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같은 만큼의 양인 것을 두고 그것에 걸쳐 있을 때 [그러한] 모든 것은 항상 멈추어 있다면, 그리고 이동되고 있는 것은 항상 지금 안에 있다면, 이동되고 있는 화살은 운동하지 않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6권 9장 239b5-7.

 

일정한 크기(연장)를 점유하고 있으면서 그 점유하는 크기에 변화가 없는 것은 멈추어 있다.

그렇다면 멈추어 있지 않은 것, 즉 움직이는 것은 그 점유하는 크기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점유하는 크기가 그 크기 자신과 같은 경우에는 운동하지 못하고 멈추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어떤 것이 '지금'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지금 그것이 점유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의 연장을 점유하고 있다.

또한 지금 그것이 점유하고 있지 않은 어떤 연장도 점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그것이 있는 그 자리에 있고 다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 안에 있는 것은, 지금 같은 만큼의 양인 것을 두고 그것에 걸쳐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 멈추어 있다.

 

그러나 이동되고 있는 것은 항상(매번) '지금' 안에 있다.

이동되고 있는 것이 '지금' 안에서 이동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이동된 것으로서 '지금'은 멈추어 있을 것이거나,

장차 이동될 것으로서 '지금'은 아직 멈추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동되고 있는 화살은 '지금' 이동되고 있으면서도, 또한 같은 만큼의 양인 것을 두고 그것에 걸쳐 있으며 따라서 멈추어 있기도 하다.

 

주어진 문장만을 놓고 보자면 "같은 만큼의 것에 걸쳐 있을 때 모든 것은 항상 멈추어 있다"와 "이동되고 있는 것은 항상 지금 안에 있다" 두 조건이 충족될 경우, 이동되고 있는 것이 운동불가능하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지금 안에 있다"는 것을 "같은 만큼의 것에 걸쳐 있다"를 함의하는 표현으로 읽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것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연장 만큼의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연장도 점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추가하면 된다. "지금 있는 것"은 그것이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며, 그 외의 다른 어디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다른 어떤 자리에도 또한 있기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지금 안에 있다"라는 것이 어떻게 "같은 만큼의 크기를 점유하고 있다"라는 것을 함의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안에 있다"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멈추어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진행형으로 운동 중에 있는 것, 단적으로 말해 '움직이는 것'은 다른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움직이고 있어야 "움직이고 있다"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 문제는 다시, 그러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지금' 움직이고 있기 위해서는 지금 점유하고 있는 연장에서는 벗어나고 있어야 하고 또한 동시에 앞으로 점유하게 될 연장에 대해서는 아직 점유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이 지금 있는 곳에는 있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지금 있지 않은 곳에는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며, 이 역시 날아가고 있는 화살이 멈추어 있다는 역설에 관련된다.

 

지금 있는 것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의 연장만을 차지한다는 숨은 전제를 추가하는 것은 크게 작위적이거나 과격한 논증재구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 있는 것은 지금 그것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다면 이것을 제논의 역설에 일상적인 경험적 믿음으로 포함시키는 데에 엄청난 해석적 부담이 뒤따른다고 볼 이유가 없다. 

 

