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소피스트는 무언가의 가상제작자, 즉 모방자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소피스트가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모방하는지에 대한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 『소피스트』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사람들로부터 지혜로운 자라고 여겨지며, 바로 그러한 평판 덕분에 젊은이들을 사냥하거나 돈을 받거나 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아무도 그를 지혜로운 자라고 여기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돈을 가져다 바치고 자신의 자식을 교육해 달라 맡기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아마도 그는 지혜로운 자처럼 보이는, 즉, 지혜로운 자를 모방하는 자라고는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소피스트는 마치 사냥술도 가지고 상술도 가지며 쟁론술도 또 논박술(검증술, 엘렝코스)도 가진 것처럼 나타나며, 각 기술자는 그 각각의 고유한 기술로 정의되므로, 소피스트라는 것이 어떠한 고유한 전문직의 유라면 저 여러 기술들 모두에 의해 규정될 수는 없다. 그는 소피스트술이라는 단일한 기술에 의해 소피스트로 있게 되는 것이며, 반면에 그가 마치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앞서 언급된 기술들은 단일한 기술자 유에 대한 정의로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사냥은 말이든 행동이든 대상을 강제로 제압하여 획득해내는 기술인 반면 상술은 대상을 거래와 계약을 통해 그 대가가 되는 것과 교환하는 기술이며, 단일한 기술이 강제로 제압하는 동시에 또한 교환하는 것이기도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는 일련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일관되게 말로써 상대방을 반박하는 행위를 수행하며, 아마도 이 점이 그의 고유한 기술에 핵심이 되는 특징일 것이다.

주목할 점은 소피스트에 대한 여섯 번째 규정 시도에서 획득된 결론으로서 그가 영혼을 정화하는 엘렝코스를 사용하는 자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엘렝코스는 플라톤의 소위 초중기 대화편들에서 일관되게 소크라테스가 사용하는 기술로서 묘사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 자신의 무지를 공언하는 자이며,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지는 몰라도 최소한 지혜로운 자 그 자신이라고는 말하기 곤란할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는 상대방이 지혜를 잉태하고 있는지 혹은 지혜를 견지하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무지한데 스스로 지혜롭다고 착각하고 있는 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두 측면을 함께 고려하면, 엘렝코스를 수행한다는 것 그 자체로는 이 수행자 자신이 지혜로운지 여부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엘렝코스는 상대가 지닌 믿음들이 상충하고 모순될 때 이를 지적함으로써 상대의 무지를 자각하도록 만들지만, 상대가 지혜롭다면 그가 모순된 믿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줄 뿐 피논박자에게 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소피스트가 만일 지혜로운 자를 모방하고 그 결과 지혜로운 자처럼 여겨지고 있고 이것이 그의 소피스트술을 사용한 귀결이라면, 엘렝코스는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이 귀결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며 소피스트술과 곧장 동일시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른 한편 무지한 소크라테스도 지혜로운 현자도 상대방의 지혜로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엘렝코스를 사용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고, 그렇다면 같은 일을 소피스트는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상대에게 묻고 동의를 구하고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상대가 동의한 것들 사이에 혹은 부정한 것들 사이에 모순이 드러난다면, 상대는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설령 소피스트가 궤변을 통해 작위적으로 상대를 기만한다 하더라도, 또는 그것이 지나치게 유치하고 억지스러워 피논박자가 어이없어 하고 성질을 낸다 하더라도, 결국 소피스트가 상대방에게 지적하는 모순을 실제로 유의미하게 해결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는 변증술적 앎이 필요하다. 어떤 것이 결합하고 또 어떤 것이 분리되며 그것들은 어떠한 기준과 조건에 따르는지, 이를 알지 못한다면 소피스트의 궤변이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이에 대해 제대로 항변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피논박자는 짜증스럽고 화가 나더라도 어찌 되었든 자신이 소피스트가 제기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변증술적 앎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는 지혜를 추구하는 소크라테스나 혹은 지혜를 획득한 현자가 엘렝코스를 사용했을 때와 결국은 같은 결론일 수 있다. 제대로 건전한 논박의 과정을 거친 결과도 피논박자가 자신의 변증술적 앎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게 되는 것임은 같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 시인, 장인, 정치가 등등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분야에서는 확고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를 거쳐 무지를 자각하고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를 향해 화를 내거나 아니면 자신을 반성하고 소크라테스에게 배움을 청하거나 이러저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자 자신의 전문영역에 있어서는 그에 한정하여 아는 자라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엘렝코스를 통해 드러날 무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무지는 결국 모순을 범하지 않고 또 이를 극복해내기도 하는 데에 필요한 바로 그러한 앎, 결합과 분리의 질서에 대한 앎의 결여인 것이다. 

