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수치와 오욕뿐인 삶.

말하자면,

씨발 개쪽팔리는 거 좆같아서 못 살겠네.

이제 내가 그냥 멍청하고 게으른 것뿐만 아니라

정직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내가 내가 아니고 제3자였더라면

쳐뒈지지 왜 사니 공기 아깝게, 라고 다정히 속삭여주고 싶은

희망찬 새해다.

+

작년에는

전두환이가 감옥이 아닌 곳에서 병사하였고

박근혜는 사면을 받아 감옥을 나왔다.

차별이 금지되고 노동자가 죽지 않는 새해였으면 좋겠다.

대선은 기대되지 않는다.

+

배은심 여사께서 별세하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蟲-

0. 『소피스트』에서 소피스트의 기술이 결론적으로 정의된 것이라 보는 해석 중 다수는 그 기술이 철학자 혹은 현자의 정상적인 엘렝코스를 거짓 모방하는 기술이라 간주한다. 그러나 소피스트의 기술 정의가 성공했다는 근거가 되는 결론부에서 소피스트는 개별적인 모순이나 특정 판단의 내용을 모방하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고, 오히려 일종의 성대모사처럼 어떤 사람을 모방하는 자로 묘사된다. 그 예로 테아이테토스를 따라하는 자가 언급되고, 여기에서 테아이테토스를 알고 모사하는 자와 알지 못하면서 모사하는 자가 구분된다. 이 대목에 주목할 경우 소피스트를 거짓 논박이나 거짓 모순을 제작하는 자로 간주하는 것은 문헌의 내용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엘렝코스를 묘사하는 여섯 번째 정의 시도에서 엘렝코스를 당하는 자는 자신이 가진 특정한 모순된 믿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을 거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간주하는, 이를 테면 메타적인 거짓된 믿음을 자각하게 되고 이를 폐기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일군의 해석자들의 주장대로 소피스트가 거짓 모순을 통해 상대를 논박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 엘렝코스의 상대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앎을 얻게 된다는 데에서 차이가 없다면, 논박이 거짓 모순을 통한 것이든 참된 모순을 통한 것이든 결정적인 차이는 없게 될 것이다. 소피스트가 작위적으로 제공하는 거짓 모순이 거짓된 것임을 알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과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것들은 결합하고 또 어떤 것들은 결합하지 않는지를 알아야 하고, 이를 아는 자는 무지에 대한 앎이 아니라 그냥 단적인 변증술적 앎을 가진 자이며 이러한 앎을 지니지 못한 자는 참된 모순을 지적 받아서든 거짓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여서든 결국 자신의 변증술적 앎의 부재를 자각한다는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피스트가 모방하는 대상은 구체적인 명제, 문장, 생각이나 판단 따위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소피스트가 그리하여 어떤 기술자를 모방하는 자일 경우, 그 기술자 자신과 이 기술자를 알면서 모방하는 자, 그리고 이 기술자를 알지 못한 채로 모방하는 자라는 세 부류가 서로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본과 이를 모방한 것 사이에는 참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엄격한 구분이 성립하고, 다시 모방한 것 사이에서는 그 비율과 척도를 잘 따른 모상과 이를 왜곡시켰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원본과 닮은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가상이 다시금 구분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소피스트의 모방이 논박이나 모순을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할 경우 소피스트가 아닌 모방자는 그 대상이 되는 원본 기술자와 구분되는 점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모순을 참되게 지적하는 철학자나 현자를 그대로 모방하는 모방자는 그 역시 참된 모순을 참되게 지적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런 일이 허용된다면,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혹은 오늘날의 양자역학의 내용을 담은 책을, 이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 그저 문자 그대로 암기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나 닐스 보어, 슈뢰딩거 등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버리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파이드로스』나 『제7 서한』 등에서 문자 기록을 통한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플라톤 자신의 입장과도 배치된다. 단순히 있는 그대로 모방하여 옮기는 것은 원본을 제대로 재현하는 일일 수 없다. 진정으로 참된 현자, 지자가 있고 이와 구분되는 모상적인 현자가 있으며, 이 둘 모두와 구분되지만 이 둘과 혼동될 여지가 있는 자로서 소피스트가 있다는 것이 『소피스트』의 전체 맥락에 부합하는 이해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렇게 생각할 때 마지막 소피스트 정의 이전까지의 여섯 가지 정의 시도들은 소피스트가 철학자를 (모상으로써든 가상으로써든) 모방한 결과들이라기 보다는 소피스트를 추적하는 손님과 테아이테토스가 참된 소피스트를 놓고 산출해낸 상들로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러한 상들은 소피스트가 현실에서 경험적으로 실제로 수행하는 일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피스트에 대한 가상이라기 보다는 모상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아마도 소피스트에 대한 가상은 소피스트를 주어로 한 술어 철학자 혹은 술어 정치가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고민 중.

 

-蟲-

CFA: IPS’ Symposium XIII, on Plato’s Sophist

The International Plato Society’s Symposium XIII at the University of Georgia (USA) July 18-22, 2022 is devoted exclusively to the Sophist.  We will consider abstracts on any aspect of the dialogue and its reception. They should be received by November 15, 2021. At this point, we expect to have an in-person Symposium. However, because some or even many people may not be able to travel, we also plan to have simultaneous Zoom sessions to make remote participation possible.

Plato’s Sophist was, arguably, the most important Platonic dialogue for mid-20th century philosophy.  Anglo-American analytic philosophers looked to it to come to understand Plato’s philosophy of language.  Continental philosophers, inspired by Heidegger’s beginning Being and Time with a quotation from the Sophist, looked to the dialogue to wrestle with Plato’s notion of being.  Not surprisingly, each group found a rich field from which to pursue their mostly non-overlapping interests.  Both sides did agree on the importance of language in the dialogue. However, as if they were re-enacting a portion of the dialogue, they waged a kind of battle of gods and giants against each other.  Now that the barriers between these approaches have begun to break down and interests, on all sides, have broadened, it is time for a new, 21st century look at this puzzling and interesting dialogue.  The dialogue raises many issues that can be fruitfully  explored.  Besides questions about the nature and possibility of language, there are issues about definitions, truth, diaresis, interweaving, the five megista gene?, separate form, the nature of images, non-being, being, dunamis, the motions of forms, and many, many more.

Our Society does not reflect a single perspective: we welcome representatives of all perspectives—and of none.  Just as the sophist proves wily enough to escape most of the dialogue’s efforts to define him, so has an understanding of the dialogue and many of its details remained frustratingly elusive.  Join us at the Symposium to explore and engage this dialogue.

Confirmed plenary speakers:

  • Mauro Bonazzi (Utrecht)
  • Lesley Brown (Oxford)
  • Ronna Burger (Tulane)
  • Paolo Crivelli (Geneva)
  • Monique Dixsaut (Sorbonne)
  • Verity Harte (Yale)
  • Marko Malink (New York University)
  • Maurizio Migliori (Macerata, Italy)
  • Noburu Notomi (Tokyo)
  • Christopher Rowe (Durham)

Please consider submitting an abstract.

The week before our Symposium, our sister society, 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the Study of Socrates, will have its own weeklong conference in Houston. For more details, see socratessociety.rice.edu. Consider attending both conferences. Make 2022 the year of Plato!

 

https://platosociety.org/cfa-symposium-xiii/

 

CFA: IPS' Symposium XIII, on Plato's Sophist

The International Plato Society’s Symposium XIII at the University of Georgia (USA) July 18-22, 2022 is devoted exclusively to the Sophist.  We will consider abstracts on any aspect of the dialogue and its reception. They should be received by November

platosociety.org

 

뭐냐... 9월 30일로 저장해 놨는데 언제 11월 15일 됐냐... 아아... 석사 쓸 때 지겹도록 읽었던 논문들의 저자들이 한 가득 보이네... 저 사람들 중에 나 박사 만들어줄 사람 하나가 없으려나... 낄낄. 씨발 거, 그 자격증이 대체 뭐라고.

 

-蟲-

0. 예를 들어 '가장 중요한 유들' 중 있는 것은 정지에 참여함으로써 정지한 것이라 이야기되지만 정지에 대해 다른 것에 참여함으로써 정지와는 다른 것이라고도 이야기된다. 그런데 운동은, 만일 그것이 정지와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서 결코 정지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역시 정지에 대해 다른 것에 참여함으로써 정지와 다른 것으로 이야기되지만, 여기에 더하여 정지에 참여할 수조차 없다는 점에서도 정지가 아니다. 이와 같은 구도에서, 예를 들어 "덕은 네모나지 않다."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이 명제는 참이며, 이 경우 덕은 형태를 가지지 못하므로 애초에 네모난 것에 참여 자체를 할 수 없다. 반면 네모난 석판을 생각해 보자. 네모난 석판은 네모난 것에 참여함으로써 네모난 것으로 이야기될 수 있지만, 네모난 것이라는 유 그 자체는 아니고 이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는 또한 네모난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도 이야기될 수 있다. 이 네모난 석판의 경우는 같은 것이나 다른 것이라는 유가 있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이야기되는 경우에 유비될 수 있다. 다른 것이든 같은 것이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있는 것이라 이야기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예외없이 있는 것 그 자체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 그 자체를 제외한 여타의 모든 있는 것들은 저 있는 것 자체와는 다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들 사이의 결합과 분리에 대한 고찰은 상(그리고 모상과 가상)과 거짓을 규정하기 위해 시도된 작업이다. 거짓의 사례로 제시되는 "테아이테토스, 지금 나와 대화하고 있는 자는, 날고 있다." 라는 문장은 위 사례들 중 무엇에 해당되는가? 브라운은 이 상황이 "양립 불가능한 속성들의 영역 내에서의 다름"에 의해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사실로서, 테아이테토스는 현재 앉아 있으며, 이 앉아 있다는 동작 상태는 여타의 동작 상태들을 포괄하는 영역 내에서 다른 동작 상태와 양립 불가능하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는 한, 그는 이와 동시에 서 있을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날고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앉아 있는 것에 참여하고 있는 테아이테토스를 언급하고 바로 그러한 테아이테토스에 관해서 앉아 있다는 것과는 동작 상태 영역 안에서 양립할 수 없는 날고 있다는 술어를 서술하는 것은 거짓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유들의 결합과 분리 논의에서는 이와 같은 양립 불가능한 속성들의 영역이라는 의미에서의 '다른 것'이 논의된 바 없다. 브라운과 그의 해석에 동의하는 일군의 학자들은 이에 대한 문헌 상의 근거로 "크지 않은 것"이 "그 반대인 작은 것만이 아니라 단지 다르기만 한 것인 같은 크기인 것 또한 의미할 수 있다"라는 손님의 언급을 제시한다. 그러나 유들의 결합과 분리 논의에서 있는 것에 참여하는 것들이 있는 것 자체와 다르다는 것과 운동이 정지와 다르다는 것이 같은 의미의 '다른 것'을 통해 설명되었고, 지금 인용된 손님의 언급에서도 여기에 연속적으로 반대되는 것도 단지 다르기만 한 것도 모두 "~이 아닌 것"으로 통칭된다고 언급될 뿐, 이로부터 한 상태가 속한 영역에서 양립할 수 없는 여타 모든 상태들을 배제한 것이 "~이 아닌 것"으로 통칭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또한 브라운 자신이 시인하듯, "덕은 네모난 것이 아니다"와 같은 참인 문장에서의 "~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브라운의 해석은 설명을 제시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따라, "덕은 네모나다"라는 문장의 거짓 역시 브라운의 해석으로는 손님의 거짓 규정에 포섭할 수 없게 된다. 반면 "~이지 않은 것"을 "~인 것 자체와 다른 것" 그리고 "~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이해할 경우, 브라운이 직면하는 문제를 겪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시도한 것이 프레데의 is1과 is2 구분을 통한 is not 해석이다. 테아이테토스는 그 자신 그 자체로 날고 있는 것 그 자체이지 않고, 그럴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도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테아이테토스는 또한 날고 있는 것에 참여하지 않고, 그래서 날고 있는 것이라는 속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통상적 차원에서 우리가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라는 문장이 거짓임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다른 것"의 의미는 이 후자의 속성 결여, 비참여인 것이다. 그런데 있다는 것과 있지 않다는 것은 자체적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도 있고 상대적(참여) 차원에서도 이야기될 수 있다는 프레데의 해석을 적용하면,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날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참여 차원에서, is2 맥락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라는 구분이 가능하다. 반면 앞서 유들의 결합과 분리 논의에서는 있는 것들 중 하나이며 있는 것 자체에 참여하는 그러한 것인 여타의 유들(운동, 정지, 같은 것, 다른 것 등)이 그러한 참여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며 있는 것이지 않은 것이라는 점이 "다른 것에의 참여"를 통해서 설명되고 있었으며, 이는 테아이테토스의 경우와 달리 is1 맥락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is'의 의미에는 차이가 없는데, "그것은 무엇으로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이 되는 is 응답에 제시될 수 있는 이러저러한 술어들을 주어에 결합시키는 기능을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is1은 주어의 자체적 측면에서 여타의 것들과의 관계를 배제한 채로 결합되거나 분리되는 술어들과의 관계를, is2는 대상에 대한 참여 또는 그 대상에 대한 다른 것에 대한 참여를 통해 결합되거나 분리되는 술어들과의 관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사용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는 이에 따라 is1 차원에서는, 마치 운동도 정지도 있는 것과 다른 것처럼, 거짓이 될 수 있다. 그러나 is2 차원에서는, 이번엔 다시 운동도 정지도 있는 것에 참여하여 있는 것들로 이야기되듯,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는 것에 참여함으로써 앉아 있는 것으로 참되게 이야기되는 것일 수 있다. 반면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는 is1에 따라서도 is2에 따라서도 거짓이다. 반면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지 않다"는 또한 is1에 따라서도 is2에 따라서도 참이다.

  이제 문제는 is1 차원에서 연결되는 것들, is1에서는 분리되지만 is2에서 결합하는 것들, 그리고 is1과 is2 모두에서 분리되는 것들 사이의 구분이다. 있는 것에 참여하는 것들은 아무리 그런 식으로 참여하더라도 있는 것 그 자체일 수는 없고 그 있는 것 자체와는 다른 것이며 따라서 자체적으로 있는 것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같은 식으로 "날고 있는 것"에 참여하는 것들이 아무리 그렇게 참여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참여자들은 자체적으로 날고 있는 것 그 자체로 이야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자들은 적어도 날고 있는 것에 아예 참여하지 않는 것들과는 구분되며, 참여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날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논점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브라운의 소위 "영역" 해석을 고려한다면, 테아이테토스의 경우처럼 앉아 있음으로써 날고 있지 않은 것에 비해서, 수나 색이나 덕이 날고 있지 않은 것은 그 영역과 아예 무관한 방식으로 날고 있지 않은 것이며 날고 있는 것과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제 앞서 논의된 참여관계를 일종의 원본과 모상 관계로 생각해 보자. 있는 것 그 자체가 원본이라면, 참여자들은 이 원본을 모방한 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은 모상과 가상으로 구분될 수 있다. 모상은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원본과 같은 이름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즉 운동은 있는 것 자체(원본)라고는 이야기될 수 없지만 그 참여를 통해 있는 것(모상)이라고는 이야기될 수 있다. 반면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는 것 자체도 아니지만 날고 있는 것에 참여하지도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상조차 아니다. 그럼에도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라는 문장은 테아이테토스를 "날고 있는 것"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는 것 자체도 아니고 이에 참여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날고 있는 것과 어떤 식으로 결부되고 있고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거짓 문장 안에서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는 것"이라는 거짓 이름을 가진, "날고 있는 것"을 잘못 모방하는, "날고 있는 것"에 대한 가상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라는 문장은 테아이테토스를 언급하고 이 언급된 주어에 관련하여 연속적으로 그에 관하여 있는 것들이나 있지 않은 것들을 서술하며, 그런 식으로 테아이테토스와 그에 관항 있는 것들을 지시한다. 이 문장은 이런 식으로 테아이테토스를 표현하며, 모방한다. 이러한 문장과 문장의 지시체 사이의 관계가 유들의 참여관계 및 원본과 모상 관계를 통해 설명되고 있는 것인지 여부는 논쟁적이나, 적어도 이러한 구도가 연상된다는 정도의 언급은 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자체적인 것 또는 원본은 이에 대한 참여자나 모방자로 하여금 그 참여대상의 본래적 성격으로부터 유래한 닮은 이름을 가지는 일을 허용해준다. 있는 것이 자체적으로 있고 이 자체적인 있는 것에 여타의 것들이 참여함으로써 그것들도 비로소 있는 것들이 된다. 그러나 이 후자인 참여자들은 그것들이 비록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이에 대한 참여를 통해 다른 것들을 있는 것들이게끔 해주지는 않는다. 물론 "자체적으로 운동으로서 있는 것"은 이것에 참여하는 것들을 또한 "상대적으로 운동으로서 있는 것들"이게끔 해주기는 할 것이다.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른 사례를 들어 보자면, 같은 것 자체는 여타의 참여자들로 하여금 그것들이 각기 자기 자신과 같은 것들이도록 해준다. 반면 이 참여자들은 그 참여를 통해 "같은 것"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참여자들에 참여하는 또 다른 것들을 "같은 것"이라 이야기되도록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속성의 원본, 표준, 원천, 근거로서 각각의 유 그 자체는 이러한 유에 참여하는 참여자들과 구분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원본과 참여자들은 서로 구분되고 서로 다른 것이라 이야기될 수 있다. 반면 원본에 참여하지 않는 것들, 그러한 속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결여하는 것들은 원본으로부터만이 아니라 참여자들로부터도 다른 것이 된다. "같은 것이란 그 자체로 있는 것 자체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 라고, "그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하고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습니까?"에 대해서도 같은 종류의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하며 이와 함께 두 대답의 서로 다른 층위를 구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소피스트가 단순히 현자를 모방하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현자를 거짓되게 모방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자로부터 두 차원 모두에서 구분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현자와도 달라야 하지만 현자를 모방한 자와도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의 구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현자와 그를 모방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선행되어야 한다. 현자를 알고 모방하는 자는 현자의 현재 상태를 반복할 수는 있지만, 그 현자의 원리적 능력을 재현할 수는 없다. 마치 참여자 있는 것들이 원본 있는 것처럼 자신에 대한 참여자들을 있는 것들로 만들어주지 못하듯, 현자는 변증술이라는 원리적인 앎을 활용하여 변화생멸하는 무한하게 다양한 사태들에 언제나 참인 판단들을 내리지만 모방자는 단지 그가 모방을 완수한 그 단계까지 현자가 지니고 있던 고정된 지식들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반면 소피스트는 그러한 고정적 지식의 반복조차 행하지 못할 것인데, 이러한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소피스트로 하여금 자신이 논박당하는 상황은 피하게 만들고 오직 그가 다른 자를 반박하는 상황만을 허용하도록 만든다고 볼 수도 있다. 

