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의도라면 상에 고유하게 귀속될 만한 문제를 짚어줘야 한다. 지금의 접근방식으로는 모든 관계적인 속성 일반으로 문제가 확장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상과 원본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문제를 야기하는 것처럼 이야기된다면, 과연 이러한 문제를 『소피스트』가 상에 관련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by S. H., Kang. 개별 상들이 고유한 개별 원본을 가져야 한다고 해서 상 일반 혹은 상 자체가 반드시 개별 상들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 자신만의 원본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또한 그러한 원본 없이 지시되는 상 자체에 대해서도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말해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상은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특수한 결합이다"라는 서술은 상 자체에 대해 유의미한 서술로 보인다. by H. S., Lee. 

  여전히 상은 원본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곤란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관점은 유지되어야 할 것 같은데, 위의 지적들을 고려하면 접근이나 서술을 고쳐야 하는 것 맞는 것 같고. 좀 더 입장을 고수해 보자면,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상은 소크라테스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가짜 사과(그것이 회화작품이든 조형물이든 거울이나 수면에 비친 상이든 그림자든)는 여전히 그것의 원본이 되는 '사과'에서 이름을 빌려와 가짜 '사과'라고 불린다. 아마도 이 지점이 관계적인 것 일반에 대한 상의 고유한 특징,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다. 아버지는 자식의 아버지로, 자식은 아버지의 자식으로 이야기되지만 그렇다고 한쪽이 다른 쪽의 성격 하나만으로 일방향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크다는 것의 경우에도 x보다 크고 y보다 작다는 식의 서술이 큰 것에 대해 서술되고 그런 관계에 의해 큰 것이 어떻게 큰 것인지 설명되긴 하지만, 그것이 '크다'라는 그 측면이 x나 y의 고유한 성질에 의존하여 설명되지는 않는다. 

  문제의 초점을 상 자체와 개별 상들 사이의 구분에서 찾지 않고 상과 그 외의 의존적인 것들 사이의 구분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접근할 경우 부정, 차이, 지시(생각, 말, 믿음, 지각)의 경우 전자로 분류할지 후자로 분류할지 아직 불분명하다. 상처럼 말이나 생각도 그것이 가리키는 원본을 '내용'으로 가지며, 이 내용 없이는 무의미해진다. 혹은 이 내용으로서의 원본을 논하지 않더라도 모방한다거나 지시한다거나 등등의 성격은 여전히 유의미하게 상이나 말 따위에 대해 서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크다는 것 자체나 아버지 그 자체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는가? a<b<c의 경우 b는 큼 자체에 참여하여 a와의 관계에서 큰 것이지만 동시에 작음 자체에 참여하여 c와의 관계에서 작은 것이기도 하다. 조금 더 고민해 볼 문제.

+ '아버지'의 정의에는 '남성'이, '어머니'의 정의에는 '여성'이 포함될 것이다. '크다' 그 자체는 크기, 양이라는 것이 본질로서 그 정의에 마치 아버지가 남성임이 필연적인 것처럼 그런 식으로 포함될 것이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실체 범주 규정 이후에 그러한 실체에 귀속될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남성 그리고 여성에 귀속될 것이며 '~보다 크다' 또는 '~보다 작다'라는 규정 역시 마찬가지로 양 자체에 후속하여 귀속될 것이다. 반면 상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상은 그림이거나 조각이거나 수면이거나 할 텐데, 이러한 것들 각각은 상의 정의에 포함되지 않고, 그 외의 성질들은 상의 고유한 원본으로부터만 유래할 것이다.

 

