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r berühmte … Kategorien. - B; A statt dessen:
- 저 유명한 … 범주들. - B; A는 그 대신에:

Es sind aber drei ursprüngliche Quellen, (Fähigkeiten oder Vermögen der Seele) die die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en enthalten, und selbst aus keinem andern Vermögen des Gemüts abgeleitet werden können, nämlich, Sinn, Einbildungskraft und Apperzeption. Darauf gründet sich 1) die Synopsis des Mannigfaltigen a priori durch den Sinn; 2) die Synthesis dieses Mannigfaltigen durch die Einbinldungskraft: endlich 3) die Einheit dieser Synthesis durch ursprüngliche Apperzeption. Alle diese Vermögen haben, außer dem empirischen Gebrauch, noch einen transz., der lediglich auf die Form geht, und a priori möglich ist. Von diesem haben wir in Ansehung der Sinne oben im ersten Teile geredet, die zwei andre aber wollen wir jetzt ihrer Natur nach einzusehen trachten.
→ 그러나 그것은 세 가지 근본적 원천들이다. 그것들(영혼의 소질들이나 능력들)은 모든 경험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포함하고, 그 자체로 감성의 다른 어떤 능력들로부터도 파생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감각, 상상력 그리고 통각이다.→ 1) 감각을 통한 선험적 잡다의 총괄(일람)이, 2) 이러한 잡다의 상상력을 통한 종합이, 끝으로 3) 이러한 종합의 근원적 통각을 통한 통일이 거기에 근거한다.→ 이러한 모든 능력들은 경험적 사용 외에 초월론적 사용 또한 가진다. 그 사용은 다만 형식에만 해당하고, 선험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감각과 관련하여 위 첫번째 부문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다른 부분은 우리가 이제 그 능력들의 본성을 통찰하고자 노력하려 한다.


Es sind aber drei ursprüngliche Quellen, (Fähigkeiten oder Vermögen der Seele) die die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en enthalten, und selbst aus keinem andern Vermögen des Gemüts abgeleitet werden können, nämlich, Sinn, Einbildungskraft und Apperzeption.
그러나 세 가지 근본적 원천들이다, (영혼의 소질이나 능력) 그것들이 모든 경험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포함하는, 그리고 그 자체로 감성의 다른 어떤 능력들로부터도 파생될 수 없는, 즉, 감각, 상상력 그리고 통각.
→ 그러나 그것은 세 가지 근본적 원천들이다. 그것들(영혼의 소질들이나 능력들)은 모든 경험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포함하고, 그 자체로 감성의 다른 어떤 능력들로부터도 파생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감각, 상상력 그리고 통각이다.
Darauf gründet sich 1) die Synopsis des Mannigfaltigen a priori durch den Sinn; 2) die Synthesis dieses Mannigfaltigen durch die Einbinldungskraft: endlich 3) die Einheit dieser Synthesis durch ursprüngliche Apperzeption.
1) 감각을 통한 선험적 잡다의 총괄(일람)이 그에 근거한다; 2) 이러한 잡다의 상상력을 통한 종합이 그에 근거한다: 끝으로 3) 이러한 종합의 근원적 통각을 통한 통일이 그에 근거한다.
→ 1) 감각을 통한 선험적 잡다의 총괄(일람)이, 2) 이러한 잡다의 상상력을 통한 종합이, 끝으로 3) 이러한 종합의 근원적 통각을 통한 통일이 거기에 근거한다.
Alle diese Vermögen haben, außer dem empirischen Gebrauch, noch einen transz., der lediglich auf die Form geht, und a priori möglich ist.
이러한 모든 능력들은 가진다, 경험적 사용 이외에, 초월론적 사용 또한, 그 사용이 다만 형식에만 해당하는, 그리고 선험적으로 가능한.
→ 이러한 모든 능력들은 경험적 사용 외에 초월론적 사용 또한 가진다. 그 사용은 다만 형식에만 해당하고, 선험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Von diesem haben wir in Ansehung der Sinne oben im ersten Teile geredet, die zwei andre aber wollen wir jetzt ihrer Natur nach einzusehen trachten.
이러한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감각과 관련하여 위 첫번째 부문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다른 부분은 우리가 이제 그 능력들의 본성을 통찰하고자 노력하고자 한다.
→ 이러한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감각과 관련하여 위 첫번째 부문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다른 부분은 우리가 이제 그 능력들의 본성을 통찰하고자 노력하려 한다.

-蟲-
Der erste dieser beiden berühmten Männer öffnete der Schwärmerei Tür und Tor, weil die Vernunft, wenn sie einmal Befugnisse auf ihrer Seite hat, sich nicht mehr durch unbestimmte Anpreisungen der Mäßigung in Schranken halten läßt; der zweite ergab sich gänzlich dem Skeptizism, da er einmal eine so allgemeine für Vernunft gehaltene Täuschung unseres Erkenntnisvermögens glaubte entdeckt zu haben. - Wir sind jetzt im Begriffe einen Versuch zu machen, ob man nicht die menschliche Vernunft zwischen diesen beiden Klippen glücklich durchbringen, ihr bestimmte Grenzen anweisen, und dennoch das ganze Feld ihrer zweckmäßigen Tätigkeit für sie geöffnet erhalten könne.
→ 이 유명한 양쪽의 방법들 중 전자는 도취의 문과 출구를 열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성이 실로 이성의 측면에 대해 권한들을 가졌다면, 제한의 불확실한 선전들을 통하여 제한들 안에 자신을 붙잡아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전적으로 회의주의에 바쳐졌다. 그 방법이 일찍이 그렇게나 보편적으로 이성으로 간주된 우리의 인식능력의 기만을 알아차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제 개념들 내에서, 사람들이 인간적 이성을 이 두 절벽 사이에서 운 좋게 관철시킬 수 있는지, 이성에 규정된 한계들을 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이성의 유효한 활동의 전체를 이성을 위해 개방된 채로 보존할 수 있는지 연구를 구성할 것이다.
Vorher will ich nur noch die Erklärung der Kategorien voranschicken. Sie sind Begriffe von einem Gegenstande überhaupt, dadurch dessen Anschauung in Ansehung einer der logischen Funktionen zu Urteilen als bestimmt angesehen wird. So war die Funktionen des kategorischen Urteils die des Verhältnisses des Subjekts zum Prädikat, z.B. alle Körper sind teilbar. Allein in Ansehung des bloß logischen Gebrauchs des Verstandes blieb es unbestimmt, welchem von beiden Begriffen die Funktion des Subjekts, und welchem die des Prädikats man geben wolle. Denn man kann auch sagen: Einiges Teilbare ist ein Körper. Durch die Kategorie der Substanz aber, wenn ich den Begriff eines Körpers darunter bringe, wird es bestimmt: daß seine empirische Anschauung in der Erfahrung immer nur als Subjekt, niemals als bloßes Prädikat betrachtet werden müsse; und so in allen übrigen Kategorien.
→ 이에 앞서 나는 아직 단지 범주들의 해명만을 미리 보이고자 한다.→ 그것들은 한 대상 일반에 대한 개념들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의 직관이 판단들에 대한 논리적 기능들의 개념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통찰된다.→ 그래서 범주적 판단의 기능들은, 예를 들어 모든 물체들은 가분적이다와 같은,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일 것이다.→ 오로지, 양자의 개념들에 대해 어떤 것에는 주어의 기능을, 그리고 어떤 것에는 술어의 기능을 사람들이 부여하고자 하는, 지성의 순전히 논리적인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만 그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또한 약간의 가분적인 것은 물체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체의 범주를 통하여, 내가 물체의 개념을 그 아래에 놓을 때, 그 개념은 그 개념의 감각적 직관이 경험 안에서 언제나 단지 주어로서만, 결코 순전한 술어로서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남은 모든 범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Der erste dieser beiden berühmten Männer öffnete der Schwärmerei Tür und Tor, weil die Vernunft, wenn sie einmal Befugnisse auf ihrer Seite hat, sich nicht mehr durch unbestimmte Anpreisungen der Mäßigung in Schranken halten läßt; der zweite ergab sich gänzlich dem Skeptizism, da er einmal eine so allgemeine für Vernunft gehaltene Täuschung unseres Erkenntnisvermögens glaubte entdeckt zu haben.
이 유명한 양쪽의 방법들 중 전자는 도취의 문과 출구를 열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성이 실로 이성의 측면에 대해 권한들을 가졌다면, 제한의 불확실한 선전들을 통하여 제한들 안에 자신을 붙잡아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전적으로 회의주의에 바쳐졌다, 그 방법이 일찍이 그렇게나 보편적으로 이성으로 간주된 우리의 인식능력의 기만을 알아차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이 유명한 양쪽의 방법들 중 전자는 도취의 문과 출구를 열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성이 실로 이성의 측면에 대해 권한들을 가졌다면, 제한의 불확실한 선전들을 통하여 제한들 안에 자신을 붙잡아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전적으로 회의주의에 바쳐졌다. 그 방법이 일찍이 그렇게나 보편적으로 이성으로 간주된 우리의 인식능력의 기만을 알아차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Wir sind jetzt im Begriffe einen Versuch zu machen, ob man nicht die menschliche Vernunft zwischen diesen beiden Klippen glücklich durchbringen, ihr bestimmte Grenzen anweisen, und dennoch das ganze Feld ihrer zweckmäßigen Tätigkeit für sie geöffnet erhalten könne.
- 우리는 이제 개념들 내에서 연구를 구성할 것이다, 사람들이 인간적 이성을 이 두 절벽 사이에서 운 좋게 관철시킬 수 있는지, 이성에 규정된 한계들을 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이성의 유효한 활동의 전체를 이성을 위해 개방된 채로 보존할 수 있는지.
→ - 우리는 이제 개념들 내에서, 사람들이 인간적 이성을 이 두 절벽 사이에서 운 좋게 관철시킬 수 있는지, 이성에 규정된 한계들을 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이성의 유효한 활동의 전체를 이성을 위해 개방된 채로 보존할 수 있는지 연구를 구성할 것이다.

Vorher will ich nur noch die Erklärung der Kategorien voranschicken.
이에 앞서 나는 아직 단지 범주들의 해명만을 미리 보이고자 한다.
→ 이에 앞서 나는 아직 단지 범주들의 해명만을 미리 보이고자 한다.
Sie sind Begriffe von einem Gegenstande überhaupt, dadurch dessen Anschauung in Ansehung einer der logischen Funktionen zu Urteilen als bestimmt angesehen wird.
그것들은 한 대상 일반에 대한 개념들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의 직관이 판단들에 대한 논리적 기능들의 개념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통찰된다.
→ 그것들은 한 대상 일반에 대한 개념들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의 직관이 판단들에 대한 논리적 기능들의 개념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통찰된다.
So war die Funktionen des kategorischen Urteils die des Verhältnisses des Subjekts zum Prädikat, z.B. alle Körper sind teilbar.
그래서 범주적 판단의 기능들은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 예를 들어 모든 물체들은 가분적이다, 일 것이다.
→ 그래서 범주적 판단의 기능들은, 예를 들어 모든 물체들은 가분적이다와 같은,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일 것이다.
Allein in Ansehung des bloß logischen Gebrauchs des Verstandes blieb es unbestimmt, welchem von beiden Begriffen die Funktion des Subjekts, und welchem die des Prädikats man geben wolle.
오로지 지성의 순전히 논리적인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만 그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양자의 개념들에 대해 어떤 것에는 주어의 기능을, 그리고 어떤 것에는 술어의 기능을 사람들이 부여하고자 하는.
→ 오로지, 양자의 개념들에 대해 어떤 것에는 주어의 기능을, 그리고 어떤 것에는 술어의 기능을 사람들이 부여하고자 하는, 지성의 순전히 논리적인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만 그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Denn man kann auch sagen: Einiges Teilbare ist ein Körper.
왜냐하면 사람들은 또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가분적인 것은 물체이다.
→ 왜냐하면 사람들은 또한 약간의 가분적인 것은 물체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Durch die Kategorie der Substanz aber, wenn ich den Begriff eines Körpers darunter bringe, wird es bestimmt: daß seine empirische Anschauung in der Erfahrung immer nur als Subjekt, niemals als bloßes Prädikat betrachtet werden müsse; und so in allen übrigen Kategorien.
그러나 실체의 범주를 통하여, 내가 물체의 개념을 그 아래에 놓을 때, 그 개념은 규정된다: 그 개념의 감각적 직관이 경험 안에서 언제나 단지 주어로서만, 결코 순전한 술어로서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긜고 남은 모든 범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 그러나 실체의 범주를 통하여, 내가 물체의 개념을 그 아래에 놓을 때, 그 개념은 그 개념의 감각적 직관이 경험 안에서 언제나 단지 주어로서만, 결코 순전한 술어로서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남은 모든 범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蟲-
Der berühmte Locke hatte, aus Ermangelung dieser Betrachtung, und weil er reine Begriffe des Verstandes in der Erfahrung antraf, sie auch von der Erfahrung abgeleitet, und verfuhr doch so inkonsequent, daß er damit Versuche zu Erkenntnissen wagte, die weit über alle Erfahrungsgrenze hinausgehen. David Hume erkannte, um das letztere tun zu können, sei es notwendig, daß diese Begriffe ihren Ursprung a priori haben müßten. Da er sich aber gar nicht erklären konnte, wie es möglich sei, daß der Verstand Begriffe, die an sich im Verstande nicht verbunden sind, doch als im Gegenstande notwendig verbunden denken müsse, und darauf nicht verfiel, daß vielleicht der Verstand durch diese Begriffe selbst Urheber der Erfahrung, worin seine Gegenstände angetroffen werden, sein könne, so leitete er sie, durch Not gedrungen, von der Erfahrung ab (nämlich von einer durch öftere Assoziation in der Erfahrung entsprungenen subjektiven Notwendigkeit, welche zuletzt fälschlich für objektiv gehalten wird, d.i. der Gewohnheit), verfuhr aber hernach sehr konsequent, darin, daß er es für unmöglich erklärte, mit diesen Begriffen und den Grundsätzen, die sie veranlassen, über die Erfahrungsgrenze hinauszugehen. Die empirische Ableitung aber, worauf beide verfielen, läßt sich mit der Wirklichkeit der wissenschaftlichen Erkenntnisse a priori, die wir haben, nämlich der reinen Mathematik und allgemeinen Naturwissenschaft, nicht vereinigen, und wird also durch das Factum widerlegt.
→ 저 유명한 로크는 이러한 숙고의 결핍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경험 안에서 지성의 순수 개념들을 마주쳤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을 또한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로써 모든 경험의 한계 밖으로 넘어서는 인식들에 대한 연구를 시도할 만큼 그렇게 일관성 없게 굴었다.→ 데이비드 흄은 후자를 행할 수 있기 위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그 개념들의 선험적 원천을 가져야만 했다는 것이 필연적이어야 할 것임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지성이 그 자체가 지성 안에서 결합되지 않는 개념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안에서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전혀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때문에 어쩌면 지성이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서 스스로, 그 안에서 그 지성의 대상들이 마주쳐지는 경험의 창시자일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곤경에 처해서 그 개념들을 경험으로부터 도출했다 (즉 경험 안에서 빈번한 결합을 통하여 발생하고 결국에는 객관적인 것으로 잘못 간주되는 주관적 필연성으로부터, 다시 말해 습관으로부터). 그러나 그 후로, 그가 이러한 개념들과 그 개념들을 야기하는 대상들을 가지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밝혀낸 그 점에 있어서 매우 일관되게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에 대해 잘못한 그 경험적 도출은 그 자체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험적인 학문적 인식의 실제성과, 즉 순수 수학과 보편적 자연과학의 인식들과 합치하도록 할 수 없고, 그러므로 사실을 통하여 반박된다.


Der berühmte Locke hatte, aus Ermangelung dieser Betrachtung, und weil er reine Begriffe des Verstandes in der Erfahrung antraf, sie auch von der Erfahrung abgeleitet, und verfuhr doch so inkonsequent, daß er damit Versuche zu Erkenntnissen wagte, die weit über alle Erfahrungsgrenze hinausgehen.
저 유명한 로크는, 이러한 숙고의 결핍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경험 안에서 지성의 순수 개념들을 마주쳤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을 또한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일관성 없게 했다, 그가 그로써 인식들에 대한 연구를 시도할 만큼, 그 인식들이 모든 경험의 한계 밖으로 넘어서는.
→ 저 유명한 로크는 이러한 숙고의 결핍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경험 안에서 지성의 순수 개념들을 마주쳤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을 또한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로써 모든 경험의 한계 밖으로 넘어서는 인식들에 대한 연구를 시도할 만큼 그렇게 일관성 없게 굴었다.
David Hume erkannte, um das letztere tun zu können, sei es notwendig, daß diese Begriffe ihren Ursprung a priori haben müßten.
데이비드 흄은 인식했다, 후자를 행할 수 있기 위해서, 필연적이어야 할 것이라고, 이러한 개념들이 그 개념들의 선험적 원천을 가져야만 했다는 것이.
→ 데이비드 흄은 후자를 행할 수 있기 위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그 개념들의 선험적 원천을 가져야만 했다는 것이 필연적이어야 할 것임을 인식했다.
Da er sich aber gar nicht erklären konnte, wie es möglich sei, daß der Verstand Begriffe, die an sich im Verstande nicht verbunden sind, doch als im Gegenstande notwendig verbunden denken müsse, und darauf nicht verfiel, daß vielleicht der Verstand durch diese Begriffe selbst Urheber der Erfahrung, worin seine Gegenstände angetroffen werden, sein könne, so leitete er sie, durch Not gedrungen, von der Erfahrung ab (nämlich von einer durch öftere Assoziation in der Erfahrung entsprungenen subjektiven Notwendigkeit, welche zuletzt fälschlich für objektiv gehalten wird, d.i. der Gewohnheit), verfuhr aber hernach sehr konsequent, darin, daß er es für unmöglich erklärte, mit diesen Begriffen und den Grundsätzen, die sie veranlassen, über die Erfahrungsgrenze hinauszugehen.
그러나 그 자신이 전혀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지성이 개념들을, 그 개념들 자체가 지성 안에서 결합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안에서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때문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어쩌면 지성이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서 스스로 경험의 창시자, 그 안에서 그 지성의 대상들이 마주쳐지는, 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그 개념들을 이끌었다, 곤경을 헤쳐 나아가게 된 때, 경험으로부터 도출했다 (즉 경험 안에서 빈번한 결합을 통하여 발생하는 주관적 필연성으로부터, 그러한 필연성이 결국에는 객관적인 것으로 잘못 간주되는, 다시 말해 습관), 그러나 그 후로 매우 일관되게 이끌었다, 그 점에 있어서, 그가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밝혀낸, 이러한 개념들과 대상들을 가지고, 그 대상들이 그 개념들을 야기하는,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 그러나 그 자신이 지성이 그 자체가 지성 안에서 결합되지 않는 개념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안에서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전혀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때문에 어쩌면 지성이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서 스스로, 그 안에서 그 지성의 대상들이 마주쳐지는 경험의 창시자일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곤경에 처해서 그 개념들을 경험으로부터 도출했다 (즉 경험 안에서 빈번한 결합을 통하여 발생하고 결국에는 객관적인 것으로 잘못 간주되는 주관적 필연성으로부터, 다시 말해 습관으로부터). 그러나 그 후로, 그가 이러한 개념들과 그 개념들을 야기하는 대상들을 가지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밝혀낸 그 점에 있어서 매우 일관되게 하였다.
Die empirische Ableitung aber, worauf beide verfielen, läßt sich mit der Wirklichkeit der wissenschaftlichen Erkenntnisse a priori, die wir haben, nämlich der reinen Mathematik und allgemeinen Naturwissenschaft, nicht vereinigen, und wird also durch das Factum widerlegt.
그러나 그 경험적 도출은, 둘 다 잘못한, 스스로 선험적인 학문적 인식의 실제성과, 그 인식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즉 순수 수학과 보편적 자연과학의 인식들, 합치하도록 할 수 없고, 그러므로 사실을 통하여 반박된다.
→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에 대해 잘못한 그 경험적 도출은 그 자체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험적인 학문적 인식의 실제성과, 즉 순수 수학과 보편적 자연과학의 인식들과 합치하도록 할 수 없고, 그러므로 사실을 통하여 반박된다.

-蟲-
Res enim nulla est de qua tantopere non solum indocti sed etiam docti dissentiant; quorum opiniones cum tam variae sint tamque inter se dissidentes, alterum fieri profecto potest ut earum nulla, alterum certe non potest ut plus una vera sit.

tantopere : a great degree, so very
indocti : indoctus. a. unlearned, ignorant, uninformed
dissentiant : dissentio. subj. to differ in opinion, disagree, dissent
cum ~ subj.(sint)
fieri : fio. inf. to take place, occur, arise.
profecto : adv. without question, undoubtedly, assuredly.

Qua quidem in causa et benivolos obiurgatores placare et invidos vituperatores confutare possumus, ut alteros reprehendisse paeniteat, alteri didicisse se gaudeant; nam qui admonent amice docendi sunt, qui inimice insectantur repellendi.

benivolos : beniuolus. kind. friendly, benevolent.
obiurgatores : obiurgator. one who reproves or rebukes, a critic, detractor.
placare : placo. inf. to make favourably disposed, conciliate, placate, calm. appease.
invidos : inuidus. a. bearing ill will, ill-disposed, malevolent, hostile. envious, jealous, grudging.
vituperatores : unfavourable critic, detractor.
confutare : confuto. inf. to keep from boiling over. to administer a check to, restrain, diminish. to abash, silence. to disprove, refute.
reprehendisse : reprehendo. pf. inf. to grap so as to prevent from moving forward, to hold back. reprehend.
paeniteat : paeniteo. subj. to cause dissatisfaction, give reason for complaint or regret. to affect to regret. to feel regret.
didicisse : diduco. pf. inf. to cause to come apart, divide, split, sever. to separate (from). to pull or draw apart. to separate in several directions. to distribute into channels or other ramifications.
insectantur : insector. dep. impf. pl. to pursue with hostile intent, chase. to pursue with hostile policies, speech, ect., harry.
repellendi : repello. ger. to push or thrust away from one, drive back. repel.

Multum autem fluxisse video de libris nostris, quos compluris brevi tempore edidimus, variumque sermonem partim admirantium unde hoc philosophandi nobis subito studium extitisset, partim quid quaque de re certi haberemus scire cupientium; multis etiam sensi mirabile videri eam nobis potissimum probatam esse philosophiam, quae lucem eriperet et quasi noctem quandam rebus offunderet, desertaeque disciplinae et iam pridem relictae patrocinium necopinatum a nobis esse susceptum.

fluxisse : fluo. pf. inf. flow.
compluris : complures. a. a fair number. quite a number of. several, many.
edidimus : edo. to eject, emit. to debouch. to bring forth, to give birth to, to produce.
sermonem : sermo. conversation. talk.
partim : pars. old acc. sg.
admirantium : admiror. dep. part. pl.-gen(?). admire.
unde : whence from, what or which place; from which, from whom.
subito : adv. suddenly.
extitisset : extexo(?). plpf. sg. 3. to unweave, undo.
mirabile : mirabilis. causing wonder, marvellous, remarkable, extraordinary.
probatam : probatus. regarded with approval, well-reputed, esteemed. Acceptable, pleasing.
eriperet : eripio. subj. impf. to seize, pull, tear, or pluck from a position, snatch out, away, or off.
offunderet : offundo. subj. impf. to pour or extend. to overspread, cover, to fill, overwhelm.
desertae : desero. desertus. empty of people, deserted, uninhabited. wilderness.
iam pridem : adv. long ago, well before now(then). for a long time now; for a long time past.
relictae : relinquo. relictus. forsaken, abandoned. left untouched.
patrocinium : the exercise of the functions of a patronus. performance as a patronus. an argument in defence. 보호자노릇, 변호사노릇.
necopinatum : necopinatus. unexpected, unforeseen.

Nos autem nec subito coepimus philosophari nec mediocrem a primo tempore aetatis in eo studio operam curamque consumpsimus, et cum minime videbamur tum maxime philosophabamur; quod et orationes declarant refertae philosophorum sententiis et doctissimorum hominum familiaritates, quibus semper domus nostra floruit, et principes illi Diodotus Philo Antiochus Posidonius, a quibus instituti sumus. (7) Et si omnia philosophiae praecepta referuntur ad vitam, arbitramur nos et publicis et privatis in rebus ea praestitisse quae ratio et doctrina praescripserit. Sin autem quis requirit quae causa nos inpulerit ut haec tam sero litteris mandaremus, nihil est quod expedire tam facile possimus. Nam cum otio langueremus et is esset rei publicae status ut eam unius consilio atque cura gubernari necesse esset, primum ipsius rei publicae causa philosophiam nostris hominibus explicandam putavi, magni existimans interesse ad decus et ad laudem civitatis res tam gravis tamque praeclaras Latinis etiam litteris contineri; (8) eoque me minus instituti mei paenitet, quod facile sentio quam multorum non modo discendi sed etiam scribendi studia commoverim. complures enim Graecis institutionibus eruditi ea quae didicerant cum civibus suis communicare non poterant, quod illa quae a Graecis accepissent Latine dici posse diffiderent; quo in genere tantum profecisse videmur, ut a Graecis ne verborum quidem copia vinceremur. (1.9.1.)

mediocrem :
aetatis :
consumpsimus :
refertae :
floruit :
praecepta :
referuntur :
arbitramur :
publicis :
privatis :
praestitisse :
praescripserit :
requirit :
inpulerit :
sero :
otio :
gubernari :
langueremus :
litteris :
mandaremus :
expedire :
explicandam :
putavi :
existimans :
decus :
praeclaras :
paenitet :
commoverim :
complures :
eruditi :
didicerant :
profecisse :

-작성중-
Cum multae res in philosophia nequaquam satis adhuc explicatae sint, tum perdifficilis, Brute, quod tu minime ignoras, et perobscura quaestio est de natura deorum, quae et ad cognitionem animi pulcherrima est et ad moderandam religionem necessaria.


De qua <cum> tam variae sint doctissimorum hominum tamque discrepantes sententiae, magno argumento esse debeat <ea> causa, principium philosophiae ad h * scientiam, prudenterque Academici a rebus incertis adsensionem cohibuisse.


quid est enim temeritate turpius aut quid tam temerarium tamque indignum sapientis gravitate atque constantia quam aut falsum sentire aut quod non satis explorate perceptum sit et cognitum sine ulla dubitatione defendere?


