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einai 용법들의 체계에서 표현되는 바로서의 Being 개념과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적 사유에서 현존 개념 사이의 대조를 통해 좀 더 가까이 가 보도록 하자. 그 체계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유형 6의 문장들에서("The gods are," "A centaur is not") 해당 동사의 사변적 용법에 아무런 특수한 역할도 할당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한 Being 논의에서 그런 문장들의 상대적으로 주변적 위치는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존재론적 사변에서 현존 개념이 전혀 명백히 정의되지 않은 역할을 그저 그렇게 수행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현존에 대한 물음들은 내가 나 자신의 현존을 확신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든 확신할 수 있는가, 물질적 대상들은 현존하는가, 나는 나 이외의 정신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과거는 실제인가, 이런 주제들에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지는, 데카르트에 의해 착수된 전통에서 갖는 그런 핵심적 중요성을 그리스 형이상학에서 갖추지 못한다. 
  어떻게 그 두 가지 전통 사이의 이런 극단적 차이를 설명할 것인가? 그 설명의 일부는 틀림없이 회의주의에 의해 수행된 역할 안에 놓인다. [32쪽] 회의주의의 극단적 도전은 -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무엇을 확실성을 갖고 알 수 있는가? - 고대 철학에서 역사적으로 이차적인 것이다. 이러한 회의적 물음이 일찍이 크세노파네스에 의해 유발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원후 3세기 두 번째 아카데미의 발흥 전까지, 고전적 사유의 주요 체계가 정식화되기 전에는, 그리스 철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진 못하였다. 반면, 그 회의주의의 도전과 그에 답하기 위해 요청된 인식론은 데카르트 자신의 사상에서도 그의 후속세대들의 사유에서도, 근대 철학에서 시작부터 중심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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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쪽] 그래서 문장 구문에 대한 플라톤의 발견은 동시에 어떠한 기술적 언어 사용에 대해서든 근본적인 조건들의 재인이었기도 하다. 주어와 술어라는 용어는 오직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서 출현하지만, 그 통찰은 똑같다. 문장의 주-술(명사-동사) 구조는 언어내에서 우리의 언어 사용을 우리가 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것에 연결시키는 지시와 기술의 의미론적 구조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나는 시작부터 서술 개념에서 이 근본적인 애매성에 주의를 요청해왔다. 한편으로는, 문장 내 요소들 사이의 구문론적 관계가, 다른 한편으로 문장 혹은 문장요소와 세계 내 그 지시체 사이의 의미론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to be의 통합된 체계 내에서 계사 구문의 중심 위치를 이해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서술의 의미론적 기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 계사 문장으로 향한다. Socrates is wise 혹은 Socrates is in the agora. 진술로서 평범하게 단언될 경우, 그런 문장은 세 가지 의미론적 관계를 포함한다. (1) 만일 그 문장이 참이라면, 주어는 반드시 현존해야만 하고, 즉, 그 문장이 그에 대한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2) 그 문장은 진리 주장을 구성하는데, 즉, 그것들이 그러하다고(그렇게 있다고, that they are) 그 문장이 말하는대로, 실제로 사물들이 그러하다고(that things are in fact) 주장한다. (3) 이 주장은 문제가 되는 서술이 (being wise, 혹은 being in the agora) 실제로 그 주어에 속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 부합하는 속성이 "발생한다"거나 이 특수한 경우에서 예화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러한 세 가지 의미론적 조건들은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서 einai의 세 가지 상이한 용법들에 부합한다. 1, 유형 4 문장들에서 주어에 대한 존재사적 용법 ("There is someone/no one who can escape death"); 2,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완결 문장에 대한 진리사적 구조 ("Things are as you say"); 그리고 3, 유형 5에서 술어들에 대한 발생의 동사 ("There will be vengeance from Orestes"). 일차 문장에서 서술의 신호로서 계사의 일상적 용법이 통상 이런 세 가지 의미론적 함축을 담기 때문에, 똑같은 동사가 또한 이차 문장의 세 유형들에서 이러한 의미론적 주장들을 명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그 기능인 문장 연산자로서도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명사-동사 문장들에서 술어는 to be 동사 없이 발생한다. 그 계사 동사는 오직 술어 표현이 형용사 또는 다른 명사적 형태일 때에만 요청된다. 그런 문장들에서 우리는 계사의 최소 역할을 (1) 인칭, 시제 따위에 대한 기호를 가져오는 동사적 형태로, (2) 서술 표현이나 동사 구를 [31쪽] 형성하기 위해 형용사와 결합하는, 그런 서술동사로서, 따라서 (3) 문장성, 즉 주-술 형태의 신호로 재인한다. 그것이 우리가 계사 동사를 서술의 신호로 기술할 때 의미하는 바 그 삼중의 기능이다. Socrates walks, Theaetetus sits 같은 더 단순한 형식의 문장들에서 이 기능은 동사만으로 수행된다. 계사로서, einai는 동사화, 동사 없는 술어로부터 동사 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기능한다. 더욱이, 이미 지적하였듯, 우회적 구조에서 einai는 그 언어의 어떤 동사든 대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Socrates is walking, Theaetetus is sitting (혹은 이것들의 그리스어 대응물들)를 명사-동사 문장의 변형들로 가진다. 전통 이론에서 계사 형태는 표준화되고 일반적인 동사라기 보다는 계사 동사가 서술의 신호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에 묶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to be가 광범위하고 다양한 문장 형식들에 대해 서술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재인하고 있다. 주요 서술 동사로서, einai는 서술 개념과 서술에 의해 내포되는 근본적인 의미론적 관계들 모두를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einai 용법들의 연결망은 서술, 진리, 현존 개념들을 함께 가져오는 더 거대한 개념적 구조를 표현하는 데에 기여한다. 이 세 가지 개념들 중 어느 하나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한 언급 없이 적절하게 해명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Being 개념을 표현하는 문장 형식들의 체계에 대한 개념적 통일성을 제공하는 것, 그것은 구문론과 의미론 양자 모두의 이러한 서술의 이중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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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내 생각에 그리스어 동사 be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그러나 이 사전적 설명은 Being 개념에의 탐구로서 존재론에 대한 그리스적 기획을 정당화할지도 모를 einai의 용법들의 통일성 개념을 정립시키는 데엔 아무 기여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존재사적 용법과 진리사적 용법에 대한 문장 구조와 의미론적 기능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가야만 하고, 어떻게 이것들이 내가 그 전 체계의 개념적 기초로 제안하는 해당 동사의 서술적 기능과 관련되는지 보아야만 한다.
