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플라톤 『에우튀프론』의 독자들은 전형적으로 에우튀프론의 경건(εὐσέβεια)에 대한 다섯 가지 정의 시도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적 검토에 주의를 집중한다 (1) 경건은 누구든지 부정의를 저지른 자에 맞서 소송을 거는 일이다(5d-6e), (2) 경건은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다(6e-9d), (3) 경건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다(9e-11b), (4) 경건은 신들이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산물을 산출하도록 봉사하는 올바름의 부분이다(11e-14b), (5) 경건은 기원과 제사의 기술이다(14b-15c). 그러나 이러한 논증적 사건들이 그 대화의 명백한 철학적 실체를 아주 잘 구성한다 할지라도 , 만일 우리가 그것들과 더불어 그 대화의 전반적인 의미까지 모두 충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대화의 참가자들을 몰아가는 그 복잡한 동기들을 또한 신중하게 철저히 검토 해 마땅하다. 플라톤 자신이 이런 종류의 검토를 유발시키길 바란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는 이상하게 복잡하고 긴 극적 도입부를, 거칠게 말해서 그 대화편 길이의 3분의 1에 달하는 그런 도입부(그 주제들이 연이은 경건으로의 탐구를 끊임없이 알리는)를 내놓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그 도입부의 가장 혼란스럽고 아직 논의가 덜 된 요소들 중 하나를 꽤 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에우튀프론의, 그가 그의 아버지를 그의 아버지가 저질렀다고 그가 상상하는 그런 종류의 살인들에 수반되는 μίασμα - 더러움 -  때문에, 그리고 공정한 정의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고소함에 있어서 정당화된다는, 그 단언이다(4b7-c3). 이 논문에서 나는 이러한 호소에 대한, 에우튀프론이 생각되어 왔던 것보다 더욱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진보적일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나 또한 『에우튀프론』이 간접적으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법률적 변호의 역할을 하는 방식을 새로이 조명하는 한 가지 새로운 설명을 주장하고자 한다.

2) 『에우튀프론』의 도입부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첫번째 부분은 곧 있을 소크라테스의 공판을 소개하는 것이고 두번째 부분은 에우튀프론 자신의 송사를 상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 의도에 맞추어 나는 다음과 같이 가정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자 한다. 이 첫번째 부분와 뒤따르는 부분에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동기들을 에우튀프론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투명하고, 완전히 고결하며, 『변론』의 소크라테스에 의해 공언된 동기들(예를 들어 『변론』 22e-23b, 29c-31c)과 동일한 것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그것,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의 탐구(15c-16a)가 결코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이 사업이 그 자체로 즐겁고 (주장컨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복'; 『변론』 41c3-4) 경건할 뿐만 아니라, 경건이 '남은 삶을 더욱 나은 삶이도록' 허용하리라는 것을(15e7-16a4), 특히 그것의 지속이 불경의 습격에 의해 위협받을 것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3b-d, 5a-c, 12e, 15e-16a).

3) 자연스럽게, 일부 주석가들은 철면피스러운 위선과 뒤엉킬 그러한 표현들을 발견했다. 존 베버스루이스에 따르자면 예를 들어 허세가 심하고 답답하며 패륜아에 '나치청년단에서도 꽤나 잘 나갔을' 광신교도로서 에우튀프론의 전형적인 성격은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검토가 실제로 얼마나 모욕적이고 모자란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주목으로부터 주의를 떼어 놓았다. 우리가 이야기하게 되는 소크라테스는 처음에 적합한 정의에 대한 그의 기이한 원리를 가지고 에우튀프론을 압도하고(5c-d, 6d-e) 다음으로 이해가 아닌 단지 문자적 동의에 불과한 것을 바탕으로 궤변적으로 그를 두들긴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은 즐거울지는 모르지만, 소크라테스가 그러므로 에우튀프론의 영혼을 불경하고 부정의하며 위선적으로 외면한 죄가 있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베버스루이스, 184). 오히려, 베버스루이스께는 죄송하게도 (176, 184), 그것은 대화편 말미에서 법정 소환 전에  에우튀프론이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고, 그래서 그로써 그가 그의 잘못 세워진 소송을 몰수당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플라톤이 일조하는 데에 가장 극적으로 효과적으로 보인다(후기 전통이 그러하듯이; D.L.2.29).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전략은 에우튀프론이 잠재적으로 행위방식을 훼손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만류함으로써 에우튀프론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친족들에게 유익하다. 이 모든 것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지금 초점을 맞추려는 에우튀프론이다.

4)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소크라테스와 에우튀프론의 우연한 만남보다 5년 앞서 에우튀프론의 소작인 중 하나(ὁ πελάτης)가 그의 가문 노예들 중 하나(ὁ οἰκέτης)를 술에 취해 홧김에 죽였다. 에우튀프론의 아버지는 그 살인자를 묶었고 구덩이에 내던졌다. 그리고 - 그 일꾼이 살인자였기 때문에 - 아테네 종교적 조언가들(ἐξηγηταί) 중 하나로부터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조언을 기다리는 동안 그 살인자를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 일꾼은 배고픔과 추위로 죽었다. 이에 대하여 에우튀프론이 이제 아르콘 바실레우스 앞에 에우튀프론의 아버지에 대하여 살인죄로 소송을(δίκη φόνου) 가져오는데, 그의 아버지와 그 자신(그리고 짐작컨데 그의 친족들) 모두를 그가 이런 종류의 부정의한 죽임을 곁에 있으면서 본 μίασμα에 대해서 정화하기 위해서이다(4b-e).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이 이야기에 놀란다. 그 자신의 아버지에게 소송을 걸음으로써 에우튀프론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데(μαίνεσθαι, 4a1), 왜냐하면 남을 위해 가족을 고소한다는 것은(만일 실제로 불가능하지 않다면; 아래를라) 가장 드문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작성중-
꼴들의 내재

1)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이 그것들의 예시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예시들에 우선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그것들의 예시들 '안에'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영향을 미친다. 로스 교수는 꼴들에 대한 이론의 발전에 있어서 '내재로부터 떠나 초월로 향하는 일반적 변동이 있다. 초기에 거의 모든 것들이 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라고 주장해 왔다. 그는 후기 대화편들에서 특수자들은 결코 충분하게 그것들의 꼴들을 예시하거나 예증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한다; 특수자들은 오로지 그 꼴들을 흉내낼 따름이다. 그러나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은 '특수자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꼴은 그것들 안에 "현존한다"; 그것은 장인에 의해 "그것들 안에" 정위된다; 꼴은 그 예시들에게 '공통적'이다; 특수자의 경우에는 꼴을 "지니거나" 그 꼴에 "관여한다".

2) 이 주장의 힘은 '내재'의 의미에 달려 있다. 로스 교수가 인용하는 모든 표현들은 그리스어에서 추상명사들과 함께 정말로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한 행위에 올바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한 행위가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의 단순히 또 다른 방식, 그리고 이상적 방식일 따름이다. 꼴들은 추상 명사들의 의미들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들의 사용은 형이상학적으로 자연스럽다: 만일 꼴들이 그것들의 예시들 안에 내재적이라는 주장이 언어적 용법의 사실들을 요약할 따름이라면, 그 주장은 참이지만, 존재론적 지위의 문제가 관련되는 한에서는 무의미한 주장이다.

3) 다른 한편, 만일 '내재'라는 것이 언어의 특정 용례를 포괄하는 말일 따름이라기 보다는, 꼴들의 존재론적 지위에 속한 것으로 취해진다면, 초기 대화편들의 언어에 대한 로스 교수의 호소는 꼴들이 내재적이라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할 것이다. 내재의 이 비일상적 의미를 그것의 추정적 반대로, 초월성이란 말로 한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꼴들이 어떤 전문적 의미에서 사물들 '안에' 있다는 주장은 그것들이 '떨어져' 있다거나 '따로' 있다는 것에 대한 부정으로 대체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로스 교수는 내재와 초월을 모순으로서 다루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플라톤이 '안에'라는 것을 장소로 사용하고 그것의 동종적인 것들을 중기와 후기 대화편들에서, 바로 그가 초기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스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은, 그[플라톤]가 그 중 어느 표현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반면, 그는 그 둘 모두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진리에 접근할 아무런 방법도 보지 못했다는 것일 듯하다. 그 하나는 보편개념과 그것의 특수자들 사이의 관계의 친밀성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특수자들 각각이 어떤 보편자에 대해서도 완벽한 예증이 되는 데에 실패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 관계가 완전히 특유하고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조차 눈치챘었을 것이다. '분유'와 '모사' 모두 그에 대한 은유들이고, 그 두 가지 상호보완적인 은유들의 사용은 그 둘 중 하나만의 사용보다는 더 낫다.

그 결론은 따르기 어렵다. 만일 예증이 그 자체의 유에 속하는(특유한) 관계라면, 어떠한 분석도 불가능하고 어떠한 분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모사'와 '분유'는 그에 대한 유용한 은유이기 어렵다; 은유는 어떤 종류의 유비적 관계성을 수반하고, 여기에는 유추를 위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분유'는 '모사'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정확히 일상적으로 추상명사들과 함께 사용되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전혀 은유가 아니라는 것이 덧붙여질 것이다. 그러나 내재가 초월의 부정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리고 로스 교수는 어디에서도 그 용어에 그 자체의 독립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한다. 중기와 후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은 그것들을 모사하는 예시들에 의해 오로지 불충분하게만 예증된다는 것은 참이면서 중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어째서 그 문제들에 대한 그 진술이 만일 누군가 선택한다면 '초월'이라 불리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러나 어떠한 독립적 의미도 '내재'에 할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그 주장이 그 꼴들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면 참도 거짓도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것들의 예시들 안에 내재적이라는 로스 교수의 주장에 덧붙지 않는다.

4) 그 문제의 참은 꼴들이 강한 의미에서 후기에서 만큼이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것들이 그것들의 예시들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그것들의 예시들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따로' 존재한다. 초기 대화편들에서의 꼴들에 대한 이론과 후행했던 이론들 사이의 차이점은 분리에 대한 사실로 구성되지 않고, 분리가 생각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중기 대화편들은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변경된 추정, 꼴들이 있는 방식에 대한 이론으로 전환된 추정을 제시한다.


『파이돈』에서의 분리

1) 분리의 주제는 『파이돈』에서 처음으로 감각과 반성 사이의 대조를 통해 소개된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이 오로지 그 자체로 있고 또한 아름다움과 좋음도 그러하다는 시미아스의 논증을 유도해 냄으로써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런 것들이 시각이나 여타의 감각들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오로지 순수한 사유 그 자체만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감각은 앎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반성보다 하위에 놓인다(『파이돈』65d-e).

2) 자연스러운 확장에 의해 이 설명은 하나의 추론을 불러일으킨다: 감각의 대상들은 반성의 대상들보다 하위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이돈』에서 상기에 대한 두번째 논증의 핵심이다. 그 논증의 첫번째 가정은 같음의 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74a-b):

내 생각에 우리는 어떤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군 - 난 막대기가 막대기와 같다거나 돌이 돌과 같다거나 그런 종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을 넘어서서 저편에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네만 - 같음 그 자체 말일세.

그리고 나서 그 같음과 감각적인 같음이 ἕτερα ὄντα, 상이한 종류의 것들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같음들은 하나에 대해서만 같음을 입증할 뿐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고, 사실 정말로 같은 것들은 같지 않을 수도 없을 뿐더러 같음은 같지 않음일 수 없기 때문이다(74b-c). 그래서 같음은 그 같음이 같지 않음에 의해 같아질 수 없다는 점에서 같은 것들과는 다르고, 그러나 실상 감각적 같음들은 또한 같지 않을 것이다.

3) 같음이 그것의 감각적 사례들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님을 보였을 때, 『파이돈』은 다음으로 계속해서 그것들의 관계를 특징지운다. 감각적 같음들이 같음이 같은 것처럼 같지는 않고, 그것이 그러한 것인 그런 종류의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동의된다; 그것들은 또 다른 종류의 것으로서 그러한 종류의 것인 것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에 대해 하위에 자리한다; 그것들은 그 같음과 유사하지만, 그것에 대한 측면에서는 부족하다(74d-e). 그러나, 우리가 이 결핍을 재인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체 안에서 그 자체에 대해 같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가졌다는 것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75b):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여타의 어떤 감각들을 사용하기 시작함에 앞서서, 우리는 반드시 같음 그 자체는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었어야만 하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감각적 같음들을 그 대상들에 귀속시킬 수 있다면 말이지. 그러한 모든 것들이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이기를 애쓰고 있으나 그것에 대해 하위에 있다는 근거에서 말일세.

그래서 말하자면 우리는 같음에 대한 우리의 앎을 감각적 같음들로부터 추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의 결핍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반드시 감각적 같음들이 같음들임을 재인하기 위해 그러한 앎을 가져야만 한다. 동일한 설명이 75c-d에 대해 유효하다:

더 크거나 더 적은 그런 종류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논증이 같음에 대해 아름다움 그 자체, 좋음 자체, 올바름, 경건에 대해서, 그리고 한 마디로 우리의 변증에 있어서 우리가 실재의 보증을 재가하는 그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보다 조금도 덜 적용되지 않기 때문일세.

반성에 대한 감각의 하위성은 지성적 꼴들에 대한 감각적 예시들의 하위성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4) 여기에서 분리는 명백하게 비동일성, 독립성, 또는 우선성 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을 필요로한다. 그것은 꼴들에 대한 예시들이 꼴들에 대한 불완전한 모사들 또는 유사물들이라는 주장을 필요로 한다. 블라스토스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모사 이론을 필요로 한다. 그 이론에 자연스러운 귀결로 감각적인 것들과 꼴들은 그것들의 실재성의 정도에 있어서 다르다는, 꼴들은 그것들의 예시들보다 더욱 실재적이라는 이론이 나중에 결합되었다.


두 세계

1) 『파이돈』은 계속해서 감각적 대상들과 지적 대상들을 두 세계, 가시계와 비가시계에 대한 원칙으로 전개시켜 나아간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알고, 지성적 영혼은 그 영혼의 앎의 대상들, 영원한 것들에 가깝다. 가시계의 대상들, '그것이 실재인 뒤에 이름지어지는 그러한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필멸의 영역에 있고, 서로에 대한 면으로나 그 자체들에 대한 면으로나 결코 동일하지 않다. 반대로, 그것의 현존에 대한 실재성을 우리가 묻고 답하는 속에서 설명해 내는 꼴들은 언제나 동일한 것들에 대한 측면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본성에 있어서 단일하며 오로지 그것들 자체만으로 현존하고 변화를 허용하는 그 어떠한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결코 속하지 않는다(78d-79b).

2) 『국가』에서 두 세계는 앎의 세계와 사견의 세계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거기에서 철학자, 지혜의 구애자를 정의하는 일을 떠맡고, 그를 그와 표면적으로만 유사한, 아름다운 볼 것들과 들을 것들의 구애자와 구별하는 일에 착수한다. 그 논의는 꼴들에 대한 이론을 전제함으로써 시작한다(Ⅴ, 475e-476a):

나는 자네가 나와 이 점에 있어서,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추함에 반대이고, 그것들은 두 가지의 것들이라는 점에 동의하리라 믿는다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들의 각각은 하나라는 것도 말일세. 같은 것들은 올바름과 그릇됨, 좋음과 나쁨, 그리고 모든 특성들에 대해 참일세. 각각의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것이지만, 행위들과 신체들과 각기 다른 것을 가지고 교류를 통하여, 각각은 많은 곳들에서 나타남으로써 많은 것들로 드러나지.

그것은 시각적인 것들과 청각적인 것들의 구애자들로부터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을 구분하는 아름다움의 꼴에 대한 인식이다.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꿈으 꾼다는 것은 어떤 것 같은 것을 단순히 그런 것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닮은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철학자는, 그가 아름다움과 그것에 참여하는 사물들 사이의 구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깨어 있고 또 꿈꾸고 있지 않으며, 단지 사견이 아니라 앎을 가진다(476c-d).

3) 이 닮음은 실재성의 정도들을 시사한다. 완전히 알 수 있는 어떤 것은 완전히 실재적이다(476e-477a). 그래서 만일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그러한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실재와 전적인 비실재 사이에 놓일 것이다. 앎은 실재하는 것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지는 비실재에 상응하므로, 우리는 만일 실재와 비실재 사이의 중간인 어떤 것이 있다면 앎과 무지 사이의 중간인 어떤 것이 있다고 기대해야만 한다. 이것은 사견이거나 믿음이다; 왜냐하면 사견은 무지보다 더욱 선명하고 앎보다는 더 흐릿하기 때문이다 (477a-b). 앎과 사견은, 그것들이 산출하는 정신의 상태에 의해서도 그것들의 대상들에 의해서도 구별되는, 서로 다른 힘들이나 능력들이다 (477c-d). 앎에 의해 산출되는 정신의 상태는 틀릴 수 없는 것이고, 사견에 의해 산출되는 것은 틀릴 수 있는 것이다. 앎의 대상은 실재적인 것이고, 그것의 능력은 실재를 그것이 그것인 바로서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사견의 대상은 비실재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비실재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래서 실재와 비실재 사이의 어떤 중간적인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478a-d).

4) 그 대상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의 현존을 재인하는 이들에게, 그러나, 동일한 것들에 대한 측면에서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현존하는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부정하는 그러한 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어야만 한다 (479a-b):

많은 아름다운 것들 중 어느 것이 또한 추함일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인가? 혹은 올바른 것들은 어떤 것이 그릇되지 않은 것인가? 또는 경건한 것들은 어느 것이 불경건하지 않은 것인가? 여러 짝들이 짝들인 만큼이나 양분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큰 사물들은 작다; 가벼운 사물들은 무겁고, 더 이상 반대인 것보다 하나인 것이지 않다. 있다고 이야기되는 이러한 많은 것들 중 각각의 무엇이든, 그것들은 있다고 이야기되지 않는 바로 그만큼일 것이다. …그것들은 모호하고, 그것들에 대해 있는 것으로서든 없는 것으로서든 그 양쪽 모두로서든 둘 다 아닌 것으로서든 고정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견의 대상들은 감각적이고, 그것들은 완전히 실재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다.

5) 두 세계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일련의 비율들에 의거한다: 꿈꾸고 있음이 깨어 있음에 맞서듯, 그렇게 사견은 앎에 맞서고, 더 흐릿한 것이 더 분명한 것에, 덜 실재적인 것이 실재적인 것에, 꼴들의 예시들이 꼴들에 맞선다. 『정체』Ⅹ,597a에서 목수는 침대의 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꼴의 유사물들인 어떤 것을 만드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의 생산품을 완전히 실재적인 것으로 부르는 것은 오류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와 참에 대한 관점에서 흐릿하고, 또렷하지 않고, 미미하기 때문이다.

6) 두 세계는 후기 대화편 『티마이오스』에서 반복된다:

무엇이 언제나 실재이고 아무런 생성도 지니지 않는 그러한 것이고, 또 무엇이 언제나 생성 중이면서 절대로 실재이지 않은 그러한 것인가? 합리적 설명과 함께 사유로써 이해가능한 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실재하는 것이다; 반면에 비지성적 감각과 더불어 믿음의 대상인 것은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결코 실재로 있음을 지니지는 못하는 그러한 것이다.

있음은 지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에 맞서듯 생성에 맞선다.

7) 이것은 고도의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중요하게도, 우주에서 가장 높은 것과 인간 영혼에서 가장 깊은 것 사이의 유대를 강조하는 도덕적 종교적 원칙이다. 『향연』에서 구애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탐구에 있어서 또 다른 세계로 상승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본성과 본질을 묘사함에 있어서 플라톤의 산문이 갑작스럽게 합창 시의 형식으로 주신 찬가들을 터뜨리는 곳에서 알아차렸다(211a-b):

첫째로, 그것은 언제나 있으며 생겨나거나 있게 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라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다시, 그것은 한 측면에서 아름답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아름답지 않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순간 아름답고 다른 순간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한 관계에서 아름답고 다른 관계에서는 추한 그런 것도 아니다;
한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으로서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아름답고 저기에서는 추한 그러한 것도 아니다.

또 다시 그것은 얼굴과 두 손과 육신의 부분들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날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앎으로서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논증으로서도 그러하지 않다;
아름다움은 한 마리 짐승 안에서, 또는 지상에서, 혹은 천상에서, 다른 어떤 것 안에서든 그와 같이
어딘가에서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으로서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 자체인 어떤 것이고,
본성에 있어서 영원히 하나이다.
모든 다른 아름다운 것들은,
그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 아름다움을 나누어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더 늘지도 줄지도 않고,
그것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찬가이면서도 형이상학적 서술이다. 플라톤의 문체는 특정한 생각들의 자극 아래에서 빨라진다; 그의 운율들에 대한 두드려대는 박자, 춤추는 박자를 번역상에서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8) 이러한 시야의 높이에 도달한 구애자의 영혼은 완전히 뒤바뀐다 (『향연』212a):

산출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그 아름다움이 보일 수 있는 그 아름다움을 보는 중에만 그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는 탁월함의 상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가 상을 접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탁월함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참된 탁월함을 산출함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을 양육함에 있어서, 그는 신께 사랑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불멸한다.

출산의 은유는 자연스럽게 『정체』에서 사용된 성교와 결혼의 은유들과 연관을 맺는다:

앎에 대한 참된 구애자는 실재에 전력하도록 타고난 자이고, 사람들이 실재일 것이라 믿는 잡다한 것들 사이에서 머무를 수가 없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내를 가지고 그가 각각의 것의 본질적 본성을 실재와의 관련으로 인하여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 그의 영혼의 일부를 가지고 발견하기 전까지 희미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그의 길을 고수한다; 그리고 그가 그로써 실재하는 것에 도달하고 그것과의 통일에 들어갔을 때, 이 혼인의 자손은 지성과 진리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앎과 참된 삶과 양식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의 여정으로부터 휴식하게 된다.

『향연』과 『정체』에서 시야와 부활에 대한 플라톤의 강조는 엘레우시스 제전의 제례에 대한 어떤 유비이다. 그 제례는 풍요와 정화를 기원했고, 마지막 통과의례에서 끝났다. 그곳에서 제물들은 갑작스럽게 작열하는 빛 속에서 숭배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에 드러났고, 숭배자들은 신에 대한 그들의 유대와 그들의 구원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9) 두 세계의 원리는 또한 아이스퀼로스의 종교적 시야에 대한 유비를 지닌다:

9-1) 아이스퀼로스의 가장 마지막 작품들에 있어서 관찰가능한 단계에서, 합창의 부분은 여전히 극적이고, 대사와 동등한 중요성에 속한다. 그 두 요소들은 균등하게 균형잡힌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상이한 세계들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이행을 느낄 수 있다. 그 결과는 이제 두 측면들을 지니는 극의 흥미로운 이중성이다. 그 하나는 보편과 영원이고, 다른 하나는 특수와 시간에 제약됨이다.

9-2) 이 현상의 본성은 우리가 희망하기로는 선명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가멤논』을 하나의 삽화로 취한다면 말이다. 이 극에서, 보이는 표현은 어떻게 트로이의 정복자가 귀국하였고 여왕에 의해 살해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앞으로 계속되는 단계에서 그 사건들은 특수한 사건들, 설화적 시간과 현실적 공간에 정위된 사건들이다. 그 인물들은 특정 개인들, 신화적이거나 역사적인 인물들이다 - 아이스퀼로스에게는 이에 대해 아무런 차이도 없다 - 그들은 그 순간 살았던 그리고 지상의 그 지점을 디뎠던 이들이다. 그러나 합창곡들에서 그 행위는 시간과 공간 바깥 우주의 계획으로 들어 내어진다. 그래서, 그 무대가 선명할 때 가시적 표현은 시간에 대해 유보되고, 적잖은 고통받는 사로잡힌 필멸자들의 그 일시적 광경을 뛰어 넘어서서, 바로 그 곳에서 그 때, 죄악의 그물 속에서, 장엄한 거리와 무시무시한 윤곽 속에서, 산들보다도 더욱 불변하게, 제우스의 영원한 권고 속에서, 확립된 진실들이 닥쳐 온다. 순간적 격정의 그 맥박은 차츰 잦아든다; 바로 지금 우리를 숨막히는 집중 속에 붙잡아둔 그 인간적 의지들의 충돌과 갈등은 인형극의 규모로 침잠하고 사그라든다; 지속되는 운명의 노래가 피에 사로잡힌 오만, 숙명의 고통으로의 끈질긴 유혹에 이끌린 오만의 주제를 펼친다 하더라도. 마치 합창부에서 불확실한 더 높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또 다른 무리가 동시에 더욱 장엄하고 상징적인 극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이 비가시적 장면에서 네메시스와 아테의 격정과 감정(휘브리스와 페이쏘)이 걷는다 - 후기 풍자의 핏기없는 추상들이 아니라, 여전히 초자연적 실재성의 극찬하는 특징들에 덮인. 무시간적 순간에 인간적 삶의 광경에서 제우스의 전능한 두 눈에 알려진 측면에서 장막이 걷힌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떨어질 때, 우리는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 일깨워지고, 정화되고, 고양되며, 평안한 그들의 필멸의 비극으로 되돌아온다.

플라톤과 아이스퀼로스 모두 도덕적 질서, 공통된 세계의 운행들을 관장하는 그 질서의 현존을 단언하였다; 두 사람 모두 그 질서를 어떤 의미에서 '분리된' 것으로, 그 자체의 고유한 실재성을 가진 것으로 다룬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 질서의 요소들은 주로 기하학과 도덕적 탁월함에서 발견되었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그 능력들은 동일성과 지혜, 좋음과 아름다움이고 만용과 복수가 아니다. 아이스퀼로스의 사유는 발상들의 동종의 그러나 더 오래된 방식의 계획, 그 뿌리들을 철학보다 오래된, 그리고 아마도 그리스보다도 더 오래된 신화들 속에 지니고 있던 계획 내에서 움직인다.


 플라톤 사유의 통일성

1)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은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분리되고, 그 점에서 그 꼴들은 그 예시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존재론적으로 그 예시들에 우선한다. 이것은 후기에까지 참인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중기 대화편들은 이 분리를, 결핍과 비실재의 심연으로 갈린 두 세계에 대한 원리를 수반하는 우주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확장시킨다. 이 원리와 결부된 것은 초기 대화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것과도 다른 종교적 태도이다; 초기 대화편들 어디에서도 꼴 - 어떤 꼴이든 - 이 경배의 적합한 대상이리라 시사되거나 함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와 중기의 대화편들 사이에 꼴들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 변화 - 혹은 더 정확하게, 발전 - 가 있다.

2) 이러한 주장은 이 세기의 특히나 두드러지는 플라톤주의자들 중 일부가 주장해 왔던 것처럼, 플라톤의 사유는 통일체라고, 그리고 『에우튀프론』과 다른 초기대화편들에서의 꼴들에 대한 이론은 『파이돈』과 『정체』에서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거부될 것이다. 『에우튀프론』, 『라케스』, 『뤼시스』로부터 도출된 세 가지 주요 문헌들은 이 관점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3) 『에우튀프론』은 꼴들이 기준들로서 사용되리라 전제하고, 기준으로서의 꼴에 대한 정의가 그 꼴의 반대항에 의해 그 꼴이 한정된다는 것을 시사할 수 없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것들은 『파이돈』의 모사이론에 있어서본질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일론 명제를 확립시켜주지 않는다. 꼴이 기준으로 사용되리라고 말하는 것이 한 가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꼴에 대한 그 꼴의 예증들이 결핍된 사례들인 그러한 꼴이 모범이기 때문에 꼴이 그렇게 사용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의 모든 예증이 각기 반드시 어떻게든 결핍된 경건이어야만 한다는 아무런 실마리도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꼴이 그 고유의 반대항에 의해 한정될 수 없다는 주장이고, 꼴의 모든 각각의 예증이 그것과 그것의 반대항 모두에 의해 한정되리라는 주장은 또 다른 것이다. 후자의 주장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유사물의 결핍에 대한 본질적인 것이다.

4) 『라케스』는 앎을, 과거, 현재, 미래에 독립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무시간적으로 만드는 앎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198d-199e). 앎의 무시간성은 그 앎의 대상들의 영원성을 수반한다는 것, 그리고 영원성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사물들의 감소하는 실재성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완전한 실재성을 수반한다는 것이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언급은, 만일 건전하다면, 단일론 명제를 뒷받침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앎이 과거, 현재, 미래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무시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그러므로 반드시 영원한 대상들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과 또 다른 것이다; 플라톤이 이러한 주장들을 초기 대화편들 안에서 연계시켰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

5) 다시, 『뤼시스』가 있다. 거기에서 모든 가치있는 것들은 제일 가치있는 것의 상들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결핍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묘사된다. 『파이돈』이 꼴의 각각이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고 주장하듯, 그렇게 『뤼시스』는 '사물들에 대해 가치 있는 어떤 것은 가치 있는 다른 어떤 것 때문이라고 이야기함에 있어서, 우리는 단순한 말 바꾸기를 내놓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정말로 가치있는 것은 그 안에 소위 가치있다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당도하는 그러한 것 자체이다'(『뤼시스』 220a-b)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될 듯이 보이는 것은 이름들 또는 어원의 제일 명칭과 파생 명칭이고, 이것은 두 세계의 원리에 속하는 중요한 언어적 귀결이다. 그러나 『뤼시스』에서 가치 있는 사물들의 제일 가치있는 것에 대한 관계는 꼴들의 예증들의 꼴들에 대한 관계가 아닌데, 왜냐하면 앞선 관계는 후자는 그렇지 않지만 목적들에 대한 수단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지만 그것들은 『뤼시스』에서 치료가 건강을 위해 가치있는 것처럼 경건함을 위해서 경건하지는 않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윤리와 선택의 목표들에 관심을 두지 형이상학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그래서 『뤼시스』는 나중에 『파이돈』에서 꼴들에 적용되었던 이름의 이론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 작품은 『파이돈』의 꼴들에 대한 이론을 전제하지는 않으며, 수단들의 목적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수단들에 귀착되는 그 결핍은 특수자들의 결핍이 아니다. 『고르기아스』(467d)는 『뤼시스』의 요점을 또 다른 방식으로 놓는다: '만일 한 사람이 목적을 위해 어떤 것을 한다면, 그는 그가 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가 그것을 해서 이루려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6) 일반적으로 꼴들에 대한 이론의 단일론적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에 인용되는 그 세 구절들은 그 설명이 참임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되어야 할 또 다른 논증이 있다. 그것은 플라톤이 설령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중기 이론을 진술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침묵으로부터 언급으로의 논증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가 쓸 때마다 매번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7) 이 논증은 만일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이론이 꼴들의 예증들의 결핍과 감소되는 실재성을 시사한다는 것이 보일 수 있다면 더 많은 영향력을 지닐 것이다; 플라톤은 짐작컨데 최소한 우리만큼은 그런 함축들을 추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함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결핍과 감소되는 실재성은 중기 대화편들에서 앎의 문제들과 연관되고 초기 대화편들에서는 논의되지 않으며, 초기에 견지되는 주장들과 모순되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과 연관된다.

8) 그래서 예를 들어 감소되는 실재성에 대한 주장은 『정체』에서 앎의 대상들을 의견의 대상들로부터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바로 그 앎과 의견의 구별은 『메논』(97a-98b)보다 더 앞에 놓이지 않는다; 그리고 앎과 의견이 상이한 대상들을 가진다는 주장은 『메논』에 부재할 뿐만 아니라, 의견은 거기에서 '근거에 대한 숙고'에 의해 앎으로 전환되기 때문에(98a; 85c 참조) 『메논』에 의해 암시적으로 반박된다.

9) 또 다시, 『파이돈』은 꼴들이 현존한다는 주장과 우리의 영혼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이 동등하다(76d-e)고 견지하고, 이것의 배경이, 결국 꼴들에 대한 꼴들의 예시들의 결핍에 의존하는 상기의 원리이다. 그러나 초기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이루어진 불멸성에 대한 주장들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 만일 상기론과 결핍의 원리가 참이라면 거의 무시될 수 없는 주장들 - 불가지론자이다. 『변론』(20c-21d)에 있어서, 그의 무죄 선고에 표를 던졌던, 그리고 그의 개인적 관점들을 왜곡시킬 아무런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친구들과 동지들에게 말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해 오로지 다음과 같은 것만을 주장하고자 하고 있다. 죽음을 좋은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음과 의식 없음, 깊고도 꿈조차 없는 잠과 같은 상태이거나 아니면 이 세계로부터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 호머의 유행 이후 생각된 그러한 이행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파이돈』에서의 영혼이 불멸하며 죽음 이후에도 '오로지 그 자체로' 존재하리라는 뜨거운 신념으로 빛나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10) 물론 플라톤의 사유에 대한 통일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금자탑의 단일성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과 발전의 단일성, 생명의 단일성이다.


변화를 위한 동기들

1) 만일 초기와 중기 대화편들이 꼴들의 지위들에 대한 그 대화편들의 평가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러한 차이가 설명될 것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철학적 계기들이 그것을 촉진시켰는가? 초기와 중기 대화편들 양쪽에서 꼴들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분리'는, 대화편들의 그러한 집단들 사이에서와 같이 상이한 의미들을 지닌다. 꼴들은 초기 대화편들에서 예증들로부터 구별되고 그보다 우선하는 것으로서 분리되어 있다. 중기 대화편들에서 그것들은 완전한 실재적 모범들, 그것들에 대해 그것들의 예증들이 결핍되어 있고 덜 실재적 예시들인 그러한 것으로서 분리되어 있다. 중기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이 답하고자 했던 존재론적 지위들에 대한 물음들이 초기에 물었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 뒤따라야 하고, 이것은 사실 참이다. 중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의 설명은 초기대화편들이 직면하지 않았던 인식론의 문제들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그러한 문제들은 회의주의와 선험적 지식을 두고 발생하였다. 그것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변증에 대해서 일어났다; 특히, 그 문제들은 플라톤이 어떻게 소크라테스적 변증이 꼴들이나 본질들에 대한 탐구로서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을 다루는 데에로 돌아섰을 때 일어났다.


회의주의와 존재론적 지위

1) 솔직한 사람은, 경건함'은 어떤 것이다' 또는 '실재하는 것이다'라고, 또는 그가 그의 행위들의 적절성을 결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그것을 고려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됨에 있어서, 확실히 '좋아. 그게 어디 있는데?'라고 말할 것이라 기대된다. 그리고 그 자체로는 충분히 소박한 요구인 위치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진짜 물음을 감추고 있다: 만일 경건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실재성을 지녔는가?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으 어떻게 존재하는가?

2) 이러한 것들은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물음이고, 그러나 그것들은 관계들로서 비동일성이나 우선성을 듦으로써 답변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꼴들, 그것들이 그러한 관계들 안에 존립할 것이라 추정되는 그러한 꼴들에 대한 물음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엄밀히 말해서 주어진 어떤 꼴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꼴이어야 할 어떤 것에 대한 물음들이다. Mr 리차드 로빈슨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중기 대화편들의 가장 대단한 단 하나의 혁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소크라테스가 그가 이전에 행했던 것처럼 특수한 '본질들' 또는 '꼴들'에 대해 어떠한지 묻는 대신에 이제는 '꼴들'의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가 어떤 특수한 '꼴'에 대해서든 그러한 만큼 일반적 '꼴'의 본성에 대해 고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기 대화편들은 일반성의 새로운 단계로 상승한다: 그것들은 그것이 꼴일 그러한 어떤 것을 묻고, 그 물음에 두 세계의 원리를 가지고 답한다. 『에우튀프론』과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 그 물음은 대답되기는커녕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남는다.

3)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채로 남겨지는데 왜냐하면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비록 전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일반 상식과 관련되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 새로움을 감추는 자연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예를 들어 정확함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이 있다고 믿고, 그 정확함이 하나의 탁월함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쉽사리 물음에 의해 탁월함인 그러한 어떤 것을 말하고자 시도하는 데에로 이끌릴 것이다. 소크라테스식 취급에 있어서, 이것은 고도로 복잡한 현존 전제, 정확함의 꼴이 있다는, 그리고 그것이 보편개념이며, 기준이고, 본질이라는 전제의 사용을 수반할 것이다; 만일 이 전제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면, 정확함은 정확함의 예증들에 대해 우선할 것으로 그리고 그것들과 동일하지 않을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여전히, 그 전체 탐구는 무엇이 정확함인지를 결정하는 데에로 정향될 것이고, 그것이 있는지 아닌지로 향하지 않을 것이다. 논의의 진행은 모호함과 혼동으로부터 선명함으로의 이행으로 드러날 것이고, 보편에 속하는 정확함에 대한 숙고로서 드러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탐구가 회의적 의심들에 의해 문제시되지 않은 채로 남는 한, 정확함과 같은 그러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상식적인 믿음은, 일반 상식이 소크라테스적 탐구에 의해 본질에 대한 숙고로 향해졌을 때조차,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4) 그 이유는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때, 지적인 불만족의 표시라는 것이다. 정확함의 위치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 무의미하다는 것은, 즉, 논박되는 그런 것이 있다는 무비판적 전제일 때까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멈추도록 강제되고 설명을 내놓는다. 일반 상식은 그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정확함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 - 정확한 모든 사람들을 보라. 소크라테스적 탐구가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에우튀프론』에서 변증의 목표는 경건함의 꼴이 현존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또는 그것이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목표는 오로지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다 -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다.

5)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꼴들의 현존이 전제되기 보다는 의심받을 바로 때에만, 오직 실재적 정의의 가능성, 그와 함께 변증의 추구가 당연시되기 보다는 도전받을 때 요청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물음은 『메논』에서 상기의 원리에 의해 제기된 선험적 앎의 문제에 의해 처음으로 플라톤의 정신에 강제되었다.


