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크기의 a, b, c가 있다. a는 정지해 있고, b와 a는 등속운동을 하면서 서로 같은 속력으로 반대방향에서 동시에 c를 지나가면서 서로를 지나치고 있다. 이 경우 c는 b 전체를 통과하는 시간 동안 a의 절반을 지난다. c의 속도를 1m/s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a, b, c의 크기는 4m라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c는 1m/s의 속력으로 4초 동안 4m의 거리를 이동한다. 그리고 바로 이 동일한 운동을 통해 2초 동안 a의 절반인 2m를 이동하는 동시에, b의 전체 크기인 4m를 통과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제논은 두 배의 시간이 절반의 시간과 같은 시간이 된다고 지적하며 이를 역설로 제시한다. 여기에서 운동하는 물체 c는 단일한 물체이며 그것의 운동 또한 단일하다. 그래서 c는 1m/s의 속력으로 2초 동안 2m를 통과한 동시에 4m를 통과하게 되고, 같은 속력의 단일한 운동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거리를 통과하게 된다. 이제 c가 a를 통과한 측면에서 c는 1m/s의 속력으로 2초 동안 2m를 지나갔고, (a) 이 속력으로 4m를 지나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4초가 될 것이다. 다른 한편 c가 b를 통과한 측면에서 (b) c가 크기 4m인 b 전체를 지나가는 데에 걸린 시간은 2초이다. (a)와 (b) 각각에 소요되는 시간은 서로 절반과 두 배라는 비례를 가진다. 그러나 (a)에서의 속력과 (b)에서의 속력은 모두 단일한 운동체 c의 단일한 운동에서 측정된 속력일 것이다. 따라서 바로 이 단일한 속력으로 4m를 지나가는 데에 걸리는 두 가지 시간, 절반의 시간과 두 배의 시간은 한 운동체의 한 운동에 속한 동일한 시간이다. 같은 속도로 반대방향에서 이동하는 b에 대해서도 c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상황이 발생하며, 정지해 있는 a에 대해서는 두 물체가 a의 절반을 지나는 데에 걸린 바로 그 똑같은 시간 동안에 a 자신과 똑같은 만큼의 크기(연장, 거리)를 지나는 일이 발생한다. 여기에서 역설이 발생하는 지점은 고려되고 있는 물체 각각의 자기동일성과 그 단일한 각 물체에 고유한 운동의 또 역시 개개의 자기동일성이 논리적으로 엄격하게 보존되는 한에서, 자기동일적인 단일한 물체에게 그 자신에 고유한 절대적 운동과 상대적 운동이 동시에 귀속될 수 없다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정지해 있는 물체를 통과하는 일과 마주 오는 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를 통과하는 일이 한 물체에게 동시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역설 발생의 전제조건일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모든 물체에 일반적으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무한하게 펼쳐진 것으로서 소위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 한편으로 가정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안의 모든 물체들의 운동이 상대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점이 또한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각기 독립적으로 고정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 전제되어 있을 경우, 이 안에서 모든 물체 각각은 자신의 고유한 운동을 이러한 시공간을 척도로 하여 측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구분되는 방식으로 임의의 운동하는 물체를 기준으로 하여 각각의 물체의 고유한 운동이 상대적으로 측정될 수도 있다. 이 상대적인 측정의 경우에도, (아마도) 제논 당대의 통념에 따르자면 각 물체의 크기(연장)는 절대적인 것으로서 주어져 있을 것이므로, 절대속도에 대한 상대속도의 차이는 거리로서의 크기나 연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절대시간과 상대시간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이다. 단적으로 무한하게 전개되어 있을 뿐인 유클리드식의 절대공간 개념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그러한 무한한 연장을 지성적으로 파악되는 잠재적인 양(量)으로 간주하는 발상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어떤 대상을 그 자체로 고려할 때와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할 때 같은 대상이 서로 (심지어는) 양립불가능한 방식으로 상충되는 것처럼 생각되거나 서술되기도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적어도 플라톤부터 (대표적인 예로는 『소피스트』에서라든지) 명시적으로 의식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체적이고 독립적이며 자기동일적인 것만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있는 것'일 수 있고, 이러한 점에서 있는 것은 하나이고 이것과 구분되는 제2, 제3의 것은 상정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상대항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상대적 관점도 자연스럽게 부정될 것이다. 만일 운동이라는 현상과 개념이 성립하는 데에 상대적인 관점(또 이것의 성립근거로서 상대항)이 불가피하다면, 이 상대적인 관점이 유발하는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운동을 부정하는 논변을 제시하는 것으로 제논의 역설을 이해해볼 여지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보자면, 운동체의 운동이 측정되기 위해서는 결국 최소한 그 운동체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이 운동체의 운동을 측정할 기준이 별도로 전제되어야만 하며, 그것이 앞서 언급한 절대공간이나 절대시간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일자만을 유일한 존재자로 인정할 경우 이와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공간이나 시간을 따로 상정하는 일은 이러한 일원론과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미 파르메니데스가 보여주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또한 그렇게 전제된 절대공간이나 절대시간이 지금 고려되는 유일한 운동체의 그 고유하고 단일한 운동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게끔 그렇게 무한한 것으로서 정지해 있다고 단언할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c의 진정하고 본질적이며 고유한 단 하나의 운동을 a를 통과하는 운동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b를 통과하는 운동으로 볼 것인지 결정할 수 없게 되고, 이 역시 운동 개념에 내재하는 역설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기준이 되는 운동이 (a)인지 (b)인지는 어떤 추가적인 형이상학적 전제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는 한 결정될 수 없을 것이다. 

