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와 우시아

1) 만일 앞서 말한 설명이 건전하다면,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그런 종류의 논증은 고려함에 있어서 실재적이고 명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지 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2) 그 대상이 적어도 그것이 유와의 관계에서 존립하는 종일 때에는 단순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될 것과 정의함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것을 고수하였던 그러한 관련은 획득하지 않는다: 그 종은 결합된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와 함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같음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같음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튀프론』10d, 13에서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은 경건에 대한 정의로서는 거부되는데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르기 때문이고(ἕτερον; 10e, 9에서 ταὐτόν이라는실에 견주어 반대로), 이러한 거부는 15c, 2에서 반복된다(οὐ ταὐτόν … ἀλλ᾿ ἕτερα ἀλλήλων).

3)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같음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연의 동일성, 또는 진리치 보존(salve veritate) 대체성이 아닌데, 설령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그러한 것들 모두가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것들만이 경건하거나 경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순히 πάθος를 진술할 뿐 οὐσία를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념적 동일성인 것도 아니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생각함에 있어서,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의 정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의어의 같음도 아니다.

4) 정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의에 있어서 필요한 같음은 이를테면 서술적 동일성, 말하자면 샛별과 태백성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하거나, 또는 - 그 예시에서 필요한 경험적 우연성을 피하기 위해 -  일곱번째 정수와 네번째 소수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동일성은 두 가지 한정적 서술들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실재적 정의에 있어서 정의될 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대상 그 자체이다. 그 비유는 만일 서술적 구절이 명사에 의해 대체된다면 더욱 근접하다: '금성은 샛별이다' 또는 '7은 네번째 소수이다'; 무엇보다도 유일한 서술로 정의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도 오독이다. 지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함이다; 그러나 '…는 탁월하다'라는 말이 소크라테스를 서술하는과 같은 의미에서 '…은(는) 탁월함이다'라는 말이 지혜를 서술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첫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이고, 두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한 특성에 대한 한 특성의 예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정적 서술에 있어서 필요한 후자의 관계이다.

5) 아마도 정의에서 필요한 종류의 동일성은 그것 자체의 유(sui generis)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포함하는 유와 그것을 그 유 속에서 다른 종들로부터 지적해 내는 종차를 진술함으로써 그 종인 어떤 것을 말할 때 필요한 그런 동일성이다. 종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종차는 종들에 대한 구별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그 구별의 결과이다; 정의에 있어서 종차는 사유근거이고, 존재근거가 아니며, 그러므로 정의에서 필요한 동일성은 대상들의 동일성이 아니다.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위한 최선의 - 그리고 ὁρίζειν과 ὅρος의 대다수 함축에 부합하는 하나의 -  비유는 사상(寫像)의 비유이다: 정의한다는 것은 한 종의 위치를 그 종을 포함한 유 속에서 정하는 것이다. 만일 종이 농장이라면, 유를 규정함의 목표는 그 농장이 위치하는 마을을 지시하는 것일 터이다; 차이를 규정함의 목표는 농장의 경계들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조사된 경계선들의 현존을 밝혀내는 것일 것이다. 정의에서 필요한 같음은 말하자면, 유일한 위치의 같음이다: 정의될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 안에서 사상된 그 위치를 점유한다.

6) 이러한 방식에서 생각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는 형이상학에서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꼴들이, 서로에 대해 포함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포함되는 것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존립하면서, 계층적으로 정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내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거나, 상호 구성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난다: 종들은 그것들이 만일 그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의해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리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특성을 그것들의 유들에 의존한다; 올바름은, 만일 그것이 탁월함이 아니었다면, 올바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탁월함은, 그것의 한 종이 올바름이 아니었더라면, 탁월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는 그것의 현존과 특징을 그것의 종에 의존한다. 전체는 그것의 부분들에 의존하여 전체인 그것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 점에 대해 조금 덜 명확하지만, 아마도 유들에 대한 정의는, 종들에 대한 정의와 달리, 구성 요소들로의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7) 이것은 플라톤적 유들에 대한 함축의 풍부함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있어서, 유들은 종들로부터의 추상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사람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사람과 말은 동물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그 유는 여기에서 단지 다양성에 대한 공통된 요소일 따름이고, 그것의 종들보다 더 '추상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정의가 사상에 대해 동종적이라면, 만일 유들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들이라면, 유는 공통된 특징이 아니라, 마치 그것의 현존이 그것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의 현존에 의해 전제하기도 하고 전제되기도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래서 유는, 함축의 상대적으로 결여되었음보다는 오히려 함축을 잔뜩 실은 것으로서, 결핍되었다기 보다는 풍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8) 하나의 체계로서, 유는 한 종류의 폐쇄를 지니고 있어야만 하고,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류의 제한들로부터 갈라놓는 단일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의 구별은 한 사물에 본질적인 것과 그 사물이 단지 가지게 되었을 뿐인 특징 사이의 구별을 수반한다. 올바름 또는 탁월함에 대한 경건의 관계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에 대한 경건의 관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 정의에 있어서 내적 성질을 시사한다면, 그러므로 그것은 꼴에 대한 모든 설명들이 본질을 진술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그 관계의 내적 성질만큼이나 외적 성질도 시사한다.

9) 유들은 체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종들은 그 유들의 요소들이기 때문에, 종들에 대한 정의들은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일상적 진술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들이다. 그러한 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또는 사용하기 위해서, 일반적 언어에도 개별적 사물들과 행위들에도 호소할 수 없다: 꼴들에 대한 지식은 지적 직관을,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는 직접적 통찰을 요청할 것이다. 실재적 정의의 진리는 오직 그에 대한 정의가 설명인 그러한 진리를 파악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10) 만일 이러하다면, 정의와 직관은 상보적일 것이다. 지적 직관은 실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만 '알고 있음에 의한 앎'에 속하는 난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설명도 제공함이 없이 푸른 하늘의 한 조각을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감각은 지적으로 노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꼴들에 대한 직관은 반대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증은 단순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 이전에 불충분한 설명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어떤 것을 충분한 설명 속에서 명확하게 보려고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시야는 진술들에 대한 검토에 의해 확보된다. 미리 앎에 의한 앎에 대한 지적 직관의 비교는 지적 직관의 대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11) 일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이 지점에서 압박을, 직관과 논리 사이의 긴장을 발견할 것을 주장해 왔다. R. G. 콜링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지만 상당히 높게 플라톤의 철학적 성취들은 평가받고, 최고에 못 미치는 어떤 가치에 있어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그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이 그 자신에 의해 철학과 수학 사이에서 확립되는 충분히 깊은 구별로 이끄는 것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결함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하는, 철학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방법론이 철학을 둘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하나는 재기 발랄한 억지 이론의 식상한 낭비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관적 시야이다. 이러한 첫번째 것이 두번째 것으로의 경로라는 것은 여러 세대들에 속하는 경험에 의해 플라톤이 그들의 길잡이로 취해졌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실들에 권위에서 받아들여질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 조명 속에서 사살들이 이해될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탐구 속에서, 철학적 탐구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플라톤이 우리에게 주진 않았다.