회의주의와 선험적 지식

1) 『메논』을 초중기 대화편으로 분류하는 것은 관습적이고 이것이 부당하지도 않다. 그 산문체 형식은 초기의 것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저술의 상기와 영혼불멸에 대한 관심, 그것의 기하학으로부터 빌려온 가설적 방법론의 사용, 그리고 그것의 앎과 의견 사이의 구별은 『파이돈』과 『정체』에서 나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들에 대한 초기 진술들이다. 이것이 그러하기 때문에, 종종 『메논』이 기원전 387년 플라톤이 첫번째 이탈리아와 시칠리 여행으로부터 아테네로 돌아온 이후에 쓰여졌다고 생각되어 왔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그는 타렌툼의 아르퀴타스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피타고라스학파를 이끄는 당대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러므로 『메논』이, 『파이돈』의 완성된 종합으로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새로운 물음들과 생각들에 대한 자극제를 시사하는 경계적 대화편이라 추측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

2) 『메논』은 여러 초기 대화편들이 시작한 것처럼 그렇게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메논은, 그것의 예시들을 구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에우튀프론』에서와 같이, 어떤 특성들이 그것과 관련되는지 결정하기 위해서 - 특히,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 또는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지 아닌지, 또는 본성에 의해 갖추어져 있는지 아닌지 결정하기 위해서, 탁월함이 무엇인지 말하도록 요청받는다. 초기 대화편들에서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재빨리 그의 응답을 당혹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그 논의는 초기에 그러하였듯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데에 실패한 메논에게, 거기에는 그것을 물음에 있어서 아무런 요점도 없으리라 제안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논증을 요약한다 (80e):

한 사람에게 그가 아는 것에 대해서나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탐구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그가 아는 것으로 탐구해 들어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알기 때문이고, 탐구의 필요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탐구해 들어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가 탐구해 들어갈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역설은 『에우튀데모스』에서 도입되었던 배움에 대한 바보같은 역설들과 일부 유사성을 지니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논쟁술의 일부라고 분류한다(80e). 그러나 그 역설을 소피스트주의라고 일축해 버리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그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 『에우튀데모스』에서 하듯 그것의 논리를 교정하고자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상기의 원리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진지한 대답은 진지한 물음들을 시사한다.

3) 어째서 소크라테스가 그 역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그 이유는 찾기 어렵지 않다. F. H. 브레들리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대상에 대한 결핍, 그리고 더욱이 대상에 대한 추구는 특정한 의미에서 그 대상에 대한 앎을 시사한다. 만일 한 사람이 언제 소유물이 획득되거나 획득되지 않는지 그가 절대로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면 그는 당연히 절대로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추구 속에서 그리고 그 추구에 의해 그는 그 자신을 그 반대되는 가정에 맡긴다. 그리고 그 가정은 어느 정도 어떤 의미에서 있는 소유물에 달려 있다. 자연스럽게, 나는 처음부터 철학자가 그가 앞서 내놓는 명제들을 지닌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행위가 그가 가정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혹은 만일 요청받는다면 전제할 것이라고, 그가 명제들을 가졌을 때, 그는 그것들에 대해 판단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들이 그에게 실재성의 이상적 소유물에 두는지 아닌지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철학에서 오로지 회의주의만이 진리가 지금까지 그리고 실제로 도달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에 스스로 자신을 가둬두어야만 한다.

메논의 역설은 마라톤 전투의 정확한 일자, 또는 어제 아침식사의 식단에 대한 조사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변증에서 관련되는 그런 종류의 탐구에는 관련이 많다.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의 정의에 대한 탐구를 고려해 보자. 에우튀프론은 무엇이 경건인지 알았는가? 그러면 그 탐구는 무의미한데, 왜냐하면 만일 그가 안다면 그는 말할 수 있고, 변증은 시작되기도 전에 성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지하다. 그러나 어째서 그러면 그에게 그것을 정의하는 것을 요청하는가? 무지하기 때문에, 그는 소크라테스적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다른 대답보다 더 적절하다는 결정을 내리기 위한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못할 것이고, 그가 언제 옳은 대답에 닿았는지 혹은 잘못된 것을 내놓았는지 말할 아무런 기준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변증은 그것이 진실 이후 응답자들의 고유한 노력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단지 어둠 속을 더듬거리게 되고, 탐구의 긴장은 끊겨 버린다.

4) 메논 역설의 압박은 꼴들이 기준들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전제에 의해 경감되기 보다는 오히려 증대된다. 경건한 것들을 점검함으로써는 경건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경건에 대한 앎이 없이는 어떤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우튀프론은 그러므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위해 그의 일상 세계를 고려해 볼 수 없다. 용이한 지적 직관에 어떤 쉬운 호소가 있지도 않은데, 그것은 탐구를 수반하고 그 역설은 어떻게 그 탐구가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을 요하기 때문이다.

5) 소크라테스는 그 역설을 두 뿔 사이로 빠져나감으로써 해결한다. 그 역설은 명백한 앎과 절대적 무지 사이의 이분법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배움과 탐구가 상기라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것이 그렇다면, 탐구하는 것은 이미 함축적으로 알려진 어떤 것을 명확한 의식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6) 그것은 이 설명이 변증의 평범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탁월함이 무엇인지 말하고자하는 시도로서, 그러나 어떻게 변증이 가능한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 즉, 어떻게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합리적으로 물어지고 대답될 것인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내놓아진다는 주의와 관련이 있다. 그 역설은 이 가능성을 시험함으로써 분명한 형이상학적 화두를 던진다. 변증은 실재적 정의를 목표로 한다; 그것은 꼴들의 현존을 전제한다. 만일 변증이 탐구의 한 형식으로서 불가능하다면, 그것들에 대한 아무런 앎도 없기 때문에, 그 변증의 탐구 대상들이 현존한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떠한 훌륭한 근거도 없다.

7) 상기에 대해 주어진 그 정당화는 잠정적으로는 충분하다. 기하학에 무지한 한 노예가 그의 발 밑 모래에 새겨진 도형들과 지적 질의의 원조 이외에 다른 아무런 도움도 없이 상당히 어려운 정리의 진리를 상기해 내도록 만들어진다. 이것은 상기의 진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에 있어서 망설인다: 그는 상기의 원리가 참이라고 확신하지 않고, '만일 우리가 우리가 그에 대해 무지한 바로 그것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우리의 의무라 믿는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메논』86b)라는 것만을 확신할 따름이다. 이 망설임의 이유는 찾기 어렵지 않다. 『메논』에는 어떻게 우리가 상기된 앎을 얻는지에 대해서도, 그 상기된 앎의 대상들의 지위는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분명한 설명이 없다. 대중적 신화의 차원에서를 제외하면 꼴들에 대해서든 선재하는 영혼에 대해서든 그것에 대해 던져진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없다. 하지만 그 물음은 만일 상기설이 참이라면 피할 수 없다. 『메논』에서의 상기설은 변증이 진행되는 것을 허용하기 위한 목적만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임시적으로(ad hoc) 불충분하다.


상기와 결핍

1) 『파이돈』에서, 하나의 다른 정신, 사물들이 종결된다고 생각한 사람의 정신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서 상기에 대한 논의는 『메논』의 논증에 대한 요약과 함께 시작하지만(『파이돈』73a), 우리가 보았듯 꼴들에 관련된 측면에서 감각적인 것들의 결핍에 기초한 새로운 설명으로 진행한다. 『메논』에서 소크라테스적 변증을 정당화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촉발된 상기의 원리는 두 세계 사이의 심연이 다리놓아지는 수단이 되었다.

2) 이 새로운 존재론은 회의주의적 의심들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다. 그것은 아마도 확실히 기하학에 의해 플라톤의 정신에 제시되었을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아마도 그의 소실된 작품 『수학에 대하여』에서 기하학은 물리적 세계에 적용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연 속에는 유사물들이 있지만, 기하학자의 넓이 없는 선과 길이 없는 점들에 대해 어떠한 물리적 등가물들도 없다. 프로타고라스는 이로부터 '기하학은 그렇게나 나쁘다'라고 추론하였다. 플라톤은 다른 결론을 이끌어 냈다. 기하학은 앎이며, 선명하고 확실하다. 만일 물리적 세계가 기하학의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그만큼 물리적 세계가 나쁜 것이다. 직선자와 콤파스를 가지고 작업하는 기하학자는 모래 위에 구조들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의 도구들이 물리적일지라도, 그리고 그의 언어 - 플라톤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 가 물리적 활동들의 언어일지라도, 그가 획득하는 진리는 물리적 대상들에 대한 진리가 아니다; 그의 구조물들은 오히려 그의 사유가 그것을 향해 정향된 그러한 것들의 상들, 부정확한 유사물들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기하학적 선은 기하학적 원에 대해 하나의 점에서 그리고 오로지 그 한 점에서만 접선이다. 그러나 물리적 선은 물리적 원을 한 점에서가 아니라 직선의 부분과 호를 통해 건드린다. 곡선과 직선은 거리에 있어서 일치한다 - 기하학적 부조리이자 물리적 사실이다. 그래서 기하학의 정리들은 그것들이 그에 의해간접적으로 증명되는 그러한 모래 위의 구조물들에 대해서만 단발적으로 맞다. 이것은 그렇게, 기하학자의 도구들이 너무 무디기 때문이라거나 그의 작업들이 너무 어설프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정리들이 견지되는 조건들이 그 자체로 물리적으로라기 보다는 기하학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물리적 대상들, 기하학적 서술들에 의해 그것들인 것으로 한정되는 그 대상들은 그러한 서술들에 의해 시사되는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데에 실패한다. 감각적 도해들은 기하학적 관계들의 닮음꼴들이다 - 그 닮음꼴들이 우리에게 그 관계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것들은 훌륭한 닮음꼴들인데, 다른 식으로는 그것들이 정리들을 발견함에 있어서나 증명들을 구성함에 있어서 유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결핍된 닮음꼴들이다. 그것들의 결핍은 정도의 일종이 아니라 종류의 하나이다; 물리적 도형들은 원칙적으로 기하학적 도형들의 대응물이 될 수 없는 유사물들이다.

3) 꼴들의 이론에 대한 이것의 관련성은 직접적이다.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동등성의 감각적 예증들, 또한 비동등성의 예증들이기도 한 그 예증들은 그러므로 결핍되게 동등성과 유사하다고 전제하고, 이 판단이 비교에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등성 그 자체에서 그 자체에 대한 우선적인 앎을 가졌어야만 한다고 전제한다. 이 논증이 의존하는 토대가, 기하학에 있어서 물리적 도형들의 유사한 결핍성에 의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제시되었어야만 한다.

4) 유비는 등가가 아니다. 물리적 원들과 기하학적 원들의 관계는 어떤 종류의 원들과 원형성의 관계와는 다르다. 그러나 기하학이 플라톤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을 해명해 주었고, 상기에 의해 제기된 존재론적 지위의 문제들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대답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5. 결론

1) 1663년 하버드 대학에서 학위 수여식 직전에 학위 논문 한 편이 유포되었다. 오래 전 행복했던 때에 미친듯이 먹고 마시던 하버드 학위 수여식은 공식적 토론들에 의해 마침표가 찍혔다. 그 논문은 화제들을 제공했다. 그것은 논쟁을 위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공했다. Ethica est vitiorum Emplastrum corrosivum. 거칠게 옮기자면 그것은 도덕 철학에 대한 연구가 악덕을 위한 허술한 고약이란 뜻이다. 중세 삼학(trivium; 문법, 논리학, 수사학)과 4과(quadrivium; 산술, 음악, 기하, 천문)의 윤곽들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던 교육과정의 대학에 걸맞게, 문법 과학은 어느 하나 잊혀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Ha Ha He vox est bilaris bene Nota, 그러니까 Ha Ha He가 잘 알려진 웃음소리를 지시하는 표현인지 아닌지를 토론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3학의 중심은 논리학이었고, 논리학은 보편개념들에 대한 고대의 고결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는 한 명제 속에 기억되었다: Universalia sunt in se ἀειφανεῖς in re ἀφανεῖς Asterismi - '보편개념들은, 그 자체 내에서는 언제나 빛나는, 그러나 사물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별들이다.'

2) 물론 그 학위 논문은 가짜 학위 수여식을 벌이려고 작정을 한 학부 3학년 무리에 의해 퍼뜨려진 풍자물이었다. 그 날조차 학부생들은 시간 낭비에 기발한 재능을 가지고 학구적 예절에 대한 어떤 불경을 위해 합심하였다. 의심할 것 없이 그 모든 것은 그들의 학부에 중요한 원천이었다 - 그들의 학부의 여섯 전부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찰스 촌시 총장과 함께였다.

3) 1663년 학부 3학년생들은 어디에서나 천체의 음악과 함께 언제나 빛나고 보이지 않는 그들의 별들의 빛을 연관지었을 것이다.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로렌조가 그들보다 먼저 알았고 제시카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대에게 보이는 가장 작은 별조차 그 궤적 안에서 천사와 같이 노래하지 않는 별이 없소, 어린 눈을 한 천사들에 따라 합창 하는 동안은.(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4막 1장).' 그리고 그들은 소리를 가지고 있듯 바로 그렇게 빛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하기 쉽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작은 별들의 그 빛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별들의 운행의 음악이 들을 수 없듯이, 왜냐하면, '이 스러져 버릴 질척이는 육신이 그 빛을 지독하게 뒤덮어 가둔 동안은'(출처 상동),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4) 꽤 괜찮은 생각이다. 그러나 가짜 학위수여식에서의 그 무리는 까불거림을 증명한 듯하고, 당연히 일부 순전한 영혼에게는, 훌륭한 시를 훼손시켜가면서, 그 작은 별들의 빛은 사실 구경꾼의 영혼의 눈이 깜빡이는 것이었다고 주장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 유명론자들은 거지 같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5) 이러한 회의주의는 물음의 특정한 분할을 제안한다. 물론 별들에 대한 물음이 있다; 그것은 철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이 여전히 토론하고 있는 것이거나, 최소한 어째서 그들이 그것을 토론하지 않아야 하는지 토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깜빡임에 대한 다양한 물음들도 있다 - 그것을 누가 가졌는지에 대해, 그리고 어째서 그가 그것을 가졌는지에 대해, 언제 그러한지에 대해. 내가 이 책에서 논의했던 것이 그러한 한 가지 물음일 것이다.

6) 나는 주장했다. - 아마 이 점에 대해서는 되풀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그리고 특히나 『에우튀프론』은 꼴들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이론은 『파이돈』과 『정체』에서 발견되는 그 꼴들에 대한 이론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그 꼴들의 탐구에 속하는 대상들로서 존재들의 구분되는 계층이 현존한다고 전제하는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토대이다. 그렇지만 중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초기 대화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달리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산출하기 위해 제공된다; 그 설명이 답변으로 여겨지는 그러한 물음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 안에서 일어나는 물음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해서 던져지는 물음들이다 - 특히, 실재적 정의들에 대한 탐구와 같은 그 변증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러한 물음들은 탐구의 역설에 의해 『메논』에서 처음으로 발생하고 상기의 원리에 의해 해소된다; 그래서 변증의 수행은 처음으로 선험적 지식의 소유를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메논』에서 임시적으로 제공된 이러한 주장은 『파이돈』과 『정체』에서 결핍과 실재성의 정도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존재론에 기초된다.

7) 중기 대화편들에서 발견되는 꼴들에 대한 이론은 그래서 초기 대화편들에서 발견되는 이론과 동일한 것도 아니고, 별개의 한 가지 것도 아니다.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초기 이론을 일부로서 탐고 있기 때문이다. 같지 않다. 그것은 초기 대화편들이 유발시키지 않은 화두들로 정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에우튀프론』에서 플라톤의 깜빡임의 가득한 광채를 발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알 수 있는 플라톤적 반짝임을 확실히 찾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蟲-

P.S 아, 초벌번역 정말 개떡이지만 어쨌든 하나 끝.
4. 꼴들에 대한 이론의 존재론적 지위와 발전


1) 만일 꼴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또는 그것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지 묻는 것은 합당하다. 중기 대화편들에서, 특히 『파이돈』과 『정체』에서, 꼴들과 그것들의 사례들 사이의 관계는 근본적 의존과 근본적 분리에 속하는 하나로 해석된다: 그 내용물들이 시간에 휩쓸리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었고, 그 세계는, 감각적 현상계에 대해 덜한 실재에 대해 더한 실재가 서듯, 실체들이 그림자들과 반영물들에 마주서듯 그렇게 마주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토대가 된다. 체르니스 교수는 중기 대화편들의 존재론을 경탄스럽게 간추려 낸다:

현상적 세계, 전체로서도 그 부분들 모두에 있어서도 지속적으로 과정 속에 있는 그 세계는 앎의 대상인 실재일 수 없다. 인간 행위, 정신적 활동, 물리적 작용의 판이하게 다른 현상들은 각기 그리고 모두 오로지 현상적 과정 외부에 행위의 표준들, 과정의 경계들, 앎의 객관적 상관물들인 실재적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실체들은 idea들이다….

이 설명은 체르니스 교수가 다른 어떤 곳에서 이데아들에 대한 이론의 철학적 경제성이라 불렀던 것을 기술한다; 그 이론이 많은 문들에 대한 하나의 열쇠이고, 동시에 윤리에 속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며, 형이상학이고, 인식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2) 중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이 이론의 존재는 그 뒤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은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을 찾은 학생들을 이 이론을 그 곳에서 찾도록 이끌었다. 그것은 초기 대화편들에서 이 이론을 찾는 데 실패한 학생들을 그 곳에 어떠한 이론이라도 있다는 걸 부정하도록 이끌었다.

3) 세 가지 주된 관점들이 주장되어 왔다. 하나는 초기와 중기 대화편들이 여기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서, 꼴들은 존재하고 그것들을 지닌 사물들과 분리되어 있다; 『에우튀프론』에는 꼴들에 대한 이론이 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파이돈』과 『정체』에서 제기되고 후기에 『파르메니데스』에서 비판받은 동일한 이론이다. 두번째 관점은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사물들 '안에' 있고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있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관점이다. 세번째 관점은 꼴들에 대한 언어가 초기 대화편들에서 발견된다 할지라도, 꼴들 그 자체는 없다는 것이다: 『파이돈』과 『정체』에서 제기되고 후기에 『파르메니데스』에서 비판받은 그 이론은 전혀 새로운 것이고, 플라톤은 『에우튀프론』을 썼을 당시 그것의 - 그 어휘를 제외하고는 -  어떤 부분도 고안하지 않았었다.

4) 또한 네번째 관점이 있다. 그 관점은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 세번째 관점의 변형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그 관점은, 초기와 중기 대화편들 양쪽 모두에서, 꼴들이라고 불려왔던 것들이 단순히 언어적 술어들이고, 독립적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 아니며, 그래서 『에우튀프론』은 그것이 제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측면에서 『파이돈』과 『정체』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비판하지 않은 무엇이 현존하는지는 진술되지 않고 남는다.

5)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의 현존에 아무런 언급도 없다는 주장은 잘못이고, 더 진전된 논의 없이는 일축될 것이다. 초기 대화편들에서의 꼴들이 사물들 '안에' 있는지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있는지, '내재적'인지 '초월적인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이 물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이 종종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비록 검토를 통해 그것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보여질 테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분리에 대하여

1)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의 사유를 소크라테스의 사유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분한다: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문제들에 전념하고 있었으며 전체로서의 본성의 세계를 도외시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윤리적 문제들에서 보편개념을 탐색하고 있었고, 정의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플라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감각적인 사물들이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실체들에 적용된 문제들을 주장했다 - 이러한 이유로, 공통 정의는 어떠한 감각적인 사물에 대해서도 그에 대한 정의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제나 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다른 종류의 사물들을 그래서 그는 이데아들이라 불렀고 감각적인 것들을 그는 이 이데아들 이후에, 이 이데아들에 대한 관계 때문에 명명되는 모든 것들이라 말했다; 다(多)는 그것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데아들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했기 때문이다.

요점은 뒤에 다른 방식으로 놓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인격의 탁월함들에 몰두하고 있었을 때, 그리고 그것들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보편적 정의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 [그는] 보편개념들이나 정의들을 따로 떨어져 존재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플라톤주의자들]은 그것들에 분리된 현존을 부여하였고, 이것이 그들이 이데아들이라 부른 종류의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그들[플라톤주의자들]은 감각세계에서 특수들이 유동상태에 있으며 그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유지되지 않는다고, 그러나 보편개념들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고 그것들과 상이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우리의 앞선 논의에서 이야기했듯이, 그의 정의들에 대한 논거로써 이 이론에 추진력을 보태 주었다. 그러나 그는 개별자들로부터 보편개념들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것들을 분리시키지 않음에 있어서 그는 옳게 생각했다. 이것은 그 결론들로부터 명백하다; 보편개념 없이 앎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분리는 이데아들에 대해 고려함과 함께 일어나는 반대들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실체들 이외에 어떤 실체들일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이 분리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다루는 그의 후계자들은, 다른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나, 이러한 보편적으로 서술되는 실체들에 분리된 현존을 부여했고, 그래서 보편개념들과 개별자들은 거의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것이 뒤따랐다.

이데아들이 χωριστά, '분리되어 있는 것들이었다'라고 말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그것들의 예시들과 수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서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 즉, 그 자체로 개별적이고 수에 있어서 하나인 것으로서 말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동시에 이데아들을 보편개념으로 만들면서 다시 그것들을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개별자들로서 다룬다'. 이것은 꼴들의 이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서 중요한 전제인데,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개념은 개별자일 수 없다고, 다자에 대해 서술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인 것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별적이며 수적으로 하나인 사물들은 예외 없이 어떤 주어에 대해서도 이야기될 수 없다.'

2) 그렇지만 수적 구별은 분리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범주론』1a 24-25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어에 있어서'라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어떤 것 안에 있는, 그러나 일부분으로서 있지는 않은, 그리고 그것이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χωρίς)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이 문서는, '아무것도 [개별적이며 수에 있어서 하나인 것을] 주어에 속해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제한하지 않는다'(1b 7-8)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후 언급과 마찬가지로, 분리는 수적 구별만큼이나 현존적 독립성 또한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독립성은 배분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하고, 집합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주어 안에서'라는 말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어떤 주어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이 아니라 '그것이 속한 특정 주어로부터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데아들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이 개별자들이라고, 그리고 그것들이 어떤 주어진 사례들에 대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데아의 현존은 그것의 사례들의 현존조건이고, 그렇게 정의된 분리는 비대칭적 관계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존재론적 우선성이다:

어떤 것들은 우선적이라고 불리고 후부적이라고 불리는데 본성과 실체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즉 다른 것들 없이 있을 수 있는 것들과, 반면에 그것들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그 외의 다른 것들 - 플라톤이 처음 사용했던 구별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들을 분리시켰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들이 수적으로 그것들의 예시들과 구분되고,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것들의 예시들에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τὸ εἶδος τὸ ἔνον에 대한 그 자신의 이론을 반대했다. 그 이론은 물질적 실체의 꼴은 그것이 꼴인 것의 꼴과 수적으로 구분되지도 독립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분리

1) 플라톤이 이데아들을 분리시켰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옳았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가 그것들을 분리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써 무엇을 생각하였는가? 이것은 틀림없이 소크라테스가 그것들을 그것들의 예시들과 구별하지 않았다거나, 그가 그것들을 그것들의 예시들에 독립적이거나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역사적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것이 참인지 아닌지는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뜻대로 그 증거를 가지고, 그 문제는 결정할 수 있기가 어렵다. 그러나 역사적 소크라테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은 아마도 주로 초기 대화편들에서의 플라톤의 묘사로부터 도출되었고, 그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들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은 종종 초기 대화편들에 대한 해석으로 다루어져 왔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역사적 소크라테스를 초기 플라톤적 소크라테스와 동일시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그 물음은 초기 대화편들에 대한 이 해석이 정확한지 아닌지 하는 것이다.

3)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들을 분리시켰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그것들의 예시들과 전혀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훌륭한 이유가 있다. 『형이상학』에서 소크라테스의 정의들에 대한 탐색을 언급하고 나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계속해서 '플라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그 문제는 감각적 사물들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실체들에 적용되었고 - 이런 이유로, 보편적 정의는 항상 변화하고 있을 그 어떤 감각적 사물에 대한 정의일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고 첨언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정의의 대상들을 감각적인 것들과 동일시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그가 꼴들을 그것들의 예시들과 구별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4)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분명히 초기 대화편들에서 감각적인 것들을 정의하고 있지 않다: 도덕적 꼴들은 어떠한 감각적 예시들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완전히 별개로, 꼴들과 그것들의 예시들의 비동일성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초기 대화편들 각각의 변증에 의해 전제되는데, 왜냐하면 정의는 우리가 보았듯 대상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고, 그 대상은 보편개념이기 때문이다. 비동일성은 또한 꼴들이 본질들이며 원인들,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것들인 바의 것들인 그 본질들과 원인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그리고 꼴들은 그 꼴들을 지니는 사물들과 지니지 않는 사물들이 무엇인지 결정하기 위한 기준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시사된다. 비동일성이 암묵적 전제일 따름인 것만은 아니다: 『에우튀데모스』300e-301a에서, 그것은 하나의 사실로 진술된다. 디오뉘소도루스가 그 곳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과 같은지 혹은 다른지 물을 때, 소크라테스는 비록 그것들에 어떤 아름다움이 현전한다 하더라도, 그것드은 아름다움 그 자체와 다르다고 답한다.

5) 아마도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구별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것을 허용하고 그것들의 구별이 수적이었다는 것을, 꼴들이 그것들의 고유한 지위에 있으리란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었다는 아무런 문헌 증거도 없고, 그가 그것을 주장했으리라 추정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자신의 것이라 알았던 비동일화된 꼴의 관념: 꼴은 있는 것이지만 개별자도 아니고 수적으로 하나도 아닌 것이라는 관념에 소크라테스가 도달했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한 사물이 수에 있어서 하나일 수 있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설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그가 오로지 아카데메이아의 일원이었던 동안 일어난 술어와 관여의 문제, 특히, 생각하기로, 『파르메니데스』(131a-c)와 『필레보스』(15a-c)에서 플라톤에 의해 진술된 관여의 딜레마의 문제에 대해 오랜 숙고의 결론으로 그 역설을 받아들이도록 이끌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꼴들이 개별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것을 증명하는 문헌들이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에게 한 번도 떠오른 적 없는 관념들의 결여에 대해 증명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꼴들의 현존을 전제하는 초기 대화편들의 구절들은 또한 습관적으로 그것들의 수적 하나임을 전제한다; 다른 대화편들을 볼 것도 없이 『프로타고라스』를 보면, 올바름은 거기에서 어떤 것이고(πρᾶγμα τι, 330c; 330d, 352d를 참조하라), 탁월함은 하나인 것이며(ἓν τι, 329c), 만일 탁월함들이 서로 구별된다면, 각각은 그것 자체의 특유한 본성과 실재성을 가질 것이다(τις ἴδιος οὐσία, 349b).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의 현존에 대한 언급은 그것들의 개별성에 대한 언급을 필요로 한다.

6)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들을 분리시켰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구별했다는 의미하진 않았지만, 그가 그것들을 그것들의 예시들에 독립적인 것으로나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인지 아닌지 고려하는 것이 남는다.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아무런 문헌적 증거도 없다; 그의 현대 주석가들과 달리, 그는 소크라테스적 꼴이 그 예시들 안에 '내재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그는, 적어도 초기 대화편들에 관한 한에서,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꼴들과 그것들의 예시들의 비동일성은 거기에서 꼴들의 그것들의 예시들에 대한 우선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인식론적으로, 꼴들에 대한 앎은 그 꼴들을 가진 어떤 것들에 대한 앎에 우선하고, 또한 우연히 그것들과 관계된 어떤 특성들에 대한 앎에 우선한다. 존재론적으로, 꼴들의 우선성은 그것들이 어떤 것들이 그것들인 바의 것들이도록 하는 본질들이고 원인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시사된다; 그것들의 현존은 그것들의 예시들의 현존조건이다. 그 우선성은 현존적 독립성을 시사한다. 만일 아버지를 고발하는 에우튀프론의 행위가 경건하다면, 경건으로서 그 행위의 현존은 경건함의 꼴, 그에 의해 그 행위가 경건한 바로 그 꼴의 현존에 의존한다; 경건함의 그 꼴이 그것의 예시를 위해 아버지를 고소하는 에우튀프론의 행위가 경건하다는 것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기괴한 생각일 따름일 것이다.

7) 요약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들을 분리시켰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그것들의 감각적 예시들로부터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가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구별했지만 그것들을 개별자들로 구별하지는 않았다거나,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구별했지만 그것들의 예시들에 독립적이고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이든, 초기 대화편들에 적용된 그의 선언은 착오이다. 그가 제안하는 분리의 모든 기준들에 의해 - 비동일성, 개별성, 독립성과 우선성 - 꼴들은 후기 대화편들에서처럼 초기 대화편들에서 '분리된 것'으로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

1) 이 결론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가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대단한 신뢰를 두는데 익숙하게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 - 그들은 많기도 하고 - 에 의해 의문을 제기받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Mr J. E. 레이븐은 『에우튀프론』6d-e가 두드러지게 꼴들의 이론에 대한 진술처럼 생각된다고 주장한 뒤, '이 물음에 대한 우리의 고대 증거의 모든 단편들 중 가장 중요하고 권위있는 것'에 기초하여 이러한 관념을 기각한다:

『형이상학』Μ, 1078b, 30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많은 말을 적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그의 보편개념들을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도 간주하지 않고 그의 정의들도 그렇게 간주하지 않는 데에 반하여, 그들(즉 플라톤과 그의 추종자들)은 분리된 현존을 그것들에 귀착시켰고 이런 층위의 실재들에 이데아들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내가 앞서 철학의 역사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두 가지 기여는 귀납적 추리와 보편적 정의였다는 취지로 인용했던 구절에 거의 즉각적으로 뒤따르는 이 구절은 더 앞선 문장과 마찬가지로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진술이다. 그러므로 이 예시에서 우리가 타당하게 여러 다른 문맥들에서 주장할 수 있듯이 그의 후계자들의 관점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이 그 자신의 원칙들에 대해 앞선 사상가들에게서 그가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예견들을 봄에 대한 그의 공언된 반대에 의해 무효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가 말하는 것과 같이, 편견에 사로잡힌 비판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노골적인 진술을 가진다. 더욱이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가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20여년이라는 최고조의 시기 동안 그는 아카데메이아에서 플라톤의 문하에 있었다. 그 시간 동안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관계가 논의되지 않았다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간략하지만 중대한 문장들을 썼을 때 실수를 저질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것을 『에우튀프론』6d-e의 해석에 적용함에 있어서 Mr. 레이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역사적 소크라테스에 대한 설명이 또한 초기 대화편들의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도 지속된다고 전제한ㄷ; 그리고 만일 그러한 대화편들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보에 있어서 주요 원천이었다면, 이것은 불합리하다. 아직 그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들이 참이라는 것은 뒤따르기 어렵고, 만일 그것들이 실수라면, 그것들이 실수라는 건 아마도 생각해 볼 만할 것이다.

2) 플라톤의 문하에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오해했을 수 없다는 논증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체르니스 교수에 의해 그 영향력이 유력하게 평가받아온 하나의 오래된 논증이다.

확실히 20여년 동안 플라톤의 학생이었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오해했을 수 없다는 그 논증에는 아무런 타당성도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물음들에 대해서 플라톤의 직계 제자들이 그의 의견들의 본성과 취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고 그래서 우리는 한 직계 제자의 해석이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멈추게 된다는 암시들을 가지기 때문이다.

크세노크라테스와, 그럴 듯이 보이듯, 헤르모도로스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들을 가지고 변화에 대한 관점들에 설명들을 제시했다. 놀랄 일도 아니다. 철학자들의 문하생들이 그들의 선생들에게 이해를 의지했으리라 주장하기 위해, 누군가는, 경험에 더 잘 기초된 주먹구구식과 같이, 그 문하생이 철학자로서 혼자 힘으로 더욱 독창적일 수록, 그에 대한 선생의 초기 영향력은 더욱 지배적이고, 결국 오해될 것이기 더욱 쉽다는 주장을 반대할 것이다: 새로운 상황들, 특히 어렵게 획득된 시점은 새롭고 가끔은 왜곡된 관점을 산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독창적인 제자였다; 플라톤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사유에 대한 지배적 영향력이었다.

3) 그래서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대해 그가 편향된 비판으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 '단순히 사실에 대한 진술'을 형성하고 있을 때 실수했다는 것만이 생각됨직한 것이다. 이 구분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그것의 반박도 그렇다:

반드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들은 그의 해석들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의심할 여지 없는 증언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가? 그런 것은 A. E. 테일러와 그에 앞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플라톤이 특정한 어떤 것을 말했다고 할 때에는 그를 믿어야만 하지만 플라톤이 의미했던 어떤 것이나 한 원칙의 역사적 기원이었던 어떤 것을 우리에게 말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 존 버넷에 의해 채용된 타당한 구별이다. 이러한 말끔한 구별의 타당성은, 그렇지만 가장 좋은 의도들에도 불구하고 증인의 증언이 사실에 대한 것으로서 사실에 대한 그의 고유한 무의식적 해석에 깊이 영향받는다는 것을 가르쳐주는일반적인 경험에 의해 상당히 손상된다. 구별의 적용가능성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 손상된다. 그는, 플라톤에 대한 설명을 의존했던 폰 슈타인공조차 그의 보고들과 그의 비판은 서로에 의해 편견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했던 보고, 해석, 그리고 비판을 그렇게 뒤얽히게 만들었다. …더욱이, 다른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해석한 그 철학자의 원칙의 필연적 함축이라고 간주한 것을 드물지 않게 철학자의 입에 집어 넣는다고, 그리고 그는 우리의 의도에 종사하는 플라톤적 대화편들의 단지 해석들만이 아니라 잘못된 보고들을 제시한다고 주장해 왔다.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들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진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의 다른 동료들로부터의 인용문이란 것인가? 이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것이 초기 대화편들이나 아카데메이아적 전통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는 것인가?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에도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리고 그런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을 아직 뒷받침되어야 하는 해석으로부터 구별해내기 위한 근거를 요구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실에 대한 순전한 진술'이란 표현에 대해 할당될 의미가, 순전함에 대한 고려와 별개로, 단지 그 진술이 참이라는 것인 듯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Mr. 레이븐이 확립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는 점이기 때문에, 그의 논증은 하나의 요청(라틴어 petitio)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플라톤의 문하생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공하는 플라톤에 대한 증언의 질을 고려해 보자. 이것은 아마도 『형이상학』(Ⅰ, ⅵ장)에서 플라톤의 원칙들에 대한 그의 첫번째 조사에 의해 견본의 목적들에 대해 묘사될 것이다.

5)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장에서 네 가지 구별되는 종류의 증거들을 제공한다: (1) 그는 플라톤이 변화하는 감각적 대상들을 그것들이 그 안에 참여하는 불변하는 꼴들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플라톤의 다른 직계제자들의 증언만큼이나 대화편들이 그의 주장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2) 그는 플라톤이 꼴들과 감각적인 것들 사이에 수학의 대상들인 '중간자들'의 계층을 상정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대화편들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그렇게 해석되었던 산재된 구절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3) 그는 '하나'와 '큼과 작음' 또는 '둘'로부터 파생된 이데아적 수들의 현존에 대해 증명하고 이것이 대화편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4) 마지막으로, 그는 플라톤이 설명에 있어서 형상인과 질료인만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함축적으로 그의 사유에서 운동인과 목적인이 어떤 역할을 가진다는 것을 부정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파이드로스』와 『법률』에서 영혼을 자기운동으로 정의했고, 그것이 우주의 모든 다른 움직임의 원천일 것이라 주장했던 그 사람은 그의 철학 안에서 운동인을 위한 어떠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파이돈』에서 감각적 대상들이 꼴들과 닮고자 애쓴다고 말했던, 그리고 『정체』에서 좋음을 현존과 가지성의 제 1 원리로 정의했던, 그리고 『티마이오스』에서 세계는 이성적 설계자의 작품이라고 단언했던 그 사람은 그의 철학에서 목적인을 위한 그 어떤 자리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증언은 기본적인 결함을 겪는다: 그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6) 믿을 수 없을 만치 먹음직스러운 것을 만드는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플라톤의 그 글을 버릴 것이다. 아마도 '대중적인' 플라톤은 많든 적든 그의 참된 견해들인 듯이 호도하는 대화편들을 다중(틀림없이 『파르메니데스』를 즐겼던)을 위해 펴냈을 것이고, 반면에 '비전적인' 플라톤은 그의 더 내밀하고 진전된 이론들, '기록되지 않은 원리들'을 아카데메이아의 그의 제자들을 위해 따로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대서 비전적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성스런 장인을 선언하는데, 왜냐하면 비전적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그 무리들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7) 이러한 접근은 최소한 한 가지 훌륭한 장점을 가진다: 일관되게 적용된다면, 플라톤 문헌에 대한 어떠한 호소도 그것을 반박할 수 없다. 이 사실의 잇점을 알아차린 그런 사람들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세계를 움직인 사유의 요체를 담고 있지만, 아리스토테레스의 증언으로부터 그의 믿음들의 재현은, 철학적으로 능란한 손들에 의해 떠맡아질 때조차, 일반적으로 어떤 횡설수설한 모습을 가진다는 더 나아간 사실에 의해 단념시켜질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이 극단적으로 부정확하다고, 프라톤 사유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들에 대해서 부정확하다고 전제하는 것은 선호할만 하다. 그의 증언이 독립적 통제에 대항해 측정될 수 없을 때, 그것은 플라톤의 관점들에 대해 불충분한 근거이다.

