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a1-217a9)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가 자신을 고발한 문제 때문에 바실레우스 관아에 용무가 있어 테아이테토스와의 대화를 마치고, 테오도로스에게 아침에 다시 같은 장소로 모이자고 제안한다(210d2-4). 그 제안에 따라 다음 날 약속대로  테오도로스와 테아이테토스, 그리고 젊은 소크라테스가 엘레아 출신의 손님을 대동하고 찾아온다. 테오도로스는 이 손님을 파르메니데스와 제논 무리의 동료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라 소개한다. 소크라테스는 그 소개를 듣고 호메로스의 시에 빗대어 그들이 대동하고 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손님의 신(즉 제우스)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여기에 더하여 그 신이 인간의 만용이나 준법을 감시하러 오듯이, 그들이 모셔온 손님이 진술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파악하고서 시험(논박, elenchos)하기 위해 찾아온 시험의 신이 아닌지 의심한다. 그런데 테오도로스는 손님을 신에 빗댄 소크라테스의 칭찬을 잘못 파악하고 손님이 '쟁론에 열중하는 자들(ton peri eridas espoudakoton)'보다는 더 온화한 사람이라 답한다. 쟁론(eris)과 시험(elenchos)에 대한 혼동에 더해 테오도로스는 이어지는 답변을 통해 신(theos)과 신적인 자(theios) 사이의 구분에 대한 문제까지 야기시킨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 모두를 신적인 자들이라 부른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자가 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쟁론가들, 철학자들-신적인 자들, 그리고 신 사이의 구분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구분이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여 논의를 이어 나간다. 테오도로스의 말에 따르자면 그는 손님이 철학자임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를 쟁론가들로부터 구분지을 수 있고, 나아가 다시 신과 신적인 자 사이의 차이 또한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호메로스에 대한 언급을 통해 연상되는 『오뒷세이아』의 해당 구절들은 가장하고 나타난 오뒷세우스를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 신의 유(genos)를 분간하는 일의 어려움이 이를 통해 암시된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라는 유가 신의 유에 비해서도 분간하기 더 쉬운 것은 전혀 아니라고 지적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러한 자들은 지어낸 자들이 아닌 실제로 철학자인 자들로서, 그 밖의 사람들에게 속하는 무지 때문에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고 도시들을 드나들며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자들로, 또 다른 이들에게는 모든 일에 합당한(가치있는) 자들로 여겨진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는 정치가로, 또 다른 경우에는 소피스테스로 나타나며, 또 다른 경우에는 이들에게 사람들이 전적으로 광기에 빠진 자들이라는 믿음을 제시하는(평판을 부여하는, doxa) 그런 자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문제를 밝히고서 엘레아에서는 소피스테스, 정치가, 철학자가 모두 하나의 유로 혹은 두 유들로 간주되는지, 아니면 이름이 셋이듯 그 이름마다 각각의 유가 적용되어 세 유들로 나뉘는지 손님에게 들어 배우기를 청한다. 소크라테스는 손님이 철학자라는 테오도로스의 소개로부터 손님이 진정으로 철학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그 유를 소피스테스, 정치가, 광인 등의 유들과 구분하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직접적으로는 철학자의 유를 밝혀줄 것을, 간접적으로는 손님 자신의 정체성을 해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테오도로스의 무지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논박과 쟁론을 구분하지 못하고 철학자와 신을 구분하지 못하며 철학자를 소피스테스, 정치가 등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채로 눈앞의 손님에 대해 규정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고, 그러한 소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이름들과 거기에 부합하는 유들에 대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손님이 마치 호메로스가 오뒷세우스를 묘사하듯, 즉 그가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자신의 부인을 탐하는 자들의 만용과 부정의를 심판하듯, 그런 식으로 테오도로스를 포함한 소크라테스 일행의 진술 속에서의 무지를 심판하리라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217a10-218b7) 테오도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대해 손님이 흔쾌히(아낌없이) 응하리라 말하고, 손님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소님은 그 유들이 각기 하나씩 셋으로 나뉜다는 점을 답한 이후에, 그 각각이 확실히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은 작은 일도 쉬운 일도 아니라고 말한다. 