 

-蟲-

"[자신과] 같은 만큼의 양인 것을 두고 그것에 걸쳐 있을 때 [그러한] 모든 것은 항상 멈추어 있다면, 그리고 이동되고 있는 것은 항상 지금 안에 있다면, 이동되고 있는 화살은 운동하지 않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6권 9장 239b5-7.

 

일정한 크기(연장)를 점유하고 있으면서 그 점유하는 크기에 변화가 없는 것은 멈추어 있다.

그렇다면 멈추어 있지 않은 것, 즉 움직이는 것은 그 점유하는 크기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점유하는 크기가 그 크기 자신과 같은 경우에는 운동하지 못하고 멈추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어떤 것이 '지금'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지금 그것이 점유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의 연장을 점유하고 있다.

또한 지금 그것이 점유하고 있지 않은 어떤 연장도 점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그것이 있는 그 자리에 있고 다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 안에 있는 것은, 지금 같은 만큼의 양인 것을 두고 그것에 걸쳐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 멈추어 있다.

 

그러나 이동되고 있는 것은 항상(매번) '지금' 안에 있다.

이동되고 있는 것이 '지금' 안에서 이동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이동된 것으로서 '지금'은 멈추어 있을 것이거나,

장차 이동될 것으로서 '지금'은 아직 멈추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동되고 있는 화살은 '지금' 이동되고 있으면서도, 또한 같은 만큼의 양인 것을 두고 그것에 걸쳐 있으며 따라서 멈추어 있기도 하다.

 

주어진 문장만을 놓고 보자면 "같은 만큼의 것에 걸쳐 있을 때 모든 것은 항상 멈추어 있다"와 "이동되고 있는 것은 항상 지금 안에 있다" 두 조건이 충족될 경우, 이동되고 있는 것이 운동불가능하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지금 안에 있다"는 것을 "같은 만큼의 것에 걸쳐 있다"를 함의하는 표현으로 읽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것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연장 만큼의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연장도 점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추가하면 된다. "지금 있는 것"은 그것이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며, 그 외의 다른 어디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다른 어떤 자리에도 또한 있기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지금 안에 있다"라는 것이 어떻게 "같은 만큼의 크기를 점유하고 있다"라는 것을 함의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안에 있다"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멈추어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진행형으로 운동 중에 있는 것, 단적으로 말해 '움직이는 것'은 다른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움직이고 있어야 "움직이고 있다"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 문제는 다시, 그러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지금' 움직이고 있기 위해서는 지금 점유하고 있는 연장에서는 벗어나고 있어야 하고 또한 동시에 앞으로 점유하게 될 연장에 대해서는 아직 점유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이 지금 있는 곳에는 있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지금 있지 않은 곳에는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며, 이 역시 날아가고 있는 화살이 멈추어 있다는 역설에 관련된다.

 

지금 있는 것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의 연장만을 차지한다는 숨은 전제를 추가하는 것은 크게 작위적이거나 과격한 논증재구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 있는 것은 지금 그것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다면 이것을 제논의 역설에 일상적인 경험적 믿음으로 포함시키는 데에 엄청난 해석적 부담이 뒤따른다고 볼 이유가 없다. 

 

반면, "같은 만큼의 것에 따라 있을 때(ὅταν ᾖ κατὰ τὸ ἴσον)"가 "지금 안에 있다(ἔστιν ... ἐν τῷ νῦν)"와 같은 것이라고 보자는 제안은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만큼의 것에 따라 있을 때"를 "같은 만큼의 연장을 점유하고 있을 때"라고 이해하는 일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어떤 것이 정지해 있기 위한 조건임을 받아들인다면, 해당 표현을 특정한 장소 혹은 거리 등의 공간적 연장을 점유하고 있다는 의미 외에 다른 식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같은 만큼의 연장을 점유한다는 것은 한 순간에 대해서도 일정 기간 동안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멈추어 있는 것은 어떤 한 순간 멈추어 있을 수도 있고 일정 기간 동안 멈추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같은 만큼의 연장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지금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의 시간관이 운동을 존재론적으로 더 앞서는 것으로 놓고 시간이나 거리 따위를 이러한 운동을 측정할 때에 비로소 뒤따라 나오는 것으로 간주하였을 수도 있으나, 이러한 이해를 해당 역설에 끌어들여 적용시킬 이유와 근거는 해당 해석을 주장하는 측에서 제시해야 한다. 또한,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을 고려하면, 시간은 있었던 것과 있는 것 그리고 장차 있을 것 사이의 구분이 있을 때 성립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공간적 운동을 떠올릴 아무런 이유도 없다. 있었던 것이 지금 있지 않거나, 지금 있는 것이 앞으로 있지 않을 것이라거나 하는 것, 즉 생성이나 소멸은 시간의 선후를 구분할 수 있다면, 그러한 선후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한편에서는 있는 것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있지 않은 것이 상이하게 상정될 수 있다면, 이러한 조건에서 충분히 이야기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운동하지 않고(점유하고 있는 연장과는 다른 연장을 점유하게 되지 않고) 멈추어 있는 것에 대해 시간 상의 구분(순간과 기간)을 적용시킬 수 없다거나 시간 개념 자체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될 수 없는 주장은 억지스럽다. 그리고 다시금, 상식적인 경험에 따라 가만히 멈추어 있는 것에 대해 움직이다가 멈추어 서게 된 것, 그리고 멈추어 있다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모두 상호 구분될 수 있으며, 이것들 각각에 대해 멈추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멈추어 있는지, 언제까지 멈추어 있다 움직이기 시작하는지, 언제까지 움직이다가 언제 멈추었는지를 모두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양의 연장을 점유하고 있을 때"는 "지금" 혹은 "지금 안에 있다"와 동일시될 수 없다. 역으로, "지금 안에 있다"는 것은 "동일한 양의 연장을 점유하고 있을 때"의 한 사례일 수 있다. 지금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지금 점유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의 동일한 연장을 점유하고 있고, 그 점에서 지금 바로 그 순간에는 자신의 자리에 머물러 있고 그래서 멈추어 있다. 지금 있는 것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연장을 점유하는 동시에 그 연장 외의 (자신이 점유하고 있지 않은) 연장까지도 함께 점유하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그것은 멈추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속해 있는 것이 이런 식으로 '지금 점유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의 연장을 가지고' 지금에 속해 있다는 내용을 추가하지 않고서는, 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이 또한 멈추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를 유의미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움직이고 있는 것(τὸ φερόμενον)은 멈추어 있지(ἠρεμεῖ) 않은 것이고, 모든 것은 같은 양을 점유하고 있을 때(ὅταν ᾖ κατὰ τὸ ἴσον) 언제나 멈추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언제나(αἰεί)' 지금 안에(지금 내가 반대하는 해석에 따르자면, '같은 양을 점유하고 있는 때' 안에) 있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금"이 "같은 양을 점유할 때"와 의미 차이가 없다면 두 번째 조건을 독자가 수용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지금" 안에 있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발화되었을 때, 즉 이전이나 이후가 아니라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그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단순히 그 의미에서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수용할 만한 조건이 된다. 그래서 더욱이 "지금"이라는 것이 아무런 보충이나 해석 없이 "같은 연장을 점유할 때"와 동일시될 수는 없으며, "지금"이라는 시간과 그 시간에 점유할 수 있는 연장 사이의 관계가 모종의 방식으로 이해될 때, 이를 매개로 하여 화살 역설이 역설로 성립할 수 있게 된다.