  내 논증의 앞선 단계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리는 플라톤에 의해 『소피스트』에서 독자적으로 제안된 명사와 동사 사이의 구분에서, 그 가장 단순한 문장 구조에서 묘사된대로의 서술 개념을 가지고 시작했다. 플라톤은 명사와 동사를 구문론적으로, 문장 산출을 위해 결합하는 것으로도, 뿐만 아니라 또한 의미론적 기능들로, 동사는 행위(praxis)를 나타내고, 명사는 행위자(pratton) 혹은 사물(pragma)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정의하였다. 이러나 의미론적 차원은 플라톤의 간략한 설명에서 조심스럽게 전개되었다. 그의 예시 문장들은(Theaetetus sits, Theaetetus flies) 대화편 내에서 그 주어"에 대한(peri)" 것, 즉 테아이테토스 그 자신에 대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참인 문장은 그에 관련하여 "the things that are (ta onta)"을 말한다(263b). 이 논의에서 플라톤의 목표는 참인 진술과 거짓인 진술을 정의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방금 인용된 einai의 진리사적 용법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참과 거짓이라는 관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먼저 보편 문법의 기초 단어 부류로, 명사와 동사로 서술적 문장 구조의 분석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 형식적으로 말하자면, 명사와 동사는 그리스어에서 구별하기 쉽다 (설령, 우리가 아는 한, 누구 하나 앞서 그것들을 구분하는 일에 개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나 플라톤이 지적한 기능적 구별은 그리스어나 심지어 인도-유럽어의 특수성이 아니다. 사피어가 언급했듯, "반드시 무언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그러한 것이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선택되고 나면 이 담화의 주어에 대하여 무언가가 이야기되어야만 한다. ... 담화의 주어는 명사이다. ... 서술이라는 작업을 위해 확보되어 있는 형식은 ... 동사이다. ... 어떤 언어도 명사와 동사를 완전히 구별 못하는 경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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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에서 나는 einai에 대한 이런 처소격 해석을 통시적 신화로, 하나의 원초적 의미로부터 그 동사의 모든 용법들의 파생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그것을 언어상의 선사시대에 대한 신화적 해석으로서 거부하였다. 그렇지만, 통시적 주장 없이, 표현된 바로 그 형식에서 이 설명은 eiani의 모든 용법들에 있어서 그 동사의 직관적 의미에 대한 그럴 법한 사전적 기술을 제시한다. 그 동사의 기초적 의미는 "to be present, be available"이고, 인물들에 대해 전형적 용법 "to live, to dwell (somewhere)"이 함께 한다. 가장 공통적인 용법인 명사적 계사의 경우에서는 물론 장소적 의미가 가장 약하다. 그러나 때로 "mere copula"로 간주되는 이 경우에서조차, 우리는 고정-지속 상(相) 값에서 처소격 의미에 대한 일종의 유비를 발견한다. 그 유비는 그리스어 동사 to be의 경우에서 특히 강력하다. 그래서, 서술의 신호로서 그 구문적 역할에 더하여, 계사로서 einai는 여전히 그대로 존립함과 남아있음이라는 사전적 시사를 유지한다. 그것은 모든 계사 용법에 현존하는 고정-지속 값으로, 파르메니데스가 eternal being이란 개념으로 변형시킨 그것이다. "It never was nor will be, since it is all together now" (단편. 8, 5).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이 불변하는 Being은 여전히 처소격 용어로 표현된다: "equal to itself in every direction," "like the bulk of a rounded sphere, balanced equally from the center in every way" (단편. 8, 43과 49이하).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그 그리스어 동사의 모든 상과 어감을 다 함께 불변하는 사태 혹은 실체라는 단일한 개념, to eon, "that which is"로 끌고 옴으로써 Being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Einai의 처소격 값들에 대한 이 논의를 마치기에 앞서, 우리는 현존과 실재성이라는 발상들을 표현하는 데에 [29쪽] 장소 혹은 상황 개념의 그런 형이상학적 확장이 얼마나 널리 기여할 수 있는지, 비단 그리스어에서만이 아닌 관점에서 주목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리와 현존이라는 의미론적 관념들을 명시하기 위해 담론의 영역 안에 상정한다거나 정위시킨다거나 하는 은유들을 체계적으로 이용해왔다. 위치의 구상화라는 유사하게 비환원적 용법이 또 달리 아주 다른 하이데거식 현존 규정에서 Dasein, "being-there" 그리고 in-der-Welt-sein, "being-in-the-world"로 나타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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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inai의 다양한 용법들을 탐사해 보았기에,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용법들이 하나의 체계로서 함께 엮이는가 하는 물음을 고찰할 수 있다. 나는 이미 한 가지 대답을 구문론적 분석에 기초하여 지적하였으나, 이러한 노선을 진행시키기에 앞서 그 동사의 사전적 의미라는 주제에 대해 무엇이 이야기될 수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자.
  단일한 본뜻(Urbedeutung)이나 근본적 의미로부터 einai의 상이한 용법들을 도출해내려는 어떠한 시도든 그럴 법하게 유형1의 문장들에서 인물들에 대해 입증된 vitla-locative(生-處所格) 의미 "live, dwell"로부터 혹은 좀 더 일반적인 처소격 의미 "be present, be available, vorhanden sein"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유사-존재사적 의미가 처소격 보어를 가지는 einai의 모든 계사용법에 의해 자동적으로 내포된다. Socrates is here, Socrates is in the agora. 그것이 바로 그 동사의 절대, "존재사" 용법이 또한 이러한 처소격 구조에서 장소 부사를 무화시킨 결과로 보일 수 있기도 한 이유이다. Socrates is (somewhere). 이를 테면, 현존은 일반화되거나 부정형으로 남겨진 정위이다. 그 동사의 그런 처소-존재사적 의미는 "whatever is, is somewhere; what is nowhere is nothing"이란 오래된 그리스적 관념(고르기아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증언되는)에 부합한다. 따라서 플라톤이 형상들에 대해 비-공간적 실재성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시키길 바랐을 때, 그는 그것들을 noetos topos, 지성적 공간에 위치시킬 책임이 있었다(『국가』 6권, 508c1).
  이러한 장소적 의미가 인도-유럽어 어근 *es-의 가장 오래된 의미들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는 영어 동사 be의 "원초적인 의미"가 "어떤 특정된 장소에서 '장소를 점유함(to occupy a place)(즉, to sit, stand, lie 등)'"이며 그로부터 "to be somewhere, no matter where, to be in the universe or realm of fact, to have a place among existing things, to exist"라는 더 일반적인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고 제안한다.
  우리가 주목하였듯, "being-there" 혹은 "being-present"의 문자적 의미는 처소격 계사의 모든 용법에 함축되고, 처소-존재사격으로 분류되는 문장들에서 강화된다. 그것은 유형2와 3에 속하는 문장들 대부분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there is a city Ephyre in the corner of Argos." 다른 한편, einai의 모든 용법들에 가장 공통적인 경우에서, 서술적 형용사와 명사를 가지는 계사 구조, "being in a place"라는 문자적 의미는 완전히 부재한다. Socrates is wise, Socrates is a philosopher. 여전히, 명사적 계사의 경우에 우리가 취하는 것은 언어학자들이 einani의 상태적 측면으로 재인하는 [28쪽] 그런 의미에서의 처소격 의미에 대한 일종의 그림자이다. Become에 해당하는 동사들의 변화-운동의 측면에 반대되는, 상태 혹은 단계 동사로서 einai의 이 근본적인 사전적 값은 그리스어에서 특히나 강한데, 두 가지 독특한 형태학적 대비들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첫째로, 인도-유럽어 어근 *es로부터 파생된 다른 동사들과 달리, 그리스어 동사 einai는 지속어간을 활용 동안에 유지하고 다른 어근들로부터 나오는 어떠한 비-지속 형태나 부정과거 형태도 (영어 동사 is가 다른 *es- 이외의 어근들로부터 나오는 be와 was를 허용하고, 라틴어 esse가 fui/fuisse를 허용한 것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덧붙여, εἰμί be에 대한 상태-처소격 값은 근사-동음이의어 εἶμι "I go"와의 대조를 통해 강화된다. 두 고대적 -μι 동사들 사이의 이러한 대조는 εἰμί be 동사에 "to go"와 대조를 통해 "to stay"라는 의미를 함축시켜준다. einai에 대한 이런 수렴적인 일련의 언어적 특성들은 우리로 하여금 전통적 그리스 사유에서 왜 te be는 to be somewhere인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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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쪽] 이러한 사변적 문장 유형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유형 6에서 그 동사의 영향력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위해, 나는 부정이 먼저 나오는 것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현존에 대한 긍정은 이차적인 것으로, 회의적 의심에 대한 응답으로 보일 수 있다. "You say that Zeus does not exist? I say that he does!" 하지만 "Zeus is not?"이라고 말함으로써 의심하는 자가 의미한 바는 정확히 무엇인가? 만일 유형 4가 einai의 존재사적 용법에 대한 전형이라는 우리의 생각이 옳다면, einai의 의미론적 기능은 서술에 대한 주어를 상정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Zeus is를 부정한다는 것은 Zeus가 무엇이 되었든 참인 어느 술어에 대해서나 주어일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제우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단지 거짓일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거짓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에 대해 이야기할 그런 주어 따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의 현존 부정은 한 전통 전체에 대한 진리 부정이다. 시인들과 신학자들의 전통에 대해서 말이다. Zeus is not에 대한 이러한 독해는 우리가 유형 4의 구문에 따라 발견하길 기대할 관계사의 그 무화를 설명해준다. 유형 6 현존 부정에서는 조건들을 제시되는 주어에 의해 충족될 것으로 구체화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주어의 not-being이 그에 앞서 모든 술어의 무효화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유형 6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라면, 왜 그 동사의 표면적 구문이, 라일과 그 외의 사람들이 논평하듯,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절대 구조에서 einai는 일상적인 동사마냥 일차 술어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einai의 표면적 구문은 그 동사가 "be alive"나 "be present"를 의미하는 유형1에서와 마찬가지인 듯, 혹은 "there are no asses in all of Scythia, because of the cold" 같은 유형 2와 3에서 처소격 계사의 유사-존재사적 용법에서와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그 악명높은, existence는 술어인가 하는 물음을 불러 일으키는 이런 오해하기 쉬운 구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무엇보다 술어일 것이나, 일차 술어는 아닐 것이다. 유형 6에서 einai가 그 외양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일차 동사가 아니라는 점은 그것이 유형 1, 2, 3에서 똑같은 동사가 취하는 것처럼 시간이나 장소 보어를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러한 불일치에 주목하지 못함은, 문헌학자들이 그리스어에서 원초적인 (혹은 적어도 가장 알려진지 오래된) einai 용법으로 간주한 경우에서 유형1과 유형6을 결합시키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일부 철학자들로 하여금 방황하게 만들었다. 고전 문장 유형들에 대한 나의 일람표는 유형 6이 einai의 원초적 용법일 것 같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5세기 후기 이전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구문 분석은 유형 1의 경우로서 평범한 술어인 것과 상당히 다르게, 유형 6에서 einai는 유형 4의, 관계절에서 피연산 문장을 구체화하는, 존재사적 문장 연산자에 유비됨으로써 가장 잘 이해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유형 6을 그렇게나 어렵게 만드는 건 정확히 이 관계절의 부재이다.