엘렝코스를 사용하는 측면에서 무지하되 지혜를 추구하는 소크라테스, 무지하되 지혜를 가장하는 소피스트, 지혜로운 자 셋 모두가 구분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이 셋은 구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파르메니데스』에서 제논과 파르메니데스의 엘렝코스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 결과 자신이 내세우는 형상이론과 관련하여 자기 자신이 결합과 분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그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반면 앞서 이야기하였듯 지혜로운 자는 아마도 같은 엘렝코스 상황에서 결합과 분리의 질서를 정확히 인지하고서 이에 따라 여러 난해한 하나와 여럿이니 있고 있지 않고 하는 등등의 문제를 해결해낼 것이다. 그러한 해결은 『소피스트』에서 실제로 손님에 의해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피스트의 경우, 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를 아이러니한 기만이라 비방하며 이에 응하기를 거부한다.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 『고르기아스』에서 칼리클레스, 『프로타고라스』에서 프로타고라스나 『에우튀데모스』에서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 등이 모두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고 함정을 파서 대화상대를 아포리아에 빠지게 만든다고 욕을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 지혜로운지 여부를 확인할 여지는 허용하지 않는다. Beere의 진단은 이 점에서 설득력이 있는데, 단지 엘렝코스를 사용한다는 능동적 측면만으로는 사용자가 지혜로운지 여부가 판별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소피스트는 그 엘렝코스나 반박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지혜롭다는 평판을 얻는데, 그러나 같은 일이 소크라테스에게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문제를 나름 설득력있게 설명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소피스트는 논박을 수행하기는 하되 논박을 당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그에 의해 논박을 당한 자(무지를 자각한 자)와 이를 지켜본 대중이 보기에는 소피스트와 그의 반박상대 중 후자는 확실히 무지한 자인 반면 소피스트 자신은 지혜로운지 무지한지 알 수 없는 자가 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처럼 자기 자신의 무지 또한 공언한다면, 혹은 자신의 지혜에 근거하여 다른 이들의 검증으로서 엘렝코스를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허용한다면, 소피스트는 단적으로 지혜롭거나 아니면 무지한 것으로 확정될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는 자신의 무지를 알고 이것이 들킬까 두려워하며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아이러니하게, 즉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자 한다. 타인들을 반박해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소피스트 자신은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이 상대적 우위가 가진 불확실성(지혜로운 자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지 무지한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에 아는 척을 더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자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비어가 주장하는 거짓 논박이나 거짓 모순은 딱히 소피스트가 지혜로운 자를 기만적 방식으로 모방하는 데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 내가 첨언하고자 하는 바이다. 반박을 가하는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반박하는지 여부는 상관없으며, 실상 그 구체적인 내용조차도 별로 중요치 않다. 문제는 결국 피반박자가 변증술적 지혜의 결여로서 그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지 여부이며, 이 부분에서의 반박은 실제로 실현되어야 위의 구도가 비로소 성립한다. 소피스트의 대화 상대자가 무지를 자각하게 되지 않는다면, 소피스트의 반박이 건전한 엘렝코스일 경우 그저 상대방의 지혜로움이 확인될 뿐일 것이고, 그것이 가짜 논박에 불과한 경우 소피스트에게 사람들이 환호하고 자발적으로 배움을 청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거짓, 가짜 논박에 넘어가면 넘어가는대로 그 허위를 지적해낼 능력이 없음이 밝혀지는 것이고, 이것이 거짓이고 기만임을 제대로 해명해낸다면 지혜로운 자로 드러나며, 그러나 이러한 폭로를 위한 철학적 지식은 현자나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소피스트가 상대하는 통상의 상대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피스트의 논박이 거짓이든 참이든 그 결과 상대방이 자신의 변증술적 무지를 자각하는 점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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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의 그 지혜는 모순을 범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확인된다. 그러나 반박의 이러한 수동적 측면이 아닌 능동적 측면을 모방함으로써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자의 비율을 왜곡하여 모방한다. 반면 지혜로운 자를 제대로 모방하는 자는 반박을 가하는 쪽이 아닌 반박을 당하는 측면을 모방하는 자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가 지혜로운 자로 나타나는 본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을 그것이 아름다운 그 점에서가 아닌 다른 측면에서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는 방식으로 모방하는 경우와 그냥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경우의 구분에도 부합한다.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자의 그 논박을 잘못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논박을 모방함으로써 지혜로운 자를 잘못 모방하는 것이다. 늑대와 개의 구분은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사이의 구분이 아니라 그냥 지혜로운 자와 소피스트 사이의 구분에 대한 유비이다.

 

0. 소피스트는 모르는 자로서 가상을 제작한다. 이에 대비하여 모르는 자가 모상을 제작하는 경우가 가능한지, 그리고 간단히 언급되기만 하고 지나가는 아는 자가 제작하는 가상은 소피스트의 가상과 어떻게 다른지 등등의 문제가 남는다. 또한 이러한 가상이나 모상의 분할 과정에서 원본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혜로운 자 그 자신이 원본인 경우가 있고 지혜로운 자의 말이나 생각이 원본인 경우도 있을 것이며, 이러저러한 덕이라든지 참이라든지 다른 맥락에서 원본이 되는 것들도 고려될 여지가 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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