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소피스트는 모든 것에 관련하여 논박을 해내는 자로 여겨진다. 설령 상대가 해당 주제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소피스트는 여전히 논박에 성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언가에 대해 그것을 모르는 자가 그것을 아는 자를 논박한다는 것은 건전한(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시, 소피스트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모든 것을 알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기에서 불가능한 앎이란, A의 전문가가 바로 이러한 정의에 입각하여 ~A인 B를 아는 일의 양립 불가능성일 것으로 보인다. 소피스트는 소피스트술이라는 단일한 기술의 담지자로서 바로 이 기술 이외의 어떤 기술에 대해 소피스트라는 해당 기술로써 알거나 저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를 빌리자면, 누군가가 의사이자 동시에 건축가라 하더라도 그가 건축을 하는 동안에 그는 부수적으로만 의사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것 각각을 그 자체로 아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여겨지는' 자이다. 이는 마치 화가가 그림으로 무엇이든 모방할 수 있고 또 누군가가 거울을 들고 다니며 무엇이든 거기에 반영시킬 수 있으며 또한 어린아이들이 아무것이나 가지고서 그것을 집으로도 신으로도 이름붙여 소꿉놀이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일 수 있다. 그는 모든 것 각각을 그 자체로서 실제로 아는 것이 아니라, 원본이 아닌 일종의 상을 취급하는 자일 수 있다. 그가 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인지, 아니면 아는 자를 원본으로 하는 상을 취급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원본이 아닌 상을 고려할 때, 비로소 소피스트가 그 자신의 소피스트술이라는 단일한 기술만으로 일체의 모든 것을 전부 다 아는 것처럼 드러나고 여겨지는 사태를 설명할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상이라는 것 그 자체가 다시금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이것은 원본이 아니면서도 또한 원본 이외의 다른 무언가를 닮은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원본을 닮은 무언가이다. 일견 상은 원본과 별도로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며, 그럼에도 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원본과 닮은 그러저러한 무언가이기는 하다. 그것은 원본을 모방하는 것인데, 이러한 모방은 그 모방의 대상인 원본 없이 설명되기 어려워 보인다. 각각의 상은 저마다 그것이 모방하는 자신의 고유한 원본과 관계를 가질 것이나, 그렇다면 상 그 자체는 무엇을 모방하는지 특정할 수 없다. 상 자체는 모든 상들의 총체가 아니며, 그럼에도 이 상의 규정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개별적인 상 각각이 상으로서 성립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상은 원본, 진정으로 있는 그대로 어떤 무언가인 바의 것, 이러한 참된 것에 대해 그것이 아닌 것, 그러한 원본으로 있지 않은 것, 그렇다고 해당 원본 이외의 것이지도 않은 것,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 것,' '참이 아닌 것,' '있지 않은 것'도 상의 경우와 유사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일상적으로 부정은 그 부정의 대상에 의존적으로 성립하고 서술된다. A가 아니거나 B가 아닌 것은 말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지만, '아닌 것'을 그 자체로 놓고 가리키거나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시, 언표, 사유를 허용하지 않으며 이러한 불가능성들이 서술되는 주어로서 성립할 수도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 있지 않은 것, 이러한 것을 그 자체로 고찰할 수 없기에,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에서 이것에 해당하는 다른 무언가를 찾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 결과 어떤 것과 그 외의 것이 다르다는 관계에서, 이 '다른 것'을 통해 무엇 아닌 것을 설명할 가능성이 확보된다. 그런데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모든 것 각각에 무차별적으로 서술된다. 각각은 어떤 무언가로 있는 한에서 그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나머지 모든 것들이 다시금 각각의 자신 이외의 것인 저것과 다르며, 모든 것들이 모든 것들과 이러한 관계에 놓인다. 이 모든 것들, 무엇인 바의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 있는 모든 것들조차, 있는 것 그 자체와 이것에 참여함으로써 있는 것이라 불리는 것들로 구분될 것이고, 있는 것 자체가 여타의 있는 것들이 있는 그러한 식으로 있지 않고 이런 것들과 다른 것이 되어 결국 그 자체가 있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있는 것 자체 외에는 다른 어떤 것이든 모두 있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 경우, 큰 것 자체와 여기에 참여해 큰 것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다르다는 것과, 큰 것들(큰 것 자체와 참여자들 모두를 아우르는) 전부에 대비되어 크지 않은 것들(같은 크기이거나 더 작은 것들) 사이에 적용되는 다르다는 것의 구분이 필요하다. 