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테아이테토스』에서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은 지각을 통한 모든 믿음을 참으로 간주한다. 만일 믿음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 혹은 지각 대상과 일치 여부로 그 진리치가 결정된다면, 특정 시점 특정 대상에게 직결되는 지각 믿음은 바로 그 특정된 대상과 일치되는 한에서 필연적으로 참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바로 이 순간의 나에게 정확히 지금 이 관점에서 F로 보이는 것, 그것도 정확히 똑같은 시간과 공간과 기타 조건들에 한정된 대상인 한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다시금 바로 이러한 조건들로 특정된 그러한 나에게 참이며, 필연적으로 그리고 탈시간적으로 참이다. 믿음 주체와 믿음 대상(그리고 이를 포함하는 세계)을 시공간 조건에 따라 무한히 많은 단면들로 분할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면, 그리고 결국 분할 불가능한 한 순간 한 단면에서 서로 일치되는 내 믿음상태와 외부의 믿음대상의 관계를 고려해 보면, 각각의 믿음 주-객 단면들은 각각의 불변하는 참을 성립시킬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도 세계도 연속적으로 변화 과정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해 도입되는 믿음이나 지각 대상의 운동, 변화하는 측면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이 극단화될 때, 주관도 객관도 어느 하나 고정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변화하며, 따라서 어떤 고정된 믿음이나 앎 등의 인식 상태가 규정될 수 없다. 믿음이 단순히 그리고 오직 지각적 혹은 경험적 세계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결국 참인 믿음이 필연성을 획득하여 앎과 구분 불가능해지거나(그리고 거짓 믿음이란 것이 불가능해지거나) 아니면 믿음이 믿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변화하게 되어 버리는 양 극단의 파국만이 남는다. 이를 극복하게 되는 것은 믿음이 있음, 같음 따위의 비지각적이고 공통적인 유 또는 형상에도 개입한다는 점이 언급되고부터이다. 참인 믿음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대상과 관련하면서도 공통적이고 고정적인 측면을 함께 파악한다. 


2. 『소피스트』에서 가상(phantasma)은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킨 상으로서, 그 원본과의 연결고리가 상당히 약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모든 상이 특정 원본에 대한 상인 한에서, 가상 역시 아무런 원본도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외부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하자면 일종의 심상이 이러한 가상의 원본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는 없을까? 가상은 실재와의 관계에서 그 실재의 비율을 왜곡시키는 가상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바로 그 실재의 비율을 왜곡시킨 채로 성립한 내적 심상과의 관계에서는 이 심상의 모상(eikōn)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러한 중간단계에 대한 언급은 『필레보스』에서 그 엇비슷한 묘사를 억지로 끌어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소피스트』에서 직접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내적 심상과 단순 가상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위의 구도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멀리 불분명하게 보이는 사람인지 조각인지 모를 것이 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실제로는 사람이라고 해 보자. 그러나 어쨌든 내게는 잘 안 보이며, 나는 그것을 시각으로 지각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 지각 내용을 영혼 안에 지닌다. 그런데 이 지각이 "저것은 조각상이다"라는 것이라고 해 보자. 『소피스트』에서 인상(phantasia)에 대한 규정에 따라 나는 지각을 동반한 (거짓)믿음을 형성하였으므로 (거짓)인상을 가진 것이 된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경우 내가 "저것은 사람이다"라고 판단했다면 참인 인상을 가진다고도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지간에 일단 인상을 가지게 되고 나서, 『필레보스』에 따르면 현재적 지각이 종료되고 아무런 지각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이 인상을 다시금 영혼 안에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지각 없이도 이 인상을 취급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재차 기록된 것'은 처음 발생한 인상과 달리, 이 인상을 모방하는 일종의 상으로 서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인상의 상에 따라서, 그 상이 참될 경우 이에 따른 믿음도 참되고, 이 상이 거짓될 경우 이에 따른 믿음 역시 거짓이 된다고 이야기되는 듯하다. 따라서 인상의 상과 이에 따른 판단 사이에는 불일치가 논의되지 않는 듯도 싶다(확실하진 않다. 『테아이테토스』의 석판이나 새장 비유에서 문제되듯, 외부의 지각 대상 없이 영혼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불일치를 통한 거짓도 분명 실재하고, 이것도 대상과 영혼 사이의 불일치 못지 않게 그것이 왜 어떻게 거짓인지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긴 하기 때문이다.). 가상이 원본 그 자체가 아닌 것(상)에서 더 나아가 원본을 닮은 것(모상)조차 아니라는 점에서, 원본과 굉장히 멀리 동떨어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으로 이러한 가상이란 것이 외부 대상으로서의 원본과 직결되어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런 대상도 가지지 않는 것은 아예 성립 자체가 안 되는 것이라면, 가상도 자신이 원본 삼을 뭔가가 있긴 있어야 한다. 인상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듯하고, 또한 인상에도 거짓 인상과 참 인상이 구분될 수 있다면, 특히나 거짓 인상에 한정하여 바로 이러한 거짓된 인상을 원본으로 삼을 경우에만 인상의 상이 원본에 대한 가상으로 규정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참된 인상의 상은 원본에 대해서도 모상일 것이다. 참인 인상과 거짓인 인상 각각에 대해 다시 그것들 각각의 모상과 가상이 구분되어 네 가지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튼 가상의 일종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이야기되고, 그 희망의 사례로 내게 황금이 많은 것을 자꾸 보면서 즐거워하는 경우가 등장하는데, 이 때 '본다'라고 하는 활동은 정확히 무엇이고, 그 대상은 무엇인지와 관련하여 위의 해석이 아마도 적절한 설명을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원본과 동떨어진 채로도 가능한 것이 가상이라면, 원본이 아예 없는 경우에도 (엄밀히 말하자면 외부 실재 원본은 없지만 내적 심상 원본은 가지는 경우에도) 가상이 가능하지 않을지, 그리고 그게 미래 사건에 관련된 '거짓된' 희망을 설명하는 데에 유효한 개념일 수 있지 않을지, 뭐 그 정도 생각.


3. 모든 크기, 운동, 시간은 가분적인 부분들로 가분적이다. 따라서 무한하게 가분적이다. 그래서 점이 선을 구성하지 않고, 지금(순간)들이 시간을 구성하지 않으며, 불가분한 최소단위 운동 같은 것들로 운동이 구성되지도 않는다. 이 모두는 연속적이다. 그런데 연속이고 무한 분할 가능할 때 제논의 역설은 어찌 되는가? 다시 헷갈려졌다. 대강 연속적인 크기를 연속적인 시간 동안 연속적인 운동이 각기 하나로 통합된 전체로서 상호 점유하는 것으로 보고서, 단위나 원소처럼 취급되는 어떤 단계들을 거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연속적 과정을 성립시키는 방식으로 제논 역설을 극복하는 것 비슷하게 설명되었던 듯한데,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일단 연속 부분 더 보면서 고민해 볼 것.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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