Velut in hac quaestione plerique, quod maxime veri simile est et quo omnes †sese duce natura venimus, deos esse dixerunt, dubitare se Protagoras, nullos esse omnino Diagoras Melius et Theodorus Cyrenaicus putaverunt.


Qui vero deos esse dixerunt tanta sunt in varietate et dissensione, ut eorum infinitum sit enumerare sententias.


nam et de figuris deorum et de locis atque sedibus et de actione vitae multa dicuntur, deque is summa philosophorum dissensione certatur; quod vero maxime rem causamque continet, utrum nihil agant nihil moliantur omni curatione et administratione rerum vacent, an contra ab iis et a principio omnia facta et constituta sint et ad infinitum tempus regantur atque moveantur, in primis [quae] magna dissensio est, eaque nisi diiudicatur in summo errore necesse est homines atque in maximarum rerum ignoratione versari.


Sunt enim philosophi et fuerunt qui omnino nullam habere censerent rerum humanarum procurationem deos.


quorum si vera sententia est, quae potest esse pietas quae sanctitas quae religio?


haec enim omnia pure atque caste tribuenda deorum numini ita sunt, si animadvertuntur ab is et si est aliquid a deis inmortalibus hominum generi tributum; sin autem dei neque possunt nos iuvare nec volunt nec omnino curant nec quid agamus animadvertunt nec est quod ab is ad hominum vitam permanare possit, quid est quod ullos deis inmortalibus cultus honores preces adhibeamus?


in specie autem fictae simulationis sicut reliquae virtutes item pietas inesse non potest; cum qua simul sanctitatem et religionem tolli necesse est, quibus sublatis perturbatio vitae sequitur et magna confusio; atque haut scio an pietate adversus deos sublata fides etiam et societas generis humani et una excellentissuma virtus iustitia tollatur.



Sunt autem alii philosophi, et hi quidem magni atque nobiles, qui deorum mente atque ratione omnem mundum administrari et regi censeant, neque vero id solum, sed etiam ab isdem hominum vitae consuli et provideri; nam et fruges et reliqua quae terra pariat et tempestates ac temporum varietates caelique mutationes, quibus omnia quae terra gignat maturata pubescant, a dis inmortalibus tribui generi humano putant, multaque quae dicentur in his libris colligunt, quae talia sunt ut ea ipsa dei inmortales ad usum hominum fabricati paene videantur.


Contra quos Carneades ita multa disseruit, ut excitaret homines non socordes ad veri investigandi cupiditatem.



-작성중-
Nun enthält aber alle Erfahrung außer der Anschauung der Sinne, wodurch etwas gegeben wird, noch einen Begriff von einem Gegenstande, der in der Anschauung gegeben wird, oder erscheint: demnach werden Begriffe von Gegenständen überhaupt, als Bedingungen a priori aller Erfahrungserkenntnis zum Grunde liegen: folglich wird die objektive Gülitgkeit der Kategorien als Begriffe a priori, darauf beruhen, daß durch sie allein Erfahrung (der Form des Denkens nach) möglich sei. Denn alsdenn beziehen sie sich notwendiger Weise und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weil nur vermittelst ihrer überhaupt irgend ein Gegenstand der Erfahrung gedacht werden kann.
→ 그러나 이제 모든 경험은, 그를 통하여 어떤 것이 주어지는 감각의 직관 외부에서, 그럼에도 직관 안에서 주어지는, 혹은 현상하는 한 대상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포함할 것이다: 그래서 대상들 일반에 대한 개념들은 모든 경험적인식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기초에 놓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험적 개념들로서 범주들의 그 객관적 정당성은, 그 개념들을 통해서만 경험이(사유의 형식에 따라) 가능할 것이라는 데에 기초한다.→ 왜냐하면 그래서 그 개념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되기 때문인데, 단지 그 개념들에 따라서만 일반적으로 어떻든 경험의 대상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Die transz. Deduktion aller Begriffe a priori hat also ein Principium, worauf die ganze Nachforschung gerichtet werden muß, nämlich dieses: daß sie als Bedingungen a priori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erkannt werden müssen, (es sei der Anschauung, die in ihr angetroffen wird, oder des Denkens). Begriffe, die den objektiven Grund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abgeben, sind eben darum notwendig. Die Entwickelung der Erfahrung aber, worin sie angetroffen werden, ist nicht ihre Deduktion, (sondern Illustration,) weil sie dabei doch nur zufällig sein würden. Ohne diese ursprüngliche Beziehung auf mögliche Erfahrung, in welcher alle Gegenstände der Erkenntnis vorkommen, würde die Beziehung derselben auf irgend ein Objekt gar nicht begriffen werden können.
→ 모든 선험적 개념들에 대한 그 초월론적 연역은 그러므로, 그것으로 전체 연구가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원칙을 갖는다. 즉 이러한 원칙이다: 그 개념들은 경험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인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경험 안에서 마주쳐지는 직관일 것이거나 혹은 사유일 것이다).→ 경험의 가능성의 개관적 근거를 내놓는 개념들은, 마찬가지로 그런 이유에서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개념들이 발견되는 경험의 전개는 그 개념들의 연역이 아닌데(오히려 묘사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그로 인해 단지 우연적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경험에 대해, 그 안에서 인식의 모든 대상들이 나타나는 이런 본질적인 관련 없이는, 좌우간에 한 객체에 그 동일한 경험의 관련이 전혀 이해될 수 없다.


Nun enthält aber alle Erfahrung außer der Anschauung der Sinne, wodurch etwas gegeben wird, noch einen Begriff von einem Gegenstande, der in der Anschauung gegeben wird, oder erscheint: demnach werden Begriffe von Gegenständen überhaupt, als Bedingungen a priori aller Erfahrungserkenntnis zum Grunde liegen: folglich wird die objektive Gülitgkeit der Kategorien als Begriffe a priori, darauf beruhen, daß durch sie allein Erfahrung (der Form des Denkens nach) möglich sei.
그러나 이제 모든 경험은 감각의 직관 외부에서 포함할 것이다, 그 직관을 통하여 어떤 것이 주어지는, 그럼에도 한 대상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그 대상이 직관 안에서 주어지는, 혹은 현상하는: 그래서 대상들 일반에 대한 개념들은, 모든 경험적인식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기초에 놓일 것이다: folglich 선험적 개념들로서 범주들의 그 객관적 정당성은, 거기에 기초한다, 그 개념들을 통해서만 경험이(사유의 형식에 따라) 가능할 것이라는.
→ 그러나 이제 모든 경험은, 그를 통하여 어떤 것이 주어지는 감각의 직관 외부에서, 그럼에도 직관 안에서 주어지는, 혹은 현상하는 한 대상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포함할 것이다: 그래서 대상들 일반에 대한 개념들은 모든 경험적인식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기초에 놓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험적 개념들로서 범주들의 그 객관적 정당성은, 그 개념들을 통해서만 경험이(사유의 형식에 따라) 가능할 것이라는 데에 기초한다.
Denn alsdenn beziehen sie sich notwendiger Weise und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weil nur vermittelst ihrer überhaupt irgend ein Gegenstand der Erfahrung gedacht werden kann.
왜냐하면 그래서 그 개념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되기 때문인데, 단지 그 개념들에 따라서만 일반적으로 어떻든 경험의 대상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그래서 그 개념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되기 때문인데, 단지 그 개념들에 따라서만 일반적으로 어떻든 경험의 대상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Die transz. Deduktion aller Begriffe a priori hat also ein Principium, worauf die ganze Nachforschung gerichtet werden muß, nämlich dieses: daß sie als Bedingungen a priori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erkannt werden müssen, (es sei der Anschauung, die in ihr angetroffen wird, oder des Denkens).
모든 선험적 개념들에 대한 그 초월론적 연역은 그러므로 하나의 원칙을 갖는다, 그것으로 전체 연구가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즉 이러한 것: 그 개념들이 경험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인식되어야만 하는, (그것은 직관일 것이다, 그 직관이 그 경험 안에서 마주쳐지는, 혹은 사유일 것이다).
→ 모든 선험적 개념들에 대한 그 초월론적 연역은 그러므로, 그것으로 전체 연구가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원칙을 갖는다. 즉 이러한 원칙이다: 그 개념들은 경험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인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경험 안에서 마주쳐지는 직관일 것이거나 혹은 사유일 것이다).
Begriffe, die den objektiven Grund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abgeben, sind eben darum notwendig.
경험의 가능성의 개관적 근거를 내놓는 개념들은, 마찬가지로 그런 이유에서 필연적이다.
→ 경험의 가능성의 개관적 근거를 내놓는 개념들은, 마찬가지로 그런 이유에서 필연적이다.
Die Entwickelung der Erfahrung aber, worin sie angetroffen werden, ist nicht ihre Deduktion, (sondern Illustration,) weil sie dabei doch nur zufällig sein würden.
그러나 경험의 전개는, 그 안에서 개념들이 발견되는, 그 개념들의 연역이 아니다, (오히려 묘사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그로 인해 단지 우연적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안에서 개념들이 발견되는 경험의 전개는 그 개념들의 연역이 아닌데(오히려 묘사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그로 인해 단지 우연적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Ohne diese ursprüngliche Beziehung auf mögliche Erfahrung, in welcher alle Gegenstände der Erkenntnis vorkommen, würde die Beziehung derselben auf irgend ein Objekt gar nicht begriffen werden können.
가능한 경험에 대한 이런 본질적인 관련 없이, 그 관련 안에서 인식의 모든 대상들이 나타나는, 좌우간에 한 객체에 그 동일한 경험의 관련이 전혀 이해될 수 없다.
→ 가능한 경험에 대해, 그 안에서 인식의 모든 대상들이 나타나는 이런 본질적인 관련 없이는, 좌우간에 한 객체에 그 동일한 경험의 관련이 전혀 이해될 수 없다.

-蟲-
Entweder wenn der Gegenstand die Vorstellung, oder diese den Gegenstand allein möglich macht. Ist das erstere, so ist diese Beziehung nur empirisch, und die Vorstellung ist niemals a priori möglich. Und dies ist der Fall mit Erscheinung, in Ansehung dessen, was an ihnen zur Empfindung gehört. Ist aber das zweite, weil Vorstellung an sich selbst (denn von deren Kausalität, vermittelst des Willens, ist hier gar nicht die Rede,) ihren Gegenstand dem Dasein nach ni hicht hervorbringt, so ist doch die Vorstellung in Ansehung des Gegenstandes alsdenn a priori bestimmend, wenn durch sie allein es möglich ist, etwas als einen Gegenstand zu erkennen. Es sind aber zwei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die Erkenntnis eines Gegenstandes möglich ist, erstlich Anschauung, dadurch derselbe, aber nur als Erscheinung, gegeben wird: zweitens Begriff, dadruch ein Gegenstand gedacht wird, der dieser Anschauung entspricht. Es ist aber aus dem obigen klar, daß die erste Bedingung, nämlich die, unter der allein Gegenstände angeschaut werden können, in der Tat den Objekten der Form nach a priori im Gemüt zum Grunde liege. Mit dieser formalen Bedingung der Sinnlichkeit stimmen also alle Erscheinungen notwendig überein, weil sie nur durch dieselbe erscheinen, d.i. empirisch angeschauet und gegeben werden können. Nun frägt es sich, ob nicht auch Begriffe a priori vorausgehen, als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etwas, wenn gleich nicht angeschauet, dennoch als Gegenstand überhaupt gedacht wird, denn alsdenn ist alle empirische Erkenntnis der Gegenstände solchen Begriffen notwendiger Weise gemäß, weil, ohne deren Voraussetzung, nichts als Objekt der Erfahrung mölgich ist.
→ 대상이 표상을 가능하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이 표상이 대상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첫번째 것은, 그래서 이러한 관계가 경험적일 따름이고, 그 표상은 전혀 선험적일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상을 가지고 그 현상들에 있어서 지각에 속하는 것을 고려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두번째 것은, 표상 그 자체가 (왜냐하면 의지에 따르는 그 표상의 인과성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전혀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그 표상의 대상을 현존에 따라 나타내지 않고, 그래서 어떤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그 표상을 통하여서만 가능할 때, 표상을 대상의 고려 속에서 그리하여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만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두 가지 조건들이 있다. 첫번째로 직관은, 그를 통하여 동일한 대상이, 그러나 단지 현상으로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두번째 것은 개념으로서, 그를 통하여 직관에 상응하는 대상이 사유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으로부터, 첫번째 조건, 즉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대상들이 직관될 수 있는 그 조건이 실제로 객체에 형식에 따라 선험적으로 감성 안에 기초로 놓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성의 형식적 조건을 가지고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호응한다. 왜냐하면 그 현상들이 단지 이 동일한 조건을 통해서만 현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경험적으로 직관되고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개념 또한 조건들로서 선험적으로 선행하지 않는지 물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아래에서만 어떤 것이 직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일반으로서 사유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상들에 대한 모든 경험적 인식이 그러한 개념들에 필연적인 방식으로 부합할 것이다. 그 개념들을 전제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경험의 객체로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Entweder wenn der Gegenstand die Vorstellung, oder diese den Gegenstand allein möglich macht.
대상이 표상을 가능하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이 표상이 대상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 대상이 표상을 가능하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이 표상이 대상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Ist das erstere, so ist diese Beziehung nur empirisch, und die Vorstellung ist niemals a priori möglich.
첫번째 것은, 그래서 이러한 관계가 경험적일 따름이고, 표상은 전혀 선험적일 수 없다.
→ 첫번째 것은, 그래서 이러한 관계가 경험적일 따름이고, 그 표상은 전혀 선험적일 수 없다.
Und dies ist der Fall mit Erscheinung, in Ansehung dessen, was an ihnen zur Empfindung gehört.
그리고 이것은 현상을 가지고 하는 경우이다, 그것의 고려 속에서, 그 현상들에 있어서 지각에 속하는.
→ 그리고 이것은 현상을 가지고 그 현상들에 있어서 지각에 속하는 것을 고려하는 경우이다.
Ist aber das zweite, weil Vorstellung an sich selbst (denn von deren Kausalität, vermittelst des Willens, ist hier gar nicht die Rede,) ihren Gegenstand dem Dasein nach nicht hervorbringt, so ist doch die Vorstellung in Ansehung des Gegenstandes alsdenn a priori bestimmend, wenn durch sie allein es möglich ist, etwas als einen Gegenstand zu erkennen.
그러나 두번째 것은, 표상 그 자체가 (왜냐하면 그 표상의 인과성에 대해서는, 의지에 따라, 여기에서 전혀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그 표상의 대상을 현존에 따라 나타나지 않고, 그래서 표상을 대상의 고려 속에서 그리하여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 표상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어떤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 그러나 두번째 것은, 표상 그 자체가 (왜냐하면 의지에 따르는 그 표상의 인과성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전혀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그 표상의 대상을 현존에 따라 나타내지 않고, 그래서 어떤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그 표상을 통하여서만 가능할 때, 표상을 대상의 고려 속에서 그리하여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Es sind aber zwei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die Erkenntnis eines Gegenstandes möglich ist, erstlich Anschauung, dadurch derselbe, aber nur als Erscheinung, gegeben wird: zweitens Begriff, dadruch ein Gegenstand gedacht wird, der dieser Anschauung entspricht.
그러나 두 가지 조건들이다, 그 조건들 아래에서만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첫번째로 직관, 그를 통하여 동일한 대상이, 그러나 단지 현상으로서만, 주어지는: 두번째 것은 개념, 그를 통하여 대상이 사유되는, 그 대상이 직관에 상응하는.
→ 그러나, 그 아래에서만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두 가지 조건들이 있다. 첫번째로 직관은, 그를 통하여 동일한 대상이, 그러나 단지 현상으로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두번째 것은 개념으로서, 그를 통하여 직관에 상응하는 대상이 사유되는 것이다.
Es ist aber aus dem obigen klar, daß die erste Bedingung, nämlich die, unter der allein Gegenstände angeschaut werden können, in der Tat den Objekten der Form nach a priori im Gemüt zum Grunde liege.
그러나 앞서 말한 것으로부터 명백하다, 첫번째 조건, 즉 그 조건이,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대상들이 직관될 수 있는, 실제로 객체를 형식에 따라 선험적으로 감성 안에 기초로 놓는다는 것.
→ 그러나 앞서 말한 것으로부터, 첫번째 조건, 즉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대상들이 직관될 수 있는 그 조건이 실제로 객체에 형식에 따라 선험적으로 감성 안에 기초로 놓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Mit dieser formalen Bedingung der Sinnlichkeit stimmen also alle Erscheinungen notwendig überein, weil sie nur durch dieselbe erscheinen, d.i. empirisch angeschauet und gegeben werden können.
그러므로 이러한 감성의 형식적 조건을 가지고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호응한다, 왜냐하면 그 현상들이 단지 이 동일한 조건을 통해서만 현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경험적으로 직관되고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러한 감성의 형식적 조건을 가지고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호응한다. 왜냐하면 그 현상들이 단지 이 동일한 조건을 통해서만 현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경험적으로 직관되고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Nun frägt es sich, ob nicht auch Begriffe a priori vorausgehen, als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etwas, wenn gleich nicht angeschauet, dennoch als Gegenstand überhaupt gedacht wird, denn alsdenn ist alle empirische Erkenntnis der Gegenstände solchen Begriffen notwendiger Weise gemäß, weil, ohne deren Voraussetzung, nichts als Objekt der Erfahrung mölgich ist.
이제 물어질 것이다, 개념 또한 선험적으로 선행하지 않는지, 조건들로서, 그 조건들 아래에서만 어떤 것이, 왜냐하면 직관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일반으로서 사유되는 것 같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리하여 대상들에 대한 모든 경험적 인식이 그러한 개념들에 필연적인 방식으로 부합할 것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 개념들을 전제함이 없이, 아무것도 경험의 객체로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제 개념 또한 조건들로서 선험적으로 선행하지 않는지 물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아래에서만 어떤 것이 직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일반으로서 사유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상들에 대한 모든 경험적 인식이 그러한 개념들에 필연적인 방식으로 부합할 것이다. 그 개념들을 전제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경험의 객체로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蟲-
Denn dieser Begriff erfordert durchaus, daß etwas A von der Art sei, daß ein anderes B daraus notwendig und nach einer schlechthin allgemeinen Regel folge. Erscheinungen geben gar wohl Fälle an die Hand, aus denen eine Regel möglich ist, nach der etwas gewöhnlicher maßen geschieht, aber niemals, daß der Erfolg notwendig sei: daher der Synthesis der Ursache und Wirkung auch eine Dignität anhängt, die man gar nicht empirisch ausdrücken kann, nämlich, daß die Wirkung nicht bloß zu der Ursache hinzu komme, sondern durch dieselbe gesetzt sei, und aus ihr erfolge. Die strenge Allgemeinheit der Regel ist auch gar keine Eigenschaft empirischer Regeln, die durch Induktion keine andere als komparative Allgemeinheit, d.i. ausgebreitete Brauchbarkeit bekommen können. Nun würde sich aber der Gebrauch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gänzlich ändern, wenn man sie nur als empirische Produkte behandeln wollte.
→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은, 어떤 A가 그 방식으로 있을 것을, 또 다른 B가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수반할 것을 전적으로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현상들은, 그들로부터 그에 따라 어떤 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러나 결코, 그 결과가 필연적이지는 않을 법칙이 가능한 더욱이 좋은 경우들을 내놓는다: 그런 이유에서 원인과 작용의 종합은 또한 사람들이 전혀 경험적으로 나타낼 수 없는, 즉, 그 작용이 순전히 원인에 덧붙여서 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동일한 것을 통해 정립될 것이고, 그로부터 귀결하리라는 위엄을 부가한다.→ 그 법칙의 강력한 보편성은 또한 귀납을 통하여 상대적 보편성, 다시 말해 광범위한 유용성 외에 다른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는 경험적 법칙들의 특성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이제, 만약 사람들이 그 개념들을 단지 경험적 산물로서만 운용하려 든다면 순수 지성개념들의 사용은 전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 14.
Übergang zur Transzendentalen Deduktion der Kategorien
범주들의 초월론적 연역으로의 이행

Es sind nur zwei Fälle möglich, unter denen synthetische Vorstellung und ihre Gegenstände zusammentreffen, sich auf einander notwendiger Weise beziehen, und gleichsam einander begegnen können.
→ 그 아래에서 종합적 표상과 그 표상의 대상들이 함께 마주치는, 서로에게 필연적 방식으로 관련되는, 그리고 동시에 상호간에 대응할 수 있는 오직 두 가지 경우만이 가능하다.


Denn dieser Begriff erfordert durchaus, daß etwas A von der Art sei, daß ein anderes B daraus notwendig und nach einer schlechthin allgemeinen Regel folge.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은 전적으로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어떤 A가 그 방식으로 있을 것을, 또 다른 B가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수반할 것을.
→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은, 어떤 A가 그 방식으로 있을 것을, 또 다른 B가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수반할 것을 전적으로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Erscheinungen geben gar wohl Fälle an die Hand, aus denen eine Regel möglich ist, nach der etwas gewöhnlicher maßen geschieht, aber niemals, daß der Erfolg notwendig sei: daher der Synthesis der Ursache und Wirkung auch eine Dignität anhängt, die man gar nicht empirisch ausdrücken kann, nämlich, daß die Wirkung nicht bloß zu der Ursache hinzu komme, sondern durch dieselbe gesetzt sei, und aus ihr erfolge.
현상들은 더욱이 좋은 경우들을 내놓는다, 그 경우들로부터 법칙이 가능한, 그 법칙에 따라 어떤 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그러나 결코 아닌, 그 결과가 필연적일: 그런 이유에서 원인과 작용의 종합은 또한 위엄을 부가한다, 그 위엄을 사람들이 전혀 경험적으로 나타낼 수 없는, 즉, 그 작용이 순전히 원인에 덧붙여서 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동일한 것을 통해 정립될 것이고, 그로부터 귀결하리라는 것.
→ 현상들은, 그들로부터 그에 따라 어떤 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러나 결코, 그 결과가 필연적이지는 않을 법칙이 가능한 더욱이 좋은 경우들을 내놓는다: 그런 이유에서 원인과 작용의 종합은 또한 사람들이 전혀 경험적으로 나타낼 수 없는, 즉, 그 작용이 순전히 원인에 덧붙여서 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동일한 것을 통해 정립될 것이고, 그로부터 귀결하리라는 위엄을 부가한다.
Die strenge Allgemeinheit der Regel ist auch gar keine Eigenschaft empirischer Regeln, die durch Induktion keine andere als komparative Allgemeinheit, d.i. ausgebreitete Brauchbarkeit bekommen können.
그 법칙의 강력한 보편성은 또한 전혀 경험적 법칙들의 특성이 아니다, 그 법칙들이 귀납을 통하여 상대적 보편성, 다시 말해 광범위한 유용성 외에 다른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는.
→ 그 법칙의 강력한 보편성은 또한 귀납을 통하여 상대적 보편성, 다시 말해 광범위한 유용성 외에 다른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는 경험적 법칙들의 특성이 전혀 아니다.
Nun würde sich aber der Gebrauch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gänzlich ändern, wenn man sie nur als empirische Produkte behandeln wollte.
그러나 이제 순수 지성개념들의 사용은 전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 개념들을 단지 경험적 산물로서만 운용하려 든다면.
→ 그러나 이제, 만약 사람들이 그 개념들을 단지 경험적 산물로서만 운용하려 든다면 순수 지성개념들의 사용은 전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 14.
Übergang zur Transzendentalen Deduktion der Kategorien
범주들의 초월론적 연역으로의 이행

Es sind nur zwei Fälle möglich, unter denen synthetische Vorstellung und ihre Gegenstände zusammentreffen, sich auf einander notwendiger Weise beziehen, und gleichsam einander begegnen können.
오직 두 가지 경우만이 가능하다, 그 경우들 아래에서 종합적 표상과 그 표상의 대상들이 함께 마주치는, 서로에게 필연적 방식으로 관련되는, 그리고 동시에 상호간에 대응할 수 있는.
→ 그 아래에서 종합적 표상과 그 표상의 대상들이 함께 마주치는, 서로에게 필연적 방식으로 관련되는, 그리고 동시에 상호간에 대응할 수 있는 오직 두 가지 경우만이 가능하다.