2. 참된 모순은 관점과 조건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양립불가능한 것들의 상충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반면 거짓 모순은 추가조건들을 규명함으로써 모종의 방식으로 양립 가능한 것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일 수 있다. By Kang. 그런데 논박대상은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때 그 믿음이 지적당함으로써 논박된다. 그렇다면 저러한 참된 모순을 믿을 때에만 그러한 무지를 가진 자가 논박당할 것이며, 이는 지나치게 논박대상이 되는 조건이 엄격해지는 것일 수 있다. By Lee. 여기에 더해, 이런 방식으로 참모순과 거짓모순을 구분할 때 소크라테스가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은 거짓모순에 빠진 상대에게 관점과 조건의 차이를 밝혀 상대의 거짓모순을 해소하는 것일 수 있다. By Kang. 그러나 논박대상은 모순되는 믿음을 가질 때 바로 그 모순이 드러남으로써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을 얻는 능력은 덕이다"라는 믿음은 "좋은 것을 정의롭게 얻는 능력이 덕이다"와 "좋은 것을 부정의하게 얻는 능력이 덕이다"라는 서로 모순되는 두 믿음을 동시에 포함하며 이 점에서 모순된다. 또한 "덕이 아닌 것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라는 믿음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인데, 좋은 것을 부정의하게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를 얻지 않는 능력은 정의로울 것이고 덕일 것이다. 즉 다시, 정의로운 방식에서 좋은 것을 못 얻는 능력과 부정의한 방식으로 좋은 것을 못 얻는 능력이 모두 덕이 아니라는 두 믿음도 모순되고 있다. 이 모순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불분명할 때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함의된 모순적인 믿음들이 모순되는 바로 그 조건과 관점이 드러남으로써 밝혀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논박을 통해 무지를 자각하고 나면, 기존에 논박대상이 모순으로 간주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을 두 가지 믿음, "좋은 것을 얻는 능력이 덕이다"와 "좋은 것을 얻지 못하는(않는) 능력이 덕이다"가 추가된 조건들을 통해 양립 가능한 것으로 수용될 수 있게 된다. 이는 논의의 진행과정에서 논박상대가 받아들이게 되는 결과이고, 논박의 대상이 된 바로 그 모순은 아니다. 그리고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 관련한 모순의 경우에도 같은 구도를 생각할 수 있다. 논박대상은 있는 것은 있고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고 믿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소피스트』의 후반 논의를 고려하면, "있는 것은 있는 것에 참여해서 있다"는 믿음과 "있는 것은 있는 것 자체에 대해서 다른 것에 참여해서 있다"라는 두 믿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있지 않은 것은 있는 것에 대해서 다른 것에 참여해서 있지 않다"는 믿음과 "있지 않은 것은 있는 것에 완전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모든 있는 것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믿음을 구분하지 않고 모순적으로 함께 가지고 있다. 이 모순들은 지적되어 논박대상의 무지를 드러낼 것이고, 이러한 무지를 자각하고 나서야 "있는 것은 있는 것에 대해서 다른 것에 참여해 있지 않다"라거나 "있지 않은 것은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마주 놓인 있는 것에 참여하여 있다"라는 모순되지 않는 믿음들을 새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운동과 정지를 참된 모순의 사례로 드는 입장에 반대하고자 한다면 이 둘 또한 양립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by Kang. 그런데 이 문제를 논하려는 의도는 없었고, 역으로 그 사례가 무엇이든 결코 양립 불가능한 것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믿는 그러한 경우에만 참된 논박이 가능하다는 조건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그런데 위의 방식으로 서술하다 보니 모순은 그대로 모순이고, 특수한 조건이나 관점이 규명되지 않은 차원에서 반성없이 지니는 믿음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조건이 해명된 차원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되는 믿음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소피스트들의 말장난으로 보이기도 하는 논박도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지 여부가 문제일 것이다. 예를 들어 (a) 나의 개가 나의 것이고 (b) 나의 아버지 또한 나의 것이라면 (c) 나는 나의 것의 자식이기에 (d) 나는 내 개의 자식이라는 말장난의 경우는 어떠한가? (a)와 (b)에서 나의 소유물로서 나와 관계맺는 것과 나의 기원으로서 나와 관계맺는 것이 모두 나에게 속한 것으로 말해진다는 점에 주의한다면, (a)와 (b)를 부주의하게 긍정하는 자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모순을 추론할 수 있다. (a)에서의 '나의 것'과 (b)에서의 '나의 것'은 그 둘이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을 같은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이는 모순을 믿는 것이 되고, 그 모순은 (c)에서 그 암묵적 동의 자체에 대한 재차 동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d)에서 지적받게 된다. 즉 말장난은 소피스트가 하고 있지만, 그가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을 중단하지 않고 수용할 경우, 대화상대방도 바로 그 말장난에 포함된 모순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며, 소피스트는 바로 이 동의된 모순을 지적하여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a)에서 '나의 것'과 (b)에서 '나의 것' 둘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조건을 알고 주의하고 있는 사람, 즉 아는 자라면 이 논박에 의해 모순에 빠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소피스트에게 당한 상대방이 아무리 억울해 한다 하더라도, 그 상대는 자신이 무지했기 때문에 논박을 당해 무지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가짜 모순, 겉보기 모순이 (d)라면, 갑자기 아무 과정이나 단계도 없이 (d) 같은 것을 받아들이거나 애초에 믿고 있거나 한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a)와 (b)를 순차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에서 그 안에 함의된 모순까지 수용하는 경우, 이는 겉보기 모순을 누군가 가짜로 만들어내 상대에게 강제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스스로 그 모순을 받아들여 버린 것이 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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