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Ἐπεὶ δὲ περὶ τῆς κατὰ κίνησιν λεγομένης δυνάμεως                               25

εἴρηται, περὶ ἐνεργείας διορίσωμεν τί τέ ἐστιν ἡ ἐνέργεια 

καὶ ποῖόν τι. 

운동에 따라 진술되는 가능에 관하여 이야기되었기에, 

현실은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지 현실과 관련하여 

분류해 보도록 한다.

                    καὶ γὰρ τὸ δυνατὸν ἅμα δῆλον ἔσται διαι-

ροῦσιν, ὅτι οὐ μόνον τοῦτο λέγομεν δυνατὸν ὃ πέφυκε κινεῖν 

ἄλλο ἢ κινεῖσθαι ὑπ᾿ ἄλλου ἢ ἁπλῶς ἢ τρόπον τινά, ἀλλὰ 

καὶ ἑτέρως, διὸ ζητοῦντες καὶ περὶ τούτων διήλθομεν.                           30

왜냐하면 그와 동시에 가능한 것이란 것도 다음과 같다는

점이 분류하는 우리에게 분명해질 테니까 말이다. 즉,

본래적으로 자신 이외의 것을 운동시키거나 이외의 것에

의해 운동되기를 단적으로든 특정 방식으로든 그리하는 

이런 것만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도 우리는 가능한

것이라고도 진술하고, 이 점으로 인해 이것들에

관련하여서도 탐구하며 상술했다는 점이 말이다.

                                                                                      ἔστι                    30

δὴ ἐνέργεια τὸ ὑπάρχειν τὸ πρᾶγμα μὴ οὕτως ὥσπερ 

λέγομεν δυνάμει· 

그래서 우리가 가능적으로 그러하다고 진술하는 그런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사태가 존속하는 것이 현실태이다.

                            λέγομεν δὲ δυνάμει οἷον ἐν τῷ ξύλῳ 

Ἑρμῆν καὶ ἐν τῇ ὅλῃ τὴν ἡμίσειαν, ὅτι ἀφαιρεθείη ἄν, 

καὶ ἐπιστήμονα καὶ τὸν μὴ θεωροῦντα, ἂν δυνατὸς ᾖ θεω-

ρῆσαι· τὸ δὲ ἐνεργείᾳ.                                                                               35

그런데 우리는 이를 테면 목재 속에 헤르메스를 그리고 

전체 안에 절반을 가능적으로 있다고 논하는데, 

[헤르메스나 절반이] 분리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

논하고, 알고 있으면서 관조 중이지 않은 자도 그렇게

논하는데, 관조하는 일이 가능할 자라면 그리 진술한다.

반면 다른 경우는 현실태로서 그리 말한다.

                                    δῆλον δ᾿ ἐπὶ τῶν καθ᾿ ἕκαστα τῇ                          35

ἐπαγωγῇ ὃ βουλόμεθα λέγειν, καὶ οὐ δεῖ παντὸς ὅρον ζη-

τεῖν ἀλλὰ καὶ τὸ ἀνάλογον συνορᾶν, ὅτι ὡς τὸ οἰκοδο-

μοῦν πρὸς τὸ οἰκοδομικόν, καὶ τὸ ἐγρηγορὸς πρὸς τὸ κα-             1048b1

θεῦδον, καὶ τὸ ὁρῶν πρὸς τὸ μῦον μὲν ὄψιν δὲ ἔχον, καὶ 

τὸ ἀποκεκριμένον ἐκ τῆς ὕλης πρὸς τὴν ὕλην, καὶ τὸ 

ἀπειργασμένον πρὸς τὸ ἀνέργαστον. 