-蟲-
Denn daß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denen im Gemüt a priori liegenden formalen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gemäß sein müssen, ist daraus klar, weil sie sonst nicht Gegenstände für uns sein würden; daß sie aber auch überdem den Bedingungen, deren der Verstand zur synthetischen Einheit des Denkens bedarf, gemäß sein müssen, davon ist die Schlußfolge nicht so leicht einzusehen. Denn es könnten wohl allenfalls Erscheinungen so beschaffen sein, daß der Verstand sie den Bedingungen seiner Einheit gar nicht gemäß fände, und alles so in Verwirrung läge, daß z.B. in der Reihenfolge der Erscheinungen sich nichts darböte, was eine Regel der Synthesis an die Hand gäbe, und also dem Begriffe der Ursache und Wirkung entspräche, so daß dieser Begriff also ganz leer, nichtig und ohne Bedeutung wäre. Erscheinungen würden nichts destoweniger unserer Anschauung Gegenstände darbieten, denn die Anschauung bedarf der Funktionen des Denkens auf keine Weise.
→ 그래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이 그 대상들의 내면에 선험적으로 자리하는 감성의 형식적 조건들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대상들이 본래부터 우리에게 대상들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상들이 또한 그 사이에, 지성이 사유의 종합적 통일을 위해 필요로하는 조건들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에 관하여 추론을 통찰하기란 그다지 쉽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현상들이 그러한 특성을 지닐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지성이 현상들을 지성의 통일의 조건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알아차릴 그러한 특성, 그리고 모든 것이 혼돈 속에 놓일 그러한 특성, 사물들의 질서 안에서 그 자체로 종합의 규칙을 주고 그러므로 인과의 개념에 상응하는 그러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을 그러한 특성, 그래서 이러한 개념이 그러므로 전적으로 공허하고 헛되며 무의미할 그러한 특성 말이다.→ 현상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직관에 대상들을 제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관은 어떤 방식으로도 사유의 기능들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Gedächte man sich von der Mühsamkeit dieser Untersuchungen dadurch loszuwickeln, daß man sagte: Die Erfahrung böte unablässig Beispiele einer solchen Regelmäßigkeit der Erscheinungen dar, die genugsam Anlaß geben, den Begriff der Ursache davon abzusondern, und dadurch zugleich die objektive Gültigkeit eines solchen Begriffs zu bewähren, so bemerkt man nicht, daß auf diese Weise der Begriff der Ursache gar nicht entspringen kann, sondern daß er entweder völlig a priori im Verstande müsse gegründet sein, oder als ein bloßes Hirngespinst gänzlich aufgegeben werden müsse.
→ 사람들은 이러한 시도들의 곤란에 대해 그를 통하여 해소하고자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말이다: 경험은 원인의 개념을 그로부터 분리해낼, 그리고 그를 통하여 동시에 그러한 개념의 객관적 정당성을 보존할 충분한 계기를 주는, 현상들의 그러한 규칙성에 대한 끊임없는 예시들을 내놓는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으로는 원인의 개념이 결코 생길 수 없고, 오히려 그 개념은 지성 안에서 완전히 선험적으로 기초되든지, 혹은 순전한 망상으로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Denn daß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denen im Gemüt a priori liegenden formalen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gemäß sein müssen, ist daraus klar, weil sie sonst nicht Gegenstände für uns sein würden; daß sie aber auch überdem den Bedingungen, deren der Verstand zur synthetischen Einheit des Denkens bedarf, gemäß sein müssen, davon ist die Schlußfolge nicht so leicht einzusehen.
그래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이 그 대상들의 내면에 선험적으로 자리하는 감성의 형식적 조건들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대상들이 본래부터 우리에게 대상들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상들이 또한 그 사이에 조건들에, 지성이 사유의 종합적 통일을 위해 필요로하는, 따라야만 한다는 것, 그것에 관해 추론이 통찰하기 그다지 쉽지 않다.
→ 그래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이 그 대상들의 내면에 선험적으로 자리하는 감성의 형식적 조건들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대상들이 본래부터 우리에게 대상들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상들이 또한 그 사이에, 지성이 사유의 종합적 통일을 위해 필요로하는 조건들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에 관하여 추론을 통찰하기란 그다지 쉽지 않다.
Denn es könnten wohl allenfalls Erscheinungen so beschaffen sein, daß der Verstand sie den Bedingungen seiner Einheit gar nicht gemäß fände, und alles so in Verwirrung läge, daß z.B. in der Reihenfolge der Erscheinungen sich nichts darböte, was eine Regel der Synthesis an die Hand gäbe, und also dem Begriffe der Ursache und Wirkung entspräche, so daß dieser Begriff also ganz leer, nichtig und ohne Bedeutung wäre.
그래서 어쩌면 현상들이 그러한 특성을 지닐는지 모른다, 지성이 현상들을 지성의 통일의 조건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알아차릴, 그리고 모든 것은 혼돈 속에 놓일, 사물들의 질서 안에서 그 자체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을, 종합의 규칙을 손에 쥔, 그리고 그러므로 인과의 개념에 상응하는, 그래서 이러한 개념이 그러므로 전적으로 공허하고 헛되며 무의미할.
→ 그래서 어쩌면 현상들이 그러한 특성을 지닐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지성이 현상들을 지성의 통일의 조건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알아차릴 그러한 특성, 그리고 모든 것이 혼돈 속에 놓일 그러한 특성, 사물들의 질서 안에서 그 자체로 종합의 규칙을 주고 그러므로 인과의 개념에 상응하는 그러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을 그러한 특성, 그래서 이러한 개념이 그러므로 전적으로 공허하고 헛되며 무의미할 그러한 특성 말이다.
Erscheinungen würden nichts destoweniger unserer Anschauung Gegenstände darbieten, denn die Anschauung bedarf der Funktionen des Denkens auf keine Weise.
현상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직관에 대상들을 제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관은 어떤 방식으로도 사유의 기능들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 현상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직관에 대상들을 제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관은 어떤 방식으로도 사유의 기능들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Gedächte man sich von der Mühsamkeit dieser Untersuchungen dadurch loszuwickeln, daß man sagte: Die Erfahrung böte unablässig Beispiele einer solchen Regelmäßigkeit der Erscheinungen dar, die genugsam Anlaß geben, den Begriff der Ursache davon abzusondern, und dadurch zugleich die objektive Gültigkeit eines solchen Begriffs zu bewähren, so bemerkt man nicht, daß auf diese Weise der Begriff der Ursache gar nicht entspringen kann, sondern daß er entweder völlig a priori im Verstande müsse gegründet sein, oder als ein bloßes Hirngespinst gänzlich aufgegeben werden müsse.
사람들은 이러한 시도들의 곤란에 대해 그를 통하여 해소하고자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함으로써: 경험은 현상들의 그러한 규칙성에 대한 끊임없는 예시들을 내놓는다고, 그 예시들이 충분한 계기를 주는, 원인의 개념을 그로부터 분리해낼, 그리고 그를 통하여 동시에 그러한 개념의 객관적 정당성을 보존할, 그래서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원인의 개념이 결코 생길 수 없고, 오히려 그 개념은 지성 안에서 완전히 선험적으로 기초되든지, 혹은 순전한 망상으로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 사람들은 이러한 시도들의 곤란에 대해 그를 통하여 해소하고자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말이다: 경험은 원인의 개념을 그로부터 분리해낼, 그리고 그를 통하여 동시에 그러한 개념의 객관적 정당성을 보존할 충분한 계기를 주는, 현상들의 그러한 규칙성에 대한 끊임없는 예시들을 내놓는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으로는 원인의 개념이 결코 생길 수 없고, 오히려 그 개념은 지성 안에서 완전히 선험적으로 기초되든지, 혹은 순전한 망상으로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蟲-
Er glitt wieder in seine frühere Lage zurück. »Dies frühzeitige Aufstehen«, dachte er, »macht einen ganz blödsinnig. Der Mensch muß seinen Schlaf haben. Andere Reisende leben wie Haremsfrauen. Wenn ich zum Beispiel im Laufe des Vormittags ins Gasthaus zurückgehe, um die erlangten Aufträge zu überschreiben, sitzen diese Herren erst beim Frühstück. Das sollte ich bei meinem Chef versuchen; ich würde auf der Stelle hinausfliegen. Wer weiß übrigens, ob das nicht sehr gut für mich wäre. Wenn ich mich nicht wegen meiner Eltern zurückhielte, ich hätte längst gekündigt, ich wäre vor den Chef hin getreten und hätte ihm meine Meinung von Grund des Herzens aus gesagt. Vom Pult hätte er fallen müssen! Es ist auch eine sonderbare Art, sich auf das Pult zu setzen und von der Höhe herab mit dem Angestellten zu reden, der überdies wegen der Schwerhörigkeit des Chefs ganz nahe herantreten muß. Nun, die Hoffnung ist noch nicht gänzlich aufgegeben; habe ich einmal das Geld beisammen, um die Schuld der Eltern an ihn abzuzahlen - es dürfte noch fünf bis sechs Jahre dauern - , mache ich die Sache unbedingt. Dann wird der große Schnitt gemacht. Vorläufig allerdings muß ich aufstehen, denn mein Zug fährt um fünf.«
그는 다시 그의 먼젓번 자리로 등을 밀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게," 그는 생각했다, "사람을 아주 바보 만드는구만. 사람은 잠을 자야 해. 다른 출장사원들은 규방부인들마냥 산다고. 내가 예를 들어 오전 중에 여관으로 돌아갈 때, 처리된 업무들을 보고하려고, 이 양반들은 그제서야 아침식사를 하려고 앉지. 그걸 내가 상사놈 곁에서 했다면; 나는 자리에서 내쫓겨 버렸을걸. 어쨌든 누가 알겠어, 그게 나에게 아주 좋지는 않을지. 내가 부모님들 때문에 참고 앉았지만 않으면, 난 진작에 때려 치웠을 거야, 난 상사한테 다가가 그에게 가슴 깊숙히 있던 내 주장들을 말해 버렸을 거라고. 책상 앞에서 그 놈은 굴러 떨어질 걸! 또 그건 괴팍한 방식이야, 책상 위에 앉아서 높은 데서 깔아 보면서 직원들과 말하는 거,
 
Und er sah zur Weckuhr hinüber, die auf dem Kasten tickte. »Himmlischer Vater!«, dachte er. Es war halb sieben Uhr, und die Zeiger gingen ruhig vorwärts, es war sogar halb vorüber, es näherte sich schon dreiviertel. Sollte der Wecker nicht geläutet haben? Man sah vom Bett aus, daß er auf vier Uhr richtig eingestellt war; gewiß hatte er auch geläutet. Ja, aber war es möglich, dieses möbelerschütternde Läuten ruhig zu verschlafen? Nun, ruhig hatte er ja nicht geschlafen, aber wahrscheinlich desto fester. Was aber sollte er jetzt tun? Der nächste Zug ging um sieben Uhr; um den einzuholen, hätte er sich unsinnig beeilen müssen, und die Kollektion war noch nicht eingepackt, und er selbst fühlte sich durchaus nicht besonders frisch und beweglich. Und selbst wenn er den Zug einholte, ein Donnerwetter des Chefs war nicht zu vermeiden, denn der Geschäftsdiener hatte beim Fünfuhrzug gewartet und die Meldung von seiner Versäumnis längst erstattet. Es war eine Kreatur des Chefs, ohne Rückgrat und Verstand. Wie nun, wenn er sich krank meldete? Das wäre aber äußerst peinlich und verdächtig, denn Gregor war während seines fünfjährigen Dienstes noch nicht einmal krank gewesen. Gewiß würde der Chef mit dem Krankenkassenarzt kommen, würde den Eltern wegen des faulen Sohnes Vorwürfe machen und alle Einwände durch den Hinweis auf den Krankenkassenarzt abschneiden, für den es ja überhaupt nur ganz gesunde, aber arbeitsscheue Menschen gibt. Und hätte er übrigens in diesem Falle so ganz unrecht? Gregor fühlte sich tatsächlich, abgesehen von einer nach dem langen Schlaf wirklich überflüssigen Schläfrigkeit, ganz wohl und hatte sogar einen besonders kräftigen Hunger.

 
Als er dies alles in größter Eile überlegte, ohne sich entschließen zu können, das Bett zu verlassen - gerade schlug der Wecker dreiviertel sieben - klopfte es vorsichtig an die Tür am Kopfende seines Bettes.


-작성중-
Die Kategorien des Verstandes dagegen stellen uns gar nicht die Bedingungen vor, unter denen Gegenstände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mithin können uns allerdings Gegenstände erscheinen, ohne daß sie sich notwendig auf Funktionen des Verstandes beziehen müssen, und dieser also die Bedingungen derselben a priori enthielte. Daher zeigt sich hier eine Schwierigkeit, die wir im Felde der Sinnlichkeit nicht antrafen, wie nämlich subjektive Bedingungen des Denkens sollten objektive Gültigkeit haben, d.i.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aller Erkenntnis der Gegenstände abgeben: denn ohne Funktionen des Verstandes können allerdings Erscheinungen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Ich nehme z.B. den Begriff der Ursache, welcher eine besondere Art der Synthesis bedeutet, da auf etwas A was ganz Verschiedenes B nach einer Regel gesetzt wird. Es ist a priori nicht klar, warum Erscheinungen etwas dergleichen enthalten sollten, (denn Erfahrungen kann man nicht zum Beweise anführen, weil die objektive Gültigkeit dieses Begriffs a priori muß dargetan werden können,) und es ist daher a priori zweifelhaft, ob ein solcher Begriff nicht etwa gar leer sei und überall unter den Erscheinungen keinen Gegenstand antreffe.
→ 반면에 지성의 범주들은 우리에게 그 아래에서 대상들이 직관에 주어지는 조건들을 전혀 표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대상들은 물론, 그 대상들이 지성 기능들에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함이 없이, 그리고 그러므로 이러한 지성이 그 대상들의 조건들을 선험적으로 포함함이 없이, 우리에게 대상들로 현상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여기에 우리가 감성의 영역에서 마주치지 않았던 곤란이 생긴다. 즉 어떻게 사유의 주관적 조건들이 객관적 타당성을 지닐 것인지, 다시 말해 대상들의 모든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내놓을 것인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들은 물론 지성의 기능들 없이 직관 안에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를 들어 원인의 개념을 취한다. 그 개념은 종합의 특수한 종류를 의미하는데, 어떤 A에 대해 전적으로 상이한 B가 규칙에 따라 놓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현상들이 그와 같은 어떤 것들을 포함해야 하는지는 선험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은경험들을 논증할 수 없으니까.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의 객관적 정당성은 선험적으로 입증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이유에서 선험적으로 의심스럽다. 그러한 개념이 어떤 공허한 것은 아닐지, 그리고 현상들 아래에서 언제나 어떠한 대상도 마주치지 않는 것은 아닌지.


Die Kategorien des Verstandes dagegen stellen uns gar nicht die Bedingungen vor, unter denen Gegenstände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mithin können uns allerdings Gegenstände erscheinen, ohne daß sie sich notwendig auf Funktionen des Verstandes beziehen müssen, und dieser also die Bedingungen derselben a priori enthielte.
지성의 범주들은 반면에 우리에게 전혀 조건들을 표상하지 않는다, 그 조건들 아래에서 대상들이 직관에 주어지는, 따라서 당연히 그 대상들이 우리에게 대상들로 현상할 수 있다, 그 대상들이 지성 기능들에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함이 없이, 그리고 그러므로 이러한 지성이 그 대상들의 조건들을 선험적으로 포함함이 없이.
→ 반면에 지성의 범주들은 우리에게 그 아래에서 대상들이 직관에 주어지는 조건들을 전혀 표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대상들은 물론, 그 대상들이 지성 기능들에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함이 없이, 그리고 그러므로 이러한 지성이 그 대상들의 조건들을 선험적으로 포함함이 없이, 우리에게 대상들로 현상할 수 있다.
Daher zeigt sich hier eine Schwierigkeit, die wir im Felde der Sinnlichkeit nicht antrafen, wie nämlich subjektive Bedingungen des Denkens sollten objektive Gültigkeit haben, d.i.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aller Erkenntnis der Gegenstände abgeben: denn ohne Funktionen des Verstandes können allerdings Erscheinungen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그런 이유에서 여기에 곤란이 생긴다, 그 곤란을 우리가 감성의 영역에서 마주치지 않았던, 즉 어떻게 사유의 주 관적 조건들이 객관적 타당성을 지닐 것인지, 다시 말해 대상들의 모든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내놓을 것인지: 왜냐하면 지성의 기능들 없이 당연히 현상들은 직관 안에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 이유에서 여기에 우리가 감성의 영역에서 마주치지 않았던 곤란이 생긴다. 즉 어떻게 사유의 주관적 조건들이 객관적 타당성을 지닐 것인지, 다시 말해 대상들의 모든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내놓을 것인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들은 물론 지성의 기능들 없이 직관 안에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Ich nehme z.B. den Begriff der Ursache, welcher eine besondere Art der Synthesis bedeutet, da auf etwas A was ganz Verschiedenes B nach einer Regel gesetzt wird.
나는 예를 들어 원인의 개념을 취한다, 그 개념이 종합의 특수한 종류를 의미하는, 어떤 A에 대해 전적으로 상이한 B가 규칙에 따라 놓이므로.
→ 나는 예를 들어 원인의 개념을 취한다. 그 개념은 종합의 특수한 종류를 의미하는데, 어떤 A에 대해 전적으로 상이한 B가 규칙에 따라 놓이기 때문이다.
Es ist a priori nicht klar, warum Erscheinungen etwas dergleichen enthalten sollten, (denn Erfahrungen kann man nicht zum Beweise anführen, weil die objektive Gültigkeit dieses Begriffs a priori muß dargetan werden können,) und es ist daher a priori zweifelhaft, ob ein solcher Begriff nicht etwa gar leer sei und überall unter den Erscheinungen keinen Gegenstand antreffe.
그것은 선험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어째서 현상들이 그와 같은 어떤 것들을 포함해야 하는지, (왜냐하면 경험들을 사람들은 논증할 수 없으니까,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의 객관적 정당성은 선험적으로 입증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그런 이유에서 선험적으로 의심스럽다, 그러한 개념이 전혀 공허하지 않고 현상들 아래에서 언제나 어떠한 대상도 마주치지 않는지.
→ 어째서 현상들이 그와 같은 어떤 것들을 포함해야 하는지는 선험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은경험들을 논증할 수 없으니까.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의 객관적 정당성은 선험적으로 입증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이유에서 선험적으로 의심스럽다. 그러한 개념이 어떤 공허한 것은 아닐지, 그리고 현상들 아래에서 언제나 어떠한 대상도 마주치지 않는 것은 아닌지.

-蟲-
Als Gregor Samsa eines Morgens aus unruhigen Träumen erwachte, fand er sich in seinem Bett zu einem ungeheueren Ungeziefer verwandelt. Er lag auf seinem panzerartig harten Rücken und sah, wenn er den Kopf ein wenig hob, seinen gewölbten, braunen, von bogenförmigen Versteifungen geteilten Bauch, auf dessen Höhe sich die Bettdecke, zum gänzlichen Niedergleiten bereit, kaum noch erhalten konnte. Seine vielen, im Vergleich zu seinem sonstigen Umfang kläglich dünnen Beine flimmerten ihm hilflos vor den Augen.
아침에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그의 침대에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껍질처럼 단단한 등으로 누워 있었고, 그가 머리를 조금 가누려 했을 때, 그는 그의 둥글고, 갈색에, 아치모양의 각질들로 나뉜 배를 보았다, 배 위에서 이불은, 이미 완전히 아래로 흘러 내려서, 거의 제구실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많은, 그의 다른 부위에 비해 보잘 것 없이 가는 다리들이 그의 눈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버둥거렸다.

»Was ist mit mir geschehen?«, dachte er. Es war kein Traum. Sein Zimmer, ein richtiges, nur etwas zu kleines Menschenzimmer, lag ruhig zwischen den vier wohlbekannten Wänden. Über dem Tisch, auf dem eine auseinandergepackte Musterkollektion von Tuchwaren ausgebreitet war - Samsa war Reisender - hing das Bild, das er vor kurzem aus einer illustrierten Zeitschrift ausgeschnitten und in einem hübschen, vergoldeten Rahmen untergebracht hatte. Es stellte eine Dame dar, die mit einem Pelzhut und einer Pelzboa versehen, aufrecht dasaß und einen schweren Pelzmuff, in dem ihr ganzer Unterarm verschwunden war, dem Beschauer entgegenhob.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정돈된, 단지 사내 방이라기엔 약간 작은 그의 방은, 익숙한 네 개의 벽들 사이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직물들의 분철된 견본묶음이 펼쳐져 있었고 - 잠자는 출장직원이었다 -  그 책상 너머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그림을 얼마 전 삽화가 든 잡지에서 오려내서 멋진, 금테 액자 안에 넣었다. 한 여인을 그린 것이었는데, 그 여인은 털모자를 쓰고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고, 똑바로 앉아있었다 묵직한 털 머프를, 그 머프 안에 그녀의 팔 전체가 감추어진, 감상자에게 마주대 놓고 있었다.
 
Gregors Blick richtete sich dann zum Fenster, und das trübe Wetter - man hörte Regentropfen auf das Fensterblech aufschlagen - machte ihn ganz melancholisch. »Wie wäre es, wenn ich noch ein wenig weiterschliefe und alle Narrheiten vergäße«, dachte er, aber das war gänzlich undurchführbar, denn er war gewöhnt, auf der rechten Seite zu schlafen, konnte sich aber in seinem gegenwärtigen Zustand nicht in diese Lage bringen. Mit welcher Kraft er sich auch auf die rechte Seite warf, immer wieder schaukelte er in die Rückenlage zurück. Er versuchte es wohl hundertmal, schloß die Augen, um die zappelnden Beine nicht sehen zu müssen, und ließ erst ab, als er in der Seite einen noch nie gefühlten, leichten, dumpfen Schmerz zu fühlen begann.
그 후 그레고르의 시선은 창을 향했고, 흐린 날씨는 - 사내는 빗방울들이 양철창문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 그를 완전히 우울하게 만들었다. "어떨까, 만일 내가 조금도 더 자고 모든 우스꽝스러운 것들을 잊어 버린다면", 그는 생각했으나, 그것은 전혀 실현불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자는 데에, 그러나 지금 위치에서 이런 자세로 옮길 수는 없었다. 그가 오른쪽으로 몸을 던질 그러한 힘으로, 거듭해서 그는 드러누워 등을 흔들었다. 그는 그 짓거리를 족히 백번은 시도했고, 눈을 감아 버렸다, 허우적거리는 다리들을 보지 않아야만 하겠기에, 그리고 비로소 단념했다, 그가 옆구리에 아직 한 번도 느껴지지 않았던, 경미하고 어렴풋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Ach Gott«, dachte er, »was für einen anstrengenden Beruf habe ich gewählt! Tag aus, Tag ein auf der Reise. Die geschäftlichen Aufregungen sind viel größer, als im eigentlichen Geschäft zu Hause, und außerdem ist mir noch diese Plage des Reisens auferlegt, die Sorgen um die Zuganschlüsse, das unregelmäßige, schlechte Essen, ein immer wechselnder, nie andauernder, nie herzlich werdender menschlicher Verkehr. Der Teufel soll das alles holen!« Er fühlte ein leichtes Jucken oben auf dem Bauch; schob sich auf dem Rücken langsam näher zum Bettpfosten, um den Kopf besser heben zu können; fand die juckende Stelle, die mit lauter kleinen weißen Pünktchen besetzt war, die er nicht zu beurteilen verstand; und wollte mit einem Bein die Stelle betasten, zog es aber gleich zurück, denn bei der Berührung umwehten ihn Kälteschauer.
"제기랄", 그는 생각했다, "나는 어째서 고된 직업을 택한 거지! 낮이나 밤이나 날이면 날마다 출장중이지. 사무실에서 원래 할 일보다 업무적인 소란들이 훨씬 더 크고, 뿐만 아니라 나에겐 또 출장의 이러한 괴로움도 얹어지고, 열차시간에 대한 염려, 불규칙적이고 저급한 식사, 언제나 뒤바뀌고, 한 번도 지속되지 않고, 여태까지 진심으로 인간적으로 된 일 없는 왕래. 그건 전부 악마가 가져왔을 거다!" 그는 배 위에 약간의 가려움을 느꼈다; 침대 다리맡으로 더 가까이 천천히 등으로 자신을 밀어냈다, 머리를 좀 더 잘 가눠 보려고; 가려운 자리를 발견했고, 그 자리가 작고 흰 반점들만으로 뒤덮힌, 그가 뭔지 모를; 그리고 한쪽 발로 그 자리를 건드리려 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되돌렸다, 왜냐하면 닿음과 동시에 그에게 오한이 들었기 때문이다.

-蟲-
So muß denn der Leser von der unumgänglichen Notwendigkeit einer solchen transzendentalen Deduktion, ehe er einen einzigen Schritt im Felde der reinen Vernunft getan hat, überzeugt werden; weil er sonst blind verfährt, und, nachdem er mannigfaltig umher geirrt hat, doch wieder zu der Unwissenheit zurückkehren muß, von der er ausgegangen war. Er muß aber auch die unvermeidliche Schwierigkeit zum voraus deutlich einsehen, damit er nicht über Dunkelheit klage, wo die Sache selbst tief eingehüllt ist, oder über die Wegräumung der Hindernisse zu früh verdrossen werde, weil es darauf ankommt, entweder alle Ansprüche zu Einsichten der reinen Vernunft, als das beliebteste Feld, nämlich dasjenige über die Grenzen aller möglichen Erfahrung hinaus, völlig aufzugeben, oder diese kritische Untersuchung zur Vollkommenheit zu bringen.
→ 그래서 참으로 독자는 그러한 초월론적 연역의 불가피한 필연성에 대해 그가 순수 이성의 분야에 독보적인 걸음을 내딛기 전에 납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는 맹목적으로 행동했고, 그리고, 그 후 그는 여러모로 방황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그가 출발하였던 바로 그 무지로 되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 사태 자체가 깊숙히 감추어진 암담함에 탄식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때 이르게 거슬리는 장애물의 제거에 대해 낙담하지 않음으로써, 우선 먼저 불가피한 난관을 분명하게 통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가장 호평받는 분야로서, 즉 모든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완전하게 내놓는 것으로서, 순수 이성의 통찰에 대한 모든 주장들이나, 아니면 이러한 비판적 연구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Wir haben oben an den Begriffen des Raumes und der Zeit mit leichter Mühe begreiflich machen können, wie diese als Erkenntnisse a priori sich gleichwohl auf Gegenstände notwendig beziehen müssen, und eine synthetische Erkenntnis derselben,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möglich macheten. Denn da nur vermittelst solcher reinen Formen der Sinnlichkeit uns ein Gegenstand erscheinen, d.i. ein Objekt der empirischen Anschauung sein kann, so sind Raum und Zeit reine Anschauungen, welche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Gegenstände als Erscheinungen a priori enthalten, und die Synthesis in denselben hat objektive Gültigkeit.
→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 개념들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선험적 인식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들에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지 작은 수고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종합적 인식을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단지 감성의 그러한 순수 형식들에 따라서만 우리에게 대상이 현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에 따라서만 대상이 감각적 직관의 객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시간은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의 가능성의 조건을 선험적으로 포함하는 순수 직관들이다. 그리고 종합은 그 직관들 안에서 객관적 정당성을 갖는다.