이러한 비판은 감각 지각의 틀을 관통하는 지적 직관을 강요함으로부터, 지적인 것으로서, 그 직관이 판단을 통해 지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함으로부터 귀결한다.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한 행위는 하나의 진술이 아니라, 진술 속에서 표현 가능한 하나의 내용을 필요로하고, 그로써 비평에 적합하다. 한 진술은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통해 통찰이 표현되는 그러한 것이다 - 그 자신에 대해서조차. 안다는 것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12)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초기 대화편들을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3. 꼴들의 현존

1)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의 꼴을 존재하는 것으로 다루고, 그와 에우튀프론은 그 꼴의 본성을 발견해 보기로 했다. 현존에 대한 이러한 존재는 다른 대화편들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 어떠한 것인지 혹은 그게 아무것도 아닌지(πρᾶγμα τι ἢ οὐδὲν πρᾶγμα) 묻고, 프로타고라스가 그것이 분명 어떠한 것이라고 그에게 동의할 때,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란 게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 더 나아가 경건이 올바름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경건이 어떠한 것임은 동의된다. 프로타고라스는 더 먼저 소크라테스에 의해 탁월함이 단일한 것이라고 말하도록 이끌렸다; 그는 나중에 각각의 탁월함은 그것의 고유하게 특유한 본성과 실재성을 가진다고 말할 것이다. 사실, 『프로타고라스』의 변증은 정확히 현존의 문제로 돌아선다(349b-c):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지혜', '사려', '용기', '올바름', '경건'이 동일한 어떤 것에 대한 다섯 가지 서로 다른 이름들인지 아닌지, 또는 그러한 이름들의 각각에 대해 그에 특유한 특정한 본성과 실재성(οὐσία)을, 각 경우에, 다른 어떤 그런 종류에도 속하지 않는, 그것의 고유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을, 거기에서 답하는지 아닌지. 이제, 프로타고라스, 당신은 그러한 이름들의 각각이 그것에 특유한 뭔가에 대해 답한다고 말했다. 설명 그것들 모두가 탁월함의 부분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에서 그 물음은, 어떤 탁월함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물음은 여러 탁월함들이 있는지 아니면 오직 하나의 탁월함만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에우튀프론』에서와 비슷하게, 수학, 기하학, 천문학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에 중요한 구절로서, 그리고 수학자들이 찾아다닐 사람들로 이야기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도해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τὰ ὄντα, 실재성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탐색자들로서, 그들은 그들이 잡은 것을 사용하지 않지만, 그들의 사냥감을 적절히 사용하기 위해 변증론자들에게로 돌려야만 한다 (290b-c). 다시, 소크라테스의 비유들 대다수는 존재론적 가정 없이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 예를 들어, 탁월함과 『라케스』에서 도출되는 시야 사이의 유비와 같은 것들 말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부가하는 것으로 그것이 부가된 것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에 대해 안다면, 그리고 나아가서, 만일 우리가 그것을 덧붙일 수 있다면,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가장 좋게 그리고 가장 쉽게 그것을 얻을지에 대해서 상담자들이 될 그러한 것 자체인 것을 알아야만 한다. 혹시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런 식으로 보자. 만일 우리가 두 눈에 덧붙여진 시야는 그것이 덧붙여진 그것을 더욱 좋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나아가, 만일 우리가 그 눈에 그것을 더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시야의 본질적 본성을 알고, 그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이 가장 훌륭하게 그리고 가장 쉽게 취해지는지에 대한 조언자들이 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시각이나 청각의 본질적 본성인 그러한 것 자체를 알지 못한다면, 상담자나 의사로서 눈과 귀의 문제에 있어서 적임자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 것처럼, 라케스, 여기 우리의 두 친구들이 이제 어떻게 탁월함이 그들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영혼들에 덧붙여질지에 대해 상담하기 위해 우리를 초대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필요한 것은 탁월함의 본질적 본성을 아는 것이다. 확실히, 만일 우리가 탁월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장 훌륭하게 그것을 획득할지에 대해 조언자들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시각은 눈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청각은 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탁월함은 영혼에 대한 것이다. 시각과 청각은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탁월함은 있는 것이다.

2) 이런 현존에 대한 가정은 변증에 있어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한다; 더욱 정확하게, 그것은 그 핵심을 설명한다. 변증의 목표는 실재적 정의이다; 현존적 전제는 정확하게 실재적 정의가 발견되리라는 전제이다. 경건에 대한 참된 설명은 임의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고, 에우튀프론이나 혹은 다른 누구라도 우연히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것으로서, 또는 그러한 방식에서 그가 사용하는 말들로서 그러한 내용에 기초하지 않는다: 참된 설명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다.


언어와 현존

1) 이러한 해석은 초기 대화편들 속에 꼴들의 현존에 대한 그 어떤 형이상학적 관련도 없다는, 그리고 꼴들에 대해 '단순하게 언어적인 문제'가 있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공통되게 주장되는 관점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한 관점은 언어와 언어를 사용해 주장하는 어떤 것 사이의 혼동인 듯하다. 무사이 여신들은 그들의 현전에 의해 도취된 시인에게, 비프스테이크의 붉음에 드문 일몰의 붉음을 비교하도록 영감을 줄 것이다; 그 여신들은 그 시인이 그의 존재론에 따라 일몰들과 비프스테이크들에 붉음을 더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영감을 주거나 그로써 영감을 주진 않는다. 그러나 만일 같은 시인이, 더 도취되지 않은 분위기에서, 일몰들과 비프스테이크들뿐만 아니라 곳간들, 소방차들, 러시아인들, 그런 비슷한 모든 것들에 공통된 특징의 본성을 이야기하게 되길 바란다고 설명하면서, 붉음이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다면; 만일 그가 계속해서, 그가 그것인 어떤 것을 배웠을 때 그가 그것을 실제로 붉은 어떤 것을 그렇지 않은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해내기 위한 표준으로서 그것을 사용할 것을 기대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그것의 αὐσία, 본성과 실재성을 진술할 그것에 대한 적절한, 그리고 최근류와 종차를 통해 표현되는 설명을 기대했다는 것을 더했다면 - 요약해서, 만일 그가 실재적 정의에 대한 규칙을 마련하고 그의 탐구에 있어서 그 규칙들을 따랐더라면, 무사이 여신들이 그에게 내렸던 그 영감이 시적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적이었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그가 이제 세계가 있는 방식과 그 방식이 담고 있는, 일상언어나 일반적 상식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훨씬 넘어선 어떤 것에 대한 관점을 지니지는 않는지 의심하기 시작해야 한다.

2) 이에 대한 남은 반대는, 만일 소크라테스의 물음들이 사실은 꼴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전제를 필요로 했다면, 그의 응답자들은 그것들에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에우튀프론과 같은, 그 밖에 다른 누구든, 변증론자가 아닌 사람은 경건의 ἰδέα가 있다는 전제를 이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고 또 주장될 것이다. 확실히 플라톤 자신이 도덕에 있어서 인습주의자로 그려냈던 프로타고라스는 주저 없이 올바름'은 어떠한 것이다'라는 것에 동의하게끔 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프로타고라스가 그로써 추상적 대상들의 존재론을 수용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동의는 오히려 언어의 일상적 사용들에 의해 유도되었을 성싶다. 냉소적이거나 혹은 그 반대로 부족한 우리 모두는 무엇보다도 올바름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고 믿는다.

