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1 미예화 보편자들?

만일 우리가 개별자들은 다름 아닌 보편자들의 다발들이라는 아이디어를 폐기하지만 여전히 보편자를 인지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개별자들, 개별발생자들(tokens)이 보편자들을 예화한다는 전통적 관점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 발생자들은 속성들을 지니고 상호관계를 맺는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안착될 필요가 있는 상당수의 논쟁적인 질문들이 있다. 한 가지 핵심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보편자들에 대한 예화 원리를 수용해야 하는가, 혹은 수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즉, 우리는 모든 보편자마다 예화된다는 점을 요구해야 하는가, 혹은 그리하지 말아야 하는가? 각 속성 보편자에 대해 그것은 일부 개별자의 속성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성립해야만 하는가? 각 관계 보편자에 대해 해당 관계가 그 사이에서 성립하는 개별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성립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확실히 모든 개별자 각각이 지금 예화되어야 하리라고 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특정 개별자가 지금 예화되지 않았더라도, 과거에 예화되었다면, 혹은 미래에 예화될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예화의 원리는 모든 시간을 아우르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형식으로라도 해당 원리를 유지해야 할까? 

  이것은 중대한 갈림길이다. 우리는 미예화된 보편자들이 있다는 관점을 플라톤주의자 관점으로 부를 수 있다. 그 관점은 플라톤에 의해 주창된 관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또한 명백하게 보편자들을 도입한 첫 번째 철학자였기도 하다. (그는 형상들 혹은 이데아들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이데아들에 심리학적 요소는 전혀 없었다.) 

  일단 당신이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취하면, 당신은 그것들을 놓기 위한 특별한 장소, 철학자들이 종종 말하는 "플라톤적 천상계"가 필요하다. 그것들은 시공간으로 된 일상세계에서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예화된 보편자도 미예화되었을지도 몰랐을 것으로 보이기에, 예를 들어, 해당 속성을 지녔던 것이 과거, 현재, 혹은 미래 언제든 아무것도 있지 않았을지도 몰랐기에, 만일 미예화된 보편자들이 플라톤적 천상계에 있다면, 모든 보편자들을 저 천상계에 위치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가 두 영역들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보편자들의 영역과 개별자들의 영역으로, 후자가 시공간 내의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런 보편자들은 종종 초월적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런 종류의 관점은 명백히 러셀에 의해 그의 초창기, 그가 보편자 다발이라는 관점을 채택하기 전에 주창되었던 바 있다.) 그래서 예화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가 된다. 예화는 보편자들과 개별자들 사이에서 영역들을 가로지르는 관계이다. 이런 종류의 이론에 대해 스콜라 학자들이 사용한 라틴어 명찰은 [333] universalia ante res, "사물 이전의 보편자들"이다. 그런 관점은 자연주의자들에게, 즉, 시공간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용불가능하다. 이 점은 어째서 경험주의자들, 자연주의에 공감하는 경향이 있는 그들이 종종 보편자들을 거부하는지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보편자들의 분리-영역 이론은 개별자들에 대한 층케잌 관점에 반대해 덩어리 관점을 허용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일은 흥미롭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물이 속성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이 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관계, 즉 예화 관계 소유, 또 다른 영역 내의 특정 보편자들 또는 형상들에 대한 그러한 관계의 소유이다. 사물 자체는 덩어리같은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물이 또한 속성 구조를 부여받을 수 있으리란 것도 참이다. 하지만 그럼 이러한 구조를 구축하는 속성들은 보편자들일 수 없고 개별자들이어야만 한다. 그 속성들은 개별양태자들(tropes)이어야 한다. 개별자들은 속성 개별양태자들을 포함하지만, 이러한 속성 개별양태자들은 보편자들의 영역 내에서 특정 속성에 대한 그것들의 예화에 의해 자연 종들에 놓이게 된다. 어쨌든, 개별양태자들을 추가로 가져오는 일 없이는, 플라톤적 보편자 이론들은 개별자들을 층케익보다는 덩어리 같은 것으로 취급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것이 플라톤적 이론들에 반대하는 논증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그러길 원한다면, 보편자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입장에 놓인다. 우리는 라틴어 명찰 universalia in rebus, "사물들 안의 보편자들"을 가진 관점을 채택할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의 속성들을 사물의 구성요소들로 생각할 수 있고 그 속성들을 보편자들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었을지도 모른다. (학자들은 의견을 달리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유명론자로 만든다. 일부는 그가 지상세계적 보편자들을 믿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그는 플라톤의 이(異)세계적 보편자들을 비판했다.) Universalia in rebus는 물론 층케익 관점이고, 보편자로서의 속성들을 사물들의 내적 구조의 일부로서 취하는 관점이다. (관계들은 universalia inter res, "사물들 사이의 보편자들"일 것이다.)

  이 입장에는 물론 보편자들의 문제에 대한 다른 모든 해결책들과 마찬가지로 난점들이 있고,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이 있다. 그 한 가지는 아마도 플라톤을 포함해 여러 철학자들을 걱정시켜왔던 바, 이 관점에서 우리가 같은 사물의 다중적 위치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a가 F라고 그리고 b 또한 F라고,  F는 속성 보편자라고 가정해 보자. 똑같은 개체가 두 장소에서 두 사물 구조의 일부여야 한다. 어떻게 그 보편자가 한 번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이후에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마무리를 위해, 나는 세 번째 스콜라식 명찰을 언급할 것이다. universalia post res, "사물들 이후의 보편자들." 이것은 유명론자 이론들에 적용되었다. 그것은 술어 혹은 개념 유명론과 가장 잘 맞는데, 거기에서 속성들 등은 이를 테면 분류를 수행하는 정신에 의해 창조된다. 우리의 술어들이나 개념들에 의해 사물들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허나 우리의 현재 작업은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동의해야 하는지 동의하지 말아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구성될 핵심은 그 증명 책임이 확고하게 플라톤주의자들 측에 놓인다는 것이다. 시공간 세계가 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자들의 독립된 영역은 순전히 가설 혹은 공준이다. 만일 한 공준이 막대한 설명적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은 훌륭한 공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준은 그 자신을 입증해야 한다. 어째서 우리는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공준으로 상정해야 하는가? 

  여러 철학자들을 움직여온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일반 명사의 의미로부터의 논증이라 부를 어떤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한다. "우리 통상 그렇게 진행하듯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사물들의 모든 집단 각각에 대해 단일한 본질적 본성 혹은 형상의 현존을 가정하여 시작할까?"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노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일상적인 이름들, 즉, 고유 명사들은 그 이름의 담지자를 가진다. 만일 우리가 일반 명사로 넘어가면, '말'이나 '삼각형' 같이 여러 상이한 사물들에 적용되는 단어들로 넘어가면, 우리는 고유명사의 담지자가 그 고유명사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은 보편적인 종류로서 해당 일반 명사에 대해 관계를 맺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해당 일반 명사의 의미를 구성하거나 혹은 이에 상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마성(馬性, horseness)이나 삼각형성(-性, triangularity)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아무런 개별자에게도 전혀 적용되지 않는 일반 명사, 예를 들어 '유니콘' 같은 단어를 고려해 보자. 그것은 완벽하게 유의미하다. 그리고 만일 그 단어가 유의미하다면, 세상에 그 단어를 구성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하지 않는가? 그래서 미예화된 보편자들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로부터 논증"은 지극히 불량한 논증이다. (소크라테스에게 공정하도록 말하자면, 그가 이 논증을 사용하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다른 철학자들은 종종 자각하지 못한 채로 사용해 왔다.) 해당 논증은 일반 명사가 의미를 가지는 모든 경우 각각에서, 세계 내에 그 의미를 구성하거나 이에 상응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334] 길버트 라일은 이에 대해 'Fido'-Fido 오류라고 말했다. Fido는 'Fido'라는 단어에 상응하지만, 일반 명사에 상응하는 단일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로부터 논증을 따라가면 보편자들에 대한 매우 난잡한 이론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만일 그 논증이 맞다면, 우리는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각각의 일반 명사에 대해,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안다. 이는 술어들과 속성들을 매우 깔끔한 방식으로 줄세우지만, 그것은 우리가 매우 의심스럽게 보아야 할 방식이다. 존재하는 보편자들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은 쉬운 일인가? 

  플라톤은 그를 미예화된보편자들로 이끈 또 다른 사유 노선을 가졌다. 이는 일상세계의 사물들이 정확한 표준들에 도달하는 일에 명백히 실패한다는 것이다. 세계 내의 어떤 것도 완벽하게 직선이거나 원이지는 않지만, 기하학에서 우리는 완벽한 직선들이나 완벽한 원들의 속성을 논한다. 다시,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불변하지는 않는다. 또, 그 어떤 행동도 완벽하게 정의롭지는 않다는 것도 맞는 말일 것이다. 확실히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덕스럽지는 못하며, 어떤 국가도 완벽하게 정의롭지는 않다. 하지만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논의에서 (예를 들어, 『국가』에서) 우리는 덕과 정의의 본성을 논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계를 특정 표준들에 못 미치는 것으로서 감지한다. 이는 만일, 우리가 알든 알지 못하든, 일상적 사물들을 형상들에, 그 일상적 사물들이 결코 완전히 예화할 수 없는 형상들에 비교하고 있다면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누군가로 하여금 최상위 정도로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 예화의 정도라는 어려운 개념으로 이끌 수 있고, 아마 플라톤을 그렇게 이끌었을 것이다.)

  이 논증이 플라톤을 그가 모든 경우에 향하고자 바란 그곳으로 완전히 이끌지는 못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기하학을 고려해 보자. 기하학에서 누군가는 예컨데 두 교차하는 원들의 속성들을 고찰하고 싶을 수 있다. 이 원들은 완벽하게 원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물론, 원에 대해 오직 단 하나의 형상만이 있다. 그럼 이 두 완전한 원들은 무엇인가? 플라톤은 보이기로는 그가 수학적인 것들이 부르는 무언가를 도입해야 했다. 수학적인 형상들이 그러하듯 그 수학적인 것들은 완벽했지만 그래서 일상적인 것들과는 닮지 않았다. 하지만 형상들과 달리, 똑같은 유형의 개별발생자들이 여럿 있을 수 있고, 이 점에서 수학적인 것들은 일상적인 것들을 닮았다. 수학적인 것들은 완벽한 개별자들이긴 하지만, 개별자들이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비록 표준들에 크게 미달한다는 것이 플라톤에게 수학적인 것들에 대한 논증을 제공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형상들을 위한 어떤 논증이기나 한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상적인 표준들이 단순히 우리가 그에 대해 그저 생각할 따름인 사물들일 수는 없는가?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알고서 사유를 형성할 수 있다. 이상적 표준들의 경우 어떤 것도 표준에 미칠 수 없지만, 상이한 정도에서 표준에 근접하는 일상적인 사물들로부터 추론함으로써, 우리는 표준에 도달하는 어떤 것에 대한 사유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런 작업은 유용한 것으로 드러난다. 어째서 그런 표준들에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부여하는가? 그러한 표준들은 유용한 허구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의 문제로서, 기하학적 사례에서 완벽한 직선이나 완벽한 원인 대상이라는 그런 개념들은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획득될지도 모른다. 그야 설령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무언가가 완전히 직선으로 혹은 완벽하게 원으로 보일 수 없겠는가? 

  미예화된 보편자들이라는 이론을 유지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사항은 만일 보편자가 예화될 것이리라는 점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것으로 보편자가 존재하기에는 충분한 것이라는 널리 퍼진 생각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나는 논의 과정에서 이 생각이 주장된 보편자가 현실의 예화들을 지닐 것이라는 점이 경험적으로 가능하다면(즉, 자연 법칙과 양립 가능하다면) 특히나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벽지의 아주 복잡한 무늬를 기술하지만 한 번도 해당 무늬를 그리거나 그 벽지를 제작하지는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우주 역사 전체에서 다른 그 누구도 그리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자연 법칙 내에는 해당 무늬가 예화를 가지는 것을, 해당 유형의 개별발생자를 가지는 것을 금지한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항 보편자, 복잡하고 구조적인 보편자인 건 물론이지만, 그렇더라도 보편자이긴 하지 않은가?

  분명 이런 식으로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서는 해당 논증이 강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개별자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날 프랑스가 군주제일 것이며 그러므로 현재 프랑스의 왕이 존재한다는 것이, 프랑스 왕족에게는 불행스럽게도, 그가 예화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경험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어째서 보편자들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로 주장하는가? 철학자들이 보편자들은 특별해서, 그저 우연적이기만 한 개별 사물들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나는 이것이 아마도 플라톤에게서 상속받은 편견보다 전혀 나을 바 없다고 생각한다. 

  미예화된 보편자들의 경험적 가능성으로부터 그 보편자들에 대한 논증에는 내가 좀 더 무게를 두는 미묘한 한 가지 변주가 있다. [335] 그 변주는 미카엘 툴리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그 변주는 자연 법칙의 본성에 관한 심오한 고찰들에 의거하는 것으로, 이는 여기에서 논의할 수가 없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해당 논증은 그 법칙이 매우 특수한 구조를 가진 것으로 밝혀진다는 점에 근거하는데, 그런 구조를 실제로 가질 것 같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그 논증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은 미예화된 보편자들이 실제적이라기 보다는 찰리 가능한 것들이라는 점인 듯하다. 그리고 이 결론조차 회피가능할지도 모른다. 

  수학, 그리고 수학에 의해 공준된 속성들과 관계들로부터의 고찰들은 미예화된 보편자들에 대한 인정을 강요한다고도 생각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보편자들에 대한 그 이론을 수학과 통합시킨다는 그 전체 기획은, 중요하긴 하지만, 이 자리에서 감당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가능성의 본성에 관한 책에서 나는 그 기획이 어찌 되어야 하는지 내가 생각하는 방식을 다소 대략적으로 윤곽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부터 나는 예화 원리를 참이라 상정할 것이다. 이미 주의를 주었듯, 이는 두-영역 원리를 폐기하도록 강제하진 않는다. 또한 이는 보편자들을 일상적인 사물들의 자리로 끌어내리도록 강제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런 일들을 허용해주긴 하고, 그렇게 하는 편이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거부하고서 그 이론을 전개시키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보인다. 

 

2 선언, 부정, 그리고 연언 보편자들

논의의 단순성을 위해, 여기에서 나는 속성 보편자들만 고려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여 구성될 지점들은 관계들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미 미예화된 보편자들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보편자들의 잠재적 집합은 우리가 납득할 만한 이론을 얻고자 한다면 대단히 많은 부분을 덜어낼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선언적 속성 보편자들을 거부할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나는 선언적 속성을 (속성) 보편자들의 선언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특정 전하와 특정 질량이 보편자라 가정해 보자. 그럼 전하 C를 가지거나 질량 M을 가짐은 (C와 M은 확정적, 즉, 정의된 값들에 대한 기호이다) 선언 속성의 예시일 것이다. 왜 그것이 보편자가 아니겠나? 두 대상들을 고려해 보자. 한쪽은 전하 C를 갖지만 질량 M은 결여한다. 다른 쪽은 전하 C를 결여하지만 질량 M은 가진다. 그럼 그 대상들은 전하 C를 가지거나 질량 M을 가짐이라는 선언 속성을 가진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어떤 진지한 의미에서도 그 대상들이 그리하여 동일한 어떤 것을 가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렇지만 보편자의 요점은 그 보편자의 상이한 예화들에서 동일하리란 것이다. 

  보편자들의 선언이 보편자라는 것을 부정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보편자들과 인과성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모종의 연관이  있다. 만일 한 사물이 특정 보편자를 예화한다면, 그 예화 덕분에, 해당 사물은 특정 방식으로 작용할 능력을 가진다. 예를 들어, 만일 한 사물이 특정 질량을 지닌다면, 그 사물은 천칭 접시나 저울에 특정 방식으로 작용할 능력을 갖는다. 더욱이, 상이한 보편자들은 상이한 능력들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전하와 질량은 상이한 방식으로 현현한다. 나는 보편자와 능력 사이의 연관이 필연적인지 의심하지만, 사실인 것으로는 보인다. 더구나, 만일 추상적으로는 가능해 보이듯, 상이한 두 보편자가 정확히 똑같은 능력을 부여했다면, 어떻게 그것들이 상이한 보편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만일 그것들이 우리의 뇌를 포함한 모든 기관들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을 오직 하나의 보편자로 판단하지 않을까?

  이제 한 사물이 전하 C를 가지지만 질량 M을 결여한다고 가정해 보자. 전하 C 덕분에, 그 사물은 작용할 특정한 능력을 가진다. 예를 들어, 그것은 같은 전하를 가진 사물들을 밀어낸다. C 또는 M이라는 선언 속성의 소유는 이 능력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이는 C는 진정한 보편자인 반면, C 또는 M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선언 보편자들을 거부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유사한 상황이 부정 보편자들에 반대하여서도 견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속성의 결여 혹은 부재는 속성이 아니다. 만일 전하 C를 가진다는 것이 보편자의 예화라면, C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보편자의 예화가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다시금 동일성에 호소할지도 모른다. 전하 C를 결여하는 모든 것 각각에 공통되는 어떤 것, 동일한 어떤 것이 정말로 있는가? 물론, 마침 전하 C의 결여와 동연인 어떤 보편 속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여 자체는 전하 C를 결여하는 사물 각각에서 발견되는 요인일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 인과적 고려들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결여나 부재가 뭐라도 인과작용을 한다는 것은 이상한 생각이다. 사물이 긍정적 요인만으로 작용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역시 보편자의 부재가 보편자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336] 다른 경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를 어떤 언어적 증거가 있다는 것은 참이다. 우리는 "물의 결여가 그의 죽음을 야기했다" 같은 것을 말한다. 표면적으로, 해당 진술은 물의 결여가 생명의 부재를 야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표현방식들을 우리 스스로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카엘 툴리는 우리가 "독의 결여가 우리로 하여금 살아 남도록 야기한다"라고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만일 첫 번째 진술을 이해하는 표면적 방식이 옳다면, 두 번째 진술도 같은 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참이라고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특정한 반사실적 진술들은 두 경우 모두에서 참이다. 만일 그가 물을 가졌었더라면,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독을 취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죽어있었을 것이다. 이런 진술들은 인과적 참들이다. 그러나 그 진술들은 우리에게 두 경우에 작동하는 실제 인과적 요인들에 관해서는 별로 말해주는 바가 없다. 내 생각에 우리는 이러한 실제 인과적 요인들이 순전히 긍정적인 용어들로 표명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보편자들의 연언들은 (전하 C와 질량 M을 둘 다 가짐) 선언과 부정 보편자들에 반대하여 조준된 두 비판들을 피해낸다는 점에 주의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연언과 관련하여 우리는 동일성을 얻는다. 요소들의 정확히 똑같은 연언이 각 예화에 현전한다. 인과에 관하여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만일 한 사물이 그 연언을 예화한다면, 그 사물은 그 결과 특정 능력들을 가질 것이다. 이 능력들은 그 사물이 해당 연언 요소들 중 하나만 가졌더라면 갖게 되었을 능력들과는 다를 것이다. 해당 연언은 각 연언요소가 따로 예화되었더라면 각 속성이 행했을 바의 총합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말하듯이, 동반상승효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효과는 각각의 원인이 따로 작용하는 것의 총합 이상의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언 보편자들에 부과되어야 하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어떤 사물은 (과거, 현재, 미래) 실제로 그 속성들 모두를 동시에 가져야만 한다. 물론 이는 단순히 연어 보편자들에 적용된 예화 원리일 따름이다. 

 

3 술어들과 보편자들

미예화된 보편자들에 관하여 이야기되어온 바, 또한 보편자들의 선언과 부정에 관해 이야기된 바는 매우 중요한 점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술어들(언어적 개체들)로부터 보편자들로 향하는 그 어떤 자동적인 경로도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하 C를 지니거나 질량 M을 지님"이란 표현은 완벽하게 훌륭한 술어이다. 그 술어는 수없이 많은 대상들에 적용될 수 있고 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 이는 이러한 술어에 상응하는 보편자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에 대한 그의 논의를 통해 보편자 문제에 유명한 기여를 한 바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반-형이상학자였고, 그의 반박은 보편자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차라리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가족 유사성에 관해 말했던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해당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했던 바의 실질적인 교훈은 단지 술어들과 보편자들은 그 어떤 단순한 방식으로도 줄세워지지 않는다는 것뿐이라 생각한다. 

  그의 『철학 탐구』에서 그는 게임이라는 개념을 고려했다. 그 개념에 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66. 예를 들어 우리가 "게임"이라 부르는 절차들을 고려해 보라. 나는 보드게임들, 카드게임들, 공놀이들, 올림픽 경기들, 기타 등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모두에 공통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공통된 것이 있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이 '게임들'이라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는 말하지 말자. 단지 그 모두에 어떤 것이든 공통된 것이 있는지를 바라보라. 만일 당신이 그것들을 살펴본다면 당신은 그 모두에 공통된 어떤 것을 보지는 못할 테지만, 유사성들, 관계들, 거기에 더해 그것들의 일련의 총체를 보게 될 것이다. 반복하건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보라. 예를 들어 다양한 관계들을 가진 보드게임들을 보라. 이제 카드게임들로 넘어가 보자. 여기에서 당신은 첫 번째 집단과 상응하는 다양한 것들을 찾을 테지만, 다수의 공통 특징들은 탈락할 것이고, 또 다른 것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공놀이로 넘어가면, 상당수의 공통된 것들이 남겠지만, 또 상당수는 사라질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즐거운가"? 체스를 오목과 비교해 보자. 항상 승패가 있다거나, 선수들 사이에 경쟁이 있나? 참을성을 갖고 생각해 보라. 공놀이에는 승패가 있다. 하지만 아이가 벽에 공을 던지고 그걸 다시 받을 때, 그 특성은 사라진다. 기술과 운이 차지하는 부분을 보라. 그리고 체스 기술과 테니스 기술의 차이를 보라. 이제 수건돌리기 같은 게임들을 생각해 보라. 여기에는 유희 요소가 있지만, 얼마나 많은 다른 특징적인 속성들이 사라졌는가? 계속해서 우리는 수 많은 다른 게임 집단들을 같은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유사성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지 볼 수 있다. 
[337] 이 고찰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중첩되고 종횡무진 교차하는 유사성들의 복잡한 관계망을 본다. 때로는 전반적인 유사성들을, 또 때로는 세부사항의 유사성들을 본다. 

 67. 나는 이러한 유사성들을 특징짓기 위한 표현으로 "가족 유사성"보다 더 나은 표현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다양한 유사함들, 즉, 체격, 생김새, 눈동자의 색, 걸음걸이, 기질 등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중첩되고 또 교차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게임들"이 가족군을 형성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구절이다.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게임이란 개념 외에도 철학자들에 의해 논의되는 여러 주요 개념들을 포함하는 온갖 종류의 개념들에 적용시켰다. 그러나 보편자를 믿는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이 보편자들에 관하여 보여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게임성이라는 그 어떤 보편자도 없다는 데에 동의하도록 하자. 그러나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논하는 이 "중첩되고 교차하는 유사성들의 복잡한 연결망"의 경우는 어떠한가? 현실주의자가 할 일이란 이러한 유사성들 각각을 공통 속성들로 분석하는 것이다. 그 유사성 분석은 유명론자와 경쟁하는 분석이긴 하겠지만 어렵거나 낯선 발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 집합 총체를 관통하고 그 모두를 게임으로 만들어주는 그 어떤 속성도 없을 것이다. 지극히 거칠게 단순화시킨 개괄을 제시하자면, 그 상황은 아마 이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별자들 a b c d e
개별자들의 속성들 FGHJ GHJK HJKL JKLM KLMN

 

여기에서 F부터 M까지는 진정한 속성 보편자들로 상정되고, "게임"이란 술어는 이러한 속성들의 덕택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상정된다. 반면 개별자들의 집합 {a...e}, 게임의 모든 개별발생자들의 집합은 비트겐슈타인식의 의미에서 가족군이다. 그렇더라도, 여기에서 보편자들에 관한 실재론과 완벽히 양립가능한 그러한 가족군들에 대한 설명을 개괄하였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언급들은 커다란 의문을 야기시킨다. 어떻게 무언가가 진정한 속성이나 관계의 현전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여부를 결정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게임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보라" 라고 말한다. 최소한 일반 지침으로서는 그것은 너무 심하게 단순해 보인다.

  나는 참된 보편자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그 어떤 무오류의 방식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미론적 고찰들에 기대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1장에서 말했듯, 의미론적 자료들로부터 특정한 보편자들을 주장하는, 술어들로부터 그 술어에 상응하는 보편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낙관적이고 비경험주의적인 방식으로 주장한다. 나는 그들을 선험적 실재론자들이라 부른다. 내 생각엔 후험적 실재론이 더 낫다. 어떤 보편자들이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가진 최선의 길잡이는 총체로서의 과학이다. 

  나 자신으로서는, 이 점이 물리학을 특별한 지위에 놓는다고 믿는다. 물리학이야말로 근본 과학이라 생각할 (과학적, 경험적, 후험적) 이유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게 맞다면, 질량, 전하, 연장, 지속, 시공간 간격 같은 속성들과 물리학에 의해 예상되는 여타 속성들은 참된 단항 보편자들일지도 모른다. (그 대부분은 양의 정도들이다. 양들은 추가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들을 야기한다.) 시공간적 그리고 인과적 관계들은 아마 참된 다항 보편자들일 것이다. 

  만일 이것이 맞다면, 일상적 유형들, 붉음 유형, 말 유형, 일반적으로, 세계에 대한 현시적 상의 유형들은 실재성의 예비적, 임시변통의 분류들로 드러날 것이다. 그것들 대부분이 거짓은 아니지만 임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 중 다수는 게임들이 그리 드러나듯 가족군들일 것이다. 한 유형에는 보편자들의 한 가족군 전체가 상응하되 항상 매우 밀접한 가족군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일상적 유형들이 실재성이라는 짐승을 그 참된 마디들을 따라 잘라내는 경우조차, 그 유형들은 여전히 사물들이 그것들로 있는 바에 관해 그 마디들을 드러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편자들에 대한 그 어떤 동일화도 사변적인 것으로 남고 만다는 점을 강저해 두도록 하자. 나는 방금 말하면서 보편자에 대한 철학을 물리주의와 결합하고자 시도했다.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생각들을 가질지도 모른다.

 

4 사태(States of Affairs)

우리가 검토 중인 보편자 이론에서, 개별자들은 속성들을 예화하고, 사태들은 (이항) 관계들을, 삼항 개별자들은 (삼항) 관계들을, 그렇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예화를 수행한다. F를 보편자로 하여, a is F, 혹은 R을 보편자로 하여, a has R to b라고 가정해 보자. 

a의 F로 있음과 a의 b에 대한 R을 가짐을 우리의 존재론 내 항목들로 인지할 것이 요청되는 것으로 보인다. [338] 

  왜 우리는 사태를 인지해야 하는가? 왜 단순히 개별자들, 보편자들 (속성들과 관계들로 분해되는), 그리고 아마도 예화를 인지하지 않는가? 그 답은 다음의 지점을 고찰함으로써 드러난다. 만일 a is F라면, 그것은 a가 존재한다는 것과 보편자 F가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지만, a 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면, 그리고 F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면,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a is F가 사실이기에는 부족하다 (F는 예화되지만, 오직 다른 어딘가에서만 예화된다). a의 F로 있음은 a와 F 그 이상의 어떤 것인가를 포함한다. a와 F의 합에 예화의 근본적 결속이나 연쇄를 단순히 추가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a, 예화, 그리고 F의 현존은 a의 F로 있음에 상당하지 못한다. a의 F로 있음은 그 이상의 무언가여야만 하며, 이것이 사태이다. 

  이 논증은 C. B. Martin에 따르는, 내가 진리구성자(the truth-maker) 원리라고 부르는 일반원리에 의존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최소한 모든 우연적 참에 대해 (그리고 아마도 모든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참에 대해서) 그것을 참으로 만드는 어떤 것이 세계 내에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어떤 것"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광범위하게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구성"은 물론 인과성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내에서 그것 덕분에 참이 참인 바의 것이다. 구스타프 베르그만과 그 추종자들은 진리들의 "존재론적 근거"에 대해 말해왔고, 나는, 나의 표현으로, 이것이 참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세계 내의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은 상이한 진리들이 어쩌면 모두 같은 진리구성자 또는 존재론적 근거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사물이 채색되어 있다, 붉다, 그리고 진홍색이다라는 것은 모두 그 사물이 특정 색조를 지닌다는 것에 의해 참인 것으로 구성된다. 

  진리구성자 원리는 내가 보기에는 한 차례 주의를 기울이고 나면 꽤나 명백해 보이는 것이지만, 그 이상 어떻게 그 원리를 위한 논증을 펼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주의해둘 것은 완전히 진지하게 여기에서 우리가 개입해 온 그런 종류의 형이상학적 탐구를 수행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원리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진리구성자 원리를 받아들이면 누군가 참인 것으로 취하는 진술들의 존재론적 함축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술어들이 진지하게 고려되어서는 안된다는 콰인의 관점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특정 표면이 붉다고 단언하는 일과 푸르다고 단언하는 일 사이의 차이를 고려해 보라. 진리-구성자 원리의 지지자는 존재론적 근거, 세계 내의 차이가 해당 표면에 적용되는 술어 '붉다'와 또한 그 표면에 적용되는 술어 '푸르다'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 존재론적 근거가 무엇인지는 추가적인 문제이다. 해당 원리로부터 보편자와 사태로 이어지는 그 어떤 지름길도 없다. 

  이제 사태 쪽으로 돌아가서, 설령 진리구성자 원리가 거부된다 할지라도 사태라는 것을 수용해야 할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첫째로, 우리는 사태에 관해 무언가 추가로 말하기 위한 준비로서, 사태를 명백하게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일반적으로는 지칭될 수 있는 것은 존재한다는 점이 받아들여진다. 두 번째로, 사태들은 인과관계의 항들로서 그럴 듯한 후보들이다. a의 F로 있음이라는 사태는 b의 G로 있음에 대한 원인일 수 있다. 셋째로, 이후 8장에서 보게 될 것과 같이, 사태들은 보편자 이론에서 상당한 부담을 주는 문제의 해결, 속성 보편자들의 다중 위치와 관계 보편자들의 비위치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집합 유명론자나 유사물 유명론자에 의해서는 사태가 요청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 각각의 이론에 중요한 경제성이라는 점을 보는 일은 흥미롭다. 집합 유명론자는 a의 F로 있음을 a가 {a, b, c, ...}를 포함하는 한 집합의 (또는 자연 종의) 원소로 있음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단지 a와 해당 집합만을 가진다. 집합-원소 관계는 내재적이며, 그 용어들의 본성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는 그 관계를 용어들에 추가되는 어떤 것으로 인지할 필요가 없다. 해당 용어들 그 자체가 충분한 진리-구성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유사물 유명론자는 a의 F로 있음을 a와, 이를 테면, 적절한 전형 F들 사이에서 견지되는 유사성 관계들의 문제로 분석한다. 그러나 해당 관계도 역시 내재적이고, 내가 a의 개별화된 본성이라 부르는 어떤 것과 전형이 되는 대상들에 의해 규정된다. 다시 한 번, 사태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술어 유명론자는 사태를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a의 F로 있음은 a가 술어 F 하에 분류됨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어떻게 하위 분류된다는 것이 단순히 a와 언어적 대상 F에 의해서 그것만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하위 분류됨은 외재적 관계이다.)

  이제 매우 중요한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태는 어떤 상당히 놀라운 성격들을 가진다. a, b, F, R, 등등을 사태의 구성요소들로 부르기로 하자. [339] 정확히 같은 구성요소들을 지니더라도 상이한 두 사태들이 있는 일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간단한 예시는 이런 것이다. R이 비대칭적 관계 (예를 들어, 사랑한다는 것) 라고 해 보자. 우연히 a는 b에 대해 R을 지니고 b는 a에 대해 R을 지니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두 구별되는 사태들이 존재한다. a의 b에 대한 R을 가짐, 그리고 b의 a에 대해 R을 가짐 (a가 b를 사랑함과 b가 a를 사랑함). 나아가, 이러한 사태들은 전적으로 구별되는데, 어느 한쪽 사태가 존재하는 반면 다른 한쪽 사태는 확보되지 못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두 사태는 정확히 같은 구성요소들을 지닌다. 

  당신은 관계만큼이나 속성으로도 똑같은 현상을 확보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그리 가정하는 것이 옳은데, 사태들의 연언 자체가 사태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1) a의 F로 있음과 b의 G로 있음을, 그리고 (2) a의 G로 있음과 b의 F로 있음을 고려해 보자. 전적으로 구별되는 두 사태들은 그러나 정확히 똑같은 구성요소들을 지닌다. 

  이 지점에서, 사태들은 단순히 보편자들을 인지하는 이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속성과 관계를, 그것들을 보편자로서든 개별자로서든, 인지하는 어떤 철학자에 의해서든 또한 요청될 것이라는 점은 알아둘 만하다. [...]

  a가 R1을 b에 대해 지닌다고, 그런데 R1은 개별자이고, 그러나 비대칭적이며, 관계라고 가정해 보자. 만일 b가 '똑같은' 관계를 a에 대해 지닌다면, 트로프(개별속성) 철학에 근거하여, 우리는 b가 a에 대한 R2를 가짐을 갖게 된다. 두 사태는 (중첩되긴 하지만) 상이한 구성요소들을 가진다. a와 b 사이에 견지되는 사랑함은 b와 a 사이에서 견지되는 사랑함과 다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가 b에 대해 R1을 가진다는 것은 구성요소 a, R1, b의 존재를 함축하지만, 이러한 구성요소들의 존재는 a가 b에 대해 R1을 가진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태들은 여전히 그 구성요소들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인다. 

  트로프를 가지고, 당신은 결코 완벽히 똑같은 구성요소들로 구축된 상이한 사태들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구성요소들의 단 한 집합만 주어지더라도, 이러한 구성요소들만을 가지는 사태들이 둘 이상인 것은 가능하다. a, 트로프 R1, b로부터, 예를 들어, 우리는 a가 b에 대해 R1을 가진다는 것이나 혹은 b가 a에 대해 R1을 가진다는 것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로프 철학이 사태를 공준해야 하는 상황을 회피할 방법은 있다. 하지만 지금 그 방법은 제쳐두기로 하자. 

  나는 사태의 구성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우리가 사태의 부분들로서도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되리라 생각한다. 논리학자들은 전체와 부분이란 개념에 어느 정도 주의를 기울여왔다. 그들은 이러한 개념들을 취급하기 위한 형식적 미적분을 고안해냈는데, 때로는 개체들에 대한 미적분으로 불리거나, 더 나은 이름으로는 부분학(mereology)이라 불린다 (그리스어 meros는 부분을 의미한다.). 이 작업에 도움을 준 철학자로 넬슨 굿맨이 있는데, 그의 책 『현상의 구조』에는 부분학에 대한 설명이 제시된다. 부분학적 원칙으로서 지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만일 다수의 사물들이 있다면, 그리고 사물들이 합을, 즉, 그 사물들이 부분들이 되는 전체를 가진다면, 사물들은 단지 하나의 합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는 만일 사물들이 합을 가진다면, 그로 인해 다수의 사물들이 항상 합을 가지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2의 제곱근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합을 가지는가? 철학자들은 어떤 식으로 부분학이 허용되어야 할지, 즉, 당신이 합산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는지에 관해, 만일 한계들이 있다면, 그 한계들이 어느 지점에 놓이는지에 대해 의견을 달리 한다. 나 자신은 합산에 대한 전면적인 허용을 수용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모두에 의해 동의되는 어떤 것이다. 사물들이 합산될 수 있는 경우, 사물들에 대한 각각의 취합에 대해 단지 하나의 합산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방금 보았듯 사태들의 완전한 구성요소들은 다른 사태의 완전한 구성요소일 능력이 있고 실제로 그러할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구성요소들은 사태에 대해 그 전체의 부분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복합적인 보편자들은 부분들이라기보다는 구성요소들을 가진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어쨌든 우리가 예화의 원리를 수용한다면 그렇다. 예를 들어 연언 보편자를 고려해 보자. 만일 P와 Q로 있음이 연언 보편자라면, P이며 또한 Q이기도 한 x인 그러한 개별자 x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x is P and x is Q 형식의 사태가 최소한 하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연언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특정 종류의 사태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P와 Q가 연언 보편자의 부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나 자신도 과거에는 그렇게 말한 바 있다. 

  복합적 보편자의 매우 중요한 유형은 구조적 속성이다. 구조적 속성은 특정 규칙성(pattern)을 예화하는 사물, 깃발 같은 것을 포함한다. 구조적 속성을 예화하는 사물의 상이한 부분들(부분학적 부분들)은 특정 속성들을 지닐 것이다. 해당 구조적 속성이 관계들을 포함한다면, 깃발이 그러하듯, 이 부분들의 일부 혹은 전부는 다양한 방식들에서 관계를 맺을 것이다. [340] 사태에 호소해야만 한다는 점은 알기 쉽다. 만일 a가 P를 가지고, b가 Q를 가지며, a가 b에 대해 R을 가진다면, 대상 [a + b]는 축약된 방식 P-R-Q라는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특히 중요한 장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짚을 점이 있다. 사태들이 만일 존재한다면 비-부분학적 형태의 구성을 지닌다는 사실은 개별자들이 보편자들의 다발에 다름 아니라는 관점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점이 마크 존스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 이해한다.) 우리는 상이한 사태들이 정확히 같은 구성요소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a가 b를 사랑함, b가 a를 사랑함). 우리는 앞서 [이 편집본에서는 생략됨] 다발 이론에 반대하여 정확히 같은 보편자들을 포함하는 두 다발들은 불가능하다고 논증한 바 있다. 그 다발들은 똑같은 다발일 것이다. 하지만, 다발 이론의 문제를 독립적으로 고려한다면, 왜 두 개별자들이 정확하게 닮은 것이 아니어야 하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럴 법하게 우리가 보편자들을 사태로서 다발로 묶는 일을 취급한다고 가정하자. 왜 정확히 똑같은 보편자들이 상이한 방식들로 다발로 묶이지 않아야 하겠는가?

  이에 답하자면, 나는 이것이 생각 가능한 것으로서 허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사물들에 대한 상이한 다발묶기에 대해 허용되는 도식을 다발 이론가들이 고안해내는지 여부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는 현실의 다발 이론들이 전개되어 온 과정에서는 제공된 바 없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이와 같은 경로를 취하기를 바란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의 이론을 발전시키고자 시도할 책임은 다발 이론가들에게 있는 것이다. 

 

5 사태들의 세계?

앞선 장에서 개별자들과 보편자들 양자 모두를 인정하는 철학은 사태들(사실들), 개별자들과 보편자들을 (부분들로서가 아니라) 요소들로서 가지는 그러한 사태들을 허용해야 한다는 점이 주장되었다. 사실의 문제로, 우리는 속성들과 개별자들을 어쨌든, 개별자들로서라도, 도입하는 일은 명백히 사태들을 포함하리란 점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관심사는 보편자들에 관한 것이다. 

  이제 제안될 바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사태들의 세계로, 오직 사태들 내에서 현존을 지니는 개별자들과 보편자들을 동반하는 그러한 세계로 생각해야 하리란 것이다. 우리는 이미 보편자들에 대한 예화 원리에 대해 주장한 바 있다. 만일 이것이 참인 원리라면, 특정 사태들 내에 존재하는 동일한 요소로서 보편자를 간주할 길이 열린다. 사태 외부에 존재했던 개별자는 어떤 속성이나 관계도 입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벌거벗은 개별자라 불릴지도 모른다. 만일 세계가 사태들의 세계일 것이라면, 우리는 예화 원리에 벌거벗은 개별자 배제 원리를 추가해야만 한다. 

  이 두 번째 원리는 충분히 설득력있어 보인다. 보편자이론에서, 사물에 그 본성, 유, 혹은 종류를 부여하는 것은 보편자들이다. 벌거벗은 개별자는 어떤 보편자도 예화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런 본성도 갖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유나 종에 속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그러한 실체로 만들 수 있겠는가? 아마도 개별자는 다른 개별자와 어떠한 관계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꽤나 잘 고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적어도 한 가지 속성은 예화해야만 한다. 

 

6 얇은 개별자와 두터운 개별자 

이 지점에서 존 퀼터에 의해 야기된 문제가 있다. 그는 그 문제를 "벌거벗은 개별자들의 이율배반"이라 부른다. 개별자 a가 속성 F를 예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a is F이다. 이 "is"는 분명히  a is a 혹은 F is F에서와 같은 동일성의 "is"가 아니다. a와 F는 상이한 개체들이고, 한쪽은개별자, 다른 쪽은 보편자이다. 우리가 취급하고 있는 "is"는 예화의 "is"이고, 개별자와 속성 사이의 근본적 매듭의 "is"이다. 그러나 만일 그 "is"가 동일성의 "is"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고려되는 a는 사실상 그 어떤 속성도 결여하는 벌거벗은 개별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경우 a는 속성 F를 획득하지 못했다. 속성 F는 a의 외부에 머물러 있다. 마치 플라톤의 이론에서 초월적 형상들이 개별자 외부에 머무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우리가 얇은 개별자와 두터운 개별자 사이의 중요한 구분을 이끌어냄으로써 이 난관에 최소한 마주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얇은 개별자 a는 그것의 속성들로부터 분리되어 취해진 것(기체)이다. 그것은 예화를 통해 그것의 속성들과 연결되지만, 그 속성들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벌거벗은 개별자는 아닌데, 왜냐하면 벌거벗은 것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속성도 예화하고 있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성이 입혀지더라도, 그 개별자는 얇은 개별자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개별자가 사유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개별자가 속성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더욱이, [341] 그 편이 우리가 개별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통상의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두터운 개별자이다. 그러나 두터운 개별자는 얇은 개별자들과 속성들 양편 모두를 포괄하고 그 양편은 예화에 의해 결합되기 때문에, 사태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없다. 

  a가 F, G, H ... 등을 예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들은 a의 (비관계적) 속성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이제 연언 속성 F&G&H...를 구성해 보자. 이 속성을 N이라 부르고, N은 a의 본성에 대한 축약을 의미한다고 해 보자. a is N은 참이고, a가 N으로 있다는 것은 (상당히 복합적인) 사태이다. 그것이 두터운 개별자이기도 하다. 두터운 개별자는 사태이다. 한 사물의 속성들은 "그 사물 안에 포함되는데" 그 속성들이 이 사태의 구성요소들이기 때문이다. (a가 N으로 있다는 것과 같은 사태들은 반복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주의하라. 그래서, 개별자들과 더불어 사태들 또한 개별자들로 불릴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의미에서 개별자는 무속성이다. 그것이 곧 얇은 개별자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개별자는 속성들을 자신 안에 포괄한다. 후자의 경우 그것이 두터운 개별자이자 사태이다. 나는 이것이 벌거벗은 개별자의 이율배반으로 촉발된 난점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을 마치기 전에 두 가지 지점을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첫째, 얇은 개별자와 두터운 개별자 사이의 구분은 보편자로서의 속성이라는 원칙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구분은 개별자에 대해 다발 관점보다는 기체-속성 설명을 선전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기체-속성 관점을 개별자로서의 속성, 즉, 개별양태자로서의 속성과 함께 취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본 바 있다. 얇은 개별자는 그 개별자의 추상된 속성들과 더불어 개별자로 남는다. 두터운 개별자는 다시금 사태이다. 얇은 개별자가 그것이 지니는 그 (개별) 속성들을 지닌다는 것으로서의 사태 말이다. 

 둘째, 얇은 개별자와 두터운 개별자는 실제로 범위의 양극단이다. 그 사이에 그 속성의 일부이되 오직 일부만으로 채색된 개별자가 있다. 그 속성들은 한 두가지 이유로 특별히 중요한 속성들일지도 모른다. 이 중간적 개별자는 물론 사태일 테지만, 두터운 개별자인 사태에 비해서는 덜 포괄적인 사태일 것이다. 

 

7 방식으로서의 보편자

앞선 장에서의 논의는 지금 그대로는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그 논의는 여전히 우리에게 얇은 개별자와 그 개별자의 속성들에 대해, 두터운 개별자를 형성하도록 사태 내에서 함께 연결되는 별개의 형이상학적 결절들로서 보는 그림을 남겨놓는다. 이 그림은 예화의 원리와 벌거벗은 개별자 배제 원리를 어느 정도 임의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왜 그 결절들은 함께 하게 되어야만 하는가? 그것들은 따로 발생할 수 없을까? 그러나 그것들은 원치 않은 피조물들, 미예화된 보편자들과 벌거벗은 개별자들이지 않겠나? 

  여기에서 나는 풍문으로는 돌았지만 내 생각에는 데이비드 서전트의 스타우트의 보편자 이론에 관한 책 이전까지 상술된 적은 없는 제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스타우트와 달리, 서전트는 보편자를 수용하고, 그의 책 4장에서 그는 우리가 그 보편자들을 방식들로 생각해야 하리라고 주장한다. 속성들은 사물들이 있는 방식들이다. 전자의 질량이나 전하는 전자가 있는 방식이다 (이 경우에는 어떤 전자든 그것이 있는 방식이다). 관계들은 사물들이 서로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들이다. 

  만일 속성이 사물이 있는 방식이라면, 이는 속성을 사물과 매우 밀접한 관계로 가져다 놓는데, 그러나 그것들 사이의 구별을 해치는 일 없이 그렇게 한다. 누군가는 예화를 근본적인 관계로, 단순 관계보다 더욱 밀접한 결속이나 연쇄로 생각하게 되는 지점을 볼 수 있다. 미예화된 속성이라는 발상에 더 끌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물들이 있는 방식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시, 누군가가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 관계가 그 사물들과 독립적으로 고유하게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 발상은 그다지 매력적이었던 적조차 없다. 속성을 실체화하는 편이 관계들을 실체화하는 것보다 더욱 쉽다.)

  "사물들이 있는 방식들"과 "사물들이 서로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들"이란 표현들이 미예화된 보편자들에 반대해 논점을 선취한다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물들이 있을 수 있을 방식들과 서로에 대해 성립할 수 있을 방식들에 대해 말하고, 그래서 그 방식들이 실제 사물들의 방식들이어야만 한다는 함축을 제거해야 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나의 논증은 이런 의미론적 지점에서 이점을 얻고자 시도하고 있지 않다. 내 입장은 일단 속성과 관계가 사물이 아니라 방식으로 사유되고 나면, 이러한 방식들을 사물들로부터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지극히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방식들은 실제 사물들이 있는 방식들로 혹은 실제 사물들이 서로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들로만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속성과 관계가 미예화된 채로 존재할 수 있다는 발상은 그것들이 방식이 아닌 사물이라는 생각에 의해 키워진다. 

[342] 이 장에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방식으로서 속성과 관계라는 개념이 그것들을 보편자로 간주하는 데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여전히 a의 속성을, 설령 그 속성이 개별자이고, 개별양태자라고 할지라도, a가 있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a 외에 다른 어떤 사물도 해당 방식으로 있을 수 없는 경우가 그 경우일 것이다. 유사하게, a와 b 사이에 견지되는 관계는 설령 이 방식이 반복불가한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a와 b가 서로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일 수 있다. 

  사태와 그 구성요소들이라는 관념, 얇은 개별자와 두터운 개별자 사이의 구별, 사물들이 있는 방식과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에 대해 성립하는 방식으로서 속성과 관계라는 개념이 보편자에 대한 철학에 뿐만 아니라 개별양태자들에 대한 철학에도 원한다면 사용가능한 것들이라는 점을 꺠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8 다중 위치

보편자들을 플라톤적 영역에서 지상으로, 시공간으로 끌고 내려오는 일은 꽤나 이상한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보편자들은 다중적으로 정위되거나 정위될지도 모른다는 점이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보편자들은 그들을 예화하는 개별자들이 발견되는 어디에서든 발견되는 것이지 않은가? 만일 두 상이한 전자들이 각기 전하 e를 가진다면, e라는 하나의 것, 보편자는 두 상이한 장소들, 그 두 전자들이 있는 장소들에서, 그렇지만 완전하고 완벽하게 그 각각의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는 여러 철학자들에게 널리 역설적인 것으로 여겨져왔다. 

  플라톤은 『필레보스』 15b-c에서 이 난점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그는 형상에 대해 질문했다. "형상은 그 자신 외부에서 전체로서 있을 수 있는가? 그렇게 한 사물 안에서도 여러 사물들 안에서도 동시에 하나이자 같은 것으로 있게 될 수 있는가? 그러한 관점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불가능한 관점이라 생각되지 않을까?" 보편자들을 개별자들로부터 분리된 영역 안에 유지시킨 이론은 최소한 이 난점을 회피해내야 할 것이다. 

  당신은 보편자들의 다중 위치를그저 수용하고자 시도할지도 모른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렇게 해왔다. 그러나 그럼 한 가지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 관계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아마도 누군가가 다중 위치에 속성들을 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중적으로 위치됨"이라는 관계들을 당신은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그 관계된 사물들 안에? 그것은 맞는 답으로 들리지 않는다. 만일 a가 b에 선행한다면, 그 관계는 a와 b 양자 모두 안에 있는가? 혹은 [a + b]라는 사물 안에 있는가? 어느 쪽 답도 맞는 답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 관계가 사물들 안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보편자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그것들을 또 다른 영역에 놓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 역시 썩 적절하지는 않다고 말함으로써 이 난점과 마주하고자 한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은, 내 생각엔, 세계가 사태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 사태들은 속성을 가지고 서로 관계 속에 성립하는 개별자들을 포함한다. 속성들과 관계들은 보편자들이되, 이는 상이한 개별자들이 똑같은 속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과 또한 개별자들의 짝도 3자도 그 이상도 서로 똑같은 관계에서 정립될 수 있다는 것 양쪽 모두를 의미한다.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놀랄 만한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자연주의가 참이라면, 세계는 단일한 시공간 다양체이다. 사태 이론으로 보자면 이는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즉, 우리는 어떻게 자연주의를 앞서 묘사된 관점과 화해시키는가? 이에 가장 대략적인 세부사항만 포함한 답이라도 제시하는 일은 추정컨데 근본적인 과학과 철학을 모두 포함하는 막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공간 세계가, 시공간적 관계들을 통해 (사태들 내에서) 함께 연결되는 사태들에서 특징을 드러내는 모든 개별자들과 더불어, 사태들의 막대한 다수성 혹은 연언이어야 하리란 것이다. 

  그래서 시공간 내 보편자들을 위치시키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투박한 말하기 방식으로 드러난다. 시공간은 보편자들이 그 안에 놓일 상자가 아니다. 보편자들은 사태들의 구성요소들이다. 시공간은 사태들의 연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편자들은 시공간 '안에' 있다. 그러나 보편자들은 그 시공간을 구성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그 안에 있다. 나는 이것이 universalia in rebus(사물 안의 보편자)에 대한 합리적 이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플라톤의 반박에 대응하기를 기대한다.

 

-蟲-

[73] 심리철학의 전형적인 관심사는 세 가지 질문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는 어떻게 타인이 고통을 가진다는 것을 아는가? (2) 고통은 뇌의 상태인가? (3) 고통 개념의 분석은 무엇인가? 퍼트남은 이 글에서 (2)에 집중한다.

 

Ⅰ. 동일성 질문들

"고통은 뇌 상태인가?" (혹은, "시점 t에 고통을 가진다는 속성은 뇌의 상태인가?") 이 질문을 "분석 철학"의 전개 과정에서 성장해온 특수한 규칙들에 관해 말하지 않고 유의미하게 논의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규칙들은 모든 개념적 혼동들을 종결짓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규칙들로,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개념적 혼동을 표현한다. 이 규칙들은 물론 대부분의 분석철학자들의 활동에서 명시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암묵적인 것인데, (1) "being A is being B" (예를 들어, "고통을 겪고 있다-being in pain-는 것은 특정 뇌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같은 형식의 진술은 오직 그 진술이 어떤 의미로 A와 B라는 용어들의 의미로부터 귀결될 때에만 맞는 진술일 수 있다. (2) "being A is being B" 형식의 진술은 오직 그 진술이 어떤 의미로 환원적인 경우에만 철학적으로 정보값을 가진다 (예를 들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특정한 불쾌한 감각을 가진다는 것이다"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정보값이 없다.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특정한 행동 경향이다"라는 것은 만일 참이라면 철학적으로 정보값을 가진다). 이 규칙들은 우리가 여전히 환원적 분석 기획이 (1930년대 형식의) 완수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훌륭한 규칙들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그 규칙들은 분석철학을 헛짓거리에 빠뜨린다. 최소한 "is" 질문들이 관련된 한에서는 그러하다. 

  퍼트남은 '속성'이란 용어를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 특정 뇌 상태에 있다는 것, 특정 행동 경향을 가진다는 것 같은 것들만이 아니라 온도 등등과 같은 규모까지, 즉, 일항 혹은 다항 술어나 함수로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할 것이다. '개념'이란 용어는 표현들의 동의어 집합들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사용할 것이다. 그래서 온도 개념은 '온도'라는 단어의 동의어 집합과 동일시될 수 있다. (이는 수 2가 모든 짝들의 집합과 동일시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2가 모든 짝들의 집합이라는-is- 특수한 진술과는 상당히 다른 진술이다. 나는 개념들이 곧 그게 무슨 의미일지는 몰라도 아무튼 동의어-집합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이 동의어-집합들과 동일시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는 관련 논의를 정식화하기 위함이다.)

  "온도라는 개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재밌는" 질문이다. 이 질문이 개념적인 질문이라면 (잠시 '열'과 '온도'가 동의어들이라 가정하고) "온도는 열이다" 혹은 "온도 개념은 열 개념과 같은 개념이다"라고까지 답하게 될지도 모른다. 해당 질문을 개념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묻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온도 개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을 때 그 "답"이 무엇일지는 신이나 알 일일 것이다. (어쩌면 그 대답은 개념들이 동의어-집합들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진술일 것이다.)

  물론 "온도라는 속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재미있다. 한 가지 해석은 이를 온도라는 개념에 관한 질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물리학자들의 방식은 아니다. 

  속성 P1이 속성 P2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해당 용어들 P1, P2가 적절한 의미에서 "동의어"일 경우뿐이라고 말한다면 그 결과는 사실상 "속성"과 "개념"이라는 두 관념을 단일 관념으로 붕괴시키는 것이다. [74] 개념들(내포들)이 속성들과 같은 것이라는 관점은 카르납이 명시적으로 옹호했던 관점이다. 이는 불운한 관점으로 보이는데, "온도는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이다"라는 진술이 참인 속성 동일성 진술의 완벽하게 훌륭한 예시로 드러나는 반면, "온도라는 개념은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라는 개념과 같은 개념이다"라는 진술은 단순히 거짓이기 때문이다. 

  다수 철학자들은 "고통은 뇌 상태이다'라는 진술이 영어의 일부 규칙이나 규범을 위배한다는 진술을 믿는다. 하지만 제시된 논증은 거의 납득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뇌 상태 S에 있다는 것을 알지 않고 내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고통은 뇌 상태 S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면, 정확히 같은 논증으로, 내가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가 높다는 것을 (혹은 심지어 분자가 존재한다는 것까지도) 알지 않고 스토브가 뜨겁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물리학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온도가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라는 것이 거짓임을 보여준다. 사실, 저 사실로부터 즉각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라곤 고통이란 개념이 뇌 상태 S에 있음이란 개념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고통이든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이든 일부 고통이든 일부 고통 상태이든, 그것들은 여전히 뇌 상태 S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온도라는 개념은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라는 개념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온도는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이다. 

  일부 철학자들은 '고통이 뇌 상태이다'와 '고통 상태가 뇌 상태이다' 둘 모두 이해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답은 이 철학자들을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잘, 모든 과학적 방법론의 모호성을 감안하더라도, 어떤 종류의 고찰들이 누군가로 하여금 경험적 환원을 구성하게끔 (즉, "물은 H2O이다," "빛은 전자기파이다," "온도는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이다" 같은 것들을 말하도록) 이끄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만일,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여전히 그가 '고통들은 뇌 상태들이다' 라는 (혹은 어쩌면 '고통 상태들은 뇌 상태들이다') 용례에 상응하는 상황들을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를 괴팍한 자라 생각할 근거가 될 것이다. 

  일부 철학자들은 "P1은 P2이다"라는 것이 여기 포함된 'is'가 경험적 환원의 'is'인 경우, 오직 속성 P1과 P2가 (a) 시공간 영역과 결부되고, (b) 해당 영역이 두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경우에만, 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온도는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이다"라는 것은, 온도와 분자 에너지가 같은 영역에 결부되기에, 허용가능한 경험적 환원이지만, "내 팔에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한 뇌 상태에 있는 것이다"라는 것은, 관련된 공간 영역들이 상이하기에, 그렇지 않다.

  이 논증은 매우 강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그 누구도 거울상이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그 다음으로 거울 표면으로부터 반사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 상이 거울 이면의 3피트 위치에 '위치'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저지당할 리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예를 들어 온도는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이다 같은 누군가 허용하길 바라고 있는,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허용하지 않길 바라는 동일화의 속성은 아닌, 환원의 일부 공통 속성을 언제나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그러한 동일화의 의도 자체가 문제의 공통 속성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줄 논증을 갖추지 못하는 한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하다.)

  다시, 또 다른 철학자들은 신경생리학적 법칙들과 "고통 상태들은 이러저러한 뇌 상태들이다" 같은 진술들의 연언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모든 예측들은 똑같은 신경생리학적 법칙들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이러저러한 뇌상태와 상관된다"의 연언으로부터도 같은 정도로 잘 도출될 수 있고, 그래서 (그들 말 그대로 옮기자면) 고통들(혹은 고통 상태들)이 뇌상태라고, 그것들이 뇌상태들과 (변화없이) 상관된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해, 그렇게 말할 아무런 방법론적 토대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 논증도 마찬가지로 빛이 전자기파와 오직 상관되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착오는, 설령 문제의 이론들이 더욱이 같은 예측들로 이끌지도 모른다 할지라도, 상이한 질문들을 받아들이거나 배제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데에 있다. "빛은 불변적으로 전자기파에 상관된다"라는 것은 "만일 빛이 전자기파와 같은 것이 아니라면, 그럼 빛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빛이 전자기파를 동반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에 열려있을 것이다. 그 질문들은 빛이 곧 전자기파라고 말하면 배제되는 질문들이다. 비슷하게, 고통들이 뇌상태들이라고 말하는 정확한 의도는 "고통이 뇌상태와 같은 것이 아니라면, 그럼 고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고통이 뇌상태를 동반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이 경험적 의미를 갖지 않도록 배제시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질문들이 말하자면 해당 문제를 바라보는 잘못된 방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시사할 근거가 있다면, 그러한 근거들은 고통과 뇌상태의 이론적 동일화를 위한 근거들이다. 

  만일 그 모든 반대 논증들이 설득력이 없다면, 우리는 고통들이 뇌상태들이라거나 [75] 고통 상태들이 뇌상태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그리고 아마도 참이라고) 결론내려야 할까? 

1. "고통들은 뇌 상태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벽하게 유의미하다 (어떠한 "영어 문법"도 위배하지 않고, 그 어떤 "용법의 확장"도 포함하지 않는다). 

2. "고통들은 뇌 상태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유의미하지 못하다 ("의미의 변경"이나 "용법의 확장" 기타 등등을 포함한다). 

  퍼트남 자신의 입장은 (1)로도 (2)로도 표현되지 않는다. "의미의 변경"과 "용법의 확장" 같은 개념들은 단순히 너무 잘못 정의되어서 실제로 (1)이든 (2)든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오늘날의 언어학자든 필부든 아니면 철학자든 우리가 논의해 오고 있는 그런 사례들에 적용가능한 "의미의 변경"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다. 언어의 역사에서 의미의 변경이라는 개념이 전개된 그 작업은 지금 이 작업보다 훨씬 더 조잡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1)이든 (2)든 단언하지 않는다면, 달리 말해서, 만일 우리가 "의미의 변경"이라는 문제를 이 사례에서 유사-문제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우리가 처음 문제로 삼은 그 질문을 논의하게 되겠나? "고통은 뇌 상태인가?"

  그 답은 "고통은 A이다"라는 형식의 진술들을, '고통'과 'A'가 어떤 의미로도 동의어들이 아닌 경우에, 허용하는 것, 그리고 그런 어떤 진술이든 경험적이고 방법론적인 근거들에 비추어 허용가능한 것으로서 발견될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제 이 작업을 진행해 볼 것이다. 

 

Ⅱ. 고통은 뇌 상태인가?

우리는 "고통은 뇌 상태인가?"를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의미의 변경"이란 문제를 철회하는 데에 동의했다. 

  퍼트남은 고통이란 개념이 무엇일지를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무엇인지를, 경험적 이론-해석(혹은 최소한 경험적 추측)을 요구하는 'is'의 의미에서 논의하고 있기에, 경험적 가정을 내세우는 데에 양해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전략은 고통이 뇌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선험적 근거들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가정이 더욱 설득력있다는 근거들에 기초해 주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의 가정에 대한 상세한 전개와 입증은 뇌상태 가정의 상세한 전개와 입증만큼이나 이상주의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상세하고도 과학적으로 "완결된" 가정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가설들을 위한 윤곽들에 대한 제안은 오랫동안 철학의 기능이어왔다. 요컨데 그는 고통이, 뇌의 (혹은 심지어 신경 체계 전체의) 물리-화학적 상태라는 의미에서, 뇌 상태가 아니라, 전적으로 또 다른 종류(kind)의 상태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는 고통, 혹은 고통을 겪는 상태가 총체적 유기체의 함수적 상태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부 기술적인 개념들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전의 논문에서 그는 튜링 머신 개념을 설명했고 유기체에 대한 모델로서 이 개념의 사용을 논의했다. 확률 기계라는 개념은 튜링 머신과 유사하게 정의되는데, "상태들" 사이의 전이가 결정론적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확률들과 결부되는 것이 허용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러하다. (물론, 튜링 머신은 단순히 특별한 종류의 확률기계로서, 0과 1이라는 확률적 전이를 가진다.) 그는 확률 기계 개념이 "감각적 입력"과 "운동 출력"을 허용하도록 일반화되었다고 추정할 것이다. 즉, 해당 기계의 표는 "상태"와 빠짐없는 "감각 입력" 집합의 모든 가능한 조합에 대해, 다음 "상태"의 가능성을, 또한 "운동 출력"의 확률 또한 결정하는 "지침"을 규정한다. (이는 테이프에 출력하는 기계라는 발상을 대체한다.) 그는 또한 다양한 입력에 반응 가능한 감각 기관의 물리적 실현, 그리고 기계적 기관의 구현은 규정되지만, "상태"와 "입력" 자체는 통상 그러하듯 오직 "암묵적으로"만 규정된다고 추정할 것이다. 즉, 기계표에 의해 제시되는 전이 확률들의 집합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추정할 것이다.

  경험적으로 제공되는 체계는 동시에 여러 상이한 확률 기계들의 "물리적 구현"일 수 있기에, 그는 체계의 기술(descrip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S가 체계인 경우 S에 대한 기술은 어떤 참인 진술이든 S가 구별되는 상태들 S1~Sn이라는 상호 관련되고 이러저러한 기계표에서 주어지는 전이 확률들에 의한 운동 출력과 감각 입력에 관련되는상태들을 소유한다는 취지의 진술이다. 해당 기술 속 언급된 기계표는 그 기술에 관한 S의 함수적 유기체로 불릴 것이고, Si는 S가 상태 Si에 제시된 시간에 있다는 것으로서 (해당 시간에) 저 기술에 상관되는 S의 상태 총체라 불릴 것이다. 한 기술에 상관되는 한 체계의 상태 총체를 아는 것은 그 체계가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지에 관해 잘 취급할 줄 아는 것을 포함하지만, Si의 물리적 구현을, 예를 들어, 뇌의 물리-화학적 상태들로서 아는 것을 포함하진 않는다. Si는 반복하건데 기술에 의해 암묵적으로만 규정된다. 즉, 오직 기계표에서 제시되는 전이 확률들의 집합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76]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유기체의 함수적 상태이다"라는 가정은 좀 더 정확하게는 다음과 같이 진술될 것이다. 

1.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있는 모든 유기체는 확률 기계이다.

2.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있는 모든 유기체 각각은 최소한 특정 종류의 한 가지 기술을 소유한다 (즉,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적합한 종류의 함수적 유기체를 지닌다는 것이다.)

3.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있는 그 어떤 유기체도 개별적으로 (2)에서 언급된 종류의 기술을 지니는 부분들로 분해되는 일을 지니지 않는다.

4. (2)에서 언급된 종류의 모든 기술 각각에 대해, 해당 기술을 가지는 유기체가 그 감각 입력들 중 일부가 해당 하위집합 내에 있는 경우에 오직 그 경우에만 고통 속에 있는 그런 감각 입력 하위집합이 존재한다.

  이 가정이 모호하긴 하지만, 앞서 뇌-상태 가정보다 더 모호하진 않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한 유기체가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있는 것이어야만 하는 종류의 함수적 유기체에 관해, 그리고 (4)에서 언급된 감각 입력들의 하위집합을 구별해내는 표지들에 관해 더 알고 싶어할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관련하여, 누군가는 아마도 그 함수적 유기체가 "선호 함수"와, 혹은 최소한 선호의 부분 순서와 유사한 어떤 것을, 그리고 "귀납 논리"와 유사한 어떤 것을 포함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기계는 "경험으로부터 학습"할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조건들의 의미는, 자동기계 모델들에 대해, "일부 기계들의 심적 삶"이라는 논문에서 논의된다.) 추가로, 해당 기계가 "통각," 즉, 통상적으로 기계의 신체에 대한 손상에 대해 혹은 위험 온도나 압력 등에 대해 신호를 주는 감각 기관, 해당 입력들의 특수한 하위집합, (4)에서 언급된 하위집합을 전달하는 감각기관을 지닐 것을 요구하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끝으로, 그리고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우리는 최소한 그 기계의 구별되는 하위집합 내의 입력들이 선호 함수나 순서에 대한 고도의 부정가치를 지닐 것을 요구하길 바랄 것이다 (추가 논의는 "일부 기계들의 심적 삶"에서 논의된다). 조건 (3)의 목적은 단일한 고통감각자로서 벌들의 군집 같은 "유기체" (만일 그렇게 간주될 수 있다면)를 배제시키는 것이다. 조건 (1)은 명백히 불필요하고, 오직 설명적인 이유에서만 도입된다. (그것은 사실 의미가 없는데, 모종의 기술 하에서 모든 것은 확률적 자동기계이기에 그러하다.)

  나는 이 가설이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물리-화학적 상태' 가설에 비하면 훨씬 덜 모호하고, 수학적인 종류와 경험적인 종류 양자 모두의 연구에 훨씬 더 수용할 만한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더욱이, 이러한 가설을 연구하는 것은 유기체의 "기계적" 모델들을 산출하고자 시도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의미로 이것이 심리학의 주제 아닌가? 물론 난점은 특정 유기체들로부터 유기체에 대한 심리학적 기술을 위한 통상 형식으로 이행하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2)와 (4)를 정확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심리학 기획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보인다. 

  이제 퍼트남은 방금 언급된 가설을 (a) 고통은 뇌상태라는 가설, 그리고 (b) 고통은 행동 경향이라는 가설과 비교할 것이다. 

 

Ⅲ. 함수적 상태대(對) 뇌상태 

뇌상태 이론가가 뇌의 물리-화학적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불공평하지 않은지 문제시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a) 뇌-상태 이론가들이 언급한 종류의 상태들은 이런 것들뿐이다. (b) 뇌상태 이론가는 보통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짝 촌동네 무신론자를 연상시키는 식으로) 그의 가설과 모든 형식의 이원론 그리고 유심론과의 양립불가능성을 언급한다. 만일 문제가 뇌의 물리-화학적 상태라면 이는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체계 총체의 함수적 상태는 상당히 다른 어떤 것이다. 특히, 함수상태 가설은 이원론과 양립불가능하지 않다. 그 가설이 발상 차원에서 "기계론적"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더라도, 신체와 "영혼"을 구성하는 체계는,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깔끔하게 확률 기계일 수 있다는 점은 살짝이나마 언급할 만하다. (c) 스마트에 의해 개진된 한 가지 논증은 뇌상태 이론이 오직 "물리적" 속성들만을 상정한다는 것이고, 스마트는 "비-물리적" 속성들이 불가해한 것들이라 생각한다. 앞서 정의된 상태 총체와 "입력값"은 물론 그 자체로는 심적인 것도 물리적인 것도 아니고, 나로서는 이런 논증을 내세우는 기능주의자를 상상할 수 없다. (d) 만일 뇌-상태 이론가가 물리-화학적 상태들과는 다른 상태들을 의도한다면(혹은 최소한 허용한다면), 그의 가설은 전적으로 무의미할 것인데, 최소한 그가 의도하는 바의 "상태들"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특정하기 전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77] 이런 식으로 뇌-상태 가설을 취할 때, 그럼 뇌-상태 가설보다 함수-상태 가설을 선호할 어떤 이유가 있는가? 뇌-상태 이론가가 그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려해 보라. 그는 어떤 유기체이든 (a) 적합한 물리-화학적 구조의 뇌를 소유하고 (b) 그 뇌가 해당 물리-화학적 상태에 있다면 오직 그 경우에만, 고통을 겪는 그러한 물리-화학적 상태를 구체화해야 한다. 이것은 문제의 물리-화학적 상태가 포유류, 파충류, 연체동물 등등의 뇌에 대해 가능한 상태여야만 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그 상태는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그 어떤 물리적으로 가능한 피조물의 뇌에 대해서도 가능한 상태여서는 안 된다. 설령 그런 상태가 발견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상태는 또한 우리가 그 상태를 고통이라 추정할 것을 염두에 둘 수 있기도 전부터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있을 것으로 알려질지도 모를 그 어떤 외계 생명체의 두뇌 상태일 것임이 법칙론적으로 확실해야만 한다. 

  그런 상태가 발견되리라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 설령 문어와 포유동물이 (연속진화가 아니라) 평행 진화의 사례라 할지라도, 예를 들어, 실제로 문어의 눈과 포유동물의 눈에서 동일한 구조가 (물리적으로 말해서) 진화되었다. 이 기관이 두 사례에서 상이한 종류의 세포들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평행 진화는 우주 전체에 걸쳐 언제나 고통에 대해 하나의 같은 물리적 "상관물"로 이끌지도 몰랐다는 것은 최소한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이는 확실히 야심찬 가설이다. 

  끝으로, 해당 가설은 우리가 뇌-상태 이론가는 단지 고통이 뇌상태라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때 훨씬 더 야심찬 가설이 된다. 물론 그는 모든 각각의 심리적 상태가 뇌상태라는 주장에 관련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포유동물과 문어 둘 모두에 명백히 적용될 수 있는 (말하자면 "배고픔"), 하지만 그 물리-화학적 "상관물"은 두 경우에 서로 다른 그러한 심리적 술어를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해당 뇌-상태 이론은 붕괴한 셈이다. 내겐 우리가 이런 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압도적으로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 경우 뇌-상태 이론가가 임시 방편적 가정들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두 상태의 선언지를 단일한 "물리-화학적 상태"로 정의한다거나), 이것은 진지하게 고려할 일은 아니다. 

  이제 함수-상태 이론에 대한 고찰로 돌아가서, 우리가 유기체들을 그 행동에 근거하여 고통을 겪는 것으로, 배고픈 것으로, 혹은 화가 나거나 열이 나는 것 등등으로 정체화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하지만 두 체계의 행동에서 유사성들은 최소한 그 두 체계에 해당하는 함수적 유기체에서의 유사성들을 추정할 이유이고, 현실의 물리적 세부사항들에서의 유사성을 추정하기에는 훨씬 더 약한 이유라는 것은 뻔한 소리이다. 더욱이, 우리는 다양한 심리적 상태들, 최소한 허기, 갈증, 공격성 등의 기초적인 것들은 상이한 종들의 경우에서 상호간에 그리고 행동과 다소간의 유사한 "전이 확률들"을 가질 것이라 기대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가 이러한 상태들을 정체화하는 방법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동물의 "불만족한" 행동이 음용을 향해 정향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 행동에 "액체에 대한 충족"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그 동물이 갈증을 겪는다고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다양한 상태들이 가능한 것으로 우리가 간주하는 어떤 동물이든 최소한 특정한 거친 종류의 함수적 유기체를 지닌 것으로 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언급했듯, 종 특화적이지 않은 심리적 법칙들을, 즉, 상이한 종들에 대한 심리학적 이론을 위한 통상 형식을 찾아내는 기획이 성공한다면, 그 결과 주어진 심리적 상태에 대해 필충조건이 되는 종류의 함수적 유기체에 대한 묘사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심리적 상태"라는 개념에 대한 정확한 정의 또한 가져올 것이다. 반대로, 뇌-상태 이론가는 종독립적인 신경생리학적 법칙들의 궁극적인 발전을 희망해야 하고, 그 희망은 심리적 법칙들(충분히 일반적인 유형에 대한)이 종독립적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혹은 훨씬 더 약한 희망으로 심리적 법칙들이 그 안에서 기술될 수 있는 종독립적 형식이 발견될 수 있다는 희망보다 훨씬 덜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Ⅳ. 함수적 상태대(對) 행동 경향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뇌상태도 함수적 상태도 아니라 행동 경향이라는 이론은 분명한 이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유기체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검증하는 방식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떤 동물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할 때 그 동물의 뇌상태에 관한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동물의 함수적 유기체에 대한 어떤 지식이든 있다 하더라도, 미증유의 직관적 방식이 아니라면 ,그걸 거의 지니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실 이 "이점"은 전혀 아무런 이점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떻게 우리가 x는 A라는 것을 검증하는지에 관한 진술들이 A로 있다는 개념이 결국 무엇이 되는지를 잘 처리했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78] 그 진술들은 속성 A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딱히 중요한 시사점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언급된 이 근거로 고통은 뇌상태도 함수적 상태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은 일상인들이 어떤 것이 뜨겁거나 차갑다는 것을 검증할 때 그것의 평균분자운동에너지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사실로부터 열이 평균분자운동에너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필연적으로 그리해야 할 것은 아니다. 필연적인 점은 열을 시사하는 것들로 간주하는 표시들이 사실상 평균분자운동에너지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유사하게, 고통에 대한 행동적 조짐들로 간주되는 표시들이 해당 유기체가 적절한 종류의 함수적 상태에 있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리란 우리의 가설은 필연적이지만, 해당 화자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하리란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 

  "행동 경향" 설명과 관련된 난점들은 매우 잘 알려져 있기에 퍼트남으로서는 여기에서 그것들을 상기시키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 그 난점이란, 사실 '난점' 이상의 것으로 보이는데, 특정이 요구되는 행동 경향을 "마치 X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는 X의 경향"을 제외한 것으로 규정하는 일이 가장 주된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고통을 정체화하기 위해 제안하는 함수적 상태를, 최소한, 거칠게 말해서, 고통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특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염두에 두는 함수적 상태는 해당 유기체의 함수적 유기조직화에서 특정 역할을 수행하는 감각 입력값들을 수용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역할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해당 감각 기관이 문제의 입력값들에 대해 신체에 대한 손상이나 위험한 극단적 온도나 압력 등을 탐지하는 기능을 가진 기관이라는 사실에 의해, 그 "입력값들" 자체가, 그 물리적 구현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해당 기관이 고도의 부정가치를 할당하는 조건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퍼트남이 "일부 기계들의 심적 삶"에서 강조했듯, 이는 기계가 문제의 조건("고통")에 있기를 항상 회피할 것이란 뜻이 아니다. 그저 해당 조건이 더 고도의 가치가 부여된 어떤 목표의 달성을 위해 그 조건을 회피하지 않는 일이 필연적이지 않는 한 회피되리란 뜻일 뿐이다. 해당 기계(이 경우, 유기체)의 행동은 단순히 감각 입력값들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상태 총체에도(즉, 다른 값들, 믿음들, 등등) 의존할 것이기에, 한 유기체가 그러한 조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지에 관한 어떤 일반 진술도 구성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해당 조건을 구체화한다는 희망을 폐기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 조건을 구체화시켰다. 

  행동 경향 이론은 그저 희망이 없을 만큼 모호해 보이는 것만이 아니다. 만일 그 언급된 "행동"이 말초적이고 상관된 자극들이 말초적 자극들이라면 (예를 들어, 우리는 유기체의 뇌가 수술을 받는다면 무슨 일을 하게 될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한 바 없다), 해당 이론은 명백히 거짓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모든 운동 신경이 절단된 두 동물은 똑같은 현실적 그리고 잠재적 "행동"을 (요컨데 말할 아무것도 없다고) 지닐 것이다. 하지만 만일 한편은 고통 섬유를 절단하고 다른 쪽은 고통 섬유를 절단하지 않았다면, 한쪽은 고통을 느낄 것이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만일 한 사람은 고통 신경을 절단했고 다른 쪽은 모종의 강압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모든 고통 반응을 억제한다면, 현실적 그리고 잠재적 말초 반응은 같을지 모르지만, 한 사람은 고통을 느낄 것이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부 철학자들은 이 마지막 사례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의 유일한 근거는 그들이 그 사례를 인정할 수 없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고통 대신, 우리가 그 "신체적 표현"을 억누르기 더 쉬운 일부 감각, 말하자면, 누군가의 왼손 새끼손가락에서의 약간의 시원함을 취한다면, 그 사례는 더욱 명확해진다. 

  끝으로, 설령 고정적으로 (종독립적으로) 고통에 상관되는 일부 행동 경향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고통"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할지라도,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그 상태의 현전이 이 행동 경향을 설명하는 일부 상태와, 뇌 상태나 함수적 상태와 동일시하는 편이, 행동 경향 자체와 그리하는 것보다 여전히 더욱 설득력있을 것이다. 설득력에 대한 그런 고찰들은 주관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다른 사항들이 동등했다면(물론 그렇지는 않지만) 왜 우리는 설득력에 대한 고찰들이 결정적 역할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아야 하는가?

 

Ⅴ. 방법론적 고찰들

여기까지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 뇌상태나 행동경향이라기 보다는 함수적 상태라고 말하기 위한 "경험적" 이유라 불릴지도 모를 것만을 고찰해왔다. 요컨데, 우리가 기술한 함수적 상태가 고정적으로 고통에 "상관되고 종독립적으로 그러하다고, 뇌의 물리-화학적 상태(뇌를 가지는 유기체는 반드시 고통을 느껴야 하는가? 어쩌면 일부 신경절들이 고통을 느낄 것이다.) 혹은 그렇게 상관되는 행동 경향이 있다는 것보다 더 그럴 듯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맞다면, 우리가 제안한 동일화는 최소한 [79] 고찰할 만한 후보이긴 하다고 귀결된다. 방법론적 고찰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 방법론적 고찰들은 대강 환원의 모든 사례들과 유사한데, 그래서 여기서 아무런 놀랄 거리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첫째로, 심리적 상태들과 함수적 상태들의 동일시는 심리학적 법칙들이 "그러저러한 유기체들은 그러저러한 기술들을 지닌다"라는 형식의 진술들과 더불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그러저러한 함수적 상태이다" 등의) 동일화 진술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로, 함수적 상태의 현전은(즉, 유기체의 함수적 유기조직화에서 우리가 기술했던 역할을 수행하는 입력값들의 현전은) 단지 고통"과 상관"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당 유기체 측에서의 고통 반응을 설명한다. 셋째로, 해당 동일시는 (자연주의적 관점이 옳다면) 해당 문제를 바라보는 완전히 잘못된 방식을 표현하는 질문들, 예를 들어, "만일 고통이 뇌상태나 함수적 상태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또 "무엇이 이런 종류의 함수적 상태에 언제나 동반되도록 고통을 야기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배제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요컨데, 해당 동일시는 생산적인 술어들과 생산적인 질문들 양자 모두로 이끄는 이론으로서, 그리고 무익하고 경험적으로 무의미한 질문들을 좌절시키는 데에 기여하는 이론으로서 임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이다. 여기서 '경험적으로 무의미하다'라는 말은 단지 검증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의 관점에서 "무의미하다"라는 뜻이다. 

  

-蟲-

[106]-[110] 이름의 지칭이 고유하게 정체화하는 표식들, 일부 고유 속성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화자가 믿는 속성들이 고유한 규정자일 필요가 없고, 그런 경우조차 해당 속성은 다른 것에 대해서도 참이거나 아무것에 대해서도 참이 아닐 수 있다. 지칭은 화자가 해당 이름을 사용하는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최초 세례식에서 지칭물이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작업은 동의어나 기술 축약이 아니다. 이 경우에도 해당 기술은 지칭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름은 지칭물이 문제의 기술-속성을 지니지 않는 반사실적 상황에서조차 지칭을 위해 사용된다.

  동일성 진술과 관련하여, 두 이름을 사용한 대상의 동일성 진술은 대상 자체의 동일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름들 사이의 관계인 것으로 간주된다. 로서는 우리가 'x'와 'y'가 같은 대상에 대한 이름이라면 오직 그 경우에만 x=y라고 말한다고 주장한다. 대상 자체에 관한 합치진술은 지나치게 사소하여 우리가 동일성 진술로 의도하는 바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x'와 'y'는 이름이 아닌 변항이며, 모든 x와 y에 대해 x=y라면 y=x라고 말할 때,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또한 이 진술은 독립적, 객관적, 필연적으로 참이다. 

  크립키는 이러한 입장에 관련하여 'schmidentity'라는 인위적 관계를 도입한다. 동일성 혹은 schmidentity는 재귀적 관계이다. 이제 키케로와 툴리의 관계가 schmidentical한지 질문할 수 있고 동일성이 대상 자체가 아닌 이름들의 관계라고 믿도록 만드는 문제들이 이 진술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다. 

  앞서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이 참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며, 그것이 선험적으로 알려지지 못하더라도 필연적 참이라고 결론지었다.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의 예에서, 그 출현 시각이나 위치가 달랐거나 전혀 다른 두 행성이 관찰되었을 경우 등 다양한 가능세계가 가정될 수 있음에도, 그 모든 가정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지칭은 고정적이고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닌 경우는 없다.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란 용어는 현실 세계에서와 똑같은 지시를 가지고 사용해야만 한다. 그것은 가능세계 속 가정적 사람들의 언어사용 방식과 별개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혼란을 겪는 원인은 정체(동일)화에 있거나,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필연적인 것 사이의 혼동에 있다. 어떤 진술들은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어야만 하며, 그런 종류의 동일성 진술이 참이라면 그것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점을 사람들은 선험적으로, 철학적 분석에 의해서 안다. 

  크립키는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추가한다.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진술이 필연적으로 참이라 하더라도, 금성이란 행성 자체가 없고 그래서 샛별고 개밥바라기별도 아예 없는 가능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 해당 진술의 진리치가 문제시될 수 있다. 이는 존재의 단일 귀속 문제에 연루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만일 개밥바라기별이 존재한다면'이라는 조건이 추가되어야 한다. 기술구 이론의 지지자들은 존재진술을 기술 혹은 속성의 충족 여부에 관한 진술로 간주한다. 그러나 크립키는 이에 반대한다. 

 

  [110]-[116] 이와 관련하여 크립키가 추가로 언급하는 지점은 de re 양상과 관련하여 본질 속성을 가지는 대상에 관한 고찰들에 선험과 필연의 구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프리지는 여왕이 왕가의 혈통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일종의 본질 속성이라고 보는 내재주의와 그 여왕이 사실은 입양되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것이 종합명제라는 반-본질주의를 소개한다. 그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여왕이 인간이란 속성을 현존의 어떤 단계에서도 결여한 것으로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크립키는 이 논의를 다듬어, 그 여왕이 실제 그녀의 부모와는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녀가 그녀의 실제 부모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기원으로 한다는 뜻이다. 다른 부부의 자식으로서 그녀가 가지는 상당수의 속성들을 지니는, 그리고 여왕이 된 다른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왕으로 지칭한 바로 그 여성이 저 다른 부부의 자식인 상황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능세계에서 그 여왕 자신은 태어난 적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아예 다른 부모가 전혀 다른 사람을 낳아 그 아이가 자라서 여왕이 되었고, 우리가 여왕이라 부른 바로 그 여성은 태어난 적이 없다. 그녀가 태어난 이후의 역사에서는 다양한 것들이 변화 가능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그녀의 기원이 아닌 다른 기원에서 비롯하는 것, 즉 그녀가 그녀가 아닌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다른 기원에서 유래한 그 어떤 대상도 이 대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 방 안의 이 목재 책상의 경우, 우리는 그 유래가 되는 목재를 모른다. 이 책상은 그 목재가 아닌 다른 목재나 혹은 물로 제작되었을 수 있었는가? 그러나 이 방 안 바로 이 책상의 위치에 다른 목재나 물로 제작된 책상이 있는 것을 가정할 경우에도, 그것은 바로 이 책상이 다른 목재나 나무로 제작된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또 다른 책상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 예시가 시사하는 한 가지 원칙은 만일 물질적 대상이 특정 물질 덩어리에 기원을 둔다면, 그 대상은 다른 어떤 물질에도 기원을 뒀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추가로 시사되는 원칙은 대상의 제작 기원인 실체가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상 존재가 지속하는 시간 내의 필연과 우연을, 비시간적으로 결여 불가능한 속성과 결여 가능한 속성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고려 대상이 된 이 책상이 다른 재질로 변화했었을 가능성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 자신의 목재와는 다른 것으로 제작되었을 수 있었을지 여부가 질문이다. 개별자 본질에 관련하여 지금의 논의에 관계되어 크립키가 지적하는 점은 (1) 한 대상에 대한 반사실적 가정은 우주 역사가 특점 시점 이전까지 그대로 진행되었을 가능성, 다른 한편 해당 시점으로부터 분기하여 그 이후로의 변화 가능성을 묻는다는 것이다. (2) 지금의 논의는 대상에 본질적인 것을 기원과 실체적 구성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상의 예에서 기원인 목재가 꽃병이 되었고 책상은 제작되지 않았더라면, 책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책상으로 있다'는 것도 본질 속성으로 간주된다. (3) 대머리라는 속성의 소유가 모호할 수 있는 것처럼(얼마나 탈모가 진행되어야 대머리인가?), 특정 속성 소유가 확정된 이후에도 그것이 본질 속성인지는 여전히 모호할 수 있다. (4) 기원 원칙에 대해 일상 어법 내에서 반례로 보이는 것들이 있을 수 있으나, 크립키는 그런 것들이 진정한 반례가 아니라고 본다.

  다시 책상 사례로 돌아와서, 앞서 다른 목재나 혹은 물로 제작된 책상을 가정하는 사례들은 본질 속성들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크립키가 고려하는 본질 유형은, 예를 들어, 기치가 '명목적 본질' 개념을 통해 취급하는 본질 유형과는 다른 것이다. 기치는 지칭 애매성을 해소하고 통시간 정체성 기준을 보장하기 위해 종류 속성을 적용시켜야만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닉슨'이란 이름을 사용할 때에는 '저 사람이 "닉슨"이다'라고 말할 때 '사람'과 같은 종류가 요청된다. 그러나 크립키가 보기에 이는 선험성을 통해 본질로 간주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명목적'이란 수식이 붙은 것이다. 반면 지금 논의되고 있는 본질은 필연성을 통해 확인되는 종류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크립키는 (1) 설령 지시적 지칭의 애매성 해소를 위해 종류가 사용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해당 대상에 대해 선험적 참으로 주장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한다. 대상의 종류가 달랐을 가능성에 대한 가정은 여전히 가능하다. (2) 크립키는 극단적 예시로서 수학자와 그의 아내의 사례를 구성한다. 남편이 '낸시'라는 이름을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때, 이를 들은 아내가 그것을 미분 가능한 위상군의 이름인지 한 여인의 이름인지 궁금해할 수 있다. 아내의 '낸시' 사용은 남편의 이름 사용에서 유래하므로 명명은 아닐 것이나, 어느 경우든 지칭은 인간 여성이거나 위상군이라는 수학적 대상이거나 할 것이고, 종류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지시의 부정성이 아내의 활동을 명명이 아니라고 할 이유는 아니다. 종류가 이름의 의미 일부여야 하는 이유는 없다.

 

  [116]-[127] 다음으로 크립키는 더 일반적인 동일성 진술의 차원에서, 이론적 동일성 진술을 고찰한다. 예를 들어 빛은 광자의 흐름이라거나, 물은 H2O라거나, 번개는 방전이라거나, 금은 원자번호 79번 원소라는 등의 진술들이 예시된다. 예를 들어 임마누엘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구별하면서, 전자는 선험적이라고 말하고 그 예로 "금은 황색 금속이다"라는 진술을 제시한다. 금이 황색 금속이라는 것은 금이라는 개념의 부분이고, 금이라는 개념을 분석하여 선험적으로 이를 알 수 있으며, 이것이 거짓이라고 경험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으리란 것이다. 

  이 사례에 대해 크립키는 반사실적 상황으로, 시각적 환각을 통해 금이 노랗다고 사람들이 믿게 되었지만, 사실은 그런 환각을 유발하는 조건들을 제거하면 금이 노랗지 않은 상황을 가정해 본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밝혀졌을 때,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세상에 금이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저 금이 노랗지 않고 다른 색이었을 뿐 금은 그대로 금이라고 취급될 것이라 추정한다. 우리는 금의 황색을 특정한 정체화 표시처럼 생각하지만, 그러한 믿음들 중 거짓된 것이 있을 수 있고, 같은 표식들을 대다수 갖추었더라도 금은 아닌 것, 예를 들면 황철광 등이 있을 수 있다. 황철광은 다른 종류의 금이 아니라 금과는 다른 실체이다. 이러한 구분은 우리가 금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변경하고 금과 황철광을 구분하는 또 다른 기준을 추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금에 대해서는 참이지만 황철광에 대해서는 거짓인 특정 속성들을 발견하고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성립한다. 

  또 다른 예로, 호랑이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는 네 발 달린 동물이라는 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세 발 달린 호랑이를 발견할 가능성도 있고, 심지어 네 발 달린 호랑이들이 실은 세 발 달린 종으로부터 유래한 개체들이었을 가능성도 부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반사실적 상황이 알려지더라도, 그래서 호랑이가 없다고 사람들이 말하기 보다는 차라리 호랑이는 세 발 달린 동물이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호랑이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또 알려진 속성들을 대다수 충족시킨다고 하여 그 대상이 필연적으로 호랑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해당 표식을 전부 갖춘 동물이 조사결과 파충류로 드러났다면, 이 동물을 우리는 더 이상 호랑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호랑이라는 기존 개념이 새로운 과학적 정의에 의해 교체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엄밀한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호랑이라는 종 개념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호랑이'라는 용어나 '금'이라는 용어는 해당 종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속성들 대다수를 충족시켜야 하는 일종의 군집 개념 같은 것을 표시하지 않는다. 

  종과 존재에 관해 또 다른 사례로 '고양이는 동물이다'라는 진술을 고려해 보자. 고양이가 자동기계나 악마종으로 밝혀졌다고 가정하면,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세상에 고양이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고양이가 동물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하여 종 진술은 선험적 참이 아니다. 이는 경험적 탐구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술들은 필연과 관련하여서는 어떠한가? 금은 원자번호 79를 가진다. 여전히, 이 진술의 토대가 되는 모든 과학적 발견이 틀렸을 것을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금이 원자번호 79번을 가진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가정되는 우리의 실제 세계에서, 금의 여러 속성들을 가지는 황철광을 우리는 여전히 금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실제 세계에서 금의 모든 자리에 그 대신 황철광이 자리하는 가능세계를 가정해 보자. 황철광은 원자번호 79번을 가진다는 것 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금을 규정하는 속성들을 충족시킨다고 해 보자. 이 반사실적 상황에서도 우리는 금이 원소가 아니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립키는 이러한 반사실적 상황이 금이 원소가 아니었을 상황이 아닐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사례는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 1m의 사례에서 '1m'가 S 막대의 길이를 지시하는 것은 필연적인 반면, S의 길이는 달리 가정될 수 있다는 점과 유사하게, 금은 원자번호 79를 고정적으로 지시하지만, 원자번호 79에 얽힌 과학 이론의 전개와 인류 발견의 역사는 얼마든지 달리 가정 가능하다. 금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가정하더라도, '금'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원자번호 79를 지시할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어떤 물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과학적 발견들을 표현하는 진술은 필연적 참이다. 이러한 속성들이 해당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거를 형성한다는 전제 하에, 이러한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 실체는 해당 실체가 아닌 것이다. 퍼트남의 '고양이들은 동물들이다'라는 진술도 이와 같은 진술들로 분류된다. 고양이들이 실제로 동물이라는 점을 전제하면, 동물이 아닌 그 어떤 유사-고양이든 실제 세계에서도 가능 세계에서도 고양이가 아니다. 

  개별 대상의 본질과 관련하여서도, 예를 들어 눈앞의 이 사물이 분자들로 구성된다는 점이 전제될 때, 그것이 존재하면서도 분자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애초에 그 대상이 분자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과학적 발견으로서 그 대상이 분자 이론에 따라 분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우리가 일단 알고 나면, 이 사물이 분자로 구성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할 수는 없다. 

  

[127]-[134] 자연종들은 고유명사들에 근접하다. 또한 이상의 고찰은 '금'이나 '물' 같은 물질 명사들에도 적용된다. 밀은 자연종 같은 한정 기술구들과 고유명사 양자 모두를 이름으로 간주하는데, 단칭명사가 한정기술구라면 함축적이지만 고유명사라면 비-함축적이라고, 반면 일반 명사는 모두 함축적이라고 한다. 프레게-러셀 류의 현대 논리학 전통은 밀의 단칭명사 해석을 거부하지만 일반명사 해석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크립키는 밀의 관점이 단칭 명사에 관해서는 일부 옳지만 보통 명사에 관해서는 틀렸다고 주장한다. 크립키는 '소'와 '호랑이' 같은 보통 명사가 속성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크립키의 관점은 앞서 고찰된 과학적 발견들을 표현하는 유형의 동일성 진술들에 적용된다. 우리가 흔히 물에 귀속시키는 대부분의 속성들을 지니지만 H2O와는 전혀 다른 원자 구조를 지닌 물질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물은 H2O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H2O 원자 구조를 지닌 이 물질이 우리가 물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하던 속성들을 지니지 않고 그와 많이 다르더라도 이건은 물의 한 형태일 것이다.

  또 다른 과학적 발견을 통한 동일성 진술들로는 '빛은 광자의 흐름이다'나 '열은 분자의 운동이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발견에 앞서 원래 우리는 빛을 빛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특정한 내재적 시각 인상을 통해, 열은 열이 우리의 신경 말단이나 촉각에 미치는 특정 영향을 통해 정체화하였다. 

  이제 인간의 눈이 작동하지 않았을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빛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은 아닐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빛이 아니라 음파에 의해, 빛이 심어주는 특정한 시각 인상과 똑같은 것을 심어주는 가능세계도 상상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전자의 상황을 우리가 빛을 못 보는 상황이라고, 후자의 상황을 빛 아닌 다른 것이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상황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서 빛이 우리를 볼 수 있게 해주지 못하므로 '빛'과 '우리에게 시각 인상을 주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우리가 빛을 정체화한 방식은 빛의 지칭을 고정시켰다. 열의 경우에도, 우리는 열이 우리 안에 열감을 산출해 심어넣는다는 사실로 열을 정체화할 수 있다. 앞서 빛의 경우와 유사하게, 우리의 감각기관이 열감을 감지하지 못하는 상황도, 또 열이 아닌 광선이 해당 감각을 제공하는 상황도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열이 분자 운동이 아니었던 가능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빛이나 혹은 다른 어떤 것이 우리에게 열감을 제공하는 상황을 가정할 수 있더라도, 이는 그 빛이 곧 열이라고 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그로써 번개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정체화 속성들을 다른 어떤 기계장치나 다른 무언가가 가지는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번개가 방전 효과가 아닌 상황을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빛, 열, 번개 등의 사례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특정 감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속성을 통해 그 지칭을 고정시킨다. 그러나 이는 우연적속성이다. 물리 이론의 용어로 기술된 어떤 현상이 이러한 감각들을 산출하는지 우리가 선험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발견은 경험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이 현상의 본질 속성을 제공해주는 정체화를 발견한 것이다.

 

[134]-[140] 이상의 고찰들은 다시 심-신 동일성에 관한 논쟁에 적용될 수 있다. 이상의 관점에 관련하여 (1) 크립키는 자연종에 대한 특정 일반 용어들이 고유명사들과 친족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밀은 진정한 고유명사들이 외연은 가지지만 내포는 가지지 않는다고, 그러나 보통 명사 혹은 일반 용어들은 내포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유와 종차를 통한 정의 전통도, 칸트가 '금'을 '황색 금속'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이 역시도, 일반 용어가 내포를 가진다는 주장으로 묶일 수 있다. 프레게-러셀의 전통도 일반 명사들에 대해 같은 입장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크립키는 단칭만이 아니라 보편 용어까지 내포를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 고유 명사로서의 종 용어에 대해, 지칭이 고정되는 방식에 의해 주어지는 선험적이지만 우연한 속성과 용어의 의미를 통한 분석적인 속성들의 대비에 주의해야 한다. 고유명사의 지칭은 초기 세례식에서 지시적 정의나 묘사에 의해 고정되거나, 공동체에서 해당 이름 사용의 연쇄에 결정된다. '1m = S의 길이'의 경우처럼 종 용어에 대해 선험적 참이 표현되고, 이 표현은 지칭을 고정한다. 해당 종은 예시를 통해 예화된 종으로서 정의된다. 예시들에 의거하여 예화된 종이 정의되기에, 예시들에 따라 이 종 이름의 사용이 폐기되거나 변경될 수 있다. 감각 지각되는 자연 현상의 지칭이 지시되는 방식, '열 = 감각 S에 의해 감지되는 것' 또한 동일성(정체성)이 지칭을 고정시킨다. '열'도 '금'도 고정 지시자이며 정의에 의해 고정된다. (3) 자연종의 특정 속성들은 기존 사례 외부의 새로운 사례들을 종 내에 포섭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특정 속성들이 선험적일 필요는 없다. 어떤 속성들이 관련된 자연종에 속하기 위한 필충조건인지 여부는 경험적 문제이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보편적 적용 가능성은 필연적일 것이다. '고양이는 동물이다' 같은 진술들, 종을 유에 포섭시키는 진술들은 참인 한에서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점을 우리는 선험적으로 안다. (4) 과학적 탐구는 자연종, 자연현상 등에 대해 필연적 본성, 종 본질을 발견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유형의 속성 정체성은 선험성이나 분석성과는 구분되는 필연성에 결부되는 것으로 보인다. '열은 분자 운동이다' 같은 이론적 정체화는 선험적이지 않더라도 필연적이다. 이러한 종 본질의 발견이 의미의 변화를 구성하는 것은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발견된 필연적 참이 문제의 용어에 대한 의미분석을 통해 도출되진 않는다. (5) 종-이름은 고유명사와 마찬가지로 그 지칭이 인과적 연쇄에 의해 결정되고, 사례나 예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름 사용자들이 해당 이름에 같은 지칭을 부여한다는 점이 보장된다면, 각 사용자들이 해당 이름의 지칭을 고정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든 같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감각되는 자연현상들의 사례에서는 이 지칭 고정 방식이 결정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라는 착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같은 감각 결과를 전혀 다른 것이 내놓는 일도, 해당 감각을 지각할 감각주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가정 가능하며, 어느 경우에도 여전히 해당 자연현상 이름의 지칭에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특정 자연현상이 특정 감각을 우리에게 유발한다는 것은 그 현상 대상 자체의 상태속성은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140]-[144] 이론적 정체화 문제로 돌아가서, 이는 두 고정 지시자를 포함하는 정체성이고 후험적 필연성의 사례들이다. 후험적 필연적 참 개념이 혼동을 야기할 수 있는데, 이를 테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가능성이 이러한 후험적 필연성의 반례로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엄밀히 말해서, 해당 상황은 개밥바라기별-샛별-금성이 그 자신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체했을 가능성을 가정하는 것이다.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라고 밝혀졌을지도 몰랐다는 부정확한 진술은, 상이한 두 천체가 아침과 저녁에 각기 개밥바라기-샛별-금성에 의해 실제로 점유된 바로 그 위치를 점유했었을지도 몰랐다는 것으로 재진술되어야 할 것이다.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의 지칭물 동일성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이 두 이름 각각이 저마다의 비고정 지시자(1m 사례에서 'S의 막대 길이' 같은) D1과 D2에 의해 고정되고 있을 때, D1=D2는 여전히 우연한 참일 수 있다. 그리고 D1과 D2에 대한 다른 가능성들을 가정하는 일이 가능하다.

 

  [144]-[] 이상의 고찰을 또 다른 동일성 명제들에 적용해 보자. 개인과 그의 신체, 개별 감각과 개별 뇌 상태, 심적 상태 유형과 물리적 상태 유형 사이의 여러 동일성 명제들이 있을 것이다. 크립키는 이 동일성 명제들 전부를 일관되게 취급할 틀을 제안하고자 하지는 않으며, 유형 동일성 명제에 대해 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데카르트식 주장에 따르면 정신은 신체 없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므로, 개인이나 정신은 그 신체로부터 구분된다. 신체가 정신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도 이와 같은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크립키는 이와 관련하여 데카르트식 전제는 수용하면서 데카르트식 결론은 거부하는 대답을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개인에 대한 고정지시자, 'B'는 그의 신체에 대한 고정 지시자라 가정하자. 여기에 더해 데카르트가 B에 동일시되었다면, 두 고정 지시자들 사이의 동일성은 필연적일 것이다. 두 고정 지시자의 지시체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데카르트는 B 없이 또 B는 데카르트 없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최초 우정 장관이 이중초점렌즈의 발명가와 동일했다는 것은 이 데카르트식 동일성 진술과 다른데, 이중초점렌즈가 발명된 적 없더라도 해당 동일성은 확보되고, 그 이유는 이중초점렌즈의 발명가가 고정 지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렌즈 사례에서는 한쪽이 다른 쪽 없이 존재하더라도 여전히 그 둘이 동일할 수 있다. 이는 데카르트의 해당 사례에 적용될 수 없다. 

  'A'는 개별 통각을 이름하고, 'B'는 그 통각에 상응하거나 그러한 동일성을 누군가 주장하는 뇌 상태를 이름한다고 해 보자. B가 A 없이 존재하는 최소한 논리적으로 가능해 보이는데, 그 둘 사이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이 가능성을 허용할 수 없다. 만일 A와 B가 동일하다면 그 동일성은 필연적인 것이어야 한다. A에게 고통임이 혹은 감각임이 우연적 속성이라는 식의 대응도 작동하지 않는다. 일부 동일성 이론가들은 프랭클린의 우연한 활동이 그를 이중초점 렌즈 발명가와 동일하게 만들고 이 동일성이 우연하다는 구도를 가져와, 뇌 상태의 우연적 속성이 이 상태를 고통으로 만들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우연한 속성이 환원불가능한 비물리적 속성이 아니기를 기대한다. 예를 들어, 마치 특정 자극과 해당 자극이 야기하는 특징적 행동처럼, 뇌 상태가 고통에 대해 인과적 역할이라는 우연적 속성을 가지길 바라는 것이다. 크립키는 이에 대해 물리적 상태의 인과적 역할이 우연적 속성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그 상태가 심적 상태라는 것 역시 해당 물리적 상태의 우연적 속성으로 간주되며, 해당 상태가 통증이라는 특수한 상태라는 점이 간과된다고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이 관점은 고통이 심적 상태임을 배제한 채로 존재 가능하다는 것이 된다. 

  데카르트식 명제와 관련하여 역전 문제, 두뇌 상태가 고통 없이 존재했었을 것이라면 고통도 두뇌 상태 없이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문제가 있다. 특정 뇌 상태 B와 고통 A가 동일하다면, 그 동일성은 필연적이고, 한편의 본질 속성은 다른 편에 대해서도 본질 속성이어야만 한다. 이 동일성 명제를 견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데카르트식 이원론적 직관, A와 B의 상관적 현존이 우연적일 뿐이라는 직관을 단순하게 수용할 수는 없고 이러한 직관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설명해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어려운 작업이다. 

  특정 뇌 상태와 특정 고통이 아니라,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의 동일화로 예화되는 유형 동일성을 고찰해 보자. 일례로 유물론자는 이 동일화를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화에 유비한다. 그리고 유물론자는 통상 이 양쪽 사례 모두가 우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열'과 '분자 운동'이 둘 다 고정 지시자이기에, 그 지칭물이 되는 현상의 동일화가 필연적임을 보았다.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 역시 둘 모두 고정 지시자일 것이다. 이 둘이 고정지시자임이 보장된다면, 그 둘 사이의 동일성이 참일 경우 그것은 필연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유물론자 혹은 동일론자는 심적 상태를 지시하는 '고통'과 물리적 상태를 지시하는 'C-신경섬유 자극'이 상호 독립적으로 별개의 사태를 지시할 수 있으리라는 명백한 가능성을, 물리 수산화 수소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는 가짜 가능성과 같은 종류의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크립키는 이러한 유비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평가한다. 열이 분자운동이 아닐 것으로 착각한 잘못된 가정은 열감을 매개로 형성되었다. 분자운동이 없더라도 열감을 느끼는 경우, 분자운동이 있더라도 열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열에 대한 정체화에 사용된 우연적 속성을 매개로 하여 열이 분자운동이 아닌 채로 존재하는 경우와 분자운동이 열이 아닌 채로 있는 경우로 혼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의 경우, 열과 열감 사이의 구분과 같은 지칭물과 속성의 구분이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동일성 이론가는 물리적 상태가 심적 상태를 산출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 둘이 동일시되길 바란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통은 심적상태이고 C-신경섬유 자극은 물리적 상태이다. 

  '열'이 여전히 고정 지시자라 하더라도, 그 지칭의 결정은 우발적 속성(열감을 준다)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통한 고정 지시는 지칭되는 현상이 열이라는 것 없이도 그러므로 분자 운동이라는 것 없이도 가능했다. 반면 고통은 고통을 준다는 것 같은 우발적 속성에 의해 지칭이 결정된 게 아니다. 고통은 고통인 것으로 있다는 속성 그 자체에 의해, 즉각적 현상학적 성질에 의해 지적된다. 고통은 '고통'이란 표현에 의해 고정 지시될 뿐만 아니라 지칭이 지칭물의 본질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열과 분자운동에 관련하여 신의 창조과정 같은 것을 상상해 보자. 신은 열, 즉 분자 운동 자체를 창조하고, 이를 열감으로 지각하는 피조물을 만든다. 여기에 더해 신이 열과 분자 운동을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추가 작업 같은 것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C-신경섬유 자극의 경우, C-신경섬유를 만들고 이를 가진 피조물이 그 섬유의 자극을 받도록 만드는 것에 더하여, 만일 이 자극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추가작업이 필요하다면, 이 둘은 동일성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해당 자극을 고통으로 만들기 위해필요한 추가작업은 요청되지 않을 것이다. 

  뇌 상태와 심적 상태의 대응은 동일성을 성립시키지 않는 두 유형의 일치라는 우연적 속성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일성 관계는 필연적이므로 이러한 우연적 요소는 이 물적 상태와 심적 상태 사이의 관계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뇌 상태와 심적 상태가 동일하다고 할 때, 이는 특정 뇌 상태가 이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피조물에게 고통이란 심적 상태를 유발한다는 식의 우연적 일치로 설명될 수 없다. 분자운동인 열이 열감을 주는 현상과 우연히 일치하는 경우와 달리, 고통은 고통이란 감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동일성 주장은 바로 이 고통 자체가 뇌 상태와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유물론자로서 동일성 이론가들은 심적 상태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우연적 속성으로서 물적 상태에 환원시킴으로써 이 둘 사이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주창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뇌의 물리적 상태는 논의의 대상이 된 다른 한쪽인 고통이라는 심적 상태와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다. 뇌 상태가 심적 상태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 둘은 동일하지 않다. 동일하다면, 우연히 동일한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동일하다. 그 경우 동일한 지칭물을 지시하는 두 이름이 서로 구분되어 한쪽만 부정되고 다른 한쪽만 남겨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반대로, 물리적 상태 없는 심적 상태의 경우에도 동일성 이론가들에게 제기되는 문제들이 있다. 

  

-蟲-

[71]-[78]

(1) 이름이나 지시표현 'X'에 대해, A가 'φX'라 믿는 속성군 φ가 상응한다. 

(2) 해당 속성군 중 하나 혹은 일부 결합이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낸다고 A에게 믿어진다.

(3) 대부분의 φ가 단일 대상 y에 의해 충족된다면, y는 'X'의 지칭물이다.

(4) φ 내 투표 결과가 고유 대상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X'는 지칭을 하지 않는다. 

(5)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 대부분을 가진다'는 진술은 화자에게 선험적으로 알려진다.

(6) 위 진술은 (해당 화자의 사적언어에서) 필연적 참을 표현한다. 

(C) 성공적 이론에서 설명은 비순환적이어야 한다. 속성군이 제거 불가능한 식으로 지칭 개념을 포함해선 안된다. 

(C)를 충족시키지 않고 (1)-(6) 논제가 성공적 이론일 수 없다. 이름이 그러한 이름으로 불린다는 속성으로 기술된다는 발상,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개별자'를 의미한다는 생각은 위 논제들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비순환조건을 위반한다. 

