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1 미예화 보편자들?
만일 우리가 개별자들은 다름 아닌 보편자들의 다발들이라는 아이디어를 폐기하지만 여전히 보편자를 인지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개별자들, 개별발생자들(tokens)이 보편자들을 예화한다는 전통적 관점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 발생자들은 속성들을 지니고 상호관계를 맺는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안착될 필요가 있는 상당수의 논쟁적인 질문들이 있다. 한 가지 핵심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보편자들에 대한 예화 원리를 수용해야 하는가, 혹은 수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즉, 우리는 모든 보편자마다 예화된다는 점을 요구해야 하는가, 혹은 그리하지 말아야 하는가? 각 속성 보편자에 대해 그것은 일부 개별자의 속성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성립해야만 하는가? 각 관계 보편자에 대해 해당 관계가 그 사이에서 성립하는 개별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성립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확실히 모든 개별자 각각이 지금 예화되어야 하리라고 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특정 개별자가 지금 예화되지 않았더라도, 과거에 예화되었다면, 혹은 미래에 예화될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예화의 원리는 모든 시간을 아우르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형식으로라도 해당 원리를 유지해야 할까?
이것은 중대한 갈림길이다. 우리는 미예화된 보편자들이 있다는 관점을 플라톤주의자 관점으로 부를 수 있다. 그 관점은 플라톤에 의해 주창된 관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또한 명백하게 보편자들을 도입한 첫 번째 철학자였기도 하다. (그는 형상들 혹은 이데아들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이데아들에 심리학적 요소는 전혀 없었다.)
일단 당신이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취하면, 당신은 그것들을 놓기 위한 특별한 장소, 철학자들이 종종 말하는 "플라톤적 천상계"가 필요하다. 그것들은 시공간으로 된 일상세계에서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예화된 보편자도 미예화되었을지도 몰랐을 것으로 보이기에, 예를 들어, 해당 속성을 지녔던 것이 과거, 현재, 혹은 미래 언제든 아무것도 있지 않았을지도 몰랐기에, 만일 미예화된 보편자들이 플라톤적 천상계에 있다면, 모든 보편자들을 저 천상계에 위치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가 두 영역들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보편자들의 영역과 개별자들의 영역으로, 후자가 시공간 내의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런 보편자들은 종종 초월적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런 종류의 관점은 명백히 러셀에 의해 그의 초창기, 그가 보편자 다발이라는 관점을 채택하기 전에 주창되었던 바 있다.) 그래서 예화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가 된다. 예화는 보편자들과 개별자들 사이에서 영역들을 가로지르는 관계이다. 이런 종류의 이론에 대해 스콜라 학자들이 사용한 라틴어 명찰은 [333] universalia ante res, "사물 이전의 보편자들"이다. 그런 관점은 자연주의자들에게, 즉, 시공간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용불가능하다. 이 점은 어째서 경험주의자들, 자연주의에 공감하는 경향이 있는 그들이 종종 보편자들을 거부하는지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보편자들의 분리-영역 이론은 개별자들에 대한 층케잌 관점에 반대해 덩어리 관점을 허용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일은 흥미롭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물이 속성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이 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관계, 즉 예화 관계 소유, 또 다른 영역 내의 특정 보편자들 또는 형상들에 대한 그러한 관계의 소유이다. 사물 자체는 덩어리같은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물이 또한 속성 구조를 부여받을 수 있으리란 것도 참이다. 하지만 그럼 이러한 구조를 구축하는 속성들은 보편자들일 수 없고 개별자들이어야만 한다. 그 속성들은 개별양태자들(tropes)이어야 한다. 개별자들은 속성 개별양태자들을 포함하지만, 이러한 속성 개별양태자들은 보편자들의 영역 내에서 특정 속성에 대한 그것들의 예화에 의해 자연 종들에 놓이게 된다. 어쨌든, 개별양태자들을 추가로 가져오는 일 없이는, 플라톤적 보편자 이론들은 개별자들을 층케익보다는 덩어리 같은 것으로 취급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것이 플라톤적 이론들에 반대하는 논증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그러길 원한다면, 보편자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입장에 놓인다. 우리는 라틴어 명찰 universalia in rebus, "사물들 안의 보편자들"을 가진 관점을 채택할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의 속성들을 사물의 구성요소들로 생각할 수 있고 그 속성들을 보편자들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었을지도 모른다. (학자들은 의견을 달리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유명론자로 만든다. 일부는 그가 지상세계적 보편자들을 믿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그는 플라톤의 이(異)세계적 보편자들을 비판했다.) Universalia in rebus는 물론 층케익 관점이고, 보편자로서의 속성들을 사물들의 내적 구조의 일부로서 취하는 관점이다. (관계들은 universalia inter res, "사물들 사이의 보편자들"일 것이다.)
이 입장에는 물론 보편자들의 문제에 대한 다른 모든 해결책들과 마찬가지로 난점들이 있고,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이 있다. 그 한 가지는 아마도 플라톤을 포함해 여러 철학자들을 걱정시켜왔던 바, 이 관점에서 우리가 같은 사물의 다중적 위치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a가 F라고 그리고 b 또한 F라고, F는 속성 보편자라고 가정해 보자. 똑같은 개체가 두 장소에서 두 사물 구조의 일부여야 한다. 어떻게 그 보편자가 한 번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이후에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마무리를 위해, 나는 세 번째 스콜라식 명찰을 언급할 것이다. universalia post res, "사물들 이후의 보편자들." 이것은 유명론자 이론들에 적용되었다. 그것은 술어 혹은 개념 유명론과 가장 잘 맞는데, 거기에서 속성들 등은 이를 테면 분류를 수행하는 정신에 의해 창조된다. 우리의 술어들이나 개념들에 의해 사물들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허나 우리의 현재 작업은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동의해야 하는지 동의하지 말아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구성될 핵심은 그 증명 책임이 확고하게 플라톤주의자들 측에 놓인다는 것이다. 시공간 세계가 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자들의 독립된 영역은 순전히 가설 혹은 공준이다. 만일 한 공준이 막대한 설명적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은 훌륭한 공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준은 그 자신을 입증해야 한다. 어째서 우리는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공준으로 상정해야 하는가?
