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gegen enthält die Vorstellung eines Körpers in der Anschauung gar nichts, was ein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zukommen könnte, sondern bloß die Erscheinung von etwas, und die Art, wie wir dadurch affiziert werden, und diese Rezeptivität unserer Erkenntnisfähigkeit heißt Sinnlichkeit, und bleibt von der Erkenntnis des Gegenstandes an sich selbst, ob man jene (die Erscheinung) gleich bis auf den Grund durchschauen möchte, dennoch himmelweit unterschieden.

그에 반해 물체의 표상은 직관 안에서 아무런 것도 전혀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대상 그 자체에 수반할 수 있을,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한 순전한 현상만을, 그리고 그 방식을, 우리가 그를 통하여 자극되는,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능력의 이러한 수용성이 감성이라 불리우며, 대상 그 자체의 인식에 대하여 남는다, 사람들이 저것(현상)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본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차이가 나는 것이.

→ 그에 반해 물체의 표상은 직관 안에서, 대상 그 자체에 수반할 수 있을 아무런 것도 전혀 포함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한 순전한 현상만을, 그리고 우리가 그를 통하여 자극되는 그 방식을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능력의 이러한 수용성이 감성이라 불리우며, 사람들이 저것(현상)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본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차이가 나는 것이 대상 그 자체의 인식에 대하여 남는다.

 

Die Leibniz-Wolffische Philosophie hat daher allen Untersuchungen über die Natur und den Ursprung unserer Ereknntnisse einen ganz unrechten Gesichtspunkt angewissen, indem sie den Unterschied der SInnlichkeit vom Intellektuellen bloß als logisch betrachtete, da er offenbar transzendental ist, und nicht bloß die Form der Deutlichkeit oder Undeutlichkeit, sondern den Ursprung und den Inhalt derselben betrifft, so daß wir durch die erstere die Beschaffenheit der Dinge an sich selbst nicht bloß undeutlich, sondern gar nicht erkennen, und, so bald wir unsre subjektive Beschaffenheit wegnehmen, das vorgestellte Objekt mit den Eigenschaften, die ihm die sinnliche Anschauung beilegte, überall nirgend anzutreffen ist, noch angetroffen werden kann, indem eben diese subjektive Beschaffenheit die Form desselben, als Erscheinung, bestimmt.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은 그에 따라 우리 인식들의 본성과 근원에 대한 모든 연구들에 전적으로 부당한 관점을 지닌다, 그 안에서 그 철학이 지성적인 것에 대한 감성의 차이를 순전히 논리적인 것으로 여기는, 그 차이가 명백하게 초월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명료함이나 불분명함의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근원과 내용에 관계한다, 그래서 우리가 전자를 통하여 사물 그 자체의 특성을 그저 불분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주관적 특성을 제거하자마자, 표상된 객관이 본성들과, 그 본성들이 그 객관에게 감각적 직관을 부가하는, 어디에서도 전혀 마주치지 않고, 마주쳐질 수조차 없다, 그 안에서 이러한 주관적 특성은 객관의 형식을, 현상으로서, 규정한다.

→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은 그에 따라 우리 인식들의 본성과 근원에 대한 모든 연구들에, 그 안에서 그 철학이 지성적인 것에 대한 감성의 차이를 순전히 논리적인 것으로 여기는 그러한 전적으로 부당한 관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차이가 명백하게 초월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명료함이나 불분명함의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근원과 내용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자를 통하여 사물 그 자체의 특성을 그저 불분명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주관적 특성을 제거하자마자, 표상된 객관이 그 객관에게 감각적 직관을 부가하는 본성들과 어디에서도 전혀 마주치지 않고, 마주쳐질 수조차 없다. 그 안에서 이러한 주관적 특성은 객관의 형식을 현상으로서 규정한다.

 

-蟲-

Wenn wir diese unsre Anschauung auch zum höchsten Grade der Deutlichkeit bringen könnten, wo würden wir dadurch der Beschaffeneit der Gegenstände an sich selbst nicht näher kommen. Denn wir würden auf allen Fall doch nur unsre Art der Anschauung d.i. unsere Sinnlichkeit vollständig erkennen, und diese immer nur unter den dem Subjekt ursprünglich anhängenden Bedingungen, von Raum und Zeit; was die Gegenstände an sich selbst sein mögen, würde uns durch die aufgeklärteste Erkenntnis der Erscheinung derselben, die uns allein gegeben ist, doch niemals bekannt werden.

→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직관을 또한 명료성의 가장 높은 단계로 가져 올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대상들 자체의 성질에 더 가까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 오로지 우리의 직관방식, 즉, 언제나 단지 주관 아래에 근원적으로 수반하는 조건들인 이러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우리의 감성만을 완전히 인식할 것이고; 대상들 자체가 무엇일지, 우리에게, 오로지 우리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그것들의 현상에 대한 개선된 인식을 통하여서는 또한 전혀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Daß daher unsere ganze Sinnlichkeit nichts als die versorrene Vorstellung der Dinge sei, welche lediglich das enthält, was ihnen an sich selbst zukömmt, aber nur unter einer Zusammenhäufung von Merkmalen und Teilvorstellungen, die wir nicht mit Bewußtsein auseinander setzen, ist eine Verfälschung des Begriffs von Sinnlichkeit und von Erscheinung, welche die ganze Lehre derselben unnütz und leer macht. Der Unterschied einer undeutlichen von der deutlichen Vorstellung ist bloß logisch, und betrifft nicht den Inhalt. Ohne Zweifel enthält der Begriff von Recht, dessen sich der gesunde Verstand bedient, eben dasselbe, was die subtileste Spekulation aus ihm entwickeln kann, nur daß im gemeinen und praktischen Gebrauche man sich dieser mannigfaltigen Vorstellungen in diesem Gedanken, nicht bewußt ist. Darum kann man nicht sagen, daß der gemeine Begriff sinnlich sei, und eine bloße Erscheinung enthalte, denn das Recht kann gar nicht erscheinen, sondern sein Begriff liegt im Verstande, und stellet eine Beschaffenheit (die moralische) der Handlungen vor, die ihnen an sich selbst zukommt.

→ 그런 이유로 우리의 전체 감성은 사물의 복잡한 표상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이 다만, 그것들에게 그 자체로 부합할 것을, 그러나 단지, 그것들을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분석하지 않는 특징들과 부분표상들에 대한 축적 아래에서만 포함할 것이라는 것은, 감성과 현상에 대한, 그에 대한 전체 학설을 헛되고 공허하게 만드는, 개념의 날조이다.→ 분명한 표상에 대한 불분명한 표상의 구분은 순전히 논리적이고, 내용과 관계맺지 않는다.→ 건전한 지성이 사용하는 법의 개념은 의심할 바 없이 섬세한 사변이 그로부터 전개할 수 있는 동일한 것을 포함한다. 단지 그 보편적이고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 사유 속에서 이러한 잡다한 표상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에 대해 사람들은, 보편적 개념이 감각적이라고, 그리고 순전한 현상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법은 전혀 현상할 수 없고, 오히려 지성 안에 놓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며, 그것 자체에 수반하는 행위의 특성(도덕적인)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Wenn wir diese unsre Anschauung auch zum höchsten Grade der Deutlichkeit bringen könnten, wo würden wir dadurch der Beschaffenheit der Gegenstände an sich selbst nicht näher kommen.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직관을 또한 명료성의 가장 높은 단계로 가져 올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대상들 자체의 성질에 더 가까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직관을 또한 명료성의 가장 높은 단계로 가져 올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대상들 자체의 성질에 더 가까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Denn wir würden auf allen Fall doch nur unsre Art der Anschauung d.i. unsere Sinnlichkeit vollständig erkennen, und diese immer nur unter den dem Subjekt ursprünglich anhängenden Bedingungen, von Raum und Zeit; was die Gegenstände an sich selbst sein mögen, würde uns durch die aufgeklärteste Erkenntnis der Erscheinung derselben, die uns allein gegeben ist, doch niemals bekannt werden.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 오로지 우리의 직관방식, 즉 우리의 감성만을 완전히 인식할 것이고, 이러한 감성이 언제나 단지 주관 아래에 근원적으로 수반하는 조건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대상들 자체가 무엇일지, 우리에게 그것들의 현상에 대한 개선된 인식을 통하여, 그 현상이 오로지 우리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또한 전혀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 오로지 우리의 직관방식, 즉, 언제나 단지 주관 아래에 근원적으로 수반하는 조건들인 이러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우리의 감성만을 완전히 인식할 것이고; 대상들 자체가 무엇일지, 우리에게, 오로지 우리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그것들의 현상에 대한 개선된 인식을 통하여서는 또한 전혀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Daß daher unsere ganze Sinnlichkeit nichts als die verworrene Vorstellung der Dinge sei, welche lediglich das enthält, was ihnen an sich selbst zukömmt, aber nur unter einer Zusammenhäufung von Merkmalen und Teilvorstellungen, die wir nicht mit Bewußtsein auseinander setzen, ist eine Verfälschung des Begriffs von Sinnlichkeit und von Erscheinung, welche die ganze Lehre derselben unnütz und leer macht.

그런 이유로 우리의 전체 감성은 사물의 복잡한 표상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이 다만 포함할 것이다, 그것들에게 그 자체로 부합할 것을, 그러나 단지 특징들과 부분표상들에 대한 축적 아래에서만, 그것들을 우리가 의식과 나누어 놓지 않는, 감성과 현상에 대한 개념의 날조이다, 그에 대한 전체 학설을 헛되고 공허하게 만드는.

→ 그런 이유로 우리의 전체 감성은 사물의 복잡한 표상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이 다만, 그것들에게 그 자체로 부합할 것을, 그러나 단지, 그것들을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분석하지 않는 특징들과 부분표상들에 대한 축적 아래에서만 포함할 것이라는 것은, 감성과 현상에 대한, 그에 대한 전체 학설을 헛되고 공허하게 만드는, 개념의 날조이다.

Der Unterschied einer undeutlichen von der deutlichen Vorstellung ist bloß logisch, und betrifft nicht den Inhalt.

분명한 표상에 대한 불분명한 표상의 구분은 순전히 논리적이고, 내용과 관계맺지 않는다.

→ 분명한 표상에 대한 불분명한 표상의 구분은 순전히 논리적이고, 내용과 관계맺지 않는다.

Ohne Zweifel enthält der Begriff von Recht, dessen sich der gesunde Verstand bedient, eben dasselbe, was die subtileste Spekulation aus ihm entwickeln kann, nur daß im gemeinen und praktischen Gebrauche man sich dieser mannigfaltigen Vorstellungen in diesem Gedanken, nicht bewußt ist.

법의 개념은, 건전한 지성이 사용하는, 의심할 바 없이 동일한 것을, 섬세한 사변이 그로부터 전개할 수 있는, 포함한다, 단지 그 보편적이고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 사유 속에서 이러한 잡다한 표상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 건전한 지성이 사용하는 법의 개념은 의심할 바 없이 섬세한 사변이 그로부터 전개할 수 있는 동일한 것을 포함한다. 단지 그 보편적이고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 사유 속에서 이러한 잡다한 표상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Darum kann man nicht sagen, daß der gemeine Begriff sinnlich sei, und eine bloße Erscheinung enthalte, denn das Recht kann gar nicht erscheinen, sondern sein Begriff liegt im Verstande, und stellet eine Beschaffenheit (die moralische) der Handlungen vor, die ihnen an sich selbst zukommt.

그에 대해 사람들은 말할 수 없다, 보편적 개념이 감각적이라고, 그리고 순전한 현상을 포함한다고, 왜냐하면 법은 전혀 현상할 수 없고, 오히려 지성 안에 놓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며, 행위의 특성(도덕적인)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에 수반하는.

→ 그에 대해 사람들은, 보편적 개념이 감각적이라고, 그리고 순전한 현상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법은 전혀 현상할 수 없고, 오히려 지성 안에 놓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며, 그것 자체에 수반하는 행위의 특성(도덕적인)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蟲-

Wir haben also sagen wollen: daß alle unsre Anschauung nichts als die Vorstellung von Erscheinung sei: daß die Dinge, die wir anschauen, nicht das an sich selbst sind, wofür wir sie anschauen, noch ihre Verhältnisse so an sich selbst beschaffen sind, als sie uns erscheinen, und daß, wenn wir unser Subjekt oder auch nur die subjektive Beschaffenheit der Sinne überhaupt aufheben, alle die Beschaffenheit, alle Verhältnisse der Objekte im Raum und Zeit, ja selbst Raum und Zeit verschwinden würden, und als Erscheinungen nicht an sich selbst, sondern nur in uns existieren können. Was es für eine Bewandtnis mit den Gegenständen an sich und abgesondert von aller dieser Rezeptivität unserer Sinnlichkeit haben möge, bleibt uns gänzlich unbekannt. Wir kennen nichts, als unsere Art, sie wahrzunehmen, die uns eigentümlich ist, die auch nicht notwendig jedem Wesen, obzwar jedem Menschen, zukommen muß. Mit dieser haben wir es lediglich zu tun. Raum und Zeit sind die reinen Formen derselben, Empfindung überhaupt die Materie. Jene können wir allein a priori d.i. vor aller wirklichen Wahrnehmung erkennen, und sie heißet darum reine Anschauung; diese aber ist das in unserm Erkenntnis, was da macht, daß sie Erkenntnis a posteriori d.i. empirische Anschauung heißt. Jene hängen unsrer Sinnlichkeit schlechthin notwendig an, welcher Art auch unsere Empfindungen sein mögen; diese können sehr verschieden sein.

→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들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 외에 그렇게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관 또는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이라도 지양한다면, 그 모든 성질,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객관의 모든 관계들, 심지어 공간과 시간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그리고 현상으로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우리 안에 현존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였다.→ 대상들 자체와 관련한 사정에 대한 것과 우리의 감성의 이러한 모든 수용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남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각하는 우리에게 특유한, 또한 각 존재자에게, 각 인간들에게는 필연적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우리의 방식 이외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이러한 방식과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공간과 시간은 그것의 순수한 형식이고, 지각 전반은 그 질료이다.→ 전자를 오직 우리만이 선험적으로, 즉, 모든 실질적인 지각에 앞서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은 그런 이유로 순수직관이라 불린다; 그러나 후자는 여기에서 후험적 인식, 즉, 감각적 직관이라 불리는 것을 형성하는 것,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의 지각이 어떠한 종류이든 우리의 감성에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속한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잘 구분될 수 있다.

 

 

Wir haben also sagen wollen:

우리는 그러므로 말하고자 하였다:

daß alle unsre Anschauung nichts als die Vorstellung von Erscheinung sei: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daß die Dinge, die wir anschauen, nicht das an sich selbst sind, wofür wir sie anschauen, noch ihre Verhältnisse so an sich selbst beschaffen sind, als sie uns erscheinen, und daß, wenn wir unser Subjekt oder auch nur die subjektive Beschaffenheit der Sinne überhaupt aufheben, alle die Beschaffenheit, alle Verhältnisse der Objekte im Raum und Zeit, ja selbst Raum und Zeit verschwinden würden, und als Erscheinungen nicht an sich selbst, sondern nur in uns existieren können.

사물들은, 그것들을 우리가 직관하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도 그렇게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라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 외에,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관 또는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이라도 지양한다면, 그 모든 성질,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객관의 모든 관계들, 심지어 공간과 시간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라고), 그리고 현상으로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우리 안에 현존할 수 있다.

→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들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 외에 그렇게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관 또는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이라도 지양한다면, 그 모든 성질,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객관의 모든 관계들, 심지어 공간과 시간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그리고 현상으로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우리 안에 현존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였다.

Was es für eine Bewandtnis mit den Gegenständen an sich und abgesondert von aller dieser Rezeptivität unserer Sinnlichkeit haben möge, bleibt uns gänzlich unbekannt.

대상들 자체와 관련한 사정에 대한 것과 우리의 감성의 이러한 모든 수용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남는다.

→ 대상들 자체와 관련한 사정에 대한 것과 우리의 감성의 이러한 모든 수용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남는다.

Wir kennen nichts, als unsere Art, sie wahrzunehmen, die uns eigentümlich ist, die auch nicht notwendig jedem Wesen, obzwar jedem Menschen, zukommen muß.

우리는 우리의 방식 이외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들을 지각하는, 그 방식은 우리에게 특유한, 또한 각 존재자에게, 각 인간들에게는 필연적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 우리는 그것들을 지각하는 우리에게 특유한, 또한 각 존재자에게, 각 인간들에게는 필연적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우리의 방식 이외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Mit dieser haben wir es lediglich zu tun.

우리는 단지 이러한 것과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 우리는 단지 이러한 방식과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Raum und Zeit sind die reinen Formen derselben, Empfindung überhaupt die Materie.

공간과 시간은 그것의 순수한 형식이다, 지각 전반은 그 질료이다.

→ 공간과 시간은 그것의 순수한 형식이고, 지각 전반은 그 질료이다.

Jene können wir allein a priori d.i. vor aller wirklichen Wahrnehmung erkennen, und sie heißet darum reine Anschauung;

이것들을 오직 우리만이 선험적으로, 즉, 모든 실질적인 지각에 앞서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은 그런 이유로 순수직관이라 불린다;

diese aber ist das in unserm Erkenntnis, was da macht, daß sie Erkenntnis a posteriori d.i. empirische Anschauung heißt.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형성하는 것, 그것들이 후험적 인식, 즉, 감각적 직관이라 불리는 것.

→ 전자를 오직 우리만이 선험적으로, 즉, 모든 실질적인 지각에 앞서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은 그런 이유로 순수직관이라 불린다; 그러나 후자는 여기에서 후험적 인식, 즉, 감각적 직관이라 불리는 것을 형성하는 것,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다.

Jene hängen unsrer Sinnlichkeit schlechthin notwendig an, welcher Art auch unsere Empfindungen sein mögen;

전자는 우리의 감성에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속한다, 우리의 지각이 어떠한 종류이든;

diese können sehr verschieden sein.

이러한 것들은 매우 잘 구분될 수 있다.

→ 전자는, 우리의 지각이 어떠한 종류이든 우리의 감성에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속한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잘 구분될 수 있다.

 

-蟲-

In unserer Theorie, von der wahren Beschaffenheit dieser zwei ursprünglichen Formen der Sinnlichkeit, ist beiden Schwierigkeiten abgeholfen.

→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Daß schlüßl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mehr, als diese zwei Elemente, nämlich Raum und Zeit, enthalten könne, ist daraus klar, weil alle andre zur Sinnlichkeit gehörige Begriffe, selbst der der Bewegung, welcher beide Stücke vereiniget, etwas Empirisches voraussetzen. Denn diese setzt die Wahrnehmung von etwas Beweglichem voraus. Im Raum, an sich selbst betrachtet, ist aber nichts Bewegliches: Daher das Bewegliche etwas sein muß, was im Raume nur durch Erfahrung gefunden wird, mithin ein empirisches Datum. Eben so kann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den Begriff der Veränderung unter ihre Data a priori zählen: denn die Zeit selbst verändert sich nicht, sondern etwas, das in der Zeit ist. Also wird dazu die Wahrnehmung von irgend einem Dasein, und der Sukzession seiner Bestimmungen, mithin Erfahrung erfordert.

→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더 이상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두 부분들을 결합한 운동의 개념 자체도,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숙고된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규정의 승계에 대한 지각, 따라서 경험이 요구된다.

 

§ 8. Allgemeine Anmerkungen zur Transzendentalen Ästhetik

 

Ⅰ. Zuerst wird es nötig sein, uns so dutlich, als möglich, zu erklären, was in Ansehung der Grundbeschaffenheit der sinnlichen Erkenntnis überhaupt unsre Meinung sei, um aller Mißdeutung derselben vorzubeugen.

→ Ⅰ.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밝히는 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In unserer Theorie, von der wahren Beschaffenheit dieser zwei ursprünglichen Formen der Sinnlichkeit, ist beiden Schwierigkeiten abgeholfen.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Daß schlüßl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mehr, als diese zwei Elemente, nämlich Raum und Zeit, enthalten könne, ist daraus klar, weil alle andre zur Sinnlichkeit gehörige Begriffe, selbst der der Bewegung, welcher beide Stücke vereiniget, etwas Empirisches voraussetzen.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더 이상,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운동의 개념 자체, 두 부분들을 결합한,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더 이상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두 부분들을 결합한 운동의 개념 자체도,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Denn diese setzt die Wahrnehmung von etwas Beweglichem voraus.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Im Raum, an sich selbst betrachtet, ist aber nichts Bewegliches:

공간 안에서, 그 자체로 숙고된,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Daher das Bewegliche etwas sein muß, was im Raume nur durch Erfahrung gefunden wird, mithin ein empirisches Datum.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 그러나 그 자체로 숙고된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Eben so kann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den Begriff der Veränderung unter ihre Data a priori zählen: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denn die Zeit selbst verändert sich nicht, sondern etwas, das in der Zeit ist.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Also wird dazu die Wahrnehmung von irgend einem Dasein, und der Sukzession seiner Bestimmungen, mithin Erfahrung erfordert.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에 대하여, 그리고 지각의 규정의 승계에 대하여, 따라서 경험에 대하여 요구된다.

→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규정의 승계에 대한 지각, 따라서 경험이 요구된다.

 

§ 8. Allgemeine Anmerkungen zur Transzendentalen Ästhetik

§ 8. 초월론적 감성학에 대한 일반적 주해

 

Ⅰ. Zuerst wird es nötig sein, uns so dutlich, als möglich, zu erklären, was in Ansehung der Grundbeschaffenheit der sinnlichen Erkenntnis überhaupt unsre Meinung sei, um aller Mißdeutung derselben vorzubeugen.

Ⅰ. 무엇보다도 그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밝히는 것,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그것의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 Ⅰ.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밝히는 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蟲-

Nehmen sie die zweite Partei (von der einige metaphysische Naturlehrer sind), und Raum und Zeit gelten ihnen als von der Erfahrung abstrahierte, obzwar in der Absonderung verworren vorgestellte, Verhältnisse der Erscheinungen (neben oder nach einander); so müssen sie den mathematischen Lehren a priori in Ansehung wirklicher Dinge (z.E. im Raume) ihre Gültigkeit, wenigstens die apodiktische Gewißheit bestreiten, indem diese a posteriori gar nicht stattfindet, und die Begriffe a priori von Raum und Zeit, dieser Meinung nach, nur Geschöpfe der Einbildungskraft sind, deren Quell wirklich in der Erfahrung gesucht werden muß, aus deren abstrahierten Verhältnissen die Einbildung etwas gemacht hat, was zwar das Allgemeine derselben enthält, aber ohne die Restriktionen, welche die NAutr mit denselben verknüpft hat, nicht stattfinden kann. Die ersteren gewinnen so viel, daß sie für die mathematishcen Behauptungen sich das Feld der Erscheinungen frei machen. Dagegen verwirren sie sich sehr durch eben diese Bedingungen, wenn der Verstand über dieses Feld hinausgehen will. Die zweiten gewinnen zwar in Ansehung des letzteren, nämlich, daß die Vorstellungen von Raum und Zeit ihnen nicht in den Weg kommen, wenn sie von Gegenständen nicht als Erscheinungen, sondern bloß im Verhältnis auf den Verstand urteilen wollen; können aber weder von der Möglichkeit mathematischer Ereknntnisse a priori (indem ihnen eine wahre und objektiv gültige Anschauung a priori fehlt) Grund angeben, noch die Erfahrungssätze mit jenen Behauptungen in notwendige Einstimmung bringen.

→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적용된다면;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은 단지, 그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형성한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제한 없이는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첫번째 학파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그에 반해 그들은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매우 당황한다.→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에 대한 고려에 있어서, 즉,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Nehmen sie die zweite Partei (von der einige metaphysische Naturlehrer sind), und Raum und Zeit gelten ihnen als von der Erfahrung abstrahierte, obzwar in der Absonderung verworren vorgestellte, Verhältnisse der Erscheinungen (neben oder nach einander);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적용된다면,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so müssen sie den mathematischen Lehren a priori in Ansehung wirklicher Dinge (z.E. im Raume) ihre Gültigkeit, wenigstens die apodiktische Gewißheit bestreiten, indem diese a posteriori gar nicht stattfindet, und die Begriffe a priori von Raum und Zeit, dieser Meinung nach, nur Geschöpfe der Einbildungskraft sind, deren Quell wirklich in der Erfahrung gesucht werden muß, aus deren abstrahierten Verhältnissen die Einbildung etwas gemacht hat, was zwar das Allgemeine derselben enthält, aber ohne die Restriktionen, welche die Natur mit denselben verknüpft hat, nicht stattfinden kann.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이,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단지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것들의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것들의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상상이 어떤 것을 형성한,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그러나 제한 없이,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발견할 수 없다.

→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적용된다면;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은 단지, 그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형성한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제한 없이는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Die ersteren gewinnen so viel, daß sie für die mathematishcen Behauptungen sich das Feld der Erscheinungen frei machen.

첫번째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 첫번째 학파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Dagegen verwirren sie sich sehr durch eben diese Bedingungen, wenn der Verstand über dieses Feld hinausgehen will.

그에 반해 그들은 매우 당황한다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 그에 반해 그들은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매우 당황한다.