  원본 그 자체가 참일 때에 그것을 모방한 것은 원본에 비하여 거짓이고, 원본을 제대로 모방한 모상은 원본을 잘못 모방한 가상에 비하여 참이며, 역으로 가상은 모상에 비하여 거짓이자 원본에 비하여서는 더욱 더 거짓이다. 이러한 두 차원의 참과 거짓이 구분되어야 소피스트가 현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현자를 모방하는 자마저도 아니라는 점이 밝혀지고, 그가 다른 자를 지혜롭게 만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지혜를 결여하고 있기까지 하다는 점이 규정되어, 그가 어느 차원의 어떤 영역에 자리하는지를 제대로 정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0. 문제 구성 중...

 

-蟲-

0. 소피스트는 무언가의 가상제작자, 즉 모방자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소피스트가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모방하는지에 대한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 『소피스트』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사람들로부터 지혜로운 자라고 여겨지며, 바로 그러한 평판 덕분에 젊은이들을 사냥하거나 돈을 받거나 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아무도 그를 지혜로운 자라고 여기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돈을 가져다 바치고 자신의 자식을 교육해 달라 맡기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아마도 그는 지혜로운 자처럼 보이는, 즉, 지혜로운 자를 모방하는 자라고는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소피스트는 마치 사냥술도 가지고 상술도 가지며 쟁론술도 또 논박술(검증술, 엘렝코스)도 가진 것처럼 나타나며, 각 기술자는 그 각각의 고유한 기술로 정의되므로, 소피스트라는 것이 어떠한 고유한 전문직의 유라면 저 여러 기술들 모두에 의해 규정될 수는 없다. 그는 소피스트술이라는 단일한 기술에 의해 소피스트로 있게 되는 것이며, 반면에 그가 마치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앞서 언급된 기술들은 단일한 기술자 유에 대한 정의로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사냥은 말이든 행동이든 대상을 강제로 제압하여 획득해내는 기술인 반면 상술은 대상을 거래와 계약을 통해 그 대가가 되는 것과 교환하는 기술이며, 단일한 기술이 강제로 제압하는 동시에 또한 교환하는 것이기도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는 일련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일관되게 말로써 상대방을 반박하는 행위를 수행하며, 아마도 이 점이 그의 고유한 기술에 핵심이 되는 특징일 것이다.

주목할 점은 소피스트에 대한 여섯 번째 규정 시도에서 획득된 결론으로서 그가 영혼을 정화하는 엘렝코스를 사용하는 자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엘렝코스는 플라톤의 소위 초중기 대화편들에서 일관되게 소크라테스가 사용하는 기술로서 묘사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 자신의 무지를 공언하는 자이며,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지는 몰라도 최소한 지혜로운 자 그 자신이라고는 말하기 곤란할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는 상대방이 지혜를 잉태하고 있는지 혹은 지혜를 견지하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무지한데 스스로 지혜롭다고 착각하고 있는 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두 측면을 함께 고려하면, 엘렝코스를 수행한다는 것 그 자체로는 이 수행자 자신이 지혜로운지 여부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엘렝코스는 상대가 지닌 믿음들이 상충하고 모순될 때 이를 지적함으로써 상대의 무지를 자각하도록 만들지만, 상대가 지혜롭다면 그가 모순된 믿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줄 뿐 피논박자에게 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소피스트가 만일 지혜로운 자를 모방하고 그 결과 지혜로운 자처럼 여겨지고 있고 이것이 그의 소피스트술을 사용한 귀결이라면, 엘렝코스는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이 귀결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며 소피스트술과 곧장 동일시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른 한편 무지한 소크라테스도 지혜로운 현자도 상대방의 지혜로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엘렝코스를 사용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고, 그렇다면 같은 일을 소피스트는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상대에게 묻고 동의를 구하고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상대가 동의한 것들 사이에 혹은 부정한 것들 사이에 모순이 드러난다면, 상대는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설령 소피스트가 궤변을 통해 작위적으로 상대를 기만한다 하더라도, 또는 그것이 지나치게 유치하고 억지스러워 피논박자가 어이없어 하고 성질을 낸다 하더라도, 결국 소피스트가 상대방에게 지적하는 모순을 실제로 유의미하게 해결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는 변증술적 앎이 필요하다. 어떤 것이 결합하고 또 어떤 것이 분리되며 그것들은 어떠한 기준과 조건에 따르는지, 이를 알지 못한다면 소피스트의 궤변이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이에 대해 제대로 항변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피논박자는 짜증스럽고 화가 나더라도 어찌 되었든 자신이 소피스트가 제기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변증술적 앎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는 지혜를 추구하는 소크라테스나 혹은 지혜를 획득한 현자가 엘렝코스를 사용했을 때와 결국은 같은 결론일 수 있다. 제대로 건전한 논박의 과정을 거친 결과도 피논박자가 자신의 변증술적 앎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게 되는 것임은 같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 시인, 장인, 정치가 등등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분야에서는 확고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를 거쳐 무지를 자각하고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를 향해 화를 내거나 아니면 자신을 반성하고 소크라테스에게 배움을 청하거나 이러저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자 자신의 전문영역에 있어서는 그에 한정하여 아는 자라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엘렝코스를 통해 드러날 무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무지는 결국 모순을 범하지 않고 또 이를 극복해내기도 하는 데에 필요한 바로 그러한 앎, 결합과 분리의 질서에 대한 앎의 결여인 것이다. 

엘렝코스를 사용하는 측면에서 무지하되 지혜를 추구하는 소크라테스, 무지하되 지혜를 가장하는 소피스트, 지혜로운 자 셋 모두가 구분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이 셋은 구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파르메니데스』에서 제논과 파르메니데스의 엘렝코스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 결과 자신이 내세우는 형상이론과 관련하여 자기 자신이 결합과 분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그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반면 앞서 이야기하였듯 지혜로운 자는 아마도 같은 엘렝코스 상황에서 결합과 분리의 질서를 정확히 인지하고서 이에 따라 여러 난해한 하나와 여럿이니 있고 있지 않고 하는 등등의 문제를 해결해낼 것이다. 그러한 해결은 『소피스트』에서 실제로 손님에 의해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피스트의 경우, 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를 아이러니한 기만이라 비방하며 이에 응하기를 거부한다.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 『고르기아스』에서 칼리클레스, 『프로타고라스』에서 프로타고라스나 『에우튀데모스』에서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 등이 모두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고 함정을 파서 대화상대를 아포리아에 빠지게 만든다고 욕을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 지혜로운지 여부를 확인할 여지는 허용하지 않는다. Beere의 진단은 이 점에서 설득력이 있는데, 단지 엘렝코스를 사용한다는 능동적 측면만으로는 사용자가 지혜로운지 여부가 판별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소피스트는 그 엘렝코스나 반박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지혜롭다는 평판을 얻는데, 그러나 같은 일이 소크라테스에게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문제를 나름 설득력있게 설명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소피스트는 논박을 수행하기는 하되 논박을 당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그에 의해 논박을 당한 자(무지를 자각한 자)와 이를 지켜본 대중이 보기에는 소피스트와 그의 반박상대 중 후자는 확실히 무지한 자인 반면 소피스트 자신은 지혜로운지 무지한지 알 수 없는 자가 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처럼 자기 자신의 무지 또한 공언한다면, 혹은 자신의 지혜에 근거하여 다른 이들의 검증으로서 엘렝코스를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허용한다면, 소피스트는 단적으로 지혜롭거나 아니면 무지한 것으로 확정될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는 자신의 무지를 알고 이것이 들킬까 두려워하며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아이러니하게, 즉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자 한다. 타인들을 반박해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소피스트 자신은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이 상대적 우위가 가진 불확실성(지혜로운 자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지 무지한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에 아는 척을 더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자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비어가 주장하는 거짓 논박이나 거짓 모순은 딱히 소피스트가 지혜로운 자를 기만적 방식으로 모방하는 데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 내가 첨언하고자 하는 바이다. 반박을 가하는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반박하는지 여부는 상관없으며, 실상 그 구체적인 내용조차도 별로 중요치 않다. 문제는 결국 피반박자가 변증술적 지혜의 결여로서 그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지 여부이며, 이 부분에서의 반박은 실제로 실현되어야 위의 구도가 비로소 성립한다. 소피스트의 대화 상대자가 무지를 자각하게 되지 않는다면, 소피스트의 반박이 건전한 엘렝코스일 경우 그저 상대방의 지혜로움이 확인될 뿐일 것이고, 그것이 가짜 논박에 불과한 경우 소피스트에게 사람들이 환호하고 자발적으로 배움을 청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거짓, 가짜 논박에 넘어가면 넘어가는대로 그 허위를 지적해낼 능력이 없음이 밝혀지는 것이고, 이것이 거짓이고 기만임을 제대로 해명해낸다면 지혜로운 자로 드러나며, 그러나 이러한 폭로를 위한 철학적 지식은 현자나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소피스트가 상대하는 통상의 상대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피스트의 논박이 거짓이든 참이든 그 결과 상대방이 자신의 변증술적 무지를 자각하는 점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지혜로운 자의 그 지혜는 모순을 범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확인된다. 그러나 반박의 이러한 수동적 측면이 아닌 능동적 측면을 모방함으로써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자의 비율을 왜곡하여 모방한다. 반면 지혜로운 자를 제대로 모방하는 자는 반박을 가하는 쪽이 아닌 반박을 당하는 측면을 모방하는 자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가 지혜로운 자로 나타나는 본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을 그것이 아름다운 그 점에서가 아닌 다른 측면에서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는 방식으로 모방하는 경우와 그냥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경우의 구분에도 부합한다.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자의 그 논박을 잘못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논박을 모방함으로써 지혜로운 자를 잘못 모방하는 것이다. 늑대와 개의 구분은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사이의 구분이 아니라 그냥 지혜로운 자와 소피스트 사이의 구분에 대한 유비이다.

 

0. 소피스트는 모르는 자로서 가상을 제작한다. 이에 대비하여 모르는 자가 모상을 제작하는 경우가 가능한지, 그리고 간단히 언급되기만 하고 지나가는 아는 자가 제작하는 가상은 소피스트의 가상과 어떻게 다른지 등등의 문제가 남는다. 또한 이러한 가상이나 모상의 분할 과정에서 원본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혜로운 자 그 자신이 원본인 경우가 있고 지혜로운 자의 말이나 생각이 원본인 경우도 있을 것이며, 이러저러한 덕이라든지 참이라든지 다른 맥락에서 원본이 되는 것들도 고려될 여지가 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蟲-

0. 얼마 전 온라인으로 학술발표회가 있어 참석했다. 국내에 관련전공자가 없다시피 한 분야를 전공하고 오신 분께서 현재까지도 한창 진행 중인 작업의 말하자면 중간결과 같은 것을 발표하여 공유하는 자리였다. 낯설고도 흥미로운 발표가 마무리되고 질의응답시간이 되었다. 몇몇 질의가 오가고, (이 좁은 바닥에서) 낯선 누군가가 발언권을 요구했다. 그러더니 발표자의 발표를 비하하는, 그러면서도 발표의 내용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자신의 관심분야를 치켜 세우는, 그냥 '난 이런 것도 알아요' 류의 개소리를 짖어댔다. 나는 내 스스로 쌍욕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내 마이크와 영상을 급하게 껐다. 동료 연구자인 발표자에 대한 존중도, 해당 발표회에 참석한 여타 연구자들이 그 발표를 듣기 위해 할애한 시간에 대한 배려도, 그 자신 역시 속해 있을 이 분야 자체에 대한 신중함과 정직함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욕 당한 기분이었다. 진심으로 살의를 느꼈다. 그냥 저런 쓰레기를 하나 치워 버리는 게, 나 따위가 되도 않는 글을 읽네 쓰네 마네 하는 것보다는 훨씬 학계에 기여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 새끼 자신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었고, 받아서도 안 되었다.

 

0. 나는 생산성이 낮은 인간이고, 무슨 대단한 통찰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분야에서 한 해에만 4~5만 건의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중에 몇 편이나 유의미하고 또 그 중 얼마가 생명력을 갖춰 이후의 논의로 확장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또 다른 분야에 비해 여기에 사람이 차고 넘치는 것도 아닌 건 물론이고 오히려 사향길에 접어들었다는 게 그럴 듯할 지경인 분야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말이다. 나 같은 게 있거나, 혹은 없거나, 별 차이는 없을 만한 정도는 된다는 것이겠다. 그래서 나는 학술적으로 유의미한 연구를 해내고 있지 못하고, 그 실질에 맞게 낮은 평가를 받고 있고, 그래서 이 기준으로만 놓고 보자면 위에 말한 저 씨발 쓰레기 새끼랑 별 차이가 없다는 거다. 적어도 저 치는 제 잘난 맛에 웃고 떠들고 다른 곳에서도 저렇게 끽끽 원숭이처럼 짖어대고 다니기라도 하겠지. 나는 저 치와 별 다를 것도 없는 처지에, 죄책감과 부채감을 떠안고 있다. 

 

0. 내가 밑바닥 진창에 쳐박혀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고,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래도 여기에 발목 잡혀서 그대로 파묻혀 버릴 거면, 그럼에도 계속 이렇게 아득바득 버티는 데에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안간힘을 써서 개발악을 하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학자구실을 하고 살 수 있다는, 이 시궁창에서 조금은 기어 올라갈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갖고 싶다. 나는 뭔가 대단히 잘못하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인 건가? 모상의 자체적 본질이 해명되기 어려운 것이고, 그것이 플라톤 형이상학에서 참여 개념에 맞물려 심각한 철학적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체적인 것과 참여적인 것의 양립 가능성을 『소피스트』 내에서 읽어내야 한다는 내 제안은 그렇게나 글러먹은 것인가? 인식상태에 대한 시험, 검토는 그 대상이 되는 인간이 승인하고 개입하는 믿음들 사이의 모순 유무를 통해 이루어지며,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모순이 실제로 성립하는지 아니면 조작적으로 거짓 모순이 구성되는지 여부는 이 검토와 별개의 문제이고, 그래서 적어도 시험과 논박 그 자체만 놓고 보자면 한 개인의 믿음 체계 내에 모순이 함축되어 있음을 드러내 밝힌다는 점에서는 소피스트의 궤변적 논박이든 철학자의 교육적 논박이든 차이가 없다는 것이, 그게 그렇게나 가망이 없는 해석인가?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들은 플라톤을 이해하는 데에는 하등 기여하는 바가 없는 그저 헛소리에 불과한 것인가? 

 

0.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노력이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蟲-

예를 들어, Being and ~Being은 모순이다.

그런데 아는 자, 변증술에 능한 자, 철학자는

Being(or ~Being) in itself와 Being(or ~Being) in a relation with something을 구분한다.

a) Being in itself and ~Being in a relation with something은 참이다.

b) Being in a relation with something and ~Being in a relation with something 또한 참이다.

c) Being in a relation with something and ~Being in itself는 경우에 따라 참이다.

(~Being in itself가 the Difference with Being in itself일 경우.)

d) Being in itself and ~Being in itself는 거짓이고 모순이다.

모르는 자가 Being and ~Being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아는 자는 모르는 자의 믿음에 생략된 조건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믿음이 특정 조건에서 모순이 되는 믿음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그의 무지를 밝혀낸다.

그런데 소피스트는 스스로 모르는 자이면서 또 다른 모르는 자의 모순을 드러내고 무지를 밝힌다.

이 경우 소피스트는 결합과 분리의 기술인 변증술을 지니고 있지 못한 자로서,

단적으로 말해 in itself와 in a relation with something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Being and ~Being을 무조건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이 믿음 내에 포함되는 d) 믿음의 모순을 결과적으로 지적해내게 되며,

무지한 자이면서도 또 다른 무지한 자의 모순된 믿음을 지적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철학자는 조건과 층위에 따른 올바른 결합과 분리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결합과 분리를 통해,

반면 소피스트는 무조건적이고 단적인 결합과 분리를 통해,

이 둘 모두가 무지한 자의 모순된 믿음을 드러내며,

이 때에 지적되는 모순은 결과적으로는 같은 모순이다.

따라서 『소피스트』에서 철학자의 논박과 소피스트의 논박은

모순 그 자체가 참인 모순과 거짓인 모순으로 구분됨에 따라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며,

이 대화편 내에서 거짓 모순 혹은 가짜 모순이라는 특수한 개념은 요청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 "나의 아버지와 나의 개가 모두 나의 무엇이다."라는 믿음은

"나의"라는 속격이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와 소유를 의미하는 경우를 구분하지 않을 때

모순된 믿음 "나의 것은 나의 것이며 따라서 아버지는 개이다"라는 소피스트적 논박을 허용하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좋은 것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덕이다."라는 믿음은

그 획득의 다양한 방식들을 무차별적으로 모두 포함하는 한에서

"좋은 것을 '정의롭게' 획득할 수 있는 능력"과 "좋은 것을 '부정의하게'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쌍을 동시에 덕으로 승인하는 모순된 믿음을 포함하게 되며,

이 점이 논박을 당하고 아포리아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논박을 통해 모순이 지적되기 위해서는 논박을 당하는 자가 모순된 믿음을 지녀야 하며,

이러한 상대의 믿음 승인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모순을 강요하여 부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소피스트는 상대가 믿지 않는 모순을 억지로 믿도록 만드는 자가 아니라

상대가 의식하지 못하는 모순을 그것이 왜 모순되는지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자이다.