여러 철학자들을 움직여온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일반 명사의 의미로부터의 논증이라 부를 어떤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한다. "우리 통상 그렇게 진행하듯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사물들의 모든 집단 각각에 대해 단일한 본질적 본성 혹은 형상의 현존을 가정하여 시작할까?"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노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일상적인 이름들, 즉, 고유 명사들은 그 이름의 담지자를 가진다. 만일 우리가 일반 명사로 넘어가면, '말'이나 '삼각형' 같이 여러 상이한 사물들에 적용되는 단어들로 넘어가면, 우리는 고유명사의 담지자가 그 고유명사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은 보편적인 종류로서 해당 일반 명사에 대해 관계를 맺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해당 일반 명사의 의미를 구성하거나 혹은 이에 상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마성(馬性, horseness)이나 삼각형성(-性, triangularity)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아무런 개별자에게도 전혀 적용되지 않는 일반 명사, 예를 들어 '유니콘' 같은 단어를 고려해 보자. 그것은 완벽하게 유의미하다. 그리고 만일 그 단어가 유의미하다면, 세상에 그 단어를 구성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하지 않는가? 그래서 미예화된 보편자들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로부터 논증"은 지극히 불량한 논증이다. (소크라테스에게 공정하도록 말하자면, 그가 이 논증을 사용하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다른 철학자들은 종종 자각하지 못한 채로 사용해 왔다.) 해당 논증은 일반 명사가 의미를 가지는 모든 경우 각각에서, 세계 내에 그 의미를 구성하거나 이에 상응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334] 길버트 라일은 이에 대해 'Fido'-Fido 오류라고 말했다. Fido는 'Fido'라는 단어에 상응하지만, 일반 명사에 상응하는 단일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로부터 논증을 따라가면 보편자들에 대한 매우 난잡한 이론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만일 그 논증이 맞다면, 우리는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각각의 일반 명사에 대해,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안다. 이는 술어들과 속성들을 매우 깔끔한 방식으로 줄세우지만, 그것은 우리가 매우 의심스럽게 보아야 할 방식이다. 존재하는 보편자들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은 쉬운 일인가?
플라톤은 그를 미예화된보편자들로 이끈 또 다른 사유 노선을 가졌다. 이는 일상세계의 사물들이 정확한 표준들에 도달하는 일에 명백히 실패한다는 것이다. 세계 내의 어떤 것도 완벽하게 직선이거나 원이지는 않지만, 기하학에서 우리는 완벽한 직선들이나 완벽한 원들의 속성을 논한다. 다시,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불변하지는 않는다. 또, 그 어떤 행동도 완벽하게 정의롭지는 않다는 것도 맞는 말일 것이다. 확실히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덕스럽지는 못하며, 어떤 국가도 완벽하게 정의롭지는 않다. 하지만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논의에서 (예를 들어, 『국가』에서) 우리는 덕과 정의의 본성을 논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계를 특정 표준들에 못 미치는 것으로서 감지한다. 이는 만일, 우리가 알든 알지 못하든, 일상적 사물들을 형상들에, 그 일상적 사물들이 결코 완전히 예화할 수 없는 형상들에 비교하고 있다면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누군가로 하여금 최상위 정도로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 예화의 정도라는 어려운 개념으로 이끌 수 있고, 아마 플라톤을 그렇게 이끌었을 것이다.)
이 논증이 플라톤을 그가 모든 경우에 향하고자 바란 그곳으로 완전히 이끌지는 못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기하학을 고려해 보자. 기하학에서 누군가는 예컨데 두 교차하는 원들의 속성들을 고찰하고 싶을 수 있다. 이 원들은 완벽하게 원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물론, 원에 대해 오직 단 하나의 형상만이 있다. 그럼 이 두 완전한 원들은 무엇인가? 플라톤은 보이기로는 그가 수학적인 것들이 부르는 무언가를 도입해야 했다. 수학적인 형상들이 그러하듯 그 수학적인 것들은 완벽했지만 그래서 일상적인 것들과는 닮지 않았다. 하지만 형상들과 달리, 똑같은 유형의 개별발생자들이 여럿 있을 수 있고, 이 점에서 수학적인 것들은 일상적인 것들을 닮았다. 수학적인 것들은 완벽한 개별자들이긴 하지만, 개별자들이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비록 표준들에 크게 미달한다는 것이 플라톤에게 수학적인 것들에 대한 논증을 제공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형상들을 위한 어떤 논증이기나 한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상적인 표준들이 단순히 우리가 그에 대해 그저 생각할 따름인 사물들일 수는 없는가?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알고서 사유를 형성할 수 있다. 이상적 표준들의 경우 어떤 것도 표준에 미칠 수 없지만, 상이한 정도에서 표준에 근접하는 일상적인 사물들로부터 추론함으로써, 우리는 표준에 도달하는 어떤 것에 대한 사유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런 작업은 유용한 것으로 드러난다. 어째서 그런 표준들에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부여하는가? 그러한 표준들은 유용한 허구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의 문제로서, 기하학적 사례에서 완벽한 직선이나 완벽한 원인 대상이라는 그런 개념들은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획득될지도 모른다. 그야 설령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무언가가 완전히 직선으로 혹은 완벽하게 원으로 보일 수 없겠는가?
미예화된 보편자들이라는 이론을 유지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사항은 만일 보편자가 예화될 것이리라는 점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것으로 보편자가 존재하기에는 충분한 것이라는 널리 퍼진 생각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나는 논의 과정에서 이 생각이 주장된 보편자가 현실의 예화들을 지닐 것이라는 점이 경험적으로 가능하다면(즉, 자연 법칙과 양립 가능하다면) 특히나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벽지의 아주 복잡한 무늬를 기술하지만 한 번도 해당 무늬를 그리거나 그 벽지를 제작하지는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우주 역사 전체에서 다른 그 누구도 그리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자연 법칙 내에는 해당 무늬가 예화를 가지는 것을, 해당 유형의 개별발생자를 가지는 것을 금지한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항 보편자, 복잡하고 구조적인 보편자인 건 물론이지만, 그렇더라도 보편자이긴 하지 않은가?
분명 이런 식으로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서는 해당 논증이 강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개별자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날 프랑스가 군주제일 것이며 그러므로 현재 프랑스의 왕이 존재한다는 것이, 프랑스 왕족에게는 불행스럽게도, 그가 예화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경험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어째서 보편자들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로 주장하는가? 철학자들이 보편자들은 특별해서, 그저 우연적이기만 한 개별 사물들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나는 이것이 아마도 플라톤에게서 상속받은 편견보다 전혀 나을 바 없다고 생각한다.