Die zweiten gewinnen zwar in Ansehung des letzteren, nämlich, daß die Vorstellungen von Raum und Zeit ihnen nicht in den Weg kommen, wenn sie von Gegenständen nicht als Erscheinungen, sondern bloß im Verhältnis auf den Verstand urteilen wollen;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를 고려하여, 즉,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können aber weder von der Möglichkeit mathematischer Ereknntnisse a priori (indem ihnen eine wahre und objektiv gültige Anschauung a priori fehlt) Grund angeben, noch die Erfahrungssätze mit jenen Behauptungen in notwendige Einstimmung bringen.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에 대한 고려에 있어서, 즉,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蟲-

Nun sind Veränderungen nur in der Zeit möglich, folglich ist die zeit etwas Wirkliches. Die Beantwortung hat keine Schwierigkeit. Ich gabe das ganze Argument zu. Die Zeit ist allerdings etwas Wirkliches, nämlich die wirkliche Form der innern Anschauung. Sie hat also subjektive Realität in Ansehung der innern Erfahrung, d.i. ich habe wirklich die Vorstellung von der Zeit und meinen Bestimmungen in ihr. Sie ist also wirklich nicht als Objekt, sondern als die vorstellungsart meiner selbst als Objekts anzusehen. Wenn aber ich selbst, oder ein ander Wesen mich, ohne diese Bedingung der Sinnlichkeit, anschauen könnte, so würden eben dieselben Bestimmungen, die wir uns jetzt als Veränderungen vorstellen, eine Erkenntnis geben, in welcher die Vorstellung der Zeit, mithin auch der Veränderung, gar nicht vorkäme. Es bleibt also ihre empirische Realität als Bedingung aller unsrer Erfahrungen. Nur die absolute Realität kann ihr nach dem oben Angeführten nicht zugestanden werden. Sie ist nichts, als die Form unsrer inneren Anschauung¹. Wenn man von ihr die besondere Bedingung unserer Sinnlichkeit wegnimmt, so verschwindet auch der Begriff der Zeit, und sie hängt nicht an den Gegenständen selbst, sondern bloß am Subjekte, welches sie anschauet.

→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인정한다.→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동일한 규정들이, 그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인식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¹Ich kann zwar sagen: meine Vorstellungen folgen einander; aber das heißt nur, wir sind uns ihrer, als in einer Zeitfolge, d.i. nach der Form des innern Sinnes, bewußt. Die Zeit ist darum nicht etwas an sich selbst, auch keine den Dingen objektiv anhängende Bestimmung.

→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Die Ursache aber, weswegen dieser Einwurf so einstimmig gemacht wird, und zwar von denen, die gleichwohl gegen die Lehre von der Idealität des Raumes nichts Einleuchtendes einzuwenden wissen, ist diese. Die absolute Reaität des Raumes hoffeten sie nicht apodiktisch dartun zu können, weil ihnen der Idealismus entgegensteht, nach welchem die Wirklichkeit äußerer Gegenstände keines strengen Beweises fähig ist: Dagegen die des Gegenstandes unserer innern Sinnen (meiner selbst und meines Zustandes) unmittelbar durchs Bewußtsein klar ist. Jene konnten ein bloßer Schein sein, dieser aber ist, ihrer Meinung nach, unleugbar etwas Wirkliches. Sie bedachten aber nicht, daß beide, ohne daß man ihre Wirklichkeit als Vorstellungen bestreiten darf, gleichwohl nur zur Erscheinung gehören, welche jederzeit zwei Seiten hat, die eine, da das Objekt an sich selbst getrachtet wird, (unangesehen der Art, dasselbe anzuschauen, dessen Beschaffenheit aber eben darum jederzeit problematisch bleibt,) die andere, da auf die Form der Anschauung dieses Gegestandes gesehen wird, welche nicht in d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sondern im Subjekte, dem derselbe erscheint, gesucht werden muß gleichwohl aber der Erscheinung dieses Gegenstandes wirklich und notwendig zukommt.

→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지만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현상하는 주관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Zeit und Raum sind demnach zwei Erkenntnisquellen, aus denen a priori synthetische Erkenntnisse geschöpft werden können, wie vornehmlich die reine Mathematik in Ansehung der Erkenntnisse vom Raume und dessen Verhältnissen ein glänzendes Beispiel gibt. Sie sind nämlich beide zusammengenommen reine Formen aller sinnlichen Anschauung, und machen dadurch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Aber diese Erkenntnisquellen a priori bestimmen sich eben dadurch (daß sie bloß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sein) ihre Grenzen, nämlich, daß sie bloß auf Gegenstände gehen, so fern sie als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nicht aber Dinge an sich selbst darstellen. Jene allein sind das Feld ihrer Gültigkeit, woraus wenn man hinausgehet, weiter kein objektiver Gebaruch derselben stattfindet. Dies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läßt übrigens die Sicherheit der Erfahrungskenntnis unangetastet: denn wir sind derselben eben so gewiß, ob diese Formen den Dingen an sich selbst, oder nur unsrer Anschauung dieser Dinge notwendiger Wiese anhängen. Dagegen die, so die absolut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behaupten, sie mögen sie nun als subsistierend, oder nur inhärierend annehmen, mit den Prinzipien der Erfahrung selbst uneinig sein müssen. Denn, entschließen sie sich zum ersteren, (welches gemeiniglich die Partei der mathematischen Naturforscher ist,) so müseen sie zwei ewige und unendliche vor sich bestehende Undinge (Raum und Zeit) annehmen, welche dasind (ohne daß doch etwas Wirkliches ist), nur um alles Wirkliche in sich zu befassen.

→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상으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저것만이,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Nun sind Veränderungen nur in der Zeit möglich, folglich ist die zeit etwas Wirkliches.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Die Beantwortung hat keine Schwierigkeit.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Ich gabe das ganze Argument zu.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시인한다.

→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인정한다.

Die Zeit ist allerdings etwas Wirkliches, nämlich die wirkliche Form der innern Anschauung.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Sie hat also subjektive Realität in Ansehung der innern Erfahrung, d.i. ich habe wirklich die Vorstellung von der Zeit und meinen Bestimmungen in ihr.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Sie ist also wirklich nicht als Objekt, sondern als die vorstellungsart meiner selbst als Objekts anzusehen.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Wenn aber ich selbst, oder ein ander Wesen mich, ohne diese Bedingung der Sinnlichkeit, anschauen könnte, so würden eben dieselben Bestimmungen, die wir uns jetzt als Veränderungen vorstellen, eine Erkenntnis geben, in welcher die Vorstellung der Zeit, mithin auch der Veränderung, gar nicht vorkäme.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동일한 규정들이, 그 규정들을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인식을 줄 것이다, 그 인식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동일한 규정들이, 그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인식을 줄 것이다.

Es bleibt also ihre empirische Realität als Bedingung aller unsrer Erfahrungen.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Nur die absolute Realität kann ihr nach dem eben Angeführten nicht zugestanden werden.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Sie ist nichts, als die Form unsrer inneren Anschauung¹.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Wenn man von ihr die besondere Bedingung unserer Sinnlichkeit wegnimmt, so verschwindet auch der Begriff der Zeit, und sie hängt nicht an den Gegenständen selbst, sondern bloß am Subjekte, welches sie anschauet.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그것들을 직관하는.

→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¹Ich kann zwar sagen: meine Vorstellungen folgen einander; aber das heißt nur, wir sind uns ihrer, als in einer Zeitfolge, d.i. nach der Form des innern Sinnes, bewußt.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의미할 따름이다,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Die Zeit ist darum nicht etwas an sich selbst, auch keine den Dingen objektiv anhängende Bestimmung.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Die Ursache aber, weswegen dieser Einwurf so einstimmig gemacht wird, und zwar von denen, die gleichwohl gegen die Lehre von der Idealität des Raumes nichts Einleuchtendes einzuwenden wissen, ist diese.

그러나 그 원인들은,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리고 더욱이 그 원인들에 대해서, 그것(원인)들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것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다.

→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Die absolute Reaität des Raumes hoffeten sie nicht apodiktisch dartun zu können, weil ihnen der Idealismus entgegensteht, nach welchem die Wirklichkeit äußerer Gegenstände keines strengen Beweises fähig ist: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Dagegen die des Gegenstandes unserer innern Sinnen (meiner selbst und meines Zustandes) unmittelbar durchs Bewußtsein klar ist.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Jene konnten ein bloßer Schein sein, dieser aber ist, ihrer Meinung nach, unleugbar etwas Wirkliches.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지만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Sie bedachten aber nicht, daß beide, ohne daß man ihre Wirklichkeit als Vorstellungen bestreiten darf, gleichwohl nur zur Erscheinung gehören, welche jederzeit zwei Seiten hat, die eine, da das Objekt an sich selbst getrachtet wird, (unangesehen der Art, dasselbe anzuschauen, dessen Beschaffenheit aber eben darum jederzeit problematisch bleibt,) die andere, da auf die Form der Anschauung dieses Gegestandes gesehen wird, welche nicht in d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sondern im Subjekte, dem derselbe erscheint, gesucht werden muß, gleichwohl aber der Erscheinung dieses Gegenstandes wirklich und notwendig zukommt.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 안에서, 그 주관에 그 대상이 현상하는, 찾아져야만 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현상하는 주관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Zeit und Raum sind demnach zwei Erkenntnisquellen, aus denen a priori synthetische Erkenntnisse geschöpft werden können, wie vornehmlich die reine Mathematik in Ansehung der Erkenntnisse vom Raume und dessen Verhältnissen ein glänzendes Beispiel gibt.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그것들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Sie sind nämlich beide zusammengenommen reine Formen aller sinnlichen Anschauung, und machen dadurch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Aber diese Erkenntnisquellen a priori bestimmen sich eben dadurch (daß sie bloß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sein) ihre Grenzen, nämlich, daß sie bloß auf Gegenstände gehen, so fern sie als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nicht aber Dinge an sich selbst darstellen.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현상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상으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Jene allein sind das Feld ihrer Gültigkeit, woraus wenn man hinausgehet, weiter kein objektiver Gebaruch derselben stattfindet.

오로지 저것만이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 오로지 저것만이,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Dies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läßt übrigens die Sicherheit der Erfahrungskenntnis unangetastet: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denn wir sind derselben eben so gewiß, ob diese Formen den Dingen an sich selbst, oder nur unsrer Anschauung dieser Dinge notwendiger Wiese anhängen.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Dagegen die, so die absolut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behaupten, sie mögen sie nun als subsistierend, oder nur inhärierend annehmen, mit den Prinzipien der Erfahrung selbst uneinig sein müssen.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Denn, entschließen sie sich zum ersteren, (welches gemeiniglich die Partei der mathematischen Naturforscher ist,) so müssen sie zwei ewige und unendliche vor sich bestehende Undinge (Raum und Zeit) annehmen, welche dasind (ohne daß doch etwas Wirkliches ist), nur um alles Wirkliche in sich zu befassen.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蟲-

Solche Eigenschaften, die den Dingen an sich zukommen, können uns durch die Sinne auch niemals gegeben werden. Hierin besteht also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r Zeit, nach welcher sie, wenn man von d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bstrahiert, gar nichts ist, und den Gegenständen an sich selbst (ohne ihr Verhältnis auf unsere Anschauung) weder subsistierend noch nhärierend beigezählt werden kann. Doch ist diese Idealität, eben so wenig wie die des Raumes, mit den Subreptionen der Empfindung in Vergleichung zu stellen, weil man doch dabei von der Erscheinung selbst, der diese Prädikate inhärieren, voraussetzt, daß sie objektive Realität habe, die hier gänzlich wegfällt, außer, so fern sie bloß empirisch ist, d.i. den Gegestand selbst bloß als Erscheinung ansieht: wovon die obige Anmerkung des ersteren Abschnitts nachzusehen ist.

→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그러한 특성들은,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시간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7. Erläuterung

 

Wider diese Theorie, welche der Zeit empirische Realität zugestehet, aber die absolute und transzendentale bestreitet, habe ich von einsehenden Männern einen Einwurf so einstimmig vernommen, daß ich daraus abnehme, er müsse sich natürlicher Weise bei jedem Leser, dem diese Betrachtungen ungewohnt sind, vorfinden. Er alutet also: Veränderungen sind wirklich (dies beweiset der Wechsel unserer eigenen Vorstellungen, wenn man gleich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amt deren Veränderungen, leugnen wollte).

→ 시간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반론을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추정한다.→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Solche Eigenschaften, die den Dingen an sich zukommen, können uns durch die Sinne auch niemals gegeben werden.

그러한 특성들은, 그것들이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그러한 특성들은,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Hierin besteht also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r Zeit, nach welcher sie, wenn man von d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bstrahiert, gar nichts ist, und den Gegenständen an sich selbst (ohne ihr Verhältnis auf unsere Anschauung) weder subsistierend noch inhärierend beigezählt werden kann.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Doch ist diese Idealität, eben so wenig wie die des Raumes, mit den Subreptionen der Empfindung in Vergleichung zu stellen, weil man doch dabei von der Erscheinung selbst, der diese Prädikate inhärieren, voraussetzt, daß sie objektive Realität habe, die hier gänzlich wegfällt, außer, so fern sie bloß empirisch ist, d.i. den Gegestand selbst bloß als Erscheinung ansieht: wovon die obige Anmerkung des ersteren Abschnitts nachzusehen ist.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그것의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전제하기 때문에, 시간이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그 실재성이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그 실재성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시간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7. Erläuterung

§7. 해명

 

Wider diese Theorie, welche der Zeit empirische Realität zugestehet, aber die absolute und transzendentale bestreitet, habe ich von einsehenden Männern einen Einwurf so einstimmig vernommen, daß ich daraus abnehme, er müsse sich natürlicher Weise bei jedem Leser, dem diese Betrachtungen ungewohnt sind, vorfinden.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시간에 대한 그 이론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반론을 아주 한 목소리로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추정한다,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 독자에게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 시간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반론을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추정한다.

Er lautet also: Veränderungen sind wirklich (dies beweiset der Wechsel unserer eigenen Vorstellungen, wenn man gleich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amt deren Veränderungen, leugnen wollte).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蟲-

Die Zeit ist also lediglich eine subjektive Bedingung unserer (menschlichen) Anschauung, (welche jederzeit sinnlich ist, d.i. so fern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und an sich, außer dem Subjekte, nichts. Nichts desto weniger ist sie in Ansehung aller Erscheinungen, mithin auch aller Dinge, die uns in der Erfahrung vorkommen können, notwendiger Weise objektiv. Wir können nicht sagen: aller Dinge sind in der Zeit, weil bei dem Begriff der Dinge überhaupt von aller Art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wird, diese aber die eigentliche Bedingung ist, unter der die Zeit in die Vorstellung der Gegenstände gehört. Wird nun die Bedingung zum Begriffe hinzugefügt, und es heißt: alle Dinge, als Erscheinungen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sind in der Zeit; so hat der Grundsatz seine gute objektive Richtigkeit und Allgemeinheit a priori.

→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우리에게 경험 내부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사물들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이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하는,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고 이야기된다.

 

Unsere Behauptungen lehren demnach empirishce Realität der Zeit, d.i. objektive Gültigkeit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die jemals unsern Sinnen gegeben werden mögen. Und da unsere Anschauung jederzeit sinnlich ist, so kann uns in der Erfahrung niemals 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der nicht unter die Bedingung der Zeit gehörete. Dagegen bestreiten wir der Zeit allen Anspruch auf absolute Realität, da sie nämlich, auch ohne auf die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Rücksicht zu nehmen, schlechthin den Dingen als Bedingung oder Eigenschaft anhinge.

→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즉,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하나의 대상은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Die Zeit ist also lediglich eine subjektive Bedingung unserer (menschlichen) Anschauung, (welche jederzeit sinnlich ist, d.i. so fern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und an sich, außer dem Subjekte, nichts.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Nichts desto weniger ist sie in Ansehung aller Erscheinungen, mithin auch aller Dinge, die uns in der Erfahrung vorkommen können, notwendiger Weise objektiv.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모든 사물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경험 안으로 생길 수 있는,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우리에게 경험 내부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사물들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Wir können nicht sagen: aller Dinge sind in der Zeit, weil bei dem Begriff der Dinge überhaupt von aller Art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wird, diese aber die eigentliche Bedingung ist, unter der die Zeit in die Vorstellung der Gegenstände gehört.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들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은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한다.

→ 우리는,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이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하는,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Wird nun die Bedingung zum Begriffe hinzugefügt, und es heißt: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그것은 이야기된다:

alle Dinge, als Erscheinungen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sind in der Zeit;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so hat der Grundsatz seine gute objektive Richtigkeit und Allgemeinheit a priori.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

→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고 이야기된다.

 

Unsere Behauptungen lehren demnach empirishce Realität der Zeit, d.i. objektive Gültigkeit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die jemals unsern Sinnen gegeben werden mögen.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가르쳐 준다, 즉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그 대상들이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즉,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가르쳐 준다.

Und da unsere Anschauung jederzeit sinnlich ist, so kann uns in der Erfahrung niemals 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der nicht unter die Bedingung der Zeit gehörete.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하나의 대상이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 대상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하나의 대상은 전혀 주어질 수 없다.

Dagegen bestreiten wir der Zeit allen Anspruch auf absolute Realität, da sie nämlich, auch ohne auf die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Rücksicht zu nehmen, schlechthin den Dingen als Bedingung oder Eigenschaft anhinge.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蟲-

c) Die Zeit ist die formale Bedingung a priori aller Erscheinungen überhaupt. Der Raum, als die reine Form aller äußeren Anschauung ist als Bedingung a priori bloß auf äußere Erscheinungen eingeschränkt. Dagegen weil alle Vorstellungen, sie mögen nun äußere Dinge zum Gegenstande haben, oder nicht, doch an sich selbst, als Bestimmungen des Gemüts, zum innern Zustande gehören: dieser innere Zustand aber, unter der formalen Bedingung der innern Anschauung, mithin der Zeit gehöret, so ist die Zeit eine Bedingung a priori von aller Erscheinung überhaupt, und zwar die unmittelbare Bedingung der inneren (unserer Seelen) und eben dadurch mittelbar auch der äußern Erscheinungen. Wenn ich a priori sagen kann: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ind im Raume, und nach den Verhältnissen des Raumes a priori bestimmt, so kann ich aus dem Prinzip des innern Sinnes ganz allgemein sagen: alle Erscheinungen überhaupt, d.i. alle Gegenstände der Sinne, sind in der Zeit, und stehen notwendiger Weise in Verhältnissen der Zeit.

→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며,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고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만일 내가 :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Wenn wir von unsrer Art, uns selbst innerlich anzuschauen, und vermittelst dieser Anschauung auch alle äußere Anschauungen in der Vorstellungs-Kraft zu befassen, abstrahieren, und mithin die Gegenstände nehmen, so wie sie an sich selbst sein mögen, so ist die Zeit nichts. Sie ist nur von objektiver Gültigkeit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weil dieses schon Dinge sind, die wir als Gegenstände unsrer Sinne annehmen; aber sie ist nicht mehr objektiv, wenn man von der Sinnlichkeit unsrer Anschauung, mithin derjenigen Vorstellungsart, welche uns eigentümlich ist, abstrahiert, und von Dingen überhaupt redet.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우리에게 고유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c) Die Zeit ist die formale Bedingung a priori aller Erscheinungen überhaupt.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Der Raum, als die reine Form aller äußeren Anschauung ist als Bedingung a priori bloß auf äußere Erscheinungen eingeschränkt.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Dagegen weil alle Vorstellungen, sie mögen nun äußere Dinge zum Gegenstande haben, oder nicht, doch an sich selbst, als Bestimmungen des Gemüts, zum innern Zustande gehören: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dieser innere Zustand aber, unter der formalen Bedingung der innern Anschauung, mithin der Zeit gehöret, so ist die Zeit eine Bedingung a priori von aller Erscheinung überhaupt, und zwar die unmittelbare Bedingung der inneren (unserer Seelen) und eben dadurch mittelbar auch der äußern Erscheinungen.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고,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며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며,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고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Wenn ich a priori sagen kann: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ind im Raume, und nach den Verhältnissen des Raumes a priori bestimmt, so kann ich aus dem Prinzip des innern Sinnes ganz allgemein sagen:

만일 내가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다:

alle Erscheinungen überhaupt, d.i. alle Gegenstände der Sinne, sind in der Zeit, und stehen notwendiger Weise in Verhältnissen der Zeit.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 만일 내가 :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Wenn wir von unsrer Art, uns selbst innerlich anzuschauen, und vermittelst dieser Anschauung auch alle äußere Anschauungen in der Vorstellungs-Kraft zu befassen, abstrahieren, und mithin die Gegenstände nehmen, so wie sie an sich selbst sein mögen, so ist die Zeit nichts.

우리가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래서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Sie ist nur von objektiver Gültigkeit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weil dieses schon Dinge sind, die wir als Gegenstände unsrer Sinne annehmen;

그것(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aber sie ist nicht mehr objektiv, wenn man von der Sinnlichkeit unsrer Anschauung, mithin derjenigen Vorstellungsart, welche uns eigentümlich ist, abstrahiert, und von Dingen überhaupt redet.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그것이 우리에게 고유한,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 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우리에게 고유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蟲-

Εὐθύφρων

[4a] ὃν διώκων αὖ δοκῶ μαίνεσθαι.

 에우튀프론 : 그를 고소하면서 다시 내가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διώκων : διώκω participle masculine singular nominative. seem

αὖ : again

Chris Emlyn-Jones, again.

μαίνεσθαι : μαίνομαι middle infinitive 광분하다, 격노하다

 

Σωκράτης

τί δέ; πετόμενόν τινα διώκεις;

소크라테스 :  왜 그렇습니까? 당신이 날아가는 어떤 자를 고소하셨습니까?

 

Εὐθύφρων

πολλοῦ γε δεῖ πέτεσθαι, ὅς γε τυγχάνει ὢν εὖ μάλα πρεσβύτης.

에우튀프론 : 꽤나 많이 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마침 너무 많이 늙어서요.

 

Σωκράτης

τίς οὗτος;

소크라테스 : 그가 누구입니까?

 

Εὐθύφρων

ὁ ἐμὸς πατήρ.

에우튀프론 : 제 아버지이십니다.

 

Σωκράτης

ὁ σός, ὦ βέλτιστε;

소크라테스 : 친구여, 당신의 아버지를?

 

Εὐθύφρων

πάνυ μὲν οὖν.

에우튀프론 : 바로 그렇습니다.

 

Σωκράτης

ἔστιν δὲ τί τὸ ἔγκλημα καὶ τίνος ἡ δίκη;

소크라테스 : 죄목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재판입니까?

 

Εὐθύφρων

φόνου, ὦ Σώκρατες.

에우튀프론 : 살인에 대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Σωκράτης

Ἡράκλεις. ἦ που, ὦ Εὐθύφρων, ἀγνοεῖται ὑπὸ τῶν πολλῶν ὅπῃ ποτὲ ὀρθῶς ἔχει· οὐ γὰρ οἶμαί γε τοῦ ἐπιτυχόντος [4b] [ὀρθῶς] αὐτὸ πρᾶξαι ἀλλὰ πόρρω που ἤδη σοφίας ἐλαύνοντος.

소크라테스 : 헤라클레이스여, 에우튀프론, 아마 사실은 많은 이들에 있어서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올바르게 취할지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의 그것(방식)이든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아마도 이미 지혜의 멀리 나아간 자의 것(방식)이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ἦ που : ἦ Adv. Ⅰ. 사실은.

ἀγνοεῖται : ἀγνοέω present passive singular-3rd. not know

ἐπιτυχόντος : ἐπιτυγχάνω participle masculine singular genitive. the first person one meets, any one.

αὐτὸ : τῶν πολλῶν을 받는다. 중성 복수는 단수취급.

πρᾶξαι : πρᾶξις pl. 1. transaction 처리, 취급

πόρρω: πρόσω later Att. onward

ἤδη : εἴδω plqpf.

ἐλαύνοντος : ἐλαύνω participle masculine singular genitive. drive.

 

Εὐθύφρων

πόρρω μέντοι νὴ Δία, ὦ Σώκρατες.

에우튀프론 : 소크라테스, 물론 제우스께 맹세코 확실합니다.

 

Σωκράτης

ἔστιν δὲ δὴ τῶν οἰκείων τις ὁ τεθνεὼς ὑπὸ τοῦ σοῦ πατρός; ἢ δῆλα δή; οὐ γὰρ ἄν που ὑπέρ γε ἀλλοτρίου ἐπεξῇσθα φόνου αὐτῷ.

소크라테스 : 가족들 중 누가 그대의 아버지에 의해 죽은 자입니까; 아니, 확실히 그렇지요? 왜냐하면 아마도 다른 사람을 위해 당신이 그(아버지)에게 살인죄로 기소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οἰκείων : οἰκεῖς pl. genitive. 가족

τεθνεὼς : θνὴσκω participle 죽은 자

ἢ : or

δῆλα δή : δῆλαδή quite clearly

ἀλλοτρίου : ἀλλότριος belonging to another

ἐπεξῇσθα : ἐπεξέρχομαι(ἐπέξειμι) imperfect singular-2nd. prosecuted 기소하다, 공소하다, 소추하다.

