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플라톤 『티마이오스』에서 모상 제작의 계기.

   우주제작자(데미우르고스)는 완전하고 영원한 살아있는 것(형상)을 본으로 삼아 이것의 모상으로서 만물(우주)을 제작한다. (제작자의 세계 창조의 동기라는 것이 애초에 신화적 추정의 대상에 불과할 것이라는 논점은 잠시 차치하고) 이 제작자는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자로서 인색하지 않다는 성격적 특징을 갖는다. 이런 성격에 따라 시혜적 활동의 일환으로서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할 수 있겠으나, 바로 이 성격은 모상의 제작 그 자체의 동기라기 보다는 이 모상을 원본에 (그리고 제작자 자신에) 가능한 한 최대한 유사하게 만드는 그 지향점을 추구하게 되는 계기라고 보는 편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그래서 이것만으로는 제작자가 우주를 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마련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런데 『티마이오스』 서두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묘사한 이상적인 국가/정체, 그리고 대화 과정에서 이에 대한 역사적 사례로 언급되는 태고의 아테네를 두고, 이러한 아름답고 훌륭한 정체가 실제로 현실에서 기능하고 작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아름다운 동물의 그림을 보거나 혹은 그러한 동물이 가만히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게 되는 마음에 비유한다. 우주제작자는 형상을 본으로 삼아 바라보며, 형상은 작중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변화생멸을 겪지 않는 영역의 것으로 묘사되는 듯하다. 다른 한편 작품의 중반 이후에서는 형상과 달리 이 형상을 원본으로 삼는 모상의 경우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른 어떤 것 '안에' 들어가 있어야지만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 고려되고, 이와 관련하여 모상이 시공간적 속성을 지니고 활동하도록 해주는 조건과 같은 것으로서 수용자라는 가상의 요소를 상정하게 된다. 원본으로서의 완전한 생명은 정의상 살아있는 것이며 이에 따라 영혼을 지니는 것이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형상인 한에서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며 운동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가능조건으로서 시공간적 제약을 가해야만 한다. 무시간적 영원성은 이 과정에서 통시간적 영원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모든 시간 전체에 대해 우주가 완전히 대응하여 그 시간을 빠짐없이 점유할 경우, 시간 자체가 유한하든 무한하든 상관없이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은 우주와 함께 발생하는 것으로서 시작을 가지므로 양방향으로 무한하게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우주와 그 우주의 운동이 소멸(정지 말고)할 경우 시간 그 자체도 함께 소멸할 것이므로, 우주는 시간적으로는 어떻게든 영속하지만 무시간적으로 영원하지는 않다. 이러한 모상으로서의 우주는 시간에 종속된다는 제한 내에서 어쨌든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영원과 유사한 것으로서 비로소 운동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이 운동에 질서와 영속성을 최대로 완성시키는 이유와 이러한 운동 자체를 성립시키는 이유는 구분될 수 있다. 

 

0. 플라톤 『소피스트』에서 분할과 우연적(일시적?) 술어.

   우선 분할과 관련하여, 『소피스트』 초반부의 분할들 각각 그 자체는 『파이드로스』에서 언급되는 자연적인 마디들에 따른 분할, 본질이나 자연적 질서 등의 객관적 구조가 허용하고 또 이를 따르는 그러한 분할이다. 다만 분할의 결과로 나온 각 기술(청년사냥, 지식매매, 쟁론경연, 논박이나 시험을 통한 영혼 정화로서의 교육 등 아직 합의된 명칭이 부여되지 않은, 그러나 기술이라는 유의 부분으로서 객관적으로 성립하는)에 대해, 소피스트의 본성(자연적 마디)이 아닌 그의 행태나 겉보기 모습을 대응시켜 그 각 기술을 소피스트 기술로 간주하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소피스트 그 자신의 고유한 정의에 따른 본질적 활동이 있을 것이고, 그가 단지 가능한 한에서 임의로 수행하는 활동들은 저것과 구분될 것이다. 후자는 소피스트가 실제로 수행하는 행위이긴 하겠으나, 그가 그 자신의 고유한 기술을 발휘하여 'de dicto' 소피스트로서 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후반부에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명제,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와 "테아이테토스, 지금 내가 대화하고 있는 그는, 날고 있다"가 가리키는 사태들은 어떠한가? 테아이테토스는 그의 본성에 따라 인간이며, 인간은 육상동물에 속하고 유영하는(물 속을 헤엄치거나 공기 중을 날거나) 동물과는 구분된다. 이런 구도에서 보자면 테아이테토스는 본성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가 날고 있다는 진술은 필연적인 거짓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거짓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시킨다. 또한 '지금 내가 대화하고 있는 자'라는 첨언이, 설령 이를 통해 '테아이테토스'라는 이름을 가진 새나 이 이름이 붙은 신 또는 신령과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딱히 유의미한 삽입구라고는 보이지 않게 되는 듯하다. 반면, 이 첨언을 통해 해당 진술과 이 진술이 지시하는 사태에 구체적인 시공간적 제약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소피스트는 청년사냥꾼이다."라는 참말과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라는 거짓말을 본질서술이나 정의와는 구분되는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차원의 서술로 묶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와 "소피스트는 청년사냥꾼이다" 둘 모두 같은 차원에서, 즉 우연적으로 참인 명제들로 연결시킬 수 있다. 다시, 이 두 명제는 자체적인 방식으로 또는 정의나 본질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제시될 경우에는 여전히 거짓이다. "앉아 있다"라는 것이 테아이테토스의 본질이나 정체성에 대해 필수적인 내용을 설명해주는 바가 없듯, "청년사냥꾼" 또한 소피스트가 소피스트이기 위한 고유한 본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는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화편 안에서 명제의 참은 그 명제가 모사하는 사태에 의존하며, 모든 명제는 주어로써 대상을 그리고 술어로써 바로 그 한정된 대상의 행위나 상태나 성질 따위를 서술하며, 사태 자체를 단위대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명제는 없으며, 시공간적으로든 지성적으로만 파악되는 영역에서든 어쨌든 어떤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명제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참인 명제는 일종의 모상으로서 그것이 원본으로 삼는 대상을 가지며, 그 대상은 부분들을 구조적으로 통합하는 한 단위의 결합체로서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런데 이 주어져 있는 것은 앞서 보았듯 본성적인 방식으로 대상에 결합되어 있는 것도 있고, 본성과 무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도 있으며, 후자의 경우에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본성적이지 않으면서 또한 필연적이지도 않은 것 또한 있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가 인간이라는 것은 본질적이고 필연적인데, 테아이테토스가 자기 자신과 같고 자신 이외의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본질은 아니며,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것은 본질도 아니고 필연적이지도 않다. 