반면, "같은 만큼의 것에 따라 있을 때(ὅταν ᾖ κατὰ τὸ ἴσον)"가 "지금 안에 있다(ἔστιν ... ἐν τῷ νῦν)"와 같은 것이라고 보자는 제안은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만큼의 것에 따라 있을 때"를 "같은 만큼의 연장을 점유하고 있을 때"라고 이해하는 일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어떤 것이 정지해 있기 위한 조건임을 받아들인다면, 해당 표현을 특정한 장소 혹은 거리 등의 공간적 연장을 점유하고 있다는 의미 외에 다른 식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같은 만큼의 연장을 점유한다는 것은 한 순간에 대해서도 일정 기간 동안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멈추어 있는 것은 어떤 한 순간 멈추어 있을 수도 있고 일정 기간 동안 멈추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같은 만큼의 연장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지금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의 시간관이 운동을 존재론적으로 더 앞서는 것으로 놓고 시간이나 거리 따위를 이러한 운동을 측정할 때에 비로소 뒤따라 나오는 것으로 간주하였을 수도 있으나, 이러한 이해를 해당 역설에 끌어들여 적용시킬 이유와 근거는 해당 해석을 주장하는 측에서 제시해야 한다. 또한,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을 고려하면, 시간은 있었던 것과 있는 것 그리고 장차 있을 것 사이의 구분이 있을 때 성립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공간적 운동을 떠올릴 아무런 이유도 없다. 있었던 것이 지금 있지 않거나, 지금 있는 것이 앞으로 있지 않을 것이라거나 하는 것, 즉 생성이나 소멸은 시간의 선후를 구분할 수 있다면, 그러한 선후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한편에서는 있는 것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있지 않은 것이 상이하게 상정될 수 있다면, 이러한 조건에서 충분히 이야기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운동하지 않고(점유하고 있는 연장과는 다른 연장을 점유하게 되지 않고) 멈추어 있는 것에 대해 시간 상의 구분(순간과 기간)을 적용시킬 수 없다거나 시간 개념 자체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될 수 없는 주장은 억지스럽다. 그리고 다시금, 상식적인 경험에 따라 가만히 멈추어 있는 것에 대해 움직이다가 멈추어 서게 된 것, 그리고 멈추어 있다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모두 상호 구분될 수 있으며, 이것들 각각에 대해 멈추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멈추어 있는지, 언제까지 멈추어 있다 움직이기 시작하는지, 언제까지 움직이다가 언제 멈추었는지를 모두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양의 연장을 점유하고 있을 때"는 "지금" 혹은 "지금 안에 있다"와 동일시될 수 없다. 역으로, "지금 안에 있다"는 것은 "동일한 양의 연장을 점유하고 있을 때"의 한 사례일 수 있다. 지금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지금 점유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의 동일한 연장을 점유하고 있고, 그 점에서 지금 바로 그 순간에는 자신의 자리에 머물러 있고 그래서 멈추어 있다. 지금 있는 것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연장을 점유하는 동시에 그 연장 외의 (자신이 점유하고 있지 않은) 연장까지도 함께 점유하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그것은 멈추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속해 있는 것이 이런 식으로 '지금 점유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의 연장을 가지고' 지금에 속해 있다는 내용을 추가하지 않고서는, 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이 또한 멈추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를 유의미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움직이고 있는 것(τὸ φερόμενον)은 멈추어 있지(ἠρεμεῖ) 않은 것이고, 모든 것은 같은 양을 점유하고 있을 때(ὅταν ᾖ κατὰ τὸ ἴσον) 언제나 멈추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언제나(αἰεί)' 지금 안에(지금 내가 반대하는 해석에 따르자면, '같은 양을 점유하고 있는 때' 안에) 있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금"이 "같은 양을 점유할 때"와 의미 차이가 없다면 두 번째 조건을 독자가 수용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지금" 안에 있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발화되었을 때, 즉 이전이나 이후가 아니라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그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단순히 그 의미에서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수용할 만한 조건이 된다. 그래서 더욱이 "지금"이라는 것이 아무런 보충이나 해석 없이 "같은 연장을 점유할 때"와 동일시될 수는 없으며, "지금"이라는 시간과 그 시간에 점유할 수 있는 연장 사이의 관계가 모종의 방식으로 이해될 때, 이를 매개로 하여 화살 역설이 역설로 성립할 수 있게 된다.

 

어찌 되었든지간에, 도대체 뭘 어떻게 읽어야 "같은 연장을 점유할 때"가 곧장 "지금"이 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설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그런 식의 "지금" 안에 움직이는 모든 것이 속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일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으며, 이 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주어진 문장만으로 가능하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부담들을 짊어지느니 "지금"을 기간을 설정할 수 없는 순간(moment)으로 이해하여 바로 그 순간에는 그 당시에 점유한 연장 이외의 다른 연장을 점유할 수 없단 점을 연결시키고, 또한 동시에 이 불가분하고 양을 가지지 않는 '순간'과 현재 진행형의 운동하는 물체에게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지금', 운동의 경과와 함께 계속 진행하는 그러한 '지금'을 일상인들이 혼동하는 데에서 오는 문제를 제논이 역설로 구성하여 제기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 생각된다.