 

Εὐθύφρων

γελοῖον, ὦ Σώκρατες, ὅτι οἴει τι διαφέρειν εἴτε ἀλλότριος εἴτε οἰκεῖος ὁ τεθνεώς, ἀλλ᾽ οὐ τοῦτο μόνον δεῖν φυλάττειν, εἴτε ἐν δίκῃ ἔκτεινεν ὁ κτείνας εἴτε μή, καὶ εἰ μὲν ἐν δίκῃ, ἐᾶν, εἰ δὲ μή, ἐπεξιέναι, ἐάνπερ ὁ κτείνας συνέστιός [4c] σοι καὶ ὁμοτράπεζος ᾖ· ἴσον γὰρ τὸ μίασμα γίγνεται ἐὰν συνῇς τῷ τοιούτῳ συνειδὼς καὶ μὴ ἀφοσιοῖς σεαυτόν τε καὶ ἐκεῖνον τῇ δίκῃ ἐπεξιών. ἐπεὶ ὅ γε ἀποθανὼν πελάτης τις ἦν ἐμός, καὶ ὡς ἐγεωργοῦμεν ἐν τῇ Νάξῳ, ἐθήτευεν ἐκεῖ παρ᾽ ἡμῖν. παροινήσας οὖν καὶ ὀργισθεὶς τῶν οἰκετῶν τινι τῶν ἡμετέρων ἀποσφάττει αὐτόν. ὁ οὖν πατὴρ συνδήσας τοὺς πόδας καὶ τὰς χεῖρας αὐτοῦ, καταβαλὼν εἰς τάφρον τινά, πέμπει δεῦρο ἄνδρα πευσόμενον τοῦ ἐξηγητοῦ ὅτι χρείη [4d] ποιεῖν. ἐν δὲ τούτῳ τῷ χρόνῳ τοῦ δεδεμένου ὠλιγώρει τε καὶ ἠμέλει ὡς ἀνδροφόνου καὶ οὐδὲν ὂν πρᾶγμα εἰ καὶ ἀποθάνοι, ὅπερ οὖν καὶ ἔπαθεν· ὑπὸ γὰρ λιμοῦ καὶ ῥίγους καὶ τῶν δεσμῶν ἀποθνῄσκει πρὶν τὸν ἄγγελον παρὰ τοῦ ἐξηγητοῦ ἀφικέσθαι. ταῦτα δὴ οὖν καὶ ἀγανακτεῖ ὅ τε πατὴρ καὶ οἱ ἄλλοι οἰκεῖοι, ὅτι ἐγὼ ὑπὲρ τοῦ ἀνδροφόνου τῷ πατρὶ φόνου ἐπεξέρχομαι οὔτε ἀποκτείναντι, ὥς φασιν ἐκεῖνοι, οὔτ᾽ εἰ ὅτι μάλιστα ἀπέκτεινεν, ἀνδροφόνου γε ὄντος τοῦ ἀποθανόντος, οὐ δεῖν φροντίζειν ὑπὲρ τοῦ τοιούτου - ἀνόσιον [4e] γὰρ εἶναι τὸ ὑὸν πατρὶ φόνου ἐπεξιέναι - κακῶς εἰδότες, ὦ Σώκρατες, τὸ θεῖον ὡς ἔχει τοῦ ὁσίου τε πέρι καὶ τοῦ ἀνοσίου.

에우튀프론 : 소크라테스, 우스운 것입니다, 어쨌든 죽은 자가 다른 사람인지 가족인지 지적하는 것은 생각하시지만 오직 이것만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즉 살인자가 정당하게 죽였는지 혹은 아닌지, 그리고 한편으로 정당하게 (살인을 했다면),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그리고 다른 한편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소해야 한다고, 설령 그 살인자가 그대에게 헤스티아를 함께 나누는 자이고(한 집에 같이 사는 자이고) 또한 한솥밥을 먹는 자라 할지라도: 즉 오점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당신이 바로 그러한 자와 알면서 함께 있으면서 당신 자신을 정화하지 않고 또한 그를 재판에 기소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죽임을 당한 자가 나의 이웃이었을 때, 우리가 낙소스에서 경작을 하고 있었을 때,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품을 팔았었습니다. 그러니까 술에 취해 우리 가복 중 어떤 이에게 화가 나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그의 두 손과 두 발을 묶었고, 어떤 도랑에 던지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영적인 지도자로부터 듣기 위해 한 사내를 여기로 보내셨습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바로 이 시간에 또한 살인자가 죽는다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고 여기고서 그래서 그는 그러한 일을 겪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로부터 전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묶인 채로 굶주림과 추위 아래에서 죽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바로 제가 살인자를 위해 아버지를 살인자로 고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로는, 살인을 하지도 않았고, 만일 가능한 한 살인을 했다면, 살인자가 죽었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자를 위해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랍니다. -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를 살인으로 고소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 소크라테스, 그들은 잘못 알았을 것입니다 신적인 것을 경건함과 불경함에 대해서 어떻게 자리하는지.

γελοῖον : 우스운 것

οἴει : οἴομαι singular-2nd acc. et inf.

διαφέρειν : point

εἴτε A εἴτε B : either A or B

δεῖν : 필요하다

φυλάττειν : 주목하다

ἔκτεινεν : κτείνω imperfect-singular-3rd. killed.

κτείνας : 살인자

ἐάνπερ : S.2379 만일(설령) ~할지라도.

συνέστιός : ἑστία를 함께 나누는 자

ὁμοτράπεζος : 한 개의 τράπεζα(식탁)에서 밥을 먹는 자

ᾖ : εἰμί subjunctive. ἐάν + ᾖ / infinitive present.

     → present genral condition

γίγνεται : γίγνομαι singular-3rd

ἀφοσιοῖς : ἀφοσιόω contract verb. singular-2nd.purify

ἐπεὶ :  since, when; since, seeing that

ἀποθανὼν : ἀποθνήσκω. ἀποκτείνω. passive participle singular-nominative 죽임을 당한 사람

πελάτης : one who approaches or comes near.

ἐμός : mine

ὡς ἐγεωργοῦμεν : ὡς + participle = ~이기 때문에

ἐγεωργοῦμεν : γεωργέω imperfect active  plural-1st. till 경작하다.

ἐθήτευεν : θητεία to be a serf or menial.

παροινήσας : παροινέω to act like a drunken man.

ὀργισθεὶς : ὁργίζω passive. to make angry.

ἡμετέρων οἰκετῶν : 우리집의 가복 pl.

ἀποσφάττει : ἀποσφάζω Att. singular-3rd. to cut the throat

συνδήσας : συνδέω to bind.

καταβαλὼν : καταβάλλω participle nominative-singular. to throw down.

δεῦρο : hither

πευσόμενον : πθνθάνομαι doric. to learn by hearsay, to learn something from a person.

ἐξηγητοῦ : ἐξηγητής. 영적인 지도자.

χρείη : χρή. optative. need, necessity.

δεδεμένου : δέω. perfect participle. lack. be in need. stand in need.

ὠλιγώρει : ὁλιγωρέω. aorist. esteem. ~라고 여기다.

ἠμέλει : μέλλω. imperfect. ~하는 것에 대해서

ἀνδροφόνου : άνδροφόνος. homicide.

ἀποθάνοι : ἀποθνήσκω. to die.

ἔπαθεν : πάσχω. 2nd-aorist.

λιμοῦ : 굶주림

ῥίγους : 추위

δεσμῶν : bound.

ἀφικέσθαι : arrive.

ἀνδροφόνου γε ὄντος τοῦ ἀποθανόντος :  absolute genetive.

φροντίζειν : think, consider, reflect, have a care, give heed.

εἰδότες : εἴδω perfect optative plural-3rd.

 

Σωκράτης

σὺ δὲ δὴ πρὸς Διός, ὦ Εὐθύφρων, οὑτωσὶ ἀκριβῶς οἴει ἐπίστασθαι περὶ τῶν θείων ὅπῃ ἔχει, καὶ τῶν ὁσίων τε καὶ ἀνοσίων, ὥστε τούτων οὕτω πραχθέντων ὡς σὺ λέγεις, οὐ φοβῇ δικαζόμενος τῷ πατρὶ ὅπως μὴ αὖ σὺ ἀνόσιον πρᾶγμα τυγχάνῃς πράττων;

소크라테스 :  에우튀프론, 제우스에 맹세코, 그렇다면 당신은 신적인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경건한 것들과 또한 불경한 것들에 대해서도,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정확하게 압니까, 그래서 이러한 일들이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일어났을 때, 아버지를 고소함으로써 또한 그대가 불경한 일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ἀκριβῶς : ἀκρῖβής Adv. exact, accurate, precise, made or done to anicety.

ἐπίστασθαι : ἐπίσταμαι present middle infinitive, to know how to do.

πραχθέντων : πράσσω. passive 1st-aorist imperative plural-3rd,

III. achieve, effect, accomplish τὰ ἔργα τῶν πραχθέντων the facts of what took place

φοβῇ : φοβέω subjunctive

δικαζόμενος : δικάζω participle masculine singular nominative

 

Εὐθύφρων

οὐδὲν γὰρ ἄν μου ὄφελος εἴη, ὦ Σώκρατες, οὐδέ [5a] τῳ ἂν διαφέροι Εὐθύφρων τῶν πολλῶν ἀνθρώπων, εἰ μὴ τὰ τοιαῦτα πάντα ἀκριβῶς εἰδείην.

에우튀프론 : 아무런 나은 점도 저에게 없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많은 이들 중에서 에우튀프론이 다를 것도 없을 것이고요, 만일 이러한 모든 것들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διαφέροι : διαφέρω optative present singular-3rd. it maskes a difference.

 

Σωκράτης

ἆρ᾽ οὖν μοι, ὦ θαυμάσιε Εὐθύφρων, κράτιστόν ἐστι μαθητῇ σῷ γενέσθαι, καὶ πρὸ τῆς γραφῆς τῆς πρὸς Μέλητον αὐτὰ ταῦτα προκαλεῖσθαι αὐτόν, λέγοντα ὅτι ἔγωγε καὶ ἐν τῷ ἔμπροσθεν χρόνῳ τὰ θεῖα περὶ πολλοῦ ἐποιούμην εἰδέναι, καὶ νῦν ἐπειδή με ἐκεῖνος αὐτοσχεδιάζοντά φησι καὶ καινοτομοῦντα περὶ τῶν θείων ἐξαμαρτάνειν, μαθητὴς δὴ γέγονα σός -- καὶ εἰ μέν, ὦ Μέλητε, φαίην ἄν, Εὐθύφρονα ὁμολογεῖς [5b] σοφὸν εἶναι τὰ τοιαῦτα, [καὶ] ὀρθῶς νομίζειν καὶ ἐμὲ ἡγοῦ καὶ μὴ δικάζου· εἰ δὲ μή, ἐκείνῳ τῷ διδασκάλῳ λάχε δίκην πρότερον ἢ ἐμοί, ὡς τοὺς πρεσβυτέρους διαφθείροντι ἐμέ τε καὶ τὸν αὑτοῦ πατέρα, ἐμὲ μὲν διδάσκοντι, ἐκεῖνον δὲ νουθετοῦντί τε καὶ κολάζοντι -- καὶ ἂν μή μοι πείθηται μηδὲ ἀφίῃ τῆς δίκης ἢ ἀντ᾽ ἐμοῦ γράφηται σέ, αὐτὰ ταῦτα λέγειν ἐν τῷ δικαστηρίῳ ἃ προυκαλούμην αὐτόν;

소크라테스 : 내게는 확실히, 놀라운 에우튀프론이여, 당신에게 제자가 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멜레토스의 고발에 앞서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이 그에게 제기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바로 내가 이미 예전에 신적인 일들을 아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람이 나를 경솔하게 말하고 신적인 일들에 대해 변혁을 꾀한다고 말하는데, 당신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 "그리고 멜레토스, 만일 한편으로", 저는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에우튀프론을 이러한 것들에 있어서 지혜롭다고 동의한다면, [그리고] 나 또한 옳게 생각하는 것으로 믿고 고소하지 마시오; 다른 한편 그렇지 않다면, 바로 그 스승에게 나에게보다 먼저 재판에 제소해야 하오, 연장자들을, 나 자신신과 그 자신의 아버지를 타락시킨 자로서, 한편으로 나를 가르치고, 다른 한편 그(아버지)를 경고하고 또한 제거함으로써" - - 그리고 그가 나에게 설득되지도 않고 고소를 오히려 제 자신 대신에 그대를 고소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우리가 제기했던 이와 같은 것들을 법정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가장 좋습니다).

μαθητῇ : 제자.

προκαλεῖσθαι : προκάλέω. evoked.

ἔμπροσθεν : before

ἐποιούμην : ποιέω middle imperfect singular-1st

αὐτοσχεδιἀζω :  aor. part. Pass. -ασθείς Stratt.4 D.: (αὐτοσχέδιος):—act or speak offhand, extemporize, Pl.Cra.413d, Mx.235c, X.Mem.3.5.21. 2. c. acc., extemporize, τὰ δέοντα Th.1.138, cf. X.HG5.2.32. II. mostly in bad sense, act, speak, or think unadvisedly

καινοτομέω : κ. περὶ τὰ θεῖα Id.Euthphr. make change or innovations

ἐξᾰμαρτάνω : fail

ὁμολογέω : agree with

λάχε : λαγχάνω 제소하다

νουθετοῦντί : νουθετέω present participle singular masculine dative. admonish.

κολάζοντι : κολάζω present participle singular masculine dative. curtail, prune

πείθηται : πείθω passive subjunctive.

ἀφίῃ : ἀφίημι passive subjunctive. give up, pers. et gen. set free from.

προυκαλούμην : προκάλέω

 

Εὐθύφρων

ναὶ μὰ Δία, ὦ Σώκρατες, εἰ ἄρα ἐμὲ ἐπιχειρήσειε [5c] γράφεσθαι, εὕροιμ᾽ ἄν, ὡς οἶμαι, ὅπῃ σαθρός ἐστιν, καὶ πολὺ ἂν ἡμῖν πρότερον περὶ ἐκείνου λόγος ἐγένετο ἐν τῷ δικαστηρίῳ ἢ περὶ ἐμοῦ.

에우튀프론 : 실로 신들에 의하여, 소크라테스, 만일 그러하다면 나를 기소되도록 당신이 시도하십시오, 저는 발견할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에게 먼저 나에 대해서라기 보다도 그에 대해 법정에서 훨씬 더 많은 논변이 생길 것입니다.

ἐπιχειρήσειε : ἐπιχειρέω.  ??

εὕροιμ᾽ : εὕροιμι. εὕρίσκω 2nd-aorist active

 

Σωκράτης

καὶ ἐγώ τοι, ὦ φίλε ἑταῖρε, ταῦτα γιγνώσκων μαθητὴς ἐπιθυμῶ γενέσθαι σός, εἰδὼς ὅτι καὶ ἄλλος πού τις καὶ ὁ Μέλητος οὗτος σὲ μὲν οὐδὲ δοκεῖ ὁρᾶν, ἐμὲ δὲ οὕτως ὀξέως [ἀτεχνῶς] καὶ ῥᾳδίως κατεῖδεν ὥστε ἀσεβείας ἐγράψατο. νῦν οὖν πρὸς Διὸς λέγε μοι ὃ νυνδὴ σαφῶς εἰδέναι διισχυρίζου, ποῖόν τι τὸ εὐσεβὲς φῂς εἶναι καὶ τὸ ἀσεβὲς [5d] καὶ περὶ φόνου καὶ περὶ τῶν ἄλλων; ἢ οὐ ταὐτόν ἐστιν ἐν πάσῃ πράξει τὸ ὅσιον αὐτὸ αὑτῷ, καὶ τὸ ἀνόσιον αὖ τοῦ μὲν ὁσίου παντὸς ἐναντίον, αὐτὸ δὲ αὑτῷ ὅμοιον καὶ ἔχον μίαν τινὰ ἰδέαν κατὰ τὴν ἀνοσιότητα πᾶν ὅτιπερ ἂν μέλλῃ ἀνόσιον εἶναι;

소크라테스 : 친애하는 동지여, 또한 나 자신도 틀림없이, 이러한 일들을 알기 위해서 당신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다른 누구라도 또한 멜레토스 자신도 역시 한편으로 그대를 전혀 못 알아 보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다른 한편 그래서 저를 날카롭게 [경험적으로] 그리고 쉽사리 얕잡아 보고서 불경한 것들에 있어서 기소하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제우스께 맹세코 나에게 지금 명백하게 안다고 확신하는 것을 말하시오, 어떤 무엇이 살인에 대해서도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불경한 것이라고 그대가 말할 것인가? 모든 행위들에 있어서 신성한 것 그 자체가 바로 그것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불경한 것이 또 다시 한편으로 모든 신성한 것들에 대해 반대가 아니겠소? 똑같은 불경한 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것에게는 동일한 것이고 불경스러운 것이라면 그 모든 불경한 것들에 대하여 어떤 유일한 이데아를 가지고 있지 않겠소?

ὀξέως : ὀξύς adv. sharply

ἀτεχνῶς : empirically

νυνδὴ : with 1st tenses. even now./ 2ndary tenses. just now.

διισχυρίζου : διϊσχῦρίζομαι. imperative?

μέλλῃ : μέλλω present subjunctive singular-3rd. likely to.

 

Εὐθύφρων

πάντως δήπου, ὦ Σώκρατες.

에우튀프론 : 아마도 모든 것에게(그러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Σωκράτης

λέγε δή, τί φῂς εἶναι τὸ ὅσιον καὶ τί τὸ ἀνόσιον;

소크라테스 : 바로 그 점을 말하시오, 무엇이 신성한 것이고 또 무엇이 불경한 것이라고 말할 것인지?

 

Εὐθύφρων

λέγω τοίνυν ὅτι τὸ μὲν ὅσιόν ἐστιν ὅπερ ἐγὼ νῦν ποιῶ, τῷ ἀδικοῦντι ἢ περὶ φόνους ἢ περὶ ἱερῶν κλοπὰς ἤ τι ἄλλο τῶν τοιούτων ἐξαμαρτάνοντι ἐπεξιέναι, ἐάντε πατὴρ [5e] ὢν τυγχάνῃ ἐάντε μήτηρ ἐάντε ἄλλος ὁστισοῦν, τὸ δὲ μὴ ἐπεξιέναι ἀνόσιον· ἐπεί, ὦ Σώκρατες, θέασαι ὡς μέγα σοι ἐρῶ τεκμήριον τοῦ νόμου ὅτι οὕτως ἔχει - - ὃ καὶ ἄλλοις ἤδη εἶπον, ὅτι ταῦτα ὀρθῶς ἂν εἴη οὕτω γιγνόμενα - - μὴ ἐπιτρέπειν τῷ ἀσεβοῦντι μηδ᾽ ἂν ὁστισοῦν τυγχάνῃ ὤν. αὐτοὶ γὰρ οἱ ἄνθρωποι τυγχάνουσι νομίζοντες τὸν Δία τῶν θεῶν ἄριστον καὶ δικαιότατον, [6a] καὶ τοῦτον ὁμολογοῦσι τὸν αὑτοῦ πατέρα δῆσαι ὅτι τοὺς ὑεῖς κατέπινεν οὐκ ἐν δίκῃ, κἀκεῖνόν γε αὖ τὸν αὑτοῦ πατέρα ἐκτεμεῖν δι᾽ ἕτερα τοιαῦτα· ἐμοὶ δὲ χαλεπαίνουσιν ὅτι τῷ πατρὶ ἐπεξέρχομαι ἀδικοῦντι, καὶ οὕτως αὐτοὶ αὑτοῖς τὰ ἐναντία λέγουσι περί τε τῶν θεῶν καὶ περὶ ἐμοῦ.

에우튀프론 : 그렇다면 저는 말합니다 한편으로 신성한 것은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식일 것입니다, 부정한 자에게 살인에 대해서든 혹은 신물의 도둑질에 대해서든 이와 같은 것들 중 다른 무엇이든지 죄를 지은 자를 고소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에 관련되든 어머니에 관련되든 다른 그 누구에 관련되든지, 다른 한편 고소하지 않음은 부정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니 생각하시오 그대에게 제가 그것이 그러하다는 율법의 확실한 증표를 말할 것이라고 - 이미 다른 이들에게 제가 말했던 그것을, 이러한 것들이 참으로 그와 같은 식으로 된다고 - 그 누구라 할지라도 불경한 자에게 양보해 주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사람들이 신들 중에서 제우스를 가장 빼어나고도 가장 정의롭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바로 그 제우스가 그 자신의 아버지가 자식들을 부정의하게 삼켰기 때문에 그를 결박했다는 것을, 또한 저 아비(크로노스)도 또한 그와 같은 다른 것들에 있어서 그의 아비를 거세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에게는 아버지에게 내가 부정의하게 고소하였다고 화를 냅니다, 그리고 동일한 이들이 신들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들에게 반대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τοίνυν : 그렇다면, 그럼.

ποιῶ : ποιός. dative. '수단'의 용법. of a certain kind.

ἐξαμαρτάνοντι : ἐξαμαρτάνω. participle singular dative. to err, do wrong, sin.

ἐάντε : S2852. whether … or ….

ὢν : εἰμί participle.

τυγχάνῃ : subjunctive singular-3rd. with participle. coincidence.

ὁστισοῦν : ὅστις Ⅳ. 2. b. anybody.

θέασαι : θεάομαι 1st-aorist imperative.

ἤδη : εἴδω pluperfect contracted.

ἐπιτρέπειν  : ἐπιτρεπω infinitive. Ⅱ. give up, yield

ὁμολογοῦσι : grant.

δῆσαι : δέω. 1st-aorist infinitive. bind.

κατέπινεν : καταπίνω. imperfect singular-3rd. swallow.

χαλεπαίνουσιν : χαλεπαίνω. with dative. to be angry with.

 

-蟲-

Εὐθύφρων

[2a] τί νεώτερον, ὦ Σώκρατες, γέγονεν, ὅτι σὺ τὰς ἐν Λυκείῳ καταλιπὼν διατριβὰς ἐνθάδε νῦν διατρίβεις περὶ τὴν τοῦ βασιλέως στοάν; οὐ γάρ που καὶ σοί γε δίκη τις οὖσα τυγχάνει πρὸς τὸν βασιλέα ὥσπερ ἐμοί.

에우튀프론 : 소크라테스,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당신이 뤼케이온에 시간을 보내시는 곳을 두시고 여기에서 지금 바실레우스의 현관을 거닐으시다니? 왜냐하면 아마 바로 당신에게도 저와 같이 마침 바실레우스에 재판이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ὅτι : for that, because, seeing that, inas much as.

γέγονεν : γίγνομαι pluperfect singular-3rd.

καταλιπὼν : καταλείπω 2nd-aorist masculine participle-nominative. left behind. leave. abandon

ἐνθάδε : here or there

διατριβὰς : διατριβή f. pl. accusative. place of resort.

διατρίβεις : διατρίβω present 2nd. left behind

βασιλέως : βασιλεύς genitive / 3. Ⅱ at Athens, the second of the nine Archons was called βασιλεύς ; he had charge of the public worship, and the conduct of criminal processes, plat., etc.

οὖσα : εἰμί present participle feminine-singular-nominative.

δίκην : Ⅰ. custom Ⅱ. right as on dependent on custom, law, right. Ⅲ. a judgement

 

Σωκράτης

οὔτοι δὴ Ἀθηναῖοί γε, ὦ Εὐθύφρων, δίκην αὐτὴν καλοῦσιν ἀλλὰ γραφήν.

소크라테스 : 에우튀프론, 그렇지 않고 여기 아테네인들은 바로 그 재판을 그러나 공소라 부릅니다.

οὔτοι : indeed not

γραφήν : Ⅲ. law-term, an indictment

 

Εὐθύφρων

[2b] τί φῄς; γραφὴν σέ τις, ὡς ἔοικε, γέγραπται· οὐ γὰρ ἐκεῖνό γε καταγνώσομαι, ὡς σὺ ἕτερον.

에우튀프론 : 무엇을 말씀하십니까(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고발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왜냐하면 바로 그것을 나는 이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다른 이를 <γέγραπται>(왜냐하면 나는 바로 그것을, 당신이 다른 이를 고발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ἔοικε : ἔοικα(from εἴκω, of which we have 3rd singular imperfect.εἶκε) Ⅱ.2. impers., ὡς ἔοικε, as it seems; probably, I believe.

γέγραπται : γράφω perfect middle singular-3rd

καταγνώσομαι : καταγιγνώσκω future singular-3rd understood.

 

Σωκράτης

οὐ γὰρ οὖν.

소크라테스 : 물론 아닙니다.(S2820)

 

Εὐθύφρων

ἀλλὰ σὲ ἄλλος;

에우튀프론 : 그러나 다른 이가 당신을?

 

Σωκράτης

πάνυ γε.

소크라테스 : 바로 그렇습니다.

  

Εὐθύφρων

τίς οὗτος;

에우튀프론 : 이 자는 누구입니까?

 

Σωκράτης

οὐδ᾽ αὐτὸς πάνυ τι γιγνώσκω, ὦ Εὐθύφρων, τὸν ἄνδρα, νέος γάρ τίς μοι φαίνεται καὶ ἀγνώς· ὀνομάζουσι μέντοι αὐτόν, ὡς ἐγᾦμαι, Μέλητον. ἔστι δὲ τῶν δήμων Πιτθεύς, εἴ τινα νῷ ἔχεις Πιτθέα Μέλητον οἷον τετανότριχα καὶ οὐ πάνυ εὐγένειον, ἐπίγρυπον δέ.

소크라테스 : 에우튀프론, 저 자신도 그 사내를 아주(썩) 잘 알지는 못합니다, 나에게는 젊고 무명인 어떤 자로 여겨지니까 ; 제가 생각하기로는, 사람들이 그 사내를 멜레토스라고 부르는 듯합니다. 피트테오스 출신인데, 생머리이며 썩 좋지 못한 수염에 매부리코인 피트테오스의 멜레토스라는 누군가를 당신이 기억하시는지.

οὐδ᾽ πάνυ τι : not very well somewhat

φαίνεται : φαίνω present passive singular-3rd. appear to be so

μέντοι : yet, nevertheless. of course. well, if it comes that.