  대신에, 우린 아마도 유형 6에서 einai의 절대 구조를 앞서 3절에서 제안되었던 것처럼 계싸 문장에서 술어를 무화시킨 결과로 해석할 것이다. X is는 X is something or other의 축약이다. 유형 6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 유형을 계사 구조에 더 밀접하게 묶어주지만 [27쪽] 그 강력한 존재사적 값은 그리 잘 설명해주지 못한다. 유형 6의 명백하게 존재사적인 영향력은 (being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유형 4의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부터의 도출로 더 잘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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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6은 후기 데카르트주의 철학의 특징인 존재사적 진술들의 종류에 고대 선례를 제공한다. (하이데거가 라이프니츠에게서 인용했던 급진적인 질문을 상기해 보라: What is there anything at all rather than nothing?) 그래서 유형 6은 유형 4에서 묘사되는 구어적 개념과 대비되는 더 사변적인 현존 개념을 표현하는 데에 기여한다. 유형 1~3에서의 einai의 내포된 존재사적 영향력과 달리, 유형 4의 문장들은 명시적으로 주어의 현존이나 부재와 관련되지만, 두 측면에서, 1) 가능한 주어들의 부류가 문맥에 의해 (위의 9절에서 인용된 우리의 첫 번째 예시로서의 문장, 그 협의회의 화자들) 혹은 그 문헌 자체에 의해서 (두 번째 예시에서 트로이인들, 특히 프리아모스의 아들들) 구체화되고, 2) 긍정된 것이나 부정된 것이 일반적으로 주어의 현존이 아니라 관계절에서 상술된, 특정 술어에 대한 주어라는 측면에서, 구체화된 현존과 관련된다는 것을 우린 보았다. 두 번째 구체화는 존재양화 ∃x(Fx)에서 구성요소 Fx에서 그 상관물을 갖는다. 두 경우 모두, 상정되는 것은 일반화된 주어가 아니라 한정된 술어들을 충족시키는 주어이다. 그렇지만, 첫 번째 구체화는 일상 회화와 논리학의 형식화된 담화 사이의 차이를 짚어낸다. 유형 4의 관용적 문장들에서 그 현존이 긍정되거나 부정되는 주어는 세계 내 어떤 객체도 아닌 확정된 유형의 어떤 것이다. 이야기하도록 구체화되는 개인, 트로이 전사이다. 이런 문장들은 불특정의 현존, 아무것도 아라기 보단 어쨌든 무언가인 바의 것을 다루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신이 현존하는지, 혹은 외부 세계의 현존을 논의할 경우처럼), 오히려 구체화되거나 문맥적인 현존, 한정된 맥락에서 (협의회나 전장) 구체화된 종류의 것의 (화자나 전사) 현존을 다룬다. 사변적인 유형 6에서, 주어에 대한 종류상의 구체화는 유지되지만 (신이나 켄타우로스), 맥락상의 제한과 구체적 술어는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문장 유형의 구문은 투명하지 않다. einai의 내포된 존재사적 영향력은 유형 4의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를 상기시키지만, 유형 6에서 우리는 아무런 피연산 문장도 갖지 않는다. 아마도 유형 6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는 어떤 임의의 술어에 대해서든 그 주어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유형 4에 대하여 einai의 주어에 종류적 제한은 견지하지만 (예를 들어 신들이나 켄타우로스들) 관계절을 제거함으로써 술어들에 대한 어떠한 구체화도 삭제하는 일반화로 이해하는 것이다. 유형 6에서 einai의 "절대" 구문, 이 경우 서술보어에 의해서든 관계절에 의해서든 제한받지 않은 구문에, 주어에 대한 현존의 마찬가지로 구체화되지 않은 긍정이나 부정이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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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세 경우에서 그 동사의 영향력을 구별하도록 허용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왜 진리사적 용법에서는 "is the case"로, 유형 4에서는 "there is" 혹은 "exists"로, 유형 5에서는 "occurs," "take palce"로 einai를 번역하는지 설명하는 일을 허용하는 것이 바로 문장 연산자로서 einai와 그 기저에 놓이는 피연산 문장 사이의 다양한 관계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에 주목하도록 하자. 이러한 것들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번역과 구문론적 분석에 기초하여 만든 구분들이다. 그리스어 화자에게 이것들은 동일한 동사, 일상의 계사 문장들에서 나타나는 바로 그 똑같은 동사의 단순한 세 가지 용법들일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어 화자는 진리사적 용법을 존재사적 용법으로부터 구별하려 하지도, 일상적 계사로부터 구별해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einiai의 상이한 구문론적 용법들 사이의 어휘적 일치의 한 가지 근본적 귀결은 그리스에서 사유하는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일련의 사건이나 사태들로부터 실체들을 구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리란 점이다. 그들이 ta onta, "beings" 혹은 "the things that are"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아마도 개별자들 혹은 자연종들, 일식이나 달의 위상 같은 천문학적 사건들, 혹은 더욱 일반화하여 사실들과 세계 내의 사실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의 현존을 지시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서는 꽤나 당황스러운 어떤 그리스 존재론적 논의들의 논리를 만든다. 우리의 번역과 분석은 사물, 사건, 그리고 사태 사이의 구분을 당연시한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그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구분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선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다루는 한, 그건 늘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인 것은 아니다.

11. 내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것은 존재사적 유형 6에 대한 논의이다. 그것은 아무런 처소격 보어나 명사적 보어도 없이 einai가 "절대적으로" 이해되는 경우의, 개별자들과 사물들의 종류들에 대한 현존의 단적인(unqualified) 선언이나 부정이다. Zeus is not. The gods are. Centaurs are not. 어떤 서술적 보어도 부재함은 einai의 이러한 용법을 근대의 동사 to exist와 유사하게 만든다. 나는 호메로스에게서는 이 문장 유형의 어떠한 사례도 발견하지 못한다. 유형 6은 그리스 문학에서 오직 [25쪽] 소피스트 시대의, 기원전 5세기 후반기 그리스에서의 신학적 회의주의의 발생과 더불어서만 나타난다. 어쨌든 그리스에서 뭔가 "exist" 같은 것을 의미하는 이러한 einai 용법은 신학적 사변의 분위기와 전통적 믿음의 대상들에 관련한 의심의 태도를 전제한다. (성경 구절에 표현된 "우매한 자들은 내심으로 '신은 없다' 말하였다." 같은 그런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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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4는 우리가 einai의 존재사 용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일람표 역할을 할 수 있다.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서, 그 동사는 여기에서 기능을 진리사적 구조에서 einai의 용법과 공유한다. 우리가 보았듯, 두 문장 유형 모두에서 einai는 언어외적 지시를, 문장의 주어에 대해서든 (유형 4에서) 혹은 문장 전체에 대해서든 (진리사의 경우), 명시화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리고 각 경우에서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는 오직 두 가지 값(esti와 ouk esti, 긍정과 부정)을 가지는데, 피연산 문장의 기술 내용을 보증하거나 거부한다. 하지만 이 문장 형식들 사이의 구문론적 차이는 현존과 진리 사이의, 그 동사의 존재사적 용법과 진리사적 용법 사이의 구별에 결정적이다. 유형 4에서 einai는 오직 피연산 문장의 주어에 대해서만 작동하는 반면(즉, 종속절을 이끄는 관계대명사 hos "who"), 진리사의 경우에서는 문장 구조 전체에 작동하고, 대화자가 말했고 화자가 긍정한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에 작동한다. 진리사적 einai가 실재성에 있어서 "상정"하는 것은 이러한 문장 구조의 내용, 상응하는 일련의 사태이다. 유형 4의 einai에 의해 상정되는 것은 관계절에서 표현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개별자들의 현존이다.

10. 존재사적 유형 5로 넘어가서, 우리는 구문론적으로 진리사적 구조에 더 가까운 문장 형식을 발견한다. 유형 5에서 그 동사의 주어는 더욱 기초적인 문장 내에서 술어 동사를 표현하는 추상적 행위 명사이다. 유형 5의 문장들에서 einai는 이하 문장의 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그런 발생의 동사로 기능한다.
  Around him was a clamor of the dead, 여기에서 추상 명사 clamor(klange)는 기저 문장 The dead clamored around him에서 그 동사의 명사화이다.