 

-추가하자면, 제논의 첫 번째 조건은 "같은 연장을 점유한다"를 "장소 변화가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전제가 된다. 반면 두 번째 조건은 "지금 안에 있다"라는 것을 두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언제 움직이고 있는지를 물을 때 우리가 답할 만한 것, "그건 '지금' 움직이고 있다"라고 말할 때의 그러한 '지금'이라 이해할 때에 수용할 만한 전제가 될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지금' 움직이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이 아닌 다른 때에 움직이고 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현재진행형으로)"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소 변화가 없는 것은 멈추어 있다는 전제와, 움직이고 있는 것은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전제, 두 가지 자연스럽게 수용할 만한 전제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수용 이후, 그러나 '지금'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 '지금' 이전도 그 이후도 아닌 바로 그 한 순간의 '지금'을 특정하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설이 성립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을 가져와 보자면 과거의 끝이자 미래의 시작이 되는 그 둘 사이에 있는 단일한 경계가 '지금'이다. 그런데 '지금'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는 일 역시 쉽사리 부정할 수는 없다. 있는 것은 지금 있는 중이며, 있었던(지금은 이미 있지 않은) 것과도 다르고 있을(지금은 아직 있지 않은) 것과도 다르다. 그리고 그렇게 지금 있는 것은 지금 있는 바로 거기에 있으며, 그렇게 차지하고 있는 바로 그 만큼의 같은 양의 연장만을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지금 움직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거기에 있기도 하다면, 그것은 아직 차지하지 않은 연장을 차지하고 있는 중도 아니고 이미 점유하고 있던 연장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도 아니며, 같은 양의 연장을 그대로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멈추어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여기에서 운동과정을 거치는 운동체와 함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지금'을 특정 시점으로서 그 이전의 끝이자 그 이후의 시작이기도 한 일종의 '경계로서의 지금'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제논의 경우에는, 그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적 입장을 공유한다면, 지금 있는 곳에는 있지 않으면서 또한 지금 있지 않은 곳에는 있기도 해야 비로소 가능한 운동(장소이동) 자체를 부정할 것이다. 또한 과거의 끝이면서 미래의 시작이기도 한 그러한 모순적인 무언가로서 시간을 분할하도록 만드는 시점이나 순간, 지금 따위 역시 부정할 것이다. 장소 이동을 부정하는 논지도 시간의 선후 구분을 부정하는 논지도 파르메니데스의 소위 「진리」편에서 찾아볼 수 있으므로, 이러한 논변의 연장선상에서 제논의 역설을 이해해 보는 것은 그 둘을 '엘레아 학파'로 묶어 취급하는 당대의 보고와 정합적인 접근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같은 연장을 점유할 때'와 '지금'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자는 제안이 무슨 이야기인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지극히 호의적으로 이해를 시도해 보자면, 시간 또한 공간처럼 일종의 연장으로 간주해서 같은 연장을 공유한다는 것이 같은 공간에 머무른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의미 또한 된다고 보고, 같은 시간을 점유하는 것을 지금 안에 혹은 현재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이를 앞서 '같은 연장을 점유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지해 있을 조건을 충족시킨 상황으로 보자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경우 "시간이 연장의 일종이다"라는 것은 주어진 문장에서 표현된 것도 아니고 '지금'을 '같은 시간 연장을 점유하는 것'이라 표현한다는 것도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더구나 움직이고 있는 것이 '같은 시간 연장을 점유하는 것'을 '언제나(αἰεί)' 그러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훨씬 더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이 '같은 시간 연장'이 오후 10시부터 11시까지의 시간량 같은 것이라 쳐보자. 이 시간양을 변화시키지 않고 딱 그 만큼을 그대로 점유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 이야기될 수 있는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항상 지금 안에 있다'고 말할 때 '지금'이란 바로 그 운동이 수행되고 있는 그 동시적인 시간, 시점이다. 이런 해석 제안이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해석은 내가 제안하는 해석과 마찬가지로 없는 얘기를 끌어다 붙이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는 바로 그 순간에는 어떤 것이 점유하고 있는 바로 그 연장 외에 다른 연장은 점유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개입시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 이외의 추가적인 외삽을 시도하는 일이라면, 시간이 연장의 일종이고 그래서 지금 안에 있는 것은 곧 같은 연장을 점유하는 것이라는 식의 해석도 결국은 외삽에 불과하다. 후자는 외삽이 아니고 주어진 문장만으로 가능한 논증재구성이라는 주장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하는지 알 수 없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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