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헨스키에 따르면 러셀을 위시한 실증주의는 철학을 명확히 규명되기 이전의 대상들 일반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의 대상들이 규명되고 그로부터 많은 분과학문들이 독립되었음에도 여전히 철학의 문제들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였다. 오히려 독립된 학문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 학문들에 대응하는 철학의 종류도 함께 늘어났다. <또 만일 독립되어 나온 학문들로 철학의 문제들을 모두 포괄하여 다루기에 충분하고, 그러므로 철학은 없다고 한다면 / 철학의 대상이 규명되기 이전의 대상이고 규정되지 않은 대상은 아무런 대상도 아니기에 따라서 철학 자체가 없다고 한다면> 그럼에도 '철학이 없다'라는 주장과 그에 따르는 논증은 다른 어떤 분과학문도 아닌 철학 내에서만 다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철학은 미규정된 대상들의 총체를 다루는 것만이 아닌 다른 일도 수행한다.

  또 다른 입장은 실존철학으로 대표되는 입장이다. 보헨스키에 따르면 이들의 견해로 철학은 이성과 합리를 넘어선 그 한계에 자리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들은 문학이나 음악 등 예술의 형식을 차용하기도 한다. 곧 예술적 상상력, 창의력을 통해서만 이성과 합리, 지성의 인식을 넘어서 자리하는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성에 속하는 문제들은 이미 독립되어 나온 분과학문들에 의해 모두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따르자면 앞서 실증주의에 대한 보헨스키의 해석에 기초한 철학에 대한 이해와 달리 철학은 축소되거나 해소되지 않고 언제까지나 남는다. 그러나 실존주의에 대한 반대자로서 비트겐슈타인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언급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아 철학이 설령 문학 및 예술의 방법론을 차용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수단이었고 본질적으로 실제 철학자들이 수행해온 일은 모두 이성적, 학문적 활동이었다고 보헨스키는 주장한다. 플라톤도, 아우구스티누스도, 사르트르 또한 문학적인 작품을 내놓았지만 그것은 모두 사상전달의 매개체였다.

  그렇다면 철학 고유의 본래적 영역은 무엇인가? 그는 인식, 가치, 인간, 언어의 네 가지 문제들을 열거한다. 이 외에도 철학의 중심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있음을 밝히면서, 보헨스키는 각 입장들 상호의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태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직 특정한 하나의 대상만이 철학 본래의 대상이라는 점이 입증된 일은 없다. 세계에는 모든 분야에 공통되면서도 아직까지 미결로 남은 숱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문제 자체가 특정 영역에 제한되지 않으므로 철학은 일종의 보편학문이다. 더불어 그 문제가 여러 영역들에 공통되므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채택함에 있어서 철학에 제한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도 철학은 보편학이다. 또한 다른 모든 분과학문들은 전제를 가지지만 철학은 전제를 문제삼는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근원학, 기초학이다. 이에 더하여 보편학으로서의 철학은 여러 학문들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지만, 존재론과 가치론(윤리학, 도덕철학)에 있어서는 다른 학문들과 구분된다.

 → 그러나 문학 및 예술의 방법론이 철학에 있어서 본질적이지 않고,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영역이 미결된 근거문제들, 한계문제들에 있다면 그것은 실증주의의 철학 이해와 어떤 점에서 구분되는가? 실증주의에서도 미결된 근거문제들이 철학의 문제들이라 여긴다. 그리고 근거가 정립되고 대상이 규정되면 이를 분석하는 독립된 학문이 발생한다. 근거문제로 소급해 나아갈 수는 있을지라도 이미 정립되고 규정된 대상을 다루는 일은 더 이상 철학이 떠맡지 않는다. 더구나 실증주의의 철학에 대한 이해에 따랐을 경우 정말로 철학은 축소되어 가는가? 반면에, 존재론과 가치론은 엄밀히 말하자면 그 구체적 대상이라 할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존재 일반', '가치 그 자체', 이러한 것이 과연 '규정된' 특정한 대상이라 할 수 있는가?

      그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철학이란 '이성적으로 전제/근거를 소급해 나아가는 학문' 정도가 될 듯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여전히 실존주의의 입장이 유효한 부분이 있다. 인식의 한계, 혹은 그 너머 어떤 영역 혹은 대상에 대해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인식'하려는 시도는 과연 정당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해 왔다는 것은 답이 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가? 그것은 여기에서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래도 이렇든 저렇든 보편학, 근본학, 근원학으로서 철학을 바라보는 그러한 문화적 배경에 대한 부러움을 지울 수는 없구만. 씁.

-蟲-

Anderseits unterscheidet sich die Philosophie von den anderen Wissenschaften durch ihren Gesichtspunkt. Wenn sie nämlich einen Gegenstand in Betracht zieht, sieht sie ihn immer und ausschließlich sozusagen vom Standpunkt der Grenzen, der grundlegenden Aspekte. In dem Sinne ist die Philosophie eine Grundlagenwissenschaft. Dort, wo andere Wissenschaften stehenbleiben, wo sie, ohne weiter zu fragen, Voraussetzungen annehmen, fängt der Philosoph erst an zu fragen. Die Wissenschaften erkennen - er fragt, was ist das Erkennen; die andern stellen Gesetze auf - er stellt sich die Frage, was ein Gesetz sei. Der Alltagsmensch und der Politiker sprechen vom Sinn und von der Zweckmäßigkeit - der Philosoph aber fragt, was man unter Sinn und Zweck eigentlich verstehen soll. Somit ist auch die Philosophie eine radikale Wissenschaft - in dem Sinne, daß sie auf die Wurzeln geht, und tiefer als irgendeine andere; daß sie dort, wo die andern zufrieden sind, weiterfragt und weiterforschen will.
다른 한편 철학은 그 관점을 통해 다른 학문들과 구분된다. 철학이 말하자면 하나의 대상을 고려할 때, 철학은 언제나 오직(배타적으로) 말하자면 한계들, 근본전제의 측면이라는 입장에서만 그 대상을 바라본다. 그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기초학문이다. 그 곳, 다른 분과학문들이 멈춰 서 있는 곳, 그 학문들이 계속해서 묻지 않고, 전제들을 받아들이는 곳에서, 철학자는 처음으로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다. 학문들은 인식하고 - 철학자는 인식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다른 이들은 법칙을 세우고 - 철학자는 법칙이 무엇일지 자문한다. 일상인과 정치가는 의미와 실현가능성에 대해 말하지만 - 철학자는 의미와 목적 아래에서 본래적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따라서 또한 철학은 - 철학이 원천들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어떤 다른 학문들보다도 더욱 깊이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철학이 다른 학문들이 만족하는 곳에서 더 멀리까지 묻고 또 더 멀리 탐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원적(근본적/급진적)) 학문이다.

Wo die eigentliche Grenze zwischen einer Spezialwissenschaft und der Philosophie liegt, ist oft nicht leicht zu sagen. So ist zum Beispiel die im Laufe unseres Jahrhunderts sich so schön entwickelnde Grundlagenforschung in der Mathematik ganz sicher eine philosophische Forschung, aber gleichzeitig ist sie mit den mathematischen Untersuchungen eng verbunden. Es gibt jedoch einige Gebiete, in welchen die Grenze klar ist. Dies ist einerseits die Ontologie, die Disziplin, welche nicht von diesem oder jenem, sondern von den allgemeinsten Sachen, wie dem Ding, der Existenz, der Eigenschaft und ähnlichem, handelt. Anderseits gehört hierhin das Studium der Werte als solcher - nicht wie sie sich in der Entwicklung der Gesellschaft zeigen, sondern in sich selbst. In diesen beiden Gebieten grenzt die Philosophie einfach an nichts - es gibt überhaupt keine Wissenschaft außer ihr, die sich mit diesen Gegenständen befaßt oder befassen kann. Und die Ontologie wird dann in den Forschungen auf anderen Gebieten vorausgesetzt, womit schon ein Unterschied im Hinblick auf andere Wissenschaften, die von der Ontologie nichts wissen können, zustande kommt.
특수학문과 철학 사이의 본래적 경계가 어디에 자리하는지는 쉽사리 말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의 세기(20세기)에는 수학에 있어서 그렇게나 훌륭히 전개되는 기초연구는 전적으로 확실히 철학적 연구이지만, 동시에 그 기초연구는 수학적 탐구들과 밀접하게 결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한계가 분명한 몇몇 영역들이 있다. 이것은 한 편으로 존재론, 이러 저러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물, 현존, 성질 등과 같은 보편 사태들에 대해에 대해 논하는 과목이다. 다른 한편 가치들에 대한 - 가치들이 사회의 전개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가 아니라, 그 자체에 있어서 어떠한지에 대한 - 학문연구가 그러한 것으로서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양자의 영역들에 있어서 철학은 아무것에도 결코 인접해 있지 않다 - 일반적으로, 이러한 대상들에 종사하거나 관련을 맺을 수 있는 철학 외의 어떠한 학문도 있지 않다. 그리고 그리하여 존재론은 다른 영역들에 대한 연구들에 있어서 전제되고, 그로써 이미 존재론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다른 학문들을 고려함에 있어서 차이가 성립한다..

So wurde die Philosophie von den meisten großen Philosophen aller Zeiten gesehen. Eine Wissenschaft, also keine Dichtung, keine Musik, sondern ein ernstes, nüchternes Forschen. Eine Universalwissenschaft in dem Sinne, daß sie sich keinem Gebiete verschließt und jede Methode benützt, die zugänglich ist. Eine Wissenschaft der Grenz- und Grundlagenproblem - somit auch eine Radikalwissenschaft, die sich mit den Voraussetzungen der anderen Disziplinen nicht zufrieden erklärt, sondern weiter bis zu den Wurzeln forschen will.
그래서 철학은 모든 시대의 대다수의 위대한 철학자들로부터 그렇게 간주되었다. 철학은 학문이며, 그러므로 어떠한 문학도, 어떠한 음악도 아니고, 진지한, 객관적인 탐구이다. 철학은 그 어떠한 영역에도 무관심하지 않고 각각의 가용한 방법을 사용하다는 의미에서 보편학이다. 철학은 한계문제와 근본문제에 대한 학문 - 그러므로 또한, 다른 과목들의 전제들을 가지고 만족을 표하지 않고, 오히려 더 멀리 원천들에까지 탐구해 나아가고자 하는 근원(급진)학이다.

Man muß auch sagen, daß sie eine furchtbar schwierige Wissenschaft ist. Wo fast alles immer in Frage gestellt wird, wo keine überlieferten Voraussetzungen und Methoden gelten, wo man die sehr komplizierten Probleme der Ontologie immer vor Augen halten muß, kann die Arbeit nicht leicht sein. kein Wunder, daß die Meinungen in der Philosophie so sehr auseinandergehen. Ein großer Denker und kein Skeptiker - im Gegenteil, einer der größten Systematiker der Geschichte -, der heilige Thomas von Aquin, hat einmal gesagt, daß nur wenige Menschen und erst nach langer Zeit und nicht einmal ohne Zumischung von Irrtümern die Grundfragen der Philosophie lösen können.
또한 사람들은 철학이 무섭도록 어려운 학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언제나 의문시되는 곳, 그 어떠한 계승된 전제들과 방법들도 유효하지 않은 곳,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론의 매우 복잡한 문제들을 직시해야만 하는 곳에서, 그 과업은 쉬울 수가 없다. 철학에 있어서 그렇게나 심하게 의견들이 갈린다는 것은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위대한 사상가이자 전혀 회의주의자가 아닌 - 반대로, 역사 속 가장 위대한 체계론자 중 한 사람인 - 성 토마스 아퀴나스(아퀸의 성 토마스)는 일찍이, 단지 소수의 인간들만이 또 우선 긴 시간 뒤에 오류의 뒤섞임이 하나도 없지는 않지만 철학의 근본물음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Aber der Mensch ist schon zum Philosophieren bestimmt, ob er es will oder nicht. Ich darf Ihnen aber abschließend noch eines sagen. Trotz der ungeheuren Schwierigkeiten, die es mit sich bringt, ist das Philosophieren eine der schönsten und edelsten Sachen, die es im menschlichen Leben geben kann. Wer auch nur einmal mit einem echten Philosophen in Berührung gekommen ist, wird sich immer von ihr angezogen fühlen.
그러나 인간은 바라든 그렇지 않든 이미 철학하도록 규정된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여전히 확정적인 한 가지는 말하고자 한다. 그 필연적으로 따르는 엄청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철학함은 인간 삶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일들 중 하나이다. 단 한 번이라도 진정한 철학자와 교제하게 되는 사람은, 언제나 그에게 매혹됨을 느낄 것이다.

-蟲-
Ist es aber so, dann drängt sich wieder die Frage auf: Eine Wissenschaft von was? Die Körperwelt wird durch die Physik, die Welt des Lebens durch die Biologie, jene des Bewußtseins durch die Psychologie, die Gesellschaft durch die Soziologie erforscht. Was bleibt für Philosophie als Wissenschaft? Was ist ihr Gebiet?
그러나 그러한 경우, 그 물음이 다시금 떠오른다: 무엇에 대한 학문인가? 물질세계는 물리학을 통해서, 생명의 세계는 생물학을 통해서, 의식존재의 세계는 심리학을 통해서, 사회는 사회학을 통해서 탐구된다. 학문으로서 철학에 대해 무엇이 남는가? 철학의 영역은 무엇인가?

Darauf erhalten wir seitens verschiedener philosophischer Schulen sehr verschiedene Antworten. Ich werde einige der wichtigsten unter ihnen aufzählen.
그에 대해 우리는 상이한 철학적 학파들에게서 매우 다양한 답변들을 받는다. 나는 그 답변들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열거할 것이다.

Erste Antwort: Erkenntnislehre. Andere Wissenschaften erkennen: die Philosophie erforscht die Möglichkeit des Erkennes selbst - die Voraussetzungen und die Grenzen der möglichen Erkenntnis. So Immanuel Kant und viele unter seinen Nachfolgern.
첫 번째 응답: 인식론. 다른 분과학문들은 인식한다: 그러나 철학은 인식 자체의 가능성을 - 가능한 인식의 전제조건들과 한계들을 -  탐구한다. 임마누엘 칸트와 그의 여러 계승자들이 그러하다.

Zweite Antwort: die Werte. Jede andere Wissenschaft untersucht das, was ist; die Philosophie erforscht dagegen, was sein soll. Diese Antwort haben zum Beispiel die Anhänger der sogenannten Süddeutschen Schule und zahlreiche zeitgenössische französische Philosophen gegeben.
두 번째 응답: 가치. 각각의 다른 분과학문은 있는 것(존재하는 것, 존재자)을 연구한다; 철학은 그와 반대로, 있어야 할 것을 탐구한다. 이러한 응답은 예를 들어 소위 남부독일학파의 추종자들과 수 많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제시해 왔다.

Dritte Antwort: der Mensch - und zwar als Voraussetzung und Grundlegung alles anderen. Nach den Verteretern dieser Meinung ist nämlich in der Wirklichkeit alles in irgendeiner Weise auf den Menschen bezogen. Diese Beziehung wird seitens der Naturwissenschaften und auch seitens der Geisteswissenschaften außer acht gelassen. Die Philosophie hat sie, und damit den Menschen selbst, unter diesem Gesichtspunkt zu eigenem Gegenstand. So lehren viele Existenzphilosophen.
세 번째 응답: 인간 - 보다 정확히는 다른 모든 것의 전제조건과 근본원리로서 인간. 이러한 견해의 대표자들에 따르면 말하자면 실제에 있어서 모든 것은 모종의 방식으로 인간들에 관련한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과학들과 또한 정신과학들에 있어서 고려되지 않는다. 그 철학은 이 관계를 가지고, 그로써 인간 자체를, 이러한 관점하에서 고유한 대상으로 가진다. 많은 실존철학자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Vierte Antwort: Die Sprache: "Es gibt keine philosophischen Sätze, sondern nur Klarlegung von Sätzen", sagt Wittgenstein. Die Philosophie untersucht die Sprache der anderen Wissenschaften vom Standpunkt ihrer Struktur aus. Das ist Lehre Ludwig Wittgensteins und der meisten logischen Positivisten der Gegenwart.
네 번째 응답: 언어: "아무런 철학적 명제도 없고, 단지 명제들에 대한 해명만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말한다. 그 철학자는 다른 분과학문들의 언어를 그 학문들의 구조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과 현대의 대다수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학설이다.

Dies sind nur einige unter noch mehreren Ansichten derselben Art. Jede von ihnen hat ihre Argumente und wird in ziemlich überzeugender Weise verteidigt. Jeder der Vertreter dieser Ansichten sagt von den Anhängern der anderen, sie seien überhaupt keine Philosophen. Man soll nur hören, mit welch tiefer Überzeugung solche Urteile gefällt werden. Die logischen Positivisten pflegen zum Beispiel alle Philosophen, die mit ihnen nicht einverstanden sind, als Metaphysiker zu brandmarken. Metaphysik ist aber nach ihnen Unsinn im strengsten Sinne des Wortes. Ein Metaphysiker produziert Laute, sagt aber gar nichts. Ebenso die Kantianer: für sie sind alle, die anderer Meinung sind als Kant, Metaphysiker; das bedeutet freilich bei ihnen nicht, daß sie Unsinn sagen, sondern daß sie überholt und unphilosophisch sind. Und über die souveräne Verachtung der Existenzphilosophen allen anderen gegenüber brauche ich gar nicht zu sprechen. Sie ist allgemein bekannt.
이것은 단지 같은 종류의 더 많은 견해들 중 일부일 뿐이다. 그 견해들의 각각은 그 견해의 논증들을 가지고 상당히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지지된다. 이러한 견해들의 옹호자들 각자는 다른 견해들의 추종자들에 대해 그들이 대개 아무런 철학자들도 아니리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다만, 얼마나 깊이 있는 논증을 가지고 그러한 판단들이 받아들여지는지를 들어야 할 따름이다. 예를 들어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그들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철학자들을 형이상학자로 낙인을 찍곤 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그들에 따르면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무의미하다. 형이상학자는 목소리를 만들어내지만, 전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칸트주의자들도 똑같다: 그들에게 있어서 칸트와 다른 견해를 가진 모든 자들은 형이상학자들이다; 그것은 확실히 그들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자들이 무의미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비철학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존철학자들의 다른 모든 철학자들에 대한 독단적인 멸시에 대해서는 내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 멸시는 널리 잘 알려져 있다.

Nun, um Ihnen meine persönliche bescheidene Meinung zu formulieren, empfinde ich angesichts dieses festen Glaubens an die eine oder andere Auffassung der Philosophie ein gewisses Unbehagen. Es scheint mir sehr vernünftig zu sein, wenn man behauptet, der Philosoph solle sich mit der Erkenntnis, mit den Werten, mit dem Meschen und mit seiner Sprache beschäftigen. Aber warum nur damit? Hat irgendein Philosoph bewiesen, daß es keine anderen Gegenstände des Philosophierens gibt? Wer das behauptet, dem muß ich, wie Mephistopheles bei Goethe, zuerst Collegium Logicum raten, damit er einmal lerne, was ein Beweis eigentlich ist. Nichts solches wurde je bewiesen. Und sehen wir uns in der Welt um, dann scheint mir diese voll von ungelösten Fragen zu sein - von wichtigen Fragen, und zwar solchen, die zu allen genannten Gebieten gehören, aber von einer Spezialwissenschaft weder behandelt sind noch behandelt werden können. Beispiel einer solchen Frage ist das Problem des Gesetzes. Ein mathematisches Problem ist es sicher nicht; der Mathematiker kann seine Gesetze ruhig formulieren und erforschen, ohne sich je diese Frage zu stellen. Der Sprachwissenschaft gehört sie auch nicht; denn es handelt sich nicht um die Sprache, sondern um etwas in der Welt oder wenigstens im Gedanken. Das mathematische Gesetz ist aber andererseits auch kein Wert, es ist nicht etwas, was sein soll, sondern was ist, gehört also gar nicht in die Werttheorie. Will man die Philosophie auf irgendeine Spezialwissenschaft einschränken oder auf eine der Disziplinen, die ich aufgezählt habe, dann kann man dieses Problem überhaupt nicht erörtern, es findet keinen Platz. Und doch ist es ein echtes und wichtiges Problem.
이제, 당신들에게 나의 개인적인 겸손한 의견을 명표하기 위해, 나는 철학에 대한 이러저러한 견해들에 있어서 이러한 확고한 신념들에 마주하여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 나에게는, 사람들이 철학자는 인식, 가치들, 인간 그리고 그의 언어에 몰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매우 이성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 오직 그것에만(몰두해야 하는가)? 어떤 철학이, 철학함의 다른 어떠한 대상들도 없다는 것을 입증하였는가? 그것을 주장하는 자에게, 나는 괴테에게 있어서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이, 일단 그가 증명이란 본래 무엇인지를 배우도록, 제일 먼저 논리학 강의를 권해야만 한다. 그러한 아무것도 지금까지 입증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돌아보고, 그리고나서 나에게 이 세계가 미결의 물음들로 - 중대한 물음들로 - , 더욱이, 분야들로 불리는 모든 곳들에 속하는 그러한 물음들, 그러나 하나의 특수한 학문에서 다루어지지도 다루어질 수도 없는 물음들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물음의 일례는 법칙의 문제이다. 그것은 확실히 수학적 문제가 아니다; 수학자는, 이러한 물음을 떠올리지 않고서 그 문제의 법칙을 침착하게 정식화하고 탐구할 수 있다. 그 물음은 언어철학에 속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문제는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 내의, 아니면 적어도 사유 내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적 법칙은 다른 한편 아무런 가치도 아니고, 있어야(~이어야) 할 어떤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러므로 전혀 가치론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철학을 내가 열거하였던 어떤 특수학문 또는 과목에 제한하고자 하는데, 그런 다음에는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 일반을 논의할 수 없고, 그 문제는 아무런 자리도 찾지 못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것은 진정한 그리고 중대한 문제이다.

Es sieht also so aus, als ob man die Philosophie weder mit den Spezialwissenschaften gleichsetzen noch auf ein besonderes Gebiet einschränken sollte. Sie ist in gewissem Sinne eine Universalwissenschaft, ihr Gebiet ist nicht wie jenes anderer Disziplinen auf etwas Beschränktes, Bestimmtes eingeschränkt.
그러므로 사람들이 철학을 특수학문들과 동일시하거나 하나의 특수한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아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편학이고, 그 보편학의 영역은 다른 과목들의 저 영역처럼 어떤 제한된 것, 규정된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Ist es aber so, dann kann es vorkommen und kommt wirklich vor, daß die Philosophie sich mit denselben Gegenständen befaßt, mit welchen auch andere Wissenschaften zu tun haben. Worin unterscheidet sich dann Philosophie von dieser Wissenschaft? Die Antwort auf diese Frage lautet, daß sie sich ebensowohl durch ihre Methode wie auch durch den Gesichtspunkt unterscheidet. Durch ihre Methode - weil der Philosoph sich den Gebrauch keiner unter den vielen Methoden der Erkenntnis verbietet. Er ist zum Beispiel nicht wie ein Physiker verpflichtet, alles auf die sinnlich beobachtbaren Phänomene zurückzuführen, das heißt, sich auf die empirisch-reduktive Methode zu beschränken; er kann auch die Einsicht in das Gegebene gebrauchen und anderes mehr.
그러나 그렇다면, 철학이 다른 학문들도 관계한 그 동일한 대상들과 관련 맺는 일이 있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있다. 그러면 철학은 이러한 분과학문과 어떤 점에서 구분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철학이 그 방법을 통해서와 마찬가지로 관점을 통해서도 구분된다는 것이다. 철학의 방법을 통해서 구분된다는 것은 - 철학자는 인식의 여러 방법들 중 어떤 것의 사용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예를 들어 물리학자처럼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관찰가능한 현상들에 원인을 두도록 의무를 지지 않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 경험-귀납적 방법에 제한될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소여에 대해서도 그 통찰을 사용할 수 있고 또 다른 많은 것에 사용할 수 있다.

-蟲-
  Es bleibt also dabei, daß man der ersten Meinung nur schwerlich rechtgeben kann. Die Philosophie muß etwas anderes sein als ein Sammelbecken für unreife Probleme. Sie hat sicher hie und da auch diese Funktion ausgeübt, aber sie ist noch etwas mehr als das.
  또한 여전히, 사람들은 그 첫 번째 견해에 대해서만이라도 거의 인정할 수 없다. 철학은 완결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한 저수조와는 다른 어떤 것임에 틀림없다. 철학은 그럼에도 확실히 때로 이러한 기능을 수행해 왔지만, 여전히 철학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Die zweite Meinung behauptet dagegen, daß die Philosophie nie verschwinden wird, auch wenn sich alle möglichen Wissenschaften von ihr loslösen - denn sie ist nach dieser Meinung keine Wissenschaft. Sie erforscht, wie man sagt, das Überrationale - das Unbegreifbare, das über dem Verstand oder wenigstens an seiner Grenze Liegende. Sie hat also mit der Wissenschaft, mit dem Verstand nur wenig Gemeinsames. Ihr Gebiet liegt außerhalb des Rationalen. Philosophieren heißt demnach nicht mit der Vernunft nachforschen, sondern auf irgendeine andere Weise, mehr oder weniger "unvernünftig". Das ist eine heute weit verbreitete Meinung, besonders auf dem europäischen Kontinent - und sie wird unter anderen durch gewisse sogenannte Existenzphilosophen vertreten. Ein ganz extremer Vertreter dieser Richtung ist sicher Professor Jean Wahl, der führende Pariser Philosoph, für welchen es im Grunde keinen wesentlichen Unterschied zwischen Philosophie und Dichtung gibt. Aber auch der bekannte Existenzphiosoph Karl Jaspers dürfte in dieser Beziehung Jean Wahl nahestehen. In der Deutung von Jeanne Hersch, der Genfer Philosophin, ist Philosophie ein Denken an der Grenze zwischen Wissenschaft und Musik; Gabriel Marcel, ein anderer Existenzphilosoph, hat in einem philosophischen Buch direkt ein Stück eigener Musik abdrucken lassen - ohne von den Romanen zu sprechen, die einige heutige Philosophen zu schreiben pflegen.
  두 번째 견해는 그와 반대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철학은, 설령 모든 가능한 분과학문들이 철학으로부터 분리된다 할지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 왜냐하면 철학은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그 어떠한 분과학문도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은, 사람들이 말하듯, 초합리적인 것 - 불가해한 것, 지성을 넘어서는 혹은 최소한 지성의 한계에 자리하는 것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학문과, 지성과 단지 약간의 공통분모만을 가진다. 철학은 합리의 외부에 영역을 둔다. 소위 철학함이란 그에 따라 이성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다른 방식, 다소 "비이성적인" 어떤 방식으로 탐색한다. 그것은 오늘날 널리 퍼진 견해이다, 특히 유럽 대륙에 - 그리고 그 견해는 또 다른 곳에서 소위 실존철학자들을 통해 주장된다. 이러한 주의의 매우 극단적인 지지자의 한 사람은 확실히, 파리의 주요한 철학자인 장 발 교수인데, 그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철학과 문학 사이에는 그 어떠한 본질적인 구별점(차이)도 있지 않다. 그러나 또한 저명한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러한 점에서 장 발과 유사할 듯싶다. 제네바의 여성철학자 잔 허쉬의 설명에서, 철학은 학문과 음악 사이의 경계에서의 사유이다; 또 다른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켈은 한 철학적 저술에 자신의 음악의 일부를 직접 게재하였다 - 오늘날 몇몇의 철학자들이 쓰곤하는 소설들에 대해 말하지 않고.