각각에 따른 것들에 관하여 귀납적으로 우리가

논하려는 바는 분명하고, 모든 것의 규정을 탐구해야

하는 게 아니라 비율을 파악해야 하는데, 건축능력을

갖춘 것에 대해 건축을 한다는 것처럼, 잠드는 것에

대해 깨어 있는 것, 눈을 감지만 지니고는 있는 것에

대해 보는 것, 질료에 대해 질료로부터 형성되어 

나오는 것, 불완전한 것에 대해 완성된 것과 같은 

비례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ταύτης δὲ τῆς διαφο-

ρᾶς θατέρῳ μορίῳ ἔστω ἡ ἐνέργεια ἀφωρισμένη θατέρῳ                        5

δὲ τὸ δυνατόν. 

이런 구분의 한 쪽 부분에 의해 현실태가 규정되어 있도록

다른 한 쪽에 의해 가능한 것이 규정되어 있도록 하자.

                         λέγεται δὲ ἐνεργείᾳ οὐ πάντα ὁμοίως ἀλλ᾿  //231101

ἢ τῷ ἀνάλογον, ὡς τοῦτο ἐν τούτῳ ἢ πρὸς τοῦτο, τόδ᾿ ἐν 

τῷδε ἢ πρὸς τόδε· τὰ μὲν γὰρ ὡς κίνησις πρὸς δύναμιν 

τὰ δ᾿ ὡς οὐσία πρός τινα ὕλην. 

그런데 현실태로 모든 것들이 마찬가지로 진술되는 게 

아니라 비례관계로, 이것이 이것 안에 혹은 이것에 대해

있듯, 특정한 것이 특정한 것 안에 혹은 그에 대해 현실태라

진술된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은 가능에 대해 운동으로서

또 어떤 것들은 모종의 질료에 대해 실체로서 진술되기

때문이다. 

                                                   ἄλλως δὲ καὶ τὸ ἄπειρον 

καὶ τὸ κενόν, καὶ ὅσα τοιαῦτα, λέγεται δυνάμει καὶ ἐνερ-                          10

γείᾳ <ἢ> πολλοῖς τῶν ὄντων, οἷον τῷ ὁρῶντι καὶ βαδίζοντι καὶ 

ὁρωμένῳ. 

그런데 여타의 방식으로는 무한정한 것허공도, 또

이러한 온갖 것들까지 가능적으로 또 현실태로 있는 것들

중 여러가지 것들에 진술되니, 이를 테면 보고 있거나

걷고 있거나 보이고 있는 것에게 그러하다.

<ἢ> 삽입할 경우: ἄλλως ... ἢ in other way from. 

무한정도 허공도 이런 온갖 것들까지도, 가능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있는 것들 중 많은 것들, 이를 테면

보고 있는 것과 걷고 있는 것 그리고 보여지고 있는

것에 관련된 경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술된다.

                 ταῦτα μὲν γὰρ ἐνδέχεται καὶ ἁπλῶς ἀληθεύε-

σθαί ποτε (τὸ μὲν γὰρ ὁρώμενον ὅτι ὁρᾶται, τὸ δὲ ὅτι 

ὁρᾶσθαι δυνατόν)· τὸ δ᾿ ἄπειρον οὐχ οὕτω δυνάμει ἔστιν ὡς 

ἐνεργείᾳ ἐσόμενον χωριστόν, ἀλλὰ γνώσει. τὸ γὰρ μὴ                             15

ὑπολείπειν τὴν διαίρεσιν ἀποδίδωσι τὸ εἶναι δυνάμει ταύ-

την τὴν ἐνέργειαν, τὸ δὲ χωρίζεσθαι οὔ.

이런 것들은 단적으로도 언젠가 참이 되는 일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한편은 보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다른

한편은 보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진술되니까). 반면 무한정한 것은 현실적으로 독립된 

것으로서 있을 것이라 그런 식으로 가능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인식에 의해서 그러한 것이다. 왜냐하면 분할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현실태가 가능적으로

있다는 것을 제시하지만, 독립되어 있다는 것은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 ὑπολείπειν : intr. had ceased.

>운동에 한정하여 가능=현실적으로 있게 될 것 이라면 

사유에서 가능=? 실현되지 않더라도 사유할 수 있는 것. 

무한은 무한하게 분할하는 사유를 허용하지만 

현실에서 그러한 분할이 이루어지거나 완수되진 않는다.