  그런데 φ가 단일속성,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다는 것이라고 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종사하였다는 것은 우연적 참이므로, 설은 이에 대한 해법으로 단일 기술이 아닌 기술 다발을 제안한다. 그런데 설은 이 다발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속성들의 논리적 합, 포괄적 선언지를 가진다는 것이 필연적 참'이라고 제안한다. 크립키는 이를 부정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던 반면 다른 누군가가 그 모든 행위들을 수행했을 가능세계에 대해 말할 때에도 우리는 그 '다른 사람'을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그 자신이라고는 말하지도 규정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정 속성을 한 대상을 고유하게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지라도, 바로 그 속성을 그 대상이 결여하는 가능세계를 가정할 때조차 그 이름은 그 대상을 지칭한다. 이것이 고정지시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속성은 필연적 혹은 본질적 속성일 필요가 없다. 그 대상-속성 관계를 부정하는 가능세계에서도 여전히 해당 대상은 같은 이름을 통해 고정적으로 지시될 수 있다. 이는 '통세계 정체화'나 '대응쌍 이론'이 전제하는 순전히 질적으로만 주어지는 '가능세계'라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지시자가 고정적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현실과 다른 가능세계를 가정하고 규정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언어 사용 방식에 따라 같은 의미와 지칭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정 지시자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지칭을 가진다. 또한 이렇게 지칭되는 사물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칭되는 사물이 없다고 가정되는 가능세계를 기술할 때조차 바로 그 대상이 고정적으로 지칭되면서 존재하지 않았을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78]-[82] 이리하여 (6)은 잘못된 것으로서 삭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6)이 부정된다고 하더라도, 1m는 여전히 S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 S의 길이가 온도나 압력에 따라 달라지더라도 그러하다. 개밥바라기별의 출현 위치가 달랐을 가능세계를 가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개밥바라기별이 내가 저녁에 그 위치에서 봤던 그 사물이라는 '지칭 결정' 성립에 따라, 나는 개밥바라기별이 내가 저녁에 그 위치에서 봤던 그 사물이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 것이다. 

  (6)이 제거된 경우에도, (2)-(4)가 모두 참이라도 (5)는 통상 거짓이다. (3)과 (4)가 선험적으로 알려질리 없고, 지칭이 결정된 이후 (2)-(4)를 통해 결정된 지칭물과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다. 희소한 경우로서, 통상 최초의 세례(명명)에서만 (2)-(5)가 모두 참이다. 우선 한 대상을 고유하게 확정해주는 일부 조건들을 제시함으로써, 다음으로 특정 단어를 이 조건에 의해 확정되는 그 대상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함으로써 제시된다. 이런 세례 명명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2)-(5)가 거짓이다.

  (1)은 정의에 해당하고, (2)는 예를 들어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자를 나타내는 데에 '키케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는 것이다. 한 속성이 하나의 대상을 고유하게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 사람이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도 로마의 유명한 연설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같은 이름을 같은 지칭으로 사용할 수 있다. 리처드 파인만의 독자적인 이론을 모르더라도, 물리학자인 누군가로서 그 이름을 사용해 그를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름들을 사용하는 그 사람들이 로마의 연설가, 혹은 물리학자 아무개라는 것이 키케로나 파인만을 고유하게 지적해낸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카틸리나에 대한 최초 고발자라는 것이 키케로를, 혹은 예를 들어 상대성 이론이 아인슈타인을 고유하게 지적해내는 경우에도, 여기에서 비순환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카틸리나가 키케로에 의해 처음 고발당한 사람이라고 규정되는 것, 혹은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라는 식으로 규정되는 것은 비순환조건을 위배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반이 발생하든, 아니면 해당 속성이 특정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내지 못하든, 여전히 일상언어에서 이러한 이름들을 통한 지칭은 성공적으로 성립한다. 

 

  [82]-[85] 이 이론과 관련된 그림은 어떤 고유한 속성들을 제시함으로써만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사용하는 이름의 지칭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립키는 누군가가 키케로가 유명한 로마 연설가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가 키케로를 안다고 간주한다. 그런데 상대성 이론에 대해 전혀 모르더라도 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다는 데에 근거하여 아인슈타인은 그 이론의 발견자이고 그 이론의 발견자는 아인슈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비순환조건을 위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말한다. 따라서 이 조건을 시사하는 그림은 우리의 말하기 방식을 설명하지 못한다. φ에 해당하는 상대성 이론의 상세내용은 알려진 바 없고, 그 외에 지칭 방식은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전히 φ와 이를 충족시키는 y의 순환적 관계만 남았음에도 지칭이 성립하는 것이다. (3)은 그런 의미에서 거짓이다. 

  만일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φ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는 A에게 'X'라는 이름의 지칭물이라는 것은 사실인가? 상대성 이론의 발견자가 아인슈타인이라는 것처럼,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이 괴델이라는 예시를 사용해 보자.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은 '괴델'의 지칭물이라는 점이 귀결되는가? 가정적 상황에서 슈미트란 사람이 실제로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했고 괴델은 이를 훔쳤을 뿐이라면, '괴델'은 사실 슈미트를 지칭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괴델'에 대해 말할 때 사실은 우리가 슈미트를 지칭하고 있는가? 우리는 잘못된 정보, 그 귀속이 거짓인 속성에 근거하여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이름 사용의 예시는 얼마든지 구성할 수 있고 또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만일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φ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가 그 이름의 지칭물이라는 것은 거짓으로 보인다. 내가 사용하는 이름이 잘못된 정보에 기인하였거나 사용 맥락에 따라 그 지칭이 애매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내가 그 이름을 '사용하는 맥락'에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같은 이름으로 같은 지칭을 '의도'하여 일관되게 사용하며, 잘못된 정보가 정정되면 그 사용을 철회할 것이다. 이 강연에서 '지칭물'은 이름에 의해 명명된 사물이라는 점에 혼동이 없어야 한다. 

 

  [86]-[87] φ가 고유 대상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X'는 지칭을 하지 않는다는 (4)의 경우, 우선 앞서 로마의 위대한 연설가나 물리학자라는 것은 키케로나 파인만을 고유하게 대상으로 내세우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았다. 또한 일련의 거짓믿음들의 총체를 가지고서, φ를 고유하게 충족하는 대상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여전히 이름이 지칭을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화나 전설 속 이름들의 경우가 그 예일 수 있다. 

  

  [87]-[90] (5)의 경우, 설령 (3)과 (4)가 참일 때조차, 통상의 화자가 이 이론에 따라 (3)과 (4)가 참이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지는 않을 것이다. 이름의 지칭물에 결부시킨 속성들에 대한 나의 믿음은 그 정보가 거짓되었다는 점이 확인될 때 언제든지 철회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름의 지칭 기능은 작동하고, 그래서 이름은 축약된 기술구가 아니다. 따라서 'X'의 지칭물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φ를 충족시킨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게 되지는 않는다. 

  하나의 반례로, '괴델'이란 이름을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5)가 비순환 조건을 위배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그렇게 믿기 위해서, 그보다 앞서 우리는 괴델을 지칭하고 있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칭은 우리 스스로 '나는 "괴델"을 산술 불완전성이 통상 귀속되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여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지칭이 성립했다면 이는 순환적이었을 것이다. 지칭이 먼저 전제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이 업적을 우리가 그 업적을 귀속시키는 그 사람에게 귀속시킨다'라는 순환적 과정만이 남는다. 

 

  [90]-[93] 스트로슨은 이러한 지칭이 다른 사람의 지칭으로부터 파생되는 식의 책임전가의 그림을 소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쇄가 비순환적이며 무한소급하지 않고 정체화에 성공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방법은 없다. 

  사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자의적으로, 예를 들어, '나는 "괴델"로 산술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라고 지칭을 확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지칭이 이루어질 경우, 사실은 슈미트가 산술 불완전성을 증명했던 것이라면, 이 상황에서 나는 "괴델"로 슈미트를 의미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이런 식으로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최초에 어떤 대상에 대해 명명이 이루어지고, 그 명명자가 그 이름을 사용하여 대화하고, 대화 참여자들로부터 다시 이 이름 사용의 연결이 확산된다. 그 대상을 고유하게 정체화하지 못하더라도, 이 연쇄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에 소속된 구성원은 그 이름으로 지칭을 수행한다. 어떤 고유한 속성군의 충족 여부를 통한 신비한 세례식 같은 것은 없다. 

  스트로슨은 이름 사용자가 그 연쇄에서 지칭의 출처를 알아야만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크립키는 그러한 요구조건을 설정하지 않는다. 스트로슨의 요구에 따르자면 화자는 그의 지칭 원천이었다고 생각하는 바에 의존한다. 반면 크립키의 그림은 화자가 지칭을 획득한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원천이 아니라, 관련된 의사소통 연쇄이다. 지칭 성립에 필요한 의사소통 연쇄의 엄밀한 필충조건을 제시하는 일이 없더라도, 이 그림은 기술이론에 근거한 것보다 나은 것으로 보인다. 

 

  [93]-[97] 앞서 밝혔듯 크립키는 자신이 제안한 그림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반면 그는 기술이론에 대해 여섯 개의 명제와 비순환조건을 명시하였고, 그와 같은 구체성을 갖고 크립키 자신의 제안을 구체화한다면 다양한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칭 결정에 관련하여 기술 이론이 제안하는 그림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의도하였다. 질적으로 고유하게 대상을 지적해내는 것, 지칭을 결정하는 속성들을 마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지칭을 성립시키는 연쇄의 필충조건에 이르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특정인을 지칭한다는 것이 공동체 내에서 지칭되는 그 사람 자신에게도 소급되는 연결, 우리와 다른 화자들 사이의 연결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지칭은 단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바에 의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이름이 누군가에 당도하였는지의 역사에, 또 그와 같은 사항들에 의존한다. 누군가가 해당 지칭을 획득하는 것은 그러한 역사에 뒤따름으로써 성립한다.

  그가 제안하는 이론에 대한 투박한 진술은 최초의 세례식으로 시작한다. 이 세례식은 기술이론과 차별되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1) 명명에 사용되는 기술은 해당 이름과 동의어가 아니라 그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2) 통상적으로 최초 세례식의 세례자는 대다수 사례에서 명명 대상과 안면이 있고 명시적으로 규정하여 명명할 능력도 있다. 반면 기술이론에 영감을 주는 사례들은 대상이 더 이상 살아있지 않고 그와 안면이 있는 살아있는 사람도 없는 과거의 유명인의 이름들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사례들이 기술이론을 통해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 앞서 지적되었다. 세례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연결의 연쇄 이행 과정에서, 수신자는 사용자와 같은 지칭으로 해당 이름을 사용하려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그림은 지칭 개념을 거의 배제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최초 세례식의 지칭 사용과 같은 의도라는 개념이 추가된다. 기술이론도 결국은 명명이나 지칭 개념을 선전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술이론에서도 최초 규정 수행 자체에서 이미 지칭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97]-[105] 동일성 진술과 관련하여, 그 양상이 철학에서 논란이 되어 왔다. 기술들은 우연적 동일성 진술들을 구성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이중초점렌즈의 발명가가 합중국 첫 우정장관이라는 것이 참일 때, 이는 우연적 참이다. 반면 이름들로 구성되는 동일성 진술의 경우 문제가 복잡하다. '샛별은 개밥바라기별이다' 혹은 '키케로는 툴리이다'라는 진술이 필연적인지 여부가 문제될 수 있다. 또한 과학 이론에서 빛이 광자의 흐름이라거나, 열이 분자들의 운동이라는 등의 동일성 진술들도 있다. 첫째로, 이러한 사례들은 우연적 동일성들로 간주된다. 둘째로, 이러한 동일성 진술들과 같은 방식으로, 고통이 C섬유 자극과 동일하다는 식의 심리학적 개념에 관한 동일성 논제가 견지된다. 그 동기는 법칙적 잔여물을 거부하는 물리주의에 기원한 것일 수 있다.

  이에 대해 크립키는 특정 이론적 동일화, '열은 분자들의 운동이다'와 같은 동일화가 물리적 필연성보다 더 상위 차원의 필연적 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동일화가 필연적 참으로 밝혀지는 방식이, 저 심리학적 개념에 관한 동일성 논제가 우연한 혹은 필연적인 참으로 드러날 수 있는 방식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해당 유비를 거부한다. 

  고유명사에 관한 사례에서, 콰인과 마르쿠스의 논쟁이 있다. 마르쿠스는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이 필연적이라 주장한다. 누군가가 키케로가 툴리라고 생각하고 두 이름을 사용한다면 이를 통해 그는 그의 동일성 믿음이 필연적 참임을 주장하는 일에 연루된다. 이에 대해 콰인은 같은 대상에 두 차례 상이한 두 이름을 붙이고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경험적이라고 답한다. 러셀의 경우, 고유한 감각 자료에 대한 명명으로서 상이한 두 지시사를 사용하는 예를 제시하지만, 이는 명명의 일상적 사례들이라고 보기 어렵다. 

  같은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상이한 두 이름을 사용하면서 그 그 이름들의 동일성을 모를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 선험적인 앎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해당 동일성이 우연적으로 참이라고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같은 금성을 '샛별'로도 '개밥바라기별'로도 부른다. 그리고 실제로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 또한 그렇지 않았을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서로 다른 두 대상을 각기 '개밥바라기별' 그리고 '샛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전히,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크립키는 이름들이 고정 지시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저 두 용어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금성을 지칭한다. 그리고 샛별이 개밥바라기별인 것으로 드러나는 가능세계와 서로 다른 둘로 드러나는 가능세계를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 드러나는 방식 자체가 우연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마치 아직 우리가 증명을 마치지 못한 어떤 수학적 정리에 대해 그것이 참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거짓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할 때, 이 가능성은 인식론적이며 우리의 현재 무지나 불확실성을 표현할 뿐이다. 수학적 정리의 진리치는 필연적이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당장 사용하는 그런 식으로 저 두 이름들을 사용하는 한, 그에 앞서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하나이고 같다면, 이 동일성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 동일한 지칭물을 그 이름들로 지칭한다. 그것들이 실제로 같은 천체라면, 어쨌든 그것을 지칭해야지만 그에 관한 가능세계들을 규정할 수 있고,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 이름들을 그 대상의 이름으로 사용해야만 하며, 그 모든 가능세계에서 개갑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은 참일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사항들이 참이다. 첫째,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지 못하고, 경험적으로 답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 답을 찾을 어떤 위치에도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그 이유는, 그 행성들이 같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와 질적으로 구별불가능한 증거를 우리가 가질 수 있을 것이고 하늘에서 두 행성의 위치로 두 이름의 지칭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녁에 저기에서 보인 그 별이 아침에 저기에서 보인 그 별이라는 것은 오직 우연적 참일 뿐인데, 샛별이 아침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던 가능세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연적 참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진술과 동일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름이 고정 지시자인 반면 기술은 고정 지시자의 지칭 없이는 비순환적으로 지칭을 설명할 수 없는 한에서 그러할 것이다.

 

-蟲-

  [22]-[24] 이 강연은 명명과 필연성이라는 두 주제와 그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분석철학에서 지칭과 필연성을 포함하는 철학적 도구의 사용은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하고 넓은 함축을 지닌다. 예를 들어 심신문제, 동일성(정체성) 문제, 실체와 자연종 등등에 이러한 개념들이 관련된다. 

  크립키는 자신의 관점이 종래의 관점과 상이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에 관해 그가 선호하는 예시를 소개한다. 필연이 아니라 우연으로 공외연을 지니는 공집합 술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예시로 흔히 유니콘이 제시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 어떤 유니콘도 전혀 없다는 점을 알더라도, 유니콘이 있었을 수는 있다고 이야기된다. 크립키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이는 어떤 유니콘도 있지 않을 것이 필연이라기 보다는, 어떤 조건 하에서 유니콘이 있었을지 우리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정 관점이 아니라 덜 낯선 영역에서 이 강연의 방법론과 문제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ㅡ우리가 '유니콘'으로 애초에 공집합을 지칭하고 있는 한에서, 최초의 전제를 부정하는 조건을 상정하여 유니콘의 존재 가능성을 말할 수는 없다? 

 

  [24]-[27] 우선 명명과 관련하여, 크립키는 현대 논리학자들의 한정 기술구를 포함하지 않는 일상적 '고유명사'를 이름으로 취급할 것이다. 이름과 기술구를 포괄하는 공통용어는 '지시자(designator)'라 하자. 

  한정기술구는 화자가 의도한 지칭체와는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정기술구가 대상을 기술하는 데에 실패하더라도 이를 통해 지칭 자체에는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술의 지칭체'는 해당 기술구의 조건을 고유하게 충족시키는 대상이다. 'φx인 x' 형태의 기술의 경우, φx인 그런 정확히 한 x가 있다면, 그것이 해당 기술구의 지칭체이다.

  반면 밀의 유명한 원리로, 이름은 지시를 가지지만 함축을 가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다트 강이 경로를 바꾸어 그 입구에 다트머스가 자리하지 않더라도 '다트머스'라는 도시의 이름을 해당 도시를 지칭할 것이다. 이 경우 다트머스가 다트 강 입구에 있지 않다는 말에는 모순이 없다. 

  'Fx인 x' 형식의 모든 표현이 항상 기술로만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인의 것도 아니며 제국조차 아니다. 이 경우 해당 표현은 기술구가 아니라 이름으로 보인다. 

  크립키는 이름이 의미나 뜻, 함축 없이 지칭에 사용되며 한정기술구 역시 기술이 아닌 지칭에 사용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고유명사는 뜻이 없이 지시체만을 가진다는 밀의 입장에 반대해 프레게-러셀은 고유명사조차 축약되거나 가장된 한정기술구라고 주장하고 이를 통해 이름에 의미가 부여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크립키는 프레게-러셀의 한정기술구 이론에 반대한다. 

 

  [27]-[34] 프레게-러셀의 입장을 지지하는 논증의 일례는 이름의 기술적 내용이 있어야, 그 기술 조건을 충족시키는 대상을 해당 이름으로 지칭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수적인 논증으로서는 샛별-개밥바라기별-금성의 사례가 있다.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문장은 단순이 한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저녁에 본 그 별이 아침에 봤던 그 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동일성 이상의 의미가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의미를 한정기술구 이론은 설명할 수 있다.

  더 이상 지칭체가 현존하지 않는(이미 죽은) 경우에 대해서도 해당 이론이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의미 없는 지칭이기만 하다면, 지칭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통해 아무런 지칭도 이룰 수 없다. 이 경우 이름은 지칭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의 경우, 그리스인이고 철학자이며 플라톤의 제자이고 알렉산더의 스승이었던, 이러저러한 저술들을 작성한 사람이라는 조건들이 제시되고, 이에 부합하는 대상을 취할 수 있고, 그 대상이 존재했는지 여부를 따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지지논증들에도 불구하고 크립키는 프레게-러셀의 관점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프레게-러셀에 대해 개념 다발이란 관념을 통해 반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정기술구 이론의 본래 취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입장에 불과하다. 개념 다발을 통해 지적되는 한정기술구 이론의 문제는 같은 이름에 대해 사람들이 저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단일 화자조차 이름의 기술을 확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기술들 중에서는 우연하고, 거짓일 수 있었던 것들이 섞여 있다. 이는 해당 이름의 '의미'일 수는 없다. 

  이에 대해, 특정 개별 기술로 이름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이름에 결부되는 것은 기술구들의 집단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이름의 지칭체는 일군의 기술들에 의해 결정되고, 이를 충분히 혹은 대다수 충족시키는 것이 해당 이름의 지칭체이다. 이러한 개념다발이론이든 단일 기술을 요하는 이론이든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해당 기술(들)이 이름의 뜻을 부여하거나, 혹은 뜻은 부여하지 않지만 이름의 지칭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기술구 이론을 이름의 뜻에 대한 이론으로 사용하는 것과 지칭 이론으로 사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이후 다시 논하기로 한다. 단, 기술이 이름의 뜻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앞선 지지 논증들 몇 가지가 유효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존재진술은 기술구 이론을 통해 '이러저러한 일을 했던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아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기술구를 이름의 뜻에 대한 이론으로 간주하여 그에 의거한 설명이다. 반면, 이름이 기술과 동의어가 아니라면, 이 현존 진술에서 이름이 기술로 대체되어 분석될 수 없다. 이는 동일성 진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단, 크립키는 해당 진술이 그러한 뜻이라는 데에도 반대한다.

 

  [34]-[47] 이어지는 논의에서 크립키는 참의 범주들 중 '선험'과 '필연'을 구분하고 상호대체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선험성은 인식론적 개념으로, 선험적 참이란 경험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알려질 수 있다'는 가능성의 종류나 조건 등은 차치하고, 앎이나 참이라는 믿음의 증거의 선험성 여부만을 다루도록 한다.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선험적으로 알려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특정 수가 소수인지 여부는 필연적 계산을 통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지만, 계산기를 통해 후험적 증거에 근거하여 알려질 수도 있다.

   필연성 개념의 경우 인식론적, 물리적, 논리적 필연의 구분이 있다. 크립키의 관심사는 형이상학적 필연이다. 진리치와 관련하여, 어떤 것이 거짓이라면 필연적 참이 아니다. 참일 경우에는, 그 어떤 것 혹은 이를 포함한 세계 전체가 달리 있을 가능성을 물을 수 있다. 달리 있을 수 없었다면 그 참은 필연적이다. 달리 있을 수 있었다면 참은 우연적이다. 

  예를 들어 수학적 추측의 경우, 그것은 참이거나 거짓일 것이고, 어느 경우든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명이 완결되지 않는 한 그에 대한 '선험적인 앎'은 성립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 수학적 진위에 대한 선험적 앎이 가능한지조차도 불분명하다. 

  따라서 선험과 필연은 구분된다. 크립키는 여기에 더해 필연적인 후험적 참과 가능적으로 우연한 선험적 참이 모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첫째, 사람들은 어떤 것이 현실세계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라면, 그 필연성을 파악하여 선험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선험과 필연이 동의어라 생각한다. 둘째로, 그들은 어떤 것이 선험적으로 알려진다면 그것은 필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험적 앎이 성립하는 경로와 해당 참이 필연성을 갖는 경로는 구분된다. 

  다른 한편 분석적 진술이나 분석적 참은 필연적일 수도 선험적일 수도 있다. 

  또한 확실성의 경우 이는 인식론적 개념이며, 확실하지 않은 것이 선험적으로 혹은 합리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

  de re와 de dicto의 구분 또한 있다. 또한 어떤 것이 필연적 속성 혹은 우연적 속성을 지니는지, 이 둘 사이의 구분도 있다. 그런데 양상은 진술이나 사태에 귀속된다. 개별자가 특정 속성을 필연적 혹은 우연적으로 지니는지 여부는 그 사태에 대한 기술 방식에 달려 있다. 콰인의 예시를 보면, 9는 필연적으로 홀수이다. 반면 9는 태양계 행성의 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행성의 수는 달랐을 수 있다. 또한 닉슨은 1968년 선거에서 승리했는데, 그를 '닉슨'으로 지칭하는 한 그 사건은 그에게 우연하다. 반면에 닉슨을 우리가 '1968년 선거의 승자'라고 지시한다면, 그가 그 해 그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필연적 참일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한 대상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속성을 지니는지 여부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기술방식에 달려 있다. 그런데 닉슨의 선거 승리와 관련하여 두 가지 관점이 대립할 수 있다. A는 닉슨을 '패배했을 수도 있는 사람'라고 말한다. 반면 B는 '그를 "닉슨"으로 기술한다면 그렇지만, 승자로 기술하면서는 그것은 거짓이다.'라고 반박한다. 이 경우 A는 직관적이고 B는 비직관적이다. A는 다른 가능성을 확신한다. "승자"나 "패자" 같은 어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일관된 대상을 가리키지 않지만, "닉슨"은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이다. 이제 닉슨에게 선거 승리는 그가 어떻게 기술되는지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우연하다. 만일 이러한 속성의 우연성이 유의미하다면, 필연적 속성이란 개념 역시 유의미해야 한다. 본질주의에 대한 공격은 사실 이 유의미성에 대한 공격이지, 본질적 속성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공격은 아니다. 그래서 우연적/필연적 속성의 구분은 단순히 대상 기술 방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적 속성이란 것은 비직관적이지 않다. 

  우연/필연 속성이 비직관적이라는 생각은 본질 속성에 대한 질문과 통가능세계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등가로 추정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현실세계에서 닉슨은 일련의 속성들을 지닌다. 닉슨이 이러한 속성들 중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가능세계는 가능한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동일성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제시하기란 어렵다고 생각된다. 수의 경우 예외적으로 가능세계를 교차하는 정체성 필요충분조건이 제시되지만, 여타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조건은 제시되기 어렵다. 반면, 단일한 정체성을 갖춘 무언가가 가능세계들을 이행하며 각 세계의 관찰자들은 서로 다른 속성들을 관찰하게 되지만, 어떤 대상이 바로 그 대상인지를 관찰하지 않는다. 속성들이 정체성의 기준이 된다면 이 상황에서 한 대상이 바로 그 대상이라는 점을 속성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거나, 가능세계들이 교차하는 와중에 무엇이 바로 그 대상인지 말할 방법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능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다. 모종의 규정들을 통해 가능세계가 규정되는 것과, 그러한 가능세계가 (실현)가능한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구분된다. 앞서 요구되는 통세계적 정체성은 후자와 같은 종류의 질문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대상에 대한 여러 가능한 기술들을 통해 다양한 가능세계를 규정하면서, 바로 그 대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규정'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여전히 기술이나 속성다발을 통한 규정을 요구받는다면, 한 대상의 동일성 조건이 되는 '모든' 조건을 나열하는 일도 '충분한' 조건을 규정할 그 기준을 제시하는 일도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을 가정할 때에는 이러한 요구를 받을 방식으로 가정하지 않는다. 단순히 한 대상을 지적하고 바로 그에게 일어났을 특정한 일을 고찰할 따름이며, 바로 이 점에 대한 가능성만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닉슨에 대해 그가 인간이란 것은 그가 그이기 위한 충분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닉슨이 선거에 패배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에 고려되는 문제가 아니다. 설령 대상 정체성의 어떤 질적 필요충분조건이 있다 하더라도, 크립키의 관점에서 반사실적 상황을 고찰하기에 앞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것이 요구되지도 않는다. 

  여기에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은 인식론적 질문과 존재론적 혹은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닉슨이 인간이 아니라 자동기계였을지 여부, 혹은 내 눈앞의 이 책상이 분자들로 구성되지 않았을지 여부는 이를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와 상이한 질문이다. 이는 선험적 혹은 후험적 지식 문제가 아니라 전자는 현사실과 달리 무엇이 참이었을지에 대한 질문이다.

  

  [47]-[53] 가능세계 교차 정체성에 관련하여 크립키는 고정 지시자라는 용어를 도입한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고정 지시자, 그렇지 않은 경우가 비고정 혹은 우연적 지시자이다. 이 경우 모든 대상이 모든 가능세계에 존재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본질이란 이렇게 어떤 대상이 존재할 경우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에 대해 참인 속성을 뜻한다. 그리고 필연적 존재에 대한 고정 지시자는 강력하게 고정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크립키는 이름이 고정지시자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닉슨은 그가 설령 1970년 미합중국 대통령이 아니었을지라도 여전히 다른 누구도 아닌 닉슨이었을 것이다. 반면 '1970년 미합중국 대통령'은 고정된 대상을 가리키지 않고, 그래서 지시자는 고정적이지 않다. 

  그는 '통세계 정체성 기준'보다 고정 지시자가 우선한다고 간주한다. 고정적 지칭에 가능하고 특정 조건 하에 고정적으로 지칭되는 대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규정 가능할 때, '통세계 정체화(혹은 동일화)'는 문제되지 않는다. 이는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순전히 질적인 기술을 요하는 경향과 대비된다. 질적 기술을 요구하는 경향은 인식론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선험과 필연 사이의 혼동에 기원한다. 이러한 혼동에 기인하여 누군가는 대상에 관한 가능세계들을 고려하기에 앞서 그를 고유하게 정체화하는 속성들을 선험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1) 반사실적 상황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2) 마치 관찰을 통해 드러나듯 가능세계가 질적으로 제시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주장한다. 

  통세계 정체화는 특정 개별자의 가능세계 교차 정체성 기준은 다른 더 '기초적인' 개별자들에 대한 그 기준을 통해 추구한다. 이 경우 저 특정 개별자에 관한 어떤 사실도 이 기초적 개별자에 관한 모든 사실의 총합을 넘어서지 않는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벅합적' 개별자의 확정성, 정체성에 대해 더 '기초적인' 개별자를 통해 관계한다. 복합적 사실이나 그에 관한 진술이 기초적 사실이나 진술로 환원될 수 있는지 불분명하고, 이에 따라 복합대상에 대해서는 상대역 관계를 적용하고 통세계 정체성 기준은 기초적 개별자 차원에 두는 시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초적 차원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한지 역시도 불분명하다. 

  반면 우리의 일상적 정체화는 이와 달리 (1) 일부 '궁극적,' '기초적' 개별자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유형의 기술에 특권적 지위를 두는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 이 책상이 다른 방에 있었을지, 닉슨이 선거에 졌을지 고려하고 규정할 때 추가로 요청되는 세부사항은 없다. (2) 일상적 정체화에서는 어떤 기초적인 요소들의 총체가 어떤 복합체를 구성한다는 필충조건의 가능성이 전제되지 않는다. (E.g., 테세우스의 배.) (3) 기초 개별자를 통한 정체화 시도는 성질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개별자와 복합체는 모두 지칭 가능하다. 반면 순전히 질적인 기술이 요구될 경우, 일련의 성질들을 지닌 대상이 어떤 성질들을 지니는지 여부를 물을 수 있을 뿐, 그런 책상이 특정 대상이었을지 여부는 물을 수 없다. 성질에 대비된 모든 지칭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크립키는 개별자를 성질들의 다발로 간주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렇다고 성질들 배후의 '순전한 개별자,' '무속성 기체'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대상들로 시작하고 이를 실제 세계에서 정체화할 수 있다. 

  

  [53]-[57] 프레게-러셀 관점은 이름의 의미론으로든 지칭론으로든 간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수면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는 온도로서 섭씨 100도, meter 단위 표준인 파리에 있는 특정 막대 S의 길이 등을 고려해 보자. 'S의 길이는 1m이다.'라는 진술은 참인가? 선험적으로 알려지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믿는 이에게는 이 진술이 필연적으로 참이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meter'라고 불리는 그 단위표준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지칭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것이 meter의 정의, S는 t0에서 1m 길이라는 것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만일 열이 가해지면 S는 1m 길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가능 규정이 가능한 이유는, '1m'가 't0에 막대 S의 특정 길이'를 모든 가능세계에서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한편, 't0에 막대 S의 길이'는 아무것도 고정 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막대 S의 길이는 반사실적으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이 '1m'의 정의로서 ' t0에서 S의 길이'와 상충하지 않는다. 이 정의는 두 표현을 동의어로 말하는 게 아니라, '1m'가 't0에서 S의 길이'를 고정 지시하도록 규정하여 지칭을 확정한 것이다. 이 상호지시관계에서 '1m'는 고정지시자이지만 't0에서 S의 길이'는 비고정 지시자이다. 

  이제 t0에서 S의 길이는 여러 조건 규정에 따라 달리 가정될 수 있지만, S는 '1m'라는 용어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되었다면, 이 정의에 따라 S가 1m 길이라는 것은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S가 1m라는 사실은 다른 가능성을 허용하는 한에서 우연적이다. 따라서 우연적인 선험적 참이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지칭 고정 정의와 유의어를 통한 정의의 구분이다.

  

  [57]-[61] 이름의 경우에도 지칭 고정 정의와 유의어 정의의 구분이 적용될 수 있다. 이름이 기술에 의해 제시된다고 할 경우, 본질 속성이 사용되지 않는 한, 그 이름과 기술은 고정 지시자가 아닐 것이다. 이 이름과 기술을 가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을 수 있다. 반면 이름이 기술에 의해 제시될 때 이것이 유의어가 아닌 지칭 고정을 위해서만 사용되었다면, 이 경우 해당 기술은 고정 지시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기술이 지칭과 식별을 위해서만 사용되었기에, 해당 대상이 이 기술에 의해 제시되는 속성을 지니지 않을 경우를 가정하여 규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기술을 통해 고정이 추가된다고 가정할 수는 있다. 어떤 이름으로 지칭된 대상에 추가적인 식별 요소를 기술을 통해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추가적 고정에 사용된 속성이 해당 이름의 의미의 일부라고 귀결되진 않는다. 예를 들어 '개밥바라기별'이라는 이름에 추가적으로 특정 시점 특정 위치에 보이는 천체라는 기술을 통한 고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개밥바라기별의 위치가 달랐을 가능세계의 규정은 가능하지만, 개밥바라기별이 개밥바라기별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규정하는 경우는 없다. '개밥바라기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지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프레게-러셀의 경우 고유명사가 고정 지시자가 아니라 기술과 동의어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서는 한 대상이 그에 결부된 모든 속성들을 결여하였을 가능성과 바로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구분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역사적 인물에 대해 기술된 여러 행위들과 속성들을 바로 그 인물이 결여하거나 수행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을 가정하는 일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프레게는 의미를 그 뜻, 지시체로 간주하는가 하면 지시자의 지칭 결정 방식으로도 취한다. 그리고 이 둘을 동일시하며 그것이 모두 한정 기술구에 의해 제시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지칭 고정 정의와 유의어 정의는 구분되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프레게가 동일시한 두 의미도 사실은 서로 구분된다. 

  'π'와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은 모두 각기 고정지시자이고, 전자가 후자의 축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자는 고유한 어떤 실수에 대해 그 이름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61]-[70] 이름이 위장된 기술이라는 프레게-러셀 관점에 대한 대안으로 스트로슨 등이 제창한 이론, 이름이 일군의 기술이진 않더라도 일군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의 더욱 강한 형태로, 이름은 동의어적으로 정의된다는 관점도 있다. 그 경우 예를 들어 알렉산더의 스승이라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기술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 따라 지칭이 고정된다면, 누군가는 선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의 스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이 속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연적으로 참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의 스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반사실적 가정에서 그 이름은 여전히 바로 그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앞서 1m와 S의 길이의 정의 사례에서 보았듯, 필연적 참이 아니더라도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고 이 둘은 구분된다. 

  이름에 대한 집합체 개념 이론은 다음의 명제들로 표현될 수 있다. (1) 이름 혹은 지칭 표현에 대해서는 상응하는 속성 다발, 속성 군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1) 그러한 속성군의 한 속성 혹은 결합된 일부가 그 자체로 그 이름이나 표현의 지칭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2) 그 속성군의 충분한 만큼 혹은 그 전부를 충족시키는 임의의 대상은 저 표현의 지칭물이라고 화자 A에게 믿어지는데, 이는 화자의 믿음에 불과하다. (3) 그러한 속성군 모두 혹은 충분한 정도를 충족시키는 대상은 저 이름의 지칭물이라고 주장된다. 그런데 이 충분함의 기준이 질적인지 양적인지가 갈릴 수 있다. 스트로슨은 오직 다수성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그럴 듯하지 않아 보이고, 아마도 모종의 경중이 있을 것이라는 편이 그럴 듯하다. (4) (3)의 속성군이 고유 대상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저 지칭물을 지칭하지 않는다. (5) '저 지칭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저 속성군 대다수를 가진다'라는 진술이 화자에게 선험적으로 알려진다. (6) (5)의 진술은 필연적 참을 표현한다. 이 이론에서 그 속성군은 해당 이름의 의미 부분으로 간주된다.

  이와 관련하여, 저 속성군이 충분히 충족되지 않는다면 X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5)에 따라 선험적으로 알려지고 (6)에 의해 필연적으로 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에 따르면 예를 들어 성경 속 묘사가 대체로 거짓일 경우,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선험적으로 아는 것이 된다. 또 이 이론에 따르면, 반대로 그가 존재했다면, 그 속성군을 충분하거나 그 이상으로 충족시켰으리란 것도 우리는 선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모세가 역사 속 실존인물이고 성경에서 그에 대해 기술된 속성들 대다수는 그럼에도 거짓이리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성경 속 인물에 대한 성경 속 묘사를 고려할 뿐이라고 한다면, 성경 그 자체는 그럼 '모세'라는 이름으로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남는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답에 불가피한 조건은 이론의 설명이란 비순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윌리엄 닐은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그리고 이것은 사소한 정보로서, 이 단어 사용에 당연히 전제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순환적이며, 임의의 이름이 임의의 이름이라는 것을 사소하게 아는 것만으로 그 지칭과 지칭물에 대해 알게 되는 바는 없다. 이것이 고유명사의 의미에 대한 전부라면, 애초에 지칭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부르고 불린다는 것, 이름지어지는 것, 이 호명 관계가 지칭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러저러하게 불리는 사람'과 같은 그런 기술구가 아닐 것이다.

 

-蟲-

[106] Lecture Ⅲ: January 29, 1970

 

뭐라도 성취된 바가 있다면 지금까지 성취된 건 무엇인가? 첫 번째로, 나는 어떻게 이름이 그 지칭을 얻는지에 관한 대중적 관점이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름의 지칭이 일부 고유하게 정체화하는 표식들에 의해, 지칭물에 의해 충족되고 화자에 의해 해당 지칭물에 대해 참이라고 알려지거나 믿어지는 일부 고유 속성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첫째로, 화자에 의해 믿어지는 속성들은 고유한 방식으로 규정해주는 것일 필요가 없다. 둘째로, 그 속성들이 그러한 경우에서조차, 그것들은 화자의 용법에 대한 실제 지칭물에 대해 고유하게 참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도 참이거나 혹은 아무것에 대해서도 참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는 화자가 어떤 개인에 관한 잘못된 믿음들을 가지는 경우이다. 그는 다른 개인에 관한 옳은 믿음들을 가지는 게 아니라, 특정 개인에 관한 잘못된 믿음들을 가진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그 지칭은 실제로 화자가 해당 이름을 사용하는 화자들의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름은 연결에서 연결로 구전되어 그에게 이행되었다. 

  두 번째로, 나는 일부 특수한 경우들, 특히 최초 세례식의 일부 경우들에서, 지칭물이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해당 속성이 여러 지시의 경우들에서 수행하고 있는 일은 동의어를 제시하는 것, 이름이 그에 대해 축약인 어떤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기술(혹은 속성)은 차라리 지칭을 고정시키고 있다. 그것은 해당 대상에 대한 일부 우연적 표식들로써 그 지칭을 고정시킨다. 그 대상을 나타내는 이름은 [107] 그래서 해당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그 대상이 문제의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 반사실적 상황들을 지칭하는 경우에서조차 그렇게 사용된다. 1m 사례가 그 예시였다. 

  끝으로, 지난 강연의 말미에 우리는 동일성 진술들에 관해 논했다. 동일성 진술들은 아주 단순해 보일 테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쩐지 아주 혼란스럽다. 나는 내 자신의 경우에서 이 관계에 의해 산출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혼동들을 바로잡을 수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 관계가 변경시켜야 할 만큼 혼란스러운 것임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키케로'와 '툴리' 같은 두 이름을 가지고 키케로가 툴리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키케로와 툴리 둘 모두인 대상에 대해 그것이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실제로 말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반대로, '키케로는 툴리이다'가, 내가 앞서 언급했듯, 경험적 발견을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철학자들은, 프레게조차 그의 저술 초기 한 단계에서, 동일성은 이름들 사이의 관계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이 말하기로 동일성은 대상과 대상 자체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이름들이 같은 대상을 지시할 때 두 이름 사이에 견지되는 관계이다. 

  이런 일은 더욱 최근 연구에서조차 나타난다. 내가 가지고 오진 않았지만, 특출난 논리학자 J. B. Rosser는 그의 책 Logic for Mathematicians에서[각주:1] 우리가 오직 'x'와 'y'가 같은 대상에 대한 이름이라면 오직 그 경우에만 x=y라고 말한다고 썼다. 그는 대상 자체에 관한 합치진술(corresponding statement), 그 자체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진술이 물론 사소하다고, 또한 그렇기에, 추정컨데, 그 진술은 우리가 뜻하는 바의 것일 수 없다고 언급한다. 이는 동일성 관계여야 할 바의 것에 대한 유난히 특이한 전형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지극히 드물게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무장 흑인 민족주의 운동 외부에서는 아무도 'x'라고 명명된 적이 없다. 물론 진지하게 말해서 열린 문장 'x=y' 내의 'x'와 'y'는 전혀 이름이 아니고, 변항들이다. 또한 이것들은 닫힌 문장 내에서 종속 변수들로서 동일성을 갖고 출현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모든 x와 y에 대해, 만일 x=y라면 [108] y=x라고, 혹은 그와 같은 어떤 것을 말한다면, 해당 진술에서 아무런 이름도 출현하지 않고, 이름들에 관해 어떤 것이든 말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진술은 설령 인류가 존재한 적이 없었거나, 존재했더라도 이름에 대한 현상을 만들어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참일 것이다. 

  만일 누구든 동일성에 대한 이 특수한 설명에 끌린다면, 그에게 그런 설명을 우리가 허락해줬다고 가정해 보자. 동일성이 영어에서 이름들 사이의 관계였다고 가정하자. 나는 내가 지금 대상과 그 대상 자체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것으로 규정한 'schmidentity' (영단어가 아니다) 라고 불리는 인위적 관계를 도입할 것이다.[각주:2] 그럼 이제 키케로와 툴리와 schmidentical한지 여부가 질문될 수 있고, 만일 그 질문이 제기된다면, 이것이 이름들 사이의 관계였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본래의 동일성 진술 경우에서 생각되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이 이 진술에 대해서도 성립할 것이다. 만일 누구든 이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나는 그가 그리하여 동일성에 대한 그의 본래 설명이 본래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에 대해 아마 필연적이지 않았겠다는 것을, 그리고 아마 가능하지 않았겠다는 것을, 또한 그러므로 그의 설명이 폐기되어야 할 것이며, 동일성은 사물과 그 사물 자체 사이의 관계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리란 것을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장치는 상당수의 철학적 문제들에 사용될 수 있다. 

  우리는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이 어쨌든 참일 때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설령 그것을 선험적으로 알지 못할지 모른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가 개밥바라기별을 저녁에 [109] 보인 특정 별로 그리고 샛별을 아침에 보인 특정 별이나 특정 천체로 정체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저녁과 아침에 바로 그 위치들에서 상이한 두 행성들이 보였을 가능세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최소한 둘 중 하나, 어쩌면 둘 모두 개밥바라기별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그럼 그 경우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상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저녁에 이 위치에서 보인 행성이 아침에 이 위치에서 보인 행성이 아니었던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상황은 아니다. 그건 또한 어쩌면, 만일 사람들이 이 행성들에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란 이름을 부여했더라면, 개밥바라기별과는 다른 어떤 행성이 '개밥바라기별'이라 불리었던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경우조차, 그것은 개밥바라기별 자체가 샛별이 아니었던 상황은 아닐 것이다.[각주:3]

  내가 언급했듯 이러한 상황들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의 일부는 정체(동일)화로부터 유래하거나, 내가 제시할 것처럼, 우리가 미리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필연적인 것 사이의 혼동에서 유래한다. 특정 진술들은―그리고 동일성 진술이 내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진술의 표준인데―만일 어찌됐든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어야만 한다. 만일 그런 동일성 진술이 참이라면 그 진술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점을, 사람들은 선험적으로, 철학적 분석에 의해 안다.

  한 가지 조건: 내가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는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때 , 나는 물론 금성이란 그런 행성이 아예 없고, 그래서 개밥바라기별도 샛별도 전혀 없는 상황들이 성립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경우,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동일성 진술이 참일지, 거짓일지, 혹은 참도 아니고 [110] 거짓도 아닐지 여부가 문제이다.[각주:4] 그리고 만일 우리가 마지막 선택지를 고른다면, '개밥바라기별 = 샛별'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인가? 혹은 우리는 필연적 참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이기를 요구해야 할까? 나는 그런 문제 일체를 내 고려사항 밖에 남겨두고 있다. 만일 우리가 좀 더 신중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그 진술을 조건문으로, '만일 개밥바라기별이 존재한다면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고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 주의깊게 오직 후자만이 필연적인 것으로 취하며 그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 조건문은 우리를 내가 여기서 논할 수 없는 문제, 존재의 단일 귀속 문제에 연루시킨다. 특히, 명명에 대한 기술구 이론에 호의적인 철학자들은 종종 대상에 대해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조차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곤 한다. 대상의 현존에 관한 것으로 간주되는 진술은 실제로는, 주장된 바에 따르자면, 특정 기술 혹은 속성이 충족되는지 여부에 관한 진술이다. 내가 이미 언급했듯,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여기서 존재 문제들에 개입할 수 없다. 

  나는 이 지점에서 de re 양상에 관한, 본질 속성을 지니는 대상에 관한 여타의 고찰들이, 내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선험성과 필연성 사이의 구분을 인지할 경우에만 제대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누군가는 본질을 경험적으로 아주 잘 발견해낼지도 모른다. 

   Timothy Sprigge의 논문에 본질 속성으로 상정되는 것들의 일부 사례들이 있다.

내재주의자는 [일부 본질 속성이 있다고 믿는 자를 의미한다] 여왕이 왕가의 혈통으로 태어났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가 뜻하는 바는 개인이 왕가의 혈통으로 태어났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본질주의자는 그 여왕이 사실은 그녀의 부모로 여겨진 자들의 자식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비밀리에 입양되었다는 것이 확정되었다고 전하는 뉴스 보도에 아무런 모순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왕가의 혈통이라는 명제는 종합 명제이다. . .
[111] 꽤 오랜 시간 [반-본질주의자]가 승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약간 지나치게 억지스러워 보이는 시점이 온다. 내재주의자는 우리가 여왕이라 부르는 개별자가 그녀의 현존 중 어떤 단계에서도 인간이라는 속성을 가지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추정한다. 만일 반-내재주의자가 이를 인정한다면, 그 여왕이 말하자면 언제나 백조로 있다는 속성을 가졌으리란 것이 논리적으로 구상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 그는 그녀가 최소한 하나의 내재적 속성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한다. 만일 다른 한편으로 그가 여왕이 인간이었던 것은 우연적 사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수용하기 곤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인간이 결코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구상 가능한 것으로 정말로 고려할 수 있는가?[각주:5]

 

'그녀의 현존 중 어떤 단계에서도'와 '언제나'는 그녀가 지금 당장 백조로 변할, 생각해 보자면 사악한 마녀나 상냥한 마녀에 의해 그렇게 될 가능성들을 허용하기 위해 도입하는 정당화 요소들로 추정된다.

  이 논의 속에서 내가 발견한 한 가지 혼동은 첫 번째 사례에서 스프리지가 우리가 그 여왕이 실제 그녀의 부모와는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발표를 가졌다고 가정함에 있어서 어떤 모순이 있을 것인지 여부에 관해 논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경우 아무런모순도 없다. 그렇더라도, 유사하게, 우리가 이것을 여성인 것으로 생각한 그 여왕이 사실은 인간 모습을 한 천사였거나, 서출에게 승계가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 왕가에 의해 영리하게 설계된 자동기계였거나 혹은 그런 어떤 것이었다고 하는 발표에도 아무런 모순은 없다. 이 발표들 중 어느 쪽도 우리가 가능적으로 발견하지 못할 것들을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여인에 관련하여 그녀가 왕가의 혈통이었을지 혹은 인간이었을지 물을 때 묻고 있는 그 질문은 무엇인가? 왕가의 혈통이란 것은 조금 복잡한데, 왜냐하면 그녀가 왕가의 혈통이었다는 것이 필연적이기 위해서는 이 특정 가계가 어떤 시점에 왕권을 획득하였다는 것이 필연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의 사실은 우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112] 그러므로 나는 그녀의 혈통이 왕족이었으리란 것이 우연적이라고 추정한다. 

  그 질문을 좀 더 다듬어 보자. 그 질문은 실제로 이런 것이어야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여왕, 바로 이 여인 자신이, 실제로 그녀의 부모와는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수 있었는가? 말하자면, 그녀는 그 대신 트루먼 부부의 딸이었을 수 있었는가? 물론 (희망하건데 이 일이 나이 때문에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허황되게 들리지만 그녀가 트루먼 부부의 딸이었다는 발표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을 것이다. 나는 심지어, 어느 쪽 가설에서든 그녀에게 마가렛이라 불리는 자매가 있다는 것이 어쨌든 매우 의심스러워 보인다지만, 이 두 마가렛이 교묘한 방법으로 날아다닌 동일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에도 아무런 모순이 없을지도 모를 것이라 추정한다. 어쨌든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알게되는 일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발견이 실제로 사실은 아니라고 가정하기로 하자. 여왕이 실제로 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서 부모란 무엇인지에 관해 너무 복잡하게 따지지는 말고, 부모란 그들의 신체 조직이 생물학적으로 정자와 난자의 기원인 사람들이라 하도록 하자. 그럼 당신은 아버지의 정자나 어머니의 난자를 다른 신체에 이식했다거나 해서 한 가지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부모였을지 몰랐다는 작위적인 가능성들을 제거하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또 다른 의미에서 그녀의 부모는 여전히 본래의 왕과 왕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바로 이 여성이 트루먼 부부로부터 유래하는 일이 일어났을 그러한 상황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가? 그 부부는 어쩌면 그녀와 여러 속성들이 유사한 아이를 지녔을지도 몰랐다. 아마 어떤 가능세계에서 트루먼 부부는 실제로 영국 여왕이 된 그리고 다른 부모의 자식으로 위장된 아이를 가지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 상황은 여전히 우리가 '엘리자베스 2세'라고 부르는 바로 이 여성이 트루먼 부부의 자식이었던 상황은 아닐 것이거나, 내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113] 그것은 실제로 엘리자베스에 대해 참인 속성들 상당수를 지닌 어떤 다른 여성이 있었던 상황일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은, 이 가능세계에서, 엘리자베스 그녀 자신은 태어난 적이 있기는 한가? 그녀가 태어난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 상황은, 트루먼 부부가 엘리자베스의 속성들 상당수를 갖춘 자식을 가지더라도, 엘리자베스 그녀 자신은 아예 존재한 적조차 없는 상황일 것이다. 당신이 이 상황을 기술하는 방식을 숙고함으로써만 이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내가 추정하기로, 많은 경우 당신은 이에 대해 납득하지 못할 것이고, 최소한 즉각 납득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납득한 점이다.)

  어떻게 다른 부모에게서, 총체적으로 다른 정자와 난자로부터 기인한 개인이 바로 이 여성일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만일 그 여성이 가정된다면, 그녀의 삶에서 다양한 것들이 변할 수 있었을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녀가 빈민이 되었으리라거나, 그녀의 왕가 혈통이 알려지지 않았으리라거나, 기타 등등. 누군가에게 그 세계의 선행하는 역사가 특정 시점까지 주어진다고, 그리고 그 시점으로부터 그 역사가 실제 경로로부터 유의하게 분기한다고 해 보자. 이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설령 그녀가 이 부모들로부터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녀가 결코 여왕이 되지 않은 것도 그렇게 가능하다. 심지어 이 부모로부터 그녀가 태어났었더라도, 마크 트웨인의 소설 등장인물처럼[각주:6] 그녀가 또 다른 소녀와 뒤바뀌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그녀가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내게는 다른 기원으로부터 유래하는 어떤 것도 이 대상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상의 경우,[각주:7] 우리는 이 책상이 어떤 나무토막으로부터 유래했는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이 책상이 완전히 다른 나무토막으로부터 제작되었거나, 교묘하게 얼음으로 경화된 물로, 템즈 강에서 가져온 물로 제작되었을 수 있었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달리, 이 책상이 그 강에서 유래한 얼음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114]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우리가 다른 나무토막으로 혹은 심지어, 이 책상과 외견상 동일한, 얼음으로 책상을 만드는 것을 상상할 수 있더라도, 또 우리가 그 책상을 이 방 안의 바로 이 위치에 둘 수 있었을지라도, 내가 보기에 이건 책상을 다른 나무나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또 다른 책상, 모든 외적 세부사항들에서 이 책상과 유사한, 또 다른 나무토막 혹은 심지어 얼음으로 제작된 그런 다른 책상을 상상하는 것이다.[각주:8][각주:9] 

  [115] 이 사례들은 오직 본질 속성들에 대한 사례일 뿐이다.[각주:10] 나는 [116] 내가 지난 강연에서 언급했던 바, 실체들과 실체의 속성들 그리고 자연 종의 속성들에 대한 용어들 사이의 일부 동일성에 대한 더 일반적인 경우를 다루고자 하기에 더 이상 그 문제들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했듯 철학자들은 이론적 동일성을 표현하는 진술들에 매우 큰 흥미를 보였다. 그러한 진술들 중에는 빛이 광자들의 흐름이라거나, 물은 H2O라거나, 번개는 방전이라거나, 금은 원자번호 79번 원소라는 진술 등이 있다.

  이러한 진술들의 상태에 관하여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금과 같은 그런 실체들의 상태에 관한 일부 사유들을 고려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금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철학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해온 사례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금에 대한 재계의 흥미는 통화 안정성 증가로 인해 감소하고 있다.[각주:11] 그렇지만 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해 왔다. [117] 다음은 임마누엘 칸트가 금에 관해 말한 바이다. (그는 그의 재산을 침대 밑에 둔 부유한 투기꾼이었다.)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사이의 구별을 도입하면서 말한다. '모든 분석 판단은 전적으로 모순율에 의존하고, 그 본성상 선험적 인지로서, 그 판단에 재료를 제공하는 개념이 경험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러하다. 왜냐하면 긍정 분석 판단의 술어는 이미 주어의 개념 내에, 그 술어가 해당 주어에 대해 모순 없이 부정될 수 없는 그러한 주어 개념 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 바로 이러한 이유로 모든 분석 판단은 선험적인데, 개념이 경험적인 때조차 그러하니, 예를 들어, "금은 황색 금속이다"와 같은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 나는 황색 금속이라는 금에 대한 나의 개념을 넘어서는 아무런 경험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바로 그 개념이고, 나는 그 개념을 그 개념 넘어서 살펴보는 일 없이 분석하기만 하면 된다.'[각주:12] 나는 독어판을 살펴봐야 했다. '사실 그것이 바로 그 개념이다(It is in fact the very concept)'라는 것은 마치 칸트가 여기서 '금'은 단지 '황색 금속'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만일 그가 그리 말하고 있다면, 그건 특히나 이상하고, 그럼 저것이 그가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니라고 가정해 보도록 하자. 적어도 칸트는 금이 황색 금속이라는 것은 그 개념의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이 점을 선험적으로 안다고,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이 경험적으로 거짓이라는 것을 가능적으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관해 칸트는 옳은가? 첫째로, 내가 하고자 했을 일은 금속으로 있는 금에 관한 부분을 논의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복잡한 일인데, 왜냐하면 우선, 내가 화학을 그다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딱 한 쌍의 문헌을 들여다 보다가, 나는 금속에 대한 좀 더 현상학적인 설명 속에서 금속이란 무엇인지 말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고 하는 진술을 발견했다. (가단성, 연성, 그런 것들에 관해 논하지만, 그 중 어느 것 하나 정확히 들어맞진 않는다.) 다른 한편, 주기율표에 관한 어떤 것이 금속으로서의 원소에 대한 [118] 기술을 원자가 속성들을 통해 제공했다. 이 기술은 어쩌면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역할을 하는 금속 개념이 실제로 두 개 있다고, 현상학적 개념과 그것을 대체하는 과학적인 개념이 있다고 곧장 생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기술을 거부하지만, 그런 시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일 것이고, 오직 내가 내 고유한 관점을 전개시킨 이후에만 반박될 수 있을 것이기에, '금은 금속이다'라는 것을 이러한 관점들을 도입시키는 사례로서 사용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쉬운 어떤 것을 고려해 보자. 금의 노랑(yellowness)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금이 사실은 노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시각적 환각이 횡행했었다고, 남아프리카와 러시아 그리고 금광이 흔한 다른 지역들에서 대기의 기이한 속성들로 말미암아 그렇다고 가정해 보자. 해당 실체를 노란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 시각적 환각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사실, 일단 그 대기의 기이한 속성들이 제거되고 나면,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푸르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악마가 금광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시각을 변질시켜서 (분명 그들의 영혼은 이미 변질되었다), 그 실체가 노랗지 않더라도, 그 실체가 노랗다고 믿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문에 이런 발표가 있었을까? '아무런 금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금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사실 금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 하에 전세계 금융 위기를 상상해 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통화 제도 내 불안정성의 꿈에도 생각 못한 원천을 가진다. 

  그런 발표는 전혀 있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발표되었을 내용은 금이 노랗다고 보였다 하더라도, 사실 금은 노란 것이 아니라, 푸른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었으리라.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우리가 '금'을 특정 종류의 사물에 대한 용어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사물을 발견했고 우리는 그에 대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화자 공동체의 일부로서 우리 자신들 사이의 특정 연관을 지니고 특정한 종류의 사물을 지닌다. 그러한 종류의 사물은 특정한 정체화 표시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이 표식들 중 일부는 실제로 금에 대해 참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119] 그 표식들에 대해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우리가 통상 금에 귀속시켰고 처음에 그것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했던 모든 정체화 표식을 지니는, 하지만 같은 종류의 사물이 아니고 같은 실체가 아닌 그런 실체가 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런 사물에 대해 설령 그것이 우리가 애초에 금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한 모습들을 모두 지닌다 하더라도, 그것은 금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었다. 그런 사물은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듯 황철광 또는 바보의 금이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금으로서 발견하고 그렇게 부른 실체처럼 문외한에게 보이는 완전히 다른 사물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우리가 금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변경하고 철광석과 금을 구별한 어떤 다른 기준을 얹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내게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보인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그로써 금을 정체화한 초기 정체화 표식들에 더하여 특정 속성들이 금에 대해 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금의 특징이자 철광석에 대해서는 참이 아닌 이러한 속성들은 바보의 금이 사실 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점을 또 다른 사례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사례는 이런 것이다.[각주:13] '나는 "'tiger'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의미를 지닌다"라고 말한다. . . . 만일 내가 "tiger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tiger는 대형 육식의 네 발 달린 고양잇과 동물로, 색은 황갈색에 검은 가로 줄무늬에 하얀 배"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Shorter Oxford English Dictionary "tiger" 항목에서 발췌.)' 그리고 이제 누군가가 '당신은 "tiger"가 영어에서 의미하는 바를 말했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지프가 묻는다. '그런가?' 그는 적절하게 말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예시는 이것이다. '정글의 공터에서 누군가가 "봐, 세 발 달린 호랑이야!"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라. 누군가가 혼동해야만 하나? "세 발 달린 호랑이"라는 구는 형용모순이 아니다. 하지만 만일 "tiger"가 영어에서 다른 것들 중에서도 네발동물 혹은 네발달림을 의미했더라면, "세 발 달린 호랑이"는 형용모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20] 그래서, 그의 예시는 만일 호랑이가 네 다리를 가진다는 것이 호랑이의 개념의 부분이라면, 세 다리 호랑이는 있을 수 없었으리란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많은 철학자들이 '군집 개념(cluster concept)'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는 종류의 사례이다. 우리가 호랑이는 절대로 네 다리를 가지지 않는다고 알게 되리라고 가정하는 일은 모순되기까지 하는가? 이러한 속성들을 호랑이들에게 귀속시킨 탐험가들이 시각적 환각에 의해 기만당했다고, 그리고 그들이 봤던 동물들이 세 발 달린 종들로부터 유래했다고 가정해 보면, 우리는 도대체 아무런 호랑이도 전혀 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하게 될까? 나는 우리가 탐험가들을 기만한 그 시각적 환각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들은 사실 세 다리를 가진다고 말할 것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이러한 사전적 기술을 충족시키는 어떤 것이든 필연적으로 호랑이라는 것은 참인가? 내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술된 호랑이의 외재적 모습들을 모두 가지면서도, 호랑이의 내적 구조와는 완전히 다른 내재적 구조를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실제로 '고양잇과(feline)'이라는 단어가 여기 들어가 있어서, 그것이 전적으로 공정하지는 않다. 이 사례를 위해 그 단어는 빠졌다고 가정해 보자. 호랑이가 어쨌든 특정한 생물학적 가계에 속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게되었던 어떤 것이다. 만일 '고양잇과'라는 것이 고양이의 외견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면, 호랑이가 큰 고양이의 외견을 지닌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어쩌면 호랑이처럼 보일지라도, 조사결과 포유류조차 아닌 것으로 밝혀진 동물들을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 동물들이 사실은 매우 특이하게 생긴 파충류들이었다고 말해 보자. 그럼 우리는 이 기술에 기반하여 일부 호랑이들은 파충류라고 결론내리는가? 우리는 그리 하지 않는다. 우리는 차라리 이 동물들이, 우리가 그로써 본래 호랑이를 정체화했던 외적 표지들을 가진다 하더라도, 사실은 호랑이가 아니라고, 왜냐하면 그 동물들이 우리가 '호랑이의 종'이라 부른 그 종과 같은 종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릴 것이다. 이제 내 생각에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일부 사람들이 말할 것처럼 호랑이의 구 개념이 새로운 과학적 정의에 의해 교체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호랑이의 내적 구조가 연구되기 전부터 호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참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우리가 호랑이의 내적 구조를 [121]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호랑이들이 특정 종 혹은 자연 종을 형성한다고 추정한다. 우리가 옳다고 가정하기로 하자. 그럼 우리는 호랑이의 모든 외적 모습을 지니더라도, 그것이 같은 종류의 사물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만큼 충분히 내적으로 호랑이와는 다른 피조물이 있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내적 구조에 관하여 어떤 것도, 이 내적 구조가 무엇인지 알지 않고도 그 피조물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나아가 우리가 '호랑이'라는 용어를 한 종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그리고 이 종에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이든, 설령 그것이 호랑이처럼 보이더라도, 사실 호랑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것이 그로써 우리가 본래 호랑이를 정체화한 그 모든 속성을 지닐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또한 호랑이가 본래 우리가 그로써 호랑이를 정체화한 그 속성들 중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고 알게 될지도 몰랐다. 아마 아무것도 네발달리지 않고, 아무것도 황갈색이지 않고, 아무것도 육식이지 않고, 기타 등등인 그런 식일 것이다. 이러한 모든 속성들이 시각적 환각이나 여타 오류에 기반한 것으로, 앞서 금의 경우처럼, 그렇게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호랑이'라는 용어는, '금'이라는 용어처럼, 그 안에서 해당 종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속성들 모두는 아니겠지만 그 대부분이 충족되어야만 하는 그러한 '군집 개념'를 표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러한 속성 대부분의 소유는 해당 종의 구성원이기 위한 필요조건일 필요도 충분조건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의심했던대로 호랑이들이 단일종을 형성한다는 점을 알아냈기에, 이 종에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은 호랑이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종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실수했을지도 모른다. 선제적으로, 우리는 호랑이들이 아마 종을 형성하리라고 가정한다. 과거의 경험은 이와 같은 것들이 통상적으로 함께 살고 비슷하게 보이며 같이 짝짓기하면서 종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만일 우리가 생각한 만큼은 아니라도 서로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두 종류의 호랑이들이 있다면, 어쩌면 그 호랑이들은 더욱 큰 생물학적 가계를 형성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들이 서로 완전히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실제로 두 종류의 호랑이들이 있는 것이다. 이건 모두 역사에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발견해낸 바에 의존한다. 

  [122] 이런 종류의 고찰을 가장 크게 인지하는 것으로 내가 찾은 철학자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우리의 사유는 별도로 전개되었다) 퍼트남이다. 'It Ain't Necessarily So'라는 논문에서,[각주:14] 그는 종에 관한 진술에 대해, 그 진술이 '총각은 미혼이다' 같은 진술보다 '덜 필연적' (그가 신중하게 말하는 것처럼) 이라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사례는 '고양이는 동물이다'이다. 어쩌면 고양이가 자동기계인 것으로, 혹은 마술사가 심어둔 이상한 악마로 (그의 사례는 아니지만) 밝혀질지도 몰랐다. 고양이가 악마종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의 관점에서, 그건 내 관점이라고도 생각하는데, 우리의 경향성은 아무런 고양이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하는 쪽이 아니라, 고양이가 우리가 본래 가정했던 것처럼 동물이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하는 쪽으로 기운다. 본래의 고양이라는 개념은 이것이다. 그 종류의 것, 해당 종류가 표준적인 예화들로 정체화될 수 있는 경우의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질적인 사전적 정의에 의해서 뽑힌 어떤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퍼트남의 결론은 '고양이는 동물이다' 같은 진술이 '총각은 미혼이다' 같은 진술보다 '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나는 그 논증이 그런 진술들은 선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그러므로 분석적이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데에 동의한다.[각주:15] 제시된 종이 동물 종인지 여부는 [123] 경험적 탐구의 문제이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론적 뜻이 퍼트남이 '필연'으로 의도한 바일 것이다. 그런 진술들이 이 강연에서 지지하는 그런 비-인식론적인 뜻에서 필연적인지 여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그래서 다음으로 탐구해 볼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그에 관해 논했던 그 필연성 개념을 사용해서): '고양이들은 동물들이다' 같은 진술들, 혹은 '금은 황색 금속이다' 같은 진술들은 필연적인가?

  여기까지 나는 오직 우리가 발견해낼 수 있을 것에 관해서만 논해왔다. 나는 우리가 금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반대로, 황색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라 말해왔다. 만일 누군가가 금속 개념에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간다면, 원자가 속성으로 말해서, 누군가는 금이 금속이라 간주했을지라도, 금이 사실 금속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금이 금속이라는 것은 필연적인가 아니면 우연적인가? 나는 금속이라는 개념에 관해 더 자세히 파고들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말했듯, 나는 그에 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금은 명백히 원자번호 79를 가진다. 금이 원자번호 79를 가진다는 것은 금의 필연적 속성인가 아니면 우연적 속성인가? 확실히 우리는 우리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양성자에 관한, 원자 번호에 관한 전체 이론, 분자 구조와 원자 구조에 관한 전체 이론, 그런 관점들에 토대가 되는 이론들이 모두 거짓으로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그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금은 원자 번호 79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금이 원자 번호 79를 가진다고 가정하면, 원자 번호 79를 가지지 않고 어떤 것이 금일 수 있는가? [124] 과학자들이 금의 본성을 조사했고, 말하자면, 금이 원자 번호 79를 가진다는 것이 이 물체의 바로 그 본성의 일부임을 알아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이제 어떤 또 다른 황색 금속 혹은 어떤 다른 황색 물체, 원래 우리가 금을 정체화할 때 사용하던 모든 속성들과 우리가 이후에 발견한 추가적인 속성들을 다수 지닌 그런 것을 발견한다고 가정해 보자. 기초적 속성들 다수를 지닌 것의 사례로는 황철광, '바보의 금'이 있다. 내가 언급했듯, 우리는 이 물체가 금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우리는 실제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제 가능세계를 고려해 보자. 바보의 금 혹은 황철광이 미국의 여러 산에서, 혹은 남아프리카와 소련의 지역들에서 실제로 발견되었던 반사실적 상황을 고려해 보자. 실제로 지금 금을 품고 있는 모든 지역들이 그 대신 황철이나 혹은 금의 피상적 속성들을 모조했지만 금의 원자 구조는 결여한 어떤 다른 물체를 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각주:16] 우리는 이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그 상황에서 금이 원소조차 아니었다고 (황철광이 원소가 아니기 때문에) 말하겠나? 내겐 우리가 그리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우리는 이를 한 실체, 말하자면 금이 아닌 황광철이 실제로 금을 포함한 바로 그 산에서 발견되었을 것이고 우리가 흔히 그로써 금을 정체화하는 바로 그 속성들을 지녔을 것인 상황으로 기술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금이 아닐 것이고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그것이 이 가능세계에서 여전히 금일 것이라고, 설령 금이 원자번호 79를 결여할지라도,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물질, 다른 실체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반사실적으로 그것을 '금'이라고 불렀을 것인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금으로서 기술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게 보이기로는 그렇게 이것은 가능적으로 금이 원소가 아니었을지도 모를 상황도 아닐 것이고, [125] 그런 사례가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가능'의 인식론적 의미로 보는 경우를 제외하고). 금이 이 원소라는 것을 가정하면, 어떤 다른 실체도, 설령 그것이 금처럼 보이고 우리가 실제로 금을 발견하는 바로 그 장소들에서 발견된다 하더라도, 금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금에 대한 모조품이었던 어떤 다른 실체일 것이다. 똑같은 지리적 영역들이 그런 실체로 채워졌던 어떤 반사실적 상황에서도, 그 영역들은 금으로 채워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영역들은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졌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이러한 고찰이 옳다면, 그 고찰은 이 물질 무엇인지에 관한 과학적 발견들을 표현하는 그러한 진술들이 우연적 참이 아니라 가장 엄밀한 가능의 의미에서 필연적 참임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단지 그것이 과학 법칙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당연히 그것이 거짓일 수 있었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속성들이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거를 형성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러한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 실체를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세계든 우리가 금이 아닌 실체를 상상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특히 현대 과학 이론은 우리가 금을 원자번호 79를 가진 원소로 간주하는 금의 그 본성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금이 원자번호 79 원소라는 것은 필연적이지 우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아마 같은 식으로 우리가 금이 무엇인지 알아낸 바로부터 어떻게 색과 금속적 성질들이 도출되는지 추가로 조사할 것이다. 그러한 속성들이 금의 원자 구조로부터 도출되는 한, 그 속성들은 금에 대해 필연적 속성들인데, 설령 그 속성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금'의 의미의 일부가 아니고 선험적 확실성을 동반하여 알려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퍼트남의 '고양이들은 동물이다'라는 예가 같은 표제 아래에 놓인다. 우리는 사실 이 사례에서 매우 놀라운 발견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믿음에 반하는 아무런 것도 찾지 못했다. 고양이들은 실제로 동물이다! 그래서 이 참은 필연적 참인가 아니면 우연적 참인가? 내게 보이기로는 그것은 필연적이다. [126] 이러한 피조물들―이러한 동물들―의 자리에서 우리가 실은 불운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는 작은 악마들을 발견하는 반사실적 상황을 고려해 보라. 우리는 이 상황을 고양이들이 악마인 상황으로 기술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 이 악마들은 고양이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유사-고양이 형태의 악마일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양이들이 악마들이라는 것을 발견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우리가 그 고양이들이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면, 우리가 그런 악마들이 주위에 있었던 반사실적 세계를 기술할 때, 우리가 그 악마들은 고양이들이 아닐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는 점은 그 고양이들의 바로 그 본성의 일부인 것이다. 그 가능세계는 고양이를 가장하는 악마들을 포함하는 세계일 것이다. 우리가 고양이들이 어쩌면, 특정한 종에 속한, 악마들인 것으로 드러났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고양이들이 실제로 동물이라는 점을 전제하면, 동물이 아닌 그 어떤 유사-고양이 존재든, 실제 세계에서든 반사실적 세계에서든, 고양이가 아니다. 같은 논리가 고양이의 외견을 지니지만 파충류의 내적 구조를 지닌 동물들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그런 것들이 존재할지라도, 고양이는 아닐 것이고, '바보들의 고양이'일 것이다. 

  이는 개별 대상의 본질에도 모종의 관계가 있다. 이를 테면, 분자 이론은 여기 이 대상이 분자들로 구성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는 확실히 중요한 경험적 발견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 알려지기로 어떤 에테르적 활력으로 구성되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여기 바로 이 위치를 점유하는 대상이 에테르적 활력이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은 여기 바로 이 대상이었을까? 그것은 이 대상의 모든 외견을 지녔을지도 모르지만, 내게 보이기로는 그것은 결코 이 사물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물의 우여곡절은 그것의 실제 역사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크레믈린으로 운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미 산산조각으로 썰려나가 현재 시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것에 다양한 일이 일어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달리 그것에 반사실적으로 일어났을 것으로 무엇을 상상하든지 간에, 우리가 이 사물에 일어나는 것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한 가지 것은,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된다는 점이 전제될 때, 그것이 [127]  여전히 존재했었을 것이었으면서도 분자로 구성되지는 않았던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이 분자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던 상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이것이 분자로 구성된 사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이것이 그것을 이루는 구성요소인 실체의 바로 그 본성이다―그럼 우리는 최소한 만일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옳다면 이 사물이 분자로 구성되는 일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할 수 없다. 

  내가 지지하는 관점에 따르면, 그래서, 자연종들은 일상적으로 추정되는 것보다 훨씬 더 고유명사들에 근접하다. '보통 명사'라는 구식 용어는 그래서 '소'나 '호랑이' 같은 종들이나 자연종들을 짚어내는 술어들에 상당히 적절하다. 그렇지만 나의 고찰은 또한 '금,' '물' 같은 그런 자연종들에 대한 특정 물질 명사들에도 적용된다. 나의 관점을 밀의 관점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밀은 '소' 같은 한정 기술구들과 고유명사들 모두를 이름으로 간주한다. 그는 '단칭' 명사들에 대해 그것들이 만일 한정기술구들이라면 함축적이지만 고유명사들이라면 비-함축적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 밀은 모든 '일반' 명사들은 함축적이라고 말한다. '인간 존재' 같은 그런 술어는 인간성의 필요충분조건들을 부여하는 특정 속성들―합리성, 동물성, 특정 물리적 특징들의 연언으로 정의된다.[각주:17] 프레게와 러셀로 대표되는 현대 논리학적 전통은 밀이 단칭명사에 대해서는 틀렸지만 보통명사들에 대해서는 옳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 최근의 철학도, 고유명사와 자연종 두 경우 모두에서 그것이 종종 정의적 속성들이라는 개념을 속성 다발이란 개념으로, 그 중 오직 일부만이 각 개별 사례에서 충족될 필요가 있는 그런 것으로 교체한다는 점을 제외하고, 전례를 따랐다. 반면에 나 자신의 관점은 밀이 '단칭' 명사에 관해서는 다소 옳지만, '보통' 명사에 관해서는 틀렸다고 간주한다. 아마도 일부 '보통' 명사들은 ('foolish', 'fat', 'yellow')  [128] 속성들을 표현한다. [각주:18] 중요한 의미에서, '소'와 '호랑이' 같은 보통 명사는 속성을 표현하지 않는데, 소로 있음이 평범하게 속성으로 간주되지 않는 한 그러하다. 확실히 '소'와 '호랑이'는, 밀이 생각했던 것처럼, 사전이 정의를 위해 취할 속성들의 연언에 대한 축약이 아니다. 과학이 경험적으로 특정 속성들이 소에 대해, 혹은 호랑이에 대해, 필연적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 여부는 내가 긍정적으로 답하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것이 어떻게 내가 앞서 논한 과학적 발견들을 표현하는 유형의 동일성 진술들에 적용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말하자면, 물은 H2O라는 진술 말이다. 그것은 확실히 물이 H2O라는 발견을 표현한다. 우리는 원래 물을 그 특징적인 느낌, 외양 그리고 아마도 맛으로 정체화했다 (그 맛이 보통 불순물들 탓일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만일 심지어 실제로 물과는 완전히 다른 원자 구조를 가졌지만, 이러한 측면들에서 유사한 물질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어떤 물은 H2O가 아니었다고 말했을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 대신 바보의 금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보의 물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원래 물을 정체화했던 속성들을 가지더라도, 실제로 물은 아니었을 물질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생각에 실제 세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들에 대해 말할 때에조차 적용된다. 만일 바보의 물인 그런 물질이 있었더라면, 그것은 바보의 물이지 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이 물질이 또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다면― [129]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되는 중합수는 우리가 오늘날 물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매우 다른 정체화 표지들을 지닌다―그것은 물의 한 형태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설령 우리가 원래 물을 정체화했던 그 외양들을 지니지 않을지라도 같은 물질이기 때문이다.

  '빛은 광자의 흐름이다' 또는 '열은 분자의 운동이다'라는 진술을 고려해 보자. 빛을 지칭함으로써, 물론, 나는 그 일부를 우리가 이 방 안에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열을 지칭할 때, 나는 누군가가 가질지도 모르는 내재적 감각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외재적 현상을 지칭한다. 그것은 우리가 열감이라 부르는 특징적 감각을 산출한다. 열 분자들의 운동이다. 우리는 또한 열을 증가시키는 것이 분자들의 운동을 증가시킨다는 것에 상응한다는 것, 엄밀히 말해서, 분자들의 평균적 운동 에너지를 증가시키는 것에 상응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온도는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와 동일시된다. 그렇지만 나는 온도에 관해 말하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실제 척도를 정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를 통해 정해질지도 모른다.[각주:19] 하지만 흥미로운 현상학적 발견을 표현하는 것은 더 뜨거워질 때 분자들이 더욱 빨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빛에 관해서 빛이 광자들의 흐름이라는 것을 또한 발견하였다. 본래 우리는 빛을 빛이 우리에게 산출해 넣을 수 있는 특징적인 내재적 시각 인상,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을 통해 정체화했다. 다른 한편, 열은 본래 우리의 신경 말단들 중 한 측면이나 우리의 촉각에 미치는 특징적 영향을 통해 정체화하였다. 

  인간 존재들이 맹목이었고 눈이 작동하지 않았던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들은 빛에 영향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빛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을까? [130]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빛을 감지하지 못할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떤 피조물들은 빛을 감지하지 못하는 눈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런 피조물들 중에 불행히도 물론 일부 사람들이 속한다. 그들은 '맹인'이라 불린다. 설령 모든 인간이 흉측한 흔적기관을 지녔고 사물을 볼 수 없었을지라도, 빛은 주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눈에 적합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런 상황이 빛은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는 없던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빛을 그것이 우리 안에 산출해 넣는 특징적인 시각적 인상으로써 정체화할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이는 지칭 고정의 좋은 사례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빛이 무엇인지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외부 세계에서 우리의 눈에 특정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사실로써 고정한다. 하지만 이제, 말하자면 사람들이 맹인이었을 반사실적 상황들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아무것도 그들의 눈에 영향을 미칠 수 없기에, 빛이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빛이―실제로는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으로 정체화시켰던 것― 존재했지만 우리의 어떤 결함으로 인해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할 방법이 없었던 상황일 것이라 말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어떤 기적에 의해 음파가 어떤 식으론가 일부 피조물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는 상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말은, 음파가 우리가 가지는 것과 같은 시각적 인상을, 어쩌면 정확히 똑같은 색 감각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똑같은 피조물이 빛(광자)에 완전히 무감각한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어떤 꿈에도 생각 못한 절묘한 가능성들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그런 가능세계에서 빛이었던 것은 소리였다고 말할까, 이러한 대기 중의 파형 운동들이 빛이었다고 말할까? 빛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전제하면, 우리는 그 상황을 달리 기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특정 피조물들, 어쩌면 '사람들'로 불렸을 그리고 이 행성에 거주하였을 그런 것들이, 빛을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음파는 감지할 수 있었던, 그런데 우리가 빛을 감지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음파를 감지할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일단 우리가 빛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131] 우리가 다른 가능세계들에 관해 말할 때 그 세계 내의 이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고, '빛'을 '무엇이든 우리에게 시각적 인상을 주는 것―무엇이든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라는 말과 동의어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은 있었을 테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주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른 어떤 것이 우리를 볼 수 있게 해줬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빛을 정체화한 방식은 지칭을 고정시켰다

  '열' 같은 또 다른 그런 표현들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여기에서 열은 우리가 '열감'이라 부르는 특정 감각을 제공한다는 것을 통해 우리가 정체화한 (그리고 그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킨) 어떤 것이다. 우리는 우리는 이 감각에 대해 열감 외에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언어가 이런 방식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반면에 당신은 내가 말한 바를 통해 그것이 다른 방식을 가졌을 것으로 가정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열이 우리 안에 열감을 산출해 넣는다는 사실로써 열을 정체화하고 그것을 감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만일 다른 누군가가 모종의 도구로써 열을 탐지해내지만, 그것을 느끼지는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바란다면, 설령 열의 지칭이 같다 할지라도 열이라는 개념은 같지 않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 지칭이 이런 식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개념에 매우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이라는 용어는 '무엇이 되었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감각들을 제공하는 바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첫째로, 사람들은 열에 대한 감각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열은 여전히 외부 세계에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어떤 식으론가 광선들이, 그들의 신경 말단 내 모종의 차이들로 인하여, 그들에게 이러한 감각들을 제공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것은 열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우리가 열감이라 부르는 감각을 제공한 빛일 것이다. 

  그럼 우리는 열이 분자 운동이 아니었던 가능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그런 가능세계를 발견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내게는 누군가가 열을―실제 사실과는 반대로―분자 운동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을 상황이라 처음에 생각한다고 생각할 어떤 상황이든, 실제로는 우리와는 다른 신경 말단들을 지닌 어떤 피조물들이 [132] 이 행성에 거주하고 (어쩌면 우리조차, 만일 우리가 이러한 특수한 신경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 우리에 대한 우연적 사실이라면), 이러한 피조물들이 열 아닌 다른 어떤 것, 말하자면 빛을, 우리가 열을 느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을 그 피조물들이 느꼈던 그런 식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말하자면 빛이 열이었을 상황, 혹은 광자의 흐름이 열이었을 상황이 아니라, 광자의 흐름이 우리가 '열감'이라 부르는 특정 감각드을 산출했을 상황이다.

  그와 같은 여타 여러 정체화들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번개는 전기라는 정체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번개의 섬광은 전기의 섬광이다. 번개는 방전이다. 우리는 물론 내가 추정하기로 그 어떤 현재하는 방전 없이 같은 종류의 섬광으로 밤에 빛났을지도 모르는 다른 방식들을 상상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나는 우리가 이를 상상할 때, 우리가 번개의 시각적 현상들 모두를 가진 어떤 것을 상상하지만, 사실 번개는 아닌 어떤 것을 상상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번개인 것처럼 보였지만 번개인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이것이 지금 경우에도 벌어지고 있다고 추정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어떤 기발한 장치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아무런 번개도 현재하지 않았을지라도 번개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들 어떤 현상을 하늘에 산출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은 저 현상이 번개처럼 보이기 때문에 실제로 번개였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방전 현상인 번개와는 다른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번개가 아니라 번개가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인 어떤 것이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말하자면 '열은 분자운동이다' 같은 사례에서 특징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가 고정시킨 특정한 지칭이 있는데, 실제 세계에 대해서도 모든 가능세계들에 대해서도, 그 지칭의 우연적 속성을 통해, 즉 그러저러한 감각을 우리 안에 산출해 넣을 수 있는 속성으로써 그리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그러저러한 감각을 산출해 넣는 것이 열의 우연적 속성이다. 무엇보다도 도대체 이 행성에 사람들이 [133] 있었어야 했다는 것 자체가 우연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용어로―물리 이론의 기본 용어로―기술된 어떤 물리적 현상이 이러한 감각들을 산출하는 현상인지 선험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하며, 어쩌다 보니 이 현상이 실제로 분자 운동이라는 것을 발견해냈던 것이다. 우리가 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이 현상의 본질적 속성을 제공해주는 정체화를 발견했다. 우리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분자 운동인 것일―분자 운동이,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 현상인 바의 것이기 때문에, 아닌 경우가 있을 수 없었을 현상을 발견했던 것이다.[각주:20]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원래 그로써 그것을 정체화하는 속성, 그러저러한 감각을 우리에게 산출해 넣는 속성은 필연적 속성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바로 이 현상이 존재할 수는 있었을 테지만, 우리의 신경 구조 같은 것들에서의 차이들로 인해, 열로서 느껴지지는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인간 존재의 구조로서 우리의 신경 구조를 말할 때, 나는 실제로 내가 앞서 언급한 지점을 얼버무리고 있다. 물론 인간 존재가 열을 감지할 수 있는 신경 구조를 지닌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성의 일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필연적이라는 점을 충분한 조사가 보여준다면 필연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을 무시하고 있는데, 논의를 단순화시키기 위해서이다. 어쟀든 내가 추정하기로 [134] 이 행성에 열에 대해 이런 식으로 감지할 수 있는 피조물들이 거주했어야 했으리란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

  나는 앞선 고찰들의 심-신 동일성 논제를 둘러싼 논쟁에 대한 적용에 관한 몇 가지 언급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내가 전개시킨 관점들을 요약하고 한 두 가지 사항들을 첨언하고자 한다.

  첫째로, 나의 논증은 암시적으로 자연종들에 대한 특정 일반 용어들이 고유 명사들과 일반적으로 의식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친족성을 지닌다고 결론내린다. 이 결론은 다양한 종명들에, '고양이', '호랑이', '금덩이' 같은 가산명사든 '금', '물', '철광석' 같은 물질 명사든 그것들에 확실히 성립한다. 그것은 또한 자연 현상들에 대한 특정 용어들, '열', '빛', '소리', '번개', 그리고 추정컨데 적절히 상술되는 경우 상응하는 형용사들―'뜨거움', '시끄러움', '붉음'에 적용된다. 

  내가 상기시켰듯 밀은 일부 '단칭 명사들', 한정기술구들이 외연과 내포 모두를 지닌다 하더라도, 반면 다른 것들, 진정한 고유명사들은 외연을 가지지만 내포는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밀은 추가로 '보통 명사들' 혹은 일반 용어들은 내포를 지녔다고 주장하였다. '소'나 '인간' 같은 용어들은 그들의 외연을 지적해내는 특정 속성들의 연언에 의해 정의된다.―예를 들어 인간 존재는 특정 물리적 특징들을 지닌 이성적 동물이다. 와 종차를 통한 고색창연한 정의의 전통은 그런 개념의 편린이다. 게다가 만일 칸트가 '금'은 '황색 금속'으로 정의될 수 있으리라 추정했다면, 그를 그러한 정의로 인도한 것은 이러한 전통일지도 모른다. ('금속'은 유일 것이고, '황색'은 종차일 것이다. 그 종차는 순환 없이 '금으로 있음'을 포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레게와 러셀에 의해 대표되는 근대 논리적 전통은 단칭 명사의 문제에 관해 밀을 반박했지만, 보편 명사들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그를 지지하였다. 그래서 단칭과 일반을 포괄한 모든 용어들은 '내포' 또는 프레게적 의미를 지닌다. 더욱 근래의 이론가들은 프레게와 러셀을 따라 [135] 그들의 관점을 오직 속성들의 특정한 연언으로 주어진 의미라는 개념을, 적용할 필요가 있는 단지 충분한  속성들의 '다발'로 주어진 의미 개념으로 교체하기만 함으로써 규정한다. 현재의 관점은, 곧바로 프레게와 러셀을 뒤집어, (다소간) 밀의 단칭 용어들에 대한 관점을 지지하지만, 보편 용어들에 대한 그의 관점은 반박한다.

  둘째로, 현재의 관점은 고유 명사의 경우로서 종 용어들의 경우에, 한 용어가 그 지칭이 고정되었던 방식에 의해 주어지는, 그 용어가 가져오는 선험적이지만 아마도 우연적인 속성들과, 그 용어가 그 의미를 통해 주어지는 것으로서 가져올지도 모르는 분석적인 (또한 그러므로 필연적인) 속성들 사이의 대비를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고유명사로서 종들에 대해, 용어의 지칭이 고정되는 방식은 해당 용어의 동의어로 간주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고유명사의 경우, 지칭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정될 수 있다. 초기 세례식에서 그것은 전형적으로 지시적 정의나 묘사에 의해 고정된다. 다른 식으로는, 지칭은 통상 그 이름이 관계를 통해 전달되어 온 연쇄에 의해 결정된다. 같은 고찰이 '금' 같은 보편 용어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만일 우리가 그 실체에 대한 가설적인 (인정하건데 어느 정도 작위적인) 세례식을 상상한다면, 우리는 '금은 저기 저 사물들에 의해 예화되는, 혹은 어쨌든 그것들 거의 전부에 의해 예화되는 실체이다'라는 모종의 '정의'에 의한 만큼이나 그것이 해당 실체를 지적해낸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이 세례식의 몇 가지 특징들은 주목할 만하다. 첫째로, '정의' 내에서 정체성(동일성)은 (완전히) 필연적 참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 항들 각각이 심지어 본질적으로 (필연적으로) 금이라 할지라도,[각주:21] 금은 그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해당 정의는 '1 meter = S의 길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리고 그것에 적용된 것과 같은 규정들을 가지고) 선험적 참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지칭을 고정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136] 자연종 용어가 (예를 들어 동물, 채소, 화학적인 종들) 이런 식으로 고정된 지칭을 획득한다고 믿는다. 해당 실체는 주어진 예시(혹은 거의 그 전부)에 의해 예화된 종으로서 정의된다. '거의 모두'라는 규정은 일부 바보의 금이 해당 사례에서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허용한다. 만일 본래의 사례가 적은 수의 예외 사례를 가진다면, 그것들은 실제로 금은 아닌 것으로서 거부될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하나의 단일형태 실체나 종이 있다는 가정이 초기 사례에서 더욱 극단적인 오류를 드러낸다면, 반응은 다양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우리는 두 종류의 금이 있다고 선언할지도 모르고, 또 어떤 경우에는 '금'이라는 용어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성들은 소진될 것으로 가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주창된 새로운 종은 다른 이유로 허상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일부 사례들이 (그 집합을 I라고 하자) 새로운 종 K에 속하는 것으로 발견되고 또한 그리 믿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이후 I의 사례들이 단일 종에 속한다는 점까지 발견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지만, 그것들이 앞서 알려진 종 L에 속한다고 해보자. 관찰상의 오류가 I에 속한 사례들이 L로부터 그것들을 배제시키는 모종의 특징 C를 소유했다는 잘못된 초기 믿음으로 이끌었다고 해 보자. 이 경우 우리는 물론 K라는 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단일형태의 초기 사례에 대한 지칭을 통해 정의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할 것이다. (만일 L이 앞서 정체화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K라는 종이 존재했지만, 그 종이 특징 C와 결부되는 것이라고 잘못 가정했었다고 문제 없이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주의하라.) '같은 종'이라는 개념이 모호한 만큼, 금에 대한 본래의 개념도 모호하다. 일상적으로, 모호성은 실천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감각에 지각될 수 있는 자연 현상의 경우, 그 지칭이 지시되어 나오는 방식은 단순하다. '열 = 감각 S에 의해 감지되는 것'. 다시 한번, 정체성이 지칭을 고정시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험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데,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열은 존재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열'은 '금'처럼 고정 지시자이고, 그 지칭은 그것의 '정의'에 의해 고정된다. 다른 자연 현상들, [137] 전기 같은 것은 본래 특정한 구체적인 경험적 영향들의 원인들로서 정체화된다. 나는 여기에서 그 규정을 끝까지 전부 제시하고자 시도하진 않고, 그저 사례들만을 제시할 것이다. 

  셋째, 자연종의 경우, 특정 속성들, 최소한 거칠게나마 그 종의 특징이라 믿어지고 본래의 사례에 적용될 것으로 믿어지는 속성들은 본래의 사례 외부에 있는 새로운 사례들을 해당 종 안에 자리잡아주는 데에 사용된다. ('속성들'은 여기에서 광의로 사용되고, 더 큰 종들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예를 호랑이에 대해 들어 동물성과 고양이성.) 이러한 속성들은 그 종에 대해 선험적으로 성립할 필요는 없다. 이후의 경험적 조사는 그 속성들 중 일부가 본래의 사례에 속하지 않았다고 확정지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 속성들이 본래의 사례의 특이성들이었고, 전체로서의 해당 종에 일반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확정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금의 황색은 시각적 허상일지도 모른다. 혹은, 더욱 그럴 듯하기로는, 본래 관찰되었던 금이 황색이었을지라도, 일부 금은 흰색인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한 대상이 본래 그 종에 사용되지만 속하지 못한 모든 특징들을 지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위에 언급된 것처럼, 한 동물이 호랑이처럼 보이지만 호랑이는 아닐지도 모른다. 주기율표의 같은 열에서 구별되는 원소들이 무척이나 밀접하게 서로 유사할지도 모른다. 그런 실패들은 예외이다. 하지만 주기율표에서처럼, 그런 일들은 일어난다. (종종 초기 사례들에서 그 사례와 결부되는 특징들을 갖지 못하는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앞서 I-K-L 사례에서처럼 해당 종들을 거부하도록 이끌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보편적이기는커녕 전형적이지조차 못하다. 금의 황색에 관한 언급이나 고양이가 동물인지 여부에 관한 언급을 보라.) 선험적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본래 그 종에 결부되는 특징들이 그 종의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으로 혹은 한 번만이라도 적용되는지, 그리고 그 특징들이 실제로 합하여 해당 종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인지 여부가 경험적 문제라는 것뿐이다. (그 합동 충분조건은 도무지 필연적이지 않을 것 같지만, 일지도 모른다. 사실, 호랑이처럼 보이는 어떤 동물이든 ―우리가 아는 한― 호랑이인데, 호랑이와 유사하지만 호랑이는 아닌 동물이 [138] 있었어야 했으리란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렇다. 다른 한편, 보편적 적용 가능성은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꽤나 잘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동물이다'라는 것은 필연적 참인 것으로 밝혀졌었다. 더욱이 그런 진술들의 상당수, 특히 한 종을 다른 종 아래에 포괄하는 진술들은, 만일 그것이 어쨌든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우리는 선험적으로 안다. 

  네 번째로, 과학적 조사는 일반적으로 본래의 집합보다 훨씬 더 나은 금에 대한 특징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물질적 대상은 오직 그 안에 포함된 원소가 원자번호 79를 지니는 것인 경우라면 바로 그 경우에만 (순수한) 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에서, '오직 그러한 경우라면 바로 그 경우에만'이란 표현은 엄격한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기초적인 구조적 특성을 조사함으로써, 본성을 발견하고자 시도하고, 그리하여 해당 종의 본질(철학적인 의미에서)을 발견하고자 시도한다. 자연 현상의 경우에도 유사하다. '열은 분자 운동이다' 같은 그러한 이론적인 정체화들은 필연적인데, 선험적이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과학에서 사용되는 유형의 속성 정체성은 선험성이나 분석성이 아니라 필연성과 결부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개체 x와 y에 대해, 오직 x가 y보다 더 높은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를 가지는 경우라면 바로 그 경우에만 x는 y보다 더 뜨겁다. 여기에서 술어 동연은 필연적이지만, 선험적이지는 않다. 다른 한편 속성(attribute)이라는 철학적 관념은 선험적 (그리고 분석적) 동연을 필연적 동연만큼이나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금의 관점에서, 종 본질에 대한 과학적 발견은 '의미의 변화'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러한 발견의 가능성은 본래 기획의 일부였다. 우리는 고래가 어류라는 것에 대한 생물학자의 부정이 그의 '어류라는 개념'이 일반인의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는 가정조차 필요치 않다. 그는 단지 '고래는 포유류이지 어류가 아니다'라는 것이 필연적 참이라는 점을 발견하여 일반인을 교정해줄 뿐이다. '고래가 포유류이다'이든 '고래가 어류이다'이든 어떤 경우에도 선험적인 것으로 혹은 분석적인 것으로 추정되지 않았다

  다섯 번째, 그리고 방금 언급된 과학적 조사들과 독립적인 사항으로, '원본 사례'는 [139] 새로운 항목의 발견에 의해 확장된다.[각주:22] (금의 경우, 사람들은 그 작업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인간의 자연과학적 호기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 경우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오직 브라이언 같은 반-과학적 근본주의자들만이 그 노력을 비난한다.) 더 중요한 점은, 종-이름이 고유명사의 경우에서와 정확히 마찬가지로 연쇄를 통해 이행되어, 소량의 금만을 봤거나 전혀 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용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의 지칭은 인과적 (역사적) 연쇄에 의해 결정되고, 어떤 항목의 사용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서 고유명사의 경우에서 정확한 이론을 표명하기 위해 들인 노력 보다는 훨씬 적은 노력만을 들일 것이다.

  통상, 고유명사가 연쇄를 통해 이행될 때, 해당 이름의 지칭이 고정되는 방식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서로 다른 화자들이 서로 다른 방식들로 해당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킬지도 모른다는 점은, 그들이 그 이름에 같은 지칭을 부여한다는 점이 보장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상황은 필경 종이름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인데, 금속공학자는 금이라곤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가질지도 모르는 개념과는 어쨌든 상당히 다른 금 개념을 지닌다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해당 지칭이 고정되는 방식이 감각된 현상의 경우에서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중요해 보인다는 점이다. '빛'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맹인은, 그가 우리와 똑같은 현상에 대한 고정지시어로 그 용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보이기로는 상당히 막대한 의미손실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손실일 것이다. ('개념'은 여기에서 비-전문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빛을 특정한 방식으로 정체화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설령 그것이 필연적이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그 암시적 연관은 필연성이라는 허상을 자아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관찰이, 앞서 속성-정체성에 관한 언급들과 더불어, [140] 1차성질과 2차성질에 대한 전통적인 반박들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히 본질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각주:23]

  이론적인 정체화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이론적 정체화는 내가 지지하는 개념에 따르자면 일반적으로 두 고정 지시자들을 포함하는 정체성들이고 그러므로 후험적으로 필연적인 것들의 사례들이다. 이제 내가 앞서 필연적 참과 선험적 참 사이의 구별에 대해 제시했던 논증들에도 불구하고, 후험적 필연적 참 개념은 여전히 어느 정도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너는 열이 분자운동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것, 그리고 금이 원자번호 79을 지닌 원소이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 문제에 관련해, 당신은 또한 [141] 엘리자베스 2세가 조지 6세의 딸이 아닌 것으로, 혹은 심지어 우리가 생각했던 특정한 정자와 난자에서 기원하지조차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 책상이 템즈강 물의 얼음으로 제작된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인정했다. 나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럼 당신이 그런 사건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당신의 말뜻은 무엇인가? 만일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면,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사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세계가 다른 식으로 드러났었을 수 있었더라면, 다른 식의 것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가능성에 의해 함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자명한 양상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였을지도 몰랐다"는 것이 순전히 인식론적인 것이라고 선언하여 그 난점을 회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참인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고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단지 우리의 현재 무지를 표현하고, "산술은 완전한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라는 것은 우리의 과거의 무지를 시사한다. 이러한 수학적 사례들에서, 우리는 무지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답이 달리 되었던 것으로 드러나는 일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신이 선호하는 본질과 두 고정 지시자들 사이의 동일성의 사례들에서도 그렇지 않다. 금이 합성물인 것으로 드러났었으리란 것은 실제로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이 책상이 주어진 특정 목재로 제작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무로 제작된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 수학적 사례와의 그 대비는 더할 나위 없을 수 있을 것이고 설령 당신 제안대로 선험적으로 아는 일이 불가능한 수학적 참들이 있을지 모른다 할지라도 그 대비가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앞선 언급들의 취지를 포착한 누군가는 스스로 내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앞선 논의에 대해 여기에서 제공하기에 적절한 선명화가 있다. 해당 반박자는 만일 내가 이 책상이 얼음으로 제작되었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얼음으로 제작된 것으로 드러났을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도 주장해야만 한다고 주장할 때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P인 것으로 드러났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142] P가 사실이었을 수 있었으리란 것을 함축한다. 

  그럼 책상이 얼음이나 다른 무언가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직관, 그것이 심지어 분자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직관은 무슨 뜻이 되는가? 나는 단순히 이 책상으로 그리고 이 방의 바로 이 자리에 놓인 것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사실은 얼음으로 제작된 한 책상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나는 (혹은 어떤 의식적인 존재가) 얼음으로 제작된 한 책상에 관하여, 실제로 획득하는 것과 질적으로 똑같은 인식론적 상황에 있었을 수도 있었고, 내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감각 증거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상황은 대응자 이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상황과 유사하다. 내가 그 책상이 다양한 것들로 제작된 것으로 드러나는 가능성에 대해 말할 때, 나는 느슨하게 말하고 있다.  책상 자체는 그것이 실제로 가졌던 것과 다른 기원을 지녔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지만, 내가 이전부터 가졌던 모든 증거와 관련하여 이 상황과 질적으로 동일한 상황에서, 그 방 안에 이 책상 위치에 얼음으로 제작된 책상이 포함되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응자 이론 같은 어떤 것이 그래서 그 상황에 적용 가능한 것이지만, 그것은 오직 우리가 이 특정한 책상에 대한 참이 무엇이었을지도 몰랐는지에 흥미가 없고, 특정 증거가 주어진다면 한 책상에 대해 무엇이 참일지도 몰랐는지 혹은 참이 아닐지도 몰랐는지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만 적용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질적인 기술구들과 대응자들로 향해야만 하는 이유는 정확히 이 책상이 템즈강에서 나온 얼음으로 제작되었을지도 몰랐다는 것이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들을 진정한 de re 양상들에 적용하는 일은 지금의 입장에서 보자면 왜곡된 것이다. 

  그래서 그 반대자를 향한 일반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어떤 필연적 참이든, 그것이 선험적이든 후험적이든, 달리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부 후험적 참의 경우 우리는 적절히 질적으로 정체화가 명백한 상황들 하에서, 적절히 부합하는 질적인 진술이 거짓이었을지도 몰랐다고 말할 수 있다. 금이 합성물인 것으로 밝혀졌었을지도 몰랐다는 느슨하고 부정확한 진술은 (거칠게 말해서) 본래 금에 대해 성립한다고 알려진 [143] 모든 속성들을 지닌 합성물이 있었으리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진술로 교체되어야 할 것이다.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라고 밝혀졌을지도 몰랐다는 부정확한 진술은 이 강의 초반에 언급된 참인 우연한 사건으로 교체되어야 할 것이다. 상이한 두 천체가 아침과 저녁에 각기 개밥바라기-샛별-금성에 의해 실제로 점유된 바로 그 위치를 점유했었을지도 몰랐다는 것이다.[각주:24]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다른 인상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서는 극도로 보편적인 진술, 증명이나 반증 없이, 수학적 추측이 참이거나 거짓임이 가능한 진술이라는 점 외에 아무런 유비도 그 자체로 시사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적절하게 부합하는 질적인 우연한 진술에 대해 그 어떤 보편적인 틀도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사물들이 다른 식으로 드러났었을지도 몰랐는지에 관련하고 있기에, 우리의 보편적 틀은 앞선 증거와 진술 양자 모두를 질적으로 재기술하고 그것들이 우연적으로만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체성의 경우, 앞서 개밥바라기별-샛별 같은 두 고정 지시자들을 사용하면, 종종 최소한 근사치로는 같은 효과를 위해 사용 가능한 더 단순한 틀이 있다. 'R1'과 'R2'는 동일성 기호를 곁하는 두 지시자들이라고 해 보자. 그럼 'R1=R2'는 만일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다. 'R1'과 'R2'의 지칭물들은, 각기 비고정 지시자들 'D1'과 'D2'에 의해 꽤나 잘 고정될지도 모른다. 개밥바라기별과 샛별 사례에서 이 비고정 지시자들이 '저녁(아침)에 하늘의 그러저러한 위치에 있는 천체'라는 형태를 취한다. 그럼 'R1=R2'가 필연적이더라도, [144] 'D1=D2'는 그럭저럭 우연할지도 모르고, 이것은 종종 'R1=R2'가 다른 식으로 밝혀졌을지도 몰랐다는 잘못된 관점으로 이끌곤 하는 것이다. 

  끝으로 나는 앞선 고찰들을 동일성 명제들에 적용하는 일에 대한 너무도 피상적인 논의로 향한다. 동일성 이론가들은 여러 구별되는 유형의 정체화들에 관련해 왔다. 개인과 그의 신체, 개별 감각과 (혹은 사건이나 감각을 가진다는 상태와) 개별적인 뇌의 상태 (6시 존의 고통은 그 시각 그의 C-신경섬유 자극이었다), 심적 상태의 유형들과 상응하는 물리적 상태들의 유형들 (고통은 C-신경섬유의 자극이다)의 정체화들. 이들 각각, 그리고 문헌 내 다른 유형의 정체화들은, 동의어와 정체성에 대해 주창된 혼동에 단순히 호소하는 것으로는 피할 수 없는, 데카르트주의 비평에 의해 올바르게 제기되는, 분석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나는 물론 최소한 (주의해서 이야기하건데) 어떤 지적인 사상가도 잠들기 직전 첫 번째 성찰에서 떠올릴, 일부 동일성 명제들을 옹호하고 여타의 것들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일을 가로막을 아무런 제한선도 없다는 점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일부 철학자들은 개별 감각과 개별 뇌 상태의 동일성은 수용해왔던 반면, 심적 유형들과 물리적 유형들 사이의 동일성의 가능성은 부정해왔다.[각주:25] 나는 주로 유형간 동일성에 관련할 것이고, 문제의 철학자들은 그래서 해당 논의의 상당부분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유형의 동일성들을 간략히 언급할 것이다. 

  데카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정신은 신체 없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기에, 개인이나 정신이 그 신체로부터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등한 수준으로 같은 결론을 [145] 신체가 정신 없이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는 전제로부터 논증했을지도 몰랐다.[각주:26] 이제 내가 순전히 수용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한 가지 대답은 천진난만하게 데카르트식 전제는 수용하면서 데카르트식 결론은 거부하는 답이다. '데카르트'가 특정 개인의 이름이라고, 혹은 고정 지시자라고 하고, 'B'가 그의 신체에 대한 고정 지시자라고 해 보자. 그럼 만일 데카르트가 그에 더해 B로 정체화되었다면, 그 추정된 정체성, 두 고정 지시자들 사이의 동일성인 바의 그것은 필연적일 것이고, 데카르트는 B 없이 그리고 B는 데카르트 없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경우는 주창된 유비, 최초의 우정 장관과 이중초점 렌즈의 발명가의 동일성에 전혀 비견될 수 없다. 사실, 설령 이중초점 렌즈가 한 번도 발명된 적 없었다 할지라도 최초의 우정 장관은 있었을 수 있었으리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동일성은 확보된다. 그 이유는 '이중초점 렌즈의 발명가'가 고정 지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중초점 렌즈를 아무도 발명하지 않았던 세계는 사실 그 자체에 따라 프랭클린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주창된 유비는 붕괴된다. 데카르트식 결론을 반박하길 바라는 [146] 철학자는 데카르트식 전제를 반박해야만 하고, 후자의 작업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A'가 개별 통각을 명명하도록, 그리고 'B'가 상응하는 뇌 상태, 혹은 어떤 정체성 이론가가 A와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뇌 상태를 명명하도록 하자. 첫눈에, B가 (존의 뇌가 문제의 시각에 정확히 그 상태에 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어떤 고통이든 간에 느끼고 있는 존 없이, 그래서 A의 현존 없이, 존재했었으리라는 것은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가능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동일성 이론가는 그 가능성을 기꺼이 인정할 수가 없고 거기에서부터 진행할 수도 없다. 일관성, 그리고 고정 지시자들을 사용하는 동일성의 필연성 원리는 그런 어떤 경로도 불허한다. 만일 AB가 동일하다면, 그 동일성은 필연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 난점은 설령 B가 A 없이 존재할 수 없을지라도, 고통임은 단지 A의 우연적 속성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므로 고통 없는 B의 현존은 A 없는 B의 현존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통해 회피되기 어렵다. 본질에 대한 어떤 경우든 각 고통에 대해 고통임이 필연적 속성이라는 사실보다 더욱 명백할 수 있는가? 문제의 전략을 채택하길 바라는 동일성 이론가는 감각임이 A의 우연적 속성이라고까지 주장해야만 하는데, 첫눈에 B가 그것과 그럴 듯하게 동일시될지도 몰랐던 어떤 감각도 없이 존재할 수 있었으리란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 차례 겪은 적 있는 개별 통증 혹은 여타 감각을 고려해 보라. 당신은 바로 그 감각이 감각임 없이 존재했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 한 특정한 발명가(프랭클린)가 발명가임 없이 존재했었을 수 있었을 그 방식으로 그리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 도대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 전략을 언급하는 이유는 다수의 동일성 이론가들에 의해 그 전략이 채택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가들은, 그들이 뇌 상태와 그에 상응하는 정신 상태의 추정된 동일성이 벤자민 프랭클린과 이중초점 렌즈의 발명가 사이의 우연적 동일성의 틀에 근거하여 분석되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의 우연적 활동이 벤자민 프랭클린을 이중초점 렌즈의 발명가로 만드는 것처럼, [147] 그렇게 뇌 상태의 어떤 우연적 속성이 그 상태를 고통으로 만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이 속성이 물리적으로, 최소한 '화제-중립적' 언어로 진술될 수 있는 속성이기를, 그래서 유물론자가 환원불가능한 비물리적 속성들을 도입한다고 비난받을 수 없게 되기를 바란다. 전형적인 관점은 고통임이 물리적 상태의 속성처럼 그 상태의 '인과적 역할'로 분석되는 것,[각주:27] 그 상태를 야기하는 특정한 자극들(예를 들어, 바늘로 찌름)과 그 자극이 야기하는 특징적인 행동으로 분석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나는 내가 여기에서 주장하는 일반 양상 고찰들에 더해 특수한 근거들에서 그들이 틀렸다는 점을 대체로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석들의 세부사항까지 살펴보진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저 물리적 상태의 '인과적 역할'이 문제의 이론가들에 의해 해당 상태의 우연적 속성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그것이 전적으로 심적 상태라는 것이 해당 상태의 우연적 속성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 그것이 통증만큼이나 특수한 어떤 것이라는 점은 차치한 채로 그리 간주된다는 것이다. 반복하자면, 이러한 관념은 내가 보기엔 자명하게 부조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지금 내가 겪는 바로 그 고통이 심적 상태임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존재했을 수 있었으리라는 관점이 된다.