 

철학자는 분별없이 뭉뚱그려진 믿음 전체에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되는 부분믿음을 정확히 지적해냄으로써

논박을 수행하지만

소피스트는 전체 믿음과 그 안에 포함된 모순된 부분믿음을 구분해내지 못하는 채로

전체 믿음을 전면적으로 모순된 것으로서 지적해냄으로써

논박을 수행한다.

어느 경우든 논박의 대상이 되는 자가 무지한 경우 이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논박을 당하는 일 역시 피할 수 없으나,

만일 그가 아는 자라면 애초에 그런 전체믿음 자체를 무분별하게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비어도 노토미도 왜 거짓 모순, 거짓 논박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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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엘렝코스가 모순 지적에 그치지 않고 상대를 논파하여 무지를 자각시키는 데에까지 가야지만 성립한다는 이해를 내가 공유할 것인지부터 문제인 듯하다. 엘렝코스는 '논박'이라고도 번역되지만 '시험(test)'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사실 그 역할이란 상대가 앎을 가진 자인지 아니면 무지한 자인지를 확인하는, 상대를 시금석에 올려놓는 작업이라고 보는데, 이 경우 엘렝코스는 그저 상대방이 가지는 믿음들 사이의 정합성만 따지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모순을 지적하고 나서 칼리클레스마냥 모르쇠로 일관하며 어깃장만 놓는 자는 엘렝코스를 당하지 않은 것인가? 나는 그가 엘렝코스를 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이해가 잘못된 것일 가능성도 일단 염두에 둬야 하겠다. 엘렝코스는 상대의 무지를 드러낸다. 그 무지를 부끄러워하고 자각하고 개선의 의지를 다지든, 그것이 무지라는 걸 여전히 자각하지 못하든, 그게 엘렝코스의 성립에 결정적인 조건이 되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보는데, 아무튼 이것이 지적받은 점 중 하나.

 

다음으로는 『에우튀데모스』에서 소피스트식 말장난은 오류추리이며, 제대로 된 엘렝코스는 정당한 추리이고, 전자를 통한 엘렝코스가 바로 거짓 엘렝코스, 거짓 논박이리라는 것. 그리고 말장난 속에서 사실과 다르게 궤변적으로 연결된 것이 바로 가짜모순쌍이라는 것. 나는 "A는 B가 지혜로워지기를 바란다."에서 "A는 B가 달라지기(변하기)를 바란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달라진다"의 범위에 이전 단계에서는 포함되지 않았던 "'본질이나 존재 차원에서' 달라지기"가 포함되었다는 것, 소피스트는 이를 의도적으로 포함시킨 것이지만 이 말장난을 당하고 있는 상대방도 '지혜로워진다'를 '달라진다'로 전환시키는 데에 동의하면서 별 다른 추가조건을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소피스트는 "A는 B가 살아있는 지금과 달라지기를, 즉 죽기를 바란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고, A 자신이 이 말장난에 기여했다는 것, 즉 말장난의 논리적 여지를 마련해준 것이며 이것이 바로 피논박자의 무지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런데 "B의 달라짐"에 "B의 지금의 지혜상태와의 다름"이 "B의 이러저러한 상태들과의 다름"에 더하여 "B의 본질이나 존재와의 다름"까지 포함된다면, 이것은 '달라짐'의 애매성(이건지 저건지)이 아니라 모호성(여기까지인지 저기까지인지)인 것 아닌가? 즉 『메논』에서 "아름다운 것을 획득하는 능력이 덕이다"라는 명제(Q)가 제대로 한정되지 않아 그 범위 안에 "아름다운 것을 '정의롭게' 획득하는 능력이 덕이다"라는 명제(q1)와 "아름다운 것을 '부정의하게' 획득하는 능력이 덕이다"라는 명제(q2) 모두를 포함하게 되어서, 상호 양립 불가능한 q1과 q2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Q가 메논의 무지함을 드러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전칭명제 Q와 특칭명제 q3 "아름다운 것을 부정의하게 획득하는 능력은 덕이 아니다" 이 둘 사이의 대립이 엘렝코스를 통해 드러나는 모순이란 지적도 있었지만, 실상 q3이 메논의 믿음이었다면 애초에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q1과 q2가 양립할 수 없고, 이 모순에서 무지를 자각한 다음에 비로소 메논은 q2를 '폐기하고" q3를 자신의 믿음체계에 추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건 이미 엘렝코스를 통한 무지의 자각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새로운 배움이 진행된 상태 아닌가? 여하간, 아름다운 걸 획득하는 능력 모두가 아니라 그 중 일부만 덕이듯, A는 B의 달라짐 모두를 바라는 게 아니라 B의 달라짐 일부만을 바라는 것, 이건 유사한 구도라 볼 수 있지 않나? 전자의 경우 메논은 자기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닫고 덕에 대한 처음의 정의 "아름다운 것을 획득하는 능력이 덕이다"를 폐기한다. 후자의 경우에서 A는 "무슨 개소리냐! 나는 B를 사랑한다! 내가 B의 죽음을 바란다니 궤변이다, 궤변론자야!" 뭐 대강 이런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을 획득하는 능력이 덕이다"와 "B가 지금과 다른 자가 되길 바란다"가 둘 모두 명확한 조건이나 범위의 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 안에서 상호 모순되는 믿음쌍이 분석되어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모순쌍을 지적함으로써 드러나는 무지란, 결국 제대로 한정되지 않은 저 두 믿음 아닌가? "B가 지혜로워지길 바란다"는 "B가 죽은 자가 되길 바란다"를 배제하지 않고 "B가 달라지길 바란다"는 다시 "B가 (살아있는 지금의 상태로부터) 달라지길 바란다"를 또 역시 배제하지 않으니, 소피스트의 궤변이나 오류추리는 피논박자의 무지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고 지적된 모순은 유의미한 것 아닌가? 여기에서 '다름'이 과일 '배'와 탈 것 '배' 사이의 애매성과 유사한 방식의 애매성을 보이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달라질 대상의 범위를 어떻게 한정하느냐에 따라서 '다름'의 애매성이 발생한다고 본다면 이는 '획득'의 방법(아름답게, 훌륭하게, 정의롭게, 불의하게, 불경하게 등등...)을 어떻게 한정하느냐에 따른 '획득'의 애매성과 무엇이 다른지 아직도 모르겠다.

 

고민 중.

 

+ 만일 위 반론을 받아들여 오류가 소피스트에게만 있을 뿐 상대방에겐 없다고 한다면, 그리고 피논박자가 위 사례에서 소피스트에 의해 논박을 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면, 그래도 여전히 소피스트의 논박을 철학자의 논박과 동일시할 여지가 남는가? 소피스트는 오류추리를 통해 스스로 모순된 믿음쌍을 가지고, 이를 상대에게 강요한다. 위의 사례가 그 강요에 저항하여 강요된 믿음을 수용하지 않은 경우라 한다면, 반면에 소피스트가 지혜롭다 믿고 그에게 배우기를 청하며 돈을 가져다 바치기까지 하는 사람은 강요된 믿음을 수용했어야 할 것이다. 혹은 누군가 그렇게 강요된 믿음을 수용하여 결과적으로 모순을 드러내 보여 무지한 자로 밝혀졌을 때, 이러한 논박을 과정을 구경한 제3자는 소피스트가 논박에 성공한 반면 그 자신은 논박당한 일이 '아직' 없으므로, 소피스트를 지혜로운 자라고 여길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 때 소피스트의 오류 추리는 상대방 피논박자의 동의를 거쳐 그 피논박자 자신의 모순된 믿음이 된다. 모순되지 않는 것을 모순된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 논박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잘못된 추론을 통해 형성된 모순된 믿음을 상대방에게 심어주는 것이고, 여기에서도 여전히 거짓 모순과 참된 모순의 구분은 불필요해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蟲-

일단 대강의 생각만.

 

예를 들어 '아버지'의 경우 그 정의항에 적어도 생물이란 유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혹은 '크다'의 경우, 그 반대항인 '작다'와 함께 '크기'라는 상위류에 포섭될 것이다. '오른쪽'이라면 장소나 방향이 그런 식으로 포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 모상, 가상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정된 규정성이 확보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상과 원본이 모두 (아마도 서술적인 의미에서) 있는 것 아래에 묶여야 하겠으나, 문제는 상의 경우 단지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있지 않기도 해야 한다.

 

-蟲-

역겨워

1. 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의도라면 상에 고유하게 귀속될 만한 문제를 짚어줘야 한다. 지금의 접근방식으로는 모든 관계적인 속성 일반으로 문제가 확장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상과 원본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문제를 야기하는 것처럼 이야기된다면, 과연 이러한 문제를 『소피스트』가 상에 관련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by S. H., Kang. 개별 상들이 고유한 개별 원본을 가져야 한다고 해서 상 일반 혹은 상 자체가 반드시 개별 상들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 자신만의 원본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또한 그러한 원본 없이 지시되는 상 자체에 대해서도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말해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상은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특수한 결합이다"라는 서술은 상 자체에 대해 유의미한 서술로 보인다. by H. S., Lee. 

  여전히 상은 원본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곤란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관점은 유지되어야 할 것 같은데, 위의 지적들을 고려하면 접근이나 서술을 고쳐야 하는 것 맞는 것 같고. 좀 더 입장을 고수해 보자면,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상은 소크라테스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가짜 사과(그것이 회화작품이든 조형물이든 거울이나 수면에 비친 상이든 그림자든)는 여전히 그것의 원본이 되는 '사과'에서 이름을 빌려와 가짜 '사과'라고 불린다. 아마도 이 지점이 관계적인 것 일반에 대한 상의 고유한 특징,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다. 아버지는 자식의 아버지로, 자식은 아버지의 자식으로 이야기되지만 그렇다고 한쪽이 다른 쪽의 성격 하나만으로 일방향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크다는 것의 경우에도 x보다 크고 y보다 작다는 식의 서술이 큰 것에 대해 서술되고 그런 관계에 의해 큰 것이 어떻게 큰 것인지 설명되긴 하지만, 그것이 '크다'라는 그 측면이 x나 y의 고유한 성질에 의존하여 설명되지는 않는다. 

  문제의 초점을 상 자체와 개별 상들 사이의 구분에서 찾지 않고 상과 그 외의 의존적인 것들 사이의 구분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접근할 경우 부정, 차이, 지시(생각, 말, 믿음, 지각)의 경우 전자로 분류할지 후자로 분류할지 아직 불분명하다. 상처럼 말이나 생각도 그것이 가리키는 원본을 '내용'으로 가지며, 이 내용 없이는 무의미해진다. 혹은 이 내용으로서의 원본을 논하지 않더라도 모방한다거나 지시한다거나 등등의 성격은 여전히 유의미하게 상이나 말 따위에 대해 서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크다는 것 자체나 아버지 그 자체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는가? a<b<c의 경우 b는 큼 자체에 참여하여 a와의 관계에서 큰 것이지만 동시에 작음 자체에 참여하여 c와의 관계에서 작은 것이기도 하다. 조금 더 고민해 볼 문제.

+ '아버지'의 정의에는 '남성'이, '어머니'의 정의에는 '여성'이 포함될 것이다. '크다' 그 자체는 크기, 양이라는 것이 본질로서 그 정의에 마치 아버지가 남성임이 필연적인 것처럼 그런 식으로 포함될 것이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실체 범주 규정 이후에 그러한 실체에 귀속될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남성 그리고 여성에 귀속될 것이며 '~보다 크다' 또는 '~보다 작다'라는 규정 역시 마찬가지로 양 자체에 후속하여 귀속될 것이다. 반면 상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상은 그림이거나 조각이거나 수면이거나 할 텐데, 이러한 것들 각각은 상의 정의에 포함되지 않고, 그 외의 성질들은 상의 고유한 원본으로부터만 유래할 것이다.

 

2. 참된 모순은 관점과 조건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양립불가능한 것들의 상충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반면 거짓 모순은 추가조건들을 규명함으로써 모종의 방식으로 양립 가능한 것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일 수 있다. By Kang. 그런데 논박대상은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때 그 믿음이 지적당함으로써 논박된다. 그렇다면 저러한 참된 모순을 믿을 때에만 그러한 무지를 가진 자가 논박당할 것이며, 이는 지나치게 논박대상이 되는 조건이 엄격해지는 것일 수 있다. By Lee. 여기에 더해, 이런 방식으로 참모순과 거짓모순을 구분할 때 소크라테스가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은 거짓모순에 빠진 상대에게 관점과 조건의 차이를 밝혀 상대의 거짓모순을 해소하는 것일 수 있다. By Kang. 그러나 논박대상은 모순되는 믿음을 가질 때 바로 그 모순이 드러남으로써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을 얻는 능력은 덕이다"라는 믿음은 "좋은 것을 정의롭게 얻는 능력이 덕이다"와 "좋은 것을 부정의하게 얻는 능력이 덕이다"라는 서로 모순되는 두 믿음을 동시에 포함하며 이 점에서 모순된다. 또한 "덕이 아닌 것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라는 믿음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인데, 좋은 것을 부정의하게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를 얻지 않는 능력은 정의로울 것이고 덕일 것이다. 즉 다시, 정의로운 방식에서 좋은 것을 못 얻는 능력과 부정의한 방식으로 좋은 것을 못 얻는 능력이 모두 덕이 아니라는 두 믿음도 모순되고 있다. 이 모순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불분명할 때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함의된 모순적인 믿음들이 모순되는 바로 그 조건과 관점이 드러남으로써 밝혀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논박을 통해 무지를 자각하고 나면, 기존에 논박대상이 모순으로 간주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을 두 가지 믿음, "좋은 것을 얻는 능력이 덕이다"와 "좋은 것을 얻지 못하는(않는) 능력이 덕이다"가 추가된 조건들을 통해 양립 가능한 것으로 수용될 수 있게 된다. 이는 논의의 진행과정에서 논박상대가 받아들이게 되는 결과이고, 논박의 대상이 된 바로 그 모순은 아니다. 그리고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 관련한 모순의 경우에도 같은 구도를 생각할 수 있다. 논박대상은 있는 것은 있고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고 믿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소피스트』의 후반 논의를 고려하면, "있는 것은 있는 것에 참여해서 있다"는 믿음과 "있는 것은 있는 것 자체에 대해서 다른 것에 참여해서 있다"라는 두 믿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있지 않은 것은 있는 것에 대해서 다른 것에 참여해서 있지 않다"는 믿음과 "있지 않은 것은 있는 것에 완전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모든 있는 것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믿음을 구분하지 않고 모순적으로 함께 가지고 있다. 이 모순들은 지적되어 논박대상의 무지를 드러낼 것이고, 이러한 무지를 자각하고 나서야 "있는 것은 있는 것에 대해서 다른 것에 참여해 있지 않다"라거나 "있지 않은 것은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마주 놓인 있는 것에 참여하여 있다"라는 모순되지 않는 믿음들을 새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운동과 정지를 참된 모순의 사례로 드는 입장에 반대하고자 한다면 이 둘 또한 양립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by Kang. 그런데 이 문제를 논하려는 의도는 없었고, 역으로 그 사례가 무엇이든 결코 양립 불가능한 것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믿는 그러한 경우에만 참된 논박이 가능하다는 조건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그런데 위의 방식으로 서술하다 보니 모순은 그대로 모순이고, 특수한 조건이나 관점이 규명되지 않은 차원에서 반성없이 지니는 믿음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조건이 해명된 차원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되는 믿음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소피스트들의 말장난으로 보이기도 하는 논박도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지 여부가 문제일 것이다. 예를 들어 (a) 나의 개가 나의 것이고 (b) 나의 아버지 또한 나의 것이라면 (c) 나는 나의 것의 자식이기에 (d) 나는 내 개의 자식이라는 말장난의 경우는 어떠한가? (a)와 (b)에서 나의 소유물로서 나와 관계맺는 것과 나의 기원으로서 나와 관계맺는 것이 모두 나에게 속한 것으로 말해진다는 점에 주의한다면, (a)와 (b)를 부주의하게 긍정하는 자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모순을 추론할 수 있다. (a)에서의 '나의 것'과 (b)에서의 '나의 것'은 그 둘이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을 같은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이는 모순을 믿는 것이 되고, 그 모순은 (c)에서 그 암묵적 동의 자체에 대한 재차 동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d)에서 지적받게 된다. 즉 말장난은 소피스트가 하고 있지만, 그가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을 중단하지 않고 수용할 경우, 대화상대방도 바로 그 말장난에 포함된 모순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며, 소피스트는 바로 이 동의된 모순을 지적하여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a)에서 '나의 것'과 (b)에서 '나의 것' 둘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조건을 알고 주의하고 있는 사람, 즉 아는 자라면 이 논박에 의해 모순에 빠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소피스트에게 당한 상대방이 아무리 억울해 한다 하더라도, 그 상대는 자신이 무지했기 때문에 논박을 당해 무지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가짜 모순, 겉보기 모순이 (d)라면, 갑자기 아무 과정이나 단계도 없이 (d) 같은 것을 받아들이거나 애초에 믿고 있거나 한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a)와 (b)를 순차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에서 그 안에 함의된 모순까지 수용하는 경우, 이는 겉보기 모순을 누군가 가짜로 만들어내 상대에게 강제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스스로 그 모순을 받아들여 버린 것이 된다. 

