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b8-236d4. 일곱 번째 분할, 모상제작술(模象-, εἰκαστική)과 환상제작술(幻象-, φανταστική).

  (231b8-232a7) 건전하지 못한 현상 : 소피스테스가 여러 가지로 나타났기 때문에 테아이테토스는 실제로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말하는 데에서 어려움에 봉착한다. 이에 대해 손님은 모든 것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는 옛말을 들어 소피스테스 역시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 놓였으리라 답한다. 그리고 소피스테스의 모습들을 헤아려 본다. 소피스테스는 (1) 젊은이를 사냥하며 보수를 받는 사냥꾼, (2) 영혼의 배움들의 무역상, (3) 같은 것들의 소매상, (4) 그것들에 관한 직매상, (5) 진술의 경쟁술의 선수로서 쟁론술로 정의된 자, (6) (이론의 여지는 있으나) 영혼에 관한 배움들에 방해되는 믿음들에 대한 정화자로 나타났다. 손님은 이 지점에서 문제를 지적한다. "누군가가 여러 가지 앎들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단 한 기술의 이름으로 불릴 경우, 이런 현상(φάντασμα)은 건전하지 못하며, 무슨 기술에 대해 이런 현상을 겪는 사람은 그 기술에 속하는, 이 모든 배움들이 의존하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으며, 이런 이유로 그 배움들을 지닌 자를 하나 대신 여러 이름들로도 부른다(232a1-6)"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영혼의 배움의 직매상이 있다고 하자. 현실적으로, 그 한 사람의 직매상이 다른 사람이 만든 영혼에 관한 배울거리들을 도매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가 배를 타고 폴리스를 오가며 영혼의 배울거리들로 무역을 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 상황에서 그 한 사람을 두고 그가 영혼의 배움들을 직매한다, 도매한다, 그것들로 무역을 한다고 말하는 어느 경우든 거짓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손님이 건전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는 현상은 이와 다르다. 우선 손님이 지적한 문제에서 '누군가'는 구체적인 개인이 아닌 유(genos)이다. 이를 테면 프로타고라스, 안티폰, 트라쉬마코스가 모두 소피스테스라는 유에 속하는 개인들이다. 이 차이에 더하여 유로서의 소피스테스는 소피스테스술이라는 하나의 기술을 통해 명명된다. 그 기술은 어떤 하나의 앎으로서 상호배제적인 여타의 앎들과 구분되어야지만 정의될 수 있다. 앞서 든 예에서 설령 한 사람이 직매와 도매, 무역을 병행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현상이 속하는 기술들 각각은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직매상인으로서의 한 사람에게 여전히 도매하는 모습과 무역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일은 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이 차이들을 고려할 때, 소피스테스라는 유 자체는 위의 여섯 가지 기술들 모두에 동시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 그러나 소피스테스라는 유에 속하는 자는 위의 여섯 가지 모습들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이 경우, 소피스테스의 기술 자체로써만 이 유에 속하는 자가 소피스테스로서 정의되지만, 그럼에도 그가 드러내는 여러 모습들은 소피스테스인 이 한 사람에게 의존하여 드러날 수 있다. "이 모든 배움들이 거기에 의존하는 것(εἰς ὅ πάντα τὰ μαθήματα ταῦτα βλέπει)"이 밝혀지지 않는 한, 하나의 기술에 속하는 하나의 이름으로 한 유를 부르고 그 유를 정의하는 일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테스는 소피스테스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유이며 그는 소피스테스술이라는 단 하나의 기술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기에, 지금의 상황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다.

  (232b1-233d2) 모든 것에 관한 반박과 믿음에 관련된 앎 : 손님은 소피스테스에 관해 이야기된 것들 중 한 가지 것이 그 유를 특히 잘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 한 가지 것은 바로 반박에 능한 자(ἀντιλογικόν)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분할의 과정에서 말싸움 중 짧은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지는 기술적인 돈벌이가 반박이었고, 그 안에는 정의와 부정의 그리고 그 외의 일반적인 것들을 다루는 쟁론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쟁론술의 주제들, 말로 이루어지는 영혼에 관련된 것들은 배움에 관한 무역, 도매, 직매에도 공통된다. 또한 같은 주제에 관하여 말로써 사귀어 이루어지는 젊은이 사냥 역시 이것들과 공통점을 갖는다. 반박이 같은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진술을 하는 것이라면, 각자는 달리 믿고 있을 것이고, 반박을 가하는 자가 반박되는 자에게 승리한다는 것은 반박당한 자의 진술이 폐기되고 나아가 그 믿음이 부정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반박은 소피스테스의 여섯 번째 모습과도 공통된 측면을 보여준다. 추정컨데 이런 이유로 손님은 반박이 "이 모든 배움들이 의존하는 그것"의 후보라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해당하는 자세한 설명은 본문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소피스테스가 반박에 능한 자라 말한 것에 더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러한 일의 교사가 된다고도 말했다. 이 역시, 설득과 배움, 정화에 걸쳐 여섯 분할들에 공통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손님은 이 반박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검토한다. 소피스테스들이 말하기로 그들의 반박은 보이지 않는 신적인 것들, 천지와 같은 보이는 것들, 사사로이 모임에서 모든 것들에 대해 그 ~됨과 ~임에 관하여 다룬다. 나아가 그들은 법과 폴리스의 모든 일 전부에 관해서도 말싸움(ἀμφισβήτησις)에 능하며 다른 이들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기술들과 또한 낱낱의 기술에 관하여, 각 장인 자체에 맞서 반론해야 하는 것들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반박하는 기술은 모든 것들에 관해 말싸움하기에 충분한 능력인 듯하다.
  소피스테스가 말하는 이러한 반박이 모든 것들에 관한 것이라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알지 못하는 자가 아는 자를 상대로 반론하면서 뭔가 건전한 것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들 각각에 관하여 그 장인 자체, 즉 아는 자 모두를 상대로 소피스테스는 반박을 행한다. 이 과정에서 만일 소피스테스의 반박이 옳게 수행되지 않거나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옳게 수행되더라도 그가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젊은이들은 그의 학생이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이를 바란다. 즉 소피스테스는 그가 반박하는 것에 관해 아는 자로 여겨진다. 이는 곧 모든 것에 관해 아는 자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소피스테스술이 여러 기술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건전하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 볼 때, 소피스테스가 각각의 모든 것을 알기란 불가능하다. 즉 그는 아는 자를 상대로 알지 못하면서 반박하여 건전하지 못한 것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그가 모든 것에 지혜로운 자라고 여긴다. 따라서 소피스테스는 진리가 아니라 믿음(여겨짐)에 관련된 앎(δοξαστικὴ ἐπιστήμη)을 지닌 것이다.
  앎을 수식하는 'δοξαστικὴ'를 '거짓된'으로 이해할 여지도 없지 않다. 소피스테스의 반박술이 모든 것에 관련하는 한에서, 그가 그의 반박술을 통해 건전한 무언가, 즉 진리를 진술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그 앎이 거짓된 것이라는 이해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소피스테스가 반박을 옳게 해낸다고, 즉 그가 건전한 뭔가를 내놓는다고 실제로 믿고, 그가 지혜롭다는 믿음을 실제로 가지게 된다. 소피스테스가 기술자인 한에서, 그가 모든 앎들에 속할 수는 없지만 소피스테스술에 해당하는 그 앎을 가지지 않을 수도 없다. 만일 그렇다면 소피스테스라는 유는 정의될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그가 아무런 앎도 없다면 그는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이 모든 것에 지혜로우며 모든 것을 반박한다는 믿음을 심어줄 수도 없을 것이다. 또한 앎이 최소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고려할 때에, '거짓된 앎'이란 형용모순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피스테스는 진리, 사실에 관한 앎은 아닐지라도 믿음에 관한 앎을 지니고 있다.

  (233d3-235b7) 상-제작술(εἰδωλοποιική) : 손님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런 일들에 관한 더 확실한 본(σαφέστερον παράδειγμα)을 취하여 보자고 제안한다. 논할 줄 아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반박할 줄 아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그러나 단 하나의 기술로써 통틀어 모든 것들을, 온갖 동식물과 천지, 신들과 여타의 것들 전부를 만들고 해낼 줄 아는 것처럼 보인다면,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재빠르게 만들어내 헐값에 팔며 이런 일을 삽시간에 가르칠 수 있다고까지 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놀이라 생각해야 한다. 이 놀이에서 가장 기술적이고 만족스러운 종(형상, εἶδος)은 모방적인 것이다. 한 기술로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고 공언하는 자의 일례는 회화술로 사람들을 속이는 자이다. 그는 생각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회화의 기술로써 ~인 것들과 같은 이름인 모방물들(μιμήματα)을 만들어 멀리서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바라는 뭐든 실제로(ἔργῳ) 해낼 수 있는 자라고 속인다. 이러한 일은 진술된 상들(εἴδωλα λεγόμενα), 진술들로써도 이루어진다. 진술로써 이러한 일을 하는 자는 사태들의 진리(τῶν πραγμάτων ἡ ἀλήθεια)에서 여전히 멀리 떨어진 어린 자들에게 모든 것들에 관하여 진술된 상들을 보여주어 자신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 여겨지도록 그리고 그 말한 자가 모든 것 전부에 대해 모든 이들 중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여겨지도록 만들 수 있다. 앞서 소피스테스가 반박을 통해 실제로 모든 것을 아는 자가 아니면서도 그러한 자로 여겨진 것은 이처럼 진술된 상들을 통해 젊은이들을 속여낸 결과이다. 그는 모든 것들에 관한 지식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인 것들의 모방자, 그렇기 때문에 현혹자들에 속하는 누군가이다. 이로써 건전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던 현상, 즉 하나의 기술에 속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가 모든 앎들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일단락이 지어진다. 그 모습들이 의존하는 하나의 앎으로서 진술된 상들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속이는 기술이 드러난 바, 이 앎은 상-제작술이다.
  이 과정에서 손님은 그려지거나 진술된 모방물들에 의해 속임을 당하는 자들은 나이가 들고 경험들(παθήματα)을 통해 ~인 것들(οὖσι)에 분명하게 가 닿을 수밖에 없고, 속임을 당한 당시에 생겨난 믿음들이 변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결과 실천들 속에서 부수하는 현실들에 의해 대단한 것들은 사소하게 보이는가 하면 쉬운 것들은 어렵게 보이고 그 진술들 속 모든 환상들이 모든 방면으로 뒤집히게 된다. 이에 대해 테아이테토스는 자신이 아직 ~인 것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답한다. 손님은 그런 이유로 두 사람 모두 테아이테토스를 시간과 경험 없이 ~인 것에 최대한 가까이 데려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한 탐구의 과정에 숨은 목적이 드러난다. 시간과 경험을 통한 실천 중의 현실에 의하지 않고서도 ~인 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 결과는 이런 것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결과와 유사할 것이다. 테아이테토스가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믿음들은 전복될 것이다. 이는 앞서 보았던 시험술의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크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 작다는 믿음과 반대되고, 쉽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어렵다고도 여겨지게 되며, 이런 모순을 통해 기존에 자신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여긴 그 믿음이 폐기된다. 대단하다고 여겨지던 이전까지의 존재론적 주장들이 자기모순에 봉착하며 더 포괄적인 논의 속에 자리매김되어야 하는 작은 것들임이 밝혀지고, 알고 있고 쉽다고 여겨지던 것들로서 τὸ ὄν과 τὸ μὴ ὄν,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진술하고 생각하던 것들이 사실은 알기 어려운 것임이 밝혀지는 이후의 전개를 고려해 볼 때 이 지점에서부터 손님과 테아이테토스의 탐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시사된다는 추측 또한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235b8-236d4) 모상제작술(模象-, εἰκαστική)과 환상제작술(幻象-, φανταστική)의 구분 :

  본의 비례를 따라 모방물을 조형하거나 그리고 그 각 부분에 알맞은 색을 입히는 것은 본에 닮은 것을 만들어내는 모상제작술이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의 것들을 주조하거나 그리는 자들 중에서는 사람들에게 감각을 통해 가까운 것은 더욱 크게, 먼 것은 더욱 작게 보인다는 점 때문에 본의 아름다움, 그 비율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나 그런 것으로 나타나는(보이는) 비율과 아름다움에 따라 모방물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닮은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닮은 것처럼 헛보이는 것이기에 환상제작술이다.

 

  236d5-241b3. 모상과 환상, 그리고 거짓.

  (236d5-

-작성중-

1.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결국 해결해야 할 숙제를 뒤로 미루기만 하다 다시 돌아왔다. 어영부영 혹은 허겁지겁 시키는 일이나 발등에 떨어진 불 따위나 신경쓰며 세월아네월아 하는 사이에 국내 대학원생의 학점이라기엔 지나치게 비루한 평점으로 그럭저럭 논자시를 통과하고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몇 차례의 강독을 마무리하고 수료학점을 이수하고 그러고서 1년을 더 지나 보냈다. 어느 사이엔가 나도 모르게 나는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는데, 그러는 와중에 석사과정 들어오던 즈음에 머리 싸매며 고민하던 문제를 놓아 버렸었나 보다. 혼잣말을 하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그 습관 그대로, 공유된 맥락 안에서 적당한 배려와 어느 정도의 무시 그 중간 즈음에 대충 개떡같은 말들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먹어주는 사람들 품에서 뒹굴며 내 고질병을 키우기만 하였다. 다른 이야기들이야 어찌 되었든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떠들 때엔 언제나 '못 알아 먹겠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우습게도, 처음 학부에 입학하고 철학이란 것을 하겠노라 떠들기 시작한 이후로 내내 빠짐없이 모든 선생님들께서는 내게 같은 조언을 하셨고 같은 지적을 해 주셨더랬다. 설명할 수 없다면 아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왜 문제이고 어떤 식으로 문제이게끔 되는지, 그걸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사실은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라고, 혼자 떠들고 싶으면 지리산이나 기어 들어가지 왜 비싼 돈 들여가며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며 시간낭비를 하느냐고, 그 얘기만 10년이 넘도록 듣고 있는 나란 놈은 참 지겹게도 발전이란 게 없는 새끼인 게다. 변명을 하자면, 어떻게든 시간만 지나 보내면 그 와중에 나는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멀쩡히 아무렇지 않은 척 꼴에 뭐 전공하고 뭐 관심있고 그러저러합니다 지껄이고 다닐 수 있었으니까, 또 앞으로도 그냥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뭐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몰랐다고 한다면 너무 양심이 없고, 말로야 늘상 다 놓치고 샛길로 겅중거리며 뛰쳐 나아가느니 돌아가더라도 제대로 한 걸음씩 디뎌 나아가는 편이 맞다고, 난 반드시 그리 살겠노라고, 주제도 모르고 떠들기야 잘도 떠들었는데 말이다. 다행이다. 더 엇나가기 전에, 더 멀리 잘못 건너가 버리기 전에,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리기 전에 발목이 붙잡혔다. 말 그대로, 혼났다. 이상한 일이긴 하다. 며칠 전 여러 선생님들 모시고 대대적으로 욕 먹기 전까지도, 지금 지도교수님께서나 이전 지도교수님께서나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게 분명하고, 그걸 나도 알아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마음 한켠에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 심지어 그 고민을 핑계로 눈앞에 떡하니 놓여 있는 당장에 해야 할 일들조차 제대로 해내질 못하고 있었다. 말귀를 못 알아먹었다고 퉁치고 가기에도 뭔가 석연찮은 그런 꼬락서니이다. 철학자를 정치가라고 하기도 하고 소피스테스라고 하기도 한다. 그가 모든 일에 합당한 자라고 했다가도 어느 순간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라고 욕을 하기도 한다. 미쳤다고 했다가 가장 지혜롭다고 칭송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셋은 이름처럼 각기 실제로도 서로 다르다.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 각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어떤 점이 어찌 다른지 알아야 한다.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는 부류가 무슨 일을 하는 족속인지를 알면 될 것이다. 그 부류는 그 이름이 연원한 기술, 그 부류에 고유한 지식을 통해 정의될 것이다. 그 기술의 이름은 소피스테스의 기술이겠고. 그런데 그 기술로 한다고 보이는 일들이 따지고 보면 거래술이기도 하고 쟁론술이기도 하며 시험과 논박을 통한 영혼의 정화기술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냥술을 갖고 부유하고 명망있는 젊은이들을 사로잡기도 한다. 소피스테스는 사냥꾼인가? 그러면서 동시에 쟁론가이기도 하고, 또한 장사꾼이기도 한 것인가? 그러나 사냥꾼과 장사꾼과 교사가 모두 각기 또한 서로 다르게 정의된다.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이기도 한 단 하나의 기술이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기술 아닌가? 그러나 소피스테스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그 모든 기술을 갖춘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러하며 남들 또한 그렇게 만들어 주겠노라 말하고 남들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만든다. 실제로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기술, 그 비슷한 기술은 회화술이다. 건축가가 아니지만 집을 만들어내고, 사냥꾼이 아니지만 사냥감을 화폭에 붙잡아 둔다. 하늘도 별도 땅도 바다도 모두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들은 진짜가 아닌 닮은꼴일 따름이다. 화가가 그러하다면 다른 한편으로 아이들의 소꿉장난도 그럴 수 있다. 아이들은 의사가 되기도 하고 왕이 되기도 하고 상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말과 몸짓으로 그렇게 따라할 뿐, 그들이 실제로 의사이고 상인인 것은 아니다. 소피스테스는 소꿉장난을 하고 있다. 그는 그가 알고 또한 가르친다고 장담하는 그런 실제의 일들을 따라하고 흉내내어 그러한 원본들의 모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모상도 다 같은 모상이 아니다. 어떤 모상은 원본의 비율을 그대로 본따 만들어지지만, 또 어떤 모상은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키면서 그럼에도 마치 원본과 같은 것인냥 여겨지도록 그렇게 만들어진다. 거대한 조각상이 아래로 갈수록 더 크게 보이고 위로 갈수록 더 작게 보이기에, 원본의 비율과 같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오히려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켜 위는 더 크게, 아래는 더 작게 구성되었을 때, 이 조각상은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킨 거짓모상이다. 이제 소피스테스는 참된 모상과 거짓 모상 둘 중 어느 하나를 만드는 모사자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소피스테스가 철학자와 다르듯, 상술이 교육술과 다르듯, 원본과 모상도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런데 원본으로서의 A라는 것이 바로 그 A인 것인 한에서, 모상은 원본이지 않기에 A이지 않은 것이 된다. 원본인 A가 참으로 A라면 모상인 ~A는 거짓이 된다. 모상, 모방물은 어떤 것이 아닌 것, 참이 아닌 거짓이다. 또한 이러한 소피스테스의 모사를 통해 사람들이 갖게 되는 믿음 또한 거짓이다. 그들은 모든 것은 아는 게 아니지만 모든 것을 안다고 사람들은 믿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니라는 것, 거짓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지 않은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 것이다. 모상과 거짓에는 이 두 가지가 섞여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가리킬 수조차 없다. 모상과 거짓을 말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이름, 그 진술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인 것이고 ~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인 것으로서 하나이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라면 그것은 둘이 아니다. ~인 것을 부르는 '~이다'라는 이름과 그 이름이 가리키는 ~인 것을 나눌 수 없다. 그러므로 ~인 것은 하나일 수 없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 하더라도, 그 둘은 모두 ~이다. 둘 중 어느 하나만이 ~이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 그 둘 모두 ~이지만 ~인 것 자체는 따로 그 둘과 다르다면, ~인 것 자체는 저 둘과 마찬가지로 ~인 것일 수도 없고 저 둘과 달리 그 하나만 ~인 것일 수도 없다. ~인 것이 달리 변한다면 그것은 이전과 다르다는 그 이유로 ~이지 않게 될 것이므로 ~인 것은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식될 수 없다. 인식이 '된다'는 것은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 인식된 것으로 변한다는 것이고,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며, 곧 ~이지 않게 된다는 것,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될 수 없고, 같은 맥락에서 진술될 수도, 지시될 수도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것이 그 하나의 것으로 자기 자신과 동일하려면, 그러나 그 자체가 '하나'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면, 그것은 그 '하나'를 겪어 그것이 되어야 하지만 멈추어 있는 것은 무언가를 겪을 수 없다. 그것은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과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그것'이라는 이름조차 붙을 수 없다. ~인 것도 ~이지 않은 것도 모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모든 것이 전혀 관계맺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있어서도 뭉뚱그려져 하나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는 결합하면서 또 다른 식으로는 분리되어야 하며, 이러한 결합과 분리의 가능조건들 그 자체가 스스로 그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 조건들의 이름은 무엇이고 그 작동의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어떻게 내가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가리키고자 하는 것을 긍정하고 또한 그것을 긍정하기 위해 다른 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부정되는 바로 그것을 또한 어떻게 긍정할 수 있고 어떻게 긍정된 것을 통해 배제되고 부정된 것들에 비추어 바로 그 긍정된 것을 다시 부정할 수 있는가? 관계를 맺은 것이 어떻게 동시에 서로 분리될 수 있는가? 원본과 모상만이 아니라 원본과 이름도, 원본과 또 다른 원본도 어떻게 이런 이중의 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는가? 저마다 모두 그 자신 외의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여타의 것들이지 않은 것이어야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다 함께 제각기 자기 자신인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지시, 진술, 사유가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항상 그 어떤 것에 관한 것, 그것에 의존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진술이나 사유, 믿음이나 인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무엇에 관한 것도 아닌 진술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것에 관해서든 그것에 관한 진술은 그것 자체일 수 없다. 그것이 어떤 것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거짓이 되고 또한 참이 되는가? 거짓은 그것 아닌 것을 그것이라 말하는 것, 그것에 관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참은 그것을 그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원본이 아닌 한에서 모든 모상은 거짓이어야 하지 않는가? 혹은, 원본에 관한 것인 한에서 다시 모든 모상은 참이기만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결합과 분리만으로는 참과 거짓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소피스테스 역시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세대이다. 그들이 단순한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반박을 엘레아의 손님이 이유없이 재검토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런 상황을 플라톤이 심심풀이 삼아 아무 생각없이 늘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다른 어떤 것이지 않다는 것과 그 무엇이 거짓이라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어떻게 다르고 또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지금 여기까지 지껄인 이야기는, 누군가의 동의를 얻을 만한 문제제기의 과정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여전히, 나는 혼잣말만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2. 간단한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어떤 학문분야를 전공하고 이것을 일로 삼아 밥을 벌어먹고 살겠다고 마음 먹으면, 해야 할 일은 그냥 열심히 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집안이 풍족하여 돈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재능과 노력을 겸비해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 반대로 대출 갚으라는 독촉이나 받으며 아침에 산 김밥 한 줄을 저녁까지 세 번에 나누어 먹거나 하루 한 끼 삼아 삼일에 걸쳐 나눠 먹게 될 수도 있다. 학원 나가고 첨삭 하고 조교일 하고 프로젝트 시다바리 하면서 이 돈 저 돈 있는대로 긁어모아 다달이 월세에 관리비에 뭐에뭐에 탈탈 털리기를 몇 달 거듭하다 자살충동에 시달릴 수도 있다. 좆나 쎄빠지게 이 악물고 버틴 것 같은데 고만고만한 바닥에서 새 공부 해 오는 사람도 안 들어오고 가르쳐줄 사람도 같이 공부할 사람도 줄어만 가는 와중에 다른 나라에서 한참이나 어린 사람들이 날고 기는 성과를 내고 곁눈질로만 봐도 부러울 정도로 신나게 열띤 토론을 해대는 걸 보면서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한 줌 정도 되는 주변의 스승들과 선배들을 보노라면, 자신이 외국이 이러네 저러네 헛소리나 지껄일 시간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잘 앞서 나아가 있는지도 보일 것이다. 거창하게 학문의 이상을 논한다면야 두 말할 나위 없이 당신은 그 학문의 역사에서는커녕 어디 동네 학술지에 비판대상으로마저도 언급될 일 없는, 학계의 해충수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지간한 실력과 운빨이 맞아 떨어져주지 않는다면, 당신이 교수가 되는 일은 당신이 로또에 당첨되는 일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더 쉽지는 않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강사나 하지, 뭐'라는 말을 쉽게 내뱉었던 지난 날을 반성하게도 되겠지. 좆도 밥도 아닌 당신을 뭐가 이쁘다고 끌어다 챙겨 남 들어갈 자리 비워다가 당신을 앉혀 주겠는가, 그게 다 돈인데. 하지만 이것도 다 당신이 살아남은 그 다음의 이야기들이다. 당신은 어느 기말 소논문에서, 어느 강독 모임에서, 또 어느 학회 뒷풀이자리에서 끊임없이 당신의 게으름과 비겁함, 그리고 모자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알아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배워나갈 수 있겠지만, 정작 바로 그것들은 배우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건 당신이 못 배워서일 거다. 그러는 와중에 당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투루 보냈는지 실감하게도 되겠지. 당신보다 훨씬 더 간절하고 치열하게 당신이 하는 그 학문을 사랑하고 애달아 하는 사람들, 그러나 당신보다는 조금 더 정직하고 용감해서 더 이상 억지 부리지 않고 또 눈치도 빨라 나가라는 암시를 잘도 붙잡아 조용히 자리 털고 일어난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보일 것이다. 종종 더 끔찍하게는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꼴도 보게 될 거다. 물론 몇몇은 수제자 소리를 들어 가며 온갖 장학금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 받고 등재지에 논문도 올리는 일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해당 학계에 학문적으로 기여한 급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는 것도 아닌 판에, 당신은 그들 뒷꽁무니나 좇고 있는 거다. 연구사에 길이 남는 꿈에서부터 국내 학계, 자신이 속한 학교, 자신이 속한 딱 그 학번대까지 내려와도 당신의 학문만을 놓고 봤을 때만 해도 당신의 앞길이 그리 밝지만은 않을 거라 미루어 짐작한다. 돈 문제는 얘기해서 뭐 하겠나?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다른 일을 하더라도 당신 꼬라지는 거기서 별반 나을 것도 없을 거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애들 만큼, 대기업 입사하겠노라고 새벽영어반 다니는 애들 만큼, 같은 새벽에 물건 끊어 동대문으로, 트럭 몰고 골목골목으로, 혹은 테이블에서 테이블로 룸에서 룸으로 뛰고 또 뛰는 애들 만큼 노력하면 그 애들 만큼 힘겨운 삶을 살게 되는 건데, 당신은 그냥 책상머리 앉아서 담배나 태우고 커피나 홀짝이면서 훨씬 더 느긋하게 당신 인생을 망치고 있잖은가? 나가면 걔들한테 밟힐 일만 남은 거야. 뭐 그나마 사정이 어느 정도 되니 대학원으로 도망칠 생각이나마 했겠지. 도망친 게 아니라면, 그냥 닥치고 빡세게 할 일 하면 되는 거고. 이 와중에 당신이 전공하고 있는 학문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를 바라기도 하고 고립에서 벗어나 여러 방향으로 소통하며 더 넓은 지평을 확인하게 되기도 바란다면, 희망만큼의 절망은 당연한 거 아닐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거 정말 몰라서 딴청 부리며 그 자리에 엉덩이 깔고 억지부리고 있는 건가? 아닐 거다. 다 알고도 그냥 선택한 거라면, 쓰잘데기 없는 고민들은 잠시 접어 놓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정말로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면 실제로 안 될 거다. 주제넘게 당신 혼자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고민하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다. 남들이 알아서 당신을 밀쳐내고 끊어내고 떨어뜨릴 테니까, 그렇게 될 때까지는 괜히 맘고생 사서 할 필요 없다는 거다. 즐겨라. 뭐가 어찌 됐든 재밌어서 붙들고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정말로 못 하게 됐을 때 구질구질하게 후회하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재밌게 한껏 해 보는 거다. 돈 못 벌어오는 자신이 가족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하고, 능력 없는 자신을 돌보느라 시간 낭비하는 선생님들께 미안하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학문에 쓰레기나 더하며 짐이나 얹어 대는 자신이 세상 앞에 미안한가? 거짓말이다. 미안하다면 관뒀겠지. 당신이 없는 양심을 쥐어짜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기에는, 다른 힘들 일들이 쌔고 쌨다는 게 문제다. 그냥, 뒈지지만 말아라. 마음껏 즐기고 끝나면 즐거웠노라고 웃으며 축배를 들어라. 끝나지 않을 때까지는 오늘도 또 하루 살아남았다는 것에 또 축배를 들어라. 내가 대학원 가지 말라고 뜯어 말리는 새끼들의 특징은, 거기 목숨 거는 척을 한다는 거다. 실제로 걸었다면 끝날 때 뒈지면 되니 미리 뒈질 필요가 없는데, 거는 척하는 새끼들은 자꾸 지 안에서 유령을 키우니까 문제다. 눈앞의 문제에 힘들어 하고 눈앞의 문제랑 씨름해라. 그리고 바로 그 싸움이 니가 그렇게나 간절히 바라던 그 유희거리라는 걸 마음 속으로 인정 좀 해라. 즐겨라. BGM으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축배'를 추천한다.

3. 내 오랜 벗 둘이 결혼을 했다. 둘이 따로가 아니라 둘이 부부가 됐다. 이러저러해서 식도 안 보고 그냥 축의금 주고 인사나 하고 돌아 나왔는데, 그 잠깐의 모습을 보고 나니 문득 내가 앞으로 어떤 꼴로 살아가게 될지가 좀 더 실감이 나더라. 그 장면 어디에 나를 놓고 싶지가 않더라. 물론 진심으로 축하하고 개인적인 믿음이지만 두 녀석은 내내 재밌게 잘 살 것 같긴 하다. 자질구레한 '삶'이라는 거에 이리저리 들볶이지 않을 수야 있겠냐만, 사랑도 의리도 이래저래 종류별로 신뢰를 갖춘 두 사람이니 뒷통수 후려 갈기고 쌍욕하며 갈라서지는 않겠지. 뭔가 새 공부도 해 보겠다 할 테고, 말도 안 되는 여행을 떠나기도 할 테고, 애가 생기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거 가르치겠다 냅두고 놀게나 하겠다 그러고 투닥거리는 것도 재밌을 테고 말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차치하고, 그냥 '결혼식'이라는 걸 보고 있노라니 내 아부지 어무이가 생각나는 거다. 연애감정도 이렇다할 신뢰도 없이 서로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채로 뜻대로 풀리는 것 하나 없이 지쳐만 가는 과정. 내가 워낙 지랄 맞게 자란 탓에 나란 놈에게 기대가 없어 그러실 수도 있겠지만 어무이는 내가 결혼 안 하고 돈 안 되는 짓거리라도 나 재밌는 거 하며 낄낄거리며 살다 뒈지겠노라 말할 때마다 그거 참 맞는 말이다 해주신다. 열심히 돈을 벌어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게 해주신 우리 아부지께서는 다니시던 직장이 본사로 철수하고 가져 나온 사업이 적자만 계속되고 거기 쏟아붓느라 아파트 하나 못 사놓은 탓에 노후까지 불안해진 와중에, 그 돈벌이 하나로 세웠던 자존심과 그 하나로 내게 휘둘렀던 권위와 강압의 습관만 남아, 그나마 푼돈이라도 주워 들어오는 내게 별 말씀도 못 하시면서 툭툭 지나가며 짜증을 내신다. 집안 대대로 내려놓은 더러운 기질은 얘기해 무엇 하나 싶고, 그거 말고라도 글쎄, 가정을 꾸리고 싶지도 않고 꾸릴 자신도 없다. 아부지나 어무이 만큼 돈을 벌어낼 자신도 없고, 그 아래에서 자라온 내 지난 날의 가정에 대한 애착도 딱히 없고, 효심이니 뭐니 워낙에 그런 거 없는 후레자식이기도 하거니와 그나마 한 번 거하게 했던 결심도 수포로 돌아가고 나니 지칠대로 지쳐 버리기도 했으니... 아마 남은 친구놈들도 저 생경한 장면 속으로 들어갈 테고, 그 자리마다 내 실수로 서먹해진 또 다른 친구 하나도 축하인사를 하러 오다가 어느 날엔가는 제 장면을 애들에게 들이밀 테고, 아, 그건 참 가슴 아프다. 구애인의 도를 지키기 위해 연락도 않고 얼굴도 피하고 뒷조사(?)도 않는 마당에 여전히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싫을 만큼 아프다는 게, 그것도 참 구질구질하네. 뭐 구애인이고 전애인이고 나발이고 몇 번 얼굴도 못 보고 차였는데 할 말은 아니다만, 그저 나는 맨날 이 지랄이지. 딴 얘기로 샜는데, 어차피 개소리 할 요량으로 지껄이고 있는 것이니 그냥 계속 지껄이자. 그냥, 갈수록 할 얘기가 없어지리라는 막연한 느낌이랄까? 가면 갈수록 우리는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몇 번을 되풀어 추억팔이나 하다가, 지금도 몇 놈은 그런 꼴을 보여주는데 또 가면 갈수록 날 동정씩이나 하는 것들도 늘어날 것 같고, 그 호의보다도 그 삶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해 나는 화를 내게 될 것만 같고, 그렇게 내 추한 꼴 더러운 꼴 보이며 안 좋게 멀어지느니 그냥 좋을 때 조용히 꺼져 주는 것이 내 매우 즐거웠던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에 대해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고. 나만 빠지면 다른 사람들은 그럭저럭 조금은 거리를 두고 또 조금은 함께 하면서 잘들 어울려 오래도록 보고 지내고들 살 것도 같고. 그냥,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반감만 키워오다 또 언제부턴가는 다른 방향에서 기대도 접어오며 거리를 둔 그런 삶의 방식, 그 상징물이랄지 뭐 그런 것을 봐 버린 느낌이다. 별 얘긴 아니다. 미역을 싫어하는 나와 청국장을 싫어하는 형 사이의 거리감 같은 것을 느꼈을 뿐, 내 미역에 대한 안 좋은 추억들이 미역에 대한 객관적 비판이 될 수는 없는 것임을 나 역시 잘 안다. 아마 다음, 다다음 남은 다른 친구녀석들의 결혼식에도 나는 축하의 마음을 담아 몇 푼 안 되는 축의금을 남기고 얼굴도장을 찍고 그렇게 인사를 하러 갈 게다. 지금은 생각조차 쉽지 않아도, 저 아프리라 예상되는 자리에도 난 어쨌든 가겠지. 아마도 거기까지다. 

4. 이 블로그에 정리하다 만 공부거리들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 놓고서 헛소리를 지껄이려 했으나, 마음청소도 제때제때 하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해서 그냥 씨부려 본다. 힐링캠프에서 강신주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더 이상 학자이길 자처하지 않는 사람이 그저 '철학자'란 이름 하나 쓰는 걸 갖고 나 따위가 지랄을 해댈 이유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효과적인 수사, 그의 조언이나 그 뒤에 놓인 소신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그는 참 시원하게 떠들고 있었고, 나는 그럴 재주가 없는 사람인데다, 아마도 앞으로도 영영 나는 그 길과는 상관없는 길을 갈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맥이 풀렸달까. 학부 때 다녔던 학교 선배는 그 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대학원생들을 모아 놓고 철학사 공부하는 모임을 만드느라 바쁘더라. 석사 내내 석사과정이 뭔지, 논문은 또 뭔지, 어찌 해야 하는지 고민만 하다 비효율적으로 지나 보낸 시간이 아쉽고 내버려두면 그 낭비를 반복할 다른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뭔가 만들어 놓고 싶다고, 그리 말하는 그 선배를 보노라니 좀 미안하기도 하더라. 다 팽개치고 도망나와 내 살 길 찾겠노라 해놓고서는, 심지어 그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나는 참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도 개새끼고 그냥 사람새끼로서도 사람이 아니라 버러지새끼고 그렇구나 싶더라. 선생님들 번역 준비 윤독 모임에 따라 들어가 뒷풀이 자리에서 선생님들 붙들고 시덥잖은 하소연이나 하느라고 새벽까지 귀찮게나 굴고, 아, 쓰레기로다. 모르겠다. 징징거리지들 말라고 하고 다니면서도 당장에 내가 칭얼거리기나 할 뿐, 어째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지. 여전히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물색없이 아무렇게나 세상에도 화가 나고 서럽고 분하고 억울한데, 그럴 자격조차 없는 새끼라는 걸 이제는 모르는 척 하기도 어려워져 버렸다. 뭘 어찌 할까. 『티마이오스』 윤독이 재개될 테고 『파르메니데스』 윤독도 시작될 테고 『필레보스』로 연구강좌도 열릴 텐데, 운도 좋게 큰 도움 받아 이래저래 읽었던 프로타고라스 관련 단편들로 대학원에서는 강의도 열릴 테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도 계속 될 텐데. 현대 영미철학도 논리철학도 수리철학도 신기하고 재밌어서 더 보려면 읽고 준비할 게 차고 넘치는데. 4월부터는 돈 들어올 구멍도 다 막히고 벌써 작년에 썼어야 할 논문은 계획이 또 밀려, 그래도 다음 학기까지는 내야 하는데. 여러 사람들이 많이도 가르쳐 주려 애를 썼던 시간들이 쌓여만 가는데 나는 왜 배우지를 못하고. 또 새벽이네. 아, 별 준 것도 없이 몇 번 얼굴이나 봤다고 그런 쓰잘데기 없는 나란 놈 그래도 안다고 아무 얘기 없이 뜬금없이 도와달란 말에 선뜻 도와준 대학원 지인들에게 술 한 잔은 사야 하는데, 꼴에 조교랍시고 들어가 도와줘야 할 것도 많았는데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하는 사이에 덜컥 대학원에 들어와 고생고생 생고생 중인 또 다른 지인에게도 힘들어도 된다고, 힘들어할 그 정직함이 참 다행이라고 또 술이라도 한 잔 바쳐야 할 터인데, 아직도 찾아가지 못하고 있는 친구의 무덤에도 한 잔을 바쳐야 하고, 내 스승의 스승, 스승의 스승의 스승께서 돌아가신지 이번에는 20주기라는데 무슨 낯으로 거긴 또 찾아 가야 하나. 함께 이거 읽어 보자, 저거 읽어 보자 말 꺼내놓고서 다음 얘기 기다리고 있는 여기저기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 하는데. 이거고 저거고 다 떠나서 나같은 놈 붙들고 지켜봐 주시는 선생님들께 그래도 뭘 배우긴 배웠노라고 제자답게 졸업자격요건 겸으로 졸업논문이라도 보여 드려야 할 것인데. 인터넷에서 좆도 없는 내가 멋대로 재단하고 욕지기뱉은 사람들에게 사죄의 잔을 올려야 하는데. 내게 배신당한 후배놈들에게 절을 하고 엉덩이를 걷어 차이고 또 한 잔을 사다 바쳐야 하는 것인데. 그냥 빚만 쌓이는 게 아니라 마음 빚까지 쌓여 가니 참 사는 게 각박하구나. 이젠 대학원생이 되어버린 후배들이 아이패드 필름을 주질 않나 과방에 퍼질러 자다 깨워달라는 걸 또 와서 깨워주질 않나, 참 나란 놈 달라진 것 없이 민폐뿐인 인생이다.

5. 괜찮아. 난 틀리지 않았어. 내가 틀렸다는 그 생각만큼은 맞는 거였어. 고치고, 거쳐서, 딛고 나아가면 되는 거야. 뒈지기 전까지 사는 동안은 계속 살아낼 거야. 그럼 되는 거야. 소크라테스 형아가 그랬잖아, 뭔지도 모르는 걸 두려워 하는 건 거짓말이라고. 죽음조차 그러할진데 고작 시답잖은 자괴감 갖고 겁 집어먹긴, 무슨. 정직하고 성실하게 되돌아 나올 기회를 얻었다. 나는 멀리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제대로 걷고 싶은 거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가슴 떨리고, 두근두근 거리는데 뭘 더 바라겠나. 가끔 갑갑하면 욕도 하고 괜히 지랄병도 부리면서, 미친놈마냥 혼자 이죽거리고 낄낄거리며 갈 때까지 가 보자. 다시, 축배를 들어라.

-蟲-

Frede, M. "Plato's Sophist on false statements," in Cambridge Companion to Plato, ed. R. Kraut (Cambridge, 1990), 397-424. 논문에 대한 번역 및 요약, 정리인데 난 나를 믿지 않으니 보시는 분들께서도 저를 믿진 마시고 책을 빌리시든 구입을 하시든 알아서들 하시길.

1) 『소피스테스』의 대화자들인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소피스테스의 본성을 규정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소피스테스적 활동의 현상이 매우 다양하고 비정형적이며, 그들이 기껏해야 소피스테스의 피상적 특징 일부를 포착하는 데에 그치기에, 이 현상 기저의 난해한 실재를 파악하는 데에 실패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31c8-e7까지 이러한 내용이 요약되고, 232a1 이하로 소피스테스를 포획하기 위해 재개된 시도는 이 대화편의 나머지 부분이 그 해결에 할애되는 난점들 속으로, 더 핵심적인 문제를 향해 나아간다. 그 시도는 소피스테스가 사물들에 대해 그의 재현(모방), 진술이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그러한 것으로 보이고 여겨지도록 만드는 두드러진 능력을 지닌다는 제안이다. 이 제안은 235d2, 236c9 이하에서 시사되고, 236d9 이하에서 자세히 다루어지는 일련의 난점들을 야기시킨다. 이 문제들을 활용하여 소피스테스는 대화자들이 제안한 규정을 기각하고 그 포획으로부터 다시금 달아난다(cf. 239c9 이하, 241a3). 그 난점들은 요컨데 거짓 진술들의 가능성에 관하여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진술이 진술이기 위해서는 그 진술이 말할 어떤 것을 다루어야 하다. 즉, 그 진술로써 이야기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에서 거짓 진술은 what is not (혹은 what is not being)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거짓 진술은 진술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거짓 진술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러하다면 더욱이, ~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식으로 ~이지 않은 그러한 거짓 믿음들에 관련한 문제들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거짓 인상들의 문제 또한 있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인상에 관련하여서도 그런 문제가 있다. 그것이 실제로 참된 것 자체는 아니지만 단지 그것의 인상인 한에서, 어떤 식으로는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으나, 또 확정짓기 어려운 어떤 특수한 의미에서는 참이다(cf. 236e1-2, 239c9-240c6).[397-398쪽]

2) 이 문제들 대부분을 처리하려 시도하면서 손님은 거짓 진술들에 대한 그 핵심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서 그는 거짓 진술과 같은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고자 하며, 이 과정에서 거짓 진술의 가능성에 관련하여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혼란들을 정리하고자 시도한다. 그의 관점은 이러한 혼란들이 최소 두 가지 원천을 지닌다는 것인 듯하다. 첫 번째, 이 혼란들은 "not being"에서 부정 불변화사 "not"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이 오해로 인해 what is not, 혹은 what is not being을 전혀 아무것도 아니고 그래서 진술 내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 어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진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혼란이 있다. 이로 인해 한 진술의 진리치가 한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되거나 혹은 서술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야기된 것에 대한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일단 이 점을 인식하고, 또 "not being"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해석될는지 이해하고 나면,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우리는 또한 거짓 진술에 의해 이야기되는 것이란 ~이지 않은(that is not)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것 없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그것이 이야기하는, 문제가 되는 특정한 주어의 경우에서 (참)이지 않은 어떤 것일 뿐, 완벽하게 실제로 무엇인 것이다.[398쪽]

3) 그 문제에 대한 이러한 진단을 고려할 때, 플라톤은 두 단계를 거쳐 나아간다. 그는 우선(241c7-259c4) ~이지 않은 것(something that is not)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없음을 보이려 한다. 다음으로 (259c5 이하) 그는 진술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을 단언하는 진술을 말하는 것이 어떤 방식에서 문제가 없는 것인지 보이고자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자신이 처음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236e4-237a1) 떠맡았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왜냐하면 누군가 거짓들이 실제로 있다고 이야기하고 또한 생각하는 경우 그 문제를 어떻게 제기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을 언표하면서,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테아이테토스, 전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네.(거짓들을 진술한다거나 믿는다고 말하는 경우 어떻게 실제로 거짓들이라고 <단언>해야만 하는지, 그리고 이런 것을 언표하면서 모순을 강제받지 않는다는 것은, 테아이테토스, 전적으로 어려운 일일세.)" 플라톤이 어떤 면에서 자임하는 목표가 상당히 소박한 것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 목표는 거짓 진술들에 관련하여 누군가 야기시키고자 바라거나 혹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난점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관한 일관된 사유방식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여 더 이상 문제점을 노출시키지 않을 듯한 그런 사유방식을 찾아내는 것이다.[398-399쪽]

4) 그렇더라도, ~이지 않은 것, 즉 being이 아닌 것이 무엇일지에 관한 논의는 거짓 진술이 무엇일지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한 까닭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플라톤이 ~인 것, a being이라는 생각이 ~이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 전혀 못지 않게 혼란스럽다고, 그리고 이 두 혼란들이 관계맺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관점에서 not being에 관한 문제들은 단지 "… is not being"에서 "not"의 기능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관한 문제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being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관련한 문제들에도 기인한다. 더욱이, being에 관한 문제들은 진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적절한 이해의 도정에도 가로놓여 있다. 그러므로 242b6 이하에서 플라톤이 끝내 실제로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반박과 ~이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에 착수할 때, being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not being" 못지 않게 문젯거리인 그 이해를 처음으로 문제시함으로써 그 일을 수행한다(243c2-5, 250e5 이하 참조). 다음으로 그는 not being의 문제로 향하기에 앞서 being에 관한 문제들의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해결책을 다룬다(251a5 이하). 우리가 "not being" 혹은 "what is not"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의 전체 길이가 그렇게 주목할 만큼 긴 까닭은 이런 이유에서이다.[399쪽]

5) 그렇더라도 이 모든 것을 논의하는 대신 이 논문은 거짓 진술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따라서 Frede는 being에 대한 언급들은 매우 간략하게 논평하고, not being이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들을 어느 정도 더 자세하게, 거짓 진술에 관련된 난점들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범위에서 고찰한다.[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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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E PROBLEM OF BEING[399-402쪽]

1) Being에 관한 어려움은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것인 듯하다. 우리가 철학자들을 따라 being으로 헤아려지는 것을 한정하고 확정하고(242c5-6 참조), 결론적으로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과 무엇이든 멈추어 있는 것을 being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또한 이 두 부류가 ~인 것의 전부라고 결정한다 가정해 보자(249c10-d4). 여전히 being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249d6 이하). ~인 것은 무엇이든 움직이거나 아니면 멈추어 있는 것이 참이라 하더라도, being 자체는 움직이지도 멈추어 있지도 않다. 움직인다는 것도 멈추어 있다는 것도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또한 ~인 것은, 그러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그것 스스로는 움직이지도 멈추어 있지도 않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그저 ~인 바의 것일 따름이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움직이지도 멈추어 있지도 않다면, 그것은 a being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250c1-d5).[399-400쪽]
  <운동과 정지, 그리고 being 사이의 문제는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being 사이의 문제와 같은 구도로 논의된다. being 외의 둘은 가장 반대되는 것(전통논리에 따르자면 운동과 정지는 반대가 아니라 모순이겠지만)이다. 만일 being이 이 둘 중 어느 하나와 동일시된다면, 여전히 그 둘 모두 being이므로, 다른 한쪽과 동일시된 한에서의 being이 나머지 한쪽에도 적용되기에, 서로 반대되는 본성이 정반대의 본성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프레데의 분석대로 운동과 정지는 배타적 선언을 이룬다. being이 둘 중 어느 한쪽도 아니라면 그것은 being이 아니다. 나아가 이 경우 being이 아닌 한에서 운동도 정지도 운동'이지 않고' 정지'이지 않으며' 그것은 ~이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된다. 그러나 not being은 진술, 사유, 언표가 불가능하다. 문제는 왜 프레데가 이러한 여러 난점들 중 저 문제만을 언급하는가, 이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은 being it self가 a being일 수 없다는 것인가? 이는 달리 말하면 이후 유들의 결합 논의에서 being이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같거나 다르다고 진술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와 같은 종류의 것일 터이다. 그러나 a being이 being이 될 수 없고, 운동과 정지가 being이 될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한 언급은 프레데가 서술한 방식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 아닌가?>

2) 이 문제의 해결책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각각의 것이 수 많은 것들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단지 그 자체로 혹은 그 자체가 그것인 바의 것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그 자체로 어떤 것인 그러한 것의 유類라면), 또한 그 자체로서 그러한 바의 것들이 아닌 어떤 다른 것과 적절한 관계 속에 성립함으로써 그러한 것들이라고도 이야기될 수 있는지 보아야 한다. 그래서 being은 그 자체에 대해 단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being이 정지 또는 운동에 대한 적절한 관계 속에 성립함으로써 멈추어 있거나 혹은 움직이는 것을 막지 않는다. 이 점을 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 문제가 진술에 대한 문제와 얽혀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 당대인들의(아마도 안티스테네스의), 어떤 것에 대해 다른 어떤 것이라 말하는 것,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일부 관점이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 사람(a man)을 "사람(man)"이라 부르고 좋은 것(what is good)을 "좋음(good)"이라 부르는 것은 좋다. 하지만 만일 사람(a man)이 좋은 것이 아니고 다른 어떤 것이라면, 어떻게 사람에 대해 그가 좋(은 사람이)다고(he is good) 말할 수 있는가(251a5 이하 참조)? 이것은 진술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를 포함한다. 진술을 구성한다는 것은 단지 사물(a thing)을 그 고유한 특정 이름으로 부르는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플라톤이 이후에 지적할 것처럼(262d2-6) 어떤 것을 그것에 대해 무언가 계속해서 말하기 위해 명명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진술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어떤 것이 수 많은 것들로 이야기될 수 있고 여러 다른 이름들로 불릴 수 있는지(251a5-6 참조), 이에 대한 이해의 이러한 실패는, 결국 그것이 다시 악화시키기도 하는, being에 대한 실패에 의해 악화된다.[400쪽]

3) 여기에서 이해의 결정적인 지점은 255c12이하의 많은 논쟁이 있어온 구절에서 플라톤이 구성하는 지점이다. 우리가 사물들에 적용시키는 Being은 두 종류이다(255d4-5 참조). 우리가 사물들'이라고' 말하는 사물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써 ~이다. 우리가 사물들'이라고' 말하는 것들 중 다른 것들은 바로 다른 어떤 것과 관련하여, 다른 어떤 것과 적절한 관계 속에 성립함으로써 ~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흼 채로 ~이거나 being이다, 그러나 흼은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에 의해 그러한 어떤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가 다른 어떤 것, 즉 색 '흼'과 적절히 관계됨으로써만 그가 그러한 어떤 것이다. 그는 오직 이러한 특정한 방식으로만, 혹은 특정한 측면에서, 즉 흼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어떤 것, 즉 색에 대한 특정한 관계 속에 정립됨으로써, ~인 것(a being)이다. 그는 흼이라는 이 특성임으로써 흰 것이 아니라, 이러한 특성을 지님으로써 희다. 아마도 말하자면 다른 어떤 것에 "참여(metechein)"함으로써, 그는 희다. 반면 그 색은 흼이라는 이러한 특성에 참여함으로써, 가짐으로써 흰 것이 아니라 그것임으로써 희다고 이야기된다. 마찬가지로 그 색은 색인데, 이런 종류의 특성을 지님으로써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특성임으로써 색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단지 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색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 색은 색 분홍과 다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색 흼임으로써 그 색이 색 분홍과 다르다 하더라도, 이런 의미는 여기에서 적합한 의미는 아니다. 색 분홍이지 않다는 것은 색 흼이라는 것의 부분이 아니다. 그래서 색 흼은 다른 어떤 것과, 즉 다름과 적절하게 관련됨으로써 분홍과 다르다. 또한 그렇게, 지극히 일반적으로, 그 색 흼은 두 가지 상당히 다른 의미에서 ~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되었든 그 자체로 그것인 바의 것임으로써, 예를 들자면, 희고 또한 색이다. 그것은 또한, 예를 들면 분홍과 다르게끔, 그렇게 다름과 같은 여타의 사물들에 적절히 관련됨으로써 ~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단 being이 이러한 두 형식을 취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한 사물을 오로지 그것의 특유한 이름으로만 부를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많은 이름들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예를 들어 어떻게 우리가 색 흼에 대해 단지 그것이 희다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그것이 분홍과 다른(~인) 것이라고도, 그리고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being 자체가 운동 중이거나 정지 중일 수 있는지, 그 자체로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닐지라도 그럴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400-401쪽]

4) 허나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being에 관련한 그 문제의 해법이 not being에 관련한 문제를 해명하는지 보기 시작한다. ~인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이지 않은 여러 가지 것들, 다시 말해 그것이 다른 어떤 것에 관련하여서 ~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이라는 것이 being의 바로 그 본성 안에 자리한다. [401쪽]

5) 이러한 해석은 결정적으로 255c12-13에서 플라톤이 "… is …"의 두 가지 용법을 구별한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나는 플라톤이 그 이후 계속해서 이 구분에 의존한다고 가정하고자 하고, 그러나 255c12-13의 이러한 해석이 변화했기에, 이 해석을 방어함에 있어서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보스톡은 그의 "Plato on 'is not,'" Oxford Studies in Ancient Philosophy 2 (1984): 89.에서 그 해석을 공격했다. 시작하기에 앞서, 그 구분이 동일성의 "is"와 "일상적인" 계사, 곧 술어적 "is" 사이의 구분은커녕, "… is …"의 불완전 용법의 두 가지 의미들로도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반대하는 주장은 플라톤이 단 하나의 being에 대한 견해만 인지한다는 것, 그리고 대화편 전체에 걸쳐 플라톤이 마치 이러한 하나의 견해가 not being이라고, 다시 말해 그것이 not being이라고 말함(258b11-c4)에 있어서도, 그리고 어떤 것이라고, 다시 말해 그것이 어떤 것과 다르다고 말함(263b11)에 있어서도 모두 포함된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두 경우 모두에 적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이자 똑같은 being(255d5)이다. 더욱이 그 두 가지 사용들은 첫 번째 용법에서 "… is …"가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is identical with"로 대체될 수 없을 그러한 것들이다. 인간이 합리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합리적 동물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척추동물이라거나 흼은 색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 자체에 대해 인간이 무엇인지 혹은 그 자체로 흼이 무엇인지 말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명백히 동일성 명제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401-402쪽]

6) 보스톡이 가정하는 것으로 보이듯, 그 두 가지 용법의 구분이 문법적 혹은 논리적 구분으로 간주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만일 우리가 이로써 우리가 의존하는 형이상학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그러한 구분을 의미한다면, 실수일 것이다. 그래서, 보스톡이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92쪽)와 반대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관점에서, 그 자체 인간인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어떤 것, 즉 인간의 형상에 참여함으로써만 인간인 것임을 고려한다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와 "소크라테스는 그 골목에 그 사람이다"가 플라톤에게는 명백히 히 "… is …"의 첫 번째 용법이 아니라, 두 번째 용법의 사례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사람이, 그 둘 중 첫 번째 항목이 두 번째 항목에 참여하는 두 가지 상이한 항목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사람과 다르다는 것, 혹은 소크라테스가 인간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에 전혀 끌리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또한 "not being is not being"이 not being이 not being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끌리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X와 Y의 동일화는 "… is …"의 첫 번째 용법에서 "X is Y"의 참에 대한 필요조건이든 충분조건이든 어떤 것을 구성한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 자체로서 흼은 색이기에 그것은 필요조건을 구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를 들어 "The same is the same (i.e., with itself)"가 "The different is the same (i.e., with itself)"이 명백히 그러하듯 "… is …"의 두 번째 용법의 경우여야 할 것임을 고려할 때, 그것은 충분조건을 구성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자기-술어의 서로 다른 유들을 구별하도록 해주고 플라톤이 내내 관심을 가져왔고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그런 종류의 자기-술어가 무해한 방식으로 "… is …"의 첫 번째 용법을 포함하는 그런 것이라 주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402쪽]

7) being에 관한 문제에 대한 해법의 이러한 안타깝게도 지극히 간단하고 개략적인 설명을 가지고, 플라톤이 어떻게 not being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402쪽]


II. THE PROBLEM OF NOT BEING[403-412쪽]

1) ~이지 않은 것에 관련한 난점들에 대한 해법은 255e8에서 시작된다. 그 해법은 이하 네 부분들로 명백히 나뉜다:
   1. 255e8-257a12: 플라톤은 사물들, 나아가 being 그 자체의 형상도 not be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257b1-257c3 : 플라톤은 ~이지 않은 것에 관련한 난점들이 "not being" 구에서 "not"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에 그 기원을 가진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3. 257c4-258c5 : 플라톤은 ~이지 않은 사물들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not being의 본성이 무엇인지까지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4. 258c6-259c4 : 플라톤은 진술에 대한 논의로 인도하는 요약을 제시한다.[403쪽]

2) 우선 255e8-257a12를 고찰해 보자. 앞선 부분에서 플라톤은 특히 중요한 다섯 가지 구별되는 유(類)들 혹은 형상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being, 운동, 정지, 같음, 그리고 다름이다. 255e8 이하에서 그는 운동을 골라내어 운동이 정지, 같음, 다름, being과 다르기에, 정지이지 않고, 같음이지 않으며, 다름이지 않고, 그 추론의 일부로서(pari ratione, 같은 논증에 따라) being이지 않다고 주장한다(cf. 256c10-d10). 이와 관련하여 그는 만일 X가 Y와 다르다면 우리가 X는 Y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는 하나의 사실에 의존한다. 256d11-12에서 그는 이로부터 다음의 추론을 도출해낸다: "이런 이유로, 필연적으로, 운동의 경우에도 다른 모든 형상들의 경우에도 not being이 속한다." 이어지는 구절(256d12-e4)은 이 추론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밝혀준다. 운동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형상들도(물론 being 자체를 제외하고) being과 다르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들이 being이지 않다는 것은 그것들 모두에 대해 참일 것이다. 그래서 "being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는 말은 어떤 것에든 올바르게 적용될 가능성조차 없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최소한 being과는 다른 모든 형상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결론에서의 표현을 주의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만일 a가 F라는 것이 참일 경우 "a에 관하여서는 F(혹은 F-ness)이다"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 표현의 기저에는 F가 ~일 한 가지 방식이 F인 어떤 a가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듯하다.[403쪽]

3) 256e6-7에서 플라톤은 255e8에서 시작한 논증으로부터 추가적인 결론을 도출해낸다. "이런 이유로, 각각의 형상에 관련하여 being인 많은 것들이 있지만, not being인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우리가 제시된 주어에 관련하여 ~인 혹은 being인 어떤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뿐 아니라, 제시된 주어에 관련하여 ~이지 않은 혹은 being이지 않은 항목들에 대해서도 말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앞선 결론에서 우리가 주목하였던 말하기 방식과 동일한 것을 가지게 되는 듯하다. 그 방식은 이 표현이 다음의 방식으로 이해될 것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a가 F라면 a의 경우 F-ness가 ~인 것이라 이야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F-ness는 만일 a가 F이지 않다면 a에 관련하여 ~이지 않다고, ~이지 않은 혹은 being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적어도 이러한 가정 하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 결론이 앞선 논증으로부터 귀결될는지 볼 수 있다. 운동이 그것이지 않은 수 많은 것들, 예를 들자면 그 외의 모든 형상들이 있다. 그리고 운동에 대해 참인 것은 물론 다른 모든 형상들에 대해서도 참이다. 그래서 각 형상에 관련하여 그것이 ~이지 않은, 혹은 being이지 않은 무수한 것들이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래서 여기에 형상들조차 not be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그 두드러지게 상당히 문제되는 두 번째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은 각각의 특정한 형상이 being의 형상이지 않다는 것만이 아니라, 여타 어떤 형상도 이 특정한 형상이지 않다는 경우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그 특정한 형상이 그것 외의 다른 어떤 형상에 관련하여서도 not being이라는 것이기도 하다.[403-404쪽]

4) 끝으로 257a11 이하에서 플라톤은 being 그 자체의 형상까지도 ~이지 않다거나 ~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고, 그것과 다른 모든 것들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플라톤이 여기에서 논하는 방식으로부터 그가 어떤 것의 F이지 않음을 어떤 것이 ~이지 않을, 즉 being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이야기할 추가적인 방식으로 간주한다는 점 또한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가 "이런 이유로 being은 여타의 것들이 있는 그 만큼의 방식으로 ~이지 않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257a4-5). 만일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255e8 이하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플라톤이 이미 그곳에서 그가 운동은 정지, 같음, 다름, 혹은 being이지 않다고 주장할 때, 분명하게 이것들을 운동이 ~이지 않은 혹은 being이지 않은 방식으로 취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각 경우 그가 운동에 대한 부정적 진술을, 운동이 다름임, 혹은 같음임, 또는 being임과 같이 ~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긍정적 진술과 짝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들이 ~이지 않을, 혹은 being이지 않을, 다시 말해 바로 이러저러한 것이지 않음으로써 ~이지 않을 추가적인 방법이 여전히 있다.[404쪽]

5) 이 부분의 결론들을 요약해 보자.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being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전적으로 무해해 보이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 만일 X와 Y가 다르다면, 우리가 "X는 Y이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이유로, 여타의 모든 형상들이 being의 형상과 다르기에, 그 형상들 각각은 not be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 이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떤 것이 not be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더욱 흥미로운 방법들이 있다. X가 Y이지 않다는 것은 X가 어떤 방식으로 ~이지 않다는 것, 즉 Y이지 않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는 또한 Y가 어떤 방식으로 ~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X와 관련하여, 혹은 X의 경우에서 ~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X가 이런 방식으로 ~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는 것은, 명백히 X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 예를 들어 Y와 다른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말하자면 Y이지 않은 어떤 것일 이러한 방식을, 그것이 being이었지 않는 한, 즉 Y와 다른 것이지 않았던 한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사하게, Y가 이런 식으로 ~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는 것은 Y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Y는 우리가 보였듯 수 많은 것들, 예컨데 X와 다른 것들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not be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추가적인 두 가지 방식들이 있다. (i) X가, 그것이 몇몇 Y이지 않은 한에서 ~이지 않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방식 (ii) Y가, 그것이 일부 X와 관련하지 않는 한에서 ~이지 않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방식. 명백히, 두 번째 방식은 단지 첫 번째 방식의 역(逆)이다. 어떤 경우든, not being인 것들이 있는 전적으로 이상할 것 없는 방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404-405쪽]

6) 이를 가지고 우리는 다음 부분, 257b1-257c3으로, 사람들이 ~이지 않은 것과 같은 그런 것은 전혀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들이 어디에서 혼란에 빠지는지 설명하고자 플라톤이 시도하는 부분으로 향할 수 있다. 그 주장은 그들이 "what is not"이나 "not being"은 반드시 ~인 것(what is)의 반대되는 것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 것은,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이라는 것이 그것에 대해 참인 그러한 어떤 것이다. 반대로, ~이지 않은 것이 이런 측면에서 ~이라는 것이 그것에 대해 참이 아닌 어떤 것이라는 인식을 하는 대신, 그들은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도 ~이라는 것이 그것에 대해 참이 아닌 어떤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not X" 형식의 표현들의 용법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형식의 표현들을 통해 의미되는 바는 X에 어떻게든 반대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405쪽]