  Auch diese Meinung ist eine respektable philosophische These. Zwar kann man zu ihren Gunsten verschiedenes anführen. Erstens, daß in den Grenzfragen - und das sind meistens philosophische Fragen - der Mensch sich aller seiner Kräfte bedienen muß, also auch des Gemütes, des Willens, der Phantasie - wie ein Dichter. Zweitens, daß die Grundgegebenheiten der Philosophie dem Verstand gar nicht zugänglich sind - man soll sie also mit anderen Mitteln zu erfassen versuchen, inwieweit es geht. Drittens, daß alles, was den Verstand betrifft, schon der einen oder der anderen Wissenschaft angehört. Also bleibt für die Philosophie nur dieses dichterische Denken an der Grenze oder gar ganz jenseits der Grenzen des Verstandes. Man könnte vielleicht noch weitere Gründe dieser Art anführen.
  그럼에도 이러한 견해는 주목할만한 철학적 명제이다. 더욱이 사람들은 그러한 견해에 유리하도록 여러가지 것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로, 한계물음들에 있어서 - 그리고 그것은 대개 철학적인 물음들이다 - 인간이 그의 능력들을 사용해야만 하고, 그러므로 또한 감정, 의지, 상상을 - 마치 작가와 같이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철학의 근본소여들이 지성에 전혀 접근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사람들은 그 근본소여들을 그러므로, 되도록 매개물들을 가지고 포착하고자 시도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지성에 관련하는 모든 것은 이미 이러저러한 분과학문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에는 단지 그 한계에 있어서나 혹은 지성의 한계들을 완전히 넘어서는 이러한 작가적 사유만이 남는다. 사람들은 어쩌면 여전히 이러한 방식에 대한 그 이상의 근거들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Gegen diese Ansicht wehren sich aber zahlreiche Denker, unter anderen jene, welche dem Spruch von Ludwig Wittgenstein treu sind: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 Mit "Sprechen" meint hier Wittgenstein das vernünftige Sprechen, also Denken. Kann man, sagen diese Gegner der dichterischen Philosophie, etwas mit normalen menschlichen Erkenntnismitteln nicht erfassen, das heißt mit dem Verstand, dann kann man es überhaupt nicht erfassen. Der Mensch kennt nur zwei mögliche Methoden, um etwas zu erkennen: entweder den Gegenstand in irgendeiner Weise direkt zu sehen - sinnlich oder geistig - oder aber zu erschließen. Beides ist aber eine Erkenntnisfunktion und im wesentlichen ein Akt des Verstandes. Daraus, daß man etwas liebt, haßt, daß man irgendeine Angst, einen Ekel oder ähnliches erlebt, folgt vielleicht, daß man sich unglücklich beziehungsweise glücklich fühlt - aber darüber hinaus gar nichts. So sagen jene Philosophen und, ich muß mit Bedauern feststellen, sie lachen den Vertretern der anderen Meinung ins Gesicht und sagen, sie seien Schwärmer, Dichter, unernste Menschen.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반하여 다수의 사상가들은, 저들 중에서도 특히, 루트뷔히 뷔트겐슈타인의 언명에 충실한 사상가들이 저항한다: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그에 대해 침묵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로 이성적 언명들, 그러니까 사유들을 의미한다. 작가적 철학의 이러한 반대자들이 말하기로, 사람들이 통상의 인간 인식수단들로써, 즉 소위 지성으로 어떤 것을 파악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은, 어떤 것을 인식하기 위한 오직 두 가지 가능한 방식들만을 안다: 어떤 방식에서 대상을 - 감각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 직접 보거나 아니면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 모두 인식기능이고 본질적으로 지성의 활동이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일, 증오하는 일, 사람들이 어떤 근심을, 혐오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을 경험하는 일로부터, 아마도, 사람들이 불행하게 내지는 요행으로 느끼는 것이 뒤따를 것이다 - 그러나 그 외에 이상의 아무것도 뒤따르지 않는다. 저 철학자들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역사 속 또 다른 견해의 지지자들을 비웃고, 그들을 몽상가, 작가, 진실하지 못한 인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Ich will mich hier in die Diskussion der Frage nicht einlassen - wir werden noch später dazu Gelegenheit haben. Eines möchte ich jedoch bemerken. Sehen wir uns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an - vom alten Griechen Thales bis auf Merleau-Ponty und auf Jaspers, so finden wir immer und immer wieder, daß der Philosoph die Wirklichkeit zu erklären versucht hat. Erklären heißt aber, den zu erklärenden Gegenstand vernünftig - mit Hilfe des Verstandes - zu deuten. Auch jene, die sich am schroffsten gegen den Gebrauch des Verstandes in der Philosophie gewehrt haben - wie Bergson zum Beispiel -, haben es immer so getan. Der Philosoph, so scheint es wenigstens, ist einer, der vernünftig denkt, der versucht, Klarheit - das heißt Ordnung, und das heißt wiederum Verstand - in die Welt und in das Leben zu bringen. HIstorisch gesehen - das heißt in dem, was die Philosophen wirklich getan haben, nicht in dem, was sie über ihre Arbeit sagten -, war die Philosophie im großen und ganzen eine vernünftige, eine wissenschaftliche Tätigkeit, eine Lehre, nicht eine Dichtung. Hie und da waren Philosophen auch dichterisch begabt: so Platon, so der heilige Augustinus - und, wenn man mit den Großen einen zeitgenössischen Schriftsteller vergleichen darf, Jean-Paul Sartre, der ein paar gute Theaterstücke geschrieben hat. Das alles scheint aber bei ihnen eher ein Mittel der Mitteilung des Gedankens gewesen zu sein. In ihrem Wesen ist die Philosophie, wie gesagt, immer eine Lehre, eine Wissenschaft gewesen.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논의에 개입하지 않길 바란다 - 그럼에도 우리는 이후에 그에 대한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한 가지 것은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철학의 역사를 고찰한다 - 고대 그리스인 탈레스로부터 메를로-퐁티와 야스퍼스에 대해서까지, 그래서 우리는 거듭 되풀이하여, 철학자는 진실을 밝혀내고자 시도해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해명이란 해명할 대상을 이성적으로 - 지성의 도움으로써 - 지시하는 것을 말한다. - 베르그송처럼 - 철학에 있어서 지성의 사용에 반대하여 가장 냉혹하게 반대해 온 저들 또한 언제나 그 일을 그렇게 해 왔다. 철학자는, 적어도 보이는 바로는,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사람, 분명함을 - 소위 질서를, 또 다시 말하자면 지성을 - 세계와 삶 속으로 이끌고자 시도하는 사람이다. 역사적으로 - 그것을 말하자면, 그들이 그들의 일에 대해서 말한 것에 있어서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실제로 행해온 일에 있어서 - 보자면, 철학은 모든 면에서 이성적, 학문적 활동이었고, 소설이 아니라 학설이었다. 때론 철학자들도 문학적으로 되었다: 플라톤이 그러하였고, 성 아우구스티누스 - 그리고, 사람들이 그 대가들과 동시대의 문인을 비교해야 한다면, 매우 훌륭한 희곡을 작성한 장-폴 사르트르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더욱 먼저 사상의 전달 매개체인 것이었다. 그것들에 있어서 본질은 철학이었고, 이야기되는 것처럼, 언제나 학설이었으며, 하나의 학문이었다.

 -蟲-
  Die Philosophie ist eine Angelegenheit, die nicht nur den Fachmann angeht, denn so merkwürdig es auch aussehen könnte: es gibt wahrscheinlich keinen Menschen, der nicht philosophiert. Oder wenigstens hat jeder Mensch Augenblicke in seinem Leben, in welchen er zum Philosophen wird. Das ist vor allem von unsern Naturwissenschaftlern, von Historikern und von den Künstlern wahr. Sie alle pflegen früher oder später sich mit Philosophie zu beschäftigen. Ich sage freilich nicht, daß damit der Menschheit ein bedeutender Dienst geleistet ist; die Bücher der philosophierenden Laien - seien sie auch berühmte Physiker, Dichter oder Politiker - sind gewöhnlich schlecht, sie enthalten nur zu oft eine kindlich-naive und meistens falsche Philosophie. Das ist aber hier Nebensache. Das Wichtige ist, daß wir alle philosophieren und, wie es scheint, schon philosophieren müssen.
  아주 유별나게 보지 않는다면 철학이 오직 전문가에게만 관련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즉 철학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각각의 인간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가 철학자가 되는 순간들을 갖는다. 그 점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연과학자들, 역사가들과 예술가들에 대해서 참이다. 그들은 모두 늦든 이르든 철학에 몰두하곤 한다. 물론 내가 그로써 인류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일이 수행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철학하는 일에 대해 문외한인 이들의, 그저 이따금 유치하고 대체로 그릇된 철학을 포함하는 책들은 - 그들이 설령 유명한 물리학자, 작가 또는 정치가일지라도 - 보통 수준에 못 미친다. 그러나 그건 여기에서 사소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철학한다는 것, 그리고 틀림없이 철학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Und deshalb ist auch für alle die Frage wichtig: Was ist eigentlich Philosophie? Leider ist dies eine der schwierigsten philosophischen Fragen. Ich kenne nur wenige Worte, die so viele Bedeutungen haben wie das Wort "Philosophie". Gerade vor einigen Wochen habe ich in Frankreich einem Kolloquium führender europäischer und amerikanischer Denker beigewohnt. Sie alle sprachen von Philosophie, verstanden aber darunter ganz und gar Verschiedenes. Wir wollen uns die verschiedenen Deutungen näher ansehen und dann versuchen, in diesem wahren Gewimmel von Definitionen und Ansichten einen Weg zum Verständnis zu finden.
  그러므로 또한 모든 이들에게 "본래적인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이 물음은 가장 까다로운 철학적 물음들 중 하나이다. 나는 "철학"이라는 말만큼 그렇게 많은 의미들을 지니는 그런 단어를 거의 알지 못한다. 바로 몇 주 전 나는 프랑스에서 주요한 유럽/미국 사상가들의 토론회에 참석했다. 그들 모두는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아래에서 전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파악한다. 우리는 그 상이한 의미들을 더 상세히 살펴보고, 정의들과 견해들의 이 진정한 혼잡 속에서 이해를 향한 길을 발견하는 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Es gibt nun zuerst eine Ansicht, nach welcher die Philosophie ein Sammelbegriff für alles wäre, was noch nicht wissenschaftlich behandelt werden kann. Dies ist zum Beispiel die Ansicht von Lord Bertrand Russell und von vielen positivistischen Philosophen. Sie machen uns darauf aufmerksam, daß bei Aristoteles Philsophie und Wissenschaft dasselbe bedeuteten und daß später die einzelnen Wissenschaften sich aus der Philosophie losgelöst haben: zuerst die Medizin, dann die Physik, später die Psychologie, zuletzt sogar die Formale Logik selbst, welche, wie bekannt, heute meistens an den mathematischen Fakultäten gelehrt wird. Oder, anders ausgedrückt, es gebe überhaupt keine Philosophie in dem Sinne, wie es zum Beispiel eine Mathematik gibt, mit ihrem besonderen Gegenstand. Einen solchen Gegenstand der Philosophie gebe es nicht. Man bezeichne damit lediglich gewisse Versuche, verschiedenartige, noch unreife Probleme zu klären.
  이제 처음으로 한 가지 견해가 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이 모든 것에 대한 총체개념일, 아직 분과학문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는. 이것은 예를 들어 버트란드 러셀 경과 여러 실증주의 철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철학과 과학(학문)이 동일한 것을 의미하였다는 것과 그 이후 개별적인 (분)과학(문)들이, 즉 오늘날 대개 이과 대학들에서 교육되는 학문들인 의학, 그리고 자연학, 다음으로 심리학, 끝으로 형식 논리학 그 자체도,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혹은 달리 말하면 예를 들어 수학과 같은 그런 의미에서 그 특수한 대상을 가진 어떠한 철학도 없을 것이다. 철학의 그러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로써 다만 특정한 시도, 다양하지만 불완전한 문제들을 명확하게 하는 시도를 가리킨다.

  Dies ist ganz gewiss ein interessanter Standpunkt, und die angeführten Argumente sehen zuerst überzeugend aus. Sieht man sich aber die Sache etwas näher an, dann erheben sich ganz große Zweifel. Denn, erstens, wäre es so, wie jene Philosophen sagen, dann sollten wir heute weniger Philosophie haben als etwa vor tausend Jahren. Das ist aber sicher nicht der Fall. Philosophie gibt es heute nicht weniger, sondern eher mehr als je. Und ich meine nicht nur der Zahl der Denker nach - es werden deren heute etwa zehntausend sein -, sondern auch der Zahl der behandelten Probleme nach. Vergleicht man die Philosophie der alten Griechen mit der unseren, so sieht man, daß wir uns im zwanzigsten Jahrhundert nach Christus bedeutend mehr Fragen stellen als die Griechen gekannt haben.
  이것은 완전히 분명하게 하나의 흥미로운 입장이고, 그 언급된 논증들은 우선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태를 어느 정도 더 가까이서 관찰하고, 그리고서 훨씬 커다란 의심을 품는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렇다면, 저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수 천 년 앞선 것보다 더 적은 철학들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은 확실히 그렇지 않다. 오늘날 철학은 더 적지 않고, 오히려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나는 단지 사상가들의 수에 따라서가 아니라 - 그 수는 거의 수만이 될 것이다 -, 오히려 다루어지는 문제들의 수에 따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우리의 철학과 비교하여, 그렇게 사람들은, 기원 후 20세기에 우리가 그리스 인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물음들을 던지고 있음을 본다.

  Zweitens ist es schon wahr, daß verschiedene Disziplinen sich von der Philosophpie im Laufe der Zeit losgelöst haben. Das Auffallende ist aber dabei, daß dann, wenn eine solche spezielle Wissenschaft sich verselbständigte, fast gleichzeitig eine parallele philosophische Disziplin entstand. So zum Beispiel in den letzten Zeiten, als sich die formale Logik von der Philosophie trennte, entstand gleich eine weit verbreitete und heiß diskutierte Philosophie der Logik. Über sie wird heute zum Beispiel in den Vereinigten Staaten Nordamerikas vielleicht mehr geschrieben und diskutiert als über die rein logischen Fragen, obwohl dieses Land gerade in der Logik führend ist - oder gerade deswegen. Die Tatsachen zeigen, daß die Philosophie, anstatt durch die Entwicklung der Wissenschaften abzusterben, noch lebendiger und reicher wird.
  두 번째로, 상이한 분과학문들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철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것은 확실히 참이다. 그러나 그 분리와 함께, 그러한 특수 학문이 독립한 이후, 거의 동시에 하나의 대응하는 철학적 분과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철학으로부터 형식 논리학이 갈라선 최근에, 동시에 널리 퍼지고 열렬히 논의된 논리학에 대한 철학(논리철학)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오늘날 미합중국에서는, 비록 이 국가가 특히 논리학에 있어서 선도적이라 할지라도 -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철학에 대해 순수 논리적 물음들에 대한 것 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 기술되고 논의된다. 그 사실들은, 철학이, 학문들의 전개를 통하여 소멸하는 대신에, 더욱 생생하고 풍요롭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Und endlich eine boshafte Frage an jene, die meinen, es gäbe keine Philosophie: Im Namen welcher Disziplin, welcher Wissenschaft wird diese Behauptung aufgestellt? Schon Aristoteles hielt den Gegnern der Philosophie folgendes vor: entweder - sagte er - soll man philosophieren oder man soll nicht philosophieren; wenn man aber nicht philosophieren soll, dann nur im Namen einer Philosophie. Also auch wenn man nicht philosophieren soll, muß man doch philosophieren. Und dies ist noch heute wahr. Nichts ist amüsanter als die Sicht vermeinter Feinde der Philosophie, die großartige philosophische Argumente anführen, um zu zeigen, daß es keine Philosophie gibt.
  그리고 끝으로, 어떠한 철학도 있지 않으리라는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에게 짓궂은 물음이 있다: 어떤 학과, 어떤 분과학문의 이름 안에서 이러한 주장이 제시되는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철학의 반대자들에 맞섰다. - 그가 말했던 것으로 - 사람들은 철학을 해야 하거나 철학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철학을 하지 않아야 한다면, 오직 철학이라는 이름 안에서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사람들이 철학을 하지 않아야 한다면, 사람들은 철학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참이다. 그 어떠한 철학도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웅대한 철학적 논증을 언급하는 자들, 철학의 그 잘못된 적들의 전망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蟲-
Daß es aber doch wirklich so sein müsse, kann, wenn man den Raum für eine bloße reine Form der Erscheinungen äußerer Sinne gelten läßt, dadurch klar dargetan werden, daß wir die Zeit, die doch gar kein Gegenstand äußerer Anschauung ist, uns nicht anders vorstellig machen können, als unter dem Bilde einer Linie, so fern wir sie ziehen, ohne welche Darstellungsart wir die Einheit ihrer Abmessung gar nicht erkennen könnten, imgleichen daß wir die Bestimmung der Zeitlänge, oder auch der Zeitstellen für alle innere Wahrnehmungen, immer von dem hernehmen müssen, was uns äußere Dinge Veränderliches darstellen, folglich die Bestimmungen des inneren Sinnes gerade auf dieselbe Art als Erscheinungen in der Zeit ordnen müssen, wie wir die der äußeren Sinne im Raume ordnen, mithin, wenn wir von der letzteren einräumen, daß wir dadurch Objekte nur so fern erkennen, als wir äußerlich affiziert werden, wir auch vom inneren Sinne zugestehen müssen, daß wir dadurch uns selbst nur so anschauen, wie wir innerlich von uns selbst affiziert werden, d.i. was die innere Anschauung betrifft, unser eigenes Subjekt nur als Erscheinung, nicht aber auch nach dem, was es an sich selbst ist, erkennen¹.

¹Ich sehe nicht, wie man so viel Schwierigkeit darin finden könne, daß der innere Sinn von uns selbst affiziert werde. Jeder Actus der Aufmerksamkeit kann uns ein Beispiel davon geben. Der Vestand bestimmt darin jederzeit den inneren Sinn der Verbindung, die er denkt, gemäß, zu inneren Anschauung, die dem Mannigfaltigen in der Synthesis des Verstandes korrespondiert. Wie sehr das Gemüt gemeiniglich hiedurch affiziert werde, wird ein jeder in sich wahrnehmen können.



Daß es aber doch wirklich so sein müsse, kann, wenn man den Raum für eine bloße reine Form der Erscheinungen äußerer Sinne gelten läßt, dadurch klar dargetan werden, daß wir die Zeit, die doch gar kein Gegenstand äußerer Anschauung ist, uns nicht anders vorstellig machen können, als unter dem Bilde einer Linie, so fern wir sie ziehen, ohne welche Darstellungsart wir die Einheit ihrer Abmessung gar nicht erkennen könnten, imgleichen daß wir die Bestimmung der Zeitlänge, oder auch der Zeitstellen für alle innere Wahrnehmungen, immer von dem hernehmen müssen, was uns äußere Dinge Veränderliches darstellen, folglich die Bestimmungen des inneren Sinnes gerade auf dieselbe Art als Erscheinungen in der Zeit ordnen müssen, wie wir die der äußeren Sinne im Raume ordnen, mithin, wenn wir von der letzteren einräumen, daß wir dadurch Objekte nur so fern erkennen, als wir äußerlich affiziert werden, wir auch vom inneren Sinne zugestehen müssen, daß wir dadurch uns selbst nur so anschauen, wie wir innerlich von uns selbst affiziert werden, d.i. was die innere Anschauung betrifft, unser eigenes Subjekt nur als Erscheinung, nicht aber auch nach dem, was es an sich selbst ist, erkennen¹.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그래야만 한다는 것은,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공간을 외감의 직관에 있어서의 순전한 형식에 적용시키도록 할 때, 그를 통하여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다, 우리가 시간을, 그것이 전혀 외적 직관의 대상은 아닌, 우리에게 다른 식으로 알아듣기 쉽게 할 수 없다, 선의 비유 아래에서 보다, 우리가 그 선을 긋는 한에서, 그러한 표현방식 없이는 우리가 그 선의 측정의 통일을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우리가 시간 길이, 또는 또한 모든 내적 지각들에 대한 시간의 위치를, 언제나 그로부터 얻어와야만 한다, 우리에게 외부 사물이 변화하는 것으로 표상하는 것으로부터, 따라서 내감의 규정들은 직접 동일한 방식으로부터 현상들을 시간 속에 질서지어야만 한다, 우리가 외감의 규정들을 공간 속에 질서짓듯이, 따라서, 우리가 후자에 대해서 용인할 때, 우리가 그를 통하여 객체를 단지 인식하는 한에서, 우리가 외적으로 촉발되는 것처럼, 또한 우리가 내감에 대해서 허용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를 통하여 우리 자신에게 직관한다는 것, 우리가 내적으로 우리 자신에 의해 촉발되는 것처럼, 즉, 내적 직관과 관계하는 것, 우리의 고유한 주체는 단지 현상으로서만, 그러나 또한 그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인 것으로서, 인식한다¹.


¹Ich sehe nicht, wie man so viel Schwierigkeit darin finden könne, daß der innere Sinn von uns selbst affiziert werde.
¹나는 모른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어려움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 내감이 우리 자신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

Jeder Actus der Aufmerksamkeit kann uns ein Beispiel davon geben.


Der Vestand bestimmt darin jederzeit den inneren Sinn der Verbindung, die er denkt, gemäß, zu inneren Anschauung, die dem Mannigfaltigen in der Synthesis des Verstandes korrespondiert.
지성은 그 안에서 항상 내감을 지성이 생각하는 결합에 적절하도록 규정하고, 내적 직관에, 그 내적 직관이 지성의 종합 안에서 잡다에 부합하는.

Wie sehr das Gemüt gemeiniglich hiedurch affiziert werde, wird ein jeder in sich wahrnehmen können.



-작성중-
Dieses nehmen wir auch jederzeit in uns wahr. Wir können uns keine Linie denken, ohne sie in Gedanken zu ziehen, keinen Zirkel denken, ohne ihn zu beschreiben, die drei Abmessungen des Raums gar nicht vorstellen, ohne aus demselben Punkte drei Linien senkrecht auf einander zu setzen, und selbst die Zeit nicht, ohne, indem wir im Ziehen einer geraden Linie (die die äußerlich figürliche Vorstellung der Zeit sein soll) bloß auf die Handlung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dadurch wir den inneren Sinn sukzessiv bestimmen, und dadurch auf die Sukzession dieser Bestimmung in demselben, Acht haben. Bewegung, als Handlung des Subjekts, (nicht als Bestimmung eines Objekts¹,) folglich di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im Raume, wenn wir von diesem abstrahieren und bloß auf die Handlung Acht haben, dadurch wir den inneren Sinn seiner Form gemäß bestimmen, bringt so gar den Begriff der Sukzession zuerst hervor. Der Verstand des Mannigfaltigen, sondern bringt sie hervor, indem er ihn affiziert. Wie aber das Ich, der ich denke, von dem Ich, das sich selbst anschauet, unterschieden (indem ich mir noch andere Anschauungsart wenigstens als möglich vorstellen kann) und doch mit diesem letzteren als dasselbe Subjekt einerlei sei, wie ich also sagen könne: Ich, als Intelligenz und denkend Subjekt, erkenne mich selbst als gedachtes Objekt, so fern ich mir noch über das in der Anschauung gegeben bin, nur, gleich andern Phänomenen, nicht wie ich vor dem Verstande bin, sondern wie ich mir erscheine, hat nicht mehr auch nicht weniger Schwierigkeit bei sich, als wie ich mir selbst überhaupt ein Objekt und zwar der Anschauung und innerer Wahrnehmungen sein könne.
→ 이러한 것을 우리는 또한 언제나 우리 안에 참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직선을 사유 속에 그어봄 없이 어떠한 직선도 생각할 수 없고, 원을 그려봄 없이 아무런 원도 생각할 수 없으며, 동일한 점 위에 세 선들을 수직으로 서로에게 놓지 않고 공간의 세 차원들을 전혀 표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자체로 시간도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의 직선을 그어봄에 있어서 (그 선이 시간의 외적 구상적 표상일) 순전히, 그를 통하여 우리가 내감을 계기적으로 규정하는 잡다의 종합작용에, 그리고 그를 통하여 잡다 안에서 이러한 규정의 계기성에 대해 주의함으로써가 아니라면 말이다.→ 주체의 활동으로서(객체에 대한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변화는, 따라서 공간 안에서 잡다의 종합은, 우리가 이러한 공간을 도외시하고 순전히 그를 통하여 우리가 내감을 그 내감의 형식에 적합하게 규정하는 활동에만 주의할 때, 오히려 계기성의 개념을 처음으로 산출한다.→ 그러므로 지성은 내감 안에서 어떤 잡다의 결합과 유사한 것을 이미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이 내감을 촉발함으로써 그 결합을 산출한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생각한다는 것의 나라는 것이 스스로 직관하는 나와 구분되고 (내가 다른 직관방식을 최소한 가능한 것으로는 표상할 수 있음으로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자를 가지고 그것의 주체와 동일할 것인지,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나는 지적이며 사유하는 주체로서 나 자신을, 내가 나에게 직관 안에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단지, 다른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지성에 대해 있는 것과 달리, 오히려 내가 나에게 현상하듯이, 생각되는 개체로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것은 또한, 어떻게 내가 나 자신 일반에 하나의 대상으로 더욱이 직관과 내적 감각의 대상으로 있을 수 있는지 보다 더 이상 조금도 덜한 어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¹ Bewegung eines Objekts im Raume gehört nicht in eine reine Wissenschaft, folglich auch nicht in die Geometrie; weil, daß Etwas beweglich sei, nicht  a priori, sondern nur durch Erfahrung erkannt werden kann. Aber Bewegung, als Beschreibung eines Raumes, ist ein reiner Actus der sukzessiven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in der äußeren Anschauung überhaupt durch produktive Einbildungskraft, und gehört nicht allein zur Geometrie, sondern sogar zur Transzendentalphilosophie.
→ ¹ 공간 안에서 객체의 운동은 순수 학문에 속하지 않고, 따라서 또한 기하학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가변적이라는 것은, 선험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을 도해하는 것으로서 운동은 직관 일반 안에서 생산적 상상력을 통한 잡다의 계기적 종합의 순수한 활동이고, 기하학에 속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초월론적철학에도 속한다.


Dieses nehmen wir auch jederzeit in uns wahr. Wir können uns keine Linie denken, ohne sie in Gedanken zu ziehen, keinen Zirkel denken, ohne ihn zu beschreiben, die drei Abmessungen des Raums gar nicht vorstellen, ohne aus demselben Punkte drei Linien senkrecht auf einander zu setzen, und selbst die Zeit nicht, ohne, indem wir im Ziehen einer geraden Linie (die die äußerlich figürliche Vorstellung der Zeit sein soll) bloß auf die Handlung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dadurch wir den inneren Sinn sukzessiv bestimmen, und dadurch auf die Sukzession dieser Bestimmung in demselben, Acht haben.
이러한 것을 우리는 또한 언제나 우리 안에 참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어떠한 직선도 생각할 수 없다, 그 직선을 사유 속에 그어봄 없이, 아무런 원도 생각할 수 없다, 그 원을 그려봄 없이, 공간의 세 차원들을 전혀 표상할 수 없다, 동일한 점 위에 세 선들을 수직으로 서로에게 놓지 않고, 그리고 그 자체로 시간도 아니다, 없이, 우리가 하나의 직선을 그어봄에 있어서 (그 선이 시간의 외적 구상적 표상일) 순전히 잡다의 종합작용에, 그를 통하여 우리가 내감을 계기적으로 규정하는, 그리고 그를 통하여 잡다 안에서 이러한 규정의 계기성에 대해, 주의함으로써.
→ 이러한 것을 우리는 또한 언제나 우리 안에 참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직선을 사유 속에 그어봄 없이 어떠한 직선도 생각할 수 없고, 원을 그려봄 없이 아무런 원도 생각할 수 없으며, 동일한 점 위에 세 선들을 수직으로 서로에게 놓지 않고 공간의 세 차원들을 전혀 표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자체로 시간도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의 직선을 그어봄에 있어서 (그 선이 시간의 외적 구상적 표상일) 순전히, 그를 통하여 우리가 내감을 계기적으로 규정하는 잡다의 종합작용에, 그리고 그를 통하여 잡다 안에서 이러한 규정의 계기성에 대해 주의함으로써가 아니라면 말이다.
Bewegung, als Handlung des Subjekts, (nicht als Bestimmung eines Objekts¹,) folglich di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im Raume, wenn wir von diesem abstrahieren und bloß auf die Handlung Acht haben, dadurch wir den inneren Sinn seiner Form gemäß bestimmen, bringt so gar den Begriff der Sukzession zuerst hervor.
주체의 활동으로서 변화는, (객체에 대한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따라서 공간 안에서 잡다의 종합은, 우리가 이러한 공간을 도외시하고 순전히 활동에만 주의할 때, 그를 통하여 우리가 내감을 그 내감의 형식에 적합하게 규정하는, 오히려 계기성의 개념을 처음으로 산출한다.
→ 주체의 활동으로서(객체에 대한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변화는, 따라서 공간 안에서 잡다의 종합은, 우리가 이러한 공간을 도외시하고 순전히 그를 통하여 우리가 내감을 그 내감의 형식에 적합하게 규정하는 활동에만 주의할 때, 오히려 계기성의 개념을 처음으로 산출한다.
Der Verstand findet also in diesem nicht etwa schon eine dergleichen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sondern bringt sie hervor, indem er ihn affiziert.
그러므로 지성은 내감 안에서 어떤 잡다의 결합과 유사한 것을 이미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합을 산출한다, 지성이 내감을 촉발함으로써.
→ 그러므로 지성은 내감 안에서 어떤 잡다의 결합과 유사한 것을 이미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이 내감을 촉발함으로써 그 결합을 산출한다.
Wie aber das Ich, der ich denke, von dem Ich, das sich selbst anschauet, unterschieden (indem ich mir noch andere Anschauungsart wenigstens als möglich vorstellen kann) und doch mit diesem letzteren als dasselbe Subjekt einerlei sei, wie ich also sagen könne: Ich, als Intelligenz und denkend Subjekt, erkenne mich selbst als gedachtes Objekt, so fern ich mir noch über das in der Anschauung gegeben bin, nur, gleich andern Phänomenen, nicht wie ich vor dem Verstande bin, sondern wie ich mir erscheine, hat nicht mehr auch nicht weniger Schwierigkeit bei sich, als wie ich mir selbst überhaupt ein Objekt und zwar der Anschauung und innerer Wahrnehmungen sein könne.
그러나 어떻게 내가 생각한다는 것의 나라는 것이 스스로 직관하는 나와 구분되고 (내가 다른 직관방식을 최소한 가능한 것으로는 표상할 수 있음으로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자를 가지고 그것의 주체와 동일할 것으로,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지적이며 사유하는 주체로서, 나 자신을 생각되는 개체로 인식한다고, 내가 나에게 직관 안에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단지, 다른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지성에 대해 있는 것과 달리, 오히려 내가 나에게 현상하듯이, 또한 더 이상 조금도 덜한 어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나 자신 일반에 하나의 대상으로 더욱이 직관과 내적 감각의 대상으로 있을 수 있는지 보다.
→ 그러나 어떻게 내가 생각한다는 것의 나라는 것이 스스로 직관하는 나와 구분되고 (내가 다른 직관방식을 최소한 가능한 것으로는 표상할 수 있음으로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자를 가지고 그것의 주체와 동일할 것인지,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나는 지적이며 사유하는 주체로서 나 자신을, 내가 나에게 직관 안에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단지, 다른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지성에 대해 있는 것과 달리, 오히려 내가 나에게 현상하듯이, 생각되는 개체로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것은 또한, 어떻게 내가 나 자신 일반에 하나의 대상으로 더욱이 직관과 내적 감각의 대상으로 있을 수 있는지 보다 더 이상 조금도 덜한 어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¹ Bewegung eines Objekts im Raume gehört nicht in eine reine Wissenschaft, folglich auch nicht in die Geometrie; weil, daß Etwas beweglich sei, nicht  a priori, sondern nur durch Erfahrung erkannt werden kann.
¹ 공간 안에서 객체의 운동은 순수 학문에 속하지 않고, 따라서 또한 기하학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가변적이라는 것은, 선험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 ¹ 공간 안에서 객체의 운동은 순수 학문에 속하지 않고, 따라서 또한 기하학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가변적이라는 것은, 선험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Aber Bewegung, als Beschreibung eines Raumes, ist ein reiner Actus der sukzessiven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in der äußeren Anschauung überhaupt durch produktive Einbildungskraft, und gehört nicht allein zur Geometrie, sondern sogar zur Transzendentalphilosophie.
그러나 운동은, 공간을 도해하는 것으로서, 직관 일반 안에서 생산적 상상력을 통한 잡다의 계기적 종합의 순수한 활동이고, 기하학에 속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초월론적철학에도 속한다.
→ 그러나 공간을 도해하는 것으로서 운동은 직관 일반 안에서 생산적 상상력을 통한 잡다의 계기적 종합의 순수한 활동이고, 기하학에 속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초월론적철학에도 속한다.