 

-蟲-

0. 소피스트는 모든 것에 관련하여 논박을 해내는 자로 여겨진다. 설령 상대가 해당 주제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소피스트는 여전히 논박에 성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언가에 대해 그것을 모르는 자가 그것을 아는 자를 논박한다는 것은 건전한(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시, 소피스트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모든 것을 알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기에서 불가능한 앎이란, A의 전문가가 바로 이러한 정의에 입각하여 ~A인 B를 아는 일의 양립 불가능성일 것으로 보인다. 소피스트는 소피스트술이라는 단일한 기술의 담지자로서 바로 이 기술 이외의 어떤 기술에 대해 소피스트라는 해당 기술로써 알거나 저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를 빌리자면, 누군가가 의사이자 동시에 건축가라 하더라도 그가 건축을 하는 동안에 그는 부수적으로만 의사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것 각각을 그 자체로 아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여겨지는' 자이다. 이는 마치 화가가 그림으로 무엇이든 모방할 수 있고 또 누군가가 거울을 들고 다니며 무엇이든 거기에 반영시킬 수 있으며 또한 어린아이들이 아무것이나 가지고서 그것을 집으로도 신으로도 이름붙여 소꿉놀이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일 수 있다. 그는 모든 것 각각을 그 자체로서 실제로 아는 것이 아니라, 원본이 아닌 일종의 상을 취급하는 자일 수 있다. 그가 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인지, 아니면 아는 자를 원본으로 하는 상을 취급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원본이 아닌 상을 고려할 때, 비로소 소피스트가 그 자신의 소피스트술이라는 단일한 기술만으로 일체의 모든 것을 전부 다 아는 것처럼 드러나고 여겨지는 사태를 설명할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상이라는 것 그 자체가 다시금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이것은 원본이 아니면서도 또한 원본 이외의 다른 무언가를 닮은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원본을 닮은 무언가이다. 일견 상은 원본과 별도로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며, 그럼에도 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원본과 닮은 그러저러한 무언가이기는 하다. 그것은 원본을 모방하는 것인데, 이러한 모방은 그 모방의 대상인 원본 없이 설명되기 어려워 보인다. 각각의 상은 저마다 그것이 모방하는 자신의 고유한 원본과 관계를 가질 것이나, 그렇다면 상 그 자체는 무엇을 모방하는지 특정할 수 없다. 상 자체는 모든 상들의 총체가 아니며, 그럼에도 이 상의 규정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개별적인 상 각각이 상으로서 성립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상은 원본, 진정으로 있는 그대로 어떤 무언가인 바의 것, 이러한 참된 것에 대해 그것이 아닌 것, 그러한 원본으로 있지 않은 것, 그렇다고 해당 원본 이외의 것이지도 않은 것,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 것,' '참이 아닌 것,' '있지 않은 것'도 상의 경우와 유사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일상적으로 부정은 그 부정의 대상에 의존적으로 성립하고 서술된다. A가 아니거나 B가 아닌 것은 말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지만, '아닌 것'을 그 자체로 놓고 가리키거나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시, 언표, 사유를 허용하지 않으며 이러한 불가능성들이 서술되는 주어로서 성립할 수도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 있지 않은 것, 이러한 것을 그 자체로 고찰할 수 없기에,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에서 이것에 해당하는 다른 무언가를 찾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 결과 어떤 것과 그 외의 것이 다르다는 관계에서, 이 '다른 것'을 통해 무엇 아닌 것을 설명할 가능성이 확보된다. 그런데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모든 것 각각에 무차별적으로 서술된다. 각각은 어떤 무언가로 있는 한에서 그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나머지 모든 것들이 다시금 각각의 자신 이외의 것인 저것과 다르며, 모든 것들이 모든 것들과 이러한 관계에 놓인다. 이 모든 것들, 무엇인 바의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 있는 모든 것들조차, 있는 것 그 자체와 이것에 참여함으로써 있는 것이라 불리는 것들로 구분될 것이고, 있는 것 자체가 여타의 있는 것들이 있는 그러한 식으로 있지 않고 이런 것들과 다른 것이 되어 결국 그 자체가 있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있는 것 자체 외에는 다른 어떤 것이든 모두 있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 경우, 큰 것 자체와 여기에 참여해 큰 것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다르다는 것과, 큰 것들(큰 것 자체와 참여자들 모두를 아우르는) 전부에 대비되어 크지 않은 것들(같은 크기이거나 더 작은 것들) 사이에 적용되는 다르다는 것의 구분이 필요하다. 이 구분은 자체적으로 어떤 무엇으로 있다는 것과 상대적으로 참여를 통해 어떤 무엇으로 있다는 것의 구분을 통해 우회적으로 마련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의 용법을 지닌 '있는 것'에 대해 바로 이것과 다른 것, 즉 다른 것 자체에서 있는 것을 상대로 하는 특정 부분을 '있는 것에 대해 다른 것'으로 재규정함으로써 논의에 필요한 구분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전히, 다른 것은 '언제나 다른 것에 대해 말해진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다른 것은 어떤 무엇과 다른 것일 뿐, 그 자체로 아무런 대상도 없이 절대적, 독립적으로 다른 것일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저러한 여러 '다른 것들'은 앞서 상의 경우에도 그러했듯 저마다의 비교대상을 지니고 그것에 의존적으로 규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다른 것들이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다른 것이라고 불리게 되는 바, 다른 것 그 자체의 경우에는, 이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무엇과 다른 것일 수도 없고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에 상대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움직이는 것의 경우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발생한다. 움직이는 것(질적 변화와 공간 이동, 그 외 생성과 소멸까지 일체의 운동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에서)은 규정상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는 것일 수 없고 그래서 고정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연속적인 변화로 인해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고정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고정적으로 명명될 수도 없고 지시되거나 사유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움직이는 것이 있으며 우리는 움직이는 것들을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것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들과도 구분되고 움직이는 것과 다른 것들과도 구분된다. 또한 정지한 것 그 자체를 놓고 말하자면 이와 가장 반대되는 것으로서 매우 분명한 관계를 통해 대극점으로서 지시되고, 그래야만 한다. 정지한 것에 대해, 움직이는 것은 그 정지한 것에 고정적으로 반대된다. 운동하는 것 그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이러한 고정성은 운동하는 것에 적용되거나 그에 대해 서술되지 않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어떤 무엇인 바의 것으로 있으면서 다른 무언가의 대극점으로, 또한 자신 이외의 것에 안정적으로 참여하는 참여자로도 사유되고 서술될 수 있는지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는 말(onoma와 rhēma의 결합물인 logos)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를 구성하는 이름(onoma)과 표현(rhēma)도 같은 문제를 겪게 된다. 말은 무언가에 관한 것이며 아무것에 관해서도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은 말로 성립조차 할 수 없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말은 불가능하다. 이름도 무언가의 이름이며, 표현도 무언가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그 자체로 생각되거나 이야기될 때, 바로 이 경우 이것들이 지시하거나 표현하는 바의 것은 특정될 수 없다. 이 문제의 성격은 앞서 상에 대해 논했던 문제와 같다. 그리고 거짓 역시도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참인 말은 그 말의 이름, 주어가 대상을 가리키고 나면, 바로 그 대상에 관련하여 그것에 관련한 있는 것들을 이어서 서술한다. 반면 거짓말은 자신의 대상에 관련하여 그것에 관련한 있는 것들과 다른 것들을, 주어가 지시하는 것에 관련한 있지 않은 것들을 바로 그 주어에 관련하여 이어서 서술한다. 그런데 주어에 관련한 있는 것들과는 다른 것, 그 주어에 관련한 있지 않은 것들은 결국 그 주어에 관련한 것들이 아닐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말은 더 이상 해당 주어 대상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볼 여지가 있을 듯하다. 특히, 이름과 표현이 결합하여 하나의 말을 이루듯 특정 대상과 특정 상태가 결합하여 특정 사건을 성립시킨다면, 그리고 결합물로서 하나의 전체인 말이 그것의 지시 대상으로서 단일한 어떤 사건에 대응한다면, 거짓말의 경우 지시대상이 없게 되어 버린다. 물론 앞서 상(그리고 그 하위종들인 모상과 가상), 있지 않은 것, 다른 것, 운동과 달리 말과 그 진리치에 관련하여서는 말의 구조가 가지는 특징과 결부되어 이전과는 다른 접근이 이루어진다. 특히 말이 무언인가를 가리키고, 바로 그것에 관련하여 이어서 말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여기에서 대상은 여전히 이름에 의해 지시되는 것이지 이름과 표현의 결합물 전체를 통해 지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렇다면 단지 이름을 통해서만 대상에 연결될 뿐 표현과 이를 포함하는 말 전체로서는 그 대상에 더 이상 연결되기 어려워 보이는 거짓말이란 것이 어떻게 참말과 마찬가지로 무언가에 대한 '말'로서 여전히 유지될 수 있는지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대상과의 연결이 약화될 경우, 거짓말이 의존적이고 상대적인 방식으로도 규정되기 곤란한 상황에서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간주될 방식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상에서 원본과 닮아 있는 모상과 대비되어 그 원본을 닮아 있지 않은(그러나 닮아 보이기는 하는?) 가상이 겪는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것이다. 말도 상도 각기 그것의 원본 대상과 별도로 그 자체로 설명되기 어려운데, 거기에서 더 나아가 상 중에서는 가상이 그리고 말 중에서는 거짓말이 재차 원본과 이격되어 그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0. 원래 J. Beere, N. Notomi 등이 주창하는 '겉보기 모순'이나 '거짓 모순'이라는 개념을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그게 학위 논문 주제나 지원 받고 있는 연구 계획하고는 거리가 좀 멀다고 느껴져서 이건 그냥 이전 발표문이나 소논문의 논지를 다듬는 정도만 생각하려고 한다. 그들의 주장은 결국 참된 모순, 진정한 모순은 운동과 정지 정도로 극단적으로 반대되고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것들의 결합에 한정되는데, 일단 개인의 믿음 차원에서 무지에 의해 발생하는 모순은 훨씬 더 소박하고 상식적인 것들임을 과연 포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Beere의 경우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결합'조차 겉보기 모순으로 취급하는데, 이게 초중기 대화편들에서 대화 상대자들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박 당할 때 지적받는 모순들에 비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 나로서는 전자가 겉보기라면 후자는 훨씬 더 분명하게 겉보기일 것 같은데, 왜냐하면 후자의 모순들은 적절한 조건과 관점의 구분을 통해 해소될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결이 조금 유난하게 어려웠던 것이 있는 것-있지 않은 것 사이의 결합과 분리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운동과 정지가 절대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긴 어려워 보인다. 설령 둘 사이의 결합이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표현될 뿐이고, 그 둘이 가장 반대된다는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논의의 맥락상 그 둘 사이의 결합을 완전히 배제할 경우 뒤따라 나오는 귀결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사실 아닌가 싶다. 특히 운동이 그 자체로 자신과 같다거나 그것이 있는 것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있는 것이라거나 하는 점들을, 그것이 정지와 결코 결합할 수 없다는 전제와 조화시킬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인식이 성립하려면 인식되기 이전 상태의 것이 인식된 이후의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문제도 물론 남을 것이다. 그가 논박을 통해 겉보기 '현자'로 드러나는 것은 그가 겉보기 논박을 해서가 아니라, 논박을 가하기만 할 뿐 논박을 받는 일은 의도적으로 극단적으로 피하기 때문이다. 논박 상황에서 한쪽이 고정적으로 논박을 가하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논박을 받기만 할 경우, 논박을 가하는 측의 지적 상태는 확정될 수 없다. 다만 당하는 쪽이 모순을 드러내게 되면 그가 무지하다는 것은 확정되고, 논박당한 당사자는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동시에 자신을 논박하는 상대의 지적 상태에 대해서도 무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물론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상대로 논박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건전한 상태이며, 이 '피해자'도 이러한 통념을 가지고는 있을 것이나, 아무튼 엄밀하게 상대방이 아는 자로 확정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논박자를 '아는 자'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의 차이는 소피스트와 달리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무지를 선언하고 있으며, 논박 당하는 일을 피하지도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 둘 모두는 현자와는 다르다. 이러한 구분 과정에서 참된 모순과 거짓 모순의 구분은 전혀 요청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 왜 겉보기 모순, 거짓 모순 같은 개념을 도입시키려 하는지 아직도 납득이 안 되지만, 그래도 이해를 해 보자면 소피스트가 말을 지어내 사기를 친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싶은 것 아니겠나 싶긴 하다. 그런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소피스트가 상대에게 하는 말은 그 상대가 수용하고 긍정할 때에만 그 상대 자신의 다른 믿음과 모순관계에 놓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수용은 이 상대방이 해당 주제나 사안을 알지 못하는 자일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모순이 작위적인 것인지 여부가 아니라 논박 상대가 무지한지 아니면 아는지만이 문제가 된다. 

 

-蟲-

 

심사자는 익명인지라 그저 비판과 조언에 막연한 감사를 드릴 뿐. 지적사항별로 이번 학기 또는 이번 해 안에 준비하거나 발전시킬 것들을 좀 정리해 보자.

 

"[평가자1 의견] - 서양고대철학 연구는 그 연구의 깊이와 양이 많이 축적되지 않아 연구 자체가 필요한 분야이며, 특히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연구는 어렵고도 중요한 연구이다.
- 전반적인 연구수행 속도가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것보다는 빠르지 않아 보인다. 또한 지난 3년간 발표한 2편의 발표문은 연구자가 노력해왔음을 보여주긴 하지만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며, 그보다 더 많은 연구물을 산출하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연구능력이 더욱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이 소략하며, 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자료 확보에 힘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Apolloni, D. The Self-Predication Assumption in Plato. Lanham, MD: Lexington Books, 2011)과 같은 자료도 연구와 밀접하게 연결된 자료임에도 생략되어 있다. 그밖에도 많은 중요한 자료들을 더 찾아 포함시켜야 하며, 또한 참고문헌 작성법에 대해서도 먼저 자신에게 편리한 방법을 찾아야 하고, 특히 표기 방식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티마이오스??와 ??자연학??의 공간-시간 개념의 연계성이 명확하지 않으며, 그것이 어떤 점에서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된 언급은 상당히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또한 지나치게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내용의 언급이 필요하다.
- 연구자는 연구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영어 설명은 대체로 명료하다. 그러나 국문 요약문에 나타난 내용으로 판단하자면, 그것이 ‘요약문’임을 고려하더라도 연구주제와 내용에 대한 설명이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만큼 명료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글로벌 역량이 내가 가진 것을 도외시하고 남의 것만을 강화하거나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최소한 요약문의 내용이라도 대학 저학년생 수준에서 이해할만한 글로 재구성해보면, 연구자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재정리하는 연습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외국인으로서 영어 발음과 작문이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교정과 보완이 될 수 있음에도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띄는 것은 다소 아쉽다. 특히, 영어 발음은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
- 학과목 학점은 A-의 성적 4과목과 B+의 성적 2과목은 연구자의 노력과 관리가 좀 더 필요했던 부분이자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 리더십이나 국가관 및 책임감 등에 대한 연계성은 판단하기 어렵다. (미래 성장 가능성 ( 배점 : 20 ))의 항목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 연구가 그러한 항목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설명될 수 있는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 연구의 결과물이 국내 연구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글로벌 수준의 연구자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속한 국가가 없이는 세계인으로서의 나도 존속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의 배경을 먼저 튼튼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일단 내가 연구자로서 생산성이 많이 낮다는 지적이 뼈아프다. 이전까지야 '내 주제에 무슨' 같은 심정으로 학술지에 투고하거나 학술발표에 지원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멀리 했다지만, 언제까지 어리다느니 미숙하다느니 하는 핑계로 미룰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든 저렇든 처음 계획했던 『파르메니데스』 관련 소논문과 『테아이테토스』 관련 소논문 작성도 해내지 못하였다. 지도교수님 조언도 있고, 되든 안 되든 이제 뭘 써 버릇해야 한다.
> 참고문헌의 경우, 계획이나 보고에 직접 활용되지 않은 자료들은 최대한 배제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원칙으로 삼았다. 평가자께서 소개해주신 아폴로니의 책은, 면밀하게 살펴보진 않았지만 형상의 자기술어화를 기본적으로 동일성 서술, "is equal"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Lloyd Gerson의 2012년도 서평에서는 이를 R. E. Allen의 입장과 연결시킨다. 그런데 애초에 『소피스트』에서 εἶναι에 대한 해석 문제와 관련하여 이 동사에서 동일성 서술의 역할을 배제시키는 것이 내가 Michael Frede의 입장에 근거하여 제안하는 노선인지라, 본격적으로 참고한 자료로 아폴로니의 저술을 언급하긴 좀 그렇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연구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설정해둔 탓에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초중기 플라톤 형이상학까지의 맥락을 논하는 사람들이랑 소위 후기 플라톤 철학을 따로 다루는 사람들을 다 살펴봐야 하게 되었다는 문제는 남는 듯하다. 참고문헌 작성 방식의 경우 급하게 작성하느라 국내, 국외, 1차, 2차, 번역, 기타 등등으로 분류도 못했고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을 것이긴 하다. 이것도 역시나 논문 투고나 발표 지원 경험 자체가 적은 게 문제이기도 하겠고, 그렇더라도 애초에 좀 신경썼으면 될 일을 게으르게 놓친 내 탓이 크다.
    관련하여, 연구 방식의 문제일 수도 있겠는데, 나는 통상 원문 번역, 내용 정리, 주제 설정, 그리고 예비적인 논증 구성을 해 보고 이 다음에 자료 조사에 나선다. 이러다 보니 독해 과정이 미진하다고 느껴지거나 어쨌든 뭐라도 내 글이 하나 나오지 않으면 자료조사가 잘 진척되질 않는다. 병행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속도를 올려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뭐 쓰다보니 변명만 늘어놓게 되는 것도 같지만 어쨌든 고민이 생기는 부분이긴 하다.
> 플라톤 『티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을 통해 양편의 시-공간 개념을 연결시켜 해석해 보자는 제안은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면 전자에서 시간이 운동 측정 단위처럼 묘사되고 있는 부분이 그 외에 더 구체적인 논의가 문헌 상에서 진행되지 않는데, 같은 관점에서 더 구체적으로 측정량(단위)과 피측정량(크기), 달리 말하면 재는 수와 재어지는 수라든지 단일 운동 단일 시간이라든지 시간 개념의 여러 다양한 측면들이 좀 더 자세하게 『자연학』에서 다루어지니, '운동량을 측정함으로써 발생되는 시간'이라는 것을 공통점으로 놓고 이 개념을 더 구체적으로 해석할 길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공간의 경우에는 『티마이오스』에서는 수용자를 일종의 잠재적 방향성 정도로 보고 이것이 형상의 고유한 성질과 결합하여 물리적 특질들을 발현시킬 때 비로소 장소라는 것이 이 과정과 함께 발생하는 것이라 해석할 생각이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의 결과로서 양이나 크기로 측정되는 그러한 공간이 앞서 이야기한 측정단위이자 측정대상이기도 한 시간과 함께 일종의 양으로 처리되는 『자연학』에서의 공간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포함시키는 것이 형상의 자기술어화와 필연적 본질 서술, 필연적 비-본질 서술, 우연적 비-본질 서술의 구분이라든지 자기참여 문제 등을 주제로 삼는 연구계획 안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되는 건 부적절하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다른 연구 계획에 비해 시-공간개념 관련해서는 조사나 준비가 진행되었다기 보다는 그저 해당 부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할 수 있다는 정도의 언급만 할 생각이었어서, 결국 겉핥기식의 이야기밖에 적지 못하였다. 
> 국문요약 관련하여서는 그야말로 평가자 말씀대로 명료하고 이해될 만한 방식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본래 명료한 글쓰기가 부족하다는 고질적인 약점도 걸려 있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번 국문요약보다는 차라리 1차 때 요약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경우에도 내 것보다 남의 것 쪽에 강조가 한참이나 더 많이 들어가 있는 건 마찬가지이긴 하다. 
> 영어 발음과 학점 쪽은 할 말이 없다. 미래성장 항목은 잘 모르겠지만, 플라톤 철학에 대한 우리사회의 접근 용이성을 높여 놓으면 누가 뭐라도 잘 활용을 하든 말든 하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에 내가 기여를 티끌만치라도 한다면, 아주 많이 쳐도 그게 내 연구관련 성장가능성의 한계이지 않을까?

