[30쪽] 그래서 문장 구문에 대한 플라톤의 발견은 동시에 어떠한 기술적 언어 사용에 대해서든 근본적인 조건들의 재인이었기도 하다. 주어와 술어라는 용어는 오직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서 출현하지만, 그 통찰은 똑같다. 문장의 주-술(명사-동사) 구조는 언어내에서 우리의 언어 사용을 우리가 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것에 연결시키는 지시와 기술의 의미론적 구조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나는 시작부터 서술 개념에서 이 근본적인 애매성에 주의를 요청해왔다. 한편으로는, 문장 내 요소들 사이의 구문론적 관계가, 다른 한편으로 문장 혹은 문장요소와 세계 내 그 지시체 사이의 의미론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to be의 통합된 체계 내에서 계사 구문의 중심 위치를 이해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서술의 의미론적 기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 계사 문장으로 향한다. Socrates is wise 혹은 Socrates is in the agora. 진술로서 평범하게 단언될 경우, 그런 문장은 세 가지 의미론적 관계를 포함한다. (1) 만일 그 문장이 참이라면, 주어는 반드시 현존해야만 하고, 즉, 그 문장이 그에 대한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2) 그 문장은 진리 주장을 구성하는데, 즉, 그것들이 그러하다고(그렇게 있다고, that they are) 그 문장이 말하는대로, 실제로 사물들이 그러하다고(that things are in fact) 주장한다. (3) 이 주장은 문제가 되는 서술이 (being wise, 혹은 being in the agora) 실제로 그 주어에 속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 부합하는 속성이 "발생한다"거나 이 특수한 경우에서 예화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러한 세 가지 의미론적 조건들은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서 einai의 세 가지 상이한 용법들에 부합한다. 1, 유형 4 문장들에서 주어에 대한 존재사적 용법 ("There is someone/no one who can escape death"); 2,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완결 문장에 대한 진리사적 구조 ("Things are as you say"); 그리고 3, 유형 5에서 술어들에 대한 발생의 동사 ("There will be vengeance from Orestes"). 일차 문장에서 서술의 신호로서 계사의 일상적 용법이 통상 이런 세 가지 의미론적 함축을 담기 때문에, 똑같은 동사가 또한 이차 문장의 세 유형들에서 이러한 의미론적 주장들을 명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그 기능인 문장 연산자로서도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명사-동사 문장들에서 술어는 to be 동사 없이 발생한다. 그 계사 동사는 오직 술어 표현이 형용사 또는 다른 명사적 형태일 때에만 요청된다. 그런 문장들에서 우리는 계사의 최소 역할을 (1) 인칭, 시제 따위에 대한 기호를 가져오는 동사적 형태로, (2) 서술 표현이나 동사 구를 [31쪽] 형성하기 위해 형용사와 결합하는, 그런 서술동사로서, 따라서 (3) 문장성, 즉 주-술 형태의 신호로 재인한다. 그것이 우리가 계사 동사를 서술의 신호로 기술할 때 의미하는 바 그 삼중의 기능이다. Socrates walks, Theaetetus sits 같은 더 단순한 형식의 문장들에서 이 기능은 동사만으로 수행된다. 계사로서, einai는 동사화, 동사 없는 술어로부터 동사 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기능한다. 더욱이, 이미 지적하였듯, 우회적 구조에서 einai는 그 언어의 어떤 동사든 대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Socrates is walking, Theaetetus is sitting (혹은 이것들의 그리스어 대응물들)를 명사-동사 문장의 변형들로 가진다. 전통 이론에서 계사 형태는 표준화되고 일반적인 동사라기 보다는 계사 동사가 서술의 신호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에 묶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to be가 광범위하고 다양한 문장 형식들에 대해 서술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재인하고 있다. 주요 서술 동사로서, einai는 서술 개념과 서술에 의해 내포되는 근본적인 의미론적 관계들 모두를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einai 용법들의 연결망은 서술, 진리, 현존 개념들을 함께 가져오는 더 거대한 개념적 구조를 표현하는 데에 기여한다. 이 세 가지 개념들 중 어느 하나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한 언급 없이 적절하게 해명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Being 개념을 표현하는 문장 형식들의 체계에 대한 개념적 통일성을 제공하는 것, 그것은 구문론과 의미론 양자 모두의 이러한 서술의 이중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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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내 생각에 그리스어 동사 be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그러나 이 사전적 설명은 Being 개념에의 탐구로서 존재론에 대한 그리스적 기획을 정당화할지도 모를 einai의 용법들의 통일성 개념을 정립시키는 데엔 아무 기여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존재사적 용법과 진리사적 용법에 대한 문장 구조와 의미론적 기능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가야만 하고, 어떻게 이것들이 내가 그 전 체계의 개념적 기초로 제안하는 해당 동사의 서술적 기능과 관련되는지 보아야만 한다.
  내 논증의 앞선 단계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리는 플라톤에 의해 『소피스트』에서 독자적으로 제안된 명사와 동사 사이의 구분에서, 그 가장 단순한 문장 구조에서 묘사된대로의 서술 개념을 가지고 시작했다. 플라톤은 명사와 동사를 구문론적으로, 문장 산출을 위해 결합하는 것으로도, 뿐만 아니라 또한 의미론적 기능들로, 동사는 행위(praxis)를 나타내고, 명사는 행위자(pratton) 혹은 사물(pragma)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정의하였다. 이러나 의미론적 차원은 플라톤의 간략한 설명에서 조심스럽게 전개되었다. 그의 예시 문장들은(Theaetetus sits, Theaetetus flies) 대화편 내에서 그 주어"에 대한(peri)" 것, 즉 테아이테토스 그 자신에 대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참인 문장은 그에 관련하여 "the things that are (ta onta)"을 말한다(263b). 이 논의에서 플라톤의 목표는 참인 진술과 거짓인 진술을 정의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방금 인용된 einai의 진리사적 용법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참과 거짓이라는 관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먼저 보편 문법의 기초 단어 부류로, 명사와 동사로 서술적 문장 구조의 분석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 형식적으로 말하자면, 명사와 동사는 그리스어에서 구별하기 쉽다 (설령, 우리가 아는 한, 누구 하나 앞서 그것들을 구분하는 일에 개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나 플라톤이 지적한 기능적 구별은 그리스어나 심지어 인도-유럽어의 특수성이 아니다. 사피어가 언급했듯, "반드시 무언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그러한 것이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선택되고 나면 이 담화의 주어에 대하여 무언가가 이야기되어야만 한다. ... 담화의 주어는 명사이다. ... 서술이라는 작업을 위해 확보되어 있는 형식은 ... 동사이다. ... 어떤 언어도 명사와 동사를 완전히 구별 못하는 경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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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에서 나는 einai에 대한 이런 처소격 해석을 통시적 신화로, 하나의 원초적 의미로부터 그 동사의 모든 용법들의 파생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그것을 언어상의 선사시대에 대한 신화적 해석으로서 거부하였다. 그렇지만, 통시적 주장 없이, 표현된 바로 그 형식에서 이 설명은 eiani의 모든 용법들에 있어서 그 동사의 직관적 의미에 대한 그럴 법한 사전적 기술을 제시한다. 그 동사의 기초적 의미는 "to be present, be available"이고, 인물들에 대해 전형적 용법 "to live, to dwell (somewhere)"이 함께 한다. 가장 공통적인 용법인 명사적 계사의 경우에서는 물론 장소적 의미가 가장 약하다. 그러나 때로 "mere copula"로 간주되는 이 경우에서조차, 우리는 고정-지속 상(相) 값에서 처소격 의미에 대한 일종의 유비를 발견한다. 그 유비는 그리스어 동사 to be의 경우에서 특히 강력하다. 그래서, 서술의 신호로서 그 구문적 역할에 더하여, 계사로서 einai는 여전히 그대로 존립함과 남아있음이라는 사전적 시사를 유지한다. 그것은 모든 계사 용법에 현존하는 고정-지속 값으로, 파르메니데스가 eternal being이란 개념으로 변형시킨 그것이다. "It never was nor will be, since it is all together now" (단편. 8, 5).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이 불변하는 Being은 여전히 처소격 용어로 표현된다: "equal to itself in every direction," "like the bulk of a rounded sphere, balanced equally from the center in every way" (단편. 8, 43과 49이하).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그 그리스어 동사의 모든 상과 어감을 다 함께 불변하는 사태 혹은 실체라는 단일한 개념, to eon, "that which is"로 끌고 옴으로써 Being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Einai의 처소격 값들에 대한 이 논의를 마치기에 앞서, 우리는 현존과 실재성이라는 발상들을 표현하는 데에 [29쪽] 장소 혹은 상황 개념의 그런 형이상학적 확장이 얼마나 널리 기여할 수 있는지, 비단 그리스어에서만이 아닌 관점에서 주목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리와 현존이라는 의미론적 관념들을 명시하기 위해 담론의 영역 안에 상정한다거나 정위시킨다거나 하는 은유들을 체계적으로 이용해왔다. 위치의 구상화라는 유사하게 비환원적 용법이 또 달리 아주 다른 하이데거식 현존 규정에서 Dasein, "being-there" 그리고 in-der-Welt-sein, "being-in-the-world"로 나타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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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inai의 다양한 용법들을 탐사해 보았기에,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용법들이 하나의 체계로서 함께 엮이는가 하는 물음을 고찰할 수 있다. 나는 이미 한 가지 대답을 구문론적 분석에 기초하여 지적하였으나, 이러한 노선을 진행시키기에 앞서 그 동사의 사전적 의미라는 주제에 대해 무엇이 이야기될 수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자.
  단일한 본뜻(Urbedeutung)이나 근본적 의미로부터 einai의 상이한 용법들을 도출해내려는 어떠한 시도든 그럴 법하게 유형1의 문장들에서 인물들에 대해 입증된 vitla-locative(生-處所格) 의미 "live, dwell"로부터 혹은 좀 더 일반적인 처소격 의미 "be present, be available, vorhanden sein"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유사-존재사적 의미가 처소격 보어를 가지는 einai의 모든 계사용법에 의해 자동적으로 내포된다. Socrates is here, Socrates is in the agora. 그것이 바로 그 동사의 절대, "존재사" 용법이 또한 이러한 처소격 구조에서 장소 부사를 무화시킨 결과로 보일 수 있기도 한 이유이다. Socrates is (somewhere). 이를 테면, 현존은 일반화되거나 부정형으로 남겨진 정위이다. 그 동사의 그런 처소-존재사적 의미는 "whatever is, is somewhere; what is nowhere is nothing"이란 오래된 그리스적 관념(고르기아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증언되는)에 부합한다. 따라서 플라톤이 형상들에 대해 비-공간적 실재성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시키길 바랐을 때, 그는 그것들을 noetos topos, 지성적 공간에 위치시킬 책임이 있었다(『국가』 6권, 508c1).
  이러한 장소적 의미가 인도-유럽어 어근 *es-의 가장 오래된 의미들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는 영어 동사 be의 "원초적인 의미"가 "어떤 특정된 장소에서 '장소를 점유함(to occupy a place)(즉, to sit, stand, lie 등)'"이며 그로부터 "to be somewhere, no matter where, to be in the universe or realm of fact, to have a place among existing things, to exist"라는 더 일반적인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고 제안한다.
  우리가 주목하였듯, "being-there" 혹은 "being-present"의 문자적 의미는 처소격 계사의 모든 용법에 함축되고, 처소-존재사격으로 분류되는 문장들에서 강화된다. 그것은 유형2와 3에 속하는 문장들 대부분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there is a city Ephyre in the corner of Argos." 다른 한편, einai의 모든 용법들에 가장 공통적인 경우에서, 서술적 형용사와 명사를 가지는 계사 구조, "being in a place"라는 문자적 의미는 완전히 부재한다. Socrates is wise, Socrates is a philosopher. 여전히, 명사적 계사의 경우에 우리가 취하는 것은 언어학자들이 einani의 상태적 측면으로 재인하는 [28쪽] 그런 의미에서의 처소격 의미에 대한 일종의 그림자이다. Become에 해당하는 동사들의 변화-운동의 측면에 반대되는, 상태 혹은 단계 동사로서 einai의 이 근본적인 사전적 값은 그리스어에서 특히나 강한데, 두 가지 독특한 형태학적 대비들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첫째로, 인도-유럽어 어근 *es로부터 파생된 다른 동사들과 달리, 그리스어 동사 einai는 지속어간을 활용 동안에 유지하고 다른 어근들로부터 나오는 어떠한 비-지속 형태나 부정과거 형태도 (영어 동사 is가 다른 *es- 이외의 어근들로부터 나오는 be와 was를 허용하고, 라틴어 esse가 fui/fuisse를 허용한 것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덧붙여, εἰμί be에 대한 상태-처소격 값은 근사-동음이의어 εἶμι "I go"와의 대조를 통해 강화된다. 두 고대적 -μι 동사들 사이의 이러한 대조는 εἰμί be 동사에 "to go"와 대조를 통해 "to stay"라는 의미를 함축시켜준다. einai에 대한 이런 수렴적인 일련의 언어적 특성들은 우리로 하여금 전통적 그리스 사유에서 왜 te be는 to be somewhere인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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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쪽] 이러한 사변적 문장 유형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유형 6에서 그 동사의 영향력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위해, 나는 부정이 먼저 나오는 것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현존에 대한 긍정은 이차적인 것으로, 회의적 의심에 대한 응답으로 보일 수 있다. "You say that Zeus does not exist? I say that he does!" 하지만 "Zeus is not?"이라고 말함으로써 의심하는 자가 의미한 바는 정확히 무엇인가? 만일 유형 4가 einai의 존재사적 용법에 대한 전형이라는 우리의 생각이 옳다면, einai의 의미론적 기능은 서술에 대한 주어를 상정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Zeus is를 부정한다는 것은 Zeus가 무엇이 되었든 참인 어느 술어에 대해서나 주어일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제우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단지 거짓일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거짓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에 대해 이야기할 그런 주어 따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의 현존 부정은 한 전통 전체에 대한 진리 부정이다. 시인들과 신학자들의 전통에 대해서 말이다. Zeus is not에 대한 이러한 독해는 우리가 유형 4의 구문에 따라 발견하길 기대할 관계사의 그 무화를 설명해준다. 유형 6 현존 부정에서는 조건들을 제시되는 주어에 의해 충족될 것으로 구체화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주어의 not-being이 그에 앞서 모든 술어의 무효화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유형 6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라면, 왜 그 동사의 표면적 구문이, 라일과 그 외의 사람들이 논평하듯,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절대 구조에서 einai는 일상적인 동사마냥 일차 술어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einai의 표면적 구문은 그 동사가 "be alive"나 "be present"를 의미하는 유형1에서와 마찬가지인 듯, 혹은 "there are no asses in all of Scythia, because of the cold" 같은 유형 2와 3에서 처소격 계사의 유사-존재사적 용법에서와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그 악명높은, existence는 술어인가 하는 물음을 불러 일으키는 이런 오해하기 쉬운 구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무엇보다 술어일 것이나, 일차 술어는 아닐 것이다. 유형 6에서 einai가 그 외양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일차 동사가 아니라는 점은 그것이 유형 1, 2, 3에서 똑같은 동사가 취하는 것처럼 시간이나 장소 보어를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러한 불일치에 주목하지 못함은, 문헌학자들이 그리스어에서 원초적인 (혹은 적어도 가장 알려진지 오래된) einai 용법으로 간주한 경우에서 유형1과 유형6을 결합시키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일부 철학자들로 하여금 방황하게 만들었다. 고전 문장 유형들에 대한 나의 일람표는 유형 6이 einai의 원초적 용법일 것 같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5세기 후기 이전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구문 분석은 유형 1의 경우로서 평범한 술어인 것과 상당히 다르게, 유형 6에서 einai는 유형 4의, 관계절에서 피연산 문장을 구체화하는, 존재사적 문장 연산자에 유비됨으로써 가장 잘 이해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유형 6을 그렇게나 어렵게 만드는 건 정확히 이 관계절의 부재이다.
  대신에, 우린 아마도 유형 6에서 einai의 절대 구조를 앞서 3절에서 제안되었던 것처럼 계싸 문장에서 술어를 무화시킨 결과로 해석할 것이다. X is는 X is something or other의 축약이다. 유형 6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 유형을 계사 구조에 더 밀접하게 묶어주지만 [27쪽] 그 강력한 존재사적 값은 그리 잘 설명해주지 못한다. 유형 6의 명백하게 존재사적인 영향력은 (being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유형 4의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부터의 도출로 더 잘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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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6은 후기 데카르트주의 철학의 특징인 존재사적 진술들의 종류에 고대 선례를 제공한다. (하이데거가 라이프니츠에게서 인용했던 급진적인 질문을 상기해 보라: What is there anything at all rather than nothing?) 그래서 유형 6은 유형 4에서 묘사되는 구어적 개념과 대비되는 더 사변적인 현존 개념을 표현하는 데에 기여한다. 유형 1~3에서의 einai의 내포된 존재사적 영향력과 달리, 유형 4의 문장들은 명시적으로 주어의 현존이나 부재와 관련되지만, 두 측면에서, 1) 가능한 주어들의 부류가 문맥에 의해 (위의 9절에서 인용된 우리의 첫 번째 예시로서의 문장, 그 협의회의 화자들) 혹은 그 문헌 자체에 의해서 (두 번째 예시에서 트로이인들, 특히 프리아모스의 아들들) 구체화되고, 2) 긍정된 것이나 부정된 것이 일반적으로 주어의 현존이 아니라 관계절에서 상술된, 특정 술어에 대한 주어라는 측면에서, 구체화된 현존과 관련된다는 것을 우린 보았다. 두 번째 구체화는 존재양화 ∃x(Fx)에서 구성요소 Fx에서 그 상관물을 갖는다. 두 경우 모두, 상정되는 것은 일반화된 주어가 아니라 한정된 술어들을 충족시키는 주어이다. 그렇지만, 첫 번째 구체화는 일상 회화와 논리학의 형식화된 담화 사이의 차이를 짚어낸다. 유형 4의 관용적 문장들에서 그 현존이 긍정되거나 부정되는 주어는 세계 내 어떤 객체도 아닌 확정된 유형의 어떤 것이다. 이야기하도록 구체화되는 개인, 트로이 전사이다. 이런 문장들은 불특정의 현존, 아무것도 아라기 보단 어쨌든 무언가인 바의 것을 다루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신이 현존하는지, 혹은 외부 세계의 현존을 논의할 경우처럼), 오히려 구체화되거나 문맥적인 현존, 한정된 맥락에서 (협의회나 전장) 구체화된 종류의 것의 (화자나 전사) 현존을 다룬다. 사변적인 유형 6에서, 주어에 대한 종류상의 구체화는 유지되지만 (신이나 켄타우로스), 맥락상의 제한과 구체적 술어는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문장 유형의 구문은 투명하지 않다. einai의 내포된 존재사적 영향력은 유형 4의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를 상기시키지만, 유형 6에서 우리는 아무런 피연산 문장도 갖지 않는다. 아마도 유형 6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는 어떤 임의의 술어에 대해서든 그 주어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유형 4에 대하여 einai의 주어에 종류적 제한은 견지하지만 (예를 들어 신들이나 켄타우로스들) 관계절을 제거함으로써 술어들에 대한 어떠한 구체화도 삭제하는 일반화로 이해하는 것이다. 유형 6에서 einai의 "절대" 구문, 이 경우 서술보어에 의해서든 관계절에 의해서든 제한받지 않은 구문에, 주어에 대한 현존의 마찬가지로 구체화되지 않은 긍정이나 부정이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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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세 경우에서 그 동사의 영향력을 구별하도록 허용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왜 진리사적 용법에서는 "is the case"로, 유형 4에서는 "there is" 혹은 "exists"로, 유형 5에서는 "occurs," "take palce"로 einai를 번역하는지 설명하는 일을 허용하는 것이 바로 문장 연산자로서 einai와 그 기저에 놓이는 피연산 문장 사이의 다양한 관계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에 주목하도록 하자. 이러한 것들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번역과 구문론적 분석에 기초하여 만든 구분들이다. 그리스어 화자에게 이것들은 동일한 동사, 일상의 계사 문장들에서 나타나는 바로 그 똑같은 동사의 단순한 세 가지 용법들일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어 화자는 진리사적 용법을 존재사적 용법으로부터 구별하려 하지도, 일상적 계사로부터 구별해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einiai의 상이한 구문론적 용법들 사이의 어휘적 일치의 한 가지 근본적 귀결은 그리스에서 사유하는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일련의 사건이나 사태들로부터 실체들을 구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리란 점이다. 그들이 ta onta, "beings" 혹은 "the things that are"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아마도 개별자들 혹은 자연종들, 일식이나 달의 위상 같은 천문학적 사건들, 혹은 더욱 일반화하여 사실들과 세계 내의 사실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의 현존을 지시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서는 꽤나 당황스러운 어떤 그리스 존재론적 논의들의 논리를 만든다. 우리의 번역과 분석은 사물, 사건, 그리고 사태 사이의 구분을 당연시한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그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구분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선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다루는 한, 그건 늘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인 것은 아니다.

11. 내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것은 존재사적 유형 6에 대한 논의이다. 그것은 아무런 처소격 보어나 명사적 보어도 없이 einai가 "절대적으로" 이해되는 경우의, 개별자들과 사물들의 종류들에 대한 현존의 단적인(unqualified) 선언이나 부정이다. Zeus is not. The gods are. Centaurs are not. 어떤 서술적 보어도 부재함은 einai의 이러한 용법을 근대의 동사 to exist와 유사하게 만든다. 나는 호메로스에게서는 이 문장 유형의 어떠한 사례도 발견하지 못한다. 유형 6은 그리스 문학에서 오직 [25쪽] 소피스트 시대의, 기원전 5세기 후반기 그리스에서의 신학적 회의주의의 발생과 더불어서만 나타난다. 어쨌든 그리스에서 뭔가 "exist" 같은 것을 의미하는 이러한 einai 용법은 신학적 사변의 분위기와 전통적 믿음의 대상들에 관련한 의심의 태도를 전제한다. (성경 구절에 표현된 "우매한 자들은 내심으로 '신은 없다' 말하였다." 같은 그런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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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4는 우리가 einai의 존재사 용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일람표 역할을 할 수 있다.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서, 그 동사는 여기에서 기능을 진리사적 구조에서 einai의 용법과 공유한다. 우리가 보았듯, 두 문장 유형 모두에서 einai는 언어외적 지시를, 문장의 주어에 대해서든 (유형 4에서) 혹은 문장 전체에 대해서든 (진리사의 경우), 명시화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리고 각 경우에서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는 오직 두 가지 값(esti와 ouk esti, 긍정과 부정)을 가지는데, 피연산 문장의 기술 내용을 보증하거나 거부한다. 하지만 이 문장 형식들 사이의 구문론적 차이는 현존과 진리 사이의, 그 동사의 존재사적 용법과 진리사적 용법 사이의 구별에 결정적이다. 유형 4에서 einai는 오직 피연산 문장의 주어에 대해서만 작동하는 반면(즉, 종속절을 이끄는 관계대명사 hos "who"), 진리사의 경우에서는 문장 구조 전체에 작동하고, 대화자가 말했고 화자가 긍정한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에 작동한다. 진리사적 einai가 실재성에 있어서 "상정"하는 것은 이러한 문장 구조의 내용, 상응하는 일련의 사태이다. 유형 4의 einai에 의해 상정되는 것은 관계절에서 표현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개별자들의 현존이다.

10. 존재사적 유형 5로 넘어가서, 우리는 구문론적으로 진리사적 구조에 더 가까운 문장 형식을 발견한다. 유형 5에서 그 동사의 주어는 더욱 기초적인 문장 내에서 술어 동사를 표현하는 추상적 행위 명사이다. 유형 5의 문장들에서 einai는 이하 문장의 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그런 발생의 동사로 기능한다.
  Around him was a clamor of the dead, 여기에서 추상 명사 clamor(klange)는 기저 문장 The dead clamored around him에서 그 동사의 명사화이다.
  There will be vengeance from Orestes, 이 문장은 기저 문장 Orestes will take revenge의 명사화로서 vengeance를 가진다.
  For you, Odysseus, there will be no murder at a wife's hand, 이 문장은 your wife will not murder you의 명사화로서 murder(phonos)를 가진다.
  주어로서의 추상 명사와 더불어, 이 문장 유형에서 그 동사의 구문은 명백히 이차적이다. 여기에서 einai는 기저에 놓이는 동사(to clamor, to take revenge, to murder)의 명사화된 형태를 주어로 취함으로써 표적이 되는 문장에 작동한다. 유형 5에서 einai의 구문은 꽤나 분명하지만, [24쪽] 그 의미론적 기능은 진리사의 경우와 유형 4에서 문장 연산자의 기능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 또한 esti 혹은 en은 그 의미론적 주어 - 이 경우 the verbal action - 를 "사실"로, 즉 담론의 세계에서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서 상정하는 데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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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유형2의 복수형식으로 해석한다면, 유형3에 속하는 문장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There are many paths up and down the camp," "Among you are the bravest of all the Achaians." 이 유형에서 주어를 도입시키는 수사적 기능은 덜 뚜렷하지만, 계사 동사의 존재사적 영향력은 처소격 보어 또는 양화사(some, many)에 의해 강화된다. 유형 2와 3의 부정 형식들에서 존재사적 어감은 특히 강하지만 국소적으로 제한된다. "There is in the whole Scythian land neither any ass at all nor any mule, because of the cold."

9. 지금까지 묘사된 어느 문장 유형에서도(유형1~3) 우리는 현존에 대한 단언이나 부정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there is"라는 영역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계사 동사의 용법을 발견한다. 제대로 된 존재사적 용법을 위해 우리는 유형 4로 향한다. 이 유형은 그 구조에 있어서 논리학에서의 존재 양화를 위한 ∃x(Fx) 형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There is an X such that X is F." 유형 4에서 einai 동사는 이하의 관계사절에서 정식화되는 서술을 위한 부정주어(someone, something)를 상정(혹은, 부정의 경우, 배제)하는 데에 기여한다. Let there be someone / who will speak wiser counsel; Now there is no one / who will escape death ...at my hands..., of all the Tojans and above all of the sons of Priam.
  부정주어가 전형적으로 인물 ("someone who...")이기에, 그 동사의 구문은 일차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 유형에서 그 동사는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 동사는 그것이 문장 연산자로 기능하는 관계사절과 함께 이해된다. 그래서 einai의 주어는 한정된 개별자가 아니라 이를 테면 제한된 변수로서, 그 관계사절에서 구체화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anyone 혹은 anything이다. 유형 4에서 einai의 의미론적 기능은 정확히, 의미론적 주어, 열린 문장(변항을 포함하는 문장)의 문법적 주어에 상응하는 언어외적 실체를,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지시하는 일을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x will speak wiser counsel, x will escape death at my hands. 그래서 유형 4의 구문론적 역할만이 아니라 의미론적 역할 또한 존재 양화의 그런 역할과 비슷하다. 특정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대상의 유효성을 긍정(혹은 부정)하는 것, 특정 술어들이 그에 대해 참인 그러한 주어를 상정(혹은 배제)하는 것.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23쪽] 서술에 대한 참과 서술의 주어에 대한 현존 사이의 개념적 연관을 재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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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하지만, 이 책에서 규정되는 여섯 가지 존재사적 유형들 중, 첫 번째이자 가장 생생한 문장 유형은 명백히 의미론적인 것도 아니고 구문론적으로 이차적인 것도 아닌데, einai가 이 경우 일상적인, 구체적 의미를 지니는 일차 동사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einai가 "to be alive," "to dwell," 혹은 "to be present"를 의미하는 경우에서 나의 존재사적 유형 1이다. 이런 유형에서 그 동사는 인물(인간 혹은 신)을 주어로 삼는다: "Your parents are still alive" (et' eisi); "The gods who are forever" (theoi aien eontes). 그 주어가 전형적으로 인물, 대화 상대자를 말하는 그것이기에, 오직 이 경우에만 그 동사가 1인칭과 2인칭으로 격변화한다; 다른 모든 존재사적 유형은 오직 3인칭 형식으로만 등장한다. 덧붙여, einai는 유형1의 경우 여느 일반 명사와 같이 시간과 장소 부사를 취한다. 그럼 어째서 우리는 이 유형을 존재사적이라 칭하는가? 그런 문장에서 그 동사가 exists 혹은 there is로조차 번역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계사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존재 동사 εἰμί의 예시들 가운데 L.S.J에 첫 번째로 기재되는 용법이다. 여타 권위자들도 그것을 유사하게 취급한다. 그 설명은 einai가 일단 여느 일상 동사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의미를 가졌다는 보편적인 가정 안에 놓인다. 유형1 용법들은 그런 본래 의미가 무엇이었을는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나의 유형2와 유형3으로 분류되는 존재사적 문장들은 구문론적 관점에서 유사하게 불순하다. "There is a city Ephyre in the corner of Argos". 모든 einai의 계사 용법들이 이러한 것들로, 통상 처소격이나, "there is"라는 번역에 의해 측정되는 한정된 존재사적 함축을 가진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어에서 이런 존재사적 어감에 부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 동사의 구문에서 아무런 대답도 발견할 수 없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그 계사는 첫 번째 자리에 등장한다. 그리스어 단어 배열은 자유롭기에, 첫 자리를 통해 부여되는 강조는 문법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수사적인 의미에 속한다. 나는, 계사 동사 자체가 그 (언어외적인) 주어의 실재성을 시사하기에, 그 동사의 이러한 그 동사의 내포된 존재사적 영향력은 바로 첫 번째 자리에 의해 이끌려 나오는 것이라 제안했다.
  책에 인용되는 사례들은 유형2 문장이 일반적으로 추가 서술에 대한 주어로서의 인물이거나 혹은 이어지는 묘사에 대한 지시의 지점으로서 지형상의 항목이다. 그런 문장들에서 그 동사의 존재사적 영향력은 문장에 문법적 주어를 도입시키는 수사적 기능과 관련되지만, 그 동사는 이 일을 정확히 부합하는 의미론적 주어를 위치시킴으로써, 즉, 뒤따르는 서술에 관련있을 인물이나 장소를 위치시킴으로써 행한다. 따라서 그 동사의 기저에 놓이는 처소격-존재사적 가치 ("is present somewhere")는 상관된 담론의 영역에 그 주어를 도입시키거나 "위치"시키는 수사적 행위에 의해 강조된다. 나는 그 동사에 관하여 수사적 강조에 의해 강조된 이러한 의미론적 함축들이, 우리가 그 동사의 주어에 대한 현존의 단언으로 지각하는 것이라 제안한다. 하지만 강조된다 하더라도 이 단언은 처소격 서술 내에 내포되기에, 우리는 존재사적 유형2에서 그 동사의 [22쪽] 의미론적(이차적) 용법을 적절하게 갖지 못한다. 우리가 가지는 것은 일차 계사의 수사적으로 의도된 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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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간결함을 위하여, 나는 우리가 여기에서 일상적인 평서문을, 즉 칠판에 적힌 주인 없는 문장이 아니라 일반적 억양으로 발화된 직설법 문장을 다루고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나는 문장과 진술 사이의 구별을 추상화시키는 중이다. 나는 앞서 einai의 일차 계사 용법들(적어도 긍정 용법들)이 일반적으로 그 의미론적 주어의 현존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제 아마도 단언된 것들로서의 문장들이 그것들의 문장 내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 진리 주장을 담지하기도 한다는 것 - 적어도 호메로스의 세계에 속한 실재성에서 그렇다는 것을 추가할 것이다. 그래서 einai의 계사 용법들은 모든 평서 문장들처럼, 두 측면에서 암시적으로 의미론적이다: 그것들은 주어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 진리 주장의 타당성 또한 시사한다. 나는 진리 주장이란 말로 문장이 단언하는 바는 무엇이든 그것을 의미한다 - 긍정적 참값의 후보로 이해된 문장내용-. 내 진리주장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이 Tractatus(4.022)에서의 언급으로 의미하였던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명제는 사물들이 그것이 참이라면 어떻게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들이 그렇게 서 있다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각각의 모든 평서문에 함축된다. 진리사적 구조에서 독특한 점은 이런 주장을 드러나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 명백한 진리 주장을 위한 운반책으로서 기여하는 것이 정확히 그 동사 to be인가? 내 생각에 그 대답은 서술의 표지로서 계사 einai의 역할 안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Theaetetus sits 같은 더 단순한 문장들에서, 이러한 기능은 일상적인 동사에 의해 수행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였듯, 어떤 동사든 is 더하기 분사로 대체될 수 있다. Theaetetus sits는 (그리스어에서 그에 상응하는) Theaetetus is sitting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와 그 밖에 이유들로, 그 계싸 동사는 가장 보편적인 동사로 보일 수 있고, 따라서 서술의 표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각각의 서술은 일상적 평서문 형태에서 진리 주장을 담지한다. 따라서 서술의 표지로서 계사 동사는 진리 주장의 표지가 될 수 있다. (인도와 스칸다나비아에서 "truth"에 해당하는 단어들이 입증하듯, 선사시대에 이미 그런 표지가 되었다.) 그것이 진리사적 구조에서 진리 주장을 명백히 하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 똑같은 그 동사인 이유에 대한 나의 설명이다. It is F는 일상적으로 It is truly F를 시사하기 때문에, is는 혼자서 is true를 의미할 수 있다.

