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n sind Veränderungen nur in der Zeit möglich, folglich ist die zeit etwas Wirkliches. Die Beantwortung hat keine Schwierigkeit. Ich gabe das ganze Argument zu. Die Zeit ist allerdings etwas Wirkliches, nämlich die wirkliche Form der innern Anschauung. Sie hat also subjektive Realität in Ansehung der innern Erfahrung, d.i. ich habe wirklich die Vorstellung von der Zeit und meinen Bestimmungen in ihr. Sie ist also wirklich nicht als Objekt, sondern als die vorstellungsart meiner selbst als Objekts anzusehen. Wenn aber ich selbst, oder ein ander Wesen mich, ohne diese Bedingung der Sinnlichkeit, anschauen könnte, so würden eben dieselben Bestimmungen, die wir uns jetzt als Veränderungen vorstellen, eine Erkenntnis geben, in welcher die Vorstellung der Zeit, mithin auch der Veränderung, gar nicht vorkäme. Es bleibt also ihre empirische Realität als Bedingung aller unsrer Erfahrungen. Nur die absolute Realität kann ihr nach dem oben Angeführten nicht zugestanden werden. Sie ist nichts, als die Form unsrer inneren Anschauung¹. Wenn man von ihr die besondere Bedingung unserer Sinnlichkeit wegnimmt, so verschwindet auch der Begriff der Zeit, und sie hängt nicht an den Gegenständen selbst, sondern bloß am Subjekte, welches sie anschauet.

→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인정한다.→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동일한 규정들이, 그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인식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¹Ich kann zwar sagen: meine Vorstellungen folgen einander; aber das heißt nur, wir sind uns ihrer, als in einer Zeitfolge, d.i. nach der Form des innern Sinnes, bewußt. Die Zeit ist darum nicht etwas an sich selbst, auch keine den Dingen objektiv anhängende Bestimmung.

→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Die Ursache aber, weswegen dieser Einwurf so einstimmig gemacht wird, und zwar von denen, die gleichwohl gegen die Lehre von der Idealität des Raumes nichts Einleuchtendes einzuwenden wissen, ist diese. Die absolute Reaität des Raumes hoffeten sie nicht apodiktisch dartun zu können, weil ihnen der Idealismus entgegensteht, nach welchem die Wirklichkeit äußerer Gegenstände keines strengen Beweises fähig ist: Dagegen die des Gegenstandes unserer innern Sinnen (meiner selbst und meines Zustandes) unmittelbar durchs Bewußtsein klar ist. Jene konnten ein bloßer Schein sein, dieser aber ist, ihrer Meinung nach, unleugbar etwas Wirkliches. Sie bedachten aber nicht, daß beide, ohne daß man ihre Wirklichkeit als Vorstellungen bestreiten darf, gleichwohl nur zur Erscheinung gehören, welche jederzeit zwei Seiten hat, die eine, da das Objekt an sich selbst getrachtet wird, (unangesehen der Art, dasselbe anzuschauen, dessen Beschaffenheit aber eben darum jederzeit problematisch bleibt,) die andere, da auf die Form der Anschauung dieses Gegestandes gesehen wird, welche nicht in d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sondern im Subjekte, dem derselbe erscheint, gesucht werden muß gleichwohl aber der Erscheinung dieses Gegenstandes wirklich und notwendig zukommt.

→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지만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현상하는 주관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Zeit und Raum sind demnach zwei Erkenntnisquellen, aus denen a priori synthetische Erkenntnisse geschöpft werden können, wie vornehmlich die reine Mathematik in Ansehung der Erkenntnisse vom Raume und dessen Verhältnissen ein glänzendes Beispiel gibt. Sie sind nämlich beide zusammengenommen reine Formen aller sinnlichen Anschauung, und machen dadurch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Aber diese Erkenntnisquellen a priori bestimmen sich eben dadurch (daß sie bloß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sein) ihre Grenzen, nämlich, daß sie bloß auf Gegenstände gehen, so fern sie als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nicht aber Dinge an sich selbst darstellen. Jene allein sind das Feld ihrer Gültigkeit, woraus wenn man hinausgehet, weiter kein objektiver Gebaruch derselben stattfindet. Dies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läßt übrigens die Sicherheit der Erfahrungskenntnis unangetastet: denn wir sind derselben eben so gewiß, ob diese Formen den Dingen an sich selbst, oder nur unsrer Anschauung dieser Dinge notwendiger Wiese anhängen. Dagegen die, so die absolut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behaupten, sie mögen sie nun als subsistierend, oder nur inhärierend annehmen, mit den Prinzipien der Erfahrung selbst uneinig sein müssen. Denn, entschließen sie sich zum ersteren, (welches gemeiniglich die Partei der mathematischen Naturforscher ist,) so müseen sie zwei ewige und unendliche vor sich bestehende Undinge (Raum und Zeit) annehmen, welche dasind (ohne daß doch etwas Wirkliches ist), nur um alles Wirkliche in sich zu befassen.

→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상으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저것만이,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Nun sind Veränderungen nur in der Zeit möglich, folglich ist die zeit etwas Wirkliches.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Die Beantwortung hat keine Schwierigkeit.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Ich gabe das ganze Argument zu.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시인한다.

→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인정한다.