So muß denn der Leser von der unumgänglichen Notwendigkeit einer solchen transzendentalen Deduktion, ehe er einen einzigen Schritt im Felde der reinen Vernunft getan hat, überzeugt werden; weil er sonst blind verfährt, und, nachdem er mannigfaltig umher geirrt hat, doch wieder zu der Unwissenheit zurückkehren muß, von der er ausgegangen war.
그래서 참으로 독자는 그러한 초월론적 연역의 불가피한 필연성에 대해, 그가 순수 이성의 분야에 독보적인 걸음을 내딛기 전에, 납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는 맹목적으로 행동했고, 그리고, 그 후 그는 여러모로 방황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무지로 되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에, 그 무지로부터 그가 출발하였던.
→ 그래서 참으로 독자는 그러한 초월론적 연역의 불가피한 필연성에 대해 그가 순수 이성의 분야에 독보적인 걸음을 내딛기 전에 납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는 맹목적으로 행동했고, 그리고, 그 후 그는 여러모로 방황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그가 출발하였던 바로 그 무지로 되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Er muß aber auch die unvermeidliche Schwierigkeit zum voraus deutlich einsehen, damit er nicht über Dunkelheit klage, wo die Sache selbst tief eingehüllt ist, oder über die Wegräumung der Hindernisse zu früh verdrossen werde, weil es darauf ankommt, entweder alle Ansprüche zu Einsichten der reinen Vernunft, als das beliebteste Feld, nämlich dasjenige über die Grenzen aller möglichen Erfahrung hinaus, völlig aufzugeben, oder diese kritische Untersuchung zur Vollkommenheit zu bringen.
그러나 그는 또한 불가피한 난관을 앞서서 분명하게 통찰해야만 한다, 그가 암담함에 탄식하지 않음으로써, 거기에 그 사태 자체가 깊숙히 감추어진, 혹은 때 이르게 거슬리는 장애물의 제거에 대해, 왜냐하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순수 이성의 통찰에 대한 모든 주장들이거나, 가장 호평받는 분야로서, 즉 이것이 모든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완전하게 내놓는 것으로서, 아니면 이러한 비판적 연구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 그러나 그는 또한 그 사태 자체가 깊숙히 감추어진 암담함에 탄식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때 이르게 거슬리는 장애물의 제거에 대해 낙담하지 않음으로써, 우선 먼저 불가피한 난관을 분명하게 통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가장 호평받는 분야로서, 즉 모든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완전하게 내놓는 것으로서, 순수 이성의 통찰에 대한 모든 주장들이나, 아니면 이러한 비판적 연구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Wir haben oben an den Begriffen des Raumes und der Zeit mit leichter Mühe begreiflich machen können, wie diese als Erkenntnisse a priori sich gleichwohl auf Gegenstände notwendig beziehen müssen, und eine synthetische Erkenntnis derselben,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möglich macheten.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 개념들을 작은 수고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선험적 인식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들에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종합적 인식을,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 개념들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선험적 인식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들에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지 작은 수고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종합적 인식을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Denn da nur vermittelst solcher reinen Formen der Sinnlichkeit uns ein Gegenstand erscheinen, d.i. ein Objekt der empirischen Anschauung sein kann, so sind Raum und Zeit reine Anschauungen, welche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Gegenstände als Erscheinungen a priori enthalten, und die Synthesis in denselben hat objektive Gültigkeit.
왜냐하면 단지 감성의 그러한 순수 형식들에 따라서만 우리에게 대상이 현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각적 직관의 객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시간은 순수 직관들이다, 현상들로서 대상들의 가능성의 조건을 선험적으로 포함하는, 그리고 종합은 그 직관들 안에서 객관적 정당성을 갖는다.
→ 왜냐하면 단지 감성의 그러한 순수 형식들에 따라서만 우리에게 대상이 현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에 따라서만 대상이 감각적 직관의 객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시간은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의 가능성의 조건을 선험적으로 포함하는 순수 직관들이다. 그리고 종합은 그 직관들 안에서 객관적 정당성을 갖는다.

-蟲-
Gleichwohl geht die Geometrie ihren sichern Schritt durch lauter Erkenntnisse a priori, ohne daß sie sich, wegen der reinen und gesetzmäßigen Abkunft ihres Grundbegriffs vom Raume, von der Philosophie einen Beglaubigungsschein erbitten darf. Allein der Gebrauch des Begriffs geht in dieser Wissenschaft auch nur auf die äußere Sinnenwelt, von welcher der Raum die reine Form ihrer Anschauung ist, in welcher also alle geometrische Erkenntnis, weil sie sich auf Anschauung a priori gründet, unmittelbare Evidenz hat, und die Gegenstände durch die Erkenntnis selbst, a priori (der Form nach)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Dagegen fängt mit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die unumgängliche Bedürfnis an, nicht allein von ihnen selbst, sondern auch vom Raum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zu suchen, weil, da sie von Gegenständen nicht durch Prädikate der Anschauung und der Sinnlichkeit, sondern des reinen Denkens a priori redet, sie sich auf Gegenstände ohne alle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allgemein beziehen, und die, da sie nicht auf Erfahrung gegründet sind, auch in der Anschauung a priori kein Objekt vorzeigen können, worauf sie vor aller Erfahrung ihre Synthesis gründeten, und daher nicht allein wegen der objektiven Gültigkeit und Schranken ihres Gebrauchs Verdacht erregen, sondern auch jenen Begriff des Raumes zweideutig machen, dadurch, daß sie ihn über die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zu gebrauchen geneigt sind, weshalb auch oben von ihm eine transzendentale Deduktion von nöten war.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은 기하학 스스로, 그 기하학의 공간에 대한 근본개념의 순수하고 정당한 출신으로 말미암아, 철학으로부터 증명서를 청구할 필요 없이 순수한 선험적 인식들을 통하여 그 학문의 안전한 길을 간다.→ 오로지  개념 사용만이 이러한 학문 안에서 또한 단지 그 외부 감각세계로 나아간다. 그러한 감각세계에 대해 공간이 그 감각세계의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고, 그 감각세계 안에서 그러므로 모든 기하학적 인식이, 그 인식 자체가 선험적으로 직관에 근거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거를 지니고, 대상들이 인식 자체를 통해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형식에 따라) 주어진다.→ 반면에 순수 지성개념들과 함께 오로지 그 개념들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공간에 대한 초월론적 연역도 시도해야 하는 불가피한 필요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 그 순수 지성개념들이 직관과 감성의 술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 사유의 술어들을 통하여 선험적으로 진술하므로, 그 순수 지성개념들 자체가 대상들에 감성의 모든 조건들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념들이 경험에 근거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그로부터 그 개념들이 모든 경험에 대해 그 개념들의 종합을 근거짓는 어떠한 객체도 제시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오로지 그 개념들의 객관적 정당성과 사용의 한계들에만 말미암아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를 통하여 그 개념들이 공간에 감각적 직관의 조건들을 뛰어넘어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 때문에 또한 위에서 공간에 대해 초월론적 연역이 필요했던 공간의 이러한 개념으로 말미암아 애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Gleichwohl geht die Geometrie ihren sichern Schritt durch lauter Erkenntnisse a priori, ohne daß sie sich, wegen der reinen und gesetzmäßigen Abkunft ihres Grundbegriffs vom Raume, von der Philosophie einen Beglaubigungsschein erbitten darf.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은 그 안전한 길을 순수한 선험적 인식들을 통하여 간다, 기하학 스스로, 그 기하학의 공간에 대한 근본개념의 순수하고 정당한 출신으로 말미암아, 철학으로부터 증명서를 청구할 필요 없이.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은 기하학 스스로, 그 기하학의 공간에 대한 근본개념의 순수하고 정당한 출신으로 말미암아, 철학으로부터 증명서를 청구할 필요 없이 순수한 선험적 인식들을 통하여 그 학문의 안전한 길을 간다.
Allein der Gebrauch des Begriffs geht in dieser Wissenschaft auch nur auf die äußere Sinnenwelt, von welcher der Raum die reine Form ihrer Anschauung ist, in welcher also alle geometrische Erkenntnis, weil sie sich auf Anschauung a priori gründet, unmittelbare Evidenz hat, und die Gegenstände durch die Erkenntnis selbst, a priori (der Form nach)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오로지 개념 사용만이 이러한 학문 안에서 또한 단지 그 외부 감각세계에 간다, 그러한 감각세계에 대해 공간이 그 감각세계의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고, 그 감각세계 안에서 그러므로 모든 기하학적 인식이, 왜냐하면 그 인식 자체가 선험적으로 직관에 근거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거를 지니고, 대상들이 인식 자체를 통해, 선험적으로 (형식에 따라) 직관 안에서, 주어진다.
→ 오로지  개념 사용만이 이러한 학문 안에서 또한 단지 그 외부 감각세계로 나아간다. 그러한 감각세계에 대해 공간이 그 감각세계의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고, 그 감각세계 안에서 그러므로 모든 기하학적 인식이, 그 인식 자체가 선험적으로 직관에 근거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거를 지니고, 대상들이 인식 자체를 통해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형식에 따라) 주어진다.
Dagegen fängt mit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die unumgängliche Bedürfnis an, nicht allein von ihnen selbst, sondern auch vom Raum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zu suchen, weil, da sie von Gegenständen nicht durch Prädikate der Anschauung und der Sinnlichkeit, sondern des reinen Denkens a priori redet, sie sich auf Gegenstände ohne alle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allgemein beziehen, und die, da sie nicht auf Erfahrung gegründet sind, auch in der Anschauung a priori kein Objekt vorzeigen können, worauf sie vor aller Erfahrung ihre Synthesis gründeten, und daher nicht allein wegen der objektiven Gültigkeit und Schranken ihres Gebrauchs Verdacht erregen, sondern auch jenen Begriff des Raumes zweideutig machen, dadurch, daß sie ihn über die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zu gebrauchen geneigt sind, weshalb auch oben von ihm eine transzendentale Deduktion von Nöten war.
반면에 순수 지성개념들과 함께 불가피한 필요가 발생한다, 오로지 그 개념들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공간에 대한 초월론적 연역도 시도해야 하는,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 그 순수 지성개념들이 직관과 감성의 술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 사유의 술어들을 통하여 선험적으로 진술하므로, 그 순수 지성개념들 자체가 대상들에 감성의 모든 조건들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고, 그 개념들이, 그 개념들이 경험에 근거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어떠한 객체도 제시할 수 없고, 그로부터 그 개념들이 모든 경험에 대해 그 개념들의 종합을 근거짓고, 그런 이유로 오로지 그것의 객관적 정당성과 사용의 한계들에만 말미암아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또한 공간의 이러한 개념으로 말미암아 애매하게 만들고, 그를 통하여, 그 개념들이 공간에 감각적 직관의 조건들에 대해 사용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그 때문에 또한 위에서 공간에 대해 초월론적 연역이 필요했다.
→ 반면에 순수 지성개념들과 함께 오로지 그 개념들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공간에 대한 초월론적 연역도 시도해야 하는 불가피한 필요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 그 순수 지성개념들이 직관과 감성의 술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 사유의 술어들을 통하여 선험적으로 진술하므로, 그 순수 지성개념들 자체가 대상들에 감성의 모든 조건들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념들이 경험에 근거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그로부터 그 개념들이 모든 경험에 대해 그 개념들의 종합을 근거짓는 어떠한 객체도 제시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오로지 그 개념들의 객관적 정당성과 사용의 한계들에만 말미암아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를 통하여 그 개념들이 공간에 감각적 직관의 조건들을 뛰어넘어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 때문에 또한 위에서 공간에 대해 초월론적 연역이 필요했던 공간의 이러한 개념으로 말미암아 애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蟲-
Allein eine Deduktion der reinen Begriffe a priori kommt dadurch niemals zu Stande, denn sie liegt ganz und gar nicht auf diesem Wege, weil in Ansehung ihres künftigen Gebrauchs, der von der Erfahrung gänzlich unabhängig sein soll, sie einen ganz andern Geburtsbrief, als den der Abstammung von Erfahrungen, müssen aufzuzeigen haben. Diese versuchte physiologische Ableitung, die eigentlich gar nicht Deduktion heißen kann, weil sie eine quaestionem facti betrifft, will ich daher die Erklärung des Besitzes einer reinen Erkenntnis nennen. Es ist also klar, daß von diesen allein es eine transzendentale Deduktion und keinesweges eine empirische geben könne, und daß letztere, in Ansehung der reinen Begriffe a priori, nichts als eitele Versuche sind, womit sich nur derjenige beschäftigen kann, welcher die ganz eigentümliche Natur dieser Erkenntnisse nicht begriffen hat.
→ 오로지 선험적인 순수 개념들의 연역만이 그를 통하여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연역은 전혀 이러한 방식으로 놓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에 대해 전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는 그 방식의 장래의 사용의 고려 속에서, 그 경험은 경험으로부터의 혈통의 출생증명서와는 전혀 다른 출생증명서를 제시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된 생리학적 추론, 그것은 원래 전혀 연역이라 부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추론이 사실의 연구들에 관계되기 때문이고, 나는 그런 이유로 순수 인식의 점유의 해명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는 오직 초월론적 연역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경험적 연역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순수한 선험적 개념들의 고려 속에서, 그로써 그저 이러한 인식들의 전적으로 독특한 본성을 파악할 수 없었던 이러한 사람만이 몰두할 수 있을 뿐인 공허한 시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Ob nun aber gleich die einzige Art einer möglichen Deduktion der reinen Erkenntnis a priori, nämlich die auf dem transzendentalen Wege eingeräumet wird, so erhellet dadurch doch eben nicht, daß sie so unumgänglich notwendig sei. Wir haben oben die Begriffe des Raumes und der Zeit, vermittelst einer transzendentalen Deduktion zu ihren Quellen verfolgt, und ihre objektive Gültigkeit a priori erklärt und bestimmt.
→ 이제 그러나 비록 순수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한 연역의 유일한 방식, 즉 초월론적 방법으로의 연역이 용인된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를 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이 그래서 불가피하게 필연적이리라는 것이 규명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을 가지고 있고, 초월론적 연역에 따라서 그 개념들의 기원을 추적하였고, 그 개념들의 객관적 정당성을 선험적으로 해명하고 규정하였다.


Allein eine Deduktion der reinen Begriffe a priori kommt dadurch niemals zu Stande, denn sie liegt ganz und gar nicht auf diesem Wege, weil in Ansehung ihres künftigen Gebrauchs, der von der Erfahrung gänzlich unabhängig sein soll, sie einen ganz andern Geburtsbrief, als den der Abstammung von Erfahrungen, müssen aufzuzeigen haben.
오로지 선험적인 순수 개념들의 연역만이 그를 통하여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연역은 전혀 이러한 방식으로 놓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방식의 장래의 사용의 고려 속에서, 그 사용이 경험에 대해 전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전혀 다른 출생증명서를, 경험으로부터의 혈통의 출생증명서와, 제시해야 할 수밖에 없는.
→ 오로지 선험적인 순수 개념들의 연역만이 그를 통하여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연역은 전혀 이러한 방식으로 놓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에 대해 전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는 그 방식의 장래의 사용의 고려 속에서, 그 경험은 경험으로부터의 혈통의 출생증명서와는 전혀 다른 출생증명서를 제시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Diese versuchte physiologische Ableitung, die eigentlich gar nicht Deduktion heißen kann, weil sie eine quaestionem facti betrifft, will ich daher die Erklärung des Besitzes einer reinen Erkenntnis nennen.
이러한 시도된 생리학적 추론, 그것은 원래 전혀 연역이라 부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추론이 사실의 연구들에 관계되기 때문이고, 나는 그런 이유로 순수 인식의 점유의 해명이라 부르고자 한다.
→ 이러한 시도된 생리학적 추론, 그것은 원래 전혀 연역이라 부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추론이 사실의 연구들에 관계되기 때문이고, 나는 그런 이유로 순수 인식의 점유의 해명이라 부르고자 한다.
Es ist also klar, daß von diesen allein es eine transzendentale Deduktion und keinesweges eine empirische geben könne, und daß letztere, in Ansehung der reinen Begriffe a priori, nichts als eitele Versuche sind, womit sich nur derjenige beschäftigen kann, welcher die ganz eigentümliche Natur dieser Erkenntnisse nicht begriffen hat.
그러므로 분명하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 오로지 초월론적 연역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경험적 연역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순수한 선험적 개념들의 고려 속에서, 공허한 시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로써 그저 이러한 사람만이 몰두할 수 있을 뿐인, 이러한 인식들의 전적으로 독특한 본성을 파악할 수 없었던.
→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는 오직 초월론적 연역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경험적 연역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순수한 선험적 개념들의 고려 속에서, 그로써 그저 이러한 인식들의 전적으로 독특한 본성을 파악할 수 없었던 이러한 사람만이 몰두할 수 있을 뿐인 공허한 시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Ob nun aber gleich die einzige Art einer möglichen Deduktion der reinen Erkenntnis a priori, nämlich die auf dem transzendentalen Wege eingeräumet wird, so erhellet dadurch doch eben nicht, daß sie so unumgänglich notwendig sei.
이제 그러나 비록 순수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한 연역의 유일한 방식, 즉 초월론적 방법으로의 연역이 용인된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를 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명되지는 않는다, 그 방식이 그래서 불가피하게 필연적이리라는 것이.
→ 이제 그러나 비록 순수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한 연역의 유일한 방식, 즉 초월론적 방법으로의 연역이 용인된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를 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이 그래서 불가피하게 필연적이리라는 것이 규명되지는 않는다.
Wir haben oben die Begriffe des Raumes und der Zeit, vermittelst einer transzendentalen Deduktion zu ihren Quellen verfolgt, und ihre objektive Gültigkeit a priori erklärt und bestimmt.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을 가지고 있고, 초월론적 연역에 따라서 그 개념들의 기원을 추적하였고, 그 개념들의 객관적 정당성을 선험적으로 해명하고 규정하였다.
→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을 가지고 있고, 초월론적 연역에 따라서 그 개념들의 기원을 추적하였고, 그 개념들의 객관적 정당성을 선험적으로 해명하고 규정하였다.

-蟲-
  Ich habe elf Söhne.
  나에게는 열 한 명의 아들들이 있다.

  Der erste ist äußerlich sehr unansehnlich, aber ernsthaft und klug; trotzdem schätze ich ihn, wiewohl ich ihn als Kind wie alle andern liebe, nicht sehr hoch ein. Sein Denken scheint mir zu einfach. Er sieht nicht rechts noch links und nicht in die Weite; in seinem kleinen Gedankenkreis läuft er immerfort rundum oder dreht sich vielmehr.
첫째는 겉보기엔 꽤나 볼품없지만 진지하고 똑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아이를, 비록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사랑하긴 하지만, 높이 쳐주진 않는다. 내게는 그 아이의 생각이 단순해 보인다. 그 아이는 좌우를 살피지도 않고 폭넓지도 보지도 않는다. 녀석은 자신의 작은 생각의 범위 안에서 둘레를 맴돌거나 되려 되돌아 온다.

  Der zweite ist schön, schlank, wohlgebaut; es entzückt, ihn in Fechterstellung zu sehen. Auch er ist klug, aber überdies welterfahren; er hat viel gesehen, und deshalb scheint selbst die heimische Natur vertrauter mit ihm zu sprechen als mit den Daheimgebliebenen.
둘째는 멋지고, 날씬하고, 잘생겼다. 그 아이를 마주 보는 건 아주 매혹적인 일이다. 또한 그 아이는 영리할 뿐 아니라 세상 물정에 밝기까지 하다. 그 아이는 많은 것을 보았으며, 그래서 자신만만해 보인다 그와 고국의 자연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고국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Doch ist gewiß dieser Vorzug nicht nur und nicht einmal wesentlich dem Reisen zu verdanken, er gehört vielmehr zu dem Unnachahmlichen dieses Kindes, das zum Beispiel von jedem anerkannt wird, der etwa seinen vielfach sich überschlagenden und doch geradezu wild beherrschten Kunstsprung ins Wasser ihm nachmachen will.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장점이 오직 여행 덕분인 것만이 아니고 본질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건 확실하고, 그 장점은 오히려 그 아이만의 독특한 특징에 속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두에게 인정받는다, 공중제비를 돌고 물속으로 정말로 강력하게 억제된 뛰어들기를 하는 그 녀석을 따라하고자 하는.
Bis zum Ende des Sprungbrettes reicht der Mut und die Lust, dort aber statt zu springen, setzt sich plötzlich der Nachahmer und hebt entschuldigend die Arme. - Und trotz dem allen (ich sollte doch eigentlich glücklich sein über ein solches Kind) ist mein Verhältnis zu ihm nicht ungetrübt.
용기와 의지가 도약대의 끝에까지 나아가지만, 거기에서 뛰어 오르는 대신에, 갑자기 그 모방자는 주저앉고 변명하려고 두 팔을 든다. -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내가 또한 그러한 아이에 대해 실로 행운이라 해야 할) 그 아이에 대한 나의 관계는 석연치 않다.
Sein linkes Auge ist ein wenig kleiner als das rechte und zwinkert viel; ein kleiner Fehler nur, gewiß, der sein Gesicht sogar noch verwegener macht als es sonst gewesen wäre, und niemand wird gegenüber der unnahbaren Abgeschlossenheit seines Wesens dieses kleinere zwinkernde Auge tadelnd bemerken. Ich, der Vater, tue es.
녀석의 왼쪽 눈은 약간 작다 오른쪽 눈보다 그리고 자주 깜빡인다; 작은 결점은 단지, 확실히, 녀석의 외모가 더욱이 저돌적이도록 만든다 그 외모가 평소에 그러했을 것보다, 그리고 그의 특성의 범접키 어려운 독특함에 비해 이러한 작고 깜빡이는 눈은 전혀 꾸짖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아버지인 나는 그런다.
Es ist natürlich nicht dieser körperliche Fehler, der mir weh tut, sondern eine ihm irgendwie entsprechende kleine Unregelmäßigkeit seines Geistes, irgendein in seinem Blut irrendes Gift, irgendeine Unfähigkeit, die mir allein sichtbare Anlage seines Lebens rund zu vollenden. Gerade dies macht ihn allerdings andererseits wieder zu meinem wahren Sohn, denn dieser sein Fehler ist gleichzeitig der Fehler unserer ganzen Familie und an diesem Sohn nur überdeutlich.
자연스러운 것은 이러한 육체적 결함이 아니라, 내가 안타까워하는,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그의 정신의 작은 불일치에 상응하는
 
  Der dritte Sohn ist gleichfalls schön, aber es ist nicht die Schönheit, die mir gefällt. Es ist die Schönheit des Sängers: der geschwungene Mund; das träumerische Auge; der Kopf, der eine Draperie hinter sich benötigt, um zu wirken; die unmäßig sich wölbende Brust; die leicht auffahrenden und viel zu leicht sinkenden Hände; die Beine, die sich zieren, weil sie nicht tragen können. Und überdies: der Ton seiner Stimme ist nicht voll; trügt einen Augenblick; läßt den Kenner aufhorchen; veratmet aber kurz darauf - Trotzdem im allgemeinen alles verlockt, diesen Sohn zur Schau zu stellen, halte ich ihn doch am liebsten im Verborgenen; er selbst drängt sich nicht auf, aber nicht etwa deshalb, weil er seine Mängel kennt, sondern aus Unschuld. Auch fühlt er sich fremd in unserer Zeit; als gehöre er zwar zu meiner Familie, aber überdies noch zu einer andern, ihm für immer verlorenen, ist er oft unlustig und nichts kann ihn aufheitern.


  Mein vierter Sohn ist vielleicht der umgänglichste von allen. Ein wahres Kind seiner Zeit, ist er jedermann verständlich, er steht auf dem allen gemeinsamen Boden und jeder ist versucht, ihm zuzunicken. Vielleicht durch diese allgemeine Anerkennung gewinnt sein Wesen etwas Leichtes, seine Bewegungen etwas Freies, seine Urteile etwas Unbekümmertes. Manche seiner Aussprüche möchte man oft wiederholen, allerdings nur manche, denn in seiner Gesamtheit krankt er doch wieder an allzu großer Leichtigkeit. Er ist wie einer, der bewundernswert abspringt, schwalbengleich die Luft teilt, dann aber doch trostlos im öden Staube endet, ein Nichts. Solche Gedanken vergällen mir den Anblick dieses Kindes.


  Der fünfte Sohn ist lieb und gut; versprach viel weniger, als er hielt; war so unbedeutend, daß man sich förmlich in seiner Gegenwart allein fühlte; hat es aber doch zu einigem Ansehen gebracht. Fragte man mich, wie das geschehen ist, so könnte ich kaum antworten. Unschuld dringt vielleicht doch noch am leichtesten durch das Toben der Elemente in dieser Welt, und unschuldig ist er. Vielleicht allzu unschuldig. Freundlich zu jedermann. Vielleicht allzu freundlich. Ich gestehe: mir wird nicht wohl, wenn man ihn mir gegenüber lobt. Es heißt doch, sich das Loben etwas zu leicht zu machen, wenn man einen so offensichtlich Lobenswürdigen lobt, wie es mein Sohn ist.


  Mein sechster Sohn scheint, wenigstens auf den ersten Blick, der tiefsinnigste von allen. Ein Kopfhänger und doch ein Schwätzer. Deshalb kommt man ihm nicht leicht bei. Ist er am Unterliegen, so verfällt er in unbesiegbare Traurigkeit; erlangt er das Obergewicht, so wahrt er es durch Schwätzen. Doch spreche ich ihm eine gewisse selbstvergessene Leidenschaft nicht ab; bei hellem Tag kämpft er sich oft durch das Denken wie im Traum. Ohne krank zu sein - vielmehr hat er eine sehr gute Gesundheit - taumelt er manchmal, besonders in der Dämmerung, braucht aber keine Hilfe, fällt nicht. Vielleicht hat an dieser Erscheinung seine körperliche Entwicklung schuld, er ist viel zu groß für sein Alter. Das macht ihn unschön im Ganzen, trotz auffallend schöner Einzelheiten, zum Beispiel der Hände und Füße. Unschön ist übrigens auch seine Stirn; sowohl in der Haut als in der Knochenbildung irgendwie verschrumpft.


  Der siebente Sohn gehört mir vielleicht mehr als alle andern. Die Welt versteht ihn nicht zu würdigen; seine besondere Art von Witz versteht sie nicht. Ich überschätze ihn nicht; ich weiß, er ist geringfügig genug; hätte die Welt keinen anderen Fehler als den, daß sie ihn nicht zu würdigen weiß, sie wäre noch immer makellos. Aber innerhalb der Familie wollte ich diesen Sohn nicht missen. Sowohl Unruhe bringt er, als auch Ehrfurcht vor der Überlieferung, und beides fügt er, wenigstens für mein Gefühl, zu einem unanfechtbaren Ganzen. Mit diesem Ganzen weiß er allerdings selbst am wenigsten etwas anzufangen; das Rad der Zukunft wird er nicht ins Rollen bringen, aber diese seine Anlage ist so aufmunternd, so hoffnungsreich; ich wollte, er hätte Kinder und diese wieder Kinder. Leider scheint sich dieser Wunsch nicht erfüllen zu wollen. In einer mir zwar begreiflichen, aber ebenso unerwünschten Selbstzufriedenheit, die allerdings in großartigem Gegensatz zum Urteil seiner Umgebung steht, treibt er sich allein umher, kümmert sich nicht um Mädchen und wird trotzdem niemals seine gute Laune verlieren.