8) 이로부터 만일 플라톤이 '기록되지 않은 원칙들'을 아카데메이아에서 선언했다면, 우리는 지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에 기초해 그러한 원칙들이 무엇이었는지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뒤따를 것이다. 이것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대해 대화편들로부터 입증될 수 없다고 말한 모든 것이 순수한 오해이거나 와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대해 대화편들로부터 입증될 수 없다고 말한 모든 것이 순수한 오해나 와전이 아닐 것이라 알려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근거가 있다.

9)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의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플라톤을 와전시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관점은 터무니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로서, 헤겔과 같이, 앞선 철학자들의 작업을 변증적으로, 그의 고유한 관점들의 바런을 위한 디딤돌들로 사용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헤겔처럼, 그는 그의 선구자들의 작업을 단지 그가 이제 단언함을 통해서 획득해 냈던 진리에 대한 예측으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정당하고 적절하다. 철학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주제에 속한 역사를 그 주제의 발전을 위한 매개물로 사용해 왔고, 그들의 선구자들을 그들의 논증에 대한 당파로 만들어 왔다. 이러한 전략이 가치있는 철학을 산출해 낼 때 -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확실히 그러하였듯이 - 그 전락은 추구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게 역사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가끔 말도 안 되는 해석들로 이끄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유의 더 앞선 기획들이 생경한 물음들과 전제들의 배경에 맞서 보여지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째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이 그렇게 자주 그것이 지니는 그러한 특성을 지니는지의 이유이다; 그것이 다른 식이었더라면 그가 독창적인 철학자는 아니었을 것이라 추정할지도 모른다.

10) 어째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이 플라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그렇게나 자주 과도한 무게를 부여받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하나는 다방면에서 고전적 전통의 내구력이다. 플라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 해석을 허용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으로 그들의 관점들에 대한 증거로 가치있게 여길 것인데,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을 통해 읽힌 플라톤은 그 안에 플로티누스에 속한 많은 것을 지니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영어권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지지받지 않았다. 그들은 그 해석의 암시된 신비주의를 불신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학문적 전통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주장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동안, 그것이 '플라톤주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의심할 것도 없이 헤겔과 독일 낭만주의의 유입으로 인하여, 그것은 유럽 학문의 상당부분에 있어서 주된 주제로 남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에 대한 그것의 취급은 그 자체를 수 세대에 걸쳐 확립시켰고, 외관상으로는, 그것 자체의 독립적 생명력을 전개시켰다.

11) 두번째 이유는 특권화된 접근방식의 원칙이다: 플라톤이 아카데메이아에서 강의하였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서 들었다는 것,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은 그가 들었던 것에 대해, 그것의 모든 결점들과 더불어, 우리가 가진 전부라는 것이 전제된다. 이것이 의존하는 증거는 아리스토크세노스의 단 하나의 구절이다. 그 구절은 플라톤의 좋음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왔던 청중을 묘사한다:

그들 모두는 세상이 좋음이라 부르는 것들 부와 건강 또는 힘의 일부 또는 다른 것을 그 강의로부터 얻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왔다; - 결국, 일부 비범한 운명의 선물. 그러나 그들이 플라톤의 추론이 수학이었음을 알아차렸을 때 - 수들, 기하학, 천문학 -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의 좋음이 있다는 결과에 대해 그들의 환멸이 완전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는 다른 이들이 그것을 비방하는 동안 그것을 조소하였던 것이다.

그 강의는 공적으로 언급되었다: 아카데메이아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얻을 것에 대해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기이는 반응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만일 플라톤이 그것들 중 다수를 제공했을지라도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반어적인 것이 있다. 그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그들의 근육들을 강하게 하며 빨리 부를 이루기 위해 온 청중에게 수학과 형이상학에 대해 강연하는 플라톤의 모습에서, 그 고유한 재미를 지니는 그런 반어법 말이다.

12) 종종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데아 수들의 이론에 대한 플라톤의 지식을 획득했다고 주장되어 오곤 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은 물론 만일 그가 그러한 사유들을 후기 대화편들에 밝히지 않았다면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가장 심오한 사유들을 수학과 변증에 훈련되어 있지 않았던 대중적 청중들에게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 대화편들은 일반 일반적인 출판물로서는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어렵게, 그 자신의 아카데메이아 구성원들을 고려하여 쓰였다. 이 강연으로 소급하는 '기록되지 않은 원칙들'은 어떤 상식적인 인간이 무지한 대중에게 알릴 종류의 것이 아니다 - 만일 그들이 한 상식적인 사람이 좌우간 그들에게 퍼뜨릴 수 있을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플라톤이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관점들을 강연들을 통해 설명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아리스토크세노스는 오로지 우리가 지니는 강연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플라톤의 사유에 대한 제일의 목격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사용함에 있어서 또 다른 더욱 파급력 있는 작업요소가 있다. 이것은 외관상 근절할 수 없는 심리주의이다. 그것은 철학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전염시킨다. 플라톤의 그 제자는 플라톤의 사유들에 대한 발견을 그의 반대로서 지닌다 - 즉, 그의 품어진 신념들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썼던 것과 독립적인 증거의 또 다른 원천이 있다 -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이다. 플라톤이 기록하였던 것이 이따금 그가 믿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과 부딪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분란을 판단하는 것은 역사가의 작업이다. 이러한 부분적으로 모순되는 증거의 두 분류들에 무게를 두는 것은 균형을 깨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 즉 플라톤이 실제로 믿었던 어떤 것을 표현하는 그 균형. 우리는 그래서, 그것의 재건이 많은 즐거움과 재미를 제공할 그런 비전적 원리들을 믿는 우리의 길에 이어서 진척되어 있다.

14) 그러나 무엇보다도 처리의 또 다른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 플라톤의 문헌을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증거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역사적 이해의 제 1 대상으로서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탐구의 목적은 그래서 일련의 문헌자료들을 해석하는 것이고, 그것들의 권위에 대해 간직된 신념들을 헤아리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문헌들이 그러한 신념들에 대한 의존할 만한 색인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관련이 우연적이고, 해석이 관련된 한에서 중요치 않다. 만일 플라톤이 속으로는 유명론자, 무신론자, 불멸에 대한 회의주의자, 그리고 쾌락주의자였다면, 또 이제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알 수 없는 동기로 썼던 대화편들을 아직 쓰고 있던 중이었다면, 이것은 그가 썼고 개인적으로 아주 조금도 믿지 않았던 어떤 것에 대한 적절한 해석으로 바뀔 것이다: 한 사람이 그가 믿지 않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여전히 완전하게 그가 말한 그러한 것을 잘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그가 표현하지 않았던 신념들, 또는 그가 표현한 것에 반대되는 신념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은 예언의 예술에 속하는 기술을 가진 이들에게 남겨질 것이다; 그 역사가는 더욱 합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문헌과 그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연구로 제한할 것이다. 만일 탐구가 이런 식으로 해석된다면, 그것은플라톤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을 플라톤 문헌의 증거보다 선호하는 자기-언급적 모순이다.

-蟲-
본질인과성

1) 꼴들은, 로크의 말을 빌리자면, 실재적 본질이며 명사적 본질이 아니다. 꼴들은 실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명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명칭들이나 단어들의 일상적 의미들에 대한 탐구는 그 탐구가 꼴들에 대한 탐구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꼴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그것들이 실제 사물들인 바의 그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본질은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인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의 존재에 대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실재는 내재적이며,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사물들의 발견 가능한 특질들이 의존하는 사물들의 구조는 그 사물들의 본질로 불릴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형성으로부터 명백하듯이, 그 단어의 적절한 의미이다; 그 기본 표기법에 있어서 적합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esentia.

로크의 설명에 의해, 본질은 '어떤 것의, 그로써 어떤 것이 그것인 바의 것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개별자의 실체적 꼴을 그 개별자의 실체와 동일시하면서, 본질을 본질을 가진 것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는 로크가 물려받았던 그 전통을 기초하였다.

2) 그러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 있음에 대해 그 꼴들이 꼴들인 것의 있음이 아니다. 하나의 있음인 보편개념은 다수성의 있음이 될 수 없다 - 정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보편개념들로부터 실체적 꼴을 구별하는 데에로 이끌렸는지의 이유이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어떤 주어진 경건한 사물이나 경건해 보이는 행위의 있음이라고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경건이 그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그러한 것임을 시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 어휘를 조금 빌리자면, 경건이 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3) 『대히피아스』에는 이 전제를 명백하게 만드는 논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히피아스가 올바름 어떤 것이다(ἔστι τι τοῦτο)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에 동의하도록 이끄는데,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지혜로운 것 등등의 그러한 것들은 만일 그것들이 어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의한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기 때문에, 히피아스는 아름다움도 어떠한 것이며, 그것들이 다른 말들이나 생각들 또는 개념들에 의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4) 이 논증은 분명히 『대히피아스』에만 놓이지만, 그것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각각의 초기 대화편들에 의해 가정되는데, 왜냐하면 꼴들이 본질들이라는 그 전제는 변증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꼴들은 정확히 보편개념들이고 표준들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바의 것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5) 플라톤이 매우 자주 꼴들과 그 꼴들을 지닌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화하기 위해 인과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꼴들이 본질들이기 때문이다. 『뤼시스』(221c)에서 소크라테스는 '원인이 파괴될 때, 그 원인이 그에 대한 존재를 지속시키는 원인인 그러한 것은 물론 있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원인이다: 경건의 현존은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현존에 필수적이다.

6)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과 그 꼴들의 예시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한다. 꼴들은 그 예시들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또는 그 예시들'에 현전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들에 '덧붙여져'야 할 것으로, 아니면 그것들'에' 있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 예시들은 다른 한편으로 꼴들을 '가지거나' '허용하거나' '취하거나' '나누어 가진다'. 이러한 은유들 전부 일상언어에 기초된다. 그것들은 정말로 평범하게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명사들과 함께 사용될 것이다. 영어에서 한 행위에 용기가 있다(there is courage in an action)고, 또는 올바름의 현전이 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내의 도량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7) 은유들로서, 그리고 친숙한 그리스어로서, 이러한 용어들은 소피스트적 논쟁들의 재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디오니소도루스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움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잠시 망설인 후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όν)와 다른 것들이고,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들 각각은 그 안에 현전하는 어떤 아름다움(κάλλος τι)을 지닌다고 말할 때, 디오니소도루스는 재빨리 주도권을 잡아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소 한 마리가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소로군요. 그리고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은 디오니소도루스고요'(301a). 소크라테스는 '맙소사'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현전'은 은유 - 혹은 최소한 많은 용례들을 지닌 단어 - 이고 잘 다룰 방법은 그것의 의미에 달려 있다.

8) 문제가 되고 있는 '현전'은 특수한 종류의 것이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나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떤 것에 현전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을 떠맡고,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그의 논의를 갑작스럽게 중단한다. '일부 사물들은 그 사물들에 현전하는 그러한 것 그 자체일 그런 것들이다;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만일, 예를 들어 금발이 하얗게 칠해진다면, 흼은 그 머리카락에 현전할 것이지만, 그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흴 적에, 흼은, 그 머리카락이 그래서 하얗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머리칼에 현전할 것이다. 앞서의 경우, 흼은 머리카락에 현전한다. 뒤의 경우, 머리카락은 '흼의 현전에 의해 하얗다'.

9) 어떤 것이 흴 때 그 의미에서 흼이 그것에 현전하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도구적 여격에 의존한다. 이러한 장치는 초기 대화편들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고, 사려있는 자들은 사려에 의해 사려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대히피아스』(300a)에 따르자면 아름다움 것들을 아름답도록 만든다(ποιεῖν).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어법과 결부된다. 이온은 그가 호메로스를 기릴 수 있음이 앎에 의한(도구적 여격)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온』541e).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건강에 의해(ὑπό와 동작주의 속격) 유익해진다고 생각한다(『크리톤』280a). 사려는 만일 그 사려가 그들에게 현전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좋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나쁜 것이다(『카르미데스』161a).

10) 그러나 비록 이러한 표현들이 일상언어에 결부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종종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Ποιεῖν은 πάσχειν에 속하는 규칙동사이고, πάσχειν은 규칙적으로 '자격지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ποιεῖν은 '자격을 둠'의 의미로 규칙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혜가 사람들을 복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지혜가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또는 지혜가 그에 의해 사람들이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논리적 차이가 있다.

11) 이러한 표현들은 인과적이다 - 흔히 당구공들의 부딪침과 연관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적 원인에 대해 말하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 아름다움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이다: 아름다움의 현존은 다른 것들의,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인 한에서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대히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물들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가 현존해야만 아름다우며,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했을 때, 그 이유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그러한 어떤 것(δι᾿ ὅ)이 현존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12) 그것들이 그에 의해 어떤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인 바의 그러한 본질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꼴들은 원인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파이돈』(100c)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것들이 아름다움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케베스에게 그가 이러한 종류의 원인(αἰτία)을 허용하는지 묻는다. F. M. 콘포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라는 구절은 … 모호하다. '이유'는 '설명'(αἰτία의 관습적 용법)을 의미할 것이다. 그 전제는 그래서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진술과 동등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나는 말들의 그 형식을 바꾸어 말함으로써 대체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명제의 분석이 아니라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론은 그래서 이 사실이 (1)특정한 가시적인 것, 이 장미, (2)아름다움(Beautiful or Beauty), 그리고 (3)우리가 '~에 참여한다'를 대체할 수 있는, '~는 ~이다'로 표현되는 그 둘 사이의 관계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으로 구성된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오로지 하나의 설명만을 가진다: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장미가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존립하게 할 어떤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어느 관점에서든 우리는 한 명제에 대한 분석이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분석만을 가질 따름이고, 참인 진술의 이유나 그 사실의 현존에 대한 원인을 가지지는 않는다.

첫번째 주장은 제외될 것이다. 당신은 말을 바꿈으로써 오로지 본래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무지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명제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 그 누구도 그 표현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줄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αἰτία가 말 바꿈에 대해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고대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가 말 바꾸기를 시사하리라는 주장은 그래서 불충분하다.

13) 콘포드가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라고 부른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사실이라면, 그가 인정하듯, 어떤 식으로 분석이 말 바꾸기와 다른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경우든, 이것은 플라톤의 핵심을 놓친다. '이 장미는 아름답다'와 '이 장미는 아름다움의 꼴에 참여한다'는 실로 등가의 진술들이다 -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확히 사실들의 구조에 있어서 존재론적 우선성에 대한 이론이지, 명제 등가들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이 장미를 아름답다고 부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사물에 세례를 내리는데 그것에 있어서 그 특징 때문이고,(그 특징 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세례의 정당함을 보장하는 그 특징의 현존 때문이다. 꼴 자체는 그렇지만 오로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만일 그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장미가 아름다운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그 꼴은, 꼴의 현존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꼴은그 장미에 있어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현존뿐만 아니라 토양의 조건, 그리고 기후, 정원사의 기술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충분조건은 본질인과만이 아니라 작용인 또한 필요로 한다.

14) 그래서 꼴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것들인 바의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원인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세계가 그 세계인 어떤 것이 아니었으리란 의미에서 말이다.


지시의 재고

1)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하는데,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대상들을 명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로부터 초기 대화편들이 이제는 이전보다 덜 널리 주장되는 그 명제, 어떤 것을 기술한다는 것은 서술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를 전제한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이 마지막 명제는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명제와 관련되어 왔다: 잘 구성된(혹은 잘 분석된) 문장들의 구조는 반드시 문장이 표현하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일대일 혹은 2방향 유일 상응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명제이다. 잘 구성된 문장들은 술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문장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은 반드시 유사-술어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 술어들이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더 나아간 단계이고, 그러한 술어들은 그것들을 명명한다.

2)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하지 않은 명제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더욱이 그것과 관련된다고 거의 이야기될 수가 없다; 그 대화편들은 특정한 어떤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되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파이돈』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일이 하나의 기술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꼴들의 각각은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 꼴들의 제 몫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라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기술하는 것은 그에게 올바르다고 명명하는 것이고, 좌우간 올바름을 명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름이 비록, 올바르게 적용된다면, 소크라테스가 올바름에 참여하기 때문에 적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3) '올바른'과 '올바름' 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메이아적 구별이었을 것을 사용하면서, 동근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예시이다: '사물들이 상이한 어미들로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들의 이름을 획득할 때, 그것들은 동근어들이라 불린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문법학자(grammarian)는 그의 이름을 문법(grammar)로부터 획득하고, 용감한 자들은 그들의 것을 용감으로부터 취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를 동원어적으로 명명한다: 그는 그의 이름을 올바름으로부터 얻는데, 어미상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참여하고 있는 꼴의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그 꼴로부터 얻은 이름과 문법적 어미에 있어서 다를 필요가 없고, 플라톤의 고유한 사용에 따르고 소크라테스가 어원적으로 명명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르다'와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참여한다'는 등가 명제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반한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동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는데, 하나는 어원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것들에 대해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어원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미는 지시를 필요로 한다; 지시 대상들은 그렇지만 어원이 그것들의 관련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구별된다.

4) 종과 유들은 근원적인 반면에 어원적으로 그것들을 도입하는 서술들은 파생적이라는 것이 이 관점의 결론이다: 용감한 자들은 용감으로부터 이름지어지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이것이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종과 유들을 논리적(혹은 어쩌면 비논리적) 구조로, 기술들 그 자체인 의미의 근원적 매개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답변은 일대다(一對多) 논증이어 왔다. 그 논증에 대한 전제들은 현대적인 차림으로 존 오스틴에 의해 경탄스럽게 진술되어왔다 - 그는 물론 그 논증의 결론에 동의하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좌우간 언어를 통해 성취하는 그런 종류의 소통일 것이 있다면, 의사전달자('화자')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피(彼)의사전달자('청자')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징들의 축적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이 '말'이라 불릴 것인데, 물론 비록 그것들이 우리가 보통 말이라 불러야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일 필요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다 - 그것들은 신호기(信號旗) 따위의 것일 터이다. 또한 말과는 다른 어떤 것, 말이 그에 대한 소통을 위해 사용될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세계'라 불릴 것이다. 어째서 세계가 말을 포함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진술 그 자체, 그에 대해 어떤 특수한 경우이든 세계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진술 자체의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다. 더욱이, 세계는 유사성들과 부동성들(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는)을 내보여야만 한다(우리는 관찰해야만 하고): 만일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될 수 없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면, 말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서 - 물론, 마찬가지로 만족될 다른 조건들도 있다) 두 가지 관습적 방식들이 있어야만 한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황, 사물, 사건 등의 유형들을 가지고 말과 관계하는 기술적인 관습적 방식들(= 문장들). 세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상황들 따위를 가지고 말과 관련하는 지시적인 관습적 방식들(= 명제들).

오스틴은 보통 일상언어철학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어떤 표어들 아래에서도 행진하지 않았고 어떤 장단에도 맞추지 않았으며, 만일 언어가 그 세계에 대한 것일 터라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 기술하는 위의 문단은, 만일 내가 실수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투명한 형이상학의 단편이다. 오스틴은 주석에서 계속해서 첨언한다:

'~를 가진 일종의 ~이다'라는 것은 '~을 가진 그런 표준적 사태들과 충분히 유사한 ~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참된 하나의 사태일 하나의 진술은 자연적 관계인 특정한 다른 것들과 유사해야만 하고, 그러나 또한, 더 이상 순수하게 자연적 관계는 아닌 동일한 '서술' 가치에 대해 충분히 유사해야만 한다. '이것은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그런 것들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이것은 붉다고 불리는 그런 것들과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사물들이 유사하다거나 또는 심지어 '정확하게' 유사하다는 것조차 나는 문자 그대로 이해할 터이지만, 그것들이 같다는 것을 나는 문자 그대로 알 수 없다 - 그것들을 똑같은 색이라 부름에 있어서 관습은 그것들이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색에 주어질 이름에 대한 관습적 선택에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유사성과 부동성은 상이한 측면들에서 획득하는 관계들이다. 크리켓 공과 야구공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고 색에 있어서 부동하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이 이것이 그러하다는 측면들을 구별함이 없이 유사하고도 부동하다고 진술할 수는 없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세계 속의 사물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가 좌우간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독립적으로 획득하는 유사성과 부동성이 자연적 관계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관계들이 그 덕분에 획득하는 그러한 특징들 - 형태적 특징들, 색채적 특징들 등 - 이 언어적 관습의 문제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거의 이치에 맞기 어려워 보인다. 만일 그 관계들이 '자연적'이라면, 그것은 그 덕분에 그것들이 유지하는 그러한 특징들도 동일하게 그렇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그러한 특징들은 기술들이 아니다: 우리는 크리켓 공과 야구공이 모두 구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구체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 혹은 구형일 것임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물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기술되는 그 사물의 특징 덕분에 유지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용감한 자들이 용기로부터 이름지어지고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5)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유사성들과 부동성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특징들의 현존을 추론해내는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를 발견하고 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 문제를 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언급들은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의 경우 그 추론이 의지하는 그러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어떤 것을 한다. 그렇지만 초기든 중기든 대화편들에서 유사성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도출된 꼴들에 대한 우리의 앎은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사실상 유사성이 획득한다고 확신할 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을 통해서만 있기 때문이다.

-蟲-
환원성

1)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이 현존한다고 주장되거나 암시되는 단언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단언들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가 아직 그 결론을 반대하는 학자들에게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기 때문에, 그 문제를 더 밀고 나가 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다.

2) 누군가는 이런 논증을 그려볼 수도 있겠다. 그 저술은 의심의 여지 없이 꼴들이 현존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 저술은 그런 주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추정되는 존재론적 관련이 사실 암암리에 어쨌든 언어적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있다. 플라톤은 - 누군가는 그 논증이 연이어지는 것을 상상할 것이다 - 실제로 언어에 대한 사실들인 항목들을 세계에 대한 사실들로 표현하기 위해, 담화의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의심할 것 없는 불가피한 편애라고 할지라도, 운이 나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분석으로서 제공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담화방식이다.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거나 시사하는 진술들은 논리적 여항 없이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지 않는 진술들로 환원가능하거나 분석가능하다. 본질에 대한 물음들은, 플라톤 자신조차 동의했을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에 대한 물음들이고, 의미에 대한 물음들은 당연히 언어적이다. 적절하게 이해된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 그리고 플라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적절하게 그것을 이해하지 않았는데 - 세계를 향해서가 아니라 말들의 의미를 향해 정향된다. 결국, 꼴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짐작컨데 단어들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탐구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의미를 분명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보편개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이한 문맥들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 단어들이 우리가 나타내는 것들을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표준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 서술이 해당하는 상황들을 동일화할 수단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본질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에 대한 모든 각각의 설명이 그 의미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요약하자면 '"경건"이란 단어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초기 대화편들에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언질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중적이고, 이중의 대답을 허용한다. 만일 그 물음이 그러한 대화편들의 본문이 꼴들의 현존을 긍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라면, 그 대답은 긍정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물음이 플라톤이 상술하고 있는 위치의 논리가 꼴들의 현존을 요청하느냐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 결정하게 된다. 그것은 이러한 대체가 순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4) 몇몇 상황들 아래에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은 사전적일 것이고, 프로디쿠스나 아니면 사전에 의해 대답될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와중에 소크라테스는 문자상의 동의어들에 대한 탐구에 종사하지 않는다. 에우튀프론조차 소크라테스가 경건이 신성함이라는 답으로 만족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5) 다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물 지시적 정의', 예시에 호소하는 정의에 의해 대답될 것이다. 그러나 예시가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협소하게 구성되는지, 아니면 요청되는 특징을 드러내 보이는 일반적 경우로서 더 넓게 구성되는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런 종류의 답변은 초기 대화편에서 그러한 답변이 나타나는 어디에서고 거부된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또는 더욱 일반적으로,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

6) 다시금,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아마도 경건의 구별적 특징들을 제공함으로써, '경건'이라는 단어의 적용의 기준들 혹은 사용의 규칙들을 제공함으로써 답변될 것이다. 그러나 구별적 특징의 관념이 가장 강한 의미에서 - 전체이자 유일하며 항상된 것(id quod omni et soli et semper), 그 용어를 적용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 -  이 물음은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에 등가가 아닌데, 왜냐하면 구별적 특징이나 대체 가능한 기준의 제공은 후자의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둘 것이기 때문이다. 에우튀프론이 경건을 모든 신들이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 소크라테스는 이 특징이 경건한 모든 것들이자 유일하게 경건한 것들을 구별하는 데에 시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떠맡지 않는다; 그는 맹목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그것의 가능성을 용인한다. 그는 그가 쉽사리 했었을 것 처럼, 그러한 특징이 경건의 예증들을 동일화함에 있어서 어떤 실질적 사용에 속한 것일지 아닐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에우티프론이 우연히 경건의 πάθος를, 경건한 것들에 대해 우연히 참인 어떤 것을 발견했을지라도, 그가 경건의 οὐσία를, 경건의 본성과 실재성을 보여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별적 특징의 제공은 그래서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7) 그러나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답변이 있다. 그것은 불분명한 답변이지만, 당장의 목적들을 위해서 중요한 한 가지 답변이다. 그것은 '경건'의 의미가 경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이란 것은 무엇인가 기원하는 것인가?
정확히 그렇다.

 8)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물음들은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물음들로 환원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첫번째 물음은 꼴들에 대한 물음들로 바뀌기 때문이다. 만일 비환원성이 존재론적 관련의 기준일 것이라면, 초기 대화편들에는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관련이 있다.

9) 이러한 관련을 제공하는 의미이론은 더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독자는 여전히 끈질긴 의심을 계속 지닐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일찍이 가상적 불길이 (당신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회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장작개비들을 태우지 않을 그런 종류의 불길이라고 언급했었다. 이것은 『소피스트』(247e)에서 존재론적 관련에 대한 플라톤의 고유한 기준, 그가 신들과 거인들에 의해 비슷하게 공유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준을 반영한다: 그것은 존재의 표징이 능력이라는 것이고, 작용하거나 작용받을 그러한 능력이라는 것이다(πάθημα ἢ ποίημα ἐκ δυνάμεώς τινος, 248b). 차이는, 차이이려면,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만일 꼴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이, 말하자면 단지 거기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작용할 것,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줄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것들은 이러한 것을 수행한다; 우리는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이 원인들임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과 지시

1) 만일 '경건'이란 단어의 의미가 경건이라면, 그리고 경건이 꼴이나 본질이라면, 그 단어와 그 어떤 것 사이에 자리하는 관계가 명칭이나 이름 붙임에 속하는 하나의 관계라고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방금 이름붙인(ὠνομάσατε) 어떤 것(πρᾶγμα)이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않은지 묻는다(330c); 나중에, 탁월함이 하나인지 혹은 여럿인지에 대한 물음은 '지혜', '올바름', '사려', '용기', 그리고 '경건'이 상이한 것들을 위한 이름들(ὀνόματα)인지 아니면 동일한 것을 위한 이름들인지 탐구하는 형식을 취한다.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한다: 그 대화편들은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이름들임을 전제한다.

2) 콰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의미는 그것이 지시대상과 분리되고 그 단어와 결합될 때 본질이 되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본질은 그것이 단어와 분리되고 대상과 결합될 때 의미가 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의미되는 어떤 것은, 최소한 때때로라도, 단순히 표현이라는 면에서가 아니라, 다소간 세계의 질서에 알맞는 내용의 일부라는 면에서, 그러나 그 자체로 그 본성이 발견에 있는 그러한 세계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항목이 된다. 우리는 세계를 불완전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말들의 의미를, 혹은 그 중의 일부를 불완전하게 이해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나의 표현으로써 의미하는 어떤 것, 그것의 공공연하거나 또는 명백한 내용과 우리가 만일 그 표현이 지시하는 본질을 이해했다면 의미해야 할 그러한 어떤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에우튀프론은 분명 그가 일상적으로 경건을 통해 의미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는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을 말한다; 숙고를 거쳐서, 그는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더욱 숙고한 끝에,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 중 아무것도 경건의 본질을 진술하지 않는다. 그의 이해력과 그의 의도 사이에, 그가 경건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설명과 그가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 만일 이따금 의미한다는 것이 이름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름지어지는 것이 본질이라면, 의미되는 것은 종종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표일 것이다.

3) 만일 때때로 의미함이 본질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본질에 대한 앎이 종종 불완전하다면, '제각기 모든 것이 그것인 것으로 질서지어져 있다'는 것은 이상 언어에 대해 참이 아닐 것인데, 왜냐하면 단어들을 지배하는 사용규칙들이 필연적으로 그 단어들이 그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규칙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해결책은 본질들을 부정하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는 거듭해서 사물의 본성에 속하는 윤곽을 추적하고 있다고, 그리고 단순히 우리가 그를 통해 본성을 바라보는 그 틀의 주변을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면이 우리를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언어와 우리에게 변치 않고 그것을 반복하는 듯이 보이는 언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단어를 사용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노력할 때,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 단어가 도대체 실제로 그것의 본래 집인 언어 게임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가? - 우리가 행하는 것은 단어들을 그 형이상학적 사용으로부터 우리 일상의 사용으로 되돌려 가져오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반대하고 있던 것을 아주 잘 알았다. 만일 이 관점이 참이라면, 소크라테스적 변증이 기대고 있는 그 전제들은 거짓이다. 그래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적 주장들도 거짓이다: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 용기가 지혜라는 주장, 경건이 올바름이라는 주장. 그 말들은 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 현대 영어에서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은 지혜롭지 않고도 용맹할 수 있으리라 주장함에 있어서, 그의 언어 사용 규칙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언어적으로 독특한 사물들의 결합은, 그것이 만약 언어에 대한 단순한 전제적 입법일 것이 아니라면, 본질의 관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본질과 일상언어

1)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단어들의 일상적 사용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의 사용이 근거하는 것들에 있어서 특징들을 탐구해 들어가는 것이다. 한 단어의 사용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 단어를 지시하는 특징과 연관된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사물들의 본성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면, 그로써 우리가 완전한 암흑 속에 있다는 것이 두따르진 않는다. 그러나 본질과 사용 사이의 관련은 경험적이다: '기준'이라는 용어의 제한적 의미에서, 단어가 지시하는 본질은 그것을 적용하기 위한 기준이고, 유일하게 신뢰 가능한 기준이다.

2) 이러한 관점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품에서 말하는 것을 배웠고, 말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그 언어의 다른 발화자들이 확실하게 동의할 명백한 경우들이 그 용어들의 예시들임을 예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 용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물론 그 용어의 사용을 위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 사용을 관찰함으로써 기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주어진 한 행위가 경건하다는 것을 '경건'이란 단어에 제공할 기준을 제시할 수 없어도 완벽하게 잘 알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종종 기준보다는 사례가 제시됨을 통해서 어떤 것이 그것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을 더 잘 배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그러므로 오해된다. 의미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사례에 호소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반대한다는 데에 이어서 그것은 실수이다; 같은 식으로 의미는 사례들이 결정될 수 있기에 앞서 반드시 고정되어야만 한다고 전제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실수이다. 이러한 실수들 때문에,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의미에 대한 충분한 기준이 발견됐을 때 결정에 대한 아무런 건전한 수단도 가지지 못하고 부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째서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이 그렇게나 일관되게 실패로 끝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잘 받아들여질 것이다. 게임의 규칙들은 아무도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게끔 그렇게 정해져 있다.

3) 확실히 이러한 반대에 핵심이 있다. 에우튀프론은 사례에 호소해서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발화자들이 이상적으로 그 용어를 가지고 이해했던 어떤 것에 호소해서도 경건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러면 그는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앎에 대한 분명한 문제가 하나 있다. 때마침, 『메논』에서 플라톤이 탐구의 역설로 진술하였던,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과 같이 상기의 원칙으로 해결했던 한 문제가 있다.

4) 그러나 만일 앎의 문제가 분명하다면, 또한 그것은 분명 실재의 문제인데, 왜냐하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의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정의될 수는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는 그저 옳을 뿐인게 아니라 확실하게 옳기 때문이다. 만일 a가 F의 한 예라면, 그리고 만일 그에 대해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a가 정의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라면, 그리고 만일 b가 F의 한 예라면, b일 것은 a일 것이다; 그리고 a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정의하므로, F일 것은 a일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번갈아서 a는 F의 예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F일 그러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F는 그 자신의 예시이자 유일한 예시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F'를 대체하고, 그에 따라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이라는 형요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이라는 추상명사를 대신한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면, 그 특이함의 원천은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무엇이 이러저러한 용어로 경건한 것을 경건으로 정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인가?

5) 동일한 고려들이 경건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주어진 어떤 것이든 그것이 경건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대신한다. '나는 a가 F임을 안다'는 명제와 '나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는 명제는 양립할 수 없다. 만일 내가 a는 F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a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의 일례라는 것을 안다; 만일 내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그것의 한 예시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르고, 만일 내가 a가 그것의 일례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F의 한 예시라는 것을 모르며, 그러므로 a가 F라는 것을 모른다. F일 그러한 어떤 것이 a가 F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이라는 것이 뒤따르는데, 오로지 a가 그 특징에 대한 하나의 예시인 그 특징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a가 그 특징의 일례라고 누군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주어진 어떤 것이 경건하다는 앎에 선행한다.

6)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한 이러한 방어가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주사위를 조작하다) 주장할지 모른다. 그 주장은 어떤 것이 무엇임을 정의하는 것과 아는 것에 관련된 관념들 - 그것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적 실수인 - 에 달려 있다. 철학적 탐구의 고유한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사용의 분석이다. 『에우티프론』에서 세워진 그런 종류의 탐구는 그런 분석이 아니고,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일부 제한적 의미에서 (의심할 바 없이 신실하게) 기만이다.

7) 그러나 기만에 대한 그 주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에우튀프론』의 변증이 특별히 다루고자 시도하는 문제를 고려해 보자: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분쟁의 해결. 우리는 사례에 호소함으로써 도덕적 용어들의 사용을 위한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제안된다.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로서, 기준의 결여는 사례들이 빗나갈 때 정확하게 감지된다. 사례들의 비일관성은 기준의 비일관성에 대한 조짐이다: 만일 당신의 기준이 나의 사례를 예외로 한다면, 나는 나의 사례를 거부할 것이나, 나는 마찬가지로 당신의 기준도 거부할 것이다. - 많은 것이 의심의 여지 없이 누구의 소가 뿔에 받혔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모순 여부). 만일 도덕전 논증에서의 호소만이 사례들로부터 추출된 사용기준일 것이라면, 에우튀프론과 그의 아버지는 각자 논리적으로 난공불락의 위치에 있다. 도덕적 분쟁을 해소할 궁극적 방법이란 크롬웰 류의 담론에 의지하는 외에 아무것도 없다 - 우리들의 원칙을 교황의 입김과 두드림들로 정통이라 증명하는 것이다.

8)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전망은 지나치게 암울한 것이다. 도덕적 의견 불일치, 그것이 아마도 주장될 것인데, 그것은 오로지 경계 경우들에서만 발생하고, 분명한 사례들에 호소함으로써 해소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F들이 깔끔하게 그 안에 자리잡히고 모든 비(非)F들이 정확하게 묘사된 원 없이 위치되는, 일종의 객체화된 벤다이어그램으로 상상하면서, 태평스럽게 F인 것들의 계층에 대해 말한다. 진실은 수학적 언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일상 언어에서 가장 일반적인 용어가 그것들을 그 안에서는 그것들의 적용 조건들이 불분명한 반영(半影)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사례는 분명히 F인 것과 분명히 F 아닌 것 사이에 그 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범위, 준연속체가 있다는 그런 방식에서 사례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것은 컵이다, 그리고 저것은 그릇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저러하게 부르거나 아무것으로도 부르지 않거나 그 둘 모두로 부를 어떤 것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의심스러운 경우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경우들을 분명하게 하기를 기대할 것이고, 경우들을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누구라도 그가 그것들을 논의하고 있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내가 지금 그로부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것이 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컵'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어떤 것을 모른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도덕적 용어들도 동일하다.

9) 이것이 참이라면 그건 즐거울 일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도덕적 용어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지적하였듯 '사람들에게 눈에 띄게 만드는 어떠한 상도 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경험적 용어들과 함께일 것이다, 선악의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들, 한 사람의 분명한 경우가 두번째 사람에게 반영을 드리울 수 있고 세번째 사람을 덮으며, 이것이 단순히 주변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추론이 그것을 가지고 다루어야만 할 가장 핵심적 문제들에 관한 것이라는 특이점을 가진다. 이러한 점을 사례들을 들어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불필요할 것이다 - 다행스럽게도 -; 비참하고 소란한 세기(이 책은 1970년대에 출판되었다)에, 독자는 그 스스로 감당하도록 남겨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마도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이 역설이리라거나 혹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할지라도, 악이 실어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지적하는 모험을 할지도 모른다. 만일 선과 악에 대한 물음들이 사람들이 언어로 하는 게임들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또는 태도나 관습 혹은 취향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도덕적 앎과 같은 어떤 것이 있다거나 혹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앎이 본질에 대한 식별에 존립한다는 『에우튀프론』의 주장은,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할지라도, 확실히 기만은 아니다.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함이 없이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 이름지어지는 단 하나의 것(Unum Nomen Unum Nominatum)

1) 지시적 의미 이론들은 종종 특유한 필연적 귀결, unum nomen unum nominatum(the sole name the sole named)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다양한 비판자들은 그들이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이러한 전제를 감지했다고 생각해 왔다. Mr 리차드 로빈슨은 '만일 소크라테스의 물음(X는 무엇인가?)이 답변을 허용하는 정당한 물음이라면 … 우리는 반드시 X라는 단어가 단일한 뜻을 가진다고 전제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로스 교수 또한 소크라테스적 물음에서 이러한 함축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플라톤은 이름의 의미에서 모호함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기로는 그가 이것을 다소 드물게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했고, 겉보기에 가장 순전한 이름이 가질 의미조차도 변화하는 그 의미의 음영을 완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추론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을 묻고 답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는 더 나아가 경건이 하나의 꼴이나 본질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들은 '경건'이나 '경건함'과 같은 단어들이 상이한 의미로 사용된다거나 사용될 수 있다거나 하는 물음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 잘못된 추론은 소크라테스는 다른 것들 중에서 우리가 같은 이름으로 상이한 것들을 부르는 것과 그렇게 불리는 것들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설명하기 위해 경건이 본질이라고 전제한다는 흐릿한 참을 가장한다. 이것은, 만일 그것이 일상언어에 대한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각 단어에 대해 하나의 유일하게 정확한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모호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umun nomen unum nominatum을 수반할 수가 없다.

