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철학자들은 알아먹지 못할 소리들만 지껄이느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다른 한편 철학계 내에서도 진영에 따라 한쪽에서 다른 쪽을 향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는 비판이 오가기도 한다. 앞의 경우에는 철학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고 어려워야만 한다. 고유한 역사와 방법론을 갖춘 학문체계로서 철학의 특히 가장 첨예한 논쟁이 오가는 주제들과 그에 관한 여러 논증들이 일반인들에게 쉬울 필요는 없다. 사용되는 개념어들은 각기 그 배경에 여러 상이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입장들을 전제하고 그 논쟁들을 아울러 일종의 개념사를 갖추고 있다. 철학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방법론으로서 논증은 그에 대한 분석, 재구성, 그리고 평가에 필요한 논리적 훈련 없이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다. 물론 이는 논증을 구성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수학자들, 과학자들, 여러 학문들 각각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가는 논쟁들과 그들의 연구성과들에 대해서는 마치 모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구는 치들이 유독 철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향해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학문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고찰도 없이, 철학을 마치 점술이나 미신처럼 대하며 혹은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며 철학이 자신에게 감동과 교훈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철학은 그것이 설령 가치나 실천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라도 그 자체로서는 학문이지 않을 수 없다. 정치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 혹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한다는 것 이전의 문제이다. 해당 철학적 입장이 문제로 제기하는 현상이 무엇이고 왜 문제가 되는지, 그에 대해 취해야 할 입장으로 그 철학적 이론이 주장하는 바가 어떻게 정당화되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논증하는 것, 그것은 당장에 문제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하고 그 입장이 근거하는 전제들에 대한 여타의 입장들이 제기하는 반론들에 대한 타당한 변론을 필요로 하며 그 과정에서 다시 연구사와 결부될 수밖에 없다. 누차 하는 말인데, 철학을 날로 먹으려는 새끼들에게 철학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탁상공론으로서의 철학을 부정하는 자들이 철학을 망치고, 교양팔이 사기꾼들을 양산해낸다. 다시 제대로 돼먹은 철학은 그 교양팔이 장사꾼들을 향해 어려운 소리만 지껄인다고 비판한다. 이 어려움은 앞서의 어려움과 의미가 다르다. 저 사기꾼들은 논증을 통한 정당화라는 학문적 소통의 근간으로부터 벗어나 짐승처럼 짖어대는데, 그것은 이미 말이 아니기에 알아들을 수 없고 그래서 어렵고 난해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왜 어려운 소리만 하느냐'며 철학을 욕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어렵지 않게 이 미친 헛소리의 추종자들을 찾을 수 있다. 이성의 신화를 해체한다느니 합리의 독재로부터 혁명을 이루자느니 하는 소리를 '맥락 없이' 받아들이면 철학 어렵다고 징징대는 자들과의 접점이 나오기는 한다. 그건 반지성주의이다. 그러나 흔히 한국에서 '그건 학문도 아니다'란 욕을 먹는 '사이비' 현대철학들도 그 본모습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될 때에는 막무가내 신들려 떠드는 방언을 지껄이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Sokal's hoax 등을 고려해 본다면 그 본모습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까지 자비를 베풀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지만, 부분으로 전체를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와중에 전범으로 혹은 그 피해국가로 한가운데에서 포화 속에 죽다 살아난 서구권에서 그들이 신앙에 가까운 태도로 추구하던 이성과 합리가 무력하였다는 경험을 딱히 그런 신념을 가져본 일이 없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가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딱하고 안타깝게 그들의 절규를 보살펴 헤아릴 수는 있겠으나, 어쨌든 이성과 합리가 도덕적 규제를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건 철학의 과제이지 철학의 패배선언은 아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러거나 말거나 문제는 이 나라의 사기꾼들이 보여주는 작태인데, 학자연하는 그 거짓말쟁이들은 합리적 비판이 애초에 불가능한 그러한 방식으로들 떠들어댄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근거가 무엇이고 어떤 논리에 기초하고 있는지, 그 전모를 파악할 기존의 이론적 전통이나 어떤 역사적 맥락은 있는지, 그런 걸 받아들여야 분석과 평가가 가능할 터인데, 그걸 거부하는 쓰레기들을 왜 학자 취급을 해줘야 하겠나? 이런 점에서 볼 때,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기도 하다. 적어도 그것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므로.

