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Ἐπεὶ δὲ τὸ πρότερον διώρισται ποσαχῶς λέγεται, 

φανερὸν ὅτι πρότερον ἐνέργεια δυνάμεώς ἐστιν. λέγω δὲ                          5

δυνάμεως οὐ μόνον τῆς ὡρισμένης ἣ λέγεται ἀρχὴ μετα-

βλητικὴ ἐν ἄλλῳ ἢ ᾗ ἄλλο, ἀλλ᾿ ὅλως πάσης ἀρχῆς κινη-

τικῆς ἢ στατικῆς. 

그런데 우선하는 것이 몇 가지 방식으로 진술되는지는 

규정되었기에, 현실태가 가능태에 우선하는 것으로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여타의 것 안에서 

혹은 여타의 것으로 있는 한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원리로 

진술되는 규정된 가능태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운동시키거나 정지시키는 모든 원리[로서의 가능태]를 

말하고 있다.

                            καὶ γὰρ ἡ φύσις ἐν ταὐτῷ [γίγνεται· 

ἐν ταὐτῷ γὰρ] γένει τῇ δυνάμει· ἀρχὴ γὰρ κινητική, ἀλλ᾿ 

οὐκ ἐν ἄλλῳ ἀλλ᾿ ἐν αὐτῷ ᾗ αὐτό.―πάσης δὴ τῆς τοιαύ-                          10

της προτέρα ἐστὶν ἡ ἐνέργεια καὶ λόγῳ καὶ τῇ οὖσίᾳ· χρόνῳ 

δ᾿ ἔστι μὲν ὥς, ἔστι δὲ ὡς οὔ. 

왜냐하면 자연본성 또한 능력과 [같은 것 안에 생성되기

때문이다. 즉 같은] 같은 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운동을 일으키는 원리이지만, 여타의 것 안에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그 자체로 있는 한에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원리보다 현실태가 정의로

보나 실체로 보나 우선하는 것으로 있다. 그런데 시간으로

보면 한편으로는 우선하는 방식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선하지 않는 방식이 있다.

                                                τῷ λόγῳ μὲν οὖν ὅτι προτέρα, 

δῆλον (τῷ γὰρ ἐνδέχεσθαι ἐνεργῆσαι δυνατόν ἐστι τὸ πρώ-

τως δυνατόν, οἷον λέγω οἰκοδομικὸν τὸ δυνάμενον οἰκοδο-

μεῖν, καὶ ὁρατικὸν τὸ ὁρᾶν, καὶ ὁρατὸν τὸ δυνατὸν ὁρᾶ-                             15

σθαι· ὁ δ᾿ αὐτὸς λόγος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ὥστ᾿ ἀνάγκη 

τὸν λόγον προϋπάρχειν καὶ τὴν γνῶσιν τῆς γνώσεως)·

그러므로 진술로는 [현실태가 가능태보다] 우선한다는 점, 

그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 가능한 것은

현실화함이 허용된다는 점에서 가능한 것으로 있으니, 이를

테면 나는 건축함이 가능한 것이 건축술을 지닌 것이라고,

보는 일에 그러한 것이 보는 능력을 갖춘 것이라고, 또

보여지는 일이 가능한 것이 보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같은 논리가 여타의

것들에도 성립하고, 그래서 (현실태에 대한) 진술과 인식이

(가능태에 대한) 인식 보다 앞서 성립함이 필연적이다.

                                                                                       τῷ 

δὲ χρόνῳ πρότερον ὧδε· τὸ τῷ εἴδει τὸ αὐτὸ ἐνεργοῦν πρότερον, 

ἀριθμῷ δ᾿ οὔ. 

시간에서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우선한다. 형상에 있어서

똑같은 것으로서 현실화하고 있는 것, 그런데 수에서는

같지 않은 것이 우선한다.