 

어찌 되었든지간에, 도대체 뭘 어떻게 읽어야 "같은 연장을 점유할 때"가 곧장 "지금"이 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설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그런 식의 "지금" 안에 움직이는 모든 것이 속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일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으며, 이 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주어진 문장만으로 가능하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부담들을 짊어지느니 "지금"을 기간을 설정할 수 없는 순간(moment)으로 이해하여 바로 그 순간에는 그 당시에 점유한 연장 이외의 다른 연장을 점유할 수 없단 점을 연결시키고, 또한 동시에 이 불가분하고 양을 가지지 않는 '순간'과 현재 진행형의 운동하는 물체에게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지금', 운동의 경과와 함께 계속 진행하는 그러한 '지금'을 일상인들이 혼동하는 데에서 오는 문제를 제논이 역설로 구성하여 제기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 생각된다.

 

-추가하자면, 제논의 첫 번째 조건은 "같은 연장을 점유한다"를 "장소 변화가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전제가 된다. 반면 두 번째 조건은 "지금 안에 있다"라는 것을 두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언제 움직이고 있는지를 물을 때 우리가 답할 만한 것, "그건 '지금' 움직이고 있다"라고 말할 때의 그러한 '지금'이라 이해할 때에 수용할 만한 전제가 될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지금' 움직이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이 아닌 다른 때에 움직이고 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현재진행형으로)"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소 변화가 없는 것은 멈추어 있다는 전제와, 움직이고 있는 것은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전제, 두 가지 자연스럽게 수용할 만한 전제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수용 이후, 그러나 '지금'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 '지금' 이전도 그 이후도 아닌 바로 그 한 순간의 '지금'을 특정하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설이 성립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을 가져와 보자면 과거의 끝이자 미래의 시작이 되는 그 둘 사이에 있는 단일한 경계가 '지금'이다. 그런데 '지금'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는 일 역시 쉽사리 부정할 수는 없다. 있는 것은 지금 있는 중이며, 있었던(지금은 이미 있지 않은) 것과도 다르고 있을(지금은 아직 있지 않은) 것과도 다르다. 그리고 그렇게 지금 있는 것은 지금 있는 바로 거기에 있으며, 그렇게 차지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의 같은 양의 연장만을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지금 움직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거기에 있기도 하다면, 그것은 아직 차지하지 않은 연장을 차지하고 있는 중도 아니고 이미 점유하고 있던 연장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도 아니며, 같은 양의 연장을 그대로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멈추어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여기에서 운동과정을 거치는 운동체와 함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지금'을 특정 시점으로서 그 이전의 끝이자 그 이후의 시작이기도 한 일종의 '경계로서의 지금'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제논의 경우에는, 그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적 입장을 공유한다면, 지금 있는 곳에는 있지 않으면서 또한 지금 있지 않은 곳에는 있기도 해야 비로소 가능한 운동(장소이동) 자체를 부정할 것이다. 또한 과거의 끝이면서 미래의 시작이기도 한 그러한 모순적인 무언가로서 시간을 분할하도록 만드는 시점이나 순간, 지금 따위 역시 부정할 것이다. 장소 이동을 부정하는 논지도 시간의 선후 구분을 부정하는 논지도 파르메니데스의 소위 「진리」편에서 찾아볼 수 있으므로, 이러한 논변의 연장선상에서 제논의 역설을 이해해 보는 것은 그 둘을 '엘레아 학파'로 묶어 취급하는 당대의 보고와 정합적인 접근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같은 연장을 점유할 때'와 '지금'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자는 제안이 무슨 이야기인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지극히 호의적으로 이해를 시도해 보자면, 시간 또한 공간처럼 일종의 연장으로 간주해서 같은 연장을 공유한다는 것이 같은 공간에 머무른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의미 또한 된다고 보고, 같은 시간을 점유하는 것을 지금 안에 혹은 현재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이를 앞서 '같은 연장을 점유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지해 있을 조건을 충족시킨 상황으로 보자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경우 "시간이 연장의 일종이다"라는 것은 주어진 문장에서 표현된 것도 아니고 '지금'을 '같은 시간 연장을 점유하는 것'이라 표현한다는 것도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더구나 움직이고 있는 것이 '같은 시간 연장을 점유하는 것'을 '언제나(αἰεί)' 그러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훨씬 더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이 '같은 시간 연장'이 오후 10시부터 11시까지의 시간량 같은 것이라 쳐보자. 이 시간양을 변화시키지 않고 딱 그 만큼을 그대로 점유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 이야기될 수 있는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항상 지금 안에 있다'고 말할 때 '지금'이란 바로 그 운동이 수행되고 있는 그 동시적인 시간, 시점이다. 이런 해석 제안이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해석은 내가 제안하는 해석과 마찬가지로 없는 얘기를 끌어다 붙이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는 바로 그 순간에는 어떤 것이 점유하고 있는 바로 그 연장 외에 다른 연장은 점유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개입시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 이외의 추가적인 외삽을 시도하는 일이라면, 시간이 연장의 일종이고 그래서 지금 안에 있는 것은 곧 같은 연장을 점유하는 것이라는 식의 해석도 결국은 외삽에 불과하다. 후자는 외삽이 아니고 주어진 문장만으로 가능한 논증재구성이라는 주장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하는지 알 수 없다. 