테오도로스에 따르면 일행은 당일 소크라테스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손님에게서 같은 문제를 고찰하는 것을 들었으나, 같은 이유로 각각의 정의를 미루었다는 점을, 그렇지만 손님이 그에 대해 충분히 듣고 또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가 이미 들어 배운 바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소크라테스는 손님이 호의를 베풀 것을 요청하고, 다음으로 그 설명의 방식에 대해 택해 줄 것을 청한다. 그는 긴 진술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상술할 것인지, 질문들을 통하여 논의를 진행할 것인지 묻는다. 후자의 방식에 첨언하여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노쇠한 파르메니데스가 후자의 방식으로 전적으로 아름다운(pankalos) 진술들을 상술하였던 것을 들은 일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와 파르메니데스, 제논이 등장하는 대화편 『파르메니데스』를 연상시킨다. 이에 대해 손님은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사람이 있다면 파르메니데스가 사용했던 그러한 방식을 선호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스스로 설명하는 전자의 방식이 낫다고 답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손님의 말에 겸손하게 귀기울일 것이며, 젊은이들 중 테아이테토스든 누구든 원하는 자를 선택할 수 있다고 답한다. 손님이 그 무리에 속하는 것으로 소개된 파르메니데스를 언급하고, 나아가 그가 원하는 조건으로 문답식의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 말함으로써 소크라테스는 손님으로 하여금 문답을 통해 각 유에 대한 정의를 설명하는 방식을 피하기 어렵도록 만든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앞서 말했듯 소크라테스는 손님의 정체성을 해명할 것을 간접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하여 쟁론과 시험 사이의 혼동이라는 테오도로스의 무지가 지적된 만큼, 손님으로서는 답변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 답변의 방식으로 일방적인 긴 연설의 방식을 택할 수도 없게 되었다. 손님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듯, 이 주제가 질문한 자가 기대하는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라 무척 긴 진술을 필요로 하리란 점을 첨언하면서도, 초면에 긴 말로 중언부언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하고, 소크라테스의 제안을 따르지 않는 것이 손님답지 못하고 투박한 모습으로 비치리란 점을 말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제안한 문답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그는 나아가 테아이테토스와 이전에 대화를 나눠본 일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대화상대자로 지목한다. 이어서 손님은 테아이테토스에게 논의의 길이에 지치게 되더라도 자신을 탓하지 말고 그의 일행들 탓을 하라 말하며, 이에 대해 테아이테토스는 자신이 그리 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지치더라도 자신의 운동 동료인 젊은 소크라테스를 참여시키면 될 것이라 말한다. 이 구절 역시 『파르메니데스』와의 관련성을 추정케 하는 부분으로 보이는 한편,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 이후 이어지는 정치가에 대한 정의가 시도되는 대화편 『정치가』에 등장하는 젊은 소크라테스를 또한 연상시킨다. 이후의 논의가 직접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인용하고 또한 그의 입장을 고찰함으로써 논의의 핵심문제가 해결되는 등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특히 『파르메니데스』와 이 대화편 『소피스테스』 사이의 연관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 더욱 설득력을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테아이테토스는 젊은 소크라테스를 묘사하며 '함께 운동을 하는 동료,' '함께 많은 고난을 극복해 나아가는 일이 익숙한 자'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바,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제시된 여러 문제들을 통해 고통스러운 훈련을 거치는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와 이후 진행될 논의들을 통해 고통을 겪게 될 테아이테토스가 연결됨으로써 두 대화편들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들 또한 연결되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손님은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말하는데, 이 역시 독자를 향한 언표로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등장하는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테스』에서 진행되는 논의에 도움을 줄 동료일지, 아니면 두 논의에서 전개되는 입장이 서로 상이하여 『소피스테스』에서의 논의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여야 할지에 대해서 여기에서 직접적인 답변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218b7-d2) 손님은 자신과 함께 검토를 시작하면서 우선 소피스테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추적하고 밝히는 진술로써 시작할 것을 테아이테토스에게 제안한다.