2. 이제 논문 심사까지 대략 넉 달 정도 남은 마당에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놓치기 아쉬운 기회들이 널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홍보를 겸하여 몇 가지 올려 보자.

정암학당 11월 공개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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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신의 자유, 인간의 자유
2. 강사 : 송유레(경희대 교수)
3. 일시 : 2013년 11월 16일(토) 오후 3시~5시
4. 장소 : 삼선동 1가 8번지 3층 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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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자유, 인간의 자유

송유레

그리고 한마디 말의 힘으로 /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 폴 엘뤼아르 (1895-1952)

  자유는 많은 이들에게, 특히 식민과 독재의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가슴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가치이다. 자유는 타민족의 예속과 독재자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정치적 이념을 일컬을 뿐만 아니라,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이라는 종교적 경지를 이르기도 하고, 허위와 편견을 벗어난 지적인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어느 누구의 간섭도, 어떤 강제도 없이 원하는 대로 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상태를 지칭하기도 한다.

  우리는 왜 자유를 원하는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자유는 무엇인가? 본 강좌에서는 자유의 이상에 대한 고대 플라톤주의자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신(神)을 닮기’를 철학의 목표로 내세운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신의 자유는 인간이 닮아야 할 자유의 본이다. 그런데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에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그에겐 나쁜 것을 선택할 자유도 없고, 나쁜 것을 행할 능력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철학자들의 신은 자유롭다고, 또 전능하다고 불린다. 본 강좌에서는 상식을 뒤엎는 이 역설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강사 소개:

송유레

신플라톤주의의 주창자인 플로티누스에 관해 박사 학위를 했다. 함부르크 대학의 도로테아 프레데 교수와 프리부르 대학의 도미니크 오마라 교수에게서 사사했다. 플라톤과 플라톤주의 전통에 연구 중점이 놓여 있지만, 고대 철학 전반에 고루 관심이 있으며 교부학 공부도 진행중이다. 신(神)과 덕(德)이 최대 관심사이며, 최근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윤리학』을 번역했다. 이번 강좌에서는 노예 에픽테토스의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에 이어 고대 플라톤주의자들이 꿈꾼 ‘신적인 자유’를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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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 <투스쿨룸의 대화> 윤독회을 열고자 합니다.
키케로 <신들의 본성> 이후 두 번째로 번역되는 철학책입니다.
참여해주실 분을 모십니다. (정암 윤독 지원 대상은 아님; 점심 밥값은 주십사 연구실장님께 로비? 중입니다)
12월과 1월 방학 중에 8주*3시간입니다. (오전에 합니다; 정암 강의실 일정 때문에 수정될 수 있음)
영혼의 고통과 치료에 관한 대화입니다.
라틴어를 좀 읽을 수 있는 철학전공자들로 채워지길 기대합니다. (라틴어는 몰라도 번역은 드리니 철학에 관심이 있으시면 참석 가능) 번역본을 제공합니다. 내년 3월 초 출간예정입니다.
참석 가능하신 분들은 kimjins2@snu.ac.kr로 연락주십시오.
5명 정도 되면 일정을 확정하여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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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겨울학기에 늘 그렇듯 서울대에서 고전어집중강독이 시작될 터인데, 고전어 문법과 독해 훈련이 아직도 한참이나 부족한 나로서는 좀 가서 듣고 싶건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생기지는 않을 듯하다.
  뭐 어쩌겠나, 이게 다 내가 게을러서 생긴 일이거늘. 자업자득이랄지.

3. 너무 인생을 흥미본위로만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논문이나 혹은 그런 입장들에 대해 좀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봐야 할 논문들은 많은데 나는 또 어느샌가 주마간산하고 있었다. 말을 달린 그 만큼 걸어서 되돌아가야 한다. 매번 이런 식인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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