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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oistros</title>
    <link>https://oistros.tistory.com/</link>
    <description>ἀ&amp;lambda;&amp;lambda;᾿ &amp;omicron;ὐ&amp;delta;ὲ&amp;nu; ἥ&amp;delta;&amp;iota;&amp;omicron;&amp;nu; ἔ&amp;mu;&amp;omicron;&amp;iota;&amp;gamma;&amp;epsilon;, &amp;epsilon;ἰ &amp;mu;ὴ &amp;tau;&amp;upsilon;&amp;gamma;&amp;chi;ά&amp;nu;&amp;epsilon;&amp;iota; ἀ&amp;lambda;&amp;eta;&amp;theta;ὲ&amp;sigmaf; ὄ&amp;nu;.</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Wed, 20 May 2026 06:34:0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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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버러지</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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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oistro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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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Saul A. Kripke, Naming and Necessity. 12th. Lecture Ⅲ.</title>
      <link>https://oistros.tistory.com/1390</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106] Lecture Ⅲ: January 29, 1970&lt;/b&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뭐라도 성취된 바가 있다면 지금까지 성취된 건 무엇인가? 첫 번째로, 나는 어떻게 이름이 그 지칭을 얻는지에 관한 대중적 관점이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름의 지칭이 일부 고유하게 정체화하는 표식들에 의해, 지칭물에 의해 충족되고 화자에 의해 해당 지칭물에 대해 참이라고 알려지거나 믿어지는 일부 고유 속성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첫째로, 화자에 의해 믿어지는 속성들은 고유한 방식으로 규정해주는 것일 필요가 없다. 둘째로, 그 속성들이 그러한 경우에서조차, 그것들은 화자의 용법에 대한 실제 지칭물에 대해 고유하게 참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도 참이거나 혹은 아무것에 대해서도 참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는 화자가 어떤 개인에 관한 잘못된 믿음들을 가지는 경우이다. 그는 다른 개인에 관한 옳은 믿음들을 가지는 게 아니라, 특정 개인에 관한 잘못된 믿음들을 가진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그 지칭은 실제로 화자가 해당 이름을 사용하는 화자들의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름은 연결에서 연결로 구전되어 그에게 이행되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두 번째로, 나는 일부 특수한 경우들, 특히 최초 세례식의 일부 경우들에서, 지칭물이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것&lt;i&gt;이라고&lt;/i&gt; 하더라도, 해당 속성이 여러 지시의 경우들에서 수행하고 있는 일은 동의어를 제시하는 것, 이름이 그에 대해 축약인 어떤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기술(혹은 속성)은 차라리 지칭을 고정시키고 있다. 그것은 해당 대상에 대한 일부 우연적 표식들로써 그 지칭을 고정시킨다. 그 대상을 나타내는 이름은 &lt;b&gt;[107]&lt;/b&gt; 그래서 해당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그 대상이 문제의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 반사실적 상황들을 지칭하는 경우에서조차 그렇게 사용된다. 1m 사례가 그 예시였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끝으로, 지난 강연의 말미에 우리는 동일성 진술들에 관해 논했다. 동일성 진술들은 아주 단순해 보일 테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쩐지 아주 혼란스럽다. 나는 내 자신의 경우에서 이 관계에 의해 산출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혼동들을 바로잡을 수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 관계가 변경시켜야 할 만큼 혼란스러운 것임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키케로'와 '툴리' 같은 두 이름을 가지고 키케로가 툴리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키케로와 툴리 둘 모두인 대상에 대해 그것이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실제로 말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반대로, '키케로는 툴리이다'가, 내가 앞서 언급했듯, 경험적 발견을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철학자들은, 프레게조차 그의 저술 초기 한 단계에서, 동일성은 이름들 사이의 관계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이 말하기로 동일성은 대상과 대상 자체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이름들이 같은 대상을 지시할 때 두 이름 사이에 견지되는 관계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런 일은 더욱 최근 연구에서조차 나타난다. 내가 가지고 오진 않았지만, 특출난 논리학자 J. B. Rosser는 그의 책&amp;nbsp;&lt;i&gt;Logic for Mathematicians&lt;/i&gt;에서&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우리가 오직 'x'와 'y'가 같은 대상에 대한 이름이라면 오직 그 경우에만 x=y라고 말한다고 썼다. 그는 대상 자체에 관한 합치진술(corresponding statement), 그 자체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진술이 물론 사소하다고, 또한 그렇기에, 추정컨데, 그 진술은 우리가 뜻하는 바의 것일 수 없다고 언급한다. 이는 동일성 관계여야 할 바의 것에 대한 유난히 특이한 전형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지극히 드물게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무장 흑인 민족주의 운동 외부에서는 아무도 'x'라고 명명된 적이 없다. 물론 진지하게 말해서 열린 문장 'x=y' 내의 'x'와 'y'는 전혀 이름이 아니고, 변항들이다. 또한 이것들은 닫힌 문장 내에서 종속 변수들로서 동일성을 갖고 출현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모든 x와 y에 대해, 만일 x=y라면 &lt;b&gt;[108]&lt;/b&gt; y=x라고, 혹은 그와 같은 어떤 것을 말한다면, 해당 진술에서 아무런 이름도 출현하지 않고, 이름들에 관해 어떤 것이든 말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진술은 설령 인류가 존재한 적이 없었거나, 존재했더라도 이름에 대한 현상을 만들어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참일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만일 누구든 동일성에 대한 이 특수한 설명에 끌린다면, 그에게 그런 설명을 우리가&amp;nbsp;&lt;i&gt;허락해줬다고&lt;/i&gt; 가정해 보자. 동일성이 영어에서 이름들 사이의 관계&lt;i&gt;였다&lt;/i&gt;고 가정하자. 나는 내가 지금 대상과 그 대상 자체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것으로 규정한 'schmidentity' (영단어가 아니다) 라고 불리는 인위적 관계를 도입할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럼 이제 키케로와 툴리와 schmidentical한지 여부가 질문될 수 있고, 만일 그 질문이 제기된다면, 이것이 이름들 사이의 관계였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본래의 동일성 진술 경우에서 생각되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이 이 진술에 대해서도 성립할 것이다. 만일 누구든 이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나는 그가 그리하여 동일성에 대한 그의 본래 설명이 본래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에 대해 아마 필연적이지 않았겠다는 것을, 그리고 아마 가능하지 않았겠다는 것을, 또한 그러므로 그의 설명이 폐기되어야 할 것이며, 동일성은 사물과 그 사물 자체 사이의 관계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리란 것을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장치는 상당수의 철학적 문제들에 사용될 수 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우리는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이 어쨌든 참일 때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설령 그것을&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알지 못할지 모른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가 개밥바라기별을 저녁에 &lt;b&gt;[109]&lt;/b&gt; 보인 특정 별로 그리고 샛별을 아침에 보인 특정 별이나 특정 천체로 정체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저녁과 아침에 바로 그 위치들에서 상이한 두 행성들이 보였을 가능세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최소한 둘 중 하나, 어쩌면 둘 모두 개밥바라기별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그럼 그 경우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상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저녁에 이 위치에서 보인 행성이 아침에 이 위치에서 보인 행성이 아니었던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상황은 아니다. 그건 또한 어쩌면, 만일 사람들이 이 행성들에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란 이름을 부여했더라면, 개밥바라기별과는 다른 어떤 행성이 '개밥바라기별'이라 불리었던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경우조차, 그것은 개밥바라기별 자체가 샛별이 아니었던 상황은 아닐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3&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3&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3)&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3)&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3&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내가 언급했듯 이러한 상황들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의 일부는 정체(동일)화로부터 유래하거나, 내가 제시할 것처럼, 우리가 미리 &lt;i&gt;선험적으로&lt;/i&gt; 알 수 있는 것과 필연적인 것 사이의 혼동에서 유래한다. 특정 진술들―그리고 동일성 진술이 내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진술의 표준인데―만일 어찌됐든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어야만 한다. &lt;i&gt;만일&lt;/i&gt; 그런 동일성 진술이 참이라면 그 진술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점을, 사람들은&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철학적 분석에 의해 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한 가지 조건: 내가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는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때 , 나는 물론 금성이란 그런 행성이 아예 없고, 그래서 개밥바라기별도 샛별도 전혀 없는 상황들이 성립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경우,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동일성 진술이 참일지, 거짓일지, 혹은 참도 아니고&amp;nbsp;&lt;b&gt;[110]&lt;/b&gt; 거짓도 아닐지 여부가 문제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4&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4&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4)&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4)&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리고 만일 우리가 마지막 선택지를 고른다면, '개밥바라기별 = 샛별'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인가? 혹은 우리는 필연적 참이 모든 가능세계에서&amp;nbsp;&lt;i&gt;참&lt;/i&gt;이기를 요구해야 할까? 나는 그런 문제 일체를 내 고려사항 밖에 남겨두고 있다. 만일 우리가 좀 더 신중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그 진술을 조건문으로, '만일 개밥바라기별이 존재한다면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고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 주의깊게 오직 후자만이 필연적인 것으로 취하며 그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 조건문은 우리를 내가 여기서 논할 수 없는 문제, 존재의 단일 귀속 문제에 연루시킨다. 특히, 명명에 대한 기술구 이론에 호의적인 철학자들은 종종 대상에 대해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조차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곤 한다. 대상의 현존에 관한 것으로 간주되는 진술은 실제로는, 주장된 바에 따르자면, 특정 기술 혹은 속성이 충족되는지 여부에 관한 진술이다. 내가 이미 언급했듯,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여기서 존재 문제들에 개입할 수 없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나는 이 지점에서&amp;nbsp;&lt;i&gt;de re&lt;/i&gt; 양상에 관한, 본질 속성을 지니는 대상에 관한 여타의 고찰들이, 내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선험성과 필연성 사이의 구분을 인지할 경우에만 제대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누군가는 본질을 경험적으로 아주 잘 발견해낼지도 모른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amp;nbsp;Timothy Sprigge의 논문에 본질 속성으로 상정되는 것들의 일부 사례들이 있다.&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2&quot;&gt;내재주의자는 [일부 본질 속성이 있다고 믿는 자를 의미한다] 여왕이 왕가의 혈통으로 태어났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가 뜻하는 바는&amp;nbsp;&lt;i&gt;이 &lt;/i&gt;&lt;i&gt;개인&lt;/i&gt;이 왕가의 혈통으로 태어났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본질주의자는 그 여왕이 사실은 그녀의 부모로 여겨진 자들의 자식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비밀리에 입양되었다는 것이 확정되었다고 전하는 뉴스 보도에 아무런 모순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왕가의 혈통이라는 명제는 종합 명제이다. . .&lt;br /&gt;&lt;b&gt;[111]&lt;/b&gt; 꽤 오랜 시간 [반-본질주의자]가 승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약간 지나치게 억지스러워 보이는 시점이 온다. 내재주의자는 우리가 여왕이라 부르는 개별자가 그녀의 현존 중 어떤 단계에서도 인간이라는 속성을 가지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추정한다. 만일 반-내재주의자가 이를 인정한다면, 그 여왕이 말하자면 언제나 백조로 있다는 속성을 가졌으리란 것이 논리적으로 구상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 그는 그녀가 최소한 하나의 내재적 속성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한다. 만일 다른 한편으로 그가 여왕이 인간이었던 것은 우연적 사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수용하기 곤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인간이 결코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구상 가능한 것으로 정말로 고려할 수 있는가?&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5&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5&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5)&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5)&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녀의 현존 중 어떤 단계에서도'와 '언제나'는 그녀가 지금 당장 백조로 변할, 생각해 보자면 사악한 마녀나 상냥한 마녀에 의해 그렇게 될 가능성들을 허용하기 위해 도입하는 정당화 요소들로 추정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논의 속에서 내가 발견한 한 가지 혼동은 첫 번째 사례에서 스프리지가 우리가 그 여왕이 실제 그녀의 부모와는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lt;i&gt;발표&lt;/i&gt;를 가졌다고 가정함에 있어서 어떤 모순이 있을 것인지 여부에 관해 논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경우 아무런모순도 없다. 그렇더라도, 유사하게, 우리가 이것을 여성인 것으로 생각한 그 여왕이 사실은 인간 모습을 한 천사였거나, 서출에게 승계가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 왕가에 의해 영리하게 설계된 자동기계였거나 혹은 그런 어떤 것이었다고 하는 &lt;i&gt;발표&lt;/i&gt;에도 아무런 모순은 없다. 이 발표들 중 어느 쪽도 우리가 가능적으로&amp;nbsp;&lt;i&gt;발견&lt;/i&gt;하지 못할 것들을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여인에 관련하여 그녀가 왕가의 혈통이었을지 혹은 인간이었을지 물을 때 묻고 있는 그 질문은 무엇인가? 왕가의 혈통이란 것은 조금 복잡한데, 왜냐하면 그녀가 왕가의 혈통이었다는 것이 필연적이기 위해서는 이 특정 가계가 어떤 시점에 왕권을 획득하였다는 것이 필연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의 사실은 우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lt;b&gt;[112]&lt;/b&gt; 그러므로 나는 그녀의 혈통이 왕족이었으리란 것이 우연적&lt;i&gt;이라고&lt;/i&gt; 추정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 질문을 좀 더 다듬어 보자. 그 질문은 실제로 이런 것이어야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여왕, 바로 이 여인 자신이, 실제로 그녀의 부모와는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수 있었는가? 말하자면, 그녀는 그 대신 트루먼 부부의 딸이었을 수 있었는가? 물론 (희망하건데 이 일이 나이 때문에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허황되게 들리지만 그녀가 트루먼 부부의 딸이었다는 발표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을 것이다. 나는 심지어, 어느 쪽 가설에서든 그녀에게 마가렛이라 불리는 자매가 있다는 것이 어쨌든 매우 의심스러워 보인다지만, 이 두 마가렛이 교묘한 방법으로 날아다닌 동일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에도 아무런 모순이 없을지도 모를 것이라 추정한다. 어쨌든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알게되는 일을 상상할 수 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하지만 그런 발견이 실제로 사실은 아니라고 가정하기로 하자. 여왕이 실제로 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서 부모란 무엇인지에 관해 너무 복잡하게 따지지는 말고, 부모란 그들의 신체 조직이 생물학적으로 정자와 난자의 기원인 사람들이라 하도록 하자. 그럼 당신은 아버지의 정자나 어머니의 난자를 다른 신체에 이식했다거나 해서 한 가지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부모였을지 몰랐다는 작위적인 가능성들을 제거하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또 다른 의미에서 그녀의 부모는 여전히 본래의 왕과 왕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바로 이 여성이 트루먼 부부로부터 유래하는 일이 일어났을 그러한 상황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가? 그 부부는 어쩌면 그녀와 여러 속성들이 유사한 아이를 지녔을지도 몰랐다. 아마 어떤 가능세계에서 트루먼 부부는 실제로 영국 여왕이 된 그리고 다른 부모의 자식으로 위장된 아이를 가지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 상황은 여전히 우리가 '엘리자베스 2세'라고 부르는&amp;nbsp;&lt;i&gt;바로 이 여성&lt;/i&gt;이 트루먼 부부의 자식이었던 상황은 아닐 것이거나, 내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lt;b&gt;[113]&lt;/b&gt; 그것은 실제로 엘리자베스에 대해 참인 속성들 상당수를 지닌 어떤 다른 여성이 있었던 상황일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은, 이 가능세계에서, 엘리자베스 그녀 자신은 태어난 적이 있기는 한가? 그녀가 태어난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 상황은, 트루먼 부부가 엘리자베스의 속성들 상당수를 갖춘 자식을 가지더라도, 엘리자베스 그녀 자신은 아예 존재한 적조차 없는 상황일 것이다. 당신이 이 상황을 기술하는 방식을 숙고함으로써만 이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내가 추정하기로, 많은 경우 당신은 이에 대해 납득하지 못할 것이고, 최소한 즉각 납득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납득한 점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어떻게 다른 부모에게서, 총체적으로 다른 정자와 난자로부터 기인한 개인이&amp;nbsp;&lt;i&gt;바로 이 여성&lt;/i&gt;일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만일 그 여성이&amp;nbsp;&lt;i&gt;가정된다면&lt;/i&gt;, 그녀의 삶에서 다양한 것들이 변할 수 있었을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녀가 빈민이 되었으리라거나, 그녀의 왕가 혈통이 알려지지 않았으리라거나, 기타 등등. 누군가에게 그 세계의 선행하는 역사가 특정 시점까지 주어진다고, 그리고 그 시점으로부터 그 역사가 실제 경로로부터 유의하게 분기한다고 해 보자. 이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설령 그녀가 이 부모들로부터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녀가 결코 여왕이 되지 않은 것도 그렇게 가능하다. 심지어 이 부모로부터 그녀가 태어났었더라도, 마크 트웨인의 소설 등장인물처럼&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6&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6&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6)&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6)&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6&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녀가 또 다른 소녀와 뒤바뀌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그녀가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내게는 다른 기원으로부터 유래하는 어떤 것도 이 대상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책상의 경우,&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7&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7&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7)&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7)&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7&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우리는 이 책상이 어떤 나무토막으로부터 유래했는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lt;i&gt;이 책상&lt;/i&gt;이 완전히&amp;nbsp;&lt;i&gt;다른&lt;/i&gt; 나무토막으로부터 제작되었거나, 교묘하게 얼음으로 경화된 물로, 템즈 강에서 가져온 물로 제작되었을 수 있었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달리, 이 책상이 그 강에서 유래한 얼음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lt;b&gt;[114]&lt;/b&gt;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우리가 다른 나무토막으로 혹은 심지어, 이 책상과 외견상 동일한, 얼음으로 책상을 만드는 것을 상상할 수 있더라도, 또 우리가 그 책상을 이 방 안의 바로 이 위치에 둘 수 있었을지라도, 내가 보기에 이건 &lt;i&gt;이&lt;/i&gt; 책상을 다른 나무나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또 다른 책상, 모든 외적 세부사항들에서 이 책상과 &lt;i&gt;유사한&lt;/i&gt;, 또 다른 나무토막 혹은 심지어 얼음으로 제작된 그런 다른 책상을 상상하는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8&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8&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8)&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8)&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8&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9&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9&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9)&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9)&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lt;b&gt;[115]&lt;/b&gt; 이 사례들은 오직 본질 속성들에 대한 사례일 뿐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0&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0&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0)&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0)&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0&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나는 &lt;b&gt;[116]&lt;/b&gt; 내가 지난 강연에서 언급했던 바, 실체들과 실체의 속성들 그리고 자연 종의 속성들에 대한 용어들 사이의 일부 동일성에 대한 더 일반적인 경우를 다루고자 하기에 더 이상 그 문제들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했듯 철학자들은 이론적 동일성을 표현하는 진술들에 매우 큰 흥미를 보였다. 그러한 진술들 중에는 빛이 광자들의 흐름이라거나, 물은 H2O라거나, 번개는 방전이라거나, 금은 원자번호 79번 원소라는 진술 등이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러한 진술들의 상태에 관하여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금과 같은 그런 실체들의 상태에 관한 일부 사유들을 고려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금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철학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해온 사례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금에 대한 재계의 흥미는 통화 안정성 증가로 인해 감소하고 있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1&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렇지만 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해 왔다. &lt;b&gt;[117]&lt;/b&gt; 다음은 임마누엘 칸트가 금에 관해 말한 바이다. (그는 그의 재산을 침대 밑에 둔 부유한 투기꾼이었다.)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사이의 구별을 도입하면서 말한다. '모든 분석 판단은 전적으로 모순율에 의존하고, 그 본성상&amp;nbsp;&lt;i&gt;선험적&lt;/i&gt; 인지로서, 그 판단에 재료를 제공하는 개념이 경험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러하다. 왜냐하면 긍정 분석 판단의 술어는 이미 주어의 개념 내에, 그 술어가 해당 주어에 대해 모순 없이 부정될 수 없는 그러한 주어 개념 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 바로 이러한 이유로 모든 분석 판단은&amp;nbsp;&lt;i&gt;선험적인데&lt;/i&gt;, 개념이 경험적인 때조차 그러하니, 예를 들어, &quot;금은 황색 금속이다&quot;와 같은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 나는 황색 금속이라는 금에 대한 나의 개념을 넘어서는 아무런 경험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바로 그 개념이고, 나는 그 개념을 그 개념 넘어서 살펴보는 일 없이 분석하기만 하면 된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2&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2&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2)&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2)&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2&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나는 독어판을 살펴봐야 했다. '사실 그것이 바로 그 개념이다(It is in fact the very concept)'라는 것은 마치 칸트가 여기서 '금'은 단지 '황색 금속'을&amp;nbsp;&lt;i&gt;의미한다&lt;/i&gt;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만일 그가 그리 말하고 있다면, 그건 특히나 이상하고, 그럼 저것이 그가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니라고 가정해 보도록 하자. 적어도 칸트는 금이 황색 금속이라는 것은 그 개념의&amp;nbsp;&lt;i&gt;부분&lt;/i&gt;이라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이 점을&amp;nbsp;&lt;i&gt;선험적으로&amp;nbsp;&lt;/i&gt;안다고,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이 경험적으로 거짓이라는 것을 가능적으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에 관해 칸트는 옳은가? 첫째로, 내가 하고자 했을 일은 금속으로 있는 금에 관한 부분을 논의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복잡한 일인데, 왜냐하면 우선, 내가 화학을 그다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딱 한 쌍의 문헌을 들여다 보다가, 나는 금속에 대한 좀 더 현상학적인 설명 속에서 금속이란 무엇인지 말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고 하는 진술을 발견했다. (가단성, 연성, 그런 것들에 관해 논하지만, 그 중 어느 것 하나 정확히 들어맞진 않는다.) 다른 한편, 주기율표에 관한 어떤 것이 금속으로서의 원소에 대한 &lt;b&gt;[118]&lt;/b&gt; 기술을 원자가 속성들을 통해 제공했다. 이 기술은 어쩌면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역할을 하는 금속 개념이 실제로 두 개 있다고, 현상학적 개념과 그것을 대체하는 과학적인 개념이 있다고 곧장 생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기술을 거부하지만, 그런 시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일 것이고, 오직 내가 내 고유한 관점을 전개시킨 이후에만 반박될 수 있을 것이기에, '금은 금속이다'라는 것을 이러한 관점들을 도입시키는 사례로서 사용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하지만 더 쉬운 어떤 것을 고려해 보자. 금의 노랑(yellowness)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금이 사실은 노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시각적 환각이 횡행했었다고, 남아프리카와 러시아 그리고 금광이 흔한 다른 지역들에서 대기의 기이한 속성들로 말미암아 그렇다고 가정해 보자. 해당 실체를 노란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 시각적 환각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사실, 일단 그 대기의 기이한 속성들이 제거되고 나면,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푸르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악마가 금광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시각을 변질시켜서 (분명 그들의&amp;nbsp;&lt;i&gt;영혼&lt;/i&gt;은 이미 변질되었다), 그 실체가 노랗지 않더라도, 그 실체가 노랗다고 믿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문에 이런 발표가 있었을까? '아무런 금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금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사실 금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 하에 전세계 금융 위기를 상상해 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통화 제도 내 불안정성의 꿈에도 생각 못한 원천을 가진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런 발표는 전혀 있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발표되었을 내용은 금이 노랗다고 보였다 하더라도, 사실 금은 노란 것이 아니라, 푸른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었으리라.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우리가 '금'을 특정&amp;nbsp;&lt;i&gt;종류&lt;/i&gt;의 사물에 대한 용어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사물을 발견했고 우리는 그에 대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화자 공동체의 일부로서 우리 자신들 사이의 특정 연관을 지니고 특정한 종류의 사물을 지닌다. 그러한 종류의 사물은 특정한 정체화 표시를 지닌다고&amp;nbsp;&lt;i&gt;생각된다&lt;/i&gt;. 이 표식들 중 일부는 실제로 금에 대해 참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lt;b&gt;[119]&lt;/b&gt; 그 표식들에 대해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우리가 통상 금에 귀속시켰고 처음에 그것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했던 모든 정체화 표식을 지니는, 하지만 같은 종류의 사물이 아니고 같은 실체가 아닌 그런 실체가 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런 사물에 대해 설령 그것이 우리가 애초에 금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한 모습들을 모두 지닌다 하더라도, 그것은 금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었다. 그런 사물은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듯 황철광 또는 바보의 금이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금으로서 발견하고 그렇게 부른 실체처럼 문외한에게 보이는 완전히 다른 사물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우리가 금이라는 용어의&amp;nbsp;&lt;i&gt;의미&lt;/i&gt;를 변경하고 철광석과 금을 구별한 어떤 다른 기준을 얹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내게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보인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그로써 금을 정체화한 초기 정체화 표식들에 더하여 특정 속성들이 금에 대해 참이었다는 것을&amp;nbsp;&lt;i&gt;알게 되었다.&lt;/i&gt; 그래서 금의 특징이자 철광석에 대해서는 참이 아닌&amp;nbsp;이러한 속성들은 바보의 금이 사실 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우리는 이 점을 또 다른 사례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사례는 이런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3&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3&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3)&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3)&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3&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나는 &quot;'tiger'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의미를 지닌다&quot;라고 말한다. . . . 만일 내가 &quot;tiger는 무엇인가?&quot;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quot;tiger는 대형 육식의 네 발 달린 고양잇과 동물로, 색은 황갈색에 검은 가로 줄무늬에 하얀 배&quot;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lt;i&gt;Shorter Oxford English Dictionary&lt;/i&gt; &quot;tiger&quot; 항목에서 발췌.)' 그리고 이제 누군가가 '당신은 &quot;tiger&quot;가 영어에서 의미하는 바를 말했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지프가 묻는다. '그런가?' 그는 적절하게 말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예시는 이것이다. '정글의 공터에서 누군가가 &quot;봐, 세 발 달린 호랑이야!&quot;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라. 누군가가 혼동해야만 하나? &quot;세 발 달린 호랑이&quot;라는 구는 &lt;i&gt;형용모순&lt;/i&gt;이 아니다. 하지만 만일 &quot;tiger&quot;가 영어에서 다른 것들 중에서도 네발동물 혹은 네발달림을 의미했더라면, &quot;세 발 달린 호랑이&quot;는&amp;nbsp;&lt;i&gt;형용모순&lt;/i&gt;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lt;b&gt;[120]&lt;/b&gt; 그래서, 그의 예시는 만일 호랑이가 네 다리를 가진다는 것이 호랑이의 개념의 부분이라면, 세 다리 호랑이는 있을 수 없었으리란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많은 철학자들이 '군집 개념(cluster concept)'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는 종류의 사례이다. 우리가 호랑이는&amp;nbsp;&lt;i&gt;절대로&lt;/i&gt; 네 다리를 가지지 않는다고 알게 되리라고 가정하는 일은 모순되기까지 하는가? 이러한 속성들을 호랑이들에게 귀속시킨 탐험가들이 시각적 환각에 의해 기만당했다고, 그리고 그들이 봤던 동물들이 세&amp;nbsp; 발 달린 종들로부터 유래했다고 가정해 보면, 우리는 도대체 아무런 호랑이도 전혀 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하게 될까? 나는 우리가 탐험가들을 기만한 그 시각적 환각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들은 사실 세 다리를 가진다고 말할 것이라 생각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더욱이, 이러한 사전적 기술을 충족시키는 어떤 것이든 필연적으로 호랑이라는 것은 참인가? 내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술된 호랑이의 외재적 모습들을 모두 가지면서도, 호랑이의 내적 구조와는 완전히 다른 내재적 구조를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실제로 '고양잇과(feline)'이라는 단어가 여기 들어가 있어서, 그것이 전적으로 공정하지는 않다. 이 사례를 위해 그 단어는 빠졌다고 가정해 보자. 호랑이가 어쨌든 특정한 생물학적 가계에 속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게되었던 어떤 것이다. 만일 '고양잇과'라는 것이 고양이의 외견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면, 호랑이가 큰 고양이의 외견을 지닌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어쩌면 호랑이처럼 보일지라도, 조사결과 포유류조차 아닌 것으로 밝혀진 동물들을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 동물들이 사실은 매우 특이하게 생긴 파충류들이었다고 말해 보자. 그럼 우리는 이 기술에 기반하여 일부 호랑이들은 파충류라고 결론내리는가? 우리는 그리 하지 않는다. 우리는 차라리 이 동물들이, 우리가 그로써 본래 호랑이를 정체화했던 외적 표지들을 가진다 하더라도, 사실은 호랑이가 아니라고, 왜냐하면 그 동물들이 우리가 '호랑이의 종'이라 부른 그 종과 같은 종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릴 것이다. 이제 내 생각에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일부 사람들이 말할 것처럼 호랑이의 구 개념이 새로운 과학적 정의에 의해 교체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호랑이의 내적 구조가 연구되기&amp;nbsp;&lt;i&gt;전부터&lt;/i&gt; 호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참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우리가 호랑이의 내적 구조를&amp;nbsp;&lt;b&gt;[121]&lt;/b&gt;&amp;nbsp;&lt;i&gt;알지&lt;/i&gt;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호랑이들이 특정 종 혹은 자연 종을 형성한다고 추정한다. 우리가 옳다고 가정하기로 하자. 그럼 우리는 호랑이의 모든 외적 모습을 지니더라도, 그것이 같은 종류의 사물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만큼 충분히 내적으로 호랑이와는 다른 피조물이 있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내적 구조에 관하여 어떤 것도, 이 내적 구조가 무엇인지 알지 않고도 그 피조물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나아가 우리가 '호랑이'라는 용어를 한 종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그리고 이 종에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이든, 설령 그것이 호랑이처럼 보이더라도, 사실 호랑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것이 그로써 우리가 본래 호랑이를 정체화한 그 모든 속성을 지닐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또한 호랑이가 본래 우리가 그로써 호랑이를 정체화한 그 속성들 중 &lt;i&gt;아무것도&lt;/i&gt; 지니지 않았다고 알게 될지도 몰랐다. 아마&amp;nbsp;&lt;i&gt;아무것도&lt;/i&gt; 네발달리지 않고, 아무것도 황갈색이지 않고, 아무것도 육식이지 않고, 기타 등등인 그런 식일 것이다. 이러한 모든 속성들이 시각적 환각이나 여타 오류에 기반한 것으로, 앞서 금의 경우처럼, 그렇게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호랑이'라는 용어는, '금'이라는 용어처럼, 그 안에서 해당 종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속성들 모두는 아니겠지만 그 대부분이 충족되어야만 하는 그러한 '군집 개념'를 표시하지&amp;nbsp;&lt;i&gt;않는다&lt;/i&gt;. 반대로, 이러한 속성 대부분의 소유는 해당 종의 구성원이기 위한 필요조건일 필요도 충분조건일 필요도 없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우리는 우리가 의심했던대로 호랑이들이 단일종을 형성한다는 점을 알아냈기에, 이 종에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은 호랑이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종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실수했을지도 모른다. 선제적으로, 우리는 호랑이들이 아마 종을 형성하리라고 가정한다. 과거의 경험은 이와 같은 것들이 통상적으로 함께 살고 비슷하게 보이며 같이 짝짓기하면서 종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만일 우리가 생각한 만큼은 아니라도 서로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두 종류의 호랑이들이 있다면, 어쩌면 그 호랑이들은 더욱 큰 생물학적 가계를 형성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들이 서로 완전히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실제로 두 종류의 호랑이들이 있는 것이다. 이건 모두 역사에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발견해낸 바에 의존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lt;b&gt;[122]&lt;/b&gt; 이런 종류의 고찰을 가장 크게 인지하는 것으로 내가 찾은 철학자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우리의 사유는 별도로 전개되었다) 퍼트남이다. 'It Ain't Necessarily So'라는 논문에서,&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4&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4&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4)&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4)&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는 종에 관한 진술에 대해, 그 진술이 '총각은 미혼이다' 같은 진술보다 '덜 필연적' (그가 신중하게 말하는 것처럼) 이라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사례는 '고양이는 동물이다'이다. 어쩌면 고양이가 자동기계인 것으로, 혹은 마술사가 심어둔 이상한 악마로 (그의 사례는 아니지만) 밝혀질지도 몰랐다. 고양이가 악마종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의 관점에서, 그건 내 관점이라고도 생각하는데, 우리의 경향성은 아무런 고양이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하는 쪽이 아니라, 고양이가 우리가 본래 가정했던 것처럼 동물이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하는 쪽으로 기운다. 본래의 고양이라는 개념은 이것이다. &lt;i&gt;그 종류의 것&lt;/i&gt;, 해당 종류가 표준적인 예화들로 정체화될 수 있는 경우의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질적인 사전적 정의에 의해서 뽑힌 어떤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퍼트남의 결론은 '고양이는 동물이다' 같은 진술이 '총각은 미혼이다' 같은 진술보다 '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나는 그 논증이 그런 진술들은&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알려지지 않고, 그러므로 분석적이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데에 동의한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5&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5&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5)&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5)&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제시된 종이 동물 종인지 여부는 &lt;b&gt;[123]&lt;/b&gt; 경험적 탐구의 문제이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론적 뜻이 퍼트남이 '필연'으로 의도한 바일 것이다. 그런 진술들이 이 강연에서 지지하는 그런 비-인식론적인 뜻에서 필연적인지 여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그래서 다음으로 탐구해 볼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그에 관해 논했던 그 필연성 개념을 사용해서): '고양이들은 동물들이다' 같은 진술들, 혹은 '금은 황색 금속이다' 같은 진술들은 필연적인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여기까지 나는 오직 우리가 발견해낼 수 있을 것에 관해서만 논해왔다. 나는 우리가 금이 사실은 ,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반대로, 황색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라 말해왔다. 만일 누군가가 금속 개념에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간다면, 원자가 속성으로 말해서, 누군가는 금이 금속이라 간주했을지라도, 금이 사실 금속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금이 금속이라는 것은 필연적인가 아니면 우연적인가? 나는 금속이라는 개념에 관해 더 자세히 파고들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말했듯, 나는 그에 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금은 명백히 원자번호 79를 가진다. 금이 원자번호 79를 가진다는 것은 금의 필연적 속성인가 아니면 우연적 속성인가? 확실히 우리는 우리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양성자에 관한, 원자 번호에 관한 전체 이론, 분자 구조와 원자 구조에 관한 전체 이론, 그런 관점들에 토대가 되는 이론들이&amp;nbsp;&lt;i&gt;모두&lt;/i&gt;거짓으로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그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금은 원자 번호 79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금이 원자 번호 79를&amp;nbsp;&lt;i&gt;가진다&lt;/i&gt;고 가정하면, 원자 번호 79를 가지지 않고 어떤 것이 금일 수 있는가? &lt;b&gt;[124]&lt;/b&gt; 과학자들이 금의 본성을 조사했고, 말하자면, 금이 원자 번호 79를 가진다는 것이 이 물체의 바로 그 본성의 일부임을 알아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이제 어떤 또 다른 황색 금속 혹은 어떤 다른 황색 물체, 원래 우리가 금을 정체화할 때 사용하던 모든 속성들과 우리가 이후에 발견한 추가적인 속성들을 다수 지닌 그런 것을 발견한다고 가정해 보자. 기초적 속성들 다수를 지닌 것의 사례로는 황철광, '바보의 금'이 있다. 내가 언급했듯, 우리는 이 물체가 금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우리는 실제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제 가능세계를 고려해 보자. 바보의 금 혹은 황철광이 미국의 여러 산에서, 혹은 남아프리카와 소련의 지역들에서 실제로 발견되었던 반사실적 상황을 고려해 보자. 실제로 지금 금을 품고 있는 모든 지역들이 그 대신 황철이나 혹은 금의 피상적 속성들을 모조했지만 금의 원자 구조는 결여한 어떤 다른 물체를 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6&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6&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6)&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6)&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6&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우리는 이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그 상황에서 금이 원소조차 아니었다고 (황철광이 원소가 아니기 때문에) 말하겠나? 내겐 우리가 그리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우리는 이를 한 실체, 말하자면 금이 아닌 황광철이 실제로 금을 포함한 바로 그 산에서 발견되었을 것이고 우리가 흔히 그로써 금을 정체화하는 바로 그 속성들을 지녔을 것인 상황으로 기술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금이 아닐 것이고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그것이 이 가능세계에서 여전히 금일 것이라고, 설령 금이 원자번호 79를 결여할지라도, 그렇게 말하지&amp;nbsp;&lt;i&gt;않아야&lt;/i&gt; 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물질, 다른 실체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반사실적으로 그것을 '금'이라고&amp;nbsp;&lt;i&gt;불렀을 것&lt;/i&gt;인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amp;nbsp;&lt;i&gt;우리는&lt;/i&gt; 그것을 금으로서 기술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게 보이기로는 그렇게 이것은 가능적으로 금이 원소가 아니었을지도 모를 상황도 아닐 것이고, &lt;b&gt;[125]&lt;/b&gt; 그런 사례가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가능'의 인식론적 의미로 보는 경우를 제외하고). 금&lt;i&gt;이&amp;nbsp;&lt;/i&gt;이 원소&lt;i&gt;라는 것&lt;/i&gt;을 가정하면, 어떤 다른 실체도, 설령 그것이 금처럼 보이고 우리가 실제로 금을 발견하는 바로 그 장소들에서 발견된다 하더라도, 금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금에 대한 모조품이었던 어떤 다른 실체일 것이다. 똑같은 지리적 영역들이 그런 실체로 채워졌던 어떤 반사실적 상황에서도, 그 영역들은 금으로 채워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영역들은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졌었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래서 만일 이러한 고찰이 옳다면, 그 고찰은 이 물질&lt;i&gt;이&lt;/i&gt; 무엇&lt;i&gt;인지&lt;/i&gt;에 관한 과학적 발견들을 표현하는 그러한 진술들이 우연적 참이 아니라 가장 엄밀한 가능의 의미에서 필연적 참임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단지 그것이 과학 법칙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당연히 그것이 거짓일 수 있었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속성들이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거를 형성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러한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 실체를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세계든 우리가 금이 아닌 실체를 상상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특히 현대 과학 이론은 우리가 금을 원자번호 79를 가진 우너소로 간주하는 금의 그 본성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금이 원자번호 79 원소라는 것은 필연적이지 우영넞ㄱ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아마 같은 식으로 우리가 금이 무엇인지 알아낸 바로부터 어떻게 색과 금속적 성질들이 도출되는지 추가로 조사할 것이다. 그러한 속성들이 금의 원자 구조로부터 도출되는 한, 그 속성들은 금에 대해 필연적 속성들인데, 설령 그 속성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금'의 &lt;i&gt;의미&lt;/i&gt;의 일부가 아니고&amp;nbsp;&lt;i&gt;선험적&lt;/i&gt; 확실성을 동반하여 알려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러하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퍼트남의 '고양이들은 동물이다'라는 예가 같은 표제 아래에 놓인다. 우리는 사실 이 사례에서 매우 놀라운 발견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믿음에 반하는 아무런 것도 찾지 못했다. 고양이들은 실제로 동물이다! 그래서 이 참은 필연적 참인가 아니면 우연적 참인가? 내게 보이기로는 그것은 필연적이다. &lt;b&gt;[126]&lt;/b&gt; 이러한 피조물들―이러한 동물들―의 자리에서 우리가 실은 불운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는 작은 악마들을 발견하는 반사실적 상황을 고려해 보라. 우리는 이 상황을 고양이들이 악마인 상황으로 기술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 이 악마들은 고양이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유사-고양이 형태의 악마일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lt;i&gt;가지고 있는&lt;/i&gt; 고양이들이 악마들이라는 것을 발견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우리가 그 고양이들이 악마가&amp;nbsp;&lt;i&gt;아니라는&amp;nbsp;&lt;/i&gt;것을 발견하고 나면, 우리가 그런 악마들이 주위에 있었던 반사실적 세계를 기술할 때, 우리가 그 악마들은 고양이들이 아닐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는 점은 그 고양이들의 바로 그 본성의 일부인 것이다. 그 가능세계는 고양이를 가장하는 악마들을 포함하는 세계일 것이다. 우리가 고양이들이&amp;nbsp;&lt;i&gt;어쩌면, &lt;/i&gt;특정한 종에 속한, 악마들인 것으로&amp;nbsp;&lt;i&gt;드러났었을지도 모른다&lt;/i&gt;고 말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고양이들이 실제로 동물이라는 점을 전제하면, 동물이 아닌 그 어떤 유사-고양이 존재든, 실제 세계에서든 반사실적 세계에서든, 고양이가 아니다. 같은 논리가 고양이의 외견을 지니지만 파충류의 내적 구조를 지닌 동물들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그런 것들이 존재할지라도, 고양이는 아닐 것이고, '바보들의 고양이'일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는 개별 대상의 본질에도 모종의 관계가 있다. 이를 테면, 분자 이론은 여기 이 대상이 분자들로 구성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는 확실히 중요한 경험적 발견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 알려지기로 어떤 에테르적 활력으로 구성되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여기 바로 이 위치를 점유하는 대상이 에테르적 활력&lt;i&gt;이었다&lt;/i&gt;고 상상해 보라. 그것은 여기 바로 이 대상이었을까? 그것은 이 대상의 모든 외견을 지녔을지도 모르지만, 내게 보이기로는 그것은 결코&amp;nbsp;&lt;i&gt;이 사물&lt;/i&gt;일 수 없었을 것이다.&amp;nbsp;&lt;i&gt;이 사물&lt;/i&gt;의 우여곡절은 그것의 실제 역사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크레믈린으로 운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미 산산조각으로 썰려나가 현재 시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것에 다양한 일이 일어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달리 그것에 반사실적으로 일어났을 것으로 무엇을 상상하든지 간에, 우리가 이 사물에 일어나는 것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한 가지 것은,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된다는 점이 전제될 때,&amp;nbsp;&lt;i&gt;그것이 &lt;/i&gt;&lt;b&gt;[127]&lt;/b&gt;&amp;nbsp; 여전히 존재했었을 것이었으면서도 분자로 구성되지는 않았던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이 분자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던 상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이것이 분자로 구성된 사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이것이 그것을 이루는 구성요소인 실체의 바로 그 본성이다―그럼 우리는 최소한 만일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옳다면 이 사물이 분자로 구성되는 일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할 수 없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내가 지지하는 관점에 따르면, 그래서, 자연종들은 일상적으로 추정되는 것보다 훨씬 더 고유명사들에 근접하다. '보통 명사'라는 구식 용어는 그래서 '소'나 '호랑이' 같은 종들이나 자연종들을 짚어내는 술어들에 상당히 적절하다. 그렇지만 나의 고찰은 또한 '금,' '물' 같은 그런 자연종들에 대한 특정 물질 명사들에도 적용된다. 나의 관점을 밀의 관점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밀은 '소' 같은 한정 기술구들과 이름들로서의 고유명사들 모두를 고려한다. 그는 '고유' 명사들에 대해 그것들이 만일 한정기술구들이라면 함축적이지만 고유명사들이라면 비-함축적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 밀은 모든 '일반' 명사들은 함축적이라고 말한다. '인간 존재' 같은 그런 술어는 인간성의 필요충분조건들을 부여하는 특정 속성들―합리성, 동물성, 특정 물리적 특징들의 연언으로 정의된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7&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7&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7)&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7)&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7&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프레게와 러셀로 대표되는 현대 논리학적 전통은 밀이 단칭명사에 대해서는 틀렸지만 보통명사들에 대해서는 옳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 최근의 철학도, 고유명사와 자연종 두 경우 모두에서 그것이 종종 정의적 속성들이라는 개념을 속성 다발이란 개념으로, 그 중 오직 일부만이 각 개별 사례에서 충족될 필요가 있는 그런 것으로 교체한다는 점을 제외하고,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전례를 따랐다. 반면에 나 자신의 관점은 밀이 '단칭' 명사에 관해서는 다소 옳지만, '보통' 명사에 관해서는 틀렸다고 간주한다.&amp;nbsp;&lt;i&gt;아마도&lt;/i&gt; 일부 '보통' 명사들은 ('foolish', 'fat', 'yellow')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lt;/span&gt;&lt;/span&gt;&lt;b&gt;[128]&lt;/b&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 &lt;/span&gt;&lt;/span&gt;속성들을 표현한다. &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8&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8&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8)&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8)&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8&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중요한 의미에서, '소'와 '호랑이' 같은 보통 명사는 속성을 표현하지 않는데,&amp;nbsp;&lt;i&gt;소로 있음&lt;/i&gt;이 평범하게 속성으로 간주되지 않는 한 그러하다. 확실히 '소'와 '호랑이'는, 밀이 생각했던 것처럼, 사전이 정의를 위해 취할 속성들의 연언에 대한 축약이&amp;nbsp;&lt;i&gt;아니다&lt;/i&gt;. 과학이 경험적으로 특정 속성들이 소에 대해, 혹은 호랑이에 대해, &lt;i&gt;필연적&lt;/i&gt;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 여부는 내가 긍정적으로 답하는 또 다른 문제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이것이 어떻게 내가 앞서 논한 과학적 발견들을 표현하는 유형의 동일성 진술들에 적용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말하자면, 물은 H2O라는 진술 말이다. 그것은 확실히 물이 H2O라는 발견을 표현한다. 우리는 원래 물을 그 특징적인 느낌, 외양 그리고 아마도 맛으로 정체화했다 (그 맛이 보통 불순물들 탓일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만일 심지어 실제로 물과는 완전히 다른 원자 구조를 가졌지만, 이러한 측면들에서 유사한 물질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어떤 물은 H2O가 아니었다고 말했을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 대신 바보의 금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보의 물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원래 물을 정체화했던 속성들을 가지더라도, 실제로 물은 아니었을 물질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생각에 실제 세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들에 대해 말할 때에조차 적용된다. 만일 바보의 물인 그런 물질이 있었더라면, 그것은 바보의 물이지 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이 물질이 또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다면― &lt;b&gt;[129]&lt;/b&gt;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되는 중합수는 우리가 오늘날 물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매우 다른 정체화 표지들을 지닌다―그것은 물의 한 형태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설령 우리가 원래 물을 정체화했던 그 외양들을 지니지 않을지라도 같은 물질이기 때문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빛은 광자의 흐름이다' 또는 '열은 분자의 운동이다'라는 진술을 고려해 보자. 빛을 지칭함으로써, 물론, 나는 그 일부를 우리가 이 방 안에 가직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열을 지칭할 때, 나는 누군가가 가질지도 모르는 내재적 감각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외재적 현상을 지칭한다. 그것은 우리가 열감이라 부르는 특징적 감각을 산출한다. 열&lt;i&gt;은&lt;/i&gt; 분자들의 운동&lt;i&gt;이다&lt;/i&gt;. 우리는 또한 열을 증가시키는 것이 분자들의 운동을 증가시킨다는 것에 상응한다는 것, 엄밀히 말해서, 분자들의 평균적 운동 에너지를 증가시키는 것에 상응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온도는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와 동일시된다. 그렇지만 나는 온도에 관해 말하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실제 척도를 정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를 통해 정해질지도 모른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19&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19&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19)&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19)&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하지만 흥미로운 현상학적 발견을 표현하는 것은 더 뜨거워질 때 분자들이 더욱 빨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빛에 관해서 빛이 광자들의 흐름이라는 것을 또한 발견하였다. 