8. 유사한 설명이 존재사 문장들에서 의미론적 연산자로서 einai 용법에 대해 제공될 수 있다. 계사 동사는 (직설법에서 어느 동사든 그렇듯) 그 주어의 현존에 대한 암시적 주장을 담지하기 때문에, 적절히 강조되었을 경우 똑같은 동사가 이러한 주장을 명백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존재사 문장에서 einai의 그 기능이다. 우리는 이 일이 존재사 문장 유형의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호메로스에서 그리고 호메로스 이후의 한 유형에서 다섯 가지 존재사 유형을 구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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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진리사 용법을 통해 나는 "is true" 혹은 "is the case, is a fact" 값을 가질 수 있는 einai의 어떤 경우이든 그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좀 더 엄격히 말하자면 진리사적 구조는 특수한 문장 형식이다. 진리사적 구조에서 einai를 포함하는 절은 말이나 생각에 해당하는 동사를 포함하는 비교 절과 관련된다: ἔστι ταῦτα οὕτω ὅπως σὺ λέγεις "Things are as you say (that they are)". 나는 be 동사를 가진 절을 essive(태격) 절이라 부르고, 생각이나 말에 해당하는 명제 태도를 가진 절을 intentional(의도) 절이라 부른다. 관용적으로 두 번째 essive 절의 발생은 통상 무화된다. 따라서 우리는 "Things are as you say"라는 더 단순한 형식을 가진다. 그러나 이 두 번째 essive 절은 진리에 대한 더욱 분명한 철학적 형식들에서 말하기에 해당하는 동사 이후에 등장할 것이다: "To say of what is that it is not, or of what is not that it is, is false; but to say of what is that it is, or of what is not that it is not, is true"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Γ, 1011b26). 두 번째 Essive 절이 무화되는 관용적 형태에서, 우리는 einai의 구문론적 주어로서, 대화자가 이야기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지시하는, 또한 그에 따라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기저에 놓이는 문장들을 지시하는 대명사 (tauta "these things")를 가진다. 그래서 이러한 진리사적 구조 내에서 einai 구문은 명백히 이차적인데, 기저에 놓이는 einai의 주어가 형식에 있어서 문장과이기에 그러하다. Essive 절에서의 einai 동사는 그 주어로서 기저에 놓이는 문장의 내용, 즉, intentional 절 ("what you say")에서 표현된 주장에 부합하는 사태를 취한다. Essive 절에서 esti의 논리적 기능은 대화자의 주장을 정확히 이러한 사태가 존재한다거나 "현존한다"고, 사물들이 대화자가 그것들이 그러하다 말하는 방식으로 "실제로 그러하다(in reality)"고 단언함으로써 보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사태의 실재성을 현존의 특별한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리사적 용법을 존재사적 동사의 특수한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 
  
일차적인 essive 절("Things are this way")에서 esti 구문은 문장 연산자 구문으로 묘사될 수 있는데, 그 동사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기저에 놓인 문장들을 자료 혹은 피연산항으로 취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것이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 기능하는데, 그것이 피연상 문장을 "실제"로(in "reality" 호메로스의 문장들에 대해 그것이 서사시들에서의 근-허구적 실재성이라는 의미에서) 사실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의미론적 연산자로서 기능하는 것이 정확히 einai 동사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문장적 진리 주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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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사 용법과 진리사 용법에 대한 분석은 더욱 어려워질 것인데, 현존과 진리라는 개념들이 우선적으로 문장 구조가 아니라 그 동사의 의미, 혹은 전체 문장의 의미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의미를 서술, 존재 그리고 진리라는 언어적 기능들 사이의 관계들을 설명하기 위한 기초로서 합당할 만큼 충분히 정확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전략은 존재사 문장과 진리사 문장에서 그 동사의 논리적 기능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구문론적 분석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직 우리가 einai의 이런 다양한 용법들의 구문론적 구조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얻을 때에만 그 용법들의 개념적 관계들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7. 나는 먼저 진리사적 용법을 취하는데, 여기에서의 기초적 구문은 분명하고 균일한 반면, einai의 존재사적 용법은 문장 형식의 곤혹스러운 다양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리사적 용법은 (그 동사가 "is true" 혹은 "is the case"를 의미하는 경우) 통계적으로 오히려 드물고, 따라서 그 용법은 존재사적 동사의 특수한 경우로 취급되곤 하였다. 우리는 결국 그러한 취급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그 대신 이 용법에 고유한 명명을 부여하고 저술 내에 독립된 장을 그것에 할당하였다면, 그것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to be의 이러한 용법은 (So be it 혹은 Tell it like it is 처럼) 존중할 만한 자격을 갖고 있다. To be의 그 의미는 전사적임에 틀림없는데, 인도-유럽 세계 극지에(인도와 스칸다나비아) 속한 언어들에서 진리에 대한 단어는 *es-의 현재 분사의 파생어로써 제공되기 때문이다 (san, satya 등, 그리스어에서 to on와 직접적으로 어원을 같이 하는 단어들. 그래서 또한 고대 영어에서도 sooth라는 단어를 가진다). 진리사적 용법에 대해 내가 독립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두 번째 이유는 철학에 대한 einai의 이러한 용법의 근본적인 중요성이다. 지식의 대상으로서 Being이라는 개념을 위해 우선시되는 표현들 중 하나로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와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에게 Being(to on)이 여러 가지를 의미할지라도, 그것은 결정적으로 이해의 목표이자 지식의 대상으로서 진리라는 개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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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이제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의미론적 서술 개념을 구체적인 명사들을 주어로 삼는 기초 (일차) 문장들이라는 초기 개념과 결합시킨다면, 우리는 그 문법적 분석이 일부 정의된 존재론적 함축들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술적 대상-언어로서 형성문법에 대한 나의 개념이 적절하게, 개인들과 안정적 대상들을 그 일차적 실체들로, 일차 문장들에 대한 의미론적 주어들로 가지는 유사-아리스토텔레스식 혹은 스트로슨식 존재론을 시사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강력한 의미에서의 존재론도 아닌데,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서 나오는 내 예시 문장들에 대한 실재를 재현하는 담론의 세계는 단순히 호메로스 서사시의 그 세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계를 기술하는 기초 문장들은 개인들과 개별물들을 그들의 의미론적 주어들로 삼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의 형성문법 사용은 기초 문장들의 두 가지 대안 개념들에 맞서 문제를 제기하는 효과를 지닌다. 내가 거부하는 그 두 가지 관점들은, 한편으로, 경험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감각-소여 같은 어떤 것을 전달하는 프로토콜-명제, 로크식 단순 관념, 혹은 흄식 인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빗슨주의자가 주장하는 바, 행위와 사건이 구체적 사물만큼이나 동일한 차원에서 기초적인 실체로 간주된다. 나는 John runs 혹은 Socrates is wise를 (언어 외적인) 주어들로서 개별자들을 취하는 기초 문장들로 선택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어나 영어와 같은 자연언어에서 문장들의 구문을 분석하기 위해 그것이 더 유용하다는 것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석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나 프랑스 혁명 같은 사건은 의미론적 주어로서 개별자들(소크라테스, 프랑스의 사람들)을 취하는 서술에 의해 표현될 것이다.

6. 우리는 이제 einai 체계의 통일성에 대한 나의 논증을 위한 기초로서 einai의 다양한 용법들을 조사하는 쪽으로 향한다. 이러한 목표를 유념하면서 나는 작금의 조사를 계사, 존재사, 진리사 용법들에 한정한다.
  계사는 엄격히 구문론적 개념이기에, 그러한 용법에 대한 기술은 상대적으로 단적일 수 있다. 우리가 보았듯, 두 종류의 계사 문장이 있다. 명사적 계사는, einai가 서술 형용사와 명사로써 이해되고, 처소격 계사는, 장소에 대한 술어들(in the marketplace, in Athens)로써 이해된다. 처소격 계사의 하위분류는 유사처소격 구조이고, 그 서술 표현은 형식상 처소격이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비유적이다. is in trouble, is in a bad mood. 이러한 문장 형식들 모두 주어로서의 추상적 (명사화된) 형식을 취하는 이차 구문에서 다시 반복된다. Wisdom is a virtue, The outcry was far away, Killing is against the law. 그러한 이차 문장들에 대해 참인 술어가 [18쪽] 그 주어의 현존을 시사하는 원리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 문장들의 추상적 주어에 대해서 현존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우리는 아마도 이차 계사 용법에 의해 시사되는 것이 그 기저의 일부 문장에 대해 참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이차 문장이 참이라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그 기저에 놓이는 일차 문장들은 또한 반드시 참이어야만 한다. 경건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가 경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의 발생은 사람들이 혁명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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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 "주어"(hypokeimenon)의 이러한 본래 뜻을 보존하고 싶고, 그건 단지 역사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문장들의 그 주-술 분석에 대한 참된 철학적 관심은 그 분석이 문장들을 넘어서서 세계 내 그 문장들의 주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콰인에게서 나온 공식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우리는 주-술 문장이 오직 그 술어 표현이 주어 표현이 지시하는 그 대상의 참일 때에만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장에 대해 진리 개념은 언어 외적 서술에 대한 진리 개념을 전제하는데, 언어적 표현들이 "세계 내" 혹은 일부 담론의 세계 내 대상들에 대한 참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참값을 통해 해석된 문장들의 주-술 구조는 의미론적 주어의 현존 개념을 포함한다. (이것은 서술, 진리, 현존 세 가지 용법들이 함께 자리한다는 내 논증의 근간이다.)
  나는 "의미론적"이라는 말을 여기에서, 일부 비언어적 모형, 예를 들면 집합론의 용어로 형식적 구조들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논리학 내에서의 형식 의미론적 개념과 유비함으로써 사용한다. 소크라테스에 관한 문장들에 대해 우리의 모형은 집합론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역사이다. 이 책에서 분석된 호메로스의 문헌들의 경우, 의미론적 해석의 영역은 호메로스 시에서 묘사된 것으로서의 세계, 영웅들과 트로이 전쟁의 사건들일 것이다. 의미론적 해석에 대해 논의의 영역이 역사에 의해 혹은 서사시에 의해 제공되는지 여부는 문제가 아니다. 아킬레스 자신이, 소크라테스 자신이 He died in 399 B.C.라는 문장의 의미론적 주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리아스』에서 여러 문장들의 의미론적 주어이다. 이러한 의미론적 서술 개념은, 문장과 그 문장이 그에 대한 것인 언어 외적 주어 사이의 관계로서, einai의 현존적 용법과 진리적 용법에 대한 우리의 설명에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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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쪽] 일차문장에서 주어 N은 고유명사일 수도 있으나, 또한 인물들이나 개별물들(동물들, 식물들, 장소들 따위)을 지시하는 보통 명사일 수도 있다. 나는 A man speaks, The cat sees the mouse, The tree is tall, 그리고 The tree stands in the yard 같은 문장들을 구문론적으로 일차술어로 헤아린다. 이러한 주어자리 명사들은 또한 술어 위치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일부 이론가들은 어쩌면 이 문장들을 기초적인 것들로 셈해 넣길 선호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대신에 그것들을 그 상응하는 술어(is a man, is a cat 따위)로부터 형성적으로 도출해낼 수도 있다. 무엇을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할 것인지에 관한 이러한 이론적 논쟁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일차 명사들에 대한 좀 더 너그러운 개념에 의존하려고 한다. 그 명사들은 인물들, 장소들, 특정물들을 지시한다. 일차명사들의 군이 순수하게 문법적인 용어들로 정의될 수 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여기에서 나는 개별적인 것들을 지시하는 "구체적인" 명사들을 한편에, 명사화된 술어들로부터 구성되는 "추상적인" 명사들을, 예를 들어 (he) is wise로부터 형성적으로 파생된 wisdom이나 (they) cried out으로부터 형성적으로 파생된 outcry 같은 것들을 다른 한편에 놓는 이러한 구별을 단순히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 문장의 구문론적 단계는 그 주어 명사의 단계에 의존할 것이다. 그래서 Socrates is wise는 계사 동사의 일차 용법이다. 다른 한편, Wisdom is a virtue와 The outcry was far away에서 그 계사 구문은 이차적인데, 이러한 문장들이 이차 (추상적) 명사들을 그 주어로 가지기 때문이다.
  일부 설명은 주부와 술부의 용어들을 위한 것이다. 서술은 (be 동사에 대한 언급 없이) 기초적인 명사-동사 문장, John runs 혹은 (플라톤이 이러한 분석을 처음 도입하는 데 사용하는 예시를 들자면) Theaetetus sits 같은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나는 문법적 주어라는 말로 이런 형식의 문장들에서 명사(혹은 명사구)를 의미하고, 문법적 술어로써 나는 그런 문장들에서의 동사 혹은 동사구를 의미한다. 서술로써 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명사와 동사(혹은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 문장성(-性)을 구성하는 그 관계이다. 여기에서 서술은 순수하게 구문론적 개념으로, 명사-동사 문장에 대해 문장성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처음에 주부와 술부라는 용어들은 구문론적으로 정의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onoma와 rhema로서 언급했던 두 가지 문장-성분들과 동일시된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어"(hypokeimenon)를 그의 고유한 서술 이론에 도입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그 onoma, 명사적 문장-성분에 귀착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해당 문장이 그에 대한 것인 바 대상이나 개별자에 귀착시켰다. 주부라는 용어의 본래 의미는 그래서 암묵적 주어나 논리적 주어로 부르는 것이다. 그 주어는 [16쪽] Socrates died in 399 B.C.라는 문장의 주어가 Socrates라는 이름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그 자신이라는 의미에서의 주어이다. 문장의 언어적 부분이 아닌 실체에 대한 "주부"라는 말의 이 본래 (하지만 근대적 관점에서 이차적인) 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 개념에 본질적이고, 여기에서 그에 대한 분석이 주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일차 명사들을 개인들이나 특정한 사물들을 지시하는 것들로 정의하면서 
(언어 외적인) 언급의 대상(subject of reference)이라는 개념에 의존해 왔다. 나는 여기서 "주어"라는 말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 주의를 당부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그 두 의미 모두에서 그 말을 체계적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Socrates died in 399 B.C.라는 문장을 고려할 때, 나는 Socrates를 그 문장의 구문상 혹은 문법적 주어로 부를 것이고, 반면 존재론적 혹은 의미론적 주어인 사람은 소크라테스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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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문론적 기술로 들어가기에 앞서, 언어철학에서 일부 개념들을 차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서술과 현존 개념을 말이다. 이것들은 자료들을 적절히 기술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그리스어 체계의 정합성에 대한 나의 논증을 정식화하는 데에도 필요할 것이다. 덧붙여 형성문법이 계사, 존재사, 진리사 용법들을 예화하는 문장유형들에 대한 엄격한 구문론적 기술을 제공하기 위해 요청된다. 나는 Zellig Harris의, 기초 혹은 핵심 문장들에 대한 이론을 포함하는 형식의 형성 문법을 채택했다. 그 기초 문장들은 그로부터 복합 문장들이 형성될 수 있는 혹은 이 문장들이 저것들로 해체될 수 있는 그런 문장들이다. 기초 문장들에 대한 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묘사하는 1차 기술 언어 부류에 대한 현대의 완전히 잘 작동하는 모형을 제공하고, 동시에 Harris의 형성들에 대한 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어떻게 언어의 남은 부분들이 그러한 기초 위에 구축될 수 있는지 알게 해준다. 이것은 그러한 형성 문법의 체계에 대한 독립적인 철학적 흥미인 것으로 치고, 문제가 되는 그리스어 동사를 기술하기 위한 그것의 쓰임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실질적으로 자연어에서 문장들의 기저에 놓이는 문법적 구조를 재현하는 체계이다. 역으로, 그런 체계는 적절히 문법적인 분석과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존재론적 기획 사이의 거리를 분명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의 구문론적 분석을 위해 우리는 기초 혹은 1차 문장 구조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의 형성 문법의 핵심 문장 형식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여기에서, N이 명사를, V가 동사를, A가 형용사를, P가 전치사를 표시하는 몇 가지 단순한 형식들을 나열한다.

1) NV: Socrates walks
2) NVN: Socrates sees Plato
3) N is A: Socrates is wise
4) N is N: Socrates is a man
5) N is PN: Socrates is in the marketplace; Socrates is in trouble

문장 형식 3과 4는 명사 연결 계사를 표현한다; 문장 형식 5는 처소격 계사와 유사처소격 계사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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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4. 그래서 나는 einai에 용법 체계에 대한 논리적 기초로서 합당한 것은 정확히 einai의 서술적 기능이라고, 철학적 연구 주제로서 Being이라는 주제를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이 체계의 이러한 개념적 통일성이라고 주장한다. 좀 더 일반적으로, 나는 서술, 현존, 진리라는 세 가지 개념이 다 함께 어떻게 언어가 실재에 대한 묘사로서 기능하는지에 대한 어떤 이론에든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어째서 존재론(Ontology), to on에 대한 이론이 그리스 철학의 분과로서 출현하였는지 설명하는 것은 바로 상호의존적 개념들의 이러한 연결망이다. 그리고 Being에 대한 그리스의 담론들이 지니는 개념적 정합성은 그 동사의 서술적 기능이 근본적인 것으로서 재인된다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구문론적 논증을 전개하기에 앞서, 나는 그것을 엄격하게 철학적인 고찰로 뒷받침하길 원한다. 서술적 구조의 우선성을 위한 사례를 이전에 빠뜨린 적이 있다. 플로티누스의 유명한 원리에서 the One과 the Good에 Being은 포함되지 않는다. 만일 그가 Being을 현존으로 이해했다면 the One의 Being을 그렇게 단정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만일 One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하였을 테니까 - 세계가 전무하였을 테고, 가지적 우주도 감각적 우주도 없었을 것인데, 다른 모든 것이 다 제 실재성을 the One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The One의 einai를 부정함으로써 플로티누스는 실재성이 아니라 서술적 구조를 부정한다. 서술에 속하는 being이 다수성을, 이를 테면 주어(hypokeimenon)와 그것에 대해 서술되는 것 사이의 개념적 구분을 함의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One"과 "Good"이 최고 원리의 속성들을 대표하지 않고, 단지 the One을 어떻게든 가리키면서 기술하지 않는 이름들일 뿐인 이유이다. 나는 플로티누스가 여기에서 그리스어 동사 einai의 근본적 기능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철학적 감각에 의존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내가 지금 einai의 계사 용법들이 그 주어에 대해 일상적으로 현존을 시사하리라고 주장하고 있기에, 그 서술적 기능을 지지하는 내가 제안했던 전환은 L. M. De Rijk 같이 존재사적 용법을 그 동사의 철학적 의미에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에게 덜 적대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서술적 용법이 중심에 오는지 존재사적 용법이 중심에 오는지 einai의 이런 명백히 경쟁적인 두 개념들은 궁극적으로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데, 그것들의 관심사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내 주장은 서술의 구문론적 기능이 [14쪽] einai의 용법들을 통일된 체계로서 파악하는 데에, 또한 철학 안에서 그 동사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 더욱 기본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우리가 번역과 구문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그 동사의 어휘상의 내용이나 의미를 탐색 중이라면, 계사 구문은 후보조차 안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로 이후 12절에서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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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사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Allan Bäck의 최근 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 이론』에서 체계적으로 전개된다. 벡은 그가 지지하는 이 관점을 계사의 아비센나식 해석이라 표현한다. "계사 is가 존재주장을 단언하고", 그래서 S is P는 S is existent as a P로 읽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센나와 벡에 따르자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일상적인 계사 문장 S is P는 두 가지 주장을 구성한다: "S exists"와 "S is P." 그들이 우리가 보기엔 현존을 주제화하지 않았기에, 그리스 철학자들은 부정적 현존재들에 대하여 많이 염려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해석가들은 부정적 현존재들의 근대적 문제가 플라톤의 Not-Being에 대한 관심 속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그들이 플라톤의 문제를 근대화하여 오늘날 독자들에게 더 흥미롭게 보이도록 만들려는 욕망에 잘못 이끌린 것이라 믿는다.) 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상상 속 대상들, 밀의 예시로 치자면 "켄타우로스는 시인들의 허구이다." 같은 것에 대한 어떤 특별한 관심도 찾아볼 수 없다.
  계사의 존재사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그쯤 하자. 이제 그 역 주장에 대해 보자.
  (ii) einai의 존재사적 용법들은 잠재적으로 서술적이라는 것이다. 영어에서, to exist는 명사나 형용사 술어를 취하지 않고, 처소격도 취하지 않는다. (Socrates exists wise는 허용될 만한 문장이 아니고, Socrates exists in the marketplace는 특수한 문맥 없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 된다.) 이 측면에서, exists는 esti에 대한 좋은 번역이 결코 될 수 없는데, [12쪽] 술어 표현을 통해 완성될 수 없는 그 동사의 어떤 용례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존을 단언하는 가장 명백한 그리스어 형식은 실상 그 형태에서 서술적이다: einai ti "to be something(rather than nothing)." 이것은 einai가 술어를 취할 때 그 존재사적 영향력을 전혀 상실하지 않는다는 점의 전형적 실례이다.
  레슬리 브라운은 어떻게 『소피스트』에서 einai의 독립적 혹은 존재사적 용법들이 플라톤에 의해 그가 "such-and-such is something"과 호환될 수 있는 표현으로서 "such-and-such is"로 취급하는 서술적 용법에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간주되는지 보여주었다. 『국가』 5권에서의 형상들의 법칙을 소개하는 핵심논증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절대적인 what is를 "what is completely(τὸ παντελῶς ὄν, 477a3)"로서의 형상들과 동일시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시작하지만 이것을 "the many beautiful things," 그 각각이 "will also appear ugly(479a)"한 것들, 그러므로 "not being과 purely being 사이에서 요동치는(479d)" 것들과의 대조로써 끝맺는다. 여기에서 다시 플라톤이 추가적 술어가 있는 einai와 없는 einai 사이에서 아무런 구분도 끌어내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그래서 『소피스트』에서도 
『국가』에서도 플라톤이 einai, ousia, on에 의해 표현되고 현존, 서술, 동일화, 진리, 아마 그 이상의 관념들을 포섭할 오직 하나의 Being 개념만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러 학자들이 현존과 서술이 함께 하는 지점에서 그 동사에 대해 "혼동된(fused)" 의미를 말하고자 바란 까닭이다. 나는 이 용어가 오해를 불러온다고 생각하는데, 혼동이라는 개념은 그 구성요소들이 앞서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물론 분석적 목적으로 플라톤의 문헌에 대한 주석에서 우리의 해석학적 메타언어에 그런 구분들을 도입시킬 필요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근대적 구분들과 고대 문헌들 내의 논의 아래 실제로 깔린 것 사이의 불일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한다. 그 두 의미를 혼동하고 있는 건 우리이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다.
  그래서 그 체계의 중심에 서술적 용법을 두는 것은 소위 존재사적 용법들을 이차적 혹은 파생적 현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구문론적 분석에 돌입할 때, 우리는 존재사적 용법과 진리사적 용법 모두 2차 형태로서, 1차 문장에 대한 구문론적 문장 연산자로서 
가장 잘 이해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inai의 이런 2차적인, 명백히 구문론적인 용법들은 계사로서의 1차 용법에서 그 동사의 암시적인 구문론적 기능들을 언급함으로써 설명될 것이리란 점을 제안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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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런 모든 결함들을 인정하면서, 그 자료를 조직하는 데에 계사-존재사 구분이 유용하다는 것은, 이 책에서 내가 한 것처럼, 여전히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사적 용법이 함축적으로 존재사적 용법이라는 것, einai의 존재사적 용법 전부 혹은 그 대부분이 잠재적으로 서술적이라는 점을 재인하기 위해 그 구별 자체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으로 반성을 행했던 것은 아니다. 계사 구문과 독립 구문 사이의 구문론적 구분은 그 그리스어 동사에 실로 충분하지만 피상적인, 오직 그 동사에 대한 표면적 구조의 특징이다. 이것이 내가 레슬리 브라운의 플라톤 『소피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X is 형태의 문장에서와 X is Y 형태의 문장에서의 einai 동사들 사이의 관계가 Jane teaches에서와 Jane teaches French에서의 teach 동사들 사이의 관계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10쪽] 이것은 플라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도,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 언어에 대해 참인 듯하다. einai에 술어를 추가하는 것은 to teach 동사에 직접 목적어를 추가하는 것이 그 동사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 변화를 주지 않는다. 생성문법의 관점에서, 더 긴 형태일 수록 더 기초적이다. X teaches는 X teaches something에서 그 직접 목적어를 무화시킴으로써 도출된다. 유사하게, X is는 X is Y에서 그 술어를 무화함으로써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제안이다. 이것이 내가 삼가 내 방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말하는 내 논증을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건 einai의 용법 체계 중심에서 현존을 서술로 교체시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einai의 모든 독립적 혹은 존재사적 용법은 일부 술어의 축약된 형태로 여겨질 수 있다. X is는 어떤 Y에 대한 X is Y의 축약이다. 그 형식의 의미는 결국 to be는 to be something or other라는 것이다.
  서술적 용법과 존재사적 용법의 상호의존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i) einai의 계사 용법은 함축적으로 존재사적이라는 것. 계사로서 esti의 일상적 용법, 명사 술어나 처소격 술어를 가진 용법을 생각해 보자. 만일 esti를 그 문장 앞에 놓으면, "그러저러한 것이 있다"라는 번역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존재사적 어조를 자주 얻게 될 것이다. ἔστι πόλις Ἐφύρη μυχῷ Ἄργεος "아르고스의 귀퉁이에 에퓌르라는 도시가 있다." 같은 문장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어에서 단어의 배열은 아무런 구문론적 중요성이 없다. 첫 번째 위치에서 그 동사의 구문은 여전히 계사 구문, "에퓌르는 도시이다(Ἐφύρη πόλις ἐστί)"이다. 첫 번째 위치는 수사적 강조를 부여하지만, 그 동사 자체가 존재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존재사적 의미를 그 계사에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주어에 대한 이러한 존재사적 함축은 일반적으로 계사가 처소격 보어와 함께 이해될 때 더욱 강력하다.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말이다. (그래서 처소격 존재사 문장들의 유형들 전체 분류를 정립시킬 수 있다.) 하지만 계사의 존재사적 함축은 처소격 보어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는 주어를 그것에 대하여(about) 말할 어떤 것으로 놓는 것이 주-술 진술의 본질적 요소이며, 그리하여 주어에 대한 존재사라는 일부 주장이 긍정 주-술 문장 모두에서 함축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부정문들의 경우를 더 문제가 될 것으로 잠시 제쳐둔다.) 계사 문장들에서 이러한 주장은 주-술 관계의 신호로서 계사 esti에 의해 행해진다. 계사에 대한 그런 존재사적 함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당방형에서, 비록 [11쪽] 형식논리에서 이 규칙의 일반 양화 형식이 타당하지 않다 하더라도, "모든 그리스인은 인간이다"가 "일부 인간은 그리스인이다"를 함축하는 데에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어와 같은 자연언어에서, 서술적 진술은 그것에 대해 어떤 것이 참인 그러한 주어를 함의하고, (평범한 경우) 그 술어가 참이 되는 주어가 반드시 존재한다. 평범하지 않은 경우는, 비문법적 이유들로, 술어 표현이 실질적 속성을 부여하지 않고 따라서 주어의 현존이 문제가 되는 그런 경우이다. 그것이 아벨라르두스 시대에 논리학자들이 계사 est의 주어로 chimaera와 centaurus를 지니는 문장들을 재분석하기 시작한 이유이다. Chimaera est opinabilis "키메라는 의견의 대상이다" 같은 문장들은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키메라를 상상한다"라고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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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서 내 원래 계획은 문헌학적이고 해석학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Being의 형이상학이 단순히 언어적 혼란으로부터나 어휘의 지역적 특수성의 구상화로부터 귀결된 것이라 주장하는 상대주의자나 실증주의자의 공격에 대한 내 관심이 그 계획을 변경시켰다. Being에 대한 물음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에 속했기에, 그들의 Being에 대한 관심을 타당한 철학적 기획으로서 방어할 책임을 느꼈다. 그 결과가 einai에 대한 다양한 용법들이 주목할 만한 통일성을 갖춘 개념적 체계, 서술 개념 부근으로 군집을 형성하는 상호의존적 개념들의 연결망을 형성했다는,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이 고대와 근대 모두에 존재론에 대한 적절한 주제를 제공한다는 나의 반대 주장이다.
  그래서 내 책의 논증은 하나는 언어적이고 하나는 철학적인 두 가지 결론들에 이른다. 철학적 결론은 그리스 존재론을 위한 나의 방어로서 einai 체계에 대한 나의 설명에 의존하지만 그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건 아니다. 그리스 존재론은 아마도 상이한 토대들에 의존할 테고, 독자는 einai 체계에 대한 내 설명을 수용할지도 모르지만 존재론에 대한 옹호로서 그것의 가치는 의미할 수도 있다. 더욱이, 나는 그리스 철학의 해석을 위한 내 분석의 생산성을 증명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그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연구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그리스 존재론의 역사에 대한 문법적 서설이다.

2. 그리스에서, 또 일반적으로 인도-유럽어들에서 동사 to be에 대한 30년 전 이론은 단순히 한 가지였다. 본래 "exists," 혹은 아마도 좀 더 구체적으로 "be present" 같은 그런 의미였을 *es- 동사가, 그게 우연히 명사적 서술어들과 함께 허사로서 쓰이게 되었던 그런 동사가 있었고, 그렇게 그 본래 의미를 잃고 "mere copula" 역할로 퇴화했다. 이런 계사로서 be와 "exists" 의미의 be 구분은 존 슈트어트 밀에 의해 처음 유명해졌다. 그는 Being의 형이상학 전체가 이 동사의 이런 두 용법들 사이의 혼동에 기인하였다고 주장했다. 언어학자들과 문헌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들의 의도들에 따라 이 이분법을 받아들였다. [9쪽] 나는 그 이분법의 만연한 영향력의 징후로서 1957년 커크와 레이븐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1판에서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였던 그리스 단어 esti의 서술적 의미와 존재사적 의미 사이의 혼동"이란 소리를 의문 없이 언급할 수 있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2판(1983년)에서 새로운 편집자 말콤 스콧필드는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혼동하였다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이 관점을 수정하였지만 esti의 파르메니데스적 용법이 "동시에 존재사적이면서 서술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나는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 동사 einai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의 증대된 세련됨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는 더이상 언어적 혼동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 Being 이론들에 대한 밀의 김빠지는 설명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한 발 더 나아가 계사와 존재사적 동사 사이의 대비 그 근원적 본성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이분법에 대한 급진적 비판은 30년 전에 비하면 오늘날엔 더 쉬워졌는데, 동사 is의 애매성에 대한 소위 프레게-러셀식 주장을 일관되게 반대해 주장해온 Jaakko Hintikka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그 방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G. E. L. Owen'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to be는 언제나 이러저러한 어떤 것임(to be something or other)이란 공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사적 용법들이 또한 서술적이기도 하였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저 구분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법은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 einai의 구문론에 관한 Lesley Brown의 작업에 의해 결정적으로 진일보하였다. 나는 계싸와 존재사 용법들 사이의 그 이분법에 대한 대 오래된 반박을 여기서 재론하진 않을 것이다. 그 두 용법들 모두 존재사적-처소격 문장들 같은 또 다른 중요한 용법들이 있다거나 계사 용법은 구문론적으로 정의되는 반면 존재사적 용법은 그 동사의 어휘적 의미의 문제이기에 그 구분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따위의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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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Introduction (2003)


1. 1-3, 5, 8장의 이론적 논의를 좀 더 분명하고 정확한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60년대 이래 언어 이론과 언어 철학의 일반 논의를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einai에 대한 내 이론적 설명의 더 간결하고 일관된 판본을 내놓는 바이다.
  "언어들이 내세울 변변한 Being 개념 같은 건 없다'는 A. C. Graham의 관점에 반대해 to be의 기능들이 그리스어나 인도-유럽 어만의 고유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내 논증은 유행이 지난 듯하다. 저 언어상대주의도 내 주장도 별로지만, 내 주장이 근거하는 내 일관된 핵심주장, einai 체계의 개념적 통일성은 새로운 형식으로 내가 여기 내놓는다.
  우선 이 기획의 본질을 밝힌다. 내 목표는 그리스 존재론에 일종의 문법적 서설이었다. 파르메니데스가 정식화한 그런 Being 개념은 역사적 선행자들 없이 난데없이 등장한 듯한데, 또 대단한 역사적 결과들을 낳았다. 플라톤의 형상론이나 Not-Being에 대한 싸움이 그의 to on 설명에서 나왔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가지로 이야기되는 to be나 'being qua being은 그의 단일론적 what is 개념에 대항마로 고안되었다. 그리스 자연철학의 전개과정은 파르메니데스주의의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8쪽] 그런데 그런 강력한 Being 개념이 파르메니데스의 선대에게선 안 보이니, 초기 그리스에서 to be 동사 용법을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언어자료를 더 잘 파악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원칙들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 공헌하길 바라며 이 동사 용법 일람표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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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이든 두 쪽이든 그냥 일단.