 

-蟲-

Third Argument, Called That of the Arrow (D16-D17)

D16

a (< A27) Arist. Phys. 6.9 239b5-7

εἰ γὰρ αἰεί, φησίν, ἠρεμεῖ πᾶν¹ ὅταν ᾖ κατὰ τὸ ἴσον,

ἔστιν δ᾿ αἰεὶ τὸ φερόμενον ἐν τῷ νῦν,² ἀκίνητον τὴν

φερομένην εἶναι ὀϊστόν.
¹ ἢ κινεῖται post πᾶν hab. mss.: secl. Zeller: coni. οὐ κινεῖται Ross, alii aliter
² ἐν τῷ νῦν EHIJK: ἐν τῷ νῦν τῷ κατὰ τὸ ἴσον fecit F, Zeller (τῷ omisso):
  ἐν τῷ νῦν, πᾶν δὲ κατὰ τὸ ἴσον ἐν τῷ νῦν Diels 

b (< A27) Arist. Phys. 6.9 239b30

τρίτος δ᾿ ὁ νῦν ῥηθείς, ὅτι ἡ ὀϊστὸς φερομένη ἕστηκεν

[. . .=R20]

 

D17 (B4) Diog. Laert. 9.72

Ζήνων δὲ τὴν κίνησιν ἀναιρεῖ λέγων "τὸ κινούμενον

οὔτε ἐν ᾧ ἔστι τόπῳ κινεῖται οὔτε ἐν ᾧ μὴ ἔστι."

 

Fourth Argument, Called that of the Stadium (D18-D19)

D18 (< A28) Arist. Phys. 6.9 239b33-240a1

τέταρτος δ᾿ ὁ περὶ τῶν ἐν τῷ¹ σταδίῳ κινουμένων ἐξ

ἐναντίας ἴσων ὄγκων παρ᾿ ἴσους, τῶν μὲν ἀπὸ² τέλους

τοῦ σταδίου τῶν δ᾿ ἀπὸ μέσου, ἴσῳ τάχει, ἐν ᾧ συμ-

βαίνειν οἴεται ἴσον εἶναι χρόνον τῷ διπλασίῳ τὸν

ἥμισυν [. . .=R21].

¹ τῷ E: om. KΛ ² ἀπὸ] ἀπὸ τοῦ FHIJ²K

 

D19 (A25) Arist. Top. 8.8 160b7-9

πολλοὺς γὰρ λόγους ἔχομεν ἐναντίους ταῖς δόξαις,

οὓς χαλεπὸν λύειν, καθάπερ τὸν Ζήνωνος ὅτι οὐκ ἐν-

δέχεται κινεῖσθαι οὐδὲ τὸ στάδιον διελθεῖν [. . .].

 

 

-작성중-

Limited and Unlimited (D11)

D11 (B3) Simpl. In Phys., p. 140.28-33
πάλιν γὰρ δεικνύς ὅτι εἰ πολλά ἐστι, τὰ αὐτὰ πεπε-
ρασμένα ἐστὶ καὶ ἄπειρα, γράφει ταῦτα κατὰ λέξιν ὁ
Ζήνων· "εἰ πολλά ἐστιν, ἀνάγκη τοσαῦτα εἶναι ὅσα
ἐστὶ καὶ οὔτε πλείονα αὐτῶν οὔτε ἐλάττονα. εἰ δὲ
τοσαῦτά ἐστιν ὅσα ἐστί, πεπερασμένα ἂν εἴη.¹ εἰ
πολλά ἐστιν, ἄπειρα τὰ ὄντα ἐστίν. ἀεὶ γὰρ ἕτερα
μεταξὺ τῶν ὄντων ἐστί, καὶ πάλιν ἐκείνων ἕτερα
μεταξύ. καὶ οὕτως ἄπειρα τὰ ὄντα ἐστί."
¹ post ἄν εἴη add. καὶ πάλιν ed. Ald.
왜냐하면 다시금 만일 여럿이라면 그것들은 한정된
것들이면서 또한 무한한 것들이라는 점을 보이면서,
제논은 격언조로(or 문장으로?) 이하의 것들을 기록한다.
"만일 여럿이라면, 그것들인 만큼의 것들이되 그것들보다
많은 것들이지도 적은 것들이지도 않다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런데 만일 그것들인 그 만큼의 것들이라면, 한정된 것들일
것이다. 여럿이라면, 있는 것들은 무한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들 사이에 항상 다른 것들이 있고, 다시
저것들과 다른 것들이 그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있는 것들은 무한한 것들이다."