-蟲-
Hier ist nun der Ort, das Paradoxe, was jedermann bei der Exposition der Form des inneren Sinnes (§ 6.) auffallen mußte, verständlich zu machen: nämlich wie dieser auch so gar uns selbst, nur wie wir uns erscheinen, nicht wie wir an uns selbst sind, dem Bewußtsein darstelle, weil wir nämlich uns nur anschauen wie wir innerlich affiziert werden, welches widersprechend zu sein scheint, indem wir uns gegen uns selbst als leidend verhalten müßten; daher man auch lieber den innern Sinn mit dem Vermögen der Apperzeption (welche wir sorgfältig unterscheiden) in den Systemen der Psychologie für einerlei auszugeben pflegt.
→ 이제 여기가 내감의 형식에 대한 설명에서(§ 6.) 모두의 관심을 끌었음에 틀림없는 그 역설을 이해가능하도록 만드는 그 지점이다. 그 역설은 말하자면 이 내감의 형식이 또한 우리 자신조차, 우리가 말하자면 우리에게 단지 우리가 내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촉발되는 것)대로 직관할 따름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 그 자체로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처럼 의식에 제시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수동적인 것으로서 태도를 취해야만 함으로써,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또한 오히려 내감을 통각의 능력과 함께 (우리가 신중히 구분하는) 심리학의 체계에서 동일한 것이라 사칭하는 경향이 있다.
Das, was den inneren Sinn bestimmt, ist der Verstand und dessen ursprüngliches Vermögen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zu verbinden, d.i. unter eine Apperzeption (als worauf selbst seine Möglichkeit beruht) zu bringen. Weil nun der Verstand in uns Menschen selbst kein Vermögen der Anschauungen ist, und diese, wenn sie auch in der Sinnlichkeit gegeben wäre, doch nicht in sich aufnehmen kann, um gleichsam das Mannigfaltige seiner eigenen Anschauung zu verbinden, so ist seine Synthesis, wenn er für sich allein betrachtet wird, nichts anders, als die Einheit der Handlung, deren er sich, als einer solchen, auch ohne Sinnlichkeit bewußt ist, durch die er aber selbst die Sinnlichkeit innerlich in Ansehung des Mannigfaltigen, was der Form ihrer Anschauung nach ihm gegeben werden mag, zu bestimmen vermögend ist. Er also übt, unter der Benennung einer transzendentalen Synthesis der Einbldungskraft, diejenige Handlung aufs passive Subjekt, dessen Vermögen er ist, aus, wovon wir mit Recht sagen, daß der innere Sinn dadurch affiziert werde. Die Apperzeption und deren synthetische Einheit ist mit dem inneren Sinne so gar nicht einerlei, daß jene vielmehr, als der Quell aller Verbindung, auf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en überhaupt unter dem Namen der Kategorien, vor aller sinnlichen Anschauung auf Objekte überhaupt geht; dagegen der innere Sinn die bloße Form der Anschauung, aber ohne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in derselben, mithin noch gar keine bestimmte Anschauung enthält, welche nur durch das Bewußtsein der Bestimmung desselben durch die transzendentale Handlung der Einbildungskraft, (synthetischer Einfluß des Verstandes auf den inneren Sinn) welche ich die figürliche Synthesis genannt habe, möglich ist.
→ 내감을 규정하는 것은 지성이고 직관의 잡다를 결합하는, 즉 하나의 통각 (그 자체에 지성의 가능성이 근거하는) 아래로 가져오는 지성의 근원적 능력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 인간들에 있어서 지성은 스스로 그 어떠한 직관들에 대한 능력도 아니고, 만일 직관들이 또한 감성 안에서 주어진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그 지성의 고유한 직관의 잡다를 결합시키기 위해서 그 지성 자체 안에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래서 잡다의 종합은 지성 그 자체에 대해서만이라면 지성이 감성 없이 의식하는 그러한 것으로서 활동의 통일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고, 그를 통해 그러나 지성 스스로 감성을 그 감성의 직관에 대한 형식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는 잡다와 관계하여서 내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성은 상상력의 초월론적 종합의 이름 아래에서 이 활동을 그 능력이 지성인 그러한 수동적 주관에 수행한다, 우리가 그에 대해 내감은 그를 통하여 영향을 받는다(촉발된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통각과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내감과 전혀 다르며 오히려 모든 결합의 원천으로, 직관 일반의 잡다에 대해 범주들의 이름들 아래에서 모든 감성적 직관에 앞서 대상 일반에 관여한다. 반면 내감은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지만, 그 형식 내에 잡다의 결합이 없고, 따라서 또한 전혀 규정된 직관을 포함하지 않는데, 그러한 규정된 직관은 단지 상상력의 초월적 활동을 통하여 내가 구상정 종합이라 명명하였던 잡다를 규정하는 의식(내감에 대한 지성의 종합적 영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Hier ist nun der Ort, das Paradoxe, was jedermann bei der Exposition der Form des inneren Sinnes (§ 6.) auffallen mußte, verständlich zu machen: nämlich wie dieser auch so gar uns selbst, nur wie wir uns erscheinen, nicht wie wir an uns selbst sind, dem Bewußtsein darstelle, weil wir nämlich uns nur anschauen wie wir innerlich affiziert werden, welches widersprechend zu sein scheint, indem wir uns gegen uns selbst als leidend verhalten müßten; daher man auch lieber den innern Sinn mit dem Vermögen der Apperzeption (welche wir sorgfältig unterscheiden) in den Systemen der Psychologie für einerlei auszugeben pflegt.
이제 여기가 그 지점이다, 그 역설을, 내감의 형식에 대한 설명에서(§ 6.) 모두의 관심을 끌었음에 틀림없는, 이해가능하도록 만드는: 말하자면 이 형식이 또한 더구나 우리 자신조차, 단지 우리가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 그 자체에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의식에 제시하듯이, 왜냐하면 우리는 말하자면 우리에게 단지 우리가 내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처럼 직관할 따름이기 때문에, 모순되어 보이는, 우리가 우리를 우리 자신에 대해 수동적인 것으로서 태도를 취해야만 함으로써;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또한 오히려 내감을 통각의 능력과 함께 (우리가 신중히 구분하는) 심리학의 체계에서 동일한 것이라 사칭하는 경향이 있다.
→ 이제 여기가 내감의 형식에 대한 설명에서(§ 6.) 모두의 관심을 끌었음에 틀림없는 그 역설을 이해가능하도록 만드는 그 지점이다. 그 역설은 말하자면 이 내감의 형식이 또한 우리 자신조차, 우리가 말하자면 우리에게 단지 우리가 내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촉발되는 것)대로 직관할 따름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 그 자체로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처럼 의식에 제시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수동적인 것으로서 태도를 취해야만 함으로써,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또한 오히려 내감을 통각의 능력과 함께 (우리가 신중히 구분하는) 심리학의 체계에서 동일한 것이라 사칭하는 경향이 있다.

Das, was den inneren Sinn bestimmt, ist der Verstand und dessen ursprüngliches Vermögen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zu verbinden, d.i. unter eine Apperzeption (als worauf selbst seine Möglichkeit beruht) zu bringen.
그것, 내감을 규정하는 것은, 지성이고 지성의 근원적 능력이다 직관의 잡다를 결합하는, 즉 하나의 통각 (그 자체에 지성의 가능성이 근거하는) 아래로 가져오는.
→ 내감을 규정하는 것은 지성이고 직관의 잡다를 결합하는, 즉 하나의 통각 (그 자체에 지성의 가능성이 근거하는) 아래로 가져오는 지성의 근원적 능력이다.
Weil nun der Verstand in uns Menschen selbst kein Vermögen der Anschauungen ist, und diese, wenn sie auch in der Sinnlichkeit gegeben wäre, doch nicht in sich aufnehmen kann, um gleichsam das Mannigfaltige seiner eigenen Anschauung zu verbinden, so ist seine Synthesis, wenn er für sich allein betrachtet wird, nichts anders, als die Einheit der Handlung, deren er sich, als einer solchen, auch ohne Sinnlichkeit bewußt ist, durch die er aber selbst die Sinnlichkeit innerlich in Ansehung des Mannigfaltigen, was der Form ihrer Anschauung nach ihm gegeben werden mag, zu bestimmen vermögend ist.
왜냐하면 이제 우리 인간들에 있어서 지성은 스스로 그 어떠한 직관들에 대한 능력도 아니고, 이 직관들은, 그 직관들이 또한 감성 안에서 주어진다면, 그럼에도 그 자체 안에 받아들일 수 없는, 말하자면 그 지성의 고유한 직관의 잡다를 결합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잡다의 종합은, 지성이 그 자체에 대해서만 간주된다면, 활동의 통일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그 활동에 대해 지성이 그러한 것으로서, 감성 없이 의식한다, 그를 통해 그러나 지성 스스로 감성을 내적으로 잡다와 관계하여서, 그 감성의 직관에 대한 형식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는, 규정하는 능력이 있다.
→ 왜냐하면 이제 우리 인간들에 있어서 지성은 스스로 그 어떠한 직관들에 대한 능력도 아니고, 만일 직관들이 또한 감성 안에서 주어진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그 지성의 고유한 직관의 잡다를 결합시키기 위해서 그 지성 자체 안에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래서 잡다의 종합은 지성 그 자체에 대해서만이라면 지성이 감성 없이 의식하는 그러한 것으로서 활동의 통일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고, 그를 통해 그러나 지성 스스로 감성을 그 감성의 직관에 대한 형식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는 잡다와 관계하여서 내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Er also übt, unter der Benennung einer transzendentalen Synthesis der Einbldungskraft, diejenige Handlung aufs passive Subjekt, dessen Vermögen er ist, aus, wovon wir mit Recht sagen, daß der innere Sinn dadurch affiziert werde.
그러므로 지성은, 상상력의 초월론적 종합의 이름 아래에서, 이 활동을 수동적 주관에 수행한다, 그 주관의 능력이 지성인, 우리가 그에 대해 정당하게 말한다, 내감은 그를 통하여 영향을 받는다고.
→ 그러므로 지성은 상상력의 초월론적 종합의 이름 아래에서 이 활동을 그 능력이 지성인 그러한 수동적 주관에 수행한다, 우리가 그에 대해 내감은 그를 통하여 영향을 받는다(촉발된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Die Apperzeption und deren synthetische Einheit ist mit dem inneren Sinne so gar nicht einerlei, daß jene vielmehr, als der Quell aller Verbindung, auf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en überhaupt unter dem Namen der Kategorien, vor aller sinnlichen Anschauung auf Objekte überhaupt geht; dagegen der innere Sinn die bloße Form der Anschauung, aber ohne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in derselben, mithin noch gar keine bestimmte Anschauung enthält, welche nur durch das Bewußtsein der Bestimmung desselben durch die transzendentale Handlung der Einbildungskraft, (synthetischer Einfluß des Verstandes auf den inneren Sinn) welche ich die figürliche Synthesis genannt habe, möglich ist.
통각과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내감과 전혀 같지 않다, 저 통각은 오히려 모든 결합의 원천으로, 직관 일반의 잡다에 대해 범주들의 이름들 아래에서, 모든 감성적 직관에 앞서 대상 일반에 geht; 반면 내감은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지만, 그 형식 내에 잡다의 결합이 없이, 따라서 또한 전혀 규정된 직관을 포함하지 않는, 단지 상상력의 초월적 활동을 통하여 잡다를 규정하는 의식을 통해서만, (내감에 대한 지성의 종합적 영향) 내가 구상정 종합이라 명명하였던, 가능하다.
→ 통각과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내감과 전혀 다르며 오히려 모든 결합의 원천으로, 직관 일반의 잡다에 대해 범주들의 이름들 아래에서 모든 감성적 직관에 앞서 대상 일반에 관여한다. 반면 내감은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지만, 그 형식 내에 잡다의 결합이 없고, 따라서 또한 전혀 규정된 직관을 포함하지 않는데, 그러한 규정된 직관은 단지 상상력의 초월적 활동을 통하여 내가 구상정 종합이라 명명하였던 잡다를 규정하는 의식(내감에 대한 지성의 종합적 영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蟲-
Αllein die figürliche Synthesis, wenn sie bloß auf die ursprünglich-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i. diese transzendentale Einheit geht, welche in den Kategorien gedacht wird, muß, zum Unterschiede von der bloß intellektuellen Verbindung, die transzendental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heißen. Einbildungskraft ist das Vermögen, einen Gegenstand auch ohne dessen Gegenwart in der Anschauung vorzustellen. Da nun alle unsere Anschauung sinnlich ist, so gehört die Einbildungskraft, der subjektiven Bedingung wegen, unter der sie allein den Verstandesbegriffen eine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geben kann, zur Sinnlichkeit; so fern aber doch ihre Synthesis eine Ausübung der Spontaneität ist, welche bestimmend, und nicht, wie der Sinn, bloß bestimmbar ist, mithin a priori den Sinn seiner Form nach der Einheit der Apperzeption gemäß bestimmen kann, so ist die Einbildungskraft so fern ein Vermögen, die Sinnlichkeit a priori zu bestimmen, und ihre Synthesis der Anschauungen, den Kategorien gemäß, muß die transzendental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sein, welches eine Wirkung des Verstandes auf die Sinnlichkeit und die erste Anwendung desselben (zugleich der Grund aller übrigen) auf Gegenstände der uns möglichen Anschauung ist. Sie ist, als figürlich, von der intellektuellen Synthesis ohne alle Einbildungskraft bloß durch den Verstand unterschieden. So fern die Einbildungskraft nun Spontaneität ist, nenne ich sie auch bisweilen die produktive Einbildungskraft, und unterscheide sie dadurch von der reproduktiven, deren Synthesis lediglich empirischen Gesetzen, nämlich denen der Assoziation, unterworfen ist, und welche daher zur Erklärung der Möglichkeit der Erkenntnis a priori nichts beiträgt, und um deswillen nicht in die Transzendentalphilosophie, sondern in die Psychologie gehört.
→ 오로지 구상적 종합이 순전히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 즉 범주들 안에서 사유되는 그러한 초월적 통일을 얻을 때에만, 반드시 순전한 지성적 결합과 구분하여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이라 이름하여야만 한다.→상상력은 또한 대상을 그 대상의 현전함이 없이 직관 안에서 표상하는 능력이다.→ 이제 우리의 직관은 감각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상상력은, 그 아래에서만이 상상력이 지성개념들에게 상응하는 직관을 제시할 수 있는 주관적 조건과 관련하여, 감성에 속한다; 그러나 상상력의 종합이 규정하는, 그리고 감관이 그러하듯 순전히 규정가능한 것이 아닌, 따라서 선험적 감관을 그 감관의 형식에 있어서 통각의 통일에 따라 확실하게 규정할 수 있는 자발성의 행사인 한에서, 그래서 상상력은 감성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하나의 능력인 한에서, 그리고 직관들에 대한 범주들에 적합한 그 감성의 종합은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 감성에 대한 지성의 작용과 지성의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대상들에 대한 최초의 적용 (동시에 여타 모든 적용들의 근거) 임에 틀림없다.→ 구상적인 것으로서의 종합은 모든 상상력과 무관하게 순전히 지성을 통하는 지성적 종합과 구분된다.→ 이제 상상력이 자발성인 한에서, 나는 그 상상력을 또한 때때로 생산적 상상력이라 명명하고, 그를 통하여 그 생산적 상상력을 단적으로 경험적 원칙들, 말하자면 연합의 원칙을 따르는, 따라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해명에 대해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 그 때문에 초월론적 철학이 아니라, 심리학에 속하는 재생적인 종합과 구분한다.


Αllein die figürliche Synthesis, wenn sie bloß auf die ursprünglich-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i. diese transzendentale Einheit geht, welche in den Kategorien gedacht wird, muß, zum Unterschiede von der bloß intellektuellen Verbindung, die transzendental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heißen.
오로지 구상적 종합만이, 그 종합이 순전히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 즉 초월적 통일을 얻을 때, 범주들 안에서 사유되는 그러한 통일을, 반드시, 순전한 지성적 결합과 구분하여,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이라 이름하여야만 한다.
→ 오로지 구상적 종합이 순전히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 즉 범주들 안에서 사유되는 그러한 초월적 통일을 얻을 때에만, 반드시 순전한 지성적 결합과 구분하여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이라 이름하여야만 한다.
Einbildungskraft ist das Vermögen, einen Gegenstand auch ohne dessen Gegenwart in der Anschauung vorzustellen.
상상력은 능력이다, 또한 대상을 그 대상의 현전함이 없이 직관 안에서 표상하는.
→상상력은 또한 대상을 그 대상의 현전함이 없이 직관 안에서 표상하는 능력이다.
Da nun alle unsere Anschauung sinnlich ist, so gehört die Einbildungskraft, der subjektiven Bedingung wegen, unter der sie allein den Verstandesbegriffen eine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geben kann, zur Sinnlichkeit; so fern aber doch ihre Synthesis eine Ausübung der Spontaneität ist, welche bestimmend, und nicht, wie der Sinn, bloß bestimmbar ist, mithin a priori den Sinn seiner Form nach der Einheit der Apperzeption gemäß bestimmen kann, so ist die Einbildungskraft so fern ein Vermögen, die Sinnlichkeit a priori zu bestimmen, und ihre Synthesis der Anschauungen, den Kategorien gemäß, muß die transzendental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sein, welches eine Wirkung des Verstandes auf die Sinnlichkeit und die erste Anwendung desselben (zugleich der Grund aller übrigen) auf Gegenstände der uns möglichen Anschauung ist.
이제 우리의 직관은 감각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상상력은 속한다, 주관적 조건과 관련하여, 그 조건 아래에서만이 상상력이 지성개념들에게 상응하는 직관을 제시할 수 있는, 감성에; 그러나 직관의 종합이 자발성의 행사인 한에서, 그 자발성이 규정하는, 그리고 감관이 그러하듯, 순전히 규정가능한 것이 아닌, 따라서 선험적 감관을 그것의 형식이 통각의 통일에 따라 확실하게 규정할 수 있는, 그래서 상상력은 하나의 능력인 한에서, 감성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그리고 직관들에 대한 그 감성의 종합, 범주들에 적합하게,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이어야만 한다, 감성에 대한 지성의 작용과 지성의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대상들에 대한 최초의 적용 (동시에 여타 모든 적용들의 근거) 이다.
→ 이제 우리의 직관은 감각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상상력은, 그 아래에서만이 상상력이 지성개념들에게 상응하는 직관을 제시할 수 있는 주관적 조건과 관련하여, 감성에 속한다; 그러나 상상력의 종합이 규정하는, 그리고 감관이 그러하듯 순전히 규정가능한 것이 아닌, 따라서 선험적 감관을 그 감관의 형식에 있어서 통각의 통일에 따라 확실하게 규정할 수 있는 자발성의 행사인 한에서, 그래서 상상력은 감성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하나의 능력인 한에서, 그리고 직관들에 대한 범주들에 적합한 그 감성의 종합은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 감성에 대한 지성의 작용과 지성의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대상들에 대한 최초의 적용 (동시에 여타 모든 적용들의 근거) 임에 틀림없다.
Sie ist, als figürlich, von der intellektuellen Synthesis ohne alle Einbildungskraft bloß durch den Verstand unterschieden.
종합은, 구상적인 것으로서, 지성적 종합과 모든 상상력 없이 순전히 지성을 통하여 구분된다.
→ 구상적인 것으로서의 종합은 모든 상상력과 무관하게 순전히 지성을 통하는 지성적 종합과 구분된다.
So fern die Einbildungskraft nun Spontaneität ist, nenne ich sie auch bisweilen die produktive Einbildungskraft, und unterscheide sie dadurch von der reproduktiven, deren Synthesis lediglich empirischen Gesetzen, nämlich denen der Assoziation, unterworfen ist, und welche daher zur Erklärung der Möglichkeit der Erkenntnis a priori nichts beiträgt, und um deswillen nicht in die Transzendentalphilosophie, sondern in die Psychologie gehört.
이제 상상력이 자발성인 한에서, 나는 그 상상력을 또한 때때로 생산적 상상력이라 명명하고, 그 생산적 상상력을 그를 통하여 재생적인 것과 구분한다, 그 재생적 상상력의 종합이 전혀 경험적 원칙들, 말하자면 그것들의 연합을, 따르는, 따라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해명에 대해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 그 때문에 초월론적 철학이 아니라, 심리학에 속하는.
→ 이제 상상력이 자발성인 한에서, 나는 그 상상력을 또한 때때로 생산적 상상력이라 명명하고, 그를 통하여 그 생산적 상상력을 단적으로 경험적 원칙들, 말하자면 연합의 원칙을 따르는, 따라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해명에 대해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 그 때문에 초월론적 철학이 아니라, 심리학에 속하는 재생적인 종합과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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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Von der Anwendung der Kategorien auf Gegenstände der SInne überhaupt
감관 일반의 대상들에 대한 범주들의 적용에 대하여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beziehen sich durch den bloßen Verstand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überhaupt, unbestimmt ob sie die unsrige oder irgend eine andere, doch sinnliche sei, sind aber eben darum bloße Gedankenformen, wodurch noch kein bestimmter Gegenstand erkannt wird. Die Synthesis oder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in denselben, bezog sich bloß auf die Einheit der Apperzeption, und war dadurch der Grund der Möglichkeit der Erkenntnis a priori, so fern sie auf dem Verstande beruht, und mithin nicht allein transzendental, sondern auch bloß rein intellektual. Weil in uns aber eine gewiss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a priori zum Grunde liegt, welche auf der Rezeptivität der Vorstellungsfähigkeit (Sinnlichkeit) beruht, so kann der Verstand, als Spontaneität, den inneren Sinn durch das Mannigfaltige gegebener Vorstellungen der 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gemäß bestimmen, und so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e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 priori denken, als die Bedingung, unter welcher alle Gegenstände unserer (der menschlichen) Anschauung notwendiger Weise stehen müssen, dadurch denn die Kategorien, als bloße Gedankenformen, objektive Realität, d.i. Anwendung auf Gegenstände, die uns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können, aber nur als Erscheinungen bekommen; denn nur von diesen sind wir der Anschauung a priori fähig.
→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순전히 지성만을 통해서 우리의 대상들인지 어떻든 또 다른 어떤 것들인지는 규정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일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 관계하고,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그를 통하여 어떠한 규정된 대상도 인식되지 않는 순전한 사유형식들이다.→ 그 사유형식들 안에서 잡다의 종합이나 결합은 순전히 통각의 통일에 해당하고, 선험적 인식이 지성에 근거하는 한 그를 통하여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토대이며 따라서 초월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순전히 순수하게 지성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표상능력(감성)의 수용성에 근거하는 감각적 직관의 확실한 형식은 선험적으로 기초되기 때문에, 그래서 지성은 자발성으로서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통하여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적합하게 내감을 규정할 수 있고, 그래서 감각적 직관의 잡다들에 대한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그 아래에서 우리의(인간적인) 직관에 속하는 모든 대상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존립해야만 하는 조건으로서 선험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순전한 사유형식들로서 범주들이 객관적 실재성을, 즉 우리에게 직관에서 주어질 수 있는 대상들에 대한 적용을, 그러나 단지 현상들로서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만 우리는 선험적 직관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Dies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die a priori möglich und notwendig ist, kann figürlich (synthesis speciosa) genannt werden, zum Unterschiede von derjenigen, welche in Ansehung des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überhaupt in der bloßen Kategorie gedacht würde, und Verstandesverbindung (synthesis intellectualis) heißt; beide sind transzendental, nicht bloß weil sie selbst a priori vorgehen, sondern auch die Möglichkeit anderer Erkenntnis a priori gründen.
→ 이와 같은 감각적 직관의 잡다에 대한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필연적인 종합은 구상적(형상들의 종합)이라 불릴 수 있다. 이와 구별하여, 순전한 범주들 안에서 직관 일반의 잡다와 관련하는 것으로 생각될 것은 지성결합 (지성적인 것들의 종합)이라 불린다. 양자 모두 초월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 자체가 순전히 선험적으로 선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근거도 되기 때문이다.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beziehen sich durch den bloßen Verstand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überhaupt, unbestimmt ob sie die unsrige oder irgend eine andere, doch sinnliche sei, sind aber eben darum bloße Gedankenformen, wodurch noch kein bestimmter Gegenstand erkannt wird.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순전히 지성만을 통해서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 관계하고, 그 대상들이 우리의 대상들인지 어떻든 또 다른 어떤 것들인지는 규정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일,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순전한 사유형식들이다, 그를 통하여 어떠한 규정된 대상도 인식되지 않는.
→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순전히 지성만을 통해서 우리의 대상들인지 어떻든 또 다른 어떤 것들인지는 규정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일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 관계하고,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그를 통하여 어떠한 규정된 대상도 인식되지 않는 순전한 사유형식들이다.
Die Synthesis oder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in denselben, bezog sich bloß auf die Einheit der Apperzeption, und war dadurch der Grund der Möglichkeit der Erkenntnis a priori, so fern sie auf dem Verstande beruht, und mithin nicht allein transzendental, sondern auch bloß rein intellektual.
그 사유형식들 안에서 잡다의 종합이나 결합은, 순전히 통각의 통일에 해당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토대이다, 그 종합이나 결합이 지성에 근거하는 한, 그리고 따라서 초월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순전히 순수하게 지성적이기도 하다.
→ 그 사유형식들 안에서 잡다의 종합이나 결합은 순전히 통각의 통일에 해당하고, 선험적 인식이 지성에 근거하는 한 그를 통하여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토대이며 따라서 초월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순전히 순수하게 지성적이기도 하다.
Weil in uns aber eine gewiss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a priori zum Grunde liegt, welche auf der Rezeptivität der Vorstellungsfähigkeit (Sinnlichkeit) beruht, so kann der Verstand, als Spontaneität, den inneren Sinn durch das Mannigfaltige gegebener Vorstellungen der 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gemäß bestimmen, und so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e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 priori denken, als die Bedingung, unter welcher alle Gegenstände unserer (der menschlichen) Anschauung notwendiger Weise stehen müssen, dadurch denn die Kategorien, als bloße Gedankenformen, objektive Realität, d.i. Anwendung auf Gegenstände, die uns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können, aber nur als Erscheinungen bekommen; denn nur von diesen sind wir der Anschauung a priori fähig.
그러나 우리 안에서 감각적 직관의 확실한 형식은 선험적으로 기초되기 때문에, 그 형식이 표상능력(감성)의 수용성에 근거하는, 그래서 지성은 자발성으로서 내감을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통하여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적합하게 규정할 수 있고, 그래서 감각적 직관의 잡다들에 대한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선험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조건으로서, 그 아래에서 우리의(인간적인) 직관에 속하는 모든 대상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존립해야만 하는,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범주들이, 순전한 사유형식들로서, 객관적 실재성을, 즉 대상들에 대한 적용을, 그 대상들이 우리에게 직관에서 주어질 수 있는, 그러나 단지 현상들로서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만 우리는 선험적 직관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우리 안에서 표상능력(감성)의 수용성에 근거하는 감각적 직관의 확실한 형식은 선험적으로 기초되기 때문에, 그래서 지성은 자발성으로서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통하여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적합하게 내감을 규정할 수 있고, 그래서 감각적 직관의 잡다들에 대한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그 아래에서 우리의(인간적인) 직관에 속하는 모든 대상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존립해야만 하는 조건으로서 선험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순전한 사유형식들로서 범주들이 객관적 실재성을, 즉 우리에게 직관에서 주어질 수 있는 대상들에 대한 적용을, 그러나 단지 현상들로서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만 우리는 선험적 직관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Dies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die a priori möglich und notwendig ist, kann figürlich (synthesis speciosa) genannt werden, zum Unterschiede von derjenigen, welche in Ansehung des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überhaupt in der bloßen Kategorie gedacht würde, und Verstandesverbindung (synthesis intellectualis) heißt; beide sind transzendental, nicht bloß weil sie selbst a priori vorgehen, sondern auch die Möglichkeit anderer Erkenntnis a priori gründen.
이와 같은 감각적 직관의 잡다에 대한 종합,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필연적인 종합은, 구상적(형상들의 종합)이라 불릴 수 있다, 이와 구별하여, 순전한 범주들 안에서 직관 일반의 잡다와 관련한 것으로 생각될 것, 지성결합 (지성적인 것들의 종합)이라 불린다. 양자 모두 초월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스스로 선험적으로 선행만 하지 않고, 또한 다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근거가 된다.
→ 이와 같은 감각적 직관의 잡다에 대한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필연적인 종합은 구상적(형상들의 종합)이라 불릴 수 있다. 이와 구별하여, 순전한 범주들 안에서 직관 일반의 잡다와 관련하는 것으로 생각될 것은 지성결합 (지성적인 것들의 종합)이라 불린다. 양자 모두 초월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 자체가 순전히 선험적으로 선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근거도 되기 때문이다.