                       λέγω δὲ τοῦτο ὅτι τοῦδε μὲν τοῦ ἀνθρώπου τοῦ 

ἤδη ὄντος κατ᾿ ἐνέργειαν καὶ τοῦ σίτου καὶ τοῦ ὁρῶντος πρό-                    20

τερον τῷ χρόνῳ ἡ ὕλη καὶ τὸ σπέρμα καὶ τὸ ὁρατικόν, ἃ 

δυνάμει μέν ἐστιν ἄνθρωπος καὶ σῖτος καὶ ὁρῶν, ἐνεργείᾳ 

δ᾿ οὔπω· 

내가 말하는 바는 이미 현실태에 따라 있는 여기 이 인간과 

곡물 그리고 보고 있는 것보다 시간에서 질료와 씨앗 그리고 

볼 능력을 갖춘 것이 우선하고, 이것들은 가능적으로는

인간으로 곡물로 그리고 보고 있는 것으로서 있지만,

현실태로서는 아직 그렇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ἀλλὰ τούτων πρότερα τῷ χρόνῳ ἕτερα ὄντα ἐνερ-

γείᾳ ἐξ ὧν ταῦτα ἐγένετο· ἀεὶ γὰρ ἐκ τοῦ δυνάμει ὄντος 

γίγνεται τὸ ἐνεργείᾳ ὂν ὑπὸ ἐνεργείᾳ ὄντος, οἷον ἄνθρωπος ἐξ                    25

ἀνθρώπου, μουσικὸς ὑπὸ μουσικοῦ, ἀεὶ κινοῦντός τινος πρώτου· 

τὸ δὲ κινοῦν ἐνεργείᾳ ἤδη ἔστιν. 

그러나 이것들이 그로부터 생성되었던 현실태로 있는 다른

것들이 이것들보다 시간에서 우선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가능적으로 있는 것으로부터 현실태로 있는 것이 현실태로

있는 것에 의해 언제나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교양을 갖춘 것은 교양을 갖춘 것에 의해, 언제나

최초의 무언가가 운동시켜서 그러하다. 그런데 운동시키고 있는

것은 현실태로 이미 있다.

                                                   εἴρηται δὲ ἐν τοῖς περὶ τῆς 

οὐσίας λόγοις ὅτι πᾶν τὸ γιγνόμενον γίγνεται ἔκ τινος τι 

καὶ ὑπό τινος, καὶ τοῦτο τῷ εἴδει τὸ αὐτό. 

실체에 관한 논의들에서 생성되는 모든 것은 어떤 것을 

통해 그리고 어떤 것에 의해 무언가로 생성되고, 이러한 

[생성된] 것은 그 형상에서 같은 것이다.

                                                                  διὸ καὶ δοκεῖ 

ἀδύνατον εἶναι οἰκοδόμον εἶναι μὴ οἰκοδομήσαντα μηθὲν ἢ                         30

κιθαριστὴν μηθὲν κιθαρίσαντα· ὁ γὰρ μανθάνων κιθαρίζειν 

κιθαρίζων μανθάνει κιθαρίζειν, ὁμοίως δὲ καὶ οἱ ἄλλοι. 

이런 점으로 인해 아무것도 건축하지 않은 자가 건축가로 

있거나 아무런 키타라 곡도 연주하지 않은 자가 키타라 

연주자로 있기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키타라 연주를 배우는 자는 키타라 연주를 하면서 키타라 

연주를 배우고, 여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ὅθεν ὁ σοφιστικὸς ἔλεγχος ἐγίγνετο ὅτι οὐκ ἔχων τις τὴν 

ἐπιστήμην ποιήσει οὗ ἡ ἐπιστήμη· ὁ γὰρ μανθάνων οὐκ ἔχει. 

그로부터 소피스트적인 논박이 생겨났으니 앎을 지니지 

않은 누군가가 그 앎이 속하는 바의 것을 행하리란 것이다. 

배우고 있는 자는 앎을 지니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ἀλλὰ διὰ τὸ τοῦ γιγνομένου γεγενῆσθαί τι καὶ τοῦ ὅλως                               35

κινουμένου κεκινῆσθαί τι (δῆλον δ᾿ ἐν τοῖς περὶ κινήσεως 

τοῦτο) καὶ τὸν μανθάνοντα ἀνάγκη ἔχειν τι τῆς ἐπιστήμης                 1050a1

ἴσως. 

허나 생성 중인 것의 일부는 생성되었고 대체운동 중인

것의 일부는 운동되었다는 점으로 인해 (운동에 관한

논의에서 이 점이 분명하다) 배우는 중인 자 또한 그 앎에

속한 무언가를 가짐이 같은 정도로 필연적이다. 