ἐγᾦμαι : ἐγὼ οἶμαι

τινα νῷ ἔχεις : 마음에 가지고 있다(기억하다)

οἷον : such as, what sort of. because of what~. how, what manner of man

τετανότριχα : with long straight hair

εὐγένειον : well-bearded

ἐπίγρῦπος : somewhat hooked

 

Εὐθύφρων

οὐκ ἐννοῶ, ὦ Σώκρατες· ἀλλὰ δὴ τίνα γραφήν [2c] σε γέγραπται;

에우튀프론 : 저는 기억하질 못합니다, 소크라테스. 그나저나 어떤 혐의로 그가 당신을 기소했습니까?

ἐννοῶ : have in one's thoughts, consider, reflect.

 

Σωκράτης

ἥντινα; οὐκ ἀγεννῆ, ἔμοιγε δοκεῖ· τὸ γὰρ νέον ὄντα τοσοῦτον πρᾶγμα ἐγνωκέναι οὐ φαῦλόν ἐστιν. ἐκεῖνος γάρ, ὥς φησιν, οἶδε τίνα τρόπον οἱ νέοι διαφθείρονται καὶ τίνες οἱ διαφθείροντες αὐτούς. καὶ κινδυνεύει σοφός τις εἶναι, καὶ τὴν ἐμὴν ἀμαθίαν κατιδὼν ὡς διαφθείροντος τοὺς ἡλικιώτας αὐτοῦ, ἔρχεται κατηγορήσων μου ὥσπερ πρὸς μητέρα πρὸς τὴν πόλιν. καὶ φαίνεταί μοι τῶν πολιτικῶν [2d] μόνος ἄρχεσθαι ὀρθῶς· ὀρθῶς γάρ ἐστι τῶν νέων πρῶτον ἐπιμεληθῆναι ὅπως ἔσονται ὅτι ἄριστοι, ὥσπερ γεωργὸν ἀγαθὸν τῶν νέων φυτῶν εἰκὸς πρῶτον ἐπιμεληθῆναι, μετὰ δὲ τοῦτο καὶ τῶν ἄλλων. καὶ δὴ καὶ Μέλητος ἴσως πρῶτον [3a] μὲν ἡμᾶς ἐκκαθαίρει τοὺς τῶν νέων τὰς βλάστας διαφθείροντας, ὥς φησιν· ἔπειτα μετὰ τοῦτο δῆλον ὅτι τῶν πρεσβυτέρων ἐπιμεληθεὶς πλείστων καὶ μεγίστων ἀγαθῶν αἴτιος τῇ πόλει γενήσεται, ὥς γε τὸ εἰκὸς συμβῆναι ἐκ τοιαύτης ἀρχῆς ἀρξαμένῳ.

소크라테스 : 어떤 것을? 바로 나에게는 그것이 하찮지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젊은이이면서 그렇게 대단한 일을 판단하기란 간단치 않으니까요. 즉 그는, 그가 주장하기로는, 어떤 방식으로 젊은이들이 파괴되고 어떤 자들이 그들을(젊은이들을) 파괴하고 있는 자들인지 압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지혜로운 자일 것으로 보이며, 또 그 자신의 동년배들을 파괴하는 나의 무지를 알아차리고서, 나를 어머니에게와 같이 폴리스에 고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시민적인 이들 중에 유일하게 그만이 옳게 시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젊은이들이 가능한 한 훌륭하게 되는 것에 관하여 신경을 쓰는 것은 옳기 때문입니다, 먼저 훌륭한 농부가 자연의 새싹들을 신경쓰고, 이 다음으로 다른 것들의 (밭일굼을 신경쓰는 것)이 합당해 보이듯이. 그리고 특히나 멜레토스는 가장 먼저 한편으로 새로운 것들의 싹을 길러내는 것을 파괴하는 자들로서 우리같은 이들을 일소합니다(쓸어냅니다), 그가 말하듯: 그러니 이 다음에 더 나이든 이들을 돌보는 것은 가장 크고도 대단히 훌륭한 것들의 원인이 폴리스에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그러한 종류의 시작에서 출발하는 이에게 따라오게 마련인 바로 그것처럼.

ἥντινα : ὅστις(γραφήν)

ἀγεννῆ : illiberal

ἐγνωκέναι : γιγνώσκω aorist infinitive

φαῦλόν : easy, slight, lightly, trivial

διαφθείρονται : διαφθείρω present passive singular-3rd.

κινδυνεύει : κινδύνεύω+εἶναι seems likely to be.

κατιδὼν : καεῖδον present masculine participle-nominative.

ὡς διαφθείροντος : ὡς - dative → S.2122

ἔρχεται κατηγορήσων : 추궁하고자 한다 ἔρχομαι + participle

ἄρχεσθαι : 시작하다

ἐπιμεληθῆναι : ἐπιμελέομαι 1st-aorist passive infinitive

ὅπως : in such manner as, as. in which, that.

ἔσονται : εἰμί future middle plural-3rd

γεωργὸν : husbandman.

εἰκὸς : Ion. ἔοικα. participle.///

καὶ δὴ καὶ : 그리고 특히나. S2890. 

ἐπιμεληθεὶς : πιμελέομαι 1st-aorist passive participle

γενήσεται : γίγνομαι 1st-aorist middle subjunctive

συμβῆναι : συμβαίνω 2nd-aorist nfinitive

ἀρξαμένῳ : άρχω 2nd-aorist middle participle masculine singular dative

 

Εὐθύφρων

βουλοίμην ἄν, ὦ Σώκρατες, ἀλλ᾽ ὀρρωδῶ μὴ τοὐναντίον γένηται· ἀτεχνῶς γάρ μοι δοκεῖ ἀφ᾽ ἑστίας ἄρχεσθαι κακουργεῖν τὴν πόλιν, ἐπιχειρῶν ἀδικεῖν σέ. καί μοι λέγε, τί καὶ ποιοῦντά σέ φησι διαφθείρειν τοὺς νέους;

에우튀프론 : 소크라테스, 저도 바랍니다만, 반대의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단순히 근본에서부터 폴리스를 망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해하고자 시도함으로써. 그리고 나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을 행함에 있어서 당신이 그 젊은이들을 파괴한다고 그가 말하는지?

 

τοὐναντίον : crasis for τὸ ἐναντίον

ἀτεχνῶς : simply

ἐπιχειρῶν : ἐπιχειρέω present participle masculine singular nominative

                    3. infinitive. attempt to do 

 

Σωκράτης

[3b] ἄτοπα, ὦ θαυμάσιε, ὡς οὕτω γ᾽ ἀκοῦσαι. φησὶ γάρ με ποιητὴν εἶναι θεῶν, καὶ ὡς καινοὺς ποιοῦντα θεοὺς τοὺς δ᾽ ἀρχαίους οὐ νομίζοντα ἐγράψατο τούτων αὐτῶν ἕνεκα, ὥς φησιν.

소크라테스 : 놀라운 이여, 이상한 것들을(말합니다), 바로 그렇게 들은 것과 같이. 왜냐하면 그는 내가 신들을 만들어낸다고, 그리고 새로운 신들을 만들면서 바로 이것들 때문에 고대의 신들을  믿지 않아서 고발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기로는.

 

θαυμάσιε : θαυμαστός masculine singular vocative

ἀρχαίους : ancient

ἐγράψατο : γράφω 1st-aorist middle

 

Εὐθύφρων

μανθάνω, ὦ Σώκρατες· ὅτι δὴ σὺ τὸ δαιμόνιον φῂς σαυτῷ ἑκάστοτε γίγνεσθαι. ὡς οὖν καινοτομοῦντός σου περὶ τὰ θεῖα γέγραπται ταύτην τὴν γραφήν, καὶ ὡς διαβαλῶν δὴ ἔρχεται εἰς τὸ δικαστήριον, εἰδὼς ὅτι εὐδιάβολα τὰ τοιαῦτα πρὸς τοὺς πολλούς. καὶ ἐμοῦ γάρ τοι, [3c] ὅταν τι λέγω ἐν τῇ ἐκκλησίᾳ περὶ τῶν θείων, προλέγων αὐτοῖς τὰ μέλλοντα, καταγελῶσιν ὡς μαινομένου· καίτοι οὐδὲν ὅτι οὐκ ἀληθὲς εἴρηκα ὧν προεῖπον, ἀλλ᾽ ὅμως φθονοῦσιν ἡμῖν πᾶσι τοῖς τοιούτοις. ἀλλ᾽ οὐδὲν αὐτῶν χρὴ φροντίζειν, ἀλλ᾽ ὁμόσε ἰέναι.

에우튀프론 : 알겠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영적인 것이 때마다 나타난다고 말하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신적인 것들에 대해 당신이 새로운 일을 시작함을 고발했고, 또한 중상하기 위하여 법정으로 나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을 다중들에게 거짓으로 전하기 쉽다는 것을 그가 알고서. 또한 당신도 알다시피, 시민집회에서 신들에 대해서 제가 무언가를 말할 때, 이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고자, 그들은 미쳐 날뛰는 자라고 나를 비웃습니다: 더구나 제가 말했던 것들 중에 진실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이 그와 같은 것들 전부로 인하여 우리를 시기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고려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똑같은 자리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ἔρχεται : ἔρχομαι present middle singular-3rd

εἴρηκα : εἴρω 2nd-perfect singular-1st.

καταγελῶσιν : genitive 지배 동사, ἐμοῦ와 ὡς의 문법기능 규정.

 

Σωκράτης

ὦ φίλε Εὐθύφρων, ἀλλὰ τὸ μὲν καταγελασθῆναι ἴσως οὐδὲν πρᾶγμα. Ἀθηναίοις γάρ τοι, ὡς ἐμοὶ δοκεῖ, οὐ σφόδρα μέλει ἄν τινα δεινὸν οἴωνται εἶναι, μὴ μέντοι διδασκαλικὸν τῆς αὑτοῦ σοφίας· ὃν δ᾽ ἂν καὶ ἄλλους οἴωνται [3d] ποιεῖν τοιούτους, θυμοῦνται, εἴτ᾽ οὖν φθόνῳ ὡς σὺ λέγεις, εἴτε δι᾽ ἄλλο τι.

소크라테스 : 친애하는 에우튀프론, 그러나 한편으로 비웃음을 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닌 것 같소. 왜냐하면 아테네인들에게는 그대도 알다시피, 나에게 보이기로는, 심하게 신경쓰지는 않습니다 만약 어떤 이상함이 있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혜의 적절한 교사가 아니라면: 그런데 만일 그가 또한 다른 이들을 그들과 같은 자들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화를 냅니다, 그러므로 바로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시기로 인해서든, 혹은 다른 무엇 때문이든.

 

καταγελασθῆναι : καταγελάω 1st-aorist passive infinitive,

                        비웃음을 받는 것

σφόδρα : Adv 심하게

μέλει : μέλω present indicative singular-3rd.

           (2) in Att. 3 singular. is commonly used impers. with the object in gen., and pers. in dat.. → 근심이 있다(신경쓰이다).

δεινὸν : Ⅱ. 2. it were strange that

οἴωνται : οἴομαι present middle&passive plural-3rd. 동족 목적어와 infinitive를 취한다.a가 b하다고 여기다, 생각하다.

θυμοῦνται : θῡμόω present middle&passive plural-3rd. 화를 내다.

 

Εὐθύφρων

τούτου οὖν πέρι ὅπως ποτὲ πρὸς ἐμὲ ἔχουσιν, οὐ πάνυ ἐπιθυμῶ πειραθῆναι.

에우튀프론 : 그러므로 이에 대해 나로부터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듣는지, 나는 전혀 시험해 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ὅπως ποτὲ : how ever

ἐπιθυμῶ : 바라다

πειραθῆναι : πειράω 1st-aorist middle infinitive, 시도하는 것

 

Σωκράτης

ἴσως γὰρ σὺ μὲν δοκεῖς σπάνιον σεαυτὸν παρέχειν καὶ διδάσκειν οὐκ ἐθέλειν τὴν σεαυτοῦ σοφίαν· ἐγὼ δὲ φοβοῦμαι μὴ ὑπὸ φιλανθρωπίας δοκῶ αὐτοῖς ὅτιπερ ἔχω ἐκκεχυμένως παντὶ ἀνδρὶ λέγειν, οὐ μόνον ἄνευ μισθοῦ, ἀλλὰ καὶ προστιθεὶς ἂν ἡδέως εἴ τίς μου ἐθέλει ἀκούειν. εἰ μὲν οὖν, ὃ νυνδὴ ἔλεγον, μέλλοιέν μου καταγελᾶν ὥσπερ [3e] σὺ φῂς σαυτοῦ, οὐδὲν ἂν εἴη ἀηδὲς παίζοντας καὶ γελῶντας ἐν τῷ δικαστηρίῳ διαγαγεῖν· εἰ δὲ σπουδάσονται, τοῦτ᾽ ἤδη ὅπῃ ἀποβήσεται ἄδηλον πλὴν ὑμῖν τοῖς μάντεσιν.

소크라테스 : 왜냐하면 바로 한편으로 그대로서는 그대 자신을 여간해서는 내놓으려 하지 않고 또 그대 자신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오: 다른 한편 나로서는 내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떠들 수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보일까 두렵습니다, 그저 대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또한 누군가 나로부터 듣기를 바란다면 즐겁게(기꺼이) 돈을 쓰기 때문에. 만일 그러하다면, 이제 내가 말하는 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을 비웃는다 말한 것처럼 나를 비웃는 일이 일어난다면, 재판장에서 놀며 웃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전혀 불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 그러나 만일 진지해질 터이면, 그대들 예언가들을 제외하고서는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나로서는 불분명합니다.

 

ἐθέλειν : with infinitive. ~하고자 바라다.

παρέχειν : 내놓다

φοβοῦμαι : φοβέω B. passive&middle. Ⅱ. followed by a relative clause. fear.

ὅτιπερ : for that, because, seeing that

ἐκκεχυμένως : ἐκχέω perfect passive participle singular-nominative to pour out 떠들어 대는 것

μόνον : alone

ἄνευ : with genitive. without.

μισθοῦ : μισθός. pay.

προστιθεὶς : participle. spend money. προστίθημι  3.

ἂν εἴ : less vivid future.  

ἡδέως : adv.

ἀκούειν : ἀκούω infinitive. with genitive - from whom it is heard

ἀηδὲς : genitive. 즐겁지 않은

παίζοντας : παίζω participle plural accusative. 놀면서

γελῶντας : γελάω participle plural accusative. 웃으면서

διαγαγεῖν : διάγω Ⅱ.2. tarry. 늑장부리는 것.

εἰ - σπουδάσονται : emotional future conditions. S.2328.

σπουδάσονται : σπουδάζω future middle plural-3rd. to be serious.

ἤδη : εἴδω pluperfect contracted. has ~ in his heart.

ὅπῃ : in what way, how, in what manner.

ἀποβήσεται : ἀποβαίνω future middle singular-3rd.

                       정착하다. 귀착하다. 귀결하다.

ἄδηλον : uot seen, unknown, obscure.

πλὴν : with genitive. except.

 

Εὐθύφρων

ἀλλ᾽ ἴσως οὐδὲν ἔσται, ὦ Σώκρατες, πρᾶγμα, ἀλλὰ σύ τε κατὰ νοῦν ἀγωνιῇ τὴν δίκην, οἶμαι δὲ καὶ ἐμὲ τὴν ἐμήν.

에우튀프론 : 그러나 소크라테스여, 아무런 문제도 아닐 것이고, 오히려 바로 당신이 마음에 흡족하게 재판에 맞설 것이고, 제 생각에 저도 또한 저의 재판을 그리할 것입니다.

ἔσται : εἰμί future middle singular-3rd.

κατὰ νοῦν : 마음에 들게, 흡족하게

ἀγωνιῇ : ἀγωνίζομαι future singular-2nd.

 

Σωκράτης

ἔστιν δὲ δὴ σοί, ὦ Εὐθύφρων, τίς ἡ δίκη; φεύγεις αὐτὴν ἢ διώκεις;

소크라테스 : 에우튀프론, 그대에게는 정말 무슨 재판이 있습니까? 그 재판을 고발하기 보다는 고발되었습니까?

 

Εὐθύφρων

διώκω.

에우튀프론 : 저는 고발하였습니다.

 

Σωκράτης

τίνα;

소크라테스 : 누구를?

 

-蟲-

Was aber das zweite betrifft, so könnte sie als eine den Dingen selbst anhangende Bestimmung oder Ordnung nicht vor den Gegenständen als ihre Bedingung vorhergehen, und a priori durch synthetische Sätze erkannt und angeschaut werden. Dieses letztere findet dagegen sehr wohl statt, wenn die Zeit nichts als die subjektive Bedingung ist, unter der alle Anschauungen in uns stattfinden können. Denn da kann diese Form der innern Anschauung vor den Gegenständen, mithin a priori, vorgestellt werden.

→ 그러나 후자와 관련하여,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인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반면에,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B) Die Zeit ist nichts anders, als die Form des innern Sinnes, d.i. des Anschauens unserer selbst und unsers innern Zustandes. Denn die Zeit kann keine Bestimmung äußerer Erscheinungen sein; sie gehöret weder zu einer Gestalt, oder Lage etc.; dagegen bestimmt sie das Verhältnis der Vorstellungen in unserm innern Zustande. Und, eben weil diese innre Anschauung keine Gestalt gibt, suchen wir auch diesen Mangel durch Analogien zu ersetzen, und stellen die Zeitfolge durch eine ins Unendliche fortgehende Linie vor, in welcher das Mannigfaltige eine Reihe ausmacht, die nur von einer Dimension ist, und schließen aus den Eigenschaften dieser Linie auf alle Eigenschaften der Zeit, außer dem einigen, daß die Teile der erstern zugleich, die der letztern aber jederzeit nach einander sind. Hieraus erhellet auch, daß die Vorstellung der Zeit selbst Anschauung sei, weil alle ihre Verhältnisse sich an einer äußern Anschauung ausdrücken lassen.

→ B) 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형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결핍을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그 안에서 잡다가 단지 일차원인 순차를 형성하는,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인데,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적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은 언제나 계기한다.→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Was aber das zweite betrifft, so könnte sie als eine den Dingen selbst anhangende Bestimmung oder Ordnung nicht vor den Gegenständen als ihre Bedingung vorhergehen, und a priori durch synthetische Sätze erkannt und angeschaut werden.

그러나 두번째 것과 관련하여서,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으로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 그러나 후자와 관련하여,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인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Dieses letztere findet dagegen sehr wohl statt, wenn die Zeit nichts als die subjektive Bedingung ist, unter der alle Anschauungen in uns stattfinden können.

반면에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 반면에,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Denn da kann diese Form der innern Anschauung vor den Gegenständen, mithin a priori, vorgestellt werden.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B) Die Zeit ist nichts anders, als die Form des innern Sinnes, d.i. des Anschauens unserer selbst und unsers innern Zustandes.

B) 시간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내감의 형식 외의,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 B) 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형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Denn die Zeit kann keine Bestimmung äußerer Erscheinungen sein;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sie gehöret weder zu einer Gestalt, oder Lage etc.;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dagegen bestimmt sie das Verhältnis der Vorstellungen in unserm innern Zustande.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Und, eben weil diese innre Anschauung keine Gestalt gibt, suchen wir auch diesen Mangel durch Analogien zu ersetzen, und stellen die Zeitfolge durch eine ins Unendliche fortgehende Linie vor, in welcher das Mannigfaltige eine Reihe ausmacht, die nur von einer Dimension ist, und schließen aus den Eigenschaften dieser Linie auf alle Eigenschaften der Zeit, außer dem einigen, daß die Teile der erstern zugleich, die der letztern aber jederzeit nach einander sind.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부재를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그 안에서 잡다가 순차를 형성하는, 그 순차는 단지 일차원이고,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이다,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을 그러나 언제나 연속하는.

→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결핍을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그 안에서 잡다가 단지 일차원인 순차를 형성하는,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인데,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적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은 언제나 계기한다.

Hieraus erhellet auch, daß die Vorstellung der Zeit selbst Anschauung sei, weil alle ihre Verhältnisse sich an einer äußern Anschauung ausdrücken lassen.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蟲-

Die Vorstellung, die nur durch einen einzige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ist aber Anschauung. Auch würde sich der Satz, daß verschiedene Zeiten nicht zugleich sein können, aus einem allgemeinen Begriff nicht herleiten lassen. Der Satz ist synthetisch, und kann aus Begriffen allein nicht entspringen. Er ist also in der Anschauung und Vorstellung der Zeit unmittelbar enthalten.

→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 표상은, 그러나 직관이다. 또한,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그 명제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5) Die Unendlichkeit der Zeit bedeute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bestimmte Größe der Zeit nur durch Einschränkungen einer einigen zum Grunde liegenden Zeit möglich sei. Daher muß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Zeit als uneingeschränkt gegeben sein. Wovon aber die Teile selbst, und jede Größe eines Gegenstandes, nur durch Einschränkung bestimmt vorgestellt werden können, da muß die ganze Vorstellung nicht durch Begriffe gegeben sein, (denn die enthalten nur Teilvorstellungen,) sondern es muß ihnen unmittelbare Anschauung zum Grunde liegen.

→ 5) 시간의 무한성은,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 5.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 5. 시간 개념의 초월론적 해명

 

Ich kann mich deshalb auf Nr. 3. berufen, wo ich, um kurz zu sein, das, was eigentlich transzendental ist, unter die Artikel der metaphysischen Erörterung gesetzt habe. Hier füge ich noch hinzu, daß der Begriff der Veränderung und, mit ihm, der Begriff der Bewegung (als Veränderung des Orts) nur durch und in der Zeitvorstellung möglich ist: daß, wenn diese Vorstellung nicht Anschauung (innere) a priori wäre, kein Begriff, welcher es auch sei, die Möglichkeit einer Veränderung, d.i. einer Verbindung kontradiktorisch entgegengesetzter Prädikate (z.B. das Sein an einem Orte und das Nichtsein eben desselben Dinges an demselben Orte) in einem und demselben Objekte begreiflich machen könnte. Nur in der Zeit können beide kontradiktorisch-entgegengesetzte Bestimmungen in einem Dinge, nämlich nach einander, anzutreffen sein. Also erklärt unser Zeitbegriff die Möglichkeit so vieler synthetischer Erkenntnis a priori, als die allgemeine Bewegungslehre, die nicht wenig fruchtbar ist, darlegt.

→ 여기에서 나는 또한,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인다: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조금도 헛되지 않은 보편적 운동학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 6. Schlüsse aus diesen Begriffen

§ 6. 이러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ie Zeit ist nicht etwas, was für sich selbst bestünde, oder den Dingen als objektive Bestimmung anhinge, mithin übrig bliebe, wenn man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denn im ersten Fall würde sie etwas sein, was ohne wirklichen Gegenstand dennoch wirklich wäre.

→ a) 시간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그러한 어떤 것이 아니고, 따라서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남는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시간은,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Die Vorstellung, die nur durch einen einzige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ist aber Anschauung.

그 표상은,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러나 직관이다.

→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 표상은, 그러나 직관이다.

Auch würde sich der Satz, daß verschiedene Zeiten nicht zugleich sein können, aus einem allgemeinen Begriff nicht herleiten lassen.

또한 그 명제는,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 또한,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그 명제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Der Satz ist synthetisch, und kann aus Begriffen allein nicht entspringen.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r ist also in der Anschauung und Vorstellung der Zeit unmittelbar enthalten.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5) Die Unendlichkeit der Zeit bedeute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bestimmte Größe der Zeit nur durch Einschränkungen einer einigen zum Grunde liegenden Zeit möglich sei.

5) 시간의 무한성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 5) 시간의 무한성은,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Daher muß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Zeit als uneingeschränkt gegeben sein.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Wovon aber die Teile selbst, und jede Größe eines Gegenstandes, nur durch Einschränkung bestimmt vorgestellt werden können, da muß die ganze Vorstellung nicht durch Begriffe gegeben sein, (denn die enthalten nur Teilvorstellungen,) sondern es muß ihnen unmittelbare Anschauung zum Grunde liegen.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다.

→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 5.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 5. 시간 개념의 초월론적 해명

 

Ich kann mich deshalb auf Nr. 3. berufen, wo ich, um kurz zu sein, das, was eigentlich transzendental ist, unter die Artikel der metaphysischen Erörterung gesetzt habe.

나는 그 때문에 3번을 증거로 댈 수 있다, 거기에서 내가, 짧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형이상학적 해명의 항 아래에 놓은.

→ 나는 그 때문에, 거기에서 내가, 짧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형이상학적 해명의 항 아래에 놓은 3번을 증거로 댈 수 있다.

Hier füge ich noch hinzu, daß der Begriff der Veränderung und, mit ihm, der Begriff der Bewegung (als Veränderung des Orts) nur durch und in der Zeitvorstellung möglich ist: daß, wenn diese Vorstellung nicht Anschauung (innere) a priori wäre, kein Begriff, welcher es auch sei, die Möglichkeit einer Veränderung, d.i. einer Verbindung kontradiktorisch entgegengesetzter Prädikate (z.B. das Sein an einem Orte und das Nichtsein eben desselben Dinges an demselben Orte) in einem und demselben Objekte begreiflich machen könnte.

여기에서 나는 또한 덧붙인다,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

→ 여기에서 나는 또한,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인다: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Nur in der Zeit können beide kontradiktorisch-entgegengesetzte Bestimmungen in einem Dinge, nämlich nach einander, anzutreffen sein.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Also erklärt unser Zeitbegriff die Möglichkeit so vieler synthetischer Erkenntnis a priori, als die allgemeine Bewegungslehre, die nicht wenig fruchtbar ist, darlegt.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보편적 운동학이, 조금도 헛되지 않은, 설명하는 것보다.