2) 그것은 로스 교수와 Mr 로빈슨이 추정하는 것처럼 절대의미와 모호의미 사이에 엄격한 괴리를 시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의미에서의 같음과 의미에서의 다름이 배타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양자택일적이라 생각하기 쉽다. 만일 의미가 지시라면, 그 결론은 보편개념들에 대한 날카로운 이론이다. 그 이론에서 각각의 중요한 단어는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동일한 보편개념을 도입하거나, 서로 다른 보편개념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들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중심 주위로 우위성과 후위성의 질서에서 조직화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람들이 올바르고 행위들이 올바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체』(Ⅳ, 443e-444a)에서 올바른 행위들은 사람들 안에 영혼의 조건으로서 올바름을 산출하도록 지키거나 돕는 그러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행위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이란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사람에게 적용되는 의미로 정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뒤따른다. 그래서 그 형용사는 우선 사람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고, 파생적 의미에서 행위에 대해 사용되며, 이것은 절대의미도 모호의미도 아니며, 어원유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꼴, 기본 사용과 파생 사용 양자에서 도입되는 동일한 꼴이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방식으로 도입될 따름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초기 대화편들에서 어원유래에 대한 사실을 인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것이 그렇다는 강력한 암시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꼴들에 대한 이론과 용어들의 어원유래적 사용 사이에 어떠한 양립불가능성도 없다고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중기 대화편들에서 꼴들 그 자체는 특정 종류의 어원들에 속하는 우선 지시되는 것들이 된다.

3) 만일 umun nomen unum nominatum이라는 꼬리표가 좌우간 초기 대화편들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상 언어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어원을 제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언어의 개선을 위한 이상, 어휘의 조화가 세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요구로서 가장 잘 받아들여진다. 『크라튈로스』에서 하나의 이름은 베틀의 북과 유사한 도구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날실과 씨실을 가르면서 북으로 베를 짠다; 바로 그렇게, 사물들을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에 따라 나누면서 이름을 가지고 가르친다(388b-c). 그리고 보통의 아무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들어지거나 부숴질 수 있는 어떤 모형이 아니라 북 그 자체의 꼴을 보는 목수에 의해서 북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이름들은 아무개가 아니라 작명가에 의해, '모든 공예가들 중 가장 드문' 그 기술자에 의해 주어져야 한다(389a); 작명가는 각각의 이름을 그것의 적절한 사용에 맞추면서, 주어진 이름들 속에서 이름 그 자체의 꼴을 볼 것이다(389d). 그리고 목수의 작품의 가치를 직조공이 판단할 것과 같이, 그렇게 변증가는 이름들의 부여자에 의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것이다(390c). 플라톤주의는, 일상언어에 대한 그 태도에 있어서, 내재적으로 수정주의적이다.

4) 이름들을 부여하는 이러한 사업은 umun nomen unum nominatum에 관련되는데, 그렇지만, 이제껏 제시된 어떤 것과도 다른 의미에서 그러하다. 『메논』(71e 이후로)에서, 메논이 탁월함을 정의하도록 요구받을 때, 그는 그 각각이 고유한 정의를 지닌 탁월함들의 목록으로 응답한다: 사내의 탁월함은 폴리스를 돌보는 것이고, 친구들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며, 적들에게 해를 주는 것이다; 여성의 탁월함은 그녀의 남편에게 명령하고 또 그 남편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노예들, 노인들에 대한 다른 탁월함들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답변을 거부한다: 메논은 그에게 한 무리의 탁월함들을 주었고,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그 모든 것들에 있어서 동일한 하나의 것, 하나의 탁월함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것은 물론 단 하나의 것이 있다는 것을, 더욱이 'x의 탁월함'과 'y의 탁월함' 등에 대해 다양한 '~의 탁월함들'에 공통된 '탁월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른 식으로 보자면, '탁월함'은 총괄적 단어도 아니고, 불완전한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의 이름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내들의 탁월함과 여성들의 탁월함에 대해 말할 때, 어째서 우리가 어원들도 단순히 얼버무리는 것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취해질 수 있다; 그러나 『메논』과 『테아이테투스』 모두에서 그것은 오히려 보편성의 더 높고 더욱 흥미로운 단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취해진다. 자신의 일을 알고 있는 작명가는 짐작컨데 그것을 마음 속에 품을 것이다.


본질인과성

1) 꼴들은, 로크의 말을 빌리자면, 실재적 본질이며 명사적 본질이 아니다. 꼴들은 실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명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명칭들이나 단어들의 일상적 의미들에 대한 탐구는 그 탐구가 꼴들에 대한 탐구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꼴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그것들이 실제 사물들인 바의 그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본질은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인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의 존재에 대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실재는 내재적이며,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사물들의 발견 가능한 특질들이 의존하는 사물들의 구조는 그 사물들의 본질로 불릴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형성으로부터 명백하듯이, 그 단어의 적절한 의미이다; 그 기본 표기법에 있어서 적합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esentia.

로크의 설명에 의해, 본질은 '어떤 것의, 그로써 어떤 것이 그것인 바의 것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개별자의 실체적 꼴을 그 개별자의 실체와 동일시하면서, 본질을 본질을 가진 것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는 로크가 물려받았던 그 전통을 기초하였다.

2) 그러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 있음에 대해 그 꼴들이 꼴들인 것의 있음이 아니다. 하나의 있음인 보편개념은 다수성의 있음이 될 수 없다 - 정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보편개념들로부터 실체적 꼴을 구별하는 데에로 이끌렸는지의 이유이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어떤 주어진 경건한 사물이나 경건해 보이는 행위의 있음이라고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경건이 그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그러한 것임을 시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 어휘를 조금 빌리자면, 경건이 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3) 『대히피아스』에는 이 전제를 명백하게 만드는 논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히피아스가 올바름이 어떤 것이다(ἔστι τι τοῦτο)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에 동의하도록 이끄는데,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지혜로운 것 등등의 그러한 것들은 만일 그것들이 어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의한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기 때문에, 히피아스는 아름다움도 어떠한 것이며, 그것들이 다른 말들이나 생각들 또는 개념들에 의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4) 이 논증은 분명히 『대히피아스』에만 놓이지만, 그것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각각의 초기 대화편들에 의해 가정되는데, 왜냐하면 꼴들이 본질들이라는 그 전제는 변증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꼴들은 정확히 보편개념들이고 표준들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바의 것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5) 플라톤이 매우 자주 꼴들과 그 꼴들을 지닌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화하기 위해 인과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꼴들이 본질들이기 때문이다. 『뤼시스』(221c)에서 소크라테스는 '원인이 파괴될 때, 그 원인이 그에 대한 존재를 지속시키는 원인인 그러한 것은 물론 있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원인이다: 경건의 현존은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현존에 필수적이다.

6)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과 그 꼴들의 예시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한다. 꼴들은 그 예시들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또는 그 예시들'에 현전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들에 '덧붙여져'야 할 것으로, 아니면 그것들'에' 있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 예시들은 다른 한편으로 꼴들을 '가지거나' '허용하거나' '취하거나' '나누어 가진다'. 이러한 은유들 전부 일상언어에 기초된다. 그것들은 정말로 평범하게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명사들과 함께 사용될 것이다. 영어에서 한 행위에 용기가 있다(there is courage in an action)고, 또는 올바름의 현전이 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내의 도량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7) 은유들로서, 그리고 친숙한 그리스어로서, 이러한 용어들은 소피스트적 논쟁들의 재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디오니소도루스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움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잠시 망설인 후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όν)와 다른 것들이고,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들 각각은 그 안에 현전하는 어떤 아름다움(κάλλος τι)을 지닌다고 말할 때, 디오니소도루스는 재빨리 주도권을 잡아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소 한 마리가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소로군요. 그리고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은 디오니소도루스고요'(301a). 소크라테스는 '맙소사'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현전'은 은유 - 혹은 최소한 많은 용례들을 지닌 단어 - 이고 잘 다룰 방법은 그것의 의미에 달려 있다.

8) 문제가 되고 있는 '현전'은 특수한 종류의 것이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나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떤 것에 현전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을 떠맡고,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그의 논의를 갑작스럽게 중단한다. '일부 사물들은 그 사물들에 현전하는 그러한 것 그 자체일 그런 것들이다;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만일, 예를 들어 금발이 하얗게 칠해진다면, 흼은 그 머리카락에 현전할 것이지만, 그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흴 적에, 흼은, 그 머리카락이 그래서 하얗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머리칼에 현전할 것이다. 앞서의 경우, 흼은 머리카락에 현전한다. 뒤의 경우, 머리카락은 '흼의 현전에 의해 하얗다'.

9) 어떤 것이 흴 때 그 의미에서 흼이 그것에 현전하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도구적 여격에 의존한다. 이러한 장치는 초기 대화편들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고, 사려있는 자들은 사려에 의해 사려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대히피아스』(300a)에 따르자면 아름다움 것들을 아름답도록 만든다(ποιεῖν).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어법과 결부된다. 이온은 그가 호메로스를 기릴 수 있음이 앎에 의한(도구적 여격)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온』541e).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건강에 의해(ὑπό와 동작주의 속격) 유익해진다고 생각한다(『크리톤』280a). 사려는 만일 그 사려가 그들에게 현전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좋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나쁜 것이다(『카르미데스』161a).

10) 그러나 비록 이러한 표현들이 일상언어에 결부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종종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Ποιεῖν은 πάσχειν에 속하는 규칙동사이고, πάσχειν은 규칙적으로 '자격지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ποιεῖν은 '자격을 둠'의 의미로 규칙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혜가 사람들을 복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지혜가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또는 지혜가 그에 의해 사람들이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논리적 차이가 있다.

11) 이러한 표현들은 인과적이다 - 흔히 당구공들의 부딪침과 연관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적 원인에 대해 말하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 아름다움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이다: 아름다움의 현존은 다른 것들의,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인 한에서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대히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물들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가 현존해야만 아름다우며,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했을 때, 그 이유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그러한 어떤 것(δι᾿ ὅ)이 현존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12) 그것들이 그에 의해 어떤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인 바의 그러한 본질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꼴들은 원인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파이돈』(100c)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것들이 아름다움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케베스에게 그가 이러한 종류의 원인(αἰτία)을 허용하는지 묻는다. F. M. 콘포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라는 구절은 … 모호하다. '이유'는 '설명'(αἰτία의 관습적 용법)을 의미할 것이다. 그 전제는 그래서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진술과 동등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나는 말들의 그 형식을 바꾸어 말함으로써 대체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명제의 분석이 아니라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론은 그래서 이 사실이 (1)특정한 가시적인 것, 이 장미, (2)아름다움(Beautiful or Beauty), 그리고 (3)우리가 '~에 참여한다'를 대체할 수 있는, '~는 ~이다'로 표현되는 그 둘 사이의 관계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으로 구성된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오로지 하나의 설명만을 가진다: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장미가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존립하게 할 어떤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어느 관점에서든 우리는 한 명제에 대한 분석이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분석만을 가질 따름이고, 참인 진술의 이유나 그 사실의 현존에 대한 원인을 가지지는 않는다.

첫번째 주장은 제외될 것이다. 당신은 말을 바꿈으로써 오로지 본래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무지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명제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 그 누구도 그 표현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줄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αἰτία가 말 바꿈에 대해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고대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가 말 바꾸기를 시사하리라는 주장은 그래서 불충분하다.

13) 콘포드가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라고 부른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사실이라면, 그가 인정하듯, 어떤 식으로 분석이 말 바꾸기와 다른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경우든, 이것은 플라톤의 핵심을 놓친다. '이 장미는 아름답다'와 '이 장미는 아름다움의 꼴에 참여한다'는 실로 등가의 진술들이다 -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확히 사실들의 구조에 있어서 존재론적 우선성에 대한 이론이지, 명제 등가들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이 장미를 아름답다고 부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사물에 세례를 내리는데 그것에 있어서 그 특징 때문이고,(그 특징 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세례의 정당함을 보장하는 그 특징의 현존 때문이다. 꼴 자체는 그렇지만 오로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만일 그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장미가 아름다운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그 꼴은, 꼴의 현존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꼴은그 장미에 있어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현존뿐만 아니라 토양의 조건, 그리고 기후, 정원사의 기술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충분조건은 본질인과만이 아니라 작용인 또한 필요로 한다.

14) 그래서 꼴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것들인 바의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원인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세계가 그 세계인 어떤 것이 아니었으리란 의미에서 말이다.


지시의 재고

1)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하는데,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대상들을 명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로부터 초기 대화편들이 이제는 이전보다 덜 널리 주장되는 그 명제, 어떤 것을 기술한다는 것은 서술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를 전제한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이 마지막 명제는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명제와 관련되어 왔다: 잘 구성된(혹은 잘 분석된) 문장들의 구조는 반드시 문장이 표현하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일대일 혹은 2방향 유일 상응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명제이다. 잘 구성된 문장들은 술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문장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은 반드시 유사-술어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 술어들이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더 나아간 단계이고, 그러한 술어들은 그것들을 명명한다.

2)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하지 않은 명제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더욱이 그것과 관련된다고 거의 이야기될 수가 없다; 그 대화편들은 특정한 어떤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되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파이돈』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일이 하나의 기술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꼴들의 각각은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 꼴들의 제 몫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라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기술하는 것은 그에게 올바르다고 명명하는 것이고, 좌우간 올바름을 명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름이 비록, 올바르게 적용된다면, 소크라테스가 올바름에 참여하기 때문에 적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3) '올바른'과 '올바름' 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메이아적 구별이었을 것을 사용하면서, 동근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예시이다: '사물들이 상이한 어미들로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들의 이름을 획득할 때, 그것들은 동근어들이라 불린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문법학자(grammarian)는 그의 이름을 문법(grammar)로부터 획득하고, 용감한 자들은 그들의 것을 용감으로부터 취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를 동원어적으로 명명한다: 그는 그의 이름을 올바름으로부터 얻는데, 어미상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참여하고 있는 꼴의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그 꼴로부터 얻은 이름과 문법적 어미에 있어서 다를 필요가 없고, 플라톤의 고유한 사용에 따르고 소크라테스가 어원적으로 명명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르다'와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참여한다'는 등가 명제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반한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동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는데, 하나는 어원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것들에 대해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어원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미는 지시를 필요로 한다; 지시 대상들은 그렇지만 어원이 그것들의 관련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구별된다.

4) 종과 유들은 근원적인 반면에 어원적으로 그것들을 도입하는 서술들은 파생적이라는 것이 이 관점의 결론이다: 용감한 자들은 용감으로부터 이름지어지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이것이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종과 유들을 논리적(혹은 어쩌면 비논리적) 구조로, 기술들 그 자체인 의미의 근원적 매개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답변은 일대다(一對多) 논증이어 왔다. 그 논증에 대한 전제들은 현대적인 차림으로 존 오스틴에 의해 경탄스럽게 진술되어왔다 - 그는 물론 그 논증의 결론에 동의하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좌우간 언어를 통해 성취하는 그런 종류의 소통일 것이 있다면, 의사전달자('화자')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피(彼)의사전달자('청자')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징들의 축적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이 '말'이라 불릴 것인데, 물론 비록 그것들이 우리가 보통 말이라 불러야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일 필요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다 - 그것들은 신호기(信號旗) 따위의 것일 터이다. 또한 말과는 다른 어떤 것, 말이 그에 대한 소통을 위해 사용될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세계'라 불릴 것이다. 어째서 세계가 말을 포함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진술 그 자체, 그에 대해 어떤 특수한 경우이든 세계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진술 자체의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다. 더욱이, 세계는 유사성들과 부동성들(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는)을 내보여야만 한다(우리는 관찰해야만 하고): 만일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될 수 없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면, 말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서 - 물론, 마찬가지로 만족될 다른 조건들도 있다) 두 가지 관습적 방식들이 있어야만 한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황, 사물, 사건 등의 유형들을 가지고 말과 관계하는 기술적인 관습적 방식들(= 문장들). 세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상황들 따위를 가지고 말과 관련하는 지시적인 관습적 방식들(= 명제들).

오스틴은 보통 일상언어철학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어떤 표어들 아래에서도 행진하지 않았고 어떤 장단에도 맞추지 않았으며, 만일 언어가 그 세계에 대한 것일 터라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 기술하는 위의 문단은, 만일 내가 실수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투명한 형이상학의 단편이다. 오스틴은 주석에서 계속해서 첨언한다:

'~를 가진 일종의 ~이다'라는 것은 '~을 가진 그런 표준적 사태들과 충분히 유사한 ~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참된 하나의 사태일 하나의 진술은 자연적 관계인 특정한 다른 것들과 유사해야만 하고, 그러나 또한, 더 이상 순수하게 자연적 관계는 아닌 동일한 '서술' 가치에 대해 충분히 유사해야만 한다. '이것은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그런 것들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이것은 붉다고 불리는 그런 것들과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사물들이 유사하다거나 또는 심지어 '정확하게' 유사하다는 것조차 나는 문자 그대로 이해할 터이지만, 그것들이 같다는 것을 나는 문자 그대로 알 수 없다 - 그것들을 똑같은 색이라 부름에 있어서 관습은 그것들이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색에 주어질 이름에 대한 관습적 선택에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유사성과 부동성은 상이한 측면들에서 획득하는 관계들이다. 크리켓 공과 야구공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고 색에 있어서 부동하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이 이것이 그러하다는 측면들을 구별함이 없이 유사하고도 부동하다고 진술할 수는 없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세계 속의 사물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가 좌우간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독립적으로 획득하는 유사성과 부동성이 자연적 관계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관계들이 그 덕분에 획득하는 그러한 특징들 - 형태적 특징들, 색채적 특징들 등 - 이 언어적 관습의 문제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거의 이치에 맞기 어려워 보인다. 만일 그 관계들이 '자연적'이라면, 그것은 그 덕분에 그것들이 유지하는 그러한 특징들도 동일하게 그렇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그러한 특징들은 기술들이 아니다: 우리는 크리켓 공과 야구공이 모두 구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구체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 혹은 구형일 것임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물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기술되는 그 사물의 특징 덕분에 유지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용감한 자들이 용기로부터 이름지어지고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5)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유사성들과 부동성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특징들의 현존을 추론해내는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를 발견하고 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 문제를 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언급들은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의 경우 그 추론이 의지하는 그러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어떤 것을 한다. 그렇지만 초기든 중기든 대화편들에서 유사성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도출된 꼴들에 대한 우리의 앎은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사실상 유사성이 획득한다고 확신할 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을 통해서만 있기 때문이다.

-蟲-
로고스와 우시아

1) 만일 앞서 말한 설명이 건전하다면,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그런 종류의 논증은 고려함에 있어서 실재적이고 명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지 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2) 그 대상이 적어도 그것이 유와의 관계에서 존립하는 종일 때에는 단순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될 것과 정의함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것을 고수하였던 그러한 관련은 획득하지 않는다: 그 종은 결합된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와 함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같음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같음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튀프론』10d, 13에서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은 경건에 대한 정의로서는 거부되는데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르기 때문이고(ἕτερον; 10e, 9에서 ταὐτόν이라는실에 견주어 반대로), 이러한 거부는 15c, 2에서 반복된다(οὐ ταὐτόν … ἀλλ᾿ ἕτερα ἀλλήλων).

3)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같음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연의 동일성, 또는 진리치 보존(salve veritate) 대체성이 아닌데, 설령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그러한 것들 모두가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것들만이 경건하거나 경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순히 πάθος를 진술할 뿐 οὐσία를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념적 동일성인 것도 아니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생각함에 있어서,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의 정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의어의 같음도 아니다.

4) 정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의에 있어서 필요한 같음은 이를테면 서술적 동일성, 말하자면 샛별과 태백성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하거나, 또는 - 그 예시에서 필요한 경험적 우연성을 피하기 위해 -  일곱번째 정수와 네번째 소수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동일성은 두 가지 한정적 서술들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실재적 정의에 있어서 정의될 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대상 그 자체이다. 그 비유는 만일 서술적 구절이 명사에 의해 대체된다면 더욱 근접하다: '금성은 샛별이다' 또는 '7은 네번째 소수이다'; 무엇보다도 유일한 서술로 정의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도 오독이다. 지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함이다; 그러나 '…는 탁월하다'라는 말이 소크라테스를 서술하는과 같은 의미에서 '…은(는) 탁월함이다'라는 말이 지혜를 서술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첫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이고, 두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한 특성에 대한 한 특성의 예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정적 서술에 있어서 필요한 후자의 관계이다.

5) 아마도 정의에서 필요한 종류의 동일성은 그것 자체의 유(sui generis)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포함하는 유와 그것을 그 유 속에서 다른 종들로부터 지적해 내는 종차를 진술함으로써 그 종인 어떤 것을 말할 때 필요한 그런 동일성이다. 종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종차는 종들에 대한 구별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그 구별의 결과이다; 정의에 있어서 종차는 사유근거이고, 존재근거가 아니며, 그러므로 정의에서 필요한 동일성은 대상들의 동일성이 아니다.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위한 최선의 - 그리고 ὁρίζειν과 ὅρος의 대다수 함축에 부합하는 하나의 -  비유는 사상(寫像)의 비유이다: 정의한다는 것은 한 종의 위치를 그 종을 포함한 유 속에서 정하는 것이다. 만일 종이 농장이라면, 유를 규정함의 목표는 그 농장이 위치하는 마을을 지시하는 것일 터이다; 차이를 규정함의 목표는 농장의 경계들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조사된 경계선들의 현존을 밝혀내는 것일 것이다. 정의에서 필요한 같음은 말하자면, 유일한 위치의 같음이다: 정의될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 안에서 사상된 그 위치를 점유한다.

6) 이러한 방식에서 생각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는 형이상학에서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꼴들이, 서로에 대해 포함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포함되는 것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존립하면서, 계층적으로 정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내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거나, 상호 구성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난다: 종들은 그것들이 만일 그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의해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리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특성을 그것들의 유들에 의존한다; 올바름은, 만일 그것이 탁월함이 아니었다면, 올바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탁월함은, 그것의 한 종이 올바름이 아니었더라면, 탁월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는 그것의 현존과 특징을 그것의 종에 의존한다. 전체는 그것의 부분들에 의존하여 전체인 그것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 점에 대해 조금 덜 명확하지만, 아마도 유들에 대한 정의는, 종들에 대한 정의와 달리, 구성 요소들로의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7) 이것은 플라톤적 유들에 대한 함축의 풍부함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있어서, 유들은 종들로부터의 추상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사람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사람과 말은 동물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그 유는 여기에서 단지 다양성에 대한 공통된 요소일 따름이고, 그것의 종들보다 더 '추상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정의가 사상에 대해 동종적이라면, 만일 유들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들이라면, 유는 공통된 특징이 아니라, 마치 그것의 현존이 그것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의 현존에 의해 전제하기도 하고 전제되기도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래서 유는, 함축의 상대적으로 결여되었음보다는 오히려 함축을 잔뜩 실은 것으로서, 결핍되었다기 보다는 풍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8) 하나의 체계로서, 유는 한 종류의 폐쇄를 지니고 있어야만 하고,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류의 제한들로부터 갈라놓는 단일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의 구별은 한 사물에 본질적인 것과 그 사물이 단지 가지게 되었을 뿐인 특징 사이의 구별을 수반한다. 올바름 또는 탁월함에 대한 경건의 관계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에 대한 경건의 관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 정의에 있어서 내적 성질을 시사한다면, 그러므로 그것은 꼴에 대한 모든 설명들이 본질을 진술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그 관계의 내적 성질만큼이나 외적 성질도 시사한다.

9) 유들은 체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종들은 그 유들의 요소들이기 때문에, 종들에 대한 정의들은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일상적 진술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들이다. 그러한 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또는 사용하기 위해서, 일반적 언어에도 개별적 사물들과 행위들에도 호소할 수 없다: 꼴들에 대한 지식은 지적 직관을,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는 직접적 통찰을 요청할 것이다. 실재적 정의의 진리는 오직 그에 대한 정의가 설명인 그러한 진리를 파악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10) 만일 이러하다면, 정의와 직관은 상보적일 것이다. 지적 직관은 실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만 '알고 있음에 의한 앎'에 속하는 난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설명도 제공함이 없이 푸른 하늘의 한 조각을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감각은 지적으로 노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꼴들에 대한 직관은 반대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증은 단순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 이전에 불충분한 설명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어떤 것을 충분한 설명 속에서 명확하게 보려고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시야는 진술들에 대한 검토에 의해 확보된다. 미리 앎에 의한 앎에 대한 지적 직관의 비교는 지적 직관의 대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11) 일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이 지점에서 압박을, 직관과 논리 사이의 긴장을 발견할 것을 주장해 왔다. R. G. 콜링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지만 상당히 높게 플라톤의 철학적 성취들은 평가받고, 최고에 못 미치는 어떤 가치에 있어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그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이 그 자신에 의해 철학과 수학 사이에서 확립되는 충분히 깊은 구별로 이끄는 것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결함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하는, 철학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방법론이 철학을 둘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하나는 재기 발랄한 억지 이론의 식상한 낭비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관적 시야이다. 이러한 첫번째 것이 두번째 것으로의 경로라는 것은 여러 세대들에 속하는 경험에 의해 플라톤이 그들의 길잡이로 취해졌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실들에 권위에서 받아들여질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 조명 속에서 사살들이 이해될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탐구 속에서, 철학적 탐구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플라톤이 우리에게 주진 않았다.

이러한 비판은 감각 지각의 틀을 관통하는 지적 직관을 강요함으로부터, 지적인 것으로서, 그 직관이 판단을 통해 지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함으로부터 귀결한다.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한 행위는 하나의 진술이 아니라, 진술 속에서 표현 가능한 하나의 내용을 필요로하고, 그로써 비평에 적합하다. 한 진술은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통해 통찰이 표현되는 그러한 것이다 - 그 자신에 대해서조차. 안다는 것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12)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초기 대화편들을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3. 꼴들의 현존

1)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의 꼴을 존재하는 것으로 다루고, 그와 에우튀프론은 그 꼴의 본성을 발견해 보기로 했다. 현존에 대한 이러한 존재는 다른 대화편들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 어떠한 것인지 혹은 그게 아무것도 아닌지(πρᾶγμα τι ἢ οὐδὲν πρᾶγμα) 묻고, 프로타고라스가 그것이 분명 어떠한 것이라고 그에게 동의할 때,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란 게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 더 나아가 경건이 올바름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경건이 어떠한 것임은 동의된다. 프로타고라스는 더 먼저 소크라테스에 의해 탁월함이 단일한 것이라고 말하도록 이끌렸다; 그는 나중에 각각의 탁월함은 그것의 고유하게 특유한 본성과 실재성을 가진다고 말할 것이다. 사실, 『프로타고라스』의 변증은 정확히 현존의 문제로 돌아선다(349b-c):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지혜', '사려', '용기', '올바름', '경건'이 동일한 어떤 것에 대한 다섯 가지 서로 다른 이름들인지 아닌지, 또는 그러한 이름들의 각각에 대해 그에 특유한 특정한 본성과 실재성(οὐσία)을, 각 경우에, 다른 어떤 그런 종류에도 속하지 않는, 그것의 고유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을, 거기에서 답하는지 아닌지. 이제, 프로타고라스, 당신은 그러한 이름들의 각각이 그것에 특유한 뭔가에 대해 답한다고 말했다. 설명 그것들 모두가 탁월함의 부분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에서 그 물음은, 어떤 탁월함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물음은 여러 탁월함들이 있는지 아니면 오직 하나의 탁월함만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에우튀프론』에서와 비슷하게, 수학, 기하학, 천문학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에 중요한 구절로서, 그리고 수학자들이 찾아다닐 사람들로 이야기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도해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τὰ ὄντα, 실재성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탐색자들로서, 그들은 그들이 잡은 것을 사용하지 않지만, 그들의 사냥감을 적절히 사용하기 위해 변증론자들에게로 돌려야만 한다 (290b-c). 다시, 소크라테스의 비유들 대다수는 존재론적 가정 없이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 예를 들어, 탁월함과 『라케스』에서 도출되는 시야 사이의 유비와 같은 것들 말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부가하는 것으로 그것이 부가된 것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에 대해 안다면, 그리고 나아가서, 만일 우리가 그것을 덧붙일 수 있다면,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가장 좋게 그리고 가장 쉽게 그것을 얻을지에 대해서 상담자들이 될 그러한 것 자체인 것을 알아야만 한다. 혹시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런 식으로 보자. 만일 우리가 두 눈에 덧붙여진 시야는 그것이 덧붙여진 그것을 더욱 좋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나아가, 만일 우리가 그 눈에 그것을 더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시야의 본질적 본성을 알고, 그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이 가장 훌륭하게 그리고 가장 쉽게 취해지는지에 대한 조언자들이 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시각이나 청각의 본질적 본성인 그러한 것 자체를 알지 못한다면, 상담자나 의사로서 눈과 귀의 문제에 있어서 적임자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 것처럼, 라케스, 여기 우리의 두 친구들이 이제 어떻게 탁월함이 그들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영혼들에 덧붙여질지에 대해 상담하기 위해 우리를 초대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필요한 것은 탁월함의 본질적 본성을 아는 것이다. 확실히, 만일 우리가 탁월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장 훌륭하게 그것을 획득할지에 대해 조언자들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시각은 눈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청각은 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탁월함은 영혼에 대한 것이다. 시각과 청각은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탁월함은 있는 것이다.

2) 이런 현존에 대한 가정은 변증에 있어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한다; 더욱 정확하게, 그것은 그 핵심을 설명한다. 변증의 목표는 실재적 정의이다; 현존적 전제는 정확하게 실재적 정의가 발견되리라는 전제이다. 경건에 대한 참된 설명은 임의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고, 에우튀프론이나 혹은 다른 누구라도 우연히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것으로서, 또는 그러한 방식에서 그가 사용하는 말들로서 그러한 내용에 기초하지 않는다: 참된 설명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다.


언어와 현존

1) 이러한 해석은 초기 대화편들 속에 꼴들의 현존에 대한 그 어떤 형이상학적 관련도 없다는, 그리고 꼴들에 대해 '단순하게 언어적인 문제'가 있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공통되게 주장되는 관점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한 관점은 언어와 언어를 사용해 주장하는 어떤 것 사이의 혼동인 듯하다. 무사이 여신들은 그들의 현전에 의해 도취된 시인에게, 비프스테이크의 붉음에 드문 일몰의 붉음을 비교하도록 영감을 줄 것이다; 그 여신들은 그 시인이 그의 존재론에 따라 일몰들과 비프스테이크들에 붉음을 더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영감을 주거나 그로써 영감을 주진 않는다. 그러나 만일 같은 시인이, 더 도취되지 않은 분위기에서, 일몰들과 비프스테이크들뿐만 아니라 곳간들, 소방차들, 러시아인들, 그런 비슷한 모든 것들에 공통된 특징의 본성을 이야기하게 되길 바란다고 설명하면서, 붉음이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다면; 만일 그가 계속해서, 그가 그것인 어떤 것을 배웠을 때 그가 그것을 실제로 붉은 어떤 것을 그렇지 않은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해내기 위한 표준으로서 그것을 사용할 것을 기대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그것의 αὐσία, 본성과 실재성을 진술할 그것에 대한 적절한, 그리고 최근류와 종차를 통해 표현되는 설명을 기대했다는 것을 더했다면 - 요약해서, 만일 그가 실재적 정의에 대한 규칙을 마련하고 그의 탐구에 있어서 그 규칙들을 따랐더라면, 무사이 여신들이 그에게 내렸던 그 영감이 시적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적이었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그가 이제 세계가 있는 방식과 그 방식이 담고 있는, 일상언어나 일반적 상식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훨씬 넘어선 어떤 것에 대한 관점을 지니지는 않는지 의심하기 시작해야 한다.

2) 이에 대한 남은 반대는, 만일 소크라테스의 물음들이 사실은 꼴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전제를 필요로 했다면, 그의 응답자들은 그것들에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에우튀프론과 같은, 그 밖에 다른 누구든, 변증론자가 아닌 사람은 경건의 ἰδέα가 있다는 전제를 이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고 또 주장될 것이다. 확실히 플라톤 자신이 도덕에 있어서 인습주의자로 그려냈던 프로타고라스는 주저 없이 올바름'은 어떠한 것이다'라는 것에 동의하게끔 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프로타고라스가 그로써 추상적 대상들의 존재론을 수용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동의는 오히려 언어의 일상적 사용들에 의해 유도되었을 성싶다. 냉소적이거나 혹은 그 반대로 부족한 우리 모두는 무엇보다도 올바름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고 믿는다.

3) 그 반대는 추상물들을 인격화하는 고대 그리스의 경향을 지적함으로써 강화될지 모른다.

대부분의 그리스 산문작가들에게서 추상적 명사들은 드물게 동사들의 주어가 된다; 평범한 행위자들은 인간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예외들이 있다. …추상적 주어의 사용이 의인화의 발상을 - 상이한 경우들에 있어서 - 얼마나 수반하는지 말하는 것은 때로 어렵다. 아마도 고대 그리스인은 대답에 대해 당황했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의인화가 나타나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의인화가 종교적이거나 극적인 암시들을 일으키는지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추상적 주어는 그리스에서 언제나, 또는 거의 언제나 최소한 의인화의 어떤 색조를 띤다. 우리는, 얼마나 완전하게 우리 고유의 언어에서 추상적 주어가 의인화하는 능력을 상실했는지 보기 위해 오직 크세노폰의 ἀναγκάζει με καὶ ταῦτα ὁμολογεῖν ἡ ἐμὴ φαυλότης,라는 경구(『메모라빌리아』, Ⅳ, ii, 39)를 영어 'candour compels me to admit(정직이 나에게 인정하도록 강제한다)'라는 말과 비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절들을 영어로 번역함에 있어서,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첫 대문자들의 18세기 사용을 되살림으로써 마주칠 심각한 어려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의인화는 형이상학을 수반하기 어렵다 - candour가 Candour라고 할지라도.

4) 데니스톤이 여기에서 고찰하고 있는 추상 개념들은 잠(Sleep), 밤(Night), 그리고 탈선(Digression) 같은 명사들이다. 의인화가 형용사적 추상어들에서 'the holy' 또는 'holiness'처럼 관사나 접미사와 관련되는지 보는 일은, 비록 그것이 그렇다 할지라도 덜 쉽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여전히 초기대화편들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런 보편개념들의 실체화는 진정한 존재론적 관련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장될 것이다. 우리는 유니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유니콘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물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경건이 존재한다고 추정함이 없이 경건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물을 것이라고 주장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 신이 있다고 추정하지 않고 몇몇 그리스 신들은 간통을 했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어떤 탁월함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여러 탁월함들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일상적 언어에서 - 일상적인 근대 영어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고대 그리스어에서도 - 어떤 의미에서 어떤 것이 '있다(이다)'고 말할 것이다 - εἶναι πως; 그러나 그래서 εἶναι πως는 εἶναι와 상당히 거리가 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한 가지 것일 것이다; 그것은 실제 세계에서 하나의 요소일 또 다른 것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올바름의 현존에 대한 일상적 언어나 공통 감각의 관련이 Mr Pickwick에 대한 그것의 관련과 훨씬 더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물론 Mr Pickwick와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 - 그는 일찍이 Sam Weller와 함께 선거들을 위해 Eatanswill로 여행했다. 그러나 Pickwick적인 여행들은 Pcikwick적인 올바름과 같다. 비록 각각이 그것들의 고유한 방식에서 흥미로 가득 찬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존재론적으로 불분명하다. 어째서 이것은 또한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참이 아니어야 하는가?

5) 그 물음은 쉽사리 답해진다. 일상적인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실체들'에 대한 관련 또는 용인에 의해 꼴들의 현존에 대한 초기 대화편들의 관련이 측정되리라고 추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보편개념, 표준, 본질로 다루어진다. 이러한 취급은 전문적이며 공식적이다; 일상적 언어는 이런 식으로 생각되는 추상들의 현존에 관련되지 않는다. 프로타고라스가 정의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에 그로써 그것을 꼴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몰랐다. 에우튀프론이 초반에 경건이 하나의 ἰδέα임을 수용했다는 것은 참이다; 그가 그것을 얼마나 조금 이해하는지는 대화의 남음 부분에서의 변증이 보여준다.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그 관련은 '단순히 언어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문제이다 - 본질의 형이상학 말이다.

6) 그러나 만일 소크라테스가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이론을 갖춘다면, 어떻게 그가 그것을 일상인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적용하는 것 - 더욱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 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 대답은, 비록 꼴들에 대한 이론이 나아가 형이상학적 이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또한 본질적으로, 진부한 단어의 한 의미로, 의미에 대한 이론임으로써, 공통 감각(상식)과 연관되어 있다. '당신은 무엇을 사려라고 말하는가?' 소크라테스가 카르미데스에게 묻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리스어를 할 줄 아니까, 당신은 의심할 것도 없이 그것이 당신에게 어떠한 것으로 보이는지 말할 수 있다.' 크리티아스가 오로지 그를 논박하기만을 위해서 논증할 것을 소크라테스에게 떠넘길 때,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만일 내가 당신을 논박하는 데에 나의 최선을 다 한다면,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지점에서 내 주의를 빠져나간다면 그러지 못하도록 그렇게 나 자신의 말들이 뜻하는 어떤 것을 검토하는 것보다, 내가 다른 어떤 동기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믿는가?