  Mein achter Sohn ist mein Schmerzenskind, und ich weiß eigentlich keinen Grund dafür. Er sieht mich fremd an, und ich fühle mich doch väterlich eng mit ihm verbunden. Die Zeit hat vieles gut gemacht; früher aber befiel mich manchmal ein Zittern, wenn ich nur an ihn dachte. Er geht seinen eigenen Weg; hat alle Verbindungen mit mir abgebrochen; und wird gewiß mit seinem harten Schädel, seinem kleinen athletischen Körper - nur die Beine hatte er als Junge recht schwach, aber das mag sich inzwischen schon ausgeglichen haben - überall durchkommen, wo es ihm beliebt. Öfters hatte ich Lust, ihn zurückzurufen, ihn zu fragen, wie es eigentlich um ihn steht, warum er sich vom Vater so abschließt und was er im Grunde beabsichtigt, aber nun ist er so weit und so viel Zeit ist schon vergangen, nun mag es so bleiben wie es ist. Ich höre, daß er als der einzige meiner Söhne einen Vollbart trägt; schön ist das bei einem so kleinen Mann natürlich nicht.


  Mein neunter Sohn ist sehr elegant und hat den für Frauen bestimmten süßen Blick. So süß, daß er bei Gelegenheit sogar mich verführen kann, der ich doch weiß, daß förmlich ein nasser Schwamm genügt, um allen diesen überirdischen Glanz wegzuwischen. Das Besondere an diesem Jungen aber ist, daß er gar nicht auf Verführung ausgeht; ihm würde es genügen, sein Leben lang auf dem Kanapee zu liegen und seinen Blick an die Zimmerdecke zu verschwenden oder noch viel lieber ihn unter den Augenlidern ruhen zu lassen. Ist er in dieser von ihm bevorzugten Lage, dann spricht er gern und nicht übel; gedrängt und anschaulich; aber doch nur in engen Grenzen; geht er über sie hinaus, was sich bei ihrer Enge nicht vermeiden läßt, wird sein Reden ganz leer. Man würde ihm abwinken, wenn man Hoffnung hätte, daß dieser mit Schlaf gefüllte Blick es bemerken könnte.


  Mein zehnter Sohn gilt als unaufrichtiger Charakter. Ich will diesen Fehler nicht ganz in Abrede stellen, nicht ganz bestätigen. Sicher ist, daß, wer ihn in der weit über sein Alter hinausgehenden Feierlichkeit herankommen sieht, im immer festgeschlossenen Gehrock, im alten, aber übersorgfältig geputzten schwarzen Hut, mit dem unbewegten Gesicht, dem etwas vorragenden Kinn, den schwer über die Augen sich wölbenden Lidern, den manchmal an den Mund geführten zwei Fingern - wer ihn so sieht, denkt: das ist ein grenzenloser Heuchler. Aber, nun höre man ihn reden! Verständig; mit Bedacht; kurz angebunden; mit boshafter Lebendigkeit Fragen durchkreuzend; in erstaunlicher, selbstverständlicher und froher Übereinstimmung mit dem Weltganzen; eine Übereinstimmung, die notwendigerweise den Hals strafft und den Körper erheben läßt. Viele, die sich sehr klug dünken und die sich, aus diesem Grunde wie sie meinten, von seinem Äußern abgestoßen fühlten, hat er durch sein Wort stark angezogen. Nun gibt es aber wieder Leute, die sein Äußeres gleichgültig läßt, denen aber sein Wort heuchlerisch erscheint. Ich, als Vater, will hier nicht entscheiden, doch muß ich eingestehen, daß die letzteren Beurteiler jedenfalls beachtenswerter sind als die ersteren.


  Mein elfter Sohn ist zart, wohl der schwächste unter meinen Söhnen; aber täuschend in seiner Schwäche; er kann nämlich zu Zeiten kräftig und bestimmt sein, doch ist allerdings selbst dann die Schwäche irgendwie grundlegend. Es ist aber keine beschämende Schwäche, sondem etwas, das nur auf diesem unsern Erdboden als Schwäche erscheint. Ist nicht zum Beispiel auch Flugbereitschaft Schwäche, da sie doch Schwanken und Unbestimmtheit und Flattern ist? Etwas Derartiges zeigt mein Sohn. Den Vater freuen natürlich solche Eigenschaften nicht; sie gehen ja offenbar auf Zerstörung der Familie aus. Manchmal blickt er mich an, als wollte er mir sagen: ›Ich werde dich mitnehmen, Vater.‹ Dann denke ich: ›Du wärst der Letzte, dem ich mich vertraue.‹ Und sein Blick scheint wieder zu sagen: ›Mag ich also wenigstens der Letzte sein.‹


  Das sind die elf Söhne.



-작성중-
Wir haben jetzt schon zweierlei Begriffe von ganz verschiedener Art, die doch darin mit einander übereinkommen, daß sie beiderseits völlig a priori sich auf Gegenstände beziehen, nämlich, die Begriffe des Raumes und der Zeit, als Formen der Sinnlichkeit, und die Kategorien, als Begriffe des Verstandes. Von ihnen eine empirische Deduktion versuchen wollen, würde ganz vergebliche Arbeit sein; weil eben darin das Unterscheidende ihrer Natur liegt, daß sie sich auf ihre Gegenstände beziehen, ohne etwas zu deren Vorstellung aus der Erfahrung entlehnt zu haben. Wenn also eine Deduktion derselben nötig ist, so wird sie jederzeit transzendental sein müssen.
→ 우리는 이제 이미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에 대한 두 가지 개념들을 가진다. 그 개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이 쌍방에 완전히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상호간에 부합한다. 즉, 그 개념들은 감성의 형식으로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 그리고 지성의 개념들로서 범주들이다.→ 그 개념들에 대해 경험적 연역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으로부터 그것들의 표상에 대한 어떤 것을 차용해 옴이 없이 그 개념들이 그것들의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그 점에 그것의 특수한 본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연역이 필연적일 때,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초월론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Indessen kann man von diesen Begriffen, wie von allem Erkenntnis, wo nicht das Principium ihrer Möglichkeit, doch die Gelegenheitsursachen ihrer Erzeugung in der Erfahrung aufsuchen, wo alsdenn die Eindrücke der Sinne den ersten Anlaß geben, die ganze Erkenntniskraft in Ansehung ihrer zu eröffnen, und Erfahrung zu Stande zu bringen, die zwei sehr ungleichartige Elemente enthält, nämlich eine Materie zur Erkenntnis aus den Sinnen, und eine gewisse Form, sie zu ordnen, aus dem innern Quell des reinen Anschauens und Denkens, die, bei Gelegenheit der ersteren, zuerst in Ausübung gebracht werden, und Begriffe hervorbringen. Ein solches Nachspüren der ersten Bestrebungen unserer Erkenntniskraft, um von einzelnen Wahrnehmungen zu allgemeinen Begriffen zu steigen, hat ohne Zweifel seinen großen Nutzen, und man hat es dem berühmten Locke zu verdanken, daß er dazu zuerst den Weg eröffnet hat.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모든 인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능성의 원칙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의 산출의 계기원인들을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경험에서 그리하여 감각의 인상들은 전체 인식능력이 그와 함께 시작하는, 그리고 경험을 성립시키는 첫번째 기회를 부여한다. 그 경험은 두 가지 매우 다른 요소를 포함한다. 즉 감각으로부터 인식을 위한 질료를 포함하고, 순수 직관과 사유의 내적 원천으로부터 질서지우는 확실한 형식을 포함한다. 그 직관과 사유가 첫번째 계기와 함께 처음으로 실행에 사용되고 개념들을 산출해낸다.→ 개별적인 지각들로부터 보편적인 개념들로 올라가기 위한 우리의 인식능력의 첫번째 기획들의 그러한 탐색은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의 커다란 이익을 지니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 길을 열었다는 것을 저 유명한 로크에게 빚진다.


Wir haben jetzt schon zweierlei Begriffe von ganz verschiedener Art, die doch darin mit einander übereinkommen, daß sie beiderseits völlig a priori sich auf Gegenstände beziehen, nämlich, die Begriffe des Raumes und der Zeit, als Formen der Sinnlichkeit, und die Kategorien, als Begriffe des Verstandes.
우리는 이제 이미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에 대한 두 가지 개념들을 가진다, 그 개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상호간에 부합하는, 그 개념들이 쌍방에 완전히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적용되는, 즉, 그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을, 감성의 형식으로서, 그리고 범주들을, 지성의 개념들로서.
→ 우리는 이제 이미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에 대한 두 가지 개념들을 가진다. 그 개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이 쌍방에 완전히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상호간에 부합한다. 즉, 그 개념들은 감성의 형식으로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 그리고 지성의 개념들로서 범주들이다.
Von ihnen eine empirische Deduktion versuchen wollen, würde ganz vergebliche Arbeit sein; weil eben darin das Unterscheidende ihrer Natur liegt, daß sie sich auf ihre Gegenstände beziehen, ohne etwas zu deren Vorstellung aus der Erfahrung entlehnt zu haben.
그 개념들에 대해 경험적 연역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만 그 안에서 그것의 본성에 구별하는 것 , 그 개념들이 그것들의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경험으로부터 그것들의 표상에 대한 어떤 것을 차용해 옴이 없이.
→ 그 개념들에 대해 경험적 연역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으로부터 그것들의 표상에 대한 어떤 것을 차용해 옴이 없이 그 개념들이 그것들의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그 점에 그것의 특수한 본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Wenn also eine Deduktion derselben nötig ist, so wird sie jederzeit transzendental sein müssen.
그러므로 그것의 연역이 필연적일 때,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초월론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 그러므로 그것의 연역이 필연적일 때,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초월론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Indessen kann man von diesen Begriffen, wie von allem Erkenntnis, wo nicht das Principium ihrer Möglichkeit, doch die Gelegenheitsursachen ihrer Erzeugung in der Erfahrung aufsuchen, wo alsdenn die Eindrücke der Sinne den ersten Anlaß geben, die ganze Erkenntniskraft in Ansehung ihrer zu eröffnen, und Erfahrung zu Stande zu bringen, die zwei sehr ungleichartige Elemente enthält, nämlich eine Materie zur Erkenntnis aus den Sinnen, und eine gewisse Form, sie zu ordnen, aus dem innern Quell des reinen Anschauens und Denkens, die, bei Gelegenheit der ersteren, zuerst in Ausübung gebracht werden, und Begriffe hervorbringen.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모든 인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능성의 원칙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의 산출의 계기원인들을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서 그리하여 감각의 인상들은 첫번째 기회를 부여한다, 전체 인식능력이 그와 함께 시작하는, 그리고 경험을 성립시키는, 그것은 두 가지 매우 다른 요소를 포함한다, 즉 감각으로부터 인식을 위한 질료를, 그리고 확실한 형식을, 그 형식이 질서지우는, 순수 직관과 사유의 내적 원천으로부터, 그것이, 전자의 계기에 있어서, 처음으로 실행에 사용되는, 그리고 개념들을 산출해내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모든 인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능성의 원칙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의 산출의 계기원인들을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경험에서 그리하여 감각의 인상들은 전체 인식능력이 그와 함께 시작하는, 그리고 경험을 성립시키는 첫번째 기회를 부여한다. 그 경험은 두 가지 매우 다른 요소를 포함한다. 즉 감각으로부터 인식을 위한 질료를 포함하고, 순수 직관과 사유의 내적 원천으로부터 질서지우는 확실한 형식을 포함한다. 그 직관과 사유가 첫번째 계기와 함께 처음으로 실행에 사용되고 개념들을 산출해낸다.
Ein solches Nachspüren der ersten Bestrebungen unserer Erkenntniskraft, um von einzelnen Wahrnehmungen zu allgemeinen Begriffen zu steigen, hat ohne Zweifel seinen großen Nutzen, und man hat es dem berühmten Locke zu verdanken, daß er dazu zuerst den Weg eröffnet hat.
우리의 인식능력의 첫번째 기획들의 그러한 탐색은, 개별적인 지각들로부터 보편적인 개념들로 올라가기 위하여, 그것의 커다란 이익을 의심 없이 지니고, 사람들은 그것을 저 유명한 로크에게 빚진다, 그가 그에 대해 처음으로 그 길을 열었던.
→ 개별적인 지각들로부터 보편적인 개념들로 올라가기 위한 우리의 인식능력의 첫번째 기획들의 그러한 탐색은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의 커다란 이익을 지니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 길을 열었다는 것을 저 유명한 로크에게 빚진다.

-蟲-
  A digression You will need to learn new ways to use (the Principle of) Mathematical Induction. You are probably familiar with Mathematical Induction as a tool for verifying formulas. We will need to use Mathematical Induction for other purposes. For example, we will need to know whether certain kinds of functions from N to N exist. There may be one function for each n, or maybe our statement will be that there is NO such function, for ANY n. We will then construct a set S := {n ∈ N : a function fn : N → N exists such that “thus and so” is true about fn}.

  Then we will follow the “same” pattern as in school induction:

  Step 0: Showthat 0 is in S. The way we show that 0 is in S will depend on what the criterion is for membership in S. But the objective of Step 0 is always the same: make sure 0 ∈ S.

  Step 1: Let someone choose an arbitrary element n of N, then showthat the statement “n ∈ S ⇒ s(n) ∈ S” is true. This is the objective of Step 1, then: showthat (∀n ∈ N)(n ∈ S ⇒ s(n) ∈ S) is true. Since this is a statement with a universal quantifier, we have to be able to show that every one of the statements n ∈ S ⇒ s(n) ∈ S is true. We knowb y nowthat there is one easy way for this statement to be true: in case n ∈ S is false! We usually don’t mention this possibility; we just assume that n ∈ S is true. Then we try to use the truth of “n ∈ S” to deduce the truth of “s(n) ∈ S.” But we can’t always work that way! Sometimes we have to use the contrapositive of “n ∈ S ⇒ s(n) ∈ S, ” namely “s(n) not ∈ S ⇒ n not ∈ S.” That is, we assume that “s(n) not ∈ S” is true. Then we try to use the truth of “s(n) not ∈ S” to deduce the truth of “n not ∈ S.” This second approach is logically equivalent to the first way, but it is not psychologically the same! Step 1 is the “heart” of an induction proof. But Step 0 is essential!

  Step 3: We apply the Principle of Mathematical Induction by noting that S = N. This step is one we do automatically; it’s like a coda in a piece of music. . . end of this digression

  (04) Example: Let’s prove that s(N) = P. We need to recall that P = N\{0}. We want to show that every n in P is s(m) for some m in N. By Postulate (01C) we know that (∀n ∈ N)(s(n) ≠ 0) is true. Thus s(N) ⊆ N\{0} = P. To showequalit y, it remains to showthat P ⊆ s(N). We do already knowof one element of P that is in s(N), namely 1 = s(0). Thus 1 ∈ {n ∈ P : there exists m ∈ N such that n = s(m)} =: E. We will use induction for P instead of N. We already did Step 0 (or ought it be Step 1, for P?)! We need to showthat, for all n in P, “n ∈ E ⇒ s(n) ∈ E” is true. Well, “n ∈ E ⇒ s(n) ∈ E” is true if “n ∈ E” is false. Since “n ∈ E” has to be true or false, we have to see what happens if “n ∈ E” is true. So, we next suppose that “n ∈ E” is true. Now, “n ∈ E” means that there exists m ∈ N such that n = s(m). But then, s(n) = s(s(m)), by the Substitution Rule. The criterion for membership of s(n) in E is that there exists m ∈ N such that s(n) = s(m). This is confusing at first, because we just saw that n = s(m) because n ∈ E. The important thing to learn here is that variables in quantifiers are “dummy” variables; we can use any convenient letter to denote them! In the present context, we just use “s(m)” as our convenient “letter!” Thus, s(n) ∈ E. Then, by Mathematical Induction (set version, for P), E = P. In other words, every n in P is the successor of some m in N, as desired.

  If you have time, I recommend that you read (listed as [3] in the References at the end of this Note) Foundations of Analysis, by Edmund Landau, Chelsea Publishing Co., NewY ork, 1951. Despite the author’s request, do read the preface for the teacher. Read the preface for the student too, and the book too, a little bit at a time. What Landau does is to carefully develop the properties of the positive integers from the axioms (the version for P). Here are some exercises, adapted from theorems in that book. In these exercises, do not use your prior knowledge, just use the axioms.

(05) Exercise: Showthat, for all n in N, and for all m in N, if n ≠ m then s(n) ≠ s(m).
(06) Problem: Showthat, for all n in N, s(n) ≠ n. You will need induction!
(07) Exercise: Showthat, for all n in N, if n ≠ 0 then there exists exactly one m in N such that n = s(m). You may need induction!
(08) Notation: If n ∈ N and n ≠ 0 we let n−1 denote the unique m in N (provided by Exercise (07)) such that n = s(m). That is, n = s(n − 1). An important point: n − 1 does not exist for all n in N; n − 1 exists only for n 0. This is not subtraction! The meaning of n − 1 is “predecessor of n.”

-작성중-
Es gibt indessen auch usurpierte Begriffe, wie etwa Glück, Schicksal, die zwar mit fast allgemeiner Nachsicht herumlaufen, aber doch bisweilen durch die Frage: quid juris, in Ansrpuch genommen werden, da man alsdenn wegen der Deduktion derselben in nicht geringe Verlegenheit gerät, indem man keinen deutlichen Rechtsgrund weder aus der Erfahrung, noch der Vernunft anführen kann, dadurch die Befugnis ihres Gebrauchs deutlich würde.
→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어떤 운수, 운명과 같은 찬탈된 개념들이 있다. 그 개념들은 더욱이 거의 보편적인 검열을 피해 다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무엇이 정의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검열을 요구받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바로 그 개념들의 연역으로 말미암아 경미한 곤경에조차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떠한 명백한 권리근거도 경험으로부터든 이성으로부터든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를 통하여 그 개념의 사용의 권한은 명백해질 것이다.
Unter den mancherlei Begriffen aber, die das sehr wermischte Gewebe der menschlichen Erkenntnis ausmachen, gibt es einige, die auch zum reinen Gebrauch a priori (völlig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bestimmt sind, und dieser ihre Befugnis bedarf jederzeit einer Deduktion; weil zu der Rechtmäßigkeit eines solchen Gebrauchs Beweise aus der Erfahrung nicht hinreichend sind, man aber doch wissen muß, wie diese Begriffe sich auf Objekte beziehen können, die sie doch aus keiner Erfahrung hernehmen. Ich nenne daher die Erklärung der Art, wie sich Begriffe a priori auf Gegenstände beziehen können,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selben, und unterscheide sie von der empirischen Deduktion, welche die Art anzeigt, wie ein Begriff durch Erfahrung und Reflexion über dieselbe erworben worden, und daher nicht die Rechtmäßigkeit, sondern das Factum betrifft, wodurch der Besitz entsprungen.
→ 그러나 인간 인식의 매우 혼잡한 작업을 형성하는 여러가지 개념들 아래에서, 또한 그것들이 순수한 선험적 사용으로 (모든 경험들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으로) 규정되는, 그리고 이러한 그 개념들의 권한이 언제나 연역을 필요로 하는 몇몇의 개념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용의 정당성에 대해 경험으로부터의 방식은 충분치 않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럼에도, 어떻게 어떠한 경험으로부터도 대상을 취하지 않는 이러한 개념들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어떻게 선험적 개념 자체가 대상들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 방식의 해명을, 그 개념들의 초월론적 연역이라고 명명하며, 그 연역을, 어떻게 한 개념이 경험과 반성을 통해 이와 같은 대상들에 대해 취득되는지 그 방식을 가리키는,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통하여 점유가 일어나는 행위에 관계하는 감각경험적 연역과 구분한다.


Es gibt indessen auch usurpierte Begriffe, wie etwa Glück, Schicksal, die zwar mit fast allgemeiner Nachsicht herumlaufen, aber doch bisweilen durch die Frage: quid juris, in Ansrpuch genommen werden, da man alsdenn wegen der Deduktion derselben in nicht geringe Verlegenheit gerät, indem man keinen deutlichen Rechtsgrund weder aus der Erfahrung, noch der Vernunft anführen kann, dadurch die Befugnis ihres Gebrauchs deutlich würde.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찬탈된 개념들이 있다, 어떤 운수, 운명과 같은, 그 개념들은 더욱이 거의 보편적인 검열을 피해 다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무엇이 정의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요구받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바로 그 개념들의 연역으로 말미암아 경미한 곤경에조차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떠한 명백한 권리근거도 경험으로부터든 이성으로부터든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그 개념의 사용의 권한은 명백해질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어떤 운수, 운명과 같은 찬탈된 개념들이 있다. 그 개념들은 더욱이 거의 보편적인 검열을 피해 다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무엇이 정의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검열을 요구받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바로 그 개념들의 연역으로 말미암아 경미한 곤경에조차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떠한 명백한 권리근거도 경험으로부터든 이성으로부터든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를 통하여 그 개념의 사용의 권한은 명백해질 것이다.

Unter den mancherlei Begriffen aber, die das sehr vermischte Gewebe der menschlichen Erkenntnis ausmachen, gibt es einige, die auch zum reinen Gebrauch a priori (völlig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bestimmt sind, und dieser ihre Befugnis bedarf jederzeit einer Deduktion; weil zu der Rechtmäßigkeit eines solchen Gebrauchs Beweise aus der Erfahrung nicht hinreichend sind, man aber doch wissen muß, wie diese Begriffe sich auf Objekte beziehen können, die sie doch aus keiner Erfahrung hernehmen.
그러나 여러가지 개념들 아래에서, 그 개념들이 인간 인식의 매우 혼잡한 작업을 형성하는, 몇몇의 개념들이 있다, 또한 그것들이 순수한 선험적 사용으로 (모든 경험들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인) 규정되는, 그리고 이러한 그 개념들의 권한이 언제나 연역을 필요로 하는; 왜냐하면 그러한 사용의 정당성에 대해 경험으로부터의 방식은 충분치 않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럼에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러한 개념들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 개념들이 대상을 어떠한 경험으로부터도 가져오지 않는.
→ 그러나 인간 인식의 매우 혼잡한 작업을 형성하는 여러가지 개념들 아래에서, 또한 그것들이 순수한 선험적 사용으로 (모든 경험들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으로) 규정되는, 그리고 이러한 그 개념들의 권한이 언제나 연역을 필요로 하는 몇몇의 개념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용의 정당성에 대해 경험으로부터의 방식은 충분치 않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럼에도, 어떻게 어떠한 경험으로부터도 대상을 취하지 않는 이러한 개념들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Ich nenne daher die Erklärung der Art, wie sich Begriffe a priori auf Gegenstände beziehen können,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selben, und unterscheide sie von der empirischen Deduktion, welche die Art anzeigt, wie ein Begriff durch Erfahrung und Reflexion über dieselbe erworben worden, und daher nicht die Rechtmäßigkeit, sondern das Factum betrifft, wodurch der Besitz entsprungen.
그런 이유에서 나는 그 방식의 해명을, 어떻게 선험적 개념 자체가 대상들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 개념들의 초월론적 연역이라고 명명하며, 그 연역을 감각경험적 연역과 구분한다, 그러한 연역이 그 방식을 가리키는, 어떻게 한 개념이 경험과 반성을 통해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 취득되는지,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에 관계하는, 그를 통하여 점유가 발생하는.
→ 그런 이유에서 나는, 어떻게 선험적 개념 자체가 대상들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 방식의 해명을, 그 개념들의 초월론적 연역이라고 명명하며, 그 연역을, 어떻게 한 개념이 경험과 반성을 통해 이와 같은 대상들에 대해 취득되는지 그 방식을 가리키는,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통하여 점유가 일어나는 행위에 관계하는 감각경험적 연역과 구분한다.

-蟲-
  The Principle of Mathematical Induction is our principal source of “mathematical energy!”
  수학적 귀납법의 원리는 "수학적 능력"에 있어서 우리의 원칙적 원천이다!
  We usually don’t make axioms in a vacuum - there is usually some thought behind them. But that thought can be hidden! So here is an “explanation” of the axioms. First, let’s imagine that we go into the “back room,” where we don’t have to prove anything - just work on ideas! We “know” the integers exist, positive, zero and negative.
   우리는 보통 진공에서 공리들을 만들지 않는다 - 일반적으로 그것들 이면에 어떤 생각이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감추어질 수 있다! 그래서 공리들에 대한 '설명'이 있다. 첫째로, 위가 "무대 뒤"로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거기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증명해야 하지 않다 - 단지 계속 생각하기만 하자! 우리는 정수의 존재, 양수, 0 그리고 음수를 "안다."
  The natural numbers are going to be our model of the non-negative integers. The successor function is “really” the function whose value at n, n ≥ 0, is n + 1 : s(n) = n + 1. Different non-negative integers “should” have different successors. This is what “s” is one–one” means. This is an assumption about the successor function! Saying 0 is not the successor of any non-negative integer means that 0
 n + 1 for any non-negative integer n. The postulate about sets of non-negative integers is not something we usually take for granted. But the idea makes sense: if a set S contains 0, and contains the successor of each of its elements, then it also contains 1, and 2, and 3, and so on. So it ought to contain every non–negative integer, namely S = N.
 자연수는 우리의 비-음수인 정수의 원형이 될 것이다. 후속자 함수는 "실제로" n이 0보다 크거나 같을 때 n 값이
n + 1 : s(n) = n + 1인 함수이다. 상이한 비-음수 정수는 상이한 후속자들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s"가 "일대일 대응"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후속자 함수에 대한 가정이다! 0이 어떠한 비-음수 정수의 후속자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비-음수 정수 n에 대해서도
0 ≠ n + 1임을 의미한다
. 비-음수 정수의 집합들에 대한 그 공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당연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말이 된다: 만일 한 집합 S가 0을 포함하고, 그 집합의 원소들 각각의 후속자를 포함한다면, 그것은 또한 1, 2, 3 등을 포함할 것이다. 그래서 그 집합은 모든 비-음수 정수 각각을 포함해야 한다, 즉 S=N이다.