→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조금도 헛되지 않은 보편적 운동학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 6. Schlüsse aus diesen Begriffen

§ 6. 이러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ie Zeit ist nicht etwas, was für sich selbst bestünde, oder den Dingen als objektive Bestimmung anhinge, mithin übrig bliebe, wenn man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a) 시간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따라서 남는다,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denn im ersten Fall würde sie etwas sein, was ohne wirklichen Gegenstand dennoch wirklich wäre.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그것들은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 a) 시간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그러한 어떤 것이 아니고, 따라서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남는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시간은,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蟲-

2) Die Zeit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die all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Man kann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überhaupt die Zeit selbsten nicht aufheben, ob man zwar ganz wohl die Erscheinungen aus der Zeit wegnehmen kann. Die Zeit ist also a priori gegeben. In ihr allein ist alle Wirklichkeit der Erscheinungen möglich. Diese können insgesamt wegfallen, aber sie selbst (als die allgemeine Bedingung ihrer Möglichkeit,) kann nicht aufgehoben werden.

→ 2) 시간은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지만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3) Auf dies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auch die Möglichkeit apodiktischer Grundsätze von den Verhältnissen der Zeit, oder Axiomen von der Zeit überhaupt. Sie hat nur Eine Dimension: verschiedene Zeiten sind nicht zugleich, sondern nach einander (so wie verschiedene Räume nicht nach einander, sondern zugleich sind). Diese Grundsätze können aus der Erfahrung nicht gezogen werden, denn diese würde weder strenge Allgemeinheit, noch apodiktische Gewißheit geben. Wir würden nur sagen können: so lehrt es die gemeine Wahrnehmung; nicht aber: so muß es sich verhalten. Diese Grundsätze gelten als Regeln, unter denen überhaupt Erfahrungen möglich sind, und belehren uns vor derselben, und nicht durch dieselbe.

→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규칙들로서 타당하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4) Die Zeit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ihn nennt, allgemeiner Begriff, sondern eine rein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Verschiedene Zeiten sind nur Teile eben derselben Zeit.

→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2) Die Zeit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die all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2) 시간은 필연적 표상이다, 그 표상이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 2) 시간은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Man kann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überhaupt die Zeit selbsten nicht aufheben, ob man zwar ganz wohl die Erscheinungen aus der Zeit wegnehmen kann.

사람들은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Die Zeit ist also a priori gegeben.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In ihr allein ist alle Wirklichkeit der Erscheinungen möglich.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Diese können insgesamt wegfallen, aber sie selbst (als die allgemeine Bedingung ihrer Möglichkeit,) kann nicht aufgehoben werden.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지만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3) Auf dies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auch die Möglichkeit apodiktischer Grundsätze von den Verhältnissen der Zeit, oder Axiomen von der Zeit überhaupt.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Sie hat nur Eine Dimension: verschiedene Zeiten sind nicht zugleich, sondern nach einander (so wie verschiedene Räume nicht nach einander, sondern zugleich sind).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Diese Grundsätze können aus der Erfahrung nicht gezogen werden, denn diese würde weder strenge Allgemeinheit, noch apodiktische Gewißheit geben.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Wir würden nur sagen können: so lehrt es die gemeine Wahrnehmung; nicht aber: so muß es sich verhalten.

우리는 단지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그러나 아니다: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

→ 우리는 단지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Diese Grundsätze gelten als Regeln, unter denen überhaupt Erfahrungen möglich sind, und belehren uns vor derselben, und nicht durch dieselbe.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규칙들로서 타당하다,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그리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규칙들로서 타당하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4) Die Zeit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ihn nennt, allgemeiner Begriff, sondern eine rein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Verschiedene Zeiten sind nur Teile eben derselben Zeit.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蟲-

Dagegen ist der transzendentale Begriff der Erscheinungen im Raume eine kritische Erinnerung, daß überhaupt nichts, was im Raume angeschaut wird, eine Sache an sich, noch daß der Raum eine Form der Dinge sei, die ihnen etwa an sich selbst eigen wäre, sondern daß uns die Gegenstände an sich gar nicht bekannt sein, und, was wir äußere Gegenstände nennen, nichts anders als bloße Vorstellungen unserer Sinnlichkeit sein, deren Form der Raum ist, deren wahres Correlatum aber, d.i. das Ding an sich selbst, dadurch gar nicht erkannt wird, noch erkannt werden kann, nach welchem aber auch in der Erfahrung niemals gefragt wird.

→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전적으로 어떤것도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또한 공간은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서 고유할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그 형식이 공간이고, 그것의 참된 상관물,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고, 알려질 수도 없으며,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도 없는, 그러한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판적 주의이다.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Zweiter Abschnitt

초월론적 감성학 제 2 장

Von der Zeit

시간에 대하여

Metaphysisch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시간 개념의 형이상학적 해명

 

Die Zeit ist 1)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irgend von einer Erfahrung abgezogen worden. Denn das Zugleichsein oder Aufeinanderfolgen würde selbst nicht in die Wahrnehmung kommen, wenn die Vorstellung der Zeit nicht a priori zum Grunde läge. Nur unter deren Voraussetzung kann man sich vorstellen: daß einiges zu einer und derselben Zeit (zugleich) oder in verschiedenen Zeiten (nach einander) sei.

→ 시간은 1)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그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을 표상할 수 있다.

 

 

Dagegen ist der transzendentale Begriff der Erscheinungen im Raume eine kritische Erinnerung, daß überhaupt nichts, was im Raume angeschaut wird, eine Sache an sich, noch daß der Raum eine Form der Dinge sei, die ihnen etwa an sich selbst eigen wäre, sondern daß uns die Gegenstände an sich gar nicht bekannt sein, und, was wir äußere Gegenstände nennen, nichts anders als bloße Vorstellungen unserer Sinnlichkeit sein, deren Form der Raum ist, deren wahres Correlatum aber, d.i. das Ding an sich selbst, dadurch gar nicht erkannt wird, noch erkannt werden kann, nach welchem aber auch in der Erfahrung niemals gefragt wird.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비판적 주의이다, 전적으로 아무것도,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것은,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것, 또한 공간은 사물들의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것, 그 형식이 그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 고유하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 표상들의 형식이 공간인, 그러나 그것의 참된 상관물은,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려질 수 있는, 그러나 역시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 없는.

→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전적으로 어떤것도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또한 공간은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서 고유할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그 형식이 공간이고, 그것의 참된 상관물,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고, 알려질 수도 없으며,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도 없는, 그러한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판적 주의이다.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Zweiter Abschnitt

초월적 감성학 제 2 장

Von der Zeit

시간에 대하여

Metaphysisch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시간 개념의 형이상학적 해명

 

Die Zeit ist 1)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irgend von einer Erfahrung abgezogen worden.

시간은 1)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 시간은 1)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그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Denn das Zugleichsein oder Aufeinanderfolgen würde selbst nicht in die Wahrnehmung kommen, wenn die Vorstellung der Zeit nicht a priori zum Grunde läge.

왜냐하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 왜냐하면,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Nur unter deren Voraussetzung kann man sich vorstellen: daß einiges zu einer und derselben Zeit (zugleich) oder in verschiedenen Zeiten (nach einander) sei.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표상할 수 있다: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

→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을 표상할 수 있다.

 

-蟲-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Geschmack und Farben sind gar nicht notwendige Bedingungen, unter welchen die Gegenstände allein vor uns Objekte der Sinne werden können. Sie sind nur als zufällig beigefügte Wirkungen der besondern Organisation mit der Erscheinung verbunden. Daher sind sie auch keine Vorstellungen a priori, sondern auf Empfindung, der Wohlgeschmack aber so gar auf Gefühl (der Lust und Unlust) als einer Würkung der Empfindung gegründet. Auch kann niemand a priori weder eine Vorstellung einer Farbe, noch irgend eines Geschmacks haben: der Raum aber betrifft nur die reine Form der Anschauung, schließt also gar keine Empfindung (nichts Empirisches) in sich, und alle Arten und Bestimmungen des Raumes können und müssen so gar a priori vorgestellt werden können, wenn Begriffe der Gestalten so wohl, als Verhältnisse entstehen sollen. Durch denselben ist es allein möglich, daß Dinge vor uns äußere Gegenstände sein. [A; sind Ak: seien Ke].

→ 맛과 색들은 전혀,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대상들이 오로지 우리에게 감관의 객체가 될 수 있는 필연적 조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특수한 조합의 우연히 덧붙여진 작용들로서 현상에 결부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들은 또한 어떠한 선험적 표상들도 아니고, 오히려 지각에, 더욱이 좋은 맛은 지각의 한 작용으로서 감정(쾌와 불쾌)에 기초된다. 또한 그 누구도 선험적으로 한 색의 표상도, 맛의 그 어떤 표상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공간은 단지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만 관계하므로, 전혀 어떠한 지각도(감각적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만일 양상들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들도 또한 생성해야 한다면, 공간의 모든 본성들과 규정들은 더욱이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고 표상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만 오직,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부 대상들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Die Absicht dieser Anmerkung geht nur dahin: zu verhüten, daß man die behauptete Idealität des Raumes nicht durch bei weitem unzulängliche Beispiele zu erläutern sich einfallen lasse, da nämlich etwa Farben, Geschmack etc. mit Recht nicht als Beschaffenheiten der Dinge, sondern bloß als Veränderungen unseres Subjekts, die so gar bei verschiedenen Menschen verschieden sein können, betrachtet werden. Denn in diesem Falle gilt das, was ursprünglich selbst nur Erscheinung ist, z.B. eine Rose, im empirischen Verstande für ein Ding an sich selbst, welches doch jedem Auge in Ansehung der Farbe anders erscheinen kann.

→ 이 주석의 장은 단지 사람들이 공간의 고수되는 관념을 매우 불충분한 예시를 사용함을 통하여 해명하기 위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을 방지하는 의도이다. 왜냐하면 다시 말해 어떤 색들, 맛 등은 정당하게 사물의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우리 주관의 변양들로서, 더욱이 상이한 인간들에게서 다를 수 있는 변양들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는 단지 현상일 뿐인 것은, 또한 그러한 것이 색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각각의 눈에 다르게 현상할 수 있는, 예를 들어 하나의 장미는, 감각적 지성에 있어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타당하다.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Geschmack und Farben sind gar nicht notwendige Bedingungen, unter welchen die Gegenstände allein vor uns Objekte der Sinne werden können.

맛과 색들은 전혀 필연적 조건들이 아니다,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대상들이 오로지 우리에게 감관의 객체가 될 수 있는.

→ 맛과 색들은 전혀,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대상들이 오로지 우리에게 감관의 객체가 될 수 있는 필연적 조건들이 아니다.

Sie sind nur als zufällig beigefügte Wirkungen der besondern Organisation mit der Erscheinung verbunden.

그것들은 단지 특수한 조합의 우연히 덧붙여진 작용들로서 현상에 결부하게 된다.

→ 그것들은 단지 특수한 조합의 우연히 덧붙여진 작용들로서 현상에 결부하게 된다.

Daher sind sie auch keine Vorstellungen a priori, sondern auf Empfindung, der Wohlgeschmack aber so gar auf Gefühl (der Lust und Unlust) als einer Würkung der Empfindung gegründet.

그래서 그것들은 또한 어떠한 선험적 표상들도 아니고, 오히려 지각에, 더욱이 좋은 맛은 지각의 한 작용으로서 감정(쾌와 불쾌)에 기초된다.

→ 그래서 그것들은 또한 어떠한 선험적 표상들도 아니고, 오히려 지각에, 더욱이 좋은 맛은 지각의 한 작용으로서 감정(쾌와 불쾌)에 기초된다.

Auch kann niemand a priori weder eine Vorstellung einer Farbe, noch irgend eines Geschmacks haben:

또한 그 누구도 선험적으로 한 색의 표상도, 맛의 그 어떤 표상도 가질 수 없다:

der Raum aber betrifft nur die reine Form der Anschauung, schließt also gar keine Empfindung (nichts Empirisches) in sich, und alle Arten und Bestimmungen des Raumes können und müssen so gar a priori vorgestellt werden können, wenn Begriffe der Gestalten so wohl, als Verhältnisse entstehen sollen.

그러나 공간은 단지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만 관계한다, 그러므로 전혀 어떠한 지각도(감각적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공간의 모든 본성들과 규정들은 더욱이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고 표상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양상들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들도 또한 생성해야 한다면.

→ 또한 그 누구도 선험적으로 한 색의 표상도, 맛의 그 어떤 표상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공간은 단지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만 관계하므로, 전혀 어떠한 지각도(감각적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만일 양상들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들도 또한 생성해야 한다면, 공간의 모든 본성들과 규정들은 더욱이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고 표상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Durch denselben ist es allein möglich, daß Dinge vor uns äußere Gegenstände sein.

그것을 통해서만 오직 그것이 가능하다,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부 대상들이라는.

→ 그것을 통해서만 오직,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부 대상들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A; sind Ak: seien Ke].

 

 

Die Absicht dieser Anmerkung geht nur dahin:

이 주석의 장은 단지 이러한 의도이다:

zu verhüten, daß man die behauptete Idealität des Raumes nicht durch bei weitem unzulängliche Beispiele zu erläutern sich einfallen lasse, da nämlich etwa Farben, Geschmack etc. mit Recht nicht als Beschaffenheiten der Dinge, sondern bloß als Veränderungen unseres Subjekts, die so gar bei verschiedenen Menschen verschieden sein können, betrachtet werden.

방지하는 것, 사람들이 공간의 고수되는 관념을 매우 불충분한 예시를 사용함을 통하여 해명하기 위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 왜냐하면 다시 말해 어떤 색들, 맛 등은 정당하게 사물의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우리 주관의 변양들로서, 그것들이 더욱이 상이한 인간들에게서 다를 수 있는, 여겨지기 때문이다.

→ 이 주석의 장은 단지 사람들이 공간의 고수되는 관념을 매우 불충분한 예시를 사용함을 통하여 해명하기 위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을 방지하는 의도이다. 왜냐하면 다시 말해 어떤 색들, 맛 등은 정당하게 사물의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우리 주관의 변양들로서, 더욱이 상이한 인간들에게서 다를 수 있는 변양들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Denn in diesem Falle gilt das, was ursprünglich selbst nur Erscheinung ist, z.B. eine Rose, im empirischen Verstande für ein Ding an sich selbst, welches doch jedem Auge in Ansehung der Farbe anders erscheinen kann.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그것은 유효하다,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는 단지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 예를 들어 하나의 장미, 감각적 지성에 있어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또한 그러한 것이 색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각각의 눈에 다르게 현상할 수 있는.

→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는 단지 현상일 뿐인 것은, 또한 그러한 것이 색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각각의 눈에 다르게 현상할 수 있는, 예를 들어 하나의 장미는, 감각적 지성에 있어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타당하다.

 

-蟲-

  Unsere Erörterungen lehren demnach die Realität (d.i. die objektive Gültigkeit) des Raumes in Ansehung alles dessen, was äußerlich als Gegenstand uns vorkommen kann, aber zugleich die Idealität des Raums in Ansehung der Dinge, wenn sie durch die Vernunft an sich selbst erwogen werden, d.i. ohne Rücksicht auf die Beschaffenheit unserer Sinnlichkeit zu nehmen. Wir behaupten also die empirische Realität des Raumes (in Ansehung aller möglichen äußeren Erfahrung), ob zwar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sselben, d.i. daß er Nichts sei, so bald wir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 weglassen, und ihn als etwas, was den Dingen an sich selbst zum Grunde liegt, annehmen.

→ 우리의 상론은 그에 따라 모든 것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외적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의 실재성(즉 객관적 타당성)을 교시하지만, 또한 사물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관념성은, 만일 그것이 이성 그 자체를 통하여 검토된다면, 즉 우리의 감성의 속성에 대한 숙려 없이 취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의 초월적 관념성에도, 즉 그것이 무(無)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감각적 실재성(가능한 모든 외적 경험에 대한 고려 속에서)을 주장한다. 우리가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생략하자 마자, 그것을, 사물들 그 자체에게 있어서 근저에 놓이는 어떤 것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Es gibt aber auch außer dem Raum keine andere subjektive und auf etwas Äußeres bezogene Vorstellung, die a priori objektiv heißen könnte. Denn man kann von keiner derselben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wie von der Anschauung im Raume, herleiten § 3. Daher ihnen, genau zu reden, gar keine Idealität zukommt, ob sie gleich darin mit der Vorstellung des Raumes übereinkommen, daß sie bloß zur subjektiven Beschaffenheit der Sinnesart gehören, z.B. des Gesichts, Gehörs, Gefühls, durch die Empfindungen der Farben, Töne und Wärme, die aber, weil sie bloß Empfindungen und nicht Anschauungen sind, an sich kein Objekt, am wenigsten a priori, erkennen lassen.

→ 그러나 또한 공간 밖에 아무런 다른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인 것에 관련하는 표상, 선험적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표상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험적 종합명제들을, 공간 안에서 직관으로부터에서와 같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3. 그런 이유에서 그 명제들에게, 정확히 말해서, 그 명제들이 그 안에서 공간의 표상과 부합할지라도, 성향의 순전히 주관적 특성에 속하는 것, 예를 들어, 색, 소리들과 온도의 지각을 통한 시각, 청각, 촉각 같은 아무런 관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순전한 지각이고 직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떠한 객관도, 최소한 선험적으로,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Daher diese subjektive Bedingung aller äußeren Erscheinungen mit keiner andern kann verglichen werden. Der Wohlgeschmack eines Weines gehört nicht zu den objektiven Bestimmungen des Weines, mithin eines Objekts so gar als Erscheinung betrachtet, sondern zu der besondern Beschaffenheit des Sinnes an dem Subjekte, was ihn genießt. Die Farben sind nicht Beschaffenheiten der Körper, deren Anschauung sie anhängen, sondern auch nur Modifikationen des Sinnes des Gesichts, welches vom Lichte auf gewisse Weise affiziert wird. Dagegen gehört der Raum, als Bedingung äußerer Objekte, notwendiger Weise zur Erscheinung oder Anschauung derselben.

이 부분에 있어서 A에 따르면: → 거기에서 모든 외적 현상들의 이러한 주관적 조건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와인의 훌륭한 향미는, 그에 따라 하나의 객관을 더욱이 현상으로 여기는 와인의 객관적 규정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주관에 있어서, 그것을 먹는다는 감관의 특수한 성질에 속한다. 색들은, 그 물체의 직관에 달려있는 물체의 성질들이 아니고, 오히려 단지, 빛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촉발되는 시각 감관의 변화일 뿐이다. 그에 반해 공간은, 외적 객관의 조건으로서, 더욱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 자체의 현상이나 직관에 속한다.

 

 

 

  Unsere Erörterungen lehren demnach die Realität (d.i. die objektive Gültigkeit) des Raumes in Ansehung alles dessen, was äußerlich als Gegenstand uns vorkommen kann, aber zugleich die Idealität des Raums in Ansehung der Dinge, wenn sie durch die Vernunft an sich selbst erwogen werden, d.i. ohne Rücksicht auf die Beschaffenheit unserer Sinnlichkeit zu nehmen.

우리의 상론은 그에 따라 모든 것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실재성(즉 객관적 타당성)을 교시한다, 그 모든 것이 외적으로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그러나 또한 사물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관념성은, 만일 그것이 이성 그 자체를 통하여 검토된다면, 즉 우리의 감성의 속성에 대한 숙려 없이 취해질 것이다.

→ 우리의 상론은 그에 따라 모든 것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외적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의 실재성(즉 객관적 타당성)을 교시하지만, 또한 사물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관념성은, 만일 그것이 이성 그 자체를 통하여 검토된다면, 즉 우리의 감성의 속성에 대한 숙려 없이 취해질 것이다.

Wir behaupten also die empirische Realität des Raumes (in Ansehung aller möglichen äußeren Erfahrung), ob zwar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sselben, d.i. daß er Nichts sei, so bald wir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 weglassen, und ihn als etwas, was den Dingen an sich selbst zum Grunde liegt, annehmen.

그러므로 우리는 공간의 감각적 실재성(가능한 모든 외적 경험에 대한 고려 속에서)을 주장한다, 그것의 초월적 관념성에도 불구하고, 즉 그것이 무(無)라는, 우리가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생략하자 마자, 그것을 어떤 것으로, 그것이 사물들 그 자체에게 있어서 근저에 놓이는, 취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의 초월적 관념성에도, 즉 그것이 무(無)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감각적 실재성(가능한 모든 외적 경험에 대한 고려 속에서)을 주장한다. 우리가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생략하자 마자, 그것을, 사물들 그 자체에게 있어서 근저에 놓이는 어떤 것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Es gibt aber auch außer dem Raum keine andere subjektive und auf etwas Äußeres bezogene Vorstellung, die a priori objektiv heißen könnte.

  그러나 또한 공간 밖에 아무런 다른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인 것에 관련하는 표상, 선험적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표상이 있다.

→ 그러나 또한 공간 밖에 아무런 다른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인 것에 관련하는 표상, 선험적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표상이 있다.

Denn man kann von keiner derselben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wie von der Anschauung im Raume, herleiten § 3.

왜냐하면 인간은 선험적 종합명제들을, 공간 안에서 직관으로부터에서와 같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인간은 선험적 종합명제들을, 공간 안에서 직관으로부터에서와 같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3

Daher ihnen, genau zu reden, gar keine Idealität zukommt, ob sie gleich darin mit der Vorstellung des Raumes übereinkommen, daß sie bloß zur subjektiven Beschaffenheit der Sinnesart gehören, z.B. des Gesichts, Gehörs, Gefühls, durch die Empfindungen der Farben, Töne und Wärme, die aber, weil sie bloß Empfindungen und nicht Anschauungen sind, an sich kein Objekt, am wenigsten a priori, erkennen lassen.

그런 이유에서 그 명제들에게, 정확히 말해서, 전혀 아무런 관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 명제들이 그 안에서 공간의 표상과 부합할지라도, 그 표상이 성향의 순전히 주관적 특성, 예를 들어, 색, 소리들과 온도의 지각을 통한 시각, 청각, 촉각에 속하는 그러나 그것들이, 순전한 지각이고 직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떠한 객관도, 최소한 선험적으로,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

→ 그런 이유에서 그 명제들에게, 정확히 말해서, 그 명제들이 그 안에서 공간의 표상과 부합할지라도, 성향의 순전히 주관적 특성에 속하는 것, 예를 들어, 색, 소리들과 온도의 지각을 통한 시각, 청각, 촉각 같은 아무런 관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순전한 지각이고 직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떠한 객관도, 최소한 선험적으로,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이 부분에 있어서 A에 따르면:

 

Daher diese subjektive Bedingung aller äußeren Erscheinungen mit keiner andern kann verglichen werden.

거기에서 모든 외적 현상들의 이러한 주관적 조건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 거기에서 모든 외적 현상들의 이러한 주관적 조건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Der Wohlgeschmack eines Weines gehört nicht zu den objektiven Bestimmungen des Weines, mithin eines Objekts so gar als Erscheinung betrachtet, sondern zu der besondern Beschaffenheit des Sinnes an dem Subjekte, was ihn genießt.

와인의 훌륭한 향미는 와인의 객관적 규정에 속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하나의 객관을 더욱이 현상으로 여기는, 오히려 주관에 있어서 감관의 특수한 성질에 속한다, 그것을 먹는다는 것.

→ 와인의 훌륭한 향미는, 그에 따라 하나의 객관을 더욱이 현상으로 여기는 와인의 객관적 규정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주관에 있어서, 그것을 먹는다는 감관의 특수한 성질에 속한다.

Die Farben sind nicht Beschaffenheiten der Körper, deren Anschauung sie anhängen, sondern auch nur Modifikationen des Sinnes des Gesichts, welches vom Lichte auf gewisse Weise affiziert wird.

색들은 물체의 성질들이 아니다, 성질들이 그 물체의 직관에 달려있는, 오히려 단지 시각 감관의 변화일 뿐이다, 그러한 감관이 빛에 대해 확실한 방식으로 촉발되는.

→ 색들은, 그 물체의 직관에 달려있는 물체의 성질들이 아니고, 오히려 단지, 빛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촉발되는 시각 감관의 변화일 뿐이다.

Dagegen gehört der Raum, als Bedingung äußerer Objekte, notwendiger Weise zur Erscheinung oder Anschauung derselben.

그에 반해 공간은 속한다, 외적 객관의 조건으로서, 더욱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 자체의 현상이나 직관에.

→ 그에 반해 공간은, 외적 객관의 조건으로서, 더욱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 자체의 현상이나 직관에 속한다.

 

-蟲-

Dieses Prädikat wird den Dingen nur in so fern beigelegt, als sie uns erscheinen, d.i. Gegenstände der Sinnlichkeit sind. Die beständige Form dieser Rezeptivität, welche wir Sinnlichkeit nennen, ist eine notwendige Bedingung aller Verhältnisse, darinnen Gegenstände als außer uns angeschauet werden, und, wenn man von diesen Gegenstände abstrahiert, eine reine Anschauung, welche den Namen Raum führet. Weil wir die besonderen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nicht zu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Sachen, sondern nur ihrer Erscheinungen machen können, so können wir wohl sagen, daß der Raum alle Dinge befasse, die uns äußerlich erscheinen mögen, aber nicht alle Dinge an sich selbst, sie mögen nun angeschaut werden oder nicht, oder auch von welchem Subjekt man wolle. Denn wir können von den Anschauungen anderer denkenden Wesen gar nicht urteilen, ob sie an die nämlichen Bedingungen gebunden sein, welche unsere Anschauung einschränken und für uns allgemein gültig sind. Wenn wir die Einschränkung eines Urteils zum Begriff des Subjekts hinzufügen, so gilt das Urteil alsdenn unbedingt. Der Satz: Alle Dinge sind neben einander im Raum, gilt unter der Einschränkung, wenn diese Dinge als Gegenstände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genommen werden. Füge ich hier die Bedingung zum Begriffe, und sage: Alle Dinge, als äußere Erscheinungen, sind neben einander im Raum, so gilt diese Regel allgemein und ohne Einschränkung.