3) 그 반대는 추상물들을 인격화하는 고대 그리스의 경향을 지적함으로써 강화될지 모른다.

대부분의 그리스 산문작가들에게서 추상적 명사들은 드물게 동사들의 주어가 된다; 평범한 행위자들은 인간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예외들이 있다. …추상적 주어의 사용이 의인화의 발상을 - 상이한 경우들에 있어서 - 얼마나 수반하는지 말하는 것은 때로 어렵다. 아마도 고대 그리스인은 대답에 대해 당황했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의인화가 나타나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의인화가 종교적이거나 극적인 암시들을 일으키는지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추상적 주어는 그리스에서 언제나, 또는 거의 언제나 최소한 의인화의 어떤 색조를 띤다. 우리는, 얼마나 완전하게 우리 고유의 언어에서 추상적 주어가 의인화하는 능력을 상실했는지 보기 위해 오직 크세노폰의 ἀναγκάζει με καὶ ταῦτα ὁμολογεῖν ἡ ἐμὴ φαυλότης,라는 경구(『메모라빌리아』, Ⅳ, ii, 39)를 영어 'candour compels me to admit(정직이 나에게 인정하도록 강제한다)'라는 말과 비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절들을 영어로 번역함에 있어서,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첫 대문자들의 18세기 사용을 되살림으로써 마주칠 심각한 어려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의인화는 형이상학을 수반하기 어렵다 - candour가 Candour라고 할지라도.

4) 데니스톤이 여기에서 고찰하고 있는 추상 개념들은 잠(Sleep), 밤(Night), 그리고 탈선(Digression) 같은 명사들이다. 의인화가 형용사적 추상어들에서 'the holy' 또는 'holiness'처럼 관사나 접미사와 관련되는지 보는 일은, 비록 그것이 그렇다 할지라도 덜 쉽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여전히 초기대화편들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런 보편개념들의 실체화는 진정한 존재론적 관련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장될 것이다. 우리는 유니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유니콘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물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경건이 존재한다고 추정함이 없이 경건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물을 것이라고 주장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 신이 있다고 추정하지 않고 몇몇 그리스 신들은 간통을 했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어떤 탁월함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여러 탁월함들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일상적 언어에서 - 일상적인 근대 영어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고대 그리스어에서도 - 어떤 의미에서 어떤 것이 '있다(이다)'고 말할 것이다 - εἶναι πως; 그러나 그래서 εἶναι πως는 εἶναι와 상당히 거리가 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한 가지 것일 것이다; 그것은 실제 세계에서 하나의 요소일 또 다른 것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올바름의 현존에 대한 일상적 언어나 공통 감각의 관련이 Mr Pickwick에 대한 그것의 관련과 훨씬 더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물론 Mr Pickwick와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 - 그는 일찍이 Sam Weller와 함께 선거들을 위해 Eatanswill로 여행했다. 그러나 Pickwick적인 여행들은 Pcikwick적인 올바름과 같다. 비록 각각이 그것들의 고유한 방식에서 흥미로 가득 찬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존재론적으로 불분명하다. 어째서 이것은 또한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참이 아니어야 하는가?

5) 그 물음은 쉽사리 답해진다. 일상적인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실체들'에 대한 관련 또는 용인에 의해 꼴들의 현존에 대한 초기 대화편들의 관련이 측정되리라고 추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보편개념, 표준, 본질로 다루어진다. 이러한 취급은 전문적이며 공식적이다; 일상적 언어는 이런 식으로 생각되는 추상들의 현존에 관련되지 않는다. 프로타고라스가 정의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에 그로써 그것을 꼴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몰랐다. 에우튀프론이 초반에 경건이 하나의 ἰδέα임을 수용했다는 것은 참이다; 그가 그것을 얼마나 조금 이해하는지는 대화의 남음 부분에서의 변증이 보여준다.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그 관련은 '단순히 언어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문제이다 - 본질의 형이상학 말이다.

6) 그러나 만일 소크라테스가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이론을 갖춘다면, 어떻게 그가 그것을 일상인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적용하는 것 - 더욱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 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 대답은, 비록 꼴들에 대한 이론이 나아가 형이상학적 이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또한 본질적으로, 진부한 단어의 한 의미로, 의미에 대한 이론임으로써, 공통 감각(상식)과 연관되어 있다. '당신은 무엇을 사려라고 말하는가?' 소크라테스가 카르미데스에게 묻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리스어를 할 줄 아니까, 당신은 의심할 것도 없이 그것이 당신에게 어떠한 것으로 보이는지 말할 수 있다.' 크리티아스가 오로지 그를 논박하기만을 위해서 논증할 것을 소크라테스에게 떠넘길 때,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만일 내가 당신을 논박하는 데에 나의 최선을 다 한다면,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지점에서 내 주의를 빠져나간다면 그러지 못하도록 그렇게 나 자신의 말들이 뜻하는 어떤 것을 검토하는 것보다, 내가 다른 어떤 동기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믿는가?

평범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그들이 뜻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묻기 시작한 오래 전부터경건에 대해 말해 왔다. 그의 탐구는 경건에 대한 정밀함에 의해 구별되었다. 그는 경건의 동의어들, 혹은 경건의 사례들, 또는 경건의 구별되는 특징들을 원한 것이 아니라, 경건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원했다. 그의 물음은 공통 감각(상식)이 그 자신의 고유한 방책들에 기대어 물을 그러한 것이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상식이 확실히 이끌릴 물음이고, 『에우튀프론』의 변증은,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으로 하여금 그의 물음의 실질적 본성을 보도록 만드는 내내 노력한 것과 같이, 사실상 그러한 인도의 기록이다. 변증의 진행은 '경건 같은 그러한 것이 이다'라는 응답자의 순진한 현존 전제에서, 만일 변증이 성공적이라면, 경건의 본질이 있다는, 그리고 그것이 정의될 수 있다는 고도로 정교화된 현존 전제에 대한 그 응답자의 수락으로 이행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만일 후자의 주장이 참이라면, 그 이행은 연속적이다: 본질에 대한 관련은 우리의 일상적 단어 사용에 잠재적이기 때문이다. 경건의 본질은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그것이다; 우리가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환원성

1)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이 현존한다고 주장되거나 암시되는 단언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단언들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가 아직 그 결론을 반대하는 학자들에게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기 때문에, 그 문제를 더 밀고 나가 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다.