          ἀλλ᾿ οὖν καὶ ταύτῃ γε δῆλον ὅτι ἡ ἐνέργεια καὶ 

οὕτω προτέρα τῆς δυνάμεως κατὰ γένεσιν καὶ χρόνον.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도 현실태가 생성과 시간에 

따라 그런 식으로도 가능태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Ἀλλὰ μὴν καὶ οιὐσίᾳ γε, πρῶτον μὲν ὅτι τὰ τῇ γενέσει 

ὕστερα τῷ εἴδει καὶ τῇ οὐσίᾳ πρότερα (οἷον ἀνὴρ παιδὸς                            5

καὶ ἄνθρωπος σπέρματος· τὸ μὲν γὰρ ἤδη ἔχει τὸ εἶδος 

τὸ δ᾿ οὔ), καὶ ὅτι ἅπαν ἐπ᾿ ἀρχὴν βαδίζε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καὶ τέλος (ἀρχὴ γὰρ τὸ οὗ ἕνεκα, τοῦ τέλους δὲ ἕνεκα ἡ 

γένεσις), τέλος δ᾿ ἡ ἐνέργεια, καὶ τούτου χάριν ἡ δύναμις 

λαμβάνεται.                                                                                                 10

그런가 하면 실체에 있어서도 우선하니, 첫째로는

생성에서 이후의 것들이 형상과 실체에서 우선한다는

점에서 (이를 테면 성인이 아이보다 그리고 인간이

씨앗보다 우선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이미 형상을

지니고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생성 중인 모든 것은 원리와 완결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것을 위한 바[목적]가 원리이고, 생성은 완결을 위한

것이니까), 현실태가 완결이며, 이것을 위해 가능태가

확보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οὐ γὰρ ἵνα ὄψσιν ἔχωσιν ὁρῶσι τὰ ζῷα ἀλλ᾿                           10

ὅπως ὁρῶσιν ὄψιν ἔχουσιν, ὁμοίως δὲ καὶ οἰκοδομικὴν ἵνα 

οἰκοδομῶσι καὶ τὴν θεωρητικὴν ἵνα θεωρῶσιν· 

시각을 지니기 위해 생물들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해 

시각을 지니고, 마찬가지로 건축술도 건축하기 위해

관조술도 관조하기 위해 지니기 때문이다.

                                                                           ἀλλ᾿ οὐ θεω-

ροῦσιν ἵνα θεωρητικὴν ἔχωσιν, εἰ μὴ οἱ μελετῶντες· οὗτοι δὲ 

οὐχὶ θεωροῦσιν ἀλλ᾿ ἢ ὡδί, † ἢ ὅτι οὐδὲν δέονται θεωρεῖν †. 

허나 관조술을 지니기 위해 관조하지는 않는다, 연마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고는 관조하는 중이지 않거나, 혹은 관조할 필요가 없는

것을 관조하고 있다.

ἔτι ἡ ὕλη ἔστι δυνάμει ὅτι ἔλθοι ἂν εἰς τὸ εἶδος· ὅταν                                 15 //231206

δέ γε ἐνεργείᾳ ἦ, τότε ἐν τῷ εἴδει ἐστίν. ὁμοίως δὲ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καὶ ὧν κίνησις τὸ τέλος, διὸ ὥσπερ οἱ διδά-

σκοντες ἐνεργοῦντα ἐπιδείξαντες οἴονται τὸ τέλος ἀποδεδω-

κέναι, καὶ ἡ φύσις ὁμοίως. 

나아가 질료는 형상에 이를 것이라는 점에서 가능적으로 

있다. 반면 현실적으로 있을 경우에 한해서는, 그 경우 형상 

안에 있다. 그런데 여타의 경우들, 그것들의 완결이 운동인 

것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 이로 인해 가르치고 있는 

자들은 실현하고 있는 자를 제시함으로써 완결을 내준 것이라 

생각하며, 자연 또한 마찬가지이다. 

> 가능태 질료와 현실태 질료. 형상/질료 관계에서는 

질료가 형상에 대해 가능적으로 형상으로서 있다. 