-蟲-
Nimmt man also ein Objekt einer nicht-sinnlichen Anschauung als gegeben an, so kann man es freilich durch alle die Prädikate vorstellen, die schon in der Voraussetzung liegen, daß ihm nichts zur sinnlichen Anschauung Gehöriges zukomme: also, daß es nicht ausgedehnt, oder im Raume sei, daß die Dauer desselben keine Zeit sei, daß in ihm keine Veränderung (Folge der Bestimmungen in der Zeit) angetroffen werde, usw. Allein das ist doch kein eigentliches Erkenntnis, wenn ich bloß anzeige, wie die Anschauung des Objekts nicht sei, ohne sagen zu können, was in ihr denn enthalten sei; denn alsdenn habe ich gar nicht die Möglichkeit eines Objekts zu meinem reinen Verstandesbegriff vorgestellt, weil ich keine Anschauung habe geben können, die ihm korrespondierte, sondern nur sagen konnte, daß die unsrige nicht für ihn gelte. Aber das Vornehmste ist hier, daß auf ein solches Etwas auch nicht einmal eine einzige Kategorie angewandt werden könnte: z.B. der Begriff einer Substanz, d.i. von Etwas, das als Subjekt, niemals aber als bloßes Prädikat existieren könne, wovon ich gar nicht weiß, ob es irgend ein Ding geben könne, das dieser Gedankenbestimmung korrespondierete, wenn nicht empirische Anschauung mir den Fall der Anwendung gäbe. Doch mehr hievon in der Folge.
→ 그러므로 사람들은 비-감성적 직관의 한 대상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대상을 술어들을 통해서 자유로이 표상할 수 있다. 그 술어들은 이미, 그 대상에 감각적 직관에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귀속하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객체는 연장되거나 또는 공간 내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객체의 존속은 시간이 아닐 것이라는, 객체 안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따라서 시간 내에서의 규정들의 변화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등등의 그러한 전제 안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 직관 안에 포함될 어떤 것을 말할 수 없이 내가 순전히 객체의 직관이 아닐 것만을 지시한다면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참된 인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 따라 내가 객체의 가능성을 전혀 나의 순수한 지성개념에 표상하지 못 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지성개념에 상응하는 어떠한 직관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단지 우리의 직관은 개념에 유효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러한 하나의 어떤 것에 대해 또 역시 단 하나의 범주도 적용될 수 없으리란 점이다. 예를 들어 실체의 범주, 즉 그 어떤 것에 대해서 주어일, 그러나 결코 순전한 술어로 현존할 수는 없는 것으로서의 그러한 어떤 것에 대해서, 나는 경험적 직관이 나에게 적용의 상황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대체 이러한 사유규정에 상응하는 하나의 사물을 제시할 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이 뒤에 따른다.


Nimmt man also ein Objekt einer nicht-sinnlichen Anschauung als gegeben an, so kann man es freilich durch alle die Prädikate vorstellen, die schon in der Voraussetzung liegen, daß ihm nichts zur sinnlichen Anschauung Gehöriges zukomme: also, daß es nicht ausgedehnt, oder im Raume sei, daß die Dauer desselben keine Zeit sei, daß in ihm keine Veränderung (Folge der Bestimmungen in der Zeit) angetroffen werde, usw.
그러므로 사람들은 비-감성적 직관의 한 대상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대상을 술어들을 통해서 자유로이 표상할 수 있다, 그 술어들은 이미 그 전제 안에 놓여 있다, 그 대상에 감각적 직관에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귀속하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객체는 연장되거나 또는 공간 내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객체의 존속은 시간이 아닐 것이라는, 객체 안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따라서 시간 내에서의 규정들의 변화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등등.
→ 그러므로 사람들은 비-감성적 직관의 한 대상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대상을 술어들을 통해서 자유로이 표상할 수 있다. 그 술어들은 이미, 그 대상에 감각적 직관에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귀속하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객체는 연장되거나 또는 공간 내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객체의 존속은 시간이 아닐 것이라는, 객체 안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따라서 시간 내에서의 규정들의 변화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등등의 그러한 전제 안에 놓여 있다.
Allein das ist doch kein eigentliches Erkenntnis, wenn ich bloß anzeige, wie die Anschauung des Objekts nicht sei, ohne sagen zu können, was in ihr denn enthalten sei; denn alsdenn habe ich gar nicht die Möglichkeit eines Objekts zu meinem reinen Verstandesbegriff vorgestellt, weil ich keine Anschauung habe geben können, die ihm korrespondierte, sondern nur sagen konnte, daß die unsrige nicht für ihn gelte.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참된 인식도 아니다, 내가 순전히 지시한다면, 객체의 직관이 아닐 것을, 말할 수 없이, 그래서 직관 안에 포함될 어떤 것을; 왜냐하면 그에 따라 내가 객체의 가능성을 전혀 나의 순수한 지성개념에 표상하지 못 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떠한 직관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직관이 지성개념에 상응하는, 오히려 단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직관은 개념에 유효하지 않다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 직관 안에 포함될 어떤 것을 말할 수 없이 내가 순전히 객체의 직관이 아닐 것만을 지시한다면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참된 인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 따라 내가 객체의 가능성을 전혀 나의 순수한 지성개념에 표상하지 못 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지성개념에 상응하는 어떠한 직관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단지 우리의 직관은 개념에 유효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Aber das Vornehmste ist hier, daß auf ein solches Etwas auch nicht einmal eine einzige Kategorie angewandt werden könnte: z.B. der Begriff einer Substanz, d.i. von Etwas, das als Subjekt, niemals aber als bloßes Prädikat existieren könne, wovon ich gar nicht weiß, ob es irgend ein Ding geben könne, das dieser Gedankenbestimmung korrespondierete, wenn nicht empirische Anschauung mir den Fall der Anwendung gäbe.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러한 하나의 어떤 것에 대해 또 역시 단 하나의 범주도 적용될 수 없으리란 점이다: 예를 들어 실체의 개념, 즉 어떤 것에 대해서, 주어인 것으로서, 그러나 결코 순전한 술어로 현존할 수는 없는 것으로서, 그에 대해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것이 도대체 하나의 사물을 제시할 수 있을지, 그 사물이 이러한 사유규정에 상응하는, 경험적 직관이 나에게 적용의 상황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러한 하나의 어떤 것에 대해 또 역시 단 하나의 범주도 적용될 수 없으리란 점이다. 예를 들어 실체의 범주, 즉 그 어떤 것에 대해서 주어일, 그러나 결코 순전한 술어로 현존할 수는 없는 것으로서의 그러한 어떤 것에 대해서, 나는 경험적 직관이 나에게 적용의 상황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대체 이러한 사유규정에 상응하는 하나의 사물을 제시할 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Doch mehr hievon in der Folge.
이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이 뒤에 따른다.
→ 이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이 뒤에 따른다.

-蟲-
§ 23.

Der obige Satz ist von der größten Wichtigkeit; denn er bestimmt eben sowohl die Grenzen des Gebrauchs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in Ansehung der Gegenstände, als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die Grenzen des Gebrauchs der reinen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bestimmte. Raum und Zeit gelten, als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wie uns Gegenstände gegeben werden können, nicht weiter, als für Gegenstände der Sinne, mithin nur der Erfahrung. Über diese Grenzen hinaus stellen sie gar nichts vor; denn sie sind nur in den Sinnen und haben außer ihnen keine Wirklichkeit.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sind von dieser Einschränkung frei, und erstrecken sich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überhaupt, sie mag der unsrigen ähnlich sein oder nicht, wenn sie nur sinnlich und nicht intellektuell ist. Diese weitere Ausdehnung der Begriffe über unsere sinnliche Anschauung hinaus, hilft uns aber zu nichts. Denn es sind alsdenn leere Begriffe von Objekten, von denen, ob sie nur einmal möglich sind oder nicht, wir durch jene gar nicht urteilen können, bloße Gedankenformen ohne objektive Realität, weil wir keine Anschauung zur Hand haben, auf welche di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ie jene allein enthalten, angewandt werden, und sie so einen Gegenstand bestimmen könnten. Unsere sinnliche und empirische Anschauung kann ihnen allein Sinn und Bedeutung verschaffen.
→ 위의 명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대상들과 관련하여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을 사용함에 있어서의 한계들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우리들의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한계들도 규정하기 때문이다.→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들로서 감관의 대상들, 따라서 오로지 경험을 넘어서서는 유효하지 않다.→ 이러한 한계들을 뛰어 넘어서서는 공간과 시간이 전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단지 감관 안에만 있으며 감관 외부에서는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상들이 감각적일 뿐 지성적이지는 않을 때, 순수 지성개념들은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고, 우리들의 대상들과 유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까지 확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들의 감각적 직관을 뛰어 넘어서는 개념들의 더 넓은 확장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객체에 대한 공허한 개념들, 그 개념들에 대해서, 그 개념들이 단지 한 번만 가능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가 저 개념들을 통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는 개념들이 있다는 것, 즉 객관적 현실성이 없는 순수한 사유형식들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 개념들을 홀로 포함하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 적용되고 그렇게 개념들이 하나의 대상을 규정할 수 있을 아무런 직관도 확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직관만이 개념들에 의미와 지시체를 제공할 수 있다.

Der obige Satz ist von der größten Wichtigkeit; denn er bestimmt eben sowohl die Grenzen des Gebrauchs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in Ansehung der Gegenstände, als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die Grenzen des Gebrauchs der reinen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bestimmte.
위의 명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대상들과 관련하여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을 사용함에 있어서의 한계들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우리들의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한계들도 규정하기 때문이다.
→ 위의 명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대상들과 관련하여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을 사용함에 있어서의 한계들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우리들의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한계들도 규정하기 때문이다.
Raum und Zeit gelten, als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wie uns Gegenstände gegeben werden können, nicht weiter, als für Gegenstände der Sinne, mithin nur der Erfahrung.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들로서 감관의 대상들, 따라서 오로지 경험을 넘어서서는 유효하지 않다.
→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들로서 감관의 대상들, 따라서 오로지 경험을 넘어서서는 유효하지 않다.
Über diese Grenzen hinaus stellen sie gar nichts vor; denn sie sind nur in den Sinnen und haben außer ihnen keine Wirklichkeit.
이러한 한계들을 뛰어 넘어서서는 공간과 시간이 전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단지 감관 안에만 있으며 감관 외부에서는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 이러한 한계들을 뛰어 넘어서서는 공간과 시간이 전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단지 감관 안에만 있으며 감관 외부에서는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sind von dieser Einschränkung frei, und erstrecken sich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überhaupt, sie mag der unsrigen ähnlich sein oder nicht, wenn sie nur sinnlich und nicht intellektuell ist.
순수 지성개념들은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고,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까지 확장한다, 그 대상들이 우리들의 대상들과 유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그 대상들이 감각적일 뿐 지성적이지는 않을 때.
→ 그 대상들이 감각적일 뿐 지성적이지는 않을 때, 순수 지성개념들은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고, 우리들의 대상들과 유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까지 확장한다.
Diese weitere Ausdehnung der Begriffe über unsere sinnliche Anschauung hinaus, hilft uns aber zu nichts.
우리들의 감각적 직관을 뛰어 넘어서는 이와 같은 개념들의 더 넓은 확장은 하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들의 감각적 직관을 뛰어 넘어서는 개념들의 더 넓은 확장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Denn es sind alsdenn leere Begriffe von Objekten, von denen, ob sie nur einmal möglich sind oder nicht, wir durch jene gar nicht urteilen können, bloße Gedankenformen ohne objektive Realität, weil wir keine Anschauung zur Hand haben, auf welche di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ie jene allein enthalten, angewandt werden, und sie so einen Gegenstand bestimmen könnten.
왜냐하면 그것은 곧 객체에 대한 공허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그 개념들에 대해서, 그 개념들이 단지 한 번만 가능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가 저 개념들을 통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는, 객관적 현실성이 없는 순수한 사유형식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런 직관도 확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직관에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 그 통일만이 저 개념들을 포함하는, 적용되는, 그리고 그 개념들이 그렇게 하나의 대상을 규정할 수 있을.
→ 왜냐하면 그것은 곧 객체에 대한 공허한 개념들, 그 개념들에 대해서, 그 개념들이 단지 한 번만 가능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가 저 개념들을 통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는 개념들이 있다는 것, 즉 객관적 현실성이 없는 순수한 사유형식들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 개념들을 홀로 포함하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 적용되고 그렇게 개념들이 하나의 대상을 규정할 수 있을 아무런 직관도 확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Unsere sinnliche und empirische Anschauung kann ihnen allein Sinn und Bedeutung verschaffen.
우리들의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직관만이 개념들에 의미와 지시체를 제공할 수 있다.
→ 우리들의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직관만이 개념들에 의미와 지시체를 제공할 수 있다.

-蟲-
§ 22.
Die Kategorie hat keinen andern Gebrauch zum Erkenntnisse der Dinge, als ihre Anwendung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범주들은 사물들을 인식하기 위한 다른 어떠한 용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범주들을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하는 이외에.
→ 범주들은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되는 것 이외의는 사물들을 인식하기 위한 다른 어떠한 용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Sich einen Gegenstand denken, und einen Gegenstand erkennen, ist also nicht einerlei. Zum Erkenntnisse gehören nämlich zwei Stücke: erstlich der Begriff, dadurch überhaupt ein Gegenstand gedacht wird (die Kategorie), und zweitens die Anschauung, dadurch er gegeben wird; denn, könnte dem Begriffe eine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gar nicht gegeben werden, so wäre er ein Gedanke der Form nach, aber ohne allen Gegenstand, und durch ihn gar keine Erkenntnis von irgend einem Dinge möglich; weil es, so viel ich wüßte, nichts gäbe, noch geben könnte, worauf mein Gedanke angewandt werden könne. Nun ist alle uns mögliche Anschauung sinnlich (Ästhetik), also kann das Denken eines Gegenstandes überhaupt durch einen reinen Verstandesbegriff bei uns nur Erkenntnis werden, so fern dieser auf Gegenstände der Sinne bezogen wird. Sinnliche Anschauung ist entweder reine Anschauung (Raum und Zeit) oder empirische Anschauung desjenigen, was im Raum und der Zeit unmittelbar als wirklich, durch Empfindung, vorgestellt wird. Durch Bestimmung der ersteren können wir Erkenntnisse a priori von Gegenständen (in der Mathematik) bekommen, aber nur ihrer Form nach, als Erscheinungen; ob es Dinge geben könne, die noch unausgemacht. Folglich sind alle mathematische Begriffe für sich nicht Erkenntnisse; außer, so fern man voraussetzen, daß es Dinge gibt, die sich nur der Form jener reinen sinnlichen Anschauung gemäß uns darstellen lassen. Dinge im Raum und der Zeit werden aber nur gegeben, so fern sie Wahrnehmungen (mit Empfindung begleitete Vorstellungen) sind, mithin durch empirische Vorstellung. Folglich verschaffen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selbst wenn sie auf Anschauungen a priori (wie in der Mathematik) angewandt werden, nur so fern Erkenntnis, als diese, mithin auch die Verstandesbegriffe vermittelst ihrer, auf empirische Anschauungen angewandt werden können. Folglich liefern uns die Kategorien vermittelst der Anschauung auch keine Erkenntnis von Dingen, als nur durch ihre mögliche Anwendung auf empirische Anschauung, d.i. sie dienen nur zur Möglichkeit empirischer Erkenntnis. Diese aber heißt Erfahrung. Folglich haben die Kategorien keinen anderen Gebrauch zum Erkenntnisse der Dinge, als nur so fern diese als Gegenstände möglicher Erfahrung angenommen werden.
→ 그러므로 범주들이 대상을 사유하는 것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같지 않다.→ 다시 말해 인식에 속하는 것은 두 가지 부문들이다. 첫째는 개념이다. 그를 통하여 대상 일반이 사유된다(범주들). 두 번째는 직관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상응하는 직관이 개념에 전혀 주어질 수 없다면, 그 개념은 형식에 따른 사유일 것이나, 모든 대상과 전혀 무관한 사유일 것이며, 그 개념을 통해서 어떤 사물에 대한 것이든 전혀 아무런 인식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유는, 내가 아는 바로는, 그에 대해 나의 사유가 적용될 수 있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제공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직관은 감성적이다 (감성학). 그러므로 대상 일반에 대한 사유는, 이러한 개념이 감각의 대상들에 관계되는 한에서 순수한 지성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있어서 인식될 수 있을 따름이다.→ 감성적 직관은 순수 직관(공간과 시간)이거나, 공간과 시간 안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서 직접 지각을 통해서 표상되는 어떤 것에 속하는 경험적 직관이다.→ 전자의 규정을 통하여 우리는 (수학에 있어서)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들을 얻을 수 있지만, 단지 그 대상들의 형식에 따라서만,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사물들이 있을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결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수학적 개념들은, 사람들이 저 순수한 감성적 직관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적합하게 나타날 수 있는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는 인식들이 아니다.→ 그러나 사물들은, 그 사물들이 지각들(감각을 수반하는 표상들)인 한에서, 따라서 경험적 표상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 안에서만 주어진다.→ 그래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그 자체로 그 개념들이 선험적 직관들에 (수학에서와 같이) 적용될 때조차, 그러므로 또한 지성개념들이 그 선험적 직관들을 가지고, 경험적 직관들에 적용될 수 있는 오로지 이러한 한에서만 인식을 마련해 준다.→ 따라서 범주들은, 경험적 직관에 대한 그 범주들의 가능한 적용을 통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즉 그 범주들이 경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이바지하는 것 이외에는 직관을 가지고 또한 대상들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경험이라 불린다.→ 따라서 범주들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 이러한 사용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로서 수용되는 그러한 경우 외에는 다른 어떠한 용도도 가지지 않는다.


Sich einen Gegenstand denken, und einen Gegenstand erkennen, ist also nicht einerlei.
그러므로 범주들이 대상을 사유하는 것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같지 않다.
→ 그러므로 범주들이 대상을 사유하는 것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같지 않다.
Zum Erkenntnisse gehören nämlich zwei Stücke: erstlich der Begriff, dadurch überhaupt ein Gegenstand gedacht wird (die Kategorie), und zweitens die Anschauung, dadurch er gegeben wird; denn, könnte dem Begriffe eine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gar nicht gegeben werden, so wäre er ein Gedanke der Form nach, aber ohne allen Gegenstand, und durch ihn gar keine Erkenntnis von irgend einem Dinge möglich; weil es, so viel ich wüßte, nichts gäbe, noch geben könnte, worauf mein Gedanke angewandt werden könne.
다시 말해 인식에 속하는 것은 두 가지 부문들이다: 첫째로 개념은, 그를 통하여 대상 일반이 사유되고(범주들), 두 번째로 직관은,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상응하는 직관이 개념에 전혀 주어질 수 없다면, 그 개념은 형식에 따른 사유일 것이나, 모든 대상이 전혀 없이, 그리고 그 개념을 통해 무엇이 되었든 사물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인식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아는 바로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제공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나의 사유가 적용될 수 있는.
→ 다시 말해 인식에 속하는 것은 두 가지 부문들이다. 첫째는 개념이다. 그를 통하여 대상 일반이 사유된다(범주들). 두 번째는 직관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상응하는 직관이 개념에 전혀 주어질 수 없다면, 그 개념은 형식에 따른 사유일 것이나, 모든 대상과 전혀 무관한 사유일 것이며, 그 개념을 통해서 어떤 사물에 대한 것이든 전혀 아무런 인식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유는, 내가 아는 바로는, 그에 대해 나의 사유가 적용될 수 있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제공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Nun ist alle uns mögliche Anschauung sinnlich (Ästhetik), also kann das Denken eines Gegenstandes überhaupt durch einen reinen Verstandesbegriff bei uns nur Erkenntnis werden, so fern dieser auf Gegenstände der Sinne bezogen wird.
이제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직관은 감성적이다 (감성학), 그러므로 대상 일반에 대한 사유는 순수한 지성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있어서 인식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개념이 감각의 대상들에 관계되는 한에서.
→ 이제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직관은 감성적이다 (감성학). 그러므로 대상 일반에 대한 사유는, 이러한 개념이 감각의 대상들에 관계되는 한에서 순수한 지성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있어서 인식될 수 있을 따름이다.
Sinnliche Anschauung ist entweder reine Anschauung (Raum und Zeit) oder empirische Anschauung desjenigen, was im Raum und der Zeit unmittelbar als wirklich, durch Empfindung, vorgestellt wird.
감성적 직관은 순수 직관(공간과 시간)이거나 다음과 같은 것의 경험적 직관이다, 공간과 시간 안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서 직접 지각을 통해서 표상되는 어떤 것의.
→ 감성적 직관은 순수 직관(공간과 시간)이거나, 공간과 시간 안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서 직접 지각을 통해서 표상되는 어떤 것에 속하는 경험적 직관이다.
Durch Bestimmung der ersteren können wir Erkenntnisse a priori von Gegenständen (in der Mathematik) bekommen, aber nur ihrer Form nach, als Erscheinungen; ob es Dinge geben könne, die noch unausgemacht.
전자의 규정을 통하여 우리는 (수학에 있어서)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들을 얻을 수 있지만, 단지 그 대상들의 형식에 따라서만,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사물들이 있을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결정되지 않는다.
→ 전자의 규정을 통하여 우리는 (수학에 있어서)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들을 얻을 수 있지만, 단지 그 대상들의 형식에 따라서만,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사물들이 있을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결정되지 않는다.
Folglich sind alle mathematische Begriffe für sich nicht Erkenntnisse; außer, so fern man voraussetzen, daß es Dinge gibt, die sich nur der Form jener reinen sinnlichen Anschauung gemäß uns darstellen lassen.
따라서 모든 수학적 개념들은 그 자체로는 인식들이 아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누군가 가정하는 한, 사물이 있다고, 그 사물이 저 순수한 감성적 직관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적합하게 나타날 수 있는.
→ 따라서 모든 수학적 개념들은, 사람들이 저 순수한 감성적 직관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적합하게 나타날 수 있는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는 인식들이 아니다.
Dinge im Raum und der Zeit werden aber nur gegeben, so fern sie Wahrnehmungen (mit Empfindung begleitete Vorstellungen) sind, mithin durch empirische Vorstellung.
그러나 사물들은 공간과 시간 안에서만 주어진다, 그 사물들이 지각들 (감각을 수반하는 표상들) 인 한에서, 따라서 경험적 표상을 통해서.
→ 그러나 사물들은, 그 사물들이 지각들(감각을 수반하는 표상들)인 한에서, 따라서 경험적 표상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 안에서만 주어진다.
Folglich verschaffen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selbst wenn sie auf Anschauungen a priori (wie in der Mathematik) angewandt werden, nur so fern Erkenntnis, als diese, mithin auch die Verstandesbegriffe vermittelst ihrer, auf empirische Anschauungen angewandt werden können.
그래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마련해 준다, 그 자체로 그 개념들이 선험적 직관들에 (수학에서와 같이) 적용될 때조차, 인식을, 오로지 이러한 한에서, 그러므로 또한 지성개념들이 그 선험적 직관들을 가지고, 경험적 직관들에 적용될 수 있는.
→ 그래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그 자체로 그 개념들이 선험적 직관들에 (수학에서와 같이) 적용될 때조차, 그러므로 또한 지성개념들이 그 선험적 직관들을 가지고, 경험적 직관들에 적용될 수 있는 오로지 이러한 한에서만 인식을 마련해 준다.
Folglich liefern uns die Kategorien vermittelst der Anschauung auch keine Erkenntnis von Dingen, als nur durch ihre mögliche Anwendung auf empirische Anschauung, d.i. sie dienen nur zur Möglichkeit empirischer Erkenntnis.
따라서 범주들은 직관을 가지고 또한 대상들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경험적 직관에 대한 그 범주들의 가능한 적용을 통해서만, 즉 그 범주들이 경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이바지하는 한에서만 제외하고.
→ 따라서 범주들은, 경험적 직관에 대한 그 범주들의 가능한 적용을 통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즉 그 범주들이 경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이바지하는 것 이외에는 직관을 가지고 또한 대상들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Diese aber heißt Erfahrung.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경험이라 불린다.
→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경험이라 불린다.
Folglich haben die Kategorien keinen anderen Gebrauch zum Erkenntnisse der Dinge, als nur so fern diese als Gegenstände möglicher Erfahrung angenommen werden.
따라서 범주들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다른 어떠한 용도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용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로서 수용되는 그러한 한에서만 외에는.
→ 따라서 범주들은, 이러한 사용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로서 수용되는 그러한 경우 외에는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다른 어떠한 용도도 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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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in von einem Stücke konnte ich im obigen Beweise doch nicht abstrahieren, nämlich davon, daß das Mannigfaltige für die Anschauung noch vor der Synthesis des Verstandes, und unabhängig von ihr, gegeben sein müsse; wie aber, bleibt hier unbestimmt. Denn, wollte ich mir einen Verstand denken, der selbst anschauet )wie etwa einen göttlichen, der nicht gegebene Gegenstände sich vorstellete, sondern durch dessen Vorstellung die Gegestände selbst zugleich gegeben, oder hervorgebracht würden), so würden die Kategorien in Ansehung eines solchen Erkenntnisse gar keine Bedeutung haben. Sie sind nur Regeln für einen Verstand, dessen ganzes Vermögen im Denken besteht, d.i. in der Handlung, di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welches ihm anderweitig in der Anschauung gegeben worden, zur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der also für sich gar nichts erkennt, sondern nur den Stoff zum Erkenntnis, die Anschauung, die ihm durchs Objekt gegeben werden muß, verbindet und ordnet. Von der Eigentümlichkeit unsers Verstandes aber, nur vermittelst der Kategorien und nur nur gerade durch diese Art und Zahl derselben Einheit der Apperzeption a priori zu Stande zu bringen, läßt sich eben so wenig ferner ein Grund angeben, als warum wir gerade diese und keine andere Funktionen zu Urteilen haben, oder warum Zeit und Raum die einzigen Formen unserer möglichen Anschauung sind.
→ 오로지 그 부문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에 대해서, 잡다가 직관에 대해 지성의 종합에 앞서서, 그리고 그 종합과 독립적으로,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내가 위의 방식에서 도외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지는 여기에서는 규정되지 않고 남는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직관하는 지성(신적인 지성과 같은 어떤 것처럼, 그 지성이 주어진 대상들을 그 자신에게 표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서 대상들 자체를 동시에 주어지거나 또는 산출되는)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인식들과 관련하여 범주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범주들은 단지, 그 모든 능력들이 사유 속에, 즉,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직관에서 지성에 주어지는 그러한 잡다를 종합함을 통각의 통일로 가져오는 그 작용 속에 존립하는 그러한 지성에 대한 규칙들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그 자체로는 전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인식의 재료를, 대상을 통하여 주어져야만 하는 직관만을 결합하고 질서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지성의 특징에 대해서, 단지 범주들만을 가지고 오로지 곧장 이러한 방식과 그 범주들의 수를 통해서 통각의 통일을 성립시킨다는 것이 그 이상의 근거를 지시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고, 왜 우리가 직접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판단들의 기능들을 가지는지, 또는 왜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들인지도 그 이상의 근거를 제시토록 하진 않을 것이다.