→ 이러한 술어는 사물들에게 단지,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즉 감각의 대상들인  그러한 한에서만 첨가된다. 이러한, 우리가 감성이라 이름하는 감수성의 영속하는 형식이, 그 안에서 대상들이 우리의 외부로서 직관되는, 모든 관계들의 필연적인 조건이고, 사람들이 이러한 대상들로부터 추상할 때, (그 형식은) 공간이란 이름을 지니는 순수한 직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성의 특수한 조건들을 사태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사태의 현상들(의 조건들)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공간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현상할 수 있는, 그러나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현상되거나 현상되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또한 그러한 주어로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다고, 잘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또 다른 사유하는 존재의 직관들에 대해서는, 그 직관들이 동일한 조건들에 연관되는지, 그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직관을 제한하고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 전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어의 개념에 대해 판단의 제한을 덧붙인다면, 그래서 그 판단은 무조건적으로 유효하다. 모든 사물들은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라는 명제는,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에 대한 대상들로서 취해질 때, 제한 하에서 유효하다. 나는 여기에 개념들에 대한 조건을 결합하고, 말한다: 모든 사물들은, 외부 현상들로서,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하고, 그래서 이러한 규칙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유효하다.

 

 

Dieses Prädikat wird den Dingen nur in so fern beigelegt, als sie uns erscheinen, d.i. Gegenstände der Sinnlichkeit sind.

이러한 술어는 사물들에게 단지 그러한 한에서만 첨가된다,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즉 감각의 대상들인.

→ 이러한 술어는 사물들에게 단지,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즉 감각의 대상들인  그러한 한에서만 첨가된다.

Die beständige Form dieser Rezeptivität, welche wir Sinnlichkeit nennen, ist eine notwendige Bedingung aller Verhältnisse, darinnen Gegenstände als außer uns angeschauet werden, und, wenn man von diesen Gegenstände abstrahiert, eine reine Anschauung, welche den Namen Raum führet.

이러한 감수성의 영속하는 형식이, 그러한 형식을 우리가 감성이라 이름하는, 모든 관계들의 필연적인 조건이다, 그 안에서 대상들이 우리의 외부로서 직관되는,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대상들로부터 추상할 때, 순수한 직관이다, 그러한 직관이 공간이란 이름을 지니는.

→ 이러한, 우리가 감성이라 이름하는 감수성의 영속하는 형식이, 그 안에서 대상들이 우리의 외부로서 직관되는, 모든 관계들의 필연적인 조건이고, 사람들이 이러한 대상들로부터 추상할 때, (그 형식은) 공간이란 이름을 지니는 순수한 직관이다.

Weil wir die besonderen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nicht zu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Sachen, sondern nur ihrer Erscheinungen machen können, so können wir wohl sagen, daß der Raum alle Dinge befasse, die uns äußerlich erscheinen mögen, aber nicht alle Dinge an sich selbst, sie mögen nun angeschaut werden oder nicht, oder auch von welchem Subjekt man wolle.

왜냐하면 우리가 감성의 특수한 조건들을 사태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사태의 현상들(의 조건들)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잘 말할 수 있다, 공간은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다고,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적으로 현상할 수 있는, 그러나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현상되거나 현상되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또한 그러한 주어로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 왜냐하면 우리는 감성의 특수한 조건들을 사태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사태의 현상들(의 조건들)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공간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현상할 수 있는, 그러나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현상되거나 현상되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또한 그러한 주어로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다고, 잘 말할 수 있다.

Denn wir können von den Anschauungen anderer denkenden Wesen gar nicht urteilen, ob sie an die nämlichen Bedingungen gebunden sein, welche unsere Anschauung einschränken und für uns allgemein gültig sind.

왜냐하면 우리는 또 다른 사유하는 존재의 직관들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직관들이 동일한 조건들에 연관되는지, 그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직관을 제한하고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

→ 왜냐하면 우리는 또 다른 사유하는 존재의 직관들에 대해서는, 그 직관들이 동일한 조건들에 연관되는지, 그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직관을 제한하고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 전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Wenn wir die Einschränkung eines Urteils zum Begriff des Subjekts hinzufügen, so gilt das Urteil alsdenn unbedingt.

우리가 주어의 개념에 대해 판단의 제한을 덧붙인다면, 그래서 그 판단은 무조건적으로 유효하다.

→ 우리가 주어의 개념에 대해 판단의 제한을 덧붙인다면, 그래서 그 판단은 무조건적으로 유효하다.

Der Satz: Alle Dinge sind neben einander im Raum, gilt unter der Einschränkung, wenn diese Dinge als Gegenstände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genommen werden.

모든 사물들은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라는 명제는, 제한 아래에서 유효하다,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에 대한 대상들로서 취해질 때.

→ 모든 사물들은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라는 명제는,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에 대한 대상들로서 취해질 때, 제한 하에서 유효하다.

Füge ich hier die Bedingung zum Begriffe, und sage: Alle Dinge, als äußere Erscheinungen, sind neben einander im Raum, so gilt diese Regel allgemein und ohne Einschränkung.

나는 여기에 개념들에 대한 조건을 결합하고, 말한다: 모든 사물들은, 외부 현상들로서,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그래서 이러한 규칙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유효하다.

→ 나는 여기에 개념들에 대한 조건을 결합하고, 말한다: 모든 사물들은, 외부 현상들로서,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하고, 그래서 이러한 규칙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유효하다.

 

-蟲-

Schlüsse aus obigen Begriffen

이상의 개념들로부터 나오는 결론

a) Der Raum stellet gar keine Eigenschaft irgend einiger Dinge an sich, oder sie in ihrem Verhältnis auf einander vor, d.i. keine Bestimmung derselben, die an Gegenständen selbst haftete, und welche bliebe, wenn man auch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abstrahierte. Denn weder absolute, noch relative Bestimmungen können vor dem Dasein der Dinge, welchen sie zukommen, mithin nicht a priori angeschaut werden.

→ 공간은 도대체 더 사물 자체에 일치하는 전혀 아무런 특성도, 혹은 그것이 그것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즉 대상들 자체를 보장하는 사물 자체의 아무런 규정도 표상하지 않고, 사람들이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할 때 그러한 것은 남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그 사물의 현존에 귀속되는 절대적인 규정들도, 상대적인 규정들도, 그에 따라 선험적으로 직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b) Der Raum ist nichts anders, als nur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äußerer Sinne, d.i. die subjektive Bedingung der Sinnlichkeit, unter der allein uns äußere Anschauung möglich ist. Weil nun die Rezeptivität des Subjekts, von Gegenständen affiziert zu werden, notwendiger Weise vor allen Anschauungen dieser Objekte vorhergeht, so läßt sich verstehen, wie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vor allen wirklichen Wahrnehmungen, mithin a priori im Gemüte gegeben sein könne, und wie sie als eine reine Anschauung, in der alle Gegenstände bestimmt werden müssen, Prinzipien der Verhältnisse derselben vor aller Erfahrung enthalten könne.

→ b) 공간은, 단지 외간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으로서, 즉, 그 아래에서 오로지 우리의 외적 직관만이 가능한, 감성의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서 촉발되는 주체의 수용성은, 이러한 객체의 모든 직관에 대한 필연적인 방식에 선행하고, 그래서 모든 실질적 지각들에 앞서서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 어떻게, 따라서 심정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 안에서 모든 대상들이 규정되어야만 하는 선험적 직관으로서, 모든 경험에 앞서서 그것 자체의 관계들에 대한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지, 이해하도록 한다.

Wir können demnach nur aus dem Standpunkte eines Menschen, vom Raum, von ausgedehnten Wesen etc. reden. Gehen wir von der subjektiven Bedingung ab, unter welcher wir allein äußere Anschauung bekommen können, so wie wir nämlich von de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mögen, so bedeutet die Vorstellung vom Raume gar nichts.

→ 우리는 그에 따라 오로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공간에 대해서, 연장된 본질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아래에서 우리는 오로지 외적 직관만을 획득할 수 있는, 또한 우리가 다시 말해 대상들로부터 촉발될 수도 있는, 주관적 조건으로부터 떠난다면, 공간의 대상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Schlüsse aus obigen Begriffen

상술한 개념들로부터 결론

→ 상술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er Raum stellet gar keine Eigenschaft irgend einiger Dinge an sich, oder sie in ihrem Verhältnis auf einander vor, d.i. keine Bestimmung derselben, die an Gegenständen selbst haftete, und welche bliebe, wenn man auch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abstrahierte.

a) 공간은 도대체 더 사물 자체에 일치하는 전혀 아무런 특성도, 혹은 그것이 그것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즉 사물 자체의 아무런 규정도 표상하지 않는다, 그것이 대상들 자체를 보장하는, 그리고 그러한 것은 남는다, 사람들이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할 때.

→ 공간은 도대체 더 사물 자체에 일치하는 전혀 아무런 특성도, 혹은 그것이 그것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즉 대상들 자체를 보장하는 사물 자체의 아무런 규정도 표상하지 않고, 사람들이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할 때 그러한 것은 남는다.

Denn weder absolute, noch relative Bestimmungen können vor dem Dasein der Dinge, welchen sie zukommen, mithin nicht a priori angeschaut werden.

왜냐하면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절대적인 규정들도, 상대적인 규정들도, 그러한 규정이 그 사물의 현존에 귀속되는, 그에 따라 선험적으로 직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그 사물의 현존에 귀속되는 절대적인 규정들도, 상대적인 규정들도, 그에 따라 선험적으로 직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b) Der Raum ist nichts anders, als nur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äußerer Sinne, d.i. die subjektive Bedingung der Sinnlichkeit, unter der allein uns äußere Anschauung möglich ist.

b) 공간은 다른 무엇도 아니다, 단지 외간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으로서, 즉 감성의 주관적 조건, 그 아래에서 오로지 우리의 외적 직관만이 가능한.

→ b) 공간은, 단지 외간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으로서, 즉, 그 아래에서 오로지 우리의 외적 직관만이 가능한, 감성의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다.

Weil nun die Rezeptivität des Subjekts, von Gegenständen affiziert zu werden, notwendiger Weise vor allen Anschauungen dieser Objekte vorhergeht, so läßt sich verstehen, wie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vor allen wirklichen Wahrnehmungen, mithin a priori im Gemüte gegeben sein könne, und wie sie als eine reine Anschauung, in der alle Gegenstände bestimmt werden müssen, Prinzipien der Verhältnisse derselben vor aller Erfahrung enthalten könne.

왜냐하면 주체의 수용성은, 대상들에 대해서 촉발되는, 이러한 객체의 모든 직관에 대한 필연적인 방식에 선행하고,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도록 한다, 모든 실질적 지각들에 앞서서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 어떻게, 따라서 심정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선험적 직관으로서, 그 안에서 모든 대상들이 규정되어야만 하는, 모든 경험에 앞서서 그것 자체의 관계들에 대한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지.

→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서 촉발되는 주체의 수용성은, 이러한 객체의 모든 직관에 대한 필연적인 방식에 선행하고, 그래서 모든 실질적 지각들에 앞서서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 어떻게, 따라서 심정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 안에서 모든 대상들이 규정되어야만 하는 선험적 직관으로서, 모든 경험에 앞서서 그것 자체의 관계들에 대한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지, 이해하도록 한다.

Wir können demnach nur aus dem Standpunkte eines Menschen, vom Raum, von ausgedehnten Wesen etc. reden.

우리는 그에 따라 오로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공간에 대해서, 연장된 본질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 우리는 그에 따라 오로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공간에 대해서, 연장된 본질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Gehen wir von der subjektiven Bedingung ab, unter welcher wir allein äußere Anschauung bekommen können, so wie wir nämlich von de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mögen, so bedeutet die Vorstellung vom Raume gar nichts.

우리는 주관적 조건으로부터 떠난다, 그러한 것 아래에서 우리는 오로지 외적 직관만을 획득할 수 있는, 또한 우리가 다시 말해 대상들로부터 촉발될 수도 있는, 그러면 공간의 대상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 우리가, 그 아래에서 우리는 오로지 외적 직관만을 획득할 수 있는, 또한 우리가 다시 말해 대상들로부터 촉발될 수도 있는, 주관적 조건으로부터 떠난다면, 공간의 대상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蟲-

Er muß ursprünglich Anschauung sein; denn aus einem bloßen Begriffe lassen sich keine Sätze, die über den Begriff hinausgehen, ziehen, welches doch in der Geometrie geschieht (Einleitung Ⅴ.). Aber diese Anschauung muß a priori, d.i. vor aller Wahrnehumg eines Gegenstandes, in uns angetroffen werden, mithin reine, nicht empirische Anschauung sein. Denn die geometrischen Sätze sind insgesamt apodiktisch, d.i. mit dem Bewußtsein ihrer Notwendigkeit verbunden, z.B. der Raum hat nur drei Abmessungen; dergleichen Sätze aber können nicht empirische oder Erfahrungsurteile sein, noch aus ihnen geschlossen werden (Einleit. Ⅱ.).

→ 그것은 근원적인 직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순수한 개념으로부터, 그 개념을 넘어서는 명제들이, 기하학의 역사 속에서와 같은 그러한 것을, 이끌어 내도록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은 선험적으로, 즉 우리의 안에서 대상들의 모든 지각에 앞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고, 따라서 순수하고, 감각적이지 않은 직관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공간은 단지 세 차원만을 가진다 같은 기하학적 명제들은 모두 다 자명한, 곧 그 명제들의 필연성의 의식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명제들은 그러나 감각적 혹은 경험적 판단일 수 없고, 또 그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

Wie kann nun eine äußere Anschauung dem Gemüte beiwohnen, die vor den Objekten selbst vorhergeht, und in welcher der Begriff der letzteren a priori bestimmt werden kann? Offenbar nicht anders, als so fern sie bloß im Subjekte, als die formale Beschaffenheit desselben von Objekten affiziert zu werden, und dadurch unmittelbare Vorstellung derselben d.i. Anschauung zu bekommen, ihren Sitz hat, also nur als Form des äußeren Sinnes überhaupt.

→ 이제 어떻게 외적 직관이 객체 자체에 앞서 선행하는 심정에 내재할 수 있고, 그러한 심정 안에서 후자(심성)의 개념이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그것은 명백하게 다름 아니라, 그것이 순수하게 주체 안에서, 그것 자체의 형식적 성질로서 촉발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것의 직접적인 표상 즉 직관을 획득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자리를 갖는 한에서, 그러므로 단지 전적으로 외감의 형식으로서이다.

Also macht allein unsere Erklärung die Möglichkeit der Geometrie als einer synthetischen Erkenntnis a priori begreiflich. Eine jede Erklärungsart, die dieses nicht liefert, wenn sie gleich dem Anscheine nach mit ihr einige Ähnlichkeit hätte, kann an diesen Kennzeichen am sichersten von ihr unterschieden werden.

→ 그러므로 오로지 우리의 해명만이 선험적 종합인식으로서 기하학의 가능성을 납득할 수 있게 만든다. 각각의 설명 방식은, 그것이 이러한 것을 산출하지 않는, 그것이 마찬가지로 우리의 설명방식과 유사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가장 확실한 특징에 있어서 우리의 것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Er muß ursprünglich Anschauung sein;

그것은 근원적인 직관이어야 한다.

denn aus einem bloßen Begriffe lassen sich keine Sätze, die über den Begriff hinausgehen, ziehen, welches doch in der Geometrie geschieht (Einleitung Ⅴ.).

왜냐하면 한 순수한 개념으로부터 명제들이, 그 명제들이 그 개념을 넘어서는, 기하학의 역사 속에서와 같은 그러한 것을, 이끌어 내도록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그것은 근원적인 직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순수한 개념으로부터, 그 개념을 넘어서는 명제들이, 기하학의 역사 속에서와 같은 그러한 것을, 이끌어 내도록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Aber diese Anschauung muß a priori, d.i. vor aller Wahrnehumg eines Gegenstandes, in uns angetroffen werden, mithin reine, nicht empirische Anschauung sein.

그러나 이러한 직관은 선험적으로, 즉 우리의 안에서 대상들의 모든 지각에 앞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고, 따라서 순수하고, 감각적이지 않은 직관이어야만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직관은 선험적으로, 즉 우리의 안에서 대상들의 모든 지각에 앞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고, 따라서 순수하고, 감각적이지 않은 직관이어야만 한다.

Denn die geometrischen Sätze sind insgesamt apodiktisch, d.i. mit dem Bewußtsein ihrer Notwendigkeit verbunden, z.B. der Raum hat nur drei Abmessungen;

왜냐하면 기하학적 명제들은 모두 다 자명한, 곧 그 명제들의 필연성의 의식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간은 단지 세 차원만을 가진다;

dergleichen Sätze aber können nicht empirische oder Erfahrungsurteile sein, noch aus ihnen geschlossen werden (Einleit. Ⅱ.).

그와 같은 명제들은 그러나 감각적 혹은 경험적 판단일 수 없고, 또 그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

→ 왜냐하면, 예를 들어 공간은 단지 세 차원만을 가진다 같은 기하학적 명제들은 모두 다 자명한, 곧 그 명제들의 필연성의 의식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명제들은 그러나 감각적 혹은 경험적 판단일 수 없고, 또 그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

 

Wie kann nun eine äußere Anschauung dem Gemüte beiwohnen, die vor den Objekten selbst vorhergeht, und in welcher der Begriff der letzteren a priori bestimmt werden kann?

이제 어떻게 외적 직관이 심정에 내재할 수 있고, 그 심정이 객체에 앞서 스스로 선행하는, 그러한 심정 안에서 후자의 개념이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 이제 어떻게 외적 직관이 객체 자체에 앞서 선행하는 심정에 내재할 수 있고, 그러한 심정 안에서 후자(심성)의 개념이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Offenbar nicht anders, als so fern sie bloß im Subjekte, als die formale Beschaffenheit desselben von Objekten affiziert zu werden, und dadurch unmittelbare Vorstellung derselben d.i. Anschauung zu bekommen, ihren Sitz hat, also nur als Form des äußeren Sinnes überhaupt.

그것은 명백하게 다름 아니라, 그것이 순수하게 주체 안에서, 그것 자체의 형식적 성질로서 촉발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것의 직접적인 표상 즉 직관을 획득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자리를 갖는 한에서, 그러므로 단지 전적으로 외감의 형식으로서이다.

→ 그것은 명백하게 다름 아니라, 그것이 순수하게 주체 안에서, 그것 자체의 형식적 성질로서 촉발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것의 직접적인 표상 즉 직관을 획득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자리를 갖는 한에서, 그러므로 단지 전적으로 외감의 형식으로서이다.

 

Also macht allein unsere Erklärung die Möglichkeit der Geometrie als einer synthetischen Erkenntnis a priori begreiflich.

그러므로 오로지 우리의 해명만이 선험적 종합인식으로서 기하학의 가능성을 납득할 수 있게 만든다.

→ 그러므로 오로지 우리의 해명만이 선험적 종합인식으로서 기하학의 가능성을 납득할 수 있게 만든다.

Eine jede Erklärungsart, die dieses nicht liefert, wenn sie gleich dem Anscheine nach mit ihr einige Ähnlichkeit hätte, kann an diesen Kennzeichen am sichersten von ihr unterschieden werden.

각각의 설명 방식은, 그것이 이러한 것을 산출하지 않는, 그것이 마찬가지로 우리의 설명방식과 유사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가장 확실한 특징에 있어서 우리의 것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 각각의 설명 방식은, 그것이 이러한 것을 산출하지 않는, 그것이 마찬가지로 우리의 설명방식과 유사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가장 확실한 특징에 있어서 우리의 것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蟲-

4-1) Nun muß man zwar einen jeden Begriff als eine Vorstellung denken, die in einer unendlichen Menge von verschiedenen möglichen Vorstellungen (als ihr gemeinschaftliches Merkmal) enthalten ist, mithin diese unter sich enthält; aber kein Begriff, als ein solcher, kann so gedacht werden, als ob er eine unendliche Menge von Vorstellungen in sich enthielte. Gleichwohl wird der Raum so gedacht (denn alle Teile des Raumes ins Unendliche sind zugleich). Also ist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vom Raume Anschauung a priori, und nicht Begriff.

→4-1) 이제 사람들은 더욱이 각각의 개념을, 상이한 가능한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 속에서 (그 표상의 공통의 표지로서) 포함되는,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그 아래 포함하는 표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개념은, 그러한 것으로서, 마치 그것이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을 그 자체에 포함했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될 수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그렇게 생각된다(왜냐하면 공간의 모든 부분들이 무한한 공간 속에 동시에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공간에 대한 본래적 표상은 선험적 직관이며, 개념이 아니다.

lautet in A : 5) Der Raum wird als eine unendliche Größe gegeben vorgestellt. Ein allgemeiner Begriff vom Raum (der so wohl einem Fuße, als einer Elle gemein ist,) kann in Ansehung der Größe nichts bestimmen. Wäre es nicht die Grenzenlosigkeit im Fortgange der Anschauung, so würde kein Begriff von Verhältnissen ein Principium der Unendlichkeit derselben bei sich führen.

→ A에서는 다음과 같다 : 5) 공간은 한없는 크기로 주어진 것으로 표상된다. 공간에 대한 보편적 개념(그것이 Fuße만이 아니라 Elle이기도 한)은 크기에 대한 고려 속에서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 직관의 진행 속에서 무제한이 없다면, 관계들에 대한 어떤 개념도 그 자체의 무한성에 대한 원칙을 그 곁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 3.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vom Raume

§ 3. 공간에 대한 개념의 초월론적 논구

 

Ich verstehe unter einer transzendentalen Erörterung die Erklärung eines Begriffs, als eines Prinzips, woraus die Möglichkeit anderer synthetischer Erkenntnisse a priori eingesehen werden kann. Zu dieser Absicht wird erfordert, 1) daß wirklich dergleichen Erkenntnisse aus dem gegebenen Begriffe herfließen, 2) daß diese Erkenntnisse nur unter der Voraussetzung einer gegebenen Erklärungsart dieses Begriffs möglich sind.

→ 나는 초월론적 논구(라는 제목) 아래에서, 원칙에 있어서, 그로부터 다른 선천적 종합적 인식들이 통찰될 수 있는, 개념의 해명을 생각한다. 이러한 의도에 1) 실질적으로 그와 같은 인식들이 그 주어진 개념들로부터 유래할 것, 2) 이러한 인식들이 오로지 이러한 개념의 주어진 설명방식의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요구된다.

Geometrie ist eine Wissenschaft, welche die Eigenschaften des Raumes synthetisch und doch a priori bestimmt. Was muß die Vorstellung des Raumes denn sein, damit eine solche Erkenntnis von ihm möglich sei?

→ 기하학은, 공간의 본성들을 종합적이고 또한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학문이다. 그러면, 그에 따라 그 개념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가능한 공간의 개념은 대체 무엇이이어야 하는가?

 

 

4-1) Nun muß man zwar einen jeden Begriff als eine Vorstellung denken, die in einer unendlichen Menge von verschiedenen möglichen Vorstellungen (als ihr gemeinschaftliches Merkmal) enthalten ist, mithin diese unter sich enthält;

4-1) 이제 사람들은 더욱이 각각의 개념을 표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표상이 상이한 가능한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 속에서 (그 표상의 공통의 표지로서) 포함되는,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그 아래 포함하는;

aber kein Begriff, als ein solcher, kann so gedacht werden, als ob er eine unendliche Menge von Vorstellungen in sich enthielte.

그러나 개념은, 그러한 것으로서, 그렇게 생각될 수 있지 않다, 마치 그것이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을 그 자체에 포함했던 것처럼.

→4-1) 이제 사람들은 더욱이 각각의 개념을, 상이한 가능한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 속에서 (그 표상의 공통의 표지로서) 포함되는,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그 아래 포함하는 표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개념은, 그러한 것으로서, 마치 그것이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을 그 자체에 포함했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될 수 있지 않다.

Gleichwohl wird der Raum so gedacht (denn alle Teile des Raumes ins Unendliche sind zugleich).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그렇게 생각된다(왜냐하면 공간의 모든 부분들이 무한한 공간 속에 동시에 있기 때문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그렇게 생각된다(왜냐하면 공간의 모든 부분들이 무한한 공간 속에 동시에 있기 때문에).

Also ist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vom Raume Anschauung a priori, und nicht Begriff.

그러므로 공간에 대한 본래적 표상은 선험적 직관이며, 개념이 아니다.

→ 그러므로 공간에 대한 본래적 표상은 선험적 직관이며, 개념이 아니다.

 

lautet in A : 5) Der Raum wird als eine unendliche Größe gegeben vorgestellt. 

A에서는 다음과 같다 : 5) 공간은 한없는 크기로 주어진 것으로 표상된다.

→ A에서는 다음과 같다 : 5) 공간은 한없는 크기로 주어진 것으로 표상된다.

Ein allgemeiner Begriff vom Raum (der so wohl einem Fuße, als einer Elle gemein ist,) kann in Ansehung der Größe nichts bestimmen.

공간에 대한 보편적 개념(그것이 Fuße만이 아니라 Elle이기도 한)은 크기에 대한 고려 속에서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

→ 공간에 대한 보편적 개념(그것이 Fuße만이 아니라 Elle이기도 한)은 크기에 대한 고려 속에서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

Wäre es nicht die Grenzenlosigkeit im Fortgange der Anschauung, so würde kein Begriff von Verhältnissen ein Principium der Unendlichkeit derselben bei sich führen.