  나는 본래의 데카르트식 고찰에 더욱 밀접한 역전 문제, 즉, 두뇌 상태가 어떤 고통도 없이 존재했을 수 있었으리라고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고통이 상응하는 두뇌 상태 없이 존재했을 수 있었으리라고 보인다는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다. 뇌 상태임이 명백히 B (해당 뇌 상태)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점에 주의하라. 뇌 상태임뿐만 아니라, 특정 유형에 속한 뇌 상태임도 B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은 더더욱이 참이다. 가정된 시점에 그 현전이 해당 시점에 B의 현전을 구성하는 그 뇌세포의 배열은 B에 본질적이고, 그 부재 상태에서 B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148] 뇌 상태와 고통이 동일하다고 주장하길 바라는 누군가는 고통 A가 매우 특정한 유형의 분자 배열 없이 존재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만일 A = B라면, A B의 동일성은 필연적이고, 한쪽의 어떤 본질적 속성이든 다른 쪽의 본질적 속성이어야만 한다. 동일성 명제를 견지하고자 하는 누군가는 A는 B 없이, B는 A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심적 속성들과 어떤 것의 상관적 현존은 B에 단지 우연적일 뿐이며, 그리고 어떤 특정 물리적 속성들의 상관적 현존이 A에게 그저 우연적일 뿐이라는 데카르트식 직관을 단순하게 수용할 수 없다. 그는 이러한 직관들을,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허상인지 보여줌으로써 설명해 내야만 한다. 이 작업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서 어떻게 일부 우연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면밀한 검토를 통해 필연적인 것으로 드러나는지 보았다. 그렇지만 그 작업은 명백히 장난이 아니고, 우리는 아래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 종류의 동일성, 내가 더 면밀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 말했던 것은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의 정체화를 통해 예화되는 유형간 동일성이다. 이러한 정체화들은 열과 분자 운동의, 물과 수산화 수소의, 등등의 동일성 같은 그런 과학적 유형 정체화에 유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유물론자의 정체화와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화 사이에 성립한다고 추정되는 유비를 고려해 보자. 두 정체화 모두 두 유형의 현상들을 동일화한다. 통상적인 관점은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화와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의 동일화가 양자 모두 우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위에서 '열'과 '분자 운동'이 둘 모두 고정지시자이기에, 그 둘이 명명하는 현상들의 동일화가 필연적이라는 점을 보았다.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고통'이 그것이 지시하는 해당 유형 혹은 현상의 고정 지시자라는 점이 이전 논의로부터 분명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고통이라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며, 고통이 그것인 바의 것과는 다른 어떤 현상이었을 수 있었으리라고 [149] 추정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같은 논리가 'C-신경섬유 자극'이란 용어에 대해서도 성립하는데, 내가 여기에서 제안할 바와 같이, 'C-신경섬유'가 고정 지시자라는 점이 보장된다면 그러하다. (그 제안은 어느 정도 위험한데, 나는 C-신경섬유에 대해 그 자극이 고통과 상관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각주:28]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 만일 'C-신경섬유'가 고정 지시자가 아니라면, 단순히 그것을 고정 지시자인 것으로 교체하거나, 그것이 지금의 문맥에서는 고정 지시자로 사용된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의 동일성은 만일 참이라면 필연적이어야만 한다.

  여기까지가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화와 고통과 C-신경섬유의 동일화 사이의 유비가 실패하지 않은 지점이다. 그것은 통상 생각되어 온 것과는 반대인 것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양자 모두, 만일 참이라면, 필연적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동일성 이론가가 고통이 아니었던 C-신경섬유 자극도 C-신경섬유 자극이 아니었던 고통도 있을 수 없었으리라는 관점에 개입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귀결들은 확실히 놀랍고 반직관적이지만, 동일성 이론가를 너무 일찍 배제하진 말도록 하자. 그가 어쩌면 C-신경섬유 자극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고통의 명백한 가능성 혹은 그 현상들 중 한 쪽의 사례가 아닌 [150] 다른 한쪽의 사례가 있다는 가능성이, 물이 수산화 수소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거나, 혹은 열이 분자 운동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거나 하는 허상과 같은 종류의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는 데카르트주의자를 종래의 분석에서처럼, 그의 전제를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논증의 오류를 드러냄으로써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반박했을 것이다. 데카르트주의 논증이 그 동일화 우연성 전제를 가정하면 그 결론에 이른다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해당 전제가 표면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거짓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동일성 이론가가 그러한 시도에 성공하리라는 것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최소한 해당 사례가 통상적인 종류의 과학적 정체화,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성을 통해 예화된 그런 종류의 정체화에 대한 유비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앞서 후험적으로 필연적인 특정 사례의 명백한 우연성을 취급하기 위해 사용된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그 전략은 해당 진술 자체가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질적으로 말해서, 본래와 똑같은 인식론적 상황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질적으로 유비되는 진술이 거짓일 수 있었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두 고정 지시자들 사이의 동일성의 사례에서, 해당 전략은 더욱 단순한 사례에 의해 사태에 근접해질 수 있다. 어떻게 해당 지시자의 지칭이 결정되는지 고려해 보라. 만일 이러한 지칭이 오직 우연하게만 일치한다면, 본래의 진술에 그 우연성이라는 허상을 부여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이다. 열과 분자 운동의 사례에서, 이 두 가지 틀이 작동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누군가가 부정확하게 열은 분자 운동인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고 말할 때, 그의 말에서 참인 것은 누군가가 우리가 열을 감각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 현상을 감각했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 즉, 우리가 '열감' (이것을 'S'라고 부르자) 이라고 부르는 감각을 그것이 산출함을 통해 그것을 느꼈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설령 그 현상이 분자 운동이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추가적으로, 그는 이 행성에 분자 운동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S를 지니지 못한 피조물들이 정주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고 말한다. [151] 어쩌면 다른 어떤 것의 현존 상황에서는 그것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피조물들은 모종의 질적인 의미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식론적 상황에 처했을 것이고, 그들에게 S 감각을 야기하는 현상에 대한 고정 지시자를 (그 고정 지시자는 '열'이기까지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분자 운동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러므로 열이 아니고!), 해당 감각을 야기하고 있던 그것이 아닐 것이다.

  이제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의 동일성이, 그것이 만일 과학적 발견이라면, 다른 식으로 드러났었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느낌을 해명하기 위해 어떤 것이 유비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엔 그런 유비는 가능하지 않다. 분자 운동이 열 없이 존재했을지도 몰랐다는 명백한 가능성의 사례에서, 실제로 가능하게 보이는 것은 분자 운동이 열로 느껴짐 없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것, 즉, 그것이 열감, S를 산출하는 일 없이 존재했을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적합한 지각을 갖춘 존재들에게 C-신경섬유 자극이 고통으로 느껴지는 일이라는 것 없이 존재했었으리라는 것이 유비적으로 가능한가?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C-신경섬유의 자극은 그 자체로 고통 없이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고통으로 느껴지는 일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 어떤 고통으로도 있는 일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고통과 그에 상응하는 물리적 상태의 추정된 필연적 동일성과 그대로 모순될 것이고, 그 유비는 상응하는 심적 상태와 동일시될지도 몰랐던 어떤 물리적 상태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문제는 동일성 이론가가 해당 물리적 상태는 단지 심적 상태를 산출한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그 둘이 동일시되는 것이길 기대하고 그래서 후험적으로 필연적으로 공동-발생하는 것이길 바란다는 점이다. 분자 운동과 열의 경우 외재적 현상과 관찰자 사이의 매개체인 어떤 것, 즉 열감이 있다. 심리-물리 사례에서는 그런 어떤 매개도 가능하지 않은데, 여기에서 물리적 현상은 내적 현상 그 자체와 [152] 동일한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열이 부재하는 상황에서조차 열이 있었을 때 그가 처했을 것과 똑같은 인식적 상황에 있을 수 있다. 단순히 열감을 느낌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열이 현존하는 상황에서조차, 그는 열이 부재하는 경우에 그가 가질 것과 같은 증거를 가질 수 있다. 단지 S 감각을 결여함으로써 말이다. 고통과 여타 심적 현상들의 경우 그런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고통을 지녔다면 획득했을 것과 똑같은 인식 상태에 처한다는 것은 고통을 지닌다는 것이다. 고통의 부재 시에 획득했을 것과 똑같은 인식적 상황에 처한다는 것 고통을 지닌다는 것이 아니다. 심적 상태와 상응하는 뇌 상태 사이의 연결의 명백한 우연성은 그래서 열의 사례에서와 같은 모종의 질적 유비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우리는 해당 상황을 질적으로 동일한 인식적 상황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했을 뿐이다. 문제는 관찰자가 감각 S를 지닌 상황과 질적으로 동일한 인식적 상황이라는 개념 단순히 관찰자가 해당 감각을 지닌 상황이라는 것이다. 같은 지점이 고정 지시자의 지칭을 지적해내는 것이라는 개념으로도 구성될 수 있다.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성 사례에서 중요한 고찰은 '열'이 고정 지시자라 하더라도, 그 고정지시자의 지칭은 그 지칭체의 우발적 속성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 즉 우리 안에 감각 S를 산출해 넣는다는 속성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현상이 열 현상과 같은 방식으로 고정적으로 지시되었으리라는 것, 그 역시 감각 S를 통해 지적되어 나온 그러한 지칭과 더불어, 해당 현상이 열이라는 것 없이 그러므로 그것이 분자 운동이라는 것 없이 그러했으리라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한편, 고통은 그 우발적 속성들 중 하나에 의해 지적되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고통인 것이라는 속성 그 자체에 의해 지적되어 나오고, 즉각적인 현상학적 성질에 의해 그리 된다. 그래서 고통은 열과 달리 '고통'이란 표현에 의해 그저 고정적으로 지시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지시자의 지칭이 지칭체의 본질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153] 그래서 고통이 특정 물리적 상태와 필연적으로 동일시된다 하더라도, 특정 현상이 해당 물리적 상태와 상관되는 것이라는 점 없이 우리가 고통을 지적해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지적되어 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 일이 가능하다. 만일 어떤 현상이든 우리가 고통을 지적해내는 방식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지적되어 나온다면, 그 현상 고통이다. 

  아마도 같은 지점이 이 강연에서의 전문적 장치에 대해 그런 특수한 지칭 없이 더욱 생생하게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창조하는 신을 상상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성을 만들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그것은 그가 해야 하는 일이 열을 창조하는 것, 즉, 분자 운동 그 자체를 창조하는 것뿐이라고 보일 것이다. 만일 공기 분자들이 이 지구에서 충분히 요동쳐진다면, 만일 타오르는 불이 있다면, 지구는 설령 그것을 바라보는 아무런 관찰자도 없다 할지라도 뜨거워질 것이다. 신은 그가 인간과 동물 관찰자들을 창조하기 전에 빛을 창조했다 (또한 그래서 광자의 흐름을, 현대 과학의 원칙에 따라, 창조했다). 그리고 같은 점이 추정컨데 열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그럼 어떻게 우리에게는 분자 운동과 열의 동일성이 실질적인 과학적 사실이라고, 단지 분자 운동의 창조만으로는 여전히 신에게 분자 운동을 열로 만드는 추가 작업을 남겨둔다고 보이는가? 이러한 느낌은 허상이고, 오히려 그 신에게 실질적인 작업 것은 열로 느껴지는 분자 운동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 그는 분자 운동이 어떤 지각이 있는 존재들에게 감각 S를 산출해 넣는 일이 보장되도록 그들을 창조해야만 한다. 그가 이 작업을 수행한 이후에만 '열은 분자 운동이다'라는 문장이 우리가 그리 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후험적 참을 표현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존재자들이 있게 될 것이다. 

  C-신경섬유 자극의 경우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이 현상을 창조하기 위해, 신은 단지 적절한 유형의 물리적 자극을 수용할 수 있는 C-신경섬유를 가진 존재자들을 창조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존재자들이 의식적 존재자들인지 아닌지 여부는 여기에서 관련이 없다. 비록 C-신경섬유 자극을 고통 혹은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에 상응하게 만들기 위해, 신이 [154] C-신경섬유 자극의 단순한 창조에 추가로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는 그 피조물들로 하여금 C-신경섬유 자극을 고통으로 느끼도록, 그리고 간지러움이나 따스함으로 느끼거나 아무것도 못 느끼거나 하지 않게 해야만 하는데, 또한 명백히 그의 능력 범위 내에 있었을 식으로 그리 해야만 한다. 만일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그의 능력 범위 내에 있다면, 신이 창조하는 고통과 C-신경섬유의 자극 사이의 관계는 동일성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해당 자극은 고통 없이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이 고정적이기에, 이러한 사실은 두 현상들 사이의 관계가 동일성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신은 한 인간 그 자체를 만드는 일에 더하여, 특정한 인간이 이중 렌즈의 발명가이도록 만들기 위해, 모종의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 사람은 그런 어떤 것도 전혀 발명하지 않고도 잘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논리가 고통에 대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 만일 해당 현상이 아무튼 존재한다면, 그것을 고통으로 만들기 위해 아무런 추가 작업도 요청되지 않을 것이다. 

  요컨데, 뇌 상태와 심적 상태 사이의 상응은 특정한 명백히 우연적인 요소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동일성이 대상들 사이에 우연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만일 동일성 명제가 맞다면, 그 우연적 요소는 해당 심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 사이의 관계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 우연적 요소는 열과 분자 운동의 사례에서처럼, 현상(=열=분자운동)과 그 현상이 느껴지거나 나타나는 방식(감각 S) 사이의 관계 내에 놓일 수 없는데, 심적 현상의 경우에 그 심적 현상 자체를 넘어서는 아무런 '나타남'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심적 상태와 상응하는 일 없는 물리적 상태의 가능성을 강조해 왔다. 그 반대 가능성, 물리적 상태(C-신경섬유 자극) 없는 심적 상태(고통) 또한 열과 분자운동의 유비에 호소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동일성 이론가들에게 제시한다. 

  나는 유사한 문제들을 더욱 간략하게 자아와 신체를, 그리고 개별 심적 사건들과 [155] 개별 물리 사건들을 동일시하는 관점에 관련해, 유형간의 사례에서와 같은 세밀함을 가지고 가능한 저항들을 논하지 않은 채로 논의하였다. 제시된 고찰들이 다양한 개별 심적 사건과 물리 사건을 동일화하길 바라는 이론가는 마땅히 유형간 동일화를 바라는 이론가가 직면할 문제들과 유사한 문제들에 직면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추정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 역시 표준적으로 주창되는 유비들에 호소할 수 없을 것이다. 해당 반응들과 유비들이 동일성 이론가의 해당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은 물론 그 어떤 대응도 소용 없다는 증명은 전혀 아니다. 나는 확실히 여기에서 그 모든 가능성을 논의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작금의 고찰들이 유물론의 일반적 형태들에 강력한 반대를 말해주는 것이라 추정한다. 내 생각에 유물론은 세계에 대한 물리적 기술이 완벽한 기술이라고, 어떤 심적 사실들도 물리적 사실들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해서 필연적으로 그것들에 따른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어떤 동일성 이론가도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직관적 관점에 반대해 그럴 듯한 논증을 구성한 적이 없어 보인다.[각주:29] 

 

-蟲-

  1. New York, McGraw-Hill (1953), see Chapter VII, 'Equality'. [본문으로]
  2. 물론, 그 장치는 그 가정된 유형의 인공 언어나 개념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철학자를 납득시키는 데에는 실패할 것이다. 지금의 경우, 일부 철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이항인 관계가 사물과 그 사물 자체 사이에서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입장은 노골적으로 부조리하다. 누군가는 그 자신의 최악의 적일 수 있고, 그 자신의 가장 가혹한 비평가일 수 있으며 그와 같은 것들일 수 있다. '전혀 더 부유하지 않은' 같은 어떤 관계들은 재귀적이다. 동일성 혹은 schmidentity는 그저 최소한의 재귀적 관계에 다름 아니다.

      나는 별도의 가설적 언어를 상상하는 이러한 장치의 유용성을 상술하기를 바란다. [본문으로]

  3. 우리가 해당 상황을 우리의 언어로 기술하며 해당 상황 내부의 사람들이 사용하였을 언어로 기술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란 용어를 현실 세계에서와 똑같은 지시를 가지고 사용해야만 한다. 해당 상황 속 사람들이 이 이름들을 상이한 행성들에 대해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았거나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상관이 없다. 그들이 우리가 그 이름들의 지시들을 고정시키고자 했던 것과 똑같은 기술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본문으로]
  4. '개밥바라기별은 개밥바라기별이다'에 대해서도 세 가지 같은 선택지가 존재하고, 그 답은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의 경우와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본문으로]
  5. 'Internal and External Properties', Mind 71 (April, 1962), pp. 202-03. [본문으로]
  6. The Prince and The Pauper. [본문으로]
  7. 물론 나는 그 방 안의 목재 책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본문으로]
  8. 이 예시들을 통해 시사되는 원칙: 만일 물질적 대상이 특정 물질 덩어리에 그 기원을 가진다면, 그 대상은 다른 어떤 물질에도 그 기원을 두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부 질적 규정들이 진술되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물질 덩어리라는 개념의 모호성은 일부 문제를 유발한다), 대체적인 경우 그 원칙은 아마 일종의 증명 같이, 개별자들에 대해 동일성의 필연성이라는 원칙을 사용함으로써, 수용가능할 것이다. 'B'가 한 책상의 이름(고정 지시자), 'A'가 그 책상이 실제로 유래한 나무 조각의 이름이라 해 보자. 'C'는 또 다른 나무 조각의 이름이라 하자. 다음으로, 실제 세계에서처럼, B가 A로부터 제작되었다고, 그런데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책상 D도 C로부터 제작되었다고 해 보자. (우리는 A와 C 사이에 한쪽으로부터 책상을 만드는 가능성이 다른 쪽으로부터 책상을 만드는 가능성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가정한다.) 이제 이 상황에서 B ≠ D이다. 따라서, 설령 D가 저절로 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A로부터 아무런 책상도 제작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D는 B이지 않을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그 '증명'은 동일성의 필연성이 아니라 차별성의 필연성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후자를 확립시키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고찰들과 같은 유형의 고찰들이 전자를 확립시키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X  Y라고 가정하라. 만일 X와 Y가 둘 모두 어떤 대상 Z와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동일했다면, X = Z, Y = Z, 따라서 X = Y이다.) 대안적으로, 그 원칙은 동일성의 필연성에 더하여 '브라우어식' 공리로부터, 혹은 그와 등가로, 가능세계들 사이의 대칭적인 접근가능성 관계로부터 도출된다. 어떤 사건에서든, 그 논증은 오직 C로부터 D의 제작이 A로부터 B의 제작 가능성에 영향을 주지 않고, 그 역 또한 성립하는 오직 그 경우에만 적용된다. [본문으로]
  9. 대상의 기원이 그 대상에 본질적이라는 원칙에 추가로, 또 다른 시사되는 원칙은 그 대상이 그것으로 제작되는 실체(substance)가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몇몇 복잡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 '한 대상이 존재하기를 중단하지 않는 한 견지해야만 하는 속성들은 무엇이고, 그 대상이 그 대상으로 존속하는 동안 변화시킬 수 있는 그 대상의 속성들은 무엇인가?'라는, 시간상의 질문인 그러한 질문에 포함된 유형의 본질을, '(비시간적으로)대상이 지니지 못했을 수 없었을 속성들은 무엇이고, 여전히 (비시간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결여했었을 수 있었을 속성들은 무엇인가?'라는, 시간이 아니라 필연성에 관련된 그리고 이 강의에서 우리의 논의 대상인 질문에 포함되는 유형의 본질과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책상이 얼음으로 변화했을 수 있었을지 여부에 대한 질문은 여기에서 부적절하다. [115] 그 책상이 본래 목재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든 제작되었을 수 있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이 적절하다. 명백히 이 질문은 전제된 나무 토막으로부터 나온 그 책상의 기원의 필연성에 그리고 그 토막이 본질적으로 목재인지 여부에도 관련된다 (특정 종류의 나무인지까지도). 그래서 그 책상이 실제로 그로부터 제작된 것과는 다른 그 어떤 실체로부터든 제작되었다고 상상하는 일은 우주의 역사 전체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연실색할 만한 수작 없이는 통상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책상이 본래부터 목재로 제작되지 않았을 다른 가능성들로 내게 제안되어 왔던 것들은, Slote의 기발한 제안을 포함하여, 그 중 어느 것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 제안들을 여기서 논의할 수는 없다.) 개별자 본질 속성 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는 여기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지점들 몇 가지는 언급하고자 한다. (1) 통상 우리가 직관적으로 어떤 일이 주어진 대상에게 발생했을지 여부를 물을 때, 우리는 우주가 특정 시점까지 진행되었던 그대로 진행되었을 수 있었는지, 하지만 그 역사 내에서 해당 시점부터 이후로 분기하여 해당 시점부터 이후로 그 대상의 우여곡절이 달랐을 것이었을지 여부를 묻는다. 아마도 이러한 특징은 본질에 관한 일반 원칙 내에 정립되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실제 역사로부터의 분기가 발생하는 시점은 때로 그 대상 자체가 창조되기 이전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주의하라. 예를 들어, 나는 만일 내가 그로부터 기원한 그 수정된 난자가 특정 방식들로 손상되었더라면, 그 손상 시점에 추정컨데 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지라도, 기형이었을지도 몰랐다. (2) 나는 오직 기원과 실체적 구성만이 본질적이라고 시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만일 그 책상이 그로부터 제작되었던 바로 그 나무 토막이 그 대신 꽃병으로 제작되었다면, 그 책상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거칠게 말하자면) 책상으로 있음은 그 책상의 본질 속성인 것으로 보인다. (3) 한 대상이 실제로 특정 속성을(예를 들어 대머리) 지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이 모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 대상이 특정 속성을 본질적으로 지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 대상이 해당 속성을 실제로 지니는지 여부가 결정된 경우조차, 모호할 수 있다. (4) 기원 원칙에 대한 특정 반례들이 일상어법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나는 그 반례들이 진정한 반례들은 아니지만, 그것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에 대해 여기서 논할 수는 없다. [본문으로]
  10. Peter Geach는 (Mental Acts, Routledge and Kegan Paul, London, 1957, Section 16,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여기에서 고려되는 본질 속성 유형과는 다른 '명목적 본질' 개념을 지지해 왔다. 기치에 따르면 가리키는 그 어떤 행위든 애매하기에, 한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명명하는 누군가는 그의 지칭에 대해 애매성을 해소하고 통시간적 동일성의 정확한 기준을 보장하기 위해 종류 속성을 적용시켜야만 한다. 예를 들어, '닉슨'에 대해 그를 가리킴으로써 지칭을 할당하는 사람은 '나는 "닉슨"을 저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한다'라고 말해야만 하고, 그래서 그의 청자들로 하여금 그가 코나 혹은 시간-단편을 가리키고 있다고 간주하려는 유혹을 제거하면서 그리 해야만 한다. 그래서 종류는 어떤 의미로는 이름의 의미의 일부이다. 이름은 무엇보다도, 설령 그 지칭을 결정하기에 충분할 만큼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116] 기술구 이론과 기술다발 이론에서 그러하듯, (부분적) 의미를 지닌다. 내가 기치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의 명목적 본질은 필연성이 아니라 선험성을 통해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여기에서 옹호되고 있는 종류의 본질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실질' 본질이 아니라 '명목' 본질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의 일부일 것이다). 그래서 '닉슨은 사람이다', '도빈은 말이다' 같은 것들은 선험적 참일 것이다.

      이 관점에 관해 내가 여기서 입장을 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해둘 것이다. (1) 설령 지시적 지칭의 애매성을 해소하기 위해 종류가 사용된다 하더라도, 물론 그것은 지시되는 대상에 대해 선험적으로 참이라 주장될 필요가 없다. 도빈이 말 이외의 종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 없거나(외견상으로 말처럼 보였더라도), 개밥바라기별이 별이 아니라 행성이라 드러날 수 없거나, 롯의 손님들이, 설령 그가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아니라 천사들이라고 드러날 수 없었는가? 아마도 기치는 종류들을 좀 더 신중하게 고집해야 했을 것이다. (2) (1)에 대한 반론을 포기하면, 물론 전제와 결론 사이에 실질적인 간극이 있다. 소수의 화자들만 실제로 지시적 정의에 의해 주어진 이름의 지칭을 배운다. 그리고, 설령 그들이 지시적 정의로 소급시켜주는 의사소통 연쇄를 통해 그 이름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왜 그 지시적 정의에 사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종류가 어떤 의미로든 그들에게 그 이름의 '의미'의 일부여야 하는가? 여기에서는 아무런 논증도 제공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경우: 한 수학자의 아내가 그녀의 남편이 '낸시'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을 우연히 듣는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지칭한 것인 낸시가 여인인지 아니면 리의 군인지 여부를 궁금해한다. 왜 그녀의 '낸시' 사용은 명명의 사례가 아닌가? 만일 그것이 명명 사례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그녀의 지칭의 부정성은 아니다.) [본문으로]

  11. 내가 너무 일찍 말했던지도 모르겠다. 1970년 1월 이 강연이 이루어졌을 때 일부 경제면에서 말했던 내용이다. [본문으로]
  12. Prolegomena to Any Future Metaphysics, Preamble Section 2.b. (Prussian Academy edition, p. 267). 나는 여기에서 실질적인 역량을 내세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후 독어판을 대충 살펴본 이후로도 해당 구절에 대한 내 인상은 바뀌지 않았다. [본문으로]
  13. Paul Ziff, Semantic Analysi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60, pp. 184-85. [본문으로]
  14. Journal of Philosophy, 59, No. 22 (October 25, 1962), pp. 658-71. 내가 이 글을 저술하고 있을 때는 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자연종과 물리학적 속성에 관한 후속작업에서, 퍼트남은 (내가 추정하기로) 여기에서 표현된 관점과 많은 접점을 가지는 추가작업을 하였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했듯, 퍼트남과 나의 접근법 사이에는 일부 분기점들이 있다. 퍼트남은 그의 고찰을 내가 언급하고 있는 필연적 진리 대(對) 선험적 진리라는 장치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의 이전 논문, 'The Analytic and the Synthetic', Minnesota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vol. III, pp. 358-97에서, 그는 일부 측면에서 '군집 개념' 이론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그 개념이 고유명사에 적용된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인다.

      나는 다시금 내가 해당 사례에 기반하여 전개시킨 이론들을 아마도 수용하지 않을 테지만, 그 사례가 이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나의 주의를 환기시킨 로저스 올브리튼의 예시였다는 점을 강조해야 하겠다. [본문으로]

  15. 나는 분석적 진리가 엄밀한 뜻(sense)에서 의미(meanings)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선험적인 만큼이나 필연적이라고 상정하고 있다. 만일 진술의 선험적 진리가 지칭의 고정을 통해 알려지는 진술이 분석 진술로 셈해진다면, 일부 분석적 진리는 우연적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여기서 채택된 분석성 개념에서는 배제된다. 분석성 개념에서의 [123] 애매성은 물론 '정의(definition)'와 '뜻' 같은 용어의 일상적 용법들에서의 애매성으로부터 야기된다. 나는 이 강연에서 분석성을 취급하는 그 미묘한 문제를 다루려고 시도하지 않았지만, 종종 분석-종합 구분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으로 제시되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사례들, 특히 자연현상과 자연종을 포함하는 사례들은 여기에서 언급된 지칭 고정 장치를 통해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이다. 칸트의 예시, '금은 황색 금속이다'는 선험적이지조차 않고, 그 예시가 지니는 필연성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은 과학적 탐구에 의해 확립된다는 점에 주의하라. 그래서 그건 어떤 뜻에서든 분석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본문으로]
  16. 더 좋은 닮은꼴 짝들도 있는데, 예를 들어, 주기율표에서 단일열의 원소들의 일부 쌍들은 서로 긴밀하게 유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원소들이다. [본문으로]
  17. Mill, op. cit. [본문으로]
  18. 나는 내가 '순수 속성' 혹은 프레게적 의도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기준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의심의 여지 없는 예시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노랑은 확실히, 앞서 금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서, 한 대상의 분명하게 물리적인 속성을 표현하고, 요청되는 그 의미에서 속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것에 고유한 바의 특정한 지칭적 요소가 없지 않은데, 현재의 관점에서 노랑이 특정되고 고정적으로 우리가 노랑의 시각적 인상을 통해 감각하는 대상의 저 외재적인 물리적 속성으로 지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측면에서 자연종 용어들과 유사하다. 반면 감각 그 자체의 현상학적 성질은 모종의 순수한 의미에서 특질(quale)로서 간주될 수 있다. 어쩌면 나는 오히려 이러한 문제들에 관련하여 모호할 수도 있지만, 추가적인 정확성은 여기에서 불필요해 보인다. [본문으로]
  19. 물론, 통계 역학적인 온도 개념과, 예를 들어, 열역학적 개념의 관계 문제가 있다. 이 논의에서는 그런 문제들을 치워두고자 한다. [본문으로]
  20. 일부 사람들은 설령 확실히 우리가 우리가 열을 느낄 때 느끼는 감각에 의해 음파가 느껴졌더라도 음파가 '열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그 상황은 실제 세계에 현재하는 것이 아닌 가능한, 분자 운동과 구분되는 현상에 관련해서는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아마도, 제안되기로, '우리의 열'과는 또 다른 형식의 열, 분자 운동이 아닌 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분자 운동 이외에 소리 같은 그 어떤 다른 실제 현상도 그것을 질적으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금에 대해서 그리고 빛에 대해서도 유사한 주장들이 구성되었다. 나는 이러한 관점들을 수용할 생각이 없지만, 그 주장들은 지금 강연의 핵심에 별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고자 하는 누군가는 예시들 내에서 단순히 '빛', '열', '고통' 등의 용어를 '우리의 빛', '우리의 열', '우리의 고통' 같은 것들로 교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 여기에 지면을 할애해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본문으로]
  21. 물론 그것들이 모두 금이라고 가정할 경우이다. 내가 이후 말하는 바와 같이, 그 일부는 바보의 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서, 선험적으로, 해당 사물들이 전형적으로 바보의 황금인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금인 그 모든 사물들은 물론 본질적으로 금이다. [본문으로]
  22. 명백히, 이 설명 전체에는 작위적인 요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항목들이 원본 사례를 구성하는지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금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경우에 독립적으로 발견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어떤 복잡성들이든 해당 그림을 급진적으로 변경시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23. 이 논박을 이해하기 위해, 황색이 상태에 관련된다 하더라도 상태 속성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 '황색'의 의미에 대한 어떤 다른 이론도 갖지 못한 여러 철학자들은 그 용어가 상태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라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동시에, 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황색은 단단함이나 구형에 못지않게 '바로 저기 있는' 명백한 속성이라는 '직감'에 의해 방해받아왔다고 의심한다. 물론 지금 개념에 관한 적절한 설명은 '황색'의 지칭이 '평범한 환경 하에서 대상들이 황색으로 보이도록 하는 (즉, 특정 시각 인상에 의해 감지되도록 하는) 원인이 되는 그 대상들의 저 (명백한) 속성'이라는 기술에 의해 고정된다. 물론 '황색'은 '그러저러한 감각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다른 자연적 구조를 지녔더라면, 대기 조건이 달랐더라면, 우리가 맹인이었더라면, 기타 등등의 조건에서, 황색 대상들은 그런 어떤 것도 전혀 지니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황색'의 정의를 환경 C 하에서 그러저러한 시각 인상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으로 개정하려 애를 쓴다면, 그 환경 C에 대한 특수화는 순환적으로 황색을 포함하거나 그 주장된 정의를 명백히 동의어가 아니라 과학적 발견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칭을 고정시킨다'라는 관점을 취한다면, 그렇게 언급된 속성을 우리가 바라는 그 어떤 더욱 근본적인 물리학적 용어로 정체화하든 그 일은 물리 과학자들에게 달린 일이 된다.

      일부 철학자들은 '황색에 대한 감각', '열에 대한 감각', '통각' 같은 용어들이 열이나 황색 같은 외재적인 관찰 가능한 현상들로 정체화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면 언어화될 수 없을 것이고 인간 행태에 결부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나는 이 질문이 이 글에서 주창된 어떤 관점과도 독립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24. 나 자신이 앞서 구성한 진술들 중 일부는 이러한 의미에서 느슨하고 부정확할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금은 원소가 아닌 것으로 밝혀질지도 몰랐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제대로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몰랐다(might)'는 것은 인식론적인 것이고 해당 증거가 금이 원소라는 선험적 (데카르트식의) 확실성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또한 내가 금의 원소성이 후험적으로 발견되었다고 말할 때 나는 엄격하게 맞다. 만일 내가 '금은 원소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었을지도 몰랐다 (might have)'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를 형이상학적인 뜻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내 진술은 이 글에서 언급된 교정의 대상이 된다. [본문으로]
  25. 토마스 나이젤과 도날드 데이빗슨이 주목할 만한 사례들이다. 그들의 관점들은 매우 흥미롭고, 나는 그 관점들을 더욱 상세하게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철학자들이 그들 자신을 '유물론자들'로 부르고 싶어했을 거라고 믿기는 어렵다. 특히 데이빗슨은 심리학적 속성들과 물리적 속성들의 상관에 대해 상정된 불가능성에 관한 그가 고안한 동일성 이론을 위한 사례에 근거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문헌에서 개별-개별 동일화에 반대하는 논증이 이러한 관점들에 적용된다. [본문으로]

  26. 물론 신체는 정신 없이 존재하고 추정컨데 개인 없이도 그리하는데, 신체가 시체인 경우에 그러하다. 이러한 고찰은, 만일 수용되었다면, 이미 개인과 그의 신체가 구분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David Wiggins. 'On Being at the Same Place at the Same Time', Philosophical Review, Vol. 77 (1968), pp. 90-5를 보라.) 마찬가지로, 조각상이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의 덩어리가 아니라고 주장될 수 있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 누군가는 그 대신 전자가 후자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같은 방식이 개인과 신체의 관계에 대해서도 시도될지도 몰랐다. 그럼 문헌 내의 난점들은 같은 형식으로 유발되지 않았을 것이고, 유비적인 난점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조각상이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에 다름 아닌 그 방식으로 개인이 신체에 다름 아니라는 이론은 (필연적으로) 개인은 오직 그의 신체가 존재하고 특정한 추가적인 물리적 유기구조들을 갖는 경우라면 그 경우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 명제는 일상적인 동일성 명제에 늘 따라다니는 것과 유사한 양상적 난점들의 대상이 될 것이고, 심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의 동일화를 대체하는 제안된 유비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는 또 다른 기회를 기약해야만 한다. 내가 논의하지 않을 또 다른 관점은, 비록 내가 그것을 그다지 수용하지 않으려 했고 참된 명증성을 갖고 표명되었다고 확신조차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심리적 개념들에 대한 소위 기능적 상태 관점이다. [본문으로]
  27. 예를 들어, David Armstrong, A Materialist Theory of the Mind, London and New York, 1968, 관련 논의는 Thomas Nagel, Philosophical review 79 (1970), pp. 394-403 ; 그리고 David Lewis, 'An Argument for the Identity Theory', The Journal of Philosophy, pp. 17-25를 보라. [본문으로]
  28. 나는 최소한 한 사람의 유능한 청자는 내가 '~에 상관된다'거나 '~에 부합한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두고 그것이 이미 동일성 명제에 맞서 선결문제의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을 알고서 놀랐다. 그가 말하기로 동일성 명제는 고통과 뇌 상태가 상관된다는 명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동일하다는 명제이다. 그래서 나의 전체 논의는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반-유물론자의 입장을 선전제한다는 것이다. 해당 논증에 그렇게나 미미한 지성만을 인정하는 반박을 듣고 내가 놀라긴 했지만, 그런 반박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관된다'라는 용어를 피하려고 특히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이해를 배제하기 위해, 내 용어사용을 설명해야 하겠다. 최소한 논의상으로는, 과학적 발견들이 처음부터 유물론을 반박하지는 않는 것으로 드러났었다고 가정하면, 이원론자도 동일성 이론가도 양자 모두 심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 사이에 상관이나 대응이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이원론자는 문제의 '상관' 관계가 비재귀적이라고 주장한다. 동일성 이론가는 그것이 단순히 동일성 관계의 특수한 사례 라고 주장한다. '상관'이나 '대응' 같은 용어들은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선입견 없이 중립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본문으로]
  29. 글에서 동일성 이론에 관한 이러한 의혹들을 표현했을 때,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해야 했을 것이다. 첫째로, 동일성 이론가들은 그들의 관점에 대한 긍정적인 논증들을 표현했었는데, 나는 확실히 여기에서 그에 답하지 않았다. 이 논증들 중 일부는 약하거나 관념론적 편견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것들은 내게 내가 지금은 설득력있게 답할 수 없는 고도로 강력한 논증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둘째로, 동일성 논제에 대한 반대는 데카르트 이원론의 수용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앞서 개인이 그가 실제로 기원하였던 것과는 다른 정자와 난자로부터 유래했을 수 있었으리라는 나의 관점은 은연 중에 데카르트식 구도에 대한 반대를 시사한다. 만일 우리가 독립적이고 존속하며 영적인 실체로서 영혼이나 정신에 대한 명증한 개념을 가졌더라면, 그것이 왜 특정 정자나 특정 난자 같은 개별 물리적 대상들의 그 어떤 필연적 연결이든 가져야 했겠는가? 확고한 이원론자는 정자와 난자에 관한 나의 관점이 데카르트에 반대되는 선결문제의 오류를 범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방식을 주장할 것이다. 내가 내 실제 기원들과는 다른 정자와 난자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내가 보기엔 우리가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그런 어떤 명증한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 같다. 어떤 경우든, 데카르트의 관념은 데카르트의 자아 개념에 대한 흄의 비판 이래로 의심스러운 것으로서 해석되어온 것처럼 보인다. 나는 심신문제를 널리 열린 결말을 가진 극도로 혼란스러운 문제로 간주한다. [본문으로]

[71] Lecture II: January 22, 1970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여기 열거된 여러 논제들로 제시된 이름에 대한 이론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1) 모든 이름 혹은 지시 표현 'X'에 대해, 속성다발, 즉 A가 'φX'라고 믿는 그러한 속성군 φ가 상응한다.

(2) 그 속성들 중 하나 혹은 일부 결합은 어떤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내는 것으로 A에게 믿어진다.

(3) 만일 대부분 혹은 편중된 대부분의 φ들이 하나의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충족된다면, y는 'X'의 지칭물이다.

(4) 만일 투표가 어떠한 고유한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X'는 지칭하지 않는다.

(5)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들의 대부분을 지닌다'라는 진술은 화자에 의해 선험적으로 알려진다.

(6)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들의 대부분을 지닌다'라는 진술은 필연적 참을 표현한다 (그 화자의 개인언어에서).

(C) 어떤 성공적 이론에 대해서든, 설명은 순환적이지 않아야만 한다. 투표에 사용되는 속성들은 그것들 자체가 궁극적으로 제거 불가능한 방식으로 지칭 개념을 포함하지 않아야만 한다.

 

(C) 는 논제가 아니라 다른 논제들의 충족에 관한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논제 (1)-(6)은 순환으로 이끄는 방식으로, 독립적인 지칭 결정으로 이끌지 않는 방식으로 충족될 수 없다. [72] 내가 지난 시간에 제시한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노골적인 순환 시도의 사례는 윌리엄 닐에 의해 언급된 이름에 대한 이론이었다. 나는 내가 복사해둔 그 이론의 해당 진술을 읽다가 조금 놀라서 다시 살펴봤다. 닐은 과거시제를 사용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였다고 말하는 것이 사소하지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라 말했다. 그는 결론내리길,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단순히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개별자'를 의미해야만 한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러셀은 몇몇 곳에서 유사한 분석을 내놓는다. 어쨌든, 과거시제를 써가며 진술했던대로, 그 조건은 순환적이지 않을 것인데, 누군가 확실히 '소크라테스'라는 용어를 누가 되었든 그리스인들에 의해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던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종의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아마 우리는 우리가 그를 '소크라테스'라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그랬다는 것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물론, 사실 그들은 그 이름을 달리 발음했었을 것이다. 이 특정한 이름의 경우, 그것은 어쩌면 그리스어로부터의 번역이 훌륭해서 영어로도 그리스어와 아주 다르지는 않게 발음되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사야가 '이사야'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사소하지 않다. 사실, 이사야가 '이사야'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거짓이다. 그 예언가는 이 이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그리스' 같은 어떤 것으로 부르지 않았다. 우리가 그 명제를 수정해서 읽었다고 가정해 보자: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우리에 의해, 최소한 나, 화자에 의해 불린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은 사소하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꽤나 사소하다. 나는 그것이 필연적이라거나 분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식으로, 말들이 '말들'이라고 불린다고 말해주는 것은, 이것이 '말'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말"이라고 불리는 동물'을 의미한다는 결론으로 이끌지 않고서는 사소한 일이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의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서 그것은 즉각적으로 [73] 악성 순환으로 이끌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Glunk' 같은 이름의 지칭물을 스스로 확정하고 이하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면, '나는 "Glunk"라는 용어를 내가 "Glunk"라고 부르는 그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다'라고 그리 했다면, 그것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Glunk'의 그 지칭물에 대해 어떤 독립적인 결정을 가지는 편이 낫다. 이것은 노골적인 순환적 확정의 좋은 예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 같은 문장들은 매우 흥미롭고 이상해 보이는 만큼 그 분석에 관해 말하는 데에 시간을 쏟을 수 있다. 나는 실제로 한 번 그랬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의 바다가 얼마나 높이 오를 수 있는지 보라. 그리고 가장 낮은 지점들에서도 보라.) 어쨌든 이것은 비순환 조건 위반의 유용한 사례이다. 그 이론은 그 진술들 모두를 아마 만족시킬 테지만, 그건 오직 지칭을 특정 조건,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그 사람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확정짓는 독립적인 어떤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지난 강연에서 명제 (6)에 관해 말했다. 명제 (5)와 (6)은 전환된다. 명제 (5)에 대해 말했던 것은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들의 대부분을 가진다는 진술이 화자에게 선험적으로 참이라는 것이다. 이 진술의 특정한 전환이 그 역시 화자에게 선험적으로 참을 견지한다는 것 또한 주어진 이론 하에서 참일 것이다. 즉: 만일 어떤 고유한 것이 적절하게 가중치가 매겨진 의미에서 속성들 φ의 대부분을 가진다면, 그것은 X이다, 라는 전환 말이다. 유사하게 특정한 전환은 이에 대해 필연적으로 참일 것이다. 즉: 만일 어떤 것이든 적절히 경중이 매겨진 의미에서 φ 속성들 대부분을 가진다면, 그것은 X이다. 그래서 실제로 누군가는 어떤 것이 X인 것은 만일 그것이 고유하게 속성들 φ의 대부분을 가진다면 오직 그 경우에만 그러하다는 것은 선험적이기도 하고 또한 필연적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이전의 명제들 (1)-(4)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간주한다. (5)와 (6)은 실제로 그저 충분히 숙고적인 화자는 이 고유명사 이론을 파악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앎으로써, 그는 그러므로 (5)와 (6)이 참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5)와 (6)에 대한 반박들은 일부 화자가 이 이론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74] 내가 지난 강연에서 그에 관해 말했던 바는 명제 (6)이다. 그것은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관찰되었던 바이다. 만일 고유명사와 결부된 속성 다발이 아주 좁은 의미에서 취해져서, 어떤 가중치에서든 오직 단 하나의 속성만이 제시된다면, 하나의 한정기술구가 지칭물을 적시해내는 것이라고 말하도록 하자.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던 철학자였다. 그럼 필연적 참이 아닌 특정한 것들이 필연적 참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경우,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설이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종사한 적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인 참이 아니라 우연적인 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단일 기술이라는 본래 전형을 폐기하고 기술 다발이라는 전형으로 전향해야만 한다고 결론내린다. 

  내가 지난 시간에 논증했던 일부 것들을 요약하자면, 이것은 필연성에 관한 이 문제에 정확한 답(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설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폐기하고 말하자면 '알렉산더의 스승'을 사용하기로 동의했다고 가정하면, 지칭되는 사람은 알렉산더의 스승이라는 것이 필연적 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종사한 적 있다는 것은 우연적 사실이고, 설령 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속성들의 논리적 합, 포괄적 선언지를 가진다는 것이 필연적 참이라 제안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foonote]Searle, 'Proper Names', in Caton, op. cit., p. 160.[/footnote]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필연의 어떤 직관적 의미에서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속성들을 가졌다는 것은 필연적 참이 아니다. 역사 철학의 일부 관점에서 어쩌면 유명한 특정 이론이 있는데, 결정론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역사 속 개별자에게 대단한 역할을 할당할지도 모르는 그런 이론이 있다. 아마도 칼라일은 위대한 사람의 그 이름의 의미를 그의 성취들과 결부시킬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일단 특정 개별자가 태어나고 나면, 그가 다양한 위대한 업적들을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져서 [75] 그가 서구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발상들을 산출해냈을 것이란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바로 그 본성에 일부일 것임이 필연적일 것이다. 그러한 관점의 이점들이 역사나 위대한 인물들의 본성에 대한 관점으로서 무엇이든지, 고유명사 이론에 근거하여 그것이 사소하게 참일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것들 중 어떤 것, 우리가 그렇게나 감탄하는 그 위대한 성취들 중 어떤 것을 행했던 적이 있다는 것은 우연적 사실로 보일 것이다. 설의 이러한 느낌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을 나는 말해야만 한다. 내가 '히틀러'라는 이름을 들을 때, 나는 그가 악이었다는 것이 일종의 분석적인 것이라는 가상적 '직감'을 갖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린츠에서 잠자코 보냈었을 지도 모른다. 그 경우 우리는 이 사람이 히틀러가 아니었으리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인데, 우리가 '히틀러'라는 이름을, 다른 가능세계들을 기술하면서조차, 저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앞선 강연에서 내가 고정 지시자라고 불렀던 그 개념이다.) 우리가 '히틀러'의 지칭을 역사상 유태인을 학살한 다른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에 성공했던 사람을 지적해내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이 그 이름의 지칭을 우리가 지적해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이 불명예를 획득했을 또 다른 반사실적 상황에서, 우리는 그 경우에 다른 사람이 히틀러였을 것이리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히틀러가 권력을 아예 얻은 적이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우리가 그의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한다고 내가 시사하고 있는 그 속성을 지닌 적이 없었을 것이다. 유사하게, 설령 우리가 1m가 무엇인지를 표준 meter 막대에 대한 지칭에 의해 정의한다 하더라도, 그 특정 막대가 1m 길이라는 것은 우연적 참이고 필연적 참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 막대가 연장되었다면, 그 막대는 1m보다 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1m'라는 용어를 특정 길이를 지시하는 데에 고정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저 길이라는 우연적 속성으로 지시하고 있는 길이가 무엇인지 고정시키더라도, 우리가 저 사람의 이름의 경우에서 저 사람의 우연적 속성으로 저 사람을 지적해낼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우리는 그 이름을 [76] 저 사람이나 저 길이를 모든 가능세계에서 지시하는 데에 사용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속성은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이라고 혹은 본질적이라고 간주되는 속성일 필요는 없다. 야드의 경우, 이 길이가 지적되어 나온 본래의 방식은, 내 생각에는, 잉글랜드의 왕 헨리 1세가 팔을 뻗었을 때 그의 손끝에서 그의 코까지의 거리였다. 만일 이것이 1야드의 길이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끝과 코 사이의 거리가 1야드일 것이라는 점은 필연적 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연히 그의 팔이 짧아졌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필연적 참이 아닌 이유는 yardhood라는 '개념 다발' 내에 다른 기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헨리 왕의 팔을 엄격하게 그의 길이 표준 단위로 사용하는 사람조차, 반사실적으로, 만일 특정한 것들이 그 왕에게 발생했더라면, 그의 손끝과 코 사이의 정확한 거리는 정확히 1야드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해당 길이임에 대한 특정 고정된 지칭을 지적해내는 데에 '야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한 다발 역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언급들은 내 생각에 '통세계 정체화'와 '대응쌍 이론'에 관한 훌륭한 학술적 처리의 직관적인 기이함을 보여준다. 이런 종류의 여러 이론가들은 그들이 하는 그대로 '가능세계'가 우리에게 오직 질적으로만 주어진다고 믿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정체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대안적으로 그의 대응쌍들이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속성들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근접하게 모방하는 그러한 것들과 정체화되는 것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루이스는 말한다: '당신의 대응쌍들은 ... 당신을 모방하는데 ... 중요한 측면들에서 ... 다른 것들이 그것들의 세계들에서 하는 것보다 더욱 근접하게 게 그리하고 ... 다양한 측면의 중요성과 유사성의 정도에 의해 가중치가 매겨진다.'[각주:1]) 몇몇은 그 중요한 속성들이란 것을 [77] 해당 대상을 실제 세계에서 정체화해주는 데에 사용되는 그런 속성들과 동일시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개념들은 틀렸다. 내게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중요한 속성들은 그의 철학적 저작으로 구성되고, 히틀러의 경우에는 그의 살인자로서의 정치적 역할로 구성된다. 두 사람 모두, 내가 말했듯, 저런 속성들을 모두 다 결여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속성들을 그들이 소유했었어야 한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든 불가피하게 만든, 아리스토텔레스든 히틀러든 그들을 속박하는 아무런 논리적 숙명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실제 경력과 완전히 다른 경력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대상의 중요한 속성들은 '중요함'이 본질과 동의어로 사용되지 않는 한 본질적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상은 그 대상의 가장 두드러지는 실제 속성들과 매우 다른, 혹은 우리가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하는 속성들과 아주 다른 속성들을 가질 수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내게 물었던 바 하나를 분명히 하고 가자. 내가 지시자가 고정적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것을 지시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언어에서 사용되듯, 그것은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들에 관하여 말할 때 그 사물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다른 언어를 발화하는 반사실적 상황이 있을지도 몰랐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누군가가 '2 + 2 = 4'를 사람들이 7이 짝수라는 의미로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우연한 것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해당 반사실적 상황에서 모두 다 독일어로 말하고 있는 그런 반사실적 상황에 대한 기술의 일부일지라도, 그것에 관해 영어로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모두 독일어로 말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라거나 '우리가 비표준적 방식으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라고 말한다. 그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 우리가 말하는 방식과 다른 특정 방식으로 말한 가능세계 또는 반사실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세계를 기술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의미와 우리의 지칭으로 영어를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정 지시자에 대해 [78]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지칭을 가지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지칭되는 사물이 모든 가능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름이 그 사물을 고정적으로 지칭한다는 뜻으로 말한다. 만일 당신이 '히틀러가 아예 태어난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라'고 말한다면 '히틀러'는 여기에서, 여전히 고정적으로, 해당 기술된 반사실적 상황에서 존재하지 않았을 어떤 것을 지칭한다. 

  이러한 언급들을 가정하면, 이는 우리가 (6)을 잘못된 것으로 삭제해야만 한다는 뜻이 된다. 다른 명제들은 필연성과 관련이 없고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명제 (5)는 필연성과 관련이 없고 살아남을 수 있다. 만일 내가 '개밥바라기별'이라는 이름을 저녁에 특정한 천문학적 위치에서 보이는 특정 천체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그리하여 개밥바라기별이 저녁에 보인다는 것이 필연적 참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태는 그 별을 목격하도록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그러한 사물들에 관한 다양한 우연적 사실들에 달려있다. 그래서 설령 내가 나 자신에게 '개밥바라기별'을 저녁에 하늘의 저 위치에서 보는 천체를 명명하기 위해 사용하리라고 말할지라도, 개밥바라기별이 저녁에 보였다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그 지칭물을 결정했던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선험적일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개밥바라기별은 내가 저녁에 그 자리에서 봤던 그 사물이라고 결정했다면, 나는 그 지칭 결정을 성립시킴으로부터, 만일 어쨌든 개밥바라기별이 도대체 있다면 그것은 저녁에 내가 봤던 그 사물이라는 점을 알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 우리가 지금까지 제시해온 논증들이 살아남는 데까지는 살아남는다. 

  명제 (6)이 제거되는 경우의 이론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명제 (2), (3), (4)는 대규모의 반례 집합을 가지는 것으로 드러난다. (2)-(4) 명제들이 참인 경우조차, 명제 (5)는 통상 거짓이다. 명제 (3)과 (4)의 진리치는 경험적 '우연'이고, 화자가 선험적으로 거의 알 리가 없는 사건이다. 즉 말하자면, 다른 원칙들은 실제로 화자의 지칭을 결정하고, 해당 지칭물이 (2)-(4)에 의해 결정된 지칭물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연적'인 것, 우리가 선험적으로 아는 그 어떤 위치에도 있지 않을 그런 사건이다. 오직 희소한 종류의 경우에서만, 보통 최초 세례(명명)에서만, (2)-(5) 모두 참이다.

   [79] 이 명제들((1)-(5))이 당신에게 어떤 명명의 그림을 제시하는가? 그 그림은 이런 것이다. 내가 한 대상을 이름짓고자 한다. 나는 그 대상을 고유하게 기술할 모종의 방법을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적 세례(명명)식을 진행한다. '키케로'로 나는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사내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키케로'의 지칭일 바의 것이리라. 나는 '키케로'를 (실제로) 카틸리나를 고발한 사내를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가 그리하지 않았던 가능세계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의사는 우선 한 대상을 고유하게 확정해주는 일부 조건들을 제시함으로써, 다음으로 특정 단어를 이 조건에 의해 확정되는 그 대상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함으로써 제시된다. 이제 우리가 실제로 이 일을 수행하는 몇몇 상황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만일 당신이 억지로 그러고자 한다면, 당신이 '나는 저기 저 천체를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기술이라 부를 수도 있다.[각주:2] 그것은 이러한 진술들이 단지 참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그 지칭이 결정되는지에 대한 올바른 그림을 제시하기까지 하는 사례이다. 또 다른 사례는, 만일 당신이 이것을 이름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런던 경찰이 '잭' 혹은 '잭 더 리퍼'를, 그가 누가 되었든 일련의 살인 혹은 그 대다수를 저지른 자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는 그 경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 그들은 그 이름의 지칭을 [80] 기술로써 제시하고 있다.[각주:3] 하지만 많은 혹은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 명제들이 거짓이라 생각한다. 그럼 그 명제들을 살펴보자.[각주:4] 

  명제 (1)는 내가 말하듯 정의이다. 명제 (2)는 대상에 대해 A가 믿는 속성들 중 하나 혹은 일부 결합이 일부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내는 것이라 믿어진다.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일종의 사례는 내가 말했던 그것이다. 나는 '키케로'라는 용어를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자를 나타내는 데에 쓸 것이다 (혹은 그를 공개적으로 처음 고발했던 자라고, 그 용어를 고유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는 이 특수한 지칭에서 대상을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Semantic Analysis에서 지프 같은 일부 작가들, 이름이 어떤 의미에서도 뜻을 지닌다고 믿지 않는 작가들은 이것이 지칭이 결정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훌륭한 그림이라 생각한다.

  명제 (2)가 참인지 봐 보도록 하자. 어떤 선험적인 방식에서 그것은 참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당신이 염두에 둔 속성들이 누구든 고유하게 지적해낸다고 당신이 생각하지 않는다면―그 속성들이 모두 두 사람에 의해 충족된다고 말해 보자―어떻게 당신은 그들 중 어느쪽 사람이 당신이 그에 관해 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이 한쪽보다는 다른 한쪽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말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통상 문제의 속성들은 문제의 그 사람의 일부 유명한 행위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키케로는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사내였다. 평균적인 개인은 이에 따르면 그가 키케로를 지칭할 때 [81] 그는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사내' 같은 어떤 것을 말하고 있고 그래서 특정 사람을 고유하게 지적해냈다. 철학자들이 이 명제를 그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견지해온 것은 철학자들의 교육의 공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키케로에 대해 생각할 때, 유명한 로마 연설가에 대해 생각하며, 오직 단 한 사람의 유명한 로마 연설가만 있었다든지 그 이름이 지칭물을 가지려면 키케로에 관해 다른 어떤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든지 하고 생각하려는 의도 없이 그리 생각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지칭할 수 있는 사람인 리처드 파인만을 고려해 보자. 그는 선도적인 현대 이론 물리학자이다. 여기 있는 모두(나 역시 물론) 파인만을 겔만과 차별화해주기 위해 그의 이론들 중 하나의 내용을 진술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길에 다니는 사람,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여전히 '파인만'이라는 그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그에게 질문을 하면 그는 말할 것이다. 그는 물리학자 뭐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이것이 누구든 고유하게 지적해낸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가 '파인만'이라는 이름을 파인만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낼 기술을 지니는 경우들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우리가 키케로는 처음으로 카틸리나를 고발한 사내였다는 것을 안다고 말해 보자. 뭐 그건 좋다. 그것은 실제로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는데, 이 기술이 또 다른 이름, 즉 '카틸리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비순환조건을 위반하는 일을 피하기 위한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그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는 점을 확보해야만 한다. 특히, 우리는 카틸리나가 키케로에 의해 고발당한 사내였다고 말하지 않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어떤 것도 고유하게 지적해내고 있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단순히 한쌍의 대상들 A와 B를, A가 B를 고발한 그런 한쌍을 지적해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고발이 발생했던 유일한 쌍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고유성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어떤 조건들을 추가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누군가는 [82] 내가 말했듯 여기 모두가 이 이론에 대한 간략하고 독립적인 진술을 구성할 수 있고 그래서 아인슈타인을 고유하게 지적해낸다는 점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이 문제에 관해 충분하게 알지 못하고, 그래서 상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을 경우, 그들은 말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라고, 그리고 그럼 가장 직접적인 종류의 악순환에 끌려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명제 (2)가 충족되는 일은 직설적인 방식으로 실패하는데, 우리가 파인만이 유명한 물리학자라고, 다른 어떤 것도 파인만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말할 경우 그러하다.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은 충족되는 경우에조차 적절한 방식으로 충족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하지만 그것은 비순환 조건을 충족시킬 그런 방식으로 그를 지적해내지는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상대성 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지적되어 나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제 (2)는 거짓으로 보인다. 

  철학자들에 의해 통상 이름들과 결부되는 조건들 φ로부터 그 조건들을 변경함으로써, 누군가는 해당 이론을 개선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들어 본 다양한 방식들이 있었다. 어쩌면 이후에 그것들을 논의할지도 모른다. 흔히 그들은 이름난 사람의 유명한 성취들에 대해 생각한다. 확실히 유명한 성취들의 경우 그 이론은 작동하지 않는다. 내 학생들 일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론의 세부사항을 제공할 백과사전을 지칭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의 지칭을 독립적으로 확정했다. (이것은 백과사전의 존재에 대한 초월적 연역이라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설령 누군가가 백과사전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이 이론이 어떤 백과사전에서인가 상세하게 제시되는지 여부를 알아야 하리란 것은 그의 지칭에 실제로 본질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지칭은 아무런 백과사전도 전혀 없었을지라도 작동했을 것이다.

  명제 (3)을 살펴보자. 만일 적절히 가중치가 매겨진 φ의 대부분이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충족된다면, y는 화자에게 그 이름의 지칭물이다. 이제, 우리가 이미 명제 (2)가 거짓이라고 확증한 마당에, [83] 왜 나머지 무엇인가가 작동해야 하겠는가? 그 이론 전체는 충족된 고유 조건들을 항상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 있음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다른 명제들을 고찰할 수 있다. 해당 이론과 결부된 그림은 오직 어떤 고유한 속성들을 제시함으로써만 당신이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그래서 당신이 사용하는 이름의 지칭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 나는 누군가가 누구인지 아는 일의 문제로 파고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주 혼란스러운 문제이다. 나는 당신이 키케로가 유명한 로마 연설가라고 답할 수 있다면 키케로를 앎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이상하게도, 만일 당신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고 그 이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면, 당신은 아인슈타인이 누구인지도, 즉 상대성이론의 발견자라는 것도, 누가 상대성이론을 발견했는지, 즉 아인슈타인이라는 것도, 둘 다 이 지식에 근거하여 알 수 있다. 이는 일종의 비순환조건에 대한 노골적인 위반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을 시사하는 그림은 틀린 그림이어야만 할 것으로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φ가 실제로 고유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 대상은 필연적으로 A에 대해 'X'의 지칭물인가? 누군가가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 사람이 적절하게 잘 교육받았으며 그 불완전성 정리에 대한 독립적인 설명을 제시할 능력까지 있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단지 '자, 그것이 괴델의 정리이다' 라거나 혹은 무엇이 되었든 단지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특정 정리, 괴델을 발견자로 하여 그에게 귀속시키는 정리를 진술한다. 만일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φ의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가 A에 대해 'X'라는 이름의 지칭물이라는 것은 그래서 사실인가? 간단한 경우를 취해 보자. 괴델의 경우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 관해 들어본 유일한 것이 그것이다. 그가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했다는 것 말이다. 누가 되었든지간에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은 '괴델'의 지칭물이라는 점이 귀결되는가?

  대놓고 허구적인 다음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괴델 교수께서 참석하고 계시지 않길 희망한다.) 괴델이 사실 이 정리의 주인이 아니었다고 가정해 보자. [84] '슈미트'란 이름이 붙은, 그의 시체가 수년 전 기이한 상황 하에 비엔나에서 발견되었던 한 사람이 실제로 문제의 그 작업을 했다. 그의 친구 괴델은 어떤 식으론가 그 필사본을 손에 넣었고 그래서 그 필사본이 괴델의 공이 되었다. 그럼 문제의 그 관점에서, 우리의 일상인이 '괴델'이란 그 이름을 사용할 때, 그는 실제로 슈미트를 지칭하려는 의도인데, 왜냐하면 슈미트가 해당 기술,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을 만족시키는 고유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은 그 기술을 '산술의 불완전성에 대한 발견을 출판한 사람'으로 변경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조금 더 변경하여 누군가는 이 정식화까지 거짓으로 만들 수도 있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출판되었는지 아니면 구전되어 떠돌았는지 여부조차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계속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을 다뤄보자. 그럼,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은 사실 슈미트이기에, 우리는, 우리가 '괴델'에 관해 말할 때, 사실은 항상 슈미트를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우리가 그러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단순히 그러고 있지 않다. 내가 나중에 논의할 한 가지 답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 대신 '산술 불완전성 정리가 통상 그에게 귀속되는 사람'이라거나 그 비슷한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이후에 살펴 보도록 하자.

  하지만 여러분들 중 상당수에게는 이것이 매우 이상한 예시로 보이거나, 그런 상황이 드물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는 또한 철학자들의 교육의 공이다. 매우 자주 우리는 주목할 만한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여 이름을 사용한다. 가상적 예시에서 사용된 수학의 경우가 핵심을 짚기에 좋은 사례이다. 우리는 페아노에 관해 무엇을 아는가?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페아노에 관해 '알'지도 모르는 바는 그가 소위 '페아노 공리'라는 자연수의 수열을 특징지어주는 특정 공리의 발견자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부 사람들은 그 공리들을 진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공리들이 페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데데킨트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고 말해왔다. 페아노는 물론 부정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주석이 [85] 데데킨트의 면을 세워주는 일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주석은 간과되어 왔다. 그래서 문제의 그 이론에 관하여 '페아노'라는 용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그대로, 실제로 데데킨트를 지칭한다. 이제 당신이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당신은 실제로 내내 데데킨트에 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리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사례는 한정없이 증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비전문가에게는 물론 더 끔찍한 오해까지도 발생한다. 앞선 예시에서 나는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을 그의 상대성에 관한 작업에 대한 지칭으로써 정체화한다고 가정했다. 실제로, 나는 종종 아인슈타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 원자 폭탄의 발명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인슈타인을 지칭할 때, 우리는 원자 폭탄 발명가를 지칭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는 않다.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깨달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서반구에 상륙한 첫 번째 유럽인이었다. 아마도 이런 것들 중 아무것도 참이 아닐 것이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콜럼버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들이 만일 지구의 둥금을 사용한다면 실제로는 어떤 그리스인들을 지칭하는 것이거나, 그들이 '아메리카의 발견'을 사용한다면 아마도 일부 고대 스칸다나비아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고 있진 않다. 그래서 만일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φ의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가 그 이름의 지칭물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단순히 거짓인 것으로 보인다.[각주:5]

  [86] 명제 (4): 만일 투표가 아무런 고유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이름은 지칭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러한 경우는 앞서 다루어졌고, 앞선 사례들에서 다루어졌다. 첫째 사례는, 키케로나 파인만의 경우에서처럼 투표가 고유한 대상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로, 그 투표가 아무런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아무것도 φ의 대부분 혹은 심지어 어떤 상당수조차 충족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해당 이름이 지칭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당신이 한 사람에 관하여 실제로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참일 수 있는 거짓 믿음들을 가질 똑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당신은 완전히 아무에게도 전혀 참이 아닌 거짓 믿음들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믿음들이 당신의 믿음들의 총체성을 구성할지도 모른다. 괴델에 관한 예시를 변화시켜서, 아무도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적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어쩌면 그 증명은 단순히 종이 한 장에 원자들이 임의로 흩뿌려져 물질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괴델이란 사람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현장에 있을 만큼 운 좋은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자. 추가로, 산술이 실제로는 완전하다고 가정해 보자. 누군가는 실제로 원자들이 임의로 흩뿌려져 정확한 증명을 산출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수십년간 알려지지 않은 교묘한 오류가 여전히 들키지 않았던 것이다. 혹은 어쩌면 실제로 들키지 않은 건 아니고, 괴델의 친구들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 그렇게 설령 고유한 대상에 의해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을지라도 [87] 그 이름이 여전히 지칭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지난 강연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요나의 사례를 제시한 바 있다. 성서학자들은 내가 말했듯 요나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이 누군가가 거대한 물고기에 의해 삼켜진 적이 있다거나 니네베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그 누구인들 아무에게도 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요나'라는 이름은 실제로 지칭물을 가진다. 위에서 아인슈타인의 폭탄 발명 사례에서, 실제로는 아무도 그 장치의 '발명자'라 불릴 자격이 없을 경우도 가능하다.

  명제 (5)는 'X가 존재한다면, X는 φ의 대다수를 가진다는 것은, A에게 선험적으로 참이다'라는 진술을 말한다. 명제 (3)과 (4)가 마침 참인 경우에서조차, 전형적인 화자는 그 명제들이 해당 이론에 의해 요청되는 방식대로의 것들이라는 점을 선험적으로 알 리가 거의 없다. 나는 괴델에 관한 나의 믿음이 실제로 옳은 것이라고 그리고 '슈미트' 이야기가 단지 허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믿음이 선험적 지식을 구성할 리는 거의 없다. 

  여기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해당 이론을 구조해낼 수 있는가?[각주:6] 첫째로, 누군가는 이러한 기술들을 변경시켜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유명한 업적들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우리의 기술로서 사용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충분히 만지작거려 누군가는 결국 이로부터 뭔가 얻어낼지도 [88] 모른다.[각주:7] 그렇지만, 누군가가 시도하는 그 시도 대부분이 반례들이나 또 다른 반박들에 노출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괴델의 사례에서 누군가는 '자,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보자, 우리 모두가 실제로 알고 있는 바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라는 것, 괴델이 흔히 산술의 불완전성이 그에게 귀속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괴델'이란 이름의 지칭물을 결정할 때, 나는 나 자신에게 '"괴델"로 내가 의미하려는 바는 "그가 그 누구든지 간에,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슈미트나 포스트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신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의도하고자 할 것이다.

  이게 맞나? 우선, 내게는, 내가 앞서 제시했던 것과 같은 유형의, 더 세련되었을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런 반례들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언급한 페아노의 경우에서, 화자 몰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소한 지금부터는) 수-론 공리들이 그에게 귀속되지 않아야 하리란 걸 철저하게 인지한다고 가정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공리들을 페아노의 공으로 돌리지 않고 이제 제대로 데데킨트에게 돌린다. 그럼 그렇게 이러한 것이 흔히 귀속되는 사람은 데데킨트일 것이고 페아노가 아닐 것이다. 여전히, 그 화자는, 그 오래된 구식의 믿음을 받아들인 채, [89] 여전히 페아노를 지칭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페아노에 관한 거짓 믿음을 견지한 채로, 데데킨트에 관한 참인 믿음은 견지하고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로, 그리고 아마도 더욱 중요하게도, 그러한 기준은 비순환 조건을 위배한다. 어쩌다 이리 되는가? 우리들 대다수가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참이다. 이것은 왜 그러한가? 우리는 확실히 그리고 신실하게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우리가 믿는다는 것, 우리가 산술의 불완전성을 이 사람에게 귀속시킨다는 것이 도출되는가? 아니다. 그저 그것으로부터만은 아니다. 우리는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말할 때 괴델을 지칭하고 있어야 한다. 만일, 실제로, 우리가 항상 슈미트를 지칭하고 있었더라면, 우리는 산술의 불완전성을 괴델이 아니라 슈미트에게 귀속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괴델'이란 발음을 내가 '슈미트'라고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했었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괴델을 지칭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을 수행하는가? 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괴델"로 나는 산술의 불완전성이 흔히 귀속되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일을 했었더라면 우리는 순환에 빠졌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두 이 방 안에 있다. 실제로 이 학교 안에서[각주:8] 몇몇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지만, 여러 학교들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공동체 내에서 우리 모두는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이 흔히 그에게 귀속되는 그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지칭을 결정짓고자 하고 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산술의 불완전성이 흔히 그에게 귀속되는 그 사람' 외에 그 이름의 지칭에 대한 어떤 독립적인 규준이 있지 않는 한 어떤 속성을 가지고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 모두는 '우리는 이 업적을 우리가 그 업적을 그에게 귀속시키는 그 사람에게 귀속시킨다'라고 말하고 있을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그 지칭의 어떤 독립적 기준도 제공하지 않고 그리 말하고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해당 결정은 순환적일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내가 'C'로 표기한 조건에 대한 위반이고, [90] 어떤 지칭 이론에서든 사용될 수 없다.

  물론 당신은 책임전가로 순환성을 회피하고자 해 볼지도 모른다. 이는 스트로슨에 의해 언급되는데, 그는 이 문제에 관한 그의 주석에서 한 사람의 지칭은 다른 사람의 지칭으로부터 파생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정체화 기술은, 문제가 되는 개별자에 대한 화자의 고유한 지칭에 대한 지칭을 포함하지 않아야만 함에도, 그 개별자에 대한 또 다른 사람의 지칭에 대한 지칭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만일 추정상 정체화하는 기술이 이런 후자의 종류에 속하는 것이라면, 더욱이  그것이 진정으로 정체화하는 기술인지 여부의 문제는 그 기술이 지칭하는 그 지칭 자체가 진정으로 정체화하는 지칭인지 여부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한 지칭은 진정으로 정체화하는 지칭이라는 그 자격을 또 다른 지칭으로부터 빌려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또 다른 지칭으로부터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급은 무한하지 않다.[각주:9]

 

  그럼 나는 말할 것이다. '봐라, "괴델"을 가지고 나는 조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자를 의미할 것이다.' 조는 그럼 그 안건을 해리에게 떠넘길 것이다. 이 일이 순환에 빠지지 않게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실제로 확신하는가? 만일 당신이 그런 연쇄를 안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연쇄 속 다른 모두가 적절한 조건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연쇄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칭들을 순차로 빌려오는 방식으로 그런 연쇄를 지시함으로써 해당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연쇄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존재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 연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이 무슨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 일이 순환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인지, 혹은 조에게 호소하면 당신이 어쨌든 제대로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 못할 것인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것을 당신의 정체화 기술로 무슨 확신을 가지고 사용할 수 없다. 당신은 괴델에 관해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진행되고 있는 일의 참된 그림은 무엇인가? 아마도 지칭이 실제로는 아예 이뤄지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실제로 [91] 우리가 그 사람을 정체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속성들 중 어떤 것이든 옳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 속성들이 고유 대상을 지적해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엇이 내가 사용하는 '키케로'를 의 이름으로 만드는 일을 수행하는가? 기술다발이론으로 이끄는 그림이 이런 어떤 것이다. 한 사람이 방 안에 고립되어 있다. 다른 화자들 그리고 여타의 모든 것들의 공동체는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스스로 지칭을 확정한다. '"괴델"로 나는 그게 누구든 간에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당신은 원한다면 이 일을 행할 수 있다. 그걸 실제로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저 결정을 고수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하는 일이 저것이라면, 산술의 불완전성을 슈미트가 발견했을 경우 당신은 '괴델이 그러저러한 일을 했다'라고 말할 때 슈미트를 지칭하는 일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 대다수가 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보자. 그의 부모는 그를 특정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그 아이에 관해 그들의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 아이를 만난다. 다양한 종류의 발화를 거쳐 그 이름이 마치 사슬로 연결되듯 연결의 연결을 거쳐 확산된다. 이 연쇄의 먼 극단에 있는 한 화자, 시장이나 어디 다른 곳에서 이를 테면 리처드 파인만에 관해 들어본 적 있는 화자는 설령 그가 누구에게서 처음 파인만에 관해 들었는지 혹은 하여간 누구한테서 그가 파인만에 대해 들었던 건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리처드 파인만을 지칭하고 있을 수 있다. 그는 파인만이 유명한 물리학자라는 것을 안다. 궁극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도달하는 의사소통의 특정 경로가 화자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파인만을 고유하게 정체화하지 못하더라도 파인만을 지칭하고 있다. 그는 파인만 다이어그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파인만 생성-소멸 쌍이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겔-만과 파인만을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다. 그래서 그가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대신, 파인만 그 자신에게로 소급되는 의사소통 연쇄가 확립된 것인데, 연결에 연결을 거쳐 그 이름이 전래된 공동체에 그가 구성원인 덕분으로 그렇게 된 것이고, 서재에 틀어박혀 사적으로 그가 행한 세례식에 의한 것은 아니다. '"파인만"으로 나는 [92] 그러저러한 짓을 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라는 그런 세례식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앞서 언급된 스트로슨의 제안, 하나의 정체화하는 지칭이 또 다른 지칭으로부터 자격을 빌려오리란 것과 어떻게 다른가? 확실히 스트로슨은 인용된 구절에서 훌륭한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 그는 확실히 최소한 내가 지지하는 그림과는 강조점에서 차이를 보여주는데, 해당 언급을 주석에 국한시키기에 그러하다. 본문은 기술다발이론을 지지한다. 그저 스트로슨이 그의 언급을 기술 이론의 맥락에서 구성하기 때문에, 그의 관점은 그리하여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나의 관점과 다르다. 스트로슨은 명백히 화자가 그의 지칭을 누구로부터 얻었는지 알아야만 한다고, 그래서 그가 '"괴델"로 나는 이 "괴델"이라 부르는 그 사람을 의미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고 요구한다. 만일 그가 어떻게 그 지칭을 집어냈는지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그런 기술을 제시하지 못한다. 현재의 이론은 그런 어떤 요구사항도 설정하지 않는다. 내가 말했듯, 나는 내가 누구에게서 괴델에 대해 들었는지 그닥 잘 기억하지 못할 수 있고, 내가 그 이름을 어떤 사람들에게서 들었는지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고찰들은 여기에서 지지되는 관점이 실질적으로 스트로슨의 주석의 귀결들로부터 분기된 귀결들로 이끌 수 있다. 화자가 '키케로'라는 이름을 스미스와 여타 사람들, 그 이름을 유명한 로마 연설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지만 이후에 그가 생각하길, 그는 그 이름을 존에게서 취했고, 존은 (화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키케로'를 악명 높은 독일 간첩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고대 세계의 어떤 연설가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 없는 자이다. 그럼, 스트로슨의 전형에 따르면, 화자는 그의 지칭을 '나는 "키케로"를 존이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다'라는 결심을 통해 결정해야만 하는 반면, 현재의 관점에서, 그 지칭물은 화자가 그 이름을 어디에서 집어냈는지에 관한 그의 거짓 인상에도 불구하고 해당 연설가일 것이다. 핵심은 스트로슨이 의사소통 연쇄 관점을 기술 이론에 맞추려 시도하면서, 화자가 그의 지칭 원천이었다고 생각하는 바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만일 화자가 [93] 그의 원천을 잊어버렸다면, 스트로슨이 사용하는 기술은 그에게 가용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그가 그것을 잘못 기억한다면, 스트로슨의 전형은 잘못된 결과들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그 원천은 화자가 지칭을 어떻게 얻었다고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상관된 실제 의사소통 연쇄이다. 나는 다른 기회에 철학적 이론들이 거짓일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고, 그래서 대안적 이론을 제시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저 그렇게 했었나? 어떤 식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나의 규정은 실제로 지칭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만한 일련의 것들에 비해 훨씬 덜 구체적이었다. 명백히 이름은 연결에서 연결로 이행된다. 하지만 물론 나로부터 특정 사람에게 도달하는 모든 종류의 인과적 연쇄가 나로 하여금 지칭을 형성하도록 해주진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산타클로스'라는 용어 사용으로부터 특정한 역사적 성인에 이르는 인과 연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아이들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이 때까지 아마도 저 성인을 지칭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를 정말로 엄격한 지칭 이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내가 이 작업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우선 나는 지금 너무 게으르고, 다음으로, 지칭 같은 용어에 대해 작동할 일련의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기 보다는, 수용되어 온 관점들에 의해 제안된 그림보다 더 나은 그림을 제안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기술 이론에 지나치게 불공평하게 굴었나? 이 자리에서 나는 그 이론의 어떤 지지자에 의해 진술되었던 것보다도 아마 더 정확하게, 아주 정확히 그 이론을 진술했다. 그래서 그건 반박하기 쉬운 일이다. 어쩌면 만일 내가 나의 이론을 충분히 정밀하게 예닐곱 개 명제들의 형태로 진술하려 했었더라면, 당신이 그 명제들을 하나씩 시험할 때, 그 명제들 모두 거짓이라고도 드러났을 것이다.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차이는 이런 것이다. 내가 제시한 예시들이 보여준다고 내가 생각하는 바는 단순히 이곳저곳에 이러저러한 기술적 오류나 실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칭이 결정되는지에 대해 이 이론에 의해서 제기된 전체 그림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94] 어떤 식으론가 질적으로 고유하게 대상을 지적해내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지칭을 결정하는 어떤 속성들을 우리 스스로 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더 나은 그림, 만일 더 많은 세부사항이 채워지게 된다면, 지칭이 발생하기 위한 더 정확한 조건들을 제공하는 일과 관련하여 더 개선될 수도 있을 그림을 제시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일련의 필충조건에 전혀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버틀러 주교의 '모든 것은 각기 그것인 바의 것이며 여타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언제나 공감해 왔다. 지칭 같은 일부 개념에 대해 지칭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용어를 통한 철학적 분석들은 무척이나 실패하기 쉽다는, 사소하지 않은 의미에서 말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어떤 분석이 제시되는 어떤 특정한 경우에서든 그 분석을 살펴보고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이것을 그저 스스로 공리로 인용하고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한층 더 신중하게, 나는 지칭을 위한 일련의 필충조건을 제공하지 않고서 더 나은 그림을 제시하고 싶다. 그런 조건들은 매우 복잡할 테지만, 진실은 우리가 특정인을 지칭한다는 것이 공동체 내에서 지칭되는 사람 그 자신에게도 소급되는 우리와 다른 화자들 사이의 연결 덕분이라는 점이다.

  기술 그림이 참인 어떤 경우들, 어떤 사람들이 실제로 혼자 자기방에 들어가 해당 지칭물이 특정한 정체화 속성들을 가진 고유한 사물이라고 말함으로써 실제로 이름을 부여할 그런 경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잭 더 리퍼'가 내가 제시했던 가능한 사례였다. 또 다른 사례는 '샛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에 욱여넣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어떤 사람을 만나 그의 이름이 이야기되고 있는 경우이다. 다른 사례들에서 기술 이론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면, 아마 '내가 지금 막 만나고 있는 그 사내'라는 기술을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사례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바란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다른 어떤 식으로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더라면 그런 말로 표현할 수도 있다. 물론, 만일 당신이 한 사람을 소개받고 [95] '저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라고 말하는 걸 듣는다면, 당신은 그에 대해 이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틀렸을지도 모르며, 기타 등등의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일부 경우들에서는 그런 전형이 작동할지도 모른다. 특히 처음으로 누군가 혹은 어떤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사람의 경우 그렇다. 혹은 그가 한 별을 가리키고 '저것은 켄타우로스좌의 알파별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이러한 세례식을 거행할 수 있다. '"켄타우로스좌의 알파별"로써 나는 이러저러한 좌표 상의 바로 저기 그 별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그림은 실패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지칭은 단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바에 의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이름이 누군가에 당도하였는지의 역사에, 또 그와 같은 사항들에 의존한다. 누군가가 해당 지칭을 획득하는 것은 그러한 역사에 뒤따름으로써 성립한다. 

  더욱 정확한 조건들은 제시하기에 너무 복잡한 것이다. 그 조건들은 유명한 사람의 경우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서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 다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한 교사가 그의 학생들에게 뉴턴이 사물들을 지구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 첫 번째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말한다. 나는 어린 친구들이 뉴턴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바가 저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업적의 이점들이 무엇일지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것이 뉴턴 발견의 유일한 내용으로 말해지는 것은 뉴턴에 대한 거짓 믿음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령 학생들이 이전에 뉴턴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가정할 것이다. 만일, 다른 한편으로,[각주:10] 해당 교사가 'George Smith'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면―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사실 그의 옆집 이웃이다―그리고 조지 스미스가 최초로 원의 사각화를 했다고 말한다면, 이로부터 그 학생들이 해당 교사의 이웃에 관한 거짓 믿음을 가진다는 점이 도출되는가? 그 교사는 학생들에게 스미스가 그의 이웃이라고 말하지 않고, 스미스가 처음으로 원을 사각화하였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는 딱히 그 이웃에 관한 어떤 믿음이든 학생들의 머릿속에 집어 넣으려 애쓰고 있지 않다. 그는 원을 사각화한 사람이 있었다는 믿음을 심어주려 애쓰고 있지만, 어떤 특정 사람에 관한 믿음을 심어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에게 처음 보인 이름을 뽑아 들었고, 마침 그가 그의 이웃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경우에서 [96] 학생들이 그 이웃에 관한 거짓 믿음을 가지는지는, 설령 그 이웃에게로 소급되는 인과 연쇄가 있을지라도, 명백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에 관해 확신하지 못한다. 어쨌든 이것이 일련의 필충조건이 되도록 하려면 더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이론은 아니지만, 실제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더 나은 그림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론에 대한 투박한 진술은 다음과 같을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세례식'이 발생한다. 여기에서 대상은 명시적 규정에 의해 명명될지도 모르고, 혹은 기술에 의해 해당 이름의 지칭이 고정될지도 모른다.[각주:11] 이름이 '연결에서 연결로 이행'될 때, 이름의 수신자는 내 생각에 그가 그 이름을 배울 때 그가 그 이름을 들은 사람과 같은 지칭을 가지고 그 이름을 사용하려는 의도를 가져야만 한다. 만일 내가 '나폴레옹'이란 이름을 듣고 내 애완 땅돼지의 이름으로 어울린다고 결정한다면, 나는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각주:12] (아마도 그런 어떤 고정된 지칭의 유지 실패가 [97] '산타클로스'의 본래 용법으로 추정되는 것과 오늘날의 용법들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다.)

  앞선 개괄이 지칭 개념을 거의 배제시키지 못한다는 점에 주의하라. 반대로, 그것은 주어진 것과 같은 지칭을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 개념을 취한다. 기술에 의한 지칭 고정이나 명시적 규정으로 설명되는 최초 세례식에 대한 호소도 있다 (만일 명시적 규정이 다른 범주 아래에 포괄되는 것이 아니라면).[각주:13] (어쩌면 최초 세례식들에 대한 다른 가능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조지 스미스 사례는 그 조건들의 충분성에 관련해 일부 의심을 드리운다. 설령 그 교사가 그의 이웃을 지칭한다 할지라도, 그가 그의 지칭을 학생들에게 이행시켰다는 점이 분명한가? 왜 그들의 믿음이 '조지 스미스'라고 명명된 다른 어떤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어야 하겠나? 만일 그가 뉴턴은 사과에 맞았다고 말한다면, 어떤 식으론가 그의 지칭 전파 작업은 더 쉬워지는데, 그가 뉴턴에 관한 흔한 오해를 갖고 의사소통했기에 그러하다. 

  반복하자면, 나는 이론을 제시했던 것은 아닐 테지만, 기술이론가들에 의해 제시된 것보다 더 나은 그림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논할 다음 주제가 동일성 진술들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진술들은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가? 그 문제는 최근의 철학 내에서 어느 정도 논란이 되어 왔다. 첫째로, [98] 모두가 기술들이 우연적 동일성 진술들을 만드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만일 이중초점렌즈를 발명한 사람이 합중국의 첫 번째 우정장관이었다는 것이 참이라면―이것들이 하나이고 같다는 것이 참이라면―그것은 우연적으로 참이다. 즉, 한 사람이 이중초점렌즈를 발명했고 또 다른 사람이 합중국의 첫 번째 우정장관이었던 것이 사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확실히 당신이 기술들을 사용해 동일성 진술들을 만들 때―당신이 'φx인 그런 x와 ψx인 그런 x가 하나이고 같다'고 말할 때―그것은 우연적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들에 대한 문제에도 흥미를 가졌다. 우리가 '샛별은 개밥바라기별이다' 또는 '키케로는 툴리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는 필연적인가 혹은 우연적인가? 더욱이, 그들은 과학 이론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유형의 동일성 진술에도 흥미를 가졌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빛을 특정 파장 범위 내 전자기 복사와, 또는 광자의 흐름과 동일시한다. 우리는 열을 분자들의 운동과 동일시한다. 소리를 공기 중 특정 종류의 파동 교란과 동일시한다. 기타 등등. 그러한 진술들과 관련하여 이하의 명제가 흔히 주장된다. 첫째로, 이들은 명백히 우연적 동일성들이다. 우리는 빛이 광자들의 흐름이라는 것을 알아냈지만, 물론 그것은 광자들의 흐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열은 사실상 분자들의 운동이다. 우리는 그 점을 알아냈지만, 열은 분자들의 운동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여러 철학자들은 이러한 사례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지극히 다행한 일이라 느낀다. 왜? 이 철학자들, 그들의 관점들이 막대한 문헌들에서 해설되는 그들은 일부 심리학적 개념에 관련하여 소위 '동일성 논제'라는 것을 견지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통이 뇌나 신체, 혹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C섬유의 자극 (그것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특정 물질적 상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이 반박해 왔다. '보라, 고통과 신체의 이런 상태들 사이에 어쩌면 상관성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상이한 두 사물 사이의 우연한 상관성에 불과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99] 이러한 상관관계가 견지되었다는 그 점이 경험적 발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으로 우리는 신체나 뇌의 이러한 상태와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상이한 두 가지 사물들이어야만 한다.'

  그럼 이런 말이 나온다. '그건 틀렸다. 모두가 우연적 동일성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우선, 내가 앞서 언급했던 이중초점렌즈와 우정장관 사례에서처럼 우연적 동일성이 있을 수 있다. 두 번째로, 현대적 전형에 더 가깝다고 믿어지는 사례들, 이론적 동일화의 사례들, 빛과 광자들의 흐름 혹은 물과 수소와 산소의 특정 화합물 같은 동일화 사례들에서 그러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연적 동일성들이다. 그것들은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고통을 느끼는 것 혹은 붉은 색을 보는 것이 인간 신체의 특정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이 우연적 사실의 문제로서 참일 수 있고 어떤 필연성의 문제로서도 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정신물리학적 동일화들이 다른 동일성들이 우연적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연적 사실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제를 믿고 싶게끔 사람들을 이끄는 널리 퍼진 동기들이 있다. 이념적 동기 또는 단지 물리법칙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신비적 연결이라는, 상이한 종류의 사물들, 물질적 상태들, 전적으로 다른 종류에 속하는 사물들 사이의 상관관계 같은 '법칙적 잔여물'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동기가 있다.

  내가 논할 주된 사항은 우선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일 것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이하에서 나는 보편적인 사례에 관해 다룰 것이다. 우선, '열은 분자들의 운동이다' 같은 특징적인 이론적 동일화들은 우연적 참이 아니라 필연적 참이라는 것인데, 물론 나는 여기에서 단지 물리적 필연성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더 높은 단계에서의 필연성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여간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리적 필연성은, 더 높은 단계에서의 필연성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앞서 판단하고 싶지 않은 문제이다. 최소한 이런 종류의 사례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 물리적으로 필연적일 때, 항상 그것은 단적으로 필연적이라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로, 이런 동일화들이 필연적 참으로 드러난 방식이 내게는 [100] 정신-뇌 동일성들이 필연적 참이나 우연적 참으로 드러날 수 있을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유비는 폐기되어야 한다. 그 자리에 무엇이 놓여야 할지 알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그 둘이 실제로 다르다는 결론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알기도 어렵다.

  고유명사에 관한 더 일상적인 사례로 돌아가 보자. 이것은 이미 충분히 신비로운 일이다. 이에 관해 콰인과 Ruth Barcan Marcus 사이에 논쟁이 있다.[각주:14] 마르쿠스는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들이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만일 누군가가 키케로는 툴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실제로 '키케로'와 '툴리'를 이름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그로써 그의 믿음이 필연적 참임을 주장하는 일에 연루된다. 그녀는 '단순 표식(mere tag)'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콰인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는 어느 멋진 저녁에 금성에 "개밥바라기별"이란 고유명사로 표식을 붙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똑같은 행성에 다시, 어느 날 동틀녘에, "샛별"이란 고유명사로 표식을 붙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같은 행성에 두 번 표식을 붙였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의 발견은 경험적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고유명사들이 기술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다.'[각주:15] 첫째로, 콰인 말대로 우리가 같은 행성에 두 번 표식을 붙였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의 발견은 경험적인 것이었다. 콰인이 다른 책에서 제시한 것으로 내가 생각하는 또 다른 사례는 같은 산을 네팔에서 본 경우와 티벳에서 본 경우, 한쪽에서는 '에베레스트 산' (당신이 들어본 그 이름)이라 불리고 다른 쪽에서는 '가우리샹카르'라고 불린다고 추정된다는 것이다. 가우리샹카르가 에베레스트라는 것은 실제로 경험적 발견일 수 있다. (콰인은 그 사례가 실제로 거짓이라 말한다. 그는 Erwin Schrödinger에게서 그 사례를 가져왔다. 당신은 파동역학의 고안자가 그런 것들을 틀렸으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실수가 어디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되는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이 상황이 있었던 일이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101] 콰인이 염두에 두었던 그런 종류의 일에 대한 훌륭한 묘사이다.)

  그것에 관해서는 어떤가? 이 책 안에서 반대편에서 마르쿠스로부터의 적절한 인용을 찾고 싶었지만 위치를 특정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토론에 참석했기에, 나는 그녀가 만일 당신이 실제로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사전은 그 이름들이 같은 지칭을 가지는지 여부를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하리라는 관점을 옹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각주:16] 그래서 누군가는 그 사전을 살펴봄으로써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이것은 참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들이 필연적이라는 관점의 귀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들이 필연적이라는 관점은 흔히 거부되어 왔다. 러셀의 결론은 뭔가 다른 것이었다. 그는 두 이름들이 같은 지칭을 가지는지 여부에 대한 어떤 경험적 질문도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일상적 이름들에 대해서는 충족되지 않지만, 당신이 당신의 고유한 감각 자료를 명명하고 있을 때,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경우에 만족된다. 당신은 말한다. '여기, 이것, 그리고 그것(같은 감각 자료를 두 지시사 모두로 지시하면서).' 그래서 당신은 경험적 조사 없이 당신이 같은 사물을 두 번 명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건들은 충족된다. 이것이 명명의 일상적 사례들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기에, 일상적 '이름들'은 진정한 이름들일 수 없다.

  이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첫째로, 누군가가 '키케로'라는 이름을 키케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고 '툴리'라는 이름도 키케로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으며, 키케로가 툴리임을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선험적으로 알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그렇게 표현된 해당 진술이 참이라면 우연적인 참이라는 점이 도출되진 않는다. 이것이 내 첫 번째 강연에서 내가 강조했던 바이다. 만일 당신이 선험적 추론을 통해 어떤 것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우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끄는 매우 강력한 감각이 있다. 그것은 다른 식으로 드러났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감각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102] 우리가 같은 천체를 두 번, '개밥바라기별'로 그리고 '샛별'로 지칭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말한다. 개밥바라기별은 저녁의 저기 저 별이다. 샛별은 아침의 저기 저 별이다. 실제로,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을 그러한 상황이 정말로 있는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고 가정하면서, 그렇지 않았을 가능한 상황을 기술하고자 시도해 보자. 그것은 쉬운 일이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나아가 두 상이한 별들을 '개밥바라기별'이라고 그리고 '샛별'이라고 부른다. '개밥바라기별' 그리고 '샛별'이라는 이름들을 우리가 도입할 때 전제된 것과 같은 조건들 하에서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황들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지 않거나 혹은 샛별이지 않았을 상황들인가? 그런 상황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제, 물론 나는 '개밥바라기별'과 '샛별' 같은 용어들이 이름들로 사용될 때 고정 지시자들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상황들이 그런 상황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에 연루되었다. 그 용어들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금성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그 가능세계에서도 금성은 금성이고 다른 어떤 사람이 이 다른 가능세계에서 무엇이라 말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기술해야 할까? 그는 금성을, 우리가 했듯, 한 경우에서는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또 다른 경우에는 '샛별'이라고 두 번 가리켰을 수도 불렀을 수도 없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었더라면,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참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둘 중 어느 때에도 금성을 가리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한 번은 그가 금성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가 '샛별'이라 부른 천체를 가리켰을 때 그랬다고 하자. 그럼 그 경우 우리는 확실히 '샛별'이라는 이름이 샛별을 지칭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샛별을 발견했던 그 아침 그것을 봤던 바로 그 위치에서, 샛별이 거기 있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른 어떤 것이 거기 있었다고, 그리고 특정 상황 하에서 그것이 '샛별'이라고 불렸던 것이었으리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샛별이 개밥바라기별이 아니었던 경우는 아니다.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실제 그것들의 이름인 것들의 이름이 아니었을 [103] 가능세계, 가능한 반사실적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만일 그가 그 이름들의 지칭을 정체화 기술들을 통해 결정했다면, 우리가 사용한 바로 그 정체화 기술들을 사용했을 수조차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고 주어진다면, 그런 경우는 있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는 매우 이상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앞서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인지 여부의 질문에 대한 답이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났을 것이라 말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 둘이 같은 것이라는 우리의 발견에 앞서서, 한편에서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었던 가능세계가,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가능세계가, 그렇게 실제로 두 가능 세계들이 있지는 않은 것인가? 우선, 한 가지 의미로는 사물들이 둘 중 어느 쪽 방식으로든 드러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밝혀진 방식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사색정리는 참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르고 거짓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것은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여전히 그 드러나는 방식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백하게, '~할지도 모른다(might)'라는 것은 여기에서 순전히 '인식론적'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현재 무지 상태 혹은 불확실성을 표현한다. 

  하지만 개밥바라기별-샛별 사례에서, 어떤 것은 훨씬 더 강력하게 참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내가 가진 증거는 내가 저녁에 특정 별 혹은 특정 천체를 보고 그것을 '개밥바라기별'이라고 그리고 아침에 그리하고 그것을 '샛별'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안다. 확실히 한 사람이 저녁에 특정 위치의 특정 별을 봤을 그리고 그것을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불렀을 또한 아침에 특정 별을 봤고 그것을 '샛별'이라고 불렀을, 또한 그가 두 상이한 별들 혹은 두 상이한 천체들을 명명한다고 결론내렸을, 경험적 관찰을 통해 알아냈을 가능세계가 있다. 최소한 이 별들 혹은 천체들 중 하나는 샛별이 아니었고, 다른 식으로는 그런 식으로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참이다. 또한 그렇게 [104] 누군가가 그의 경험적 조사에 선행하여 가지고 있는 증거가 전제될 때,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정확히 같은 상황, 즉 질적으로 동일시되는 인식론적 상황에 놓일 수 있고, 두 천체가 동일시되는 일 없이 두 천체를 '개밥바라기별'과 '샛별'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래서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 일이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일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점에 관련하여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났을 지도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미리 알고 있던 한에서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로 다른 어떤 식으로도 드러났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확히, 말하자면 질적으로 같은 증거를 가지는 상황에 놓인 채로,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식으로 이 행성의 이름들로 사용되지 않고 다른 대상들의 이름들로 사용되었을 반사실적 세계에서, 누군가는 질적으로 동일한 증거를 가졌었을 수 있고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상이한 두 대상들을 명명했다고 결론내렸을 수 있었을 것이다.[각주:17]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당장 사용하듯 그 이름들을 사용하면서 선행하여 만일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면, 다른 그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그것들이 다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을 특정 천체의 이름으로 그리고 '샛별'을 특정 천체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런 천체들의 이름들로 사용한다. 만일, 실제로, 그것들이 같은 천체라면, 어떤 다른 가능세계에서든 우리는 그것들을 그 대상의 이름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어떤 가능세계에서든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은 참일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사항들이 참이다. 첫째,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지 못하고, 경험적으로 답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 답을 찾을 어떤 위치에도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그 이유는, 그 행성들이 같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와 질적으로 구별불가능한 증거를 우리가 가질 수 있을 것이고 하늘에서 두 행성의 위치로 두 이름의 지칭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5] 물론, 저녁에 저기에서 보인 그 별이 아침에 저기에서 보인 그 별이라는 것은 오직 우연적 참일 뿐인데, 샛별이 아침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던 가능세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연적 참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진술과 동일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진술은 당신이 개밥바라기별이 저녁에 저기에서 보이는 것이라는 점 혹은 샛별이 아침에 저기에서 보이는 것이라는 점이 필연적 참이었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식으로만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행성을 지적해내는 방식이 그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들 중 어느 쪽도 필연적 참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로써 특정 행성을 정체화하고 이름을 부여하는 우연한 표식들이다.

 

-蟲-

  1. D. Lewis, op. cit., pp. 114-15. [본문으로]
  2. 지시적 정의에 대비해 기술로 이름의 지칭을 결정하는 오히려 더 좋은 사례는 해왕성의 발견이다. 해왕성은 특정한 다른 행성들의 궤도에서 그러저러한 차이들을 야키한 행성으로서 가정되었다. 만일 르베리에가 그 행성이 보이기 전에 그 행성에 '해왕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기까지 했었더라면, 그는 '해왕성'의 지칭을 방금 언급된 기술로써 고정시켰을 것이다. 그 당시에 그는 망원경을 통해서조차 그 행성을 볼 수 없었다. 이 단계에서, '해왕성이 존재한다'라는 진술과 '그러저러한 다른 행성들의 궤도에 섭동을 유발시키는 어떤 한 행성이 그러저러한 위치에 존재한다'라는 진술 사이에 선험적인 물질적 등가가 성립하고, 또한 '만일 그러저러한 섭동들이 한 행성에 의해 야기된다면, 그 섭동들은 해왕성에 의해 야기된다'라는 진술도 선험적 참의 상태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술들은 필연적 참이 아니었을 것인데, '해왕성'이 특정 행성을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이름으로 도입되었기에 그러하다. 르베리에는 만일 해왕성이 100만년 더 먼저 그 궤도가 중단되었더라면, 그런 어떤 섭동도 전혀 유발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일부 다른 대상들이 그 자리에서 그 섭동들을 유발시켰을지도 몰랐다고까지도 문제없이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 한정 기술구에 관한 도넬란의 언급에 따르면 우리는, 일부 경우에, 대상에 대해 거짓으로 드러날지도 모르는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대상이 정체화될지도 모르고, 이름의 지칭이 고정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Phosphorus'의 지칭이 '샛별'로, 이후 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그것으로 결정된 경우가 명백한 사례이다. 그런 경우 지칭을 고정하는 기술은 명백히 어떤 의미로도 그 대상을 포착하는 것는 것으로 선험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데, 더욱 신중한 대체물이더라도 그러하다. 만일 그런 더욱 신중한 대체물이 가용하다면, 그것이 실제로 해당 문헌에서 의도된 의미에서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대체물이다. [본문으로]
  4. 그 명제들 중 일부는 인용부호의 사용과 관련된 세부사항들 같은 까다로운 문제들의 측면에서 엉성하게 진술되었다. (예를 들어, 명제 (5)와 (6)은 진술된 대로, 화자의 언어가 영어라고 전제한다.) 그 명제들의 요지는 명백하고, 어쨌든 그것들이 거짓이기에, 나는 그 명제들을 그대로 열거하는 데에 곤란해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5. 이름에 대한 기술다발이론은 '페아노가 수 이론에 대한 공리를 발견했다'라는 것이 오해가 아니라 사소한 참을 표현하도록 만들 것이고, 과학의 역사에 관한 여타 오해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일을 할 것이다. 그런 사례들을 인정한 일부 사람들은 내게 다발 이론을 충족시키는 동일한 고유명사들의 다른 용법들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물론 슈미트가 아니라 괴델을 지칭하고 있다고 주장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괴델은 그 증명의 이 단계에서 대각 논법에 의존하였다'라고 말한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아마도 '누가 되었든 그 정리를 증명한 자'를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유사하게, 만일 누군가가 '아리스토텔레스(혹은 셰익스피어)가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 저자가 누가 되었든지 간에 문제의 구절의 저자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나? 기술구들에 대한 도넬란의 용법에 유비하여, 이것은 고유명사의 "한정적" 용법이라 불릴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일이 그렇다면, 괴델-슈미트 이야기를 상정할 때,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했다'라는 문장은 거짓이지만, '괴델은 그 증명에서 대각 논법을 사용했다'라는 문장은 (최소한 어떤 맥락들에서는) 참이고, '괴델'이란 이름의 지칭은 애매하다. 일부 반례들이 남아있기에, [86] 기술다발이론은 일반적으로 여전히 거짓일 것이고, 그게 이 글에서 내 주요 논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은 사례들의 층위에 적용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어떤 애매성도 상정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때로 누군가가 '괴델'이란 이름을 사용할 때, 그의 주요 관심사는 누구든 여하간 그 정리를 증명한 사람이고, 또 아마도, 어떤 의미로는, 그가 그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은 참일 것이다. 나는 이 사례가 25쪽 3번 주석에서 스미스와 존의 사례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스미스를 존으로 착각한다면, 나는 스미스가 낙엽을 쓸고 있다고 말할 때 존을 (적절한 의미에서) 지칭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미스'를 애매한 방식으로, 때로는 스미스의 이름이고 또 때로는 존의 이름인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스미스의 이름으로 일의적으로 사용한다. 유사하게, 만일 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저러한 구절을 기록하였다고 잘못 생각한다면, 나는 아마도 때때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구절의 실제 저자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지도 모르는데, 설령 내가 그 이름을 사용하는 데에 아무런 애매성도 없을지라도 그럴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나는 해당 사실들에 대해 고지받는다면, 내 본래 진술과 내가 본래 그 이름을 사용한 방식을 철회할 것이다. 이 강연에서 '지칭물'이 이름(혹은 기술을 고유하게 충족시킴)에 의해 명명된 사물이란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거기에 아무런 혼동도 없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본문으로]
  6. 이름은 도넬란식의 의미에서 기술의 '지칭적' 용법과 결부된다고 누군가는 주장할지도 모른다는 제안이 온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괴델을 불완전성 정리의 저자로 정체화하더라도, 우리는 설령 그가 해당 정리를 증명한 적이 없다고 밝혀지더라도 그에 관해 말하고 있다. 명제 (2)-(6)은 그래서 거짓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이름은 기술을 축약시킬 것인데, 명명과정에서 기술의 역할이 프레게와 러셀이 상상한 것과는 급진적으로 다를지라도 그러하다. 내가 앞서 언급하였듯, 나는 지칭적 한정 기술이라는 개념에 대한 도넬란식의 정식화를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렇지만 도넬란의 그 분석이 수용된 경우라 하더라도, 작금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아야 하리란 점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지칭적 한정 기술, '샴페인을 마시는 남자' 같은 그런 기술은 화자가 그 기술이 그 기술의 대상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전형적으로 철회되기 때문이다. 만일 괴델식 사기가 폭로된다면, 괴델은 더 이상 '불완전성 정리의 저자'라 불리지 않을 테지만 그러나 여전히 '괴델'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 이름은 그러므로 기술의 축약이 아니다. [본문으로]
  7. Robert Nozick이 내게 지적해주었듯, 이름의 지칭에 대한 어떤 이론이든지, 지칭 개념과 독립적으로 상술된 이론이 사용될 수 있다면, 기술 이론은 그런 의미에서 사소하게 참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런 이론이 대상이 이름의 지칭물이 되는 조건들을 제시한다면, 그 대상은 물론 이러한 조건들을 고유하게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로 지칭 개념을 제거하는 어떤 이론도 제시할 생각이 없기에, 해당 기술 이론의 그런 어떤 사소한 충족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고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름의 지칭 개념을 사용하는 기술은 쉽사리 사용될 수 있지만 우리가 닐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서 보았듯 순환적이다.) 그렇지만 만일 그런 어떤 사소한 충족이든 사용가능했더라면, 내가 제시했던 논증들은 해당 기술이 프레게, 러셀, 설, 스트로슨 그리고 그 기술이론의 여타 옹호자들에 의해 가정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어야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문으로]
  8. Princeton University. [본문으로]
  9. Strawson, op. cit., p. 182 n. [본문으로]
  10. 이 사례의 본질적인 핵심들은 Richard Miller에 의해 제안되었다. [본문으로]
  11. 세례식의 지칭이 기술을 통해 고정되는 좋은 사례는 79쪽 주석 33에서 해왕성을 명명하는 사례이다. 명시적 규정에 의한 세례식 사례는 아마도 기술 개념 하에 그 또한 포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술 이론의 기본적인 적용가능성은 최초 세례식 사례에 대한 것이다. 기술들 또한 도입된 용어들이 통상 '이름들'로 불리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명명과 유사한 지시의 사례들에서 지칭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된다. '1m','섭씨 100도' 같은 용어들이 이미 사례로 제시된 적 있고, 다른 사례들도 이 강연에서 이후에 제시될 것이다. 두 가지 사항이 최초 세례식에서 기술을 통한 이름의 도입 사례와 관련하여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사용된 기술은 그 기술이 도입시키는 이름과 동의어가 아니라 그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통상의 기술 이론가들과 차이가 난다. 둘째, 최초 세례식의 대다수 사례는 본래 기술 이론에 영감을 준 사례들과 거리가 멀다. 통상 세례자는 어떤 의미에서 그가 명명하는 대상과 안면이 있고 그 대상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여 명명할 능력이 있다. 이제 기술 이론의 영감은 우리가 종종 오래 전에 죽어서 그와 마주친 적이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과거 유명인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우리의 관점에서 기술 이론에 의해서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사례들이다. [본문으로]
  12. 나는 그 땅돼지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 사람들 각자에게는, 나에게 그러하듯, 그 이름에 대한 나의 용법과 프랑스 황제 사이의 특정 종류의 인과적 혹은 역사적 연결이 있을 것이지만, 요청되는 유형의 연결은 있지 않을 것이다. [본문으로]
  13. 일단 우리가 이름의 지칭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기술이 그 이름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리고 나면, 기술이론은 명명이나 지칭 개념을 선전제한다고 간주될 수 있다. 사용되는 기술이 그 자체로 순환적인 방식으로 지칭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내가 만든 요구조건은 별개의 이야기이고 만일 기술이론이 어떤 가치라도 하여간 가지려면 결정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기술이론가들이 각 화자가 그의 지칭을 결정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최초 명명 행위에서 그가 제시하는 기술을 사용한다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명백히, 만일 그가 해당 결정을 통해, '"키케로"라는 말로 나는 내가 "키케로"라고 부르는 사람을 지칭할 것이다"라고 해서 '키케로'라는 이름을 도입한다면, 그는 이 의식을 통해 아무런 지칭도 전혀 결정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기술이론가들이 지칭 개념을 전부 다 제거하고 있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일부 사람들은 일부 명시적 규정 개념 또는 초기 지칭 개념이 그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요청된다는 점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러셀은 확실히 그 점을 알았다. [본문으로]

  14. Ruth Barcan Marcus, 'Modalities and Intensional Languages' (comments by W. V. Quine, plus discussion) Boston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volume I, Reidel, Dordrecht, Holland, 1963, pp. 77-116 . [본문으로]
  15. p. 101. [본문으로]
  16. p. 115. [본문으로]
  17. 세 번째 강연에 이러한 점에 대한 더 정교한 논의가 담겨 있다. 그 강연에서 그 지점의 특정 종류의 대응쌍이론과의 관계 또한 언급된다. [본문으로]

78a10-84b7. 유사성 논증. 죽음 뒤에 영혼이 흩어져 소멸한다는 반박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일을 겪기에 적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영혼이 둘 중 어느 쪽의 것으로 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구성된 것은 그 구성된 방식으로 분해되지만, 구성되지 않은 것은 그런 일을 겪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매번 다르게 절대로 같은 것들에 따라 있지는 않은 것들은 구성된 것들인 반면, 항상 똑같이 한결같게 있는 것들은 구성되지 않은 것들이라고 분류한다. 앞선 논의에서 그에 대해 설명(definition?)을 제시한 것들, 무엇으로 있는 그 각각은 항상 그 자체로 단일형상으로 있으면서 같은 것들에 따라 한결같게 있고 어떤 변경도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 여럿인 것들, 저것들과 동명인 것들의 경우에는 자체로도 서로와도 어떤 식으로도 같은 것들에 따른 상태에 있지 못하다. 그리고 변화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감각들로 지각할 수 있는 반면, 같은 것들에 따르는 상태에 있는 것들은 사유의 추론으로서만 파악할 수 있고, 후자는 불가시한 것들이다. 구성되고 변화하는 가시적인 것들과 구성되지 않고 같은 상태에 있으며 불가시적인 것들의 두 부류가 구분되었다. 이제 인간의 경우, 인간의 일부는 신체이고 다른 일부는 영혼이다. 그리하여 신체와 영혼이 각기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 중 어느 쪽 종류(형상)와 더욱 유사하고 더욱 동종적인지를 고찰하는 데에로 넘어간다. 신체는 가시적인 것과 더욱 유사하고 더욱 동종적이다. 반면 영혼은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고, 인간 본성상 비가시적인 것이며, 신체에 비해 영혼이 비가시적인 것에 더욱 유사한 것이다.[각주:1] 그런데 '영혼이' 감각을 통해 신체를 추가로 사용하여 검토할 경우 같은 상태에 있지 않은 것들에 이끌려 혼란에 빠진다. 반면 영혼 스스로 그 자체로 검토할 때에는 자신과 동류인 불사불변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그것과 동반하여 그것에 접해 있는 한에서 방황을 멈춘다. 이 상태가 지혜라 불린다. 또한 영혼과 신체가 같은 것 안에 있을 때 영혼이 주인이 되고 신체는 노예가 되도록 타고났으며 전자가 신적인 것에 유사하며 후자는 사멸하는 것과 유사하다. 영혼은 신적이고 불별하며 지성적이고 단일한 형상인 해체되지 않는 것, 항상 한결같이 자기 자신과 같은 것들에 따른 상태에 있는 것과 유사하고, 신체는 그렇지 못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영혼은 해체되지 않거나 그에 근사한 무언가로 있는 것이, 반면 신체는 빨리 해체되는 쪽이 어울린다. 그런데 신체도 꽤나 오래 해체되지 않고 남는다. 해체되는 일이 어울리는 신체조차 오래 남는데, 이로부터 벗어난 순정한 영혼이 그렇게 벗어나자마자 해체된다는 것은 영혼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특히 신체와 공유하지 않고 신체를 피해 생애동안 죽음을 연마한 영혼은 신체를 벗어나 순정한 것이 되어 신체에 속한 것들을 끌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신체를 벗어난 영혼은 자신과 유사한 것들이 있는 자신과 유사한 곳으로 떠나게 된다. 해체되기 마련인 신체조차 오래 남기도 하는 것처럼, 해체되지 않는 것과 유사한 영혼도 만일 신체와 교류하고 이를 보살피며 이에 오염된다면, 영혼 그 자체로서 순정한 상태로 신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영혼은 영혼이라 하더라도 가시적인 곳으로 이끌리게 된다. 신체에 얽매인 잘못된 삶의 대가로 이러한 영혼은 죽어서 가시적 영역을 방황하다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열망에 의해 다시 신체에 속박되고, 이전 생에 연마한 그 습성들에 속박된다. 육체에 묶여 죽음을 연마하지 않는 삶을 산 영혼은 그 삶의 대가로 죽어서는 방황하고, 욕망에 의해 다시 이전 삶에 어울리는 신체에 속박된다. 시민적 덕에 따른 삶을 살았던 영혼조차 철학하지 않고 죽음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신들의 부류에 가 닿지는 못하고 개미나 벌, 혹은 다시 인간의 부류로 돌아가게 된다. 반면 철학자는 영혼이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바라보며, 이 구속이 열망에 의한 것이고 열망이 클수록 구속이 강력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필연적이지 않은 한에서 지각들을 멀리하고 불신한다. 그리고 영혼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로 모이도록 하고, 영혼 자체가 지성적이고 불가시한 그 자체인 것을 검토할 때에는 영혼만을 신뢰하며 다른 것들을 신뢰하지 않고, 지각되는 가시적인 것을 검토할 때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이러한 해방에 맞서 반대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즐겁거나 괴롭게 되는 것, 그리고 이 강력한 경험으로 인해 그것이 참이라 생각하도록 강제되는 것이 특히 신체에 의해 영혼이 구속되도록 만든다. 이 구속의 악순환으로 인해 영혼은 점점 더 하데스로부터 멀어진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절제를 갖추고 용기를 내는 자들이 진정으로 정당하게 배움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철학은 영혼을 해방하고 나면 다시 신체에 속박되고 다시 해방해주는 일이 반복된다 생각하지 않고, 쾌락과 고통을 잦아들게 하여 인간적인 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영혼과 동류인 곳에 이르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양육을 통해 영혼은 신체로부터 벗어나면 해체되어 버릴 것이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혼은 애초에 해체되지 않는 것과 유사하며, 이 유사함을 높여 가는 과정이 철학이며, 제대로 철학한 영혼의 해방은 해체됨과 더욱 거리가 멀다.

