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Aaron Hillel Swartz (November 8, 1986 – January 11, 2013). 

 

0. 나는 앎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국가』 1권에서 주장하는 바가 앎의 사적이고 배타적인 독점에 대한 비판에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타의 관습적 가치들과 달리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이 점에서, 앎은 서로 다른 기능과 역할 그리고 능력을 가진 상이한 개인들이 한 마음 한 뜻 한 몸과 같은 사회를 이루는 데에 기여할 여지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앎을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당대 소피스트들의 행태는 플라톤이 보기에 심각하게 반사회적인 것이며 부정의한 짓이었을지도 모른다.

 

0. 학술적 지식은 시장경제의 수요와 공급 논리에 맡겨 놓을 경우 아마 자생적으로 보전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위 상품가치라는 것은 앎 그 자체에서 나오지를 않고 무언가에 적용하고 활용한 다음에야 비로소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의 공적 성격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하여 맹목적 지원을 통해 학술활동을 보호하든지, 아니면 거짓 실용성이나 거짓 상품성을 가공해내 지식 그 자체를 판매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후자의 경우 다시,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고 진입장벽은 높이되 접근성은 낮추면서 팔아먹는 방식이 가능할 것이다. 대중과 사회에 특정 분야의 지극히 전문적인 지식을 그 정당성이나 타당성 자체만을 놓고 평가할 시간적 여유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고, 그 평가절차를 간소화하는 수단 중에 하나가 저 권위라는 것일 텐데, 이를 획득 가능한 재화처럼 취급하고 또 독점하면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20대 청년이 반대하다 좌절하고 스러져버린 허구적인 구조, 2500년 전부터 비판받아온 기이하고 허무맹랑한 가짜 상품이 앞으로 언제까지 사기행각을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0. 도서관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런데 도서관의 저 거대 출판사들을 향한 비판 논리는 다시 사회가 대학에 대해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저술과 강의를 '팔아야' 먹고 사는 처지인 오늘날의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학자들 역시 같은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을까. 그러나 사회는 학문의 '무임승차'를 허용하지 않을 듯하고, 국공립연구소와 기업 산하 연구소가 구분되지 않을 것이고, 극소수의 대중적 명성을 획득한 광대들과 또 다른 한편에서 저 권위의 철옹성 가장 높은 곳의 권좌를 차지한 자들, 그리고 이 모든 광대극의 기획자들 말고는 학계에서 살아남을 연구자가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닌가? 아직도 설득의 여지는 남아 있나?

 

0. 아마도 상당수의 학술자료는 불법적인 경로로 유출되고 있을 것이고, 이것이 그러한 자료를 취급 관리하는 단체나 기관에 경제적 손실을 끼칠 것이고, 그 손실을 극복하고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저쪽에서는 자료의 가격을 높일 것이고 유출을 차단하기 위해 갈수록 접근을 어렵게 만들 것이며 열심히 고소고발에 매진할 것인데, 그러면 다시 학술자료가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사람들은 다시 그 자료를 훔치려 들 것이고, 어쨌든 이 균형이 어디에선가는 끊어질 거라 본다. 공공교육의 양적 확대가 어느모로보나 세계 전체에 유익하다는 걸 지금에 와서 다시 떠들어야 한다면 그것도 참 지칠 일이고, 무슨 고대 비교의 신관도 아니고 중세 사제도 아니고 조선 양반도 아니고, 인터넷 시대에 저 치들이 지식을 냅다 흩뿌리지 않고 두 손에 아등바등 움켜쥐고서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나는 애런 슈워츠 편이다. 아마 소크라테스가 이 친구를 만났다면 사자 앞의 사슴처럼 콩닥대는 가슴으로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으려나.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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