Allein von einem Stücke konnte ich im obigen Beweise doch nicht abstrahieren, nämlich davon, daß das Mannigfaltige für die Anschauung noch vor der Synthesis des Verstandes, und unabhängig von ihr, gegeben sein müsse; wie aber, bleibt hier unbestimmt.
오로지 그 부문에 대해서만 나는 위의 방식에서 도외시하지 않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에 대해서, 잡다가 직관에 대해 지성의 종합에 앞서서, 그리고 그 종합과 독립적으로,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지는 여기에서는 규정되지 않고 남는다.
→ 오로지 그 부문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에 대해서, 잡다가 직관에 대해 지성의 종합에 앞서서, 그리고 그 종합과 독립적으로,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내가 위의 방식에서 도외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지는 여기에서는 규정되지 않고 남는다.
Denn, wollte ich mir einen Verstand denken, der selbst anschauet (wie etwa einen göttlichen, der nicht gegebene Gegenstände sich vorstellete, sondern durch dessen Vorstellung die Gegestände selbst zugleich gegeben, oder hervorgebracht würden), so würden die Kategorien in Ansehung eines solchen Erkenntnisse gar keine Bedeutung haben.
왜냐하면, 내가 지성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스스로 직관하는 (신적인 지성과 같은 어떤 것처럼, 그 지성이 주어진 대상들을 그 자신에게 표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서 대상들 자체를 동시에 주어지거나 또는 산출되는), 그러면 그러한 인식들과 관련하여 범주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직관하는 지성(신적인 지성과 같은 어떤 것처럼, 그 지성이 주어진 대상들을 그 자신에게 표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서 대상들 자체를 동시에 주어지거나 또는 산출되는)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인식들과 관련하여 범주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Sie sind nur Regeln für einen Verstand, dessen ganzes Vermögen im Denken besteht, d.i. in der Handlung, di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welches ihm anderweitig in der Anschauung gegeben worden, zur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der also für sich gar nichts erkennt, sondern nur den Stoff zum Erkenntnis, die Anschauung, die ihm durchs Objekt gegeben werden muß, verbindet und ordnet.
그 범주들은 단지 지성에 대한 규칙들이다, 그 지성의 모든 능력들이 사유 속에 존립하는, 즉 작용 속에 존립하는, 잡다의 종합을, 그 잡다가 직관에서 지성에 다른 어디에서부터 주어지는, 통각의 통일로 가져오는, 그러므로 지성이 그 자체로는 전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인식의 재료를, 직관을, 대상을 통하여 주어져야만 하는, 결합하고 질서지우는.
→ 그 범주들은 단지, 그 모든 능력들이 사유 속에, 즉,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직관에서 지성에 주어지는 그러한 잡다를 종합함을 통각의 통일로 가져오는 그 작용 속에 존립하는 그러한 지성에 대한 규칙들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그 자체로는 전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인식의 재료를, 대상을 통하여 주어져야만 하는 직관만을 결합하고 질서지우는 것이다.
Von der Eigentümlichkeit unsers Verstandes aber, nur vermittelst der Kategorien und nur gerade durch diese Art und Zahl derselben Einheit der Apperzeption a priori zu Stande zu bringen, läßt sich eben so wenig ferner ein Grund angeben, als warum wir gerade diese und keine andere Funktionen zu Urteilen haben, oder warum Zeit und Raum die einzigen Formen unserer möglichen Anschauung sind.
그러나 우리 지성의 특징에 대해서, 단지 범주들만을 가지고 오로지 곧장 이러한 방식과 그 범주들의 수를 통해서 통각의 통일을 성립시킨다는 것, 그 이상의 근거를 지시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고, 왜 우리가 직접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판단들의 기능들을 가지는지, 또는 왜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들인지도.
→ 그러나 우리 지성의 특징에 대해서, 단지 범주들만을 가지고 오로지 곧장 이러한 방식과 그 범주들의 수를 통해서 통각의 통일을 성립시킨다는 것이 그 이상의 근거를 지시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고, 왜 우리가 직접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판단들의 기능들을 가지는지, 또는 왜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들인지도 그 이상의 근거를 제시토록 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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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Anmerkung
주해

Ein Mannigfaltiges, das in einer Anschauung, die ich die meinige nenne, enthalten ist, wird durch die Synthesis des Verstandes als zur notwendigen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gehörig vorgestellt, und dieses geschieht durch die Kategorie¹. Diese zeigt also an: daß das empirische Bewußtsein eines gegebenen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eben sowohl unter einem reinen Selbstbewußtsein a priori, wie empirische Anschauung unter einer reinen sinllichen, die gleichfalls a priori Statt hat, stehe. - Im obigen Satze ist also der Anfang ein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gemacht, in welcher ich, da die Kategorien unabhängig von Sinnlichkeit bloß im Verstande entspringen, noch von der Art, wie das Mannigfaltige zu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gegeben werde, abstrahieren muß, um nur auf die Einheit, die in die Anschauung vermittelst der Kategorie durch den Verstand hinzukommt, zu sehen. In der Folge (§ 26.) wird aus der Art, wie in der Sinnlichkeit die empirische Anschauung gegeben wird, gezeigt werden, daß die Einheit derselben keine andere sei, als welche die Kategorie nach dem vorigen § 20. dem Mannigfaltigen einer gegebenen Anschauung überhaupt vorschreibt, und dadurch also, daß ihre Gültigkeit a priori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unserer Sinne erklärt wird, die Absicht der Deduktion allererst völlig erreicht werden.
→ 내가 나의 직관이라 이름하는 하나의 직관 안에 포함되는 잡다는 지성의 종합을 통하여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에 속하는 것으로 표상되고, 이러한 것은 범주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이것은 그러므로 단일한 직관의 주어진 잡다에 대한 경험적 의식이, 경험적 직관이 마찬가지로 선험적 자리를 가지는 순수한 감성 형식들 아래에서 그러하듯, 순수한 자기의식 아래에서 선험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그러므로 앞선 명제에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대한 연역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그 연역에서 나는, 범주들이 감성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지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오로지 지성을 통해 범주를로써 직관 안에 부가되는 통일에 대해서만 주목하기 위해서, 또한 잡다가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방식을 도외시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감성에서 경험적 직관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 26.)으로, 그와 같은 통일이 범주들이 바로 전 § 20.에 따라서 주어진 직관 일반의 잡다에 따라 제공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통일의 선험적 정당성이 우리 감관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해명됨으로써, 연역의 의도가 처음으로 충분하게 성취된다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¹Der Beweisgrund beruht auf der vorgestellten Einheit der Anschauung, dadurch ein Gegenstand gegeben wird, welche jederzeit ein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zu einer Anschauung Gegebenen in sich schließt, und schon die Beziehung dieses letzteren auf Einheit der Apperzeption enthält.
→ ¹그 논증은, 그를 통하여 대상이 주어지는, 항상 직관에 주어진 잡다의 종합을 수반하는, 그러한 직관의 표상된 통일성에 근거하고, 그리고 이러한 통각의 통일에 대한 주어진 잡다의 관계를 이미 포함할 것이다.


Ein Mannigfaltiges, das in einer Anschauung, die ich die meinige nenne, enthalten ist, wird durch die Synthesis des Verstandes als zur notwendigen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gehörig vorgestellt, und dieses geschieht durch die Kategorie¹.
잡다는, 그 잡다가 하나의 직관 안에, 내가 나의 직관이라 이름하는 직관 안에, 포함되는 잡다는, 지성의 종합을 통하여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에 속하는 것으로 표상되고, 이러한 것은 범주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 내가 나의 직관이라 이름하는 하나의 직관 안에 포함되는 잡다는 지성의 종합을 통하여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에 속하는 것으로 표상되고, 이러한 것은 범주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Diese zeigt also an: daß das empirische Bewußtsein eines gegebenen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eben sowohl unter einem reinen Selbstbewußtsein a priori, wie empirische Anschauung unter einer reinen sinllichen, die gleichfalls a priori Statt hat, stehe.
이것은 그러므로 가리킨다: 단일한 직관의 주어진 잡다에 대한 경험적 의식이 순수한 자기의식 아래에서 선험적으로, 경험적 직관이 순수한 감성 형식들 아래에서, 그것이 마찬가지로 선험적 자리를 가지는, 존립한다는 것.
→ 이것은 그러므로 단일한 직관의 주어진 잡다에 대한 경험적 의식이, 경험적 직관이 마찬가지로 선험적 자리를 가지는 순수한 감성 형식들 아래에서 그러하듯, 순수한 자기의식 아래에서 선험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Im obigen Satze ist also der Anfang ein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gemacht, in welcher ich, da die Kategorien unabhängig von Sinnlichkeit bloß im Verstande entspringen, noch von der Art, wie das Mannigfaltige zu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gegeben werde, abstrahieren muß, um nur auf die Einheit, die in die Anschauung vermittelst der Kategorie durch den Verstand hinzukommt, zu sehen.
- 앞선 명제에서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대한 연역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그 연역에서 나는, 범주들이 감성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지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또한 잡다가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는 되이시해야만 한다, 오로지 통일에 대해서, 그 통일이 지성을 통해 범주를로써 직관 안에 부가되는, 보기 위해서.
→ - 그러므로 앞선 명제에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대한 연역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그 연역에서 나는, 범주들이 감성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지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오로지 지성을 통해 범주를로써 직관 안에 부가되는 통일에 대해서만 주목하기 위해서, 또한 잡다가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방식을 도외시해야만 한다.
In der Folge (§ 26.) wird aus der Art, wie in der Sinnlichkeit die empirische Anschauung gegeben wird, gezeigt werden, daß die Einheit derselben keine andere sei, als welche die Kategorie nach dem vorigen § 20. dem Mannigfaltigen einer gegebenen Anschauung überhaupt vorschreibt, und dadurch also, daß ihre Gültigkeit a priori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unserer Sinne erklärt wird, die Absicht der Deduktion allererst völlig erreicht werden.
결론적으로 감성에서 경험적 직관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 26.)으로, 지시된다, 그와 같은 통일이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 범주들이 그에 따라 바로 전 § 20.에서 주어진 직관 일반의 잡다에 따라 제공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러므로, 그 통일의 선험적 정당성이 우리 감관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해명되는 것, 연역의 의도가 처음으로 충분하게 성취된다.
→ 결론적으로 감성에서 경험적 직관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 26.)으로, 그와 같은 통일이 범주들이 바로 전 § 20.에 따라서 주어진 직관 일반의 잡다에 따라 제공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통일의 선험적 정당성이 우리 감관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해명됨으로써, 연역의 의도가 처음으로 충분하게 성취된다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¹Der Beweisgrund beruht auf der vorgestellten Einheit der Anschauung, dadurch ein Gegenstand gegeben wird, welche jederzeit ein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zu einer Anschauung Gegebenen in sich schließt, und schon die Beziehung dieses letzteren auf Einheit der Apperzeption enthält.
¹그 논증은 직관의 표상된 통일성에 근거하고, 그를 통하여 대상이 주어지는, 항상 직관에 주어진 잡다의 종합을 수반하는, 그리고 이러한 후자의 관계가 이미 통각의 통일에 대해 포함할 것이다.
→ ¹그 논증은, 그를 통하여 대상이 주어지는, 항상 직관에 주어진 잡다의 종합을 수반하는, 그러한 직관의 표상된 통일성에 근거하고, 그리고 이러한 통각의 통일에 대한 주어진 잡다의 관계를 이미 포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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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Alle sinnliche Anschauungen stehen unter den Kategorien, als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das Mannigfaltige derselben in ein Bewußtsein zusammenkommen kann
모든 감각적 직관들은 범주들 아래에, 그것들 아래에서만 그 직관의 잡다가 하나의 의식 속으로 함께 들어올 수 있는 그러한 조건들로서의 범주들 아래에서 자리한다

Das mannigfaltige in einer sinnlichen Anscahuung Gegebene gehört notwendig unter die ursprünglich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weil durch diese die Einheit der Anschauung allein möglich ist. (§ 17.) Diejenige Handlung des Verstandes aber, durch die das Mannigfaltige gegebener Vorstellungen (sie mögen Anschauungen oder Begriffe sein) unter eine Apperzeption überhaupt gebracht wird, ist die logische Funktion der Urteils. (§ 19.) Also ist alles Mannigfaltige, so fern es in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gegeben ist, in Ansehung einer der logischen Funktionen zu urteilen bestimmt, durch die es nämlich zu einem Bewußtsein überhaupt gebracht wird. Nun sind aber die Kategorien nichts andres, als eben diese Funktionen zu urteilen, so fern das Mannigfaltige einer gegebenen Anschauung in Ansehung ihrer bestimmt ist. (§ 13.) Also steht auch das Mannigfaltige in einer gegebenen Anschauung notwendig unter Kategorien.
→ 감각적 직관 안에서 잡다로서 주어진 것은 필연적으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 아래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이 통일을 통해서만 직관의 통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17.)→ 그러나 지성의 저 활동, 그를 통하여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가 (그 표상들은 직관들이거나 개념들일 수 있다) 어쨌든 하나의 통각 아래에로 이끌릴 수 있는 그러한 활동은 판단의 논리적 기능이다. (§ 19.) → 그러므로 모든 잡다는, 하나 안에 감각적 직관이 주어지는 한에서, 판단을 위한 논리적 기능, 그를 통하여 잡다가 말하자면 의식 일반으로 이끌리는 그러한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된다.→ 그러나 이제 범주들은,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그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되는 한에서, 바로 이러한 판단하는 기능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직관 안에서 잡다 역시 필연적으로 범주들 아래에 선다.


Das mannigfaltige in einer sinnlichen Anscahuung Gegebene gehört notwendig unter die ursprünglich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weil durch diese die Einheit der Anschauung allein möglich ist. (§ 17.)
감각적 직관 안에서 잡다로서 주어진 것은 필연적으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 아래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이 통일을 통해서만 직관의 통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17.)
→ 감각적 직관 안에서 잡다로서 주어진 것은 필연적으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 아래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이 통일을 통해서만 직관의 통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17.)
Diejenige Handlung des Verstandes aber, durch die das Mannigfaltige gegebener Vorstellungen (sie mögen Anschauungen oder Begriffe sein) unter eine Apperzeption überhaupt gebracht wird, ist die logische Funktion der Urteils. (§ 19.)
그러나 지성의 저 활동은, 그 활동을 통하여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가 (그 표상들은 직관들이거나 개념들일 수 있다) 어쨌든 하나의 통각 아래에로 이끌릴 수 있는, 판단의 논리적 기능이다. (§ 19.)
→ 그러나 지성의 저 활동, 그를 통하여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가 (그 표상들은 직관들이거나 개념들일 수 있다) 어쨌든 하나의 통각 아래에로 이끌릴 수 있는 그러한 활동은 판단의 논리적 기능이다. (§ 19.)
Also ist alles Mannigfaltige, so fern es in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gegeben ist, in Ansehung einer der logischen Funktionen zu urteilen bestimmt, durch die es nämlich zu einem Bewußtsein überhaupt gebracht wird.
그러므로 모든 잡다는, 하나 안에 감각적 직관이 주어지는 한에서, 판단을 위한 논리적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된다, 그 기능을 통하여 잡다가 말하자면 의식 일반으로 이끌리는.
→ 그러므로 모든 잡다는, 하나 안에 감각적 직관이 주어지는 한에서, 판단을 위한 논리적 기능, 그를 통하여 잡다가 말하자면 의식 일반으로 이끌리는 그러한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된다.
Nun sind aber die Kategorien nichts andres, als eben diese Funktionen zu urteilen, so fern das Mannigfaltige einer gegebenen Anschauung in Ansehung ihrer bestimmt ist. (§ 13.)
그러나 이제 범주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이러한 판단하는 기능들 이외에,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그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되는 한에서.
→ 그러나 이제 범주들은,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그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되는 한에서, 바로 이러한 판단하는 기능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Also steht auch das Mannigfaltige in einer gegebenen Anschauung notwendig unter Kategorien.
그러므로 주어진 직관 안에서 잡다 역시 필연적으로 범주들 아래에 선다.
→ 그러므로 주어진 직관 안에서 잡다 역시 필연적으로 범주들 아래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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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nn ich aber die Beziehung gegebener Erkenntnisse in jedem Urteile genauer untersuche, und sie, als dem Verstande angehörige, von dem Verhältnisse nach Gesetzen der reproduktiven Einbildungskraft (welches nur subjektive Gültigkeit hat) unterscheide, so finde ich, daß ein Urteil nichts andres sei, als die Art, gegebene Erkenntnisse zur objektiven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Darauf zielt das Verhältniswörtchen ist in denselben, um die objektive Einheit gegebener Vorstellungen von der subjektiven zu unterscheiden. Denn dieses bezeichnet die Beziehung derselben auf die ursprüngliche Apperzeption und die notwendige Einheit derselben, wenn gleich das Urteil selbst empirisch, mithin zufällig ist, z.B. die Körper sind schwer. Damit ich zwar nicht sagen will, diese Vorstellungen gehören in der empirischen Anschauung notwendig zu einander, sondern sie gehören vermöge der notwendigen Einheit der Apperzeption in der Synthesis der Anschauungen zu einander, d.i. nach Prinzipien der objektiven Bestimmung aller Vorstellungen, so fern daraus Erkenntnis werden kann, welche Prinzipien alle aus dem Grundsatze der transzendentalen Einheit der Apperzeption abgeleitet sind. Dadurch allein wird aus diesem Verhältnisse ein Urteil, d.i. ein Verhältnis, das objektiv gültig ist, und sich von dem Vrhältnisse eben derselben Vorstellungen, worin bloß subjektive Gültigkeit wäre, z.B. nach Gesetzen der Assoziation, hinreichend unterscheidet. Nach der letzteren würde ich nur sagen können: Wenn ich einen Körper trage, so fühle ich einen Druck der Schwere; aber nicht: er, der Körper, ist schwer; welches so viel sagen will, als, diese beide Vorstellungen sind im Objekt, d.i. ohne Untershied des Zustandes des Subjekts, verbunden, und nicht bloß in der Wahrnehmung (so oft sie auch wiederholt sein mag) beisammen.
→ 그러나 내가 각각의 판단에 있어서 주어진 인식들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검토할 때, 그리고 그 관계를 지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단지 주관적 정당성만을 지니는)재생적 상상력의 법칙에 따른 관계로부터 구분할 때, 그래서 나는 하나의 판단은, 주어진 인식들을 통각의 객관적 통일로 가져오는 그 방식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어진 표상들의 객관적 통일을 주관적 통일과 구분하기 위해서 인식들에 있어서 관계사 ist는 그에 대해 지시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비록 그 판단 자체가, 예를 들어 물체는 무겁다와 같이 경험적이고, 따라서 우연적이라고 하더라도 근원적 통각과 그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대해 그 표상들 자체의 관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나는, 이러한 표상들이 경험적 직관 안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 표상들은 직관들의 종합에서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따라, 즉 모든 표상들의 객관적 규정의 원칙에 따라, 그로부터 인식이 이루어지는 한에서,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의 근본명제로부터 도출되는 그런 모든 원칙들에 따라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를 통해서만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하나의 판단이, 즉 객관적으로 정당한 하나의 관계가, 그 안에서 예를 들어 연합의 법칙에 따르는 순전히 주관적 정당성만이 있을 바로 동일한 표상들의 관계와 충분하게 구분된다.→ 후자에 따라 나는 단지 내가 하나의 물체를 옮길 때, 나는 무게의 압력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체, 바로 그것이 무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양자의 표상들은 대상 안에서, 즉 주체의 상태에 대한 구분 없이, 결합되고, 순전히 지각(그 지각은 또한 자주 반복될 수 있다) 안에서만 결합되지는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Wenn ich aber die Beziehung gegebener Erkenntnisse in jedem Urteile genauer untersuche, und sie, als dem Verstande angehörige, von dem Verhältnisse nach Gesetzen der reproduktiven Einbildungskraft (welches nur subjektive Gültigkeit hat) unterscheide, so finde ich, daß ein Urteil nichts andres sei, als die Art, gegebene Erkenntnisse zur objektiven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그러나 내가 각각의 판단에 있어서 주어진 인식들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검토할 때, 그리고 그 관계를, 지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단지 주관적 정당성만을 지니는)재생적 상상력의 법칙에 따른 관계로부터 구분할 때, 나는 그래서 알게 된다, 하나의 판단은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을, 주어진 인식들을 통각의 객관적 통일로 가져오는 그 방식 이외에.
→ 그러나 내가 각각의 판단에 있어서 주어진 인식들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검토할 때, 그리고 그 관계를 지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단지 주관적 정당성만을 지니는)재생적 상상력의 법칙에 따른 관계로부터 구분할 때, 그래서 나는 하나의 판단은, 주어진 인식들을 통각의 객관적 통일로 가져오는 그 방식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Darauf zielt das Verhältniswörtchen ist in denselben, um die objektive Einheit gegebener Vorstellungen von der subjektiven zu unterscheiden.
인식들에 있어서 관계사 ist는 그에 대해 지시한다, 주어진 표상들의 객관적 통일을 주관적 통일과 구분하기 위해서.
→ 주어진 표상들의 객관적 통일을 주관적 통일과 구분하기 위해서 인식들에 있어서 관계사 ist는 그에 대해 지시한다.
Denn dieses bezeichnet die Beziehung derselben auf die ursprüngliche Apperzeption und die notwendige Einheit derselben, wenn gleich das Urteil selbst empirisch, mithin zufällig ist, z.B. die Körper sind schwer.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근원적 통각과 그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대해 그 표상들 자체의 관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판단 자체가 경험적이고, 따라서 우연적이라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물체는 무겁다.
→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비록 그 판단 자체가, 예를 들어 물체는 무겁다와 같이 경험적이고, 따라서 우연적이라고 하더라도 근원적 통각과 그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대해 그 표상들 자체의 관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Damit ich zwar nicht sagen will, diese Vorstellungen gehören in der empirischen Anschauung notwendig zu einander, sondern sie gehören vermöge der notwendigen Einheit der Apperzeption in der Synthesis der Anschauungen zu einander, d.i. nach Prinzipien der objektiven Bestimmung aller Vorstellungen, so fern daraus Erkenntnis werden kann, welche Prinzipien alle aus dem Grundsatze der transzendentalen Einheit der Apperzeption abgeleitet sind.
그와 함께 나는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러한 표상들이 경험적 직관 안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오히려 그 표상들은 직관들의 종합에서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따라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즉 모든 표상들의 객관적 규정의 원칙에 따라, 그로부터 인식이 되는 한에서,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의 근본명제로부터 도출되는 그런 모든 원칙들.
→ 그와 함께 나는, 이러한 표상들이 경험적 직관 안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 표상들은 직관들의 종합에서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따라, 즉 모든 표상들의 객관적 규정의 원칙에 따라, 그로부터 인식이 이루어지는 한에서,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의 근본명제로부터 도출되는 그런 모든 원칙들에 따라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Dadurch allein wird aus diesem Verhältnisse ein Urteil, d.i. ein Verhältnis, das objektiv gültig ist, und sich von dem Vrhältnisse eben derselben Vorstellungen, worin bloß subjektive Gültigkeit wäre, z.B. nach Gesetzen der Assoziation, hinreichend unterscheidet.
그를 통해서만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하나의 판단이, 즉 하나의 관계와, 객관적으로 정당한, 그 자체가 바로 동일한 표상들의 관계와, 그 안에서 순전히 주관적 정당성이 있을, 예를 들어 연합의 법칙에 따르는, 충분하게 구분된다.
→ 그를 통해서만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하나의 판단이, 즉 객관적으로 정당한 하나의 관계가, 그 안에서 예를 들어 연합의 법칙에 따르는 순전히 주관적 정당성만이 있을 바로 동일한 표상들의 관계와 충분하게 구분된다.
Nach der letzteren würde ich nur sagen können: Wenn ich einen Körper trage, so fühle ich einen Druck der Schwere; aber nicht: er, der Körper, ist schwer; welches so viel sagen will, als, diese beide Vorstellungen sind im Objekt, d.i. ohne Untershied des Zustandes des Subjekts, verbunden, und nicht bloß in der Wahrnehmung (so oft sie auch wiederholt sein mag) beisammen.
후자에 따라 나는 단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나의 물체를 옮길 때, 나는 무게의 압력을 느낀다; 그러나 물체, 바로 그것이 무겁다 라고는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말하고자 한다, 이 양자의 표상들은 대상 안에서, 즉 주체의 상태에 대한 구분 없이, 결합되고, 순전히 지각(그 지각은 또한 자주 반복될 수 있다) 안에서만 결합되지는 않는다.
→ 후자에 따라 나는 단지 내가 하나의 물체를 옮길 때, 나는 무게의 압력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체, 바로 그것이 무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양자의 표상들은 대상 안에서, 즉 주체의 상태에 대한 구분 없이, 결합되고, 순전히 지각(그 지각은 또한 자주 반복될 수 있다) 안에서만 결합되지는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蟲-
§ 19.
Die logische Form aller Urteile besteht in der objektiven Einheit der Apperzeption der darin enthaltenen Begriffe
모든 판단의 논리적 형식은 내부에 개념을 포함하는 통각의 객관적 통일 안에 존립한다

Ich habe mich niemals durch die Erklärung, welche die Logiker von einem Urteile überhaupt geben, befriedigen können: es ist, wie sie sagen, die Vorstellung eines Verhältnisses zwischen zwei Begriffen. Ohne nun hier über das Fehlerhafte der Erklärung, daß sie allenfalls nur auf kategorische, aber nicht hypothetische und disjunktive Urteile paßt, (als welche letztere nicht ein Verhältnis von Begriffen, sondern selbst von Urteilen enthalten,) mit ihnen zu zanken, (ohnerachtet aus diesem Versehen der Logik manche lästige Folgen erwachsen sind,)¹ merke ich nur an, daß, worin dieses Verhältnis bestehe, hier nicht bestimmt ist.
→ 나는 판단 일반에 대해 논리학자들이 제시하는 해명, 그들이 말하듯 두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표상이라는 그러한 해명을 통해서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 이제 여기에서, 그 해명이(후자가 개념들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판단들의 관계 자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기껏해야 정언판단에만 적합할 뿐 가언판단이나 선언판단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해명의 결점에 대하여 그들과 논쟁함이 없이(논리학의 이러한 오류로부터 여러 성가신 결론들이 발생됨에도 불구하고)¹, 나는 단지 무엇 안에 이러한 관계가 존립하는지는 여기에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여 말할 따름이다.

¹Die weitläuftige Lehre von den vier syllogistischen Figuren betrifft nur die kategorischen Vernunftschlüsse, und, ob sie zwar nichts weiter ist, als eine Kunst, durch Versteckung unmittelbarer Schlüsse (consequentiae immediatae) unter die Prämissen eines reinen Vernunftschlusses, den Schein mehrerer Schlußarten, als des in der ersten Figur, zu erschleichen, so würde sie doch dadurch allein kein sonderliches Glück gemacht haben, wenn es ihr nicht gelungen wäre, die kategorischen Urteile, als die, worauf sich alle andere müssen beziehen lassen, in ausschließliches Ansehen zu bringen, welches aber nach § 9. falsch ist.
→ ¹네 가지 삼단논법적 형태들에 대한 광범위한 학설은 다만 정언적 이성추론과 관계될 따름이고, 비록 그 학설이, 순수한 이성추론의 전제들 아래에서 불가피한 결론의(즉각적인 결론의) 은폐를 통하여, 더욱 많은, 첫 번째 추론형태에 속하는 것 이외의 추론법들의 가상을, 사취하는 하나의 기능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그 학설은 그래서, 정언판단들이 다른 모든 판단들이 거기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하는 독점적인 명성을 가져오는 것에 있어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를 통해서만으로는 어떠한 대단한 행운도 이루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 9에 따라 잘못된 것이다.


Ich habe mich niemals durch die Erklärung, welche die Logiker von einem Urteile überhaupt geben, befriedigen können: es ist, wie sie sagen, die Vorstellung eines Verhältnisses zwischen zwei Begriffen.
나는 해명을 통해서 전혀, 판단 일반에 대해 논리학자들이 제시하는 해명,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판단)이, 그들이 말하듯, 두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표상이라는.
→ 나는 판단 일반에 대해 논리학자들이 제시하는 해명, 그들이 말하듯 두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표상이라는 그러한 해명을 통해서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Ohne nun hier über das Fehlerhafte der Erklärung, daß sie allenfalls nur auf kategorische, aber nicht hypothetische und disjunktive Urteile paßt, (als welche letztere nicht ein Verhältnis von Begriffen, sondern selbst von Urteilen enthalten,) mit ihnen zu zanken, (ohnerachtet aus diesem Versehen der Logik manche lästige Folgen erwachsen sind,)¹ merke ich nur an, daß, worin dieses Verhältnis bestehe, hier nicht bestimmt ist.
이제 여기에서 해명의 결점에 대하여, 그 해명이 기껏해야 정언판단에만 적합할 뿐 가언판단이나 선언판단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후자가 개념들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판단들의 관계 자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들과 논쟁함이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학의 이러한 오류로부터 여러 성가신 결론들이 발생된다,)¹ 나는 단지 덧붙여 말할 따름이다, 무엇 안에 이러한 관계가 존립하는지는, 여기에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 이제 여기에서, 그 해명이(후자가 개념들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판단들의 관계 자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기껏해야 정언판단에만 적합할 뿐 가언판단이나 선언판단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해명의 결점에 대하여 그들과 논쟁함이 없이(논리학의 이러한 오류로부터 여러 성가신 결론들이 발생됨에도 불구하고)¹, 나는 단지 무엇 안에 이러한 관계가 존립하는지는 여기에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여 말할 따름이다.