미예화된 보편자들의 경험적 가능성으로부터 그 보편자들에 대한 논증에는 내가 좀 더 무게를 두는 미묘한 한 가지 변주가 있다. [335] 그 변주는 미카엘 툴리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그 변주는 자연 법칙의 본성에 관한 심오한 고찰들에 의거하는 것으로, 이는 여기에서 논의할 수가 없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해당 논증은 그 법칙이 매우 특수한 구조를 가진 것으로 밝혀진다는 점에 근거하는데, 그런 구조를 실제로 가질 것 같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그 논증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은 미예화된 보편자들이 실제적이라기 보다는 찰리 가능한 것들이라는 점인 듯하다. 그리고 이 결론조차 회피가능할지도 모른다.
수학, 그리고 수학에 의해 공준된 속성들과 관계들로부터의 고찰들은 미예화된 보편자들에 대한 인정을 강요한다고도 생각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보편자들에 대한 그 이론을 수학과 통합시킨다는 그 전체 기획은, 중요하긴 하지만, 이 자리에서 감당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가능성의 본성에 관한 책에서 나는 그 기획이 어찌 되어야 하는지 내가 생각하는 방식을 다소 대략적으로 윤곽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부터 나는 예화 원리를 참이라 상정할 것이다. 이미 주의를 주었듯, 이는 두-영역 원리를 폐기하도록 강제하진 않는다. 또한 이는 보편자들을 일상적인 사물들의 자리로 끌어내리도록 강제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런 일들을 허용해주긴 하고, 그렇게 하는 편이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거부하고서 그 이론을 전개시키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보인다.
2 선언, 부정, 그리고 연언 보편자들
논의의 단순성을 위해, 여기에서 나는 속성 보편자들만 고려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여 구성될 지점들은 관계들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미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보편자들의 잠재적 집합은 우리가 납득할 만한 이론을 얻고자 한다면 대단히 많은 부분을 덜어낼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선언적 속성 보편자들을 거부할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나는 선언적 속성을 (속성) 보편자들의 선언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특정 전하와 특정 질량이 보편자라 가정해 보자. 그럼 전하 C를 가지거나 질량 M을 가짐은 (C와 M은 확정적, 즉, 정의된 값들에 대한 기호이다) 선언 속성의 예시일 것이다. 왜 그것이 보편자가 아니겠나? 두 대상들을 고려해 보자. 한쪽은 전하 C를 갖지만 질량 M은 결여한다. 다른 쪽은 전하 C를 결여하지만 질량 M은 가진다. 그럼 그 대상들은 전하 C를 가지거나 질량 M을 가짐이라는 선언 속성을 가진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어떤 진지한 의미에서도 그 대상들이 그리하여 동일한 어떤 것을 가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렇지만 보편자의 요점은 그 보편자의 상이한 예화들에서 동일하리란 것이다.
보편자들의 선언이 보편자라는 것을 부정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보편자들과 인과성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모종의 연관이 있다. 만일 한 사물이 특정 보편자를 예화한다면, 그 예화 덕분에, 해당 사물은 특정 방식으로 작용할 능력을 가진다. 예를 들어, 만일 한 사물이 특정 질량을 지닌다면, 그 사물은 천칭 접시나 저울에 특정 방식으로 작용할 능력을 갖는다. 더욱이, 상이한 보편자들은 상이한 능력들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전하와 질량은 상이한 방식으로 현현한다. 나는 보편자와 능력 사이의 연관이 필연적인지 의심하지만, 사실인 것으로는 보인다. 더구나, 만일 추상적으로는 가능해 보이듯, 상이한 두 보편자가 정확히 똑같은 능력을 부여했다면, 어떻게 그것들이 상이한 보편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만일 그것들이 우리의 뇌를 포함한 모든 기관들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을 오직 하나의 보편자로 판단하지 않을까?
이제 한 사물이 전하 C를 가지지만 질량 M을 결여한다고 가정해 보자. 전하 C 덕분에, 그 사물은 작용할 특정한 능력을 가진다. 예를 들어, 그것은 같은 전하를 가진 사물들을 밀어낸다. C 또는 M이라는 선언 속성의 소유는 이 능력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이는 C는 진정한 보편자인 반면, C 또는 M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선언 보편자들을 거부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유사한 상황이 부정 보편자들에 반대하여서도 견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속성의 결여 혹은 부재는 속성이 아니다. 만일 전하 C를 가진다는 것이 보편자의 예화라면, C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보편자의 예화가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다시금 동일성에 호소할지도 모른다. 전하 C를 결여하는 모든 것 각각에 공통되는 어떤 것, 동일한 어떤 것이 정말로 있는가? 물론, 마침 전하 C의 결여와 동연인 어떤 보편 속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여 자체는 전하 C를 결여하는 사물 각각에서 발견되는 요인일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 인과적 고려들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결여나 부재가 뭐라도 인과작용을 한다는 것은 이상한 생각이다. 사물이 긍정적 요인만으로 작용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역시 보편자의 부재가 보편자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336] 다른 경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를 어떤 언어적 증거가 있다는 것은 참이다. 우리는 "물의 결여가 그의 죽음을 야기했다" 같은 것을 말한다. 표면적으로, 해당 진술은 물의 결여가 생명의 부재를 야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표현방식들을 우리 스스로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카엘 툴리는 우리가 "독의 결여가 우리로 하여금 살아 남도록 야기한다"라고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만일 첫 번째 진술을 이해하는 표면적 방식이 옳다면, 두 번째 진술도 같은 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참이라고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특정한 반사실적 진술들은 두 경우 모두에서 참이다. 만일 그가 물을 가졌었더라면,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독을 취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죽어있었을 것이다. 이런 진술들은 인과적 참들이다. 그러나 그 진술들은 우리에게 두 경우에 작동하는 실제 인과적 요인들에 관해서는 별로 말해주는 바가 없다. 내 생각에 우리는 이러한 실제 인과적 요인들이 순전히 긍정적인 용어들로 표명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보편자들의 연언들은 (전하 C와 질량 M을 둘 다 가짐) 선언과 부정 보편자들에 반대하여 조준된 두 비판들을 피해낸다는 점에 주의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연언과 관련하여 우리는 동일성을 얻는다. 요소들의 정확히 똑같은 연언이 각 예화에 현전한다. 인과에 관하여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만일 한 사물이 그 연언을 예화한다면, 그 사물은 그 결과 특정 능력들을 가질 것이다. 이 능력들은 그 사물이 해당 연언 요소들 중 하나만 가졌더라면 갖게 되었을 능력들과는 다를 것이다. 해당 연언은 각 연언요소가 따로 예화되었더라면 각 속성이 행했을 바의 총합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말하듯이, 동반상승효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효과는 각각의 원인이 따로 작용하는 것의 총합 이상의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언 보편자들에 부과되어야 하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어떤 사물은 (과거, 현재, 미래) 실제로 그 속성들 모두를 동시에 가져야만 한다. 물론 이는 단순히 연어 보편자들에 적용된 예화 원리일 따름이다.