A Corollary? The Grain of Millet (D12)
D12
a (< A29) Arist. Phys. 8.5 250a19-22
ὁ Ζήνωνος λόγος [. . .] ὡς ψοφεῖ τῆς κέγχρου ὁτιοῦν
μέρος [. . . =R 16].
곡물의 그 어떤 낱알 부분이든 소리를 낸다는 제논의 논변.

b (< A29) Simpl. In Phys., p. 1108.14-29
[. . .] λύει καὶ τὸν Ζήνωνος τοῦ Ἐλεάτου λόγον, ὃν
ἤρετο Πρωταγόραν τὸν σοφιστήν. "εἰπὲ γάρ μοι,"
ἔφη, "ὦ Πρωταγόρα, ἆρα ὁ εἷς κέγχρος καταπεσὼν
ψόφον ποιεῖ ἢ τὸ μυριοστὸν τοῦ κέγχρου"; τοῦ δὲ εἰ-
πόντος μὴ ποιεῖν "ὁ δὲ μέδιμνος," ἔφη, "τῶν κέγχρων
καταπεσῶν ποιεῖ ψόφον ἢ οὔ"; τοῦ δὲ ψοφεῖν εἰπόντος
τὸν μέδιμνον "τί οὖν," ἔφη ὁ Ζήνων, "οὐκ ἔστι λόγος
τοῦ μεδίμνου τῶν κέγχρων πρὸς τὸν ἕνα καὶ τὸ μυ-
ριοστὸν τὸ τοῦ ἑνός"; τοῦ δὲ φήσαντος εἶναι "τί οὖν,"
ἔφη ὁ Ζήνων, "οὐ καὶ τῶν ψόφων ἔσονται λόγοι πρὸς
ἀλλήλους οἱ αὐτοί; ὡς γὰρ τὰ ψοφοῦντα, καὶ οἱ ψό-
φοι· τούτου δὲ οὕτως ἔχοντος, εἰ ὁ μέδιμνος τοῦ κέγ-
χρου ψοφεῖ, ψοφήσει καὶ ὁ εἷς κέγχρος καὶ τὸ μυριο-
στὸν τοῦ κέγχρου."
엘레아의 제논의 논변,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에게
질문으로 제시되었던 논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해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게 말해 주시오,
프로타고라스, 수만의 씨알이 소리를 내기 보다는 낱알
하나가 떨어지며 소리를 냅니까?" 프로타고라스가

낱알 하나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니

그가 말했다. "그런데 씨알들 한 되는 떨어지며 소리를

냅니까 내지 않습니까?" 한 되는 소리를 낸다고 그가

말하자 제논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씨알들

한 되의 씨알 하나에 대한 그리고 그 한 씨알의 수만

가지 부분에 대한 비율이 있지 않습니까?" 있다고

그가 말하기에 제논은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그 소리들의 서로에 대한 비율들도 같은 비율들이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소리를 내는 것들처럼, 그 소리들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정이 이러하기에, 만일

씨알 한 되가 소리를 낸다면, 낱알 하나도 그 낱알의

수만 가지 부분도 소리를 낼 것입니다."

 

Argument Against the Existence of Place (D13)
D13
a (> A24) Arist. Phys. 4.1 209a23-26
ἔτι δὲ καὶ αὐτὸς εἰ ἔστι τι τῶν ὄντων, ποῦ¹ ἔσται; ἡ
γὰρ Ζήνωνος ἀπορία ζητεῖ τινὰ λόγον· εἰ γὰρ πᾶν τὸ
ὂν ἐν τόπῳ, δῆλον ὅτι καὶ τοῦ τόπου τόπος ἔσται, καὶ
τοῦτο εἰς ἄπειρον.²
¹ ποῦ] ποὺ Ross  ² ἄπειρον ΕV: ἄπειρον πρόεισιν Λ

그런데 더 나아가 그것[장소] 또한 있는 것들 중 어떤

것이라면, 어디에 있겠는가? 제논의 역설도 모종의 설명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만일 있는 것이 모두 장소 안에 있다면,

그 장소에 대해서도 장소가 있을 것임이 분명하고, 이 또한

무한을 향하기 때문이다.


b. (Nachtrag I, p. 498) Simpl. In Phys., p. 562.3-6
ὁ Ζήνωνος λόγος ἀναιρεῖν ἐδόκει τὸ εἶναι¹ τὸν τόπον
ἐρωτῶν οὕτως· "εἰ ἔστιν ὁ τόπος, ἔν τινι ἔσται· πᾶν
γὰρ ὂν ἔν τινι· τὸ δὲ ἔν τινι καὶ ἐν τόπῳ. ἔσται ἄρα
καὶ² ὁ τόπος ἐν τόπῳ καὶ τοῦτο ἐπ᾿ ἄπειρον· οὐκ ἄρα
ἔστιν ὁ τόπος."
¹ τὸ εἶναι Ε: om. F  ² καὶ om. Ε
제논의 논변은 장소를 그런 식으로 물으면서 있다는 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만일 장소가 있다면, 어떤 것

안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은 모두 어떤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것 안에"라는 것은 "장소

안에"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소 또한 장소 안에 있을 것이고

이 또한 무한을 향한다. 그래서 장소는 있지 않다."