 

>> 내 계획에서는 어찌 됐든 『소피스트』가 중심축인데 평가자께서는 『파르메니데스』에 주목하신 듯하여 흥미로웠다. 혹시 고대철학 전공 연구자이신 걸지.

 

 

"[평가자2 의견] 플라톤의 3 대화편인 (파르메니데스)와 (테아이테토스) 그리고 (소피스트)를 그리스어 동사 에이나이에 대한 대안적 해석에 근거하여 형상의 자기술어화 개념을 중심으로 일관성있게 재해석하는 연구자의 연구는 계획한 목표에 부응하여 성실하게 진행되어 왔다고 보인다. 아울러,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연구자의 차기계획도 우수하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플라톤의 후기존재론을 언어와의 연관성 속에서 다루는 연구자의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플라톤 대화편 전체에 대한 그림과 전기 대화편에 나타난 존재론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철학의 전략 및 플라톤 철학의 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나아가 왜 지금 이 시기에 플라톤의 철학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더자고 연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꾸준한 연구를 기대한다."

> 아아, 달콤한 칭찬... 정작 이 주제로 연구를 계속 진행하게 된다면, 그리고 박사논문까지 이걸로 가게 된다면 마지막에 평가자께서 요구하신 사항이 결국은 도입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석사 쓸 때도 개고생했던 문제인데, 내가 다루고 있는 문제에 남들까지 관심을 가질 이유를 설명해내지 못하면, 학술연구가 아닌 취미생활이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설득력을, 타당성을 보여줘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확한 지형도가 필요하며 자신이 어디 있는지 또한 구체적으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어렵지만 가능한 일이라고 보고, 뭐 한 번 하고서 끝날 문제도 아니긴 하다. 

 

 

"[평가자3 의견] - 연구자는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형상들 사이의 결합과 분리라는 일종의 변증법적 구조를 간취해내려 한다. 형상의 자기술어화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와 언어의 구조를 해명하고, 형상과 참여자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서구 현재 철학에서도 여전히문제가 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형상의 자체적이고 절대적인 측면과, 참여자의 관계적이고 우연적인 측면의 단절과 구분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는 아주 고전적인 철학적 문제였고, 지금도 그렇다. 연구자의 주제가 학문적으록 가치가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
- 연구자가 제출한 단계평가서로 판단할 때, (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트) 등의 원전을 성실하게 강독하고 있고, 국내외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내용들은 그의 주제가 생산적으로 구현될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의 연구가 계획대로 추진되어 성공적인 결말에 이른다면 플라톤 철학의 난해한 대화편을 정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플라톤 전체 철학 체계를 비교적 수미일관하게 정립할 수 있고, 나아가 현재 진행형인 이 주제의 연구와 관련해서도 의미 있는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티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대한 연구 기획도 해당 주제와 관련해서 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 성적 증명서와 지도교수 의견서는 연구자가 연구수행에 필요한 지식을 착실히 습득해 나가고 있으며, 연구 수행의 성실성과 글로벌 수준의 연구자로서의 성장가능성을 상당 부분 증명하고 있다.
- 다만 학문적 의욕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내용들을 다루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도교수와 협력하여 준비가 되는 대로 짧은 글이나마 전문 철학지에 발표했으면 한다."

> 앞서 다른 평가자께서 지적하신 문제에 대해 이 평가자분의 말씀이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형상과 참여자라는 문제가 속성과 개체 혹은 술어와 주어 뭐 기타 여러가지 아직까지 다양한 접근이나 해석이 시도되고 있는 형이상학, 인식론, 언어철학에 얽혀있는 문제이긴 하고, 내가 플라톤 연구 및 해석에서 충분히 보편성을 확보해낸다면 이 흐름 안에서 내 연구의 위치나 기대되는 역할 등을 좀 더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지금 단계에서는 내가 그걸 제대로 못 했다는 것이 문제겠다.
> 아아, 달콤한 칭찬...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도교수님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열심히 한다고 다 잘 되진 않지요. 허허. 속으로 몇 번씩 다짐한다. 열심히는 하되, 그건 어쨌든 아무리 잘 해 봐야 자기만족이고, 문제는 잘 해내는 것이다. 위에 생산성 문제랑 직결되는 것 아닐까 싶다. 여러모로 많이 쓰면, 뭔가 더 키워볼 만한 것도 그 중에 남기도 하고 그러지 않겠나.
> 같은 성적표에 상반된 평가... 한국에서 대학원의 성적이란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돌아가는지야 우리끼리는 모르는 사람이 없긴 하고, 말이 좋아 A-, B+이지 사실상 C, D 때려 맞은 게 몇 과목씩 있단 얘긴데, 이 평가자께서는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좋게 넘어가 주신 듯. 뭐 그렇다고 저 앞쪽 평가자분의 내 성적에 대한 지적이 날 죽이자는 의도였다는 얘긴 아니다. '열심히 잘 했다'나 '좀 잘하지 그랬냐'나 결국 방향은 대강 같을 것. 
> 생산성 지적 다시 한 번. 그리고 연구 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잡은 것 같다는 문제는 고민을 하긴 해야 할 듯. 대화편 단위로 말해서 일이 커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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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또 한 고비 넘겼다. 한숨 고르고 가자.



-蟲-

0. 플라톤 『티마이오스』에서 모상 제작의 계기.

   우주제작자(데미우르고스)는 완전하고 영원한 살아있는 것(형상)을 본으로 삼아 이것의 모상으로서 만물(우주)을 제작한다. (제작자의 세계 창조의 동기라는 것이 애초에 신화적 추정의 대상에 불과할 것이라는 논점은 잠시 차치하고) 이 제작자는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자로서 인색하지 않다는 성격적 특징을 갖는다. 이런 성격에 따라 시혜적 활동의 일환으로서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할 수 있겠으나, 바로 이 성격은 모상의 제작 그 자체의 동기라기 보다는 이 모상을 원본에 (그리고 제작자 자신에) 가능한 한 최대한 유사하게 만드는 그 지향점을 추구하게 되는 계기라고 보는 편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그래서 이것만으로는 제작자가 우주를 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마련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런데 『티마이오스』 서두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묘사한 이상적인 국가/정체, 그리고 대화 과정에서 이에 대한 역사적 사례로 언급되는 태고의 아테네를 두고, 이러한 아름답고 훌륭한 정체가 실제로 현실에서 기능하고 작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아름다운 동물의 그림을 보거나 혹은 그러한 동물이 가만히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게 되는 마음에 비유한다. 우주제작자는 형상을 본으로 삼아 바라보며, 형상은 작중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변화생멸을 겪지 않는 영역의 것으로 묘사되는 듯하다. 다른 한편 작품의 중반 이후에서는 형상과 달리 이 형상을 원본으로 삼는 모상의 경우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른 어떤 것 '안에' 들어가 있어야지만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 고려되고, 이와 관련하여 모상이 시공간적 속성을 지니고 활동하도록 해주는 조건과 같은 것으로서 수용자라는 가상의 요소를 상정하게 된다. 원본으로서의 완전한 생명은 정의상 살아있는 것이며 이에 따라 영혼을 지니는 것이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형상인 한에서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며 운동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가능조건으로서 시공간적 제약을 가해야만 한다. 무시간적 영원성은 이 과정에서 통시간적 영원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모든 시간 전체에 대해 우주가 완전히 대응하여 그 시간을 빠짐없이 점유할 경우, 시간 자체가 유한하든 무한하든 상관없이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은 우주와 함께 발생하는 것으로서 시작을 가지므로 양방향으로 무한하게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우주와 그 우주의 운동이 소멸(정지 말고)할 경우 시간 그 자체도 함께 소멸할 것이므로, 우주는 시간적으로는 어떻게든 영속하지만 무시간적으로 영원하지는 않다. 이러한 모상으로서의 우주는 시간에 종속된다는 제한 내에서 어쨌든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영원과 유사한 것으로서 비로소 운동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이 운동에 질서와 영속성을 최대로 완성시키는 이유와 이러한 운동 자체를 성립시키는 이유는 구분될 수 있다. 

 

0. 플라톤 『소피스트』에서 분할과 우연적(일시적?) 술어.

   우선 분할과 관련하여, 『소피스트』 초반부의 분할들 각각 그 자체는 『파이드로스』에서 언급되는 자연적인 마디들에 따른 분할, 본질이나 자연적 질서 등의 객관적 구조가 허용하고 또 이를 따르는 그러한 분할이다. 다만 분할의 결과로 나온 각 기술(청년사냥, 지식매매, 쟁론경연, 논박이나 시험을 통한 영혼 정화로서의 교육 등 아직 합의된 명칭이 부여되지 않은, 그러나 기술이라는 유의 부분으로서 객관적으로 성립하는)에 대해, 소피스트의 본성(자연적 마디)이 아닌 그의 행태나 겉보기 모습을 대응시켜 그 각 기술을 소피스트 기술로 간주하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소피스트 그 자신의 고유한 정의에 따른 본질적 활동이 있을 것이고, 그가 단지 가능한 한에서 임의로 수행하는 활동들은 저것과 구분될 것이다. 후자는 소피스트가 실제로 수행하는 행위이긴 하겠으나, 그가 그 자신의 고유한 기술을 발휘하여 'de dicto' 소피스트로서 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후반부에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명제,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와 "테아이테토스, 지금 내가 대화하고 있는 그는, 날고 있다"가 가리키는 사태들은 어떠한가? 테아이테토스는 그의 본성에 따라 인간이며, 인간은 육상동물에 속하고 유영하는(물 속을 헤엄치거나 공기 중을 날거나) 동물과는 구분된다. 이런 구도에서 보자면 테아이테토스는 본성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가 날고 있다는 진술은 필연적인 거짓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거짓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시킨다. 또한 '지금 내가 대화하고 있는 자'라는 첨언이, 설령 이를 통해 '테아이테토스'라는 이름을 가진 새나 이 이름이 붙은 신 또는 신령과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딱히 유의미한 삽입구라고는 보이지 않게 되는 듯하다. 반면, 이 첨언을 통해 해당 진술과 이 진술이 지시하는 사태에 구체적인 시공간적 제약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소피스트는 청년사냥꾼이다."라는 참말과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라는 거짓말을 본질서술이나 정의와는 구분되는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차원의 서술로 묶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와 "소피스트는 청년사냥꾼이다" 둘 모두 같은 차원에서, 즉 우연적으로 참인 명제들로 연결시킬 수 있다. 다시, 이 두 명제는 자체적인 방식으로 또는 정의나 본질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제시될 경우에는 여전히 거짓이다. "앉아 있다"라는 것이 테아이테토스의 본질이나 정체성에 대해 필수적인 내용을 설명해주는 바가 없듯, "청년사냥꾼" 또한 소피스트가 소피스트이기 위한 고유한 본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는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화편 안에서 명제의 참은 그 명제가 모사하는 사태에 의존하며, 모든 명제는 주어로써 대상을 그리고 술어로써 바로 그 한정된 대상의 행위나 상태나 성질 따위를 서술하며, 사태 자체를 단위대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명제는 없으며, 시공간적으로든 지성적으로만 파악되는 영역에서든 어쨌든 어떤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명제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참인 명제는 일종의 모상으로서 그것이 원본으로 삼는 대상을 가지며, 그 대상은 부분들을 구조적으로 통합하는 한 단위의 결합체로서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런데 이 주어져 있는 것은 앞서 보았듯 본성적인 방식으로 대상에 결합되어 있는 것도 있고, 본성과 무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도 있으며, 후자의 경우에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본성적이지 않으면서 또한 필연적이지도 않은 것 또한 있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가 인간이라는 것은 본질적이고 필연적인데, 테아이테토스가 자기 자신과 같고 자신 이외의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본질은 아니며,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것은 본질도 아니고 필연적이지도 않다. 

   『소피스트』 중반부에서 유들의 결합과 분리를 논하는 과정에서, 각 유는 자기 자신과 같고 자신 이외의 것과 다른데, 이는 본질적이지는 않지만 필연적이다. 따라서 본질적인 차원에서 특정 유가 자기 자신과 같다고 말할 경우, 이는 그 논의 수준으로 인해 거짓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은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명제의 거짓과 그 논의의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이며, 거짓이 되는 이유 역시 어느 정도는 다를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리키는 대상에 관련하여 그 대상에 결부되는 술어들 이외의 술어들이라는 점에서는 두 거짓 사이에 차이가 없다. 이 두 거짓 사이의 구분을 위해서는 주술관계에서 그리고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과 성질 사이에서 우연적, 일시적 결합과 분리가 따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는 『소피스트』에서 서술되는 참여관계를 통한 설명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변화생멸의 시공간적 계기가 도입되어야지만 비로소 그러한 구분이 가능해질 것이다. 『소피스트』에서는 지성적 차원에서 혹은 논리적 차원에서의 거짓과 경험적 수준에서의 거짓 모두를 포괄하여 거짓 일반에 대한 정의를 시도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 둘 사이의 차이를 암시함으로써 추가적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는 『티마이오스』에서 그 해결이 시도되는 것으로 보인다. 『파르메니데스』는 대상, 객관, 존재 차원에서 결합과 분리의 문제를 여러 역설들을 통해 제시하고, 『테아이테토스』는 주관적 인식, 지각, 경험 차원에서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며, 『소피스트』는 객관적 구조에 대한 주관적(언어와 사유) 구조의 모방관계를 통해 해당 문제에 대한 이론적 차원에서의 설명을 제공하고, 『티마이오스』는 다시 경험적 차원에서 같은 문제의 더욱 구체적인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명제의 진리치는 사태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명제론』 19a24-34에서 말하는 바가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있을 때, 그리고 있지 않은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있지 않을 때, 필연적이다. 그렇지만 있는 것 전부가 필연적으로 있지도 않고 있지 않은 것이 필연적으로 있지 않지도 않다. 왜냐하면 '있는 경우에, 있는 것 전부가 필연적으로 있다는 것'과 '필연적으로 단적으로(무조건적으로) 있다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있지 않은 것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모순의 경우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전부 필연적으로 있거나 있지 않고 게다가 있을 것이거나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분할하며 둘 중 한쪽을 필연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바는, 이를 테면 내일 해전이 있을 것이거나 있지 않을 것임이 필연적이지만, 내일 해전이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것도 아니고 생성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생성되거나 아니면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시간상의 우연적인 서술들의 경우 이미 벌어졌거나 현재 진행 중인 사실이 진리치의 기준이 되고, 각 사건에 부합하는 명제를 기준으로 다른 명제들은 거짓이 된다. 여기에서 특정 시점 특정 위치 여타 특정 조건들을 공유하는 사건-참인 명제가 고정되고, 이 조건들은 공유하면서 실제 대상-속성 결합과 다른 결합을 지시하는 주-술 결합은 전부 거짓이 되지만, 이 조건과 무관하고 해당 대상을 공유하지 않는 명제들은 지금 이 참-거짓 영역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蟲-

0. Aaron Hillel Swartz (November 8, 1986 – January 11, 2013). 

 

0. 나는 앎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국가』 1권에서 주장하는 바가 앎의 사적이고 배타적인 독점에 대한 비판에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타의 관습적 가치들과 달리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이 점에서, 앎은 서로 다른 기능과 역할 그리고 능력을 가진 상이한 개인들이 한 마음 한 뜻 한 몸과 같은 사회를 이루는 데에 기여할 여지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앎을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당대 소피스트들의 행태는 플라톤이 보기에 심각하게 반사회적인 것이며 부정의한 짓이었을지도 모른다.