 

-작성중- 

  1. 79b4-5. 정확히 둘 중 어느 종류에 속하거나 일치하는지를 검토하는 게 아니라 유사성(homoios)과 동종성(syggenēs)의 정도를 묻는다. 또한 가시와 비가시의 여부가 '인간 본성'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도 강조되고 있다. 이는 이어지는 논의에서, 영혼이 '단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것이자 불변하는 것이며 비가시적인 것이기만 하다면 설명하기 곤란한 측면들, 영혼이 육체에 영향을 받고 물들거나 물체적인 특징들을 지니게 되는 서술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본문으로]

[22] Lecture Ⅰ: January 20, 1970[각주:1] 

 

  나는 몇 사람 정도는 제목의 두 주제 사이의 어느 정도의 관계를 알아채 주길 바란다. 이 강연에서는 그런 관계들이 개진될 것이다. 오늘날 분석철학에서 지칭(reference)과 필연성을 포함한 도구 사용으로 인해, [23] 전통적으로 이런 주제들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되어 왔던, 심신문제나 소위 '동일성 논제'에 관한 논증들 같은 다른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이런 주제들에 관한 우리의 관점들은 정말로 광범위한 함축을 가진다. 이런 구도에서 오늘날 유물론은 종종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속성 동일성에서 필연적인 것이나 우연적인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나 그와 같은 문제들에 연루되곤 한다. 그래서,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자 할 철학자들에게 이런 개념들을 분명히 하는 일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 강연 중에 어쩌면 내가 심신문제에 관련해 좀 언급할 수도 있다.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체와 자연종에 관해서도 어느 시점에서는 논하고 싶다.

  내가 이런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식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꽤나 다를 것이다 (비록 그 방식도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고 쓰고 있던 것과 몇몇 접점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이런 비격식적인 강연에서 사람들을 놓치더라도, 용서해주길 바란다).[각주:2] 내가 가진 관점들 중 일부는 몇몇 사람들에게 명백히 틀렸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는 관점들이다. 내가 선호하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예시를 아마 강연에서 방어하진 않을 것이다. 도무지 아무도 설득시키지 못할 한 가지 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 사실은 공집합-공외연을 가지는-이라도 어떤 종류의 필연 문제도 아니라 [24] 우연적 사실의 문제로 공외연을 가지는 그런 특정 술어들이 있다는 것은 동시대 철학에서 흔한 주장이다. 난 그 점은 반박하지 않는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예시가 유니콘 사례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어떤 유니콘들도 전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유니콘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된다. 특정 상황에서 유니콘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의 사례이다. 내 식으로는 아마 어떤 유니콘도들도 있지 않을 것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바로 무슨 조건들 하에서 유니콘들이 있었을 것인지 우리가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참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설령 고고학자나 지리학자가 내일이라도 우리가 유니콘에 대한 설화를 통해 유니콘에 관하여 알고 있는 모든 점을 만족시키는 과거 동물들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일부 화석을 발견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게 유니콘이 있었을 것임을 보여주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게 이 특정 관점을 방어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놀랄 만한 관점의 일례이다. (나는 실제로 이 관점에 대해 두 회기에 걸쳐 여기에서 강연한 바 있다.) 그렇게, 내 의견들 중 일부는 어느 정도 놀라운 것들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놀랍지는 않을 일부 영역에서 시작해서 이 강연의 방법론과 문제들을 소개하기로 하자.

  한 짝의 주제들 중 첫 번째는 명명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름을 고유명사라는 의미로, 즉 한 개인이나 한 도시 혹은 한 나라 등의 이름이란 뜻으로 쓸 것이다. 현대 논리학자들이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s)에 매우 관심이 많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건 'φx인 x (the x such that φx)' 형식의 구들, '하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내(the man who corrupted Hadleyburg)' 같은 것이다. 이제, 만일 오직 단 한 사람만이 하들리버그를 타락시켰다면, 그 사람은 현대 논리학자가 이해하는 의미로 해당 기술(description)의 지시체(referent)이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한정기술구를 포함하지 않도록, 오직 일상언어에서 '고유명사'로 불릴 그런 것들만을 포함하게끔 그렇게 '이름'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름과 기술을 포괄하는 공통용어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시어(designator)'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25] 도넬런이 말했던 바,[각주:3] 특정 상황 하에서 개별 화자가 한정기술구를, 내가 방금 정의했던 의미에서, 그 기술구의 적절한 지칭체가 아니라, 그가 지적해내길 바라는 그리고 해당 기술구의 적절한 지칭체라고 그 화자가 생각하는, 하지만 사실은 적절한 지칭체가 아닌 그런 어떤 다른 것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을리란 점이 핵심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의 잔에 샴페인을 담고 저기에 있는 그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그가 실제로는 그저 잔에 물을 담고 있을 뿐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설령 그의 잔에 샴페인이라고는 전혀 없다 하더라도, 그리고 잔에 샴페인을 담아 가지고 있는 그 방 안의 또 다른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화자는 그가 잔에 샴페인을 담아 가지고 있던 자로 생각했던 그 사람을 지칭하기를 의도했거나(intended), 혹은 어쩌면, '지칭'의 일부 의미에서, 지칭을 했다(did).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계속 [26] '기술의 지칭체'라는 용어를 해당 한정 기술구 내의 조건들을 고유하게 충족시키는 대상이란 뜻으로 사용할 것이다. 이는 논리적 전통에서 사용되어 온 의미이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φx인 x' 형태의 기술을 지니고, φx인 그런 정확히 한 x가 있다면, 그것이 해당 기술구의 지칭체이다.

  이제, 이름과 기술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John Stuart Mill의 책 A System of Logic에는, 이름은 지시를 가지지만 함축을 가지지 않는다는 유명한 원리가 있다. 그의 예시 하나를 사용하자면, 우리가 영국의 특정한 곳을 기술하기 위해 'Dartmouth'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그 곳은 Dart의 입구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하기로 Dart(강)가 설령 그 경로를 바꿔서 다트머스가 더 이상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 장소를 적절하게 '다트머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설령 그 이름이 그곳은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한다는 점을 시사할지라도 그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밀의 말을 바꿔서, 아마 우리는 '다트머스' 같은 이름이 일부 사람들에게 (나에겐 아니다. 나는 절대로 이렇게 생각한 적 없다.) '다트머스'라고 불리는 어떤 장소든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한다는 '함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그 이름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적어도, '다트머스'라는 이름의 에는 그렇게 명명된 도심지가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한다는 것이 부분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다트머스가 다트 강의 입구에 놓여있지 않았다고 말한 누군가는 그 자신과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Fx인 x' 형식의 모든 구가 항상 영어에서 이름 보다는 기술로 사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나,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인의 것도 제국이지도 않은 신성로마제국에 관해 들어봤으리라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에겐 국제연합이 있다. 여기에서 이런 것들이 신성로마국제연합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 불릴 수 있기에, 이런 구들이 한정기술구가 아니라 이름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일부 용어의 경우, 사람들은 그게 이름인지 기술인지 여부에 관해 의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신' 같은 용어는 [27] 신을 고유의 신성한 존재로 묘사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신의 이름인가? 하지만 그런 경우로 우리가 반드시 골머리를 썩힐 필요는 없다. 

  이제 여기에서 나는 언어 내에서 확실히 형성되는 구분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근대 논리의 고전적 전통은 밀의 관점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프레게와 러셀 두 사람 모두, 매우 강력한 의미에서 밀이 틀렸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결론에 두 사람 각자 독립적으로 당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유명사는, 적절히 사용된다면, 단순히 축약되거나 가장된 한정기술구였다는 것이다. 프레게는 특별히 그런 기술이 이름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말했다.[각주:4] 

  이제 밀의 관점에 반대하고 프레게와 러셀에 의해 채택된 대안적 관점을 선호할 이유는 실제로 매우 강력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름이 가장된 기술구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관점에 의구심을 가질지 모른다 하더라도- 어떻게 프레게-러셀 관점 혹은 그 일부 적합한 변주가 사실에 부합하지 못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프레게와 러셀의 관점을 선호하도록 하는 결정적인 논증들의 일부 사례를 제시해 보겠다. 밀의 관점과 같은 어떤 관점에 대해서든 기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가정된 화자에 의해 사용된 이름의 지칭체가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8] 기술구 관점에 따르자면, 그 대답은 명백하다. 만일 'Joe Doakes'가 바로 '하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람'에 대한 생략이라면, 그 누가 되었든 하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자가 고유하게 '조 도크스'라는 이름의 지칭체이다. 그렇지만, 만일 해당 이름에 그런 기술적 내용이 있지 않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여간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인가? 그들은 아마 일부 사물들을 가리키는 입장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특정 이름들의 지칭들을 명시적으로 결정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러셀의 직접 접촉의 원리였다. 그는 소위 진정한 혹은 고유 명사가 그 원리를 충족시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일상적인 이름들은 월터 스콧 같이 우리가 가능한 방식으로 가리킬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지칭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들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해당 이름의 지칭체를 그런 속성들을 만족시키는 고유한 것으로 결정한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Napoleon'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나폴레옹은 19세기 초 프랑스의 황제였다, 그는 결국 워털루에서 패배했다' 같은 어떤 것을 답할 것이고, 그 이름의 지칭체를 결정하는 고유하게 정체성(동일성)을 규정하는 기술(a uniquely identifying description)을 제공하며 그리 할 것이다. 프레게와 러셀은 그리하여 여기에서 어떻게 지칭이 결정되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밀은 아무 설명도 내놓지 않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더 특수화된 문제들에 기반하긴 했지만 이 역시 해당 관점을 수용할 동기를 부여해주는 부수적인 논증들이 있다. 한 가지는 때로 우리가 같은 지칭체를 가지는 두 이름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을 동일성 진술로써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진부한 예시인 것 같지만) 당신은 저녁에 별을 보고 그 별이 'Hesperus(개밥바라기별)'라고 불린다. (우리가 그 별을 저녁에 그렇게 부른다. 맞나? 그 반대가 아니길 빈다.) 우리는 아침에 별을 보고 그것을 'Phosphorus(샛별)'이라 부른다. 자, 이제, 우리는 사실 그것이 별(항성)이 아니라 행성 금성이고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은 사실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29]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확실히 한 대상에 대해 그것이 그 자신과 동일하다고만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밝혀냈던 어떤 것이다. 매우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실제 내용이 곧 우리가 저녁에 봤던 별이 우리가 아침에 봤던 별이라는 사실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저녁에 봤던 것이 우리가 아침에 봤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문제의 동일성 진술의 실제 의미를 제공한다. 그리고 기술구로의 분석이 이 일을 수행한다. 

  또한 우리는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했던 적이 있는지 여부를 물을 때 도대체 이름이 어떤 지칭이든 지니기는 하는지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질문은 이 사물(사람)이 존재했는지 여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단 우리가 그 사물을 취하고 나면, 우리는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안다. 실제 질문은 어떤 것이든 우리가 그 이름과 결부시키는 속성들에 대해 답이 되는지 여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사례에서는, 누구든 한 사람의 그리스 철학자가 특정 작업들을, 혹은 적어도 그것들 중 적정 수의 작업들을 산출하였는지 여부이다.

  이런 논증들 전부에 답하는 것은 멋진 일일 것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일관하는 나의 방식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게다가, 나는 내게 이번 강연들을 통해 이 질문들 모두를 농의할 시간이 없으리란 걸 꽤나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와 러셀의 관점이 거짓이라는 점은 꽤나 확실하다고 생각한다.[각주:5] 

  [30] 많은 사람들이 프레게와 러셀의 이론이 거짓이라고 말해왔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그 이론의 철자는 폐기했지만 취지는 유지시켰는데, 말하자면, 개념 다발이란 관념을 사용해왔다.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프레게와 러셀에게 명확한 문제, 즉각적으로 마음에 떠오르는 문제는 이미 프레게 자신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진정으로 고유한 이름의 경우 그 의미에 관해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제안될 수 있다. 플라톤의 제자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교사. 이 의미를 수용하는 누구든지 해당 진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의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를 알렉산더 대왕의 스타게이로스인 교사로 변역한 사람과는 다른 식으로 해석할 것이다. 명명되는 것이 같은 것으로 유지되는 한, 이러한 의미에서의 변동들은 용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변동들은 실증과학의 체계에서 회피되어야 할 것이고 완전한 언어에서는 출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각주:6]

 

그래서 프레게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에는 모종의 느슨함이나 약함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한 가지 의미를 부여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단일 화자조차 '당신이 그 이름을 대체하고자 하는 기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상당히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사실, 그는 그에 관하여 여러가지 것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특수한 어떤 것이든 명백히 해당 대상의 우연적 속성을 표현한다 느낄 것이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렌산더 대왕을 가르쳤던 사람을 의미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교사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동어반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렇지 않다. 그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다는 사실, 우리가 그것이 거짓임을 발견할 수 있었을 어떤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의 교사로 있음은 해당 이름[의 의미]의 일부일 수 없다. 

  [31] 이 어려움을 피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우리가 개별(particular) 기술로 이름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 일상언어에서 약점이 아니다. 그건 괜찮다. 우리가 실제로 이름과 결부시키는 것은 기술구들의 일군(family)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시는 (내가 그걸 찾을 수 있다면), 가족 유사성이라는 관념이 강력한 힘을 가진 채로 도입된,  『철학 탐구』안에 있다.

이러한 예를 고려해 보자. 만일 누군가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을 의미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철수할 때 단일 지도자를 지니지 않았다-혹은: 그들의 지도자는 모세라고 불리지 않았다-혹은: 성격이 모세에 관해 전해주는 모든 일을 성취해낸 그 어떤 사람도 있었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모세에 관한 진술을 형성할 때,-나는 항상 그런 기술들 중 어떤 한 가지로 '모세'를 대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어쩌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라는 말로 나는 성경이 모세에 관해 전해주는 일을 했던 사람을 이해하거나, 어느 정도, 그 말을 잘 취급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로 말인가? 나는 얼마나 많이 내게 거짓으로 입증되어야만 나의 명제를 거짓으로서 포기할 것인지 결정하였나? '모세'라는 이름은 모든 가능한 경우에서 나에게 확정되고 애매함이 없는 용법을 갖춘 것인가?[각주:7]

 

이 관점에 따르면, 또한 그에 대한 표준구(locus classicus)는 고유명사에 관한 Searle의 논문인데,[각주:8] 이름의 지칭체는 단일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부 다발이나 일군의 기술들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일군을 충분히 혹은 그 대다수를 충족시키는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해당 이름의 지칭체이다. 나는 이후에 다시 이 관점에 대한 논의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일상언어의 분석으로서는 프레게와 러셀의 분석보다 상당히 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이 이론의 모든 장점을 유지하면서 단점들을 제거해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개념다발이론이나, 단일 기술을 요하는 이론조차 가능한 관점이 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하기로 하자. (이는 우리에게 내가 이 명명 이론을 실제로 고려하기 전에 또 다른 새로운 주제를 소개해줄 것이다.) [32] 그것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은 기술 다발 혹은 단일 기술이 실제로 이름의 뜻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월터 스콧'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러저러한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

  이제 또 다른 관점은 설령 해당 기술이 어떤 의미에서 이름의 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름의 지칭을 결정하는 것이고 '월터 스콧'이란 구가 '이러저러한 그런 사람'과, 혹은 심지어 그 기술 일군과도 (만일 어떤 것이 한 기술군과 동의어일 수 있다면) 동의어가 아니더라도, 그 일군 혹은 단일 기술은 누군가가 '월터 스콧'을 말할 때 지칭하고 있는 사람을 결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라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만일 우리가 월터 스콧에 관한 그의 믿음들을 들을 때 그 믿음들이 실제로는 Salvador Dali에 대해 훨씬 더 참일 듯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이론에 따라 이 이름의 지칭은 스콧이 아니라 달리일 것이다. 내가 생각에는, 명시적으로 내가 그리할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이름이 뜻을 가지는 일을 완전히 부정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이름의 지칭체가 결정되는지에 대해 이러한 구도를 사용하는 저자들이 있다. 핵심을 잘 짚은 사례는 Paul Ziff인데, 그는 매우 강조하며 말하길, 이름은 전혀 뜻을 가지지 않고, 이름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일부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어떻게 우리가 그 이름의 지칭이었던 바를 결정하는지에 관하여 말할 때, 그는 이 구도를 제시한다. 불행히도 나는 문제가 되는 구절을 지금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각주:9]

  [33] 이 이론을 뜻에 대한 이론으로 사용하는 것과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 사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이후에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이론의 매력 중 일부는 만일 그것이 이름의 뜻을 제공한다고 가정되지 않는다면 상실된다. 내가 방금 언급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들 중 일부는 맞지 않거나, 최소한 명백하게 맞지는 않을 것인데, 만일 기술이 이름의 뜻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라면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일 누군가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그러저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있지 않다'는 뜻으로 말하거나, 비트겐슈타인의 예시에서, '모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저러한 일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말했다면, 그것은 문제의 이론을 '모세'라는 이름의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뜻에 대한 이론으로 취하는 데에 의거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사실상 그렇게 의거한다).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지금 직접 드러나는 것 전부가 다른 식으로 뒤집힐지도 모른다. 만일 '모세'가 '그러저러한 일을 했던 사람'과 같은 뜻이라면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러저러한 일을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즉, 단 한 사람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모세'가 그 어떤 기술과도 동의어가 아니라면, 설령 그 지칭이 어떤 의미에서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할지라도, 해당 이름을 포함하는 진술은 일반적으로 그 이름을 기술로 대체함으로써 분석될 수 없다. 실질적으로는 그 기술을 포함하는 진술과 동격일 수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위에 언급된 단칭 현존 진술의 분석은, 이름의 뜻에 대한 일반 이론에 대해 독립적인 어떤 특별한 논증에 의해 확립되지 않는 한, 포기되어야 할 것이다. 동일성 진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경우든, 나는 '모세가 존재한다'가 그런 뜻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라 생각한다. [34] 그래서 우리가 그런 특별한 논증이 도출될 수 있는지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각주:10]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더 진입하기에 앞서, 이 강연의 방법론에 중요할 또 다른 구별에 대해 말해두고 싶다. 철학자들은 참의 다양한 범주들[에 관하여], '선험적', '분석적', '필연적'-때로는 '확실한'이란 표현까지 이 집단에 포함시키며 말해 왔다. (그리고, 물론, 최근 몇 년 간 이러한 관념들의 유의미함을 두고 주목할 만한 논쟁이 있어 왔다.) 그 용어들은 종종 이러한 개념들에 응답하는 것들이 있는지 여부(whether)가 관심가는 문제인 것처럼 사용되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들 모두를 같은 것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모두가 '선험적'과 '분석적' 사이의 구분을 만든 칸트를 (다소간) 기억한다. 그래서 이 구분은 여전히 구성되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의 논의에서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만일 누구라도 있다면, 선험적인 진술 개념과 필연적인 진술 개념을 구분한다. 나는 어느 수준에서든 '선험적' 그리고 '필연적'이란 용어를 여기에서 상호대체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선험적'과 '필연적' 같은 용어들의 전통적인 규정들이 무엇인지 고려해 보자. 우선 선험성이라는 관념은 인식론적 개념이다. 나는 칸트로부터 유래한 전통적 규정이 이런 어떤 것으로 전개되는 것이라 추정한다. 선험적 참은 어떤 경험으로부터든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장을 떠나기에 앞서 또 다른 문제를 도입하는데, '선험적'에 대한 규정 안에 또 다른 양상성이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어떤 경험으로부터든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독립적으로 아는 일이 가능하다는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어떤 경험으로부터든 독립적으로 알든 알지 못하든) 뜻이다. 누구에게 가능한가? 신에게? 화성인에게? [35] 혹은 그저 우리와 같은 정신을 갖춘 사람들에게? 이를 분명하게 밝히는 일은 여기에서 문제시되는 가능성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관련하여 모두 그 작업에 고유한 것들인 수 많은 문제들을 포함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선험적 참'이라는 구를 사용하기는 하되, 그 용어를 누군가가 어쨌든 사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특정 개인이나 인식자가 어떤 것을 선험적으로 알거나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선험적 증거에 기반하여 형성하는지 여부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일 듯하다.

  나는 선험성 관념과 관련해 야기될 문제들에 여기에서 더 이상 너무 깊게 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나는 일부 철학자들이 어떤 식으론가 이러한 규정 내의 그 양상성을 can으로부터 must로 변경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만일 어떤 것이 선험적 지식의 영역에 귀속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방식으로 경험적으로 알려질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착오이다. 어떤 것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지만 여전히 개별 사람들에게 경험에 기반하여 알려질 그런 진술들의 영역에 속할 수도 있다. 정말로 상식적인 예시는 이런 것이다. 계산기를 가지고 작업해 본 누구든 계산기가 이러저러한 수가 소수인지 여부에 답을 제공하리란 것을 안다. 그 누구도 해당 수가 소수라는 점을 계산하거나 증명한 적 없다. 하지만 그 계산기는 이 수가 소수라고 답을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만일 우리가 그 수는 소수라고 믿는다면 물리법칙, 계산기의 구조, 기타 등등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기반하여 그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순수하게 선험적 증거에 기반하여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만일 어떤 것이 되었든 좌우간 후험적인 것이 있다면) 후험적인 증거에 기반하여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필수적인 계산을 한 누군가에 의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알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두 번째 개념은 필연성 개념이다. 때로 이 개념은 인식론적 방식으로 사용되고 그래서 선험적이라는 것을 뜻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때로 그것은 물리적 방식에서 사람들이 물리적인 필연성과 논리적 필연성을 구별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식론이 아니라, [36] 일부 (내가 희망하기로) 비경멸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에 속하는 관념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참이었을지 혹은 거짓이었을지 묻는다. 자, 만일 어떤 것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명백하게 필연적으로 참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그것이 달리 있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세계는 세계가 있는 그 방식과 달리 있었으리라는 것은 가능한가? 만일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세계에 관한 이 사실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만일 저 답이 '네'라면, 세계에 관한 이 사실은 우연적인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 자체 내에서 또 그 자체에 대해 그 무엇에 대한 그 누구의 지식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모든 선험적인 것이 필연적이라거나 모든 필연적인 것이 선험적이라는 것은 확실히 철학적 논제이고, 명백한 정의상 등가의 문제가 아니다. 두 개념들 모두 모호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논제들은 두 가지 상이한 분야, 상이한 영역, 인식론적 영역과 형이상학적 영역을 다루고 있다. 이를 테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고려해 보자. 혹은 골드바흐 추측을 생각해 보자. 골드바흐 추측은 2보다 큰 짝수가 반드시 두 소수의 합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짐작건대 그것은 필연적이고, 만일 거짓이라면, 짐작건데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수학의 고전적 관점을 취하고 있고 수학적 실재성 내에서 그것은 참이거나 아니면 거짓이라고 상정한다. 

  만일 골드바흐 추측이 거짓이라면, p₁과 p₂가 모두 <n인 어떤 소수 p₁과 p₂에 대해서도, n= p₁+ p₂인 그런 2보다 큰 짝수 n이 있지 않다. n에 대한 이 사실은, 만일 참이라면, 직접 계산에 의해 검증될 수 있고, 그래서 만일 그 산술적 계산 결과들이 필연적이라면 또한 필연적이다. 다른 한편, 만일 그 추측이 참이라면, 2를 초과하는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다. 그래서 사실 그런 모든 짝수가 두 소수의 합이라 하더라도, 두 소수의 합이 아닌 그런 짝수가 있는 경우가 가능했을까? 그건 무슨 뜻일까? 그런 수는 4, 6, 8, 10, ... 중 하나여야 할 것이고, 우리가 골드바흐 추측이 참이라 가정하고 있으니, 전제에 의해, 이것들 각각이 다시금 직접 계산에 의해 [37] 두 소수의 합이라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 그래서 골드바흐 추측은 우연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일 수는 없다. 그 추측이 가지는 진리값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 추측은 필연에 의해 그 진리값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지금 당장 우리가 아는 한에서 그 문제가 둘 중 어느 한 쪽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결정해주는 수학적 증명의 부재 상황에서, 우리 중 누구도 이 문제에 관하여 둘 중 어느 방향으로든 그 어떤 선험적 지식이든 지니고 있지 않다. 우리는 골드바흐 추측이 참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로 지금 우리는 확실히 그 추측에 관하여 어떤 것이든 선험적으로 알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그것이 참인지 여부를 우리가 원칙으로는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수를 철저히 조사할 수 있는 무한한 정신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한 정신이 그 일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었을지 알지 못한다. 그 추측을 판가름해주는 아무런 수학적 증명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은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거나 할 것이다. 이 문제를 판가름해줄 수학적 증명이 있을지도 모른다. 힐베르트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직관적 증명이라는 관념이 단일 체계 내에서의 형식적 증명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 한 그 문제가 불가해한 것이라 생각해 오고 있다. 확실히 그 어떤 단일 형식 체계도 모든 수학적 문제를 판단해주지 않는다. 내가 괴델로부터 배운 바로는 그렇다. 어쨌든, 이것은 중요한 일이고,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설령 누군가가,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라는 것이 좌우간 참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에 관해 어떤 것이든 선험적인 것을 안다는 점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심지어 내게는 몇 가지 추가적인 철학적 논증 없이는 (그것은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이다) 누군들 그것에 관해 어떤 것이든 선험적인 것을 알 수 있으리란(could) 것조차 따라나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가 말했던 바,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몇몇 다른 양상을 포함한다. 우리는 설령 단 한 사람도, 어쩌면 미래에 걸쳐서까지도, 골드바흐 추측이 옳은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하고 알게 되지도 못한다 하더라도, 그 선험적 질문에 답하는 데에 [38] 활용될 수 있을 방법이 원칙적으로는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언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진술들에 적용되는 '필연'과 '선험'이란 용어는 명백한 동의어가 아니다.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어쩌면 심지어 동일시하는 철학적 논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용어가 명백히 상호교환가능하다는 점은 단순히 관찰결과가 아니라 논증이 요청된다. (나는 이후 그 둘이 사실 외연조차 동연이지 않다고, 필연적인 후험적 참들과 가능적으로 우연한 선험적 참들 양쪽 모두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것들이 이하의 이유들에서 같은 뜻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다고 본다. 

  첫째로, 만일 어떤 것이 마침 현실세계에서 참일 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세계에서 또한 참이라면, 물론 우리의 머릿속 그 모든 가능세계를 관통하여, 우리는 그 진술이 필연적이라면, 그 어떤 것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충분한 노력을 기울여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 점을 선험적으로 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일은 그리 명백하게 실현가능한 것이 전혀 아니다. 

  둘째로, 그 반대로, 나는 만일 어떤 것이 선험적으로 알려진다면 그것은 필연적이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세계를 관찰하는 일 없이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왔다고 추정한다. 만일 그것이 현실세계의 우연적 특징 일부에 의존했더라면,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관찰 없이 알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그 현실세계는 그것이 거짓이었을 가능한 세계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는 관찰 없이 현실세계에 관해 알 방법으로서 모든 가능세계에 관하여 같은 것을 알 방법이 아닐 방법은 있을 수 없다는 논제에 달려있다. 이는 인식론과 지식의 본성에 대한 문제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물론 그 문제는 진술된 대로 지극히 모호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사소한 것도 아니다. 필연적인데 선험적이지 않은 혹은 선험적인데 필연적이지 않은 것으로 내세워지는 어떤 것의 여느 특수한 사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개념들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어떤 것이 우리가 오직 후험적으로만 알 수 있을 어떤 것이라는 데에 기반하여, 그것이 필연적 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이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39] 단지 어떤 것이 어떤 의미에서 선험적으로 알려진다는 이유만으로, 알려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점이 사소해지지는 않는다. 

  철학에서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는 '분석적'이라는 것이다. 이 강연에서 이 용어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더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분석적 진술의 흔한 예시는 '총각은 미혼이다' 같은 것이다. 칸트는 "황금은 황색 금속이다"라는 것을 예시로 내놓는데, 그건 내가 보기엔 평범하지 않은 사례인 바, 나는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분석적 진술은 어떤 의미에서 그 의미 덕분에 참이고 그 의미 덕분에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라고 규정하는 문제로 치도록 하자. 분석적으로 참인 어떤 것은 필연적이고 또한 선험적일 것이다. (이는 규정적인 종류의 진술이다.)

  내가 언급한 또 다른 범주는 확실성의 범주였다. 그 어떤 확실성이 되었든지 간에, 필연적인 것이 확실하다는 점은 분명 병백하게 사실이지 않다. 확실성은 또 다른 인식론적 관념이다. 어떤 것이 상당히 확실한 것이 아니고도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거나 최소한 합리적으로 믿어질 수 있다. 당신은 수학 책에서 증명을 읽어본 적이 있다. 당신이 그 증명을 정확한 것이라 생각할지라도, 당신은 착오를 저질렀을 수 있다. 당신은 종종 이런 종류의 착오를 범한다. 당신은 아마 계산을 잘못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비적 방식에서 다루고자 하는 또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일부 철학자들은 본질주의, de re(실재) 양상 믿음과 필연성에 대한 단순 지지, de dicto(언표/명제적) 양상 믿음 사이를 구분한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필연성 개념을 제시해 보자.[각주:11] [40] 더 곤란한 것은, 막대한 추가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우리가 어느 특정한 것에 대해서든 그것이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 속성들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애초에 필연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 사이의 구분을 마련할 수나 있는지 여부이다.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이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술이나 일련의 상황(a state of affairs)뿐이다. 개별자(a particular)가 필연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특정한 속성을 지니는지 여부는 그것이 기술되는 방식에 달려있다. 이는 아마 우리가 개별 사물을 지칭하는 방식이 기술에 의한 것이라는 관점에 밀접하게 관련된다. 콰인의 유명한 예는 무엇인가? 우리가 수 9를 고려한다면, 9는 필연적 홀이라는 속성을 지니는가? 그 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홀수인 것으로 파악되었나? 아홉이 홀이라는 것은 확실히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고, 말하자면, 그것은 달리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9는 (태양계)행성의 수로도 못지 않게 같은 정도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여덟 행성들이 있었더라면, 행성의 그 수는 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든다. 닉슨이 선거에서 승리했던 것은 필연이었나 우연이었나? (어떤 불가항력의 과정들에 

대한 모종의 관점을 가지지 않는 한, 그건 우연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그를 '닉슨'이라 지칭함에 관계해서만 닉슨의 우연적 속성이다 ('닉슨'이 '그러저러한 시점에 선거에서 승리했던 사람'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닉슨을 '1968년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으로 지시한다면, 물론 1968년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이 1968년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필연적인 참일 것이다. 유사하게, 대상이 모든 가능 세계에서 같은 속성을 지니는지 여부는 [41] 그저 대상 자체에 달린 일이 아니라, 그 대상이 어떻게 기술되는지에 달려 있는 일이다. 그것이 주장되는 내용이다. 

  필연 개념이 그 이면에 일종의 직관을 지닐지라도 (우리는 어떤 것들은 달리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또 여타의 것들은 달리 있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개념 [필연적인 속성들과 우연적 속성들 사이의 구분이라는 개념]은 어떤 불량한 철학자에 의해 구성된 원칙일 뿐이라는 점이 문헌상으로 시사되는 일조차 있다. 그는 (내 짐작으로는)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이다. 나는 일부 철학자들이 이를 깨닫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쨌든 이 발상 [한 속성이 한 대상에게 본질적인 것이라거나 우발적인 것이라고 그 대상에 대한 기술과 독립적으로 유의미하게 주장될 수 있다는]이 아무런 직관적 내용도 지니지 않는, 그 일상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관념이라는 것은 진실과는 아주 많이 거리가 멀다. 누군가가 닉슨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패배했을 수도 있는 그 사내이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또 다른 누군가는 '아니다, 당신이 "닉슨"이라고 그 사람을 기술한다면, 그는 패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히, 그를 승자로 기술하면서는, 그가 패배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제 여기에서 철학자인 사람, 비직관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보기에는 두 번째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두 번째 사람은 철학적 이론을 견지하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은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 선거의 승자는 다른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 실제 승자는, 그 선거 과정이 달랐더라면, 패자였을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가 승자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아무런 선거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승자"나 "패자" 같은 용어는 모든 가능세계 내에서 각기 일관된 대상들을 지시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닉슨"이란 용어는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이다.' 당신이 닉슨이 선거에서 이겼다는 것이 필연적인지 우연적인지 물을 경우, 당신은 모종의 반사실적 상황에서, 이 사람이 실제로 그 선거에 패배했을 것인지 직관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필연적 혹은 우연적 속성이란 개념이 (사소하지 않은 필연적 속성들이 있는지 여부는 잊고 그 관념의 유의미함만 고려하자[각주:12]) [42] 아무런 직관적 내용도 지니지 않은 한 철학자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틀렸다. 물론, 일부 철학자들은 어떤 것이 직관적 내용을 지닌다는 것이 그것을 선호할 증거로는 전혀 결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은 어떤 것을 선호하는 데에 그 점이 매우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실제로, 어떤 점에서는, 누군가가 무언가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더욱 결정적인 증거가, 궁극적으로 말해서,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우연적 속성이란 개념이 비직관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역전된 직관을 지닌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였는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동기들은 여럿 있지만, 한 가지는 이런 것이다. 소위 본질적 속성들에 대한 질문이 '가능세계들을 관통하는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물음과 등가이리라 추정하는 것(그리고 등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닉슨이라는 사람을 상정하고 현실세계에서 닉슨이 가지는 모든 속성들을 가진 아무도 있지 않은 또 다른 가능세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다른 사람들 중, 만일 누구라도 있다면, 누가 닉슨인가? 물론 당신은 이 지점에서 동일성에 대한 모종의 기준을 제시해야만 한다. 만일 당신이 동일성의 기준을 갖고 있다면, 나머지 가능세계들에서 닉슨인 사람을 찾아볼 것이다. 그러면 그 다른 가능 세계에서 닉슨이 특정 속성들을 지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잘 정의된다. 그것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인지, 혹은 닉슨이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한 일부 가능세계들이 있는지 여부가 그런 개념들로 잘 정의된다는 것 역시 가정된다. 하지만, 그런 동일성 기준을 제공하는 문제는 매우 어렵다고 말해진다. [43] 수의 경우 때로는 더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조차 상당히 임의적이라는 점이 주장된다). 예를 들어, 수열에서의 위치가 수 9를 9이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또 다른 세계에서) 행성의 수가 8이었을 경우, 그 행성의 수는 실제 그 수와는 다른 수였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고, 그것은 물론 참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 수가 이 세계에서 우리의 수 9와 동일시되는 것이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유형의 대상들의 경우, 사람들, 물질적 대상들, 그런 사물들의 경우, 가능세계들을 교차하는 정체성을 위한 일련의 필요충분조건을 누군가가 제시한 바 있는가?

  실제로, 어느 경우든 정체성에 대한 선결문제를 요구하지 않는 적절한 필요충분조건들은 지극히 드물다. 수학이 가능 세계 내에서 참을 말하는 정체성 필요충분조건이 제시되는 내가 실제로 아는 유일한 경우이다. 시간의 경과 속에서 물질적 대상들 또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한 그러한 조건들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문제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잊기로 하자. 더욱 결정적인 반박으로 보이는 것은 이것이 가능세계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잘못된 방식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이 구도에서 가능세계를 마치 외국 같은 것마냥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관찰자 입장에서 고찰한다. 닉슨은 다른 나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성질들만을 제공받는다. 누군가는 그의 모든 성질들을 관찰할 수 있지만, 물론, 어떤 이가 닉슨이라는 것을 관찰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무언가가 붉은(혹은 푸르든 노랗든) 머리카락을 가진다는 것을 관찰하지만 어떤 것이 닉슨인지 여부를 관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우리가 이전에 봤던 것과 똑같은 것을 마주하는지 속성들을 통해 설명할 방법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다른 가능세계들 중 하나와 교차할 때 누가 닉슨이었는지를 말할 방법을 지니고 있었어야 했다. 

  일부 논리학자들은 양상 논리에 대한 그들의 형식적 취급 내에서 이 그림을 지지할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사례는 아마 나 자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관적으로 말해서, [44] 그것은 내게 가능세계들에 관한 올바른 사유방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능세계는 우리가 교차할 혹은 망원경으로 바라볼 먼 나라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또 다른 가능세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설령 우리가 빛보다 빠르게 여행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 닿지 못할 것이다. 가능세계는 우리가 그 세계에 결부시키는 기술적 조건들에 의해 주어진다. 우리가 '어떤 다른 가능세계에서 내가 이 강연을 오늘 진행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단지 내가 이 강연을 열지 않기로 결정한 혹은 다른 어떤 날에 열기로 결정한 상황을 상상한다. 물론, 우리는 참이거나 거짓인 모든 것을 상상하진 않지만, 단지 내 강연 진행에 관련되어 그런 것들만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해당 세계의 기술 총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부분을 제외하고서 실제로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가능세계'이다. 왜 그 가능세계가 닉슨을 포함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세계에서 닉슨이 해당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능세계에 대한 기술의 일부일 수 없는가? 그것은 그런 세계가 가능한 것인지 여부를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견 그 세계는 명백히 가능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일단 알고 나면, 이 가능세계에서 해당 선거에 패배했을 혹은 패배한 사람이 닉슨이라는 사실을 제시받는데, 그것이 그 세계에 대한 기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가능세계들'은 규정되는 것이지, 강력한 망원경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특정한 반사실적 상황에서 닉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가 바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규정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물론, 누군가가 모든 가능세계는 순전히 성질에 관련된 방식에서 기술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한다면, 우리는 '닉슨이 그 선거에서 졌다고 가정해 보라'라고 말할 수 없고, 그 대신, 'Checkers라고 명명된 개를 가진, David Frye 닮은꼴인 한 사람이 특정 가능세계 내에 있고 선거에서 패배했다' 같은 어떤 말을 해야만 한다. 자, 그는 닉슨과 동일시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닉슨을 모사하였나? 사물을 고찰하는 이런 방식의 매우 명백하고도 노골적인 사례는 [45] 데이비드 루이스의 상대역 이론(counterpart theory)이지만,[각주:13] 양화된 양상에 대한 문헌에는 그런 방식이 차고 넘친다.[각주:14] 우리가 왜 그런 요구를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이 사람이 졌다고 가정해 보라'라고 말할 뿐이다. [46] 그 가능세계가 이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에서, 그가 패배했다는 것이 전제된다. 가능성에 관한 어떤 직관이 생길지에 대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점 (이 사람의 선거 패배)의 가능성에 관한 그런 직관을 지닌다면, 그 직관은 그 점에 대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 가능성이 그러저러한 것을 고찰하거나 그러저러한 정치적 관점을 견지하거나 혹은 달리 질적으로 기술되는, 패배한 사람의 가능성과 동일시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사람을 지적할 수 있고, 사건들이 달랐다면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물을 수 있다.

  '이것이 참이라 가정해 보자. 그것은 결국 같은 일로 귀결될 것인데, 왜냐하면 닉슨이 특정 속성들, 그가 실제로 지니고 있는 것과는 다른 속성들을 지녔을 수 있었는지 여부는 가능세계를 교차하는 정체성 기준이 닉슨은 이러한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포함하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과 등가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같은 일로 귀결되지는 않는데, 통세계 정체성 기준이라는 일상적 관념은 우리가 누군가가 닉슨이라는 것에 대한 순전히 질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닉슨이 특정 속성을 지니지 않는 가능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면, 그 속성은 누군가가 닉슨으로 있음의 필요조건이다. 혹은 그가 그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 닉슨의 필연적 속성이다. 예를 들어, 닉슨이 실제로 인간으로 있다고 상정하면서, 우리는 그가 말하자면 무생물 대상이었을 가능한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니었기란 가능하지조차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튼 닉슨이 존재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가 인간이거나 어쨌든 무생물 대상은 아니라는 것은 그에 관해 필연적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상술할 수 있는 닉슨다움을 위한 순전히 질적인 충분조건이 있다는 어떤 요구사항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이 있어야 할까? 아마도 있어야 하리란 몇몇 논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충분조건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개입하지 않고 필요조건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을 고려할 수 있다. [47] 게다가, 설령 닉슨이기 위한 일련의 순전히 질적인 필요충분조건이 있었다 할지라도, 내가 옹호하는 관점은 우리가 이러한 조건들을 닉슨이 선거에 승리하였을지 여부를 물을 수 있기 전에 발견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조건들로 해당 질문을 재진술하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닉슨을 고려할 수 있고 에게 다양한 제반사항이 달랐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물을 수 있다. 그래서 그 두 관점들, 사물들을 고찰하는 두 가지 방식들은 차이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질문, 닉슨이 인간이지 않을 수 있었을지 여부는 제기된 질문이 인식론적이지 않은 명백한 경우라는 점을 주의하자. 닉슨이 실제로 자동기계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닉슨이 인간인지 자동기계인지 여부에 증거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지식에 관한 질문이다. 닉슨이 인간이지 않았을 것인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가 그 한 사람이라는 점을 전제하면, 후험적으로든 선험적으로든 지식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설령 이러저러한 사물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달리 무엇이 참이었을지에 관한 질문이다.

  이 책상은 분자들로 구성된다.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일까? 확실히 책상이 분자들(또는 원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과학적 발견의 위대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인가가 바로 이 대상이자 분자들로 구성되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확실히 그에 대한 답이 '아니오'여야만 한다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어쨌든, 어떤 환경 하에서 당신이 바로 이 대상을 가지고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낼 것인지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실제 세계에서 실제로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여부와 우리가 이를 어떻게 아는지는 꽤나 상이한 질문이다. (나는 본질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이후에 더 상세하게 고찰할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내가 논하고 있는 이름들에 대한 이론을 논의하기 위한 방법론에 필요한 어떤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가능세계 교차적 정체성'이라는, 통상적으로 그리고 내 생각에는 어느 정도 오독되어 불리는[각주:15][48] 그 개념을, 지금 내가 만들고자 하는 구별을 명확히 하기 위해 필요로 한다. 9가 7보다 더 크다는 것이 필연적인지 여부를 묻는 것과 행성의 수가 7보다 더 크다는 것이 필연적인지를 묻는 것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한편의 질문이 다른 질문보다 본질에 관하여 뭐라도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가? 이에 대한 답은 직관적으로 '자, 봐라, 행성의 수는 실제 수와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9는 실제로 그것인 바의 것과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꽤나 전문용어처럼 보이는 것을 사용해 보자. 만일 어떤 것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면 그것을 고정 지시자라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비고정 혹은 우연적 지시자라고 부르기로 하자. 물론 우리는 대상들이 모든 가능세계들에 존재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확실히 닉슨은 그의 부모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통상의 경우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한 대상에 본질로서 한 속성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통상적으로 그 대상이 존재했을 어떤 경우에서든 그 대상에 대해 그 속성이 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필연적 존재에 대한 고정 지시자는 강력하게 고정된 것이라 불릴 수 있다.

  이 강연에서 내가 주장할 직관적 주장들 중 하나는 이름이 고정 지시자라는 것이다. 확실히 이름은 앞서 언급된 직관적 시험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1970년 미합중국 대통령과는 다른 누군가가 1970년 미합중국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험프리가 그랬다 하더라도), 닉슨과 다른 그 누구 단 한 사람도 닉슨이었을 리 없다. 같은 방식으로, [49] 지시자는 고정적으로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데 만일 그 지시자가 그 대상이 존재하는 어디에서든 그 대상을 지시한다면 그러하다. 덧붙여, 만일 그 대상이 필연적 존재자라면, 그 지시자는 강력하게 고정된 것이라 불릴 수 있다. 예를 들어, '1970년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특정한 사람, 닉슨을 지시한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예를 들어 험프리가) 1970년 그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르고, 닉슨은 대통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지시자는 고정적이지 않다. 

  이 강연에서 나는 직관적으로 고유명사가 고정지시자라고 주장할 것인데, 그 사람(닉슨)이 대통령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가 닉슨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닉슨'이라 불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고정 지시자 개념을 말이 되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보다 앞서 '통세계 정체성의 기준'을 말이 되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본말을 정확히 전도시켰다. 우리가 (고정적으로) 닉슨을 지칭할 수 있고 (특정 환경 하에서)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에, '통세계 정체화'가 그런 경우에 문제가 없는 것이다.[각주:16] 반사실적 상황에 대한 순전히 질적인 기술을 요구하는 경향은 다양한 원천을 지닌다. 아마도 그 하나는 인식론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혼동, 선험성과 필연성 사이에서의 그러한 혼동이다. 만일 누군가가 필연성을 선험성과 동일시한다면, 그리고 대상들이 속성들을 고유하게 정체화함으로써 명명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그 속성들이 선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그 대상을 모든 가능세계에서 정체화하는 데에, 어떤 대상이 닉슨인지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에 맞서, 나는 다시 반복한다. (1) 일반적으로, 반사실적 상황에 관한 것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규정된다. (2) 가능세계는 [50] 마치 우리가 망원경을 통해 관찰하는 것처럼 순전히 질적으로 제시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반사실적 세계에서 한 대상이 지니는 속성들이 실제 세계에서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속성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간략하게 보게 될 것이다.[각주:17]

  '통세계 정체화'의 '문제'는 말이 되는가? 그것은 단순히 사이비-문제인가? 그에 대해 이하의 내용은 이야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이 독일과 1943년에 싸웠다는 진술은 아마도 개별자들에 관한 어떤 진술로도 환원될 수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그 진술은 개인들에 관한, 역사에 걸친 그들의 행동에 관한 모든 사실의 총합을 '넘어서는' 사실은 아니다. 국가에 관한 사실들이 개인들에 관한 사실들 '이상의'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는 세계에 대한 기술로서 개인들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거론하지만 국가에 관한 사실들을 생략하는 기술이, 그로부터 국가에 관한 사실들이 도출되는 그러한 세계에 관한 완전한 기술일 수 있다는 관찰로 표현될 수 있다. 아마도 그와 유사하게 물질적 대상들에 관한 사실들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분자들에 관한 사실들 '이상의' 사실들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실현된 가능한 상황에 대한 기술이 사람들을 가지고 주어진다면, 그 상황에서 영국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여부, 또는 그 상황에 존재할 특정 국가(말하자면 존이 살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는)가 영국인지 여부를 물을 것이다. 비슷하게, 책상 T의 분자들에 대한 역사상의 특정한 반사실적 우여곡절이 주어지면,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T가 존재할지 여부를, 혹은 그 상황에서 책상을 구성할 분자들의 특정 묶음이 바로 그 똑같은 책상 T를 구성하는지 여부를 물을지도 모른다. 각각의 경우, 특정 개별자들에 대한 가능세계를 교차하는 정체성 기준을 다른 더욱 '기초적인' 개별자들에 대한 가능세계교차정체성기준을 통해 추구한다. 만일 국가(혹은 부족)에 관한 진술이 다른 더 '기초적인' 구성요소들에 관한 진술로 환원가능하지 않다면, 만일 그것들 사이의 관계에 '열린 결말' 같은 것이 있다면, 우리는 확고하고 엄격한 정체성 기준을 제시하길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5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사례에서 우리는 분자들의 특정 묶음이 여전히 T를 구성할지 여부를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몇몇 경우 그 대답이 애매할지라도 말이다. 시간에 따른 정체성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언급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통상적으로 '복합적인' 개별자의 확정성, 정체성에 관해 더 '기초적인' 개별자를 통해 관계한다. (예를 들어, 책상의 다양한 부분들이 교체된다면, 그 책상은 똑같은 대상인가?[각주:18])

  그렇지만 '통세계 정체화'라는 그런 개념은 일상적 정체화와 주목할 만한 차이를 가진다. 첫째, 우리가 분자들을 통해 세계를 기술하고자 시도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더욱 총체적인 개체들로 기술하는 데에는 아무런 부적절함이 없다. 이 책상이 다른 방에 놓였을지도 모른다는 진술은 그 자체로 완벽히 적절하다. 우리가 그 책상의 분자들을 통한, 혹은 더 총체적인 부분들을 통한 기술을 사용할지 몰라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개별자들이 '궁극적,' '기초적' 개별자들이라고 가정하지 않는 한, 어떤 유형의 기술도 특권적 지위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닉슨이 선거에 졌을 수도 있는지 여부를 추가적인 세부사항 없이 물을 수 있고, 통상 아무런 추가적인 세부사항도 요구되지 않는다. 둘째, 어떤 종류의 분자 총체가 이 책상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52] 필요충분조건이 가능하다는 것은 전제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내가 방금 언급한 바 있다. 셋째, 그 시범적인 개념은 개별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기준을 다른 개별자들을 통해서 다루며, 성질들을 통해 취급하지 않는다. 나는 내 앞의 책상을 지칭할 수 있고, 특정 환경 하에서 그 책상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물을 수 있다. 또한 나는 그 분자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 만일 내가 각각의 반사실적 상황을 순전히 질적으로 기술하는 일이 요구된다면, 나는 오직 이러저러한 색상이나 기타 그러한 것들을 가진 책상(a table)이 특정 속성들을 지녔을지 여부만을 물을 수 있다. 문제의 그 책상이 이 책상(this table), 책상 T였을지 여부는 고려되지 않는데, 성질들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대상들에 대한 모든 지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종종, 만일 반사실적 상황이 닉슨에게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으로서 기술된다면, 그리고 만일 그러한 기술이 순전히 질적인 기술로 환원가능하다는 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신비의 '순전한 개별자,' 성질들의 기저에 놓이는 무속성의 기체가 가정된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사정은 그렇지 않다. 나는 닉슨이 그저 공화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 뒤에 숨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닉슨이 공화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그가 민주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속성들 중 일부가 본질적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제외하고, 닉슨이 지닐지도 모를 다른 어떤 속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부정하는 것은 개별자가 '성질들의 다발'에 다름 아니라는 것, 그것이 무슨 의미가 되었든 그저 그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일 성질이 추상적 대상이라면, 성질의 다발은 더 고차원의 추상 대상이고, 개별자가 아니다. 철학자들은 거짓 역설을 통해 정반대 관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이러한 대상들은 성질의 다발 배후에 있는가, 아니면 그 대상은 그 다발에 다름 아닌가? 어느 쪽도 아니다. 이 책상은 목재로 된 것이고, 갈색이며, 방 안에 있고, 그 외에 그러저러하다. 그 책상은 이 모든 속성들을 지니고 속성들 없이 그 속성들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하여 그 책상이 그것의 속성들의 집합이나 '다발'과 동일시되어야 할 것도 아니고, 그 책상의 본질적 속성들의 하위집합과 동일시되어야 할 것도 아니다. 어떻게 내가 이 책상을 그 속성들을 통하지 않고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정체화할 수 있는지 묻지 말라. 나는 내 손에 그 책상을 잡고 있고, 그것을 지적할수 있으며, 그것이 다른 방에 있었을지도 모르는지 여부를 물을 때, [53] 나는 정의상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나는 망원경을 통해 그것을 본 이후에 그것을 정체화해야 하는 게 아니다. 만일 내가 그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면, 내가 우리 손이 녹색으로 채색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때, 내가 녹색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규정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대상의 일부 속성들이 그 대상에, 그 대상이 그 속성들을 지니지 않았을 수 없으리란 점에서, 본질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속성들은 그 대상을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런 정체화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의 본질적 속성들이 실제세계에서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될 필요도 없는데, 더욱이 그 대상이 속성들을 수단으로 하여 실제세계에서 정체화된다면 그러하다 (지금까지 나는 그 문제를 열어두었다).

  그래서, 통세계 정체화에 대한 질문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데, 대상의 구성 부분들에 관한 질문들을 통하여 정체성에 관해 묻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성질들이 아니고, 문제가 되는 것은 주어진 대상과 유사한 대상이 아니다. 이론가들은 종종 우리가 가능세계를 교차하여 대상을 가장 중요한 측면들에서 주어진 대상과 유사한 대상으로 정체화한다고 말해 왔다. 반대로, 닉슨은, 그가 다른 식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었더라면, 설령 사사로이 급진적 의견을 품고 있었더라도, 마치 정치를 역병마냥 피했을지도 모른다. 핵심은, 우리가 대상에 관한 질문을 그 부분들에 관한 질문으로 교체할 수 있을 경우조차,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대상을 지칭할 수 있고 그것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지 물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현실이라 가정되는, 그 세계의 대상들이 아니라 성질들이 우리에게 인지가능한 것들인 그런) 세계들로 시작하지 않고, 그리고서 통세계 정체화의 기준에 관하여 묻는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그 대상들로 시작하고, 실제 세계에서 정체화할 수 있다. 우리는 그래서 특정한 것들이 그 대상들에 대해 참이었을지 여부를 물을 수 있다.

  앞서 나는 기술에 의해 이름이 도입된다는 프레게-러셀 관점이 이름의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서든 (프레게와 러셀은 이런 식으로 그 관점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54] 단지 그 이름의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서든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통상 '고유명사'라고 불릴 것을 포함하지 않고 이를 묘사할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가 섭씨 100도는 해수면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는 온도라고 규정한다 가정해 보자. 해수면에서 압력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완벽하게 정확하진 않다. 물론, 역사적으로, 더욱 정확한 정의가 이후에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의였다고 가정해 보자. 학술자료 내에서의 또 다른 종류의 사례는 1m란 S가 파리에 있는 특정 막대 혹은 작대기인 경우 S의 길이라는 것이다. (통상 이러한 정의들에 관해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의 길이'를 '조작적' 개념으로 만들고자 시도한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관해 매우 혼란스러운 어떤 점을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에 대해 누군가가 그것이 1m 길이라고도 그것이 1m 길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고, 그것이 파리에 있는 표준 meter이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어떤 비범한 속성을 그것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meter법을 가지고 측정을 하는 언어게임에서 그것의 고유한 역할을 언급하는 것일 뿐이다.'[각주:19] 실제로 이건 어떤 막대가 가지기엔 무척이나 '비범한 속성'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 막대가 예를 들어 39.37in. 길이 막대라면 (나는 inches에 대해 좀 다른 표준을 가진다고 추정한다), 왜 그것은 1m 길이가 아닌가? 어쨌든, 그가 틀렸다고 그리고 그 막대가 1m 길이라고 가정해 보자. 비트겐슈타인을 괴롭히는 문제의 일부는 물론 이 막대가 길이의 표준 노릇을 하고 그래서 우리가 그 막대에 길이를 귀속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물론, 아닐지도 모르지만), '막대 S는 1m 길이이다'라는 진술은 필연적 참인가? 물론 그 막대의 길이는 시간에 따라 다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정의를 1m가 고정된 시간 t0에서 S의 길이인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더 정확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막대 S가 t0에서 1m 길이라는 것이 필연적 참인가? 누군가가 선험적으로 아는 모든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meter의 정의이다. [55] 정의상, 막대 S는 t0에서 1m 길이이다. 이는 곧 필연적으로 참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결론지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1m'의 진술된 정의를 사용하는 자에게조차 말이다. 그는 그가 'meter'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칭을 고정하기 위해서 이 정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의 단위 같은 그런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 지칭이라는 개념은 불분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금의 취지에는 충분히 분명하다고 가정하기로 하자.) 그는 그 정의를 지칭 고정을 위해 사용한다. 그가 언표하고자 하는 특정 길이가 있다. 그는 우연적 속성으로 그것을, 말하자면 그 길이의 막대가 있다는 것을 언표한다. 다른 누군가는 같은 지칭을 또 다른 우연적 속성으로 언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설령 그가 길이에 대한 그의 표준, meter에 대한 지칭을 고정시키기 위해 이것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만일 t0에 이 막대 S에 열이 제공되었더라면, t0에 막대 S는 1m 길이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자, 그는 왜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부분적인 이유는 여기에서 내가 파고들길 바라지는 않는, 과학철학에서 일부 사람들의 정신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이것이다. 설령 이것이 그가 사용하는 유일한 길이 표준이라 할지라도,[각주:20] '1m'와 't0에서 S의 길이'라는 두 문구 사이에는 직관적 차이가 있다. 첫 번째 문구는 실제 세계에서 마침 t0에 막대 S의 길이인 특정 길이를 모든 가능세계에서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것을 의도한다. 다른 한편으로 't0에서 S의 길이'는 아무것도 고정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일부 반사실적 상황에서 그 막대는 더 길었을지도 모르고 또 일부 경우에는 더 짧았을지도 모른다, 만일 다양한 압박과 압력이 그 막대에 가해졌더라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막대에 대해, 똑같은 물질과 길이로 이루어진 다른 어떤 막대에 대해서도 그러했을 똑같은 방식으로, 만일 일정 양의 열이 그것에 가해졌더라면, 그것이 이러저러한 길이까지 연장되었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 [56] 그런 반사실적 진술은, 동일한 물리적 속성을 지니는 다른 막대들에 대해서도 참이기에, 이 막대에 대해서도 또한 참일 것이다. 그 반사실적 진술과 't0에 S의 길이'로서 '1m'에 대한 정의 사이에는 아무런 상충도 없는데, 그 '정의'는 적절하게 해석된다면 '1m'라는 표현이 't0에 S의 길이'라는 표현과 동의어인 것이라 말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우리가 '1m'라는 표현에 대해 '1m'는 t0에서 S의 길이가 사실상 그 길이인 그러한 길이에 대한 고정 지시자인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지칭을 확정한 것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S가 t0에서 1m 길이라는 것을 필연적 참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실, 특정 환경 하에서, S는 1m 길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한쪽 지시자('1m')는 고정적이고 다른 한쪽 지시자('t0에서 S의 길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막대 S에 대한 지칭으로 미터법을 확정시킨 누군가에게 '막대 S가 t0에 1m 길이이다'라는 진술의 인식론적 상태는 무엇인가? 그는 그것을 선험적으로 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만일 그가 막대 S를 '1m'라는 용어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했다면, 이런 종류의 '정의' (축약되거나 동의어적인 정의가 아닌)의 결과, 그는 자동적으로, 추가적인 조사 없이, S가 1m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각주:21] 다른 한편, 설령 S가 meter의 표준으로 사용된다 할지라도, 'S는 1m 길이이다'의 형이상학적 상태는 우연적 진술의 상태일 것인데, '1m'가 고정 지시자로 간주된다고 한다면 그러하다. 적절한 압박과 압력, 가열이나 냉각 하에서, S는 t0에서도 1m와는 다른 길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물은 해수면에서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같은 그런 진술들이 유사한 상태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우연적인 선험적 참이 있다. 그렇더라도 당장의 취지에 우연적인 선험적인 것의 사례로 이 예시를 수용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57] 지칭을 고정시키는 '정의'과 유의어를 제시하는 정의 사이의 구분에 대한 그 서술이다. 

  이름의 경우에서 누군가는 이 구별을 마찬가지로 만들지도 모른다. 이름의 지칭을 기술 혹은 일군의 기술에 의해 제시된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 이름이 기술 혹은 일군의 기술과 같은 뜻이라면, 이름은 고정 지시자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똑같은 대상을 필연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을 것인데, (물론) 우리가 마침 우리의 기술 안에서 본질적 속성들을 사용하지 않는 한, 다른 대상들이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그 제시된 속성들을 가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서 수학한 가장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우리가 그것을 정의로 사용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은 '플라톤에게서 수학한 가장 대단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 물론 일부 다른 가능세계에서 그 사람은 플라톤에게서 수학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어떤 다른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우리가 단지 지칭물을 고정하기 위해 그 기술을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칭체일 것이다. 그 기술의 유일한 용도는 우리가 지칭하고자 의도하는 사람을 식별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럼, 우리가 반사실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에 결코 들어선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자'라고 말할 때, 우리가 '플라톤에게서 수학한,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친, 이러저러한 글들을 쓴, 이러저러한 사람이 철학에 결코 들어선 적조차 없다'라는, 모순처럼 보일지도 모를 그런 것을 뜻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지 '그 사람이 결코 철학에 들어선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자'라는 것만 뜻하면 된다.

  일부 경우, 미터가 고정되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술을 통해 추가로 고정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신화적 인물이 개밥바라기별을 처음 봤을 때, 그는 '나는 하늘의 저 위치에 출현하는 천체의 이름으로 "개밥바라기별"을 사용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지칭을 잘 고정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개밥바라기별'의 지칭을 그 외견상의 천체 위치로 고정시켰다. [58] 개밥바라기별이 문제의 그 당시에 그러한 위치를 지닌다는 것이 그 이름의 의미의 일부라는 점이 귀결되는가? 물론 아니다. 개밥바라기별이 일찌기 혜성에 가격당했더라면, 그 당시 다른 위치에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반사실적 상황에서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 그 위치를 점유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지, 개밥바라기별이 개밥바라기별이 아니었을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개밥바라기별'이 고정적으로 특정 천체를 지시하고 '저 위치의 물체'는 그 천체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다른 물체가 그 위치에 있었을지 모르거나 혹은 아무런 물체도 그 위치에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아무런 물체도 개밥바라기별이었을 것이지는 않다 (또 다른 물체, 개밥바라기 별이 아닌 다른 물체가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더욱이, 내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름이 항상 고정 지시자라고 주장할 것이다.

  프레게와 러셀은 확실히 그에 따라 고유명사가 고정 지시자가 아니고 그 이름을 대체하는 기술과 동의어인 완전히 전개된 이론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기술이 고정 지칭을 결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또 다른 이론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두 대안들은 내가 앞서 묻고 있던 그 질문들에 대해 상이한 귀결을 가질 것이다. 만일 '모세'가 '이러저러한 일을 했던 그 사람'을 의미한다면, 만일 아무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러저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의 분석이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그 기술이 지칭을 고정적으로 확정하는데에 사용된다면, 그 기술은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를 통해 의미되는 바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나는 우리가 아무도 그러저러한 일을, 말하자면,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벗어나도록 인도한 일을 하지 않은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으리란 점이 도출되는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출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모세는 이집트 궁정에서 더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정치에도 종교에도 결코 개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아무도 성경이 모세에게 결부시키는 것들 중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자체로 그러한 가능세계에서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59] '모세가 존재한다'라는 것은 '특정 기술에 대한 존재와 고유성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과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 단칭 존재 진술에 대한 분석은 제공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이것은 의미에 대한 이론이라는 발상을 포기하고 그 생각을 내가 기술하였던 그 방식으로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 만든다면, 당신은 그 이론의 장점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단칭 존재 진술과 이름들 간의 동일성 진술은 어떤 다른 분석을 필요로 한다.

  프레게는 '의미'라는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시자의 의미를 그 지시자의 뜻인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그는 그 지시자의 의미를 그 지시자의 지칭이 결정되는 방식인 것으로 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둘을 동일시하면서, 그는 그 둘 모두가 한정 기술구에 의해 제시된다고 가정한다. 궁극적으로, 나는 이 두 번째 가정도 마찬가지로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았다 하더라도, 나는 첫 번째 가정을 거절한다. 기술은 지시자와 유의어로 사용될지도 모르고, 혹은 지시자의 지칭을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될지도 모른다. '의미'의 프레게식 두 가지 뜻은 일상어법에서 '정의'의 두 가지 의미에 상응한다. 그 의미들은 주의깊게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각주:22]

[60] 나는 지칭을 고정시킨다는 발상이 한 용어를 다른 용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실제로 정의하는 것에 대조적으로 어느 정도 명확한 것이기를 희망한다. 대단히 구체적인 수준으로 모든 것을 따져 들어가기에는 사실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내 생각에, 지칭의 우연성에 맞선 고정성 개념이 문제가 되는 그 차이를 구분해내는 데에 사용되지 못하는 경우들에서조차, 소위 정의로 불리는 어떤 것들은 자구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 즉 유의어를 제공하는 것보다 오히려 실제로 지칭을 고정시키기를 의도한다. 예를 들어 보자. π는 원의 지름에 대한 그 원의 원주의 비율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제, 내가 주장할 것은 그저 공허한 직관적 느낌에 다름 아니다. 내겐 여기 이 그리스어 철자가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이란 구의 축약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도 보이지 않고 π의 대안적 정의군, 그게 무슨 의미든지 간에, 그것의 축약으로 사용되는 것으로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실수, 이 경우 필연적으로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인 바로 그 실수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π'와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 모두 고정지시자이고, 그래서 미터법 사례에서 제시된 논증들은 적용불가하다는 점을 주의하자. (뭐 누군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내가 제기했던 이름에 관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내가 말했듯, 프레게와 러셀의 이론을 대체하는 유명한 근대적 이론이 있다. 그 이론은 스트로슨 같은 프레게와 러셀, 특히 러셀의 여러 관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들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각주:23] [61] 그 대안은, 이름이 위장된 기술은 아니더라도 그것이 일군의 기술을 축약시킨 것이거나 어쨌든 그 지칭이 일군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질문은 이것이 참인지 여부이다. 내가 또한 말했듯, 이 대안의 더 강한 형태와 더 약한 형태가 있다. 더 강한 형태는 이름이 단순히 정의된다고, 동의어적으로, 일군의 기술로서 그리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이 일군 내에서 임의의 특정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속성들의 선언지를 지녔다는 것이 필연적일 것이다. 그가 그런 일들 중 어떤 것도 행하지 않았던 어떤 반사실적 상황도 있을 수 없다. 나는 이 형태가 매우 설득력이 없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혹은 그렇게 말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필연'을 어떤 다른 의미에서 사용하면서 말했다. 어쨌든, 예를 들어, 고유명사에 관한 Searle의 논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같은 지점을 다른 식으로 살펴보기 위해, 우리가 이렇게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도대체 왜 우리는 고유명사라는 것을 가지는가?' 개별자들을 지칭하기 위해서임은 명백하다. '그렇긴 하지만 기술이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지칭이 형성되는 모든 경우마다 동일성 조건을 특정해주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버리고 이를 테면 '알렉산더의 스승'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동의했다고 가정하자. 그럼 지칭된 그 사람이 알렉산더의 스승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개입했던 것은 우연적 사실이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속성들의 논리적 총합, 포괄적 선언지를 지닌다는 사실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더라도).[각주:24]

 

그러한 제안은, 만일 '필연'이 내가 이 강연에서 사용해 온 그런 식으로 사용된다면, 명백히 거짓이어야만 한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흔히 귀속되는 일부 매우 흥미로운 본질적 속성을 찾아냈던 게 아니라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흔히 귀속되는 것들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혀 행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지 모르는 것들이다. 그가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우리는 그 상황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들을 행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기술할 것이다. 이것은 기술의 경우 때때로, 누군가가, 알렉산더를 가르쳤던 사람이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 참이었을 수는 없을지라도, [62] 알렉산더를 가르쳤던 사람이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는 경우 발생하는 그런 범위 구분이 아니다. 이것이 러셀의 범위 구분이다. (나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 구분이 여기에서 참이 아니라는 점은 내게 분명해 보인다. 그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그가 교육에 개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참은 아니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용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영역에 들어서지도 않았고 우리가 그에게 흔히 귀속시키는 그 어떤 성취도 이루지 않았던 반사실적 상황을 생각하면서, 여전히 우리가 그 상황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것들을 행하지 않았던 그런 상황이라고 말했을, 그런 식으로 사용한다는 것 역시 참이다.[각주:25] 뭐 그가 살았던 날들 같은 어떤 것들, 필연적인 것이라 더 상상되었을지도 몰랐던 것들이 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우리가 흔히 그에게 귀속시키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예외들이 있다. 어쩌면 그가 어떻게 실제로 죽었던 것보다 500년 더 그 이후까지 살았었을 수도 있었을지 상상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건 확실히 최소한 문제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 일자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는 사람을 상정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들에 대한 공허한 집합체 일부를 가질 뿐이다. 그 업적들 각각을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이러한 속성들의 전체 선언지의 소유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단지 우연적 사실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속성들의 선언지를 가졌다는 진술은 우연적 참이다. [63] 

  누군가는, 만일 그가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칭을 이런 것들 중 하나를 행했던 사람으로 고정시킨다면, 어떤 의미에서 선험적으로 그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것은 그에 대한 필연적 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예시는 선험성이 필연성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 않는 경우의 사례일 것이다, 만일 이름의 집합체 이론이 옳다면 말이다. '1m'의 지칭을 고정하는 경우는 누군가가 그저 그가 이런 식으로 지칭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이 막대의 길이가 1m라는 것을 필연적 참으로 간주하지 않은 채로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매우 분명한 사례이다. 어쩌면 필연성을 함의하는 선험성에 관한 그 주장은 개정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주장은 인식론에 관해 중요할지도 모르는 참인 어떤 통찰을 진술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어떤 식으로는 이와 같은 사례가 일부 사람들이 오직 필연적 참만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생각하는 바의 핵심이 실제로는 아닌 사소한 반례 같은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자, 만일 모든 선험적 참이 필연적이라는 명제가 이런 종류의 반례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론가 개정될 필요가 있다. 개정되지 않은 경우 그것은 지칭의 본성에 관한 혼동으로 이끈다. 그리고 나 자신은 그것이 어떻게 개정되거나 재진술되어야 할지, 혹은 그런 개정 혹은 재진술이 가능할지 아무런 생각이 없다.[각주:26]

  [64] 그럼 이름에 대한 집합체 개념 이론이 무엇인지 진술해 보자. (실제로 그것은 훌륭한 이론이다.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결점은 아마도 모든 철학적 이론들이 모두 공통으로 가지는 것, 즉,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그 대신에 또 다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라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기를 희망하는데, 그것이 이론이라면 그 또한 마찬가지로 틀렸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이론은 얼마간의 명제들, 만일 당신이 그 이론이 존재진술, 동일성진술, 기타 등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자 한다면 일부 부수적인 명제들을 가진 그런 명제들로 분해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그 이론을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서 더 강력한 형태로 취한다면 더 많은 명제들이 있다. 발화자는 A이다.

  (1) 모든 이름 또는 지칭 표현 'X'에 대해, 상응하는 속성 다발, 즉 A가 'φX'라고 믿는 그런 속성군 φ가 있다.

이 명제는 참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정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물론, 일부 사람들은 화자가 X에 관해 믿는 모든 것이 'X'의 지칭을 결정하는 일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직 부분집합에만 관심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후에 이를 다른 명제들의 일부를 개정함으로써 다룰 수 있다. 그래서 이 명제는 정의에 따라 맞다. 그렇지만 뒤따르는 명제들은 모두 내 생각에는 거짓이다. 

  (2) 그 속성들 중 하나 혹은 결합하여 그 일부는 A에 의해 어떤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내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은 그 속성들이 어떤 것을 고유하게 지적해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들이 그렇다고 A가 믿는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또 다른 명제는 그가 맞다는 것이다.

  (3) 하나의 고유 대상 y에 의해 φ의 대부분 혹은 편중된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는 'X'의 지칭물이다.

자, 그 이론은 'X'의 지칭물이 그 속성들 모두가 아니라면 '충분한' 만큼을 만족시키는 것이라 간주한다. [65] 명백히 A는 X에 관한 어떤 것들에 관해 틀릴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투표를 생각해 보라. 이제 문제는 이 투표가 민주적인지 아니면 속성들 사이에 모종의 불평등을 지니는지 여부이다. 모종의 경중을 따지는 일이 있으리란 것, 일부 속성들이 다른 속성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더욱 그럴 듯해 보인다. 이론은 실제로 이러한 경중 판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특정해야 한다. 나는 스트로슨이, 내게는 놀랍게도, 명시적으로 여기에서 민주주의가 지배해야 할 것이라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소한 속성들이 가장 결정적인 속성들과 같은 무게를 가진다고 진술한다고 믿는다.[각주:27] 물론 모종의 가중치가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더욱 그럴 듯하다.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고 말해 보자. 만일 지칭에 완전히 부적절한 어떤 속성이 있다면 우리는 가중치를 0으로 줌으로써 그 모든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 그 속성들은 집단의 구성원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일부 집단은 다른 집단보다 더 많은 구성원들을 지닌다. 일부 집단은 투표권이 없는 구성원들만 지닐지도 모른다. 

  (4) 만일 그 투표가 아무런 고유한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X'는 지칭하지 않는다. 

  (5)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의 대다수를 가진다'라는 진술은 화자에게 선험적으로 알려진다.

  (6)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의 대다수를 가진다'라는 진술은 필연적 참을 표현한다 (해당 화자의 개인적 발화에서).

 

(6)은 만일 누군가가 해당 다발이 해당 이름의 의미의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의 명제일 필요는 없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칭을 φ의 대다수를 가진 사람으로 결정하더라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φ의 대다수를 가지지 않았을 특정하게 가능한 상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였던 대로, 자세하게 다루진 않을 테지만, 일부 부수적인 명제들이 있다. 이것들은 '"모세가 존재한다"는 "충분한 속성들 φ가 충족된다"를 의미한다' 같은 단칭 존재 진술에 대한 분석을 제공할 것이다. [66] 해당 이론을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조차 이러한 명제들 중 일부를 가진다. 예를 들어, 명제 4에 부수명제로, 우리는 해당 화자에게 만일 충분한 φ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X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선험적으로 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오직 그가 지칭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서 그 관점을 견지하는 경우에만, 만일 충분한 φ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X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참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것은 그가 선험적으로 아는 어떤 것일 것이다. (최소한 그는 이름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안다는 가정 하에 선험적으로 그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같은 노선에 따라 동일성 진술에 대한 분석 또한 있다. 질문은, 이것들 중 어떤 것은 참인가? 만일 참이라면, 그것들은 일의 진행에 대한 멋진 그림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명제들을 논의하기에 앞서, 종종 사람들이 어떤 속성들 φ가 상관있는 것인지 특정할 때, 그들이 그것들을 잘못 특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언급하도록 하자. 이는 내가 그 이론에 반대하여 곧 제시할 논증들에 밀접하게 관련되었긴 하지만, 그냥 부수적인 결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예시를 고려해 보자. 그는 무엇이 상관된 속성들이라 말하는가? '누군가가 "모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이스라엘민족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할 때 단일한 지도자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의 지도자가 모세라고 불렸지 않았다거나, 성경이 모세에게 결부시키는 그 모든 일을 완수했던 사람이 그 누구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의 요지는, 만일 성경 속 이야기가 대체적으로 거짓이라면,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선험적으로 안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성경의 이야기가 모세의 필연적 속성들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이런 일들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살았었을지도 몰랐다는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 나는 만일 모세가 존재했다면, 그가 실제로 그 일들 중 일부 혹은 그 대다수를 했다는 것을 우리가 선험적으로 아는지 여부를 묻는다. 우리가 여기에서 사용할 것이 정말로 이 속성 다발인가? 물론 이런 종류의 언급에서 간과되는 구분이 있다. 성경의 이야기는 완전히 전설이었을지 몰랐거나, 현실의 개인에 대한 대체적으로 거짓인 설명이었을지도 몰랐다. 후자의 경우, 학자는 모세가 존재했을지라도 그에 대해 성경에서 말해진 것들은 대체적으로 거짓이라고 추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67] 그런 것들은 바로 이러한 학술적 영역에서 발생한다. 누군가가 예언가 그 누구도 고래나 큰 물고기에게 집어삼켜진 적 없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에 근거하여 요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따라나오는가? 성경의 설명이 그 어떤 개인에 대한 것도 아닌 전설로서의 설명인지 아니면 현실의 개인에게 장착된 전설로서의 설명인지 여부는 여전히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후자의 경우, 요나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아무도 흔히 그에게 결부되는 일들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따름이다. 내가 이 사례를 선택한 이유는 성경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요나가 존재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큰 물고기에 의해 삼켜졌다는 설명만이 아니라 니네베에 설교를 하러 간 일이나 다른 무엇이든 성경 이야기에서 말해진 것까지 대체적으로 거짓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현실의 예언가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이유들이 있다. 만일 내가 적당한 책을 갖고 있었다면 인용으로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는 현실의 예언가였지만, 그러저러하고 그러저러했다'. 이것이 상상의 인물에 대한 순전한 전설이 아니라 현실의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독립적인 이유들이 있다.[각주:28]

  [68] 이러한 예시들은 개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믿는 것은 모두 성경이 그에게 결부시킨 그러저러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데, 우리는 성경이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의 지칭 문제는 성경에서의 지칭 문제로 되돌려진다. 이는 우리가 명시적으로 포함시켜야 할 조건으로 이끈다. 

(C) 어떤 성공적인 이론에 대해서든, 설명은 순환적이지 않아야만 한다. 투표에 사용되는 속성들은 그들 스스로 궁극적으로 제거 불가능한 방식으로 지칭 개념을 포함하지 않아야만 한다. 비순환 조건이 명백하게 위반되는 사례를 들어 보자. 이어질 고유명사 이론은 William Kneale의 'Modality, De Dicto and De Re'에서 온 것이다.[각주:29] 이 논문은 내 생각에 명백한 비순환 조건 위반을 포함한다. 

 

사람들의 일상적 고유 명사들은 존 스튜어트 밀이 추정했던 것처럼 의미 없는 기호는 아니다. 누군가에게 가장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정보값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에게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명백하게 하찮은 짓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히 그가 이미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개별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 한 당신의 진술의 시작에서 당신의 '소크라테스'라는 단어 사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각주:30]

 

여기에서 우리는 고유명사의 지칭 이론을 가진다. '소크라테스'는 그저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실제로, 물론, 어쩌면 한 사람만 '소크라테스'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고, [69] 몇몇은 그를 '소크라테스'로 부르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리 부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것은 특정 조건 하에서 고유하게 충족되는 조건이다. 어쩌면 오직 단 한 사람만이 특정한 경우에 나에 의해 '소크라테스'라고 불렸었을 것이다. 

  닐은 누군가에게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사소하다고 말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그것이 하찮지 않다. 어쩌면 그리스인들은 그를 '소크라테스'라고 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우리에 의해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고 말해 보자. 어쨌든 나에 의해서는 그렇다.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가정해 보자. (나는 닐이 여기에서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것이 놀랍다고 생각한다. 그리스인들이 그를 '소크라테스'라고 불렀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최소한, 그리스어 이름은 그와 달리 발음된다. 다음 강연까지 인용의 정확성을 확인해 볼 것이다.)

  닐은 이 이론을 위한 논증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개별자'로 분석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달리 어떻게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고 말해지는 것이 사소한 일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겠나? 몇몇 경우 그것은 사소하다. 내가 추정하기로 같은 의미에서 당신은 영어의 어떤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든 멋진 이론을 확보하고 사전을 편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말들이 경주에 사용된다고 누군가에게 말해주는 것은 정보값이 있을지 모르더라도, 그에게 말들이 '말들'이라 불린다고 말해주는 것은 사소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horse'라는 용어가 영어에서 '"horses"라고 불리는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일 수 있을 것이다. 영어에서 사용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어떤 표현의 경우든 마찬가지이다. 현자들이 '현자들'로 불린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 사소하기에, '현자들'은 '"현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제 단적으로 이것은 실제로 아주 좋은 논증은 아니고,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고 말해주는 것이 왜 사소한 일인지에 대한 유일한 설명일 수도 없다. 물론, 영어에서 'is called'의 용법을 아는 누구든 해당 진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만일 'quarks'가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quarks는 "quarks"라고 불린다'는 참을 표현할 것이라는 점을 안다. 그는 그것이 표현하는 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는 quark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참을 표현한다는 그의 지식은 [70] 'quarks'라는 용어의 의미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단한 분량을 할애하여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구절로부터 생기는 흥미로운 문제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여기에서 소개한 주된 이유는 지칭이론으로서 그것이 비순환 조건의 명백한 위반을 제시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어떻게 우리는 그가 지칭하는 자가 누구인지 안다고 가정되는가? 그 이름의 의미를 제시하는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그러하다. 닐에 따르면, 그 기술은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추정컨데, 이것이 그렇게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기에!)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취할 때 그것은 전혀 아무런 지칭 이론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묻는다. '그는 "소크라테스"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그리고 그 대답이 제시된다. '자, 그는 그가 지칭하는 그 사람을 지칭한다.' 만일 이것이 고유명사의 의미에 대한 전부라면, 아무런 지칭도 시작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만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이 특정 이론의 경우에 그 조건은 명백히 충족되지 않았다. 충분히 놀랍게도, 그 전형은 때때로 러셀에 의해 기술적 의미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월터 스콧"이라 불리는 사람'. 명백하게 만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름의 유일한 기술적 의미가 '그러저러하게 불리는 사람', '"월터 스콧"이라 불리는 사람',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사람' 형식의 것이라면, 이 호명 관계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이 실제로 지칭을 결정하는 것이고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사람" 같은 어떤 기술도 아닐 것이다.

  

 

-작성중-

  1. 이 책은 1970년 1월 프린스턴 대학에서의 세 차례 강연을 옮긴 것이다. 강연은 원고 없이 진행되었고, 지금 판본은 일부 편집이 있지만 비격식 문체는 건드리지 않았다. 각주는 대부분 추가된 것이나, 강연 때 말로 부연했던 것들도 있다.

      이런 점들을 독자들이 감안해 주길 바란다. 강연에 허락된 시간이나 비격식적 문체 때문에 피치 못하게 논증을 축약해야 했고 특정 반론들을 다루지 못하기도 했다. 특히 과학적 동일성과 심신문제를 포함한 부분에서 철저함을 희생해야 했다. 이 책에서 주장되는 관점을 완전히 표현하는 데에 본질적인 일부 주제들, 특히 존재진술과 빈-이름 논의도 생략돼야 했다. [본문으로]

  2. 주석에 추가할 기회가 있다면, Rogers Albritton, Charles Chastain, Keith Donnellan, Michael Slote (특히 Hilary Putnam을 위시하여 본문에 언급되는 철학자들에 더하여), 이 사람들이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바의 여러 측면에 접점을 가지는 저마다 독립적으로 표명된 관점들을 가진다는 점을 언급해야 하겠다. 올브리튼은 소위 자연종들에서 필연성과 선험성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레몬들이 과일이 아니었더라면 그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인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여, 나의 주의를 환기시켜주었다. (그가 내 모든 결론을 받아들여줄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나는 또한 올브리튼과 Peter Geach가 기원의 본질성에 관하여 일찌기 나눈 대화의 영향력을 떠올린다. 본문의 사과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주석의 목록이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활발한 대화로 나를 도와준 친구들과 학생들을 열거하려 시도하진 않는다. Thomas Nagel과 Gilbert Harman은 강연록의 편집에 준 도움에 대해 특히 감사 받을 만하다. [본문으로]
  3. Keith Donnellan, 'Reference and Definite Descriptions', Philosophical Review 75 (1966), pp. 281-304. 또한 Leonard Linsky, 'Reference and Referents', in Philosophy and Ordinary Language (ed. Cato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Urbana, 1963. 도넬런의 구분은 기술 만큼이나 이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누군가를 멀리서 일별하고 그를 존스라고 재인한다고 생각한다. '존스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낙엽들을 갈퀴로 모으기'. 만일 그 먼 거리에 있는 낙엽 치우는 사람이 실제로는 스미스라면, 그들은 어떤 의미로는 스미스를 지칭하고 있는데, 설령 그 둘 모두 '존스'를 존스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본문에서, 나는 이름의 '지칭대상(referent)'을 그 이름에 의해 명명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아마도 '지칭'보다 '지시(denote)' 같은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편이 덜 호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지칭'이란 단어 사용은, 'X'가 어느 이름나 기술로도 대체될 수 있는 경우의 '"X"의 지칭대상은 X이다'라는 도식을 만족시키는 그런 것이다. 나는 도넬런에 반대하여, 도넬런의 지칭에 관한 언급이, 비록 언어행위이론에 적합할 것들이리라 하더라도, 의미론이나 진리조건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다고 믿는 쪽으로 잠정적으로 기울어 있다. 지면의 한계로 내 관점을 옹호하기는커녕 내 말뜻을 설명할 수조차 없지만, 간략히 언급은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의미에서 이름이나 기술의 지칭체를 '의미론적 지칭체'로 부르자. 이 의미론적 지칭체가 이름의 경우에는 이름지어진 그것이고, 기술의 경우에는 해당 기술을 고유하게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그가 적절한 거짓 믿음을 지니는 경우라면 해당 의미론적 지칭체와는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스미스-존스) 이름짓기의 경우에 벌어진 일이고 또한 도넬런의 '샴페인' 경우에서도 벌어진 일이다. 한편은 이름이 애매한 것이라는 어떤 이론도 요청하지 않고, 다른 한편은 러셀 기술구이론의 어떤 수정도 요청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4. 엄밀히 말하자면, 물론 러셀은 이름이 기술을 축약시키지 않고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이름'이라 부르는 것들이 기술을 축약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것들이 실제로는 이름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러셀에 따르면, 'Walter Scott'은 기술을 축약시키기에, 'Walter Scott'은 이름이 아니다. 그리고 오직 일상 언어 내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름들만이 아마도 특수한 경우에 러셀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화자가 '직접 접한(acquainted)' 대상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는 'this'나 'that' 같은 지시사들일 것이다. 우리가 러셀이 하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상정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러셀이 일상적으로 그리 불리는 이름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묘사할 수 있을 이다. 그 이름들은 강한 방식으로 의미를 지니는데, 말하자면, 정의상 이름의 지칭체가 해당 기술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인 그런 한정기술구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러셀 자신은 그의 초기 표기법으로부터 기술구를 제거하기에, 「지시에 관하여」에서 '의미'라는 관념이 허황되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셀의 관점을 보고하면서, 그리하여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에게서 이탈한다. 첫째, 우리는 '이름'이 러셀의 '논리적으로 적절한(고유한, proper) 이름'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이해된 대로의 이름일 것이라 규정한다. 둘째, 우리는 기술과 그 축약을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한다. [본문으로]
  5. 내가 프레게-러셀 관점과 그 변주들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오직 이름의 지칭에 대한 실질적인 이론을 제공하는 그런 변용들만을 포함시킨다. 특히, '표준 표기법'에서 '소크라테스' 같은 이름은 '소크라테스함(the Socratizer)' ('소크라테스함'이 고안된 술어인 경우) 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그리고 해당 기술은 러셀의 방법론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제안은 이름에 대한 지칭이론을 의도하였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점들을 가진 언어 개선 제안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은, 필요한 수정을 거쳐, 개선된 언어에 모두 적용될 것이다. 특히, '어떻게 "소크라테스"의 지칭이 결정되는가?'라는 물음은 '어떻게 "소크라테스하다"의 외연이 결정되는가?'로 이어진다. 물론 내가 콰인이 그 반대 경우를 주장한 적이 있다고 시사하는 건 아니다. [본문으로]
  6. Gottlob Frege, 'On Sense and Nominatum', translated by Herbert Feigl in Readings in Philosophical Analysis (ed. by Herbert Feigl and Wilfrid Sellars), Appleton Century Crofts, 1949, p. 86. [본문으로]
  7.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lated by G. E. M. Anscombe, MacMillan, 1953, § 79. [본문으로]
  8. John R. Searle, 'Proper Names', Mind 67 (1958), 166-73. [본문으로]
  9. 지프 식으로 이해된 이름의 지칭에 대한 기술다발 이론에 대한 그의 가장 상세한 진술은 'About God', reprinted in Philosopllical Turnings,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 and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1966, pp. 94--96에 담겨 있다. 더 간략한 진술은 Semantic Analysis,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 1960, pp. 102--05 (esp. pp. 103--04)에 있다. 후자의 구절은 우리가 직접 접하는 사물의 (전시와 세례를 사용하는) 이름이 역사적 인물의 이름과 달리 취급되어야 할 것이라는, 그 지칭이 결부된 기술들(혹은 그 다발)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에 그렇다는 점을 시사한다. Semantic Analysis  93쪽에서 지프는 '고유 명사에 관한 단순하고 강한 일반화(들)'은 불가능하다고, '무언가가 대체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진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프는 명백히 기술다발 이론이 그런 거친 진술로서는 합리적이라고, 적어도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진술하고 있다. 고유명사가 일상적으로 해당 언어의 단어가 아니고 일상적으로 뜻을 지니지 않는다는 지프의 관점에 대해서는 Semantic Analysis pp.85-89와 93-94 참조. [본문으로]
  10. 역사 속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결정론자들은 모세가 결코 존재했던 적이 없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가 했던 모든 일을 성취하는 결과를 야기했을 것이라고 잘도 주장할지 모른다. 그들의 주장은 '모세가 존재한다'라는 것의 뜻에 대한 제대로 된 철학적 이론에 호소함으로써는 반박될 수 없다. [본문으로]
  11. 그런데, 엄격하게 정의되기 전에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철학에서 공통된 태도이다 (어느 정도 대중적인 엄격하다는 개념에 따라). 여기에서 나는 직관점 개념을 취급하고 있고 직관적 개념 차원에 머물 것이다. 즉, 우리는 어떤 것들이 실제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강연을 오늘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일 그게 맞다면, 오늘 내가 이 강연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가능(possible)하다. 이와 상당히 다른 질문은 인식론적 질문, 어떻게 누구든 특정 개인이 내가 오늘 이 강연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지의 질문이다. 나는 그 경우 그가 이것을 후험적으로 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내가 이 강연을 오늘 하게 될 것이었다는 선천적 믿음을 가지고 태어났었더라면, 그건 또 모를 일이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사람들이 이를 후험적으로 안다고 상정하자. 어쨌든, 제기된 두 질문은 상이한 것이다. [본문으로]
  12. 내가 제시한 사례는 특정 속성-선거 승리-가 닉슨에게 우연적이라는 것을, 그가 어떻게 기술되는지와 독립적으로 단언한다. 물론, 만일 우연적 속성 개념이 유의미하다면, 본질적 속성 개념 또한 유의미해야만 한다. 이는 어떤 본질적 속성이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사실 내가 그게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통상적인 논증은 본질주의의 유의미성을 문제삼고, 한 대상에게 한 속성이 우연적인지 혹은 본질적인지 여부가 그 대상이 어떻게 기술되는지에 의거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관점은 모든 속성이 우연적이라는 관점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일부 관념론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바, 모든 속성이 본질적이고 모든 관계가 내재적이라는 관점 또한 아니다. [본문으로]
  13. David K. Lewis, 'Counterpart Theory and Quantified Modal Logic', Journal of Philosophy 65 (1968), 113-126. 루이스의 멋진 논문조차 순전히 형식적인 난점에 시달린다. 양화 양상에 대한 그의 해석과 관련하여, (y)((x)A(x)⊃A(y))라는 친숙한 법칙은, 만일 A(x)가 양상 연산자를 포함하는 일이 허용된다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y) ((x) ◇ (x ≠ y))는 만족될 수 있지만  (∃y) ◇ (y ≠ y)는 만족될 수 없다.) 루이스의 형식 모형은 상대역에 관한 그의 철학적 관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기에, 또한 양상 속성에 대한 보편 예화의 불성립은 직관적으로 기이하기에, 이 불성립이 그의 철학적 관점이 가지는 타당성에 반대하는 추가적인 논증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덜 심각한 형식적 난점들 또한 있다. 내가 여기에서 상세히 논할 수는 없다.

      엄밀하게 말해서, 루이스의 관점은 '통세계 정체화' 관점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가능세계들을 교차하는 유사성들이 대칭적일 필요도 이행적(transitive)일 필요도 없는 상대역적 관계를 확정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의 상대역은 절대로 그 어떤 것 자체와 동일하지(identical) 않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Humphrey가 선거에서 이겼을지도 모른다 (오직 그가 그러한 일을 수행한 경우라면 그 경우에만)'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Humphrey에게 발생했을지도 모를 어떤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 "상대역"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를 어떤 것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Humphrey는 다른 누군가가, 그가 험프리를 얼마나 닮았든 상관 없이,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승자였는지 여부를 신경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 두 관점 모두에 공통된다. 다른 가능세계들이 더 포괄적인 우주의 다른 차원들 같은 것이라는 가정, 그 세계들이 순전히 질적인 기술들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는 가정, 또한 그러므로 정체성 관계든 상대역 관계든 질적 유사성을 통해 확정되어야만 한다는 가정이다.

      여러 사람들이 내게 상대역 이론의 아버지는 아마도 라이프니츠일 것이리라고 지적해왔다. 나는 여기에서 그런 역사적인 문제에 개입하진 않을 것이다. 루이스의 관점을 양자역학에 대한 휠러-에버렛 해석과 비교하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나는 이 물리학에서의 관점이 루이스의 상대역 이론과 유비되는 철학적 문제로 곤란을 겪을 것이라 의심한다. 확실히 그 정신은 지극히 유사하다. [본문으로]

  14. 내가 비판하고 있는 그 관점의 또 다른 전형으로 루이스의 논문보다 더욱 철학적인 해설을 포함한 논문은 통세계 정체성에 관한 David Kaplan의 논문이다. 아쉽게도, 이 논문은 출판된 적이 없다. 그 논문은 카플란의 현재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15. 오독되었다는 것은, 해당 표현이 '통세계 정체성'의 특수한 문제로서, 우리가 또 다른 가능세계를 상상할 적에 그 혹은 그것에 관하여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혹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규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는 시사를 하기 때문이다. '가능세계'라는 용어 또한 오독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외국'이란 그림을 시사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에서 때때로 '반사실적 상황'을 사용해왔다. Michael Slote는 '세계의 가능 상태(혹은 역사)'를 '가능 세계'보다 덜 오독하게 될 용어로 제안해왔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일부 가능세계에서, 험프리가 승리하였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단순하게 '험프리는 승리하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가능세계들이라는 장치는 (내가 희망하기로는) 양화된 양상 논리학의 집합론적 모형이론에 관련된 한에서 매우 유용한 것이었지만, 철학적 사이비문제들과 오독된 그림들을 증진시켜왔다. [본문으로]
  16. 물론 나는 언어가 모든 대상 각각에 대한 이름을 포함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건 아니다. 지시사들이 고정 지시자로 사용될 수 있고, 자유 변항이 불특정 대상들에 대한 고정 지시자로 사용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을 특정할 때, 우리는 그 가능세계 전체를 기술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부분만을 기술한다. [본문으로]
  17. See Lecture 1, p. 53 (on Nixon), and Lecture II, pp. 74-7. [본문으로]
  18. 여기에는 모종의 애매함이 있다. 상정된 책상의 부스러기, 혹은 분자가 하나씩 교체되었다면, 우리는 똑같은 책상을 가지고 있다고 기꺼이 말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여러 조각들 달랐다면, 다른 책상을 가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시간에 따른 정체성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정체성 관계가 애매한 경우, 그것은 비교차적(intransitive)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상대역' 개념이 (모사, 외지 세계라는 루이스의 철학적 보강물들은 없을지라도) 여기에서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엄격한 정체성이 오직 개별자들(분자들)에게만 적용되고, 그것들로 '구성된' 개별자들, 책상들에게는 상대역 관계가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상대역 관계는 애매하고 비교차적인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에 대한 정체성 관계가 아무런 애매함이 없고 비교차성의 위험이 소거된 궁극적이고 기초적인 개별자들의 차원에 가 닿으리라 가정하는 것은 이상주의인 것처럼 보인다. 그 위험은 보통 실천 차원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단순하게 걱정 없이 정체성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논리학자들은 애매함에 대한 논리학을 고안해내지 않았다. [본문으로]

  19.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 50. [본문으로]
  20. 과학철학자들은 '1m'가 '조직개념(cluster concept)'이라는 관점에서 그 문제의 열쇠를 찾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정적으로 이하를 가정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주어진 그 '정의'는 해당 미터법을 확정짓기 위해 사용되는 유일한 표준이다. 나는 그 문제가 여전히 발생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본문으로]
  21. 그가 아는 참은 우연적이기에, 나는 규정상 분석적 참이 필연적이면서 또한 선험적이기도 하기를 요구하기에, 그 참을 '분석적'이라 부르지 않는다. 주석 63을 보라. [본문으로]
  22. 통상 프레게식 의미는 오늘날 '지칭 고정자'와 주의깊게 구별되어야만 하는 바, 뜻으로서 해석된다. 우리는 이후 대부분의 화자에게, 그들이 최초에 대상에 그 이름을 부여한 사람들이 아닌 한, 그 이름의 지칭물이 기술보다는 오히려 의사소통의 '인과적' 연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양상 논리의 형식 의미론에서, 항 t의 '의미'는 통상 (가능적 일부) 함수로서 각 가능세계 H에 H에서의 t에 대한 지칭물을 할당하는 함수인 것으로 간주된다. 고정 지시자에 대해, 그러한 함수가 상수이다. 이러한 '의미' 개념은 '뜻을 부여하는 것'이란 개념과 결부되고 지칭을 고정하는 것이란 개념과는 결부되지 않는다. '의미'의 이러한 용법에서, '1m'는 상수 함수를 그 의미로 가지는데, 그 지칭이 'S의 길이'라는, 상수 함수를 그 의미로 가지지 않는 것에 의해 고정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일부 철학자들은 기술들이, 영어에서, 애매하다고, 때로 기술은 각 세계에서 그것을 만족시키는(그런 것이 뭐라도 있다면) 대상을  비-고정적으로 지시하고, 반면 때로는 그 기술을 실제로 만족하는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한다고 생각해왔다. (도넬란에게 영감을 받은 다른 철학자들은 기술이 그 기술을 만족하는 것으로 생각되거나 전제되는 대상을 때때로 고정적으로 지시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어떤 추정되는 애매함들이든 의심스럽다고 본다. [60] 나는 러셀의 범위 개념을 통해서도 이 책 25쪽 주석 3에 언급된 고려들을 통해서도 취급될 수 없는 그런 애매함들에 대해 아무런 분명한 증거도 알지 못한다.

      만일 애매성이 존재한다면, 'S의 길이'의 가정된 고정적 의미에서, '1m'와 'S의 길이'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것을 지시하고 (기능상) 같은 '의미'를 가진다.

      내포 논리의 형식 의미론에서, 우리가 한정 기술구를 각각의 세계에서 그 기술구를 만족시키는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취한다고 가정해 보자. 각 기술을 그 기술을 실제로 만족시키는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용어로 전환시켜주는 연산자를 가지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데이비드 카플란이 그런 연산자를 제안하고 'Dthat'이라 부른 바 있다. [본문으로]

  23. P. F. Strawson, Individuals, Methuen, London, 1959, Ch. 6. [본문으로]
  24. Searle, op. cit. in Caton, Philosophy and Ordinary Language, p. 160. [본문으로]
  25. '알렉산더의 스승'이 양상 맥락에서 범위 구분일 수 있다는 사실과 그 표현이 고정 지시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군가가 알렉산더의 스승이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그리고, 그런 조건에서, 알렉산더의 스승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점을 알아볼 때 양자 모두 묘사된다.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것은 참이 아닌데, 아리스토텔레스가, 2x2가 '4'라고 불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것처럼,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대충, 일상어법은, 종종 사용과 언급을 혼동하는데, 그런 어법은 물론 누군가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렸거나 불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였을지도 아리스토텔레스였지 않았을지 몰랐다고 말해서 표현할지도 모른다. 이따금 나는 그런 느슨한 용법이 일상언어에 대한 현재 이론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반례로 제시되는 것을 듣곤 했다. 이런 구어체는 '불가능한 임무 전담부대'의 임무 성공이 불가능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양상 법칙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내 주장에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특정 조건 하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더라도, 이런 조건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이지 않았을 조건들이 아니다. [본문으로]
  26. 만일 누군가가 1m를 't0에서 막대 S의 길이'로 고정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t0에서 막대 S의 길이가 1m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안다. 그가 이 진술을 우연적 참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측정 체계를 고정시킴으로써, 그가 세계에 관해 그 전까지 알지 못했던 어떤 (우연적인) 정보를, 어떤 새로운 사실배웠는가? 어떤 의미로 그는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데, S가 1m 길이라는 것이 설령 부인할 수 없이 우연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반례로부터 그 주장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모든 선험적인 것이 필연적이라고 재정식화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했듯, 나는 그런 재정식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아는 바가 없다. 그 재정식화는 해당 주장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고 (예를 들어, 선험을 경험독립적으로 (참이라는 것 대신에)필연적인 것으로 알려지는 것이라 정의함으로써라든지), 그 역 명제는 여전히 거짓일 것이다.

      나는 그런 재정식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기에, 일관되게 [64] '선험적' 이라는 용어를 지칭고정 '정의'로부터 그 참이 귀결되는 진술들을 선험적인 것으로 만드는 쪽으로 사용할 것이다. [본문으로]

  27. Strawson, op. cit., pp. 191-92. 스트로슨은 실제로 몇몇 화자들의 경우를 고려하고, 그들의 속성들을 모아서, (그 경중을 동격으로 취한) 민주적 투표를 상정한다. 그는 주류성이 아니라 오직 충분한 다수성만을 요구한다. [본문으로]
  28. H. L. Ginsberg, The Five Megilloth and Jonah,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1969, p. 114: '이 이야기의 "영웅", 아미타이의 아들 예언가 요나는 역사적 유명인사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허구이다.' 학술적 합의는 그 책 속 요나에 관한 모든 세부사항을 사실적 토대에 기반하지도 않은 전설로 간주하는데, 그가 히브리 예언가였다는 단순 진술을 제외하고 그리하며, 이 단순진술은 고유하게 정체화해줄 리가 거의 없다. 그가 히브리인들에게 '요나'라고 불렸을 필요도 없다. 'J' 소리는 히브리어에 존재하지 않고, 요나의 역사적 존재는 우리가 그의 본래 히브리어 이름을 알든 알지 못하든 그 여부와 독립적이다. 우리가 그를 요나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그를 순환 논리에 빠지지 않고 짚어내는 데에 사용될 수 없다. 요나의 역사성에 대한 증거는 II Kings에서 그에 대한 독립적 지칭으로부터 온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그러한 어떤 다른 지칭들의 부재 중에도 사용가능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히브리 전설은 실제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는 증거. 더욱이, 요나가 실제 인물에 관한 전설이라는 진술은 이었을지도 몰랐는데, 그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었을지라도 그러하다. 누군가는 '나치 선동의 히틀러는 존재한 적 없다'라고 말하듯 '그 책의 요나는 존재한 적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위의 인용이 보여주듯, 이 용법은 [68] 요나가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한 역사가의 관점과 일치할 필요는 없다. Ginsberg는 일반 독자, 그의 진술이 이해가능한 것임을 알아볼 것이라 그가 추정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쓰고 있다. [본문으로]
  29. In Ernest Nagel, Patrick Suppes, and Alfred Tarski, Logic, Methodology and the Philosophy of Science: Proceedings of the 1960 International Congress, Stanford University Press, I962, 622-33. [본문으로]
  30. Loc. cit., pp. 629-30. [본문으로]

1. 추상적 개체

  경험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추상적 개체들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 추상적 개체에 대한 문제가 현대에 의미론과 관련하여 제기되었다. 일부 의미론자들은 술어가 지시하는 속성, 문장이 지시하는 명제 등의 추상 개체를 주장한다. 경험주의는 이에 반발한다. 

  이 글의 목적은 추상 개체를 지시하는 언어 수용이 추상 개체 존재론을 함의하지 않으며, 경험주의 및 과학적 사고와 양립 가능함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의미론에서 추상적 개체에 대한 질문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2. 언어 골조작업

  기존 언어로 새로운 개체를 말하려면 새 규칙에 따르는 새로운 말하기 방식의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이 체계 도입을 골조작업이라 부르기로 한다. 이 골조작업 내부에서 특정 개체에 대한 존재물음을 내재적 질문이라 하자. 다른 한편 체계 자체의 존재나 실재성에 대한 물음은 외재적 질문이라 하자. 

  사물세계에서 일상언어에 따를 때 내적 질문에 대한 답은 시공간적으로 질서잡힌 사물과 사건에 대한 규칙을 준수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평가된다. 경험주의적 탐구에 따른 관찰결과들을 증거로, 기존에 시공간에 정위되어 실재로 판별된 사물들과 합치하는 것은 존재한다고, 그렇지 못한 것은 부재한다고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세계 일상언어의 골조작업 내에서 내적 질문과 대답을 수행하는 것이 곧 골조작업 자체에 대한 존재 승인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골조작업 수용 여부는 이에 해당하는 일상언어의 효용성, 유익성, 단순성 등의 요소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해당 체계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는 다르다. 

  수학언어의 경우 개별 수, 수 일반, 수의 속성과 관계 및 함수, 변항과 양화사 등의 단어와 문장들로 이 골조작업이 구성된다. 개별 수나 수 일반개념에 대한 내재적 존재물음은 이 체계 집합이 공집합인지를 묻는 것이고 그 답은 사소하게 참이다. 이러한 답을 거부하는 철학은 해당 질문을 외재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수학 골조작업의 수용 이전의 수에 대해 그 실재성이나 형이상학적 특성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 문제를 공통의 과학적 언어로 정식화하지 못했으므로 이 외재적 질문에는 인지적 내용이 없다. 이는 비-이론적 사이비질문이다.[각주:1] 

  명제체계의 경우 존재 진술에서 심리적 조건들이 지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제들이 심리적 개체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언어적 개체의 존재진술은 언어에 대한 지시를 포함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존재진술 내에 그러한 어떤 지시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제들이 언어적 개체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진술들 내에서 주체에 대한 아무런 지시도 없다는 사실은 명제와 그 속성이 주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물 속성 체계, 정수와 유리수 체계, 실수 체계, 물리학의 시공간 좌표체계까지 모두 이와 마찬가지로 내재적 존재문답이 가능하고 이는 사소하며 분석적이거나 경험관찰에 근거하여 판단되는 반면, 외재적 질문은 실천적 효용성에 따라 판단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인지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

 

3. 개체 수용의 의미

  새로운 개체 수용을 위한 골조작업은 그 개체에 대해 상위 차원의 일반 용어 도입, 새 개체를 값으로 하는 새 변항의 도입이다. 이러한 새 형식을 도입하여 내재적 질문과 답을 정식화하게 된다. 이 질문은 경험적이거나 논리적이며 답은 사실적으로 혹은 분석적이다. 이와 달리 외재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개체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인지적 내용이 없는 사이비 질문이다. 혹은 그 새 개체를 수용하기 위한 체계 전체를 수용할지 여부에 대한 실천적, 실용적 문제이다. 그리고 실용적 문제인 한에서 그것은 유명론자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각주:2] 

 

4. 의미론에서 추상개체

  명명-지시 관계가 피지시체의 존재를 외재적인 의미에서 함의하는 것이 아니다.  "'...'는 ...를 지시한다"라는 형식의 어떤 표현이든 수용된 골조작업 내에서 "..."에 해당하는 용어가 상수라는 점이 가정된다면 분석적 진술이다. 그렇지 않은 외재적 질문은 이를 두고 대립하는 양 진영 모두가 공통된 인지적 해석을 제공하기 전까지는 사이비-질문으로 간주해야 한다. 

 

5. 결론

  외재적 질문은 실용적으로 판단하고, 내재적 질문과 외재적 질문을 혼동하지 말자.