  In your experience, perhaps N starts with 1, not 0. There is an equivalent version of these axioms for that version of N. We simply replace each “0” in the first version with “1, ” and call the newset P, for positive integers. We will want to use induction “starting with 1.” But, instead of making another set of axioms, we can give the name 1 to s(0), and then we can deduce the proposed axioms, from the Peano Postulates, so they become a Theorem: a set of true mathematical statements whose truth is logically deduced from axioms, instead of being assumed.
 당신의 경험에서, 아마도 N은 0이 아니라 1로 시작할 것이다. N의 그 판에 대한 이러한 공리들에 상응하는 판이 있다. 우리는 간단하게 첫번째 판에서 각각의 "0"을 "1"로 대체하고, 새집합 P라고 부른다, 양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로 시작하는" 귀납법을 사용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공리들의 또 다른 집합을 만드는 대신, 우리는 s(0)에 1이란 이름을 줄 수 있고, 그 다음으로 우리는 제시된 공리들을 연역할 수 있다, 페아노의 공준들로부터, 그래서 그것들은 정리가 된다: 참인 수학적 진술들의 한 집합, 그 진술의 참이 논리적으로 공리들로부터 연역된, 가정되는 대신에.
  (03) Theorem and Definition and Notation: There is a non-empty set P, whose elements we will call positive integers, a one-to-one function s : P → P, that we will call the successor function, and an element 1 ∈ P such that 1 is not in the image, s(P), of s. In addition, for all subsets E of P, if E contains 1, and s(E) ⊆ E, then E = P.
  (03) 정리와 정의 그리고 기수법: 비-공집합 P가 있다. P의 원소들을 우리는 양의 정수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일대일 대응 함수 s : P → P가 있다, 우리가 후속자 함수라고 부를. 그리고 1이 s(P)라는 s의 관념 속에 있는 1이 아닌 한 원소
1 ∈ P이 있다. 덧붙여서, P의 모든 부분집합들에 대해서, 만일 E가 1을 포함하고 s(E)
 ⊆ E 라면, E = P이다.
  The idea of the proof is to remove 0 from N to construct
P: P := N
 {0}
. Then we have to check that each of the postulates can be re–interpreted in the newset. The Induction property is deduced by temporarily putting 0 back, then taking it out after applying the Principle of Mathematical Induction for N. We will not carry out the details of this proof unless you ask.
  그 증명에 대한 생각은
P: P := N
 {0}를 구성하기 위해 N으로부터 0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집합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 그 공준들의 각각을 점검해야 한다. 그 귀납법 특성은 주기적으로 0을 되돌려 놓고, 다음으로 그 0을 N에 대한 수학적 귀납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 뒤로 끄집어 냄으로써 연역된다.
  You have probably seen Mathematical Induction before, but it looked a little different then.
  당신은 아마도 이전에 수학적 귀납법을 봤을 테지만, 그것을 조금 다르게 봤을 것이다.
  Example (unofficial!): Use Mathematical Induction (school version) to show that for all positive integers n,
1 + 2 + 3 + · · · + n = n(n + 1)/2. In this Example, we will use your prior knowledge about P.
  예시 (비공식!): 수학적 귀납법을 사용하라 모든 양의 정수 n에 대해서
1 + 2 + 3 + · · · + n = n(n + 1)/2 임을 보이기 위해. 이 예시에서, 우리는 P에 대한 여러분의 사전지식을 사용할 것이다.
  The procedure is this:
1. Let P(n) denote the statement to be proved: P(n) must have n as its only free variable.
2. Verify that P(1) is true.
3. Show that, by assuming P(n) is true, you can deduce that P(n + 1) must be true.
  절차는 이러하다:
1. P(n)이 다음과 같이 증명될 진술을 표시하도록 하라: P(n)은 반드시 그것의 자유 변수로서만 n을 가져야 한다.
2. P(1)이 참임을 입증하라.
3. P(n)이 참임을 가정함으로써, 당신이 P(n+1)이 반드시 참이어야만 함을 연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라.
  That is, prove the quantified mathematical statement “For all n in N, P(n) ⇒ P(n + 1).”
  Then Mathematical Induction assures us that P(n) is true for all n.
  즉, 양화된 수학적 진술 "N에서 모든 n에 대해 P(n)
 ⇒ P(n + 1)"을 증명하라.
  Let’s do it, for review.
  검코를 위해 해 보자.
  Step 1. Let P(n) denote the statement “1 + 2 + 3 + · · · + n = n(n + 1)/2.”
 
Step 2. P(1) is the statement
“1 = 1(1 + 1)/2.” This is true, by a very quick computation.
 
Step 3. Assume that P(n) is true for some n.
Then P(n + 1) is the statement “1 + 2 + 3 + · · · + (n + 1) =
(n+1)(n+2)/2.” We have 1+2+3+· · ·+(n+1) = 1+2+3+· · ·+n+(n+1) = (1+2+3+· · ·+n)+(n+1) = n(n+1)/2 +2(n+1/2) = (n+1)(n+2)/2, by a few basic algebraic manipulations. The equality of the first and last expressions in
this chain of equalities is P(n + 1), shown to be true under the assumption that P(n) is true. The truth of P(n) for all n is now established, by Mathematical Induction.
   
1단계. P(n)이 "
1 + 2 + 3 + · · · + n = n(n + 1)/2"라는 진술을 표시하도록 하라.
   2단계. P(1)은 "
1 = 1(1 + 1)/2"라는 진술이다. 이것은 참이다, 매우 즉각적인 계산에 의해.
   3단계. P(n)이 어떤 n에 대해 참이라고 전제하라. 그래서 P(n + 1) 은 "
1 + 2 + 3 + · · · + (n + 1) =
(n+1)(n+2)/2"이라는 진술이다. 그래서 우리는 약간의 기초적인 대수적 조작들을 통해
1+2+3+· · ·+(n+1) = 1+2+3+· · ·+n+(n+1) = (1+2+3+· · ·+n)+(n+1) = n(n+1)/2 +2(n+1/2) = (n+1)(n+2)/2 를 가진다, P(n)이 참이라는 저제 하에 참이라 보여지는. 모든 n에 대한 P(n)의 참은 이제 확정된다, 수학적 귀납법에 의해서.
 
  Remark: Note that, were P(n) false, the statement P(n) ⇒ P(n + 1) would be true vacuously. Thus we can
eliminate that possibility, and concentrate on what happens if P(n) is true.
   주의: 다음을 주의하라. P(n)이 거짓이라면,
P(n) ⇒ P(n + 1)이라는 진술은 허황된 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고, P(n)이 참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집중할 수 있다.
  The way we will often “do” Mathematical Induction differs only a little from this (and you may certainly use the old way in your papers in this class). The set–theoretic version of the argument for this example:
Let E := {n ∈ P : 1 + 2 + 3 + · · · + n = n(n+1)2}. We show 1 ∈ E (just as we just did), and that n ∈ E implies n + 1 ∈ E (just as we just did). Then E = P by Mathematical Induction.
  우리가 자주 '할' 수학적 귀납법의 방식은 이것(그리고 당신이 확실히 이 수업에서 당신의 paper들에서 사용했을지 모르는 그 오래된 방식)과 약간만 다르다. 이 예시에 대한 논증의 집합론적 판:
E := {n ∈ P : 1 + 2 + 3 + · · · + n = n(n+1)2}라고 하자. 우리는
1 ∈ E 임을 보이고(바로 우리가 방금 했던 것처럼),
n ∈ E 이
n + 1 ∈ E을 시사함을 보인다(바로 우리가 방금 했듯이). 그래서 수학적 귀납법에 의해 E = P이다.

-蟲-
출처 : www.math.umn.edu/~jodeit/course/Peano3.pdf

  THE NATURAL NUMBERS
  자연수
 
  We are ready for the official introduction of the natural numbers. I ask you to suspend belief in the truth of the things you already know about the natural numbers. I insist you keep every bit of your knowledge - just stop taking things for granted. “The Natural Numbers” is now a name only, to be used in the following list of mathematical statements, each of which you are asked to regard as true.
  우리는 자연수에 대한 공식적인 입문(개론)의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자연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보류할 것을 요청한다. 나는 당신이 당신 지식의 모든 낱낱을 붙들어 둘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 그것들을 당연시 하는 것은 확실히 중단하자. "자연수"는 이제 하나의 명칭일 뿐이다. 그 명칭은 아래의 수학적 진술들의 목록에서 사용될 것이며, 당신에게는 그 진술들의 각각을 참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This is where the course really starts. What came before was “preliminary.” We still have some preliminary stuff to do. But the natural numbers will literally be the foundation on which are built the ordinary integers, the rational numbers, and then the real and the complex numbers, which all form the foundations for Calculus.
  그 교육 과정은 실제로 여기서 시작한다. 앞서 나왔던 것은 "예비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아직 해야할 몇몇 예비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수는 문자 그대로 기초가 될 것이다. 그 기초 위에 정수, 유리수, 그리고 실수와 복소수가 세워진다. 그 모든 수들은 계산을 위한 기초를 이루는 것들이다.

(01) The Peano Postulates (or Axioms)
(01) 페아노 공준 (혹은 공리)
  We assume that the four following mathematical statements are true.
  우리는 다음 네 가지 수학적 진술들이 참이라고 가정한다.
(01A) There exists a non-empty set N, whose elements we will call natural numbers.
(01A) 공집합이 아닌 하나의 집합 N이 있다. 우리는 그 집합의 원소들을 자연수라 부를 것이다.
(01B) There exists a one-to-one function s : N → N, that we will call the successor function.
(01B) 하나의 일대일 대응 함수 s : N → N이 있다. 우리는 그 함수를 후속자 함수라고 부를 것이다.
(01C) There exists an element 0 ∈ N such that 0 is not in the image, s(N), of s.
(01C) N에 포함되는(0 ∈ N) 하나의 원소 0이 있다. 그 같은 0은 s집합의 상인 s(N) 내에 없다.
(01D) For all subsets S of N, if S contains 0, and s(S) ⊆ S, then S = N.
(01D) N의 모든 부분집합 S에 대해서, 만일 S가 0을 포함하고, s(S)가 S에 동치이거나 포함된다면(s(S) ⊆ S), S는 N이다.
  Here is a restatement of these axioms, in a less dense form:
  여기 이 공리들에 대한 조금은 덜 난해한 형식의 재진술이 있다:
  (02-1) There exists a non-empty set N, called the set of natural numbers, and a function s on N, called the successor function, whose value, s(n), at any n in N, is called the successor of n, such that (02-2) Different elements of N have different successors (s is one-to-one), (02-3) There is an element, 0, of N that is not the successor of any element of N (0 is not in the image of s), (02-4) Every subset S of N that contains 0 and also contains the successor of each element of S must be equal to N (if S contains 0, and s(S) ⊆ S, then S = N).
  (02-1) 공집합이 아닌 집합 N이 있다. N은 자연수의 집합으로 부른다. 그리고 N에 대해 함수 s가 있다. 함수 s는 후속자 함수라 부른다. 함수 s의 값 s(n)은, N 내에서 어떠한 n에서든, n의 후속자라고 부른다. (02-2) N의 그러한 서로 다른 원소들은 서로 다른 후속자들을 가진다 (s는 일대일 대응이다). (02-3) N의 원소 0이 있다. 0은 N의 어떠한 원소에 대해서도 후속자가 아니다 (0은 s의 상 내에 없다). (02-4) 0을 포함하고 또한 S의 각 원소들에 대한 후속자를 포함하는 모든 부분집합 S는 반드시 N에 동치여야만 한다 (만일 S가 0을 포함하고, s(S) ⊆ S라면, S = N).

  According to the Encyclopedia Britannica, 15th edition, the five Peano postulates are:

  브리트니 백과 15번째 편집본에 따르면, 다섯 가지 페아노 공준들이 있다:
1. 0 is a number.
1. 0은 수이다.
2. The successor of any number is also a number.
2. 어떤 수의 후속자든 또한 수이다.
3. No two distinct numbers have the same successor.
3. 그 어떤 별개의 두 수도 동일한 후속자를 가지지 않는다.
4. 0 is not the successor of any number.
4. 0은 그 어떤 수의 후속자도 아니다.
5. If any property is possessed by 0 and also by the successor of any number having that property, then all numbers have that property.
5. 만일 어떤 특성이든 0에 의해 그리고 또한 그 특성을 지닌 어떤 수의 후속자에 의해 소유된다면, 모든 수는 그 특성을 지닌다.
  Postulate 5, (01D) and (02-4) are certainly different. But all three versions amount to the same thing mathematically, when expressed in terms of set–selector notation. For, “property” has to refer to a mathematical statement P(n) about elements n of N. Thus, {n ∈ N : P(n) is true } is the set of all elements of N that possess the property P(n). If the “property” satisfies the conditions of postulate 5, then 0 ∈ {n ∈ N : P(n) is true }, and s({n ∈ N : P(n) is true }) ⊆ {n ∈ N : P(n) is true }, so {n ∈ N : P(n) is true } = N. On the other hand, let S be a subset of N. We define the “property (of n)” to be that n belongs to S. That is, P(n) is the statement “n ∈ S.” This “property” is then covered by postulate 5.
  공준 5, (01D)와 (02-4)는 확실하게 다르다. 그러나 세 가지 설명들 모두 수학적으로 동일한 것에 이르게 된다, 집합-선택자 기수법이란 용어로 표현될 때. 왜냐하면, "특성"은 N의 원소들 n에 대한
수학적 진술 P(n)를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특성"이 공준 5의 조건들을 만족시킨다면,
0 ∈ {n ∈ N : P(n) 가 참 }, 그리고 s({n ∈ N : P(n) 가 참 }) ⊆ {n ∈ N : P(n) 가 참 }, 그래서 {n ∈ N : P(n) 가 참 } = N 이다. 다른 한편, S를 N의 한 부분집합으로 두자. 우리는 그 "(n의) 특성"을 n이 S에 속한다는 것으로 정의한다. 즉, P(n)은 "
n ∈ S"라는 진술이다. 이 "특성"은 그래서 공준 5에 의해 포섭된다.
  Postulate 5 is about sets of natural numbers. You probably did not bring this postulate with you to this course, at least not explicitly. And yet, it will seem natural to you shortly, I hope. Here are the three versions of Postulate 5, collected in one place:
  공준 5는 자연수 집합들에 대한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이 공준을 갖고 이 과정을 수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명백하게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직, 그것이 당신에게 곧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내가 희망하기로는. 여기 공준 5의 세 판이 있다, 한 자리에 모은:
  For all subsets P of N, if P contains the element 0, and s(P) ⊆ P, then P = N; Every subset of N that contains 0 and also contains the successor of each of its elements must be equal to N; If any property is possessed by 0 and also by the successor of any number having that property, then all numbers
have that property.
  N의 모든 부분집합 P에 대해서, 만일 P가 원소 0을 포함한다면, 그리고
s(P) ⊆ P라면, P = N이다; 0을 포함하고또한 그 원소들의 각각에 대한 후속자를 포함하는 N의 모든 각각의 부분집합은 N과 동치여야만 한다; 만일 어떤 특성이든 0에 의해 그리고 또한 그 특성을 지니는 어떤 수든지 그에 대한 후속자에 의해 소유된다면, 모든 수는 그 특성을 지닌다.
  This Postulate is called The Principle of Mathematical Induction.
  이 공준은 수학적 귀납법의 원리라 부른다.

-蟲-
Der Analytik der Begriffe
Zweites Hauptstück
개념의 분석
제 2 부문
Von d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에 대하여
Erster Abschnitt
제 1장
§ 13. Von den Prinzipien einer transzendentalen Deduktion überhaupt
§ 13. 초월론적 연역 일반의 원칙들에 대하여

Die Rechtslehrer, wenn sie von Befugnissen und Anmaßungen reden, unterscheiden in einem Rechtshandel die Frage über das, was Rechtens ist, (quid juris) von der, die die Tatsache angeht, (quid facti) und indem sie von beiden Beweis fordern, so nennen sie den erstern, der die Befugnis, oder auch den Rechtsanspruch dartun soll, die Deduktion. Wir bedienen uns einer Menge empirischer Begriffe ohne jemandes Widerrede, und halten uns auch ohne Deduktion berechtigt, ihnen einen Sinn und eingebildete Bedeutung zuzueignen, weil wir jederzeit die Erfahrung bei der Hand haben, ihre objektive Realität zu beweisen.
→ 법학자들은, 그들이 권한들과 월권에 대해서 말할 때, 소송에 있어서 정당한 것(ius, iuris. 법에 속하는 것)에 대한 물음을 사실과 관계있는(사건에 속하는 것) 물음과 구별하고, 그들이 양자에 대해 증명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은 권한을, 혹은 권리주장을 내놓아야 하는 전자를 연역이라고 명명한다.→ 우리는 상당수의 경험적 개념들을 누구의 이의도 없이 사용하고, 또한 그 개념들에 의미와 상상된 의의를 바치는 정당화된 연역 없이 견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 개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을 입증하는 경험을 손안에 지니기 때문이다.

Die Rechtslehrer, wenn sie von Befugnissen und Anmaßungen reden, unterscheiden in einem Rechtshandel die Frage über das, was Rechtens ist, (quid juris) von der, die die Tatsache angeht, (quid facti) und indem sie von beiden Beweis fordern, so nennen sie den erstern, der die Befugnis, oder auch den Rechtsanspruch dartun soll, die Deduktion.
법학자들은, 그들이 권한들과 월권에 대해서 말할 때, 소송에서의 그것에 대한 물음을 구별한다, 정당한 것, (ius, iuris. 법에 속하는 것) 그것과, 사실과 관계있는 물음, (사건에 속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양자에 대해 증명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은 전자를 이름한다, 그것이 권한을, 혹은 권리주장을 내놓아야 하는, 연역이라고.
→ 법학자들은, 그들이 권한들과 월권에 대해서 말할 때, 소송에 있어서 정당한 것(ius, iuris. 법에 속하는 것)에 대한 물음을 사실과 관계있는(사건에 속하는 것) 물음과 구별하고, 그들이 양자에 대해 증명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은 권한을, 혹은 권리주장을 내놓아야 하는 전자를 연역이라고 명명한다.
Wir bedienen uns einer Menge empirischer Begriffe ohne jemandes Widerrede, und halten uns auch ohne Deduktion berechtigt, ihnen einen Sinn und eingebildete Bedeutung zuzueignen, weil wir jederzeit die Erfahrung bei der Hand haben, ihre objektive Realität zu beweisen.
우리는 상당수의 경험적 개념들을 누구의 이의도 없이 사용하고, 견지한다 또한 정당화된 연역 없이, 그 개념들에 의미와 상상된 의의를 바치는,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경험을 손안에 지니기 때문이다, 그 개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을 입증하는.
→ 우리는 상당수의 경험적 개념들을 누구의 이의도 없이 사용하고, 또한 그 개념들에 의미와 상상된 의의를 바치는 정당화된 연역 없이 견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 개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을 입증하는 경험을 손안에 지니기 때문이다.

-蟲-
Woraus erhellet, daß diese logische Kriterien der Möglichkeit der Erkenntnis überhaupt die drei Kategorien der Größe, in denen die Einheit in der Erzeugung des Quantum durchgängig gleichartig angenommen werden muß, hier nur in Absicht auf die Verknüpfung auch ungleichartiger Erkenntnisstücke in einem Bewußtsein durch die Qualität eines Erkenntnisses als Prinzips verwandeln. So ist das Kriterium der Möglichkeit eines Begriffs (nicht des Objekts derselben) die Definition, in der die Einheit des Begriffs, die Wahrheit alles dessen, was zunächst aus ihm abgeleitet werden mag, endlich die Vollständigkeit dessen, was aus ihm gezogen worden, zur Herstellung des ganzen Begriffs das Erforderliche desselben ausmacht; oder so ist auch das Kriterium einer Hypothese die Verständlichkeit des angenommenen Erklärungsgrundes oder dessen Einheit (ohne Hülfshypothese) die Wahrheit (Übereinstimmung unter sich selbst und mit der Erfahrung) der daraus abzuleitenden Folgen, und endlich die Vollständigkeit des Erklärungsgrundes zu ihnen, die auf nichts mehr noch weniger zurückweisen, als in der Hypothese angenommen worden, und das, was a priori synthetisch gesammenstimmen. - Also wird durch die Begriffe von Einheit, Wahrheit und Vollkommenheit die transzendentale Tafel der Kategorien gar nicht, indem das Verhältnis dieser Begriffe auf Objekte gänzlich bei Seite gesetzt wird, das Verfahren mit ihnen unter allgemeine logische Regeln der Übereinstimmung der Erkenntnis mit sich selbst gebracht.
→ 그로부터 인식 일반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논리적 표지들이 그 안에서 양의 산출에 있어서 통일성이 일반적으로 동종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크기의 세 가지 범주들을, 여기에서 단지 또한 이종적인 인식의 부분들의 결합에의 의도로서만 의식 안에서 원칙으로서 인식의 질을 통해 전환시킨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래서 개념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표지는 정의이다. 그 정의 안에서 개념의 통일이, 맨 먼저 그 개념으로부터 이끌려 나올지도 모르는 그 모든 것의 진리를, 궁극적으로 그 개념으로부터 증명된 것의 완전성을, 전체 개념의 재건을 위해 그 개념의 필수적인 것을 형성한다; 혹은 그래서 또한 가설의 표지는 수용된 설명근거의 이해가능성이거나 그 근거의 통일성 (보조가설 없이) 그로부터 도출한 결론들의 진리 (그 자체 아래에서의 일치와 경험과의 일치),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결론들에 대한 설명근거의 완전성이다, 가설 안에서 수용될 때 그 귀결들은 많든 적든 그 어떤 것도 인용하지 않고, 선험적 종합적으로 생각되었던 그것을, 후험적 분석적으로 다시금 산출하고 거기에 일치시킨다.→ - 그러므로 통일성, 진리 그리고 완전성에 대한 개념들을 통하여 범주들의 초월론적 도표는 전혀, 마치 그 도표가 약간 불충분하기라도 한 듯, 보완되지는 않고, 오히려 단지, 이러한 개념들의 객체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제쳐 놓여짐으로써, 그 개념들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 인식 그 자체의 일치에 대한 일반 논리학적 규칙 아래에서 사용될 뿐이다.


Woraus erhellet, daß diese logische Kriterien der Möglichkeit der Erkenntnis überhaupt die drei Kategorien der Größe, in denen die Einheit in der Erzeugung des Quantum durchgängig gleichartig angenommen werden muß, hier nur in Absicht auf die Verknüpfung auch ungleichartiger Erkenntnisstücke in einem Bewußtsein durch die Qualität eines Erkenntnisses als Prinzips verwandeln.
그로부터 밝혀진다, 인식 일반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논리적 표지들이 크기의 세 가지 범주들을, 그 범주들 안에서 양의 산출에 있어서 통일성이 일반적으로 동종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여기에서 단지 또한 이종적인 인식의 부분들의 결합에의 의도로서만 의식 안에서 인식의 질을 통해 원칙으로서 전환시킨다는 것이.
→ 그로부터 인식 일반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논리적 표지들이 그 안에서 양의 산출에 있어서 통일성이 일반적으로 동종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크기의 세 가지 범주들을, 여기에서 단지 또한 이종적인 인식의 부분들의 결합에의 의도로서만 의식 안에서 원칙으로서 인식의 질을 통해 전환시킨다는 것이 밝혀진다.
So ist das Kriterium der Möglichkeit eines Begriffs (nicht des Objekts derselben) die Definition, in der die Einheit des Begriffs, die Wahrheit alles dessen, was zunächst aus ihm abgeleitet werden mag, endlich die Vollständigkeit dessen, was aus ihm gezogen worden, zur Herstellung des ganzen Begriffs das Erforderliche desselben ausmacht; oder so ist auch das Kriterium einer Hypothese die Verständlichkeit des angenommenen Erklärungsgrundes oder dessen Einheit (ohne Hülfshypothese) die Wahrheit (Übereinstimmung unter sich selbst und mit der Erfahrung) der daraus abzuleiten den Folgen, und endlich die Vollständigkeit des Erklärungsgrundes zu ihnen, die auf nichts mehr noch weniger zurückweisen, als in der Hypothese angenommen worden, und das, was a priori synthetisch gedacht war, a posteriori analytisch wieder liefern und dazu zusammenstimmen.
그래서 개념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표지는 정의이다, 그 정의 안에서 개념의 통일이, 그 모든 것의 진리를, 맨 먼저 그 개념으로부터 이끌려 나올지도 모르는, 궁극적으로 그것의 완전성을, 그 개념으로부터 증명된, 전체 개념의 재건을 위해 그 개념의 필수적인 것을 형성하는; 혹은 그래서 또한 가설의 표지는 수용된 해명의 전제의 이해가능성이거나 그 전제의 통일성이 (보조가설 없이) 그로부터 도출한 결론들의 진리를 (그 자체 아래에서의 일치와 경험과의 일치), 그리고 궁극적으로 해명의 전제의 완전성을 그것들에, 그것들이 많든 적든 그 어떤 것도 인용하지 않는, 가설 안에서 수용될 때, 그리고 그것이, 선험적 종합적으로 생각되었던, 후험적 분석적으로 다시금 산출하고 거기에 일치시킨다.
→ 그래서 개념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표지는 정의이다. 그 정의 안에서 개념의 통일이, 맨 먼저 그 개념으로부터 이끌려 나올지도 모르는 그 모든 것의 진리를, 궁극적으로 그 개념으로부터 증명된 것의 완전성을, 전체 개념의 재건을 위해 그 개념의 필수적인 것을 형성한다; 혹은 그래서 또한 가설의 표지는 수용된 설명근거의 이해가능성이거나 그 근거의 통일성 (보조가설 없이) 그로부터 도출한 결론들의 진리 (그 자체 아래에서의 일치와 경험과의 일치),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결론들에 대한 설명근거의 완전성이다, 가설 안에서 수용될 때 그 귀결들은 많든 적든 그 어떤 것도 인용하지 않고, 선험적 종합적으로 생각되었던 그것을, 후험적 분석적으로 다시금 산출하고 거기에 일치시킨다.
- Also wird durch die Begriffe von Einheit, Wahrheit und Vollkommenheit die transzendentale Tafel der Kategorien gar nicht, als wäre sie etwa mangelhaft, ergänzt, sondern nur, indem das Verhältnis dieser Begriffe auf Objekte gänzlich bei Seite gesetzt wird, das Verfahren mit ihnen unter allgemeine logische Regeln der Übereinstimmung der Erkenntnis mit sich selbst gebracht.
- 그러므로 통일성, 진리 그리고 완전성에 대한 개념들을 통하여 범주들의 초월론적 도표는 전혀, 마치 그 도표가 약간 불충분하기라도 한 듯, 보완되지는 않고, 오히려 단지, 이러한 개념들의 객체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제쳐 놓여짐으로써, 그 개념들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 인식 그 자체의 일치에 대한 일반 논리학적 규칙 아래에서 사용될 뿐이다.
→ - 그러므로 통일성, 진리 그리고 완전성에 대한 개념들을 통하여 범주들의 초월론적 도표는 전혀, 마치 그 도표가 약간 불충분하기라도 한 듯, 보완되지는 않고, 오히려 단지, 이러한 개념들의 객체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제쳐 놓여짐으로써, 그 개념들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 인식 그 자체의 일치에 대한 일반 논리학적 규칙 아래에서 사용될 뿐이다.