3 술어들과 보편자들
미예화된 보편자들에 관하여 이야기되어온 바, 또한 보편자들의 선언과 부정에 관해 이야기된 바는 매우 중요한 점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술어들(언어적 개체들)로부터 보편자들로 향하는 그 어떤 자동적인 경로도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하 C를 지니거나 질량 M을 지님"이란 표현은 완벽하게 훌륭한 술어이다. 그 술어는 수없이 많은 대상들에 적용될 수 있고 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 이는 이러한 술어에 상응하는 보편자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에 대한 그의 논의를 통해 보편자 문제에 유명한 기여를 한 바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반-형이상학자였고, 그의 반박은 보편자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차라리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가족 유사성에 관해 말했던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해당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했던 바의 실질적인 교훈은 단지 술어들과 보편자들은 그 어떤 단순한 방식으로도 줄세워지지 않는다는 것뿐이라 생각한다.
그의 『철학 탐구』에서 그는 게임이라는 개념을 고려했다. 그 개념에 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66. 예를 들어 우리가 "게임"이라 부르는 절차들을 고려해 보라. 나는 보드게임들, 카드게임들, 공놀이들, 올림픽 경기들, 기타 등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모두에 공통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공통된 것이 있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이 '게임들'이라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는 말하지 말자. 단지 그 모두에 어떤 것이든 공통된 것이 있는지를 바라보라. 만일 당신이 그것들을 살펴본다면 당신은 그 모두에 공통된 어떤 것을 보지는 못할 테지만, 유사성들, 관계들, 거기에 더해 그것들의 일련의 총체를 보게 될 것이다. 반복하건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보라. 예를 들어 다양한 관계들을 가진 보드게임들을 보라. 이제 카드게임들로 넘어가 보자. 여기에서 당신은 첫 번째 집단과 상응하는 다양한 것들을 찾을 테지만, 다수의 공통 특징들은 탈락할 것이고, 또 다른 것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공놀이로 넘어가면, 상당수의 공통된 것들이 남겠지만, 또 상당수는 사라질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즐거운가"? 체스를 오목과 비교해 보자. 항상 승패가 있다거나, 선수들 사이에 경쟁이 있나? 참을성을 갖고 생각해 보라. 공놀이에는 승패가 있다. 하지만 아이가 벽에 공을 던지고 그걸 다시 받을 때, 그 특성은 사라진다. 기술과 운이 차지하는 부분을 보라. 그리고 체스 기술과 테니스 기술의 차이를 보라. 이제 수건돌리기 같은 게임들을 생각해 보라. 여기에는 유희 요소가 있지만, 얼마나 많은 다른 특징적인 속성들이 사라졌는가? 계속해서 우리는 수 많은 다른 게임 집단들을 같은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유사성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지 볼 수 있다.
[337] 이 고찰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중첩되고 종횡무진 교차하는 유사성들의 복잡한 관계망을 본다. 때로는 전반적인 유사성들을, 또 때로는 세부사항의 유사성들을 본다.
67. 나는 이러한 유사성들을 특징짓기 위한 표현으로 "가족 유사성"보다 더 나은 표현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다양한 유사함들, 즉, 체격, 생김새, 눈동자의 색, 걸음걸이, 기질 등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중첩되고 또 교차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게임들"이 가족군을 형성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구절이다.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게임이란 개념 외에도 철학자들에 의해 논의되는 여러 주요 개념들을 포함하는 온갖 종류의 개념들에 적용시켰다. 그러나 보편자를 믿는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이 보편자들에 관하여 보여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게임성이라는 그 어떤 보편자도 없다는 데에 동의하도록 하자. 그러나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논하는 이 "중첩되고 교차하는 유사성들의 복잡한 연결망"의 경우는 어떠한가? 현실주의자가 할 일이란 이러한 유사성들 각각을 공통 속성들로 분석하는 것이다. 그 유사성 분석은 유명론자와 경쟁하는 분석이긴 하겠지만 어렵거나 낯선 발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 집합 총체를 관통하고 그 모두를 게임으로 만들어주는 그 어떤 속성도 없을 것이다. 지극히 거칠게 단순화시킨 개괄을 제시하자면, 그 상황은 아마 이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 개별자들 | a | b | c | d | e |
| 개별자들의 속성들 | FGHJ | GHJK | HJKL | JKLM | KLMN |
여기에서 F부터 M까지는 진정한 속성 보편자들로 상정되고, "게임"이란 술어는 이러한 속성들의 덕택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상정된다. 반면 개별자들의 집합 {a...e}, 게임의 모든 개별발생자들의 집합은 비트겐슈타인식의 의미에서 가족군이다. 그렇더라도, 여기에서 보편자들에 관한 실재론과 완벽히 양립가능한 그러한 가족군들에 대한 설명을 개괄하였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언급들은 커다란 의문을 야기시킨다. 어떻게 무언가가 진정한 속성이나 관계의 현전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여부를 결정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게임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보라" 라고 말한다. 최소한 일반 지침으로서는 그것은 너무 심하게 단순해 보인다.
나는 참된 보편자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그 어떤 무오류의 방식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미론적 고찰들에 기대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1장에서 말했듯, 의미론적 자료들로부터 특정한 보편자들을 주장하는, 술어들로부터 그 술어에 상응하는 보편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낙관적이고 비경험주의적인 방식으로 주장한다. 나는 그들을 선험적 실재론자들이라 부른다. 내 생각엔 후험적 실재론이 더 낫다. 어떤 보편자들이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가진 최선의 길잡이는 총체로서의 과학이다.
나 자신으로서는, 이 점이 물리학을 특별한 지위에 놓는다고 믿는다. 물리학이야말로 근본 과학이라 생각할 (과학적, 경험적, 후험적) 이유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게 맞다면, 질량, 전하, 연장, 지속, 시공간 간격 같은 속성들과 물리학에 의해 예상되는 여타 속성들은 참된 단항 보편자들일지도 모른다. (그 대부분은 양의 정도들이다. 양들은 추가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들을 야기한다.) 시공간적 그리고 인과적 관계들은 아마 참된 다항 보편자들일 것이다.