본래 우리는 빛을 빛이 우리에게 산출해 넣을 수 있는 특징적인 내재적 시각 인상,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을 통해 정체화했다. 다른 한편, 열은 본래 우리의 신경 말단들 중 한 측면이나 우리의 촉각에 미치는 특징적 영향을 통해 정체화하였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인간 존재들이 맹목이었고 눈이 작동하지 않았던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들은 빛에 영향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빛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을까? &lt;b&gt;[130]&lt;/b&gt;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빛을 감지하지 못할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떤 피조물들은 빛을 감지하지 못하는 눈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런 피조물들 중에 불행히도 물론 일부 사람들이 속한다. 그들은 '맹인'이라 불린다. 설령 모든 인간이 흉측한 흔적기관을 지녔고 사물을 볼 수 없었을지라도, 빛은 주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눈에 적합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런 상황이 빛은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는 없던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빛을 그것이 우리 안에 산출해 넣는 특징적인 시각적 인상으로써 정체화할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이는 지칭 고정의 좋은 사례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빛이 무엇인지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외부 세계에서 우리의 눈에 특정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사실로써 고정한다. 하지만 이제, 말하자면 사람들이 맹인이었을 반사실적 상황들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아무것도 그들의 눈에 영향을 미칠 수 없기에, 빛이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빛이―실제로는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으로 정체화시켰던 것― 존재했지만 우리의 어떤 결함으로 인해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할 방법이 없었던 상황일 것이라 말할 것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아마도 우리는 어떤 기적에 의해 음파가 어떤 식으론가 일부 피조물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는 상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말은, 음파가 우리가 가지는 것과 같은 시각적 인상을, 어쩌면 정확히 똑같은 색 감각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똑같은 피조물이 빛(광자)에 완전히&amp;nbsp;&lt;i&gt;무감각&lt;/i&gt;한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어떤 꿈에도 생각 못한 절묘한 가능성들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그런 가능세계에서 빛이었던 것은 소리였다고 말할까, 이러한 대기 중의 파형 운동들이 빛이었다고 말할까? 빛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전제하면, 우리는 그 상황을 달리 기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특정 피조물들, 어쩌면 '사람들'로 불렸을 그리고 이 행성에 거주하였을 그런 것들이, 빛을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음파는 감지할 수 있었던, 그런데 우리가 빛을 감지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음파를 감지할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일단 우리가 빛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lt;b&gt;[131]&lt;/b&gt; 우리가 다른 가능세계들에 관해 말할 때 그 세계 내의&amp;nbsp;&lt;i&gt;이&amp;nbsp;&lt;/i&gt;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고, '빛'을 '무엇이든 우리에게 시각적 인상을 주는 것―무엇이든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라는 말과&amp;nbsp;&lt;i&gt;동음이의어&lt;/i&gt;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은 있었을 테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주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른 어떤 것이 우리를 볼 수 있게 해줬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빛을 정체화한 방식은&amp;nbsp;&lt;i&gt;지칭을 고정시켰다&lt;/i&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열' 같은 또 다른 그런 표현들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여기에서 열은 우리가 '열감'이라 부르는 특정 감각을 제공한다는 것을 통해 우리가 정체화한 (그리고 그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킨) 어떤 것이다. 우리는 우리는 이 감각에 대해 열감 외에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언어가 이런 방식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반면에 당신은 내가 말한 바를 통해 그것이 다른 방식을 가졌을 것으로 가정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열이 우리 안에 열감을 산출해 넣는다는 사실로써 열을 정체화하고 그것을 감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만일 다른 누군가가 모종의 도구로써 열을 탐지해내지만, 그것을 느끼지는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바란다면, 설령 열의 지칭이 같다 할지라도 열이라는 개념은 같지 않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 지칭이 이런 식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개념에 매우 중요할지도 모른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이라는 용어는 '무엇이 되었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감각들을 제공하는 바의 것'을&amp;nbsp;&lt;i&gt;의미하지&lt;/i&gt; 않는다. 첫째로, 사람들은 열에 대한 감각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열은 여전히 외부 세계에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어떤 식으론가 광선들이, 그들의 신경 말단 내 모종의 차이들로 인하여, 그들에게 이러한 감각들을 제공&lt;i&gt;했다고&lt;/i&gt; 가정해 보자. 그럼 그것은 열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우리가 열감이라 부르는 감각을 제공한 빛일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럼 우리는 열이 분자 운동이 아니었던 가능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그런 가능세계를 발견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내게는 누군가가 열을―실제 사실과는 반대로―분자 운동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을 상황이라 처음에 생각한다고 생각할 어떤 상황이든, 실제로는 우리와는 다른 신경 말단들을 지닌 어떤 피조물들이 &lt;b&gt;[132]&lt;/b&gt; 이 행성에 거주하고 (어쩌면 우리조차, 만일 우리가 이러한 특수한 신경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 우리에 대한 우연적 사실이라면), 이러한 피조물들이 열 아닌 다른 어떤 것, 말하자면 빛을, 우리가 열을 느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을 그 피조물들이 느꼈던 그런 식으로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감지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말하자면 빛이 열이었을 상황, 혹은 광자의 흐름이 열이었을 상황이 아니라, 광자의 흐름이 &lt;i&gt;우리가&lt;/i&gt; '열감'이라 부르는 특정 감각드을 산출했을 상황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그와 같은 여타 여러 정체화들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번개는 전기라는 정체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번개의 섬광은 전기의 섬광이다. 번개는 방전이다. 우리는 물론 내가 추정하기로 그 어떤 현재하는 방전 없이 같은 종류의 섬광으로 밤에 빛났을지도 모르는 다른 방식들을 상상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나는 우리가 이를 상상할 때, 우리가 번개의 시각적 현상들 모두를 가진 어떤 것을 상상하지만, 사실 번개는 아닌 어떤 것을 상상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번개인 것처럼 보였지만 번개인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이것이 지금 경우에도 벌어지고 있다고 추정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어떤 기발한 장치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아무런 번개도 현재하지 않았을지라도 번개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들 어떤 현상을 하늘에 산출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은 저 현상이 번개처럼 보이기 때문에 실제로 번개였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방전 현상인 번개와는 다른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번개가 아니라 번개가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인 어떤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이러한 경우들에서, 말하자면 '열은 분자운동이다' 같은 사례에서 특징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가 고정시킨 특정한 지칭이 있는데, 실제 세계에 대해서도 모든 가능세계들에 대해서도, 그 지칭의 우연적 속성을 통해, 즉 그러저러한 감각을 우리 안에 산출해 넣을 수 있는 속성으로써 그리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그러저러한 감각을 산출해 넣는 것이 열의 우연적 속성이다. 무엇보다도 도대체 이 행성에 사람들이 &lt;b&gt;[133]&lt;/b&gt; 있었어야 했다는 것 자체가 우연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용어로―물리 이론의 기본 용어로―기술된 어떤 물리적 현상이 이러한 감각들을 산출하는 현상인지&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하며, 어쩌다 보니 이 현상이 실제로 분자 운동이라는 것을 발견해냈던 것이다. 우리가 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이 현상의 본질적 속성을 제공해주는 정체화를 발견했다. 우리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분자 운동인 것일―분자 운동이,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 현상&lt;i&gt;인 바의&amp;nbsp;&lt;/i&gt;것이기 때문에, 아닌 경우가 있을 수 없었을 현상을 발견했던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0&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0&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0)&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0)&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0&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원래 그로써 그것을 정체화하는 속성, 그러저러한 감각을 우리에게 산출해 넣는 속성은 필연적 속성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바로 이 현상이 존재할 수는 있었을 테지만, 우리의 신경 구조 같은 것들에서의 차이들로 인해, 열로서 느껴지지는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인간 존재의 구조로서&amp;nbsp;&lt;i&gt;우리의&lt;/i&gt; 신경 구조를 말할 때, 나는 실제로 내가 앞서 언급한 지점을 얼버무리고 있다. 물론 인간 존재가 열을 감지할 수 있는 신경 구조를 지닌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성의 일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필연적이라는 점을 충분한 조사가 보여준다면 필연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을 무시하고 있는데, 논의를 단순화시키기 위해서이다. 어쟀든 내가 추정하기로 &lt;b&gt;[134]&lt;/b&gt; 이 행성에 열에 대해 이런 식으로 감지할 수 있는 피조물들이 거주했어야 했으리란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나는 앞선 고찰들의 심-신 동일성 논제를 둘러싼 논쟁에 대한 적용에 관한 몇 가지 언급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내가 전개시킨 관점들을 요약하고 한 두 가지 사항들을 첨언하고자 한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첫째로, 나의 논증은 암시적으로 자연종들에 대한 특정 일반 용어들이 고유 명사들과 일반적으로 의식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친족성을 지닌다고 결론내린다. 이 결론은 다양한 종명들에, '고양이', '호랑이', '금덩이' 같은 가산명사든 '금', '물', '철광석' 같은 물질 명사든 그것들에 확실히 성립한다. 그것은 또한 자연 현상들에 대한 특정 용어들, '열', '빛', '소리', '번개', 그리고 추정컨데 적절히 상술되는 경우 상응하는 형용사들―'뜨거움', '시끄러움', '붉음'에 적용된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내가 상기시켰듯 밀은 일부 '단칭 명사들', 한정기술구들이 외연과 내포 모두를 지닌다 하더라도, 반면 다른 것들, 진정한 고유명사들은 외연을 가지지만 내포는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밀은 추가로 '보통 명사들' 혹은 일반 용어들은 내포를 지녔다고 주장하였다. '소나'나 '인간' 같은 용어들은 그들의 외연을 지적해내는 특정 속성들의 연언에 의해 정의된다.―예를 들어 인간 존재는 특정 물리적 특징들을 지닌 이성적 동물이다.&amp;nbsp;&lt;i&gt;유&lt;/i&gt;와&amp;nbsp;&lt;i&gt;종차&lt;/i&gt;를 통한 고색창연한 정의의 전통은 그런 개념의 편린이다.게다가 만일 칸트가 '금'은 '황색 금속'으로&amp;nbsp;&lt;i&gt;정의&lt;/i&gt;될 수 있으리라 추정ㅇ했다면, 그를 그러한 정의로 인도한 것은 이러한 전통일지도 모른다. ('금속'은 유일 것이고, '황색'은 종차일 것이다. 그 종차는 순환 없이 '금으로 있음'을 포함할 수는 없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프레게와 러셀에 의해 대표되는 근대 논리적 전통은 단칭 명사의 문제에 관해 밀을 반박했지만, 보편 명사들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그를 지지하였다. 그래서 단칭과 일반을 포괄한&amp;nbsp;&lt;i&gt;모든&amp;nbsp;&lt;/i&gt;용어들은 '내포' 또는 프레게적 의미를 지닌다. 더욱 근래의 이론가들은 프레게와 러셀을 따라 &lt;b&gt;[135]&lt;/b&gt; 그들의 관점을 오직 속성들의 특정한 연언으로 주어진 의미라는 개념을, 적용할 필요가 있는 단지&amp;nbsp;&lt;i&gt;충분한&lt;/i&gt;&amp;nbsp; 속성들의 '다발'로 주어진 의미 개념으로 교체하기만 함으로써 규정한다. 현재의 관점은, 곧바로 프레게와 러셀을 뒤집어, (다소간) 밀의 &lt;i&gt;단칭&lt;/i&gt; 용어들에 대한 관점을&amp;nbsp;&lt;i&gt;지지하지만&lt;/i&gt;, &lt;i&gt;보편&lt;/i&gt; 용어들에 대한 그의 관점은&amp;nbsp;&lt;i&gt;반박한다.&lt;/i&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둘째로, 현재의 관점은 고유 명사의 경우로서 종 용어들의 경우에, 한 용어가 그 지칭이 고정되었던 방식에 의해 주어지는, 그 용어가 가져오는&amp;nbsp;&lt;i&gt;선험적&lt;/i&gt;이지만 아마도 우연적인 속성들과, 그 용어가 그 의미를 통해 주어지는 것으로서 가져올지도 모르는 분석적인 (또한 그러므로 필연적인) 속성들 사이의 대비를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고유명사로서 종들에 대해, 용어의 지칭이 고정되는 방식은 해당 용어의 동의어로 간주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고유명사의 경우, 지칭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정될 수 있다. 초기 세례식에서 그것은 전형적으로 지시적 정의나 묘사에 의해 고정된다. 다른 식으로는, 지칭은 통상 그 이름이 관계를 통해 전달되어 온 연쇄에 의해 결정된다. 같은 고찰이 '금' 같은 보편 용어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만일 우리가 그 실체에 대한 가설적인 (인정하건데 어느 정도 작위적인) 세례식을 상상한다면, 우리는 '금은 저기 저 사물들에 의해 예화되는, 혹은 어쨌든 그것들 거의 전부에 의해 예화되는 실체이다'라는 모종의 '정의'에 의한 만큼이나 그것이 해당 실체를 지적해낸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이 세례식의 몇 가지 특징들은 주목할 만하다. 첫째로, '정의' 내에서 정체성(동일성)은 (완전히) 필연적 참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 항들 각각이 심지어 본질적으로 (필연적으로) 금이라 할지라도,&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1&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금은 그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해당 정의는 '1 meter = S의 길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리고 그것에 적용된 것과 같은 규정들을 가지고)&amp;nbsp;&lt;i&gt;선험적&lt;/i&gt; 참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amp;nbsp;&lt;i&gt;지칭을 고정한다.&lt;/i&gt; 나는 일반적으로 &lt;b&gt;[136]&lt;/b&gt; 자연종 용어가 (예를 들어 동물, 채소, 화학적인 종들) 이런 식으로 고정된 지칭을 획득한다고 믿는다. 해당 실체는 주어진 예시(혹은 거의 그 전부)에 의해 예화된 종으로서 정의된다. '거의 모두'라는 규정은 일부 바보의 금이 해당 사례에서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허용한다. 만일 본래의 사례가 적은 수의 예외 사례를 가진다면, 그것들은 실제로 금은 아닌 것으로서 거부될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하나의 단일형태 실체나 종이 있다는 가정이 초기 사례에서 더욱 극단적인 오류를 드러낸다면, 반응은 다양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우리는 두 종류의 금이 있다고 선언할지도 모르고, 또 어떤 경우에는 '금'이라는 용어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성들은 소진될 것으로 가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주창된 새로운 종은 다른 이유로 허상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일부 사례들이 (그 집합을&amp;nbsp;&lt;i&gt;I&lt;/i&gt;라고 하자) 새로운 종 K에 속하는 것으로 발견되고 또한 그리 믿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이후 &lt;i&gt;I&lt;/i&gt;의 사례들이 단일 종에 속한다는 점까지 발견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지만, 그것들이 앞서 알려진 종&amp;nbsp;&lt;i&gt;L&lt;/i&gt;에 속한다고 해보자. 관찰상의 오류가 &lt;i&gt;I&lt;/i&gt;에 속한 사례들이&amp;nbsp;&lt;i&gt;L&lt;/i&gt;로부터 그것들을 배제시키는 모종의 특징&amp;nbsp;&lt;i&gt;C&lt;/i&gt;를 소유했다는 잘못된 초기 믿음으로 이끌었다고 해 보자. 이 경우 우리는 물론&amp;nbsp;&lt;i&gt;K&lt;/i&gt;라는 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단일형태의 초기 사례에 대한 지칭을 통해 정의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할 것이다. (만일&amp;nbsp;&lt;i&gt;L&lt;/i&gt;이 앞서 정체화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lt;i&gt;K&lt;/i&gt;라는 종이 존재했지만, 그 종이 특징 &lt;i&gt;C&lt;/i&gt;와 결부되는 것이라고 잘못 가정했었다고 문제 없이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주의하라.) '같은 종'이라는 개념이 모호한 만큼, 금에 대한 본래의 개념도 모호하다. 일상적으로, 모호성은 실천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감각에 지각될 수 있는 자연 현상의 경우, 그 지칭이 지시되어 나오는 방식은 단순하다. '열 = 감각 S에 의해 감지되는 것'. 다시 한번, 정체성이 지칭을 고정시킨다. 그러므로 그것은&amp;nbsp;&lt;i&gt;선험적&lt;/i&gt;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데,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열은 존재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열'은 '금'처럼 고정 지시자이고, 그 지칭은 그것의 '정의'에 의해 고정된다. 다른 자연 현상들, &lt;b&gt;[137]&lt;/b&gt; 전기 같은 것은 본래 특정한 구체적인 경험적 영향들의 원인들로서 정체화된다. 나는 여기에서 그 규정을 끝까지 전부 제시하고자 시도하진 않고, 그저 사례들만을 제시할 것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셋째, 자연종의 경우, 특정 속성들, 최소한 거칠게나마 그 종의 특징이라 믿어지고 본래의 사례에 적용될 것으로 믿어지는 속성들은 본래의 사례 외부에 있는 새로운 사례들을 해당 종 안에 자리잡아주는 데에 사용된다. ('속성들'은 여기에서 광의로 사용되고, 더 큰 종들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예를 호랑이에 대해 들어 동물성과 고양이성.) 이러한 속성들은 그 종에 대해&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성립할 필요는 없다. 이후의 경험적 조사는 그 속성들 중 일부가 본래의 사례에 속하지 않았다고 확정지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 속성들이 본래의 사례의 특이성들이었고, 전체로서의 해당 종에 일반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확정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금의 확색은 시각적 허상일지도 모른다. 혹은, 더욱 그럴 듯하기로는, 본래 관찰되었던 금이 확색이었을지라도, 일부 금은 흰색인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한 대상이 본래 그 종에 사용되지만 속하지 못한 모든 특징들을 지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위에 언급된 것처럼, 한 동물이 호랑이처럼 보이지만 호랑이는 아닐지도 모른다. 주기율표의 같은 열에서 구별되는 원소들이 무척이나 밀접하게 서로 유사할지도 모른다. 그런 실패들은 예외이다. 하지만 주기율표에서처럼, 그런 일들은&amp;nbsp;&lt;i&gt;일어난다.&lt;/i&gt; (종종 초기 사례들에서 그 사례와 결부되는 특징들을 갖지 못하는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앞서 &lt;i&gt;I-K-L&amp;nbsp;&lt;/i&gt;사례에서처럼 해당 종들을 거부하도록 이끌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보편적이기는커녕 전형적이지조차 못하다. 금의 황색에 관한 언급이나 고양이가 동물인지 여부에 관한 언급을 보라.)&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본래 그 종에 결부되는 특징들이 그 종의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으로 혹은 한 번만이라도 적용되는지, 그리고 그 특징들이 실제로 합하여 해당 종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인지 여부가 경험적 문제라는 것뿐이다. (그 합동 충분조건은 도무지&amp;nbsp;&lt;i&gt;필연적&lt;/i&gt;이지 않을 것 같지만,&amp;nbsp;&lt;i&gt;참&lt;/i&gt;일지도 모른다. 사실, 호랑이처럼 보이는 어떤 동물이든 ―우리가 아는 한― 호랑이인데, 호랑이와 유사하지만 호랑이는 아닌 동물이 &lt;b&gt;[138]&lt;/b&gt; 있었어야 했으리란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lt;i&gt;가능하다&lt;/i&gt; 하더라도 그렇다. 다른 한편, 보편적 적용 가능성은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꽤나 잘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동물이다'라는 것은 필연적 참인 것으로 밝혀졌&lt;i&gt;었다&lt;/i&gt;. 더욱이 그런 진술들의 상당수, 특히 한 종을 다른 종 아래에 포괄하는 진술들은, 만일 그것이 어쨌든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우리는&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안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네 번째로, 과학적 조사는 일반적으로 본래의 집합보다 훨씬 더 나은 금에 대한 특징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물질적 대상은 오직 그 안에 포함된 원소가 원자번호 79를 지니는 것인 경우라면 바로 그 경우에만 (순수한) 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에서, '오직 그러한 경우라면 바로 그 경우에만'이란 표현은&amp;nbsp;&lt;i&gt;엄격한&amp;nbsp;&lt;/i&gt;(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기초적인 구조적 특성을 조사함으로써, 본성을 발견하고자 시도하고, 그리하여 해당 종의 본질(철학적인 의미에서)을 발견하고자 시도한다. 자연 현상의 경우에도 유사하다. '열은 분자 운동이다' 같은 그러한 이론적인 정체화들은 필연적인데,&amp;nbsp;&lt;i&gt;선험적&lt;/i&gt;이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과학에서 사용되는 유형의 속성 정체성은 선험성이나 분석성이 아니라 &lt;i&gt;필연성&lt;/i&gt;과 결부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개체 x와 y에 대해, 오직 x가 y보다 더 높은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를 가지는 경우라면 바로 그 경우에만 x는 y보다 더 뜨겁다. 여기에서 술어 동연은 &lt;i&gt;필연적&lt;/i&gt;이지만,&amp;nbsp;&lt;i&gt;선험적&lt;/i&gt;이지는 않다. 다른 한편 속성(attribute)이라는 철학적 관념은&amp;nbsp;&lt;i&gt;선험적&lt;/i&gt; (그리고 분석적) 동연을 필연적 동연만큼이나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작금의 관점에서, 종 본질에 대한 과학적 발견은 '의미의 변화'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러한 발견의 가능성은 본래 기획의 일부였다. 우리는 고래가 어류라는 것에 대한 생물학자의 부정이 그의 '어류라는 개념'이 일반인의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는 가정조차 필요치 않다. 그는 단지 '고래는 포유류이지 어류가 아니다'라는 것이 필연적 참이라는 점을 발견하여 일반인을 교정해줄 뿐이다. '고래가 포유류이다'&lt;i&gt;이든&amp;nbsp;&lt;/i&gt;'고래가 어류이다'&lt;i&gt;이든&amp;nbsp;&lt;/i&gt;어떤 경우에도&amp;nbsp;&lt;i&gt;선험적&lt;/i&gt;인 것으로 혹은 분석적인 것으로 추정되지&amp;nbsp;&lt;i&gt;않았다&lt;/i&gt;.&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다섯 번째, 그리고 방금 언급된 과학적 조사들과 독립적인 사항으로, '원본 사례'는 &lt;b&gt;[139]&lt;/b&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 &lt;/span&gt;&lt;/span&gt;새로운 항목의 발견에 의해 확장된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2&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2&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2)&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2)&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2&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금의 경우, 사람들은 그 작업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인간의 자연과학적 호기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 경우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오직 브라이언 같은 반-과학적 근본주의자들만이 그 노력을 비난한다.) 더 중요한 점은, 종-이름이 공유명사의 경우에서와 정확히 마찬가지로 연쇄를 통해 이행되어, 소량의 금만을 봤거나 전혀 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용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의 지칭은 인과적 (역사적) 연쇄에 의해 결정되고, 어떤 항목의 사용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서 고유명사의 경우에서 정확한 이론을 표명하기 위해 들인 노력 보다는 훨씬 적은 노력만을 들일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통상, 고유명사가 연쇄를 통해 이행될 때, 해당 일므의 지칭이 고정되는 방식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서로 다른 화자들이 서로 다른 방식들로 해당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킬지도 모른다는 점은, 그들이 그 이름에 같은 지칭을 부여한다는 점이 보장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상황은 필경 종이름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인데, 금속공학자는 금이라곤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가질지도 모르는 개념과는 어쨌든 상당히 다른 금 개념을 지닌다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해당 지칭이 고정되는 방식이 감각된 현상의 경우에서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중요해 보인다는 점이다. '빛'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맹인은, 그가 우리와 똑같은 현상에 대한 고정지시어로 그 용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보이기로는 상당히 막대한 의미손실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손실일 것이다. ('개념'은 여기에서 비-전문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빛을 특정한 방식으로 정체화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amp;nbsp;&lt;i&gt;결정적인 것&lt;/i&gt;으로 보이는데, 설령 그것이 필연적이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그 암시적 연관은 필연성이라는&amp;nbsp;&lt;i&gt;허상&lt;/i&gt;을 자아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관찰이, 앞서 속성-정체성에 관한 언급들과 더불어, &lt;b&gt;[140]&lt;/b&gt; 1차성질과 2차성질에 대한 전통적인 반박들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히 본질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3&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3&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3)&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3)&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3&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이론적인 정체화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이론적 정체화는 내가 지지하는 개념에 따르자면 일반적으로 두 고정 지시자들을 포함하는 정체성들이고 그러므로&amp;nbsp;&lt;i&gt;후험적으로&lt;/i&gt; 필연적인 것들의 사례들이다. 이제 내가 앞서 필연적 참과&amp;nbsp;&lt;i&gt;선험적&lt;/i&gt; 참 사이의 구별에 대해 제시했던 논증들에도 불구하고,&amp;nbsp;&lt;i&gt;후험적&lt;/i&gt; 필연적 참 개념은 여전히 어느 정도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너는 열이 분자운동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것, 그리고 금이 원자번호 79을 지닌 원소이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 문제에 관련해, 당신은 또한 &lt;b&gt;[141]&lt;/b&gt; 엘리자베스 2세가 조지 6세의 딸이 아닌 것으로, 혹은 심지어 우리가 생각했던 특정한 정자와 난자에서 기원하지조차 않았던 것으로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드러났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 책상이 템즈강 물의 얼음으로 제작된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인정했다. 나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럼 당신이 그런 사건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당신의 말뜻은 뭉엇인가? 만일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amp;nbsp;&lt;i&gt;아닌 것으로 드러났&lt;/i&gt;&lt;i&gt;을지도&lt;/i&gt; 몰랐다면, 개밥바라기별은 샛별&lt;i&gt;이지&amp;nbsp;&lt;/i&gt;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사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세계가 다른 식으로 &lt;i&gt;드러났었을&lt;/i&gt; 수 있었더라면, 다른 식의 것&lt;i&gt;이었을&lt;/i&gt;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가능성에 의해 함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자명한 양상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quot;~였을지도 몰랐다&quot;는 것이 순전히 인식론적인 것이라고 선언하여 그 난점을 회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참인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고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quot;는 단지 우리의 현재 무지를 표현하고, &quot;산술은 완전한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quot;라는 것은 우리의 과거의 무지를 시사한다. 이러한 수학적 사례들에서, 우리는 무지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답이 달리 되었던 것으로 드러나는 일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신이 선호하는 본질과 두 고정 지시자들 사이의 동일성의 사례들에서도 그렇지 않다. 금이 합성물인 것으로 드러났었으리란 것은 실제로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이 책상이 주어진 특정 목재로 제작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무로 제작된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 수학적 사례와의 그 대비는 더할 나위 없을 수 있을 것이고 설령 당신 제안대로&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아는 일이 불가능한 수학적 참들이 있을지 모른다 할지라도 그 대비가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lt;br /&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어쩌면 나의 앞선 언급들의 취지를 포착한 누군가는 스스로 내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앞선 논의에 대해 여기에서 제공하기에 적절한 선명화가 있다. 해당 반박자는 만일 내가 이 책상이 얼음으로 제작되었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얼음으로 제작된 것으로 드러났을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도 주장해야만 한다고 주장할 때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amp;nbsp;&lt;i&gt;P인 것으로 드러났었을 수 있었을 것&lt;/i&gt;이라는 것은 &lt;b&gt;[142]&lt;/b&gt; P가 사실이었을 수 있었으리란 것을 함축한다.&amp;nbsp;&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그럼 책상이 얼음이나 다른 무언가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직관, 그것이 심지어 분자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드러났을지도 몰랐다는 직관은 무슨 뜻이 되는가? 나는 단순히 이 책상으로 그리고 이 방의 바로 이 자리에 놓인 것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사실은 얼음으로 제작된 &lt;i&gt;한 책상&lt;/i&gt;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나는 (혹은 어떤 의식적인 존재가) 얼음으로 제작된 &lt;i&gt;한 책상&lt;/i&gt;에 관하여, 실제로 획득하는 것과 &lt;i&gt;질적으로 똑같은 인식론적 상황에&lt;/i&gt; 있었을 수도 있었고, 내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감각 증거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상황은 대응자 이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상황과 유사하다. 내가 그 책상이 다양한 것들로 제작된 것으로 드러나는 가능성에 대해 말할 때, 나는 느슨하게 말하고 있다.&amp;nbsp;&lt;i&gt;이&lt;/i&gt; 책상 자체는 그것이 실제로 가졌던 것과 다른 기원을 지녔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지만, 내가 이전부터 가졌던 모든 증거와 관련하여 이 상황과 질적으로 동일한 상황에서, 그 방 안에 이 책상 위치에&amp;nbsp;&lt;i&gt;얼음으로 제작된 책상&lt;/i&gt;이 포함되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응자 이론 같은 어떤 것이 그래서 그 상황에 적용 가능한 것이지만, 그것은 오직 우리가&amp;nbsp;&lt;i&gt;이 특정한&amp;nbsp;&lt;/i&gt;책상에 대한 참이 무엇이었을지도 몰랐는지에 흥미가&amp;nbsp;&lt;i&gt;없고&lt;/i&gt;, 특정 증거가 주어진다면&amp;nbsp;&lt;i&gt;한 책상&lt;/i&gt;에 대해 무엇이 참일지도 몰랐는지 혹은 참이 아닐지도 몰랐는지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만 적용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질적인 기술구들과 대응자들로 향해야만 하는 이유는 정확히 이 책상이 템즈강에서 나온 얼음으로 제작되었을지도 몰랐다는 것이 참이 &lt;i&gt;아니기&lt;/i&gt;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들을 진정한&amp;nbsp;&lt;i&gt;de re&lt;/i&gt; 양상들에 적용하는 일은 지금의 입장에서 보자면 왜곡된 것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그래서 그 반대자를 향한 일반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어떤 필연적 참이든, 그것이&amp;nbsp;&lt;i&gt;선험적&lt;/i&gt;이든&amp;nbsp;&lt;i&gt;후험적&lt;/i&gt;이든, 달리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부 &lt;i&gt;후험적&lt;/i&gt; 참의 경우 우리는 적절히 질적으로 정체화가 명백한 상황들 하에서, 적절히 부합하는 질적인 진술이 거짓이었을지도 몰랐다고 말할 수 있다. 금이 합성물인 것으로 밝혀졌었을지도 몰랐다는 느슨하고 부정확한 진술은 (거칠게 말해서) 본래 금에 대해 성립한다고 알려진 &lt;b&gt;[143]&lt;/b&gt; 모든 속성들을 지닌 합성물이 있었으리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진술로 교체되어야 할 것이다.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라고 밝혀졌을지도 몰랐다는 부정확한 진술은 이 강의 초반에 언급된 참인 우연한 사건으로 교체되어야 할 것이다. 상이한 두 천체가 아침과 저녁에 각기 개밥바라기-샛별-금성에 의해 실제로 점유된 바로 그 위치를 점유했었을지도 몰랐다는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4&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4&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4)&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4)&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다른 인상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서는 극도로 보편적인 진술, 증명이나 반증 없이,&amp;nbsp;&lt;i&gt;수학적 추측&lt;/i&gt;이 참이거나 거짓임이 가능한 진술이라는 점 외에 아무런 유비도 그 자체로 시사하지 않다는 것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나는 적절하게 부합하는 질적인 우연한 진술에 대해 그 어떤 보편적인 틀도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사물들이 다른 식으로 드러났었을지도 몰랐는지에 관련하고 있기에, 우리의 보편적 틀은 앞선 증거와 진술 양자 모두를 질적으로 재기술하고 그것들이 우연적으로만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체성의 경우, 앞서 개밥바라기별-샛별 같은 두 고정 지시자들을 사용하면, 종종 최소한 근사치로는 같은 효과를 위해 사용 가능한 더 단순한 틀이 있다. 'R1'과 'R2'는 동일성 기호를 곁하는 두 지시자들이라고 해 보자. 그럼 'R1=R2'는 만일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다. 'R1'과 'R2'의 지칭물들은, 각기 비고정 지시자들 'D1'과 'D2'에 의해 꽤나 잘 고정될지도 모른다. 개밥바라기별과 샛별 사례에서 이 비고정 지시자들이 '저녁(아침)에 하늘의 그러저러한 위치에 있는 천체'라는 형태를 취한다. 그럼 'R1=R2'가 필연적이더라도, &lt;b&gt;[144]&lt;/b&gt; 'D1=D2'는 그럭저럭 우연할지도 모르고, 이것은 종종 'R1=R2'가 다른 식으로 밝혀졌을지도 몰랐다는 잘못된 관점으로 이끌곤 하는 것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끝으로 나는 앞선 고찰들을 동일성 명제들에 적용하는 일에 대한 너무도 피상적인 논의로 향한다. 동일성 이론가들은 여러 구별되는 유형의 정체화들에 관련해 왔다. 개인과 그의 신체, 개별 감각과 (혹은 사건이나 감각을 가진다는 상태와) 개별적인 뇌의 상태 (6시 존의 고통은 그 시각 그의 C-신경섬유 자극이었다), 심적 상태의&amp;nbsp;&lt;i&gt;유형들&lt;/i&gt;과 상응하는 물리적 상태들의&amp;nbsp;&lt;i&gt;유형들&lt;/i&gt; (고통은 C-신경섬유의 자극이다)의 정체화들. 이들 각각, 그리고 문헌 내 다른 유형의 정체화들은, 동의어와 정체성에 대해 주창된 혼동에 단순히 호소하는 것으로는 피할 수 없는, 데카르트주의 비평에 의해 올바르게 제기되는, 분석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나는 물론 최소한 (주의해서 이야기하건데) 어떤 지적인 사상가도 잠들기 직전 첫 번째 성찰에서 떠올릴, 일부 동일성 명제들을 옹호하고 여타의 것들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일 가로막을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아무런 제한선도&lt;span&gt;&amp;nbsp;없다는&lt;/span&gt;&lt;/span&gt; 점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일부 철학자들은 개별 감각과 개별 뇌 상태의 동일성은 수용해왔던 반면, 심적&amp;nbsp;&lt;i&gt;유형들&lt;/i&gt;과 물리적&amp;nbsp;&lt;i&gt;유형들&lt;/i&gt; 사이의 동일성의 가능성은 부정해왔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5&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5&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5)&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5)&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 나는 주로 유형간 동일성에 관련할 것이고, 문제의 철학자들은 그래서 해당 논의의 상당부분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유형의 동일성들을 간략히 언급할 것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데카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정신은 신체 없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기에,&amp;nbsp;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개인이나 정신이 그 신체로부터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등한 수준으로 같은 결론을 &lt;b&gt;[145]&lt;/b&gt; 신체가 정신 없이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는 전제로부터 논증했을지도 몰랐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6&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6&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6)&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6)&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6&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이제 내가 순전히 수용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한 가지 대답은 천진난만하게 데카르트식 전제는 수용하면서 데카르트식 결론은 거부하는 답이다. '데카르트'가 특정 개인의 이름이라고, 혹은 고정 지시자라고 하고, 'B'가 그의 신체에 대한 고정 지시자라고 해 보자. 그럼 만일 데카르트가 그에 더해 B로 정체화되었다면, 그 추정된 정체성, 두 고정 지시자들 사이의 동일성인 바의 그것은 필연적일 것이고, 데카르트는 B 없이 그리고 B는 데카르트 없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경우는 주창된 유비, 최초의 우정 장관과 이중초점 렌즈의 발명가의 동일성에 전혀 비견될 수 없다. 사실, 설령 이중초점 렌즈가 한 번도 발명된 적 없었다 할지라도 최초의 우정 장관은 있었을 수 있었으리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동일성은 확보된다. 그 이유는 '이중초점 렌즈의 발명가'가 고정 지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중초점 렌즈를 아무도 발명하지 않았던 세계는&amp;nbsp;&lt;i&gt;사실 그 자체에 따라&amp;nbsp;&lt;/i&gt;프랭클린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주창된 유비는 붕괴된다. 데카르트식 결론을 반박하길 바라는 &lt;b&gt;[146]&lt;/b&gt; 철학자는 데카르트식 전제를 반박해야만 하고, 후자의 작업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lt;i&gt;A&lt;/i&gt;'가 개별 통각을 명명하도록, 그리고 '&lt;i&gt;B&lt;/i&gt;'가 상응하는 뇌 상태, 혹은 어떤 정체성 이론가가 &lt;i&gt;A&lt;/i&gt;와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뇌 상태를 명명하도록 하자. &lt;i&gt;첫눈에&lt;/i&gt;, &lt;i&gt;B&lt;/i&gt;가 (존의 뇌가 문제의 시각에 정확히 그 상태에 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어떤 고통이든 간에 느끼고 있는 존 없이,&amp;nbsp;그래서 &lt;i&gt;A&lt;/i&gt;의 현존 없이,&amp;nbsp; 존재했었으리라는 것은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가능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동일성 이론가는 그 가능성을 기꺼이 인정할 수가 없고 거기에서부터 진행할 수도 없다. 일관성, 그리고 고정 지시자들을 사용하는 동일성의 필연성 원리는 그런 어떤 경로도 불허한다. 만일&amp;nbsp;&lt;i&gt;A&lt;/i&gt;와 &lt;i&gt;B&lt;/i&gt;가 동일하다면, 그 동일성은 필연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 난점은 설령 &lt;i&gt;B&lt;/i&gt;가 A 없이 존재할 수 없을지라도, &lt;i&gt;고통임&lt;/i&gt;은 단지&amp;nbsp;&lt;i&gt;A&lt;/i&gt;의 우연적 속성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므로 고통 없는 &lt;i&gt;B&lt;/i&gt;의 현존은&amp;nbsp;&lt;i&gt;A&lt;/i&gt; 없는 &lt;i&gt;B&lt;/i&gt;의 현존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통해 회피되기 어렵다. 본질에 대한 어떤 경우든 각 고통에 대해&amp;nbsp;&lt;i&gt;고통임&lt;/i&gt;이 필연적 속성이라는 사실보다 더욱 명백할 수 있는가? 문제의&amp;nbsp; 전략을 채택하길 바라는 동일성 이론가는&amp;nbsp;&lt;i&gt;감각임&lt;/i&gt;이&amp;nbsp;&lt;i&gt;A&lt;/i&gt;의 우연적 속성이라고까지 주장해야만 하는데,&amp;nbsp;&lt;i&gt;첫눈에&lt;/i&gt; &lt;i&gt;B&lt;/i&gt;가 그것과 그럴 듯하게 동일시될지도 몰랐던 어떤 감각도 없이 존재할 수 있었으리란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 차례 겪은 적 있는 개별 통증 혹은 여타 감각을 고려해 보라. 당신은&amp;nbsp;&lt;i&gt;바로 그 감각&lt;/i&gt;이 감각임 없이 존재했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 한 특정한 발명가(프랭클린)가 발명가임 없이 존재했었을 수 있었을 그 방식으로 그리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 도대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는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내가 이 전략을 언급하는 이유는 다수의 동일성 이론가들에 의해 그 전략이 채택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가들은, 그들이 뇌 상태와 그에 상응하는 정신 상태의 추정된 동일성이 벤자민 프랭클린과 이중초점 렌즈의 발명가 사이의 우연적 동일성의 틀에 근거하여 분석되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의 우연적 활동이 벤자민 프랭클린을 이중초점 렌즈의 발명가로 만드는 것처럼, &lt;b&gt;[147]&lt;/b&gt; 그렇게 뇌 상태의 어떤 우연적 속성이 그 상태를 고통으로 만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이 속성이 물리적으로,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최소한 '화제-중립적' 언어로&lt;/span&gt; 진술될 수 있는 속성이기를, 그래서 유물론자가 환원불가능한 비물리적 속성들을 도입한다고 비난받을 수 없게 되기를 바란다. 전형적인 관점은&amp;nbsp;&lt;i&gt;고통임&lt;/i&gt;이 물리적 상태의 속성처럼 그 상태의 '인과적 역할'로 분석되는 것,&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7&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7&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7)&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7)&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7&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 상태를 야기하는 특정한 자극들(예를 들어, 바늘로 찌름)과 그 자극이 야기하는 특징적인 행동으로 분석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나는 내가 여기에서 주장하는 일반 양상 고찰들에 더해 특수한 근거들에서 그들이 틀렸다는 점을 대체로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석들의 세부사항까지 살펴보진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저 물리적 상태의 '인과적 역할'이 문제의 이론가들에 의해 해당 상태의 우연적 속성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그것이 전적으로 심적 상태라는 것이 해당 상태의 우연적 속성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 그것이 통증만큼이나 특수한 어떤 것이라는 점은 차치한 채로 그리 간주된다는 것이다. 반복하자면, 이러한 관념은 내가 보기엔 자명하게 부조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amp;nbsp;&lt;i&gt;지금 내가 겪는 바로 그 고통&lt;/i&gt;이 심적 상태임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존재했을 수 있었으리라는 관점이 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나는 본래의 데카르트식 고찰에 더욱 밀접한 역전 문제, 즉, 두뇌 상태가 어떤 고통도 없이 존재했을 수 있었으리라고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고통이 상응하는 두뇌 상태 없이 존재했을 수 있엇으리라고 보인다는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다.&amp;nbsp;&lt;i&gt;뇌 상태임&lt;/i&gt;이 명백히&amp;nbsp;&lt;i&gt;B &lt;/i&gt;(해당 뇌 상태)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점에 주의하라. 뇌 상태임뿐만 아니라, 특정 유형에 속한 뇌 상태임도 &lt;i&gt;B&lt;/i&gt;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은 더더욱이 참이다. 가정된 시점에 그 현전이 해당 시점에&amp;nbsp;&lt;i&gt;B&lt;/i&gt;의 현전을 구성하는 그 뇌세포의 배열은 &lt;i&gt;B&lt;/i&gt;에 본질적이고, 그 부재 상태에서&amp;nbsp;&lt;i&gt;B&lt;/i&gt;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lt;b&gt;[148]&lt;/b&gt; 뇌 상태와 고통이 동일하다고 주장하길 바라는 누군가는 고통&amp;nbsp;&lt;i&gt;A&lt;/i&gt;가 매우 특정한 유형의 분자 배열 없이 존재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만일&amp;nbsp;&lt;i&gt;A&lt;/i&gt; = &lt;i&gt;B&lt;/i&gt;라면, &lt;i&gt;A&lt;/i&gt;와&lt;i&gt; B&lt;/i&gt;의 동일성은 필연적이고, 한쪽의 어떤 본질적 속성이든 다른 쪽의 본질적 속성이어야만 한다. 동일성 명제를 견지하고자 하는 누군가는&amp;nbsp;&lt;i&gt;A&lt;/i&gt;는&amp;nbsp;&lt;i&gt;B &lt;/i&gt;없이,&amp;nbsp;&lt;i&gt;B&lt;/i&gt;는&amp;nbsp;&lt;i&gt;A&lt;/i&gt;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심적 속성들과 어떤 것의 상관적 현존은 &lt;i&gt;B&lt;/i&gt;에 단지 우연적일 뿐이며, 그리고 어떤 특정 물리적 속성들의 상관적 현존이 &lt;i&gt;A&lt;/i&gt;에게 그저 우연적일 뿐이라는&amp;nbsp;데카르트식 직관을 단순하게&amp;nbsp;&lt;i&gt;수용&lt;/i&gt;할 수 없다. 그는 이러한 직관들을,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허상인지 보여줌으로써 설명해 내야만 한다. 이 작업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서 어떻게 일부 우연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면밀한 검토를 통해 필연적인 것으로 드러나는지 보았다. 그렇지만 그 작업은 명백히 장난이 아니고, 우리는 아래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게 될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마지막 종류의 동일성, 내가 더 면밀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 말했던 것은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의 정체화를 통해 예화되는 유형간 동일성이다. 이러한 정체화들은 열과 분자 운동의, 물과 수산화 수소의, 등등의 동일성 같은 그런 과학적 유형 정체화에 유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유물론자의 정체화와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화 사이에 성립한다고 추정되는 유비를 고려해 보자. 두 정체화 모두 두 유형의 현상들을 동일화한다. 통상적인 관점은 열과ㅏ 분자 운동의 동일화와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의 동일화가 양자 모두 우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위에서 '열'과 '분자 운동'이 둘 모두 고정지시자이기에, 그 둘이 명명하는 현상들의 동일화가 필연적이라는 점을 보았다.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고통'이 그것이 지시하는 해당 유형 혹은 현상의 고정 지시자라는 점이 이전 논의로부터 분명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고통이라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며, 고통이 그것인 바의 것과는 다른 어떤 현상이었을 수 있었으리라고 &lt;b&gt;[149]&lt;/b&gt; 추정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같은 논리가 'C-신경섬유 자극'이란 용어에 대해서도 성립하는데, 내가 여기에서 제안할 바와 같이, 'C-신경섬유'가 고정 지시자라는 점이 보장된다면 그러하다. (그 제안은 어느 정도 위험한데, 나는 C-신경섬유에 대해 그 자극이 고통과 상관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8&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8&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8)&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8)&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8&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 만일 'C-신경섬유'가 고정 지시자가 아니라면, 단순히 그것을 고정 지시자인 것으로 교체하거나, 그것이 지금의 문맥에서는 고정 지시자로 사용된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의 동일성은 만일 참이라면&amp;nbsp;&lt;i&gt;필연적&lt;/i&gt;이어야만 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여기까지가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화와 고통과 C-신경섬유의 동일화 사이의 유비가 실패하지 않은 지점이다. 그것은 통상 생각되어 온 것과는 반대인 것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양자 모두, 만일 참이라면, 필연적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동일성 이론가가 고통이 아니었던 C-신경섬유 자극도 C-신경섬유 자극이 아니었던 고통ㅇ도 있을 수 없었으리라는 관점에 개입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귀결들은 확실히 놀랍고 반직관적이지만, 동일성 이론가를 너무 일찍 배제하진 말도록 하자. 그가 어쩌면 C-신경섬유 자극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고통의 명백한 가능성 혹은 그 현상들 중 한 쪽의 사례가 아닌 &lt;b&gt;[150]&lt;/b&gt; 다른 한쪽의 사례가 있다는 가능성이, 물이 수산화 수소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거나, 혹은 열이 분자 운동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거나 하는 허상과 같은 종류의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는 데카르트주의자를 종래의 분석에서처럼, 그의 전제를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논증의 오류를 드러냄으로써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반박했을 것이다. 데카르트주의 논증이 그 동일화 우연성 전제를 가정하면 그 결론에 이른다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해당 전제가 표면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거짓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제 나는 동일성 일노가가 그러한 시도에 성공하리라는 것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최소한 해당 사례가 통상적인 종류의 과학적 정체화,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성을 통해 예화된 그런 종류의 정체화에 대한 유비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앞서&amp;nbsp;&lt;i&gt;후험적으로&lt;/i&gt; 필연적인 특정 사례의 명백한 우연성을 취급하기 위해 사용된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그 전략은 해당 진술 자체가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amp;nbsp;&lt;i&gt;질적으로&lt;/i&gt; 말해서, 본래와 똑같은 인식론적 상황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lt;i&gt;질적으로&lt;/i&gt; 유비되는 진술이 거짓일 수 있었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두 고정 지시자들 사이의 동일성의 사례에서, 해당 전략은 더욱 단순한 사례에 의해 사태에 근접해질 수 있다. 어떻게 해당 지시자의 지칭이 결정되는지 고려해 보라. 만일 이러한 지칭이 오직 우연하게만 일치한다면, 본래의 진술에 그 우연성이라는 허상을 부여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이다. 열과 분자 운동의 사례에서, 이 두 가지 틀이 작동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누군가가 부정확하게 열은 분자 운동인 것으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고 말할 때, 그의 말에서 참인 것은 누군가가 우리가 열을 감각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 현상을 감각했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 즉, 우리가 '열감' (이것을 '&lt;i&gt;S&lt;/i&gt;'라고 부르자) 이라고 부르는 감각을 그것이 산출함을 통해 그것을 느꼈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설령 그 현상이 분자 운동이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추가적으로, 그는 이 행성에 분자 운동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lt;i&gt;S&lt;/i&gt;를 지니지 못한 피조물들이 정주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고 말한다. &lt;b&gt;[151]&lt;/b&gt; 어쩌면 다른 어떤 것의 현존 상황에서는 그것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피조물들은 모종의 질적인 의미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식론적 상황에 처했을 것이고, 그들에게&amp;nbsp;&lt;i&gt;S &lt;/i&gt;감각을 야기하는 현상에 대한 고정 지시자를 (그 고정 지시자는 '열'이기까지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분자 운동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러므로 열이 아니고!), 해당 감각을 야기하고 있던 그것이 아닐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제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의 동일성이, 그것이 만일 과학적 발견이라면, 다른 식으로 드러났었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느낌을 해명하기 위해 어떤 것이 유비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엔 그런 유비는 가능하지 않다. 분자 운동이 열 없이 존재했을지도 몰랐다는 명백한 가능성의 사례에서, 실제로 가능하게 보이는 것은 분자 운동이&amp;nbsp;&lt;i&gt;열로 느껴짐&lt;/i&gt; 없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것, 즉, 그것이 열감,&amp;nbsp;&lt;i&gt;S&lt;/i&gt;를 산출하는 일 없이 존재했을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적합한 지각을 갖춘 존재들에게 C-신경섬유 자극이 고통으로 느껴지는 일이라는 것 없이 존재했었으리라는 것이 유비적으로 가능한가?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C-신경섬유의 자극은 그 자체로 고통 없이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것이&amp;nbsp;&lt;i&gt;고통으로&amp;nbsp;&lt;/i&gt;&lt;i&gt;느껴지는&lt;/i&gt; 일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amp;nbsp;&lt;i&gt;그 어떤&lt;/i&gt; 고통으로도&amp;nbsp;&lt;i&gt;있는 일&lt;/i&gt;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고통과 그에 상응하는 물리적 상태의 추정된 필연적 동일성과 그대로 모순될 것이고, 그 유비는 상응하는 심적 상태와 동일시될지도 몰랐던 어떤 물리적 상태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문제는 동일성 이론가가 해당 물리적 상태는 단지 심적 상태를&amp;nbsp;&lt;i&gt;산출한다&lt;/i&gt;는 것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그 둘이 동일시되는 것이길 기대하고 그래서&amp;nbsp;&lt;i&gt;후험적으로&lt;/i&gt; 필연적으로 공동-발생하는 것이길 바란다는 점이다. 분자 운동과 열의 경우 외재적 현상과 관찰자 사이의 매개체인 어떤 것, 즉 열감이 있다. 심리-물리 사례에서는 그런 어떤 매개도 가능하지 않은데, 여기에서 물리적 현상은 내적 현상 그 자체와 &lt;b&gt;[152]&lt;/b&gt; 동일한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열이 부재하는 상황에서조차 열이 있었을 때 그가 처했을 것과 똑같은 인식적 상황에 있을 수 있다. 단순히 열감을 느낌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열이 현존하는 상황에서조차, 그는 열이 부재하는 경우에 그가 가질 것과 같은 증거를 가질 수 있다. 단지 &lt;i&gt;S&lt;/i&gt; 감각을 결여함으로써 말이다. 고통과 여타 심적 현상들의 경우 그런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고통을 지녔다면 획득했을 것과 똑같은 인식 상태에 처한다는 것&lt;i&gt;은&amp;nbsp;&lt;/i&gt;고통을 지닌다는 것&lt;i&gt;이다&lt;/i&gt;. 고통의 부재 시에 획득했을 것과 똑같은 인식적 상황에 처한다는 것&lt;i&gt;은&lt;/i&gt; 고통을 지닌다는 것&lt;i&gt;이&amp;nbsp;&lt;/i&gt;아니다. 심적 상태와 상응하는 뇌 상태 사이의 연결의 명백한 우연성은 그래서 열의 사례에서와 같은 모종의 질적 유비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우리는 해당 상황을 질적으로 동일한 인식적 상황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했을 뿐이다. 문제는 관찰자가 감각&amp;nbsp;&lt;i&gt;S&lt;/i&gt;를 지닌 상황과 질적으로 동일한 인식적 상황이라는 개념&lt;i&gt;이&lt;/i&gt; 단순히 관찰자가 해당 감각을 지닌 상황&lt;i&gt;이라는&lt;/i&gt; 것이다. 같은 지점이 고정 지시자의 지칭을 지적해내는 것이라는 개념으로도 구성될 수 있다.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성 사례에서 중요한 고찰은 '열'이 고정 지시자라 하더라도, 그 고정지시자의 지칭은 그 지칭체의 우발적 속성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 즉 우리 안에 감각&amp;nbsp;&lt;i&gt;S&lt;/i&gt;를 산출해 넣는다는 속성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현상이 열 현상과 같은 방식으로 고정적으로 지시되었으리라는 것, 그 역시 감각 &lt;i&gt;S&lt;/i&gt;를 통해 지적되어 나온 그러한 지칭과 더불어, 해당 현상이 열이라는 것 없이 그러므로 그것이 분자 운동이라는 것 없이 그러했으리라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한편, 고통은 그 우발적 속성들 중 하나에 의해 지적되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고통인 것이라는 속성 그 자체에 의해 지적되어 나오고, 즉각적인 현상학적 성질에 의해 그리 된다. 그래서 고통은 열과 달리 '고통'이란 표현에 의해 그저 고정적으로 지시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지시자의 지칭이 지칭체의 본질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lt;b&gt;[153]&lt;/b&gt; 그래서 고통이 특정 물리적 상태와 필연적으로 동일시된다 하더라도, 특정 현상이 해당 물리적 상태와 상관되는 것이라는 점 없이 우리가 고통을 지적해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지적되어 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 일이 가능하다. 만일 어떤 현상이든 우리가 고통을 지적해내는 방식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지적되어 나온다면, 그 현상&lt;i&gt;은&lt;/i&gt; 고통&lt;i&gt;이다.&lt;/i&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아마도 같은 지점이 이 강연에서의 전문적 장치에 대해 그런 특수한 지칭 없이 더욱 생생하게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창조하는 신을 상상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열과 분자 운동의 동일성을 만들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그것은 그가 해야 하는 일이 열을 창조하는 것, 즉, 분자 운동 그 자체를 창조하는 것뿐이라고 보일 것이다. 만일 공기 분자들이 이 지구에서 충분히 요동쳐진다면, 만일 타오르는 불이 있다면, 지구는 설령 그것을 바라보는 아무런 관찰자도 없다 할지라도 뜨거워질 것이다. 신은 그가 인간과 동물 관찰자들을 창조하기 전에 빛을 창조했다 (또한 그래서 광자의 흐름을, 현대 과학의 원칙에 따라, 창조했다). 그리고 같은 점이 추정컨데 열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그럼 어떻게 우리에게는 분자 운동과 열의 동일성이 실질적인 과학적 사실이라고, 단지 분자 운동의 창조만으로는 여전히 신에게 분자 운동을 열로 만드는 추가 작업을 남겨둔다고 보이는가? 이러한 느낌은 허상이고, 오히려 그 신에게 실질적인 작업&lt;i&gt;인&lt;/i&gt; 것은 열로 느껴지는 분자 운동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 그는 분자 운동이 어떤 지각이 있는 존재들에게 감각 &lt;i&gt;S&lt;/i&gt;를 산출해 넣는 일이 보장되도록 그들을 창조해야만 한다. 그가 이 작업을 수행한 이후에만 '열은 분자 운동이다'라는 문장이 우리가 그리 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amp;nbsp;&lt;i&gt;후험적&amp;nbsp;&lt;/i&gt;참을 표현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존재자들이 있게 될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C-신경섬유 자극의 경우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이 현상을 창조하기 위해, 신은 단지 적절한 유형의 물리적 자극을 수용할 수 있는 C-신경섬유를 가진 존재자들을 창조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존재자들이 의식적 존재자들인지 아닌지 여부는 여기에서 관련이 없다. 비록 C-신경섬유 자극을 고통 혹은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에 상응하게 만들기 위해, 신이 &lt;b&gt;[154]&lt;/b&gt; C-신경섬유 자극의 단순한 창조에 추가로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는 그 피조물들로 하여금 C-신경섬유 자극을&amp;nbsp;&lt;i&gt;고통&lt;/i&gt;으로 느끼도록, 그리고 간지러움이나 따스함으로 느끼거나 아무것도 못 느끼거나 하지 않게 해야만 하는데, 또한 명백히 그의 능력 범위 내에 있었을 식으로 그리 해야만 한다. 만일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그의 능력 범위 내에 있다면, 신이 창조하는 고통과 C-신경섬유의 자극 사이의 관계는 동일성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해당 자극은 고통 없이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과 'C-신경섬유 자극'이 고정적이기에, 이러한 사실은 두 현상들 사이의 관계가 동일성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신은 한 인간 그 자체를 만드는 일에 더하여, 특정한 인간이 이중 렌즈의 발명가이도록 만들기 위해, 모종의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 사람은 그런 어떤 것도 전혀 발명하지 않고도 잘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논리가 고통에 대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 만일 해당 현상이 아무튼 존재한다면, 그것을 고통으로 만들기 위해 아무런 추가 작업도 요청되지 않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요컨데, 뇌 상태와 심적 상태 사이의 상응은 특정한 명백히 우연적인 요소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동일성이 대상들 사이에 우연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만일 동일성 명제가 맞다면, 그 우연적 요소는 해당 심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 사이의 관계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 우연적 요소는 열과 분자 운동의 사례에서처럼, 현상(=열=분자운동)과 그 현상이 느껴지거나 나타나는 방식(감각&amp;nbsp;&lt;i&gt;S&lt;/i&gt;) 사이의 관계 내에 놓일 수 없는데, 심적 현상의 경우에 그 심적 현상 자체를 넘어서는 아무런 '나타남'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여기에서 나는 심적 상태와 상응하는 일 없는 물리적 상태의 가능성을 강조해 왔다. 그 반대 가능성, 물리적 상태(C-신경섬유 자극) 없는 심적 상태(고통) 또한 열과 분자운동의 유비에 호소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동일성 이론가들에게 제시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나는 유사한 문제들을 더욱 간략하게 자아와 신체를, 그리고 개별 심적 사건들과 &lt;b&gt;[155]&lt;/b&gt; 개별 물리 사건들을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동일시하는 관점에 관련해, 유형간의 사례에서와 같은 세밀함을 가지고 가능한 저항들을 논하지 않은 채로&lt;/span&gt; 논의하였다. 제시된 고찰들이 다양한 개별 심적 사건과 물리 사건을 동일화하길 바라는 이론가는 마땅히 유형간 동일화를 바라는 이론가가 직면할 문제들과 유사한 문제들에 직면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추정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 역시 표준적으로 주창되는 유비들에 호소할 수 없을 것이다. 해당 반응들과 유비들이 동일성 이론가의 해당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은 물론 그 어떤 대응도 소용 없다는 증명은 전혀 아니다. 나는 확실히 여기에서 그 모든 가능성을 논의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작금의 고찰들이 유물론의 일반적 형태들에 강력한 반대를 말해주는 것이라 추정한다. 내 생각에 유물론은 세계에 대한 물리적 기술이&amp;nbsp;&lt;i&gt;완벽한&lt;/i&gt; 기술이라고, 어떤 심적 사실들도 물리적 사실들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해서 필연적으로 그것들에 따른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어떤 동일성 이론가도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직관적 관점에 반대해 그럴 듯한 논증을 구성한 적이 없어 보인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90_29&quot; id=&quot;footnote_link_1390_29&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90, 29)&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90, 29)&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蟲-&lt;/p&gt;