¹Die weitläuftige Lehre von den vier syllogistischen Figuren betrifft nur die kategorischen Vernunftschlüsse, und, ob sie zwar nichts weiter ist, als eine Kunst, durch Versteckung unmittelbarer Schlüsse (consequentiae immediatae) unter die Prämissen eines reinen Vernunftschlusses, den Schein mehrerer Schlußarten, als des in der ersten Figur, zu erschleichen, so würde sie doch dadurch allein kein sonderliches Glück gemacht haben, wenn es ihr nicht gelungen wäre, die kategorischen Urteile, als die, worauf sich alle andere müssen beziehen lassen, in ausschließliches Ansehen zu bringen, welches aber nach § 9. falsch ist.
¹네 가지 삼단논법적 형태들에 대한 광범위한 학설은 다만 정언적 이성추론과 관계될 따름이고, 비록 그 학설이 하나의 기능, 순수한 이성추론의 전제들 아래에서 불가피한 결론의(즉각적인 결론의) 은폐를 통하여, 더욱 많은 추론법들의 가상을, 첫 번째 추론형태에 속하는 것 이외의, 사취하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그 학설은 그래서 그를 통하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대단한 행운도 이루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정언판단들은, 다른 모든 판단들이 거기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하는, 독점적인 명성을 가져오는 것에 있어서, 그러나 그것은 § 9에 따라 잘못된 것이다.
→ ¹네 가지 삼단논법적 형태들에 대한 광범위한 학설은 다만 정언적 이성추론과 관계될 따름이고, 비록 그 학설이, 순수한 이성추론의 전제들 아래에서 불가피한 결론의(즉각적인 결론의) 은폐를 통하여, 더욱 많은, 첫 번째 추론형태에 속하는 것 이외의 추론법들의 가상을, 사취하는 하나의 기능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그 학설은 그래서, 정언판단들이 다른 모든 판단들이 거기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하는 독점적인 명성을 가져오는 것에 있어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를 통해서만으로는 어떠한 대단한 행운도 이루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 9에 따라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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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Was die objektive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sei
자기의식의 객관적 통일이란 무엇인가

Die transzendentale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diejenige, durch welche alles in einer Anschauung gegebene Mannigfaltige in einen Bewgriff vom Objekt vereinigt wird. Sie heißt darum objektiv, und muß von der subjektiven Einheit des Bewußtseins unterschieden werden, die eine Bestimmung des inneren Sinnes ist, dadurch jene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zu einer solchen Verbindung empirisch gegeben wird. Ob ich mir des Mannigfaltigen als zugleich, oder nach einander, empirisch bewußt sein könne, kommt auf Umstände, oder empirische Bedingungen, an. Daher die empir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durch Assoziation der Vortstellungen, selbst eine Erscheinung betrifft, und ganz zufällig ist. Dagegen steht die reine Form der Anschauung in der Zeit, bloß als Anscahuung überhaupt, die ein gegebenes Mannigfaltiges enthält, unter der ursprünglichen Einheit des Bewußtseins, lediglich durch die notwendige Beziehung des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 zum Einen: Ich denke; also durch die reine Synthesis des Verstandes, welche a priori der empirischen zum Grunde liegt. Jene Einheit ist allein objektiv gültig; die empir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ie wir hier nicht erwägen, und die auch nur von der ersteren, unter gegebenen Bedingungen in concreto, abgeleitet ist, hat nur subjektive Gültigkeit. Einer verbindet die Vorstellung eines gewissen Worts mit einer Sache, der andere mit einer anderen Sache; und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m, was empirisch ist, ist in Ansehung dessen, was gegeben ist, nicht notwendig und allgemein geltend.
→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은 그를 통하여 직관에 주어진 모든 잡다가 대상에 대한 개념 안으로 결합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 통일은 그런 이유로 객관적이라 일컬어지고, 의식의 주관적 통일, 내적 감관의 규정이며, 그를 통하여 저 직관의 잡다가 그러한 하나의 결합에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그러한 통일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내가 잡다에 속하는 나에게 경험적으로 동시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지, 아니면 연속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은 상황들 또는 경험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의식의 경험적 통일은 표상들의 연관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의 현상에 관계하고, 전적으로 우연적이다.→ 그에 반해 직관의 순수 형식은 시간 안에서 순전히 직관 일반으로서 존립하고, 그러한 직관은 주어진 잡다를, 그 의식의 근원적 통일 아래에서, 오로지 직관의 잡다와 내가 생각한다는 그 하나의 것과의 필연적 관계를 통해서; 그러므로, 경험적인 것들의 토대를 선험적으로 마련하는 지성의 순수한 종합을 통해서만 포함한다.→ 오로지 저 통일만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 우리가 여기에서 고려치 않으며 또한 그 통일이 단지 전자의 통일로부터만, 주어진 조건들 아래에서 확고하게, 파생되는 통각의 경험적 통일은 오직 주관적 정당성만을 가진다.→ 한 사람은 언어의 표상을 사태와 결합시키고, 또 다른 언어표상을 또 다른 사태와 결합시킨다; 그리고 경험적인 어떤 것 내에서 의식의 통일은 주어진 어떤 것에 관계하는 것이고 필연적이거나 우세하지 않다.


Die transzendentale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diejenige, durch welche alles in einer Anschauung gegebene Mannigfaltige in einen Bewgriff vom Objekt vereinigt wird.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은 그를 통하여 직관에 주어진 모든 잡다가 대상에 대한 개념 안으로 결합되는 그러한 것이다.
→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은 그를 통하여 직관에 주어진 모든 잡다가 대상에 대한 개념 안으로 결합되는 그러한 것이다.
Sie heißt darum objektiv, und muß von der subjektiven Einheit des Bewußtseins unterschieden werden, die eine Bestimmung des inneren Sinnes ist, dadurch jene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zu einer solchen Verbindung empirisch gegeben wird.
그 통일은 그런 이유로 객관적이라 일컬어지고, 의식의 주관적 통일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통일은 내적 감관의 규정이며, 그를 통하여 저 직관의 잡다가 그러한 하나의 결합에 경험적으로 주어진다.
→ 그 통일은 그런 이유로 객관적이라 일컬어지고, 의식의 주관적 통일, 내적 감관의 규정이며, 그를 통하여 저 직관의 잡다가 그러한 하나의 결합에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그러한 통일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Ob ich mir des Mannigfaltigen als zugleich, oder nach einander, empirisch bewußt sein könne, kommt auf Umstände, oder empirische Bedingungen, an.
내가 잡다에 속하는 나에게 동시적으로, 아니면 연속적으로, 경험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지, 상황들 또는 경험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 내가 잡다에 속하는 나에게 경험적으로 동시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지, 아니면 연속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은 상황들 또는 경험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Daher die empir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durch Assoziation der Vortstellungen, selbst eine Erscheinung betrifft, und ganz zufällig ist.
그러므로 의식의 경험적 통일은 표상들의 연관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의 현상에 관계하고, 전적으로 우연적이다.
→ 그러므로 의식의 경험적 통일은 표상들의 연관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의 현상에 관계하고, 전적으로 우연적이다.
Dagegen steht die reine Form der Anschauung in der Zeit, bloß als Anscahuung überhaupt, die ein gegebenes Mannigfaltiges enthält, unter der ursprünglichen Einheit des Bewußtseins, lediglich durch die notwendige Beziehung des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 zum Einen: Ich denke; also durch die reine Synthesis des Verstandes, welche a priori der empirischen zum Grunde liegt.
그에 반해 직관의 순수 형식은 시간 안에서 순전히 직관 일반으로서 존립하고, 그러한 직관은 주어진 잡다를 포함한다, 그 의식의 근원적 통일 아래에서, 오로지 직관의 잡다와 하나의 것, 내가 생각한다는 것과의 필연적 관계를 통해서만; 그러므로 지성의 순수한 종합을 통해서, 경험적인 것들의 토대를 선험적으로 마련하는.
→ 그에 반해 직관의 순수 형식은 시간 안에서 순전히 직관 일반으로서 존립하고, 그러한 직관은 주어진 잡다를, 그 의식의 근원적 통일 아래에서, 오로지 직관의 잡다와 내가 생각한다는 그 하나의 것과의 필연적 관계를 통해서; 그러므로, 경험적인 것들의 토대를 선험적으로 마련하는 지성의 순수한 종합을 통해서만 포함한다.
Jene Einheit ist allein objektiv gültig; die empir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ie wir hier nicht erwägen, und die auch nur von der ersteren, unter gegebenen Bedingungen in concreto, abgeleitet ist, hat nur subjektive Gültigkeit.
오로지 저 통일만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 통각의 경험적 통일은, 우리가 여기에서 고려치 않는, 그리고 그 통일이 또한 단지 전자의 통일로부터만, 주어진 조건들 아래에서 확고하게, 파생되는, 오직 주관적 정당성만을 가진다.
→ 오로지 저 통일만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 우리가 여기에서 고려치 않으며 또한 그 통일이 단지 전자의 통일로부터만, 주어진 조건들 아래에서 확고하게, 파생되는 통각의 경험적 통일은 오직 주관적 정당성만을 가진다.
Einer verbindet die Vorstellung eines gewissen Worts mit einer Sache, der andere mit einer anderen Sache; und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m, was empirisch ist, ist in Ansehung dessen, was gegeben ist, nicht notwendig und allgemein geltend.
누군가는 언어의 표상을 사태와 결합시키고, 또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언어표상을 또 다른 사태와 결합시킨다; 그리고 의식의 통일은 경험적인 어떤 것 내에서 주어진 어떤 것에 관계하는 것이고 필연적이거나 우세하지 않다.
→ 한 사람은 언어의 표상을 사태와 결합시키고, 또 다른 언어표상을 또 다른 사태와 결합시킨다; 그리고 경험적인 어떤 것 내에서 의식의 통일은 주어진 어떤 것에 관계하는 것이고 필연적이거나 우세하지 않다.

-蟲-
Dieser letzte Satz ist, wie gesagt, selbst analytisch, ob er zwar die synthetische Einheit zur Bedingung alles Denkens macht; denn er sag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meine Vorstellungen in irgend einer gegebenen Anschauung unter der Bedingung stehen müssen, unter der ich sie allein als meine Vorstellungen zu dem identischen Selbst rechnen, und also, als in einer Apperzeption synthetisch verbunden, durch den allgemeinen Ausdruck Ich denke zusammenfassen kann.
→ 이러한 후자의 명제는 이야기되었듯 그 자체로는 분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합적 통일을 모든 사유의 조건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나의 모든 표상들이 어쨌든 하나의 주어진 직관 안에서 그 조건 아래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조건 아래에서 나는 그 표상들을 오로지 나의 표상들로서만 동일한 자아에 고려해 넣고, 그러므로 하나의 통각 안에서 종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 보편적 언명을 통하여 나는 총괄하여 생각할 수 있다.
Aber dieser Grundsatz ist doch nicht ein Prinzip für jeden überhaupt möglichen Verstand, sondern nur für den, durch dessen reine Apperzeption in der Vorstellung: Ich bin, noch gar nichts Mannigfaltiges gegeben ist. Derjenige Verstand, durch dessen Selbstbewußtsein zugleich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gegeben würde, ein Verstand, durch dessen Vorstellung zugleich die Objekte dieser Vorstellung existierten, würde einen besondern Actus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zu der Einheit des Bewußtseins nicht bedürfen, deren der menschliche Verstand, der bloß denkt, nicht anschaut, bedarf. Aber für den menschlichen Verstand ist er doch unvermeidlich der erste Grundsatz, so, daß er sich sogar von einem anderen möglichen Verstande, entweder einem solchen, der selbst anschauete, oder, wenn gleich eine sinnliche Anschauung, aber doch von anderer Art, als die im Raume und der Zeit, zum Grunde liegend besäße, sich nicht den mindesten Begriff machen kann.
→ 그러나 이러한 근본명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지성 전반 각각에 대한 하나의 원칙은 아니며, 오히려 단지 "내가 있다"라는 표상 안에서 지성의 순수한 통각을 통해 그 지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잡다도 전혀 주어지지 않는 그러한 지성에 대한 원칙이다.→ 저 지성, 그 지성의 자기의식을 통해 동시에 직관의 잡다가 주어질 그러한 지성,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 동시에 이러한 표상의 대상이 현존하는 하나의 지성은 의식의 통일성에 대한 잡다의 종합에 대한 하나의 특수한 활동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며, 순전히 사유할 뿐 직관하지는 않는 인간적 지성은 이를 요청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지성에 대해 불가피하게 첫 번째 근본명제이다, 그러니까, 그 지성은, 그 자체로 직관하는 그러한 지성이든 아니면 감각적 직관이라 하더라도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러한 직관간을 기초에 놓는 그러한 지성이든 또 다른 가능한 지성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개념조차 형성할 수 없을 것이다.



Dieser letzte Satz ist, wie gesagt, selbst analytisch, ob er zwar die synthetische Einheit zur Bedingung alles Denkens macht; denn er sag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meine Vorstellungen in irgend einer gegebenen Anschauung unter der Bedingung stehen müssen, unter der ich sie allein als meine Vorstellungen zu dem identischen Selbst rechnen, und also, als in einer Apperzeption synthetisch verbunden, durch den allgemeinen Ausdruck Ich denke zusammenfassen kann.
이러한 후자의 명제는 이야기되었듯 그 자체로는 분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합적 통일을 모든 사유의 조건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나의 모든 표상들이 어쨌든 하나의 주어진 직관 안에서 그 조건 아래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조건 아래에서 나는 그 표상들을 오로지 나의 표상들로서만 동일한 자아에 고려해 넣고, 그러므로 하나의 통각 안에서 종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 보편적 언명을 통하여 나는 총괄하여 생각할 수 있다.
→ 이러한 후자의 명제는 이야기되었듯 그 자체로는 분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합적 통일을 모든 사유의 조건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나의 모든 표상들이 어쨌든 하나의 주어진 직관 안에서 그 조건 아래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조건 아래에서 나는 그 표상들을 오로지 나의 표상들로서만 동일한 자아에 고려해 넣고, 그러므로 하나의 통각 안에서 종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 보편적 언명을 통하여 나는 총괄하여 생각할 수 있다.

Aber dieser Grundsatz ist doch nicht ein Prinzip für jeden überhaupt möglichen Verstand, sondern nur für den, durch dessen reine Apperzeption in der Vorstellung: Ich bin, noch gar nichts Mannigfaltiges gegeben ist.
그러나 이러한 근본명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지성 전반 각각에 대한 하나의 원칙은 아니며, 오히려 단지 "내가 있다"라는 표상 안에서 지성의 순수한 통각을 통해 그 지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잡다도 전혀 주어지지 않는.
→ 그러나 이러한 근본명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지성 전반 각각에 대한 하나의 원칙은 아니며, 오히려 단지 "내가 있다"라는 표상 안에서 지성의 순수한 통각을 통해 그 지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잡다도 전혀 주어지지 않는 그러한 지성에 대한 원칙이다.
Derjenige Verstand, durch dessen Selbstbewußtsein zugleich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gegeben würde, ein Verstand, durch dessen Vorstellung zugleich die Objekte dieser Vorstellung existierten, würde einen besondern Actus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zu der Einheit des Bewußtseins nicht bedürfen, deren der menschliche Verstand, der bloß denkt, nicht anschaut, bedarf.
저 지성, 그 지성의 자기의식을 통해 동시에 직관의 잡다가 주어질 그러한 지성은, 하나의 지성,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 동시에 이러한 표상의 대상이 현존하는, 의식의 통일성에 대한 잡다의 종합에 대한 하나의 특수한 활동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적 지성은 그것이 순전히 사유하고 직관하지는 않는 요청한다.
→ 저 지성, 그 지성의 자기의식을 통해 동시에 직관의 잡다가 주어질 그러한 지성,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 동시에 이러한 표상의 대상이 현존하는 하나의 지성은 의식의 통일성에 대한 잡다의 종합에 대한 하나의 특수한 활동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며, 순전히 사유할 뿐 직관하지는 않는 인간적 지성은 이를 요청한다.
Aber für den menschlichen Verstand ist er doch unvermeidlich der erste Grundsatz, so, daß er sich sogar von einem anderen möglichen Verstande, entweder einem solchen, der selbst anschauete, oder, wenn gleich eine sinnliche Anschauung, aber doch von anderer Art, als die im Raume und der Zeit, zum Grunde liegend besäße, sich nicht den mindesten Begriff machen kann.
그러나 인간 지성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첫 번째 근본명제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또 다른 가능한 지성에 대해서, 그 자체로 직관하는 그러한 것이든 아니면 감각적 직관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부터, 기초에 놓는 고유할 것인, 최소한의 개념조차 형성할 수 없을.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지성에 대해 불가피하게 첫 번째 근본명제이다, 그러니까, 그 지성은, 그 자체로 직관하는 그러한 지성이든 아니면 감각적 직관이라 하더라도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러한 직관간을 기초에 놓는 그러한 지성이든 또 다른 가능한 지성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개념조차 형성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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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stand ist, allgemein zu reden, das Vermögen der Erkenntnisse. Diese bestehen in der bestimmten Beziehung gegebener Vorstellungen auf ein Objekt. Objekt aber ist das, in dessen Begriff das Mannigfaltige einer gegebenen Anschauung vereinigt ist. Nun erfodert aber alle Vereinigung der Vorstellungen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r Synthesis derselben. Folglich ist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dasjenige, was allein die Beziehung der Vorstellungen auf einen Gegenstand, mithin ihre objektive Gültigkeit, folglich, daß sie Erkenntnisse werden, ausmacht, und worauf folglich selbst die Möglichkeit des Verstandes beruht.
→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성은 인식들의 능력이다.→ 이러한 인식들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 주어진 표상들의 규정된 관계 안에 존립한다.→ 그러나 대상는 개념에서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결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표상들의 모든 결합은 종합에 있어서 의식의 통일성을 요청한다.→ 그래서 의식의 통일성은 바로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련, 그것이다. 따라서 그 연관의 객관적 실재성은 그래서 그 표상들이 인식들로 되는 것을 결정하고, 그래서 지성의 가능성 자체가 거기에 근거한다.

 Das erste reine Verstandeserkenntnis also, worauf sein ganzer übriger Gebrauch sich gründet, welches auch zugleich von all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ganz unabhängig ist, ist nun der Grundsatz der ursprünglichen 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So ist die bloße Form der äußeren sinnlichen Anschauung, der Raum, noch gar keine Erkenntnis; er gibt nur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a priori zu einem möglichen Erkenntnis. Um aber irgend etwas im Raume zu erkennen, z.B. eine Linie, muß ich sie ziehen, und also eine bestimmte Verbindung des gegebenen Einheit dieser Handlung zugleich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im Begriffe einer Linie) ist, und dadurch allererst ein Objekt (ein bestimmter Raum) erkannt wird. Die synthet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ist also eine objektive Bedingung aller Erkenntnis, nicht deren ich bloß selbst bedarf, um ein Objekt zu erkennen, sondern unter der jede Anschauung stehen muß, um für mich Objekt zu werden, weil auf andere Art, und ohne diese Synthesis, das Mannigfaltige sich nicht in einem Bewußtsein vereinigen würde.
→ 그러므로 여타 모든 사용이 거기에 근거하며 또한 동시에 감각적 직관의 모든 조건들로부터 전적으로 독립적인 최초의 순수한 지성인식은 이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성의 원칙이다.→ 그래서 외적 감각적 직관의 순수 형식은 공간이고 여전히 전혀 인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간은 선험적으로 가능한 하나의 인식에 직관의 잡다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우간 공간 내에서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하나의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 나는 그 선을 그어야만 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의 주어진 통일성의 규정된 결합은 동시에 의식의 통일성(하나의 선에 대한 개념 안에서)이며, 그를 통하여 최초로 하나의 대상(하나의 규정된 공간)이 인식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종합적 통일은 모든 인식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 조건이고,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순전히 나 혼자서 그 조건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나에 대한 대상이 되려면 그 조건 아래에 각각의 직관을 세워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방식으로는, 그리고 이러한 종합 없이는, 잡다가 하나의 의식 안에서 결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Verstand ist, allgemein zu reden, das Vermögen der Erkenntnisse.
지성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식들의 능력이다.
→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성은 인식들의 능력이다.
Diese bestehen in der bestimmten Beziehung gegebener Vorstellungen auf ein Objekt.
이러한 인식들은 주어진 표상들의 객체에 대한 규정된 관계 안에 존립한다.
→ 이러한 인식들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 주어진 표상들의 규정된 관계 안에 존립한다.
Objekt aber ist das, in dessen Begriff das Mannigfaltige einer gegebenen Anschauung vereinigt ist.
그러나 대상은 그것이다, 그 대상의 개념에서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결합되는.
→ 그러나 대상는 개념에서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결합되는 것이다.
Nun erfodert aber alle Vereinigung der Vorstellungen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r Synthesis derselben.
그러나 이제 표상들의 모든 결합은 그 표상들의 종합에 있어서 의식의 통일성을 요청한다.
→ 그러나 이제 표상들의 모든 결합은 종합에 있어서 의식의 통일성을 요청한다.
Folglich ist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dasjenige, was allein die Beziehung der Vorstellungen auf einen Gegenstand, mithin ihre objektive Gültigkeit, folglich, daß sie Erkenntnisse werden, ausmacht, und worauf folglich selbst die Möglichkeit des Verstandes beruht.
그래서 의식의 통일성은 바로 그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련, 따라서 그 표상들의 객관적 실재성은, 그래서, 그 표상들이 인식들로 되는 것을 결정하고, 그래서 지성의 가능성 자체가 거기에 근거한다.
→ 그래서 의식의 통일성은 바로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련, 그것이다. 따라서 그 연관의 객관적 실재성은 그래서 그 표상들이 인식들로 되는 것을 결정하고, 그래서 지성의 가능성 자체가 거기에 근거한다.

Das erste reine Verstandeserkenntnis also, worauf sein ganzer übriger Gebrauch sich gründet, welches auch zugleich von all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ganz unabhängig ist, ist nun der Grundsatz der ursprünglichen 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그러므로 최초의 순수한 지성인식은, 거기에 여타 모든 사용이 근거하는, 또한 동시에 감각적 직관의 모든 조건들로부터 전적으로 독립적인, 이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성의 원칙이다.
→ 그러므로 여타 모든 사용이 거기에 근거하며 또한 동시에 감각적 직관의 모든 조건들로부터 전적으로 독립적인 최초의 순수한 지성인식은 이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성의 원칙이다.
So ist die bloße Form der äußeren sinnlichen Anschauung, der Raum, noch gar keine Erkenntnis; er gibt nur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a priori zu einem möglichen Erkenntnis.
그래서 외적 감각적 직관의 순수 형식은, 공간이고, 여전히 전혀 인식은 아니다; 공간은 가능한 하나의 인식에 선험적으로 직관의 잡다만을 제공한다.
→ 그래서 외적 감각적 직관의 순수 형식은 공간이고 여전히 전혀 인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간은 선험적으로 가능한 하나의 인식에 직관의 잡다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Um aber irgend etwas im Raume zu erkennen, z.B. eine Linie, muß ich sie ziehen, und also eine bestimmte Verbindung des gegebenen Einheit dieser Handlung zugleich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im Begriffe einer Linie) ist, und dadurch allererst ein Objekt (ein bestimmter Raum) erkannt wird.
그러나 좌우간 공간 내에서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하나의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 나는 그 선을 그어야만 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의 주어진 통일성의 규정된 결합은 동시에 의식의 통일성(하나의 선에 대한 개념 안에서)이며, 그를 통하여 최초로 하나의 대상(하나의 규정된 공간)이 인식된다.
→ 그러나 좌우간 공간 내에서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하나의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 나는 그 선을 그어야만 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의 주어진 통일성의 규정된 결합은 동시에 의식의 통일성(하나의 선에 대한 개념 안에서)이며, 그를 통하여 최초로 하나의 대상(하나의 규정된 공간)이 인식된다.
Die synthet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ist also eine objektive Bedingung aller Erkenntnis, nicht deren ich bloß selbst bedarf, um ein Objekt zu erkennen, sondern unter der jede Anschauung stehen muß, um für mich Objekt zu werden, weil auf andere Art, und ohne diese Synthesis, das Mannigfaltige sich nicht in einem Bewußtsein vereinigen würde.
그러므로 의식의 종합적 통일은 모든 인식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 조건이고, 내가 순전히 스스로 그 조건을 요청하지 않는다,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오히려 그 조건 아래에 각각의 직관을 세워야만 하는데, 나에 대한 대상이 되기 위해서, 왜냐하면 다른 방식으로는, 그리고 이러한 종합 없이는, 잡다가 하나의 의식 안에서 결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의식의 종합적 통일은 모든 인식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 조건이고,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순전히 나 혼자서 그 조건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나에 대한 대상이 되려면 그 조건 아래에 각각의 직관을 세워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방식으로는, 그리고 이러한 종합 없이는, 잡다가 하나의 의식 안에서 결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蟲-
§ 17. Der Grundsatz der 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das oberste Prinzip alles Verstandesgebrauchs
§ 17.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대한 원칙은 모든 지성사용에 대해 최상의 원칙이다.

Der oberste Gundsatz der Möglichkeit aller Anschauung in Beziehung auf die Sinnlichkeit war laut der transz. Ästhetik: daß alles Mannigfaltige derselben unter den formalen Bedingungen des Raums und der Zeit stehe. Der oberste Gundsatz eben derselben in Beziehung auf den Verstand ist: daß alles Mannifgaltige der Anschauung unter Bedingungen der ursprünglich-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stehe¹. Unter dem ersteren stehen alle mannifgaltige Vorstellungen der Anschauung, so fern sie uns gegeben werden, unter dem zweiten so fern sie in einem Bewußtsein müssen verbunden werden können; denn ohne das kann nichts dadurch gedacht oder erkannt werden, weil die gegebene Vorstellungen den Actus der Apperzeption, Ich denke, nicht gemein haben, und dadurch nicht in einem Selbstbewußtsein zusammengefaßt sein würden.
→ 감성에 관련하여 모든 직관의 가능성에 대한 최상의 원칙은 초월적 감성학에 의하면 그 직관의 모든 잡다는 공간과 시간의 형식적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었다.¹→ 마찬가지로 지성과 관련하여 동일한 최상의 원칙은 직관의 모든 잡다가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의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다.→ 직관의 모든 잡다한 표상들은 그 표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에서 전자 아래에 서고, 후자 아래에서는 그것들이 하나의 의식 내에서 결합될 수 있어야만 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그를 통해 사유되거나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의 활동을 주어진 표상들이 공통으로 지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취합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¹ Der Raum und die Zeit und alle Teile derselben sind Anschauungen, mithin einzelne Vorstellungen mit dem Mannigfaltigen, das sie in sich enthalten (siehe die transz. Ästhetik), mithin nicht bloße Begriffe, durch die eben dasselbe Bewußtsein, als in vielen Vorstellungen, sondern viel Vorstellungen als in einer, und deren Bewußtsein, enthalten, mithin als zusammengesetzt, folglich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als synthetisch, aber doch ursprünglich angetroffen wird. Diese Einzelnheit derselben ist wichtig in der Anwendung (siehe § 25.).
→ ¹공간과 시간과 그것들의 모든 부분들은 직관들이며, 따라서 자체 내에 포함하는 잡다를 가지는 개별적인 표상들이고(초월론적 감성학을 보라), 따라서 그 개념들을 통해 마찬가지로 여러 표상들 내에 있는 것으로서 동일한 의식을 포함하는 그러한 순전한 개념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이자 그것들에 대한 것인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많은 표상들을 포함하고, 따라서 공존하는 것으로서 포함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의식의 통일은 종합적인 것으로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와 같은 표상들의 이러한 개별성은 적용에 있어서 중요하다 (§ 25.를 보라).


Der oberste Gundsatz der Möglichkeit aller Anschauung in Beziehung auf die Sinnlichkeit war laut der transz. Ästhetik: daß alles Mannigfaltige derselben unter den formalen Bedingungen des Raums und der Zeit stehe.¹
감성에 관련하여 모든 직관의 가능성에 대한 최상의 원칙은 초월적 감성학에 의하면 그 직관의 모든 잡다는 공간과 시간의 형식적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었다.¹
→ 감성에 관련하여 모든 직관의 가능성에 대한 최상의 원칙은 초월적 감성학에 의하면 그 직관의 모든 잡다는 공간과 시간의 형식적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었다.¹
Der oberste Gundsatz eben derselben in Beziehung auf den Verstand ist: daß alles Mannifgaltige der Anschauung unter Bedingungen der ursprünglich-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stehe¹.
마찬가지로 지성과 관련하여 동일한 최상의 원칙은 직관의 모든 잡다가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의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지성과 관련하여 동일한 최상의 원칙은 직관의 모든 잡다가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의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다.
Unter dem ersteren stehen alle mannifgaltige Vorstellungen der Anschauung, so fern sie uns gegeben werden, unter dem zweiten so fern sie in einem Bewußtsein müssen verbunden werden können; denn ohne das kann nichts dadurch gedacht oder erkannt werden, weil die gegebene Vorstellungen den Actus der Apperzeption, Ich denke, nicht gemein haben, und dadurch nicht in einem Selbstbewußtsein zusammengefaßt sein würden.
전자 아래에서 직관의 모든 잡다한 표상들은 서는데, 그 표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에서 그러하고, 후자 아래에서는 그것들이 하나의 의식 내에서 결합될 수 있어야만 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그를 통해 사유되거나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며,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의 활동을 주어진 표상들이 공통으로 지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취합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직관의 모든 잡다한 표상들은 그 표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에서 전자 아래에 서고, 후자 아래에서는 그것들이 하나의 의식 내에서 결합될 수 있어야만 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그를 통해 사유되거나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의 활동을 주어진 표상들이 공통으로 지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취합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¹Der Raum und die Zeit und alle Teile derselben sind Anschauungen, mithin einzelne Vorstellungen mit dem Mannigfaltigen, das sie in sich enthalten (siehe die transz. Ästhetik), mithin nicht bloße Begriffe, durch die eben dasselbe Bewußtsein, als in vielen Vorstellungen, sondern viel Vorstellungen als in einer, und deren Bewußtsein, enthalten, mithin als zusammengesetzt, folglich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als synthetisch, aber doch ursprünglich angetroffen wird.
¹공간과 시간과 그것들의 모든 부분들은 직관들이며, 따라서 자체 내에 포함하는 잡다를 가지는 개별적인 표상들이고(초월론적 감성학을 보라), 따라서 순전한 개념들이 아니다, 그 개념들을 통해 마찬가지로 여러 표상들 내에 있는 것으로서 동일한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이자 그것들에 대한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많은 표상들을 포함하고, 따라서 공존하는 것으로서 포함하고, 그래서 의식의 의식의 통일은 종합적인 것으로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 ¹공간과 시간과 그것들의 모든 부분들은 직관들이며, 따라서 자체 내에 포함하는 잡다를 가지는 개별적인 표상들이고(초월론적 감성학을 보라), 따라서 그 개념들을 통해 마찬가지로 여러 표상들 내에 있는 것으로서 동일한 의식을 포함하는 그러한 순전한 개념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이자 그것들에 대한 것인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많은 표상들을 포함하고, 따라서 공존하는 것으로서 포함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의식의 통일은 종합적인 것으로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Diese Einzelnheit derselben ist wichtig in der Anwendung (siehe § 25.).
그와 같은 표상들의 이러한 개별성은 적용에 있어서 중요하다 (§ 25.를 보라).
→ 그와 같은 표상들의 이러한 개별성은 적용에 있어서 중요하다 (§ 25.를 보라).