  There will be vengeance from Orestes, 이 문장은 기저 문장 Orestes will take revenge의 명사화로서 vengeance를 가진다.
  For you, Odysseus, there will be no murder at a wife's hand, 이 문장은 your wife will not murder you의 명사화로서 murder(phonos)를 가진다.
  주어로서의 추상 명사와 더불어, 이 문장 유형에서 그 동사의 구문은 명백히 이차적이다. 여기에서 einai는 기저에 놓이는 동사(to clamor, to take revenge, to murder)의 명사화된 형태를 주어로 취함으로써 표적이 되는 문장에 작동한다. 유형 5에서 einai의 구문은 꽤나 분명하지만, [24쪽] 그 의미론적 기능은 진리사의 경우와 유형 4에서 문장 연산자의 기능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 또한 esti 혹은 en은 그 의미론적 주어 - 이 경우 the verbal action - 를 "사실"로, 즉 담론의 세계에서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서 상정하는 데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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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유형2의 복수형식으로 해석한다면, 유형3에 속하는 문장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There are many paths up and down the camp," "Among you are the bravest of all the Achaians." 이 유형에서 주어를 도입시키는 수사적 기능은 덜 뚜렷하지만, 계사 동사의 존재사적 영향력은 처소격 보어 또는 양화사(some, many)에 의해 강화된다. 유형 2와 3의 부정 형식들에서 존재사적 어감은 특히 강하지만 국소적으로 제한된다. "There is in the whole Scythian land neither any ass at all nor any mule, because of the cold."

9. 지금까지 묘사된 어느 문장 유형에서도(유형1~3) 우리는 현존에 대한 단언이나 부정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there is"라는 영역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계사 동사의 용법을 발견한다. 제대로 된 존재사적 용법을 위해 우리는 유형 4로 향한다. 이 유형은 그 구조에 있어서 논리학에서의 존재 양화를 위한 ∃x(Fx) 형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There is an X such that X is F." 유형 4에서 einai 동사는 이하의 관계사절에서 정식화되는 서술을 위한 부정주어(someone, something)를 상정(혹은, 부정의 경우, 배제)하는 데에 기여한다. Let there be someone / who will speak wiser counsel; Now there is no one / who will escape death ...at my hands..., of all the Tojans and above all of the sons of Priam.
  부정주어가 전형적으로 인물 ("someone who...")이기에, 그 동사의 구문은 일차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 유형에서 그 동사는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 동사는 그것이 문장 연산자로 기능하는 관계사절과 함께 이해된다. 그래서 einai의 주어는 한정된 개별자가 아니라 이를 테면 제한된 변수로서, 그 관계사절에서 구체화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anyone 혹은 anything이다. 유형 4에서 einai의 의미론적 기능은 정확히, 의미론적 주어, 열린 문장(변항을 포함하는 문장)의 문법적 주어에 상응하는 언어외적 실체를,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지시하는 일을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x will speak wiser counsel, x will escape death at my hands. 그래서 유형 4의 구문론적 역할만이 아니라 의미론적 역할 또한 존재 양화의 그런 역할과 비슷하다. 특정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대상의 유효성을 긍정(혹은 부정)하는 것, 특정 술어들이 그에 대해 참인 그러한 주어를 상정(혹은 배제)하는 것.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23쪽] 서술에 대한 참과 서술의 주어에 대한 현존 사이의 개념적 연관을 재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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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하지만, 이 책에서 규정되는 여섯 가지 존재사적 유형들 중, 첫 번째이자 가장 생생한 문장 유형은 명백히 의미론적인 것도 아니고 구문론적으로 이차적인 것도 아닌데, einai가 이 경우 일상적인, 구체적 의미를 지니는 일차 동사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einai가 "to be alive," "to dwell," 혹은 "to be present"를 의미하는 경우에서 나의 존재사적 유형 1이다. 이런 유형에서 그 동사는 인물(인간 혹은 신)을 주어로 삼는다: "Your parents are still alive" (et' eisi); "The gods who are forever" (theoi aien eontes). 그 주어가 전형적으로 인물, 대화 상대자를 말하는 그것이기에, 오직 이 경우에만 그 동사가 1인칭과 2인칭으로 격변화한다; 다른 모든 존재사적 유형은 오직 3인칭 형식으로만 등장한다. 덧붙여, einai는 유형1의 경우 여느 일반 명사와 같이 시간과 장소 부사를 취한다. 그럼 어째서 우리는 이 유형을 존재사적이라 칭하는가? 그런 문장에서 그 동사가 exists 혹은 there is로조차 번역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계사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존재 동사 εἰμί의 예시들 가운데 L.S.J에 첫 번째로 기재되는 용법이다. 여타 권위자들도 그것을 유사하게 취급한다. 그 설명은 einai가 일단 여느 일상 동사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의미를 가졌다는 보편적인 가정 안에 놓인다. 유형1 용법들은 그런 본래 의미가 무엇이었을는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나의 유형2와 유형3으로 분류되는 존재사적 문장들은 구문론적 관점에서 유사하게 불순하다. "There is a city Ephyre in the corner of Argos". 모든 einai의 계사 용법들이 이러한 것들로, 통상 처소격이나, "there is"라는 번역에 의해 측정되는 한정된 존재사적 함축을 가진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어에서 이런 존재사적 어감에 부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 동사의 구문에서 아무런 대답도 발견할 수 없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그 계사는 첫 번째 자리에 등장한다. 그리스어 단어 배열은 자유롭기에, 첫 자리를 통해 부여되는 강조는 문법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수사적인 의미에 속한다. 나는, 계사 동사 자체가 그 (언어외적인) 주어의 실재성을 시사하기에, 그 동사의 이러한 그 동사의 내포된 존재사적 영향력은 바로 첫 번째 자리에 의해 이끌려 나오는 것이라 제안했다.
  책에 인용되는 사례들은 유형2 문장이 일반적으로 추가 서술에 대한 주어로서의 인물이거나 혹은 이어지는 묘사에 대한 지시의 지점으로서 지형상의 항목이다. 그런 문장들에서 그 동사의 존재사적 영향력은 문장에 문법적 주어를 도입시키는 수사적 기능과 관련되지만, 그 동사는 이 일을 정확히 부합하는 의미론적 주어를 위치시킴으로써, 즉, 뒤따르는 서술에 관련있을 인물이나 장소를 위치시킴으로써 행한다. 따라서 그 동사의 기저에 놓이는 처소격-존재사적 가치 ("is present somewhere")는 상관된 담론의 영역에 그 주어를 도입시키거나 "위치"시키는 수사적 행위에 의해 강조된다. 나는 그 동사에 관하여 수사적 강조에 의해 강조된 이러한 의미론적 함축들이, 우리가 그 동사의 주어에 대한 현존의 단언으로 지각하는 것이라 제안한다. 하지만 강조된다 하더라도 이 단언은 처소격 서술 내에 내포되기에, 우리는 존재사적 유형2에서 그 동사의 [22쪽] 의미론적(이차적) 용법을 적절하게 갖지 못한다. 우리가 가지는 것은 일차 계사의 수사적으로 의도된 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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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간결함을 위하여, 나는 우리가 여기에서 일상적인 평서문을, 즉 칠판에 적힌 주인 없는 문장이 아니라 일반적 억양으로 발화된 직설법 문장을 다루고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나는 문장과 진술 사이의 구별을 추상화시키는 중이다. 나는 앞서 einai의 일차 계사 용법들(적어도 긍정 용법들)이 일반적으로 그 의미론적 주어의 현존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제 아마도 단언된 것들로서의 문장들이 그것들의 문장 내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 진리 주장을 담지하기도 한다는 것 - 적어도 호메로스의 세계에 속한 실재성에서 그렇다는 것을 추가할 것이다. 그래서 einai의 계사 용법들은 모든 평서 문장들처럼, 두 측면에서 암시적으로 의미론적이다: 그것들은 주어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 진리 주장의 타당성 또한 시사한다. 나는 진리 주장이란 말로 문장이 단언하는 바는 무엇이든 그것을 의미한다 - 긍정적 참값의 후보로 이해된 문장내용-. 내 진리주장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이 Tractatus(4.022)에서의 언급으로 의미하였던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명제는 사물들이 그것이 참이라면 어떻게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들이 그렇게 서 있다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각각의 모든 평서문에 함축된다. 진리사적 구조에서 독특한 점은 이런 주장을 드러나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 명백한 진리 주장을 위한 운반책으로서 기여하는 것이 정확히 그 동사 to be인가? 내 생각에 그 대답은 서술의 표지로서 계사 einai의 역할 안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Theaetetus sits 같은 더 단순한 문장들에서, 이러한 기능은 일상적인 동사에 의해 수행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였듯, 어떤 동사든 is 더하기 분사로 대체될 수 있다. Theaetetus sits는 (그리스어에서 그에 상응하는) Theaetetus is sitting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와 그 밖에 이유들로, 그 계싸 동사는 가장 보편적인 동사로 보일 수 있고, 따라서 서술의 표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각각의 서술은 일상적 평서문 형태에서 진리 주장을 담지한다. 따라서 서술의 표지로서 계사 동사는 진리 주장의 표지가 될 수 있다. (인도와 스칸다나비아에서 "truth"에 해당하는 단어들이 입증하듯, 선사시대에 이미 그런 표지가 되었다.) 그것이 진리사적 구조에서 진리 주장을 명백히 하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 똑같은 그 동사인 이유에 대한 나의 설명이다. It is F는 일상적으로 It is truly F를 시사하기 때문에, is는 혼자서 is true를 의미할 수 있다.