&lt;div class=&quot;footnotes&quot;&gt;
  &lt;ol class=&quot;footnotes&quot;&gt;
    &lt;li id=&quot;footnote_1390_1&quot;&gt;New York, McGraw-Hill (1953), see Chapter VII, 'Equality'.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quot;&gt;물론, 그 장치는 그 가정된 유형의 인공 언어나 개념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철학자를 납득시키는 데에는 실패할 것이다. 지금의 경우, 일부 철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이항인 관계가 사물과 그 사물 자체 사이에서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입장은 노골적으로 부조리하다. 누군가는 그 자신의 최악의 적일 수 있고, 그 자신의 가장 가혹한 비평가일 수 있으며 그와 같은 것들일 수 있다. '전혀 더 부유하지 않은' 같은 어떤 관계들은 재귀적이다. 동일성 혹은 schmidentity는 그저 최소한의 재귀적 관계에 다름 아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나는 별도의 가설적 언어를 상상하는 이러한 장치의 유용성을 상술하기를 바란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3&quot;&gt;우리가 해당 상황을 우리의 언어로 기술하며 해당 상황 내부의 사람들이 사용하였을 언어로 기술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란 용어를 현실 세계에서와 똑같은 지시를 가지고 사용해야만 한다. 해당 상황 속 사람들이 이 이름들을 상이한 행성들에 대해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았거나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상관이 없다. 그들이 우리가 그 이름들의 지시들을 고정시키고자 했던 것과 똑같은 기술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3&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4&quot;&gt;'개밥바라기별은 개밥바라기별이다'에 대해서도 세 가지 같은 선택지가 존재하고, 그 답은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의 경우와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4&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5&quot;&gt;'Internal and External Properties', &lt;i&gt;Mind&lt;/i&gt; 71 (April, 1962), pp. 202-03.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5&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6&quot;&gt;&lt;i&gt;The Prince and The Pauper.&lt;/i&gt;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6&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7&quot;&gt;물론 나는 그 방 안의 목재 책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7&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8&quot;&gt;이 예시들을 통해 시사되는 원칙: &lt;i&gt;만일 물질적 대상이 특정 물질 덩어리에 그 기원을 가진다면, 그 대상은 다른 어떤 물질에도 그 기원을 두었을 수 없었을 것이다.&lt;/i&gt; 일부 질적 규정들이 진술되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물질 덩어리라는 개념의 모호성은 일부 문제를 유발한다), 대체적인 경우 그 원칙은 아마 일종의 증명 같이, 개별자들에 대해 동일성의 필연성이라는 원칙을 사용함으로써, 수용가능할 것이다. 'B'가 한 책상의 이름(고정 지시자), 'A'가 그 책상이 실제로 유래한 나무 조각의 이름이라 해 보자. 'C'는 또 다른 나무 조각의 이름이라 하자. 다음으로, 실제 세계에서처럼, B가 A로부터 제작되었다고, 그런데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책상 D도 C로부터 제작되었다고 해 보자. (우리는 A와 C 사이에 한쪽으로부터 책상을 만드는 가능성이 다른 쪽으로부터 책상을 만드는 가능성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가정한다.) 이제 이 상황에서 B &amp;ne; D이다. 따라서, 설령 D가 저절로 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A로부터 아무런 책상도 제작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D는 B이지 않을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그 '증명'은 동일성의 필연성이 아니라 차별성의 필연성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후자를 확립시키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고찰들과 같은 유형의 고찰들이 전자를 확립시키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X&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lt;/span&gt;&amp;ne;&lt;span&gt; &lt;/span&gt;&lt;/span&gt;Y라고 가정하라. 만일 X와 Y가 둘 모두 어떤 대상 Z와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동일했다면, X = Z, Y = Z, 따라서 X = Y이다.) 대안적으로, 그 원칙은 동일성의 필연성에 더하여 '브라우어식' 공리로부터, 혹은 그와 등가로, 가능세계들 사이의 대칭적인 접근가능성 관계로부터 도출된다. 어떤 사건에서든, 그 논증은 오직 C로부터 D의 제작이 A로부터 B의 제작 가능성에 영향을 주지 않고, 그 역 또한 성립하는 오직 그 경우에만 적용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8&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9&quot;&gt;대상의 &lt;i&gt;기원&lt;/i&gt;이 그 대상에 본질적이라는 원칙에 추가로, 또 다른 시사되는 원칙은 그 대상이 그것으로 제작되는 &lt;i&gt;실체(substance)&lt;/i&gt;가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몇몇 복잡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 '한 대상이 존재하기를 중단하지 않는 한 견지해야만 하는 속성들은 무엇이고, 그 대상이 그 대상으로 존속하는 동안 변화시킬 수 있는 그 대상의 속성들은 무엇인가?'라는, 시간상의 질문인 그러한 질문에 포함된 유형의 본질을, '(비시간적으로)대상이 지니지 못했을 수 없었을 속성들은 무엇이고, 여전히 (비시간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결여했었을 수 있었을 속성들은 무엇인가?'라는, 시간이 아니라 필연성에 관련된 그리고 이 강의에서 우리의 논의 대상인 질문에 포함되는 유형의 본질과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책상이 얼음으로 &lt;i&gt;변화&lt;/i&gt;&lt;i&gt;했을&lt;/i&gt; 수 있었을지 여부에 대한 질문은 여기에서 부적절하다. &lt;b&gt;[115]&lt;/b&gt; 그 책상이 &lt;i&gt;본래&lt;/i&gt; 목재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든 제작되었을 수 있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이 적절하다. 명백히 이 질문은 전제된 나무 토막으로부터 나온 그 책상의 기원의 필연성에 그리고 그 토막이 본질적으로 목재인지 여부에도 관련된다 (특정 종류의 나무인지까지도). 그래서 그 책상이 실제로 그로부터 제작된 것과는 다른 그 어떤 실체로부터든 제작되었다고 상상하는 일은 우주의 역사 전체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연실색할 만한 수작 없이는 통상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책상이 본래부터 목재로 제작되지 않았을 다른 가능성들로 내게 제안되어 왔던 것들은, Slote의 기발한 제안을 포함하여, 그 중 어느 것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 제안들을 여기서 논의할 수는 없다.) 개별자 본질 속성 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는 여기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지점들 몇 가지는 언급하고자 한다. (1) 통상 우리가 직관적으로 어떤 일이 주어진 대상에게 발생했을지 여부를 물을 때, 우리는 우주가 특정 시점까지 진행되었던 그대로 진행되었을 수 있었는지, 하지만 그 역사 내에서 해당 시점부터 이후로 분기하여 해당 시점부터 이후로 그 대상의 우여곡절이 달랐을 것이었을지 여부를 묻는다.&amp;nbsp;&lt;i&gt;아마도&lt;/i&gt; 이러한 특징은 본질에 관한 일반 원칙 내에 정립되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실제 역사로부터의 분기가 발생하는 시점은 때로 그 대상 자체가 창조되기 이전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주의하라. 예를 들어, 나는 만일 내가 그로부터 기원한 그 수정된 난자가 특정 방식들로 손상되었더라면, 그 손상 시점에 추정컨데 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지라도, 기형이었을지도 몰랐다. (2) 나는 오직 기원과 실체적 구성만이 본질적이라고 시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만일 그 책상이 그로부터 제작되었던 바로 그 나무 토막이 그 대신 꽃병으로 제작되었다면, 그 책상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거칠게 말하자면) &lt;i&gt;책상으로 있음&lt;/i&gt;은 그 책상의 본질 속성인 것으로 보인다. (3) 한 대상이 &lt;i&gt;실제로&lt;/i&gt; 특정 속성을(예를 들어 대머리) 지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이 모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 대상이 특정 속성을 본질적으로 지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 대상이 해당 속성을 실제로 지니는지 여부가 결정된 경우조차, 모호할 수 있다. (4) 기원 원칙에 대한 특정 반례들이 일상어법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나는 그 반례들이 진정한 반례들은 아니지만, 그것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에 대해 여기서 논할 수는 없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9&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10&quot;&gt;Peter Geach는 (&lt;i&gt;Mental&amp;nbsp;Acts&lt;/i&gt;, Routledge and Kegan Paul, London, 1957, Section 16,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여기에서 고려되는 본질 속성 유형과는 다른 '명목적 본질' 개념을 지지해 왔다. 기치에 따르면 가리키는 그 어떤 행위든 애매하기에, 한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명명하는 누군가는 그의 지칭에 대해 애매성을 해소하고 통시간적 동일성의 정확한 기준을 보장하기 위해 종류 속성을 적용시켜야만 한다. 예를 들어, '닉슨'에 대해 그를 가리킴으로써 지칭을 할당하는 사람은 '나는 &quot;닉슨&quot;을 저 &lt;i&gt;사람&lt;/i&gt;의 이름으로 사용한다'라고 말해야만 하고, 그래서 그의 청자들로 하여금 그가 코나 혹은 시간-단편을 가리키고 있다고 간주하려는 유혹을 제거하면서 그리 해야만 한다. 그래서 종류는 어떤 의미로는 이름의 의미의 일부이다. 이름은 무엇보다도, 설령 그 지칭을 결정하기에 충분할 만큼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lt;b&gt;[116]&lt;/b&gt; 기술구 이론과 기술다발 이론에서 그러하듯, (부분적) 의미를 지닌다. 내가 기치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의 명목적 본질은 필연성이 아니라 선험성을 통해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여기에서 옹호되고 있는 종류의 본질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실질' 본질이 아니라 '명목' 본질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의 일부일 것이다). 그래서 '닉슨은 사람이다', '도빈은 말이다' 같은 것들은&amp;nbsp;&lt;i&gt;선험적&lt;/i&gt; 참일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관점에 관해 내가 여기서 입장을 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해둘 것이다. (1) 설령 지시적 지칭의 애매성을 해소하기 위해 종류가 사용된다 하더라도, 물론 그것은 지시되는 대상에 대해 선험적으로 참이라 주장될 필요가 없다. 도빈이 말 이외의 종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 없거나(외견상으로 말처럼 보였더라도), 개밥바라기별이 별이 아니라 행성이라 드러날 수 없거나, 롯의 손님들이, 설령 그가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아니라 천사들이라고 드러날 수 없었는가? 아마도 기치는 종류들을 좀 더 신중하게 고집해야 했을 것이다. (2) (1)에 대한 반론을 포기하면, 물론 전제와 결론 사이에 실질적인 간극이 있다. 소수의 화자들만 실제로 지시적 정의에 의해 주어진 이름의 지칭을 배운다. 그리고, 설령 그들이 지시적 정의로 소급시켜주는 의사소통 연쇄를 통해 그 이름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왜 그 지시적 정의에 사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종류가 어떤 의미로든 그들에게 그 이름의 '의미'의 일부여야 하는가? 여기에서는 아무런 논증도 제공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경우: 한 수학자의 아내가 그녀의 남편이 '낸시'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을 우연히 듣는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지칭한 것인 낸시가 여인인지 아니면 리의 군인지 여부를 궁금해한다. 왜 그녀의 '낸시' 사용은 명명의 사례가 아닌가? 만일 그것이 명명 사례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그녀의 지칭의 부정성은&amp;nbsp;&lt;i&gt;아니다&lt;/i&gt;.)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0&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11&quot;&gt;내가 너무 일찍 말했던지도 모르겠다. 1970년 1월 이 강연이 이루어졌을 때 일부 경제면에서 말했던 내용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12&quot;&gt;&lt;i&gt;Prolegomena&amp;nbsp;to&amp;nbsp;Any&amp;nbsp;Future&amp;nbsp;Metaphysics&lt;/i&gt;, Preamble Section 2.b. (Prussian Academy edition, p. 267). 나는 여기에서 실질적인 역량을 내세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후 독어판을 대충 살펴본 이후로도 해당 구절에 대한 내 인상은 바뀌지 않았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2&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13&quot;&gt;Paul Ziff, &lt;i&gt;Semantic Analysis&lt;/i&gt;,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60, pp. 184-85.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3&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14&quot;&gt;&lt;i&gt;Journal of Philosophy&lt;/i&gt;, 59, No. 22 (October 25, 1962), pp. 658-71. 내가 이 글을 저술하고 있을 때는 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자연종과 물리학적 속성에 관한 후속작업에서, 퍼트남은 (내가 추정하기로) 여기에서 표현된 관점과 많은 접점을 가지는 추가작업을 하였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했듯, 퍼트남과 나의 접근법 사이에는 일부 분기점들이 있다. 퍼트남은 그의 고찰을 내가 언급하고 있는 필연적 진리 대(對) &lt;i&gt;선험적&lt;/i&gt; 진리라는 장치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의 이전 논문, 'The Analytic and the Synthetic', &lt;i&gt;Minnesota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lt;/i&gt;, vol. III, pp. 358-97에서, 그는 일부 측면에서 '군집 개념' 이론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그 개념이 고유명사에 적용된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인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나는 다시금 내가 해당 사례에 기반하여 전개시킨 이론들을 아마도 수용하지 않을 테지만, 그 사례가 이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나의 주의를 환기시킨 로저스 올브리튼의 예시였다는 점을 강조해야 하겠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4&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15&quot;&gt;나는 분석적 진리가 엄밀한 뜻(sense)에서 &lt;i&gt;의미&lt;/i&gt;(meanings)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lt;i&gt;선험적&lt;/i&gt;인 만큼이나 필연적이라고 상정하고 있다. 만일 진술의 &lt;i&gt;선험적&lt;/i&gt; 진리가 지칭의 고정을 통해 알려지는 진술이 분석 진술로 셈해진다면, 일부 분석적 진리는 우연적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여기서 채택된 분석성 개념에서는 배제된다. 분석성 개념에서의 &lt;b&gt;[123]&lt;/b&gt; 애매성은 물론 '정의(definition)'와 '뜻' 같은 용어의 일상적 용법들에서의 애매성으로부터 야기된다. 나는 이 강연에서 분석성을 취급하는 그 미묘한 문제를 다루려고 시도하지 않았지만, 종종 분석-종합 구분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으로 제시되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사례들, 특히 자연현상과 자연종을 포함하는 사례들은 여기에서 언급된 지칭 고정 장치를 통해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이다. 칸트의 예시, '금은 황색 금속이다'는 &lt;i&gt;선험적&lt;/i&gt;이지조차 않고, 그 예시가 지니는 필연성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은 과학적 탐구에 의해 확립된다는 점에 주의하라. 그래서 그건 어떤 뜻에서든 분석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5&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16&quot;&gt;더 좋은 닮은꼴 짝들도 있는데, 예를 들어, 주기율표에서 단일열의 원소들의 일부 쌍들은 서로 긴밀하게 유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원소들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6&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17&quot;&gt;Mill, op. cit.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7&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18&quot;&gt;나는 내가 '순수 속성' 혹은 프레게적 의도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기준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의심의 여지 없는 예시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노랑은 확실히, 앞서 금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서, 한 대상의 분명하게 물리적인 속성을 표현하고, 요청되는 그 의미에서 속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것에 고유한 바의 특정한 지칭적 요소가 없지 않은데, 현재의 관점에서 노랑이 특정되고 고정적으로 우리가 &lt;i&gt;노랑의 시각적 인상&lt;/i&gt;을 통해 감각하는 대상의 저 외재적인 물리적 속성으로 지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측면에서 자연종 용어들과 유사하다. 반면 감각 그 자체의 현상학적 성질은 모종의 순수한 의미에서&amp;nbsp;&lt;i&gt;특질(quale)&lt;/i&gt;로서 간주될 수 있다. 어쩌면 나는 오히려 이러한 문제들에 관련하여 모호할 수도 있지만, 추가적인 정확성은 여기에서 불필요해 보인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8&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19&quot;&gt;물론, 통계 역학적인 온도 개념과, 예를 들어, 열역학적 개념의 관계 문제가 있다. 이 논의에서는 그런 문제들을 치워두고자 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19&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0&quot;&gt;일부 사람들은 설령 확실히 우리가 우리가 열을 느낄 때 느끼는 감각에 의해 음파가 느껴졌더라도 음파가 '열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그 상황은 실제 세계에 현재하는 것이 아닌 가능한, 분자 운동과 구분되는 현상에 관련해서는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아마도, 제안되기로, '우리의 열'과는 또 다른 형식의 열, 분자 운동이 아닌 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분자 운동 이외에 소리 같은 그 어떤 다른 실제 현상도 그것을 질적으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금에 대해서 그리고 빛에 대해서도 유사한 주장들이 구성되었다. 나는 이러한 관점들을 수용할 생각이 없지만, 그 주장들은 지금 강연의 핵심에 별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고자 하는 누군가는 예시들 내에서 단순히 '빛', '열', '고통' 등의 용어를 '우리의 빛', '우리의 열', '우리의 고통' 같은 것들로 교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 여기에 지면을 할애해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0&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1&quot;&gt;물론 그것들이 모두 금이라고 가정할 경우이다. 내가 이후 말하는 바와 같이, 그 일부는 바보의 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서, &lt;i&gt;선험적으로&lt;/i&gt;, 해당 사물들이 &lt;i&gt;전형적으로&lt;/i&gt; 바보의 황금인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금인 그 모든 사물들은 물론 본질적으로 금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2&quot;&gt;명백히, 이 설명 전체에는 작위적인 요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항목들이 원본 사례를 구성하는지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금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경우에 독립적으로 발견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어떤 복잡성들이든 해당 그림을 급진적으로 변경시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2&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3&quot;&gt;이 논박을 이해하기 위해, 황색이 상태에 관련된다 하더라도 상태 속성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 '황색'의 의미에 대한 어떤 다른 이론도 갖지 못한 여러 철학자들은 그 용어가 상태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라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동시에, 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황색은 단단함이나 구형에 못지않게 '바로 저기 있는' 명백한 속성이라는 '직감'에 의해 방해받아왔다고 의심한다. 물론 지금 개념에 관한 적절한 설명은 '황색'의 지칭이 '평범한 환경 하에서 대상들이 황색으로 보이도록 하는 (즉, 특정 시각 인상에 의해 감지되도록 하는) 원인이 되는 그 대상들의 저 (명백한) 속성'이라는 기술에 의해 고정된다.&amp;nbsp; 물론 '황색'은 '그러저러한 감각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lt;i&gt;의미&lt;/i&gt;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다른 자연적 구조를 지녔더라면, 대기 조건이 달랐더라면, 우리가 맹인이었더라면, 기타 등등의 조건에서, 황색 대상들은 그런 어떤 것도 전혀 지니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황색'의 정의를 환경 C 하에서 그러저러한 시각 인상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으로 개정하려 애를 쓴다면, 그 환경 C에 대한 특수화는 순환적으로 황색을 포함하거나 그 주장된 뻔히 정의를 동의어가 아니라 과학적 발견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칭을 고정시킨다'라는 관점을 취한다면, 그렇게 언급된 속성을 우리가 바라는 그 어떤 더욱 근본적인 물리학적 용어로 정체화하든 그 일은 물리 과학자들에게 달린 일이 된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일부 철학자들은 '황색에 대한 감각', '열에 대한 감각', '통각' 같은 용어들이 열이나 황색 같은 외재적인 관찰 가능한 현상들로 정체화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면 언어화될 수 없을 것이고 인간 행태에 결부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나는 이 질문이 이 글에서 주창된 어떤 관점과도 독립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3&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4&quot;&gt;나 자신이 앞서 구성한 진술들 중 일부는 이러한 의미에서 느슨하고 부정확할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금은 원소가 아닌 것으로 밝혀질지도 &lt;i&gt;몰랐다&lt;/i&gt;'라고 말한다면, 나는 제대로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몰랐다(might)'는 것은 &lt;i&gt;인식론적&lt;/i&gt;인 것이고 해당 증거가 금이 원소라는 &lt;i&gt;선험적 &lt;/i&gt;(데카르트식의) 확실성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또한 내가 금의 원소성이 &lt;i&gt;후험적으로&lt;/i&gt; 발견되었다고 말할 때 나는 엄격하게 맞다. 만일 내가 '금은 원소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lt;i&gt;었을지도 몰랐다 (might have)&lt;/i&gt;'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를 형이상학적인 뜻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내 진술은 이 글에서 언급된 교정의 대상이 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4&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5&quot;&gt;토마스 나이젤과 도날드 데이빗슨이 주목할 만한 사례들이다. 그들의 관점들은 매우 흥미롭고, 나는 그 관점들을 더욱 상세하게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철학자들이 그들 자신을 '유물론자들'로 부르고 싶어했을 거라고 믿기는 어렵다. 특히 데이빗슨은 심리학적 속성들과 물리적 속성들의 상관에 대해 상정된 &lt;i&gt;불가능성&lt;/i&gt;에 관한 그가 고안한 동일성 이론을 위한 사례에 근거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문헌에서 개별-개별 동일화에 반대하는 논증이 이러한 관점들에&amp;nbsp;적용&lt;i&gt;된다&lt;/i&gt;.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5&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6&quot;&gt;물론 신체는 정신 없이&amp;nbsp;존재&lt;i&gt;하고&lt;/i&gt; 추정컨데 개인 없이도 그리하는데, 신체가 시체인 경우에 그러하다. 이러한 고찰은, 만일 수용되었다면, 이미 개인과 그의 신체가 구분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David Wiggins. 'On Being at the Same Place at the Same Time', &lt;i&gt;Philosophical&amp;nbsp;Review&lt;/i&gt;, Vol. 77 (1968), pp. 90-5를 보라.) 마찬가지로, 조각상이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의 덩어리가 아니라고 주장될 수 있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 누군가는 그 대신 전자가 후자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같은 방식이 개인과 신체의 관계에 대해서도 시도될지도 몰랐다. 그럼 문헌 내의 난점들은 같은 형식으로 유발되지 않았을 것이고, 유비적인 난점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조각상이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에 다름 아닌 그 방식으로 개인이 신체에 다름 아니라는 이론은 (필연적으로) 개인은 오직 그의 신체가 존재하고 특정한 추가적인 물리적 유기구조들을 갖는 경우라면 그 경우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 명제는 일상적인 동일성 명제에 늘 따라다니는 것과 유사한 양상적 난점들의 대상이 될 것이고, 심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의 동일화를 대체하는 제안된 유비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는 또 다른 기회를 기약해야만 한다. 내가 논의하지 않을 또 다른 관점은, 비록 내가 그것을 그다지 수용하지 않으려 했고 참된 명증성을 갖고 표명되었다고 확신조차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심리적 개념들에 대한 소위 기능적 상태 관점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6&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7&quot;&gt;예를 들어, David Armstrong, &lt;i&gt;A Materialist Theory of the Mind&lt;/i&gt;, London and New York, 1968, 관련 논의는 Thomas Nagel, &lt;i&gt;Philosophical review&lt;/i&gt; 79 (1970), pp. 394-403 ; 그리고 David Lewis, 'An Argument for the Identity Theory', &lt;i&gt;The Journal of Philosophy&lt;/i&gt;, pp. 17-25를 보라.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7&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8&quot;&gt;나는 최소한 한 사람의 유능한 청자는 내가 '~에 상관된다'거나 '~에 부합한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두고 그것이 이미 동일성 명제에 맞서 선결문제의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을 알고서 놀랐다. 그가 말하기로 동일성 명제는 고통과 뇌 상태가 상관된다는 명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동일하다는 명제이다. 그래서 나의 전체 논의는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반-유물론자의 입장을 선전제한다는 것이다. 해당 논증에 그렇게나 미미한 지성만을 인정하는 반박을 듣고 내가 놀라긴 했지만, 그런 반박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관된다'라는 용어를 피하려고 특히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이해를 배제하기 위해, 내 용어사용을 설명해야 하겠다. 최소한&amp;nbsp;&lt;i&gt;논의상으로는&lt;/i&gt;, 과학적 발견들이 처음부터 유물론을 반박하지는 않는 것으로 드러났었다고 가정하면, 이원론자도 동일성 이론가도 양자 모두 심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 사이에 상관이나 대응이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이원론자는 문제의 '상관' 관계가 비재귀적이라고 주장한다. 동일성 이론가는 그것이 단순히 동일성 관계의 특수한 사례 라고 주장한다. '상관'이나 '대응' 같은 용어들은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선입견 없이 중립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8&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90_29&quot;&gt;글에서 동일성 이론에 관한 이러한 의혹들을 표현했을 때,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해야 했을 것이다. 첫째로, 동일성 이론가들은 그들의 관점에 대한 긍정적인 논증들을 표현했었는데, 나는 확실히 여기에서 그에 답하지 않았다. 이 논증들 중 일부는 약하거나 관념론적 편견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것들은 내게 내가 지금은 설득력있게 답할 수 없는 고도로 강력한 논증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둘째로, 동일성 논제에 대한 반대는 데카르트 이원론의 수용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앞서 개인이 그가 실제로 기원하였던 것과는 다른 정자와 난자로부터 유래했을 수 있었으리라는 나의 관점은 은연중에 데카르트식 구도에 대한 반대를 시사한다. 만일 우리가 독립적이고 존속하며 영적인 실체로서 영혼이나 정신에 대한 명증한 개념을 가졌더라면, 그것이 왜 특정 정자나 특정 난자 같은 개별 물리적 대상들의 그 어떤 필연적 연결이든 가져야 했겠는가? 확고한 이원론자는 정자와 난자에 관한 나의 관점이 데카르트에 반대되는 선결문제의 오류를 범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방식을 주장할 것이다. 내가 내 실제 기원들과는 다른 정자와 난자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내가 보기엔 우리가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그런 어떤 명증한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 같다. 어떤 경우든, 데카르트의 관념은 데카르트의 자아 개념에 대한 흄의 비판 이래로 의심스러운 것으로서 해석되어온 것처럼 보인다. 나는 심신문제를 널리 열린 결말을 가진 극도로 혼란스러운 문제로 간주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90_29&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ol&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english/reading</category>
      <category>Kripke</category>
      <category>Lecture_Ⅲ</category>
      <category>Naming_and_Necessity</category>
      <author>버러지</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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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 Jan 2026 18:40:33 +0900</pubDate>
    </item>
    <item>
      <title>Saul A. Kripke, Naming and Necessity. 12th. Lecture Ⅱ.</title>
      <link>https://oistros.tistory.com/1389</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71] Lecture II: January 22, 1970&lt;/b&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지난 시간에 우리는 여기 열거된 여러 논제들로 제시된 이름에 대한 이론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1) 모든 이름 혹은 지시 표현 'X'에 대해, 속성다발, 즉 A가 '&amp;phi;X'라고 믿는 그러한 속성군 &amp;phi;가 상응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2) 그 속성들 중 하나 혹은 일부 결합은 어떤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내는 것으로 A에게 믿어진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3) 만일 대부분 혹은 편중된 대부분의 &amp;phi;들이 하나의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충족된다면, y는 'X'의 지칭물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4) 만일 투표가 어떠한 고유한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X'는 지칭하지 않는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5)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amp;phi;들의 대부분을 지닌다'라는 진술은 화자에 의해&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알려진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amp;phi;들의 대부분을 지닌다'라는 진술은 필연적 참을 표현한다 (그 화자의 개인언어에서).&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C) 어떤 성공적 이론에 대해서든, 설명은 순환적이지 않아야만 한다. 투표에 사용되는 속성들은 그것들 자체가 궁극적으로 제거 불가능한 방식으로 지칭 개념을 포함하지 않아야만 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C) 는 논제가 아니라 다른 논제들의 충족에 관한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논제 (1)-(6)은 순환으로 이끄는 방식으로, 독립적인 지칭 결정으로 이끌지 않는 방식으로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충족될 수 없다. &lt;b&gt;[72]&lt;/b&gt; 내가 지난 시간에 제시한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노골적인 순환 시도의 사례는 윌리엄 닐에 의해 언급된 이름에 대한 이론이었다. 나는 내가 복사해둔 그 이론의 해당 진술을 읽다가 조금 놀라서 다시 살펴봤다. 닐은 과거시제를 사용&lt;i&gt;했다&lt;/i&gt;. 그는 소크라테스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였다고 말하는 것이 사소하지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라 말했다. 그는 결론내리길,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단순히 '&quot;소크라테스&quot;라고 불리는 개별자'를 의미해야만 한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러셀은 몇몇 곳에서 유사한 분석을 내놓는다. 어쨌든, 과거시제를 써가며 진술했던대로, 그 조건은 순환적이지 않을 것인데, 누군가 확실히 '소크라테스'라는 용어를 누가 되었든 그리스인들에 의해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던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종의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아마 우리는&amp;nbsp;&lt;i&gt;우리가&lt;/i&gt; 그를 '소크라테스'라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그랬다는 것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물론, 사실 그들은 그 이름을 달리 발음했었을 것이다. 이 특정한 이름의 경우, 그것은 어쩌면 그리스어로부터의 번역이 훌륭해서 영어로도 그리스어와&amp;nbsp;&lt;i&gt;아주&lt;/i&gt; 다르지는 않게 발음되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사야가 '이사야'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사소하지 않다. 사실, 이사야가 '이사야'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거짓이다. 그 예언가는 이 이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그리스' 같은 어떤 것으로 부르지 않았다. 우리가 그 명제를 수정해서 읽었다고 가정해 보자: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우리에 의해, 최소한 나, 화자에 의해 불린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은 사소하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꽤나 사소하다. 나는 그것이 필연적이라거나 분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식으로, 말들이 '말들'이라고 불린다고 말해주는 것은, 이것이 '말'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quot;말&quot;이라고 불리는 동물'을&amp;nbsp;&lt;i&gt;의미한다&lt;/i&gt;는 결론으로 이끌지 않고서는 사소한 일이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의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서 그것은 즉각적으로 &lt;b&gt;[73]&lt;/b&gt; 악성 순환으로 이끌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Glunk' 같은 이름의 지칭물을 스스로 확정하고 이하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면, '나는 &quot;Glunk&quot;라는 용어를 내가 &quot;Glunk&quot;라고 부르는 그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다'라고 그리 했다면, 그것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Glunk'의 그 지칭물에 대해 어떤 독립적인 결정을 가지는 편이 낫다. 이것은 노골적인 순환적 확정의 좋은 예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quot;소크라테스&quot;라고 불린다' 같은 문장들은 매우 흥미롭고 이상해 보이는 만큼 그 분석에 관해 말하는 데에 시간을 쏟을 수 있다. 나는 실제로 한 번 그랬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의 바다가 얼마나 높이 오를 수 있는지 보라. 그리고 가장 낮은 지점들에서도 보라.) 어쨌든 이것은 비순환 조건 위반의 유용한 사례이다. 그 이론은 그 진술들 모두를 아마 만족시킬 테지만, 그건 오직 지칭을 특정 조건,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그 사람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확정짓는 독립적인 어떤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나는 이미 지난 강연에서 명제 (6)에 관해 말했다. 명제 (5)와 (6)은 전환된다. 명제 (5)에 대해 말했던 것은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amp;phi;들의 대부분을 가진다는 진술이 화자에게&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참이라는 것이다. 이 진술의 특정한 전환이 그 역시 화자에게&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참을 견지한다는 것 또한 주어진 이론 하에서 참일 것이다. 즉: 만일 어떤 고유한 것이 적절하게 가중치가 매겨진 의미에서 속성들 &amp;phi;의 대부분을 가진다면, 그것은 X이다, 라는 전환 말이다. 유사하게 특정한 전환은 이에 대해&amp;nbsp;&lt;i&gt;필연적으로&lt;/i&gt; 참일 것이다. 즉: 만일 어떤 것이든 적절히 경중이 매겨진 의미에서 &amp;phi; 속성들 대부분을 가진다면, 그것은 X이다. 그래서 실제로 누군가는 어떤 것이 X인 것은 만일 그것이 고유하게 속성들 &amp;phi;의 대부분을 가진다면 오직 그 경우에만 그러하다는 것은&amp;nbsp;&lt;i&gt;선험적&lt;/i&gt;이기도 하고 또한 필연적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이전의 명제들 (1)-(4)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간주한다. (5)와 (6)은 실제로 그저 충분히 숙고적인 화자는 이 고유명사 이론을 파악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앎으로써, 그는 그러므로 (5)와 (6)이 참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5)와 (6)에 대한 반박들은 일부 화자가 이 이론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amp;nbsp;&lt;i&gt;아닐&lt;/i&gt; 것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lt;b&gt;[74]&lt;/b&gt; 내가 지난 강연에서 그에 관해 말했던 바는 명제 (6)이다. 그것은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관찰되었던 바이다. 만일 고유명사와 결부된 속성 다발이 아주 좁은 의미에서 취해져서, 어떤 가중치에서든 오직 단 하나의 속성만이 제시된다면, 하나의 한정기술구가 지칭물을 적시해내는 것이라고 말하도록 하자.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던 철학자였다. 그럼 필연적 참이 아닌 특정한 것들이 필연적 참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경우,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설이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종사한 적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인 참이 아니라 우연적인 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단일 기술이라는 본래 전형을 폐기하고 기술 다발이라는 전형으로 전향해야만 한다고 결론내린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내가 지난 시간에 논증했던 일부 것들을 요약하자면, 이것은 필연성에 관한 이 문제에 정확한 답(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설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2&quot;&gt;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폐기하고 말하자면 '알렉산더의 스승'을 사용하기로 동의했다고 가정하면, 지칭되는 사람은 알렉산더의 스승이라는 것이 필연적 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종사한 적 있다는 것은 우연적 사실이고, 설령 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속성들의 논리적 합, 포괄적 선언지를 가진다는 것이 필연적 참이라 제안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foonote]Searle, 'Proper Names', in Caton, op. cit., p. 160.[/footnote]&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는 사실이 아니다. 필연의 어떤 직관적 의미에서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속성들을 가졌다는 것은 필연적 참이 아니다. 역사 철학의 일부 관점에서 어쩌면 유명한 특정 이론이 있는데, 결정론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역사 속 개별자에게 대단한 역할을 할당할지도 모르는 그런 이론이 있다. 아마도 칼라일은 위대한 사람의 그 이름의 의미를 그의 성취들과 결부시킬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일단 특정 개별자가 태어나고 나면, 그가 다양한 위대한 업적들을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져서 &lt;b&gt;[75]&lt;/b&gt; 그가 서구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발상들을 산출해냈을 것이란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바로 그 본성에 일부일 것임이 필연적일 것이다. 그러한 관점의 이점들이 역사나 위대한 인물들의 본성에 대한 관점으로서 무엇이든지, 고유명사 이론에 근거하여 그것이 사소하게 참일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것들 중&amp;nbsp;&lt;i&gt;어떤 것&lt;/i&gt;, 우리가 그렇게나 감탄하는 그 위대한 성취들 중&amp;nbsp;&lt;i&gt;어떤 것&lt;/i&gt;을 행했던 적이 있다는 것은 우연적 사실로 보일 것이다. 설의 이러한 느낌에는 &lt;i&gt;무언가&lt;/i&gt;가 있다는 점을 나는 말해야만 한다. 내가 '히틀러'라는 이름을 들을 때, 나는 그가 악이었다는 것이 일종의 분석적인 것이라는 가상적 '직감'을 갖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린츠에서 잠자코 보냈었을 지도 모른다. 그 경우 우리는 이 사람이 히틀러가 아니었으리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인데, 우리가 '히틀러'라는 이름을, 다른 가능세계들을 기술하면서조차, 저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앞선 강연에서 내가&amp;nbsp;&lt;i&gt;고정 지시자&lt;/i&gt;라고 불렀던 그 개념이다.) 우리가 '히틀러'의 지칭을 역사상 유태인을 학살한 다른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에 성공했던 사람을 지적해내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이 그 이름의 지칭을 우리가 지적해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이 불명예를 획득했을 또 다른 반사실적 상황에서, 우리는 그 경우에 다른 사람이 히틀러였을 것이리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히틀러가 권력을 아예 얻은 적이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우리가 그의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한다고 내가 시사하고 있는 그 속성을 지닌 적이 없었을 것이다. 유사하게, 설령 우리가 1m가 무엇인지를 표준 meter 막대에 대한 지칭에 의해 정의한다 하더라도, 그 특정 막대가 1m 길이라는 것은 우연적 참이고 필연적 참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 막대가 연장되었다면, 그 막대는 1m보다 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1m'라는 용어를 특정 길이를 지시하는 데에 고정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저 길이라는 우연적 속성으로 지시하고 있는 길이가 무엇인지 고정시키더라도, 우리가 저 사람의 이름의 경우에서 저 사람의 우연적 속성으로 저 사람을 지적해낼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우리는 그 이름을 &lt;b&gt;[76]&lt;/b&gt; 저 사람이나 저 길이를 모든 가능세계에서 지시하는 데에 사용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속성은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이라고 혹은 본질적이라고 간주되는 속성일 필요는 없다. 야드의 경우, 이 길이가 지적되어 나온 본래의 방식은, 내 생각에는, 잉글랜드의 왕 헨리 1세가 팔을 뻗었을 때 그의 손끝에서 그의 코까지의 거리였다. 만일 이것이 1야드의 길이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끝과 코 사이의 거리가 1야드일 것이라는 점은 필연적 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연히 그의 팔이 짧아졌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필연적 참이 아닌 이유는 yardhood라는 '개념 다발' 내에 다른 기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헨리 왕의 팔을 엄격하게 그의 길이 표준 단위로 사용하는 사람조차, 반사실적으로, 만일 특정한 것들이 그 왕에게 발생했더라면, 그의 손끝과 코 사이의 정확한 거리는 정확히 1야드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해당 길이임에 대한 특정 고정된 지칭을 지적해내는 데에 '야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한 다발 역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러한 언급들은 내 생각에 '통세계 정체화'와 '대응쌍 이론'에 관한 훌륭한 학술적 처리의 직관적인 기이함을 보여준다. 이런 종류의 여러 이론가들은 그들이 하는 그대로 '가능세계'가 우리에게 오직 질적으로만 주어진다고 믿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정체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대안적으로 그의 대응쌍들이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속성들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근접하게 모방하는 그러한 것들과 정체화되는 것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루이스는 말한다: '당신의 대응쌍들은 ... 당신을 모방하는데 ... 중요한 측면들에서 ... 다른 것들이 그것들의 세계들에서 하는 것보다 더욱 근접하게 게 그리하고 ... 다양한 측면의 중요성과 유사성의 정도에 의해 가중치가 매겨진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1&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몇몇은 그 중요한 속성들이란 것을 &lt;b&gt;[77]&lt;/b&gt; 해당 대상을 실제 세계에서 정체화해주는 데에 사용되는 그런 속성들과 동일시할지도 모른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물론 이러한 개념들은 틀렸다. 내게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중요한 속성들은 그의 철학적 저작으로 구성되고, 히틀러의 경우에는 그의 살인자로서의 정치적 역할로 구성된다. 두 사람 모두, 내가 말했듯, 저런 속성들을 모두 다 결여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속성들을 그들이 소유했었어야 한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든 불가피하게 만든, 아리스토텔레스든 히틀러든 그들을 속박하는 아무런 논리적 숙명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실제 경력과 완전히 다른 경력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대상의&amp;nbsp;&lt;i&gt;중요한&lt;/i&gt; 속성들은 '중요함'이 본질과 동의어로 사용되지 않는 한 본질적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상은 그 대상의 가장 두드러지는 실제 속성들과 매우 다른, 혹은 우리가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하는 속성들과 아주 다른 속성들을 가질 수도 있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몇몇 사람들이 내게 물었던 바 하나를 분명히 하고 가자. 내가 지시자가 고정적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것을 지시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amp;nbsp;&lt;i&gt;우리의&lt;/i&gt; 언어에서 사용되듯, 그것은&amp;nbsp;&lt;i&gt;우리가&amp;nbsp;&lt;/i&gt;반사실적 상황들에 관하여 말할 때 그 사물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다른 언어를 발화하는 반사실적 상황이 있을지도 몰랐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누군가가 '2 + 2 = 4'를 사람들이 7이 짝수라는 의미로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우연한 것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해당 반사실적 상황에서 모두 다 독일어로 말하고 있는 그런 반사실적 상황에 대한 기술의 일부일지라도, 그것에 관해 영어로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모두 독일어로 말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라거나 '우리가 비표준적 방식으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라고 말한다. 그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 우리가 말하는 방식과 다른 특정 방식으로 말한 가능세계 또는 반사실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세계를 기술하면서, 우리는&amp;nbsp;&lt;i&gt;우리의&lt;/i&gt; 의미와&amp;nbsp;&lt;i&gt;우리의&lt;/i&gt; 지칭으로&amp;nbsp;&lt;i&gt;영어&lt;/i&gt;를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정 지시자에 대해 &lt;b&gt;[78]&lt;/b&gt;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지칭을 가지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지칭되는 사물이 모든 가능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름이 그 사물을 고정적으로 지칭한다는 뜻으로 말한다. 만일 당신이 '히틀러가 아예 태어난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라'고 말한다면 '히틀러'는 여기에서, 여전히 고정적으로, 해당 기술된 반사실적 상황에서 존재하지 않았을 어떤 것을 지칭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러한 언급들을 가정하면, 이는 우리가 (6)을 잘못된 것으로 삭제해야만 한다는 뜻이 된다. 다른 명제들은 필연성과 관련이 없고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명제 (5)는 필연성과 관련이 없고 살아남을 수 있다. 만일 내가 '개밥바라기별'이라는 이름을 저녁에 특정한 천문학적 위치에서 보이는 특정 천체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그리하여 개밥바라기별이 저녁에 보인다는 것이 필연적 참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태는 그 별을 목격하도록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그러한 사물들에 관한 다양한 우연적 사실들에 달려있다. 그래서 설령 내가 나 자신에게 '개밥바라기별'을 저녁에 하늘의 저 위치에서 보는 천체를 명명하기 위해 사용하리라고 말할지라도, 개밥바라기별이 저녁에 보였다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그 지칭물을 결정했던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것은&amp;nbsp;&lt;i&gt;선험적&lt;/i&gt;일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개밥바라기별은 내가 저녁에 그 자리에서 봤던 그 사물이라고 결정했다면, 나는 그 지칭 결정을 성립시킴으로부터, 만일 어쨌든 개밥바라기별이 도대체 있다면 그것은 저녁에 내가 봤던 그 사물이라는 점을 알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 우리가 지금까지 제시해온 논증들이 살아남는 데까지는 살아남는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명제 (6)이 제거되는 경우의 이론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명제 (2), (3), (4)는 대규모의 반례 집합을 가지는 것으로 드러난다. (2)-(4) 명제들이 참인 경우조차, 명제 (5)는 통상 거짓이다. 명제 (3)과 (4)의 진리치는 경험적 '우연'이고, 화자가&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거의 알 리가 없는 사건이다. 즉 말하자면, 다른 원칙들은 실제로 화자의 지칭을 결정하고, 해당 지칭물이 (2)-(4)에 의해 결정된 지칭물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연적'인 것, 우리가&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아는 그 어떤 위치에도 있지 않을 그런 사건이다. 오직 희소한 종류의 경우에서만, 보통 최초 세례(명명)에서만, (2)-(5) 모두 참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amp;nbsp;&lt;b&gt;[79]&lt;/b&gt; 이 명제들((1)-(5))이 당신에게 어떤 명명의 그림을 제시하는가? 그 그림은 이런 것이다. 내가 한 대상을 이름짓고자 한다. 나는 그 대상을 고유하게 기술할 모종의 방법을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적 세례(명명)식을 진행한다. '키케로'로 나는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사내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키케로'의 지칭일 바의 것이리라. 나는 '키케로'를 (실제로) 카틸리나를 고발한 사내를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가 그리하지 않았던 가능세계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의사는 우선 한 대상을 고유하게 확정해주는일부 조건들을 제시함으로써, 다음으로 특정 단어를 이 조건에 의해 확정되는 그 대상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함으로써 제시된다. 