지금 여기에서는 형상과 함께하여 실현된 질료가 

그러한 결합 이전의 질료에 상대적으로 현실태라는 것인가?

> 현실적으로 있는 질료는 형상 안에 있다는 것과 

완결이 운동인 경우는 어떤 점에서 마찬가지인가?

목재 안에 집이 잠재적으로 들어 있다가 

집이 '밖으로' 실현되어 나오면 그 집 안에 목재가 

현실적으로 들어가 있게 된다. 

학생의 경우 앎을 발휘하는 상태가 잠재적으로 

학생 안에 있다가 배움이 완결되면 

학생의 활동을 통해 밖으로 발휘되고, 

그 경우 아는 자의 활동 안에 학생이 자리잡게 된다.

                                           εἰ γὰρ μὴ οὕτω γίγνεται, ὁ 

Παύσωνος ἔσται Ἑρμῆς· ἄδηλος γὰρ καὶ ἡ ἐπιστήμη εἰ                             20

ἔσω ἢ ἔξω, ὥσπερ κἀκεῖνος. τὸ γὰρ ἔργον τέλος, ἡ δὲ 

ἐνέργεια τὸ ἔργον, διὸ καὶ τοὔνομα ἐνέργεια λέγεται κατὰ 

τὸ ἔργον καὶ συντείνει πρὸς τὴν ἐντελέχειαν. 

만일 그런 식으로 생성되지 않는다면, 파우손의

헤르메스 상이 있게 될 것이다. 지식 역시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가, 마치 저 조각상처럼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실현[기능]이 완결이고, 현실태가 그

실현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ergon(실현)'에 따라

'energeia(현실태)'라는 이름이 진술되고

완결태(entelecheia)로 확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ἐπεὶ δ᾿ ἐστὶ 

τῶν μὲν ἔσχατον ἡ χρῆσις (οἷον ὄψεως ἡ ὅρασις, καὶ οὐθὲν 

γίγνεται παρὰ ταύτην ἕτερον ἀπὸ τῆς ὄψεως), ἀπ᾿ ἐνίων                          25

δὲ γίγνεταί τι (οἷον ἀπὸ τῆς οἰκοδομικῆς οἰκία παρὰ τὴν 

οἰκοδόμησιν), ὅμως οὐθὲν ἧττον ἔνθα μὲν τέλος, ἔνθα δὲ 

μᾶλλον τέλος τῆς δυνάμεώς ἐστιν· ἡ γὰρ οἰκοδόμησις ἐν 

τῷ οἰκοδομουμένῳ, καὶ ἅμα γίγνεται καὶ ἔστι τῇ οἰκίᾳ. 

그런데 어떤 것들의 경우 사용이 극단이고 (이를 테면 봄이 

시각의 극단이고, 시각으로부터는 이 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는다), 어떤 일부 것들로부터는 무언가가

생성되지만 (이를 테면 건축술로부터 건축활동 외에 건물이 

생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서는 사용이 [생성물에

비해] 전혀 덜함이 없이 완결이고, 다른 쪽에서는 가능에

비하면 훨씬 더 완결로서 있다. 왜냐하면 건축은 건축되는 것 

안에, 건물과 함께 생성되고 또한 있기 때문이다.

> Energeia 는 Active/Passive 중 후자 안에 잠재되어 있다.

건축은 건축물과 시간적으로 동시에 생기기는 어렵다. 

> Dynamis는 소유/사용자 안에, 그런데 Xresis는 생성물 

안에 있으니 Xresis가 Telos에 자연스럽게 더욱 가깝다.

여기서 hama를 시간적으로 읽을지 공간적으로 읽을지. 

ὅσων μὲν οὖν ἕτερόν τί ἐστι παρὰ τὴν χρῆσιν τὸ γιγνόμε-                         30

νον, τούτων μὲν ἡ ἐνέργεια ἐν τῷ ποιουμένῳ ἐστίν (οἷον ἥ τε 

οἰκοδόμησις ἐν τῷ οἰκοδομουμένῳ καὶ ἡ ὕφανσις ἐν τῷ 

ὑφαινομένῳ, ὁμοίως δὲ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καὶ ὅλως ἡ 

κίνησις ἐν τῷ κινουμένῳ)· 

그리하여 사용 외에 생성되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들의 

경우, 그것들의 현실태는 행해지는 것 안에 있다 (이를 테면 

건축도 건축되는 것 안에 있고 직조는 직조되는 것 안에 

있으며, 여타의 것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운동은 운동되는 것 안에 있다).