7) 이 정도까지는, 아마도, 꽤나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석자들은 "not X" 형식 표현들의 사용에 대한 플라톤의 고유한 적극적 규정 그리고 특히 "not being"이라는 표현에 대한 그의 해명에 곤란을 겪었다. 플라톤의 표현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과 선행하는 구절 사이의 밀접한 관련을 유념해야 한다. 플라톤은 "not being"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257b3-4).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being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는 어느 때에든, 우리는 being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지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네." "It seems(~처럼 보인다)"라는 단서는 그 표현이 선행하는 것에 비추어 이해될 것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 뜻은 또한 우리가 다음 문장을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257b6-7).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것을 'not big'이라 말할 때, 우리가 그리하여 이 구절로써 같음보다 오히려 작음을 더 지시한다고 자네에게 여겨지는가?" 이것이 선행하는 문장에 대한 해명으로 표현된다는 사실로부터(이것이 그 응답이 되는 257b5에서 테아이테토스의 물음을 참조하라), 허나 또한 "e.g.(hoion, 예를 들어)"라는 말로부터도 명백하듯, 어떤 것을 크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것을 ~이지 않은 것으로(as not being) 이야기하는 경우로 간주된다.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어떤 것을 not being으로 이야기하는 경우인지는 즉각적으로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어떤 것을 not being으로 이야기하는 경우인 바, 즉 not being big으로 이야기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것이 해당 문헌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은 다음 고찰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255e8-257a12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257b3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not being이 (i) being의 형상이지 않은 어떤 것의 그 not bieng이거나, 혹은 (ii) 더 일반적으로, 어떤 이러저러한 특정한 것이지 않은 어떤 것의 not being이거나, (iii) 끝으로, (ii)의 역, 이러저러한 특정한 것에 관련하지 않는 어떤 것의 not being이라고 추정해야 할 것이다. 이제 being이지 않은 어떤 것은 그것이 being의 형상이 아닌 한에서 being의 반대가 아니라 단지 그것과 다르다는 점은 명백히 참이다. 하지만 크지 않은 것은 being의 형상이지 않음으로써 being이지 않은 것의 예가 아니다. 크지 않음이 이러저러한 특정한 것에 관련하여 being이지 않은 것의 직접적인 예시인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일 그러한 경우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참일 경우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그가 이 경우에 대해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이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작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플라톤이 여기 257b3에서 그에 대해 논하고 있는 not being이 이러저러한 특정한 것, 예를 들어 큰 것이지 못하는 어떤 것의 not being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이것이 플라톤이 being 자체의 형상까지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즉 그것과 다른 모든 것들이지 않음 속에서 not being이라고 말했을 때, 그 선행하는 구절에서 그가 결국에 말한 그런 종류의 not being이었다는 사실에 부합한다. 더 나아가, 그런 방식으로 not being인 것, 예를 들어 not big임으로써 not being인 것은 being인 것에 이런 방식으로 반대이지 않고, 단순히 다를 뿐이다. Not big인 것이 being인 것에 반대이지 않고, 단지 being인 것과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것에 상대적으로) big인 것과 다른 것일 한 가지 방식이 (상대적으로) 작은 것임일지라도, big인 것과 다를 또 다른 방식이 같은 크기일 것이라는 이유로 명백하다. 그래서 매우 일반적으로 "not X"는 단지 X인 것과 다른 어떤 것에 적용된다. [405-406쪽]

8) 이제 결정적인 난점은 플라톤이 어떻게, 내가 당연시하였듯, 어떤 것의 큰 것이지 않음, 혹은 어떤 것의 크지 않은 것임(플라톤은 그 둘을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에 포함되는 그런 종류의 not being이 운동의 정지, 같음, 다름, being, 혹은 다른 어떤 형상이든 그것이지 않음에 포함되는 그런 종류의 not being과 같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해석자들은 플라톤이 257b3 혹은 257b6에서 다른 종류의 경우로 비약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 지점까지 그는 어떤 것이 직접적으로 어떤 다른 것과 다른 경우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한 형상이 어떤 다른 형상과 다른 그러한 경우들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작음(smallness)이라는 속성은 큼(bigness)이라는 속성과 다르다. 그리고 따라서 작음은 큼이 아니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혹은 우리가 플라톤의 표현을 받아들인다면, 작음(the small)은 안 큼(the not big)이고, 혹은 작음은 크지 않기까지 하다. 하지만 257b3에서 플라톤은 being이지 않은 것에 대해, 예를 들어 크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마치 이것이, 큼이라는 속성과 다른 것임으로써가 아니라, 그 속성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최소한 큰 것이지는 못한 것의 경우를 포함했던 것처럼, 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극히 다른 종류의 경우인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이 예고도 없이 한 종류의 사태에서 다른 종류의 사태로 넘어간다는 것은 그가 단지 혼동하고 있다는 의심을 갖도록 만든다. 이것이 보스톡이 주장하는 바이다. 덜 자비롭게 우리는 아마도 플라톤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자비의 원칙을 적용하고자 노력해 왔고, 더욱이, 플라톤을 혼란에 빠졌다는 죄목으로부터 풀어줄 어떤 방법을 찾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일종의 혼란을 플라톤에게 돌리지 않을 수 있을지 알아보기란 여전히 어렵다.[406-407쪽]

9) 그 문제는 플라톤이 257b3 이하에서 단지 "not big"과 같은 표현들 속에서, 매우 일반적으로 "not F" 형식의 표현들에서, 따라서 "not being"이라는 표현에서까지 "not"의 사용에 대해, 즉 "not"이 반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not F" 형식의 표현들에서 "not"의 사용에 대해 주장한다는 것은 충분히 사실이지만, 이 주장을 펴는 데에 있어서, 그가 이러저러한 특정한 어떤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주장했다고 믿는다는 것 역시 참일 것으로 보인다. 오웬처럼("Plato on Not-Being," 232, 237, 238) 플라톤이 여기에서 "not big" 같은 표현들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며 "not being"을 그런 표현들과의 유비 속에서 설명하고자 시도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독이다. 어떤 것에 대해 not big으로 말하는 것은, 동시에, 어떤 것에 대해 단지 not being에 대한 유비가 아니라 오히려 not being으로 말하는 것으로 취급된다.[407쪽]

10) 그 난점은 정확히 플라톤이 운동의 정지이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어떤 것의 크지 않음으로, 마치 양쪽 경우 모두에서 not being이 같은 종류의 not being인 것처럼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이 그의 숙고된 관점인 것으로 보인다. 257c4 이하에서 그가 not being의 본성인 바의 것을 설명하는 데에로 나아갈 때, 그가 우리가 고찰하고 있던 not being의 모든 경우에 추정상 포함되는,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의 해석에서든, 단순한 비동일성의 경우들과 우리가 일상적인 부정 서술로 간주할 그러한 것의 경우들 양자 모두에 포함되는 하나의 본성을 명시하기 때문이다(258a11 이하). 이로부터 플라톤이 그 문제를 "… is not …" 혹은 "not being"의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함으로써 해결하려 생각했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는 "운동은 정지이지 않다"와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지 않다" 둘 모두에 포함된 "… is not …"의 한 가지 의미가 있다고 가정함에 틀림없다. 문제는 명백히 어떻게 그가 이를 가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407-408쪽]

11) 만일 우리가, 오웬이 그리하듯(237쪽), 플라톤에 대해 동일성의 부정으로부터 서술 문장들에서 거짓을 고찰하는 쪽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작업을 가망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선, 여기에서 문제시되는 이행은 서술 문장들에서의 거짓을 향한 이행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보이기로는 부정적 서술 문장들을 향한 매개적 이행, 오웬이 너무 지나치게 빨리 강력하게 얼버무린 이행이다(237-8쪽). 하지만, 더 중대하게, 플라톤이 이전의 진술들을 단순히 동일성의 부정들로 생각한다고 추정하는 것은 실수이다. 만일 그가 그랬다면, 그 작업은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만일 X와 Y가 동일하지 않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리하여 X는 Y이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를 말하면서 우리는 X와 Y의 동일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not being을 X에 부과하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동일하게 작은 것에 대해 그것이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똑같은 not being을 그것에 부과하는 것이라고 추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 작은 것에 대해 그것이 ~이지 않다고, 즉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408쪽]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여기에서 어떤 구분을 만들고자 바라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뒤따르는 부분을 고찰하면 그러하다. 작음은 큼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작음은 큼이지 않다. 플라톤은 스스로 이로부터 "작음은 크지 않음이다"로 이행하는 것을 허용한다(추정컨데 이것이, 만일 "작음이 그 자체로 크다" 혹은 "작음이 그 자체의 본성에 의해 크다"가 참이라면 "작음이 크다"가 참인 그런 "… is …"의 용법에서 "작음이 크다"에 대한 부정이라는 사실에 의존함으로써). 그래서 우리는 "작음이 크지 않다"와 "이것(작은 것)이 크지 않다" 둘 모두를 가진다. 이 두 진술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어떤 것이 특정한 속성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고, 후자는 어떤 것이 특정한 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수로 플라톤이 이 차이를 특정해야 하는가?[408쪽]

13) 차후 257c4 이하 부분의 세부사항들에 들어서지 않고도, 우리는 이미 여기에서 플라톤이 not being을 다름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의 특정한 형상 혹은 유(類), "다름의 부분"과 동일시한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작음은 큼이지 않다" 혹은 "작음은 크지 않다"가 "작음(smallness)이 큼(bigness)과 다르다"를 의미하거나 그렇게 분석되어야 할 것이라 추정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그가 그 문장이 "작음은 큰 것과 다르다"로 분석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는 또한 그것을, 그가 "이것(작은 것)이 크지 않다"가 마찬가지로 "이것이 큰 것과 다르다"로 분석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어째서 그가 "not"의 용법에 대한 단지 하나의 설명이 있다고, "big"이나 "the big"에 아무런 애매성도 없다고, "difference" 혹은 "… is not …"에 아무런 애매성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만일 그가 원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에게 구별하기를 바라는 두 종류의 경우들을 구별할 수 있는지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 is big"에서 "… is …"의 두 가지 용법들을 구분함으로써 그리할 수 있다.[408-409쪽]

14) 다음으로 세 번째 부분(257c4 이하)에서, 플라톤은 ~이지 않은 것 혹은 being이지 않은 것이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이자 생각할 수 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불가능하며 논의의 주제로 부적절한 것과도 거리가 멀며, 정의를 구성하고, 유를 특정할 수 있는 것임을 보이고자 시도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유가 구성되는 방식을 고려할 때, ~이지 않은 것이 ~인 것만큼이나 실질적이라는 것을 보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고려해 보자. 그것은 우선 다름에 의해 구성된다. 다름은 ~인 어떤 것이다. 하지만 다름은, 지식이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인 것과 같이, 언제나 어떤 것과 다르다. 그래서 아름다움과의 다름이 있고, 즉, 아름다운 것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한 부류의 것들을, 말하자면 아름답지 않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또 다른 한 부류의 것들, 다시 말해 아름다운 그러한 모든 것들에 걸쳐 맞세워 내어 놓는다. 다름이 완전히 실질적이고 아름다움이 완전히 실질적이기에, 아름다움과 다름, 그리고 이런 이유로 아름답지 않음은, 아름다움만큼이나 완전히 실질적이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아름답지 않음은 아름다움 못지 않게 문제 없는 한 부류의 사물들을 구성한다. Not being의 경우에도 유사하다. 그것은 다름을 포함하고, 더 구체적으로는 특정한 방식에서 ~인 것 혹은 being인 것과 다름을 포함한다. 이에 대해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이 특정한 다름은 한 부류의 것들, 다시 말해 같은 방식으로 ~이지 않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또 다른 한 부류의 것들, 다시 말해 이런 식으로 ~인 그러한 모든 것들에 걸쳐 마주 세워 놓는다. being이지 않다는 것은 단지, 특정한 방식으로 ~인 것, 이러한 방식으로 being인 것과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나온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not being은 being만큼이나 실질적이고 이런 이유로 그 고유한 본성이다.[409쪽]

15) 아마도 누군가는 내가 그 설명에 도입시킨 "특정한 방식으로"라는 구절에 대해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플라톤에게 being이 언제나 이러저러한 어떤 것임(being)의 문제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에 부응하게 not being은 언제나 특정한 관점, 측면, 혹은 방식에서 not being에 대한 문제이다. 규정되지 않은 not being 같은 그런 것은 없다. 이것은 이하의 요약, 플라톤이 not being에 대해 being의 개별적 유에 반대로 마주 놓인 다름의 부분이라 말하는 곳에서 플라톤에 의해 파악된 것으로 보인다(pros to on hekaston, 258e1). 그래서 being이지 않다는 것은 특정 방식으로, 특정 관점에서 ~인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409-410쪽]

16) 이제 분명한 점은, 이 부분의 논의의 결론으로, "not"의 사용에 대한 앞선 부분에서 분명치 않았던 어떤 것이고, 우리가 기껏해야 그 부분을, "앞에 놓인 'not'이 그것을 뒤따르는 이름과는 다른 어떤 사물들 중 하나를 의미하거나, 차라리, 그 사물들에 적용되고 그 부정에 뒤따르는 이름에 의해 지시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들 중 하나를 의미한다(257b10-c2)"라는 문장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해석을 통해 회피했다는 것이다. 이제 분명한 것은 플라톤이 "not being"과 "… is not …"을 어떤 것이 어떤 것이지 못하는 경우 그것이 특정한 성질을 지니지 못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제 "not being"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정 서술이라 부를 그런 경우를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플라톤이 다음 부분, 258c7 이하를 향하여 그 논증의 요약으로 들어설 때 말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요약은 또한 혼란스럽고, 더욱이, 만일 누군가 어떻게 플라톤이 첫 부분에서 논의된 경우들을 정확히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의미에서 not being의 경우들이라고 취하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면, 즉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와 같은 진술들에서 문제가 되는 말하기라고 취하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면 반드시 혼란스러워야만 한다. 플라톤은 259a5 이하에서 다시 어떻게 어떤 것이 ~이지 않다거나 being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지 설명하기 때문이다. 다름의 형상을 취해 보자. 그것은 being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not being이다(259a6-b1). Being의 형상은 여타 모든 형상들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그것도 마찬가지로 ~이지 않고, 다시 말해 이러한 여타의 형상들이지 않다(259b1-5). 유사하게 여타의 형상들 각각이 나머지 형상들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여타의 형상들 각각이 여러 방식으로 ~이지 않다(259b5-6). 이제 이것이 "… is not" 혹은 "… is not being"의 무해한 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참이지만, 문제는 이것이 만일 우리가 어떻게 진술이 거짓일 수 있는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계속해서 그 만큼 도움이 될지 하는 것이다. 요약의 끝까지 내내 플라톤은 만일 X와 Y가 다르다면 우리가 X는 Y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기초하여 그는 우리가 X는 ~이지 않다고 혹은 X가 being이지 않다고, 즉 Y이지 않거나 Y인 것이 아니라고 말함에 있어서 정당화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Y가 being 자체의 형상인 경우, being이지 않은 being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든 그것이 참이라는 사실에 의존했다.[410-411쪽]

17) 이제 만일 누군가 첫 부분(255e8-257a12)에서의 부정 진술들이 비동일성 진술들이라 믿는다면, 그 진술들이 어떤 형상 X에 대해 그것이 어떤 형상 Y와 다르다는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 요약은 틀림없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거짓 진술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X는 Y이지 않다"의 의미는 분명 "X는 Y와 다르다"의 의미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특정 대상 a가 아름답다는 것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a가 아름답다"가 사실상 a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취지에서의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a의 not being beautiful은 a의 아름다움과 다름 혹은 아름답다는 것과 다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아름다움에 참여함으로써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움과 다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짓 진술들 때문에 필요로 하는 not being에 대한 설명은 X가 Y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단지 X가 Y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라는 설명보다는 더 복잡해야 한다. 그래서, 만일 그 요약이 우리에게 거짓 진술들의 설명이 필요하리라는 결론을 주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플라톤이 첫 부분의 부정 진술들을 비동일성 진술들로 간주했다는 가정을 견지하는 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는 데에 전혀 근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11쪽]

18) 내가 받아들이기로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플라톤이 "다름은 같음이지 않다"와 같은 진술들을 "다름이 같음과 다르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비동일성 진술들로 취한다고 추정하는 것이 내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진술들을 그가 "a는 아름답지 않다"라는 것을 a에 not being을 부여하는 것으로 취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주어에 not being을 부여하는 것으로 취한다. 하지만 누군가 이 점을 알아 보더라도, 플라톤이 요약에서 우리에게 염려할 것이 아닌 듯한, 그리고 어떤 경우든 만일 우리가 거짓 진술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염려할 바가 아닌, not being의 경우들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혼란스러운 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마도 그 설명은 플라톤이 요약에서 다시금 어떻게 어떤 것에 대해 not being이라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지 강조하고자 바란다는 것, 그리고 ~이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411쪽]

19) 우리의 의도에 맞게 우리는 지금까지 그 논의의 결론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요약할 것이다. 플라톤은 만일 X가 Y인 것과 다르다면, Y-ness 형상과 무엇이든 이러한 형상에 참여하는 것이 모두 Y인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곳에서, X가 Y이지 않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그런 "… is not …"의 사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부합하게 그는 X가 어떤 ~이지 않은 것, 예를 들어 Y이지 않은 채로 그렇다는 것을 주장하는 일이 문제가 없다는 걸 발견한다. 이에 맞추어 그는 "… is not …"의 역용법을 도입한다(256e6-7). 만일 X가 Y이지 않다면, Y-ness는 X와 관련하여 ~이지 않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그에 맞게, Y-ness가 X에 관련하여 ~인 것과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다시 다름 그리고 같음과 다름이, 비록 다른 방식들에서라도, 둘 모두 다름에 관련하여 ~인 것으로 간주되는 그러한 방식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거짓 진술들에 포함된 not being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거짓 진술들이 not being을 포함하는 그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술들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또한 그래서 이것이 그가 다음으로 향하는 주제이다.[411-412쪽]


III. FALSE STATEMENTS[412-423쪽]

1) 이제 진술들에 대한 더욱 적합한 이해에 이르도록 플라톤이 만드는 결정적인 이행은 진술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두 가지 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우리가 그 항목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 그 항목을 확정하는 일, 그리고 (2)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구체화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진술은 최소 두 부분으로, 논의의 주어를 확정하는 부분과 그로써 그 주어에 대하여 어떤 것이 이야기되는 그러한 부분으로 구성된다. 진술이 주어를 선정하는 일을 해내는 것은 최초에 진술을 얻기 위한 조건이다. 이런 이유로 그것의 참이나 거짓은 이러한 주어에 대해 그 다음으로 이야기된 것에 대한 문제이다. 즉, 참이나 거짓의 자리는, 이를 테면, 전체로서의 진술이 아니라, 그 진술의 서술적 혹은 진술하는 부분이다. 문제를 다른 식으로 살펴 보자. 참인 진술을 구성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이 저 어떤 것에 대해 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맞추어, 거짓 진술을 구성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을, 저 어떤 것에 대해 거짓이라고, 즉 참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진술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아무 것에 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뭐가 되었든 주어 표현이 그 진술의 주어로 명명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제 주어진 주어에 대해 어떤 것이 참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어떤 주어에 대해서든 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원칙적으로 어떤 주어들에 대해서는 거짓일 것이다. 역으로, 주어진 주어에 대해 거짓인 것은, 적어도 원칙적으로, 모든 주어들에 대해 거짓은 아닐 것이고, 어떤 것에 대해 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거짓 진술에 귀속되는 것에 관해서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만일 어쨌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주어에 대해 참이지 않은 것을 주어에 귀속시킨다는 것에 관련되는 문제여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는 더 이상 문제거리일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것을 어떤 것에 대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즉,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이 그것에 대해 참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그것이 이 특정한 주어에 대해 참인 것과 우연히 다른 것이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기에 완전히 좋은(말해도 좋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에 대한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진술이 어떤 것에 대한 것이라는 게 무엇인지 안다면,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의 혹은 어떤 것에 대한 참이라는 게 무엇인지 안다면, 그리고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인 바의 것과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짓 진술들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혹은 우리는 그 문제를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우리가 ~이지 않은 것이라는 게 단지 다른 것임의 특정한 방식일 뿐임을 알고 나서, 그리고 만일 우리가 진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지 않은 것이라는 게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거짓 진술들의 가능성을 알아 보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아주 간결하게 말해서, 플라톤의 해법인 것으로 보인다.[412-413쪽]

2) 하지만 진술들에 관련한 플라톤의 논의의 세부사항들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 보도록 하자. 그 핵심은 진술이 최소 두 부분들, 이름(onoma)과 동사(rhema)를, 플라톤이 두 종류의 부분들을 확정하듯(262c4 이하), 가진다는 것이다. 이름의 기능은 어떤 것을 명명하고, 언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어딘가에서 얻는" 동사를, 플라톤이 훨씬 모호하게 말하는 대로(262d4), 우리가 어떤 것을 진술(legein)하는 것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262d5) 그런 동사를 추가함으로써만, 따라서 또한 결과로 나온 복잡한 표현이 logos라 불린다(262d5-6). 진술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두 종류 표현들에 대한 확정과 규정에 관하여 여기에 모든 종류의 문제들이 있음은 명백하다. 그래서, 만일, 그리 보이듯, 여기에서 "이름"(고대 문법학자들의 뜻에서)과 "동사"가 각 품사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우리는 엄격히 말해서 오직 진술들의 엉뚱한 하위분류에 대한 규정만을 얻고, 반면 플라톤은 매우 일반적으로 단순한 (즉 비분자적) 진술들에 대한 규정을 목표로 하고 있고 실제로 구문론적 범주들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두 종류의 표현들에 대한 의미론적 규정은 부적절해 보이지만(262a3-7 참조), 우리는 그것들의 분류를 품사로든 구문론적 범주로든 해석한다. 하지만 그 난점들과 문제들이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이 만큼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 단순한 진술들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기능들을 지닌 두 부분들에 의해 구성된다. 그 한 부분은 그 기능이 명명하는 것, 언급하는 것, 주어를 확정짓는 것이고, 다른 한 부분은 그것을 수단으로 우리가 그 주어에 속하는, 혹은 그 주어에 대한 어떤 것을 말하고, 어떤 것을 진술하고, 어떤 것을 서술하는 것이다.[413-414쪽]

3) 이 점을 명확히 하고 나서, 플라톤은 우리가 엄격히 분리시켜 놓을 필요가 있는 것으로 그가 분명히 가정하는 그러한 진술들의 두 가지 특징들로 향한다. (1) 그것들은 어떤 것에 대한 진술들이고, (2) 그가 간주하는대로 그것들은 특정 성질을 갖는 바, 즉 참이거나 거짓이다(262e4 이하). 첫 번째 특징에 놀라울 정도의 주목이 집중된다(262e11-263a10, 263c5-12 참조). 이러한 것들은 단지 상이한 특징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것이 두 번째 것으로부터 독립적이기도 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참이거나 거짓인 진술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어를 구체화시켜내는 진술의 부분을 지녀야 하고, 그 부분이 구체화시키는 어떤 주어는, 최소한 원칙적으로, 이 주어에 대해 이야기되는 무엇인가로부터 독립적으로 결정되며, 더 강력한 이유에서, 그것의 참이나 거짓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결정된다. 플라톤은 굉장히 분명하게 그 엘레아 손님으로 하여금 그가 손님에게 진술들의 참이나 거짓에 대한 고찰을 계속하도록 하기에 앞서 단순한 진술들에 대한 언급의 문제를 결정하도록 한다.[414쪽]

4) 우리가 역사적 배경으로 향한다면, 이 논의가 이루어지는 그 주의와 세밀함의 적절성은 어느 정도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위에서 주목하였듯 "to say(legein)"이라는 동사의 목적어(대상)에 대한 어떤 불명확성과 혼란이 있다. 이는 진술이 말한 것은 진술이 그것에 대한 것이었던 그것이었다는 관점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그 대화편에서(『에우튀데모스』 283e9-284a1), 크테싶포스에게 묻는다. 만일 누군가 거짓인 어떤 것을 말한다면, "그는 그 진술이 그것에 대한 바의 것인 바로 그것을 말하면서 그리 하는가?" 그리고 크테싶포스는 긍정하여 답한다. 이로부터 에우튀데모스는 거짓 진술을 만들어내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추론한다. 진술은 반드시 ~인 어떤 것에 대한 것이어야만 하고, 반면에 거짓 진술에 의해 이야기된 것은 ~이지 않은 어떤 것이기 대문이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진술이 그것에 대한 것인 바의 것이 그것의 참임 혹은 거짓임으로부터 독립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주어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라는 점, 또한 참이거나 거짓인 것은 이 후자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414쪽]

5) 플라톤이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역사적인 수수께끼, 혹은 아마도 차라리 일련의 수수께끼들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듭하여 안티스테네스에게 돌리는, 상호 모순되는 진술들과 같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관점이 있었다(『형이상학』 1024b16 이하, 『토피카』 104b20 이하). 사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관점을 어떠한 거짓 진술들도 전혀 있을 수 없다는 관점에 연결시킨다. 안티스테네스의 관점은,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언에 따르자면(1024b32-4), 각각의 것은 그것의 독자적인 logos나 진술을 지니는 바, 그것은 확정(동일시)하거나 설명하는 것이라는 관점이었다. 이는 언제나 학자들로 하여금 『테아이테토스』 마지막 부분의 시작에서 상세히 설명된 관점에 대해 상기시켰다. 그 관점에 따르면, 만일 진술이 어쨌든 어떤 것에 대해 구성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의 고유한 진술이어야만 하고, 그것에 적절하며 특유한 진술이어야만 한다(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 202a6-8 참조). 그리고 이것은 또한 『소피스테스』 자체 내에서(251a5 이하) 공박된 관점 중 하나를 상기시킨다. 그 관점에 따르면 각각의 것은 그것의 고유한 이름에 의해서만 호출되어야 할 것이고, 다른 어떤 것의 이름에 의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예를 들어 한 대상을 "희다"라고 부르지 않아야 할 것인 바, "희다"는 것은 색의 이름이고 대상은 색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러할지라도, 만일 각각의 것이 그것의 고유한 진술을 지니고 모든 진술들이 어떤 하나의 것에 대한 진술이어야 한다면, 모순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명백히 모순되거나 혹은 단지 반대되는 두 진술들 중에서조차 오직 하나의 진술만이 문제가 되는 것에 대한 진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다른 한쪽의 진술은 문제가 되는 것에 대한 진술일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참인 진술일 것이거나 혹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진술일 수 없을 것이며, 이런 이유로 거짓일 수도 없을 것이다.[414-415쪽]

6) 『에우튀데모스』 285d7 이하에서, 우리는 이러한 antilogia(반박) 논증의 어떤 다른 형태를 얻는다. 여기에서 그 논증은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자 프로타고라스 혹은 더 이전 변증론자들의 동료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286c2-3). 여기에서는 서로 반박하는 두 개인들에 대해여 그들이 같은 것에 대한 진술, 같은 진술일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의견차이도 내놓지 않는 그러한 진술을 산출하고 있을 수 없을 것이라 주장된다(286a4-7). 만일 그들 중 누구도 문제가 되는 그것에 대한 진술을 산출하지 않았다면 어떠한 불일치도 없을 것이다(286a7-b3). 그래서 만일 표면적으로나마 불일치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한 사람이 문제가 되는 그것에 대한 진술을 산출하고 있는 반면, 다른 쪽은 불일치하는, 그 첫 번째 진술과 모순되는 진술을 산출한다. 하지만 그 경우 두 번째 사람은 어떤 다른 것, 그 경우 아무런 모순도 없는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진술을 산출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혹은 그는 어떤 것에 대한 진술도 산출하지 못하며, 그 경우 그는, 첫 번째 발화자와 모순되는 것은 차치하고, 어떤 것도 어떻게든 말하지도 않는 것이다(286b3-6). 뒤따르는 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를, 마찬가지로, 거짓 진술의 가능성에 관련한 논증일 것으로도 받아들인다. 이 논증 그리고 이와 유사한 논증들은 만일 그것들이 특정한 형이상학적 관점들, 예를 들어 비실체적 변화를 부정하는 것 등과 관련된다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얻는다는 점이 더불어 주목될지도 모른다.[415쪽]

7) 이제 누군가 여기에서 플라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의 논증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의심할 한 가지 이유는, 그 관련성과 적절성과는 별개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해당 구절에서의 인상적인 언어적 상세함이다. 예를 들어 단지 “그 진술은 X에 대한 것(peri)이다”라는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 “너에 대한 것”을 사용하고, 그것이 또한 “X에 속하는 진술”과 “X의 진술,” 예컨데 “너에 속하는 진술”과 “너의 진술”을 말한다(262e6, e14; 263a4, a5, a9, c7), 때로는 양쪽 방식 모두를 결합시키면서(263a4, a5, a9-10),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로 하여금 말하기의 한 가지 방식이 다른 방식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하도록 허용할 확정된 질서를 주장함이 없이(263a5에서 “나와 나의 것에 대해” 그리고 263a9-10에서 “나의 것을 그리고 나에 대해” 참조). 이를 고려할 때, 그리고 “대해서”라는 언어적 표현이 전적으로 명백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또한 소유 대명사들로 이루어진 언어적 표현들이 일상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것이 antilogia(반박) 논증의 기저에 놓인 진술들에 관한 사유방식을, 더 나아가 antilogia 논증 자체를 시사한다고 보지 않기란 어렵다. 그래서 핵심은 진술이 그에 대한 것인 바의 것과 그 진술 내에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이 구별될 두 가지 것들이리란 것, 실상 그러할 것이며 일상적으로 그러하듯 설령 그 진술이 참이라 하더라도 다르다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같은 것에 대해 반대하는 진술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들 중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일 것이다. 그 사실로부터 거짓 진술에 의해 이야기된 것이 거짓이라는 것은 귀결되지 않고, ~이지 않은 어떤 것, 진술이 그것에 대한 바의 것이 ~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는 게,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것이도록 하지도 않는다.[416쪽]

8) 우리가 안티스테네스의 입장 또는 『에우튀데모스』에서 숙고되는 입장에 관련되는 관점에 대해 말해야 하는 바, 하지만 그것들과는 한 관점에서 중대하게 다른 그것이 또한 명백해진다. 안티스테네스의 관점은 각각의 것이 기껏해야 하나의 진술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소피스테스』에서 우리가 이미 “각각의 것은 여러 진술들을 가진다” 라고 주장하였다, to stay with the language of Antisthenes and the sophists (Aristotle, Met. 1024b32 이하 참조).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반대되거나 거짓인 진술들은 전혀 없다고, 현실에서 명백히 반대되거나 거짓인 진술은 다른 주제에 대한 참인 진술이라고 주장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일 소크라테스가 건강하다면, 누군가는 이것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진술이기는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건강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것이라는,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아프다”라는 진술은, 거짓은커녕, 그 진술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이 다른 소크라테스에 대한 것, 다시 마해 아팠던 소크라테스에 대한 것이었기에 그러하다는 관점을 취할지도 모른다. 263c7에서 엘레아 손님이 스스로 테아이테토스가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라는 진술을, 다른 누군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앉아 있는 그 자신에 대한 것(263a2)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단언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다시, 여러 관점들 중에서 그러한 관점을 취하는 것은 진술이 특정 주어에 관한 것이라는 것과 이 주어가 그것에 관하여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이야기된 어떤 것을 가진다는 것이 상당히 다른 것임을 알아 보는 데에 실패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론상 진술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가 그 다음으로 그것에 관해 이야기된 바의 것, 그것이 참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416-417쪽]

9) 그래서, 진술들의 이러한 특징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에 대한 우리의 검토를 결론짓기 위해, 플라톤은 꽤나 의도적으로 진술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진술일 수 없다는 점을, 그리고 진술은 어떤 것에 관한 것이어야 함을 당연시하고 있다(263c9-11). 하지만 그는 진술들에 관한 어떤 혼란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거짓 진술들이라는 그러한 것들이 ~이지 않은 것에 관한 것이며 이런 이유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쪽으로의 어떠한 이행에도 저항한다. 진술들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가지고 또한 ~이지 않은 어떤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 나은 파악을 가지고서, 우리는 이제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거짓 진술이 ~이지 않은 어떤 것을 진술하는 진술인지 이해하는, 그런 식으로 이러한 일이 전적으로 문제없는 것임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러한 지점에 이르렀다.[417쪽]

10)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진술들의 중대한 특징, 성질, 그것들의 참임 혹은 거짓임에 대한 논의로 향할 수 있다(cf. 263a11-d5). 그렇더라도 우선 여기에서는 "quality(성질)"이란 용어에 대해 간략히 첨언하도록 하자(cf. 262e5, e9; 263a11, e2). 그 표현 자체만으로는, 어떤 것의 그것인 바의 것, 혹은 본질(260e4-5, 263c2 참조)과 그것과 닮은 것 사이의 익숙한 대조에 의존하여, 진술이 그 진술의 참임 혹은 그것의 거짓임과 독립적으로 진술임을 시사한다. 진술은 (1) 주어를 특정하는 일을 수행해냄으로써 그리고 (2) 이 주어에 관하여 어떤 것을 말함으로써 진술이다. 일단 이러한 두 조건들이 충족되고 나면 우리는 진술을 얻으며, 그 진술이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 여부의 문제는 오직,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플라톤이 주장하기로는, 두 조건들 모두가 충족되고 나서 발생할 따름이다. 더욱이, 그는 참과 거짓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그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야기된 바의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하자면 우리는 그 술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417쪽]

11) 플라톤은 처음에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가설상) 참인 진술로 향하지만, 그것을 상당히 일반적으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참인 진술로서 고찰한다. 그가 목표로 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참인 진술의 일반적 규정이다. 어떤 경우든, 그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규정한다(263b4~5): legei … ta onta hos estin peri sou. 이것은 그 자체로 받아들일 경우 여러 방식으로 모호하다. hos(how or that)의 모호성을 고려할 때, 그것은 아마도 참인 진술이 사물들을 그것들이 그러한대로 ~이라고 말한다는 뜻이거나, 혹은 참인 진술이 ~인 사물들을 그것들이 ~이라고 말한다는 뜻일지 모른다. 263b9, 263d1, 263d2에서 hos의 상응하는 용례들은 후자의 의미임을 시사한다. onta가 그 주어에 대해 긍정적으로 참인 술어들을 지시하는지 여부 혹은 그 주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술어들에 걸치는 것으로 간주되는지 여부에 달린 추가적인 모호성이 있다. 이것이 최소한 단순한 참인 진술을 일반적으로 의도하는 듯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onta가 후자의 의미로 추해지는 것이라 추정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추가적인 문제가 있는데, 말하자면 peri sou가 onta를 취하는지 estin을 취하는지 여부이다. 263b11과의 비교는 그것이, 양자 모두를 취하는 게 가능하다 할지라도, 확실히 onta를 취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명확화를 고려할 때, 그 주장은 참인 진술이 실제로 ~인 것에 대해, 다시 말해 그 주어에 관해 혹은 그 주어에 관련하여서 그것이 ~이라는 것을 말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X에 관하여 ~인 것 혹은 X에 관련하여 ~인 것(what is about, or with reference to, X)"이라는 구절은 명백히 어떤 해명을 필요로 하는 꽤나 준-전문적 용어이다. 우리는 "… is …"의 역용법과 같은 어떤 것, 우리가 앞서, 플라톤 자신이 여기에서의 그의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좀 더 아래의 어느 정도의 행들(263b11-12)을 지시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256e6에 연결하여 논의했던 그런 것을 인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나는 "~와 같은 것(something like)"이라고 말하는데, 작은 차이가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플라톤이 여기에서 단지 긍정적 진술들의 참이 아니라, 참인 진술들의 참을 일반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다고 추정한다면, 우리는 그가 이제 "F는 a와 관련하여 ~인 어떤 것이다"에서 "F"가 "not G" 형식 그 자체일 것을 허용한다고 추정해야 한다. 그래서 참인 진술들에 관한 플라톤의 관점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a에 관한 일련의 단순한 참인 진술들에 부합하여, a에 관련하여 ~인 일련의 F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인 진술은 a에 관련하여 ~인 그러한 F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 혹은 그것이 a와 관련하여 ~이라고 말하는 진술일 것이다.[417-418쪽]

12)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를 고찰해 보자. 첫 번째로 이것이 진술이기 위해서 이것은 어떤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 그것에 관해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어떤 것을 언급하고 명명하는 일을 수행해내야 한다. 그 진술은 테아이테토스를 언급하면서 그리 한다. 테아이테토스가 거기에서 그에 관해 이야기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측면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앉아 있다는 것에 관하여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앉아 있다는 그러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정합적인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가정해 보건데) 앉아 있다는 것에 관련된 어떤 언급 없이는 세계에 대한 완결된 설명이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앉아 있는 것들이 있는 한에서 앉아 있다는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며, 그래서 또한 이런 관점에서 앉아 있음이 ~인 어떤 것, 다시 말해 그것들과 관련하여 ~인 어떤 것임도 명백하다. 그래서 앉아 있음에 관한한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문제는 오직 앉음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어떤 것인지 여부, 혹은 -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보자면 -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는지 여부이다. 그리고 그 주장은 정확하게 만일 앉음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어떤 것이라면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참이라는 것이다.[418-419쪽]

13)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거짓 진술과 관련하여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것이다.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를 취해 보자. 그 진술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것은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것이고, 그는 ~인 어떤 것이다. 그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된 바의 것, 즉, 날고 있다는 것에 관하여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날고 있음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 그것에 관한 정합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완결된 기술은 그것에 대한 어떤 언급을 해야 할 것이다. 날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 한, 물론 날고 있음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 오직 문제는 날고 있음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어떤 것인지 여부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주장은 거짓이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not being, 혹은 ~이지 않은 것인 바의 것에 관하여 말했던 것을 고려할 때, 이것도 지금은 문제가 아니다.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날고 있음이 ~이지 않다는 것은 단지 날고 있음이 마침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것과 다르다는 것, 즉 날고 있음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F들 중 하나가 아니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날고 있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인 어떤 것임을 보았고, 하나 이상의 방식에서 이러하다는 것을 보았다. 더구나, 테아이테토스의 경우에서 그것의 not being 자체는 단지 그것이 ~인 어떤 것인 다른 측면, 다시 말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무엇이든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419쪽]

14) 하지만, 이것이 236c부터 계속해서 플라톤이 그렇게나 주의를 기울여 고조시키고 있던 점임을 고려해, 그 스스로 이제 어떻게 거짓 진술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가 이 특정한 예시를 다루는지 상세하게 고찰해 보도록 하자. 그는 263b7에서 거짓 진술로 나아간다. 그가 말하는 바는 이러한 것이다. ho de de pseudes hetera ton onton(거짓은 ~인 것들과 다른 것들이다). 이 문장이 생략된 것이며 263b4-5에서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는 참인 진술에 관한 "men" 절에 부합하는 대응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이해될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거짓 진술은 ~인 것들과는 다른 것들을 진술한다(legei). 참인 진술들에 관한 주장이 그것들은 ~인 그러한 것들에 대해 그것들이 ~이라고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약간의 난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참인 진술들에 대해 그 진술들이 ~인 것들에 대해 그것들이 ~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견지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그러하듯 특정한 진술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오직 ~인 것들 중 하나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 말할 뿐이며, 플라톤이 그리 하듯 ~인 것들에 대해 그것들이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딱히 우리에게 우려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플라톤은 263b3-4에서 참인 진술이 ~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on ti hos esti)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어진 주어에 관련하여, ~인 것들의 부류 전체에 대한 언급을, 거짓 진술에 대한 적절한 규정을 위해 이것이 필요할 것이기에, 참인 진술에 대한 규정 안에 넣고자 한다. 이것은 우선 플라톤의 논의에 따라 "… is …"의 용법에 대한 적절한 규정에서 보편 양화사의 필요에 부합하고, 다음으로, 여러 주석가들이 옳게 주장해 온 거짓에 대한 그 필요에 부합한다. 오직 그렇게만 플라톤은 거짓 진술이 ~인 것들 중 어떤 것이든 그것과 다른 것을, 즉 주어진 주어에 대한 관계 속에서 ~인 것들 중 어떤 것과 다른 것을 말하거나 그에 대해 진술한다고 말할 수 있다. 거짓 진술에 대해 그것이 ~인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진술한다고 말하는 것이 단순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거짓이기 위해 그것은 ~인 것들, 다시 말해 주어진 주어에 관련하여 ~인 것들 중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더 나아가, 263b4-5와의 유사성을 고려할 때, 263b7이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거짓 진술은 무엇이 되었든 주어진 주어와 관련하여 ~인 것과 다른 것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 말하자면 저 주어와의 관련 속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런 이유로 플라톤은 263b9에서 계속해서 주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이지 않은 것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 말한다." 명백히, 여기에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은 (a) 263b3-4로부터 263b7를 가지고 이해되어야 하는 "that it is(그것이 ~이라는 것)"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b) "~인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으로부터 "~이지 않은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저 후자의 이행은 예를 들어 어떻게 아름답지 않은 것 혹은 크지 않은 것이 단지 아름답거나 큰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 것일 뿐인지에 대한 우리의 앞선 설명에 의해 포괄된다. 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being인 것이면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 것이 not being이다.[419-420쪽]

15) 우리는 이제 이 대화편 내에서 그 문제가 발생한 이래로 처음으로 우리 스스로 거짓 진술들이 ~이지 않은 것을 말하거나 그에 대해 진술한다(legei)는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는지 알고, 그런 식으로 이해될 때 어째서 그것이 어떤 문제들 제기하지 않는지 안다. ~이지 않은 것을 말함은 주어진 주어와의 관련 속에서 ~인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남아있는 그 어떤 꺼림칙함도 치워 버리기 위해, 플라톤은 263b7d에서 사용되는 것으로서 "what is not(~이지 않은 것)"을 263b11-12에서 계속해서 설명해 나아간다. 여기에 플라톤이 정말로 말하는 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작은 문헌상의 문제가 있다. 263b11에서 첫 번째 단어는 사본들에 의해 ontos로 제시된다. 만일 우리가 전승된 독해를 따른다면, 플라톤은 설령 거짓 진술이 ~이지 않은 것을 말하거나 그것에 대해 진술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의 것이 실제로(ontos) ~인 어떤 것이라는, 즉 다른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는 거짓 진술이 주어진 주어에 관련하여 실제로 ~인, 즉 다른 어떤 것을 말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의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거짓 진술은 주어진 주어에 관하여 실제로 ~인 어떤 것을, 다시 말해 이 주어에 관련하여 ~인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 어떤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해진 문헌을 받아들이는 대신, 모든 근대 편집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코르나리우스의 추정에 따른다면, 그리고 ontos를 onton으로 읽는다면 플라톤이 이에 훨씬 근사치에 오는 어떤 것을 말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ton onton으로 추정한다면 여전히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취하는 문헌이 뭐가 되었든지 간에, 플라톤이 구성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지점은 충분히 분명하다. ~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그것이 ~인 한에서만, 다시 말해 주어진 주어에 관련하여 ~인 것과 다른 한에서만 "not being"이라 불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263b11-12) 플라톤은 우리로 하여금 각각의 모든 것과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인 것들과 무수히 많은 ~이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우리의 앞선 발견을 상기시킨다. 그 표현을 고려할 때 그는 틀림없이 256e6-7을 돌이켜 지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학자들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주요한 문제를 구성했다.[420-421쪽]

16) 여기 263b에서 플라톤의 사유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고 하는 거짓 진술을 취해 보자. 그것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그와 관렪여 ~이지 않은 어떤 것, 즉 날고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이지 않은 어떤 것, 다시 말해 날고 있음을, 마치 그것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 속에 ~인 것 처럼 나타내거나 말한다. 이것은 문제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앞서 어떤 것과 관련해서든 ~이지 않은 수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날고 있음은 단지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이지 않은 그러한 것들 중 하나일 따름이다. 또한 이것이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는 진술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날고 있음을, 사실상 그것이 ~이지 않을 때, 사실 날고 있음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무엇이든 그것과 다를 때, 혹은, 그 문제를 달리 보자면, 사실상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지 않을 때,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어떤 것으로 나타낸다(263d1-2 참조).[421쪽]

17) 하지만 만일 우리가 256e6-7에서의 주장, 플라톤이 263b11-12에서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주장을 되돌아 본다면, 그것은 X와 Y가 다르고, 이런 이유로 우리가 그 경우에 X는 Y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이런 이유로 Y가 X와 관련하여 not being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경우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X에 대해서든 X가 그것과 다른, 따라서 X가 그것이지 않은 수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각각의 모든 것과 관련하여 그것과 관련하여 not being인 수 많은 것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생각되는 바 여기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데, 설령 테아이테토스와 날고 있음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참이라 하더라도,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음과 다르고 따라서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지 않다는(날고 있음이지 않다는) 것, 이것은 어째서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인지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의미는 아니다. 설령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는 것이 참이라 할지라도, 테아이테토스와 날고 있음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고 따라서 그러한 의미에서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지 않다는(날고 있음이 아니라는) 것은 여전히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의 거짓을 설명하는 것일 수 없다.[421-422쪽]

18) 256e6-7과 그에 앞선 부분에 대한 주석가들의 이해를 고려할 때, 특히 이 부분에서 "X는 Y이지 않다" 형식의 진술들이 비동일성 진술들을 표현한다는 그들의 추정을 고려할 때, 그들은 또한 어째서 플라톤이 여기 263b에서 not being에 대한 논의의 후반부, - 누구의 해석으로 보나 - 플라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정적 진술로 간주할 것에 합의하고자 시도하는 그곳을 언급하지 않는지에 대해 올바르게 혼란에 빠진다(McDowell, "Falsehood and Not-being," 122쪽 이하, Bostock, "Plato on 'Is not" 111쪽 참조). 이제부터 플라톤의 256e6-7에 대한 재언급은 오직, 플라톤이 내내 "X는 Y이지 않다" 형식의 진술들을 그 부분에서 비동일성 진술들, 다름에 대한 진술들로서가 아니라, not being에 대한 진술들, 즉 다른 것임의 특정한 방식에 대한 진술들로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기 때문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곳에서조차 다른 것임의 이러한 방식이 두 형상들이 서로 다른 경우들에서만이 아니라, 어떤 것이 특정한 성질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들에서도 드러났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제 256e6-7은 플라톤이 263b에서 의존해야 하는 "… is …"의 용법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57b1 이하 이어지는 추가된 논의는 그 용법이 또한 부정 서술의 경우를 포괄한다는 것을 보도록 해준 이러한 용법에 대한 이해였다. 그 이해는 이어지는 논의를 우리가 256e6-7을 통해 그것의 being을 확인하였던 바로 그 not being의 본성을 밝혀내는 것으로 취한다. 이것이 263b에서 플라톤으로 하여금 256e6-7을 재지시하도록 허용하는 것, 혹은 차라리, 말하자면 258b를 재지시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추가적 해명이 요구되는 문헌 상의 세부사항들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추가적인 해명으로 특정한 지점들에 대해 플라톤이 더 분명하고 더 정확해졌기를 우리가 바랄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의 논증에 대한 개요와 그의 일반적인 입장은 합리적으로 분명하고 혼란에 의해 손상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422-423쪽]


IV. CONCLUSION[423쪽]

 사실 더 앞선 대화편들에 비하여 『소피스테스』에서 인상적인 것은 이 대화편의 "교조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이다. 이 대화편은 신중하게 일련의 문제들, aporiai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대화편의 초반부는 초기 대화편들 혹은 그 직전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와도 유사하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 대화편은 이러한 aporiai의 해결들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대화편의 전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언급하고 또한 따르는 방법론적 원칙들 중 한 가지, 주어진 주제적 문제에 대해 우리는 해당 문제에 대한 적절한 설명, 그 적절성을 부분적으로 aporiai에 대한 설명과 해결 양자 모두의 능력을 통해 입증하는 그러한 설명을 진행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관련된 aporiai를 명확히 바라 보아야 한다는 원칙을 상기시킨다(『영혼론』 1권 2장 403b20-21, 『형이상학』 2권 1장, 995a27 이하 참조). 그리고 『소피스테스』는 이러한 난점들을 매우 체계적이고 거의 전문적인 방식으로 해소해 나아간다. 신중한 분석을 통해 이 대화편은 주제를 명확하게 독립시키고 확정짓고자 시도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대화편은 플라톤의 모든 대화편들 중에서도 특출나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이 대화편은 또한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이 문헌과 관련하여 곤란을 겪는다면, 그것은 좋은 의미에서 그러할 것인즉, 당시의 플라톤은 거의 전적으로 탐구된 바 없는 문제들, 그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개념들조차 상실된 채였던 그러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거짓 진술들에 의해 나타난 난점에 대한 플라톤의 해결책은 뛰어난 성취이다.

-작성중-

1. 지도교수님께서는 다음 학기까지 논문을 제출하려는 계획이 가당할지 되물으셨다. 음, 글쎄, 모르겠다.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얻고자 했던 건 기초였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다진 기반에 대한 검토를 거친 보장이었다. 제기한 문제가 역사적으로 가치를 검증받은 그러한 고전 문헌 중에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정당화하고, 그 저술이 보여주는 문제의식을 둘러싼 연구사를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거쳐 가야할 자료들을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추려내어 계획을 잡고, 그들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내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내 입장을 글로 써서 밝히는 것, 말하자면 이건 연구를 수행할 기초적인 훈련이 되어 있는가에 대한 시험을 받는 과정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연구할 수 있다'라는 승인을 구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그리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박사과정은 거기에 '스스로'가 부사로 붙는 정도 아닐까 싶고. 물론 해당 연구사에 대한 기여도가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만, 그 역시도 스스로 연구해 나아갈 한 사람의 학자로 인정받기 위한 평가의 요소 중 하나로 들어갈 테고, 그 이후에야 뭐 기여를 하는지 못 하는지 그런 건 학계에서 단계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 과정을 대충 어떻게 굴러먹어 덮어 넘기고 지나가 봤자 어차피 이후에 연구자로서 살아가는 일이 계속될 수 없을 것은 자명하지 않나. 물론 '학문의 전통'이란 것을 냅다 집어 치워 버리고 나 혼자 잘난 맛에 낄낄거리며 자위질이나 하며 살아가려면야 학위고 학제고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그럴 작정이었다면 애초에 대학 자체를 안 갔겠지. 대학 갈 결심을 하기 전까지 내 장래희망 중 하나는 술, 담배, 마약에 절어 좆질이나 하다 복상사로 뒈지는 거였으니. 흐, 이 꿈도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야무지네. 여하간에, 익숙한 좌절에 다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본래 계획대로 논문을 제출해 통과를 하더라도 수료 후 세 학기를 보낸 것이 되고, 연구계획 심사랄지 그 비슷한 것을 받는 과정에서 '안 된다'는 얘기가 나와 버린다면 그마저도 더 늦어지게 되었다. 나이가 서른마흔다섯이 된들 뭔 상관인가, 석사논문에 10년을 쏟아 붓는 일도 안될 게 뭐 있겠나, 그렇긴 한데 나는 지금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 석사논문으로 플라톤 해석사와 서구철학사 전체에, 아니면 앗싸리 인류사에 큰 획이라도 하나 그을 요량이었더라면 또 모르겠으나, 나는 그저 '너 공부해도 된다'는 허락이 간절할 뿐이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역시나 그리 말한다. 석사논문에 기 빨리지 말라고, 후딱 털고 박사도 빨리 따고 어서 할 일 찾아 해야 한다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욕심을 버린 뒤에도 여전히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노력을 요구받을 때, 혹은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지금 꼬락서니로 봐서는 네 재능이 필요에 미치지를 못하니 나가 뒈져라'라는 식으로 이해되는 평가들에 발목이 잡혀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뭐가 있나. 다음 학기에 못 낸다면 그 다음 학기를 목표로 준비하게 될 것이고, 몇 학기에 걸쳐 준비를 하고 통과를 하고 나면 그대로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치든 유학을 시도하든 아니면 병행을 하든 뭐 또 그 다음 걸음이야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하지만, 아, 모르겠다. 무서울 건 또 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정해진 길을 아득바득 기어가면 된다. 닥치고 두 발을 옮기고 대가리를 굴리고 읽고, 생각하고, 쓰면 된다. 그냥, 늘 그렇듯이, 또 징징거려 봤다.

2. 천재일 필요는 없지. 다만 이거 하려고 살겠다 다짐한 나로서는 동시에 굳이 내가 이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나 당위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 또한 떨치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결론은 살만한 가치라든지 뭐 그런 것을 말하기 애매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아깝게 떠나간 사람들을 떠올린다. 하는 일도 없이 불면에 시달린다. 간혹 누군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삽날로 내 모가지를 내리찍을 것 같은, 내 상황과 조건이 간절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혹은 더 나은 재능과 성실함으로 더 좋은 결실을 앞두고서도 죽어 버린 그런 사람들이 돌아와 내 사지를 찢어 발길 것 같은, 혹은 그래야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무섭고 두렵고 불안하고 뭔가 죄책감에 가슴 졸이고 부채의식에 목이 죄인다면, 나는 좀 더 나은 성과를 내고 있어야 한다. 핑계도 변명도 아무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사실이다.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이루어 놓았나, 아무것도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아, 허무한듸. 학제 외부에서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을 책상물림 뜬구름 잡는 고리타분한 비겁자들 취급하고, 비생산적이고 기계적이며 그저 답습에 답습만을 거듭한다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쌩개지랄을 떨어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역시나 열등감일지도 모르겠다. 이름없는 필사가, 잊혀진 편집자들,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두어 사람 읽히고 잊힐 글을 쓰고 살았다가 죽어 사라진 숱한 사람들의 뼈무더기 위에 세워진 학문의 역사에는 물론 외부로부터의 자극도 필요했을 것이다. 허나 반대로 그 장기말들, 벽돌 혹은 자갈이나 모래알들, 천재도 영재도 수재도 아닌 어거지로 버텨 몸으로 학문을 버티다 깔려 뒈진 병신들 없는 그러한 학문이란 걸 정말로 상상이나 할 수 있나? 아니, 넘치는 재능과 들끓는 열정으로 제 이름자를 남기는 대신 남길 것을 지키고 전할 것을 간직하는 일에 투신한 사람들, 그런 천재들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있나? 몇몇 쓰레기를 제하고 나면 정말로 그렇게 싸잡아 욕할 수 없는 사람들로 이어져 왔고 또 이어 나아가고 있는 마당이 저 우골탑인지 상아탑인지 하는 화장터가 아니겠나. 이 바닥에서 잘난 사람들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허드렛일이나마 할 만큼의 자격만 갖춘다면, 그래도 나 따위 개쓰레기도 뭔가 조금은 살 만한 삶을 살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내 삶의 목표는 이쪽에 있다. 강단에 서지 못해도 좋고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여도 좋다만, 읽혀야 할 글이 읽혀야 한다는 이야기를, 읽어야 할 방식이 반복되고 전승되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그냥 되풀이하여 지키는 데에 아주 조금이라도 미력하나마 일조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그런 내가 꿈꾸는 삶이 거기에 있다. 그걸 깔아 뭉갤 정도의 가치가 저 '바깥 사람들'에게 있는가? 이 과정을 왜곡하고 날조하며 위악스럽게 호도하고 비난을 일삼을 정당성을 정말로 그들이 가지고 있나? 모르겠다. 그러할 수 있을 만큼의 재능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짓을 할 만큼의 확신을 가진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그래서 화를 내는 것이다. 철학자의 말 몇 마디로 세상이 좌우되는 일이 가능하리라 믿을 만큼 내가 단단히 콩깍지가 씌진 않았고, 끽해야 aletheia가 아닌 doxa나 pistis 정도 던져주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게 고작일 대중의 영웅들에게 내가 찌질거리며 열폭하는 게 뭐 그리 잘못인지도 사실 모르겠다. 그들이 비난의 표적으로 삼는 몇몇 정치적인 꼰대 씹새끼들을 제하고 나면, 그냥 입 닥치고 책들 사이에 파묻혀 낑낑거리며 죽네사네 정리하고 쓰고 옮기며 살다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게 학계이다. 잠자코 있는 나의 스승들, 선배들, 이 길에 들어서려 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욕을 먹을 이유는 나는 알지 못한다. 실상, 내게 돌아올 말은 뻔하다. '니나 잘하세요.' 그들이 철학으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든 우주의 진리를 전파하든 정의를 울부짖고 세상을 단죄하든 도를 닦든 상상과 통찰로 돈을 벌어 떵떵 거리고 잘 살든 적어도 그들은 그 만큼의 호응을 얻고 영향력을 갖출 만큼의 실질적인 무언가를 내놓고 해낸 것이고, 나는 내가 옹호하는 입장 안에서도 자격미달인 씨발새끼 아니겠나. 내가 화를 내는 건, 사실은 저 사람들의 몇몇 발언이 내 지극히 개인적인 맥락 속에서 고인드립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나, 나는 다른 누구를 대신해 변호하긴커녕 나 자신을 증명하기에도 한참이나 부족한 배냇병신이다. 아무래도 쳐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보다. 살기로 했고 살고 싶은데 살아도 좋은지에 대해 아직 확신이 없다. 이거 원 염치가 없어서.

3. 내가 들은 것만 플라톤 대화편 강독모임이 서울대 하나, 서강대 하나, 연대 하나(이건 끝났다던가?), 나 지금 들어가고 있는 건대 모임도 있고, 아리스토텔레스 강독도 정암에서 『영혼론』 읽고 서울대에서는 『자연학』 읽고 어르신들끼리 『범주론』 읽는다는 얘기도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푸른 역사인가에서 끼께로 모임 하나, 같은 선생님이 다른 글로 라틴어 강독 또 하나, 생각해 보면 공부할 자리는 참 많다. 연대에서 고전어 강좌가 1, 2로 나뉘어 열리고 서울대에서도 겨울마다 하던 집중강좌가 또 열리고. 듣자하니 숭실대에도 고대철학 전공하는 학생들이 있다 하고 고대에도 있다고 들었다. 자리는 많은데 나는 도통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다. 이 좁아터진 바닥에서 따로따로 나눠먹기라도 하는 중일까? 뭐 이것도 그저 내 오지랖일 따름이겠지만.

4. 나는 '찝적댄다'는 오해를 자주 사는 편이다. 기실 나란 놈이 뭐든 지르고 보는 성격인지라 연애도 꽂히면 일단 왁, 하고 달려들지 간보고 재고 따지고를 못 하는 편인데, 결국 찝적거릴 요량이면 그냥 사귀자고 해보고 차이는지라 저런 오해가 좀 당혹스럽긴 하다. 워낙에 오지랖이 고질병인 인간인지라 특히나 이 놈의 철학과란 바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궁금해하고 별로 관계도 없는데 친한 척하고 그러는 까닭에 별 수 없이 받는 오해라고는 생각한다. 게다가 성적 취향도 남녀불문인지라 여차하면 굉장히 복잡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하지만 저 오해 때문에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궁금하고 알고 싶고 뭔가 도와주고 싶은데도 그러질 못하고 아예 싹 관심을 끊어 버려야 했던 관계들도 꽤 있었다는 거다. 친구의 전애인이나 선배의 애인이나 뭐 타과의 이름 난 미인이라든지 이래저래 마치 나는 추근덕대는 놈이고 상대는 내가 추근덕거려서는 안 되는 사람인 뭐 그런 식의 구도가 되는... 솔직히 귀찮아서 이걸 다 해명하고 오해를 불식시키고 차근차근 대화로 풀어가며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유지할 만큼 성실하고 진득한 성격도 못 되고. 애초에 혼자 있는 걸 훨씬 더 좋아라 하고 사람 만나는 걸 애써서 겨우 하는 일로 여기는 주제에 왜 이런 오지랖이 흘러 넘치는지도 스스로 의문스러운 일이긴 한데, 뭐 어쩌겠나, 그렇게 생겨먹은 걸. 그러거나 말거나 짧은 생을 반추해 보면 결국 나 따위야 어떻든 저들 각자 혼자 알아서 나름대로 잘들 살아낼 것이니, 애초에 오해 살 사람한테만 관심 끊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관심을 끊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네.

5. 논문 마무리 지으면 마이클 루 『형이상학』도 좀 차근차근 사람들하고 같이 읽고, 히쓰경 수학사나 유클리드 주석서도 사람 모아서 읽어 보고, 가능하면 『파르메니데스』 강독도 하고 그러고 싶다. 다른 대화편도 편별로 대강이나마 좀 줄거리를 정리해서 글로 써서 남겨 놓으면서 다시 읽어 보고, IELTS든 GRE든 영어 공부도 하고 시험도 보고. 지금은 쫓기느라 바쁜 와중이지만 이 과정을 마치면 그래도 몇 개월 정도는 내 멋대로 필사적으로 절실하게 애쓸 그런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뭐 그런 기대를 하는 중이다. 20대를 고스란히 다 가져다 바쳐서 내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붙들고 있던 것들이 죄다 허깨비였고, 나는 빈쭉정이라는 게 만천하에 까발려졌지만, 아직 뒈지진 않았으니 뭔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고 싶다. 어깃장을 놓는 것뿐일지라도 최소한의 일관성은 갖추려면, 결국 텅텅 비었으니 뭐라도 채워넣어 보아야 하겠노라 말하고 그 말에 맞게 움직이는 게 옳지 않겠나. 모르긴 몰라도 학문적으로도 사형선고 같은 것이 분명 있을 거다. 민폐이고 해악이니 어서 썩 꺼지라는 불호령이 내린다든지 뭐 그런 어떤 것이, '통과시켜 줄 테니 대충하고 꺼져라'라든지 '너 같은 새끼한텐 십원짜리도 아까우니 돈 없으면 꺼져라'라든지 뭐 그런 게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닌대도 끊임없이 부족하고 어리석고 욕이나 쳐먹고 있다면, 때려 치우지 못할 바에야 안간힘을 써서 붙들고 늘어질 수밖에 없다. 솔직히 좀 후달리던 참이었는데, 매번 그렇듯, 이번에도 후딱 정신부터 차려야 하겠다. 내가 못 지킨 사람들과 아직 내게 등돌리지 않은 사람들, 뭣보다 일단 내 목숨줄이 내가 아까워서라도, 난 아직 질 수가 없다. 추하게라도,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겠다. 난 여전히 유들의 결합이 전체와 부분, 운동과 정지를 넣어야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Identity Being과 predicative Being 논의를 구문론과 의미론에 묶어 놓는 한에서야 그런 얘기들이 부담스럽고 억지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길이 있을 것 같다. 헛소리 씨부리지 않고 말이 되게 뭔가 재고를 촉구하는 정도의 이야기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스운 얘기지만, 파르메니데스의 그 긴 시에서 하필 그 부분만 가져다 중심이니 끝이니 떠든 게 그냥 그러진 않았을 테니까. Predication과 participation만으로는 자기술어화도 부정적 자기언급의 역설도 못 피하고 참인 진술들 중에서 정의에 해당하는 진술들을 구별해낼 방법도 없고, 그럼 결국 소피스테스 못 잡으니까. 날고 기는 저 이름 난 학자들이 분명 뭔가 반대든 찬성이든 관련된 이야기의 실마리를 남겨 놓았을 거다. 선입견이기만 하다는 게 확실해진다면 차라리 속시원하게 이 입장 접어 버리고 딴 길로 갈 텐데, 그렇다고 이 얘기가 그렇게나 급진적인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구문론, 의미론 적용하는 게 오히려 역시대착오 아닌가? 형상의 친구들도 거인족도 다 글러 먹었다고 얘기하는 사람에게서 그 둘 각 입장의 핵심개념을 내다 버리는 것도, 좀 뭔가 아니다 싶고 말이지. 여기서 이러고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엄서요=ㅁ=....

6. 대자보, 코레일 이래저래 떠들썩한 와중에 난 뭐 말 덧붙일 주제도 못 되고 염치도 없고 해서, 그래도 공감가는 의견 하나를 링크로...