2) 누군가는 이런 논증을 그려볼 수도 있겠다. 그 저술은 의심의 여지 없이 꼴들이 현존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 저술은 그런 주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추정되는 존재론적 관련이 사실 암암리에 어쨌든 언어적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있다. 플라톤은 - 누군가는 그 논증이 연이어지는 것을 상상할 것이다 - 실제로 언어에 대한 사실들인 항목들을 세계에 대한 사실들로 표현하기 위해, 담화의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의심할 것 없는 불가피한 편애라고 할지라도, 운이 나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분석으로서 제공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담화방식이다.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거나 시사하는 진술들은 논리적 여항 없이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지 않는 진술들로 환원가능하거나 분석가능하다. 본질에 대한 물음들은, 플라톤 자신조차 동의했을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에 대한 물음들이고, 의미에 대한 물음들은 당연히 언어적이다. 적절하게 이해된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 그리고 플라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적절하게 그것을 이해하지 않았는데 - 세계를 향해서가 아니라 말들의 의미를 향해 정향된다. 결국, 꼴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짐작컨데 단어들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탐구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의미를 분명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보편개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이한 문맥들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 단어들이 우리가 나타내는 것들을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표준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 서술이 해당하는 상황들을 동일화할 수단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본질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에 대한 모든 각각의 설명이 그 의미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요약하자면 '"경건"이란 단어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초기 대화편들에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언질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중적이고, 이중의 대답을 허용한다. 만일 그 물음이 그러한 대화편들의 본문이 꼴들의 현존을 긍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라면, 그 대답은 긍정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물음이 플라톤이 상술하고 있는 위치의 논리가 꼴들의 현존을 요청하느냐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 결정하게 된다. 그것은 이러한 대체가 순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4) 몇몇 상황들 아래에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은 사전적일 것이고, 프로디쿠스나 아니면 사전에 의해 대답될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와중에 소크라테스는 문자상의 동의어들에 대한 탐구에 종사하지 않는다. 에우튀프론조차 소크라테스가 경건이 신성함이라는 답으로 만족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5) 다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물 지시적 정의', 예시에 호소하는 정의에 의해 대답될 것이다. 그러나 예시가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협소하게 구성되는지, 아니면 요청되는 특징을 드러내 보이는 일반적 경우로서 더 넓게 구성되는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런 종류의 답변은 초기 대화편에서 그러한 답변이 나타나는 어디에서고 거부된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또는 더욱 일반적으로,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

6) 다시금,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아마도 경건의 구별적 특징들을 제공함으로써, '경건'이라는 단어의 적용의 기준들 혹은 사용의 규칙들을 제공함으로써 답변될 것이다. 그러나 구별적 특징의 관념이 가장 강한 의미에서 - 전체이자 유일하며 항상된 것(id quod omni et soli et semper), 그 용어를 적용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 -  이 물음은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에 등가가 아닌데, 왜냐하면 구별적 특징이나 대체 가능한 기준의 제공은 후자의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둘 것이기 때문이다. 에우튀프론이 경건을 모든 신들이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 소크라테스는 이 특징이 경건한 모든 것들이자 유일하게 경건한 것들을 구별하는 데에 시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떠맡지 않는다; 그는 맹목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그것의 가능성을 용인한다. 그는 그가 쉽사리 했었을 것 처럼, 그러한 특징이 경건의 예증들을 동일화함에 있어서 어떤 실질적 사용에 속한 것일지 아닐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에우티프론이 우연히 경건의 πάθος를, 경건한 것들에 대해 우연히 참인 어떤 것을 발견했을지라도, 그가 경건의 οὐσία를, 경건의 본성과 실재성을 보여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별적 특징의 제공은 그래서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7) 그러나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답변이 있다. 그것은 불분명한 답변이지만, 당장의 목적들을 위해서 중요한 한 가지 답변이다. 그것은 '경건'의 의미가 경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이란 것은 무엇인가 기원하는 것인가?
정확히 그렇다.

 8)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물음들은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물음들로 환원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첫번째 물음은 꼴들에 대한 물음들로 바뀌기 때문이다. 만일 비환원성이 존재론적 관련의 기준일 것이라면, 초기 대화편들에는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관련이 있다.

9) 이러한 관련을 제공하는 의미이론은 더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독자는 여전히 끈질긴 의심을 계속 지닐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일찍이 가상적 불길이 (당신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회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장작개비들을 태우지 않을 그런 종류의 불길이라고 언급했었다. 이것은 『소피스트』(247e)에서 존재론적 관련에 대한 플라톤의 고유한 기준, 그가 신들과 거인들에 의해 비슷하게 공유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준을 반영한다: 그것은 존재의 표징이 능력이라는 것이고, 작용하거나 작용받을 그러한 능력이라는 것이다(πάθημα ἢ ποίημα ἐκ δυνάμεώς τινος, 248b). 차이는, 차이이려면,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만일 꼴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이, 말하자면 단지 거기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작용할 것,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줄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것들은 이러한 것을 수행한다; 우리는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이 원인들임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과 지시

1) 만일 '경건'이란 단어의 의미가 경건이라면, 그리고 경건이 꼴이나 본질이라면, 그 단어와 그 어떤 것 사이에 자리하는 관계가 명칭이나 이름 붙임에 속하는 하나의 관계라고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방금 이름붙인(ὠνομάσατε) 어떤 것(πρᾶγμα)이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않은지 묻는다(330c); 나중에, 탁월함이 하나인지 혹은 여럿인지에 대한 물음은 '지혜', '올바름', '사려', '용기', 그리고 '경건'이 상이한 것들을 위한 이름들(ὀνόματα)인지 아니면 동일한 것을 위한 이름들인지 탐구하는 형식을 취한다.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한다: 그 대화편들은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이름들임을 전제한다.

2) 콰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의미는 그것이 지시대상과 분리되고 그 단어와 결합될 때 본질이 되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본질은 그것이 단어와 분리되고 대상과 결합될 때 의미가 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의미되는 어떤 것은, 최소한 때때로라도, 단순히 표현이라는 면에서가 아니라, 다소간 세계의 질서에 알맞는 내용의 일부라는 면에서, 그러나 그 자체로 그 본성이 발견에 있는 그러한 세계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항목이 된다. 우리는 세계를 불완전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말들의 의미를, 혹은 그 중의 일부를 불완전하게 이해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나의 표현으로써 의미하는 어떤 것, 그것의 공공연하거나 또는 명백한 내용과 우리가 만일 그 표현이 지시하는 본질을 이해했다면 의미해야 할 그러한 어떤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에우튀프론은 분명 그가 일상적으로 경건을 통해 의미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는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을 말한다; 숙고를 거쳐서, 그는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더욱 숙고한 끝에,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 중 아무것도 경건의 본질을 진술하지 않는다. 그의 이해력과 그의 의도 사이에, 그가 경건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설명과 그가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 만일 이따금 의미한다는 것이 이름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름지어지는 것이 본질이라면, 의미되는 것은 종종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표일 것이다.