8. 유사한 설명이 존재사 문장들에서 의미론적 연산자로서 einai 용법에 대해 제공될 수 있다. 계사 동사는 (직설법에서 어느 동사든 그렇듯) 그 주어의 현존에 대한 암시적 주장을 담지하기 때문에, 적절히 강조되었을 경우 똑같은 동사가 이러한 주장을 명백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존재사 문장에서 einai의 그 기능이다. 우리는 이 일이 존재사 문장 유형의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호메로스에서 그리고 호메로스 이후의 한 유형에서 다섯 가지 존재사 유형을 구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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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진리사 용법을 통해 나는 "is true" 혹은 "is the case, is a fact" 값을 가질 수 있는 einai의 어떤 경우이든 그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좀 더 엄격히 말하자면 진리사적 구조는 특수한 문장 형식이다. 진리사적 구조에서 einai를 포함하는 절은 말이나 생각에 해당하는 동사를 포함하는 비교 절과 관련된다: ἔστι ταῦτα οὕτω ὅπως σὺ λέγεις "Things are as you say (that they are)". 나는 be 동사를 가진 절을 essive(태격) 절이라 부르고, 생각이나 말에 해당하는 명제 태도를 가진 절을 intentional(의도) 절이라 부른다. 관용적으로 두 번째 essive 절의 발생은 통상 무화된다. 따라서 우리는 "Things are as you say"라는 더 단순한 형식을 가진다. 그러나 이 두 번째 essive 절은 진리에 대한 더욱 분명한 철학적 형식들에서 말하기에 해당하는 동사 이후에 등장할 것이다: "To say of what is that it is not, or of what is not that it is, is false; but to say of what is that it is, or of what is not that it is not, is true"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Γ, 1011b26). 두 번째 Essive 절이 무화되는 관용적 형태에서, 우리는 einai의 구문론적 주어로서, 대화자가 이야기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지시하는, 또한 그에 따라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기저에 놓이는 문장들을 지시하는 대명사 (tauta "these things")를 가진다. 그래서 이러한 진리사적 구조 내에서 einai 구문은 명백히 이차적인데, 기저에 놓이는 einai의 주어가 형식에 있어서 문장과이기에 그러하다. Essive 절에서의 einai 동사는 그 주어로서 기저에 놓이는 문장의 내용, 즉, intentional 절 ("what you say")에서 표현된 주장에 부합하는 사태를 취한다. Essive 절에서 esti의 논리적 기능은 대화자의 주장을 정확히 이러한 사태가 존재한다거나 "현존한다"고, 사물들이 대화자가 그것들이 그러하다 말하는 방식으로 "실제로 그러하다(in reality)"고 단언함으로써 보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사태의 실재성을 현존의 특별한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리사적 용법을 존재사적 동사의 특수한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 
  
일차적인 essive 절("Things are this way")에서 esti 구문은 문장 연산자 구문으로 묘사될 수 있는데, 그 동사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기저에 놓인 문장들을 자료 혹은 피연산항으로 취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것이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 기능하는데, 그것이 피연상 문장을 "실제"로(in "reality" 호메로스의 문장들에 대해 그것이 서사시들에서의 근-허구적 실재성이라는 의미에서) 사실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의미론적 연산자로서 기능하는 것이 정확히 einai 동사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문장적 진리 주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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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사 용법과 진리사 용법에 대한 분석은 더욱 어려워질 것인데, 현존과 진리라는 개념들이 우선적으로 문장 구조가 아니라 그 동사의 의미, 혹은 전체 문장의 의미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의미를 서술, 존재 그리고 진리라는 언어적 기능들 사이의 관계들을 설명하기 위한 기초로서 합당할 만큼 충분히 정확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전략은 존재사 문장과 진리사 문장에서 그 동사의 논리적 기능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구문론적 분석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직 우리가 einai의 이런 다양한 용법들의 구문론적 구조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얻을 때에만 그 용법들의 개념적 관계들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7. 나는 먼저 진리사적 용법을 취하는데, 여기에서의 기초적 구문은 분명하고 균일한 반면, einai의 존재사적 용법은 문장 형식의 곤혹스러운 다양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리사적 용법은 (그 동사가 "is true" 혹은 "is the case"를 의미하는 경우) 통계적으로 오히려 드물고, 따라서 그 용법은 존재사적 동사의 특수한 경우로 취급되곤 하였다. 우리는 결국 그러한 취급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그 대신 이 용법에 고유한 명명을 부여하고 저술 내에 독립된 장을 그것에 할당하였다면, 그것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to be의 이러한 용법은 (So be it 혹은 Tell it like it is 처럼) 존중할 만한 자격을 갖고 있다. To be의 그 의미는 전사적임에 틀림없는데, 인도-유럽 세계 극지에(인도와 스칸다나비아) 속한 언어들에서 진리에 대한 단어는 *es-의 현재 분사의 파생어로써 제공되기 때문이다 (san, satya 등, 그리스어에서 to on와 직접적으로 어원을 같이 하는 단어들. 그래서 또한 고대 영어에서도 sooth라는 단어를 가진다). 진리사적 용법에 대해 내가 독립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두 번째 이유는 철학에 대한 einai의 이러한 용법의 근본적인 중요성이다. 지식의 대상으로서 Being이라는 개념을 위해 우선시되는 표현들 중 하나로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와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에게 Being(to on)이 여러 가지를 의미할지라도, 그것은 결정적으로 이해의 목표이자 지식의 대상으로서 진리라는 개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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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이제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의미론적 서술 개념을 구체적인 명사들을 주어로 삼는 기초 (일차) 문장들이라는 초기 개념과 결합시킨다면, 우리는 그 문법적 분석이 일부 정의된 존재론적 함축들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술적 대상-언어로서 형성문법에 대한 나의 개념이 적절하게, 개인들과 안정적 대상들을 그 일차적 실체들로, 일차 문장들에 대한 의미론적 주어들로 가지는 유사-아리스토텔레스식 혹은 스트로슨식 존재론을 시사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강력한 의미에서의 존재론도 아닌데,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서 나오는 내 예시 문장들에 대한 실재를 재현하는 담론의 세계는 단순히 호메로스 서사시의 그 세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계를 기술하는 기초 문장들은 개인들과 개별물들을 그들의 의미론적 주어들로 삼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의 형성문법 사용은 기초 문장들의 두 가지 대안 개념들에 맞서 문제를 제기하는 효과를 지닌다. 내가 거부하는 그 두 가지 관점들은, 한편으로, 경험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감각-소여 같은 어떤 것을 전달하는 프로토콜-명제, 로크식 단순 관념, 혹은 흄식 인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빗슨주의자가 주장하는 바, 행위와 사건이 구체적 사물만큼이나 동일한 차원에서 기초적인 실체로 간주된다. 나는 John runs 혹은 Socrates is wise를 (언어 외적인) 주어들로서 개별자들을 취하는 기초 문장들로 선택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어나 영어와 같은 자연언어에서 문장들의 구문을 분석하기 위해 그것이 더 유용하다는 것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석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나 프랑스 혁명 같은 사건은 의미론적 주어로서 개별자들(소크라테스, 프랑스의 사람들)을 취하는 서술에 의해 표현될 것이다.

6. 우리는 이제 einai 체계의 통일성에 대한 나의 논증을 위한 기초로서 einai의 다양한 용법들을 조사하는 쪽으로 향한다. 이러한 목표를 유념하면서 나는 작금의 조사를 계사, 존재사, 진리사 용법들에 한정한다.