>> 운동은 운동인 한에서 미완. 무한분할은 운동 처럼

미완의 변화 자체의 현실태?

Ἐπεὶ δὲ τῶν πράξεων ὧν ἔστι πέρας οὐδεμία τέλος 

ἀλλὰ τῶν περὶ τὸ τέλος, οἷον τὸ ἰσχναίνειν ἢ ἰσχνασία 

[ὰὐτό], αὐτὰ δὲ ὅταν ἰσχναίνῃ οὕτως ἐστὶν ἐν κινήσει, μὴ                        20

ὑπάρχοντα ὧν ἕνεκα ἡ κίνησις, οὐκ ἔστι ταῦτα πρᾶξις ἢ 

οὐ τελεία γε (οὐ γὰρ τέλος)· ἀλλ᾿ ἐκείνη <ᾗ> ἐνυπάρχει τὸ 

τέλος καὶ [ἡ] πρᾶξις. 

한계가 있는 행위들은 아무것도 목적은 아니나 목적 

주위의 것들에 속하는데, 이를 테면 감소시키는 것이나 

감소는, 그것들이 감소시킬 때 그런 식으로 운동 내에

있는데, 해당 운동이 그것을 위한 바인 목적들이 현존하지 

않는 채로 그러하니, 이것들은 행위로 있지 않거나 적어도

완성된 행위로 있지는 않다 (목적이 아니기에). 허나 목적이

그 안에 내재하는 저 운동은 행위이기도 하다. 

> 한계가 있는 행위들은 목적 주변부 것들인데, 

이것들은 운동 내에 있고, 행위나 완성이 아니다. 

목적이 내재하는 운동이 행위이다.

한계가 있는 행위들, 목적이 아니고 완전한 행위가 아닌 

그런 행위들, 운동 안에 있는 행위들. 

                                 οἷον ὁρᾷ ἅμα <καὶ ἑώρακε,> καὶ φρονεῖ <καὶ 

πεφρόνηκε,> καὶ νοεῖ καὶ νενόηκεν, ἀλλ᾿ οὐ μανθάνει καὶ μεμά-

θηκεν οὐδ᾿ ὑγιάζεται καὶ ὑγίασται· εὖ ζῇ καὶ εὖ ἔζηκεν ἅμα,                     25

καὶ εὐδαιμονεῖ καὶ εὐδαιμόνηκεν. εἰ δὲ μή, ἔδει ἄν ποτε παύε-

σθαι ὥσπερ ὅταν ἰσχναίνῃ, νῦν δ᾿ οὔ, ἀλλὰ ζῇ καὶ ἔζηκεν. 

이를 테면 보고 있는 동시에 보았고, 사려하는 것과 동시에 

사려하였으며, 사유하는 동시에 사유하였으나, 배우면서 

배운 것도 아니고 건강해지고 있으면서 건강해진 것도 

아니다. 잘 살아가면서 동시에 잘 산 것이고, 행복하게 

있으면서 행복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감소시킬

때처럼 언젠가 중단하는 일이 필요했을 것이나, 실은

그렇지 않고, 살아가고 있고 또한 살았다.

> 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한계가 없다. 보는 동시에 보았다.

배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한계가 있다. 배우고 있는 

것과 배워서 완료된 것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복: 그 자체가 목적이고 한계가 없다. 행복한 중인 것과 

행복하게 된 것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봄과 행복은 같은 종류의 행위인가? 

구분은 둘로만 나오는 것 같다 by Kang.

                                                     

τούτων δὴ <δεῖ> τὰς μὲν κινήσεις λέγειν, τὰς δ᾿ ἐνεργείας. 

πᾶσα γὰρ κίνησις ἀτελής, ἰσχνασία μάθησις βάδισις οἰκοδό-

μησις· αὗται δὴ κινήσεις, καὶ ἀτελεῖς γε.                                                   30

그래서 그것들 중 일부는 운동들로 논해야 하고, 

또 일부는 현실태들로 논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운동은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감소도 배움도 걸음도 건축도. 