                                          ὅσων δὲ μὴ ἔστιν ἄλλο τι ἔργον 

παρὰ τὴν ἐνέργειαν, ἐν αὐτοῖς ὑπάρχει ἡ ἐνέργεια (οἷον ἡ                         35

ὅρασις ἐν τῷ ὁρῶντι καὶ ἡ θεωρία ἐν τῷ θεωροῦντι καὶ ἡ 

ζωὴ ἐν τῇ ψυχῇ, διὸ καὶ ἡ εὐδαιμονία· ζωὴ γὰρ ποιά                        1050b1

τίς ἐστιν). 

그런데 현실태 이외에 여타 어떤 실현이 있지 않은

것들의 경우, 그것들 자체 내에 현실태가 존속한다

(이를 테면 봄은 보고 있는 자 안에 관조는 관조하는 자

안에 생은 영혼 안에 있고, 이로 인해 행복 또한

그러하다. 행복이 어떤 모종의 생으로서 있기 때문이다).

                ὥστε φανερὸν ὅτι ἡ οὐσία καὶ τὸ εἶδος ἐνέργειά 

ἐστιν. κατά τε δὴ τοῦτον τὸν λόγον φανερὸν ὅτι πρότερον 

τῇ οὐσίᾳ ἐνέργεια δυνάμεως, καὶ ὥσπερ εἴπομεν, τοῦ χρόνου 

ἀεὶ προλαμβάνει ἐνέργεια ἑτέρα πρὸ ἑτέρας ἕως τῆς τοῦ                           5

ἀεὶ κινοῦντος πρώτως. 

그래서 실체와 형상이 현실태로 있다는 점이 분명하다.

그래서 같은 논리에 따라서도 실체에 있어서 현실태가

가능태보다 우선하는 것임이 분명하고, 우리가 주장하였듯,

한 현실태가 다른 현실태에 대해 일정 시간 내에 언제나

앞서며 매번 일차적으로 운동하는 것의 현실태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 '매번 일차적으로 운동하는 것'의 '매번'은 잠재-현실의

각 계열 부동의 원동자'들'. 아버지-아들 이거나 스승-제자 이거나 

여러 가지.

                                      ―ἀλλὰ μὴν καὶ κυριωτέρως· τὰ μὲν 

γὰρ ἀΐδια πρότερα τῇ οὐσίᾳ τῶν φθαρτῶν, ἔστι δ᾿ οὐθὲν

δυνάμει αΐδιον. λόγος δὲ ὅδε· πᾶσα δύναμις ἅμα τῆς 

ἀντιφάσεώς ἐστιν· τὸ μὲν γὰρ μὴ δυνατὸν ὑπάρχειν οὐκ 

ἂν ὑπάρξειεν οὐθενί, τὸ δυνατὸν δὲ πᾶν ἐνδέχεται μὴ ἐνερ-                     10

γεῖν. 

허나 물론 더욱 주도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영속적인 것들은 소멸하는 것들보다 실체에 있어서

우선하는데, 그 어떤 영속적인 것도 가능적으로 않기 

때문이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모든 가능은 모순에

동시에 관련하여 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존속이

가능하지 않은 것은 무엇으로 보나 존속하지 못할 것이나,

가능한 모든 것은 실현되지 않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τὸ ἄρα δυνατὸν εἶναι ἐνδέχεται καὶ εἶναι καὶ μὴ 

εἶναι· τὸ αὐτὸ ἄρα δυνατὸν καὶ εἶναι καὶ μὴ εἶναι. 

그래서 있음이 가능한 것은 있다는 것도 있지 않다는

것도 허용된다. 그래서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 1. F와 ~F 두 능력이 있고 각각의 발휘 결과는 상반된다.

    2. F의 능력은 발휘되거나 발휘되지 않고 결과는 상반된다.

> Cf. 앞서 이성적 능력이 양방향인 경우.