7. 결국 난 뭐 하나라도 나보다 잘난, 그러나 게으르거나 비겁한 자들에게 질색팔색을 하고 욕지기를 뱉는 것 아닐까. 그 좋은 머리와 빠삭한 눈치로 조건도 받쳐주겠다 그냥 주는 거 얌전히 받아만 먹어도 그 비싼 등록금에까지 값하는지야 모르겠지만 술 쳐먹고 이바구나 헛씹어제끼는 것보다는 훨씬 유익할 게 분명한데 지 좆대가리 자랑하듯 되도 않는 허세질에 구라빨이나 세워가며 시간낭비하는 아새끼들이 꼴에 같잖은 꼰대질이나 해대는 씹떡같은 나란 새끼한테 이건 이래요, 저건 저래요 구절구절 짚어가며 말뜻 새기며 따박따박 대꾸하는 그 정도 일조차 못하고 뒤로 혼자 딸딸이치며 교수도 병신 선배도 병신 철학자들 다 병신에 나만 좆나 잘났어, 이 지랄병을 떨고 있으면 거기다 대고 내가 쫌 화를 내기로소니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권위주의에 엄숙주의고 씹꼰대염병이나 되냐. 내가 무슨 나이가 노친네 뒷구녕만큼 쳐먹어서 '어디 어린 놈의 새끼가' 뭐 이딴 소리 한 것도 아니고 '좆도 모르는 게 까불고 자빠졌네' 이 지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러저러하게 써 있는데 내가 이러저러하게 읽었고 근거는 뭐고 논리는 어떠해서 내 주장이 이러저러하니 씨발 반박하라고. ...뭐 다 옛날 얘기다. 또 한 번 꼰대기질 발휘하여 한 마디 하자면 '내 새끼들' 뒈지지 않고 공부할 세상이란 걸 나는 여전히 꿈꾸며 산다. 지혜사랑 아니냐, 영혼이 신들의 가무단을 따라다니며 보았던, 영혼의 날개깃에 물을 대어 적시고 싹을 틔워 키워 날리는, 바로 그 선과 정의와 아름다움, 진리에 대한 사랑 아니냐, 이게 사는 건지 그냥 굴러먹는 건지 고민하고 반추하며 살 만한 삶을 살려는 발버둥이지 않냐, 그것 좀 해 보겠다는 것들 기왕 하는 거 좀 하하호호하며 하면 좀 좋냐.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고, 그렇지 못한 세상이란 게 결국 내가 이날 이때껏 잠자코 기라면 기고 핥으라면 핥아가며 내버려둔 책임이 없을 수 없는 그런 세상이라서, 나는 도무지 씨부리기가 저어되는 것이다. 먹여 살릴 것도 아니면서 내가 뭐라고 철학을 하라느니 말라느니 제대로 하는 게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주둥이 놀리고 앉았겠나, 게다가 여기저기 나보다 잘난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쌔고 쌨는데. 그나마 갈수록 열심히도 하고 잘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에 이래저래 연이 닿아서, 뚜쟁이노릇이나 하며 죄갚음하고 살아야지, 뭐 그런 생각을 하는 요즈음이다. 삶은 삶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학문도 학문 나름으로 또한 그러하게 살아내고 또 해내야만 한다고 믿으면서도, 나는 둘 중 무엇하나 온전히 지켜내질 못하고 있고, 그래서 나는 두 배로 세 배로 욕 먹어야 싼 인생을 보내고 있다. 살아내질 못하고 살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蟲-

뭔가 이 논문 때문에 방문자 수가 늘었나 싶어 일단 출처를 좀 더 자세히 밝힌다. http://www.philosophy.ox.ac.uk/members/emeritus/lesley_brown ...그런데 생각해 보니 뭘로 검색하든 저 페이지가 먼저 뜰 텐데 그럼 왜 갑자기 방문자가 400 가까이 되는 거냐. 뭐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참고문헌들 빠방하고 논증이 견고한 듯하여 읽는 재미와 읽는 고됨이 동반되는 글이다. 영어 때문인지 이해가 부족한 건지 따라가지 못한 부분도 몇 개 있어서 좀 물고 빨고 해야 할 듯. 아, 그리고 Mrs Lesley Brown, 혹시 이 글 보면 그리스어 서식으로 S-Greek 쓰지 마요... 복붙을 못 하겠잖아요...

  Charles Kahn’s work on the verb ‘be’ in ancient Greek has sparked what he has “modestly called [his] version of the Copernican Revolution: replacing existence by predication at the center of the system of uses for einai”.[각주:1] In gratitude for the stimulus I have gained from this rich seam within Kahn’s wide-ranging work, and for fruitful exchanges on einai over the years, I am very happy to contribute these tentative remarks on a stretch of Plato’s Sophist. His insight about einai and predication will prove to be an important key in unlocking some of the difficulties I examine below. My aim is to try to understand what I regard as the most difficult stretch of the Sophist, 257-9. In responding to a particularly impenetrable claim made by the Eleatic Stranger (ES), Theaetetus announces at 258b7 that they have found τὸ μὴ ὄν (not being), which they have been searching for on account of the sophist. He is thinking, of course, of what sparked the long excursus into not being and being: the sophist’s imagined challenge to the inquirers’ defining his expertise as involving images and falsehood. Here’s that challenge: speaking of images and falsehood requires speaking of what is not, and combining it with being, but to do so risks contradiction and infringes a dictum of Parmenides. This heralds the puzzles of not being, and of being, which are followed by the positive investigations of the Sophist’s Middle Part. So Theaetetus’ eureka moment ought to signal some satisfying clarification and closure to the discussions. But in fact the stretch it is embedded in is singularly baffling, and the subject of continuing debate among commentators.[각주:2] There is little agreement about what issues Plato is discussing in this section, let alone about any supposed solutions.
  고대 그리스어에서 'be' 동사에 대한 찰스 칸의 작업은 그가 "점잖게 이름하여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른, einai 용례 체계의 중심에서 계사에 의한 존재사의 교체"를 촉발시켰다. 칸의 광범위한 작업 내의 이 보고로부터 내가 얻은 자극에 대한, 그리고 einai에 관한 유익한 교환들에 대한 감사에서,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의 일정 대목에 관하여 이 잠정적인 언급들을 표명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einai와 계사에 대한 그의 통찰은 이하에서 내가 고찰하는 난점들 중 일부를 해소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임이 드러날 것이다. 내 목표는 내가 『소피스테스』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으로 간주하는 257-9를 이해해 보는 것이다. 엘레아 손님에 의해 구성되는 특히나 불가해한 요청에 답하면서, 테아이테토스는 258b7에서 그들이 소피스테스 때문에 추적하고 있던 to me on을 발견했다고 선언한다. 그는 물론 not being과 being으로 들어서는 긴 여담을 촉발시켰던 것, 소피스트의 기술을 모상과 거짓을 포함하는 것으로 하는 탐구자들의 정의에 대한 소피스테스의 가상의 이의제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 이의제기는 이런 것이다: 모상들과 거짓을 말하는 것은 what is not에 대해 말함을 요구받고, 그것을 being과 결합시킬 것을 요청받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모순을 범하고 파르메니데스의 금언을 위반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소피스테스』의 핵심부에 대한 결정적인 연구들에 의해 귀결되는, not being 그리고 being의 수수께끼에 대한 전조이다. 그래서 테아이테토스의 발견의 순간은 그 논의들에 대한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해명과 종결의 신호여야 한다. 하지만 실상 그 순간이 포함된 대목은 유독 당혹스럽고, 주석가들 사이에서 지속되는 논쟁의 주제이다. 이 부분에서 추정된 해법들에 대해서는 고사하고 플라톤이 논의하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거의 동의된 바 없다.
  [2] My strategy is to try to read the passage without preconceived ideas about what it ought to contain. Some of the most celebrated discussions fall down, in my view, precisely because they have an agenda about what must be found there. For instance, many commentators note that an account of negative predication is a desideratum. This is to fill the gap between 256e, (by which point we have an account of ‘Kinesis is not being’ where this is a denial of identity between Kinesis and the kind being,) and 263, where we are given an account of the false predicative sentence ‘Theaetetus flies’, which seems to require that Plato has already offered an account of negative predication. So some critics attempt to find an account of negative predication at a point in our stretch where the topic is, I submit, quite different: see my analysis of Stage 2 below.[각주:3] To take a different example, Owen’s celebrated essay locates the key error exposed by Plato as that of taking ‘is not’ to mean ‘is not anything at all’, and Owen sees a reference to this at 2586ff, where the ES remarks that in revealing τὸ μὴ ὄν (not being) they have not been so bold as to say that the contrary of being is. To justify that account (which may well be correct) Owen offered a very forced reading of the opening of our problem stretch - I label it Stage 1 below -, believing that there the ES is explaining the negation of ‘… is…’ by an analogy with the negation of ‘large’. Again, careful reading of that passage reveals - I shall argue - that Owen’s account of it cannot stand.[각주:4]
  나의 전략은 해당 구절이 무엇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선입견 없이 그 구절을 독해해 보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일부 논의들은 내가 보기에 부족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이유는 그들이 그곳에서 발견되어야만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안건을 지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러 주석가들은 부정술어에 대한 설명이 필수적인 것이라는 데에 주목한다. 이것은 256e(그 지점에서 'Kinesis is not being'이 Kinesis와 유類 being 사이의 동일성에 대한 부정이라는 설명을 우리가 얻는)와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거짓 서술문장에 대해, 플라톤이 이미 부정 서술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는 점이 요청되는 듯한, 그런 설명이 주어지는 263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비평가들은 내 생각에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우리의 대목 중 한 지점에서 부정 서술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고자 시도한다. 2단계 이하에서의 내 분석을 참고하라. 다른 예를 들자면, 오웬의 유명한 논문은 플라톤에 의해 노출된 핵심적인 오류를 'is not'이 'is not anything at all'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이는 오류로 두고, 오웬은 이에 대한 언급을 2586 이하<아마도 '258e6 이하'의 오기인 듯>, ES가 not being을 밝힘에 있어서 being의 반대인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모하진 않았다고 언급하는 구절에서 찾는다. 그 설명(아마도 옳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웬은 우리가 문제 삼는 대목 - 나는 아래에서 그 대목을 1 단계로 이름붙인다 - 의 도입부에 대해 매우 억지스러운 독해를 내놓았다, 거기에서 ES가 'large'에 대한 부정과의 유비로 '… is…'의 부정을 설명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다시, 해당 구절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는 - 내가 주장하기로 - 오웬의 그 설명이 견지될 수 없음을 밝혀준다.
  I start by outlining three problems concerning our passage.
  우리가 다루는 구절에 관련된 세 가지 문제들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First: the obscurity problem (whence my title’s “dark matter”). The topic or topics of the section are hard to discern, and have given rise to a plethora of very different readings. The section culminates in two accounts of not being, both of them worded obscurely and hard to fathom. The accounts are apparently meant to be equivalent (258d), though they seem to be rather different, as I discuss below.
  첫 번째, 모호성 문제 (내 제목의 'dark matter'가 거기서 나온다). 이 부분의 문제 혹은 문제들은 분간하기 어렵고, 지극히 상이한 독해들의 범람을 야기시켜왔다. 그 부분은 결국 not being에 대한 두 가지 설명으로 귀결된다. 그 둘 모두 모호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말로 된다. 그 설명들은 외견상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들이 상당히 다른 듯 보이더라도, 내가 이하에서 논의하는 것처럼.
  Second: the sandwich problem. This obscure stretch comes between two very carefully written and highly important stretches of the work. It follows the ‘Communion of Kinds‘ section, where Plato makes the ES set out four quartets of statements showing how Kinesis combines with the four other kinds. He shows how both (1) ‘Kinesis is the same’ and (2) ‘Kinesis is not the same’ can be true, and [3] explains why this is so, in manner which can explain the parallel claims that Kinesis both is and is not different, and Kinesis is and is not being.[각주:5] Though scholars are divided over how to read the lines in which the ES explains why (1) and (2) are not, despite appearances, contradictory, it is clear that the Communion of Kinds section is carefully written and fully signposted by Plato. And the section that follows our problem stretch - that on logos and false logos - is even more carefully signposted. From 260b-261c the ES explains patiently that the new problem - that of not being as falsehood - is different from the topic of not being discussed before. And what follows - the stretch in which the ES explains what a logos is, and how a false logos is possible, 261d-264b - is another brilliant stretch of dialogue. So our problematic stretch is sandwiched between two careful, lucid and successful discussions.
  두 번째, 샌드위치 문제. 이 모호한 대목은 아주 주의 깊게 쓰인 그리고 이 작품의 고도로 중요한 두 대목들 사이에 온다. 이 대목은 '유들의 결합' 부분에 뒤따르는데, 그 부분은 플라톤이 ES로 하여금 어떻게 운동이 다른 네 가지 유들과 결합하는지 보여주는 네 항목으로 된 네 묶음의 진술들을 정리하도록 하는 부분이다. 그는 어떻게 (1) 'Kinesis is the same'과 (2) 'Kinesis is not the same' 둘 모두 참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이것이 왜 그러한지, Kinesis is and is not different, Kinesis is and is not being이라는 양립하는 주장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ES가 외견상으로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1)과 (2)가 모순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더라도, 유들의 결합 부분이 플라톤에 의해 주의 깊게 쓰이고 충실한 이정표로 제시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가 문제 삼는 대목을 뒤따르는 부분 - logos와 거짓 logos에 관한 - 은 한층 더 신준하게 이정표로 제시된다. 260b부터 261c까지 ES는 끈기 있게 새로운 문제 - 거짓으로서의 not being에 대한 문제 - 가 앞서 논의된 not being 문제와 다르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 ES가 logos는 무엇인지 설명하고, 어떻게 거짓 logos가 가능한지 설명하는, 261d-264b - 대화편의 또 다른 멋진 대목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적인 대목은 두 가지 주의 깊고 명철하며 성공적인 논의들 사이에서 샌드위치된다.(짜부된다? 낑긴다?)
  Third: the résumé problem. After a preamble from 258e6, the ES gives (from 259a4) what purports to be a résumé of our problem passage, but it signally leaves out what had appeared to be its key moments, the accounts of what the form of not being is.
  세 번째, 요약 문제. 258e6부터의 서두 이후, ES는 (259a4부터) 우리가 문제 삼는 구절에 대한 요지가 될 것을 제공하지만, 그 핵심이 되는 지점들인 듯이 보인, not being의 형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들을 분명 남겨 둔다.
  Stranger: [Intro.] Then let no-one say against us that it is some contrary of being which we are bringing to light when we make bold to say that not being is. As far as some contrary of it goes, we long ago said goodbye to such a thing, (259a) whether it is or is not, whether any explanation [logos] can be given of it or whether it's utterly unexplainable [alogon]. But as for what we've just now said not being is - if someone wants to try to refute that and to persuade us that it's not correct, let them do so; but until they succeed, they must say just what we say on these matters: [Résumé] viz, that the kinds mix (a5) with one another, and that being and the different pervade all the kinds and each other.[각주:6] The different shares in being and is because of that sharing, not that in which it shares but different, and, because it is different from being, (259b) it clearly has to be that it is not being.[각주:7] And, being, in turn, because it shares in the different, will be different from the other kinds, and, being [4] different from them all, is not each of them or all of them except itself.[각주:8] So being, in turn, undeniably is not a thousand things, while those other kinds in the same way, each and every one of them, is in many ways and in many ways is not.[각주:9]
  손님: [도입] 그래서 그 누구도 우리에게 맞서 우리가 과감히 not being is라고 말할 때 우리가 밝히고 있는 것이 being의 어떤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세. 그것과 반대되는 어떤 것에 관하여서는, 그런 것에 대해 우리가 오래 전에 작별을 고했네, (259a) 그것이 is든 is not이든, 어떤 설명 [logos]가 그것에 대해 주어질 수 있든 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alogon]이든 말이지. 하지만 방금 우리가 말했던 not being 이라는 것에 관하여서는 - 누군가 그것을 반박하고 그것이 옳지 못하고 우리를 설득하길 원한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게; 하지만 그들이 성공하기 전까지, 그들은 반드시 우리가 말하는 바로 그것처럼 이 문제들에 대해 말해야만 하네. [요지] 즉, 유들이 상호에 섞인다고, 그리고 being과 다름이 모든 유들과 서로에 스며든다고 말일세. 다름은 being을 나누어 가지고 그 나누어 가짐 때문에 ~이지만, 그것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며, 그것이 being과 다르기 때문에, (259b) 그것이 being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지. 또 이번엔 being은 다름을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다른 유들과 다를 것이고, being이 그것들 모두와 다르기에, 그 자신을 제외하고 그것들 각각도 그것들 모두도 아닐세. 그래서 이번엔, being은 부정할 수 없이 수 천 가지의 것들이지 않고, 반면 저 다른 유들도 같은 방식으로, 그것들 각각 모든 하나하나가 여러 가지 방식에서 ~이고 또 많은 방식에서 ~이지 않다네.
  There is a question what the introductory lines refer to. There may be a reference to 257b1-c4 (discussed below), but it seems more likely that the back reference is to the aporetic passage at 238c-239a. What is quite plain is that in the résumé proper, the ES rehearses points that had been established in the discussion of the Communion of Kinds, as my footnotes marking some of the parallels indicate. That is, before our problem passage begins at 257b1. This difficulty faces everyone trying to understand our stretch, but it poses an especially severe problem for those (such as Michael Frede and others) who hold that here Plato has set himself and accomplished the novel task of explaining negative predication. Frede holds that a key advance is made in our stretch, with the much-desired account of negative predication, an advance that is crucial, in his view, to the account of falsehood that follows. But, as Frede admits, ‘it has to be granted that it is puzzling that Plato in the summary [i.e. 259a3-b6, above] returns to the cases of not being that do not seem worrisome and that, in any case, we are not worried about if we are worried about false statements’.[각주:10]
  도입부의 구절들이 언급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문제가 있다. 아마도 257b1-c4(이하에서 논의되는)를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238c-239a의 난해한 구절에 대한 재언급이라는 것이 더욱 그럴 듯해 보인다. 꽤나 분명한 점은 그 요지 내에서, ES가 유들의 결합에 대한 논의에서 확립되었던 점들을 예행연습한다는 것이다, 내 각주에서 그 유사점들이 드러나듯. 그것은 257b1에서 우리가 문제 삼는 구절들이 시작되기 전이다. 이 어려움은 우리의 그 대목을 이해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이들이 직면하게 되지만, 특히나 (미카엘 프레데와 다른 사람들 같은) 여기에서 플라톤이 그 자신을 내세우고 부정 서술을 설명한다는 새로운 과업을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프레데는 핵심적인 진전이 그 대목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무척이나 바라는 부정 서술에 대한 설명과 함께, 뒤따르는 거짓에 대한 설명에, 그가 보기에 결정적인 진전이 말이다. 하지만, 프레데가 인정하듯, '플라톤이 그 요약[즉, 위의259a3-b6]에서 우리가 거짓 진술들에 대해 걱정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걱정하지 않고 걱정스러운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 not being의 사례들로 돌아간다는 것은 수수께끼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I now turn to our problem passage itself. I divide it into four stages, as follows:
First stage, 257b1-c4: the meaning of negative expressions: ‘not contrary but only different’.
Second stage, 257c5-d13: the parts of the different and their names compared to the parts of knowledge and their names
Third stage, 257d14-258e5: more on the parts of the different, culminating in two accounts of what ‘the form of not being’ is.
Fourth stage, 258e6- 259b7: conclusion with résumé (quoted and discussed above).
나는 이제 우리가 문제 삼는 구절 그 자체로 향한다. 나는 그것을 네 단계로 다음과 같이 나눈다.
첫 번째 단계, 257b1-c4: 부정 표현들의 의미: '반대가 아니라 단지 다름'.
두 번째 단계, 257c5-d13: 지식의 부분들과 그것들의 이름들에 비교된 다름의 부분들과 그것들의 이름들.
세 번째 단계, 257d14-258e5: 'not being의 형상'인 것에 대한 두 가지 설명들로 귀결되는, 다름의 부분들에 관한 추가적 설명.
네 번째 단계, 258e6-259b7: 요지와 함께 결론 (위에서 인용되고 논의된)

Stage 1: what negative expressions mean (I justify this controversial title below)
첫 단계: 부정 표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논란거리인 제목을 이하에서 정당화한다)
[5]
Str. Now then, let's look at the following as well -
ES. 자 이제, 다음의 것도 살펴봅시다 -
Tht. What?
테아이테토스. 무엇을 살펴보죠?
Str. Whenever we speak of not being, (so it seems), we don't speak of something contrary to being, but only different. A1
우리가 not being을 말할 때는 언제든, (그렇게 보이는 바), 우리가 being에 반대되는 뭔가가 아니라, 단지 다른 것만을 말합니다. A1
Tht. How so?
어떻게 그렇죠?
Str. For example, when we call something “not large”, do you think we signify small by that expression any more than same-sized? A2
예를 들어, 우리가 "크지 않은" 어떤 것을 부를 때, 당신은 우리가 그 표현으로 같은 크기인 것보다 작은 것을 조금이라도 더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2
Tht. No.
아닙니다.
Str. So, when it is said that a negative signifies a contrary, we shan't agree, but we'll allow only this much - the prefixed word "not" indicates something other than the words following the negative, or rather, other than the things which the words uttered after the negative apply to. A3
그렇게, 부정이 반대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될 때,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나, 오직 이것 만큼만 받아들일 것입니다 - 앞에 놓이는 'not'이 그 부정에 뒤따르는 단어들과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거나, 혹은 차라리, 부정 뒤에 그 언표된 단어들이 적용되는 것(사물)들과 다른 것을 지시한다고 말입니다. A3
Tht. Absolutely.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

  The key to understanding this problematic stretch lies in seeing the relation between the claims I have labelled A1, A2 and A3. And to do so it helps to pay close attention to Theaetetus’ responses. A1 makes a claim that Theaetetus doesn’t understand. Once the ES has explained it with an example or illustration in A2, he has got the point; he now understands what the ES means by ‘not contrary but only different’. The ES then repeats the point at A3, and Theaetetus now concurs fully.[각주:11]
  이 문제가 되는 대목을 이해하는 열쇠는 내가 A1, A2, A3라 부른 주장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에 테아이테토스의 대답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 A1은 테아이테토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을 제기한다. 일단 ES는 그것을 A2에서 예 혹은 묘사를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논점을 이해했다; 그는 이제 ES가 '반대가 아니라 단지 다름'이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다. 그래서 ES는 A3에서 그 논점을 반복하고, 테아이테토스는 이제 완전히 동의한다.
  From this we must conclude that at A1 ὁπόταν τὸ μὴ ὂν λέγωμεν the ES is referring to every time we speak of (or say) not being something; an example of such speaking is when we say ‘not large’. This is somewhat surprising, since we might expect the phrase to mean ‘when we use the expression μὴ ὄν’. But taking the passage as a whole, I find strong reasons against that initially suggested reading, and in favour of the one I’ve just offered.[각주:12] We must, contra Owen and others, understand [6] οἷον as ‘for example’, so that speaking of not large is an example, a case, of speaking of μὴ ὄν.[각주:13] As we see from A3, where the point is repeated, the topic of this stretch is negative expressions generally: compare τῷ ῥήματι in b7. At A2 we are given ‘not large’ as an example of such a ῥήμα or phrase.[각주:14]
  이로부터 우리는 A1 'ὁπόταν τὸ μὴ ὂν λέγωμεν(우리가 ~이지 않은 것을 진술할 언제든)'에서 ES가 우리가 무엇이 아닌 것을 말하는 모든 순간을 언급하고 있다고 결론내려야만 한다; 그러한 발화의 일례는 우리가 '크지 않다'고 말할 때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놀라운 일인데, 우리가 아마도 그 구절이 '~이지 않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를 의미할 것으로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구절 전체를 취하여, 나는 처음에 제안된 독해에 반대할 강력한 근거들을 발견하고, 내가 제안했던 하 가지 것에 유리하다. 우리는 오웬과 그 외의 사람들에 반대로, οἷον을 '예를 들어'로 이해해야만 한다, 크지 않음을 말함이 '~이지 않음'을 말하는 예시, 사례이게끔 말이다. 우리가 논점이 반복되는 A3에서 보듯, 이 대목의 주제는 일반적 방식에서 부정 표현들이다: b7에서 'τῷ ῥήματι'와 비교해 보라. A2에서 우리에게는 그런 ῥήμα 혹은 구의 예로 '크지 않음'이 주어진다.
  In what follows I’ll proceed on the assumption that the passage is discussing negative expressions generally. Later in this essay, I return to give further reasons for rejecting Owen’s rival interpretation, on which we should translate οἷον ‘just as’ and read the passage as explaining the negation of ‘is’ by analogy with the negation of ‘large’. So the passage tells us in A1 that we don’t mean the contrary of something when we say not something, but ‘only different’; and this is recalled in A3 with the claim that a negative expression ‘only indicates this much, one of the others τῶν ἄλλων τί’.[각주:15] To explain the terms contrary and different the ES takes the case of ‘not large’ and offers ‘small’ and ‘same-sized’ as ‘contrary’ and ‘only different’ respectively: not large doesn’t mean its contrary small. I take it that both small and same-sized are different from large, while small (but not same-sized) is contrary as well as different. So contrary here means polar contrary.
  뒤에서 나는 그 구절이 부정 표현들을 일반적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가정에 대해 계속 진행할 것이다. 이 논문의 후반부에서, 나는 오웬의 경쟁적 해석에 반대하기 위한 추가적인 근거들을 제시하는 데에로 돌아온다. 그 해석에서 우리는 οἷον을 '바로 ~와 같이'로 번역할 것이고 그 구절을 '큼'에 대한 부정과의 유비를 통해 'is'의 부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읽을 것이다. 그래서 그 구절은 우리에게 A1에서 우리가 어떤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어떤 것의 반대가 아니라 '오직 다름만'을 의미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점은 A3에서 부정 표현이 '단지 이 만큼만을 가리키는데, 다른 것들 중의 하나τῶν ἄλλων τί'를 가리킨다는 주장과 함께 상기된다. 반대와 다름을 설명하기 위해 ES는 '크지 않음'의 사례를 들고 '작음'과 '같은 크기임'을 각기 '반대'와 '단지 다를 뿐인 것'으로서 제시한다: 크지 않음은 그 반대인 작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작음과 같은 크기임 모두 큼과 다르다고, 반면에 작음(하지만 같은 크기는 아님)이 다를 뿐만 아니라 반대이기도 하다고 취한다. 그래서 반대는 여기에서 극단적 반대를 의미한다.
  Before asking how to understand ‘different’, we should clarify the terms large, small, same-sized (ἴσον). Plato is clearly thinking of the trio larger than, same-sized as, smaller than, a trio he often discusses together.[각주:16] Though he here uses the terms large and small, rather than larger than/smaller than, it is clear that he has the above trio in [7] mind.[각주:17] The point made in A2 alludes to the fact that what is not large (in comparison to Y) need not be small (in comparison to Y) but may be the same size (as Y). One who recognizes that ‘large’ is interchangeable with ‘larger’ and who has an elementary understanding of the relations between larger than, smaller than and equal to/same-sized as would understand the point at once, as Theaetetus does.[각주:18]
  '다름'을 이해하는 방식을 묻기에 앞서, 우리는 큼, 작음, 같은 크기임(ἴσον)이라는 용어들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분명히 더 큼, 그 만큼의 같은 크기임, 더 작음이라는 그가 종종 한꺼번에 논의하는 셋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가 여기에서 더 큼이나 더 작음이 아니라 큼과 작음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더라도, 그가 위의 셋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A2에서 구성된 논점은 크지 않은 것(Y에 비교해)은 작은 것(Y에 비교해)일 필요는 없지만 같은 크기일 수도 있다(Y와)는 사실을 암시한다. '큼'이 '더 큼'과 대체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 그리고 더 큼, 더 작음 그리고 어떤 것과 동등함/그 만큼의 같은 크기임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 기초적인 이해를 갖춘 사람은 테아이테토스가 그러하듯 단번에 논점을 이해할 것이다.
  Now to the contested question: how to understand the claim that not … does not mean the contrary of… but ‘only different’. It is crucial that the ‘only different’ term (see A1, A3) - i.e same-sized in A2 - , as well as the ‘contrary’ term small, excludes large. To repeat what I have written elsewhere: “think how laughable it would have been if the ES had chosen a random attribute - say, yellow - different from large and said ‘When we say ‘not large’ do you think we signify small any more than yellow?’ Being yellow does not rule out being large, so appealing to it in the explication of not large’ would be ridiculous.”[각주:19] Not any old term referring to a property different from large could be used in A2; and it is clear that the ES has in mind a range of incompatible properties, F, G, H, and so on, such that not F does not (or need not) mean the contrary of F but only a different one from F in that range.[각주:20]
  이제 이론의 여지가 있는 물음으로 가서: … 아님이 … 에 반대가 아니라 '단지 다름'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단지 다를 뿐'이라는 용어 (A1, A3을 보라) - 즉 A2에서 같은 크기임 - 는 '반대' 용어 작음만큼이나 큼을 배제한다. 다른 곳에서 썼던 것을 되풀이하자면: "만일 ES가 임의의 속성 - 말하자면, 노랑 - 을 큼과 다른 것으로 선택했다고 그리고 '우리가 '크지 않음'을 말할 때 너는 우리가 노랑보다 조금이라도 더 작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될지 생각해 보라. 노란 것임은 큰 것임을 배제하지 않고, 크지 않음에 대한 해명에서 그렇게 그것에 호소한다는 건 조롱거리일 것이다." 큼과 다른 속성을 가리키는 어떤 기존 용어든지 A2에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ES가 양립 불가능한 속성들 F, G, H 등의 영역, not F가 F의 반대를 의미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으나 단지 그 영역 내에서 F와 다른 어떤 것만 의미하는 그런 영역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But, critics protest, heteron means different, not incompatible. Indeed it does, and we must concede this point: heteron and allo continue to mean different i.e. nonidentical. But the analysis the ES offers of negative expressions makes crucial use of the understood notion of a range of incompatible predicates, which A2 proffers precisely to explicate the point that ‘not … doesn’t mean contrary but only different. So a different term will, since it belongs to such a range, pick out an attribute which is in fact incompatible, as equal to Y is indeed incompatible with larger than Y, while not its contrary.[각주:21] We have such a locution in English: if I say ‘the policeman was other than helpful’, you will understand me to mean that his attitude was different from and incompatible with being helpful.
  하지만 비판자들은 heteron이 다름을 의미하지 양립불가능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저항한다. 그것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heteron과 allo는 계속해서 다름, 즉 비동일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ES가 부정 표현들에 대해 제공하는 분석들은 양립 불가능한 술어들의 영역에 대한 암묵적(동의된) 생각의 결정적인 용례를 만들어낸다, A2가 '~이 아님이 반대가 아니라 단지 다름만을 의미한다'라는 점에 대해 정확히 해명을 내놓는 용례를 말이다. 그런 식으로 다름이라는 용어는, 그러한 영역에 속하기에, Y와 같음이 Y보다 큼과 양립불가능하기도 하듯, 사실상 양립 불가능한 속성을 지적해낸다, 하지만 그 반대는 아닌 속성을. 우리는 영어에서 그런 어구를 가지고 있다: 만일 내가 '그 경찰은 기꺼이 도우려는 것과는 달랐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내가 그의 태도는 기꺼이 도움을 주려는 것임과 달랐고 양립불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이해할 것이다.
  The upshot of this reading of Stage 1 is that, contrary to first appearances, the ES is not offering an analysis of the expression μὴ ὄν, but rather taking μὴ ὄν to stand in for any expression ‘not F’. I noted above that this may seem surprising, but Charles [8] Kahn’s work above all has paved the way for an understanding of Greek einai such that to talk of being is, above all, to talk of predication; the predicative function of einai is central to understanding it.
  첫 단계에 대한 이러한 독해의 결과는, 첫인상들과 반대로, ES가 μὴ ὄν 표현의 분석을 제공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이든 'not F' 표현을 대신하는 것으로 μὴ ὄν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위에서 이것이 놀라워 보일지도 모른다고 주목하였으나, 찰스 칸의 작업이 무엇보다도 그리스어 einai에 대한 그러한 being is에 대해 말하고, 특히, 술어에 대해 말하는 이해를 위한 길을 닦았다; einai의 술어적 기능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이다.
  So I read Phase 1 as offering an account of negative expressions of the type ‘not F’, an account which makes key use of the notion of a range of incompatible properties such that to be not F is to have a different one (taken from that range) from the property Fness. Now many critics have resisted attributing such an account to Plato, since it has a serious drawback. It offers at best a sufficient condition, but not a necessary condition, for being not F. As Price remarked in opposing such a theory, it is true and meaningful to insist that virtue is not square, although it’s not the case that virtue is some shape other than square.[각주:22]
  그런 식으로 나는 첫 단계를 'not F' 식의 부정 표현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양립 불가능한 속성들의 영역에 대한 생각의 핵심적인 사용, F이지 않다는 것이 F임이란 속성과 다른 속성(그 범위에서 취한)을 가진다는 것으로 쓰이는 용례를 만들어 주는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읽는다. 오늘날 많은 비판자들이 그러한 설명을 플라톤에게 돌리는 것에 저항해 왔다, 그것이 심각한 결점을 지니기에. 그것은 기껏해야 충분 조건을 제공할 뿐, 필요 조건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F이지 않음에 대해서 말이다. Price가 그런 이론에 반대하여 언급하였듯, 덕이 네모지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이며 의미를 가진다, 설령 덕이 사각형과 다른 어떤 도형이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A rival interpretation of Phase 1 may be labelled the extensional interpretation. It agrees that Phase 1 focuses on negative expressions generally, rather than on the expression μὴ ὄν. It takes Plato to be explaining negative predications ‘x is not F’, but reads the account very differently from the way proposed above. The advantage of the interpretation is that it finds Plato offering an account of ‘x is not F’ as ‘x is different from all the Fs’, and the two are indeed materially equivalent. But to find this reading in the text is - I submit - impossible, in spite of the ingenious arguments offered in its support.[각주:23] The interpretation focuses on the claim, in A1 and A3, that not … means different, but it cannot adequately explain the way this is elaborated, either in A2 or in A3. It is particularly hard to get the reading Bostock wants from the sentence at A3, since that speaks of ‘not’ signifying ‘one of the others (τῶν ἄλλων τί) than the words following the negative, or rather, than the things the words … apply to.’ I submit that this cannot be read as telling us that to say that ‘x is not F’ is to say that x is one of the others than, i.e. different from everything that is F.[각주:24] The [9] reading I have given, on the other hand, fits the preceding sentence perfectly. Just as not large need not mean small any more than same-sized, so in general not F means one of the others than F (that is, one or another from the understood range of properties other than F, and not necessarily the contrary). Since Bostock supports his reading by appealing to a sentence from Stage 2, I’ll have a little more to say about it below.
  첫 단계에 대한 경쟁적 해석은 확장적 해석이라 명명될지도 모른다. 그 해석은 1 단계가 μὴ ὄν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부정 표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 해석은 플라톤이 'x는 F이지 않다'라는 부정 서술들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위에서 제안된 방식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그 설명을 독해한다. 그 해석의 장점은 그 해석이 'x는 F이지 않다'에 대한 설명으로 플라톤이 'X는 모든 F들과 다르다'를 제공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둘이 더욱이 실질적으로 동치라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러한 독해를 문헌 내에서 찾아내기란 불가능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공된 기발한 논증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해석은 A1과 A3에서 ~이지 않음이 다름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A2에서든 A3에서든 이것이 정교화되는 그 방식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보스톡이 A3의 그 문장에서 바라는 독해를 얻기란 어려운데, 'not'이 '부정 뒤에 따르는 단어들과는 다른 단어들 중 하나, 혹은 차라리, 그 단어들이 ... 적용되는 그 사물들과 다른 사물들 중 한 사물을' 의미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x는 F이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 x가 F와 다른 것들 중 하나, 즉 F인 모든 것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 이 구절이 읽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제시했던 독해는 그와 달리 이전 문장에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크지 않음이 같음보다 조금도 더 작음일 필요가 없듯, 그런 식으로 일반적으로 F이지 않음은 F와 다른 것들 중 하나를 의미한다 (즉, F와 다른, 또한 필연적으로 반대인 것은 아닌 속성들의 합의된 영역으로부터 나온 이러저러한 것). 보스톡은 두 번째 단계에서 나오는 문장에 호소하여 그의 독해를 지지하므로, 나는 아래에서 그것에 대해 좀 더 말할 것이다.
  Our conclusion about Stage 1 is that is best read as offering a tempting, if flawed account of expressions such as ‘not F’, and/or of their use in negative predications ‘x is not F’. (It’s tempting to think that ‘x is not white’ means ‘x is some colour other than white’, but careful reflection shows that this cannot be correct.) Paying attention to the illustration in A2, we saw how to interpret contrary (viz as polar contrary) and different (viz, as a different one from a range of incompatible properties). No other interpretation offers an adequate explanation of the point of A2. I prefer an interpretation that makes good sense of the text, even if it credits Plato with a less than watertight account of negation, to ones that do Procrustean violence to what Plato wrote.
  첫 단계에 대한 우리의 결론은 그것이 매력적 제안으로서 최선의 독해라는 것이다, 설령 'not F'와 같은 표현들에 대해, 그리고/혹은 'x는 F이지 않다'라는 부정 서술들에서 그 표현들의 쓰임에 대해 결함이 있는 설명이라 할지라도. ('x가 희지 않다'라는 것이 'x는 흼과 다른 어떤 색이다'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주의 깊은 숙고는 이것이 옳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A2에서의 묘사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우리는 반대(즉 극단적 반대)와 다름(즉 양립 불가능한 속성들의 범위에서 나온 한 가지 다른 것으로서)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보았다. 다른 어떤 해석도 A2의 논점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해당 문헌을 합리화하는 해석을 선호한다, 설령 부정에 대한 물 샐 틈 없는 설명보다는 덜한 공을 플라톤에게 돌리게 되더라도, 플라톤이 저술한 것에 대해 프로크루스테스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해석보다는 말이다.

Stage 2: the parts of the different and their names, compared to the parts of knowledge and their names
두 번째 단계: 다름의 부분들과 그것들의 이름들, 지식의 부분들과 그것들의 이름들에 비교된.
  The following passage, and particularly the closing sentence uttered by Theaetetus, has given rise to a popular but incorrect reading. Frede, Bostock and others find in the remark by Theaetetus at 257d11-13 an account of negative predication (of ‘x is not beautiful’) such that it is to be read as ‘x is different from all the beautiful things’.[각주:25] But a closer look at the passage shows that its function is not to give an account of negative predication, but to introduce a novel notion, that of a ‘part of the different’ - named by a phrase such as ‘not beautiful’, by analogy with a part of knowledge, named by (for instance) ‘geometry’. This is the prelude to further discussion of negative forms in the succeeding lines.
  이하의 구절, 그리고 특히 테아이테토스에 의해 발화되는 마지막 문장은, 유명하지만 부정확한 독해를 불러 일으켜 왔다. 프레데, 보스톡 그리고 다른 이들은 257d11-13에서 테아이테토스에 의한 언급에서 부정 서술에 대한('x는 아름답지 않다'에 대한) 설명으로 'x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다르다'로 읽혀야 된다는 설명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구절에 대한 더 근접한 고찰은 그 역할이 부정 서술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는 것, 즉 '다름의 부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 '아름답지 않음'과 같은 구에 의해 명명되는 부분, 지식의 부분과의 유비를 통해, (예를 들어) '기하학'에 의해 명명되는. 이것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부정적 형상들에 대한 추가적 논의에 대한 서곡이다.
[10]
257c5 Str. And we should consider the following, if you agree.
또한 우리는 다음의 것을 고찰해야 할 걸세, 자네가 동의한다면.
Tht. What? 무엇을요?
Str. It seems to me that the nature of the different is to be parcelled out, just like knowledge.
내게는 다름의 본성이 나뉘어지는 것인 듯 보인다네, 마치 지식처럼 말일세.
Tht. How so? 어떻게 그렇습니까?
c10 Str. Well, knowledge also is a single thing, surely, but each of its parts that applies to something is marked off and gets some special name of its own. That’s why there are many skills and kinds of knowledge that get spoken of.
자, 지식 또한 단일한 것일세, 물론, 하지만 어떤 것에 적용된 그 각 부분들은 한정(정의)되어 나오고 그 자체의 고유한 어떤 특수한 이름을 얻지. 그것이 논해지는 많은 기술들과 지식의 유들이 있는 이유라네.
Tht. Certainly. 확실히 그렇습니다.
257d4 Str. And so with the nature of the different: though it's a single thing, it has parts in a similar fashion.
다름의 본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일세: 그것이 단일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비슷한 방식으로 부분들을 가지지.
Tht. Possibly, but shouldn't we say how? 아마도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식으론가 말하지 않나요?
Str. Is there some part of the different that is set against the beautiful?
아름다움에 반대로 놓인 다름의 어떤 부분이 있는가?
Tht. There is. 있지요.
Str. So shall we say it's nameless, or that it has a name?
그럼 우리는 그것이 이름 없는 것이라 말할까, 아님 이름을 가진 것이라 말할까?
257d10Tht. That it has a name; because what -from time to time- we put into words as “not beautiful”, it’s this that is different from nothing other than the nature of the beautiful.
이름을 가진 것으로요; 왜냐하면 때때로 우리가 '아름답지 않은'이라는 문장을 내놓으니까요, 이것이 다름 아니라 아름다움의 본성과 다른 것이지요.
(in other words: the name you just asked me about (of the ‘part of the different set against the beautiful’) is “not beautiful”.)
(다른 식으로: 당신께서 방금 제게 물으셨던 이름은 (아름다움에 반대되어 놓인 다름의 부분) "아름답지 않음"입니다.)
  Once again the ES begins with a claim Theaetetus doesn’t understand. But the young man rapidly catches on, this time without the help of an example, and at 257d3 signifies that he understands how the parts of knowledge, each applied to something, have names of their own. Still, let’s supply some examples, using names of ‘parts of knowledge’ from the dialogue in which we first meet him.
  다시 한 번 ES는 테아이테토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재빨리, 이번에는 예시의 도움 없이, 파악하고 257d3에서 각각이 어떤 것에 적용되는 지식의 부분들이 어떻게 그것들의 고유한 이름들을 가지는지 이해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몇 가지 예시들을 보충해 보자, 우리가 처음 그를 만난 대화로부터 '지식의 부분들'의 이름들을 사용하면서.
[11]
Knowledge
APPLIED TO: producing shoes / shapes / numbers
NAME: cobblery /geometry / arithmetic
  The ES proceeds with his analogy, and gets Theaetetus to agree that there is a part of the different set against the beautiful, and to name it. The young man obliges with the name ‘not beautiful’.
  ES는 그의 유비를 진행시키고, 테아이테토스에게서 아름다움에 반대되어 놓이는 다름의 부분이 있다는 동의를 얻어내고, 그것을 명명하게 만든다. 그 젊은이는 '아름답지 않음'이라는 이름으로 돕는다.
Different
FROM: beautiful / large / etc
NAME: not beautiful / not large / etc
  That is the entire message of this short passage. It does not, pace Bostock and Frede, offer an account of negative predication, and a fortiori does not offer one in extensional terms. Both scholars interpret Theaetetus as offering an analysis of ‘x is not beautiful’ as ‘x is different from everything that is beautiful’. But to take the phrase ‘different from nothing other than the nature of the beautiful’ to mean ‘different from everything which is beautiful’ is a desperate expedient, and the alleged parallels cited by Frede go no way towards making this interpretation plausible.[각주:26]
  저것이 이 짧은 구절 전체의 전달하려는 바이다. 보스톡과 프레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것은 부정 서술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고, 더 강력한 이유로 확장된 용어들로 설명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두 학자들 모두 테아이테토스가 'x는 아름답지 않다'를 'x는 아름다운 모든 것들과 다르다'로 분석해 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다른 무엇도 아닌 아름다움의 본성과 다른'이라는 구절을 '아름다운 모든 것과 다른'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망 없는 방편이고, 프레데에 의해 인용되어 주장된 유사점들은 이 해석을 타당하게 만드는 쪽으로 나아갈 길이 전혀 없다.

  Here’s how Bostock argues for his view. Taking his start from the phrase ὅ γὰρ μὴ καλὸν ἑκάστοτε φθεγγόμεθα, he writes: ‘the subject expression must be taken as ‘whatever is not beautiful’ for otherwise the word ἑκάστοτε has no intelligible function. [He is assuming that ἑκάστοτε must be translated ‘on each occasion’, which I dispute below.] But then it follows that ‘the nature of the beautiful’ must also be taken as generalizing, and equivalent to ‘whatever is beautiful’ if we are not to credit Plato with obvious nonsense. Of course we do not call things not beautiful just because they are other than the form of beauty.’[각주:27] Reply: indeed we do not, but the better inference is that ‘the nature of the beautiful’ does indeed mean the form of beauty, and that the subject expression therefore should not be understood as referring to whatever is not beautiful.
  보스톡이 그의 관점을 논증하는 방식은 이와 같다. 그는 'ὅ γὰρ μὴ καλὸν ἑκάστοτε φθεγγόμεθα(우리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때마다 발화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서 시작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그 주어표현은 '아름답지 않은 무엇이든'으로 취해져야만 하는데 다른 방식이라면 'ἑκάστοτε(때마다)'라는 단어가 아무런 합리적인 역할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ἑκάστοτε가 '각 경우마다'라고 번역되어야만 한다고 가정하고 있는데, 이후에 반박한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아름다움의 본성'이 일반화하는 것으로, 또한 '아름다운 무엇이든'에 상응하는 것으로 취해져야만 한다는 것 또한 뒤따른다, 만일 우리가 플라톤에게 명백한 역설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물론 우리는 사물들을 그것들이 아름다움의 형상과 다르다는 바로 그 이유로 아름답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러하다. 실살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허나 더 나은 추론은 '아름다움의 본성'이 아름다움의 형상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 주어 표현은 그러므로 아름답지 않은 아무것이나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12]
  My alternative translation ‘what -from time to time- we put into words as “not beautiful”’ indicates that the topic is precisely the form or kind the not beautiful, that is, the very part of the different set against the beautiful that Theaetetus was asked to name. I justify it by pointing out that Plato commonly uses ἑκάστοτε in contexts where it cannot mean ‘each time’ but rather ‘from time to time’.[각주:28] But even if we keep the traditional translation, the reading given by Bostock and Frede can be safely set aside, both because it ignores the context of Theaetetus’ remark, and because it gives a very strained, if not impossible, reading of the words ‘is different from nothing other than the nature of the beautiful’.[각주:29]
  내 대안적 번역 '- 때때로 - 우리가 "아름답지 않은'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번역은 정확히 그 주제가 아름답지 않은 것의 형상이나 유라는 것, 즉, 테아이테토스가 명명을 요청받은, 아름다움에 반대되어 놓인 다름의 바로 그 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나는 그 점을 플라톤이 흔하게 'ἑκάστοτε'를 그것이 '때마다'를 의미할 수 없고 오히려 '때때로'를 의미할 문맥들에서 사용한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정당화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통적 해석을 견지한다 하더라도, 보스톡과 프레데에 의해 제시된 독해는 무난하게 제외될 수 있는데, 그것이 테아이테토스의 발언 문맥을 무시한다는 이유에서도, 또한 '다른 아무것도 아닌 아름다움의 본성과 다르다'라는 문장에 대해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매우 불편한 독해를 제시한다는 이유에서도 그러하다.
  So what is the role of this passage? The analogy between knowledge and its parts, and the different and its parts, suggests the following. Knowledge is a form, and (probably) its objects are forms too; hence its parts - branches identified by their objects- are forms. And by comparing the different to knowledge, Plato suggests that, in just the same way, the different is a form, what each part of it is ‘set against’ (ἀντιτιθέμενον) is a form (e.g. the beautiful), and so the resulting part itself, whose name is ‘not beautiful’, is itself a form. Those who might - with good reason - baulk at such negative forms are to be lulled into acceptance by the analogy with the parts of knowledge; and comforted by noting a parallel between the ways each of Knowledge and the Different are parcelled out.[각주:30] In the sequel, the ES will stress that the not beautiful, the not large, the not just and so on have an equal claim to being as the beautiful, the large and the just.[각주:31] This seems a strange thesis for Plato to be arguing for, and one that seems to conflict with Aristotle’s claims that the Platonists deny negative forms.[각주:32]
  이 구절의 역할은 그럼 무엇인가? 지식과 그 부분들, 그리고 다름과 그 부분들 사이의 유비는 다음을 시사한다. 지식은 형상이며, (아마도) 그 대상들도 역시 형상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분들 - 그 대상들에 의해 규정된 분과들 - 은 형상들이다. 그리고 다름을 지식에 비교함으로써, 플라톤은, 바로 동일한 방식으로, 다름이 형상이라는 것, 그것의 각 부분이 '마주 놓이는(ἀντιτιθέμενον)' 바의 것이 형상(예를 들어 아름다움)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식으로 귀결하는 부분 자체, 그 이름이 '아름답지 않음'인 그 부분 자체도 형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한 부정적 형상들을 - 적절한 이유로 - 꺼려하는 사람들은 지식의 부분들 유비에 의해 허용하는 쪽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식과 다름 각각이 나뉘어지는 방식들 사이에 유사점에 주목함으로써 안도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ES는 아름답지 않음, 크지 않음, 정의롭지 않음 같은 것들이 아름다움, 큼 그리고 정의로움과 동등하게 being에 대한 권리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하기에는 낯선 논지인 듯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주의자들은 부정적 형상들을 부정한다는 주장들과 상충하는 것으로 보인다.
  How are we to understand the positing of a form of not F, described as a part of the different set against F? How can we apply the moral of Stage 1 to this? One way to do so - though I don’t feel entirely confident it is right - is to carry over the idea that [13] Plato has in mind a range of incompatible properties such that to be not F is to have some property taken from that range that is other than Fness. Thus the form not large is the form or property of being some size (relative to…) other than large. Likewise the form not beautiful is the property of having some aesthetic property other than beautiful: perhaps plain, perhaps ugly. I have already noted, above, that this is unsatisfactory as an account of negation, even though it is an account that appealed to thinkers as diverse as Hegel, Bosanquet and Ryle. But if we set aside that objection, we can see the appeal of understanding ‘not square’ as ‘having some shape other than square’ and ‘not green’ as ‘having some colour other than green’. If you want to countenance negative forms/forms of negations, it is comforting (if incorrect) to do so with some positive designation.[각주:33] A more serious difficulty for this understanding of the notion of not large as a part of the different, is this: how do we apply this to the account - or rather the two accounts - of not being that follow?
  우리는 F에 반대되어 놓인 다름의 부분으로서 묘사되는 not F 형상의 상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첫 단계의 교훈을 이것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 그렇게 할 한 가지 방법은 - 내가 그것이 옳다고 전적으로 확신을 가지지는 않을지라도 - 플라톤이 양립 불가능한 속성들의 범위를, F이지 않다는 것이 저 범위에서 취해진 F임과 다른 어떤 속성을 가지는 것이라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발상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크지 않음이라는 형상은 큼과 다른 (~에 상대적인) 어떤 크기임이라는 형상 혹은 속성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아름답지 않음이라는 형상은 아름다움과 다른 어떤 심미적 속성을 가진다는 그런 속성이다: 아마도 뻔하고, 아마도 추하다. 나는 위에서 이미 이것이 부정에 대한 설명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설령 그것이 헤겔, 보잔켓, 라일 같이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호소력있는 설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반대를 차치하면, 우리는 '사각이 아님'을 '사각과 다른 어떤 형태를 지님'으로 그리고 '푸르지 않음'을 '푸름과 다른 어떤 색을 지님'으로 이해함의 매력을 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부정적인 형상들/부정들에 대한 형상들을 지지하길 원한다면, (부정확할지라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명칭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편이 편하다. 크지 않음이라는 관념을 다름의 일부로 이렇게 이해하는 데에 대한 더 심각한 어려움은 이러한 것이다: 뒤따르는 not being에 대한 설명 - 혹은 차라리 두 가지 설명들 - 에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적용시키는가?

Stage 3 the two formulae for not being
세 번째 단계: not being의 두 가지 공식들
  In the third and most puzzling stretch the ES will offer, in swift succession, two formulae for τὸ μὴ ὄν, not being. Let’s call them the first formula for not being, 258a11-b8, and the second formula for not being, 258d5-e3. There is a sharp divide between scholars who favour
 * the Analogy interpretation - whereby Plato offers an account of not being according to which it is one part of the different, the one set against being - by analogy with the not large, which is another part of the different, this time set against large[각주:34]
and those who favour
  * the Generalization interpretation, whereby not being is ‘the part of the different set against each being’ (258e2, or against ‘the being of each’ if we read hekastou); in other words whereby not being generalises over not F, not G etc.[각주:35]
  세 번째 가장 곤란한 대목에서 ES는 신속하게 잇달아 τὸ μὴ ὄν, not being에 대해 두 가지 공식들을 내어놓을 것이다. 그것들을 258a11-b8, not being에 대한 첫 번째 공식과 258d5-e3, not being에 대한 두 번째 공식이라 부르기로 하자. 학자들 사이에는 날카로운 구분이 존재한다.
  * 유비 해석을 선호하는 학자들은 그로써 플라톤이 그에 따라 not being이, being에 마주 놓인 일련의 것, 다름의 한 부분인 설명을 제공한다 - 크지 않음의 유비로써, 그것은 이 경우 크지 않음에 마주 놓인 다름의 또 다른 부분이다.
  * 일반화 해석을 선호하는 학자들의 경우, 그로써 not being이 '각 being에 마주 놓인 다름의 부분' (258e2, 혹은 우리가 hekastou를 읽는다면 '각각의 being'에 마주 놓이는)이다. 달리 말해 그로써 not being은 not F, not G 등에 대해 일반화된다.

[14]
  Now the debate is a crucial one. If the analogy interpretation is right, the ES does indeed postulate a form of not being, in a manner parallel to the forms of not beautiful, not large and so on that he had argued for in Phase 2. And indeed much of his language suggests that he is doing precisely that. See 258b9-c5, at the close of which the ES remarks ‘just as the large was large and the beautiful beautiful, and the not large not large and the not beautiful not beautiful, so too not being in just the same way was and is not being.’[각주:36] This seems to be a clear statement that there is a form of not being, in just the same way as (and in addition to) the other negative forms. So far the so-called Analogy interpretation of the first formula seems to be vindicated. But it faces serious difficulties. After setting out, the relevant texts I shall argue that the socalled generalization interpretation is probably the correct one. Before we proceed, note that on one point both formulae are in agreement: not being is not identified with the different, but with either one special part of it - Analogy reading, suggested by first formula, or with any part of the different - Generalization reading.
  이제 그 논쟁이 결정적인 한 가지 것이다. 만일 유비 해석이 옳다면, ES는 확실히 not being의 형상을 상정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않음, 크지 않음 등 그가 2 단계에서 논증하였던 그와 같은 형상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리고 더욱이 그의 말의 상당부분은 그가 정확히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258b9-c5를 보면, 그 말미에서 ES는 '바로 큼이 컸고 아름다움이 아름다웠던 것처럼, 크지 않음도 크지 않았고 아름답지 않음도 아름답지 않았으며, 그렇게 not being 또한 바로 동일한 방식으로 not being이었고 not being이다'라고 언급한다. 이것은 not being의 형상이 있다는 명백한 진술인 듯이 보인다, 다른 부정적인 형상들과 동일한 바로 그런 방식으로(혹은 그러한 형상들에 더하여). 여기까지 첫 공식에 대한 소위 유비 해석이 입증된 듯 보인다. 하지만 그 해석은 심각한 어려움들에 직면한다. 정리 이후, 나는 연관된 문헌들로 소위 일반화 해석이 하나의 올바른 해석일 것 같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진행하기에 앞서, 두 공식들 모두 동의하는 한 가지 지점을 주의하자. not being은 다름과 동일시되지 않지만, 그것의 특정한 한 부분 - 첫 공식에 의해 시사되는 유비적 독해 - 혹은 다름의 어떤 부분과든 - 일반화 독해 - 동일시된다.

First formula for not being Sophist 258a11-b8

Str. So, it seems, the setting-against of a part of the nature of the different and <a part of> of the nature of being, lying one against the other, is no less being [ousia] than being itself – if I may be permitted to put it like that -, for it signifies not a contrary of it, but just this: different from being.
그래서, 보이기로는, 다름의 본성의 부분과 being의 본성의 <부분의> 마주 놓임은, 상호에 마주 놓임으로써, being 자체 못지 않게 being[ousia]인 듯하다 - 만일 내가 그렇게 놓아도 괜찮다면 -, 왜냐하면 그것이 그것의 반대가 아니라, 바로 이것, being과 다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Tht. That's very clear. (258b5) 그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Str. So what shall we call this setting-against? 그럼 우리는 이 마주 놓임을 무엇이라 부를까?
Tht. It's clear that this very thing is that not being which we have been searching for on account of the sophist! (258b8)
이것이 우리가 소피스테스에 대한 설명(정의)을 위해 추적해 온 바로 그 not being이란 것은 분명합니다.
  Theaetetus’ response at b5 is surely meant to raise a smile from the reader. The preceding sentence is one of the hardest to fathom. Lee has discussed the many [15] possible construals of the Greek, and has pointed out that in any event it is a small slip on Plato’s part to make the antithesis subject of ‘signifies’ (however we understand the antithesis in question). But the major issue is how we understand what the antithesis is between, and this hangs on whether or not we mentally supply <a part of> at b1.[각주:37] If we do not do so, then the antithesis is between a part of the different and being, and this yields the Analogy interpretation favoured by Owen and others. If we do make that mental supplement, then the formula can perhaps be seen to fall into line with the second formula, which (as I show below) seems unambiguously to favour the Generalization interpretation. For if we do, the effect is that not being is an antithesis between a part of the different and any part of being (for instance, the beautiful). It has to be admitted that this is a strained reading of the first formula, and, if the ES had stopped after the first formula for not being, the Analogy interpretation would prevail. As I noted above, the lines which follow the statement of the first formula, 258b9ff, certainly seem to point us to μὴ ὄν (not being) as a form in its own right, on a par with the not beautiful, the not large and so on.
  b5에서 테아이테토스의 응답은 물론 독자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할 것이다. 계속되는 문장은 헤아리기 가장 어려운 문장 중 하나이다. Lee는 해당 그리스어의 가능한 여러 해석들을 논의하였고, 어느 경우에서든 'antithesis'를 '의미하다'의 주어로 만드는 것은 플라톤으로서는 작은 실수라는 점을 지적해냈다(그렇지만 우리는 문제가 되는 그 antithesis를 이해한다). 하지만 주요 쟁점은 우리가 antithesis가 무엇 사이에 있는지 이해하는 방식이며, 이것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a part of>를 b1에서 보충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antithesis는 다름의 부분과 being 사이에 있고, 이것은 오웬과 그 외의 사람들에 의해 지지받는 유비적 해석을 내놓는다. 만일 우리가 심리적 보완을 행한다면, 그 공식은 아마도 두 번째 공식과 보조를 맞추는 데에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일 수 있다, (내가 아래에서 보여주듯) 모호하지 않게 일반화 해석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 일을 한다면, 그 결과는 not being이 다름의 부분과 being의 어떤 부분(예를 들어, 아름다움) 사이의 antithesis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공식에 대한 억지스런 독해라는 점은 받아들여야 하고, 만일 ES가 not being에 대한 첫 번째 공식 이후로 중단했었더라면, 유비적 해석이 승리했을 것이다. 위에서 내가 주목하였듯, 첫 번째 공식에 뒤따르는 258b9 이하 구절들은 확실히 우리에게 μὴ ὄν (not being)을 그 자체 고유하게 형상으로 지시하는 듯이 보인다, 아름답지 않음, 크지 않음 등 그러한 것들과 동등하게 말이다.
  But the sequel, the second formula for not being, puts things in a different light.
  하지만 그 뒤를 잇는 것, not being에 대한 두 번째 공식은 사물들을 다른 관점에 놓는다.

Second formula for not being, Soph 258d5 -258e5
not being에 대한 두 번째 공식, 258d5-258e5
         ...생략...
258e2 ἄλληλα, τὸ πρὸς τὸ ὂν ἕκαστον[각주:38] μόριον αὐτῆς
         ...생략...

258d Str. Whereas we have not only demonstrated that the things that
        are not are, but in addition we've brought to light what the form of
        not being is. We've demonstrated the nature of the different,
        showing that it is, and that it's parcelled out[각주:39] over all the
[16]
    e  things that are, set against each other[각주:40]; and the part of it set
        against each being - that very thing is what we've dared to say
        really is not being.
        반면 우리는 ~인 것들이 ~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만이 아니라,
        추가로 not being의 형상이 무엇인지 밝혀냈다네.
        우리는 다름의 본성을 증명하였고,
        그것이 ~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서로 반대되어 놓인,
        모든 ~인 것들에 걸쳐 나뉘어져 들어간다는 것도 증명했지.
        그리고 그것의 부분이 각각의 being에 반대되어 놓인 것 -
        바로 그것이 우리가 정말로 not being이라 말하고자 감행했던 그것일세.
    e4 Tht. Absolutely, sir; I think we've spoken very truly indeed.
        완벽히 그렇습니다, 선생님; 저는 우리가 더구나 매우 참되게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We must first try to identify the two achievements referred to by the ES: a) we’ve demonstrated that the things that are not are and b) we’ve brought to light what the form of not being is. We may hazard that with a) the ES refers back to the Communion of Kinds section, with its final proof that the kind Kinesis really is not being and being, since it shares in being (256d8-9). If so the μὴ ὄντα, the things that are not, are things which are not the kind being, as Kinesis is not the kind being, but of course is a being. The additional feat b), of bringing to light what the form of not being is, is presumably what occurs from 257c onwards, culminating in the first formula for not being that I’ve just discussed.
  우리는 ES에 의해 언급되는 두 가지 성취들을 동일시하고자 시도해야만 한다: a) 우리는 ~인 것들이 ~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고 b) 우리는 not being의 형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우리는 아마도 a)를 가지고 ES가 돌이켜 유들의 결합 부분을 언급한다는 것을, 운동이라는 유가, being의 몫을 나누어 가지기에, 실제로 not being이자 being이라는(256d8-9) 그 마지막 증명과 더불어 어림짐작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μὴ ὄντα, ~이지 않은 것들, 그것들은, 운동이 유 being이 아닌 것처럼, 유 being이지 않은 것들이지만, 물론 어떤 being이다. not being의 형상이 무엇인지 밝혀냈다는 그 추가적인 성과 b)는 추정컨데, 내가 방금 논의했던 not being에 대한 첫 번째 공식으로 귀결되는, 257c부터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In the sentence beginning ‘We’ve demonstrated’ then, the ES is offering to restate what the form of not being is. First he remarks that he has demonstrated that the nature of the different is. This may refer back to the proof that same and different were among the five megista gene (254e2-255b6). But when he adds that he’s demonstrated that it’s parcelled out over all the things that are, we recognise our Stage 2, the analogy between knowledge and the different. Now comes the problematic part: the remainder of the sentence, which purports to remind Theaetetus what he had shown not being to be. Whichever textual reading we adopt, the upshot is effectively the same: the second formula says that not being is the part of (the different) set against each being’ or the part of (the different) set against the being of each.[각주:41] Even if we follow a translator such as White and understand the phrase as ‘each part of the different set against being’, the effect is the same: not being is identified with each and any part of the different set against a being.[각주:42] It is not identified with a single part, the one set against being. In other words, not being is explained as not being beautiful, or not being large, or not being just, or ….. and so on. The second formula [17] for not being clearly offers the generalizing account of not being.[각주:43] And since it is introduced as a restatement of what he already delivered (note ἀπεφηνάμεθα and ἀποδείξαντες in 258d8), we should try to make the two formulae cohere if possible. That is why I favoured the less obvious way of interpreting the first formula, as discussed above.[각주:44]
  그래서 '우리는 증명했다'로 시작하는 문장에서, ES는 not being의 형상이 무엇이라는 재진술을 제공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그가 다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아마도 같음과 다름이 다섯 가지 최고류들에 속한다는 증명에 대한 재언급일 것이다 (254e2-255b6). 하지만 그가 그 다름이 ~인 모든 것들에 걸쳐 나뉘어져 들어간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덧붙일 때, 우리는 우리의 두 번째 단계, 지식과 다름 사이의 유비를 재인한다. 이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등장한다: 그 문장의 남은 부분, 테아이테토스로 하여금 그가 not being이 그것이리라 보여주었던 것을 상기시킨다고 하는. 어떤 원문 독해를 우리가 사용하든, 그 결과는 실질적으로 동일하다: 두 번째 공식은 not being이 '각 being에 마주 놓인 (다름) 의 부분' 혹은 각각의 것의 being에 마주 놓인 (다름) 의 부분이라고 말한다. being에 마주 놓인 일련의 것, 그것은 단일한 부분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달리 말해서, not being은 아름답지 않은 것, 혹은 크지 않은 것, 정의롭지 않은 것 혹은 그러한 등등의 것으로 설명된다. Not being에 대한 두 번째 공식은 분명 not being에 대한 일반화 설명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설명이 그가 이미 내놓았던 것에 대한 재진술로 도입되기에 (258d8에서 ἀπεφηνάμεθα, '우리가 보여주었다.aor.'와  ἀποδείξαντες, '우리가 증명하였다.aor.'에 주의하라), 우리는 그 두 공식들이 가능하다면 일관되도록 만들고자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위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첫 번째 공식을 덜 분명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일을 지지하는 이유이다.