그래서 이런 것들은 운동이며, 또한 적어도 미완의 

운동이다.

                                                                οὐ γὰρ ἅμα                                30

βαδίζει καὶ βεβάδικεν, οὐδ᾿ οἰκοδομεῖ καὶ ᾠκοδόμηκεν, οὐδὲ 

γίγνεται καὶ γέγονεν ἢ κινεῖται καὶ κεκίνηται, ἀλλ᾿ ἕτε-

ρον, [καὶ κινεῖ καὶ κεκίνηκεν·] ἑώρακε δὲ καὶ ὁρᾷ ἅμα τὸ 

αὐτό, καὶ νοεῖ καὶ νενόηκεν. 

왜냐하면 걷고 있는 동시에 걸은 것도 아니고, 건축하고 

있다고 건축을 한 것도 아니며, 생성되면서 생성되었거나 

운동되면서 운동된 것도 아니라, [운동시키고 있는 것도 

운동 시킨 것도]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것을 

동시에 보았고 또한 보고 있으며, 사유하고 있기도 하고 

사유하였기도 하다.

                                             τὴν μὲν οὖν τοιαύτην ἐνέργειαν 

λέγω, ἐκείνην δὲ κίνησιν. τὸ μὲν οὖν ἐνεργείᾳ τί τέ ἐστι                           35

καὶ ποῖον, ἐκ τούτων καὶ τῶν τοιούτων δῆλον ἡμῖν ἔστω. 

그러므로 나는 이런 것을 현실태라고, 저런 것은 운동이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것은 현실태로 무엇이자 

어떠한 것으로 있는지,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도 우리에게 

분명한 것으로 있다고 하자. 

 

>> 인식은 변화나 운동이라 할 수 있는가?

>> 건축술 - 건축 활동 - 건축물 

      앎 - 사유 - ?

      (운동 전 - <운동 과정) - 정지>

      정지 - 운동 - 정지.

 

7. //231108

Πότε δὲ δυνάμει ἔστιν ἕκαστον καὶ πότε οὔ, διοριστέον· 

οὐ γὰρ ὁποτεοῦν. οἷον ἡ γῆ ἆρ᾿ ἐστὶ δυνάμει ἄνθρωπος; ἢ οὔ,     1049a1

ἀλλὰ μᾶλλον ὅταν ἤδη γένηται σπέρμα, καὶ οὐδὲ τότε 

ἴσως; 

각각의 것이 언제 가능적으로 있고 언제 그렇지 않은지, 

정의해야만 한다. 언제든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땅은 가능적으로 인간인가? 아니면 그게 아니라, 오히려 

씨앗으로 생성되고 난 때에 그러한가? 어쩌면 이 때 조차도

아닌가?

          ὥσπερ οὖν οὐδ᾿ ὑπὸ ἰατρικῆς ἅπαν ἂν ὑγιασθείη οὐδ᾿ 

ἀπὸ τύχης, ἀλλ᾿ ἔστι τι ὃ δυνατόν ἐστι, καὶ τοῦτ᾿ ἔστιν 

ὑγιαῖνον δυνάμει.                                                                                      5 

마치 의술에 의해서도 우연으로부터도 모든 것이 건강해질

것이 아니라, [건강해짐이] 가능한 것으로 있는 무언가로

있어서, 바로 이런 것이 가능적으로 건강한 것으로서 있는

그런 것처럼.

                            ὅρος δὲ τοῦ μὲν ἀπὸ διανοίας ἐντελε-                          5

χείᾳ γιγνομένου ἐκ τοῦ δυνάμει ὄντος, ὅταν βουληθέντος γί-

γνηται μηθενὸς κωλύοντος τῶν ἐκτός, ἐκεῖ δ᾿ ἐν τῷ ὑγια-

ζομένῳ, ὅταν μηθὲν κωλύῃ τῶν ἐν αὐτῷ· 

그런데 한편으로 사유를 통해 가능적으로 있는 것으로부터 

완성태로 생성되는 것의 규정은, 외부의 것들 중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을 때 누군가 바라서 생성되는 경우인데, 반면 

저 경우 건강해지는 것 안에서는, 내부의 것들 중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을 경우이다.