 

-蟲-

  1. 외재적 질문에 대해 과학 골조작업 내적 질문의 조건을 충족시키라는 요구는 부당해 보인다. [본문으로]
  2. 유명론자는 추상 개체 수용을 '외재적' 의미에서 거부하고자 할 텐데, 추상 개체에 대한 '외재적' 존재론을 긍정하는 입장과 마찬가지로 그 반대에는 인지내용이 결여되어 있다는 게 카르납의 입장인 듯하다. [본문으로]

69e5-72d10. 윤회논증. 케베스는 죽음 이후의 희망을 위해 인간이 죽은 이후의 영혼이 소멸하지 않고 있으며 능력과 지혜를 지닌다는 위로와 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동의하고 이를 위해 설화를 주고받자고(diamythologeо̄) 제안한다.[각주:1]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하데스에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영혼이 하데스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렇게 죽은 자들로부터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가져온다. 여기에서 영혼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이미 있었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여기에 더하여 오직 죽은 자들로부터만 산 자들이 태어날 수 있다면, 이 역시 영혼이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상황을 일반화하여 생성을 지니는 모든 것이 반대되는 것들로부터 반대되는 것들로서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큰 것이 되는(생성) 것은 그보다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각 과정은 증가와 감소라 불리며 서로 반대방향의 변화이다. 강하고 약한 것이나 빠르고 느린 것, 좋고 나쁜 것과 정의롭고 부정의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반대쌍이 있고, 그 둘 사이에 양방향으로 두 가지 생성이 있다. 반대의 원리를 일반화한 이후 소크라테스는 이를 죽음과 삶의 반대쌍에 대입시킨다. [각주:2] 이에 따라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죽어있는 것으로 되고, 이 과정이 죽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역으로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죽어있는 것이 되며, 이 과정에도 죽는 일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붙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태어남이나 살아남이라면, 살아남의 출발점이 되는 죽어있는 영혼이 있어야 한다. 또한 죽는 일이 비가역적인 과정이라면,[각주:3] 결국 모든 것이 죽어있기만 하고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오직 결합만이 있다면 아낙사고라스의 '모든 것이 함께 있"도록 귀결되었을 것이다.[각주:4]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소진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죽지 않는 것 역시 아니므로, 죽은 영혼이 어딘가에 있다가 육체와 결합하여 태어(살아)난다. 

 

72e1-76a8. 상기논증1. 케베스는 윤회(순환)논증에 동의하고, 이에 더해 상기논증도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영혼이 어딘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첨언한다. 그가 정리하는 상기논변은 배움이 상기이며, 지금 인간이 상기해내는 것은 이전 어느 시간에 배운 것임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심미아스는 상기논증에 대해 자신을 상기시켜 줄 것을 케베스에게 요청한다. 이에 케베스는 누군가가 훌륭하게 질문할 경우 질문을 받은 자는 스스로 모든 것이 어떠한지 말한다는 것, 그리고 이는 질문 받은 자 안에 앎과 논변이 들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라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더해, 케베스가 배움이 상기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는지 묻는다. 케베스는 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하고, 그렇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의 설명을 추가로 요청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기억해내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언젠가 알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를 구한다. 이어서 그는 감각을 통해 감각대상만이 아니라 그 외의 것까지 알게 될 경우, 이 알게 된 또 다른 것을 두고 상기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예는 어떤 뤼라를 보고서 그것을 연주하던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 또한 뤼라 그림을 보며 누군가를 상기하는 경우, 어떤 사람의 그림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 어떤 사람의 그림을 보고 바로 그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 등이다. 특히 이 대상이 시간의 경과와 검토의 부재를 통해 망각되었던 것이었을 경우 상기라 할 만하다. 그리고 예시들에서 보이듯 유사한 것으로부터 유사한 것을 상기할 수도, 유사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유사하지 않은 것을 상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유사한 것들 사이에서의 상기의 경우, 상기를 일으킨 것이 결과적으로 상기된 것과 관련하여 유사성을 기준으로 부족한지 그렇지 않은지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한 사례는 "같은 만큼"이란 것이다. 같은 만큼의 크기인 목재들이나 돌들을 보면서, 이것들과는 구분되는 "같은 만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데 같은 만큼의 것들로 이야기된 목재들이나 돌들은 어떤 것에 비해서는 더 크거나 작기도 하다. 반면 같은 만큼의 것들 자체 또는 같은 만큼임은 같은 만큼이지 않은 것들로 보이거나 같은 만큼이지 않음으로 보이거나 하지 않는다.[각주:5] 따라서 같은 만큼인 것들과 같은 만큼이라는 것 그 자체는 다르다. 그럼에도 전자들로부터 후자에 대한 앎을 생각하고 확보했다. 따라서 유사하지 않은 것들로부터만이 아니라 유사한 것들로부터도 어쨌든 다른 것을 생각하는 한, 상기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그것들인 바의 것들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있으려고 하지만, 그것으로 있기에 부족하고 그러한 것으로 있을 수 없으며 그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그와 유사하지만 그에 미치지는 못한 저 대상을 먼저 알고 있었음이 필연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 자신이 그런 일을 실제로 겪었으므로, 우리도 처음 같은 만큼인 것들을 보고 같은 만큼이란 것 자체와 닮았지만 그에 못 미친다는 걸 생각하기에 앞서, 같은 만큼의 것 자체를 미리 알았음이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같은 만큼인 것 자체는 감각을 통해 생각한 것이다. 이 지각들을 통해 지각들 안에서 같은 만큼인 것들은 저 같은 만큼인 것 자체에 미치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지각 안의 같은 만큼인 것들을 저 같은 만큼인 것 자체에 회부시키는 한, 지각을 시작하기에 앞서 같은 만큼인 것 그 자체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그 앎을 파악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각을 할 수 있으므로, 지각 안에서의 어떤 것들을 파악하기에 앞서, 즉 태어나기 전에 그것들을 회부시키는 어떤 것 자체를 그보다 먼저 파악했어야만 한다. 이는 같은 만큼인 것, 큰 것, 작은 것에서 더 나아가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정의로운 것, 경건한 것, "그것으로 있다"라는 인장을 부여하는 모든 것에 관련하여 같은 논변이 성립한다. 그런데 지각 안에서의 부족한 것들을 통해 어떤 것 자체를 떠올리기 전까지는 어떤 것 자체를 자각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이 어떤 것 자체는 내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잊었던 것을 다시 떠올려내는 것이다. 지각을 통해 지각된 것들과 유사한 것이든 유사하지 않은 것이든 잊었던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되는 일이 가능하다. 

 

76a9-77a7. 상기논증2. 인간은 아는 채로 태어나 내내 아는 채로 살아가거나, 아니면 언젠가 알았던 것을 이후에 상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는 자는 그가 아는 것에 대해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각주:6] 그런데 심미아스는 모든 사람이 그 모든 '어떤 것으로 있는 것' 자체에 대해 설명을 제시할 수는 없다고 답한다. 따라서 모두가 언제나 내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알았던 것을 망각했다가 다시 상기해내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혼은 인간의 모습으로 있기 전 신체로부터 독립되어 있었으며,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영혼이 신체와 결합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앎을 가질 가능성이 심미아스에 의해 제기되지만, 이 경우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것 자체를 설명할 수는 없으므로 이 앎을 상실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앎을 가졌다가 또 그 즉시 상실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유래한 모든 것들을 거기에 회부시키는 그 모든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도 있었듯, 우리 자신의 영혼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것이다. 

 

77a8-78a9. 심미아스는 상기논증이 태어나기 이전 영혼의 존재는 입증해주지만, 죽으면 영혼이 흩어져 끝난다는 반박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한다. 케베스도 이에 동의하며 영혼이 죽은 이후에도 태어나기 전에 못지 않게 있다는 점이 나머지 증명되어야 할 절반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앞선 순환논증을 상기논증과 한 곳으로 모으면 그 증명이 이미 된 것이라고 답한다. 태어나기 전에 영혼이 있다는 점이 상기논증으로 증명되었고, 반대원리에 따라 살아있는 것은 죽어있는 것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점이 인정된다면, 태어나기 이전 영혼의 상태는 곧 죽음 이후의 영혼의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 이후 영혼의 존속을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심미아스와 케베스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마치 그들이 아이들이 갖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것이라 평한다. 마치 아이가 도깨비를 두려워하듯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신들 안의 아이가 있는 것 같다는 케베스의 말에, 소크라테스는 퇴마를 위한 주문을 외워주어야 하겠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니 어디서 주술사를 찾을지 모르겠다는 케베스의 말에, 소크라테스는 재화와 노력을 아끼지 말고 헬라스와 야만을 불문하고 그런 이를 찾아야 한다고, 또한 서로 더불어 공동으로 탐구하기도 해야만 한다고 조언한다. 

 

-蟲-

  1. 이 부분에서 형상 혹은 '그 자체로 있는 것'에 대한 논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상호의존적으로 규정되는 다양한 반대자들과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변화가 논의되며,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의 상보성에 근거하여 몸과의 결합 이전에 영혼이 먼저 독립적으로 있었으리라는 추정이 제시된다. Mythos와 eikos가 언급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티마이오스』의 논의가 eikos mythos로 간주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 대목에서도 일상세계에 한정된 논의가 전개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본문으로]
  2.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반대쌍은 같은 유에 속하는 양극단으로 규정된다. 일종의 영역이나 맥락이 설정되고 그 안에서 반대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생성, 변화를 가지는 한에서, 그리고 반대쌍은 같은 유에 그리고 같은 차원에 속한 것이어야 한다는 한에서 이 반대의 원리는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영혼과 신체의 결합, 죽음이 분리라는 제한조건 하에서 무생물을 죽은 것과 구분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이 반대를 이루는 맥락에서 비교대상은 살아있을 수 있는 것, 상호 결합 가능한 물체와 영혼에 국한된다. [본문으로]
  3.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반대를 같은 유의 양극단으로 규정하고, 이 양극단 사이에서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연학』에서는 이를 변화(운동)의 원리로 상정하여, 변화의 원리를 기체와 반대쌍이라는 셋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는 기체와 형상 그리고 그것의 결여로 바꿔 말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변화의 원리를 둘로 말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시, 『범주론』에서는 시각과 맹목을 반대되는 것으로 두고, 이 둘 사이에서는 양방향으로의 변화가 성립하지 않고 오직 시각에서 그 결여인 맹목으로의 비가역적 변화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와 달리 시각능력이 발현되지 않았다가 이후에 발현되는 동물의 성장 과정은 결여에서 상태로의 이행이 아닌 또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 『형이상학』에서 가능태와 현실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개념 도입의 단초가 마련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범주론』에서는 아직 그와 같은 개념적 도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 가능태와 현실태를 통하지 않고 시각의 발현 과정과 시각에서 맹목으로의 결여(상실?) 과정을 구분하는 『범주론』 자체 내에서 가능한 설명 방식이 재구성될 수 있을지 문제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다시 생명이 성립하게 되는 과정과 발현된 생명이 상실되는 과정이라는 두 변화(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장소이동이나 성질변화와 구분하여 생성과 소멸로 간주할 것이다.)와 관련하여 지금 플라톤이 이를 같은 유 안에서 한정된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는 같은 운동의 양방향과 같이 취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일 수 있다. 단, 결합과 분리를 반대쌍으로 설정하고 그 사이에서의 운동을 두 방향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극복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본문으로]
  4. 이는 과거 방향으로의 시간이 무한하게 뻗어 있다는 가정 하에서 가능한 결론일 것이다. 한정된 시간 이후 현재에 이르렀다면 오직 분리만 축적된 경우든 역으로 오직 결합만 축적된 경우든 죽음과 삶 중 어느 한쪽만 남아 있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티마이오스』에서는 (『파이돈』 보다 이후에 저술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차치하면) 시간은 있음과 같음 그리고 다름의 결합 이후 천구와 천체의 운동을 통해 제작된 것이고, 그래서 시간은 과거 방향으로 무한하지 않다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본문으로]
  5. 74c1. auta ta isa. 복수형태이다. 이것이 (a) 형상으로서의 같은 만큼이라는 것 그 자체를 가리킨다면 왜 복수로 표현되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반면 (b) 같은 만큼의 것들로 판단된 사물을 가리킨다면, 어떤 맥락에서 이 사물들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 또한 설명이 필요하다. (a') 각 사물을 상호비교하여 같은 만큼의 것들로 판단하는 매 사례마다 그 사례에서 (혹은 비교군별로) 적용된 '같은 만큼의 것 자체'라는 형상들을 총괄하여 복수로 표현하였을 가능성. (a")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말하는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각 실체에 귀속된 성질이나 속성처럼 취급된 '같은 만큼의 것' 각각을 복수로 표현하였을 가능성. (b') 같은 만큼의 것들로 판단된 것들이 74b8-9에서 언급된 비교대상(해당 구절에서 dat.를 비교대상으로 번역할 경우)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만 고려된 경우. 이렇게 cambridge change에 개입되는 비교 맥락을 끊고, 또한 증가나 감소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같은 만큼의 것으로 측정된 각각의 것들 그 자체는 그 자신이 가진 만큼의 양을 유지한다. 개인적으로는 (a')가 가장 평이하고 쉬운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만큼임(혹은 동등성, isotēs)과 같은 만큼이지 않음(혹은 비동등성, anisotēs) 같은 표현이 따로 등장하는 것을 고려하면 (a")나 (b') 역시 고려해 보아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74d4-5에서 'ta en(in)'이란 표현에 주목한다면 (a")의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는 단순히 '그것들 안에서 벌어진 상황들' 정도로 약하게 번역하여 처리할 여지도 있으므로 결정적이지는 않다. [본문으로]
  6. 앞서 지각을 통해 형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 형상을 아는 것으로 서술하는 부분과 달리, 여기에서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된다. 두 앎의 주어가 다르거나, 대상이 다르거나, 앎의 정도가 다르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상기가 일종의 과정을 거치며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수용할 수 있다면, 앎의 정도차를 통해 두 부분을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본문으로]

65a9-d3. 소크라테스는 지혜의 획득과 관련하여 탐구에서 신체를 동반자로 삼는 경우, 감각은 진리를 담고 있지 않으며 정확한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신체의 감각이 부정확하고 불확실하다면, 신체와 더불어 검토를 시도할 때 영혼은 기만당한다. 따라서 영혼이 진리에 접하는 다른 곳이 있다면 그것은 헤아림(logizesthai) 속에서이다. 또한 이 속에서 영혼이 감각이나 쾌고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최대한 영혼 그 자체가 될 때, 가능한 한 신체와의 공유 그리고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있는 것(to on)을 포착할 때 가장 훌륭하게 헤아림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즐거움의 경우에서처럼, 지혜 획득의 경우에도 철학자는 신체를 경시하고 피하는 반면 영혼 자체가 되기를 추구한다. 

> 표면적인 서술에 따라서는 영혼의 즐거움과 지혜의 획득이 별도의 사안처럼 묘사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진정한 철학자는 지혜 그 자체를 열망하고 이것의 획득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는 전제가 마련되는 듯하다. 이에 근거하여 철학자는 자신에게 즐거운 일인 지혜 획득을 위해 이를 방해하는 요인인 신체로부터 해방되길 그리고 영혼이 그렇게 영혼 그 자체로써 지혜 그 자체를 추구하길 바라며, 신체에서 영혼의 해방은 곧 죽음이므로 결국 죽음을 바라게 된다는 논증이 전개되는 듯하다.  

> 지혜의 획득에 앞서, 영혼 그 자체로 있기를 추구하는 것을 '즐거움'과 관련시킬 경우, 신체를 통해 발생하는 즐거움들에 하등 관심이 없다면 그것이 영혼 자체로 있기를 추구하는 이유라 말할 수 있다.

 

65d4-67c4. 정의, 아름다움, 좋음은 물론 크기, 건강, 힘, 그 각각으로 있는 바의 모든 것들의 그 있음(ousia)에 관하여, 그 각각을 아는 일에 가장 가까울 자는 신체를 통해 그것들을 관조하는 자가 아니라 각각의 것 그 자체를 사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이다. 이러한 자는 감각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를 최대한 배제하며 최대한 사유 그 자체로써 순수한 각각의 것 그 자체를 포착하고자 시도하는 자이다. 철학자는 그리하여 영혼이 신체를 지니고 뒤섞여 있는 한 지혜를 충분히 획득할 수 없으리라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체는 필수적인 양분으로 인한 분주함을 우리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신체는 애욕과 열망, 공포, 온갖 상들, 허상들로 우리를 채우며 전쟁과 분란, 다툼을 야기한다. 신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도록 인간에게 강제하여 다툼이 일어나고 그 일에 노예노릇을 하도록 만든다. 이로 인해 철학할 여유가 없게 된다. 이보다 더욱 극단적인 문제는 탐구가 가능할 때에도 신체가 개입하여 소란과 혼란을 야기하고 마비시켜서, 참된 것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만일 사정이 이러하다면, 순수하게 앎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신체로부터 해방되어 영혼 그 자체로써 사태 자체를 관조해야 하고, 따라서 지혜는 살아서는 가질 수 없고 죽은 이후에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신체와의 교류가 전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아니기에, 최대한 신체와 교류하지 않고 신체의 본성으로 채워지는 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따라서 죽은 이후에야 순수하게 정화된 상태에서 지혜 그 자체를 획득할 수 있다면, 죽음을 희망할 만하다. 

> 신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저한의 양분조차 충족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닐 듯하다. 오히려 이러한 기본욕구는 충족될 경우 안정되어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나마 영혼의 탐구를 덜 방해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필수 욕구를 넘어서는 애욕과 열망이 추가적으로 혹은 과도하게 발생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설명이 제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필수 욕구가 충족되어 탐구를 위한 여가가 마련된 상황에서도 신체는 소란과 혼란을 야기해 마비시킨다는 점과 관련하여서도 그 이유가 명시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67c5- 69e4. 정화란 신체 전반에 분산되어 착종된 영혼을 취대한 분리시켜 취합하고 영혼 자체로서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정화는 신체로부터 영혼의 해방이란 점에서 곧 죽음이고, 또한 이것이 철학자가 가장 열망하는 것이자 철학자가 연마하는 바의 일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철학자에게는 늘 바라고 준비해온 바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죽음이기에 이 죽음에 당면하여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는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신체로부터 해방되고 지혜를 마주할 희망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죽음에 당면하여 두려워하고 화를 내는 자는 제대로 된 철학자가 아님도 분명하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철학자가 참으로 용기있는 자이고, 열망들을 경시하고 조화롭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가 바로 참으로 분별 있는 자이다. 이러한 자는 비철학자들의 용기와 분별을 기이하다 여긴다. 비철학자는 죽음을 나쁜 것으로 여기고, 그들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경우 그보다 더 큰 나쁜 일에 대한 공포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다. 즉 그는 두려워함으로써 두려움을 통해서 용기있게 된다. 이는 용기 그 자체가 아니라 정반대되는 것에 의해 정립된 이상한 것이다. 분별의 경우에도, 비철학자는 한 쾌락을 통해 다른 쾌락을 포기하는 식으로 무절제를 통해 절제를 갖춘다는 이상한 상황에 놓인다. 각각의 것 그 자체를 두고 그 좋고 나쁨을 평가하여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고 또 용기를 내거나 두려워해야 하며, 이러한 과정은 두려움으로부터 용기를 정화해내고 또 무절제로부터 분별을 정화해내는 정화이기도 하다. 

> Cf.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덕과 악덕은 유 차원에서 반대되는 것이다. 상대적인 크고 작음, 많고 적음의 비교를 통한 판단은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다.  

> 이 단계에서, 앞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기이하게 혼합되어 있다는 가설에 대한 일종의 반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공포들을 서로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정립된 용기는 용기와 정반대인 두려움과 착종되어 있고, 쾌락들의 경우에도 다른 쾌락들(그 획득이나 상실)에 비교할 경우 다른 불쾌함들과 뒤섞인 것으로서만 상대적으로 정립되어 있게 된다. 반면 제대로 된 철학자의 지혜 그 자체에 대한 열망과 이것의 획득에는 그와 같은 상대적인 비교평가가 개입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 영혼 자체로 있으면서 사유 자체를 가지고 지혜 자체를 획득하려는 것이 진정한 철학자. 그렇다면 착종되지 않은 순수한 용기 자체, 절제 자체가 중심주제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일반인의 용기가 두려움의 극복이라는 식으로 그 반대되는 것과 착종되어 상대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 문제라면, 절제도 즐거움이나 괴로움과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점 자체가 문제이지 않은가?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주놓임과 그 자체로 규정되는 것을 두고 논의하는 바와 연결되지 않을까?

-작성중-

61b8-61d2.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케베스에게 에우에노스의 물음에 대해 답할 거리를 말해주고서, 만일 에우에노스가 지혜롭다면 최대한 빨리 자신을 쫓아 오도록 전해달라 말한다. 심미아스는 에우에노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안을 받지 않으리라 얘기하는데, 소크라테스는 그가 철학자라면, 그리고 철학에 제대로 참여하는 자들 모두가 가능한 빨리 죽으려 하리라고, 하지만 자살은 불법이기에 하지 않을 듯하다고 답한다. 

 

61d3-62c8. 케베스는 스스로를 해치는 것은 위법하지만 철학자는 죽는 이를 뒤따르려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다. 우선 그는 자살이 위법한 이유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여타의 일들은 경우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더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만, 삶보다 죽음이 더 낫다는 일은 오직 이 일만이 인간에게 결코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발생한다면, 또한 사는 것이 죽는 것이 더 나은 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은인을 기다려야 하고 이것이 경건한 일이라면, 케베스가 놀라워 할 것이라고 말한다. 

>> 무조건적이라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것인지, 오직 철학자에게만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인지 불분명. 또한 그러한 가정이 참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지, 반대로 거짓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지,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케베스의 놀라움이 감탄인 것인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표현일지 해석이 갈릴 수 있다. Cf. Gallop (1975)  pp. 79-83.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이와 관련하여 인간이 신의 소유물이라는 논의를 가져온다. 소유물이 소유자의 뜻에 반하여 자살한다면 소유자는 소유물에게 화를 내리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신이, 마치 이제 그가 사형 선고에 따라 극약을 마실 것과 같이, 모종의 필연을 부과하기 전까지는, 인간이 자살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62c9-63d3. 케베스는 자살이 불경하다는 설명을 받아들이고, 이어서 철학자가 쉽사리 죽으려 한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그는 인간이 신의 소유물이라는 이야기를 받아, 가장 지혜로운 자들인 철학자들이 가장 훌륭한 감독관인 신의 보살핌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반박한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쉽게 납득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해 버릇하는 케베스를 칭찬하고, 심미아스는 케베스가 단순히 습관적으로 반대한 것이 아니라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라 거든다. 여기에 더해 케베스는 심미아스가 그 반박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힐난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소크라테스도 훌륭한 주인인 신과 좋은 친구들을 저버리고 떠나려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죽은 이후에도 또 다른 지혜로운 신들과 훌륭한 (죽은)사람들 곁으로 가게 되리라 생각한다고 답한다. 또한 죽은 자들에게는 나쁜 자들에게 보다 좋은 자들에게 훨씬 더 좋은 것이 있으리라는 희망 역시 전한다. 심미아스는 소크라테스가 품은 희망적인 생각이 그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같이 좋은 것일 테니, 그 생각을 공유해 달라고 요청한다. 

 

63d4-64a3.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에 앞서, 극약을 전달할 사람이 크리톤에게 대화를 많이 하면 열이 올라 약효가 저해될 수 있어서 약을 몇 배나 더 마시게 될 수도 있으니 대화를 자제시키라고 재촉했다는 이야기를 크리톤이 전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는 그의 할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답한 다음, 정말로 철학 속에서 생애를 보낸 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하며 저승에서 가장 큰 훌륭한 것들을 받으리란 희망에 차는 편이 그럴 듯하다는 논변을 제시하겠다고 선언한다. 

 

64a4-65a8. 철학자들은, 남들 몰래, 죽는 것 그리고 죽어 있는 것에만 열중한다. 늘 열망하던 일이기에 철학자들은 죽음이 찾아올 때 불편해하지 않는다. 심미아스는 남들이 모르지 않는다고 지적하는데,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시 다른 자들은 철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죽는지, 어떤 점에서 죽을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죽음에 대해 그러한지를 알지 못한다고 답한다. 그는 우선 죽음이 신체로부터 영혼의 벗어남이라 규정한다. 그는 신체(물체)는 영혼을 벗어나 물체 그 자체가 되고, 영혼은 신체로부터 벗어나 영혼 그 자체가 되는 것, 그것이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그는 철학자의 즐거움이 식욕이나 성욕 등의 신체적 즐거움이겠느냐고 묻고, 심미아스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나아가 철학자는 신체에 관한 보살핌들의 경우에도, 필연적으로 관여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경시할 것이라 말한다. 따라서 철학자는 신체에 관련하여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난 영혼 자체로 정향된 문제의식을 가진다. 그는 최대한으로 영혼을 신체와의 공유로부터 해방시키는 식으로 문제를 다룬다. 즉 철학자는 그런 것들에 참여하지 않기에 살 가치가 있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가까이 있으며 신체를 통한 즐거움에 신경쓰지 않는 자이다.

> 철학자가 죽음을 연마하고 추구하기에 신체에 무관심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지 아직 근거가 제시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 단계에서 죽음이 신체로부터 영혼의 벗어남, 신체는 신체 자체가 되고 영혼은 영혼 자체가 되는 것으로 규정된다. 어떤 이유에서 철학자가 신체에 관련해서가 아니라 영혼에 관련하여 즐거움을 추구하는가? 죽은 이후에 더 훌륭한 주인들과 또한 이웃들 곁으로 가게 되리란 희망은 설명되어야 할 사항이지 근거로 보이지는 않는다.

 

-작성중-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
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
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
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
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
고 부를 수 있어.
  전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너는 혼란스러웠다.

 

소년은 중학교 3학년이다. 사람들은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함부로 엮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결국은 지난 겨울 내란의 밤이 떠오른다. 전두환이 천수를 누리고 죽었을 때처럼, 치욕스러웠다. 아무것도 아닌 나는 모독당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유가족들이, 생존자들이, 피해자들이 살아남아 있는데, 감히 어떻게. 

 

이제 겨우 18쪽을 읽었다. 달리 무슨 뜻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할 일을 마친 다음에, 조금씩 읽어 나가기로. 

 

-蟲-

0. 양에는 연속량과 불연속량이 있다. 연속량은 상대적인 위치를 지니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불연속량은 "상대적인 위치를 지니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해당 표현은 불연속량의 부분들이 상대적 위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번역될 수 있고, 다른 한편 불연속량이 부분들을 지니지 않는다고도 번역될 수 있다. 버니옛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수를 부분을 가지지 않는 불연속량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예시로 드는 것은 트럼프 카드 각 장에 표기된 수이다. 각각의 수는 고유한 양을 표현하지만 한 수가 다른 수를 부분으로 포함하거나 또는 연속량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분할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볼 경우 수에 대한 사칙연산, 산술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수가 부분들을 가진다고 할 경우, 우선 수의 부분이 다른 수라면 기이한 역설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10은 1과 9를 더해서도 또 4와 6을 더해서도 또 5를 두 개 더해서도 이루어지며, 서수로 생각할 경우에는 순서대로 1부터 9까지의 수들 이후에 온다. 순서에 따라 앞에 나열된 수들을 10의 부분으로 포함하는 것 역시 불합리해 보인다. 10의 부분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55가 될 수도 있다. 다른 한편 1의 갯수를 통해 여타의 자연수 복수를 설명하고자 할 경우, 1 자체는 수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형이상학』에서의 논의를 고려하자면 단위로서의 1과 2 이상의 복수를 구분하고 후자를 수로 간주하는 듯한 입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나, 이와 같은 입장이 

『범주론』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1이 수라면, 수를 부분들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노선에서, 1 역시 부분들을 가질 것인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0. 불연속량은 본래 정의된 양 혹은 규정된 양으로 번역될 diōrismenon이다. 상대적 위치, 순서, 경계 등의 의미 또한 단적으로 명확하다고 보긴 어렵다. 이러한 규정들은 실체, 속성, 마주놓임, 관계 등 다른 범주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주어나 술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한정하고 특정짓는 데에 앞서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별자, 개체의 그 단일성, 통일성과 이를 중심으로 결합하거나 부속하는 여러 성질들에 기초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데에 기초가 되는 개념들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고,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는 『형이상학』에 나아가기에 앞서 그 발상의 시초, 원형을 가늠해 볼 수 있기에, 이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이해가 본래 어떠한 취지에서 출발하였는지를 추적할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라고 뻥을 쳐도 되는가?

 

0. 가능하면 10월 중순까지, 늦어도 11월 중순까지 작성 목표로..

 

-蟲-

57a1-58d1. 에케크라테스는 파이돈에게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약을 마시던 날에 대해 묻는다. 에케크라테스가 있는 플레이우스와 아테네 사이에는 오랫동안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기에,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약을 마시고 운명하였다는 것 이외에 자세한 사항은 전해들은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선 파이돈이 당시에 현장에 있었는지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바가 있는지 물었다. 파이돈은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고 말하고, 재판에 관해서도 듣지 못하였는지 되묻는다. 에케크라테스는 재판의 진행과정은 전해들었으며, 다만 재판으로부터 소크라테스가 운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 놀랐다고 말한다. 파이돈은 우선 사형이 연기된 연유에 대해 설명해준다. 테세우스가 아폴론에게 구원을 기원하며 약속한 이래로, 아네테인들은 매년 델로스에 사절을 보냈는데, 그 사절이 아네테를 떠나 델로스를 거쳐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동안에는 아테네를 정결하게 유지하며 공개적으로 사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법이 있었다. 그런데 사절행은 풍랑이 심하거나 하면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으며, 마침 소크라테스의 재판 바로 전날에 사절행사가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재판과 사형 사이에 긴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또한 에케크라테스는 사형 당시 소크라테스가 홀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아니면 친애하는 자들이 함께 있었는지를 묻고, 파이돈은 그의 곁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58d2-59c6. 에케크라테스가 자세한 이야기를 재차 청하자, 파이돈은 소크라테스를 기억하며 말하는 것도 그 이야기를 듣는 것도 가장 기쁜 일이라 말하고, 에케크라테스는 파이돈처럼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을 가장 기뻐하는 청자들이 지금 여기에도 있다고 맞장구를 친다. 파이돈은 우선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하여 경이로운 체험을 보고한다. 소크라테스가 행복해 보였고, 그 태도나 말에 두려움이 없이 고결하게 끝을 맞이하였으며, 신적인 운명과 함께 저곳으로 나아가 안녕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지도 않았으나, 반면에 언제나처럼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기존에 익히 누려오던 철학에서의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한다. 오히려 즐거움과 고통이 뒤섞인 어떤 낯선 혼합을 겪었고, 당시에 함께 자리한 자들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었다. 에케크라테스가 당시에 함께 있던 자들을 자세히 묻고, 파이돈이 함께 한 자들의 이름과 참석하지 못한 몇 사람의 이름을 전한 후, 당시에 이루어진 대화에 대한 보고가 이어진다. 

 

> 사형일의 지연.

 

59c7-60c7. 소크라테스가 수감된 후 사형 당일까지 지인들은 주기적으로 감옥 근처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렸던 재판장에 아침부터 모여서 면회가 허가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 함께 들어가 그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당일에는 사절단의 배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보다 더 이른 아침부터 모였다. 감옥에는 구속에서 막 풀려난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와 그의 자식들이 함께 있었고, 지인들을 보자 통곡을 하며 소크라테스와 지인들의 마지막 만남을 슬퍼하였다. 이에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사람들을 시켜 크산티페와 자식들을 집으로 데려가도록 하라고 부탁하고, 구속이 풀린 후 자세를 고쳐 잡아 앉으며 다리를 문지르던 소크라테스는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오진 않지만 늘상 한쪽이 다른쪽에 뒤따른다고 하며 이를 이상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소포스가 이런 일들에 주목하였더라면 쾌락과 고통이란 두 머리가 한 몸에 달려 늘상 한쪽이 다른 쪽에 뒤따른다는 설화를 지었으리라고 말한다.

 

60c8-61b7. 케베스는 소크라테스가 아이소포스를 언급하는 것을 듣고서는, 근래에 소크라테스가 아이소포스의 이야기들과 아폴론에게 바치는 서시에 운율을 넣어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에우에노스가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물었다고 전한다. 소크라테스가 이전까지는 그렇게 시를 짓는 일이 없었는데, 수감된 이후부터 갑자기 시를 짓기 시작한 것이 이상하였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시인들과 시 짓는 기술을 경쟁하려고 시를 짓기 시작한 게 아니라, 꿈이 자신에게 시를 지으라고 말하고 있던 것 아닐까 하여, 그 꿈이 신성한 명령을 하는 것이라면 이제부터라도 그 명을 따라 부정을 씻기 위해 시를 지었다고 말한다. 꿈은 여러 차례 소크라테스에게 '시를 짓고 일로 삼으라'고 말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전까지는 철학(지혜사랑)을 가장 위대한 시가로 여기고 자신이 행해온 일이 바로 철학이라 믿고서 저 꿈들이 그러한 자신을 향한 응원이라 생각하였다. 자신은 사는 내내 철학을 해 왔으므로 더 이상 자신에게 남은 할 일은 따로 없을 것이니, 적법한 재판에 따른 사형 선고가 미루어질 이유가 하등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절행이 길어져 사형이 연기되자 혹시 실제로 시를 지으라고 한 것인데 아직 자신이 시를 지은 적이 없어서 이 일을 마저 하라고 유예를 준 것인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우선 그 사절이 엮인 번제의 주인공인 아폴론을 위한 시를 지었고, 이후 철학자가 아니라 시인이기 위해서는 논변(logos)이 아닌 설화(muthos)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아이소포스의 설화들을 운율에 맞춰 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 철학과 시. 남은 사명.

 

61b8-61d2.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케베스에게 에우에노스의 물음에 대해 답할 거리를 말해주고서, 만일 에우에노스가 지혜롭다면 최대한 빨리 자신을 쫓아 오도록 전해달라 말한다. 심미아스는 에우에노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안을 받지 않으리라 얘기하는데, 소크라테스는 그가 철학자라면, 그리고 철학에 제대로 참여하는 자들 모두가 가능한 빨리 죽으려 하리라고, 하지만 자살은 불법이기에 하지 않을 듯하다고 답한다.

 

 

-작성중-

모든 것들은 있고, 있는 것들이 모든 것들이다. 

McX는 자신과 콰인이 존재론적 의견 불일치가 생기는 대상의 '존재'를 상정한다. 그러나 콰인으로서는 이러한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문제의 정식화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문제는 콰인이 McX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그의 존재론에 개입하게 된다는 점이다. 

콰인은 McX와 존재론적 의견 불일치가 생기는 대상의 '존재'를 상정하면서, 그러한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신의 입장과 모순을 겪게 된다.

이 경우 존재론적 의견 갈등에서 부정적 입장에 선 사람은 늘 불리해지는 듯이 보인다.

McX는 모순 없이 역설에 빠지지 않고 일관되게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대상으로서, 예를 들어 페가수스 같은 허구적 대상을 승인한다. 그러나 페가수스라는 관념을 떠올리고 이에 대해 존재를 부정하는 사유를 진행하는 데에서 역설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페가수스가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콰인은 여기에서 대상과 그에 대한 관념 사이의 초보적인 혼동이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사유 과정에서 어떤 대상의 존재 부정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적 대상이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an unactualised possible)을 가지고 있다는 좀 더 세련되고 처치 곤란한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자를 Wyman이라 해 보자. 페가수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라는 속성을 지니지 않는 것이다. 현실화가 속성일 때,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붉지 않다는 것만큼이나 평이한 서술이며 두 서술 모두 대상의 존재에 관련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여기에서 '현실화'라는 속성과 그 속성을 담지할 무언가의 '존재'가 구분되고 있는데, 이는 앞서 A는 그 존재를 주장하고 B는 그 비존재를 주장하는 동일대상의 '상정'과 유사한 구도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Wyman은 통상적인 '존재(Existence)'를 현실성(actuality)에 한정시키고, 그 영역 바깥에 페가수스가 비실현된 가능성으로서 '있다'고 여전히 주장하고자 시도한다. 하지만 페가수스의 비존재를 주장하는 콰인은 시공간 상의 물리적 구현만을 기준으로 한 것도 아니고 수학적 대상(예를 들어 27의 세제곱근) 또한 존재한다고 말하는 그러한 의미에서 페가수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Wyman이 존재를 현실성에 한정시켜서 페가수스의 비존재를 비현실화되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페가수스가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는 '있다'는 주장을 고집한다면, 이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페가수스에 대한 비존재 주장을 '페가수스는 있지 않다'라는 주장으로 바꿀 수 있다.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 있는 것들을 존재론에 포함시킬 경우 가능성들 사이의 개별화, 동일성, 차별성, 온갖 지점에서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들이 연쇄된다. 

존재가 부정되는 대상을 McX처럼 그 부정이 성립하기 위해서라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하든, Wyman처럼, 역시나 그 부정이 성립하기 위해, 실현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존재하진 않더라도 비실현된 가능성으로서는 있다고 주장하든, 같은 논리에서 모순된 것(예를 들어, 버클리 대학의 둥근 사각형 지붕)까지 있다고 허용하게 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모순된 것은 애초에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는 식으로 Wyman은 공격을 비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모순된 것에 대해 그것이 있지 않다는 말이나 구절은 무의미하다고 대응한다. 이에 대해 콰인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근거로 모순에 대한 범용 검증의 체계적 방법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반박한다. 따라서 모순이 무의미의 기준이라면 무엇이 무의미한 발화인지도 결정할 수 없다. 

그리고 콰인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러셀의 기술구 이론을 가져온다. 명사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고도 이해될 수 있는 방법으로, 명사처럼 보이는 것을 기술구들로 분석하는 일을 제안하는 것이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둥글고 사각형이며 버클리 대학의 지붕이고, 다른 아무것도 둥글고 사각형이며 버클리 대학의 지붕이지 않다.'라는 문장은 둥근 사각형 지붕이라는 '복합기술구'를 속성을 기술하는 술어들로 환원시키고 여기에서 존재주장을 배제시킨다. 허구적 존재 혹은 존재 부정의 대상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향한 객관적 지시가 요구된다는 '잘못'은 이제 양화사 혹은 종속 변수가 그 부담을 감당함으로써 개선된다. 이런 식으로 '페가수스'를 날개가 달렸다거나 말이라는 유에 속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기술구로 환원시킬 수 있고, 혹은 이런 규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페가수스'가 불분명한 관념이라면 그냥 '페가수스스러움'이나 '페가수스함' 따위의 조어를 만들 수도 있다. 아무튼 어떤 양화사나 종속 변수를 놓고 '페가수스'라는 말 자체가 특정 대상의 존재를 요구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 페가수스의 이데아 같은 것 혹은 페가수스 관념에 상응하는 속성 같은 보편자의 존재여부는 문제시될 수는 있겠으나 지금의 논의에서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제 앞서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의 불리함은 해소되었고, 특정 속성을 만족하는 객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쪽은 그러한 존재론에 개입하지만 그러한 객체가 '있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해당 존재론에 개입하지 않고 남을 수 있다. 프레게의 의미와 명명 사이의 구분도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별'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들이 가리키는 개체, 대상은 동일하다. 반면 McX와 Wyman은 의미를 이름으로 혼동하여 '페가수스'가 이름으로서 단적으로 어떤 '존재하는' 대상을 지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McX는 명명된 대상이 되는 페가수스와 '페가수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혼동하면서, 그 단어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해 반드시 대상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의미하기와 명명하기의 구분을 고려하면,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은 오히려 정신 속 관념들이라 할 때 더욱 설명이 용이할 것으로도 보인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별'의 의미 차이를 설명하는 데에 서로 다른 '존재하는 대상들'이 필요하진 않고, 그것들을 의미부여하는 사유과정이 오히려 더 중요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McX는 '페가수스'를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페가수스를 요청하고 있으므로, 그가 혼동하는 것은 페가수스라는 관념과 '페가수스'라는 단어가 된다. 반면 Wyman은 실현여부를 구분함으로써 McX의 오류를 피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체를 전제하지 않고는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극복되었다. 반면에 이 과정에서 보편자가 전제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의미와 명명의 구분을 받아들이더라도, McX는 여전히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보편자들의 존재가 요청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McX는 의미라는 어떤 추상적 개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콰인은 그런 개체를 허용하지 않더라도 단어와 진술은 여전히 유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뜻을 더욱 분명하게 말하거나 서로 동의하거나 또는 의견이 불일치하는 데에는 딱히 보편자의 존재가 요청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콰인에 따르면 존재론적 개입은 긍정문이 참이기 위해 변항의 적용 범위인 개체들에 어떤 것이 포함되어야만 할 때, 오직 그 경우에만 발생한다. '어떤 개들이 희다.' 라는 긍정문이 참이려면, '어떤 것들'이 적용되는 범위가 되는 그 개체들에는 흰 개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흼'이나 '개'라는 것 자체가 요청되진 않는다. '어떤 종들은 타가수정이다'라는 문장이 참이려면, 이 경우에는 추상물인 종들이 변항 적용 범위가 되는 개체들 중에 있어야 한다. 종속변수인 양화사가 거칠게 말하자면 일종의 지시사로서 근본적으로 이름의 역할을 담당하고, 여타의 것들은 의미를 구성하는 기술구들로 분석될 수 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특정한 존재론적 개입이란 명제의 참이 성립하기 위해 요청되는 양화사의 적용범위에 한정된다. 

실재론-논리주의는 추상적 개체들을 지시하는 데에 종속 변수들을 무차별적으로 허용한다. 개념론-직관주의는 보편자들이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하며, 특정 기초들로부터 성립하는 추상적 개체들에 제한적으로 변수 지시를 허용한다. 유명론-형식주의는 고전 수학을 규칙들에 따른 기호 조작으로 간주하기에 보편자 지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이나 주의주장들은 종속변수와 존재론의 관계 속에서 그 함의와 귀결을 알 수 있지만, 그래서 무엇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각각의 존재론적 입장에서, 반대하는 존재론에는 속하되 옹호하는 존재론에는 속하지 않는 대상을 자신의 존재론에서 종속변수가 지시하는 일을 불허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존재론의 차이, 종속 변수가 지시 가능한 범위의 차이를 말할 수 있으므로 이런 식으로 존재부정 서술 또한 일관되게 가능하다.

이상의 논의는 각각의 존재론에서 존재론적 개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의미론적 접근을 통해 보여주지만, 존재론들 사이의 우열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산재한 무질서하게 유전하는 경험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처리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단순성의 원칙에 따라 이러저러한 입장을 채택하거나 폐기할 수 있으며, 이는 열린 추구의 장일 따름이다.

 

> 존재 부정에서 개체 전제 요청이라는 주장과 이에 대한 반박. 러셀 기술구 이론과 프레게의 의미와 지시 구분. 

> 의미론적 차원에서 보편자 요청과 존재론적 개입의 의미. 양화사의 지시 범위에 추상체, 보편자가 포함될 수 있으나 이는 단어가 이름으로 기능할 때 그 지시 대상의 존재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특정 존재론에서 양화사의 지시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또 다른 존재론에서는 포함할 경우, 이 둘 사이의 의견 불일치는 '모순의 무의미성' 같은 역설에 부딪치는 일 없이 일관되게 설명 가능하다.

> 존재론적 개입에 대한 의미론적 해명과 존재론 그 자체의 차이. 각각의 개념도식에서 이루어지는 존재론적 개입은 의미론적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으나, 그것으로 여러 존재론들 사이의 우열을 평가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이 둘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작성중-

1. 추상적 개체

 

  경험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속성, 집합, 관계, 수, 명제 등과 같은 어떤 종류의 추상적 개체들에 대해서든 회의적이다. 그들은 보통 실재론자들(중세적인 의미에서) 보다는 유명론자들에 더 많이 공감한다. 가능한 한 그들은 추상적 개체들에 대한 어떤 지시도 피하고자 하고 종종 유명론적 언어라 불리는 것, 즉, 그런 지시들을 포함하지 않는 언어에 머무르고자 한다. 그렇지만, 특정한 과학적 맥락 내에서 그런 지시들을 피하기란 거의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수학의 경우, 일부 경험주의자들은 수학 전체를 단순 연산으로, 아무런 해석도 주어지지 않거나 주어질 수 없는 형식적 체계로 취급함으로써 그럴 방안을 강구하고자 한다. 따라서, 수학자는 수, 함수, 무한 집합이 아니라 단지 주어진 형식적 규칙들에 따라 조작되는 무의미한 기호와 공식에 관해 논하는 것이라 이야기된다. 물리학에서는 그 의심받는 개체들을 회피하기가 더욱 어렵다. 물리학의 언어가 보고와 예측을 통한 의사소통에 종사하고 따라서 단순 연산으로 취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 개체에 대해 회의적인 물리학자는 어쩌면 물리학의 언어에서 특정 부분, 실수를 시공간 좌표나 물리적 규모의 수치로 지시하고 함수, 극한, 기타 등등을 지시하는 부분을, 번역되지 않고 또한 번역될 수 없는 것으로 선언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더 그럴 듯한 것은 주말에 공언하는 높은 기준의 도덕률에 부합하지 않는 많은 일들을 일상 속에서 찝찝해 하면서 저지르는 다른 누구든 그렇듯이, 께름칙한 기분으로 그 모든 것들에 관해 그냥 말하리란 것이다. 최근 추상적 개체들에 대한 문제는 의미론, 의미와 참에 대한 이론과의 관련 속에서 재발해왔다. 일부 의미론자들은 특정 표현들이 특정 개체들을 지시한다고, 그리고 그 표현들이 이러한 지시된 개체들 사이에 구체적인 물질적인 것들만이 아니라 추상적 개체들, 술어에 의해 지시되는 속성과 문장에 의해 지시되는 명제까지 포함한다고 말한다.[각주:1] 다른 이들은 경험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뒤흔들어놓고 플라톤 류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으로 후퇴시키는 이러한 절차에 강력하게 반발한다.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논쟁적 주제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추상적 개체들을 지시하는 언어에 대한 수용의 본성과 함축들이 일반적 차원에서 먼저 논의될 것이다.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일은 플라톤적 존재론을 포괄하는 일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주의와 그리고 엄격한 과학적 사고와 완벽하게 양립 가능한 것이다. 다음으로 의미론에서 추상적 개체들의 역할에 대한 특수한 질문이 논의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명확화가 수학, 물리학, 의미론, 혹은 다른 어느 분야든 그 안에서 활동하면서 추상적 개체들을 수용하고 싶어할 이들에게 유용할 것임이 기대된다. 그것은 그들이 유명론적 양심의 가책을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2. 언어적 골조작업

 

속성, 집합, 수, 명제는 있는가? 이러한 그리고 이와 연관된 문제들의 본성을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개체들의 존재나 실재성에 관한 두 가지 질문들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을 인지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수적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의 언어로 새로운 종류의 개체들에 관해 말하길 바란다면, 그는 새로운 규칙들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말하기 방식들에 대한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절차를 문제가 되는 새로운 실체들을 위한 언어적 골조작업의 구축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이제 우리는 존재에 대한 두 종류의 질문들을 구분해야만 한다. 첫째로, 그 골조작업 내에서 새로운 종류의 특정 개체들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있다. 우리는 이를 내재적 질문이라 부른다. 두 번째로, 개체들의 체계 전체의 존재 또는 실재성에 관한 물음들은 외재적 질문이라 불린다. 내재적 질문과 그에 대한 가능한 답은 새로운 형식의 표현들의 도움으로 정식화된다. 그 답은 해당 골조작업이 논리적인 것인지 혹은 사실적인 것인지에 따라 순전히 논리적 방식으로 또는 경험주의적 방식으로 발견될 것이다. 외재적 질문은 더욱 면밀한 고찰이 필요한 문제적 성격의 것이다.

  사물세계. 일상어를 가지고 다루어지는 가장 단순한 종류의 개체들을 예로 들어 보자. 시공간적으로 정돈된 가시적 사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체계. 일단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그 골조작업과 함께 사물 언어를 수용하고 나면, 우리는 내재적 질문들을 제기하고 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책상 위에 하얀 종이 조각이 있는가?" "아서 왕은 실제로 살았었나?" "유니콘과 켄타우로스는 현실인가 아니면 단지 허구인가?" 같은 것들. 이러한 질문들은 경험주의적 탐구들에 의해 답변될 것이다. 관찰 결과는 가능한 답변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 증거로서 특정 규칙들에 따라 평가된다. (이 평가는 통상 의도적인 합리적 절차 보다는 습관의 문제로서 수행된다. 하지만 합리적 재구축에 있어서, 평가 기준을 명확히 밝히는 것은 가능하다. 이는 심리학과 구별되는 한에서 순수한 인식론의 주요 작업 중 하나이다.) 이러한 내재적 질문에서 출현하는 실재성 개념은 경험주의적, 과학적, 비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어떤 것을 실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으로 인지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 사물들의 체계 안으로 특정 시공간 위치에 포함시키는 데에 성공하여 실재라고 인지된 다른 사물들과 합치시키도록, 그 골조작업의 규칙들에 따라 그리하도록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우리는 그 사물 세계 자체의 실재성에 대한 외재적 질문을 분리해내야만 한다. 앞선 질문들과 반대로, 이 질문은 일상인에 의해서도 과학자에 의해서도 제기되지 않고 오직 철학자에 의해서만 제기된다. 실재론자들은 긍정적 답변을, 주관주의적 관념론자들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고, 그 논쟁은 해결된 적 없이 수 세기 동안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논쟁은 해결될 수 없는데, 그것이 잘못된 방식으로 골조가 잡혔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의미에서 실재적이라는 것은 그 체계의 요소로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개념은 그 체계 자체에는 유의미하게 적용될 수가 없다. 사물 세계 자체의 실재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자들은 아마도 그들의 정식화가 제시할 것으로 보이는 이론적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적인 질문, 우리 언어의 구조에 관한 실천적인 결정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문제시된 골조작업 내에서 그러한 표현 형식을 수용하고 사용할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특수한 사례의 경우, 통상 아무런 의도적인 선택도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사물 언어를 일찌기 우리의 삶에서 당연한 문제로 받아들여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이를 결단의 문제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물 언어를 계속해서 사용할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후자의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감각자료와 여타 '현상적' 개체들에 대한 언어에 제한할 수 있을 것이고, 혹은 관습적인 사물 언어에 대해 그 외의 구조를 가지고 대안을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는, 끝으로, 말하기를 관둘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사물 언어를 수용하기로 결정한다면, 그가 사물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데에 반대할 어떠한 반론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사물 세계의 현실성에 대한 믿음을 그가 수용한 것처럼 해석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 믿음이나 단언이나 가정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이론적 물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 세계를 수용한다는 것은 단지 언어의 특정 형식을 수용한다는 것, 달리 말해 진술들을 형성하고 검토하고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규칙들을 수용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사물 언어의 수용은 형성된 관찰결과들에 기반하여 특정 진술들에 대한 수용, 믿음, 단언으로도 이끈다. 하지만 사물 세계의 현실성에 대한 논제는 이러한 진술들 사이에 끼어 있을 수 없으니, 그것이 사물 언어 내에서 정식화될 수 없거나, 보이기로는, 여느 이론 언어에서든 정식화될 수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사물 언어를 수용한다는 결정은, 그 자체로는 인지적 본성에 속하지 않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으로 이론적 지식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인데, 언어적인 혹은 다른 규칙들의 수용에 관련된 여타 의도적 결정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할 것이다. 그 언어가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의도된, 예를 들어, 사실적 지식을 두고 의사소통하려는 목적은 어떤 요소들이 그 결정에 적합한지 결정할 것이다. 사물 언어 사용의 효용성, 유익성, 단순성은 그 결정적 요소들에 속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성질들에 관련된 질문들은 더욱이 이론적 본성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실재론에 대한 질문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 질문들은 긍정/부정 의문문이 아니라 정도에 대한 질문들이다. 관습적 형태에서 사물 언어는 일상생활 대다수 목적에 부합하는 높은 정도의 효용성을 갖추고 작동한다. 이는 우리의 경험 내용에 기반한 사실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은 말로 기술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사물 언어가 효용성이 있다는 사실은 사물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는 그 대신에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은 사물 언어 수용을 권장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수의 체계. 사실적 본성 보다는 차라리 논리적 본성에 속하는 체계의 사례로 자연수 체계를 고려해 보자. 이 체계를 위한 골조작업은 적절한 규칙들을 가지고 새로운 표현들을 언어에 도입함으로써 구축된다. (1) "다섯"과 같은 숫자와 "책상에 다섯 권의 책이 있다" 같은 문장형식들 (2) 새로운 개체들을 위한 일반용어 "수"와 "다섯은 수이다" 같은 문장 형식들. (3) 수의 속성들 (예를 들어 "홀," "소(素)"), 관계들 (예를 들어, "보다 더 크다"), 함수들 (예를 들어 "더하기"), 그리고 "둘 더하기 셋은 다섯이다" 같은 문장 형식들을 위한 표현들. (4) 관습적 연역 규칙들을 동반하는 수적 변수들("m," "n," 등등)과 보편 문장을 위한 양화사들 ("모든 n에 대하여, ...") 그리고 존재 문장들("다음과 같은 n이 있다.).

  여기에서 다시 내재적 질문, 예를 들어 "100보다 더 큰 소수가 있는가?" 같은 질문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그 답은 관찰에 근거한 경험적 탐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표현들을 위한 규칙들에 근거한 논리적 분석에 의해 발견된다. 그러므로 그 답변은 여기에서 분석적으로, 즉, 논리적으로 참이다. 

  이제 수의 존재 혹은 실재성에 관련된 철학적 질문의 본성은 무엇인가? 우선, 긍정적인 대답과 함께 새로운 용어로 정식화될 수 있는 내재적 질문이 있는데, 말하자면, "수들이 있다" 혹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수인 그러한 n이 있다."라는 새 용어로 정식화될 수 있다. 이러한 진술은 "다섯은 수이다"라는 분석적 진술로부터 도출되고 그러므로 그 자체로 분석적인 진술이다. ("100만보다 더 큰 소수가 있다"와 같은 진술이 비슷하게 분석적이지만 사소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에 대비하여) 그것은 사소한 진술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새 체계가 공집합이 아니라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즉각 "다섯"과 같은 단어들이 새로운 변항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진술하는 규칙으로부터 보여진다. 그러므로 "수들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내재적인 뜻으로 이해하는 자들 중 부정적 답변을 선언하거나 진지하게 고려라도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수들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진지한 철학적 문제로 취급하고 어느 입장으로든 지난한 논증을 제공하는 철학자들이 내재적 물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추정을 설득력있게 만든다. 더욱이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당신은 수들에 대한 골조 작업을 우리가 받아들일지 여부를 묻는 것이 그것이 공집합일지 아닐지 여부가 될 것이라 보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도 대답할 것이다. "전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골조 작업의 수용 여부보다 우선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수의 존재론적 상태에 대한 물음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의도하는 바를 설명하려 할지도 모른다. 수들이 소위 실재성이라는(일종의 이상적 실재성, 사물 세계의 물질적 실재성과는 다른) 혹은 실체나  "독립적 개체들"의 상태라는 특정한 형이상학적 특성을 가지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철학자들은 공통의 과학적 언어로 그들의 문제를 정식화해 주지 못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의 판단은 그들이 그 외재적 질문에 그리고 가능한 답변에 어떠한 인지적 내용도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들이 명확한 인지적 해석을 제공하지 않는 한 또 그리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질문이 유사질문, 즉, 이론적 질문의 형식으로 위장되었지만 실상 비-이론적인 질문이라는 우리의 의심은 정당화된다. 수들에 대한 골조 작업을 구성하는 새로운 언어적 형식들이 해당 언어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지금의 경우 실천적 문제이다. 

 

명제 체계. 새로운 변항들 "p," "q," 등등은 여느 (평서문) 문장이든 이런 종류의 변항들을 대체할 수도 있도록 하는 규칙과 함께 도입된다. 이는 본래의 사물 언어 문장들에 더하여 그 언어에 도입되어왔을 어떤 종류의 변항들이든 그것을 지닌 모든 보편 문장 또한 포함한다. 더욱이, 보편 용어 "명제"가 도입된다. "p는 명제이다"는 "p 또는 ~p" (혹은 분석 문장만을 산출하는 여타 문장 형식) 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 그러므로, "...는 명제이다" 형식의 모든 문장은 (생략된 위치에 어떤 문장이 오는 경우든) 분석적이다. 이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에 적용된다.

(a) "시카고는 크다는 명제이다" 

(절 구분을 해줘야 한다는 건 차치하기로 하자.) 논항 표현이 문장형태인 술어들이 허용될 것이다. 이러한 술어들은 확장적인 것일 수도 (예를 들어 통상적인 진리-함수적 연결사)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능," "필연" 등의 양상 술어들). 새로운 변항들의 도움으로 보편 문장이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b) "모든 p에 대하여, p이거나 not-p이다."

(c) "p가 필연적이지 않고 not-p가 필연적이지 않은 그런 p가 있다." 

(d) "p가 명제인 그런 p가 있다."

(c)와 (d)는 존재에 대한 내재적 단언이다. "명제들이 있다"라는 진술은 (d)를 뜻할 것이다. 이 경우 ((a)로부터 따라나오기에) 그것은 분석적이고 사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만일 그 진술이 외재적인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비인지적이다. 

  명제적 골조작업의 언어적 표현들에 대한 (여기에서는 극히 일부만 간략히 표현된)  규칙 체계가 해당 골조작업을 도입하기에 충분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일이 중요하다. 명제의 본성에 관련된 어떤 추가적인 설명도 (예를 들어 묘사된 체계의 구성요소들, 변항 "p," "q"의 값 등) 이론적으로는 필수적이지 않은데, 제대로 했다면 그 규칙들로부터 그것들이 도출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명제들은 (러셀의 이론에서처럼) 심리적 사건들인가? 해당 규칙을 일별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걸 보게 되는데, 왜냐하면 다른 식으로 존재 명제는 다음과 같은 이하의 형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문제가 되는 개인의 심적 상태가 이러저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면, 이러저러한 그런 p가 있다." 존재 진술에서 ((c), (d) 등에서 처럼) 심리적 조건들이 지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제들이 심리적 개체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더욱이 언어적 개체의 (표현, 표현들의 분류 등) 존재에 대한 진술은 언어에 대한 지시를 포함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존재진술 내에 그러한 어떤 지시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제들이 언어적 개체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진술들 내에서 주체(관찰자나 인식자)에 대한 아무런 지시도 없다는 (예를 들어 X씨에게 필연적인 그러한 p가 있다 같은 건 전혀 없다) 사실은 명제들이 (또한 필연성 같은 명제 속성들이) 주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설령 이러한 혹은 이와 유사한 종류의 성격규정들이 엄밀히 말해서 필수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인 유용성은 있을 것이다. 그런 규정들이 주어지면, 체계의 필수 요소로서가 아니라 단지 규칙들만을 배울 때보다 사용자가 더 쉽게 언어를 배우도록 해주는 실마리나 도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각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성격규정은 물리학자가 종종 초심자에게 제공하는 체계-외부적 설명에 유비된다. 원자를 공처럼, 전자기장을 탄성을 가진 장의 장력과 진동처럼 상상해 보라는 식이다. 그렇지만 사실상 정확히 원자나 장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문제가 되는 이론에 대한 물리법칙 내에 명백하게 포함된 것이다.[각주:2]

 

사물 속성들의 체계. 사물 언어는 "붉은," "단단한," "돌," "집," 등등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사물들이 어떠한지를 기술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리고 그 어휘들 또는 일반 용어 "속성"이 그에 대응할 "f," "g" 등의 새로운 변항들을 도입할 수 있다. "붉은은 속성이다," "붉은은 색이다," "이 두 장의 종이는 최소한 한 가지 색을 공통으로 지닌다" ("f가 색인 그러한 f가 있고, ...") 같은 문장들을 허용하는 새 규칙이 마련된다. 마지막 문장은 내재적 단언이고 경험적, 사실적 본성에 속한다. 하지만 속성의 실재성에 대한 철학적 진술, 외재적 진술은 인지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 

 

정수와 유리수 체계. 자연수 골조 작업을 포함하는 언어에 우리는 우선 자연수들 사이의 관계로서 (음과 양의)정수를 도입할 것이고 정수들 사이의 관계로 유리수를 도입할 것이다. 이는 새로운 유형의 변항들, 그 변항들에 대응하는 표현들, 일반 용어 "정수"와 "유리수"의 도입을 포함한다.

 

실수 체계. 유리수에 기초하여, 실수는 유리수의 특수한 종류의 집합들 (부분들)로서 도입될 것이다 (데데킨트와 프레게에 의해 개발된 방법론에 따라). 여기에서 다시 새로운 유형의 변항들, 그 변항들을 채울 표현들(예를 들어 루트2), 일반 용어 "실수"가 도입된다. 

 

물리학을 위한 시공간 좌표 체계. 새로운 개체들은 시공간 질점들이다. 그 각각의 질점은 소위 그 질점의 좌표들이라는, 세 개의 공간 좌표와 한 개의 시간 좌표로 이루어진 네 실수들의 순서쌍이다. 시공간 질점 혹은 영역의 물리적 상태는 질적인 술어들을 통해 기술되거나 수를 물리적 규모의 수치로 (예를 들어 질량, 온도 같은 것들) 간주함으로써 기술된다. 사물들의 체계(시공간 질점들을 포함하지 않고 오직 대상들 사이의 시공간적 관계를 통해 연장된 대상들만을 포함하는) 로부터 물리적 좌표 체계로의 이행은 다시금 결단의 문제이다. 특정 속성들에 대한 우리의 선택은 그 자체로는 설령 이론적이지 않더라도, 논리적인 것이든 사실적인 것이든 이론적 지식에 의해 제안된다. 예를 들어, 유리수나 정수보다 실수를 좌표로 선택하는 일은 경험 사실들에 의해서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주로 수학적 단순성에 대한 고려에 의한 것이다. 유리수 좌표로 제한하는 일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 어떤 실험적인 지식과도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데, 그 어떤 측정 결과든 유리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제한은 일상적인 기하학(예를 들어 한 변이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무리수 값 √2를 가진다고 말하는) 사용을 가로막아서 대단히 복잡한 문제들로 이끈다. 다른 한편 둘이나 넷보다 셋의 공간좌표를 사용하기로 결정하는 일은 통상적인 관찰 결과들에 의해 강력하게 제안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심령술적 강신회에서 목격되었다고 주장되는 특정 사건들, 예를 들어 밀폐된 상자에서 빠져나오는 공 같은 사건들이 여느 합리적 의심도 극복하고 확정되었더라면, 네 공간 좌표 사용이 권장될 만한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이 경우에 내재적 질문은 경험적 관찰에 의해 답변될 경험적 질문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물리적 공간과 물리적 시간의 실재성에 대한 외재적 질문들은 사이비 질문들이다. "(실제로) 시-공간 위치가 있는가?" 같은 질문은 애매하다. 그 질문은 내재적 질문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 경우 물론 긍정 답변은 분석적이고 사소한 것이 된다. 아니면 그 질문은 외재적 의미일 수도 있다. "우리 언어 속에 그러한 형식들을 도입하도록 할까?" 이 경우 그 질문은 이론적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이고, 단언보다는 결정의 문제이며, 따라서 그 제안된 정식화는 오도적일 것이다. 혹은 끝으로, 그 질문이 다음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은 문제가 되는 그런 언어 형식의 사용이 편리하고 유익할 그런 종류의 경험인가?" 이는 사실적, 경험적 본성에 대한 이론적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정도의 문제에 관련된다. 그러므로 "실제인가 아닌가"라는 식의 정식화는 부적절할 것이다. 

 

 

3. 일종의 개체에 대한 수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위에서 개괄된 다양한 사례들에 공통되는 새로운 종류의 개체들이나 성질들의 도입을 포함하는 상황들의 본질적인 특징들을 요약해 보도록 하자. 

  새로운 종류의 개체 수용은 언어에 있어서 새로운 일련의 규칙들에 부합하여 사용될 새로운 표현 형식들의 골조작업을 도입함으로써 표현된다. 문제가 되는 종류의 개별 개체에 대한 새로운 명칭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부 명칭들은 그 새로운 골조작업의 도입 이전부터 이미 해당 언어에서 출현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물 언어는 속성들에 대한 골조작업이 도입되기 전부터 "푸르다"와 "집"과 같은 유형의 단어들을 확실히 포함한다. 또한 그 언어는 "나는 열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와 같은 형태의 문장에서 "열"과 같은 단어들을 수에 대한 골조작업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후자의 사실은 문제가 되는 해당 유형 상수-새로운 골조작업이 도입된 이후 새로운 유형의 개체들의 명칭들로 간주되는-의 출현이 새로운 유형의 개체들에 대한 수용의 확정 신호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런 상수의 도입은 골조작업 도입의 본질적 단계로 간주되지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본질적 두 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새로운 유형의 개체들에 대한 일반 용어, 상위 차원 술어의 도입으로, 이는 우리에게 이 유형에 속하는 임의의 특정 개체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다. (예를 들어 "붉음은 속성이다," "다섯은 이다.") 둘째로, 새로운 유형의 변항들의 도입이다. 새로운 개체는 이 변항들의 값이다. 상수(그리고 완결된 복합 표현들, 그런 것들이 있다면)는 변항을 대체할 수 있다.[각주:3] 변항의 도움으로 새로운 개체에 관한 보편 문장이 정식화될 수 있다. 

  언어에 새 형식들이 도입된 이후, 그 형식들의 도움으로 내재적 질문과 그에 대한 가능한 답을 정식화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경험적이거나 논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참인 답은 사실적으로 혹은 분석적으로 참이다. 

  우리는 그러한 내재적 질문으로부터 외재적 질문, 새로운 개체 체계 총체의 존재나 실재성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명확히 구분해야만 한다. 여러 철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질문을 새로운 언어 형식들의 도입에 앞서 제기되어야만 하고 또한 답해져야만 하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간주한다. 이후의 도입은 오직 그 실재성에 대한 질문에 긍정적 답변을 제공하는 존재론적 통찰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에만 적법하다고 그들은 믿는다. 이러한 관점과 대조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말하기 방식의 도입이 어떤 이론적 정당화도 필요치 않다고, 왜냐하면 그 도입이 아무런 실재성에 대한 단언도 시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개체에 대한 수용"에 대해 말할지도 모르는데(또한 그렇게 해왔고), 이러한 말하기의 형식이 관습이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구문이 우리에게 새로운 골조작업에 대한 수용, 즉, 새로운 언어 형식의 수용 이상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그 구절은 "해당 개체의 실재성"에 대한 가정이나 믿음 혹은 단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아야만 한다. 그런 어떠한 단언도 없다. 개체 체계의 실재성에 대한 진술로 주장되는 것은 인지적 내용이 없는 유사-진술이다. 확실히,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천적 질문이지, 이론적 질문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언어 형식을 수용할지 하지 않을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 수용은 참으로도 거짓으로도 판정될 수 없는데, 그것이 단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해당 언어가 의도하는 목적을 위해 다소간 편리한지, 유익한지, 기여하는지만 판정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판단은 그런 종류의 개체를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결정에 동기를 부여한다.[각주:4] 

  그래서 언어적 골조작업의 수용은 문제가 되는 개체의 실재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주의주장을 함의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중요한 구별에 대한 경시 때문에 일부 현대 유명론자들이 추상적인 유형의 변항들에 대한 승인을 "플라톤주의"로 분류하는 것으로 보인다.[각주:5] 이는, 최소한으로 말하자면, 극도로 오도할 위험이 있는 용어법이다. 그것은 물리학 언어를 그 실수 변항들과 더불어(단지 계산이 아니라 의사소통 언어로) 수용하는 모두의 입장이 플라톤주의로 불리게 될 부조리한 귀결로 이끈다. 설령 그가 플라톤적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엄격한 경험주의자라 하더라도 말이다. 

  역사와 관련된 간략한 언급이 여기에 추가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외재적 질문이라 부른 그러한 질문의 비인지적 성격은 이미 Moritz Schlick의 주도 하의 비엔나 서클에 의해 재인되고 강조된 바 있다. 논리적 경험주의 운동이 그 그룹에서 기원하였다. Ludwig Wittgenstein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 비엔나 서클은 외부 세계 실재성에 대한 논제와 그 비실재성에 대한 논제 모두를 유사진술로 치부하여 거부했다.[각주:6] 보편자의 실재성(지금 우리 용어법으로는 추상적 개체들)에 대한 논제와 그것들이 실제이지 않는다는 그리고 그것들의 이름으로 주장되는 것들은 아무런 이름도 아니고 단지 flatus vocis(허튼 소리)에 불과하다는 유명론적 논제 모두에 대해 사정은 같다. (유사진술에 대한 명백한 부정은 그 역시 유사-진술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비엔나 서클의 회원들을 종종 그리 하듯 유명론자들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대다수 유명론자들의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유물론자들과 실재론자들 다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기본적으로 반-형이상학적이고 과학지향적인 태도에 주목한다면, 그들의 우연한 유사이론적 정식화를 차치할 때, 물론, 비엔나 서클은 이런 철학자들에 그 적대자들보다는 훨씬 더 가까이 있었다고 말하는 게 참일 것이다.

 

 

4. 의미론에서 추상적 개체

 

추상적 개체의 적법성과 지위의 문제는 최근 다시 의미론과 관련하여 논쟁적인 담론으로 이끌었다. 의미론적 의미 분석에서 언어의 특정 표현들은 종종 특정 언어-외적 개체들을 지시한다고 (혹은 명명하거나 표시하거나 의미하거나 언급한다고) 이야기되곤 한다.[각주:7] 물리적 사물이나 사건(시카고 또는 카이사르의 죽음)이 피지시체로 간주되는 데에까지는, 아무런 심각한 의구심도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 경험주의자들에 의해, 피지시체로서의 추상적 개체들에 반대하여, 예를 들어 이하의 유형에 대한 의미론적 진술들에 반대하여 강력한 반론들이 제기되어 왔다. 

  (1) "'붉음'이란 단어는 사물의 속성을 지시한다."

  (2) "'색'이라는 단어는 사물 속성의 속성을 지시한다."

  (3) "'다섯'은 수를 지시한다."

  (4) "'홀'은 수의 속성을 지시한다."

  (5) "'시카고는 크다'라는 문장은 명제를 지시한다."

  이러한 진술들을 비판하는 자들은 물론 "붉음"이나 "다섯" 같은 문제의 표현들의 사용을 거부하지도 않고 이러한 표현들이 의미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의미가 있다는 것은 지시되는 개체라는 뜻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문제가 되는 유형의 각 표현("붉은" 같은 형용사, "다섯" 같은 숫자 등)에 대해 특수한 현실적인 개체, 그 표현이 지시관계에서 그에 대한 것인 그러한 개체가 있다는, 그들의 의미론적 진술에 의해 암시적으로 선전제된다고 그들이 간주하는 그런 믿음을 거부한다. 이러한 믿음은 경험주의나 과학적 사고의 기초적인 원칙들과 양립불가능한 것으로서 거부된다. "플라톤적 실재론"이나 "실체화" 또는 "'피도'-피도 원리" 같은 멸칭들이 그러한 믿음에 결부된다. 마지막 멸칭은 길버트 라일이 그 비판받는 믿음에 부여한 명칭으로, 그의 관점에서, 그 믿음은 유치한 유비추론에 의해 촉발된 믿음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개체, 예를 들어 나의 개 피도라는 개체가 있고 "피도"라는 이름에 의해 지시되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유의미한 표현들에 대해 지시나 명명 관계에 놓이는 특수한 개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피도"-피도에 의해 예화되는 관계 말이다.[각주:8] 비판대상이 되는 그 믿음은 그래서 실체화의 경우, 즉, 이름이 아닌 표현들을 이름으로 취급하는 경우이다. "피도"는 이름인 반면, "붉은"이나 "다섯" 같은 표현들은 이름이게끔 말해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을 지시하도록 말해지는 것도 아니다. 

  골조작업의 수용에 관한 우리의 앞선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이제 피지시체로서 추상적 개체에 관련된 상황을 분명하게 만들 수 있게 해준다. 다음과 같은 진술을 사례로 들어 보자. 

(a) "'다섯'은 수를 지시한다."

  이러한 진술의 정식화는 우리의 언어 L이 우리가 수의 골조작업이라 부른 것, 특히, 수적 변항들과 일반용어 "수"라는표현 형식들을 포함한다는 점을 선전제한다. 만일 L이 이러한 형식들을 포함한다면, 이하는 L 내에서 분석적 진술이다. 

(b) "다섯은 수이다."

  나아가, 진술 (a)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L은 반드시 "지시하다" 혹은 "~의 이름이다" 같은 표현들을 의미론적 지시관계를 위해 포함해야만 한다. 만일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적절한 규칙들이 마련된다면, 이하의 것도 마찬가지로 분석적이다.

(c) "'다섯'은 다섯을 지시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는 ...를 지시한다"라는 형식의 어떤 표현이든 수용된 골조작업 내에서 "..."에 해당하는 용어가 상수라는 점이 가정된다면 분석적 진술이다.) (a)는 (c)와 (b)로부터 귀결되므로, (a)도 마찬가지로 분석적이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수의 골조작업을 수용한다면, 그는 (c)와 (b) 또한 그에 따라 (a)를 참인 진술로 인정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만일 누군가가 특정 종류의 개체들을 위한 골조작업을 수용한다면, 그는 해당 개체들을 가능한 피지시체들로 승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특정 유형의 개체들 혹은 일반적으로 추상적 개체들을 피지시체로서 승인할 가능성의 문제는 그러한 개체들을 위한 언어적 골조작업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된다. "붉은", "다섯" 등과 같은 표현들에 대해 지시자나 이름으로서의 지위를, 추상적 개체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부정하는 유명론적 비판들도, 그 지위에 대해 그 존재와 관련된 의구심을 표명하고 증거를 요구하는 회의적 비판들도, 둘 다 존재에 대한 질문을 이론적 질문으로 취급한다. 물론 그들은 내재적 질문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긍정적 답변은, 우리가 본대로, 분석적이고 사소하며 의심하거나 부정하기에는 지나치게 명백하다. 그들의 의구심은 차라리 개체 체계 그 자체를 향한다. 따라서 그들은 외재적 질문을 의도하고 있다. 그들은 오직 문제가 되는 해당 종류의 개체 체계가 실제로 있다는 점을 확정한 이후에만 우리의 언어에 해당 언어적 형식들을 결합시킴으로써 해당 골조작업의 수용  과정에서 정당화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외재적 질문이 이론적 질문이 아니라 그러한 언어적 형식들을 수용할 것인지 여부의 실천적 문제임을 보았다. 이러한 수용은 이론적 정당화가 필요치 않은데(편의성과 유용성의 관점을 제외하면), 왜냐하면 그 수용은 믿음이나 단언을 함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일은 "피도"-피도 원리가 "괴기스러운 이론"이라고 말한다. 기괴하든 그렇지 않든, 라일은 그것을 이론이라고 부르는 점에서 틀렸다. 그것은 차라리 특정 골조작업을 수용하기로 한 실천적 결정이다. 어쩌면 라일은 해당 원의 선구적 대표자들로 언급하는 존 스튜어트 밀, 프레게, 러셀에 관해서 역사적으로는 옳을지도 모른다. 만일 이러한 철학자들이 개체 체계 수용을 이론으로, 단언으로 간주했었더라면, 그들은 똑같은 낡은 형이상학적 혼동의 희생양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의미론적 방법이 추상적 개체의 실재성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는 것이라 간주하는 것은, 내가 이런 종류의 논제를 형이상학적 사이비-진술로서 거부하기에,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의미론에서의 추상적 개체 사용에 대한 비판은 개체 체계 수용과 내재적 단언, 예를 들어 코끼리나 전자 혹은 100만보다 큰 소수가 있다는 단언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간과한다. 내재적 단언을 구성하는 누구든 확실히 증거를 제시하여 그를 정당화할 책임이 있다. 전자의 경우 경험적 증거로, 소수의 경우 논리적 증명으로 말이다. 내재적 단언의 경우에 옳은 것으로서, 이론적 정당화에 대한 요구는 종종 개체 체계 수용에 대해 잘못 적용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어니스트 네이글은 "무한소나 명제 같은 개체들이 있다는 점을 보장하는 단언을 위한 관련 증거"를 요구한다.[각주:9] 그는 그런 경우에 - 전자의 경우 경험적 증거와 구별하여 - 요구되는 증거를 "광의에서 논리적이고 변증적"인 것으로 특징짓는다. 이를 넘어서서는 관련 증거로 간주될 것과 관련해 제공되는 아무런 실마리도 제시되지 않는다. 일부 유명론자들은 그 추상적 개체 수용을, 허구적이거나 최소한 의심스러운 개체들을 가진 세계에 정주시키면서, 켄타우로스나 악마에 대한 믿음에 유비적으로, 일종의 미신이나 신화로 간주한다. 이는 다시금 앞서 언급된 혼동을 보여주는데, 미신이나 신화는 거짓된 (혹은 의심스러운) 내재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기 책 세 권이 있다" 같은 문맥에서 기수로서 자연수를 고려해 보자. 수에 대한 골조작업의 언어적 형식, 변항과 일반용어 "수"를 포함하는 그 형식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의사소통을 위한 공통 언어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그러한 언어형식의 사용을 위한 명백한 규칙들을 정식화하기란 쉽다. 그래서 이 골조작업의 논리적 특징들은 충분히 분명하다 (반면 여러 내재적 질문들, 예를 들어 산술적 질문들은 물론 여전히 열려 있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수 체계의 존재론적 실재성에 대한 외재적 질문에 관련된 논쟁은 이어진다. 한 철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수들이 현실적인 개체들로서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나에게 숫자화된 골조작업의 언어적 형식을 사용하고 숫자들의 피지시체들로서 수들에 관한 의미론적 진술들을 구성하는 일에 빛을 밝혀준다." 그의 유명론적 반대자는 답한다. "당신은 틀렸다. 어떤 수도 있지 않다. 숫자는 여전히 유의미한 표현들로 사용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름이 아니고, 숫자들로 지시되는 어떤 개체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수'라는 단어와 수적 변항들은 사용되지 않아야만 한다 (그것들을 단지 축약 수단으로 도입할 방식이, 숫자를 유명론적 사물 언어로 번역할 방식이 발견되지 않는 한)." 나는 두 철학자 모두에 의해 적절한 것으로 간주될, 그래서, 설령 실제로 발견되었더라면, 그 논쟁에 결론을 짓거나 최소한 이 대적자들 중 어느 한쪽을 다른 쪽보다 더 가능하게 만들어줄, 그 어떤 가능한 증거도 생각할 수 없다. (수를 프레게-러셀 방법론에 따라 2차 수준의 집합이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해당 논쟁을 해결하지 못하는데, 2차 수준의 집합 또는 속성 체계의 존재를 전자는 긍정하고 후자는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해당 외재적 질문을, 해당 논쟁에 대해 대립하는 양 진영 모두가 해당 진문에 대해 인지적 질문으로 공통된 해석을 제공하기 전까지는, 사이비-질문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양편에 의해 적절하다고 간주되는 가능한 증거에 대한 함축을 포함할 것이다.

  과학의 다양한 분야와 의미론에서 추상적 개체들의 수용에 대한 특수한 종류의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잘못된 해석이 있다. 특정 초기 영국 경험론자들(예를 들어 버클리와 흄)은 즉각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오직 개별자들을 가지고서만 표현되고 보편자들을 가지고서는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 예를 들어 이 붉은 천조각을 가지고서는 표현되지만 붉음이나 색-일반을 가지고서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점에 근거하여 추상적 개체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부등변 삼각형의 경우도 유사하다. 오직 그 예시들이 즉각적인 경험 내에서 발견될 그런 유형에 속하는 개체들만 실재성의 궁극적인 구성요소로 수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고방식에 따라, 추상적 개체의 존재는 오직 누군가가 일부 추상 개체들이 주어져 있는 것들 중에 속해 있다는 것, 혹은 그 추상적 개체들이 주어져 있는 실체 유형들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 경우에만 단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론자들은 감각자료 영역 내에서 아무런 추상 개체도 찾을 수 없었기에, 그 개체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보편자를 개별자로 정의하려는 헛된 시도를 했다. 일부 동시대 철학자들, 특히 버트란드 러셀을 위시한 영국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유사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자료(data, 주어진 것들, 의식 내에 즉각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예를 들어 감각자료, 즉각적으로 지난 경험 등)와 그 자료에 기반한 구조 사이의 구분을 강조한다. 존재나 실재성은 오직 자료에만 부여된다. 구조는 실제적인 개체가 아니다. 그에 부합하는 언어적 표현들은 단지 발화 방식이고 아무것도 실제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유명론자들의 flatus vocis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보편 개념을 비판하진 않기로 하자. (그 보편 개념이 특정 개체들을 수용하고 다른 것들은 수용하지 않는 원칙인 한에서, 어떤 존재론적, 현상학적, 유명론적 유사-진술이든 제쳐두는 한에서, 그것에 대한 어떤 이론적 반론도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만일 이 개념이 추상적 개체를 수용하는 여타 철학자나 과학자가 즉각적인 자료로서 그 개체들의 발생을 그 개념으로써 단언하거나 함의하는 관점으로 이끈다면, 그런 관점은 잘못된 해석으로서 거부되어야만 한다. 물리학에서 시-공간 지점, 전자기장, 전자에 대한 언급들, 수학에서 실수나 복소수 그리고 그 함수들에 대한 언급, 심리학에서 흥분 전위나 무의식 복합체에 대한 언급, 경제학에서 인플레이션 경향에 대한 언급, 그와 유사한 언급들은 이런 종류의 개체들이 즉각적인 자료로서 출현한다는 단언을 함의하지 않는다. 의미론에서 피지시체들로서 추상적 개체들에 대한 언급에 관련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언급들에 반대하는 영국 철학자들에 의한 비판들 중 일부는 아마도 방금 언급된 잘못된 해석 탓에 의미론자를 (유명론자들이 그리 하는 만큼) 그 정도까지 잘못된 형이상학에 속한다고 비난하진 않지만, 잘못된 심리학에 속한다고 비난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들이 추상적 개체를 포함하는 의미론적 방법론을 단지 의심스럽고 아마도 잘못된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만이 아니라, 명백하게 부조리한 것으로, 얼토당토않고 기괴한 것으로까지 간주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이 방법론에 맞서 깊은 공포와 분노를 표한다는 사실은 아마도 앞서 묘사된 종류의 잘못된 해석에 의해 설명될 것이다. 물론, 사실 의미론자는 최소한으로 쳐도 그가 언급하는 추상 개체가 감각에 의해서건 일종의 합리적 직관에 의해서건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경험될 수 있다고 단언하거나 이를 시사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단언은 더욱이 매우 의심스러운 심리학일 것이다. 어떤 종류의 개체가 즉각적 자료로서 출현하고 또 출현하지 않는지에 관한 심리학적 질문은 의미론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된 사례들과 관련하여 물리학, 수학, 경제학에 대해서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각주:10] 

 

 

5 결론

 

의미론적 방법론을 개발하거나 사용하길 바라는 자들에게, 결정적인 질문은 추상 개체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자처하는 그런 질문이 아니라 추상 언어 형식의 사용 혹은 전문용어로 사물(혹은 현상 자료)을 넘어서는 변항들의 사용이 의미론적 분석이 구성된 목적에 비추어, 요컨데 분석, 해석, 해명, 의사소통 언어의, 특히 과학언어의 구축에 편리하고 유익한지 여부이다. 이 질문은 여기에서 결정되지도 논의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예 아니면 아니오의 질문이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의미론적 분석을 이끌어오고 이 작업을 위한 적절한 수단을 생각해온 철학자들 사이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현대 논리에 기반한 더 전문적인 방식에서 C. S. 퍼스와 프레게와 더불어, 대다수 주류가 추상 개체를 수용했다. 이는 물론 사실의 증명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기술적인 의미에서 의미론은 여전히 그 발전의 초기 단계이고, 우리는 방법론에 있어서 가능한 근본적 변화를 준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유명론적 비판이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승인하도록 하자. 만일 정말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까지보다는 더 나은 논증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존재론적 통찰에 호소하는 것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 그 비판은 추상 개체에 대한 모든 언급을 피하면서 더욱 단순한수단으로 본질적으로 다른 방법론과 같은 결과를 이루어내는 의미론적 방법론 구축의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추상 언어 형식의 수용이나 거부는 어느 과학 분과의 어떤 다른 언어 형식의 수용이나 거부와도 마찬가지로 결국 수단으로서의 유용성, 요구되는 노력의 양과 복잡성에 대한 성취되는 결과의 비율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특정 언어 형식을 그 실천적인 활용에서의 성공이나 실패를 통해 시험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교조적 금지를 명령하는 것은 헛된 것 그 이상으로 나쁜 일이다. 이는 적극적으로 유해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과학적 진전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역사는 종교적, 신화적, 형이상학적, 혹은 다른 비합리적 원천들로부터 유래한 편견들에 기반한 그와 같은 금지의 사례들,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발전을 저해했던 그 사례들을 보여준다.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배우도록 하자. 탐구의 어느 특정 분야에서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유용해 보이는 어떤 표현 형식이든 사용할 자유를 인정해 주도록 하자. 해당 분야에서의 작업은 늦든 빠르든 아무런 유용한 기능도 지니지 못한 그런 형식들에 대한 제거로 이끌 것이다. 언어 형식을 단언하는 데에서 주의하고 검토함에 있어서 비판적이기로, 하지만 허용함에 있어서는 관용적이기로 하자.

 

-蟲-

  1. 이 글에서 '문장(sentence)'과 '진술(statement)'은 명백한 (평서문, 명제적) 문장들에 대해 동의어로 사용된다. [본문으로]
  2. 내 책 Meaning and Necessity(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7)에서 나는 명제를 문장에 의해 지시되는 개체로(더 구체적으로는, 문장의 내포로) 간주하는 의미론적 방식을 전개하였다. 그 체계적 전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는 명제의 본성에 관한 일부 비형식적, 체계-외적 설명을 추가했다. 나는 "명제"라는 용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어적 표현에 대해서도 주관적 심리적 발현에 대해서도 사용되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으로는 예화될 수도 예화되지 않을 수도 있는 객관적인 어떤 것에 대해 사용된다. ...우리는 '명제'라는 용어를 특정한 논리적 유형의 어떤 개체에 대해서든, 즉, 언어에서 (평서)문장에 의해 표현될 어떤 개체에 대해서든 적용한다." (p. 27) 명제와 사실 사이의 관계, 거짓 명제의 본성에 관한 좀 더 상세한 논의 이후, 나는 다음과 같이 첨언했다. "앞선 언급들은 명제라는 우리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만일 독자가 이러한 표현들로 명확함을 얻기 보단 더욱 혼란스러워진다면, 그런 표현들을 무시할 수도 있다." (p. 31) (즉, 한 리뷰어가 이해한 바대로, 문장의 내포로서 명제라는 이론 전체가 아니라, 체계-외적 표현들은 무시하라.)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해당 표현들로 혼란스러워진 독자들 중 일부는 그것들을 무시하지 않고 그 표현들에 대한 반론들을 제기함으로써 해당 이론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는 물리학 이론의 도상이나 여타 시각화 자료들을 (어쩌면 정확하게) 비판하며, 그들이 해당 이론을 논박했다고 생각하는 일부 문외한들의 절차에 유비된다. 아마도 지금 이 논문에서의 논의는 한편으로 개체들에 대한 골조작업 도입을 위한 언어 규칙 체계의 역할을, 다른 한편으로는 해당 개체의 본성에 관한 체계-외적 표현들의 역할을 분명하게 만들어주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3. 콰인은 개체 수용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변항 도입의 중요성을 인지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언어 사용이 그로 하여금 개입하게 만드는 존재론은 단순히 그가 그의 변항들의 값의 영역 내에 ... 속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대상들을 구성한다." W. V. Quine, "Notes on existence and necessity," Journal of Philosophy 40 (1943), pp. 113~27, p. 118; "Designation and existence," Journal of Philosophy 36 (1939), pp. 702~9, 그리고 "On universals," Journal of Symbolic Logic 12 (1947), pp. 74-84.와도 비교해 보라. [본문으로]
  4. 이러한 질문들에 관하여 더욱 밀접하게 관련된 관점에 대해서는 Herbert Feigl, "Existential hypotheses," Philosophy of Science 17 (1950), pp. 35~62의 상세한 논의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5. Paul Bernays, "Sur le platonisme dans les mathématiques," L'Enseignement math. 34 (1935), pp. 52~69. W. V. Quine의 경우, 앞선 주석 그리고 이 책의 1장 "On what there is"를 보면, 그는 내가 위에서 강조하는 그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의 일반적 이해에 따르면 논리적 참과 사실적 참 사이에, 의미에 대한 질문과 사실에 대한 질문 사이에, 언어 구조 수용과 해당 언어에서 정식화된 단언의 수용 사이에 엄격한 경계선이 없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사고방식에서 주목할 만하게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이해는 그의 논문 "Semantics and abstract objects," Proceedings of 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80 (1951), pp. 90-6에서 설명될 것이다. 콰인이 위 논문에서 (프레게와 러셀로부터 나온) 수학에 대한 내 기호 논리적(logi'ci?'stic) 개념을 "플라톤적 실재론"으로 분류할 때, (그와의 사적인 대화에 따르자면) 이는 나에게 보편자에 대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주의주장에 대한 동의를 부여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상위 차원의 변항들을 포함하는 수학 언어를 내가 수용한다는 사실을 지시한다는 뜻일 뿐이다. 언어 형식을(콰인의 용어로는 "존재론"을, 이는 내겐 오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택함에 있어서 취해지는 기본적인 태도의 측면에서, 우리 사이에는 이제 합의점이 드러난다. "명백한 조언자는 관용과 실험정신이다" (같은 책, p. 12). [본문으로]
  6. Rudolf Carnap, Scheinprobleme in der Philosophie; das Fremdpsychische und der Realismusstreit (Berlin, 1928); Moritz Schlick, Positivismus und Realismus, repr. in Gesammelte Aufsätze (Vienna: 1938)를 보라. [본문으로]
  7. Rudolf Carnap, Introduction to Semantic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42); 동일 저자, Meaning and Necessity를 보라. 후자의 책에서 내가 이끌어낸 명명-관계 방법론과 내포와 외연의 방법론 사이의 구별은 작금의 논의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지칭"은 현재 논문에서 중립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는 명명-관계나 내포-관계 혹은 외연-관계 또는 다른 의미론적 방법론에서 사용되는 여느 유사한 관계든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본문으로]
  8. Gilbert Ryle, "Meaning and necessity," Philosophy 24 (1949), pp. 69~76. [본문으로]
  9. Ernest Nagel, review of Rudolf Carnap, Meaning and Necessity, 1st edn, Journal of Philosophy 45 (1948), pp. 467~72. [본문으로]
  10. Wilfrid Sellars는, "Acquaintance and description again," Journal of Philosophy 46 (1949), pp. 496~504, pp. 502 f.에서 "의미론적 이론의 지시 관계를 경험에 현전하여 있는 것으로의 재구축인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의 근간을 명백하게 분석한다. [본문으로]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는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마침 『파이돈』을 한동안 붙들고 있게 될 참인지라 이 구절에 오래 눈이 머물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따르던 젊은이들을 위로하고 싶었을 테고, 플라톤은 그런 소크라테스를 추모하면서도 또 제 자신을 위로하고 싶지 않았을까. 불사하는 것이 몸을 갖고 이름이 붙여져 그걸 '나'로 삼아 살다 죽은 그 개인의 영혼은 아마 아닐 것이나, 부디 내도록 행복하고 평안하길 기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https://www.nobelprize.org/prizes/literature/2024/han/225027-nobel-lecture-korean/ 

 

Han Kang – Nobel Prize lecture in Korean - NobelPrize.org

Six prizes were awarded for achievements that have conferred the greatest benefit to humankind. The 12 laureates' work and discoveries range from proteins' structures and machine learning to fighting for a world free of nuclear weapons. See them all presen

www.nobelprize.org

 

이미 여러 매체에서 보도되었고 잘 알려진 강연이지만 다시금, 『채식주의자』를 대기와 중력 안쪽으로 끌고 들어오는 건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강연 만큼이나 기자 회견도 인상 깊었다. 여기저기 영상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랄까. 전문은 따로 올라와 있는 건 없는 듯.

 

여하간에, 매일 하려고 하는 만큼의 일들을 마쳐놓고 책을 펴려다 보니, 뭐 그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여전히 이 책이 마주보고 있는 일이 버겁고 죄스러워서인지, 진도를 빼기도 어렵고 서둘러 읽고 지나갈 결심이 서지도 않고 그렇다. 올해 안에는 다 읽으려나.

 

오직 몸만이 죽는다. 몸만이 죽을 수 있다. 영혼이 지배할 때에 비로소 살아있게 되는 몸은 그 영혼이 떠나면서 살아있지 않게 되고 그것이 몸이 죽는 일이다. 죽은 몸은 더 이상 사람의 몸이 아니라 그저 물체이다. 신체와 물체의 차이. 단일성을 부여하고 통합시키고 유기적인 전체를 성립시켜 또한 유지시켜주는 것, 그것이 조화든 긴장이든 이상적 현실태이든 형상이든 아니면 영혼이든 뭐든 간에. 죽은 인간을 주어로 삼은 모든 긍정문은 거짓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좀 너무 심하게 매정하단 생각이 문득. 말넘심.

 

-蟲-

상무관에 있는 여든세개의 관들 중 아직 합동추도식을 치르지 
않은 것은 모두 스물여섯이었는데, 어제저녁 두 가족이 나타나 시
신을 확인하고 급히 입관을 해 스물여덟이 되었다.

 

아, 무섭네. 끝까지 읽을 수 있으려나. 바람이 불 것 같고 비가 내릴 것 같은 풍경 묘사를 보고 있자니 멀미가 나는 기분이다. SBS에서 5.18 민주화항쟁 40주년 특집으로 방송했던 '그녀의 이름은'이란 다큐멘터리가 있다. 배경음악 처럼 묘사된 

…마이크를 쥔 젊은 여자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분수
대 앞 스피커에서 울려온다.

 

라는 구절을 읽을 때 저 방송이 기억났다. 

 

나는 그 때 그 자리에 없었고, 어려서부터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나는 빚을 진 채로 갚지도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는가 하는 것이다. 

 

 

거의 80년 가까이 지난 콰인의 논문을 필사하듯, 하지만 대충 번역하고 있자니

2,500년 전 플라톤의 글들을 붙들고 사는 나로서는 어쩐지 새삼스럽다.

어느덧 영미철학'사(史)'라는 게 쌓여 굳어진 것이려나 싶기도 하고, 

분명 학부 때도 읽었을 텐데 왜 이렇게 생경한가 싶기도 하고, 

바삐바삐 서둘러 읽고 요약정리 해두고서 또 재빨리 다음 읽을거리로 넘어가야 하는 건지 

아무튼지간에 차근차근 한 자씩 말이 되게 번역해 가며 곱씹어 읽어서 

괜히 또 되돌아올 일 늘리지 말고 잘 갈무리하는 편이 나은 건지 여전히 헷갈리기도 하고. 

 

 

문학작품이란 것을 각 잡고 읽은지가 너무 오랜만인지라 

그런데 그렇게 대면하게 된 글이 또 글이고 일이 또 일인지라 

이렇게 읽어야 하나 저렇게 읽어야 하나, 그런 고민이 논문에서 소설까지 옮겨 붙었다. 

십대 때 이십대 때는 말 그대로 뭘 어찌해야 하는지 갈피조차 잡을 수가 없었고, 

이리저리 허둥대고 대가리 깨져가며 굴러다니다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뜨겁게 온몸으로 싸우지를 못할 것이라면 

남들 보고 하라고 하자니 안할 거 같고 내가 한다고 무슨 대단한 값을 받지도 못할 것 같은 

책상물림 먹물짓거리나마 진지하고 성실하게 또 정직하게 해나가기라도 하자고 

뭐 그런 것이었는데, 

그걸 해내면 좀 덜 부끄럽고, 왜 그런지 어려서부터 들러붙은 이상한 부채감을 좀 덜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도망쳐 온 길은 도망쳐 온 대로 내팽개친 것이고 들어선 길은 또 이 길대로 지지부진한 마당에 

 

무슨 말을 적어두려고 했었더라?

 

 

일상적인 말하기가 어색해졌다. 가끔 나가 걸으면 걸음걸이도 어색하고, 공부 말고 다른 일로 사람 만나는 것도 어색하고, 끼니를 챙겨먹는 것도 어색하고, 번호이동 요금제 변경도 어색하고, 건강검진도 어색하고, 아니 뭐 그렇다고 이걸 다 말아먹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골방에서 고독사했다가 수 개월 후에 발견될 거 같다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런데 JAMS로 논문투고 하는 것도 어색하고, 먹물들 논문 찌끄리는 시스템이 어쩌다 해킹을 당했는지도 모르겠고, 서양고전학회 말고는 회원가입 안 했는데 왜 다른 학회까지 통합회원으로 취급 안 해주는지 그것도 어색하고, 그러고보니 논문은 어떻게 쓰더라, 보고서는 어떻게 쓰는 거더라, 죄다 낯설기만 하네. 

 

-蟲-

  존재론적 문제의 흥미로운 지점은 그 단순성이다. 그건 세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What is there?' 더구나 그 대답은 'Everything' 한 마디로 가능하고 모두가 이 답이 참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있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사례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여지가 있다. 그래서 그 문제가 수 세기 동안 살아 남아왔다. 

  이제 McX와 나라는 두 철학자가 존재론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고 해 보자. McX는 내가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 보자. McX는 그의 관점을 꽤나 일관되게 견지하면서 내가 특정 개체들(entities)을 승인하길 거부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의견 차이를 묘사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내가 승인할 것이라고 그가 혐의를 제기하는 그런 종류의 어떤 개체도 있지 않다는 게 내 주장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의 의견 불일치를 잘못 정식화한 것이라고 저항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그의 정식화에서 잘못을 지적해낸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그의 존재론 내에서 그의 잘못을 고려하게 되어 버렸단 점이다. 

  반면에 우리의 의견 차이를 내가 정식화할 경우 나는 곤경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로서는 McX는 용인하는데 나는 용인하지 않는 그런 어떤 것들이 있다는 걸 허용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면 내가 그것들을 거부한다는 점과 모순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추론이 건전하다면, 어떤 존재론적 논쟁에서든 부정적 입장에 선 사람은 상대가 자신과 의견이 갈린다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것이 비존재(nonbeing)에 대한 오래 된 플라톤 식의 수수께끼이다. 있지 않음이 어떤 의미에선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있지 않다는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런 뒤엉킨 원칙은 플라톤의 수염이란 별명이 붙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역사적으로는 오캄의 면도날을 빈번하게 무디게 만듦으로써 그 어려움을 입증해 오기도 하였다. 

  McX 같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다른 식으로는 아무것도 있지 않다고(that there is nothing) 기꺼이 시인할 상황에 존재를 끼워넣도록 이끄는 그런 사유 노선이 있다. 예를 들어 페가수스를 보자. McX는 페가수스가 있지 않았더라면, 그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페가수스가 있지 않다는 것조차 말하기에는 역설적일 것이다. 그래서 페가수스에 대한 부정이 일관되게 주장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페가수스가 있다고 결론내린다. 

  McX가 파르테논과 파르테논-관념(idea)을 혼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파르테논은 물리적이다. 파르테논-관념은 정신적이다. (어쨌든 McX 식의 관념에 따르면 그렇고, 내게 더 나은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파르테논은 가시적이다. 파르테논-관념은 비가시적이다. 파르테논과 파르테논-관념보다 더 닮지 않고 또 혼동되지 않을 만한 짝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파르테논에서 페가수스로 넘어가면 그 혼동이 시작된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McX가 페가수스의 비존재를 인정하느니 차라리 가장 투박하고 노골적인 모조품에 기만당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페가수스는 반드시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페가수스가 있지 않다는 것조차 말하기 곤란해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이 McX를 기초보적인 혼동에 빠뜨린 것으로 보였다. 좀 더 영리한 사람들은 똑같은 범례에서 출발하면서도 McX의 경우보다 명백히 덜 잘못된, 따라서 더욱 처치곤란한 페가수스에 대한 이론들을 보여준다. 이런 사람들 중 하나를 Wyman이라 하자. 그가 주장하기로 페가수스는 비실현된 가능성(an unactualised possible)으로서의 존재를 가진다. 우리가 페가수스에 대해 그런 것은 있지 않다고 말할 때, 그걸 더 정확히 말하면 페가수스가 특수한 현실화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가수스가 현실화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파르테논이 붉지 않다는 말과 같은 수준의 말이다. 이 중 어느 경우든 그 존재가 문제시되지 않는 개체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어쨌든 Wyman은 '존재하다(exist)'라는 오래된 훌륭한 단어를 망가뜨린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그런 철학자들 중 하나이다. 비실현된 가능성을 옹호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존재(existence)'라는 단어를 현실성(actuality)에 한정한다. 그래서 그 자신과 그의 팽창된 세계의 나머지 영역을 거부하는 우리 사이의 존재론적 합의라는 환상을 지켜낸다. 우리는 모두 '존재하다'라는 말의 일상적 용법에서 페가수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순히 그런 개체가 전혀 있지 않다는 의미로 그리 말하는 경향이 있다. 만일 페가수스가 존재했었더라면 그것은 또한 공간과 시간 안에 있었을 것이나, 그건 단지 '페가수스'라는 단어가 시공간적 함축을 지니기 때문이지, '존재하다'라는 말이 시공간 함축을 지니기 때문은 아니다. 설령 우리가 27의 세제곱근의 존재를 확언할 때 시공간 언급이 결여되어 있더라도, 이것은 단순히 세제곱근이 시공간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존재하다'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는 데에 애매함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각주:1] 그렇지만 Wyman은 동의해줄 만하게 보이려는 헛된 노력 속에서 순순히 페가수스의 비존재를 받아들이더니, 우리가 페가수스의 비존재란 말로 의미하는 바와 반대로, 페가수스가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 존재와 존속(subsistence)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문제를 흐려놓는 일을 처리할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Wyman 에게 '존재하다'라는 단어를 줘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단어를 다시 쓰지 않아 보겠다. 나는 여전히 '있다'라는 말을 가지고 있다. 어휘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해두고, 의 존재론을 다시 보자.

  Wyman의 과잉된 세계는 여러모로 내키지 않는다. 이 세계는 살풍경 취향인 우리 같은 사람들의 미감에 내키지 않는데, 이게 최악의 지점은 아니다. Wyman의 가능성들로 북적이는 뒷골목은 혼란스러운 요소들의 사육장이다. 예를 들어 저 출입구의 가능한 비만 남성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다시, 저 출입구의 대머리 남성을 가정해 보자. 그들은 가능한 동일인인가, 아니면 가능한 두 남성인가? 우리는 이걸 어떻게 결정하는가? 바로 그 출입구에 대체 얼마나 많은 가능한 남성들이 있는가? 가능한 뚱보들보다 가능한 홀쭉이들이 더 많이 있는가? 그들 중 몇이나 닮았나? 혹은 그 닮아 있다는 것이 그들을 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그 어떤 가능한 두 개인 것들도 닮지 않았는가? 이는 두 가지 것들이 닮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은 것인가? 혹은, 끝으로, 동일성 개념이 그저 실현되지 않은 가능들에 적용 불가한 것인가? 하지만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과 상호간의 차이를 유의미하게 논할 수 없는 개체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요소들은 거의 구제불능에 가깝다. 개별 개념들에 대한 프레게주의적 대처에 의해, 일부 재활을 위한 노력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Wyman의 뒷골목을 쓸어 버리고 손절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가능은 필연이나 불가능 그리고 우연 같은 다른 양상들과 함께 우리가 등져야 할 것이라고 시사하려는 의도는 없는 그런 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양상을 진술 전체에 한정할 수는 있다. 우리는 '가능적으로(possibly)'라는 부사를 전체 진술에 부과하고, 그런 용법의 의미론적 분석에 대해 잘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석에서 우리의 확장된 세계가 소위 가능적 개체들을 포함하리라는 실질적 진전은 거의 기대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확장의 주된 계기가 단순히, 예를 들면 페가수스가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게 헛소리가 아니려면 페가수스가 있어야만 한다는 오래된 관념에 불과한 것 아닐까 의심한다. 

  여전히, Wyman의 가능들의 세계의 지나치게 우거진 풍성함은 우리가 예시를 약간만 바꿔서 페가수스가 아니라 버클리 대학의 둥근 사각형 지붕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무의미해 보일 것이다. 페가수스가 없는 한 그것이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헛소리일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버클리 대학 건물의 둥근 사각형 지붕이 있지 않는 한, 그것이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헛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페가수스와 달리 버클리 대학의 둥근 사각형 지붕은 실현되지 않은 가능으로서조차 허용될 수 없다. 이제 우리가 Wyman으로 하여금 실현되지 않은 불가능의 영역까지 허용하도록 몰아갈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 실현되지 않은 불가능에 대해 괜찮은 여러 당혹스러운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로 하여금 그 실현되지 않은 불가능들 중 특정한 것들이 동시에 둥글면서 사각형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어 Wyman을 모순의 덫에 빠뜨릴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약삭빠른 Wyman은 딜레마의 다른 쪽 뿔을 붙들고서 버클리 대학의 둥근 사각형 지붕이 있지 않다고 말하는 건 헛소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둥근 사각형 지붕'이라는 구절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Wyman이 이런 대안의 첫 번째 옹호자였던 것은 아니다. 모순의 무의미라는 원리는 그 유래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심지어 그 전통은 Wyman의 동기들을 전혀 공유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저자들에게도 살아남아있다. 나는 여전히 그런 원리에 대한 최초의 유혹은 실질적으로 Wyman에게서 보이는 그 동기이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확실히 그 원리는 자체적인 호소력이라곤 없다. 그리고 그 원리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귀류법에 저항하는 허황된 극단들로 이끌어 왔다. 이 저항이란 말에서 나는 저 원리 자체에 대한 귀류법을 감지한다.

  더욱이 모순 무의미 원리는 치명적인 방법론적 결점을 지니는데, 원칙적으로, 무엇이 의미있고 또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실효적인 검증을 고안해내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호의 연쇄가 의미를 구성하는지, 다른 사람들을 차치하고 우리 개개인에게조차,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결정할 체계적 방법들을 고안해내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게 모순성에 대한 범용 검증이란 있을 수 없다는 수리논리학의 발견으로부터 귀결되는 결론이다.

  나는 플라톤의 수염에 대해 폄훼하여 말해왔고 그것이 착종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해왔다. 나는 그 수염을 참아주는 일의 불펴함에 대해 상술해왔다.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시간이다. 

  러셀은 그의 소위 단일 기술구(singular descriptions, definite descriptions?) 이론에서 어떻게 우리가 잠정적으로 명명된 객체들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명사 처럼 보이는 것들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러셀의 이론이 직접 적용되는 이름들은 복합 기술적 이름들, '『웨이벌리』의 저자'라거나 '프랑스의 현재 왕' 또는 '버클리 대학의 둥근 사각형 지붕' 같은 것들이다. 러셀은 그런 구문들을 그 구문들이 출현하는 전체 문장의 부분들로서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예를 들어 '『웨이벌리』의 저자는 시인이었다'라는 문장 전체는 '누군가(더 나은 표현으로는 '무언가')가 『웨이벌리』를 썼고 시인이었으며, 다른 아무것도 『웨이벌리』를 쓰지 않았다'라는 의미로 설명된다. (이 추가된 절의 핵심은 '『웨이벌리』의 저자the author of Waverley'에서 'the'라는 단어에 내포된 그 고유성을 단언하는 것이다.) '버클리 대학의 둥근 사각형 지붕은 분홍색이다'라는 문장은 '어떤 것이 둥글고 사각형이며 버클리 대학의 지붕이고 분홍색이고, 다른 아무것도 둥글고 사각형이며 버클리 대학의 지붕이지 않다'라고 설명된다. 

  이렇나 분석 덕분에 이름처럼 보이는 기술구는 맥락 상 소위 불완전 기호로 달리 표현된다. 기술구에 대한 분석으로서 어떤 통합된 표현도 제공되지 않지만, 해당 구의 문맥이었던 전체 진술은 여전히 그 전체 의미를 확보한다. 그 진술이 참이든 거짓이든 말이다. 

  분석되지 않은 진술 '『웨이벌리』의 저자는 시인이었다'는 '『웨이벌리』의 저자'라는 부분을 포함하고, 그 부분이 McX와 Wyman에 의해 어쨌든 그 부분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지시를 요구한다고 잘못 가정하게 되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웨이벌리』를 썼고, 시인이었으며 다른 아무것도 『웨이벌리』를 쓰지 않았다'에는 러셀의 번역에서는 해당 기술구에 두어졌던 객관적 지시라는 부담이 이제 논리학자들이 종속 변수라 부르는 종류의 단어들, 양화 변항들, 즉 'something,' 'nothing,' 'everything' 같은 단어들에 의해 덜어진다. 이런 단어들은 『웨이벌리』의 저자에 대한 특별한 이름이기를 주창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아예 이름이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 단어들은 객체를 일반적으로 지시하며, 그들 자신들에 관련하여 계획된 독특한 일종의 애매성을 가지고 그리 한다. 이 양화 단어들 혹은 종속 변수들은 물론 언어의 기초적인 부분이고, 그 의미는 최소한 맥락 내에서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어떤 식으로도 『웨이벌리』의 저자나 버클리 대학의 둥근 사각형 지붕이나 다른 무엇이 되었든 미리 상정된 대상들이 있다고 먼저 가정하지 않는다. 

  기술구에 관한 한, 더 이상 있음을 긍정하든 부정하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웨이벌리』의 저자가 있다'는 것은 러셀에 의해 '누군가 한 사람(좀 더 엄격하게는 어떤 것)이 『웨이벌리』를 썼고 다른 아무것도 『웨이벌리』를 쓰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설명된다. '『웨이벌리』의 저자는 있지 않다'라는 것은 그에 따라 '각각의 것이 『웨이벌리』를 쓰는 데에 실패했거나 둘 이상의 것들이 『웨이벌리』를 썼다'라고 대체되어 설명된다. 이 대안은 거짓이지만 유의미하다. 그리고 이 대안은 『웨이벌리』의 저자를 명명한다고 주창하지 않는다. '버클리 대학의 둥근 사각형 지붕은 있지 않다'도 유사한 방식으로 분석된다. 그렇게 비존재에 대한 진술이 자기논박적이라는 낡은 생각은 더 이상 굴러가지 않는다. 존재나 비존재에 대한 진술이 러셀의 기술구 이론으로 분석될 때, 그 진술은 그 존재가 문제시되는 잠정적 객체를 명명하기를 주창하기까지 하는 어떠한 표현도 포함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그 진술의 유의미함은 더 이상 그와 같은 객체가 있다는 것을 앞서 전제하는 것이라 생각될 수 없게 된다.