  Let us take stock of the upshot of this discussion. Is it a surprise to find the ES explaining the much trumpeted form of not being in this way: reducing it, in effect, to not F or not G or not H? For this is how - as I’ve just argued - the second formula for not being must be read.
  이 논의의 축적된 결과를 취해 보자. ES가 not being의 대대적으로 선언된 형상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는 것, 그 형상을 사실상 not F나 not G 혹은 not H로 환원(축소)시키는 방식으로 설명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놀랄 일인가? 이것이 - 내가 방금 주장했듯 - not being에 대한 두 번째 공식이 읽혀야만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Once again I appeal to the important insight due to Charles Kahn, who emphasized the centrality of predication in the Greek concept of being. Given that the core of being is being something, it is not so surprising to find Plato explaining not being as not being large, not being beautiful and so on. Indeed this was the very understanding of Stage 1 I argued for above. A careful reading of that stretch showed that what the ES was explicating was negative expressions in general, even though he introduced the point with the remark ὁπόταν τὸ μὴ ὂν λέγωμεν, whenever we speak of not being.
  다시 한 번 나는 찰스 칸에 기인하는 중요한 통찰에 호소한다, 그는 그리스어 being 개념에서 서술의 중심성을 강조했다. Being의 핵심이 어떤 것'임'이라고 전제한다면, 플라톤이 not being을 크지 않음, 아름답지 않음 등으로 설명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더욱이 이것은 내가 위에서 논증했던 첫 단계에 대한 바로 그 이해였다. 그 대목에 대한 신중한 독해는 ES가 해석하고 있던 것이 부정 표현들 일반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설령 그가 그 지점을 'ὁπόταν τὸ μὴ ὂν λέγωμεν,' 우리가 not being을 말하는 언제든 이라는 언급과 함께 도입시켰다 하더라도 말이다.
  Now, as we saw, Owen favoured a different interpretation both of Stage 1 above, and of the formula for not being, whereby not large and so on were analogues for not being (rather than, as on my view, examples of not being). But, as Owen himself implicitly recognized, the alleged analogy simply doesn’t work. Owen explained the analogy he discerned in Stage 1 as follows. The ES points out that not large needn’t mean the contrary small, since same-sized (or middling, as Owen prefers to translate ison), which is not the contrary, is available as the meaning of not large. This, according to Owen, allows us to recognize by analogy the following point: negating ‘is’ does not yield ‘is not in any way’ (the contrary of ‘is’) but ‘is not something’.[각주:45]
  이제, 우리가 보았듯, 오웬은 위에서 첫 단계에 대해서도 not being에 대한 공식에 대해서도 양자 모두에 상이한 해석을 지지했고, 그 해석으로써 크지 않음 같은 것들이 not being에 대한 유비들이었다 (내 관점에서는 차라리 not being의 예시들). 하지만, 오웬 자신이 암암리에 인정하였듯, 그 제기된 유비는 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웬은 그가 첫 단계에서 분간해냈던 그 유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ES는 크지 않음이 반대되는 작음을 의미할 필요가 없고, 그것은 같은 크기임 (혹은 중간, ison에 대한 번역으로 오웬이 선호하는 것처럼), 그 반대 아닌 것이, 크지 않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해낸다. 이것은, 오웬에 따르면, 우리로 하여금 유비를 통해 다음의 점을 인정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다'를 부정함은 '어떤 식으로도 ~이지 않다' ('~이다'의 반대)가 아니라 '어떤 것이지 않다'를 주장한다.
[18]
…not … /                    / contrary
not large / same-sized / small
is not / is not something / is not anything at all
  But as the table shows, and as Owen in effect accepts, there is a strong disanalogy between the two points he sees Plato making.[각주:46] For what is not large may be either same-sized or small; so in this case the contrary is possible, but is not required by the negative expression. But things are quite different with the negation of ‘is’. Owen takes Plato to be making the point that the contrary of being, viz ‘what is not in any way’ cannot be applied to anything.
  하지만 도표가 보여주듯, 그리고 오웬이 사실상 받아들이듯, 플라톤이 만든다고 그가 보는 두 지점들 사이에는 강력한 불일치가 존재한다. 크지 않은 것은 같은 크기이거나 작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고; 그래서 이 경우에서 반대는 가능하지만, 그것은 부정 표현에 의해 요청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물들은 '~이다'의 부정과 확연히 다르다. 오웬은 플라톤이 being의 반대, 즉 '어떤 식으로도 ~이지 않은 것'이 어떤 것에든 적용될 수는 없다는 지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간주한다.

Concluding remarks

결론

  That almost concludes my discussion of the dark stretch. I do not think I have shed much light on Stage 3, and I certainly am not convinced that ‘this carefully constructed doctrine of the Parts of Otherness’ represents one of Plato’s ‘major “analytic” achievements’, as Lee describes it.[각주:47] So I find it less surprising than Lee does that it is left ‘totally unused in Plato’s subsequent account of falsity’, though I agree in finding it strange that it is not even mentioned in the résumé.
  저것이 그 어두운 대목에 대한 내 논의의 거진 결론이다. 나는 내가 세 번째 단계에 대해 많은 조명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름의 부분들에 대한 이 주의깊게 구성된 원칙'이 플라톤의 '주요한 "분석적" 성취들" 중 하나를 대표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Lee가 묘사하듯이. 그래서 나는 그것이 '거짓에 대한 플라톤의 이후 설명에서 충분히 사용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다는 것에 대해 Lee보다는 덜 놀란다, 내가 그것이 요점정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데에 동의하더라도.
  The role of Stage 1, however, seems to me clear. Whether or not Plato intended it as the missing account of negative predication, or simply as an account of the meaning of negative expressions - and I do not think we need to choose between the two suggestions, for Stage 1-, he certainly introduced a key notion when he claimed that a negative term need not signify the contrary of F but ‘only different’. I have argued above that he gives a clear indication of his meaning here with the help of the example in A2 that invokes the trio large/small/ same-sized (though commentators have been reluctant to take the hint, for fear of saddling Plato with an incorrect account), and that we must understand him to appeal to the notion of something different chosen from a range of incompatible properties. Plato will make use of the same disputed term ‘different’, which he uses to paraphrase ‘not’ in his account of what it is for ‘Theaetetus flies’ to be false, and there too, as and I others have argued, [19] we understand his account best if we invoke the notion of something different chosen from a range of incompatible properties.[각주:48] There we are offered as a true statement ‘Theaetetus sits’ and we note the relation of flying to sitting, just as we noted the relation of equal to large: not any old different attribute, but a different one from an understood range. On this point at least, our dark stretch helps throw light on an important part still to come in Sophist, the justly admired discussion of false statement.[각주:49]
  그렇지만 첫 단계의 역할은 내가 보기에는 분명하다. 플라톤이 그 단계를 부정 서술에 대한 잃어버린 서술로, 혹은 단순히 부정 표현들의 의미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했든 그렇지 않든 - 또한 나는 우리가 그 두 제안들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 단계와 관련하여 -, 그는 부정적 용어가 F의 반대를 의미할 필요는 없고 '단지 다름만' 의미하면 된다고 주장했을 때 확실히 핵심 개념을 도입시켰다. 나는 위에서 그가 여기에서 큼/작음/같은 크기임을 언급하는 A2의 예시의 도움으로 (비록 주석가들은 그 암시를 받아들이길 주저하지만, 부정확한 설명을 플라톤이 짊어지게 만들까 하는 두려움에서) 그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분명한 암시를 준다는 것을 논증했고, 우리는 그가 양립불가능한 속성들의 범위로부터 선택된 어떤 다른 것이라는 개념에 호소한다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논증했다. 플라톤은 논의된 그 동일한 '다름'이라는 용어를 활용할 것이다, 그가 '테아이테토스가 난다'라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not'을 다른 말로 바꾸기 위해 사용하는 그 용어를,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였듯, 만일 우리가 양립 불가능한 속성들의 범위에서 선택된 어떤 다른 것이라는 개념을 든다면 그의 설명을 최선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테아이테토스는 앉는다'라는 것을 참인 진술로서 제공받고 우리가 큼에 대한 같음의 관계에 주목하였듯 바로 그렇게 앉음에 대한 난다는 것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 어떤 무작위로 다른 속성이 아니라, 합의된 범위에서 나온 다른 속성. 적어도 이 지점에서, 우리의 그 어두운 대목은 여전히 『소피스테스』에 들어서기 위해 중요한 부분에 빛을 밝히는 데에 도움을 준다, 마땅히 경탄받을 만한 거짓 진술에 대한 논의에 말이다.

-작성중-


  1. 1 Charles Kahn, The Verb ‘be’ in ancient Greek reprinted by Hackett (2003), x. The new introduction, from which the above quotation comes, is reprinted in the welcome volume Essays on Being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본문으로]
  2. 2 I list here and in the next two notes some of the major discussions. I have learned from them all, and from many others not mentioned. M.Frede, Prädikation und Existenzaussage (Göttingen, Hypomnemata xviii 1967). G.E.L.Owen, “Plato on Not-being” in G.Vlastos (ed), Plato: A collection of critical essays 1, (Garden City 1971) 223-267. Owen’s essay is reprinted in G. Fine (ed), Plato 1: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E.N.Lee, “Plato on Negation and Not-being in the Sophist”, Philosophical Review LXXXI.3 1972, 267-304. D.Bostock, “Plato on “Is Not” (Sophist 254-9)”, (Oxford: Oxford Studies in Ancient Philosophy 2, 1984), 89-119. M.Ferejohn, “Plato and Aristotle on Negative Predication and Semantic Fragmentation”, Archiv für Geschichte der Philosophie 71, (1989), 257-82. M.Frede, “Plato’s Sophist on False Statements” in R.Kraut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Plato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397-424. [본문으로]
  3. 3 J. van Eck “Falsity without Negative Predication: On Sophistes 255e-263d”, Phronesis, 40 (1995), 20-47 exposes the drawbacks of this approach. J. van Eck가 이러한 접근의 결점들을 노출시킨다. [본문으로]
  4. 4 J. Kostman, “False Logos and Not-Being in Plato’s Sophist” in J.M.E.Moravcsik (ed), Patterns in Plato’s Thought (Dordrecht, Holland:Reidel 1973) already made such objections to Owen’s argumentation. 이미 오웬의 논증에 대한 그러한 반론들이 위 책에서 구성되었다. [본문으로]
  5. 5 In L.Brown, “The Sophist on Statements, Predication and Falsehood”, in G.Fine (ed) The Oxford Handbook of Plato,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437-462, I discuss the Communion of Kinds stretch at 444-451. Agreeing with Kahn, The Verb ‘be’, 372, 400, I find no grounds for saying that an ‘is’ of identity is marked off, either in that passage or elsewhere in Plato or Aristotle. I prefer instead to see Plato noting a distinction between kinds of statement (predicative versus identifying statements). In this essay I argue at greater length for the interpretation of 257a-c adumbrated in that paper at 456-7. 나는 444-451에서 유들의 결합 대목을 논의한다. 칸의 책 372, 400에 동의하면서, 나는 저 구절에서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어떤 곳에서든 동일성의 'is'가 규정되어 나온다고 말할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한다. 나는 대신에 플라톤이 진술의 종류들(서술적 진술들 vs 동일화 진술들) 사이에서의 구분을 주목한다고 보는 쪽을 선호한다. 이 논문에서 나는 상당한 분량으로 257a-c의 해석을 논증한다. 이는 해당 논문 456-7에서 개괄되었다. [본문으로]
  6. 6 cf. 255e4. [본문으로]
  7. 7 cf. 256d11-e1. [본문으로]
  8. 8 cf. 257a1-5. [본문으로]
  9. 9 cf. 257a4. [본문으로]
  10. 10 Frede, “False Statement”, 211; others including Lee, “Negation”, 299n53, note this enigma. 프레데와 Lee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이 수수께끼에 주목한다. [본문으로]
  11. I am in considerable agreement here with Kostman’s valuable article, ‘False Logos’, section IV, though I do not agree with him that we have to translate heteron as incompatible. 코츠만의 논문 4장에 동의하지만 우리가 heteron을 양립불가능성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12. Compare the following imaginary dialogue: ‘When we say mighty something, we don’t mean strong we mean to intensify.’ ‘How so?’ ‘For instance, when we say ‘mighty rich’, we mean very rich, not strong and rich.’ I take A1 in a similar way, i.e. roughly as: when we say ‘not something’…. 다음의 가상 대화와 비교해 보라. '우리가 강력한 뭔가를 말하 때, 우리는 물리적 강함이 아닌 정도의 심화를 의미합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가 '강력한 부'라고 말할 때, 우리는 대단한 부를 의미하고, 힘이 센 것과 부유함을 뜻하진 않습니다.' 나는 A1을 그 유사한 방식으로, 거칠게 말해서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 우리가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본문으로]
  13. In support of the translation ‘for instance’ note that in all the following places οἷον ὅταν is used to introduce an illustration of a general claim: Phaedo 70e6, Cratylus 394d6, Cratylus 424e2, Republic 462c10. '예를 들어'라는 번역을 지지함에 있어서 οἷον ὅταν이 일반적 주장에 대한 묘사를 도입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점을 주목하라. 『파이돈』 70e6, 『크라튈로스』 394d6, 424e2, 『국가/정체』 462c10. [본문으로]
  14. Note that at 257b8 ‘not large’ is called a rhema, while at 257c1 the ES refers to the words (onomata) which follow the negative. This is keeping with Plato’s standard usage (prior to the Sophist) of onoma for single word, rhema for phrase. In 261d ff he will announce, with considerable fanfare, a new usage for the two terms. 257b8에서 '크지 않음'이 rhema로 불리는 반면, 257c1에서 ES는 부정에 뒤따르는 것으로 단어들(onomata)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것은 단일 단어에 대해 onoma를, 구에 대해 rhema를 사용하는 (『소피스테스』에 앞선) 플라톤의 표준적인 용법에 따르고 있다. 261d 이하에서 그는 대대적인 축하와 더불어 그 두 가지 용어들에 대한 새로운 용법을 발표할 것이다. [본문으로]
  15. I am making two assumptions: a) that Plato does not intend to distinguish between what we mean (A1, A2) and what an expression means and b) that he intends the three verbs to be roughly, if not exactly, equivalent: A1 λέγομεν, A2 δηλοῦν and A3 μηνύει. We can explain the weaker μηνύει by the vagueness of the claim that ‘not F’ means ‘one of the others’. See M.Dixsaut, “La Négation, Le non-Etre et L’Autre dans le Sophiste”, in Etudes sur le Sophiste de Platon (Paris: Bibliopolis 1991), 195. I do not agree with J.McDowell, “Falsehood and not-being in Plato’s Sophist”, in edd. M.Schofield and M.Nussbaum Language and Logo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ch 6, 119 that Plato is not making a semantic point in A3. 나는 두 가지 가정들을 구성하고 있다: a) 플라톤은 우리가 의미하는 바 (A1, A2)와 표현이 의미하는 바 사이의 구별을 의도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b) 세 동사들, 즉 A1 λέγομεν, A2 δηλοῦν 그리고 A3 μηνύει를 설령 정확하진 않더라도 거칠게 말해서 등가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약한 의미의 μηνύει를 'not F'가 '그 외의 것들 중 하나'를 의미할 수 있다는 주장의 막연함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나는 플라톤이 A3에서 의미론적 관점을 구성하고 있지 않다는 멕도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16. Phaedo 75c9 and Republic 602e4-5 both cite the trio using comparatives: larger than/equal to/smaller than. Parmenides 167c has the trio largeness/smallness/equality. See D.Sedley “Equal Sticks and Stones” ch 4 of D.Scott (ed) Maieusi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70. I choose the translation ‘same-sized’, given the connection with large and small, though ‘equal’ is also a possible translation. Owen’s translation ‘middling’ is adopted by many, but is unwarranted. 『파이돈』 75c9와 『국가/정체』 602e4-5 양자 모두 비교급으로 사용하는 세 가지 것을 언급한다: 더 큼/같음/더 작음. 『파르메니데스』 167c는 큼/작음/같음의 세 항을 가진다. 나는 '같은 크기임'이라는 번역을 선택했다, 큼과 작음에 연결을 고려하여, '같음' 또한 가능한 번역이라 하더라도. 오웬의 번역인 '중간'이 많은 이들에 의해 채택되지만, 부적절하다. [본문으로]
  17. See previous note, and, for large and larger than as equivalent, see Phaedo 100e5. [본문으로]
  18. cf Sedley, n16, ‘Equal Sticks’ 69-72. [본문으로]
  19. Brown, n5, “The Sophist on Statements”, 457. [본문으로]
  20. I pass over the question of how exactly to construe the positive thesis about the meaning of not large. The issue is, in part, whether one takes ‘one of the others’ de re or de dicto. 나는 크지 않음이라는 의미에 대한 긍정 명제를 정확히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지나쳤다. 그 문제는, 부분적으로, '그 외의 것들 중 하나'를 de re로 취하는지 아니면 de dicto로 취하는지의 문제이다. [본문으로]
  21. Ferejohn, “Semantic Fragmentation” 262ff. [본문으로]
  22. Brown, n 5 “The Sophist on Statements”, 458, notes that the incompatibility range account of negation and falsehood was supported by Mabbott and Ryle in an Aristotelian Society Symposium in 1929, and effectively criticised by H.H.Price. [본문으로]
  23. Frede, Prädikation, 78, and “False Statements”, 408-9, offers this interpretation but does not show how he derives it from A3. Bostock, “Is not”, 115 admits it is a strained reading of A3 but tries to justify it, cf. next note. 프레데는 A3으로부터 그것을 어떻게 도출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보스톡은 그 독해가 억지스럽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한다. [본문으로]
  24. Bostock, “Is not”, 115 notes the expression “the things which the words following the ‘not’ stand for” πραγμάτα περὶ ἅττ᾿ ἂν κέηται τὰ ὀνόματα and suggests that here Plato is talking not about forms (as the things the words apply to) but about instances of forms, the terms being assigned what Bostock calls their generalizing role. But this does not fit with the full version of what the ES says, for he begins by saying that ‘not’ indicates ‘one of the others than the words’ and then corrects himself - ‘or rather, than the things etc. That slip could hardly have occurred if the ES was all along thinking not of forms but their instances. 보스톡은 "'not'을 뒤따르는 단어들이 나타내는 것(사물)들"이라는 표현 πραγμάτα περὶ ἅττ᾿ ἂν κέηται τὰ ὀνόματα(단어들이 그것들에 관하여 놓이는 사태들)에 주목하고 여기에서 플라톤이 형상들 (단어들이 적용되는 것들로서) 이 아니라 형상들의 예화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제안한다, 보스톡이 그것들의 일반화하는 역할이라 부르는 것을 배정받은 용어들로서. 하지만 이것은 ES가 말한 것 전체에 부합하지 않는데, 그는 'not'이 '그 단어들과는 다른 단어들 중 하나'를 가리킨다고 말함으로써 시작하고 그 스스로 정정하기 때문이다 - '차라리, 사물들... 과 다른'이라고. 저 실수는 만일 ES가 내내 형상들이 아니라 그 예화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면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본문으로]
  25. Frede, Prädikation, 86-9; Bostock, “Is not”, 115-7 [본문으로]
  26. Frede, Prädikation, 88 cites Phaedrus 248c, 251b; Republic 429c for ‘the nature of F’ meaning simply ‘the Fs’. [본문으로]
  27. Bostock, “Is not”, 116. [본문으로]
  28. The clearest cases are Theaetetus 187e5, Symposium 177a5, Republic 393b7. It is striking how frequently Plato combines ἑκάστοτε with verbs of saying, often - it seems- as a sort of catchphrase. I have noted over twenty occurrences. See also Sophist 237d6. 그 가장 분명한 사례들은 『테아이테토스』 187e5, 『향연』 177a5, 『국가/정체』 393b7이다. 플라톤이 ἑκάστοτε를 발화동사와 얼마나 빈번히, 종종 보이기로는 일종의 구호로서, 결합시키는지는 결정적이다. 나는 스무 번의 출현들에 대해 주목했다. 『소피스테스』 237d6 또한 보라. [본문으로]
  29. As van Eck, “Falsity without”, 32, argues persuasively, while keeping the traditional translation of ἑκάστοτε. [본문으로]
  30. 257c. A further parallel is missed in English: knowledge of… and different from… are both expressed by the genitive case in Greek. [본문으로]
  31. 257b9-10 not beautiful ‘is no less than’ beautiful. 258a1-2 ὁμοίως ἄρα τὸ μὴ μέγα καὶ τὸ μέγα αὐτὸ εἶναι λεκτέον; 258b9-c4 indicates that these are regarded as forms. 257b9-10 아름답지 않음'은' 아름다'에 전혀 못지 않게'. 258a1-2 ὁμοίως ἄρα τὸ μὴ μέγα καὶ τὸ μέγα αὐτὸ εἶναι λεκτέον;(혹시 같은 방식으로 크지 않은 것도 큰 것 자체도 ~이다라고 논해져야만 하는가?) 258b9-c4는 이러한 것들이 형상들로 간주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32. Metaphysics 990b13-14, 1079a9-10. The issue is a complex one; see Frede, Prädikation, 92 and G.Fine, On Idea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113-6 with notes. I agree with Frede, against Fine, that this passage does assert the existence of negative forms/forms of negations. 나는 이 구절이 부정적 형상들/부정들의 형상들의 현존을 단언한다는 점에서 프레데에 동의하고 파인에 반대한다. [본문으로]
  33. Ferejohn, “Semantic Fragmentation”, 279 argues for this line, putting a lot of weight on the term antithesis. See also M-L Gill at . Contra, many scholars including Lee, “Plato on Negation”, 292 and 296, Dixsaut, “La Négation”, n 15, 188. [본문으로]
  34. Owen, “Not-Being”, 232-241, esp 239 [본문으로]
  35. Defended by, among others, Frede, Prädikation, 91-2, and J. van Eck, “Not being and difference: on Plato’s Sophist 256d5-258e3”, Oxford Studies in Ancient Philosophy 2002, 68-83, at 73ff. [본문으로]
  36. With the OCT, I accept the additions by Boeckh in 258c1-2. Those who prefer not to add them to the text must supply them mentally. [본문으로]
  37. Lee, “Negation”, 282-3, lists various interpretations with their adherents. He argues against supplying to yield either part of being, or part of the nature of being, protesting - strongly but not decisively - that we have not been introduced to the notion of a part of being. Frede, Prädikation, 91-2 defends supplying , to make the first formula cohere with the second. 리는 다양한 해석들과 그 지지자들을 나열한다. 그는 를 보충하는 데에 반대하여 part of being 또는 part of the nature of being을 주장한다, 강경하지만 결정적이지는 못한 방식으로, 우리가 a part of being이라는 생각을 도입시키지 않았다고 항의하면서. 프레데는 을 보충하는 일을 옹호한다, 첫 공식을 두 번째 공식에 일치시키기 위해. [본문으로]
  38. ἑκάστου mss and Simplicius; ἕκαστον Simplicius. [본문으로]
  39. cf. 257c7. [본문으로]
  40. cf. 258b1. [본문으로]
  41. We find both forms in Simplicius, cf.n38. [본문으로]
  42. To see that both interpretations yield a reading whereby not being is understood as any part of the different, not just one part, compare the following phrases: 1) each threshold set against a door, and 2) the threshold set against each door. In both case the phrase generalises over thresholds set against doors; in neither case does it pick just one threshold. 두 해석 모두 not being이 다름의 단적으로 한 부분이 아니라 어떤 부분으로 이해되는 독해를 주장한다는 점을 보기 위해, 다음 구들을 비교해 보라. 1) 각 문지방은 문에 마주 놓인다, 그리고 2) 그 문지방은 각 문에 마주 놓인다. 두 경우 모두에서 그 구절은 문들에 마주 놓인 문지방들을 일반화한다; 어느 경우에서도 단 하나의 문지방을 특정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43. See Frede, Prädikation, 91-2. Even Owen, “Not Being”, 239-240 n33 gives this generalizing interpretation of the second formula, despite his taking the opposing view both of Stage 1 and of the first formula. 프레데 그리고 오웬까지도 두 번째 공식에 대한 이러한 일반화 해석을 내놓는다, 첫 단계와 첫 번째 공식 모두에 대해 그가 취하는 반대되는 관점에도 불구하고. [본문으로]
  44. Lee, “Plato on Negation”, 282 n 21, has a different way of reconciling the two formulae. He insists, plausibly, that the first formula discusses ‘Being Itself’ but suggests that between the first and second formula Theaetetus’ incorrect way of understanding that notion is corrected by the ES. 리는 두 공식들을 조화시키는 다른 방식을 가진다. 그는 설득력 있게 첫 번째 공식이 'being 자체'를 논의한다고 주장하지만 첫 공식과 두 번째 공식 사이에서 그 개념에 대한 테아이테토스의 부정확한 이해방식이 ES에 의해 교정된다고 제안한다. [본문으로]
  45. Owen, “Not-Being”, 234 “…just as…calling a thing not white does not relegate it to the other extreme black, so ..saying that it ‘not is’ does not relegate it to the other extreme from being”. 오웬은 "한 사물(것)을 희지 않은 것으로 부르는 일이 그것을 극단적으로 검은 다른 것으로 격하시키지 않는 것처럼, 바로 그렇게 그것이 'not is'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being으로부터 극단적으로 다른 것으로 격하시키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46. Owen, “Not-Being”, 234: “The conclusion he is leading us to is that in one case this latter option is not open. With the verb “to be” the negative construction not only does not mean the contrary (which is what the analogy is designed to show) but cannot even be applied to anything in the contrary state.” Kostman, “False Logos”, 203, points out the disanalogy. 오웬은 "그가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결론은 한 경우에서 <즉 'is'의 부정에 대한 경우에서> 이 후자의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to be"라는 동사를 가진 부정적 구문구조는 반대를 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그 유비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그것) 반대 상태 내의 어떤 것에도 적용될 수조차 없다"고 말한다. 코츠만도 그 불일치를 지적한다. [본문으로]
  47. Lee, “Negation”, 299 n53. [본문으로]
  48. Brown, “The Sophist on Statements”, 456n52 cites Ferejohn “Semantic Fragmentation” n9 for a list of earlier advocates of this view, and adds M-L.Gill, see n 33, and J.Szaif, Platon’s Begriff der Wahrheit (Munich, Verlag Karl Alber, 1998) 487-99. [본문으로]
  49. I am very grateful to all who made helpful comments on an earlier version of this paper, both in the workshop for ancient philosophy in Oxford, and at the Delphi conference in June 2009. Especial thanks are due to Charles Kahn. [본문으로]

1. 매번 이런 식이었다. '이런 식'이란 게 나쁘다거나 뭐 그런 얘기는 아니고, 나는 세 차례에 걸쳐 논문 주제를 줄여야 했고, 그렇게까지 해서도 여전히 내 문제의식이 무엇이고 그게 왜 문제시되어야 하는지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으며, 그 과정에서 내 입장과 상충하는 입장들 혹은 나를 지지하는 입장들이라 내가 늘어놓은 사람들을 정말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받았다. 내 자료조사나 그 분석의 능력을 검증받기 위해 우선 국내논문 한 편을 요약, 정리하여 지도교수님께 검토를 받았고, 된통 깨졌다. 이전에 썼듯 나는 이른 바 '자비의 원리'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고, 바로 그런 이유로 자료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었을 그리고 또한 얻어내야만 했던 정보들을 놓치고 있었다. 우습게도 내가 내 주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바로 그런 경계해야만 할 태도를 내 스스로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10년 가까이 비슷한 가르침을 받아 오면서도 말이다. 첫 장을 넘겨서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 책에 대해 말하지 말라.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적을 친구가 될 만큼 굳고 강하게 되세우고 바로잡아 정면에서 마주하라.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를, 헤라클레이토스를, 파르메니데스를 대하는 방식들을 생각해 보라. 분석하고 재구성하고 평가하라.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원칙을 깨뜨리면서, 심지어 그 원칙을 강조하기까지 하며 그딴 짓을 하는 건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여전히 발전이 없다. 그렇게 깨지고 까이고 걷어 차이면서 또 한 주를 같은 논문을 반복해서 읽고 분석하고 정리하며 보냈다. 다시 찾아 뵙고서 다시 검토를 받고, 크게 다르지 않은 지적들을 훨씬 호의적이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듣고 나서, 이제 또 다른 논문을 붙들고 있다. 학부 졸업할 때, 대학원 입학할 때, 기말 보고서를 제출하고 성적을 받을 때마다 느꼈던 기분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살아남았다. 한 단계, 한 고비를 넘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나는 나아지길 바라고 또한 나아가길 바라는데 실상은 그저 같은 자리에 멈추어 서서는 떠밀리고 내쫓기고 버려질 위험들을 가까스로 넘겨가며 그냥 그 자리를 지켜내는 게 고작이다. 어쩌면 방학부터 안티폰 강독이 진행될지도 모르겠다. 또 그 즈음 혹은 내년 봄학기부터 『파르메니데스』 윤독을 청강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서울대에서는 류혁 선생님께서, 서강대에서는 전헌상 선생님께서 각기 『테아이테토스』 강독모임을 꾸려 진행 중이라 하시고, 그 사이에 정준영 선생님께서 그 대화편의 번역을 내놓으셨다. 여전히 금요일마다 오전에는 『파이드로스』 강독을 하고, 이번 주부터 월요일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이 시작되었다. 후배 한 녀석이 학부 졸업논문으로 『소피스테스』 분할부분을 정리해서 낼 계획이라더라. 다른 한 녀석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쓸 듯하고.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할 일들이 중첩되고 쌓여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기쁜 일이다. 다만 이것저것 붙잡지 못하고 놓치고 마는 것은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내 무능과 나태와 비겁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어려움과 그 크기와 그 간극 사이에서 비틀거리다 죽도 밥도 안된 채 끝날 내 인생 같은 것을 멍하니 곱씹다가 결국 다시 발등에 떨어진 불로 되돌아 온다. Brown은 착한 할머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2. 튀빙겐 학파가 대표라 할 소위 'Unwritten Doctrines(or 'unwritten teachings,' ἄγραφα δόγματα)'를 내세우는 플라톤 해석의 흐름이 있다. 뭐 그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비의 같은 것이야 관심사는 아니고, 그 안에 어떤 독자적이고 기발한 발상이 있어서 그걸 내세우고 싶다면 그들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일지, 그런 게 좀 흥미롭게 여겨진다. 대화편들은 플라톤의 정수도 아니고 그 진면목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엎어치나 메치나 매한가지로 그 대화편들은 결국 플라톤이 쓴 글들일 수밖에 없다. 그 외에 초기, 중기, 후기 플라톤주의자들이나 아카데미아의 일원들, 아리스토텔레스가 될 수도 있고 스페우시포스가 될 수도 있고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대화편에서 발견되지 않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조금씩 언급하고 있다. 이런 것들 말고 우리에게 전해져 남은 것도 없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료들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기존의 해석보다 더 나은 점, 더 유익한 지점을, 더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어야 하다. 그것 말고는 '플라톤'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논쟁의 영역에서 그들의 역할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물론 그 경계를 넘어 철학 일반, 세계에 대한 깨달음, 뭐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일이야 말릴 수도 없고 말릴 이유도 없겠지만 그들의 '쓰여지지 않은 가르침들'은 결국 플라톤의 가르침들일 따름이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주장이 아니라는 거다. 문제가 왜 문제인지 설득하지 못하다면, 그리고 내세우는 주장이 그 문제의 범위 내에서 가운데를, 핵심을, 혹은 주요한 마디들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명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저 말을 위한 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규칙을 부정하고 판을 깨는 자들에게 아마도 이것이 탁상공론이고 고리타분한 상아탑의 현학놀음이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새 판을 짜는 자들 중 여전히 유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란 결국 이전의 판을 합의 하에 배제시킨 자들 또는 이전까지의 모든 규칙들을 섭렵한 자들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리광부리고 투정부린다고 그것이 자유이고 창조인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3. 결국 쓴다거나 말한다거나 하는 그러한 일들은 다른 누군가를 향한 일일 수밖에 없지 않나. 지금 이 지랄도 개소리를 쳐발라 놓는 것도 그게 혼잣말이라 해서 아무 상대도 없는 게 아니라,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영혼이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이지 않겠나. 독자가 나든 나 아닌 다른 누구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나. 그리고 주둥이와 손가락으로 깔짝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제 아무리 과격하고 급진적이라 하더라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결국 드러나고 확립되어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 실제로 현실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가 되어 빼도박도 못하게 자리잡는 것은 실천이고, 움직임이고, 삶이다. 지껄임을 통한, 끄적임을 통한 실천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난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러한 좋게 말하자면 설득, 나쁘게 말하자면 선동, 그건 그에 따라 동의하고 실제로 행동하는 자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실천의 몫을 나누어 받는 것뿐이다. 아무리 멋진 글과 대단한 연설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더라도, 그 자신은 여전히 어딘가 현실로부터 괴리된 구석배기에 쳐박혀서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딸딸이에 몰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글과 말은 그 사람의 사람됨을, 그의 삶을 대표하지도 그것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글과 말과 생각으로 삶을 바라보고 무언가 알아내어 거기에 준거하여 실로 살아내려는 자들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짐지울 뿐, 변명도 핑계도 실상 아무런 현실적 능력은 없는 것 아닐까. 내 스스로 실천을 철학으로 갈음하겠노라 어줍잖은 변명질을 하며 살아가는 비겁자, 변절자, 그런 쓰레기에 불과하여 또 거기에 덧붙이는 변명으로 이 비슷한 꼴을 한 모든 삶들이 죄다 뭉뚱그려 씨발, 좆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있으나, 혹시 모를 일이다. 누군가는 글로써 살아내고 말로써 움직이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언행이 일치하고 합일하는 그러한 삶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그저, 내가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뿐인지도 모를 일이다.

-蟲-

  그나마 최근에는 내 실상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있는 듯해서 속이 편하다. 그러니까 개쓰레기 폐급 취급을 받는다, 뭐 그런 말이지. 읽을 줄도 쓸 줄도 생각할 줄도 모르는 새끼가 기어이 어깃장을 놓아 그래도 철학이란 걸 해보겠노라고 바닥을 기고 있는 꼴이 사람들 보기에도 참으로 우습겠구나 싶기도 하고. 나가서 목 매달고 뒈져라, 은혜도 모르는 새끼, 거렁뱅이 새끼, 뭐 집에서 그런 소리 들어가면서 여기까지 왔고 밖에서도 딱히 내게서 밝은 전망을 감지하신 분들을 뵌 것 같지도 않다. 종종, 그냥 악착같이 구는 꼴이 가엾고 안쓰러워 동정과 연민이 가득한 따뜻한 말 몇 마디를 듣거나 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본래 성격상 칭찬보다 욕이 더 잘 들리고 또 그나마 더 알아먹겠는 비뚤어진 인간인지라 관두라든지 니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든지 뭐 그런 소리들이 익숙하기도 하고. 그래도 끈덕지게 버텨 온 것 같기는 한데, 정말로 빼도 박도 못하게 내쫓기면, 혹은 모든 가능성이 차단당하면 어찌 해야 할까나, 최근들어 종종 그런 막막함을 느끼곤 한다. 어쨌든 나 좋은 짓을 나 좋을대로 하고 있다는 게 너무 좋고 도무지 놓을 수가 없어서, 무섭기도 하다. 막상 또 다 망해 버려도 어떻게든 살아지기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긴 하지만서도. 꼴 같잖은 절박함 뭐 그런 것이 있어서, 그래서 악다구니를 쓰고 지랄을 해대며 그런 건 철학이 아니라느니 저 따위가 철학자면 철학 따위 다 불살라 버리라느니 험악한 욕지기를 천지사방 싸제끼고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모르겠긴, 개뿔. 그거다. 인문장사치들, 철학협잡꾼들, 도사들과 그들 저마다의 개똥철학에서 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정당방위다, 씨벌놈들아. 물론 주먹질도 못해 보고 망할 빌어먹을 쭈구리 학문의 시다바리 호로 잡놈의 인생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만, 혹시나 볕 볼 날이 오면은 느그들 다 뒈졌어, 써글. ...아, 쪽팔린다. 선생님들께서 떠먹여 주시는 공부도 못 받아 먹고 욕이나 쳐먹고 다니는 주제에 무슨. '나가 뒈져라' 소리 들으며 쫓겨날까 심장이 쫄깃쫄깃한 나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만나러 가자.

-蟲-

전헌상, 「『소피스트』에서 있지 않음과 거짓 진술」 정리


1. 내용정리

국문초록 정리

  이 글은 『소피스트』 252c-263d에 관련하여 두 가지 논점을 다룬다. 우선 252c-257a에서 최고류들의 결합 논의로부터 to me on의 있음이 보여지는 방식을 검토한다. 이 부분에서 'einai'의 다양한 용법을 구분하여 어떤 것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이 벌어져 왔는데, 그 중 한 해석은 252c-257a에서 'einai' 동사의 소위 완전용법이 전제되고 있지 않으며, 문제 되는 것은 불완전용법뿐이라고 한다. 그 근거는 256d11-e4에서 256e6-7로의 전이가 불완전용법을 일관되게 사용한다는 전제하에서만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 글은 이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적 설명을 제시하여, 문제의 전이가 완전용법으로부터 불완전용법으로의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인다. 두 번째로 252c-257a에서 확립된 있지 않은 것의 있음이 어떻게 거짓 진술 분석에 적용되는지 검토한다. 플라톤은 252c-257a에서 사용된 있지 않음을 있는 것과 다름으로 분석하는 전략이 거짓 진술 분석에 직접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포착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파르메니데스 극복과 거짓 진술 분석의 두 과제를 한 분석틀로 공략하려던 플라톤의 기획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는 236b9<263b9의 오기(誤記).>의 거짓 진술 규정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많은 논란의 근원이다.


들어가는 글

  이 글은 최고류들의 결합이 논의되는 252c부터 거짓 진술 가능성이 확립되는 263d까지의 논의전개에서 핵심 주제인, to me on의 있음이 최고류들의 결합이 최고류들의 결합을 통해 분석되는 방식, 그 분석결과가 거짓 진술 분석에 활용되는 방식을 검토한다. 이 검토의 목표는 두 가지이다. 최고류들의 결합 논의를 통해 있지 않은 것의 본성이 규명되는 과정에서 'einai' 동사의 완전/불완전용법의 역할에 관한 논란 중, 그 과정에서 'einai'의 완전용법이 역할이 없으며, 불완전용법의 'einai'가 전제된다는 해석이 있다. 우선 이에 대해 완전용법으로부터 확장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헌에 더 충실한 해석임을 보이고, 그 확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안한다. 둘째, 최고류들의 결합을 통해 밝혀진 있지 않은 것의 본성은 거짓 진술 분석에 적용될 때 문제를 일으키고,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독해의 방안들이 제안되어 왔다. 이 글은 이 문제가 핵심적인 지점에 대한 플라톤의 불명확함에 기인한다는 것이라 주장하며, 그 불명확함이 어떤 지점에서 발생하며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하나의 설명을 제안한다.


1. 소피스트의 규정과 있지 않은 것(to me on)의 문제

  엘레아의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소피스트의 본성을 규명하기 정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소피스트가 말로 된 모상(eidola legomena)을 만들어, 듣는 이들을 현혹시키는 자로 규정한다(233c).<그러나 233c에서는 '말로 된 모상'이 언급되지 않는다. 234c5-6에 대한 오기로 추정된다.> 이 규정에서 서로 연결된 두 가지 난점이 발생한다. 첫째, 모상은 진짜인 것과 다른 그것과 닮은 것으로서, 진짜인 것이 정말로 -인 것인 반면 모상은 정말로 -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모상은 정말로 모상인 것이라는 점에서 정말로 -인 것이기도 하다. 이 기묘한 섞임이 문제가 된다. 둘째, 소피스트의 기술은 이러한 모상을 만들어 속이는 일종의 속임술이다. 이 기술을 통해 우리는 거짓 믿음을 가지게 된다. 거짓 믿음은 있는 것들과 반대되는 것들을 믿음으로써 생겨나며, 따라서 거짓 믿음은 있지 않은 것들을 믿는 것이다. 또한 거짓 믿음은 전적으로 있지 않은 것들을 어떤 식으로 있다고, 전적으로 있는 것들은 어떤 점에서도 있지 않다고 믿는 것이다. 진술은 이러한 규정에서 '믿음'을 '진술'로 대체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거짓/진술 믿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 대상인 있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대상이 없다면 그러한 진술/믿음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있지 않은 것은 사유될 수도, 말할 수도, 언표될 수도 없고, 말이 안 되는 것이라 동의되었다. 때문에 거짓 진술/믿음 자체가 자기모순적이고 성립불가능한 것이며, 이에 대한 생산자로 소피스트를 규정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소피스트의 기술을 속임술로 규정하기 위해 거짓 진술/믿음을 성립 가능한 것으로 규정해야 하고, 이를 위해 그 대상이 되는 '있지 않은 것'이 있다고 규정해야 하며, 이를 위해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을 비판해야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어떤 점에서 있다는 것, 있는 것이 어떤 식으로 있지 않다는 것을 결론으로 강제해야 한다. 이는 최고류들의 결합 논의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있지 않은 것의 있음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다.


2. 최고류들의 결합과 있지 않은 것

2-1. '그 자체로'와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9-12쪽)

  편의상 운동, 정지, 있는 것, 같은 것, 다른 것을 M(Motion), R(Rest), E(Existence), S(Sameness), D(Difference)로 약칭한다. M과 R은 서로 섞일 수 없기에 둘이다. M과 R 둘 모두에 섞이는 E는 그 둘이 서로 섞일 수 없기에 세 번째 것이다. 이제 이 세 유들 각각이 자기 자신과는 '같고(S)' 나머지 둘과는 '다르다(D)'. S와 D는 모두 M과 R에 공히 속하기에, 그 둘 중 하나일 경우 다른 하나를 본성의 반대쪽으로 강제할 것이므로 S와 D가 M과 R로부터 구분된다. 다음으로 S가 E와 동일시된다면 M과 R이 모두 있다고 옳게 말하면서 그 둘이 같다고 불합리하게 말하게 되므로, S는 E와 다르다. 따라서 S는 네 번째 유이다. D와 E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있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어떤 것들은 항상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 말해진다.(255c14-15.)" 라는 진술이 등장한다. D는 항상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만 말해지는 반면 E는 두 형상 모두에 몫을 나누어 가지므로 D는 다섯 번째 유이다.

  <1> "있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어떤 것들은 항상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 말해진다.(255c14-15.)"

  <1>에서 제시되는 구분은 있음과 있지 않음의 의미에 관련되므로 그 해석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해석을 위해 구문론적 구분과 의미론적 구분이 전제된다. 이에 따르면 E의 경우 주어만을 취하는 X esti의 경우에는 구문론적으로 complete use, 보어까지 취하는 X esti Y의 경우에는 incomplete use라는 구분이 이루어지며 이는 각기 의미론적으로 전자가 존재를 나타내고, 후자는 다시 동일성의 의미와 서술의 의미로 구분된다. 이를 전제로 크게 세 가지 입장이 제시된다.

  1) '그 자체로'는 complete use를,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는 in-를 의미하며, E는 두 용법 모두를 지니고 의미론 상에서 각기 존재와 동일성으로 구분된다. D는 (구문론적으로) 후자의 용법만을 지닌다.
  2) 두 구분 모두 구문론적으로 in-을 의미하며, 의미론적으로 E의 경우 전자가 동일성, 후자가 서술로 나뉘고 그 각각이 순서대로 E의 '그 자체로' 쓰인 경우와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쓰인 경우에 해당한다. D는 (구문론적으로나 의미로적으로나) 후자의 용법만을 지닌다.
  3) 구문론상으로 '2)'의 구분과 같으나, E의 경우 서술관계에 따라 주어와 보어가 경우에도 '그 자체로'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희다"의 경우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흼으로써(by being white)가 아니라 그 성질을 가짐으로써(by having this feature) '다른 것과 관련하여,' 다른 어떤 것에 참여함으로써, 즉 색(color)과 관련하여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희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그 색이 희고 색이라고 말할 때, 그 색은 이런 성질을 가짐으로써 그 성질에 참여함으로써 희고 색인 것이 아니라, 그것임으로써, 그 자체로 희고 색이다. D의 경우 그 색은 핑크색과 다르다. 그러나 그 색이 핑크색이지 다른 것임으로써 그 자체로 핑크색과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인 다름과 관련하여 다름이라는 성질을 지니고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핑크색과 다르다.


2-2. 상이한 유들의 다양한 결합.(12-14쪽)

  다섯 유는 상이하며 서로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결합한다. 유들이 서로 다른 것이면서도 상호 결합한다는 사실로부터 me on이 on일 수 있는 가능성이 확보되기에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엘레아의 손님은 255e11-256d10에 걸쳐 M이 그 외의 네 유와 가지는 관계를 검토한다.

   1. 운동과 정지(255e11-256a2)
  1.1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
  1.2 따라서 운동은 정지가 아니다.
  1.3 운동은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1.4 따라서 운동은 있다.
 
   2. 256a3-9
  2.1 운동은 같은 것과 다르다.
  2.2 따라서 운동은 같은 것이 아니다.
  2.3 운동은 같은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2.4 따라서 운동은 같은 것이다.

   3. 운동과 다른 것(256c3-d4)
  3.1 운동은 다른 것과 다르다.
  3.2 따라서 운동은 다른 것이 아니다.
  3.3 운동은 다른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3.4 따라서 운동은 다른 것이다.

   4. 운동과 있는 것(256d5-10)
  3.1 운동은 있는 것과 다르다.
  3.2 따라서 운동은 있는 것이 아니다.
  3.3 운동은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3.4 따라서 운동은 있는 것이다.

  2-4를 통해 엘레아의 손님이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은 외견상 모순적으로 보이는 언명들이 동시에 참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주된 관심사는 2.2와 2.4, 3.2와 3.4, 4.2와 4.4의 쌍이 된다.


2-3. 'einai의 (의미론적)애매성'과 '뒤따르는 단어들의 애매성'.(14-16쪽)

  2.2와 2.4, 3.2와 3.4, 4.2와 4.4의 쌍이 외견상 모순되면서도 동시에 참일 수 있는 설명은 다음의 구절에서 발견된다.

  <2> "그러면 우리는 운동은 같은 것이자 동시에 같은 것이 아님을 거리낌 없이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같은 것이고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같은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ou... homoios eirekamen). 우리가 그것을 같은 것이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자신과 관련해서 같은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것을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는, 다른 것과의 결합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운동은 다른 것과의 이 결합으로 인하여, 같음과 분리됨으로써,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운동이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옳게 말하는 것입니다(256a10-b4)."

  M은 자신 이외의 유들에 대해 그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것들이 되지만, D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것들이 아니게 된다. 이 과정에서 metechein을 통해 긍정되는 것은 M을 주어로 하여 그것과 그 외의 유들 사이의 서술관계이다. 반면 부정되는 것은 M을 주어로 하여 그 외의 것들과의 동일성 관계이다. 즉 앞서 외견상의 모순은 E의 의미론적 구분이 지니는 애매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가 그 동사의 애매성을 강조하지도 않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때문에 이 논의가 einai의 애매성을 강조하기 위해 진행되었다는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플라톤이 강조하고자 한 지점이 einai의 보어가 지니는 애매성이라는 견해가 제시된다. 앞서 2.2와 2.4의 경우 동일한 표현인 'tauton'이 사용되지만 2.2는 그것이 추상명사를, 2.4는 형용사를 의미한다. 반면 D와 E의 경우 'to heteron'과 'to on'이 그 자체로 형용사로 쓰일 수 없다. einai의 보어로 3.2, 4.2에서 이 두 표현이 그대로 뒤따랐다면 3.2와 3.4, 4.2와 4.4 사이의 표현상의 차이로 인해 외견상의 모순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3.2와 4.2에서 관사를 생략함으로써 3.2와 3.4, 4.2와 4.4 사이에 작위적으로 외견상의 모순을 만들어낸다.
  좀 더 보충하여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3.2, 4.2 등에서 '~이 아니다'의 경우 이는 동일성의 부정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의 보어로는 관사가 붙어 실체화된 추상명사가 자리해야 한다. 반면 3.4, 4.4에서는 그 문장이 의미하는 것이 서술관계이므로 esti 이후에 추상명사가 아닌 형용사가 따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3.2, 4.2에서 'to heteron'과 'to on' 등의 표현으로 관사를 통해 그것들이 추상명사임을, 따라서 그 문장의 의미가 3.4, 4.4의 서술관계와 달리 동일성에 대한 부정의 문장임을 정확히 표현했다면 두 표현들 사이의 외견상의 모순이 강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외견상의 모순이란 동일성 관계와 서술 관계가 구분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드러나는 부정관계와 긍정관계 사이의 모순이다. 다만 Brown(2008)은 D와 E뿐만 아니라 S에 대해서도 플라톤이 정확한 표현을 위해서 관사를 사용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므로(p447),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조심스러운 요약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운동이 다르다(ἕτερον ἐστί)'와 '운동은 다른 것이다(ἕτερον ἐστί)'의 번역상의 차이에도 주의를 기울였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네 가지 외견상의 모순은 형용사와 추상명사가 표현상 구분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나, 위 번역은 표현상으로 그 차이를 드러내기 떄문이다.
  덧붙여, 'esti heteron tou heterou'와 'ouk heteron esti'에서 전자에 등장하는 'to heteron'은 위 논의에서 언급되는 외견상의 모순과 관련된 표현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esti heteron'과 'ouk esti heteron' 사이에서 서술관계로서 긍정을 의미하는 전자와 동일성 관계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후자 사이에, 각기 형용사와 추상명사를 의미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의 heteron이 표현상 같음에서 드러나는 모순이다. 'tou heterou'의 경우 이러한 표현상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관사를 생략함으로써 표현상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주장 자체는 철회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필요한 일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에 문제의 애매성을 확정지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후로 유들 사이의 관계에서 상이한 방식들을 통해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제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4. 'einai'의 (의미론적)애매성의 해석과 두 가지 난점.

  <3> "그러면 운동에 관해서 그리고 모든 유들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점은 필연적이군요(estin ara ex anankes to me on epi te kineseos einai kai kata panta ta gene). 왜냐하면 모든 것들에 관해서, 다른 것의 본성은 각각의 것을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드니까요(ouk on poiei). 그리고 모든 것들이 같은 식으로 이렇게 있지 않다고, 그리고 또 다시 그것들은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고 또한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옳게 말하는 것입니다(256d11-e4)."

  이는 앞서 M과 E의 관계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일반화된다.

  (E를 제외한) 유 X에 관해서:
  (1) X는 E와 다르다 → X는 있지 않은 것이다.
  (2) X는 E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 X는 있는 것이다.
  (3) 따라서: X의 경우,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4>"그러면(ara) 형상들 각각에 관해서, 있는 것은 수가 많지만, 있지 않은 것은 셀 수 없이 많다(peri hekaston ara ton eidon poly men esti to on, apeiron de plethei to me on)(256e6-7)."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우선 1) 있는 것(to on)과 있지 않은 것(to me on)은 불완전용법으로 간주되고, 2) '~에 관해서 있는 것'의 의미는 einai의 converse use로 간주된다. Converse use는 예를 들어 'X는 F이다'가 'X에 관해서 F가 있는 것이다'와 동치로, 'X는 F가 아니다'가 'X에 관해서 F가 있지 않은 것이다'와 동치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전제 하에서 각각에 관해 있는 것이 수가 많다는 것은 서술관계를 참으로 만드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고, 있지 않은 것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은 동일성의 부정을 참으로 만드는 F가 무수히 많다는 것이라 해석된다. 이 해석에 따라, 그리고 논리적 연결을 함의하는 'ara'에 주목할 때, <3>의 on을 complete use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를 근거로 나아가 『소피스트』 전체에서 complete use는 역할이 없다는 주장도 제시된다. 그러나 <3>에서 그리고 그 이전의 맥락에서 M이 E의 몫을 나누어 가짐은 M을 독립적인 하나의 유로 확립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표현이고, 그 과정에서 'M은 ( )이다'의 incomplete use를 적용할 경우 부자연스럽기에 인용 3.에서는 complete use가 더 자연스럽다. 반면에 <4>는 incomplete use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둘 사이의 차이에 더하여 두 번째 차이가 있다. <3>에서 on과 me on은 E와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었고 그 관계를 통해 M 자체를 가리켰다. 반면 <4>에서 M에 관한 on은 M에 관하여 그것의 몫을 가지는 유들을 일반화해서 가리킨다. me on 역시 M이 아닌 그것과 다른 모든 유들을 가리킨다. 이 두 차이로 인해 <3>은 complete use, <4>는 in-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든 둘 모두 in-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든 두 대목 사이에서 모종의 확장, on과 me on을 규정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으나, 이를 설명하는 데에는 어느 쪽이든 어려움을 겪는다.


2-5. <3>의 완전용법(존재)에서 <4>의 불완전용법(서술)으로의 연속과 확장.(21-22쪽)

  <3>에서 어떤 것은 E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방식을 <4>에 적용하여 S가 M에 관련해 있는 것이 되는 것은, M이 나누어 가지는 E를 나누어 가진다는 점에서 M에 관해서 있는 것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의 경우에도 <3>에서 다름을 통해 규정되었듯 <4>에서도 또한 S가 M이 나누어 가지는 E와 다름을 통해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E 자체와 다른 것'은 'M이 나누어 가지는 E와 다른 것'과 차이가 있다. <4>에서 E 자체는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의 예이나, E 자체는 자기 자신과 다를 수 없으므로 E 자체와 M이 나누어 가지는 E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방식으로 볼 때 <3>에서 M은 E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는 것이 되고, <4>에서 S는 M이 나누어 가진 E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M에 관하여 있는 것이 된다. 이는 '몫을 나누어 가짐'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해석이며, <3>과 <4>의 차이는 단지 새로운 항 S가 추가되었다는 점뿐이다.
  이를 통해 <3>에서 <4>로 on과 me on의 의미 변화가 극단적 비약이 아니기 위해서는 <4>에서와 마찬가지로 <3>에서도 on이 불완전용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약화된다. <3>에서 M은 E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4>에서 M이 나누어 가진 E를 S가 나누어 가짐으로써, S는 M에 관해서 있는 것이 된다. E를 나누어 가진다는 관계의 방식과 그 결과로서 있는 것이 된다는 결과가 연속되므로, E의 의미와 그것에 관련하는 방식은 연속된다. 즉 이것은 <4>에 대해 <3>에서 'einai'의 완전용법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불완전용법이 적용된 것이 아니라 'einai'의 완전용법이 확장되어 적용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다름의 경우 einai 자체와 M의 einai가 구분되었으므로, S는 있는 것이면서(einai 자체에 대한 몫을 가짐으로써) 동시에 M에 대해서는 있지 않다는 것이 설명될 수 있다(M이 가진 있음과는 다름으로써).


2-6. 있는 것이 있지 않음.(23쪽)

  <5>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있는 것은 나머지 것들이 있는 그 만큼 있지 않습니다(hosaper esti ta alla, kata tosauta ouk estin). 그것이 이 나머지 것들이지 않은 한,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이지만(ekeina ... ouk on hen ... auto estin), 그것은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것들이지 않으니까요(aperanta ... ton arithmon talla ouk estin)(257a4-6)."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일 수 있음을 보인 뒤, 엘레아의 손님은 있는 것이 있지 않은 것임을 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표면적이다. <5>에서 E가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3>가 아닌 유들이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사태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앞서의 해석에 따르자면 <3>에서 M은 E 자체와 다름으로써 있지(E) 않은 것이다. 반면 <5>에서 E는 M이 E 자체에 대해 나누어 가진 몫으로서 M의 E와 E 자체가 다르다는 점에서 M에 대해서 있지 않은 것이다.


3. 있지 않은 것과 다른 것, 그리고 거짓 진술

3-1. 거짓 진술의 본성, 있는 것의 반대가 아닌 있는 것과 다른 것.(24-26쪽)

  257a12까지의 논의를 통해,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임이 보여졌고, 따라서 거짓 진술이 무언가 어떤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임을 보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엘레아의 손님은 곧장 거짓 진술에 대한 논의로 진입하지 않고 257b1-259d8까지의 또 다른 논의를 진행한다. 특히 이 부분의 내용이 뒤따르는 거짓 진술의 분석에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해석상의 난점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있지 않음, 다름, 거짓 진술이라는 세 주제를 하나의 연관된 주제로 다루는 과정에서 플라톤의 불명확한 구분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다.
  257b3-4에서 손님은 "우리가 있지 않은 것을 말할 때마다, 우리는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와 다른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예를 들어(hoion), 우리가 어떤 것을 "크지 않다(me mega)"고 말할 때, 우리가 그 표현으로써 같은 것(to ison)보다 작은 것(to smikron)을 더 지시하는 것으로 당신에게 보입니까?"라고 묻고 이 예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일반화한다. "그러면 부정어가 반대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될 때, 우리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단지 다음과 같은 점에만 동의할 것입니다. 그 앞에 놓인 'me'와 'ou'는 그 다음에 오는 이름들과는 다른 어떤 이름을 드러낸다는 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부정어 다음에 언표되는 이름들이 관련하는 사물과는 다른 어떤 사물을 드러낸다는 점 말입니다(257b1-c4)." 257e6-258a6에서는 부정어를 뒤따르는 단어의 또 다른 예로 아름답지 않은 것, 크지 않은 것, 정의롭지 않은 것이 등장한다. 이것들의 짝으로 아름다운 것, 큰 것, 정의로운 것을 더해 각 쌍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덜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이유는 전자가 후자에 대비되는, 다른 것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예시된 부정에 뒤따르는 이름들은 다른 것의 부분이고, 다른 것이 있는 것이므로, 부정에 뒤따르는 이름들 역시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밖의 다른 것들에 관해서도 동일한 식으로 말을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의 본성은 있는 것들에 속한다는 점이 밝혀졌고, 그리고 다른 것의 본성이 있으니, 이것의 부분들도 결코 어떤 것에도 못지 않게 있다는 점을 반드시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258a7-9)." 'me/ou+X'가 다른 것의 부분이고, 그러한 한에서 있는 것이라는 원칙이, 있는 것에 적용된다. "그렇다면, 다른 것의 부분의 본성(he tes thaterou moriou physeos)이 있는 것의 본성에 대비되었을 때(antikeimenon) 이 대비(antithesis)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면, 있는 것 자체 못지않게 존재(ousia)인 듯합니다.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과 다른 것만을 의미하니까요." 그리고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이 대비,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서의 '있지 않은 것'이 소피스트의 정의를 위해 찾던 '있지 않은 것'임을 선언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의 반대'가 아닌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 확립하는 일이다.


3-2. 거짓 진술의 두 규정과 문제점(26-27쪽)

  '있지 않은 것'을 일종의 대비로 이해하여 이를 거짓 진술의 분석에 적용되는 방식이 검토되어야 한다. 거짓 진술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6> (X에 관한) 거짓 진술은 X에 관해서 있는 것들과 다른 것들을(hetera ton onton) 말한다(263b9).
  <7> (X에 관한) 거짓 진술은 X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들을 있는 것들로서(ta me onta ... hos onta) 말한다(263b11-12).

  그리고 '테아이테토스는 난다'라는 진술을 거짓 진술로서, '테아이테토스는 앉는다' 라는 진술을 참인 진술로서 예시한다. 전자의 경우 <6>의 규정이 적용되어, '테아이테토스는 난다'는 그것이 테아이테토스에 관해서 있는 것들과 다른 것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이다. 여기에서 '테아이테토스에 관해서 있는 것들'은 <5>를 고려하면 테아이테토스가 몫을 나누어 가지는, 혹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F라고 하는 진술을 참으로 만드는 속성 F들이라 보는 게 자연스럽다. 반면 '테아이테토스는 앉는다'에 포함되어 있는 '앉음'은 그러한 속성일 것이다. 이제 거짓 진술은 테아이테토스에 관해서 있는 것들 중 하나인 앉음과 다른 날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앉음'과 다르지만 '테아이테토스는 F이다'를 참으로 만드는 많은 속성들을 통한 참인 진술들을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는 젊다"라는 진술이 참이라면, 그럼에도 '젊다'라는 속성은 '앉아 있다'라는 속성과 다르기에, 이는 또한 거짓 진술이다.


3-3. 해석의 제안들(27-29쪽)

  '앉음'과 다르지만 테아이테토스에 대해서 있는 것들이 만드는 참인 진술들은 '다름'으로서의 '있지 않음'을 통해서 설명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 세 가지 해석들이 있다.

  1) Oxford interpretation이라 불리는 입장은 <6>에서 '있는 것들'에 보편양화사를 추가하여 해석한다. 테아이테토스에게 '실제로 귀속되는 모든 속성들'과 다른 것이 그에 관해서 거짓이다. 즉 '날고 있음'이 단지 '앉음'과 달라서가 아니라 그에게 실제로 귀속되는 모든 속성들과 다르기 때문에 '테아이테토스가 난다'는 거짓 진술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문헌에 없는 양화사의 도입을 설명할 부담이 있다.
  2) <6>에서의 '다름'을 양립불가능성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앉음'을 테아이테토스가 가지고 있는 속성으로 볼 때 '난다'는 속성은 반대관계로서 '앉음'과 양립불가능하다. 혹은 테아이테토스가 가진 인간이라는 속성이 날개 달린 짐승이라는 속성과 모순되므로, 날개 달린 짐승이라는 속성에 귀속되는 '난다'는 속성 또한 테아이테토스가 가진 속성과 양립불가능하다. 나아가 특정 범주를 한정하여, '색'이라는 범주 내에서 흰색은 희지 않은 모든 색과 양립불가능하다는 식으로 거짓 진술에서의 다름을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거짓 진술의 일반적 규정을 제공하긴 하지만, 반대가 아닌 다름을 강조하는 이전까지의 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
  3) '다름'의 범위를 한정한다. 예를 들어 '크지 않은 것이 작은 것 못지 않게 같은 것을 지시할 수 있다'는 말에서 큼, 작음, 같음은 한정된 범위에 속하며 한 속성은 '다른' 속성들 각각 모두와 양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역시 명시적 언급이 아닌 추정에 근거한다.

  세 해석들 중 1)이 다름의 앞서 드러난 의미인 비동일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들'이 보편양화사를 내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자연스럽다고 판단된다.