Arguments Against Motion (D14-19)
First Argument, Called That of Dichotomy (D14)
D14 (< A25) Arist. Phys. 6.9 239b11-14
[. . . = D1] πρῶτος μὲν ὁ περὶ τοῦ μὴ κινεῖσθαι διὰ τὸ
πρότερον εἰς τὸ ἥμισυ δεῖν ἀφικέσθαι τὸ φερόμενον
ἢ πρὸς τὸ τέλος [. . .].

첫 번째 논변은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에 관련하여 움직이는

것이 완결점을 향하기에 앞서 중간에 당도해야 한다는

논변이다.


Second Argument, Called Achilles (D15)
D15
a (A26) Arist. Phys. 6.9 239b14-20
δεύτερος δ᾿ ὁ καλούεμνος Ἀχιλλεύς· ἔστι δ᾿ οὗτος, ὅτι
τὸ βραδύτατον¹ οὐδέποτε καταληφθήσεται θέον ὑπὸ
τοῦ ταχίστου· ἔμπροσθεν γὰρ ἀναγκαῖον ἐλθεῖν τὸ
διῶκον ὅθεν ὥρμησεν τὸ φεῦγον, ὥστε ἀεί τι προέχειν
ἀναγκαῖον τὸ βραδύτερον. ἔστιν δὲ καὶ οὗτος ὁ αὐτὸς
λόγος τῷ διχοτομεῖν, διαφέρει δ᾿ ἐν τῷ διαιρεῖν μὴ
δίχα τὸ προσλαμβανόμενον μέγεθος [. . . = R19]
¹ βραδύτατον Ε: βραδύτερον ΚΛ

두 번째 논변은 아킬레우스 논변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는

이러한 것인데, 가장 느리게 달리는 것이 가장 빠른 것에

의해 절대로 따라잡히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쫓는 것은 먼저 달아나는 것이 그로부터 나아가는 곳에

도달하는 일이 필연적이고, 그래서 언제나 더 느린 것이

언제나 조금이라도 앞서는 일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도 이분 논변과 같은 논리이며, 그런데

추가로 상정되는 크기를 이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난다. 


b (≠ DK) Them. In Phys., p. 199.23-29
δεύτερος δέ ἐστιν ὁ λόγος ὁ καλούμενος Ἀχιλλεὺς
τετραγῳδημένος καὶ τῷ ὀνόματι· οὐ γάρ, ὅπως φησίν,
τὸν Ἕκτορα καταλήψεται ὁ ποδωκέστατος Ἀχιλλεύς,
ἀλλ᾿ οὐδὲ τὴν βραδυτάτην χελώνην. εἰ γὰρ τὸν δι-
ώκοντα ἀνάγκη¹ πρότερον ἐλθεῖν ἐπὶ τὸ πέρας τοῦ
διαστήματος, οὗ τὸ φεῦγον προελήλυθεν, ἀδύνατον
ἄλλο ὑπ᾿ ἄλλου καταληφθῆναι. ἐν ᾧ γὰρ ὁ διώκων
τοῦτο δίεισι τὸ διάστημα, δῆλον ὡς ὁ φεύγων ἕτερόν
τι προστίθησιν· εἰ γὰρ καὶ ἔλαττον ἀεὶ τῷ βραδύτε-
ρος ὑποκεῖσθαι, ἀλλ᾿ οὖν προστίθησί γέ τι.

두 번째 논변은 그 이름에서도 비극조로 취급되어

아킬레우스 논변이라 불리는 것이다. 즉, 그 논변이

주장하듯, 헥토르를 가장 발이 빠른 아킬레우스가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가장 느린 거북이조차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뒤쫓는 자는 먼저, 달아나는

쪽이 앞서 나간 그 간격의 경계에 도착하는 일이 필연적이며,

한 쪽이 남은 쪽에 의해 따라잡히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쫓는 자가 이 간격을 통과하는 그 [시간] 안에,

달아나는 자가 또 다른 어떤 간격을 추가한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 느린 쪽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매번

[간격이] 더 작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적어도 뭐라도

추가하기 때문이다.

¹ τὸν διώκοντα ἀνάγκη L:
τὸν διώκοντα MCS:
δεῖ τὸν διώκοντα Laur. 85, 14:
τὸ διῶκον ἀνάγκη Schenkl (cf. Simpl. In Phys. 1014.14-15)


-蟲-

D6 (< B1) Simpl. In Phys., p. 141.2-8

εἰ δὲ ἔστιν, ἀνάγκη ἕκαστον¹ μέγεθός τι ἔχειν καὶ

πάχος καὶ ἀπέχειν αὐτοῦ τὸ ἕτερον ἀπὸ τοῦ ἑτέρου.

καὶ περὶ τοῦ προύχοντος ὁ αὐτὸς λόγος. καὶ γὰρ 

ἐκεῖνο ἕξει μέγεθος καὶ προέξει αὐτοῦ τι. ὅμοιον δὴ 

τοῦτο ἅπαξ τε εἰπεῖν καὶ ἀεὶ λέγειν· οὐδὲν γὰρ 

αὐτοῦ τοιοῦτον ἔσχατον ἔσται οὔτε ἕτερον πρὸς ἕτε-

ρον οὐκ ἔσται. οὕτως εἰ πολλά ἐστιν, ἀνάγκη αὐτὰ

μικρά τε εἶναι καὶ μεγάλα, μικρὰ μὲν ὥστε μὴ ἔχειν

μέγεθος, μεγάλα δὲ ὥστε ἄπειρα εἶναι.