직관의 진행 속에서 무제한이 없다면, 관계들에 대한 어떤 개념도 그 자체의 무한성에 대한 원칙을 그 곁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 직관의 진행 속에서 무제한이 없다면, 관계들에 대한 어떤 개념도 그 자체의 무한성에 대한 원칙을 그 곁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 3.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vom Raume

§ 3. 공간에 대한 개념의 초월론적 논구

 

Ich verstehe unter einer transzendentalen Erörterung die Erklärung eines Begriffs, als eines Prinzips, woraus die Möglichkeit anderer synthetischer Erkenntnisse a priori eingesehen werden kann.

나는 초월론적 논구(라는 제목) 아래에서 개념의 해명을 생각한다, 원칙에 있어서, 그로부터 다른 선천적 종합적 인식들이 통찰될 수 있는.

→ 나는 초월론적 논구(라는 제목) 아래에서, 원칙에 있어서, 그로부터 다른 선천적 종합적 인식들이 통찰될 수 있는, 개념의 해명을 생각한다.

Zu dieser Absicht wird erfordert,

이러한 의도에 요구된다,

1) daß wirklich dergleichen Erkenntnisse aus dem gegebenen Begriffe herfließen,

1) 실질적으로 그와 같은 인식들이 그 주어진 개념들로부터 유래할 것,

2) daß diese Erkenntnisse nur unter der Voraussetzung einer gegebenen Erklärungsart dieses Begriffs möglich sind.

2) 이러한 인식들이 오로지 이러한 개념의 주어진 설명방식의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 이러한 의도에 1) 실질적으로 그와 같은 인식들이 그 주어진 개념들로부터 유래할 것, 2) 이러한 인식들이 오로지 이러한 개념의 주어진 설명방식의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요구된다.

 

Geometrie ist eine Wissenschaft, welche die Eigenschaften des Raumes synthetisch und doch a priori bestimmt.

기하학은 학문이다, 그 학문이 공간의 본성들을 종합적이고 또한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 기하학은, 공간의 본성들을 종합적이고 또한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학문이다.

Was muß die Vorstellung des Raumes denn sein, damit eine solche Erkenntnis von ihm möglich sei?

그러면 공간의 개념은 대체 무엇이이어야 하는가, 그에 따라 그 개념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가능한?

→ 그러면, 그에 따라 그 개념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가능한 공간의 개념은 대체 무엇이이어야 하는가?

 

-蟲-

3) Der Raum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sagt, allgemeiner Begriff von Verhältnissen der Dinge überhaupt, sondern eine reine Anschauung. Denn erstlich kann man sich nur einen einigen Raum vorstellen, und wenn man von vielen Räumen redet, so verstehet man darunter nur Teile eines und desselben alleinigen Raumes. Diese Teile können auch nicht vor dem einigen allbefassenden Raume gleichsam als dessen Bestandteile (daraus eine Zusammensetzung möglich sei) vorhergehen, sondern nur in ihm gedacht werden. Er ist wesentlich einig, das Mannigfaltige in ihm, mithin auch der allgemeine Begriff von Räumen überhaupt, beruht lediglich auf Einschränkungen. Hieraus folgt, daß in Ansehung seiner eine Anschauung a priori (die nicht empirisch ist) allen Begriffen von demselben zum Grunde liegt. So werden auch alle geometrische Grundsätze, z.E. daß in einem Triangel zwei Seiten zusammen größer sein, als die dritte, niemals aus allgemeinen Begriffen von Linie und Triangel, sondern aus der Anschauung und zwar a priori mit apodiktischer Gewißheit abgeleitet.

→ 공간은 추론적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 전적으로 사물들의 관계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직관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고,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단지 하나의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공간의 부분들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이러한 부분들은 또한 그 고유하게 총괄하는 공간에 앞서 마치 그 공간의 요소들처럼 (그로부터 합성물이 가능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공간 안에서 생각된다. 공간은 본질적으로 고유하고, 다양한 것들은 그 안에서, 따라서 또한 공간들에 대한 일반적 개념은, 단지 제한들에 근거한다. 이에 따라, 그 공간의 선험적 직관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 자체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기초에 놓인다. 그래서 또한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들, 예를 들어 한 삼각형 안에서 두 변들의 합은 그 세번째 변보다 더욱 크다는 것과 같은 근본명제들은 직선과 삼각형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들로부터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직관으로부터 더욱이 선험적으로 서술적 확실성을 가지고 이끌려 나온다.

4) Der Raum wird als eine unendliche gegebene Größe vorgestellt.

→ 4) 공간은 주어진 한없는 크기로서 표상된다.

 

 

3) Der Raum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sagt, allgemeiner Begriff von Verhältnissen der Dinge überhaupt, sondern eine reine Anschauung.

3) 공간은 추론적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 전적으로 사물들의 관계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직관이다.

→ 공간은 추론적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 전적으로 사물들의 관계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직관이다.

Denn erstlich kann man sich nur einen einigen Raum vorstellen, und wenn man von vielen Räumen redet, so verstehet man darunter nur Teile eines und desselben alleinigen Raumes.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고,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단지 하나의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공간의 부분들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고,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단지 하나의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공간의 부분들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Diese Teile können auch nicht vor dem einigen allbefassenden Raume gleichsam als dessen Bestandteile (daraus eine Zusammensetzung möglich sei) vorhergehen, sondern nur in ihm gedacht werden.

이러한 부분들은 또한 그 고유하게 총괄하는 공간에 앞서 마치 그 공간의 요소들처럼 (그로부터 합성물이 가능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공간 안에서 생각된다.

→이러한 부분들은 또한 그 고유하게 총괄하는 공간에 앞서 마치 그 공간의 요소들처럼 (그로부터 합성물이 가능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공간 안에서 생각된다.

Er ist wesentlich einig, das Mannigfaltige in ihm, mithin auch der allgemeine Begriff von Räumen überhaupt, beruht lediglich auf Einschränkungen.

그것은 본질적으로 고유하다, 다양한 것들이 그 안에서, 따라서 또한 공간들에 대한 일반적 개념이, 단지 제한들에 근거한다.

→공간은 본질적으로 고유하고, 다양한 것들은 그 안에서, 따라서 또한 공간들에 대한 일반적 개념은, 단지 제한들에 근거한다.

Hieraus folgt, daß in Ansehung seiner eine Anschauung a priori (die nicht empirisch ist) allen Begriffen von demselben zum Grunde liegt.

이에 따라, 그 공간의 선험적 직관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 자체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기초에 놓인다.

→이에 따라, 그 공간의 선험적 직관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 자체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기초에 놓인다.

So werden auch alle geometrische Grundsätze, z.E. daß in einem Triangel zwei Seiten zusammen größer sein, als die dritte, niemals aus allgemeinen Begriffen von Linie und Triangel, sondern aus der Anschauung und zwar a priori mit apodiktischer Gewißheit abgeleitet.

그래서 또한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들, 예를 들어 한 삼각형 안에서 두 변들은 함께 더욱 크다, 그 세번째 변보다, 같은 것은 전혀 직선과 삼각형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들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직관으로부터 더욱이 선험적으로 서술적 확실성을 가지고 이끌려 나온다.

→ 그래서 또한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들, 예를 들어 한 삼각형 안에서 두 변들의 합은 그 세번째 변보다 더욱 크다는 것과 같은 근본명제들은 직선과 삼각형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들로부터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직관으로부터 더욱이 선험적으로 서술적 확실성을 가지고 이끌려 나온다.

 

4) Der Raum wird als eine unendliche gegebene Größe vorgestellt.

4) 공간은 주어진 한없는 크기로서 표상된다.

→ 4) 공간은 주어진 한없는 크기로서 표상된다.

 

-蟲-

Er wird also als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Erscheinungen, und nicht als eine von ihnen abhängende Bestimmung angesehen, und ist eine Vorstellung a priori, die notwendiger Weise äußeren Erscheinungen zum Grunde liegt.

→ 그러므로 그것(공간)은 현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그리고 현상들에 달려 있는 규정이 아닌 것으로서 고려되고, 그 필연적인 방식의 표상이 외부 현상들에 기초로서 놓여진 선험적인 표상이다.

 

In A folgt : 3) Auf di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die apodiktische Gewißheit aller geometrischen Grundsätze, und die Möglichkeit ihrer Konstruktion a priori. Wäre nämlich diese Vorstellung des Raums ein a posteriori erworbener Begriff, der aus der allgemeinen äußeren Erfahrung geschöpft wäre, so würden die ersten Grundsätze der mathematischen Bestimmung nichts als Wahrnehmungen sein. Sie hätten also alle Zufälligkeit der Wahrnehmung, und es wäre eben nicht notwendig, daß zwischen zween Punkten nur eine gerade Linie sei, sondern die Erfahrung würde es so jederzeit lehren. Was von der Erfahrung entlehnt ist, hat auch nur komparative Allgemeinheit, nämlich durch Induktion. Man würde also nur sagen können, so viel zur Zeit noch bemerkt worden, ist kein Raum gefunden worden, der mehr als drei Abmessungen hätte.

→ A판에 따르면 : 3)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의 자명한 확실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하며, 그것의 선험적 구조의 가능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한다. 즉 공간의 이러한 표상이 후험적으로 습득된 개념이라면, 그 개념이 일반적 외적 경험으로부터 길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수학적 규정의 최초의 근본명제는 지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 표상은 지각의 모든 우연성을 가질 것이고, 두 점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곧은 선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경험은 그것을 그렇게 언제나(매번) 배울 것이다. 경험으로부터 차용된 것은, 또한 오직 상대적 보편성만, 즉 귀납을 통한 (보편성)을 가진다. 사람들은 그러므로 단지 현재 관찰된 것에 따르면 3차원 이상을 가지는 공간은 발견되지 않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r wird also als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Erscheinungen, und nicht als eine von ihnen abhängende Bestimmung angesehen, und ist eine Vorstellung a priori, die notwendiger Weise äußeren Erscheinungen zum Grunde liegt.

그러므로 그것(공간)은 현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그리고 현상들에 달려 있는 규정으로서 고려되고, 선험적인 표상이다, 그 필연적인 방식의 표상이 외부 현상들에 기초로서 놓여진.

→ 그러므로 그것(공간)은 현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그리고 현상들에 달려 있는 규정이 아닌 것으로서 고려되고, 그 필연적인 방식의 표상이 외부 현상들에 기초로서 놓여진 선험적인 표상이다.

 

In A folgt : 3) Auf di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die apodiktische Gewißheit aller geometrischen Grundsätze, und die Möglichkeit ihrer Konstruktion a priori.

A판에 따르면 : 3)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의 자명한 확실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하며, 그것의 선험적 구조의 가능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한다.

→ A판에 따르면 : 3)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의 자명한 확실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하며, 그것의 선험적 구조의 가능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한다.

Wäre nämlich diese Vorstellung des Raums ein a posteriori erworbener Begriff, der aus der allgemeinen äußeren Erfahrung geschöpft wäre, so würden die ersten Grundsätze der mathematischen Bestimmung nichts als Wahrnehmungen sein.

즉 공간의 이러한 표상이 후험적으로 습득된 개념이라면, 그 개념이 일반적 외적 경험으로부터 길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수학적 규정의 최초의 근본명제는 지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 즉 공간의 이러한 표상이 후험적으로 습득된 개념이라면, 그 개념이 일반적 외적 경험으로부터 길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수학적 규정의 최초의 근본명제는 지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Sie hätten also alle Zufälligkeit der Wahrnehmung, und es wäre eben nicht notwendig, daß zwischen zween Punkten nur eine gerade Linie sei, sondern die Erfahrung würde es so jederzeit lehren.

그러므로 그 표상은 지각의 모든 우연성을 가질 것이고, 그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을 것이다, 두 점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곧은 선만이 있다는 것, 오히려 경험은 그것을 그렇게 언제나 배울 것이다.

→ 그러므로 그 표상은 지각의 모든 우연성을 가질 것이고, 두 점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곧은 선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경험은 그것을 그렇게 언제나(매번) 배울 것이다.

Was von der Erfahrung entlehnt ist, hat auch nur komparative Allgemeinheit, nämlich durch Induktion.

경험으로부터 차용된 것은, 또한 오직 상대적 보편성만을 가진다, 즉 귀납을 통한.

→ 경험으로부터 차용된 것은, 또한 오직 상대적 보편성만, 즉 귀납을 통한 (보편성)을 가진다.

Man würde also nur sagen können, so viel zur Zeit noch bemerkt worden, ist kein Raum gefunden worden, der mehr als drei Abmessungen hätte.

사람들은 그러므로 단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관찰된 것에 따르면, 공간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공간이 세 측정들(차원들) 이상을 가진.

→ 사람들은 그러므로 단지 현재 관찰된 것에 따르면 3차원 이상을 가진 공간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蟲-

Um uns hierüber zu belehren, wollen wir zuerst den Begriff des Raumes erörtern. Ich verstehe aber unter Erörterung (expositio) die deutliche (wenn gleich nicht ausführliche) Vorstellung dessen, was zu einem Begriffe gehört; metaphysisch aber ist die Erörterung, wenn sie dasjenige enthält, was den Begriff, als a priori gegeben, darstellt.

→ 이에 관해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에 공간의 개념을 상론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상론(해명)을 개념에 속하는 그것의 분명한 (비록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표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상론은, 그 상론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제시하는 개념을 그것을 포함한다면. 형이상학적이다.

1) Der Raum ist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von äußeren Erfahrungen abgezogen worden. Denn damit gewisse Empfindungen auf etwas außer mir bezogen werden, (d.i. auf etwas in einem andern Orte des Raumes, als darinnen ich mich befinde,) imgleichen damit ich sie als außer und neben einander, mithin nicht bloß verschieden, sondern als in verschiedenen Orten vorstellen könne, dazu muß die Vorstellung des Raumes schon zum Grunde liegen. Demnach kann die Vorstellung des Raumes nicht aus den Verhältnissen der äußern Erscheinung durch Erfahrung erborgt sein, sondern diese äußere Erfahrung ist selbst nur durch gedachte Vorstellung allererst möglich.

→ 1) 공간은, 그 개념이 외적 경험들로부터 도출되는 감각적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확실한 지각이 어떤 것에 나의 외부에서 관련되기 위해서, (즉 어떤 것에,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는 공간의 다른 한 지점에서,) 또한 내가 그것들을 서로 바깥에 그리고 곁에 있는 것으로서, 그에 따라 자체로 상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지점에서 표상할 수 있기 위해서, 그에 대해 공간의 표상이 이미 기초에 놓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공간의 표상은 외적 직관의 내용들로부터 경험을 통해 차용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외적 경험이 스스로 오직 사유된 표상을 통해서만 처음으로 가능하다.

2) Der Raum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a priori, die allen äußer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Man kann sich niemals eine Vorstellung davon machen, daß kein Raum sei, ob man sich gleich ganz wohl denken kann, daß keine Gegenstände darin angetroffen werden.

→ 2) 공간은, 그 표상을 모든 외적 직관들이 기초에 두는, 선험적인 필연적 표상이다.→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그 안에 어떠한 대상들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결코, 공간이 없다는 그에 대한 표상을 만들 수 없다.

 

Um uns hierüber zu belehren, wollen wir zuerst den Begriff des Raumes erörtern.

이에 관해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에 공간의 개념을 상론하고자 한다.

→ 이에 관해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에 공간의 개념을 상론하고자 한다.

Ich verstehe aber unter Erörterung (expositio) die deutliche (wenn gleich nicht ausführliche) Vorstellung dessen, was zu einem Begriffe gehört;

그러나 나는 상론(해명)을 그것의 분명한 (비록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표상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개념에 속하는;

metaphysisch aber ist die Erörterung, wenn sie dasjenige enthält, was den Begriff, als a priori gegeben, darstellt.

그러나 그 상론은 형이상학적이다, 그 상론이 그것을 포함한다면, 그것이 개념을,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제시하는.

→ 그러나 나는 상론(해명)을 개념에 속하는 그것의 분명한 (비록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표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상론은, 그 상론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제시하는 개념을 그것을 포함한다면. 형이상학적이다.

 

1) Der Raum ist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von äußeren Erfahrungen abgezogen worden.

1) 공간은 감각적 개념이 아니다, 그 개념이 외적 경험들로부터 도출되는.

→ 1) 공간은, 그 개념이 외적 경험들로부터 도출되는 감각적 개념이 아니다.

Denn damit gewisse Empfindungen auf etwas außer mir bezogen werden, (d.i. auf etwas in einem andern Orte des Raumes, als darinnen ich mich befinde,) imgleichen damit ich sie als außer und neben einander, mithin nicht bloß verschieden, sondern als in verschiedenen Orten vorstellen könne, dazu muß die Vorstellung des Raumes schon zum Grunde liegen.

왜냐하면 그것으로 확실한 지각이 어떤 것에 나의 외부에서 관련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에,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는 공간의 다른 한 지점에서,) 또한 내가 그것들을 서로 바깥에 그리고 곁에 있는 것으로서, 그에 따라 순전히 상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지점에서 표상할 수 있는, 그에 대해 공간의 표상이 이미 기초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 왜냐하면 그것으로 확실한 지각이 어떤 것에 나의 외부에서 관련되기 위해서, (즉 어떤 것에,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는 공간의 다른 한 지점에서,) 또한 내가 그것들을 서로 바깥에 그리고 곁에 있는 것으로서, 그에 따라 자체로 상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지점에서 표상할 수 있기 위해서, 그에 대해 공간의 표상이 이미 기초에 놓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Demnach kann die Vorstellung des Raumes nicht aus den Verhältnissen der äußern Erscheinung durch Erfahrung erborgt sein, sondern diese äußere Erfahrung ist selbst nur durch gedachte Vorstellung allererst möglich.

그에 따라 공간의 표상은 외적 직관의 내용들로부터 경험을 통해 차용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외적 경험이 스스로 오직 사유된 표상을 통해서만 처음으로 가능하다.

→ 그에 따라 공간의 표상은 외적 직관의 내용들로부터 경험을 통해 차용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외적 경험이 스스로 오직 사유된 표상을 통해서만 처음으로 가능하다.

2) Der Raum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a priori, die allen äußer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2) 공간은 필연적 표상이다, 선험적인, 그 표상을 모든 외적 직관들이 기초에 두는.

→ 2) 공간은, 그 표상을 모든 외적 직관들이 기초에 두는, 선험적인 필연적 표상이다.

Man kann sich niemals eine Vorstellung davon machen, daß kein Raum sei, ob man sich gleich ganz wohl denken kann, daß keine Gegenstände darin angetroffen werden.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표상을 만들 수 없다, 공간이 없다는, 비록 사람들이 아주 잘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어떠한 대상들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그 안에 어떠한 대상들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결코, 공간이 없다는 그에 대한 표상을 만들 수 없다.

 

-蟲-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Erster Abschnitt

초월적 감성학 제 1장

Von der Raume

공간에 대하여

§ 2. Metaphysische Erörterung dieses Begriffs

§ 2. 이 개념의 형이상학적 논구

Vermittelst des äußeren Sinnes, (einer Eigenschaft unsres Gemüts,) stellen wir uns Gegenstände als außer uns, und diese insgesamt im Raume vor. Darinnen ist ihre Gestalt, Größe und Verhältnis gegen einander bestimmt, oder bestimmbar. Der innere Sinn, vermittelst dessen das Gemüt sich selbst, oder seinen inneren Zustand anschauet, gibt zwar keine Anschauung von der Seele selbst, als einem Objekt; allein es ist doch eine bestimmte Form, unter der die Anschauung ihres innern Zustandes allein möglich ist, so, daß alles, was zu den innern Bestimmungen gehört, in Verhältnissen der Zeit vorgestellt wird. Äußerlich kann die Zeit nicht angeschaut werden, so wenig wie der Raum, als etwas in uns. Was sind nun Raum und Zeit? Sind es wirkliche Wesen? Sin des zwar nur Bestimmungen, oder auch Verhältnisse der Dinge, aber doch solche, welche ihnen auch an sich zukommen würden, wenn sie auch nicht angeschaut würden, oder sind sie solche, die nur an der Form der Anschauung allein haften, und mithin an der subjektiven Beschaffenheit unseres Gemüts, ohne welche diese Prädikate gar keinem Dinge beigeleget werden können?

→ 외감에 따라서, (우리의 심정의 본성의,) 우리는 우리에게 대상들을 우리 외부에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을 모두 다 공간 속에서 표상한다. 그 속에서 대상의 형태, 크기 그리고 관계가 다른 것들에 대해서 규정되거나, 규정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심정 자체를, 혹은 심정의 내적 상태를 관찰하는 내감은, 더욱이 영혼 자체에 대한 어떠한 직관도, 객체로서 주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이 규정된 형식인 경우에만, 그 아래에서 그것의 내적 상태의 직관만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내적 규정에 속하는 모든 것은, 시간 관계들 속에서 표상된다. 외적으로 시간은 관찰될 수 없고, 그만큼 공간은, 우리 안에 어떤 것으로서 관찰될 수 없다. 이제 공간과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질적 실체(본질)인가? 그것은 단순한 규정들이거나, 사물의 내용들인가, 그러나 또한, 그 자체로 부합하게 되는 그러한 것들이, 그것들이 직관되지 않는다면, 혹은 그것들이, 단지 직관의 형식에만 부착되어 있는,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심정의 주관적 성질에 부착되어 있는, 이러한 술어가 없이는 전혀 어떠한 사물도 부여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인가?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Erster Abschnitt

초월적 감성학 제 1장

Von der Raume

공간에 대하여

§ 2. Metaphysische Erörterung dieses Begriffs

§ 2. 이 개념의 형이상학적 논구

Vermittelst des äußeren Sinnes, (einer Eigenschaft unsres Gemüts,) stellen wir uns Gegenstände als außer uns, und diese insgesamt im Raume vor.

외감에 따라서, (우리의 심정의 본성의,) 우리는 우리에게 대상들을 우리 외부에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을 모두 다 공간 속에서 표상한다.

→ 외감에 따라서, (우리의 심정의 본성의,) 우리는 우리에게 대상들을 우리 외부에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을 모두 다 공간 속에서 표상한다.

Darinnen ist ihre Gestalt, Größe und Verhältnis gegen einander bestimmt, oder bestimmbar.

그 속에서 대상의 형태, 크기 그리고 관계가 다른 것들에 대해서 규정되거나, 규정할 수 있다.

→ 그 속에서 대상의 형태, 크기 그리고 관계가 다른 것들에 대해서 규정되거나, 규정할 수 있다.

Der innere Sinn, vermittelst dessen das Gemüt sich selbst, oder seinen inneren Zustand anschauet, gibt zwar keine Anschauung von der Seele selbst, als einem Objekt;

내감, 그에 따라 심정 자체를, 혹은 심정의 내적 상태를 관찰하는, 더욱이 영혼 자체에 대한 어떠한 직관도, 객체로서 주지 않는다;

allein es ist doch eine bestimmte Form, unter der die Anschauung ihres innern Zustandes allein möglich ist, so, daß alles, was zu den innern Bestimmungen gehört, in Verhältnissen der Zeit vorgestellt wird.

오로지 그것이 규정된 형식인 경우에만, 그 아래에서 그것의 내적 상태의 직관만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모든 것은, 내적 규정에 속하는(모든 것), 시간 관계들 속에서 표상된다.

→ 그에 따라 심정 자체를, 혹은 심정의 내적 상태를 관찰하는 내감은, 더욱이 영혼 자체에 대한 어떠한 직관도, 객체로서 주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이 규정된 형식인 경우에만, 그 아래에서 그것의 내적 상태의 직관만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내적 규정에 속하는 모든 것은, 시간 관계들 속에서 표상된다.

Äußerlich kann die Zeit nicht angeschaut werden, so wenig wie der Raum, als etwas in uns.

외적으로 시간은 관찰될 수 없고, 그만큼 공간은, 우리 안에 어떤 것으로서 (관찰될 수 없다).

→ 외적으로 시간은 관찰될 수 없고, 그만큼 공간은, 우리 안에 어떤 것으로서 관찰될 수 없다.

Was sind nun Raum und Zeit? Sind es wirkliche Wesen?

이제 공간과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질적 실체(본질)인가?

→ 이제 공간과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질적 실체(본질)인가?

Sind es zwar nur Bestimmungen, oder auch Verhältnisse der Dinge, aber doch solche, welche ihnen auch an sich zukommen würden, wenn sie auch nicht angeschaut würden, oder sind sie solche, die nur an der Form der Anschauung allein haften, und mithin an der subjektiven Beschaffenheit unseres Gemüts, ohne welche diese Prädikate gar keinem Dinge beigeleget werden können?

그것은 단순한 규정들이거나, 사물의 내용들이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것들이, 그 자체로 부합하게 되는, 그것들이 직관되지 않는다면, 혹은 그것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단지 직관의 형식에만 부착되어 있는,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심정의 주관적 성질에 부착되어 있는, 이러한 술어가 없이는 전혀 어떠한 사물도 부여될 수 없는?

→ 그것은 단순한 규정들이거나, 사물의 내용들인가, 그러나 또한, 그 자체로 부합하게 되는 그러한 것들이, 그것들이 직관되지 않는다면, 혹은 그것들이, 단지 직관의 형식에만 부착되어 있는,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심정의 주관적 성질에 부착되어 있는, 이러한 술어가 없이는 전혀 어떠한 사물도 부여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인가?

 

-蟲-

1-1) Um deswillen ist es ratsam, diese Benennung entweder wiederum eingehen zu lassen, und sie derjenigen Lehre aufzubehalten, die wahre Wissenschaft ist, (wodurch man auch der Sprache und dem Sinne der Alten näher treten würde, bei denen die Einteilung der Erkenntnis in αλσθετὰ χαὶ νοητά sehr berühmt war), oder sich in die Benennung mit der spekulativen Philosophie zu teilen und die Ästhetik teils im transzendentalen Sinne, teils in psychologischer Bedeutung zu nehmen.