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두 사람이 오직 이름과 관련해서만 '소피스테스'라는 것을 공통된 방식으로 지니고 있을 뿐, 그 이름을 부여하는 바로 그 일(ergon)은 각자 개별적으로(개인적으로)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소크라테스의 첫 질문에서는 이름과 유 사이의 관계가 언급되었으나, 여기에서는 이름과 일 사이의 관계가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적이 소피스테스에게만 국한된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철학자에 대해 혼동하고, 그 혼동의 결과는 철학자를 정치가로도, 소피스테스로도 믿는다는 것이며, 이는 달리 말하자면 정치가, 철학자의 경우에도 소피스테스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유, 이름과 일을 어떻게 부합시킬지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다시금 테오도로스의 무지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소크라테스의 간접적인 문제제기와 관련하여 손님이 답해야 할 것은 자신이 소피스테스가 아닌 철학자라는 점이라 기대할 수 있다. 그는 시험하는 자이고 쟁론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 이 점을 밝히고자 할 때 정치가, 소피스테스, 광인 모두와 혼동되는 철학자보다는 우선 철학자와의 혼동만이 논의된 소피스테스에 대해 고찰하고 밝히는 것이 증명의 부담이 덜할 수 있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이는 대화의 방식을 논하는 과정에서 질문들을 통한 문답의 방식과 긴 진술을 혼자서 늘어놓는 과시적 연설의 방식을 구분하는 데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 방향이다. 손님은 후자의 방식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도 여러 조건들을 추가하면서 손님이 문답의 방식쪽을 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두 사람 모두 쟁론과 시험이 다르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타의 대화편들에서 소피스테스와 과시적 연설 사이를 연결짓는 점을 고려하자면, 논의의 방향이 소피스테스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피스테스에 대해 이름은 공유하되 그 일은 따로 지니는 사람은 명시적으로는 손님과 테오도로스이나, 테오도로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그 일행인 테아이테토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손님은 이름에 대한 합의와 일에 대한 합의를 좀 더 자세히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는 모든 것에 관하여 단지 이름만을 진술과 별개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사실(사태, pragma) 자체를 진술들을 거쳐 합의하는 일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이름의 경우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진술과 별개로 합의가 가능하지만, 사실 자체의 경우에는 진술과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점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미 앞서 보았듯 세 유들 각각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의하는 일은 긴 진술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소피스테스에 대해서도 긴 진술이 필요하다. 좀 더 나아가 소피스테스라는 사태 자체에 합의하기 위해서도 역시 긴 진술이 필요할 것이고, 이는 노고로 인한 피로를 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문제이다. 손님은 이 점을 재차 언급함으로써 논의의 방식을 제안한다.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큰 일들을 잘 해내기 위해서 더 작고 쉬운 일에서 연습을 해 보는 일이 고래로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는 바, 소피스테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더 작은 일에서 연습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해명되지 않고 넘어가는 문제들 중 하나는 '일'의 의미하는 바이다. 그것을 각자가 나름대로 서로 다르게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앞서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여러 가지로 드러나는 나타남, 즉 인상(phantasma)과 서로 다른 평가들, 즉 믿음(doxa)일 수 있다. 