-蟲-

Dieser Grundsatz, der notwendigen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nun zwar selbst identisch, mithin ein analytischer Satz, erklärt aber doch eine Synthesis des in einer Anschauung gegebene Mannigfaltigen als notwendig, ohne welche jene durchgängige Identität des Selbstbewußtseins nicht gedacht werden kann. Denn durch das Ich, als einfache Vorstellung, ist nichts Mannigfaltiges gegeben; in der Anschauung, die davon unterschieden ist, kann es nur gegeben und durch Verbindung in einem Bewußtsein gedacht werden. Ein Verstand, in welchem durch das Selbstbewußtsein zugleich alles Mannigfaltige gegeben würde, würde anschauen; der unsere kann nur denken und muß in den Sinnen die Anschauung gegebenen Vorstellungen, weil ich sie insgesamt meine Vorstellungen nenne, die eine ausmachen. Das ist aber so viel, als, daß ich mir einer notwendigen Synthesis derselben a priori bewußt bin, welche die ursprünglich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heißt, unter der alle mir gegebene Vorstellungen stehen, aber unter die sie auch durch eine Synthesis gebracht werden müssen.
→ 통각의 필연적 통일이라는 이러한 원칙은 이제 더욱이 자기동일적이고, 따라서 분석적 명제이지만 직관 안에 주어진 잡다들의 종합을, 그것 없이는 자기의식의 저 보편적 동일성이 생각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해명한다.→ 왜냐하면 단일한 표상으로서 나라는 것을 통하여 아무런 잡다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는 상이한 직관 안에서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 오로지 결합을 통해서만 잡다는 주어지고 생각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자기의식을 통하여 동시에 모든 잡다들이 주어질 어떤 지성은 직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성은 단지 감각 안에 직관으로 주어진 표상들을 사유할 수 있을 뿐이며 감각 안에서 그 직관을 찾아야만 한다. →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동일한 나로 의식된다, 직관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와 관련해서, 왜냐하면 나는 그 표상들을 모두 하나의 표상을 형성하는 나의 표상들이라고 명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통각의 근원적인 종합적 통일이라 불리우는 그러한 하나의 필연적인 종합을 선험적으로 의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표상들이 그 종합 아래에 존립하지만, 그 표상들은 또한 하나의 종합을 통해 그 아래에 놓여야만 한다.


Dieser Grundsatz, der notwendigen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nun zwar selbst identisch, mithin ein analytischer Satz, erklärt aber doch eine Synthesis des in einer Anschauung gegebene Mannigfaltigen als notwendig, ohne welche jene durchgängige Identität des Selbstbewußtseins nicht gedacht werden kann.
통각의 필연적 통일이라는 이러한 원칙은 이제 더욱이 자기동일적이고, 그러므로 분석적 명제이다, 그러나 직관 안에 주어진 잡다들의 종합을 필연적인 것으로 해명한다, 그것 없이는 자기의식의 저 보편적 동일성이 생각될 수 없는.
→ 통각의 필연적 통일이라는 이러한 원칙은 이제 더욱이 자기동일적이고, 따라서 분석적 명제이지만 직관 안에 주어진 잡다들의 종합을, 그것 없이는 자기의식의 저 보편적 동일성이 생각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해명한다.
Denn durch das Ich, als einfache Vorstellung, ist nichts Mannigfaltiges gegeben; in der Anschauung, die davon unterschieden ist, kann es nur gegeben und durch Verbindung in einem Bewußtsein gedacht werden.
왜냐하면 단일한 표상으로서 나라는 것을 통하여 아무런 잡다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상이한 직관 안에서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결합을 통해서만 오로지 주어지고 생각될 수 있다.
→ 왜냐하면 단일한 표상으로서 나라는 것을 통하여 아무런 잡다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는 상이한 직관 안에서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 오로지 결합을 통해서만 잡다는 주어지고 생각될 수 있다.
Ein Verstand, in welchem durch das Selbstbewußtsein zugleich alles Mannigfaltige gegeben würde, würde anschauen; der unsere kann nur denken und muß in den Sinnen die Anschauung suchen. 
한 지성은, 그 안에서 자기의식을 통하여 동시에 모든 잡다들이 주어질, 직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성은 단지 감각 안에 직관으로 주어진 표상들을 사유할 수 있을 뿐이며 감각 안에서 그 직관을 찾아야만 한다.
→ 그 안에서 자기의식을 통하여 동시에 모든 잡다들이 주어질 어떤 지성은 직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성은 단지 감각 안에 직관으로 주어진 표상들을 사유할 수 있을 뿐이며 감각 안에서 그 직관을 찾아야만 한다.
Ich bin mir also des identischen Selbst bewußt, in Ansehung des Mannigfaltigen der mir in einer Anschauung gegebenen Vorstellungen, weil ich sie insgesamt meine Vorstellungen nenne, die eine ausmachen.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동일한 나로 의식된다, 직관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와 관련해서, 왜냐하면 나는 그 표상들을 모두 하나의 표상을 형성하는 나의 표상들이라고 명명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동일한 나로 의식된다, 직관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와 관련해서, 왜냐하면 나는 그 표상들을 모두 하나의 표상을 형성하는 나의 표상들이라고 명명하기 때문이다.
Das ist aber so viel, als, daß ich mir einer notwendigen Synthesis derselben a priori bewußt bin, welche die ursprünglich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heißt, unter der alle mir gegebene Vorstellungen stehen, aber unter die sie auch durch eine Synthesis gebracht werden müssen.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이다, 내가 나에게 하나의 필연적인 종합으로 선험적으로 의식된다는 것, 통각의 근원적인 종합적 통일이라 불리우는, 그 아래에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표상들이 존립하는, 그러나 그 아래로 그 표상들이 또한 하나의 종합을 통해 놓여야만 하는.
→ 그러나 그것은 내가 통각의 근원적인 종합적 통일이라 불리우는 그러한 하나의 필연적인 종합을 선험적으로 의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표상들이 그 종합 아래에 존립하지만, 그 표상들은 또한 하나의 종합을 통해 그 아래에 놓여야만 한다.

-蟲-
Der Gedanke: diese in der Anschauung gegebene Vorstellungen gehören mir insgesamt zu, heißt demnach so viel, als ich vereinige sie in einem Selbstbewußtsein, oder kann sie wenigstens darin vereinigen, und ob er gleich selbst noch nicht das Bewußtsein der Synthesis der Vorstellungen ist, so setzt er doch die Möglichkeit der letzteren voraus, d.i. nur dadurch, daß ich das Mannigfaltige derselben in einem Bewußtsein begreifen kann, nenne ich dieselbe insgesamt meine Vorstellungen; denn sonst würde ich ein so vielfärbiges verschiedenes Slebst haben, als ich Vorstellungen habe, deren ich mir bewußt bin. Synthetische Einheit des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en, als a priori gegeben, ist also der Grund der Identität der Apperzeption selbst, die a priori allem meinem bestimmten Denken vorhergeht. Verbindung liegt aber nicht in den Gegenständen, und kann von ihnen nicht etwa durch Wahrnehmung entlehnt und in den Verstand dadurch allererst aufgenommen werden, sondern ist allein eine Verrichtung des Verstandes, der selbst nichts weiter ist, als das Vermögen, a priori zu verbinden, und das Mannifgaltige gegebener Vorstellungen unter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welcher Grundsatz der oberste im ganzen menschlichen Erkenntnis ist.
→ 사유 : 직관 안에 주어진 표상들은 내가 그것들을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 통일한다고 이야기되는 한에서, 혹은 적어도 그것들을 그 안에 통일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부 나에게 속한다. 그리고 그 사유 자체가 비록 표상들의 종합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제 그 사유는 후자(종합에 대한 의식)의 가능성을 요청한다, 즉,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내가 잡다 자체를 하나의 의식 안에서 파악할 수 있음을 통해서만, 나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모두 나의 표상들이라 이름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들로 내가 나에게 의식되는 그러한 표상들을 가지는 만큼 그렇게 다양하고 상이한 자기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직관의 잡다의 종합적 통일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따라서 선험적으로 규정되는 나의 모든 사유들에 선행하는 통각 그 자체의 동일성의 토대이다.→ 그러나 결합은 대상들 안에 놓이지 않고, 그 대상들로부터 지각을 통해서는 결코 빌려올 수 없고 지성 안에서 그를 통해 최초로 산출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오로지, 그 자체가 선험적으로 결합시키는, 그리고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들을 인간 인식 전반에 있어서 최상의 원칙인 통각의 통일 아래로 가져오는 능력들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닌 지성의 기능만이 결합을 산출할 수 있다.


Der Gedanke: diese in der Anschauung gegebene Vorstellungen gehören mir insgesamt zu, heißt demnach so viel, als ich vereinige sie in einem Selbstbewußtsein, oder kann sie wenigstens darin vereinigen, und ob er gleich selbst noch nicht das Bewußtsein der Synthesis der Vorstellungen ist, so setzt er doch die Möglichkeit der letzteren voraus, d.i. nur dadurch, daß ich das Mannigfaltige derselben in einem Bewußtsein begreifen kann, nenne ich dieselbe insgesamt meine Vorstellungen; denn sonst würde ich ein so vielfärbiges verschiedenes Slebst haben, als ich Vorstellungen habe, deren ich mir bewußt bin.
사유 : 직관 안에 주어진 표상들은 전부 나에게 속한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이 이야기되는 한, 내가 그것들을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 통일한다고, 혹은 적어도 그것들을 그 안에 통일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사유 자체가 비록 표상들의 종합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제 그 사유는 후자의 가능성을 요청한다, 즉,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내가 잡다 자체를 하나의 의식 안에서 파악할 수 있음을 통해서만, 나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모두 나의 표상들이라 이름한다; 왜냐하면 그렇게나 다양하고 상이한 자기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표상들을 가지는 만큼, 그것들로 내가 나에게 의식되는.
→ 사유 : 직관 안에 주어진 표상들은 내가 그것들을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 통일한다고 이야기되는 한에서, 혹은 적어도 그것들을 그 안에 통일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부 나에게 속한다. 그리고 그 사유 자체가 비록 표상들의 종합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제 그 사유는 후자(종합에 대한 의식)의 가능성을 요청한다, 즉,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내가 잡다 자체를 하나의 의식 안에서 파악할 수 있음을 통해서만, 나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모두 나의 표상들이라 이름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들로 내가 나에게 의식되는 그러한 표상들을 가지는 만큼 그렇게 다양하고 상이한 자기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Synthetische Einheit des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en, als a priori gegeben, ist also der Grund der Identität der Apperzeption selbst, die a priori allem meinem bestimmten Denken vorhergeht.
직관의 잡다의 종합적 통일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따라서 통각 그 자체의 동일성의 토대이다, 선험적으로 규정되는 나의 모든 사유들에 선행하는.
→ 직관의 잡다의 종합적 통일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따라서 선험적으로 규정되는 나의 모든 사유들에 선행하는 통각 그 자체의 동일성의 토대이다.
Verbindung liegt aber nicht in den Gegenständen, und kann von ihnen nicht etwa durch Wahrnehmung entlehnt und in den Verstand dadurch allererst aufgenommen werden, sondern ist allein eine Verrichtung des Verstandes, der selbst nichts weiter ist, als das Vermögen, a priori zu verbinden, und das Mannifgaltige gegebener Vorstellungen unter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welcher Grundsatz der oberste im ganzen menschlichen Erkenntnis ist.
그러나 결합은 대상들 안에 놓이지 않고, 그 대상들로부터 지각을 통해서는 결코 빌려올 수 없고 지성 안에서 그를 통해 최초로 산출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오로지 지성의 기능만이, 그 자체가 능력들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닌, 선험적으로 결합시키는, 그리고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들을 통각의 통일 아래로 가져오는, 그것이 인간 인식 전반에 있어서 최상의 근본명제인.
→ 그러나 결합은 대상들 안에 놓이지 않고, 그 대상들로부터 지각을 통해서는 결코 빌려올 수 없고 지성 안에서 그를 통해 최초로 산출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오로지, 그 자체가 선험적으로 결합시키는, 그리고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들을 인간 인식 전반에 있어서 최상의 원칙인 통각의 통일 아래로 가져오는 능력들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닌 지성의 기능만이 결합을 산출할 수 있다.

-蟲-
Nämlich diese durchgängige Identität der Apperzeption eines in der Anschauung gegebenen Mannigfaltigen, enthält eine Synthesis der Vorstellungen, und ist nur durch das Bewußtsein dieser Synthesis möglich. Denn das empirisch Bewußtsein, welches verschiedene Vorstellungen begleitet, ist an sich zerstreut und ohne Beziehung auf die Identität des Subjekts. Diese Beziehung geschieht also dadurch noch nicht, daß ich jede Vorstellung mit Bewußtsein begleite, sondern daß ich eine zu der andern hinzusetze und mir der Synthesis derselben bewußt bin. Also nur dadurch, daß ich ein Mannigfaltiges gegebener Vorstellungen in einem Bewußtsein verbinden kann, ist es möglich, daß ich mir die Identität des Bewußtseins in diesen Vorstellungen selbst vorstelle, d.i. die analy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nur unter der Voraussetzung irgend einer synthetischen möglich.¹
→ 말하자면 직관 안에 주어진 잡다에 대한 통각의 이러한 일반적 동일성은, 표상들의 종합을 포함할 것이고, 오직 이러한 종합의 의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상이한 표상들을 수반하는 경험적 의식은 그 자체로는 흩어지고 주체의 동일성과 관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련은 그러므로, 내가 각각의 표상을 의식과 동반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하나를 다른 하나에 덧붙이고 나에게 그것들의 종합이 의식되는 것을 통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오로지 내가 잡다를 하나의 의식 안에서 주어진 표상들에 결합할 수 있음을 통해서만, 내가 나에게 의식의 동일성을 이러한 표상들 자체 안에 표상하는 것이, 즉 통각의 분석적 통일성은 단지 어떻든 종합적 통일성의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가능하다.¹

¹Die analyt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hängt allen gemeinsamen Begriffen, als solchen, an, z.B. wenn ich mir rot überhaupt denke, so stelle ich mir dadurch eine Beschaffenheit vor, die (als Merkmal) irgend woran angetroffen, oder mit anderen Vorstellungen verbunden sein kann; also nur vermöge einer vorausgedachten möglichen synthetischen Einheit kann ich mir die analytische vorstellen. Eine Vorstellung, die als verschiedenen gemein gedacht werden soll, wird als zu solchen gehörig angesehen, die außer ihr noch etwas Verschiedenes an sich haben, folglich muß sie in synthetischer Einheit mit anderen (wenn gleich nur möglichen Vorstellungen) vorher gedacht werden, ehe ich die analyt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welche sie zum conceptus communis macht, an ihr denken kann. Und so ist di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er höchste Punkt, an dem man allen Verstandesgebrauch, selbst die ganze Logik, und, nach ihr, die Transzendental-Philosophie heften muß, ja dieses Vermögen ist der Verstand selbst.
→ ¹의식의 분석적 통일성은 모든 공통분모적 개념들에 매달려 있다. 즉, 예를 들어 내가 나에게 있어서 '붉음' 일반을 생각할 때, 그래서 내가 나에게 그것을 통하여 (특성으로서) 좌우간 거기에서 발견된, 혹은 다른 표상들과 결합될 수 있는 하나의 성질을 표상하는 그러한 것으로서의 통일성이 말이다; 그러므로 고려된 가능한 종합적 통일의 힘으로만 나는 나에게 분석적 통일성을 표상할 수 있다.→ 상이한 공통 표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하나의 표상은, 그 외부에서 여전히 어떤 상이한 것을 가지는 그러한 표상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내가 공통 개념을 형성하는 의식의 분석적 통일성을 그 표상에 있어서 생각할 수 있기 이전에, 그 표상은 다른 표상과 (비록 단지 가능한 표상들이라 할지라도) 종합적 통일성 안에서앞서 생각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래서 통각의 종합적 통일성은 거기에 사람들이 모든 지성사용을, 논리학 그 전체를, 그리고, 그에 따라서, 초월론적 철학을 붙여야만 하는 더 높은 지점이다. 이러한 능력이 지성 그 자체이다.


Nämlich diese durchgängige Identität der Apperzeption eines in der Anschauung gegebenen Mannigfaltigen, enthält eine Synthesis der Vorstellungen, und ist nur durch das Bewußtsein dieser Synthesis möglich.
말하자면 직관 안에 주어진 잡다에 대한 통각의 이러한 일반적 동일성은, 표상들의 종합을 포함할 것이고, 오직 이러한 종합의 의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말하자면 직관 안에 주어진 잡다에 대한 통각의 이러한 일반적 동일성은, 표상들의 종합을 포함할 것이고, 오직 이러한 종합의 의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Denn das empirisch Bewußtsein, welches verschiedene Vorstellungen begleitet, ist an sich zerstreut und ohne Beziehung auf die Identität des Subjekts.
왜냐하면 경험적 의식은, 그것이 상이한 표상들을 수반하는, 그 자체로는 흩어지고 주체의 동일성과 관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상이한 표상들을 수반하는 경험적 의식은 그 자체로는 흩어지고 주체의 동일성과 관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Diese Beziehung geschieht also dadurch noch nicht, daß ich jede Vorstellung mit Bewußtsein begleite, sondern daß ich eine zu der andern hinzusetze und mir der Synthesis derselben bewußt bin.
이러한 관련은 그러므로, 내가 각각의 표상을 의식과 동반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하나를 다른 하나에 덧붙이고 나에게 그것들의 종합이 의식되는 것을 통해서 발생한다.
→ 이러한 관련은 그러므로, 내가 각각의 표상을 의식과 동반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하나를 다른 하나에 덧붙이고 나에게 그것들의 종합이 의식되는 것을 통해서 발생한다.
Also nur dadurch, daß ich ein Mannigfaltiges gegebener Vorstellungen in einem Bewußtsein verbinden kann, ist es möglich, daß ich mir die Identität des Bewußtseins in diesen Vorstellungen selbst vorstelle, d.i. die analy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nur unter der Voraussetzung irgend einer synthetischen möglich.¹
그러므로 오로지, 내가 잡다를 하나의 의식 안에서 주어진 표상들에 결합할 수 있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내가 나에게 의식의 동일성을 이러한 표상들 자체 안에 표상하는 것이, 즉 통각의 분석적 통일성은 단지 어떻든 종합적 통일성의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 그러므로 오로지 내가 잡다를 하나의 의식 안에서 주어진 표상들에 결합할 수 있음을 통해서만, 내가 나에게 의식의 동일성을 이러한 표상들 자체 안에 표상하는 것이, 즉 통각의 분석적 통일성은 단지 어떻든 종합적 통일성의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가능하다.

¹Die analyt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hängt allen gemeinsamen Begriffen, als solchen, an, z.B. wenn ich mir rot überhaupt denke, so stelle ich mir dadurch eine Beschaffenheit vor, die (als Merkmal) irgend woran angetroffen, oder mit anderen Vorstellungen verbunden sein kann; also nur vermöge einer vorausgedachten möglichen synthetischen Einheit kann ich mir die analytische vorstellen.
의식의 분석적 통일성은 모든 공통분모적 개념들에 매달려 있다, 그러한 것으로서, 즉, 예를 들어 내가 나에게 있어서 '붉음' 일반을 생각할 때, 그래서 나는 나에게 그것을 통하여 하나의 성질을 표상한다, (특성으로서) 좌우간 거기에서 발견된, 혹은 다른 표상들과 결합될 수 있는; 그러므로 고려된 가능한 종합적 통일의 힘으로만 나는 나에게 분석적 통일성을 표상할 수 있다.
→ 의식의 분석적 통일성은 모든 공통분모적 개념들에 매달려 있다. 즉, 예를 들어 내가 나에게 있어서 '붉음' 일반을 생각할 때, 그래서 내가 나에게 그것을 통하여 (특성으로서) 좌우간 거기에서 발견된, 혹은 다른 표상들과 결합될 수 있는 하나의 성질을 표상하는 그러한 것으로서의 통일성이 말이다; 그러므로 고려된 가능한 종합적 통일의 힘으로만 나는 나에게 분석적 통일성을 표상할 수 있다.
Eine Vorstellung, die als verschiedenen gemein gedacht werden soll, wird als zu solchen gehörig angesehen, die außer ihr noch etwas Verschiedenes an sich haben, folglich muß sie in synthetischer Einheit mit anderen (wenn gleich nur möglichen Vorstellungen) vorher gedacht werden, ehe ich die analyt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welche sie zum conceptus communis macht, an ihr denken kann.
하나의 표상은, 상이한 공통 표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그러한 것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외부에서 여전히 어떤 상이한 것을 가지는, 따라서 그 표상은 종합적 통일성 안에서 다른 표상과 (비록 단지 가능한 표상들이라 할지라도) 앞서 생각되어야만 한다, 내가 의식의 분석적 통일성을, 그 통일성이 공통 개념을 형성하는, 그에 있어서 생각할 수 있기 이전에.
→ 상이한 공통 표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하나의 표상은, 그 외부에서 여전히 어떤 상이한 것을 가지는 그러한 표상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내가 공통 개념을 형성하는 의식의 분석적 통일성을 그 표상에 있어서 생각할 수 있기 이전에, 그 표상은 다른 표상과 (비록 단지 가능한 표상들이라 할지라도) 종합적 통일성 안에서앞서 생각되어야만 한다.
Und so ist di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er höchste Punkt, an dem man allen Verstandesgebrauch, selbst die ganze Logik, und, nach ihr, die Transzendental-Philosophie heften muß, ja dieses Vermögen ist der Verstand selbst.
그리고 그래서 통각의 종합적 통일성은 더 높은 지점이다, 그 지점에 사람들이 모든 지성사용을, 그 자체로 논리학 전체를, 그리고, 그에 따라서, 초월론적 철학을 붙여야만 하는, 이러한 능력이 지성 자체이다.
→ 그리고 그래서 통각의 종합적 통일성은 거기에 사람들이 모든 지성사용을, 논리학 그 전체를, 그리고, 그에 따라서, 초월론적 철학을 붙여야만 하는 더 높은 지점이다. 이러한 능력이 지성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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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Von der ursprünglich-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 16. 통각의 근원전-종합적 통일성에 대하여

Das: Ich denke, muß alle meine Vorstellungen begleiten können; denn sonst würde etwas in mir vorgestellt werden, was gar nicht gedacht werden könnte, welches eben so viel heißt, als die Vorstellung würde entweder unmöglich, oder wenigstens für mich nichts sein. Diejenige Vorstellung, die vor allem Denken gegeben sein kann, heißt Anschauung. Also hat alle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eine notwendige Beziehung auf das: Ich denke, in demselben Subjekt, darin dieses Mannigfaltige angetroffen wird. Diese Vorstellung aber ist ein Actus der Spontaneität, d.i. sie kann nicht als zur Sinnlichkeit gehörig angesehen werden. Ich nenne sie die reine Apperzeption, um sie von der empirischen zu unterscheiden, oder auch die ursprüngliche Apperzeption, weil sie dasjenige Selbstbewußtsein ist, was, indem es die Vorstellung Ich denke hervorbringt, die alle andere muß begleiten können, und in allem Bewußtsein ein und dasselbe ist, von keiner weiter begleitet werden kann. Ich nenne auch die Einheit derselben die transzendentale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um die Möglichkeit der Erkenntnis a priori aus ihr zu bezeichnen. Denn die mannigfaltigen Vorstellungen, die in einer gewissen Anschauung gegeben werden, würden nicht insgesamt meine Vorstellungen sein, wenn sie nicht insgesamt zu einem Selbstbewußtsein gehöreten, d.i. als meine Vorstellungen (ob ich mich ihrer gleich nicht als solcher bewußt bin) müssen sie doch der Bedingung notwendig gemäß sein, unter der sie allein in einem allgemeinen Selbstbewußtsein zusammenstehen können, weil sie sonst nicht durchgängig mir angehören würden. Aus dieser ursprünglichen Verbindung läßt sich vieles folgern.
→ 내가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모든 표상들을 수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 전혀 사유될 수 없을 어떤 것이 표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은 표상으로 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유에 앞서 주어질 수 있는 이 표상을 직관이라 한다.→ 그러므로 직관의 모든 잡다는 그 안에서 이러한 잡다가 마주쳐지는 그 문장의 주어 안에서 '나는 생각한다'와 필연적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자발성의 활동이고, 다시 말해 그 표상은 감성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나는 그 표상을 감각적 표상들로부터 구분하기 위하여 순수한 통각이라 명명한다. 혹은 또 근원적 통각이라고 명명한다. 왜냐하면 그 표상이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을 산출함으로써, 그 표상이 다른 모든 표상들을 수반할 수 있어야만 하는, 그리고 모든 의식에 있어서 하나이고 그 자체인, 그 이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수반될 수 없는 그러한 자기의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그 표상의 통일성을 그로부터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특징지우기 위하여 자기의식의 초월론적 통일성으로 명명한다.→ 왜냐하면 어떤 직관 안에서 주어지는 잡다한 표상들은 그 표상들이 모두 다 하나의 자기의식에 속하지 않는다면 모두 다 나의 표상들이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의 표상들로서 (비록 내가 그 표상들에 속한 나를 그러한 것으로서 의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표상들은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그 표상들이 하나의 보편적 자기의식 안으로 함께 설 수 있는 조건에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표상들은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나에게 속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원적 묶음으로부터 많은 것이 추론된다.


Das: Ich denke, muß alle meine Vorstellungen begleiten können; denn sonst würde etwas in mir vorgestellt werden, was gar nicht gedacht werden könnte, welches eben so viel heißt, als die Vorstellung würde entweder unmöglich, oder wenigstens für mich nichts sein.
내가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모든 표상들을 수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 표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혀 사유될 수 없을 어떤 것이, 그러한 것은 의미한다, 표상으로 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 내가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모든 표상들을 수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 전혀 사유될 수 없을 어떤 것이 표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은 표상으로 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Diejenige Vorstellung, die vor allem Denken gegeben sein kann, heißt Anschauung.
이 표상, 모든 사유에 앞서 주어질 수 있는, 그것을 직관이라 한다.
→ 모든 사유에 앞서 주어질 수 있는 이 표상을 직관이라 한다.
Also hat alle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eine notwendige Beziehung auf das: Ich denke, in demselben Subjekt, darin dieses Mannigfaltige angetroffen wird.
그러므로 직관의 모든 잡다는 '나는 생각한다'와 필연적 관계를 가진다, 그 문장의 주어 안에서, 그 안에서 이러한 잡다가 마주쳐지는.
→ 그러므로 직관의 모든 잡다는 그 안에서 이러한 잡다가 마주쳐지는 그 문장의 주어 안에서 '나는 생각한다'와 필연적 관계를 가진다.
Diese Vorstellung aber ist ein Actus der Spontaneität, d.i. sie kann nicht als zur Sinnlichkeit gehörig angesehen werden.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자발성의 활동이고, 다시 말해 그 표상은 감성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자발성의 활동이고, 다시 말해 그 표상은 감성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Ich nenne sie die reine Apperzeption, um sie von der empirischen zu unterscheiden, oder auch die ursprüngliche Apperzeption, weil sie dasjenige Selbstbewußtsein ist, was, indem es die Vorstellung Ich denke hervorbringt, die alle andere muß begleiten können, und in allem Bewußtsein ein und dasselbe ist, von keiner weiter begleitet werden kann.
나는 그 표상을 순수한 통각이라 명명한다, 그 표상을 감각적 표상들로부터 구분하기 위하여, 혹은 또 근원적 통각이라고 명명한다, 왜냐하면 그 표상이 다음과 같은 자기의식이기 때문이다, 그것,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을 산출함으로써, 그 표상이 다른 모든 표상들을 수반할 수 있어야만 하는, 그리고 모든 의식에 있어서 하나이고 그 자체인, 그 이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수반될 수 없는.
→ 나는 그 표상을 감각적 표상들로부터 구분하기 위하여 순수한 통각이라 명명한다. 혹은 또 근원적 통각이라고 명명한다. 왜냐하면 그 표상이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을 산출함으로써, 그 표상이 다른 모든 표상들을 수반할 수 있어야만 하는, 그리고 모든 의식에 있어서 하나이고 그 자체인, 그 이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수반될 수 없는 그러한 자기의식이기 때문이다.
Ich nenne auch die Einheit derselben die transzendentale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um die Möglichkeit der Erkenntnis a priori aus ihr zu bezeichnen.
나는 또한 그 표상의 통일성을 자기의식의 초월론적 통일성으로 명명한다, 그로부터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특징지우기 위하여.
→ 나는 또한 그 표상의 통일성을 그로부터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특징지우기 위하여 자기의식의 초월론적 통일성으로 명명한다.
Denn die mannigfaltigen Vorstellungen, die in einer gewissen Anschauung gegeben werden, würden nicht insgesamt meine Vorstellungen sein, wenn sie nicht insgesamt zu einem Selbstbewußtsein gehöreten, d.i. als meine Vorstellungen (ob ich mich ihrer gleich nicht als solcher bewußt bin) müssen sie doch der Bedingung notwendig gemäß sein, unter der sie allein in einem allgemeinen Selbstbewußtsein zusammenstehen können, weil sie sonst nicht durchgängig mir angehören würden.
왜냐하면 잡다한 표상들은, 그 표상들이 어떤 직관 안에서 주어지는, 모두 다 나의 표상들이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그 표상들이 모두 다 하나의 자기의식에 속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나의 표상들로서 (비록 내가 그 표상들에 속한 나를 그러한 것으로서 의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표상들은 조건에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한다, 오로지 그 조건 아래에서만 그 표상들이 하나의 보편적 자기의식 안으로 함께 설 수 있는, 왜냐하면 그 표상들은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나에게 속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어떤 직관 안에서 주어지는 잡다한 표상들은 그 표상들이 모두 다 하나의 자기의식에 속하지 않는다면 모두 다 나의 표상들이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의 표상들로서 (비록 내가 그 표상들에 속한 나를 그러한 것으로서 의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표상들은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그 표상들이 하나의 보편적 자기의식 안으로 함께 설 수 있는 조건에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표상들은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나에게 속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Aus dieser ursprünglichen Verbindung läßt sich vieles folgern.
이러한 근원적 묶음으로부터 많은 것이 추론된다.
→ 이러한 근원적 묶음으로부터 많은 것이 추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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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er der Begriff der Verbindung führt außer dem Begriffe des Mannigfaltigen, und der Synthesis desselben, noch den der Einheit desselben bei sich. Verbindung ist Vorstellung der synthetischen Einheit des Mannigfaltigen¹. Die Vorstellung dieser Einheit kann also nicht aus der Verbindung entstehen, sie macht vielmehr dadurch, daß sie zur Vorstellung des Mannigfaltigen hinzukommt, den Begriff der Verbindung allererst möglich. Diese Einheit, die a priori vor allen Begriffen der Verbindung vorhergeht, ist nicht etwa jene Kategorie der Einheit (§ 10.); denn alle Kategorien gründen sich auf logische Funktionen in Urteilen, in diesen aber ist schon Verbindung, mithin Einheit gegebener Begriffe gedacht. Die Kategorie setzt also schon Verbindung voraus. Also müssen wir diese Einheit (als qualitative § 12.) noch höher suchen, nämlich in demjenigen, was selbst den Grund der Einheit verschiedener Begriffe in Urteilen, mithin der Möglichkeit des Verstandes, sogar in seinem logischen Gebrauche, enthält.
→ 그러나 묶음의 개념은 잡다의 개념 밖으로 나아가고, 잡다의 종합은 여전히 잡다의 통일의 개념을 지닌다.→ 묶음은 잡다의 종합적 통일의 표상이다¹.→ 이러한 통일의 표상은 그러므로 결합으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 그 결합이 오히려 그 통일이 잡다의 표상에 덧붙는 것을 통해서 결합의 개념을 처음으로 가능케 한다.→ 선험적으로 결합의 모든 개념들에 선행하는 이러한 통일은, 저 하나임의 범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다 (§ 10.); 왜냐하면 모든 범주들은 판단들에서 논리적 기능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들 안에서 이미 묶음, 따라서 통일이 주어진 개념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범주들은 이미 묶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통일성(질적인 것으로서의 § 12.)을 더욱 높은 차원에서 찾아야만 한다. 즉, 판단들에 있어서의 상이한 개념들의 통일성의 근거를, 따라서 더욱이 지성의 논리적 사용에 있어서 지성의 가능성의 근거를 포함할 그 어떤 것에서 찾아야만 한다.
* Einheit는 우리말 번역어 '통일성', '하나(단일성)'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독일어에서는 구분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설명을 덧붙이는 듯하다.
¹Ob die Vorstellungen selbst identisch sind, und also eine durch die andere analytisch könne gedacht werden, das kommt hier nicht in Betrachtung. Das Bewußtsein der einen ist, so fern vom Mannigfaltigen die Rede ist, vom Bewußtsein der anderen doch immer zu unterscheiden, und auf die Synthesis dieses (möglichen) Bewußtseins kommt es hier allein an.
→ ¹표상들 자체가 동일한지 동일하지 않은지,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하여 분석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여기에서 고찰하지 않는다.→ 잡다에 대한 이야기인 한에서 한 표상에 대한 의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것에 대한 의식에 대해 항상 구분할 것이고, 여기에서는 오로지 이러한 (가능한) 의식의 종합에 대한 것만이 문제이다.