3) 만일 때때로 의미함이 본질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본질에 대한 앎이 종종 불완전하다면, '제각기 모든 것이 그것인 것으로 질서지어져 있다'는 것은 이상 언어에 대해 참이 아닐 것인데, 왜냐하면 단어들을 지배하는 사용규칙들이 필연적으로 그 단어들이 그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규칙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해결책은 본질들을 부정하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는 거듭해서 사물의 본성에 속하는 윤곽을 추적하고 있다고, 그리고 단순히 우리가 그를 통해 본성을 바라보는 그 틀의 주변을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면이 우리를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언어와 우리에게 변치 않고 그것을 반복하는 듯이 보이는 언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단어를 사용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노력할 때,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 단어가 도대체 실제로 그것의 본래 집인 언어 게임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가? - 우리가 행하는 것은 단어들을 그 형이상학적 사용으로부터 우리 일상의 사용으로 되돌려 가져오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반대하고 있던 것을 아주 잘 알았다. 만일 이 관점이 참이라면, 소크라테스적 변증이 기대고 있는 그 전제들은 거짓이다. 그래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적 주장들도 거짓이다: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 용기가 지혜라는 주장, 경건이 올바름이라는 주장. 그 말들은 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 현대 영어에서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은 지혜롭지 않고도 용맹할 수 있으리라 주장함에 있어서, 그의 언어 사용 규칙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언어적으로 독특한 사물들의 결합은, 그것이 만약 언어에 대한 단순한 전제적 입법일 것이 아니라면, 본질의 관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본질과 일상언어

1)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단어들의 일상적 사용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의 사용이 근거하는 것들에 있어서 특징들을 탐구해 들어가는 것이다. 한 단어의 사용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 단어를 지시하는 특징과 연관된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사물들의 본성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면, 그로써 우리가 완전한 암흑 속에 있다는 것이 두따르진 않는다. 그러나 본질과 사용 사이의 관련은 경험적이다: '기준'이라는 용어의 제한적 의미에서, 단어가 지시하는 본질은 그것을 적용하기 위한 기준이고, 유일하게 신뢰 가능한 기준이다.

2) 이러한 관점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품에서 말하는 것을 배웠고, 말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그 언어의 다른 발화자들이 확실하게 동의할 명백한 경우들이 그 용어들의 예시들임을 예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 용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물론 그 용어의 사용을 위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 사용을 관찰함으로써 기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주어진 한 행위가 경건하다는 것을 '경건'이란 단어에 제공할 기준을 제시할 수 없어도 완벽하게 잘 알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종종 기준보다는 사례가 제시됨을 통해서 어떤 것이 그것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을 더 잘 배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그러므로 오해된다. 의미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사례에 호소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반대한다는 데에 이어서 그것은 실수이다; 같은 식으로 의미는 사례들이 결정될 수 있기에 앞서 반드시 고정되어야만 한다고 전제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실수이다. 이러한 실수들 때문에,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의미에 대한 충분한 기준이 발견됐을 때 결정에 대한 아무런 건전한 수단도 가지지 못하고 부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째서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이 그렇게나 일관되게 실패로 끝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잘 받아들여질 것이다. 게임의 규칙들은 아무도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게끔 그렇게 정해져 있다.

3) 확실히 이러한 반대에 핵심이 있다. 에우튀프론은 사례에 호소해서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발화자들이 이상적으로 그 용어를 가지고 이해했던 어떤 것에 호소해서도 경건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러면 그는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앎에 대한 분명한 문제가 하나 있다. 때마침, 『메논』에서 플라톤이 탐구의 역설로 진술하였던,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과 같이 상기의 원칙으로 해결했던 한 문제가 있다.

4) 그러나 만일 앎의 문제가 분명하다면, 또한 그것은 분명 실재의 문제인데, 왜냐하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의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정의될 수는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는 그저 옳을 뿐인게 아니라 확실하게 옳기 때문이다. 만일 a가 F의 한 예라면, 그리고 만일 그에 대해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a가 정의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라면, 그리고 만일 b가 F의 한 예라면, b일 것은 a일 것이다; 그리고 a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정의하므로, F일 것은 a일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번갈아서 a는 F의 예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F일 그러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F는 그 자신의 예시이자 유일한 예시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F'를 대체하고, 그에 따라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이라는 형요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이라는 추상명사를 대신한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면, 그 특이함의 원천은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무엇이 이러저러한 용어로 경건한 것을 경건으로 정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인가?

5) 동일한 고려들이 경건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주어진 어떤 것이든 그것이 경건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대신한다. '나는 a가 F임을 안다'는 명제와 '나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는 명제는 양립할 수 없다. 만일 내가 a는 F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a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의 일례라는 것을 안다; 만일 내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그것의 한 예시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르고, 만일 내가 a가 그것의 일례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F의 한 예시라는 것을 모르며, 그러므로 a가 F라는 것을 모른다. F일 그러한 어떤 것이 a가 F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이라는 것이 뒤따르는데, 오로지 a가 그 특징에 대한 하나의 예시인 그 특징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a가 그 특징의 일례라고 누군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주어진 어떤 것이 경건하다는 앎에 선행한다.

6)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한 이러한 방어가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주사위를 조작하다) 주장할지 모른다. 그 주장은 어떤 것이 무엇임을 정의하는 것과 아는 것에 관련된 관념들 - 그것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적 실수인 - 에 달려 있다. 철학적 탐구의 고유한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사용의 분석이다. 『에우티프론』에서 세워진 그런 종류의 탐구는 그런 분석이 아니고,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일부 제한적 의미에서 (의심할 바 없이 신실하게) 기만이다.

7) 그러나 기만에 대한 그 주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에우튀프론』의 변증이 특별히 다루고자 시도하는 문제를 고려해 보자: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분쟁의 해결. 우리는 사례에 호소함으로써 도덕적 용어들의 사용을 위한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제안된다.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로서, 기준의 결여는 사례들이 빗나갈 때 정확하게 감지된다. 사례들의 비일관성은 기준의 비일관성에 대한 조짐이다: 만일 당신의 기준이 나의 사례를 예외로 한다면, 나는 나의 사례를 거부할 것이나, 나는 마찬가지로 당신의 기준도 거부할 것이다. - 많은 것이 의심의 여지 없이 누구의 소가 뿔에 받혔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모순 여부). 만일 도덕전 논증에서의 호소만이 사례들로부터 추출된 사용기준일 것이라면, 에우튀프론과 그의 아버지는 각자 논리적으로 난공불락의 위치에 있다. 도덕적 분쟁을 해소할 궁극적 방법이란 크롬웰 류의 담론에 의지하는 외에 아무것도 없다 - 우리들의 원칙을 교황의 입김과 두드림들로 정통이라 증명하는 것이다.

8)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전망은 지나치게 암울한 것이다. 도덕적 의견 불일치, 그것이 아마도 주장될 것인데, 그것은 오로지 경계 경우들에서만 발생하고, 분명한 사례들에 호소함으로써 해소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F들이 깔끔하게 그 안에 자리잡히고 모든 비(非)F들이 정확하게 묘사된 원 없이 위치되는, 일종의 객체화된 벤다이어그램으로 상상하면서, 태평스럽게 F인 것들의 계층에 대해 말한다. 진실은 수학적 언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일상 언어에서 가장 일반적인 용어가 그것들을 그 안에서는 그것들의 적용 조건들이 불분명한 반영(半影)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사례는 분명히 F인 것과 분명히 F 아닌 것 사이에 그 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범위, 준연속체가 있다는 그런 방식에서 사례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것은 컵이다, 그리고 저것은 그릇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저러하게 부르거나 아무것으로도 부르지 않거나 그 둘 모두로 부를 어떤 것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의심스러운 경우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경우들을 분명하게 하기를 기대할 것이고, 경우들을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누구라도 그가 그것들을 논의하고 있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내가 지금 그로부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것이 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컵'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어떤 것을 모른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도덕적 용어들도 동일하다.