                                                                  ὁμοίως δὲ δυ-

νάμει καὶ οἰκία· εἰ μηθὲν κωλύει τῶν ἐν τούτῳ καὶ τῇ 

ὕλῃ τοῦ γίγνεσθαι οἰκίαν, οὐδ᾿ ἔστιν ὃ δεῖ προσγενέσθαι ἢ                      10

απογενέσθαι ἢ μεταβαλεῖν, τοῦτο δυνάμει οἰκία·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ὡσαύτως ὅσων ἔξωθεν ἡ ἀρχὴ τῆς γενέσεως. 

건물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가능적으로 있다. 만일 건물에 

내재하는 그리고 건물이 생성됨의 질료에 내재하는 것들

중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는다면, 또한 추가됨이나 제거됨 

혹은 변화가 필요한 바가 있지도 않다면, 이런 것이 

가능적으로 건물로 있다. 생성의 원리가 외부로부터 

오는 여타의 것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방식이다.

καὶ ὅσων δὴ ἐν αὐτῷ τῷ ἔχοντι, ὅσα μηθενὸς τῶν ἔξωθεν 

ἐμποδίζοντος ἔσται δι᾿ αὐτοῦ· οἷον τὸ σπέρμα οὔπω (δεῖ γὰρ 

ἐν ἄλλῳ <πεσεῖν> καὶ μεταβάλλειν), ὅταν δ᾿ ἤδη διὰ τῆς αὑτοῦ              15

ἀρχῆς ᾖ τοιοῦτον, ἤδη τοῦτο δυνάμει· ἐκεῖνο δὲ ἑτέρας ἀρ-

χῆς δεῖται, ὥσπερ ἡ γῆ οὔπω ἀνδριὰς δυνάμει (μετα-

βαλοῦσα γὰρ ἔσται χαλκός). 

자체 내에 [생성의 원리를] 지니고 있는 것들의 경우에도, 

외부로부터의 것들 중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으면 자신을 

통해 있을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테면 씨앗은 아직

[가능적으로 무언가로] 있지 않은데 (여타의 것 내에 <들어가>

변화해야 하니까), 이미 자신의 원리를 통해 이러한 것으로서

있을 경우, 이런 것이 이제 가능적으로 있다. 반면 저 씨앗은

또 다른 원리가 필요한데, 땅이 아직 가능적으로 인물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변화하여 청동으로 있을 테니).

                                              ἔοικε δὲ ὃ λέγομεν εἶναι οὐ 

τόδε ἀλλ᾿ ἐκείνινον―οἷον τὸ κιβώτιον οὐ ξύλον ἀλλὰ ξύλι-

νον, οὐδὲ τὸ ξύλον γῆ ἀλλὰ γήϊνον, πάλιν ἡ γῆ εἰ οὕτως                          20

μὴ ἄλλο ἀλλὰ ἐκείνινον―ἀεὶ ἐκεῖνο δυνάμει ἁπλῶς τὸ ὕστε-

ρόν ἐστιν. 

그런데 우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여기 이것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 된 것[?]인 듯하다. 이를 테면 상자는 목재가 아니라 

목재로 된 것, 목재도 흙이 아니라 흙으로 된 것, 또 다시 흙도 

만일 그런 식으로 하자면 다름 아니라 저 어떤 것으로 된 

것이다. 언제나 [저것으로 된 것의] '저것'은 단적으로 다음

것으로 가능적으로 있다.

 

                 οἷον τὸ κιβώτιον οὐ γήϊνον οὐδὲ γῆ ἀλλὰ ξύλινον· 

τοῦτο γὰρ δυνάμει κιβώτιον καὶ ὕλη κιβωτίου αὕτη, ἁπλῶς 

μὲν τοῦ ἁπλῶς τουδὶ δὲ τοδὶ τὸ ξύλον. 