Ἐπεὶ δ᾿ ἡ φύσις μέν ἐστιν ἀρχὴ κινήσεως καὶ μεταβολῆς, ἡ δὲ μέθοδος ἡμῖν περὶ φύσεώς ἐστι, δεῖ μὴ λανθάνειν τί ἐστι κίνησις· ἀναγκαῖον γὰρ ἀγνοουμένης αὐτῆς ἀγνοεῖσθαι καὶ τὴν φύσιν. διορισαμένοις δὲ περὶ κινήσεως πειρατέον τὸν αὐτὸν ἐπελθεῖν τρόπον περὶ τῶν ἐφεξῆς. δοκεῖ δ᾿ ἡ κίνησις εἶναι τῶν συνεχῶν, τὸ δ᾿ ἄπειρον ἐμφαίνεται πρῶτον ἐν τῷ συνεχεῖ· διὸ καὶ τοῖς ὁριζομένοις τὸ συνεχὲς συμβαίνει προσχρήσασθαι πολλάκις τῷ λόγῳ τῷ τοῦ ἀπείρου, ὡς τὸ εἰς ἄπειρον διαιρετὸν συνεχὲς ὄν. πρὸς δὲ τούτοις ἄνευ τόπου καὶ κενοῦ καὶ χρόνου κίνησιν ἀδύνατον εἶναι. δῆλον οὖν ὡς διά τε ταῦτα, καὶ διὰ τὸ πάντων εἶναι κοινὰ καὶ καθόλου ταῦτα, σκεπτέον προχειρισαμένοις περὶ ἑκάστου τούτων (ὑστέρα γὰρ ἡ περὶ τῶν ἰδίων θεωρία τῆς περὶ τῶν κοινῶν ἐστιν)· καὶ πρῶτον, καθάπερ εἴπομεν, περὶ κινήσεως. ἔστι δὴ τὸ μὲν ἐντελεχείᾳ μόνον, τὸ δὲ δινάμει καὶ ἐντελεχείᾳ, τὸ μὲν τόδε τι, τὸ δὲ τοσόνδε, τὸ δὲ τοιόνδε, καὶ τῶν ἄλλων τῶν τοῦ ὄντος κατηγοριῶν ὁμοίως. τοῦ δὲ πρός τι τὸ μὲν καθ᾿ ὑπεροχὴν λέγεται καὶ κατ᾿ ἔλλειψιν, τὸ δὲ κατὰ τὸ ποιητικὸν καὶ παθητικόν, καὶ ὅλως κινητικόν τε καὶ κινητόν· τὸ γὰρ κινητικὸν κινητικὸν τοῦ κινητοῦ καὶ τὸ κινητὸν κινητὸν ὑπὸ τοῦ κινητικοῦ. οὐκ ἔστι δὲ κίνησις παρὰ τὰ πράγματα· μεταβάλλει γὰρ ἀεὶ τὸ μεταβάλλον ἢ κατ᾿ οὐσίαν ἢ κατὰ ποσὸν ἢ κατὰ ποιὸν ἦ κατὰ τόπον, κοινὸν δ᾿ ἐπὶ τούτων οὐδὲν ἔστι λαβεῖν, ὡς φαμέν, ὃ οὔτε τόδε οὔτε ποσὸν οὔτε ποιὸν οὔτε τῶν ἄλλων κατηγορημάτων οὐθέν· ὥστ᾿ οὐδὲ κίνησις οὐδὲ μεταβολὴ οὐθενὸς ἔσται παρὰ τὰ εἰρημένα, μηθενός γε ὄντος παρὰ τὰ εἰρημένα. ἕκαστον δὲ διχῶς ὑπάρχει πᾶσιν, οἷον τὸ τόδε (τὸ μὲν γὰρ μορφὴ οὐτοῦ, τὸ δὲ στέρησις), καὶ κατὰ τὸ ποιόν (τὸ μὲν γὰρ λευκὸν τὸ δὲ μέλαν), καὶ κατὰ τὸ ποσὸν τὸ μὲν τέλειον τὸ δ᾿ ἀτελές. ὁμοίως δὲ καὶ κατὰ τὴν φορὰν τὸ μὲνἄων τὸ δὲ κάτω, ἢ τὸ μὲν κοῦφον τὸ δὲ βαρύ. ὥστε κινήσεως καὶ μεταβολῆς ἔστιν εἴδε τοσαῦτα ὅσα τοῦ ὄντος.
자연은 운동과 변화의 원리이고, 우리의 일은 자연에 관한 탐구이기에, 운동이 무엇인지를 몰라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운동이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경우 자연 역시 알려지지 않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운동에 관하여 정의를 내린 사람들은 똑같은 방식을 뒤따르는 것들에 관하여 적용시켜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운동은 연속들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우선(또는처음으로, 혹은 최초의) 무한이 그 연속 안에서 밝혀진다. 이런 이유로 연속을 규정하는 자들은 자주 무한에 대한 그 이론을 추가로 사용하도록 귀결되는 바, 연속인 것은 무한을 향해 분할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이런 것들에 더하여 장소와 공백과 시간 없이 운동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런 점들 때문에, 또 이런 것들이 모든 것들에 공통되고 보편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러한 것들 각각에 관하여 먼저 착수하여 검토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고유한 것들에 관한 탐구가 공통된 것들에 관한 것보다 나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우리가 말했던대로, 운동에 관하여 탐구한다. 그럼 어떤 것은 현실태로서만 존재하는 반면, 다른 것은 가능태로도 현실태로도 존재하며, 어떤 것은 여기 이 무언가로, 다른 것은 이 만큼의 것으로, 또 다른 것은 이러한 것으로 존재하며, 존재의 여타 범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무언가에 대한 것(상대범주)의 어떤 것은 초과에 따라 그리고 부족에 따라 진술되고, 다른 것은 작용과 수용에 따라, 또 일반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움직여지는 것으로 진술된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것은 움직여지는 것에 대해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여지는 것은 그것을 움직이는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은 이러한 사태 외에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에 따라서나 양에 따라 혹은 성질에 따라서나 장소에 따라 변화하며, 이러한 것들에 공통으로 파악되는 것은, 우리가 말하듯, 여기 이것도 얼만큼도 어떠함도 여타 범주들 중 어떤 것도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것의 운동도 변화도 상술된 바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상술된 바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모든 경우에 각각은 이중으로 존속한다. 예를 들어 여기 이것도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형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결여로 존재하니까),어떠함에 따르는 경우에도 (한편은 희고 다른 한편은 검으니까), 또 양에 따라서도 한편은 완전한 것인 반면 다른 한편은 불완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운동에 대해서도 위로 향하는 것과 아래로 향하는 것이 있고, 혹은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있다. 그래서 운동과 변화의 종류는 그 수가 존재의 종류만큼 있다.
διῃρημένου δὲ καθ᾿ ἕκαστον γένος τοῦ μὲν ἐντελεχείᾳ τοῦ δὲ δυνάμει, ἡ τοῦ δυνάμει ὄντος ἐντελέχεια, ᾗ τοιοῦτον, κίνησίς ἐστιν, οἷον τοῦ μὲν ἀλλοιωτοῦ, ᾗ αλλοιωτόν, ἀλλοίωσις, τοῦ δὲ αὐξητοῦ καὶ τοῦ ἀντικειμένου φθιτοῦ (οὐδὲν γὰρ ὄνομα κοινὸν ἐπ᾿ ἀμφοῖν) αὔξησις καὶ φθίσις, τοῦ δὲ γενητοῦ καὶ φθαρτοῦ γένεσις καὶ φθορά, τοῦ δὲ φορητοῦ φορά. ὅτι δὲ τοῦτο ἔστιν ἡ κίνησις, ἐντεῦθεν δῆλον. ὅταν γὰρ τὸ οἰκοδομητόν, ᾗ τοιοῦτον αὐτὸ λέγομεν εἶναι, ἐντελεχείᾳ ᾖ, οἰκοδομεῖται, καὶ ἔστιν τοῦτο οἰκοδόμησις· ὁμοίως δὲ καὶ μάθησις καὶ ἰάτρευσις καὶ κύλισις καὶ ἅλσις καὶ ἅδρυνσις καὶ γήρανσις. ἐπεὶ δ᾿ ἔνια ταὐτὰ καὶ δυνάμει καὶ ἐντελεχείᾳ ἐστίν, οὐχ ἅμα δὲ ἢ οὐ κατὰ τὸ αὐτό, ἀλλ᾿ οἷον θερμὸν μὲν ἐντελεχείᾳ ψυχρὸν δὲ δυνάμει, πολλὰ ἤδη ποιήσει καὶ πείσεται ὑπ᾿ ἀλλήλων· ἅπαν γὰρ ἔσται ἅμα ποιητικὸν καὶ παθητικόν. ὥστε καὶ τὸ κινοῦν φυσικῶς κινητόν· πᾶν γὰρ τὸ τοιοῦτον κινεῖ κινούμενον καὶ αὐτό. δοκεῖ μὲν οὖν τισιν ἅπαν κινεῖσθαι τὸ κινοῦν, οὐ μὴν ἀλλὰ περὶ τούτου μὲν ἐξ ἄλλων ἔσται δῆλον ὅπως ἔχει (ἔστι γάρ τι κινοῦν καὶ ἀκίνητον), ἡ δὲ τοῦ δυνάμει ὄντος <ἐντελέχεια>, ὅταν ἐντελεχείᾳ ὂν ἐνεργῇ οὐχ ᾗ αὐτὸ ἀλλ᾿ ᾗ κινητόν, κίνησίς ἐστιν. λέγω δὲ τὸ ᾗ ὡδί. ἔστι γὰρ ὁ χαλκὸς δυνάμει ἀνδριάς, ἀλλ᾿ ὅμως οὐχ ἡ τοῦ χαλκοῦ ἐντελέχεια, ᾗ χαλκός, κίνησίς ἐστιν· οὐ γὰρ τὸ αὐτὸ τὸ χαλκῷ εἶναι καὶ δυνάμει τινί [κινητῷ], ἐπεὶ εὶ ταὐτὸν ἦν ἁπλῶς καὶ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ἦν ἂν ἡ τοῦ χαλκοῦ, ᾗ χαλκός, ἐντελέχεια κίνησις· οὐκ ἔστιν δὲ ταὐτόν, ὡς εἴρηται (δῆλον δ᾿ ἐπὶ τῶν ἐναντίων· τὸ μὲν γὰρ δύνασθαι ὑγιαίνειν καὶ δύνασθαι κάμνειν ἕτερον - καὶ γὰρ ἂν τὸ κάμνειν καὶ τὸ ὑγιαίνειν ταὐτὸν ἦν - τὸ δὲ ὑποκείμενον καὶ τὸ ὑγιαῖνον καὶ τὸ νοσοῦν, εἴθ᾿ ὑγρότης εἴθ᾿ αἷμα, ταὐτὸν καὶ ἕν). ἐπεὶ δ᾿ οὐ ταὐτόν, ὥσπερ οὐδὲ χρῶμα ταὐτὸν καὶ ὁρατόν, ἡ τοῦ δυνατοῦ, ᾗ δυνατόν, ἐντελέχεια φανερὸν ὅτι κίνησίς ἐστιν.
각 유에 따라 한편으로는 현실태로 존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능태로 존재하는 것이 구분되었기에, 가능태로 존재하는 것의 현실태는, 이러한 한에 있어서, 운동이다. 예를 들어 변경되는 것의 경우, 그것이 변경되는 것인 한에서, 그 현실태는 변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증가하는 것과 그 반대에 놓이는 감소되는 것(이 양자에 공통된 이름이 없으므로)의 경우, 증가와 감소이고, 생성되는 것과 소멸되는 것의 경우 생성과 소멸이며, 이동되는 것의 경우에는 이동이다. 운동이 이러한 것이라는 점이, 이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건축되는 것이, 이러한 것이라고 우리가 진술하는 한에서,현실태로 존재할 때, 건축되고 있으며, 이것이 건축이기 때문이다. 교육과 의료 그리고 구르기와 도약 또 성숙과 나이듦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들 일부는 가능태이기도 현실태이기도 한데, 동시에 혹은 같은 것에 대해 그러하진 않고, 예를들어 한편으로 열이 현실태인 경우 냉은 가능태이며, 이제 여러가지 것들이 작용할 것이고 서로에 의해 작용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통틀어 모든 것이 동시에 작용자이자 수용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하는 것도 자연적으로 운동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은 움직이면서 또한그 자신이 움직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에게는 움직이는 것이 전부 움직여진다고 여겨지는데, 그럼에도 이에 관하여서는 여타의 것들을 통해 사정이 어떠한지 분명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움직이는 것은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현실태는, 현실태로 존재하면서 그 자체인 한에서가 아니라 움직여지는 것인 한에서 작동할 때, 운동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한정하여 진술하고 있다. 즉 청동은 가능적으로 조각상이지만, 그럼에도 청동의 현실태는 청동인 한에서 운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청동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가능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단적으로 또 정의에 따라 같은 것이었더라면, 청동이 청동인 한에서 그것의 현실태가 운동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것이 아니다. 이야기된 바와 같이. (그런데 이는 반대쌍의 경우에 분명하다. 즉 건강할 수 있다는 것과 아플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 그렇지 않으면 아픈 것과 건강한 것이 같은 것이었을 테니까 - 그런데 밑에 놓이는 것은 건강한 것도 아픈 것도, 기질이든 혈액이든, 같은 것이며 하나이기 때문이다).같은 것이 아니기에, 색과 시각적인 것이 같지 않듯, 가능적인 것의 가능적인 한에서의 현실태는 운동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ὅτι μὲν οὖν ἐστιν αὔτη, καὶ ὅτι συμβαίνει τότε κινεῖσθαι ὅταν ἡ ἐντελέχεια ᾖ αὐτή, καὶ οὔτε πρότερον οὔτε ὕστερον, δῆλον· ἐνδέχεται γὰρ ἕκαστον ὁτὲ μὲν ἐνεργεῖν ὁτὲ δὲ μή, οἷον τὸ οἰκοδομητόν, καὶ ἡ τοῦ οἰκοδομητοῦ ἐνέργεια, ᾗ οἰκοδομητόν, οἰκοδόμησίς ἐστιν (ἢ γὰρ οἰκοδόμησις ἡ ἐνέργεια [τοῦ οἰκοδομητοῦ] ἢ ἡ οἰκία· ἀλλ᾿ ὅταν οἰκία ᾖ, οὐκέτ᾿ οἰκοδομητὸν ἔστιν· οἰκοδομεῖται δὲ τὸ οἰκοδομητόν· ἀνάγκη οὖν οἰκοδόμησιν τὴν ἐνέργειαν εἶναι)· ἡ δ᾿ οἰκοδόμησις κίνησίς τις. ἀλλὰ μὴν ὁ αὐτὸς ἐφαρμόσει λόγος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κινήσεων.
그러므로 운동이 이러한 것임은, 그리고 현실태가 그 자체인 한에서 운동할 때 운동이 귀결되고 그 이전도 이후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은 어느 때엔 현실화하고 또 다른 때엔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건축되는 것, 그리고 그 건축되는 것의 현실화는, 건축되는 것인 한에서, 건축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현실화는 건축이거나 집이기 때문이다. 허나 집일 경우, 더 이상 건축되는 것은 아니다. 건축되는 것은 건축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 현실화는 건축임이 필연적이다). 그런데 건축은 어떤 운동이다. 동일한 논변이 여타의 운동들에 관하여서도 적절할 것이다.

Ὅτι δὲ καλῶς εἴρηται, δῆλον καὶ ἐξ ὧν οἱ ἄλλοι περὶ αὐτῆς λέγουσιν, καὶ ἐκ τοῦ μὴ ῥᾴδιον εἶναι διορίσαι ἄλλως αὐτήν. οὔτε γὰρ τὴν κίνησιν καὶ τὴν μεταβολὴν ἐν ἄλλῳ γένει θεῖναι δύναιτ᾿ ἂν τις, δῆλόν τε σκοποῦσιν ὡς τιθέασιν αὐτὴν ἔνιοι, ἑτερότητα καὶ ἀνισότητα καὶ τὸ μὴ ὂν φάσκοντες εἶναι τὴν κίνησιν· ὧν οὐδὲν ἀναγκαῖον κινεῖσθαι, οὔτ᾿ ἂν ἕτερα ᾖ οὔτ᾿ ἂνισα οὔτ᾿ ἂν οὐκ ὄντα· ἀλλ᾿ οὐδ᾿ ἡ μεταβολὴ οὔτ᾿ εἰς ταῦτα οὔτ᾿ ἐκ τούτων μᾶλλόν ἐστιν ἦ ἐκ τῶν ἀντικειμένων. αἴτιον δὲ τοῦ εἰς ταῦτα τιθέναι ὅτι ἀόριστόν τι δοκεῖ εἶναι ἡ κίνησις, τῆς δὲ ἑτέρας συστοιχίας αἱ ἀρχαὶ διὰ τὸ στερητικαὶ εἶναι ἀόριστοι· οὔτε γὰρ τόδε οὔτε τοιόνδε οὐδεμία αὐτῶν ἐστιν, [ὅτι] οὐδὲ τῶν ἄλλων κατηγοριῶν. τοῦ δὲ δοκεῖν ἀόριστον εἶναι τὴν κίνησιν αἴτιον ὅτι οὔτε εἰς δύναμιν τῶν ὄντων οὔτε εἰς ἐνέργειαν ἔστιν θεῖναι αὐτήν· οὔτε γὰρ τὸ δυνατὸν ποσὸν εἶναι κινεῖται ἐξ ἀνάγκης οὔτε τὸ ἐνεργείᾳ ποσόν, ἥ τε κίνησις ἐνέργεια μὲν εἶναι τις δοκεῖ, ἀτελὴς δέ· αἴτιον δ᾿ ὅτι ἀτελὲς τὸ δυνατόν, οὗ ἐστιν ἐνέργεια. καὶ διὰ τοῦτο δὴ χαλεπὸν αὐτὴν λαβεῖν τί ἐστιν· ἢ γὰρ εἰς στέρησιν ἀναγκαῖον θεῖναι ἢ εἰς δύναμιν ἢ εἰς ἐνέργειαν ἁπλῆν, τούτων δ᾿ οὐδὲν φαίνεται ἐνδεχόμενον. λείπεται τοίνυν ὁ εἰρημένος τρόπος, ἐνέργειαν μέν τινα εἶναι, τοιαύτην δ᾿ ἐνέργειαν οἵαν εἴπαμεν, χαλεπὴν μὲν ἰδεῖν, ἐνδεχομένην δ᾿ εἲναι.
훌륭하게 이야기되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운동에 관하여 논한 바들을 통해서도, 그 운동이란 것을 다른 식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통해서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누군가 운동과 변화를 다른 유 안에 정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일부 사람들이 그 운동을 어디에 정립하는지 살펴보면 분명하다. 그들은 운동이 다름과 부등 그리고 아님(비존재)이라 주장한다. 그것들 중 아무것도 필연적으로 운동되지 않는다, 다름이 되었든 부등이 되었든 아닌 것들이 되었든지간에. 오히려 변화는 이것들로 향하지도 않고 이것들로부터 성립하지도 않으며 차라리 그 반대인 것들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 정립시키는 이유는 운동이 무언가 정의되지 않는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고, 다른 목록의 원리들이 결여적인 것들이기 떄문에 정의되지 않는 것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기 이것도 이러한 것도 그것들 중 그 무엇 하나도 아니고, 여타 범주들에 속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동이 정의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원인은 그 운동을 존재하는 것들의 가능으로도 현실로도 정립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가능적 
κινεῖται δὲ καὶ τὸ κινοῦν ὥσπερ εἴρηται πᾶν, τὸ δυνάμει ὂν κινητόν, καὶ οὗ ἡ ἀκινησία ἠρεμία ἐστίν (ᾧ γὰρ ἡ κίνησις ὑπάρχει, τούτου ἡ ἀκινησία ἠρεμία). τὸ γὰρ πρὸς τοῦτο ἐνεργεῖν, ᾗ τοιοῦτον, αὐτὸ τὸ κινεῖν ἐστι· τοῦτο δὲ ποιεῖ θίξει, ὥστε ἅμα καὶ πάσχει· διὸ ἡ κίνησις ἐντελέχεια τοῦ κινητοῦ, ᾗ κινητόν, συμβαίνει δὲ τοῦτο θίξει τοῦ κινητικοῦ, ὥσθ᾿ ἅμα καὶ πάσχει. εἶδος δὲ ἀεὶ οἶσεταί τι τὸ κινοῦν, ἤτοι τόδε ἢ τοιόνδε ἢ τοσόνδε, ὃ ἔσται ἀρχὴ καὶ αἴτιον τῆς κινήσεως, ὅταν κινῇ, οῐον ὁ ἐντελεχείᾳ ἄνθρωπος ποιεῖ ἐκ τοῦ δυνάμει ὄντος ἀνθρώπου ἄνθρωπον.
헌데 움직이는 것 또한 이야기된대로 모두 움직여지는데, 가능적으로 운동하는 것이고, 

Καὶ τὸ ἀπορούμενον δὲ φανερόν, ὅτι ἐστὶν ἡ κίνησις ἐν τῷ κινητῷ· ἐντελέχεια γάρ ἐστι τούτου [καὶ] ὑπὸ τοῦ κινητικοῦ. καὶ ἡ τοῦ κινητικοῦ δὲ ἐνέργεια οὐκ ἄλλη ἐστίν· δεῖ μὲν γὰρ εἶναι ἐντελέχειαν ἀμφοῖν· κινητικὸν μὲν γάρ ἐστιν τῷ δύνασθαι, κινοῦν δὲ τῷ ἐνεργεῖν, ἀλλ᾿ ἔστιν ἐνεργητικὸν τοῦ κινητοῦ, ὥστε ὁμοίως μία ἡ ἀμφοῖν ἐνέργεια ὥσπερ τὸ αὐτὸ διάστημα ἓν πρὸς δύο καὶ δύο πρὸς ἕν, καὶ τὸ ἄναντες καὶ τὸ κάταντες· ταῦτα γὰρ ἓν μέν ἐστιν, ὁ μέντοι λόγος οὐχ εἷς· ὁμοίως δὲ καὶ ἐπὶ τοῦ κινοῦντος καὶ κινουμένου.

ἔχει δ᾿ ἀπορίαν λογικήν· ἀναγκαῖον γὰρ ἴσως εἶναί τινα ἐνέργειαν τοῦ ποιητικοῦ καὶ τοῦ παθητικοῦ· τὸ μὲν δὴ ποίησις, τὸ δὲ πάθησις, ἔργον δὲ καὶ τέλος τοῦ μὲν ποίημα, τοῦ δὲ πάθος. ἐπεὶ οὖν ἄμφω κινήσεις, εἰ μὲν ἕτεραι, ἐν τίνι; ἢ γὰρ ἄμφω ἐν τῷ πάχοντι καὶ κινουμένῳ, ἢ ἡ μὲν ποίησις ἐν τῷ ποιοῦντι, ἡ δὲ πάθησις ἐν τῷ πάσχοντι (εἰ δὲ δεῖ καὶ ταύτην ποίησιν καλεῖν, ὁμώνυμος ἂν εἴη). ἀλλὰ μὴν εἰ τοῦτο, ἡ κίνησις ἐν τῷ κινοῦντι ἔσται (ὁ γὰρ αὐτὸς λόγος ἐπὶ κινοῦντος καὶ κινουμένου), ὥστ᾿ ἢ πᾶν τὸ κινοῦν κινήσεται, ἢ ἔχον κίνησιν οὐ κινήσεται. εἰ δ᾿ ἄμφω ἐν τῷ κινουμένῳ καὶ πάσχοντι, καὶ ἡ ποίησις καὶ ἡ πάθησις, καὶ ἡ δίδαξις καὶ ἡ μάθησις δύο οὖσαι ἐν τῷ μανθάνοντι, πρῶτον μὲν ἡ ἐνέργεια ἡ ἑκάστου οὐκ ἐν ἑκάστῳ ὑπάρξει, εἶτα ἄτοπον δύο κινήσεις ἅμα κινεῖσθαι· τίνες γὰρ ἔσονται ἀλλοιώσεις δύο τοῦ ἑνὸς καὶ εἰς ἓν εἶδος; ἀλλ᾿ ἀδύνατον. ἀλλὰ μία ἔσται ἡ ἐνέργεια. ἀλλ᾿ ἄλογονδύο ἑτέρων τῷ εἴδει τὴν αὐτὴν καὶ μίαν εἶναι ἐνέργειαν· καὶ ἔσται, εἴπερ ἡ δίδαξις καὶ ἡ μάθησις τὸ αὐτὸ καὶ ἡ ποίησις καὶ ἡ πάθησις, καὶ τὸ διδάσκειν τῷ μανθάνειν τὸ αὐτὸ καὶ τὸ ποιεῖν τῷ πάσχειν, ὥστε τὸν διδάσκοντα ἀνάγκη ἔσται πάντα μανθάνειν καὶ τὸν ποιοῦντα πάσχειν.

ἢ οὔτε τὸ τὴνἄλλου ἐνέργειαν ἐν ἑτέρῳ εἶναι ἄτοπον (ἔστι γὰρ ἡ δίδαξις ἐνέργεια τοῦ διδασκαλικοῦ, ἔν τινι μέντοι, καὶ οὐκ ἀποτετμημένη, ἀλλὰ τοῦδε ἐν τῷδε), οὔτε μίαν δυοῖν κωλύει οὐθὲν τὴν αὐτὴν εἶναι (μὴ ὡς τῷ εἲναι τὸ αὐτό, ἀλλ᾿ ὡς ὑπάρχει τὸ δυνάμει ὂν πρὸς τὸ ἐνεργοῦν), οὔτ᾿ ἀνάγκη τὸν διδάσκοντα μανθάνειν, οὐδ᾿ εἰ τὸ ποιεῖν καὶ πάσχειν τὸ αὐτό ἐστιν, μὴ μέντοι ὥστε τὸν λόγον εἶναι ἕνα τὸν <τὸ> τί ἦν εἶναι λέγοντα, οἷον ὡς λώπιον καὶ ἱμάτιον, ἀλλ᾿ ὡς ἡ ὁδὸς ἡ Θήβηθεν Ἀθήναζε καὶ ἡ Ἀθήνηθεν εἰς Θήβας, ὥσπερ εἴρηται καὶ πρότερον; οὐ γὰρ ταὐτὰ πάντα ὑπάρχει τοῖς ὁπωσοῦν τοῖς αὐτοῖς, ἀλλὰ μόνον οἷς τὸ εἶναι τὸ αὐτό. οὐ μὴν ἀλλ᾿ οὐδ᾿ εἰ ἡ δίδαξις τῇ μαθήσει τὸ αὐτό, καὶ τὸ μανθάνειν τῷ διδάσκειν, ὥσπερ οὐδ᾿ εἰ ἡ διάστασις μία τῶν διεστηκότων, καὶ τὸ διίστασθαι ἐνθένθε ἐκεῖσε κἀκεῖθεν δεῦρο ἓν καὶ τὸ αὐτό. ὅλως δ᾿ εἰπεῖν οὐδ᾿ ἡ δίδαξις τῇ μαθήσει οὐδ᾿ ἡ ποίησις τῇ παθήσει τὸ αὐτὸ κυρίως, ἀλλ᾿ ᾧ ὑπάρχει ταῦτα, ἡ κίνησις· τὸ γὰρ τοῦδε ἐν τῷδε καὶ τὸ τοῦδε ὑπὸ τοῦδε ἐνέργειαν εἶναι ἕτερον τῷ λόγῳ.

τί μὲν οὖν ἐστιν κίνησις εἴρηται καὶ καθόλου καὶ κατὰ μέρος· οὐ γὰρ ἄδηλον πῶς ὁρισθήσεται τῶν εἰδῶν ἕκαστον αὐτῆς· ἀλλοίωσις μὲν γὰρ ἡ τοῦ ἀλλοιωτοῦ, ᾗ ἀλλοιωτόν, ἐντελέχεια. ἔτι δὲ γνωριμώτερον, ἡ τοῦ δυνάμει ποιητικοῦ καὶ παθητικοῦ, ᾗ τοιοῦτον, ἁπλῶς τε καὶ πάλιν καθ᾿ ἕκαστον, ἢ οἰκοδόμησις ἢ ἰάτρευσις. τὸν αὐτὸν δὲ λεχθήσεται τρόπον καὶ περὶ τῶν ἄλλων κινήσεων ἑκάστης.


-작성중-

Λεκτέον δὴ πρῶτον μὲν διότι ἡ φύσις τῶν ἕνεκά του αἰτίων, ἔπειτα περὶ τοῦ ἀναγκαίου, πῶς ἔχει ἐν τοῖς φυσικοῖς· εἰς γὰρ τύτην τὴν αἰτίαν ἀνάγουσι πάντες, ὅτι ἐπειδὴ τὸ φερμὸν τοιονδὶ πέφυκεν καὶ τὸ ψυχρὸν καὶ ἕκαστον δὴ τῶν τοιούτων, ταδὶ ἐξ ἀνάγκης ἐστὶ καὶ γίγνεται· καὶ γὰρ ἐὰν ἄλλην αἰτίαν εἴπωσιν, ὅσον ἁψάμενοι χαίρειν ἐῶσιν, ὁ μὲν τὴν φιλίαν καὶ τὸ νεῖκος, ὁ δὲ τὸν νοῦν· ἔχει δ᾿ ἀπορίαν τί κωλύει τὴν φύσιν μὴ ἕνεκά του ποιεῖν μηδ᾿ ὅτι βέλτιον, ἀλλ᾿ ὥσπερ ὕει ὁ Ζεὺς οὐχ ὅπως τὸν σῖτον αὐξήσῃ, ἀλλ᾿ ἐξ ἀνάγκης (τὸ γὰρ ἀναχθὲν ψυχθῆναι δεῖ, καὶ τὸ ψυχθὲν ὕδωρ γενόμενον κατελθεῖν· τὸ δ᾿ αὐξάνεσθαι τούτου γενομένου τὸ σῖτον συμβαίνει), ὁμοίως δὲ καὶ εἴ τῳ ἀπόλλυται ὁ σῖτος ἐν τῇ ἅλῳ, οὐ τούτου ἕνεκα ὕει ὅπως ἀπόληται, ἀλλὰ τοῦτο συμβέβηκεν-ὥστε τί κωλύει οὕτω καὶ τὰ μέρη ἔχειν ἐν τῇ φύσει, οἷον τοὺς ὁδόντας ἐξ ἀνάγκης ἀνατεῖλαι τοὺς μὲν ἐμπροσθίους ὀξεῖς, ἐπιτηδείους πρὸς τὸ λεαίνειν τὴν τροφήν, ἐπεὶ οὐ τούτου ἕνεκα γενέσθαι, ἀλλὰ συμπεσεῖν; ὁμοίως δὲ καὶ περὶ τῶν ἄλλων μερῶν, ἐν ὅσοις δοκεῖ ὑπάρχειν τὸ ἕνεκά του. ὅπου μὲν οὖν ἅπαντα συνέβη ὥσπερ κἂν εἰ ἕνεκά του ἐγίγνετο, ταῦτα μὲν ἐσώθη ἀπὸ τοῦ αὐτομάτου συστάντα ἐπιτηδείως· ὅσα δὲ μὴ οὕτως, ἀπώλετο καὶ ἀπόλλυται, καθάπερ Ἐμπεδοκλῆς λέγει τὰ βουγενῆ ἀνδρόπρῳρα.