9) 이것이 참이라면 그건 즐거울 일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도덕적 용어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지적하였듯 '사람들에게 눈에 띄게 만드는 어떠한 상도 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경험적 용어들과 함께일 것이다, 선악의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들, 한 사람의 분명한 경우가 두번째 사람에게 반영을 드리울 수 있고 세번째 사람을 덮으며, 이것이 단순히 주변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추론이 그것을 가지고 다루어야만 할 가장 핵심적 문제들에 관한 것이라는 특이점을 가진다. 이러한 점을 사례들을 들어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불필요할 것이다 - 다행스럽게도 -; 비참하고 소란한 세기(이 책은 1970년대에 출판되었다)에, 독자는 그 스스로 감당하도록 남겨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마도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이 역설이리라거나 혹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할지라도, 악이 실어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지적하는 모험을 할지도 모른다. 만일 선과 악에 대한 물음들이 사람들이 언어로 하는 게임들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또는 태도나 관습 혹은 취향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도덕적 앎과 같은 어떤 것이 있다거나 혹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앎이 본질에 대한 식별에 존립한다는 『에우튀프론』의 주장은,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할지라도, 확실히 기만은 아니다.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함이 없이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 이름지어지는 단 하나의 것(Unum Nomen Unum Nominatum)


1) 지시적 의미 이론들은 종종 특유한 필연적 귀결, unum nomen unum nominatum(the sole name the sole named)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다양한 비판자들은 그들이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이러한 전제를 감지했다고 생각해 왔다. Mr 리차드 로빈슨은 '만일 소크라테스의 물음(X는 무엇인가?)이 답변을 허용하는 정당한 물음이라면 … 우리는 반드시 X라는 단어가 단일한 뜻을 가진다고 전제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로스 교수 또한 소크라테스적 물음에서 이러한 함축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플라톤은 이름의 의미에서 모호함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기로는 그가 이것을 다소 드물게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했고, 겉보기에 가장 순전한 이름이 가질 의미조차도 변화하는 그 의미의 음영을 완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추론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을 묻고 답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는 더 나아가 경건이 하나의 꼴이나 본질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들은 '경건'이나 '경건함'과 같은 단어들이 상이한 의미로 사용된다거나 사용될 수 있다거나 하는 물음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 잘못된 추론은 소크라테스는 다른 것들 중에서 우리가 같은 이름으로 상이한 것들을 부르는 것과 그렇게 불리는 것들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설명하기 위해 경건이 본질이라고 전제한다는 흐릿한 참을 가장한다. 이것은, 만일 그것이 일상언어에 대한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각 단어에 대해 하나의 유일하게 정확한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모호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umun nomen unum nominatum을 수반할 수가 없다.

2) 그것은 로스 교수와 Mr 로빈슨이 추정하는 것처럼 절대의미와 모호의미 사이에 엄격한 괴리를 시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의미에서의 같음과 의미에서의 다름이 배타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양자택일적이라 생각하기 쉽다. 만일 의미가 지시라면, 그 결론은 보편개념들에 대한 날카로운 이론이다. 그 이론에서 각각의 중요한 단어는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동일한 보편개념을 도입하거나, 서로 다른 보편개념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들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중심 주위로 우위성과 후위성의 질서에서 조직화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람들이 올바르고 행위들이 올바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체』(Ⅳ, 443e-444a)에서 올바른 행위들은 사람들 안에 영혼의 조건으로서 올바름을 산출하도록 지키거나 돕는 그러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행위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이란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사람에게 적용되는 의미로 정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뒤따른다. 그래서 그 형용사는 우선 사람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고, 파생적 의미에서 행위에 대해 사용되며, 이것은 절대의미도 모호의미도 아니며, 어원유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꼴, 기본 사용과 파생 사용 양자에서 도입되는 동일한 꼴이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방식으로 도입될 따름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초기 대화편들에서 어원유래에 대한 사실을 인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것이 그렇다는 강력한 암시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꼴들에 대한 이론과 용어들의 어원유래적 사용 사이에 어떠한 양립불가능성도 없다고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중기 대화편들에서 꼴들 그 자체는 특정 종류의 어원들에 속하는 우선 지시되는 것들이 된다.

3) 만일 umun nomen unum nominatum이라는 꼬리표가 좌우간 초기 대화편들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상 언어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어원을 제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언어의 개선을 위한 이상, 어휘의 조화가 세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요구로서 가장 잘 받아들여진다. 『크라튈로스』에서 하나의 이름은 베틀의 북과 유사한 도구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날실과 씨실을 가르면서 북으로 베를 짠다; 바로 그렇게, 사물들을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에 따라 나누면서 이름을 가지고 가르친다(388b-c). 그리고 보통의 아무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들어지거나 부숴질 수 있는 어떤 모형이 아니라 북 그 자체의 꼴을 보는 목수에 의해서 북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이름들은 아무개가 아니라 작명가에 의해, '모든 공예가들 중 가장 드문' 그 기술자에 의해 주어져야 한다(389a); 작명가는 각각의 이름을 그것의 적절한 사용에 맞추면서, 주어진 이름들 속에서 이름 그 자체의 꼴을 볼 것이다(389d). 그리고 목수의 작품의 가치를 직조공이 판단할 것과 같이, 그렇게 변증가는 이름들의 부여자에 의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것이다(390c). 플라톤주의는, 일상언어에 대한 그 태도에 있어서, 내재적으로 수정주의적이다.

4) 이름들을 부여하는 이러한 사업은 umun nomen unum nominatum에 관련되는데, 그렇지만, 이제껏 제시된 어떤 것과도 다른 의미에서 그러하다. 『메논』(71e 이후로)에서, 메논이 탁월함을 정의하도록 요구받을 때, 그는 그 각각이 고유한 정의를 지닌 탁월함들의 목록으로 응답한다: 사내의 탁월함은 폴리스를 돌보는 것이고, 친구들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며, 적들에게 해를 주는 것이다; 여성의 탁월함은 그녀의 남편에게 명령하고 또 그 남편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노예들, 노인들에 대한 다른 탁월함들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답변을 거부한다: 메논은 그에게 한 무리의 탁월함들을 주었고,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그 모든 것들에 있어서 동일한 하나의 것, 하나의 탁월함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것은 물론 단 하나의 것이 있다는 것을, 더욱이 'x의 탁월함'과 'y의 탁월함' 등에 대해 다양한 '~의 탁월함들'에 공통된 '탁월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른 식으로 보자면, '탁월함'은 총괄적 단어도 아니고, 불완전한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의 이름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내들의 탁월함과 여성들의 탁월함에 대해 말할 때, 어째서 우리가 어원들도 단순히 얼버무리는 것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취해질 수 있다; 그러나 『메논』과 『테아이테투스』 모두에서 그것은 오히려 보편성의 더 높고 더욱 흥미로운 단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취해진다. 자신의 일을 알고 있는 작명가는 짐작컨데 그것을 마음 속에 품을 것이다.