이를 테면 상자는 땅으로 된 것도 땅도 아니라 목재로 된 

것으로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가능적 상자이고

상자의 질료인데, 단적인 것은 단적인 것의, 바로 여기 이

목재는 바로 여기 이 상자의 질료이기 때문이다.

                                                              εἰ δέ τί ἐστι πρῶ-

τον ὃ μηκέτι κατ᾿ ἄλλο λέγεται ἐκείνινον, τοῦτο πρώτη                            25

ὕλη· οἷον εἰ ἡ γῆ ἀερίνη, ὁ δ᾿ ἀὴρ μὴ πῦρ ἀλλὰ πύρινος,

τὸ πῦρ ὕλη πρώτη οὐ τόδε τι οὖσα. 

그런데 만일 더 이상 여타의 것에 따라 어떤 것으로 된

것이라 진술되지 않는 최초의 무언가가 있다면, 이런

것이 제일 질료일 것이다. 이를 테면 만일 땅이 공기로

된 것, 그런데 공기는 불이 아니라 불로 된 것이라면,

불은 여기 이 어떤 것으로 있지 않으면서 질료로서는

첫 번째인 것이다.

                                                         τούτῳ γὰρ δια-       //231122

φέρει τὸ καθ᾿ οὗ καὶ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τῷ εἶναι τόδε τι ἢ 

μὴ εἶναι· οἷον τοῖς πάθεσι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ἄνθρωπος καὶ 

σῶμα καὶ ψυχή, πάθος δὲ τὸ μουσικὸν καὶ λευκόν                                  30

그에 대한 것인 바의 것과 기저에 놓이는 것은 이 점에서

차이가 나는데, 여기 이 무언가로 있는가 아니면 있지

않은가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겪음들에게 기저에

놓이는 것은 인간과 신체 그리고 영혼이고, 겪음은

음악적임과 백색임인 것이다.

                                                                               (λέ-                            30

γεται δὲ τῆς μουσικῆς ἐγγενομένης ἐκεῖνο οὐ μουσικὴ ἀλλὰ 

μουσικόν, καὶ οὐ λευκότης ὁ ἄνθρωπος ἀλλὰ λευκόν, οὐδὲ 

βάδισις ἢ κίνησις ἀλλὰ βαδίζον ἢ κινούμενον, ὡς τὸ ἐκεί-

νινον)·

(그런데 음악이 안에 생성될 때 저것은 음악이 아니라 

음악적인 것이라고, 또 백색의 경우에도 인간이 그것으로 

말해지는 게 아니라 백색인 자라고 말해지고, 걸음으로도 

운동으로도 말해지지 않고 걷는 자나 운동하는 자라고, 

저러한 것이라 말해지듯 그렇게 진술된다.)

           ―ὅσα μὲν οὖν οὕτω, τὸ ἔσχατον οὐσία· ὅσα δὲ μὴ 

οὕτως ἀλλ᾿ εἶδός τι καὶ τόδε τι τὸ κατηγορούμενον, τὸ                            35

ἔσχατον ὕλη καὶ οὐσία ὑλική.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있는 것들은, 궁극적으로 실체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있지 않고 모종의 형상이나 여기 이 

무언가라고 진술되는 것으로 있는 것들은, 궁극적으로

질료이자 질료적 실체이다.

                                               καὶ ὀρθῶς δὴ συμβαίνει τὸ 

ἐκείνινον λέγεσθαι κατὰ τὴν ὕλην καὶ τὰ πάθη· ἄμφω                    1049b1

γὰρ ἀόριστα. πότε μὲν οὖν λεκτέον δυνάμει καὶ πότε οὔ, 

εἴρηται.

더욱이 어떤 것으로 된 것이 질료에 따라 또 겪음들에 

따라 진술된다는 점이 올바르게 귀결된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비규정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 가능적으로 라고 또 언제 그렇지 않다고 

진술되어야만 하는지가 이야기되었다.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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