만일 이것이 맞다면, 일상적 유형들, 붉음 유형, 말 유형, 일반적으로, 세계에 대한 현시적 상의 유형들은 실재성의 예비적, 임시변통의 분류들로 드러날 것이다. 그것들 대부분이 거짓은 아니지만 임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 중 다수는 게임들이 그리 드러나듯 가족군들일 것이다. 한 유형에는 보편자들의 한 가족군 전체가 상응하되 항상 매우 밀접한 가족군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일상적 유형들이 실재성이라는 짐승을 그 참된 마디들을 따라 잘라내는 경우조차, 그 유형들은 여전히 사물들이 그것들로 있는 바에 관해 그 마디들을 드러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편자들에 대한 그 어떤 동일화도 사변적인 것으로 남고 만다는 점을 강저해 두도록 하자. 나는 방금 말하면서 보편자에 대한 철학을 물리주의와 결합하고자 시도했다.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생각들을 가질지도 모른다.
4 사태(States of Affairs)
우리가 검토 중인 보편자 이론에서, 개별자들은 속성들을 예화하고, 사태들은 (이항) 관계들을, 삼항 개별자들은 (삼항) 관계들을, 그렇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예화를 수행한다. F를 보편자로 하여, a is F, 혹은 R을 보편자로 하여, a has R to b라고 가정해 보자.
a의 F로 있음과 a의 b에 대한 R을 가짐을 우리의 존재론 내 항목들로 인지할 것이 요청되는 것으로 보인다. [338]
왜 우리는 사태를 인지해야 하는가? 왜 단순히 개별자들, 보편자들 (속성들과 관계들로 분해되는), 그리고 아마도 예화를 인지하지 않는가? 그 답은 다음의 지점을 고찰함으로써 드러난다. 만일 a is F라면, 그것은 a가 존재한다는 것과 보편자 F가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지만, a 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면, 그리고 F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면,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a is F가 사실이기에는 부족하다 (F는 예화되지만, 오직 다른 어딘가에서만 예화된다). a의 F로 있음은 a와 F 그 이상의 어떤 것인가를 포함한다. a와 F의 합에 예화의 근본적 결속이나 연쇄를 단순히 추가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a, 예화, 그리고 F의 현존은 a의 F로 있음에 상당하지 못한다. a의 F로 있음은 그 이상의 무언가여야만 하며, 이것이 사태이다.
이 논증은 C. B. Martin에 따르는, 내가 진리구성자(the truth-maker) 원리라고 부르는 일반원리에 의존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최소한 모든 우연적 참에 대해 (그리고 아마도 모든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참에 대해서) 그것을 참으로 만드는 어떤 것이 세계 내에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어떤 것"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광범위하게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구성"은 물론 인과성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내에서 그것 덕분에 참이 참인 바의 것이다. 구스타프 베르그만과 그 추종자들은 진리들의 "존재론적 근거"에 대해 말해왔고, 나는, 나의 표현으로, 이것이 참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세계 내의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은 상이한 진리들이 어쩌면 모두 같은 진리구성자 또는 존재론적 근거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사물이 채색되어 있다, 붉다, 그리고 진홍색이다라는 것은 모두 그 사물이 특정 색조를 지닌다는 것에 의해 참인 것으로 구성된다.
진리구성자 원리는 내가 보기에는 한 차례 주의를 기울이고 나면 꽤나 명백해 보이는 것이지만, 그 이상 어떻게 그 원리를 위한 논증을 펼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주의해둘 것은 완전히 진지하게 여기에서 우리가 개입해 온 그런 종류의 형이상학적 탐구를 수행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원리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진리구성자 원리를 받아들이면 누군가 참인 것으로 취하는 진술들의 존재론적 함축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술어들이 진지하게 고려되어서는 안된다는 콰인의 관점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특정 표면이 붉다고 단언하는 일과 푸르다고 단언하는 일 사이의 차이를 고려해 보라. 진리-구성자 원리의 지지자는 존재론적 근거, 세계 내의 차이가 해당 표면에 적용되는 술어 '붉다'와 또한 그 표면에 적용되는 술어 '푸르다'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 존재론적 근거가 무엇인지는 추가적인 문제이다. 해당 원리로부터 보편자와 사태로 이어지는 그 어떤 지름길도 없다.
이제 사태 쪽으로 돌아가서, 설령 진리구성자 원리가 거부된다 할지라도 사태라는 것을 수용해야 할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첫째로, 우리는 사태에 관해 무언가 추가로 말하기 위한 준비로서, 사태를 명백하게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일반적으로는 지칭될 수 있는 것은 존재한다는 점이 받아들여진다. 두 번째로, 사태들은 인과관계의 항들로서 그럴 듯한 후보들이다. a의 F로 있음이라는 사태는 b의 G로 있음에 대한 원인일 수 있다. 셋째로, 이후 8장에서 보게 될 것과 같이, 사태들은 보편자 이론에서 상당한 부담을 주는 문제의 해결, 속성 보편자들의 다중 위치와 관계 보편자들의 비위치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집합 유명론자나 유사물 유명론자에 의해서는 사태가 요청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 각각의 이론에 중요한 경제성이라는 점을 보는 일은 흥미롭다. 집합 유명론자는 a의 F로 있음을 a가 {a, b, c, ...}를 포함하는 한 집합의 (또는 자연 종의) 원소로 있음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단지 a와 해당 집합만을 가진다. 집합-원소 관계는 내재적이며, 그 용어들의 본성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는 그 관계를 용어들에 추가되는 어떤 것으로 인지할 필요가 없다. 해당 용어들 그 자체가 충분한 진리-구성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유사물 유명론자는 a의 F로 있음을 a와, 이를 테면, 적절한 전형 F들 사이에서 견지되는 유사성 관계들의 문제로 분석한다. 그러나 해당 관계도 역시 내재적이고, 내가 a의 개별화된 본성이라 부르는 어떤 것과 전형이 되는 대상들에 의해 규정된다. 다시 한 번, 사태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술어 유명론자는 사태를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a의 F로 있음은 a가 술어 F 하에 분류됨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어떻게 하위 분류된다는 것이 단순히 a와 언어적 대상 F에 의해서 그것만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하위 분류됨은 외재적 관계이다.)