본질인과성

1) 꼴들은, 로크의 말을 빌리자면, 실재적 본질이며 명사적 본질이 아니다. 꼴들은 실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명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명칭들이나 단어들의 일상적 의미들에 대한 탐구는 그 탐구가 꼴들에 대한 탐구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꼴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그것들이 실제 사물들인 바의 그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본질은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인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의 존재에 대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실재는 내재적이며,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사물들의 발견 가능한 특질들이 의존하는 사물들의 구조는 그 사물들의 본질로 불릴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형성으로부터 명백하듯이, 그 단어의 적절한 의미이다; 그 기본 표기법에 있어서 적합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esentia.

로크의 설명에 의해, 본질은 '어떤 것의, 그로써 어떤 것이 그것인 바의 것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개별자의 실체적 꼴을 그 개별자의 실체와 동일시하면서, 본질을 본질을 가진 것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는 로크가 물려받았던 그 전통을 기초하였다.

2) 그러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 있음에 대해 그 꼴들이 꼴들인 것의 있음이 아니다. 하나의 있음인 보편개념은 다수성의 있음이 될 수 없다 - 정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보편개념들로부터 실체적 꼴을 구별하는 데에로 이끌렸는지의 이유이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어떤 주어진 경건한 사물이나 경건해 보이는 행위의 있음이라고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경건이 그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그러한 것임을 시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 어휘를 조금 빌리자면, 경건이 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3) 『대히피아스』에는 이 전제를 명백하게 만드는 논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히피아스가 올바름이 어떤 것이다(ἔστι τι τοῦτο)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에 동의하도록 이끄는데,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지혜로운 것 등등의 그러한 것들은 만일 그것들이 어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의한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기 때문에, 히피아스는 아름다움도 어떠한 것이며, 그것들이 다른 말들이나 생각들 또는 개념들에 의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4) 이 논증은 분명히 『대히피아스』에만 놓이지만, 그것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각각의 초기 대화편들에 의해 가정되는데, 왜냐하면 꼴들이 본질들이라는 그 전제는 변증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꼴들은 정확히 보편개념들이고 표준들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바의 것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5) 플라톤이 매우 자주 꼴들과 그 꼴들을 지닌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화하기 위해 인과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꼴들이 본질들이기 때문이다. 『뤼시스』(221c)에서 소크라테스는 '원인이 파괴될 때, 그 원인이 그에 대한 존재를 지속시키는 원인인 그러한 것은 물론 있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원인이다: 경건의 현존은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현존에 필수적이다.

6)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과 그 꼴들의 예시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한다. 꼴들은 그 예시들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또는 그 예시들'에 현전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들에 '덧붙여져'야 할 것으로, 아니면 그것들'에' 있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 예시들은 다른 한편으로 꼴들을 '가지거나' '허용하거나' '취하거나' '나누어 가진다'. 이러한 은유들 전부 일상언어에 기초된다. 그것들은 정말로 평범하게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명사들과 함께 사용될 것이다. 영어에서 한 행위에 용기가 있다(there is courage in an action)고, 또는 올바름의 현전이 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내의 도량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7) 은유들로서, 그리고 친숙한 그리스어로서, 이러한 용어들은 소피스트적 논쟁들의 재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디오니소도루스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움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잠시 망설인 후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όν)와 다른 것들이고,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들 각각은 그 안에 현전하는 어떤 아름다움(κάλλος τι)을 지닌다고 말할 때, 디오니소도루스는 재빨리 주도권을 잡아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소 한 마리가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소로군요. 그리고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은 디오니소도루스고요'(301a). 소크라테스는 '맙소사'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현전'은 은유 - 혹은 최소한 많은 용례들을 지닌 단어 - 이고 잘 다룰 방법은 그것의 의미에 달려 있다.

8) 문제가 되고 있는 '현전'은 특수한 종류의 것이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나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떤 것에 현전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을 떠맡고,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그의 논의를 갑작스럽게 중단한다. '일부 사물들은 그 사물들에 현전하는 그러한 것 그 자체일 그런 것들이다;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만일, 예를 들어 금발이 하얗게 칠해진다면, 흼은 그 머리카락에 현전할 것이지만, 그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흴 적에, 흼은, 그 머리카락이 그래서 하얗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머리칼에 현전할 것이다. 앞서의 경우, 흼은 머리카락에 현전한다. 뒤의 경우, 머리카락은 '흼의 현전에 의해 하얗다'.

9) 어떤 것이 흴 때 그 의미에서 흼이 그것에 현전하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도구적 여격에 의존한다. 이러한 장치는 초기 대화편들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고, 사려있는 자들은 사려에 의해 사려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대히피아스』(300a)에 따르자면 아름다움 것들을 아름답도록 만든다(ποιεῖν).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어법과 결부된다. 이온은 그가 호메로스를 기릴 수 있음이 앎에 의한(도구적 여격)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온』541e).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건강에 의해(ὑπό와 동작주의 속격) 유익해진다고 생각한다(『크리톤』280a). 사려는 만일 그 사려가 그들에게 현전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좋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나쁜 것이다(『카르미데스』161a).

10) 그러나 비록 이러한 표현들이 일상언어에 결부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종종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Ποιεῖν은 πάσχειν에 속하는 규칙동사이고, πάσχειν은 규칙적으로 '자격지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ποιεῖν은 '자격을 둠'의 의미로 규칙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혜가 사람들을 복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지혜가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또는 지혜가 그에 의해 사람들이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논리적 차이가 있다.

11) 이러한 표현들은 인과적이다 - 흔히 당구공들의 부딪침과 연관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적 원인에 대해 말하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 아름다움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이다: 아름다움의 현존은 다른 것들의,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인 한에서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대히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물들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가 현존해야만 아름다우며,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했을 때, 그 이유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그러한 어떤 것(δι᾿ ὅ)이 현존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12) 그것들이 그에 의해 어떤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인 바의 그러한 본질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꼴들은 원인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파이돈』(100c)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것들이 아름다움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케베스에게 그가 이러한 종류의 원인(αἰτία)을 허용하는지 묻는다. F. M. 콘포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라는 구절은 … 모호하다. '이유'는 '설명'(αἰτία의 관습적 용법)을 의미할 것이다. 그 전제는 그래서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진술과 동등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나는 말들의 그 형식을 바꾸어 말함으로써 대체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명제의 분석이 아니라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론은 그래서 이 사실이 (1)특정한 가시적인 것, 이 장미, (2)아름다움(Beautiful or Beauty), 그리고 (3)우리가 '~에 참여한다'를 대체할 수 있는, '~는 ~이다'로 표현되는 그 둘 사이의 관계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으로 구성된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오로지 하나의 설명만을 가진다: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장미가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존립하게 할 어떤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어느 관점에서든 우리는 한 명제에 대한 분석이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분석만을 가질 따름이고, 참인 진술의 이유나 그 사실의 현존에 대한 원인을 가지지는 않는다.

첫번째 주장은 제외될 것이다. 당신은 말을 바꿈으로써 오로지 본래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무지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명제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 그 누구도 그 표현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줄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αἰτία가 말 바꿈에 대해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고대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가 말 바꾸기를 시사하리라는 주장은 그래서 불충분하다.