이제 우리가 실제로 이 일을 수행하는 몇몇 상황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만일 당신이 억지로 그러고자 한다면, 당신이 '나는 저기 저 천체를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기술이라 부를 수도 있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2&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2&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2)&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2)&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것은 이러한 진술들이 단지 참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그 지칭이 결정되는지에 대한 올바른 그림을 제시하기까지 하는 사례이다. 또 다른 사례는, 만일 당신이 이것을 이름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런던 경찰이 '잭' 혹은 '잭 더 리퍼'를, 그가 누가 되었든 일련의 살인 혹은 그 대다수를 저지른 자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는 그 경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 그들은 그 이름의 지칭을 &lt;b&gt;[80]&lt;/b&gt; 기술로써 제시하고 있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3&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3&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3)&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3)&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3&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하지만 많은 혹은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 명제들이 거짓이라 생각한다. 그럼 그 명제들을 살펴보자.&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4&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4&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4)&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4)&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명제 (1)는 내가 말하듯 정의이다. 명제 (2)는 대상에 대해 A가 믿는 속성들 중 하나 혹은 일부 결합이 일부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내는 것이라 믿어진다.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일종의 사례는 내가 말했던 그것이다. 나는 '키케로'라는 용어를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자를 나타내는 데에 쓸 것이다 (혹은 그를 공개적으로 처음 고발했던 자라고, 그 용어를 고유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는 이 특수한 지칭에서 대상을 고유하게 지적해낸다.&amp;nbsp;&lt;i&gt;Semantic Analysis&lt;/i&gt;에서 지프 같은 일부 작가들, 이름이 어떤 의미에서도 뜻을 지닌다고 믿지 않는 작가들은 이것이 지칭이 결정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훌륭한 그림이라 생각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명제 (2)가 참인지 봐 보도록 하자. 어떤&amp;nbsp;&lt;i&gt;선험적인&lt;/i&gt; 방식에서 그것은 참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당신이 염두에 둔 속성들이 누구든 고유하게 지적해낸다고 당신이 생각하지 않는다면―그 속성들이 모두 두 사람에 의해 충족된다고 말해 보자―어떻게 당신은 그들 중 어느쪽 사람이 당신이 그에 관해 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이 한쪽보다는 다른 한쪽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말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통상 문제의 속성들은 문제의 그 사람의 일부 유명한 행위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키케로는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사내였다. 평균적인 개인은 이에 따르면 그가 키케로를 지칭할 때 &lt;b&gt;[81]&lt;/b&gt; 그는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사내' 같은 어떤 것을 말하고 있고 그래서 특정 사람을 고유하게 지적해냈다. 철학자들이 이 명제를 그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견지해온 것은 철학자들의 교육의 공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키케로에 대해 생각할 때,&amp;nbsp;&lt;i&gt;유명한 로마 연설가&lt;/i&gt;에 대해 생각하며, 오직 단 한 사람의 유명한 로마 연설가만 있었다든지 그 이름이 지칭물을 가지려면 키케로에 관해 다른 어떤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든지 하고 생각하려는 의도 없이 그리 생각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지칭할 수 있는 사람인 리처드 파인만을 고려해 보자. 그는 선도적인 현대 이론 물리학자이다. 여기 있는 모두(나 역시 물론) 파인만을 겔만과 차별화해주기 위해 그의 이론들 중 하나의 내용을 진술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길에 다니는 사람,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여전히 '파인만'이라는 그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그에게 질문을 하면 그는 말할 것이다. 그는 물리학자 뭐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이것이 누구든 고유하게 지넉해낸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가 '파인만'이라는 이름을 파인만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낼 기술을 지니는 경우들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우리가 키케로는 처음으로 카틸리나를 고발한 사내였다는 것을 안다고 말해 보자. 뭐 그건 좋다. 그것은 실제로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는데, 이 기술이 또 다른 이름, 즉 '카틸리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비순환조건을 위반하는 일을 피하기 위한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그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는 점을 확보해야만 한다. 특히, 우리는 카틸리나가 키케로에 의해 고발당한 사내였다고 말하지 않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어떤 것도 고유하게 지적해내고 있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단순히 한쌍의 대상들 A와 B를, A가 B를 고발한 그런 한쌍을 지적해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고발이 발생했던 유일한 쌍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고유성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어떤 조건들을 추가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만일 우리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누군가는 &lt;b&gt;[82]&lt;/b&gt; 내가 말했듯&amp;nbsp;&lt;i&gt;여기&amp;nbsp;&lt;/i&gt;모두가 이 이론에 대한 간략하고 독립적인 진술을 구성할 수 있고 그래서 아인슈타인을 고유하게 지적해낸다는 점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이 문제에 관해 충분하게 알지 못하고, 그래서 상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을 경우, 그들은 말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라고, 그리고 그럼 가장 직접적인 종류의 악순환에 끌려들어갈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래서 명제 (2)가 충족되는 일은 직설적인 방식으로 실패하는데, 우리가 파인만이 유명한 물리학자라고, 다른 어떤 것도 파인만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말할 경우 그러하다.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은 충족되는 경우에조차 적절한 방식으로 충족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하지만 그것은 비순환 조건을 충족시킬 그런 방식으로 그를 지적해내지는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상대성 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지적되어 나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제 (2)는 거짓으로 보인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철학자들에 의해 통상 이름들과 결부되는 조건들 &amp;phi;로부터 그 조건들을 변경함으로써, 누군가는 해당 이론을 개선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들어 본 다양한 방식들이 있었다. 어쩌면 이후에 그것들을 논의할지도 모른다. 흔히 그들은 이름난 사람의 유명한 성취들에 대해 생각한다. 확실히 유명한 성취들의 경우 그 이론은 작동하지 않는다. 내 학생들 일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론의 세부사항을 제공할 백과사전을 지칭함으로써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상대성 이론'의 지칭을 독립적으로 확정했다. (이것은 백과사전의 존재에 대한 초월적 연역이라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설령 누군가가 백과사전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이 이론이 어떤 백과사전에서인가 상세하게 제시되는지 여부를 알아야 하리란 것은 그의 지칭에 실제로 본질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지칭은 아무런 백과사전도 전혀 없었을지라도 작동했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명제 (3)을 살펴보자. 만일 적절히 가중치가 매겨진 &amp;phi;의 대부분이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충족된다면, y는 화자에게 그 이름의 지칭물이다. 이제, 우리가 이미 명제 (2)가 거짓이라고 확증한 마당에, &lt;b&gt;[83]&lt;/b&gt; 왜 나머지 무엇인가가 작동해야 하겠는가? 그 이론 전체는 충족된 고유 조건들을 항상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 있음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다른 명제들을 고찰할 수 있다. 해당 이론과 결부된 그림은 오직 어떤 고유한 속성들을 제시함으로써만 당신이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그래서 당신이 사용하는 이름의 지칭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 나는 누군가가 누구인지 아는 일의 문제로 파고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주 혼란스러운 문제이다. 나는 당신이 키케로가 유명한 로마 연설가라고 답할 수 있다면 키케로를 앎을&amp;nbsp;&lt;i&gt;수행한다고&lt;/i&gt; 생각한다. 충분히 이상하게도, 만일 당신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고 그 이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면, 당신은 아인슈타인이 누구인지도, 즉 상대성이론의 발견자라는 것도, 누가 상대성이론을 발견했는지, 즉 아인슈타인이라는 것도, 둘 다 이 지식에 근거하여 알 수 있다. 이는 일종의 비순환조건에 대한 노골적인 위반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을 시사하는 그림은 틀린 그림이어야만 할 것으로 보일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대부분의 &amp;phi;가 실제로 고유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 대상은 필연적으로 A에 대해 'X'의 지칭물인가? 누군가가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 사람이 적절하게 잘 교육받았으며 그 불완전성 정리에 대한 독립적인 설명을 제시할 능력까지 있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단지 '자, 그것이 괴델의 정리이다' 라거나 혹은 무엇이 되었든 단지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특정 정리, 괴델을 발견자로 하여 그에게 귀속시키는 정리를 진술한다. 만일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amp;phi;의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가 A에 대해 'X'라는 이름의 지칭물이라는 것은 그래서 사실인가? 간단한 경우를 취해 보자. 괴델의 경우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 관해 들어본 유일한 것이 그것이다. 그가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했다는 것 말이다. 누가 되었든지간에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은 '괴델'의 지칭물이라는 점이 귀결되는가?&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대놓고 허구적인 다음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괴델 교수께서 참석하고 계시지 않길 희망한다.) 괴델이 사실 이 정리의 주인이 아니었다고 가정해 보자. &lt;b&gt;[84]&lt;/b&gt; '슈미트'란 이름이 붙은, 그의 시체가 수년 전 기이한 상황 하에 비엔나에서 발견되었던 한 사람이 실제로 문제의 그 작업을 했다. 그의 친구 괴델은 어떤 식으론가 그 필사본을 손에 넣었고 그래서 그 필사본이 괴델의 공이 되었다. 그럼 문제의 그 관점에서, 우리의 일상인이 '괴델'이란 그 이름을 사용할 때, 그는 실제로 슈미트를 지칭하려는 의도인데, 왜냐하면 슈미트가 해당 기술,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을 만족시키는 고유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은 그 기술을 '산술의 불완전성에 대한 발견을 &lt;i&gt;출판한&lt;/i&gt; 사람'으로 변경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조금 더 변경하여 누군가는 이 정식화까지 거짓으로 만들 수도 있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출판되었는지 아니면 구전되어 떠돌았는지 여부조차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계속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을 다뤄보자. 그럼,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은 사실 슈미트이기에, 우리는, 우리가 '괴델'에 관해 말할 때, 사실은 항상 슈미트를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우리가 그러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단순히 그러고 있지 않다. 내가 나중에 논의할 한 가지 답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 대신 '산술 불완전성 정리가 통상 그에게 귀속되는 사람'이라거나 그 비슷한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이후에 살펴 보도록 하자.&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하지만 여러분들 중 상당수에게는 이것이 매우 이상한 예시로 보이거나, 그런 상황이 드물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는 또한 철학자들의 교육의 공이다. 매우 자주 우리는 주목할 만한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여 이름을 사용한다. 가상적 예시에서 사용된 수학의 경우가 핵심을 짚기에 좋은 사례이다. 우리는 페아노에 관해 무엇을 아는가?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페아노에 관해 '알'지도 모르는 바는 그가 소위 '페아노 공리'라는 자연수의 수열을 특징지어주는 특정 공리의 발견자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부 사람들은 그 공리들을 진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공리들이 페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데데킨트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고 말해왔다. 페아노는 물론 부정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주석이 &lt;b&gt;[85]&lt;/b&gt; 데데킨트의 면을 세워주는 일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주석은 간과되어 왔다. 그래서 문제의 그 이론에 관하여 '페아노'라는 용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그대로, 실제로 데데킨트를 지칭한다. 이제 당신이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당신은 실제로 내내 데데킨트에 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리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사례는 한정없이 증식될 수 있을 것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그 비전문가에게는 물론 더 끔찍한 오해까지도 발생한다. 앞선 예시에서 나는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을 그의 상대성에 관한 작업에 대한 지칭으로써 정체화한다고 가정했다. 실제로, 나는 종종 아인슈타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 원자 폭탄의 발명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인슈타인을 지칭할 때, 우리는 원자 폭탄 발명가를 지칭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는 않다.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깨달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서반구에 상륙한 첫 번째 유럽인이었다. 아마도 이런 것들 중 아무것도 참이 아닐 것이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콜럼버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들이 만일 지구의 둥금을 사용한다면 실제로는 어떤 그리스인들을 지칭하는 것이거나, 그들이 '아메리카의 발견'을 사용한다면 아마도 일부 고대 스칸다나비아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고 있진 않다. 그래서 만일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amp;phi;의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가 그 이름의 지칭물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단순히 거짓인 것으로 보인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5&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5&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5)&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5)&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lt;b&gt;[86]&lt;/b&gt; 명제 (4): 만일 투표가 아무런 고유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이름은 지칭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러한 경우는 앞서 다루어졌고, 앞선 사례들에서 다루어졌다. 첫째 사례는, 키케로나 파인만의 경우에서처럼 투표가&amp;nbsp;&lt;i&gt;고유한&lt;/i&gt; 대상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로, 그 투표가&amp;nbsp;&lt;i&gt;아무런&lt;/i&gt;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아무것도 &amp;phi;의 대부분 혹은 심지어 어떤 상당수조차 충족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해당 이름이 지칭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당신이 한 사람에 관하여 실제로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참일 수 있는 거짓 믿음들을 가질 똑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당신은 완전히 아무에게도 전혀 참이 아닌 거짓 믿음들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믿음들이 당신의 믿음들의 총체성을 구성할지도 모른다. 괴델에 관한 예시를 변화시켜서, 아무도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적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어쩌면 그 증명은 단순히 종이 한 장에 원자들이 임의로 흩뿌려져 물질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괴델이란 사람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현장에 있을 만큼 운 좋은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자. 추가로, 산술이 실제로는 완전하다고 가정해 보자. 누군가는 실제로 원자들이 임의로 흩뿌려져 정확한 증명을 산출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수십년간 알려지지 않은 교묘한 오류가 여전히 들키지 않았던 것이다. 혹은 어쩌면 실제로 들키지 않은 건 아니고, 괴델의 친구들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 그렇게 설령 고유한 대상에 의해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을지라도 &lt;b&gt;[87]&lt;/b&gt; 그 이름이 여전히 지칭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지난 강연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요나의 사례를 제시한 바 있다. 성서학자들은 내가 말했듯 요나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이 누군가가 거대한 물고기에 의해 삼켜진 적이 있다거나 니네베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그 누구인들 아무에게도 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요나'라는 이름은 실제로 지칭물을 가진다. 위에서 아인슈타인의 폭탄 발명 사례에서, 실제로는 아무도 그 장치의 '발명자'라 불릴 자격이 없을 경우도 가능하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명제 (5)는 'X가 존재한다면, X는 &amp;phi;의 대다수를 가진다는 것은, A에게&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참이다'라는 진술을 말한다. 명제 (3)과 (4)가 &lt;i&gt;마침&lt;/i&gt; 참인 경우에서조차, 전형적인 화자는 그 명제들이 해당 이론에 의해 요청되는 방식대로의 것들이라는 점을&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알 리가 거의 없다. 나는 괴델에 관한 나의 믿음이 실제로 옳은 것&lt;i&gt;이라고&lt;/i&gt; 그리고 '슈미트' 이야기가 단지 허구일 뿐이라고&amp;nbsp;&lt;i&gt;생각한다.&lt;/i&gt; 하지만 그 믿음이&amp;nbsp;&lt;i&gt;선험적&lt;/i&gt; 지식을 구성할 리는 거의 없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여기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해당 이론을 구조해낼 수 있는가?&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6&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6&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6)&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6)&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6&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첫째로, 누군가는 이러한 기술들을 변경시켜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유명한 업적들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우리의 기술로서 사용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충분히 만지작거려 누군가는 결국 이로부터 뭔가 얻어낼지도 &lt;b&gt;[88]&lt;/b&gt; 모른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7&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7&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7)&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7)&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7&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렇지만, 누군가가 시도하는 그 시도 대부분이 반례들이나 또 다른 반박들에 노출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괴델의 사례에서 누군가는 '자, &quot;괴델&quot;은 &quot;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quot;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보자, 우리 모두가 실제로 알고 있는 바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amp;nbsp;&lt;i&gt;생각한다&lt;/i&gt;라는 것, 괴델이 흔히 산술의 불완전성이 그에게 귀속되는 사람이라고&amp;nbsp;&lt;i&gt;생각한다&lt;/i&gt;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괴델'이란 이름의 지칭물을 결정할 때, 나는 나 자신에게 '&quot;괴델&quot;로 내가 의미하려는 바는 &quot;그가 그 누구든지 간에,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quot;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슈미트나 포스트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신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amp;nbsp;&lt;i&gt;생각하는&lt;/i&gt; 사람'을 의미하고자 할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이게 맞나? 우선, 내게는, 내가 앞서 제시했던 것과 같은 유형의, 더 세련되었을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런 반례들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언급한 페아노의 경우에서, 화자 몰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소한 지금부터는) 수-론 공리들이 그에게 귀속되지 않아야 하리란 걸 철저하게 인지한다고 가정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공리들을 페아노의 공으로 돌리지 않고 이제 제대로 데데킨트에게 돌린다. 그럼 그렇게 이러한 것이 흔히 귀속되는 사람은 데데킨트일 것이고 페아노가 아닐 것이다. 여전히, 그 화자는, 그 오래된 구식의 믿음을 받아들인 채, &lt;b&gt;[89]&lt;/b&gt; 여전히 페아노를 지칭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페아노에 관한 거짓 믿음을 견지한 채로, 데데킨트에 관한 참인 믿음은 견지하고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그러나 두 번째로, 그리고 아마도 더욱 중요하게도, 그러한 기준은 비순환 조건을 위배한다. 어쩌다 이리 되는가? 우리들 대다수가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참이다. 이것은 왜 그러한가? 우리는 확실히 그리고 신실하게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우리가 믿는다는 것, 우리가 산술의 불완전성을 이 사람에게 귀속시킨다는 것이 도출되는가? 아니다. 그저 그것으로부터만은 아니다. 우리는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말할 때&amp;nbsp;&lt;i&gt;괴델을 지칭하고 있&lt;/i&gt;어야 한다. 만일, 실제로, 우리가 항상 슈미트를 지칭하고 있었더라면, 우리는 산술의 불완전성을 괴델이 아니라 슈미트에게 귀속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괴델'이란 발음을 내가 '슈미트'라고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했었더라면 말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하지만 우리는 사실 괴델을 지칭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을 수행하는가? 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quot;괴델&quot;로 나는 산술의 불완전성이 흔히 귀속되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일을 했었더라면 우리는 순환에 빠졌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두 이 방 안에 있다. 실제로 이 학교 안에서&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8&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8&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8)&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8)&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8&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몇몇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지만, 여러 학교들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공동체 내에서 우리 모두는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이 흔히 그에게 귀속되는 그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지칭을 결정짓고자 하고 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산술의 불완전성이 흔히 그에게 귀속되는 그 사람' 외에 그 이름의 지칭에 대한 어떤 독립적인 규준이 있지 않는 한 어떤 속성을 가지고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 모두는 '우리는 이 업적을 우리가 그 업적을 그에게 귀속시키는 그 사람에게 귀속시킨다'라고 말하고 있을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그 지칭의 어떤 독립적 기준도 제공하지 않고 그리 말하고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해당 결정은 순환적일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내가 'C'로 표기한 조건에 대한 위반이고, &lt;b&gt;[90]&lt;/b&gt; 어떤 지칭 이론에서든 사용될 수 없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물론 당신은 책임전가로 순환성을 회피하고자 해 볼지도 모른다. 이는 스트로슨에 의해 언급되는데, 그는 이 문제에 관한 그의 주석에서 한 사람의 지칭은 다른 사람의 지칭으로부터 파생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2&quot;&gt;정체화 기술은, 문제가 되는 개별자에 대한 화자의 고유한 지칭에 대한 지칭을 포함하지 않아야만 함에도, 그 개별자에 대한 또 다른 사람의 지칭에 대한 지칭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만일 추정상 정체화하는 기술이 이런 후자의 종류에 속하는 것이라면, 더욱이&amp;nbsp; 그것이 진정으로 정체화하는 기술인지 여부의 문제는 그 기술이 지칭하는 그 지칭 자체가 진정으로 정체화하는 지칭인지 여부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한 지칭은 진정으로 정체화하는 지칭이라는 그 자격을 또 다른 지칭으로부터 빌려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또 다른 지칭으로부터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급은 무한하지 않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9&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9&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9)&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9)&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럼 나는 말할 것이다. '봐라, &quot;괴델&quot;을 가지고 나는 조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자를 의미할 것이다.' 조는 그럼 그 안건을 해리에게 떠넘길 것이다. 이 일이 순환에 빠지지 않게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실제로 확신하는가? 만일 당신이 그런 연쇄를 안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연쇄 속 다른 모두가 적절한 조건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연쇄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칭들을 순차로 빌려오는 방식으로 그런 연쇄를 지시함으로써 해당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연쇄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존재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 연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이 무슨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 일이 순환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인지, 혹은 조에게 호소하면 당신이 어쨌든 제대로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 못할 것인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것을 당신의 정체화 기술로 무슨 확신을 가지고 사용할 수 없다. 당신은 괴델에 관해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진행되고 있는 일의 참된 그림은 무엇인가? 아마도 지칭이 실제로는 아예 일워지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실제로 &lt;b&gt;[91]&lt;/b&gt; 우리가 그 사람을 정체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속성들 중 어떤 것이든 옳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 속성들이 고유 대상을 지적해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엇이 내가 사용하는 '키케로'를&amp;nbsp;&lt;i&gt;그&lt;/i&gt;의 이름으로 만드는 일을&amp;nbsp;&lt;i&gt;수행하는가&lt;/i&gt;? 기술다발이론으로 이끄는 그림이 이런 어떤 것이다. 한 사람이 방 안에 고립되어 있다. 다른 화자들 그리고 여타의 모든 것들의 공동체는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스스로 지칭을 확정한다. '&quot;괴델&quot;로 나는 그게 누구든 간에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당신은 원한다면 이 일을 행할 수 있다. 그걸 실제로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저 결정을 고수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하는 일이 저것이라면, 산술의 불완전성을 슈미트가 발견했을 경우 당신은 '괴델이 그러저러한 일을 했다'라고 말할 때 슈미트를 지칭하는 일을&amp;nbsp;&lt;i&gt;수행한다&lt;/i&gt;.&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하지만 그건 우리 대다수가 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보자. 그의 부모는 그를 특정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그 아이에 관해 그들의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 아이를 만난다. 다양한 종류의 발화를 거쳐 그 이름이 마치 사슬로 연결되듯 연결의 연결을 거쳐 확산된다. 이 연쇄의 먼 극단에 있는 한 화자, 시장이나 어디 다른 곳에서 이를 테면 리처드 파인만에 관해 들어본 적 있는 화자는 설령 그가 누구에게서 처음 파인만에 관해 들었는지 혹은 하여간 누구한테서 그가 파인만에 대해 들었던 건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리처드 파인만을 지칭하고 있을 수 있다. 그는 파인만이 유명한 물리학자라는 것을 안다. 궁극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도달하는 의사소통의 특정 경로가 화자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파인만을 고유하게 정체화하지 못하더라도 파인만을 지칭하고 있다. 그는 파인만 다이어그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파인만 생성-소멸 쌍이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겔-만과 파인만을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다. 그래서 그가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대신, 파인만 그 자신에게로 소급되는 의사소통 연쇄가 확립된 것인데, 연결에 연결을 거쳐 그 이름이 전래된 공동체에 그가 구성원인 덕분으로 그렇게 된 것이고, 서재에 틀어박혀 사적으로 그가 행한 세례식에 의한 것은 아니다. '&quot;파인만&quot;으로 나는 &lt;b&gt;[92]&lt;/b&gt; 그러저러한 짓을 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라는 그런 세례식 말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이러한 관점은 앞서 언급된 스트로슨의 제안, 하나의 정체화하는 지칭이 또 다른 지칭으로부터 자격을 빌려오리란 것과 어떻게 다른가? 확실히 스트로슨은 인용된 구절에서 훌륭한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 그는 확실히 최소한 내가 지지하는 그림과는 강조점에서 차이를 보여주는데, 해당 언급을 주석에 국한시키기에 그러하다. 본문은 기술다발이론을 지지한다. 그저 스트로슨이 그의 언급을 기술 이론의 맥락에서 구성하기 때문에, 그의 관점은 그리하여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나의 관점과 다르다. 스트로슨은 명백히 화자가 그의 지칭을 누구로부터 얻었는지&amp;nbsp;&lt;i&gt;알아&lt;/i&gt;야만 한다고, 그래서 그가 '&quot;괴델&quot;로 나는&amp;nbsp;&lt;i&gt;존&lt;/i&gt;이 &quot;괴델&quot;이라 부르는 그 사람을 의미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고 요구한다. 만일 그가 어떻게 그 지칭을 집어냈는지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그런 기술을 제시하지 못한다. 현재의 이론은 그런 어떤 요구사항도 설정하지 않는다. 내가 말했듯, 나는 내가 누구에게서 괴델에 대해 들었는지 그닥 잘 기억하지 못할 수 있고, 내가 그 이름을 어떤 사람들에게서 들었는지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이러한 고찰들은 여기에서 지지되는 관점이 실질적으로 스트로슨의 주석의 귀결들로부터&amp;nbsp;&lt;i&gt;분기된&amp;nbsp;&lt;/i&gt;귀결들로 이끌 수 있다. 화자가 '키케로'라는 이름을 스미스와 여타 사람들, 그 이름을 유명한 로마 연설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지만 이후에 그가 생각하길, 그는 그 이름을 존에게서 취했고, 존은 (화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키케로'를 악명 높은 독일 간첩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고대 세계의 어떤 연설가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 없는 자이다. 그럼, 스트로슨의 전형에 따르면, 화자는 그의 지칭을 '나는 &quot;키케로&quot;를 존이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다'라는 결심을 통해 결정해야만 하는 반면, 현재의 관점에서, 그 지칭물은 화자가 그 이름을 어디에서 집어냈는지에 관한 그의 거짓 인상에도 불구하고 해당 연설가일 것이다. 핵심은 스트로슨이 의사소통 연쇄 관점을 기술 이론에 맞추려 시도하면서, 화자가 그의 지칭 원천이었다고&amp;nbsp;&lt;i&gt;생각하는&lt;/i&gt; 바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만일 화자가 &lt;b&gt;[93]&lt;/b&gt; 그의 원천을 잊어버렸다면, 스트로슨이 사용하는 기술은 그에게 가용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그가 그것을 잘못 기억한다면, 스트로슨의 전형은 잘못된 결과들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그 원천은 화자가 지칭을 어떻게 얻었다고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상관된 실제 의사소통 연쇄이다. 나는 다른 기회에 철학적 이론들이 거짓일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고, 그래서 대안적 이론을 제시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저 그렇게 했었나? 어떤 식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나의 규정은 실제로 지칭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만한 일련의 것들에 비해 훨씬 덜 구체적이었다. 명백히 이름은 연결에서 연결로 이행된다. 하지만 물론 나로부터 특정 사람에게 도달하는 모든 종류의 인과적 연쇄가 나로 하여금 지칭을 형성하도록 해주진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산타클로스'라는 용어 사용으로부터 특정한 역사적 성인에 이르는 인과 연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아이들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이 때까지 아마도 저 성인을 지칭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를 정말로 엄격한 지칭 이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내가 이 작업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우선 나는 지금 너무 게으르고, 다음으로, 지칭 같은 용어에 대해 작동할 일련의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기 보다는, 수용되어 온 관점들에 의해 제안된 그림보다&amp;nbsp;&lt;i&gt;더 나은 그림&lt;/i&gt;을 제안하고 싶기 때문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내가 기술 이론에 지나치게 불공평하게 굴었나? 이 자리에서 나는 그 이론의 어떤 지지자에 의해 진술되었던 것보다도 아마 더 정확하게, 아주 정확히 그 이론을 진술했다. 그래서 그건 반박하기 쉬운 일이다. 어쩌면 만일 내가 나의 이론을 충분히 정밀하게 예닐곱 개 명제들의 형태로 진술하려 했었더라면, 당신이 그 명제들을 하나씩 시험할 때, 그 명제들 모두 거짓이라고도 드러났을 것이다.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차이는 이런 것이다. 내가 제시한 예시들이 보여준다고 내가 생각하는 바는 단순히 이곳저곳에 이러저러한 기술적 오류나 실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칭이 결정되는지에 대해 이 이론에 의해서 제기된 전체 그림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lt;b&gt;[94]&lt;/b&gt; 어떤 식으론가 질적으로 고유하게 대상을 지적해내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지칭을 결정하는 어떤 속성들을 우리 스스로 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더 나은 그림, 만일 더 많은 세부사항이 채워지게 된다면, 지칭이 발생하기 위한 더 정확한 조건들을 제공하는 일과 관련하여 더 개선될 수도 있을 그림을 제시하는 것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누군가는 일련의 필충조건에 전혀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버틀러 주교의 '모든 것은 각기 그것인 바의 것이며 여타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언제나 공감해 왔다. 지칭 같은 일부 개념에 대해 지칭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용어를 통한&amp;nbsp;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철학적 분석들은 무척이나 실패하기 쉽다는, 사소하지 않은 의미에서 말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어떤 분석이 제시되는 어떤 특정한 경우에서든 그 분석을 살펴보고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이것을 그저 스스로 공리로 인용하고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한층 더 신중하게, 나는 지칭을 위한 일련의 필충조건을 제공하지 않고서 더 나은 그림을 제시하고 싶다. 그런 조건들은 매우 복잡할 테지만, 진실은 우리가 특정인을 지칭한다는 것이 공동체 내에서 지칭되는 사람 그 자신에게도 소급되는 우리와 다른 화자들 사이의 연결 덕분이라는 점이다.&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기술 그림이 참인 어떤 경우들, 어떤 사람들이 실제로 혼자 자기방에 들어가 해당 지칭물이 특정한 정체화 속성들을 가진 고유한 사물이라고 말함으로써 실제로 이름을 부여할 그런 경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잭 더 리퍼'가 내가 제시했던 가능한 사례였다. 또 다른 사례는 '샛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에 욱여넣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어떤 사람을 만나 그의 이름이 이야기되고 있는 경우이다. 다른 사례들에서 기술 이론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면, 아마 '내가 지금 막 만나고 있는 그 사내'라는 기술을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사례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바란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다른 어떤 식으로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더라면 그런 말로 표현할 수도 있다. 물론, 만일 당신이 한 사람을 소개받고 &lt;b&gt;[95]&lt;/b&gt; '저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라고 말하는 걸 듣는다면, 당신은 그에 대해 이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틀렸을지도 모르며, 기타 등등의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일부 경우들에서는 그런 전형이 작동할지도 모른다. 특히 처음으로 누군가 혹은 어떤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사람의 경우 그렇다. 혹은 그가 한 별을 가리키고 '저것은 켄타우로스좌의 알파별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이러한 세례식을 거행할 수 있다. '&quot;켄타우로스좌의 알파별&quot;로써 나는 이러저러한 좌표 상의 바로 저기 그 별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그림은 실패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지칭은 단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바에 의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이름이 누군가에 당도하였는지의 역사에, 또 그와 같은 사항들에 의존한다. 누군가가 해당 지칭을 획득하는 것은 그러한 역사에 뒤따름으로써 성립한다.&amp;nbsp;&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더욱 정확한 조건들은 제시하기에 너무 복잡한 것이다. 그 조건들은 유명한 사람의 경우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서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 다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한 교사가 그의 학생들에게 뉴턴이 사물들을 지구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 첫 번째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말한다. 나는 어린 친구들이 뉴턴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바가 저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업적의 이점들이 무엇일지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것이 뉴턴 발견의 유일한 내용으로 말해지는 것은&amp;nbsp;&lt;i&gt;뉴턴에 대한&lt;/i&gt; 거짓 믿음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령 학생들이 이전에 뉴턴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가정할 것이다. 만일, 다른 한편으로,&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10&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10&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10)&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10)&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0&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해당 교사가 'George Smith'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면―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사실 그의 옆집 이웃이다―그리고 조지 스미스가 최초로 원의 사각화를 했다고 말한다면, 이로부터 그 학생들이 해당 교사의 이웃에 관한 거짓 믿음을 가진다는 점이 도출되는가? 그 교사는 학생들에게 스미스가 그의 이웃이라고 말하지 않고, 스미스가 처음으로 원을 사각화하였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는 딱히&amp;nbsp;&lt;i&gt;그 이웃에 관한&lt;/i&gt; 어떤 믿음이든 학생들의 머릿속에 집어 넣으려 애쓰고 있지 않다. 그는 원을 사각화한 사람이 있었다는 믿음을 심어주려 애쓰고 있지만, 어떤 특정 사람에 관한 믿음을 심어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에게 처음 보인 이름을 뽑아 들었고, 마침 그가 그의 이웃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경우에서 &lt;b&gt;[96]&lt;/b&gt; 학생들이 그 이웃에 관한 거짓 믿음을 가지는지는, 설령 그 이웃에게로 소급되는 인과 연쇄가 있을지라도, 명백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에 관해 확신하지 못한다. 어쨌든 이것이 일련의 필충조건이 되도록 하려면 더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이론은 아니지만, 실제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더 나은 그림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amp;nbsp;이론에 대한 투박한 진술은 다음과 같을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세례식'이 발생한다. 여기에서 대상은 명시적 규정에 의해 명명될지도 모르고, 혹은 기술에 의해 해당 이름의 지칭이 고정될지도 모른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11&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1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1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1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이름이 '연결에서 연결로 이행'될 때, 이름의 수신자는 내 생각에 그가 그 이름을 배울 때 그가 그 이름을 들은 사람과 같은 지칭을 가지고 그 이름을 사용하려는 의도를 가져야만 한다. 만일 내가 '나폴레옹'이란 이름을 듣고 내 애완 땅돼지의 이름으로 어울린다고 결정한다면, 나는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12&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12&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12)&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12)&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2&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아마도 그런 어떤 고정된 지칭의 유지 실패가 &lt;b&gt;[97]&lt;/b&gt; '산타클로스'의 본래 용법으로 추정되는 것과 오늘날의 용법들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앞선 개괄이 지칭 개념을 거의&amp;nbsp;&lt;i&gt;배제&lt;/i&gt;시키지 못한다는 점에 주의하라. 반대로, 그것은 주어진 것과 같은 지칭을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 개념을 취한다. 기술에 의한 지칭 고정이나 명시적 규정으로 설명되는 최초 세례식에 대한 호소도 있다 (만일 명시적 규정이 다른 범주 아래에 포괄되는 것이 아니라면).&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13&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13&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13)&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13)&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3&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어쩌면 최초 세례식들에 대한 다른 가능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조지 스미스 사례는 그 조건들의 충분성에 관련해 일부 의심을 드리운다. 설령 그 교사가 그의 이웃을 지칭한다 할지라도, 그가 그의 지칭을 학생들에게 이행시켰다는 점이 분명한가? 왜 그들의 믿음이 '조지 스미스'라고 명명된 다른 어떤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어야 하겠나? 만일 그가 뉴턴은 사과에 맞았다고 말한다면, 어떤 식으론가 그의 지칭 전파 작업은 더 쉬워지는데, 그가 뉴턴에 관한 흔한 오해를 갖고 의사소통했기에 그러하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반복하자면, 나는 이론을 제시했던 것은 아닐 테지만, 기술이론가들에 의해 제시된 것보다 더 나은 그림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나는 내가 논할 다음 주제가 동일성 진술들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진술들은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가? 그 문제는 최근의 철학 내에서 어느 정도 논란이 되어 왔다. 첫째로, &lt;b&gt;[98]&lt;/b&gt; 모두가 기술들이 우연적 동일성 진술들을 만드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만일 이중초점렌즈를 발명한 사람이 합중국의 첫 번째 우정장관이었다는 것이 참이라면―이것들이 하나이고 같다는 것이 참이라면―그것은 우연적으로 참이다. 즉, 한 사람이 이중초점렌즈를 발명했고 또 다른 사람이 합중국의 첫 번째 우정장관이었던 것이 사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확실히 당신이 기술들을 사용해 동일성 진술들을 만들 때―당신이 '&amp;phi;x인 그런 x와 &amp;psi;x인 그런 x가 하나이고 같다'고 말할 때―그것은 우연적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들에 대한 문제에도 흥미를 가졌다. 우리가 '샛별은 개밥바라기별이다' 또는 '키케로는 툴리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는 필연적인가 혹은 우연적인가? 더욱이, 그들은 과학 이론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유형의 동일성 진술에도 흥미를 가졌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빛을 특정 파장 범위 내 전자기 복사와, 또는 광자의 흐름과 동일시한다. 우리는 열을 분자들의 운동과 동일시한다. 소리를 공기 중 특정 종류의 파동 교란과 동일시한다. 기타 등등. 그러한 진술들과 관련하여 이하의 명제가 흔히 주장된다. 첫째로, 이들은 명백히 우연적 동일성들이다. 우리는 빛이 광자들의 흐름이라는 것을 알아냈지만, 물론 그것은 광자들의 흐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열은 사실상 분자들의 운동이다. 우리는 그 점을 알아냈지만, 열은 분자들의 운동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여러 철학자들은 이러한 사례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지극히 다행한 일이라 느낀다. 왜? 이 철학자들, 그들의 관점들이 막대한 문헌들에서 해설되는 그들은 일부 심리학적 개념에 관련하여 소위 '동일성 논제'라는 것을 견지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통이 뇌나 신체, 혹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C섬유의 자극 (그것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특정 물질적 상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이 반박해 왔다. '보라, 고통과 신체의 이런 상태들 사이에 어쩌면&amp;nbsp;&lt;i&gt;상관성&lt;/i&gt;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상이한 두 사물 사이의 우연한 상관성에 불과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lt;b&gt;[99]&lt;/b&gt; 이러한 상관관계가 견지되었다는 그 점이 경험적 발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quot;고통&quot;으로 우리는 신체나 뇌의 이러한 상태와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상이한 두 가지 사물들이어야만 한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럼 이런 말이 나온다. '그건 틀렸다. 모두가 우연적 동일성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우선, 내가 앞서 언급했던 이중초점렌즈와 우정장관 사례에서처럼 우연적 동일성이 있을 수 있다. 두 번째로, 현대적 전형에 더 가깝다고 믿어지는 사례들, 이론적 동일화의 사례들, 빛과 광자들의 흐름 혹은 물과 수소와 산소의 특정 화합물 같은 동일화 사례들에서 그러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연적 동일성들이다. 그것들은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고통을 느끼는 것 혹은 붉은 색을 보는 것이 인간 신체의 특정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이 우연적 사실의 문제로서 참일 수 있고 어떤 필연성의 문제로서도 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정신물리학적 동일화들이 다른 동일성들이 우연적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연적 사실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제를 믿고 싶게끔 사람들을 이끄는 널리 퍼진 동기들이 있다. 이념적 동기 또는 단지 물리법칙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신비적 연결이라는, 상이한 종류의 사물들, 물질적 상태들, 전적으로 다른 종류에 속하는 사물들 사이의 상관관계 같은 '법칙적 잔여물'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동기가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내가 논할 주된 사항은 우선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일 것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이하에서 나는 보편적인 사례에 관해 다룰 것이다. 우선, '열은 분자들의 운동이다' 같은 특징적인 이론적 동일화들은 우연적 참이 아니라 필연적 참이라는 것인데, 물론 나는 여기에서 단지 물리적 필연성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더 높은 단계에서의 필연성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여간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리적 필연성은, 더 높은 단계에서의 필연성인 것으로 드러날&lt;i&gt;지도 모른다&lt;/i&gt;.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앞서 판단하고 싶지 않은 문제이다. 최소한 이런 종류의 사례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 물리적으로 필연적일 때, 항상 그것은&amp;nbsp;&lt;i&gt;단적으로&lt;/i&gt; 필연적이라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로, 이런 동일화들이 필연적 참으로 드러난 방식이 내게는 &lt;b&gt;[100]&lt;/b&gt; 정신-뇌 동일성들이 필연적 참이나 우연적 참으로 드러날 수 있을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유비는 폐기되어야 한다. 그 자리에 무엇이 놓여야 할지 알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그 둘이 실제로 다르다는 결론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알기도 어렵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고유명사에 관한 더 일상적인 사례로 돌아가 보자. 이것은 이미 충분히 신비로운 일이다. 이에 관해 콰인과 Ruth Barcan Marcus 사이에 논쟁이 있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14&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14&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14)&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14)&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마르쿠스는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들이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만일 누군가가 키케로는 툴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실제로 '키케로'와 '툴리'를 이름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그로써 그의 믿음이 필연적 참임을 주장하는 일에 연루된다. 그녀는 '단순 표식(mere tag)'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콰인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는 어느 멋진 저녁에 금성에 &quot;개밥바라기별&quot;이란 고유명사로 표식을 붙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똑같은 행성에 다시, 어느 날 동틀녘에, &quot;샛별&quot;이란 고유명사로 표식을 붙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같은 행성에 두 번 표식을 붙였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의 발견은 경험적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고유명사들이 기술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15&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15&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15)&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15)&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첫째로, 콰인 말대로 우리가 같은 행성에 두 번 표식을 붙였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의 발견은 경험적인 것이었다. 콰인이 다른 책에서 제시한 것으로 내가 생각하는 또 다른 사례는 같은 산을 네팔에서 본 경우와 티벳에서 본 경우, 한쪽에서는 '에베레스트 산' (당신이 들어본 그 이름)이라 불리고 다른 쪽에서는 '가우리샹카르'라고 불린다고 추정된다는 것이다. 가우리샹카르가 에베레스트라는 것은 실제로 경험적 발견일 수 있다. (콰인은 그 사례가 실제로 거짓이라 말한다. 그는 Erwin Schr&amp;ouml;dinger에게서 그 사례를 가져왔다. 당신은 파동역학의 고안자가 그런 것들을 틀렸으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실수가 어디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되는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이 상황이 있었던 일이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lt;b&gt;[101]&lt;/b&gt; 콰인이 염두에 두었던 그런 종류의 일에 대한 훌륭한 묘사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것에 관해서는 어떤가? 이 책 안에서 반대편에서 마르쿠스로부터의 적절한 인용을 찾고 싶었지만 위치를 특정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토론에 참석했기에, 나는 그녀가 만일 당신이 실제로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사전은 그 이름들이 같은 지칭을 가지는지 여부를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하리라는 관점을 옹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16&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16&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16)&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16)&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6&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래서 누군가는 그 사전을 살펴봄으로써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이것은 참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들이 필연적이라는 관점의 귀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들이 필연적이라는 관점은 흔히 거부되어 왔다. 러셀의 결론은 뭔가 다른 것이었다. 그는 두 이름들이 같은 지칭을 가지는지 여부에 대한 어떤 경험적 질문도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일상적 이름들에 대해서는 충족되지 않지만, 당신이 당신의 고유한 감각 자료를 명명하고 있을 때,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경우에 만족된다. 당신은 말한다. '여기, 이것, 그리고 그것(같은 감각 자료를 두 지시사 모두로 지시하면서).' 그래서 당신은 경험적 조사 없이 당신이 같은 사물을 두 번 명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건들은 충족된다. 이것이 명명의 일상적 사례들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기에, 일상적 '이름들'은 진정한 이름들일 수 없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첫째로, 누군가가 '키케로'라는 이름을 키케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고 '툴리'라는 이름도 키케로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으며, 키케로가 툴리임을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필연적으로&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알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그렇게 표현된 해당 진술이 참이라면 우연적인 참이라는 점이 도출되진 않는다. 이것이 내 첫 번째 강연에서 내가 강조했던 바이다. 만일 당신이&amp;nbsp;&lt;i&gt;선험적&lt;/i&gt; 추론을 통해 어떤 것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우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끄는 매우 강력한 감각이 있다. 그것은 다른 식으로 드러났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감각이 틀렸다고 생각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lt;b&gt;[102]&lt;/b&gt; 우리가 같은 천체를 두 번, '개밥바라기별'로 그리고 '샛별'로 지칭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말한다. 개밥바라기별은 저녁의 저기 저 별이다. 샛별은 아침의 저기 저 별이다. 