이제 매우 중요한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태는 어떤 상당히 놀라운 성격들을 가진다. a, b, F, R, 등등을 사태의 구성요소들로 부르기로 하자. [339] 정확히 같은 구성요소들을 지니더라도 상이한 두 사태들이 있는 일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간단한 예시는 이런 것이다. R이 비대칭적 관계 (예를 들어, 사랑한다는 것) 라고 해 보자. 우연히 a는 b에 대해 R을 지니고 b는 a에 대해 R을 지니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두 구별되는 사태들이 존재한다. a의 b에 대한 R을 가짐, 그리고 b의 a에 대해 R을 가짐 (a가 b를 사랑함과 b가 a를 사랑함). 나아가, 이러한 사태들은 전적으로 구별되는데, 어느 한쪽 사태가 존재하는 반면 다른 한쪽 사태는 확보되지 못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두 사태는 정확히 같은 구성요소들을 지닌다.
당신은 관계만큼이나 속성으로도 똑같은 현상을 확보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그리 가정하는 것이 옳은데, 사태들의 연언 자체가 사태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1) a의 F로 있음과 b의 G로 있음을, 그리고 (2) a의 G로 있음과 b의 F로 있음을 고려해 보자. 전적으로 구별되는 두 사태들은 그러나 정확히 똑같은 구성요소들을 지닌다.
이 지점에서, 사태들은 단순히 보편자들을 인지하는 이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속성과 관계를, 그것들을 보편자로서든 개별자로서든, 인지하는 어떤 철학자에 의해서든 또한 요청될 것이라는 점은 알아둘 만하다. [...]
a가 R1을 b에 대해 지닌다고, 그런데 R1은 개별자이고, 그러나 비대칭적이며, 관계라고 가정해 보자. 만일 b가 '똑같은' 관계를 a에 대해 지닌다면, 트로프(개별속성) 철학에 근거하여, 우리는 b가 a에 대한 R2를 가짐을 갖게 된다. 두 사태는 (중첩되긴 하지만) 상이한 구성요소들을 가진다. a와 b 사이에 견지되는 사랑함은 b와 a 사이에서 견지되는 사랑함과 다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가 b에 대해 R1을 가진다는 것은 구성요소 a, R1, b의 존재를 함축하지만, 이러한 구성요소들의 존재는 a가 b에 대해 R1을 가진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태들은 여전히 그 구성요소들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인다.
트로프를 가지고, 당신은 결코 완벽히 똑같은 구성요소들로 구축된 상이한 사태들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구성요소들의 단 한 집합만 주어지더라도, 이러한 구성요소들만을 가지는 사태들이 둘 이상인 것은 가능하다. a, 트로프 R1, b로부터, 예를 들어, 우리는 a가 b에 대해 R1을 가진다는 것이나 혹은 b가 a에 대해 R1을 가진다는 것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로프 철학이 사태를 공준해야 하는 상황을 회피할 방법은 있다. 하지만 지금 그 방법은 제쳐두기로 하자.
나는 사태의 구성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우리가 사태의 부분들로서도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되리라 생각한다. 논리학자들은 전체와 부분이란 개념에 어느 정도 주의를 기울여왔다. 그들은 이러한 개념들을 취급하기 위한 형식적 미적분을 고안해냈는데, 때로는 개체들에 대한 미적분으로 불리거나, 더 나은 이름으로는 부분학(mereology)이라 불린다 (그리스어 meros는 부분을 의미한다.). 이 작업에 도움을 준 철학자로 넬슨 굿맨이 있는데, 그의 책 『현상의 구조』에는 부분학에 대한 설명이 제시된다. 부분학적 원칙으로서 지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만일 다수의 사물들이 있다면, 그리고 사물들이 합을, 즉, 그 사물들이 부분들이 되는 전체를 가진다면, 사물들은 단지 하나의 합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는 만일 사물들이 합을 가진다면, 그로 인해 다수의 사물들이 항상 합을 가지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2의 제곱근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합을 가지는가? 철학자들은 어떤 식으로 부분학이 허용되어야 할지, 즉, 당신이 합산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는지에 관해, 만일 한계들이 있다면, 그 한계들이 어느 지점에 놓이는지에 대해 의견을 달리 한다. 나 자신은 합산에 대한 전면적인 허용을 수용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모두에 의해 동의되는 어떤 것이다. 사물들이 합산될 수 있는 경우, 사물들에 대한 각각의 취합에 대해 단지 하나의 합산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방금 보았듯 사태들의 완전한 구성요소들은 다른 사태의 완전한 구성요소일 능력이 있고 실제로 그러할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구성요소들은 사태에 대해 그 전체의 부분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복합적인 보편자들은 부분들이라기보다는 구성요소들을 가진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어쨌든 우리가 예화의 원리를 수용한다면 그렇다. 예를 들어 연언 보편자를 고려해 보자. 만일 P와 Q로 있음이 연언 보편자라면, P이며 또한 Q이기도 한 x인 그러한 개별자 x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x is P and x is Q 형식의 사태가 최소한 하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연언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특정 종류의 사태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P와 Q가 연언 보편자의 부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나 자신도 과거에는 그렇게 말한 바 있다.
복합적 보편자의 매우 중요한 유형은 구조적 속성이다. 구조적 속성은 특정 규칙성(pattern)을 예화하는 사물, 깃발 같은 것을 포함한다. 구조적 속성을 예화하는 사물의 상이한 부분들(부분학적 부분들)은 특정 속성들을 지닐 것이다. 해당 구조적 속성이 관계들을 포함한다면, 깃발이 그러하듯, 이 부분들의 일부 혹은 전부는 다양한 방식들에서 관계를 맺을 것이다. [340] 사태에 호소해야만 한다는 점은 알기 쉽다. 만일 a가 P를 가지고, b가 Q를 가지며, a가 b에 대해 R을 가진다면, 대상 [a + b]는 축약된 방식 P-R-Q라는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특히 중요한 장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짚을 점이 있다. 사태들이 만일 존재한다면 비-부분학적 형태의 구성을 지닌다는 사실은 개별자들이 보편자들의 다발에 다름 아니라는 관점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점이 마크 존스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 이해한다.) 우리는 상이한 사태들이 정확히 같은 구성요소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a가 b를 사랑함, b가 a를 사랑함). 우리는 앞서 [이 편집본에서는 생략됨] 다발 이론에 반대하여 정확히 같은 보편자들을 포함하는 두 다발들은 불가능하다고 논증한 바 있다. 그 다발들은 똑같은 다발일 것이다. 하지만, 다발 이론의 문제를 독립적으로 고려한다면, 왜 두 개별자들이 정확하게 닮은 것이 아니어야 하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럴 법하게 우리가 보편자들을 사태로서 다발로 묶는 일을 취급한다고 가정하자. 왜 정확히 똑같은 보편자들이 상이한 방식들로 다발로 묶이지 않아야 하겠는가?