평범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그들이 뜻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묻기 시작한 오래 전부터경건에 대해 말해 왔다. 그의 탐구는 경건에 대한 정밀함에 의해 구별되었다. 그는 경건의 동의어들, 혹은 경건의 사례들, 또는 경건의 구별되는 특징들을 원한 것이 아니라, 경건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원했다. 그의 물음은 공통 감각(상식)이 그 자신의 고유한 방책들에 기대어 물을 그러한 것이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상식이 확실히 이끌릴 물음이고, 『에우튀프론』의 변증은,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으로 하여금 그의 물음의 실질적 본성을 보도록 만드는 내내 노력한 것과 같이, 사실상 그러한 인도의 기록이다. 변증의 진행은 '경건 같은 그러한 것이 이다'라는 응답자의 순진한 현존 전제에서, 만일 변증이 성공적이라면, 경건의 본질이 있다는, 그리고 그것이 정의될 수 있다는 고도로 정교화된 현존 전제에 대한 그 응답자의 수락으로 이행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만일 후자의 주장이 참이라면, 그 이행은 연속적이다: 본질에 대한 관련은 우리의 일상적 단어 사용에 잠재적이기 때문이다. 경건의 본질은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그것이다; 우리가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환원성

1)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이 현존한다고 주장되거나 암시되는 단언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단언들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가 아직 그 결론을 반대하는 학자들에게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기 때문에, 그 문제를 더 밀고 나가 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다.

2) 누군가는 이런 논증을 그려볼 수도 있겠다. 그 저술은 의심의 여지 없이 꼴들이 현존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 저술은 그런 주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추정되는 존재론적 관련이 사실 암암리에 어쨌든 언어적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있다. 플라톤은 - 누군가는 그 논증이 연이어지는 것을 상상할 것이다 - 실제로 언어에 대한 사실들인 항목들을 세계에 대한 사실들로 표현하기 위해, 담화의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의심할 것 없는 불가피한 편애라고 할지라도, 운이 나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분석으로서 제공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담화방식이다.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거나 시사하는 진술들은 논리적 여항 없이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지 않는 진술들로 환원가능하거나 분석가능하다. 본질에 대한 물음들은, 플라톤 자신조차 동의했을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에 대한 물음들이고, 의미에 대한 물음들은 당연히 언어적이다. 적절하게 이해된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 그리고 플라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적절하게 그것을 이해하지 않았는데 - 세계를 향해서가 아니라 말들의 의미를 향해 정향된다. 결국, 꼴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짐작컨데 단어들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탐구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의미를 분명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보편개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이한 문맥들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 단어들이 우리가 나타내는 것들을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표준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 서술이 해당하는 상황들을 동일화할 수단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본질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에 대한 모든 각각의 설명이 그 의미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요약하자면 '"경건"이란 단어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초기 대화편들에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언질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중적이고, 이중의 대답을 허용한다. 만일 그 물음이 그러한 대화편들의 본문이 꼴들의 현존을 긍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라면, 그 대답은 긍정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물음이 플라톤이 상술하고 있는 위치의 논리가 꼴들의 현존을 요청하느냐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 결정하게 된다. 그것은 이러한 대체가 순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4) 몇몇 상황들 아래에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은 사전적일 것이고, 프로디쿠스나 아니면 사전에 의해 대답될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와중에 소크라테스는 문자상의 동의어들에 대한 탐구에 종사하지 않는다. 에우튀프론조차 소크라테스가 경건이 신성함이라는 답으로 만족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5) 다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물 지시적 정의', 예시에 호소하는 정의에 의해 대답될 것이다. 그러나 예시가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협소하게 구성되는지, 아니면 요청되는 특징을 드러내 보이는 일반적 경우로서 더 넓게 구성되는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런 종류의 답변은 초기 대화편에서 그러한 답변이 나타나는 어디에서고 거부된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또는 더욱 일반적으로,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

6) 다시금,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아마도 경건의 구별적 특징들을 제공함으로써, '경건'이라는 단어의 적용의 기준들 혹은 사용의 규칙들을 제공함으로써 답변될 것이다. 그러나 구별적 특징의 관념이 가장 강한 의미에서 - 전체이자 유일하며 항상된 것(id quod omni et soli et semper), 그 용어를 적용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 -  이 물음은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에 등가가 아닌데, 왜냐하면 구별적 특징이나 대체 가능한 기준의 제공은 후자의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둘 것이기 때문이다. 에우튀프론이 경건을 모든 신들이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 소크라테스는 이 특징이 경건한 모든 것들이자 유일하게 경건한 것들을 구별하는 데에 시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떠맡지 않는다; 그는 맹목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그것의 가능성을 용인한다. 그는 그가 쉽사리 했었을 것 처럼, 그러한 특징이 경건의 예증들을 동일화함에 있어서 어떤 실질적 사용에 속한 것일지 아닐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에우티프론이 우연히 경건의 πάθος를, 경건한 것들에 대해 우연히 참인 어떤 것을 발견했을지라도, 그가 경건의 οὐσία를, 경건의 본성과 실재성을 보여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별적 특징의 제공은 그래서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7) 그러나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답변이 있다. 그것은 불분명한 답변이지만, 당장의 목적들을 위해서 중요한 한 가지 답변이다. 그것은 '경건'의 의미가 경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이란 것은 무엇인가 기원하는 것인가?
정확히 그렇다.

 8)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물음들은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물음들로 환원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첫번째 물음은 꼴들에 대한 물음들로 바뀌기 때문이다. 만일 비환원성이 존재론적 관련의 기준일 것이라면, 초기 대화편들에는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관련이 있다.

9) 이러한 관련을 제공하는 의미이론은 더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독자는 여전히 끈질긴 의심을 계속 지닐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일찍이 가상적 불길이 (당신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회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장작개비들을 태우지 않을 그런 종류의 불길이라고 언급했었다. 이것은 『소피스트』(247e)에서 존재론적 관련에 대한 플라톤의 고유한 기준, 그가 신들과 거인들에 의해 비슷하게 공유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준을 반영한다: 그것은 존재의 표징이 능력이라는 것이고, 작용하거나 작용받을 그러한 능력이라는 것이다(πάθημα ἢ ποίημα ἐκ δυνάμεώς τινος, 248b). 차이는, 차이이려면,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만일 꼴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이, 말하자면 단지 거기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작용할 것,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줄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것들은 이러한 것을 수행한다; 우리는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이 원인들임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과 지시

1) 만일 '경건'이란 단어의 의미가 경건이라면, 그리고 경건이 꼴이나 본질이라면, 그 단어와 그 어떤 것 사이에 자리하는 관계가 명칭이나 이름 붙임에 속하는 하나의 관계라고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방금 이름붙인(ὠνομάσατε) 어떤 것(πρᾶγμα)이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않은지 묻는다(330c); 나중에, 탁월함이 하나인지 혹은 여럿인지에 대한 물음은 '지혜', '올바름', '사려', '용기', 그리고 '경건'이 상이한 것들을 위한 이름들(ὀνόματα)인지 아니면 동일한 것을 위한 이름들인지 탐구하는 형식을 취한다.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한다: 그 대화편들은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이름들임을 전제한다.

2) 콰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의미는 그것이 지시대상과 분리되고 그 단어와 결합될 때 본질이 되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본질은 그것이 단어와 분리되고 대상과 결합될 때 의미가 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의미되는 어떤 것은, 최소한 때때로라도, 단순히 표현이라는 면에서가 아니라, 다소간 세계의 질서에 알맞는 내용의 일부라는 면에서, 그러나 그 자체로 그 본성이 발견에 있는 그러한 세계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항목이 된다. 우리는 세계를 불완전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말들의 의미를, 혹은 그 중의 일부를 불완전하게 이해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나의 표현으로써 의미하는 어떤 것, 그것의 공공연하거나 또는 명백한 내용과 우리가 만일 그 표현이 지시하는 본질을 이해했다면 의미해야 할 그러한 어떤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에우튀프론은 분명 그가 일상적으로 경건을 통해 의미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는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을 말한다; 숙고를 거쳐서, 그는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더욱 숙고한 끝에,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 중 아무것도 경건의 본질을 진술하지 않는다. 그의 이해력과 그의 의도 사이에, 그가 경건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설명과 그가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 만일 이따금 의미한다는 것이 이름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름지어지는 것이 본질이라면, 의미되는 것은 종종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표일 것이다.

3) 만일 때때로 의미함이 본질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본질에 대한 앎이 종종 불완전하다면, '제각기 모든 것이 그것인 것으로 질서지어져 있다'는 것은 이상 언어에 대해 참이 아닐 것인데, 왜냐하면 단어들을 지배하는 사용규칙들이 필연적으로 그 단어들이 그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규칙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해결책은 본질들을 부정하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는 거듭해서 사물의 본성에 속하는 윤곽을 추적하고 있다고, 그리고 단순히 우리가 그를 통해 본성을 바라보는 그 틀의 주변을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면이 우리를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언어와 우리에게 변치 않고 그것을 반복하는 듯이 보이는 언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단어를 사용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노력할 때,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 단어가 도대체 실제로 그것의 본래 집인 언어 게임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가? - 우리가 행하는 것은 단어들을 그 형이상학적 사용으로부터 우리 일상의 사용으로 되돌려 가져오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반대하고 있던 것을 아주 잘 알았다. 만일 이 관점이 참이라면, 소크라테스적 변증이 기대고 있는 그 전제들은 거짓이다. 그래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적 주장들도 거짓이다: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 용기가 지혜라는 주장, 경건이 올바름이라는 주장. 그 말들은 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 현대 영어에서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은 지혜롭지 않고도 용맹할 수 있으리라 주장함에 있어서, 그의 언어 사용 규칙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언어적으로 독특한 사물들의 결합은, 그것이 만약 언어에 대한 단순한 전제적 입법일 것이 아니라면, 본질의 관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본질과 일상언어

1)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단어들의 일상적 사용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의 사용이 근거하는 것들에 있어서 특징들을 탐구해 들어가는 것이다. 한 단어의 사용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 단어를 지시하는 특징과 연관된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사물들의 본성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면, 그로써 우리가 완전한 암흑 속에 있다는 것이 두따르진 않는다. 그러나 본질과 사용 사이의 관련은 경험적이다: '기준'이라는 용어의 제한적 의미에서, 단어가 지시하는 본질은 그것을 적용하기 위한 기준이고, 유일하게 신뢰 가능한 기준이다.

2) 이러한 관점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품에서 말하는 것을 배웠고, 말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그 언어의 다른 발화자들이 확실하게 동의할 명백한 경우들이 그 용어들의 예시들임을 예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 용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물론 그 용어의 사용을 위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 사용을 관찰함으로써 기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주어진 한 행위가 경건하다는 것을 '경건'이란 단어에 제공할 기준을 제시할 수 없어도 완벽하게 잘 알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종종 기준보다는 사례가 제시됨을 통해서 어떤 것이 그것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을 더 잘 배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그러므로 오해된다. 의미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사례에 호소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반대한다는 데에 이어서 그것은 실수이다; 같은 식으로 의미는 사례들이 결정될 수 있기에 앞서 반드시 고정되어야만 한다고 전제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실수이다. 이러한 실수들 때문에,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의미에 대한 충분한 기준이 발견됐을 때 결정에 대한 아무런 건전한 수단도 가지지 못하고 부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째서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이 그렇게나 일관되게 실패로 끝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잘 받아들여질 것이다. 게임의 규칙들은 아무도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게끔 그렇게 정해져 있다.

3) 확실히 이러한 반대에 핵심이 있다. 에우튀프론은 사례에 호소해서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발화자들이 이상적으로 그 용어를 가지고 이해했던 어떤 것에 호소해서도 경건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러면 그는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앎에 대한 분명한 문제가 하나 있다. 때마침, 『메논』에서 플라톤이 탐구의 역설로 진술하였던,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과 같이 상기의 원칙으로 해결했던 한 문제가 있다.

4) 그러나 만일 앎의 문제가 분명하다면, 또한 그것은 분명 실재의 문제인데, 왜냐하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의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정의될 수는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는 그저 옳을 뿐인게 아니라 확실하게 옳기 때문이다. 만일 a가 F의 한 예라면, 그리고 만일 그에 대해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a가 정의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라면, 그리고 만일 b가 F의 한 예라면, b일 것은 a일 것이다; 그리고 a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정의하므로, F일 것은 a일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번갈아서 a는 F의 예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F일 그러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F는 그 자신의 예시이자 유일한 예시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F'를 대체하고, 그에 따라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이라는 형요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이라는 추상명사를 대신한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면, 그 특이함의 원천은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무엇이 이러저러한 용어로 경건한 것을 경건으로 정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인가?

5) 동일한 고려들이 경건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주어진 어떤 것이든 그것이 경건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대신한다. '나는 a가 F임을 안다'는 명제와 '나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는 명제는 양립할 수 없다. 만일 내가 a는 F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a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의 일례라는 것을 안다; 만일 내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그것의 한 예시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르고, 만일 내가 a가 그것의 일례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F의 한 예시라는 것을 모르며, 그러므로 a가 F라는 것을 모른다. F일 그러한 어떤 것이 a가 F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이라는 것이 뒤따르는데, 오로지 a가 그 특징에 대한 하나의 예시인 그 특징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a가 그 특징의 일례라고 누군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주어진 어떤 것이 경건하다는 앎에 선행한다.

6)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한 이러한 방어가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주사위를 조작하다) 주장할지 모른다. 그 주장은 어떤 것이 무엇임을 정의하는 것과 아는 것에 관련된 관념들 - 그것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적 실수인 - 에 달려 있다. 철학적 탐구의 고유한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사용의 분석이다. 『에우티프론』에서 세워진 그런 종류의 탐구는 그런 분석이 아니고,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일부 제한적 의미에서 (의심할 바 없이 신실하게) 기만이다.

7) 그러나 기만에 대한 그 주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에우튀프론』의 변증이 특별히 다루고자 시도하는 문제를 고려해 보자: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분쟁의 해결. 우리는 사례에 호소함으로써 도덕적 용어들의 사용을 위한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제안된다.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로서, 기준의 결여는 사례들이 빗나갈 때 정확하게 감지된다. 사례들의 비일관성은 기준의 비일관성에 대한 조짐이다: 만일 당신의 기준이 나의 사례를 예외로 한다면, 나는 나의 사례를 거부할 것이나, 나는 마찬가지로 당신의 기준도 거부할 것이다. - 많은 것이 의심의 여지 없이 누구의 소가 뿔에 받혔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모순 여부). 만일 도덕전 논증에서의 호소만이 사례들로부터 추출된 사용기준일 것이라면, 에우튀프론과 그의 아버지는 각자 논리적으로 난공불락의 위치에 있다. 도덕적 분쟁을 해소할 궁극적 방법이란 크롬웰 류의 담론에 의지하는 외에 아무것도 없다 - 우리들의 원칙을 교황의 입김과 두드림들로 정통이라 증명하는 것이다.

8)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전망은 지나치게 암울한 것이다. 도덕적 의견 불일치, 그것이 아마도 주장될 것인데, 그것은 오로지 경계 경우들에서만 발생하고, 분명한 사례들에 호소함으로써 해소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F들이 깔끔하게 그 안에 자리잡히고 모든 비(非)F들이 정확하게 묘사된 원 없이 위치되는, 일종의 객체화된 벤다이어그램으로 상상하면서, 태평스럽게 F인 것들의 계층에 대해 말한다. 진실은 수학적 언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일상 언어에서 가장 일반적인 용어가 그것들을 그 안에서는 그것들의 적용 조건들이 불분명한 반영(半影)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사례는 분명히 F인 것과 분명히 F 아닌 것 사이에 그 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범위, 준연속체가 있다는 그런 방식에서 사례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것은 컵이다, 그리고 저것은 그릇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저러하게 부르거나 아무것으로도 부르지 않거나 그 둘 모두로 부를 어떤 것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의심스러운 경우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경우들을 분명하게 하기를 기대할 것이고, 경우들을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누구라도 그가 그것들을 논의하고 있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내가 지금 그로부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것이 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컵'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어떤 것을 모른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도덕적 용어들도 동일하다.

9) 이것이 참이라면 그건 즐거울 일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도덕적 용어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지적하였듯 '사람들에게 눈에 띄게 만드는 어떠한 상도 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경험적 용어들과 함께일 것이다, 선악의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들, 한 사람의 분명한 경우가 두번째 사람에게 반영을 드리울 수 있고 세번째 사람을 덮으며, 이것이 단순히 주변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추론이 그것을 가지고 다루어야만 할 가장 핵심적 문제들에 관한 것이라는 특이점을 가진다. 이러한 점을 사례들을 들어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불필요할 것이다 - 다행스럽게도 -; 비참하고 소란한 세기(이 책은 1970년대에 출판되었다)에, 독자는 그 스스로 감당하도록 남겨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마도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이 역설이리라거나 혹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할지라도, 악이 실어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지적하는 모험을 할지도 모른다. 만일 선과 악에 대한 물음들이 사람들이 언어로 하는 게임들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또는 태도나 관습 혹은 취향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도덕적 앎과 같은 어떤 것이 있다거나 혹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앎이 본질에 대한 식별에 존립한다는 『에우튀프론』의 주장은,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할지라도, 확실히 기만은 아니다.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함이 없이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 이름지어지는 단 하나의 것(Unum Nomen Unum Nominatum)


1) 지시적 의미 이론들은 종종 특유한 필연적 귀결, unum nomen unum nominatum(the sole name the sole named)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다양한 비판자들은 그들이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이러한 전제를 감지했다고 생각해 왔다. Mr 리차드 로빈슨은 '만일 소크라테스의 물음(X는 무엇인가?)이 답변을 허용하는 정당한 물음이라면 … 우리는 반드시 X라는 단어가 단일한 뜻을 가진다고 전제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로스 교수 또한 소크라테스적 물음에서 이러한 함축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플라톤은 이름의 의미에서 모호함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기로는 그가 이것을 다소 드물게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했고, 겉보기에 가장 순전한 이름이 가질 의미조차도 변화하는 그 의미의 음영을 완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추론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을 묻고 답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는 더 나아가 경건이 하나의 꼴이나 본질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들은 '경건'이나 '경건함'과 같은 단어들이 상이한 의미로 사용된다거나 사용될 수 있다거나 하는 물음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 잘못된 추론은 소크라테스는 다른 것들 중에서 우리가 같은 이름으로 상이한 것들을 부르는 것과 그렇게 불리는 것들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설명하기 위해 경건이 본질이라고 전제한다는 흐릿한 참을 가장한다. 이것은, 만일 그것이 일상언어에 대한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각 단어에 대해 하나의 유일하게 정확한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모호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umun nomen unum nominatum을 수반할 수가 없다.

2) 그것은 로스 교수와 Mr 로빈슨이 추정하는 것처럼 절대의미와 모호의미 사이에 엄격한 괴리를 시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의미에서의 같음과 의미에서의 다름이 배타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양자택일적이라 생각하기 쉽다. 만일 의미가 지시라면, 그 결론은 보편개념들에 대한 날카로운 이론이다. 그 이론에서 각각의 중요한 단어는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동일한 보편개념을 도입하거나, 서로 다른 보편개념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들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중심 주위로 우위성과 후위성의 질서에서 조직화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람들이 올바르고 행위들이 올바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체』(Ⅳ, 443e-444a)에서 올바른 행위들은 사람들 안에 영혼의 조건으로서 올바름을 산출하도록 지키거나 돕는 그러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행위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이란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사람에게 적용되는 의미로 정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뒤따른다. 그래서 그 형용사는 우선 사람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고, 파생적 의미에서 행위에 대해 사용되며, 이것은 절대의미도 모호의미도 아니며, 어원유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꼴, 기본 사용과 파생 사용 양자에서 도입되는 동일한 꼴이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방식으로 도입될 따름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초기 대화편들에서 어원유래에 대한 사실을 인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것이 그렇다는 강력한 암시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꼴들에 대한 이론과 용어들의 어원유래적 사용 사이에 어떠한 양립불가능성도 없다고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중기 대화편들에서 꼴들 그 자체는 특정 종류의 어원들에 속하는 우선 지시되는 것들이 된다.

3) 만일 umun nomen unum nominatum이라는 꼬리표가 좌우간 초기 대화편들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상 언어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어원을 제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언어의 개선을 위한 이상, 어휘의 조화가 세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요구로서 가장 잘 받아들여진다. 『크라튈로스』에서 하나의 이름은 베틀의 북과 유사한 도구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날실과 씨실을 가르면서 북으로 베를 짠다; 바로 그렇게, 사물들을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에 따라 나누면서 이름을 가지고 가르친다(388b-c). 그리고 보통의 아무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들어지거나 부숴질 수 있는 어떤 모형이 아니라 북 그 자체의 꼴을 보는 목수에 의해서 북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이름들은 아무개가 아니라 작명가에 의해, '모든 공예가들 중 가장 드문' 그 기술자에 의해 주어져야 한다(389a); 작명가는 각각의 이름을 그것의 적절한 사용에 맞추면서, 주어진 이름들 속에서 이름 그 자체의 꼴을 볼 것이다(389d). 그리고 목수의 작품의 가치를 직조공이 판단할 것과 같이, 그렇게 변증가는 이름들의 부여자에 의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것이다(390c). 플라톤주의는, 일상언어에 대한 그 태도에 있어서, 내재적으로 수정주의적이다.

4) 이름들을 부여하는 이러한 사업은 umun nomen unum nominatum에 관련되는데, 그렇지만, 이제껏 제시된 어떤 것과도 다른 의미에서 그러하다. 『메논』(71e 이후로)에서, 메논이 탁월함을 정의하도록 요구받을 때, 그는 그 각각이 고유한 정의를 지닌 탁월함들의 목록으로 응답한다: 사내의 탁월함은 폴리스를 돌보는 것이고, 친구들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며, 적들에게 해를 주는 것이다; 여성의 탁월함은 그녀의 남편에게 명령하고 또 그 남편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노예들, 노인들에 대한 다른 탁월함들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답변을 거부한다: 메논은 그에게 한 무리의 탁월함들을 주었고,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그 모든 것들에 있어서 동일한 하나의 것, 하나의 탁월함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것은 물론 단 하나의 것이 있다는 것을, 더욱이 'x의 탁월함'과 'y의 탁월함' 등에 대해 다양한 '~의 탁월함들'에 공통된 '탁월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른 식으로 보자면, '탁월함'은 총괄적 단어도 아니고, 불완전한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의 이름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내들의 탁월함과 여성들의 탁월함에 대해 말할 때, 어째서 우리가 어원들도 단순히 얼버무리는 것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취해질 수 있다; 그러나 『메논』과 『테아이테투스』 모두에서 그것은 오히려 보편성의 더 높고 더욱 흥미로운 단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취해진다. 자신의 일을 알고 있는 작명가는 짐작컨데 그것을 마음 속에 품을 것이다.


본질인과성

1) 꼴들은, 로크의 말을 빌리자면, 실재적 본질이며 명사적 본질이 아니다. 꼴들은 실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명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명칭들이나 단어들의 일상적 의미들에 대한 탐구는 그 탐구가 꼴들에 대한 탐구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꼴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그것들이 실제 사물들인 바의 그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본질은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인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의 존재에 대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실재는 내재적이며,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사물들의 발견 가능한 특질들이 의존하는 사물들의 구조는 그 사물들의 본질로 불릴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형성으로부터 명백하듯이, 그 단어의 적절한 의미이다; 그 기본 표기법에 있어서 적합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esentia.

로크의 설명에 의해, 본질은 '어떤 것의, 그로써 어떤 것이 그것인 바의 것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개별자의 실체적 꼴을 그 개별자의 실체와 동일시하면서, 본질을 본질을 가진 것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는 로크가 물려받았던 그 전통을 기초하였다.

2) 그러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 있음에 대해 그 꼴들이 꼴들인 것의 있음이 아니다. 하나의 있음인 보편개념은 다수성의 있음이 될 수 없다 - 정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보편개념들로부터 실체적 꼴을 구별하는 데에로 이끌렸는지의 이유이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어떤 주어진 경건한 사물이나 경건해 보이는 행위의 있음이라고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경건이 그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그러한 것임을 시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 어휘를 조금 빌리자면, 경건이 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3) 『대히피아스』에는 이 전제를 명백하게 만드는 논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히피아스가 올바름이 어떤 것이다(ἔστι τι τοῦτο)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에 동의하도록 이끄는데,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지혜로운 것 등등의 그러한 것들은 만일 그것들이 어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의한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기 때문에, 히피아스는 아름다움도 어떠한 것이며, 그것들이 다른 말들이나 생각들 또는 개념들에 의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4) 이 논증은 분명히 『대히피아스』에만 놓이지만, 그것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각각의 초기 대화편들에 의해 가정되는데, 왜냐하면 꼴들이 본질들이라는 그 전제는 변증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꼴들은 정확히 보편개념들이고 표준들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바의 것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5) 플라톤이 매우 자주 꼴들과 그 꼴들을 지닌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화하기 위해 인과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꼴들이 본질들이기 때문이다. 『뤼시스』(221c)에서 소크라테스는 '원인이 파괴될 때, 그 원인이 그에 대한 존재를 지속시키는 원인인 그러한 것은 물론 있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원인이다: 경건의 현존은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현존에 필수적이다.

6)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과 그 꼴들의 예시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한다. 꼴들은 그 예시들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또는 그 예시들'에 현전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들에 '덧붙여져'야 할 것으로, 아니면 그것들'에' 있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 예시들은 다른 한편으로 꼴들을 '가지거나' '허용하거나' '취하거나' '나누어 가진다'. 이러한 은유들 전부 일상언어에 기초된다. 그것들은 정말로 평범하게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명사들과 함께 사용될 것이다. 영어에서 한 행위에 용기가 있다(there is courage in an action)고, 또는 올바름의 현전이 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내의 도량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7) 은유들로서, 그리고 친숙한 그리스어로서, 이러한 용어들은 소피스트적 논쟁들의 재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디오니소도루스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움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잠시 망설인 후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όν)와 다른 것들이고,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들 각각은 그 안에 현전하는 어떤 아름다움(κάλλος τι)을 지닌다고 말할 때, 디오니소도루스는 재빨리 주도권을 잡아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소 한 마리가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소로군요. 그리고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은 디오니소도루스고요'(301a). 소크라테스는 '맙소사'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현전'은 은유 - 혹은 최소한 많은 용례들을 지닌 단어 - 이고 잘 다룰 방법은 그것의 의미에 달려 있다.

8) 문제가 되고 있는 '현전'은 특수한 종류의 것이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나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떤 것에 현전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을 떠맡고,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그의 논의를 갑작스럽게 중단한다. '일부 사물들은 그 사물들에 현전하는 그러한 것 그 자체일 그런 것들이다;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만일, 예를 들어 금발이 하얗게 칠해진다면, 흼은 그 머리카락에 현전할 것이지만, 그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흴 적에, 흼은, 그 머리카락이 그래서 하얗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머리칼에 현전할 것이다. 앞서의 경우, 흼은 머리카락에 현전한다. 뒤의 경우, 머리카락은 '흼의 현전에 의해 하얗다'.

9) 어떤 것이 흴 때 그 의미에서 흼이 그것에 현전하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도구적 여격에 의존한다. 이러한 장치는 초기 대화편들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고, 사려있는 자들은 사려에 의해 사려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대히피아스』(300a)에 따르자면 아름다움 것들을 아름답도록 만든다(ποιεῖν).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어법과 결부된다. 이온은 그가 호메로스를 기릴 수 있음이 앎에 의한(도구적 여격)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온』541e).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건강에 의해(ὑπό와 동작주의 속격) 유익해진다고 생각한다(『크리톤』280a). 사려는 만일 그 사려가 그들에게 현전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좋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나쁜 것이다(『카르미데스』161a).

10) 그러나 비록 이러한 표현들이 일상언어에 결부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종종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Ποιεῖν은 πάσχειν에 속하는 규칙동사이고, πάσχειν은 규칙적으로 '자격지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ποιεῖν은 '자격을 둠'의 의미로 규칙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혜가 사람들을 복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지혜가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또는 지혜가 그에 의해 사람들이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논리적 차이가 있다.

11) 이러한 표현들은 인과적이다 - 흔히 당구공들의 부딪침과 연관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적 원인에 대해 말하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 아름다움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이다: 아름다움의 현존은 다른 것들의,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인 한에서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대히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물들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가 현존해야만 아름다우며,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했을 때, 그 이유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그러한 어떤 것(δι᾿ ὅ)이 현존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12) 그것들이 그에 의해 어떤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인 바의 그러한 본질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꼴들은 원인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파이돈』(100c)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것들이 아름다움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케베스에게 그가 이러한 종류의 원인(αἰτία)을 허용하는지 묻는다. F. M. 콘포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라는 구절은 … 모호하다. '이유'는 '설명'(αἰτία의 관습적 용법)을 의미할 것이다. 그 전제는 그래서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진술과 동등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나는 말들의 그 형식을 바꾸어 말함으로써 대체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명제의 분석이 아니라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론은 그래서 이 사실이 (1)특정한 가시적인 것, 이 장미, (2)아름다움(Beautiful or Beauty), 그리고 (3)우리가 '~에 참여한다'를 대체할 수 있는, '~는 ~이다'로 표현되는 그 둘 사이의 관계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으로 구성된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오로지 하나의 설명만을 가진다: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장미가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존립하게 할 어떤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어느 관점에서든 우리는 한 명제에 대한 분석이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분석만을 가질 따름이고, 참인 진술의 이유나 그 사실의 현존에 대한 원인을 가지지는 않는다.

첫번째 주장은 제외될 것이다. 당신은 말을 바꿈으로써 오로지 본래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무지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명제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 그 누구도 그 표현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줄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αἰτία가 말 바꿈에 대해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고대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가 말 바꾸기를 시사하리라는 주장은 그래서 불충분하다.

13) 콘포드가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라고 부른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사실이라면, 그가 인정하듯, 어떤 식으로 분석이 말 바꾸기와 다른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경우든, 이것은 플라톤의 핵심을 놓친다. '이 장미는 아름답다'와 '이 장미는 아름다움의 꼴에 참여한다'는 실로 등가의 진술들이다 -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확히 사실들의 구조에 있어서 존재론적 우선성에 대한 이론이지, 명제 등가들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이 장미를 아름답다고 부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사물에 세례를 내리는데 그것에 있어서 그 특징 때문이고,(그 특징 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세례의 정당함을 보장하는 그 특징의 현존 때문이다. 꼴 자체는 그렇지만 오로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만일 그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장미가 아름다운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그 꼴은, 꼴의 현존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꼴은그 장미에 있어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현존뿐만 아니라 토양의 조건, 그리고 기후, 정원사의 기술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충분조건은 본질인과만이 아니라 작용인 또한 필요로 한다.

14) 그래서 꼴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것들인 바의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원인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세계가 그 세계인 어떤 것이 아니었으리란 의미에서 말이다.


지시의 재고

1)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하는데,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대상들을 명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로부터 초기 대화편들이 이제는 이전보다 덜 널리 주장되는 그 명제, 어떤 것을 기술한다는 것은 서술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를 전제한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이 마지막 명제는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명제와 관련되어 왔다: 잘 구성된(혹은 잘 분석된) 문장들의 구조는 반드시 문장이 표현하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일대일 혹은 2방향 유일 상응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명제이다. 잘 구성된 문장들은 술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문장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은 반드시 유사-술어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 술어들이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더 나아간 단계이고, 그러한 술어들은 그것들을 명명한다.

2)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하지 않은 명제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더욱이 그것과 관련된다고 거의 이야기될 수가 없다; 그 대화편들은 특정한 어떤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되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파이돈』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일이 하나의 기술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꼴들의 각각은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 꼴들의 제 몫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라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기술하는 것은 그에게 올바르다고 명명하는 것이고, 좌우간 올바름을 명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름이 비록, 올바르게 적용된다면, 소크라테스가 올바름에 참여하기 때문에 적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3) '올바른'과 '올바름' 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메이아적 구별이었을 것을 사용하면서, 동근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예시이다: '사물들이 상이한 어미들로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들의 이름을 획득할 때, 그것들은 동근어들이라 불린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문법학자(grammarian)는 그의 이름을 문법(grammar)로부터 획득하고, 용감한 자들은 그들의 것을 용감으로부터 취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를 동원어적으로 명명한다: 그는 그의 이름을 올바름으로부터 얻는데, 어미상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참여하고 있는 꼴의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그 꼴로부터 얻은 이름과 문법적 어미에 있어서 다를 필요가 없고, 플라톤의 고유한 사용에 따르고 소크라테스가 어원적으로 명명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르다'와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참여한다'는 등가 명제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반한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동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는데, 하나는 어원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것들에 대해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어원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미는 지시를 필요로 한다; 지시 대상들은 그렇지만 어원이 그것들의 관련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구별된다.

4) 종과 유들은 근원적인 반면에 어원적으로 그것들을 도입하는 서술들은 파생적이라는 것이 이 관점의 결론이다: 용감한 자들은 용감으로부터 이름지어지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이것이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종과 유들을 논리적(혹은 어쩌면 비논리적) 구조로, 기술들 그 자체인 의미의 근원적 매개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답변은 일대다(一對多) 논증이어 왔다. 그 논증에 대한 전제들은 현대적인 차림으로 존 오스틴에 의해 경탄스럽게 진술되어왔다 - 그는 물론 그 논증의 결론에 동의하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좌우간 언어를 통해 성취하는 그런 종류의 소통일 것이 있다면, 의사전달자('화자')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피(彼)의사전달자('청자')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징들의 축적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이 '말'이라 불릴 것인데, 물론 비록 그것들이 우리가 보통 말이라 불러야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일 필요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다 - 그것들은 신호기(信號旗) 따위의 것일 터이다. 또한 말과는 다른 어떤 것, 말이 그에 대한 소통을 위해 사용될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세계'라 불릴 것이다. 어째서 세계가 말을 포함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진술 그 자체, 그에 대해 어떤 특수한 경우이든 세계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진술 자체의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다. 더욱이, 세계는 유사성들과 부동성들(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는)을 내보여야만 한다(우리는 관찰해야만 하고): 만일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될 수 없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면, 말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서 - 물론, 마찬가지로 만족될 다른 조건들도 있다) 두 가지 관습적 방식들이 있어야만 한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황, 사물, 사건 등의 유형들을 가지고 말과 관계하는 기술적인 관습적 방식들(= 문장들). 세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상황들 따위를 가지고 말과 관련하는 지시적인 관습적 방식들(= 명제들).

오스틴은 보통 일상언어철학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어떤 표어들 아래에서도 행진하지 않았고 어떤 장단에도 맞추지 않았으며, 만일 언어가 그 세계에 대한 것일 터라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 기술하는 위의 문단은, 만일 내가 실수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투명한 형이상학의 단편이다. 오스틴은 주석에서 계속해서 첨언한다:

'~를 가진 일종의 ~이다'라는 것은 '~을 가진 그런 표준적 사태들과 충분히 유사한 ~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참된 하나의 사태일 하나의 진술은 자연적 관계인 특정한 다른 것들과 유사해야만 하고, 그러나 또한, 더 이상 순수하게 자연적 관계는 아닌 동일한 '서술' 가치에 대해 충분히 유사해야만 한다. '이것은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그런 것들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이것은 붉다고 불리는 그런 것들과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사물들이 유사하다거나 또는 심지어 '정확하게' 유사하다는 것조차 나는 문자 그대로 이해할 터이지만, 그것들이 같다는 것을 나는 문자 그대로 알 수 없다 - 그것들을 똑같은 색이라 부름에 있어서 관습은 그것들이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색에 주어질 이름에 대한 관습적 선택에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유사성과 부동성은 상이한 측면들에서 획득하는 관계들이다. 크리켓 공과 야구공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고 색에 있어서 부동하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이 이것이 그러하다는 측면들을 구별함이 없이 유사하고도 부동하다고 진술할 수는 없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세계 속의 사물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가 좌우간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독립적으로 획득하는 유사성과 부동성이 자연적 관계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관계들이 그 덕분에 획득하는 그러한 특징들 - 형태적 특징들, 색채적 특징들 등 - 이 언어적 관습의 문제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거의 이치에 맞기 어려워 보인다. 만일 그 관계들이 '자연적'이라면, 그것은 그 덕분에 그것들이 유지하는 그러한 특징들도 동일하게 그렇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그러한 특징들은 기술들이 아니다: 우리는 크리켓 공과 야구공이 모두 구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구체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 혹은 구형일 것임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물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기술되는 그 사물의 특징 덕분에 유지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용감한 자들이 용기로부터 이름지어지고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5)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유사성들과 부동성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특징들의 현존을 추론해내는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를 발견하고 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 문제를 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언급들은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의 경우 그 추론이 의지하는 그러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어떤 것을 한다. 그렇지만 초기든 중기든 대화편들에서 유사성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도출된 꼴들에 대한 우리의 앎은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사실상 유사성이 획득한다고 확신할 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을 통해서만 있기 때문이다.

-蟲-
꼴들의 영역의 구조

1) 만일 종의 유에 대한 관계가 꼴들의 구조에 기초된다면, 그 구조는 반드시 계층적이어야만 한다.