이 구분은 자체적으로 어떤 무엇으로 있다는 것과 상대적으로 참여를 통해 어떤 무엇으로 있다는 것의 구분을 통해 우회적으로 마련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의 용법을 지닌 '있는 것'에 대해 바로 이것과 다른 것, 즉 다른 것 자체에서 있는 것을 상대로 하는 특정 부분을 '있는 것에 대해 다른 것'으로 재규정함으로써 논의에 필요한 구분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전히, 다른 것은 '언제나 다른 것에 대해 말해진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다른 것은 어떤 무엇과 다른 것일 뿐, 그 자체로 아무런 대상도 없이 절대적, 독립적으로 다른 것일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저러한 여러 '다른 것들'은 앞서 상의 경우에도 그러했듯 저마다의 비교대상을 지니고 그것에 의존적으로 규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다른 것들이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다른 것이라고 불리게 되는 바, 다른 것 그 자체의 경우에는, 이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무엇과 다른 것일 수도 없고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에 상대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움직이는 것의 경우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발생한다. 움직이는 것(질적 변화와 공간 이동, 그 외 생성과 소멸까지 일체의 운동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에서)은 규정상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는 것일 수 없고 그래서 고정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연속적인 변화로 인해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고정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고정적으로 명명될 수도 없고 지시되거나 사유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움직이는 것이 있으며 우리는 움직이는 것들을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것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들과도 구분되고 움직이는 것과 다른 것들과도 구분된다. 또한 정지한 것 그 자체를 놓고 말하자면 이와 가장 반대되는 것으로서 매우 분명한 관계를 통해 대극점으로서 지시되고, 그래야만 한다. 정지한 것에 대해, 움직이는 것은 그 정지한 것에 고정적으로 반대된다. 운동하는 것 그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이러한 고정성은 운동하는 것에 적용되거나 그에 대해 서술되지 않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어떤 무엇인 바의 것으로 있으면서 다른 무언가의 대극점으로, 또한 자신 이외의 것에 안정적으로 참여하는 참여자로도 사유되고 서술될 수 있는지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는 말(onoma와 rhēma의 결합물인 logos)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를 구성하는 이름(onoma)과 표현(rhēma)도 같은 문제를 겪게 된다. 말은 무언가에 관한 것이며 아무것에 관해서도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은 말로 성립조차 할 수 없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말은 불가능하다. 이름도 무언가의 이름이며, 표현도 무언가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그 자체로 생각되거나 이야기될 때, 바로 이 경우 이것들이 지시하거나 표현하는 바의 것은 특정될 수 없다. 이 문제의 성격은 앞서 상에 대해 논했던 문제와 같다. 그리고 거짓 역시도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참인 말은 그 말의 이름, 주어가 대상을 가리키고 나면, 바로 그 대상에 관련하여 그것에 관련한 있는 것들을 이어서 서술한다. 반면 거짓말은 자신의 대상에 관련하여 그것에 관련한 있는 것들과 다른 것들을, 주어가 지시하는 것에 관련한 있지 않은 것들을 바로 그 주어에 관련하여 이어서 서술한다. 그런데 주어에 관련한 있는 것들과는 다른 것, 그 주어에 관련한 있지 않은 것들은 결국 그 주어에 관련한 것들이 아닐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말은 더 이상 해당 주어 대상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볼 여지가 있을 듯하다. 특히, 이름과 표현이 결합하여 하나의 말을 이루듯 특정 대상과 특정 상태가 결합하여 특정 사건을 성립시킨다면, 그리고 결합물로서 하나의 전체인 말이 그것의 지시 대상으로서 단일한 어떤 사건에 대응한다면, 거짓말의 경우 지시대상이 없게 되어 버린다. 물론 앞서 상(그리고 그 하위종들인 모상과 가상), 있지 않은 것, 다른 것, 운동과 달리 말과 그 진리치에 관련하여서는 말의 구조가 가지는 특징과 결부되어 이전과는 다른 접근이 이루어진다. 특히 말이 무언인가를 가리키고, 바로 그것에 관련하여 이어서 말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여기에서 대상은 여전히 이름에 의해 지시되는 것이지 이름과 표현의 결합물 전체를 통해 지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렇다면 단지 이름을 통해서만 대상에 연결될 뿐 표현과 이를 포함하는 말 전체로서는 그 대상에 더 이상 연결되기 어려워 보이는 거짓말이란 것이 어떻게 참말과 마찬가지로 무언가에 대한 '말'로서 여전히 유지될 수 있는지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대상과의 연결이 약화될 경우, 거짓말이 의존적이고 상대적인 방식으로도 규정되기 곤란한 상황에서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간주될 방식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상에서 원본과 닮아 있는 모상과 대비되어 그 원본을 닮아 있지 않은(그러나 닮아 보이기는 하는?) 