이에 답하자면, 나는 이것이 생각 가능한 것으로서 허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사물들에 대한 상이한 다발묶기에 대해 허용되는 도식을 다발 이론가들이 고안해내는지 여부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는 현실의 다발 이론들이 전개되어 온 과정에서는 제공된 바 없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이와 같은 경로를 취하기를 바란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의 이론을 발전시키고자 시도할 책임은 다발 이론가들에게 있는 것이다.
5 사태들의 세계?
앞선 장에서 개별자들과 보편자들 양자 모두를 인정하는 철학은 사태들(사실들), 개별자들과 보편자들을 (부분들로서가 아니라) 요소들로서 가지는 그러한 사태들을 허용해야 한다는 점이 주장되었다. 사실의 문제로, 우리는 속성들과 개별자들을 어쨌든, 개별자들로서라도, 도입하는 일은 명백히 사태들을 포함하리란 점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관심사는 보편자들에 관한 것이다.
이제 제안될 바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사태들의 세계로, 오직 사태들 내에서 현존을 지니는 개별자들과 보편자들을 동반하는 그러한 세계로 생각해야 하리란 것이다. 우리는 이미 보편자들에 대한 예화 원리에 대해 주장한 바 있다. 만일 이것이 참인 원리라면, 특정 사태들 내에 존재하는 동일한 요소로서 보편자를 간주할 길이 열린다. 사태 외부에 존재했던 개별자는 어떤 속성이나 관계도 입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벌거벗은 개별자라 불릴지도 모른다. 만일 세계가 사태들의 세계일 것이라면, 우리는 예화 원리에 벌거벗은 개별자 배제 원리를 추가해야만 한다.
이 두 번째 원리는 충분히 설득력있어 보인다. 보편자이론에서, 사물에 그 본성, 유, 혹은 종류를 부여하는 것은 보편자들이다. 벌거벗은 개별자는 어떤 보편자도 예화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런 본성도 갖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유나 종에 속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그러한 실체로 만들 수 있겠는가? 아마도 개별자는 다른 개별자와 어떠한 관계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꽤나 잘 고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적어도 한 가지 속성은 예화해야만 한다.
6 얇은 개별자와 두터운 개별자
이 지점에서 존 퀼터에 의해 야기된 문제가 있다. 그는 그 문제를 "벌거벗은 개별자들의 이율배반"이라 부른다. 개별자 a가 속성 F를 예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a is F이다. 이 "is"는 분명히 a is a 혹은 F is F에서와 같은 동일성의 "is"가 아니다. a와 F는 상이한 개체들이고, 한쪽은개별자, 다른 쪽은 보편자이다. 우리가 취급하고 있는 "is"는 예화의 "is"이고, 개별자와 속성 사이의 근본적 매듭의 "is"이다. 그러나 만일 그 "is"가 동일성의 "is"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고려되는 a는 사실상 그 어떤 속성도 결여하는 벌거벗은 개별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경우 a는 속성 F를 획득하지 못했다. 속성 F는 a의 외부에 머물러 있다. 마치 플라톤의 이론에서 초월적 형상들이 개별자 외부에 머무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우리가 얇은 개별자와 두터운 개별자 사이의 중요한 구분을 이끌어냄으로써 이 난관에 최소한 마주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얇은 개별자 a는 그것의 속성들로부터 분리되어 취해진 것(기체)이다. 그것은 예화를 통해 그것의 속성들과 연결되지만, 그 속성들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벌거벗은 개별자는 아닌데, 왜냐하면 벌거벗은 것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속성도 예화하고 있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성이 입혀지더라도, 그 개별자는 얇은 개별자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개별자가 사유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개별자가 속성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더욱이, [341] 그 편이 우리가 개별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통상의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두터운 개별자이다. 그러나 두터운 개별자는 얇은 개별자들과 속성들 양편 모두를 포괄하고 그 양편은 예화에 의해 결합되기 때문에, 사태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없다.
a가 F, G, H ... 등을 예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들은 a의 (비관계적) 속성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이제 연언 속성 F&G&H...를 구성해 보자. 이 속성을 N이라 부르고, N은 a의 본성에 대한 축약을 의미한다고 해 보자. a is N은 참이고, a가 N으로 있다는 것은 (상당히 복합적인) 사태이다. 그것이 두터운 개별자이기도 하다. 두터운 개별자는 사태이다. 한 사물의 속성들은 "그 사물 안에 포함되는데" 그 속성들이 이 사태의 구성요소들이기 때문이다. (a가 N으로 있다는 것과 같은 사태들은 반복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주의하라. 그래서, 개별자들과 더불어 사태들 또한 개별자들로 불릴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의미에서 개별자는 무속성이다. 그것이 곧 얇은 개별자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개별자는 속성들을 자신 안에 포괄한다. 후자의 경우 그것이 두터운 개별자이자 사태이다. 나는 이것이 벌거벗은 개별자의 이율배반으로 촉발된 난점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을 마치기 전에 두 가지 지점을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첫째, 얇은 개별자와 두터운 개별자 사이의 구분은 보편자로서의 속성이라는 원칙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구분은 개별자에 대해 다발 관점보다는 기체-속성 설명을 선전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기체-속성 관점을 개별자로서의 속성, 즉, 개별양태자로서의 속성과 함께 취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본 바 있다. 얇은 개별자는 그 개별자의 추상된 속성들과 더불어 개별자로 남는다. 두터운 개별자는 다시금 사태이다. 얇은 개별자가 그것이 지니는 그 (개별) 속성들을 지닌다는 것으로서의 사태 말이다.
둘째, 얇은 개별자와 두터운 개별자는 실제로 범위의 양극단이다. 그 사이에 그 속성의 일부이되 오직 일부만으로 채색된 개별자가 있다. 그 속성들은 한 두가지 이유로 특별히 중요한 속성들일지도 모른다. 이 중간적 개별자는 물론 사태일 테지만, 두터운 개별자인 사태에 비해서는 덜 포괄적인 사태일 것이다.
7 방식으로서의 보편자
앞선 장에서의 논의는 지금 그대로는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그 논의는 여전히 우리에게 얇은 개별자와 그 개별자의 속성들에 대해, 두터운 개별자를 형성하도록 사태 내에서 함께 연결되는 별개의 형이상학적 결절들로서 보는 그림을 남겨놓는다. 이 그림은 예화의 원리와 벌거벗은 개별자 배제 원리를 어느 정도 임의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왜 그 결절들은 함께 하게 되어야만 하는가? 그것들은 따로 발생할 수 없을까? 그러나 그것들은 원치 않은 피조물들, 미예화된 보편자들과 벌거벗은 개별자들이지 않겠나?