2) 이것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 관점은 반대에 부딪쳤다. 예를 들어 체르니스 교수는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체에 대한 구성부분으로서 또는 종에 대한 유로서 어떠한 이데아도 없다. …플라톤은 어디에서도 이데아들 사이에 유와 종의 구별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라고 부른 것, 종차라고 부른 것, 그리고 종이라고 부른 것은 그에게 모든 별개의 관념적 단일체들이다, 각기 다른 것들의 현존을 수반하거나 다른 것들과 양립 가능한 측면들을 지닌 다른 것들 보다는 가기 다른 것들, 그러나 남김없이 다른 것들로 분석될 수는 없는 독립적 본성인. 플라톤은 그래서 분절을 사용하여 이데아들의 세계에서의 존재론적 계층을 산출할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소피스트』와 『정치가』, 분절에 대한 안내서로 여겨지게 된 그 두 저술들은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오히려 발견적 학습법을 의미했고, 한정된 이데아를 탐색함이 용이하도록 하는 수단을, 다른 이데아들로부터 그 이데아를 구별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의 함축들과 동일성을 의미했다는 것과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이데아, 이데아의 기원, 혹은 그것의 구성 요소들의 '구조'를 묘사하는 것으로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체르니스 교수는 일부 꼴들이 어떠한 부분들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서 단순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단순하다는 것을, 그리고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다는 것을 또한 주장한다. 그의 의견들은 후기 대화편들을 겨냥하고 있고, 명확하게 『소피스트』에서와 같은 종류의 집단에 속하는 원칙을 겨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초기 대화편들의 해석으로서도 잘 맞는다.

2) 이러한 관점에 반대되는 그 저술들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유나 혹은 그에 대해 꼴이 검토 아래에서 일부인 그러한 전체를 명시할 것임을, 또는 그 꼴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임을 진술하거나 시사하는 모든 저술들이다. 그러한 저술들은 : 『에우튀프론』 11e-12a, 『프로타고라스』 329c와 그 이후, 『메논』 74-6, 『라케스』 190c-d, 199e이다. 이러한 구절들 모두 유 아래에 종을 포함하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그래서 꼴들의 계층적 배열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지 않고 단층화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3)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저술들, 그리고 후기 대화편들의 다른 저술들이 그 저술들의 의도가 발견적이라는 점을 제쳐두고 세워진다고 제안한다: 그 저술들은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으로 전제를 반성한다. 그러나 탐구의 방법은 그 탐구의 핵심-문제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거나 적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꼴들이 상호에 대해 종과 유처럼 자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발견의 의도에 유용하다면, 어째서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의 가능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 확실한 대답은 그 전제가 꼴들의 실재적 구조에 답한다는 것이다.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대답에 반대하면서, 그 대신에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부는 방법론과 설명을 요하는 반대 사이의 동일척도불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실상 아무런 유들도 그리고 어떠한 계층도 없을 때, 어떻게 꼴들이 유들 아래에서 포함가능한 것들이고 발견적 기능을 제공하도록 계층적으로 배열된다는 전제가 가능한가?

4) 더 큰 어려움도 있다. 초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은 ποῖόν τι의 물음보다 τί의 물음이 우선한다거나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체르니스 교수가 제안하듯 오로지 꼴들 사이에서의 관계들만이 차이, 포함, 양립의 관계들이라면, 이러한 구별은 도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래서 만일 꼴 F가 그것의 함축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하지 않다면, 'F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F는 오로지 함축들과 양립들의 관계들에 의해서만 특징지어질 수 있고, 그러한 관계들 중 특정한 것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본질적인 것임을 뒷받침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οὐσία를 πάθος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F가 그것의 포함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시된다면, 후자는 그것이 F일 그러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 중의 어떠한 것들이든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보다 결핍하고 있거나 다른 것이라면, F는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이 아닐 것이고,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과는 다른 것일 것이다. 즉, 동일성은 '내적 관계들'로 이끈다. 그리고 양립가능성과 함축이 모든 각각의 꼴을 다른 모든 각각의 꼴들에 관련시키기 때문에, F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각각의 꼴과 관련될 것이다: 진리는 전체일 것이다. 스페우시푸스는 나중에 이러한 단계에 매우 근접하게 나아갔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플라톤은, 최소한 초기 대화편들에서는, 그렇지지 않은데, 왜냐하면 πάθος와 οὐσία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을 그 단계는 부정하기 때문이다.

5)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소크라테스가 물었고 또 그것이 대답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던 것처럼 물어지고 또 대답될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ποῖόν τι의 물음들로부터 구별이 유지될 것이라면, 꼴들 사이에서 포함들과 양립가능성 그리고 그것들의 부정들의 관계들 보다 더 나아간 어떤 관련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한 관련의 본성은 『메논』에서 올바름은 탁월함 자체가 아니지만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주장에 의해, 『라케스』에서 용기는 전체로서의 탁월함에 속하는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올바름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제시된다. 그 관련은 종과 유 사이의 관련이다: 한 부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 부분의 위치를 그것을 한 부분으로 하는 전체 속에서 정립해야만 한다.


탁월함의 단일성

1) 탁월함들이 유 속에 그것들을 정립시킴으로써 한정가능하다는 관점은 또 다른 초기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와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이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명제는 플라톤의 생애 마지막에 그의 생각을 차지한 것이었고, 그것은 종종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프로타고라스』의 교훈은 모든 탁월함들은 그것들이 앎이나 지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은 탁월함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정의로 고수되어 왔다. 솔직히, 그것은, 종과 유의 비동일성을 시사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가 아니다.

2) 『프로타고라스』에서 앎의 우선성은 단호하게 내세워진다(352b-c):

대부분의 사람들은 앎이 명령의 힘도 권위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앎을 가질지는 모르지만 그 앎은 제압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분노에 의해, 그리고 기쁨과 고통에 의해, 가끔은 사랑에 의해, 그리고 자주 두려움에 의해서 - 비록 앎이 어떤 가난한 노예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격정들에 의해 제멋대로 끌려다닐 것과 같이 말이다. 그것이 당신의 관점 아닌가, 프로타고라스? 아니면 당신은 오히려 앎이 아름다움과 능력, 그리고 그 무엇도 꺾을 수 없는 것에 속하는 어떤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텐가; 나쁨으로부터 좋음을 구별해 내기만 하면, 지상의 그 무엇도 그러한 앎을 가진 자를 그 앎 - 그의 조력자로 충분한 지혜 - 과 반대로 행동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겠는가?

이 구절은 의심할 나위 없이 소크라테스 그 자신의 믿음을 대변한다: 탁월함은 앎이다. 그 누구도 제 뜻으로 또는 알면서도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3) 만일 앎이 탁월함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탁월함이 앎을 수반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탁월함과 앎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점이 따르지는 않는다. 동치는 동일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치는 더 넓은 논증의 부분으로 나타난다. 그 논증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한 것에 대한 모든 이름들이라는, '용기',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탁월함'은 동의어들이라는(349b-c) 점을 받아들이도록 이끌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앎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4) 하지만 아직 이러한 방식에는 어려움들이 있다. 우선, 그 설명이 탁월함과 앎을 동일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능력의 동일성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이다. 만일 그 탁월함들의 명칭들이 동의어들이라면, 그 탁월함들이 지혜로 화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어떤지, 지혜를 포함한 그 탁월함들이 경건이나 올바름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임의적이다. 물론, 탁월함은 앎이나 지혜이다; 그러나 그래서, 탁월함은 용기나 경건, 또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동의어에 대해 대칭적인 관계이다.

5) 그 동일화 방식에는 두번째 어려움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들이 구별된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네 가지 논증들을 내놓는다. 첫번째(330b-331b)는 올바름과 경건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두번째(332a-333b)는 사려와 지혜의 단일성을; 세번째(333d-334a)는 그 결론에 도달하지 않고 중단되는데, 어쨌든 올바름과 사려의 단일성을 주장할 것이었다. 거기에서 남은 대화편을 통해 중단 없이 추적되는 그 물음이 다시 말해진 다음(439b-d) 긴 중간극이 따른다. 마지막 논증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용기와 지혜의 단일성을 증명할 것을 자임한다(349d-360e). 만일 탁월함들의 단일성이 탁월함들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해진다면, 이러한 논증들 각각은 논리적 오류이고, 그것들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그리고 창피스럽도록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그 문답의 고비를 넘긴다. 프로타고라스는 지적인 사람으로서 도처에서 묘사되고, 말들을 다루는 방식들에 있어서 지혜롭지만,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을 다룰 줄 모른다. 그의 실패는 물론 말의 단련에 있어서 기술 부족 탓이 아니다; 그것은 소피스트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비록 그가 탁월함을 가르치리라 주장할지라도, 탁월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그 사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은, 만일 그 논증들이 공허한 오류들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결론을 가리키는 쪽으로 그 논증들이 행한다고 의미되는 것으로서 이바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6)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타고라스』도 실패로 끝나고, 그것은 익숙한 이유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는 먼저 탁월함이 무엇인지 결정함이 없이는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점은 추론할 것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답의 변증에 대한 명쾌한 요약정리를 되보여준다 (360e-361c):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탁월함에 관련한 것들을 가지고 바로 그것인지, 탁월함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 밝혀내려는 바람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묻는다. 왜냐하면 나는 만일 그것이 한 번만 보여진다면 당신과 내가 논의한 물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가 말끔하게 정리되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논증의 결과는 그것이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혀를 가졌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 둘 다 뭐 이런 바보들이 있나,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분명히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없다고 말한 소크라테스 당신은 지금 바로 그 반대의 것을 설득하려 들고 있다, 모든 것 - 올바름도 사려도 그리고 용기도 - 은 앎임을 보여주려고 애쓰면서, 그걸 보여줌으로써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 는 것이 따라나오는 것을 말이다. 만일 그것이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하려 애쓰는 것처럼 앎과 다른 것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만일 그것이 당신 주장처럼 전적으로 앎일 것이라 증명하는 것이 된다면, 소크라테스, 만일 그것이 가르쳐질 수 없다면 더욱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서 프로타고라스가 조금 전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고 전제했는데 지금은, 다름 아닌 앎을 피함으로써, 그것이 무엇보다도 최소한 가르쳐질 수만은 없을 것이도록 그렇게, 그 반대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 프로타고라스, 내가 주장된 이 모든 것을 앞뒤로 볼 때, 나의 바람은 그것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것이오: 나는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향해 진격해야 할 것 같고 또 공격해야 할 것 같소. 그리고 나서 다시 되돌아와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물어야 할 듯 싶소.

『프로타고라스』의 결론에서,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모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들을 뒤집어 버렸다. 이러한 뒤얽힘은 변증적 반어법의 단편이다. 그 목적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의 필연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7) 『프로타고라스』는 『메논』에서 그 짝이 되는 조각을 가진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그는 전제를 가지고 그 문제를 정착시킬 것을 최종적으로 떠맡는다. 그는 만일 탁월함이 앎이라면 그것은 가르쳐질 수 있다(87a-c)고 가정한고; 그것이 앎이라고 주장한다(87c-89a); 그리고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선생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89c-96c); 그리고 그것이 '다이몬적인 분배에 의해, 이해 없이' 사람들 속에 현존한다고 결론내린다(100a). 즉, 소크라테스는 함축을 전제하고, 그 함축의 선행하는 것을 긍정하고, 그것의 결론을 부정하며, 회의주의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구조는 플라톤이 그의 독자들을 그의 전제들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할 작정이었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나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먼저 밝혀내지 않고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아포리아(당황)로 끝을 맺었고, 심지어 기하학자들로부터 빌려온 새로운 가정의 방법조차 그들을 구해내지 못한다(86e-87a). 그러나 또, 기하학자들은 그들의 용어들을 정의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할 수 없다. 이것은, 그래서, 그들의 실패의 교훈이다. 정의는 필수적이라는,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중인 그 어떤 것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익숙한 소크라테스적 교훈이다. 그래서 『메논』은 또한 변증적 역설의 한 조각이다: 그 극적인 구조는 정의가 필수적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과 같은 그런 도덕적 결론들을 권고하는 것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그러한 결론들만이 달성될 수 있는 그러한 조건을 지시하는 데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다.

8) 만일 이것이 『프로타고라스』와 『메논』에 대한 옳은 설명이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전하고자 하는 바가 탁월함과 앎의 단일성이라는 관점에 반대하여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그 둘 중 어떤 대화편도 이러한 문제에 헌신하지 않고, 두 대화편 모두 그 대화편들의 변증적 중심점으로서,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의 필수불가결함 - 즉 그것을 정의하는 일의 필연성 - 을 강조하며 결론에서는 그 물음이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9)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관한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이, 그 방식에서 탁월함이 하나일 그러한 대안적 방식들을 예상한다는 것은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에 동의하도록 이끌린다 (329c-330b): 탁월함은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용기라는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구별되고, 같은 것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 아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오로지 크기에서만 차이가 나는 황금의 일부 같은 부분들이 아니고, 두 눈과 두 귀 처럼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부분들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가 아니라(οὔτε αὐτὸ οὔτε ἡ δύναμις αὐτοῦ, 330b) 서로 그러한 종류의 것(οἷον)에 속하는 것들이다; 탁월함의 그 부분들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용기 있으나 올바르지 못하거나 올바르되 지혜롭지 못할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사람은 탁월함 전부를 가지지 못하고서도 탁월함들의 일부를 가질 것이라는 점에서, 분리될 수도 있다.

10) 다음으로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하는 하나의 전체임을 긍정함에 있어서, 복합된 반박을 내놓고 있다: 그는 탁월함의 상이한 부분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동일한 것들임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 부분들이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도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탁월함들이 하나일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

11) 탁월함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들이 상이한 정의들을 가진다고 마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탁월함이 기능에 있어서 다르거나 같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탁월함의 기능은 무엇인가?

12) 그런 물음은 『프로타고라스』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대답되지 않는다. 탁월함의 기능은 탁월함 그 자체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얼굴에 대한 예시를 무관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두 눈과 두 귀는 그것들의 기능들인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차이가 난다. 다시, 두 가지 덕들은 그것들이 동일하다거나(ταὐτόν) 아주 유사하다(ὁμοιότατον)는 것조차 긍정할 것도 없이 서로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οἷον)에 속한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단어의 '기능'이 그 단어의 의미 또는 능력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올바름이 '올바름'의 의미라 할지라도, 올바름의 기능은, '올바름'의 기능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은 아니다.

13) 만일 탁월함의 기능에 대한 관념이 이해될 것이라면, 우리는 그 표현이 그 안에서 사용되는 그러한 논증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기능으로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부정(330b)하는 근거, 그리고 나중에 그 탁월함들이 서로 간에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라는 것을 부정(330e-331c)하는 근거는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다(329e; 349d참조). 그리고 이것은 탁월함들이 서로 만나도록 한다는 것, 경건의 현존이 올바름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 또는 용기의 현존이 지혜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추론은 명확해 보인다: 탁월함의 기능은 그 기능을 도입하는 어떤 것 속에 놓인다; 만일 탁월함들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면, 그것들은 분리가능하다;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

14) 이것은 그 논증의 양식에 걸맞는다.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모두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명제는 만일 그 명제가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나 또는 그것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면 틀린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만일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라면, 그것들은 기능에 있어서도 하나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기능에 있어서 하나라면 정의에 있어서도 하나라는 것이 뒤따를 방법은 없다. 사람이 올바름 없이 경건할 수 없다거나 경건함 없이 올바를 수 없다고, 또는 경건과 올바름이 서로를 도입한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름의 정의와 경건의 정의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탁월함들은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구별가능하다; 만일 탁월함들이 구별가능하다면, 그것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만일 탁월함의 부분들이 황금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면, 그 자체에 있어서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 모두 상이한,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라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즉, 탁월함의 특수한 경우에, 황금과 얼굴에 대한 그 예시들은 부적당하다는 것일 수 있고, 황금도 얼굴도 밝혀내지 못하는 정의에 있어서 차이와 기능에 있어서의 동일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일 수 있다.

15) 그 논증에 대해서는 이 만큼이면 됐다. 그러나 그 변증적 상황은 여전히 더욱 복잡하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고 추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올바름 없이 단지 지혜롭거나 용감할 수 있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탁월함들이 그 자체에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다르다는 그 주장을 반박할 것이고, 탁월함들이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탁월함들이 어떤 면에서 하나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것들이 서로 도입하고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라는 것인지 말이다.

16) 『프로타고라스』는 이 물음에 대해 세심하게 고안된 모호함을 유지한다. 그것은 대안들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니고, 프로타고라스 그 자신은 그 논증에 대한 그 대안들의 관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놀랄 것도 없다. 탁월함들이 정의에서 하나인지 기능에서 하나인지 혹은 양자에 있어서 하나인지 묻는 것은 탁월함이 무엇인지를 암시함으로써 묻는 것이다. 그 물음은 오로지 대화의 중국에서야 명확하게 된다(361b-c).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고려하는 중에 내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시사한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그가 탁월함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했고(318a-319a), 그리고 탁월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자로서, 소크라테스적 엘렝코스(논박술)가 바로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계획된 그러한 그 자신의 무지에 대한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탁월함의 본성으로 파고드는 탐구에 유익하게 착수할 수 없었다.

17) 요약하면: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하나일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예상한다 - 말하자면, 정의에 있어서의 동일성이나 같음, 그리고 기능에 있어서의 상호 함축 또는 같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 주제에 대한 다른 대화편들의 논증 양식에 부합한다. 그에 대해 『메논』은 탁월한 예시를 제공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단언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모든 것들은 영혼에 의존하지만, 영혼에 속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좋음을 지혜에 의존한다고; 이러한 설명으로, 유익한 것은 지혜이고, 우리는 탁월함이 유익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함이 지혜이고, 전체로서나 부분에 있어서나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지혜와 탁월함이 동일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상 탁월함들이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오히려 지혜가 탁월함에 대해 필연적인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한 것이며, 조건이며, 다른 탁월함들을 수반하고 또 그것들에 의해 수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 이후 『정체』에서 플라톤은 영혼에 대한 분석에 기초된 탁월함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그 설명은 탁월함들의 단일성을 상호 함축을 통해 긍정한다. 영혼은 그 부분들 각각이 적합한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올바를 수 있다; 절제는, 각 부분이 지배해야 하고 따를 것에 동의할 때; 지혜는 이성적 부분이 그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고 지배할 때, 용기는, 기백의 부분이 그 지배자의 명령에 있어서 훈련될 때 생긴다(『정체』Ⅳ, 442b-d). 그 탁월함들은 여기에서 명백하게 정의상으로 다르다; 그만큼 명백하게, 탁월함들은 기능에 있어서 하나이다 - 그것들은 서로를 도입하고, 서로로부터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용기는 지혜를 수반하고 그것에 의해 수반된다; 지혜는 올바름을 수반하고 또 그에 의해 수반된다; 올바름은 절제를 수반하고 그에 의해 수반된다. 소크라테스가 결론에 있어서 '우리가 지금 논증에 있어서 이 높이에 올랐으니, 내가 보기에, 산 정상으로부터 보는 것처럼, 탁월함의 단일한 꼴 하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언급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원칙은 그래서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라는 주장과, 그리고 탁월함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통해 정의될 수 있다는 주장과도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분들과 부분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동시함축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로고스와 우시아

1) 만일 앞서 말한 설명이 건전하다면,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그런 종류의 논증은 고려함에 있어서 실재적이고 명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지 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2) 그 대상이 적어도 그것이 유와의 관계에서 존립하는 종일 때에는 단순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될 것과 정의함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것을 고수하였던 그러한 관련은 획득하지 않는다: 그 종은 결합된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와 함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같음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같음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튀프론』10d, 13에서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은 경건에 대한 정의로서는 거부되는데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르기 때문이고(ἕτερον; 10e, 9에서 ταὐτόν이라는실에 견주어 반대로), 이러한 거부는 15c, 2에서 반복된다(οὐ ταὐτόν … ἀλλ᾿ ἕτερα ἀλλήλων).

3)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같음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연의 동일성, 또는 진리치 보존(salve veritate) 대체성이 아닌데, 설령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그러한 것들 모두가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것들만이 경건하거나 경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순히 πάθος를 진술할 뿐 οὐσία를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념적 동일성인 것도 아니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생각함에 있어서,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의 정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의어의 같음도 아니다.

4) 정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의에 있어서 필요한 같음은 이를테면 서술적 동일성, 말하자면 샛별과 태백성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하거나, 또는 - 그 예시에서 필요한 경험적 우연성을 피하기 위해 -  일곱번째 정수와 네번째 소수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동일성은 두 가지 한정적 서술들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실재적 정의에 있어서 정의될 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대상 그 자체이다. 그 비유는 만일 서술적 구절이 명사에 의해 대체된다면 더욱 근접하다: '금성은 샛별이다' 또는 '7은 네번째 소수이다'; 무엇보다도 유일한 서술로 정의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도 오독이다. 지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함이다; 그러나 '…는 탁월하다'라는 말이 소크라테스를 서술하는과 같은 의미에서 '…은(는) 탁월함이다'라는 말이 지혜를 서술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첫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이고, 두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한 특성에 대한 한 특성의 예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정적 서술에 있어서 필요한 후자의 관계이다.

5) 아마도 정의에서 필요한 종류의 동일성은 그것 자체의 유(sui generis)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포함하는 유와 그것을 그 유 속에서 다른 종들로부터 지적해 내는 종차를 진술함으로써 그 종인 어떤 것을 말할 때 필요한 그런 동일성이다. 종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종차는 종들에 대한 구별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그 구별의 결과이다; 정의에 있어서 종차는 사유근거이고, 존재근거가 아니며, 그러므로 정의에서 필요한 동일성은 대상들의 동일성이 아니다.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위한 최선의 - 그리고 ὁρίζειν과 ὅρος의 대다수 함축에 부합하는 하나의 -  비유는 사상(寫像)의 비유이다: 정의한다는 것은 한 종의 위치를 그 종을 포함한 유 속에서 정하는 것이다. 만일 종이 농장이라면, 유를 규정함의 목표는 그 농장이 위치하는 마을을 지시하는 것일 터이다; 차이를 규정함의 목표는 농장의 경계들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조사된 경계선들의 현존을 밝혀내는 것일 것이다. 정의에서 필요한 같음은 말하자면, 유일한 위치의 같음이다: 정의될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 안에서 사상된 그 위치를 점유한다.

6) 이러한 방식에서 생각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는 형이상학에서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꼴들이, 서로에 대해 포함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포함되는 것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존립하면서, 계층적으로 정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내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거나, 상호 구성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난다: 종들은 그것들이 만일 그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의해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리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특성을 그것들의 유들에 의존한다; 올바름은, 만일 그것이 탁월함이 아니었다면, 올바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탁월함은, 그것의 한 종이 올바름이 아니었더라면, 탁월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는 그것의 현존과 특징을 그것의 종에 의존한다. 전체는 그것의 부분들에 의존하여 전체인 그것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 점에 대해 조금 덜 명확하지만, 아마도 유들에 대한 정의는, 종들에 대한 정의와 달리, 구성 요소들로의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7) 이것은 플라톤적 유들에 대한 함축의 풍부함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있어서, 유들은 종들로부터의 추상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사람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사람과 말은 동물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그 유는 여기에서 단지 다양성에 대한 공통된 요소일 따름이고, 그것의 종들보다 더 '추상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정의가 사상에 대해 동종적이라면, 만일 유들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들이라면, 유는 공통된 특징이 아니라, 마치 그것의 현존이 그것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의 현존에 의해 전제하기도 하고 전제되기도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래서 유는, 함축의 상대적으로 결여되었음보다는 오히려 함축을 잔뜩 실은 것으로서, 결핍되었다기 보다는 풍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8) 하나의 체계로서, 유는 한 종류의 폐쇄를 지니고 있어야만 하고,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류의 제한들로부터 갈라놓는 단일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의 구별은 한 사물에 본질적인 것과 그 사물이 단지 가지게 되었을 뿐인 특징 사이의 구별을 수반한다. 올바름 또는 탁월함에 대한 경건의 관계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에 대한 경건의 관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 정의에 있어서 내적 성질을 시사한다면, 그러므로 그것은 꼴에 대한 모든 설명들이 본질을 진술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그 관계의 내적 성질만큼이나 외적 성질도 시사한다.

9) 유들은 체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종들은 그 유들의 요소들이기 때문에, 종들에 대한 정의들은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일상적 진술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들이다. 그러한 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또는 사용하기 위해서, 일반적 언어에도 개별적 사물들과 행위들에도 호소할 수 없다: 꼴들에 대한 지식은 지적 직관을,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는 직접적 통찰을 요청할 것이다. 실재적 정의의 진리는 오직 그에 대한 정의가 설명인 그러한 진리를 파악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10) 만일 이러하다면, 정의와 직관은 상보적일 것이다. 지적 직관은 실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만 '알고 있음에 의한 앎'에 속하는 난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설명도 제공함이 없이 푸른 하늘의 한 조각을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감각은 지적으로 노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꼴들에 대한 직관은 반대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증은 단순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 이전에 불충분한 설명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어떤 것을 충분한 설명 속에서 명확하게 보려고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시야는 진술들에 대한 검토에 의해 확보된다. 미리 앎에 의한 앎에 대한 지적 직관의 비교는 지적 직관의 대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11) 일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이 지점에서 압박을, 직관과 논리 사이의 긴장을 발견할 것을 주장해 왔다. R. G. 콜링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지만 상당히 높게 플라톤의 철학적 성취들은 평가받고, 최고에 못 미치는 어떤 가치에 있어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그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이 그 자신에 의해 철학과 수학 사이에서 확립되는 충분히 깊은 구별로 이끄는 것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결함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하는, 철학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방법론이 철학을 둘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하나는 재기 발랄한 억지 이론의 식상한 낭비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관적 시야이다. 이러한 첫번째 것이 두번째 것으로의 경로라는 것은 여러 세대들에 속하는 경험에 의해 플라톤이 그들의 길잡이로 취해졌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실들에 권위에서 받아들여질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 조명 속에서 사살들이 이해될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탐구 속에서, 철학적 탐구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플라톤이 우리에게 주진 않았다.

이러한 비판은 감각 지각의 틀을 관통하는 지적 직관을 강요함으로부터, 지적인 것으로서, 그 직관이 판단을 통해 지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함으로부터 귀결한다.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한 행위는 하나의 진술이 아니라, 진술 속에서 표현 가능한 하나의 내용을 필요로하고, 그로써 비평에 적합하다. 한 진술은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통해 통찰이 표현되는 그러한 것이다 - 그 자신에 대해서조차. 안다는 것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12)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초기 대화편들을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蟲-
2. 실재적 정의

1)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 속에서 확정적이고 기술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꼴을 명시해야 한다 - 즉, 보편개념이고 표준이며 본질이다. 『에우튀프론』은 그 설명이 반드시 그 꼴이 부분인 어떤 전체를, 그리고 그 전체의 어떤 부분이 그 꼴인지 진술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최근류와 종차로써 경건을 정의하는 것이다.

2) 이 관점에서 그런 종류의 정의는 물론 실재적 정의이며 명사적 정의가 아니다; 그 정의는 어떤 것들의 진리치인 말들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에 대한 말들이 참인 그러한 것들의 본성에 대한 정의이다. 실재적 정의는 말들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조건들이나 어떻게 그 말들이 실제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분석이다. 그것이 본질분석이기 때문에, 실재적 정의는 조건들로서가 아니라 참 또는 거짓이다. 예를 들어 올바름이 탁월함이라는 것은 참이고, 그것이 양이라는 것은 거짓이며, 만일 'is'가 종들과 유들에 관련하는 개념정의적 'is'로서 해석된다면 계속 그러할 것이다.

3) 실재적 정의에 대한 공통된 관념은 그러한 정의가 단순하게 명사적 정의에 현존 주장을 더한 것이라는 관념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삼각형의 실재적 정의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삼각형은 "분명한 세 각을 가진 도형"이고, 삼각형들이 있다'. 밀은 지난 세기(19세기)에 이것을 주장했고, 일부 해석자들에 따르자면, 그것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었기도 하다. 그래서 토마스 히쓰 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고자 더욱 고심한 정의들과 정의된 사물의 현존이나 현존하지 않음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정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어떤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고, 그 어떤 것이 그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의된 다양한 것들의 현존은 각 학문에서 기본적인 몇몇 것들, 그것들의 현존이 증명될 수 없고 각 학문의 제 1 원리들 중에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입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기하학에서 점들과 선들은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야만 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의 현존은 입증되어야만 한다.

히쓰 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계속해서 연결한다. 그 이론은 아마도 구조가 현존의 증명으로 기능하는 유클리드 『원론』에서 유클리드의 실행을 가지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당대의 수학에 더욱 밀접하게 관련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유클리드의 정의들과 그 정의들에 대한 그의 사용은 정의들 그 자체는 정의된 것들의 현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하지만 그것들 각각의 현존은 입증되거나 ('원칙들'의 경우에는)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과 일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하학에서 점들과 선들의 현존만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나머지 것들의 현존은 증명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유클리드의 첫번째 세 가지 가정들은 직선들과 원들을 작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명한다(『원론』에서 사용된 직선들을 제외한 '선들'만). 다른 것들은 정의되고 그 후에 작도되며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예를 들어 1권 정의 20에서 등변 삼각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된다; 그리고 (1권 1) 그 등변 삼각형을 작도할 것이 제안되고, 작도되었을 때, 그것은 정의와 일치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사각형이 정의될 때(1권 정의 22) 그러한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어떤지 하는 물음은 1권 46에서 정의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증명되기 전까지 열려 있다. 직각(1권 정의 10, 1권 11)과 평행(1권 정의 23, 1권 27-9)을 가지고도 비슷하다. 단순한 추정과 상상을 배제시키는데에 굉장한 주의를 요한다. 이름들에 대한 주관적 정의로부터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 정의로의 이행은 기하학에서 구조들(가정된 제 1원리들)을 수단으로, 다른 학문들에 있어서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듯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정의와 현존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의심할 것도 없이 아카데미아에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거기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 뿌리들은, 특정한 본성의 어떤 것에 대한 현존을 전제하도록 허용되고, 그 가정을 지지하거나 거부하도록 허용되는, 플라톤의 가설들에 의한 연구방법에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일한 것과 단일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른 것이다'라고 주장한 첫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4) 실재적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또한 현존과 근대 논리학에서 자주 제시되는 분석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밀접하게 부합한다. 정의들, 혹은 더욱 정확하게 말해서 그 참값이 유일하게 정의들에만 기대는 명제들은 분석적이고, 그들의 용어들로 의미하는 바에 의해 참이며, 그것의 반박들은 자기모순적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암여우(vixen)들은 암컷인 여우들이다'라는 것은 정확하게 참인데 왜냐하면 '암여우'라는 표현은 '암컷 여우'라는 표현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언어를 본다. 그러나 어떠한 분석적 명제도 분석적인 것으로서 현존 주장을 시사하지 않는다: 이것을 가정하는 것은 현존이 술어적 표현의 의미에 대해 부분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현존이 술어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될 것인데, 반면 사실 그것은 술어들에 대한 적용을 명시하는 양화사이다. 그래서 '암여우'가 의미하는 것은 암여우들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 않고 시사할 수도 없다: 그러한 정보의 단편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 세계를 보아야만 한다.

5) 실재적 정의가 단순하게 명사적 정의에 현존 주장을 더한 것이라는 관점은 그 이면에 수세기에 걸친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전통의 부담과 동시대 논리학의 부담 모두를 가진다. 그 관점은 그 관점이 『에우튀프론』과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 전제된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보기 위한 지적 상상력의 활동을 요구한다.

6) 그리고 분명히 그건 아니다. 『에우튀프론』의 변증 절차는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로 대변될 수는 없다. 추가적으로 '경건'이 어떤 것에든 해당되는지 아닌지를 밝혀내기 위한 시도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답하기 위한 필요조건들은 명사적 정의의 필요조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사적 정의들은 말들에 대한 정의들이지 표준들 또는 본질들에 대한 정의들이 아니고, 어째서 그것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것이기를 요구받아야 하는지 아무런 훌륭한 이유도 없다. 그리고 둘째로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존재적 의미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시된다: 소크라테스와 에우튀프론은 경건한 것들이 있다고  전제하고, 오로지 무엇이 그것들의 본성인지만을 묻는다; 그리고 현존에 대한 이러한전제는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최초에 사례들 - 그 물음이 제기된 모든 초기 대화편들 각가에서 이야기하는 것 - 에 호소함으로써 대답되는 모든 초기대화편들에서 이루어진다.

7) 이건 다른 식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꼴은 '실체시된 의미'가 아닌데, 예를 들어 '염소사슴'과 '직각원' 같이 의미하는 바는 있지만 어떠한 적용도 가지지 않는 표현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꼴은 '가능성', 또는 화이트헤드주의의 영원적 객체가 아닌데, 예컨데 유니콘들처럼 아무것도 만족시킬 수 없는 가능성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꼴은 오히려 무엇인 어떤 것의 본성이고, 그러므로 존재적 의미는 그 어떤 것의 바로 그 관념 안에 세워진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꼴들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혼동에 기초하는 것이다.

8)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해서 현존이란 말하자면 주어진 것이다: 그 목적은 변증의 본성을 관통하는 것이고, 그러한 관통은 정의 속에서 표현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관점이 일반화되고, 윤리학에 대한 물음들로부터 옮겨져서 전체 세계에 대한 물음들로 활동한다면, 정의는 어떤 것에 대한 모든 앎의 토대가 될 것이다.

9)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실재적 정의는 대상 - 탐구의 목표 역할을 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만일 그러한 정의가 단어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면, '개념'에 대한 정의 또한 아닐 것이라는 것은 아마도살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에우튀프론의 경건에 대한 개념 또는 일상적인 아테나인들이 '경건'이란 단어를 가지고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어떤 것은 경건의 본성과 본질에 대해 불충분하다; 이것은 엘렝코스, 변증적 반박술에 이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개념들의 꼴에 대한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목적론적이다: 경건의 꼴은 짐작컨데 에우튀프론이 만일 그의 말들이 의미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더라면 그 '경건'이란 말을 가지고 이해했을 어떤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가능성으로서 그가 '경건'이란 단어를 가지고 그가 '올바름'이나 '용기', '사려', '지혜' 그리고 '탁월함'이라는 다른 단어들로 의미하는 것과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의미했을 것임을 알아차릴 거라고 말한다. 비록 이러한 단어들의 이상적 사용에 있어서 이 단어들의 검토가 오직 이것이 역설이었다는 것만을 말할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한 단어를 가지고 이해하는 어떤 것은 우리가 그걸 가지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이해해야만 하는 어떤 것은 아니고, 꼴들과 우리의 일상적 개념들 사이의 그 구분은 실재적 정의의 결핍과 어려움 모두를 설명한다. 사물들의 본성과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들을 무분별하게 동일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많은 숙고가 요구된다.

최근류와 종차

1) 전통적인 논리학 교과서들에 따르면 정의는 많은 종들에 공통된 하나의 유를 언급함으로써 수행되고,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검토 하에 그 종들을 구별해 내는 차이점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러하고 로스 교수는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도 또한 그렇다고 주장했다:

['용기란 무엇인가?'와 같은 그런 물음들에 의해서] 용기는 요소들로 나뉘어질 수 있는 복합적인 것임이 암시된다; 만일 용기가 그러하지 않다면, 그 물음은 … 오직 용기는 용기라는 것만이 참인 응답일 바보같은 물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이러한 형식의 물음들에 대한 응답들은 원칙적으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명시적으로 수행해 나아가던 것과 같이 정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분석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의가 유들과 종차를 통해 진행하는 것이라는 그 주장은 『에우튀프론』에 의해 확인된다. 소크라테스의 그 문제에 대한 논의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들어간다. 첫번째 부분은 정의가 유를 제공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그 부분은 경건이 올바름의 한 부분인지, 그리고 올바름은 경건의 한 부분이 아닌지 어떤지를 묻는다. 그것은 스타시누스(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 시인)가 주장하게 된 것처럼 삼가는 마음은 두려움의 한 부분인 반면에 두려움은 삼가하는 마음의 한 부분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다음으로 그것을 뭐라 이름붙이지 않고서 종차의 관념을 도입하는 데에로 나아간다; 그 논증에서의 이 새로운 단계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점을 숙고하라'는 그의 요구에 의해 표시된다(12d, 5): 만일 경건이 올바름의 부분이라면, 그 다음으로 밝혀지는 것은, 짝수가 수에 있어서 서로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 측면들이 아니라 똑같이 나뉘어 떨어지는 두 측면들을 지닌 그러한 부분인 것처럼, 그것이 어떤 부분인가 하는 것이다.

2) 초기 대화편들의 정의에 대한 모든 사례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라케스』(192b)에서는 재빠름이 '짧은 시간에 꽤나 많은 것을 해내는 능력'으로 정의되고, 『메논』(75b)에서는 처음에 도형이 '언제나 빛깔을 뒤따르는 것'으로 정의된다. 어느 정의도 『에우튀프론』의 요구들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메논』은 그 도형을 '한 입체의 경계'로 한정함으로써 도형에 대한 정의를 개선시켜 나아간다. 그것은 최근류와 종차를 제공한다; 그래서 아마도 고르기아스의 방식으로 제공되는, '시각에 맞추어질 수 있는 형태의 발산'으로서 색을 정의하는(76d) 그럴싸한 가짜 정의도 제공한다.

3) 『에우튀프론』에서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이 그 문제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설명인지 아닌지, 또는 그의 의견들이, 에우튀프론을 이끌어 가는 수단으로서 부분적으로는 변증적인 것으로 의미되는지는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후자의 관점에 대한 증거가 있다. 만일 삼가는 마음이 두려움의 부분인 것처럼 경건이 올바름의 부분이라면, 그래서, 에우튀프론의 설명에 의해, 두려움이 삼가는 마음보다 넓은 것처럼 올바름은 경건보다 넓다; 즉, 경건은 올바름을 수반하는 반면, 올바름은 경건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프로타고라스』에서 주장되고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 암시적인, 탁월함은 정의에 있어서 모든 탁월함들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서나, 그 탁월함들이 상호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나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적 명제와 상충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마도 최소한 특히 탁월함의 경우에는, 『에우튀프론』에 있어서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이 자격을 부여함 없이, 그리고 수정을 요구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것은 아니라는 것일 터이다: a가 b의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b가 a보다 더 넓은 영역들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언제나 수반할 필요는 없다.