-蟲-
Diese vermeintlich transzendentale Prädikate der Dinge sind nichts anders als logische Erfordernisse und Kriterien aller Erkenntnis der Dinge überhaupt, und legen ihr die Kategorien der Quantität, nämlich der Einheit, Vielheit und Allheit, zum Grunde, nur daß sie diese, welche eigentlich material, als zur Möglichkeit der Dinge selbst gehörig, genommen werden müßten, in der Tat nur in formaler Bedeutung als zur logischen Forderung in Ansehung jeder Erkenntnis gehörig brauchten, und doch diese Kriterien des Denkens unbehutsamer Weise zu Eigenschaften der Dinge an sich selbst machten. In jedem Erkenntnisse eines Objektes ist nämlich Einheit des Begriffes, welche man qualitative Einheit nennen kann, so fern darunter nur die Einheit der Zusammenfassung des Mannigfaltigen der Erkenntnisse gedacht wird, wie etwa die Einheit des Thema in einem Schauspiel, einer Rede, einer Fabel. Zweitens Wahrheit in Ansehung der Folgen. Je mehr wahre Folgen aus einem gegebenen Begriffe, desto mehr Kennzeichen seiner objektiven Realität. Dieses könnte man die qualitative Vielheit der Merkmale, die zu einem Begriffe als einem gemeinschaftlichen Grunde gehören, (nicht in ihm als Größe gedacht werden,) nennen. Endlich drittens Vollkommenheit, die darin besteht, daß umgekehrt diese Vielheit zusammen auf die Einheit des Begriffes zurückführt, und zu diesem und keinem anderen völlig zusammenstimmt, welches man die qualitative Vollständigkeit (Totalität) nennen kann.
→ 이러한 사물의 소위 초월론적 술어들은 사물 일반의 모든 인식의 논리적 조건들과 표지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 술어들은 그 조건들에 양의 범주들을, 즉 하나, 다수와 모두를 기초에 둔다. 오로지 본래 질료적인 사물 자체의 가능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취해져야만 하는 이러한 범주들을, 실제로 형식적 조건에 있어서 각 인식의 고려 속에서 논리적 요구에 속하는 것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이러한 사유의 표지들을 경솔한 방식으로 물자체의 성질들로 만들었다.→ 각각의 인식에 있어서 객체는, 연극에 있어서 주제, 대사, 줄거리의 어떤 통일과 같이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인식의 잡다들의 총괄의 통일이 생각되는 한에서, 사람들이 질적인 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즉 개념들의 통일이다.→ 두번째 것은 결론들과의 관련 속에서 참이다.→ 주어진 개념으로부터 참인 결론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의 표지들도 더욱 더 많다.→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그 개념에서 크기로서 생각되지 않고) 공통된 토대로서 개념에 속하는 표지들의 질적 다수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세번째 것은 반대되는 이러한 다수성이 동시에 개념의 통일성으로 환원하는, 그리고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것에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 질적 완전성(총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안에 존립하는 완전함이다.


Diese vermeintlich transzendentale Prädikate der Dinge sind nichts anders als logische Erfordernisse und Kriterien aller Erkenntnis der Dinge überhaupt, und legen ihr die Kategorien der Quantität, nämlich der Einheit, Vielheit und Allheit, zum Grunde, nur daß sie diese, welche eigentlich material, als zur Möglichkeit der Dinge selbst gehörig, genommen werden müßten, in der Tat nur in formaler Bedeutung als zur logischen Forderung in Ansehung jeder Erkenntnis gehörig brauchten, und doch diese Kriterien des Denkens unbehutsamer Weise zu Eigenschaften der Dinge an sich selbst machten.
이러한 사물의 소위 초월론적 술어들은 사물 일반의 모든 인식의 논리적 조건들과 표지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그 조건들에 양의 범주들을, 즉 하나, 다수와 모두를, 기초에 둔다. 오로지 그 범주들이 이러한 것들인, 본래 질료적인, 사물 자체의 가능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취해져야만 하는, 실제로 형식적 조건에 있어서 각 인식의 고려 속에서 논리적 요구에 속하는 것으로 사용하며, 또한 이러한 사유의 표지들이 경솔한 방식으로 물자체의 성질들로 형성하는.
→ 이러한 사물의 소위 초월론적 술어들은 사물 일반의 모든 인식의 논리적 조건들과 표지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 술어들은 그 조건들에 양의 범주들을, 즉 하나, 다수와 모두를 기초에 둔다. 오로지 본래 질료적인 사물 자체의 가능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취해져야만 하는 이러한 범주들을, 실제로 형식적 조건에 있어서 각 인식의 고려 속에서 논리적 요구에 속하는 것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이러한 사유의 표지들을 경솔한 방식으로 물자체의 성질들로 만들었다.
In jedem Erkenntnisse eines Objektes ist nämlich Einheit des Begriffes, welche man qualitative Einheit nennen kann, so fern darunter nur die Einheit der Zusammenfassung des Mannigfaltigen der Erkenntnisse gedacht wird, wie etwa die Einheit des Thema in einem Schauspiel, einer Rede, einer Fabel.
각각의 인식에 있어서 객체는 다시 말해 개념들의 통일이다, 사람들이 질적인 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인식의 잡다들의 총괄의 통일이 생각되는 한에서, 연극에 있어서 주제, 대사, 줄거리의 어떤 통일과 같이.
→ 각각의 인식에 있어서 객체는, 연극에 있어서 주제, 대사, 줄거리의 어떤 통일과 같이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인식의 잡다들의 총괄의 통일이 생각되는 한에서, 사람들이 질적인 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즉 개념들의 통일이다.
Zweitens Wahrheit in Ansehung der Folgen.
두번째 것은 결론들과의 관련 속에서 참이다.
→ 두번째 것은 결론들과의 관련 속에서 참이다.
Je mehr wahre Folgen aus einem gegebenen Begriffe, desto mehr Kennzeichen seiner objektiven Realität.
주어진 개념으로부터 참인 결론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의 표지들도 더욱 더 많다.
→ 주어진 개념으로부터 참인 결론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의 표지들도 더욱 더 많다.
Dieses könnte man die qualitative Vielheit der Merkmale, die zu einem Begriffe als einem gemeinschaftlichen Grunde gehören, (nicht in ihm als Größe gedacht werden,) nennen.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표지들의 질적 다수성이라고, 그 다수성이 공통된 토대로서 개념에 속하는, (그 개념에서 크기로서 생각되지 않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그 개념에서 크기로서 생각되지 않고) 공통된 토대로서 개념에 속하는 표지들의 질적 다수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Endlich drittens Vollkommenheit, die darin besteht, daß umgekehrt diese Vielheit zusammen auf die Einheit des Begriffes zurückführt, und zu diesem und keinem anderen völlig zusammenstimmt, welches man die qualitative Vollständigkeit (Totalität) nennen kann.
끝으로 세번째 것은 완전함이다, 그 안에 존립하는, 반대되는 이러한 다수성이 동시에 개념의 통일성으로 환원하는, 그리고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것에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 질적 완전성(총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 끝으로 세번째 것은 반대되는 이러한 다수성이 동시에 개념의 통일성으로 환원하는, 그리고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것에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 질적 완전성(총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안에 존립하는 완전함이다.

-蟲-
Aber jeder, der Platon auch nur wenig kennt, weiß, daß bei Sokrates die Frage in völlig neuer Bedeutung gestellt wird. Er zeigt, daß es nicht nur äußere Kraftentfaltung ist, die den Menschen zum >Guten< macht, sondern daß seine Bestheit darauf beruht, daß er Kräfte in sich verwirklicht, die wir Tugenden nennen; Einzel-Bestheiten, die in den ethischen Bereich gehören, wie die Besonnenheit, Tapferkeit, Gerechtigkeit usw. Das Gut-Leben wird gleichsam mit einer Hundertachtziggrad-Drehung in eine andere Richtung gekehrt und meint nun die Verwirklichung des Höchsten im Menschen, die nur durch die Gerechtigkeit möglich ist, und auch die Eudaimonie gewinnt ganz anderen Charakter. Also aus dem gleichen Bereich kommend wie die Sophisten, vollzieht nun Sokrates diese Drehung, indem die Dinge ganz neuen Wertcharakter bekommen. Aber es ist doch der gleiche Bereich der Menschendinge, den auch Cicero in jenem Wort deutlich abhebt gegen den der Vorsokratiker, die nach ganz anderen Dingen gefragt hatten.

Wir können noch von einer anderen Ecke her diese Wendung verdeutlichen, und zwar von dem eigentlichen Anfang her, damit ein Raum frei bleibt für das, was dann wirklich die Vorsokratiker bedeuten. Da wollen wir zunächst von dem Begriff des Philosophierens allgemein sprechen. Es ist nötig, daß wir, die wir uns mit diesen Dingen beschäftigen, einmal versuchen, solche Worte, die zu unserem geistigen Hausgebrauch gehören, da wir nun einmal an ihrem Wurzelbereich stehen, auch von dorther neu zu fassen. Zunächst ist es auffällig, daß der Begriff für die Vorsokratiker noch nicht existiert. Er tritt erst ein bei jener Tätigkeit, die eben wirklich schon Philosophie ist, auch in unserem Sinne, und das ist bei Platon. Von da ab hat er solche Relevanz, erscheint als so völlig entsprechend dem, was man tut, daß er nun fest mit dieser Tätigkeit verbunden bleibt bis auf den heutigen Tag. Und wenn man auch öfter versucht hat, ihn durch andere Begriffe zu ersetzen, wie >Lebensweisheit< u.a., so ist das nie durchgedrungen und hat den Begriff der Philosophie nicht verdrängen können aus den europäischen Sprachen und wohl auch darüber hinaus.

Man wird sich auch diesen Begriff, philosophia und verbal philosophein, vorstellen müssen als einen Begriff der Alltagssprache. Die früheste Stelle ist Herodot Ⅰ30, wo von Solon gesagt wird, er sei, nachdem er sein Gesetzeswerk in Athen abgeschlossen hatte, auf Reisen gegangen >um der theoria willen< - nicht unsere >Theorie<, sondern eigentlich >heilige Schau<: die Weise, wie ein Festgesandter etwa den Olympischen Spielen oder sonst einer kultischen Veranstaltung beiwohnte.



Aber jeder, der Platon auch nur wenig kennt, weiß, daß bei Sokrates die Frage in völlig neuer Bedeutung gestellt wird.


Er zeigt, daß es nicht nur äußere Kraftentfaltung ist, die den Menschen zum >Guten< macht, sondern daß seine Bestheit darauf beruht, daß er Kräfte in sich verwirklicht, die wir Tugenden nennen; Einzel-Bestheiten, die in den ethischen Bereich gehören, wie die Besonnenheit, Tapferkeit, Gerechtigkeit usw.


Das Gut-Leben wird gleichsam mit einer Hundertachtziggrad-Drehung in eine andere Richtung gekehrt und meint nun die Verwirklichung des Höchsten im Menschen, die nur durch die Gerechtigkeit möglich ist, und auch die Eudaimonie gewinnt ganz anderen Charakter.


Also aus dem gleichen Bereich kommend wie die Sophisten, vollzieht nun Sokrates diese Drehung, indem die Dinge ganz neuen Wertcharakter bekommen.


Aber es ist doch der gleiche Bereich der Menschendinge, den auch Cicero in jenem Wort deutlich abhebt gegen den der Vorsokratiker, die nach ganz anderen Dingen gefragt hatten.



Wir können noch von einer anderen Ecke her diese Wendung verdeutlichen, und zwar von dem eigentlichen Anfang her, damit ein Raum frei bleibt für das, was dann wirklich die Vorsokratiker bedeuten.


Da wollen wir zunächst von dem Begriff des Philosophierens allgemein sprechen.


Es ist nötig, daß wir, die wir uns mit diesen Dingen beschäftigen, einmal versuchen, solche Worte, die zu unserem geistigen Hausgebrauch gehören, da wir nun einmal an ihrem Wurzelbereich stehen, auch von dorther neu zu fassen.


Zunächst ist es auffällig, daß der Begriff für die Vorsokratiker noch nicht existiert.


Er tritt erst ein bei jener Tätigkeit, die eben wirklich schon Philosophie ist, auch in unserem Sinne, und das ist bei Platon.


Von da ab hat er solche Relevanz, erscheint als so völlig entsprechend dem, was man tut, daß er nun fest mit dieser Tätigkeit verbunden bleibt bis auf den heutigen Tag.


Und wenn man auch öfter versucht hat, ihn durch andere Begriffe zu ersetzen, wie >Lebensweisheit< u.a., so ist das nie durchgedrungen und hat den Begriff der Philosophie nicht verdrängen können aus den europäischen Sprachen und wohl auch darüber hinaus.



Man wird sich auch diesen Begriff, philosophia und verbal philosophein, vorstellen müssen als einen Begriff der Alltagssprache.


Die früheste Stelle ist Herodot Ⅰ30, wo von Solon gesagt wird, er sei, nachdem er sein Gesetzeswerk in Athen abgeschlossen hatte, auf Reisen gegangen >um der theoria willen< - nicht unsere >Theorie<, sondern eigentlich >heilige Schau<: die Weise, wie ein Festgesandter etwa den Olympischen Spielen oder sonst einer kultischen Veranstaltung beiwohnte.



-작성중-
Sokrates und, wie ich gleich sagen will, auch die Sophisten - die in diesem Sinne auch nicht zu den Vorsokratikern gehören, aber solche Inkonsequenzen stören nicht, wenn man terminologisch vorgeht - fragen nicht nach diesen vorhandenen Dingen, sondern, kurz gesagt, nach der menschlichen Tauglichkeit, der arete. Wir befinden uns hier im Bereich der Polis, in der die Menschen zusammen leben und in der sie etwas werden wollen, vor allem politisch etwas werden wollen. Da geht es primär darum, wie man tauglich wird im Leben, wie man vorankommt und möglichst in eine herrschende Stellung. Man sieht, dies Fragen nach der menschlichen Bestheit ist ursprünglich durchaus nicht im ethischen Sinne zu verstehen, sondern umfassend nach der vollen Entfaltung dessen, was der Mensch als Mensch an Kräften mitbekommen hat, wodurch er das möglichst >gute Leben<, eu zen, erlangt, was auch ganz materiell verstanden werden kann, dann aber vom Wohlergehen zum Wohlbefinden wird und schließlich zur eudaimonia, >Glückseligkeit< in dem Sinne, daß der Mensch einen guten Daimon hat. Von all diesen Begriffen werden wir noch eingehend zu sprechen haben.
→ 소크라테스와, 내가 동시에 이야기하고자 하듯이, 또한 소피스테스들은 - 그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전 소크라테스에 속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용어적으로 우선할 때 그러한 불일치들이 방해하지 않는 - 이러한 수중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짧게 말하면, 인간적인 쓸모, 아레테에 대해서 묻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안에서 인간들이 다 함께 살아가고 그 안에서 그들이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폴리스의 범위 안에 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어떻게 사람이 삶에 있어서 쓸모있게 되는지, 어떻게 사람이 가능한 한 지배적 지위로 나아갈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인간적 최선에 대한 이러한 물음이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윤리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폭넓게 인간이 인간으로서 능력들을 동시에 얻는 것, 그를 통하여 인간이 가능한 한, 에우 젠, >좋은 삶<을 얻는 그러한 것의 풍부한 전개에 대한 물음임을 본다. 에우 젠은 또한 전적으로 물질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무사로부터 평안에까지 결국 에우다이모니아가 되는, 인간이 좋은 다이몬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행복<이다.→ 이러한 모든 개념들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 상론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Die Frage nach diesem Gut-Leben und dieser Eudaimonie ist die in der Gemeinschaft sich stellende Frage, die jeden als Lebensfrage angeht und in die die Sophisten hineinzielen vor allem mit dem Mittel des gekonnten Worts, das zum Machtmittel werden kann. Sie versprechen, daß sie den Menschen möglichst tauglich und fähig machen können, so daß er zum >guten Leben<, zu Stellung und Machteinfluß gelangt und also auch glücklich wird. Sie sehen, es ist ein ganz anderer Bereich als der, vor dem die Vorsokratiker stehen, die sich vor dem Ganzen des Seienden fühlen. Es sind durchaus die Menschenwelt und die Menschendinge und -bestrebungen, die von den Sophisten behandelt werden, die nun bestimmte Praktiken entwickeln, wie man etwa den schwächeren Logos zum stärkeren machen kann; die aber über diese Kunstgriffe hinaus auch Wissen vermitteln, das den Menschen ertüchtigen und zur Arete erziehen soll - worauf mit Sokrates die Frage entsteht, ob und wie man die Arete überhaupt lehren und vermitteln kann. Es wäre ja schön für den Menschen, wenn er sich diese Höchstfrom irgendwo beschaffen könnte, wenn es Menschen gäbe, die sie vermitteln könnten. Die Sophisten behaupten, sie seien solche Lehrer der Arete.
→ 이러한 좋은-삶과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물음은 공동체 안에서 제기된, 그 물음 각각이 삶의 물음으로서 시작되고 그 물음 안으로 소피스테스들은 무엇보다도 그 방법이 권력수단으로 될 수 있는 능란한 말의 방법을 가지고 내부를 겨냥하는 물음이다.→ 그들은, 그들이 인간들을 가능한 한 쓸모 있고 유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그래서 그가 >좋은 삶<을, 지위와 권력을 얻고 그러므로 행복하게 된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그것이 그 영역에 대해 전 소크라테스들이 마주 서 있는, 그것들이 있는 것들의 전체를 채우는 것과 전혀 다른 영역임을 본다.→ 그것은 소피스테스들에 의해 다루어진, 그들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 더욱 약한 말을 더욱 강한 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규정된 취급방식들을 전개한, 전적으로 인간계와 인간적인 것들 그리고 인간적 활동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교들을 넘어서 또한 인간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 소크라테스와 함께 어떤 것에 대한 것인지, 혹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 아레테 일반을 배우고 전할 수 있는지 그 물음이 생겨난 - 아레테로 가르칠 그러한 앎을 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이러한 최상의 조건을 얻을 수 있다면, 만일 그들이 전할 수 있을 그것이 인간들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멋진 것일 터이다.→ 소피스트들은 그들이 덕에 대한 그러한 교사라고 주장했다.



Sokrates und, wie ich gleich sagen will, auch die Sophisten - die in diesem Sinne auch nicht zu den Vorsokratikern gehören, aber solche Inkonsequenzen stören nicht, wenn man terminologisch vorgeht - fragen nicht nach diesen vorhandenen Dingen, sondern, kurz gesagt, nach der menschlichen Tauglichkeit, der arete.
소크라테스와, 내가 동시에 이야기하고자 하듯이, 또한 소피스테스들은 - 그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전 소크라테스에 속하지 않지만, 그러한 불일치들이 방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용어적으로 우선할 때 - 묻는다 이러한 수중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짧게 말하면, 인간적인 쓸모, 아레테에 대해서.
→ 소크라테스와, 내가 동시에 이야기하고자 하듯이, 또한 소피스테스들은 - 그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전 소크라테스에 속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용어적으로 우선할 때 그러한 불일치들이 방해하지 않는 - 이러한 수중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짧게 말하면, 인간적인 쓸모, 아레테에 대해서 묻는다.
Wir befinden uns hier im Bereich der Polis, in der die Menschen zusammen leben und in der sie etwas werden wollen, vor allem politisch etwas werden wollen.
우리는 여기에서 폴리스의 범위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인간들이 다 함께 살아가고 그 안에서 그들이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 우리는 여기에서, 그 안에서 인간들이 다 함께 살아가고 그 안에서 그들이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폴리스의 범위 안에 있다.
Da geht es primär darum, wie man tauglich wird im Leben, wie man vorankommt und möglichst in eine herrschende Stellung.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 어떻게 사람이 삶에 있어서 쓸모있게 되는지, 어떻게 사람이 가능한 한 지배적 지위로 나아갈 수 있는지.
→ 여기에서 처음으로, 어떻게 사람이 삶에 있어서 쓸모있게 되는지, 어떻게 사람이 가능한 한 지배적 지위로 나아갈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가 된다.
Man sieht, dies Fragen nach der menschlichen Bestheit ist ursprünglich durchaus nicht im ethischen Sinne zu verstehen, sondern umfassend nach der vollen Entfaltung dessen, was der Mensch als Mensch an Kräften mitbekommen hat, wodurch er das möglichst >gute Leben<, eu zen, erlangt, was auch ganz materiell verstanden werden kann, dann aber vom Wohlergehen zum Wohlbefinden wird und schließlich zur eudaimonia, >Glückseligkeit< in dem Sinne, daß der Mensch einen guten Daimon hat.
사람들은 본다, 인간적 최선에 대한 이러한 물음이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윤리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폭넓게 그것의 풍부한 전개에 대한 물음, 인간이 인간으로서 능력들을 동시에 얻는 것, 그를 통하여 인간이 가능한 한 >좋은 삶<, 에우 젠, 그것을 얻는, 그것이 또한 전적으로 물질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러나 그 경우 무사로부터 평안에까지 결국 에우다이모니아가 되는, >행복<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인간이 좋은 다이몬을 가진다는.
→ 사람들은, 인간적 최선에 대한 이러한 물음이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윤리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폭넓게 인간이 인간으로서 능력들을 동시에 얻는 것, 그를 통하여 인간이 가능한 한, 에우 젠, >좋은 삶<을 얻는 그러한 것의 풍부한 전개에 대한 물음임을 본다. 에우 젠은 또한 전적으로 물질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무사로부터 평안에까지 결국 에우다이모니아가 되는, 인간이 좋은 다이몬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행복<이다.
Von all diesen Begriffen werden wir noch eingehend zu sprechen haben.
이러한 모든 개념들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 상론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 이러한 모든 개념들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 상론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Die Frage nach diesem Gut-Leben und dieser Eudaimonie ist die in der Gemeinschaft sich stellende Frage, die jeden als Lebensfrage angeht und in die die Sophisten hineinzielen vor allem mit dem Mittel des gekonnten Worts, das zum Machtmittel werden kann.
이러한 좋은-삶과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물음은 공동체 안에서 제기된 물음이다, 그 물음 각각이 삶의 물음으로서 시작되고 그 물음 안으로 소피스테스들은 무엇보다도 능란한 말의 방법을 가지고 내부를 겨냥하는, 그 방법이 권력수단으로 될 수 있는.
→ 이러한 좋은-삶과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물음은 공동체 안에서 제기된, 그 물음 각각이 삶의 물음으로서 시작되고 그 물음 안으로 소피스테스들은 무엇보다도 그 방법이 권력수단으로 될 수 있는 능란한 말의 방법을 가지고 내부를 겨냥하는 물음이다.
Sie versprechen, daß sie den Menschen möglichst tauglich und fähig machen können, so daß er zum >guten Leben<, zu Stellung und Machteinfluß gelangt und also auch glücklich wird.
그들은 약속한다, 그들이 인간들을 가능한 한 쓸모 있고 유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그래서 그가 >좋은 삶<을, 지위와 권력을 얻고 그러므로 행복하게 된다고.
→ 그들은, 그들이 인간들을 가능한 한 쓸모 있고 유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그래서 그가 >좋은 삶<을, 지위와 권력을 얻고 그러므로 행복하게 된다고 약속한다.
Sie sehen, es ist ein ganz anderer Bereich als der, vor dem die Vorsokratiker stehen, die sich vor dem Ganzen des Seienden fühlen.
그들은 본다, 그것이 전혀 다른 영역임을 다음과 같은 것과, 그 영역에 대해 전 소크라테스들이 마주 서 있는, 그들이 있는 것들의 전체를 채우는.
→ 그들은 그것이 그 영역에 대해 전 소크라테스들이 마주 서 있는, 그것들이 있는 것들의 전체를 채우는 것과 전혀 다른 영역임을 본다.
Es sind durchaus die Menschenwelt und die Menschendinge und -bestrebungen, die von den Sophisten behandelt werden, die nun bestimmte Praktiken entwickeln, wie man etwa den schwächeren Logos zum stärkeren machen kann; die aber über diese Kunstgriffe hinaus auch Wissen vermitteln, das den Menschen ertüchtigen und zur Arete erziehen soll - worauf mit Sokrates die Frage entsteht, ob und wie man die Arete überhaupt lehren und vermitteln kann.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계와 인간적인 것들 그리고 인간적 활동들이다, 그것들이 소피스테스들에 의해 다루어진, 이제 그들이 규정된 취급방식들을 전개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더욱 약한 말을 더욱 강한 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교들을 넘어서 또한 앎을 전달한다, 그 앎이 인간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아레테로 가르칠 - 어떤 것에 대한 것인지 소크라테스와 함께 그 물음이 생겨난, 혹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 아레테 일반을 배우고 전할 수 있는지.
→ 그것은 소피스테스들에 의해 다루어진, 그들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 더욱 약한 말을 더욱 강한 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규정된 취급방식들을 전개한, 전적으로 인간계와 인간적인 것들 그리고 인간적 활동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교들을 넘어서 또한 인간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 소크라테스와 함께 어떤 것에 대한 것인지, 혹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 아레테 일반을 배우고 전할 수 있는지 그 물음이 생겨난 - 아레테로 가르칠 그러한 앎을 전달한다.
Es wäre ja schön für den Menschen, wenn er sich diese Höchstfrom irgendwo beschaffen könnte, wenn es Menschen gäbe, die sie vermitteln könnten.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멋진 것일 터이다, 만일 그가 이러한 최상의 조건을 얻을 수 있다면, 만일 그것이 인간들에게 주어진다면, 그들이 전할 수 있을.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이러한 최상의 조건을 얻을 수 있다면, 만일 그들이 전할 수 있을 그것이 인간들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멋진 것일 터이다.
Die Sophisten behaupten, sie seien solche Lehrer der Arete.
소피스트들은 주장했다, 그들이 덕에 대한 그러한 교사라고.
→ 소피스트들은 그들이 덕에 대한 그러한 교사라고 주장했다.

-蟲-
§ 12.