3-4. 비동일성과 서술관계의 부정(29-30쪽)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추가적인 해석이 요청되는 이유는 <3>과 <4>에서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인 있지 않음이 거짓 진술에서의 있지 않음과 의미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3>과 <4>에서 다름은 비동일성을 의미하며, 이는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언명을 만족스럽게 설명한다. M을 제외한 모든 유들이 비동일성 조건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명을 거짓 진술에 적용할 경우,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있지 않은 것들은 테아이테토스와 다른 것들이며, 이 경우 앞서 예시한 '젊음'을 테아이테토스에 대하여 진술하면 거짓 진술이 된다.
  'X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을 'X와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전략은 거짓 진술 분석에 곧바로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엘레아의 손님은 263b7-10에서 거짓 진술에 대한 규정을 하며 <4>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연관된 틀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제는 'X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을 동일성의 부정이 아니라 서술관계의 부정으로 이해하는 일이 거짓 진술 분석에 필요했다는 점이다. 거짓 진술이 '(어떤 것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규정될 때, 그 '있음'이 동일성이 아닌 서술관계를 내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 규정은 직관적으로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3-5. 비동일성과 서술관계의 부정 사이의 불명료함(31쪽)

  <6>에서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3>과 <4>의 설명틀이 견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6>에서 '있는 것과 다른 것'은, M을 예로 들면 M과 다른 어떤 유가 아니라, M과 관련해 있는 유와 다른 어떤 유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서는 각 유 자체의 상호 다름이 아니라 한 유에 속하는 유에 대한 다른 유의 다름을 논하고 있고 이는 <3>과 <4>에서 논의되지 않는 주제이다. '크지 않은 것'을 '작은 것' 못지 않게 '같은 것'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표현을 '큰 것과 다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앞서 언급하였듯 263b7-10에서 <4>를 가리키는 듯한 손님의 언급 때문에 이것이 'me/ou+X'에 대해 <3>, <4>와 다른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는 것을 의식하고 또한 의도한 것이라 확답하기도 어렵다. 또한 동일성 부정어가 아닌 서술 부정어 분석을 의도하고 의식했다면, 'me/ou+X'이 X와 다름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3>, <4>에서 'me/ou+X'가 비동일성으로 분석되었기 때문이다.


3-6. 두 가지 논파와 하나의 이론적 도구(31-32쪽)

  이러한 문제는 다름을 통한 있지 않음의 분석이라는 하나의 도구로 파르메니데스를 논파하여 세계에 다수의 존재들이 있고 그것들에 대해 다양한 참된 진술이 가능함을 보이려는 일과 거짓 진술의 역설을 극복하는 일이라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비동일성 혹은 다름으로서의 있지 않음은 세계에 다수의 존재자들이 있을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또한 이 존재자들 사이에 '몫을 나누어 가짐'의 관계가 개입하여 다양한 진술들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는 <6>에서 거짓 진술의 규정에 직접 적용될 수 없다.
 

2. 평가

  구문론적 구분과 의미론적 구분을 중심으로 유들의 결합과 그 속에서 metechein과 다름으로서의 to me on에 대한 가능한 해석들을 정리하고 이를 거짓 진술에 대한 분석에 적용한 입장들을 정리함으로써 to on과 to me on, 유들의 결합, 거짓 진술 세 가지 문제들이 각기 어떻게 이해되고 있으며 또한 서로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구도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기존 연구들의 상이한 입장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 또한 이 연구의 결실이라 생각된다. 다른 한편 동일성 관계와 서술 관계, 그리고 각각에 대한 부정이라는 이론적 도구로 해석상의 여러 상이한 난점들을 일관된 시각에서 분석한 점은 이 논문에서 특히 중요한 시도로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있음의 몫을 나누어 가짐'과 '다름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지 않음'을 중심으로 einai의 완전용법이 불완전용법으로 확장될 수 있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한 점 역시 눈에 띈다. 이는 <3>에 대해 문헌에 충실한 해석을 견지하면서도 <4>에서 확인되는 einai의 의미 확장을 적절히 설명해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즉 특정 대상을 주어로 삼아 그것에 대해 서술관계를 맺는 속성들은 그 대상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들로 이해될 수 있고, 이러한 한에서 불완전용법의 의미들 중 하나로 간주되는 서술관계가 완전용법을 통해서도 해명될 수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 과정에서 X의 있음과 있음 자체의 구분은 이 이론적 도구의 확장된 적용 혹은 일반화의 가능성 또한 열어준다.
  이 해석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검토해 보자. 예를 들어 '나무는 땅이 아니다'라는 진술은 앞서의 해석을 통해 '나무는 땅의 있음과 다름을 통해 땅에 대해 있지 않다'라고 바꾸어 진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땅에 있다. 이 경우 '땅에'라는 표현은 장소를 표현하는 부사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유들의 결합에서 언급되는 최고류들은 물리적 공간과 무관한 논리적 사태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유들의 결합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는 땅이라는 장소에 위치하는 나무와 그 장소로서의 땅 사이의 관계를 직접 해명할 수는 없다. 다만, '장소' 역시 일종의 고유한 유로 간주할 수 있다면, 장소를 매개로 나무가 땅의 있음에 대해 몫을 나누어 가진다는 설명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추정해 보자면, 장소가 땅의 있음에 대해 몫을 나누어 가지고 바로 이러한 있음을 다시 나무가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이 경우 땅에 나무가 있다는 사태를 설명할 여지는 남을 것이다. 즉 나무는 땅에 대해 있으면서 또한 땅에 대해 있지 않을 수 있다. 이로부터 추론 가능한 점은 있음 자체로 부터 그 몫을 나누어 가진 어떤 것에 대해 있음, 또 그 나누어 가져진 있음에 대해 몫을 나누어 가짐 등의 관계를 통해 '있음의 몫을 나누어 가짐'이 복잡한 중첩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각 단계마다의 있음에 대해 바로 그 각각의 있음과 다름을 통해 여러 층위의 '있지 않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추정을 바탕으로 <4>로 돌아가 보면, '있음의 몫을 나누어 가짐'의 관계는 제한적이다. 일차적으로 있음 자체에 대한 나누어 가짐이 전제되는 한에서, 이런 방식으로 있는 것이 된 각각의 것들의 수만큼 유한한 있음들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있는 것들이 진술되고, '각 유에 대해' 있는 것들은 각 유가 각기 나누어 가진 그 있음에 한하여 그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 것들로 또한 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있지 않은 것들은 무한히 많을 것인데, X라는 유의 있음을 나누어 가지는 Y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X와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기에 또한 있지 않은 것이며, 아예 X에 대해 나누어 가짐의 관계를 갖지 않는 것들 또한 모두 각기 고유하고 자기 자신과 같으며 X와 다르다는 점에서 X에 대해 있지 않은 것들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확인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M은 S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 인해 같은 것이다(256a). 반면 S가 M이 지닌 E의 몫을 나누어 가지면 'S는 M에 대하여 있는 것이다'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를 esti를 통해 표현하면 'M esti S(-ame)'이 될 것이다. 이는 다시 'M은 같은 것이다'라는 앞서의 표현과 동일하다. E 자체와 E 이외의 유가 지닌 E 사이에서는 각 유의 고유한 존재와 어떤 다른 유에 대한 존재라는 의미의 구분이 가능하다. 그러나 E 이외의 유가 지닌 E에 대한 metechein은 E 이외의 유 자체에 대한 metechein과 구분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metechein의 주어가 S이고 그 대상이 M이 지닌 E인 경우가 역으로 M이 주체가 되고 그 대상이 S가 되는 경우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즉 두 경우 모두 'M이 S이다'라는 M에 대한 S의 서술관계로 귀결된다. 그러나 M과 R의 경우(256b6-8)에서 알 수 있듯 M은 R에 대해 직접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정지한 것이라 부를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어떤 것이 M에 대해 몫을 나누어 가진다면 그 주체가 되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 될 것이고 '어떤 것이 움직인다'고 진술될 것이다. 따라서 위 해석에 따를 경우 'S가 M의 E에 대한 몫을 나누어 가짐'을 'S가 M의 몫을 나누어 가짐'과 구분하고 또한 전자를 'M이 S의 몫을 나누어 가짐'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나 해석이 문헌 상으로 어느 정도까지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 문헌 상의 정당화에 있어서 문제는 서술관계를 매개하는 'X가 그 몫을 나누어 가진 E'와 역시 서술관계를 성립시키는 'X의 몫을 나누어 가짐'이 중첩될 때, 어째서 두 표현 중 전자만이 명시적으로 등장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문제는 E 자체와 X의 E 사이의 분명한 의미 차이가 발생하므로, 이 차이를 발생시키는 추가적인 조건이 둘 사이의 연속성 속에서 해명되어야 한다는 요구로 볼 수도 있다.
  이는 이후 거짓 진술의 문제에서 플라톤의 서술방식을 비판하는 입장과 일관되지 못한 측면 또한 있다. ~E와 D의 관계를 유들의 결합에서 거짓진술의 분석으로 적용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추가된 부분, 동일성의 의미에서 서술의 의미로의 전환 혹은 확장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들의 결합을 논하는 부분과 거짓 진술을 분석하는 부분의 차이는 문헌을 통해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는 반대의 주장도 가능하다. 상기 논문에서는 문헌 상에 이름(주어)과 말(동사)의 구분이 거짓 진술의 분석에 앞서 진술 자체의 분석 단계에 이르러 추가되었음에도 이에 대한 고려가 없다. 유들의 결합과 달리 말은 앞서 '모상'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유들의 결합과 진술에서 이름과 말 사이의 결합을 단순히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또한 다름으로서의 to me on 규정을 통해 모든 각각의 것이 자신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to me on과 필연적으로 결합할 수밖에 없음에도 손님은 소피스트가 진술의 경우 to me on과 결합하지 않을 것이라 재반박할 것이며 따라서 말과 믿음과 인상이 무엇인지를 추적해야 한다고 말한다(260d5-261a4). 이 재반박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도 역시 유들의 결합과 진술에서의 결합을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모상의 규정과 거짓의 규정 역시 구분해야 한다. 만일 단순히 있는 것들 사이의 대비로서 다름이 거짓에 적용되는 '있지 않음'이라면, 그 있지 않음의 역할은 어떤 것을 그 외의 것들과 다른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 없이는 다른 것들과의 구분이 불가능하므로 그것을 이름할 수도, 가리킬 수도, 말할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한에서 대비로서의 있지 않음은 모든 유들에 필연적으로 결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말의 경우, 손님은 이것들이 있지 않은 것과 섞인다면 거짓된 믿음과 말이 생긴다고 말하고 테아이테토스 또한 이에 동의한다(260c1-5). 이는 적어도 유들의 결합에서 다름을 통해 도출되는 결과와는 다른 결과이다. 더욱이 257d11-257e5까지의 내용은 아름답지 않은 것(to me kalon)을 "있는 것들 중의 어떤 한 유의 부분으로 구분됨으로써, 그리고 다시 또 있는 것들 중 무언가에 대해 대비됨으로써"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구분됨'으로 옮긴 'aphoristhen'은 단순히 '분리'만을 의미하지 않고 '따로 규정됨,' '따로 정의됨'을 의미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인용된 257b1-c4를 다시 보면, 부정에 뒤따르는 이름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름들(onomata),' 나아가 '사태들(pragmata)'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려들에 비추어 볼 때 '대비'로서의 to me on은 그 자체로 고유한 본성을 지닌 개별적인 유 또는 이름이나 사태라 해석할 여지가 남는다. 이 역시 유들의 결합에서 대비로 이해된 '있지 않음'이 수행하는 역할이 말과 믿음에 결합하여 거짓을 산출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근거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엘레아의 손님 혹은 플라톤 자신이 유들의 결합에서 규정된 다름과 to me on을 거짓 진술 분석에도 일관되게 사용하고자 한다거나 혹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최소한 거기에 추가되는 요소가 문헌 상에 등장하지 않는다고까지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이러한 차이를 논문에서는 동일성의 부정과 서술관계의 부정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이 구분을 불명확하게 하여 전자에서 다름으로서의 있지 않음이 수행하는 역할을 그대로 거짓 진술 분석에 적용하려 한 것이 문헌 상에 드러나는 플라톤의 문제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말, 생각, 믿음, 인상이 무엇인지 추적해야 한다는 손님의 주장(260d5-261a4)은 이전까지의 있지 않음을 거짓 진술 분석에 적용함에 있어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플라톤이 의식하고 있다는 충분한 문헌상의 근거로 보인다. 덧붙여 추상적 혹은 보편적인 것으로 보이는 유들 사이의 결합은 진술 분석에서 제시된 '테아이테토스'라는 구체적인(더욱이 '지금 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라는 한정까지 붙는, 263a9) 한 사람과 그를 가리키는 이름, 그리고 그의 현재 진행 중인 행위로서 '날고 있다'나 '앉아 있다'와 그에 대한 동사들 사이의 결합과 큰 차이를 보여주며, 이러한 예시를 선택한 것은 플라톤 자신이라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부적으로는 위 논문의 21쪽에서 'M과 완전히 분리된 R'이라는 표현에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256b6-8을 고려할 때 M과 R이 서로에 대해 몫을 나누어 가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蟲-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6번째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출간

-‘앎’이란 무엇인가? 

《테아이테토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인식론 텍스트 가운데 하나이다. 이 텍스트는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중단 없이 일관되게 탐문하며,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가장 명확하고 단일한 주제로 묶인 책이다. 그러나 《테아이테토스》는 아주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다. 이를테면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어려서부터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 지적 훈련을 받았음에도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을 자서전에 남기고 있다. 그럼에도 《테아이테토스》는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많은 작품이다. 논의의 다양함과 예리함, 그리고 독창성의 측면에서 독자의 끝없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식론 텍스트로 《테아이테토스》에 버금가는 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아이테토스》는 철학의 역사에서 최초로 상대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논증을 제시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또한 인간의 사유를 ‘밀랍 서판’에 빗대는 비유 등 흥미롭고 매력적인 여러 비유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 또한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한없이 자극한다. 그런가 하면 소크라테스를 ‘산파’(maia)에 빗대는 ‘산파의 비유’는 너무도 유명해서 교육철학의 식탁에는 지금도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논의의 잔치 음식이 되고 있다. 그 밖에 철학의 시작을 ‘놀라워하는 것’(thaumazein)에서 찾는 유명한 글귀가 등장하는 것도 《테아이테토스》이고, 탈레스가 우물에 빠진 이야기의 출처 또한 《테아이테토스》이다. 《테아이테토스》에 대한 연구자들의 입장은 예나 지금이나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갈림길이 플라톤에 대한 이해를 다르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 철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꿈꾸는 독자라면 《테아이테토스》를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다. 《테아이테토스》의 논의는 산파술로 진행되기 때문에 겉으로 보아서는 좇아가기가 어려운 텍스트이다. 그러나 그 같은 논의 방식 때문에 길어내고 길어 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깊은 통찰을 품고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대화편 내에서 소크라테스와 테아이테토스가 나누는 대화의 열정과 진지함은 독자로 하여금 감동과 경외의 느낌마저 들게 한다. 우리는 이런 대화의 논의를 통해서 소크라테스적인 정신과 플라톤적인 정신이 《테아이테토스》에서 어떻게 만나는가를 체험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6번째 대화편. 《테아이테토스》는 철학의 역사에서 최초로 상대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논증을 제시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또한 인간의 사유를 ‘밀랍 서판’에 빗대는 비유 등 흥미롭고 매력적인 여러 비유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 또한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한없이 자극한다. 그런가 하면 소크라테스를 ‘산파’(maia)에 빗대는 ‘산파의 비유’는 너무도 유명해서 교육철학의 식탁에는 지금도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논의의 잔치 음식이 되고 있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을 펴내며
작품해설

작품개요

등장인물
본문과 주석
부록

옮긴이의 글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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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플라톤 (Platon)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으로 서양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명문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20살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셨을 때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정치에도 뜻을 두었으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철학자로서의 삶을 결심한다.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저서들을 저술하고 그 안에 자신의 철학도 담는다. 그 후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기원전 387년에 철학 중심의 종합 학교인 아카데메이아라는 학교를 세웠다.  플라톤의 저서는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변론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전부 대화체 형식으로 되어 있어 『대화편』이라고도 말한다. 플라톤이 30대부터 70대까지 저술한 이 대화편들은「파이돈」「크리톤」「향연」「국가」「프로타고라스」등 35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저술 활동으로 남기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사상을 엿보려면 플라톤의 『대화편』에 기대야 한다. 초기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짙게 느낄 수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소크라테스 철학을 근간으로 한 플라톤의 철학이 나타난다.

 

역자 : 정준영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플라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플라톤 철학과 그 영향》(공저, 2001), 《서양고대철학 I》(공저, 2013) 등이 있고, 역서로는 《알키비아데스 I·II》(공역, 2007) 등이 있다. 호메로스에 관한 논문으로 〈《일리아스》에서 영웅적 자아의 aidos와 행위패턴〉(2008) 등이 있고, 비극에 관한 논문으로 〈메데이아의 자식살해와 튀모스(thymos)〉가 있으며, 플라톤에 관한 논문으로는 〈달래기 힘든 격정(thymos), 그러나 고귀한 격정〉 등이 있다. 대진대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는 정암학당의 연구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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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잔.

-蟲-

1.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스무살의 나에게'

그때 나는 세상이 언젠가 내것이 될 줄로만 알았지
하지만 나는 이런 멋진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데

승리자의 남겨진 기록이 역사란건 이미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실격 당했어
기회조차 없었어

가지려 하지마 다 정해져 있어 세상의 주인공은 네가 아냐
이 멋진 세상을 그냥 받아 들여 어차피 넌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냐

남들이 다 하는데 대로 살아 아무리 애 써봐도 헛거야
도망쳐도 결국 돌아 오게 돼 안되는 건 안돼

* 가지려 하지마 다 정해져 있어 세상의 주인공은 네가 아냐
이 멋진 세상을 그냥 받아 들여 어차피 넌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냐


2.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폐허의 콜렉션'

그녀가 지나간 폐허의 콜렉션 도대체 얼마나 짓밟고 다닐껀데
무너진 사랑탑 파멸의 콜렉션 너도 별다를 건 없어
이젠 나의 노래에 1절이 되어라

아까워 사랑한다는 그 말들 나는 또 인생을 낭비했어
지겨워 이게 뭐 하자는 건지
부끄러워 나는 당한거야

이젠 너에게 사랑은 없어 모두 다 니가 뿌린 씨앗이야
이젠 내게도 사랑은 없어 누군갈 다시 좋아하게 돼도
잊지마 그래봤자 난

그녀가 지나간 폐허의 콜렉션 도대체 얼마나 짓밟고 다닐 건데
무너진 사랑탑 파멸의 콜렉션 너도 별다를 건 없어
이젠 나의 노래에 2절도 해 봐라

잘 살아 아니 똑바로 살아
잘 들어 그렇게 사는거 아냐
고마워 또 하나 배우게 됐어
다시는 아무도 안 믿어

언젠가 너도 당할지 몰라
적당히 가려가며 집적대봐
언젠가 나도 좋아질 거야
어쩌다 모든 일이 잘 풀려도 잊지마 그래봤자 난

그녀가 지나간 폐허의 콜렉션 도대체 얼마나 짓밟고 다닐 건데
무너진 사랑탑 파멸의 콜렉션 너도 별다를 건 없어
이런 너의 노래로 작업도 해봤지만 안되더군
그저 나는 그녀의 콜렉션
폐허의 콜렉션 파멸의 콜렉션

그녀가 지나간 폐허의 콜렉션 도대체 얼마나 짓밟고 다닐 건데
무너진 사랑탑 파멸의 콜렉션 나도 별다를 건 없어
이런 너의 노래로 돈이나 벌었으면 좋겠어

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나
폐허의 콜렉션 파멸의 콜렉션
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나


3. UMC/UW, '내가 쓰러지면'


내가 말이 너무 많다구?
난 직업이 래펀데?
그럼 무슨 얘기할까?
사랑은 아이스크림이라구? 먹다가 이빨 다 나갔다구?
Allow me, huh.

꼴초에겐 담배 드라이버에겐 유류세
통화할 땐 패킷에 전국민에겐 통일세
우리가 꼬라박고 들이붓고 끝없이 희생할 때
너희 아들들과 딸들은 LA공항에 면세
이것을 글로 쓰면 유언비어 유포죄
이것을 책으로 내면 불온서적 출판죄
이것 때문에 모이면 불법 집회가 된다네
이것 때문에 모이면 불법 결사라네
사주에게 이익이 될 땐 건실청년으로
사주 이익에 방해 될 땐 불순분자로
회사에게 이익이 될 땐 불량이 정품으로
회사 이익에 방해 될 땐 정품이 불량으로
이것을 글로 쓰면 언론의 자유
이것을 책으로 내면 출판의 자유
이것 때문에 모인다면 집회의 자유
거기서 가스통을 휘두른다면 결사의 자유

지천에 널린 것들은 거짓을 말하는 벗들
돈으로 환산한 꿈들이 잘라 내버린 풀뿌리
미천한 신분인 것들이 혁명을 노래한 말들이
돈으로 치장한 놈들의 비위를 거스른 말들에
세상이 내 말을 외면하는 건 두렵지 않아
하지만 반대의 경우엔 누군가에게 복수를 당하겠지
내가 쓰러지면 늬들이 울어는 주냐?
내가 쓰러지면 늬들이 기억은 허냐?

우리의 기억을 지배한 사건은 보통 교과서
우리의 신경을 지배한 것들은 보통 광고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보통 참고해서
돈을 쓰고 삶을 바치는 것 따위 시장 안쪽에서
너와 싸우다 죽는 일 따위 두렵지 않아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 받겠지
내가 쓰러지면 늬들이 울어는 주냐?
내가 쓰러지면 늬들이 기억은 허냐?

OK, 둘.
월세 낼 땐 재개발로 경제적 무장 해제
사치세 그 댓가로 개발구역 해제
니 애들을 가르칠 땐 교육의 quality
남의 애들 급식할 땐 한줌의 charity
이것을 말한다면 자본주의의 적
이것을 책으로 내면 판매금지 서적
이것을 노래로 부르면 따지겠지 품격
UMC는 사람들에게 결국 공공의 적

당의 진로에 도움이 될 땐 거물정치인으로
스폰서들이 싫어할 땐 성추행 잡범으로
매출에 도움이 될 땐 음치도 가수로
여론상에 문제가 될 땐 때운다 선행기사로
이것을 말한다면 매니저한테 전화
이것을 책으로 내면 팬들한테 성화
이것을 노래로 부르면 쌓여간다 반대파
UMC는 결국 사람들에게 악마가 되어 간다

지천에 널린 것들은 거짓을 말하는 벗들
돈으로 환산한 꿈들이 잘라 내버린 풀뿌리
미천한 신분인 것들이 혁명을 노래한 말들이
돈으로 치장한 놈들의 비위를 거스른 말들에
세상이 내 말을 외면하는 건 두렵지 않아
하지만 반대의 경우엔 누군가에게 복수를 당하겠지
내가 쓰러지면 늬들이 울어는 주냐?
내가 쓰러지면 늬들이 기억은 허냐?
우리의 기억을 지배한 사건은 보통 교과서
우리의 신경을 지배한 것들은 보통 광고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보통 참고해서
돈을 쓰고 삶을 바치는 것 따위 시장 안쪽에서
너와 싸우다 죽는 일 따위 두렵지 않아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 받겠지
내가 쓰러지면 늬들이 울어는 주냐?
내가 쓰러지면 늬들이 기억은 허냐?

지천에 널린 것들은 거짓을 말하는 벗들
돈인지 꿈인지 구분이 안돼 자라지 못하는 풀뿌리
미천한 신분인 것들이 혁명을 노래한 말들이
돈만보고 사는 놈들의 비위를 거스른 말들이
세상이 내 말을 외면하는 건 두렵지 않아
하지만 반대의 경우엔 누군가에게 복수를 당하겠지
내가 쓰러지면 늬들이 울어는 주냐?
내가 쓰러지면 늬들이 기억은 허냐?

우리의 기억을 지배한 것들은 보통 TV에서
우리의 신경을 지배한 것은 자극으로 가득찼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보통 참고해서
돈을 벌고 쓰는 것의 반복을 우린 삶이라 불러
너와 싸우다 죽는 일 따위 두렵지 않아
다만 사랑했던 사랑하는 이들이 고통 받겠지
내가 쓰러지면 울 일이 뭐가 있냐?
내가 쓰러지면 니 알 바 아닌데.

미안하다.
니 월급을 내가 주냐, 니 용돈을 내가 주냐?
니 카트에 풍선을 달아주길 했냐,
아템을 하나 현질해 준적이 있냐?
레포트를 써주길 했냐,
니 스파링할 때 한 대 맞아준 적이 있냐?
미안하다, 이래라 저래라 해서.
간다.

-蟲-

1. 내가 생각하는, 혹은 기대하는 학문이란 그저 진리 추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믿는 진리란 사실이다. 문제도 해결책도 그 한계 내에서 그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다루어지는 모두에게 강제된 무언가이다. 그래서 나는 합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같은 문제를 두고 서기 위해, 싸우든 손을 맞잡든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과정을 거칠 수 있기 위해 '세계'가 자의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두 발로 굳은 땅을 딛고 서야한다. 땅을 다지고 디딜 자리를 만드는 것, 그것이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학문의 모습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보다 사람들의 앎이란 것이 좁고 얕았던 시절에는 확인해야 할 것도 적었을 것이고 그래서 수월하게 신념을 갖고 행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더 넓고 더욱 견고한 앎의 영토를 얻었기에, 그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한 각 개인은 확인해야 할 것이 더 많아진 것 아닌가 한다. 학문의 성과가 축적되어 왔고 교육의 질이 높아졌으니 물론 저마다 이전보다 자유롭게 그리고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실천을 감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 때까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모두가 알 때까지, 학문은 그저 앎을 추구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학문과 달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각자 얼만큼의 확실성을 견지하고 언제부터 걸음을 내딛을 것인지는 그야말로 각자의 선택일는지도 모르겠고. 결국 거창하게 허황된 나와 현실적으로 비루한 나 사이의 싸움이다. 한편에서는 학문의 이상과 현실의 저열함을 꽥꽥거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시궁창 같은 현실을 핑계로 이상의 비현실성을 조소하고 또 자조하면서, 어쨌든 실상은 후자에 가깝겠지만.

2. 몇 시간 뒤면 지도교수님께 과제 검사 받으러 가야 한다. 전 지도교수님께서 부과하신 과제는 기한도 넘기고 어물쩍 잊고 지내다 그저께 뵙고 또 혼이 났다. 게으르고 못난 주제에 욕심은 많아서, 그저 대화편 요약 정리만 하면 될 일을 혼자 이 얘기 저 얘기 껴 붙이다 제풀에 지쳐 죽도 밥도 안 되게 일을 망치고, 나름 괜찮다 싶었던 논문 주제는 걷어 차이고 깎이고 조각이 났는데도 그 쪼가리마저 감당을 못해 주위 사람들에게 의구심만 심어주고 있다. 제대로 읽을 줄은 아는 건지, 아마도 사람들은 나에 대해 그것이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그렇게 의심을 받다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하고. 이러니 저러니 궁시렁거리고 징징거려도 결국 또 기고 구르며 버티겠다는 결론밖에 없지만, 어쩌면 끝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뭐 가 봐야 알겠지. Oxford 홈페이지 교수 소개란에 내게 필요한 최신 논문들 몇 편이 내려받을 수 있게 열려 있어서 기분이 좋다. 그냥 그러고 산다.

3. 나는 내가 나 자신을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자괴감에 빠져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상적이라서 도무지 가당치 않은 기대를 스스로 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늘상 갖고는 있다. 잘 모르겠다. 내게 장점이 있다면 아마도 현실에서 결과로 나올 것이니 그걸 결론이 나기 전에 미리 자부할 필요가 있을까? 반대로 뭔가 결과를 보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단점과 한계를 직면하고 그걸 어떻게든 붙들고 씨름하는 것 아닌가 싶다. 선생님들 말씀대로 자괴는 부정적일 따름일지도 모르겠으나, 원동력은 되지 못할지라도, 그게 일종의 부담이나 강제일 수는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게으르고 비겁해서 혼자서라도 내 등을 떠밀고 윽박을 질러야 한다는 그런 절박함이랄까? 그럼 또 말씀대로 내 할 일이나 알아서 나 혼자 잘 하면 그만인데 왜 그리 주변을 치받으며 짜증을 부리고 화를 내고 욕지기를 내뱉는 건지. 사실은 분하고 억울해서 그렇다. 그야 잘못은 나에게 있다. 내가 제멋대로 어울리지도 않게 기준만 높게 잡아 놓고, 그 기준에 내가 못 미쳐 옴짝달싹 못하는 와중에 열등감이 폭발해서, 잘난 자들이 잘난 값을 하는 꼴이 아니꼽고 띠꺼워서,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 부러워하고 혼자 삐치고 혼자 지랄쌩쇼를 하는 것이다. 뜻을 펴지 못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지도 대가를 받지도 못하고 그런데도 나 못지 않은 높은 기준으로 스스로 채찍질하며 묵묵히 더딘 걸음을 걷는 사람들, 그러다 죽어 버린 사람들이나 그들을 가슴에 묻고 더 무거워진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는 사람들, 그런 스승들, 그런 선배들, 그런 친구들이 떠올라 이 기준을 벗어난 사람들, 벗어났다는 그것 때문에 무시하는 거라고 내가 누명을 씌운 그 사람들, 그들에게 부당하게 화를 내고 삿대질을 해대는 것이다. 맞다. 다 내가 병신이라 그렇다. 어쩌겠나, 제 목숨줄 간수도 제대로 못하던 진작부터 배냇병신인 나 따위가, 배배 꼬이고 뒤틀린 심사로 어거지 난장을 부리는 걸, 그렇게 생겨먹은 걸. 그래도 현실에서 사회 속에서 미쳐 날뛰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4. 나이가 그래서 그런가, 갈수록 주변에 연애니 결혼이니 출산이니 이런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 막막하고 각박한 바닥에서 그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다들 안 다치고 버티지 않겠나 싶다. 『파이드로스』 식으로 하자면야 둘만의 알콩달콩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투영된 저 천상의 아름다움, 그곳에서의 기억을 되짚는 철학으로 날아 올라야 한다고 말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런 거 내다 버리고 그냥 좋아 죽겠는 시기와 나른하니 편안한 시기를 거치며 남들은 알아서 살라 그러고 둘씩 둘씩 혹은 둘이 셋 되고 넷 되어 그네들끼리만이라도 즐거우면 그게 쾌락의 총량에 이바지하지 않겠나 싶기도 하고. 이게 뭔 개소리래냐. 솔직하게 말하자면, 갈수록 주변의 고통에 내성이 약해지는 듯하여 불쌍한 꼬라지들은 그만 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세상이 행복하면 나는 참 마음 놓고 자학하고 자괴감에 빠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남들은 나몰라라 하면서, 예지계에서 가져온 내 영혼 속 기억은 언제쯤이나 되살아나려나, 나는 레테의 강물을 뭘 얼마나 들이 쳐마셔서 이 꼬라진가, 뭐 그런 망상이나 하면서.

5. Google Search: Reunion(링크). 그냥, 마무리는 훈훈한게 좋을 듯하여.

-蟲-


1. 왜 철학자들은 알아먹지 못할 소리들만 지껄이느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다른 한편 철학계 내에서도 진영에 따라 한쪽에서 다른 쪽을 향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는 비판이 오가기도 한다. 앞의 경우에는 철학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고 어려워야만 한다. 고유한 역사와 방법론을 갖춘 학문체계로서 철학의 특히 가장 첨예한 논쟁이 오가는 주제들과 그에 관한 여러 논증들이 일반인들에게 쉬울 필요는 없다. 사용되는 개념어들은 각기 그 배경에 여러 상이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입장들을 전제하고 그 논쟁들을 아울러 일종의 개념사를 갖추고 있다. 철학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방법론으로서 논증은 그에 대한 분석, 재구성, 그리고 평가에 필요한 논리적 훈련 없이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다. 물론 이는 논증을 구성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수학자들, 과학자들, 여러 학문들 각각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가는 논쟁들과 그들의 연구성과들에 대해서는 마치 모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구는 치들이 유독 철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향해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학문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고찰도 없이, 철학을 마치 점술이나 미신처럼 대하며 혹은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며 철학이 자신에게 감동과 교훈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철학은 그것이 설령 가치나 실천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라도 그 자체로서는 학문이지 않을 수 없다. 정치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 혹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한다는 것 이전의 문제이다. 해당 철학적 입장이 문제로 제기하는 현상이 무엇이고 왜 문제가 되는지, 그에 대해 취해야 할 입장으로 그 철학적 이론이 주장하는 바가 어떻게 정당화되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논증하는 것, 그것은 당장에 문제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하고 그 입장이 근거하는 전제들에 대한 여타의 입장들이 제기하는 반론들에 대한 타당한 변론을 필요로 하며 그 과정에서 다시 연구사와 결부될 수밖에 없다. 누차 하는 말인데, 철학을 날로 먹으려는 새끼들에게 철학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탁상공론으로서의 철학을 부정하는 자들이 철학을 망치고, 교양팔이 사기꾼들을 양산해낸다. 다시 제대로 돼먹은 철학은 그 교양팔이 장사꾼들을 향해 어려운 소리만 지껄인다고 비판한다. 이 어려움은 앞서의 어려움과 의미가 다르다. 저 사기꾼들은 논증을 통한 정당화라는 학문적 소통의 근간으로부터 벗어나 짐승처럼 짖어대는데, 그것은 이미 말이 아니기에 알아들을 수 없고 그래서 어렵고 난해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왜 어려운 소리만 하느냐'며 철학을 욕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어렵지 않게 이 미친 헛소리의 추종자들을 찾을 수 있다. 이성의 신화를 해체한다느니 합리의 독재로부터 혁명을 이루자느니 하는 소리를 '맥락 없이' 받아들이면 철학 어렵다고 징징대는 자들과의 접점이 나오기는 한다. 그건 반지성주의이다. 그러나 흔히 한국에서 '그건 학문도 아니다'란 욕을 먹는 '사이비' 현대철학들도 그 본모습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될 때에는 막무가내 신들려 떠드는 방언을 지껄이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Sokal's hoax 등을 고려해 본다면 그 본모습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까지 자비를 베풀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지만, 부분으로 전체를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와중에 전범으로 혹은 그 피해국가로 한가운데에서 포화 속에 죽다 살아난 서구권에서 그들이 신앙에 가까운 태도로 추구하던 이성과 합리가 무력하였다는 경험을 딱히 그런 신념을 가져본 일이 없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가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딱하고 안타깝게 그들의 절규를 보살펴 헤아릴 수는 있겠으나, 어쨌든 이성과 합리가 도덕적 규제를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건 철학의 과제이지 철학의 패배선언은 아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러거나 말거나 문제는 이 나라의 사기꾼들이 보여주는 작태인데, 학자연하는 그 거짓말쟁이들은 합리적 비판이 애초에 불가능한 그러한 방식으로들 떠들어댄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근거가 무엇이고 어떤 논리에 기초하고 있는지, 그 전모를 파악할 기존의 이론적 전통이나 어떤 역사적 맥락은 있는지, 그런 걸 받아들여야 분석과 평가가 가능할 터인데, 그걸 거부하는 쓰레기들을 왜 학자 취급을 해줘야 하겠나? 이런 점에서 볼 때,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기도 하다. 적어도 그것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므로.

2. 이제 논문 심사까지 대략 넉 달 정도 남은 마당에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놓치기 아쉬운 기회들이 널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홍보를 겸하여 몇 가지 올려 보자.

정암학당 11월 공개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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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신의 자유, 인간의 자유
2. 강사 : 송유레(경희대 교수)
3. 일시 : 2013년 11월 16일(토) 오후 3시~5시
4. 장소 : 삼선동 1가 8번지 3층 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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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자유, 인간의 자유

송유레

그리고 한마디 말의 힘으로 /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 폴 엘뤼아르 (1895-1952)

  자유는 많은 이들에게, 특히 식민과 독재의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가슴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가치이다. 자유는 타민족의 예속과 독재자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정치적 이념을 일컬을 뿐만 아니라,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이라는 종교적 경지를 이르기도 하고, 허위와 편견을 벗어난 지적인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어느 누구의 간섭도, 어떤 강제도 없이 원하는 대로 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상태를 지칭하기도 한다.

  우리는 왜 자유를 원하는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자유는 무엇인가? 본 강좌에서는 자유의 이상에 대한 고대 플라톤주의자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신(神)을 닮기’를 철학의 목표로 내세운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신의 자유는 인간이 닮아야 할 자유의 본이다. 그런데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에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그에겐 나쁜 것을 선택할 자유도 없고, 나쁜 것을 행할 능력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철학자들의 신은 자유롭다고, 또 전능하다고 불린다. 본 강좌에서는 상식을 뒤엎는 이 역설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강사 소개:

송유레

신플라톤주의의 주창자인 플로티누스에 관해 박사 학위를 했다. 함부르크 대학의 도로테아 프레데 교수와 프리부르 대학의 도미니크 오마라 교수에게서 사사했다. 플라톤과 플라톤주의 전통에 연구 중점이 놓여 있지만, 고대 철학 전반에 고루 관심이 있으며 교부학 공부도 진행중이다. 신(神)과 덕(德)이 최대 관심사이며, 최근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윤리학』을 번역했다. 이번 강좌에서는 노예 에픽테토스의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에 이어 고대 플라톤주의자들이 꿈꾼 ‘신적인 자유’를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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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 <투스쿨룸의 대화> 윤독회을 열고자 합니다.
키케로 <신들의 본성> 이후 두 번째로 번역되는 철학책입니다.
참여해주실 분을 모십니다. (정암 윤독 지원 대상은 아님; 점심 밥값은 주십사 연구실장님께 로비? 중입니다)
12월과 1월 방학 중에 8주*3시간입니다. (오전에 합니다; 정암 강의실 일정 때문에 수정될 수 있음)
영혼의 고통과 치료에 관한 대화입니다.
라틴어를 좀 읽을 수 있는 철학전공자들로 채워지길 기대합니다. (라틴어는 몰라도 번역은 드리니 철학에 관심이 있으시면 참석 가능) 번역본을 제공합니다. 내년 3월 초 출간예정입니다.
참석 가능하신 분들은 kimjins2@snu.ac.kr로 연락주십시오.
5명 정도 되면 일정을 확정하여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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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겨울학기에 늘 그렇듯 서울대에서 고전어집중강독이 시작될 터인데, 고전어 문법과 독해 훈련이 아직도 한참이나 부족한 나로서는 좀 가서 듣고 싶건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생기지는 않을 듯하다.
  뭐 어쩌겠나, 이게 다 내가 게을러서 생긴 일이거늘. 자업자득이랄지.

3. 너무 인생을 흥미본위로만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논문이나 혹은 그런 입장들에 대해 좀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봐야 할 논문들은 많은데 나는 또 어느샌가 주마간산하고 있었다. 말을 달린 그 만큼 걸어서 되돌아가야 한다. 매번 이런 식인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蟲-

전헌상, 「『소피스트』에서 있지 않음과 거짓 진술」 정리

1. 내용정리

1-1. 소피스트의 규정과 있지 않은 것(to me on)의 문제

  소피스트는 말로 된 모상을 만들어 내는 자로, 또한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속임술을 가진 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모상은 진짜가 아니라 진짜와 닮은 다른 것이다. 진짜인 것은 정말로 ~인 것이므로 진짜가 아닌 모상은 정말로 ~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상은 정말로 모상이다. 여기에는 있지 않음과 있음이 섞여있다. 또한 속임을 통해 거짓 믿음이 생기는데 이러한 믿음은 있는 것들과 반대되는 것들을 믿음으로써 생겨난다. 진술 또한 그러하다. 거짓은 있지 않은 것들을 믿는/진술하는 것이며 전적으로 있지 않은 것들을 어떤 식으로 있다고, 전적으로 있는 것들을 어떤 점에서도 없다고 믿는/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진술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 거짓 믿음/진술이 있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한다면, 있지 않은 것은 사유, 언표, 진술이 불가능한 것으로 동의되었기에, 그 대상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며, 거짓 믿음/진술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소피스트를 이러한 거짓의 생산자로 규정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며, 이러한 규정 자체가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있다고 말하거나 믿으면서, 그것을 언표하여 모순에 빠지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 이를 위해 있지 않은 것이 어떤 점에서 있다는 것, 그리고 있는 것은 어떤 식으로 있지 않다는 것을 결론으로 강제해야 한다.(1장)
 
1-2. 최고류들의 결합과 있지 않은 것

  편의상 운동, 정지, 있는 것, 같은 것, 다른 것을 M(Motion), R(Rest), E(Existence), S(Sameness), D(Difference)로 약칭한다. M과 R은 서로 섞일 수 없기에 둘이다. M과 R 둘 모두에 섞이는 E는 그 둘이 서로 섞일 수 없기에 세 번째 것이다. 이제 이 세 유들 각각이 자기 자신과는 '같고(S)' 나머지 둘과는 '다르다(D)'. S와 D는 모두 M과 R에 공히 속하기에, 그 둘 중 하나일 경우 다른 하나를 본성의 반대쪽으로 강제할 것이므로 S와 D가 M과 R로부터 구분된다. 다음으로 S가 E와 동일시된다면 M과 R이 모두 있다고 옳게 말하면서 그 둘이 같다고 불합리하게 말하게 되므로, S는 E와 다르다. 따라서 S는 네 번째 유이다. D와 E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있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어떤 것들은 항상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 말해진다.(255c14-15. 인용 1.)" 라는 진술이 등장한다. D는 항상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만 말해지는 반면 E는 두 형상 모두에 몫을 나누어 가지므로 D는 다섯 번째 유이다.(2장 9쪽)
인용된 구절에서 제시되는 구분은 있음과 있지 않음의 의미에 관련되므로 그 해석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해석을 위해 구문론적 구분과 의미론적 구분이 전제된다. 이에 따르면 E의 경우 주어만을 취하는 X esti의 경우에는 구문론적으로 complete use, 보어까지 취하는 X esti Y의 경우에는 incomplete use라는 구분이 이루어지며 이는 각기 의미론적으로 전자가 존재를 나타내고, 후자는 다시 동일성의 의미와 서술의 의미로 구분된다. 이를 전제로 크게 세 가지 입장이 제시된다.

1) '그 자체로'는 complete use를,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는 in-를 의미하며, E는 두 용법 모두를 지니고 의미론 상에서 각기 존재와 동일성으로 구분된다. D는 (구문론적으로) 후자의 용법만을 지닌다.
2) 두 구분 모두 구문론적으로 in-을 의미하며, 의미론적으로 E의 경우 전자가 동일성, 후자가 서술로 나뉘고 그 각각이 순서대로 E의 '그 자체로' 쓰인 경우와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쓰인 경우에 해당한다. D는 (구문론적으로나 의미로적으로나) 후자의 용법만을 지닌다.
3) '2)'의 구분과 같으나, E의 경우 서술관계에 따라 주어와 보어가 경우에도 '그 자체로'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희다"의 경우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흰 것으로서 있는 것(E)이 아니라 그 성질을 가짐으로써 '다른 것과 관련하여' 희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흰 색에 대해 "그것은 희다," "그것은 색이다"의 경우 주어 자체의 성격에 의해 그것이 희고 색이다(E). 즉 '그 자체로' 희고 또한 색이다. D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흰색이 핑크색과 다르다면(D), 흰색임 자체의 부분이 '핑크색과 다름'은 아니기에, 흰색은 '다른 것과 관련하여', 즉 D와 관련하여 다른 것이다.(9-12쪽)
  다섯 유는 상이하며 서로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결합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M은 R과 다르다(D). 그러므로 M은 R이 아니다(~E). M은 E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metechein). 그러므로 M은 있다(E).
(2) M은 S와 다르다(D). 그러므로 M은 S가 아니다(~E). M은 S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그러므로 M은 같다(S).
(3) M은 D와 다르다(D). 그러므로 M은 D가 아니다(~E). M은 D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그러므로 M은 다르다(D).
(4) M은 E와 다르다(D). 그러므로 M은 E가 아니다. M은 E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그러므로 M은 있다(E).

각 항목에서 밑줄 친 쌍은 외견상 모순된다. 엘레아의 손님은 (2)와 관련하여 "그것이 같은 것이고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 같은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전자는 M이 자신과 관련하여 S의 몫을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후자는 D와 결합하기 때문에 S와 '분리됨으로써' 그와 같이 말한다는 것이다.(인용 2.)
  M은 자신 이외의 유들에 대해 그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것들이 되지만, D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것들이 아니게 된다. 이 과정에서 metechein을 통해 긍정되는 것은 M을 주어로 하여 그것과 그 외의 유들 사이의 서술관계이다. 반면 부정되는 것은 M을 주어로 하여 그 외의 것들과의 동일성 관계이다. 즉 앞서 외견상의 모순은 E의 의미론적 구분이 지니는 애매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가 einai의 애매성을 강조하기 위해 진행되었다면 그 동사의 애매성을 강조하지도 않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플라톤이 강조하고자 한 지점이 einai의 보어가 지니는 애매성이라는 견해가 제시된다. 다시 말해 부정되는 경우는 추상명사가, 긍정되는 경우에는 형용사가 술어 자리에 온다는 것이다. S의 경우 그 자체로 추상명사로도 형용사로도 사용되지만, E와 D의 경우 그렇지 않은데 플라톤이 관사를 제거함으로써 이러한 모순을 후자의 두 경우에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이 입장의 근거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필요한 일은 동일한 한 쌍의 유들에 외견상 모순적 문장들이 성립가능하다는 것뿐이기에 그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여 애매성의 문제를 여기에서 확정지을 필요는 없다.(12-16쪽)

  "모든 유들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점은 필연적이다. ... 다른 것의 본성은 각각의 것을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 모든 것들이 같은 식으로 이렇게 있지 않다고, 또 다시 그것들은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고 또한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옳게 말하는 것이다."(인용 3.)

이는 앞서 M과 E의 관계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일반화된다. 

(E를 제외한) 유 X에 관해서:
(1) X는 E와 다르다 → X는 있지 않은 것이다.
(2) X는 E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 X는 있는 것이다.
(3) 따라서: X의 경우,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그러면(ara) 형상들 각각에 관해서, 있는 것은 수가 많지만, 있지 않은 것은 셀 수 없이 많다(인용 4.)"는 진술이 문제가 된다.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우선 1) 있는 것(to on)과 있지 않은 것(to me on)은 불완전용법으로 간주되고, 2) '~에 관해서 있는 것'의 의미는 einai의 converse use로 간주된다. 이 두 전제 하에서 각각에 관해 있는 것이 수가 많다는 것은 서술관계를 참으로 만드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고, 있지 않은 것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은 동일성의 부정을 참으로 만드는 F가 무수히 많다는 것이라 해석된다. 이 해석에 따라, 그리고 논리적 연결을 함의하는 'ara'에 주목할 때, 인용 3.의 on을 complete use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를 근거로 나아가 『소피스트』 전체에서 complete use는 역할이 없다는 주장도 제시된다. 그러나 인용 3.에서 그리고 그 이전의 맥락에서 M이 E의 몫을 나누어 가짐은 M을 독립적인 하나의 유로 확립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표현이고, 그 과정에서 'M은 ( )이다'의 incomplete use를 적용할 경우 부자연스럽기에 인용 3.에서는 complete use가 더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인용 4.는 incomplete use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둘 사이의 차이에 더하여 두 번째 차이는 다음과 같다. 인용 3.에서 on과 me on은 E와의 관계를 규정되었고 그 관계를 통해 M 자체를 가리켰다. 반면 인용 4.에서 M에 관한 on은 M에 관하여 그것의 몫을 가지는 유들을 일반화해서 가리킨다. me on 역시 M이 아닌 그것과 다른 모든 유들을 가리킨다. <M의 몫을 가진다? M의 몫을 가질 경우 어떤 주어에 대해 그것이 '움직인다'라고 서술된다. 'M이 ~이다'의 형식에서 보어 자리에 오는 유들이 M의 몫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나?> 이 두 차이로 인해 인용 3.은 complete use, 인용 4.는 in-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든 둘 모두 in-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든 두 대목 사이에서 모종의 확장, on과 me on을 규정하는 방식의 차이를 해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16-20쪽)
  3.에서 어떤 것은 E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방식을 4.에 적용하여 S가 M에 관련해 있는 것이 되는 것은, M이 나누어 가지는 E를 나누어 가진다는 점에서 M에 관해서 있는 것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의 경우 3.에서 다름을 통해 규정되었듯 4.에서도 S가 M이 나누어 가지는 E와 다름을 통해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E 자체와 다른 것'은 'M이 나누어 가지는 E와 다른 것'과 차이가 있다. 4.에서 E 자체는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의 예이나, E 자체는 자기 자신과 다를 수 없으므로 E 자체와 M이 나누어 가지는 E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방식으로 볼 때 3.에서 M은 E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는 것이 되고, 4.에서 S는 M이 나누어 가진 E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M에 관하여 있는 것이 된다. 이는 '몫을 나누어 가짐'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해석이며, 3.과 4.의 차이는 단지 새로운 항 S가 추가되었다는 점뿐이다. (20-23쪽)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일 수 있음을 보인 뒤, 엘레아의 손님은 있는 것이 있지 않은 것임을 보이고자 한다. "있는 것은 나머지 것들이 있는 그 만큼 있지 않다. 나머지 것들이 아닌 한 그 자체는 하나이지만,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것들이지 않기 때문이다.(인용 5.)" 그러나 5.는 E가 그 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것들이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고, 3.은 E 이외의 것들이 E와 다르다는 점에서 E이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므로 둘 사이의 차이는 없다. (23-24쪽)
 
1-3. 있지 않은 것과 다른 것, 그리고 거짓 진술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점이 밝혀졌으므로, 있지 않은 것을 말하는/믿는 거짓 진술/믿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손님은 거짓 진술/믿음을 검토하기에 앞서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의 반대가 아닌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 말한다"는 것에 대해 추가적인 검토를 시작한다. 예를 들어 크지 않다는 것은 같은 것보다 작은 것을 더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일반화하여 그는 부정어(me, ou)는 반대가 아니라 그 다음에 오는 이름과 다른 어떤 이름을 드러내며, 그 이름들이 관련하는 사물과 다른 어떤 사물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아름답지 않은 것과 아름다운 것 등의 부정/긍정 쌍은 전자가 후자보다 덜 있는 것이 아니다. 전자는 후자에 대비되는, 다른 것의 부분이며 다른 것은 있는 것이므로 (그 부분인) 전자 또한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의 본성은 있는 것들에 속하고, 다른 것의 본성이 있기에, 그것의 부분들도 못지않게 있다." "다른 것의 부분의 본성이 있는 것의 본성에 대비되었을 때, 이 대비는 있는 것 자체에 못지않게 존재인 듯하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그 대비가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서의 '있지 않은 것'이다.
  이 대비가 거짓 진술의 분석에 적용되는 방식이 검토되어야 한다. 거짓 진술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1) (X에 관한) 거짓 진술은 X에 관해서 있는 것들과 다른 것들을 말한다.(인용 6.)
(2) (X에 관한) 거짓 진술은 X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들을 있는 것들로서 말한다.(인용 7.)

그리고 '테아이테토스는 난다'라는 진술을 거짓 진술로서, '테아이테토스는 앉는다' 라는 진술을 참인 진술로서 예시한다. 테아이테토스가 몫을 나누어 가지는, 혹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F라고 하는 진술을 참으로 만드는 속성 F들이 그에 관해서 '있는 것들'이라 보는 게 자연스럽다. 위의 거짓 진술은 테아이테토스에 관해서 있는 것들 중 하나인 앉음과 다른 날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앉음'과 다르지만 '테아이테토스는 F이다'를 참으로 만드는 많은 속성들을 통한 참인 진술들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 세 가지 해석들이 제시된다. 

1) Oxford interpretation이라 불리는 입장은 6.에서 '있는 것들'에 보편양화사를 추가하여 해석한다. 테아이테토스에게 '실제로 귀속되는 모든 속성들'과 다른 것은 그에 관해서 거짓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문헌에 없는 양화사의 도입을 설명할 부담이 있다.
2) 6.에서의 '다름'을 양립불가능성으로 해석한다. 이는 거짓 진술의 일반적 규정을 제공하긴 하지만, 반대가 아닌 다름을 강조하는 이전까지의 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
3) '다름'의 범위를 한정한다. 예를 들어 '크지 않은 것이 작은 것 못지 않게 같은 것을 지시할 수 있다'는 말에서 큼, 작음, 같음은 한정된 범위에 속하며 양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역시 명시적 언급이 아닌 추정에 근거한다.

세 해석들 중 1)이 다름의 일관된 의미로서 비동일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들'이 보편양화사를 내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자연스럽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추가적인 해석이 요청되는 이유는 3., 4.에서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인 있지 않음이 거짓 진술에서의 있지 않음과 다르기 때문이다. 진술 분석에서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은 서술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서술관계의 부정은 최고류들의 결합, 3., 4.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이다. 6.에서는 X에 관해서 '있는 것과 다른 것'이 X와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하는 유들과 다른 유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비동일성으로서의 있지 않음과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서의 있음은 파르메니데스를 극복하고 복수의 존재자를 확보하는 동시에 그것들의 결합을 성립시켜 다양한 진술 또한 가능케 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와 '늦게 배운 노인들'을 논파하는 이 이론적 도구들만으로는 거짓 진술의 역설을 논파할 수 없다. 이 두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고자 했던 시도가 문제이다.

2. 평가(작성중)

구문론적 구분과 의미론적 구분을 중심으로 연구사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가 이루어지고, 이러한 입장들이 주목하는 핵심 문제를 적시해준다.
(1장)
<이 작업이 유들의 결합과 무슨 관계에 있는가? "있음"의 불가능성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유들의 결합으로 나아가는 논의의 전개가 설명되기 어렵다.>
인용된 구절에서 제시되는 구분은 있음과 있지 않음의 의미에 관련되므로<왜?>
이 시점에서 필요한 일은 동일한 한 쌍의 유들에 외견상 모순적 문장들이 성립가능하다는 것뿐이기에<왜?> 그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여 애매성의 문제를 여기에서 확정지을 필요는 없다.(12-16쪽)
인용 3.에서 그리고 그 이전의 맥락에서 M이 E의 몫을 나누어 가짐은 M을 독립적인 하나의 유로 확립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표현이고, 그 과정에서 'M은 ( )이다'의 incomplete use를 적용할 경우 부자연스럽기에<보어가 없어서?>
<아닌 것 같은데.>(20-23쪽)
21쪽. M과 완전히 분리된 R? 256b. 나누어 가질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22쪽. complete use에서는 주어의 존재가 표명되는데 in-에서는 metechein이 이야기된다면, einai는 metechein과 같은 것인가?
<X>(23-24쪽) E가
<'대비로서의 다름이 있지 않은 것이다.' 필자의 주장 아닌가?>
25쪽. 다른 것이 있기에 그 부분도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의 부분이 따로 정의된 어떤 무엇이기에 있는 것이다. 257e.
25쪽. 다른 것의 부분의 본성이 아니라 다른 것의 본성의 부분. 번역 문제.
28-29쪽. '못지 않게'가 아니라 '보다는 오히려'이다.
'테아이테토스는 난다'라는 진술을 거짓 진술로서, '테아이테토스는 앉는다'<<'날고 있다,' '앉아 있다' 아닌가? 테아이테토스가 단순한 유가 아니기 때문에 유들의 결합 구도를 그대로 가져와 '앉음 일반'과 같은 술어를 가정할 수는 없다. 『티마이오스』와 『테아이테토스』로 확장될 여지가 막혀 버린다.>>
<E 자체와 X가 나누어 가진 E를 구분할 때엔 일관성만 강조하고 추가된 부분을 설명하지 않더니, ~E와 D의 관계를 유들의 결합에서 거짓진술의 분석으로 적용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추가된 부분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진술에서 이름(주어)과 말(동사)의 구분이 추가되었음에도 이에 대한 고려가 없다. 유들의 결합과 달리 말은 앞서 '모상'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유들의 결합과 진술에서 이름과 말 사이의 결합을 단순히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또한 다름으로서의 to me on 규정을 통해 모든 각각의 것이 자신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to me on과 필연적으로 결합할 수밖에 없음에도 손님은 소피스트가 진술의 경우 to me on과 결합하지 않을 것이라 재반박하리라고 말한다. 이 재반박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도 역시 유들의 결합과 진술에서의 결합을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모상의 규정과 거짓의 규정 역시 구분해야 한다. 엘레아의 손님 혹은 플라톤 자신이 유들의 결합에서 규정된 다름과 to me on을 거짓 진술 분석에도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거기에 추가되는 요소가 문헌 상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면 소위 그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그것이 문헌 자체의 문제라는 입장은 유지될 수 없다. 

=================================1차 요약 실패==================================

1. 해석과 정리를 구분하라.

2. 가능한 한 긍정적인 해석을 통해 비판하라.

3. 이기려 들지 말고 배울 것을 찾아라.

4. 인용과 주석을 거쳐 확인하며 연구의 범위를 넓혀라.

5. 글쓰기의 방식을 고민하라.

그래서 결론은 위 요약 정리는 실패입니다.

그 외에 논문에서 제안된 대안적 해석에 따를 경우, 예를 들어 '나무는 땅이 아니다'와 같은 사태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관사를 생략함으로써 모순을 드러냄'이라는 것은 Brown의 주장인가 전헌상의 주장인가? 본문에서 'to heteron,' 'tou heterou,' 'heteron esti'의 등장을 논문은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인가? 요약 정리하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 아, 『소피스테스』 요약도 해야지. 나야말로 정말이지 게을러 터진 쓰레기 버러지로구나. 나가 뒈지자, 쌀과 물과 공기가 아까운 화상아.

=================================2차 요약 시도==================================

-작성중-

1. 11월 15일에 이런 행사가 있다.

  올해로 26회째라는 건국대학교 철학과 프로메테우스 제전. 이런저런 부침이 있었고 학과제에서 학부제를 거쳐 다시 학과제로 전환되는 동안에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이어져 온 나름 크게 열리는 행사이다. 학과 교수님들이 직접 학회 지도를 위해 시간을 내시고 학부생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1년 공부를 탈탈 털어 나름 논문 형식을 갖춰 학술지를 만들고, 또 학회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도 춤, 노래, 연극 등 여러 방식으로 한 해 동안의 학교생활 정리하듯 놀아제끼는 마당이랄지. 문화제는 꾸준히 이어져 왔던 반면에 학술제는 한동안 열리지 않다가 03년도에 98학번 선배들 주도로 서양철학사 공부하는 모임이 소규모로 재개시켜서 04년도부터 동양고전강독, 서양철학, 독일어강독, 서양철학사, 동양철학사 각기 학회들 생기면서 규모가 커졌고 학술제가 커지면서 문화제가 좀 위축되다가(학부제랑 진입생, 다전공생, 전과생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다른 일도 좀 많아서 그랬다고는 하는데 잘 모르겠고) 나 졸업하면서부터 문화제랑 학술제 균형이 다시 좀 맞추어져 가는 듯. 학부생활의 반 이상은 저 학회, 학술제랑 엮여 있는 나로서는 매년 저 행사가 이어지는 걸 보는 게 나름 감회에 젖게 되는 일인데, 뭐 어설프게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졸업한 선배 나부랭이가 괜히 가봤자 꼰대질밖에 더 되겠나 싶어 몇 년 정도는 안 가고 있다. 이번에는 학생회장이고 학회장이고 죄다 나랑 좀 연이 깊다면 깊은 사람들이라, 또 동기놈들 본지도 오래 됐는데 이번에는 다들 얼굴 비추는 듯해서 갈까 말까 고민 중. 학술제, 문화제 끝나면 철학과 창립 50주년 기념행사가 이어진다는데, 외부 사람들 가면 공짜로 밥이랑 술 주고 거창하게 소개도 시켜주고 그럴 테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가 봐도 좋을 듯. 나는 내일 논문계획발표 결과부터 봐야 하겠다. 이러고 있으려니 내가 '학위논문'이란 것을 써 본 일이 정말로 없는 놈이구나 싶다. 학사논문은 논문이라기 보다 '저 그래도 고대그리스어로 문헌 읽고 쓴 거에요' 뭐 자랑하는 일기나 감상문 수준이었겠고. 이 모양이니 선배로서 낯부끄럽기도 하고 해서 이래저래 공부고 학교생활이고 열심히 애쓰는 사람들 보러 가기가 저어되기도 하는구만.


  『뤼시아스』, 『향연』, 『파이드로스』, 『필레보스』가 말하자면 죄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이게 앎에 대한 사랑을 거쳐서 아름다움 그 자체와 지상에서의 아름다움이 현상하는 방식, 아름다움과 좋음과 관계, 좋음이 다른 이데아들과 맺는 관계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플라톤의 철학 내에서는 가치판단, 지향성, 온갖 문제와 관련하여 핵심적인 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좇으며 애쓰는 그것이 무엇이고 왜 그렇게 되는지, 의지와 욕망의 문제도 얘기될 수 있고 정의와 행복이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에 대해서도 이 사랑이란 것이 문제의 근간을 이룰 수 있을 듯하다. 내가 학부시절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추태 중 하나로 기억하는 몇몇 대학연합의 어떤 학술제도 주제가 '사랑'이었더랬지. '철학사에서는 사랑에 대해 논한 바를 찾을 수가 없어서'라는 말을 해서 이 사람들이 뭘 믿고 학술제를 하겠다고 하는 건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던 기괴망측한 만담회였는데, 뭐 어쨌건 솔직히 중세를 거치면서 뭔가 신의 사랑 말고는 학술적인 연구주제로 사랑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걸고 거론된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긴 하다. 그래도 고대 그리스부터 헬레니즘 시기까지는 꽤나 날리는 주제였건만, 쩝. 뭐 그러거나 말거나 서울대에서 할 예정인 저 학술대회가 무슨 대단한 성과를 내리라는 기대는 전혀 들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 해 볼 만한 시도이지 않나 싶기는 하다. 욕망, 욕구, 의지, 기대, 가치, 도덕, 숱한 갈래로 나뉘어 버린 사랑이란 것에 대해서도 사실 철학보다는 다른 분야들이 더 많은 근거들을 가지고 더 그럴듯한 논리로 각기 고유한 주장들을 펼치는 시대에, 철학의 자기 한계를 절감하기에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전에도 말했지만 이쪽에서 내보일 패가 없는 마당에 다른 분야에서 철학이란 걸 굳이 거들떠볼 필요나 느낄지 의구심이 들어서, '이 안에서 백날 우물안 개구리 씨름질을 해봤자 노답이구나' 뭐 이런 현실인식이라도 공유되면 좋은 일 아니겠나. 문제는 인간환경미래연구원 수장께서 이 좁디 좁은 한국 서양고대철학계의 원로이시고, 3부 좌장은 또 내 지도교수님이시라는 것. 뭐 '눈치껏 알아서 기어 나와' 이런 분위기는 아닌지라 딱히 강요받을 일도 없겠지만 어쨌든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 역시 그러거나 말거나 내 논문계획 평가가 더 중요한 문제겠지만. 혹시 궁금한 사람 있으면 가서 구경해 봐도 좋지 않을까 해서 한 번 올려 본다.

-蟲-

  철학상담이 어떻다느니 치유의 인문학이 저떻다느니 개소리들이 판을 치는 와중에 또 그 약팔이 사기꾼 개소리에 넘어가 스스로 하고 있는 공부가 뭔지도 고민하지 않고 그냥 '나는 인문학도요' 이 지랄을 떨면서 세상의 답이 다 책 속에 있고 그럴싸한 경구와 어림짐작으로 어설프게 엮어낸 신념만 있으면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도 될 수 있는 듯이 구는 새끼들이 저 장사치새끼들을 부추겨댄다.