13) 콘포드가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라고 부른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사실이라면, 그가 인정하듯, 어떤 식으로 분석이 말 바꾸기와 다른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경우든, 이것은 플라톤의 핵심을 놓친다. '이 장미는 아름답다'와 '이 장미는 아름다움의 꼴에 참여한다'는 실로 등가의 진술들이다 -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확히 사실들의 구조에 있어서 존재론적 우선성에 대한 이론이지, 명제 등가들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이 장미를 아름답다고 부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사물에 세례를 내리는데 그것에 있어서 그 특징 때문이고,(그 특징 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세례의 정당함을 보장하는 그 특징의 현존 때문이다. 꼴 자체는 그렇지만 오로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만일 그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장미가 아름다운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그 꼴은, 꼴의 현존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꼴은그 장미에 있어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현존뿐만 아니라 토양의 조건, 그리고 기후, 정원사의 기술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충분조건은 본질인과만이 아니라 작용인 또한 필요로 한다.

14) 그래서 꼴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것들인 바의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원인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세계가 그 세계인 어떤 것이 아니었으리란 의미에서 말이다.


지시의 재고

1)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하는데,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대상들을 명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로부터 초기 대화편들이 이제는 이전보다 덜 널리 주장되는 그 명제, 어떤 것을 기술한다는 것은 서술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를 전제한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이 마지막 명제는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명제와 관련되어 왔다: 잘 구성된(혹은 잘 분석된) 문장들의 구조는 반드시 문장이 표현하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일대일 혹은 2방향 유일 상응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명제이다. 잘 구성된 문장들은 술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문장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은 반드시 유사-술어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 술어들이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더 나아간 단계이고, 그러한 술어들은 그것들을 명명한다.

2)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하지 않은 명제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더욱이 그것과 관련된다고 거의 이야기될 수가 없다; 그 대화편들은 특정한 어떤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되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파이돈』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일이 하나의 기술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꼴들의 각각은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 꼴들의 제 몫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라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기술하는 것은 그에게 올바르다고 명명하는 것이고, 좌우간 올바름을 명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름이 비록, 올바르게 적용된다면, 소크라테스가 올바름에 참여하기 때문에 적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3) '올바른'과 '올바름' 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메이아적 구별이었을 것을 사용하면서, 동근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예시이다: '사물들이 상이한 어미들로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들의 이름을 획득할 때, 그것들은 동근어들이라 불린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문법학자(grammarian)는 그의 이름을 문법(grammar)로부터 획득하고, 용감한 자들은 그들의 것을 용감으로부터 취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를 동원어적으로 명명한다: 그는 그의 이름을 올바름으로부터 얻는데, 어미상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참여하고 있는 꼴의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그 꼴로부터 얻은 이름과 문법적 어미에 있어서 다를 필요가 없고, 플라톤의 고유한 사용에 따르고 소크라테스가 어원적으로 명명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르다'와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참여한다'는 등가 명제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반한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동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는데, 하나는 어원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것들에 대해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어원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미는 지시를 필요로 한다; 지시 대상들은 그렇지만 어원이 그것들의 관련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구별된다.

4) 종과 유들은 근원적인 반면에 어원적으로 그것들을 도입하는 서술들은 파생적이라는 것이 이 관점의 결론이다: 용감한 자들은 용감으로부터 이름지어지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이것이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종과 유들을 논리적(혹은 어쩌면 비논리적) 구조로, 기술들 그 자체인 의미의 근원적 매개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답변은 일대다(一對多) 논증이어 왔다. 그 논증에 대한 전제들은 현대적인 차림으로 존 오스틴에 의해 경탄스럽게 진술되어왔다 - 그는 물론 그 논증의 결론에 동의하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좌우간 언어를 통해 성취하는 그런 종류의 소통일 것이 있다면, 의사전달자('화자')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피(彼)의사전달자('청자')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징들의 축적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이 '말'이라 불릴 것인데, 물론 비록 그것들이 우리가 보통 말이라 불러야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일 필요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다 - 그것들은 신호기(信號旗) 따위의 것일 터이다. 또한 말과는 다른 어떤 것, 말이 그에 대한 소통을 위해 사용될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세계'라 불릴 것이다. 어째서 세계가 말을 포함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진술 그 자체, 그에 대해 어떤 특수한 경우이든 세계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진술 자체의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다. 더욱이, 세계는 유사성들과 부동성들(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는)을 내보여야만 한다(우리는 관찰해야만 하고): 만일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될 수 없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면, 말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서 - 물론, 마찬가지로 만족될 다른 조건들도 있다) 두 가지 관습적 방식들이 있어야만 한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황, 사물, 사건 등의 유형들을 가지고 말과 관계하는 기술적인 관습적 방식들(= 문장들). 세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상황들 따위를 가지고 말과 관련하는 지시적인 관습적 방식들(= 명제들).

오스틴은 보통 일상언어철학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어떤 표어들 아래에서도 행진하지 않았고 어떤 장단에도 맞추지 않았으며, 만일 언어가 그 세계에 대한 것일 터라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 기술하는 위의 문단은, 만일 내가 실수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투명한 형이상학의 단편이다. 오스틴은 주석에서 계속해서 첨언한다:

'~를 가진 일종의 ~이다'라는 것은 '~을 가진 그런 표준적 사태들과 충분히 유사한 ~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참된 하나의 사태일 하나의 진술은 자연적 관계인 특정한 다른 것들과 유사해야만 하고, 그러나 또한, 더 이상 순수하게 자연적 관계는 아닌 동일한 '서술' 가치에 대해 충분히 유사해야만 한다. '이것은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그런 것들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이것은 붉다고 불리는 그런 것들과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사물들이 유사하다거나 또는 심지어 '정확하게' 유사하다는 것조차 나는 문자 그대로 이해할 터이지만, 그것들이 같다는 것을 나는 문자 그대로 알 수 없다 - 그것들을 똑같은 색이라 부름에 있어서 관습은 그것들이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색에 주어질 이름에 대한 관습적 선택에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유사성과 부동성은 상이한 측면들에서 획득하는 관계들이다. 크리켓 공과 야구공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고 색에 있어서 부동하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이 이것이 그러하다는 측면들을 구별함이 없이 유사하고도 부동하다고 진술할 수는 없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세계 속의 사물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가 좌우간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독립적으로 획득하는 유사성과 부동성이 자연적 관계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관계들이 그 덕분에 획득하는 그러한 특징들 - 형태적 특징들, 색채적 특징들 등 - 이 언어적 관습의 문제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거의 이치에 맞기 어려워 보인다. 만일 그 관계들이 '자연적'이라면, 그것은 그 덕분에 그것들이 유지하는 그러한 특징들도 동일하게 그렇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그러한 특징들은 기술들이 아니다: 우리는 크리켓 공과 야구공이 모두 구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구체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 혹은 구형일 것임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물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기술되는 그 사물의 특징 덕분에 유지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용감한 자들이 용기로부터 이름지어지고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5)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유사성들과 부동성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특징들의 현존을 추론해내는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를 발견하고 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 문제를 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언급들은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의 경우 그 추론이 의지하는 그러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어떤 것을 한다. 그렇지만 초기든 중기든 대화편들에서 유사성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도출된 꼴들에 대한 우리의 앎은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사실상 유사성이 획득한다고 확신할 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을 통해서만 있기 때문이다.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