→ 1-1) 그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한편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과 그 명칭을, 참된 학문인 그 설에 붙잡아 두는 것이나, (그를 통하여 사람들이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으로의 인식 구분이 매우 유명하였던, 옛 사람들의 언어와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 이름 안에서 사변적 철학과 공유하는 것과 감성학을 일부분 초월적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는 심리학적 의미에서 취하는 것이나 권장할 만하다.

Es muß also eine solche Wissenschaft geben, die den ersten Teil der transzendentalen Elementarlehre ausmacht, im Gegensatz derjenigen, welche die Prinzipien des reinen Denkens enthält, und transzendentale Logik genannt wird.

→ 그러므로 초월적 요소론의 제 1부를 구성하는 그러한 학문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의 대립에 있어서(그 맞은 편에), 순수한 사유의 원칙을 포함하는 그러한 것이, 초월적 논리학이라 명명된다.

In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also werden wir zuerst die Sinnlichkeit isolieren, dadurch, daß wir alles absondern, was der Verstand durch seine Begriffe dabei denkt, damit nichts als empirische Anschauung übrig bleibe. Zweitens werden wir von dieser noch alles, was zur Empfindung gehört, abtrennen, damit nichts als reine Anschauung und die bloße Form der Erscheinungen übrig bleibe, welches das einzige ist, das die Sinnlichkeit a priori liefern kann. Bei dieser Untersuchung wird sich finden, daß es zwei reine Formen sinnlicher Anschauung, als Prinzipien der Erkenntnis a priori gebe, nämlich Raum und Zeit, mit deren Erwägung wir uns jetzt beschäftigen werden.

→ 그러므로 초월적 감성학에서 우리는 처음에, 우리가 모든 것을 분류하는 것, 오성이 오성의 개념을 통하여 동시에 사유하는 모든 것을 통하여, 감성을 고립시킨다. 그러므로 감각적 직관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또한, 지각에 속하는 모든 것을,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순수한 직관과 현상의 순전한 형식 이외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선험적 감성을 산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와 동시에, 감성적 직관의 두 가지 순수한 형식들이, 선험적 인식의 원리들로서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간과 시간, 우리는 이제 그것들의 숙고에 몰두할 것이다.

 

 

1-1) Um deswillen ist es ratsam, diese Benennung entweder wiederum eingehen zu lassen, und sie derjenigen Lehre aufzubehalten, die wahre Wissenschaft ist, (wodurch man auch der Sprache und dem Sinne der Alten näher treten würde, bei denen die Einteilung der Erkenntnis in αλσθετὰ χαὶ νοητά sehr berühmt war), oder sich in die Benennung mit der spekulativen Philosophie zu teilen und die Ästhetik teils im transzendentalen Sinne, teils in psychologischer Bedeutung zu nehmen.

1-1) 그 때문에 권장할 만하다, 이러한 명칭을 한편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과 그 명칭을 그 설에 붙잡아 두는 것이나, 그 설은 참된 학문인데, (그를 통하여 사람들이 또한 옛 사람들의 언어와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으로의 인식 구분이 매우 유명하였던), 아니면 그 이름 안에서 사변적 철학과 공유하는 것과 감성학을 일부분 초월적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는 심리학적 의미에서 취하는 것이나.

→ 1-1) 그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한편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과 그 명칭을, 참된 학문인 그 설에 붙잡아 두는 것이나, (그를 통하여 사람들이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으로의 인식 구분이 매우 유명하였던, 옛 사람들의 언어와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 이름 안에서 사변적 철학과 공유하는 것과 감성학을 일부분 초월적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는 심리학적 의미에서 취하는 것이나 권장할 만하다.

 

 

Es muß also eine solche Wissenschaft geben, die den ersten Teil der transzendentalen Elementarlehre ausmacht, im Gegensatz derjenigen, welche die Prinzipien des reinen Denkens enthält, und transzendentale Logik genannt wird.

그러므로 그러한 학문이 있어야만 한다, 그 학문은 초월적 요소론의 제 1부를 구성하는데, 그것의 대립에 있어서(그 맞은 편에), 그러한 것이 순수한 사유의 원칙을 포함하는, 그리고 초월적 논리학이라 명명된다.

→ 그러므로 초월적 요소론의 제 1부를 구성하는 그러한 학문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의 대립에 있어서(그 맞은 편에), 순수한 사유의 원칙을 포함하는 그러한 것이, 초월적 논리학이라 명명된다.

 

In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also werden wir zuerst die Sinnlichkeit isolieren, dadurch, daß wir alles absondern, was der Verstand durch seine Begriffe dabei denkt, damit nichts als empirische Anschauung übrig bleibe.

그러므로 초월적 감성학에서 우리는 처음에 감성을 고립시킨다, 그를 통하여, 우리가 모든 것을 분류하는 것, 오성이 오성의 개념을 통하여 동시에 사유하는(모든 것), 그러므로 감각적 직관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 그러므로 초월적 감성학에서 우리는 처음에, 우리가 모든 것을 분류하는 것, 오성이 오성의 개념을 통하여 동시에 사유하는 모든 것을 통하여, 감성을 고립시킨다. 그러므로 감각적 직관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Zweitens werden wir von dieser noch alles, was zur Empfindung gehört, abtrennen, damit nichts als reine Anschauung und die bloße Form der Erscheinungen übrig bleibe, welches das einzige ist, das die Sinnlichkeit a priori liefern kann.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또한 모든 것을, 지각에 속하는(모든 것),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순수한 직관과 현상의 순전한 형식 이외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선험적 감성을 산출할 수 있는.

→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또한, 지각에 속하는 모든 것을,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순수한 직관과 현상의 순전한 형식 이외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선험적 감성을 산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Bei dieser Untersuchung wird sich finden, daß es zwei reine Formen sinnlicher Anschauung, als Prinzipien der Erkenntnis a priori gebe, nämlich Raum und Zeit, mit deren Erwägung wir uns jetzt beschäftigen werden.

이러한 연구와 동시에 알 것이다, 감성적 직관의 두 가지 순수한 형식들이, 선험적 인식의 원리들로서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공간과 시간, 우리는 이제 그것들의 숙고에 몰두할 것이다.

→ 이러한 연구와 동시에, 감성적 직관의 두 가지 순수한 형식들이, 선험적 인식의 원리들로서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간과 시간, 우리는 이제 그것들의 숙고에 몰두할 것이다.

 

-蟲-

So, wenn ich von der Vorstellung eines Körpers das, was der Verstand davon denkt, als Substanz, Kraft, Teilbarkeit etc. imgleichen, was davon zur Empfindung gehört, als Undurchdringlichkeit, Härte, Farbe etc. absondere, so bleibt mir aus dieser empirischen Anschauung noch etwas übrig, nämlich Ausdehnung und Gestalt. Diese gehören zur reinen Anschauung, die a priori, auch ohne einen wirklichen Gegenstand der Sinne oder Empfindung, als eine bloße Form der Sinnlichkeit im Gemüte stattfindet.

→ 그래서, 내가 물체의 표상으로부터 오성이 생각하는 실체, 힘, 가분성 등으로서 분류하는 것을, 그로부터 직관에 속하는 것을, 불가투입성, 견고성, 색채 등으로서 분류할 때, 그래서 나에게 이러한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또한 어떤 것이, 즉 연장과 형태가 남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선험적인, 또한 감관이나 지각의 실질적 대상이 없이, 감성의 순전한 형식으로서 심정에 발생하는 순수한 직관에 속한다.

Eine Wissenschaft von allen Prinzipien der Sinnlichkeit a priori nenne 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1).

→선험적 감성의 모든 원칙들에 대한 학문을 나는 초월적 감성학이라 이름한다.

1) Die Deutschen sind die einzigen, welche sich jetzt des Worts Ästhetik bedienen, um dadurch das zu bezeichnen, was andre Kritik des Geschmacks heißen. Es liegt hier eine verfehlte Hoffnung zum Grunde, die der vortreffliche Analyst Baumgarten faßte, die kritische Beurteilung des Schönen unter Vernunftprinzipien zu bringen, und die Regeln derselben zur Wissenschaft zu erheben. Allein diese Bemühung ist vergeblich. Denn gedachte Regeln, oder Kriterien, sind ihren vornehmsten Quellen nach bloß empirisch, und können also niemals zu bestimmten Gesetzen a priori dienen, wornach sich unser Geschmacksurteil richten müßte, vielmehr macht das letztere den eigentlichen Probierstein der Richtigkeit der ersteren aus.

→1) 오늘날 Ästhetik 이란 단어를, 또 다른 취미비판이라 불리는 것을 그를 통해 그려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독일이 유일하다.→ 여기에, 우수한 분석가 바움가르텐이 품었던, 이성원칙 하에서 아름다움의 비판적 평가를 이끌어내고, 그 비판 자체의 규칙들을 학문으로 내세우려는, 빗나간 희망이 근저에 놓인다.→ 단지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헛수고이다.→ 왜냐하면 고려된 규칙들, 혹은 판단의 표지들은, 그것들의 주요한 원천에 있어서 순전히 감각적인 것에 따르고, 그러므로, 우리의 취미판단이 그것을 표준으로 삼는 법칙들로, 더욱이 후자(감각적인 것)가 전자(고려된 원칙들, 판단의 표지들)의 정당성에 대한 유일무이한 시금석을 형성하는, 규정된 선험적 법칙들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다.

 

 

So, wenn ich von der Vorstellung eines Körpers das, was der Verstand davon denkt, als Substanz, Kraft, Teilbarkeit etc. imgleichen, was davon zur Empfindung gehört, als Undurchdringlichkeit, Härte, Farbe etc. absondere, so bleibt mir aus dieser empirischen Anschauung noch etwas übrig, nämlich Ausdehnung und Gestalt.

그래서, 내가 물체의 표상으로부터 그것을, 오성이 그것을 생각하는 것을, 실체, 힘, 가분성 등으로서 분류하는, 그로부터 직관에 속하는 것을, 불가투입성, 견고성, 색채 등으로서 분류할 때, 그래서 나에게 이러한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또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 즉 연장과 형태.

→ 그래서, 내가 물체의 표상으로부터 오성이 생각하는 실체, 힘, 가분성 등으로서 분류하는 것을, 그로부터 직관에 속하는 것을, 불가투입성, 견고성, 색채 등으로서 분류할 때, 그래서 나에게 이러한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또한 어떤 것이, 즉 연장과 형태가 남아 있다.

Diese gehören zur reinen Anschauung, die a priori, auch ohne einen wirklichen Gegenstand der Sinne oder Empfindung, als eine bloße Form der Sinnlichkeit im Gemüte stattfindet.

이러한 것들은 순수한 직관에 속한다, 선험적인, 또한 감관이나 지각의 실질적 대상이 없이, 감성의 순전한 형식으로서 심정에 발생하는 직관.

→ 이러한 것들은, 선험적인, 또한 감관이나 지각의 실질적 대상이 없이, 감성의 순전한 형식으로서 심정에 발생하는 순수한 직관에 속한다.

 

Eine Wissenschaft von allen Prinzipien der Sinnlichkeit a priori nenne 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1).

선험적 감성의 모든 원칙들에 대한 학문을 나는 초월적 감성학이라 이름한다.

→선험적 감성의 모든 원칙들에 대한 학문을 나는 초월적 감성학이라 이름한다.

 

1) Die Deutschen sind die einzigen, welche sich jetzt des Worts Ästhetik bedienen, um dadurch das zu bezeichnen, was andre Kritik des Geschmacks heißen.

1) 독일이 유일하다, 오늘날 Ästhetik 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그를 통해 그려내기 위해서, 또 다른 취향의 비판이라 불리는 것을.

→1) 오늘날 Ästhetik 이란 단어를, 또 다른 취미비판이라 불리는 것을 그를 통해 그려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독일이 유일하다.

Es liegt hier eine verfehlte Hoffnung zum Grunde, die der vortreffliche Analyst Baumgarten faßte, die kritische Beurteilung des Schönen unter Vernunftprinzipien zu bringen, und die Regeln derselben zur Wissenschaft zu erheben.

여기에 빗나간 희망이 근저에 놓인다, 우수한 분석가 바움가르텐이 품었던, 이성원칙 하에서 아름다움의 비판적 평가를 이끌어내려는, 그 비판 자체의 규칙들을 학문으로 내세우려는.

→ 여기에, 우수한 분석가 바움가르텐이 품었던, 이성원칙 하에서 아름다움의 비판적 평가를 이끌어내고, 그 비판 자체의 규칙들을 학문으로 내세우려는, 빗나간 희망이 근저에 놓인다.

Allein diese Bemühung ist vergeblich.

단지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헛수고이다.

→ 단지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헛수고이다.

Denn gedachte Regeln, oder Kriterien, sind ihren vornehmsten Quellen nach bloß empirisch, und können also niemals zu bestimmten Gesetzen a priori dienen, wornach sich unser Geschmacksurteil richten müßte, vielmehr macht das letztere den eigentlichen Probierstein der Richtigkeit der ersteren aus.

왜냐하면 고려된 규칙들, 혹은 판단의 표지들은, 그것들의 주요한 원천에 있어서 순전히 감각적인 것에 따르고, 그러므로 규정된 선험적 법칙들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다, 우리의 취미판단이 그것을 표준으로 삼는 법칙들로, 더욱이 후자는 전자의 정당성에 대한 유일무이한 시금석을 형성하는.

→ 왜냐하면 고려된 규칙들, 혹은 판단의 표지들은, 그것들의 주요한 원천에 있어서 순전히 감각적인 것에 따르고, 그러므로, 우리의 취미판단이 그것을 표준으로 삼는 법칙들로, 더욱이 후자(감각적인 것)가 전자(고려된 원칙들, 판단의 표지들)의 정당성에 대한 유일무이한 시금석을 형성하는, 규정된 선험적 법칙들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다.

 

-蟲-

Die Wirkung eines Gegenstandes auf die Vorstellungsfähigkeit, so fern wir von demselben affiziert werden, ist Empfindung. Diejenige Anschauung, welche sich auf den Gegenstand durch Empfindung bezieht, heißt empirisch. Der unbestimmte Gegenstand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heißt Erscheinung.

→ 표상능력에 대한 대상의 작용은, 우리가 그 대상 자체로부터 자극받는 한에서, 지각이다. 지각을 통해 대상에 관련하는 그 직관을 감각적이라 부른다. 감각적 직관의 무규정적 대상을 현상이라 부른다.

In der Erscheinung nennen ich das, was der Empfindung korrespondiert, die Materie derselben, dasjenige aber, welches macht, daß das Mannigfaltige der Erscheinung in gewissen Verhältnissen geordnet werden kann, nennen ich die Form der Erscheinung. Da das, worinnen sich die Empfindungen allein ordnen, und in gewisse Form gestellet werden können, nicht selbst wiederum Empfindung sein kann, so ist uns zwar die Materie aller Erscheinung nur a posteriori gegeben, die Form derselben aber muß zu ihnen insgesamt im Gemüte a priori bereit liegen, und dahero abgesondert von aller Empfindung können betrachtet werden.

→ 현상 안에서 나는, 직관에 일치하는 그것을, 그 현상의 질료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현상의 다양성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질서지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구성하는 것을, 나는 현상의 형식이라 명명한다. 여기에서, 그 안에서 지각만을 질서지우는 그것은, 그리고 확실한 형식 안에서 세워질 수 있는 그것은, 반면에 그 자체로 직관일 수 없고,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이 모든 현상의 질료는 단지 후험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며, 그러나 그 현상의 형식은 그에 대해 빠짐없이 심성 내에서 선험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며, 모든 직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Ich nennen alle Vorstellungen rein (im transzendentalen Verstande), in denen nichts, was zur Empfindung gehört, angetroffen wird. Demnach wird die reine Form sinnlicher Anschauungen überhaupt im Gemüte a priori angetroffen werden, worinnen alles Mannigfaltige der Erscheinungen in gewissen Verhältnissen angeschauet wird. Diese reine Form der Sinnlichkeit wird auch selber reine Anschauung heißen.

→ 나는, 그 표상들 안에, 직관에 속하는 아무것도, 마주쳐지지 않는 모든 표상들을 순수하다고 명명한다 (초월적 오성에 있어서). 그에 따라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은 전적으로, 그 안에서 현상의 모든 다양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직관되는, 심성 안에서 선험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감성의 이러한 순수형식이 또한 그 자체로 순수한 직관이라 불리울 것이다.

 

 

Die Wirkung eines Gegenstandes auf die Vorstellungsfähigkeit, so fern wir von demselben affiziert werden, ist Empfindung.

표상능력에 대한 대상의 작용은, 우리가 그 대상 자체로부터 자극받는 한에서, 지각이다.

→ 표상능력에 대한 대상의 작용은, 우리가 그 대상 자체로부터 자극받는 한에서, 지각이다.

Diejenige Anschauung, welche sich auf den Gegenstand durch Empfindung bezieht, heißt empirisch.

그 직관을, 지각을 통해 대상에 관련하는, 감각적이라 부른다.

→ 지각을 통해 대상에 관련하는 그 직관을 감각적이라 부른다.

Der unbestimmte Gegenstand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heißt Erscheinung.

감각적 직관의 무규정적 대상을 현상이라 부른다.

→ 감각적 직관의 무규정적 대상을 현상이라 부른다.

 

In der Erscheinung nennen ich das, was der Empfindung korrespondiert, die Materie derselben, dasjenige aber, welches macht, daß das Mannigfaltige der Erscheinung in gewissen Verhältnissen geordnet werden kann, nennen ich die Form der Erscheinung.

현상 안에서 나는 그것을 이름한다, 직관에 일치하는 것, 그 현상의 질료라고, 그러나 그것을, 그러한 구성하는 것, 현상의 다양성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질서지어질 수 있도록, 나는 현상의 형식이라 명명한다.

→ 현상 안에서 나는, 직관에 일치하는 그것을, 그 현상의 질료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현상의 다양성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질서지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구성하는 것을, 나는 현상의 형식이라 명명한다.

Da das, worinnen sich die Empfindungen allein ordnen, und in gewisse Form gestellet werden können, nicht selbst wiederum Empfindung sein kann, so ist uns zwar die Materie aller Erscheinung nur a posteriori gegeben, die Form derselben aber muß zu ihnen insgesamt im Gemüte a priori bereit liegen, und dahero abgesondert von aller Empfindung können betrachtet werden.

여기에서 그것은, 그 안에서 지각만을 질서지우는, 그리고 확실한 형식 안에서 세워질 수 있는, 반면에 그 자체로 직관일 수 없고,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이 모든 현상의 질료는 단지 후험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며, 그러나 그 현상의 형식은 그에 대해 빠짐없이 심성 내에서 선험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며, 모든 직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 여기에서, 그 안에서 지각만을 질서지우는 그것은, 그리고 확실한 형식 안에서 세워질 수 있는 그것은, 반면에 그 자체로 직관일 수 없고,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이 모든 현상의 질료는 단지 후험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며, 그러나 그 현상의 형식은 그에 대해 빠짐없이 심성 내에서 선험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며, 모든 직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Ich nennen alle Vorstellungen rein (im transzendentalen Verstande), in denen nichts, was zur Empfindung gehört, angetroffen wird.

나는 모든 표상들을 순수하다고 명명한다 (초월적 오성에 있어서), 그 표상들 안에 아무것도, 직관에 속하는 것이, 마주쳐지지 않는.

→ 나는, 그 표상들 안에, 직관에 속하는 아무것도, 마주쳐지지 않는 모든 표상들을 순수하다고 명명한다 (초월적 오성에 있어서).

Demnach wird die reine Form sinnlicher Anschauungen überhaupt im Gemüte a priori angetroffen werden, worinnen alles Mannigfaltige der Erscheinungen in gewissen Verhältnissen angeschauet wird.

그에 따라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은 전적으로 심성 안에서 선험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 안에서 현상의 모든 다양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직관되는.

→ 그에 따라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은 전적으로, 그 안에서 현상의 모든 다양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직관되는, 심성 안에서 선험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Diese reine Form der Sinnlichkeit wird auch selber reine Anschauung heißen.

감성의 이러한 순수형식이 또한 그 자체로 순수한 직관이라 불리울 것이다.

→ 감성의 이러한 순수형식이 또한 그 자체로 순수한 직관이라 불리울 것이다.

 

-蟲-

Kritik der reinen Vernunft Ⅰ. 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

순수이성비판 Ⅰ. 초월적 요소론

Der 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

Erster Teil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초월적 요소론 제1 부문 초월적 감성학

§ 1.

 

Auf welche Art und durch welche Mittel sich auch immer eine Erkenntnis auf Gegenstände beziehen mag, so ist doch dijenige, wodurch sie sich auf dieselbe unmittelbar bezieht, und worauf alles Denken als Mittel abzweckt, die Anschauung. Diese findet aber nur statt, so fern uns der Gegenstand gegeben wird; dieses aber ist wiederum, uns Menschen wenigstens, nur dadurch möglich, daß er das Gemüt auf gewisse Wiese affiziere. Die Fähigkeit, (Rezeptivität) Vorstellungen durch die Art, wie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zu bekommen, heißt Sinnlichkeit. Vermittelst der Sinnlichkeit also werden uns Gegenstände gegeben, und sie allein liefert uns Anschauungen; durch den Verstand aber werden sie gedacht, und von ihm entspringen Begriffe. Alles Denken aber muß sich, es sei geradezu (directe), oder im Umschweife (indirecte), vermittelst gewisser Merkmale, zuletzt auf Anschauungen, mithin, bei uns, auf Sinnlichkeit beziehen, weil uns auf andere Weise k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수단을 통하여 항상 인식이 대상들에 속하든지, 또한 그를 통하여 인식이 대상들 자체에 곧바로 관계하는 그것은,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유가 수단으로서 목표로 하는 것은, 직관이다.→ 이러한 것은 그러나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는 한에서 발생할 따름이다; 이러한 대상은 그러나 반면에, 최소한 우리 인간에게는, 단지 그 대상이 심성에 확실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감수성) 표상들을 그 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과 같이, 획득하는 그 소질은, 감성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감성에 따라서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고, 오직 그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한다; 그러나 오성을 통하여 대상들이 사유되고, 그 오성으로부터 개념이 발생한다.→ 그러나 모든 사유는, 우리에게 다른 식으로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곧장이든 (직접), 혹은 우회로든 (간접), 확실한 표지에 따라서, 최후에는 직관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감성에 관계해야만 한다.

 

 

Kritik der reinen Vernunft Ⅰ. 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

순수이성비판 Ⅰ. 초월론적 요소론

Der 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

초월론적 요소론

Erster Teil

제1부문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 1.

초월론적 감성학 § 1.

 

Auf welche Art und durch welche Mittel sich auch immer eine Erkenntnis auf Gegenstände beziehen mag, so ist doch dijenige, wodurch sie sich auf dieselbe unmittelbar bezieht, und worauf alles Denken als Mittel abzweckt, die Anschauung.

어떠한 본성 위에서 그리고 어떠한 수단을 통하여 항상 인식이 대상들에 속하든지, 그래서 또한 그것은, 그를 통하여 인식이 대상들 자체에 곧바로 관계하는,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유가 수단으로서 목표로 하는, 직관이다.

→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수단을 통하여 항상 인식이 대상들에 속하든지, 또한 그를 통하여 인식이 대상들 자체에 곧바로 관계하는 그것은,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유가 수단으로서 목표로 하는 것은, 직관이다.

Diese findet aber nur statt, so fern uns der Gegenstand gegeben wird;

이러한 것은 그러나 발생할 따름이다,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는 한에서;

dieses aber ist wiederum, uns Menschen wenigstens, nur dadurch möglich, daß er das Gemüt auf gewisse Wiese affiziere.

이러한 대상은 그러나 반면에, 최소한 우리 인간에게는, 단지 그것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그 대상이 심성에 확실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

→ 이러한 것은 그러나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는 한에서 발생할 따름이다; 이러한 대상은 그러나 반면에, 최소한 우리 인간에게는, 단지 그 대상이 심성에 확실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Die Fähigkeit, (Rezeptivität) Vorstellungen durch die Art, wie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zu bekommen, heißt Sinnlichkeit.

그 소질은, (감수성) 표상들을 그 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과 같이, 획득하는, 감성이라 이름한다.

→ (감수성) 표상들을 그 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과 같이, 획득하는 그 소질은, 감성이라 이름한다.

Vermittelst der Sinnlichkeit also werden uns Gegenstände gegeben, und sie allein liefert uns Anschauungen;

그러므로 감성에 따라서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고, 오직 그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한다;

durch den Verstand aber werden sie gedacht, und von ihm entspringen Begriffe.

그러나 오성을 통하여 대상들이 사유되고, 그 오성으로부터 개념이 발생한다.

→ 그러므로 감성에 따라서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고, 오직 그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한다; 그러나 오성을 통하여 대상들이 사유되고, 그 오성으로부터 개념이 발생한다.

Alles Denken aber muß sich, es sei geradezu (directe), oder im Umschweife (indirecte), vermittelst gewisser Merkmale, zuletzt auf Anschauungen, mithin, bei uns, auf Sinnlichkeit beziehen, weil uns auf andere Weise k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그러나 모든 사유는, 그것이 곧장이든 (직접), 혹은 우회로든 (간접), 확실한 표지에 따라서, 최후에는 직관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감성에 관계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다른 식으로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 그러나 모든 사유는, 우리에게 다른 식으로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곧장이든 (직접), 혹은 우회로든 (간접), 확실한 표지에 따라서, 최후에는 직관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감성에 관계해야만 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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