  역사를 통해 문학을 통해 그리고 철학을 통해서 무엇을 위해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다고, 그 실마리를 찾았다고 떠들어대는 씨발것들로 인해서 정작 학문은 본연의 가치를 잃고 퇴색되어 간다. 소위 '문, 사, 철'을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묶는 것 자체가 가당키나 한지도 의심스러우나 어쨌든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학문 자체는 고유한 연구사와 연구방법론 그리고 그 성과들에 대한 교육을 중심으로 전문화되어 있고 그 목표는 단적으로 말해 '앎'이다. 그것은 잘 살기 위해서도, 행복하기 위해서도, 다른 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도 될 수 없는 가장 직접적인 목표이다. 묻고 따지고 검토하는 것, 그 외의 일들은 학문 자체에 의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개개인 혹은 그 학문에 가치를 부여하고 투자를 감행하며 결과를 요구하는 사회가 떠맡아야 할 일들이다. 또한 현실에서 학문의 쓰임이란 학문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학문의 현실성, 사실에 근거한 정당성을 검토받기 위한 시험의 과정이다.

  학문을 통해 얻어 현실로 가져가야 할 것은 답이 아니라 물음이다. 구체적이며 복잡다단한 현실을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방식으로 제단하여 편협하고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생각을 피하는 게으름과 자신의 무지를 변명하기 위해 '유명한 누구씨가 어느 책에서 그랬어'라고 떠들어대는 것, 그것은 학문과 전혀 무관할 뿐더러 학문에 똥오줌을 갈겨대는 짓이다. 학문이 현실로 나올 때 그 학문은 현실에 대해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설득력을 검토받고 그 근거들을 시험받는다.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와 그에 대해 철학이 제안하는 해법은 현실을 구성하는 다른 여러 요소들과 현실 속에서 조우해야 한다.

  통계와 역학과 진화론이, 전산과 회계와 행정이, 입법과 사법과 온갖 입장들 그리고 이론들 또한 여러 응용학문들과 공학들이 제작을 통한 실현이나 현상에 대한 강력한 설명력을 통해 현실에 개입해 왔고 이런 것들이 현실화되어 얽히고 설킨 것이 그야말로 현실이다. 이것들과 무관한 철학, 이것들과 절연된 문학, 이것들과 별개의 사학이 그 자체 독자적으로 지니는 가치는 그 외의 학문들이 현실과 별개로 지니는 가치와 같은 종류의 것들뿐이다. 앎, 그것뿐이다. 그렇지 않고 현실의 모든 접근들을 부정하려 들든,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종합하려 하든, 아니면 건전하고 상식적인 방식으로 대화하고 수용하고 분석하고 비판도 하면서 상생을 도모하든, 현실에 개입하려 한다면 또 역시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그 소위 '인문학'이란 것도 정당성을 입증하고 여러 비판과 반박에 응대하여야 하며, 이러한 상호작용만을 위해서라도 다른 학문들에 대한 연구를 병행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에 앞서 자신이 속한 학문 자체가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되돌아 보는 일이 먼저일 것이다.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는 그 성과와 방법론이 외부로부터 수입되고 이식된 것인가, 아니면 자생적으로 일종의 학문풍토라 할 것을 갖추어 온 것인가 따져 물어야 한다. 그러한 틀 속에서 기초라 이야기되는 것들, 전제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작업이 완수되어 있는지 또한 반성해야 한다. 용어의 통일은 이루어졌는가? 합의된 정론과 이를 중심으로 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정리, 축적되고 있는가? 이러한 작업을 지속시키기 위한 경제적 여건은 마련되어 있는가? 이를 가능케 할 연구자들의 수는 충분한가? 자료의 수집과 정리의 방식이 정립되어 있나? 현실에 개입을 하네 현실을 규제하네마네 다른 학문들이 이러네 저러네 오지랖 떨고 분수를 모르고 개지랄 쌩쇼를 해대기 전에 당연히 자문하며 거쳐야 할 고민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들이 저 위에서 말한 과대망상 정신병에 걸린 상태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우주의 의지나 역사의 참뜻 혹은 감수성이 메마른 자들은 모르는 촉촉하고 따스한 통찰 뭐 그런 것을 지들만이 안다고(사실 그딴 걸 알 필요 자체가 없으므로 남들이 모른다는 건 맞는 얘기일 수도 있다) 떠들어대는 치들에게는 자신이 연구하는 그 학문이 실상 지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한계지어져 있고 아주 구체적으로 물리적인 배경에서 그러한 조건들을 필요로 하는 살아있는 학문이라는 실감 자체가 없다.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심지어 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들은 이미 어느 정도 마쳐 놓고서 당연시하는 고리타분하고 시시껄렁한, 연구라고 하기도 뭣한 단순반복작업마저도 반드시 필요하고 불가피하다는 것을 모르는 새끼들이 그 학문의 정수인냥 떠들어대는 직관이니 통찰이니 하는 것, 사실 그런 것은 학문이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학문이 추구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말했듯이,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을 충족시키기에 앞서 개별 학문이 학문으로서 유지되고 존속되고 가능하다면 발전까지 도모하기 위해서 그냥 구석에 쳐박혀서 입 닥치고 좆나 파야할 것들만도 산더미처럼 많다. 그럼 이러한 일들을 하는 것이 학제를 통해 연구자로 양성되는 과정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연습하고 또 이후 스스로 이어 나아가야할 인문학의 정체 아닌가. 이것이 어떻게 창의적이고 기발한 발상에 기여하고 전체를 종합적으로 보는 통찰력에 기여하며 심지어 그것이 사회 내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동안 그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다종다양한 영역들의 차이들을 싹 다 무시한 채로 일관되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나? 미친 거 아니냐.

  혹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누는 뭐 그런 일들이 조금이라도 사고를 유연하게 하고 뭐 그러는 데에 도움을 준다손 치더라도, 그건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란 것에 고유한 것도 뭣도 아니다. 모든 학문이 요구하는 일이다. 공학이 되었든 문예창작이 되었든 어디서라도 그런 걸 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심지어 대학이란 곳과도 상관이 없다.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알만한 사람을 찾아 묻고 그렇게 도움을 받아 책을 추천 받고 글을 교정 받고, 그런 게 왜 대학, 그것도 인문대학에만 고유한 기능인가? 이러한 기본교양은 '인문학'이 아니다. 혹시 그런 걸 '인문학'이라고 하고 있던 것이라면 그게 전공부심의 이유가 되는 건 전혀 아니란 것도 받아들이길 바라고.

  내 전공분야만 하더라도 고전어-우리말 사전편찬도 시도조차 못하고 있고(종교계에서 나오는 헬라어 사전 말하는 거 아니다, 라틴어가 불가타랑 고전기 라틴어 다르듯이 희랍어도 그렇게 나뉘는데 뭐 더 말해서 뭐하겠나), 그야말로 '고전'이라 불리는 주요 저술들의 번역도 갈 길이 멀고, 우리나라에서 만들고 검토해서 수용된 독자적인 편집본도 물론 없고 그걸 할 연구자들을 양성할 교육과정조차 부족하고, 이런 거 말고도 숱한 기초작업들 다 거치고 나서야 외국 학술연구서들 번역해서 도서관 꽂고 강의교재로 쓰고 할 수 있을 테니 그런 번역도 한참이나 먼 미래의 일일 테고, 이게 한국에서 서양고대철학에 국한해서 한 얘기이니 시대별, 주제별, 인물별로 나눠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는 작업들이 널려 있다.

  그나마 이런 것들은 다른 나라에서 해놓은 게 있으니 2500년을 싹 다 반복할 필요는 없어 그나마 다행인데, 가끔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우리만의 철학' 어쩌고 하는 개새끼들은 철학 처음부터 다시 하잔 얘기를 하는 듯하지만 그런 병신들은 알아서 걸러질 테고, 철학사에 관련된 이러한 작업들 말고 작금의 현실에 관련하는 철학적 논쟁들과 관련해서는 다시 앞서 이야기했던 여타 학문들에 대한 기본적인 소통능력의 부재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고, 역시나 그에 앞서 이쪽의 패가 뭐가 있어야 저쪽과 게임을 하든 말든 하는 것이지 철학 고유의 아무것도 없다 하고 들어가려면 다른 학문들이 굳이 철학을 끼고 놀아줄 이유가 없고.

  이런 마당에 씨발 인문대 나오면 취업이 안 되는데 취업 시켜줘요, 잡스가 인문학이 좋댔어요, 우린 공돌이들과 달라서 생각이 깊고 시야가 넓고 막 착해요, 이딴 씹창난 구역질이나 해대는 새끼들을 봐야 한다는 게 좀 난감하고 짜증이 치미는 것이지. 솔직히 어떤 매체에 올라간 어떤 잡소리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데, 듣자하니 그거 쓴 사람이 인문계 전공자가 아니라던가 뭐라던가 하기도 하더라. 유학파래나? 그냥 고도의 인문안티이길 바랄 따름이다.

  총체적 난국이다. 이성을 극복하고 주체를 탈피하자는 얘기를 앞뒤 싹 다 잘라 버리고 '우리에게 무식할 자유를 허하라'로 받아들인 몇몇 인문팔이 씨발놈들 때문에도 심적으로 많이 힘든데, 인문학이라 묶을 만한 게 만일 있고 또 그게 인문정신이라 할 만한 무언가를 갖추었다면, 그건 skeptomai, 묻고 따져 의심하면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앎을 향해 나아가는 정직한 양심과 성실함, 그러한 지적인 태도일 것이다. 뭐 인문학, 인문정신이라기 보다는 초창기 학문의 본래적 모습이란 게 저런 거 아니겠나. 그걸 내다 버리고 다른 모든 학문들이 저 태도를 유지하는 와중에 지 혼자 미친년 장마에 널뛰듯 하는 평론뭐시깽이 몇몇에 더해, 상담과 치유를 논하는 사기꾼들을 포함하여, '난 인문학 전공자라 좆나 톡톡 튀어요'류의 찌질이들까지 합세하니 내 마음이 심히 아프다. 이 따위 태도들로 중론이 모이고 그게 힘을 얻어 이를 바탕으로 지원책이 마련된다면 아마 학문을 더 빨리 더 확실하게 망쳐 버리는 일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순수학문은 그냥 다 무턱대고 버리는 돈 갖다 넘기는 식으로 지원하는 거다. 그 우연하고 기가 막힌 어마무지한 성과들이야 역사를 통해 봐왔을 테고, 그게 투자와 결과의 인과관계 같은 건 아니라서 미안하지만 쌩돈 날릴 수도 있는 거다. 애초에 순수학문이란 게, 누차 말하지만, 뭘 하려는 게 아니라 뭘 알려고 하는 거라서 말이지. 뭐 어쩌겠나,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냥 닥치고 잡일이나 하다 뒈지면 그만일 터인데.

-蟲-

P.S. 좀 찾아보니 이 글에 대한 주된 반론들은 대강 '인문학의 목적이 앎이라니 너무 단순한 주장이다'인 듯. 뭐 행동을 촉구하는 주장이 들어있는 논증도 연구의 결과로 나올 수 있겠고, 연구 자체가 기존 지식권력의 헛점을 폭로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겠고, 이래저래 여러가지 가능한 반론들이 짐작되긴 하는데 여기에 직접 말 걸어 주실 만큼 한가하시고 인류애 넘치시는 다정다감하신 분들이 계시길 기대하는 건 내가 너무 염치가 없으니 그저 짐작만 할 따름.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현실참여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요소들이 사실의 검토와 논증의 구성, 제시된 논증들의 분석과 재구성과 평가라는 이를 테면 '학술연구'에 대해 앎보다 더 앞서거나 더욱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리란 생각은 하기 어려운데, 이걸 좀 구체적으로 반박해 주시는 분이 계시길 바라기도 또 역시나 염치가 없고, 내가 궁금하면 내가 책 찾아 보는 게 맞는 일이겠지. 그러라고 빌어먹고 사는 나는야 인문학도이니까.=_= 근데 난 밑딱까리 시다바리 빌어먹는 지지리 궁상 거지새끼 같은 학자를 꿈꾸기 때문에 그냥 좆나 비생산적이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고리타분한 사료정리와 개뻘소리가 아닌 한에서의 소박하고 사소한 해석 제안 정도나 하다 뒈지면 그만인지라, 아, 모르겠다. 뭐 직접 말 건 사람도 없건만 나는 왜 또 뻘소리를 늘어 놓는가. 아, 근데 학문이 시장가치 없다는 내 또 다른 주장은 동의를 좀 얻고 있는 건가? 하기사 이것도 인문학의 적극적 현실참여가 가능하다고 보면 막무가내로 '그게 팔릴 이유가 없다'고 하기도 어렵겠네. 깨시민들에게 내다 팝시다, 인문학. 인문학 좀 사줘요. 기왕이면 서양고대철학 좀 사줘요. http://www.jungam.or.kr/donate ← 정암학당 후원 안내, 피싱사기 아니니 그냥 둘러나 보세요=_= 플라톤 전집,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헬레니즘 사상가들의 저술들과 단편들의 우리말 번역을 만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학당연구실 임대료만도 후덜덜해요. 돈이 없다면 부동산 정책에 개입합시다. ...음, 이것이 학문의 현실적인 힘? 아, 자꾸 뭔가 말을 보태게 된다. 역시 죄 지은 자에게 변명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앎을 추구하는 과정과 결과로 나온 앎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고, 나는 전자의 활동 그 자체가 학문의 본질이라고 하는 중인데 결과로서의 앎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 내 입장에 대한 적절한 반론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고, 뭔가 알아낸 다음에 그게 이성의 간계에 뭔가 스토아학파마냥 부합하는 식으로 사는 쪽으로 쓰이든 유물론적 역사의 진행에 발맞추어 자본의 개들에게 철퇴를 내리자는 주장의 근거로 쓰이든, 도덕과 이념의 계보를 들추어내든 뭐 어쩌든 저쩌든 그거 다 그야말로 '알고 난 다음' 이야기 아닌가 싶다. 아, 혼자 떠드니 외롭다. 그래도 또 한 마디, 결국 내가 하려던 말은 '인생의 답은 책에 없어요'인 듯. 실존주의는 신앙이거나 문예지 학문은 아니라고 봐요.(실존주의 추종자님들 미안, 여러분도 플라톤을 욕해요, 뭐 플라톤 욕은 나도 하지만) 아, 이거 자꾸 덧붙이다 보니 재미 붙네. 생각해 보니 내가 막무가내로 '학문은 그냥 앎이야, 닥치고 알자' 뭐 이런 거 아니었는듸=_=?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개별학문이 현실의 여러 조건들은 물론이고 여타 학문들의 상반된 입장들에 의해서도 제한받고 시험받아야 한다는 얘기였고, 그거 하기 전에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순수하게 학술적인 불가피한 작업들이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네네, 인문학으로 인생의 답을 찾으세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우주가 응답해 줄 거에요. 음?

1. 내가 요구 받은 사항들을 되짚어 보자. 우선 한정된 시간 안에, 그러니까 내년 3월 초까지 대략 네 달 안에 완성할 수 있는, 석사수준에서 요구되는 연구성과를 낼 수 있는 범위를 넘지 않는 주제를 구체화시켜야 한다. 다음으로, 그 주제가 어떤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논증해야 한다. 이는 다시 고대철학 내에서, 여타의 철학에서, 학술일반에서 나누어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문제에 관련하여 학술적으로 중요한 연구들을 추려야 한다. 연구의 주된 흐름들을 정리하고 내 위치가 어디이며 내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격해야 할 지점들과 방어해야 할 지점들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계획을 목차의 형태로, 혹은 간략한 논증을 포함한 요약의 형태로 작성하여 발표해야 한다. 『소피스테스』를 읽지 않은, 따라서 당연하게도 관련된 주제에 대한 여러 연구들에도 생소한 사람들로 하여금 내 논문이 문제로 삼는 바를 왜 물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그리고 왜 내가 주장하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그런 식으로 바로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고대철학연구의 의의는 이미 고착되고 정형화된 사유틀의 성립 이전으로 되돌아가 지금에 와서는 간과하고 있는 문제들, 혹은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여러 문제들이 처음 제기되고 고찰되기 시작하던 당시의 상황을 재점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떤 문제가 왜 제기되었고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이 충족시켜야 할 조건들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것이 오늘날 지속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측면은 없는지, 혹은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해 오해를 불러 일으킨 부분들은 없는지, 처음 시작점에서 지향하였던 바로 그 목적지를 향해 뻗어나온 선의 기울기가 기대했던 방향으로부터 얼만큼 가까이 있고 또 얼마나 멀어졌는지 검토한다는 것, 혹은 역으로 당시의 문제제기에서 부족했거나 잘못되었던 점은 없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고 어떻게 수정되고 보완되어 왔는지, 이런 것들을 반성해 본다는 것만으로도 고대철학은 그 자체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고 믿는다. 『소피스테스』는 어떤 것이 그것으로서 자기 자신과 같고 그 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것, 그것 자체로는 '다름'이라는 속성도 '같음'이라는 성질도 지니지 않음에도 '다름'과 '같음'을 겪고 그러한 부분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어떤 무엇이면서 또한 그 외의 어떤 것들이 아니며, 그럼에도 그 외의 것들인 한에서만 그것 자체 고유한 자기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따져 묻는다. 가까이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논리로부터 헬레니즘 시기 여러 학파들의 서로 다른 각기 고유한 논리학들, 중세를 거쳐 정교화된 논리에 이르기까지 소위 '고전논리학'이 출발 이면에 자리하는 논리적 문제의식이 여기에서 구체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르네상스 시기의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흄, 이런 사람들을 거쳐 다시 칸트, 헤겔까지 또 각자 상이한 논리에 대한 이해들을 제시하고 프레게, 러셀 등이 등장하고 수학과 전산학과 논리학 자체의 발전에 더해 자연과학도 분과별로 눈부신 성장을 거친 현대에는 문외한이 보기엔 외계어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을 기호들이 범람하는 현대논리학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양화니 양상이니 진리치가 2가니 3가니 뭐 이러저러하 논의들에 대해서도, 두 가지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고대철학의 문헌학적 특징에 주목하여 현대의 논리적 도구들을 사용해 고대철학의 문헌들을 해석하는 일에 대해 반박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논리학이 전제하는 형이상학적 조건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여전히 이도저도 아닌데 있기만 한 x라는 것이 '어떻게 진술, 사유, 지시 가능한지' 직관적으로 이해하진 못하고 있다. 젠장, 얘기가 산으로 가는군. 쨌든 『소피스테스』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의 문제를 다루고 이를 전제하고서 다시 진리치에 대해 탐구한다. 이런 용어들이 전혀 성립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누구는 그렇다 하고 또 누구는 아니라 하지만 내 입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플라톤 해석사에서는 발전론과 통합론 사이를 가르는 길목 중 하나가 되고(초기 이데아론이랑 여기 논의가 맞아 떨어지냐 아니냐 뭐 그런 거), 고대철학사에서는 엘레아학파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당시 논의의 큰 전쟁터 중 하나였던 'to on(the Being)'의 문제가 플라톤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고 어떤 문제가 구성되며 어떤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는지, 그것이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부합하는지 혹은 대척되는지 뭐 그런 이야기들도 나올 수 있겠고. 그런데 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계획을 줄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래서 나로서는 유들 혹은 형상들 사이의 결합만 남겨놓으면 되는 것인데, 내가 제시하려는 해석의 실마리는 그 얘기 나오기 전 하나와 여럿, 운동과 정지 논의하는 부분에서 등장하고, 유들의 결합의 사례로 등장하는 놈들은 to on, 운동, 정지, 같음, 다름인데 to on은 to me on(the Not-Being)과 관련해서 대화편 중반부터 끝까지 핵심개념이고 운동과 정지도 말했듯이 유들의 결합 논의하기 전에 한참 다루는 쌍이고, 이것들에 대해 검토하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논증하는 그런 과정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내가 이 빠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다 다루려고 든다면 석사논문 작성과정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 버릴 테니, 그럴 수는 없겠고. 그러데 이 가지치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도무지 계획이니 의의니 뭐니 이러저러한 것들을 씨부릴 자신이 없다. 음, 대화편 논의 흐름에서 내가 다룰 문제의 위치를 정리하는 것도 넣어줘야 하겠고. 머리는 안 돌아가고, 아, 모르겠다.

2. 수사적인 의도로 현학적인 문체를 사용하는 것은 대화할 생각이 없고 그냥 내가 옳으니 너는 닥쳐라, 뭐 그런 뜻 아닐까. 스스로 알지 못하는 소리들을 내뱉고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참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아는 척하고 그러면서 서로 다른 말을 하면서 아무도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한참을 떠들다가 '나 너 좋아, 나랑 놀자, 나 너 싫어, 너랑 안 놀아' 뭐 이런 결론에 이르는 것. 책 읽을 때 저딴 짓 하는 새끼들은 위고 아래고 상관없이 그냥 다 쓰레기로 보이는데, 말 섞을 때는 별로 그런 역겨움이 동하지 않는다. 몇 마디 나오는 순간 그냥 넋을 놓아 버리거나, 아니면 대놓고 따져 물으면 되니까. 전자의 경우 다시는 안 볼 작정을 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안 보게 되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아무리 그렇게 묻고 따지고 결국 본래 하려던 얘기를 훨씬 쉽고 간단한 말로 바꾸어 놓아도 나중에 다시 만나면 상대는 또 엇비슷한 잘난 척을 해대고 그렇게 나는 지치다가 다시 앞쪽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정리되지 않은 혼자만의 넋두리야 말 그대로 생각이 정리가 안 되었으니 어렵고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떠들든 끄적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렇게라도 지껄이고 뱉고 싸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남과 대화하거나 남의 생각에 다가서거나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때 저 따위로 굴면 그냥 답이 없는 듯. 뭐 이해는 한다. 조곤조곤하게 한 마디 한 마디 새겨 넣고 쌓아 올리듯 말하는 사람들을 얕잡아 보고 만만하게 보고 깔보고 업신여기는 그 더럽고 추잡한 열등감이야 이미 지겹게 겪어 봤으니. 뭐 그들의 기를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가방끈과 잘난 명함을 곁들여 되도 않는 뻘소리를 휘황찬란하게 씨부려대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고 굳이 찌질한 잡것들을,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며 날로 먹으려 들고 그걸 당연히 여기고 제 권리라 생각해 주장하고 강요해대는 씨발새끼들에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하게 굴기 어렵다는 것,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 모르겠다. 실은 상대가 그 누구든 마치 저 소크라테스마냥 재치와 익살과 그 밑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지치는 일 없이 대화하고 또 대화하거나, 아니면 그냥 이기고 지고 그런 거 다 때려치우고 틀어박혀 책이나 읽다가 한줌 정도 되는 '알아듣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기네들만의 이야기만 떠들다 가거나. 뭐 내가 뭔 상관인가, 다들 알아서들 살 텐데.

3. 생각해 보면 나는 읽는 법만 죽어라 배우고 쓰는 법은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지 싶다. 그런데 남들이라고 뭐 그걸 따로 딱 각 잡고서 배운 일이 있을까, 이 놈의 나라에서? 결국 제대로 읽는 것은 제대로 쓰는 것과 완전히 별개의 일은 아닐 텐데, 나는 잘 쓰질 못하니 잘 읽지도 못하는 것이고 남들은 잘 쓰는 걸 보니 잘 읽기도 하는 듯하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또 어그러진 건지, 그걸 다시 되짚어 돌아가 돌이켜 세우기까지 나는 또 얼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지, 그러는 동안에 그나마 얼마 남지도 않은 몇몇 기회들마저 죄다 날려 버리면, 내게 기약할 '다음'마저 없어져 버리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걱정들이 가득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한 번만이라도 똑바로 걷고 싶다. 단 한 걸음만이라도 제대로 내딛고 싶다. 그 한 번을 준비하다 그마저도 못 나아가 보고 뒈져도 좋으니까, 올바르려고 애쓰는 그 발버둥 지랄까지도 올바르게 하고 싶다. 남들은 잘만 해내는 일을 내가 못 해내는 까닭은 게으르고 비겁해서, 그것도 능력도 없는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막 돼먹어서, 뭐 그렇겠지만서도, 모르겠다. 아아, 씨발, 좆같구나. 난 왜 남들 붙들고 이래야 하느니 저래야 하느니 개소리 해대며 시간만 낭비해 댔던가, 우라질 오지랖 지랄병이 도져서 개새끼가 헛지랄만 하다가 허송세월 잘도 보냈구나. 썅알, 지 새끼들 공부한 거 아까워서 헛소리 뽑다 관두지 말고 조금이라도 돼먹은 소리 좀 지껄이게 해주겠노라고 주제 줄여라, 문제 다시 잡아라, 다시 읽어 봐라 하는 어르신 두고 섭섭하다느니 왜 도전을 막느냐느니 해대는 새끼들이 있질 않나, 뭔 소린지 알고 지껄이냐 모르고 지껄이냐 엉킨 뇌부터 차근차근 풀고서 쳐 써 갈겨라 소새끼야 말새끼야 해줬던 것들은 여전히 내 대가리 똥 좀 보소 자랑질 하느라 여념이 없고, 인문정신문화뭐시깽이가 어쩌고 하는 와중에도 노령화가 진행되고 수험생들이 줄어가고 결국 대학들이 줄어들 것이고 교수자리, 강사자리 다 줄어들 것이고 그 자리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백 배 천 배로 늘어나도 나새끼나 니새끼들이나 그 자리랑 연 없는 좆된 인생인데 씨발 왠 학부새끼 하나는 교수가 꿈이라고 개드립을 쳐대고 또 어떤 새끼는 다 쳐 읽지도 않은 책 가져다 사회분석을 하겠다는데 이게 사회학을 하겠다는 건지 정치철학을 하겠다는 건지 그냥 평론가가 되시겠다는 건지 나도 너도 옆집 발정난 개새끼도 다 모르겠고, 내가 대가리 빠가인 새끼들한테 이러니저러니 시비붙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남들 이만큼 한다, 니도 이만큼 못 하면 넌 저새끼들의 좆밥이고 저새끼들 먹다 버린 찌꺼기도 못 주워먹고 팽당하고 그냥 쓰레기고' 뭐 이런 얘기 하는데도, '형은 하면서 나보곤 왜 하지 말래요'라고 하면 씨발, 내가 병신인데 나만큼도 못하는 씹호로개병신 데리고 내가 '야, 신난다, 같이 망하자' 이래야 내가 좀 바람직하고 따스하고 인간미 넘치고 착하고 애정 가득한 씹선비선배새끼가 되는 거냐 뭐냐. 하지 말란 게 아니라 개빡세게 하란 소리일 뿐이고, 뭐 개중에 난 놈년들한텐 그나마도 해보고 싶음 하고 말면 말고까지 보들보들하게 말하기도 했고, 그 지랄병을 하고 산 게 7~8년인데 맨날 나는 같은 소리 쳐지껄이며 오지랖꼰대꼬장씹쓰레기취급이나 당하는 거고 세상 바뀌는 거 좆털의 때만큼도 없고, 그러는 사이 원래 찐따인 나는 더 호구잡놈거적때기버러지새끼가 되어서는 '그 나이 쳐먹도록 뭘 했길래 아직까지 그렇게 좆도 없이 병신이냐' 뭐 그런 평가나 받으며 천지사방에서 내가 다른 놈들한테 말하는 걸 고대로 되받아 먹고 사는 거다, '그만 해라, 관둬라, 때려 치워라, 나가 뒈져라, 네게 할당된 시공간마저 아깝다,' 대놓고 들어도 좋지만 뭐 예의와 배려와 아량을 갖추신 어르신들 입에서 나올 얘기들은 아니라 그저 그 깊은 속내를 하찮기가 동네 시궁창 장구벌레 똥구녕같은 내가 감히 헤아려 짐작컨데 그러하단 얘기지. 모르겄다. 빡셌는데, 지금도 빡센데, 앞으로도 그럴 작정인데, 난 뭘 얼마나 어떻게 더해야 사람구실을 하고 살게 될까,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아, 외롭다. 언제나 그렇듯 또 술이 고프다.

-蟲-

1. 주제를 뭉텅뭉텅 쳐내서 1/9까지 왔건만 연구의 목적과 의의를 밝힌다거나 주요 방법론을 정리한다거나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기간까지 확정한다거나 하는데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냥 게을러서든 능력이 부족해서든 어찌 되었든지간에 답답한 김에 영화나 몇 편 때릴까, 그러다가 본 것이 둘 다 애니메이션이다. 하나는 '늑대아이,' 다른 하나는 '언령의 정원'이다. 보다보니 문득 내가 어떤 사람을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더라. 말하자면 '씩씩함' 같은 것에 푹 빠지는 경향이 나한테 있는 듯하다. 밝음, 맑음, 건강함, 뒤틀리거나 배배 꼬이지 않은 선명함이랄까 분명함이랄까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 그런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간이란 게 필요한 듯도 싶다. 상대가 실제로 그런 힘이나 의지 같은 것, 심지랄까 뭐 그런 걸 정말로 가지고 있는지 확실해지는 건 그 사람이 이러저러한 일들을 거치고 난 뒤 아니겠나. 이십대를 지나 보내고, 삼십대를 거치면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사람을 잃기도 하고 뒷통수를 맞기도 하고 얼토당토 않은 불운에 허덕거려 보기도 하고, 좀 구체적으로는 방세와 수도세, 전기세를 제 손으로 처리해 보고 밥그릇부터 화장실 뜨개밸브까지 직접 찾아 사다가 제 살림을 꾸려 보는 것, 시비가 일어 소장을 작성해 본다든가 입원을 하고 퇴원수속을 밟고 약을 타고, 누군가의 장례를 치르면서 울고 불고 하기 전에 조문객을 받고 비용 계산을 하고, 일자리를 잡기 위해 스스로 누군가를 찾아 어떤 부탁을 한다든지 계좌를 연다든지 이러저러한 일들, 그 과정이 죄다 여차하면 사람 비뚤어지기 딱 좋은 일들이고 요즘 같아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기 전까지 서른이 가까워져서도 경험해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그런 '세파'란 것에 부딪치기 전까지는 내가 바라고 선망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동경하기까지 하는 그러한 건강함이나 씩씩함이란 게 검증될 수가 없을 것도 같다. 겪지 않고, 그러니까 어떤 줄을 타고 가는 과정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차근차근 부모의 보호에서부터 시작해서 꽤 이름 있는 대학, 안정된 직장, 그러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면 그런 이후의 사람들이 갖추게 되는 씩씩함이야 내가 불륜을 꿈꾸지 않는 이상 나한테는 상관이 없고, 결국은 원하는 사람을 찾기란 내겐 그닥 쉬운 일이 될 수가 없어 보인다. 또 역으로, 나 역시 좀 더 겪고 부대끼기 전에는 그 무언가를 알아볼 '눈'이랄 것을 갖추기 어려우리란 생각도 든다. 내 나름 겪었다, 할 만한 일들은 거의 대부분 자발적으로 경험한 일들인데다 중학교 시절, 혹은 고등학교 관두고 나서, 사실은 벼랑 끝이라 할 만한 상황은 아닌 한에서 말하자면 '즐겼다'고 할 수도 있을 그런 모험에 불과했다. 그렇게 겉핥기로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뒤부터는 어림짐작으로나마 그런 것들이 장난으로 감당할 만한 일들은 아니리라는 겁을 집어먹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 정말로 간절한 일이 생겨 버려서, 그러니까 철학을 꼭 해야만 하겠어서 최대한 위험요소들은 배제하고 살았다. 얹혀 살면서 밥 하고 빨래 하고 몇 푼이나마 돈을 보태고, 사실 다시 나가서 살라면 못 할 것도 없지만 독립을 하면 얼마가 어디에 들어가고 어떤 불편이 있을지 아는 지금에 와서는 별로 그걸 억지부려 앞당길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앞으로의 삶이 복잡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냥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 혹은 거기에 덧붙여 공부하는 무리들 주변에서 뒤치닥거리나 하는 것으로 주워먹을 수 있는 그런 돈으로, 그렇게 계속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그냥 뒈져 버리는, 산수보다 간단한 계산이면 충분한 그런 삶을 바랄 따름인지라 내 스스로 사서 변수를 키우고 싶지는 않다. 석사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고 지원을 받으면 나가고 못 나가면 박사를 알아보고 어쨌든 그런 식으로 금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남의 제한을 받고 그 제한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그런 식의 한계나 제한만 있다면 앞서 말한 과정들이 그렇게 벅차고 암담한 것만도 아니다. 막무가내로 열려 있는 불확실한 가능성들만큼 공포스러운 것도 없는 법이다. 그 두려움에 직면할 때 내가 말하는 저 '씩씩함'이란 걸 적어도 내 방식으로 나는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자질구레하고 잡다한 생존에 맞서 짜증과 자기연민으로 빠져들거나 타성에 젖어 기계처럼 살아가거나, 어느 쪽이든 그런 성격에 대해서는 도무지 매력이란 걸 느낄 수 없다. 내가 이전까지 좋아했던 사람들이 그러했는지 어쨌는지 이제는 솔직히 잘 모르겠긴 하다. 어쩌면 내가 덮어씌운 환상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은 어떤가 하면, 그나마 조금 건강해졌다고는 생각한다. 이제 전처럼 뒈져 버리겠다고 지랄을 해댈 일은 없으리라 믿고 있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잡일들에 휘둘려 꽥꽥거리며 짐승같이 비명을 지르는 일도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학문으로만 놓고 보더라도 박사 끝내고 박사 후 과정까지 거치게 된다면 그 이후에야 내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 나아가는 삶이 시작될 것이고, 그냥 계획과 경로에 따라 놓여 있는 돈을 따먹는 게 아니라 스스로 돈 나올 구멍을 고민해야 하는 그 순간이 오고 나서야, 어쨌든 정말로 내 한 몸 건사하는 생활을 하게 될 테니. 지금은 그냥 거렁뱅이 아닌가. 요즘 사람 보는 눈이 높아진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도 하다. 30대 정도의 상대들이야 뭐 이렇게저렇게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게 되어 버렸고, 40대 상대들도 자꾸 눈에 들어오는데, 그렇다고 가정파괴범이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서(내 연애관에 따르자면야 그게 왜 가정파괴인지도 잘 모르겠긴 하다만. 인간이 인간을 좋아하는 게 꼭 일대 일의 관계여야만 한다는 법은 없잖은가. 아닌가, 법이 있나? 뭐 도덕적으로 정당화가 된다고는 생각이 안 되지만=_=), 그런데 저 정도 건강함을 갖춘 사람들에겐 '상식'이랄지 뭐 그런 것도 있어서 나이 서른 쳐먹고 전망도 어두운 공부 한답시고 찔찔거리는 나같은 새끼한테 호감을 갖는 상대를 30대에서 찾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 20대에서 찾아 보자니 뭐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그냥 2d 캐릭터와 가상결혼식이라도 올려야 하려나. 하하하, 좆됐다. '언령의 정원' 쪽은, 음, 중학생 남자애와 여교사 사이의 연애가 뭐가 그렇게 문제인지 이쪽도 역시 잘 모르겠다. 인간의 성숙 여부를 가타부타하기에는 이 사회가 지나치게 미성숙하다는 생각도 들고. 웃긴 건 이렇게 말하면 청소년 성범죄나 아동성폭력을 두둔하는 거냐는 식으로 반박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것인데, 연애와 범죄도 구분이 안 되고 천부인권과 사회적 인격의 성립도 구분이 안 되고 아무런 기준도 잣대도 없는 세상이 좀 거북스러울 뿐 뭐 딱히 뭘 어떻게 해 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학생들의 두발과 복장을 제한하고 폭력을 교육의 정당한 방식으로 용인하고 그런 와중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감정까지 인간으로서 미성숙한 어떤 짐승의 것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 혹은 원조교제를 하고 흡연과 음주에 노출되고 그 모든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는 정도로까지 그들의 인격을 인정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건 쉬운 문제가 아니긴 하겠지만 난 차라리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후자쪽을 택하겠다. 그들을 키울 생각을 하지 말고, 그들을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그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편이 더 당연한 것 같아서 말이다. 울타리 쳐 가둬놓고 짐승처럼 때리고 밟아 가며 '너희를 위해서야' 하는 비겁함이 싫기도 하고. 실은 같잖은 꼰대새끼들이 애들 데리고서 지네만 인간입네 하며 완성된 인격이라도 갖춘 듯이 구는 꼬라지가 아니꼽고 띠껍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만. 교사고 부모고 나발이고 지상에 완전한 인간이 어디있나? 그 전에 인간의 완성을 가늠하는 척도따윈 또 어디 있나? 멈춘 주사위들이 던져진 주사위들보다 우위에 설 수는 없다. 이건 참 이상한 믿음이긴 하다. 그런데 얘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2. 이따금 말 뒤에 숨은 우려와 불신을 느끼곤 한다. 내가 짐작하기로 이제 주변 사람들은 내가 유학을 갈 수 있으리라고도 믿지 않는 듯하고 그렇기는 커녕 당장에 석사 졸업이나 제대로 할는지도 의문스러워 하는 듯하다. 고등학교 때려 치우고 망나니처럼 놀아제끼다가 대학 가겠다고 할 즈음에 사람들의 속내가 저 비슷하였다. 대학에 들어가 학부생들끼리 학회를 한답시고 날뛰었을 때에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대강 저러하였다. 고대철학을 하겠노라고 고전어를 배워야 하겠다고 말하고 다닐 적에도 주변 사람들의 눈빛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학원에 들어가겠다고 영어시험을 준비할 때, 학부 졸업논문을 어떻게든 원전 읽고 써내겠다고 할 때, 실은 내가 뭔가를 하려고 들 때마다 언제나 나는 같은 평가를 받곤 하였다. 시작은 언제였을까. 국민학교 다닐 때, 중학교 1, 2학년 때, 시를 쓴다느니 소설을 쓴다느니 하고 다닐 적부터였나? PC통신 드나들며 판타지소설을 쓰겠다고 껍죽대고 다닐 때가 시작이었나? 철거촌 시위하는 데 따라다니던 때 용역새끼들 눈까리가 처음이었던 건가? 시위현장 폭력반대니 뭐니 그러고 다닐 적에 소위 '같은 편'이라 할 사람들, 누군가의 등 뒤에서 비겁하게 내 면상을 후려 갈기고 달아나며 낄낄거리던 어떤 새끼가, 그 새끼가 나한테 처음으로 저주를 건 새끼였나? 나름 잡다하게 이것저것 일을 벌리고 도전하고 희망을 품고 하였고, 몇 가지는 엎어졌고 또 몇 가지는 아슬아슬 간당간당하게 어찌 턱걸이로 해내기도 하였고, 결국 그 과정에서 저러한 평가들도 그 중 몇몇은 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너무나도 중요한 것들이었고 또 몇몇은 쓰레기들 개소리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고 그런데 이제는 슬슬 사람들의 우려와 불신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직 본게임 시작도 못한 준비과정에 불과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어쨌든 억지 쓴다고 누가 불쌍히 여겨주어 동정과 연민으로 버틸 수 있는 그런 바닥은 아닌 듯하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학벌도 없는데 글도 못 쓰고 게다가 대충 읽고 꼴에 욕심은 많고, 나를 두고 이루어지는 여러 평가들은 너무나 많은 근거들을 갖추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은 오히려 훨씬 관대하다. 그것은 질문이거나 혹은 주어를 바꾼 비유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이다. 그리고 거기서 더 파고 들어가면 결론은 하지 말아라, 관둬라, 뭐 그런 금지와 제한들이다. 늘상 그래 왔다는 것, 그게 어느 정도의 위안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먹게 만든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적어도 이건 내가 납득할 만한 결말은 아니다.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내 눈앞에 드러나고 내 사지를 잡아 비트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러한 결론이 필요하다. 돈이 끊기고, 적(籍)을 둘 곳이 없어지고, 자료로부터 차단 당하고, 더 이상 아무도 내 논증에 비판조차 해주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그거면 된다. 그렇거나 목숨줄이 끊기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면 지금 이렇게 사는 걸음을 멈추거나 거둘 수는 없다. 늦춰지거나 꼬이거나 에두르게 되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여태까지 버텨 왔던 것에 대해 인정받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나는 이번에도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데까지 가 봐야 하겠다. 여전히 사람들이 무언가 나에게 시키고 또 뭔가를 요구하고 있고, 남들 보기엔 같잖을 수도 있으나 내 스스로 보기엔 티끌만치라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더디고 버겁게나마 나는 나아왔고 또 나아갈 것이다. 뭐 세상에 그런 의무 따위야 당연히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절실한 그 만큼 충실한 답변을 세상에 바랄 따름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낼 테니, 이 삶을 절단내야 한다는 답이든 조금 더 유예기간을 주는 답이든 그 역시 정직하고 성실한 답이길 바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호의와 또 누군가의 배려, 동정과 연민, 그런 것들로 빙빙 둘러 긴가민가하게 흐지부지 주어지는 그런 답으로는 관둘 수가 없다. 욕심인 건 안다. 나 하나 따위를 납득시키기 위해 누가 내 목에 칼이라도 꽂아야 한다는 이런 억지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노력할 여지가 남아 있는 한, 그리고 내가 스스로 노력하고 있는 한, 일단은 이 노력을 지속시키고 싶다. 『소피스테스』를 읽으며 내가 느끼고 배우는 태도란 그런 것이다. 아무것도 없고 희망도 기대도 갖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면 안 된다는 것, 포기하고 돌아서 버리면 안 된다는 것, 그 턱없이 막막하고 가망없는 상황 자체가, 그 안에서 버둥거리는 몸부림만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매번 의심 받고 조롱을 당할 때마다 했던 말이 있다. 당신들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다행히 아직까진 전적이 그리 나쁘지 않다. 지긋지긋하겠지만, 그래도 난 또 이 악물고 버텨야 하겠다. 뭐 그렇다고.

3. 욕이 턱밑까지 차서 입술을 깨물어서야 겨우 속으로 삼켜지는 와중에도 문득 돌아보면 내 일은 댈 것도 아닐 만큼 짜증스럽고 어이없는 일들을 당하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자리에 있더라. 무슨 콩고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인격자에 부처님 반토막이라서도 아니라, 그냥 어느 정도의 의리와 상식, 적절한 인내를 가지고 사태를 관조하고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더라. 나 따위를 가져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노력을 하고, 훨씬 더 대단한 재능으로 더 높은 자리에 가서도 여전히 겸손하고 점잖게, 그저 주어진 일은 묵묵히 최선을 다해 해내고 마무리짓는 사람들이 있어서, 혼자 속으로 울분을 삭이느니 뭐니 하는 나 자신이 우습게 여겨지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있더라. 이 역시, 뭐 그냥, 그렇더라고, 그렇다고. 갈수록 '아, 궁시렁거리지 말아야 하겠구나'하는 다짐만 거듭하여 하게 되는구나.

-蟲-

1. 『소피스테스』에 대한 미카엘 프레데의 논문 말미, 그는 이 대화편이 지극히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방식으로 그것도 당대까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일이 없는 새로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전면에서 다루다는 점에서 지극히 중요하다는 논조로 거의 찬사를 보낸다. 아크릴은 현대 논리학 저술까지 인용해 가면서 이 글의 그러한 체계적, 전문적 측면, 달리 말하자면 그 형식적 엄밀성에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진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앞서 유들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적용시키지 않는다. "로고스는 유들의 결합에 의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생겨난다)." to on을 규정성 자체로, 같음과 다름을 내포와 외연의 조건들로, 운동과 정지를 형상들의 형이상학적 결합가능성 혹은 개념들의 상관가능성의 근거들로 간주한다면, 어차피 로고스가 아니라 그 무엇이 되었든 모든 것은 그 각각의 성립을 위해서 유들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콘포드도 아크릴도 그렇게 보질 않았다. 아마도 "어떤 것들을 서로 결합하고 어떤 것들은 그리 하지 않는다" 라는 문제가 이러한 선택과 관련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논리적 규칙들, 논리적 조건들로서 '가장 중요한 유들'을 해석할 경우 서로 결합하지 않는 것은 없다. 추가적인 조건이 붙을지언정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섞인다. 물론 내 입장에서 보자면야 중심은 끝들과 섞이지 않는다고 주장하겠지만, 그 중심이 뭐고 끝들은 또 무엇인지 문헌 내에서 얼마나 그 해석을 정당화시킬 수 있느냐 묻는다면 답하기는 쉽지 않다.

2. 『소피스테스』를 일관된 논지가 전개되고 통일된 체계를 보여주며 그 자체로도 충분한 완결성을 갖춘 대화편으로 간주하는 내 입장에서는 한 문제를 다른 문제와 연결시키지 않고 심화시켜 문제제기를 하는 일만도 가닥이 잘 잡히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제기하는 문제가 이 문헌에 관련하여 유효하고 적절한 것이라면 더욱이 그것이 일종의 구심점과 같이 다른 문제들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지도교수님 말씀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한정된 시간 안에 확실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의미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해결할 계획을 마련해 이 작업의 수행 가능성을 먼저 검토받아야 하는 것이다. '중심과 끝들'에 대한 언급은 유들의 결합을 다루기 전에 등장하며, 심지어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을 인용한 것이다. 그 인용 끝에 등장인물인 엘레아 출신의 손님이 덧붙이는 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은 부분들로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중요한 건 그러니까 막무가내로 '하나'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한정적인 주장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게 증명부담이 덜 하다. 직접적인 논의맥락은 일원론 안된다는 얘기기도 하고, 파르메니데스가 일원론자로 간주된다는 점에서(그게 질적인 것이든 수적인 것이든)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서 수사적으로도 꽤나 흥미로운 비판의 방식이라 해석할 여지도 생기긴 한다. 하지만 부분들을 지닌다는 점을 유들의 결합에 적용시키지 않고서는 사람이란 것이 여러 이름들을 또한 가지며 그렇게 불리고 모든 것들이 ta onta이면서 그 각각이 to on이고 그런데도 to on 그 자체와는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또 부분들을 끌고 들어와 하나가 동시에 여럿이기도 하다는 점을 설명함으로써 전체와 부분을 나눈들, 능동적 부분과 수동적 부분, 정지된 부분과 움직여진 부분, to on의 부분과 to gignomenon(becoming, 물론 이런 표현이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의 부분이 다 같이 부분이라면 이 사이의 구분을 설명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어떤 것의 정의(定義)를 구성하는 진술들과 우연적이지만 참인 진술들, 그리고 필연적으로 거짓인 진술들과 개연적으로만 거짓인 진술들 사이의 수준이나 단계에 대해서도 구분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결국 중심과 끝들에 대한 이야기를 유들의 결합에까지 끌고 들어와 버리면, 이 적용의 근거로 써먹은 내용들이 정의와 진술과 작용 등등의 것들이기 때문에라도 to on의 해석 문제, kinesis(움직임)와 stasis(멈춤, 섬)에 대한 해석 문제에 대해 우선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결과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유들의 결합과 진술에서 이름과 동사의 결합, 그리고 전반부에 걸쳐 제시되는 분할들에 대해서도 내 입장을 정당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걸 다 다룬다는 것이 지금의 내 수준으로 가능할까? 가능할 수야 있다. 시간만 한 10년 20년 받는다면 어쩌면 뭐 연구사도 다 섭렵하고 아예 『소피스테스』로 주석서 한 편 내고 뭐 그러면서 말이다. 그렇게 석사를 써서 뭘 하려는 건가? 그렇게 하고 싶은가? 그렇지는 않다. 난 늘상 내가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확인하고 싶었던 바가 이후에 계속 더 앞으로 나아가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할 기본적인 자격을 갖추었는가 하는 점이었다고 생각해 왔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할 제멋대로의 욕심만 늘어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계속 욕이나 먹었던 주제에 무슨 근자감인가. 학당 선배 말대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논증할 만한 꺼리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도 학자의 능력이라면 능력인 것이다. 하기사 그 정도로 거창한 일조차도 지금의 내가 당면한 문제와는 사실 좀 거리가 먼 얘기이겠지만.

3. 『소피스테스』 전반부에 제시되는 분할들을 정리하려니 솔직히 좀 흥이 안 난다.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룬 대화편으로 『정치가』가 떡하니 있을 뿐더러 『파이드로스』나 『필레보스』 같은 곳에서도 여기보다는 좀 더 진지하게 분할이라는 방법 자체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소피스테스』에서 분할의 과정은 엄밀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유들의 결합을 고찰하기 전까지, 손님과 테아이테토스에게는 '~A'와 'B(B≠A)'를 구분할 개념적 도구랄까 뭐 그런 것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사냥꾼이 장사를 하는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사냥하는지 낚시꾼이 교육을 하는지, 그런 것들이 가능한 건지 필연적인 것인지 사실인지 참인지 거짓인지 논할 확실한 근거와 기준이 없는 마당에 이 분할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차라리 바로 이러한 문제상황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 아니겠나? 물론 이를 읽어 나아가면서 느껴지는 위화감도 플라톤이 의도했다는 정도의 추정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뭐야, 씨발, 소피스테스가 소크라테스나 하던 정화로서의 시험(elenchos)을 한다고?' 뭐 이런 느낌이 들도록 만드는 게, 적어도 이 대화편보다 앞서 쓰였다고 간주되는 다른 대화편들을 거치면서 소크라테스 뽕을 맞은 족속들에 한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게 만들 아주 효과적인 미끼를 던진 거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소피스테스가 온갖 짓들을 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소피스테스가 정의되는 건 아니고, 뭐 그러다 보니 분할해 나아가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딱 떨어지게 한정이 되어서 뭔가 '이게 이거다'하는 느낌으로 정의를 내리는 기분이 들기는 해서 버리기는 아까운 분할이라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을 것 같고 말이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분할들을 제시하는 부분의 논지와 줄거리를 요약하고 정리하자면야 이 과정이 어떤 식으로 문제에 착안하고 그것을 재구성해 제기하는지 밝히는 방식으로 해야 하겠지만, 아예 이 주제로 딴 논문을 하나 쓸 수도 있을 것을 지금 시급한 문제가 코앞에 발등에 난리가 난 마당에 이걸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게 좀 뭐랄까 거시기하다는 것이지. 그러거나 말거나 까라면 까야지, 그러려고 들어온 대학원인데.

4. 『소피스테스』 연구서 중에 노토미가 쓴 것이 있는데, 또 학부 조교 들어갔을 때였나 동양철학 전공하는 대학원생 친구가 이 대화편 일역 가져다가 쓴 글도 흥미롭고, 해서 좀 일역들이나 일본발 연구서들이 궁금하던 차에 학부 동기녀석 하나가 생각난다. 지금 기자 하느라 바쁜 놈인데 일본어가 아주 기똥찬 친구. 학부 다닐 때였으면 '야, 너 일어로 읽고 나 희랍어로 읽고 그러면서 강독이나 하자' 했겠지만 지금이야 얼굴 보는 일도 드문 마당에 무슨. 사실 그런 문제가 아니고 내가 직접 일어도 배우고 최근에 중국에서도 아주 그냥 본격적으로다가 플라톤 번역 착수했다던가 뭐라던가 그런 얘기도 주워 들었던 것도 같고 해서 중국어도 배우면 좋겠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당장에 독일어도 어중간하게 하다 만 거 더 붙들고 불어부터도 일단 시작을 해야 하긴 하겠고 이탈리아어도 모르면 연구 쪽으로 손해보는 게 꽤 되는 듯한데 이건 또 어쩌지,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욕심만 는다. 이게 욕심인지 양심인지 둘 다인지 그건 또 모를 일이겠으나. 당장에 고전어나 좀 똑바로 해야지 않겠나 싶기도 하고. 그 전에 영어는? 아니, 우리말은 좀 제대로 하시나? 흐, 한도 끝도 없지.

5. 진즉에 우려스러웠던, 뭐 꼴같지도 않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이긴 하나 그나마도 과장된 학부 때의 허명이 이래저래 벗겨지고 있는 듯하여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나를 세상 둘도 없는 개쓰레기 가식으로 똘똘 뭉친 위선자 취급하는 사람도 나오고, 무슨 철학사라도 새로 쓸 것처럼 굴던(사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야심은 품은 적이 없긴 한데 말이지) 나란 놈이 석사 가자마자 시작해서 수료하고 나서까지 내내 욕이나 먹고 찌끄래기 병신 취급을 받으며 이래저래 걷어차이고 다니기나 하고, 인간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뭐 물론 아무리 애써 봤댔자 잘 풀렸어도 평가조차 받을 수준이 못되는 시퍼런 갓난쟁이 처지였겠지만 지금은 그나마의 취급도 아까운 적나라하고 처참한 몰골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의리 빼면 시체인 척은 지 혼자 다 하고 다니던 나란 놈은 이제 동기녀석들 만난 게 언제였나 그조차 오래 되어서 가물거릴 지경이고, 그러니 선배니 후배니 스승님들이니 따지고 들면 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쌓은 것도 없는 주제에 그나마 무너져 바닥을 파고 들어가고 있는지라 이젠 뭘 추스려 주워 섬길래도 그러기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이 꼬라지가 늘상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나같은 저급 버러지 한 마리 짓이겨 밟지도 않고서, 우물 안에서 개구락지 한 마리 배때기 갈라 내장 뒤집어 놓지도 않고서 꾸벅꾸벅 선후배놀이나 하면서 웃는 낯 뒤로는 '씨발, 세상이 나를 몰라주네, 난 좆나 천잰데 무지랭이 시정잡배 허접쓰레기 거지새끼들이 눈깔이 썩어서 이 나님을 홀대하네, 니들 나중에 내 자서전에 이름 안 올려 준다, 흥칫뿡' 이런 생각이나 쳐 하고 있으면, 그 따위로 살면 좆된다는 얘기가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학부에서 내가 목격한 현실이란 건 죄다 나보다 (애초에 비교하는 게 웃길 정도로) 잘난 사람들의 미칠 듯한 노력과 그들에게 돌아오는 얼토당토 않은 가난과 이해할 수 없는 천대, 그런 것뿐이었으니. 그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것들에 대해 내가 의심하는 한 가지는 혹시라도 저것들이 '난 교수 될 수 있을 거야'라는 헛발질을 남몰래 차대고 다니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었고. 썅알 것들아, 우린 진즉에 좆됐다니께. 그렇다고 무슨 중뿔난 학문업적을 남기리란 기대도 안 들고, 그저 하나 남은 희망이라고는 학문이란 게, 앎이란 게 어쨌든 저 혼자서 알아서 잘 살아 짱짱한 그런 놈일지도 모른다는 거, 언젠가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거기 닿을지도 모르고 거기까지 이어지는 길에 티끌의 때의 세균의 코딱지만큼은 나나 너 같은 집먼지진드기 같은 새끼들도 기여라는 걸 혹시나 하고 뒈질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뭐 그런 거라고 나는 굳게 믿어서, 그건 전하고 나누고 함께하길 바란 것이다. 설령 세상이 망하더라도 그게 진리를 없게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런 진리에 대한 일종의 사이비신앙이랄지 뭐 그런 거다. 내 한몸 간수하며 신경써야 할 거라곤 그냥 정직하고 성실하게 학문하고 있는지, 그거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학문이란 게 마냥 즐겁고 욕을 먹고 걷어 차여도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고, 그러다 보니 꼰대질 하는 잡것들한테 대들어도 보고 나 군대 갈 때 교복 처음 입어 본 애들이 기어 들어와 이게 맞네 저게 맞네 뭔소린지 못 알아들을 소리를 해대며 개기고 대들어도 혹시 뭔가 맞는 얘기 하는데 내가 병신이라 못 알아 쳐먹는 건 아닌가 귀도 기울이게 되고 닥치고 끄덕거리는 새끼들보다 치받아 죽여 버릴까 보다 하고 덤비는 새끼들이 좆나 반갑고 고맙고, 아, 뭐, 그랬단 거다. 그래 봤댔자 실상 나는 남일에다 개를 놓아라 소를 놓아라 지랄병 난 꼰대질을 해댄 마초꼰대쭉정이새끼였지 않나. 남의 정직과 남의 성실에 내 잣대나 들이밀며 시비질이나 걸어대던 유아론 작살나는 독단적 싸이코패스였을 따름이지 않나. 차라리 진작에 지금처럼 살아야 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끔은 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저 따위로 살다 보니 이 따위 꼴이 된 거란 생각에 별로 과거 붙들고 후회하고 지랄하는 거 좋아하진 않지만서도, 애초부터 니가 어쩌니 걔가 저쩌니 할 거 없이 닥치고 집, 도서관, 학교만 왔다갔다 하면서 잠자코 책이나 봤으면 적어도 석사 수료까지 하고나서 이 새끼 대학원 와서 뭐 한 건가 의구심 들게 만드는 떨거지는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거다. 말했듯이, 그럼 뭐하나, 어쩌면 이런 반성조차 못하고 주화입마 거하게 빠져 있을지도 모르지. 그냥, 며칠 전에 오랜만에 학교 후배들 만나 술 몇 잔 하고 나니 난 참 변함없이 꼰대새끼구나 싶기도 하고, 또 어찌어찌 건너건너 알게 된 고등학생 한 분께서 건대 철학과 수시 몇 차를 붙었다던가 뭐라던가 하는 얘기가 들리길래, 속으로 '말려야 하나, 뭐 어디라고 별 다를 것도 없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근데 내가 뭐라고 가타부타 씨부렁대나' 이런저런 생각도 들어서 그냥 씨부려 봤다. 나는 그냥 레인보우랑 걸스데이랑 에이핑크랑 레이디스 코드나 추앙하면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랑 UMC/UW나 들으면서, 유통기한 지난 내 쓸쓸한 콘돔에 조의나 표하면서, 플라톤이 이랬느니 플라톤을 가지고 누가 저랬으니 뭐랬느니 어쨌느니 저쨌느니 그러고 살던대로 살면 그만이겠다만.

-蟲-

P.S. 몇몇 지인들께서 드나들곤 하신다는 이야기를 접하여 조금 자기검열을 해볼까 싶었으나, 말짱 황에 도루묵인지라 그냥 여전히 이 새끼 병신이구나 하고 넘어가들 주십사 삼가 하해와 같은 아량을 청하여 비옵나이다. 막 꼴보기 싫어서 한 대 쥐어 때리고 싶으면 술을 쏴요들, 맞아 줄게.