 

0. 학술적 지식은 시장경제의 수요와 공급 논리에 맡겨 놓을 경우 아마 자생적으로 보전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위 상품가치라는 것은 앎 그 자체에서 나오지를 않고 무언가에 적용하고 활용한 다음에야 비로소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의 공적 성격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하여 맹목적 지원을 통해 학술활동을 보호하든지, 아니면 거짓 실용성이나 거짓 상품성을 가공해내 지식 그 자체를 판매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후자의 경우 다시,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고 진입장벽은 높이되 접근성은 낮추면서 팔아먹는 방식이 가능할 것이다. 대중과 사회에 특정 분야의 지극히 전문적인 지식을 그 정당성이나 타당성 자체만을 놓고 평가할 시간적 여유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고, 그 평가절차를 간소화하는 수단 중에 하나가 저 권위라는 것일 텐데, 이를 획득 가능한 재화처럼 취급하고 또 독점하면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20대 청년이 반대하다 좌절하고 스러져버린 허구적인 구조, 2500년 전부터 비판받아온 기이하고 허무맹랑한 가짜 상품이 앞으로 언제까지 사기행각을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0. 도서관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런데 도서관의 저 거대 출판사들을 향한 비판 논리는 다시 사회가 대학에 대해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저술과 강의를 '팔아야' 먹고 사는 처지인 오늘날의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학자들 역시 같은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을까. 그러나 사회는 학문의 '무임승차'를 허용하지 않을 듯하고, 국공립연구소와 기업 산하 연구소가 구분되지 않을 것이고, 극소수의 대중적 명성을 획득한 광대들과 또 다른 한편에서 저 권위의 철옹성 가장 높은 곳의 권좌를 차지한 자들, 그리고 이 모든 광대극의 기획자들 말고는 학계에서 살아남을 연구자가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닌가? 아직도 설득의 여지는 남아 있나?

 

0. 아마도 상당수의 학술자료는 불법적인 경로로 유출되고 있을 것이고, 이것이 그러한 자료를 취급 관리하는 단체나 기관에 경제적 손실을 끼칠 것이고, 그 손실을 극복하고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저쪽에서는 자료의 가격을 높일 것이고 유출을 차단하기 위해 갈수록 접근을 어렵게 만들 것이며 열심히 고소고발에 매진할 것인데, 그러면 다시 학술자료가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사람들은 다시 그 자료를 훔치려 들 것이고, 어쨌든 이 균형이 어디에선가는 끊어질 거라 본다. 공공교육의 양적 확대가 어느모로보나 세계 전체에 유익하다는 걸 지금에 와서 다시 떠들어야 한다면 그것도 참 지칠 일이고, 무슨 고대 비교의 신관도 아니고 중세 사제도 아니고 조선 양반도 아니고, 인터넷 시대에 저 치들이 지식을 냅다 흩뿌리지 않고 두 손에 아등바등 움켜쥐고서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나는 애런 슈워츠 편이다. 아마 소크라테스가 이 친구를 만났다면 사자 앞의 사슴처럼 콩닥대는 가슴으로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으려나.

 

-蟲-

0. 高銀 白基琓 先生 別世.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0. 재작년에 Myles Fredric Burnyeat이 9월에 세상을 뜨고 David Bostock이 다음 달에 또 떠났다.

 

0. 무엇을 바꾸었고 무엇을 남겼느냐고 따져 물을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럴 나이도 지나가 버리는 중이고.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부끄럽기만 하고.

 

-蟲-

미카엘 프레데의 해석 제안에 따르자면 『소피스트』에서 einai는 자체적 용법과 관계적 용법의 두 가지 사용 방식을 지닌다. 전자는 본질이나 정의의 차원에서 형상에 대해 서술하는 반면, 후자는 서술 대상이 참여를 통해 지니는 내용들을 서술한다. 이로부터 형상은 자기술어화를 통한 자체적 자기서술과 자기참여를 통해 관계적 자기서술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으며, 이 두 경우 모두는 다시 동일성 서술과 구분된다. A가 A와 동일하다는 것은 A가 A 이외의 B 또는 C와 동일하다고 서술될 때와 마찬가지로, A가 지니는 어떤 무엇과의 '동일성'에 초점이 맞추어 서술되는 것이다. 반면 자기술어화 서술이든 자기참여 서술이든 이는 서술 대상이 무엇인지, 무엇으로 있는지, 어떻게 존재하는지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to on, being의 측면을 서술하는 것이다. A가 A이거나 A하다는 것은 A가 A와 같다는 것과는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춘 서술이다. 따라서 이 세 경우 각각의 부정 역시 비본질적이라는 것, 참여를 통한 속성 획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비동일성(다름)을 속성으로 지닌다는 것으로 그 의미가 구분된다. 일상적인 단순부정서술은 두 번째 부정서술에 해당하며, 다른 한편 비동일성을 속성으로 지니는 경우도 다시금 그러한 것으로서 자체적으로 있는지 아니면 관계적으로 있는지에 따라 두 차원에서 서술이 구분될 수 있다. 동일성부정(비동일성) 서술과 단순부정 서술의 구분이 필요하며, 이를 주장하는 미카엘 프레데의 해석이 프레게-러셀 이후 영미 전통에 따른 be 동사 의미구분에 근거한 전통적인 『소피스트』 해석과 이러한 의미구분을 극복해내지만 미카엘 프레데가 요청하고 제안하는 두 가지 부정 사이의 구분에는 이르지 못하는 레슬리 브라운의 해석 둘 모두에 비해 『소피스트』에 대한 더욱 정당하고 일관된 해석이라 본다. 

 

다른 한편 『티마이오스』에서는 영혼의 제작 과정을 묘사하면서 우주 제작자가 있는 것, 같은 것, 다른 것이라는 세 가지 것들을 자체적으로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영역과 변화생멸하는 영역의 양편에서 그 중간의 것으로서 취해 영혼의 재료로 삼는 듯한 묘사를 한다. 그러나 이 양쪽 영역 각각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저 세 가지 것들 각각이 어떻게 위의 상이한 두 영역 각각에서 성립하는지, 그리고 그 중간적인 제 3의 것이 어떻게 성립되고 또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등도 충분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einai(to be)의 두 용법을 고려하고, 또한 모든 각각의 것은 예외없이 전부 to on(the being)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소피스트』의 입장을 전제할 경우, 『티마이오스』에서 축약적으로 소개된 영혼 제작의 과정에서 제기되는 의문들에 답할 하나의 가능한 방법이 마련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것 그리고 다른 것 각각의 그 자체가 아닌 그것들의 있음(ousia)을 양편에서 취한다는 『티마이오스』에서의 언급은, 있는 것과 달리 다른 것은 언제나 다른 것에 대해서(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진술된다는 언급과 그러한 것들이 to on에 대한 참여를 통해 to on 자체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용법으로 서술되기 시작한다는 미카엘 프레데의 해석을 적용할 경우 그 서술 방식의 불가피함을 설명할 길이 열리는 듯도 하다.

 

좀 더 세부사항을 따져볼 게 많지만, 일단 이런 식으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지는 않을까 정도의 생각.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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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서양고전학회에서는 춘계 고전어교실도 마련하였습니다.

동계 고전어교실에 이어지는 과정으로 우선 초급 산문 강독 2개반을 아래와 같이 개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서양고전학회 춘계 고전어 교실

 

기간 : 2021년 3월 첫 주부터 15주(매주 1회 3시간)

수업 : 희랍어 : 크세노폰 <향연>

          라틴어 : 카이사르 <갈리아 전기> 1권

강사 : 희랍어 : 이호섭(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라틴어 : 오수환(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박사과정)

진행 : 수강신청서에 기재된 강사 연락처를 통해 수강 신청 후 Zoom으로 수업함.

 

강의 계획서를 첨부하오니, 주변의 학생들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총무이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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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양고전학회

The Korean Society of Greco-Roman Studies

 (06561) 서울 서초구 동광로 65 방배빌딩 401호 (정암학당 서울 연구실)

(06561) Bangbae building 401, Dongkwang-ro 65, Seocho-gu, Seoul (Jungam Academy for Greco-Roman Studies)

email: grecoroman.studies@gmail.com

homepage: www.greco-roman.or.kr

초급그리스어산문강독_강의계획서.pdf
0.22MB
초급라틴어산문강독_강의계획서.pdf
0.1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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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감각이 뛰어나신 동학께서 희랍어 쪽 강사를 맡으셨는지라 요쪽도 광고를.

정암 플라톤 『메논』과 비교하자면 문헌 난이도는 크세노폰 『향연』 쪽이 좀 더 평이.

'쪼'도 플라톤 쪽이 좀 더 쎈 면이 없지 않고=_=

근 5~6년 가까이, 고전어 초중급 문법 강좌를 수강한 학생들이 접근 가능한 적절한 수준의 초급 강독 강좌가 부족하다고 이곳저곳에서 선생님들 뵐 때마다 한탄을 하기도 했고, 다른 분들 생각도 같았으나 막상 강좌 개설이 이런저런 일들로 좌절되곤 했는데 이렇게 한 번에 여러 강좌가 마련되다니 기쁜 일이다.

이제 이런 강좌들이 정착만 되면 겨울에는 서울대 집중강좌(문법, 강독), 상반기에는 정암과 고전학회에서 강독 강좌,

다시 여름에는 정암 초중급 문법 강좌, 또 하반기에는 다른 강독 강좌, 뭐 이런 식으로 1년 과정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나저나 라틴어 쪽은 고전학과에 박사과정생이 수가 적은 건지, 어쩌다 보니 불문과쪽 분께서 강사를 하시게 되었나 보다. 그리스어 쪽도 내 기억이 맞으면 호섭씨 이후로 석사과정 수료 전인 분은 안 계시고 새로 들어오신 분도 아직 없는 듯한데, 나중에 사람 없으면 강좌 진행 연속성은 어떻게 되려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우리 존재 파이팅...

 

-蟲-

www.jungam.or.kr/blog/72713

 

2021년 상반기 ‘교육강좌’를 안내합니다.

학당에서는 지난 해 고전 그리스어 초급이나 중급 과정을 마친 분들을 위한 ‘교육강좌’를 신설하였습니다. 본 강좌는 그리스어 원전 강독 훈련을 통해 원전 독해 능력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장차 고전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이나 고전을 깊이 있게 탐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자 하는 분들에게 수강을 권합니다. 기본적인 어형론과 더불어 구문론 등 고전 그리스어 문법을 체계적으로 학습하시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2021년 상반기 교육강좌는 정준영 선생님의   ‘플라톤의  『메논』 강독’으로 진행됩니다.

강의는 매주 플라톤의 『메논』 원전을 문법적으로, 내용적으로 분석하며 읽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탁월함(덕)의 교육 가능성을 탐색하는 『메논』은 플라톤의 대화편들 가운데서도 논증적이고 비판적인 탐구로서의 철학의 전형을 간결하고도 압축적인 언어로 보여주고 있는 매우 중요한 대화편입니다.  『메논』 원전 강독에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강좌에 대한 상세 안내는 첨부된 ‘수업계획서’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강좌는 ZOOM을 활용한 비대면 실시간 온라인 강의로 진행됩니다.

강좌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정준영 선생님께 이메일로 신청하시거나 댓글에 신청 의사를 남기시면 정준영 선생님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강좌를 신청하실 때 1) 고전 그리스어 학습 이력과 2) 관심사를 함께 기재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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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 추천!

 

-蟲-

1. 진행 중: 플라톤 『티마이오스』 강독.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윤독.

              안티폰 연설 윤독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예정: 엘레아의 제논 단편 세미나 준비(초벌 번역). 

           플라톤 『메논』 강독.

 

2. 미수료 3학점 수강: II부분 이론1 현대 프랑스철학 or 니체.

   학점교류 수강: 엘레아의 제논 단편 세미나.

   청강: 프레게 참/거짓 세미나 or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자기애 개념 세미나

 

3. 논자시 제2외국어 독일어, 자체논자시(어느 분야?), 논문 투고.

 

구조를 갖지 않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인식대상과 인식능력이 『테아이테토스』의 문제이고

구조를 갖지 않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형상이 복잡하고 간접적인 존재와 인식에 매개될 수 없다는 게 『파르메니데스』의 문제이며

대상과 인식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언어 모두에 중심과 끝들 그리고 부분과 전체라는 구조를 부여하고 간접적인 중간 단계를 제공하는 것이 『소피스트』가 위 두 문제를 진단하여 제안하는 해결책이고

단순하고 직접적인 형상이 변화생멸하는 시공간적 영역에서 여전히 질서와 체계를 갖춘 채 인식의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원리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티마이오스』에서 제시되며

"있는 것은 있지 않다"와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가 구조를 공유하되 양상에서 구분되는 일이 이상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설명된다는 것을,

 

박사논문 주제로 삼아서 쓰겠다고 하면 나는 또 얼마나 욕을 바가지로 먹을까? 심지어 저 '구조'를 형상의 자기술어화와 본질과 정의라는 어마무시한 개념들을 통해서 설명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내가 졸업을 할 수나 있을까? 뭐 일단 그냥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고, 꼭 이게 아니래도 결국 저 넷, 적어도 앞의 세 대화편 안에서 싸우게 될 거고 그보다 좁힐 수 있다면 뭐 좁힐 수도 있겠고, 그야말로 두려움도 희망도 없이 가는 데까지 가 볼 수밖에.

 

-蟲-

殺し屋1(イチ) by 山本英夫. 


사람이든 글이든 생각이든, 다시 그런 순간을 만날 때까지 존버.


-蟲-

1. 아리스토텔레스가 대통령에게 부동산 문제로 편지를 보내고, 어떤 가수는 소크라테스를 형이라고 부르는가 보던데, 그냥 다 역겹고 구역질이 날 따름이다. 나야 뭐 잘난 것도 없는 쓰레기 찌끄레기라서 할 말도 없다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소크라테스도 진지한 학술연구의 대상이고 꽤 많은 사람이 그런 일에 목숨을 바쳐왔던 건 분명할 텐데, 저 치들은 자신들의 무지에 부끄러움도 없고 다른 이들의 고민과 노력에 대한 존중도 없는 것 아닌가. 내가 조심스럽게 애써 살펴 나아가고 있는 이 길고 긴 길에, 이 길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새끼들이 똥오줌을 갈겨댄 기분인데, 그래도 난 아무것도 아닌 씨발나부랭이니까, 입 닥치고 내 할 일이나 해야지.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과 선후배와 여러 동료들을, 저 씨발것들이 조롱한 것 같아 분하고, 진심으로 토가 쏠리지만, 나 따위가 뭐라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 좆같네.


2. 30%. 대갈머리에서 뜬구름 잡는 개소리 중에 딱 30%만, 알지도 못하고 지껄이려고 드는 그 시시껄렁한 넋두리에서 다 덜어내고 30%만, 그러니까 정리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거기서 멈춰야 하는데 감이 없다. 문헌을 읽다 보면 의문이 생기고, 그 의문에 따라 내 나름대로 이런저런 해법을 모색해 보게 되고, 그런데 여기에서 30%가 문제의식만 남겨 놓으면 되는 건지, 문제도 해법 제안도 다 합쳐서 그 중 30%를 남겨놓아야 하는 건지, 내가 어느 순간에 책임지지 못하는 그 선을 넘어서서 지껄이게 되는 건지, 가닥이 잡히질 않는다. 뭐지. 이 지랄을 몇 년을 해대며 굴렀는데 아직도 지 깜냥하나 가늠을 못해서 이 따위로 구는지. 


3. 얼마 안 있으면 대학원 동료들 몇이 졸업논문 발표를 할 것이다. 몇몇은 한 학기 미뤘고, 또 몇은 남아서 마무리 작업 중이겠지. 미룬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미루고 또 미뤄 만신창이가 된 너절한 글로 허겁지겁 만기 꽉 채워 졸업하던 몇 년 전이 떠올라서, 그것보단 똑똑하고 깔끔하게 서둘러 마무리들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긴 하다만, 말 그대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그 막막함이라든지 막연한 불안감,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싶은 당황스러움도 다시 떠오르고, 저 사람들도 똑같진 않더라도 그 엇비슷한 어떤 고민으로 저마다 복잡하겠거니 싶기도 하다. 글쎄, 버티면 어떻게든 버텨지고, 또 이 길만이 유일한 길인 것도 아니라는, 그저 그런 뻔한 이야기 말고는 할 말이 없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마무리 중인 사람들은 어찌됐든 이 시점까지 지도교수의 퇴장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면 결국 심사와 통과까지도 나아가지 않겠나 짐작해 본다. 다만 원하는 모든 얘기를 풀어놓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결국엔 해냈으며 문제도 해법도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는 자만도, 가능하면 둘 다 멀리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것도 알아서들 잘 하겠지. 동료들도, 나도, 이 자격시험 면허취득과정을 어서 빠져나와, 다시 읽고 토론하고 쓰고 싶다. 물론 지금도 그러고 있고, 계속 그래야 하겠지만, 뒷꽁지나 발등에 불똥을 얹고 사는 꼴을 벗어나서, 좀 딴 생각 않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종종 하긴 하니까. 아마 여기까지 버틴 사람들이 나중에도 또 버텨서, 결국 스승들과 선배들이 그러고 있는 모습 엇비슷하게 또 만나 그 비슷한 윤독이니 학술대회니 뭐 그런 것들을 하며 만나게 되지 않겠나. 그래서 지나온 사람도 지나고 있는 사람도 잠깐 쉬어 가기로 한 사람도, 다들 너무 지치지 않고 잘 버티길 바랄 따름이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蟲-

갚아야 할 걸 안 갚고 사는 기분이다. 쫓겨날까봐 불안하고, 어딘지 당당하질 못하다. 간간이 궁색한 사정을 집주인이 위로해주는 모양새로 이런저런 애매한 격려식의 추임새를 만나기도 하긴 하지만, 정작 내 손에 쥔 건 없다. 빚쟁이 구멍난 통장마냥, 뭐 쌓인 게 없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지난 자리가 다 무너지고, 다음 발을 빨리 떼고 딛지 않으면 그대로 푹 꺼져 기어오를 수 없는 데까지 떨어질 것 같다. 나이는 쳐먹었는데, 그 쳐먹은 나이만큼 그 시간에 안 게으르고 열심히 살았더라면, 지금 이 따위 꼬락서니여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이게 내 부채감이다. 더 오래 했으니 더 낫다는 게 아니라, 더 오래 했으면 더 나아야 한다는 거.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다는 건, 면목 없고 변명의 여지도 없는 죄고 부채다. 시기나 질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의 자리를 내 자리라 생각해본 일도, 아예 없지는 않을지 몰라도 하여간 그다지 없었던 것 같고. 거꾸로 이 자리가 자꾸만 남의 자리 같은 거다. 이 자리에 맞는 몫을 하거나 아니면 비켜줘야 하는데, 아, 비키자니 엄두가 안 나는데. 내가 욕하던 썩어빠진 노친네들은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그나마 그 치들은 지 잘난 맛에 살기라도 하던데. 내가 잘했으면 될 일들을 내가 다 망치고 있을 따름이다. 늘상 그렇듯, 열심히 한다고 다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다. 그래, 노력했다 치자. 애썼다고 치자. 그래도 손에 쥔 건 없고, 눈치는 보이고, 그래서 뭘 어쩔까 하면, 결국 또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어쩌겠나, 떨구어내면 떨궈져 나갈 수밖에 없고, 다만 할 만큼 했다는 자위라도 하려면, 그냥 닥치고 들이박는 거다. 또 모르지, 세상이 내게 퇴장과 더불어 금딸까지 명하는 건지. -蟲- P.S. 괜찮은 인간이 되긴 어렵고, 징징거리긴 쉽지.