실제로,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을 그러한 상황이 실제로 있는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고 가정하면서, 그렇지 않았을 가능한 상황을 기술하고자 시도해 보자. 그것은 쉬운 일이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나아가 두&amp;nbsp;&lt;i&gt;상이한&lt;/i&gt; 별들을 '개밥바라기별'이라고 그리고 '샛별'이라고 부른다. '개밥바라기별' 그리고 '샛별'이라는 이름들을 우리가 도입할 때 전제된 것과 같은 조건들 하에서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황들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지 않거나 혹은 샛별이지 않았을 상황들인가? 그런 상황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제, 물론 나는 '개밥바라기별'과 '샛별' 같은 용어들이 이름들로 사용될 때 고정 지시자들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상황들이 그런 상황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에 연루되었다. 그 용어들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금성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그 가능세계에서도 금성은 금성이고 다른 어떤 사람이 이 다른 가능세계에서 무엇이라 말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amp;nbsp;&lt;i&gt;우리&lt;/i&gt;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기술해야 할까? 그는 금성을, 우리가 했듯, 한 경우에서는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또 다른 경우에는 '샛별'이라고 두 번 가리켰을 수도 불렀을 수도 없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었더라면,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참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둘 중 어느 때에도 금성을 가리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한 번은 그가 금성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가 '샛별'이라 부른 천체를 가리켰을 때 그랬다고 하자. 그럼 그 경우 우리는 확실히 '샛별'이라는 이름이 샛별을 지칭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샛별을 발견했던 그 아침 그것을 봤던 바로 그 위치에서, 샛별이 거기 있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른 어떤 것이 거기 있었다고, 그리고 특정 상황 하에서 그것이 '샛별'이라고&amp;nbsp;&lt;i&gt;불렸던&lt;/i&gt; 것이었으리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샛별이 개밥바라기별이 아니었던 경우는 아니다.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실제 그것들의 이름인 것들의 이름이 아니었을&amp;nbsp;&lt;b&gt;[103]&lt;/b&gt; 가능세계, 가능한 반사실적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만일 그가 그 이름들의 지칭을 정체화 기술들을 통해 결정했다면, 우리가 사용한 바로 그 정체화 기술들을 사용했을 수조차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고 주어진다면, 그런 경우는 있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제 이는 매우 이상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앞서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인지 여부의 질문에 대한 답이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났을 것이라 말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그 둘이 같은 것이라는 우리의 발견에 앞서서&lt;/span&gt;, 한편에서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었던 가능세계가,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가능세계가, 그렇게 실제로 두 가능 세계들이 있지는 않은 것인가? 우선, 한 가지 의미로는 사물들이 둘 중 어느 쪽 방식으로든 드러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밝혀진 방식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사색정리는 참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르고 거짓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것은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여전히 그 드러나는 방식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백하게, '~할지도 모른다(might)'라는 것은 여기에서 순전히 '인식론적'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현재 무지 상태 혹은 불확실성을 표현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하지만 개밥바라기별-샛별 사례에서, 어떤 것은 훨씬 더 강력하게 참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내가 가진 증거는 내가 저녁에 특정 별 혹은 특정 천체를 보고 그것을 '개밥바라기별'이라고 그리고 아침에 그리하고 그것을 '샛별'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안다. 확실히 한 사람이 저녁에 특정 위치의 특정 별을 봤을 그리고 그것을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불렀을 또한 아침에 특정 별을 봤고 그것을 '샛별'이라고 불렀을, 또한 그가 두 상이한 별들 혹은 두 상이한 천체들을 명명한다고 결론내렸을, 경험적 관찰을 통해 알아냈을 가능세계가 있다. 최소한 이 별들 혹은 천체들 중 하나는 샛별이 아니었고, 다른 식으로는 그런 식으로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참이다. 또한 그렇게 &lt;b&gt;[104]&lt;/b&gt; 누군가가 그의 경험적 조사에 선행하여 가지고 있는 증거가 전제될 때,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정확히 같은 상황, 즉 질적으로 동일시되는 인식론적 상황에 놓일 수 있고, 두 천체가 동일시되는 일 없이 두 천체를 '개밥바라기별'과 '샛별'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래서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 일이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일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점에 관련하여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났을 지도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미리 알고 있던 한에서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로 다른 어떤 식으로도 드러났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확히, 말하자면 질적으로 같은 증거를 가지는 상황에 놓인 채로,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식으로 이 행성의 이름들로 사용되지 않고 다른 대상들의 이름들로 사용되었을 반사실적 세계에서, 누군가는 질적으로 동일한 증거를 가졌었을 수 있고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상이한 두 대상들을 명명했다고 결론내렸을 수 있었을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9_17&quot; id=&quot;footnote_link_1389_17&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9, 17)&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9, 17)&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7&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당장 사용하듯 그 이름들을 사용하면서 선행하여 만일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면, 다른 그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그것들이 다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을 특정 천체의 이름으로 그리고 '샛별'을 특정 천체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런 천체들의 이름들로 사용한다. 만일, 실제로, 그것들이&amp;nbsp;&lt;i&gt;같은&amp;nbsp;&lt;/i&gt;천체라면, 어떤 다른 가능세계에서든 우리는 그것들을 그 대상의 이름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어떤 가능세계에서든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은 참일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사항들이 참이다. 첫째,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을&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알지 못하고, 경험적으로&amp;nbsp; 답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 답을 찾을 어떤 위치에도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그 이유는, 그 행성들이 같지 않더라도,&amp;nbsp;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와 질적으로 구별불가능한 증거를 우리가 가질 수 있을 것이고 하늘에서 두 행성의 위치로 두 이름의 지칭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lt;b&gt;[105]&lt;/b&gt; 물론, 저녁에 저기에서 보인 그 별이 아침에 저기에서 보인 그 별이라는 것은 오직 우연적 참일 뿐인데, 샛별이 아침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던 가능세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연적 참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진술과 동일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진술은 당신이 개밥바라기별이 저녁에 저기에서 보이는 것이라는 점 혹은 샛별이 아침에 저기에서 보이는 것이라는 점이 필연적 참이었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식으로만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행성을 지적해내는 방식이 그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들 중 어느 쪽도 필연적 참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로써 특정 행성을 정체화하고 이름을 부여하는 우연한 표식들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蟲-&lt;/p&gt;
&lt;div class=&quot;footnotes&quot;&gt;
  &lt;ol class=&quot;footnotes&quot;&gt;
    &lt;li id=&quot;footnote_1389_1&quot;&gt;D. Lewis, op. cit., pp. 114-15.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2&quot;&gt;지시적 정의에 대비해 기술로 이름의 지칭을 결정하는 오히려 더 좋은 사례는 해왕성의 발견이다. 해왕성은 특정한 다른 행성들의 궤도에서 그러저러한 차이들을 야키한 행성으로서 가정되었다. 만일 르베리에가 그 행성이 보이기 전에 그 행성에 '해왕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기까지 했었더라면, 그는 '해왕성'의 지칭을 방금 언급된 기술로써 고정시켰을 것이다. 그 당시에 그는 망원경을 통해서조차 그 행성을 볼 수 없었다. 이 단계에서, '해왕성이 존재한다'라는 진술과 '그러저러한 다른 행성들의 궤도에 섭동을 유발시키는 어떤 한 행성이 그러저러한 위치에 존재한다'라는 진술 사이에 &lt;i&gt;선험적인&lt;/i&gt; 물질적 등가가 성립하고, 또한 '만일 그러저러한 섭동들이 한 행성에 의해 야기된다면, 그 섭동들은 해왕성에 의해 야기된다'라는 진술도&amp;nbsp;&lt;i&gt;선험적&lt;/i&gt; 참의 상태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술들은&amp;nbsp;&lt;i&gt;필연적 &lt;/i&gt;참이 아니었을 것인데, '해왕성'이 특정 행성을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이름으로 도입되었기에 그러하다. 르베리에는 만일 해왕성이 100만년 더 먼저 그 궤도가 중단되었더라면, 그런 어떤 섭동도 전혀 유발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일부 다른 대상들이 그 자리에서 그 섭동들을 유발시켰을지도 몰랐다고까지도 문제없이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2&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3&quot;&gt;한정 기술구에 관한 도넬란의 언급에 따르면 우리는, 일부 경우에, 대상에 대해 거짓으로 드러날지도 모르는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대상이 정체화될지도 모르고, 이름의 지칭이 고정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Phosphorus'의 지칭이 '샛별'로, 이후 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그것으로 결정된 경우가 명백한 사례이다. 그런 경우 지칭을 고정하는 기술은 명백히 어떤 의미로도 그 대상을 포착하는 것는 것으로&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알려지지 않는데, 더욱 신중한 대체물이더라도 그러하다. 만일 그런 더욱 신중한 대체물이 가용하다면, 그것이 실제로 해당 문헌에서 의도된 의미에서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대체물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3&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4&quot;&gt;그 명제들 중 일부는 인용부호의 사용과 관련된 세부사항들 같은 까다로운 문제들의 측면에서 엉성하게 진술되었다. (예를 들어, 명제 (5)와 (6)은 진술된 대로, 화자의 언어가 영어라고 전제한다.) 그 명제들의 요지는 명백하고, 어쨌든 그것들이 거짓이기에, 나는 그 명제들을 그대로 열거하는 데에 곤란해하지 않았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4&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5&quot;&gt;이름에 대한 기술다발이론은 '페아노가 수 이론에 대한 공리를 발견했다'라는 것이 오해가 아니라 사소한 참을 표현하도록 만들 것이고, 과학의 역사에 관한 여타 오해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일을 할 것이다. 그런 사례들을 인정한 일부 사람들은 내게 다발 이론을 충족시키는 동일한 고유명사들의 &lt;i&gt;다른&lt;/i&gt; 용법들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물론 슈미트가 아니라 괴델을 지칭하고 있다고 주장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괴델은 그 증명의 이 단계에서 대각 논법에 의존하였다'라고 말한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아마도 '&lt;i&gt;누가 되었든 그 정리를 증명한 자&lt;/i&gt;'를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유사하게, 만일 누군가가 '아리스토텔레스(혹은 셰익스피어)가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 저자가 누가 되었든지 간에 문제의 구절의 저자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나? 기술구들에 대한 도넬란의 용법에 유비하여, 이것은 고유명사의 &quot;한정적&quot; 용법이라 불릴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일이 그렇다면, 괴델-슈미트 이야기를 상정할 때,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했다'라는 문장은 거짓이지만, '괴델은 그 증명에서 대각 논법을 사용했다'라는 문장은 (최소한 어떤 맥락들에서는) 참이고, '괴델'이란 이름의 지칭은 애매하다. 일부 반례들이 남아있기에, &lt;b&gt;[86]&lt;/b&gt; 기술다발이론은 일반적으로 여전히 거짓일 것이고, 그게 이 글에서 내 주요 논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은 사례들의 층위에 적용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어떤 애매성도 상정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때로 누군가가 '괴델'이란 이름을 사용할 때, 그의 주요 관심사는 누구든 여하간 그 정리를 증명한 사람이고, 또 &lt;i&gt;아마도&lt;/i&gt;, 어떤 의미로는, 그가 그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은 참일 것이다. 나는 이 사례가 25쪽 3번 주석에서 스미스와 존의 사례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스미스를 존으로 착각한다면, 나는 스미스가 낙엽을 쓸고 있다고 말할 때 존을 (적절한 의미에서) &lt;i&gt;지칭&lt;/i&gt;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미스'를 애매한 방식으로, 때로는 스미스의 이름이고 또 때로는 존의 이름인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스미스의 이름으로 일의적으로 사용한다. 유사하게, 만일 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저러한 구절을 기록하였다고 잘못 생각한다면, 나는 아마도 때때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구절의 실제 저자를&amp;nbsp;&lt;i&gt;지칭&lt;/i&gt;하는 데에 사용할지도 모르는데, 설령 내가 그 이름을 사용하는 데에 아무런 애매성도 없을지라도 그럴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나는 해당 사실들에 대해 고지받는다면, 내 본래 진술과 내가 본래 그 이름을 사용한 방식을 을철회할 것이다. 이 강연에서 '지칭물'이 이름(혹은 기술을 고유하게 충족시킴)에 의해 명명된 사물이란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거기에 아무런 혼동도 없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5&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6&quot;&gt;이름은 도넬란식의 의미에서 기술의 '지칭적' 용법과 결부된다고 누군가는 주장할지도 모른다는 제안이 온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괴델을 불완전성 정리의 저자로 정체화하더라도, 우리는 설령 그가 해당 정리를 증명한 적이 없다고 밝혀지더라도 그에 관해 말하고 있다. 명제 (2)-(6)은 그래서 거짓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이름은 기술을 축약시킬 것인데, 명명과정에서 기술의 역할이 프레게와 러셀이 상상한 것과는 급진적으로 다를지라도 그러하다. 내가 앞서 언급하였듯, 나는 지칭적 한정 기술이라는 개념에 대한 도넬란식의 정식화를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렇지만 도넬란의 그 분석이 수용된 경우라 하더라도, 작금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아야 하리란 점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지칭적 한정 기술, '샴페인을 마시는 남자' 같은 그런 기술은 화자가 그 기술이 그 기술의 대상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전형적으로 철회되기 때문이다. 만일 괴델식 사기가 폭로된다면, 괴델은 더 이상 '불완전성 정리의 저자'라 불리지 않을 테지만 그러나 여전히 '괴델'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 이름은 그러므로 기술의 축약이 아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6&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7&quot;&gt;Robert Nozick이 내게 지적해주었듯, 이름의 지칭에 대한 어떤 이론이든지, 지칭 개념과 독립적으로 상술된 이론이 사용될 수 있다면, 기술 이론은 그런 의미에서 사소하게 참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런 이론이 대상이 이름의 지칭물이 되는 조건들을 제시한다면, 그 대상은 물론 이러한 조건들을 고유하게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로 지칭 개념을 제거하는 어떤 이론도 제시할 생각이 없기에, 해당 기술 이론의 그런 어떤 사소한 충족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고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름의 지칭 개념을 사용하는 기술은 쉽사리 사용될 수 있지만 우리가 닐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서 보았듯 순환적이다.) 그렇지만 만일 그런 어떤 사소한 충족이든 사용가능했더라면, 내가 제시했던 논증들은 해당 기술이 프레게, 러셀, 설, 스트로슨 그리고 그 기술이론의 여타 옹호자들에 의해 가정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어야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7&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8&quot;&gt;Princeton University.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8&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9&quot;&gt;Strawson, op. cit., p. 182 n.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9&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10&quot;&gt;이 사례의 본질적인 핵심들은 Richard Miller에 의해 제안되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10&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11&quot;&gt;세례식의 지칭이 기술을 통해 고정되는 좋은 사례는 79쪽 주석 33에서 해왕성을 명명하는 사례이다. 명시적 규정에 의한 세례식 사례는 아마도 기술 개념 하에 그 또한 포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술 이론의 기본적인 적용가능성은 최초 세례식 사례에 대한 것이다. 기술들 또한 도입된 용어들이 통상 '이름들'로 불리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명명과 유사한 지시의 사례들에서 지칭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된다. '1m','섭씨 100도' 같은 용어들이 이미 사례로 제시된 적 있고, 다른 사례들도 이 강연에서 이후에 제시될 것이다. 두 가지 사항이 최초 세례식에서 기술을 통한 이름의 도입 사례와 관련하여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사용된 기술은 그 기술이 도입시키는 이름과 동의어가 아니라 그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통상의 기술 이론가들과 차이가 난다. 둘째, 최초 세례식의 대다수 사례는 본래 기술 이론에 영감을 준 사례들과 거리가 멀다. 통상 세례자는 어떤 의미에서 그가 명명하는 대상과 안면이 있고 그 대상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여 명명할 능력이 있다. 이제 기술 이론의 영감은 우리가 종종 오래 전에 죽어서 그와 마주친 적이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과거 유명인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우리의 관점에서 기술 이론에 의해서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사례들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1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12&quot;&gt;나는 그 땅돼지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 사람들 각자에게는, 나에게 그러하듯, 그 이름에 대한 나의 용법과 프랑스 황제 사이의 특정 종류의 인과적 혹은 역사적 연결이 있을 것이지만, 요청되는 유형의 연결은 있지 않을 것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12&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13&quot;&gt;일단 우리가 이름의 지칭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기술이 그 이름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리고 나면, 기술이론은 명명이나 지칭 개념을 선전제한다고 간주될 수 있다. 사용되는 기술이 그 자체로 순환적인 방식으로 지칭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내가 만든 요구조건은 별개의 이야기이고 만일 기술이론이 어떤 가치라도 하여간 가지려면 결정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기술이론가들이 각 화자가 그의 지칭을 결정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최초 명명 행위에서 그가 제시하는 기술을 사용한다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명백히, 만일 그가 해당 결정을 통해, '&quot;키케로&quot;라는 말로 나는 내가 &quot;키케로&quot;라고 부르는 사람을 지칭할 것이다&quot;라고 해서 '키케로'라는 이름을 도입한다면, 그는 이 의식을 통해 아무런 지칭도 전혀 결정하지 않은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모든 기술이론가들이 지칭 개념을 전부 다 제거하고 있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일부 사람들은 일부 명시적 규정 개념 또는 초기 지칭 개념이 그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요청된다는 점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러셀은 확실히 그 점을 알았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13&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14&quot;&gt;Ruth Barcan Marcus, 'Modalities and Intensional Languages' (comments by W. V. Quine, plus discussion) &lt;i&gt;Boston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lt;/i&gt;, volume I, Reidel, Dordrecht, Holland, 1963, pp. 77-116 .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14&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15&quot;&gt;p. 101.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15&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16&quot;&gt;p. 115.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16&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9_17&quot;&gt;세 번째 강연에 이러한 점에 대한 더 정교한 논의가 담겨 있다. 그 강연에서 그 지점의 특정 종류의 대응쌍이론과의 관계 또한 언급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9_17&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ol&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english/reading</category>
      <category>Kripke</category>
      <category>Lecture_Ⅱ</category>
      <category>Naming_and_Necessity</category>
      <author>버러지</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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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4 Dec 2025 14:26:2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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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파이돈』 요약정리 78a10-84b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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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78a10-84b7. 유사성 논증. 죽음 뒤에 영혼이 흩어져 소멸한다는 반박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일을 겪기에 적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영혼이 둘 중 어느 쪽의 것으로 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구성된 것은 그 구성된 방식으로 분해되지만, 구성되지 않은 것은 그런 일을 겪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매번 다르게 절대로 같은 것들에 따라 있지는 않은 것들은 구성된 것들인 반면, 항상 똑같이 한결같게 있는 것들은 구성되지 않은 것들이라고 분류한다. 앞선 논의에서 그에 대해 설명(definition?)을 제시한 것들, 무엇으로 있는 그 각각은 항상 그 자체로 단일형상으로 있으면서 같은 것들에 따라 한결같게 있고 어떤 변경도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 여럿인 것들, 저것들과 동명인 것들의 경우에는 자체로도 서로와도 어떤 식으로도 같은 것들에 따른 상태에 있지 못하다. 그리고 변화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감각들로 지각할 수 있는 반면, 같은 것들에 따르는 상태에 있는 것들은 사유의 추론으로서만 파악할 수 있고, 후자는 불가시한 것들이다. 구성되고 변화하는 가시적인 것들과 구성되지 않고 같은 상태에 있으며 불가시적인 것들의 두 부류가 구분되었다. 이제 인간의 경우, 인간의 일부는 신체이고 다른 일부는 영혼이다. 그리하여 신체와 영혼이 각기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 중 어느 쪽 종류(형상)와 더욱 유사하고 더욱 동종적인지를 고찰하는 데에로 넘어간다. 신체는 가시적인 것과 더욱 유사하고 더욱 동종적이다. 반면 영혼은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고, 인간 본성상 비가시적인 것이며, 신체에 비해 영혼이 비가시적인 것에 더욱 유사한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8_1&quot; id=&quot;footnote_link_1388_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8, 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8, 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런데 '영혼이' 감각을 통해 신체를 추가로 사용하여 검토할 경우 같은 상태에 있지 않은 것들에 이끌려 혼란에 빠진다. 반면 영혼 스스로 그 자체로 검토할 때에는 자신과 동류인 불사불변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그것과 동반하여 그것에 접해 있는 한에서 방황을 멈춘다. 이 상태가 지혜라 불린다. 또한 영혼과 신체가 같은 것 안에 있을 때 영혼이 주인이 되고 신체는 노예가 되도록 타고났으며 전자가 신적인 것에 유사하며 후자는 사멸하는 것과 유사하다. 영혼은 신적이고 불별하며 지성적이고 단일한 형상인 해체되지 않는 것, 항상 한결같이 자기 자신과 같은 것들에 따른 상태에 있는 것과 유사하고, 신체는 그렇지 못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영혼은 해체되지 않거나 그에 근사한 무언가로 있는 것이, 반면 신체는 빨리 해체되는 쪽이 어울린다. 그런데 신체도 꽤나 오래 해체되지 않고 남는다. 해체되는 일이 어울리는 신체조차 오래 남는데, 이로부터 벗어난 순정한 영혼이 그렇게 벗어나자마자 해체된다는 것은 영혼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특히 신체와 공유하지 않고 신체를 피해 생애동안 죽음을 연마한 영혼은 신체를 벗어나 순정한 것이 되어 신체에 속한 것들을 끌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신체를 벗어난 영혼은 자신과 유사한 것들이 있는 자신과 유사한 곳으로 떠나게 된다. 해체되기 마련인 신체조차 오래 남기도 하는 것처럼, 해체되지 않는 것과 유사한 영혼도 만일 신체와 교류하고 이를 보살피며 이에 오염된다면, 영혼 그 자체로서 순정한 상태로 신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영혼은 영혼이라 하더라도 가시적인 곳으로 이끌리게 된다. 신체에 얽매인 잘못된 삶의 대가로 이러한 영혼은 죽어서 가시적 영역을 방황하다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열망에 의해 다시 신체에 속박되고, 이전 생에 연마한 그 습성들에 속박된다. 육체에 묶여 죽음을 연마하지 않는 삶을 산 영혼은 그 삶의 대가로 죽어서는 방황하고, 욕망에 의해 다시 이전 삶에 어울리는 신체에 속박된다. 시민적 덕에 따른 삶을 살았던 영혼조차 철학하지 않고 죽음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신들의 부류에 가 닿지는 못하고 개미나 벌, 혹은 다시 인간의 부류로 돌아가게 된다. 반면 철학자는 영혼이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바라보며, 이 구속이 열망에 의한 것이고 열망이 클수록 구속이 강력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필연적이지 않은 한에서 지각들을 멀리하고 불신한다. 그리고 영혼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로 모이도록 하고, 영혼 자체가 지성적이고 불가시한 그 자체인 것을 검토할 때에는 영혼만을 신뢰하며 다른 것들을 신뢰하지 않고, 지각되는 가시적인 것을 검토할 때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이러한 해방에 맞서 반대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즐겁거나 괴롭게 되는 것, 그리고 이 강력한 경험으로 인해 그것이 참이라 생각하도록 강제되는 것이 특히 신체에 의해 영혼이 구속되도록 만든다. 이 구속의 악순환으로 인해 영혼은 점점 더 하데스로부터 멀어진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절제를 갖추고 용기를 내는 자들이 진정으로 정당하게 배움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철학은 영혼을 해방하고 나면 다시 신체에 속박되고 다시 해방해주는 일이 반복된다 생각하지 않고, 쾌락과 고통을 잦아들게 하여 인간적인 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영혼과 동류인 곳에 이르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양육을 통해 영혼은 신체로부터 벗어나면 해체되어 버릴 것이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혼은 애초에 해체되지 않는 것과 유사하며, 이 유사함을 높여 가는 과정이 철학이며, 제대로 철학한 영혼의 해방은 해체됨과 더욱 거리가 멀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작성중-&amp;nbsp;&lt;/p&gt;
&lt;div class=&quot;footnotes&quot;&gt;
  &lt;ol class=&quot;footnotes&quot;&gt;
    &lt;li id=&quot;footnote_1388_1&quot;&gt; 79b4-5. 정확히 둘 중 어느 종류에 속하거나 일치하는지를 검토하는 게 아니라 유사성(&lt;i&gt;homoios&lt;/i&gt;)과 동종성(&lt;i&gt;syggenēs&lt;/i&gt;)의 정도를 묻는다. 또한 가시와 비가시의 여부가 '인간 본성'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도 강조되고 있다. 이는 이어지는 논의에서, 영혼이 '단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것이자 불변하는 것이며 비가시적인 것이기만 하다면 설명하기 곤란한 측면들, 영혼이 육체에 영향을 받고 물들거나 물체적인 특징들을 지니게 되는 서술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8_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ol&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생각</category>
      <category>phaedo</category>
      <category>Plato</category>
      <author>버러지</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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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4 Oct 2025 18:08: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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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aul A. Kripke, Naming and Necessity. 12th. Lecture Ⅰ.</title>
      <link>https://oistros.tistory.com/1387</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22] Lecture Ⅰ: January 20, 1970&lt;/b&gt;&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나는 몇 사람 정도는 제목의 두 주제 사이의 어느 정도의 관계를 알아채 주길 바란다. 이 강연에서는 그런 관계들이 개진될 것이다. 오늘날 분석철학에서 지칭(reference)과 필연성을 포함한 도구 사용으로 인해, &lt;b&gt;[23]&lt;/b&gt; 전통적으로 이런 주제들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되어 왔던, 심신문제나 소위 '동일성 논제'에 관한 논증들 같은 다른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이런 주제들에 관한 우리의 관점들은 정말로 광범위한 함축을 가진다. 이런 구도에서 오늘날 유물론은 종종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속성 동일성에서 필연적인 것이나 우연적인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나 그와 같은 문제들에 연루되곤 한다. 그래서,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자 할 철학자들에게 이런 개념들을 분명히 하는 일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 강연 중에 어쩌면 내가 심신문제에 관련해 좀 언급할 수도 있다.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체와 자연종에 관해서도 어느 시점에서는 논하고 싶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내가 이런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식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꽤나 다를 것이다 (비록 그 방식도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고 쓰고 있던 것과 몇몇 접점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이런 비격식적인 강연에서 사람들을 놓치더라도, 용서해주길 바란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내가 가진 관점들 중 일부는 몇몇 사람들에게 명백히 틀렸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는 관점들이다. 내가 선호하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예시를 아마 강연에서 방어하진 않을 것이다. 도무지 아무도 설득시키지 못할 한 가지 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 사실은 공집합-공외연을 가지는-이라도 어떤 종류의 필연 문제도 아니라 &lt;b&gt;[24]&lt;/b&gt; 우연적 사실의 문제로 공외연을 가지는 그런 특정 술어들이 있다는 것은 동시대 철학에서 흔한 주장이다. 난 그 점은 반박하지 않는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예시가 &lt;i&gt;유니콘&lt;/i&gt; 사례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어떤 유니콘들도 전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유니콘들이 &lt;i&gt;있었을 수도 있다&lt;/i&gt;고 이야기된다. 특정 상황에서 유니콘들이 &lt;i&gt;있었을 수도 있다&lt;/i&gt;. 그리고 이것은 내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의 사례이다. 내 식으로는 아마 어떤 유니콘도들도 있지 않을 것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바로 무슨 조건들 하에서 유니콘들이 있었을 것인지 우리가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참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설령 고고학자나 지리학자가 내일이라도 우리가 유니콘에 대한 설화를 통해 유니콘에 관하여 알고 있는 모든 점을 만족시키는 과거 동물들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일부 화석을 발견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게 유니콘이 있었을 것임을 보여주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게 이 특정 관점을 방어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놀랄 만한 관점의 일례이다. (나는 실제로 이 관점에 대해 두 회기에 걸쳐 여기에서 강연한 바 있다.) 그렇게, 내 의견들 중 일부는 어느 정도 놀라운 것들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놀랍지는 않을 일부 영역에서 시작해서 이 강연의 방법론과 문제들을 소개하기로 하자.&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한 짝의 주제들 중 첫 번째는 명명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름을 고유명사라는 의미로, 즉 한 개인이나 한 도시 혹은 한 나라 등의 이름이란 뜻으로 쓸 것이다. 현대 논리학자들이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s)에 매우 관심이 많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건 '&amp;phi;x인 x (the x such that &amp;phi;x)' 형식의 구들, '하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내(the man who corrupted Hadleyburg)' 같은 것이다. 이제, 만일 오직 단 한 사람만이 하들리버그를 타락시켰다면, 그 사람은 현대 논리학자가 이해하는 의미로 해당 기술(description)의 지시체(referent)이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한정기술구를 포함하지 &lt;i&gt;않도록&lt;/i&gt;, 오직 일상언어에서 '고유명사'로 불릴 그런 것들만을 포함하게끔 그렇게 '이름'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름과 기술을 포괄하는 공통용어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시어(designator)'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amp;nbsp; [25]&lt;/b&gt; 도넬런이 말했던 바,&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3&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3&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3)&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3)&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3&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특정 상황 하에서 개별 화자가 한정기술구를, 내가 방금 정의했던 의미에서, 그 기술구의 적절한 지칭체가 아니라, 그가 지적해내길 바라는 그리고 해당 기술구의 적절한 지칭체라고 그 화자가 생각하는, 하지만 사실은 적절한 지칭체가 아닌 그런 어떤 다른 것을 지칭하기 위해&amp;nbsp; 사용할 수 있을리란 점이 핵심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의 잔에 샴페인을 담고 저기에 있는 그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그가 실제로는 그저 잔에 물을 담고 있을 뿐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설령 그의 잔에 샴페인이라고는 전혀 없다 하더라도, 그리고 잔에 샴페인을 담아 가지고 있는 그 방 안의 또 다른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화자는 그가 잔에 샴페인을 담아 가지고 있던 자로 생각했던 그 사람을 지칭하기를 &lt;i&gt;의도했거나(intended)&lt;/i&gt;, 혹은 어쩌면, '지칭'의 일부 의미에서, 지칭을 &lt;i&gt;했다(did)&lt;/i&gt;.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계속 &lt;b&gt;[26]&lt;/b&gt; '기술의 지칭체'라는 용어를 해당 한정 기술구 내의 조건들을 고유하게 충족시키는 대상이란 뜻으로 사용할 것이다. 이는 논리적 전통에서 사용되어 온 의미이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amp;phi;x인 x' 형태의 기술을 지니고, &amp;phi;x인 그런 정확히 한 x가 있다면, 그것이 해당 기술구의 지칭체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제, 이름과 기술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John Stuart Mill의 책 &lt;i&gt;A System of Logic&lt;/i&gt;에는, 이름은 지시를 가지지만 함축을 가지지 않는다는 유명한 원리가 있다. 그의 예시 하나를 사용하자면, 우리가 영국의 특정한 곳을 기술하기 위해 'Dartmouth'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그 곳은 Dart의 입구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하기로 Dart(강)가 설령 그 경로를 바꿔서 다트머스가 더 이상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 장소를 적절하게 '다트머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설령 그 이름이 그곳은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한다는 점을 시사할지라도 그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밀의 말을 바꿔서, 아마 우리는 '다트머스' 같은 이름이 일부 사람들에게 (나에겐 아니다. 나는 절대로 이렇게 생각한 적 없다.) '다트머스'라고 불리는 어떤 장소든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한다는 '함축'을 가지고 &lt;i&gt;있다고&lt;/i&gt;&amp;nbsp; 말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그 이름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적어도, '다트머스'라는 이름의 &lt;i&gt;뜻&lt;/i&gt;에는 그렇게 명명된 도심지가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한다는 것이 부분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다트머스가 다트 강의 입구에 놓여있지 않았다고 말한 누군가는 그 자신과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Fx인 x' 형식의 모든 구가 항상 영어에서 이름 보다는 기술로 사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나,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인의 것도 제국이지도 않은 신성로마제국에 관해 들어봤으리라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에겐 국제연합이 있다. 여기에서 이런 것들이 신성로마국제연합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 불릴 수 있기에, 이런 구들이 한정기술구가 아니라 이름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일부 용어의 경우, 사람들은 그게 이름인지 기술인지 여부에 관해 의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신' 같은 용어는 &lt;b&gt;[27]&lt;/b&gt; 신을 고유의 신성한 존재로 묘사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신의 이름인가? 하지만 그런 경우로 우리가 반드시 골머리를 썩힐 필요는 없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제 여기에서 나는 언어 내에서 확실히 형성되는 구분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근대 논리의 고전적 전통은 밀의 관점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프레게와 러셀 두 사람 모두, 매우 강력한 의미에서 밀이 틀렸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결론에 두 사람 각자 독립적으로 당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유명사는, 적절히 사용된다면, 단순히 축약되거나 가장된 한정기술구였다는 것이다. 프레게는 특별히 그런 기술이 이름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말했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4&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4&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4)&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4)&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제 밀의 관점에 반대하고 프레게와 러셀에 의해 채택된 대안적 관점을 선호할 이유는 실제로 매우 강력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름이 가장된 기술구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관점에 의구심을 가질지 모른다 하더라도- 어떻게 프레게-러셀 관점 혹은 그 일부 적합한 변주가 사실에 부합하지 못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프레게와 러셀의 관점을 선호하도록 하는 결정적인 논증들의 일부 사례를 제시해 보겠다. 밀의 관점과 같은 어떤 관점에 대해서든 기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가정된 화자에 의해 사용된 이름의 지칭체가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lt;b&gt;[28]&lt;/b&gt; 기술구 관점에 따르자면, 그 대답은 명백하다. 만일 'Joe Doakes'가 바로 '하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람'에 대한 생략이라면, 그 누가 되었든 하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자가 고유하게 '조 도크스'라는 이름의 지칭체이다. 그렇지만, 만일 해당 이름에 그런 기술적 내용이 있지 &lt;i&gt;않다면&lt;/i&gt;,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여간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인가? 그들은 아마 일부 사물들을 가리키는 입장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특정 이름들의 지칭들을 명시적으로 결정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러셀의 직접 접촉의 원리였다. 그는 소위 진정한 혹은 고유 명사가 그 원리를 충족시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일상적인 이름들은 월터 스콧 같이 우리가 가능한 방식으로 가리킬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지칭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들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해당 이름의 지칭체를 그런 속성들을 만족시키는 고유한 것으로 결정한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Napoleon'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나폴레옹은 19세기 초 프랑스의 황제였다, 그는 결국 워털루에서 패배했다' 같은 어떤 것을 답할 것이고, 그 이름의 지칭체를 결정하는 고유하게 정체성(동일성)을 규정하는 기술(a uniquely identifying description)을 제공하며 그리 할 것이다. 프레게와 러셀은 그리하여 여기에서 어떻게 지칭이 결정되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밀은 아무 설명도 내놓지 않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더 특수화된 문제들에 기반하긴 했지만 이 역시 해당 관점을 수용할 동기를 부여해주는 부수적인 논증들이 있다. 한 가지는 때로 우리가 같은 지칭체를 가지는 두 이름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을 동일성 진술로써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진부한 예시인 것 같지만) 당신은 저녁에 별을 보고 그 별이 'Hesperus(개밥바라기별)'라고 불린다. (우리가 그 별을 저녁에 그렇게 부른다. 맞나? 그 반대가 아니길 빈다.) 우리는 아침에 별을 보고 그것을 'Phosphorus(샛별)'이라 부른다. 자, 이제, 우리는 사실 그것이 별(항성)이 아니라 행성 금성이고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은 사실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lt;b&gt;[29]&lt;/b&gt;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확실히 한 대상에 대해 그것이 그 자신과 동일하다고만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밝혀냈던 어떤 것이다. 매우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실제 내용이 곧 우리가 저녁에 봤던 별이 우리가 아침에 봤던 별이라는 사실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저녁에 봤던 것이 우리가 아침에 봤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문제의 동일성 진술의 실제 의미를 제공한다. 그리고 기술구로의 분석이 이 일을 수행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또한 우리는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했던 적이 있는지 여부를 물을 때 도대체 이름이 어떤 지칭이든 지니기는 하는지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질문은 이 &lt;i&gt;사물&lt;/i&gt;(사람)이 존재했는지 여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단 우리가 그 사물을 &lt;i&gt;취하고&lt;/i&gt; 나면, 우리는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안다. 실제 질문은 어떤 것이든 우리가 그 이름과 결부시키는 속성들에 대해 답이 되는지 여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사례에서는, 누구든 한 사람의 그리스 철학자가 특정 작업들을, 혹은 적어도 그것들 중 적정 수의 작업들을 산출하였는지 여부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런 논증들 전부에 답하는 것은 멋진 일일 것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일관하는 나의 방식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게다가, 나는 내게 이번 강연들을 통해 이 질문들 모두를 농의할 시간이 없으리란 걸 꽤나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와 러셀의 관점이 거짓이라는 점은 꽤나 확실하다고 생각한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5&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5&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5)&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5)&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lt;b&gt;[30]&lt;/b&gt; 많은 사람들이 프레게와 러셀의 이론이 거짓이라고 말해왔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그 이론의 철자는 폐기했지만 취지는 유지시켰는데, 말하자면, 개념 다발이란 관념을 사용해왔다.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프레게와 러셀에게 명확한 문제, 즉각적으로 마음에 떠오르는 문제는 이미 프레게 자신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2&quot;&gt;&quot;아리스토텔레스&quot; 같은 진정으로 고유한 이름의 경우 그 의미에 관해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제안될 수 있다. 플라톤의 제자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교사. 이 의미를 수용하는 누구든지 해당 진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의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를 알렉산더 대왕의 스타게이로스인 교사로 변역한 사람과는 다른 식으로 해석할 것이다. 명명되는 것이 같은 것으로 유지되는 한, 이러한 의미에서의 변동들은 용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변동들은 실증과학의 체계에서 회피되어야 할 것이고 완전한 언어에서는 출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6&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6&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6)&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6)&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6&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래서 프레게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에는 모종의 느슨함이나 약함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한 가지 의미를 부여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단일 화자조차 '당신이 그 이름을 대체하고자 하는 기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상당히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사실, 그는 그에 관하여 여러가지 것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특수한 어떤 것이든 명백히 해당 대상의 우연적 속성을 표현한다 느낄 것이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amp;nbsp;&lt;i&gt;알렌산더 대왕을 가르쳤던 사람&lt;/i&gt;을 의미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교사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동어반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렇지 않다. 그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다는 사실, 우리가 그것이 거짓임을 발견할 수 있었을 어떤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amp;nbsp;&lt;i&gt;알렉산더 대왕의 교사로 있음&lt;/i&gt;은 해당 이름[의 의미]의 일부일 수 없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lt;b&gt;[31]&lt;/b&gt; 이 어려움을 피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우리가&amp;nbsp;&lt;i&gt;개별(particular)&lt;/i&gt; 기술로 이름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 일상언어에서 약점이 아니다. 그건 괜찮다. 우리가 실제로 이름과 결부시키는 것은 기술구들의 일군(family)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시는 (내가 그걸 찾을 수 있다면), 가족 유사성이라는 관념이 강력한 힘을 가진 채로 도입된,&amp;nbsp; 『철학 탐구』안에 있다.&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2&quot;&gt;이러한 예를 고려해 보자. 만일 누군가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을 의미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철수할 때 &lt;i&gt;단일&lt;/i&gt; 지도자를 지니지 않았다-혹은: 그들의 지도자는 모세라고 불리지 않았다-혹은: 성격이 모세에 관해 전해주는 모든 일을 성취해낸 그 어떤 사람도 있었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모세에 관한 진술을 형성할 때,-나는 항상 그런 기술들 중 어떤 &lt;i&gt;한 가지&lt;/i&gt;로 '모세'를 대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어쩌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라는 말로 나는 성경이 모세에 관해 전해주는 일을 했던 사람을 이해하거나, 어느 정도, 그 말을 잘 취급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로 말인가? 나는 얼마나 많이 내게 거짓으로 입증되어야만 나의 명제를 거짓으로서 포기할 것인지 결정하였나? '모세'라는 이름은 모든 가능한 경우에서 나에게 확정되고 애매함이 없는 용법을 갖춘 것인가?&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7&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7&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7)&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7)&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7&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관점에 따르면, 또한 그에 대한 표준구(&lt;i&gt;locus classicus&lt;/i&gt;)는 고유명사에 관한 Searle의 논문인데,&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8&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8&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8)&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8)&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8&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이름의 지칭체는 단일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부 다발이나 일군의 기술들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일군을 충분히 혹은 그 대다수를 충족시키는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해당 이름의 지칭체이다. 나는 이후에 다시 이 관점에 대한 논의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일상언어의 분석으로서는 프레게와 러셀의 분석보다 상당히 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이 이론의 모든 장점을 유지하면서 단점들을 제거해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개념다발이론이나, 단일 기술을 요하는 이론조차 가능한 관점이 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하기로 하자. (이는 우리에게 내가 이 명명 이론을 실제로 고려하기 전에 또 다른 새로운 주제를 소개해줄 것이다.) &lt;b&gt;[32]&lt;/b&gt; 그것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은 기술 다발 혹은 단일 기술이 실제로 이름의 뜻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월터 스콧'이라고 말할 때, 그는 &lt;i&gt;이러저러한&amp;nbsp; 그런 사람&lt;/i&gt;을 의미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제 또 다른 관점은 설령 해당 기술이 어떤 의미에서 이름의 &lt;i&gt;뜻&lt;/i&gt;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lt;i&gt;이름의&amp;nbsp;지칭을 결정하는&lt;/i&gt; 것이고 '월터 스콧'이란 구가 '이러저러한 그런 사람'과, 혹은 심지어 그 기술 일군과도 (만일 어떤 것이 한 기술군과 동의어일 수 있다면) 동의어가 아니더라도, 그 일군 혹은 단일 기술은 누군가가 '월터 스콧'을 말할 때 지칭하고 있는 사람을 결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라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만일 우리가 월터 스콧에 관한 그의 믿음들을 들을 때 그 믿음들이 실제로는 Salvador Dali에 대해 훨씬 더 참일 듯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이론에 따라 이 이름의 지칭은 스콧이 아니라 달리일 것이다. 내가 생각에는, 명시적으로 내가 그리할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이름이 뜻을 가지는 일을 완전히 부정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이름의 지칭체가 결정되는지에 대해 이러한 구도를 사용하는 저자들이 있다. 핵심을 잘 짚은 사례는 Paul Ziff인데, 그는 매우 강조하며 말하길, 이름은 전혀 뜻을 가지지 않고, 이름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일부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어떻게 우리가 그 이름의 지칭이었던 바를 결정하는지에 관하여 말할 때, 그는 이 구도를 제시한다. 불행히도 나는 문제가 되는 구절을 지금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9&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9&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9)&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9)&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lt;b&gt;[33]&lt;/b&gt; 이 이론을 뜻에 대한 이론으로 사용하는 것과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 사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이후에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이론의 매력 중 일부는 만일 그것이 이름의 뜻을 제공한다고 가정되지 않는다면 상실된다. 내가 방금 언급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들 중 일부는 맞지 않거나, 최소한 명백하게 맞지는 않을 것인데, 만일 기술이 이름의 뜻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라면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일 눅누가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그러저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있지 않다'는 &lt;i&gt;뜻으로&lt;/i&gt; 말하거나, 비트겐슈타인의 예시에서, '모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저러한 일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라는 &lt;i&gt;뜻으로&lt;/i&gt; 말했다면, 그것은 문제의 이론을 '모세'라는 이름의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뜻에 대한 이론으로 취하는 데에 의거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사실상 그렇게 의거한다).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지금 직접 드러나는 것 전부가 다른 식으로 뒤집힐지도 모른다. 만일 '모세'가 '그러저러한 일을 했던 사람'과 같은 뜻이라면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러저러한 일을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즉, 단 한 사람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달느 한편, 만일 '모세'가 그 어떤 기술과도 동의어가 아니라면, 설령 그 지칭이 어떤 의미에서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할지라도, 해당 이름을 포함하는 진술은 일반적으로 그 이름을 기술로 대체함으로써 &lt;i&gt;분석될&lt;/i&gt; 수 없다. 실질적으로는 그 기술을 포함하는 진술과 동격일 수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위에 언급된 단칭 현존 진술의 분석은, 이름의 뜻에 대한 일반 이론에 대해 독립적인 어떤 특별한 논증에 의해 확립되지 않는 한, 포기되어야 할 것이다. 동일성 진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경우든, 나는 '모세가 존재한다'가 그런 뜻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라 생각한다. &lt;b&gt;[34]&lt;/b&gt; 그래서 우리가 그런 특별한 논증이 도출될 수 있는지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0&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0&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0)&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0)&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0&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더 진입하기에 앞서, 이 강연의 방법론에 중요할 또 다른 구별에 대해 말해두고 싶다. 