Es findet sich aber in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der Alten noch ein Haupstück vor, welches reine Verstandesbegriffe enthält, die, ob sie gleich nicht unter die Kategorien gezählt werden, dennoch, nach ihnen, als Begriffe a priori von Gegenständen gelten sollten, in welchem Falle sie aber die Zahl der Kategorien vermehren würden, welches nicht sein kann. Diese trägt der unter den Scholastikern so berufene Satz vor: quodlibet ens est unum, verum, bonum. Ob nun zwar der Gebrauch dieses Prinzips in Absicht auf die Folgerungen (die lauter tautologische Sätze gaben) sehr kümmerlich ausfiel, so, daß man es auch in neueren Zeiten beinahe nur ehrenhalber in der Metaphysik aufzustellen pflegt, so verdient doch ein Gedanke, der sich so lange Zeit erhalten hat, so leer er auch zu sein scheint, immer eine Untersuchung seines Ursprungs, und berechtigt zur Vermutung, daß er in irgend einer Verstandesregel seinen Grund habe, der nur, wie es oft geschieht, falsch gedolmetscht worden.
→ 그러나 고대인들의 초월철학 내에서도 순수 지성개념들을 포함하는 그 한 장이 발견된다. 그 개념들이, 비록 그것들이 범주들로 간주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따르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개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경우 그 개념들은 범주들의 수를 늘릴 것이지만, 그러한 범주일 수 없다.→ 이러한 개념들은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나 유명한 명제를 내놓는다: 있는 것은 어디서든 일이요, 진이요, 선이니라.(ens: sum present participle sons. modified form ab-sens, prae-sens, The simple form ens.)→ 이제 비록 그 결과들에 대한 의도 속에서 이러한 원칙들의 사용이 (순수한 동의이어적 명제를 주는) 매우 옹색한 결과가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또한 새로운 시대에 형이상학 안에서 거의 체면치레만을 위해 제시하곤 한다고는 할지라도, 그래서 또한 그렇게나 공허하게 보이는 것이 그렇게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것은 언제나 그것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생각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그것이 좌우간 지성규칙 안에 자주 그러하듯이 단지 그릇되게 납득되었던 근거를 가진다고 추측하게끔 한다.

Es findet sich aber in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der Alten noch ein Haupstück vor, welches reine Verstandesbegriffe enthält, die, ob sie gleich nicht unter die Kategorien gezählt werden, dennoch, nach ihnen, als Begriffe a priori von Gegenständen gelten sollten, in welchem Falle sie aber die Zahl der Kategorien vermehren würden, welches nicht sein kann.
그러나 발견된다 고대인들의 초월철학 내에서도 그 한 장이, 순수 지성개념들을 포함하는, 그 개념들이, 비록 그것들이 범주들로 간주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따르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개념들로서, 그 개념들이 그러나 범주들의 수를 넘어서게 될 경우, 그러한 것일 수 없는.
→ 그러나 고대인들의 초월철학 내에서도 순수 지성개념들을 포함하는 그 한 장이 발견된다. 그 개념들이, 비록 그것들이 범주들로 간주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따르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개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경우 그 개념들은 범주들의 수를 늘릴 것이지만, 그러한 범주일 수 없다.
Diese trägt der unter den Scholastikern so berufene Satz vor: quodlibet ens est unum, verum, bonum.
이러한 개념들은 내놓는다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나 유명한 명제를: 있는 것은 어디서든 일이요, 진이요, 선이니라.(ens: sum present participle sons. modified form ab-sens, prae-sens, The simple form ens.)
→ 이러한 개념들은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나 유명한 명제를 내놓는다: 있는 것은 어디서든 일이요, 진이요, 선이니라.(ens: sum present participle sons. modified form ab-sens, prae-sens, The simple form ens.)
Ob nun zwar der Gebrauch dieses Prinzips in Absicht auf die Folgerungen (die lauter tautologische Sätze gaben) sehr kümmerlich ausfiel, so, daß man es auch in neueren Zeiten beinahe nur ehrenhalber in der Metaphysik aufzustellen pflegt, so verdient doch ein Gedanke, der sich so lange Zeit erhalten hat, so leer er auch zu sein scheint, immer eine Untersuchung seines Ursprungs, und berechtigt zur Vermutung, daß er in irgend einer Verstandesregel seinen Grund habe, der nur, wie es oft geschieht, falsch gedolmetscht worden.
이제 비록 그 결과들에 대한 의도 속에서 이러한 원칙들의 사용이 (순수한 동의이어적 명제를 주는) 매우 옹색한 결과가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또한 새로운 시대에 형이상학 안에서 거의 체면치레만을 위해 제시하곤 한다고는 할지라도, 그래서 또한 생각할 가치가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것은, 그것이 그렇게나 공허하게 보이는, 언제나 그것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그리고 추측하게끔 한다, 그것이 좌우간 지성규칙 안에 그것의 근거를 가진다고, 그것이 단지, 그것이 자주 일어나는 것처럼, 그릇되게 납득되었던.
→ 이제 비록 그 결과들에 대한 의도 속에서 이러한 원칙들의 사용이 (순수한 동의이어적 명제를 주는) 매우 옹색한 결과가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또한 새로운 시대에 형이상학 안에서 거의 체면치레만을 위해 제시하곤 한다고는 할지라도, 그래서 또한 그렇게나 공허하게 보이는 것이 그렇게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것은 언제나 그것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생각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그것이 좌우간 지성규칙 안에 자주 그러하듯이 단지 그릇되게 납득되었던 근거를 가진다고 추측하게끔 한다.

-蟲-
Um sich dieser Übereinstimmung zu versichern, muß man bemerken: daß in allen disjunktiven Urteilen die Sphäre (die Menge alles dessen, was unter ihm enthalten ist) als ein Ganzes in Teile (die untergeordneten Begriffe) geteilt vorgestellt wird, und, weil einer nicht unter dem andern enthalten sein kann, sie als einander koordiniert, nicht subordiniert, so daß sie einander nicht einseitig, wie in einer Reihe, sondern wechselseitig, als in einem Aggregat, bestimmen (wenn ein Glied der Einteilung gesetzt wird, alle übrige ausgeschlossen werden, und so umgekehrt), gedacht werden.
→ 이러한 일치를 확신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모든 선언적 판단들에 있어서 그 범위는 (그 판단 아래에 속해지는 모든 것의 집합) 전체로서 부분(종속된 개념)으로 표상되고, 하나가 다른 것 아래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상호 병렬하고, 종속시키지 않으며, 그래서 줄에 있어서 처럼 그것들 상호에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집합체 안에 있는 것으로서 상호적으로 규정 (구분의 마디가 놓일 때, 모든 남은 것들은 제외되고, 정반대된다) 되고, 사유된다.

Nun wird eine ähnliche Verknüpfung in einem Ganzen der Dinge gedacht, da nicht eines, als Wirkung, dem andern, als Ursache seines Daseins, untergeordnet, sondern zugleich und wechselseitig als Ursache in Ansehung der Bestimmung der andern beigeordnet wird, (z.B in einem Körper, dessen Teile einander wechselseitig ziehen, und auch widerstehen,) welches eine ganz andere Art der Verknüpfung ist, als die, so im bloßen Verhältnis der Ursache zur Wirkung (des Grundes zur Folge) angetroffen wird, in welchem die Folge nicht wechselseitig wiederum den Grund bestimmt, und darum mit diesem (wie der Weltschöpfer mit der Welt) nicht ein Ganzes ausmacht. Dasselbe Verfahren des Verstandes, wenn er sich die Sphäre eines eingeteilten Begriffs vorstellt, beobachtet er auch, wenn er ein Ding als teilbar denkt, und, wie die Glieder der Einteilung im ersteren einander ausschließen und doch in einer Sphäre verbunden sind, so stellt er sich die Teile des letzteren als solche, deren Existenz (als Substanzen) jedem auch ausschließlich von den übrigen zukommt, doch als in einem Ganzen verbunden vor.
→ 이제 유사한 결합이 사물의 전체 안에서 사유된다. 왜냐하면 작용으로서 어떤 것이 그 사물의 현존의 원인으로서의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고, 동시에 상호적으로 원인으로서 다른 것의 규정에의 고려 속에서 병렬되며, (예를 들어 육체에 있어서, 육체의 부분들이 상호적으로 끌어 당기고, 또한 맞선다,) 그 안에서 결과가 상호적으로 다시금 근거를 규정하지 않고 그 근거에 대해 이 결과를 가지고 (조물주가 세계를 가지고) 전체를 형성하지 않는 그러한 작용에 대한 원인의(결과에 대한 근거의) 순전한 관계 내에서 발견되는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그러한 결합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지성이 분할된 개념의 범위를 표상할 때의 동일한 방식들을 지성이 사물을 가분적으로 생각할 때 또한 주시하고, 그리고, 분할의 마디가 전자에 있어서 상호 제외하고 또한 한 범위 내에서 결합되는 것처럼, 그렇게 지성은 자신에게 후자의 부분을 그러한 것으로서, 그 부분의 현존(실체들로서)이 각각에 또한 남은 부분들에서 배타적으로 속하고, 더욱이 전체 내에서 결합된 것으로서 표상한다.



Um sich dieser Übereinstimmung zu versichern, muß man bemerken: daß in allen disjunktiven Urteilen die Sphäre (die Menge alles dessen, was unter ihm enthalten ist) als ein Ganzes in Teile (die untergeordneten Begriffe) geteilt vorgestellt wird, und, weil einer nicht unter dem andern enthalten sein kann, sie als einander koordiniert, nicht subordiniert, so daß sie einander nicht einseitig, wie in einer Reihe, sondern wechselseitig, als in einem Aggregat, bestimmen (wenn ein Glied der Einteilung gesetzt wird, alle übrige ausgeschlossen werden, und so umgekehrt), gedacht werden.
이러한 일치를 확신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모든 선언적 판단들에 있어서 그 범위는 (그 판단 아래에 속해지는 모든 것의 집합) 전체로서 부분(종속된 개념)으로 표상되고, 하나가 다른 것 아래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상호 병렬하고, 종속시키지 않으며, 그래서 그것들 상호에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줄에 있어서 처럼, 오히려 상호적으로, 집합체 안에 있는 것으로서, 규정 (구분의 마디가 놓일 때, 모든 남은 것들은 제외되고, 정반대된다) 되고, 사유된다.
→ 이러한 일치를 확신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모든 선언적 판단들에 있어서 그 범위는 (그 판단 아래에 속해지는 모든 것의 집합) 전체로서 부분(종속된 개념)으로 표상되고, 하나가 다른 것 아래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상호 병렬하고, 종속시키지 않으며, 그래서 줄에 있어서 처럼 그것들 상호에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집합체 안에 있는 것으로서 상호적으로 규정 (구분의 마디가 놓일 때, 모든 남은 것들은 제외되고, 정반대된다) 되고, 사유된다.

Nun wird eine ähnliche Verknüpfung in einem Ganzen der Dinge gedacht, da nicht eines, als Wirkung, dem andern, als Ursache seines Daseins, untergeordnet, sondern zugleich und wechselseitig als Ursache in Ansehung der Bestimmung der andern beigeordnet wird, (z.B in einem Körper, dessen Teile einander wechselseitig ziehen, und auch widerstehen,) welches eine ganz andere Art der Verknüpfung ist, als die, so im bloßen Verhältnis der Ursache zur Wirkung (des Grundes zur Folge) angetroffen wird, in welchem die Folge nicht wechselseitig wiederum den Grund bestimmt, und darum mit diesem (wie der Weltschöpfer mit der Welt) nicht ein Ganzes ausmacht.
이제 유사한 결합이 사물의 전체 안에서 사유된다, 왜냐하면 작용으로서 어떤 것이, 다른 것에, 그 사물의 현존의 원인으로서, 종속되지 않고, 동시에 상호적으로 원인으로서 다른 것의 규정에의 고려 속에서 병렬되며, (예를 들어 육체에 있어서, 육체의 부분들이 상호적으로 끌어 당기고, 또한 맟선다,) 전적으로 다른 결합의 방식이다, 그것으로서, 작용에 대한 원인의(결과에 대한 근거의) 순전한 관계 내에서 발견되는, 그 안에서 결과가 반면에 상호적으로 근거를 규정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이것을 가지고 (조물주가 세계를 가지고) 전체를 형성하지 않는.
→ 이제 유사한 결합이 사물의 전체 안에서 사유된다. 왜냐하면 작용으로서 어떤 것이 그 사물의 현존의 원인으로서의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고, 동시에 상호적으로 원인으로서 다른 것의 규정에의 고려 속에서 병렬되며, (예를 들어 육체에 있어서, 육체의 부분들이 상호적으로 끌어 당기고, 또한 맞선다,) 그 안에서 결과가 상호적으로 다시금 근거를 규정하지 않고 그 근거에 대해 이 결과를 가지고 (조물주가 세계를 가지고) 전체를 형성하지 않는 그러한 작용에 대한 원인의(결과에 대한 근거의) 순전한 관계 내에서 발견되는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그러한 결합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Dasselbe Verfahren des Verstandes, wenn er sich die Sphäre eines eingeteilten Begriffs vorstellt, beobachtet er auch, wenn er ein Ding als teilbar denkt, und, wie die Glieder der Einteilung im ersteren einander ausschließen und doch in einer Sphäre verbunden sind, so stellt er sich die Teile des letzteren als solche, deren Existenz (als Substanzen) jedem auch ausschließlich von den übrigen zukommt, doch als in einem Ganzen verbunden vor.
지성의 동일한 방식들을, 지성이 분할된 개념의 범위를 표상할 때, 지성이 또한 주시하고, 지성이 사물을 가분적으로 생각할 때, 그리고, 분할의 마디가 전자에 있어서 상호 제외하고 또한 한 범위 내에서 결합되는 것처럼, 그렇게 지성은 자신에게 후자의 부분을 그러한 것으로서, 그 부분의 현존(실체들로서)이 각각을 또한 남은 부분들에서 배타적으로 나타나고, 더욱이 전체 내에서 결합된 것으로서 표상한다.
→ 지성은 지성이 분할된 개념의 범위를 표상할 때의 동일한 방식들을 지성이 사물을 가분적으로 생각할 때 또한 주시하고, 그리고, 분할의 마디가 전자에 있어서 상호 제외하고 또한 한 범위 내에서 결합되는 것처럼, 그렇게 지성은 자신에게 후자의 부분을 그러한 것으로서, 그 부분의 현존(실체들로서)이 각각에 또한 남은 부분들에서 배타적으로 속하고, 더욱이 전체 내에서 결합된 것으로서 표상한다.

-蟲-
So ist die Allheit (Totalitat) nichts anders als die Vielheit als Einheit betrachtet, die Einschrankung nichts anders als Realitat mit Negation verbunden, die Gemeinschaft ist die Kausalitat einer Substanz in Bestimmung der andern wechselseitig, endlich die Notwendigkeit nichts anders als die Existenz, die durch die Moglichkeit selbst gegeben ist. Man denke aber ja nicht, daß darum die dritte Kategorie ein bloß abgeleiteter und kein Stammbegriff des reinen Verstandes sei. Denn die Verbindung der ersten und zweiten, um den dritten Begriff hervorzubringen, erfodert einen besonderen Actus des Verstandes, der nicht mit dem einerlei ist, der beim ersten und zweiten ausgeubt wird. So ist der Begriff einer Zahl (die zur Kategorie der Allheit gehort) nicht immer moglich, wo die Begriffe der Menge und der Einheit sind (z.B. in der Vorstellung des Unendlichen), oder daraus, daß ich den Begriff einer Ursache und den einer Substanz beide verbinde, noch nicht so fort der Einfluß, d.i. wie eine Substanz Ursache von etwas in einer anderen Substanz werden konne, zu verstehen. Daraus erhellet, daß dazu ein besonderer Actus des Verstandes erfoderlich sei; und so bei den ubrigen.
→ 그래서 '모두(총체성)'는 '하나'로 간주된 '여럿'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제한'은 사실의 부정과의 결합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결합은 상호간에 다른 실체의 규정 속에서 한 실체의 인과성이고, 끝으로 필연성은 가능성 자체를 통하여 주어지는 현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 세번째 범주는 순전히 파생된 것이고 전혀 순수지선의 기초개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의 결합은, 세번째 개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지성의 특수한 활동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그 활동이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에 있어서 수행되는 활동과 동종이 아니다.→ 그래서 수의 개념은 ('모두'의 범주에 속하는)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은데, 양의 개념과 '하나'의 개념이 있는 곳(예를 들어 무한의 표상 안에서)에서 그렇고, 혹은 내가 원인의 개념을 실체의 개념과 함께 결합하는 것으로부터, 즉각 유입이, 즉 어떻게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에 있어서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그로부터, 그에 대해 지성의 특수한 활동이 필수적이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도 그렇다.

3te Anmerk. Von einer einzigen Kategorie, namlich der der Gemeinschaft, die unter dem dritten Titel befindlich ist, ist die Ubereinstimmung mit der in der Tafel der logischen Funktionen ihr korrespondierenden Form eines disjunktiven Urteils nicht so in die Augen fallend, als bei den ubrigen.
→ 세번째 주해. 유일한 범주, 즉 세번째 제목 아래에 있는 결합의 범주에 대해서, 논리적 기능들의 도표에서의 그 제목과 선언판단의 그 제목의 상응하는 형식의 일치는,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 만큼 그렇게 눈에 띄이지는 않는다.


So ist die Allheit (Totalitat) nichts anders als die Vielheit als Einheit betrachtet, die Einschrankung nichts anders als Realitat mit Negation verbunden, die Gemeinschaft ist die Kausalitat einer Substanz in Bestimmung der andern wechselseitig, endlich die Notwendigkeit nichts anders als die Existenz, die durch die Moglichkeit selbst gegeben ist.
그래서 '모두(총체성)'는 '하나'로 간주된 '여럿'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제한'은 사실의 부정과의 결합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결합은 상호간에 다른 실체의 규정 속에서 한 실체의 인과성이고, 끝으로 필연성은 가능성 자체를 통하여 주어지는 현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 그래서 '모두(총체성)'는 '하나'로 간주된 '여럿'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제한'은 사실의 부정과의 결합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결합은 상호간에 다른 실체의 규정 속에서 한 실체의 인과성이고, 끝으로 필연성은 가능성 자체를 통하여 주어지는 현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Man denke aber ja nicht, daß darum die dritte Kategorie ein bloß abgeleiteter und kein Stammbegriff des reinen Verstandes sei.
그러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관해 세번째 범주는 순전히 파생된 것이고 전혀 순수지선의 기초개념은 아닐 것이라고.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 세번째 범주는 순전히 파생된 것이고 전혀 순수지선의 기초개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Denn die Verbindung der ersten und zweiten, um den dritten Begriff hervorzubringen, erfodert einen besonderen Actus des Verstandes, der nicht mit dem einerlei ist, der beim ersten und zweiten ausgeubt wird.
왜냐하면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의 결합은, 세번째 개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지성의 특수한 활동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그 활동이 활동과 동종이 아니다,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에 있어서 수행되는.
→ 왜냐하면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의 결합은, 세번째 개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지성의 특수한 활동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그 활동이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에 있어서 수행되는 활동과 동종이 아니다.
So ist der Begriff einer Zahl (die zur Kategorie der Allheit gehort) nicht immer moglich, wo die Begriffe der Menge und der Einheit sind (z.B. in der Vorstellung des Unendlichen), oder daraus, daß ich den Begriff einer Ursache und den einer Substanz beide verbinde, noch nicht so fort der Einfluß, d.i. wie eine Substanz Ursache von etwas in einer anderen Substanz werden konne, zu verstehen.
그래서 수의 개념은 ('모두'의 범주에 속하는)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은데, 양의 개념과 '하나'의 개념이 있는 곳(예를 들어 무한의 표상 안에서)에서, 혹은 그로부터, 내가 원인의 개념을 실체의 개념과 함께 결합하는 것, 즉각 유입이, 즉 어떻게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에 있어서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
→ 그래서 수의 개념은 ('모두'의 범주에 속하는)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은데, 양의 개념과 '하나'의 개념이 있는 곳(예를 들어 무한의 표상 안에서)에서 그렇고, 혹은 내가 원인의 개념을 실체의 개념과 함께 결합하는 것으로부터, 즉각 영향이, 즉 어떻게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에 있어서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Daraus erhellet, daß dazu ein besonderer Actus des Verstandes erfoderlich sei; und so bei den ubrigen.
그로부터 자명하다, 그에 대해 지성의 특수한 활동이 필수적이리라는 것은; 그리고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도 그렇다.
→ 그로부터, 그에 대해 지성의 특수한 활동이 필수적이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도 그렇다.

3te Anmerk. Von einer einzigen Kategorie, namlich der der Gemeinschaft, die unter dem dritten Titel befindlich ist, ist die Ubereinstimmung mit der in der Tafel der logischen Funktionen ihr korrespondierenden Form eines disjunktiven Urteils nicht so in die Augen fallend, als bei den ubrigen.
세번째 주해. 유일한 범주, 즉 결합의 범주에 대해서, 세번째 제목 아래에 있는, 논리적 기능들의 도표에서의 그 범주와 선언파단의 그 범주의 상응하는 형식의 일치는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 만큼.
→ 세번째 주해. 유일한 범주, 즉 세번째 제목 아래에 있는 결합의 범주에 대해서, 논리적 기능들의 도표에서의 그 제목과 선언판단의 그 제목의 상응하는 형식의 일치는,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 만큼 그렇게 눈에 띄이지는 않는다.
Die erste ist: daß sich diese Tafel, welche vier Klassen von Verstandesbegriffen enthält, zuerst in zwei Abteilungen zerfällen lasse, deren erstere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der reinen sowohl als empirischen), die zweite aber auf die Existenz dieser Gegenstände (entweder in Beziehung auf einander oder auf den Verstand) gerichtet sind.
→ 첫번째 주해는: 지성개념들에 대한 네 가지 부문들을 포함하는 이러한 도표가 먼저 두 구분으로 나뉘어 있고, 그 중의 첫번째 것은 직관의 대상들에 대해 (순수한 직관뿐만 아니라 경험적 직관까지도), 그러나 두번째 것은 이러한 대상들의 현존에 대해 (상호에 관해서든지성에 관해서든) 향해진다는 것이다.

Die erste Klasse würde ich die der mathematischen, die zweite der dynamischen Kategorien nennen. Die erste Klasse hat, wie man sieht, keine Korrelate, die allein in der zweiten Klasse angetroffen werden. Dieser Unterschied muß doch einen Grund in der Natur des Verstandes haben.
→ 그 첫번째 부문을 나는 수학적 범주들의 부문, 두번째 부문을 역학적 범주들의 부문이라 명명할 것이다.→ 첫번째 부문은, 사람들이 보았듯이, 오로지 두번째 부문에서만 발견되는 어떠한 상관개념들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지성의 본성에 이유를 가짐에 틀림없다.

2te Anmerk. Daß allerwärts eine gleiche Zahl der Kategorien jeder Klasse, nämlich drei sind, welches eben sowohl zum Nachdenken auffodert, da sonst alle Einteilung a priori durch Begriffe dichotomie sein muß. Dazu kommt aber noch, daß die dritte Kategorie allenthalben aus der Verbindung der zweiten mit der ersten ihrer Klasse entspringt.
→ 두번째 주해. 어느 곳에서나 각 부문의 범주들의 수는 똑같이 셋이다. 더욱이 모든 구분들은 선험적으로 개념들을 통해 양분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똑같이 숙고를 요구한다.→ 그러나 게다가 세번째 범주들이 어디에서나 그 범주들의 부문의 두번째 것과 세번째 것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 있다.


Die erste ist: daß sich diese Tafel, welche vier Klassen von Verstandesbegriffen enthält, zuerst in zwei Abteilungen zerfällen lasse, deren erstere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der reinen sowohl als empirischen), die zweite aber auf die Existenz dieser Gegenstände (entweder in Beziehung auf einander oder auf den Verstand) gerichtet sind.
첫번째 주해는: 이러한 도표가, 지성개념들에 대한 네 가지 부문들을 포함하는, 먼저 두 구분으로 나뉘어 있고, 그 중의 첫번째 것이 직관의 대상들에 대해 (순수한 직관뿐만 아니라 경험적 직관까지도), 그러나 두번째 것은 이러한 대상들의 현존에 대해 (상호에 관해서든지성에 관해서든) 향해진다는 것이다.
→ 첫번째 주해는: 지성개념들에 대한 네 가지 부문들을 포함하는 이러한 도표가 먼저 두 구분으로 나뉘어 있고, 그 중의 첫번째 것은 직관의 대상들에 대해 (순수한 직관뿐만 아니라 경험적 직관까지도), 그러나 두번째 것은 이러한 대상들의 현존에 대해 (상호에 관해서든지성에 관해서든) 향해진다는 것이다.

Die erste Klasse würde ich die der mathematischen, die zweite der dynamischen Kategorien nennen.
그 첫번째 부문을 나는 수학적 범주들의 부문, 두번째 부문을 역학적 범주들의 부문이라 명명할 것이다.
→ 그 첫번째 부문을 나는 수학적 범주들의 부문, 두번째 부문을 역학적 범주들의 부문이라 명명할 것이다.
Die erste Klasse hat, wie man sieht, keine Korrelate, die allein in der zweiten Klasse angetroffen werden.
첫번째 부문은, 사람들이 보았듯이, 어떠한 상관개념들도 가지지 않는다, 그 상관개념들이 오로지 두번째 부문에서만 발견되는.
→ 첫번째 부문은, 사람들이 보았듯이, 오로지 두번째 부문에서만 발견되는 어떠한 상관개념들도 가지지 않는다.
Dieser Unterschied muß doch einen Grund in der Natur des Verstandes haben.
이러한 구분은 지성의 본성에 이유를 가짐에 틀림없다.
→ 이러한 구분은 지성의 본성에 이유를 가짐에 틀림없다.

2te Anmerk. Daß allerwärts eine gleiche Zahl der Kategorien jeder Klasse, nämlich drei sind, welches eben sowohl zum Nachdenken auffodert, da sonst alle Einteilung a priori durch Begriffe dichotomie sein muß.
두번째 주해. 어느 곳에서나 각 부문의 범주들의 동일한 수가, 즉 셋이, 똑같이 숙고를 요구하는, 더욱이 모든 구분들은 선험적으로 개념들을 통해 양분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 두번째 주해. 어느 곳에서나 각 부문의 범주들의 수는 똑같이 셋이다. 더욱이 모든 구분들은 선험적으로 개념들을 통해 양분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똑같이 숙고를 요구한다.
Dazu kommt aber noch, daß die dritte Kategorie allenthalben aus der Verbindung der zweiten mit der ersten ihrer Klasse entspringt.
그러나 게다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세번째 범주들이 어디에서나 그 범주들의 부문의 두번째 것과 세번째 것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
→ 그러나 게다가 세번째 범주들이 어디에서나 그 범주들의 부문의 두번째 것과 세번째 것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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