ὁ μὲν οὖν λόγος, ᾧ ἄν τις ἀπορήσειεν, οὗτος, καὶ εἴ τις ἄλλος τοιοῦτός ἐστιν· ἀδύνατον δὲ τοῦτον ἔχειν τὸν τρόπον. ταῦτα μὲν γὰρ καὶ πάντα τὰ φύσει ἢ αἰεὶ οὕτω γίγνεται ὴ ὡς ἐπὶ τὸ πολύ, τῶν δ᾿ ἀπὸ τύχης καὶ τοῦ αὐτομάτου οὐδέν. οὐ γὰρ ἀπὸ τύχης οὐδ᾿ ἀπὸ συμπτώματος δοκεῖ ὕειν πολλάκις τοῦ χειμῶνος, ἀλλ᾿ ἐὰν ὑπὸ κύνα· οὐδὲ καύματα ὑπὸ κύνα, ἀλλ᾿ ἂν χειμῶνος. εἰ οὖν ἢ ἀπὸ συμπτώματος δοκεῖ ἢ ἕνεκά του εἶναι, εἰ μὴ οἷόν τε ταῦτ᾿ εἶναι μήτε ἀπὸ συμπτώματος μήτ᾿ ἀπὸ ταὐτομάτου, ἕνεκά του ἂν εἴη. ἀλλὰ μὴν φύσει γ᾿ ε'στὶ τὰ τοιαῦτα πάντα, ὡς κἂν αὐτοὶ φαῖεν οἱ ταῦτα λέγοντες. ἔστιν ἄρα τὸ ἕνεκά του ἐν τοῖς φύσει γιγνομένοις καὶ οὖσιν.

ἔτι ἐν ὅσοις τέλος ἔστι τι, τούτου ἕνεκα πράττεται τὸ πρότερον καὶ τὸ ἐφεξῆς. οὐκοῦν ὡς πράττεται, οὕτω πέφυκε, καὶ ὡς πέφυκεν, οὕτω πράττεται ἕκαστον, ἂν μή τι ἐμποδίζῃ. πράττεται δ᾿ ἕνεκά του· καὶ πέφυκεν ἄρα ἕνεκά του. οἷον εἰ οἰκία τῶν φύσει γιγνομένων ἦν, οὕτως ἂν ἐγίγνετο ὡς νῦν ὑπὸ τῆς τέχνης· εἰ δὲ τὰ φύσει μὴ μόνον φύσει ἀλλὰ καὶ τέχνῃ γίγνοιτο, ὡσαύτως ἂν γίγνοιτο ᾗ πέφυκεν. ἕνεκα ἄρα θατέρου θάτερον. ὅλως δὲ ἡ τέχνη τὰ μὲν ἐπιτελεῖ ἃ ἡ φύσις ἀδυνατεῖ ἀπεργάσασθαι, τὰ δὲ μιμεῖται. εἰ οὖν τὰ κατὰ τέχνην ἕνεκά του, δῆλον ὅτι καὶ τὰ κατὰ φύσιν· ὁμοίως γὰρ ἔχει πρὸς ἄλληλα ἐν τοῖς κατὰ τέχνην καὶ ἐν τοῖς κατὰ φύσιν τὰ ὕστερα πρὸς τὰ πρότερα.
어떤 목적이 내재하는 것들의 경우, 그 목적을 위해 그것에 앞서고 연쇄되는 것이 수행된다. 그리하여 수행되는 방식대로, 그렇게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고, 자연스러운 상태 그대로, 그렇게 각기 수행된다, 무슨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그런데 어떤 것을 위해서 수행된다. 또한 그래서 어떤 것을 위해 자연상태에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집이 자연 생성물들에 속했더라면, 실상 기술에 의해서처럼 그렇게 생성되었을 터이다. 그러데 만일 자연상의 것들이 자연뿐만 아니라 기술에 의해서도 생성된다면, 자연상태에 있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생성될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른 것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자연이 완수해낼 수 없는 것들은 기술이 성취해내고, 여타의 것들은 모방한다. 그러므로 만일 기술에 따르는 것들이 어떤 것을 위해서 있다면, 자연에 따른 것들 또한 그렇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기술에 따르는 것들 내에서도 자연에 따르는 것들 내에서도 선행하는 것들에 대해 후행하는 것들은 서로에 대해 비슷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μάλιστα δὲ φανερὸν ἐπὶ τῶν ζῴων τῶν ἄλλων, ἃ οὔτε τέχνῃ οὔτε ζητήσαντα οὔτε βουλευσάμενα ποιεῖ· ὅθεν διαποροῦσί τινες πότερον νῷ ἤ τινι ἄλλῳ ἐργάζονται οἵ τ᾿ ἀράχναι καὶ οἱ μύρμηκες καὶ τὰ τοιαῦτα. κατὰ μικρὸν δ᾿ οὕτω προϊόντι καὶ ἐν τοῖς φυτοῖς φαίνεται τὰ συμφέροντα γιγνόμενα πρὸς τὸ τέλος, οἷον τὰ φύλλα τῆς τοῦ καρποῦ ἕνεκα σκέπης. ὥστ᾿ εἰ φύσει τε ποιεῖ καὶ ἕνεκά τοῦ ἡ χελιδὼν τὴν νεοττιὰν καὶ ὁ ἀράχνης τὸ ἀράχνιον, καὶ τὰ φυτὰ τὰ φύλλα ἕνεκα τῶν καρπῶν καὶ τὰς ῥίζας οὐκ ἄνω ἀλλὰ κάτω τῆς τροφῆς, φανερὸν ὅτι ἔστιν ἡ αἰτία ἡ τοιαύτη ἐν τοῖς φύσει γιγνομένοις καὶ οὖσιν. καὶ ἐπεὶ ἡ φύσις διττή, ἡ μὲν ὡς ὕλη ἡ δ᾿ ὡς μορφή, τέλος δ᾿ αὕτη, τοῦ τέλους δὲ ἕνεκα τἆλλα, αὕτη ἂν εἴη ἡ αἰτία, ἡ οὗ ἕνεκα.
여타의 것들 중 특히나 동물들에 관련하여 명백한 것은, 기술로써도 탐구함으로써도 숙고해서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어떤 이들은 거미들과 개미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이 지성으로써 완수해내는 것인지 다른 어떤 것으로써 그리하는지 혼란에 빠진다. 그런 식으로 점차 나아가 식물들에서도 목적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들이 생겨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잎들은 열매를 위한 보호물에 속한다. 그래서 만일 자연적으로도 그리고 또 어떤 것을 위해서도 제비가 둥지를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친다면, 그리고 식물이 열매를 위해 잎들을 짓고 또한 뿌리들이 양분을 위해 위가 아니라 아래로 향하다면, 자연적으로 생성되고 존재하는 것들 내에 이와 같은 원인이 있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자연이 이중, 즉 한편으로는 질료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형상으로서 자연이기에, 그런데 이것(후자)은 목적이고, 여타의 것들은 목적을 위한 것들이기에, 원인은 이것, 어떤 것을 위한 원인일 터이다. 
ἁμαρτία δὲ γίγνεται καὶ ἐν τοῖς κατὰ τέχνην (ἔγραψε γὰρ οὐκ ὀρθῶς ὁ γραμματικός, καὶ ἐπότισεν [οὐκ ὀρθῶς] ὁ ἰατρὸς τὸ φάρμακον), ὥστε δῆλον ὅτι ἐνδέχεται καὶ ἐν τοῖς κατὰ φύσιν. εἰ δὴ ἔστιν ἔνια κατὰ τέχνην ἐν οἷς τὸ ὀρθῶς ἕνεκά του, ἐν δὲ τοῖς ἁμαρτανομένοις ἕνεκα μέν τινος ἐπιχειρεῖται ἀλλ᾿ ἀποτυγχάνεται, ὁμοίως ἂν ἔχοι καὶ ἐν τοῖς φυσικοῖς, καὶ τὰ τέρατα ἁμαρτήματα ἐκείνου τοῦ ἕνεκά του. καὶ ἐν ταῖς ἐξ ἀρχῆς ἄρα συστάσεσι τὰ βουγενῆ, εἰ μὴ πρός τινα ὅρον καὶ τέλος δυνατὰ ἦν ἐλθεῖν, διαφθειρομένης ἂν ἀρχῆς τινὸς ἐγίγνετο, ὥσπερ νῦν τοῦ σπέρματος.
그런데 기술에 따른 일들에서도 실수가 생기고 (문법학자가 잘못 글을 쓰고, 의사가 약을 잘못 먹이니까), 그래서 자연에 따르는 일들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만일 어떤 것을 위해 제대로 행하는 것이 그 안에 속하는 어떤 일들이 있다면, 그런데 실수가 일어난 일들에서 어떤 것을 위한 일들이 시도되지만 실패한다면, 자연적인 일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고, 기형들 또한 어떤 것을 위한 그 경우의 실수들일 것이다. 또한 그래서 소의 족속들이 원리로부터 구성됨에 있어서, 만일 특정한 한계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면, 특정 원리가 훼손될 경우 생성될 것이다, 이제 마치 씨앗이 그런 경우처럼.
ἔτι ἀνάγκη σπέρμα γενέσθαι πρῶτον, ἀλλὰ μὴ εὐθὺς τὰ ζῷα· καὶ τὸ "οὐλοφυὲς μὲν πρῶτα" σπέρμα ἦν.
나아가 처음에 씨앗이 생성됨이 필연적이고, 곧장 동물들이 생성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처음에 구분되지 않는 것"은 씨앗이었다.
ἔτι καὶ ἐν τοῖς φυτοῖς ἔνεστι τὸ ἕνεκά του, ἧττον δὲ διήρθρωται· πότερον οὖν καὶ ἐν τοῖς φυτοῖς ἐγίγνετο, ὥσπερ τὰ βουγενῆ ἀνδρόπρῳρα, οὕτω καὶ ἀμπελογενῆ ἐλαιόπρῳρα, ἢ οὔ; ἄτοπον γάρ· ἀλλὰ μὴν ἔδει γε, εἴπερ καὶ ἐν τοῖς ζῴοις.
더욱이 식물들에도 어떤 것을 위한 것이 내재한다, 그러나 덜 조직된다. 그러면 인면을 한 소의 족속들처럼, 그렇게 위가 올리브 나무인 포도나무 족속들이 식물들 중에서 생겨나겠는가, 혹은 그렇지 않겠는가? 이상한 일이기야 하지만, 만일 정말 동물들에게도 그런 일이 있다면, 이 경우도 그래야 한다.
ἔτι ἔδει καὶ ἐν τοῖς σπέρμασι γίγνεσθαι ὅπως ἔτυχεν· ὅλως δ᾿ ἀναιρεῖ ὁ οὕτως λέγων τὰ φύσει τε καὶ φύσιν· φύσει γάρ, ὅσα ἀπό τινος ἐν αὑτοῖς ἀρχῆς συνεχῶς κινούμενα ἀφικνεῖται εἴς τι τέλος· ἀφ᾿ ἑκάστης δὲ οὐ τὸ αὐτὸ ἑκάστοις οὐδὲ τὸ τυχόν, ἀεὶ μέντοι ἐπὶ τὸ αὐτό, ἂν μή τι ἐμποδίσῃ. τὸ δὲ οὗ ἕνεκα, καὶ ὃ τούτου ἕνεκα, γένοιτο ἂν καὶ ἀπὸ τύχης, οἷον λέγομεν ὅτι ἀπὸ τύχης ἦλθεν ὁ ξένος καὶ λυσάμενος ἀπῆλθεν, ὅταν ὥσπερ ἕνεκα τούτου ἐλθὼν πράξῃ, μὴ ἕνεκα δὲ τούτου ἔλθῃ. καὶ τοῦτο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ἡ γὰρ τύχη τῶν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αἰτίων, καθάπερ καὶ πρότερον εἴπομεν), ἀλλ᾿ ὅταν τοῦτο αἰεὶ ἢ ὡς ἐπὶ τὸ πολὺ γένηται, οὐ συμβεβηκὸς οὐδ᾿ ἀπὸ τύχης· ἐν δὲ τοῖς φυσικοῖς ἀεὶ οὕτως, ἂν μή τι ἐμποδίσῃ.
더 나아가 씨앗들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우연한 것이 생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렇게 논하는 자는 자연상의 것들과 자연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자연에서, 자체 내의 어떤 원리를 통해 연속적으로 움직여지는 것들은 어떤 목적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각의 원리로부터 각각에 동일한 목적이 있는 것도 우연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지만 언제나 같은 목적을 향할 것이다, 뭔가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런데 목적,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한 것, 그것은 우연을 통해서도 생성될 것이다, 이를 테면 우리는 소님이 우연히 왔고 돈을 갚았다고 말한다, 마치 그 일을 위해 와서 행한 것처럼 그리 했을 때,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온 것은 아닐 경우. 또한 이것은 부수적이지만 (왜냐하면 우연은 부수적 원인들에 속하니까, 앞서 우리가 이야기하기도 한 그대로), 그 일이 언제나 혹은 대개의 경우 발생할 때, 부수적이지도 우연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연적인 일들에서는 언제나 그렇게 된다, 뭔가 방해하지 않는다면.
ἄτοπον δὲ τὸ μὴ οἴεσθαι ἕνεκά του γίγνεσθαι, ἐὰν μὴ ἴδωσι τὸ κινοῦν βουλευσάμενον. καίτοι καὶ ἡ τέχνη οὐ βουλεύεται· καὶ εἰ ἐνῆν ἐν τῷ ξύλῳ ἡ ναυπηγική, ὁμοίως ἂν τῇ φύσει ἐποίει· ὥστ᾿ εἰ ἐν τῇ τέχνῃ ἔνεστι τὸ ἕνεκά του, καὶ ἐν τῇ φύσει. μάλιστα δὲ δῆλον, ὅταν τις ἰατρεύῃ αὐτὸς ἑαυτόν· τούτῳ γὰρ ἔοικεν ἡ φύσις. ὅτι μὲν οὖν αἰτία ἡ φύσις, καὶ οὕτως ὡς ἕνεκά του, φανερόν.
그런데, 사람들이 의도하여 움직이는 것을 설령 못 보았더라도, 무언가를 위해서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더구나 기술 또한 의도를 갖지 않는다. 또한 만일 목재 내에 조선술이 내재했더라면, 그와 비슷하게 그 본성으로써 만들었을 터이다. 그래서 만일 기술 안에 어떤 것을 위함이 내재한다면, 자연 안에도 내재한다. 어떤 자가 제 자신을 스스로 치료할 경우, 특히 분명하다. 왜냐하면 자연은 이 경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원인이고, 어떤 것을 위한 경우처럼 그런 식으로 원인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Τὸ δ᾿ ἐξ ἀνάγκης πότερον ἐξ ὑποθέσεως ὑπάρχει ἢ καὶ ἁπλῶς; νῦν μὲν γὰρ οἴονται τὸ ἐξ ἀνάγκης εἶναι ἐν τῇ γενέσει ὥσπερ ἂν εἴ τις τὸν τοῖχον ἐξ ἀνάγκης γεγενῆσθαι νομίζοι, ὅτι τὰ μὲν βαρέα κάτω πέφυκε φέρεσθαι τὰ δὲ κοῦφα ἐπιπολῆς, διὸ οἱ λίθοι μὲν κάτω καὶ τὰ θεμέλια, ἡ δὲ γῆ ἄνω διὰ κουφότητα, ἐπιπολῆς δὲ μάλιστα τὰ ξύλα· κουφότατα γάρ. ἀλλ᾿ ὅμως οὐκ ἄνευ μὲν τούτων γέγονεν, οὐ μέντοι διὰ ταῦτα πλὴν ὡς δι᾿ ὕλην, ἀλλ᾿ ἕνεκα τοῦ κρύπτειν ἄττα καὶ σώζειν. ὁμοίως δὲ καὶ ἐν τοῖς ἄλλοις πᾶσιν, ἐν ὅσοις τὸ ἕνεκά του ἔστιν, οὐκ ἄνευ μὲν τῶν ἀναγκαίαν ἐχόντων τὴν φύσιν, οὐ μέντοι γε διὰ ταῦτα ἀλλ᾿ ἢ ὡς ὕλην, ἀλλ᾿ ἕνεκά του, οἷον διὰ τί ὁ πρίων τοιοσδί; ὅπως τοδὶ καὶ ἕνεκα τουδί. τοῦτο μέντοι τὸ οὗ ἕνεκα ἀδύνατον γενέσθαι, ἂν μὴ σιδηροῦς ᾖ· ἀνάγκη ἄρα σιδηροῦν εἶναι, εἰ πρίων ἔσται καὶ τὸ ἔργον αὐτοῦ. ἐξ ὑποθέσεως δὴ τὸ ἀναγκαῖον, ἀλλ᾿ οὐχ ὡς τέλος· ἐν γὰρ τῇ ὕλῃ τὸ ἀναγκαῖον, τὸ δ᾿ οὗ ἕνεκα ἐν τῷ λόγῳ.
필수적인 것은 전제된 것을 통해 존속하는가 아니면 단적으로도 현존하는가? 왜냐하면 오늘날 생성에는 필수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무거운 것은 본디 아래로 이동하고 가벼운 것은 위로 향하며, 이로 인해 돌들과 반석들은 아래로, 반면 흙은 가벼운 것이기 때문에 위로 향하여, 목재는, 가장 가벼우니까, 특히나 위로 향한다는 점에서, 성벽은 필수적으로 생성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할 것처럼 말이다. 허나 이것들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질료 때문으로서가 아니라면 이것들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엄폐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 어떤 것을 위함이 내재하는 여타 모든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필수적인 본성을 지닌 것들 없이 생성되진 않지만, 질료로서가 아니라면 이것들 때문이 아니라, 어떤 것을 위하여 생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톱은 무엇 때문에 이러한가? 이러한 것일 방식으로 또한 이러한 것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을 위함은 이것이 될 수 없다, 쇠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쇠임은 필수적이다, 만일 톱이 있으려면 그리고 그 자신의 일이 있으려면. 그래서 필수적인 것은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전제로부터 그러한 것이다. 왜냐하면 필연은 질료 내에 있는데, 목적은 정의 내에 있기 때문이다.
ἔστι δὲ τὸ ἀναγκαῖον ἔν τε τοῖς μαθήμασι καὶ ἐν τοῖς κατὰ φύσιν γιγνομένοις τρόπον τινὰ παραπλησίως· ἐπεὶ γὰρ τὸ εὐθὺ τοδί ἐστιν, ἀνάγκη τὸ τρίγωνον δύο ὀρθαῖς ἴσας ἔχειν· ἀλλ᾿ οὐκ ἐπεὶ τοῦτο, ἐκεῖνο· ἀλλ᾿ εἴ γε τοῦτο μὴ ἔστιν, οὐδὲ τὸ εὐθὺ ἔστιν. ἐν δὲ τοῖς γιγνομένοις ἕνεκά του ἀνάπαλιν, εἰ τὸ τέλος ἔσται ἢ ἔστι, καὶ τὸ ἔμπροσθεν ἔσται ἢ ἔστιν· εἰ δὲ μή, ὥσπερ ἐκεῖ μὴ ὄντος τοῦ συμπεράσματος ἡ ἀρχὴ οὐκ ἔσται, καὶ ἐνταῦθα τὸ τέλος καὶ τὸ οὗ ἕνεκα. ἀρχὴ γὰρ καὶ αὔτη, οὐ τῆς πράξεως ἀλλὰ τοῦ λογισμοῦ (ἐκεῖ δὲ τοῦ λογισμοῦ· πράξεις γὰρ οὐκ εἰσίν). ὥστ᾿ εἰ ἔσται οἰκία, ἀνάγκη ταῦτα γενέσθαι ἢ ὑπάρχειν, ἢ εἶναι [ἢ] ὅλως τὴν ὕλην τὴν ἕνεκά του, οἷον πλίνθους καὶ λίθους, εἰ οἰκία· οὐ μέντοι διὰ ταῦτά ἐστι τὸ τέλος ἀλλ᾿ ἢ ὡς ὕλην, οὐδ᾿ ἔσται διὰ ταῦτα. ὅλως μέντοι μὴ ὄντων οὐκ ἔσται οὔθ᾿ ἡ οἰκία οὔθ᾿ ὁ πρίων, ἡ μὲν εἰ μὴ οἱ λίθοι, ὁ δ᾿ εἰ μὴ ὁ σίδηρος· οὐδὲ γὰρ ἐκεῖ αἱ ἀρχαί, εἰ μὴ τὸ τρίγωνον δύο ὀρθαί.
필수적인 것은 수학에도 그리고 자연에 따라 생성되는 것들에도 어떤 방식으로 유사하게 있다. 왜냐하면 직선은 이러한 것이기에, 삼각형이 직각과 같은 크기의 각들을 두 배 지니는 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허나 후자이기에, 전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일 후자이지 않다면, 직선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것을 위하여 생성되는 것들에서는 역전이 있다, 만일 목적이 있을 것이거나 있다면, 선행자도 있을 것이거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저 수학의 경우 결론이 없기에 원리(출발점)도 있지 않을 것처럼, 여기에서도 목적과 무엇을 위함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또한 원리, 그런데 행위가 아니라 추론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경우 추론에 속한다. 행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집이 있을 것이라면, 그런 것들이 생성되거나 존속함이 필연적이거나,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위한 질료가 있음이 필연적이다, 예를 들어 벽돌이나 돌이, 만일 집이 있을 것이라면. 그렇지만 그 목적이 아니라 질료로서 이러한 것들 때문이고, 이것들 때문에 있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것들이 있지 않을 경우 집도 톱도 있지 않을 것인 바, 만일 돌들이 없다면 집이, 쇠가 없다면 톱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수학의 경우에서, 만일 삼각형이 직각 두배가 되는 각들을 지니지 않는다면, 원리들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φανερὸν δὴ ὅτι τὸ ἀναγκαῖον ἐν τοῖς φυσικοῖς τὸ ὡς ὕλη λεγόμενον καὶ αἱ κινήσεις αἱ ταύτης. καὶ ἄμφω μὲν τῷ φυσικῷ λεκτέαι αἱ αἰτίαι, μᾶλλον δὲ ἡ τίνος ἕνεκα· αἴτιον γὰρ τοῦτο τῆς ὕλης, ἀλλ᾿ οὐχ αὕτη τοῦ τέλους· καὶ τὸ τέλος τὸ οὗ ἕνεκα, καὶ ἡ ἀρχὴ ἀπὸ τοῦ ὁρισμοῦ καὶ τοῦ λόγου, ὥσπερ ἐν τοῖς κατὰ τέχνην, ἐπεὶ ἡ οἰκία τοιόνδε, τάδε δεῖ γενέσθαι καὶ ὑπάρχειν ἐξ ἀνάγκης, καὶ ἐπεὶ ἡ ὑγίεια τοδί, τάδε δεῖ γενέσθαι ἐξ ἀνάγκης καὶ ὑπάρχειν - οὕτως καὶ εἰ ἄνθρωπος τοδί, ταδί· εἰ δὲ ταδί, ταδί. ἴσως δὲ καὶ ἐν τῷ λόγῳ ἔστιν τὸ ἀναγκαῖον. ὁρισαμένῳ γὰρ τὸ ἔργον τοῦ πρίειν ὅτι διαίρεσις τοιαδί, αὔτη γ᾿ οὐκ ἔσται, εἰ μὴ ἕξει ὀδόντας τοιουσδί· οὗτοι δ᾿ οὔ, εἰ μὴ σιδηροῦς. ἔστι γὰρ καὶ ἐν τῷ λόγῳ ἔνια μόρια ὡς ὕλη τοῦ λόγου.
그래서 자연적인 것들의 경우에서 필수적인 것은 질료라고 정의되는 것이고 운동(변화)이 그것에 속한 운동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또한 자연학자는 양자 모두 원인들이라 정의해야 하지만, 어떤 것을 위한 원인을 훨씬 더 그리 논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질료의 원인이지만, 그것은 목적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적은 무엇을 위함이고, 원리는 규정과 정의로부터 나오며, 기술에 따른 것들의 경우, 집이 여기 이러하기에, 여기 이러한 것들이 필수적으로 생성되어야 하고 존속해야 하며, 건강이 여기 이러하기에, 여기 이러한 것들이 필수적으로 생성되어야 하고 존속해야 하는 것처럼 - 그렇게 인간도 만일 여기 이와 같다면, 여기 이와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한다. 여기 이러한 것들이 있다면, 여기 그러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 같은 식으로 정의 내에도 필수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 이러한 종류의 분할을 톱질의 기능으로 정의하는 자에게, 이 분할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 이러한 종류의 톱니를 지니지 않는다면. 그런데 이러한 톱니들이 아닐 것이다, 만일 쇠로 된 것들이 아니라면. 왜냐하면 정의 내에도 정의의 질료로서 몇몇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蟲-

  Λέγεται δὲ καὶ ἡ τύχη καὶ τὸ αὐτόματον τῶν αἰτίων, καὶ πολλὰ καὶ εἶναι καὶ γίγνεσθαι διὰ τύχην καὶ διὰ τὸ αὐτόματον· τίνα οὖν τρόπον ἐν τούτοις ἐστὶ τοῖς αἰτίοις ἡ τύχη καὶ τὸ αὐτόματον, καὶ πότερον τὸ αὐτὸ ἡ τύχη καὶ τὸ αὐτόματον ἢ ἕτερον, καὶ ὅλως τί ἐστιν ἡ τύχη καὶ τὸ αὐτόματον, ἐπισκεπτέον. ἔνιοι γὰρ καὶ εἰ ἔστιν ἢ μὴ ἀποροῦσιν· οὐδὲν γὰρ δὴ γίγνεσθαι ἀπὸ τύχης φασίν, ἀλλὰ πάντων εἶναί τι αἴτιον ὡρισμένον ὅσα λέγομεν ἀπὸ ταὐτομάτου γίγνεσθαι ἢ τύχης, οἷον τοῦ ἐλθεῖν ἀπὸ τύχης εἰς τὴν ἀγοράν, καὶ καταλαβεῖν ὅν ἐβούλετο μὲν οὐκ ᾤετο δέ, αἴτιον τὸ βούλεσθαι ἀγοράσαι ἐλθόντα· ὁμοίως δὲ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τῶν ἀπὸ τύχης λεγομένων ἀεί τι εἶναι λαβεῖν τὸ αἴτιον, ἀλλ᾿ οὐ τύχην, ἐπεὶ εἴ γέ τι ἦν ἡ τύχη, ἄτοπον ἂν φανείη ὡς ἀληθῶς, καὶ ἀπορήσειεν ἄν τις διὰ τί ποτ᾿ οὐδεὶς τῶν ἀρχαίων σοφῶν τὰ αἴτια περὶ γενέσεως καὶ φθορᾶς λέγων περὶ τύχης οὐδὲν διώρισεν, ἀλλ᾿ ὡς ἔοικεν, οὐδὲν ᾤοντο οὐδ᾿ ἐκεῖνοι εἶναι ἀπὸ τύχης. ἀλλὰ καὶ τοῦτο θαυμαστόν· πολλὰ γὰρ καὶ γίγνεται καὶ ἔστιν ἀπὸ τύχης καὶ ἀπὸ ταὐτομάτου, ἃ οὐκ ἀγνοοῦντες ὅτι ἔστιν ἐπανενεγκεῖν ἕκαστον ἐπί τι αἴτιον τῶν γιγνομένων, καθάπερ ὁ παλαιὸς λόγος εἶπεν ὁ ἀναιρῶν τὴν τύχην, ὅμως τούτων τὰ μὲν εἶναί φασι πάντες ἀπὸ τύχης τὰ δ᾿ οὐκ ἀπὸ τύχης· διὸ καὶ ἁμῶς γέ πως ἦν ποιητέον αὐτοῖς μνείαν. ἀλλὰ μὴν οὐδ᾿ ἐκείνων γέ τι ᾤοντο εἶναι τὴν τύχην, οἷον φιλίαν ἢ νεῖκος ἢ νοῦν ἢ πῦρ ἢ ἄλλο γέ τι τῶν τοιούτων. ἄτοπον οὖν εἴτε μὴ ὑπελάμβανον εἶναι εἴτε οἰόμενοι παρέλειπον, καὶ ταῦτ᾿ ἐνίοτε χρώμενοι, ὥσπερ Ἐμπεδοκλῆς οὐκ ἀεὶ τὸν ἀέρα ἀνωτάτω ἀποκρίνεσθαί φησιν, ἀλλ᾿ ὅπως ἂν τύχῃ. λέγει γοῦν ἐν τῇ κοσμοποιίᾳ ὡς "οὕτω συνέκυρσε θέων τοτέ, πολλάκι δ᾿ ἄλλως"· καὶ τὰ μόρια τῶν ζῴων ἀπὸ τύχης γενέσθαι τὰ πλεῖστά φησιν.
  그런데 우연과 자동(저절로)도 원인들 중의 것들로, 그리고 여러가지 것들이 우연으로 인한 또한 자동으로 인한 것이라고도 또 그렇게 생성된다고도 논해진다. 그러므로 무슨 방식으로 이러한 원인들 속에 우연과 자동이 속하는지, 또 우연과 필연이 같은지 혹은 다른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연과 자동이 무엇인지, 검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그것들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난해해 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정말로 우연하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저절로(자동으로) 혹은 우연히 일어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들에 무언가 규정된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연히 시장에 들러, 찾고자 바랐지만 찾으리라 생각치는 못한 자를 찾은 것에 대해, 시장을 보러 간 자가 바란 것이 그 원인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비슷하게 여타 우연한 것으로 논해지는 것들에 관하여서도 언제나, 우연이 아니라, 어떤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만일 정말로 뭔가 우연이랄 것이 있다면. 정말로 이상해 보일 것이며, 누군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옛 성현들 중 그 누구도 생성과 소멸의 원인들에 관하여 논하며 우연에 관하여서는 아무것도 정의하지 않았는지 난감해할 것이기에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허나 보이기로는, 저들도 우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새각했던 것으 아니다. 오히려 다음 사항도 놀라운 것이다. 그들이, 마치 우연을 삭제하는 그 옛 이론처럼, 일어나는 일들의 어떤 각각의 원인으로 소급시킬 수 있는 것을 모르지 않는, 그런 많은 것들이 우연하게 그리고 저절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있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 중 어떤 것들은 모두들 우연한 것들이라고 반면 다른 것들은 우연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이유로 이렇든 저렇든 어떻게든 그들은 언급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저것들, 예를 들어 우애나 증오 또는 지성이나 불 혹은 그런 것들 중 여타의 무언가에 우연이 속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종종, 마치 엠페도클레스가 공기가 언제나 최상위에 놓이지는 않는다고, 오히려 우연히 그리 되었다고 답변을 하였던 것처럼, 그들이 그것들을 사용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그는 우주생성론에서 "그 때에 마침 그렇게 진행되었지만, 자주 달리 진행된다."라고 논한다. 또한 동물들의 지체들도 그 대부분이 우연히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εἰσὶ δέ τινες οἳ καὶ τοὐρανοῦ τοῦδε καὶ τῶν κόσμων πάντων αἰτιῶνται τὸ αὐτόματον· ἀπὸ ταὐτομάτου γὰρ γενέσθαι τὴν δίνην καὶ τὴν κίνησιν τὴν διακρίνασαν καὶ καταστήσασαν εἰς ταύτην τὴν τάξιν τὸ πᾶν. καὶ μάλα τοῦτό γε αὐτὸ θαυμάσαι ἄξιον· λέγοντες γὰρ τὰ μὲν ζῷα καὶ τὰ φυτὰ ἀπὸ τύχης μήτε εἶναι μήτε γίγνεσθαι, ἀλλ᾿ ἤτοι φύσιν ἢ νοῦν ἤ τι τοιοῦτον ἕτερον εἶναι τὸ αἴτιον (οὐ γὰρ ὅ τι ἔτυχεν ἐκ τοῦ σπέρματος ἑκάστου γίγνεται, ἀλλ᾿ ἐκ μὲν τοῦ τοιουδὶ ἐλαία ἐκ δὲ τοῦ τοιουδὶ ἄνθρωπος), τὸν δ᾿ οὐρανὸν καὶ τὰ θειότατα τῶν φανερῶν ἀπὸ τοῦ αὐτομάτου γενέσθαι, τοιαύτην δ᾿ αἰτίαν μηδεμίαν εἶναι οἵαν τῶν ζῴων καὶ τῶν φυτῶν. καίτοι εἰ οὕτως ἔχει, τοῦτ᾿ αὐτὸ ἄξιον ἐπιστάσεως, καὶ καλῶς ἔχει λεχθῆναί τι περὶ αὐτοῦ. πρὸς γὰρ τῷ καὶ ἄλλως ἄτοπον εἶναι τὸ λεγόμενον, ἔτι ἀτοπώτερον τὸ λέγειν ταῦτα ὁρῶντας ἐν μὲν τῷ οὐρανῷ οὐδὲν ἀπὸ ταὐτομάτου γιγνόμενον, ἐν δὲ τοῖς οὐκ ἀπὸ τύχης πολλὰ συμβαίνοντα ἀπὸ τύχης· καίτοι εἰκός γε ἦν τοὐναντίον γίγνεσθαι.
반면 여기 이 하늘과 우주만물에 대해 자동(저절로)을 원인으로 보는 어떤 이들이 있다. 즉 그 회전과 이와 같은 질서로 분산되고 배치된 운동이 전부 저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훨씬 더 놀랄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동물과 식물이 우연한 것도 우연히 생겨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나 지성 또는 이런 어떤 다른 것이 그 원인이라고 논하면서 (왜냐하면 우연히 주어진 어떤 씨앗이든 그 각 씨앗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런 것으로부터는 올리브가 다른 한편 여기 이러한 것으로부터는 인간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런데 하늘과 가시적인 것들 중 가장 신적인 것들은 저절로 생겨났다고, 동물들이나 식물들의 그런 어떠하 원인도 전혀 없다고 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이 멈추어 살펴 볼 만하며, 그것에 관하여 훌륭하게 논해졌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다른 식으로도 그 논의된 바가 이상한 데 더하여, 같은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하늘 안의 아무것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런데 우연하지 않은 것들 안에서 많은 것들은 우연히 부수하다고 논하는 것은 훨씬 더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반대로 되는 편이 그럴 듯했을 것이다.
εἰσὶ δέ τινες οἷς δοκεῖ εἶναι μὲν αἰτία ἡ τύχη, ἄδηλος δὲ ἀνθρωπίνῃ διανοίᾳ ὡς θεῖόν τι οὖσα καὶ δαιμονιώτερον. ὥστε σκεπτέον καὶ τί ἑκάτερον, καὶ εἰ ταὐτὸν ἢ ἕτερον τό τε αὐτόματον καὶ ἡ τύχη, καὶ πῶς εἰς τὰ διωρισμένα αἴτια ἐμπίπτουσιν.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한편으로 우연이 원인이라 여기나, 다른 한편 인간의 지성에는 그것이 어떤 신적인 것이자 한층 신성한 것으로서 불분명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 양자 각각이 무엇인지, 또 자동과 우연이 같은지 혹은 다른지, 또한 어떻게 규정된 원인들에 귀속시키는지도 고찰해야만 한다.