¹ τὸ ὄν post ἕκαστον hab. F

그런데 만일 있다면, 각각(의 존재는) 어떤 크기와 두께를

지니는 것과 그것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이 필연적이다. 초과하는 것에 관련하여서도

같은 논리가 성립한다. 왜냐하면 저것 또한 크기를 가질

것이고 그것보다 얼마라도 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점을 한 번 이야기하는 것도 언제나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이러한 어떤 일부가

끝이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것이 또 다른 것에 대해 그러한

것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일 여럿이라면,

그것들은 작은 것들이자 또한 큰 것들이기도 하다는 것이

필연적이고, 크기를 가지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들인 한편,

무한한 것들일 만큼 큰 것들임이 필연적이다.


D7 (B2) Simpl. In Phys., p. 139.9-15
ἐν δὴ τούτῳ δείκνυσιν ὅτι οὗ μήτε μέγεθος μήτε πά-
χος μήτε ὄγκος μηθείς ἐστιν, οὐδ᾿ ἂν εἴη τοῦτο. "εἰ
γὰρ¹ ἄλλῳ ὄντι, φησί, προσγένοιτο, οὐδὲν ἂν μεῖζον
ποιήσειεν· μεγέθους γὰρ μηδενὸς ὄντος, προσγενο-
μένου δὲ² οὐδὲν οἷόν τε εἰς μέγεθος ἐπιδοῦναι. καὶ
οὕτως ἂν ἤδη τὸ προσγινόμενον οὐδὲν εἴη. εἰ δὲ
ἀπογινομένου τὸ ἕτερον μηδὲν ἔλαττόν ἐστι, μηδὲ
αὖ προσγινομένου αὐξήσεται, δῆλον ὅτι τὸ προσ-
γενόμενον οὐδὲν ἦν οὐδὲ τὸ ἀπογενόμενον."³

¹ εἰ γὰρ D: οὐ γὰρ EF: οὐ γὰρ εἰ ed. Ald.
² προσγενομένου δὲ obl. D, δὲ del. Zeller.
³ ἀπογενόμενον ed. Ald.: ἀπογινόμενον DEF

그래서 이 점에서 그들은 크기도 두께도 입체도 어느

하나도 전혀 그것의 것이지 않은 바의 것, 이런 것은

아무것이지도 않으리란 점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 외의 것인 바의 것에, 그들이 주장하기로, 그것이

추가된다면, 전혀 더 크게 만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혀 어떠한 크기이지도 않기에, 추가됨으로써

크기 쪽에 아무런 것도 부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이제 추가되는 것은 아무 것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제거되는데도 다른 것이

전혀 더 작은 것이지 않고, 이번엔 [그것이] 추가되더라도

[다른 것이] 증가하지도 않을 것이라면, 추가된 것은

아무런 것이지도 않을 것이고 제거된 것도 아무것이지

않으리라는 점이 분명하다."


D8 (A21) Arist. Metaph. B4 1001b7-13
ἔτι εἰ ἀδιαίρετον αὐτὸ τὸ ἕν, κατὰ μὲν τὸ Ζήνωνος
ἀξίωμα οὐθὲν ἂν εἴη (ὃ γὰρ μήτε προστιθέμενον μήτε
ἀφαιρούμενον ποιεῖ μεῖζον μηδὲ ἔλαττον,¹ οὔ φησιν
εἶναι τοῦτο τῶν ὄντων, ὡς δηλονότι ὄντος μεγέθους
τοῦ ὄντος· καὶ εἰ μέγεθος, σωματικόν· τοῦτο γὰρ
πάντῃ ὄν· τὰ δὲ ἄλλα πὼς μὲν προστιθέμενα ποιήσει
μεῖζον, πὼς δ᾿ οὐθέν, οἷον ἐπίπεδον καὶ γραμμή,
στιγμὴ δὲ καὶ μονὰς οὐδαμῶς) [. . . = R24].

¹ μηδὲ ἔλαττον Aᵇ: om. EJ

더욱이 만일 하나 자체가 불가분한 것이라면, 제논의 공리에

따라 아무런 것이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추가됨으로써도

제거됨으로써도 더 크게도 작게도 만들지 못하는 것, 이것은

있는 것들 중의 어떤 것이 아니라고 그가 주장하는 바, 있는

것은 크기인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기에 그렇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크기인 것이라면, 물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방면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외의

것들은 어떤 식으로는 추가됨으로써 더 크게 만들 것이나,

또 어떤 식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니, 이를 테면 면과 선이

그러하며, 점과 단위는 어떤 식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D9 (< A22) Simpl. In Phys., p. 138.3-6
τὸν δὲ [. . .] λόγον τὸν ἐκ τῆς διχοτομίας τοῦ Ζήνωνος
εἶναί φησιν ὁ Ἀλέξανδρος λέγοντος ὡς εἰ μέγεθος
ἔχοι τὸ ὂν καὶ διαιροῖτο, πολλὰ τὸ ὂν καὶ οὐχ ἓν ἔτι
ἔσεσθαι, καὶ διὰ τοῦτο¹ δεικνύντος ὅτι μηδὲν τῶν
ὄντων ἔστι τὸ ἕν.

¹ τοῦτο E: τούτου cett.
그런데 만일 있는 것이 크기를 가지고 분할될 것이라면,

있는 것은 여러가지 것들이고 더 이상 하나이지 않을

것이라고 논하고, 이로 인해 하나는 있는 것들 중 아무런

것이지도 않다는 점을 증명하는 제논의 이분을 통한 논변이

있다고 알렉산드로스는 주장한다.

 

D10 (A16) Simpl. In Phys., p. 97.12-13 (= Eudem. Frag. 37a Wehrli)
καὶ Ζήνωνά φασι λέγειν, εἴ τις αὐτῷ τὸ ἓν ἀποδοίη τί
ποτέ ἐστιν, ἕξειν τὰ ὄντα λέγειν.

그들은 제논 또한, 만일 누군가 그에게 하나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제시할 수 있다면, 있는 것들을 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논한다고

주장한다.


