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In der natürlichen Theologie, da man sich einen Gegenstand denkt, der nicht allein für uns gar kein Gegenstand der Anschauung, sondern der ihm selbst durchaus kein Gegenstand der sinnlichen Anschauung sein kann, ist man sorgfältig darauf bedacht, von aller seiner Anschauung (denn dergleichen muß alles sein Erkenntnis sein, und nicht Denken, welches jederzeit Schranken beweiset) die Bedingungen der Zeit und des Raumes wegzuschaffen. Aber mit welchem Rechte kann man dieses tun, wenn man beide vorher zu Formen der Dinge an sich selbst gemacht hat, und zwar solchen, die, als Bedingungen der Existenz der Dinge a priori, übrig bleiben, wenn man gleich die Dinge selbst aufgehoben hätte: denn, als Beidngungen alles Daseins überhaupt, müßten sie es auch vom Dasein Gottes sein. Es bleibt nichts übrig, wenn man sie nicht zu objektiven Formen aller Dinge machen will, als daß man sie zu subjektiven Formen unserer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Anschauungsart macht, die darum sinnlich heißt, weil sie nicht ursprünglich, d.i. eine solche ist, durch die selbst das Dasein des Objekts der Anschauung gegeben wird (und die, so viel wir einsehen, nur dem Urwesen zukommen kann), sondern von dem Dasein des Objekts abhängig, mithin nur dadurch, daß die Vorstellungsfähigkeit des Subjekts durch dasselbe affiziert wird, möglich ist.

→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면밀하게,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이,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를 통해 그 형식들은 감각적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Ⅳ. In der natürlichen Theologie, da man sich einen Gegenstand denkt, der nicht allein für uns gar kein Gegenstand der Anschauung, sondern der ihm selbst durchaus kein Gegenstand der sinnlichen Anschauung sein kann, ist man sorgfältig darauf bedacht, von aller seiner Anschauung (denn dergleichen muß alles sein Erkenntnis sein, und nicht Denken, welches jederzeit Schranken beweiset) die Bedingungen der Zeit und des Raumes wegzuschaffen.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사람들은 면밀하게 그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그것의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을.

→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면밀하게,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Aber mit welchem Rechte kann man dieses tun, wenn man beide vorher zu Formen der Dinge an sich selbst gemacht hat, und zwar solchen, die, als Bedingungen der Existenz der Dinge a priori, übrig bleiben, wenn man gleich die Dinge selbst aufgehoben hätte:

그러나 그런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에 앞서 형성하였다면,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에, 그것들이,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는,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denn, als Beidngungen alles Daseins überhaupt, müßten sie es auch vom Dasein Gottes sein.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이,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s bleibt nichts übrig, wenn man sie nicht zu objektiven Formen aller Dinge machen will, als daß man sie zu subjektiven Formen unserer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Anschauungsart macht, die darum sinnlich heißt, weil sie nicht ursprünglich, d.i. eine solche ist, durch die selbst das Dasein des Objekts der Anschauung gegeben wird (und die, so viel wir einsehen, nur dem Urwesen zukommen kann), sondern von dem Dasein des Objekts abhängig, mithin nur dadurch, daß die Vorstellungsfähigkeit des Subjekts durch dasselbe affiziert wird, möglich ist.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그 형식들이 그를 통해 감각적이라고 불리는,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다.

→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를 통해 그 형식들은 감각적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