   『소피스트』 중반부에서 유들의 결합과 분리를 논하는 과정에서, 각 유는 자기 자신과 같고 자신 이외의 것과 다른데, 이는 본질적이지는 않지만 필연적이다. 따라서 본질적인 차원에서 특정 유가 자기 자신과 같다고 말할 경우, 이는 그 논의 수준으로 인해 거짓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은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명제의 거짓과 그 논의의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이며, 거짓이 되는 이유 역시 어느 정도는 다를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리키는 대상에 관련하여 그 대상에 결부되는 술어들 이외의 술어들이라는 점에서는 두 거짓 사이에 차이가 없다. 이 두 거짓 사이의 구분을 위해서는 주술관계에서 그리고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과 성질 사이에서 우연적, 일시적 결합과 분리가 따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는 『소피스트』에서 서술되는 참여관계를 통한 설명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변화생멸의 시공간적 계기가 도입되어야지만 비로소 그러한 구분이 가능해질 것이다. 『소피스트』에서는 지성적 차원에서 혹은 논리적 차원에서의 거짓과 경험적 수준에서의 거짓 모두를 포괄하여 거짓 일반에 대한 정의를 시도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 둘 사이의 차이를 암시함으로써 추가적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는 『티마이오스』에서 그 해결이 시도되는 것으로 보인다. 『파르메니데스』는 대상, 객관, 존재 차원에서 결합과 분리의 문제를 여러 역설들을 통해 제시하고, 『테아이테토스』는 주관적 인식, 지각, 경험 차원에서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며, 『소피스트』는 객관적 구조에 대한 주관적(언어와 사유) 구조의 모방관계를 통해 해당 문제에 대한 이론적 차원에서의 설명을 제공하고, 『티마이오스』는 다시 경험적 차원에서 같은 문제의 더욱 구체적인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명제의 진리치는 사태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명제론』 19a24-34에서 말하는 바가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있을 때, 그리고 있지 않은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있지 않을 때, 필연적이다. 그렇지만 있는 것 전부가 필연적으로 있지도 않고 있지 않은 것이 필연적으로 있지 않지도 않다. 왜냐하면 '있는 경우에, 있는 것 전부가 필연적으로 있다는 것'과 '필연적으로 단적으로(무조건적으로) 있다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있지 않은 것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모순의 경우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전부 필연적으로 있거나 있지 않고 게다가 있을 것이거나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분할하며 둘 중 한쪽을 필연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바는, 이를 테면 내일 해전이 있을 것이거나 있지 않을 것임이 필연적이지만, 내일 해전이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것도 아니고 생성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생성되거나 아니면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시간상의 우연적인 서술들의 경우 이미 벌어졌거나 현재 진행 중인 사실이 진리치의 기준이 되고, 각 사건에 부합하는 명제를 기준으로 다른 명제들은 거짓이 된다. 여기에서 특정 시점 특정 위치 여타 특정 조건들을 공유하는 사건-참인 명제가 고정되고, 이 조건들은 공유하면서 실제 대상-속성 결합과 다른 결합을 지시하는 주-술 결합은 전부 거짓이 되지만, 이 조건과 무관하고 해당 대상을 공유하지 않는 명제들은 지금 이 참-거짓 영역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