  (216a1-217a9)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가 자신을 고발한 문제 때문에 바실레우스 관아에 용무가 있어 테아이테토스와의 대화를 마치고, 테오도로스에게 아침에 다시 같은 장소로 모이자고 제안한다(210d2-4). 그 제안에 따라 다음 날 약속대로  테오도로스와 테아이테토스, 그리고 젊은 소크라테스가 엘레아 출신의 손님을 대동하고 찾아온다. 테오도로스는 이 손님을 파르메니데스와 제논 무리의 동료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라 소개한다. 소크라테스는 그 소개를 듣고 호메로스의 시에 빗대어 그들이 대동하고 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손님의 신(즉 제우스)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여기에 더하여 그 신이 인간의 만용이나 준법을 감시하러 오듯이, 그들이 모셔온 손님이 진술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파악하고서 시험(논박, elenchos)하기 위해 찾아온 시험의 신이 아닌지 의심한다. 그런데 테오도로스는 손님을 신에 빗댄 소크라테스의 칭찬을 잘못 파악하고 손님이 '쟁론에 열중하는 자들(ton peri eridas espoudakoton)'보다는 더 온화한 사람이라 답한다. 쟁론(eris)과 시험(elenchos)에 대한 혼동에 더해 테오도로스는 이어지는 답변을 통해 신(theos)과 신적인 자(theios) 사이의 구분에 대한 문제까지 야기시킨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 모두를 신적인 자들이라 부른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자가 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쟁론가들, 철학자들-신적인 자들, 그리고 신 사이의 구분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구분이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여 논의를 이어 나간다. 테오도로스의 말에 따르자면 그는 손님이 철학자임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를 쟁론가들로부터 구분지을 수 있고, 나아가 다시 신과 신적인 자 사이의 차이 또한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호메로스에 대한 언급을 통해 연상되는 『오뒷세이아』의 해당 구절들은 가장하고 나타난 오뒷세우스를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 신의 유(genos)를 분간하는 일의 어려움이 이를 통해 암시된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라는 유가 신의 유에 비해서도 분간하기 더 쉬운 것은 전혀 아니라고 지적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러한 자들은 지어낸 자들이 아닌 실제로 철학자인 자들로서, 그 밖의 사람들에게 속하는 무지 때문에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고 도시들을 드나들며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자들로, 또 다른 이들에게는 모든 일에 합당한(가치있는) 자들로 여겨진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는 정치가로, 또 다른 경우에는 소피스테스로 나타나며, 또 다른 경우에는 이들에게 사람들이 전적으로 광기에 빠진 자들이라는 믿음을 제시하는(평판을 부여하는, doxa) 그런 자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문제를 밝히고서 엘레아에서는 소피스테스, 정치가, 철학자가 모두 하나의 유로 혹은 두 유들로 간주되는지, 아니면 이름이 셋이듯 그 이름마다 각각의 유가 적용되어 세 유들로 나뉘는지 손님에게 들어 배우기를 청한다. 소크라테스는 손님이 철학자라는 테오도로스의 소개로부터 손님이 진정으로 철학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그 유를 소피스테스, 정치가, 광인 등의 유들과 구분하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직접적으로는 철학자의 유를 밝혀줄 것을, 간접적으로는 손님 자신의 정체성을 해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테오도로스의 무지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논박과 쟁론을 구분하지 못하고 철학자와 신을 구분하지 못하며 철학자를 소피스테스, 정치가 등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채로 눈앞의 손님에 대해 규정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고, 그러한 소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이름들과 거기에 부합하는 유들에 대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손님이 마치 호메로스가 오뒷세우스를 묘사하듯, 즉 그가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자신의 부인을 탐하는 자들의 만용과 부정의를 심판하듯, 그런 식으로 테오도로스를 포함한 소크라테스 일행의 진술 속에서의 무지를 심판하리라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217a10-218b7) 테오도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대해 손님이 흔쾌히(아낌없이) 응하리라 말하고, 손님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소님은 그 유들이 각기 하나씩 셋으로 나뉜다는 점을 답한 이후에, 그 각각이 확실히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은 작은 일도 쉬운 일도 아니라고 말한다. 테오도로스에 따르면 일행은 당일 소크라테스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손님에게서 같은 문제를 고찰하는 것을 들었으나, 같은 이유로 각각의 정의를 미루었다는 점을, 그렇지만 손님이 그에 대해 충분히 듣고 또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가 이미 들어 배운 바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소크라테스는 손님이 호의를 베풀 것을 요청하고, 다음으로 그 설명의 방식에 대해 택해 줄 것을 청한다. 그는 긴 진술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상술할 것인지, 질문들을 통하여 논의를 진행할 것인지 묻는다. 후자의 방식에 첨언하여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노쇠한 파르메니데스가 후자의 방식으로 전적으로 아름다운(pankalos) 진술들을 상술하였던 것을 들은 일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와 파르메니데스, 제논이 등장하는 대화편 『파르메니데스』를 연상시킨다. 이에 대해 손님은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사람이 있다면 파르메니데스가 사용했던 그러한 방식을 선호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스스로 설명하는 전자의 방식이 낫다고 답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손님의 말에 겸손하게 귀기울일 것이며, 젊은이들 중 테아이테토스든 누구든 원하는 자를 선택할 수 있다고 답한다. 손님이 그 무리에 속하는 것으로 소개된 파르메니데스를 언급하고, 나아가 그가 원하는 조건으로 문답식의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 말함으로써 소크라테스는 손님으로 하여금 문답을 통해 각 유에 대한 정의를 설명하는 방식을 피하기 어렵도록 만든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앞서 말했듯 소크라테스는 손님의 정체성을 해명할 것을 간접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하여 쟁론과 시험 사이의 혼동이라는 테오도로스의 무지가 지적된 만큼, 손님으로서는 답변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 답변의 방식으로 일방적인 긴 연설의 방식을 택할 수도 없게 되었다. 손님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듯, 이 주제가 질문한 자가 기대하는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라 무척 긴 진술을 필요로 하리란 점을 첨언하면서도, 초면에 긴 말로 중언부언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하고, 소크라테스의 제안을 따르지 않는 것이 손님답지 못하고 투박한 모습으로 비치리란 점을 말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제안한 문답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그는 나아가 테아이테토스와 이전에 대화를 나눠본 일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대화상대자로 지목한다. 이어서 손님은 테아이테토스에게 논의의 길이에 지치게 되더라도 자신을 탓하지 말고 그의 일행들 탓을 하라 말하며, 이에 대해 테아이테토스는 자신이 그리 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지치더라도 자신의 운동 동료인 젊은 소크라테스를 참여시키면 될 것이라 말한다. 이 구절 역시 『파르메니데스』와의 관련성을 추정케 하는 부분으로 보이는 한편,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 이후 이어지는 정치가에 대한 정의가 시도되는 대화편 『정치가』에 등장하는 젊은 소크라테스를 또한 연상시킨다. 이후의 논의가 직접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인용하고 또한 그의 입장을 고찰함으로써 논의의 핵심문제가 해결되는 등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특히 『파르메니데스』와 이 대화편 『소피스테스』 사이의 연관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 더욱 설득력을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테아이테토스는 젊은 소크라테스를 묘사하며 '함께 운동을 하는 동료,' '함께 많은 고난을 극복해 나아가는 일이 익숙한 자'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바,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제시된 여러 문제들을 통해 고통스러운 훈련을 거치는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와 이후 진행될 논의들을 통해 고통을 겪게 될 테아이테토스가 연결됨으로써 두 대화편들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들 또한 연결되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손님은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말하는데, 이 역시 독자를 향한 언표로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등장하는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테스』에서 진행되는 논의에 도움을 줄 동료일지, 아니면 두 논의에서 전개되는 입장이 서로 상이하여 『소피스테스』에서의 논의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여야 할지에 대해서 여기에서 직접적인 답변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218b7-d2) 손님은 자신과 함께 검토를 시작하면서 우선 소피스테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추적하고 밝히는 진술로써 시작할 것을 테아이테토스에게 제안한다.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두 사람이 오직 이름과 관련해서만 '소피스테스'라는 것을 공통된 방식으로 지니고 있을 뿐, 그 이름을 부여하는 바로 그 일(ergon)은 각자 개별적으로(개인적으로)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소크라테스의 첫 질문에서는 이름과 유 사이의 관계가 언급되었으나, 여기에서는 이름과 일 사이의 관계가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적이 소피스테스에게만 국한된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철학자에 대해 혼동하고, 그 혼동의 결과는 철학자를 정치가로도, 소피스테스로도 믿는다는 것이며, 이는 달리 말하자면 정치가, 철학자의 경우에도 소피스테스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유, 이름과 일을 어떻게 부합시킬지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다시금 테오도로스의 무지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소크라테스의 간접적인 문제제기와 관련하여 손님이 답해야 할 것은 자신이 소피스테스가 아닌 철학자라는 점이라 기대할 수 있다. 그는 시험하는 자이고 쟁론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 이 점을 밝히고자 할 때 정치가, 소피스테스, 광인 모두와 혼동되는 철학자보다는 우선 철학자와의 혼동만이 논의된 소피스테스에 대해 고찰하고 밝히는 것이 증명의 부담이 덜할 수 있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이는 대화의 방식을 논하는 과정에서 질문들을 통한 문답의 방식과 긴 진술을 혼자서 늘어놓는 과시적 연설의 방식을 구분하는 데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 방향이다. 손님은 후자의 방식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도 여러 조건들을 추가하면서 손님이 문답의 방식쪽을 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두 사람 모두 쟁론과 시험이 다르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타의 대화편들에서 소피스테스와 과시적 연설 사이를 연결짓는 점을 고려하자면, 논의의 방향이 소피스테스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피스테스에 대해 이름은 공유하되 그 일은 따로 지니는 사람은 명시적으로는 손님과 테오도로스이나, 테오도로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그 일행인 테아이테토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손님은 이름에 대한 합의와 일에 대한 합의를 좀 더 자세히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는 모든 것에 관하여 단지 이름만을 진술과 별개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사실(사태, pragma) 자체를 진술들을 거쳐 합의하는 일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이름의 경우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진술과 별개로 합의가 가능하지만, 사실 자체의 경우에는 진술과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점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미 앞서 보았듯 세 유들 각각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의하는 일은 긴 진술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소피스테스에 대해서도 긴 진술이 필요하다. 좀 더 나아가 소피스테스라는 사태 자체에 합의하기 위해서도 역시 긴 진술이 필요할 것이고, 이는 노고로 인한 피로를 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문제이다. 손님은 이 점을 재차 언급함으로써 논의의 방식을 제안한다.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큰 일들을 잘 해내기 위해서 더 작고 쉬운 일에서 연습을 해 보는 일이 고래로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는 바, 소피스테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더 작은 일에서 연습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해명되지 않고 넘어가는 문제들 중 하나는 '일'의 의미하는 바이다. 그것을 각자가 나름대로 서로 다르게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앞서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여러 가지로 드러나는 나타남, 즉 인상(phantasma)과 서로 다른 평가들, 즉 믿음(doxa)일 수 있다. 그러나 논의의 맥락상 '일'에 대한 합의는 로고스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결과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정의(definition)이다. 또한 앎과 믿음을 개인의 심적상태라 말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이 되는 사태 자체로서의 일이라는 것을 앎과 믿음으로 충분히 포괄할 수 없을 것으로도 보인다. 일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측면과 더불어 각자의 상이한 판단으로 나뉘어지는 주관적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는 차후의 고찰과 관련짓기 이전에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218d2-221c5) 손님은 소피스테스의 유보다 더 쉬운 유에서 그 방법을 예행연습하고, 이를 거쳐가 그 유를 더 큰 유에 대한 본으로 세우고자 시도해 볼 것을 제안한다. 예행연습의 대상이 되는 유의 조건은 잘 알려진 작은 것이지만 더 큰 것들에 비해 진술은 전혀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손님은 이 방법과 진술이 그들이 바라는 것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여기에서 본이 되는 것은 유 혹은 방법 어느 한쪽만인 것이 아니라 이후 진행될 예행연습이 적용된 결과로서의 유이다. 또한 이 연습 이전에 제안된 목표가 소피스테스의 유, 일, 사태 자체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이었으므로, 이 연습 또한 더 쉬운 어떤 유에 대한 정의일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이 되는 것은 모종의 정의방법을 거쳐 정의된 그러한 유일 것이다. 손님은 이러한 연습의 대상으로서 낚시꾼을 제안한다. 그는 이것이 모두에게 잘 알려진 것이자 많은 열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테아이테토스도 이에 동의한다. 낚시꾼을 정의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손님은 그를 기술을 지닌 자로 놓을지, 아니면 기술은 지니지 않으나 그 외의 능력을 지닌 자로 놓을지 묻는다. 테아이테토스가 낚시꾼을 기술을 가진 자로 놓자고 하자 손님은 거의 모든 기술들이 두 종들이라 말한다. 그 한쪽은 '이전에 무엇이지 않은 것을 이후에 ~임을 향해 이끄는 모든 것으로서, 이끄는 쪽은 만드는 것, 이끌리는 쪽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들을 요약하여 만듦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 것들이나 ~된 것들을 진술들이나 행위들로 입수하고, 입수된 것들을 넘겨주지 않는 것으로서 인식이나 재물획득, 경쟁이나 사냥 등의 부분들을 모두 합쳐 획득술이라 할 수 있다. 이 둘 중 낚시술은 획득술 쪽에 놓이며, 이제 다시 획득술이 두 종들로 나뉜다. 획득술은 선물이나 보수 혹은 거래를 통한 자발적인 교환기술의 종이거나 아니면 일들에 따라서든 진술들에 따라서든 제압하는 종이다. 다시 제압하는 종이 취해져 두 가지로 잘리는데 그 한편은 공개적 경쟁이고, 다른 한편은 비공개의 사냥이다. 다시 사냥이 영혼을 지니지 않는 것에 대한 종과 영혼이 깃든 것에 대한 종으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잠수를 비롯 이름 없는 자잘한 부분들이고, 후자는 동물사냥술로 불린다. 동물사냥술은 다리 달린 유에 대한 뭍짐승사냥술과 헤엄치는 동물에 대한 수중사냥술로 나뉜다. 헤엄치는 동물에서 날개 달린 족속과 물에 사는 족속이 나뉘고, 전자에 대해 조류사냥술이 속한다. 후자에 대해서는 어획술이 속한다. 어획술이 크게 둘로 나뉘면 한쪽은 그물 등으로 가두어 잡는 에워싸는 사냥술이고 다른 쪽은 작살이나 삼지창으로 가격하여 잡는 가격술이다. 가격술에 대해 밤에 횃불을 들고 하는 횃불사냥과 낮동안에 작살과 삼지창으로 하는 갈고리술이 속한다. 가격술 중 갈고리술에 대해 다시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지는 쪽이 작살술이고, 남은 것은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갈고리로 물고기의 몸통 아무 곳이 아니라 각각의 경우 대가리와 주둥이 주위를 가격하여 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 과정을 요약하여 손님은 모든 기술 중 반절의 부분으로서 획득술, 거기에서 제압술, 제압술에서 사냥술로, 다시 사냥술에서 동물사냥술, 여기에서 다시 수중사냥술, 거기에서 아래에서 잘린 부분 전체가 어획술, 그 중에서 가격술, 작살술로 나아가, 작살술 중 끝으로 아래에서 위로의 가격하는 행위를 닮은 '낚시술'이 이름으로서 추적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 대해 평하기를 그 이름만 합의된 것이 아니라 일 자체에 관하여서도 충분히 파악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기술 외의 능력이란 무엇이고 그 능력 또한 기술과 같은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247e-249d까지의 논의는 능력(dynamis)를 행함과 겪음으로 일반화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적용시키고 그 작용과 결과의 사례로 인식함과 인식됨을 논하고 있으나, 이 설명이 기술과 기술 이외의 능력을 포함한 능력 일반에 대한 설명으로 선취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다음으로, 둘로 나누는 분할에서 분할의 기준이 문제될 수 있다. 또한 그 기준이 분할의 모든 단계에 일관되게 적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다. 226b-231b에 걸쳐 분할의 기술이 논의의 주제가 되고 이것이 같은 것들 사이의 분리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분리로서 정화에 관련되어 검토된다. 다른 한편 251e-252e에서는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분리되지도 무조건적으로 결합되지도 않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결합하고 어떤 경우에는 결합하지 않고 분리되어야 한다는 논증이 제시된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 철자들 사이의 엮임과 소리들 사이의 섞임, 그리고 유들에 있어서 결합의 원인과 분리의 원인이 탐구된다. 257에서는 특히 다름이 분리의 원인으로서 'to me on einai'와 'to on ouk einai'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상의 구절들에서 등장하는 분리, 분할, 구분과 관련된 논의들이 소피스테스의 유를 정의해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분할에 적용될 수 있다면 분할의 기준을 확정하는 데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gnorimon'의 의미도 문제될 수 있다. 그것이 이미 정의된 것 혹은 그러한 정의가 알려진 것을 의미한다면 이미 정의된 것을 정의하는 과정이란 무엇이고 그 과정에서 분할의 역할과 의미는 무엇인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의미가 '알려지는 것'에 그친다면 어떤 조건에서 그것이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되는지, 그리고 알려지는 것이 알려지기 전과 알려진 이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지 등에 대한 추가적인 의문이 야기될 것이다.


  221c6-231e7. 소피스테스의 여섯 가지 모습들(여섯 차례의 분할들).

  (221c6-223b7) 젊은이를 사냥하는 기술(1) : 손님은 이 본보기를 따라(kata touto to paradeigma) 소피스테스 또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찾기를 시도할 것을 제안한다. 낚시꾼의 경우 첫 질문은 그를 일반인(私人, 門外漢, idiotes)으로 놓을지 아니면 기술을 가진 자로 놓을지의 여부였다. 마찬가지로 손님은 소피스테스에 대해서도 그를 일반인으로 놓을지 전적으로 진정 소피스테스(<전문>지식인, 識者)로 놓을지 테아이테토스에게 묻는다. 이에 대해 그 이름에 걸맞게 전문지식인으로 놓아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오고, 이어서 손님은 그를 낚시꾼과 비슷한 족속으로, 즉 사냥꾼으로 놓는다. 사냥은 앞서 수중 동물 사냥과 육지 동물 사냥으로 분리하여 둘로 나뉘었다(220a1-5).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어졌으나 후자에 대해서는 나누어지지 않았고 종(형상)이 많으리라고 진술되었다. 손님은 여기에서 소피스테스와 낚시꾼이 갈라진다고 하며 소피스테스의 경우 부와 젊음의 강, 아낌없이 주는 초지에서 길러지는 것들을 제압하여 예속하려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육지 동물 사냥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육지 동물 사냥이 길들인 동물 사냥과 야생 동물 사냥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길들인 동물 사냥에 대해 테아이테토스가 묻자, 이와 관련하여 인간이 길들인 동물이거나, 길들인 동물이 없거나, 있으되 인간은 야생이라거나, 아니면 인간이 길들인 동물이되 인간에 대한 사냥은 없다는 것 중 원하는 주장을 고르라는 손님의 요구에 테아이테토스는 자신들이 길들인 동물이며 인간 사냥이 있다고 답한다. 길들이 동물 사냥은 강제에 의한 사냥과 설득술로 나뉘고, 설득술이 다시 사적인 모임에서의 것과 공적인 모임에서의 것으로 나뉜다. 사적인 사냥은 보수를 받는 부분과 선물을 주는 부분이 있는데, 후자의 경우 구애자들이 행하는 사냥이다. 즉 선물을 주어 인간을 사로잡는 '구애술'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 보수를 받는 기술은 쾌락을 미끼로 보수를 요구하는 아첨술, 쾌락술의 부분과 탁월함(arete)를 위해 사교한다면서 현금을 보수로 요구하는 기술의 부분으로 나뉜다. 테아이테토스는 탁월함을 위한 사교를 통해 보수를 요구하는 부분, 이 족속을 소피스테스라 부르고자 한다. 이에 대한 손님의 요약에 따르면 기술 중 자기 것으로 삼는 기술에서, 사냥술에서, 동물 사냥술 중, 육지 사냥술에서, 길들인 동물 사냥술에서, 인간 사냥술에서, 사사로운 모임에서의 사냥술 중, 보수를 받는 기술 중, 현금을 버는 기술에서, 가짜로 교육하는 기술(doxopaideutike) 중, 부유하고 명망있는 젊은이들을 사냥하는 기술이 소피스테스의 기술이다.
  (223c1-224e5) 탁월함에 관련한 교육매매술(2무역술-3도매술-4직매술) : 손님은 앞서의 결론에서 더 나아가 다른 방식으로 살펴볼 것을 테아이테토스에게 제안한다. 이 제안의 이유는 앞서 이야기된 것들에서 그들이 말하던 것과는 다른 어떤 유인 듯한 모습이 주어지며, 따라서 지금 좇고 있는 유는 무척이나 다채로운 기술에(εὖ μάλα ποικίλης) 참여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앞서의 논의에 따라 획득술의 종은 사냥하는 부분과 교환하는 부분 두 가지였다. 교환하는 기술에는 다시 종이 둘로서 한쪽은 선물하는 기술이고 다른 쪽은 거래술이다. 거래술은 자가생산물들에 대한 직매술과 타인의 산물들로 장사하는 상술로 나뉘고, 상술은 다시 도시 내의 소매술과 도시 간의 무역술로 나뉜다. 무역술은 몸을 기르고 몸이 쓰는 것들의 무역술과 혼이 그리하는 것들의 무역술로 나뉜다. 후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손님은 시가술, 회화술 등을 포함하여 영혼의 위안이나 진지한 기쁨을 위해 도시에서 도시로 가져와 매매되는 것들을 가져와 파는 자가 먹고 마실 것을 가져다 파는 자 못지 않게 무역상이라 불려 마땅하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설명된 영혼(-을 위한)매매술은 한편으로 과시술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전자(영혼매매술)만큼이나 우습더라도, 교육들에 대한 것이기에 이 행위와 형제간인 그러한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기술을 포함한다. 이를 교육매매술이라 하고 이러한 기술은 여타의 기술들에 대한 교육매매술과 탁월함(덕, arete)에 대한 교육에 관련된 다른 이름의 기술로 나뉜다. 이 후자의 기술이 소피스테스의 기술이며, 획득술의, 교환술의, 거래술의, 무역술의, 영혼매매술에서 탁월함에 대한 진술들과 교육들에 관련된 것으로 정리된다. 여기에 더하여 세 번째로 도시에 눌러앉아 이와 같은 것들에 관한 교육들을 매입하거나 스스로 고안하여 팔아 이로써 삶을 영위하는 자 또한 소피스테스라 부른다. 그래서 거래술에서 상술에 속하는 도매술이든 직매술이든 양자 모두 이러한 것들에 관한 교육매매의 유일 것이기에, 소피스테스의 기술을 지닌 유로 부를 것이다. 이로써 젊은이에 대한 사냥술에 더하여 교육매매술인 한에서의 무역술, 도매술, 직매술까지 네 가지 기술들이 소피스테스의 기술의 유인 듯이 나타난다.
  (224e6-226a5) 쟁론술(5) : 손님은 지금 추적하고 있는 유가 다른 어떤 것에도 유사한지 살펴보기를 제안한다. 획득술에는 경쟁술적인 부분이 속하며 이것이 한편으로는 경연으로, 다른 쪽으로는 투쟁으로 나뉜다. 투쟁술에서 몸에 몸으로 맞서게 되는 것은 폭력에 관한 것이다. 반면 진술에 진술로 맞서게 되는 것은 말싸움(ἀμφισβήτησις)에 관한 것이다. 말싸움에 관한 것은 정의와 부정의에 관하여 긴 진술에 긴 진술로 공적으로 맞서는 법정논쟁과 사인(私人)들 사이에서 답변들에 맞선 질문들로 나뉘어진 반박(ἀντιλογικόν)으로 나뉜다. 반박에서 약속(계약)을 둘러싸고 되는대로 비기술적으로 논쟁하는 종은 진술이 따로 분간해 두었고, 기술이 포함되었으며 정의 자체와 부정의 그리고 여타의 것들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논쟁하는 쪽은 쟁론이다. 쟁론은 돈을 쓰는 쪽과 돈을 버는 쪽으로 나뉜다. 돈을 쓰는, 즉 이런 일들에 관련하여 시간을 보내는 일의 즐거움으로 인해 제 자신의 일에는 소홀해지고, 반면 그 말에 관련하여 듣는 이들 중 대다수에게는 들으면서 즐거움이 함께하지 않는 그런 쪽은 수다라 불린다. 반면 사적인 쟁론들을 통하여 돈을 버는 쪽은 네 번째로 되돌아온 소피스테스이다. 이는 손님에 의해 돈을 버는 유로서, 쟁론적 기술에 속하고, 반박술에 속하며, 논쟁술에, 투쟁술에, 경쟁술에, 획득술에 속하는 소피스테스로 정리된다.
  (226a6-231b8) 시험-정화술(6) : 여기까지 드러난 소피스테스의 다섯 가지 모습을 통해 그 유가 다채롭고 한 손으로 잡히지 않는 사냥감이라는 것이 참되게 진술되었다는 점이 받아들여진다. 때문에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두 손으로, 더욱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그리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진행은 231c5-6에서 모든 것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는 언급으로 이어진다. 이는 앞서의 다섯 가지 분할들과 이후의 두 분할들이 소피스테스를 정의하는 데에 기여하는 방식에 대한 추정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손님은 이제 여섯 번째 추적을 시도한다. 그는 가사일들의 이름들, 예를 들어 거르다, 체로 치다, 체로 거르다, 키질하다, (털을)빗다, 감아 내리다, (북으로 베를)가르다 같은 것들을 언급하고 이 모두를 분할하는 것들로 아우른다. 손님의 진술에 따를 경우 이러한 것들에 관련하여 기술이 그 모든 것 안에서 단일하겠기에 그 기술을 단일한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그 기술이 곧 분할술이다. 분할의 두 종은 좋은 것으로부터 나쁜 것을 분리해내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부터 유사한 것을 분리해내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이름할 만한 것이 없으나 후자는 정화라 불리운다. 정화술의 분할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우선 물체와 관련하여 영혼이 있는 물체와 영혼이 없는 물체 사이의 분할이 이루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물체의 안과 밖으로 두 가지 정화가 나뉜다. 살아있는(즉, 영혼이 있는) 물체의 경우 내부로는 체육술과 의술이 (나쁜 것을) 분리해내어 제거하고, 외부로는 세신술 등 하찮은 것들이 정화를 제공한다. 영혼 없는 물체들에 대해서는 축융술을 비롯한 정돈술이 정화를 제공하나 이러한 것들은 세분할 경우 우스운 이름들이 나온다. 그러나 손님은 이러한 하찮음, 우스움, 혹은 이를 통한 이로움의 경중이 논의의 방법으로 고려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논의의 방법은 모든 기술들에 대해 동종적인 것(συγγενές)과 동종적이지 않은 것을 파악하고 유사성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를 강조하면서 손님은 영혼의 정화를 따로 놓고 그 외의 무언가를 정화하는 모든 것을 함께 묶는다. 그 이유는 논의의 방법이 사유에 관한 정화를 다른 정화로부터 따로 정의하고자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화는 영혼에 관한 것과 물체에 관한 것으로 나뉜다. 이제 다시 이러한 영혼의 정화가 제거하는 대상이 되는 악에 대한 분할이 이루어진다. 영혼의 악은 신체의 악에 대한 분할에 유비된다. 신체의 악은 질병과 추함으로 나뉘고, 이에 따라 영혼에 있어서도 질병에는 내분(στάσις)이, 추함에는 불균형(ἀμετρία)이 대응된다. 내분은 믿음(판단)이 열망과, 격정이 쾌락과, 지성(logos)이 고통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서로 간에 추잡하게 어긋나는 것이다. 이 영혼의 내분과 질병은 저열함(πονηρία)이다. 반면 불균형은 운동에 참여하여 표적을 세워 그것에 맞기를 시도하나 매 촉발마다 빗나가고 벗어나게 되는 원인이다. 이처럼 영혼의 불균형도 영혼이 진리를 향해 촉발되지만 이해로부터 빗나가도록 만드는 것, 무지(ἀγνοία)이며 이는 사리분별로부터의 빗나감(παραφροσύνη)이다. 이제 영혼의 두 가지 악으로 영혼의 질병과 무지에 대해 정화 역시 두 가지로 대응하여 나뉜다. 영혼의 악이 신체의 악에 유비되어 분할되었듯 정화 또한 신체의 정화에 영혼의 정화가 유비되어 나뉜다. 신체의 경우 질병에는 의술이, 추함에는 체육이 대응하며, 이에 따라 영혼의 경우 그 저열함에는 처벌의 기술이(κολαστική), 무지에는 교수기술(διδασκαλική)이 대응된다. 영혼의 무지에 대한 정화로서의 교수기술은 다시 무지의 종류와 함께 둘로 나뉜다. 무지는 사유의 모든 실패 원인이 되는 어리석음(ἀμαθία)과 그 외의 무지로 나뉜다. 여기에서 어리석음이란 어떤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무지, 즉 어리석음에 대한 교수기술로서 교육(παιδεία)과 그 외의 무지에 대한 장인교수(δημιουργική διδασκαλική)가 교수기술의 하위분류를 이룬다. 교육은 다시 훈계술과 또 다른 기술로 나뉜다. 모든 어리석음은 비자발적이며, 스스로 지혜롭다 믿는 자는 자신이 능란하다 여기는 것들에 대해 전혀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고, 이에 대해 훈계술은 많은 노력에 비해 성과가 미미하기에 또 다른 기술이 필요하다. 이 또 다른 기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누군가 아무것도 진술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 진술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문답한다. (2) 진술들로써 그 믿음들을 서로 곁하여 같은 곳으로 모아, 그 믿음들이 같은 것들에 관련하여 같은 것들에 대해 같은 식으로 그 자신과 반대된다는 것을 밝혀준다. (3) 이를 보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자신에 관한 대단하고도 완고한 믿음들로부터 풀려난다. 이에 대해 손님은 의사의 유비를 든다. 의사가 몸 속의 장애물들(τὰ ἐμποδίζοντα)이 제거되지 않는 한 그 몸이 추가적인 양분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듯, 시험하는 자는 배움에 방해되는 믿음들을 제거하기 전까지 영혼은 추가된 배움의 이익을 취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에 논의되겠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무언가 말하는 것'은 거짓에 대한 설명에 해당하고, 이 상태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말한다고 믿는 것은 거짓 믿음에 대한 설명에 해당한다. 이를 정리하면 '거짓 진술을 말하고 거짓 믿음을 가진 자에게서 그의 믿음들을 같은 곳으로 모아 서로 곁하여 세움으로써 그 믿음들의 자기모순을 드러내 그의 믿음들을 제거하는 것,' 이것이 곧 시험(ἔλεγχος)이며 유(類)로서 고귀한 소피스테스술(ἡ γένει γενναία σοφιστική)이다.

  223c1-2. "앞서 이야기된 것들에서" 사냥술이 아닌 다른 유인 듯한 모습은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 이후의 내용에 따르면 그 '다른 유'는 교환술, 거래술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사적인 모임에서의 사냥술을 분할하는 과정에서 보수를 받고 현금을 버는 기술로의 이행을 통해 시사된 바 있다.
  223c6-7. "획득하는 기술의 종은 이중이다. 한편으로는 사냥하는 부분을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환(ἀλλακτικόν)하는 부분을 지닌다." 219d κτητική μεταβλητικόν-χειρωτική. χειρωτική ἀναφανδόν-κρυφαῖον. κρυφαῖον=θηρευτικόν.
  처음 교육매매술은 무역술의 하위분류로 제시되었으나 이후 제 3, 제 4의 모습(phantasma)이 제시되는 과정에서는 다시 교육매매술이 소매술과 직매술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소매술은 무역술과 함께 상술을 이루는 것이고, 상술은 다시 직매술과 더불어 거래술을 이룬다. 이에 따라 분할의 임의성이 지적될 수 있다.
  '여타의 기술들에 속하는(ἄλλων τεχνῶν)' 교육과 '탁월함에 관한(περὶ τῆς ἀρετῆς)' 교육이 구분되는 표현을 고려할 때, 앞서 기술과 여타의 능력들의 경우(219a4-6)와 마찬가지로 덕은 그 외의 기술들과 동급으로 분류된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탁월함은 기술의 일종이며 기술은 능력의 일종이다. 이를 고려할 때 교육의 분류 또한 그것이 속하거나 관련하는 기술들에 따라 둘 이상의 더욱 다종다양한 교육들로 분할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유에 종이 속하는 방식들과 여기에서 교육이 기술들에 속하는/관련하는 방식은 같은 결과를 낳는가?

  돈을 번다는 언급은 앞서 네 가지 모습들 모두에서 드러난다.
  225c에서 'εἰκῇ δὲ καὶ ἀτέχνως'. 사소한 문제이긴 하나 기술(혹은 기술자)의 분할과정에서 비기술적인 종이 등장한다. 이 상충은 분할의 단계들이 엄밀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다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정리하는 부분에서 'χρηματιστικὸν'은 앞서의 분할에서 등장하는 교환 이하의 매매술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자나 후자 공히 돈을 벌어 들이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2차 분할에서 지적한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제압으로부터 전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투의 하위종으로서 폭력까지 그 획득의 대상은 기술이 적용되는 대상과 일치한다. 그러나 논쟁 이하의 분류에서는 기술의 적용 대상은 상대가 되는 사람인 반면, 획득의 결과물은 사람이 아닌 돈으로 전환된다.
  '두 손으로 잡아야 한다.' 정화술에서 시험술로 이어지는 분할에서도 다시 한 번 같은 맥락의 표현이 등장한다. 231c '모든 것을 다 피하기는 쉽지 않다.' 이 표현은 분할의 결과들이 폐기되지 않고 유지되거나 혹은 적어도 거짓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소피스테스에 대해 참인 진술들과 소피스테스에 대해 정의인 진술이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구분이 없다면 소피스테스에 대해 참인 진술과 정의인 진술이 같은 것으로서 정의에 실패한 이제까지의 분할들은 모두 거짓이 된다. 반면에 마찬가지로 구분이 없는 상태에서 이 진술들이 모두 참이라는 점에서 모두 정의라면 역시 소피스테스는 다섯 가지 서로 다른 기술자들로 나타나 정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낚시꾼의 경우에도 자신이 획득한 물고기를 자신이 먹을 수 있고, 혹은 직매술을 통해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다. 낚시꾼을 분할하는 과정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던 문제가 소피스테스에게서는 발생하고 있다. 이후의 논의에서 소피스테스의 기술을 논박술에서 나아가 모방술, 일종의 장난으로 다루면서 그 기술이 '모든 것들'에 관련한다는 점이 이러한 문제 발생의 원인으로 지적된다면 이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논박 자체가 모든 주제들을 다루는 것에 대해 논박을 통해 돈을 버는 것과 논박을 통해 젊은이를 사냥하는 것이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기 어려울 것이다. 후자의 기술들이 목표로 하는 바는 전자의 기술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전자의 기술 자체의 목표는 후자의 기술들과 별개이다. 모방술의 목적은 모방의 완전한 수행이다.
  여러 분할들은 그 출발점을 선정하는 데에 아무런 정당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매 결론마다 테아이테토스는 그것이 소피스테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 답하며, 손님은 이러한 답을 유도해내는 질문을 던진다. 낚시꾼에 대해 사람들이 지니는 인상은 낚시꾼이 행하는 활동으로부터 파생될 것이며 낚시꾼의 활동이 단순한 한에서 인상 역시 복잡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소피스테스의 경우에는 젊은이에 대한 사냥, 지식의 산매, 쟁론 등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지며 이것들 각각에 의존하는 여러 인상들이 사람들 사이에 생겨날 것이다. 원본과 모상, 둘 사이의 관계에서 다시 참과 거짓의 중첩된 구분을 고려할 경우, 유와 유의 활동들, 그리고 활동들에 대한 진술과 생각과 믿음들 사이의 단계적인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이 구분에서 출발점으로 선정될 수 있는 것은 피정의항인 유 자체일 수 없다. 또한 피정의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단순한 믿음도 정의에 활용될 수 없다. 반면 유의 일부로서 유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으면서 또한 믿음이나 진술이라는 모상의 원본이 될 수 있는 활동들, 이 활동들에 관련된 모상들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의 분류에서 분할이 반드시 획득이나 제작 중 어느 한쪽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다만 제작에 대한 정의와 이후 능력에 대한 논의에서 마찬가지로 만듦(작용)에 대한 정의를 고려해 볼 경우 대상에 직접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에서 분할 역시 제작의 하위분류로 간주할 여지가 있다. 분류는 전체를 부분들로 변화시키고 정화는 악들에 대해서는 소멸을, 악과 선의 혼합물에 대해서는 개선을 야기시킨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는 제작에 대한 정의가 악에 대해 긍정에서 부정으로 나아가는 배제의 방식과 다르다. 하지만 예를 들어 나무로부터 책상을 제작할 경우, 이전에 나무이던 것은 더 이상 나무가 아니게 된다. 오직 책상에 관점을 고정할 경우에만 책상 아니던 것이 책상이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모든 제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작과 분류의 관계보다 불분명한 지점은 오히려 능력의 차원에서 만듦에 대해 제시된 정의의 범위 안에서 획득이 구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획득의 대상도 획득이란 작용을 겪음으로써 변화된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제작에서의 변화와 획득에서의 변화를 구분할 기준이 필요하다. 

  덕(탁월함, arete)의 판매술(224d1-2)과 처벌술(κολαστική)의 관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교수술(διδασκαλική)의 하위분류로서 교육술(παιδεία), 다시 이것의 하위분류로서 훈계술(νουθετητική)와 짝을 이루는 시험술-혈통이 좋은 소피스테스술이 처벌술과 마찬가지로 정화술의 하위분류라 한다면, 무지의 제거가 아닌 지식의 전달로서 덕의 판매술과 짝을 이룰 또 다른 기술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덕을 전달하여 그 덕을 가지게끔 만들어주는 것과 악덕(영혼의 추함)을 제거해주는 것은 서로 다르다. 처벌술은 이를 테면 덕의 교육술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교수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교수술이 정화술의 하위분류로서 영혼의 무지에 대한 제거의 기능을 갖는 한, 교수술은 교육적인 것들(μαθήματα)을 넘겨주는 것(παραδιδόναι)과 다른, 이 넘겨줌에 앞서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수술이 기술교수술들(δημιουργικαὶ διδασκαλίαι)과 교육으로 나뉜다는 테아이테토스의 언급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무지(ἀγνοία) 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관련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무지는 단순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지는 잘못된 혹은 거짓인 믿음들이 올바른 혹은 참인 믿음들과 혼재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여타의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가 자부하는 '무지의 지'와 이를 관련시켜 본다면,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참인 믿음뿐만 아니라 거짓 믿음 역시 가지지 않으며, 그러한 한에서 교육받을 수 없게 된다.

  우선 손님과 테아이테토스가 정의를 위해 도입하는 분할이 있고, 그 분할의 내용으로 등장하는 분할이 있으며, 분할의 일종으로서 시험이 있다. 시험은 다시 무지에 대한 정화로서 소피스테스가 사람들에게 행하는 시험, 소피스테스의 시험에 맞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가 행하는 시험, 이 과정에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가 일원론, 다원론, 유물론, 형상론에 대해 행하는 시험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정의를 위한 분할은 분류일 뿐 정화가 아니다. 이 경우 같은 것을 같은 것과 나눌 때에 이 나눔의 기준이 무엇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 또한 소크라테스, 손님, 소피스테스 각각에 대해 진술될 수 있는 시험이라는 것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지 논의되어야 한다. 230d에서 제시되는 시험에 대한 정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역할뿐이다. 또한 그에 앞서 230b의 묘사를 보자면 시험은 상대의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일을 목표로 한다. 소크라테스, 손님, 소피스테스 공히 이러한 목표에 도달한다.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여럿이라고 말하게 되는 등의 결론은 세 경우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손님은 이 문제를 극복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더 나아갈 것을 제안하고, 실제로 더 나아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만, 소피스테스는 이 결론을 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또 다른 지점은 시험술이 누구의 기술인가 하는 것이다. 손님에 의해서, 그리고 손님이 가정하여 반박당하는 소피스테스의 입장을 통해서 모두 충족된다는 것이다. 이 논란에서 번역의 문제가 대두되는 부분은 231a9-b1이다. 여기에서 'οὐ'가 본동사를 수식하느냐 'σμικρῶν'을 수식하느냐가 문제이다. 후자의 경우 '충분히 주의할 경우, 사소하지 않은 규정들에 관하여 논박이 생겨날 것으로 생각한다.' 라는 번역이 이루어질 것이다. 반면 전자의 경우에는 '충분히 주의할 경우, 사소한 규정들에 관하여서 논박이 생겨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번역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번역을 반대하는 이들의 논거는 첫째로 문법상 'οὐ'가 가까운 'σμικρῶν' 대신 'οἴομαι'를 수식한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며, 다음으로 '사소한 규정들'의 의미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οὐ'의 위치를 고려할 때 전체 문장에 대한 부정의 의미로 번역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으며, '사소한 규정들' 못지 않게 '사소하지 않은 규정들'도 의미의 규명이 필요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시험에 대한 정의가 자기모순을 통한 무지의 입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 한에서, 이에 합치하는 활동이 문헌 내에 제시될 때에 개에 의한 시험이든 늑대에 의한 시험이든 그 차이는 중요치 않을 수 있다. 이는 227a-c까지 제시되는 손님의 발언과도 관련될 수 있다. 장군술과 이 잡기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실상 시험을 소크라테스에 고유한 것으로서 소피스테스에게는 적용 불가한 것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시험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테스 사이의 가치평가를 통해 이를 한쪽에 배타적으로 적용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과정에서 이 차이에 주목할 필요는 없다. 충분한 경계의 의미를 분할을 성립 가능케 하는 근거로서 중후반부의 변증술에 대한 이해와 결부지어 생각한다면, 사소한 규정들에서 논박이 일어나지 않는 과정 또한 설명 가능하다. 예를 들어 각각의 모든 것들을 to on이라 부를 때 to on 자체와 그 이외의 것들 사이의 차이는 명명의 기준이 to on이라는 점을 '충분히 경계'한다면 차치할 수 있다. 물론 to on이라는 것은 to on 자체에게만 고유한 본성일 뿐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겪음을 통해 나온 결과일 것이다. 이는 소피스테스와 시험술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소피스테스라는 유를 정의하기 위해 시험술의 정의는 불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의 구체적인 어떤 한 사람의 소피스테스가 다른 누군가에게 시험술을 적용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테아이테토스는 어쩌면 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테아이테토스가 개이거나 말이기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 소피스테스를 추적하면서 드러난 여섯 가지 모습들과 소피스테스라는 유 자체 사이의 관계는 이후 유들의 결합, 그리고 거짓 진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蟲-


1. 첫 콜로퀴엄 때 너무 일 벌리지 말라는 쪽의 조언들을 한참이나 들어 놓고서는, 이번 콜로퀴엄에서도 결국 같은 종류의 지적을 받았다. 욕심 부리지 않는다고 나름 자부했었는데 말짱 꽝이었달지. 처음에는 반박술, 변증술, 분할술을 다 다루면서도 '『소피스테스』 한 권만 다루는 것이니 크게 무리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었고 이번에는 '변증술 다루려니 to on(being) 해석 문제도 좀 다루고, 자기술어화도 좀 다루고, 거짓 문제도 좀 다루고 하면 되겠지. 중심이니 끝들이니 전체니 부분들이니 하는 얘기 나오기도 하니, 이거 가지고 끼워 맞추면 그림 좀 되겠네'라고 생각했었으나... 뭐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낙관적인 인간인지라(언제부터!?) 수습도 못 할 정도로 일 벌리기 전에 적절히 지적받고 제한받아서 이 즈음에서라도 재점검해 보게 되었으면 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Owen이 symploke eidon 논문 썼고, Sayer(이름 이거 맞나?)나 Silverman, Job van Eck도 있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논문들부터 일단 추려야 하겠다. 어쨌든 잠시 잊고 있었던 '너 플라톤 왜 읽니'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다. 결국 내가 궁금한 건 애초에 문제가 뭐였는가 하는 거다. 명제논리, 술어논리, 양화, 양상, 이런저런 도구들이 등장하고 그 방법론들이 구체화되는 사이에 지금에 와서 당연시되는 것들이, 그러한 도구와 방법론들이 마련되기 이전에 어떤 점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또 그걸 해결하기 위해 어떤 사유과정을 거쳤는지, 그래서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놓쳤던 것뿐 해결되지는 않은 채로 남아있는 그런 문제들이 있지 않을까, 또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도 역시나 그 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는 하다. 플라톤 철학 안에서는 물론 독립적이기만 한줄 알았던 이데아(대놓고 이데아라고 안 하고 에이도스니 게노스니 하면서 둘러 얘기하긴 하지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든지 심지어 의존하기까지 한다는 게, 어찌 보느냐에 따라서 플라톤의 철학 전체를 발전론으로 볼지 통합론으로 볼지 이 문제까지 얽혀들 것이고, 『파르메니데스』에서 제기된 형상의 자기술어화 문제, 또 이것과 관련해서 『파이돈』에서 등장하는 세련된 원인에 대한 문제, 『에우튀데모스』에서 나오는 거짓불가능성과 모순불가능성, 『크라튈로스』에서 제기되는 언어에 대한 입장들이 다 관련될 테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정지는 운동이 아니다"와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 사이의 간극은 결국 시간과 생성의 문제가 얽혀있는지라, 이게 해결되려면 감각적 대상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지적하는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테스』에서 등장하는 to on과 to me on, 같음(tauton)과 다름(thateron)의 얽힘을 통해 이루어지는 『티마이오스』에서의 시간과 운동이 함께 다루어져야 할 듯하고, 변증술과 분할하고 종합하는 기술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아야 변증술에 대해 가타부타 할 테니 『정치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이래저래 여전히 『소피스테스』가 결정적인 대화편이긴 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더구나 도덕이나 윤리, 가치 문제를 안 다룬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게다가 수학 얘기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일 거라는 아주 개인적인 확신도 있고=_=.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 콜로퀴엄에서 한 장을 마무리해서 가져오지 말고 서론과 목차, 주요 참고문헌을 포함한 논문작성계획을 마련해 오라는 하명은 그 뜻을 풀자면 '자네 아직 준비가 안 되었군'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지금 『소피스테스』 붙들고 앉은지가 벌써 몇 해 째인데 이 지경이라니 나도 참 나다. 이전 지도교수님께서 '전체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주요 논지가 전개되는 방식을 정리해 보라'라고 하신 것도 역시나 같은 맥락일 터이다. 요컨데 문헌을 꽉 움켜쥐고 지배하질 못하고서, 게다가 연구사나 연구계획, 그에 따른 견적이랄지 뭐 그런 것도 못 잡은 채로 뭘 쓰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씀들이 아니시겠는가. 게다가 이번에 가져간 3장 초안 안에서만도 being에 관련해 complete와 incomplete 구분, predication과 copula 구분, existential 문제, 몇 사람 지지하지도 않는 생소한 'idia physin exein(to have its own nature)'으로서의 being 해석까지 다루려 들고 뭔가 시도되지도 않은 '중심과 끝들' 얘기를 마구잡이로 적용시키려 들지를 않나 은근슬쩍 이 두 가지로 자기술어화 문제 다 풀리는 것처럼 얘기를 하지 않나, 막 나가다 못해 이 얘기들로 초중반까지의 분할문제도 해석해 버리려 하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옛말의 전형적인 사례 아니겠나. symploke eidon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자료 조사부터. 뭐 그래도 여전히 이 짓거리가 재밌고, 그냥 욕만 먹는 게 아니라 그럴수록 조금씩 또 나아갈 구석이 보이니, 그야말로 용기를 내야만 한달까. 내용요약은 2주 남았고, 계획발표는 5주 정도 남았고, 이제 좀 차근차근 숨 좀 골라 가면서 스토아 자연학 강독도 마무리 하고, 소피스테스 단편들 마무리도 하고, 몇 주를 날려먹은 『파이드로스』도 슬금슬금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 여전히, 평생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심정. 다만 확실히 실력이나 노력이 이 지경으로 밑바닥이어서는 가망이 없긴 없다. 더 빡세게, 더 치밀하게, 더 악착같이, 오키오키.

2. 사회성지수란 게 있다면 지금쯤 아마 난 바닥을 치지 않았을까 싶다. 학부 때는 뭔가 의리랄까, 약간은 어떤 사명감이랄까 그런 것도 더해서, 그야말로 소위 '술 먹고 으쌰으쌰'하는 것도 있고 하여 뭐 시키는 거 없어도 이래저래 사람들 챙긴답시고 귀찮게 굴고 일 벌리고 사람 모으고 이리저리 나돌아다니고 그랬는데(그래 봤자 결국 다 학회니 학생회니 그런 쪽이었지만), 군대 가서는 기왕 온 거 좀 빠릿빠릿하게 굴고 싶어서도 그렇고 귀찮은 거 싫어서라도 별 문제 안 일으키고 가끔 싸바싸바도 해가며 적당히 챙겨먹을 거 챙겨먹고 그리 살았고, 이러니 저러니 해서 학부 졸업하고 다른 곳으로 대학원을 들어가서는, 이게 다 뭔가 싶게 되었달지. 사실은 그리 살갑고 친절하고 예의바른 그런 인간은 본래 아니고, 연구실도 안 쓰고 강의 들을 때 말고는 대학원 사람들은 교수든 선배든 거의 만날 일이 없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돈 받는 쪽으로는 시키는 일이야 하지만 전처럼 뭔가 '으아~ 의리 아니겠습니까!?' 뭐 이런 건 하게 되질 않고, 여전히 자잘한 행정업무나 때마다 찾아 뵙고 인사드릴 일도 있고 해서 사실은 그런 거 다 잘 하는 게 나쁜 일도 아니고 오히려 필요하긴 한데, 모르겠다. 전 같으면 정말 간혹가다 내 스스로도 '아차' 싶은 짓을 할 때나 듣던 지적들을 요새는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군대도 갔다 오고, 한창 막내급으로 바삐 다녀야 할 처지에 눈치도 없이 안하무인으로 왜 그러고 다니냐는 듯한 눈치 혹은 직접 그런 지적들. 앗싸리 능력이나 출중하면 그냥 싹통머리 없는 놈이겠거니 하고 아무도 안 건드리겠지만, 능력은 개뿔 바닥이나 벅벅 긁고 있는 주제에 내가 왜 이러는지. 그냥 만사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미래조차 풍요와 안락과는 영 인연이 없고 그냥 어디 골방에서 고독사하는 결말인데(그나마 그리 죽을 방이나마 있다면 다행 아니겠나) 그런 꿈이나마 지키려면 굼뜬 머리와 썩은 몸뚱이로는 딴짓하고 한눈 팔 여지가 없다면 없는 처지인지라, 진작에 그리 했어야할 집중이란 것을 하려고 그런다는 핑계는, 뭐 그야말로 핑계이고 변명일 따름이겠지. 나중에라도 조금이나마 공부하는 삶이라는 게 기반까지는 아니더라도 흐름만이라도 잡힌 다음에는 근 2~3년 막돼먹은 새끼로 살아온 시간들을 사죄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학부 때 은사님들께도, 지금 대학원 와서 뵙게 된 은사님들께도 마땅히 받으실 만큼의 감사와 존경을 못 드렸다는 건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내 탓이긴 하니. 연애를 하면 좀 말랑말랑하니 좀 그렇게 나아지려나? 음, 그럼 앞으로도 가망이 없군.

3. 물론 철학계란 게 밖에서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것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게 학계이긴 하다. 내세울 학회와 학술지가 마련되지 못했고, 애초에 사람 자체가 적은 마당에 그나마도 세대별로 몰려 있어서 그 몰린 세대가 어느 지역으로 유학을 다녀오고 또 국내에서도 어느 학교 어느 교수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느냐에 따라 주제나 방법론까지 쏠리고 흔들려서 자생력이랄까 그런 걸 말하기도 어렵고, 그게 앞으로 사정이 나아질까 하고 묻는다면 당장에 주요 문헌들에 대한 번역, 제대로 된 사전의 편찬, 그러고 나면 연구사에 대한 정리도 필요할 거고 이래저래 한참 걸려 온갖 고생 다 해야 겨우 넘을 산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그나마 어떤 자부심 덕일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게 있을지 여하간 비교적 사정이 깨끗하다면 깨끗한 편이고, 해야 할 일이 막막하리만치 많다고 해서 다들 등돌리고 있는가 하면 그 역시 아니고,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활동하고 교류하는 사람들, 그런 움직임들도 아예 없지만은 않은 마당에 '망했어, 다 망했어, 세상은 똥이야, 이히히 오줌발사!'라고 할 필요는 없다 생각한다. 이성과 주체의 신화에 빠져 있다느니,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발전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느니, 사실 이런 얘기들은 국내의 학문연구사를 기준으로 보자면 좀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남의 얘기랄 수도 있을 듯하고. 우리 전통이 아니니 그렇긴 하지만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히도 딴 나라 사람들이 열심히 해준 덕분에 그들의 시행착오는 반복하지 않고 그나마 비교적 빠르게(그래봤댔자 50년 100년 얘기겠지만) 좇아갈 희망도 없지는 않고, 그럭저럭 세상을 굴러가지 않겠나. 물론 3년이 다 가도록 전공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며 서양고대철학 자체에 위기감을 느끼기는 하는데, 뭐 그래봤자 깨작 3년이기도 하고, 학부생들이 『법률』로도 졸업논문을 쓰고 『소피스테스』에다가 엘레아의 제논까지 다루는 세상이다. 나름 희망적이라면 희망적이지 않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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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 지도교수님과 현 지도교수님을 번갈아 찾아 뵈면서 한편에서는 전체 개괄을, 다른 쪽에서는 중요 장의 초안을 보여 드려야 하는 상황. 지도교수님도 논문 준비 과정도 실수도 오류도 작성 기간도 두 배가 돼, really!? 이리저리 검색 돌려 확인해 보니 국내 학술지 등재 논문들, 석박사학위논문들, 단행본 등등 해서 40편 정도가 『소피스테스』에 직접 관련되는 듯. 영미권 저널들이랑 단행본들은 얼추 잡아 100편 남짓. 독어 단행본은 몇 개 있는듸 꾸역꾸역 보면 어떻게든 되지 싶으나 불어나 이태리어로 된 놈들이 문제. 이건 뭐 아예 엄두를 못 내니. 물론 그건 일어로 된 놈들도 마찬가지. 읽을 수 있는 것들만 추려서 대강 얼개 정도는 잡겠는데 딱 떨어지게 계통도 그려내고 연구사 정리할 정도로 보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다. 쓰다 보니 생각이 바뀌는 지점들도 있고. '가장 중요한 유들'을 여섯 개로 밀어 붙여 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을 듯하다든지 뭐 그런 것들. 그래도 덕분에 좀 생각이 정리되기도 했으니. 며칠 동안 밤샜다 퍼질러 잤다가 또 밤샜다가 이래 놓으니 몸상태가 영 아니다. 어찌 되었든 결국은 재밌어서 하는 짓이다. 오늘 전 지도교수님께서 그러시더라, 이거 참 재미있는 대화편이라고. 말씀대로, 재밌긴 재밌다. 이러니저러니 징징거리며 죽는 소리를 해대고, 결국 나란 놈은 재밌으면 장땡인 거고 당장은 재밌으니 된 거다. Complete/incomplete be랑 tautological proposition, self-predication, 단순정언, 단순부정, 무한판단, 거짓의 역설, 실재와 가상, 논박과 모방과 변증, 분할과 종합이 마구 뒤얽히면서 못해도 19세기 이래로 지금까지 논란이 끊이질 않고 이어지는 2천년 묵은 대화편이라니, 그게 또 움직이니 멈추니 같네 다르네 해가며 오늘날의 논리적 도구들, 학문적 방법론들이 자리잡히기 이전의 언어와 사유를 가지고 이어져 나간다니 두근반세근반콩닥콩닥하지 않냔 말이지. 아, 뭐, 아님 말고.

2. 대학원 들어와서 알게 된 선배 한 분께서 내일 장가를 가신다. 날 잡일꾼으로 쓰며 돈 쥐어주는 훌륭한 학술단체에서는 유라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아시아 문화사 연구가 한창 탄력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중화와 대동아가 포착하지 못하는 새로운 사상사담론을 위한 실질적인 유적발굴이나 서사해석, 교류사 재구성 등의 작업들이 신나게 벌어지고 있다고 어느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 조교와 학생들로 만났던 사람들 중 몇몇이 이번에 학사논문 발표를 하는데 『법률』도 있고 『국가』도 있고 『소피스테스』도 있고 엘레아의 제논 운동역설 가지고 쓰는 친구도 있더라. 그 발표 전날에 10년을 고생하신 박사과정 선생님 논문 초록 발표가 있는데 이게 아리스토텔레스 연속개념 관련된 거라 운동역설 쓰는 그 친구는 가서 구경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뭐 어차피 심사 다 끝났으니 발표 날짜 잡힌 걸 텐데 굳이 심사 복잡하게 딴 소리 들을 필요도 없다면야 없겠지만서도. 『소피스테스』 붙잡고 거짓진술 주제로 쓴 친구는 운동역설 저 친구랑 사귄다던가 뭐라던가. 재밌는 발표가 많아 보여서 구경을 갈까 싶기도 한데, 또 그 날 교수-대학원생 모임이라나 뭐라나 하여간 그런 게 있다는 것도 같더라. 그러거나 말거나 플라톤 대화편들이 학사논문 주제목록에 저렇게들 차고 넘치는데 수료를 하고도 1년이 더 지나가도록 나는 왜 신입생 머리카락 끄트머리조차 보지를 못 하는지. 하기사 오든 말든. 다음 달에는 건대 학부아해들 학술제도 있겄지. 그때나 지금이나 난 그냥 별 다를 것도 없고 계속 뭔가 읽고 또 뭔가 쓴답시고 낑낑거리고 뭐 그러고 있을 따름. 몇 주 정도 술을 쉬었더니 술이 참 고프다. 지도교수님 뵈러 가던 길에, 조교와 학생으로 만나 이제는 대학원 선후배인 친구도 하나 만났는데 그 친구 바람 잘 쐬었나 모르겠네. 때 되면 술이나 한 잔, 뭐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블로그로 약혼소식을 전한 선배는 또 언제 보게 되려나. 연락이 끊긴, 다시 만난, 등을 진, 데면데면한, 괜찮은, 사사로운, 이러저러한 인연들. 나 자신이 바뀌는 건 못 느끼겠는데 시간도 사람도 나만 두고 훌훌 잘도 흘러들 간다. 그나마 그 덕에 가끔 정신을 차리기도 한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나도 또 어디로가 허부적거리며 휩쓸려 가고 있지 않겠나, 하고. 밑바닥 진창에 내다꽂혀도 내 발로 뛰어드는 게 낫지. 여차하면 아차하는 순간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나가리 나는 거여.

3. 『국가』, 『정치가』 윤독 청강도 들어가고 싶고 『파이드로스』 강독도 더 하고 싶고 라틴어도 뭐 하나 읽었으면 좋겠고 그래도 나름 깨작거리며 꾸준하게 내 딴에는 논문준비랍시고, 한답시고 했는데 막상 일정이 잡히고 나니 시간에 쫓기기만 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쩝. 『티마이오스』 읽고 싶엉. 막막 사전 찾고 문법 확인하고 머리 싸매 가면서. 『파르메니데스』도 읽고 싶엉. DK도 뒤지고 쌓아 놓은 논문들도 뒤적거리고 하면서 멜리소스 욕도 하고 제논 후빨도 하고 그러고 싶엉. 큰 논문 말고 자잘하게 이 문제 저 문제 들쑤시는 것도 하고 싶고. 현실에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아예 현실과 동떨어져 괴리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간혹 하게는 되는데, 아직은 방향을 선회하게 되리란 기대조차 가지기가 힘들다. 예전에는 뭔가 딱 '답(!)' 막 이러고 뭐 하나 붙잡아내면 금의환향하듯 현장으로 나아가 확신을 가지고 사명감을 갖고서 이 한 몸 불사르는 날도 오겠지,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도 하고 뭐 그랬었는데. 지금은 심지어 그냥 공부는 공부대로 하더라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몸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순간이 와도 책으로 생각으로 후다닥 달아나 버리지나 않을까 싶을 지경이니. 그저 정직과 성실, 그것뿐이다. 그게 인이 배기면 비겁하려 해도 몸이 말을 안 듣지 않겠나. 뭐 그런 거다. 아.. 기분전환 삼아서 깔삼한 영상이나.

하나 더.


-蟲-

1. 아리스토텔레스의 categories와 관련하여, 혹은 to on, being의 다의성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이야기되는 것이 focal meaning이다. 결국 내가 하려는 말은 이러한 논의를 가능케 하는 발상의 단초가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편에 대해 구문론적 해석을 시도하던 20세기 중후반까지의 여러 학자들에 따르자면 to on은 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반면 이에 대한 반론으로 계사 혹은 논리적 연산자로서 to on이 어떻게 문헌에서 언급되는 그러한 종류의 본성, physis를 지닐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긍정과 부정, 연언, 선언, 양상 등이 과연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metexein, koinein 등등의 동사들은 물론 명사화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그 이론의 유효성일 수도 있겠다. 본질주의가 아직도 유효한가? 구성주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편이긴 하다.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정확히 조영기 선생님 입장을 내 나름대로 이해한 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리철학 내에서 구성주의적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뭐 결국 그 자신의 실재론과 정합적이지 못한 탓에 폐기되는 것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수학적 진리치의 정당화 문제라든지 그런 것도 있겠고, 그렇다고 그의 실재론에 맞추어 가자니 경험 가능한 현상들과 수학적 대상들 사이의 간극이 커서 그걸 시도하기도 뭣하고(완전한 구체라든지 경험 가능한 점 같은 것을 말하기는 좀 뭣하지 않은가). 의미들이 분화하고 상호에 결합하는 와중에서도 그 자체를 그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어떤 의미의 중심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심을 기준으로 정의가 성립하고 중심과 부분들의 결합상태에 근거하여 이를 모사하는 진술의 진리치가 확정된다는 것은 오늘날의 논의에 어디까지 적용, 아니, 그 논의에서 어느 정도까지 검증이 가능할까? 우리의 사고와 판단에 합치하는 어떤 실재, 그런 것은 단순히 '철학적 질병'이기만 한 것일까? 논리적 실재 같은 것은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일까? 플라톤이 말하려던 이데아라는 것이 그런 것이 맞기는 한 건가? to on은 불특정의 무한한 포화상태의 긍정이고 to me on은 또 역시 한정 없는 부정이다.  to me on에 못지 않게 to on에 대해서도 같은 만큼의 당혹스러움에 빠질 수밖에 없고, 양자를 동시에 헤쳐 나아가야만 한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 변증의 기술을 지니는 자가 속한 그 곳의 밝음은, 소피스테스가 속한 to me on의 어둠이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그 만큼이나, 또한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밝아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complete einai와 incomplete einai, 둘 사이의 구분과 관련하여 존재사와 계사, 다시 형상들의 결합과 분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라는 표지로서 등장하는 능동과 수동의 능력, 그 움직임, 논문을 써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모르겠어서 어찌 써야 할지 앞이 캄캄하네.

2. 『파이드로스』 초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신들린 광기를 세 차원으로 구분한다. 사제나 신관의 경우, 입교와 의식을 통한 죄의 정화, 예술가의 영감. 신은 전선하며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므로 신의 힘으로 간주되는 광증 또한 위대하고 고귀한 것이다. 초중기 사이의 여러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시인과 예언가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 이러한 찬사는 기이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그건 오늘날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읽는 독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에 대한 비판과 관련된다. '시인을 추방하라니! 무식한 소리!' '예술을 모르는 고리타분한 무지랭이!' 뭐 이딴 개소리들을 지껄여들 대시는데, 씨발, 좀 자세히 읽고 씨부릴 수는 없는가.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 가지고 덮어놓고 욕부터 씹어대는데 짜증이 치민다. 『국가』에서 비판의 기준이 되는 것은 도덕-윤리적 교육의 효과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가치와 관련된 비판적 사고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치밀한 철학적 체계 내에서 반추되어야 한다. 여러 분과학문들을 익히는 것, 그 학문들 사이의 관계와 위계를 파악하는 것, 이런 것들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자 아예 이로부터 멀어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는 자신의 철학 내에서 윤리학을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이 와중에 사회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란 이러한 과정의 출발단계이고, 검증된 윤리적 판단들을 엄정하게 선별하여 확신의 차원에서 제공하는 방식 말고는 교육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교육의 수단에 한정하여 문학에 대해 논하는 것을 그냥 다짜고짜 문학 일반을 싸잡아 까내리는 것으로 보는 독해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애초에 그냥 안 읽고 얻어 듣고서 씨부리는 거라는 확신만 들 뿐이다. 『이온』이나 『히피아스』 등등에서는 오히려 예술의 독립성을 확보해 주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예술은 결국 학적 기술이 아니다. 이론수업으로 예술창작자를 양산해낸다는 생각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근거를 마련해준다. 예술이 학문이 아니라는 것, 그게 예술에 대한 비난이라고 이해할 여지가 어디 있는가? 결국 학문과 예술을 상호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한에서 예술에 대한 『파이드로스』에서의 찬사가 이해 가능한 것이 된다. 그것은 불가해한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들끓는 심적 충동, 일종의 광기, 그것 없는 예술은 결국 논문의 형식으로 환원될 것이다. 다시, 플라톤의 예술 비판에 대해 독단적 저평가를 내리는 자들은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착각을 하곤 한다. 그것이 감동을 일으키길, 어떤 적극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길, 과감한 가치판단을 동반하길 기대한다. 아, 글쎄, 모르겠다. 그런 치들이 학문의 영역에서는 영감을 논하고 치기어린 재기발랄함으로 논증의 엄밀함을 대체하려 들고 예술로 넘어가서는 창조와 반성을 혼동하여 문학비평문학이랄까 뭔가 괴이한 짓거리들을 시도한다. 모른다고 닥칠 필요는 없겠지. 나 역시도 모르는데 지껄이고 있으니. 씨발, 서로 걸지게 욕이나 뇌까리면 그만 아니겠나.

3. 여전히 뜬금없는 칭찬들에 거부감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처음 몇 번 겸손을 떨다가 고맙다느니 어쩌니 몇 마디 지껄이고 한 귀로 흘려 버린다. 내가 듣고 싶은, 혹은 필요로 하는 '긍정적 평가'는 실체를 가진 평가이다. 어떤 분석이 유효하고 타당하다든지 어디 논증이 깔끔하다든지 그런 식의 것들 말이다. 두루뭉술하고 구태의연한 칭찬들은 오히려 내 자괴감을 북돋운다. 내 상황을 봐라. 철학과랍시고 몇 년을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면서도 기초조차 못 갖춰 아직도 헤매고 있는 와중에 학위 따겠답시고 논문 쓴다고 설레발을 치는 쓰레기, 학부에 자생력을 갖춘 자발적이고 체계적인 학회를 정착시켜 놓으리라 해놓고서는 타성에 젖어 꼰대질 하는 애새끼들과 강의 듣듯(물론 강의에서도 그딴 태도가 맞는 게 아니지만) 몸뚱이만 덜렁 들고와 주둥이만 놀리는 애새끼들을 남겨둔 채 썩어가는 꼴을 멍하니 지켜볼 뿐인 퇴물 꼰대, 내 사람이니 내 새끼니 어쩌니 저쩌니 해가며 얼싸안고 꽥꽥거리던 주제에 다 잃고 다시 골방에 들어앉은 자폐증 걸린 것마냥 우중충한 젖은 장작같은 새끼, 몇이나 죽고 또 죽어 나가도 낯짝 두껍게 멀쩡히 대가리 쳐들고 살아서 돌아다니는 염치 없는 오라 지고 염병할 놈, 좋게 봐줄 구석이 없다. 그리고 결국 예상했던 지점들마다 적확한 비판과 힐난 그리고 지적질이 등장한다. 전 지도교수님께 욕먹고 현 지도교수님께 또 욕먹고 다른 선생님들께 지적받고 하나 고치려 하면 또 하나 욕먹어서 돌려막다가 인생 쫑날 판이다. 결국 나와 부대끼지 않고 나와 섞이지 않는 일정 거리 떨어진 사람들만 적당한 동정과 연민을 담아 좋은 소리 몇 마디를 적선하듯 던져줄 뿐이다. 물론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다들 나보다 한참이나 먼저 훨씬 더 나은 방식과 결과를 통해 버텨내고 있는 사람들인지라 그 평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은 든다. 실제로 그런 지적까지도 들었고. 그러나 어쩌겠나, 결국 이 지긋지긋한 꼬라지를 가장 가까이서 썩은내 참아가며 머리털 쥐어 뜯으며 참고 버티고 끌고 가는 건 나 자신인 것을.