  '페가수스'에 대해서는 어떤가? 이것은 기술구라기보다는 단어이고, 러셀의 주장이 곧장 적용되진 않는다. 하지만 적용되게 만들기는 쉽다. 우리의 관념을 짚어내기에 적절하다 싶은 어떤 방식으로든 '페가수스'를 기술구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벨레로폰에게 붙잡혔던 날개 달린 말'이라든지. '페가수스'를 그런 구로 대체하면서, '페가수스가 있다'나 '페가수스가 있지 않다'라는 진술을 '『웨이벌리』의 작가가 있다'와 '『웨이벌리』의 작가가 있지 않다'에 대한 러셀의 분석에 정확히 유비적으로 분석해 나아갈 수 있다. 

  '페가수스' 같은 단일어 이름 혹은 이름을 표방하는 것을 러셀의 기술 이론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물론 우리가 우선 그 단어를 기술로 번역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질적 제한은 아니다. 만일 페가수스라는 관념이 친숙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온 기술구로 간단히 번역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불명료하고 근본적인 것이었다면, 그래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인위적이고 하잘 것 없는 표면상의 장치는 써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분석불가능하고 환원불가능한 '페가수스로 있음(being Pegasus)'라는 속성에 호소하길 이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is-Pegasus'나 'pegasises' 같은 동사를 사용해 그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페가수스'라는 명사 자체는 그래서 파생어로 취급될 수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것이 기술구와 동일시될 수 있었을 것이다. 'the thinig that is-Pegasus'라든지 'the thing that pegasises' 같은 것과 말이다.

  'Pegasises' 같은 술어를 도입하는 것이 플라톤의 천상계나 인간 정신 안에 그에 상응하는 속성, pegasising 같은 속성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면, 나쁠 것 없다. 우리든 Wyman이든 McX든 여기까지는 보편자의 존재나 비존재에 대해서 주장하지 않고 있었고, 페가수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만일 pegasising이란 용어로 '페가수스'라는 명사를 러셀의 기술 이론에 기반한 그 기술구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페가수스가 어떤 의미로는 있다는 것을 선전제하지 않고 페가수스가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는 낡은 생각을 폐기한 것이다.

   우리의 논증은 이제 상당히 일반화된 것이다. McX와 Wyman은 'So-and-so is not'이란 형식의 진술을 두고, so-and-so가 있지 않는 한 'so-and-so' 자리에 오는 단순한 혹은 기술적으로 단일한 명사를 가지고 그 진술에 대해 유의미하게 긍정할 수 없으리라 가정했다. 이 가정은 이제 꽤나 일반적으로 근거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문제가 되는 단일 명사가 언제나 사소하게든 다른 어떤 식으로든 단일 기술구로 확장될 수 있고 그래서 러셀 류의 것으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100만보다 큰 소수들이 있다고 말할 때 수를 포함하는 존재론에 개입한다. 켄타우로스가 있다고 말할 때는 켄타우로스를 포함하는 존재론에, 페가수스가 있다고 말할 때는 또 글너 존재론에 개입한다. 하지만 페가수스나 『웨이벌리』의 작가 또는 버클리 대학의 둥근 사각 지붕이 있지 않다고 말할 때는 그런 것들을 포함하는 존재론에 개입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용어에 의해 명명되는 개체를 선전제하는 단일 용어를 포함하는 진술의 유의미함이라는 망상 속에서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 단일 용어가 의미 있기 위해 이름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Wyman과 McX에게 이에 대한 예감은 러셀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본래 한 대상의 진짜 이름인 단일 용어의 경우에서조차 의미하기와 이름하기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는 점에, 우리 중 극소수가 그리 하듯 주의를 기울이기만 했다면 드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프레게의 예시가 도움이 될 것이다.[각주:2] '개밥바라기별'이란 구는 특정한 구형의 거대한 물리적 대상, 이곳으로부터 몇백만 마일 거리의 공간을 질주하고 있는 대상을 명명한다. '샛별'은 그 똑같은 것을 눈썰미 좋은 몇몇 바빌로니아인들이 처음 정했을 것 같은 방식으로 명명한다. 하지만 두 구는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저 바빌로니아인은 그의 관찰들이 필요없었을 것이고 그가 가진 단어들의 의미를 반추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의미들은 두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것인 그 명명된 대상과는 다른 것이어야만 한다. 

  의미하기와 명명하기의 혼동은 McX가 유의미하게 페가수스를 부정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다. 의미하기와 이름하기의 계속된 혼동은 의심할 여지 없이 페가수스가 관념, 정신적 개체라는 그의 부조리한 생각을 낳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의 혼동이 지닌 구조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는 명명된 대상을 표방하는 페가수스를 '페가수스'라는 단어의 의미와 혼동하였고, 그리하여 '페가수스'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페가수스가 있어야만 한다고 결론내린 것이다. 하지만 의미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는 논란거리가 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번엔 정신 안의 관념들이라는 관념에 대해 그 의미를 분명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저 의미라는 것을 정신 속의 관념들로서 꽤나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애초에 의미와 혼동된 그 페가수스는 결국 정신 속 관념이 된다. McX와 똑같은 최초 동기를 가진 Wyman이 이 특정한 실수를 피했으리란 것 그리고 그 대신에 실현되지 않은 가능들로 마무리를 지었으리란 것이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이제 보편자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로 돌아가자. 속성, 관계, 집합, 수, 함수 같은 개체들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말이다. McX는 충분히 개성적인 방식으로 그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붉은 집, 붉은 장미, 붉은 노을이 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동의해야만 하는 철학적 상식이다. 이 집, 장미, 노을은 어떤 것인가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이것이 내가 붉음이란 속성으로 의미하는 전부다.' 그래서 McX에게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 붉은 집, 장미, 노을이 있다는 명백하고도 사소한 사실보다도 훨씬 더 명백하고도 사소한 일이다. 내 생각에 이것이 형이상학의 특징적인 부분, 혹은 최소한 소위 존재론이라 불리는 형이상학의 부분의 특징이다. 이 주제에 관련하여 한 진술을 참이라 간주하는 이는 그 진술이 평밤하게 참이라고 간주해야만 한다. 누군가의 존재론은 모든 경험들, 가장 일상적인 경험들마저도 그가 그것으로써 해석하는 개념적 도식의 기초이다. 일부 특정한 개념적 도식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또 달리 어찌 판단이라는 것이 가능하겠나? 아무튼 그렇다면, 존재론적 진술은 그 어떠한 별도의 정당화도 전혀 필요치 않는 채로 진행된다. 존재론적 진술들은 일상적 사실들에 대한 가벼운 진술들로부터 즉각적으로 뒤따른다. 마치, 어쨌든 McX의 개념적 도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속성이 있다'는 것은 '붉은 집, 붉은 장미, 붉은 노을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뒤따라나온다. 

  또 다른 개념적 도식에서 판단할 경우, McX의 정신에 공리격인 존재론적 진술이, 동등한 정도의 즉각성과 사소함을 동반하여, 거짓으로 판단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붉은 집들, 장미들, 노을들은 있다고 인정하지만 대중적이고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말하기 방식을 제외하고서, 그것들이 어떤 것이든 공통으로 가진다는 점은 부정할지도 모른다. '집들,' '장미들,' '노을들'은 집들과 장미들 긜고 노을들인 잡다한 개별적 개체들에 대해 참이고, '붉은' 혹은 '붉은 대상'이란 단어는 붉은 집들, 붉은 장미들, 붉은 노을들인 잡다한 개별적 개체들 각각에 대해 참이다. 하지만 여기에 더하여 개별적으로든 다른 어떤 식으로든, '붉음(redness),'이란 단어로 명명되는, 또 이 문제에 관한 한, '집다움(-hood),' '장미다움,' '노을다움'이란 단어로 명명되는 그 어떤 개체도 있지 않다. 집들과 장미들 그리고 노을들이 전부 다 붉다는 것은 궁극적이고 환원불가능한 사실로서 취해질 수도 있지만, McX는 실질적인 설명력이라는 지점에서 그가 '붉음' 같은 이름 기저에 배정하는 모든 신비한 개체들에 대해 사정이 더 나은 것은 전혀 아니라고 주장될 수 있다. 

  McX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그의 보편자 존재론을 부과하려 했을지도 모르는 한 가지 수단이 우리가 보편자 문제로 향하기 전에 이미 제거되었다. McX는 '붉음'이나 '붉다(is-red),' 우리 모두가 그 사용에 동의하는 그런 술어들이 도대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단일 보편 개체의 이름들로 간주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것의 이름으로 있다는 것이 유의미한 것으로 있다는 것보다 훨씬 더 특수한 특성이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최소한 저 논증으로는 우리에게 'pegasises'라는 술어 채택을 가지고 pegasising이라는 속성을 상정했다고 우리를 탓할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McX는 색다른 전략을 고안해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내세우는 의미하기와 이름하기의 그러한 구분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is re", "pegasises" 등이 속성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까지 받아들이도록 하자. 여전히, 당신은 그것들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들은 그것들이 명명되든 그렇지 않든 여전히 보편자들이고, 나는 과감히 그것들 중 일부는 내가 속성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들이기까지 할 것이라고, 혹은 결국에는 거의 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리라고 말한다.' 

  McX에게, 이것은 비범하리 만치 예리한 웅변이다. 그리고 그것에 맞설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의미를 허용하는 일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의미를 허용하는 일을 거부하는 데에 거부감이 없는데, 그렇다고 내가 단어와 진술이 유의미하다는 것을 부정하게 되진 않기 때문이다. McX와 나는 아마 유의미한 것과 무의미한 것으로의 언어적 형식에 대한 분류에 있어서 후자에 동의할 것이다. 설령 McX가 유의미함을 그가 의미라 부르는 일부 추상적 개체를 가짐('가짐'의 어떤 뜻에서)으로 이해하고 반면에 나는 그러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여전히 주어진 언어적 발화가 유의미하다는(혹은 significant, 개체로서의 의미라는 기체를 도입하지 않는 만큼 나는 이렇게 말하는 쪽을 더욱 선호한다) 사실이 궁극적이고 환원불가능한 사실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혹은 나는 직접적으로 그 문제가 되는 언어적 발화와 또 다른 그와 유사한 발화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수행하는지를 통해 그 사실을 분석하고자 나설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의미에 대해 말하거나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용한 방식들은 두 가지로 추려진다. 의의인 바의 것으로서 의미를 가지기, 그리고 의미의 동일성 혹은 동의성. 발화의 의미를 소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동의어의 발화, 일상적으로는 본래의 것보다 더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의미에 거부감이 있다면, 발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의의가 있다는 것과 의의가 있지 않은 것을 말할 수 있고, 상호의 동의성과 이의성을 말할 수 있다. '의의'라거나 '동의' 같은 이런 형용사들을 일정 수준의 명확성과 엄격성을 가지고 설명하는 문제는, 내가 보기에는 행동으로 설명하는 편이 선호할 만한데, 중요한 문제인 그 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위 의미라고 하는 특수하고 환원불가능한 매개적 개체의 설명적 가치는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 

  여기까지 나는 단일 용어를 문장 안에서 의의 있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그 용어들이 명명한다 참칭하는 개체들이 있다는 것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서도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또한 나는 우리가 일반 용어, 예를 들어 술어들을 그것들이 추상적 개체들의 이름이라고 시인하지 않고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에 더해 나는 발화들은 의의 있는 것으로, 상호 동의적이거나 이의적인 것으로, 소위 의미라 불리는 개체들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서도 그리 볼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 지점에서 McX는 우리의 존재론적 면역에 도대체 어떤 제한이라도 있긴 한 건지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말할 그 어떤 것도 우리로 하여금 보편자나 우리가 달갑지 않아 할 다른 개체들을 가정하도록 만들지 않는 것인가?

  나는 이미 러셀의 기술구 이론과 관련하여 종속 변수나 양화 변항에 대해 말하면서 그 문제에 대해 부정적 대답을 시사한 바 있다. 우리는 아주 쉽게 존재론적 개입을 저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있는데(there is something, 종속 변수) 붉은 집들과 노을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럴 수 있다. 혹은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100만보다 더 큰 소수라고 말함으로써도 그리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존재론적 개입에 들어설 유일한 방식이다. 즉 종속 변수 사용에 의해서 말이다. 이름을 참칭하는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아무런 기준도 되지 못하는데, 우리가 그것들의 이름성을 언제든 당장에 거절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응하는 개체라는 가정이 우리가 종속 변수를 통해 긍정하는 사물들에서 발견될 수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사실상 이름들은 존재론적 문제에 소용이 없는데, 내가 이미 보였듯, '페가수스'와 'pegasise'의 관계에서, 이름들은 기술구로 전환될 수 있고, 러셀은 기술구가 제거될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름의 도움으로 말하는 무엇이 되었든 이름 모두를 회피하는 언어에서 말해질 수 있다. 개체로서 가정된다는 것은 순수하게 또 단순히 변항의 값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전통적 문법의 범주들로 치면, 이것은 거칠게 말해 있다는 것이 대명사의 지시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이란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대명사는 지시의 기본적 수단이다. 명사는 대명사들이라 명명되었던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양화 변항들인 'something', 'nothing', 'everything'은 우리의 존재론 전체에 걸쳐 있다. 그게 도대체 뭐든지 간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특정 존재론적 선전제의 혐의를 다음과 같은 경우에 받는데, 선전제를 표방하는 것이 우리의 긍정들 중 하나를 참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변항이 적용되는 영역인 개체들 사이에 포함되어야 할 경우에, 또 오직 그 경우에만(iff) 그렇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부(some) 개들이 희다고 말할 수 있고 그로써 우리 자신이 견성이나 흼을 개체들로 인지하는 일에 개입하게 되진 않는다. '일부 개들은 희다'라는 것은 일부 개인 것들(things that are dogs)이 희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술이 참이기 위해, 종속 변항 'something'이 적용되는 범위인 사물들은 반드시 몇몇(some) 하얀 개들을 포함해야만 하지만, 그 사물들이 개스러움이나 흼을 포함할 필요는 없다. 다른 한편, 우리가 일부 동물학적 종들이 타가수정이라고 말할 때에는, 우리 스스로 다양한 종들 자체를 개체들로서, 설령 그것들이 추상적인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리 인지하는 일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우리가 우리의 종속 변수의 일부에서 종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회피 가능한 화법이었음을 보여주도록 해당 진술을 바꿔 말하는 일종의 방식을 고안해내기 전까지 그렇게 개입된 채로 남아있다. 

  고전적인 수학은 백만보다 더 큰 소수의 예시가 명백히 묘사하듯 추상적 개체 존재론 개입이 턱밑까지 차오른 상황이다. 그래서 보편자를 둘러싼 저 중세의 위대한 논쟁이 근대 수학 철학에서 새삼 불타올랐다. 그 문제는 예전보다 더 분명해졌는데, 우리는 이제 좀 더 분명한 기준으로 주어진 이론이나 담론 형식이 개입한 존재론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은 해당 이론의 종속 변수가 그 이론 내에서 구성된 긍정들을 참으로 만들기 위해 지시할 수 있어야만 하는 개체들에 또 오직 그러한 개체들에만 개입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선전제의 기준이 철학적 전통에서 명백하게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대 수리 철학자들은 새로이 명백해진 형식의 그 동일한 오래된 보편자 논쟁을 두고 토론하고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인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학적 기초에 관한 근대적 관점들 사이의 근본적인 골들은 종속 변수들이 지시할 수 있도록 허용될 개체들의 범위에 관한 의견불일치로 꽤나 분명하게 수렴된다. 

  보편자를 취급하는 중세의 주요한 세 가지 관점은 사가들에 의해 실재론, 개념론, 유명론이라 지칭된다. 본질적으로 이것들과 동일한 원리들이 20세기 수학 철학 연구에서 논리주의, 직관주의, 그리고 형식주의라는 새 이름으로 재등장한다. 

  실재론은 중세 보편자 논쟁과의 연관 속에서 사용되는 단어로서 보편자나 추상적 개체가 정신 독립적으로 있음을 가진다는 플라톤적 원리이다. 정신은 그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창조해낼 수는 없다. 프레게, 러셀, 화이트헤드, 처치, 카르납에 의해 재창된 논리주의로서는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특정될 수 있거나 특정될 수 없는 추상적 개체들을 지시하는 데에 종속 변수들을 사용하는 일을 무차별적으로 허용한다.

  개념론은 보편자들이 있지만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직관주의는 근대에 이런저런 형태로 푸앵카레, 브라우어, 바일 등에 의해 옹호된 입장으로 오직 추상적 개체들이 앞서 특정된 재료들로 개별적으로 마련될 수 있는 경우에만 종속 변수들을 추상적 개체들을 지시하는 데에 사용하는 일을 지지한다. 프렝켈이 언급했던 대로, 논리학은 집합들이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직관주의는 그것들이 발명된다고 주장한다. 실재론과 개념론 사이의 오래된 대립에 대한 온당한 진술이다. 이 대립은 그저 투덜거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 대립은 누군가가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고전 수학의 범위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만든다. 논리주의자들 혹은 실재론자들은 그들의 가정들에 의거하여 칸토어의 무한의 차순을 확보할 수 있다. 직관주의자들은 무한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중단하도록 강제당하고, 간접적인 귀결로서, 실수의 고전적 법칙들 중 일부까지 폐기하도록 강제받는다. 논리주의와 직관주의의 근대 논쟁은 사실상 무한을 둘러싼 의견불일치로부터 촉발되었다.

  형식주의는 힐베르트의 이름에 결부된 것으로, 논리주의자들의 보편자들에 대한 고삐 풀린 의존을 개탄하며 직관주의에 호응하여 나온 것이다. 하지만 형식주의는 직관주의에서도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찾아냈다. 이는 두 가지 대립되는 이유들 중 하나 때문에 일어났을 수 있다. 형식주의자는 논리주의자처럼, 고전 수학을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데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혹은 그는 과거의 유명론자들처럼, 아예 추상적 개체들을 용인하는 데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정신에 의해 제작된 개체들이라는 완화된 의미에서조차 말이다. 그 결과는 같다. 형식주의자는 고전 수학을 무의미한(insignificant) 기호들의 놀이로 간주한다. 이 기호 놀음은 여전히 유용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이 가진 유용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물리학자들과 공학자들을 위한 목발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이미 스스로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유용성이 어떤 문자 그대로의 언어적 의미에서든 유의미성을 함의할 필요는 없다. 정리들을 연장시키는 데에서 또 상호의 결론들 사이의 합의를 위한 객관적 기초들의 발견에서 수학자들의 주목할 만한 성취가 유의미성을 함의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수학자들 사이의 동의를 위한 적당한 기초는 단순히 기호 조작을 통제하는 규칙들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문론적 규칙들은 기호들 그 자체와 달리 꽤나 유의미하고 이해가능한 것들이다.

  나는 우리가 채택하는 존재론의 종류가 특히 수학과의 연관 속에서, 이것이 단지 사례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제 우리는 경쟁하는 존재론들을 어떻게 심사하게 될까? '있다는 것은 변항의 값으로 있다는 것이다' 라는 의미론적 정식화에 의해서는 확실히 그 대답이 마련되지 않는다. 이러한 정식화는 차라리, 역으로, 주어진 언급이나 주의가 선행하는 존재론적 기준에 적합한 정도를 평가하는 데에 쓸모가 있다. 우리는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종속 변수를 존재론과 관련지어 살펴본 것이 아니라, 주어진 언표나 주의가 우리의 것이든 다른 누군가의 것이든 그것이 말하는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리 한 것이다. 그리고 언어를 연루시킨 문제로서는 이 정도까지가 꽤나 적당하다. 하지만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둘러싼 논쟁에서, 의미론적 기획을 손대는 데에는 여전히 이유가 있다. 한 가지 이유는 이 글 서두에서 지적한 곤경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것이다. McX는 지지하지만 나는 지지하지 않는 그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곤경 말이다. 내가 McX의 존재론에 반대해 나 자신의 존재론에 붙어있는 한 나는 나의 종속 변수들이 McX의 존재론에는 속하지만 내 존재론에는 속하지 않는 개체들을 지시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일관되게 우리의 의견불일치를 묘사할 수 있으니, McX가 긍정하는 진술들을 규정함으로써 그리 할 수 있다. 그저 내 존재론이 언어적 형식들, 최소한 구체적인 명문과 발화를 지지한다는 점만 제공된다면, 나는 McX의 문장들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의미론적 기획을 철회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주장의 공통 근거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존재론에서의 의견불일치는 개념적 도식에서의 기초적인 의견불일치를 포함한다. 하지만 McX와 나는 이러한 기초적인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개념적 도식들이 정치, 기후, 특히 언어 같은 주제들에 관해 우리가 성공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간 혹은 상위의 파생효과들에서 충분히 조우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존재론을 둘러싼 우리의 기초적인 논쟁이 단어들과 그것들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론적 논쟁으로 승화되어 번역될 수 있는 한에서, 그 논쟁이 선결문제의 오류라는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지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존재론적 논쟁이 언어를 둘러싼 논쟁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으리란 것은 놀라운 것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단어에 의존한다는 결론으로 비약하지 말아야만 한다. 한 질문의 의미론적 용어로의 번역가능성은 그 질문이 언어적이라는 점을 시사하지 않는다. 나폴리를 본다는 것은 '나폴리는 본다'라는 문장 앞에 놓일 때 참인 문장을 산출하는 그런 이름을 지닌다는 것이다. 여전히 나폴리는 보는 일에 관한 언어적인 요소는 아무것도 없지만. 

  존재론에 대한 우리의 수용은 내 생각에 원칙적으로 과학 이론, 말하자면 물리학의 체계에 대한 우리의 수용과 유사하다.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합리적인 한에서 가장 단순한 개념적 도식, 무질서한 미증유의 경험 파편들이 거기에 맞추어지고 배열될 수 있는 그러한 도식을 채택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과학을 수용하는 총괄적인 개념적 도식을 일단 확정하면 우리의 존재론이 결정된다. 그 개념적 도식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든, 예를 들어 생물학적 부분이든 물리학적 부분이든, 합리적 구조를 결정해주는 고찰들은 과학 전체에 합리적 구조를 결정해주는 고찰들과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까지가 되었든지 간에 어떤 과학이론 체계 채택이 언어의 문제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면, 똑같이,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닌 정도로, 그것은 존재론 채택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념적 도식 구성을 인도해주는 원칙으로서 단순성은 분명하고 애매성이 없는 관념이 아니다. 그리고 그 관념은 둘 이상의 기준들을 표현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즉각적인 경험을 실황중계하기에 적합한 가장 경제적인 개념 목록을 고안해냈다고 상상해 보자. 이 도식 하에 들어오는 개체들, 종속 변수들의 값들이 감각이나 반성의 개별적인 주관적 사건들이라고 가정해 보자.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는 여전히 외부 대상들에 관하여 말한다고 주장하는 물리주의적 개념 도식이 우리의 보고 전반을 단순화하는 데에 대단한 이점을 제공한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산발적인 감각 사건들을 취합하고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지각들로 취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경험 흐름이 지닌 복잡성을 취급가능한 개념적 단순성으로 경감시킨다. 단순성의 원리는 더욱이 감각자료들을 대상들에 할당함에 있어서 길잡이가 되어주는 격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전의 둥근 감각과 이후의 둥근 감각을 똑같은 소위 동전에 결부시키거나 두 개의 소위 동전들에 결부시키는데, 우리의 총체적인 세계상에서의 단순성의 격언이 요구하는 바를 추종하여 그리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경쟁하는 개념 도식들, 현상주의적인 도식과 물리주의적 도식을 가진다. 어느 쪽이 우월할 것인가? 그 각각이 고유한 이점을 지닌다. 각각은 각각의 특수한 단순성을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지닌다. 나는 각각이 발전시켜볼 만한 것이라 제안한다. 각각은 더욱이 더 근본적인 차원의 것이라 이야기될 수도 있다. 한편은 인식론적으로, 다른 한편은 물리적으로 근본적이라고 말이다.  

  물리적인 개념 도식은 경험에 대한 우리의 설명을 단순화시켜주는데 무수히 산재된 감각 사건들이 소위 단일 대상들과 결부되게끔 하는 방식으로 인해 그러하다. 여전히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각 문장이 실제로, 하지만 우회적으로 그리고 복잡하게 현상학적 언어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물리적 대상들은 경험의 유전에 대한 우리의 설명을 마감하고 단순화하는 개체로 상정되는데, 마치 무리수의 도입이 산술 규칙을 단순화하는 것과 같다. 유리수 만의 기초 산술에 대한 개념적 도식의 관점으로부터, 유리수와 무리수에 대한 더 넓은 영역의 산술은 손쉽게 써먹을 수 있는 신화의 지위를 가질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진실 (즉, 유리수에 대한 산술) 보다 더욱 단순하지만 저 문자 그대로의 진실을 산재된 부분으로서 포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과 속성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이런 종류의 플라톤식의 존재론은 엄격한 물리주의적 개념 도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물리주의적 개념 도식 자체가 현상주의에 대해 그러한 만큼이나 신화적인 것이다. 이 고차원 신화는 괜찮고 쓸모 있는 것인데, 그것이 물리학에 대한 우리의 설명을 단순화해주는 한에서 그러하다. 수학은 이 상위신화의 필수요소이기에, 물리 과학에 대한 이 신화의 유용성은 충분히 분명하다. 그것을 신화로 치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서 형식주의라는 이름 아래 암시하였던 그 수학 철학에 동조한다. 그러나 형식주의적 입장은 같은 만큼의 정당성을 가지고 순수한 탐미주의자나 현상주의자에 의해 물리적 개념 체계에 대해 채택될 수도 있다.

  수학의 신화와 물리학의 신화 사이의 유비는 어느 정도 부차적이고 아마도 요행인 방법들에서 결정적으로 가까워진다. 예를 들어 러셀 역설의 발견과 집합론의 다른 이율배반들에 의해, 세기의 전환기에 수학의 근간에서 촉발되었던 위기들을 고려해 보라. 이러한 모순들은 비직관적인 임기응변들에 의해 제거되어야 했다. 우리의 수학적 신화구성은 의도된 것이자 모두에게 명백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물리학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빛에 대한 파동 해석과 입자 해석 사이의 이율배반이 발생했다. 만일 이것이 러세르이 역설 만큼 완전히 모순이지 않았다면, 나는 그 이유가 물리학이 수학 만큼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라 의심한다. 다시, 산술에서 결정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진술들이 있다는 괴델의 증명에 의해 1931년에 촉발된 수학의 근간에서의 두 번째 거대한 근대적 위기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물리학의 맞짝을 가진다. 

  앞서 나는 특정 존재론을 선호하는 일부 통상적인 논증들이 오류임을 보이는 일을 자청했다. 게다가, 나는 한 이론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이 무엇인지 결정할 명백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어느 존재론을 채택할 것인지는 여전히 열린 문제이고, 그 확실한 조언자는 포용력과 실험적인 정신이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물리주의적 개념 도식이 어느 정도까지 현상주의 개념 도식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 봐 보자. 여전히 물리학 또한 총체적으로는 환원불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추구를 요구한다. 어떻게 혹은 어느 정도까지 자연과학이 플라톤적 수학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해석될지 봐 보자. 하지만 수학 역시 추구하고 그 플라톤적 토대들로 파고들어 가 보자.

  이러한 다양한 추구들에 가장 적합한 여러 개념적 도식들 중에서, 한 가지 도식, 현상주의적 도식이 인식론적 우선성을 주장한다. 현상주의적 개념 도식에서 보자면, 물리적 대상들 그리고 수학적 대상들의 존재론들은 신화들이다. 그렇지만 그 신화의 완성도는 상대적이다. 이 경우에는 인식론적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다양한 관심과 목적 중 하나에 상응하는, 다양한 관점들 중 한 관점이다.

 

  

-작성중-

  1. 시공간 어딘가에서 실현된 대상에 적용되는 존재와 그 외의 영역에서 출현하는 또 다른 대상에 적용되는 존재(혹은 실체나 있음)을 용어상으로 구별하고 싶어지는 충동은 아마 자연관찰이 첫 번째 종류의 존재에만 상관 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이미 반례를 통해 반박되었다. 예를 들어 '유니콘의 수에 대한 켄타우로스의 수의 비' 같은 반례가 있다. 만일 그런 비가 있었더라면, 그건 추상적 개체, 즉 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켄타우로스의 수와 유니콘의 수가 모두 0이고 그래서 그런 비 같은 건 있지 않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자연을 탐구함으로써만 성립한다. [본문으로]
  2.  Gottlob Frege, 'On sense and nominatum', in Herbert Feigl and Wilfrid Sellars (eds), Readings in Philosophical Analysis (New York: Appleton-Century-Crofts, 1949), pp. 85-102. [본문으로]

1. 10년 전 즈음 내가 싸지른 지랄발광의 피해자로부터 예기치 못한 연락을 받았더랬다. 고개 돌리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는 그러한 정직함과 성실함을 최고의 가치로 숭앙하다시피 하며 살아오고 있는 나로서는, 얼마가 지났든 내가 토해놓은 말들의 당사자로서 그 오물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기로 한 사람을 모르는 척 할 수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으므로, 만나자 하길래 곧장 수락을 하였다. 범수의 고사를 떠올리며 10년이 지나서도 복수를 꿈꾸는 이라면 군자라 할 만하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고, 용기를 낸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우가 따라 마땅하다는 생각에 만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었달까. 다만 10년이 지나서 다시 떠올라 사람을 불러낼 만큼의 원한이란 뭘까, 어떤 기분일까, 그것만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당시에 적었던 뻘글의 내용에 한해서는 고칠 생각이 없었기도 하고, 제아무리 욕설이 난무한들 내 기준으로는 평서문이라 할 만한 문체였기도 하였던지라, 만난다고 다짜고짜 대구리 박고 오체를 투지하며 사죄할 마음도 들지를 않았고. 그저 나를 보자고 말을 꺼내기로 결심한 그런 용기를 낸 사람이라면, 내게 묻고 싶은 걸 묻고 답을 요구할 자격만은 충분하다 생각하였다. 세상이 흉흉한 지 오래인지라 상대가 분을 못 이기고 칼부림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하였지만, 뭐랄까, 별 수 없나 싶기도 하였더랬다. 고작 그게 답이고 매듭이라면 실망스러울 것이고, 욕지거리 몇 마디에 분개하며 범죄자로 전락해도 좋을 만큼 인생이란 게 보잘 것 없는 것일 리는 없으니 그 점에도 화가 날 테지만, 질문을 하든 대화를 시도하든 칼부림을 하든 그건 상대방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기도 하고. 뭐 구태여 억지로 뒈져야만 하겠다는 입장은 아닌지라, 찌르면 찔리되 안 죽을 곳을 찔릴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리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였고, 몇 차례 더 만나고서, 오늘에 이르렀다. 내 기준으로는 매우 낯설다 해야 할까 이질적이라 해야 할까, 뒤틀리거나 꼬인 구석 없이 건강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받았고, 그래서인지 어쩐지 아무튼 다행스럽게도 나는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왔긴 한데, 예상 밖의 허를 찔렸다고나 할지, 이 역시 10년은 더 된, 도피의 여정이 가로막혀 버렸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선물받아 버린 것. 14년이란 정말이지 자괴감과 무력감, 그리고 죄책감으로 뒈져 버릴 것만 같던 때이고, 스스로 아무런 자격도 없다는 생각에 차마 입에 올릴 수조차 없던 가슴 아픈 일들을 곱씹던 시기인데, 뭐 아무튼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한 달 뒤에 출간된 저 책이 5.18 민주화 항쟁을 다루었다는 얘기만 듣고, '아, 난 저 책을 아마 못 읽겠구나' 하고 피해다녔던 기억이 있다. 기억이 있다? 그냥 계속 도망다녔다. 기념재단이나 국가기록원의 자료, 건조한 사실의 나열 외에는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나 따위가 감히' 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다 명치 즈음에서 숨을 틀어막는 기분이랄까. 으음, 뭐, 그렇긴 한데, 도망가지 말라 했던 사람이 도망을 가지 않고 찾아와 도망가지 말라는 말을 되돌려준 것 같은 상황에서, 더 어디로 도망을 가겠나. 그리하여, 뭐랄까, 오늘부터 조금씩 틈날 때마다 몇 문장씩이라도 버텨내 보기로. 『흰』도 같이 선물해 주셨으나, 매는 먼저 맞는 편이 낫지 않나 싶어서 아무튼 그러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와 그의 글을 신뢰하므로, 자꾸 '매'라느니 읽기 힘들다느니 하는 징징거리는 개소리는 그만하기로 하고. 

 

 

2. 뭔가 끄적거려 보아야 할 문제들.

 

2.1.1『범주론』에서 수는 부분들을 가지는가? 가진다면 그 부분을 이루는 것은 또 다른 수인가 아니면 수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 단위로서의 1과 수로서의 1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해당 저술 내에서는 아직 등장하지 않는 단위로서의 1이라는 개념 없이 다른 방식으로 수의 부분이란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시간은 연속된 양이지만 오직 '지금'만이 실존하며 과거와 미래는 지금을 매개로 지금과 연속하여서만 상정되고 실현되는 것이고 그러한 한에서만 시간의 부분이라는 식의 해석이 가능하다면,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수와 그 수에 의해 부수적으로 실현되는 해당 수의 부분 같은 것을 설명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아무튼 수의 부분 문제. 

 

2.1.2. hexis와 sterēsis 관련하여 일방향의 변화만이 가능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맹목이 sterēsis의 사례로 제시되는데 이 맹목은 본문의 서술에 부합하게 이해하려면 아예 시각의 가능성 자체가 상실되어 버린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Dynamis가 개입할 여지가 있는지, 혹은 없는지. 공양미 삼백석으로 눈을 뜰 수 있었다면 심봉사는 엄밀하게 말해서 장님인 건 아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려나. 『자연학』에서는 반대자쌍의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의 변화를 한 형상과 그것의 결여 사이의 변화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리고 이 변화는 양방향 다 가능한데, 이 구조에 따르면 시각과 맹목 사이의 변화에 대한 설명과 맞지를 않는다. 요걸 어케 맞춰볼까 고민 중. 혹은 두 저술 사이에 그냥 불일치를 인정하게 될 수도 있고.

 

2.1.3. 삶과 죽음과 반대 혹은 마주놓임 그리고 인과에 관련한 『파이돈』의 논의들에 마치 하나하나 반응하고 반박하는 듯이 『범주론』의 논의들이 전개되어 있는 듯한데,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보다는 한쪽의 논의를 통해 다른 한쪽의 논의를 좀 더 풍부하게 해석할 여지가 생기지는 않을까 막연한 기대 중. 불의 뜨거움과 뜨거움을 가진 불,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게 만들어주는 것과 그것의 살아있음, 이런 것들이 그 반대자와 반대자를 지닌 것에 대해 어떤 작용을 주고 받는지 플라톤의 서술을 좀 더 잘 이해하고 나서 고민해 볼 문제이긴 하다. 

 

2.1.4. 『분석론 전서』에서 완전한 추론 형식에 대한 증명이 이루어지는지, 그 증명이 거칠게 말하자면 공리공준에 따른 기하학적 증명인지 혹은 모순된 예시를 통한 귀류법 같은 것인지. 추론 형식 마다 제시되는 예시의 역할을 무엇인지. 

 

2.1.5. 『파르메니데스』에서 '단위' 문제 정리해 보기로 해놓고 안 했지. 이거 정리하면 저 위에 수의 부분 문제하고 연관시켜서 생각해 볼 문제들도 생길 것이고, 『형이상학』에서 '하나'가 말해지는 다양한 방식들 다루는 부분도 같이 다뤄볼 수 있을 것 같고. 임의의 연속량에 단일성을 부과해 묶어서 단위를 형성하고 다시 이 단위로 연속량을 측정하고, 뭐 그런 상호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선후관계까지 있어도 되는 것일지 그게 존재론적 우열까지 가도 되는지 아니면 상호 독립적인 것인지, 아무튼 이것도 그냥 발상만 늘어놓아 보는 중.

 

2.1.6. 『크라튈로스』 와 『테아이테토스』에서 진리치의 판별기준으로서 대응의 문제, 의미와 지시의 구분 여부 확인 같은 거 다루어볼 생각이었는데, 이것도 진행하다 말았지. 되든 안 되든 일단 그 방향으로 훑어는 보기로. 안 좋은 버릇이 들은 것은 아닐까 싶어서 기존에 익숙하게 보아오던 저술들을 살짝 의도적으로 멀리했는데, 그냥 시행횟수를 늘리는 게 장땡 아닌가 싶어지기도 하는 즈음. 이것저것 찔러보자. 뭐 하나 걸리면 좋고 안됨 말고.

 

 

3. 왜 저렇게 이것저것 찔러 보느냐 하면 연구재단 연구지원 신청 자격이 일정 기간 내 논문 게재수 5편 이상인가 그러하여서. 굶어 뒈질 수도 빚만 지고 살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나. 옘병할 거, 결과가 없으면 한 일이 없는 거고 그러니까 뭔 개소리를 지껄이든 나는 그냥 게으른 새끼인 거지. 할 말 없다. 

 

 

4. 요즘 ヨルシカ, Ado, tuki.에 꽂혀서 믹스 틀어주는 거 내내 듣는 중. 다른 쪽으로는 갑자기 Eminem이랑 Kendrick Lamar가 땡겨서 이쪽은 또 이쪽대로 너튭이 스까주는대로 쳐먹는 중. UMC랑 달빛요정만 죽어라고 듣던 때가 있었는데, 이번엔 얼마나 들으면 그만 듣게 되려나. 오지 오스본도 척 맨지오니도 헐크 호건도 떠났다. 내란부터 대선까지 나라가 정신없던 사이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란 중국 대만 그 와중에 트럼프, 뭔가 넘나넘나인 거시다. 자꾸 현실감이 없어지고 죄책감과 부채감은 커져 가는데 힘도 용기도 줄어만 가고, 소크라테스는 저 혼자 잘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구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죽기 직전까지도 걱정을 하다 가는데, 나는 갈수록 품도 시야도 좁아져만 간다. 이대로 쪼그라들다가 짓이겨져서 없어져 버리는 것 아닐까, 음, 모르겠다. 

 

 

5. 꽤 오래 넋두리 개소리 씨부리지 않고 그냥 냅다 초벌번역만 쳐 올렸던지라 뭔가 씨부릴 개소리가 쌓였지 않을까 했지만, 뭐 딱히 대단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해내야만 하는 일들을 해내지 못하고 있어서, 가면 갈수록 더 심하게, 나를 알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볼 자신이 없어진다는 그런 어떤 기분이 드는구만. 오는 연락이랄 것도 없다시피 드물지만 그나마도 답하지 못할 만큼 비루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저 앞에 말했던 뜻밖의 만남을 계기로 문득 정다웠던 친구들 생각이 나서.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저마다 다들 잘 살고 있고, 제 나름의 세계를 꾸려 놓은 사람들인지라, 딱히 내 소용도 필요도 없을 것이라는 게 무관심에 대한 변명이라면 변명이려나. 필요한 자들에게 필요한 대로 쓰이다 필요를 다해 버려지면 그것만도 감지덕지겠으나, 그나마의 필요조차 되지 못하는 인생인지 오래. 이게 뭐냐. 뭐 대단한 좌절까진 아니고, 그냥, 또 가던 길 가야지.

 

-蟲-

Ταῦτα δὴ εἰπόντος αὐτοῦ ὁ Κρίτων, Εἶεν, ἔφη, ὦ                                   b

Σώκρατες· τί δὲ τούτοις ἢ ἐμοὶ ἐπιστέλλεις ἢ περὶ τῶν 

παίδων ἢ περὶ ἄλλου του, ὅτι ἄν σοι ποιοῦντες ἡμεῖς ἐν 

χάριτι μάλιστα ποιοῖμεν; 

그래서 그분께서 이런 것들을 말씀하시니 크리톤께서 

말씀하셨소. "좋네, 소크라테스. 그런데 자네는 그들에게든

내게든 자식들에 관련하여서든 다른 누구에 관련하여서든 

우리가 자네에게 호의로 특히나 해주었으면 하는 일로 무언가 

일러줄 일이 있나?"

 

Ἅπερ ἀεὶ λέγω, ἔφη, ὦ Κρίτων, οὐδὲν καινότερον· ὅτι                             5

ὑμῶν αὐτῶν ἐπιμελούμενοι ὑμεῖς καὶ ἐμοὶ καὶ τοῖς ἐμοῖς 

καὶ ὑμῖν αὐτοῖς ἐν χάριτι ποιήσετε ἅττ᾿ ἂν ποιῆτε, κἂν μὴ 

νῦν ὁμολογήσητε·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내가 항상 말하던 바로 그걸세, 크리톤, 

전혀 더 새로울 것도 없네. 자네들 스스로 자네들 자신들을 

돌봄으로써 하고자 할 어떤 일들을 내게도 내 사람들에게도

자네들 자신들에게도 호의로 행해달란 것이지. 설령 지금은 

자네들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말일세.

                              ἐὰν δὲ ὑμῶν μὲν αὐτῶν ἀμελῆτε καὶ μὴ 

θέλητε ὥσπερ κατ᾿ ἴχνη κατὰ τὰ νῦν τε εἰρημένα καὶ τὰ ἐν 

τῷ ἔμπροσθεν χρόνῳ ζῆν, οὐδὲ ἐὰν πολλὰ ὁμολογήσητε ἐν                   10

τῷ παρόντι καὶ σφόδρα, οὐδὲν πλέον ποιήσετε.                                   c

그런데 자네들이 자신들을 돌보지 않고 마치 발자취를 따르듯

지금 언급된 것들과 이전의 시간 동안에 언급된 것들을 따라 살려

하지 않는다면, 설령 자네들이 당장에 많은 것들을 지극하게 

동의한다 한들, 전혀 더 많은 일을 해내지 못할 걸세."

> Smyth 2381.

 

Ταῦτα μὲν τοίνυν προθυμησόμεθα, ἔφη, οὕτω ποιεῖν· 

θάπτωμεν δέ σε τίνα τρόπον;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러면 그런 일들은 그런 식으로 행하도록

우리가 마음을 쏟겠네. 그런데 자네를 어떤 식으로 장사 지내 

주었으면 하는가?"

 

Ὅπῶς ἄν, ἔφη, βούλησθε, ἐάνπερ γε λάβητέ με καὶ μὴ 

ἐκφύγω ὑμᾶς. Γελάσας δὲ ἅμα ἡσυχῇ καὶ πρὸς ἡμᾶς ἀπο-                     5

βλέψας εἶπεν· Οὐ πείθω, ὦ ἄνδρες, Κρίτωνα, ὡς ἐγώ εἰμι 

οὗτος Σωκράτης, ὁ νυνὶ διαλεγόμενος καὶ διατάττων 

ἕκαστον τῶν λεγομένων, ἀλλ᾿ οἴεταί με ἐκεῖνον εἶναι ὃν 

ὄψεται ὀλίγον ὕστερον νεκρόν, καὶ ἐρωτᾷ δὴ πῶς με                            d

θάπτῃ.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자네들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해주게,

자네들이 정말로 나를 붙잡아 내가 자네들에게서 달아나지

못한다면 말일세." 그런데 조용히 웃으시고는 우리 쪽을 

바라보시고 말씀하셨다오. "이보게들, 내가 크리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군, 내가 이런 사람인 소크라테스라는 걸, 지금 대화를

나누고 논해진 바 각각을 정돈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말일세. 

오히려 그는 내가 잠시 뒤에 그가 보게 될 저 송장이라

생각하고는, 나를 어찌 장사지낼지 묻는군.

            ὅτι δὲ ἐγὼ πάλαι πολὺν λόγον πεποίημαι, ὡς, 

ἐπειδὰν πίω τὸ φάρμακον, οὐκέτι ὑμῖν παραμενῶ, ἀλλ᾿ 

οἰχήσομαι ἀπιὼν εἰς μακάρων δή τινας εὐδαιμονίας, 

ταῦτά μοι δοκῶ αὐτῷ ἄλλως λέγειν, παραμυθούμενος ἅμα                     5

μὲν ὑμᾶς, ἅμα δ᾿ ἐμαυτόν. 

그런데 내가 진작부터 많은 논의를 지었는데, 내가 약을 마시고 

나면, 더 이상 자네들 곁에 있지 않을 것이고, 복된 자들의 어떤 

행복을 향해 떠나 거주하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두고서는, 이런

것들을 내가 달리 논한 것으로 그에게 여겨지고 있네. 부분적으로는

자네들을 달래며, 또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을 달래며 말이지."

                                           ἐγγυήσασθε οὖν με πρὸς 

Κρίτωνα, ἔφη, τὴν ἐναντίαν ἐγγύην ἢ ἣν οὗτος πρὸς τοὺς 

δικαστὰς ἠγγυᾶτο. οὗτος μὲν γὰρ ἦ μὴν παραμενεῖν· ὑμεῖς 

δὲ ἦ μὴν μὴ παραμενεῖν ἐγγυήσασθε ἐπειδὰν ἀποθάνω, 

ἀλλὰ οἰχήσεσθαι ἀπιόντα, ἵνα Κρίτων ῥᾷον φέρῃ, καὶ μὴ                      e

ὁρῶν μου τὸ σῶμα ἢ καόμενον ἢ κατορυττόμενον ἀγα-

νακτῇ ὑπὲρ ἐμοῦ ὡς δεινὰ πάσχοντος, μηδὲ λέγῃ ἐν τῇ 

ταφῇ ὡς ἢ προτίθεται Σωκράτη ἢ ἐκφέρει ἢ κατορύττει.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러니 자네들이 나를 크리톤에게 보증해 

주게. 이 사람이 판관들에게 보증해주었던 그 맹세와 반대되는 

맹세를 말일세. 이 친구는 단언컨데 머물 것이라 보증하였으니. 

그런데 자네들은 내가 죽고 나면 단언컨데 머물지 않으리라고, 

오히려 떠나 거주하게 되리라 보증해 주게. 크리톤이 수월하게 

지내도록, 내 육신이 불타든 파묻히든 그걸 보며 끔찍한 일을 

겪는다고 나를 위해 성내지 않고, 소크라테스를 장지에 두었다느니 

그리로 옮겼다느니 묻었다느니 하고 말하지도 못하도록 말일세."

                                                                                        εὖ 

γὰρ ἴσθι, ἦ δ᾿ ὅς, ὦ ἄριστε Κρίτων, τὸ μὴ καλῶς λέγειν οὐ                      5

μόνον εἰς αὐτὸ τοῦτο πλημμελές, ἀλλὰ καὶ κακόν τι 

ἐμποιεῖ ταῖς ψυχαῖς. ἀλλὰ θαρρεῖν τε χρὴ καὶ φάναι 

τοὐμὸν σῶμα θάπτειν, καὶ θάπτειν οὕτως ὅπως ἄν σοι 

φίλον ᾖ καὶ μάλιστα ἡγῇ νόμιμον εἶναι.                                             116a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러니까 잘 알아두게, 복 받은 크리톤, 

아름답지 못하게 논하는 것은 비단 그 자체로 엇나간 일일 뿐만 

아니라, 영혼에 어떤 나쁜 것까지 만들어 넣는 것이라네. 오히려 

내 육신을 장사 지낸다고 용감하게 말해야만 하고, 자네에게 

친숙하고 특히나 관습에 맞는 것이라 자네가 생각할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장사지내기에 망설임이 없어야만 하네."

 

Ταῦτ᾿ εἰπὼν ἐκεῖνος μὲν ἀνίστατο εἰς οἴκημά τι ὡς 

λουσόμενος, καὶ ὁ Κρίτων εἵπετο αὐτῷ, ἡμᾶς δ᾿ ἐκέλευε 

περιμένειν. περιεμένομεν οὖν πρὸς ἡμᾶς αὐτοὺς δια-

λεγόμενοι περὶ τῶν εἰρημένων καὶ ἀνασκοποῦντες, τοτὲ δ᾿                     5

αὖ περὶ τῆς συμφορᾶς διεξιόντες ὅση ἡμῖν γεγονυῖα εἴη, 

ἀτεχνῶς ἡγούμενοι ὥσπερ πατρὸς στερηθέντες διάξειν 

ὀρφανοὶ τὸν ἔπειτα βίον. 

저분께서는 이런 것들을 말씀하시고 재계하시려 어떤 방으로 

일어나 들어가셨고, 크리톤께서는 그분을 따르셨으며, 우리에게 

기다리라 말씀하셨소. 그리하여 우리는 언급된 것들에 관하여 

우리끼리 대화를 하고 곱씹으며 기다리다, 그 때 다시 우리에게 

생겨난 그만큼이나 되는 불운에 관하여 상술하면서, 그야말로 

아버지를 잃은 고아들처럼 이후의 생애를 살아내게 되리라 

생각하였다오.

                                        ἐπειδὴ δὲ ἐλούσατο καὶ ἠνέχθη 

παρ᾿ αὐτὸν τὰ παιδία―δύο γὰρ αὐτῷ ὑεῖς σμικροὶ ἦσαν,                     b

εἷς δὲ μέγας―καὶ αἱ οἰκεῖαι γυναῖκες ἀφίκοντο ἐκεῖναι, 

ἐναντίον τοῦ Κρίτωνος διαλεχθείς τε καὶ ἐπιστείλας ἅττα 

ἐβούλετο, τὰς μὲν γυναῖκας καὶ τὰ παιδία ἀπιέναι 

ἐκέλευσεν, αὐτὸς δὲ ἧκε παρ᾿ ἡμᾶς. καὶ ἦν ἤδη ἐγγὺς ἡλίου                   5

δυσμῶν· χρόνον γὰρ πολὺν διέτριψεν ἔνδον. 

그런데 그분께서 재계하셨을 때 그분 곁에 아이들이 데려다 

놓여졌고, 그야 그분께 어린 자제 둘이 있었고, 장성한 자제

하나가 있었으니, 또한 집안의 저 여인들도 도착했으며, 

그분께서는 크리톤의 맞은편에서 대화하시고 바라시는 바 몇

가지를 적으셨고, 여인들과 아이들에게 떠나도록 명하시고는, 

당신 자신께서는 우리 곁으로 오셨소. 그러자 이미 일몰이

가까웠다오. 많은 시간 동안을 그 안에서 보내셨으니 말이오.

                                                                        ἐλθὼν δ᾿ 

ἐκαθέζετο λελουμένος καὶ οὐ πολλὰ ἄττα μετὰ ταῦτα 

διελέχθη, καὶ ἧκεν ὁ τῶν ἕνδεκα ὑπηρέτης καὶ στὰς παρ᾿ 

αὐτόν, Ὦ Σώκρατες, ἔφη, οὐ καταγνώσομαί γε σοῦ ὅπερ                    c

ἄλλων καταγιγνώσκω, ὅτι μοι χαλεπαίνουσι καὶ 

καταρῶνται ἐπειδὰν αὐτοῖς παραγγείλω πίνειν τὸ φάρ-

μακον ἀναγκαζόντων τῶν ἀρχόντων. 

그분께선 재계하시고서 와서 앉으셨고 그런 일들 다음으로 

많지 않은 몇 가지 것들을 대화 나누셨고, 11인의 보좌가 와서 

그분 곁에 서서는 말했소."소크라테스, 저는 당신께 제가 다른 

이들에게 가지는 바로 그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관리들이 강제하는 것임에도 제가 약을 마시라고 그들에게

전할 때면 언제나 제게 험하게 굴고 저주를 퍼부으니까요.

                                                            σὲ δὲ ἐγὼ καὶ ἄλλως 

ἔγνωκα ἐν τούτῳ τῷ χρόνῳ γενναιότατον καί πρᾳότατον                        5

καὶ ἄριστον ἄνδρα ὄντα τῶν πώποτε δεῦρο ἀφικομένων, 

καὶ δὴ καὶ νῦν εὖ οἶδ᾿ ὅτι οὐκ ἐμοὶ χαλεπαίνεις, γιγνώσκεις 

γὰρ τοὺς αἰτίους, ἀλλὰ ἐκείνοις. νῦν οὖν, οἶσθα γὰρ ἃ 

ἦλθον ἀγγέλλων, χαῖρέ τε καὶ πειρῶ ὡς ῥᾷστα φέρειν τὰ                     d

ἀναγκαῖα. Καὶ ἅμα δακρύσας μεταστρεφόμενος ἀπῄει. 

그런데 저는 특히나 당신이 그 그러한 시간에 가장 고결하고

온화하며 훌륭한 사내로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지껏 이곳에 

이른 이들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더욱이 지금도 당신께서 제게 

험악하게 굴지 않으시고, 그야 누구의 탓인지를 아시니, 오히려

저들에게 가혹하게 구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제가 전해드리러 온 말들을 아시니, 안녕하시고 또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최대한 수월하게 견뎌내고자 해 보아 주십시오."

 

Καὶ ὁ Σωκράτης ἀναβλέψας πρὸς αὐτόν, Καὶ σύ, ἔφη, 

χαῖρε, καὶ ἡμεῖς ταῦτα ποιήσομεν. Καὶ ἅμα πρὸς ἡμᾶς, 

Ὡς ἀστεῖος, ἔφη, ὁ ἄνθρωπος· καὶ παρὰ πάντα μοι τὸν                          5

χρόνον προσῄει καὶ διελέγετο ἐνίοτε καὶ ἦν ἀνδρῶν 

λῷστος, καὶ νῦν ὡς γενναίως με ἀποδακρύει. ἀλλ᾿ ἄγε δή, 

ὦ Κρίτων, πειθώμεθα αὐτῷ, καὶ ἐνεγκάτω τις τὸ 

φάρμακον, εἰ τέτριπται· εἰ δὲ μή, τριψάτω ὁ ἄνρθωπος. 

그러자 소크라테스께서 그를 올려다 보시고서는 말씀하셨소. 

"자네도 안녕하게, 우리도 그리 하겠네." 그와 동시에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셨소. "사람 참 어찌나 점잖은지. 온 시간 내내 

내 곁에 있어주었고 때로는 대화를 나누었으며 사람들 중 

가장 바람직한 자였거니와, 지금도 어찌나 진지하게도 나를 

위해 울어주는지. 자, 그럼, 크리톤, 우리 그에게 따르도록 

하세. 그리고 누가 약을 가져오게, 약이 지어졌다면 말일세.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짓도록 하고." 

 

Καὶ ὁ Κρίτων, Ἀλλ᾿ οἶμαι, ἔφη, ἔγωγε, ὦ Σώκρατες, ἔτι                         e

ἥλιον εἶναι ἐπὶ τοῖς ὄρεσιν καὶ οὔπω δεδυκέναι. καὶ ἅμα 

ἐγὼ οἶδα καὶ ἄλλους πάνυ ὀψὲ πίνοντας, ἐπειδὰν παραγ-

γελθῇ αὐτοῖς, δειπνήσαντάς τε καὶ πιόντας εὖ μάλα, καὶ 

συγγενομένους γ᾿ ἐνίους ὧν ἂν τύχωσιν ἐπιθυμοῦντες.                          5

ἀλλὰ μηδὲν ἐπείγου· ἔτι γὰρ ἐγχωρεῖ. 

그러자 크리톤께서 말씀하셨소. "허나 내 생각엔, 소크라테스, 

여전히 해가 산등성이에 있고 아직 저물지 않았다네. 또 그와 

함께 나는 다른 이들도 한참이나 늦게 마신다는 걸 알고 있네, 

그들에게 명이 전해지고 나면, 무척이나 잘 차려먹고 또 마시고, 

어떤 이들은 마침 열망이 동하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기까지 

한다는 걸 말이지. 그러니 전혀 서두를 것 없네. 아직 여유가 

있으니 말이네."

 

Καὶ ὁ Σωκράτης, Εἰκότως γε, ἔφη, ὦ Κρίτων, ἐκεῖνοί 

τε ταῦτα ποιοῦσιν, οὓς σὺ λέγεις―οἴονται γὰρ κερδαίνειν 

ταῦτα ποιήσαντες―καὶ ἔγωγε ταῦτα εἰκότως οὐ ποιήσω· 

οὐδὲν γὰρ οἶμαι κερδανεῖν ὀλίγον ὕστερον πιὼν ἄλλο γε ἢ              117a

γέλωτα ὀφλήσειν παρ᾿ ἐμαυτῷ, γλιχόμενος τοῦ ζῆν καὶ 

φειδόμενος οὐδενὸς ἔτι ἐνόντος. ἀλλ᾿ ἴθι, ἔφη, πείθου καὶ 

μὴ ἄλλως ποίει. 

그러자 소크라테스께서 말씀하셨소. "저들이 자네가 말하는 

그런 일들을 하는 것도 그럴 듯하고, 그야 그들은 그런 일들을 

해서 이득을 본다 생각하니, 또 나 자신이 그런 일들을 하지 

않을 것도 그럴 듯하네. 그야 아직 그 안에 여분의 것이라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음에도 그 삶에 집착하면서, 나 자신에게

비웃음을 사게 되리란 것 말고는 달리 조금 늦게 마신다고 득을

볼 건 전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분께서는 말씀하셨다오. 

"허나 잘 알아두게, 납득하고 달리 하지 말게나."

 

Καὶ ὁ Κρίτων ἀκούσας ἔνευσε τῷ παιδὶ πλησίον ἑστῶτι.                         5

καὶ ὁ παῖς ἐξελθὼν καὶ συχνὸν χρόνον διατρίψας ἦκεν 

ἄγων τὸν μέλλοντα δώσειν τὸ φάρμακον, ἐν κύλικι 

φέροντα τετριμμένον. ἰδὼν δὲ ὁ Σωκράτης τὸν ἄνθρωπον, 

Εἶεν, ἔφη, ὦ βέλτιστε, σὺ γὰρ τούτων ἐπιστήμων, τί χρὴ 

ποιεῖν;                                                                                                      10

그러자 크리톤께서 들으시고는 가까이 서 있던 아이를 향해 

돌아서셨소. 그러자 아이가 나가서 긴 시간을 보내고서 

장차 약을 줄 사람을 이끌고 왔는데, 그는 잔 속에 지어진 약을 

가져왔소. 소크라테스께서 그 사람을 보시고는 말씀하셨소. 

"좋소, 가장 훌륭한 분, 당신이 일을 아는 사람이니, 무엇을 

해야 하오?"

 

Οὐδὲν ἄλλο, ἔφη, ἢ πιόντα περιιέναι, ἕως ἂν σου βάρος 

ἐν τοῖς σκέλεσι γένηται, ἔπειτα κατακεῖσθαι· καὶ οὕτως                          b

αὐτὸ ποιήσει. Καὶ ἅμα ὤρεξε τὴν κύλικα τῷ Σωκράτει. 

그는 말했소. "달리 하실 건 전혀 없고, 마시시며 주위를 

도시기를, 당신의 두 다리가 무거워질 때까지 그리 하시고, 

이후에는 앉아계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약이 할 일을 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가 그 잔을 소크라테스께 내밀었소. 

 

Καὶ ὃς λαβὼν καὶ μάλα ἵλεως, ὦ Ἐχέκρατες, οὐδὲν 

τρέσας οὐδὲ διαφθείρας οὔτε τοῦ χρώματος οὔτε τοῦ 

προσώπου, ἀλλ᾿ ὥσπερ εἰώθει ταυρηδὸν ὑποβλέψας πρὸς                  5

τὸν ἄνθρωπον, Τί λέγεις, ἔφη, περὶ τοῦδε τοῦ πώματος 

πρὸς τὸ ἀποσπεῖσαί τινι; ἔξεστιν ἢ οὔ; 

그분께서 잔을 드시고는 무척이나 자애롭게, 에케크라테스, 

안색도 표정도 어느 하나 두려워 하시지도 망가뜨리시지도 

않으시고서, 오히려 익히 그러하셨듯 황소처럼 그 사람을 

바라보시고는 말씀하셨다오. "이걸 마시는 일과 관련해서

어떤 분께든 뇌주하여 올리려는 일에 대해 무어라 말씀하시오? 

가능하오 혹은 그렇지 않소?"

 

Τοσοῦτον, ἔφη, ὦ Σώκρατες, τρίβομεν ὅσον οἰόμεθα 

μέτριον εἶναι πιεῖν. 

그가 말했소. "마시시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한 그 만큼을

저희가 지어드렸습니다, 소크라테스."

 

Μανθάνω, ἦ δ᾿ ὅς· ἀλλ᾿ εὔχεσθαί γέ που τοῖς θεοῖς ἔξεστί                    c

τε καὶ χρή, τὴν μετοίκησιν τὴν ἐνθένδε ἐκεῖσε εὐτυχῆ 

γενέσθαι· ἃ δὴ καὶ ἐγὼ εὔχομαί τε καὶ γένοιτο ταύτῃ. Καὶ 

ἅμ᾿ εἰπὼν ταῦτα ἐπισχόμενος καὶ μάλα εὐχερῶς καὶ 

εὐκόλως ἐξέπιεν.                                                                                      5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알겠소. 허나 적어도 분명 신들께 

기도를 드리는 일은 허락되고 또한 해야만 하는 일이라오,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이주가 복된 것이기를 기원하는 것 

말이오. 더욱이 내가 기도 드리는 일들 또한 그리 되기를." 

그와 동시에 이런 말씀들을 멈추시고 무척이나 무던하게도 

또 순순히 들이켜시었소.

                            καὶ ἡμῶν οἱ πολλοὶ τέως μὲν ἐπιεικῶς                         5

οἷοί τε ἦσαν κατέχειν τὸ μὴ δακρύειν, ὡς δὲ εἴδομεν 

πίνοντά τε καὶ πεπωκότα, οὐκέτι, ἀλλ᾿ ἐμοῦ γε βίᾳ καὶ 

αὐτοῦ ἀστακτὶ ἐχώρει τὰ δάκρυα, ὥστε ἐγκαλυψάμενος 

ἀπέκλαον ἐμαυτόν―οὐ γὰρ δὴ ἐκεῖνόν γε, ἀλλὰ τὴν 

ἐμαυτοῦ τύχην, οἵου ἀνδρὸς ἑταίρου ἐστερημένος εἴην.                       d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때까지는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꽤나 그럴 듯하게 참을 수 있었으나, 그분께서 마시고 계신 

것을 또 다 들이켜신 것을 보고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쏟아져 흐르는 눈물에 항복하여, 

얼굴을 가리고서 통곡하였다오. 그야 정말이지 저분이 

아니라, 동료인 사내를 잃어 버린, 그런 나 자신의 운명을

두고서 운 것이니 말이오. 

                                                                                        ὁ                    d

δὲ Κρίτων ἔτι πρότερος ἐμοῦ, ἐπειδὴ οὐχ οἷός τ᾿ ἦν κατέ-

χειν τὰ δάκρυα, ἐξανέστη. Ἀπολλόδωρος δὲ καὶ ἐν τῷ 

ἔμπροσθεν χρόνῳ οὐδὲν ἐπαύετο δακρύων, καὶ δὴ καὶ τότε 

ἀναβρυχησάμενος κλάων καὶ ἀγανακτῶν οὐδένα ὅντινα οὐ                   5

κατέκλασε τῶν παρόντων πλήν γε αὐτοῦ Σωκράτους. 

그런데 크리톤께서는 나보다도 훨씬 더 먼저, 눈물을 참아내실 

수가 없어서, 자리를 뜨셨다오. 아폴로도로스는 앞선 시간에도 

전혀 눈물을 그치지 못하더니, 그 때에는 더욱 더 소리 높여 

포효하며 통곡하고 괴로워하여 그 자리에 있는 자들 중 소크라테스 

당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라도 어느 하나 무너뜨리지 않은

자가 없었소.

 

Ἐκεῖνος δέ, Οἷα, ἔφη, ποιεῖτε, ὦ θαυμάσιοι. ἐγὼ μέντοι 

οὐχ ἥκιστα τούτου ἕνεκα τὰς γυναῖκας ἀπέπεμψα, ἵνα μὴ 

τοιαῦτα πλημμελοῖεν· καὶ γὰρ ἀκήκοα ὅτι ἐν εὐφημίᾳ χρὴ                    e

τελευτᾶν. ἀλλ᾿ ἡσυχίαν τε ἄγετε καὶ καρτερεῖτε.

그런데 저분께서는 말씀하셨소. "무엇들을 하는 겐가, 놀라운 

친구들. 내가 무엇보다도 이걸 위해 여인들을 떠나보냈는데, 

이런 실수를 하지 말라고 말일세. 그야 나는 경건한 기도 속에

끝을 맞이해야만 한다고 들었으니까. 그러니 조용히 하고 진정들 

하게."

 

Καὶ ἡμεῖς ἀκούσαντες ᾐσχύνθημέν τε καὶ ἐπέσχομεν τοῦ 

δακρύειν. ὁ δὲ περιελθών, ἐπειδή οἱ βαρύνεσθαι ἔφη τὰ 

σκέλη, κατεκλίνη ὕπτιος―οὕτω γὰρ ἐκέλευεν ὁ ἄνθρω-                         5

πος―καὶ ἅμα ἐφαπτόμενος αὐτοῦ οὗτος ὁ δοὺς τὸ 

φάρμακον, διαλιπὼν χρόνον ἐπεσκόπει τοὺς πόδας καὶ τὰ 

σκέλη, κἄπειτα σφόδρα πιέσας αὐτοῦ τὸν πόδα ἤρετο εἰ 

αἰσθάνοιτο· ὁ δ᾿ οὐκ ἔφη. καὶ μετὰ τοῦτο αὖθις τὰς κνήμας·           118a

καὶ ἐπανιὼν οὕτως ἡμῖν ἐπεδείκνυτο ὅτι ψύχοιτό τε καὶ 

πήγνυτο. καὶ αὐτὸς ἥπτετο καὶ εἶπεν ὅτι, ἐπειδὰν πρὸς τῇ 

καρδίᾳ γένηται αὐτῷ, τότε οἰχήσεται.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서 침묵하였고 눈물흘리기를 그쳤소. 

그분께서는 주위를 도시다가, 누군가에게 두 다리가 무거워진다 

말씀하시고, 엎드려 누우셨으니, 그 사람이 그리 권했기 때문이오. 

그와 동시에 약을 준 그 사람이 그분을 부축하였고, 시간 간격을 

두고 그분의 두 발과 두 다리를 살펴보고서, 다음으로 매우 세게 

그분의 발을 눌러보고는 느껴지시는지 물었다오. 그분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소. 그러자 그 다음에는 다시 종아리를 그리 

하였다오. 그리고 그는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에게 

그분께서 식어가시고 굳어가시는 것을 보여주었소. 그리고 그는 

손을 대고서 말하기를, 그분께 심장에 이르고 나면, 그 때에 

떠나시리라 말해주었소.

 

Ἤδη οὖν σχεδόν τι αὐτοῦ ἦν τὰ περὶ τὸ ἦτρον ψυχόμενα,                     5

καὶ ἐκκαλυψάμενος―ἐνεκεκάλυπτο γάρ―εἶπεν―ὃ δὴ 

τελευταῖον ἐφθέγξατο―Ὦ Κρίτων, ἔφη, τῷ Ἀσκληπιῷ 

ὀφείλομεν ἀλεκτρυόνα· ἀλλὰ ἀπόδοτε καὶ μὴ ἀμελήσητε. 

그리하여 이미 그분의 거의 아랫배 부근까지 식게 되었고, 

천에 덮여 가리워져 계셨기에 천을 걷어내시고는 말씀하셨소. 

그분께서 정녕 마지막으로 발음하신 말씀이라오.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크리톤, 우리가 아스클레피오스께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자네들이 소홀히 하지 말고 갚아 드리게."

 

Ἀλλὰ ταῦτα, ἔφη, ἔσται, ὁ Κρίτων· ἀλλ᾿ ὅρα εἴ τι ἄλλο 

λέγεις.                                                                                                     10

크리톤께서 말씀하셨소. "그리 될 걸세. 허나 달리 자네가 할 

말이 있는지 보게."

 

Ταῦτα ἐρομένου αὐτοῦ οὐδὲν ἔτι ἀπεκρίνατο, ἀλλ᾿ ὀλί-

γον χρόνον διαλιπὼν ἐκινήθη τε καὶ ὁ ἄνθρωπος ἐξεκά-

λυψεν αὐτόν, καὶ ὃς τὰ ὄμματα ἔστησεν· ἰδὼν δὲ ὁ Κρίτων 

συνέλαβε τὸ στόμα καὶ τοὺς ὀφθαλμούς. 

그분께서 이리 물으셨으나 여전히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셨고, 

짧은 시간을 두고 움직이시다가 그 사람이 그분에게서 천을

걷어내 드렸고, 그러자 그분께서는 두 눈을 뜨고 계셨다오. 

크리톤께서 보시고는 그 분의 입과 두 눈을 갈무리해주셨소.

 

Ἥδε ἡ τελευτή, ὦ Ἐχέκρατες, τοῦ ἑταίρου ἡμῖν ἐγέ-                              15

νετο, ἀνδρός, ὡς ἡμεῖς φαῖμεν ἄν, τῶν τότε ὧν ἐπειράθη-

μεν ἀρίστου καὶ ἄλλως φρονιμωτάτου καὶ δικαιοτάτου. 

바로 이 결말이, 에케크라테스, 우리의 동지이신 분의, 우리가

말할지니, 당시에 우리가 대해 본 이들 중 가장 훌륭하시고

특히나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정의로우신 사내의 결말이 

되었다오.

 

-작성중-

Λέγεται γραφῆς τοίνυν, ἔφη, ὦ ἑταῖρε, πρῶτον μὲν εἶναι τοιαύτη                              5

ἡ γῆ αὐτὴ ἰδεῖν, εἴ τις ἄνωθεν θεῷτο, ὥσπερ αἱ δωδεκά-

σκυτοι σφαῖραι, ποικίλη, χρώμασιν διειλημμένη, ὧν καὶ 

τὰ ἐνθάδε εἶναι χρώματα ὥσπερ δείγματα, οἷς δὴ οἱ 

γραφῆς καταχρῶνται.                                                                                 c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러니까, 동지, 우선은 바로 그 대지가

보이기에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만일 누군가가 위에서 본다면,

마치 열두 조각으로 된 구체들 처럼, 실제로 화가들이 사용하는

이 땅의 색들 또한 그것들 중에 있는 그러한 색들로 구획지어진 

다채로운 것이라고 말해지네.

                                   ἐκεῖ δὲ πᾶσαν τὴν γῆν ἐκ τοιούτων                          c

εἶναι, καὶ πολὺ ἔτι ἐκ λαμπροτέρων καὶ καθαρωτέρων ἢ 

τούτων· 

그런데 저곳에서는 온 대지가 그러한 것들로, 그것들보다 훨씬 더

찬란하고 더욱 순정한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해지지.

              τὴν μὲν γὰρ ἁλουργῆ εἶναι καὶ θαυμαστὴν τὸ 

κάλλος, τὴν δὲ χρυσοειδῆ, τὴν δὲ ὅση λευκὴ γύψου ἢ 

χιόνος λευκοτέραν, καὶ ἐκ τῶν ἄλλων χρωμάτων συγκει-                             5

μένην ὡσαύτως, καὶ ἔτι πλειόνων καὶ καλλιόνων ἢ ὅσα 

ἡμεῖς ἑωράκαμεν. 

즉 그 대지는 한편으로는 진자줏빛으로는 아름답기가 놀라울

정도인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황금빛으로, 석회나 눈보다도

더욱 흴 만큼 그 정도로 희며, 여타의 색들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아 온 정도의 것들에 비해 훨씬 더 짙고도 아름답기까지 한

색들로 조합된 것이란 말일세.

                             καὶ γὰρ αὐτὰ ταῦτα τὰ κοῖλα αὐτῆς, 

ὕδατός τε καὶ ἀέρος ἔκπλεα ὄντα, χρώματός τι εἶδος 

παρέχεσθαι στίλβοντα ἐν τῇ τῶν ἄλλων χρωμάτων ποι-                           d

κιλίᾳ, ὥστε ἕν τι αὐτῆς εἶδος συνεχὲς ποικίλον φαντάζεσ-

θαι. 

또한 그 대지의 구덩이들 그 자체도, 물과 공기로 흘러넘치고 

있는데, 여타의 색들의 다채로움 속에서 반짝이며 색채의 어떤

형상을 내놓는다고, 그래서 대지의 어떤 단일하고 연속된

다채로운 형성을 드러내 보이게 된다고 하는 것이지.

       ἐν δὲ ταύτῃ οὔσῃ τοιαύτῃ ἀνὰ λόγον τὰ φυόμενα 

φύεσθαι, δένδρα τε καὶ ἄνθη καὶ τοὺς καρπούς· καὶ αὖ τὰ 

ὄρη ὡσαύτως καὶ τοὺς λίθους ἔχειν ἀνὰ τὸν αὐτὸν λόγον                            5

τήν τε λειότητα καὶ τὴν διαφάνειαν καὶ τὰ χρώματα καλ-

λίω· 

그런데 이러한 것으로 있는 대지 안에서 비율에 맞게 생장하는 

것들이 생장하니, 식물도 꽃도 그 열매도 그러하다고 하네. 또 

이번엔 산맥들과 돌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비율에 따라 더욱 

아름다운 매끄러움과 투명함 그리고 색채들을 지닌다고 하지.

       ὧν καὶ τὰ ἐνθάδε λιθίδια εἶναι ταῦτα τὰ ἀγαπώμενα 

μόρια, σάρδιά τε καὶ ἰάσπιδας καὶ σμαράγδους καὶ πάντα 

τὰ τοιαῦτα· ἐκεῖ δὲ οὐδὲν ὅτι οὐ τοιοῦτον εἶναι καὶ ἔτι                                 e

τούτων καλλίω. 

그것들에 대해 이 땅의 광석들로서도 다음과 같은 귀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그 부분들이라고 말해지니, 홍옥과 벽옥과

에메랄드 그리고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라고 하네. 그런데 

저곳에는 이와 같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그 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군.

                          τὸ δ᾿ αἴτιον τούτου εἶναι ὅτι ἐκεῖνοι οἱ 

λίθοι εἰσὶ καθαροὶ καὶ οὐ κατεδηδεσμένοι οὐδὲ διεφθαρμέ-

νοι ὥσπερ οἱ ἐνθάδε ὑπὸ σηπεδόνος καὶ ἅλμης ὑπὸ τῶν 

δεῦρο συνερρυηκότων, ἅ καὶ λίθοις καὶ γῇ καὶ τοῖς ἄλλοις                           5

ζῴοις τε καὶ φυτοῖς αἴσχη τε καὶ νόσους παρέχει. 

이러한 일의 원인은 저 돌들이 정화된 것들이자 부식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기를 마치 이곳의 돌들이 부패와 바닷물의 침식에 

의해 그러하듯 이곳으로 흘러드는 것들에 의해 그리 되지도 

않는 것들이란 점이라네. 이 흘러드는 것들이 돌에도 대지에도

여타의 동식물에도 추함과 질병을 넘겨주지.

                                                                              τὴν δὲ 

γῆν αὐτὴν κεκοσμῆσθαι τούτοις τε ἅπασι καὶ ἔτι χρυσῷ τε 

καὶ ἀργύρῳ καὶ τοῖς ἄλλοις αὖ τοῖς τοιούτοις. ἐκφανῆ γὰρ                    111a

αὐτὰ πεφυκέναι, ὄντα πολλὰ πλήθει καὶ μεγάλα καὶ παν-

ταχοῦ τῆς γῆς, ὥστε αὐτὴν ἰδεῖν εἶναι θέαμα εὐδαιμόνων 

θεατῶν. 

반면 그 대지 자체는 그와 같은 온갖 것들과 특히 황금과 은 

그리고 다시금 그와 같은 여타의 것들에 의해 치장되어 있다고 

하네. 수가 많고 거대하며 대지의 모든 곳에 있도록, 그것들이 

그렇게 타고난 것으로 드러나 보이기에, 그 대지가 보이기에

행복한 관조자들이 관조할 만한 것들일 정도라는 것이지.

              ζῷα δ᾿ ἐπ᾿ αὐτῇ εἶναι ἄλλα τε πολλὰ καὶ ἀνθρώ-

πους, τοὺς μὲν ἐν μεσογαίᾳ οἰκοῦντας, τοὺς δὲ περὶ τὸν                             5

ἀέρα ὥσπερ ἡμεῖς περὶ τὴν θάλατταν, τοὺς δ᾿ ἐν νήσοις ἅς 

περιρρεῖν τὸν ἀέρα πρὸς τῇ ἠπείρῳ οὔσας· 

그런데 그 위에 살아있는 것들은 여타의 많은 것들도 있지만

특히 인간들이 있는데, 어떤 인간들은 내륙에 거주하고, 또 어떤

인간들은 우리가 연안에 거주하듯 그처럼 공기 주위에 거주하며, 

또 어떤 인간들은 그 공기 주위로 육지 근처를 부유하는 섬들에 

거주하네.

                                                                      καὶ ἑνὶ λόγῳ, 

ὅπερ ἡμῖν τὸ ὕδωρ τε καὶ ἡ θάλαττά ἐστι πρὸς τὴν ἡμε-

τέραν χρείαν, τοῦτο ἐκεῖ τὸν ἀέρα, ὃ δὲ ἡμῖν ἀήρ, ἐκείνοις                         b

τὸν αἰθέρα. 

한 마디로, 우리의 필요를 위한 물과 바다인 바 바로 그것, 이것이 

저곳에서 공기이고, 우리에게 공기인 바의 것은, 저들에게는 

에테르이지.

                   τὰς δὲ ὥρας αὐτοῖς κρᾶσιν ἔχειν τοιαύτην ὥστε 

ἐκείνους ἀνόσους εἶναι καὶ χρόνον τε ζῆν πολὺ πλείω τῶν 

ἐνθάδε, καὶ ὄψει καὶ ἀκοῇ καὶ φρονήσει καὶ πᾶσι τοῖς τοι-

ούτοις ἡμῶν ἀφεστάναι τῇ αὐτῇ ἀποστάσει ᾗπερ ἀήρ τε                             5

ὕδατος ἀφέστηκεν καὶ αἰθὴρ ἀέρος πρὸς καθαρότητα. 

그들의 계절은 그와 같은 혼합을 지녀서 저들이 병들지 않는 

자들로 있도록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네. 또한 시각에서도 청각에서도

지혜에서도 우리의 그와 같은 모든 감각들에서도 그로써 공기도

물로부터 에테르도 공기로부터 그 순수성에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바로 그 이격으로써 우리로부터 떨어져 있고.

                                                                                       καὶ 

δὴ καὶ θεῶν ἄλση τε καὶ ἱερὰ αὐτοῖς εἶναι, ἐν οἷς τῷ ὄντι 

οἰκητὰς θεοὺς εἶναι, καὶ φήμας τε καὶ μαντείας καὶ αἰσθή-

σεις τῶν θεῶν καὶ τοιαύτας συνουσίας γίγνεσθαι αὐτοῖς 

πρὸς αὐτούς· καὶ τόν γε ἥλιον καὶ σελήνην καὶ ἄστρα ὁρᾶ-                        c

σθαι ὑπ᾿ αὐτῶν οἷα τυγχάνει ὄντα, καὶ τὴν ἄλλην εὐδαιμο-

νίαν τούτων ἀκόλουθον εἶναι. 

더욱이 그들에게는 신들의 성림과 성소가 있으니, 그 안에 있는 

그대로 거하시는 신들께서 계시고, 신탁과 예언 그리고 신들에 

대한 지각과 이와 같은 교류들이 그들에게 정면에서 이뤄진다지. 

태양도 달도 별들도 마침 그러한 것들로서 있는 그 자체들에 

의해 보여지고, 여타의 행복까지 그것들에 따라 있다 하네.

 

Καὶ ὃλην μὲν δὴ τὴν γῆν οὕτω πεφυκέναι καὶ τὰ περὶ τὴν 

γῆν· τόπους δ᾿ ἐν αὐτῇ εἶναι κατὰ τὰ ἔγκοιλα αὐτῆς κύκλῳ                          5

περὶ ὅλην πολλούς, τοὺς μὲν βαθυτέρους καὶ ἀναπεπτα-

μένους μᾶλλον ἢ ἐν ᾧ ἡμεῖς οἰκοῦμεν, τοὺς δὲ βαθυτέρους 

ὄντας τὸ χάσμα αὐτοὺς ἔλαττον ἔχειν τοῦ παρ᾿ ἡμῖν τόπου, 

ἔστι δ᾿ οὓς καὶ βραχυτέρους τῷ βάθει τοῦ ἐνθάδε εἶναι καὶ                        d

πλατυτέρους. 

온 대지가 그렇게 타고났고 대지 주위의 것들 또한 그리 타고 

났단 것이지. 그런데 그 대지 안의 장소들은 대지의 함몰된

분지들을 따라 여럿이 온 대지 주위로 둥글게 있다고, 어떤 

장소들은 우리가 그 안에 거주하는 곳보다 훨씬 더 깊고 넓게 

열려있는가 하면, 어떤 장소들은 우리쪽 장소에 비해 더 

깊으면서도 또 그 길목은 더 작은 것을 가진다고 하고, 그런데

이곳보다 깊이가 더 얕고 더 넓은 장소들도 있지.

                       τούτους δὲ πάντας ὑπὸ γῆν εἰς ἀλλήλους 

συντετρῆσθαί τε πολλαχῇ καὶ κατὰ στενότερα καὶ εὐρύ-

τερα καὶ διεξόδους ἔχειν, ᾗ πολὺ μὲν ὕδωρ ῥεῖν ἐξ 

ἀλλήλων εἰς ἀλλήλους ὥσπερ εἰς κρατῆρας, καὶ ἀενάων                             5

ποταμῶν ἀμήχανα μεγέθη ὑπὸ τὴν γῆν καὶ θερμῶν 

ὑδάτων καὶ ψυχρῶν, πολὺ δὲ πῦρ καὶ πυρὸς μεγάλους 

ποταμούς, πολλοὺς δὲ ὑγροῦ πηλοῦ καὶ καθαρωτέρου καὶ 

βορβορωδεστέρου, ὥσπερ ἐν Σικελίᾳ οἱ πρὸ τοῦ ῥύακος                          e

πηλοῦ ῥέοντες ποταμοὶ καὶ αὐτὸς ὁ ῥύαξ· 

그런데 대지 아래의 그 모든 장소들이 여러 방면으로 서로를

향해 함께 길이 뚫려 있고 또한 더 좁거나 더 넓은 통로들 역시 

지닌다고 하네. 그 길로 많은 물이 서로에게서 서로에게로 마치

포도주 그릇으로 흘러들듯 흐르고, 영원히 흐르는 광대한 크기의 

뜨겁거나 또 차가운 물줄기의 강들이 있는데, 많은 불과 거대한 

불의 강들, 더 순정한 것도 더욱 질척거리는 것도 있는 많은 습한 

진흙의 강들도 있으니, 마치 시켈리아에서 용암에 앞서 흐르는

진창의 강물들과 용암 그 자체 같지.

                                                                   ὧν δὴ καὶ ἑκά-

στους τοὺς τόπους πληροῦσθαι, ὡς ἂν ἑκάστοις τύχῃ 

ἑκάστοτε ἡ περιρροὴ γιγνομένη. 

더욱이 각각의 장소들은 그것들로 채워지니, 순환이 생겨 매번

각각의 장소와 마주치기는 언제든 그러하다네.

                                                    ταῦτα δὲ πάντα κινεῖν 

ἄνω καὶ κάτω ὥσπερ αἰώραν τινὰ ἐνοῦσαν ἐν τῇ γῇ· ἔστι δὲ                        5

ἄρα αὕτη ἡ αἰώρα διὰ φύσιν τοιάνδε τινά. ἕν τι τῶν 

χασμάτων τῆς γῆς ἄλλως τε μέγιστον τυγχάνει ὂν καὶ 

διαμπερὲς τετρημένον δι᾿ ὅλης τῆς γῆς, τοῦτο ὅπερ                               112a

Ὅμηρος εἶπε, λέγων αὐτό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마치 대지 안에 무슨 맥박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위아래로 움직인다고 하지. 대지의 입구들 중 어느 하나가 

마침 특히나 가장 거대한 것이고 온 대지를 끝에서 끝까지 관통하여 

뚫려 있는데, 호메로스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지. 

τῆλε μάλ᾿, ᾗχι βάθιστον ὑπὸ χθονός ἐστι βέρεθρον· 
아득히 멀리, 가장 깊은 지저의 나락이 있는 곳.

 

ὃ καὶ ἄλλοθι καὶ ἐκεῖνος καὶ ἄλλοι πολλοὶ τῶν ποιητῶν 

Τάρταρον κεκλήκασιν.                                                                                   5

다른 곳에서도 저분께서도 다른 많은 시인들 또한 타르타로스라 

불렀던 것이라네.

                                     εἰς γὰρ τοῦτο τὸ χάσμα συρρέουσί                           5

τε πάντες οἱ ποταμοὶ καὶ ἐκ τούτου πάλιν ἐκρέουσιν· 

γίγνονται δὲ ἕκαστοι τοιοῦτοι δι᾿ οἵας ἂν καὶ τῆς γῆς 

ῥέωσιν.                                                                                                        b

이 입구로 모든 강들이 흘러들고 그로부터 다시 흘러나오니까. 

그런데 그 각각의 강들은 그를 통해 강이 흐를 그 대지 역시 

그러할 그와 같은 것들로 되지.

              ἡ δὲ αἰτία ἐστὶν τοῦ ἐκρεῖν τε ἐντεῦθεν καὶ εἰσρεῖν                         b

πάντα τὰ ῥεύματα, ὅτι πυθμένα οὐκ ἔχει οὐδὲ βάσιν τὸ 

ὑγρὸν τοῦτο. 

그런데 이곳에서 모든 흐름들의 유출과 유입의 원인은, 기저도 

층도 이 습한 흐름이 지니지 않는다는 것일세.

                      αἰωρεῖται δὴ καὶ κυμαίνει ἄνω καὶ κάτω, καὶ 

ὁ ἀὴρ καὶ τὸ πνεῦμα τὸ περὶ αὐτὸ ταὐτὸν ποιεῖ· 

더 나아가 그 흐름이 위로 아래로 부상하고 물결치니, 공기도

바람도 그 흐름 주위에서 일어나는 똑같은 일을 행한다네. 

                                                                            συνέπεται 

γὰρ αὐτῷ καὶ ὅταν εἰς τὸ ἐπ᾿ ἐκεῖνα τῆς γῆς ὁρμήσῃ καὶ                              5

ὅταν εἰς τὸ ἐπὶ τάδε, καὶ ὥσπερ τῶν ἀναπνεόντων ἀεὶ 

ἐκπνεῖ τε καὶ ἀναπνεῖ ῥέον τὸ πνεῦμα, οὕτω καὶ ἐκεῖ 

συναιωρούμενον τῷ ὑγρῷ τὸ πνεῦμα δεινούς τινας 

ἀνέμους καὶ ἀμηχάνους παρέχεται καὶ εἰσιὸν καὶ ἐξιόν. 

공기도 바람도 대지의 저편으로 촉발할 때에도 이편으로 촉발할

때에도 그 흐름에 함께 따르고, 마치 호흡하는 것들의 숨이 흐르며  

항상 내쉬어지고 또 들이마셔지듯, 그렇게 저곳에서도 바람이

그 습한 흐름과 함께 물결치며 무시무시하고 어찌할 수 없는 어떤 

돌풍을 내놓으며 드나들기 때문이지.

ὅταν τε οὖν ὑποχωρήσῃ τὸ ὕδωρ εἰς τὸν τόπον τὸν δὴ κάτω                     c

καλούμενον, τοῖς κατ᾿ ἐκεῖνα τὰ ῥεύματα διὰ τῆς γῆς εἰσρεῖ 

τε καὶ πληροῖ αὐτὰ ὥσπερ οἱ ἐπαντλοῦντες· 

그리하여 물이 아랫쪽이라 불리는 장소로 되돌아갈 때에도,

흐름들을 따라 대지를 관통하여 그것들에 유입되고 그것들을 

마치 물을 대는 사람들처럼 가득 채운다네.

                                                                      ὅταν τε αὖ 

ἐκεῖθεν μὲν ἀπολίπῃ, δεῦρο δὲ ὁρμήσῃ, τὰ ἐνθάδε πληροῖ 

αὖθις, τὰ δὲ πληρωθέντα ῥεῖ διὰ τῶν ὀχετῶν καὶ διὰ τῆς                             5

γῆς, καὶ εἰς τοὺς τόπους ἕκαστα ἀφικνούμενα, εἰς οὓς 

ἑκάστους ὁδοποιεῖται, θαλάττας τε καὶ λίμνας καὶ ποτα-

μοὺς καὶ κρήνας ποιεῖ· 

또한 이번엔 저곳으로부터 떠나, 이곳으로 촉발할 때에도, 이곳의 

흐름들을 다시 채우고, 그 채워진 흐름들은 물줄기들을 통해 

그리고 대지를 통해 흐르며, 각각의 흐름들이 그쪽으로 물길이 

내어진 그 장소들로 저마다 당도하여, 바다와 호수와 강과 샘을 

만들지.

                                     ἐντεῦθεν δὲ πάλιν δυόμενα κατὰ τῆς 

γῆς, τὰ μὲν μακροτέρους τόπους περιελθόντα καὶ πλείους,                       d

τὰ δὲ ἐλάττους καὶ βραχυτέρους, πάλιν εἰς τὸν Τάρταρον 

ἐμβάλλει, τὰ μὲν πολὺ κατωτέρω ἢ ᾗ ἐπηντλεῖτο, τὰ δὲ 

ὀλίγον· 

이로부터 다시 대지를 따라 잠겨들어, 어떤 것들은 더욱 길고 

많은 장소들을 순회하고, 또 어떤 것들은 더 적고 짧은 장소들을 

순회하고서, 다시 타르타로스로 쏟아져 들어가니, 어떤 것들은

물대어졌던 곳보다 훨씬 더 깊이 흘러들고, 어떤 것들은 일부만 

흘러든다네. 

            πάντα δὲ ὑποκάτω εἰσρεῖ τῆς ἐκροῆς, καὶ ἔνια μὲν 

καταντικρὺ ᾗ εἰσρεῖ ἐξέπεσεν, ἔνια δὲ κατὰ τὸ αὐτὸ μέρος·                          5

그런데 모든 것들이 분출구 아래로 흘러들어가니, 어떤 것들은 

분출되었던 곳과 반대편으로 흘러들어가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같은 부분을 따라 흘러들어간다네.

ἔστι δὲ ἃ παντάπασιν κύκλῳ περιελθόντα, ἢ ἅπαξ ἢ καὶ 

πλεονάκις περιελιχθέντα περὶ τὴν γῆν ὥσπερ οἱ ὄφεις, εἰς 

τὸ δυνατὸν κάτω καθέντα πάλιν ἐμβάλλει. 

그런데 전적으로 원형으로 회전하는 것들이 있으니, 단 한 번이든 

여러 차례든 마치 뱀들처럼 대지 주위를 회전하고서, 가능한 한 

밑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비워져 나오지.

                                                                   δυνατὸν δέ 

ἐστιν ἑκατέρωσε μέχρι τοῦ μέσου καθιέναι, πέρα δ᾿ οὔ·                             e

ἄναντες γὰρ ἀμφοτέροις τοῖς ῥεύμασι τὸ ἑκατέρωθεν 

γίγνεται μέρος. 

그런데 중간까지는 둘 중 어느 쪽으로든 내려가는 일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가능하지 않다네. 양편의 흐름들 모두에 

양방향 각각으로부터의 길이 오르막이 되기 때문이지.

 

Τὰ μὲν οὖν δὴ ἄλλα πολλά τε καὶ μεγάλα καὶ παντο-

δαπὰ ῥεύματά ἐστι· τυγχάνει δ᾿ ἄρα ὄντα ἐν τούτοις τοῖς                             5

πολλοῖς τέτταρ᾿ ἄττα ῥεύματα, ὧν τὸ μὲν μέγιστον καὶ 

ἐξωτάτω ῥέον περὶ κύκλῳ ὁ καλούμενος Ὠκεανός ἐστιν, 

τούτου δὲ καταντικρὺ καὶ ἐναντίως ῥέων Ἀχέρων, ὃς δι᾿ 

ἐρήμων τε τόπων ῥεῖ ἄλλων καὶ δὴ καὶ ὑπὸ γῆν ῥέων εἰς                     113a

τὴν λίμνην ἀφικνεῖται τὴν Ἀχερουσιάδα, οὗ αἱ τῶν τετε-

λευτηκότων ψυχαὶ τῶν πολλῶν ἀφικνοῦνται καὶ τινας 

εἱμαρμένους χρόνους μείνασαι, αἱ μὲν μακροτέρους, αἱ δὲ 

βραχυτέρους, πάλιν ἐκπέμπονται εἰς τὰς τῶν ζῴων γενέ-                           5

σεις.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실로 많고도 거대하며 다양한 여타의 

흐름들이 있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많은 흐름들 속에서 

마침 어떤 네 가지 흐름들이 있으니, 그것들 중 하나는 가장 

거대하고 원 주위로 가장 바깥의 흐름으로서 오케아노스라고 

불리는 흐름이고, 이 흐름에 맞은편에서 반대로 흐르는 것이 

아케론으로, 여타의 황무지들을 관통하여서도 그렇지만 특히

대지 아래를 흘러 아케루시아스라는 호수에 이르는 흐름이고, 

그곳에 끝을 맞이한 많은 사람들의 영혼들이 도착하고 운명지어진 

모종의 시간 동안, 어떤 영혼들은 더 긴 시간 동안을, 또 어떤 

영혼들은 더 짧은 시간 동안 머물고서, 다시 살아있는 것들의 

생성을 향해 내보내지지.

         τρίτος δὲ ποταμὸς τούτων κατὰ μέσον ἐκβάλλει, καὶ 

ἐγγὺς τῆς ἐκβολῆς ἐκπίπτει εἰς τόπον μέγαν πυρὶ πολλῷ 

καόμενον, καὶ λίμνην ποιεῖ μείζω τῆς παρ᾿ ἡμῖν θαλάττης, 

ζέουσαν ὕδατος καὶ πηλοῦ· 

세 번째 강은 그것들의 중간을 따라 흘러나오고, 분출구 근처에서

큰 불에 불타는 거대한 장소를 향해 쏟아져 들어가며, 우리쪽의

바다보다 더욱 큰 호수를 만드는데, 물과 진흙으로 들끓는다네.

                                            ἐντεῦθεν δὲ χωρεῖ κύκλῳ 

θολερὸς καὶ πηλώδης, περιελιττόμενος δὲ τῇ γῇ ἄλλοσέ τε                       b

ἀφικνεῖται καὶ παρ᾿ ἔσχατα τῆς Ἀχερουσιάδος λίμνης, οὐ 

συμμειγνύμενος τῷ ὕδατι· 

이곳으로부터 뻘과 진창을 머금은 채로 둥글게 나아가는데, 대지를

휘감아 돌다가 다른 곳에도 이르지만 특히 아테루시아스 호수의

극단에 이르는데, 그 물에 함께 뒤섞이지는 않는 채로 그리 하지.

                                          περιελιχθεὶς δὲ πολλάκις ὑπὸ 

γῆς ἐμβάλλει κατωτέρω τοῦ Ταρτάρου· οὗτος δ᾿ ἐστὶν ὃν 

ἐπονομάζουσιν Πυριφλεγέθοντα, οὗ καὶ οἱ ῥύακες ἀπο-                              5

σπάσματα ἀναφυσῶσιν ὃπῃ ἂν τυχωσι τῆς γῆς· 

그런데 지저를 여러 차례 휘감아 돌고서 타르타로스보다 더욱 

아래로 흘러들어가네. 그런데 이 강이 사람들이 퓌리플레게톤이라 

이름 붙인 것이고, 그 강의 용암류들 또한 대지의 마주치는 부분에서 

조각들을 뿜어내지. 

                                                                             τούτου δὲ 

αὖ καταντικρὺ ὁ τέταρτος ἐκπίπτει εἰς τόπον πρῶτον 

δεινόν τε καὶ ἄγριον, ὡς λέγεται, χρῶμα δ᾿ ἔχοντα ὅλον 

οἷον ὁ κυανός, ὃ δὴ ἐπονομάζουσι Στύγιον, καὶ τὴν λίμνην                        c

ἣν ποιεῖ ὁ ποταμὸς ἐμβάλλων, Στύγα· 

그런데 이번엔 그 강의 맞은편에 네 번째 강이 제일 무섭고 거친 

장소로 쏟아져 들어가니, 전해지기로는, 그 전체가 이를 테면

청금석 빛깔을 지닌 채로 그리 한다네. 그래서 사람들이

스튀기오스라 이름 붙였고, 그 강이 흘러들어가 만드는 호수가 

스튁스이지.

                                                             ὁ δ᾿ ἐμπεσὼν 

ἐνταῦθα καὶ δεινὰς δυνάμεις λαβὼν ἐν τῷ ὕδατι, δὺς κατὰ 

τῆς γῆς, περιελιττόμενος χωρεῖ ἐναντίος τῷ Πυριφλεγέ-

θοντι καὶ ἀπαντᾷ ἐν τῇ Ἀχερουσιάδι λίμνῃ ἐξ ἐναντίας·                                5

그런데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강은 물 속에서 무시무시한 능력들을 

갖춘 채로, 지저로 잠겨들어, 휘감아 돌면서 퓌리플레게톤과 

반대편의 강으로서 나아가 반대편으로부터 아케루시아스

호수에서 만난다네.

                                                                                       καὶ                          5

οὐδὲ τὸ τούτου ὕδωρ οὐδενὶ μείγνυται, ἀλλὰ καὶ οὗτος 

κύκλῳ περιελθὼν ἐμβάλλει εἰς τὸν Τάρταρον ἐναντίος τῷ 

Πυριφλεγέθοντι· ὄνομα δὲ τούτῳ ἐστίν, ὡς οἱ ποιηταὶ 

λέγουσιν, Κωκυτός. 

그 강의 물은 무엇과도 섞이지도 않고, 오히려 이 강이 원형으로 

회전하며 퓌리플레게톤에 반대되는 강으로서 타르타로스로

흘러들어가지. 그런데 그것에 이름이 있으니, 시인들이 말하기로, 

코퀴토스라 하네.

 

Τούτων δὲ οὕτως πεφυκότων, ἐπειδὰν ἀφίκωνται οἱ                                  d

τετελευτηκότες εἰς τὸν τόπον οἷ ὁ δαίμων ἕκαστον κομίζει, 

πρῶτον μὲν διεδικάσαντο οἵ τε καλῶς καὶ ὁσίως βιώ-

σαντες καὶ οἱ μή. 

그런데 이것들이 그렇게 타고났기에, 끝을 맞이한 자들은 신령이

그들 각각을 데려 오는 그 장소에 이를 때에는, 우선 훌륭하고 

경건하게 살아온 자들도 그렇지 못하게 살아온 자들도 심판을 

받지.

                           καὶ οἳ μὲν ἂν δόξωσι μέσως βεβιωκέναι, 

πορευθέντες ἐπὶ τὸν Ἀχέροντα, ἀναβάντες ἃ δὴ αὐτοῖς                               5

ὀχήματά ἐστιν, ἐπὶ τούτων ἀφικνοῦνται εἰς τὴν λίμνην, καὶ 

ἐκεῖ οἰκοῦσί τε καὶ καθαιρόμενοι τῶν τε ἀδικημάτων 

διδόντες δίκας ἀπολύονται, εἴ τίς τι ἠδίκηκεν, τῶν τε 

εὐεργεσιῶν τιμὰς φέρονται κατὰ τὴν ἀξίαν ἕκαστος·                                   e

중간 정도로 살아왔다 여겨질 자들은 아케론까지 실려가는데,

그들을 위한 탈 것들에 올라, 그 탈 것들에 타서 호수에 당도하고, 

저곳에서 거주하며 부정의한 일들의 죗값을 치러 정화되어  

해방되는데, 만일 누군가가 뭐라도 부정의한 짓을 했다면 

그러하고, 업적들에 대해서도 그 각각의 가치에 따라 명예를 

누린다네.

                                                                                   οἳ δ᾿                          e

ἂν δόξωσιν ἀνιάτως ἔχειν διὰ τὰ μεγέθη τῶν ἁμαρτη-

μάτων, ἢ ἱεροσυλίας πολλὰς καὶ μεγάλας ἢ φόνους ἀδί-

κους καὶ παρανόμους πολλοὺς ἐξειργασμένοι ἢ ἄλλα ὅσα 

τοιαῦτα τυγχάνει ὄντα, τούτους δὲ ἡ προσήκουσα μοῖρα                              5

ῥίπτει εἰς τὸν Τάρταρον, ὅθεν οὔποτε ἐκβαίνουσιν. 

반면 잘못의 크기로 인해 치유 불가능한 지경이라 여겨질 자들은 

많고도 막대한 신전절도이든 부정의하고 위법한 대량의 살인이든 

혹은 마침 그와 같은 것들인 여타의 짓들이든 저질러 버린 자들, 

이 자들은 걸맞는 운명이 타르타로스로 내동댕이치니, 이로부터 

결코 기어오를 수 없지.

                                                                                 οἳ δ᾿ ἂν 

ἰάσιμα μὲν μεγάλα δὲ δόξωσιν ἡμαρτηκέναι ἁμαρτήματα, 

οἷον πρὸς πατέρα ἢ μητέρα ὑπ᾿ ὀργῆς βίαιόν τι πράξαντες, 

καὶ μεταμέλον αὐτοῖς τὸν ἄλλον βίον βιῶσιν, ἢ ἀνδροφόνοι                 114a

τοιούτῳ τινὶ ἄλλῳ τρόπῳ γένωνται, τούτους δὲ ἐμπεσεῖν 

μὲν εἰς τὸν Τάρταρον ἀνάγκη, ἐμπεσόντας δὲ αὐτοὺς καὶ 

ἐνιαυτὸν ἐκεῖ γενομένους ἐκβάλλει τὸ κῦμα, τοὺς μὲν 

ἀνδροφόνους κατὰ τὸν Κωκυτόν, τοὺς δὲ πατραλοίας καὶ                           5

μητραλοίας κατὰ τὸν Πυριφλεγέθοντα· 

치유할 수는 있지만 거대한 잘못을 저질렀다 여겨질 자들은, 

이를 테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상대로 분개에 의해 어떤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그 일들에 후회하는 남은 삶을 살아가고, 혹은 

살인자들이 그와 같은 어떤 여타의 방식으로 그리 되는데, 

이들이 타르타로스로 추락하는 것은 필연이지만, 그들이

추락하고 저곳에서 한 해를 보내면 물결이 그들을 내보내니,

살인자들은 코퀴토스로, 부친살해범이나 모친살해범은

퓌리플레게톤으로 보낸다네.

                                                              ἐπειδὰν δὲ 

φερόμενοι γένωνται κατὰ τὴν λίμνην τὴν Ἀχερουσιάδα, 

ἐνταῦθα βοῶσί τε καὶ καλοῦσιν, οἱ μὲν οὓς ἀπέκτειναν, οἱ 

δὲ οὓς ὕβρισαν, καλέσαντες δ᾿ ἱκετεύουσι καὶ δέονται 

ἐᾶσαι σφᾶς ἐκβῆναι εἰς τὴν λίμνην καὶ δέξασθαι, καὶ ἐὰν                            b

μὲν πείσωσιν, ἐκβαίνουσί τε καὶ λήγουσι τῶν κακῶν, εἰ δὲ 

μή, φέρονται αὖθις εἰς τὸν Τάρταρον καὶ ἐκεῖθεν πάλιν εἰς 

τοὺς ποταμούς, καὶ ταῦτα πάσχοντες οὐ πρότερον παύον-

ται πρὶν ἄν πείσωσιν οὓς ἠδίκησαν· αὕτη γὰρ ἡ δίκη ὑπὸ                            5

τῶν δικαστῶν αὐτοῖς ἐτάχθη. 

아케루시아스 호수로 옮겨지게 될 때엔, 여기에서 목놓아 부르기를, 

어떤 이들은 그들이 살해한 자들을, 또 어떤 자들은 오만하게 대한 

자들을 부르며, 불러서는 간정하고 애원하기를 그들이 그 호수로 

올라가고 받아들여지도록 허락해 달라 하고, 그래서 설득을 해낸다면, 

올라가 악을 그치고, 만일 설득하지 못한다면, 다시 타르타로스로 

옮겨져 저곳에서부터 다시 강들로 옮겨지며, 이런 일들을 겪기를 

그들이 부정의를 저지른 상대들을 설득하기 전에는 그보다 먼저 

그치지 못하네. 이것이 판관들에 의해 그들에게 부과된 판결이니 

말일세.

                                               οἳ δὲ δὴ ἄν δόξωσι δια-

φερόντως πρὸς τὸ ὁσίως βιῶναι, οὗτοί εἰσιν οἱ τῶνδε μὲν 

τῶν τόπων τῶν ἐν τῇ γῇ ἐλευθερούμενοί τε καὶ ἀπαλλατ-

τόμενοι ὥσπερ δεσμωτηρίων, ἄνω δὲ εἰς τὴν καθαρὰν                              c

οἴκησιν ἀφικνούμενοι καὶ ἐπὶ γῆς οἰκιζόμενοι. 

경건하게 살아내는 방향으로 특출나게 살아왔다 여겨질 자들은, 

이런 자들이 대지의 여기 이 장소들로부터는 마치 감옥으로부터

그리하듯 자유로워지고 해방되고, 위로는 정화된 거주지에 

이르러 대지 위에 거주하는 자들이지.

                                                                        τούτων δὲ 

αὐτῶν οἱ φιλοσοφίᾳ ἱκανῶς καθηράμενοι ἄνευ τε 

σωμάτων ζῶσι τὸ παράπαν εἰς τὸν ἔπειτα χρόνον, καὶ εἰς 

οἰκήσεις ἔτι τούτων καλλίους ἀφικνοῦνται, ἃς οὔτε ῥᾴδιον                           5

δηλῶσαι οὔτε ὁ χρόνος ἱκανὸς ἐν τῷ παρόντι. 

그런데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 철학으로써 충분히 정화된 자들은 

신체 없이 이후의 시간 전부를 살아가고, 또한 신체의 거처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현세에서는 쉽사리 밝힐 수도 그럴 시간이

충분치도 않은 거주들에 이른다네.

                                                                          ἀλλὰ τούτων 

δὴ ἕνεκα χρὴ ὧν διεληλύθαμεν, ὦ Σιμμία, πᾶν ποιεῖν ὥστε 

ἀρετῆς καὶ φρονήσεως ἐν τῷ βίῳ μεταχσεῖν· καλὸν γὰρ τὸ 

ἆθλον καί ἡ ἐλπὶς μεγάλη. 

우리가 상술해온 이것들을 위해서, 심미아스, 모든 일을 행하여 

생애 동안 덕과 지혜에 참여하도록 해야만 하네. 그 포상이 

아름답거니와 희망 역시 대단하니.

 

Τὸ μὲν οὖν ταῦτα διισχυρίσασθαι οὕτως ἔχειν ὡς ἐγὼ                               d

διελήλυθα, οὐ πρέπει νοῦν ἔχοντι ἀνδρί· ὅτι μέντοι ἢ ταῦτ᾿ 

ἐστὶν ἢ τοιαῦτ᾿ ἄττα περὶ τὰς ψυχὰς ἡμῶν καὶ τὰς οἰκήσεις, 

ἐπείπερ ἀθάνατόν γε ἡ ψυχὴ φαίνεται οὖσα, τοῦτο καὶ 

πρέπειν μοι δοκεῖ καὶ ἄξιον κινδυνεῦσαι οἰομένῳ οὕτως                              5

ἔχειν―καλὸς γὰρ ὁ κίνδυνος―καὶ χρὴ τὰ τοιαῦτα ὥσπερ 

ἐπᾴδειν ἑαυτῷ, διὸ δὴ ἔγωγε καὶ πάλαι μηκύνω τὸν 

μῦθον. 

그리하여 이러한 일들이 내가 상술한 대로 사실이 그러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제정신을 가진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네. 그렇지만 

우리의 영혼과 그 거처를 둘러싸고 어떤 것들은 그러한 것들이거나 

그와 같은 것들이라는 것은, 영혼이 적어도 불멸인 것으로 드러난 

한에서, 이것이 내게 어울린다 여겨지고 사실이 그러하다 생각하는 

자로서는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여겨지네. 그런 위험은 

아름답단 말이지. 

            ἀλλὰ τούτων δὴ ἕνεκα θαρρεῖν χρὴ περὶ τῇ ἑαυτοῦ 

ψυχῇ ἄνδρα ὅστις ἐν τῷ βίῳ τὰς μὲν ἄλλας ἡδονὰς τὰς περὶ                    e

τὸ σῶμα καὶ τοὺς κόσμους εἴασε χαίρειν, ὡς ἀλλοτρίους τε 

ὄντας, καὶ πλέον θάτερον ἡγησάμενος ἀπεργάζεσθαι, τὰς 

δὲ περὶ τὸ μανθάνειν ἐσπούδασέ τε καὶ κοσμήσας τὴν 

ψυχὴν οὐκ ἀλλοτρίῳ ἀλλὰ τῷ αὑτῆς κόσμῳ, σωφροσύνῃ                           5

τε καὶ δικαιοσύνῃ καὶ ἀνδρείᾳ καὶ ἐλευθερίᾳ καὶ ἀληθείᾳ,                     115a

οὕτω περιμένει τὴν εἰς Ἅιδου πορείαν ὡς πορευσόμενος 

ὅταν ἡ εἱμαρμένη καλῇ. 

허나 정말로 이런 일들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에 말미암아 용기를 

내야만 하는 걸세. 그의 생애에서 신체를 둘러싼 여타의 쾌락들과

치장들은, 이질적인 것이라 여기며, 떠나 보냈고, 다른 일을 더 많이

실현하고자 생각하고서, 배움에 관련된 쾌락에 열중하고 영혼을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니라 영혼 자체에 속한 장식으로, 분별과

정의와 용기 그리고 자유와 진리로 치장하는 사내라면 말일세.

그는 자신의 영혼에 관하여 운명지어진 여정이 그를 부를 때면

나아갈 요량으로 하데스를 향한 여정을 기다리지."