-蟲-

Early Greek Philosophy, Volume V: Western Greek Thinkers, Part 2. Edited and translated by André Laks, Glenn W. Most. Loeb Classical Library 528.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

 

D1 (< A25) Arist. Phys. 6.9 239b9-11
τέτταρες δ᾿ εἰσὶν οἱ λόγοι περὶ κινήσεως Ζήνωνος οἱ
παρέχοντες τὰς δυσκολίας τοῖς λύουσιν.
운동에 관련하여 해결하려는 이들에게 난점들을 제기하는

제논의 논변들은 네 가지이다.
D2 (< A15) Procl. In Parm., p. 694.17-19
πολλῶν δὲ εἰρημένων ὑπὸ τοῦ Ζήνωνος λόγων καὶ
τετταράκοντα ὄντων¹ πάντων, ἕνα τῶν πρώτων ὁ Σω-
κράτης ἀπολαβὼν ἀπορεῖ πρὸς αὐτόν [. . .].
¹ ὄντων Steel ex Moerbeke (entibus): τῶν ΑΣ
제논에 의해 여러 논변들이 언급되었고 그 모든 논변들은

사십 가지이며, 첫 번째 논변들 중 하나를 소크라테스가 취해

이를 상대로 곤란을 겪는다 [. . .].
D3 (< A15) Elias in Cat., p. 109.15-20
καὶ τῷ οἰκείῳ διδασκάλῳ ποτὲ Παρμενίδῃ ἓν λέγοντι
τὸ ὂν κατὰ¹ τὸ εἶδος, ἐκ τῆς ἐναργείας² πολλὰ τὰ ὄντα,
συντίθησιν ἐκ τεσσαράκοντα ἐπιχειρημάτων ὅτι ἓν τὸ
ὄν, ἀγαθὸν νομίσας τῷ οἰκείῳ συμμαχεῖν διδασκάλῳ.
καί ποτε πάλιν τῷ αὐτῷ συνηγορῶν διδασκάλῳ
ἀκίνητον λέγοντι τὸ ὄν, διὰ πέντε ἐπιχειρημάτων κα-
τασκευάζει ὅτι ἀκίνητον τὸ ὄν.
¹καὶ mss., corr. Kranz  ²ἐναργείας Diels: ἐνεργείας mss.
형상에 따라(or 형상과) 있는 것은 하나이고

명백하게(or 현실태로) 있는 것들은 여럿이라고 언젠가 논한

자신의 스승 파르메니데스를 위해, 있는 것이 하나라는 점을

증명하려는 시도들로부터 사십 가지를 구성하는데, 자신의

스승과 함께 싸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있는 것이 부동인 것이라 언젠가 말한 바로 그 스승을

변호하면서, 있는 것이 부동인 것이라는 점을 다섯 가지

시도를 통해 논증하였다.
The Contents of the Arguments Preserved (D4-D19)
Arguments Against Plurality (D4-D12)
The First Argument: Similar and Dissimilar (D4)

D4 (A12 Untersteiner) Plat. Parm. 127d-128a
τὸν οὖν Σωκράτη ἀκούσαντα πάλιν τε κελεῦσαι τὴν
πρώτην ὑπόθεσιν τοῦ πρώτου λόγου ἀναγνῶναι, καὶ
ἀναγνωσθείσης, πῶς, φάναι, ὦ Ζήνων, τοῦτο λέγεις;
εἰ πολλά ἐστι τὰ ὄντα, ὡς ἄρα δεῖ αὐτὰ ὅμοιά τε εἶναι
καὶ ἀνόμοια, τοῦτο δὲ δὴ ἀδύνατον· οὔτε γὰρ τὰ
ἀνόμοια ὅμοια οὔτε τὰ ὅμοια ἀνόμοια οἷόν τε εἶναι.
οὐχ οὕτω λέγεις; οὕτω, φάναι τὸν Ζήνωνα. οὐκοῦν εἰ
ἀδύνατον τά τε ἀνόμοια ὅμοια εἶναι καὶ τὰ ὅμοια
ἀνόμοια, ἀδύνατον δὴ καὶ πολλὰ εἶναι· εἰ γὰρ πολλὰ
εἴη, πάσχοι ἂν τὰ ἀδύνατα.
그리하여 소크라테스께서 들으시고는 첫 번째 논변의

첫 번째 가정을 읽어 주십사 재차 청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 가정이 다시 읽히자, 그 분께서는 말씀하셨답니다.

"제논, 이는 어찌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만일 있는 것들이

여럿이라면, 그래서 그것들이 마찬가지인 것들이자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은 것들이어야 한다고, 그럼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찬가지이지 않은

것들이 마찬가지인 것들일 수도 없고 마찬가지인 것들이

마찬가지이지 않은 것들일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요?" 제논께서는 "그렇게

말하는 걸세,"라고 하셨답니다. "그러니 만일 마찬가지이지

않은 것들이 마찬가지인 것들이기도 마찬가지인 것들이

마찬가지이지 않은 것들이기도 불가능한 것이라면, 더 나아가

여러가지 것들이기도 불가능하다고 말이지. 왜냐하면 만일

여러가지 것들이라면, 그 불가능한 일들을 겪을 테니 말이지."

Argument by Magnitude: Small and Large (D5-D10)

D5 (< B1) Simpl. In Phys., p. 141.1-2
εἰ μὴ ἔχοι¹ μέγεθος τὸ ὂν οὐδ᾿ ἂν εἴη.
¹ ἔχοι DF: ἔχει E ed. Ald.
만일 있는 것이 크기를 지니지 못한다면 (않는다면) 있지도 못할 것이다.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