가상이 겪는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것이다. 말도 상도 각기 그것의 원본 대상과 별도로 그 자체로 설명되기 어려운데, 거기에서 더 나아가 상 중에서는 가상이 그리고 말 중에서는 거짓말이 재차 원본과 이격되어 그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0. 원래 J. Beere, N. Notomi 등이 주창하는 '겉보기 모순'이나 '거짓 모순'이라는 개념을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그게 학위 논문 주제나 지원 받고 있는 연구 계획하고는 거리가 좀 멀다고 느껴져서 이건 그냥 이전 발표문이나 소논문의 논지를 다듬는 정도만 생각하려고 한다. 그들의 주장은 결국 참된 모순, 진정한 모순은 운동과 정지 정도로 극단적으로 반대되고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것들의 결합에 한정되는데, 일단 개인의 믿음 차원에서 무지에 의해 발생하는 모순은 훨씬 더 소박하고 상식적인 것들임을 과연 포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Beere의 경우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결합'조차 겉보기 모순으로 취급하는데, 이게 초중기 대화편들에서 대화 상대자들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박 당할 때 지적받는 모순들에 비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 나로서는 전자가 겉보기라면 후자는 훨씬 더 분명하게 겉보기일 것 같은데, 왜냐하면 후자의 모순들은 적절한 조건과 관점의 구분을 통해 해소될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결이 조금 유난하게 어려웠던 것이 있는 것-있지 않은 것 사이의 결합과 분리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운동과 정지가 절대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긴 어려워 보인다. 설령 둘 사이의 결합이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표현될 뿐이고, 그 둘이 가장 반대된다는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논의의 맥락상 그 둘 사이의 결합을 완전히 배제할 경우 뒤따라 나오는 귀결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사실 아닌가 싶다. 특히 운동이 그 자체로 자신과 같다거나 그것이 있는 것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있는 것이라거나 하는 점들을, 그것이 정지와 결코 결합할 수 없다는 전제와 조화시킬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인식이 성립하려면 인식되기 이전 상태의 것이 인식된 이후의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문제도 물론 남을 것이다. 그가 논박을 통해 겉보기 '현자'로 드러나는 것은 그가 겉보기 논박을 해서가 아니라, 논박을 가하기만 할 뿐 논박을 받는 일은 의도적으로 극단적으로 피하기 때문이다. 논박 상황에서 한쪽이 고정적으로 논박을 가하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논박을 받기만 할 경우, 논박을 가하는 측의 지적 상태는 확정될 수 없다. 다만 당하는 쪽이 모순을 드러내게 되면 그가 무지하다는 것은 확정되고, 논박당한 당사자는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동시에 자신을 논박하는 상대의 지적 상태에 대해서도 무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물론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상대로 논박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건전한 상태이며, 이 '피해자'도 이러한 통념을 가지고는 있을 것이나, 아무튼 엄밀하게 상대방이 아는 자로 확정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논박자를 '아는 자'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의 차이는 소피스트와 달리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무지를 선언하고 있으며, 논박 당하는 일을 피하지도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 둘 모두는 현자와는 다르다. 이러한 구분 과정에서 참된 모순과 거짓 모순의 구분은 전혀 요청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 왜 겉보기 모순, 거짓 모순 같은 개념을 도입시키려 하는지 아직도 납득이 안 되지만, 그래도 이해를 해 보자면 소피스트가 말을 지어내 사기를 친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싶은 것 아니겠나 싶긴 하다. 그런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소피스트가 상대에게 하는 말은 그 상대가 수용하고 긍정할 때에만 그 상대 자신의 다른 믿음과 모순관계에 놓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수용은 이 상대방이 해당 주제나 사안을 알지 못하는 자일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모순이 작위적인 것인지 여부가 아니라 논박 상대가 무지한지 아니면 아는지만이 문제가 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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