철학자들은 참의 다양한 범주들[에 관하여], '선험적', '분석적', '필연적'-때로는 '확실한'이란 표현까지 이 집단에 포함시키며 말해 왔다. (그리고, 물론, 최근 몇 년 간 이러한 관념들의 유의미함을 두고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주목할 만한 논쟁이&lt;span&gt; 있어 왔다.) 그 용어들은 종종 이러한 개념들에 응답하는 것들이 있는지 &lt;i&gt;여부(whether)&lt;/i&gt;가 관심가는 문제인 것처럼 사용되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들 모두를 같은 것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모두가 '선험적'과 '분석적' 사이의 구분을 만든 칸트를 (다소간) 기억한다. 그래서 이 구분은 여전히 구성되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의 논의에서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만일 누구라도 있다면, 선험적인 진술 개념과 필연적인 진술 개념을 구분한다. 나는 어느 수준에서든 '선험적' 그리고 '필연적'이란 용어를 여기에서 상호대체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lt;i&gt;않을&lt;/i&gt; 것이다.&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 '선험적'과 '필연적' 같은 용어들의 전통적인 규정들이 무엇인지 고려해 보자. 우선 선험성이라는 관념은 인식론적 개념이다. 나는 칸트로부터 유래한 전통적 규정이 이런 어떤 것으로 전개되는 것이라 추정한다. 선험적 참은 어떤 경험으로부터든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장을 떠나기에 앞서 또 다른 문제를 도입하는데, '선험적'에 대한 규정 안에 또 다른 양상성이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어떤 경험으로부터든 독립적으로 알려&lt;i&gt;질 수 있는&lt;/i&gt;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독립적으로 아는 일이 &lt;i&gt;가능&lt;/i&gt;하다는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어떤 경험으로부터든 독립적으로 알든 알지 못하든) 뜻이다. 누구에게 가능한가? 신에게? 화성인에게? &lt;b&gt;[35]&lt;/b&gt; 혹은 그저 우리와 같은 정신을 갖춘 사람들에게? 이를 분명하게 밝히는 일은 여기에서 문제시되는 가능성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관련하여 모두 그 작업에 고유한 것들인 수 많은 문제들을 포함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선험적 참'이라는 구를 사용하기는 하되, 그 용어를 누군가가 어쨌든 사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특정 개인이나 인식자가 어떤 것을 선험적으로 알거나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선험적 증거에 기반하여 형성하지 여부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일 듯하다.&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 나는 선험성 관념과 관련해 야기될 문제들에 여기에서 더 이상 너무 깊게 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나는 일부 철학자들이 어떤 식으론가 이러한 규정 내의 그 양상성을 &lt;i&gt;can&lt;/i&gt;으로부터 &lt;i&gt;must&lt;/i&gt;로 변경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만일 어떤 것이 선험적 지식의 영역에 귀속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방식으로 경험적으로 알려질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착오이다. 어떤 것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지만 여전히 개별 사람들에게 경험에 기반하여 알려질 그런 진술들의 영역에 속할 수도 있다. 정말로 상식적인 예시는 이런 것이다. 계산기를 가지고 작업해 본 누구든 계산기가 이러저러한 수가 소수인지 여부에 답을 제공하리란 것을 안다. 그 누구도 해당 수가 소수라는 점을 계산하거나 증명한 적 없다. 하지만 그 계산기는 이 수가 소수라고 답을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만일 우리가 그 수는 소수라고 믿는다면 물리법칙, 계산기의 구조, 기타 등등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기반하여 그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순수하게 선험적 증거에 기반하여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만일 어떤 것이 되었든 좌우간 후험적인 것이 있다면) 후험적인 증거에 기반하여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필수적인 계산을 한 누군가에 의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험적으로 알려질 &lt;i&gt;수 있다&lt;/i&gt;'는 것은 '선험적으로 알려져&lt;i&gt;야만 한다&lt;/i&gt;'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amp;nbsp;&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 문제가 되는 두 번째 개념은 필연성 개념이다. 때로 이 개념은 인식론적 방식으로 사용되고 그래서 선험적이라는 것을 뜻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때로 그것은 물리적 방식에서 사람들이 물리적인 필연성과 논리적 필연성을 구별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식론이 아니라, &lt;b&gt;[36]&lt;/b&gt; 일부 (내가 희망하기로) 비경멸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에 속하는 관념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참이었을지 혹은 거짓이었을지 묻는다. 자, 만일 어떤 것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명백하게 필연적으로 참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그것이 달리 있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세계는 세계가 있는 그 방식과 달리 있었으리라는 것은 가능한가? 만일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세계에 관한 이 사실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만일 저 답이 '네'라면, 세계에 관한 이 사실은 우연적인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 자체 내에서 또 그 자체에 대해 그 무엇에 대한 그 누구의 지식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모든 선험적인 것이 필연적이라거나 모든 필연적인 것이 선험적이라는 것은 확실히 철학적 논제이고, 명백한 정의상 등가의 문제가 아니다. &lt;/span&gt;&lt;/span&gt;두 개념들 모두 모호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논제들은 두 가지 상이한 분야, 상이한 영역, 인식론적 영역과 형이상학적 영역을 다루고 있다. 이를 테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고려해 보자. 혹은 골드바흐 추측을 생각해 보자. 골드바흐 추측은 2보다 큰 짝수가 반드시 두 소수의 합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짐작건대 그것은 필연적이고, 만일 거짓이라면, 짐작건데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수학의 고전적 관점을 취하고 있고 수학적 실재성 내에서 그것은 참이거나 아니면 거짓이라고 상정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만일 골드바흐 추측이 거짓이라면, p₁과 p₂가 모두 &amp;lt;n인 어떤 소수 p₁과 p₂에 대해서도, n= p₁+ p₂인 그런 2보다 큰 짝수 n이 있지 않다. n에 대한 이 사실은, 만일 참이라면, 직접 계산에 의해 검증될 수 있고, 그래서 만일 그 산술적 계산 결과들이 필연적이라면 또한 필연적이다. 다른 한편, 만일 그 추측이 참이라면, 2를 초과하는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다. 그래서 사실 그런 모든 짝수가 두 소수의 합이라 하더라도, 두 소수의 합이 아닌 그런 짝수가 있는 경우가 가능했을까? 그건 무슨 뜻일까? 그런 수는 4, 6, 8, 10, ... 중 하나여야 할 것이고, 우리가 골드바흐 추측이 참이라 가정하고 있으니, 전제에 의해, 이것들 각각이 다시금 직접 계산에 의해 &lt;b&gt;[37]&lt;/b&gt; 두 소수의 합이라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 그래서 골드바흐 추측은 우연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일 수는 없다. 그 추측이 가지는 진리값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 추측은 필연에 의해 그 진리값에 속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하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지금 당장 우리가 아는 한에서 그 문제가 둘 중 어느 한 쪽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결정해주는 수학적 증명의 부재 상황에서, 우리 중 누구도 이 문제에 관하여 둘 중 어느 방향으로든 그 어떤 선험적 지식이든 지니고 있지 않다. 우리는 골드바흐 추측이 참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로 지금 우리는 확실히 그 추측에 관하여 어떤 것이든 선험적으로 알고 있지 못하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어쩌면 그것이 참인지 여부를 우리가 원칙으로는 선험적으로 알 &lt;i&gt;수 있다&lt;/i&gt;고 주장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수를 철저히 조사할 수 있는 무한한 정신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한 정신이 그 일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었을지 알지 못한다. 그 추측을 판가름해주는 아무런 수학적 증명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은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거나 할 것이다. 이 문제를 판가름해줄 수학적 증명이 있을지도 모른다. 힐베르트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직관적 증명이라는 관념이 단일 체계 내에서의 형식적 증명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 한 그 문제가 불가해한 것이라 생각해 오고 있다. 확실히 그 어떤 단일 형식 체계도 모든 수학적 문제를 판단해주지 않는다. 내가 괴델로부터 배운 바로는 그렇다. 어쨌든, 이것은 중요한 일이고,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설령 누군가가,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라는 것이 좌우간 참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에 관해 어떤 것이든 선험적인 것을 안다는 점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심지어 내게는 몇 가지 추가적인 철학적 논증 없이는 (그것은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이다) 누군들 그것에 관해 어떤 것이든 선험적인 것을 알 &lt;i&gt;수 있으리란(could)&lt;/i&gt; 것조차 따라나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가 말했던 바, '&lt;i&gt;할 수 있으리라&lt;/i&gt;'는 것은 몇몇 다른 양상을 포함한다. 우리는 설령 단 한 사람도, 어쩌면 미래에 걸쳐서까지도, 골드바흐 추측이 옳은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하고 알게 되지도 못한다 하더라도, 그 선험적 질문에 답하는 데에 &lt;b&gt;[38]&lt;/b&gt; 활용될 &lt;i&gt;수 있을&lt;/i&gt; 방법이 원칙적으로는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언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래서 진술들에 적용되는 '필연'과 '선험'이란 용어는 명백한 동의어가 &lt;i&gt;아니다&lt;/i&gt;.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어쩌면 심지어 동일시하는 철학적 논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용어가 명백히 상호교환가능하다는 점은 단순히 관찰결과가 아니라 논증이 요청된다. (나는 이후 그 둘이 사실 외연조차 동연이지 않다고, 필연적인 후험적 참들과 가능적으로 우연한 선험적 참들 양쪽 모두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나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것들이 이하의 이유들에서 같은 뜻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다고 본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첫째로, 만일 어떤 것이 마침 현실세계에서 참일 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세계에서 또한 참이라면, 물론 우리의 머릿속 그 모든 가능세계를 관통하여, 우리는 그 진술이 필연적이라면, 그 어떤 것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충분한 노력을 기울여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 점을 선험적으로 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일은 그리 명백하게 실현가능한 것이 전혀 아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둘째로, 그 반대로, 나는 만일 어떤 것이 선험적으로 알려진다면 그것은 필연적이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세계를 관찰하는 일 없이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왔다고 추정한다. 만일 그것이 현실세계의 우연적 특징 일부에 의존했더라면,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관찰 없이 알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그 현실세계는 그것이 거짓이었을 가능한 세계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는 관찰 없이 현실세계에 관해 알 방법으로서 모든 가능세계에 관하여 같은 것을 알 방법이 아닐 방법은 있을 수 없다는 논제에 달려있다. 이는 인식론과 지식의 본성에 대한 문제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물론 그 문제는 진술된 대로 지극히 모호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amp;nbsp;&lt;i&gt;사소한&lt;/i&gt; 것도 아니다. 필연적인데 선험적이지 않은 혹은 선험적인데 필연적이지 않은 것으로 내세워지는 어떤 것의 여느 특수한 사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개념들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어떤 것이 우리가 오직 후험적으로만 알 수 있을 어떤 것이라는 데에 기반하여, 그것이 필연적 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이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lt;b&gt;[39]&lt;/b&gt; 단지 어떤 것이 어떤 의미에서 선험적으로 알려진다는 이유만으로, 알려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점이 사소해지지는 않는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철학에서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는 '분석적'이라는 것이다. 이 강연에서 이 용어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더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분석적 진술의 흔한 예시는 '총각은 미혼이다' 같은 것이다. 칸트는 &quot;황금은 황색 금속이다&quot;라는 것을 예시로 내놓는데, 그건 내가 보기엔 평범하지 않은 사례인 바, 나는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분석적 진술은 어떤 의미에서 그 의미 덕분에 참이고 그 의미 덕분에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라고 규정하는 문제로 치도록 하자. 분석적으로 참인 어떤 것은 필연적이고 또한 선험적일 것이다. (이는 규정적인 종류의 진술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내가 언급한 또 다른 범주는 확실성의 범주였다. 그 어떤 확실성이 되었든지 간에, 필연적인 것이 확실하다는 점은 분명 병백하게 사실이지 않다. 확실성은 또 다른 인식론적 관념이다. 어떤 것이 상당히 확실한 것이 아니고도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거나 최소한 합리적으로 믿어질 수 있다. 당신은 수학 책에서 증명을 읽어본 적이 있다. 당신이 그 증명을 정확한 것이라 생각할지라도, 당신은 착오를 저질렀을 수 있다. 당신은 종종 이런 종류의 착오를 범한다. 당신은 아마 계산을 잘못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예비적 방식에서 다루고자 하는 또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일부 철학자들은 본질주의, de re(실재) 양상 믿음과 필연성에 대한 단순 지지, de dicto(언표/명제적) 양상 믿음 사이를 구분한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필연성 개념을 &lt;i&gt;제시&lt;/i&gt;해 보자.&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1&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lt;b&gt;[40]&lt;/b&gt; 더 곤란한 것은, 막대한 추가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우리가 어느 특정한 것에 대해서든 그것이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 속성들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애초에 필연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 사이의 구분을 마련할 수나 있는지 여부이다.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이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lt;i&gt;진술&lt;/i&gt;이나 &lt;i&gt;일련의 상황(a state of affairs)&lt;/i&gt;뿐이다. &lt;i&gt;개별자(a particular)&lt;/i&gt;가 필연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특정한 속성을 지니는지 여부는 그것이 기술되는 방식에 달려있다. 이는 아마 우리가 개별 사물을 지칭하는 방식이 기술에 의한 것이라는 관점에 밀접하게 관련된다. 콰인의 유명한 예는 무엇인가? 우리가 수 9를 고려한다면, 9는 필연적 홀이라는 속성을 지니는가? 그 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홀수인 것으로 파악되었나? &lt;i&gt;아홉&lt;/i&gt;이 홀이라는 것은 확실히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고, 말하자면, 그것은 달리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9는 (태양계)&lt;i&gt;행성의 수&lt;/i&gt;로도 못지 않게 같은 정도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여덟 행성들이 있었더라면, 행성의 그 수는 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든다. 닉슨이 선거에서 승리했던 것은 필연이었나 우연이었나? (어떤 불가항력의 과정들에&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대한 모종의 관점을 가지지 않는 한, 그건 우연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그를 '닉슨'이라 지칭함에 관계해서만 닉슨의 우연적 속성이다 ('닉슨'이 '그러저러한 시점에 선거에서 승리했던 사람'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닉슨을 '1968년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으로 지시한다면, 물론 1968년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이 1968년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필연적인 참일 것이다. 유사하게, 대상이 모든 가능 세계에서 같은 속성을 지니는지 여부는 &lt;b&gt;[41]&lt;/b&gt; 그저 대상 자체에 달린 일이 아니라, 그 대상이 어떻게 기술되는지에 달려 있는 일이다. 그것이 주장되는 내용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필연 개념이 그 이면에 일종의 직관을 지닐지라도 (우리는 어떤 것들은 달리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또 여타의 것들은 달리 있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개념 [필연적인 속성들과 우연적 속성들 사이의 구분이라는 개념]은 어떤 불량한 철학자에 의해 구성된 원칙일 뿐이라는 점이 문헌상으로 시사되는 일조차 있다. 그는 (내 짐작으로는)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이다. 나는 일부 철학자들이 이를 깨닫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쨌든 이 발상 [한 속성이 한 대상에게 본질적인 것이라거나 우발적인 것이라고 그 대상에 대한 기술과 독립적으로 유의미하게 주장될 수 있다는]이 아무런 직관적 내용도 지니지 않는, 그 일상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관념이라는 것은 진실과는 아주 많이 거리가 멀다. 누군가가 닉슨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패배했을 수도 있는 그 사내이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또 다른 누군가는 '아니다, 당신이 &quot;닉슨&quot;이라고 그 사람을 기술한다면, 그는 패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히, 그를 승자로 기술하면서는, 그가 패배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제 여기에서 철학자인 사람, 비직관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보기에는 두 번째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두 번째 사람은 철학적 이론을 견지하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은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 선거의 승자는&lt;i&gt; 다른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lt;/i&gt;. 실제 승자는, 그 선거 과정이 달랐더라면, 패자였을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가 승자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아무런 선거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quot;승자&quot;나 &quot;패자&quot; 같은 용어는 모든 가능세계 내에서 각기 일관된 대상들을 지시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quot;닉슨&quot;이란 용어는 바로 &lt;i&gt;이 사람의 이름&lt;/i&gt;이다.' 당신이 &lt;i&gt;닉슨&lt;/i&gt;이 선거에서 이겼다는 것이 필연적인지 우연적인지 물을 경우, 당신은 모종의 반사실적 상황에서, &lt;i&gt;이 사람이&lt;/i&gt; 실제로 그 선거에 패배했을 것인지 직관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필연적 혹은 우연적 속성이란 개념이 (사소하지 않은 필연적 속성들이 &lt;i&gt;있는지&lt;/i&gt; 여부는 잊고 그 관념의 유의미함만 고려하자&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2&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2&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2)&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2)&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2&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lt;b&gt;[42]&lt;/b&gt; 아무런 직관적 내용도 지니지 않은 한 철학자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틀렸다. 물론, 일부 철학자들은 어떤 것이 직관적 내용을 지닌다는 것이 그것을 선호할 증거로는 전혀 결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은 어떤 것을 선호하는 데에 그 점이 매우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실제로, 어떤 점에서는, 누군가가 무언가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더욱 결정적인 증거가, 궁극적으로 말해서,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우연적 속성이란 개념이 비직관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역전된 직관을 지닌다고 나는 생각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였는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동기들은 여럿 있지만, 한 가지는 이런 것이다. 소위 본질적 속성들에 대한 질문이 '가능세계들을 관통하는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물음과 등가이리라 추정하는 것(그리고 등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닉슨이라는 사람을 상정하고 현실세계에서 닉슨이 가지는 모든 속성들을 가진 아무도 있지 않은 또 다른 가능세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다른 사람들 중, 만일 누구라도 있다면, 누가 닉슨인가? 물론 당신은 이 지점에서 동일성에 대한 모종의 기준을 제시해야만 한다. 만일 당신이 동일성의 기준을 갖고 있다면, 나머지 가능세계들에서 닉슨인 사람을 찾아볼 것이다. 그러면 그 다른 가능 세계에서 닉슨이 특정 속성들을 지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잘 정의된다. 그것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인지, 혹은 닉슨이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한 일부 가능세계들이 있는지 여부가 그런 개념들로 잘 정의된다는 것 역시 가정된다. 하지만, 그런 동일성 기준을 제공하는 문제는 매우 어렵다고 말해진다. &lt;b&gt;[43]&lt;/b&gt; 수의 경우 때로는 더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조차 상당히 임의적이라는 점이 주장된다). 예를 들어, 수열에서의 위치가 수 9를 9이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또 다른 세계에서) 행성의 수가 8이었을 경우, 그 행성의 수는 실제 그 수와는 다른 수였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고, 그것은 물론 참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 수가 이 세계에서 우리의 수 9와 동일시되는 것이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유형의 대상들의 경우, 사람들, 물질적 대상들, 그런 사물들의 경우, 가능세계들을 교차하는 정체성을 위한 일련의 필요충분조건을 누군가가 제시한 바 있는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실제로, 어느 경우든 정체성에 대한 선결문제를 요구하지 않는 적절한 필요충분조건들은 지극히 드물다. 수학이 가능 세계 &lt;i&gt;내에서&lt;/i&gt; 참을 말하는 정체성 필요충분조건이 제시되는 내가 실제로 아는 유일한 경우이다. 시간의 경과 속에서 물질적 대상들 또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한 그러한 조건들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문제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잊기로 하자. 더욱 결정적인 반박으로 보이는 것은 이것이 가능세계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잘못된 방식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이 구도에서 가능세계를 마치 외국 같은 것마냥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관찰자 입장에서 고찰한다. 닉슨은 다른 나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성질들만을 제공받는다. 누군가는 그의 모든 성질들을 관찰할 수 있지만, 물론, 어떤 이가 닉슨이라는 것을 관찰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무언가가 붉은(혹은 푸르든 노랗든) 머리카락을 가진다는 것을 관찰하지만 어떤 것이 닉슨인지 여부를 관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우리가 이전에 봤던 것과 똑같은 것을 마주하는지 속성들을 통해 설명할 방법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다른 가능세계들 중 하나와 교차할 때 누가 닉슨이었는지를 말할 방법을 지니고 있었어야 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일부 논리학자들은 양상 논리에 대한 그들의형식적 취급 내에서 이 그림을 지지할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사례는 아마 나 자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관적으로 말해서, &lt;b&gt;[44]&lt;/b&gt; 그것은 내게 가능세계들에 관한 올바른 사유방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능세계는 우리가 교차할 혹은 망원경으로 바라볼 먼 나라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또 다른 가능세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설령 우리가 빛보다 빠르게 여행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 닿지 못할 것이다. 가능세계는&amp;nbsp;&lt;i&gt;우리가 그 세계에 결부시키는 기술적 조건들에 의해 주어진다&lt;/i&gt;. 우리가 '어떤 다른 가능세계에서 내가 이 강연을 오늘 진행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단지 내가 이 강연을 열지 않기로 결정한 혹은 다른 어떤 날에 열기로 결정한 상황을 상상한다. 물론, 우리는 참이거나 거짓인 모든 것을 상상하진 않지만, 단지 내 강연 진행에 관련되어 그런 것들만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해당 세계의 기술 총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부분을 제외하고서 실제로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가능세계'이다. 왜 그 가능세계가 &lt;i&gt;닉슨&lt;/i&gt;을 포함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세계에서 &lt;i&gt;닉슨&lt;/i&gt;이 해당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능세계에 대한 &lt;i&gt;기술&lt;/i&gt;의 일부일 수 없는가? 그것은 그런 세계가 가능한 것&lt;i&gt;인지&lt;/i&gt; 여부를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견 그 세계는 명백히 가능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일단 알고 나면, 이 가능세계에서 해당 선거에 패배했을 혹은 패배한 사람이 닉슨이라는 사실을 제시받는데, 그것이 그 세계에 대한 기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가능세계들'은 &lt;i&gt;규정&lt;/i&gt;되는 것이지, 강력한 망원경으로 &lt;i&gt;발견&lt;/i&gt;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특정한 반사실적 상황에서 닉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가 &lt;i&gt;바로 그&lt;/i&gt;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lt;i&gt;규정&lt;/i&gt;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물론, 누군가가 모든 가능세계는 순전히 성질에 관련된 방식에서 기술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한다면, 우리는 '닉슨이 그 선거에서 졌다고 가정해 보라'라고 말할 수 없고, 그 대신, 'Checkers라고 명명된 개를 가진, David Frye 닮은꼴인 한 사람이 특정 가능세계 내에 있고 선거에서 패배했다' 같은 어떤 말을 해야만 한다. 자, 그는 닉슨과 동일시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닉슨을 모사하였나? 사물을 고찰하는 이런 방식의 매우 명백하고도 노골적인 사례는 &lt;b&gt;[45]&lt;/b&gt; 데이비드 루이스의 상대역 이론(counterpart theory)이지만,&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3&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3&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3)&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3)&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3&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양화된 양상에 대한 문헌에는 그런 방식이 차고 넘친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4&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4&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4)&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4)&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우리가 왜 그런 요구를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이 사람이 졌다고 가정해 보라'라고 말할 뿐이다. &lt;b&gt;[46]&lt;/b&gt; 그 가능세계가 &lt;i&gt;이 사람&lt;/i&gt;을 포함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에서, 그가 패배했다는 것이 &lt;i&gt;전제&lt;/i&gt;된다. 가능성에 관한 어떤 직관이 생길지에 대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lt;i&gt;그 점&lt;/i&gt; (&lt;i&gt;이 사람&lt;/i&gt;의 선거 패배)의 가능성에 관한 그런 직관을 지닌다면, 그 직관은 &lt;i&gt;그 점&lt;/i&gt;에 대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 가능성이 그러저러한 것을 고찰하거나 그러저러한 정치적 관점을 견지하거나 혹은 달리 질적으로 기술되는, 패배한 사람의 가능성과 동일시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lt;i&gt;사람&lt;/i&gt;을 지적할 수 있고,&amp;nbsp;사건들이 달랐다면 &lt;i&gt;그&lt;/i&gt;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물을 수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것이 참이라 가정해 보자. 그것은 결국 같은 일로 귀결될 것인데, 왜냐하면 닉슨이 특정 속성들, 그가 실제로 지니고 있는 것과는 다른 속성들을 지녔을 수 있었는지 여부는 가능세계를 교차하는 정체성 기준이 닉슨은 이러한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포함하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과 등가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같은 일로 귀결되지는 않는데, 통세계 정체성 기준이라는 일상적 관념은 우리가 누군가가 닉슨이라는 것에 대한 순전히 질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닉슨이 특정 속성을 지니지 않는 가능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면, 그 속성은 누군가가 닉슨으로 있음의 필요조건이다. 혹은 그가 그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 닉슨의 필연적 속성이다. 예를 들어, 닉슨이 실제로 인간으로 있다고 상정하면서, 우리는 그가 말하자면 무생물 대상이었을 가능한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니었기란 가능하지조차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튼 닉슨이 존재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가 인간이거나 어쨌든 무생물 대상은 아니라는 것은 그에 관해 필연적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상술할 수 있는 닉슨다움을 위한 순전히 질적인 &lt;i&gt;충분&lt;/i&gt;조건이 있다는 어떤 요구사항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이 있어야 할까? 아마도 있어야 하리란 몇몇 논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amp;nbsp;&lt;i&gt;충분&lt;/i&gt;조건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개입하지 않고&amp;nbsp;&lt;i&gt;필요&lt;/i&gt;조건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을 고려할 수 있다. &lt;b&gt;[47]&lt;/b&gt; 게다가, 설령 닉슨이기 위한 일련의 순전히 질적인 필요충분조건이 있었다 할지라도, 내가 옹호하는 관점은 우리가 이러한 조건들을 닉슨이 선거에 승리하였을지 여부를 물을 수 있기 전에 발견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조건들로 해당 질문을 재진술하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lt;i&gt;닉슨&lt;/i&gt;을 고려할 수 있고&amp;nbsp;&lt;i&gt;그&lt;/i&gt;에게 다양한 제반사항이 달랐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물을 수 있다. 그래서 그 두 관점들, 사물들을 고찰하는 두 가지 방식들은 차이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질문, 닉슨이 인간이지 않을 수 있었을지 여부는 제기된 질문이 인식론적이지 않은 명백한 경우라는 점을 주의하자. 닉슨이 실제로 자동기계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닉슨이 인간인지 자동기계인지 여부에 증거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지식에 관한 질문이다. 닉슨이 인간이지 않았을 것인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가 그 한 사람이라는 점을 전제하면, 후험적으로든 선험적으로든 지식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설령 이러저러한 사물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달리 무엇이 참이었을지에 관한 질문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책상은 분자들로 구성된다.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일까? 확실히 책상이 분자들(또는 원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과학적 발견의 위대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인가가 바로 이 대상이자 분자들로 구성되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확실히 그에 대한 답이 '아니오'여야만 한다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어쨌든, 어떤 환경 하에서 당신이 바로 이 대상을 가지고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낼 것인지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실제 세계에서 실제로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여부와 우리가 이를 어떻게 아는지는 꽤나 상이한 질문이다. (나는 본질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이후에 더 상세하게 고찰할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나는 이 지점에서 내가 논하고 있는 이름들에 대한 이론을 논의하기 위한 방법론에 필요한 어떤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가능세계 교차적 정체성'이라는, 통상적으로 그리고 내 생각에는 어느 정도 오독되어 불리는&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5&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5&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5)&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5)&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amp;nbsp;&lt;b&gt;[48]&lt;/b&gt; 그 개념을, 지금 내가 만들고자 하는 구별을 명확히하기 위해 필요로 한다. 9가 7보다 더 크다는 것이 필연적인지 여부를 묻는 것과 행성의 수가 7보다 더 크다는 것이 필연적인지를 묻는 것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한편의 질문이 다른 질문보다 본질에 관하여 뭐라도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가? 이에 대한 답은 직관적으로 '자, 봐라, 행성의 수는 실제 수와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9는 실제로 그것인 바의 것과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꽤나 전문용어처럼 보이는 것을 사용해 보자. 만일 어떤 것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면 그것을 &lt;i&gt;고정 지시자&lt;/i&gt;라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amp;nbsp;&lt;i&gt;비고정&lt;/i&gt; 혹은&amp;nbsp;&lt;i&gt;우연적 지시자&lt;/i&gt;라고 부르기로 하자. 물론 우리는 대상들이 모든 가능세계들에 존재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확실히 닉슨은 그의 부모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통상의 경우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한 대상에 본질로서 한 속성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통상적으로 그 대상이 존재했을 어떤 경우에서든 그 대상에 대해 그 속성이 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필연적 존재에 대한 고정 지시자는 &lt;i&gt;강력하게 고정&lt;/i&gt;된 것이라 불릴 수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강연에서 내가 주장할 직관적 주장들 중 하나는 &lt;i&gt;이름&lt;/i&gt;이 고정 지시자라는 것이다. 확실히 이름은 앞서 언급된 직관적 시험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1970년 미합중국 대통령과는 다른 누군가가 1970년 미합중국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험프리가 그랬다 하더라도), 닉슨과 다른 그 누구 단 한 사람도 닉슨이었을 리 없다. 같은 방식으로, &lt;b&gt;[49]&lt;/b&gt; 지시자는 고정적으로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데 만일 그 지시자가 그 대상이 존재하는 어디에서든 그 대상을 지시한다면 그러하다. 덧붙여, 만일 그 대상이 필연적 존재자라면, 그 지시자는 &lt;i&gt;강력하게 고정&lt;/i&gt;된 것이라 불릴 수 있다. 예를 들어, '1970년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특정한 사람, 닉슨을 지시한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예를 들어 험프리가) 1970년 그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르고, 닉슨은 대통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지시자는 고정적이지 않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강연에서 나는 직관적으로 고유명사가 고정지시자라고 주장할 것인데, 그 사람(닉슨)이 대통령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가 닉슨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닉슨'이라 &lt;i&gt;불리지는&lt;/i&gt;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고정 지시자 개념을 말이 되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보다 앞서 '통세계 정체성의 기준'을 말이 되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본말을 정확히 전도시켰다. 우리가 (고정적으로) 닉슨을 지칭할 수 있고 (특정 환경 하에서) &lt;i&gt;그&lt;/i&gt;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을 규정할 수 있기 &lt;i&gt;때문에&lt;/i&gt;, '통세계 정체화'가 그런 경우에 문제가 없는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6&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6&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6)&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6)&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6&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반사실적 상황에 대한 순전히 질적인 기술을 요구하는 경향은 다양한 원천을 지닌다. 아마도 그 하나는 인식론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혼동, 선험성과 필연성 사이에서의 그러한 혼동이다. 만일 누군가가 필연성을 선험성과 동일시한다면, 그리고 대상들이 속성들을 고유하게 정체화함으로써 명명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는&amp;nbsp;그 속성들이 &lt;i&gt;선험적으로&lt;/i&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그 대상을 모든 가능세계에서 정체화하는 데에, 어떤 대상이 닉슨인지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에 맞서, 나는 다시 반복한다. (1) 일반적으로, 반사실적 상황에 관한 것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규정된다. (2) 가능세계는 &lt;b&gt;[50]&lt;/b&gt; 마치 우리가 망원경을 통해 관찰하는 것처럼 순전히 질적으로 제시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반사실적 세계에서 한 대상이 지니는 속성들이 실제 세계에서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속성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간략하게 보게 될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7&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7&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7)&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7)&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7&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통세계 정체화'의 '문제'는 말이 되는가? 그것은 &lt;i&gt;단순히&lt;/i&gt; 사이비-문제인가? 그에 대해 이하의 내용은 이야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이 독일과 1943년에 싸웠다는 진술은 아마도 개별자들에 관한 어떤 진술로도 &lt;i&gt;환원&lt;/i&gt;될 수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그 진술은 개인들에 관한, 역사에 걸친 그들의 행동에 관한 모든 사실의 총합을 '넘어서는' 사실은 아니다. 국가에 관한 사실들이개인들에 관한 사실들 '이상의'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는 세계에 대한 기술로서 개인들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거론하지만 국가에 관한 사실들을 생략하는 기술이, 그로부터 국가에 관한 사실들이 도출되는 그러한 세계에 관한 &lt;i&gt;완전한&lt;/i&gt; 기술일 수 있다는 관찰로 표현될 수 있다. 아마도 그와 유사하게 물질적 대상들에 관한 사실들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분자들에 관한 사실들 '이상의' 사실들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실현된 가능한 상황에 대한 기술이 사람들을 가지고 주어진다면, 그 상황에서 영국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여부, 또는 그 상황에 존재할 특정 국가(말하자면 존이 살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는)가 영국인지 여부를 물을 것이다. 비슷하게, 책상 T의 분자들에 대한 역사상의 특정한 반사실적 우여곡절이 주어지면,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T가 존재할지 여부를, 혹은 그 상황에서 책상을 구성할 분자들의 특정 묶음이 바로 그 똑같은 책상 T를 구성하는지 여부를 물을지도 모른다. 각각의 경우, 특정 개별자들에 대한 가능세계를 교차하는 정체성 기준을 다른 더욱 '기초적인' 개별자들에 대한 가능세계교차정체성기준을 통해 추구한다. 만일 국가(혹은 부족)에 관한 진술이 다른 더 '기초적인' 구성요소들에 관한 진술로 &lt;i&gt;환원가능&lt;/i&gt;하지 않다면, 만일 그것들 사이의 관계에 '열린 결말' 같은 것이 있다면, 우리는 확고하고 엄격한 정체성 기준을 제시하길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lt;b&gt;[51]&lt;/b&gt;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사례에서 우리는 분자들의 특정 묶음이 여전히 T를 구성할지 여부를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몇몇 경우 그 대답이 애매할지라도 말이다. 시간에 따른 정체성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언급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통상적으로 '복합적인' 개별자의 확정성, 정체성에 관해 더 '기초적인' 개별자를 통해 관계한다. (예를 들어, 책상의 다양한 부분들이 교체된다면, 그 책상은 똑같은 대상인가?&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8&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8&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8)&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8)&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8&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그렇지만 '통세계 정체화'라는 그런 개념은 일상적 정체화와 주목할 만한 차이를 가진다. 첫째, 우리가 분자들을 통해 세계를 기술하고자 시도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더욱 총체적인 개체들로 기술하는 데에는 아무런 부적절함이 없다.&amp;nbsp;&lt;i&gt;이 책상&lt;/i&gt;이 다른 방에 놓였을지도 모른다는 진술은 그 자체로 완벽히 적절하다. 우리가 그 책상의 분자들을 통한, 혹은 더 총체적인 부분들을 통한 기술을 사용&lt;i&gt;할지 몰라도&lt;/i&gt;, 사용&lt;i&gt;해야&lt;/i&gt; 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개별자들이 '궁극적,' '기초적' 개별자들이라고 가정하지 않는 한, 어떤 유형의 기술도 특권적 지위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amp;nbsp;&lt;i&gt;닉슨&lt;/i&gt;이 선거에 졌을 수도 있는지 여부를 추가적인 세부사항 없이 물을 수 있고, 통상 아무런 추가적인 세부사항도 요구되지 않는다. 둘째, 어떤 종류의 분자 총체가 이 책상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lt;b&gt;[52]&lt;/b&gt; 필요충분조건이 가능하다는 것은 전제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내가 방금 언급한 바 있다. 셋째, 그 시범적인 개념은 개별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기준을 다른&amp;nbsp;&lt;i&gt;개별자들&lt;/i&gt;을 통해서 다루며, 성질들을 통해 취급하지 않는다. 나는 내 앞의 책상을 지칭할 수 있고, 특정 환경 하에서 그 책상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물을 수 있다. 또한 나는 그 분자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 만일 내가 각각의 반사실적 상황을 순전히 질적으로 기술하는 일이 요구된다면, 나는 오직 이러저러한 색상이나 기타 그러한 것들을 가진 &lt;i&gt;책상&lt;/i&gt;(&lt;i&gt;a table&lt;/i&gt;)이 특정 속성들을 지녔을지 여부만을 물을 수 있다. 문제의 그 책상이 &lt;i&gt;이 책상&lt;/i&gt;(&lt;i&gt;this table&lt;/i&gt;), 책상 T였을지 여부는 고려되지 않는데, 성질들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대상들에 대한 모든 지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종종, 만일 반사실적 상황이&amp;nbsp;&lt;i&gt;닉슨&lt;/i&gt;에게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으로서 기술된다면, 그리고 만일 그러한 기술이 순전히 질적인 기술로 환원가능하다는 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신비의 '순전한 개별자,' 성질들의 기저에 놓이는 무속성의 기체가 가정된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사정은 그렇지 않다. 나는 닉슨이 그저 공화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 뒤에 숨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닉슨이 공화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그가 민주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속성들 중 일부가 본질적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제외하고, 닉슨이 지닐지도 모를 다른 어떤 속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부정하는 것은 개별자가 '성질들의 다발'에 다름 아니라는 것, 그것이 무슨 의미가 되었든 그저 그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일 성질이 추상적 대상이라면, 성질의 다발은 더 고차원의 추상 대상이고, 개별자가 아니다. 철학자들은 거짓 역설을 통해 정반대 관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이러한 대상들은 성질의 다발&amp;nbsp;&lt;i&gt;배후&lt;/i&gt;에 있는가, 아니면 그 대상은 그 다발에 &lt;i&gt;다름 아닌가&lt;/i&gt;? 어느 쪽도 아니다. 이 책상은 목재로 된 것이고, 갈색이며, 방 안에 있고, 그 외에 그러저러하다. 그 책상은 이 모든 속성들을 지니고 속성들 없이 그 속성들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하여 그 책상이 그것의 속성들의 집합이나 '다발'과 동일시되어야 할 것도 아니고, 그 책상의 본질적 속성들의 하위집합과 동일시되어야 할 것도 아니다. 어떻게 내가 이 책상을 그 속성들을 통하지 않고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정체화할 수 있는지 묻지 말라. 나는 내 손에 그 책상을 잡고 있고, 그것을 지적할수 있으며,&amp;nbsp;&lt;i&gt;그것&lt;/i&gt;이 다른 방에 있었을지도 모르는지 여부를 물을 때, &lt;b&gt;[53]&lt;/b&gt; 나는 정의상 &lt;i&gt;그것&lt;/i&gt;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나는 망원경을 통해 그것을 본 이후에 그것을 정체화해야 하는 게 아니다. 만일 내가 그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면, 내가 우리 손이 녹색으로 채색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때, 내가 녹색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규정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amp;nbsp;&lt;i&gt;그것&lt;/i&gt;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대상의 일부 속성들이 그 대상에, 그 대상이 그 속성들을 지니지 않았을 수 없으리란 점에서, 본질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속성들은 그 대상을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런 정체화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의 본질적 속성들이 실제세계에서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될 필요도 없는데, 더욱이 그 대상이 속성들을 수단으로 하여 실제세계에서 정체화된다면 그러하다 (지금까지 나는 그 문제를 열어두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그래서, 통세계 정체화에 대한 질문은 &lt;i&gt;어느 정도&lt;/i&gt; 의미가 있는데, 대상의 구성 부분들에 관한 질문들을 &lt;i&gt;통하여&lt;/i&gt; 정체성에 관해 묻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성질들이 아니고, 문제가 되는 것은 주어진 대상과 유사한 대상이 아니다. 이론가들은 종종 우리가 가능세계를 교차하여 대상을 가장 중요한 측면들에서 주어진 대상과 유사한 대상으로 정체화한다고 말해 왔다. 반대로, 닉슨은, 그가 다른 식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었더라면, 설령 사사로이 급진적 의견을 품고 있었더라도, 마치 정치를 역병마냥 피했을지도 모른다. 핵심은, 우리가 대상에 관한 질문을 그 부분들에 관한 질문으로 교체&lt;i&gt;할 수 있을&lt;/i&gt; 경우조차, 우리가 그렇게 &lt;i&gt;해야 하는&lt;/i&gt;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대상을 지칭할 수 있고&amp;nbsp;&lt;i&gt;그것&lt;/i&gt;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지 물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어떤 식으로 현실이라 가정되는, 그 세계의 대상들이 아니라 성질들이 우리에게 인지가능한 것들인 그런)&lt;/span&gt; 세계들로 시작하지 않고, 그리고서 통세계 정체화의 기준에 관하여 묻는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lt;i&gt;가지는&lt;/i&gt;,&amp;nbsp; 그 대상들로 시작하고, 실체 세계에서 정체화할 수 있다. 우리는 그래서 특정한 것들이 그 대상들에 대해 참이었을지 여부를 물을 수 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앞서 나는 기술에 의해 이름이 도입된다는 프레게-러셀 관점이 이름의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서든 (프레게와 러셀은 이런 식으로 그 관점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lt;b&gt;[54]&lt;/b&gt; 단지 그 이름의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서든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통상 '고유명사'라고 불릴 것을 포함하지 않고 이를 묘사할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가 섭씨 100도는 해수면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는 온도라고 규정한다 가정해 보자. 해수면에서 압력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완벽하게 정확하진 않다. 물론, 역사적으로, 더욱 정확한 정의가 이후에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의였다고 가정해 보자. 학술자료 내에서의 또 다른 종류의 사례는 1m란 S가 파리에 있는 특정 막대 혹은 작대기인 경우 S의 길이라는 것이다. (통상 이러한 정의들에 관해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의 길이'를 '조작적' 개념으로 만들고자 시도한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관해 매우 혼란스러운 어떤 점을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에 대해 누군가가 그것이 1m 길이라고도 그것이 1m 길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고, 그것이 파리에 있는 표준 meter이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어떤 비범한 속성을 그것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meter법을 가지고 측정을 하는 언어게임에서 그것의 고유한 역할을 언급하는 것일 뿐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19&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19&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19)&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19)&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실제로 이건 어떤 막대가 가지기엔 무척이나 '비범한 속성'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 막대가 예를 들어 39.37in. 길이 막대라면 (나는 inches에 대해 좀 다른 표준을 가진다고 추정한다), 왜 그것은 1m 길이가 아닌가? 어쨌든, 그가 틀렸다고 그리고 그 막대가 1m 길이라고 가정해 보자. 비트겐슈타인을 괴롭히는 문제의 일부는 물론 이 막대가 길이의 표준 노릇을 하고 그래서 우리가 그 막대에 길이를 귀속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물론, 아닐지도 모르지만), '막대 S는 1m 길이이다'라는 진술은 필연적 참인가? 물론 그 막대의 길이는 시간에 따라 다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정의를 1m가 고정된 시간 t0에서 S의 길이인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더 정확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막대 S가 t0에서 1m 길이라는 것이 필연적 참인가? 누군가가&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아는 모든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meter의&amp;nbsp;&lt;i&gt;정의&lt;/i&gt;이다. &lt;b&gt;[55]&lt;/b&gt; 정의상, 막대 S는 t0에서 1m 길이이다. 이는 곧 필연적으로 참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결론지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1m'의 진술된 정의를 사용하는 자에게조차 말이다. 그는 그가 'meter'라고 부르는 것의 &lt;i&gt;의미를 부여&lt;/i&gt;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lt;i&gt;지칭을 고정&lt;/i&gt;하기 위해서 이 정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의 단위 같은 그런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 지칭이라는 개념은 불분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금의 취지에는 충분히 분명하다고 가정하기로 하자.) 그는 그 정의를 지칭 고정을 위해 사용한다. 그가 언표하고자 하는 특정 길이가 있다. 그는 우연적 속성으로 그것을, 말하자면 그 길이의 막대가 있다는 것을 언표한다. 다른 누군가는 같은 지칭을 또 다른 우연적 속성으로 언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설령 그가 길이에 대한 그의 표준, meter에 대한 지칭을 고정시키기 위해 이것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만일 t0에 이 막대 S에 열이 제공되었더라면, t0에 막대 S는 1m 길이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자, 그는 왜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부분적인 이유는 여기에서 내가 파고들길 바라지는 않는, 과학철학에서 일부 사람들의 정신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이것이다. 설령 이것이 그가 사용하는 &lt;i&gt;유일한&lt;/i&gt; 길이 표준이라 할지라도,&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0&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0&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0)&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0)&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0&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1m'와 't0에서 S의 길이'라는 두 문구 사이에는 직관적 차이가 있다. 첫 번째 문구는 실제 세계에서 마침 t0에 막대 S의 길이인 특정 길이를 모든 가능세계에서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것을 의도한다. 다른 한편으로 't0에서 S의 길이'는 아무것도 고정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일부 반사실적 상황에서 그 막대는 더 길었을지도 모르고 또 일부 경우에는 더 짧았을지도 모른다, 만일 다양한 압박과 압력이 그 막대에 가해졌더라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막대에 대해, 똑같은 물질과 길이로 이루어진 다른 어떤 막대에 대해서도 그러했을 똑같은 방식으로, 만일 일정 양의 열이 그것에 가해졌더라면, 그것이 이러저러한 길이까지 연장되었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 &lt;b&gt;[56]&lt;/b&gt; 그런 반사실적 진술은, 동일한 물리적 속성을 지니는 다른 막대들에 대해서도 참이기에, 이 막대에 대해서도 또한 참일 것이다. 그 반사실적 진술과 't0에 S의 길이'로서 '1m'에 대한 정의 사이에는 아무런 상충도 없는데, 그 '정의'는 적절하게 해석된다면 '1m'라는 표현이 't0에 S의 길이'라는 표현과&amp;nbsp;&lt;i&gt;동의어&lt;/i&gt;인 것이라 말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우리가 '1m'라는 표현에 대해 '1m'는 t0에서 S의 길이가 사실상 그 길이인 그러한 길이에 대한 &lt;i&gt;고정&lt;/i&gt; 지시자인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lt;i&gt;그 지칭을 확정&lt;/i&gt;한 것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S가 t0에서 1m 길이라는 것을 필연적 참으로 만들지 &lt;i&gt;않는다.&lt;/i&gt; 사실, 특정 화환경 하에서, S는 1m 길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한쪽 지시자('1m')는 고정적이고 다른 한쪽 지시자('t0에서 S의 길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럼 막대 S에 대한 지칭으로 미터법을 확정시킨 누군가에게 '막대 S가 t0에 1m 길이이다'라는 진술의 &lt;i&gt;인식론적&lt;/i&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상태는 무엇인가? 그는 그것을&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만일 그가 막대 S를 '1m'라는 용어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했다면, 이런 종류의 '정의' (축약되거나 동의어적인 정의가 아닌)의 결과, 그는 자동적으로, 추가적인 조사 없이, S가 1m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1&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다른 한편, 설령 S가 meter의 표준으로 사용된다 할지라도, 'S는 1m 길이이다'의&amp;nbsp;&lt;i&gt;형이상학적&lt;/i&gt; 상태는 우연적 진술의 상태일 것인데, '1m'가 고정 지시자로 간주된다고 한다면 그러하다. 적절한 압박과 압력, 가열이나 냉각 하에서, S는 t0에서도 1m와는 다른 길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물은 해수면에서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같은 그런 진술들이 유사한 상태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우연적인 &lt;i&gt;선험적&lt;/i&gt; 참이 있다. 그렇더라도 당장의 취지에 우연적인&amp;nbsp;&lt;i&gt;선험적인 것&lt;/i&gt;의 사례로 이 예시를 수용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lt;b&gt;[57]&lt;/b&gt; 지칭을 고정시키는 '정의'과 유의어를 제시하는 정의 사이의 구분에 대한 그 서술이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이름의 경우에서 누군가는 이 구별을 마찬가지로 만들지도 모른다. 