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얼마 전 온라인으로 학술발표회가 있어 참석했다. 국내에 관련전공자가 없다시피 한 분야를 전공하고 오신 분께서 현재까지도 한창 진행 중인 작업의 말하자면 중간결과 같은 것을 발표하여 공유하는 자리였다. 낯설고도 흥미로운 발표가 마무리되고 질의응답시간이 되었다. 몇몇 질의가 오가고, (이 좁은 바닥에서) 낯선 누군가가 발언권을 요구했다. 그러더니 발표자의 발표를 비하하는, 그러면서도 발표의 내용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자신의 관심분야를 치켜 세우는, 그냥 '난 이런 것도 알아요' 류의 개소리를 짖어댔다. 나는 내 스스로 쌍욕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내 마이크와 영상을 급하게 껐다. 동료 연구자인 발표자에 대한 존중도, 해당 발표회에 참석한 여타 연구자들이 그 발표를 듣기 위해 할애한 시간에 대한 배려도, 그 자신 역시 속해 있을 이 분야 자체에 대한 신중함과 정직함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욕 당한 기분이었다. 진심으로 살의를 느꼈다. 그냥 저런 쓰레기를 하나 치워 버리는 게, 나 따위가 되도 않는 글을 읽네 쓰네 마네 하는 것보다는 훨씬 학계에 기여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 새끼 자신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었고, 받아서도 안 되었다.

 

0. 나는 생산성이 낮은 인간이고, 무슨 대단한 통찰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분야에서 한 해에만 4~5만 건의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중에 몇 편이나 유의미하고 또 그 중 얼마가 생명력을 갖춰 이후의 논의로 확장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또 다른 분야에 비해 여기에 사람이 차고 넘치는 것도 아닌 건 물론이고 오히려 사향길에 접어들었다는 게 그럴 듯할 지경인 분야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말이다. 나 같은 게 있거나, 혹은 없거나, 별 차이는 없을 만한 정도는 된다는 것이겠다. 그래서 나는 학술적으로 유의미한 연구를 해내고 있지 못하고, 그 실질에 맞게 낮은 평가를 받고 있고, 그래서 이 기준으로만 놓고 보자면 위에 말한 저 씨발 쓰레기 새끼랑 별 차이가 없다는 거다. 적어도 저 치는 제 잘난 맛에 웃고 떠들고 다른 곳에서도 저렇게 끽끽 원숭이처럼 짖어대고 다니기라도 하겠지. 나는 저 치와 별 다를 것도 없는 처지에, 죄책감과 부채감을 떠안고 있다. 

 

0. 내가 밑바닥 진창에 쳐박혀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고,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래도 여기에 발목 잡혀서 그대로 파묻혀 버릴 거면, 그럼에도 계속 이렇게 아득바득 버티는 데에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안간힘을 써서 개발악을 하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학자구실을 하고 살 수 있다는, 이 시궁창에서 조금은 기어 올라갈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갖고 싶다. 나는 뭔가 대단히 잘못하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인 건가? 모상의 자체적 본질이 해명되기 어려운 것이고, 그것이 플라톤 형이상학에서 참여 개념에 맞물려 심각한 철학적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체적인 것과 참여적인 것의 양립 가능성을 『소피스트』 내에서 읽어내야 한다는 내 제안은 그렇게나 글러먹은 것인가? 인식상태에 대한 시험, 검토는 그 대상이 되는 인간이 승인하고 개입하는 믿음들 사이의 모순 유무를 통해 이루어지며,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모순이 실제로 성립하는지 아니면 조작적으로 거짓 모순이 구성되는지 여부는 이 검토와 별개의 문제이고, 그래서 적어도 시험과 논박 그 자체만 놓고 보자면 한 개인의 믿음 체계 내에 모순이 함축되어 있음을 드러내 밝힌다는 점에서는 소피스트의 궤변적 논박이든 철학자의 교육적 논박이든 차이가 없다는 것이, 그게 그렇게나 가망이 없는 해석인가?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들은 플라톤을 이해하는 데에는 하등 기여하는 바가 없는 그저 헛소리에 불과한 것인가? 

 

0.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노력이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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