4. The Great Porn Experiment: Gary Wilson at TEDxGlasgow. 자, 다들 보고 야동 끊읍시다.

5. 학기와 연차로 계산되는 동네에 계속 붙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은 까닭에 입학년도하고 출생년도를 외우고 다닐 뿐 딱히 내가 몇 해를 살았는지 헤아리고 다니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문득문득 만나는 사람들과 나이 차이를 꼽아 보게 될 때면 약간 어색한 기분을 느낀다.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야 어차피 거의 공부 관련한 얘기들만 하게 되니 나이 얘기는 피차 필요가 없고, 잘 읽고 제대로 말 전하면 위아래가 뭔 상관인가. 나이 많은 어르신들 뵈면야 그냥 끄덕끄덕 꾸벅거리면 그만이니 그것도 별 상관은 없고.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공부 말고 다른 일로는 만날 기회조차 없으니 결국 뭐가 틀렸네 맞네 뭐가 빠졌네 너무 나갔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들만 주고 받으면 그만이고. 결국 나이 얘기를 왜 해야 하나, 뭐 그런 생각에 조금 뻘쭘해진다고나 할까. 그런데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이제 나랑 뭔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고 추억을 공유할 만한 관계를 맺는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 것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앞으로도 운만 좋다면야 살아온 것의 곱절만큼을 더 살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다들 취직하고 가정 꾸리고 해서 동년배들과는 더 어울려 지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10년 차이, 20년 차이 넘어가면 애초에 공감대랄 것이 없어질 테고, 그럼 또 거추장스럽고 자질구레한 그 소위 '알아가는 과정' 따위를 거치느라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려울 테고, 이래저래 대인관계와 관련해서는 참 실속 없는 인생이었지 싶다. 딱히 대단한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 이리 되었나. 뭐 불알친구라 할 만한 새끼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들이나 나란 놈이나 대가리 굵어지고 나서는 시덥잖은 흰소리나 쫌 하다가 취직이 어쩌니 연애가 어쩌니 그러저러한 일상다반사나 지껄일 뿐이고. 어쩌면 '도반' 같은 것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르겠고, 연애도 실은 좀 일찍부터 해서 오래 시간을 들여 익숙해진 사람에게 헌신하고 싶은 것이지 생짜 모르는데 형식적으로 예의 차리고 어쩌고 하고 싶은 건 아니라서, 이러니 저러니 다 그냥 글러먹었지 싶다. 아예 체념을 하기 위해 눈을 억지로 높여 보기로 했다. 키 크고 몸매 잘 빠지고 얼굴 예쁜 클럽에서 잘 나가는 부잣집 직장여성. 이 정도로 잡고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혼자 늙어 뒈질 수 있겠지. '도반'이야 뭐, 우둔한 대가리에 게으른 몸뚱아리로 구질구질하고 추레하고 비굴하게 학문 변두리 언저리에 묻혀 가는 먼지 같은 찌질이와 누가 뜻을 같이해 함께 절차탁마하려 들겠나. 이렇거나 저렇거나 씨발 좆됐지.

6. 왜 이렇게 천지사방 똥오줌 못 가리고 날뛰는 '철학도' 씹새끼들이 판을 치기 시작하는지 모르겠다. 늙은 거나 어린 거나 할 거 없이. 늙은 것들이야 뒈지면 그만인데, 현실의 어려움도 파악 못하고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학문의 기초도 파악하지 못한 채로 '교수가 됐으면 좋겠는데 칸트나 지젝이나 플라톤이나 공자는 이러니 저러니 하고요' 하고 씨부리는 헛바람 가득 든 풍선같은 위태로운 청춘들을 보노라면 싸대기를 갈겨서라도 정신차리게 해주고 싶다. 이거야말로 그야말로 더할나위 없이 오지랖 꼰대질인 걸 아는 까닭에 실제로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도 않긴 하지만서도. 돈도 없고 실력도 없고 학벌도 없으면, 이 새끼들아, 끽해야 내 꼴 나는 거다. 당장에 살아남을지 그 자체도 불확실하고, 이 악물고 버텨도 당연히 교수는 물 건너 간 거고 강사도 급이 있어서 강의 하나 못 받고 길거리 나앉아 거지나 돼서, 왜 늬들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대낮부터 술 취해서 방언 터진 산발한 거렁뱅이 노숙병신들 있잖냐, 딱 그꼴 나기 십상인 거야. 그래도 너만은 괜찮을 것 같지? 막 학부논문은 천재 탄생의 신호탄 취급을 받고 석박사 논문은 학계의 판도를 뒤집고 2천년 서양철학 역사를 까뒤집고 공맹과 노장과 석가를 씹어먹다가 역사에 길이 남을 것 같냐? 그냥 니 중간 기말 과제물이나 다시 딱 각 잡고 앉아서 쳐 읽어 봐, 등신들아. 늬들 스스로 늬들 수준을 파악하지 못하면 단 한 걸음도 못 나아가는 거다. 수준이 남달랐다면 누군가는 너에게 귀띔이라도 해줬을 건데, 하다못해 '같이 다듬어서 학회에 내거나 해 보자' 소리라도 하며 도와주려고 했을 텐데, 그런 적 없으면 말이다. 씨발, 주요문헌 한 두 문장만 지나가도 오독에 빠지는 마당에 무슨 허무맹랑한 꿈들을 꾸는 건지. 이러니 철학이 힐링이니 씨발 좆소리가 나오는 거지. 구원은 종교 가서 찾아라, 좀.

7. 뭔가 더 끄적거리려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이제 매일 여섯 시간씩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소피스테스』나 물고 뜯어야겠다. 그저 이런 삶이 살아있는 날까지 계속되기만을 바란다. 갈수록 이게 얼마나 크고 무거운 꿈인지 실감하게 되어 조금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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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웹툰작가 '모래인간'님 블로그(링크)에서 본 m/v(?). I Am Me Once More by Zee Avi.

* 이거 왜 동영상 재생이 안 되는가. 노래 좋은데. 유튜브 링크 타고 가서 보시든지(링크). 근데 네이버에서 유입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는구만. 딱히 작가님 블로그에다 뭐 한 것도 없는데, 작가님 닉네임을 써 놓은 탓인가...


2. 늘상 그렇듯 이번에도 또 턱밑까지 잠겼달지 진창에 쳐박혔달지 끄트머리에 내몰렸달지. 미친듯이 버둥거리면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발버둥을 치다가 엉겨붙어 빠져들어가 끝장이 날 수도 있는 거다. 쳐박힌 자리가 시궁창인지 망망대해인지 가늠을 못한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마련이다. 자진해서 발벗고 뛰어든 이 길이 워낙에 그 따위로 생겨먹은 길이라면야 사구나 늪구덩이라도 어쨌든 계속 허우적거리며 발광을 해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냥 내 망상이고 현실도피이기만 하다면 잠자코 사태의 추이를 살필 필요도 있을 것인데, 모르겠다.

3. 논리적 필연으로 함축되고 연쇄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세계라는 전제 하에서만 영원한 회귀에 대한 스토아의 논증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다가도 기계적 인과 연쇄보다는 유기체 유비를 선호하고 윤리학을 전체 학문의 알맹이이자 심장 같이 대하는 저들이 과연 그러한 딱딱한(?) 세계관을 수용하고 있던 걸지 의심이 들기도 하고, 논리적 관계와 인과적 관계, 그 두 관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어쨌든 철학사에서는 내내 문제였기도 하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단편 몇 개 모아둔 것 겉핥기로 읽은 게 고작인 내가 그걸 판단할 깜냥이 안 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이겠다. 내일 모레 강독 들어가기 전까지 또 해석 좀 쌓아 둬야지. 『소피스테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의의 대상이 되는 유와 결과하는 본성 혹은 본성의 중심으로부터 유의 본성의 부분들이나 유에 대한 종들을 구분하고 다시 이에 대한 모상의 진리치들을 구분하면서 존재론적으로 세계를 세 층위로 나누고자 시도하는 것 같고, 소크라테스가 어떤 유에 속하는 자일 경우 그 유의 정의에는 시험 혹은 논박(엘렝코스)이 필수적이지만 소피스테스의 경우에는 그것이 정의를 서술하는 데에 포함되지 않으면서도 그 유에 대한 우연적 사실의 지위까지 박탈할 근거는 없으며 나아가 『소피스테스』 내에서는 바로 그러한 난점을 지적하기 위해 소피스테스 나름의 엘렝코스를 드러내 보여주는 시도를 감행하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이고, 이 두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지 않음"의 여러 불가능성들을 통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의 아포리아,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임"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상대로 전개되는 소피스테스, 손님, 테아이테토스 공동의 엘렝코스, 그리고 결국 소피스테스의 것이자 그들 자신들의 것이기도 한 "~이지 않음"의 단적이고 절대적인 불가능성들에 대한 엘렝코스와 나아가 소피스테스의 2차 반론에 대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의 엘렝코스가 해명되어야 할 것인데, 그러려면 종들의 엮임(symplokē eidōn)과 거기에서 to on과 to mē on에 대한 번역, 멈춤과 움직임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논증, 이것들과 같음 그리고 다름까지 유들이 여섯인지 다섯인지 그것들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지 다루지 않을 수 없고, 그걸 하려면 일단은 본문 번역부터 검토를 마쳐야 하는데 월, 화 연달아 강독수업이랑 강독 준비해 가야 하는 청강이 있고 방학 안에 이 대화편으로 논문 초안 만들려던 나는 이제 뭘 더 이상 어찌해야 할지 잠깐 당혹스러워 하는 중이다. 이중논변이 단순히 상반되는 두 주장들을 각기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제논의 역설들처럼 한쪽 입장이 다른 한쪽 입장으로 귀결되지 않고는 자기모순에 빠지지만 그 둘 모두 양립 불가능하기도 한 형식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억지를 부려 봤는데, 왜 그랬느냐 하면은 내가 관심 있는 게 그런 쪽이라서지 뭐. 이러니 나는 한참이나 글러 먹은 것인데, 문헌주의자를 꿈꾸면서도 과대망상 쓰레기 꼴을 면하지를 못하는 거다. 주말 내내 붙들고 있으면 대충 강독 준비 마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일단 들이받아 봐야지. 『정치가』 윤독 청강 들어가서는 마침 소피스테스를 정치가로부터 분리해내는 듯한 부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미친 몸뚱아리가 제멋대로 졸아 버려서 질문을 충분히 못 했다. 『국가』 윤독 청강도 들어가서 듣고 있노라면 재밌고 배우는 것도 많고 좋은데 막상, 이전 지도교수님 지론처럼 뭔가 써서 남기질 않으면 아무것도 안 남을 것 같아서 걱정이긴 하다. 이딴 잡소리 말고 글 같은 글을 좀 만들려고 애라도 써봐야 하는듸. 『파이드로스』는 여전히 흥미진진. 배에 오르지도 않고 트로이의 성채에 가 닿은 일도 없는 자는 헬레네를 비난한 자인가 헬레네 자신인가 이건 뭐 원문 확인하면 될 듯한데 원문도 단편만 전해지는 건가 싶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화자가 대상화해서 2인칭으로 서술하는 것이 더 재밌지 않나? 스테시코로스가 호메로스와 다른 점, 그 다름으로 인해 신에 대한 자신의 불경을 정화할 수 있었던 실마리는 서사시와 서정시라는 시적 형식의 차이인가? 그건 너무 맹탕이지 않나? 무사이 여신들은 말 그대로 '신'이고 진정한 '무시코스(mousikos)', 즉 무사이 여'신'들의 진정한 추종자라면 인간으로서 신을 풍자하거나 전선한 자들을 일견 악하고 저열한 자들로 그리는 불경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무시코스'를 서정시인으로 번역한다면 그냥 스테시코로스는 운 좋게 서사시를 안 써서 돌이키는(취소하는?) 노래를 쓸 수 있었던 게 된다. 디튀람보스 형식에 대한 비판이라면 모를까 뜬금없이 서사시와 서정시를 비교하는 건 문맥에도 부적절하다. 반면에 신에 대한 태도로 이야기하자면 『국가』에서나 혹은 간접적으로 『에우튀프론』 등에서 볼 수 있듯 호메로스와 그에 따르는 전통적인 신에 대한 묘사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보기에 불경하기 그지 없다. 신들이 불륜을 저지르고 기만과 거짓을 일삼으며 서로 불란을 일으키고 불화한다는 게, 그게 '신'들에게 어울리는, 아니, 참인 묘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신이 신인 한에서 전적으로 선함을 받아들이려면 진정으로 신에 대한 추종자여야 하며 이러한 바탕에서만 자신이 신을 묘사하며 신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자각할 가능성이 확보된다. 스테시코로스는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에게 던지는 질문, '신이 정말로 신이라면 신인 한에서 신은 선하고 전혀 악하지 아니한가?' 라는 물음에 '그렇다.' 라고 대답하는 자일 수 있다. 취소의 시를 지으니까. 그러나 호메로스가 신들에 대한 자신의 묘사를 철회한 경우는 없다. 영원히 앞을 못 보고 두 눈을 빼앗긴 채로 살다 죽은 자와 빼앗긴 두 눈을 되찾은 자 사이의 대비 역시 앎과 모름의 대비에 어울리기도 하고. 서사시는 모르고 서정시는 아는가? 서사시는 불경하고 서정시는 경건한가? 이렇게 읽는 게 문헌 이해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고. 역시나 강독 비축분이 떨어져 가니 해석이나 열심히 해 두는 게 당장 급한 일이긴 하지만.

4. 내 스스로 끊임없이 징징거리고 한탄을 해대며 못나게 구는 주제에 왜 남들 그러는 건 웃어 넘기지를 못하는지. 글쎄, 요즘은 내가 칭얼대고 있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와중에 어느 한 구석에선가 다시 재미와 흥분이 되살아나는 걸 느끼기도 한다. 논문 심사도 받고 싶고 GRE이든 IELTS든 영어 시험도 일단 한 번 봐 보고 싶고 낯선 곳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이래저래 조급하게 허둥거려 보고도 싶고 관심만 두고 열심히 파고 들지 못했던 분야의 책들도 한껏 물고 뜯고 싶기도 하고. 뭐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실연의 상처(크크)가 아무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위에 올린 노래 제목처럼, I am me once more.

5. Θαρρεῖν, ὦ Θεαίτητε, χρὴ τὸν καὶ σμικρόν τι δυνάμενον εἰς τὸ πρόσθεν ἀεὶ προϊέναι. Platonis Sophista. 261b4-5. 계속 되뇌이게 된다. 뭔가 조금만이라도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용기를 내야만 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딱히 가로막힌 것도 없다. 중요한 건 어디에 가 닿는 게 아니라 나아가야 하고 또 나아갈 수 있는 그 순간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또 내딛어 걷는 것이다. 성경무오류주의마냥 플라톤무오류주의를 외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느 정도는 확실히 내게 플라톤이 일종의 종교 비스무레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정당화할 생각만 가지지 않는다면 삶의 위안 정도로는 뭐 괜찮을지도. 적어도 내가 플라톤의 글들에서 찾고자 하는 게 구원나부랭이는 아니니까. 인간의 자리에서 인간의 지혜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거면 충분하다. 그리고 여전히 ἀλλ᾿ οὐδὲν ἥδιον ἔμοιγε, εἰ μὴ τυγχάνει ἀληθὲς ὄν. 진리가 아닐 바에야, 나로서는 아무것도 즐겁지 않다.

-蟲-

1. 또 한 일주일 정도를 날려 먹었다. 더위에 약하고 식도고 위고 장이고 엉망이고,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 봤댔자 본래 내 식대로 얘기하자면 정신력이 쓰레기인 것이겠지만서도. 『정치가』 윤독도 못 들어가고, 스토아 자연학 강독도 못 들어가고, 『국가』 윤독도 못 들어갔다. 화장실 쳐박혀서 토하다 설사하다 비척거리며 기어나와 널부러져서 또 끙끙거리다 보면 언제 해가 떴는지 언제 졌는지 가늠도 안 된다. 뭐가 문제인지. 나름 막다른 곳 끄트머리에 몰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전 같으면 이 정도 되면 발악을 해서라도 다음 걸음을 내딛었던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전보다 더 겁쟁이가 된 것도 같다. 수료는 했지만 아직 졸업 전이라 적(籍)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당장에 이거 아니면 끝장이다 할 만한 위기에 당면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게 빤히 보이는 그 만큼의 거리에서 그냥 어물쩡거리고 있을 뿐이다. 누가 등판을 걷어차고 싸대기라도 날려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가야할 길도 해야할 일도 빤히 보이고, 그걸 해내기에 내가 뭐가 얼마나 어떻게 부족한지도 잘 알겠는데, 그래서 서둘러서 바쁘게 채워 넣어야 하는데도 그냥 쳐박혀서 꿈질거리고 있다. 당연히도, 용기를 내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 그리고 뭔가 잘못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용기를 내는 게 아니라 저질러 버리는 뭐 그런 식으로. 내내 충동적이었을 뿐 무던하고 꾸준하게 견뎌내진 못 했던 것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든다. 잘못 살아왔다, 라는 생각. 뭐 운 좋으면 살아온 만큼은 충분히 더 살아갈 만한 나이이긴 하지만 어쨌든.

2. 아닐 줄은 알고 있었다. 내가 꼴같잖게 어울리지도 않는 실연남 흉내를 내는 사이에 그 친구는 또 아무렇지 않게 새 연애를 시작했다더라. 그도 그럴 것이 누구에게든 나는 멋진 남자, 라기 보다는 그냥 좋은 사람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흔한 평은 아니었으니. 나는 이 지경인데 너는 어찌 그리 잘 사느냐, 갖고 논 거냐, 배신이다, 뭐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힘든 건 다른 거다. 날 두고 그 친구가 설레는 마음을 갖는 것도 애가 타는 것도 뭐 그리 간절한 것도 아니었던 걸 뻔히 알면서도, 그저 내 욕심에 잠시라도 붙잡아두고 싶어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렸던 게 화근이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인생을 다 뒤집어 엎어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 본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는 이르게 끝장이 났지만 더 길어 봤댔자 우리가 1년만이라도 채워 만날 수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다.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란 사람은 그냥 곁에서 부담스럽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추장스러운 인간관계 중에 하나였고, 결국 알면서 모르는 척한 나 때문에 그 친구도 괜한 시간 낭비만 한 것이지. 사실 그 중간의 한 달도 못 되는 만남만 제외하면, 7~8년 가까이 지금과 별 다를 것도 없는 관계였다. 내가 짝사랑을 한다고 뭐 뒤를 캔다거나 집요하게 애정을 구걸한다거나 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 친구도 나름대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하고 싶은 일들 해 가며, 그게 어쩌면 적당했던 건데. 다만 정말 잘해줄 수 있었는데 그 기회까지 날려먹은 게 내내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 어쩌면 내가 바란 게 연애가 아닌 걸지도 모르겠다. 그냥 가끔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해주고, 날 더우면 그늘 좋은데서 부채질이나 해주며 이런저런 얘기나 하고, 그런 것도 같이 하기 싫을 정도로 내가 역겹고 귀찮은 종류의 인간이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 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하기사 언제부턴가 나란 놈은 참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저 하는 얘기라곤 철학 얘기, 공부 얘기, 그런 것들 뿐이고, 나도 모르게 우스갯소리가 어색해져 버렸다. 억지로 하라면야, 그런 자리에 서게 되거나 그런 부탁을 받게 되거나 하면야 실없는 소리도 하고 기실 별 관심도 없는 연예기사들을 읊거나 어느 음식점은 뭐가 맛있네 어느 동네에 옷가게가 싸네 뭐네 하는 뻘소리를 떠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친구든 연인이든 진지한 관계가 되면 별로 그럴 의욕이 안 생기는 걸 어쩌겠나. 이렇게 징징거려도 나도 결국 근 1년 연락 한 번 더 해 본 일도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연락을 먼저 한다, 그런 건 정말이지 누구에게든 어색해서. 남들이 내게 연락을 해 오면 고맙고 반갑고 그렇긴 한데,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그리 연락을 하려고 들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무슨 권리로, 아무 허락도 없이, 다짜고짜 그 사람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와중인지도 모르면서 전화벨을 울려대고 받으라고 강요를 할 수 있는 건지. 나야 못 받을 상황이면 전화 꺼놓고, 사실 공부하는 거 말고는 딱히 일정이 빡빡한 종류의 인생도 아니고 해서 괜찮지만. 그러다 보니 그냥 가만히 있다가 연락이 끊기면 끊기는가 보다, 멀어지면 멀어지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들로서도 나 따위가 뭐 그리 대단히 아쉽고 귀중하다고 애써 시간내 찾고 자시고 하겠나, 뭐 그 과정에서 '저 새낀 연락도 안 해' 하며 내 욕을 하더라도 별 수 없지 싶다. 1년만이든 10년만이든, 그게 내 이상한 점일 수도 있는데, 나는 만나던 사람이 살갑고 정겹게 느껴진다. 어차피 나와 붙어 지내는 시간 말고는 각자의 영역이니까. 그 사이의 시간이야 내가 가타부타 할 것도 없고. 그냥 내 중심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상대편에서는 그닥 가깝게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나 혼자서 굉장히 친한 사람 취급을 해 버리기도 하고. 그래도 사실 큰 상관은 없다. 누구한테 부탁하는 성격도 아니고, 친하든 말든 보통은 상대방이 바라는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지 내가 먼저 이렇게 대해야지, 저렇게 대해야지 정해놓는 성격도 아니어서. 연애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총체적으로 인간관계가 죄다 문제인가 싶기도 하네. 어쨌든 다른 얘기가 아니라, 나랑 헤어진 친구가 딱히 미안해 하거나 아쉬워 하지 않고 새 사람 만나 즐겁게 잘 지내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으니 나도 뭔가 새삼 마음정리를 좀 하고 싶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다 죽자, 같이 망하자, 뭐 그런 게 좋을리 없기도 하고 상대는 별로 시덥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을 나혼자 부풀려서 끙끙거리고 있었던 것 같아서, 좀 객관적으로 내 생황을 돌아볼 계기도 되는 것 같고. 그래도 물론 7년을 한 사람만 보던 입장에서 그 시간이 다 헛짓거리였다는 게 좀 허망하긴 하지. 중간에 예상치 못한 그 기회만 없었으면, 지나가는 말로 했던 그 약속대로 서른 때 불쑥 들이밀고 같이 유학이나 가자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내가 좀처럼 올 일 없던 그 기회를 날려먹지만 않았더라면, 역시나 나도 좀 더 목표를 갖고 착실하게, 좀 현실적으로 애써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내게 학문이란 건 그냥 가는 데까지 주욱 걸어 나아가 보는 것 말고 목표랄 게 없고, 그 와중에 신경써야 할 현실적인 문제라고는 내 한 몸 건사하는 게 전부인지라, 사실 절박함이 없다. 쉬운 길이라 생각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피를 봐도 나 혼자 보는 거란 생각이 좀 들어서 말이다. 나랑 겹치던 그 친구 동기들과의 관계도 나만 빠지면 대충 별 다를 것 없을 듯하고, 난 조용히 사라져 주면 되는 거지 싶다. 동기녀석들은 무슨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건지 오랜만에 만난 학교 선배는 '얘기 들었다'며 안쓰럽게 쳐다 보더라만, 나야 뭐 워낙에 생겨먹기를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한 때에 굳이 끼어서 어색함을 더할 생각은 없다. 없던 일처럼, 없던 사람취급 해주면 고마울 따름이지. 난 그냥 혼자 꾸역꾸역 살다가, 좀 추하고 주변에 민폐이긴 하겠지만 지인도 없이 혼자 뒈지고, 그럼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연고지 없으면 송장이야 실험실로 가든 소각장으로 가든 어떻게 되겠지. 그 때까지 다만 정직하게, 구라빨 안 세우고, 잠자코 묵묵하게 연구만 할 수 있다면 된 거다. 잠깐 주제넘은 꿈을 꿨던 것 같다. 외롭지 않은 시간 같은, 누릴 자격도 없는 대단한 여유를 욕심냈던 것일지도. 그래도 유학가서 박사 끝나면 조금은 고립되어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스승이고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다 끊고, 아예 다른 나라 쳐박히면 그냥 조그맣고 꾀죄죄한 이방인 연구자로, 종종 커피 마시는 자리나 담배 피는 자리 가면 볼 수 있는, 이따금 별로 대단찮지만 그래도 개소리는 아닌 논문이나 몇 편 내는, 그런가 보다 하고 말 무명 연구자로 살다 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쓸데없는 기대나 희망 같은 거 없이 좀 조용하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세상일 장담은 못 하니까, 살다가 다른 인연 만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아마 그게 일이 그렇게 돌아가진 않을 듯하다. 평생 가야 달 80~100 정도 벌며 어디 단칸방에 빵이나 몇 조각 끼니 삼으며 고전이나 뒤적거리며 저 혼자 키득거릴 골방 쓰레기에게 연애니 결혼이니 좀 안 어울리는 얘기이긴 하니까. 애초에 달리 살았다면 모를까, 이젠 별로 기대하고 싶지 않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늙어서까지 교류를 하고, 장인장모에 친부모까지 다 모시고 여행을 다니고, 아들딸 귀저기 갈고 새벽까지 잠 못 자며 피식 웃거나, 뭐 그런 장면들이 그냥 소설 속 혹은 영화 속 얘기 같기만 하다. 그 삶이 맞고 더욱 가치 있다고 믿지만, 아무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아쉽게도 그렇다고 다른 쪽으로 대단히 잘 풀릴 것도 아닐 듯하지만. 학문적으로 큰 성취는 물론 힘들 테고 명성을 얻는 일도 없을 테고 안정된 자리마저 꿈조차 꾸기 어렵고, 혹은 우습고. 그저 남은 건 철학뿐이구나. 그런데 이러고 자빠져 있다. 망할. 이래저래 고민 많고 고생 많던 그 친구는 좋은 사람 만나고 일 잘 풀려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잘들 살았으면 좋겠다. 언젠가부터 멀어져 버린 연락이 닿지 않는 이런저런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 그들에게 미안해 하기도, 그들을 그리워 하기도, 아쉬워 하기도 힘에 부치고 지친다. 재능도 조건도 따라주질 않고 아무런 여유도 없는데 성격까지 못나서 노력으로 빈 자리를 채우기도 힘든 나로서는, 그냥 하루씩 버텨 나아가는 것만도 숨이 찬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차였던 게 좋은 계기였던 것 같기는 하다. 아무리 달아도 손이 안 닿는 포도가 있게 마련이다. 시든 달든 그건 상관 없고.

3. 동물이라는 유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차지하는 부분은 인간이라는 종이 동물이라는 유에 대해 차지하는 부분과 같다. 그러나 멈춤이라는 유가 부분적으로 지니는 움직임은 움직임이라는 유가 부분적으로 지니는 멈춤과 다르다. 전자는 인식작용의 수용을 통한 변화를 함의하고 후자는 인식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함의한다. 기술의 분할에서 제압의 하위분류로서 사냥과 제압의 상위류로서 획득의 아래에 곧장 자리하는 사냥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최고류의 섞임에 대한 논의를 고려하자면 주어의 자리에 오는 것과 술어의 자리에 오는 것 사이의 차이가 발생하고 이에 기초하여 볼 때 획득 아래의 사냥과 제압 아래의 사냥은 주어의 차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동물에서 인간인 부분을 논하는 일과 인간에서 동물인 부분을 논하는 일 역시 차이를 가질 것이다. 여전히 이 문제에서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사냥이 사냥으로서 지니는 동일성은 획득 아래에서든 제압 아래에서든 유지되어야 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차이 역시 해명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이라 할 만한 것은 동물이라는 상위류의 속성과 불가분한 것인가? 뭔가 질문이 주제를 엎어 버린 듯한 기분이다. 내 입장은 뭐였더라. 낚시꾼 분할에서는 획득 아래에 교환과 제압이 오고 제압 아래에 경쟁과 사냥이 온다. 그런데 이후 소피스테스 분할에서는 다시 획득 아래에 사냥이 온다. 두 사냥은 서로 다르다. 그 차이는 획득과 사냥의 교집합이 획득과 제압과 사냥의 교집합과 다르다는 점을 통해 해명될 수 있다. 아마도 이게 내 입장이었을 거다. 그리고 여기에서 계보랄지 그 층위는 고정적이지 않다. 교집합이 문제이므로 사냥과 획득의 교집합을 논하는 것과 획득과 사냥의 교집합을 논하는 것에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 이에 대한 반론이 첫째로 자연물에서 생물과 무생물, 생물에서 동물과 식물, 나아가 인간까지의 계통도이다. 여기에서는 포함관계가 고정적이고 층위는 확고하다. 기술의 경우에는 왜 그렇지 않은가? 아니다, 교집합을 논하는 것 역시 포함관계를 통한 계층의 구분이 가능하다. 문제는 교집합의 경우에 한정할 때에 어떠한가 하는 점이다. 두 번째 반론은 내가 생각해낸 것일 듯한데 운동과 정지의 문제.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식, 그리고 능력(dynamis)과 더불어 작용과 수용이라는 다른 유들이 개입한다. 정지가 부분적으로 개입할 경우는 일관되게 인식 대상의 자기동일성이 논해지고, 운동이 부분적으로 개입할 경우에는 또 역시 일관되게 인식작용의 수용결과라는 변화가 논해지며, 정지 전체의 본성 자체와 운동 전체의 본성 자체는 어떤 주어에 귀속된 것으로 논해질 수 없다. 획득과 제압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논의되는 사냥 전체의 본성 자체는 동일한 어떤 무엇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차이는 주어의 단순성과 복합성 때문에 발생한다. 씨발, 또 혼자 생각했더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이래 가지고 공부하고 살 수 있겠나,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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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가 플라톤을 관념론자로 규정하고서 그의 철학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한다. 이데아와 현실 사이의 이분법을 비판한다.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현실과 사유 사이의 간극을 지적하며 플라톤의 관념론과 이분법을 옹호한다. 그 싸움을 지켜보거나 전해들은 사람들은 플라톤이 관념론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플라톤은 관념론자가 아니다. 관념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고 정당화하며 연구해온 사람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근거들, 해석의 전통들을 이어받아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밑에서 배우고 익히며 이후의 연구를 수행할 준비를 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잊혀져 버린다. 적도 아군도 구경꾼들도 없다.

2. 한국에서 누군가 들뢰즈니 라깡이니 뭐니 하며 이전의 철학은 모두 틀렸다느니 새로운 철학의 탄생이라느니, 정신분석이라느니 주체의 해체라느니 차이의 승리라느니 단말마를 토해낸다. 한쪽에서는 프랑스 철학이 뭔 소리를 하는지 알아먹지도 못하겠다고 욕을 한다. 다른 쪽에서는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에 갇혀 고정관념 속에서 허우적대느라 못 알아듣는 너희들은 우민이라고 마주대고 욕을 한다. 그러는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플라톤전집이 재편집되어 출간되고 헬레니즘과 중세, 중동과 근동의 고중세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띄고 철학사의 맥락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바로 그 들뢰즈와 베르그송과 이러저러한 사람들에 대한 해석과 연구가 진행된다. 고대 아테네로부터, 르네상스 시기의 프랑스로부터, 근대 독일과 영국으로부터, 현대 미국으로부터 단절 없는 매개를 발견하거나 파악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입체적으로 살아있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란 것이 현재진행형으로 논의된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 역시 근 한 세기 가까이 이루어지고 있다. Sokal's hoax를 처음 전해 들었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전히 학계에서는 지젝에 대해 회의적이다. 자연과학과 수리과학 뿐만 아니라 언어학과 역사학이 언제나 날카로운 눈으로, 혹은 경멸섞인 태도로 논박의 준비를 마친 채 각자의 일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에서 삶의 구원과 문화의 향유와 인간의 정신건강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휘둘러지는 만능의 프랑스 철학과 그 정체불명의 허황한 망상에 대한 사람들의 냉소와 야유, 그리고 좀 더 많은 구경꾼들 그 어느 사이에서도 프랑스 철학을 찾기 어렵다.

3. 이혼하는 자세로 결혼을 하란다. 냉장고를 없애 자본주의를 극복하잔다. 그리고 자신은 철학자라 한다. 그 놀랍고도 독창적인 통찰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다. 경제도 사회도 역사도 이해 못하며 아무 맥락도 없이 그저 피상적으로 기술에 적대적인 전형적인 인문학자, 혹은 철학자의 전형이라 비웃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역시나 말없이 논란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싸움판의 정반대편에서, 인문학의 기본은 문헌자료의 수집, 정리임을 역설하며 이를 위한 연구인력이 필요하고 또 다시 교육제도와 설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본들과 편집본 또 각 편집본의 편집방식에 대한 엄격한 기준에 맞추어진 연구를 통한 정당화, 이를 기초로 한 논설이 이루어지지 않아 세계 학계에서 국내의 퇴계 연구, 다산 연구, 원효 연구에 의구심을 품는 현실, 그러한 현실 내에서 전통의 중국철학이니 아니면 무슨 조선성리학이나 조선실학이니 뭐니 하는 소리들 뒤에 묵묵히 필요한 일을 준비하고 또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플라톤 전집,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자연철학자들과 소피스테스들의 단편들에 대한 정리, 헬레니즘 시기의 수 많은 사상가들과 학파들의 전해지는 글들의 번역, 이를 위해 필요한 역사학, 문헌학, 언어학 등에 대한 탐구와 그러한 연구를 가능케 하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을 요구하는 움직임들은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다. 관심받지 못하지만 그것이 적나라한, 그야말로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철학'의 현실이다. 유학파 국내 3, 4세대 교수들은 자신의 속한 대학원에서 박사를 배출하고자 바라지 않는 듯하다. 자신이 유학시절 향유하였던 연구환경과 자신의 제자가 처한 환경 사이의 비교를 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어떤 주제로 어떤 방법을 택해 연구를 하든 어지간하면 선행연구자가 있고 상호보완 가능한 관련분야 연구자들 또한 있으며 원로급과 현역과 동년배 연구자들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러한 조건이 국내에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재능이 있고 꾸준한 노력까지 보여주는 학생이 그런 조건들을 누리지 못하고 또 학위를 받고 나서도 자신의 연구를 검증받거나 함께 발전시켜 나갈 여건이 되지 못하는 국내에 머무르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말은 제주로 사람을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엇비슷하게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물학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던 박사후 연구과정생이 철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가거나, 수학분야의 중진연구자가 물리학 실험실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는 고대 수리철학을 논한다거나, 국내에서 당장에 불가능하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은 여러 사례들을 생각해 보면 의문이 생긴다. 자신을 '철학자'라 부르는 저 치들에게 철학이란 그야말로 개똥철학 아닌가? 철학자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플라톤은 『국가』의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철학이 전제의 정당화를 추구하고 앎들의 관계와 구조 및 위계 등을 통합적으로 총괄하여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활동이라면, 필경 플라톤이 당대에 생각했던 것보다도 오늘날 철학이란 훨씬 더 실현되기 어려운 학문일 것이다. 개나소나 철학을 떠벌리고, 그 잡것들에 대해 욕을 하는 사람들은 철학이 글러먹었다느니 철학 따위 장식에 불과하다느니 화를 내고 실망을 한다. 누가 한국의 철학자를 보았나? 철학자가 있다면 당장에 학위과정 포기하고 그 밑에 들어가 제자로 받아주길 간청이라도 하겠다.

4.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이중의 고발자들이 있음을 토로한다. 대놓고 면전에서 고발을 한 멜레토스 등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소크라테스라고 부르며 고발하고 있다. 그 소크라테스는 강한 논변을 약하게 만들고 약한 논변을 강하게 만들며, 태양을 돌멩이라 말하고 전통의 신들을 부정하며, 땅 밑의 것들과 하늘 위의 것들을 바라보느라 돌뿌리에 걸려 저 혼자 넘어지고, 줄에 매달은 바구니 위에 올라서서 공중을 걷는다고 미친 소리를 지껄인다.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 대체 그는 누구인가? 고발이 이루어지고 아테네인들이 소란을 피우며 야유하고 편드는 그 가운데에서, 정말로 그 자리에 소크라테스가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림자에 맞서 권투를 해야 하는 처지라고 한탄한다. 그러나 정작 저 장면에서 화제의 중심에 선 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아니라 그의 그림자이다. 그러나 표결을 받고 형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그림자가 아닌 실제의 소크라테스이다. 나는 지금 아테네에 살고 있나? 그러나 다행히도, 소크라테스는 없다. 다만 그를 낳을 자궁이 찢어 발겨지는 듯한 환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5. 보거나 듣거나 읽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멈추어 바로 그 지점을 묻고 고민해야 한다. 사실로부터 논거들을 마련하고 논리에 입각하여 논증의 구조를 세움으로써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바를 참일 것으로서 주장해야 한다. 후자의 기준으로 전자의 일을 행하고 전자의 일로부터 후자의 기준을 체득해야 한다. 논증을 분석하고 재구성해 보면서 문헌으로부터 또 역사적 맥락과 오늘날까지의 발전된 학문에 도움을 받아 가능한 한 정당성이 강화되는 방식으로 빈 부분을 채우고 어긋나는 부분들을 조율하는 것, 매순간 자신의 한계를 거짓 없이 드러내고 또 거기에 직면함으로써 나아갈 길을 받아들이고 나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 자신 혹은 자신이 믿는 어떤 주장의 한계를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길을 언제나 열어두는 것, '철학' 운운하기 이전에 가장 상식적이고 기초적인 학문하는 태도라 믿는다. 꼭 논증이 아니더라도 좋다. 사회 현상이어도 좋고 관찰이나 계산의 과정이나 결과여도 좋고 한갓된 경험이어도 괜찮다. 비약 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이해하려 노력하면 된다. 그게 싫으면 학문을 관두어야 한다. 철학이 아니라 건전하고 정상적인 사고를 위한 이러한 조건들을 밝히고 세우는 데에만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큰 노력과 희생이 필요했다. 그게 학문의 역사다. 이 일을 하려고 만사를 제치고 제 삶을 바친 자들, 그러다 권력자의 눈밖에 나거나 대중의 뜻에 어긋나거나 전통과 대립하다 죽임을 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된 사람들, 그들을 지지하고 그 뜻을 이으며 드러나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노력을 하며 또 일생을 바쳐 '연구'하다 이름없이 사라진 그 모든 사람들, 그들 덕택에 이제 비로소 학문을 하려면 어찌 해야 하는지, 학문에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그런 문제들이 점차로 명료해진 것이라 믿는다. 이 모든 성과를 개무시한 채 뜬금없이 자신이 철학자라며 온갖 비약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오류를 직관과 통찰로 포장해 수치도 모르고서 똥오줌을 갈기고 다니는 치들로 인해, 아직 출발도 못한 채 겨우 갈피나 잡아가나 싶은 한국의 학문이 다시 가망 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는 듯하다. 한국에는 철학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거기서 한참이나 먼 어느 구석 그늘진 곳에서 철학을 준비하는 학문이, 연구와 교육이 저 그림자에 덧씌워진 심판을 피할 길 없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들이 그렇게나 엿먹이고 있는 바로 그 철학이 너무나 하고 싶어서 간절하기만 하였던 동갑내기 친구 하나는 서른도 못 되어 죽어 버렸다. 독일에서 최고논문상을 받고 학위 받아 돌아와 돈도 없고 강의기회도 부족한 와중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매일 열 시간 가까이 묵묵히 번역을 하고 번역을 위해 연구를 하고 그 연구를 검토받고 토론해 보기 위해 발표회장들과 온갖 학회들을 찾아 다니던 스승님 한 분께서는 가족분들을 남긴 채 나이 쉰에 돌아가셨다. 그 후에도 강의와 행정업무에 치이면서도 연구가 하고 싶어 이 악물고 버티며 없는 시간 쥐어 짜 머리 싸매가며 공부하던 사람들이 매년 죽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철학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학문이란 이름조차 아까운 허황한 망상을 자랑스레 지껄여대며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는 어릿광대들을 마주칠 때면, 그야말로 살의를 느낀다. 그런들 무엇하겠나, 내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나같은 쓰레기는 분노할 자격조차 없다. 배울거리를 팔러 이리저리 떠돌며 젊은이들을 현혹시키고 말싸움을 일으켜 이기려 들고 사람들의 무지를 조롱하는 소피스테스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소피스테스』 붙들고 논문이나 쓸밖에. 그래도 한 마디 하자면, 적어도 저 따위 것은 철학이 아니다.

-蟲-

P.S. 어찌된 일인지 이 시시껄렁한 넋두리를 페이스북 링크 타고 보러 오시는 분들이 계신 듯합니다. 저는 찌질하고 궁상맞은 데다가 능력도 없고 게을러 터져서는 피해망상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세상 욕이나 하며 방구석에 쳐박혀서 징징거리는 걸 인생의 낙으로 삼는 답이 없는 쓰레기 찌끄래기 버러지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저를 조리돌림하고 계신 걸까 하는 두려움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잠잠하던 장염과 위염과 식도염까지 도지는 듯하며 돈도 없는 주제에 술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을 주체할 수 없게 되어 버려서 큰 일입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여러분들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이겠습니다만. 제가 불쌍하고 안타깝고 목불인견의 참상 속 구제불능의 폐인처럼 여겨지신다면 긍휼히 여기시어 하해와 같은 마음 베푸시는 김에 술이나 쏘시면 고맙게 마시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지금 더위를 먹었나 보군요.



 9-10


 

『파이드로스』
강독 / 기종석
선생님 / 건대

 

『파이드로스』
강독 / 기종석
선생님 / 건대

 10-11

스토아 자연학
강독 / 이창우
선생님 / 서울대

 

 『파이드로스』
강독 / 기종석
선생님 / 건대

 

『파이드로스』
강독 / 기종석
선생님 / 건대

 11-12

스토아 자연학
강독 / 이창우
선생님 / 서울대

 

 『파이드로스』
강독 / 기종석
선생님 / 건대

 

『파이드로스』
강독 / 기종석
선생님 / 건대

 12-13

스토아 자연학
강독 / 이창우
선생님 / 서울대

 

 

 

 

 13-14

 

 


 

 

 14-15

 

『국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소피스테스』
강독/연구
이윤철선생님 /
정암학당

『정치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15-16

 

 『국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소피스테스』
강독/연구
이윤철선생님 /
정암학당

『정치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16-17

 

 『국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소피스테스』
강독/연구
이윤철선생님 /
정암학당

『정치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17-18

 

 『국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소피스테스』
강독/연구
이윤철선생님 /
정암학당

『정치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18-19

 

 

 

 

 

 19-20

 

 『국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소피스테스단편
강독 / 이윤철
선생님 / 정암

『정치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20-21

 

 『국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소피스테스단편
강독 / 이윤철
선생님 / 정암

『정치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21-22

 

 『국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소피스테스단편
강독 / 이윤철
선생님 / 정암

『정치가』
교열독회 청강
정암학당

 

1. 라틴어 강독을 하고 싶다거나 하는 욕심이 들기는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고, 빈 시간은 강독 준비하고 논문 준비하다 보면 부족하면 부족했지 남는 것은 아닌지라 그저 퍼져서 나가 떨어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이미 수료하고 논문 준비 중인 대학원 석박사 선배들이야 그러려니 하는데, 어느 사이엔가 나도 모르게(내가 뭐라고 '나도 모르게'라고 하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여기저기 고대철학 전공하겠다고 석사 진입한 사람들은 어디서 무얼 하느라 보이지를 않는지 모르겠다. 여름에 고전그리스어 강독할 수 있는 곳이라곤 적어도 여름방학 중 서울에선 정암학당뿐일 듯한데. 철학아카데미는 문법수업일 테고,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는 학기 중 정식 강의 말고는 겨울 집중독회뿐이고, 정암에서 여름에 하는 문법강좌에 한 사람 들어온다고는 들었는데 얼굴은 못 봤고. 남 걱정해서 무엇하겠나. 다만 이러다가 서양고대철학 전공자 씨가 말라 버리는 건 아닌지, 아니면 아예 그리스어 라틴어 전혀 모르는 전공자만 남게 되는 건 아닌지(그렇다고 내가 잘 하는 것도 아니면서), 역시나 이것도 쓰잘데기 없는 걱정.

2. 원래 정암에서 목요일 『정치가』 윤독에 청강 들어가려 했는데 일정이 연기되었다. 금요일 『소크라테스의 변론』도 격주로 진행되는데 오전에 건대에서 강독 마치면 시간이 맞으니 상황 봐서 들어가 봐도 괜찮을 듯. 다만 이게 『국가』처럼 길게 가는 거라 그냥 듣기만 해도 진이 빠질 듯해서. 뭐 누구 말대로 노느니 뭐라도 하는 게 낫겠지만서도. 『국가』는 해당 권별로 번역 담당하신 선생님들께서 교대로 진행하시고 윤독 참여하시는 다른 선생님들께서 그 때마다 맡으신 분량에 대해 검토하신 내용들을 내놓으시면 토론이 이어지는 방식이다. 그 지난하고 고된 고민의 시간을 지켜 보노라면, 가끔은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아무리 애써 고민하고 조율해서 그야말로 '말'이 되면서도 이를 테면 '원문의 정신'을 최대한으로 보존하면서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게끔, 그렇지만 번역의 일관성이나 개념에 대한 엄밀한 이해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여 역서를 낸들, 사람들은 그냥 고민없이 되는대로 잘 읽히게 슬슬 써갈긴 번역인지 소설인지 알 수 없는 것이나 떠받들며 잘 읽히니 어쩌니 멋모르는 소리나 지껄여대고 무슨 검증도 안된 허접한 영역서 들이밀며 '원문'이 어쩌니 저쩌니 되도 않는 개소리나 짖어대는데(씨바, 플라톤 태어날 때 영어가 있기나 했냐?), 이 공부가 이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고 살아남을 가능성은 있는지 그런 생각을 하면 억울한 거다. 뭐 나야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찌끄래기지만서도.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묵묵히 연구에 매진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나같은 조무래기로서는 궁시렁거리기도 민망스럽다.

3. 『소피스테스』에서 능력이 수동과 능동으로 나뉘고 또한 인식이 능력의 일종으로 제시되는 것은 또한 능력이 기술과 그 이외의 능력으로 분할되고 기술에서 제작술과 획득술로 나뉘는 것, 나아가 획득술에서 배움이나 인식에 관련된 것이 예시들 중에 등장하는 것과 여러모로 상충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종들의 결합과 분리에 대한 설명이 요청된다. 이러한 보완을 시도하지 않을 경우 개념이나 용어의 미분 혹은 내용의 비일관성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종들'과 '부분들'이 호환가능한 개념들로 묘사되고, 다시 전체에 걸친 겪음과 부분적인 겪음, 중심과 본성 따위가 논의되며, 원본과 모상의 구분이 모상에서 참과 거짓의 구분과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정의를 위한 분할의 과정에서 이러한 이후의 논의들이 배제되는 해석은 수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소피스테스는 젊은이들을 붙잡아 타락시키는가 하면 자신이 만든 것들이나 얻어온 것들을 한 자리에서 혹은 이리저리 떠돌며 팔기도 또 사기도 하고, 강한 논변을 약하게 또 약한 논변을 강하게 하면서 반박을 일삼는가 하면 이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 사람들의 무지를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소피스테스의 일(ergon)들이 모두 거짓인가? 혹은, 이 일이 소피스테스 그 자체의 유를 정확하게 정의해 주는가? 둘 다 아니라면, 제 3의 가능성이 필요하다. 그 모든 일들을 가능케 하는 어떤 단일한 능력 혹은 기술이 모상제작술이라 볼 수 있을 듯하다. 믿음에 관련하는 앎(doxastikē epistēmē)도 일종의 앎이고 기술인가? 허상제작술도 허상을 제작하는 앎을 지닌 능력이라면, 거짓 믿음이라도 그러한 믿음을 갖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앎이 있다면 그러한 앎 나름의 능력이 성공적으로 발휘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풀어야 할 문제는 많은 문제만 벌려 놓고 수습이 안 되면 어쩌나. 어쩌긴 뭘 어째, 닥치고 수습해야지.

-蟲-


너무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니 어지럽네. 그냥 이제부터는 개소리 넋두리 해 놓은 것도 남겨 두기로.

1. 소피스테스는 모든 기술들, 전문적인 앎들을 논파해낼 수 있다고 단언한다. 또한 그러한 반박의 기술을 가르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반박하는 자가 그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건전한 반박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왜 한 개인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아는 일이 불가능한가? 그것은 현실적인 한계인가 혹은 논리적 불가능인가. 유(類)의 수준에서 제화공은 제화공인 한에서 조타수일 수 없다. 만일 모든 것이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반면 전문적인 앎들 각각을 논파하는 개별 사례를 생각해 보면, 상호에 모순되는 주장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A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A임을 보임으로써 논파하는 자가 ~A를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 A를 내세워 논파를 하는 일은 가능한가?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현실적 한계를 들어 누군가가 모든 것을 아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소피스테스에 대한 첫 번째 문제제기는 유효성을 상실한다. 알 수도 있다. 혹은 테아이테토스가 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문을 남겨둔 채 소피스테스의 반박술은 충분히 정당화되지 못한 저 전제를 근거로 하여 모방술로 간주된다. 너는 장군도 제화공도 목수도 아니다. 너는 기하학자도 천문학자도 아니다. 너는 예언가도 아니며 시인도 아니다. 그러나 너는 신에 대해, 정의에 대해, 씨름과 장사에 대해 논하며 너와 대화하는 모든 자들은 너에 의해 논파된다. 너는 하나이면서 여럿이자 모든 것이다.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면 네가 하는 일은 마치 소꿉장난과 같은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모래로 성을 쌓고 돌멩이들을 가져다 전쟁놀이를 하듯, 너는 하늘 위의 모든 것들과 땅 아래의 모든 것들을 지어낸다. 그 어느 하나 진짜가 아니고 참이 아니다. 너는 화가나 조각가와 같이 무언가를 따라 그리고 따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모습을 본을 따 거대한 조각상을 세울 경우 실제 본이 되는 사람과 같은 비율로 더욱 크게 만들어진 조각상은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작아 보이고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커 보여 커다란 발에 작은 머리를 가진 기이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왜곡을 고려하여 조각상의 위로 갈수록 그 크기를 과장하고 혹은 아래로 갈수록 이것을 축소한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그것이 실제의 비율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소피스테스, 너는 아마도 이러한 조각상을 만들어내는 조각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조각상은 본이 되는 실제의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거짓 사람이다. 너는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소피스테스는 반문한다. 나는 거짓을 말하는 자이고 모상을 만들어내는 자인가? 그렇다면 모상이란 무엇인가? 거짓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이 아닌 것을 무엇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아닌 것,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소피스테스에게 거울을 바라보라고, 수면에 비친 상들을 보라고, 그림들을 보라고 닥달한다. 그러나 그는 눈과 귀를 막은 채 묻는다. 어떤 것에 대한 것이면서 어떤 것이 아닌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거울에 맺힌 상은 누구의 상도 아니다. 물에 비친 상은 무엇의 상도 아니다. 그러한 것은 없다. 말은 어떠한가? 생각은 어떠한가? 그것들은 그것들이 가리키고 본뜨는 그 무엇 자체인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말이나 생각이 있기는 한가? 심지어 거짓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 자체도 아니고 그 무엇을 본 뜨지도 않은 것이 바로 그 무엇을 가리키고 그와 관련하여 거짓이라 이름이 붙는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소피스테스는 파르메니데스의 뒤에 숨는다. 모든 것은 무엇인가이다. 무엇으로서 바로 그러한 것만이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애초에 무엇인 것일 수 있다. 그 외에 아무것도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가리킬 수조차도 없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 '것'이라는 이름마저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는 묻는다. 나는 불가능한 일은 가능하게 하는 자인가? 아니다. 말과 생각과 그림과 수면에, 거울에 비치는 상들과 땅에 드리우는 그림자 각각을 모두 그 자체로 무엇이라 말할 수 있다. 모상은 원본과의 관계와 따로 떼어 놓은 이후에도 그 나름의 규정성을 갖는다. 그림자를 그림자라 부르는 일은, 그리고 그 그림자를 어떤 무엇의 그림자인 것으로 그러나 그 무엇 자체는 아닌 것으로 부르는 일은, 그리 생각하고 가리키는 일은 가능하다. 좀 더 정확히 너를 정의하자면, 너는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켜 그려내고 조각해내는 사기꾼이다. 소피스테스는 그 말을 일부분만 받아들인다. 좋다. 나는 이러저러한 것들에 대해 말도 하고 생각도 하며 그것을 따라하기도 하고 본을 떠 모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말도 생각도 그림자도 모두 그 나름대로 무엇인가이며 자기 자신과 동일하고 다른 것들과 다른 의미있는 것들이라면, 거짓은 무엇인가? 말은 그 자체로 무엇인 어떤 것에 대한 것이며 또한 이러한 관계로 따로 떨어져서도 나름대로의 뜻을 가진다. 생각 또한 마찬가지로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무엇인가이다. 여기에 무엇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 들어 오는가? 거짓이란 무엇인가? 무엇이지 않은 것을 무엇으로, 무엇인가를 또 무엇 아닌 것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말도 생각도 그것들이 관계하는 모든 것들도 저마다 모두 무엇이지 무엇 아니지 않다. 왜곡된 비율이란 무엇인가? 과장과 축소를 겪은 조각상이든 원본의 비율을 그대로 따른 조각상이든 그 각각은 조각상이지 않은가? 그 조각상들이 본으로 삼은 누군가는 또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사람 아닌가? 어디에 거짓이 있는가? 오직 진실뿐이다. 모두가 참이다. 다시 파르메니데스의 뒤로 숨은 소피스테스는 말한다. 무엇 아닌 것, 그것은 불가능하다. 무엇인 바의 것, 그 무엇임, 오직 그것뿐이다. 아무런 틈도 남지 않는다.

2. 소크라테스는 정치하는 인문주의자이다. 아테네 인문정신의 뒷받침 없이 당대 이전까지 유래가 없던 민주주의의 그 눈부신 발전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플라톤에 의해 묘사되는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까지 당대 자연철학자들의 논설들을 탐구했다. 당대의 산술과 기하와 천문은 수학적 계산을 통해 그릇된 전제마저 정당화시킬 정도로 정교했다. 그들의 논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운동에 대해, 다시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에 대해, 무한과 극한과 수렴과 발산에 대해 감지하고 고찰하는 데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이러한 기존 학설들에 대한 수용은 비단 소크라테스에 국한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 소피스테스로 분류되는 일단의 연설가들, 교육자들, 그들 또한 이러한 지식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논리적 형식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자연에 대한 당대의 관찰결과들에도 부합하지 않는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전통의 신념들에 의문을 던진다. 질문은 파괴적이다. 아무도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가치기준을 정당화하여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좋은가? 이에 대해 모두의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가면을 쓴 플라톤은 반문한다. 과연 어떤 객관적 기준 없이 개별적 관찰과 추론의 진리가 보장될 수 있는가? 만일 한 마리의 개를 향해 '저것은 개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참일 수 있다면, 그것을 참으로 만드는 근거와 기준이 있을 것이다. 만일 살인이 나쁜 것이고 도둑질이 나쁜 것이라면, 여기에 대해서도 어떤 근거와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 판단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토대 없이는 우리는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근거가 되는 기준이다. 물론 우리는 모른다. 좋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옳음의 궁극적인 기원이 무엇인지, 그러한 것이 정말로 있기는 한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제화공이, 시인이, 예언가가 옳고 그름을 논한다. 수사학과 논리학을 등에 업은 자들이 이에 대해 온갖 역설들을 만들어내며 되묻는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답이 없음을 확인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되풀이하여 말한다. 나는 대중을 상대로 민회에 나서서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한 개인으로서 또 다른 한 사람을 향해 나 자신의 무지를 가지고 묻는다.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시험한다. 시험을 통과하는 자에게서 나는 배울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나은, 좋은, 올바른 삶을 살 것이다. 그럼 다시 생각해 보자. 그는 정치하는 인문주의자인가? 그는 정말로 철학학이 아닌 철학함을 보여주고 있는가?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인가? 그리고 인문과 정치의 결합은 그렇게 간단하고 선명하게 도식화될 수 있는가? 그는 무엇이 옳고 좋고 아름다운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단언한 일이 없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말할 수 있는 신적인 지혜에 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을 사실판단의 지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매개해야 할 그 커다란 간극 역시 해결하지 못하였다. 병사로 전장에 나아가 전투를 수행하고, 제비뽑기로 선출된 지위를 맡아 의무를 다하는 과정에서 그는 한 개인으로서 반성한다. 왜 폴리스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가? 폴리스의 명령은 대중의 명령인가 혹은 그 도시의 법이 정하는 명인가? 인문학의 지적동력은 민주화를 촉발시키지 않는다. 무역의 중심이자 소단위 폴리스들의 연합으로서 부의 축적이 가능하였고 사회안정이 용이하였던, 그리고 노예제를 통한 노동과 학술 및 정치의 분업이 가능하였던 사회에서 노동을 담당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그 작은 사회단위 각각에서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에, 정말로 플라톤의 인문정신과 소피스테스들의 수사학적 선전활동들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는가? '좋은' 민주주의라면 거기에는 그 구성원들 각각의 올바른 정치적, 윤리적 판단이 가능한 정도의 인식수준이 요구될 것이고 그렇다면 인문학의 부흥이 요구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했듯 올바른 가치판단 자체가 이미 문제시된다. 그리고 설령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경험적으로 검토된 전통적 가치들과 사회적 통념들을 기초로 상식적인 수준의 윤리를 체득하고 산술과 기하와 천문을 거치며 오랜 시간 추론의 형식적 절차를 익혀 분과학문들의 위계와 질서를 파악하고 그 근저에 숨겨진 공통의 원리를 고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후에, 만일 정말로 가능하다면, 윤리적 판단의 근원적 토대, 객관적 기준을 직관하고, 그 이후에도 이 모든 교육의 성과를 가지고 실제 정치사회에서 실무를 통해 훈련을 거친 자들만이 비로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게 『국가』에서 수호자로서의 철학자가 거쳐야 하는 교육이자 그에게 요구되는 실천의 조건이다. 그래서 '좋은' 민주주의에서는 사실 여러모로 민주주의 자체가 필요치 않다. 모두가 철학자라면 판단에 상이함이 없을 것이고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모두가 비효율적으로 정치에 얽혀들 이유가 없다. 다른 한편 저 모든 과정을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빠짐없이 거친다는 것은 각각의 능력차도 사회적 분업의 필요성도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물론 대중교육, 의무교육이 강화되면서 근 20년 가까운 교육이 개별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에게 시행되고, 전문연구자 양성을 목표로 하지 않고 시민사회 구성원을 양성해 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 미국식 대학교육은 민주주의와 인문학의 매개를 고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된 점은 법과 정치에 대한 현대의 이해이다. 즉, 플라톤과 그의 대변자로 등장하는 대화편 속 인물 소크라테스,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서의 이야기이다. 소피스테스들의 경우에서 보이듯, 논리적 형식과 적절한 수사에 대한 훈련이 윤리적 판단에서 산출해내는 결론은 답 없음이다. 그 답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늘날 훌륭한 민주시민의 태도이기도 하다.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작태는 소통이 불가능한 일방적 폭력으로 귀결할 따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최소한의 합의점으로서 법이라든지 시장경제 내에서의 '이익'이라든지 하는 여러 기준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자연권'이니 '인권'이니 하는 것까지도 암암리에 전제되고 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인문정신은 이러한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소피스테스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결론으로서 '답 없음'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따져 물을 수 있고 반성할 수 있으며 좀 더 검토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민주주의가 어느 지점에선가 타협하는 바로 그 상식적인 한계를 따져 물으리란 점에서 적어도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의 친구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뭐 이 나라에서야 그나마의 상식적인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차에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이긴 하겠다. 실천이 함께하는 학문이란 학문의 이상적 상태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엄밀함과 정직함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괴리를 감내해낼 필요도 있다고 본다. 그 간극에서 비약해 버리면 학문과 무관한 실천이 남을 뿐이지 않나. 다행히도 개인은 학자이기만 하지도 않고 사회인이기만 하지도 않은지라 그 둘 사이를 넘나들며 살아갈 수 있다. 학문의 제 역할을 다 해낼 때까지 개인은 그저 양쪽을 바쁘게 오가며 두 가지 책무 모두에 충실하게 살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무책임한 소리이긴 하다만.

3. 한 두 걸음 정도 앞서 가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 연구자에게는 좋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 보면 아예 내 길과 동떨어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딱히 실감할 수 없을 만치 능력이나 조건에서 차이가 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 어느 중간 즈음의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말로야 건대 스승님들, 서울대 스승님들, 정암 스승님들 그리고 여기저기 선배들 얘기를 하면서 혹은 인터넷에서 만난 제도권 안팎의 연구자들을 언급하며 '학문한다고 굶어 죽는 건 아니네, 10년 뒤까지는 버티는 사람이 있네, 20년 뒤에는 저렇게 버티고 사시네' 뭐 이런 생각을 입밖에 내곤 하지만, 당장에 학위논문에 쩔쩔매고 조교일 하며 첨삭 하나마다 자괴감 한 번씩 떠올리게 되고 이제는 습관이 될 법도 한 강독준비도 모래 씹듯 어렵고 불편한 마당에 이런저런 일들 다 거치고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삼는다는 게 정말로 와닿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종종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나 대충 타협하고 적당히 넘어가며 이리저리 빠져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정직하고 성실한 길이 어렵기는 하지만 어쨌든 끝까지 이 악물고 버티면 넘지 못할 정도의 고비는 없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이 잘 하느냐 못 하느냐, 그 결과가 어떻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긴 하다. 학계에도 사회에도 아무런 기여가 없는 짓을 한다는 건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일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면 어쨌든 경제적으로도 제한이 생기고 연구환경도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재능 못지 않게 사람들이 기피하거나 미처 주목하지 못해 방치된 고단한 일들을 묵묵히 해내는 뚝심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문이란 것을 더 넓게, 더 길게 볼 필요가 있고 자신의 한계를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고 본다. 몸으로 부대끼며 견디고 버티는 것, 미련하게 들이미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필요한 일일 수 있다. 타협하지 않고 정직과 성실을 끝끝내 지킨다면 물론 재능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그 길은 더디고 고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에 사람이 필요하고 손 하나가 아쉬운 길들이 차고 넘친다. 강상진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는 문헌들은 차고 넘친다.' 옛 선배 하나는 칸트 전공하겠다고 독일 갔다가 지도교수 면담 때 이런 일을 당했더랜다. 독일에서 그간 나온 칸트 관련 논문들, 연구서들, 주석서들을 연구실 한 가득 쌓아 놓고, '여기에 뭘 또 더하겠다고?'라고 물었더래나 뭐래나. 그러나 그 사이에 칸트와 칸트 연구자들이 시대적 한계로 인해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정보들도 끊임없이 쌓이고 있고, 국내에 소개되지 못한 중요한 연구서들도 수두룩하고, 어떻게 그것을 교육할지, 어떤 부분에 접목시킬지, 무엇을 받아들이고 또 비판할지, 일들은 여전히 많기만 하다. 플라톤에 대한 연구가 2000년이 넘도록 여전히 이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도 그 비슷할 것이다. 물론 두렵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나만 뒤쳐지고 나만 부족해서 결국 나만 쫓겨나는 것 아닌가 겁이 나고 불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 뒤에는 분명 일종의 오만도 숨어 있다. 내가 좀 더 나을 수도 있으리라는, 더 훌륭하고 뛰어나서 남들의 눈에 띄고 좋은 평가를 받을 그런 결과를 내놓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학문이라면, 지난 학문의 역사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 여지가 있다. 학문의 진행이 그 위에 또 쌓이고 쌓이며 조금씩 나아간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그러나 빈틈을 채우고 성긴 곳들을 메우고 다져가며 무명씨로 잊혀져간 숱한 연구자들 없는 학문의 역사를 생각하기란 그야말로 불가능하다. 어렵고 힘들지만 버텨야 하는 지점, 그렇지만 자신의 한계 내에서 감당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속도와 높이를 기준으로 한 익숙한 평가에 물들어 버리면 자기 자신의 자리도 그 자리에서 전체에 대한 조망도 모두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괜찮다. 모두가 너를 버려도 학문은 기다리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막말로 못 해내면 내쳐지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이 잘리는 것도 심장이 먿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 자신에게 하는 말들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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