  Πρῶτον μὲν οὖν, ἐπειδὴ ὁρῶμεν τὰ μὲν ἀεὶ ὡσαύτως γιγνόμενα τὰ δὲ ὡς ἐπὶ τὸ πολύ, φανερὸν ὅτι οὐδετέρου τούτων αἰτία ἡ τύχη λέγεται οὐδὲ τὸ ἀπὸ τύχης, οὔτε τοῦ ἐξ ἀνάγκης καὶ αἰεὶ οὔτε τοῦ ὡς ἐπὶ τὸ πολύ. ἀλλ᾿ ἐπειδὴ ἔστιν ἃ γίγνεται καὶ παρὰ ταῦτα, καὶ ταῦτα πάντες φασὶν εἶναι ἀπὸ τύχης, φανερὸν ὅτι ἔστιν τι ἡ τύχη καὶ τὸ αὐτόματον· τά τε γὰρ τοιαῦτα ἀπὸ τύχης καὶ τὰ ἀπὸ τύχης τοιαῦτα ὄντα ἴσμεν. τῶν δὲ γιγνομένων τὰ μὲν ἕνεκά του γίγνεται τὰ δ᾿ οὔ (τούτων δὲ τὰ μὲν κατὰ προαίρεσιν, τὰ δ᾿ οὐ κατὰ προαίρεσιν, ἄμφω δ᾿ ἐν τοῖς ἕνεκά του), ὥστε δῆλον ὅτι καὶ ἐν τοῖς παρὰ τὸ ἀναγκαῖον καὶ τὸ ὡς ἐπὶ τὸ πολὺ ἔστιν ἔνια περὶ ἃ ἐνδέχεται ὑπάρχειν τὸ ἕνεκά του. ἔστι δ᾿ ἕνεκά του ὅσα τε ἀπὸ διανοίας ἂν πραχθείη καὶ ὅσα ἀπὸ φύσεως. τὰ δὴ τοιαῦτα ὅταν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γένηται, ἀπὸ τύχης φαμὲν εἶναι (ὥσπερ γὰρ καὶ ὄν ἐστι τὸ μὲν καθ᾿ αὑτὸ τὸ δὲ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ὕτω καὶ αἴτιον ἐνδέχεται εἶναι, οἷον οἰκίας καθ᾿ αὑτὸ μὲν αἴτιον τὸ οἰκοδομικόν,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δὲ τὸ λευκὸν ἢ τὸ μουσικόν· τὸ μὲν οὖν καθ᾿ αὑτὸ αἴτιον ὡρισμένον, τὸ δὲ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ἀόριστον· ἄπειρα γὰρ ἂν τῷ ἑνὶ συμβαίη). καθάπερ οὖν ἐλέχθη, ὅταν ἐν τοῖς ἕνεκά του γιγνομένοις τοῦτο γένηται, τότε λέγεται ἀπὸ ταὐτομάτου καὶ ἀπὸ τύχης (αὐτῶν δὲ πρὸς ἄλληλα τὴν διαφορὰν τούτων ὕστερον διοριστέον· νῦν δὲ τοῦτο ἔστω φανερόν, ὅτι ἄμφω ἐν τοῖς ἕνεκά τού ἐστιν)· οἷον ἕνεκα τοῦ ἀπολαβεῖν τὸ ἀργύριον ἦλθεν ἂν κομιζομένου τὸν ἔρανον, εἰ ᾔδει· ἦλθε δ᾿ οὐ τούτου ἕνεκα, ἀλλὰ συνέβη αὐτῷ ἐλθεῖν, καὶ ποιῆσαι τοῦτο τοῦ κομίσασθαι ἕνεκα· τοῦτο δὲ οὔθ᾿ ὡς ἐπὶ τὸ πολὺ φοιτῶν εἰς τὸ χωρίον οὔτ᾿ ἐξ ἀνάγκης· ἔστι δὲ τὸ τέλος, ἡ κομιδή, οὐ τῶν ἐν αὐτῷ αἰτίων, ἀλλὰ τῶν προαιρετῶν καὶ ἀπὸ διανοίας· καὶ λέγεταί γε τότε ἀπὸ τύχης ἐλθεῖν, εἰ δὲ προελόμενος καὶ τούτου ἕνεκα ἢ ἀεὶ φοιτῶν ἢ ὡς ἐπὶ τὸ πολύ [κομιζόμενος], οὐκ ἀπὸ τύχης. δῆλον ἄρα ὅτι ἡ τύχη αἰτία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ἐν τοῖς κατὰ προαίρεσιν τῶν ἕνεκά του. διὸ περὶ τὸ αὐτὸ διάνοια καὶ τύχη· ἡ γὰρ προαίρεσις οὐκ ἄνευ διανοίας.
그러니까 우선, 우리가 한편으로는 언제나 한결같이 이루어지는 것들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개의 경우 그러한 것들을 보았으므로, 우연도 우연한 것도 이것들 중 어느 쪽의 원인이라고도 진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필연을 통한 것의 원인도 대개의 경우 성립하는 것의 원인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들 이외의 것들 또한 이루어지는 것들로서 있기에, 또 이것들 모두 우연한 것이라고 말하기에, 어떤 우연과 저절로 이루어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우연한 것들이고 우연한 것들이 이러한 것들이라고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루어지는 것들 중 한편의 것들은 무언가를 위하여 이루어지는 반면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으며 (그런데 이것들 중 한편의 것들은 의도에 따르는 반면, 다른 편의 것들은 의도에 따르지 않으며, 양자 모두 무언가를 위한 것들에 속한다.), 그래서 필연과 대개 그러함 이외의 것들 속에서도 그것들에 관해 무언가를 위함(목적)이 존속하는 일이 허용되는 얼마간의 것들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사유를 통해 실행되는 것들과 본성적으로 실행되는 것들은 무언가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부수적으로 생겨날 때, 우연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마치 존재도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그러하지만 다른 한편 부수적으로 그러하듯, 원인도 그런 식이라는 것이 허용되는 바, 예를 들어 건축물의 그 자체 원인은 건축인 한편, 부수적으로는 흼 또는 교양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의 원인은 규정된 것인 반면, 부수적으로는 규정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에 무한한 것들이 부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되었듯, 무언가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들 중에서 이런 것이 생성될 때, 그 경우 저절로 혹은 우연히라고 진술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것들의 서로에 대한 차이점은 이후에 규정되어야만 한다. 지금은 이 점이 명백하다고 하자. 양자 모두 무언가를 위한 것들에 속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그가 알았다면, 빚을 지러 온 그에게서 돈을 받기 위해 그곳에 갔을 것이다. 그러데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가지 않았고, 그는 우연하게 그곳에 갔으며, 빚진 자가 목적인(~때문인) 일을 우연히 한 것이다. 이 일은 대개의 경우 그 장소로 그가 가는 것으로서도 아니고 필연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다. 그 목적, 즉 회수는, 그 사람 내부의 원인들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선택지들과 사유를 통한 것들에 속한다. 또한 이 경우 우연히 갔다고 말하고, 그런데 만일 그가 그 일을 위해서 선택을 하거나 또는 언제나 그곳에 가거나 대개 가거나 한다면, 우연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연이 무언가를 위한 일들 중 선택에 따른 것들 내에서 부수적으로 원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사유와 우연이 같은 영역에 관련한다. 사유 없이는 선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ἀόριστα μὲν οὖν τὰ αἴτια ἀνάγκη εἶναι ἀφ᾿ ὧν ἂν γένοιτο τὸ ἀπὸ τύχης. ὅθεν καὶ ἡ τύχη τοῦ ἀορίστου εἶναι δοκεῖ καὶ ἄδηλος ἀνθρώπῳ, καὶ ἔστιν ὡς οὐδὲν ἀπὸ τύχης δόξειεν ἂν γίγνεσθαι. πάντα γὰρ ταῦτα ὀρθῶς λέγεται, εὐλόγως. ἔστιν μὲν γὰρ ὡς γίγνεται ἀπὸ τύχης·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γὰρ γίγνεται, καὶ ἔστιν αἴτιον ὡς συμβεβηκὸς ἡ τύχη· ὡς δ᾿ ἁπλῶς οὐδενός· οἷον οἰκίας οἰκοδόμος μὲν αἴτιος,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δὲ αὐλητής, καὶ τοῦ ἐλθόντα κομίσασθαι τὸ ἀργύριον, μὴ τούτου ἕνεκα ἐλθόντα, ἄπειρα τὸ πλῆθος· καὶ γὰρ ἰδεῖν τινὰ βουλόμενος καὶ διώκων καὶ φεύγων καὶ θεασόμενος. καὶ τὸ φάναι εἶναί τι παράλογον τὴν τύχην ὀρθῶς· ὁ γὰρ λόγος ἢ τῶν ἀεὶ ὄντων ἢ τῶν ὡς ἐπὶ τὸ πολύ, ἡ δὲ τύχη ἐν τοῖς γιγνομένοις παρὰ ταῦτα. ὥστ᾿ ἐπεὶ ἀόριστα τὰ οὕτως αἴτια, καὶ ἡ τύχη ἀόριστον. ὅμως δ᾿ ἐπ᾿ ἐνίων ἀπορήσειεν ἄν τις, ἆρ᾿ οὖν τὰ τυχόντα αἴτι᾿ ἂν γένοιτο τῆς τύχης· οἶον ὑγιείας ἢ πνεῦμα ἢ εἴλησις, ἀλλ᾿ οὐ τὸ ἀποκεκάρθαι· ἔστιν γὰρ ἄλλα ἄλλων ἐγγύτερα τῶν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αἰτίων. τύχη δὲ ἀγαθὴ μὲν λέγεται ὅταν ἀγαθόν τι ἀποβῇ, φαύλη δὲ ὅταν φαῦλόν τι, εὐτυχία δὲ καὶ δυστυχία ὅταν μέγεθος ἔχοντα ταῦτα· διὸ καὶ τὸ παρὰ μικρὸν κακὸν ἢ ἀγαθὸν λαβεῖν μέγα ἢ εὐτυχεῖν ἢ ἀτυχεῖν ἐστίν, ὅτι ὡς ὑπάρχον λέγει ἡ διάνοια· τὸ γὰρ παρὰ μικρὸν ὥσπερ οὐδὲν ἀπέχειν δοκεῖ. ἔτι ἀβέβαιον ἡ εὐτυχία εὐλόγως· ἡ γὰρ τύχη ἀβέβαιος· οὔτε γὰρ ἀεὶ οὔθ᾿ ὡς ἐπὶ τὸ πολὺ οἷον τ᾿ εἶναι τῶν ἀπὸ τύχης οὐθέν. ἔστι μὲν οὖν ἄμφω αἴτια, καθάπερ εἴρηται,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 καὶ ἡ τύχη καὶ τὸ αὐτόματον - ἐν τοῖς ἐνδεχομένοις γίγνεσθαι μὴ ἁπλῶς μηδ᾿ ὡς ἐπὶ τὸ πολύ, καὶ τούτων ὅσ᾿ ἂν γένοιτο ἕνεκά του.
그러므로 우연한 것이 그로부터 나오는 그러한 원인들은 필연적으로 비규정적이다. 이런 연유로 우연도 그 비규정적인 것에 속하다고 여겨지고 인간에게 불분명한 것으로 여겨지며, 어떻게 우연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여겨질 수 있는지도 이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드 것은 제대로, 조리있게 진술되었기 때문이다. 즉 한편으로는 우연히 생겨난다는 것도 맞다. 왜냐하면 부수적으로 생겨나고, 그 원인은 부수적인 것으로서 우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어떤 우연으로부터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도 맞다. 예를 들어 집의 원인은 미장이이고, 부수적으로는 아울로스 연주자이며, 가서 돈을 받은, 그러나 이 목적으로 가지는 않은 그 사람의 경우 그 원인은 수가 무한하다. 왜냐하면 그가 누군가를 보고자 바라면서 또 누군가를 좇으면서 또 누군가를 피하면서 또한 구경을 하다 등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연이 뭔가 설명을 벗어난 것이라는 주장도 맞다. 왜냐하면 설명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들에 속하거나 대개의 경우 그러한 것들에 속하지만, 우연은 이것들 외의 생성되는 것들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원인들이 비규정적이기에, 우연도 비규정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들에 관하여서 누군가 길을 잃을 수 있는데, 그러니까 혹시 우연의 우연한 원인들이 생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에 대해 바람이나 햇볕이 원인일 수 있지만, 이발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은 다른 부수적인 원인들보다 더 가까운 원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은 한편으로 뭔가 좋은 결과가 날 때에는 좋은 운이라 진술되고, 나쁜 결과를 내놓을 때엔 나쁜 운이라 진술되며, 행운이나 악운은 그것들이 규모를 가질 때에 사용된다. 이런 이유로 큰 해악이나 이득에서 조금 벗어난 것은 행운이라거나 불운이라고 하는데, 사유가 일어난 일로 진술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미세한 빗겨남은 마치 아무 차이도 없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덧붙여 행운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조리있게 진술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우연한 것들 중 그 무엇 하나 언제나 그럴 수도 대개의 경우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자 모두, 이야기된 것처럼, 부수적으로  - 우연도 자동도 - 단적으로도 대개의 경우로도 생성이 허용되지 않는 것들 내에서 원인이며, 무언가를 위해 이루어지는 그러한 것들의 원인이다.

  Διαφέρει δ᾿ ὅτι τὸ αὐτόματον ἐπὶ πλεῖόν ἐστι· τὸ μὲν γὰρ ἀπὸ τύχης πᾶν ἀπὸ ταὐτομάτου, τοῦτο δ᾿ οὐ πᾶν ἀπὸ τύχης. ἡ μὲν γὰρ τύχη καὶ τὸ ἀπὸ τύχης ἐστὶν ὅσοις καὶ τὸ εὐτυχῆσαι ἂν ὑπάρξειεν καὶ ὅλως πρᾶξις. διὸ καὶ ἀνάγκη περὶ τὰ πρακτὰ εἶναι τὴν τύχην (σημεῖον δ᾿ ὅτι δοκεῖ ἤτοι ταὐτὸν εἶναι τῇ εὐδαιμονίᾳ ἡ εὐτυχία ἢ ἐγγύς, ἡ δ᾿ εὐδαιμονία πρᾶξίς τις· εὐπραξία γάρ), ὥσθ᾿ ὁπόσοις μὴ ἐνδέχεται πρᾶξαι, οὐδὲ τὸ ἀπὸ τύχης τι ποιῆσαι. καὶ διὰ τοῦτο οὔτε ἄψυχον οὐδὲν οὔτε θηρίον οὔτε παιδίον οὐδὲν ποιεῖ ἀπὸ τύχης, ὅτι οὐκ ἔχει προαίρεσιν· οὐδ᾿ εὐτυχία οὐδ᾿ ἀτυχία ὑπάρχει τούτοις, εἰ μὴ καθ᾿ ὁμοιότητα, ὥσπερ ἔφη Πρώταρχος εὐτυχεῖς εἶναι τοὺς λίθους ἐξ ὧν οἱ βωμοί, ὅτι τιμῶνται, οἱ δὲ ὁμόζυγες αὐτῶν καταπατοῦνται. τὸ δὲ πάσχειν ἀπὸ τύχης ὑπάρξει πως καὶ τούτοις, ὅταν ὁ πραττων τι περὶ αὐτὰ πράξῃ ἀπὸ τύχης, ἄλλως δὲ οὐκ ἔστιν· τὸ δ᾿ αὐτόματον καὶ τοῖς ἄλλοις ζῴοις καὶ πολλοῖς τῶν ἀψύχων, οἷον ὁ ἵππος ἀυτόματος, φαμέν, ἦλθεν, ὅτι ἐσώθη μὲν ἐλθών, οὐ τοῦ σωθῆναι δὲ ἕνεκα ἦλθε· καὶ ὁ τρίπους αὐτόματος κατέπεσεν· ἔστη μὲν γὰρ τοῦ καθῆσθαι ἕνεκα, ἀλλ᾿ οὐ τοῦ καθῆσθαι ἕνεκα κατέπεσεν. ὥστε φανερὸν ὅτι ἐν τοῖς ἁπλῶς ἕνεκά του γιγνομένοις, ὅταν μὴ τοῦ συμβάντος ἕνεκα γένηται ὧν ἔξω τὸ αἴτιον, τότε ἀπὸ τοῦ αὐτομάτου λέγομεν· ἀπὸ τύχης δέ, τούτων ὅσα ἀπὸ τοῦ αὐτομάτου γίγνεται τῶν προαιρετῶν τοῖς ἔχουσι προαίρεσιν. σημεῖον δὲ τὸ μάτην, ὅτι λέγεται ὅταν μὴ γένηται τὸ ἕνεκα ἄλλου ἐκείνου ἕνεκα, οἷον εἰ τὸ βαδίσαι λαπάξεως ἕνεκά ἐστιν, εἰ δὲ μὴ ἐγένετο βαδίσαντι, μάτην φαμὲν βαδίσαι καὶ ἡ βάδισις ματαία, ὡς τοῦτο ὂν τὸ μάτην, τὸ πεφυκὸς ἄλλου ἕνεκα, ὅταν μὴ περαίνῃ ἐκεῖνο οὗ ἕνεκα ἦν καὶ ἐπεφυκει, ἐπεὶ εἴ τις λούσασθαι φαίη μάτην ὅτι οὐκ ἐξέλιπεν ὁ ἥλιος, γελοῖος ἂν εἴη· οὐ γὰρ ἦν τοῦτο ἐκείνου ἕνεκα. οὕτω δὴ τὸ αὐτόματον καὶ κατὰ τὸ ὄνομα ὅταν αὐτὸ μάτην γένηται· κατέπεσεν γὰρ οὐ τοῦ πατάξαι ἕνεκεν ὁ λίθος· ἀπὸ τοῦ αὐτομάτου ἄρα κατέπεσεν ὁ λίθος, ὅτι πέσοι ἂν ὑπὸ τινὸς καὶ τοῦ πατάξαι ἕνεκα.

μάλιστα δ᾿ ἐστὶ χωριζόμενον τοῦ ἀπὸ τύχης ἐν τοῖς φύσει γιγνομένοις· ὅταν γὰρ γένηταί τι παρὰ φύσιν, τότε οὐκ ἀπὸ τύχης ἀλλὰ μᾶλλον ἀπὸ ταὐτομάτου γεγονέναι φαμέν. ἔστι δὲ καὶ τοῦτο ἕτερον· τοῦ μὲν γὰρ ἔξω τὸ αἴτιον, τοῦ δ᾿ ἐντός.

τί μὲν οὖν ἐστιν τὸ αὐτόματον καὶ τί ἡ τύχη, εἴρηται καὶ τί διαφέρουσιν ἀλλήλων. τῶν δὲ τρόπων τῆς αἰτίας ἐν τοῖς ὅθεν ἡ ἀρχὴ τῆς κινήσεως ἑκάτερον αὐτῶν· ἢ γὰρ τῶν φύσει τι ἢ τῶν ἀπὸ διανοίας αἰτίων ἀεί ἐστιν· ἀλλὰ τούτων τὸ πλῆθος ἀόριστον. ἐπεὶ δ᾿ ἐστὶ τὸ αὐτόματον καὶ ἡ τύχη αἴτια ὧν ἂν ἢ νοῦς γένοιτο αἴτιος ἢ φύσις, ὅταν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αἴτιόν τι γένηται τούτων αὐτῶν, οὐδὲν δὲ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ἐστι πρότερον τῶν καθ᾿ αὑτό, δῆλον ὅτι οὐδὲ τὸ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αἴτιον πρότερον τοῦ καθ᾿ αὑτό. ὕστερον ἄρα τὸ αὐτόματον καὶ ἡ τύχη καὶ νοῦ καὶ φύσεως· ὥστ᾿ εἰ ὅτι μάλιστα τοῦ οὐρανοῦ αἴτιον τὸ αὐτόματον, ἀνάγκη πρότερον νοῦν αἴτιον καὶ φύσιν εἶναι καὶ ἄλλων πολλῶν καὶ τοῦδε τοῦ παντός.
그러므로 저절로인 것이 무엇이고 우연이 무엇인지, 이야기되었고, 또한 서로 무엇이 다른지도 이야기되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런 식으로 그로부터 유래하는 원인의 방식들에 관하여 그것들의 양쪽 각각이 운동의 원리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자연에 의한 원인들 혹은 의도를 통한 원인들에 언제나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무규정적이다. 저절로인 것과 우연은 지성이나 자연이 원인일 그러한 것들의 원인이고, 부수적으로 원인인 어떤 것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성립할 때, 그 자체적인 것들보다 앞서는 부수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부수적으로 원인인 것이 그 자체적인 것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절로인 것과 우연은 지성과 자연보다 나중 것이다. 그래서 만일 천구에 대해 저절로인 것이 최대한 원인이라면, 지성과 자연이 다른 많은 것들과 더불어 여기 이 세계보다 더 앞선 원인임이 필연적이다.

  Ὅτι δὲ ἔστιν αἴτια, καὶ ὅτι τοσαῦτα τὸν ἀριθμὸν ὅσα φαμέν, δῆλον· τοσῦτα γὰρ τὸν ἀριθμὸν τὸ διὰ τί περιείληφεν· ἢ γὰρ εἰς τὸ τί ἐστιν ἀνάγεται τὸ διὰ τί ἔσχατον, ἐν τοῖς ἀκινήτοις (οἷον ἐν τοῖς μαθήμασιν· εἰς ὁρισμὸν γὰρ τοῦ εὐθέος ἢ συμμέτρου ἢ ἄλλου τινὸς ἀνάγεται ἔσχατον), ἢ εἰς τὸ κινῆσαν πρῶτον (οἷον διὰ τί ἐπολέμησαν; ὅτι ἐσύλησαν), ἢ τίνος ἕνεκα (ἵνα ἄρξωσιν), ἢ ἐν τοῖς γιγνομένοις ἡ ὕλη.
  원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말한 그 만큼의 수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무엇 때문에'라는 것을 그 정도의 수로 포괄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는 결국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귀착되고, 부동인 것들에서 (예를 들어 수학에서. 왜냐하면 직선의 정의나 동일단위의 정의 또는 다른 어떤 것의 정의로 결국에 귀착되기 때문이다), 혹은 최초의 동인으로 (예를 들어 '무엇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는가?' '국경을 침범했기 때문에'), 또는 무엇을 위해(지배하기 위해서), 아니면 생성되는 것들에서 질료이기 때문이다.
ὅτι μὲν οὖν τὰ αἴτια ταῦτα καὶ τοσαῦτα, φανερόν· ἐπεὶ δ᾿ αἱ αἰτίαι τέτταρες, περὶ πασῶν τοῦ φυσικοῦ εἰδέναι, καὶ εἰς πάσας ἀνάγων τὸ διὰ τί ἀποδώσει φυσικῶς, τὴν ὕλην, τὸ εἶδος, τὸ κινῆσαν, τὸ οὗ ἕνεκα. ἔρχεται δὲ τὰ τρία εἰς [τὸ] ἓν πολλάκις· τὸ μὲν γὰρ τί ἐστι καὶ τὸ οὗ ἕνεκα ἕν ἐστι, τὸ δ᾿ ὅθεν ἡ κίνησις πρῶτον τῷ εἴδει ταὐτὸ τούτοις· ἄνθρωπος γὰρ ἄνθρωπον γεννᾷ - καὶ ὅλως ὅσα κινούμενα κινεῖ (ὅσα δὲ μή, οὐκέτι φυσικῆς· οὐ γὰρ ἐν αὑτοῖς ἔχοντα κίνησιν οὐδ᾿ ἀρχὴν κινήσεως κινεῖ, ἀλλ᾿ ἀκίνητα ὄντα· διὸ τρεῖς αἱ πραγματεῖαι, ἡ μὲν περὶ ἀκινήτων, ἡ δὲ περὶ κινουμένων μὲν ἀφθάρτων δέ, ἡ δὲ περὶ τὰ φθαρτά). ὥστε τὸ διὰ τί καὶ εἰς τὴν ὕλην ἀνάγοντι ἀποδίδοται, καὶ εἰς τὸ τί ἐστιν, καὶ εἰς τὸ πρῶτον κινῆσαν. περὶ γενέσεως γὰρ μάλιστα τοῦτον τὸν τρόπον τὰς αἰτίας σκοποῦσι, τί μετὰ τί γίγνεται, καὶ τί πρῶτον ἐποίησεν ἢ τί ἔπαθεν, καὶ οὕτως αἰεὶ τὸ ἐφεξῆς. διτταὶ δὲ αἱ ἀρχαὶ αἱ κινοῦσαι φυσικῶς, ὧν ἡ ἑτέρα οὐ φυσική· οὐ γὰρ ἔχει κινήσεως ἀρχὴν ἐν αὑτῇ. τοιοῦτον δ᾿ ἐστὶν εἴ τι κινεῖ μὴ κινούμενον, ὥσπερ τό τε παντελῶς ἀκίνητον καὶ [τὸ] πάντων πρῶτον καὶ τὸ τί ἐστιν καὶ ἡ μορφή· τέλος γὰρ καὶ οὗ ἕνεκα· ὥστε ἐπεὶ ἡ φύσις ἕνεκά του, καὶ ταύτην εἰδέναι δεῖ, καὶ πάντως ἀποδοτέον τὸ διὰ τί, οἷον ὅτι ἐκ τοῦδε ἀνάγκη τόδε (τὸ δὲ ἐκ τοῦδε ἢ ἁπλῶς ἢ ὡς ἐπὶ τὸ πολύ), καὶ εὶ μέλλει τοδὶ ἔσεσθαι (ὥσπερ ἐκ τῶν προτάσεων τὸ συμπέρασμα), καὶ ὅτι τοῦτ᾿ ἦν τὸ τί ἦν εἶναι, καὶ διότι βέλτιον οὕτως, οὐχ ἁπλῶς, ἀλλὰ τὸ πρὸς τὴν ἑκάστου οὐσίαν.
그러므로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고 이 만큼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원인들은 네 가지이고, 자연학의 앎은 그 모든 것들에 관련하며, 그 모든 것들로 '무엇 때문에'를 소급하여 자연학적으로 답한다, 즉 질료, 형상, 운동, 목적으로. 그런데 그 셋이 자주 하나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하는 것과 어떤 것을 위해서라는 것은 하나이고, 최초 운동이 유래하는 바는 종적으로 이것들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을 낳기 때문이다 - 또한 일반적으로 운동하는 것들이 운동을 시킨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더 이상 자연학적 앎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체 내에 운동이나 운동의 원인을 지니면서 운동을 시키는 게 아니라, 부동인 것들로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제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부동인 것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것은 운동하는 불멸인 것들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운동하는 소멸하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라는 것은 질료로도, 무엇인가로도, 최초의 동자로도 이끌려 대답된다. 왜냐하면 생성에 관련하여 대부분 바로 다음과 같은 방식에서 원인들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무엇 다음에 무엇이 생기는지, 또 무엇이 처음 작용하였는지 또는 무엇을 겪었는지, 그런 식으로 항상 순서대로. 그런데 자연적으로 운동을 시키는 원리들은 두 가지이며, 그 중 하나는 자연적인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체 내에 운동의 원리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것이 운동하지 않으면서 운동을 시킨다면 이러한 것이다, 마치 전적으로 부동이면서도 모든 중 최초이자 무엇인 바의 것이고 형상인 것처럼. 왜냐하면 그것은 결과이며 그 때문인 바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은 어떤 것을 위한 것이며, 이러한 자연을 알아야 하고, 모든 방식으로 무엇 때문인가를 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여기 이것으로부터 여기 이것이 필연적이라는 식으로 (여기 이것으로부터 일반적이라거나 혹은 대개의 경우), 또한 장차 그러할 것이라면 여기 이것에 그러저러할 것이라고 (마치 전제들로부터 결론처럼), 또한 그것이 무엇인 바의 바로 그것인 것이라고, 또 그러한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그런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본질(실체)에 관련한 것으로서.

-蟲-

  

Καὶ μάλα, ἔφη.
무척이나 그렇습니다, 그가 말했네.

Ἆρ' οὖν δὴ οὐ μετρίως ἀπολογησόμεθα ὅτι πρὸς τὸ ὂν πεφυκὼς εἴη ἁμιλλᾶσθαι ὅ γε ὄντως φιλομαθής, καὶ οὐκ ἐπιμένοι ἐπὶ τοῖς δοξαζομένοις εἶναι πολλοῖς ἑκάστοις, ἀλλ' ἴοι καὶ οὐκ ἀμβλύνοιτο οὐδ' ἀπολήγοι τοῦ ἔρωτος, πρὶν αὐτοῦ ὃ ἔστιν ἑκάστου τῆς φύσεως ἅψασθαι ᾧ προσήκει ψυχῆς ἐφάπτεσθαι τοῦ τοιούτου - προσήκει δὲ συγγενεῖ - ᾧ πλησιάσας καὶ μιγεὶς τῷ ὄντι ὄντως, γεννήσας νοῦν καὶ ἀλήθειαν, γνοίη τε καὶ ἀληθῶς ζῴη καὶ τρέφοιτο καὶ οὕτω [Stephanus page 490, section b, line 7] λήγοι ὠδῖνος, πρὶν δ' οὔ;
그렇다면 우리가 적절하게 변론하는 것이 아니겠나, 진실로 배움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은 천성상 있는 것을 열망할 수 있을 것이고, 있다고 여겨지는 여러 각각의 것들에 머무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 사랑하는 일에 싫증을 내지도 거절을 하지도 않고 나아갈 것인데, 있는 것 그 자체 각각의 그 본성에, 혼에 있어서 그 각각의 것에 닿기에 적합한 - 동류의 것에 적합한 - 그런 것으로써 닿기 전까지 그러할 것이고, 그로써 실로 있는 것에 가까워지고 교합하여서, 지성과 진리를 산출하여, 참되게 알고 또 살며 돌보고 그런 식으로 산통을 겪을 것인데, 그러하지 않는 한 그러리라고?
ἁμιλλᾶσθαι : ἁμιλλάομαι inf. strive, hasten, eagerly.
ἀμβλύνοιτο : ἀμβλύνω opt. blunt, dull, take the edge off.

Ὡς οἷόν τ', ἔφη, μετριώτατα.
가능한 한, 그가 말했네, 가장 적절합니다.

Τί οὖν; τούτῳ τι μετέσται ψεῦδος ἀγαπᾶν ἢ πᾶν τοὐναντίον μισεῖν;
그렇다면 어떤가? 그 자에게 무언가 거짓을 기꺼워하는 뭐라도 함께 있는가 아니면 정반대로 미워함이 함께 하는가?

Μισεῖν, ἔφη.
미워함이요, 그가 말했네.