  계사는 엄격히 구문론적 개념이기에, 그러한 용법에 대한 기술은 상대적으로 단적일 수 있다. 우리가 보았듯, 두 종류의 계사 문장이 있다. 명사적 계사는, einai가 서술 형용사와 명사로써 이해되고, 처소격 계사는, 장소에 대한 술어들(in the marketplace, in Athens)로써 이해된다. 처소격 계사의 하위분류는 유사처소격 구조이고, 그 서술 표현은 형식상 처소격이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비유적이다. is in trouble, is in a bad mood. 이러한 문장 형식들 모두 주어로서의 추상적 (명사화된) 형식을 취하는 이차 구문에서 다시 반복된다. Wisdom is a virtue, The outcry was far away, Killing is against the law. 그러한 이차 문장들에 대해 참인 술어가 [18쪽] 그 주어의 현존을 시사하는 원리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 문장들의 추상적 주어에 대해서 현존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우리는 아마도 이차 계사 용법에 의해 시사되는 것이 그 기저의 일부 문장에 대해 참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이차 문장이 참이라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그 기저에 놓이는 일차 문장들은 또한 반드시 참이어야만 한다. 경건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가 경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의 발생은 사람들이 혁명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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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 "주어"(hypokeimenon)의 이러한 본래 뜻을 보존하고 싶고, 그건 단지 역사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문장들의 그 주-술 분석에 대한 참된 철학적 관심은 그 분석이 문장들을 넘어서서 세계 내 그 문장들의 주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콰인에게서 나온 공식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우리는 주-술 문장이 오직 그 술어 표현이 주어 표현이 지시하는 그 대상의 참일 때에만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장에 대해 진리 개념은 언어 외적 서술에 대한 진리 개념을 전제하는데, 언어적 표현들이 "세계 내" 혹은 일부 담론의 세계 내 대상들에 대한 참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참값을 통해 해석된 문장들의 주-술 구조는 의미론적 주어의 현존 개념을 포함한다. (이것은 서술, 진리, 현존 세 가지 용법들이 함께 자리한다는 내 논증의 근간이다.)
  나는 "의미론적"이라는 말을 여기에서, 일부 비언어적 모형, 예를 들면 집합론의 용어로 형식적 구조들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논리학 내에서의 형식 의미론적 개념과 유비함으로써 사용한다. 소크라테스에 관한 문장들에 대해 우리의 모형은 집합론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역사이다. 이 책에서 분석된 호메로스의 문헌들의 경우, 의미론적 해석의 영역은 호메로스 시에서 묘사된 것으로서의 세계, 영웅들과 트로이 전쟁의 사건들일 것이다. 의미론적 해석에 대해 논의의 영역이 역사에 의해 혹은 서사시에 의해 제공되는지 여부는 문제가 아니다. 아킬레스 자신이, 소크라테스 자신이 He died in 399 B.C.라는 문장의 의미론적 주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리아스』에서 여러 문장들의 의미론적 주어이다. 이러한 의미론적 서술 개념은, 문장과 그 문장이 그에 대한 것인 언어 외적 주어 사이의 관계로서, einai의 현존적 용법과 진리적 용법에 대한 우리의 설명에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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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쪽] 일차문장에서 주어 N은 고유명사일 수도 있으나, 또한 인물들이나 개별물들(동물들, 식물들, 장소들 따위)을 지시하는 보통 명사일 수도 있다. 나는 A man speaks, The cat sees the mouse, The tree is tall, 그리고 The tree stands in the yard 같은 문장들을 구문론적으로 일차술어로 헤아린다. 이러한 주어자리 명사들은 또한 술어 위치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일부 이론가들은 어쩌면 이 문장들을 기초적인 것들로 셈해 넣길 선호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대신에 그것들을 그 상응하는 술어(is a man, is a cat 따위)로부터 형성적으로 도출해낼 수도 있다. 무엇을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할 것인지에 관한 이러한 이론적 논쟁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일차 명사들에 대한 좀 더 너그러운 개념에 의존하려고 한다. 그 명사들은 인물들, 장소들, 특정물들을 지시한다. 일차명사들의 군이 순수하게 문법적인 용어들로 정의될 수 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여기에서 나는 개별적인 것들을 지시하는 "구체적인" 명사들을 한편에, 명사화된 술어들로부터 구성되는 "추상적인" 명사들을, 예를 들어 (he) is wise로부터 형성적으로 파생된 wisdom이나 (they) cried out으로부터 형성적으로 파생된 outcry 같은 것들을 다른 한편에 놓는 이러한 구별을 단순히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 문장의 구문론적 단계는 그 주어 명사의 단계에 의존할 것이다. 그래서 Socrates is wise는 계사 동사의 일차 용법이다. 다른 한편, Wisdom is a virtue와 The outcry was far away에서 그 계사 구문은 이차적인데, 이러한 문장들이 이차 (추상적) 명사들을 그 주어로 가지기 때문이다.
  일부 설명은 주부와 술부의 용어들을 위한 것이다. 서술은 (be 동사에 대한 언급 없이) 기초적인 명사-동사 문장, John runs 혹은 (플라톤이 이러한 분석을 처음 도입하는 데 사용하는 예시를 들자면) Theaetetus sits 같은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나는 문법적 주어라는 말로 이런 형식의 문장들에서 명사(혹은 명사구)를 의미하고, 문법적 술어로써 나는 그런 문장들에서의 동사 혹은 동사구를 의미한다. 서술로써 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명사와 동사(혹은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 문장성(-性)을 구성하는 그 관계이다. 여기에서 서술은 순수하게 구문론적 개념으로, 명사-동사 문장에 대해 문장성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처음에 주부와 술부라는 용어들은 구문론적으로 정의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onoma와 rhema로서 언급했던 두 가지 문장-성분들과 동일시된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어"(hypokeimenon)를 그의 고유한 서술 이론에 도입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그 onoma, 명사적 문장-성분에 귀착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해당 문장이 그에 대한 것인 바 대상이나 개별자에 귀착시켰다. 주부라는 용어의 본래 의미는 그래서 암묵적 주어나 논리적 주어로 부르는 것이다. 그 주어는 [16쪽] Socrates died in 399 B.C.라는 문장의 주어가 Socrates라는 이름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그 자신이라는 의미에서의 주어이다. 문장의 언어적 부분이 아닌 실체에 대한 "주부"라는 말의 이 본래 (하지만 근대적 관점에서 이차적인) 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 개념에 본질적이고, 여기에서 그에 대한 분석이 주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일차 명사들을 개인들이나 특정한 사물들을 지시하는 것들로 정의하면서 
(언어 외적인) 언급의 대상(subject of reference)이라는 개념에 의존해 왔다. 나는 여기서 "주어"라는 말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 주의를 당부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그 두 의미 모두에서 그 말을 체계적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Socrates died in 399 B.C.라는 문장을 고려할 때, 나는 Socrates를 그 문장의 구문상 혹은 문법적 주어로 부를 것이고, 반면 존재론적 혹은 의미론적 주어인 사람은 소크라테스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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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문론적 기술로 들어가기에 앞서, 언어철학에서 일부 개념들을 차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서술과 현존 개념을 말이다. 이것들은 자료들을 적절히 기술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그리스어 체계의 정합성에 대한 나의 논증을 정식화하는 데에도 필요할 것이다. 덧붙여 형성문법이 계사, 존재사, 진리사 용법들을 예화하는 문장유형들에 대한 엄격한 구문론적 기술을 제공하기 위해 요청된다. 나는 Zellig Harris의, 기초 혹은 핵심 문장들에 대한 이론을 포함하는 형식의 형성 문법을 채택했다. 그 기초 문장들은 그로부터 복합 문장들이 형성될 수 있는 혹은 이 문장들이 저것들로 해체될 수 있는 그런 문장들이다. 기초 문장들에 대한 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묘사하는 1차 기술 언어 부류에 대한 현대의 완전히 잘 작동하는 모형을 제공하고, 동시에 Harris의 형성들에 대한 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어떻게 언어의 남은 부분들이 그러한 기초 위에 구축될 수 있는지 알게 해준다. 이것은 그러한 형성 문법의 체계에 대한 독립적인 철학적 흥미인 것으로 치고, 문제가 되는 그리스어 동사를 기술하기 위한 그것의 쓰임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실질적으로 자연어에서 문장들의 기저에 놓이는 문법적 구조를 재현하는 체계이다. 역으로, 그런 체계는 적절히 문법적인 분석과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존재론적 기획 사이의 거리를 분명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의 구문론적 분석을 위해 우리는 기초 혹은 1차 문장 구조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의 형성 문법의 핵심 문장 형식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여기에서, N이 명사를, V가 동사를, A가 형용사를, P가 전치사를 표시하는 몇 가지 단순한 형식들을 나열한다.