                                      ὑμεῖς μὲν οὖν, ἔφη, ὦ Σιμμία τε 

καὶ Κέβης καὶ οἱ ἄλλοι, εἰς αὖθις ἔν τινι χρόνῳ ἕκαστοι 

πορεύσεσθε· ἐμὲ δὲ νῦν ἤδη καλεῖ, φαίη ἂν ἀνὴρ τραγικός,                        5

ἡ εἱμαρμένη, καὶ σχεδόν τί μοι ὥρα τραπέσθαι πρὸς τὸ 

λουτρόν· δοκεῖ γὰρ δὴ βέλτιον εἶναι λουσάμενον πιεῖν τὸ 

φάρμακον καὶ μὴ πράγματα ταῖς γυναιξὶ παρέχειν νεκρὸν 

λούειν.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리하여 자네들은, 심미아스 그리고 

케베스와 다른 친구들이여, 저마다 언젠가는 다시 여정을 떠나게

될 걸세. 그런데 나는 이제, 비극의 주인공이 말한다면, 운명지어진

그 여정이 부르거니와, 욕조로 향할 때가 거의 다 되었구만.

목욕재계하고 약을 마시는 편이 좋을 것이라 여겨지고 여인들에게 

송장을 염하도록 넘기기에도 곤란하지 않지 싶으니 말일세.

 

 

작성중-

Πάλιν δή μοι, ἔφη, ἐξ ἀρχῆς λέγε. καὶ μή μοι ὃ ἂν                                               5

ἐρωτῶ ἀποκρίνου, ἀλλὰ μιμούμενος ἐμέ. λέγω δὴ παρ᾿ ἣν 

τὸ πρῶτον ἔλεγον ἀπόκρισιν, τὴν ἀσφαλῆ ἐκείνην, ἐκ τῶν 

νῦν λεγομένων ἄλλην ὁρῶν ἀσφάλειαν.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럼 다시 내게 처음부터 말해주게. 내가 

질문하는 것을 내게 답하지 말고, 나를 모방해서 말일세. 내 말은  

처음에 답으로 말했던 저 안전한 답 말고, 지금 논해진 것들로부터 

그 외의 안전함을 보면서 하는 말일세.

                                                                εἰ γὰρ ἔροιό με ᾧ 

ἂν τί ἐν τῷ σώματι ἐγγένηται θερμὸν ἔσται, οὐ τὴν ἀσφαλῆ 

σοι ἐρῶ ἀπόκρισιν ἐκείνην τὴν ἀμαθῆ, ὅτι ᾧ ἂν θερμότης,                              c

ἀλλὰ κομψοτέραν ἐκ τῶν νῦν, ὅτι ᾧ ἂν πῦρ· οὐδὲ ἂν ἔρῃ ᾧ 

ἂν σώματι τί ἐγγένηται νοσήσει, οὐκ ἐρῶ ὅτι ᾧ ἂν νόσος, 

ἀλλ᾿ ᾧ ἂν πυρετός· οὐδ᾿ ᾧ ἂν ἀριθμῷ τί ἐγγένηται περιττὸς 

ἔσται, οὐκ ἐρῶ ᾧ ἂν περιττότης, ἀλλ᾿ ᾧ ἂν μονάς, καὶ                                       5

τἆλλα οὕτως. ἀλλ᾿ ὅρα εἰ ἤδη ἱκανῶς οἶσθ᾿ ὅτι βούλομαι. 

만일 자네가 내게 무엇이 물체 안에 생성되어 들어가 그로써 

뜨거운 물체로 있게 될 것인지 질문해 준다면, 나는 자네에게

저 안전하고도 배움이 부족한 답, 그로써 그러할 것은 열이라는 

답은 하지 않을 것이고, 지금 논의들로부터 나온 더 세련된 

답, 그로써 그러할 것은 불이라는 답을 할 걸세. 무엇이 물체 

안에 생성되어 들어가 그로써 병들 것인지 묻는다면 그 경우에도, 

그로써 그러할 것은 질병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테고, 그로써 

그러할 것은 발열이라고 이야기할 테고. 무엇에 수 안에 생성되어 

들어가 그로써 홀수로 있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로써 그러할 

것이 홀수라고 말하지 않고, 그로서 그러할 것은 단수라고, 또 

여타의 것들도 그렇게 말할 걸세. 허나 의도하는 바를 이제 자네가

충분히 알겠는지 봐 보게나.

> "ᾧ"는 causal 또는 agent dative로 보고 선행사는 중성 단수 주격이 생략된 것으로 취급. 생략된 선행사는 다시 "ἐγγένηται"의 주어로 간주. "εγγένηται" 는 ἄν + subj. 조건절 취급해서 선행사가 '물체 안에 들어가 있게 된다면,' '생성되어 들어간다면' 이라 번역. "θερμὸν ἔσται" 또는 "νοσήσει" 등은 관계사절의 주동사로 의미상 주어는 σῶμα여야 할 것. 그런데 주격 σῶμα가 문법상 생략될 수 있는지 불분명. 생략된 선행사는 τί를 보어로 하여 ἐστί가 생략된 의문문으로 번역. 

 

Ἀλλὰ πάνυ ἱκανῶς, ἔφη. 

그는 말했소. "그야 무척이나 충분하게 알겠습니다."

 

Ἀποκρίνου δή, ἦ δ᾿ ὅς, ᾧ ἂν τί ἐγγένηται σώματι ζῶν 

ἔσται;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럼 답해 주게, 물체 안에 생성되어 

들어가 그로써 살아있는 것으로 있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Ὧι ἂν ψυχή, ἔφη.                                                                                                10

그가 말했소. "그로써 그러할 것은 영혼입니다."

 

Οὐκοῦν ἀεὶ τοῦτο οὕτως ἔχει;                                                                           d

"그렇다면 그건 항상 그런 상태이지 않나?"

 

Πῶς γὰρ οὐχί; ἦ δ᾿ ὅς. 

그는 말했소. "그야 어찌 아니겠습니까?"

 

Ψχυὴ ἄρα ὅτι ἂν αὐτὴ κατάσχῃ, ἀεὶ ἥκει ἐπ᾿ ἐκεῖνο 

φέρουσα ζωήν; 

"혹시 영혼은 이것이 점유하는 그 무엇이든, 항상 그것에 

생명을 적용시키게 되는가?"

 

Ἥκει μέντοι, ἔφη.                                                                                                5

그는 말했소. "그리 됩니다."

 

Πότερον δ᾿ ἔστι τι ζωῇ ἐναντίον ἢ οὐδέν; 

"그런데 무언가가 생명에 반대되는가 혹은 아무것도 그렇지 

않은가?"

 

Ἔστιν, ἔφη. 

그는 말했소. "반대되는 것이 있지요."

 

Τί; 

"무엇인가?"

 

Θάνατος. 

"죽음이요."

 

Οὐκοῦν ψυχὴ τὸ ἐναντίον ᾧ αὐτὴ ἐπιφέρει ἀεὶ οὐ μή                                         10

ποτε δέξηται, ὡς ἐκ τῶν πρόσθεν ὡμολόγηται; 

"그렇다면 영혼은 영혼이 그로써 항상 적용시키는 바의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결코 절대로 수용하지 않겠지? 앞선

논의들로부터 동의된대로 말일세."

> "τὸ ἐναντίον"의 대조대상이 되는 문장성분은 생략된 선행사이므로, 관계사의 dat. 형태가 곧바로 대조대상임을 의미한다고 보긴 어렵다. ἐπιφέρω는 적용대상 dat.와 적용물 acc.를 가지므로, 관계사의 dat.는 적용대상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앞선 논의를 통해 구체화하면 영혼은 생명'을' 대상'에게' 적용시킨다. 그러나 이는 내용상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영혼이 항상, 언제나 생명을 끊임없이 적용시키는 대상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단이나 방법의 dat.로 간주하고 본래 용법의 acc.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석하여 '생명'으로 보는 편이 나을 듯하다.

 

Καὶ μάλα σφόδρα, ἔφη ὁ Κέβης. 

케베스는 말했소. "무척이나 지극히도 그렇습니다."

 

Τί οὖν; τὸ μὴ δεχόμενον τὴν τοῦ ἀρτίου ἰδέαν τί νυνδὴ 

ὠνομάζομεν; 

"그렇다면 어떤가? 짝수의 형상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방금 

무엇이라 우리가 합의하였지?"

 

Ἀνάρτιον, ἔφη.                                                                                                    15

그가 말했소. "짝수 아닌 것이죠."

 

Τὸ δὲ δίκαιον μὴ δεχόμενον καὶ ὃ ἂν μουσικὸν μὴ 

δέχηται; 

"그런데 정의로운 것을 수용하지 않는 것 또 교양을 갖춘 

것을 수용하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

 

Ἄμουσον, ἔφη, τὸ δὲ ἄδικον.                                                                            e

그가 말했소. "교양 없는 것, 그리고 부정의한 것이죠."

 

Εἶεν· ὃ δ᾿ ἂν θάνατον μὴ δέχηται τί καλοῦμεν; 

"좋네. 그런데 죽음을 수용하지 않을 것은 우리가 무어라 

부르는가?"

 

Ἀθάνατον, ἔφη. 

그가 말했소. "불사인 것이죠."

 

Οὐκοῦν ψυχὴ οὐ δέχεται θάνατον; 

"그렇다면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지?"

 

Οὔ.                                                                                                                      5

"안 받아들이죠."

 

Ἀθάνατον ἄρα ψυχή. 

"그럼 영혼은 불사인 것이군."

 

Ἀθάνατον. 

"불사인 것이죠."

 

Εἶεν, ἔφη· τοῦτο μὲν δὴ ἀποδεδεῖχθαι φῶμεν; ἢ πῶς 

δοκεῖ;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좋군. 그럼 이건 증명되었다고 주장할까? 

아니면 어찌 하는 게 좋겠나?" 

 

Καὶ μάλα γε ἱκανῶς, ὦ Σώκρατες.                                                                      10

"아주 충분하게 증명되었다고 하죠, 소크라테스."

 

Τί οὖν, ἦ δ᾿ ὅς, ὦ Κέβης; εἰ τῷ ἀναρτίῳ ἀναγκαῖον ἦν 

ἀνωλέθρῳ εἶναι, ἄλλο τι τὰ τρία ἢ ἀνώλεθρα ἂν ἦν;                                   106a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렇다면 어떤가? 만일 짝수이지 

않은 것에게 불멸하는 것으로 있음이 필연적이었더라면, 

다름 아니라 3인 것들이 불멸인 것들로 있었겠지?"

 

Πῶς γὰρ οὔ; 

"어찌 아니겠습니까?"                                                            //260723

 

Οὐκοῦν εἰ καὶ τὸ ἄθερμον ἀναγκαῖον ἦν ἀνώλεθρον 

εἶναι, ὁπότε τις ἐπὶ χιόνα θερμὸν ἐπάγοι, ὑπεξῄει ἂν ἡ χιὼν 

οὖσα σῶς καὶ ἄτηκτος; οὐ γὰρ ἂν ἀπώλετό γε, οὐδ᾿ αὖ                                     5

ὑπομένουσα ἐδέξατο ἂν τὴν θερμότητα. 

"그렇다면 만일 뜨겁지 않은 것 또한 불멸하는 것으로 있음이 

필연적이었더라면, 누군가가 눈(雪)에 뜨거운 것을 가져다 둘 어느 

때에든, 눈은 온전하고 녹지 않는 것으로 있기에 사라지지 않았겠지?

왜냐하면 해체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번엔 또 열을 견뎌내서 

수용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 "뜨겁지 않은 것"을 정암판에서는 "뜨거워질 수 없는 것"으로 번역. 양상이 들어가면 열을 수용하지 않는 이유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ἄθερμον"의 단어 구성 자체에 양상이 들어간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고, 단지 뜨겁지 않은 혹은 뜨거움이 없는 것으로 보더라도 그것이 뜨거움을 받아들이면 전에 그것이었던 바로 그것으로는 더 이상 있지 못할 것이므로, 열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은 여전히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대화에서 "τὸ ἄψυκτον"의 경우 어미 형태로부터 양상을 포함한 번역이 가능해진다. 뜨거워'질 수 없다'든지 차가워'질 수 없다'는 양상이 해당 논증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면 그렇게, 그렇지 않다면 안 뜨거운 것과 냉각'되지 않는 것(-τος는 분사변화형 어미에서 온 것으로 수동과 가능을 함의)' 정도로 번역하기로.

 

Ἀληθῆ, ἔφη, λέγεις. 

그는 말했소. "참된 말씀이십니다."

 

Ὣς δ᾿ αὔτως οἶμαι κἂν εἰ τὸ ἄψυκτον ἀνώλεθρον ἦν, 

ὁπότε ἐπὶ τὸ πῦρ ψυχρόν τι ἐπῄει, οὔποτ᾿ ἂν ἀπεσβέννυτο 

οὐδ᾿ ἀπώλλυτο, ἀλλὰ σῶν ἂν ἀπελθὸν ᾤχετο.                                                  10

"그런데 내 생각에 바로 그런 식으로 만일 차가워지지 않는 것이 

불멸이었더라면, 불에 어떤 차가운 것이 접근하는 언제라도, 결코 

꺼지지도 해체되지도 않고, 오히려 온전하게 되어 떠났을 걸세."

 

Ἀνάγκη, ἔφη. 

그는 말했소. "필연적이지요."

 

Οὐκοῦν καὶ ὧδε, ἔφη, ἀνάγκη περὶ τοῦ ἀθανάτου εἰπεῖν;                                 b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렇다면 불사인 것에 관련하여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필연적이지 않나?

εἰ μὲν τὸ ἀθάνατον καὶ ἀνώλεθρόν ἐστιν, ἀδύνατον ψυχῇ, 

ὅταν θάνατος ἐπ᾿ αὐτὴν ἴῃ, ἀπόλλυσθαι· θάνατον μὲν γὰρ 

δὴ ἐκ τῶν προειρημένων οὐ δέξεται οὐδ᾿ ἔσται τεθνηκυῖα, 

ὥσπερ τὰ τρία οὐκ ἔσται, ἔφαμεν, ἄρτιον, οὐδέ γ᾿ αὖ τὸ                                    5

περιττόν, οὐδὲ δὴ πῦρ ψυχρόν, οὐδέ γε ἡ ἐν τῷ πυρὶ 

θερμότης. 

만일 불사인 것이 불멸이라면, 영혼에게는 그것에게 죽음이 

다가올 때 해체되는 일이 불가능하네. 왜냐하면 죽음을 앞서 

언급된 것들로부터 수용하지도 않을 것이고 죽어 있지도 않을 

테니까. 마치 3인 것들이 우리가 주장하였기로 짝수로 있지 

않을 것처럼, 또 이번엔 홀수인 것 역시 짝수로 있지 않을

것이고, 불이 차가운 것으로도, 불 안의 뜨거움 또한 차가운 

것으로도 있지 않을 것처럼 말이지.

                 "Ἀλλὰ τί κωλύει," φαίη ἄν τις, "ἄρτιον μὲν τὸ 

περιττὸν μὴ γίγνεσθαι ἐπιόντος τοῦ ἀρτίου, ὥσπερ 

ὡμολόγηται, ἀπολομένου δὲ αὐτοῦ ἀντ᾿ ἐκείνου ἄρτιον                                   c

γεγονέναι;" 

그런데 누군가는 이리 주장할 걸세. '허나 무엇이 막겠습니까? 

홀수인 것은 짝수가 다가와도, 동의된 그대로, 짝수가 못 되지만,

저 홀수 자체가 해체되면 그 대신 짝수가 생기는 것을 말입니다.' 

                   τῷ ταῦτα λέγοντι οὐκ ἂν ἔχοιμεν διαμαχέσα-

σθαι ὅτι οὐκ ἀπόλλυται· τὸ γὰρ ἀνάρτιον οὐκ ἀνώλεθρόν 

ἐστιν· ἐπεὶ εἰ τοῦτο ὡμολόγητο ἡμῖν, ῥᾳδίως ἂν διεμαχό-

μεθα ὅτι ἐπελθόντος τοῦ ἀρτίου τὸ περιττὸν καὶ τὰ τρία                                     5

οἴχεται ἀπιόντα· καὶ περὶ πυρὸς καὶ θερμοῦ καὶ τῶν ἄλλων 

οὕτως ἂν διεμαχόμεθα. ἢ οὔ; 

이런 말을 하는 자에게 우리는 그것이 해체되지 않는다고 맞서 

싸우지 못할 걸세. 왜냐하면 짝수 아닌 것은 불멸인 것은 아니니까. 

만일 이 점이 우리에게 동의되었더라면, 짝수가 도래했을 때

홀수와 3인 것들은 떠나게 된다고 쉽사리 맞서 싸웠을 테니까. 

불과 열에 관해서도 여타의 것들에 관련하여서도 그런 식으로 

맞서 싸웠을 테지. 그렇지 않나?"

> F인 사물들 각각에 들어가 있는 F', F'' 등은 가멸인지 불멸인지 보류.

Πάνυ μὲν οὖν. 

"물론입니다."

 

Οὐκοῦν καὶ νῦν περὶ τοῦ ἀθανάτου, εἰ μὲν ἡμῖν ὁμο-

λογεῖται καὶ ἀνώλεθρον εἶναι, ψυχὴ ἂν εἴη πρὸς τῷ ἀθά-                                   10

νατος εἶναι καὶ ἀνώλεθρος· εἰ δὲ μή, ἄλλου ἂν δέοι λόγου.                              d

"그렇다면 지금 불사인 것에 관련하여서도, 만일 그것이 

불멸이기도 하다고까지 우리에게 동의되었더라면, 영혼은 

불사인 것에 더해 불멸이기까지 하였을 걸세. 반면에 그렇지 

않다면, 그 외의 논변이 필요할 테지."

 

Ἀλλ᾿ οὐδὲν δεῖ, ἔφη, τούτου γε ἕνεκα· σχολῇ γὰρ ἄν τι 

ἄλλο φθορὰν μὴ δέχοιτο, εἰ τό γε ἀθάνατον ἀίδιον ὂν 

φθορὰν δέξεται. 

그가 말했소. "허나 그것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다른 무언가가 소멸을 수용하지 못할 리도 없다시피 할 테니까요,

만일 적어도 불사인 것이 영원한 것으로 있으면서도 파멸을 

수용할 것이라면 말입니다."

 

Ὁ δέ γε θεὸς οἶμαι, ἔφη ὁ Σωκράτης, καὶ αὐτὸ τὸ τῆς                                         5

ζωῆς εἶδος καὶ εἴ τι ἄλλο ἀθάνατόν ἐστιν, παρὰ πάντων ἂν 

ὁμολογηθείη μηδέποτε ἀπόλλυσθαι. 

소크라테스께서 말씀하셨소. "어쨌든 내 생각에 신께서는, 또 

생명의 형상 그 자체도 그리고 다른 무언가가 불사인 것으로 있다면 

그것도, 결코 해체되지 않으리란 점이 모든 이들에게서 동의를 

받을 걸세."

> 불사이면 불멸이기도 하다는 주장의 논증이 충분히 제시되었나?

모든 이들에게서 동의를 받으리란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 의문.

Παρὰ πάντων μέντοι νὴ Δί᾿, ἔφη, ἀνθρώπων τέ γε καὶ ἔτι 

μᾶλλον, ὡς ἐγᾦμαι, παρὰ θεῶν. 

그는 말했소. "그야 제우스께 맹세코 모든 인간들게서는 물론이고 

제 생각엔 신들께 훨씬 더 크게 동의를 받겠지요."

 

Ὁπότε δὴ τὸ ἀθάνατον καὶ ἀδιάφθορόν ἐστιν, ἄλλο τι                                      e

ψυχὴ ἤ, εἰ ἀθάνατος τυγχάνει οὖσα, καὶ ἀνώλεθρος ἂν εἴη; 

"그래서 불사인 것이 불멸인 것으로도 있는 경우에는, 다름

아니라 영혼이, 마침 불사로 있기도 하다면, 불멸인 것으로도

있겠지?"

 

Πολλὴ ἀνάγκη. 

"매우 필연적이죠."

 

Ἐπιόντος ἄρα θανάτου ἐπὶ τὸν ἄνθρωπον τὸ μὲν θνητόν, 

ὡς ἔοικεν, αὐτοῦ ἀποθνῄσκει, τὸ δ᾿ ἀθάνατον σῶν καὶ                                      5

ἀδιάφθορον οἴχεται ἀπιόν, ὑπεκχωρῆσαν τῷ θανάτῳ. 

"그래서 죽음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 그럴 듯해 보이기로, 그의 

가사적인 부분은 죽을 것이고, 반면 불사인 부분은 온전하게 

불멸하는 것으로서 떠나게 될 걸세, 죽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서서 말이지."

 

Φαίνεται. 

"그리 드러나 보입니다."

 

Παντὸς μᾶλλον ἄρα, ἔφη, ὦ Κέβης, ψυχὴ ἀθάνατον καὶ 

ἀνώλεθρον, καὶ τῷ ὄντι ἔσονται ἡμῶν αἱ ψυχαὶ ἐν Ἅιδου.                          107a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래서 무엇보다도 더, 케베스, 영혼이 

불사이고 불멸이며, 있는 그대로 우리의 영혼이 하데스 안에 

있게 될 걸세."

 

Οὔκουν ἔγωγε, ὦ Σώκρατες, ἔφη, ἔχω παρὰ ταῦτα 

ἄλλο τι λέγειν οὐδέ πῃ ἀπιστεῖν τοῖς λόγοις. ἀλλ᾿ εἰ δή τι 

Σιμμίας ὅδε ἤ τις ἄλλος ἔχει λέγειν, εὖ ἔχει μὴ κατασι-

γῆσαι· ὡς οὐκ οἶδα εἰς ὅντινά τις ἄλλον καιρὸν ἀναβάλ-                                    5

λοιτο ἢ τὸν νῦν παρόντα, περὶ τῶν τοιούτων βουλόμενος ἤ 

τι εἰπεῖν ἢ ἀκοῦσαι. 

그가 말했소. "그렇다면 저로서는, 소크라테스, 그것들 말고는

달리 무슨 말할 것도 갖고 있지 않고 어떤 점에서든 그 논의들을

불신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만일 여기 심미아스

이 친구나 다른 누군가가 말할 거리가 있다면, 침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지금 이 기회가 아니고서는 누군가가 다른 그 무슨

적기로라도 미룰 수 있을지 알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것들에 관해

뭐라도 말하길 바라든 듣길 바라든 말이지요."

 

Ἀλλὰ μήν, ἦ δ᾿ ὅς ὁ Σιμμίας, οὐδ᾿ αὐτὸς ἔχω ἔτι ὅπῃ 

ἀπιστῶ ἐκ γε τῶν λεγομένων· ὑπὸ μέντοι τοῦ μεγέθους 

περὶ ὧν οἱ λόγοι εἰσίν, καὶ τὴν ἀνθρώπίνην ἀσθένειαν                                     b

ἀτιμάζων, ἀναγκάζομαι ἀπιστίαν ἔτι ἔχειν παρ᾿ ἐμαυτῷ 

περὶ τῶν εἰρημένων. 

심미아스는 말했소. "허나 물론 저 자신도 아직 논의된

것들로부터는 어떤 점에서 불신을 품을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논의들이 그에 관한 것이었던 주제의 방대함에

의해, 또한 인간적인 나약함을 멸시하며, 언급된 것들에

관련하여 제 자신에게 불신을 가지도록 강제하고(억지로

불신해 보고) 있습니다."

 

Οὐ μόνον γ᾿, ἔφη, ὦ Σιμμία, ὁ Σωκράτης, ἀλλὰ ταῦτά 

τε εὖ λέγεις καὶ τάς γε ὑποθέσεις τὰς πρώτας, καὶ εἰ πισταὶ                               5

ὑμῖν εἰσιν, ὅμως ἐπισκεπτέαι σαφέστερο· καὶ ἐὰν αὐτὰς 

ἱκανῶς διέλητε, ὡς ἐγᾦμαι, ἀκολουθήσετε τῷ λόγῳ, καθ᾿ 

ὅσον δυνατὸν μάλιστ᾿ ἀνθρώπῳ ἐπακολουθῆσαι· κἂν τοῦτο 

αὐτὸ σαφὲς γένηται, οὐδὲν ζητήσετε περαιτέρω. 

소크라테스께서 말씀하셨소. "뿐만 아니라, 심미아스, 자네는 

그것들도 또 첫 번째 가정들도 잘 말해주고 있네, 만일 우리에게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확실하게 

검토받아야만 하는 것들이라고 말이지. 자네들이 그 가정들을 

충분히 고찰한다면, 내 생각에, 그 논변에 따를 걸세, 인간으로서 

따르는 일이 가능한 최대한으로 말일세. 이 일 자체가 확실하게 

된다면 자네들은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탐구하지도 않을 걸세."

 

Ἀληθῆ, ἔφη, λέγεις.                                                                                             10

그가 말했소. "맞는 말씀이십니다."                                                                             //260806

 

Ἀλλὰ τόδε γ᾿, ἔφη, ὦ ἄνδρες, δίκαιον διανοηθῆναι, ὅτι,                                    c

εἴπερ ἡ ψυχὴ ἀθάνατος, ἐπιμελείας δὴ δεῖται οὐχ ὑπὲρ τοῦ 

χρόνου τούτου μόνον ἐν ᾧ καλοῦμεν τὸ ζῆν, ἀλλ᾿ ὑπὲρ τοῦ 

παντός, καὶ ὁ κίνδυνος νῦν δὴ καὶ δόξειεν ἂν δεινὸς εἶναι, εἴ 

τις αὐτῆς ἀμελήσει.                                                                                              5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럼 이건 정당한지 사유해 보세. 만일 

정말로 영혼이 불사라면, 그럼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오직 그 

시간에 걸쳐서만이 아니라, 모든 시간에 걸쳐서 관심이 필요하고,

이제 무시무시한 위험이 있다고 여겨지기까지 할 걸세, 만일

누군가가 영혼에 무관심할 것이라면 말일세.

                                εἰ μὲν γὰρ ἦν ὁ θάνατος τοῦ παντὸς                                    5

ἀπαλλαγή, ἕρμαιον ἂν ἦν τοῖς κακοῖς ἀποθανοῦσι τοῦ τε 

σώματος ἅμ᾿ ἀπηλλάχθαι καὶ τῆς αὑτῶν κακίας μετὰ τῆς 

ψυχῆς· νῦν δ᾿ ἐπειδὴ ἀθάνατος φαίνεται οὖσα, οὐδεμία ἂν 

εἴη αὐτῇ ἄλλη ἀποφυγὴ κακῶν οὐδὲ σωτηρία πλὴν τοῦ ὡς                             d

βελτίστην τε καὶ φρονιμωτάτην γενέσθαι. 

왜냐하면 죽음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면, 죽어가는 

악인들에게는 신체로부터도 또한 그들의 영혼에 동반하는

악으로부터도 해방되는 횡재였을 테니까. 그런데 실은 영혼이

불사인 것으로 드러났기에, 영혼에게는 최선이자 가장 지혜로운 

영혼이 되는 것 말고는 악들로부터의 다른 아무런 도피도 구원도 

있지 못할 걸세.

                                                                  οὐδὲν γὰρ ἄλλο 

ἔχουσα εἰς Ἅιδου ἡ ψυχὴ ἔρχεται πλὴν τῆς παιδείας τε καὶ 

τροφῆς, ἃ δὴ καὶ μέγιστα λέγεται ὠφελεῖν ἢ βλάπτειν τὸν 

τελευτήσαντα εὐθὺς ἐν ἀρχῇ τῆς ἐκεῖσε πορείας.                                               5

왜냐하면 영혼은 교육과 양육을 제외하고는 다른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로 하데스에 당도하는데, 그런 것들이 특히 가장 크게 

이롭거나 해롭다고, 끝을 맞이하자마자 저곳을 향한 여정의 시작에 

있는 자에게 그러하다고 말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지.

                                                                              λέγεται δὲ                              5

οὕτως, ὡς ἄρα τελευτήσαντα ἕκαστον ὁ ἑκάστου δαίμων, 

ὅσπερ ζῶντα εἰλήχει, οὗτος ἄγειν ἐπιχειρεῖ εἰς δή τινα 

τόπον, οἷ δεῖ τοὺς συλλεγέντας διαδικασαμένους εἰς 

Ἅιδου πορεύεσθαι μετὰ ἡγεμόνος ἐκείνου ᾧ δὴ προστέ-                                e

τακται τοὺς ἐνθένδε ἐκεῖσε πορεῦσαι· 

헌데 그래서 끝을 맞이한 각자를 그 각자의 신령, 살아있는 

동안의 그를 운명으로 맡은 바로 이 신령이 모종의 장소로,

그곳에 인간들이 모여서 재판을 받고서, 이 땅의 사람들을 

저편으로 몰아가도록 명 받은, 저 인도자와 더불어 하데스로

나아가야 하는 그곳으로 이끌어 가는 일을 시도한다고

전해지지.

                                                            τυχόντας δὲ ἐκεῖ ὧν 

δεῖ τυχεῖν καὶ μείναντας ὃν χρὴ χρόνον ἄλλος δεῦρο πάλιν 

ἡγεμὼν κομίζει ἐν πολλαῖς χρόνου καὶ μακραῖς περιόδοις. 

그런데 저곳에서 충족시켜야 할 것들을 충족시키고 기려야 하는

만큼의 시간 동안을 기다린 자들을 또 다른 신령이 많고도 긴

시간의 순환들을 거쳐 이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되돌려 준다네.

ἔστι δὲ ἄρα ἡ πορεία οὐχ ὡς ὁ Αἰσχύλου Τήλεφος λέγει·                                    5

ἐκεῖνος μὲν γὰρ ἁπλῆν οἶμόν φησιν εἰς Ἅιδου φέρειν, ἡ δ᾿                        108a

οὔτε ἁπλῆ οὔτε μία φαίνεταί μοι εἶναι. οὐδὲ γὰρ ἂν 

ἡγεμόνων ἔδει· οὐ γάρ πού τις ἂν διαμάρτοι οὐδαμόσε 

μιᾶς ὁδοῦ οὔσης. 

그런데 아이스퀼로스의 『텔레포스』가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여정은 아닐세. 저분께서는 단순한 길이 하데스로 데려다준다 

말씀하시지만, 그 길은 단순하지도 않고 단일하지도 않은 것으로 

내게는 보이기 때문이야. 그야 그랬다면 인도해주실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길이 하나였다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실패해 버릴 리

없었겠지.

                             νῦν δὲ ἔοικε σχίσεις τε καὶ τριόδους 

πολλὰς ἔχειν· ἀπὸ τῶν θυσιῶν τε καὶ νομίμων τῶν ἐνθάδε                                5

τεκμαιρόμενος λέγω. 

그런데 실은 숱한 두 갈래 세 갈래 길들을 지닌 듯하네. 나는 이

땅에서의 사람들의 번제와 장례로부터 증거를 삼아 말하고 있는

걸세.

                                  ἡ μὲν οὖν κοσμία τε καὶ φρόνιμος 

ψυχὴ ἕπεταί τε καὶ οὐκ ἀγνοεῖ τὰ παρόντα· ἡ δ᾿ ἐπιθυμη-

τικῶς τοῦ σώματος ἔχουσα, ὅπερ ἐν τῷ ἔμπροσθεν εἶπον, 

περὶ ἐκεῖνο πολὺν χρόνον ἐπτοημένη καὶ περὶ τὸν ὁρατὸν                              b

τόπον, πολλὰ ἀντιτείνασα καὶ πολλὰ παθοῦσα, βίᾳ καὶ 

μόγις ὑπὸ τοῦ προστεταγμένου δαίμονος οἴχεται ἀγομένη. 

그리하여 한편으로 질서있고 지혜로운 영혼은 (인도자를) 따르며 

현실에 무지하지 않지. 반면 신체에 대한 열망에 빠진 상태의 

연혼은, 앞서 내가 말했던 그대로, 저 신체 주위에서 그리고

가시적인 장소 주위에서 많은 시간 동안 허둥대며, 많이 맞서고

또 많이 시달리고서, 배정된 신령에 의해 강제로 가까스로

인도받기 시작하네.

ἀφικομένην δὲ ὅθιπερ αἱ ἄλλαι, τὴν μὲν ἀκάθαρτον καί τι 

πεποιηκυῖαν τοιοῦτον, ἢ φόνων ἀδίκων ἡμμένην ἢ ἄλλ᾿                                    5

ἄττα τοιαῦτα εἰργασμένην, ἃ τούτων ἀδελφά τε καὶ 

ἀδελφῶν ψυχῶν ἔργα τυγχάνει ὄντα, ταύτην μὲν ἅπας 

φεύγει τε καὶ ὑπεκτρέπεται καὶ οὔτε συνέμπορος οὔτε 

ἡγεμὼν ἐθέλει γίγνεσθαι, αὐτὴ δὲ πλανᾶται ἐν πάσῃ ἐχο-

μένη ἀπορίᾳ ἕως ἂν δή τινες χρόνοι γένωνται, ὧν ἐλθόντων                           c

ὑπ᾿ ἀνάγκης φέρεται εἰς τὴν αὐτῇ πρέπουσαν οἴκησιν· 

그런데 영혼이 여타의 영혼들이 있는 바로 그 곳에 당도하면,

정화되지 못한 채 이런 어떤 짓을 한 그 영혼으로서, 부정의한

살인에 연루되었거나 이와 같은 여타 어떤 일들, 그 일들의

형제격인 짓들이자 또한 형제격인 영혼들의 짓거리로 마침 있기도

그런 일들을 저질러서, 이 영혼을 여타의 모든 영혼들이 전부

피하고 외면하며 동반자도 인도자도 되려 하지 않으며, 그 영혼

자신은 전적인 난관에 빠져 방황하기를, 그 시간이 도래하면

필연에 의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거처로 옮겨질, 어떤 시간들이

지날 때까지 그리 하지.

                                                                                       ἡ δὲ 

καθαρῶς τε καὶ μετρίως τὸν βίον διεξελθοῦσα, καὶ 

συνεμπόρων καὶ ἡγεμόνων θεῶν τυχοῦσα, ᾤκησεν τὸν 

αὐτῇ ἑκάστη τόπον προσήκοντα. εἰσὶν δὲ πολλοὶ καὶ                                         5

θαυμαστοὶ τῆς γῆς τόποι, καὶ αὐτὴ οὔτε οἵα οὔτε ὅση 

δοξάζεται ὑπὸ τῶν περὶ γῆς εἰωθότων λέγειν, ὡς ἐγὼ ὑπό 

τινος πέπεισμαι. 

반면에 순정하게 또한 적도에 맞게 삶을 영위한 영혼은, 동반자이자 

인도자인 신들을 만나서, 각자가 자신에게 적합한 장소에 거하지. 

그런데 대지의 여러 경이로운 장소들이 있고, 대지 자체도 대지에 

관해 익숙하게 말하는 자들에 의해 여겨지는 그런 어떠한 것도 그 

만한 것 역시도 아니라네, 내가 누군가에 의해 납득하게 된 바로는 

말일세."

 

Καὶ ὁ Σιμμίας, Πῶς ταῦτα, ἔφη, λέγεις, ὦ Σώκρατες;                                       d

περὶ γάρ τοι γῆς καὶ αὐτὸς πολλὰ δὴ ἀκήκοα, οὐ μέντοι 

ταῦτα ἃ σὲ πείθει· ἡδέως οὖν ἂν ἀκούσαιμι. 

그러자 심미아스가 말했소. "어떤 의미로 이런 것들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소크라테스? 그야 대지에 관해서는 아시다시피 저 역시 

많은 것들을 들었으니까요, 당신을 설득해낸 그런 것들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러니 기쁘게 청해 듣겠습니다."

 

Ἀλλὰ μέντοι, ὦ Σιμμία, οὐχ ἡ Γλαύκου τέχνη γέ μοι 

δοκεῖ εἶναι διηγήσασθαι ἅ γ᾿ ἐστίν· ὡς μέντοι ἀληθῆ,                                         5

χαλεπώτερόν μοι φαίνεται ἢ κατὰ τὴν Γλαύκου τέχνην, καὶ 

ἅμα μὲν ἐγὼ ἴσως οὐδ᾿ ἂν οἷός τε εἴην, ἅμα δέ, εἰ καὶ 

ἠπιστάμην, ὁ βίος μοι δοκεῖ ὁ ἐμός, ὦ Σιμμία, τῷ μήκει 

τοῦ λόγου οὐκ ἐξαρκεῖν. τὴν μέντοι ἰδέαν τῆς γῆς οἵαν 

πέπεισμαι εἶναι, καὶ τοὺς τόπους αὐτῆς οὐδέν με κωλύει                                 e

λέγειν. 

"그렇지만, 심미아스, 글라우콘의 기술은 그 있는 일들을

상술하도록 있는 것이라고 내게 여겨지지 않는다네. 하지만

진실이 어떠한지는, 글라우콘의 기술을 따를 경우보다 더욱

어려운 것으로 내겐 보이고, 나도 할 수 없기도 하고, 만일 내가

알았할지라도, 논의의 길이로 볼 때 내게 내 생이 충분히 않다

여겨지는군. 하지만 대지의 형상이 어떠한 것이라는 데에 내가

설득되었는지, 대지의 장소들을 내가 논하는 걸 막는 건 아무것도

없다네."

 

Ἀλλ᾿, ἔφη ὁ Σιμμίας, καὶ ταῦτα ἀρκεῖ. 

심미아스가 말했소. "허나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Πέπεισμαι τοίνυν, ἦ δ᾿ ὅς, ἐγὼ ὡς πρῶτον μέν, εἰ ἔστιν 

ἐν μέσῳ τῷ οὐρανῷ περιφερὴς οὖσα, μηδὲν αὐτῇ δεῖν μήτε                             5

ἀέρος πρὸς τὸ μὴ πεσεῖν μήτε ἄλλης ἀνάγκης μηδεμιᾶς                            109a

τοιαύτης, ἀλλὰ ἱκανὴν εἶναι αὐτὴν ἴσχειν τὴν ὁμοιότητα 

τοῦ οὐρανοῦ αὐτοῦ ἑαυτῷ πάντῃ καὶ τῆς γῆς αὐτῆς τὴν 

ἰσορροπίαν· ἰσόρροπον γὰρ πρᾶγμα ὁμοίου τινὸς ἐν μέσῳ 

τεθὲν οὐχ ἕξει μᾶλλον οὐδ᾿ ἧττον οὐδαμόσε κλιθῆναι,                                       5

ὁμοίως δ᾿ ἔχον ἀκλινὲς μενεῖ. πρῶτον μὲν τοίνυν, ἦ δ᾿ ὅς, 

τοῦτο πέπεισμαι.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러니까 나는 첫 번째로는, 만일 

하늘 가운데에 대지가 구형인 채로 있다면, 대지가 추락하지 않기

위해 공기도 여타 아무런 이와 같은 필연도 필요치 않고, 대지가  

하늘 자체의 그 자신과의 모든 방면에서의 유사성과 대지 자신의

평형성을 지닌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에 납득했다네. 왜냐하면 

평형한 사물은 어떤 유사한 것의 중심에 놓인 채 그 어느 쪽으로도 

더도 덜도 기울지 못할 것이고, 한결같은 상태로 편향 없는 것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 점을 납득하였네."

그분께서는 그리 말씀하셨소.

 

Καὶ ὀρθῶς γε, ἔφη ὁ Σιμμίας. 

심미아스가 말했소. "옳게 납득하신 것이기도 하고요."

 

Ἔτι τοίνυν, ἔφη, πάμμεγά τι εἶναι αὐτό, καὶ ἡμᾶς

οἰκεῖν, τοὺς μέχρι Ἡρακλείων στηλῶν ἀπὸ Φάσιδος, ἐν                                   b

σμικρῷ τινι μορίῳ, ὥσπερ περὶ τέλμα μύρμηκας ἢ 

βατράχους περὶ τὴν θάλατταν οἰκοῦντας, καὶ ἄλλους 

ἄλλοθι πολλοὺς ἐν πολλοῖσι τοιούτοις τόποις οἰκεῖν.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러니까 더 나아가 그것이 지극히

광대한 무언가이고, 우리는, 파시스 강으로부터 헤라클레스의

기둥들까지의 사람들로, 어떤 작은 일부분에 거주하기를,

마치 연못가의 개미나 개구리처럼 바닷가에 거주하며, 

다른 곳에 다른 많은 자들이 그와 같은 여러 장소들에 

거주한다고 납득하였네.

                                                                                   εἶναι 

γὰρ πανταχῇ περὶ τὴν γῆν πολλὰ κοῖλα καὶ παντοδαπὰ καὶ                               5

τὰς ἰδέας καὶ τὰ μεγέθη, εἰς ἃ συνερρυηκέναι τό τε ὕδωρ 

καὶ τὴν ὁμίχλην καὶ τὸν ἀέρα· 

대지 둘레로 온갖 곳에 여러 형태도 규모도 온갖 종류인 공동들이

있다고, 그 공동들로 물도 안개도 공기도 흘러들어 모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일세.

                                               αὐτὴν δὲ τὴν γῆν καθαρὰν ἐν 

καθαρῷ κεῖσθαι τῷ οὐρανῷ ἐν ᾧπέρ ἐστι τὰ ἄστρα, ὃν δὴ 

αἰθέρα ὀνομάζειν τοὺς πολλοὺς τῶν περὶ τὰ τοιαῦτα                                       c

εἰωθότων λέγειν· οὗ δὴ ὑποστάθμην ταῦτα εἶναι καὶ 

συρρεῖν ἀεὶ εἰς τὰ κοῖλα τῆς γῆς. 

그런데 대지 자체는 별들이 바로 그 안에 있는 순정한 하늘 안에, 

이런 것들에 관해 익숙히 논하는 자들의 상당수가 에테르라

이름하는 그 안에, 순정한 것으로서 놓여 있다고 납득했지. 그래서 

그 에테르의 퇴적물이 그러한 것들이고 대지의 공동들로 항상 

함께 흘러든다고 말일세.

                                                    ἡμᾶς οὖν οἰκοῦντας ἐν 

τοῖς κοίλοις αὐτῆς λεληθέναι καὶ οἴεσθαι ἄνω ἐπὶ τῆς γῆς 

οἰκεῖν, ὥσπερ ἂν εἴ τις ἐν μέσῳ τῷ πυθμένι τοῦ πελάγους                                5

οἰκῶν οἴοιτό τε ἐπὶ τῆς θαλάττης οἰκεῖν καὶ διὰ τοῦ ὕδατος 

ὁρῶν τὸν ἥλιον καὶ τὰ ἄλλα ἄστρα τὴν θάλατταν ἡγοῖτο 

οὐρανὸν εἶναι, διὰ δὲ βραδυτῆτά τε καὶ ἀσθένειαν 

μηδεπώποτε ἐπὶ τὰ ἄκρα τῆς θαλάττης ἀφιγμένος μηδὲ                                  d

ἑωρακὼς εἴη, ἐκδὺς καὶ ἀνακύψας ἐκ τῆς θαλάττης εἰς τὸν 

ἐνθάδε τόπον, ὅσῳ καθαρώτερος καὶ καλλίων τυγχάνει ὢν 

τοῦ παρὰ σφίσι, μηδὲ ἄλλου ἀκηκοὼς εἴη τοῦ ἑωρακότος. 

그리하여 우리는 그 대지의 공동들 안에 거주하는 것을 모르는 

채로 대지의 위쪽에 거주한다 생각하니, 마치 만일 누군가가 

심해의 밑바닥 한가운데에 거주하면서 바다 위에 거주한다 

생각하고 물을 통해 태양과 여타 별들을 보면서 그 바다를 

하늘이라 생각한다면, 그 반면 나태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결코

바다의 극단 그 위에 당도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목도하지도 못한

채로 있다면, 바다로부터 여기 이 장소로 빠져나와 고개를 쳐들면, 

마침 그들 편의 장소보다 얼만큼 더 깨끗하고 또한 더욱 아름다운 

장소인지를, 목격한 다른 이에게 듣지도 못한 채로 있다면 그러한 

것처럼 그리 한다고 납득하였네.

ταὐτὸν δὴ τοῦτο καὶ ἡμᾶς πεπονθέναι· οἰκοῦντας γὰρ ἔν                                   5

τινι κοίλῳ τῆς γῆς οἴεσθαι ἐπάνω αὐτῆς οἰκεῖν, καὶ τὸν 

ἀέρα οὐρανὸν καλεῖν, ὡς διὰ τούτου οὐρανοῦ ὄντος τὰ 

ἄστρα χωροῦντα· τὸ δὲ εἶναι ταὐτόν, ὑπ᾿ ἀσθενείας καὶ 

βραδυτῆτος οὐχ οἵους τε εἶναι ἡμᾶς διεξελθεῖν ἐπ᾿ ἔσχατον                            e

τὸν ἀέρα· 

실로 우리도 똑같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걸세. 대지의 어떤 공동 

속에 거주하면서 그 대지의 위쪽에 거주한다 생각하고, 공기를 

하늘이라고, 하늘로 있는 그것을 통해 별들이 운행하기에 

그리 부르니까. 똑같은 일이라는 것은, 나약함과 게으름에 의해 

우리가 극단의 공기까지 헤쳐 나아갈 수 있는 자들로 있지 

못하다는 것이고.

                ἐπεί, εἴ τις αὐτοῦ ἐπ᾿ ἄκρα ἔλθοι ἢ πτηνὸς 

γενόμενος ἀνάπτοιτο, κατιδεῖν <ἂν> ἀνακύψαντα, ὥσπερ 

ἐνθάδε οἱ ἐκ τῆς θαλάττης ἰχθύες ἀνακύπτοντες ὁρῶσι τὰ 

ἐνθάδε, οὕτως ἄν τινα καὶ τὰ ἐκεῖ κατιδεῖν, καὶ εἰ ἡ φύσις                                   5

ἱκανὴ εἴη ἀνασχέσθαι θεωροῦσα, γνῶναι ἂν ὅτι ἐκεῖνός 

ἐστιν ὁ ἀληθῶς οὐρανὸς καὶ τὸ ἀληθινὸν φῶς καὶ ἡ ὡς 

ἀληθῶς γῆ.                                                                                                 110a

만일 누군가가 그 공기의 극단에 이르거나 날개가 돋아 거기까지 

날아오른다면, 고개를 들어 알아보기를, 마치 이곳에서 바다로부터

고개를 내민 물고기들이 이곳의 것들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그 

누군가가 저곳의 것들을 또한 알아볼 것이기에, 그 본성이 관조하는 

일을 유지하기에 충분하다면, 저것이 참으로 하늘이고 진정한 빛이며 

참으로 대지라는 것을 알리란 말이지.

                   ἥδε μὲν γὰρ ἡ γῆ καὶ οἱ λίθοι καὶ ἃπας ὁ τόπος                       110a

ὁ ἐνθάδε διεφθαρμένα ἐστὶν καὶ καταβεβρωμένα, ὥσπερ 

τὰ ἐν τῇ θαλάττῃ ὑπὸ τῆς ἅλμης, καὶ οὔτε φύεται ἄξιον 

λόγου οὐδὲν ἐν τῇ θαλάττῃ, οὔτε τέλειον ὡς ἔπος εἰπεῖν 

οὐδέν ἐστι, σήραγγες δὲ καὶ ἄμμος καὶ πηλὸς ἀμήχανος                                    5

καὶ βόρβοροί εἰσιν, ὅπου ἂν καὶ γῆ ᾖ, καὶ πρὸς τὰ παρ᾿ 

ἡμῖν κάλλη κρίνεσθαι οὐδ᾿ ὁπωστιοῦν ἄξια. 

여기 이 대지와 돌들 그리고 이 땅의 통틀어 모든 장소는,

바닷물에 의해 바다 속의 것들이 그러하듯, 파괴되어버리고

썩어문드러지는 것들이고, 바다 속의 그 아무것도 언급할

만한 것으로 자라나지도 않으니, 말 그대로 완성된 것은

아무것도 있지 않으나, 구덩이들과 모래바닥 그리고 막대한

진흙과 진창들이, 흙 또한 있을 그 어디에든, 있고, 우리쪽의

아름다운 것들에 비추어서도 그 무엇이 되었든 전혀 선호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네.

                                                                      ἐκεῖνα δὲ αὖ 

τῶν παρ᾿ ἡμῖν πολὺ ἂν ἔτι πλέον φανείη διαφέρειν· εἰ γὰρ 

δὴ καὶ μῦθον λέγειν καλόν, ἄξιον ἀκοῦσαι, ὦ Σιμμία, οἷα                                  b

τυγχάνει τὰ ἐπὶ τῆς γῆς ὑπὸ τῷ οὐρανῷ ὄντα. 

그런데 이번엔 또 저편의 것들은 우리쪽의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이 빼어난 것들로 보일 걸세. 더구나, 심미아스, 마침 어떤 

것들이 대지 위 하늘 아래 있는지 설화를 논함이 아름다운 

일이라면, 그건 들을 가치가 있을 테니까."

 

Ἀλλὰ μήν, ἔφη ὁ Σιιμίας, ὦ Σώκρατες, ἡμεῖς γε τούτου 

τοῦ μύθου ἡδέως ἂν ἀκούσαιμεν. 

심미아스가 말했소. "허나 물론, 소크라테스, 저희는 그 설화를 

기쁘게 청해 들을 것입니다.

 

 

-작성중-

 

Αλλ᾿, ἦ δ᾿ ὅς, ὧδε λέγω, οὐδὲν καινόν, ἀλλ᾿ ἅπερ ἀεί τε                                b

ἄλλοτε καὶ ἐν τῷ παρεληλυθότι λόγῳ οὐδὲν πέπαυμαι 

λέγων.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허나 나는 전혀 생소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늘상 다른 때에도 지난 논변에서도 말하기를 

멈춘 적이 없는 바로 그것들을 이렇게 말하고 있네.

            ἔρχομαι γὰρ δὴ ἐπιχειρῶν σοι ἐπιδείξασθαι τῆς 

αἰτίας τὸ εἶδος ὅ πεπραγμάτευμαι, καὶ εἶμι πάλιν ἐπ᾿ 

ἐκεῖνα τὰ πολυθρύλητα καὶ ἄρχομαι ἀπ᾿ ἐκείνων, ὑποθέ-                                5

μενος εἶναί τι καλὸν αὐτὸ καθ᾿ αὑτὸ καὶ ἀγαθὸν καὶ μέγα 

καὶ τἆλλα πάντα· 

그러니까 나는 자네에게 내가 씨름해 온 그 원인의 형상이란 

것을 자네에게 증명해 보이고자 시도하기로 할 걸세, 다시 

저 지난 이야기들로 가서 그것들로부터 시작하니, 아름다운 

것 자체나 좋은 것 자체 또 큰 것 자체와 여타 온갖 것들 그 

자체와 같은 무언가가 있다고 가정하며 그리 한다는 것일세.

                            ἃ εἴ μοι δίδως τε καὶ συγχωρεῖς εἶναι 

ταῦτα, ἐλπίζω σοι ἐκ τούτων τὴν αἰτίαν ἐπιδείξειν καὶ 

ἀνευρήσειν ὡς ἀθάνατον ἡ ψυχή. 

만일 그런 것들이 있다는 점을 내게 허락해주고 동의해준다면, 

자네에게 그것들을 통해 원인이란 것을 증명해 보이고 영혼이 

불사라는 사실을 발견해낼 희망이 있을 그런 것들이지."

 

Ἀλλὰ μήν, ἔφη ὁ Κέβης, ὡς διδόντος σοι οὐκ ἂν                                            c

φθάνοις περαίνων. 

케베스는 말했소. "그야 물론 당신께 허락해 드리는 바이니 

부디 서둘러 완수해지시길 바랍니다."

 

Σκόπει δή, ἔφη, τὰ ἑξῆς ἐκείνοις ἐάν σοι συνδοκῇ ὥσπερ 

ἐμοί. φαίνεται γάρ μοι, εἴ τί ἐστιν ἄλλο καλὸν πλὴν αὐτὸ τὸ 

καλόν, οὐδὲ δι᾿ ἓν ἄλλο καλὸν εἶναι ἢ διότι μετέχει ἐκείνου                               5

τοῦ καλοῦ· καὶ πάντα δὴ οὕτως λέγω. τῇ τοιᾷδε αἰτίᾳ 

συγχωρεῖς;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럼 검토해 주게. 저기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내게 그러하듯 자네에게 같이 여겨질지 말일세. 

내게는, 만일 아름다운 것 그 자체 외에 달리 무슨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저 아름다운 것에 참여한다는 점으로 인해서

이외에는 다른 어떤 원인으로 인해서도 아름다운 것으로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네. 나는 더욱이 모든 것들이 그런 식이라

말하지. 이와 같은 원인에 자네는 동의하는가?"

 

Συγχωρῶ, ἔφη. 

그는 말했소. "동의합니다."

 

Οὐ τοίνυν, ἦ δ᾿ ὅς, ἔτι μανθάνω οὐδὲ δύναμαι τὰς ἄλλας 

αἰτίας τὰς σοφὰς ταύτας γιγνώσκειν· ἀλλ᾿ ἐάν τίς μοι λέγῃ                               10

δι᾿ ὅτι καλόν ἐστιν ὁτιοῦν, ἢ χρῶμα εὐανθὲς ἔχον ἢ σχῆμα ἢ                          d

ἄλλο ὁτιοῦν τῶν τοιούτων, τὰ μὲν ἄλλα χαίρειν ἐῶ,―

ταράττομαι γὰρ ἐν τοῖς ἄλλοις πᾶσι―τοῦτο δὲ ἁπλῶς καὶ 

ἀτέχνως καὶ ἴσως εὐήθως ἔχω παρ᾿ ἐμαυτῷ, ὅτι οὐκ ἄλλο 

τι ποιεῖ αὐτὸ καλὸν ἢ ἡ ἐκείνου τοῦ καλοῦ εἴτε παρουσία                                  5

εἴτε κοινωνία εἴτε ὅπῃ δὴ καὶ ὅπως προσαγορευομένη·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러니까 나는 아직 그와 같이 절묘한 

다른 원인을 배우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네. 오히려 누군가가

내게 아름다운 것으로 있는 것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그 무엇으로

말하든, 화려한 색이나 형태 또는 그와 같은 것들 중 무엇이든 그걸

지녀서라고 말한다면, 여타의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야 내가

여타의 일들에서는 혼란을 겪으니 말이네만, 그런데 이건 단적으로 

단순히 또 아마도 내 자신에게 쉽게 견지하고 있지, 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참여든 공유든 어떤 점에서 어떤 식으로 불린 것이든 그것 말고

다른 무언가가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일세.

                                                                                        οὐ 

γὰρ ἔτι τοῦτο διισχυρίζομαι, ἀλλ᾿ ὅτι τῷ καλῷ πάντα τὰ 

καλὰ καλά. τοῦτο γάρ μοι δοκεῖ ἀσφαλέστατον εἶναι καὶ 

ἐμαυτῷ ἀποκρίνασθαι καὶ ἄλλῳ, καὶ τούτου ἐχόμενος 

ἡγοῦμαι οὐκ ἄν ποτε πεσεῖν, ἀλλ᾿ ἀσφαλὲς εἶναι καὶ ἐμοὶ                                e

καὶ ὁτῳοῦν ἄλλῳ ἀποκρίνασθαι ὅτι τῷ καλῷ τὰ καλὰ 

γίγνεται καλά· ἢ οὐ καὶ σοὶ δοκεῖ; 

내가 아직 그걸 단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것에 의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것들로 있다는 것은 단언하네. 

왜냐하면 이게 내 자신에게든 그 밖의 사람에게든 대답하기에 

가장 안전한 것이라 여겨지고, 이것을 붙들고 있으면 내가 

결코 추락하지 않으리라고, 오히려 나에게도 다른 그 누가 

되었든 그에게도 아름다운 것에 의해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것들로 된다고 답하는 편이 안전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혹시 

자네에게도 그리 여기지지 않나?"

 

Δοκεῖ. 

"그리 여겨집니다."

 

Καὶ μεγέθει ἄρα τὰ μεγάλα μεγάλα καὶ τὰ μείζω                                                5

μείζω, καὶ σμικρότητι τὰ ἐλάττω ἐλάττω; 

혹시 또 큼에 의해 큰 것들이 큰 것들로 또 더 큰 것들은 더 큰

것들로 있고, 작음에 의해 작은 것들이 작은 것들로 있나?

 

Ναί. 

"네."

 

Οὐδὲ σὺ ἄρα ἂν ἀποδέχοιο εἴ τίς τινα φαίη ἕτερον 

ἑτέρου τῇ κεφαλῇ μείζω εἶναι, καὶ τὸν ἐλάττω τῷ αὐτῷ 

τούτῳ ἐλάττω, ἀλλὰ διαμαρτύροιο ἂν ὅτι σὺ μὲν οὐδὲν                             101a

ἄλλο λέγεις ἢ ὃτι τὸ μεῖζον πᾶν ἕτερον ἑτέρου οὐδενὶ ἄλλῳ 

μεῖζόν ἐστιν ἢ μεγέθει, καὶ διὰ τοῦτο μεῖζον, διὰ τὸ 

μέγεθος, τὸ δὲ ἔλαττον οὐδενὶ ἄλλῳ ἔλαττον ἢ σμικρότητι, 

καὶ διὰ τοῦτο ἔλαττον, διὰ τὴν σμικρότητα, φοβούμενος                                    5

οἶμαι μή τίς σοι ἐναντίος λόγος ἀπαντήσῃ, ἐὰν τῇ κεφαλῇ 

μείζονά τινα φῇς εἶναι καὶ ἐλάττω, πρῶτον μὲν τῷ αὐτῷ τὸ 

μεῖζον μεῖζον εἶναι καὶ τὸ ἔλαττον ἔλαττον, ἔπειτα τῇ 

κεφαλῇ σμικρᾷ οὔσῃ τὸν μείζω μείζω εἶναι, καὶ τοῦτο δὴ 

τέρας εἶναι, τὸ σμικρῷ τινι μέγαν τινὰ εἶναι· ἢ οὐκ ἂν                                       b

φοβοῖο ταῦτα; 

"그럼 자네는 만일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두고서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보다 머리에 의해 (그 만큼) 더 크다고 말한다면,

또 더 작은 사람이 바로 그 똑같은 것에 의해 (그 만큼) 더 작다고

말한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더 큰 모든 것은 큼 

외에 다른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큰 것이 

아니라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또한 이것, 

즉 크기로 인해 더 큰 것이고, 더 작은 것은 다름 아니라 작음에

의해 더 작은 것이며, 이로 인해, 그 작음으로 인해서 더 작은 

것이라고 강변하지 않겠나? 내 생각에 그건 어떤 반대 논변이

자네와 마주서게 되진 않을까 두려워하며, 그 머리 만큼 더 큰

누군가를 자네가 더 작다고도 주장할까봐, 처음에는 같은 것에

의해 더 큰 것은 더 크고 더 작은 것은 더 작다고, 다음으로는

머리가 작다는 쪽으로 있기에 그것에 의해 더 큰 자가 더 크다고,

더욱이 이는 괴상한 일이라고, 무언가 작은 것에 의해 어떤 것이

큰 것으로 있다는 것은 그렇다고 주장할까봐 그런 것 같네만

말일세. 아니면 자네는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는 게 아닌 것인가?

> A가 B보다 머리 하나 만큼 더 크다면, B는 A보다 머리 하나 만큼 작고, A를 B보다 크게 해주는 그 머리는 B보다 그 만큼 큰 것으로서 A에게 있는데, 다시 B를 A보다 작게 해주는 것도 바로 그 똑같은 머리이고, B에게는 A보다 그 만큼 작은 것으로서의 머리가 있게 된다. 말하자면 A는 머리를 +로, B는 머리를 -로 가지고, 이 두 머리는 같은 머리이다. 『범주론』에서는 연속량으로서 '크기(metethos)'가 양이고 더 크다거나 더 작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관계쌍으로 간주된다. 『범주론』에서 특히 대응, 관계, 반대에 관한 논의들은 상당 부분 『파이돈』의 문제의식들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파이돈』에서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그 주제의식이 삶과 죽음이고 이 둘이 정말로 반대되는 것인가 하는 점 역시 문젯거리로 다루어지고 있는 듯한데, 동일한 것이 반대자를 모두 수용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동시에 양립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고 이는 플라톤에게서는 절묘한?정교한?세련된? 원인 이론, 형상-참여론, 이데아론을 통해 일정부분 극복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크고 작음과 크기를 서로 다른 범주로 분류하므로 문제의 진단이 다르고, 생멸이나 이동 또는 상태변화 등을 오직 실체만이 가능한 반대자의 수용의 방식이나 양태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문제의 해법도 다를 듯하다. 

> 같은 것이 반대쌍(크고 작음)의 원인

> 원인과 결과가 반대.

Καὶ ὁ Κέβης γελάσας, Ἔγωγε, ἔφη. 

그러자 케베스가 웃더니 말했소. "저로서는요."

 

Οὐκοῦν, ἦ δ᾿ ὅς, τὰ δέκα τῶν ὀκτὼ δυοῖν πλείω εἶναι, 

καὶ διὰ ταύτην τὴν αἰτίαν ὑπερβάλλειν, φοβοῖο ἂν λέγειν,                                  5

ἀλλὰ μὴ πλήθει καὶ διὰ τὸ πλῆθος; καὶ τὸ δίπηχυ τοῦ 

πηχυαίου ἡμίσει μεῖζον εἶναι ἀλλ᾿ οὐ μεγέθει; ὁ αὐτὸς γάρ 

που φόβος.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렇다면 10이 8보다 2에 의해 (그 만큼) 

더 많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원인으로 인해 초과한다는 것은, 

말하기 두려워 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다수에 의해, 다수인 것으로 

인해서이지 않을까 하고 말일세. 두 척이 한 척보다 절반에 의해 

(그 만큼) 더 큰 것이고 큼에 의해서는 아니라고도 말하기 두렵지 

않나? 그야 분명 같은 두려움일 테니 말일세."

 

Πάνυ γ᾿, ἔφη. 

그가 말했소. "무척이나 그렇긴 합니다." //260429

 

Τί δέ; ἑνὶ ἑνὸς προστεθέντος τὴν πρόσθεσιν αἰτίαν εἶναι                                   10

τοῦ δύο γενέσθαι ἢ διασχισθέντος τὴν σχίσιν οὐκ εὐλαβοῖο                             c

ἂν λέγειν; 

그런데 어떤가? 하나에 하나가 추가되면 그 추가가 둘이 생기는 

일의 원인이라거나 절단된다면 그 절단이 원인이라 말하는 걸 

자네는 주의하지 않겠나?

> 반대쌍 원인으로 같은 결론.

                καὶ μέγα ἂν βοῴης ὃτι οὐκ οἶσθα ἄλλως πως 

ἕκαστον γιγνόμενον ἢ μετασχὸν τῆς ἰδίας οὐσίας ἑκάστου 

οὗ ἂν μετάσχῃ, καὶ ἐν τούτοις οὐκ ἔχεις ἄλλην τινὰ αἰτίαν 

τοῦ δύο γενέσθαι ἀλλ᾿ ἢ τὴν τῆς δυάδος μετάσχεσιν, καὶ                                   5

δεῖν τούτου μετασχεῖν τὰ μέλλοντα δύο ἔσεσθαι, καὶ 

μονάδος ὃ ἂν μέλλῃ ἓν ἔσεσθαι, τὰς δὲ σχίσεις ταύτας καὶ 

προσθέσεις καὶ τὰς ἄλλας τὰς τοιαύτας κομψείας ἐῴης ἂν 

χαίρειν, παρεὶς ἀποκρίνασθαι τοῖς σεαυτοῦ σοφωτέροις· 

또한 자네는 크게 소리칠 걸세, 각각의 것은 그것이 참여하는

각각의 고유한 있음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떤 식으로든 

생겨나는 걸 알지 못한다고, 그리고 이것들 속에서 2에 대한 

참여 외에 2가 됨의 다른 무슨 원인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장차 

2로 있을 것들은 그것에 참여해야 한다고, 또 장차 1로 있을 것은 

무엇이든 1에 그래야 한다고, 반면 절단이나 추가나 그와 같은 

여타의 미묘한 것들에게는 작별을 고할 것이라고, 자네보다 더욱 

분별 있는 자들에게 답변을 맡긴 채 그리 소리칠 테지.

σὺ δὲ δεδιὼς ἄν, τὸ λεγόμενον, τὴν σαυτοῦ σκιὰν καὶ τὴν                               d

ἀπειρίαν, ἐχόμενος ἐκείνου τοῦ ἀσφαλοῦς τῆς ὑποθέσεως 

οὕτως ἀποκρίναιο ἄν. 

헌데 자네는 옛말처럼 제 자신의 그림자와 미숙함을 두려워하며,

저 가정의 안전함을 붙든 채로 그렇게 대답할 걸세.

                                    εἰ δέ τις αὐτῆς τῆς ὑποθέσεως 

ἔχοιτο, χαίρειν ἐῴης ἂν καὶ οὐκ ἀποκρίναιο ἕως ἂν τὰ ἀπ᾿ 

ἐκείνης ὁρμηθέντα σκέψαιο εἴ σοι ἀλλήλοις συμφωνεῖ ἢ                                    5

διαφωνεῖ·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바로 그 가정을 붙든다면, 자네는 그를

내버려 두고 저 가정으로부터 촉발되어 나온 것들이 자네와 서로

한 목소리를 내는지 아니면 다른 말을 하는지 검토를 마칠 때까지

답하지 않을 걸세. 

                ἐπειδὴ δὲ ἐκείνης αὐτῆς δέοι σε διδόναι λόγον, 

ὡσαύτως ἂν διδοίης, ἄλλην αὖ ὑπόθεσιν ὑποθέμενος ἥτις 

τῶν ἄνωθεν βελτίστη φαίνοιτο, ἕως ἐπί τι ἱκανὸν ἔλθοις, 

ἅμα δὲ οὐκ ἂν φύροιο ὥσπερ οἱ ἀντιλογικοὶ περί τε τῆς                                  e

ἀρχῆς διαλεγόμενος καὶ τῶν ἐξ ἐκείνης ὡρμημένων, εἴπερ 

βούλοιό τι τῶν ὄντων εὑρεῖν; 

그런데 저 가정에 대해 자네는 설명을 제시해야 할 것이기에, 

같은 방식으로 설명을 제시할 것인데, 위로부터 나오는 가정들 중

최선이라 보이는 어떤 전제이든 여타의 가정을 전제하며, 충분한

무언가에 이를 때까지 그리할 테고, 동시에 마치 반론가들이 

원리에 관하여서도 그 원리로부터 촉발된 것들에 관련하여서도 

대화를 나누며 그러하듯 뒤섞지 않을 테지? 만일 정말로 자네가 

있는 것들 중 뭐라도 찾아내길 바란다면 말일세.

                                              ἐκείνοις μὲν γὰρ ἴσως οὐδὲ 

εἷς περὶ τούτου λόγος οὐδὲ φροντίς· ἱκανοὶ γὰρ ὑπὸ σοφίας 

ὁμοῦ πάντα κυκῶντες ὅμως δύνασθαι αὐτοὶ αὑτοῖς ἀρέ-                                   5

σκειν· σὺ δ᾿, εἴπερ εἶ τῶν φιλοσόφων, οἶμαι ἂν ὡς ἐγὼ 

λέγω ποιοῖς.                                                                                                102a

왜냐하면 저들에게는 아마 그 일에 관한 단일한 설명도 사유도 

있지 않은 것 같으니까. 그들은 지혜에 의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뒤섞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들에게 만족할 

능력이 충분한 자들이기 때문이지. 반면 자네는, 정말로 자네가 

철학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면, 내 생각엔 내가 말하는 대로 그리 

할 걸세."

 

Ἀληθέστατα, ἔφη, λέγεις, ὅ τε Σιμμίας ἅμα καὶ ὁ 

Κέβης. 

심미아스와 케베스가 동시에 말했소. "참된 말씀이십니다."

 

ΕΧ. Νὴ Δία, ὦ Φαίδων, εἰκότως γε· θαυμαστῶς γάρ 

μοι δοκεῖ ὡς ἐναργῶς τῷ καὶ σμικρὸν νοῦν ἔχοντι εἰπεῖν                                   5

ἐκεῖνος ταῦτα. 

에케크라테스: 제우스께 맹세코, 파이돈, 그럴 듯하긴 하오. 

조금이라도 제정신인 자에게는 어찌나 명백한지 놀라울 만한

그런 방식으로 저분께서 그런 것들을 말씀하신 것이라 내게는

여겨진다오.

 

ΦΑΙΔ. Πάνυ μὲν οὖν, ὦ Ἐχέκρατες, καὶ πᾶσι τοῖς 

παροῦσιν ἔδοξεν. 

파이돈: 그야 물론이오, 에케크라테스, 또한 곁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도 그리 여겨졌다오.

 

ΕΧ. Καὶ γὰρ ἡμῖν τοῖς ἀποῦσι, νῦν δὲ ἀκούουσιν. ἀλλὰ 

τίνα δὴ ἦν τὰ μετὰ ταῦτα λεχθέντα;                                                                     10

에케크라테스: 곁에 있지 못한 우리에게도, 지금 듣고 나니 

그리 여겨지는군. 허나 그 다음으로 논해진 것들은 무엇이었소?

 

ΦΑΙΔ. Ὡς μὲν ἐγὼ οἶμαι, ἐπεὶ αὐτῷ ταῦτα συνε-

χωρήθη, καὶ ὡμολογεῖτο εἶναί τι ἕκαστον τῶν εἰδῶν καὶ                                   b

τούτων τἆλλα μεταλαμβάνοντα αὐτῶν τούτων τὴν 

ἐπωνυμίαν ἴσχειν, τὸ δὴ μετὰ ταῦτα ἠρώτα, Εἰ δή, ἦ δ᾿ ὅς, 

ταῦτα οὕτως λέγεις, ἆρ᾿ οὐχ, ὅταν Σιμμίαν Σωκράτους 

φῇς μείζω εἶναι, Φαίδωνος δὲ ἐλάττω, λέγεις τότ᾿ εἶναι ἐν                                  5

τῷ Σιμμίᾳ ἀμφότερα, καὶ μέγεθος καὶ σμικρότητα; 

파이돈: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분께 이러한 것들이 동의되었고, 

또한 형상들의 각각이 무언가로 있으며 그것들 이외의 것들은 

바로 그것들에 관여함으로써 별칭을 가졌다고 합의되었기에, 

그분께서는 이런 일들 다음으로 질문하시어 말씀하셨소. 

"그래서 만일, 이런 것들을 그렇게 자네가 말한다면, 그럼, 

심미아스를 소크라테스보다 더 큰 자라고, 반면 파이돈보다는 

더 작은 자라고 자네가 말할 때, 자네는 이 때 심미아스 안에 

양자 모두가, 큼도 작음도 그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 비교에 따라 부수하는 속성, Cambridge Change. Cf.『테아이테토스』 154 상대적 크기, 『소피스트』 245 속성을 겪어서 가지게 됨 257 "크지 않은 것" 『파르메니데스』 149e ff. 하나의 크기와 크고 작음.

 

Ἔγωγε. 

"저로서는요."

 

Ἀλλὰ γάρ, ἦ δ᾿ ὅς, ὁμολογεῖς τὸ τὸν Σιμμίαν ὑπερέχειν 

Σωκράτους οὐχ ὡς τοῖς ῥήμασι λέγεται οὕτω καὶ τὸ 

ἀληθὲς ἔχειν; οὐ γάρ που πεφυκέναι Σιμμίαν ὑπερέχειν                                  c

τούτῳ, τῷ Σιμμίαν εἶναι, ἀλλὰ τῷ μεγέθει ὃ τυγχάνει 

ἔχων·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허나 그야 자네는 심미아스가 

소크라테스보다 초과한다는 것이 그 자구로 말해지는 그대로 

그렇게 또 참까지 지니는 건 아니라고 동의하지? 분명 

심미아스가 그로써, 즉 심미아스로 있음으로써 본래부터 

초과하게 타고났던 것이 아니라, 마침 그가 가진 그 크기로써 

초과하니까 말일세.

          οὐδ᾿ αὖ Σωκράτους ὑπερέχειν ὅτι Σωκράτης ὁ 

Σωκράτης ἐστίν, ἀλλ᾿ ὅτι σμικρότητα ἔχει ὁ Σωκράτης 

πρὸς τὸ ἐκείνου μέγεθος;                                                                                   5

이번엔 또 소크라테스보다 초과한다는 것 또한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로서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저 사람의 

큼에 대해 작음을 가지기 때문이라고도 동의하지?"

 

Ἀληθῆ. 

"맞는 말씀이십니다."

 

Οὐδέ γε αὖ ὑπὸ Φαίδωνος ὑπερέχεσθαι τῷ ὅτι Φαίδων 

ὁ Φαίδων ἐστίν, ἀλλ᾿ ὅτι μέγεθος ἔχει ὁ Φαίδων πρὸς τὴν 

Σιμμίου σμικρότητα; 

"또 이번엔 심미아스가 파이돈에 의해 초과당한다는 것도 

파이돈이 파이돈으로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심미아스의 작음에 

대해 파이돈이 큼을 가진다는 점에서라고도 동의하겠지?"

 

Ἔστι ταῦτα.                                                                                                         10

"사실이 그러합니다."

 

Οὕτως ἄρα ὁ Σιμμίας ἐπωνυμίαν ἔχει σμικρός τε καὶ 

μέγας εἶναι, ἐν μέσῳ ὢν ἀμφοτέρων, τοῦ μὲν τῷ μεγέθει 

ὑπερέχειν τὴν σμικρότητα ὑπέχων, τῷ δὲ τὸ μέγεθος τῆς                               d

σμικρότητος παρέχων ὑπερέχον. 

그래서 그런 식으로 심미아스는 작은 자로도 큰 자로도 있다는

별칭을 지니지, 양자의 중간에 있으면서, 큼으로써 초과하는

쪽(파이돈)에 대해서는 작음을 감내하고, 다른

쪽(소크라테스)에게는 그의 작음을 초과하는 큼을 내주면서."

> Focus: by submitting his Smallness to the Bigness of the one for that one to exceed it, while supplying his Bigness for the other's Smallness to be exceed by it. 

> Cambridge: offering his smallness to Phaedo’s largeness to be exceeded, but providing to Socrates his largeness, which exceeds Socrates’ smallness.

> Loeb: surpassing the smallness of the one by exceeding him in height, and granting to the other the greatness that exceeds his own smallness.

                                                      Καὶ ἅμα μειδιάσας, 

Ἔοικα, ἔφη, καὶ συγγραφικῶς ἐρεῖν, ἀλλ᾿ οὖν ἔχει γέ που 

ὡς λέγω. Συνέφη. 

그와 동시에 미소지으시고는 말씀하셨소. "내가 산문투로

얘기한 듯하네만, 그리하여 분명 사정은 내 말한대로이긴 하네." 

심미아스는 동의했소.

 

Λέγω δὴ τοῦδ᾿ ἕνεκα, βουλόμενος δόξαι σοὶ ὅπερ ἐμοί.                                    5

ἐμοὶ γὰρ φαίνεται οὐ μόνον αὐτὸ τὸ μέγεθος οὐδέποτ᾿ 

ἐθέλειν ἅμα μέγα καὶ σμικρὸν εἶναι, ἀλλὰ καὶ τὸ ἐν ἡμῖν 

μέγεθος οὐδέποτε προσδέχεσθαι τὸ σμικρὸν οὐδ᾿ ἐθέλειν 

ὑπερέχεσθαι, ἀλλὰ δυοῖν τὸ ἕτερον, ἢ φεύγειν καὶ ὑπεκχω-

ρεῖν ὅταν αὐτῷ προσίῃ τὸ ἐναντίον, τὸ σμικρόν, ἢ προσε-                              e

λθόντος ἐκείνου ἀπολωλέναι· ὑπομένον δὲ καὶ δεξάμενον 

τὴν σμικρότητα οὐκ ἐθέλειν εἶναι ἕτερον ἢ ὅπερ ἦν. 

"나는 이걸 위해 말하고 있다네, 내게 여겨지는 그대로 자네에게 

여겨지길 바라면서 말일세. 내게는 크기 그 자체만이 결코 동시에 

크면서 작기도 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크기 또한

결코 작은 것을 허용하지도 않고 초과당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둘 중 하나, 자신에게 반대되는 것, 즉 작은 것이 

다가올 때는 달아나거나 물러나거나, 저것이 다가오면 해체되려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기저에 머무르며 그 작음을 수용하는 

것은 그것이었던 바로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 있으려고는 하지 않지. //260506

                                                                                  ὥσπερ 

ἐγὼ δεξάμενος καὶ ὑπομείνας τὴν σμικρότητα, καὶ ἔτι ὢν 

ὅσπερ εἰμί, οὗτος ὁ αὐτὸς σμικρός εἰμι· ἐκεῖνο δὲ οὐ                                         5

τετόλμηκεν μέγα ὂν σμικρὸν εἶναι· ὡς δ᾿ αὔτως καὶ τὸ 

σμικρὸν τὸ ἐν ἡμῖν οὐκ ἐθέλει ποτὲ μέγα γίγνεσθαι οὐδὲ 

εἶναι, οὐδ᾿ ἄλλο οὐδὲν τῶν ἐναντίων, ἔτι ὂν ὅπερ ἦν, ἅμα 

τοὐναντίον γίγνεσθαί τε καὶ εἶναι, ἀλλ᾿ ἤτοι ἀπέρχεται ἢ                             103a

ἀπόλλυται ἐν τούτῳ τῷ παθήματι. 

마치 내가 작음을 받아들이고 그 밑에 머무르면서, 또한

여전히 나인 바로 그 사람으로 있으면서, 이러한 나 자신이 작은

사람인 것처럼 말일세. 그런데 저것은 큰 것으로 있으면서 작은

것으로 있기를 감행하지 않았지. 그렇게 우리 안의 작은 것도 결코

큰 것이 되려 하지 않고 그리 있으려 하지도 않듯, 반대쌍들 중

여타 그 무엇도, 여전히 그것이었던 바로 그것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으로 되거나 있으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바로

상태에서 떠나거나 해체된다네."

 

Παντάπασιν, ἔφη ὁ Κέβης, οὕτω φαίνεταί μοι. 

케베스는 말했소. "제게 전적으로 그렇게 보입니다."

 

Καί τις εἶπε τῶν παρόντων ἀκούσας―ὅστις δ᾿ ἦν, οὐ 

σαφῶς μέμνημαι―Πρὸς θεῶν, οὐκ ἐν τοῖς πρόσθεν ὑμῖν                                  5

λόγοις αὐτὸ τὸ ἐναντίον τῶν νυνὶ λεγομένων ὡμολογεῖτο, 

ἐκ τοῦ ἐλάττονος τὸ μεῖζον γίγνεσθαι καὶ ἐκ τοῦ μείζονος 

τὸ ἔλαττον, καὶ ἀτεχνῶς αὕτη εἶναι ἡ γένεσις τοῖς 

ἐναντίοις, ἐκ τῶν ἐναντίων; νῦν δέ μοι δοκεῖ λέγεσθαι ὅτι 

τοῦτο οὐκ ἄν ποτε γένοιτο.                                                                                 10

그러자 곁에 있는 자들 중 누군가가 듣고서는 말했소. 도대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군. "신들께 대고, 이전 우리 

논의에서 지금 논의되는 것들의 정반대인 것이 동의되지

않았습니까? 더 작은 것으로부터 더 큰 것이 생기고 더 큰

것으로부터 더 작은 것이 생긴다고, 또한 단순히 이런 것이 

반대인 것들에게 생성이란 것이라고, 즉 반대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게는 그런 일이 도대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논의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Καὶ ὁ Σωκράτης παραβαλὼν τὴν κεφαλὴν καὶ ἀκούσας, 

Ἀνδρικῶς, ἔφη, ἀπεμνημόνευκας, οὐ μέντοι ἐννοεῖς τὸ                                   b

διαφέρον τοῦ τε νῦν λεγομένου καὶ τοῦ τότε. 

그러자 소크라테스께서 고개를 기울이시고 들으시고는

말씀하셨소. "남자답게 상기시켜주었긴 하네만, 지금 논의되는

것과 그 때 논의된 것의 차이는 알지 못하는군.

                                                                       τότε μὲν γὰρ 

ἐλέγετο ἐκ τοῦ ἐναντίου πράγματος τὸ ἐναντίον πρᾶγμα 

γίγνεσθαι, νῦν δέ, ὅτι αὐτὸ τὸ ἐναντίον ἑαυτῷ ἐναντίον οὐκ 

ἄν ποτε γένοιτο, οὔτε τὸ ἐν ἡμῖν οὔτε τὸ ἐν τῇ φύσει.                                         5

그 때는 반대되는 사태로부터 그 반대의 사태가 생긴다고 

논의되었네만, 지금은, 반대되는 것 그 자체가 자기 자신과

반대되는 것으로는 결코 되지 못할 것이고, 우리 안의 반대항

역시 자연 안의 반대항도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논의되고

있지.

                                                                                    τότε                                 5

μὲν γάρ, ὦ φίλε, περὶ τῶν ἐχόντων τὰ ἐναντία ἐλέγομεν, 

ἐπινομάζοντες αὐτὰ τῇ ἐκείνων ἐπωνυμίᾳ, νῦν δὲ περὶ 

ἐκείνων αὐτῶν ὧν ἐνόντων ἔχει τὴν ἐπωνυμίαν τὰ ὀνομα-

ζόμενα· αὐτὰ δ᾿ ἐκεῖνα οὐκ ἄν ποτέ φαμεν ἐθελῆσαι γένεσιν                           c

ἀλλήλων δέξασθαι. 

그 때는, 친애하는 이여, 반대되는 것들을 지니는 것들에 관하여 

우리가 논하고 있었다네. 저것들의 별칭으로 그것들을 이름

붙이며 말일세. 반면 지금은 명명된 것들이 그 내재하는 것들의

별칭을 가지는 저것들 자체에 관하여 논하고 있지. 그런데 저것들

자체는 결코 상호의 생성을 수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네." 

                                Καὶ ἅμα βλέψας πρὸς τὸν Κέβητα 

εἶπεν, Ἆρα μή που, ἔφη, ὦ Κέβης, καὶ σέ τι τούτων ἐτάρα-

ξεν ὧν ὅδε εἶπεν; 

그와 동시에 그분께서 케베스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소. 

"혹시, 케베스, 여기 이 사람이 이야기한 것들 중 뭔가가 자네를 

혼란시킨 것은 아니겠지?"

> 속성과 속성 담지자의 구분 및 관계에 대한 논의도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에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개진되고 예시도 중첩된다. 

 

Οὐδ᾿ αὖ, ἔφη ὁ Κέβης, οὕτως ἔχω· καίτοι οὔτι λέγω ὡς                                     5

οὐ πολλά με ταράττει. 

케베스는 말했소. "이번엔 저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혼란시키는 것들이 많지 않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Συνωμολογήκαμεν ἄρα, ἦ δ᾿ ὅς, ἁπλῶς τοῦτο, μηδέποτε 

ἐναντίον ἑαυτῷ τὸ ἐναντίον ἔσεσθαι.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럼 우리는 단적으로 이것을, 어떤 

경우에도 결코 반대되는 것이 제 자신과 반대되는 것으로 있지 

않으리란 것을 동의하였네."

 

Παντάπασιν, ἔφη. 

그는 말했소.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Ἔτι δή μοι καὶ τόδε σκέψαι, ἔφη, εἰ ἄρα συνομολογή-                                        10

σεις. θερμόν τι καλεῖς καὶ ψυχρόν;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럼 이것도 좀 더 검토해 주게. 혹시 

자네가 동의할는지 말일세. 자네는 뭔가를 온이라거나 냉이라 

부르지?"

 

Ἔγωγε. 

"저야 그렇죠."

 

Ἆρ᾿ ὅπερ χιόνα καὶ πῦρ; 

"그게 바로 눈이고 불인가?"

 

Μὰ Δί᾿ οὐκ ἔγωγε.                                                                                            d

"제우스께 맹세코 저로서는 그리 부르지 않습니다."

 

Ἀλλ᾿ ἕτερόν τι πυρὸς τὸ θερμὸν καὶ ἕτερόν τι χιόνος τὸ 

ψυχρόν; 

"오히려 열은 불과 다른 무언가이고 냉은 눈과 다른 무엇인가?"

 

Ναί. 

"네."

 

Ἀλλὰ τόδε γ᾿ οἶμαι δοκεῖ σοι, οὐδέποτε χιόνα γ᾿ οὖσαν                                      5

δεξαμένην τὸ θερμόν, ὥσπερ ἐν τοῖς ἔμπροσθεν ἐλέγομεν, 

ἔτι ἔσεσθαι ὅπερ ἦν, χιόνα καὶ θερμόν, ἀλλὰ προσιόντος 

τοῦ θερμοῦ ἢ ὑπεκχωρήσειν αὐτῷ ἢ ἀπολεῖσθαι. 

"그럼 내 생각에 자네에겐 이리 여겨지는 것이군, 적어도 눈인 

한에서 결코 열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마치 앞서 우리가 논하던 

것처럼, 바로 그것이었던 바의 것으로 여전히 있을 것이라고, 

즉 눈은 눈으로 열은 열로, 오히려 열이 다가오면 그것에게서 

물러나주거나 해체되어 버린다고 말일세."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Καὶ τὸ πῦρ γε αὖ προσιόντος τοῦ ψυχροῦ αὐτῷ ἢ ὑπε-                                     10

ξιέναι ἢ ἀπολεῖσθαι, οὐ μέντοι ποτὲ τολμήσειν δεξάμενον 

τὴν ψυχρότητα ἔτι εἶναι ὅπερ ἦν, πῦρ καὶ ψυχρόν. 

"이번엔 불 또한 냉이 그것에게 다가오면 사그라들거나 해체되어 

버린다고, 냉을 수용하면서 여전히 그것이었던 바의 것으로 있기를,

불은 불로 냉은 냉으로 있기를 결코 감행하진 않으리라고 여기겠군."

 

Ἀληθῆ, ἔφη, λέγεις.                                                                                          e

그는 말했소. "맞는 말씀이십니다."

 

Ἔστιν ἄρα, ἦ δ᾿ ὅς, περὶ ἔνια τῶν τοιούτων, ὥστε μὴ 

μόνον αὐτὸ τὸ εἶδος ἀξιοῦσθαι τοῦ αὑτοῦ ὀνόματος εἰς τὸν 

ἀεὶ χρόνον, ἀλλὰ καὶ ἄλλο τι ὃ ἔστι μὲν οὐκ ἐκεῖνο, ἔχει δὲ 

τὴν ἐκείνου μορφὴν ἀεί, ὅτανπερ ᾖ· ἔτι δὲ ἐν τῷδε ἴσως                                    5

ἔσται σαφέστερον ὃ λέγω· τὸ γὰρ περιττὸν ἀεί που δεῖ 

τούτου τοῦ ὀνόματος τυγχάνειν ὅπερ νῦν λέγομεν· ἢ οὔ;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래서 이런 것들 중 일부에 관해서는, 

오직 형상 그 자체만이 자신의 이름에 항상 시간 내내 합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저것으로 있지는 않지만, 그것으로 있을 어느

때에든, 항상 저것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또 다른 것도 그러하지.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우에 아마 내가 말하는 바가 좀 더

정확하게 들어 있을 걸세. 홀수는 분명 항상 지금 우리가 논하는

바로 그 이름을 충족시켜야 하지. 아니 그런가?"

 

Πάνυ γε. 

"물론이죠."

 

Ἆρα μόνον τῶν ὄντων―τοῦτο γὰρ ἐρωτῶ―ἢ καὶ ἄλλο 

τι ὃ ἔστι μὲν οὐχ ὅπερ τὸ περιττόν, ὅμως δὲ δεῖ αὐτὸ μετὰ                        104a

τοῦ ἑαυτοῦ ὀνόματος καὶ τοῦτο καλεῖν ἀεὶ διὰ τὸ οὕτω 

πεφυκέναι ὥστε τοῦ περιττοῦ μηδέποτε ἀπολείπεσθαι; 

"혹시 오직 있는 것들 중에서 오직 그것만 그런가, 내가 묻고 있는

이것이니 하는 말이네만, 혹은 바로 그 홀수로는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과 더불어 이것으로도 항상

불러야하는 것, 홀과 결코 떨어지지 않도록 그렇게 타고났다는

점으로 인해 그러한 것도 그런가?

λέγω δὲ αὐτὸ εἶναι οἷον καὶ ἡ τριὰς πέπονθε καὶ ἄλλα 

πολλά. σκόπει δὲ περὶ τῆς τριάδος. ἆρα οὐ δοκεῖ σοι τῷ τε                              5

αὑτῆς ὀνόματι ἀεὶ προσαγορευτέα εἶναι καὶ τῷ τοῦ περιτ-

τοῦ, ὄντος οὐχ ὅπερ τῆς τριάδος; 

나는 그것이 이를 테면 3도 겪고 여타의 많은 것들 역시 겪는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네. 그런데 3에 관해 검토해 주게나. 

혹시 자네에게 그건 항상 그 자신의 이름으로도 또한 홀수의

이름으로도 불려야만 한다고, 홀수의 이름은 3의 이름 바로

그것은 아님에도 그렇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260709

                                                      ἀλλ᾿ ὅμως οὕτω πως 

πέφυκε καὶ ἡ τριὰς καὶ ἡ πεμπτὰς καὶ ὁ ἥμισυς τοῦ ἀρι-

θμοῦ ἅπας, ὥστε οὐκ ὢν ὅπερ τὸ περιττὸν ἀεὶ ἕκαστος                                  b

αὐτῶν ἐστι περιττός· καὶ αὖ τὰ δύο καὶ τέτταρα καὶ ἅπας ὁ 

ἕτερος αὖ στίχος τοῦ ἀριθμοῦ οὐκ ὢν ὅπερ τὸ ἄρτιον ὅμως 

ἕκαστος αὐτῶν ἄρτιός ἐστιν ἀεί· συγχωρεῖς ἢ οὔ;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도 5도 수의 절반이 통틀어 모두 

그런 어떤 식으로 타고났고, 그래서 홀수인 바의 바로 그것으로 

있지 않음에도 항상 그것들의 각각이 홀수로 있지. 또 이번엔 2와 

4 그리고 이제 또 수의 다른 쪽 열 통틀어 전부가 짝수인 바로 

그것으로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각각은 항상 짝수로 

있지. 동의하지 않는가?"

 

Πῶς γὰρ οὔκ; ἔφη.                                                                                             5

그는 말했소. "어찌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Ὃ τοίνυν, ἔφη, βούλομαι δηλῶσαι, ἄθρει. ἔστιν δὲ τόδε, 

ὅτι φαίνεται οὐ μόνον ἐκεῖνα τὰ ἐναντία ἄλληλα οὐ δεχό-

μενα, ἀλλὰ καὶ ὅσα οὐκ ὄντ᾿ ἀλλήλοις ἐναντία ἔχει ἀεὶ 

τἀναντία, οὐδὲ ταῦτα ἔοικε δεχομένοις ἐκείνην τὴν ἰδέαν ἣ 

ἂν τῇ ἐν αὐτοῖς οὔσῃ ἐναντία ᾖ, ἀλλ᾿ ἐπιούσης αὐτῆς ἤτοι                                 10

ἀπολλύμενα ἢ ὑπεκχωροῦντα.                                                                         c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러니까 내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을, 

주목하게. 이런 것이네만, 비단 서로를 수용하지 않는 저 반대들

뿐만 아니라, 서로 반대되는 것들로 있지 않으면서 항상 반대를

지니는 것들 또한, 이러한 것들도 그것들 안에 있는 형상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있는 저 형상을 수용하는 것들과 유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형상이 접근해오면 해체되어 버리거나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걸세.

                                                 ἢ οὐ φήσομεν τὰ τρία καὶ                                 c

ἀπολεῖσθαι πρότερον καὶ ἄλλο ὁτιοῦν πείσεσθαι, πρὶν 

ὑπομεῖναι ἔτι τρία ὄντα ἄρτια γενέσθαι; 

아니면 우리가 3은 여전히 3인 채로 짝수가 되는 일을 감내하기 

전에, 그보다 먼저 해체되고 무엇이 되었든 여타의 것을 겪을 

것이라 주장하지 않을 것인가?"

 

Πάνυ μὲν οὖν, ἔφη ὁ Κέβης. 

케베스가 말했소. "그야 물론 그렇습니다."

 

Οὐδὲ μήν, ἦ δ᾿ ὅς, ἐναντίον γέ ἐστι δυὰς τριάδι.                                                5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물론 2가 3의 반대인 것도 아니지."

 

Οὐ γὰρ οὖν. 

"그야 아니죠."

 

Οὐκ ἄρα μόνον τὰ εἴδη τὰ ἐναντία οὐχ ὑπομένει ἐπιόντα 

ἄλληλα, ἀλλὰ καὶ ἄλλ᾿ ἄττα τὰ ἐναντία οὐχ ὑποένει 

ἐπιόντα. 

"그래서 반대되는 형상들만 접근해 오는 서로를 감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타 어떤 반대되는 것들도 접근해 오는 걸 

감내하지 않는다네."

 

Ἀληθέστατα, ἔφη, λέγεις.                                                                                    10

그가 말했소. "무척이나 참된 말씀이십니다."

 

Βούλει οὖν, ἦ δ᾿ ὅς, ἐὰν οἷοί τ᾿ ὦμεν, ὁρισώμεθα ὁποῖα 

ταῦτά ἐστιν;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러니 자네는,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이런 것들이 어떠한 것들인지 규정하길 바라는가?"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Ἆρ᾿ οὖν, ἔφη, ὦ Κέβης, τάδε εἴη ἄν, ἃ ὅτι ἂν κατάσχῃ                                     d

μὴ μόνον ἀναγκάζει τὴν αὑτοῦ ἰδέαν αὐτὸ ἴσχειν, ἀλλὰ καὶ 

ἐναντίου αὖ τῳ ἀεί τινος;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렇다면, 케베스, 이런 것들이겠나? 

그것들이 점유한 무엇이든 그것으로 하여금 단지 자신의 형상을 

지니도록 강제할 뿐만 아니라, 이번엔 또 어떤 것에 항상 반대되는 

무언가의 형상 또한 그리 하는 것들 말일세."

> 3, 불, 기타 이러저러한 것들. 자신의 형상 + 반대쌍의 어느 한쪽까지.

Πῶς λέγεις; 

"어찌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Ὥσπερ ἄρτι ἐλέγομεν. οἶσθα γὰρ δήπου ὅτι ἃ ἂν ἡ τῶν                                    5

τριῶν ἰδέα κατάσχῃ, ἀνάγκη αὐτοῖς οὐ μόνον τρισὶν εἶναι 

ἀλλὰ καὶ περιττοῖς. 

"방금 우리가 논하던 그대로라네. 그야 자네는 분명 3들의 

형상이 점유하는 것들은, 그것들이 3으로 있는 것뿐만 아니라

홀수로 있는 것 역시 필연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니 말이지."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Ἐπὶ τὸ τοιοῦτον δή, φαμέν, ἡ ἐναντία ἰδέα ἐκείνῃ τῇ 

μορφῇ ἣ ἂν τοῦτο ἀπεργάζηται οὐδέποτ᾿ ἂν ἔλθοι.                                            10

"그래서 이런 것에게, 우리가 주장하기로, 이런 것을

실현시켜주는 저 형태와 반대되는 형상은 절대로 당도하지 

못하겠지."

 

Οὐ γάρ. 

"못하니까요."

 

Εἰργάζετο δέ γε ἡ περιττή; 

"그런가 하면 홀수는 실현되지?"

 

Ναί. 

"네."

 

Ἐναντία δὲ ταύτῃ ἡ τοῦ ἀρτίου; 

"그런데 그것에 짝수의 형상은 반대이지?"

 

Ναί.                                                                                                                     15

"네."

 

Ἐπὶ τὰ τρία ἄρα ἡ τοῦ ἀρτίου ἰδέα οὐδέποτε ἥξει.                                            e

"그래서 3인 것들에는 짝수의 형상이 결코 가 닿지 않을 걸세."

 

Οὐ δῆτα. 

"분명 닿지 않을 것입니다."

 

Ἄμοιρα δὴ τοῦ ἀρτίου τὰ τρία. 

"그래서 3인 것들은 짝수의 몫을 가지지 않는 것이지."

 

Ἄμοιρα. 

"몫이 없는 것입니다."

 

Ἀνάρτιος ἄρα ἡ τριάς.                                                                                         5

"그럼 3은 짝수이지 않은 것이네."

 

Ναί. 

"네."

                                                                                                            //260715

Ὃ τοίνυν ἔλεγον ὁρίσασθαι, ποῖα οὐκ ἐναντία τινὶ ὄντα 

ὅμως οὐ δέχεται αὐτό, τὸ ἐναντίον―οἷον νῦν ἡ τριὰς τῷ 

ἀρτίῳ οὐκ οὖσα ἐναντία οὐδέν τι μᾶλλον αὐτὸ δέχεται, τὸ 

γὰρ ἐναντίον ἀεὶ αὐτῷ ἐπιφέρει, καὶ ἡ δυὰς τῷ περιττῷ                                    10

καὶ τὸ πῦρ τῷ ψυχρῷ καὶ ἄλλα πάμπολλα―ἀλλ᾿ ὅρα δὴ εἰ                       105a

οὕτως ὁρίζῃ, μὴ μόνον τὸ ἐναντίον τὸ ἐναντίον μὴ δέχε-

σθαι, ἀλλὰ καὶ ἐκεῖνο, ὃ ἂν ἐπιφέρῃ τι ἐναντίον ἐκείνῳ, ἐφ᾿ 

ὅτι ἂν αὐτὸ ἴῃ, αὐτὸ τὸ ἐπιφέρον τὴν τοῦ ἐπιφερομένου 

ἐναντιότητα μηδέποτε δέξασθαι.                                                                         5

그러니까 내가 규정한다 말하던 것, 어떠한 것들이 어떤 것과

반대되는 것들로 있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를 테면 지금 3은 짝수와 반대되는 것으로

있지 않으면서 그것을 전혀 조금이라도 더 받아들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짝수에 항상 반대되는 것을 가져오기 때문이고,

2는 홀에 그리고 불은 냉에 또한 여타의 온갖 다종다양한 것들도

그러하니까, 허나 그럼 자네가 그렇게 규정할지 보게나. 오직

반대되는 것만이 반대되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저런 것도, 어떤 반대되는 것을, 그것이 접근할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에 적용시킬, 그러한 적용하는 것 자체도 적용되는 것의

그 반대를 결코 수용하지 않으리라고 말이지.

                                                    πάλιν δὲ ἀναμιμνῄσκου·                                 5

οὐ γὰρ χεῖρον πολλάκις ἀκούειν. τὰ πέντε τὴν τοῦ ἀρτίου 

οὐ δέξεται, οὐδὲ τὰ δέκα τὴν τοῦ περιττοῦ, τὸ διπλάσιον. 

그런데 다시 상기해 보게. 자주 들어 나쁠 건 아니니. 5인 것들은 

짝수의 형상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고, 10인 것들도 홀수의

형상을 수용하지 않을 테지, 두 배인 것으로서.

τοῦτο μὲν οὖν καὶ αὐτὸ ἄλλῳ ἐναντίον, ὅμως δὲ τὴν τοῦ 

περιττοῦ οὐ δέξεται· οὐδὲ δὴ τὸ ἡμιόλιον οὐδὲ τἆλλα τὰ                                  b

τοιαῦτα, τὸ ἥμισυ, τὴν τοῦ ὅλου, καὶ τριτημόριον αὖ καὶ 

πάντα τὰ τοιαῦτα, εἴπερ ἕπῃ τε καὶ συνδοκεῖ σοι οὕτως. 

그리하여 이러한 것(두 배인 것)은 그 자체도 여타의 것과

반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수의 형상을 수용하지 않을

걸세. 그래서 1½도 이와 같은 여타의 것들도, 절반도, 전체의 

형상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⅓도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 역시 수용하지 않을 것이니, 만일 정말로 자네가 따라와 

그렇게 같이 여겨준다면 그럴 걸세.

>> τὴν τοῦ ὅλου. 관계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1½, ½, ⅓ 등은 

정수를 수용할 수는 있지만 '전체'를 수용할 수는 없다.

Πάνυ σφόδρα καὶ συνδοκεῖ, ἔφη, καὶ ἕπομαι. 

그가 말했소. "정말로 지극히 같이 여겨지고 또 따라가고

있습니다."

 

 -작성중-

Ἄκουε τοίνυν ὡς ἐροῦντος. ἐγὼ γάρ, ἔφη, ὦ Κέβης,                                          5

νέος ὢν θαυμαστῶς ὡς ἐπεθύμησα ταύτης τῆς σοφίας ἣν 

δὴ καλοῦσι περὶ φύσεως ἱστορίαν· ὑπερήφανος γάρ μοι 

ἐδόκει εἶναι, εἰδέναι τὰς αἰτίας ἑκάστου, διὰ τί γίγνεται 

ἕκαστον καὶ διὰ τί ἀπόλλυται καὶ διὰ τί ἔστι. 

"그러니 내가 어찌 말하는지 들어주게." 그 분께서 말씀하셨소. 

"나는, 케베스, 젊을 적에 사람들이 자연에 관한 연구라 부르는 

그 지혜에 마음을 쏟았다네. 내겐 자뭇 야심차다고 여겨졌으니, 

각각의 원인을 안다는 것이, 무엇으로 인해서 각각의 것이 생겨나고 

또 무엇으로 인해서 해체되며 무엇으로 인해 있는지 안다는 게 

말일세.

                                                                     καὶ πολλάκις 

ἐμαυτὸν ἄνω κάτω μετέβαλλον σκοπῶν πρῶτον τὰ τοιάδε·                             b

"Ἆρ᾿ ἐπειδὰν τὸ θερμὸν καὶ τὸ ψυχρὸν σηπεδόνα τινὰ 

λάβῃ, ὥς τινες ἔλεγον, τότε δὴ τὰ ζῷα συντρέφεται; καὶ 

πότερον τὸ αἶμά ἐστιν ᾧ φρονοῦμεν, ἢ ὁ ἀὴρ ἢ τὸ πῦρ; //260401

또 이런 것들을 처음 검토하며 내 자신이 여러 차례 거꾸로

뒤집혔지. "온과 냉이 모종의 부패를 취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어떤 이들이 말하던 대로, 그 때 생물들이 함께 생육되는가?

우리가 그로써 지혜를 발휘하는 것은 피인가, 아니면 공기인가
혹은 불인가?

                                                                                        ἢ 

τούτων μὲν οὐδέν, ὁ δ᾿ ἐγκέφαλός ἐστιν ὁ τὰς αἰσθήσεις                                   5

παρέχων τοῦ ἀκούειν καὶ ὁρᾶν καὶ ὀσφραίνεσθαι, ἐκ 

τούτων δὲ γίγνοιτο μνήμη καὶ δόξα, ἐκ δὲ μνήμης καὶ 

δόξης λαβούσης τὸ ἠρεμεῖν, κατὰ ταῦτα γίγνεσθαι 

ἐπιστήμην; 

혹은 이것들 중 아무것도 아니고, 머릿속을 채운 것이 듣고 보고

향을 맡는 일의 감각들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 감각들로부터

기억과 믿음이 생겨날 것인데, 기억과 믿음이 정지함을 취하면 

그로부터, 이것들을 따라 앎이 생성되는 것일까? 

                  καὶ αὖ τούτων τὰς φθορὰς σκοπῶν, καὶ τὰ περὶ 

τὸν οὐρανόν τε καὶ τὴν γῆν πάθη, τελευτῶν οὕτως ἐμαυτῷ                              c

ἔδοξα πρὸς ταύτην τὴν σκέψιν ἀφυὴς εἶναι ὡς οὐδὲν 

χρῆμα. 

또 이번엔 이것들의 소멸을 검토하면서, 또한 천상과 지상 주변의 

상태들을 검토하며, 결국 그렇게 내가 내 자신에게 바로 그 검토를 

위해 아무 쓸모가 없을 정도로 타고난 바가 없다고 여겨졌지. 

            τεκμήριον δέ σοι ἐρῶ ἱκανόν· ἐγὼ γὰρ ἃ καὶ 

πρότερον σαφῶς ἠπιστάμην, ὥς γε ἐμαυτῷ καὶ τοῖς ἄλλοις 

ἐδόκουν, τότε ὑπὸ ταύτης τῆς σκέψεως οὕτω σφόδρα                                       5

ἐτυφλώθην, ὥστε ἀπέμαθον καὶ ταῦτα ἃ πρὸ τοῦ ᾤμην 

εἰδέναι, περὶ ἄλλων τε πολλῶν καὶ διὰ τί ἄνρθωπος 

αὐξάνεται. 

그 증거는 내 자네에게 충분히 이야기해주겠네. 그야 나는 그 

전부터도 확실히 알고 있던 것들, 적어도 내 자신과 여타의 

사람들에게 그리 여겨졌던 것들을 두고, 그 때 바로 그 검토에

의해 그렇게 지독하게 눈이 멀어 버려서, 그 이전에 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고, 여타의 많은 

것들에 관련하여서도 그렇지만 무엇으로 인해 인간이

성장하는지조차 잊어버렸다네.

                  τοῦτο γὰρ ᾤμην πρὸ τοῦ παντὶ δῆλον εἶναι, ὅτι 

διὰ τὸ ἐσθίειν καὶ πίνειν· ἐπειδὰν γὰρ ἐκ τῶν σιτίων ταῖς 

μὲν σαρξὶ σάρκες προσγένωνται, τοῖς δὲ ὀστοῖς ὀστᾶ, καὶ                               d

οὕτω κατὰ τὸν αὐτὸν λόγον καὶ τοῖς ἄλλοις τὰ αὐτῶν 

οἰκεῖα ἑκάστοις προσγένηται, τότε δὴ τὸν ὀλίγον ὄγκον 

ὄντα ὕστερον πολὺν γεγονέναι, καὶ οὕτω γίγνεσθαι τὸν 

σμικρὸν ἄνθρωπον μέγαν. οὕτως τότε ᾤμην· οὐ δοκῶ σοι                                5

μετρίως; 

전에는 이것이 모두에게 분명하다 생각했으니까, 먹고 마시는 

일로 인해서라는 점이 말이지. 음식을 통해 살에 살이 더해지고, 

뼈에 뼈가, 그렇게 같은 논리에 따라 여타의 것들 각각에게도 

그것들의 친족적인 것들이 추가되는 경우라면 언제든, 그 때 

적은 덩어리로 있는 것이 이후에 많게 되고, 그렇게 작은 인간이 

크게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때는 그리 생각했었네. 자네에겐 

내가 적절하게 생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가?"

 

Ἔμοιγε, ἔφη ὁ Κέβης. 

케베스는 말했소. "제겐 그리 여겨집니다."

 

Σκέψαι δὴ καὶ τάδε ἔτι. ᾤμην γὰρ ἱκανῶς μοι δοκεῖν, 

ὁπότε τις φαίνοιτο ἄνθρωπος παραστὰς μέγας σμικρῷ 

μείζων εἶναι αὐτῇ τῇ κεφαλῇ, καὶ ἵππος ἵππου· καὶ ἔτι γε                                  e

τούτων ἐναργέστερα, τὰ δέκα μοι ἐδόκει τῶν ὀκτὼ πλέονα 

εἶναι διὰ τὸ δύο αὐτοῖς προσεῖναι, καὶ τὸ δίπηχυ τοῦ 

πηχυαίου μεῖζον εἶναι διὰ τὸ ἡμίσει αὐτοῦ ὑπερέχειν. 

"그럼 이런 것도 더 검토해 주게. 왜냐하면 나는 내게 충분하다 

여겨진다고 생각했으니, 어떤 큰 사람이 작은 사람 곁에 서서

바로 그 머리 만큼 더 큰 사람처럼 보일 때, 또 말이 다른 말보다 

그리 보일 때 말일세. 또한 이것들보다 한참이나 더 명백하게, 

10이 8보다 더 많은데 10에는 2가 추가되어 있음으로 인해서 

그렇다는 것, 또 한 척보다 두 척이 그 두 척의 절반 만큼 

초과한다는 점으로 인해 더 큰 것이라고 여겨졌지."

 

Νῦν δὲ δή, ἔφη ὁ Κέβης, τί σοι δοκεῖ περὶ αὐτῶν;                                               5

케베스가 말했소. "헌데 그래서 지금은, 그것들에 관련하여 

당신께 무엇이라 여겨지시나요?"

 

Πόρρω που, ἔφη, νὴ Δία ἐμὲ εἶναι τοῦ οἴεσθαι περὶ 

τούτων του τὴν αἰτίαν εἰδέναι, ὅς γε οὐκ ἀποδέχομαι 

ἐμαυτοῦ οὐδὲ ὡς ἐπειδὰν ἑνί τις προσθῇ ἕν, ἢ τὸ ἓν ᾧ 

προσετέθη δύο γέγονεν, <ἢ τὸ προστεθέν>, ἢ τὸ προστεθὲν 

καὶ ᾧ προσετέθη διὰ τὴν πρόσθεσιν τοῦ ἑτέρου τῷ ἑτέρῳ                           97a

δύο ἐγένετο· 

그 분께서는 말씀하셨소. "분명, 제우스께 맹세컨데 나는 

그것들에 관련하여 어떤 것의 원인을 안다고 생각하던 것에서 

내가 멀리 있다고 여기고 있네. 적어도, 누군가가 하나에 하나를 

더한 경우라면 언제든, 추가를 받은 하나가 둘이 되었거나, 

<아니면 추가로 주어진 하나가 둘이 되었거나>, 아니면 추가로

주어진 하나와 추가를 받아들인 하나가 한쪽의 다른 쪽에 대한 

그 추가로 인해 둘이 되었다고 스스로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으로서는 말일세.

                     θαυμάζω γὰρ εἰ ὅτε μὲν ἑκάτερον αὐτῶν 

χωρὶς ἀλλήλων ἦν, ἓν ἄρα ἑκάτερον ἦν καὶ οὐκ ἤστην τότε 

δύο, ἐπεὶ δ᾿ ἐπλησίασαν ἀλλήλοις, αὕτη ἄρα αἰτία αὐτοῖς 

ἐγένετο τοῦ δύο γενέσθαι, ἡ σύνοδος τοῦ πλησίον ἀλλήλων                              5

τεθῆναι. 