                                                                             τὸ 

δὲ δυνατὸν μὴ εἶναι ἐνδέχεται μὴ εἶναι· τὸ δὲ ἐνδεχόμε-

νον μὴ εἶναι φθαρτόν, ἢ ἁπλῶς ἢ τοῦτο αὐτὸ ὃ λέγεται 

ἐνδέχεσθαι μὴ εἶναι, ἢ κατὰ τόπον ἢ κατὰ τὸ ποσὸν ἢ ποιόν·                   15

ἁπλῶς δὲ τὸ κατ᾿ οὐσίαν. 

그런데 있지 않음이 가능한 것은 있지 않다는 것도

허용된다. 있지 않음이 허용되는 것은 소멸할 수 있는 것

인데, 단적으로든 아니면 장소에 따라서나 양에 따라서나 질에

따라서나 있지 않음이 허용된다고 진술되는 바로 그런

것으로서든 그러하다. 그런데 실체에 따라서 라는 것이

단적으로 라는 것이다.

                                          οὐθὲν ἄρα τῶν ἀφθάρτων ἁπλῶς 

δυνάμει ἔστιν ἁπλῶς (κατά τι δὲ οὐδὲν κωλύει, οἷον ποιὸν 

ἢ πού)· ἐνεργείᾳ ἄρα πάντα· οὐδὲ τῶν ἐξ ἀνάγκης ὄντων 

(καίτοι ταῦτα πρῶτα· εἰ γὰρ ταῦτα μὴ ἦν, οὐθὲν ἂν ἦν)· 

그래서 단적으로 불멸하는 것들 중 아무것도 가능태로서

단적으로 있지는 않다 (어떤 점에 따라서는 전혀 안될 것도 

없는데, 예를 들어 질이나 장소에 따라 그러하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은 현실태로서 있다. 필연적으로 있는 것들 

중에서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일차적인 

것들이다. 왜냐하면 만일 이런 것들이 있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있지 않았을 테니까).

οὐδὲ δὴ κίνησις, εἴ τίς ἐστιν ἀΐδιος· οὐδ᾿ εἴ τι κινούμενον ἀΐδιον,              20

οὐκ ἔστι κατὰ δύναμιν κινούμενον ἀλλ᾿ ἢ ποθὲν ποί (τούτου 

δ᾿ ὕλην οὐδὲν κωλύει ὑπάρχειν), διὸ ἀεὶ ἐνεργεῖ ἥλιος καὶ 

ἄστρα καὶ ὅλος ὁ οὐρανός, καὶ οὐ φοβερὸν μή ποτε στῇ, ὃ 

φοβοῦνται οἱ περὶ φύσεως. 

그래서 운동도 [단적으로 가능태로서] 있지는 않은데, 만일

어떤 영원한 운동이 [단적으로] 있다면 그러하다. 만일 어떤

것이 영속적으로 운동된다면, 그것도 가능에 따라 운동되는 

것으로 있는 게 아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운동하는 게 아니면.

(이것의 질료가 존속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로

인해 태양과 별들과 천구 전체가 언제까지나 현현하며, 자연에

관련하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바, 언젠가 멎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없이 그러하다. 

> 어디에서 어디로: 영속적 운동인 회전운동에서 위치 상 

가능적으로 동쪽에 있는 현실적으로 서쪽에 있는 태양 같은 것.

                                            οὐδὲ κάμνει τοῦτο δρῶντα· οὐ                 //231213

γὰρ περὶ τὴν δύναμιν τῆς ἀντιφάσεως αὐτοῖς, οἷον τοῖς                            25

φθαρτοῖς, ἡ κίνησις, ὥστε ἐπίπονον εἶναι τὴν συνέχειαν τῆς 

κινήσεως· ἡ γὰρ οὐσία ὕλη καὶ δύναμις οὖσα, οὐκ ἐνέργεια, 

αἰτία τούτου. 