1) NV: Socrates walks
2) NVN: Socrates sees Plato
3) N is A: Socrates is wise
4) N is N: Socrates is a man
5) N is PN: Socrates is in the marketplace; Socrates is in trouble

문장 형식 3과 4는 명사 연결 계사를 표현한다; 문장 형식 5는 처소격 계사와 유사처소격 계사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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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4. 그래서 나는 einai에 용법 체계에 대한 논리적 기초로서 합당한 것은 정확히 einai의 서술적 기능이라고, 철학적 연구 주제로서 Being이라는 주제를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이 체계의 이러한 개념적 통일성이라고 주장한다. 좀 더 일반적으로, 나는 서술, 현존, 진리라는 세 가지 개념이 다 함께 어떻게 언어가 실재에 대한 묘사로서 기능하는지에 대한 어떤 이론에든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어째서 존재론(Ontology), to on에 대한 이론이 그리스 철학의 분과로서 출현하였는지 설명하는 것은 바로 상호의존적 개념들의 이러한 연결망이다. 그리고 Being에 대한 그리스의 담론들이 지니는 개념적 정합성은 그 동사의 서술적 기능이 근본적인 것으로서 재인된다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구문론적 논증을 전개하기에 앞서, 나는 그것을 엄격하게 철학적인 고찰로 뒷받침하길 원한다. 서술적 구조의 우선성을 위한 사례를 이전에 빠뜨린 적이 있다. 플로티누스의 유명한 원리에서 the One과 the Good에 Being은 포함되지 않는다. 만일 그가 Being을 현존으로 이해했다면 the One의 Being을 그렇게 단정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만일 One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하였을 테니까 - 세계가 전무하였을 테고, 가지적 우주도 감각적 우주도 없었을 것인데, 다른 모든 것이 다 제 실재성을 the One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The One의 einai를 부정함으로써 플로티누스는 실재성이 아니라 서술적 구조를 부정한다. 서술에 속하는 being이 다수성을, 이를 테면 주어(hypokeimenon)와 그것에 대해 서술되는 것 사이의 개념적 구분을 함의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One"과 "Good"이 최고 원리의 속성들을 대표하지 않고, 단지 the One을 어떻게든 가리키면서 기술하지 않는 이름들일 뿐인 이유이다. 나는 플로티누스가 여기에서 그리스어 동사 einai의 근본적 기능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철학적 감각에 의존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내가 지금 einai의 계사 용법들이 그 주어에 대해 일상적으로 현존을 시사하리라고 주장하고 있기에, 그 서술적 기능을 지지하는 내가 제안했던 전환은 L. M. De Rijk 같이 존재사적 용법을 그 동사의 철학적 의미에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에게 덜 적대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서술적 용법이 중심에 오는지 존재사적 용법이 중심에 오는지 einai의 이런 명백히 경쟁적인 두 개념들은 궁극적으로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데, 그것들의 관심사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내 주장은 서술의 구문론적 기능이 [14쪽] einai의 용법들을 통일된 체계로서 파악하는 데에, 또한 철학 안에서 그 동사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 더욱 기본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우리가 번역과 구문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그 동사의 어휘상의 내용이나 의미를 탐색 중이라면, 계사 구문은 후보조차 안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로 이후 12절에서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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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사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Allan Bäck의 최근 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 이론』에서 체계적으로 전개된다. 벡은 그가 지지하는 이 관점을 계사의 아비센나식 해석이라 표현한다. "계사 is가 존재주장을 단언하고", 그래서 S is P는 S is existent as a P로 읽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센나와 벡에 따르자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일상적인 계사 문장 S is P는 두 가지 주장을 구성한다: "S exists"와 "S is P." 그들이 우리가 보기엔 현존을 주제화하지 않았기에, 그리스 철학자들은 부정적 현존재들에 대하여 많이 염려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해석가들은 부정적 현존재들의 근대적 문제가 플라톤의 Not-Being에 대한 관심 속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그들이 플라톤의 문제를 근대화하여 오늘날 독자들에게 더 흥미롭게 보이도록 만들려는 욕망에 잘못 이끌린 것이라 믿는다.) 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상상 속 대상들, 밀의 예시로 치자면 "켄타우로스는 시인들의 허구이다." 같은 것에 대한 어떤 특별한 관심도 찾아볼 수 없다.
  계사의 존재사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그쯤 하자. 이제 그 역 주장에 대해 보자.
  (ii) einai의 존재사적 용법들은 잠재적으로 서술적이라는 것이다. 영어에서, to exist는 명사나 형용사 술어를 취하지 않고, 처소격도 취하지 않는다. (Socrates exists wise는 허용될 만한 문장이 아니고, Socrates exists in the marketplace는 특수한 문맥 없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 된다.) 이 측면에서, exists는 esti에 대한 좋은 번역이 결코 될 수 없는데, [12쪽] 술어 표현을 통해 완성될 수 없는 그 동사의 어떤 용례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존을 단언하는 가장 명백한 그리스어 형식은 실상 그 형태에서 서술적이다: einai ti "to be something(rather than nothing)." 이것은 einai가 술어를 취할 때 그 존재사적 영향력을 전혀 상실하지 않는다는 점의 전형적 실례이다.
  레슬리 브라운은 어떻게 『소피스트』에서 einai의 독립적 혹은 존재사적 용법들이 플라톤에 의해 그가 "such-and-such is something"과 호환될 수 있는 표현으로서 "such-and-such is"로 취급하는 서술적 용법에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간주되는지 보여주었다. 『국가』 5권에서의 형상들의 법칙을 소개하는 핵심논증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절대적인 what is를 "what is completely(τὸ παντελῶς ὄν, 477a3)"로서의 형상들과 동일시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시작하지만 이것을 "the many beautiful things," 그 각각이 "will also appear ugly(479a)"한 것들, 그러므로 "not being과 purely being 사이에서 요동치는(479d)" 것들과의 대조로써 끝맺는다. 여기에서 다시 플라톤이 추가적 술어가 있는 einai와 없는 einai 사이에서 아무런 구분도 끌어내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그래서 『소피스트』에서도 
『국가』에서도 플라톤이 einai, ousia, on에 의해 표현되고 현존, 서술, 동일화, 진리, 아마 그 이상의 관념들을 포섭할 오직 하나의 Being 개념만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러 학자들이 현존과 서술이 함께 하는 지점에서 그 동사에 대해 "혼동된(fused)" 의미를 말하고자 바란 까닭이다. 나는 이 용어가 오해를 불러온다고 생각하는데, 혼동이라는 개념은 그 구성요소들이 앞서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물론 분석적 목적으로 플라톤의 문헌에 대한 주석에서 우리의 해석학적 메타언어에 그런 구분들을 도입시킬 필요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근대적 구분들과 고대 문헌들 내의 논의 아래 실제로 깔린 것 사이의 불일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한다. 그 두 의미를 혼동하고 있는 건 우리이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다.
  그래서 그 체계의 중심에 서술적 용법을 두는 것은 소위 존재사적 용법들을 이차적 혹은 파생적 현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구문론적 분석에 돌입할 때, 우리는 존재사적 용법과 진리사적 용법 모두 2차 형태로서, 1차 문장에 대한 구문론적 문장 연산자로서 
가장 잘 이해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inai의 이런 2차적인, 명백히 구문론적인 용법들은 계사로서의 1차 용법에서 그 동사의 암시적인 구문론적 기능들을 언급함으로써 설명될 것이리란 점을 제안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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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런 모든 결함들을 인정하면서, 그 자료를 조직하는 데에 계사-존재사 구분이 유용하다는 것은, 이 책에서 내가 한 것처럼, 여전히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사적 용법이 함축적으로 존재사적 용법이라는 것, einai의 존재사적 용법 전부 혹은 그 대부분이 잠재적으로 서술적이라는 점을 재인하기 위해 그 구별 자체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으로 반성을 행했던 것은 아니다. 계사 구문과 독립 구문 사이의 구문론적 구분은 그 그리스어 동사에 실로 충분하지만 피상적인, 오직 그 동사에 대한 표면적 구조의 특징이다. 이것이 내가 레슬리 브라운의 플라톤 『소피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X is 형태의 문장에서와 X is Y 형태의 문장에서의 einai 동사들 사이의 관계가 Jane teaches에서와 Jane teaches French에서의 teach 동사들 사이의 관계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10쪽] 이것은 플라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도,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 언어에 대해 참인 듯하다. einai에 술어를 추가하는 것은 to teach 동사에 직접 목적어를 추가하는 것이 그 동사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 변화를 주지 않는다. 생성문법의 관점에서, 더 긴 형태일 수록 더 기초적이다. X teaches는 X teaches something에서 그 직접 목적어를 무화시킴으로써 도출된다. 유사하게, X is는 X is Y에서 그 술어를 무화함으로써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제안이다. 이것이 내가 삼가 내 방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말하는 내 논증을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건 einai의 용법 체계 중심에서 현존을 서술로 교체시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einai의 모든 독립적 혹은 존재사적 용법은 일부 술어의 축약된 형태로 여겨질 수 있다. X is는 어떤 Y에 대한 X is Y의 축약이다. 그 형식의 의미는 결국 to be는 to be something or other라는 것이다.