왜냐하면 나는 만일 그것들의 양편 각각이 서로로부터 따로 

있었을 때, 그래서 양편 각각의 하나가 있었고 그 때 그 둘이

둘로 있지 않았다면, 그런데 서로에게 근접하여, 그래서 이것이

그것들에게 둘이 됨의 바로 그 원인이 되었다면, 서로 근접하여 

정립된다는 그 동행이 그리 되었다면 놀랄 테니까.

              οὐδέ γε ὡς ἐάν τις ἓν διασχίσῃ, δύναμαι ἔτι πεί-

θεσθαι ὡς αὕτη αὖ αἰτία γέγονεν, ἡ σχίσις, τοῦ δύο 

γεγονέναι· ἐναντία γὰρ γίγνεται ἢ τότε αἰτία τοῦ δύο 

γίγνεσθαι. τότε μὲν γὰρ ὅτι συνήγετο πλησίον ἀλλήλων                                   b

καὶ προσετίθετο ἕτερον ἑτέρῳ, νῦν δ᾿ ὅτι ἀπάγεται καὶ 

χωρίζεται ἕτερον ἀφ᾿ ἑτέρου. 

적어도 누군가가 하나를 갈라 잘랐다면, 이번엔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즉 그 절단이, 둘로 됨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여전히

납득할 수는 없다네. 왜냐하면 저 때 둘로 됨의 원인과는 반대로 

되기 때문이지. 그 때는 서로 가까이 모이고 한 쪽이 다른 쪽에 

추가되었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한쪽으로부터 다른 한쪽이

떨어지고 분리되기 때문에 둘이 되는 것이니까.

                                               οὐδέ γε δι᾿ ὅτι ἓν γίγνεται ὡς 

ἐπίσταμαι, ἔτι πείθω ἐμαυτόν, οὐδ᾿ ἄλλο οὐδὲν ἑνὶ λόγῳ δι᾿ 

ὅτι γίγνεται ἢ ἀπόλλυται ἢ ἔστι, κατὰ τοῦτον τὸν τρόπον                                     5

τῆς μεθόδου, ἀλλά τιν᾿ ἄλλον τρόπον αὐτὸς εἰκῇ φύρω, 

τοῦτον δὲ οὐδαμῇ προσίεμαι. 

무엇으로 인해서 하나가 되는지 내가 안다고도, 여전히 자신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고, 여타의 아무것도 무엇으로 인해서

생성되거나 해체되거나 있거나 하는지 역시 하나의 설명으로, 

이러한 탐구의 방식에 따라서는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며, 

오히려 여타의 어떤 방식을 스스로 임의로 뒤섞고 있고, 

그런데 이 방식을 어느 모로 보나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네.

 

Ἀλλ᾿ ἀκούσας μέν ποτε ἐκ βιβλίου τινός, ὡς ἔφη, Ἀναξ-

αγόρου ἀναγιγνώσκοντος, καὶ λέγοντος ὡς ἄρα νοῦς                                      c

ἐστιν ὁ διακοσμῶν τε καὶ πάντων αἴτιος, ταύτῃ δὴ τῇ αἰτίᾳ 

ἥσθην τε καὶ ἔδοξέ μοι τρόπον τινὰ εὖ ἔχειν τὸ τὸν νοῦν 

εἶναι πάντων αἴτιον, καὶ ἡγησάμην, εἰ τοῦθ᾿ οὕτως ἔχει, 

τόν γε νοῦν κοσμοῦντα πάντα κοσμεῖν καὶ ἕκαστον τιθέναι                                 5

ταύτῃ ὅπῃ ἂν βέλτιστα ἔχῃ· 

허나 언젠가 누군가가, 그 사람 말로는, 아낙사고라스의 책을 

읽어주는 것을 듣고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자 모든 것의 

원인이기도 한 것은 지성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서, 이 원인에 

기뻐했고 내겐 지성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것이 아주 잘 된

어떤 방식이라고 여겨졌으며, 또한,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적어도 지성은 질서잡아주면서 모든 것을 질서잡고 각각의 것

역시 그것이 최선의 상태가 될 그 방식으로 정립시킨다고 

생각하였지.

                                            εἰ οὖν τις βούλοιτο τὴν αἰτίαν 

εὑρεῖν περὶ ἑκάστου ὅπῃ γίγνεται ἢ ἀπόλλυται ἢ ἔστι, 

τοῦτο δεῖν περὶ αὐτοῦ εὑρεῖν, ὅπῃ βέλτιστον αὐτῷ ἐστιν ἢ 

εἶναι ἢ ἄλλο ὁτιοῦν πάσχειν ἢ ποιεῖν· ἐκ δὲ δὴ τοῦ λόγου                                 d

τούτου οὐδὲν ἄλλο σκοπεῖν προσήκειν ἀνθρώπῳ καὶ περὶ 

αὐτοῦ ἐκείνου καὶ περὶ τῶν ἄλλων ἀλλ᾿ ἢ τὸ ἄριστον καὶ τὸ 

βέλτιστον. 

그리하여 누군가가 각각의 것에 관련하여 어떤 식으로 생기거나 

해체되거나 혹은 있는지 그 원인을 발견하길 바란다면, 그 각각에 

관련하여 이런 것을 찾아야 한다고, 어떤 식으로 그것이 있거나

혹은 다른 무엇이든 겪거나 행함이 최선인지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바로 이 논리를 통해 인간이 검토하기에

적절한 것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 그 자신에 관련하여서든 여타의

것들에 관련하여서든 다름 아닌 최고의 것 그리고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지. 

                  ἀναγκαῖον δὲ εἶναι τὸν αὐτὸν τοῦτον καὶ τὸ 

χεῖρον εἰδέναι· τὴν αὐτὴν γὰρ εἶναι ἐπιστήμην περὶ αὐτῶν.                                5

ταῦτα δὴ λογιζόμενος ἅσμενος ηὑρηκέναι ᾤμην διδά-

σκαλον τῆς αἰτίας περὶ τῶν ὄντων κατὰ νοῦν ἐμαυτῷ, τὸν 

Ἀναξαγόραν, καί μοι φράσειν πρῶτον μὲν πότερον ἡ γῆ 

πλατεῖά ἐστιν ἢ στρογγύλη, ἐπειδὴ δὲ φράσειεν, ἐπεκδιη-                               e

γήσεσθαι τὴν αἰτίαν καὶ τὴν ἀνάγκην, λέγοντα τὸ ἄμεινον 

καὶ ὅτι αὐτὴν ἄμεινον ἦν τοιαύτην εἶναι· 

헌데 바로 그 사람이 열등한 것 역시 아는 일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였네. 왜냐하면 그것들에 관련하여 앎이 같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헤아리며 지성에 

따른 있는 것들의 원인에 대한 나 자신을 위한 스승으로서, 

아낙사고라스를 발견했다 생각하며 기뻐하였다네. 처음으로 

내게 대지가 편평한지 아니면 구형인지 알려줄 거라고, 그런데 

그걸 알려줄 때, 그 원인과 필연을 훌륭하게 상술해주리라고, 

더 나은 것을 말해주고 대지가 그러한 것으로 있음이 더 나은 

것이었다는 점을 말해주며 그리 하리라 생각하여 기뻐했지. 

                                                               καὶ εἰ ἐν μέσῳ 

φαίη εἶναι αὐτήν, ἐπεκδιηγήσεσθαι ὡς ἄμεινον ἦν αὐτὴν ἐν 

μέσῳ εἶναι· καὶ εἴ μοι ταῦτα ἀποφαίνοι, παρεσκευάσμην                              98a

ὡς οὐκέτι ποθεσόμενος αἰτίας ἄλλο εἶδος. 

또 그가 만일 대지가 중간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중간에

있는 편이 더 나았다는 것을 상술해주리라고도 생각하였네.

또 만일 내게 이러한 것들을 드러내 보여준다면, 나는 더 이상

원인의 여타 형상을 갈망하지 않을 준비를 마쳤지.

                                                                    καὶ δὴ καὶ περὶ 

ἡλίου οὕτω παρεσκευάσμην ὡσαύτως πευσόμενος, καὶ 

σελήνης καὶ τῶν ἄλλων ἄστρων, τάχους τε πέρι πρὸς 

ἄλληλα καὶ τροπῶν καὶ τῶν ἄλλων παθημάτων, πῇ ποτε                                   5

ταῦτ᾿ ἄμεινόν ἐστιν ἕκαστον καὶ ποιεῖν καὶ πάσχειν ἃ 

πάσχει. 

더 나아가 태양에 관하여서도 그렇게 같은 정도로 배울 준비를 

마쳤고, 달과 여타의 별들에 관하여서도, 서로에 대한 속도와

교차점 그리고 여타의 상태들에 관련하여서도, 각각의 것이

겪는 일들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더 낫게 행하고 또 겪는지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네. //260408

             οὐ γὰρ ἄν ποτε αὐτὸν ᾤμην, φάσκοντά γε ὑπὸ νοῦ 

αὐτὰ κεκοσμῆσθαι, ἄλλην τινὰ αὐτοῖς αἰτίαν ἐπενεγκεῖν ἢ 

ὅτι βέλτιστον αὐτὰ οὕτως ἔχειν ἐστὶν ὥσπερ ἔχει· 

왜냐하면 결코 그가, 지성에 의해 그것들이 질서잡혔다고 단언한

한, 그것들이 그런 상태에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원인을 그것들에 적용시킨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ἑκάστῳ 

οὖν αὐτῶν ἀποδιδόντα τὴν αἰτίαν καὶ κοινῇ πᾶσι τὸ                                         b

ἑκάστῳ βέλτιστον ᾤμην καὶ τὸ κοινὸν πᾶσιν ἐπεκδιηγή-

σεσθαι ἀγαθόν· 

그리하여 그가 그것들 각각에게 그리고 공통되게 모두에게도

그 원인을 부여하면서 각각에게 최선인 것과 모두에게 공통된 

좋은 것을 상술해 주리라 생각했다네.

                          καὶ οὐκ ἂν ἀπεδόμην πολλοῦ τὰς ἐλπίδας, 

ἀλλὰ πάνυ σπουδῇ λαβὼν τὰς βίβλους ὡς τάχιστα οἷός τ᾿ ἦ 

ἀνεγίγνωσκον, ἵν᾿ ὡς τάχιστα εἰδείην τὸ βέλτιστον καὶ τὸ                                   5

χεῖρον. 

많은 값에도 그 희망을 내놓지도 않을 것이었고, 오히려 최대한

빨리 최선의 것과 열등한 것을 알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그의 책을 찾아 읽는 데에 무척이나 열중하였다네.

 

Ἀπὸ δὴ θαυμαστῆς ἐλπίδος, ὦ ἑταῖρε, ᾠχόμην φερό-

μενος, ἐπειδὴ προϊὼν καὶ ἀναγιγνώσκων ὁρῶ ἄνδρα τῷ 

μὲν νῷ οὐδὲν χρώμενον οὐδέ τινας αἰτίας ἐπαιτιώμενον εἰς 

τὸ διακοσμεῖν τὰ πράγματα, ἀέρας δὲ καὶ αἰθέρας καὶ                                      c

ὕδατα αἰτιώμενον καὶ ἄλλα πολλὰ καὶ ἄτοπα. 

그래서 놀라운 희망으로부터, 동지, 나는 씻겨나와 버렸네. 

나아가 읽으면서 그 사람이 지성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특정 

원인을 사태들을 질서잡는 일에 대해 탓하지도 않는 것을, 

공기와 에테르 그리고 물이라 다른 많은 이상한 것들을 

탓하는 것을 보았기에 말일세.

                                                                        καί μοι 

ἔδοξεν ὁμοιότατον πεπονθέναι ὥσπερ ἂν εἴ τις λέγων ὅτι 

Σωκράτης πάντα ὅσα πράττει νῷ πράττει, κἄπειτα ἐπι-

χειρήσας λέγειν τὰς αἰτίας ἑκάστων ὧν πράττω, λέγοι                                        5

πρῶτον μὲν ὅτι διὰ ταῦτα νῦν ἐνθάδε κάθημαι, ὅτι σύγκει-

ταί μου τὸ σῶμα ἐξ ὀστῶν καὶ νεύρων, καὶ τὰ μὲν ὀστᾶ 

ἐστιν στερεὰ καὶ διαφυὰς ἔχει χωρὶς ἀπ᾿ ἀλλήλων, τὰ δὲ 

νεῦρα οἷα ἐπιτείνεσθαι καὶ ἀνίεσθαι, περιαμπέχοντα τὰ                                   d

ὀστᾶ μετὰ τῶν σαρκῶν καὶ δέρματος ὃ συνέχει αὐτά· 

또한 내게는 만일 누군가가 소크라테스는 그가 수행하는 모든

일을 지성으로써 수행한다고 말하면서, 또 이어서 그가 행하는 

일들 각각의 원인을 말하려 시도하고서, 처음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인하여 지금 여기 내가 앉아 있다고, 나의 신체가 뼈와 

힘줄로부터 조합되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뼈들은 단단하고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마디를 가지고, 힘줄들은 긴장하거나 

이완하거나 할 수 있는 것들인데, 뼈를 연결시키는 살과 피부를 

동반하여 그 뼈들을 감싸면서 그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와 가장 유사한 일을 겪은 것으로 여겨졌네. 

αἰωρουμένων οὖν τῶν ὀστῶν ἐν ταῖς αὑτῶν συμβολαῖς 

χαλῶντα καὶ συντείνοντα τὰ νεῦρα κάμπτεσθαί που ποιεῖ 

οἷόν τ᾿ εἶναι ἐμὲ νῦν τὰ μέλη, καὶ διὰ ταύτην τὴν αἰτίαν                                       5

συγκαμφθεὶς ἐνθάδε κάθημαι· 

그리하여 그것들의 결합 속에서 뼈들이 들어올려져 있을 때 

힘줄이 이완되고 긴장되며 어느 정도 내가 지금 나의 사지를 

굽힐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이 원인으로 인하여 굽혀서 여기 

앉아있다는 것이지.

                                                 καὶ αὖ περὶ τοῦ διαλέγε-

σθαι ὑμῖν ἑτέρας τοιαύτας αἰτίας λέγοι, φωνάς τε καὶ 

ἀέρας καὶ ἀκοὰς καὶ ἄλλα μυρία τοιαῦτα αἰτιώμενος, 

ἀμελήσας τὰς ὡς ἀληθῶς αἰτίας λέγειν, ὅτι, ἐπειδὴ                                          e

Ἀθηναίοις ἔδοξε βέλτιον εἶναι ἐμοῦ καταψηφίσασθαι, διὰ 

ταῦτα δὴ καὶ ἐμοὶ βέλτιον αὖ δέδοκται ἐνθάδε καθῆσθαι, 

καὶ δικαιότερον παραμένοντα ὑπέχειν τὴν δίκην ἣν ἂν 

κελεύσωσιν·                                                                                                        5

그리고 또 이번엔 자네들과의 대화에 관련하여서도 이와 같은 

또 다른 원인을 말할 경우에도 말이지. 소리나 공기 또 청취나 

여타 무수한 이와 같은 것들을 원인으로 두면서, 참된 방식으로 

원인인 것들을 논하는 데에는 무관심한 채, 즉, 아테네인들에게 

나에 대해 유죄표를 던지는 편이 더 나은 일이라 여겨졌기에,

이런 일들로 인하여 더욱이 내게도 또한 여기 앉아있는 편이

더 나은 것이라 여겨졌고, 머물러 아테네인들이 명할 처벌을 받는

편이 더욱 정의롭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란 것을 논하는 일은

도외시한 채 말이야.

                     ἐπεὶ νὴ τὸν κύνα, ὡς ἐγὦμαι, πάλαι ἂν ταῦτα                                5

τὰ νεῦρα καὶ τὰ ὀστᾶ ἢ περὶ Μέγαρα ἢ Βοιωτοὺς ἦν, ὑπὸ                            99a

δόξης φερόμενα τοῦ βελτίστου, εἰ μὴ δικαιότερον ᾤμην 

καὶ κάλλιον εἶναι πρὸ τοῦ φεύγειν τε καὶ ἀποδιδράσκειν 

ὑπέχειν τῇ πόλει δίκην ἥντιν᾿ ἂν τάττῃ. 

그 개에 맹세컨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러한 힘줄과 뼈가 

진작에 메가라나 보이오티아 지역에 있었을 테니, 최선의 것에 

대한 믿음에 의해 그리 옮겨져서 그랬을 걸세, 만일 폴리스가

명한 그 무슨 죗값이 되었든 그것을 폴리스에 갚는 일을

회피하거나 도망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의롭고 더 훌륭한

일이라 내가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말일세.

                                                              ἀλλ᾿ αἴτια μὲν τὰ 

τοιαῦτα καλεῖν λίαν ἄτοπον· εἰ δέ τις λέγοι ὅτι ἄνευ τοῦ τὰ 

τοιαῦτα ἔχειν καὶ ὀστᾶ καὶ νεῦρα καὶ ὅσα ἄλλα ἔχω οὐκ ἂν                                 5

οἷός τ᾿ ἦ ποιεῖν τὰ δόξαντά μοι, ἀληθῆ ἂν λέγοι· ὡς μέντοι 

διὰ ταῦτα ποιῶ ἃ ποιῶ, καὶ ταῦτα νῷ πράττων, ἀλλ᾿ οὐ τῇ 

τοῦ βελτίστου αἱρέσει, πολλὴ ἂν καὶ μακρὰ ῥᾳθυμία εἴη                                   b

τοῦ λόγου. 

오히려 그런 것들을 원인이라 부르는 건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지. 

반면에 만일 누군가가 이와 같은 뼈니 힘줄이니 여타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을 가지는 일 없이 내게 그리 해야 하겠다 여겨진 것들을

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참된 말을 하는 것일 테지.

그렇지만 내가 행하는 일들을 이런 것들로 인해서 행한다고, 또

이런 일들을 지성으로써 수행하면서, 그러나 최선의 것에 대한

선택으로써 수행하지는 않는다고 한다면, 그 논변에는 무척이나

심각한 나태가 속해 있을 걸세.

                  τὸ γὰρ μὴ διελέσθαι οἷόν τ᾿ εἶναι ὅτι ἄλλο μέν τί 

ἐστι τὸ αἴτιον τῷ ὄντι, ἄλλο δὲ ἐκεῖνο ἄνευ οὗ τὸ αἴτιον οὐκ 

ἄν ποτ᾿ εἴη αἴτιον· ὃ δή μοι φαίνονται ψηλαφῶντες οἱ 

πολλοὶ ὥσπερ ἐν σκότει, ἀλλοτρίῳ ὀνόματι προσχρώ-                                      5

μενοι, ὡς αἴτιον αὐτὸ προσαγορεύειν. 

왜냐하면 있는 것에게 원인인 바로 그것을 따로, 다른 한편

그것 없이는 원인이 도무지 원인으로 있지 못할 저것을 또 따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 점에서 내게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어둠 속에서와 같이 더듬거리며 이질적인 이름을

가져다 써 가며 그것을 원인이라 부르는 것처럼 보인다네.

                                                             διὸ δὴ καὶ ὁ μέν τις 

δίνην περιτιθεὶς τῇ γῇ ὑπὸ τοῦ οὐρανοῦ μένειν δὴ ποιεῖ τὴν 

γῆν, ὁ δὲ ὥσπερ καρδόπῳ πλατείᾳ βάθρον τὸν ἀέρα 

ὑπερείδει·                                                                                                          c

그래서 이런 연유로 한편으로 누군가는 소용돌이를 대지 주위로

둘러 세우면서 하늘 아래 대지를 머물러 있도록 만들고, 또 다른

이는 마치 넓은 나무통에 받침대를 두듯이 공기를 대지에

받쳐두었네.

                 τὴν δὲ τοῦ ὡς οἷόν τε βέλτιστα αὐτὰ τεθῆναι                                    c

δύναμιν οὕτω νῦν κεῖσθαι, ταύτην οὔτε ζητοῦσιν οὔτε τινὰ 

οἴονται δαιμονίαν ἰσχὺν ἔχειν, ἀλλὰ ἡγοῦνται τούτου 

Ἄτλαντα ἄν ποτε ἰσχυρότερον καὶ ἀθανατώτερον καὶ 

μᾶλλον ἅπαντα συνέχοντα ἐξευρεῖν, καὶ ὡς ἀληθῶς τὸ                                      5

ἀγαθὸν καὶ δέον συνδεῖν καὶ συνέχειν οὐδὲν οἴονται. 

그런데 그것들이 가능한 한 최선의 상태로 정립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지금 배열되어 있도록 해주는 능력, 그 능력을 그들은 

탐구하지도 않고 어떤 신성한 힘을 그 능력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것보다 더 강력하고 더욱 

불사이며 그 모든 것을 훨씬 더 많이 모으는 아틀라스를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진정으로 좋은 것이자 묶어주는

것이 그것들을 한 데 묶고 모아둔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

                                                                                    ἐγὼ 

μὲν οὖν τῆς τοιαύτης αἰτίας ὅπῃ ποτὲ ἔχει μαθητὴς ὁτουοῦν 

ἥδιστ᾿ ἂν γενοίμην· ἐπειδὴ δὲ ταύτης ἐστερήθην καὶ οὔτ᾿ 

αὐτὸς εὑρεῖν οὔτε παρ᾿ ἄλλου μαθεῖν οἷός τε ἐγενόμην, τὸν 

δεύτερον πλοῦν ἐπὶ τὴν τῆς αἰτίας ζήτησιν ᾗ πεπραγμάτευ-                            d

μαι βούλει σοι, ἔφη, ἐπίδειξιν ποιήσωμαι, ὦ Κέβης;

그리하여 나는 이와 같은 원인에 대체 도대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 누구의 제자라도 기쁘게 될 작정이었다네. 그러나 이 원인을 

상실하였고 스스로 찾는 일도 다른 이에게서 배우는 일도 할 수 

있게 되진 못하였기에, 원인에 대한 탐구를 향한 두 번째 항해를

내가 어떤 식으로 고민하여왔는지, 내가 보여주길 바라는가, 

케베스?" 

 

Ὑπερφυῶς μὲν οὖν, ἔφη, ὡς βούλομαι. 

그는 말했소. "그야 저로서는 지나치다 할 만큼 바랍니다." //260422

 

Ἔδοξε τοίνυν μοι, ἦ δ᾿ ὅς, μετὰ ταῦτα, ἐπειδὴ ἀπειρήκη 

τὰ ὄντα σκοπῶν, δεῖν εὐλαβηθῆναι μὴ πάθοιμι ὅπερ οἱ τὸν                               5

ἥλιον ἐκλείποντα θεωροῦντες καὶ σκοπούμενοι πάσχουσιν· 

διαφθείρονται γάρ που ἔνιοι τὰ ὄμματα, ἐὰν μὴ ἐν ὕδατι ἤ 

τινι τοιούτῳ σκοπῶνται τὴν εἰκόνα αὐτοῦ.                                                        e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러니까 내게는, 그 다음으로, 있는 

것들을 검토하기에 지쳤기에, 태양의 일식을 관찰하고 고찰하는

자들이 겪는 바로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여겨졌다네. 왜냐하면 분명 어떤 이들은 눈이 망가져 버리니까,

물 또는 그런 어떤 것 안에서 태양의 모상을 검토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τοιοῦτόν τι καὶ                                 e

ἐγὼ διενοήθην, καὶ ἔδεισα μὴ παντάπασι τὴν ψυχὴν 

τυφλωθείην βλέπων πρὸς τὰ πράγματα τοῖς ὄμμασι καὶ 

ἑκάστῃ τῶν αἰσθήσεων ἐπιχειρῶν ἅπτεσθαι αὐτῶν. 

이러한 어떤 일을 나 또한 생각하였고, 내가 사태들을

두 눈으로 주시하고 또 각각의 감각으로 그것들에 접하기를 

시도하며 영혼이 완전히 눈이 멀어 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웠다네.

                                                                                   ἔδοξε 

δή μοι χρῆναι εἰς τοὺς λόγους καταφυγόντα ἐν ἐκείνοις                                      5

σκοπεῖν τῶν ὄντων τὴν ἀλήθειαν. ἴσως μὲν οὖν ᾧ εἰκάζω 

τρόπον τινὰ οὐκ ἔοικεν· οὐ γὰρ πάνυ συγχωρῶ τὸν ἐν                              100a

λόγοις σκοπούμενον τὰ ὄντα ἐν εἰκόσι μᾶλλον σκοπεῖν ἢ 

τὸν ἐν ἔργοις. 

그래서 나로서는 논변들로 도망쳐서 그 안에서 있는 것들의 

진리를 검토해야만 한다고 여겨졌지. 그리하여 아마 내가 

비유하고 있는 것은 어떤 식으로는 그럴 듯하지 않을 것 같네.

논변 속에서 있는 것들을 검토하는 자는 현실에서 그리 하는 

자보다 훨씬 더 모상들 속에서 검토하는 것이라는 데에 나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으니까.

                       ἀλλ᾿ οὖν δὴ ταύτῃ γε ὥρμησα, καὶ ὑποθέ-

μενος ἑκάστοτε λόγον ὃν ἂν κρίνω ἐρρωμενέστατον εἶναι, 

ἃ μὲν ἄν μοι δοκῇ τούτῳ συμφωνεῖν τίθημι ὡς ἀληθῆ ὄντα,                               5

καὶ περὶ αἰτίας καὶ περὶ τῶν ἄλλων ἁπάντων, ἃ δ᾿ ἂν μή, 

ὡς οὐκ ἀληθῆ. 

그럼 이런 식으로 시작하지. 때마다 내가 가장 건전하다 판단할 

논변을 가정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게 그것과 한 목소리를 낸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참으로 있는 것들로 세우고, 원인에 관련해서든 

여타 통틀어 모든 것들에 관련하여서든 그리하고, 다른 한편 

그렇지 않은 것들은, 참이 아닌 것들로 세운다네.

                        βούλομαι δέ σοι σαφέστερον εἰπεῖν ἃ λέγω· 

οἶμαι γάρ σε νῦν οὐ μανθάνειν. 

그런데 내 말을 자네에게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해주고 싶군. 자네가 

지금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되니 말이야."

 

Οὐ μὰ τὸν Δία, ἔφη ὁ Κέβης, οὐ σφόδρα. 

케베스는 말했소. "제우스께 맹세코, 아주 잘 알지는 못합니다."

 

-작성중-

Τί δέ, ἦ δ᾿ ὅς, ὦ Σιμμία, τῇδε; δοκεῖ σοι ἁρμονίᾳ ἢ ἄλλῃ                              92e5

τινὶ συνθέσει προσήκειν ἄλλως πως ἔχειν ἢ ὡς ἂν ἐκεῖνα                           93a

ἔχῃ ἐξ ὧν ἂν συγκέηται;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어떤가, 심미아스?

자네에게 조화든 다른 어떤 구성이든 그것이 그로부터 구성되어

나오는 저 요소들의 상태 외에 다른 어떤 상태에 있음이 적절하다

여겨지는가?"

 

Οὐδμαῶς. 

"결코 아닙니다."

 

Οὐδὲ μὴ ποιεῖν τι, ὡς ἐγᾦμαι, οὐδέ τι πάσχειν ἄλλο 

παρ᾿ ἃ ἂν ἐκεῖνα ἢ ποιῇ ἢ πάσχῃ; Συνέφη.                                                        5

"내 생각에, 저 요소들이 행하거나 겪을 것들 외에 달리

무언가를 행하는 것도 겪는 것도 적절하지 않지?" 그가

동의하였소.

 

Οὐκ ἄρα ἡγεῖσθαί γε προσήκει ἁρμονίαν τούτων ἐξ ὧν 

ἂν συντεθῇ, ἀλλ᾿ ἕπεσθαι. Συνεδόκει. 

"그래서 조화는 그것이 그로부터 구성되어 나오는 요소들을 

선도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따른다고 생각하는 편이 적절하지." 

그도 그렇다고 여겼소.

 

Πολλοῦ ἄρα δεῖ ἐναντία γε ἁρμονία κινηθῆναι ἢ 

φθέγξασθαι ἤ τι ἄλλο ἐναντιωθῆναι τοῖς αὑτῆς μέρεσιν. 

"그래서 조화가 자신의 부분들과 반대로 운동하거나 반대로 

불리거나 여타 어떤 점에서 반대된다는 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지."

 

Πολλοῦ μέντοι, ἔφη.                                                                                           10

그는 말했소. "많이도 먼 얘기지요." 

 

Τί δέ; οὐχ οὕτως ἁρμονία πέφυκεν εἶναι ἑκάστη 

ἁρμονία ὡς ἂν ἁρμοσθῇ; 

"그런데 어떤가? 조화란 각각이 조화로워진 그런 식으로 

조화로서 있게 마련이지 않나?"

 

Οὐ μανθάνω, ἔφη. 

그는 말했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Ἤ οὐχί, ἦ δ᾿ ὅς, ἂν μὲν μᾶλλον ἁρμοσθῇ καὶ ἐπὶ πλέον, 

εἴπερ ἐνδέχεται τοῦτο γίγνεσθαι, μᾶλλόν τε ἂν ἁρμονία εἴη                             b

καὶ πλείων, εἰ δ᾿ ἧττόν τε καὶ ἐπ᾿ ἔλαττον, ἥττων τε καὶ 

ἐλάττων;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더 많이 심지어 초과하는 방향으로까지

조화로워진다면,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 허용된다면, 또한

더 많은 그리고 초과하는 조화로서 있게 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덜 그리고 미달하는 쪽으로 조화로워진다면, 부족하고 모자라게

그리 될 것이지 않나?"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Ἦ οὖν ἔστι τοῦτο περὶ ψυχήν, ὥστε καὶ κατὰ τὸ σμικρό-                                   5

τατον μᾶλλον ἑτέραν ἑτέρας ψυχῆς ἐπὶ πλέον καὶ μᾶλλον ἢ 

ἐπ᾿ ἔλαττον καὶ ἧττον αὐτὸ τοῦτο εἶναι, ψυχήν;

"그러면 영혼에 관련하여 이런 일이 있어서, 아주 미미하게나마 

한 영혼이 다른 영혼보다 초과하는 쪽으로 더 많이 혹은 부족한 

쪽으로 모자라게 그것 자체로, 즉 영혼으로 있게 되는가?"

 

Οὐδ᾿ ὁπωστιοῦν, ἔφη. 

그는 말했소. "그 어떤 식으로든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Φέρε δή, ἔφη, πρὸς Διός· λέγεται ἡ μὲν νοῦν τε 

ἔχειν καὶ ἀρετὴν καὶ εἶναι ἀγαθή, ἡ δὲ ἄνοιάν τε καὶ                                           10

μοχθηρίαν καὶ εἶναι κακή; καὶ ταῦτα ἀληθῶς λέγεται;                                       c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자, 그럼, 제우스께 대고 살펴 보세. 

어떤 영혼은 지성과 덕을 갖추고 훌륭한 것이라고 말해지는가 

하면, 또 어떤 영혼은 무지성과 무능을 지니고 악한 것이라 

말해지는가? 또 이러한 것들은 참되게 말해지는 것이고?"

 

Ἀληθῶς μέντοι. 

"참되게 말해지는 것이죠."

 

Τῶν οὖν θεμένων ψυχὴν ἁρμονίαν εἶναι τί τις φήσει 

ταῦτα ὄντα εἶναι ἐν ταῖς ψυχαῖς, τήν τε ἀρετὴν καὶ τὴν 

κακίαν; πότερον ἁρμονίαν αὖ τινα ἄλλην καὶ ἀναρμοστίαν;                               5

καὶ τὴν μὲν ἡρμόσθαι, τὴν ἀγαθήν, καὶ ἔχειν ἐν αὑτῇ 

ἁρμονίᾳ οὔσῃ ἄλλην ἁρμονίαν, τὴν δὲ ἀνάρμοστον αὐτήν 

τε εἶναι καὶ οὐκ ἔχειν ἐν αὑτῇ ἄλλην; 

"그렇다면 영혼이 조화라고 정하는 자들 중 누군가가 영혼 안에 

있는 이러한 것들을 무엇이라 주장하겠나? 덕과 악덕을 말일세. 

또 이번엔 그것들을 또 다른 어떤 조화와 부조화라 주장할까 

혹은 그렇지 않을까? 한편으로 조화로워진 영혼은 훌륭한 

영혼이라고, 조화로서 있는 자신 안에 또 다른 조화를 지닌다고, 

반면 부조화한 영혼이 있고 그건 자신 안에 또 다른 조화를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할까?"

 

Οὐκ ἔχω ἔγωγ᾿, ἔφη ὁ Σιμμίας, εἰπεῖν· δῆλον δ᾿ ὅτι 

τοιαῦτ᾿ ἄττ᾿ ἂν λέγοι ὁ ἐκεῖνο ὑποθέμενος.                                                        10

심미아스는 말했소. "저로서는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허나 

분명한 것은 저런 것을 가정하는 자는 그런 어떤 것들을 

말하리란 점입니다."

 

Ἀλλὰ προωμολόγηται, ἔφη, μηδὲν μᾶλλον μηδ᾿ ἧττον                                     d

ἑτέραν ἑτέρας ψυχὴν ψυχῆς εἶναι, τοῦτο δ᾿ ἔστι τὸ 

ὁμολόγημα, μηδὲν μᾶλλον μηδ᾿ ἐπὶ πλέον μηδ᾿ ἧττον μηδ᾿ 

ἐπ᾿ ἔλαττον ἑτέραν ἑτέρας ἁρμονίαν ἁρμονίας εἶναι. ἦ γάρ;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허나 앞서 동의된 바, 어떤 영혼이 다른

영혼보다 더 영혼으로 있지도 덜 영혼으로 있지도 않으니, 다른

한편 이런 것이 동의된 바, 한 조화가 다른 조화보다 더 많아

초과하는 것으로도 더 적어 미달하는 것으로도 있지 않다네. 

그랬지?" 

 

Πάνυ γε.                                                                                                             5

"물론입니다."

 

Τὴν δέ γε μηδὲν μᾶλλον μηδὲ ἧττον ἁρμονίαν οὖσαν 

μήτε μᾶλλον μήτε ἧττον ἡρμόσθαι· ἔστιν οὕτως; 

"그런가 하면 더도 덜도 조화로 있지 않은 영혼은 더도 덜도 

조화로워지지도 않은 것이지. 그렇지?"

 

Ἔστιν. 

"그렇습니다."

 

Ἡ δὲ μήτε μᾶλλον μήτε ἧττον ἡρμοσμένη ἔστιν ὅτι 

πλέον ἢ ἔλαττον ἁρμονίας μετέχει, ἢ τὸ ἴσον;                                                     10

"그런데 더도 덜도 조화로워지지 않은 영혼은 조화에 

정도 이상으로 혹은 미달하게 참여한다는 점에서 그러한가,

아니면 같은 만큼 참여하기 때문에 그러한가?"

 

Τὸ ἴσον. 

"같은 만큼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Οὐκοῦν ψυχὴ ἐπειδὴ οὐδὲν μᾶλλον οὐδ᾿ ἧττον ἄλλη 

ἄλλης αὐτὸ τοῦτο, ψυχή, ἐστίν, οὐδὲ δὴ μᾶλλον οὐδὲ ἧττον                            e

ἥρμοσται; 

"그렇다면 영혼은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도 덜도 그것 자체, 즉 

영혼이지 않으니, 그래서 더도 덜도 조화로워진 것도 아니지?"

 

Οὕτω. 

"그렇습니다."

 

Τοῦτο δέ γε πεπονθυῖα οὐδὲν πλέον ἀναρμοστίας οὐδὲ 

ἁρμονίας μετέχοι ἄν;                                                                                          5

"그런가 하면 이런 일을 겪은 영혼은 조화를 과하게 참여하지도 

부족하게 참여하지도 않겠지?"

 

Οὐ γὰρ οὖν. 

"그리 참여하지 않으니까요."

 

Τοῦτο δ᾿ αὖ πεπονθυῖα ἆρ᾿ ἄν τι πλέον κακίας ἢ ἀρετῆς 

μετέχοι ἑτέρα ἑτέρας, εἴπερ ἡ μὲν κακία ἀναρμοστία, ἡ δὲ 

ἀρετὴ ἁρμονία εἴη; 

"그런데 이번엔 또 이런 일을 겪은 영혼은 한 영혼이 다른 

영혼보다 악이나 덕에 조금이라도 초과하여 참여하겠는가? 

만일 정말로 한편으로 악은 부조화이고, 덕은 조화일 것이라면 

말일세."

 

Οὐδὲν πλέον.                                                                                                     10

"전혀 초과하여 참여하지 않습니다."

 

Μᾶλλον δέ γέ που, ὦ Σιμμία, κατὰ τὸν ὀρθὸν λόγον                                   94a

κακίας οὐδεμία ψυχὴ μεθέξει, εἴπερ ἁρμονία ἐστίν· 

ἁρμονία γὰρ δήπου παντελῶς αὐτὸ τοῦτο οὖσα, ἁρμονία, 

ἀναρμοστίας οὔποτ᾿ ἂν μετάσχοι. 

"그런가 하면 오히려, 심미아스, 옳은 설명에 따라 그 어떤

영혼도 악에 참여하지 않을 걸세, 만일 정말로 영혼이 조화라면

말이지. 왜냐하면 조화는 분명 전적으로 바로 그것 자체로 있어서,

즉 조화로서 있어서, 결코 부조화에 참여하지 않을 테니 말일세."

 

Οὐ μέντοι.                                                                                                           5

"참여하지 않지요."

 

Οὐδέ γε δήπου ψυχή, οὖσα παντελῶς ψυχή, κακίας. 

"영혼도 분명, 전적으로 영혼으로서 있기에, 악에 참여하지 않겠지."

 

Πῶς γὰρ ἔκ γε τῶν προειρημένων; 

"앞선 언급들로부터야 어찌 참여하겠습니까?"

 

Ἐκ τούτου ἄρα τοῦ λόγου ἡμῖν πᾶσαι ψυχαὶ πάντων 

ζῴων ὁμοίως ἀγαθαὶ ἔσονται, εἴπερ ὁμοίως ψυχαὶ πεφύ-

κασιν αὐτὸ τοῦτο, ψυχαί, εἶναι.                                                                           10

"그 논의를 통해 우리에게 모든 생물의 영혼이 마찬가지로 

훌륭한 것들일 걸세, 만일 정말로 영혼들이 마찬가지로 본디

바로 그것 자체, 즉 영혼으로 있게 마련이었다면 말이지."

 

Ἔμοιγε δοκεῖ, ἔφη, ὦ Σώκρατες. 

그는 말했소. "제겐 그리 여겨집니다, 소크라테스."

 

Ἦ καὶ καλῶς δοκεῖ, ἦ δ᾿ ὅς, οὕτω λέγεσθαι, καὶ πάσχειν 

ἂν ταῦτα ὁ λόγος εἰ ὀρθὴ ἡ ὑπόθεσις ἦν, τὸ ψυχὴν ἁρμονίαν                          b

εἶναι;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렇게 훌륭하게 논해진 것으로, 그리고 

만일 그 가정, 영혼이 조화라는 것이 옳았다면 그 논변이 그런

일들을 겪었으리라고 여겨지는가?"

 

Οὐδ᾿ ὁπωστιοῦν, ἔφη. 

그는 말했소. "어떤 식으로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Τί δέ; ἦ δ᾿ ὅς· τῶν ἐν ἀνθρώπῳ πάντων ἔσθ᾿ ὅτι ἄλλο 

λέγεις ἄρχειν ἢ ψυχὴν ἄλλως τε καὶ φρόνιμον;                                                   5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런데 어떤가? 인간에 속한 모든 

것들 중에서 영혼과 특히 지혜로운 영혼 말고 달리 무엇이든 

다스리는 일이 있는가?"

 

Οὐκ ἔγωγε. 

"저로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Πότερον συγχωροῦσαν τοῖς κατὰ τὸ σῶμα πάθεσιν ἢ καὶ 

ἐναντιουμένην; λέγω δὲ τὸ τοιόνδε, οἷον καύματος ἐνόντος 

καὶ δίψους ἐπὶ τοὐναντίον ἕλκειν, τὸ μὴ πίνειν, καὶ πείνης 

ἐνούσης ἐπὶ τὸ μὴ ἐσθίειν, καὶ ἄλλα μυρία που ὁρῶμεν                                     10

ἐναντιουμένην τὴν ψυχὴν τοῖς κατὰ τὸ σῶμα· ἢ οὔ;                                         c

영혼이 신체에 따른 경험들에 동조하여 그리하나 아니면 

반대되는 채로 그리 하는가?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네. 

이를 테면 열과 갈증이 내재함에도 그 반대로, 즉 마시지 않는

쪽으로 이끄는 것, 또 굶주림이 내재함에도 먹지 않는 쪽으로 

이끄는 것, 또한 여타 무수한 일들을 신체에 따른 경험들에 

반대하여 영혼이 행하는 걸 우리는 본다네. 그렇지 않나?"

 

Πάνυ μὲν οὖν. 

"물론입니다."

 

Οὐκοῦν αὖ ὡμολογήσαμεν ἐν τοῖς πρόσθεν μήποτ᾿ ἂν 

αὐτήν, ἁρμονίαν γε οὖσαν, ἐναντία ᾄδειν οἷς ἐπιτείνοιτο 

καὶ χαλῷτο καὶ ψάλλοιτο καὶ ἄλλο ὁτιοῦν πάθος πάσχοι                                    5

ἐκεῖνα ἐξ ὧν τυγχάνοι οὖσα, ἀλλ᾿ ἕπεσθαι ἐκείνοις καὶ 

οὔποτ᾿ ἂν ἡγεμονεύειν; 

"그럼 또 우리는 앞선 논의에서 결코 영혼이, 조화로서 있는

한, 그로부터 마침 영혼이 있게 된 저것들(요소들)이 그것들에 

의해 수축되고 이완되고 퉁겨지며 여타 그 무슨 경험을 겪든,

그러한 것들과 반대로 노래하지 않으리라고, 오히려 저것들에 

따르고 결코 선도하지 않으리라고 동의하지 않았나?"

 

Ὡμολογήσαμεν, ἔφη· πῶς γὰρ οὔ; 

그는 말했소. "동의했죠. 어찌 아니겠습니까?"                 //260328

 

Τί οὖν; νῦν οὐ πᾶν τοὐναντίον ἡμῖν φαίνεται ἐργαζο-

μένη, ἡγεμονεύουσά τε ἐκείνων πάντων ἐξ ὧν φησί τις                                     10

αὐτὴν εἶναι, καὶ ἐναντιουμένη ὀλίγου πάντα διὰ παντὸς τοῦ                            d

βίου καὶ δεσπόζουσα πάντας τρόπους, τὰ μὲν χαλεπώ-

τερον κολάζουσα καὶ μετ᾿ ἀλγηδόνων, τά τε κατὰ τὴν 

γυμναστικὴν καὶ τὴν ἰατρικήν, τὰ δὲ πρᾳότερον, καὶ τὰ μὲν 

ἀπειλοῦσα, τὰ δὲ νουθετοῦσα, ταῖς ἐπιθυμίαις καὶ ὀργαῖς                                  5

καὶ φόβοις ὡς ἄλλη οὖσα ἄλλῳ πράγματι διαλεγομένη; 

"그렇다면 어떤가? 이제 우리에게 영혼은 정반대로 구현되지 

않나? 누군가가 그것들을 통해 영혼이 있게 된다고 주장할 저 

모든 요소들을 주도하고, 전 생애에 걸쳐 거의 모든 경우에 

반대하고 모든 방식에서 주인노릇하며, 어떤 것들은 고통을

동원해서까지 더욱 가혹하게 꾸짖는데, 체육과 의술에 따른 

경우에 그리히며, 또 어떤 것들은 더욱 온화하게 다루면서,

또 어떤 것들은 내치고, 어떤 것들은 유념하면서, 자신을 열망과

분노 그리고 공포와 서로 다른 사태라 여기며 대화함으로써

말일세.

οἷόν που καὶ Ὅμηρος ἐν Ὀδυσσείᾳ πεποίηκεν, οὖ λέγει 

τὸν Ὀδυσσέα· 

이를 테면 호메로스께서도 오뒷세이아 어딘가에서 이런 구절을 

지으셨지. 거기에서 오뒷세우스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στῆθος δὲ πλήξας κραδίην ἠνίπαπε μύθῳ· 
τέτλαθι δή, κραδίη· καὶ κύντερον ἄλλο ποτ᾿ ἔτλης.                                       e
'가슴을 치고 심장을 이야기로써 책망하였노라.
그래, 견디거라, 심장이여. 언젠가 더욱 개같은 다른 일조차  
너는 견뎌냈으니.'

 

ἆρ᾿ οἴει αὐτὸν ταῦτα ποιῆσαι διανοούμενον ὡς ἁρμονίας 

αὐτῆς οὔσης καὶ οἵας ἄγεσθαι ὑπὸ τῶν τοῦ σώματος παθη-

μάτων, ἀλλ᾿ οὐχ οἵας ἄγειν τε ταῦτα καὶ δεσπόζειν, καὶ 

οὔσης αὐτῆς πολὺ θειοτέρου τινὸς πράγματος ἢ καθ᾿                                       5

ἁρμονίαν; 

혹시 자네는 그분께서 이 싯구를 지으실 적에 조화로서 영혼이 

있고 또한 신체의 감정들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이끌고 주인노릇하는 것이라고, 조화에 따르기 보다는

훨씬 더 신적인 어떤 사태로서 있으며 그리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지으셨다 생각하나?"

 

Νὴ Δία, ὦ Σώκρατες, ἔμοιγε δοκεῖ. 

"제우스께 맹세코, 소크라테스, 제겐 그리 여겨집니다."

 

Οὐκ ἄρα, ὦ ἄριστε, ἡμῖν οὐδαμῇ καλῶς ἔχει ψυχὴν 

ἁρμονίαν τινὰ φάναι εἶναι· οὔτε γὰρ ἄν, ὡς ἔοικεν, Ὁμήρῳ                         95a

θείῳ ποιητῇ ὁμολογοῖμεν οὔτε αὐτοὶ ἡμῖν αὐτοῖς. 

"그럼, 가장 훌륭한 친구, 우리에겐 영혼이 모종의 조화라고

주장하는 일은 어떤 식으로도 훌륭하지 못하군. 그럴 듯하기로,

신적인 시인 호메로스께 동의하지도 못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동의하지도 못할 테니까."

 

Ἔχει οὕτως, ἔφη. 

그는 말했소. "그런 상황입니다."

 

Εἶεν δή, ἦ δ᾿ ὅς ὁ Σωκράτης, τὰ μὲν Ἁρμονίας ἡμῖν τῆς 

Θηβαϊκῆς ἵλεά πως, ὡς ἔοικε, μετρίως γέγονεν· τί δὲ δὴ τὰ                               5

Κάδμου, ἔφη, ὦ Κέβης, πῶς ἱλασόμεθα καὶ τίνι λόγῳ; 

소크라테스께서는 말씀하셨소. "좋네, 그럼 테베 출신이신 

하르모니아(조화)께 속한 일들은 어쨌든 적절히 순조로워진 

듯하군. 헌데 그럼 카드모스에 속한 일들은, 케베스, 우리가 

어떻게 또 무슨 말로 달래겠는가?"

 

Σύ μοι δοκεῖς, ἔφη ὁ Κέβης, ἐξευρήσειν· τουτονὶ γοῦν 

τὸν λόγον τὸν πρὸς τὴν ἁρμονίαν θαυμαστῶς μοι εἶπες ὡς 

παρὰ δόξαν. 

케베스는 말했소. "제게는 당신께서 찾아내시리라 여겨집니다. 

어쨌든 조화에 대한 그 논변은 어찌나 의외인지 놀랄 만한 방식으로 

제게 말씀해주셨고요.

                     Σιμμίου γὰρ λέγοντος ὅτε ἠπόρει, πάνυ ἐθαύ-

μαζον εἴ τι ἕξει τις χρήσασθαι τῷ λόγῳ αὐτοῦ· πάνυ οὖν                                 b

μοι ἀτόπως ἔδοξεν εὐθὺς τὴν πρώτην ἔφοδον οὐ δέξασθαι 

τοῦ σοῦ λόγου. ταὐτὰ δὴ οὐκ ἂν θαυμάσαιμι καὶ τὸν τοῦ 

Κάδμου λόγον εἰ πάθοι. 

심미아스가 논의를 진행하다가 난관에 빠졌던 순간, 그의 논변을

가지고 누군가가 뭐라도 해낼 수 있을지 저는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당신의 논변의 첫 번째 공격부터

받아내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카드모스의 논변조차 그런 일을 겪더라도 놀라지는 않을 겁니다."

 

Ὠγαθέ, ἔφη ὁ Σωκράτης, μὴ μέγα λέγε, μή τις ἡμῖν                                            5

βασκανία περιτρέψῃ τὸν λόγον τὸν μέλλοντα ἔσεσθαι. 

ἀλλὰ δὴ ταῦτα μὲν τῷ θεῷ μελήσει, ἡμεῖς δὲ Ὁμηρικῶς 

ἐγγὺς ἰόντες πειρώμεθα εἰ ἄρα τι λέγεις. 

소크라테스께서 말씀하셨소. "훌륭한 친구, 너무 과언하지 말게, 

어떤 저주가 장차 있게 될 우리의 논변을 전복시켜 버리지 

못하도록 말일세. 허나 그런 일들은 신께서 돌보실 일이고,

우리는  호메로스의 방식으로 가까이 다가가 혹시 자네가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봐 보도록 하세.

                                                                ἔστι δὲ δὴ τὸ 

κεφάλαιον ὧν ζητεῖς· ἀξιοῖς ἐπιδειχθῆναι ἡμῶν τὴν ψυχὴν 

ἀνώλεθρόν τε καὶ ἀθάνατον οὖσαν, εἰ φιλόσοφος ἀνὴρ                                   c

μέλλων ἀποθανεῖσθαι, θαρρῶν τε καὶ ἡγούμενος ἀπο-

θανὼν ἐκεῖ εὖ πράξειν διαφερόντως ἢ εἰ ἐν ἄλλῳ βίῳ βιοὺς 

ἐτελεύτα, μὴ ἀνόητόν τε καὶ ἠλίθιον θάρρος θαρρήσει. 

그런데 자네가 탐구하고 있는 것들의 요점은 이런 것이라네.

자네는 우리의 영혼이 불멸이자 불사로 있다는 것은 증명될

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지, 만일 철학하는 자가 장차 죽으려 할 때,

용감하게 또한 죽어서도 저곳에서 여타의 삶을 살고 죽는다면

그러할 것보다 훨씬 빼어나게 잘 지내리라 생각하며,

무지성적인 헛된 용기를 내지 않도록 할 것이라면 말일세.

                                                                                       τὸ 

δὲ ἀποφαίνειν ὅτι ἰσχυρόν τί ἐστιν ἡ ψχυὴ καὶ θεοειδὲς καὶ                                5

ἦν ἔτι πρότερον, πρὶν ἡμᾶς ἀνθρώπους γενέσθαι, οὐδὲν 

κωλύειν φῂς πάντα ταῦτα μηνύειν ἀθανασίαν μὲν μή, ὅτι 

δὲ πολυχρόνιόν τέ ἐστιν ψυχὴ καὶ ἦν που πρότερον ἀμή-

χανον ὅσον χρόνον καὶ ᾔδει τε καὶ ἔπραττεν πολλὰ ἄττα· 

그런데 영혼이 무언가 강력한 것이자 신적인 종류의 것이며 우리 

인간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것임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 자네 주장으로는 불멸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것들을, 즉 

영혼이 오래 지속하는 것이자 어떤 많은 일들을 알았고 또 행했던 

그 만큼의 헤아릴 수 없을 시간 동안 어딘가에 앞서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임을 막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지.

ἀλλὰ γὰρ οὐδέν τι μᾶλλον ἦν ἀθάνατον, ἀλλὰ καὶ αὐτὸ τὸ                               d

εἰς ἀνθρώπου σῶμα ἐλθεῖν ἀρχὴ ἦν αὐτῇ ὀλέθρου, ὥσπερ 

νόσος· καὶ ταλαιπωρουμένη τε δὴ τοῦτον τὸν βίον ζῴη καὶ 

τελευτῶσά γε ἐν τῷ καλουμένῳ θανάτῳ ἀπολλύοιτο. 

허나 전혀 조금이라도 더 불사였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인간 

신체에 들어간다는 그 일 자체마저 영혼에게 파멸의 시원이었고, 

마치 질병 같은 것이라고 말일세. 그래서 이러한 삶 동안에 고역을 

치르며 살 테고 끝난 후에는 소위 죽음 속에서 해체될 테지.

διαφέρειν δὲ δὴ φῂς οὐδὲν εἴτε ἅπαξ εἰς σῶμα ἔρχεται εἴτε                               5

πολλάκις, πρός γε τὸ ἕκαστον ἡμῶν φοβεῖσθαι· προσήκει 

γὰρ φοβεῖσθαι, εἰ μὴ ἀνόητος εἴη, τῷ μὴ εἰδότι μηδὲ 

ἔχοντι λόγον διδόναι ὡς ἀθάνατόν ἐστι.                                                           e

헌데 그래서 자네는 신체에 한 차례 들어가든 여러 차례 들어가든, 

적어도 우리들 각자가 두려워함과 관련하여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네. 그야 두려워하는 편이 적절하니까, 만일 무지성한

자가 아니라면, 영혼이 어떻게 불사인지 알지도 못하고 설명도

내놓지 못하는 자에게는 말이지.

                                                               τοιαῦτ᾿ ἄττα ἐστίν,                             e

οἶμαι, ὦ Κέβης, ἃ λέγεις· καὶ ἐξεπίτηδες πολλάκις ἀνα-

λαμβάνω, ἵνα μή τι διαφύγῃ ἡμᾶς, εἴ τέ τι βούλει, 

προσθῇς ἢ ἀφέλῃς. 

이런 어떤 것들이, 내 생각에, 케베스, 자네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라네. 내가 일부러 여러 차례 되풀이하긴 했네만, 

뭐라도 우리에게서 달아나 버리지 않게끔 그리 했던 것이고, 

만일 자네가 바란다면, 더하거나 빼거나 해주게."

 

Καὶ ὁ Κέβης, Ἀλλ᾿ οὐδὲν ἔγωγε ἐν τῷ παρόντι, ἔφη,                                          5

οὔτε ἀφελεῖν οὔτε προσθεῖναι δέομαι· ἔστι δὲ ταῦτα ἃ 

λέγω. 

그러자 케베스가 말했소. "허나 저로서는 당장은 뺄 필요도 

더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바가 그러한 

것들입니다."

 

Ὁ οὖν Σώκράτης συχνὸν χρόνον ἐπισχὼν καὶ πρὸς 

ἑαυτόν τι σκεψάμενος, Οὐ φαῦλον πρᾶγμα, ἔφη, ὦ Κέβης, 

ζητεῖς· ὅλως γὰρ δεῖ περὶ γενέσεως καὶ φθορᾶς τὴν αἰτίαν                                10

διαπραγματεύσασθαι. ἐγὼ οὖν σοι δίειμι περὶ αὐτῶν, ἐὰν                           96a

βούλῃ, τά γε ἐμὰ πάθη· ἔπειτα ἄν τί σοι χρήσιμον φαίνηται 

ὧν ἂν λέγω, πρὸς τὴν πειθὼ περὶ ὧν δὴ λέγεις χρήσῃ. 

그리하여 소크라테스께서는 긴 시간 멈추어 계신 채로 당신 

자신을 상대로 무언가 고찰하시고서는 말씀하셨소. "하찮은 일이 

아니군, 케베스, 자네가 탐구하고 있는 게 말일세. 총체적으로 

생성과 소멸의 원인에 관하여 철저히 고민해야 하니 말일세. 

그러니 내 자네에게 그것들에 관련해서, 괜찮다면, 내 경험들을 

늘어놓겠네. 내가 논할 것들 중 뭐라도 자네에게 쓸모있어 보이는

게 있다면, 자네가 논하고 있는 것들에 관한 설득을 위해 사용해 

주게."

 

Ἀλλὰ μήν, ἔφη ὁ Κέβης, βούλομαί γε. 

케베스는 말했소. "저야 물론 그렇기를 바랍니다."

 

 

-작성중-

Πῶς λέγεις; ἔφην ἐγώ. 

나는 말씀드렸소. "어찌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Ὥσπερ, ἦ δ᾿ ὅς, περὶ τῶν σφόδρα σμικρῶν καὶ 

μεγάλων· οἴει τι σπανιώτερον εἶναι ἢ σφόδρα μέγαν ἢ                                       5

σφόδρα σμικρὸν ἐξευρεῖν ἄνθρωπον ἢ κύνα ἢ ἄλλο ὁτιοῦν; 

ἢ αὖ ταχὺν ἢ βραδὺν ἢ αἰσχρὸν ἢ καλὸν ἢ λευκὸν ἢ μέλανα; 

ἢ οὐχὶ ᾔσθησαι ὅτι πάντων τῶν τοιούτων τὰ μὲν ἄκρα τῶν 

ἐσχάτων σπάνια καὶ ὀλίγα, τὰ δὲ μεταξὺ ἄφθονα καὶ 

πολλά;                                                                                                                10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마치 과도하게 작은 것들과 거대한 

것들에 관련한 것처럼 말일세. 인간이든 개든 여타 그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과도하게 거대하거나 과도하게 작은 것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드문 어떤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또 이번엔 빠르거나 

느리거나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희거나 검은 것은 어떤가? 

아니면 이와 같은 모든 극단들의 극점들은 드물고 적지만, 그 

중간의 것들은 아쉬울 것 없이 많다는 것을 자네는 알아차리지 

못하였나?"

 

Πάνυ γε, ἦν δ᾿ ἐγώ. 

나는 말씀드렸소. "물론 알고 있지요."

 

Οὐκοῦν οἴει, ἔφη, εἰ πονηρίας ἀγὼν προτεθείη, πάνυ ἂν                                 b

ὀλίγους καὶ ἐνταῦθα τοὺς πρώτους φανῆναι;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렇다면 자네는 만일 저열함의 경연이 

열린다면, 여기에서도 일등을 하는 자들이 무척이나 적게 

나타나리라 생각하지 않는가?"

 

Εἰκός γε, ἦν δ᾿ ἐγώ. 

나는 대답해 드렸소. "그럴 듯하긴 합니다."

 

Εἰκὸς γὰρ, ἔφη. ἀλλὰ ταύτῃ μὲν οὐχ ὅμοιοι οἱ λόγοι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ἀλλὰ σοῦ νυνδὴ προάγοντος ἐγὼ ἐφεσπόμην,                               5

ἀλλ᾿ ἐκείνῃ, ᾗ, ἐπειδάν τις πιστεύσῃ λόγῳ τινὶ ἀληθεῖ εἶναι 

ἄνευ τῆς περὶ τοὺς λόγους τέχνης, κἄπειτα ὀλίγον ὕστερον 

αὐτῷ δόξῃ ψευδὴς εἶναι, ἐνίοτε μὲν ὤν, ἐνίοτε δ᾿ οὐκ ὤν, 

καὶ αὖθις ἕτερος καὶ ἕτερος

그분께서 말씀하셨지. "그야 그럴 듯하지. 그럼 그 점에서는 

논변이 인간과 유사한 것이 아니지만, 자네가 방금 앞장서기에 

내가 따라갔네만, 저 측면에서는, 누군가 어떤 논변이 참이라고 

논변에 관한 기술을 갖추지 못한 채 확신할 경우라면, 그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논변이 거짓이라 여기게 된다면, 때로는 

그것이 그렇고, 또 때로는 그렇지 않은데, 또 다시 또 다른 논변을 

그리 하면,

                                             ―καὶ μάλιστα δὴ οἱ περὶ τοὺς 

ἀντιλογικοὺς λόγους διατρίψαντες οἶσθ᾿ ὅτι τελευτῶντες                                 c

οἴονται σοφώτατοι γεγονέναι καὶ κατανενοηκέναι μόνοι 

ὅτι οὔτε τῶν πραγμάτων οὐδενὸς οὐδὲν ὑγιὲς οὐδὲ βέβαιον 

οὔτε τῶν λόγων, ἀλλὰ πάντα τὰ ὄντα ἀτεχνῶς ὥσπερ ἐν 

Εὐρίπῳ ἄνω κάτω στρέφεται καὶ χρόνον οὐδένα ἐν οὐδενὶ                                5

μένει. 

더군다나 특히 논박하는 논변들에 시간을 쏟은 자들은 결국 오직 

자신들만이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사태들

중에도 논변들 중에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아무런 건전한 것도

확고한 것도 있지 않고, 오히려 모든 있는 것들은 단순히 마치

에우리포스 해협에서 그러하듯 상하로 전복되고 그 어떤 시간

동안에도 그 무엇 안에서도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간파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지.

 

Πάνυ μὲν οὖν, ἔφην ἐγώ, ἀληθῆ λέγεις. 

나는 답해드렸소. "그야 물론입니다. 참된 말씀이십니다."

 

Οὐκοῦν, ὦ Φαίδων, ἔφη, οἰκτρὸν ἄν εἴη τὸ πάθος, εἰ 

ὄντος δή τινος ἀληθοῦς καὶ βεβαίου λόγου καὶ δυνατοῦ 

κατανοῆσαι, ἔπειτα διὰ τὸ παραγίγνεσθαι τοιούτοις τισὶ                                   d

λόγοις, τοῖς αὐτοῖς τοτὲ μὲν δοκοῦσιν ἀληθέσιν εἶναι, τοτὲ 

δὲ μή, μὴ ἑαυτόν τις αἰτιῷτο μηδὲ τὴν ἑαυτοῦ ἀτεχνίαν, 

ἀλλὰ τελευτῶν διὰ τὸ ἀλγεῖν ἅσμενος ἐπὶ τοὺς λόγους ἀφ᾿ 

ἑαυτοῦ τὴν αἰτίαν ἀπώσαιτο καὶ ἤδη τὸν λοιπὸν βίον μισῶν                               5

τε καὶ λοιδορῶν τοὺς λόγους διατελοῖ, τῶν δὲ ὄντων τῆς 

ἀληθείας τε καὶ ἐπιστήμης στερηθείη.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렇다면, 파이돈, 그 경험은 안타까운 

일일 걸세, 만일 참이고 확고하며 이해도 가능한 어떤 논변이 

있는데도, 같은 논변들이 때로는 참이라 여겨지고, 또 때로는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는, 그와 같은 어떤 논변들 곁에 있게 됨으로 

인하여, 누군가가 제 자신을 탓하지도 자신의 기술 없음을 탓하지도 

않고, 오히려 결국에는 괴로움으로 인해 기꺼이 그 원인을 제 

자신으로부터 그 논변들에게로 전가시키게 되어 이제 남은 생애 

동안 논변을 증오하고 욕하며 보낸다면, 반면 있는 것들에 대한 

진리와 앎은 결여한다면 말일세."

 

Νὴ τὸν Δία, ἦν δ᾿ ἐγώ, οἰκτρὸν δῆτα. 

나는 말씀드렸소. "제우스께 맹세코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Πρῶτον μὲν τοίνυν, ἔφη, τοῦτο εὐλαβηθῶμεν, καὶ μὴ 

παρίωμεν εἰς τὴν ψυχὴν ὡς τῶν λόγων κινδυνεύει οὐδὲν                                e

ὑγιὲς εἶναι, ἀλλὰ πολὺ μᾶλλον ὅτι ἡμεῖς οὔπω ὑγιῶς ἔχο-

μεν, ἀλλὰ ἀνδριστέον καὶ προθυμητέον ὑγιῶς ἔχειν, σοὶ 

μὲν οὖν καὶ τοῖς ἄλλοις καὶ τοῦ ἔπειτα βίου παντὸς ἕνεκα, 

ἐμοὶ δὲ αὐτοῦ ἕνεκα τοῦ θανάτου, ὡς κινδυνεύω ἔγωγε ἐν                          91a

τῷ παρόντι περὶ αὐτοῦ τούτου οὐ φιλοσόφως ἔχειν ἀλλ᾿ 

ὥσπερ οἱ πάνυ ἀπαίδευτοι φιλονίκως.                                                            //260212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러니 우선은 그 점에 유의하도록 하세. 

그래서 논변들에 아무것도 건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영혼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말고, 오히려 훨씬 더 우리 자신이 아직 건전하지 

못하지만, 건전하기를 용기내고 열망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도록 

하세. 그리하여 자네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후의 생애 전체를 

위해서, 내게는 죽음 그 자체를 위해서 말일세. 나로서는 당장은

바로 그 죽음에 관하여 철학자다운 게 아니라 마치 아주 못 배운 

자들처럼 명예욕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으니.

                                                              καὶ γὰρ ἐκεῖνοι ὅταν 

περί του ἀμφισβητῶσιν, ὅπῃ μὲν ἔχει περὶ ὧν ἂν ὁ λόγος ᾖ 

οὐ φροντίζουσιν, ὅπως δὲ ἃ αὐτοὶ ἔθεντο ταῦτα δόξει τοῖς                                 5

παροῦσιν, τοῦτο προθυμοῦνται. καὶ ἐγώ μοι δοκῶ ἐν τῷ 

παρόντι τοσοῦτον μόνον ἐκείνων διοίσειν· οὐ γὰρ ὅπως τοῖς 

παροῦσιν ἃ ἐγὼ λέγω δόξει ἀληθῆ εἶναι προθυμήσομαι, εἰ 

μὴ εἴη πάρεργον, ἀλλ᾿ ὅπως αὐτῷ ἐμοὶ ὅτι μάλιστα δόξει 

οὕτως ἔχειν.                                                                                                      b

왜냐하면 저들은 어떤 것에 관하여 논쟁할 때면, 그 논변이 

관련하여 있는 바의 것들이 어떠한지 고민하지 않고, 자신들이 

정립한 것들이 곁에 있는 자들에게 어찌 여겨질 것인지, 이것에만 

열중하니 말일세. 나 또한 내게 당장은 오직 이만큼만 저들과 

차이가 난다고 여겨지는군. 곁에 있는 이들에게 내가 말하는 바가 

참이라 여겨지도록 하기 위해 열중하지는 않을 것이고, 만일 

부수적으로 그리 되는 게 아니라면야, 오히려 내 자신에게 

최대한 그렇게 여겨지도록 하는 일에 열중할 테니까.

                     λογίζομαι γάρ, ὦ φίλε ἑταῖρε―θέασαι ὡς                                    b

πλεονεκτικῶς―εἰ μὲν τυγχάνει ἀληθῆ ὄντα ἃ λέγω, 

καλῶς δὴ ἔχει τὸ πεισθῆναι· εἰ δὲ μηδέν ἐστι τελευτήσαντι, 

ἀλλ᾿ οὖν τοῦτόν γε τὸν χρόνον αὐτὸν τὸν πρὸ τοῦ θανάτου 

ἧττον τοῖς παροῦσιν ἀηδὴς ἔσομαι ὀδυρόμενος, ἡ δὲ ἄνοιά                               5

μοι αὕτη οὐ συνδιατελεῖ―κακὸν γὰρ ἂν ἦν―ἀλλ᾿ ὀλίγον 

ὕστερον ἀπολεῖται. 

왜냐하면 나는, 친애하는 동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보게나. 

한편으로는 만일 내가 말하는 바가 마침 참이라면, 설득되는 일도

훌륭하다 생각한다네. 헌데 만일 끝을 맞이한 자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오히려 그리하여 죽음을 앞둔 바로 이 시간 동안에는

여기 있는 이들에게 내가 통곡을 하며 불쾌한 자로 있게 되는 일이

덜 할 것이고, 이 무지가 내게 끝까지 이어지는 게 아니라, 그야

그건 나쁜 일일 테고, 오히려 잠시 후에 사라질 거라 생각하네."

                               παρεσκευασμένος δή, ἔφη, ὦ Σιμμία 

τε καὶ Κέβης, οὑτωσὶ ἔρχομαι ἐπὶ τὸν λόγον· ὑμεῖς μέντοι, 

ἂν ἐμοὶ πείθησθε, σμικρὸν φροντίσαντες Σωκράτους, τῆς                               c

δὲ ἀληθείας πολὺ μᾶλλον, ἐὰν μέν τι ὑμῖν δοκῶ ἀληθὲς 

λέγειν, συνομολογήσατε, εἰ δὲ μή, παντὶ λόγῳ ἀντιτείνετε, 

εὐλαβούμενοι ὅπως μὴ ἐγὼ ὑπὸ προθυμίας ἅμα ἐμαυτόν 

τε καὶ ὑμᾶς ἐξαπατήσας, ὥσπερ μέλιττα τὸ κέντρον                                           5

ἐγκαταλιπὼν οἰχήσομαι.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래서 나는, 심미아스와 케베스, 

준비를 마친 채로 그렇게 그 논변을 향해 나아간다네. 그렇지만 

자네들은, 내게 설득된다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조금만 

고려하고, 진리에 훨씬 더 많이 고려하면서, 만일 납득되지

않는다면, 모든 논변에 저항해주게, 내가 열망에 의해 나 자신과

자네들까지 한꺼번에 기만해 버리고서, 마치 내가 독침을 남겨둔

벌처럼 떠나 버리지 못하도록 경계하면서 말이야."

 

Ἀλλ᾿ ἰτέον, ἔφη. πρῶτόν με ὑπομνήσατε ἃ ἐλέγετε, ἐὰν 

μὴ φαίνωμαι μεμνημένος. Σιμμίας μὲν γάρ, ὡς ἐγᾦμαι, 

ἀπιστεῖ τε καὶ φοβεῖται μὴ ἡ ψυχὴ ὅμως καὶ θειότερον καὶ 

κάλλιον ὂν τοῦ σώματος προαπολλύηται ἐν ἁρμονίας εἴδει                             d

οὖσα·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럼 나아가야만 하겠네. 우선 내게 

자네들이 말하던 바를 상기시켜주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말일세. 즉 심마아스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영혼이 신체보다 더욱 신적이며 더 아름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화의 형상 내에 있어서 먼저 해체되지는 않을까 의심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네.

           Κέβης δέ μοι ἔδοξε τοῦτο μὲν ἐμοὶ συγχωρεῖν, 

πολυχρονιώτερόν γε εἶναι ψυχὴν σώματος, ἀλλὰ τόδε 

ἄδηλον παντί, μὴ πολλὰ δὴ σώματα καὶ πολλάκις κατα-

τρίψασα ἡ ψυχὴ τὸ τελευταῖον σῶμα καταλιποῦσα νῦν                                      5

αὐτὴ ἀπολλύηται, καὶ ᾖ αὐτὸ τοῦτο θάνατος, ψυχῆς 

ὄλεθρος, ἐπεὶ σῶμά γε ἀεὶ ἀπολλύμενον οὐδὲν παύεται. 

ἆρα ἄλλ᾿ ἢ ταῦτ᾿ ἐστίν, ὦ Σιμμία τε καὶ Κέβης, ἃ δεῖ ἡμᾶς 

ἐπισκοπεῖσθαι; 

반면 케베스는 내게 이런 점에는 동의하는 걸로 여겨졌는데, 

영혼이 신체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는 점을 두고 그랬고,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불분명하다고, 영혼이 

정말로 여러 신체들을 여러 차례 닳아 없어지도록 하고서 마지막 

신체를 남겨두고서 이제 그 자신이 해체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바로 이것이 죽음으로서, 영혼의 소멸이 아닐까, 신체는 늘상 

해체되기를 전혀 그치지 않으니, 그리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으로]

여겨졌네. 혹시 우리가 검토해야하는 일들이,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런 것들 말고 다른 것들인가?"

 

Συνωμολογείτην δὴ ταῦτ᾿ εἶναι ἄμφω.                                                              e

그래서 그런 것들이라는 데에 두 사람 모두 동의하였소.

 

Πότερον οὖν, ἔφη, πάντας τοὺς ἔμπροσθε λόγους οὐκ 

ἀποδέχεσθε, ἢ τοὺς μέν, τοὺς δ᾿ οὔ; 

그 분께서는 말씀하셨지. "그렇다면 자네들은 앞선 논변들 

모두 수용하지 않는가, 아니면 어떤 논변은 수용하고, 또 

어떤 논변은 그리하지 않는 것인가?"

 

Τοὺς μέν, ἐφάτην, τοὺς δ᾿ οὔ. 

그 둘은 말했소. "일부는 수용하고 다른 일부는 수용하지 않습니다."

 

Τί οὖν, ἦ δ᾿ ὅς, περὶ ἐκείνου τοῦ λόγου λέγετε ἐν ᾧ                                           5

ἔφαμεν τὴν μάθησιν ἀνάμνησιν εἶναι, καὶ τούτου οὕτως 

ἔχοντος ἀναγκαίως ἔχειν ἄλλοθι πρότερον ἡμῶν εἶναι τὴν 

ψυχήν, πρὶν ἐν τῷ σώματι ἐνδεθῆναι;                                                          92a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렇다면 우리가 그 와중에 배움은 

상기라고,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필연적으로 다른 곳에 

더 먼저 우리의 영혼이 있음이, 신체에 결박되기 전에 그러함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던 저 논변에 관련하여서는 자네들은 

무어라 말하는가?"

 

Ἐγὼ μέν, ἔφη ὁ Κέβης, καὶ τότε θαυμαστῶς ὡς 

ἐπείσθην ὑπ᾿ αὐτοῦ καὶ νῦν ἐμμένω ὡς οὐδενὶ λόγῳ. 

케베스가 말했소. "저는 그 때에도 그 논변에 의해 놀라울 

만치 설득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그 어느 논변에도 그렇지 

않을 만큼 놀라우리만치 그 논변 편에 서 있습니다."

 

Καὶ μήν, ἔφη ὁ Σιμμίας, καὶ αὐτὸς οὕτως ἔχω, καὶ πάνυ 

ἂν θαυμάζοιμι εἴ μοι περί γε τούτου ἄλλο ποτέ τι δόξειεν.                                   5

심미아스가 말했소. "물론 저 역시도 그렇고, 만일 제게 적어도 

그 논변에 관련하여 도대체 조금이라도 달리 여겨질 것이라면 

무척이나 놀랄 것입니다."

 

Καὶ ὁ Σωκράτης, Ἀλλὰ ἀνάγκη σοι, ἔφη, ὦ ξένε 

Θηβαῖε, ἄλλα δόξαι, ἐάνεπρ μείνῃ ἥδε ἡ οἴησις, τὸ 

ἁρμονίαν μὲν εἶναι σύνθετον πρᾶγμα, ψυχὴν δὲ ἁρμονίαν 

τινὰ ἐκ τῶν κατὰ τὸ σῶμα ἐντεταμένων συγκεῖσθαι· οὐ γάρ 

που ἀποδέξῃ γε σαυτοῦ λέγοντος ὡς πρότερον ἦν ἁρμονία                           b

συγκειμένη, πρὶν ἐκεῖνα εἶναι ἐξ ὧν ἔδει αὐτὴν συντεθῆναι. 

ἢ ἀποδέξῃ; 

그러자 소크라테스께서 말씀하셨소. "허나, 테베 손님, 자네에겐 

달리 여겨짐이 필연적인가? 만일 이런 생각이 견지된다면, 즉 

조화는 구성된 사물인 반면, 영혼은 신체를 따라 당겨진 것들로 

구성된 일종의 조화라는 의견 말일세. 왜냐하면 자네 스스로 

조화가 먼저 구성되어 있었다고, 그로부터 그 조화가 구성되어 

나와야 했던 저 요소들이 있기 전부터 그러했다고 말하는 걸 

수용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면 이를 수용하겠나?"

 

Οὐδαμῶς, ἔφη, ὦ Σώκρατες. 

그는 말했소. "결코 허용하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

 

Αἰσθάνῃ οὖν, ἦ δ᾿ ὅς, ὅτι ταῦτά σοι συμβαίνει λέγειν,                                         5

ὅταν φῇς μὲν εἶναι τὴν ψυχὴν πρὶν καὶ εἰς ἀνθρώπου εἶδός 

τε καὶ σῶμα ἀφικέσθαι, εἶναι δὲ αὐτὴν συγκειμένην ἐκ τῶν 

οὐδέπω ὄντων; οὐ γὰρ δὴ ἁρμονία γέ σοι τοιοῦτόν ἐστιν ᾧ 

ἀπεικάζεις, ἀλλὰ πρότερον καὶ ἡ λύρα καὶ αἱ χορδαὶ καὶ οἱ 

φθόγγοι ἔτι ἀνάρμοστοι ὄντες γίγνονται, τελευταῖον δὲ                                    c

πάντων συνίσταται ἡ ἁρμονία καὶ πρῶτον ἀπόλλυται. 

οὗτος οὖν σοι ὁ λόγος ἐκείνῳ πῶς συνᾴσεται;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렇다면 눈치챘는가? 자네로서는 

그렇게 말하도록 귀결된다는 점을 말일세. 자네가 한편으로는 

영혼이 인간 형상과 신체에 당도하기 전에 있다고, 그런데 

영혼은 아직 있지 않은 것들로부터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는 말이야. 왜냐하면 실로 조화란 자네가 비유하는 그런

아니라(신체보다 먼저 있다), 오히려 먼저 뤼라와 현들과

음들이 아직 부조화스러운 것들로 있으면서 생성되고, 마지막에

그 모든 것들의 조화가 구성되고 또 첫 번째로 해체된다네.

그렇다면 자네의 이 논변(영혼이 신체에 선행)이 저 논변(조화)과

어떻게 합창하겠나?" 

 

Οὐδαμῶς, ἔφη ὁ Σιμμίας. 

심미아스가 말했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Καὶ μήν, ἦ δ᾿ ὅς, πρέπει γε εἴπερ τῳ ἄλλῳ λόγῳ                                                5

συνῳδῷ εἶναι καὶ τῷ περὶ ἁρμονίας. 

그 분께서 말씀하셨지. "그야 물론 만일 다른 어떤 합창하는

논변이 있다면 조화에 관련된 논변과도 합창하는 논변임이

적절할 걸세."

 

Πρέπει γάρ, ἔφη ὁ Σιμμίας. 

심미아스가 말했소. "그 편이 적절합니다."

 

Οὗτος τοίνυν, ἔφη, σοί οὐ συνῳδός· ἀλλ᾿ ὅρα πότερον 

αἱρῇ τῶν λόγων, τὴν μάθησιν ἀνάμνησιν εἶναι ἢ ψυχὴν 

ἁρμονίαν;                                                                                                            10 //260318

그 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러니까 이런 논변은 자네와 

합창해주지 않는다네. 오히려 봐 보게. 자네는 어느 쪽 

논변을 택하겠나? 배움이 상기라는 쪽인가 아니면 영혼이 

조화라는 쪽인가?"

 

Πολὺ μᾶλλον, ἔφη, ἐκεῖνον, ὦ Σώκρατες. ὅδε μὲν γάρ 

μοι γέγονεν ἄνευ ἀποδείξεως μετὰ εἰκότος τινὸς καὶ                                         d

εὐπρεπείας, ὅθεν καὶ τοῖς πολλοῖς δοκεῖ ἀνθρώποις· ἐγὼ 

δὲ τοῖς διὰ τῶν εἰκότων τὰς ἀποδείξεις ποιουμένοις λόγοις 

σύνοιδα οὖσιν ἀλαζόσιν, καὶ ἄν τις αὐτοὺς μὴ φυλάττηται 

εὖ μάλα, ἐξαπατῶσι, καὶ ἐν γεωμετρίᾳ καὶ ἐν τοῖς ἄλλοις                                    5

ἅπασιν. 

그는 말했소. "더할 나위 없이 저쪽을 고르겠죠, 소크라테스. 

저에게 이쪽 논변은 증명 없이 어떤 그럴듯함이나 설득력을 갖고 

이루어졌던 것이니까요.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다고

여겨질 그런 것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럴듯함을 통한 증명을 

만들어내는 논변들이 허장성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누군가가 

그런 논변들을 아주 주의깊게 경계하지 않는다면, 기만해 버린다는 

걸, 기하학에서든 여타 온갖 것들에서든 그렇다는 걸 잘 압니다. 

              ὁ δὲ περὶ τῆς ἀναμνήσεως καὶ μαθήσεως λόγος δι᾿ 

ὑποθέσεως ἀξίας ἀποδέξασθαι εἴρηται. ἐρρήθη γάρ που 

οὕτως ἡμῶν εἶναι ἡ ψυχὴ καὶ πρὶν εἰς σῶμα ἀφικέσθαι, 

ὥσπερ αὐτὴ ἔστιν ἡ οὐσία ἔχουσα τὴν ἐπωνυμίαν τὴν τοῦ 

"ὃ ἔστιν"· ἐγὼ δὲ ταύτην, ὡς ἐμαυτὸν πείθω, ἱκανῶς τε καὶ                              e

ὀρθῶς ἀποδέδεγμαι. ἀνάγκη οὖν μοι, ὡς ἔοικε, διὰ ταῦτα 

μήτε ἐμαυτοῦ μήτε ἄλλου ἀποδέχεσθαι λέγοντος ὡς ψυχή 

ἐστιν ἁρμονία. 

반면에 상기와 배움에 관한 그 논변은 수용될 가치가 있는 가정을 

통해 이야기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영혼이 신체에 당도하기 전부터, 

마치 "그것으로 있는 바의 것"이란 별칭을 가진 있음 그 자체가 

있는 식으로, 그렇게 있다는 것이 언급되었단 것이지요. 저는 이 

가정을 제 스스로 납득하기로는 충분히 또 제대로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로서는 그럴 듯하기로는 이런 점들을 통해서 영혼이

조화라고 제 자신이 말하는 것도 여타의 사람이 말하는 것도

수용하지 못함이 필연적입니다."

 

-작성중-

Λέγω δή, ἦ δ᾿ ὃς ὁ Κέβης. ἐμοὶ γὰρ φαίνεται ἔτι ἐν τῷ 

αὐτῷ ὁ λόγος εἶναι, καί, ὅπερ ἐν τοῖς πρόσθεν ἐλέγομεν, 

ταὐτὸν ἔγκλημα ἔχειν.                                                                                   87a

케베스가 말했소. "그럼 제가 말씀드리죠. 제게는 여전히 같은

곳에 그 논의가 있는 것처럼, 또한, 앞서 우리가 논하던 바, 똑같은

불평거리를 가진 채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ὅτι μὲν γὰρ ἦν ἡμῶν ἡ ψυχὴ καὶ                               87a

πρὶν εἰς τόδε τὸ εἶδος ἐλθεῖν, οὐκ ἀνατίθεμαι μὴ οὐχὶ πάνυ 

χαριέντως καί, εἰ μὴ ἐπαχθές ἐστιν εἰπεῖν, πάνυ ἱκανῶς 

ἀποδεδεῖχθαι· ὡς δὲ καὶ ἀποθανόντων ἡμῶν ἔτι που ἔστιν, 

οὔ μοι δοκεῖ τῇδε.                                                                                               5

왜냐하면 한편으로 우리의 영혼이 여기 이 형상에 이르기 전에도 

있었다는 것은, 꽤나 반길 만하게 그리고, 만일 말씀드리기에 

거슬리는 일이 아니라면, 꽤나 충분하게 입증되었다는 입장을 

철회하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죽는 경우에도 여전히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제게는 그런 식으로 여겨지지 않으니까요. 

                             ὡς μὲν οὐκ ἰσχυρότερον καὶ πολυ-                                        5

χρονιώτερον ψυχὴ σώματος, οὐ συγχωρῶ τῇ Σιμμίου 

ἀντιλήψει· δοκεῖ γάρ μοι πᾶσι τούτοις πάνυ πολὺ διαφέ-

ρειν. 

영혼이 신체보다 더 강력하지도 않고 더욱 오래 지속하는 것도

아니라는, 심미아스의 반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그

모든 점에서 영혼이 훨씬 많이 뛰어나다고 여겨지니까요.

        τί οὖν, ἂν φαίη ὁ λόγος, ἔτι ἀπιστεῖς, ἐπειδὴ ὁρᾷς 

ἀποθανόντος τοῦ ἀνθρώπου τό γε ἀσθενέστερον ἔτι ὄν; τὸ 

δὲ πολυχρονιώτερον οὐ δοκεῖ σοι ἀναγκαῖον εἶναι ἔτι                                      b

σῴζεσθαι ἐν τούτῳ τῷ χρόνῳ; 

그 논변은 이리 말할 것입니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아직까지 

불신하는가, 인간이 죽어도 더 약한 부분조차 아직 있는 것을 

보았는데도? 그런데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 그 시간 속에서 

여전히 보존된다는 것이 당신에겐 필연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가?'                                      

                                                  πρὸς δὴ τοῦτο τόδε ἐπί-

σκεψαι, εἴ τι λέγω· εἰκόνος γάρ τινος, ὡς ἔοικεν, κἀγὼ 

ὥσπερ Σιμμίας δέομαι. ἐμοὶ γὰρ δοκεῖ ὁμοίως λέγεσθαι 

ταῦτα ὥσπερ ἄν τις περὶ ἀνθρώπου ὑφάντου πρεσβύτου                                  5

ἀποθανόντος λέγοι τοῦτον τὸν λόγον, ὅτι οὐκ ἀπόλωλεν ὁ 

ἄνθρωπος ἀλλ᾿ ἔστι που σῶς, τεκμήριον δὲ παρέχοιτο 

θοιμάτιον ὃ ἠμπείχετο αὐτὸς ὑφηνάμενος ὅτι ἐστὶ σῶν καὶ 

οὐκ ἀπόλωλεν, καὶ εἴ τις ἀπιστοίη αὐτῷ, ἀνερωτῴη 

πότεορν πολυχρονιώτερόν ἐστι τὸ γένος ἀνθρώπου ἢ                                    c

ἱματίου ἐν χρείᾳ τε ὄντος καὶ φορουμένου, ἀπορκιναμένου 

δὴ ὅτι πολὺ τὸ τοῦ ἀνθρώπου, οἴοιτο ἀποδεδεῖχθαι ὅτι 

παντὸς ἄρα μᾶλλον ὅ γε ἄνθρωπος σῶς ἐστιν, ἐπειδὴ τό γε 

ὀλιγοχρονιώτερον οὐκ ἀπόλωλεν.                                                                      5

그럼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을 검토해 주십시오, 제가 뭐라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지 말입니다. 저로서도 심미아스처럼 어떤 

모상이 필요할 듯하니까요. 제게는 누군가가 노쇠하여 죽은

직조공인 사람에 관하여 그러한 논변을 논할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이 논해진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해체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온전하게 있다고, 그런데 그 직조공 

자신이 직조하여 둘렀던 그 의복을 그가 아직 온전하게 있고 

해체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로 내놓으며, 만일 누군가 그를 

불신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부류가 쓰이고 옮겨지는 의복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인지 아닌지 따져 물어서, 사람의 부류가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고 상대가 대답하면, 더 짧게 

지속하는 것이 해체되어 버리지 않았으니, 그럼 무엇보다도 

적어도 그 사람은 온전하게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리란 그런 논변 말이지요.

                                                       τὸ δ᾿ οἶμαι, ὦ Σιμμία,                                    5

οὐχ οὕτως ἔχει· σκόπει γὰρ καὶ σὺ ἃ λέγω. πᾶς ἂν ὑπολά-

βοι ὅτι εὔηθες λέγει ὁ τοῦτο λέγων· ὁ γὰρ ὑφάντης οὗτος 

πολλὰ κατατρίψας τοιαῦτα ἱμάτα καὶ ὑφηνάμενος 

ἐκείνων μὲν ὕστερος ἀπόλωλεν πολλῶν ὄντων, τοῦ δὲ 

τελευταίου οἶμαι πρότερος, καὶ οὐδέν τι μᾶλλον τούτου                                   d

ἕνεκα ἄνθρωπός ἐστιν ἱματίου φαυλότερον οὐδ᾿ ἀσθενέ-

στερον. 

그런데, 심미아스, 내 생각엔 사정이 그렇지 않다네. 그야 자네도 

내가 논하는 바를 검토해 보게. 모두가 그런 것을 논하는 자는

순진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간주할 걸세. 왜냐하면 이 직조공은 

그런 많은 의복들을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쓰고 또 직조하며 그렇게 

저 많은 것들보다 더 나중에 해체되었지만, 내 생각에 마지막

것보다는 더 앞서 해체되었고, 그 덕에 인간이 뭔가 조금이라도 

의복보다 더 열등한 것도 더 약한 것도 아니니까.

             τὴν αὐτὴν δὲ ταύτην οἶμαι εἰκόνα δέξαιτ᾿ ἂν ψυχὴ 

πρὸς σῶμα, καί τις λέγων αὐτὰ ταῦτα περὶ αὐτῶν μέτρι᾿ ἄν 

μοι φαίνοιτο λέγειν, ὡς ἡ μὲν ψυχὴ πολυχρόνιόν ἐστι, τὸ δὲ                              5

σῶμα ἀσθενέστερον καὶ ὀλιγοχρονιώτερον· 

그런데 이 모상 자체가 신체에 대한 영혼의 관계에 받아들여질 

것이고, 누군가 그것들에 관련하여 바로 그런 말을 한다면 적절히 

말한 것으로 내게 보일 걸세, 영혼은 오래 지속하는 것이지만, 

신체는 더 약하고 더 짧게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이지.

                                                                      ἀλλὰ γὰρ ἂν 

φαίη ἑκάστην τῶν ψυχῶν πολλὰ σώματα κατατρίβειν, 

ἄλλως τε κἂν πολλὰ ἔτη βιῷ―εἰ γὰρ ῥέοι τὸ σῶμα καὶ 

ἀπολλύοιτο ἔτι ζῶντο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ἀλλ᾿ ἡ ψυχὴ ἀεὶ τὸ 

κατατριβόμενον ἀνυφαίνοι―ἀναγκαῖον μεντἂν εἴη, ὁπότε                               e

ἀπολλύοιτο ἡ ψυχή, τὸ τελευταῖον ὕφασμα τυχεῖν αὐτὴν 

ἔχουσαν καὶ τούτου μόνου προτέραν ἀπόλλυσθαι, ἀπολο-

μένης δὲ τῆς ψυχῆς τότ᾿ ἤδη τὴν φύσιν τῆς ἀσθενείας ἐπι-

δεικνύοι τὸ σῶμα καὶ ταχὺ σαπὲν διοίχοιτο.                                                       5

오히려 그는 영혼들 각각이 많은 신체들을 닳아 없앤다고, 특히 

여러 해 동안 살아갈 때 그리 하는데, 왜냐하면 신체는 인간이

살아있을 때에도 여전히 유전하고 해체될 것이나, 영혼은 항상

그 닳아버린 신체를 새로 직조할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해체될 때, 영혼이 마침 그 마지막 직물을 지니고 또한 

오직 이 신체에 비해서만 더 먼저 해체됨이 필연적일 것이니,

영혼이해체되면 그제서야 신체가 그 나약함의 본성을 보여주고

금새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네.

                                                                     ὥστε τούτῳ                                    5

τῷ λόγῳ οὔπω ἄξιον πιστεύσαντα θαρρεῖν ὡς ἐπειδὰν 

ἀποθάνωμεν ἔτι που ἡμῶν ἡ ψυχὴ ἔστιν.                                                     88a

그래서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어딘가에 우리의 영혼이

있다는 그 논변에 아직 확신을 가지고 용기를 낼 만한 것은 

아닌 것이지.

                                                                  εἰ γάρ τις καὶ                                88a

πλέον ἔτι τῷ λέγοντι ἢ ἃ σὺ λέγεις συγχωρήσειεν, δοὺς 

αὐτῷ μὴ μόνον ἐν τῷ πρὶν καὶ γενέσθαι ἡμᾶς χρόνῳ εἶναι 

ἡμῶν τὰς ψυχάς, ἀλλὰ μηδὲν κωλύειν καὶ ἐπειδὰν ἀπο-

θάνωμεν ἐνίων ἔτι εἶναι καὶ ἔσεσθαι καὶ πολλάκις γεν-                                       5

ήσεσθαι καὶ ἀποθανεῖσθαι αὖθις

왜냐하면 만일 누군가가 저렇게 말하는 자에게 자네가 말하는

바에 동의할 것보다 심지어 훨씬 더 많이 동의할 것이라면, 

우리의 영혼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시간대에서만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죽고난 이후에도 일부 사람들의 영혼이 여전히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며 자주 태어날 것이고 또 다시 죽을 

것이라고 허용해주면서 그리 한다면, 

                                                   ―οὕτω γὰρ αὐτὸ φύσει 

ἰσχυρὸν εἶναι, ὥστε πολλάκις γιγνομένην ψυχὴν ἀντέ-

χειν―

그렇게 본성상 강력한 것으로 있어서, 영혼이 여러 차례

태어나면서도 견뎌낼 정도인 것이니, 

          δοὺς δὲ ταῦτα ἐκεῖνο μηκέτι συγχωροῖ, μὴ οὐ πονεῖν 

αὐτὴν ἐν ταῖς πολλαῖς γενέσεσιν καὶ τελευτῶσάν γε ἔν τινι 

τῶν θανάτων παντάπασιν ἀπόλλυσθαι, τοῦτον δὲ τὸν                                       10

θάνατον καὶ ταύτην τὴν διάλυσιν τοῦ σώματος ἣ τῇ ψυχῇ                                b

φέρει ὄλεθρον μηδένα φαίη εἰδέναι

그런데 이런 것들은 허용해주면서 저 부분에는 더 이상 동의해주지 

않는다면, 즉 영혼이 여러 차례의 생성 중에 고생하고 끝을

맞이하고서는 그 죽음들 중 어느 죽음 속에서 완전히 해체되어 

버린다는 데에 동의해 주지 않는다면, 그런데 영혼에 파멸을 

가져오는 그 죽음과 신체로부터의 이러한 분리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ἀδύνατον γὰρ εἶναι 

ὁτῳοῦν αἰσθέσθαι ἡμῶν―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에 의해서도 지각되는 일이 불가능하니, 

                                           εἰ δὲ τοῦτο οὕτως ἔχει, οὐδενὶ 

προσήκει θάνατον θαρροῦντι μὴ οὐκ ἀνοήτως θαρρεῖν, ὃς 

ἂν μὴ ἔχῃ ἀποδεῖξαι ὅτι ἔστι ψυχὴ παντάπασιν ἀθάνατόν τε                              5

καὶ ἀνώλεθρον· εἰ δὲ μή, ἀνάγκην εἶναι ἀεὶ τὸν μέλλοντα 

ἀποθανεῖσθαι δεδιέναι ὑπὲρ τῆς αὑτοῦ ψυχῆς μὴ ἐν τῇ νῦν 

τοῦ σώματος διαζεύξει παντάπασιν ἀπόληται. 

그런데 그 일이 그러하다면, 영혼이 전적으로 불사이며 불멸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할 사람은, 그 누구라도 죽음에 용기를 낼 경우 

무지성적으로 그리 하는 게 아니라면 용기를 낸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네. 그런데 만일 그게 아니라면, 장차 죽을 자는 항상 그 자신의 

영혼을 위해 지금 육신과의 결속 상태에서 완전히 해체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함이 필연적이고."

 

Πάντες οὖν ἀκούσαντες εἰπόντων αὐτῶν ἀηδῶς διετέ-                                    c

θημεν, ὡς ὕστερον ἐλέγομεν πρὸς ἀλλήλους, ὅτι ὑπὸ τοῦ 

ἔμπροσθεν λόγου σφόδρα πεπεισμένους ἡμᾶς πάλιν ἐδό-

κουν ἀναταράξαι καὶ εἰς ἀπιστίαν καταβαλεῖν οὐ μόνον 

τοῖς προειρημένοις λόγοις, ἀλλὰ καὶ εἰς τὰ ὕστερον μέλ-                                    5

λοντα ῥηθήσεσθαι, μὴ οὐδενὸς ἄξιοι εἶμεν κριταὶ ἢ καὶ τὰ 

πράγματα αὐτὰ ἄπιστα ᾖ. 

그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듣고서는 개운치 

못한 상황이 되었소. 나중에 우리가 서로에게 말했던 대로, 

앞선 논의에 의해 지극히 설득되었던 우리가 다시 혼란해진 

것으로 그리고 비단 앞서 언급된 논의들에게만이 아니라,

이후 장차 이야기될 것들 쪽으로도, 우리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배심원들이지 않나 또는 사태 자체마저도 의심할 만한

것들이지는 않을까 하는 불신에 빠진 것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말이오.

 

ΕΧ. Νὴ τοὺς θεούς, ὦ Φαίδων, συγγνώμην γε ἔχω 

ὑμῖν. καὶ γὰρ αὐτόν με νῦν ἀκούσαντά σου τοιοῦτόν τι 

λέγειν πρὸς ἐμαυτὸν ἐπέρχεται· "Τίνι οὖν ἔτι πιστεύσομεν                              d

λόγῳ; ὡς γὰρ σφόδρα πιθανὸς ὤν, ὃν ὁ Σωκράτης ἔλεγε 

λόγον, νῦν εἰς ἀπιστίαν καταπέπτωκεν." 

에케크라테스: 신들께 맹세컨데, 파이돈, 내 여러분을 이해하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지금 당신 말을 듣고서 나 자신을 상대로

이런 어떤 말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가

어떤 말을 확신하겠는가? 그렇게나 지극히도, 소크라테스께서

말씀하셨던 그러한 논의가 설득력이 있었음에도, 지금 불신에

빠져 버렸으니."

                                                                 θαυμαστῶς γάρ 

μου ὁ λόγος οὗτος ἀντιλαμβάνεται καὶ νῦν καὶ ἀεί, τὸ 

ἁρμονίαν τινὰ ἡμῶν εἶναι τὴν ψυχήν, καὶ ὥσπερ ὑπέμνησέν                             5

με ῥηθεὶς ὅτι καὶ αὐτῷ μοι ταῦτα προυδέδοκτο. καὶ πάνυ 

δέομαι πάλιν ὥσπερ ἐξ ἀρχῆς ἄλλου τινὸς λόγου ὅς με 

πείσει ὡς τοῦ ἀποθανόντος οὐ συναποθνῄσκει ἡ ψυχή. 

왜냐하면 이러한 논변이 지금도 또 늘 나를 놀랍도록 사로잡으니, 

우리의 영혼이 어떤 조화라는 것으로, 당신이 그걸 언급하여

내 자신에게도 그것들이 좋게 여겨졌다는 걸 내게 상기시켜준 것 

같기까지 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다시 처음처럼, 죽는 자의

영혼은 함께 죽지 않는다고 나를 납득시켜줄 다른 어떤 논변이

무척이나 필요하다오.

                                                                                         λέγε 

οὖν πρὸς Διὸς πῇ ὁ Σωκράτης μετῆλθε τὸν λόγον; καὶ 

πότερον κἀκεῖνος, ὥσπερ ὑμᾶς φῄς, ἔνδηλός τι ἐγένετο                                 e

ἀχθόμενος ἢ οὔ, ἀλλὰ πρᾴως ἐβοήθει τῷ λόγῳ; καὶ 

ἱκανῶς ἐβοήθησεν ἢ ἐνδεῶς; πάντα ἡμῖν δίελθε ὡς 

δύνασαι ἀκριβέστατα. 

그러니 제우스께 대고 말해 주시오. 소크라테스께서 그 논변을

어찌 추구해 나아가셨소? 당신이 당신들을 그리 말했던 것처럼, 

저분께서도 티가 나게 무언가 불편해 하시게 되었소? 혹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온화하게 그 논변을 도와주셨소? 또 그 

도움은 충분하였소 아니면 부족하였소? 우리에게 모두 다 

능력이 닿는 한 정확하게 상술해 주시오.

 

ΦΑΙΔ. Καὶ μήν, ὦ Ἐχέκρατες, πολλάκις θαυμάσας                                            5

Σωκράτη οὐ πώποτε μᾶλλον ἠγάσθην ἢ πότε παραγενό-

μενος. τὸ μὲν οὖν ἔχειν ὅτι λέγοι ἐκεῖνος ἴσως οὐδὲν                                   89a

ἄτοπον· ἀλλὰ ἔγωγε μάλιστα ἐθαύμασα αὐτοῦ πρῶτον μὲν 

τοῦτο, ὡς ἡδέως καὶ εὐμενῶς καὶ ἀγαμένως τῶν 

νεανίσκων τὸν λόγον ἀπεδέξατο, ἔπειτα ἡμῶν ὡς ὀξέως 

ᾔσθετο ὃ ᾿πεπόνθεμεν ὑπὸ τῶν λόγων, ἔπειτα ὡς εὖ ἡμᾶς                               5

ἰάσατο καὶ ὥσπερ πεφευγότας καὶ ἡττημένους ἀνεκαλέ-

σατο καὶ προύτρεψεν πρὸς τὸ παρέπεσθαί τε καὶ συσκοπεῖν 

τὸν λόγον. 

파이돈: 그야 물론, 에케크라테스, 나는 자주 소크라테스께 

놀랐소만 그 때 그 분 곁에 있던 때보다 더 감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소. 한편으로 저분께서 말씀하실 게 있다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 같았소. 오히려 나로서는 저분께 우선 이 점에 특히나 

놀랐으니, 어찌나 기쁘고도 호의적으로 그리고 존중을 가지고

젊은이들의 그 논의를 수용하셨는지 놀랐고, 다음으로는 어찌나 

예리하게 그 논의들에 의해 우리가 겪은 바를 우리에게서 감지해 

내셨는지, 그 다음으로는 마치 도주하고 패배한 자들을 격려하시듯 

얼마나 훌륭하게 우리를 치유해 주셨는지 그리고 그 논의에 동참하여 

공동탐구하도록 응원해주셨는지 놀랐다오.

 

ΕΧ. Πῶς δή; 

에케크라테스: 정말로 어떻게 응원해주셨소?

 

ΦΑΙΔ. Ἐγὼ ἐρῶ. ἔτυχον γὰρ ἐν δεξιᾷ αὐτοῦ καθή-                                            10

μενος παρὰ τὴν κλίνην ἐπὶ χαμαιζήλου τινός, ὁ δὲ ἐπὶ πολὺ                            b

ὑψηλοτέρου ἢ ἐγώ. καταψήσας οὖν μου τὴν κεφαλὴν καὶ 

συμπιέσας τὰς ἐπὶ τῷ αὐχένι τρίχας―εἰώθει γάρ, ὁπότε 

τύχοι, παίζειν μου εἰς τὰς τρίχας―Αὔριον δή, ἔφη, ἴσως, 

ὦ Φαίδων, τὰς καλὰς ταύτας κόμας ἀποκερῇ.                                                    5

파이돈: 내 말해 보겠소. 그러니까 나는 마침 그분 오른편 

침상 곁 어떤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 분께서는 나보다 꽤나 

더 높은 곳에 계셨소. 그리하여 그 분께서 내 머리를 쓸어내리시고 

목 언저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시고는, 그야 때마다 제 머리카락에

익숙히 장난을 치곤 하셨으니, 그리 하시고는 말씀하셨소. "그럼

아마 내일은, 파이돈, 이 아름다운 머릿결을 자르겠군."

 

Ἔοικεν, ἦν δ᾿ ἐγώ, ὦ Σώκρατες. 

나는 말씀드렸소. "그럴 듯합니다, 소크라테스."

 

Οὔκ, ἄν γε ἐμοὶ πείθῃ. 

"적어도 자네가 내게 설득되었다면, 그렇지 않을 걸세."

 

Ἀλλὰ τί; ἦν δ᾿ ἐγώ. 

나는 말씀드렸소. "허나 무슨 이유로 말씀이십니까?"

 

Τήμερον, ἔφη, κἀγὼ τὰς ἐμὰς καὶ σὺ ταύτας, ἐάνπερ γε 

ἡμῖν ὁ λόγος τελευτήσῃ καὶ μὴ δυνώμεθα αὐτὸν ἀναβιώ-                                   10

σασθαι. καὶ ἐγωγ᾿ ἄν, εἰ σὺ εἴην καί με διαφεύγοι ὁ λόγος,                               c

ἔνορκον ἂν ποιησαίμην ὥσπερ Ἀργεῖοι, μὴ πρότερον 

κομήσειν, πρὶν ἂν νικήσω ἀναμαχόμενος τὸν Σιμμίου τε 

καὶ Κέβητος λόγον.  

그 분께서는 말씀하셨소. "오늘이라네, 나도 나의 자네도 그 

머릿결을 자르는 건, 만약에라도 우리의 논의가 끝나 버리고 

우리가 그 논의를 되살릴 능력이 없다면 말일세. 또한 나로서는, 

내가 자네라면 그리고 그 논의가 나를 피해 달아난다면,

아르고스인들처럼 맹세를 할 걸세, 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논의와 

다시 싸워 승리할 때까지, 그 전에는 머리를 기르지 않으리라고 

말이지."

 

Ἀλλ᾿, ἦν δ᾿ ἐγώ, πρὸς δύο λέγεται οὐδ᾿ ὁ Ἡρακλῆς οἷός                                    5

τε εἶναι. 

나는 말씀드렸소. "허나 두 사람을 상대로는 헤라클레스조차 

어찌할 수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Ἀλλὰ καὶ ἐμέ, ἔφη, τὸν Ἰόλεων παρακάλει, ἕως ἔτι φῶς 

ἐστιν.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럼 나까지 이올라오스로 불러주게, 

아직 빛이 있는 동안 말이지."

 

Παρακαλῶ τοίνυν, ἔφην, οὐχ ὡς Ἡρακλῆς, ἀλλ᾿ ὡς 

Ἰόλεως τὸν Ἡρακλῆ.                                                                                           10

나는 말씀드렸소. "그러면 헤라클레스로서가 아니라, 

이올로스로서 헤라클레스라 불러드리겠습니다."

 

Οὐδὲν διοίσει, ἔφη. ἀλλὰ πρῶτον εὐλαβηθῶμέν τι 

πάθος μὴ πάθωμεν. 

그 분께서는 말씀하셨소. "아무런 차이도 없을 걸세. 그럼 

우선은 우리가 모종의 경험을 겪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세."

 

Τὸ ποῖον; ἦν δ᾿ ἐγώ. 

나는 말씀드렸소. "어떤 경험 말씀이십니까?"

 

Μὴ γενώμεθα, ἦ δ᾿ ὅς, μισόλογοι, ὥσπερ οἱ μισάνθρω-                                  d

ποι γιγνόμενοι· ὡς οὐκ ἔστιν, ἔφη, ὅτι ἄν τις μεῖζον τούτου 

κακὸν πάθοι ἢ λόγους μισήσας.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논변혐오자들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걸세. 마치 인간혐오자들이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말일세."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지. "누군가 논변을 혐오하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악으로서 겪을 일이란 있지 않으니.

                                                    γίγνεται δὲ ἐκ τοῦ αὐτοῦ 

τρόπου μισολογία τε καὶ μισανθρωπία. ἥ τε γὰρ 

μισανθρωπία ἐνδύεται ἐκ τοῦ σφόδρα τινὶ πιστεῦσαι ἄνευ                                 5 

τέχνης, καὶ ἡγήσασθαι παντάπασί γε ἀληθῆ εἶναι καὶ ὑγιῆ 

καὶ πιστὸν τὸν ἄνθρωπον, ἔπειτα ὀλίγον ὕστερον εὑρεῖν 

τοῦτον πονηρόν τε καὶ ἄπιστον, καὶ αὖθις ἕτερον· καὶ ὅταν 

τοῦτο πολλάκις πάθῃ τις καὶ ὑπὸ τούτων μάλιστα οὓς ἂν 

ἡγήσαιτο οἰκειοτάτους τε καὶ ἑταιροτάτους, τελευτῶν δὴ                                  e

θαμὰ προσκρούων μισεῖ τε πάντας καὶ ἡγεῖται οὐδενὸς 

οὐδὲν ὑγιὲς εἶναι τὸ παράπαν. ἢ οὐκ ᾔσθησαι σύ πω τοῦτο 

γιγνόμενον; 

그런데 같은 방식을 통해 논변혐오도 인간혐오도 생겨난다네. 

왜냐하면 인간혐오도 기술을 가지지 못한 채로 누군가를

과도하게 신뢰함을 통해 들어서고, 인간을 전적으로 참되고

건전하며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였다가, 이후 얼마 뒤  

그가 저열하고 믿을 수 없는 자임을 알게 되고, 또 다시 다른 

자를 그리함을 통해 들어서니까. 누군가가 이러한 일을 특히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가장 가까운 동지라 생각할 자들에

의해서조차 여러 차례 겪게 되면, 결국 자주 화를 내다 그들

모두를 증오하게 되고 그 누구의 그 무엇도 전혀 건전하지

못하다 생각하게 되지. 아니면 자네는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였나?"

 

Πάνυ γε, ἦν δ᾿ ἐγώ.                                                                                             5

나는 말씀드렸소. "물론 알고 있습니다."

 

Οὐκοῦν, ἦ δ᾿ ὅς, αἰσχρόν, καὶ δῆλον ὅτι ἄνευ τέχνης τῆς 

περὶ τἀνθρώπεια ὁ τοιοῦτος χρῆσθαι ἐπεχείρει τοῖς ἀνθρώ-

ποις; εἰ γάρ που μετὰ τέχνης ἐχρῆτο, ὥσπερ ἔχει οὕτως ἂν 

ἡγήσατο, τοὺς μὲν χρηστοὺς καὶ πονηροὺς σφόδρα ὀλί-                             90a

γους εἶναι ἑκατέρους, τοὺς δὲ μεταξὺ πλείστους.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소. "그렇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 아닌가? 

또 인간사에 관련한 기술을 갖추지 못한 채로 저러한 자가 인간을 

대하려 시도했다는 게 분명하지 않나? 왜냐하면 만일 어딘가에서 

기술을 갖추어 대했더라면, 사실이 그러한 것처럼 그리 생각하였을 

테니까, 극단적으로 유익한 자들과 저열한 자들은 양편이 저마다 적고, 

그 중간인 자들이 대부분이라고 말일세."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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