Ἡγουμένης δὴ ἀληθείας οὐκ ἄν ποτε οἶμαι φαμὲν αὐτῇ χορὸν κακῶν ἀκολουθῆσαι.
진리가 이끌 때에는 내 생각에 결코 그것에 나쁜 것들의 가무단이 따른다고 우리가 말하지는 않을 걸세.

Πῶς γάρ;
어찌 그리 말하겠습니까?

Ἀλλ' ὑγιές τε καὶ δίκαιον ἦθος, ᾧ καὶ σωφροσύνην ἕπεσθαι.
오히려 건전하고 정의로운 습성이, 그리고 그에게 사려 또한 따른다고 말하겠지.

[Stephanus page 490, section c, line 7] Ὀρθῶς, ἔφη.
옳습니다, 그가 말했네.

Καὶ δὴ τὸν ἄλλον τῆς φιλοσόφου φύσεως χορὸν τί δεῖ πάλιν ἐξ ἀρχῆς ἀναγκάζοντα τάττειν; μέμνησαι γάρ που ὅτι συνέβη προσῆκον τούτοις ἀνδρεία, μεγαλοπρέπεια, εὐμάθεια, μνήμη· καὶ σοῦ ἐπιλαβομένου ὅτι πᾶς μὲν ἀναγκασθήσεται ὁμολογεῖν οἷς λέγομεν, ἐάσας δὲ τοὺς λόγους, εἰς αὐτοὺς ἀποβλέψας περὶ ὧν ὁ λόγος, φαίη ὁρᾶν αὐτῶν τοὺς μὲν ἀχρήστους, τοὺς δὲ πολλοὺς κακοὺς πᾶσαν κακίαν, τῆς διαβολῆς τὴν αἰτίαν ἐπισκοποῦντες ἐπὶ τούτῳ νῦν γεγόναμεν, τί ποθ' οἱ πολλοὶ κακοί, καὶ τούτου δὴ ἕνεκα [Stephanus page 490, section d, line 6] πάλιν ἀνειλήφαμεν τὴν τῶν ἀληθῶς φιλοσόφων φύσιν καὶ ἐξ ἀνάγκης ὡρισάμεθα.
더 나아가 지혜를 사랑하는 자의 본성에 속하는 또 다른 가무단을 처음부터 다시 나열해야만 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아마도 그런 것들에 적합한 것으로 용기, 호방함, 잘 배움, 기억력이 뒤따른단 것을 자네가 기억하니까: 그리고 자네가, 모든 이가 우리가 말한 것들에 대해 동의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논의들은 방치되었고, 그들에 관하여 논의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주목하여, 그들 중 일부는 쓸모 없는 자들이나, 다른 많은 자들은 모든 나쁜 일에 있어서 나쁜 자들임을 본다고 말하리라고, 그렇게 공격하였기에(ἐπιλαβομένου), 그  비방의 원인을 검토하면서 이제 우리는 이런 일에 있게 되었고, 도대체 왜 그 많은 자들이 나쁜 자들인지,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다시 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의 본성을 우리가 되취하고 필연적으로 규정도 하였지.

Ἔστιν, ἔφη, ταῦτα.
그렇습니다, 그가 말했네.

Ταύτης δή, ἦν δ' ἐγώ, τῆς φύσεως δεῖ θεάσασθαι τὰς φθοράς, ὡς διόλλυται ἐν πολλοῖς, σμικρὸν δέ τι ἐκφεύγει, οὓς δὴ καὶ οὐ πονηρούς, ἀχρήστους δὲ καλοῦσι· καὶ μετὰ τοῦτο αὖ τὰς μιμουμένας ταύτην καὶ εἰς τὸ ἐπιτήδευμα καθισταμένας αὐτῆς, οἷαι οὖσαι φύσεις ψυχῶν εἰς ἀνάξιον καὶ μεῖζον ἑαυτῶν ἀφικνούμεναι ἐπιτήδευμα, πολλαχῇ πλημμελοῦσαι, πανταχῇ καὶ ἐπὶ πάντας δόξαν οἵαν λέγεις [Stephanus page 491, section a, line 5] φιλοσοφίᾳ προσῆψαν.
그리고 내가 말했지, 그래서 바로 이 본성의 파괴들을 살펴 보아야 하지, 많은 이들에게서 어떻게 파괴되는지, 그런데 어떻게 조금쯤은 피해가는지, 열등한 자들까진 아니지만, 쓸모 없는 자들이라 불리는 그들이 말일세: 이 다음으로 이번에는 그 본성을 모방하며 그 본성의 일에 내려앉을 때, 그런 영혼들의 본성들이 어떠한 것이어서 그럴 만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더 넘치는 일에 이르고, 여러 방식으로 잘못을 저지르며, 온갖 곳에서 온갖 사람들 사이에서 자네가 말하고 있는 그런 평판을 지혜를 사랑하는 일에 붙였는지를.

Τίνας δέ, ἔφη, τὰς διαφθορὰς λέγεις;
그가 말했네, 당신께서는 그 파괴들이 무엇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Ἐγώ σοι, εἶπον, ἂν οἷός τε γένωμαι, πειράσομαι διελθεῖν. τόδε μὲν οὖν οἶμαι πᾶς ἡμῖν ὁμολογήσει, τοιαύτην φύσιν καὶ πάντα ἔχουσαν ὅσα προσετάξαμεν νυνδή, εἰ τελέως μέλλοι φιλόσοφος γενέσθαι, ὀλιγάκις ἐν ἀνθρώποις φύεσθαι καὶ ὀλίγας. ἢ οὐκ οἴει;
내가 말했네, 내가 자네에게 그럴 수 있다면 상술하고자 시도해 보겠네. 그러니까 나는 이 점은 모두가 우리에게 동의하리라 생각하는데, 이와 같은 본성이 또 우리가 방금 요구한 그 모든 것들을 갖추어서는, 만일 그 본성이 장차 완전하게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라면 말이지, 드물게 사람들에게서 또 소수가 자라난다는 것을. 자네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Σφόδρα γε.
지극히 그리 생각합니다.

Τούτων δὴ τῶν ὀλίγων σκόπει ὡς πολλοὶ ὄλεθροι καὶ μεγάλοι.
그래서 이런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 파괴들이 얼마나 많고도 대단한 것들인지 살펴 보게.

[Stephanus page 491, section b, line 6] Τίνες δή;
무엇들입니까?

Ὃ μὲν πάντων θαυμαστότατον ἀκοῦσαι, ὅτι ἓν ἕκαστον ὧν ἐπῃνέσαμεν τῆς φύσεως ἀπόλλυσι τὴν ἔχουσαν ψυχὴν καὶ ἀποσπᾷ φιλοσοφίας. λέγω δὲ ἀνδρείαν, σωφροσύνην καὶ πάντα ἃ διήλθομεν.
무엇보다도 듣기에 경악스러운 것은, 우리가 칭찬하던 그 본성에 속하는 것들의 하나하나가 그것을 지닌 영호을 파괴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일로부터 분리시켜 놓는다는 사실이지. 그런데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용기, 사려 그리고 우리가 상술한 모든 것들일세.

Ἄτοπον, ἔφη, ἀκοῦσαι.
그가 말했네, 이상하게 들립니다.

Ἔτι τοίνυν, ἦν δ' ἐγώ, πρὸς τούτοις τὰ λεγόμενα ἀγαθὰ πάντα φθείρει καὶ ἀποσπᾷ, κάλλος καὶ πλοῦτος καὶ ἰσχὺς σώματος καὶ συγγένεια ἐρρωμένη ἐν πόλει καὶ πάντα τὰ τούτων οἰκεῖα· ἔχεις γὰρ τὸν τύπον ὧν λέγω.
더군다나, 내가 말했네, 이런 것들에 더하여 좋은 것들이라 이야기되는 모든 것들이 파괴하고 떼어 놓는데, 아름다움과 부유함 그리고 육체의 강건함과 폴리스에서의 강력한 가문 또한 이런 것들의 친족들 모두가 그러하지: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의 모습을 자네가 알고 있네.

[Stephanus page 491, section c, line 5] Ἔχω, ἔφη· καὶ ἡδέως γ' ἂν ἀκριβέστερον ἃ λέγεις πυθοίμην.
그가 말했네,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고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을 기쁘게 더 정확하게 들어 배울 것입니다.

Λαβοῦ τοίνυν, ἦν δ' ἐγώ, ὅλου αὐτοῦ ὀρθῶς, καί σοι εὔδηλόν τε φανεῖται καὶ οὐκ ἄτοπα δόξει τὰ προειρημένα περὶ αὐτῶν.
내가 말했네, 그럼 그것을 전체로서 옳게 파악하게, 그러면 자네에게 그것들에 관하여 먼저 이야기된 것들이 명확하게 잘 드러나고 또 이상한 것들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네.

Πῶς οὖν, ἔφη, κελεύεις;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어찌 하라 명하시는지요?

Παντός, ἦν δ' ἐγώ, σπέρματος πέρι ἢ φυτοῦ, εἴτε ἐγγείων εἴτε τῶν ζῴων, ἴσμεν ὅτι τὸ μὴ τυχὸν τροφῆς ἧς προσήκει ἑκάστῳ μηδ' ὥρας μηδὲ τόπου, ὅσῳ ἂν ἐρρωμενέστερον ᾖ, τοσούτῳ πλειόνων ἐνδεῖ τῶν πρεπόντων· ἀγαθῷ γάρ που [Stephanus page 491, section d, line 5] κακὸν ἐναντιώτερον ἢ τῷ μὴ ἀγαθῷ.
모든, 내가 말했네, 씨나 싹에 관하여, 땅 속의 것들에 속하든 살아있는 것들에 속하든, 우리는 그 각각에 적절한 돌봄도 적기도 적소도 얻지 못한 것은, 강건한 것일 만큼, 그 만큼 더욱 많은 적절한 것들에 대해 결핍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왜냐하면 아마도 나쁜 것은 좋지 못한 것보다도 좋은 것에 더욱 반대되는 것이니 말이네.

Πῶς δ' οὔ;
어찌 아니겠습니까?

Ἔχει δὴ οἶμαι λόγον τὴν ἀρίστην φύσιν ἐν ἀλλοτριωτέρᾳ οὖσαν τροφῇ κάκιον ἀπαλλάττειν τῆς φαύλης.
그래서 내 생각에 최상의 본성이 더 부적절한 돌봄 안에 있음으로써 평범한 본성보다 더 나쁘게 끝나 버린다는 건 말이 되는 듯하네.

Ἔχει.
말이 됩니다.

Οὐκοῦν, ἦν δ' ἐγώ, ὦ Ἀδείμαντε, καὶ τὰς ψυχὰς οὕτω φῶμεν τὰς εὐφυεστάτας κακῆς παιδαγωγίας τυχούσας διαφερόντως κακὰς γίγνεσθαι; ἢ οἴει τὰ μεγάλα ἀδικήματα καὶ τὴν ἄκρατον πονηρίαν ἐκ φαύλης ἀλλ' οὐκ ἐκ νεανικῆς φύσεως τροφῇ διολομένης γίγνεσθαι, ἀσθενῆ δὲ φύσιν [Stephanus page 491, section e, line 6] μεγάλων οὔτε ἀγαθῶν οὔτε κακῶν αἰτίαν ποτὲ ἔσεσθαι;
그렇다면, 내가 말했네, 아데이만토스, 영혼들도 그런 식으로 가장 좋은 본성들이 나쁜 훈육을 얻어서 유독 나쁜 것들이 된다고 우리가 말하지 않겠나? 혹은 자네는 대단한 부정의들과 순전한 열등함이 평범한 본성으로부터 생겨나고 생기발랄하지만 돌봄에 의해 파괴된 본성으로부터는 생겨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약한 본성은 도대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대단한 일들의 원인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가?

Οὔκ, ἀλλά, ἦ δ' ὅς, οὕτως.
그가 말했네, 아니요, 전자의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작성중-

[Stephanus page 487, section a, line 6] Οὐδ' ἂν ὁ Μῶμος, ἔφη, τό γε τοιοῦτον μέμψαιτο.
모모스도, 그가 말했네, 그런 일이라면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Ἀλλ', ἦν δ' ἐγώ, τελειωθεῖσι τοῖς τοιούτοις παιδείᾳ τε καὶ ἡλικίᾳ ἆρα οὐ μόνοις ἂν τὴν πόλιν ἐπιτρέποις;
그럼, 내가 말했네, 교육과 나이로 완성된 그런 자들에게만 자네는 폴리스를 맡기지 않겠는가?

Καὶ ὁ Ἀδείμαντος, Ὦ Σώκρατες, ἔφη, πρὸς μὲν ταῦτά σοι οὐδεὶς ἂν οἷός τ' εἴη ἀντειπεῖν. ἀλλὰ γὰρ τοιόνδε τι πάσχουσιν οἱ ἀκούοντες ἑκάστοτε ἃ νῦν λέγεις· ἡγοῦνται δι' ἀπειρίαν τοῦ ἐρωτᾶν καὶ ἀποκρίνεσθαι ὑπὸ τοῦ λόγου παρ' ἕκαστον τὸ ἐρώτημα σμικρὸν παραγόμενοι, ἁθροισθέντων τῶν σμικρῶν ἐπὶ τελευτῆς τῶν λόγων μέγα τὸ σφάλμα καὶ ἐναντίον τοῖς πρώτοις ἀναφαίνεσθαι, καὶ ὥσπερ ὑπὸ τῶν πεττεύειν [Stephanus page 487, section b, line 8] δεινῶν οἱ μὴ τελευτῶντες ἀποκλείονται καὶ οὐκ ἔχουσιν ὅτι φέρωσιν, οὕτω καὶ σφεῖς τελευτῶντες ἀποκλείεσθαι καὶ οὐκ ἔχειν ὅτι λέγωσιν ὑπὸ πεττείας αὖ ταύτης τινὸς ἑτέρας, οὐκ ἐν ψήφοις ἀλλ' ἐν λόγοις· ἐπεὶ τό γε ἀληθὲς οὐδέν τι μᾶλλον ταύτῃ ἔχειν.
그리고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 하고 말했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당신에게 그 누구도 대꾸할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허나 이런 어떤 것을 당신이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들을 듣는 자들이 들을 때마다 겪습니다: 그들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일에 대한 미숙함 때문에 논변에 의해 그들이 질문 마다 조금씩 오도되어,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는 논의들의 끝에 이르러 대단한 실책이자 제일 처음의 것들에 반대되는 것으로 드러나 보인다고 믿고, 마치 장기에 능란한 자들에 의해 완숙하지 못한 자들이 가로막혀 그들이 옮길 것을 지니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그들 자신들도 결국 가로막혀 버리고 그와 같은 어떤 다른 장기놀이에 의해 말할 것을 가지지 못한다고, 장기말들에서가 아니라 말들에서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조금도 진리를 가지지 못하기에 말입니다.
ἁθροισθέντων : ἀθροίζω aor. pass. gather together.
ἀποκλείονται : ἀποκλείω mp. shut out.

λέγω δ' εἰς τὸ παρὸν ἀποβλέψας. νῦν γὰρ φαίη ἄν τίς σοι λόγῳ μὲν οὐκ ἔχειν καθ' ἕκαστον τὸ ἐρωτώμενον ἐναντιοῦσθαι, ἔργῳ δὲ ὁρᾶν, ὅσοι ἂν ἐπὶ φιλοσοφίαν ὁρμήσαντες μὴ τοῦ πεπαιδεῦσθαι ἕνεκα ἁψάμενοι νέοι ὄντες ἀπαλλάττωνται, ἀλλὰ μακρότερον ἐνδιατρίψωσιν, τοὺς μὲν πλείστους καὶ πάνυ ἀλλοκότους γιγνομένους, ἵνα μὴ [Stephanus page 487, section d, line 3] παμπονήρους εἴπωμεν, τοὺς δ' ἐπιεικεστάτους δοκοῦντας ὅμως τοῦτό γε ὑπὸ τοῦ ἐπιτηδεύματος οὗ σὺ ἐπαινεῖς πάσχοντας, ἀχρήστους ταῖς πόλεσι γιγνομένους.
그런데 저는 지금 상황을 주시하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누군가 당신께 말로써는 질문된 각각의 것에 따라 반대할 수는 없으나, 실천으로는 본다고, 지혜를 사랑하는 일을 시작하고서 배움을 위해 어려서 손대고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오랜 시간을 쏟아 버린 자들 모두가, 그들 중 대다수는 무척이나 괴상한 자들이 되고, 우리가 타락해 버린 자들이라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또 다른 자들은 매우 유능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칭찬하시는 바로 그 일에 의해 이런 일을 겪어서, 폴리스들에 쓸모가 없는 자들이 되는 걸을 본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ἐναντιοῦσθαι : ἐναντιόομαι. set oneself against, oppose.
ἀπαλλάττωνται : ἀπαλλάσσω mp. subj. set free.
παμπονήρους : thoroughly depraved

Καὶ ἐγὼ ἀκούσας, Οἴει οὖν, εἶπον, τοὺς ταῦτα λέγοντας ψεύδεσθαι;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서, 그렇다면 자네는 이리 생각하는가, 하고 말했네, 이런 말들을 하는 자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Οὐκ οἶδα, ἦ δ' ὅς, ἀλλὰ τὸ σοὶ δοκοῦν ἡδέως ἂν ἀκούοιμι.
그리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가 말했네, 당신께 여겨지는 바를 기꺼이 듣고자 합니다.

Ἀκούοις ἂν ὅτι ἔμοιγε φαίνονται τἀληθῆ λέγειν.
자네는 내게 있어서는 진리를 말한 것으로 보이는 바를 듣게 될 걸세.

Πῶς οὖν, ἔφη, εὖ ἔχει λέγειν ὅτι οὐ πρότερον κακῶν παύσονται αἱ πόλεις, πρὶν ἂν ἐν αὐταῖς οἱ φιλόσοφοι [Stephanus page 487, section e, line 3] ἄρξωσιν, οὓς ἀχρήστους ὁμολογοῦμεν αὐταῖς εἶναι;
그가 말했지, 그렇다면 어떻게, 폴리스들 내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 그 도시들에 무용한 자들이라고 우리가 동의하는 그 자들이 지배하기 전에는, 그보다 먼저 폴리스들이 해악을 그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잘 말할 수 있습니까?

Ἐρωτᾷς, ἦν δ' ἐγώ, ἐρώτημα δεόμενον ἀποκρίσεως δι' εἰκόνος λεγομένης.
내가 말했네, 자네는 비유를 통해 이야기되는 답변이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군.

Σὺ δέ γε, ἔφη, οἶμαι οὐκ εἴωθας δι' εἰκόνων λέγειν.
그런데 바로 당신께서는, 그가 말했네, 비유들을 통해 이야기하시는 일에 익숙치 않으신 걸로 생각합니다.

Εἶεν, εἶπον· σκώπτεις ἐμβεβληκώς με εἰς λόγον οὕτω δυσαπόδεικτον; ἄκουε δ' οὖν τῆς εἰκόνος, ἵν' ἔτι μᾶλλον ἴδῃς ὡς γλίσχρως εἰκάζω. οὕτω γὰρ χαλεπὸν τὸ πάθος τῶν ἐπιεικεστάτων, ὃ πρὸς τὰς πόλεις πεπόνθασιν, ὥστε οὐδ' ἔστιν ἓν οὐδὲν ἄλλο τοιοῦτον πεπονθός, ἀλλὰ δεῖ ἐκ πολλῶν αὐτὸ συναγαγεῖν εἰκάζοντα καὶ ἀπολογούμενον [Stephanus page 488, section a, line 6] ὑπὲρ αὐτῶν, οἷον οἱ γραφῆς τραγελάφους καὶ τὰ τοιαῦτα μειγνύντες γράφουσιν. 
자, 내가 말했지: 자네 나를 그렇게나 증명하기 어려운 논의로 빠뜨려 놓고서는 농담을 하고 있는가? 허나 그렇다면 그 비유를 들어 보게, 내가 얼마나 힘들게 비유를 하는지 자네가 훨씬 더 잘 알도록 말일세. 왜냐하면 그 가장 적합한 자들의 그 경험, 그들이 폴리스들에서 겪은 그 경험은 가혹한 것이어서, 그와 같은 다른 일을 겪은 경우는 하나도 있지 않을 정도이나, 그들을 위한 비유들과 변호 그것은 많은 것들로부터 취합될 필요가 있는데, 말하자면 화가들이 염소-사슴들과 그런 종류의 것들을 뒤섞어서 그리는 것과 같지.
σκώπτεις : σκώπτω. mock, jest, joke.
ἐμβεβληκώς : ἐμβάλλω pf. part.
γλίσχρως : sticky. hardly.

νόησον γὰρ τοιουτονὶ γενόμενον εἴτε πολλῶν νεῶν πέρι εἴτε μιᾶς· ναύκληρον μεγέθει μὲν καὶ ῥώμῃ ὑπὲρ τοὺς ἐν τῇ νηὶ πάντας, ὑπόκωφον δὲ καὶ ὁρῶντα ὡσαύτως βραχύ τι καὶ γιγνώσκοντα περὶ ναυτικῶν ἕτερα τοιαῦτα, τοὺς δὲ ναύτας στασιάζοντας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περὶ τῆς κυβερνήσεως, ἕκαστον οἰόμενον δεῖν κυβερνᾶν, μήτε μαθόντα πώποτε τὴν τέχνην μήτε ἔχοντα ἀποδεῖξαι διδάσκαλον ἑαυτοῦ μηδὲ χρόνον ἐν ᾧ ἐμάνθανεν, πρὸς δὲ τούτοις φάσκοντας μηδὲ διδακτὸν εἶναι, ἀλλὰ καὶ τὸν λέγοντα ὡς [Stephanus page 488, section b, line 8] διδακτὸν ἑτοίμους κατατέμνειν, αὐτοὺς δὲ αὐτῷ ἀεὶ τῷ ναυκλήρῳ περικεχύσθαι δεομένους καὶ πάντα ποιοῦντας ὅπως ἂν σφίσι τὸ πηδάλιον ἐπιτρέψῃ, ἐνίοτε δ' ἂν μὴ πείθωσιν ἀλλὰ ἄλλοι μᾶλλον, τοὺς μὲν ἄλλους ἢ ἀποκτεινύντας ἢ ἐκβάλλοντας ἐκ τῆς νεώς, τὸν δὲ γενναῖον ναύκληρον μανδραγόρᾳ ἢ μέθῃ ἤ τινι ἄλλῳ συμποδίσαντας τῆς νεὼς ἄρχειν χρωμένους τοῖς ἐνοῦσι, καὶ πίνοντάς τε καὶ εὐωχουμένους πλεῖν ὡς τὸ εἰκὸς τοὺς τοιούτους, πρὸς δὲ τούτοις ἐπαινοῦντας ναυτικὸν μὲν καλοῦντας καὶ κυβερνητικὸν καὶ ἐπιστάμενον τὰ κατὰ ναῦν, ὃς ἂν συλλαμβάνειν δεινὸς ᾖ ὅπως [Stephanus page 488, section d, line 3] ἄρξουσιν ἢ πείθοντες ἢ βιαζόμενοι τὸν ναύκληρον, τὸν δὲ μὴ τοιοῦτον ψέγοντας ὡς ἄχρηστον, τοῦ δὲ ἀληθινοῦ κυβερνήτου πέρι μηδ' ἐπαΐοντες, ὅτι ἀνάγκη αὐτῷ τὴν ἐπιμέλειαν ποιεῖσθαι ἐνιαυτοῦ καὶ ὡρῶν καὶ οὐρανοῦ καὶ ἄστρων καὶ πνευμάτων καὶ πάντων τῶν τῇ τέχνῃ προσηκόντων, εἰ μέλλει τῷ ὄντι νεὼς ἀρχικὸς ἔσεσθαι, ὅπως δὲ κυβερνήσει ἐάντε τινες βούλωνται ἐάντε μή, μήτε τέχνην τούτου μήτε μελέτην οἰόμενοι δυνατὸν εἶναι λαβεῖν ἅμα καὶ τὴν κυβερνητικήν. 
왜냐하면 생각해 보게, 다음과 같은 어떤 일이 생기는 걸 많은 배들과 관련해서건 단 한 척의 배에 관해서건 말일세: 덩치로도 힘으로도 그 배 안의 모든 이들을 능가하는 선장이, 그러나 귀머거리에 마찬가지로 근시안적이고 항해술에 관련된 것 말고 그런 다른 것들을 아는데, 선원들이 항로에 관하여 서로 반목할 때, 각자 (자신이) 키를 잡아야 한다 생각할 때, 한 번도 그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그 자신의 스승도 그 배웠던 기간도 내세워 보이지 못하면서, 그러나 이런 일들을 향해 배울 수 있는 일도 아니라고 그들이 단언하며,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까지 절단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 그들 스스로 바로 그 선장을 언제나 둘러싸고 모여들었다고(생각해 보게) 그들 자신에게 키가 주어지도록 바라고 또 온갖 짓들을 저지르면서, 종종 그들이 설득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이들이 설득할 때, 그 다른 자들은 베어 버리거나 배 밖으로 던져 버리고, 훌륭한 선장은 만드라고라를 가지고서든 독한 술을 가지고서든 다른 무엇으로든 손발을 묶고서 안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여 배를 지배하는 일이(γενόμενον), 그런 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마셔대고 잔치를 벌이며 항해하는 일이(γενόμενον), 이런 일들에 더하여 그들은 항해술에 능하다고 부르면서 조타술이 있고 배에 관련한 일들을 아는 자라고 부르고, 누구든 그들이 선장을 설득하든 강제하든 지배하도록 돕는 데에 능란한 자를, 반면에 이러한 자가 아닌 자를 쓸모 없는 자라고 비난하며, 참된 조타술에 관하여서 칭찬하지도 않고, 그로서는 날씨와 하늘과 별들과 바람들 그리고 그 기술에 속하는 온갖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만일 실제로 배의 지배자가 될 자라면, 어떤 이들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키를 잡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기술도 주의도 동시에 조타술을 취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일세.
ναύκληρον : captain
μεγέθει : greatness. in stature. might, power.
ῥώμῃ : bodily strength.
ὑπόκωφον : somewhat deaf. absurd.
στασιάζοντας : quarrel, against.
κυβερνήσεως : steering, pilotage.
ἑτοίμους : at hand, ready, prepared.
περικεχύσθαι : περιχέω pf. mp. inf. crowding round.
πηδάλιον : steering-paddle.
μέθῃ : strong drink.
συμποδίσαντας : συμποδίζω aor. part.
πίνοντάς : πίνω.
εὐωχουμένους : εὐωχέω mp. fare sumptuously, feast.
ψέγοντας : ψέγω. blame.

τοιούτων δὴ περὶ τὰς ναῦς γιγνομένων τὸν ὡς ἀληθῶς κυβερνητικὸν οὐχ ἡγῇ ἂν τῷ ὄντι μετεωροσκόπον [Stephanus page 489, section a, line 1] τε καὶ ἀδολέσχην καὶ ἄχρηστόν σφισι καλεῖσθαι ὑπὸ τῶν ἐν ταῖς οὕτω κατεσκευασμέναις ναυσὶ πλωτήρων;
배들을 둘러싸고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 진정으로 조타술에 능한 자가 실제로는 별 보는 자이자 헛소리하는 자 그리고 그들 자신들에게 쓸모없는 자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배들의 선원들에 의해 불릴 것이라 자네가 생각하지 않겠나?
κατεσκευασμένα : κατασκευάζω pf. mp. equip. furnish fully with. make. set up.

Καὶ μάλα, ἔφη ὁ Ἀδείμαντος.
물론 그렇습니다, 아데이만토스가 말했네.

Οὐ δή, ἦν δ' ἐγώ, οἶμαι δεῖσθαί σε ἐξεταζομένην τὴν εἰκόνα ἰδεῖν, ὅτι ταῖς πόλεσι πρὸς τοὺς ἀληθινοὺς φιλοσόφους τὴν διάθεσιν ἔοικεν, ἀλλὰ μανθάνειν ὃ λέγω.
내가 말하길, 나는 자네가 그 고찰되는 비유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네만, 그 상태가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폴리스들과 닮았다는 것 말일세, 허나 내가 말하는 바를 안다고 생각한다네.
ἐξεταζομένην : ἐξετάζω mp. part. examine well or closely.

Καὶ μάλ', ἔφη.
물론이죠, 그가 말했네.

Πρῶτον μὲν τοίνυν ἐκεῖνον τὸν θαυμάζοντα ὅτι οἱ φιλόσοφοι οὐ τιμῶνται ἐν ταῖς πόλεσι δίδασκέ τε τὴν εἰκόνα καὶ πειρῶ πείθειν ὅτι πολὺ ἂν θαυμαστότερον ἦν [Stephanus page 489, section b, line 1] εἰ ἐτιμῶντο.
그러니 우선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 폴리스들 안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놀라워하는 저 사람에게 그 비유를 가르쳐 주고 또한 만일 그들이 존경을 받았다면 그게 훨씬 더 놀라운 일이었으리란 점을 설득시키고자 시도해 보게.

Ἀλλὰ διδάξω, ἔφη.
그럼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가 말했네.

Καὶ ὅτι τοίνυν τἀληθῆ λέγεις, ὡς ἄχρηστοι τοῖς πολλοῖς οἱ ἐπιεικέστατοι τῶν ἐν φιλοσοφίᾳ· τῆς μέντοι ἀχρηστίας τοὺς μὴ χρωμένους κέλευε αἰτιᾶσθαι, ἀλλὰ μὴ τοὺς ἐπιεικεῖς. 
그러니까 자네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지혜를 사랑하는 일에 몸담은 자들 중 가장 능력있는 자들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무능한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네: 그렇지만 그 무능에 대해 사용하지 않는 자들을 탓하도록, 그러나 그 유능한 자들을 탓하지는 않도록 명하시게.

οὐ γὰρ ἔχει φύσιν κυβερνήτην ναυτῶν δεῖσθαι ἄρχεσθαι ὑφ' αὑτοῦ οὐδὲ τοὺς σοφοὺς ἐπὶ τὰς τῶν πλουσίων θύρας ἰέναι, ἀλλ' ὁ τοῦτο κομψευσάμενος ἐψεύσατο, τὸ δὲ ἀληθὲς πέφυκεν, ἐάντε πλούσιος ἐάντε πένης κάμνῃ, ἀναγκαῖον εἶναι ἐπὶ ἰατρῶν θύρας ἰέναι καὶ πάντα τὸν ἄρχεσθαι [Stephanus page 489, section c, line 2] δεόμενον ἐπὶ τὰς τοῦ ἄρχειν δυναμένου, οὐ τὸν ἄρχοντα δεῖσθαι τῶν ἀρχομένων ἄρχεσθαι, οὗ ἂν τῇ ἀληθείᾳ τι ὄφελος ᾖ. 
왜냐하면 선장이 그 자신에 의한 지배를 선원들에게 구걸한다는 것도 지혜로운 자들이 부유한 자들의 대문으로 나아간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고, 이 우스갯소리를 한 자는 거짓말을 한 것이나, 본래 사실은, 부자든 날품팔이꾼이든 아프다면, 의사들의 대문으로 나아가고 또 모든 경우에 지배를 필요로 하는 자가 지배할 수 있는 자의 대문으로 나아가는 게 필연적이라는 것이기 때문일세, 지배하는 자가 지배받는 자들에게 지배를 구걸하는 게 아니고, 그 일에 진정으로 뭔가 유익한 자라면 말이네.

ἀλλὰ τοὺς νῦν πολιτικοὺς ἄρχοντας ἀπεικάζων οἷς ἄρτι ἐλέγομεν ναύταις οὐχ ἁμαρτήσῃ, καὶ τοὺς ὑπὸ τούτων ἀχρήστους λεγομένους καὶ μετεωρολέσχας τοῖς ὡς ἀληθῶς κυβερνήταις.
허나 오늘날 정치하는 자들이 지배할 때 그들을 자네가 방금 우리가 말하던 그 선원들에 비유하면 잘못하는 건 아닐 것이고, 이들에 의해 쓸모없는 자들이자 별 보는 자들이라 이야기되는 사람들을 진정한 선장들에 비유하는 것도 그러할 걸세.

Ὀρθότατα, ἔφη.
무척이나 옳습니다, 그가 말했네.

