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번 이런 식이었다. '이런 식'이란 게 나쁘다거나 뭐 그런 얘기는 아니고, 나는 세 차례에 걸쳐 논문 주제를 줄여야 했고, 그렇게까지 해서도 여전히 내 문제의식이 무엇이고 그게 왜 문제시되어야 하는지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으며, 그 과정에서 내 입장과 상충하는 입장들 혹은 나를 지지하는 입장들이라 내가 늘어놓은 사람들을 정말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받았다. 내 자료조사나 그 분석의 능력을 검증받기 위해 우선 국내논문 한 편을 요약, 정리하여 지도교수님께 검토를 받았고, 된통 깨졌다. 이전에 썼듯 나는 이른 바 '자비의 원리'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고, 바로 그런 이유로 자료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었을 그리고 또한 얻어내야만 했던 정보들을 놓치고 있었다. 우습게도 내가 내 주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바로 그런 경계해야만 할 태도를 내 스스로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10년 가까이 비슷한 가르침을 받아 오면서도 말이다. 첫 장을 넘겨서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 책에 대해 말하지 말라.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적을 친구가 될 만큼 굳고 강하게 되세우고 바로잡아 정면에서 마주하라.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를, 헤라클레이토스를, 파르메니데스를 대하는 방식들을 생각해 보라. 분석하고 재구성하고 평가하라.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원칙을 깨뜨리면서, 심지어 그 원칙을 강조하기까지 하며 그딴 짓을 하는 건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여전히 발전이 없다. 그렇게 깨지고 까이고 걷어 차이면서 또 한 주를 같은 논문을 반복해서 읽고 분석하고 정리하며 보냈다. 다시 찾아 뵙고서 다시 검토를 받고, 크게 다르지 않은 지적들을 훨씬 호의적이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듣고 나서, 이제 또 다른 논문을 붙들고 있다. 학부 졸업할 때, 대학원 입학할 때, 기말 보고서를 제출하고 성적을 받을 때마다 느꼈던 기분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살아남았다. 한 단계, 한 고비를 넘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나는 나아지길 바라고 또한 나아가길 바라는데 실상은 그저 같은 자리에 멈추어 서서는 떠밀리고 내쫓기고 버려질 위험들을 가까스로 넘겨가며 그냥 그 자리를 지켜내는 게 고작이다. 어쩌면 방학부터 안티폰 강독이 진행될지도 모르겠다. 또 그 즈음 혹은 내년 봄학기부터 『파르메니데스』 윤독을 청강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서울대에서는 류혁 선생님께서, 서강대에서는 전헌상 선생님께서 각기 『테아이테토스』 강독모임을 꾸려 진행 중이라 하시고, 그 사이에 정준영 선생님께서 그 대화편의 번역을 내놓으셨다. 여전히 금요일마다 오전에는 『파이드로스』 강독을 하고, 이번 주부터 월요일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이 시작되었다. 후배 한 녀석이 학부 졸업논문으로 『소피스테스』 분할부분을 정리해서 낼 계획이라더라. 다른 한 녀석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쓸 듯하고.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할 일들이 중첩되고 쌓여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기쁜 일이다. 다만 이것저것 붙잡지 못하고 놓치고 마는 것은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내 무능과 나태와 비겁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어려움과 그 크기와 그 간극 사이에서 비틀거리다 죽도 밥도 안된 채 끝날 내 인생 같은 것을 멍하니 곱씹다가 결국 다시 발등에 떨어진 불로 되돌아 온다. Brown은 착한 할머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2. 튀빙겐 학파가 대표라 할 소위 'Unwritten Doctrines(or 'unwritten teachings,' ἄγραφα δόγματα)'를 내세우는 플라톤 해석의 흐름이 있다. 뭐 그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비의 같은 것이야 관심사는 아니고, 그 안에 어떤 독자적이고 기발한 발상이 있어서 그걸 내세우고 싶다면 그들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일지, 그런 게 좀 흥미롭게 여겨진다. 대화편들은 플라톤의 정수도 아니고 그 진면목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엎어치나 메치나 매한가지로 그 대화편들은 결국 플라톤이 쓴 글들일 수밖에 없다. 그 외에 초기, 중기, 후기 플라톤주의자들이나 아카데미아의 일원들, 아리스토텔레스가 될 수도 있고 스페우시포스가 될 수도 있고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대화편에서 발견되지 않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조금씩 언급하고 있다. 이런 것들 말고 우리에게 전해져 남은 것도 없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료들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기존의 해석보다 더 나은 점, 더 유익한 지점을, 더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어야 하다. 그것 말고는 '플라톤'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논쟁의 영역에서 그들의 역할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물론 그 경계를 넘어 철학 일반, 세계에 대한 깨달음, 뭐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일이야 말릴 수도 없고 말릴 이유도 없겠지만 그들의 '쓰여지지 않은 가르침들'은 결국 플라톤의 가르침들일 따름이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주장이 아니라는 거다. 문제가 왜 문제인지 설득하지 못하다면, 그리고 내세우는 주장이 그 문제의 범위 내에서 가운데를, 핵심을, 혹은 주요한 마디들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명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저 말을 위한 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규칙을 부정하고 판을 깨는 자들에게 아마도 이것이 탁상공론이고 고리타분한 상아탑의 현학놀음이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새 판을 짜는 자들 중 여전히 유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란 결국 이전의 판을 합의 하에 배제시킨 자들 또는 이전까지의 모든 규칙들을 섭렵한 자들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리광부리고 투정부린다고 그것이 자유이고 창조인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3. 결국 쓴다거나 말한다거나 하는 그러한 일들은 다른 누군가를 향한 일일 수밖에 없지 않나. 지금 이 지랄도 개소리를 쳐발라 놓는 것도 그게 혼잣말이라 해서 아무 상대도 없는 게 아니라,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영혼이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이지 않겠나. 독자가 나든 나 아닌 다른 누구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나. 그리고 주둥이와 손가락으로 깔짝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제 아무리 과격하고 급진적이라 하더라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결국 드러나고 확립되어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 실제로 현실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가 되어 빼도박도 못하게 자리잡는 것은 실천이고, 움직임이고, 삶이다. 지껄임을 통한, 끄적임을 통한 실천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난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러한 좋게 말하자면 설득, 나쁘게 말하자면 선동, 그건 그에 따라 동의하고 실제로 행동하는 자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실천의 몫을 나누어 받는 것뿐이다. 아무리 멋진 글과 대단한 연설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더라도, 그 자신은 여전히 어딘가 현실로부터 괴리된 구석배기에 쳐박혀서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딸딸이에 몰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글과 말은 그 사람의 사람됨을, 그의 삶을 대표하지도 그것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글과 말과 생각으로 삶을 바라보고 무언가 알아내어 거기에 준거하여 실로 살아내려는 자들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짐지울 뿐, 변명도 핑계도 실상 아무런 현실적 능력은 없는 것 아닐까. 내 스스로 실천을 철학으로 갈음하겠노라 어줍잖은 변명질을 하며 살아가는 비겁자, 변절자, 그런 쓰레기에 불과하여 또 거기에 덧붙이는 변명으로 이 비슷한 꼴을 한 모든 삶들이 죄다 뭉뚱그려 씨발, 좆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있으나, 혹시 모를 일이다. 누군가는 글로써 살아내고 말로써 움직이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언행이 일치하고 합일하는 그러한 삶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그저, 내가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뿐인지도 모를 일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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