이름의 지칭을 기술 혹은 일군의 기술에 의해 제시된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 이름이 기술 혹은 일군의 기술과 &lt;i&gt;같은 뜻&lt;/i&gt;이라면, 이름은 고정 지시자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똑같은 대상을 필연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을 것인데, (물론) 우리가 마침 우리의 기술 안에서 본질적 속성들을 사용하지 않는 한, 다른 대상들이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그 제시된 속성들을 가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서 수학한 가장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우리가 그것을&amp;nbsp;&lt;i&gt;정의&lt;/i&gt;로 사용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은 '플라톤에게서 수학한 가장 대단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 물론 일부 다른 가능세계에서 그 사람은 플라톤에게서 수학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어떤 다른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우리가 단지&amp;nbsp;&lt;i&gt;지칭물을 고정&lt;/i&gt;하기 위해 그 기술을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칭체일 것이다. 그 기술의 유일한 용도는 우리가 지칭하고자 의도하는 사람을 식별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럼, 우리가 반사실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에 결코 들어선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자'라고 말할 때, 우리가 '플라톤에게서 수학한,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친, 이러저러한 글들을 쓴, 이러저러한 사람이 철학에 결코 들어선 적조차 없다'라는, 모순처럼 보일지도 모를 그런 것을 뜻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지 '&lt;i&gt;그 사람&lt;/i&gt;이 결코 철학에 들어선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자'라는 것만 뜻하면 된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일부 경우, 키터법이 고정되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술을&amp;nbsp;&lt;i&gt;통해&lt;/i&gt; 추가로 고정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신화적 인물이 개밥바라기별을 처음 봤을 때, 그는 '나는 하늘의 저 위치에 출현하는 천체의 이름으로 &quot;개밥바라기별&quot;을 사용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지칭을 잘 고정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개밥바라기별'의 지칭을 그 외견상의 천체 위치로 고정시켰다. &lt;b&gt;[58]&lt;/b&gt; 개밥바라기별이 문제의 그 당시에 그러한 위치를 지닌다는 것이 그 이름의&amp;nbsp;&lt;i&gt;의미&lt;/i&gt;의 일부라는 점이 귀결되는가? 물론 아니다. 개밥바라기별이 일찌기 혜성에 가격당했더라면, 그 당시 다른 위치에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반사실적 상황에서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 그 위치를 점유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지, 개밥바라기별이 개밥바라기별이 아니었을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개밥바라기별'이 고정적으로 특정 천체를 지시하고 '저 위치의 물체'는 그 천체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다른 물체가 그 위치에 있었을지 모르거나 혹은 아무런 물체도 그 위치에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아무런 물체도 개밥바라기별이었을 것이지는 않다 (또 다른 물체, 개밥바라기 별이 아닌 다른 물체가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더욱이, 내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름이 항상 고정 지시자라고 주장할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프레게와 러셀은 확실히 그에 따라 고유명사가 고정 지시자가 아니고 그 이름을 대체하는 기술과 동의어인 완전히 전개된 이론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기술이 고정 지칭을 결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또 다른 이론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두 대안들은 내가 앞서 묻고 있던 그 질문들에 대해 상이한 귀결을 가질 것이다. 만일 '모세'가 '이러저러한 일을 했던 그 사람'을&amp;nbsp;&lt;i&gt;의미&lt;/i&gt;&lt;i&gt;한다면&lt;/i&gt;, 만일 아무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러저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의 분석이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그 기술이 지칭을 고정적으로 확정하는데에 사용된다면, 그 기술은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를 통해 의미되는 바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나는 우리가 아무도 그러저러한 일을, 말하자면,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벗어나도록 인도한 일을 하지 않은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으리란 점이 도출되는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출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모세는 이집트 궁정에서 더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정치에도 종교에도 결코 개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아무도 성경이 모세에게 결부시키는 것들 중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자체로 그러한 가능세계에서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lt;b&gt;[59]&lt;/b&gt; '모세가 존재한다'라는 것은 '특정 기술에 대한 존재와 고유성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과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 단칭 존재 진술에 대한 분석은 제공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이것은 의미에 대한 이론이라는 발상을 포기하고 그 생각을 내가 기술하였던 그 방식으로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 만든다면, 당신은 그 이론의 장점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단칭 존재 진술과 이름들 간의 동일성 진술은 어떤 다른 분석을 필요로 한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프레게는 '의미'라는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시자의 의미를 그 지시자의 뜻인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그는 그 지시자의 의미를 그 지시자의 지칭이 결정되는 방식인 것으로 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둘을 동일시하면서, 그는 그 둘 모두가 한정 기술구에 의해 제시된다고 가정한다. 궁극적으로, 나는 이 두 번째 가정도 마찬가지로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았다 하더라도, 나는 첫 번째 가정을 거절한다. 기술은 지시자와 유의어로 사용될지도 모르고, 혹은 지시자의 지칭을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될지도 모른다. '의미'의 프레게식 두 가지 뜻은 일상어법에서 '정의'의 두 가지 의미에 상응한다. 그 의미들은 주의깊게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2&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2&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2)&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2)&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2&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60]&lt;/span&gt;&lt;/b&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 나는 지칭을 고정시킨다는 발상이 한 용어를 다른 용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실제로 정의하는 것에 대조적으로 어느 정도 명확한 것이기를 희망한다. 대단히 구체적인 수준으로 모든 것을 따져 들어가기에는 사실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내 생각에, 지칭의 우연성에 맞선 고정성 개념이 문제가 되는 그 차이를 구분해내는 데에 사용되지 못하는 경우들에서조차, 소위 정의로 불리는 어떤 것들은 자구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 즉 유의어를 제공하는 것보다 오히려 실제로 지칭을 고정시키기를 의도한다. 예를 들어 보자. &amp;pi;는 원의 지름에 대한 그 원의 원주의 비율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제, 그것은 내가 주장할 것은 그저 공허한 직관적 느낌에 다름 아니다. 내겐 여기 이 그리스어 철자가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이란 구의&amp;nbsp;&lt;i&gt;축약&lt;/i&gt;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도 보이지 않고 &amp;pi;의 대안적 정의군, 그게 무슨 의미든지 간에, 그것의 축약으로 사용되는 것으로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실수, 이 경우 필연적으로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인 바로 그 실수에 대한&amp;nbsp;&lt;i&gt;이름&lt;/i&gt;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amp;pi;'와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 모두 고정지시자이고, 그래서 미터법 사례에서 제시된 논증들은 적용불가하다는 점을 주의하자. (뭐 누군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내가 제기했던 이름에 관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내가 말했듯, 프레게와 러셀의 이론을 대체하는 유명한 근대적 이론이 있다. 그 이론은 스트로슨 같은 프레게와 러셀, 특히 러셀의 여러 관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들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3&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3&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3)&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3)&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3&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lt;b&gt;[61]&lt;/b&gt; 그 대안은, 이름이 위장된 기술은 아니더라도 그것이 일군의 기술을 축약시킨 것이거나 어쨌든 그 지칭이 일군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질문은 이것이 참인지 여부이다. 내가 또한 말했듯, 이 대안의 더 강한 형태와 더 약한 형태가 있다. 더 강한 형태는 이름이 단순히&amp;nbsp;&lt;i&gt;정의된다&lt;/i&gt;고, 동의어적으로, 일군의 기술로서 그리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이 일군 내에서 임의의 특정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속성들의 선언지를 지녔다는 것이 필연적일 것이다. 그가 그런 일들 중 어떤 것도 행하지 않았던 어떤 반사실적 상황도 있을 수 없다. 나는 이 형태가 매우 설득력이 없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lt;i&gt;했다&lt;/i&gt;. 혹은 그렇게 말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필연'을 어떤 다른 의미에서 사용하면서 말했다. 어쨌든, 예를 들어, 고유명사에 관한 Searle의 논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2&quot;&gt;같은 지점을 다른 식으로 살펴보기 위해, 우리가 이렇게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도대체 왜 우리는 고유명사라는 것을 가지는가?' 개별자들을 지칭하기 위해서임은 명백하다. '그렇긴 하지만 기술이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지칭이 형성되는 모든 경우마다 동일성 조건을 특정해주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버리고 이를 테면 '알렉산더의 스승'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동의했다고 가정하자. 그럼 지칭된 그 사람이 알렉산더의 스승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개입했던 것은 우연적 사실이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속성들의 논리적 총합, 포괄적 선언지를 지닌다는 사실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더라도).&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4&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4&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4)&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4)&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한 제안은, 만일 '필연'이 내가 이 강연에서 사용해 온 그런 식으로 사용된다면, 명백히 거짓이어야만 한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흔히 귀속되는 일부 매우 흥미로운 본질적 속성을 찾아냈던 게 아니라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흔히 귀속되는 것들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혀 행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지 모르는 것들이다. 그가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우리는 그 상황을 &lt;i&gt;아리스토텔레스&lt;/i&gt;가 그것들을 행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기술할 것이다. 이것은 기술의 경우 때때로, 누군가가, 알렉산더를 가르쳤던 사람이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 참이었을 수는 없을지라도, &lt;b&gt;[62]&lt;/b&gt; 알렉산더를 가르쳤던 사람이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는 경우 발생하는 그런 범위 구분이 아니다. 이것이 러셀의 범위 구분이다. (나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 구분이 여기에서 참이 아니라는 점은 내게 분명해 보인다. 그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그가 교육에 개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참은 아니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용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영역에 들어서지도 않았고 우리가 그에게 흔히 귀속시키는 그 어떤 성취도 이루지 않았던 반사실적 상황을 생각하면서, 여전히 우리가 그 상황을 &lt;i&gt;아리스토텔레스&lt;/i&gt;가 그런 것들을 행하지 않았던 그런 상황이라고 말했을, 그런 식으로 사용한다는 것 역시 참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5&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5&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5)&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5)&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뭐 그가 살았던 날들 같은 어떤 것들, 필연적인 것이라 더 상상되었을지도 몰랐던 것들이 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우리가 흔히 그에게 귀속시키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예외들이 있다. 어쩌면 그가 어떻게 실제로 죽었던 것보다 500년 더 그 이후까지 살았었을 수도 있었을지 상상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건 확실히 최소한 문제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 일자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는 사람을 상정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들에 대한 공허한 집합체 일부를 가질 뿐이다. 그 업적들 각각을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이러한 속성들의 전체 선언지의 소유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단지 우연적 사실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속성들의 선언지를 가졌다는 진술은 우연적 참이다. &lt;b&gt;[63]&lt;/b&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누군가는, 만일 그가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칭을 이런 것들 중 하나를 행했던 사람으로 고정시킨다면, 어떤 의미에서&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그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것은 그에 대한 필연적 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예시는 선험성이 필연성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 않는 경우의 사례일 것이다, 만일 이름의 집합체 이론이 옳다면 말이다. '1m'의 지칭을 고정하는 경우는 누군가가 그저 그가 이런 식으로 지칭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이 막대의 길이가 1m라는 것을 필연적 참으로 간주하지 않은 채로&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알 수 있는 매우 분명한 사례이다. 어쩌면 필연성을 함의하는 선험성에 관한 그 주장은 개정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주장은 인식론에 관해 중요할지도 모르는 참인 어떤 통찰을 진술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어떤 식으로는 이와 같은 사례가 일부 사람들이 오직 필연적 참만이 &lt;i&gt;선험적으로&lt;/i&gt; 알려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생각하는 바의 핵심이 실제로는 아닌 사소한 반례 같은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자, 만일 모든&amp;nbsp;&lt;i&gt;선험적&lt;/i&gt; 참이 필연적이라는 명제가 이런 종류의 반례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론가 개정될 필요가 있다. 개정되지 않은 경우 그것은 지칭의 본성에 관한 혼동으로 이끈다. 그리고 나 자신은 그것이 어떻게 개정되거나 재진술되어야 할지, 혹은 그런 개정 혹은 재진술이 가능할지 아무런 생각이 없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6&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6&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6)&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6)&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6&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lt;b&gt;[64]&lt;/b&gt; 그럼 이름에 대한 집합체 개념 이론이 무엇인지 진술해 보자. (실제로 그것은 훌륭한 이론이다.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결점은 아마도 모든 철학적 이론들이 모두 공통으로 가지는 것, 즉,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그 대신에 또 다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라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기를 희망하는데, 그것이 이론이라면 그 또한 마찬가지로 틀렸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이론은 얼마간의 명제들, 만일 당신이 그 이론이 존재진술, 동일성진술, 기타 등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자 한다면 일부 부수적인 명제들을 가진 그런 명제들로 분해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그 이론을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서 더 강력한 형태로 취한다면 더 많은 명제들이 있다. 발화자는 A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1) 모든 이름 또는 지칭 표현 'X'에 대해, 상응하는 속성 다발, 즉 A가 '&amp;phi;X'라고 믿는 그런 속성군 &amp;phi;가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명제는 참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정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물론, 일부 사람들은 화자가 X에 관해 믿는 모든 것이 'X'의 지칭을 결정하는 일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직 부분집합에만 관심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후에 이를 다른 명제들의 일부를 개정함으로써 다룰 수 있다. 그래서 이 명제는 정의에 따라 맞다. 그렇지만 뒤따르는 명제들은 모두 내 생각에는 거짓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2) 그 속성들 중 하나 혹은 결합하여 그 일부는 A에 의해 어떤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내는 것으로 믿어진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것은 그 속성들이 어떤 것을 고유하게 지적해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들이 그렇다고 A가 믿는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또 다른 명제는 그가 맞다는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3) 하나의 고유 대상 y에 의해 &amp;phi;의 대부분 혹은 편중된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는 'X'의 지칭물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자, 그 이론은 'X'의 지칭물이 그 속성들 모두가 아니라면 '충분한' 만큼을 만족시키는 것이라 간주한다. &lt;b&gt;[65]&lt;/b&gt; 명백히 A는 X에 관한 어떤 것들에 관해 틀릴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투표를 생각해 보라. 이제 문제는 이 투표가 민주적인지 아니면 속성들 사이에 모종의 불평등을 지니는지 여부이다. 모종의 경중을 따지는 일이 있으리란 것, 일부 속성들이 다른 속성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더욱 그럴 듯해 보인다. 이론은 실제로 이러한 경중 판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특정해야 한다. 나는 스트로슨이, 내게는 놀랍게도, 명시적으로 여기에서 민주주의가 지배해야 할 것이라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소한 속성들이 가장 결정적인 속성들과 같은 무게를 가진다고 진술한다고 믿는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7&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7&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7)&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7)&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7&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물론 모종의 가중치가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더욱 그럴 듯하다.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고 말해 보자. 만일 지칭에 완전히 부적절한 어떤 속성이 있다면 우리는 가중치를 0으로 줌으로써 그 모든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 그 속성들은 집단의 구성원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일부 집단은 다른 집단보다 더 많은 구성원들을 지닌다. 일부 집단은 투표권이 없는 구성원들만 지닐지도 모른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4) 만일 그 투표가 아무런 고유한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X'는 지칭하지 않는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5)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amp;phi;의 대다수를 가진다'라는 진술은 화자에게&amp;nbsp;&lt;i&gt;선험적으로&amp;nbsp;&lt;/i&gt;알려진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6)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amp;phi;의 대다수를 가진다'라는 진술은 필연적 참을 표현한다 (해당 화자의 개인적 발화에서).&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은 만일 누군가가 해당 다발이 해당 이름의 의미의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의 명제일 필요는 없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칭을 &amp;phi;의 대다수를 가진 사람으로 결정하더라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amp;phi;의 대다수를 가지지 않았을 특정하게 가능한 상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내가 보였던 대로, 자세하게 다루진 않을 테지만, 일부 부수적인 명제들이 있다. 이것들은 '&quot;모세가 존재한다&quot;는 &quot;충분한 속성들 &amp;phi;가 충족된다&quot;를 의미한다' 같은 단칭 존재 진술에 대한 분석을 제공할 것이다. &lt;b&gt;[66]&lt;/b&gt;&amp;nbsp;해당 이론을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조차 이러한 명제들 중 일부를 가진다. 예를 들어, 명제 4에 부수명제로, 우리는 해당 화자에게 만일 충분한 &amp;phi;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X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오직 그가 지칭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서 그 관점을 견지하는 경우에만, 만일 충분한 &amp;phi;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X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amp;nbsp;&lt;i&gt;필연적으로&lt;/i&gt; 참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것은 그가&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아는 어떤 것일 것이다. (최소한 그는 이름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안다는 가정 하에&amp;nbsp;&lt;i&gt;선험적으로&amp;nbsp;&lt;/i&gt;그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같은 노선에 따라 동일성 진술에 대한 분석 또한 있다. 질문은, 이것들 중 어떤 것은 참인가? 만일 참이라면, 그것들은 일의 진행에 대한 멋진 그림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명제들을 논의하기에 앞서, 종종 사람들이 어떤 속성들 &amp;phi;가 상관있는 것인지 특정할 때, 그들이 그것들을 잘못 특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언급하도록 하자. 이는 내가 그 이론에 반대하여 곧 제시할 논증들에 밀접하게 관련되었긴 하지만, 그냥 부수적인 결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예시를 고려해 보자. 그는 무엇이 상관된 속성들이라 말하는가? '누군가가 &quot;모세는 존재하지 않는다&quot;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이스라엘민족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할 때&amp;nbsp;&lt;i&gt;단일한&lt;/i&gt; 지도자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의 지도자가 모세라고 불렸지 않았다거나, 성경이 모세에게 결부시키는 그 모든 일을 완수했던 사람이 그 누구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의 요지는, 만일 성경 속 이야기가 대체적으로 거짓이라면,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안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성경의 이야기가 모세의&amp;nbsp;&lt;i&gt;필연적&lt;/i&gt; 속성들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이런 일들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살았었을지도 몰랐다는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 나는 만일 모세가 존재했다면, 그가 실제로 그 일들 중 일부 혹은 그 대다수를 했다는 것을 우리가&amp;nbsp;&lt;i&gt;선험적으로&lt;/i&gt; 아는지 여부를 묻는다. 우리가 여기에서 사용할 것이 정말로 이 속성 다발인가? 물론 이런 종류의 언급에서 간과되는 구분이 있다. 성경의 이야기는 완전히 전설이었을지 몰랐거나, 현실의 개인에 대한 대체적으로 거짓인 설명이었을지도 몰랐다. 후자의 경우, 학자는 모세가 존재했을지라도 그에 대해 성경에서 말해진 것들은 대체적으로 거짓이라고 추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lt;b&gt;[67]&lt;/b&gt; 그런 것들은 바로 이러한 학술적 영역에서 발생한다. 누군가가 예언가 그 누구도 고래나 큰 물고기에게 집어삼켜진 적 없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에 근거하여 요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따라나오는가? 성경의 설명이 그 어떤 개인에 대한 것도 아닌 전설로서의 설명인지 아니면 현실의 개인에게 장착된 전설로서의 설명인지 여부는 여전히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후자의 경우, 요나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아무도 흔히 그에게 결부되는 일들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따름이다. 내가 이 사례를 선택한 이유는 성경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요나가 존재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큰 물고기에 의해 삼켜졌다는 설명만이 아니라 니네베에 설교를 하러 간 일이나 다른 무엇이든 성경 이야기에서 말해진 것까지 대체적으로 거짓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현실의 예언가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이유들이 있다. 만일 내가 적당한 책을 갖고 있었다면 인용으로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는 현실의 예언가였지만, 그러저러하고 그러저러했다'. 이것이 상상의 인물에 대한 순전한 전설이 아니라 현실의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독립적인 이유들이 있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8&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8&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8)&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8)&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8&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lt;b&gt;[68]&lt;/b&gt; 이러한 예시들은 개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믿는 것은 모두 &lt;i&gt;성경이 그에게 결부시킨&lt;/i&gt; 그러저러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데, 우리는 성경이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의 지칭 문제는 성경에서의 지칭 문제로 되돌려진다. 이는 우리가 명시적으로 포함시켜야 할 조건으로 이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C) 어떤 성공적인 이론에 대해서든, 설명은 순환적이지 않아야만 한다. 투표에 사용되는 속성들은 그들 스스로 궁극적으로 제거 불가능한 방식으로 지칭 개념을 포함하지 않아야만 한다. 비순환 조건이 명백하게 위반되는 사례를 들어 보자. 이어질 고유명사 이론은 William Kneale의 'Modality, De Dicto and De Re'에서 온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29&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29&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29)&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29)&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이 논문은 내 생각에 명백한 비순환 조건 위반을 포함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2&quot;&gt;사람들의 일상적 고유 명사들은 존 스튜어트 밀이 추정했던 것처럼 의미 없는 기호는 아니다. 누군가에게 가장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정보값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에게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명백하게 하찮은 짓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히 그가 이미 '소크라테스'는 '&quot;소크라테스&quot;라고 불리는 개별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 한 당신의 진술의 시작에서 당신의 '소크라테스'라는 단어 사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7_30&quot; id=&quot;footnote_link_1387_30&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7, 30)&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7, 30)&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30&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기에서 우리는 고유명사의 지칭 이론을 가진다. '소크라테스'는 그저 '&quot;소크라테스&quot;라고 불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실제로, 물론, 어쩌면 한 사람만 '소크라테스'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고, &lt;b&gt;[69]&lt;/b&gt; 몇몇은 그를 '소크라테스'로 부르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리 부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것은 특정 조건 하에서 고유하게 충족되는 조건이다. 어쩌면 오직 단 한 사람만이 특정한 경우에 나에 의해 '소크라테스'라고 불렸었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닐은 누군가에게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lt;i&gt;렸다&lt;/i&gt;고 말해주는 것은 사소하다고 말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그것이 하찮지 않다. 어쩌면 그리스인들은 그를 '소크라테스'라고 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우리에 의해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고 말해 보자. 어쨌든 나에 의해서는 그렇다.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가정해 보자. (나는 닐이 여기에서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것이 놀랍다고 생각한다. 그리스인들이 그를 '소크라테스'라고 불&lt;i&gt;렀었다&lt;/i&gt;는 것은 의심스럽다. 최소한, 그리스어 이름은 그와 달리 발음된다. 다음 강연까지 인용의 정확성을 확인해 볼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닐은 이 이론을 위한 논증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는 '&quot;소크라테스&quot;라고 불리는 개별자'로 분석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달리 어떻게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고 말해지는 것이 사소한 일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겠나? 몇몇 경우 그것은 사소하다. 내가 추정하기로 같은 의미에서 당신은 영어의 어떤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든 멋진 이론을 확보하고 사전을 편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말들이 경주에 사용된다고 누군가에게 말해주는 것은 정보값이 있을지 모르더라도, 그에게 말들이 '말들'이라 불린다고 말해주는 것은 사소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horse'라는 용어가 영어에서 '&quot;horses&quot;라고 불리는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일 수 있을 것이다. 영어에서 사용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어떤 표현의 경우든 마찬가지이다. 현자들이 '현자들'로 불린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 사소하기에, '현자들'은 '&quot;현자들&quot;이라 불리는 사람들&quot;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제 단적으로 이것은 실제로 아주 좋은 논증은 아니고,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고 말해주는 것이 왜 사소한 일인지에 대한 유일한 설명일 수도 없다. 물론, 영어에서 'is called'의 용법을 아는 누구든 해당 진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만일 'quarks'가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quarks는 &quot;quarks&quot;라고 불린다'는 참을 표현할 것이라는 점을 안다. 그는 그것이 표현하는 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는 quark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참을 표현한다는 그의 지식은 &lt;b&gt;[70]&lt;/b&gt; 'quarks'라는 용어의 의미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우리는 이 문제에 대단한 분량을 할애하여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구절로부터 생기는 흥미로운 문제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여기에서 소개한 주된 이유는 지칭이론으로서 그것이 비순환 조건의 명백한 위반을 제시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어떻게 우리는 그가 지칭하는 자가 누구인지 안다고 가정되는가? 그 이름의 의미를 제시하는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그러하다. 닐에 따르면, 그 기술은 '&quot;소크라테스&quot;라고 불리는 사람&quot;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추정컨데, 이것이 그렇게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기에!)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취할 때 그것은 전혀 아무런 지칭 이론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묻는다. '그는 &quot;소크라테스&quot;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그리고 그 대답이 제시된다. '자, 그는 그가 지칭하는 그 사람을 지칭한다.' 만일 이것이 고유명사의 의미에 대한 전부라면, 아무런 지칭도 시작할 수조차 없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래서 만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이 특정 이론의 경우에 그 조건은 명백히 충족되지 않았다. 충분히 놀랍게도, 그 전형은 때때로 러셀에 의해 기술적 의미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quot;월터 스콧&quot;이라 불리는 사람'. 명백하게 만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름의 유일한 기술적 의미가 '그러저러하게 불리는 사람', '&quot;월터 스콧&quot;이라 불리는 사람', '&quot;소크라테스&quot;라고 불리는 사람' 형식의 것이라면, 이 &lt;i&gt;호명&lt;/i&gt; 관계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이 실제로 지칭을 결정하는 것이고 '&quot;소크라테스&quot;라고 불리는 사람&quot; 같은 어떤 기술도 아닐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작성중-&lt;/p&gt;
&lt;div class=&quot;footnotes&quot;&gt;
  &lt;ol class=&quot;footnotes&quot;&gt;
    &lt;li id=&quot;footnote_1387_1&quot;&gt; 이 책은 1970년 1월 프린스턴 대학에서의 세 차례 강연을 옮긴 것이다. 강연은 원고 없이 진행되었고, 지금 판본은 일부 편집이 있지만 비격식 문체는 건드리지 않았다. 각주는 대부분 추가된 것이나, 강연 때 말로 부연했던 것들도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런 점들을 독자들이 감안해 주길 바란다. 강연에 허락된 시간이나 비격식적 문체 때문에 피치 못하게 논증을 축약해야 했고 특정 반론들을 다루지 못하기도 했다. 특히 과학적 동일성과 심신문제를 포함한 부분에서 철저함을 희생해야 했다. 이 책에서 주장되는 관점을 완전히 표현하는 데에 본질적인 일부 주제들, 특히 존재진술과 빈-이름 논의도 생략돼야 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quot;&gt;주석에 추가할 기회가 있다면, Rogers Albritton, Charles Chastain, Keith Donnellan, Michael Slote (특히 Hilary Putnam을 위시하여 본문에 언급되는 철학자들에 더하여), 이 사람들이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바의 여러 측면에 접점을 가지는 저마다 독립적으로 표명된 관점들을 가진다는 점을 언급해야 하겠다. 올브리튼은 소위 자연종들에서 필연성과 선험성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레몬들이 과일이 아니었더라면 그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인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여, 나의 주의를 환기시켜주었다. (그가 내 모든 결론을 받아들여줄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나는 또한 올브리튼과 Peter Geach가 기원의 본질성에 관하여 일찌기 나눈 대화의 영향력을 떠올린다. 본문의 사과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주석의 목록이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활발한 대화로 나를 도와준 친구들과 학생들을 열거하려 시도하진 않는다. Thomas Nagel과 Gilbert Harman은 강연록의 편집에 준 도움에 대해 특히 감사 받을 만하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3&quot;&gt;Keith Donnellan, 'Reference and Definite Descriptions', &lt;i&gt;Philosophical Review&lt;/i&gt; 75 (1966), pp. 281-304. 또한 Leonard Linsky, 'Reference and Referents', in &lt;i&gt;Philosophy and Ordinary Language&lt;/i&gt; (ed. Cato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Urbana, 1963. 도넬런의 구분은 기술 만큼이나 이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누군가를 멀리서 일별하고 그를 존스라고 재인한다고 생각한다. '존스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낙엽들을 갈퀴로 모으기'. 만일 그 먼 거리에 있는 낙엽 치우는 사람이 실제로는 스미스라면, 그들은 어떤 의미로는 스미스를 &lt;i&gt;지칭하고&lt;/i&gt;&amp;nbsp;있는데, 설령 그 둘 모두 '존스'를 존스의 &lt;i&gt;이름으로&lt;/i&gt; 사용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본문에서, 나는 이름의 '지칭대상(referent)'을 그 이름에 의해 명명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아마도 '지칭'보다 '지시(denote)' 같은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편이 덜 호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지칭'이란 단어 사용은, 'X'가 어느 이름나 기술로도 대체될 수 있는 경우의 '&quot;X&quot;의 지칭대상은 X이다'라는 도식을 만족시키는 그런 것이다. 나는 도넬런에 반대하여, 도넬런의 지칭에 관한 언급이, 비록 언어행위이론에 적합할 것들이리라 하더라도, 의미론이나 진리조건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다고 믿는 쪽으로 잠정적으로 기울어 있다. 지면의 한계로 내 관점을 옹호하기는커녕 내 말뜻을 설명할 수조차 없지만, 간략히 언급은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의미에서 이름이나 기술의 지칭체를 '의미론적 지칭체'로 부르자. 이 의미론적 지칭체가 이름의 경우에는 이름지어진 그것이고, 기술의 경우에는 해당 기술을 고유하게 충족시키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리하여 화자는 그가 적절한 거짓 믿음을 지니는 경우라면 해당 의미론적 지칭체와는 다른 어떤 것을 &lt;i&gt;지칭하는&lt;/i&gt; 것일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스미스-존스) 이름짓기의 경우에 벌어진 일이고 또한 도넬런의 '샴페인' 경우에서도 벌어진 일이다. 한편은 이름이 애매한 것이라는 어떤 이론도 요청하지 않고, 다른 한편은 러셀 기술구이론의 어떤 수정도 요청하지 않는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3&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4&quot;&gt;엄밀히 말하자면, 물론 러셀은 이름이 기술을 축약시키지 않고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이름'이라 부르는 것들이 기술을 축약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것들이 실제로는 이름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러셀에 따르면, 'Walter Scott'은 기술을 축약시키기에, 'Walter Scott'은 이름이 아니다. 그리고 오직 일상 언어 내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름들만이 아마도 특수한 경우에 러셀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화자가 '직접 접한(acquainted)' 대상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는 'this'나 'that' 같은 지시사들일 것이다. 우리가 러셀이 하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상정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러셀이 일상적으로 그리 불리는 이름들이 의미를 가지고 &lt;i&gt;있다&lt;/i&gt;고 말한다고 묘사할 수 있을 이다. 그 이름들은 강한 방식으로 의미를 지니는데, 말하자면, 정의상 이름의 지칭체가 해당 기술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인 그런 한정기술구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러셀 자신은 그의 초기 표기법으로부터 기술구를 제거하기에, 「지시에 관하여」에서 '의미'라는 관념이 허황되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셀의 관점을 보고하면서, 그리하여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에게서 이탈한다. 첫째, 우리는 '이름'이 러셀의 '논리적으로 적절한(고유한, proper) 이름'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이해된 대로의 이름일 것이라 규정한다. 둘째, 우리는 기술과 그 축약을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4&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5&quot;&gt;내가 프레게-러셀 관점과 그 변주들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오직 이름의 지칭에 대한 실질적인 이론을 제공하는 그런 변용들만을 포함시킨다. 특히, '표준 표기법'에서 '소크라테스' 같은 이름은 '소크라테스함(the Socratizer)' ('소크라테스함'이 고안된 술어인 경우) 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그리고 해당 기술은 러셀의 방법론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제안은 이름에 대한 지칭이론을 의도하였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점들을 가진 언어 개선 제안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은, 필요한 수정을 거쳐, 개선된 언어에 모두 적용될 것이다. 특히, '어떻게 &quot;소크라테스&quot;의 지칭이 결정되는가?'라는 물음은 '어떻게 &quot;소크라테스하다&quot;의 외연이 결정되는가?'로 이어진다. 물론 내가 콰인이 그 반대 경우를 주장한 적이 있다고 시사하는 건 아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5&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6&quot;&gt;Gottlob Frege, 'On Sense and Nominatum', translated by Herbert Feigl in &lt;i&gt;Readings in Philosophical Analysis&lt;/i&gt; (ed. by Herbert Feigl and Wilfrid Sellars), Appleton Century Crofts, 1949, p. 86.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6&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7&quot;&gt;Ludwig Wittgenstein, &lt;i&gt;Philosophical Investigations&lt;/i&gt;, translated by G. E. M. Anscombe, MacMillan, 1953, &amp;sect; 79.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7&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8&quot;&gt;John&amp;nbsp;R.&amp;nbsp;Searle,&amp;nbsp;'Proper&amp;nbsp;Names',&amp;nbsp;&lt;i&gt;Mind&lt;/i&gt; 67 (1958), 166-73.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8&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9&quot;&gt;지프 식으로 이해된 이름의 지칭에 대한 기술다발 이론에 대한 그의 가장 상세한 진술은 'About God', reprinted in &lt;i&gt;Philosopllical Turnings&lt;/i&gt;,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 and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1966, pp. 94--96에 담겨 있다. 더 간략한 진술은 &lt;i&gt;Semantic Analysis&lt;/i&gt;,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 1960, pp. 102--05 (esp. pp. 103--04)에 있다. 후자의 구절은 우리가 직접 접하는 사물의 (전시와 세례를 사용하는) 이름이 역사적 인물의 이름과 달리 취급되어야 할 것이라는, 그 지칭이 결부된 기술들(혹은 그 다발)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에 그렇다는 점을 시사한다. &lt;i&gt;Semantic Analysis&lt;/i&gt;&amp;nbsp; 93쪽에서 지프는 '고유 명사에 관한 단순하고 강한 일반화(들)'은 불가능하다고, '무언가가 대체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진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프는 명백히 기술다발 이론이 그런 거친 진술로서는 합리적이라고, 적어도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진술하고 있다. 고유명사가 일상적으로 해당 언어의 단어가 아니고 일상적으로 뜻을 지니지 않는다는 지프의 관점에 대해서는 &lt;i&gt;Semantic Analysis&lt;/i&gt; pp.85-89와 93-94 참조.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9&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10&quot;&gt;역사 속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결정론자들은 모세가 결코 존재했던 적이 없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가 했던 모든 일을 성취하는 결과를 야기했을 것이라고 잘도 주장할지 모른다. 그들의 주장은 '모세가 존재한다'라는 것의 뜻에 대한 제대로 된 철학적 이론에 호소함으로써는 반박될 수 없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0&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11&quot;&gt;그런데, 엄격하게 정의되기 전에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철학에서 공통된 태도이다 (어느 정도 대중적인 엄격하다는 개념에 따라). 여기에서 나는 직관점 개념을 취급하고 있고 직관적 개념 차원에 머물 것이다. 즉, 우리는 어떤 것들이 실제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강연을 오늘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일 그게 맞다면, 오늘 내가 이 강연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lt;i&gt;가능(possible)&lt;/i&gt;하다. 이와 상당히 다른 질문은 인식론적 질문, 어떻게 누구든 특정 개인이 내가 오늘 이 강연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지의 질문이다. 나는 그 경우 그가 이것을 후험적으로 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내가 이 강연을 오늘 하게 될 것이었다는 선천적 믿음을 가지고 태어났었더라면, 그건 또 모를 일이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사람들이 이를 후험적으로 안다고 상정하자. 어쨌든, 제기된 두 질문은 상이한 것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12&quot;&gt;내가 제시한 사례는 특정 속성-선거 승리-가 닉슨에게 우연적이라는 것을, 그가 어떻게 기술되는지와 독립적으로 단언한다. 물론, 만일 우연적 속성 개념이 유의미하다면, 본질적 속성 개념 또한 유의미해야만 한다. 이는 어떤 본질적 속성이든 &lt;i&gt;있다&lt;/i&gt;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사실 내가 그게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통상적인 논증은 본질주의의 &lt;i&gt;유의미성&lt;/i&gt;을 문제삼고, 한 대상에게 한 속성이 우연적인지 혹은 본질적인지 여부가 그 대상이 어떻게 기술되는지에 의거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관점은 모든 속성이 우연적이라는 관점이 &lt;i&gt;아니다&lt;/i&gt;. 물론 그것은 일부 관념론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바, 모든 속성이 본질적이고 모든 관계가 내재적이라는 관점 또한 아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2&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13&quot;&gt;David K. Lewis, 'Counterpart Theory and Quantified Modal Logic', &lt;i&gt;Journal of Philosophy&lt;/i&gt; 65 (1968), 113-126. 루이스의 멋진 논문조차 순전히 형식적인 난점에 시달린다. 양화 양상에 대한 그의 해석과 관련하여, (y)((x)A(x)&amp;sup;A(y))라는 친숙한 법칙은, 만일 A(x)가 양상 연산자를 포함하는 일이 허용된다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amp;exist;y) ((x) ◇ (x &amp;ne; y))는 만족될 수 있지만&amp;nbsp; (&amp;exist;y) ◇ (y &amp;ne; y)는 만족될 수 없다.) 루이스의 형식 모형은 상대역에 관한 그의 철학적 관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기에, 또한 양상 속성에 대한 보편 예화의 불성립은 직관적으로 기이하기에, 이 불성립이 그의 철학적 관점이 가지는 타당성에 반대하는 추가적인 논증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덜 심각한 형식적 난점들 또한 있다. 내가 여기에서 상세히 논할 수는 없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엄밀하게 말해서, 루이스의 관점은 '통세계 정체화' 관점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가능세계들을 교차하는 유사성들이 대칭적일 필요도 이행적(transitive)일 필요도 없는 상대역적 관계를 확정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의 상대역은 &lt;i&gt;절대로&lt;/i&gt; 그 어떤 것 자체와 동일하지(identical) 않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Humphrey가 선거에서 이겼을지도 모른다 (오직 그가 그러한 일을 수행한 경우라면 그 경우에만)'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lt;i&gt;Humphrey&lt;/i&gt;에게 발생했을지도 모를 어떤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 &quot;상대역&quot;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를 어떤 것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Humphrey는 &lt;i&gt;다른&lt;/i&gt; 누군가가, 그가 험프리를 얼마나 닮았든 상관 없이,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승자였는지 여부를 신경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 두 관점 모두에 공통된다. 다른 가능세계들이 더 포괄적인 우주의 다른 차원들 같은 것이라는 가정, 그 세계들이 순전히 질적인 기술들에 의해서만 제세될 수 있다는 가정, 또한 그러므로 정체성 관계든 상대역 관계든 질적 유사성을 통해 확정되어야만 한다는 가정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여러 사람들이 내게 상대역 이론의 아버지는 아마도 라이프니츠일 것이리라고 지적해왔다. 나는 여기에서 그런 역사적인 문제에 개입하진 않을 것이다. 루이스의 관점을 양자역학에 대한 휠러-에버렛 해석과 비교하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나는 이 물리학에서의 관점이 루이스의 상대역 이론과 유비되는 철학적 문제로 곤란을 겪을 것이라 의심한다. 확실히 그 정신은 지극히 유사하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3&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14&quot;&gt;내가 비판하고 있는 그 관점의 또 다른 전형으로 루이스의 논문보다 더욱 철학적인 해설을 포함한 논문은 통세계 정체성에 관한 David Kaplan의 논문이다. 아쉽게도, 이 논문은 출판된 적이 없다. 그 논문은 카플란의 현재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4&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15&quot;&gt;오독되었다는 것은, 해당 표현이 '통세계 정체성'의 특수한 문제로서, 우리가 또 다른 가능세계를 상상할 적에 그 혹은 그것에 관하여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혹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규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는 시사를 하기 때문이다. '가능세계'라는 용어 또한 오독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외국'이란 그림을 시사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에서 때때로 '반사실적 상황'을 사용해왔다. Michael Slote는 '세계의 가능 상태(혹은 역사)'를 '가능 세계'보다 덜 오독하게 될 용어로 제안해왔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일부 가능세계에서, 험프리가 승리하였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단순하게 '험프리는 승리하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가능세계들이라는 장치는 (내가 희망하기로는) 양화된 양상 논리학의 집합론적 모형이론에 관련된 한에서 매우 유용한 것이었지만, 철학적 사이비문제들과 오독된 그림들을 증진시켜왔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5&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16&quot;&gt;물론 나는 언어가 모든 대상 각각에 대한 이름을 포함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건 아니다. 지시사들이 고정 지시자로 사용될 수 있고, 자유 변항이 불특정 대상들에 대한 고정 지시자로 사용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을 특정할 때, 우리는 그 가능세계 전체를 기술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부분만을 기술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6&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17&quot;&gt;See Lecture 1, p. 53 (on Nixon), and Lecture II, pp. 74-7.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7&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18&quot;&gt;여기에는 모종의 애매함이 있다. 상정된 책상의 부스러기, 혹은 분자가 하나씩 교체되었다면, 우리는 똑같은 책상을 가지고 있다고 기꺼이 말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여러 조각들 달랐다면, 다른 책상을 가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시간에 따른 정체성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정체성 관계가 애매한 경우, 그것은 비교차적(intransitive)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상대역' 개념이 (모사, 외지 세계라는 루이스의 철학적 보강물들은 없을지라도) 여기에서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엄격한 정체성이 오직 개별자들(분자들)에게만 적용되고, 그것들로 '구성된' 개별자들, 책상들에게는 상대역 관계가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상대역 관계는 애매하고 비교차적인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에 대한 정체성 관계가 아무런 애매함이 없고 비교차성의 위험이 소거된 궁극적이고 기초적인 개별자들의 차원에 가 닿으리라 가정하는 것은 이상주의인 것처럼 보인다. 그 위험은 보통 실천 차원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단순하게 걱정 없이 정체성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논리학자들은 애매함에 대한 논리학을 고안해내지 않았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8&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19&quot;&gt; &lt;i&gt;Philosophical Investigations&lt;/i&gt;, &amp;sect; 50.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19&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0&quot;&gt;과학철학자들은 '1m'가 '조직개념(cluster concept)'이라는 관점에서 그 문제의 열쇠를 찾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정적으로 이하를 가정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주어진 그 '정의'는 해당 미터법을 확정짓기 위해 사용되는 &lt;i&gt;유일한&lt;/i&gt; 표준이다. 나는 그 문제가 여전히 발생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0&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1&quot;&gt;그가 아는 참은 우연적이기에, 나는 규정상 분석적 참이 필연적이면서 또한&amp;nbsp;&lt;i&gt;선험적&lt;/i&gt;이기도 하기를 요구하기에, 그 참을 '분석적'이라 부르지 &lt;i&gt;않는다&lt;/i&gt;. 주석 63을 보라.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2&quot;&gt;통상 프레게식 의미는 오늘날 '지칭 고정자'와 주의깊게 구별되어야만 하는 바, 뜻으로서 해석된다. 우리는 이후 대부분의 화자에게, 그들이 최초에 대상에 그 이름을 부여한 사람들이 아닌 한, 그 이름의 지칭물이 기술보다는 오히려 의사소통의 '인과적' 연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양상 논리의 형식 의미론에서, 항 t의 '의미'는 통상 (가능적 일부) 함수로서 각 가능세계 H에 H에서의 t에 대한 지칭물을 할당하는 함수인 것으로 간주된다. 고정 지시자에 대해, 그러한 함수가 상수이다. 이러한 '의미' 개념은 '뜻을 부여하는 것'이란 개념과 결부되고 지칭을 고정하는 것이란 개념과는 결부되지 않는다. '의미'의 이러한 용법에서, '1m'는 상수 함수를 그 의미로 가지는데, 그 지칭이 'S의 길이'라는, 상수 함수를 그 의미로 가지지 않는 것에 의해 고정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일부 철학자들은 기술들이, 영어에서, 애매하다고, 때로 기술은 각 세계에서 그것을 만족시키는(그런 것이 뭐라도 있다면) 대상을&amp;nbsp; 비-고정적으로 지시하고, 반면 때로는 그 기술을 실제로 만족하는 대상을 &lt;i&gt;고정적으로&lt;/i&gt; 지시한다고 생각해왔다. (도넬란에게 영감을 받은 다른 철학자들은 기술이 그 기술을 만족하는 것으로 생각되거나 전제되는 대상을 때때로 고정적으로 지시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어떤 추정되는 애매함들이든 의심스럽다고 본다. &lt;b&gt;[60]&lt;/b&gt; 나는 러셀의 범위 개념을 통해서도 이 책 25쪽 주석 3에 언급된 고려들을 통해서도 취급될 수 없는 그런 애매함들에 대해 아무런 분명한 증거도 알지 못한다. &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만일 애매성이 존재한다면, 'S의 길이'의 가정된&amp;nbsp;&lt;i&gt;고정적&lt;/i&gt; 의미에서, '1m'와 'S의 길이'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것을 지시하고 (기능상) 같은 '의미'를 가진다. &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내포 논리의 형식 의미론에서, 우리가 한정 기술구를 각각의 세계에서 그 기술구를 만족시키는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취한다고 가정해 보자. 각 기술을 그 기술을 &lt;i&gt;실제로&lt;/i&gt; 만족시키는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용어로 전환시켜주는 연산자를 가지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데이비드 카플란이 그런 연산자를 제안하고 'Dthat'이라 부른 바 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2&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3&quot;&gt;P.&amp;nbsp;F.&amp;nbsp;Strawson,&amp;nbsp;&lt;i&gt;Individuals&lt;/i&gt;, Methuen, London, 1959, Ch. 6.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3&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4&quot;&gt;Searle, op. cit. in Caton, &lt;i&gt;Philosophy and Ordinary Language&lt;/i&gt;, p. 160.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4&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5&quot;&gt;'알렉산더의 스승'이 양상 맥락에서 범위 구분일 수 있다는 사실과 그 표현이 고정 지시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군가가 알렉산더의 스승이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그리고, 그런 조건에서, 알렉산더의 스승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점을 알아볼 때 양자 모두 묘사된다.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것은 참이 아닌데, 아리스토텔레스가,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2x2가 '4'라고&lt;span&gt;&amp;nbsp;&lt;/span&gt;&lt;/span&gt;&lt;i&gt;불리지&lt;span&gt;&amp;nbsp;&lt;/span&gt;&lt;/i&gt;않았을지도 몰랐다는 것처럼,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라고 &lt;i&gt;불리지&lt;/i&gt; 않았을지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대충, 일상어법은, 종종 사용과 언급을 혼동하는데, 그런 어법은 물론 누군가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렸거나 불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였을지도 아리스토텔레스였지 않았을지 몰랐다고 말해서 표현할지도 모른다. 이따금 나는 그런 느슨한 용법이 일상언어에 대한 현재 이론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반례로 제시되는 것을 듣곤 했다. 이런 구어체는 '불가능한 임무 전담부대'의 임무 성공이 불가능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양상 법칙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내 주장에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특정 조건 하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더라도, 이런 조건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이지 않았을 조건들이 아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5&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6&quot;&gt;만일 누군가가 1m를 't0에서 막대 S의 길이'로 고정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t0에서 막대 S의 길이가 1m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안다. 그가 이 진술을 우연적 참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측정 체계를 고정시킴으로써, 그가 세계에 관해 그 전까지 알지 못했던 어떤 (우연적인) &lt;i&gt;정보&lt;/i&gt;를, 어떤 새로운&amp;nbsp;&lt;i&gt;사실&lt;/i&gt;을 &lt;i&gt;배웠는가&lt;/i&gt;? 어떤 의미로 그는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데, S가 1m 길이라는 것이 설령 부인할 수 없이 우연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반례로부터 그 주장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모든&amp;nbsp;&lt;i&gt;선험적인&lt;/i&gt; 것이 필연적이라고 재정식화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했듯, 나는 그런 재정식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아는 바가 없다. 그 재정식화는 해당 주장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고 (예를 들어, &lt;i&gt;선험&lt;/i&gt;을 경험독립적으로 (참이라는 것 대신에)&lt;i&gt;필연적인 것&lt;/i&gt;으로 알려지는 것이라 정의함으로써라든지), 그 역 명제는 여전히 거짓일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나는 그런 재정식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기에, 일관되게 &lt;b&gt;[64]&lt;/b&gt; &lt;i&gt;'선험적' &lt;/i&gt;이라는 용어를 지칭고정 '정의'로부터 그 참이 귀결되는 진술들을 &lt;i&gt;선험적인 것&lt;/i&gt;으로 만드는 쪽으로 사용할 것이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6&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7&quot;&gt;Strawson, op. cit., pp. 191-92. 스트로슨은 실제로 몇몇 화자들의 경우를 고려하고, 그들의 속성들을 모아서, (그 경중을 동격으로 취한) 민주적 투표를 상정한다. 그는 주류성이 아니라 오직 충분한 다수성만을 요구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7&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8&quot;&gt;H. L. Ginsberg, &lt;i&gt;The Five Megilloth and Jonah&lt;/i&gt;,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1969, p. 114: '이 이야기의 &quot;영웅&quot;, 아미타이의 아들 예언가 요나는 역사적 유명인사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허구이다.' 학술적 합의는 그 책 속 요나에 관한 모든 세부사항을 사실적 토대에 기반하지도 않은 전설로 간주하는데, 그가 히브리 예언가였다는 단순 진술을 제외하고 그리하며, 이 단순진술은 고유하게 정체화해줄 리가 거의 없다. 그가 히브리인들에게 '요나'라고&amp;nbsp;&lt;i&gt;불렸을&lt;/i&gt; 필요도 없다. 'J' 소리는 히브리어에 존재하지 않고, 요나의 역사적 존재는 우리가 그의 본래 히브리어 이름을 알든 알지 못하든 그 여부와 독립적이다. &lt;i&gt;우리가&lt;/i&gt; 그를 요나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그를 순환 논리에 빠지지 않고 짚어내는 데에 사용될 수 없다. 요나의 역사성에 대한 증거는&amp;nbsp;&lt;i&gt;II Kings&lt;/i&gt;에서 그에 대한 독립적 지칭으로부터 온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그러한 어떤 다른 지칭들의 부재 중에도 사용가능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히브리 전설은 실제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는 증거. 더욱이, 요나가 실제 인물에 관한 전설이라는 진술은 &lt;i&gt;참&lt;/i&gt;이었을지도 몰랐는데, 그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었을지라도 그러하다. 누군가는 '나치 선동의 히틀러는 존재한 적 없다'라고 말하듯 '그 책의 요나는 존재한 적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위의 인용이 보여주듯, 이 용법은 &lt;b&gt;[68]&lt;/b&gt; 요나가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한 역사가의 관점과 일치할 필요는 없다. Ginsberg는 일반 독자, 그의 진술이 이해가능한 것임을 알아볼 것이라 그가 추정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쓰고 있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8&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29&quot;&gt; In Ernest Nagel, Patrick Suppes, and Alfred Tarski, &lt;i&gt;Logic, Methodology and the Philosophy of Science: Proceedings of the 1960 International Congress&lt;/i&gt;, Stanford University Press, I962, 622-33.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29&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7_30&quot;&gt; &lt;i&gt;Loc. cit.&lt;/i&gt;, pp. 629-30.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7_30&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ol&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english/reading</category>