1. 『테아이테토스』에서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은 지각을 통한 모든 믿음을 참으로 간주한다. 만일 믿음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 혹은 지각 대상과 일치 여부로 그 진리치가 결정된다면, 특정 시점 특정 대상에게 직결되는 지각 믿음은 바로 그 특정된 대상과 일치되는 한에서 필연적으로 참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바로 이 순간의 나에게 정확히 지금 이 관점에서 F로 보이는 것, 그것도 정확히 똑같은 시간과 공간과 기타 조건들에 한정된 대상인 한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다시금 바로 이러한 조건들로 특정된 그러한 나에게 참이며, 필연적으로 그리고 탈시간적으로 참이다. 믿음 주체와 믿음 대상(그리고 이를 포함하는 세계)을 시공간 조건에 따라 무한히 많은 단면들로 분할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면, 그리고 결국 분할 불가능한 한 순간 한 단면에서 서로 일치되는 내 믿음상태와 외부의 믿음대상의 관계를 고려해 보면, 각각의 믿음 주-객 단면들은 각각의 불변하는 참을 성립시킬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도 세계도 연속적으로 변화 과정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해 도입되는 믿음이나 지각 대상의 운동, 변화하는 측면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이 극단화될 때, 주관도 객관도 어느 하나 고정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변화하며, 따라서 어떤 고정된 믿음이나 앎 등의 인식 상태가 규정될 수 없다. 믿음이 단순히 그리고 오직 지각적 혹은 경험적 세계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결국 참인 믿음이 필연성을 획득하여 앎과 구분 불가능해지거나(그리고 거짓 믿음이란 것이 불가능해지거나) 아니면 믿음이 믿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변화하게 되어 버리는 양 극단의 파국만이 남는다. 이를 극복하게 되는 것은 믿음이 있음, 같음 따위의 비지각적이고 공통적인 유 또는 형상에도 개입한다는 점이 언급되고부터이다. 참인 믿음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대상과 관련하면서도 공통적이고 고정적인 측면을 함께 파악한다. 


2. 『소피스트』에서 가상(phantasma)은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킨 상으로서, 그 원본과의 연결고리가 상당히 약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모든 상이 특정 원본에 대한 상인 한에서, 가상 역시 아무런 원본도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외부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하자면 일종의 심상이 이러한 가상의 원본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는 없을까? 가상은 실재와의 관계에서 그 실재의 비율을 왜곡시키는 가상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바로 그 실재의 비율을 왜곡시킨 채로 성립한 내적 심상과의 관계에서는 이 심상의 모상(eikōn)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러한 중간단계에 대한 언급은 『필레보스』에서 그 엇비슷한 묘사를 억지로 끌어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소피스트』에서 직접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내적 심상과 단순 가상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위의 구도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멀리 불분명하게 보이는 사람인지 조각인지 모를 것이 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실제로는 사람이라고 해 보자. 그러나 어쨌든 내게는 잘 안 보이며, 나는 그것을 시각으로 지각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 지각 내용을 영혼 안에 지닌다. 그런데 이 지각이 "저것은 조각상이다"라는 것이라고 해 보자. 『소피스트』에서 인상(phantasia)에 대한 규정에 따라 나는 지각을 동반한 (거짓)믿음을 형성하였으므로 (거짓)인상을 가진 것이 된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경우 내가 "저것은 사람이다"라고 판단했다면 참인 인상을 가진다고도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지간에 일단 인상을 가지게 되고 나서, 『필레보스』에 따르면 현재적 지각이 종료되고 아무런 지각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이 인상을 다시금 영혼 안에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지각 없이도 이 인상을 취급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재차 기록된 것'은 처음 발생한 인상과 달리, 이 인상을 모방하는 일종의 상으로 서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인상의 상에 따라서, 그 상이 참될 경우 이에 따른 믿음도 참되고, 이 상이 거짓될 경우 이에 따른 믿음 역시 거짓이 된다고 이야기되는 듯하다. 따라서 인상의 상과 이에 따른 판단 사이에는 불일치가 논의되지 않는 듯도 싶다(확실하진 않다. 『테아이테토스』의 석판이나 새장 비유에서 문제되듯, 외부의 지각 대상 없이 영혼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불일치를 통한 거짓도 분명 실재하고, 이것도 대상과 영혼 사이의 불일치 못지 않게 그것이 왜 어떻게 거짓인지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긴 하기 때문이다.). 가상이 원본 그 자체가 아닌 것(상)에서 더 나아가 원본을 닮은 것(모상)조차 아니라는 점에서, 원본과 굉장히 멀리 동떨어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으로 이러한 가상이란 것이 외부 대상으로서의 원본과 직결되어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런 대상도 가지지 않는 것은 아예 성립 자체가 안 되는 것이라면, 가상도 자신이 원본 삼을 뭔가가 있긴 있어야 한다. 인상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듯하고, 또한 인상에도 거짓 인상과 참 인상이 구분될 수 있다면, 특히나 거짓 인상에 한정하여 바로 이러한 거짓된 인상을 원본으로 삼을 경우에만 인상의 상이 원본에 대한 가상으로 규정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참된 인상의 상은 원본에 대해서도 모상일 것이다. 참인 인상과 거짓인 인상 각각에 대해 다시 그것들 각각의 모상과 가상이 구분되어 네 가지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튼 가상의 일종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이야기되고, 그 희망의 사례로 내게 황금이 많은 것을 자꾸 보면서 즐거워하는 경우가 등장하는데, 이 때 '본다'라고 하는 활동은 정확히 무엇이고, 그 대상은 무엇인지와 관련하여 위의 해석이 아마도 적절한 설명을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원본과 동떨어진 채로도 가능한 것이 가상이라면, 원본이 아예 없는 경우에도 (엄밀히 말하자면 외부 실재 원본은 없지만 내적 심상 원본은 가지는 경우에도) 가상이 가능하지 않을지, 그리고 그게 미래 사건에 관련된 '거짓된' 희망을 설명하는 데에 유효한 개념일 수 있지 않을지, 뭐 그 정도 생각.


3. 모든 크기, 운동, 시간은 가분적인 부분들로 가분적이다. 따라서 무한하게 가분적이다. 그래서 점이 선을 구성하지 않고, 지금(순간)들이 시간을 구성하지 않으며, 불가분한 최소단위 운동 같은 것들로 운동이 구성되지도 않는다. 이 모두는 연속적이다. 그런데 연속이고 무한 분할 가능할 때 제논의 역설은 어찌 되는가? 다시 헷갈려졌다. 대강 연속적인 크기를 연속적인 시간 동안 연속적인 운동이 각기 하나로 통합된 전체로서 상호 점유하는 것으로 보고서, 단위나 원소처럼 취급되는 어떤 단계들을 거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연속적 과정을 성립시키는 방식으로 제논 역설을 극복하는 것 비슷하게 설명되었던 듯한데,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일단 연속 부분 더 보면서 고민해 볼 것.


-蟲-

0. 쓰고 버릴 쓰레기를 쓰자. 버리고 태우고 하다 다행히 뭐라도 남으면 좋고, 아니더라도 뒈질 때까지 그러고 살 수밖에 없기도 하고.


1. 255c14-15: 있는 것들(Being) 중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또 어떤 것들은 그 외의 것들에 관련해서 항상 말해진다.

   255d1      : 다른 것은 항상 다른 것에 관련해서 말해진다.


M. Frede의 제안에 따르면, 어떤 것이 being something으로 말해지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인간이라고, 그리고 나아가 동물이고, 두 발 달린 것이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그 자체로' 말해진다. 반면 인간은 좋다거나 희다거나 앉아 있다고 '그 외의 것들에 관련해서' 말해진다. X is Y에서 'Y'는 X에 본질적이거나 정의상 포함되는 것으로서 X에 관하여(peri)

"being(더 엄밀히 말하자면 'being Y')"이라고 말해진다. 다시 말해 X는 그 자체로 Y이다. 그러나 또한 'Y'는 X에 부수적으로 귀속되는 속성이나 성질 같은 것일 수 있다. 이 경우의 being Y'는 X에 관하여 X 이외의 것에 관련해서 말해진다. 그리고 X는 자신 이외의 것에 관련하여서 비로소 "being Y'"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 어떤 것이 different라고 말해질 때, 이는 항상 다른 것(아마도 '그 외의 것'과 같은 의미에서)에 관련해서 말해진다. "X is diffrent from Y"라는 문장은 "Y is something that is different from X"라고 바꾸어 말해질 수 있다. 이는 다시금 "X is something(Y) that is different from X"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여기에서 X에 올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오직 자기 자신이기만 하다. 그 무엇도 자신의 정의나 본질 안에 "무엇과 다르다"라는 술어나 속성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인간은 개와 다르고 그래서 "개와 다른 것"이라고 말해질 수 있지만, 인간의 정의에 "개와 다르다"라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다른 것에 관련하여'가 "Z와 다르다"의 "Z"에 관련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리라는 점이다. "다른 것에 관련하여"라는 표현이 "그 외의 것에 관련하여"와 같은 의미라면,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라는 말이 참인 이유를 설명하기 곤란해질 것이다. 오히려 "다른 것에 관련하여"에서 "다른 것"은 비교대상이 아닌 그 차이가 나는 상태, 곧 '다름' 바로 그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형식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것도 타자와의 구분을 그 자체의 고유한 본질로 삼지는 않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런 식의 이해에 따를 때 문제는 다름 자체, "The Different Itself"라 할 만한 것, 다섯 개의 최고류 중 하나로서 지시되는 그 '다른 것'이라는 유(또는 형상)를 이해할 방법이다. 여타의 것들과 달리 다른 것 그 자체는 그 외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다르다'라는 술어를 가질 것처럼 보인다. 좋은 것 그 자체가 가장 있는 그대로의 의미에서 좋다거나 아름다운 것이라는 형상 자체가 여타의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원천으로서 역시나 가장 아름답다는 등의, 말하자면 형상의 자기술어화 원리라 할 만한 것을 '다른 것'이라는 유에 적용할 경우, 앞서 주목한 구절에서의 규정과 달리 적어도 '다른 것'이라는 유 그 자체만은 '다른 것에 관련하여'서만 "다르다"라고 말해지지 않고 '그 자체로'도 "다르다"라고 말해져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The Different is different from ...."이라는 문장은 그 안의 "is"라는 동사를 통해 다시 두 가지 방식으로 문장전환이 될 수 있다. 이 둘 각각은 우선 (1) '다른 것'이라는 유가 'being different'라고 그 자체로 이야기되는 경우와 (2) 그 유가 그렇게 '그 외의 것에 관련하여' 말해지는 경우로 구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문제가 되는 문장에서 '다른 것'이라는 유는 "...is different ...."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is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되는 바로 그 "있는 것(being)"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가 있다면 그것은 본질 상으로도 정의 상으로도 자기 자신을 술어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인 비교 대상을 상정하고 개별화된 사례로서 이것이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구분된다. 개별화된 사례에서 여타의 것들이, 굳이 말하자면, '다른 것'이라는 유에 참여함으로써 자신 이외의 것들과 "다른 것"으로 말해지듯, '다른 것'이라는 유도 여타의 것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다른 것"으로 말해질 때에는 이 참여의 방식을 공유해야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이 '다른 것이란 유에의 참여'를 통한 경우 "being different"라는 이름의 강조점은 "different" 쪽에 주어진다. 반면 이 참여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말해지는 경우 "being different"라는 이름에서는 "being"이 강조되는 것이며, 이러한 "being different"는 그 자체로 말해진 한에서의 것으로서, 그 주어는 오직 '다른 것'이라는 유 그 자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동물이다"라고 말해지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인간도 개도 원숭이도 주어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하위종에 대한 상위류, 혹은 복합체로서의 피정의항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정의항은 둘 이상의 주어에 참되게 서술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다른 것'이라는 유의 자체적 자기술어화 사례는 특수한 사례로 따로 취급되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그 자체적인 본질이나 정의를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경우의 being'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다른 것'이라는 유이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처지에 놓인 또 다른 유가 바로 '운동'이라는 유이다. 이 유는 '정지'라는 유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언제나 움직이고 있는 그 움직임 자체이며, 그 움직임을 수행하는 어떤 것을 따로 상정하지 않는 기묘한 것이다. 운동이 운동인 한에서 그것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생성과 소멸에 따라서도 장소에 따라서도 전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며 이러한 한에서는 도무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떤 것으로 상정될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앞서 '다른 것'이라는 유에 대한 자체적 서술의 방식이 허용된다면, 같은 방식이 '운동'이라는 유에 적용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문제는 being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에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일 수 있다. 계사적으로든 존재사적으로든 혹은 그러한 구분 없는 어떤 통합된 의미에서든 "is"라고 말해지기 위해서는 being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각각의 모든 것은 그 각각의 것'으로서 있기' 위해 being에 참여해야만 하며, 단지 자기 자신만으로는 어떻게도 이야기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자체적으로 성립하거나 서술되는 일이 극단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또 다른 후보가 있다. 그것은 상, 모상, 가상이다. 이것들은 원본을 닮아 있는 것 또는 닮아 보이는 것으로서 규정되며, 따라서 원본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다. 이는 다시 말해 그 자체만을 독립적으로 놓고서 바로 그것을 직접적으로 '상'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상은 그 자체로서는 상이라고 말해질 수 없다. 


같은 문제에 직면할 또 다른 대상은 '생각'과 '말'이다. 이것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것이며, 바로 그 무언가에 대해 그 무언가가 어떠어떠하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는 일은 곧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상과 말은 이상의 문제를 유의 차원에서도 개별적으로 실현된 차원에서도 겪는 것으로 보인다. "X is Y"라는 말은 말이기 위해 X를 대상으로 그것에 대하여 Y가 있다고, 그렇게 대상을 상정함으로써만 비로소 무언가를 말하는 말이 된다. 그런데 유의 차원에서 '말'이라는 유는 역시나 그 자체로 다름 아닌 말이어야 한다. 그리고 말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으로서 그냥 어딘가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수는 없다. 


* 주의할 점은 지금 고려되고 있는 유 또는 형상이 속성을 가리키는 추상명사나 어떤 보편자가 아니라 인과적 능력을 지니는 실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청동 조각상으로서 있다"라고 말할 때, 원본과의 관련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보자면 실상 이 문장은 어떤 청동 덩어리인 것이 있다는 의미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이 '상'으로서 있기 위해서는 원본과의 관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바로 이 관련 한에서만 어떤 것이 '상'이라는 규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림은 원본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아무것도 그린다고 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림으로서 있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단지 선이나 면 또는 색으로 이루어진 조합물이 있다고만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말이나 생각도, 운동도, 그리고 다르다는 것도 모두 같은 문제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역시 어느 정도는 공통점을 지닐 것으로 기대된다.


뭔가 전달이 잘 안 되네.


-蟲-

 

09-10

 

 

 

 

 

 

 

10-11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윤독 유재민


 

11-12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윤독 유재민


 

12-13

 

 

윤리학연습 김현섭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윤독 유재민


 

13-14

 

 

윤리학연습

김현섭

 

 

 

 

14-15

서양고대철학연습: 플라톤 『티마이오스』

강성훈

 윤리학연습

김현섭

안티폰 연설

강독 이윤철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이윤철


15-16

서양고대인식론연구: 파르메니데스 단편

이윤철(청강)

서양고대철학연습: 플라톤 『티마이오스』

강성훈

 

안티폰 연설

강독 이윤철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이윤철

 

 

16-17

서양고대인식론연구: 파르메니데스 단편

이윤철(청강)

서양고대철학연습: 플라톤 『티마이오스』

강성훈

 

안티폰 연설

강독 이윤철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이윤철

 

 

17-18

서양고대인식론연구: 파르메니데스 단편

이윤철(청강)

 

 

안티폰 연설

강독 이윤철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이윤철


18-19

 




 

 

19-20

 

플라톤 『티마이오스』 강독

강성훈(미정)

 

 

 

20-21

 

플라톤 『티마이오스』 강독

강성훈(미정)


 

 

21-22

 

플라톤 『티마이오스』 강독

강성훈(미정)


 

 


1. 2020년 2학기 10월 이후 계획.

2. 8월부터 10월 초까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Γ 강독.