Ἔκ τε τοίνυν τούτων καὶ ἐν τούτοις οὐ ῥᾴδιον εὐδοκιμεῖν τὸ βέλτιστον ἐπιτήδευμα ὑπὸ τῶν τἀναντία ἐπιτηδευόντων· πολὺ δὲ μεγίστη καὶ ἰσχυροτάτη διαβολὴ γίγνεται φιλοσοφίᾳ [Stephanus page 489, section d, line 2] διὰ τοὺς τὰ τοιαῦτα φάσκοντας ἐπιτηδεύειν, οὓς δὴ σὺ φῂς τὸν ἐγκαλοῦντα τῇ φιλοσοφίᾳ λέγειν ὡς παμπόνηροι οἱ πλεῖστοι τῶν ἰόντων ἐπ' αὐτήν, οἱ δὲ ἐπιεικέστατοι ἄχρηστοι, καὶ ἐγὼ συνεχώρησα ἀληθῆ σε λέγειν. ἦ γάρ;
따라서 이런 일들로부터 그리고 이런 자들 속에서 그 가장 중요한 일을 정반대의 일들을 하는 자들 아래에서 좋게 평하기란 쉽지가 않다네: 너무나 대단하고도 수치스러운 비방이 지혜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그런 정반대의 짓들을 일삼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들은 자네가 철학에 비난을 하는 자라고 말하는 자들이지, 그들은 그 일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 중 대다수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고, 가장 유능한 자들도 쓸모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자네가 진실을 말한다고 동의한 바 있네. 아니 그런가?

Ναί.
맞습니다.

Οὐκοῦν τῆς μὲν τῶν ἐπιεικῶν ἀχρηστίας τὴν αἰτίαν διεληλύθαμεν;
그렇다면 유능한 자들의 무능함에 대한 원인을 우리가 상술해 보도록 하지 않겠나?

Καὶ μάλα.
물론입니다.

Τῆς δὲ τῶν πολλῶν πονηρίας τὴν ἀνάγκην βούλει τὸ μετὰ τοῦτο διέλθωμεν, καὶ ὅτι οὐδὲ τούτου φιλοσοφία αἰτία, [Stephanus page 489, section e, line 1] ἂν δυνώμεθα, πειραθῶμεν δεῖξαι;
많은 이들의 타락에 대한 필연성을 자네가 좋다면 그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 보고, 그 일의 원인이 지혜 사랑은 아니라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증명해 보이기를 시도하도록 할까?

Πάνυ μὲν οὖν.
물론입니다.

Ἀκούωμεν δὴ καὶ λέγωμεν ἐκεῖθεν ἀναμνησθέντες, ὅθεν διῇμεν τὴν φύσιν οἷον ἀνάγκη φῦναι τὸν καλόν τε κἀγαθὸν ἐσόμενον. ἡγεῖτο δ' αὐτῷ, εἰ νῷ ἔχεις, πρῶτον μὲν ἀλήθεια, ἣν διώκειν αὐτὸν πάντως καὶ πάντῃ ἔδει ἢ ἀλαζόνι ὄντι μηδαμῇ μετεῖναι φιλοσοφίας ἀληθινῆς.
저기에서부터 기억을 떠올려 우리 듣고 말하기로 하세, 아름답고도 훌륭하게 될 자가 필연적으로 본성으로 지닐 그러한 본성을 논의한 곳에서부터 말이네. 그 자에게 길잡이가 되었던 것은, 자네가 기억한다면, 우선은 진리였는데, 그건 그 자가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추구해야만 했던 것이고 아니라면 허세를 부리는 자로서 어떤 식으로도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아야 했지.

Ἦν γὰρ οὕτω λεγόμενον.
그렇게 이야기된 바 있었지요.

Οὐκοῦν ἓν μὲν τοῦτο σφόδρα οὕτω παρὰ δόξαν τοῖς νῦν [Stephanus page 490, section a, line 6] δοκουμένοις περὶ αὐτοῦ;
그렇다면 그것은 오늘날 그 일에 관하여 의견을 가지는 자들과 그렇게나 심각하게 어긋난 의견의 하나가 아닌가?

-蟲-

Οἱ μὲν δὴ φιλόσοφοι, ἦν δ' ἐγώ, ὦ Γλαύκων, καὶ οἱ μὴ διὰ μακροῦ τινος διεξελθόντες λόγου μόγις πως ἀνεφάνησαν οἵ εἰσιν ἑκάτεροι.
내가 말했네, 그럼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과, 글라우콘, 또 그렇지 않은 자들은 어떤 긴 논의를 통해 거쳐 나와서 겨우 그 둘 각각의 사람들이 어떠한 자들인지 드러났구만. 

[Stephanus page 484, section a, line 4] Ἴσως γάρ, ἔφη, διὰ βραχέος οὐ ῥᾴδιον.
그가 말했네, 짧은 논의를 통해서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으니 말입니다.

Οὐ φαίνεται, εἶπον· ἐμοὶ γοῦν ἔτι δοκεῖ ἂν βελτιόνως φανῆναι εἰ περὶ τούτου μόνου ἔδει ῥηθῆναι, καὶ μὴ πολλὰ τὰ λοιπὰ διελθεῖν μέλλοντι κατόψεσθαι τί διαφέρει βίος δίκαιος ἀδίκου.
드러나지 않지, 내가 말했네: 그야 내게는 여전히 더욱 잘 밝혀졌을 것으로 여겨지니 말이네, 단지 이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면, 또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무엇이 다른지 고찰할 자에게 거쳐갈 것들이 많지 않았다면.

Τί οὖν, ἔφη, τὸ μετὰ τοῦτο ἡμῖν;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남은 건 무엇입니까?

Τί δ' ἄλλο, ἦν δ' ἐγώ, ἢ τὸ ἑξῆς; ἐπειδὴ φιλόσοφοι μὲν οἱ τοῦ 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ἔχοντος δυνάμενοι ἐφάπτεσθαι, οἱ δὲ μὴ ἀλλ' ἐν πολλοῖς καὶ παντοίως ἴσχουσιν πλανώμενοι οὐ φιλόσοφοι, ποτέρους δὴ δεῖ πόλεως ἡγεμόνας [Stephanus page 484, section b, line 7] εἶναι;
달리 무엇이겠나, 내가 말했지, 그 바로 다음 것 말고는 말일세? 언제나 동일한 것들에 따라 동일한 상태에 있는 것에 닿을 수 있는 자들은 철학자들인 반면, 그렇지를 못하고 많으면서 온갖 상태로 있는 것들 속에서 헤매이는 자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니, 그 두쪽 중 어느 쪽이 폴리스의 지도자들이어야 하겠는가?
ἐφάπτεσθαι : ἐφάπτω mp. inf. bind on or to.
ἴσχουσιν : redupl. form of ἔχω. 
πλανώμενοι : πλανάω mp. part. wander, stray.

Πῶς οὖν λέγοντες ἂν αὐτό, ἔφη, μετρίως λέγοιμεν;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가 그걸 어떻게 말하면서 적절하게 말하겠습니까?

Ὁπότεροι ἄν, ἦν δ' ἐγώ, δυνατοὶ φαίνωνται φυλάξαι νόμους τε καὶ ἐπιτηδεύματα πόλεων, τούτους καθιστάναι φύλακας.
내가 말했네, 어느 쪽이든 폴리스들의 법들과 관습들을 수호할 수 있는 자들로 드러나는 자들, 그들을 수호자들로 세운다고 말하겠지.
ἐπιτηδεύματα : pursuit, business, custom.

Ὀρθῶς, ἔφη.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가 말했네.

Τόδε δέ, ἦν δ' ἐγώ, ἆρα δῆλον, εἴτε τυφλὸν εἴτε ὀξὺ ὁρῶντα χρὴ φύλακα τηρεῖν ὁτιοῦν;
그런데 이 점은 혹시 분명한가, 내가 말했네, 무엇이 되었든 감시를 해야하는 수호자는 눈이 먼 자인지 예리하게 보는 자인지 말일세?
τυφλὸν : blind. dark, dim, ubscure, unseen.
ὀξὺ : sharp, dazzling, bright.
φύλακα : watcher, guard, sentinel, keeper, protector.
τηρεῖν : τηρέω inf. watch over, take care.

Καὶ πῶς, ἔφη, οὐ δῆλον;
그가 말했네, 또 어찌 분명치 않겠습니까?

Ἦ οὖν δοκοῦσί τι τυφλῶν διαφέρειν οἱ τῷ ὄντι τοῦ ὄντος [Stephanus page 484, section c, line 7] ἑκάστου ἐστερημένοι τῆς γνώσεως, καὶ μηδὲν ἐναργὲς ἐν τῇ ψυχῇ ἔχοντες παράδειγμα, μηδὲ δυνάμενοι ὥσπερ γραφῆς εἰς τὸ ἀληθέστατον ἀποβλέποντες κἀκεῖσε ἀεὶ ἀναφέροντές τε καὶ θεώμενοι ὡς οἷόν τε ἀκριβέστατα, οὕτω δὴ καὶ τὰ ἐνθάδε νόμιμα καλῶν τε πέρι καὶ δικαίων καὶ ἀγαθῶν τίθεσθαί τε, ἐὰν δέῃ τίθεσθαι, καὶ τὰ κείμενα φυλάττοντες σῴζειν;
그렇다면 눈이 먼 자들과 어떤 점에서 그들이 차이가 나는가? 실제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해 앎을 결여한 자들, 그 영혼 안에 아무런 뚜렷한 것도 본으로 지니지 않은 자들, 마치 화가들처럼 가장 참된 것 쪽을 보면서 언제나 저 쪽으로 조회하고 또한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게 볼 능력도 없는 자들, 그런 식으로 더 나아가 이곳에서 아름다운 것들과 정의로운 것들 그리고 선한 것들에 관하여 만일 세울 필요가 있다면 법령들을 제정하고, 또한 그 규정된 것들을 감시하면서 지킬 능력도 없는 자들이 말일세?
ἐστερημένοι  : στερέω pf. mp. part. deprive, bereave. to be deprived.
ἐναργές : ἐναργής. visible, palpable, manifest to the mind's eye.
ὡς οἷόν τε : so far as possible.

Οὐ μὰ τὸν Δία, ἦ δ' ὅς, οὐ πολύ τι διαφέρει.
제우스께 맹세코, 그가 말했네, 그닥 다를 바 없습니다.

Τούτους οὖν μᾶλλον φύλακας στησόμεθα ἢ τοὺς ἐγνωκότας μὲν ἕκαστον τὸ ὄν, ἐμπειρίᾳ δὲ μηδὲν ἐκείνων ἐλλείποντας μηδ' ἐν ἄλλῳ μηδενὶ μέρει ἀρετῆς ὑστεροῦντας;
그렇다면 우리가 있는 것 각각을 알고 있는 자들, 그런데 경험으로도 전혀 저들보다 부족하지 않고 덕의 다른 그 어느 부분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 자들보다도 오히려 그런 자들을 우리가 수호자들로 세우겠는가?
ἐγνωκότας : γιγνώσκω pf. part.

[Stephanus page 484, section d, line 8] Ἄτοπον μεντἄν, ἔφη, εἴη ἄλλους αἱρεῖσθαι, εἴ γε τἆλλα μὴ ἐλλείποιντο· τούτῳ γὰρ αὐτῷ σχεδόν τι τῷ μεγίστῳ ἂν προέχοιεν.
아니, 다른 자들이 선출되는 건 이상한 일일 겁니다, 그가 말했네, 만일 그들이 다른 점들까지도 부족하지 않다면 말입니다: 거의 가장 대단할 바로 그 점에서 그들이 능가할 테니까요.

Οὐκοῦν τοῦτο δὴ λέγωμεν, τίνα τρόπον οἷοί τ' ἔσονται οἱ αὐτοὶ κἀκεῖνα καὶ ταῦτα ἔχειν;
그렇다면 실로 우리 이 점을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식으로 그들 자신들이 저런 것들과 이런 것들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자들이 될 것인지를?

Πάνυ μὲν οὖν.
물론입니다.

Ὃ τοίνυν ἀρχόμενοι τούτου τοῦ λόγου ἐλέγομεν, τὴν φύσιν αὐτῶν πρῶτον δεῖ καταμαθεῖν· καὶ οἶμαι, ἐὰν ἐκείνην ἱκανῶς ὁμολογήσωμεν, ὁμολογήσειν καὶ ὅτι οἷοί τε ταῦτα ἔχειν οἱ αὐτοί, ὅτι τε οὐκ ἄλλους πόλεων ἡγεμόνας δεῖ [Stephanus page 485, section a, line 8] εἶναι ἢ τούτους.
그러니까 우리가 이 논의를 시작하면서 말했던 것은, 그들의 본성을 우선 면밀히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 그리고, 만일 우리가 저 본성에 충분히 동의하게 된다면, 또한 바로 그들이 그런 것들을 가질 만한 그런 자들이라는 점도 동의할 것이라고, 이들 말고 다른 자들이 폴리스들의 지도자들이어서는 안 된다고도 동의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Πῶς;
어째서입니까?

Τοῦτο μὲν δὴ τῶν φιλοσόφων φύσεων πέρι ὡμολογήσθω ἡμῖν ὅτι μαθήματός γε ἀεὶ ἐρῶσιν ὃ ἂν αὐτοῖς δηλοῖ ἐκείνης τῆς οὐσίας τῆς ἀεὶ οὔσης καὶ μὴ πλανωμένης ὑπὸ γενέσεως καὶ φθορᾶς.
이 점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의 본성들에 관련해서 우리에게 동의되었다고 하세, 그 본성들이 자신들에게 저 언제나 존재하는 그 존재에 대해 밝혀주고 또한 생성과 소멸에 의해 방황하지도 않는 그 배움을 언제나 사랑한다는 것 말이지.

Ὡμολογήσθω.
동의된 것이도록 하죠.

Καὶ μήν, ἦν δ' ἐγώ, καὶ ὅτι πάσης αὐτῆς, καὶ οὔτε σμικροῦ οὔτε μείζονος οὔτε τιμιωτέρου οὔτε ἀτιμοτέρου μέρους ἑκόντες ἀφίενται, ὥσπερ ἐν τοῖς πρόσθεν περί τε τῶν [Stephanus page 485, section b, line 8] φιλοτίμων καὶ ἐρωτικῶν διήλθομεν.
좋군, 내가 말했네, 그리고 그것 전체에 대해서이기 때문에, 그들은 작든 크든 명예롭든 불명예스럽든 그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그들이 자발적으로 폐기하지 않는다네, 바로 그 앞선 논의들에서 명예를 사랑하는 자들과 구애자들에 관해서 우리가 상술했던 것처럼 말일세.

Ὀρθῶς, ἔφη, λέγεις.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가 말했네.

Τόδε τοίνυν μετὰ τοῦτο σκόπει εἰ ἀνάγκη ἔχειν πρὸς τούτῳ ἐν τῇ φύσει οἳ ἂν μέλλωσιν ἔσεσθαι οἵους ἐλέγομεν.
그러니 그 다음으로 이걸 살펴 보게, 그에 더하여 본성에 있어서 장차 우리가 말하던 그런 자들이 될 자들이 이런 것을 지녀야만 하는지 살펴 보게.

Τὸ ποῖον;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Τὴν ἀψεύδειαν καὶ τὸ ἑκόντας εἶναι μηδαμῇ προσδέχεσθαι τὸ ψεῦδος ἀλλὰ μισεῖν, τὴν δ' ἀλήθειαν στέργειν.
거짓 없음 그리고 결코 자발적으로 거짓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되, 참된 것을 좋아함이지.

Εἰκός γ', ἔφη.
그런 것 같긴 합니다, 그가 말했네.

Οὐ μόνον γε, ὦ φίλε, εἰκός, ἀλλὰ καὶ πᾶσα ἀνάγκη τὸν ἐρωτικῶς του φύσει ἔχοντα πᾶν τὸ συγγενές τε καὶ οἰκεῖον [Stephanus page 485, section c, line 8] τῶν παιδικῶν ἀγαπᾶν.
그럴 것 같은 것만이 아니라, 친애하는 친구, 전적으로 필연적이기도 하다네 본성에 의해 사랑하는 상태인 자는 사랑받는 이들의 친족과 친근한 자 모두를 사랑한다는 건 말일세.

Ὀρθῶς, ἔφη.
맞습니다, 그가 말했네.

Ἦ οὖν οἰκειότερον σοφίᾳ τι ἀληθείας ἂν εὕροις;
그렇다면 자네는 참된 것보다 지혜와 더욱 친근한 무언가를 찾겠는가?

Καὶ πῶς; ἦ δ' ὅς.
어찌 찾겠습니까? 그가 말했네.

Ἦ οὖν δυνατὸν εἶναι τὴν αὐτὴν φύσιν φιλόσοφόν τε καὶ φιλοψευδῆ;
그렇다면 지혜를 사랑하는 본성과 거짓을 사랑하는 본성이 동일한 것임이 가능하겠는가?

Οὐδαμῶς γε.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Τὸν ἄρα τῷ ὄντι φιλομαθῆ πάσης ἀληθείας δεῖ εὐθὺς ἐκ νέου ὅτι μάλιστα ὀρέγεσθαι.
그래서 진정으로 배움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진리에 어려서부터 곧장 가능한 한 최대한 도달해야 하지.

Παντελῶς γε.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Stephanus page 485, section d, line 6] Ἀλλὰ μὴν ὅτῳ γε εἰς ἕν τι αἱ ἐπιθυμίαι σφόδρα ῥέπουσιν, ἴσμεν που ὅτι εἰς τἆλλα τούτῳ ἀσθενέστεραι, ὥσπερ ῥεῦμα ἐκεῖσε ἀπωχετευμένον.
허나 정말로 어떤 한 가지 것을 향해 열망들이 격하게 기우는 누구에게든지 바로 그에게, 다른 것들을 향해서는 그 사람에게 그 열망들이 더욱 약한 것들이 된다는 걸 아마 우리는 알고 있겠지, 마치 저쪽으로 대어진 물줄기처럼 말일세.
ἀπωχετευμένον : ἀποχετεύω pf. mp. draw off water, by a canal.

Τί μήν;
네, 그래서요?

Ὧι δὴ πρὸς τὰ μαθήματα καὶ πᾶν τὸ τοιοῦτον ἐρρυήκασιν, περὶ τὴν τῆς ψυχῆς οἶμαι ἡδονὴν αὐτῆς καθ' αὑτὴν εἶεν ἄν, τὰς δὲ διὰ τοῦ σώματος ἐκλείποιεν, εἰ μὴ πεπλασμένως ἀλλ' ἀληθῶς φιλόσοφός τις εἴη.
그래서 그 자에게 배움들과 그와 같은 종류의 모든 것을 향하여 열망들이 흘러 들었고, 내 생각에 열망들은 영혼의 쾌락과 관련하여 영혼 자체로 바로 그 영혼에 속할 테지, 만일 가장한 게 아니라 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어떤 자라면 말일세.

Μεγάλη ἀνάγκη.
매우 필연적입니다.

Σώφρων μὴν ὅ γε τοιοῦτος καὶ οὐδαμῇ φιλοχρήματος· [Stephanus page 485, section e, line 4] ὧν γὰρ ἕνεκα χρήματα μετὰ πολλῆς δαπάνης σπουδάζεται, ἄλλῳ τινὶ μᾶλλον ἢ τούτῳ προσήκει σπουδάζειν.
정말로 적어도 이와 같은 자는 사려 있는 자이자 결코 재물을 사랑하는 자가 아닌 자이지: 왜냐하면 다른 지출들과 더불어 그를 위해 재물이 갈구되는 그런 것들은, 그런 것들을 갈구하는 일이 이 자에게보다는 오히려 다른 어떤 자에게 어울리니까.

Οὕτω.
그렇습니다.

Καὶ μήν που καὶ τόδε δεῖ σκοπεῖν, ὅταν κρίνειν μέλλῃς φύσιν φιλόσοφόν τε καὶ μή.
그럼 또 아마 이런 것도 살펴보아야 하겠지, 자네가 지혜를 사랑하는 본성과 그렇지 않은 본성을 분간하길 바랄 경우에는.

Τὸ ποῖον;
어떤 것을 말씀이십니까?

Μή σε λάθῃ μετέχουσα ἀνελευθερίας· ἐναντιώτατον γάρ που σμικρολογία ψυχῇ μελλούσῃ τοῦ ὅλου καὶ παντὸς ἀεὶ ἐπορέξεσθαι θείου τε καὶ ἀνθρωπίνου.
자네도 모르게 그 본성이 노예상태에 참여하지는 않도록 하는 것이네: 왜냐하면 아마도 하잘 것 없음은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총체적인 모든 것에 대해 언제나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 영혼에 가장 반대되는 것이니까.
ἐπορέξεσθαι : ἐπορέγω fut. med. inf. stretch oneself towards. yearn for. c.gen.

Ἀληθέστατα, ἔφη.
지극히 참된 말씀이십니다, 그가 말했네.

[Stephanus page 486, section a, line 8] Ἧι οὖν ὑπάρχει διανοίᾳ μεγαλοπρέπεια καὶ θεωρία παντὸς μὲν χρόνου, πάσης δὲ οὐσίας, οἷόν τε οἴει τούτῳ μέγα τι δοκεῖν εἶναι τὸν ἀνθρώπινον βίον;
그렇다면 그 본성에 사유에 있어서의 기품과 모든 시간 모든 존재에 대한 관조가 속하는, 그런 자에게 인간의 삶이 무슨 대단한 거라도 된다고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οἷόν τε : it is possible.

Ἀδύνατον, ἦ δ' ὅς.
불가능합니다, 그가 말했네.

Οὐκοῦν καὶ θάνατον οὐ δεινόν τι ἡγήσεται ὁ τοιοῦτος;
그렇다면 죽음조차도 어떤 두려운 것으로 그런 사람이 믿지는 않겠지?

Ἥκιστά γε.
무엇보다도 그렇습니다.

Δειλῇ δὴ καὶ ἀνελευθέρῳ φύσει φιλοσοφίας ἀληθινῆς, ὡς ἔοικεν, οὐκ ἂν μετείη.
그래서 비열하고도 노예스러운 본성으로서는 참된 지혜사랑에, 아마도, 관여하지 못할 걸세.
Δειλῇ : δειλός. cowardly. miserable, wretched.

Οὔ μοι δοκεῖ.
못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Τί οὖν; ὁ κόσμιος καὶ μὴ φιλοχρήματος μηδ' ἀνελεύθερος [Stephanus page 486, section b, line 7] μηδ' ἀλαζὼν μηδὲ δειλὸς ἔσθ' ὅπῃ ἂν δυσσύμβολος ἢ ἄδικος γένοιτο;
그렇다면 어떤가? 조화로우며 재물을 사랑하지 않고 노예스럽지도 않으며 허풍을 떨지도 않고 비열하지도 않은 자가 어떤 식으로든 대하기 어려운 자이거나 혹은 부정의한 자가 되겠는가?
δυσσύμβολος : δυσξύμβολος. hard to deal with.

Οὐκ ἔστιν.
그렇지 않습니다.

Καὶ τοῦτο δὴ ψυχὴν σκοπῶν φιλόσοφον καὶ μὴ εὐθὺς νέου ὄντος ἐπισκέψῃ, εἰ ἄρα δικαία τε καὶ ἥμερος ἢ δυσκοινώνητος καὶ ἀγρία.
그래서 자네는 영혼에 있어서 이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살펴 보면서 그가 젊은 때에는 그런 자가 아닌지도 검토하겠지, 그래서 정의롭고 얌전한 자인지 아니면 함께 하기 어렵고 거친 자인지.

Πάνυ μὲν οὖν.
물론 그렇습니다.

Οὐ μὴν οὐδὲ τόδε παραλείψεις, ὡς ἐγᾦμαι.
내 생각에, 자네는 이런 것도 물론 남겨두지 않을 것이네.

Τὸ ποῖον;
어떤 것을요?

Εὐμαθὴς ἢ δυσμαθής. ἢ προσδοκᾷς ποτέ τινά τι ἱκανῶς [Stephanus page 486, section c, line 4] ἂν στέρξαι, ὃ πράττων ἂν ἀλγῶν τε πράττοι καὶ μόγις σμικρὸν ἀνύτων;
잘 배우는 자인지 아님 못 배우는 자인지. 혹은 자네는 도대체 누군가가 뭔가 충분히 애정을 가진 것이라 기대하는가, 행하자는 자가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간신히 미미한 것만을 성취하며 행한다면?

Οὐκ ἂν γένοιτο.
그리 되지 않을 것입니다.

Τί δ' εἰ μηδὲν ὧν μάθοι σῴζειν δύναιτο, λήθης ὢν πλέως; ἆρ' ἂν οἷός τ' εἴη ἐπιστήμης μὴ κενὸς εἶναι;
그런데 만일 그가 배웠을 것들 중에 무엇 하나 보존할 수 없다면, 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어떤가? 그가 앎에 대해 텅 비지 않을 수 있겠는가?

Καὶ πῶς;
또 어찌 그렇겠습니까?

Ἀνόνητα δὴ πονῶν οὐκ οἴει ἀναγκασθήσεται τελευτῶν αὑτόν τε μισεῖν καὶ τὴν τοιαύτην πρᾶξιν;
그럼 허투루 애를 쓰며 끝내 그 자신도 그러한 행위도 싫어할 수밖에 없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는가?

Πῶς δ' οὔ;
어찌 아니겠습니까?

Ἐπιλήσμονα ἄρα ψυχὴν ἐν ταῖς ἱκανῶς φιλοσόφοις μή [Stephanus page 486, section d, line 2] ποτε ἐγκρίνωμεν, ἀλλὰ μνημονικὴν αὐτὴν ζητῶμεν δεῖν εἶναι.
그럼 잘 잊는 영혼을 우리는 충분히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 안에 결코 셈해 넣지 말고, 기억력 있는 영혼이어야 하도록 추구하기로 하지.

Παντάπασι μὲν οὖν.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Ἀλλ' οὐ μὴν τό γε τῆς ἀμούσου τε καὶ ἀσχήμονος φύσεως ἄλλοσέ ποι ἂν φαῖμεν ἕλκειν ἢ εἰς ἀμετρίαν.
그럼 물론 적어도 교양 없고 못난 본성에 속하는 속하는 것은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지나침 쪽으로 이끈다고 우리가 말할 걸세.

Τί μήν;
그래서요?

Ἀλήθειαν δ' ἀμετρίᾳ ἡγῇ συγγενῆ εἶναι ἢ ἐμμετρίᾳ;
그런데 진리는 지나침과 동류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적도와 동류라 생각하는가?

Ἐμμετρίᾳ.
적도와 동류이지요.

Ἔμμετρον ἄρα καὶ εὔχαριν ζητῶμεν πρὸς τοῖς ἄλλοις διάνοιαν φύσει, ἣν ἐπὶ τὴν τοῦ ὄντος ἰδέαν ἑκάστου τὸ [Stephanus page 486, section d, line 11] αὐτοφυὲς εὐάγωγον παρέξει.
그럼 적도와 품위를 다른 것들에 더하여 본성적인 사유로 추구하세, 그 사유를 그 본성이 있는 것 각각의 이데아를 향해 잘 이끌 것일 그러한 사유로 말이네.

Πῶς δ' οὔ; 
어찌 아니겠습니까?

Τί οὖν; μή πῃ δοκοῦμέν σοι οὐκ ἀναγκαῖα ἕκαστα διεληλυθέναι καὶ ἑπόμενα ἀλλήλοις τῇ μελλούσῃ τοῦ ὄντος ἱκανῶς τε καὶ τελέως ψυχῇ μεταλήψεσθαι; 
그렇다면 어떠한가? 자네에게는 우리가 어떤 점에서 장차 존재에 충분히 그리고 완전하게 관여할 영혼에 그 각각이 필연적이지도 않고 또 서로 뒤따르지도 않는 것들을 상술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가?

Ἀναγκαιότατα μὲν οὖν, ἔφη.
무엇보다도 필연적인 것들을 상술하였습니다, 그가 말했네.

Ἔστιν οὖν ὅπῃ μέμψῃ τοιοῦτον ἐπιτήδευμα, ὃ μή ποτ' ἄν τις οἷός τε γένοιτο ἱκανῶς ἐπιτηδεῦσαι, εἰ μὴ φύσει εἴη μνήμων, εὐμαθής, μεγαλοπρεπής, εὔχαρις, φίλος τε καὶ συγγενὴς ἀληθείας, δικαιοσύνης, ἀνδρείας, σωφροσύνης;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자네가 비난하겠는가, 그 일을 누가 되었든 충분히 추구하게 될 수 없을, 만일 본성상 기억력이 좋은 자, 잘 배우는 자, 훌륭한 자, 친절한 자, 진리의, 정의의, 용기의, 절제의 친구이자 동류인 자가 아니라면?
μέμψῃ : μέμφομαι aor. subj. or fut. blame, censure.


-蟲-

Οὔκ, ἀλλ' ἀνάγκη, ἔφη, καὶ καλά πως αὐτὰ καὶ αἰσχρὰ φανῆναι, καὶ ὅσα ἄλλα ἐρωτᾷς.
그가 말했네, 없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것들도 어떤 식으로는 그것들이 추한 것들로도 보이는 것이 필연적이고, 당신께서 물으신 다른 것들도 모두 그러합니다.

Τί δὲ τὰ πολλὰ διπλάσια; ἧττόν τι ἡμίσεα ἢ διπλάσια φαίνεται;
그런데 두 배인 많은 것들은 어떠한가? 두 배인 것들로 나타나는 것보다 얼마간 덜 절반인 것들로 나타나는가?

Οὐδέν.
전혀 아닙니다.

Καὶ μεγάλα δὴ καὶ σμικρὰ καὶ κοῦφα καὶ βαρέα μή τι [Stephanus page 479, section b, line 7] μᾶλλον ἃ ἂν φήσωμεν, ταῦτα προσρηθήσεται ἢ τἀναντία;
더 나아가 큰 것들과 작은 것들 그리고 가벼운 것들과 무거운 것들도 우리가 말할 그것들이 조금도 더 유력하진 않겠지, 이런 이름들로 불리게 되리란 것이 그 반대의 이름들로 불리게 되리란 것보다 말일세?
προσρηθήσεται : προσερέω fut. pass.
μᾶλλον : a portiori.

Οὔκ, ἀλλ' ἀεί, ἔφη, ἕκαστον ἀμφοτέρων ἕξεται.
더 유력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그가 말했네, 그 각각이 양자에 연결될 것입니다.

Πότερον οὖν ἔστι μᾶλλον ἢ οὐκ ἔστιν ἕκαστον τῶν πολλῶν τοῦτο ὃ ἄν τις φῇ αὐτὸ εἶναι;
그렇다면 여러 가지 것들의 각각은 우리가 그 자체라고 말할 바로 그것이 아닌가 아니면 오히려 그것인가?

Τοῖς ἐν ταῖς ἑστιάσεσιν, ἔφη, ἐπαμφοτερίζουσιν ἔοικεν, καὶ τῷ τῶν παίδων αἰνίγματι τῷ περὶ τοῦ εὐνούχου, τῆς βολῆς πέρι τῆς νυκτερίδος, ᾧ καὶ ἐφ' οὗ αὐτὸν αὐτὴν αἰνίττονται βαλεῖν· καὶ γὰρ ταῦτα ἐπαμφοτερίζειν, καὶ οὔτ' εἶναι οὔτε μὴ εἶναι οὐδὲν αὐτῶν δυνατὸν παγίως νοῆσαι, οὔτε ἀμφότερα οὔτε οὐδέτερον.
그가 말했네, 연회에서 양의어 놀이를 하는 자들과 같고, 그리고 고자에 관한 아이들의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박쥐에게 던지는 일에 관한 것인데, 그 사람이 그 박쥐를 무엇으로 그리고 무엇 위에 던졌는가 수수께끼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도 양의어 놀이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 중 아무것도 있다고도 있지 않다고도 확실하게 생각할 수도 없고, 양쪽 다라고도 어느 쪽도 아니라고도 생각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ἑστιάσεσιν : ἑστίᾱσις. feasting, banqueting, entertainment.
ἐπαμφοτερίζουσιν : ἐπαμφοτερίζω. to be double. play a double game.

[Stephanus page 479, section c, line 6] Ἔχεις οὖν αὐτοῖς, ἦν δ' ἐγώ, ὅτι χρήσῃ, ἢ ὅποι θήσεις καλλίω θέσιν τῆς μεταξὺ οὐσίας τε καὶ τοῦ μὴ εἶναι; οὔτε γάρ που σκοτωδέστερα μὴ ὄντος πρὸς τὸ μᾶλλον μὴ εἶναι φανήσεται, οὔτε φανότερα ὄντος πρὸς τὸ μᾶλλον εἶναι.
그러면 자네 알고 있는가, 내가 말했네, 그것들로 자네가 사용할 바를, 혹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보다 더 아름다운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 말이네? 왜냐하면 아마도 그것들이 더욱 비존재라는 쪽으로 비존재보다 더 어두운 것들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고, 더욱 존재라는 쪽으로 존재보다 더욱 밝은 것들로도 나타나지 않을 거싱기 때문일세.

Ἀληθέστατα, ἔφη.
무엇보다도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가 말했네.