Die Zeit ist allerdings etwas Wirkliches, nämlich die wirkliche Form der innern Anschauung.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Sie hat also subjektive Realität in Ansehung der innern Erfahrung, d.i. ich habe wirklich die Vorstellung von der Zeit und meinen Bestimmungen in ihr.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Sie ist also wirklich nicht als Objekt, sondern als die vorstellungsart meiner selbst als Objekts anzusehen.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Wenn aber ich selbst, oder ein ander Wesen mich, ohne diese Bedingung der Sinnlichkeit, anschauen könnte, so würden eben dieselben Bestimmungen, die wir uns jetzt als Veränderungen vorstellen, eine Erkenntnis geben, in welcher die Vorstellung der Zeit, mithin auch der Veränderung, gar nicht vorkäme.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동일한 규정들이, 그 규정들을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인식을 줄 것이다, 그 인식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동일한 규정들이, 그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인식을 줄 것이다.

Es bleibt also ihre empirische Realität als Bedingung aller unsrer Erfahrungen.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Nur die absolute Realität kann ihr nach dem eben Angeführten nicht zugestanden werden.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Sie ist nichts, als die Form unsrer inneren Anschauung¹.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Wenn man von ihr die besondere Bedingung unserer Sinnlichkeit wegnimmt, so verschwindet auch der Begriff der Zeit, und sie hängt nicht an den Gegenständen selbst, sondern bloß am Subjekte, welches sie anschauet.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그것들을 직관하는.

→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¹Ich kann zwar sagen: meine Vorstellungen folgen einander; aber das heißt nur, wir sind uns ihrer, als in einer Zeitfolge, d.i. nach der Form des innern Sinnes, bewußt.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의미할 따름이다,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Die Zeit ist darum nicht etwas an sich selbst, auch keine den Dingen objektiv anhängende Bestimmung.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Die Ursache aber, weswegen dieser Einwurf so einstimmig gemacht wird, und zwar von denen, die gleichwohl gegen die Lehre von der Idealität des Raumes nichts Einleuchtendes einzuwenden wissen, ist diese.

그러나 그 원인들은,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리고 더욱이 그 원인들에 대해서, 그것(원인)들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것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다.

→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Die absolute Reaität des Raumes hoffeten sie nicht apodiktisch dartun zu können, weil ihnen der Idealismus entgegensteht, nach welchem die Wirklichkeit äußerer Gegenstände keines strengen Beweises fähig ist: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Dagegen die des Gegenstandes unserer innern Sinnen (meiner selbst und meines Zustandes) unmittelbar durchs Bewußtsein klar ist.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Jene konnten ein bloßer Schein sein, dieser aber ist, ihrer Meinung nach, unleugbar etwas Wirkliches.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지만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Sie bedachten aber nicht, daß beide, ohne daß man ihre Wirklichkeit als Vorstellungen bestreiten darf, gleichwohl nur zur Erscheinung gehören, welche jederzeit zwei Seiten hat, die eine, da das Objekt an sich selbst getrachtet wird, (unangesehen der Art, dasselbe anzuschauen, dessen Beschaffenheit aber eben darum jederzeit problematisch bleibt,) die andere, da auf die Form der Anschauung dieses Gegestandes gesehen wird, welche nicht in d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sondern im Subjekte, dem derselbe erscheint, gesucht werden muß, gleichwohl aber der Erscheinung dieses Gegenstandes wirklich und notwendig zukommt.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 안에서, 그 주관에 그 대상이 현상하는, 찾아져야만 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현상하는 주관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Zeit und Raum sind demnach zwei Erkenntnisquellen, aus denen a priori synthetische Erkenntnisse geschöpft werden können, wie vornehmlich die reine Mathematik in Ansehung der Erkenntnisse vom Raume und dessen Verhältnissen ein glänzendes Beispiel gibt.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그것들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Sie sind nämlich beide zusammengenommen reine Formen aller sinnlichen Anschauung, und machen dadurch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Aber diese Erkenntnisquellen a priori bestimmen sich eben dadurch (daß sie bloß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sein) ihre Grenzen, nämlich, daß sie bloß auf Gegenstände gehen, so fern sie als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nicht aber Dinge an sich selbst darstellen.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현상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상으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Jene allein sind das Feld ihrer Gültigkeit, woraus wenn man hinausgehet, weiter kein objektiver Gebaruch derselben stattfindet.

오로지 저것만이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 오로지 저것만이,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Dies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läßt übrigens die Sicherheit der Erfahrungskenntnis unangetastet: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denn wir sind derselben eben so gewiß, ob diese Formen den Dingen an sich selbst, oder nur unsrer Anschauung dieser Dinge notwendiger Wiese anhängen.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Dagegen die, so die absolut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behaupten, sie mögen sie nun als subsistierend, oder nur inhärierend annehmen, mit den Prinzipien der Erfahrung selbst uneinig sein müssen.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Denn, entschließen sie sich zum ersteren, (welches gemeiniglich die Partei der mathematischen Naturforscher ist,) so müssen sie zwei ewige und unendliche vor sich bestehende Undinge (Raum und Zeit) annehmen, welche dasind (ohne daß doch etwas Wirkliches ist), nur um alles Wirkliche in sich zu befassen.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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