Aber der Begriff der Verbindung führt außer dem Begriffe des Mannigfaltigen, und der Synthesis desselben, noch den der Einheit desselben bei sich.
그러나 묶음의 개념은 잡다의 개념 밖으로 나아가고, 잡다의 종합은, 여전히 잡다의 통일의 개념을 지닌다.
→ 그러나 묶음의 개념은 잡다의 개념 밖으로 나아가고, 잡다의 종합은 여전히 잡다의 통일의 개념을 지닌다.
Verbindung ist Vorstellung der synthetischen Einheit des Mannigfaltigen¹.
묶음은 잡다의 종합적 통일의 표상이다¹.
→ 묶음은 잡다의 종합적 통일의 표상이다¹.
Die Vorstellung dieser Einheit kann also nicht aus der Verbindung entstehen, sie macht vielmehr dadurch, daß sie zur Vorstellung des Mannigfaltigen hinzukommt, den Begriff der Verbindung allererst möglich.
이러한 통일의 표상은 그러므로 결합으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 그 결합이 오히려 그를 통하여, 그 통일이 잡다의 표상에 덧붙어서, 결합의 개념을 처음으로 가능케 한다.
→ 이러한 통일의 표상은 그러므로 결합으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 그 결합이 오히려 그 통일이 잡다의 표상에 덧붙는 것을 통해서 결합의 개념을 처음으로 가능케 한다.
Diese Einheit, die a priori vor allen Begriffen der Verbindung vorhergeht, ist nicht etwa jene Kategorie der Einheit (§ 10.); denn alle Kategorien gründen sich auf logische Funktionen in Urteilen, in diesen aber ist schon Verbindung, mithin Einheit gegebener Begriffe gedacht.
이러한 통일은, 그 통일이 선험적으로 결합의 모든 개념들에 선행하는, 저 하나임의 범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다 (§ 10.); 왜냐하면 모든 범주들은 판단들에서 논리적 기능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들 안에서 이미 묶음, 따라서 통일이 주어진 개념으로 생각된다.* Einheit는 우리말 번역어 '통일성', '하나(단일성)'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독일어에서는 구분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설명을 덧붙이는 듯하다.
→ 선험적으로 결합의 모든 개념들에 선행하는 이러한 통일은, 저 하나임의 범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다 (§ 10.); 왜냐하면 모든 범주들은 판단들에서 논리적 기능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들 안에서 이미 묶음, 따라서 통일이 주어진 개념으로 생각된다.* Einheit는 우리말 번역어 '통일성', '하나(단일성)'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독일어에서는 구분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설명을 덧붙이는 듯하다.
Die Kategorie setzt also schon Verbindung voraus.
그러므로 범주들은 이미 묶음을 전제한다.
→ 그러므로 범주들은 이미 묶음을 전제한다.
Also müssen wir diese Einheit (als qualitative § 12.) noch höher suchen, nämlich in demjenigen, was selbst den Grund der Einheit verschiedener Begriffe in Urteilen, mithin der Möglichkeit des Verstandes, sogar in seinem logischen Gebrauche, enthält.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통일성(질적인 것으로서의 § 12.)을 더욱 높은 차원에서 찾아야만 한다, 즉 그것에서, 판단들에 있어서의 상이한 개념들의 통일성의 근거를, 따라서 지성의 가능성의 근거를, 더욱이 지성의 논리적 사용에 있어서, 포함할.
→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통일성(질적인 것으로서의 § 12.)을 더욱 높은 차원에서 찾아야만 한다. 즉, 판단들에 있어서의 상이한 개념들의 통일성의 근거를, 따라서 더욱이 지성의 논리적 사용에 있어서 지성의 가능성의 근거를 포함할 그 어떤 것에서 찾아야만 한다.

¹Ob die Vorstellungen selbst identisch sind, und also eine durch die andere analytisch könne gedacht werden, das kommt hier nicht in Betrachtung.
¹표상들 자체가 동일한지 동일하지 않은지,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하여 분석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여기에서 고찰에 들어오지 않는다.
→ ¹표상들 자체가 동일한지 동일하지 않은지,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하여 분석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여기에서 고찰하지 않는다.
Das Bewußtsein der einen ist, so fern vom Mannigfaltigen die Rede ist, vom Bewußtsein der anderen doch immer zu unterscheiden, und auf die Synthesis dieses (möglichen) Bewußtseins kommt es hier allein an.
한 표상에 대한 의식은, 잡다에 대한 이야기인 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것에 대한 의식에 대해 항상 구분해야 하는 것이고, 여기에서는 이러한 (가능한) 의식의 종합에 대한 것만이 문제이다.
→ 잡다에 대한 이야기인 한에서 한 표상에 대한 의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것에 대한 의식에 대해 항상 구분할 것이고, 여기에서는 오로지 이러한 (가능한) 의식의 종합에 대한 것만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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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Zweiter Abschnitt [nach Ausgabe B]
순수 지성 개념들의 연역 제 2 장 [B판]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순수 지성개념들의 초월론적 연역
§ 15. Von der Möglichkeit einer Verbindung überhaupt
§ 15. 결합 일반의 가능성에 대하여

Das Mannigfaltige der Vorstellungen kann in einer Anschauung gegeben werden, die bloß sinnlich d.i. nichts als Empfänglichkeit ist, und die Form dieser Anschauung kann a priori in unserem Vorstellungsvermögen liegen, ohne doch etwas endres, als die Art zu sein, wie das Subjekt affiziert wird. Allein die Verbindung (conjunctio) eines Mannigfaltigen überhaupt, kann niemals durch Sinne in uns kommen, und kann also auch nicht in der reinen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zugleich mit enthalten sein; denn sie ist ein Actus der Spontaneität der Vorstellungskraft, und, da man diese, zum Unterschiede von der Sinnlichkeit, Verstand nennen muß, so ist alle Verbindung, wir mögen uns ihrer bewußt werden oder nicht, es mag eine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 oder mancherlei Begriffe, und an der ersteren der sinnlichen, oder nicht sinnlichen Anschauung sein, eine Verstandeshandlung, die wir mit der allgemeinen Benennung Synthesis belegen würden, um dadurch zugleich bemerklich zu machen, daß wir uns nichts, als im Objekt verbunden, vorstellen können, ohne es vorher selbst verbunden zu haben, und unter allen Vorstellungen die Verbindung die einzige ist, die nicht durch Objekte gegeben, sondern nur vom Subjekte selbst verrichtet werden kann, weil sie ein Actus seiner Selbsttätigkeit ist. Man wird hier leicht gewahr, daß diese Handlung ursprünglich einig, und für alle Verbindung gleichgeltend sein müsse, und daß die Auflösung (Analysis), die ihr Gegenteil zu sein scheint, sie doch jederzeit voraussetze; denn wo der Verstand vorher nichts verbunden hat, da kann er auch nichts auflösen, weil es nur durch ihn als verbunden der Vorstellungskraft hat gegeben werden können.
→ 표상들의 잡다는 순전히 감각적인 즉 수용성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직관 안에 주어질 수 있고 이러한 직관의 형식은, 주체가 영향을 받는 그러한 것이기 위한 본성 이외에 다른 어떤 것 없이 우리의 표상능력들 안에 선험적으로 놓일 수 있다.→ 오로지 잡다들 일반의 묶음 (결합) 만으로는, 결코 감각을 통하여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없고, 그러므로 또 역시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서 함께 동시에 포함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표상력의 자발성의 활동이기 때문이고, 사람들은 이것을 감성과 구분하여 지성이라고 명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결합은, 우리가 우리에게 그것으로 인식되든 아니든, 직관의 잡다들의 묶음이든, 혹은 갖가지 개념들이든, 그리고 전자에 있어서 감각적 직관이든, 아니면 감각적 직관이 아니든, 우리가 종합이라는 일반적 명칭을 부과할 지성작용이다. 그를 통하여 동시에 우리가 우리에게 그것이 먼저 스스로 결합해 있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객체 내적인 것으로서 결합하고 표상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표상들 아래에서 결합은 유일한 것이고, 그 결합은 객체를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단지 주체 자체로부터 수행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결합이 그 주체의 자발성의 활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운용은 근본적으로 고유하고, 모든 결합에 대하여 등가여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결합의 반대인 것으로 보이는 그 풀어냄 (분석) 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예상된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리게 된다; 왜냐하면 지성이 먼저 아무것도 묶어내지 않은 곳에서, 그 곳에서 지성은 또한 아무것도 풀어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표상력이 결합한 것으로서의 그것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Das Mannigfaltige der Vorstellungen kann in einer Anschauung gegeben werden, die bloß sinnlich d.i. nichts als Empfänglichkeit ist, und die Form dieser Anschauung kann a priori in unserem Vorstellungsvermögen liegen, ohne doch etwas endres, als die Art zu sein, wie das Subjekt affiziert wird.
표상들의 잡다는 직관 안에 주어질 수 있다, 그 직관이 순전히 감각적인 즉 수용성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이러한 직관의 형식은 우리의 표상능력들 안에 선험적으로 놓일 수 있다, 어떤 다른 것 없이, 이기 위한 본성 이외에는, 주체가 영향을 받는.
→ 표상들의 잡다는 순전히 감각적인 즉 수용성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직관 안에 주어질 수 있고 이러한 직관의 형식은, 주체가 영향을 받는 그러한 것이기 위한 본성 이외에 다른 어떤 것 없이 우리의 표상능력들 안에 선험적으로 놓일 수 있다.
Allein die Verbindung (conjunctio) eines Mannigfaltigen überhaupt, kann niemals durch Sinne in uns kommen, und kann also auch nicht in der reinen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zugleich mit enthalten sein; denn sie ist ein Actus der Spontaneität der Vorstellungskraft, und, da man diese, zum Unterschiede von der Sinnlichkeit, Verstand nennen muß, so ist alle Verbindung, wir mögen uns ihrer bewußt werden oder nicht, es mag eine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 oder mancherlei Begriffe, und an der ersteren der sinnlichen, oder nicht sinnlichen Anschauung sein, eine Verstandeshandlung, die wir mit der allgemeinen Benennung Synthesis belegen würden, um dadurch zugleich bemerklich zu machen, daß wir uns nichts, als im Objekt verbunden, vorstellen können, ohne es vorher selbst verbunden zu haben, und unter allen Vorstellungen die Verbindung die einzige ist, die nicht durch Objekte gegeben, sondern nur vom Subjekte selbst verrichtet werden kann, weil sie ein Actus seiner Selbsttätigkeit ist.
오로지 잡다들 일반의 묶음 (결합) 만으로는, 결코 감각을 통하여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없고, 그러므로 또 역시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서 함께 동시에 포함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표상력의 자발성의 활동이고, 사람들이 이것을 감성과 구분하여 지성이라고 명명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결합은, 우리가 우리에게 그것으로 인식되든 아니든, 직관의 잡다들의 묶음이든, 혹은 갖가지 개념들이든, 그리고 전자에 있어서 감각적 직관이든, 아니면 감각적 직관이 아니든, 지성작용이다, 그 작용을 우리가 종합이라는 일반적 명칭을 부과할, 그를 통하여 동시에 인지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객체 내적인 것으로서 결합하고 표상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먼저 스스로 결합해 있지 않고서는, 그리고 모든 표상들 아래에서 결합은 유일한 것이고, 그 결합은 객체를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단지 주체 자체로부터 수행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결합이 그 주체의 자발성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 오로지 잡다들 일반의 묶음 (결합) 만으로는, 결코 감각을 통하여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없고, 그러므로 또 역시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서 함께 동시에 포함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표상력의 자발성의 활동이기 때문이고, 사람들은 이것을 감성과 구분하여 지성이라고 명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결합은, 우리가 우리에게 그것으로 인식되든 아니든, 직관의 잡다들의 묶음이든, 혹은 갖가지 개념들이든, 그리고 전자에 있어서 감각적 직관이든, 아니면 감각적 직관이 아니든, 우리가 종합이라는 일반적 명칭을 부과할 지성작용이다. 그를 통하여 동시에 우리가 우리에게 그것이 먼저 스스로 결합해 있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객체 내적인 것으로서 결합하고 표상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표상들 아래에서 결합은 유일한 것이고, 그 결합은 객체를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단지 주체 자체로부터 수행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결합이 그 주체의 자발성의 활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Man wird hier leicht gewahr, daß diese Handlung ursprünglich einig, und für alle Verbindung gleichgeltend sein müsse, und daß die Auflösung (Analysis), die ihr Gegenteil zu sein scheint, sie doch jederzeit voraussetze; denn wo der Verstand vorher nichts verbunden hat, da kann er auch nichts auflösen, weil es nur durch ihn als verbunden der Vorstellungskraft hat gegeben werden können.
여기에서 사람들은 쉽사리 알아차리게 된다, 이러한 운용은 근본적으로 고유하고, 모든 결합에 대하여 등가여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풀어냄 (분석) 은, 그것이 결합의 반대인 것으로 보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예상된다; 왜냐하면 지성이 먼저 아무것도 묶어내지 않은 곳에서, 그 곳에서 지성은 또한 아무것도 풀어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표상력이 결합한 것으로서의 그것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운용은 근본적으로 고유하고, 모든 결합에 대하여 등가여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결합의 반대인 것으로 보이는 그 풀어냄 (분석) 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예상된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리게 된다; 왜냐하면 지성이 먼저 아무것도 묶어내지 않은 곳에서, 그 곳에서 지성은 또한 아무것도 풀어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표상력이 결합한 것으로서의 그것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蟲-
- Der berühmte … Kategorien. - B; A statt dessen:
- 저 유명한 … 범주들. - B; A는 그 대신에:

Es sind aber drei ursprüngliche Quellen, (Fähigkeiten oder Vermögen der Seele) die die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en enthalten, und selbst aus keinem andern Vermögen des Gemüts abgeleitet werden können, nämlich, Sinn, Einbildungskraft und Apperzeption. Darauf gründet sich 1) die Synopsis des Mannigfaltigen a priori durch den Sinn; 2) die Synthesis dieses Mannigfaltigen durch die Einbinldungskraft: endlich 3) die Einheit dieser Synthesis durch ursprüngliche Apperzeption. Alle diese Vermögen haben, außer dem empirischen Gebrauch, noch einen transz., der lediglich auf die Form geht, und a priori möglich ist. Von diesem haben wir in Ansehung der Sinne oben im ersten Teile geredet, die zwei andre aber wollen wir jetzt ihrer Natur nach einzusehen trachten.
→ 그러나 그것은 세 가지 근본적 원천들이다. 그것들(영혼의 소질들이나 능력들)은 모든 경험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포함하고, 그 자체로 감성의 다른 어떤 능력들로부터도 파생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감각, 상상력 그리고 통각이다.→ 1) 감각을 통한 선험적 잡다의 총괄(일람)이, 2) 이러한 잡다의 상상력을 통한 종합이, 끝으로 3) 이러한 종합의 근원적 통각을 통한 통일이 거기에 근거한다.→ 이러한 모든 능력들은 경험적 사용 외에 초월론적 사용 또한 가진다. 그 사용은 다만 형식에만 해당하고, 선험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감각과 관련하여 위 첫번째 부문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다른 부분은 우리가 이제 그 능력들의 본성을 통찰하고자 노력하려 한다.


Es sind aber drei ursprüngliche Quellen, (Fähigkeiten oder Vermögen der Seele) die die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en enthalten, und selbst aus keinem andern Vermögen des Gemüts abgeleitet werden können, nämlich, Sinn, Einbildungskraft und Apperzeption.
그러나 세 가지 근본적 원천들이다, (영혼의 소질이나 능력) 그것들이 모든 경험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포함하는, 그리고 그 자체로 감성의 다른 어떤 능력들로부터도 파생될 수 없는, 즉, 감각, 상상력 그리고 통각.
→ 그러나 그것은 세 가지 근본적 원천들이다. 그것들(영혼의 소질들이나 능력들)은 모든 경험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포함하고, 그 자체로 감성의 다른 어떤 능력들로부터도 파생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감각, 상상력 그리고 통각이다.
Darauf gründet sich 1) die Synopsis des Mannigfaltigen a priori durch den Sinn; 2) die Synthesis dieses Mannigfaltigen durch die Einbinldungskraft: endlich 3) die Einheit dieser Synthesis durch ursprüngliche Apperzeption.
1) 감각을 통한 선험적 잡다의 총괄(일람)이 그에 근거한다; 2) 이러한 잡다의 상상력을 통한 종합이 그에 근거한다: 끝으로 3) 이러한 종합의 근원적 통각을 통한 통일이 그에 근거한다.
→ 1) 감각을 통한 선험적 잡다의 총괄(일람)이, 2) 이러한 잡다의 상상력을 통한 종합이, 끝으로 3) 이러한 종합의 근원적 통각을 통한 통일이 거기에 근거한다.
Alle diese Vermögen haben, außer dem empirischen Gebrauch, noch einen transz., der lediglich auf die Form geht, und a priori möglich ist.
이러한 모든 능력들은 가진다, 경험적 사용 이외에, 초월론적 사용 또한, 그 사용이 다만 형식에만 해당하는, 그리고 선험적으로 가능한.
→ 이러한 모든 능력들은 경험적 사용 외에 초월론적 사용 또한 가진다. 그 사용은 다만 형식에만 해당하고, 선험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Von diesem haben wir in Ansehung der Sinne oben im ersten Teile geredet, die zwei andre aber wollen wir jetzt ihrer Natur nach einzusehen trachten.
이러한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감각과 관련하여 위 첫번째 부문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다른 부분은 우리가 이제 그 능력들의 본성을 통찰하고자 노력하고자 한다.
→ 이러한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감각과 관련하여 위 첫번째 부문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다른 부분은 우리가 이제 그 능력들의 본성을 통찰하고자 노력하려 한다.

-蟲-
Der erste dieser beiden berühmten Männer öffnete der Schwärmerei Tür und Tor, weil die Vernunft, wenn sie einmal Befugnisse auf ihrer Seite hat, sich nicht mehr durch unbestimmte Anpreisungen der Mäßigung in Schranken halten läßt; der zweite ergab sich gänzlich dem Skeptizism, da er einmal eine so allgemeine für Vernunft gehaltene Täuschung unseres Erkenntnisvermögens glaubte entdeckt zu haben. - Wir sind jetzt im Begriffe einen Versuch zu machen, ob man nicht die menschliche Vernunft zwischen diesen beiden Klippen glücklich durchbringen, ihr bestimmte Grenzen anweisen, und dennoch das ganze Feld ihrer zweckmäßigen Tätigkeit für sie geöffnet erhalten könne.
→ 이 유명한 양쪽의 방법들 중 전자는 도취의 문과 출구를 열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성이 실로 이성의 측면에 대해 권한들을 가졌다면, 제한의 불확실한 선전들을 통하여 제한들 안에 자신을 붙잡아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전적으로 회의주의에 바쳐졌다. 그 방법이 일찍이 그렇게나 보편적으로 이성으로 간주된 우리의 인식능력의 기만을 알아차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제 개념들 내에서, 사람들이 인간적 이성을 이 두 절벽 사이에서 운 좋게 관철시킬 수 있는지, 이성에 규정된 한계들을 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이성의 유효한 활동의 전체를 이성을 위해 개방된 채로 보존할 수 있는지 연구를 구성할 것이다.
Vorher will ich nur noch die Erklärung der Kategorien voranschicken. Sie sind Begriffe von einem Gegenstande überhaupt, dadurch dessen Anschauung in Ansehung einer der logischen Funktionen zu Urteilen als bestimmt angesehen wird. So war die Funktionen des kategorischen Urteils die des Verhältnisses des Subjekts zum Prädikat, z.B. alle Körper sind teilbar. Allein in Ansehung des bloß logischen Gebrauchs des Verstandes blieb es unbestimmt, welchem von beiden Begriffen die Funktion des Subjekts, und welchem die des Prädikats man geben wolle. Denn man kann auch sagen: Einiges Teilbare ist ein Körper. Durch die Kategorie der Substanz aber, wenn ich den Begriff eines Körpers darunter bringe, wird es bestimmt: daß seine empirische Anschauung in der Erfahrung immer nur als Subjekt, niemals als bloßes Prädikat betrachtet werden müsse; und so in allen übrigen Kategorien.
→ 이에 앞서 나는 아직 단지 범주들의 해명만을 미리 보이고자 한다.→ 그것들은 한 대상 일반에 대한 개념들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의 직관이 판단들에 대한 논리적 기능들의 개념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통찰된다.→ 그래서 범주적 판단의 기능들은, 예를 들어 모든 물체들은 가분적이다와 같은,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일 것이다.→ 오로지, 양자의 개념들에 대해 어떤 것에는 주어의 기능을, 그리고 어떤 것에는 술어의 기능을 사람들이 부여하고자 하는, 지성의 순전히 논리적인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만 그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또한 약간의 가분적인 것은 물체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체의 범주를 통하여, 내가 물체의 개념을 그 아래에 놓을 때, 그 개념은 그 개념의 감각적 직관이 경험 안에서 언제나 단지 주어로서만, 결코 순전한 술어로서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남은 모든 범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Der erste dieser beiden berühmten Männer öffnete der Schwärmerei Tür und Tor, weil die Vernunft, wenn sie einmal Befugnisse auf ihrer Seite hat, sich nicht mehr durch unbestimmte Anpreisungen der Mäßigung in Schranken halten läßt; der zweite ergab sich gänzlich dem Skeptizism, da er einmal eine so allgemeine für Vernunft gehaltene Täuschung unseres Erkenntnisvermögens glaubte entdeckt zu haben.
이 유명한 양쪽의 방법들 중 전자는 도취의 문과 출구를 열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성이 실로 이성의 측면에 대해 권한들을 가졌다면, 제한의 불확실한 선전들을 통하여 제한들 안에 자신을 붙잡아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전적으로 회의주의에 바쳐졌다, 그 방법이 일찍이 그렇게나 보편적으로 이성으로 간주된 우리의 인식능력의 기만을 알아차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이 유명한 양쪽의 방법들 중 전자는 도취의 문과 출구를 열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성이 실로 이성의 측면에 대해 권한들을 가졌다면, 제한의 불확실한 선전들을 통하여 제한들 안에 자신을 붙잡아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전적으로 회의주의에 바쳐졌다. 그 방법이 일찍이 그렇게나 보편적으로 이성으로 간주된 우리의 인식능력의 기만을 알아차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Wir sind jetzt im Begriffe einen Versuch zu machen, ob man nicht die menschliche Vernunft zwischen diesen beiden Klippen glücklich durchbringen, ihr bestimmte Grenzen anweisen, und dennoch das ganze Feld ihrer zweckmäßigen Tätigkeit für sie geöffnet erhalten könne.
- 우리는 이제 개념들 내에서 연구를 구성할 것이다, 사람들이 인간적 이성을 이 두 절벽 사이에서 운 좋게 관철시킬 수 있는지, 이성에 규정된 한계들을 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이성의 유효한 활동의 전체를 이성을 위해 개방된 채로 보존할 수 있는지.
→ - 우리는 이제 개념들 내에서, 사람들이 인간적 이성을 이 두 절벽 사이에서 운 좋게 관철시킬 수 있는지, 이성에 규정된 한계들을 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이성의 유효한 활동의 전체를 이성을 위해 개방된 채로 보존할 수 있는지 연구를 구성할 것이다.

Vorher will ich nur noch die Erklärung der Kategorien voranschicken.
이에 앞서 나는 아직 단지 범주들의 해명만을 미리 보이고자 한다.
→ 이에 앞서 나는 아직 단지 범주들의 해명만을 미리 보이고자 한다.
Sie sind Begriffe von einem Gegenstande überhaupt, dadurch dessen Anschauung in Ansehung einer der logischen Funktionen zu Urteilen als bestimmt angesehen wird.
그것들은 한 대상 일반에 대한 개념들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의 직관이 판단들에 대한 논리적 기능들의 개념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통찰된다.
→ 그것들은 한 대상 일반에 대한 개념들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의 직관이 판단들에 대한 논리적 기능들의 개념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통찰된다.
So war die Funktionen des kategorischen Urteils die des Verhältnisses des Subjekts zum Prädikat, z.B. alle Körper sind teilbar.
그래서 범주적 판단의 기능들은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 예를 들어 모든 물체들은 가분적이다, 일 것이다.
→ 그래서 범주적 판단의 기능들은, 예를 들어 모든 물체들은 가분적이다와 같은,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일 것이다.
Allein in Ansehung des bloß logischen Gebrauchs des Verstandes blieb es unbestimmt, welchem von beiden Begriffen die Funktion des Subjekts, und welchem die des Prädikats man geben wolle.
오로지 지성의 순전히 논리적인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만 그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양자의 개념들에 대해 어떤 것에는 주어의 기능을, 그리고 어떤 것에는 술어의 기능을 사람들이 부여하고자 하는.
→ 오로지, 양자의 개념들에 대해 어떤 것에는 주어의 기능을, 그리고 어떤 것에는 술어의 기능을 사람들이 부여하고자 하는, 지성의 순전히 논리적인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만 그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Denn man kann auch sagen: Einiges Teilbare ist ein Körper.
왜냐하면 사람들은 또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가분적인 것은 물체이다.
→ 왜냐하면 사람들은 또한 약간의 가분적인 것은 물체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Durch die Kategorie der Substanz aber, wenn ich den Begriff eines Körpers darunter bringe, wird es bestimmt: daß seine empirische Anschauung in der Erfahrung immer nur als Subjekt, niemals als bloßes Prädikat betrachtet werden müsse; und so in allen übrigen Kategorien.
그러나 실체의 범주를 통하여, 내가 물체의 개념을 그 아래에 놓을 때, 그 개념은 규정된다: 그 개념의 감각적 직관이 경험 안에서 언제나 단지 주어로서만, 결코 순전한 술어로서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긜고 남은 모든 범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 그러나 실체의 범주를 통하여, 내가 물체의 개념을 그 아래에 놓을 때, 그 개념은 그 개념의 감각적 직관이 경험 안에서 언제나 단지 주어로서만, 결코 순전한 술어로서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남은 모든 범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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