Ηὑρήκαμεν ἄρα, ὡς ἔοικεν, ὅτι τὰ τῶν πολλῶν πολλὰ νόμιμα καλοῦ τε πέρι καὶ τῶν ἄλλων μεταξύ που κυλινδεῖται τοῦ τε μὴ ὄντος καὶ τοῦ ὄντος εἰλικρινῶς.
그럼 보이기로는 우리가 아름다움에 관하여 그리고 다른 것들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의 많은 용례들이 아마도 비존재와 순수한 존재 사이에서 뒤척인다는 것을 알아낸 듯하군.

Ηὑρήκαμεν.
알아냈습니다.

[Stephanus page 479, section d, line 7] Προωμολογήσαμεν δέ γε, εἴ τι τοιοῦτον φανείη, δοξαστὸν αὐτὸ ἀλλ' οὐ γνωστὸν δεῖν λέγεσθαι, τῇ μεταξὺ δυνάμει τὸ μεταξὺ πλανητὸν ἁλισκόμενον.
그런데 우리가 동의도 한 것인가, 만일 어떤 것이 그런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것이 앎의 대상이 아닌 의견의 대상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걸, 중간의 헤매는 것은 중간의 능력으로 포착됨으로써 그렇다는 것을 말일세.

Ὡμολογήκαμεν.
동의했습니다.

Τοὺς ἄρα πολλὰ καλὰ θεωμένους, αὐτὸ δὲ τὸ καλὸν μὴ ὁρῶντας μηδ' ἄλλῳ ἐπ' αὐτὸ ἄγοντι δυναμένους ἕπεσθαι, καὶ πολλὰ δίκαια, αὐτὸ δὲ τὸ δίκαιον μή, καὶ πάντα οὕτω, δοξάζειν φήσομεν ἅπαντα, γιγνώσκειν δὲ ὧν δοξάζουσιν οὐδέν.
그래서 많은 아름다움 것들을 보면서, 아름다움 자체는 보지 못하고 그 자체를 향해 이끄는 자에게 따를 능력도 없는 자들은, 또 많은 정의로운 것들을 보면서, 정의 그 자체는 보지 못하고, 또 모든 것들에 있어서도 그런 식인 자들을, 우리는 그들 모두가 의견을 지닌다고 말할 테고, 그러나 그들이 그에 대해 의견을 가지는 그것들 중 아무것도 그들이 알지는 못한다고 말할 것이네.

Ἀνάγκη, ἔφη.
필연적입니다, 그가 말했네.

[Stephanus page 479, section e, line 7] Τί δὲ αὖ τοὺς αὐτὰ ἕκαστα θεωμένους καὶ 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ὄντα; ἆρ' οὐ γιγνώσκειν ἀλλ' οὐ δοξάζειν;
그런데 이번엔 그 자체들 각각의 것들과 언제나 그 자체로 동일한 방식으로 있는 것들을 보는 자들은 어떤가? 혹시 의견을 가진다고 하지 않고 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Ἀνάγκη καὶ ταῦτα.
이러한 일들 또한 필연적입니다.

Οὐκοῦν καὶ ἀσπάζεσθαί τε καὶ φιλεῖν τούτους μὲν ταῦτα φήσομεν ἐφ' οἷς γνῶσίς ἐστιν, ἐκείνους δὲ ἐφ' οἷς δόξα; ἢ οὐ μνημονεύομεν ὅτι φωνάς τε καὶ χρόας καλὰς καὶ τὰ τοιαῦτ' ἔφαμεν τούτους φιλεῖν τε καὶ θεᾶσθαι, αὐτὸ δὲ τὸ καλὸν οὐδ' ἀνέχεσθαι ὥς τι ὄν;
그렇다면 인식이 그에 관계되는 이러한 것들을 그들이 반기고 사랑하지만, 저들은 의견이 관계된 것들을 그리한다고 말하지 않겠나? 아니면 아름다운 소리들과 빛깔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것들을 그들이 사랑하고 반기는 반면, 아름다움 그 자체는 뭐나 되는 거라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가?

Μεμνήμεθα.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Μὴ οὖν τι πλημμελήσομεν φιλοδόξους καλοῦντες αὐτοὺς [Stephanus page 480, section a, line 7] μᾶλλον ἢ φιλοσόφους; καὶ ἆρα ἡμῖν σφόδρα χαλεπανοῦσιν ἂν οὕτω λέγωμεν;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견을 사랑하는 자들이라 부르면서 뭔가 실수하게 되진 않겠지? 그리고 혹시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극도로 험하게 굴겠는가?
πλημμελήσομεν : πλημμελέω fut. offend, err.

Οὔκ, ἄν γέ μοι πείθωνται, ἔφη· τῷ γὰρ ἀληθεῖ χαλεπαίνειν οὐ θέμις.
아닙니다, 적어도 그들이 제게 설득된다면 말이죠, 그가 말했네: 왜냐하면 진실에 화를 내는 법은 없으니까요.

Τοὺς αὐτὸ ἄρα ἕκαστον τὸ ὂν ἀσπαζομένους φιλοσόφους ἀλλ' οὐ φιλοδόξους κλητέον;
그럼 각각의 있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의견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로 불려야 하는 것이겠지?

Παντάπασι μὲν οὖν.
전적으로 그러합니다.

-蟲-

[Stephanus page 476, section a, line 3] Καὶ τοῦτο.
그 또한 그렇습니다.

Καὶ περὶ δὴ δικαίου καὶ ἀδίκου καὶ ἀγαθοῦ καὶ κακοῦ καὶ πάντων τῶν εἰδῶν πέρι ὁ αὐτὸς λόγος, αὐτὸ μὲν ἓν ἕκαστον εἶναι, τῇ δὲ τῶν πράξεων καὶ σωμάτων καὶ ἀλλήλων κοινωνίᾳ πανταχοῦ φανταζόμενα πολλὰ φαίνεσθαι ἕκαστον.
그럼 정의와 부정의 그리고 선과 악에 관하여서도 또한 다른 모든 종류의 것들에 관해서도 동일한 설명이 있는데, 그 자체로는 각각 하나이지만, 그 실천들과 실물들 그리고 상호의 공유로써 모든 곳에서 많은 상들이 각각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일세.

Ὀρθῶς, ἔφη, λέγεις.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가 말했네.

Ταύτῃ τοίνυν, ἦν δ' ἐγώ, διαιρῶ, χωρὶς μὲν οὓς νυνδὴ ἔλεγες φιλοθεάμονάς τε καὶ φιλοτέχνους καὶ πρακτικούς, καὶ χωρὶς αὖ περὶ ὧν ὁ λόγος, οὓς μόνους ἄν τις ὀρθῶς προσείποι φιλοσόφους.
그러니까 같은 방식으로, 내가 말했네, 나는 구분하네, 한편으로는 따로 지금 자네가 구경을 좋아하는 자들이자 기술을 좋아하는 자들 그리고 실천적인 자들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따로 이번에는 그들에 관하여 논의가 있는, 누군가가 오직 그들만을 옳게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라 부를 그런 자들을 말이지.

[Stephanus page 476, section b, line 3]Πῶς, ἔφη, λέγεις;
어찌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그가 말했네.

Οἱ μέν που, ἦν δ' ἐγώ, φιλήκοοι καὶ φιλοθεάμονες τάς τε καλὰς φωνὰς ἀσπάζονται καὶ χρόας καὶ σχήματα καὶ πάντα τὰ ἐκ τῶν τοιούτων δημιουργούμενα, αὐτοῦ δὲ τοῦ καλοῦ ἀδύνατος αὐτῶν ἡ διάνοια τὴν φύσιν ἰδεῖν τε καὶ ἀσπάσασθαι.
내가 말했지, 듣기를 좋아하는 자들과 구경을 좋아하는 자들은 아름다운 소리들을 반기고 또 그런 색들과 모양들 또한 이런 것들을 통해 빚어진 온갖 것들을 반기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들의 판단이 본성상 볼 수도 반길 수도 없지.

Ἔχει γὰρ οὖν δή, ἔφη, οὕτως.
그야 사정이 그러하니까요, 그가 말했네.

Οἱ δὲ δὴ ἐπ' αὐτὸ τὸ καλὸν δυνατοὶ ἰέναι τε καὶ ὁρᾶν καθ' αὑτὸ ἆρα οὐ σπάνιοι ἂν εἶεν;
그런데 정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를 향해 나아가고 또 그 자체에 관하여 볼 수 있는 자들은 그래서 드문 자들이지 않겠나?

[Stephanus page 476, section c, line 1]Καὶ μάλα.
무척이나 그렇습니다.

Ὁ οὖν καλὰ μὲν πράγματα νομίζων, αὐτὸ δὲ κάλλος μήτε νομίζων μήτε, ἄν τις ἡγῆται ἐπὶ τὴν γνῶσιν αὐτοῦ, δυνάμενος ἕπεσθαι, ὄναρ ἢ ὕπαρ δοκεῖ σοι ζῆν; σκόπει δέ. τὸ ὀνειρώττειν ἆρα οὐ τόδε ἐστίν, ἐάντε ἐν ὕπνῳ τις ἐάντ' ἐγρηγορὼς τὸ ὅμοιόν τῳ μὴ ὅμοιον ἀλλ' αὐτὸ ἡγῆται εἶναι ᾧ ἔοικεν;
그러므로 아름다운 사물들을 생각하는 자, 바로 그 자가 아름다움 자체는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 그에 대한 앎을 향해 인도할지라도, 따를 수 없는 자일 때, 자네에게는 그가 잠들어 산다고 여겨지는가 아니면 깬 채로 산다고 여겨지는가? 그러나 살펴 보게. 혹시 꿈을 꾼다는 것은 이런 것 아닌가, 누군가 잠들어서든 깨어서든 어떤 것과 닮은 것을 닮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닮은 바로 그것 자체라고 믿는다면 그럴 때 말이네만?

Ἐγὼ γοῦν ἄν, ἦ δ' ὅς, φαίην ὀνειρώττειν τὸν τοιοῦτον.
그러니까 저로서는, 그가 말했네, 그러한 것이 꿈을 꾼다는 것이라 말할 것입니다.

Τί δέ; ὁ τἀναντία τούτων ἡγούμενός τέ τι αὐτὸ καλὸν καὶ δυνάμενος καθορᾶν καὶ αὐτὸ καὶ τὰ ἐκείνου μετέχοντα[Stephanus page 476, section d, line 2], καὶ οὔτε τὰ μετέχοντα αὐτὸ οὔτε αὐτὸ τὰ μετέχοντα ἡγούμενος, ὕπαρ ἢ ὄναρ αὖ καὶ οὗτος δοκεῖ σοι ζῆν;
그런데 어떤가? 이러한 자들과 반대로 어떤 아름다움 자체를 믿고 그 자체와 저것에 참여하는 것들까지 파악할 수 있는 자, 참여하는 것들을 그 자체인 것으로도 그 자체인 것을 참여하는 것들로도 믿지 않는 자, 그런 자가 자네에게는 깬 채로 사는 것으로 여겨지는가 잠든 채로 사는 걸로 여겨지는가?

Καὶ μάλα, ἔφη, ὕπαρ.
더할 나위 없이 깨어 있는 채로입니다, 그가 말했네.

Οὐκοῦν τούτου μὲν τὴν διάνοιαν ὡς γιγνώσκοντος γνώμην ἂν ὀρθῶς φαῖμεν εἶναι, τοῦ δὲ δόξαν ὡς δοξάζοντος;
그렇다면 이런 자의 판단은 아는 자에 속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앎이라고 옳게 말할 테고, 다른 자의 판단은 사견을 갖는 자에 속하는 것으로서 사견이라 옳게 말하지 않겠는가?

Πάνυ μὲν οὖν.
물론입니다.

Τί οὖν ἐὰν ἡμῖν χαλεπαίνῃ οὗτος, ὅν φαμεν δοξάζειν ἀλλ' οὐ γιγνώσκειν, καὶ ἀμφισβητῇ ὡς οὐκ ἀληθῆ λέγομεν; ἕξομέν τι παραμυθεῖσθαι αὐτὸν καὶ πείθειν ἠρέμα, ἐπικρυπτόμενοι ὅτι οὐχ ὑγιαίνει;
그럼 그런 자가 우리에게 역정을 낸다면, 우리가 사견을 가지지만 알지 못한다고 말한 그가 말일세, 그리고 우리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반대한다면 어쩌겠는가? 우리가 그를 얼마간 달래고 점잖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가 건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말일세?

[Stephanus page 476, section e, line 3] Δεῖ γέ τοι δή, ἔφη.
적어도 정말 그래야 하긴 합니다, 그가 말했네.

Ἴθι δή, σκόπει τί ἐροῦμεν πρὸς αὐτόν. ἢ βούλει ὧδε πυνθανώμεθα παρ' αὐτοῦ, λέγοντες ὡς εἴ τι οἶδεν οὐδεὶς αὐτῷ φθόνος, ἀλλ' ἅσμενοι ἂν ἴδοιμεν εἰδότα τι. ἀλλ' ἡμῖν εἰπὲ τόδε· ὁ γιγνώσκων γιγνώσκει τὶ ἢ οὐδέν; σὺ οὖν μοι ὑπὲρ ἐκείνου ἀποκρίνου.
자, 우리가 그에게 뭐라 말할지 살펴 보게. 혹은 우리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식으로 물어 듣기를 바라는가, 만일 그가 뭔가 안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그에게 시기를 하는 게 아니라, 기꺼이 뭔가 아는 사람을 볼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말일세. "그러나 우리에게 당신이 이점을 말해 주시오: 아는 자는 뭔가를 압니까 아니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까?" 그러면 자네가 내게 저 사람 대신 대답해 주게.

Ἀποκρινοῦμαι, ἔφη, ὅτι γιγνώσκει τί.
그가 말했네, 저는 그가 뭔가를 안다고 대답합니다.

Πότερον ὂν ἢ οὐκ ὄν;
그는 있는 것을 아는가 아니면 있지 않은 것을 아는가?

Ὄν· πῶς γὰρ ἂν μὴ ὄν γέ τι γνωσθείη;
있는 것을요: 그야 어찌 적어도 있지 않은 뭔가가 알려지겠습니까?

Ἱκανῶς οὖν τοῦτο ἔχομεν, κἂν εἰ πλεοναχῇ σκοποῖμεν, [Stephanus page 477, section a, line 3] ὅτι τὸ μὲν παντελῶς ὂν παντελῶς γνωστόν, μὴ ὂν δὲ μηδαμῇ πάντῃ ἄγνωστον;
그러니 우리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겠지, 우리가 여러 측면에서 검토해도, 완전히 있는 것은 완전히 알려지는 것이지만, 전혀 있지 않음은 어떤 방식으로도 알려지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Ἱκανώτατα.
무엇보다도 충분히 이해할 겁니다.

Εἶεν· εἰ δὲ δή τι οὕτως ἔχει ὡς εἶναί τε καὶ μὴ εἶναι, οὐ μεταξὺ ἂν κέοιτο τοῦ εἰλικρινῶς ὄντος καὶ τοῦ αὖ μηδαμῇ ὄντος;
좋네: 그런데 만일 뭔가가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한 그런 상태라면, 순수하게 있는 것과 또 어떤 식으로도 있지 않은 것의 중간에 놓이지 않겠는가?

Μεταξύ.
중간에 놓입니다.

Οὐκοῦν ἐπὶ μὲν τῷ ὄντι γνῶσις ἦν, ἀγνωσία δ' ἐξ ἀνάγκης ἐπὶ μὴ ὄντι, ἐπὶ δὲ τῷ μεταξὺ τούτῳ μεταξύ τι καὶ ζητητέον ἀγνοίας τε καὶ ἐπιστήμης, εἴ τι τυγχάνει ὂν τοιοῦτον;
그렇다면 있는 것에는 앎이 있지만, 무지는 필연적으로 있지 않음에 있고, 그 중간인 이것에는 무지와 앎의 중간인 뭔가가 또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지 않은가, 만일 이런 뭔가가 있다면 말일세?

Πάνυ μὲν οὖν.
물론입니다.

[Stephanus page 477, section b, line 3] Ἆρ' οὖν λέγομέν τι δόξαν εἶναι;
그럼 혹시 우리는 어떤 사견이 있다고 말하는가?

Πῶς γὰρ οὔ;
어찌 아니겠습니까?

Πότερον ἄλλην δύναμιν ἐπιστήμης ἢ τὴν αὐτήν;
그건 앎과 다른 힘인가 아니면 같은 힘인가?

Ἄλλην.
다른 것이죠.

Ἐπ' ἄλλῳ ἄρα τέτακται δόξα καὶ ἐπ' ἄλλῳ ἐπιστήμη, κατὰ τὴν δύναμιν ἑκατέρα τὴν αὑτῆς.
그래서 어떤 것에는 사견이 그리고 또 다른 것에는 앎이 배치되었네, 그 자체에 속하는 각각의 능력에 따라서 말일세.

Οὕτω.
그렇습니다.

Οὐκοῦν ἐπιστήμη μὲν ἐπὶ τῷ ὄντι πέφυκε, γνῶναι ὡς ἔστι τὸ ὄν; - μᾶλλον δὲ ὧδέ μοι δοκεῖ πρότερον ἀναγκαῖον εἶναι διελέσθαι.
그러니 앎은 본성상 있는 것에 대한 것이지 않은가, 있는 것이 있다고 알도록 말일세? - 더 나아가 내게는 그보다 앞서 이런 식으로 나누는 일이 필연적이라고 여겨지네.

[Stephanus page 477, section b, line 13] Πῶς;
어떻게요?

Φήσομεν δυνάμεις εἶναι γένος τι τῶν ὄντων, αἷς δὴ καὶ ἡμεῖς δυνάμεθα ἃ δυνάμεθα καὶ ἄλλο πᾶν ὅτι περ ἂν δύνηται, οἷον λέγω ὄψιν καὶ ἀκοὴν τῶν δυνάμεων εἶναι, εἰ ἄρα μανθάνεις ὃ βούλομαι λέγειν τὸ εἶδος.
우리는 능력들이 있는 것들 중의 어떤 부류라고 말할 것이네, 더욱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과 또한 그것이 뭐가 되었든 가능한 그 모든 다른 일까지 바로 우리가 그 능력들로써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나는 시각과 청각이 그 능력들에 속한다고 말한다네, 혹시 자네가 내가 말하려 하는 그 형상(종류)을 이해한다면 말일세.

Ἀλλὰ μανθάνω, ἔφη.
이해합니다, 그가 말했네.

Ἄκουσον δὴ ὅ μοι φαίνεται περὶ αὐτῶν. δυνάμεως γὰρ ἐγὼ οὔτε τινὰ χρόαν ὁρῶ οὔτε σχῆμα οὔτε τι τῶν τοιούτων οἷον καὶ ἄλλων πολλῶν, πρὸς ἃ ἀποβλέπων ἔνια διορίζομαι παρ' ἐμαυτῷ τὰ μὲν ἄλλα εἶναι, τὰ δὲ ἄλλα· δυνάμεως [Stephanus page 477, section d, line 1] δ' εἰς ἐκεῖνο μόνον βλέπω ἐφ' ᾧ τε ἔστι καὶ ὃ ἀπεργάζεται, καὶ ταύτῃ ἑκάστην αὐτῶν δύναμιν ἐκάλεσα, καὶ τὴν μὲν ἐπὶ τῷ αὐτῷ τεταγμένην καὶ τὸ αὐτὸ ἀπεργαζομένην τὴν αὐτὴν καλῶ, τὴν δὲ ἐπὶ ἑτέρῳ καὶ ἕτερον ἀπεργαζομένην ἄλλην. τί δὲ σύ; πῶς ποιεῖς;
그럼 그것들과 관련해 내게 보이는 바를 들어 보게. 왜냐하면 나는 능력의 어떤 색도 형태도 이런 것들에 속하는 어떤 것도 보는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다른 많은 것들의 그런 것도 보는 것이 아닐세, 내가 그것들에 주목하여 몇몇 것들을 내 스스로 그 일부는 어떤 것들이고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이라고 정의하는데, 능력에 대해서는 저것 그러니까 그것이 그에 대한 것인 바의 것이자 그것이 해내는 것인 그것만을 보고, 또 같은 방식으로 그것들 각각을 능력이라 불렀으며, 같은 것에 대해 행하고 같은 것을 해내는 능력을 같은 능력으로 부르며, 다른 것에 대해 그리고 다른 것을 해내는 능력은 다른 것으로 부르니까. 그런데 자네는 어떤가? 자네는 어찌 하는가?

Οὕτως, ἔφη.
그런 식으로요, 그가 말했네.

Δεῦρο δὴ πάλιν, ἦν δ' ἐγώ, ὦ ἄριστε. ἐπιστήμην πότερον δύναμίν τινα φῂς εἶναι αὐτήν, ἢ εἰς τί γένος τιθεῖς;
내가 말했네, 그럼 다시 돌아오게, 훌륭한 친구. 자네는 앎을 두고 그것이 어떤 능력이라고 말하겠나, 아니면 어떤 부류에 두겠는가?

Εἰς τοῦτο, ἔφη, πασῶν γε δυνάμεων ἐρρωμενεστάτην.
이런 것으로 둡니다, 그가 말했네, 모든 능력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능력으로요.

Τί δέ, δόξαν εἰς δύναμιν ἢ εἰς ἄλλο εἶδος οἴσομεν;
그럼 어떤가, 사견을 능력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할까 아니면 다른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할까?

[Stephanus page 477, section e, line 2] Οὐδαμῶς, ἔφη· ᾧ γὰρ δοξάζειν δυνάμεθα, οὐκ ἄλλο τι ἢ δόξα ἐστίν.
결코 다른 종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네: 왜냐하면 그로써 우리가 사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사견이니까요.

Ἀλλὰ μὲν δὴ ὀλίγον γε πρότερον ὡμολόγεις μὴ τὸ αὐτὸ εἶναι ἐπιστήμην τε καὶ δόξαν.
허나 정말 조금 전에 자네 앎과 사견이 같은 것은 아니라고 동의하였지.

Πῶς γὰρ ἄν, ἔφη, τό γε ἀναμάρτητον τῷ μὴ ἀναμαρτήτῳ ταὐτόν τις νοῦν ἔχων τιθείη;
그가 말했네, 그야 어떻게 오류 없는 것을 오류 없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누가 제정신으로 그리 두겠습니까?

Καλῶς, ἦν δ' ἐγώ, καὶ δῆλον ὅτι ἕτερον ἐπιστήμης δόξα ὁμολογεῖται ἡμῖν.
내가 말했네, 훌륭하네, 그리고 앎과 사견이 다르다고 우리에게 동의된 건 분명하지.

Ἕτερον.
다른 것이죠.

Ἐφ' ἑτέρῳ ἄρα ἕτερόν τι δυναμένη ἑκατέρα αὐτῶν [Stephanus page 478, section a, line 4] πέφυκεν;
그럼 그 둘 각각이 다른 뭔가를 할 수 있기에 본성상 다른 것에 관계하는가?

Ἀνάγκη.
필연적으로요.

Ἐπιστήμη μέν γέ που ἐπὶ τῷ ὄντι, τὸ ὂν γνῶναι ὡς ἔχει;
적어도 앎은 아마 있는 것에 관련하고, 있는 것을 그러하다고 아는 것이지?

Ναί.
네.

Δόξα δέ, φαμέν, δοξάζειν;
그런데 의견은, 우리가 의견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지?

Ναί.
네.

Ἦ ταὐτὸν ὅπερ ἐπιστήμη γιγνώσκει; καὶ ἔσται γνωστόν τε καὶ δοξαστὸν τὸ αὐτό; ἢ ἀδύνατον;
앎이 아는 바로 그것과 동일한 것인가 아닌가? 동일한 것이 알려질 수 있는 것이자 의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게 되겠는가? 아니면 이는 불가능한 일인가?

Ἀδύνατον, ἔφη, ἐκ τῶν ὡμολογημένων· εἴπερ ἐπ' ἄλλῳ ἄλλη δύναμις πέφυκεν, δυνάμεις δὲ ἀμφότεραί ἐστον, δόξα τε [Stephanus page 478, section b, line 1] καὶ ἐπιστήμη, ἄλλη δὲ ἑκατέρα, ὥς φαμεν, ἐκ τούτων δὴ οὐκ ἐγχωρεῖ γνωστὸν καὶ δοξαστὸν ταὐτὸν εἶναι.
그가 말했네, 불가능한 일입니다, 동의된 것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만일 정말로 다른 것에는 천상 다른 능력이 관련한다면, 그 양자의 능력들, 즉 의견과 앎은, 각기 다른 능력이고, 우리가 말했듯, 그래서 이런 일들을 통하여 동일한 것이 알려지는 것이자 의견의 대상이라는 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Οὐκοῦν εἰ τὸ ὂν γνωστόν, ἄλλο τι ἂν δοξαστὸν ἢ τὸ ὂν εἴη;
그럼 만일 있는 것이 앎의 대상이라면,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의견의 대상이겠는가?

Ἄλλο.
다른 어떤 것이겠지요.

Ἆρ' οὖν τὸ μὴ ὂν δοξάζει; ἢ ἀδύνατον καὶ δοξάσαι τό γε μὴ ὄν; ἐννόει δέ. οὐχ ὁ δοξάζων ἐπὶ τὶ φέρει τὴν δόξαν; ἢ οἷόν τε αὖ δοξάζειν μέν, δοξάζειν δὲ μηδέν;
그렇다면 혹시 있지 않다면 그것에 대해 자네가 의견을 가지는가? 아니면 바로 그 있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의견의 대상이 되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게. 의견을 가지는 자는 무언가를 향해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가? 혹은 이번엔 의견을 가지면서도, 반면에 아무것도 아닌 의견을 가질 수 있는가?

Ἀδύνατον.
불가능합니다.

Ἀλλ' ἕν γέ τι δοξάζει ὁ δοξάζων;
허나 의견을 가지는 자는 바로 어떤 한 가지의 것을 의견의 대상으로 삼는가?

[Stephanus page 478, section b, line 11]Ναί.
네.

Ἀλλὰ μὴν μὴ ὄν γε οὐχ ἕν τι ἀλλὰ μηδὲν ὀρθότατ' ἂν προσαγορεύοιτο;
그러면 실로 다름 아닌 있지 않음은 어떤 한 가지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무엇보다 옳게 불리는 일이겠지?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Μὴ ὄντι μὴν ἄγνοιαν ἐξ ἀνάγκης ἀπέδομεν, ὄντι δὲ γνῶσιν;
실로 있지 않음에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무지를 내어주고, 있음에는 앎을 내어준 것인가?

Ὀρθῶς, ἔφη.
맞습니다, 그가 말했네.

Οὐκ ἄρα ὂν οὐδὲ μὴ ὂν δοξάζει;
그런데 혹시 자네 있음도 있지 않음도 그에 대해 의견을 가지지 않는가?

Οὐ γάρ.
갖지 않으니까요.

Οὔτε ἄρα ἄγνοια οὔτε γνῶσις δόξα ἂν εἴη;
그럼 의견은 무지도 앎도 아니겠군?

[Stephanus page 478, section c, line 9] Οὐκ ἔοικεν.
아닌 것 같습니다.

Ἄρ' οὖν ἐκτὸς τούτων ἐστίν, ὑπερβαίνουσα ἢ γνῶσιν σαφηνείᾳ ἢ ἄγνοιαν ἀσαφείᾳ;
그렇다면 혹시 이런 것들 외에, 확실함으로는 앎을 불확실함으로는 무지를 능가하는 것인가?

Οὐδέτερα.
어느 쪽도 아닙니다.

Ἀλλ' ἆρα, ἦν δ' ἐγώ, γνώσεως μέν σοι φαίνεται δόξα σκοτωδέστερον, ἀγνοίας δὲ φανότερον;
그리고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혹시 자네에게 의견은 앎보다는 더 불분명한 것으로, 그러나 무지보다는 선명한 것으로 보이는가?

Καὶ πολύ γε, ἔφη.
네, 무척이나요, 그가 말했네.

Ἐντὸς δ' ἀμφοῖν κεῖται;
그러나 그 둘 안에 놓이고?

Ναί.
네.

Μεταξὺ ἄρα ἂν εἴη τούτοιν δόξα.
그럼 의견은 이 둘의 중간에 있겠군.

[Stephanus page 478, section d, line 4] Κομιδῇ μὲν οὖν.
정확히 그렇습니다.

Οὐκοῦν ἔφαμεν ἐν τοῖς πρόσθεν, εἴ τι φανείη οἷον ἅμα ὄν τε καὶ μὴ ὄν, τὸ τοιοῦτον μεταξὺ κεῖσθαι τοῦ εἰλικρινῶς ὄντος τε καὶ τοῦ πάντως μὴ ὄντος, καὶ οὔτε ἐπιστήμην οὔτε ἄγνοιαν ἐπ' αὐτῷ ἔσεσθαι, ἀλλὰ τὸ μεταξὺ αὖ φανὲν  ἀγνοίας καὶ ἐπιστήμης;
그렇다면 우리는 앞서 논의들 속에서, 만일 무언가가 말하자면 동시에 있으면서 없는 것으로 나타날 때, 이러한 것이 순수하게 있는 것과 전적으로 있지 않은 것 사이에 놓인다고, 그리고 앎도 무지도 그것에 관련하지 않을 것이나, 이 경우에는 무지와 앎의 중간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관련할 것이라 말하지 않았는가?

Ὀρθῶς.
맞습니다.

Νῦν δέ γε πέφανται μεταξὺ τούτοιν ὃ δὴ καλοῦμεν δόξαν;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실로 의견이라 부를 것이 이러한 것들의 중간에 나타났지?

Πέφανται.
그리 나타났습니다.

Ἐκεῖνο δὴ λείποιτ' ἂν ἡμῖν εὑρεῖν, ὡς ἔοικε, τὸ ἀμφοτέρων [Stephanus page 478, section e, line 2] μετέχον, τοῦ εἶναί τε καὶ μὴ εἶναι, καὶ οὐδέτερον εἰλικρινὲς ὀρθῶς ἂν προσαγορευόμενον, ἵνα, ἐὰν φανῇ, δοξαστὸν αὐτὸ εἶναι ἐν δίκῃ προσαγορεύωμεν, τοῖς μὲν ἄκροις τὰ ἄκρα, τοῖς δὲ μεταξὺ τὰ μεταξὺ ἀποδιδόντες. ἢ οὐχ οὕτως;
그럼 우리가 찾을 것으로 저러한 것이 남은 듯하네, 그 양자에 참여하는 것, 즉 있음과 있지 않음에 참여하는 것이자, 둘 중 어느 쪽으로도 순수하게 그러한 것으로 불려서는 옳게 불리지 못할 것 말이네, 만일 그런 것이 나타난다면, 그것을 의견의 대상이라고 적법하게 우리가 부를 수 있도록 말이지, 극단의 것들에는 극단의 것들을, 중간 것들에는 중간 것들을 분배하면서 말일세.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Οὕτω.
그렇습니다.

Τούτων δὴ ὑποκειμένων λεγέτω μοι, φήσω, καὶ ἀποκρινέσθω ὁ χρηστὸς ὃς αὐτὸ μὲν καλὸν καὶ ἰδέαν τινὰ αὐτοῦ κάλλους μηδεμίαν ἡγεῖται ἀεὶ μὲν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ἔχουσαν, πολλὰ δὲ τὰ καλὰ νομίζει, ἐκεῖνος ὁ φιλοθεάμων καὶ οὐδαμῇ ἀνεχόμενος ἄν τις ἓν τὸ καλὸν φῇ εἶναι καὶ [Stephanus page 479, section a, line 5] δίκαιον καὶ τἆλλα οὕτω. “Τούτων γὰρ δή, ὦ ἄριστε, φήσομεν, τῶν πολλῶν καλῶν μῶν τι ἔστιν ὃ οὐκ αἰσχρὸν φανήσεται; καὶ τῶν δικαίων, ὃ οὐκ ἄδικον; καὶ τῶν ὁσίων, ὃ οὐκ ἀνόσιον;”
내가 말하겠네, 이런 것들이 전제되었으니 그 정직한 자로 하여금 내게 말하고 또 대답하도록 하게, 아름다움 자체와 그것의 어떤 이데아, 언제나 그것들 자체로 동일한 상태인 그것들 어느 하나도 믿지 않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여럿이라 생각하는 단순한 자, 구경하기를 좋아하고 누구든 아름다움과 정의와 그런 다른 것들이 하나라고 말하면 견디지를 못하는 저 사람으로 하여금 말이지. 우리는 말할 것이네. "실로 이러한 것들, 대단한 분, 그 많은 아름다운 것들 중 추해 보이지 않을 무언가는 물론 없겠지요? 정의로운 것들 중에서도, 부정의해 보이지 않을 뭔가는 없겠죠? 경건한 것들 중에서도, 불경해 보이지 않을 뭔가는 없겠죠?"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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