  서술적 용법과 존재사적 용법의 상호의존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i) einai의 계사 용법은 함축적으로 존재사적이라는 것. 계사로서 esti의 일상적 용법, 명사 술어나 처소격 술어를 가진 용법을 생각해 보자. 만일 esti를 그 문장 앞에 놓으면, "그러저러한 것이 있다"라는 번역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존재사적 어조를 자주 얻게 될 것이다. ἔστι πόλις Ἐφύρη μυχῷ Ἄργεος "아르고스의 귀퉁이에 에퓌르라는 도시가 있다." 같은 문장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어에서 단어의 배열은 아무런 구문론적 중요성이 없다. 첫 번째 위치에서 그 동사의 구문은 여전히 계사 구문, "에퓌르는 도시이다(Ἐφύρη πόλις ἐστί)"이다. 첫 번째 위치는 수사적 강조를 부여하지만, 그 동사 자체가 존재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존재사적 의미를 그 계사에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주어에 대한 이러한 존재사적 함축은 일반적으로 계사가 처소격 보어와 함께 이해될 때 더욱 강력하다.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말이다. (그래서 처소격 존재사 문장들의 유형들 전체 분류를 정립시킬 수 있다.) 하지만 계사의 존재사적 함축은 처소격 보어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는 주어를 그것에 대하여(about) 말할 어떤 것으로 놓는 것이 주-술 진술의 본질적 요소이며, 그리하여 주어에 대한 존재사라는 일부 주장이 긍정 주-술 문장 모두에서 함축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부정문들의 경우를 더 문제가 될 것으로 잠시 제쳐둔다.) 계사 문장들에서 이러한 주장은 주-술 관계의 신호로서 계사 esti에 의해 행해진다. 계사에 대한 그런 존재사적 함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당방형에서, 비록 [11쪽] 형식논리에서 이 규칙의 일반 양화 형식이 타당하지 않다 하더라도, "모든 그리스인은 인간이다"가 "일부 인간은 그리스인이다"를 함축하는 데에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어와 같은 자연언어에서, 서술적 진술은 그것에 대해 어떤 것이 참인 그러한 주어를 함의하고, (평범한 경우) 그 술어가 참이 되는 주어가 반드시 존재한다. 평범하지 않은 경우는, 비문법적 이유들로, 술어 표현이 실질적 속성을 부여하지 않고 따라서 주어의 현존이 문제가 되는 그런 경우이다. 그것이 아벨라르두스 시대에 논리학자들이 계사 est의 주어로 chimaera와 centaurus를 지니는 문장들을 재분석하기 시작한 이유이다. Chimaera est opinabilis "키메라는 의견의 대상이다" 같은 문장들은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키메라를 상상한다"라고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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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서 내 원래 계획은 문헌학적이고 해석학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Being의 형이상학이 단순히 언어적 혼란으로부터나 어휘의 지역적 특수성의 구상화로부터 귀결된 것이라 주장하는 상대주의자나 실증주의자의 공격에 대한 내 관심이 그 계획을 변경시켰다. Being에 대한 물음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에 속했기에, 그들의 Being에 대한 관심을 타당한 철학적 기획으로서 방어할 책임을 느꼈다. 그 결과가 einai에 대한 다양한 용법들이 주목할 만한 통일성을 갖춘 개념적 체계, 서술 개념 부근으로 군집을 형성하는 상호의존적 개념들의 연결망을 형성했다는,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이 고대와 근대 모두에 존재론에 대한 적절한 주제를 제공한다는 나의 반대 주장이다.
  그래서 내 책의 논증은 하나는 언어적이고 하나는 철학적인 두 가지 결론들에 이른다. 철학적 결론은 그리스 존재론을 위한 나의 방어로서 einai 체계에 대한 나의 설명에 의존하지만 그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건 아니다. 그리스 존재론은 아마도 상이한 토대들에 의존할 테고, 독자는 einai 체계에 대한 내 설명을 수용할지도 모르지만 존재론에 대한 옹호로서 그것의 가치는 의미할 수도 있다. 더욱이, 나는 그리스 철학의 해석을 위한 내 분석의 생산성을 증명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그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연구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그리스 존재론의 역사에 대한 문법적 서설이다.

2. 그리스에서, 또 일반적으로 인도-유럽어들에서 동사 to be에 대한 30년 전 이론은 단순히 한 가지였다. 본래 "exists," 혹은 아마도 좀 더 구체적으로 "be present" 같은 그런 의미였을 *es- 동사가, 그게 우연히 명사적 서술어들과 함께 허사로서 쓰이게 되었던 그런 동사가 있었고, 그렇게 그 본래 의미를 잃고 "mere copula" 역할로 퇴화했다. 이런 계사로서 be와 "exists" 의미의 be 구분은 존 슈트어트 밀에 의해 처음 유명해졌다. 그는 Being의 형이상학 전체가 이 동사의 이런 두 용법들 사이의 혼동에 기인하였다고 주장했다. 언어학자들과 문헌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들의 의도들에 따라 이 이분법을 받아들였다. [9쪽] 나는 그 이분법의 만연한 영향력의 징후로서 1957년 커크와 레이븐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1판에서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였던 그리스 단어 esti의 서술적 의미와 존재사적 의미 사이의 혼동"이란 소리를 의문 없이 언급할 수 있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2판(1983년)에서 새로운 편집자 말콤 스콧필드는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혼동하였다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이 관점을 수정하였지만 esti의 파르메니데스적 용법이 "동시에 존재사적이면서 서술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나는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 동사 einai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의 증대된 세련됨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는 더이상 언어적 혼동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 Being 이론들에 대한 밀의 김빠지는 설명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한 발 더 나아가 계사와 존재사적 동사 사이의 대비 그 근원적 본성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이분법에 대한 급진적 비판은 30년 전에 비하면 오늘날엔 더 쉬워졌는데, 동사 is의 애매성에 대한 소위 프레게-러셀식 주장을 일관되게 반대해 주장해온 Jaakko Hintikka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그 방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G. E. L. Owen'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to be는 언제나 이러저러한 어떤 것임(to be something or other)이란 공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사적 용법들이 또한 서술적이기도 하였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저 구분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법은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 einai의 구문론에 관한 Lesley Brown의 작업에 의해 결정적으로 진일보하였다. 나는 계싸와 존재사 용법들 사이의 그 이분법에 대한 대 오래된 반박을 여기서 재론하진 않을 것이다. 그 두 용법들 모두 존재사적-처소격 문장들 같은 또 다른 중요한 용법들이 있다거나 계사 용법은 구문론적으로 정의되는 반면 존재사적 용법은 그 동사의 어휘적 의미의 문제이기에 그 구분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따위의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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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Introduction (2003)


1. 1-3, 5, 8장의 이론적 논의를 좀 더 분명하고 정확한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60년대 이래 언어 이론과 언어 철학의 일반 논의를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einai에 대한 내 이론적 설명의 더 간결하고 일관된 판본을 내놓는 바이다.
  "언어들이 내세울 변변한 Being 개념 같은 건 없다'는 A. C. Graham의 관점에 반대해 to be의 기능들이 그리스어나 인도-유럽 어만의 고유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내 논증은 유행이 지난 듯하다. 저 언어상대주의도 내 주장도 별로지만, 내 주장이 근거하는 내 일관된 핵심주장, einai 체계의 개념적 통일성은 새로운 형식으로 내가 여기 내놓는다.
  우선 이 기획의 본질을 밝힌다. 내 목표는 그리스 존재론에 일종의 문법적 서설이었다. 파르메니데스가 정식화한 그런 Being 개념은 역사적 선행자들 없이 난데없이 등장한 듯한데, 또 대단한 역사적 결과들을 낳았다. 플라톤의 형상론이나 Not-Being에 대한 싸움이 그의 to on 설명에서 나왔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가지로 이야기되는 to be나 'being qua being은 그의 단일론적 what is 개념에 대항마로 고안되었다. 그리스 자연철학의 전개과정은 파르메니데스주의의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8쪽] 그런데 그런 강력한 Being 개념이 파르메니데스의 선대에게선 안 보이니, 초기 그리스에서 to be 동사 용법을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언어자료를 더 잘 파악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원칙들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 공헌하길 바라며 이 동사 용법 일람표를 제시한다.


-蟲-

-한 쪽이든 두 쪽이든 그냥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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