4) 이것이 『에우튀프론』이 정의를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것으로 그린다는 사실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우튀프론』은 정의될 것이 반드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로스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지도 않는다. 이 제안은 그것이, 예를 들어 경건이 요소들로 구성되지만, 그 요소들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정의가 독립적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그런 일련의 항목들에 있어서 반드시 한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 제안이 암시한다거나, 또는 정의가 불가능하고 그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 종결할 수 없는 무한퇴행을 암시한다는, 그런 일반적 반대에 대해 책임이 있다. 로스 교수의 해석에 대한 원문의 뒷받침도 없다; 소크라테스의 공간적 은유들은 공간들의 가분성을 제안하는 어떤 방식과도 중첩하지 않는다; 삼가는 마음이 있는 그 어디에서나 두려움이 있지만 두려움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삼가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도출된 그 추론은, 두려움이 삼가는 마음의 부분이 아니지만 삼가는 마음은 두려움의 일부라는 것이 아니다; 삼가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것을 나누지 않지만, 삼가는 마음을 검토함에 있어서 그것이 두려움을 수반한다는 것은 안다. 최근류를 가지고 그러하듯 종차를 가지고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종차의 사례는 짝수가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 두 쪽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나뉘어 떨어지는 두 쪽을 갖는 수'라는 것이다. 즉, 자체적으로 둘로 나뉠 수 있는 수라는 것이다. 2는 그 자체로 짝수이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이 차이는 짝수의 현존에 속하는 필연적 귀결을 표현하는 것이지, 짝수의 구조 속에서 하나의 요소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는 정의될 것이 반드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가정은 『에우튀프론』이라는 글 위에 정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설명을 투영하였음을 표현한다. 이러한 투사는 실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유(類)들

1) '유'와 '종'의 일상적 함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함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였던, 그의 가정들로부터 유래된 논리학적 전통의 침전물은, 유들은 내용에 있어서 종들보다 빈약하고, 그 추상적 계층에서 위로 향하는 이행은 공허를 향하는 이행이라는 것이다. 포르피리우스의 계통수에서 각각의 종은 최근, 하위, 그리고 최상위[summum] 유들을 수반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것의 정의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유도 그 유 아래에 들어가는 종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동물을 수반하지만, 동물은 사람을 수반하지 않는다; 동물의 경우 생물을 수반하지만 그에 의해 수반되지는 않는다. 유는 종보다 더 적은 표지(標識, merkmal. de. pl.-e)들, 더 적은 특징들을 가진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더욱 빈약하다.

2) 상승은 공허를 향하고, 하강은 충족을 향한다. 유에 대한 종의 관계에 대한 이런 설명은 종종 논리학의 중립적 문제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중립적일 수 없는 절차인데 그것이 다름 아니라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나게끔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3) 종종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느 날 그가 사는 세상을 바라 보았고 개별자들을 발견했다고 가정된다 - '실재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라 불린 어떤 것을 지니고 있는 철학자들의 웅장한 노선에서 첫번째로 말이다. 어쩌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오히려 자연적 종류들을 -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짐말이 아니라 말에 대한 우선함을 - 찾고 있었고 발견했다는, 그리고 그가 그러한 종류들에 속하는 것들인 소크라테스와 짐말과 같은 그런 개별자들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지지하도록 이끌렸던 것은 자연적 종류들에 대한 이러한 발견을 통해서라는 증거가 있다. 이러한 발견을 향한 도정은 플라톤만이 아니라 스페우시푸스도 포함한 아카데메이아에서 정의를 둘러싼 논란의 가시덤불을 통과했다. 그것은 제 2 실체의 구별적 표시 - 즉, 실체의 범주에 있어서 술부들 - 는 이름과 정의에 있어서 서술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범주들』의 원칙이 되었다. 이러한 규칙, 기초적 실재들의 본성을 표현하는 용어들을 골라낼 수 있도록 하게 되어있는 그 규칙은 존재론에 묶인다.

제 2 실체에 속하는 종은 유보다 더욱 실체적인데, 왜냐하면 종은 제 1 실체에 더욱 가깝기 때문이다. 만일 제 1 시체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욱 많은 정보를 주고 유보다 종을 부여하는 경향이 더 많은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별적인 사람에 대해 그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는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줄 것이다(왜냐하면 하나는 개별적 사람에 대해 더욱 특징적인 반면, 다른 하나는 더욱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별적 나무에 대해 그것이 나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 식물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줄 것이다. 나아가, 제 1 실체들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것이고 모든 다른 것들은 그 제 1실체들에 대해 술부일 수 있거나 그 제 1 실체들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제 1실체들은 무엇보다도 실체들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제 1 실체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자리하는 것처럼, 그렇게 종도 유에 대해 자리한다: 종은 유에 대한 것이다(유들은 종에 대해 서술되지만, 종은 유들에 대해 상호적으로 서술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로 마찬가지로 종은 유보다 더욱 실체적이다.

이러한 이행은,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일반화적 공허의 원칙으로 향한다. 그것은 또한 그것의 토대를 해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를 술어적인 것으로, 그리고 술부를 비대칭적으로 이해한다: 유는 그것의 종에 대해 서술 가능하지만, 종도 종차도 유에 대해 서술 가능하지 않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동물은 사람도 아니고 이족보행동물도 아니다. 유들이 종에 대해서 종이 개별자들에 대해 서는 것처럼 서기 때문이고, 개별자들은 종들보다 더욱 실체적이고, 종들은 유보다 더욱 실체적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나 코리스쿠스처럼 그것들도 그에 대해 서술가능한 제 1 실체에 대해 대조적으로, 설령 종들과 유들이 둘 다 제 2 실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면, 유들의 결핍이 즉각적으로 따른다: 상대적으로 덜 실체적인 유들은 상대적으로 더 실체적인 종들을 거의 포함할 수 없다시피 하다. 논리적으로 놓고 봤을 때, 유들은 종들을 수반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종차들이 그 종들의 유들에 대해 비본질적이어야만 하기 때문이고, 그 점에서 그 종들은 그것들의 유들에 대해 서술 가능하지 않다: 그 유는 그것의 종을 수반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 종의 분석에 있어서 오로지 한 요소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유의 종에 대한 관계에서 술어의 비대칭성은 수반의 비대칭성을 수반한다.

4) 『범주론』은 초기작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어휘는 그의 정신이 성장에 따라 변화했다. 제 1 실체와 제 2 실체 사이의 대립은 후기에 폐기되었다; 제 1 실체는 질료, 꼴, 그리고 그것들의 합성으로 분해되어 들어갔다; 제 2 실체는 실체적 꼴과 보편적 꼴로 분해되었다. 그러나 유들이 종들보다 더욱 결핍되어 있다는 전제는 남았다. 『형이상학』에서, 은유로써, 유들은 종들에 대한 질료로서, 나아가 종차들이 상대적으로 꼴로서 서는 한정에 대한 잠재력이 된다.

5) 이러한 주장 또는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은 가장 나중의 생각을 보편개념들에 채색하였다. 그것은 논리적 주어들로서, 이야기되는 것들에 속하는 우선성이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 자체로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의 우선성인, 개별자들의 우선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것은 술부들의 파생물,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들을 전제한다. 이러한 것들은 플라톤적인 전제들이 아니다.


플라톤적 유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들에 대한 설명은 초기 대화편들에 맞지 않는다. 우선, 그 설명이 비록 소크라테스의 어휘를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설명은 소크라테스의 은유를 뒤집는다. 소크라테스는 종이 유의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그 유는 전체이다. - 이 종 부분에 다른 부분들을 더하여 포함하는 그러한 전체이다. 그러나 만일 유들이 종들보다 더 결핍된 것이라면, 그 종은 전체인 종일 것이고, 그 종에 대한 유와 종차는 각각의 부분들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에서의 정의에 대한 이론들에 내재하는 문제들에 대한 숙고로써 은유의 이러한 역전을 지지하는 데에로 이끌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처음으로 부분과 전체의 은유를 도입했던 그가 그것을 뒤집힌 것으로 도입했을 성 싶지는 않다.

2) 결핍된 유들과 초기 및 중기 대화편들을 조화시키는 그 방식에는 두번째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은 그 유들이 소크라테스가 그 곳에서 처음으로 고려한 용어의 종류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르피리우스의 계통수는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사람의 동물에 대한 관계나 동물의 생물에 대한 관계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짝수의 수에 대한 관계나 도형에 대한 원의 관계, 또는 탁월함에 대한 올바름의 관계에는 충분치 못하다. 왜냐하면 수의 현존이 짝수의 현존을 수반한다고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고, 도형의 현존이 원형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도 타당하며, 탁월함의 현존이 하나의 탁월함으로서 올바름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도 타당하기 때문이다. 일반화적 공허의 원칙은, 만일 그것이 어떤 것에든 어울리고, 말이나 개와 같은 자연적인 종류들에 어울린다.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원칙을 지지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그 원칙은 수학적 용어들, 또는 도덕적 용어들에 어울리지 않고, 그러므로 그것은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에 어울리지 않는다. 정의에 대한 관념에 대해 전형적인 그 원칙을 상정하는 것은 개념들의 실제 구조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들에 대한 그러한 관점이 그렇게나 오래, 또 그렇게나 널리 받아들여졌어야 하다는 것은 인간 정신에 대한 잘못된 추상의 능력을 위한 서글픈 증거이다.

3) 대신에 유들이 충족되거나 결핍되는 만큼 정의에 있어서 종차의 역할은 변화할 것이다. 만일 후자라면, 종차는 종에 대한 궁극적 한정이 될 것이다: '마지막 차이는 사물과 그 정의에 대한 실체일 것이다.' 종은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를 포함할 것이고, 그것들이 바로 그것인 어떠한 것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 정의상으로 그 부분들과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들이 그 유들의 종들을 부분들로서 포함하는 전체들로 간주된다면, 종차는 종차는 상이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전체는 그 자체 그것의 부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전체에 덧붙혀져 부분을 이룰 어떠한 한정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으로 놓고 보자면, 종차는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 한 종이 동일한 유 속에서 다른 종들과 구별될 그러한 특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특징은 그 종차의 구성요소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구별의 귀결일 것이다; 그것은 인식근거(ratio cognoscendi)일 것이고, 존재근거(ratio dssendi)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둘로 나뉠 수 있음은 홀수와 짝수 사이의 본질적 차이이다; 그렇지만 그 차이는 홀수와 짝수 사이의 구별을 구성하지는 않고, 오히려 그러한 구별의 필연적 귀결이다.


한정가능성과 단순성

1) 어느 초기 대화편에도 탁월함에 대한 만족스러운 정의는 아무것도 없다. 이로부터 종종 암시되어 온 것은 실재적 정의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건 말할 것도 없고, 그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꼴들은 정의될 수 없다.

2) 만족스러운 정의들이 결론에 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그 정의들이 달성될 수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만일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꼴들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면, 어째서 그들이 꼴들이 있다고 전제되는 변증적 탐구 방법을 지지해야 했는지 그 이유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꼴들이 정의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원칙적으로 대답될 수 없다. 즉,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물음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째서 그것이 물어져야 했는가? 어째서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14c에서 그것이 답해질 수 있다고 암시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그는 그 물음이 대답되기 전까지는 예를 들어 ποῖόν τι에 속하는 물음들과 같은 다른 여러 물음들에 대한 대답들이 알려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야 하는가? - '탁월함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앞선다는 것이다. 초기 대화편의 몇 안 되는 주장들은 꼴들이 정의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서 아주 좋지 못하게 놓인다.

3) 그러나 만일 꼴들이 정의될 수 있다면, 꼴들의 정의가능성을 그것들의 단순성과 조화시키는 일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4) 아리스토텔레스를 괴롭혔던 정의의 통일성에 대한 문제를 고려해 보자. S라는 종이 있다. 그 종은 G라는 유와 D라는 종차로 정의될 것이다. 즉, S는 G와 D이고, '~는~이다'는 한정적 동일성에 속하는 '~는 ~이다'인데, GD는 S인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을 낳는다: 정의될 것에서는 언급된 하나가 있고, 정의함에 있어서는 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가 둘과 동일할 수 있는가? 어떻게 S는 B와 D일 수 있는가?

5) 만일 정의를 고려함에 있어서 단지 명사적일 따름이라면, 이 문제는 흥미로울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는 ~이다'는 동의어에 대한 '~는 ~이다'일 것이고, 한 복잡한 표현이 그 표현에 대해 상대적으로, 언어적으로 더 단순한 또 다른 표현과 동의적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려 중인 정의는 명사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고, 그 정의가 산출한 역설도 또한 실재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그 역설을 존재하는 것은 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서 이중적이라는 그의 원칙으로써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종과 유 그리고 종차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다; 그렇지만 유는 그 자체로 오로지 한 종류의 질료나 가능성, 그에 대해 종차가 상대적으로 현실성으로서 그리고 꼴로서 마주서는 그러한 것이다.

6) 이런 해법의 이점이 뭐든지 간에, 그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는 부적절하다. 하나의 것인 꼴은 그것과 구별되는 다른 어떤 꼴과도 또는 일련의 꼴들과도 동일시될 수 없고, 그러므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도한 그런 종류의 동일성으로 표현할 수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한 탁월함에 대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일이 그 탁월함의 내적 존재가 복잡하고, 탁월함의 유를 포함하며, 그리고 그 복잡성 안에서 요소들로서 차이를 포함한다는 것을 수반한다고 일관성 있게 생각할 수 없었다. 정의에 대한 관계물, 종들은 단순한 단일체들이고,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것처럼은 일어나지 않는다.

7)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지는 물어볼 만한 일일 것이다. 만일 종들이 단순한 단일체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것들은 정의될 수 있는가? 이러한 어려움은, 비록 널리 논의되어 왔다 할지라도, 현실보다 더욱 분명하다. 단순성과 복잡성은 상대적 용어들이다. 그 어떤 것도 완전히 단순하거나 완전하게 복잡하지는 않다; 그것은 주어진 국면들에서 단순하거나 복잡하고, 다른 측면들에서는 다른 식일 것이다. 만일 탁월함이 경건을 부분으로 하는 하나의 전체라면, 그리고 경건이 경건에 마주서는 탁월함으로서 그 어떠한 더 하위의 꼴에도 마주서지 않는다면, 부분들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탁월함은 복잡하고 경건은 단순하다. 그러나 만일 종들의 꼴들이 이러한 측면에서 단순하다면, 그 꼴들이 모든 측면에서 단순하다는 것은 따라나오기 어렵다; 꼴들의 단순성을 확립시키는 바로 그 논증은 그 꼴들이 다른 꼴들과 부분과 전체, 종차, 수반, 양립가능성의 관계 속에 정립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꼴들은 창 없는 단자들이 아니고, 그것들에 대해 설명이 제시될 수 있다. 그 꼴들은 그것들을 포함하는 더 넓은 꼴들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정의할 수 있다. 유들인 그러한 더 넓은 꼴들은 부분들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복잡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유들이 이러한 측면에서 복잡하다는 사실로부터 그것들이 모든 측면에 있어서 복잡하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유들이, 더 상위의 유들에 의한 그것들의 포함이라는 측면에서, 전체들이 그것들의 부분들의 합산보다 더 큰 그러한 전체들로서, 단순하다는 것일 터이다.


꼴들의 영역의 구조

1) 만일 종의 유에 대한 관계가 꼴들의 구조에 기초된다면, 그 구조는 반드시 계층적이어야만 한다.

2) 이것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 관점은 반대에 부딪쳤다. 예를 들어 체르니스 교수는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체에 대한 구성부분으로서 또는 종에 대한 유로서 어떠한 이데아도 없다. …플라톤은 어디에서도 이데아들 사이에 유와 종의 구별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라고 부른 것, 종차라고 부른 것, 그리고 종이라고 부른 것은 그에게 모든 별개의 관념적 단일체들이다, 각기 다른 것들의 현존을 수반하거나 다른 것들과 양립 가능한 측면들을 지닌 다른 것들 보다는 가기 다른 것들, 그러나 남김없이 다른 것들로 분석될 수는 없는 독립적 본성인. 플라톤은 그래서 분절을 사용하여 이데아들의 세계에서의 존재론적 계층을 산출할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소피스트』와 『정치가』, 분절에 대한 안내서로 여겨지게 된 그 두 저술들은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오히려 발견적 학습법을 의미했고, 한정된 이데아를 탐색함이 용이하도록 하는 수단을, 다른 이데아들로부터 그 이데아를 구별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의 함축들과 동일성을 의미했다는 것과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이데아, 이데아의 기원, 혹은 그것의 구성 요소들의 '구조'를 묘사하는 것으로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체르니스 교수는 일부 꼴들이 어떠한 부분들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서 단순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단순하다는 것을, 그리고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다는 것을 또한 주장한다. 그의 의견들은 후기 대화편들을 겨냥하고 있고, 명확하게 『소피스트』에서와 같은 종류의 집단에 속하는 원칙을 겨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초기 대화편들의 해석으로서도 잘 맞는다.

2) 이러한 관점에 반대되는 그 저술들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유나 혹은 그에 대해 꼴이 검토 아래에서 일부인 그러한 전체를 명시할 것임을, 또는 그 꼴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임을 진술하거나 시사하는 모든 저술들이다. 그러한 저술들은 : 『에우튀프론』 11e-12a, 『프로타고라스』 329c와 그 이후, 『메논』 74-6, 『라케스』 190c-d, 199e이다. 이러한 구절들 모두 유 아래에 종을 포함하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그래서 꼴들의 계층적 배열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지 않고 단층화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3)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저술들, 그리고 후기 대화편들의 다른 저술들이 그 저술들의 의도가 발견적이라는 점을 제쳐두고 세워진다고 제안한다: 그 저술들은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으로 전제를 반성한다. 그러나 탐구의 방법은 그 탐구의 핵심-문제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거나 적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꼴들이 상호에 대해 종과 유처럼 자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발견의 의도에 유용하다면, 어째서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의 가능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 확실한 대답은 그 전제가 꼴들의 실재적 구조에 답한다는 것이다.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대답에 반대하면서, 그 대신에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부는 방법론과 설명을 요하는 반대 사이의 동일척도불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실상 아무런 유들도 그리고 어떠한 계층도 없을 때, 어떻게 꼴들이 유들 아래에서 포함가능한 것들이고 발견적 기능을 제공하도록 계층적으로 배열된다는 전제가 가능한가?

4) 더 큰 어려움도 있다. 초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은 ποῖόν τι의 물음보다 τί의 물음이 우선한다거나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체르니스 교수가 제안하듯 오로지 꼴들 사이에서의 관계들만이 차이, 포함, 양립의 관계들이라면, 이러한 구별은 도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래서 만일 꼴 F가 그것의 함축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하지 않다면, 'F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F는 오로지 함축들과 양립들의 관계들에 의해서만 특징지어질 수 있고, 그러한 관계들 중 특정한 것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본질적인 것임을 뒷받침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οὐσία를 πάθος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F가 그것의 포함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시된다면, 후자는 그것이 F일 그러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 중의 어떠한 것들이든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보다 결핍하고 있거나 다른 것이라면, F는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이 아닐 것이고,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과는 다른 것일 것이다. 즉, 동일성은 '내적 관계들'로 이끈다. 그리고 양립가능성과 함축이 모든 각각의 꼴을 다른 모든 각각의 꼴들에 관련시키기 때문에, F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각각의 꼴과 관련될 것이다: 진리는 전체일 것이다. 스페우시푸스는 나중에 이러한 단계에 매우 근접하게 나아갔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플라톤은, 최소한 초기 대화편들에서는, 그렇지지 않은데, 왜냐하면 πάθος와 οὐσία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을 그 단계는 부정하기 때문이다.

5)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소크라테스가 물었고 또 그것이 대답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던 것처럼 물어지고 또 대답될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ποῖόν τι의 물음들로부터 구별이 유지될 것이라면, 꼴들 사이에서 포함들과 양립가능성 그리고 그것들의 부정들의 관계들 보다 더 나아간 어떤 관련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한 관련의 본성은 『메논』에서 올바름은 탁월함 자체가 아니지만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주장에 의해, 『라케스』에서 용기는 전체로서의 탁월함에 속하는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올바름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제시된다. 그 관련은 종과 유 사이의 관련이다: 한 부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 부분의 위치를 그것을 한 부분으로 하는 전체 속에서 정립해야만 한다.


탁월함의 단일성

1) 탁월함들이 유 속에 그것들을 정립시킴으로써 한정가능하다는 관점은 또 다른 초기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와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이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명제는 플라톤의 생애 마지막에 그의 생각을 차지한 것이었고, 그것은 종종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프로타고라스』의 교훈은 모든 탁월함들은 그것들이 앎이나 지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은 탁월함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정의로 고수되어 왔다. 솔직히, 그것은, 종과 유의 비동일성을 시사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가 아니다.

2) 『프로타고라스』에서 앎의 우선성은 단호하게 내세워진다(352b-c):

대부분의 사람들은 앎이 명령의 힘도 권위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앎을 가질지는 모르지만 그 앎은 제압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분노에 의해, 그리고 기쁨과 고통에 의해, 가끔은 사랑에 의해, 그리고 자주 두려움에 의해서 - 비록 앎이 어떤 가난한 노예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격정들에 의해 제멋대로 끌려다닐 것과 같이 말이다. 그것이 당신의 관점 아닌가, 프로타고라스? 아니면 당신은 오히려 앎이 아름다움과 능력, 그리고 그 무엇도 꺾을 수 없는 것에 속하는 어떤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텐가; 나쁨으로부터 좋음을 구별해 내기만 하면, 지상의 그 무엇도 그러한 앎을 가진 자를 그 앎 - 그의 조력자로 충분한 지혜 - 과 반대로 행동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겠는가?

이 구절은 의심할 나위 없이 소크라테스 그 자신의 믿음을 대변한다: 탁월함은 앎이다. 그 누구도 제 뜻으로 또는 알면서도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3) 만일 앎이 탁월함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탁월함이 앎을 수반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탁월함과 앎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점이 따르지는 않는다. 동치는 동일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치는 더 넓은 논증의 부분으로 나타난다. 그 논증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한 것에 대한 모든 이름들이라는, '용기',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탁월함'은 동의어들이라는(349b-c) 점을 받아들이도록 이끌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앎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4) 하지만 아직 이러한 방식에는 어려움들이 있다. 우선, 그 설명이 탁월함과 앎을 동일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능력의 동일성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이다. 만일 그 탁월함들의 명칭들이 동의어들이라면, 그 탁월함들이 지혜로 화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어떤지, 지혜를 포함한 그 탁월함들이 경건이나 올바름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임의적이다. 물론, 탁월함은 앎이나 지혜이다; 그러나 그래서, 탁월함은 용기나 경건, 또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동의어에 대해 대칭적인 관계이다.

5) 그 동일화 방식에는 두번째 어려움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들이 구별된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네 가지 논증들을 내놓는다. 첫번째(330b-331b)는 올바름과 경건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두번째(332a-333b)는 사려와 지혜의 단일성을; 세번째(333d-334a)는 그 결론에 도달하지 않고 중단되는데, 어쨌든 올바름과 사려의 단일성을 주장할 것이었다. 거기에서 남은 대화편을 통해 중단 없이 추적되는 그 물음이 다시 말해진 다음(439b-d) 긴 중간극이 따른다. 마지막 논증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용기와 지혜의 단일성을 증명할 것을 자임한다(349d-360e). 만일 탁월함들의 단일성이 탁월함들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해진다면, 이러한 논증들 각각은 논리적 오류이고, 그것들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그리고 창피스럽도록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그 문답의 고비를 넘긴다. 프로타고라스는 지적인 사람으로서 도처에서 묘사되고, 말들을 다루는 방식들에 있어서 지혜롭지만,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을 다룰 줄 모른다. 그의 실패는 물론 말의 단련에 있어서 기술 부족 탓이 아니다; 그것은 소피스트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비록 그가 탁월함을 가르치리라 주장할지라도, 탁월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그 사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은, 만일 그 논증들이 공허한 오류들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결론을 가리키는 쪽으로 그 논증들이 행한다고 의미되는 것으로서 이바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6)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타고라스』도 실패로 끝나고, 그것은 익숙한 이유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는 먼저 탁월함이 무엇인지 결정함이 없이는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점은 추론할 것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답의 변증에 대한 명쾌한 요약정리를 되보여준다 (360e-361c):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탁월함에 관련한 것들을 가지고 바로 그것인지, 탁월함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 밝혀내려는 바람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묻는다. 왜냐하면 나는 만일 그것이 한 번만 보여진다면 당신과 내가 논의한 물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가 말끔하게 정리되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논증의 결과는 그것이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혀를 가졌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 둘 다 뭐 이런 바보들이 있나,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분명히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없다고 말한 소크라테스 당신은 지금 바로 그 반대의 것을 설득하려 들고 있다, 모든 것 - 올바름도 사려도 그리고 용기도 - 은 앎임을 보여주려고 애쓰면서, 그걸 보여줌으로써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 는 것이 따라나오는 것을 말이다. 만일 그것이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하려 애쓰는 것처럼 앎과 다른 것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만일 그것이 당신 주장처럼 전적으로 앎일 것이라 증명하는 것이 된다면, 소크라테스, 만일 그것이 가르쳐질 수 없다면 더욱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서 프로타고라스가 조금 전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고 전제했는데 지금은, 다름 아닌 앎을 피함으로써, 그것이 무엇보다도 최소한 가르쳐질 수만은 없을 것이도록 그렇게, 그 반대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 프로타고라스, 내가 주장된 이 모든 것을 앞뒤로 볼 때, 나의 바람은 그것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것이오: 나는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향해 진격해야 할 것 같고 또 공격해야 할 것 같소. 그리고 나서 다시 되돌아와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물어야 할 듯 싶소.

『프로타고라스』의 결론에서,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모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들을 뒤집어 버렸다. 이러한 뒤얽힘은 변증적 반어법의 단편이다. 그 목적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의 필연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7) 『프로타고라스』는 『메논』에서 그 짝이 되는 조각을 가진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그는 전제를 가지고 그 문제를 정착시킬 것을 최종적으로 떠맡는다. 그는 만일 탁월함이 앎이라면 그것은 가르쳐질 수 있다(87a-c)고 가정한고; 그것이 앎이라고 주장한다(87c-89a); 그리고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선생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89c-96c); 그리고 그것이 '다이몬적인 분배에 의해, 이해 없이' 사람들 속에 현존한다고 결론내린다(100a). 즉, 소크라테스는 함축을 전제하고, 그 함축의 선행하는 것을 긍정하고, 그것의 결론을 부정하며, 회의주의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구조는 플라톤이 그의 독자들을 그의 전제들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할 작정이었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나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먼저 밝혀내지 않고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아포리아(당황)로 끝을 맺었고, 심지어 기하학자들로부터 빌려온 새로운 가정의 방법조차 그들을 구해내지 못한다(86e-87a). 그러나 또, 기하학자들은 그들의 용어들을 정의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할 수 없다. 이것은, 그래서, 그들의 실패의 교훈이다. 정의는 필수적이라는,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중인 그 어떤 것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익숙한 소크라테스적 교훈이다. 그래서 『메논』은 또한 변증적 역설의 한 조각이다: 그 극적인 구조는 정의가 필수적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과 같은 그런 도덕적 결론들을 권고하는 것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그러한 결론들만이 달성될 수 있는 그러한 조건을 지시하는 데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다.

8) 만일 이것이 『프로타고라스』와 『메논』에 대한 옳은 설명이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전하고자 하는 바가 탁월함과 앎의 단일성이라는 관점에 반대하여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그 둘 중 어떤 대화편도 이러한 문제에 헌신하지 않고, 두 대화편 모두 그 대화편들의 변증적 중심점으로서,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의 필수불가결함 - 즉 그것을 정의하는 일의 필연성 - 을 강조하며 결론에서는 그 물음이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9)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관한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이, 그 방식에서 탁월함이 하나일 그러한 대안적 방식들을 예상한다는 것은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에 동의하도록 이끌린다 (329c-330b): 탁월함은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용기라는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구별되고, 같은 것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 아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오로지 크기에서만 차이가 나는 황금의 일부 같은 부분들이 아니고, 두 눈과 두 귀 처럼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부분들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가 아니라(οὔτε αὐτὸ οὔτε ἡ δύναμις αὐτοῦ, 330b) 서로 그러한 종류의 것(οἷον)에 속하는 것들이다; 탁월함의 그 부분들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용기 있으나 올바르지 못하거나 올바르되 지혜롭지 못할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사람은 탁월함 전부를 가지지 못하고서도 탁월함들의 일부를 가질 것이라는 점에서, 분리될 수도 있다.

10) 다음으로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하는 하나의 전체임을 긍정함에 있어서, 복합된 반박을 내놓고 있다: 그는 탁월함의 상이한 부분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동일한 것들임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 부분들이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도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탁월함들이 하나일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

11) 탁월함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들이 상이한 정의들을 가진다고 마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탁월함이 기능에 있어서 다르거나 같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탁월함의 기능은 무엇인가?

12) 그런 물음은 『프로타고라스』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대답되지 않는다. 탁월함의 기능은 탁월함 그 자체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얼굴에 대한 예시를 무관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두 눈과 두 귀는 그것들의 기능들인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차이가 난다. 다시, 두 가지 덕들은 그것들이 동일하다거나(ταὐτόν) 아주 유사하다(ὁμοιότατον)는 것조차 긍정할 것도 없이 서로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οἷον)에 속한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단어의 '기능'이 그 단어의 의미 또는 능력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올바름이 '올바름'의 의미라 할지라도, 올바름의 기능은, '올바름'의 기능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은 아니다.

13) 만일 탁월함의 기능에 대한 관념이 이해될 것이라면, 우리는 그 표현이 그 안에서 사용되는 그러한 논증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기능으로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부정(330b)하는 근거, 그리고 나중에 그 탁월함들이 서로 간에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라는 것을 부정(330e-331c)하는 근거는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다(329e; 349d참조). 그리고 이것은 탁월함들이 서로 만나도록 한다는 것, 경건의 현존이 올바름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 또는 용기의 현존이 지혜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추론은 명확해 보인다: 탁월함의 기능은 그 기능을 도입하는 어떤 것 속에 놓인다; 만일 탁월함들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면, 그것들은 분리가능하다;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

14) 이것은 그 논증의 양식에 걸맞는다.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모두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명제는 만일 그 명제가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나 또는 그것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면 틀린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만일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라면, 그것들은 기능에 있어서도 하나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기능에 있어서 하나라면 정의에 있어서도 하나라는 것이 뒤따를 방법은 없다. 사람이 올바름 없이 경건할 수 없다거나 경건함 없이 올바를 수 없다고, 또는 경건과 올바름이 서로를 도입한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름의 정의와 경건의 정의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탁월함들은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구별가능하다; 만일 탁월함들이 구별가능하다면, 그것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만일 탁월함의 부분들이 황금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면, 그 자체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모두 상이한,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라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즉, 탁월함의 특수한 경우에, 황금과 얼굴에 대한 그 예시들은 부적당하다는 것일 수 있고, 황금도 얼굴도 밝혀내지 못하는 정의에 있어서 차이와 기능에 있어서의 동일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일 수 있다.

15) 그 논증에 대해서는 이 만큼이면 됐다. 그러나 그 변증적 상황은 여전히 더욱 복잡하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고 추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올바름 없이 단지 지혜롭거나 용감할 수 있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탁월함들이 그 자체에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다르다는 그 주장을 반박할 것이고, 탁월함들이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탁월함들이 어떤 면에서 하나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것들이 서로 도입하고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라는 것인지 말이다.

16) 『프로타고라스』는 이 물음에 대해 세심하게 고안된 모호함을 유지한다. 그것은 대안들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니고, 프로타고라스 그 자신은 그 논증에 대한 그 대안들의 관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놀랄 것도 없다. 탁월함들이 정의에서 하나인지 기능에서 하나인지 혹은 양자에 있어서 하나인지 묻는 것은 탁월함이 무엇인지를 암시함으로써 묻는 것이다. 그 물음은 오로지 대화의 중국에서야 명확하게 된다(361b-c).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고려하는 중에 내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시사한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그가 탁월함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했고(318a-319a), 그리고 탁월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자로서, 소크라테스적 엘렝코스(논박술)가 바로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계획된 그러한 그 자신의 무지에 대한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탁월함의 본성으로 파고드는 탐구에 유익하게 착수할 수 없었다.

17) 요약하면: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하나일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예상한다 - 말하자면, 정의에 있어서의 동일성이나 같음, 그리고 기능에 있어서의 상호 함축 또는 같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 주제에 대한 다른 대화편들의 논증 양식에 부합한다. 그에 대해 『메논』은 탁월한 예시를 제공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단언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모든 것들은 영혼에 의존하지만, 영혼에 속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좋음을 지혜에 의존한다고; 이러한 설명으로, 유익한 것은 지혜이고, 우리는 탁월함이 유익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함이 지혜이고, 전체로서나 부분에 있어서나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지혜와 탁월함이 동일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상 탁월함들이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오히려 지혜가 탁월함에 대해 필연적인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한 것이며, 조건이며, 다른 탁월함들을 수반하고 또 그것들에 의해 수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 이후 『정체』에서 플라톤은 영혼에 대한 분석에 기초된 탁월함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그 설명은 탁월함들의 단일성을 상호 함축을 통해 긍정한다. 영혼은 그 부분들 각각이 적합한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올바를 수 있다; 절제는, 각 부분이 지배해야 하고 따를 것에 동의할 때; 지혜는 이성적 부분이 그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고 지배할 때, 용기는, 기백의 부분이 그 지배자의 명령에 있어서 훈련될 때 생긴다(『정체』Ⅳ, 442b-d). 그 탁월함들은 여기에서 명백하게 정의상으로 다르다; 그만큼 명백하게, 탁월함들은 기능에 있어서 하나이다 - 그것들은 서로를 도입하고, 서로로부터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용기는 지혜를 수반하고 그것에 의해 수반된다; 지혜는 올바름을 수반하고 또 그에 의해 수반된다; 올바름은 절제를 수반하고 그에 의해 수반된다. 소크라테스가 결론에 있어서 '우리가 지금 논증에 있어서 이 높이에 올랐으니, 내가 보기에, 산 정상으로부터 보는 것처럼, 탁월함의 단일한 꼴 하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언급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원칙은 그래서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라는 주장과, 그리고 탁월함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통해 정의될 수 있다는 주장과도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분들과 부분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동시함축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로고스와 우시아

1) 만일 앞서 말한 설명이 건전하다면,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그런 종류의 논증은 고려함에 있어서 실재적이고 명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지 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2) 그 대상이 적어도 그것이 유와의 관계에서 존립하는 종일 때에는 단순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될 것과 정의함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것을 고수하였던 그러한 관련은 획득하지 않는다: 그 종은 결합된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와 함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같음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같음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튀프론』10d, 13에서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은 경건에 대한 정의로서는 거부되는데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르기 때문이고(ἕτερον; 10e, 9에서 ταὐτόν이라는실에 견주어 반대로), 이러한 거부는 15c, 2에서 반복된다(οὐ ταὐτόν … ἀλλ᾿ ἕτερα ἀλλήλων).

3)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같음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연의 동일성, 또는 진리치 보존(salve veritate) 대체성이 아닌데, 설령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그러한 것들 모두가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것들만이 경건하거나 경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순히 πάθος를 진술할 뿐 οὐσία를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념적 동일성인 것도 아니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생각함에 있어서,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의 정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의어의 같음도 아니다.

4) 정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의에 있어서 필요한 같음은 이를테면 서술적 동일성, 말하자면 샛별과 태백성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하거나, 또는 - 그 예시에서 필요한 경험적 우연성을 피하기 위해 -  일곱번째 정수와 네번째 소수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동일성은 두 가지 한정적 서술들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실재적 정의에 있어서 정의될 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대상 그 자체이다. 그 비유는 만일 서술적 구절이 명사에 의해 대체된다면 더욱 근접하다: '금성은 샛별이다' 또는 '7은 네번째 소수이다'; 무엇보다도 유일한 서술로 정의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도 오독이다. 지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함이다; 그러나 '…는 탁월하다'라는 말이 소크라테스를 서술하는과 같은 의미에서 '…은(는) 탁월함이다'라는 말이 지혜를 서술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첫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이고, 두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한 특성에 대한 한 특성의 예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정적 서술에 있어서 필요한 후자의 관계이다.

5) 아마도 정의에서 필요한 종류의 동일성은 그것 자체의 유(sui generis)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포함하는 유와 그것을 그 유 속에서 다른 종들로부터 지적해 내는 종차를 진술함으로써 그 종인 어떤 것을 말할 때 필요한 그런 동일성이다. 종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종차는 종들에 대한 구별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그 구별의 결과이다; 정의에 있어서 종차는 사유근거이고, 존재근거가 아니며, 그러므로 정의에서 필요한 동일성은 대상들의 동일성이 아니다.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위한 최선의 - 그리고 ὁρίζειν과 ὅρος의 대다수 함축에 부합하는 하나의 -  비유는 사상(寫像)의 비유이다: 정의한다는 것은 한 종의 위치를 그 종을 포함한 유 속에서 정하는 것이다. 만일 종이 농장이라면, 유를 규정함의 목표는 그 농장이 위치하는 마을을 지시하는 것일 터이다; 차이를 규정함의 목표는 농장의 경계들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조사된 경계선들의 현존을 밝혀내는 것일 것이다. 정의에서 필요한 같음은 말하자면, 유일한 위치의 같음이다: 정의될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 안에서 사상된 그 위치를 점유한다.