-蟲-

왜 다들 섣불리 넘어서질 못해 안달하는지 모르겠다. 글이 있고, 그 안에는 글쓴이의 생각, 주장과 근거와 논리가 들어 있다. 글은 닻처럼 내려앉아 혼란스럽고 광폭한 상념의 횡포에 휩쓸려 방황하는 이를 붙들어 매어준다. 이성과 합리와 비판의 정신이 노가 되어 족쇄가 허락하는 한계까지 배를 저어 나아갈 원동력이 되어준다. 닻을 내리지도 노를 젓지도 않고 떠드는 망망대해의 자유는 그저 자살선망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논증을 분석하고 재구성하여 그 정당성을 평가하라. 그건 철학사의 권위에 굴종하고 아첨하라는 것도 아니고, 웅대한 포부를 단념하라고 종용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담담하게 자기 자신을 직면하라. 천재도 위인도 아니지만 쓰레기도 역병도 아닌 당신이 그냥 거기에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첫 발을 내디딜 지혜도 용기도 없다면, 당신의 철학은 아니면 그게 무슨 학문이든 그 배움은 그저 병이 들어 부풀어 오른 구역질나는 허영에 불과하지 않나. 아, 씨발, 다 지겹다. -蟲-

0. 그는 겉보기 혹은 거짓 양립불가능성과 그 자체 혹은 참인 양립불가능성을 구분한다. 전자를 통해 소피스트는 역시 참인 논박에 대비되는 거짓 논박을 구성하며, 이 논박을 통해 피논박자로 하여금 소피스트는 논박불가능하기에 지혜로운 반면 자기 자신은 논박당하였다는 점에서 지혜롭지 못하다는 거짓 믿음을 지니게 만든다. 

 

  1) 겉보기 모순과 진정한 모순

     아주 거칠고 단순한 예를 생각해 보자면, 변지윤은 20대에는 장발이었으나 30대 이후로는 대머리이다. 이에 대한 거짓 모순은 변지윤이 (무조건적으로) 장발인 동시에 또한 대머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인인 변지윤을 두고 그를 서술하는 시점을 구분하여 20대일 때라는 조건에서 변지윤은 장발인 동시에 또한 30대라는 조건에서 바로 그 동일인 변지윤은 대머리이기도 하다. 이는 모순이 아니다. 서술의 관점이나 측면을 구분함으로써 서로 양립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양립가능함을 보일 수 있을 때, 이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 양립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소피스트가 사용하는 거짓 모순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로 초기대화편들에서 제기되는 이러저러한 덕 자체와 그 덕의 사례들에 관련한 모순들이 바로 위에서 설명된 "사실은 어떤 식으로 양립 가능한" 겉보기 모순으로 생각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제우스를 따르는 것일 수도 또 이에 반대하는 헤라를 따르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나 거꾸로 경건하기 때문에 신이 비로소 그 경건한 것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라케스』에서는 임전무퇴와 전략적 후퇴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그 둘 모두가 용기로 간주되기도 한다.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차원에서 덕에 대한 참인 믿음들과 본질 혹은 정의(definition) 차원에서 덕에 대한 그 자체적인 규정은 서술의 차원이나 층위를 구분함으로써 비로소 양립가능한 것들이 되고, 그런 식으로 초기 대화편에서 제기되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상황들은 이러한 관점이나 조건에 대한 대화자들의 무지를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포리아로 끝나지만, 또한 바로 이 무지가 극복될 경우에 모순은 더 이상 모순이 아니게 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소피스트가 기만을 위해 고의적으로 고안해낸 거짓 모순이 초기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와 대화 상대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던 모순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인상을 주게 만든다. 그리고 심지어는 소크라테스가 거짓 모순을 만들어내 의도적으로 대화상대방을 기만한 것처럼 보이게까지 만든다. 물론 소피스트는 자신의 무지를 숨기는 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공개하며, 소피스트는 논박을 자신이 지혜롭다는 거짓 믿음을 가지도록 만들기 위한 기만의 도구로 사용하는 반면 소크라테스는 논박을 거쳐 자신과 상대방 모두 특정 주제에 무지함을 합의함으로써 탐구와 교육을 목표를 위한 예비단계로 해당 논박을 활용한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을 강조할수록, 더욱이 교육과 진정한 탐구를 목표로 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순이 소피스트의 기만전술에서 활용되는 모순과 구분되기 어렵다는 점도 그 만큼 기이해질 것이다.

     아마도 Beer가 할 법한 반론은 진정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들(대표적인 예로 정지와 운동)과 겉보기 양립 불가능한 것들(대화편에서 핵심적인 예로는 "is"와 "is not")이 구분될 수 있으며, 전자만이 진정한 모순의 요소이고 후자는 겉보기 모순의 요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is와 is not의 경우, 이것들은 특정 조건에서는 결합되는 반면 또 어떤 관점에서는 결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운동은 같은-것에 참여함으로써 "운동이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다"라고 서술된다. 그러나 또한 운동은 같은-것에 관련된 다른-것에 참여함으로써 "운동은 같은-것과는 다른 것이다"라고 서술되기도 한다. 전자의 의미에서 운동은 같은-것이지만 동시에 후자의 의미에서 운동은 같은-것이 아니기도 하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자체적으로는 서로 다른 것들이 참여관계를 통해서는 연결될 수 있으며, 다름을 통한 is not과 참여를 통한 is는 양립 가능하다. 그러나 여전히 자체적인 차원에서 is와 is not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소피스트는 어떤 것들을 양립 시키는 측면과 상호 배제시키는 측면을 왜곡함으로써 거짓 모순을 만들어낼 것이다. 즉 여기에서 본래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과 가상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의 구분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같은 요소들 사이에서 어떤 조건에 따라 양립 가능 여부가 구분되는지가 핵심이 된다. 이는 다시 앞서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진정한 탐구의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난관으로서의 모순과 소피스트가 기만을 위해 활용하는 모순은 구분되지 않는다. 


  2) 원본과 모상 사이의 거짓/모상과 가상 사이의 거짓.

      Beer에 따르면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자를 모방하여 자기 자신을 도구로 써서 자신이 지혜로운 자처럼 보이도록 하는 그러한 가상을 만들어내는 자이다. 그리고 이에 대비하여 지혜로운 자의 비율(영혼의 균형, 진정한 모순과 양립가능성에 따라 정합적인 믿음 체계)을 왜곡하는 소피스트의 가상과 달리, 이 비율을 그대로 보존시킨 모방물로서 지혜로운 자의 모상은 그 자체도 지혜로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본과 모상의 관계는 사물과 그림 혹은 실제 인물과 그를 묘사한 조각상 등의 비유를 통해 제시되고 있으며,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맥락에서 이 몸이란 결국 입을 통해 말을 하거나 손을 통해 글을 쓰는 등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원본과 상 사이의 단절이 굉장히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홀로그램이나 조각상을 실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일 것이고 거짓 믿음일 것이다. 가상이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킨 상이라는 묘사에 따라 소피스트의 경우 그가 제작하는 가상은 무엇인지, 이 가상이 모방하는 원본은 무엇이고 그 본래의 비율은 무엇인지, 그리고 소피스트의 가상이 이러한 특정한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키는 방법과 결과는 무엇인지, 이에 대한 Beer의 설명은 문헌근거로 충분히 잘 뒷받침되고 그 논지 또한 상당히 일관적이다. 그럼에도 그의 해석은 그 자신이 주목하는 바 (단지 가상만이 아니라) 가상과 모상을 모두 포함하는 상 일반이 거짓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처럼 서술되고 있다는 문헌 상의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소피스트의 경우에만 또 지혜로운 자의 영혼을 원본으로 하는 경우에만 모상과 원본은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가?

    해명되어야 할 문제는 원본에 대해 상이 거짓이라 불리는 맥락과 모상과 가상 사이에서 가상이 더욱 거짓이라 불리는 맥락이 구분된다는 것, 그럼에도 그 둘 사이에 모종의 연결이 있다는 것, 그리고 『소피스트』의 결론부에서 검토된 거짓이란 생각-말-믿음-인상에서 특정 주어에 관련하여 있지 않은 것들을 바로 그 주어에 관하여 있는 것으로 결부시키는 종류의 것이라는 것, 그래서 이런 식으로 규정된 거짓이 앞서 구분된 두 종류의 거짓을 포괄하거나 혹은 그 둘 사이를 적절히 매개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설명하는 것이다.


-蟲-


1. 1) If X participates in Y, then X is Y.

   2) If X participates in (the) Different from Y, then X is not Y. ("is-not" or "not-Y")


2. 각 형상에 관련하여 있는 것은 많고 있지 않은 것은 그 수가 무한하다. M. Frede 아이디어 가져온 것이다.

   1) If X participates in (the) Being, then X is (<a> Being).

   2) If X participates in Y, then Y is (<a> Being) about X. (?)

   

   a. 여기에서 2. 1)로부터 Being is about X를 도출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1. 1)로부터 2. 2)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각 형상에 관련하여 있는 것은 많지 않고 하나이다. 

   단, (1) 모든 것이 저마다 있는-것에 참여하는 그 모든 상황들을 아울러서, 각각에 관한 "있는-것"이라는 게 전반적으로 보자면 많다고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는 해당 부분의 원문에 대한 자연스러운 독해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2) 각각의 것에 관련하여 서술되는 여러 술어들이 지시하는 그 모든 것들을, 해당 주어에 관련하여 많은 있는 것들로 간주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1. 1)로부터 2. 2)를 도출하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b. 다른 한편, 있는 것은 많은 반면에 있지 않은 것은 무한하다는 언급에서, 있지 않은 것의 수가 더 많아야 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이해가 타당하다면, 어떻게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보다 더 많게 되는가? 

      여기에서 a.(1)의 해석에 따르면 각각은 있는 것에 참여하는 한에서만 있으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딱 그 수 만큼 있다. 반면 모든 것은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 각각에 대한 다른-것에 참여하여 그 각각의 것들로 "있지 않다." 각각이 모두 자신 이외의 것들이 있는 만큼 있지 않으므로, 있는 것의 경우보다 월등히 그 수가 많다. 무한한지 여부는 차치하고.

      a. (2)의 해석을 따르면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수는 언뜻 비등해 보인다. X는 참여 가능한 대상들의 수만큼 있고, 자신과 구분되는 대상들의 수만큼 있지 않다.


3. auto kath' hauto/pros allo.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 있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하고 다른 것에 관련하여 있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M. Frede 아이디어 가져온 것이다.

   그 자체로 있는 것을 참여 대상으로서의 형상으로, 다른 것에 관련하여 있는 것을 참여 결과로 간주해 보자.


   X is itself X.

   X is being-X by participation in Being.

   

   X is being-Y by participation in being-Y.

   Y is being-Y about X by participation of X in Y.

   Z is being-Y ....

   Y is being-Y about Z ....


   Everything is being-itself by participation in Being.

   Y is being-Y by participation in Being.

   

   이제 X는 being으로 불리는 경우와 being-something으로 불리는 경우, 두 가지 방식으로 being이라 말해질 수 있다. 둘 중 어느 경우든 X는 참여를 통해서 being으로 불리게 되고, 참여대상은 형상이다. 그리고 X가 being-Y로 불릴 때 Y는 X에 관하여 being으로 불린다. 즉 X가 Y에 참여하면 Y는 X에 관하여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때 X에 관하여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형상 Y이지, Y에 참여한 결과 Y로 불리는 Z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보자. 운동은 같은-것에 참여하여 같은-것으로 있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 경우 같은-것은 운동에 관련하여 있는-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같은-것에 참여하여 각기 자기 자신과 같은-것으로 있으므로, 정지 또한 (각기 자기 자신과) 같은-것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이러한 정지를 '같은-것(정지)'라고 해 보자. 운동에 관련하여 같은-것은 있는 것이지만, 같은-것(정지)은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1. 2)를 통해서 있지-않은-것이 이야기된다. 우선 being과 다를 때 not-being이 나오고, 또한 being-something과 다를 경우 not-being-something이 나올 것이다. 다시 운동과 정지, 같은-것을 놓고 생각해 보자. 운동은 같은-것과도 다르지만, 같은-것(정지)와도 다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같은-것도 운동에 관하여 있지 않은 것이고 같은-것(정지) 또한 마찬가지로 운동에 관하여 있지 않은 것이다. 

   Being에 대한 참여를 놓고 생각해 보자. 운동은 being에 참여하여 being이지만, being과의 다름에 참여한다는 점에서는 not-being이다. 또한 모든 것이 being에 참여하므로, the same 역시 being-the-same이라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the same에 참여하므로, 모든 것이 being-the-same에 참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제 운동은 being-the-same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the same with itself로도 또 being something(i.e., being-the-same)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밑줄은 각 경우에 주목되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being-the-same(at rest, "같은-것(정지)")로 간주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운동이 정지에 참여한다면 being-at-rest 같은 무언가로서 다시금 being-something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단, 모든 것은 형상에 참여한 결과만을 긍정문에서 술어로 가질 뿐, 형상에 참여한 결과물에는 참여할 수 없고 이런 참여의 결과는 긍정문의 술어로 가질 수 없다. 반면에 모든 것 각각은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형상과 다르고, 또한 이러저러한 형상에 참여한 결과물들과도 (이것들이 자신 이외의 것들인 한에서) 또한 다르다. 그리고 이 모든 형상과 또한 참여자들의 수만큼 not-being이다. 


not-being은 세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형상 Being과 다름, 형상 F, G, H 따위들과 다름, 이러한 형상들에 참여하는 f, g, h 따위들과 다름.



음. 이거 맞나? 내가 M. Frede의 『소피스트』 해석을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해 본 것인데, 일단 이게 프레데 생각이 맞는지 여부가 문제이고 또 이게 해당 대화편에서 문헌 근거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인지도 문제이다. 그런데 X가 Being에 참여한 결과 말고 여타 형상들에 참여한 결과도 being으로 보려면, 그리고 이와 평행하게 Being과의 다름 말고 여타 형상들 각각과의 다름(더 나아가 자기 자신 이외의, 형상 아닌, 모든 것들과의 다름)에 참여한 결과도 not-being으로 보려면, being이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해진다는 거랑 참여대상은 형상인데 다름-참여대상은 개별자까지 포함한다는 아이디어 두 개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싶다.


-蟲-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정어와 결합된 명사로서 비규정 명사, 부정어와 결합된 동사로서 비규정 동사, 그리고 문장 단위에서 긍정문에 대립되는 부정문을 각각 이야기한다. 주어를 보편적으로 서술하는 문장과 보편적이지 않게 서술하는 문장을 구분하며, 후자의 경우 오늘날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보편양화가 부정되는 문장과 양화표현이 등장하지 않는 문장이 해당된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성에 대한 부정과 필연성에 대한 부정을 논하고 있는데, 이러한 양상의미가 동사에 의해 표현되는지 혹은 앞서 양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장 내에서 일종의 부사처럼, 혹은 동사를 보조하는 조동사에 의해 따로 구분되어 표현되는지 불분명하다. 이 모든 경우의 부정이 전부 서로 구분된다고 하면 부정어가 결합하는 방식은 최대 다섯 가지이다. 반면 비규정 명사나 비규정 동사에 의해 부정문이 구성될 경우, 양화표현이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적 방식으로만 이해될 경우, 그리고 양상표현이 본동사를 기준으로 부수적인 의미만을 부여하는 일종의 의존적인 표현으로만 이해될 경우 부정의 방식은 최소 두 가지까지 줄어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다른 모든 동사표현은 모두 be 동사 문장으로 환원 가능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강하게 해석할 경우, 그리고 be 동사가 그 자체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극단적으로는 부정어의 결합 방식은 비규정 명사 하나만이라고까지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더하여 주어와 술어를 통해 결합과 분리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문장이 성립한다는 것으로 그의 문장에 대한 생각을 해석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이 결합과 분리를 문장의 긍정과 부정에 관련하여 이해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에 관련하여,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 부정어에 관련한 여러 논의들을 참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정어와 be 동사의 결합, 다른 동사 또는 명사나 형용사와 부정어의 결합, 주어와 술어가 결합한 진술이나 문장과 부정어의 결합, 원본과 모상의 관계에서 모상에게 부여되는 원본과 부정어의 결합, 다시 원본과 모상과 가상의 관계에서 가상에 부여되는 부정-원본(원본 아님) 결합과 부정-모상(닮지 않음) 결합 등은 종합적으로 일관되게 이해될 때 거짓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명제론』에서 직접 거짓 불가능의 역설이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거짓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목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문장의 구성요소와 결합구조, 각 요소와 부정의 관계, 부정문과 긍정문, 그리고 진리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의의 영역은 상당부분 중첩되고 있다. 특히 문장이 주어(혹은 명사, 이름, onoma)와 술어(혹은 동사, rhēma)의 결합물이라는 것, 그리고 부정어가 무엇과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파악된다는 입장 등은 플라톤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연속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蟲-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 10장에서 대립관계를 다시 관계, 반대, 소유-결여, 긍정-부정의 네 가지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는 『자연학』에서 변화 및 운동이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변화를 생성 및 소멸과 구분하는데, 생성과 소멸의 경우 변화의 시작 혹은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는 『정치학』에서 왕정, 최선정, 혼합정 각각에 순서대로 그 타락한 형태로서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이 대립되어 놓인다고 주장한다. 또한 각각의 정체는 하나의 유로 하여 그 하위 종들이 구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사이에서 정체들 사이의 전환과 해체, 보존 등의 원인이 분석되고, 특히 타락된 형태의 정체들 각각은 자신의 고유한 특징이 극단화됨으로써도, 다른 한편 자신과 반대되는 정체를 원인으로 하여서도 해체될 수 있다고 이야기된다. 정체의 보존과 지속이 일종의 완성과 정지를, 반면 해체나 전환이 일종의 변화와 운동을 의미한다면, 변화의 운동의 조건으로서 반대관계가 각 정체들 사이에도 일관적으로 성립하리라 기대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범주론』에서 제시된 대립의 종류들, 그리고 반대관계와 반대항에 대한 설명이 정체들 각각과 그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관계가 성립하는 방식에 따라 최선정과 혼합정의 관계가 밝혀질 것이고, 전통적인 해석사의 문제 중 하나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이상적인 정체와 일종의 차선 정체인 현실적 정체의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것은 둘인지 혹은 하나인지, 그 시간상의 혹은 논리상의 선후관계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도 이러한 연구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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