여기에서 나는 풍문으로는 돌았지만 내 생각에는 데이비드 서전트의 스타우트의 보편자 이론에 관한 책 이전까지 상술된 적은 없는 제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스타우트와 달리, 서전트는 보편자를 수용하고, 그의 책 4장에서 그는 우리가 그 보편자들을 방식들로 생각해야 하리라고 주장한다. 속성들은 사물들이 있는 방식들이다. 전자의 질량이나 전하는 전자가 있는 방식이다 (이 경우에는 어떤 전자든 그것이 있는 방식이다). 관계들은 사물들이 서로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들이다.
만일 속성이 사물이 있는 방식이라면, 이는 속성을 사물과 매우 밀접한 관계로 가져다 놓는데, 그러나 그것들 사이의 구별을 해치는 일 없이 그렇게 한다. 누군가는 예화를 근본적인 관계로, 단순 관계보다 더욱 밀접한 결속이나 연쇄로 생각하게 되는 지점을 볼 수 있다. 미예화된 속성이라는 발상에 더 끌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물들이 있는 방식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시, 누군가가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 관계가 그 사물들과 독립적으로 고유하게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 발상은 그다지 매력적이었던 적조차 없다. 속성을 실체화하는 편이 관계들을 실체화하는 것보다 더욱 쉽다.)
"사물들이 있는 방식들"과 "사물들이 서로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들"이란 표현들이 미예화된 보편자들에 반대해 논점을 선취한다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물들이 있을 수 있을 방식들과 서로에 대해 성립할 수 있을 방식들에 대해 말하고, 그래서 그 방식들이 실제 사물들의 방식들이어야만 한다는 함축을 제거해야 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나의 논증은 이런 의미론적 지점에서 이점을 얻고자 시도하고 있지 않다. 내 입장은 일단 속성과 관계가 사물이 아니라 방식으로 사유되고 나면, 이러한 방식들을 사물들로부터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지극히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방식들은 실제 사물들이 있는 방식들로 혹은 실제 사물들이 서로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들로만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속성과 관계가 미예화된 채로 존재할 수 있다는 발상은 그것들이 방식이 아닌 사물이라는 생각에 의해 키워진다.
[342] 이 장에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방식으로서 속성과 관계라는 개념이 그것들을 보편자로 간주하는 데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여전히 a의 속성을, 설령 그 속성이 개별자이고, 개별양태자라고 할지라도, a가 있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a 외에 다른 어떤 사물도 해당 방식으로 있을 수 없는 경우가 그 경우일 것이다. 유사하게, a와 b 사이에 견지되는 관계는 설령 이 방식이 반복불가한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a와 b가 서로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일 수 있다.
사태와 그 구성요소들이라는 관념, 얇은 개별자와 두터운 개별자 사이의 구별, 사물들이 있는 방식과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으로서 속성과 관계라는 개념이 보편자에 대한 철학에 뿐만 아니라 개별양태자들에 대한 철학에도 원한다면 사용가능한 것들이라는 점을 꺠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8 다중 위치
보편자들을 플라톤적 영역에서 지상으로, 시공간으로 끌고 내려오는 일은 꽤나 이상한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보편자들은 다중적으로 정위되거나 정위될지도 모른다는 점이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보편자들은 그들을 예화하는 개별자들이 발견되는 어디에서든 발견되는 것이지 않은가? 만일 두 상이한 전자들이 각기 전하 e를 가진다면, e라는 하나의 것, 보편자는 두 상이한 장소들, 그 두 전자들이 있는 장소들에서, 그렇지만 완전하고 완벽하게 그 각각의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는 여러 철학자들에게 널리 역설적인 것으로 여겨져왔다.
플라톤은 『필레보스』 15b-c에서 이 난점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그는 형상에 대해 질문했다. "형상은 그 자신 외부에서 전체로서 있을 수 있는가? 그렇게 한 사물 안에서도 여러 사물들 안에서도 동시에 하나이자 같은 것으로 있게 될 수 있는가? 그러한 관점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불가능한 관점이라 생각되지 않을까?" 보편자들을 개별자들로부터 분리된 영역 안에 유지시킨 이론은 최소한 이 난점을 회피해내야 할 것이다.
당신은 보편자들의 다중 위치를그저 수용하고자 시도할지도 모른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렇게 해왔다. 그러나 그럼 한 가지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 관계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아마도 누군가가 다중 위치에 속성들을 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중적으로 위치됨"이라는 관계들을 당신은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그 관계된 사물들 안에? 그것은 맞는 답으로 들리지 않는다. 만일 a가 b에 선행한다면, 그 관계는 a와 b 양자 모두 안에 있는가? 혹은 [a + b]라는 사물 안에 있는가? 어느 쪽 답도 맞는 답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 관계가 사물들 안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보편자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그것들을 또 다른 영역에 놓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 역시 썩 적절하지는 않다고 말함으로써 이 난점과 마주하고자 한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은, 내 생각엔, 세계가 사태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 사태들은 속성을 가지고 서로 관계 속에 성립하는 개별자들을 포함한다. 속성들과 관계들은 보편자들이되, 이는 상이한 개별자들이 똑같은 속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과 또한 개별자들의 짝도 3자도 그 이상도 서로 똑같은 관계에서 정립될 수 있다는 것 양쪽 모두를 의미한다.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놀랄 만한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자연주의가 참이라면, 세계는 단일한 시공간 다양체이다. 사태 이론으로 보자면 이는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즉, 우리는 어떻게 자연주의를 앞서 묘사된 관점과 화해시키는가? 이에 가장 대략적인 세부사항만 포함한 답이라도 제시하는 일은 추정컨데 근본적인 과학과 철학을 모두 포함하는 막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공간 세계가, 시공간적 관계들을 통해 (사태들 내에서) 함께 연결되는 사태들에서 특징을 드러내는 모든 개별자들과 더불어, 사태들의 막대한 다수성 혹은 연언이어야 하리란 것이다.
그래서 시공간 내 보편자들을 위치시키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투박한 말하기 방식으로 드러난다. 시공간은 보편자들이 그 안에 놓일 상자가 아니다. 보편자들은 사태들의 구성요소들이다. 시공간은 사태들의 연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편자들은 시공간 '안에' 있다. 그러나 보편자들은 그 시공간을 구성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그 안에 있다. 나는 이것이 universalia in rebus(사물 안의 보편자)에 대한 합리적 이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플라톤의 반박에 대응하기를 기대한다.
-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