그것들은 이런 일을 수행함에 지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모순에 속한 가능과 관련하여 그것들에게, 이를

테면 소멸하는 것들에게 그 운동이, 그 운동의 연속이

고역으로 있게끔, 그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질료이자 가능인 실체가, 현실태이지 않은 것으로서,

그 일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 여기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지침'이나 '고역'을 고려하면, 

필멸자들에게 모순과 관련된 가능적 운동의 경우, 가능조건이

모두 충족되더라도 실현으로 곧장 이어지는 게 

아니라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질료와 가능이 실체 역할을 하는 필멸자의 경우에는 

노력이 추가된다는 추가 설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 지금 논의가 수동에 한정인가 능동까지 포함인가 아니면 

능동이 중심인가. 

                      μιμεῖται δὲ τὰ ἄφθαρτα καὶ τὰ ἐν μετα-

βολῇ ὄντα, οἷον γῆ καὶ πῦρ. καὶ γὰρ ταῦτα ἀεὶ ἐνεργεῖ· 

καθ᾿ αὑτὰ γὰρ καὶ ἐν αὑτοῖς ἔχει τὴν κίνησιν.                                            30

그런데 변화 안에 있는 것들, 이를 테면 땅과 불 역시 

불멸하는 것들을 모방한다. 왜냐하면 이것들도 언제나 

현현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자체 안에서 운동을 

지니니 말이다.

> '언제나 현현'은 특정 방식으로'만' 언제나 현현하는 

불멸한느 것에 대해 모방하는 것으로서 '어떻게든' 

계속 운동하긴 한다는 정도의 의미로 by Kang.

                                                                       αἱ δὲ                                    30

ἄλλαι δυνάμεις, ἐξ ὧν διώρισται, πᾶσαι τῆς ἀντιφάσεώς 

εἰσιν· τὸ γὰρ δυνάμενον ὡδὶ κινεῖν δύναται καὶ μὴ ὡδί, 

ὅσα γε κατὰ λόγον· αἱ δ᾿ ἄλογοι τῷ παρεῖναι καὶ μὴ 

τῆς ἀντιφάσεως ἔσονται αἱ αὐταί. 

그런데 규정된 것들로부터 유래하는 여타의 가능들은 

모두 대립에 속하여 있다. 특정 방식으로 운동시키는 일이 

가능한 것은 그 방식이 아닌 식으로도 운동시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논리에 따르는 것들을 말이다. 

그런데 비논리적인 가능들은 대립이 곁하여 있음과 

그렇지 않음에 의해 같은 가능들로 있을 것이다.

> antiphasis와 enantia는 구분되는가 구분되지 않는가?

여기서는 antiphasis가 enantia와 마찬가지로 취급되는 느낌.

그런데 antiphasis는 F 능력과 ~F 능력, enantia는 F의 실현과 

비실현이란 차이가 있지 않았나? 

의술의 경우 못 고친 것, 안 고친 것, 악화시킨 것.

> Cf. 자연학 8권 1장 자연의 운동은 영원을 모방한다는 논의. 

자연학에서는 antiphasis가 아니라 enantia로 논의.

                                                      εἰ ἄρα τινὲς εἰσὶ φύ-

σεις τοιαῦται ἢ οὐσίαι οἵας λέγουσιν οἱ ἐν τοῖς λόγοις τὰς                         35

ἰδέας, πολὺ μᾶλλον ἐπιστῆμον ἄν τι εἴη ἢ αὐτὸ ἐπιστήμη 

καὶ κινούμενον ἢ κίνησις· ταῦτα γὰρ ἐνέργειαι μᾶλλον,                   1051a1

ἐκεῖναι δὲ δυνάμεις τούτων. 

그래서 만일 모종의 자연들 혹은 실체들이 논리에

머무는 자들이 이데아들이라 부르는 그런 것들로

있다면, 앎 자체보다 훨씬 더한 모종의 것이 있을 테고

운동보다 더한 운동하는 것이 있을 터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훨씬 더 현실태들로 있고, 저 이데아들은

이것들의 가능들이기 때문이다.

> 이데아가 energeia라고 보고 제3인간 논변 끌어들이기.

> 이데아가 dynamis라고 보고 영원한 dynamis 역설 비판. by Kang.

                                             ὅτι μὲν οὖν πρότερον ἡ ἐνέργεια 

καὶ δυνάμεως καὶ πάσης ἀρχῆς μεταβλητικῆς, φανερόν. 

그러므로 현실태가 가능태보다도 그리고 모든

변화시키는 원리들보다도 우선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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