6) 이러한 방식에서 생각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는 형이상학에서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꼴들이, 서로에 대해 포함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포함되는 것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존립하면서, 계층적으로 정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내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거나, 상호 구성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난다: 종들은 그것들이 만일 그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의해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리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특성을 그것들의 유들에 의존한다; 올바름은, 만일 그것이 탁월함이 아니었다면, 올바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탁월함은, 그것의 한 종이 올바름이 아니었더라면, 탁월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는 그것의 현존과 특징을 그것의 종에 의존한다. 전체는 그것의 부분들에 의존하여 전체인 그것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 점에 대해 조금 덜 명확하지만, 아마도 유들에 대한 정의는, 종들에 대한 정의와 달리, 구성 요소들로의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7) 이것은 플라톤적 유들에 대한 함축의 풍부함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있어서, 유들은 종들로부터의 추상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사람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사람과 말은 동물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그 유는 여기에서 단지 다양성에 대한 공통된 요소일 따름이고, 그것의 종들보다 더 '추상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정의가 사상에 대해 동종적이라면, 만일 유들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들이라면, 유는 공통된 특징이 아니라, 마치 그것의 현존이 그것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의 현존에 의해 전제하기도 하고 전제되기도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래서 유는, 함축의 상대적으로 결여되었음보다는 오히려 함축을 잔뜩 실은 것으로서, 결핍되었다기 보다는 풍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8) 하나의 체계로서, 유는 한 종류의 폐쇄를 지니고 있어야만 하고,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류의 제한들로부터 갈라놓는 단일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의 구별은 한 사물에 본질적인 것과 그 사물이 단지 가지게 되었을 뿐인 특징 사이의 구별을 수반한다. 올바름 또는 탁월함에 대한 경건의 관계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에 대한 경건의 관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 정의에 있어서 내적 성질을 시사한다면, 그러므로 그것은 꼴에 대한 모든 설명들이 본질을 진술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그 관계의 내적 성질만큼이나 외적 성질도 시사한다.

9) 유들은 체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종들은 그 유들의 요소들이기 때문에, 종들에 대한 정의들은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일상적 진술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들이다. 그러한 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또는 사용하기 위해서, 일반적 언어에도 개별적 사물들과 행위들에도 호소할 수 없다: 꼴들에 대한 지식은 지적 직관을,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는 직접적 통찰을 요청할 것이다. 실재적 정의의 진리는 오직 그에 대한 정의가 설명인 그러한 진리를 파악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10) 만일 이러하다면, 정의와 직관은 상보적일 것이다. 지적 직관은 실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만 '알고 있음에 의한 앎'에 속하는 난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설명도 제공함이 없이 푸른 하늘의 한 조각을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감각은 지적으로 노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꼴들에 대한 직관은 반대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증은 단순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 이전에 불충분한 설명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어떤 것을 충분한 설명 속에서 명확하게 보려고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시야는 진술들에 대한 검토에 의해 확보된다. 미리 앎에 의한 앎에 대한 지적 직관의 비교는 지적 직관의 대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11) 일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이 지점에서 압박을, 직관과 논리 사이의 긴장을 발견할 것을 주장해 왔다. R. G. 콜링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지만 상당히 높게 플라톤의 철학적 성취들은 평가받고, 최고에 못 미치는 어떤 가치에 있어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그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이 그 자신에 의해 철학과 수학 사이에서 확립되는 충분히 깊은 구별로 이끄는 것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결함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하는, 철학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방법론이 철학을 둘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하나는 재기 발랄한 억지 이론의 식상한 낭비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관적 시야이다. 이러한 첫번째 것이 두번째 것으로의 경로라는 것은 여러 세대들에 속하는 경험에 의해 플라톤이 그들의 길잡이로 취해졌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실들에 권위에서 받아들여질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 조명 속에서 사살들이 이해될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탐구 속에서, 철학적 탐구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플라톤이 우리에게 주진 않았다.

이러한 비판은 감각 지각의 틀을 관통하는 지적 직관을 강요함으로부터, 지적인 것으로서, 그 직관이 판단을 통해 지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함으로부터 귀결한다.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한 행위는 하나의 진술이 아니라, 진술 속에서 표현 가능한 하나의 내용을 필요로하고, 그로써 비평에 적합하다. 한 진술은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통해 통찰이 표현되는 그러한 것이다 - 그 자신에 대해서조차. 안다는 것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12)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초기 대화편들을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蟲-
플라톤의 꼴들에 대한 초기 이론

서론

1)『에우튀프론』은 실패로 끝났다; 경건함의 어떤 정의(定義)도 진술되지 않고, 아무것도 함축되지 않는다. 그 대화의 참된 의미가 밝혀지도록 파헤쳐질 수 있는 아무런 '가면'도 없다; 그 대화는 그것의 의미를 그 표면에 지닌다.

2)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 대화가 아무런 명확한 철학적 내용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W.A.하이델은 일찍이 『에우튀프론』에 대해 '더 짧은 플라톤 대화편들 중 어느 것도 철학적 이론으로 향하는 암시들의 가치로 그 책과 비교될 수 없다'라고 언급했었고, 이것은 물론 진실이다. 그 대화편의 흥미로운 점은 그것의 변증법에 대한 산출에 놓이지 않는다, 아무런 산물도 없기 때문에; 그 흥미는 그 변증 자체에 자리한다. 그 변증은 그 변증의 작업을 규제하는 것들의 본질 또는 본성에 대한 가정들에 기초하여 나아간다; 그리고 만일 그 작업이 실패로 끝난다면, 경건에 대해 성취된 어떠한 정의도 없이, 실패의 시금석은 정확하게 그 탐구를 이끌었던 규칙들에 놓인다.

3) 그러한 규칙들, 그리고 그 규칙들이 근거하는 전제들은 형상들에 대한 이론(어떤 특정한 바로 그 이론은 아닌)을 형성한다. 그 이론은 명시적 진술보다 전제의 차원에서 훨씬 더 많이 작동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의 요소들이 어느 정도 정밀하게 배치되는 이론이다. 『에우튀프론』에서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무엇이 경건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얻는 것이다. 그는 그의 탐구를 이어감에 있어서 경건에 대한 하나의 ἰδέα, 혹은 εἶδος, 하나의 꼴이 있다고, 그리고 이 꼴은 보편적이고, 모든 경건한 것들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5d, 6d-e). 나아가 그는 그 꼴이 그로써 어떠한 것들이 경건하고 어떠한 것들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규준으로 사용될 것이라 가정한다(6e); <p67>그 꼴에 의해 또는 그 꼴의 덕(virtue) 안에서 경건한 것들이 경건하다고(6d); 그리고 그 꼴이 실질적이거나 본질적인 정의의 능력이라고 가정한다(11a, 12c-d). 이러한 전제들은 꼴들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구성한다.

4) 그 이론은 논리적이기도 하고 형이상학적이기도 하다. 논리적으로, 꼴들은 변증에 있어서 규제적 규칙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그것'의 전항들로서 그것들은 소크라테스의 정의 탐색에 있어서 허용가능한 답변의 종류들을 결정하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는, 허용될 수 없는 것들을 결정한다. 그 꼴들은 변증이 성공한 순간과 실패한 순간의 조건들을 한정한다. 형이상학적으로, 형상들은 세계의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꼴들은 사물들의 실질적 본성들이고, 세계는 그 본성들이 그러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이다.

5) 플라톤의 이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측면들은 실질적 정의의 관념에서 만난다. 변증은 규칙에 의해 통제되고, 사물들의 본성으로 향하게 된다. 변증의 규칙들은 그 변증의 목적에 의해 결정된다. 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실질적 정의가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질적 정의가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우튀프론』 안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변증에 쌓아올린 조잡한 상부구조물이 아니다: 그 이론은 변증의 토대이다. 그 이론 없이, 변증은 그것이 사용하는 규칙들에 의해 수행되지 않았거나 그것이 의도했던 목표를 향해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도덕 탐구는 실재에 대한 탐구이다.

6) 그 이론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에우튀프론』에서 가정된 꼴들에 대한 이론은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들에서 발견되는 그 이론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버크는 일찍이 '아무도 밤과 낮의 경계 사이에 한 획을 그을 수 없다, 빛과 어둠이 분간할 수 있는 그 전체 위에 있기 전까지'라고 언급했었다. 이것은 초기 대화편들과 중기 대화편들에서도 그렇다. 한편으로는 『에우튀프론』과 다른 한편으로는『파이돈』 그리고 『정체』 사이의 그 차이는 아마도 빛과 어둠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는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 중기 대화편들의 철학은 결부된 반대항들의 온상이다: 있음과 됨, 겉모습과 실재, 영속과 유전(流轉), 이성과 감각, 몸과 영혼, 육체와 정신. 이러한 반대항들은 결핍의 심연에 의해 나뉘어진 두 세계에 대한 존재론에 뿌리를 둔다. 더욱 실재적인 것이 덜 실재적인 것에 맞서고, 원형(原形)들이 그림자들과 반영물들에 맞서는 것처럼, 영원한 꼴들을 내용물들로 지닌 앎의 세계는 감각적이고 변화하는 내용물들을 지닌 사견의 세계에 맞선다. 가시적 세계는 그 세계에 속하는 결핍 안에서 알 수 없는 상(象)이고,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이해 가능한 세계의 상이다. <68p>만일 『에우튀프론』과 같은 초기 대화편들에 이러한 세계관의 씨앗들이 뿌려져 있다면, 그 씨앗들은 아직 그곳에서 수확되지 않았을 것이다.(67-69.2)


1. 변증의 규제적 원칙들로서 꼴들

1)『에우튀프론』의 중심물음인 '경건함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 자체로, 그 물음은 고유하게 다의적이다: 그 물음은 그에 답하도록 요청되는 본질에 대해 하나의 예시인지 구별되는 특징인지 또는 본질에 대한 설명인지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특징 자체(αὐτὸ τὸ εἶδος)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그러한 특징을 설명하도록 - 즉, τὴν ἰδέαν τίς ποτέ ἐστιν(6d-e), '이 특징인 그것'을 설명하도록 - 에우튀프론에게 요청하면서 이 물음을 더욱 명확하게 만든다.

보편개념들로서 꼴들

1) 경건의 ἰδέα 또는 꼴들을 요구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모든 각각의 경건한 행위에 있어서 동일한 것(ταὐτόν, 5d)이 이야기되길 기대한다. 에우튀프론이 경건함의 의문스러운 예시들을 가지고 답할 때,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의 예시들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로 경건하니까,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바란 것은 그것들 모두가 지니는(ἔχον, 5d) 그 꼴의 본성이기 때문에.

2) 논증의 이러한 흐름은 다른 대화편들에서 발견된다. 『라케스』(191e-192b)에서, 용기가 전쟁에서의 용기에 대한 예시에 의해 정의될 때,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용기는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바다에서의 위험들 속에서도, 질병과 가난, 그리고 정치에 있어서도 또한 발견되고, 소크라테스가 이야기되길 바란 것은 이러한 것들 전부에 있어서 동일한 것(ταὐτόν)이다. 『대(大) 히피아스』(300a-b)에서, 소크라테스는 만일 두 가지 서로 다른 것들이 아름답다면, 그것들은 반드시 그것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그러한 어떤 동일한 것(τι τὸ αὐτό)을 가져야만 한다고, 그리고 이 공통된 것(τὸ κοινὸν τοῦτο)은 그 두 가지 것들에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초중기 대화편에서 메논이 예시들의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덕(탁월함)을 정의하고자 시도할 때, 소크라테스는 유추를 가지고 그를 바로잡는다. 당신이 벌이 무엇인지 질문받았다고 가정하자. 여러 서로 다른 종류의 벌들이 있지만, 그렇게 많은 벌들이 있다는 것은 그것들을 이름짓는 데에는 아무런 득될 것이 없다; 벌들은 벌들로서 다르지 않고, 그 물음은 모든 벌들이 나누어 가지는 공통된 특징에 대한 어떤 설명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특징은 덕과 함께: '다양하고 무수한 덕들이 있겠지만,<69p> 그 덕들은 전부 그것들을 덕들이도록 만드는 하나의 특징(εἶδος)을 가지고, 그 특징은 덕이 무엇인지 말할 그 누구라도 그의 시선을 집중시켜야 할 그러한 것이다'(『메논』72c).

3) 보편개념으로서, 꼴들은 변증에 있어서 규제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 꼴들은 τί ἐστί,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들에 있어서 ἐστί의 전항들이고, 그 꼴들은 그러므로 그 물음의 본성을 상술하며, 그래서 그 물음에 분별있게 제시될 답변들의 범위를 제한한다. '경건은 무엇인가?' 혹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들은 단순하게 문법적 형식의 말로는, 경건이나 아름다움의 예시에 대한 요청일 수 있었다; 그리고 에우튀프론과 히피아스 모두 처음에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의 물음을 해석한다. 중성 형용사와 관사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추상적 명사조차 이러한 의미에 대해 열려있다: 카르미데스는 사려의 예시를 듦으로써 무엇이 σωφροσύνη, 사려(중용, 절제)인지 말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의 예시들 모두에 있어서 동일한 그런 ἰδέα 또는 꼴을, 그리고 예시들 모두가 가지는 어떤 것을 찾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배제시켰다; 왜냐하면 경건과 사려와 아름다움은 보편개념들이고, 그것들이 무엇인지의 물음에 대한 대답들은 단지 그것들의 예시들을 제공하기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규준들로서의 꼴들

1) 소크라테스는 그것으로써 어떤 것들이 경건하고 어떤 것들이 경건하지 않은지 말할 규준 혹은 모형으로 사용하기 위해 경건의 본성이 이야기되기를 바랐다. 경건의 꼴은 경건한 것들이 그와 같은 종류(τοιοῦτον)의 것(6e)이라는 그 사실에 대한 추론에 의해서 이 일에 적합하게 될 것이다. 유사하게, 뤼시스에서 나이와 함께 희어진 머리카락은 흼과 같은 동일한 종류(οἷον)의 것 - 그것에 지금 있는 것과 같은 동일한 종류의 것 - 이다(217c-d).

2) τοιοῦτος (라틴어 talis, of such kind)와 οἷος (라틴어 qualis, of the kind that, such as)라는 단어들은 각기 의문사 ποῖος, '어떤 종류의?'와 상관하는 지시 대명사와 부정 대명사이다. 그 대명사들의 사용은 꼴들의 예시들과 꼴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시사점은 그 꼴이 규준 또는 παράδειγμα로 기술된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러나 이 암시는 함축이 거의 아니다. 예를 들어 『고르기아스』460b에서 οἷον의 사용은 유사점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중에 paronymy(파생어, 동근어)라고 부를 어떤 것을 포함한다. 『프로타고라스』에서 οἷον의 사용은 동일성이나 상호 함축을 포함한다. 그리고 『파이드로스』246a에서 그 사용은 유사성과 대비된다. 이러한 단어들의 사용이 유동적이라는 것, 그리고 오직 특정한 문맥 안에서만 한정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τοιοῦτον이 『에우튀프론』6e에서 유사성을 함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플라톤이 그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유사성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어휘를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는 초기 대화편들 그 어디에서도 꼴들의 예시들을 꼴들의 μιμήματα나 εἰκόνες, 또는 ὁμοιώματα라고 부르지 않고, 그러한 예시들이 꼴들과 맺는 관계들을 이러한 명사들의 어원들로부터 파생된 동사들을 가지고 묘사하지도 않는다.

3) 꼴들의 예시들이 꼴들과 유사하다는 주장은 그러니까 『에우튀프론』이라는 글에 의해 시사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건 비경제적이다. 그 글이 그런 주장 없이도 이해되기 때문이다. 경건의 꼴은 경건한 것들을 경건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규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그 꼴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적합한 이유는 그 꼴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만일 경건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 한 번 이해되기만 한다면 그러한 앎이 그 아는 자로 하여금 경건한 것들을 경건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구별해낼 수 있도록 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경건은 그것과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들을 - 즉, 그것의 사례들인 것들을- 간파해내기 위한 규준이다.

4) 이러한 해석은 그 문맥에 적합하다. 인식론적으로, 꼴들은 그 꼴들의 사례들을 간파하기 위한 규준들이다. 이러한 기능의 존재론적 근거(토대)는 예시들이 그 꼴을 가진다는 것(5d), 그리고 그 꼴은 바로 그 꼴에 의하여 그 사례들이 그것들인 그러한 것인 바의 것이라는 것이다(6d).

5) 꼴들이 규준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전제가 그 꼴들이 보편개념들이라는 전제로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그의물음 속에 직접적으로 깊숙히 박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하다.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동일성에 대한 실천적인 문제에 의해 『에우튀프론』에서 촉구된다: 경건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은 어떤 종류의 행위들이 경건하고 또 어떤 행위들이 그렇지 않은지를 알기 위해 중요하다. 무엇이 우정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두 사람이 친구인지를(『뤼시스』223b), 혹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한 연설이 아름다운지를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대(大)히피아스』286c-d), 무엇이 경건인지에 대한 앎이 없이는 한 주어진 행위가 경건한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6e, 9a-c, 15d-e). 그 꼴을 아는 것은 그 꼴의 사례들을 알기 위한 조건이다: 경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경건한 것들을 경건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구분할 척도에 대한 앎을 요청하는 것이다.

6) 척도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단지 추상적 이해가 아니라 삶에 대한 올바른 질서지음을 향해 정향된 소크라테스의 변증에 본질적이다; 변증의 그 목표는 그러한 질서의 원칙들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 원칙들을 구체적인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단을 얻는 것이다. 『정체』(1권, 344d-e)에서는 경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의는 무엇이며 탁월함(덕스러움)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되는데, 왜냐하면 삶을 꾸려나아감이 그러한 앎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카르미데스』(175e)에서 젊은 카르미데스는 가장 사려깊은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사려에 대한 앎이 없다면, 그는 그의 삶에서 그 사려의 현존- 훗날 30인 참주들 중 하나가 되는 한 남자에게 있어서의 - 으로부터 아무런 이득도 갖지 못할 것이다. 만일 변증의 목적이 꼴을 정의하는 것이라면, 그 실천적 목표는 사물들 속에서 꼴의 식별일 것이다. '경건함 그 자체는 모든 각각의 행위들에 있어서 그 자체로 동일하지 않은가? 그리고 불경건함의 경우에는, 경건함과 전혀 반대로, 그 자체로서는 동일하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각각의 불경할 것들은 불경건함이라는 점에서 단 하나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가?'

7) 꼴들은 숱한 상이한 사례들에 공통적인 보편적 개념들이기 때문에 , 특정한 종류의 대답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배제된다: 말하자면 예시에 의해, 즉 사례들을 인용함으로써 정의를 시도하는 그런 모든 대답들이 배제된다. 왜냐하면 꼴들은 규준들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류의 답변이 배제된다: 경건이나 사려나 아름다움이 어떤 식으로든 불경건이나 사려깊지 못함 또는 추함을 암시할 그런 종류의 답변들은 배제되는 것이다. 꼴들은 그것들의 반대항들에 의해서 한정되지 않는다.

8) 『에우튀프론』의 경우에서 첫번째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검토는 정확히 이 점에 주목한다. 경건은 단지 정의로움이 부정의함일 수 있는 만큼만 불경건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 또한 신들에 의해 미움받고 그래서 불경하기 때문에, 경건은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일 수 없다. 『정체』에서,  그러한 행위들이 때에 따라 올바를지 모르지만, 또 이따금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올바름에 대해서 제안된 진실을 말하고 빚을 갚는 것으로서의 정의의 충분한 반박이다: 만일 한 친구가 당신에게 무기들을 빌려주었고 그 다음에는 정신이 나갔다면, 그러한 친구가 그 무기들을 요구할 때 그것들을 되돌려주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미친 사람에게 진실만을 말하는 것도 옳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고 빚진 것을 되돌려주는 것은 올바름의 정의가 아니다.

9) 꼴들이 그것들의 반대항들에 의해 한정될 수 없다는 그 원칙의 응용은 『대히피아스』에 있다.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하고자 할 때,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너무 협소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를 주의시킨다; 아름다운 처녀들 외에도 아름다운 암말들과 아름다운 리라들 그리고 아름다운 항아리들도 있다. 히피아스는 그 항아리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치 없고 사소한 것은 아름다움으로 암말이나 여인에 전혀 비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무엇보다도 한 항아리는 그 종류에 있어서 아름다울 것이고, 아름다운 여인조차 여신에 비한다면 추할 것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아름다움 그 자체는 무엇인가? 그 물음은 상이한 비교들 속에서 추한 것보다 더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예증함으로써 답해질 수는 없다. 히피아스는 다음으로 아름다움이 황금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황금이나 황금의 있음이 아름답지 않은 상황들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을 반박할 때, 히피아스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나로서는 당신이 아름다움이란 그 누구에게도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결코 추한 것으로는 드러나지 않을 그러한 종류의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는 답변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바로 그거에요, 히피아스. 지금 당신은 아름답게(빼어나게) 나를 이해하네요.'(291d).

10) 꼴들이 그것들의 고유한 반대항들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는 원칙은 꼴들의 자기동일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이 αὐτὸ αὑτῷ, 그 자체로 동일한 것이며, 그것의 반대, 불경건도 αὑτῷ ὅμοιον, 그것 자체와 같은(동일한 것)이라고 제안함으로써『에우튀프론』에서의 변증을 시작했다(5d). 그리고 그는 그와 같은 경건의 본성을 찾고 있다. 이러한 제안은 7a에서 경건이 불경건과 동일하지 않지만 그것의 정 반대항이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그리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으로서 에우튀프론의 경건에 대한 정의에 대한 반박은 그래서 그 정의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위배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진술된다: 당신은 ὃ τυγχάνει ταὐτὸν ὃν ὅσιον τε καὶ ἄνοσιον, '어떤 동일한 것이 우연히 경건이면서도 또 불경건이기도 한 그러한 것'을 진술함으로써 경건이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다(8a). 여기에서 전제는 만일 경건이 어떤 식으로든 불경이라면, 그것은 불경건의 반대항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고, 이 추론 아래에 깔린 직관적 원칙은 분명하다: 어떤 것 또는 그 어떤 것의 덕에 의해 그것들이 경건한 그러한 어떤 것은 그러한 경건이고, 그 자체로 불경건일 수 없다는 것이다. 꼴들의 자기동일성은 그 꼴들의 반대항들에 대한 단적인 배제를 함축하고, 그러한 배제는 직접적으로 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과 관련된다.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불경건인 어떤 것을 이름붙이는 것은 결코 참인 대답일 수 없다.


본질들로서의 꼴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의하면, 경건의 본질은 어떤 경건이 καθ᾿ αὑτό, 그러니까 그 자체 안에서 또 그 자체에 대한 것, 혹은 그러한 바의 것이어야 할 것이고,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은 정의여야 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플라톤의 상투어들인 'αὐτὸ τὸ…'와 '…αὐτὸ καθ᾿ αὑτό', 그러니까 '~인 것 자체'와 '오로지 그 자체로 …인 것'의 영향력이다.

2) 본질에 대한 관념의 본원들은 아낙사고라스에게 있다. 그의 체계의 중심 논제는 모든 것들 하나하나에 '큼'과 '작음' 처럼 대립항들의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고, 오로지 정신만이 그 자체로 혼합되지 않고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논제를 제시하는 것은 그 논제의 부정을 자극시키는 것이다. 만일 그 반대항들이 언제나 함께 뒤섞여 있다면, 무엇이 그것들에 대해 뒤섞이지 않은,
ἐφ᾿ ἑαυτοῦ, 오로지 그러한 것들 자체로서 그러한 것들 자체인 것과 같은 것
일까? 이러한 종류의 물음을 묻는 것은 『에우튀프론』이 경건에 대해 묻는 그런 종류의 물음으로의 긴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강력하진 않지만 아리스토파네스에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걸음을 디뎠다는 증거가 있다. 그는 'αὐτὸ καθ᾿ αὑτό'라는 상투어를 사용했었고 그러므로 생각컨데 그 뒤에 그런 사고가 놓여 있다는 증거 말이다. 그리고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 자신은 결코 인간적 주제들을 토론하는데에 싫증을 내는 일이 없었다: 경건이란 무엇인가? 불경건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추함은 무엇인가? 고귀함은 무엇인가? 천함은 무엇인가? 정의로움과 부정의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그리고 비슷한 다른 문제들, 어떤 것에 대한 앎은, 그가 말하듯, 귀족의 특권을 소유주에게 주었고, 반면에 그 앎을 결여한 그러한 자들은 아마도 응당 노예로서 비난받았을 것이다.

물론 이로부터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정확하게 『에우튀프론』에서 제안한 그 방식으로 한정된 것으로 의도했었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부정도 따라나오진 않는다. 최소한 그 대화편이 그것의 본질에 대한 탐구, 그 자체로서의 경건에 대한 정의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심중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나타낸다는 것은 가능하다.

3) 본질로서, 꼴들은 변증에서 규제적 역할을 수행한다. 꼴들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응답의 특정한 종류들을 문제 외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 말하자면, 꼴 자체와는 다른 것으로서, 단지 그 꼴을 지니는 것들을 특징짓는 특색 있는 징표를 제공할 뿐인 그러한 모든 대답들을 배제한다. 당신은 단순히 그것의 사례들을 구별짓기 위한 징표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것이 그 자체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에우튀프론』 10e-11a의 내용은 이것의 전형적인 예시이다. 경건이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다는 것은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오직 경건의 πάθος만을 진술할 뿐, 그것의 οὐσία를 진술하지 않는다. 다시금, 소크라테스는 뒤이어 만일 경건이 신들에게 만족스러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추론한다(15b); 이러한 추론은 그 'is'가 특징 부여의 'is'가 아니라,
 πάθος로써가 아닌 οὐσία로써 대답하는
 정의의 'is'로 의미되지 않는 한 말이 되지 않는다. 본질에 대한 탐구는 변증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4) Mr.리처드 로빈슨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혹은 그가 부르듯 'X-는-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 이중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것을 가지고 어떠한 서술이라도 치환할 수 있기 때문에
 단지 X의 동치에 대한 탐구일 따름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방식으로 X로 생각되는 어떤 X의 특별한 하나의 동치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협소하게 생각되는 어떤 것에 대한 탐구이다.

Mr. 로빈슨이 제기하는 그 이중성은 설령 소크라테스가 때때로 X의 본성이나 본질이 이야기되기를 기대한다 치더라도, 그는 다른 경우들에서 X의 치환 가능한 서술에, 다른 X들로부터 X 전부를 그리고 오직 X만을 드러낼 특징적 징표에 만족했다는 사실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이중성은 소크라테스가 본질과 동일성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는 그것들을 혼동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5) Mr. 로빈슨의 한 가지 논증은 이에 대해 예시의 역할을 할 지지에 있어서 나타난다.

여러 구절들이 그(소크라테스)가 원한 모든 것은 그것으로 주어진 어떤 것에 대해서든 그것이 X인지 아닌지 판단할 모형의 역할을 할 징표라고 암시한다. 『에우튀프론』(6e)에서 그는 그의 목표를 바로 이 방식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는 그의 목표를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그 목표를 오히려 경건의 τὴν ἰδέαν τίς ποτέ ἐστιν에 대한 배움의 방식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그가 어떤 것들이 경건하고 또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위한 규준이나 παράδειγμα로 사용할 것을 기대한 것이다. - '징표'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러한, 경건 그 자체인 규준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경건의 οὐσία와 그것의 본성, 그리고 실체를 진술해야만 한다. Mr. 로빈슨은 더욱 앞서서 그가 '추론에 의한 오역'이라고 불렀던 결정적 착오를 기술했었다;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6e 에서 오직 특징적 징표만을 바란다는 그의 전제는 그러한 유의 종이다, 그것이 어떠한 함축에도 기초되지 않은 추론이라는 차이와 함께. 그 추론은 덜 만족스러운데 왜냐하면 Mr. 로빈슨은 소크라테스가 『메논』74d에서 '…X의 꼴, 많은 것들에 있어서 단 하나, 여러 X들 모두에 있어서 그 현존이 우리가 그것들을 모든 X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의해 보증되는 그러한 단일한 동일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가 본질을 추구하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절은 제쳐두고 - 사물들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은 물론 우리가 그것들을 부르는 그 어떤 것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다 - 이것은 『에우튀프론』6d-e에서 소크라테스의 목적에 대한 훌륭한 진술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비록 꼴을 찾고 있다 하더라도 본질을 찾고 있지는 않다는 한 구절로부터,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본질을 찾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꼴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는 또 다른 한 구절로부터 누군가 추론해내도록 한다는 것은 불만족스러운 해석방법이다.

6) Mr. 로빈슨은 또한 소크라테스적 물음에 이중성이 있다는 논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자주 What-is-it 물음을 묻는 과정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한 단어, 즉 horizein에 의해 시사된다. 이 용어는, 경계석과의 본래적인 관련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잊지 않으면서
, 그렇게 한정된 영역들에서의 경작지들이나 작물들을 묘사하는 어떤 방식도 없이,
 한 영역을 다른 영역과 구분하기 위한 표지를 세울 것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편들 속에서, 'distinguish(구분하다)' 또는 'mark off(구분선을 긋다)'라는 번역들은 'define(한정하다)'라는 번역어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자주 적절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소크라테스가 그의 물음에 대해 의도했던 특수한 종류의 구분짓기에 관한 것이다. 초기 대화편에서의 대답은 명확하다: 경계석은 본질이다.

7) 이러한 결론은 또한 꼴들이 표준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그리고 Mr. 로빈슨 자신이 주의를 기울였던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지니는 그 외의 물음들에 대한 그 특유한 우선성에 의해 암시된다. 바로 무엇이 경건인지 모르고서는 어떤 것들이 경건한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성들이 경건과 관련되는지 결정할 수 있기에 앞서 경건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X가 Y임을 알 수 있기 전에 X의 본성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탁월함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그 탁월함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를 누군와 논의할 수 없다(『라케스』190b-c). 올바름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그것이 탁월함인지 아닌지, 또는 득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 혹은 그것을 가진 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다(『정체』Ⅰ, 354b-c).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이 가르칠 수 있는 건지 아닌지에 대해, 혹은 그것이 앎인지 아닌지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프로타고라스』359e-361d).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그것의 특성들이 무엇인지 (ὁποῖόν τι), 또는 특히, 그것이 연습에 의해서 가르쳐지거나 획득되는지 아니면 본성에 의해 존재하는지(『메논』71b) 말할 수 없다. 더욱이 어떻게 ὅ τι ἔστι(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서 ποῖόν τί ἐστι(그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겠는가?

8)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것은 οὐσία에 대한 앎이 πάθος에 대한 앎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Mr. 로빈슨이 말한 그 'intimate(사적인)' 의미에서 경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한, 어떤 특성들이 경건과 관련되는지 알 수 없다. 만일 초기 대화편들이 Mr. 로빈슨이 주장하는 이중성을 드러냈다면, 그 대화편들은 안타깝게도 일관되지 못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들을 다룸에 있어서 이중성이 아니라 우선성이 있는 것이다: 본질이 앎의 핵심이다.

9) πάθος에 대한 οὐσία의 우선성은 꼴들이 표준들이라는 사실로 직접적으로 시사된다. 경건의 어떤 특성이든 그것의 연관의 토대는 경건 자체의 본성이든 경건한 것들에든 자리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경건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경건의 꼴에 대한 주장이거나 그 안에 경건이 현존하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주장이다. 어느 경우든 경건이 무엇인지 앎이 없이 그 진리치를 가늠할 수 없는데, 어떤 것들이 경건한지 결정할 수 있기에 앞서 경건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건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왜 경건과 관련된 특성들이나 πάθη로 답해질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 그런 종류의 대답은 순환을 포함할 것이다. '경건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경건한 것들이 특징지어지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경건이 정의되는 것을 묻는 것이다.

R. E. Allen,
 Plato's 'Euthyphro' and the
 Earlier Theory of Forms, Routledge & Kegan Paul, 1970, 67-79p

-蟲-
배경. 에우튀프론은 종을 죽인 품팔이를 묶어 방치해 죽게 한 아버지에게 소송을 걸었다. 소크라테스는 오래된 신들을 믿지 않고 낯선 신들을 만들어내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멜레토스에 의해 고소를 당했다. 두 죄목이 모두 바실레우스의 종교적 문제에 대한 재판에 관련된다. 따라서 피고인 에우튀프론 아버지와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피소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불경에 대해서 고소를 한 자는 경건과 불경건을 잘 알기도 할 것이니 고소를 당한 처지인 자신을 그가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1 논의. 에우튀프론은 올바르지 못하게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에게 소송을 거는 지금 자신의 행위가 경건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거세한 일과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처단한 일을 든다. 또한 제우스를 모든 이들이 가장 옳고 훌륭한 신으로 모시기 때문에 그의 일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은 경건하다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하나의 일이 경건하다는 것 말고 이러저러한 경건한 일들을 경건한 것이도록 만드는 경건함, 하나의 특징으로서의 경건함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제2 논의. 에우튀프론은 이에 대해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경건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불경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앞서 크로노스와 우라노스의 싸움, 제우스와 크로노스의 싸움뿐만 아니라 신화 속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신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싸운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이 의견을 달리하고 싸우는 까닭은 수의 많고 적음이나 어떤 것의 크기나 무게와 달리 '옳고 그름, 미추, 좋고 나쁨'은 하나의 것을 두고도 서로 달리 말하면서 조율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를 근거로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행위를 신들 중에 누군가는 사랑하고 또 다른 어떤 신은 미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에우튀프론이 부모에게 소송을 건 것은 제우스는 좋아할 일이지만 크로노스와 우라노스가 싫어하고, 헤파이스토스는 좋아하지만 헤라는 싫어할 일이기에 경건하면서도 경건하지 않기도 하다고 반박한다.
제2 논의 후퇴1. 소크라테스는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경건'이라는 정의를 논박하였으나 에우튀프론은 다시금 '자신이 한 행위는 부정의한 살인을 고발한 것이고 이 행위는 다들 동의할 것이다'라고 구체적인 행위를 옹호한다.
 소크라테스는 다시금 '부정의한 살인'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만약에 그것이 애초부터 부정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물론 고소되고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살인은 에우튀프론에게는 부정의하지만 친족들에게는 부정의한 것은 아닌 것으로, 그리고 소크라테스에게는 그러한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앞서의 결론으로 되돌아온다. 하나의 행위를 두고 이 신들은 옳다 하고 저 신들은 그르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경건'이라는 말은 경건한 것이 동시에 불경건한 것이 되기도 하므로 적절한 정의일 수 없다.
제2 논의 후퇴2. 신들의 의견(혹은 개인 각자의 의견)으로는 어떤 한 행위가 경건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의 행위가 옳다는 '증거'를 요구한다. 여전히 이 증거는 앞서 소크라테스가 요구한 정의내림의 조건 속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에우튀프론은 다시금 '그건 아마도 작은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요구대로라면 그것은 선명하고 작고 정확한 일이다. 결국 에우튀프론은 더 많은 사례들을 들어 보이려고 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제3 논의.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이 '자신의 행위가 경건하다'는 점에 집착하는 것을 의식하고 논의를 전환시킨다. 모든 신이 '그 행위'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경건한 것이다'라는 정의가 옳은지 어쩐지에 대한 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논의를 정의의 문제로 끌어오기 위해 에우튀프론의 논의를 빌려 '(만일 당신의 행위가 모든 신들이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것이라면) 모든 신들이 사랑(동의)하는 것은 경건하고 모든 신들이 미워(반대)하는 것은 불경하다'라는 정의로 수정하겠는지 묻는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다시 이 정의를 반박한다.
           (1)무엇으로 되거나 무엇을 겪는 것은 그 '무엇이 됨'이나 '겪음'을 통해 그러한 것이 된다.
           (2)신들이 사랑하는 것도 신들에 의해 사랑을 받음으로써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3)경건한 것은 것이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만일 (4)경건한 것과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면,
           (2-1)신들이 사랑하는 것은 신들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에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한편 (3-1)신들이 사랑하는 것은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그런데  (2-1)과 (3-1)이 서로 어긋나고 또한 (3-1)은 (2)에도 모순되므로 경건한 것과 신들이 사랑하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르다.

제4 논의-1.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것이 이러저러한 것을 겪는다는 정의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논의를 전환시킨다. 그는 경건함과 올바름을 견준다.
이 경우 (1) 모든 경건한 것은 올바르고 모든 올바른 것도 경건하다, 이거나
           (2) 모든 경건한 것은 올바르지만 모든 올바른 것이 경건하지는 않다, 이다.
           (경건>올바름, 경건≠올바름, 이 두 경우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에우튀프론은 (2)를 선택하고 덧붙여서 신을 섬기는 올바름이 경건이며 나머지는 인간을 보살피는 올바름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다시 '섬김', '보살핌'이 무엇인지 묻는다. '섬김(보살핌)'은 그 대상의 이득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인간이 신을 보살펴 신이 얻을 '이득'은 없다.
제4 논의-2/제 2논의로의 후퇴1. 이제 에우튀프론은 '섬김(보살핌)'을 '노예가 주인에게 행하는 종류의 섬김'으로 수정한다.
 소크라테스는 주인이 목표하는 바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이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봉사인지 되묻는다. 에우튀프론이 동의하자 그는 조선공, 의사 등의 예를 든다. 그리고 다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신들이 이루어내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에우튀프론은 '좋고도 많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이란 언급을 통해 이것이 제2논의 후퇴2에서와 같은 종류의 답변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신들의 '목적'이 되는 것을 '신들이 만족스러워 하는 것'으로 대치하여 스스로 이전의 논의로 확실하게 후퇴해 버린다.
제4 논의-3/제 2논의로의 후퇴2. 소크라테스는 논의가 후퇴하였음을 간파하고 한탄하지만 '신들한테 제물을 바치고 기원을 하는데 대한 일종의 앎'이라는 에우튀프론의 정의에 대해 더 고찰하고자 한다. 이는 주고 받음이며 나아가 상대가 바라는 것을 주고 원하는 것을 청하여 받는 거래이다. 그러나 제4논의-1에서 언급되었듯 신들이 인간들을 통해 얻을 이득은 없고 '만족'을 얻을 뿐이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것'이 '사랑받는 것'과 다르냐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에우튀프론은 그 둘이 같다고 답한다. 이로써 논의는 아포리아에 빠진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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