      <category>Kripke</category>
      <category>Lecture_Ⅰ</category>
      <category>Naming_and_Necessity</category>
      <author>버러지</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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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oistros.tistory.com/1387#entry1387comment</comments>
      <pubDate>Sun, 12 Oct 2025 08:35:46 +0900</pubDate>
    </item>
    <item>
      <title>Rudolf Carnap, Empiricism, Semantics, and Ontology 요약.</title>
      <link>https://oistros.tistory.com/1385</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1. 추상적 개체&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경험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추상적 개체들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 추상적 개체에 대한 문제가 현대에 의미론과 관련하여 제기되었다. 일부 의미론자들은 술어가 지시하는 속성, 문장이 지시하는 명제 등의 추상 개체를 주장한다. 경험주의는 이에 반발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글의 목적은 추상 개체를 지시하는 언어 수용이 추상 개체 존재론을 함의하지 않으며, 경험주의 및 과학적 사고와 양립 가능함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의미론에서 추상적 개체에 대한 질문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2. 언어 골조작업&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기존 언어로 새로운 개체를 말하려면 새 규칙에 따르는 새로운 말하기 방식의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이 체계 도입을 골조작업이라 부르기로 한다. 이 골조작업 내부에서 특정 개체에 대한 존재물음을 내재적 질문이라 하자. 다른 한편 체계 자체의 존재나 실재성에 대한 물음은 외재적 질문이라 하자.&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사물세계에서 일상언어에 따를 때 내적 질문에 대한 답은 시공간적으로 질서잡힌 사물과 사건에 대한 규칙을 준수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평가된다. 경험주의적 탐구에 따른 관찰결과들을 증거로, 기존에 시공간에 정위되어 실재로 판별된 사물들과 합치하는 것은 존재한다고, 그렇지 못한 것은 부재한다고 평가될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러나 이러한 사물세계 일상언어의 골조작업 내에서 내적 질문과 대답을 수행하는 것이 곧 골조작업 자체에 대한 존재 승인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골조작업 수용 여부는 이에 해당하는 일상언어의 효용성, 유익성, 단순성 등의 요소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해당 체계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는 다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수학언어의 경우 개별 수, 수 일반, 수의 속성과 관계 및 함수, 변항과 양화사 등의 단어와 문장들로 이 골조작업이 구성된다. 개별 수나 수 일반개념에 대한 내재적 존재물음은 이 체계 집합이 공집합인지를 묻는 것이고 그 답은 사소하게 참이다. 이러한 답을 거부하는 철학은 해당 질문을 외재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수학 골조작업의 수용 이전의 수에 대해 그 실재성이나 형이상학적 특성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 문제를 공통의 과학적 언어로 정식화하지 못했으므로 이 외재적 질문에는 인지적 내용이 없다. 이는 비-이론적 사이비질문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5_1&quot; id=&quot;footnote_link_1385_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5, 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5, 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명제체계의 경우 존재 진술에서 심리적 조건들이 지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제들이 심리적 개체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언어적 개체의 존재진술은 언어에 대한 지시를 포함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존재진술 내에 그러한 어떤 지시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제들이 언어적 개체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진술들 내에서 주체에 대한 아무런 지시도 없다는 사실은 명제와 그 속성이 주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사물 속성 체계, 정수와 유리수 체계, 실수 체계, 물리학의 시공간 좌표체계까지 모두 이와 마찬가지로 내재적 존재문답이 가능하고 이는 사소하며 분석적이거나 경험관찰에 근거하여 판단되는 반면, 외재적 질문은 실천적 효용성에 따라 판단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인지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3. 개체 수용의 의미&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새로운 개체 수용을 위한 골조작업은 그 개체에 대해 상위 차원의 일반 용어 도입, 새 개체를 값으로 하는 새 변항의 도입이다. 이러한 새 형식을 도입하여 내재적 질문과 답을 정식화하게 된다. 이 질문은 경험적이거나 논리적이며 답은 사실적으로 혹은 분석적이다. 이와 달리 외재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개체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인지적 내용이 없는 사이비 질문이다. 혹은 그 새 개체를 수용하기 위한 체계 전체를 수용할지 여부에 대한 실천적, 실용적 문제이다. 그리고 실용적 문제인 한에서 그것은 유명론자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5_2&quot; id=&quot;footnote_link_1385_2&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5, 2)&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5, 2)&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4. 의미론에서 추상개체&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명명-지시 관계가 피지시체의 존재를 외재적인 의미에서 함의하는 것이 아니다. &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lt;/span&gt;&quot;'...'는 ...를 지시한다&quot;라는 형식의 어떤 표현이든 수용된 골조작업 내에서 &quot;...&quot;에 해당하는 용어가 상수라는 점이 가정된다면 분석적 진술이다. 그렇지 않은 외재적 질문은 이를 두고 대립하는 양 진영 모두가 공통된 인지적 해석을 제공하기 전까지는&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gt;&amp;nbsp;&lt;/span&gt;사이비-질문으로 간주해야 한다.&amp;nbsp;&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5. 결론&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amp;nbsp; 외재적 질문은 실용적으로 판단하고, 내재적 질문과 외재적 질문을 혼동하지 말자.&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lt;span style=&quot;color: #333333; text-align: start;&quot;&gt;-蟲-&lt;/span&gt;&lt;/span&gt;&lt;/p&gt;
&lt;div class=&quot;footnotes&quot;&gt;
  &lt;ol class=&quot;footnotes&quot;&gt;
    &lt;li id=&quot;footnote_1385_1&quot;&gt;외재적 질문에 대해 과학 골조작업 내적 질문의 조건을 충족시키라는 요구는 부당해 보인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5_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5_2&quot;&gt;유명론자는 추상 개체 수용을 '외재적' 의미에서 거부하고자 할 텐데, 추상 개체에 대한 '외재적' 존재론을 긍정하는 입장과 마찬가지로 그 반대에는 인지내용이 결여되어 있다는 게 카르납의 입장인 듯하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5_2&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ol&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생각</category>
      <category>Carnap</category>
      <category>Empiricism</category>
      <category>existence</category>
      <category>Metaphysics</category>
      <category>Ontology</category>
      <category>semantics</category>
      <author>버러지</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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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2 Oct 2025 03:24:36 +0900</pubDate>
    </item>
    <item>
      <title>『파이돈』 요약정리 69e5-78a9.</title>
      <link>https://oistros.tistory.com/1384</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9e5-72d10. 윤회논증. 케베스는 죽음 이후의 희망을 위해 인간이 죽은 이후의 영혼이 소멸하지 않고 있으며 능력과 지혜를 지닌다는 위로와 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동의하고 이를 위해 설화를 주고받자고(diamythologeо̄) 제안한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4_1&quot; id=&quot;footnote_link_1384_1&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4, 1)&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4, 1)&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1&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하데스에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영혼이 하데스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렇게 죽은 자들로부터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가져온다. 여기에서 영혼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이미 있었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여기에 더하여 오직 죽은 자들로부터만 산 자들이 태어날 수 있다면, 이 역시 영혼이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상황을 일반화하여 생성을 지니는 모든 것이 반대되는 것들로부터 반대되는 것들로서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큰 것이 되는(생성) 것은 그보다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각 과정은 증가와 감소라 불리며 서로 반대방향의 변화이다. 강하고 약한 것이나 빠르고 느린 것, 좋고 나쁜 것과 정의롭고 부정의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반대쌍이 있고, 그 둘 사이에 양방향으로 두 가지 생성이 있다. &lt;span style=&quot;letter-spacing: 0px;&quot;&gt;반대의 원리를 일반화한 이후 소크라테스는 이를 죽음과 삶의 반대쌍에 대입시킨다. &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4_2&quot; id=&quot;footnote_link_1384_2&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4, 2)&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4, 2)&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2&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이에 따라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죽어있는 것으로 되고, 이 과정이 죽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역으로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죽어있는 것이 되며, 이 과정에도 죽는 일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붙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태어남이나 살아남이라면, 살아남의 출발점이 되는 죽어있는 영혼이 있어야 한다. 또한 죽는 일이 비가역적인 과정이라면,&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4_3&quot; id=&quot;footnote_link_1384_3&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4, 3)&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4, 3)&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3&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lt;/span&gt;&lt;span style=&quot;letter-spacing: 0px;&quot;&gt;결국 모든 것이 죽어있기만 하고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오직 결합만이 있다면 아낙사고라스의 '모든 것이 함께 있&quot;도록 귀결되었을 것이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4_4&quot; id=&quot;footnote_link_1384_4&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4, 4)&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4, 4)&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소진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죽지 않는 것 역시 아니므로, 죽은 영혼이 어딘가에 있다가 육체와 결합하여 태어(살아)난다.&amp;nbsp;&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72e1-76a8. 상기논증1. 케베스는 윤회(순환)논증에 동의하고, 이에 더해 상기논증도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영혼이 어딘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첨언한다. 그가 정리하는 상기논변은 배움이 상기이며, 지금 인간이 상기해내는 것은 이전 어느 시간에 배운 것임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심미아스는 상기논증에 대해 자신을 상기시켜 줄 것을 케베스에게 요청한다. 이에 케베스는 누군가가 훌륭하게 질문할 경우 질문을 받은 자는 스스로 모든 것이 어떠한지 말한다는 것, 그리고 이는 질문 받은 자 안에 앎과 논변이 들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라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더해, 케베스가 배움이 상기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는지 묻는다. 케베스는 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하고, 그렇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의 설명을 추가로 요청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기억해내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언젠가 알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를 구한다. 이어서 그는 감각을 통해 감각대상만이 아니라 그 외의 것까지 알게 될 경우, 이 알게 된 또 다른 것을 두고 상기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예는 어떤 뤼라를 보고서 그것을 연주하던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 또한 뤼라 그림을 보며 누군가를 상기하는 경우, 어떤 사람의 그림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 어떤 사람의 그림을 보고 바로 그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 등이다. 특히 이 대상이 시간의 경과와 검토의 부재를 통해 망각되었던 것이었을 경우 상기라 할 만하다. 그리고 예시들에서 보이듯 유사한 것으로부터 유사한 것을 상기할 수도, 유사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유사하지 않은 것을 상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유사한 것들 사이에서의 상기의 경우, 상기를 일으킨 것이 결과적으로 상기된 것과 관련하여 유사성을 기준으로 부족한지 그렇지 않은지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한 사례는 &quot;같은 만큼&quot;이란 것이다. 같은 만큼의 크기인 목재들이나 돌들을 보면서, 이것들과는 구분되는 &quot;같은 만큼&quot;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데 같은 만큼의 것들로 이야기된 목재들이나 돌들은 어떤 것에 비해서는 더 크거나 작기도 하다. 반면 같은 만큼의 것들 자체 또는 같은 만큼임은 같은 만큼이지 않은 것들로 보이거나 같은 만큼이지 않음으로 보이거나 하지 않는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4_5&quot; id=&quot;footnote_link_1384_5&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4, 5)&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4, 5)&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따라서 같은 만큼인 것들과 같은 만큼이라는 것 그 자체는 다르다. 그럼에도 전자들로부터 후자에 대한 앎을 생각하고 확보했다. 따라서 유사하지 않은 것들로부터만이 아니라 유사한 것들로부터도 어쨌든 다른 것을 생각하는 한, 상기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그것들인 바의 것들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있으려고 하지만, 그것으로 있기에 부족하고 그러한 것으로 있을 수 없으며 그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그와 유사하지만 그에 미치지는 못한 저 대상을 먼저 알고 있었음이 필연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 자신이 그런 일을 실제로 겪었으므로, 우리도 처음 같은 만큼인 것들을 보고 같은 만큼이란 것 자체와 닮았지만 그에 못 미친다는 걸 생각하기에 앞서, 같은 만큼의 것 자체를 미리 알았음이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같은 만큼인 것 자체는 감각을 통해 생각한 것이다. 이 지각들을 통해 지각들 안에서 같은 만큼인 것들은 저 같은 만큼인 것 자체에 미치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지각 안의 같은 만큼인 것들을 저 같은 만큼인 것 자체에 회부시키는 한, 지각을 시작하기에 앞서 같은 만큼인 것 그 자체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그 앎을 파악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각을 할 수 있으므로, 지각 안에서의 어떤 것들을 파악하기에 앞서, 즉 태어나기 전에 그것들을 회부시키는 어떤 것 자체를 그보다 먼저 파악했어야만 한다. 이는 같은 만큼인 것, 큰 것, 작은 것에서 더 나아가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정의로운 것, 경건한 것, &quot;그것으로 있다&quot;라는 인장을 부여하는 모든 것에 관련하여 같은 논변이 성립한다. 그런데 지각 안에서의 부족한 것들을 통해 어떤 것 자체를 떠올리기 전까지는 어떤 것 자체를 자각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이 어떤 것 자체는 내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잊었던 것을 다시 떠올려내는 것이다. 지각을 통해 지각된 것들과 유사한 것이든 유사하지 않은 것이든 잊었던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되는 일이 가능하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76a9-77a7. 상기논증2. 인간은 아는 채로 태어나 내내 아는 채로 살아가거나, 아니면 언젠가 알았던 것을 이후에 상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는 자는 그가 아는 것에 대해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lt;sup class=&quot;footnote&quot;&gt;&lt;a href=&quot;#footnote_1384_6&quot; id=&quot;footnote_link_1384_6&quot; onmouseover=&quot;tistoryFootnote.show(this, 1384, 6)&quot; onmouseout=&quot;tistoryFootnote.hide(1384, 6)&quot; style=&quot;color:#f9650d; font-family: Verdana, Sans-serif; display: inline;&quot;&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각주:&lt;/span&gt;6&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lt;/span&gt;&lt;/a&gt;&lt;/sup&gt; 그런데 심미아스는 모든 사람이 그 모든 '어떤 것으로 있는 것' 자체에 대해 설명을 제시할 수는 없다고 답한다. 따라서 모두가 언제나 내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알았던 것을 망각했다가 다시 상기해내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혼은 인간의 모습으로 있기 전 신체로부터 독립되어 있었으며,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영혼이 신체와 결합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앎을 가질 가능성이 심미아스에 의해 제기되지만, 이 경우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것 자체를 설명할 수는 없으므로 이 앎을 상실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앎을 가졌다가 또 그 즉시 상실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유래한 모든 것들을 거기에 회부시키는 그 모든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도 있었듯, 우리 자신의 영혼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77a8-78a9. 심미아스는 상기논증이 태어나기 이전 영혼의 존재는 입증해주지만, 죽으면 영혼이 흩어져 끝난다는 반박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한다. 케베스도 이에 동의하며 영혼이 죽은 이후에도 태어나기 전에 못지 않게 있다는 점이 나머지 증명되어야 할 절반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앞선 순환논증을 상기논증과 한 곳으로 모으면 그 증명이 이미 된 것이라고 답한다. 태어나기 전에 영혼이 있다는 점이 상기논증으로 증명되었고, 반대원리에 따라 살아있는 것은 죽어있는 것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점이 인정된다면, 태어나기 이전 영혼의 상태는 곧 죽음 이후의 영혼의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 이후 영혼의 존속을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심미아스와 케베스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마치 그들이 아이들이 갖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것이라 평한다. 마치 아이가 도깨비를 두려워하듯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신들 안의 아이가 있는 것 같다는 케베스의 말에, 소크라테스는 퇴마를 위한 주문을 외워주어야 하겠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니 어디서 주술사를 찾을지 모르겠다는 케베스의 말에, 소크라테스는 재화와 노력을 아끼지 말고 헬라스와 야만을 불문하고 그런 이를 찾아야 한다고, 또한 서로 더불어 공동으로 탐구하기도 해야만 한다고 조언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letter-spacing: 0px;&quot;&gt;-蟲-&lt;/span&gt;&lt;/p&gt;
&lt;div class=&quot;footnotes&quot;&gt;
  &lt;ol class=&quot;footnotes&quot;&gt;
    &lt;li id=&quot;footnote_1384_1&quot;&gt;이 부분에서 형상 혹은 '그 자체로 있는 것'에 대한 논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상호의존적으로 규정되는 다양한 반대자들과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변화가 논의되며,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의 상보성에 근거하여 몸과의 결합 이전에 영혼이 먼저 독립적으로 있었으리라는 추정이 제시된다. Mythos와 eikos가 언급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티마이오스』의 논의가 eikos mythos로 간주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 대목에서도 일상세계에 한정된 논의가 전개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4_1&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4_2&quot;&gt;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반대쌍은 같은 유에 속하는 양극단으로 규정된다. 일종의 영역이나 맥락이 설정되고 그 안에서 반대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생성, 변화를 가지는 한에서, 그리고 반대쌍은 같은 유에 그리고 같은 차원에 속한 것이어야 한다는 한에서 이 반대의 원리는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영혼과 신체의 결합, 죽음이 분리라는 제한조건 하에서 무생물을 죽은 것과 구분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이 반대를 이루는 맥락에서 비교대상은 살아있을 수 있는 것, 상호 결합 가능한 물체와 영혼에 국한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4_2&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4_3&quot;&gt;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반대를 같은 유의 양극단으로 규정하고, 이 양극단 사이에서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연학』에서는 이를 변화(운동)의 원리로 상정하여, 변화의 원리를 기체와 반대쌍이라는 셋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는 기체와 형상 그리고 그것의 결여로 바꿔 말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변화의 원리를 둘로 말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시, 『범주론』에서는 시각과 맹목을 반대되는 것으로 두고, 이 둘 사이에서는 양방향으로의 변화가 성립하지 않고 오직 시각에서 그 결여인 맹목으로의 비가역적 변화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와 달리 시각능력이 발현되지 않았다가 이후에 발현되는 동물의 성장 과정은 결여에서 상태로의 이행이 아닌 또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 『형이상학』에서 가능태와 현실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개념 도입의 단초가 마련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범주론』에서는 아직 그와 같은 개념적 도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 가능태와 현실태를 통하지 않고 시각의 발현 과정과 시각에서 맹목으로의 결여(상실?) 과정을 구분하는 『범주론』 자체 내에서 가능한 설명 방식이 재구성될 수 있을지 문제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다시 생명이 성립하게 되는 과정과 발현된 생명이 상실되는 과정이라는 두 변화(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장소이동이나 성질변화와 구분하여 생성과 소멸로 간주할 것이다.)와 관련하여 지금 플라톤이 이를 같은 유 안에서 한정된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는 같은 운동의 양방향과 같이 취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일 수 있다. 단, 결합과 분리를 반대쌍으로 설정하고 그 사이에서의 운동을 두 방향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극복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4_3&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4_4&quot;&gt;이는 과거 방향으로의 시간이 무한하게 뻗어 있다는 가정 하에서 가능한 결론일 것이다. 한정된 시간 이후 현재에 이르렀다면 오직 분리만 축적된 경우든 역으로 오직 결합만 축적된 경우든 죽음과 삶 중 어느 한쪽만 남아 있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티마이오스』에서는 (『파이돈』 보다 이후에 저술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차치하면) 시간은 있음과 같음 그리고 다름의 결합 이후 천구와 천체의 운동을 통해 제작된 것이고, 그래서 시간은 과거 방향으로 무한하지 않다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4_4&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4_5&quot;&gt; 74c1. &lt;i&gt;auta ta isa&lt;/i&gt;. 복수형태이다. 이것이 (a) 형상으로서의 같은 만큼이라는 것 그 자체를 가리킨다면 왜 복수로 표현되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반면 (b) 같은 만큼의 것들로 판단된 사물을 가리킨다면, 어떤 맥락에서 이 사물들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 또한 설명이 필요하다. (a') 각 사물을 상호비교하여 같은 만큼의 것들로 판단하는 매 사례마다 그 사례에서 (혹은 비교군별로) 적용된 '같은 만큼의 것 자체'라는 형상들을 총괄하여 복수로 표현하였을 가능성. (a&quot;)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말하는 &quot;안에 있는 것&quot;과 같이, 각 실체에 귀속된 성질이나 속성처럼 취급된 '같은 만큼의 것' 각각을 복수로 표현하였을 가능성. (b') 같은 만큼의 것들로 판단된 것들이 74b8-9에서 언급된 비교대상(해당 구절에서 dat.를 비교대상으로 번역할 경우)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만 고려된 경우. 이렇게 cambridge change에 개입되는 비교 맥락을 끊고, 또한 증가나 감소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같은 만큼의 것으로 측정된 각각의 것들 그 자체는 그 자신이 가진 만큼의 양을 유지한다. 개인적으로는 (a')가 가장 평이하고 쉬운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만큼임(혹은 동등성, isotēs)과 같은 만큼이지 않음(혹은 비동등성, anisotēs) 같은 표현이 따로 등장하는 것을 고려하면 (a&quot;)나 (b') 역시 고려해 보아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74d4-5에서 'ta en(in)'이란 표현에 주목한다면 (a&quot;)의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는 단순히 '그것들 안에서 벌어진 상황들' 정도로 약하게 번역하여 처리할 여지도 있으므로 결정적이지는 않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4_5&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li id=&quot;footnote_1384_6&quot;&gt;앞서 지각을 통해 형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 형상을 아는 것으로 서술하는 부분과 달리, 여기에서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된다. 두 앎의 주어가 다르거나, 대상이 다르거나, 앎의 정도가 다르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상기가 일종의 과정을 거치며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수용할 수 있다면, 앎의 정도차를 통해 두 부분을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lt;a href=&quot;#footnote_link_1384_6&quot;&gt;[본문으로]&lt;/a&gt;&lt;/li&gt;
  &lt;/ol&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생각</category>
      <category>phaedo</category>
      <category>Plato</category>
      <author>버러지</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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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0 Oct 2025 18:38:38 +0900</pubDate>
    </item>
    <item>
      <title>『파이돈』 요약정리 65a9-69e4.</title>
      <link>https://oistros.tistory.com/1383</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5a9-d3. 소크라테스는 지혜의 획득과 관련하여 탐구에서 신체를 동반자로 삼는 경우, 감각은 진리를 담고 있지 않으며 정확한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신체의 감각이 부정확하고 불확실하다면, 신체와 더불어 검토를 시도할 때 영혼은 기만당한다. 따라서 영혼이 진리에 접하는 다른 곳이 있다면 그것은 헤아림(logizesthai) 속에서이다. 또한 이 속에서 영혼이 감각이나 쾌고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최대한 영혼 그 자체가 될 때, 가능한 한 신체와의 공유 그리고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있는 것(to on)을 포착할 때 가장 훌륭하게 헤아림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즐거움의 경우에서처럼, 지혜 획득의 경우에도 철학자는 신체를 경시하고 피하는 반면 영혼 자체가 되기를 추구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gt; 표면적인 서술에 따라서는 영혼의 즐거움과 지혜의 획득이 별도의 사안처럼 묘사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진정한 철학자는 지혜 그 자체를 열망하고 이것의 획득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는 전제가 마련되는 듯하다. 이에 근거하여 철학자는 자신에게 즐거운 일인 지혜 획득을 위해 이를 방해하는 요인인 신체로부터 해방되길 그리고 영혼이 그렇게 영혼 그 자체로써 지혜 그 자체를 추구하길 바라며, 신체에서 영혼의 해방은 곧 죽음이므로 결국 죽음을 바라게 된다는 논증이 전개되는 듯하다.&amp;nbsp;&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gt; 지혜의 획득에 앞서, 영혼 그 자체로 있기를 추구하는 것을 '즐거움'과 관련시킬 경우, 신체를 통해 발생하는 즐거움들에 하등 관심이 없다면 그것이 영혼 자체로 있기를 추구하는 이유라 말할 수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5d4-67c4. 정의, 아름다움, 좋음은 물론 크기, 건강, 힘, 그 각각으로 있는 바의 모든 것들의 그 있음(ousia)에 관하여, 그 각각을 아는 일에 가장 가까울 자는 신체를 통해 그것들을 관조하는 자가 아니라 각각의 것 그 자체를 사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이다. 이러한 자는 감각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를 최대한 배제하며 최대한 사유 그 자체로써 순수한 각각의 것 그 자체를 포착하고자 시도하는 자이다. 철학자는 그리하여 영혼이 신체를 지니고 뒤섞여 있는 한 지혜를 충분히 획득할 수 없으리라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체는 필수적인 양분으로 인한 분주함을 우리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신체는 애욕과 열망, 공포, 온갖 상들, 허상들로 우리를 채우며 전쟁과 분란, 다툼을 야기한다. 신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도록 인간에게 강제하여 다툼이 일어나고 그 일에 노예노릇을 하도록 만든다. 이로 인해 철학할 여유가 없게 된다. 이보다 더욱 극단적인 문제는 탐구가 가능할 때에도 신체가 개입하여 소란과 혼란을 야기하고 마비시켜서, 참된 것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만일 사정이 이러하다면, 순수하게 앎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신체로부터 해방되어 영혼 그 자체로써 사태 자체를 관조해야 하고, 따라서 지혜는 살아서는 가질 수 없고 죽은 이후에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신체와의 교류가 전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아니기에, 최대한 신체와 교류하지 않고 신체의 본성으로 채워지는 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따라서 죽은 이후에야 순수하게 정화된 상태에서 지혜 그 자체를 획득할 수 있다면, 죽음을 희망할 만하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gt; 신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저한의 양분조차 충족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닐 듯하다. 오히려 이러한 기본욕구는 충족될 경우 안정되어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나마 영혼의 탐구를 덜 방해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필수 욕구를 넘어서는 애욕과 열망이 추가적으로 혹은 과도하게 발생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설명이 제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필수 욕구가 충족되어 탐구를 위한 여가가 마련된 상황에서도 신체는 소란과 혼란을 야기해 마비시킨다는 점과 관련하여서도 그 이유가 명시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7c5- 69e4. 정화란 신체 전반에 분산되어 착종된 영혼을 취대한 분리시켜 취합하고 영혼 자체로서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정화는 신체로부터 영혼의 해방이란 점에서 곧 죽음이고, 또한 이것이 철학자가 가장 열망하는 것이자 철학자가 연마하는 바의 일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철학자에게는 늘 바라고 준비해온 바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죽음이기에 이 죽음에 당면하여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는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신체로부터 해방되고 지혜를 마주할 희망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죽음에 당면하여 두려워하고 화를 내는 자는 제대로 된 철학자가 아님도 분명하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철학자가 참으로 용기있는 자이고, 열망들을 경시하고 조화롭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가 바로 참으로 분별 있는 자이다. 이러한 자는 비철학자들의 용기와 분별을 기이하다 여긴다. 비철학자는 죽음을 나쁜 것으로 여기고, 그들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경우 그보다 더 큰 나쁜 일에 대한 공포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다. 즉 그는 두려워함으로써 두려움을 통해서 용기있게 된다. 이는 용기 그 자체가 아니라 정반대되는 것에 의해 정립된 이상한 것이다. 분별의 경우에도, 비철학자는 한 쾌락을 통해 다른 쾌락을 포기하는 식으로 무절제를 통해 절제를 갖춘다는 이상한 상황에 놓인다. 각각의 것 그 자체를 두고 그 좋고 나쁨을 평가하여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고 또 용기를 내거나 두려워해야 하며, 이러한 과정은 두려움으로부터 용기를 정화해내고 또 무절제로부터 분별을 정화해내는 정화이기도 하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gt; Cf.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덕과 악덕은 유 차원에서 반대되는 것이다. 상대적인 크고 작음, 많고 적음의 비교를 통한 판단은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다.&amp;nbsp;&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gt; 이 단계에서, 앞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기이하게 혼합되어 있다는 가설에 대한 일종의 반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공포들을 서로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정립된 용기는 용기와 정반대인 두려움과 착종되어 있고, 쾌락들의 경우에도 다른 쾌락들(그 획득이나 상실)에 비교할 경우 다른 불쾌함들과 뒤섞인 것으로서만 상대적으로 정립되어 있게 된다. 반면 제대로 된 철학자의 지혜 그 자체에 대한 열망과 이것의 획득에는 그와 같은 상대적인 비교평가가 개입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amp;nbsp;&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gt; 영혼 자체로 있으면서 사유 자체를 가지고 지혜 자체를 획득하려는 것이 진정한 철학자. 그렇다면 착종되지 않은 순수한 용기 자체, 절제 자체가 중심주제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일반인의 용기가 두려움의 극복이라는 식으로 그 반대되는 것과 착종되어 상대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 문제라면, 절제도 즐거움이나 괴로움과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점 자체가 문제이지 않은가?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주놓임과 그 자체로 규정되는 것을 두고 논의하는 바와 연결되지 않을까?&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작성중-&lt;/p&gt;</description>
      <category>생각</category>
      <category>phaedo</category>
      <category>Plato</category>
      <author>버러지</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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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2 Sep 2025 17:43:5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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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이돈』 요약정리 61b8-65a8.</title>
      <link>https://oistros.tistory.com/1382</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1b8-61d2.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케베스에게 에우에노스의 물음에 대해 답할 거리를 말해주고서, 만일 에우에노스가 지혜롭다면 최대한 빨리 자신을 쫓아 오도록 전해달라 말한다. 심미아스는 에우에노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안을 받지 않으리라 얘기하는데, 소크라테스는 그가 철학자라면, 그리고 철학에 제대로 참여하는 자들 모두가 가능한 빨리 죽으려 하리라고, 하지만 자살은 불법이기에 하지 않을 듯하다고 답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1d3-62c8. 케베스는 스스로를 해치는 것은 위법하지만 철학자는 죽는 이를 뒤따르려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다. 우선 그는 자살이 위법한 이유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여타의 일들은 경우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더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만, 삶보다 죽음이 더 낫다는 일은 오직 이 일만이 인간에게 결코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발생한다면, 또한 사는 것이 죽는 것이 더 나은 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은인을 기다려야 하고 이것이 경건한 일이라면, 케베스가 놀라워 할 것이라고 말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gt;&amp;gt; 무조건적이라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것인지, 오직 철학자에게만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인지 불분명. 또한 그러한 가정이 참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지, 반대로 거짓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지,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케베스의 놀라움이 감탄인 것인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표현일지 해석이 갈릴 수 있다. Cf. Gallop (1975)&amp;nbsp; pp. 79-83.&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이와 관련하여 인간이 신의 소유물이라는 논의를 가져온다. 소유물이 소유자의 뜻에 반하여 자살한다면 소유자는 소유물에게 화를 내리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신이, 마치 이제 그가 사형 선고에 따라 극약을 마실 것과 같이, 모종의 필연을 부과하기 전까지는, 인간이 자살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2c9-63d3. 케베스는 자살이 불경하다는 설명을 받아들이고, 이어서 철학자가 쉽사리 죽으려 한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그는 인간이 신의 소유물이라는 이야기를 받아, 가장 지혜로운 자들인 철학자들이 가장 훌륭한 감독관인 신의 보살핌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반박한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쉽게 납득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해 버릇하는 케베스를 칭찬하고, 심미아스는 케베스가 단순히 습관적으로 반대한 것이 아니라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라 거든다. 여기에 더해 케베스는 심미아스가 그 반박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힐난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소크라테스도 훌륭한 주인인 신과 좋은 친구들을 저버리고 떠나려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죽은 이후에도 또 다른 지혜로운 신들과 훌륭한 (죽은)사람들 곁으로 가게 되리라 생각한다고 답한다. 또한 죽은 자들에게는 나쁜 자들에게 보다 좋은 자들에게 훨씬 더 좋은 것이 있으리라는 희망 역시 전한다. 심미아스는 소크라테스가 품은 희망적인 생각이 그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같이 좋은 것일 테니, 그 생각을 공유해 달라고 요청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3d4-64a3.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에 앞서, 극약을 전달할 사람이 크리톤에게 대화를 많이 하면 열이 올라 약효가 저해될 수 있어서 약을 몇 배나 더 마시게 될 수도 있으니 대화를 자제시키라고 재촉했다는 이야기를 크리톤이 전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는 그의 할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답한 다음, 정말로 철학 속에서 생애를 보낸 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하며 저승에서 가장 큰 훌륭한 것들을 받으리란 희망에 차는 편이 그럴 듯하다는 논변을 제시하겠다고 선언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4a4-65a8. 철학자들은, 남들 몰래, 죽는 것 그리고 죽어 있는 것에만 열중한다. 늘 열망하던 일이기에 철학자들은 죽음이 찾아올 때 불편해하지 않는다. 심미아스는 남들이 모르지 않는다고 지적하는데,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시 다른 자들은 철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죽는지, 어떤 점에서 죽을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죽음에 대해 그러한지를 알지 못한다고 답한다. 그는 우선 죽음이 신체로부터 영혼의 벗어남이라 규정한다. 그는 신체(물체)는 영혼을 벗어나 물체 그 자체가 되고, 영혼은 신체로부터 벗어나 영혼 그 자체가 되는 것, 그것이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그는 철학자의 즐거움이 식욕이나 성욕 등의 신체적 즐거움이겠느냐고 묻고, 심미아스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나아가 철학자는 신체에 관한 보살핌들의 경우에도, 필연적으로 관여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경시할 것이라 말한다. 따라서 철학자는 신체에 관련하여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난 영혼 자체로 정향된 문제의식을 가진다. 그는 최대한으로 영혼을 신체와의 공유로부터 해방시키는 식으로 문제를 다룬다. 즉 철학자는 그런 것들에 참여하지 않기에 살 가치가 있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가까이 있으며 신체를 통한 즐거움에 신경쓰지 않는 자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gt; 철학자가 죽음을 연마하고 추구하기에 신체에 무관심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지 아직 근거가 제시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 단계에서 죽음이 신체로부터 영혼의 벗어남, 신체는 신체 자체가 되고 영혼은 영혼 자체가 되는 것으로 규정된다. 어떤 이유에서 철학자가 신체에 관련해서가 아니라 영혼에 관련하여 즐거움을 추구하는가? 죽은 이후에 더 훌륭한 주인들과 또한 이웃들 곁으로 가게 되리란 희망은 설명되어야 할 사항이지 근거로 보이지는 않는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작성중-&lt;/p&gt;</description>
      <category>생각</category>
      <category>phaedo</category>
      <category>Plato</category>
      <category>파이돈</category>
      <category>플라톤</category>
      <author>버러지</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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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5 Sep 2025 17:48:1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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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50904.</title>
      <link>https://oistros.tistory.com/1381</link>
      <description>&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2&quot;&gt;&amp;nbsp; 그 과정에서&amp;nbsp;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amp;nbsp;&lt;br /&gt;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amp;nbsp;&lt;br /&gt;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lt;br /&gt;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lt;br /&gt;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lt;br /&gt;니라는 듯이.&lt;br /&gt;&amp;nbsp;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amp;nbsp;&lt;br /&gt;뜨며 대답했다.&amp;nbsp;&lt;br /&gt;&amp;nbsp;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amp;nbsp;&lt;br /&gt;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lt;br /&gt;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amp;nbsp;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lt;br /&gt;고 부를 수 있어.&lt;br /&gt;&amp;nbsp; 전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너는 혼란스러웠다.&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소년은 중학교 3학년이다. 사람들은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함부로 엮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결국은 지난 겨울 내란의 밤이 떠오른다. 전두환이 천수를 누리고 죽었을 때처럼, 치욕스러웠다. 아무것도 아닌 나는 모독당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유가족들이, 생존자들이, 피해자들이 살아남아 있는데, 감히 어떻게.&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제 겨우 18쪽을 읽었다. 달리 무슨 뜻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할 일을 마친 다음에, 조금씩 읽어 나가기로.&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蟲-&lt;/p&gt;</description>
      <category>생각</category>
      <category>소년이_온다</category>
      <category>한강</category>
      <author>버러지</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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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4 Sep 2025 23:53:5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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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범주론』 소논문 기획</title>
      <link>https://oistros.tistory.com/1380</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0. 양에는 연속량과 불연속량이 있다. 연속량은 상대적인 위치를 지니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불연속량은 &quot;상대적인 위치를 지니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quot; 해당 표현은 불연속량의 부분들이 상대적 위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번역될 수 있고, 다른 한편 불연속량이 부분들을 지니지 않는다고도 번역될 수 있다. 버니옛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수를 부분을 가지지 않는 불연속량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예시로 드는 것은 트럼프 카드 각 장에 표기된 수이다. 각각의 수는 고유한 양을 표현하지만 한 수가 다른 수를 부분으로 포함하거나 또는 연속량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분할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볼 경우 수에 대한 사칙연산, 산술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수가 부분들을 가진다고 할 경우, 우선 수의 부분이 다른 수라면 기이한 역설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10은 1과 9를 더해서도 또 4와 6을 더해서도 또 5를 두 개 더해서도 이루어지며, 서수로 생각할 경우에는 순서대로 1부터 9까지의 수들 이후에 온다. 순서에 따라 앞에 나열된 수들을 10의 부분으로 포함하는 것 역시 불합리해 보인다. 10의 부분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55가 될 수도 있다. 다른 한편 1의 갯수를 통해 여타의 자연수 복수를 설명하고자 할 경우, 1 자체는 수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형이상학』에서의 논의를 고려하자면 단위로서의 1과 2 이상의 복수를 구분하고 후자를 수로 간주하는 듯한 입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나, 이와 같은 입장이&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범주론』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1이 수라면, 수를 부분들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노선에서, 1 역시 부분들을 가질 것인지의 문제가 발생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0. 불연속량은 본래 정의된 양 혹은 규정된 양으로 번역될 diōrismenon이다. 상대적 위치, 순서, 경계 등의 의미 또한 단적으로 명확하다고 보긴 어렵다. 이러한 규정들은 실체, 속성, 마주놓임, 관계 등 다른 범주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주어나 술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한정하고 특정짓는 데에 앞서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별자, 개체의 그 단일성, 통일성과 이를 중심으로 결합하거나 부속하는 여러 성질들에 기초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데에 기초가 되는 개념들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고,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는 『형이상학』에 나아가기에 앞서 그 발상의 시초, 원형을 가늠해 볼 수 있기에, 이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이해가 본래 어떠한 취지에서 출발하였는지를 추적할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라고 뻥을 쳐도 되는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0. 가능하면 10월 중순까지, 늦어도 11월 중순까지 작성 목표로..&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蟲-&lt;/p&gt;</description>
      <category>생각</category>
      <category>Aristotle</category>
      <category>Categories</category>
      <category>Quantity</category>
      <category>범주론</category>
      <category>아리스토텔레스</category>
      <author>버러지</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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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oistros.tistory.com/1380#entry1380comment</comments>
      <pubDate>Thu, 4 Sep 2025 22:11:3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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