그러나 논의의 맥락상 '일'에 대한 합의는 로고스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결과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정의(definition)이다. 또한 앎과 믿음을 개인의 심적상태라 말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이 되는 사태 자체로서의 일이라는 것을 앎과 믿음으로 충분히 포괄할 수 없을 것으로도 보인다. 일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측면과 더불어 각자의 상이한 판단으로 나뉘어지는 주관적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는 차후의 고찰과 관련짓기 이전에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218d2-221c5) 손님은 소피스테스의 유보다 더 쉬운 유에서 그 방법을 예행연습하고, 이를 거쳐가 그 유를 더 큰 유에 대한 본으로 세우고자 시도해 볼 것을 제안한다. 예행연습의 대상이 되는 유의 조건은 잘 알려진 작은 것이지만 더 큰 것들에 비해 진술은 전혀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손님은 이 방법과 진술이 그들이 바라는 것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여기에서 본이 되는 것은 유 혹은 방법 어느 한쪽만인 것이 아니라 이후 진행될 예행연습이 적용된 결과로서의 유이다. 또한 이 연습 이전에 제안된 목표가 소피스테스의 유, 일, 사태 자체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이었으므로, 이 연습 또한 더 쉬운 어떤 유에 대한 정의일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이 되는 것은 모종의 정의방법을 거쳐 정의된 그러한 유일 것이다. 손님은 이러한 연습의 대상으로서 낚시꾼을 제안한다. 그는 이것이 모두에게 잘 알려진 것이자 많은 열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테아이테토스도 이에 동의한다. 낚시꾼을 정의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손님은 그를 기술을 지닌 자로 놓을지, 아니면 기술은 지니지 않으나 그 외의 능력을 지닌 자로 놓을지 묻는다. 테아이테토스가 낚시꾼을 기술을 가진 자로 놓자고 하자 손님은 거의 모든 기술들이 두 종들이라 말한다. 그 한쪽은 '이전에 무엇이지 않은 것을 이후에 ~임을 향해 이끄는 모든 것으로서, 이끄는 쪽은 만드는 것, 이끌리는 쪽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들을 요약하여 만듦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 것들이나 ~된 것들을 진술들이나 행위들로 입수하고, 입수된 것들을 넘겨주지 않는 것으로서 인식이나 재물획득, 경쟁이나 사냥 등의 부분들을 모두 합쳐 획득술이라 할 수 있다. 이 둘 중 낚시술은 획득술 쪽에 놓이며, 이제 다시 획득술이 두 종들로 나뉜다. 획득술은 선물이나 보수 혹은 거래를 통한 자발적인 교환기술의 종이거나 아니면 일들에 따라서든 진술들에 따라서든 제압하는 종이다. 다시 제압하는 종이 취해져 두 가지로 잘리는데 그 한편은 공개적 경쟁이고, 다른 한편은 비공개의 사냥이다. 다시 사냥이 영혼을 지니지 않는 것에 대한 종과 영혼이 깃든 것에 대한 종으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잠수를 비롯 이름 없는 자잘한 부분들이고, 후자는 동물사냥술로 불린다. 동물사냥술은 다리 달린 유에 대한 뭍짐승사냥술과 헤엄치는 동물에 대한 수중사냥술로 나뉜다. 헤엄치는 동물에서 날개 달린 족속과 물에 사는 족속이 나뉘고, 전자에 대해 조류사냥술이 속한다. 후자에 대해서는 어획술이 속한다. 어획술이 크게 둘로 나뉘면 한쪽은 그물 등으로 가두어 잡는 에워싸는 사냥술이고 다른 쪽은 작살이나 삼지창으로 가격하여 잡는 가격술이다. 가격술에 대해 밤에 횃불을 들고 하는 횃불사냥과 낮동안에 작살과 삼지창으로 하는 갈고리술이 속한다. 가격술 중 갈고리술에 대해 다시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지는 쪽이 작살술이고, 남은 것은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갈고리로 물고기의 몸통 아무 곳이 아니라 각각의 경우 대가리와 주둥이 주위를 가격하여 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 과정을 요약하여 손님은 모든 기술 중 반절의 부분으로서 획득술, 거기에서 제압술, 제압술에서 사냥술로, 다시 사냥술에서 동물사냥술, 여기에서 다시 수중사냥술, 거기에서 아래에서 잘린 부분 전체가 어획술, 그 중에서 가격술, 작살술로 나아가, 작살술 중 끝으로 아래에서 위로의 가격하는 행위를 닮은 '낚시술'이 이름으로서 추적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 대해 평하기를 그 이름만 합의된 것이 아니라 일 자체에 관하여서도 충분히 파악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기술 외의 능력이란 무엇이고 그 능력 또한 기술과 같은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247e-249d까지의 논의는 능력(dynamis)를 행함과 겪음으로 일반화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적용시키고 그 작용과 결과의 사례로 인식함과 인식됨을 논하고 있으나, 이 설명이 기술과 기술 이외의 능력을 포함한 능력 일반에 대한 설명으로 선취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다음으로, 둘로 나누는 분할에서 분할의 기준이 문제될 수 있다. 또한 그 기준이 분할의 모든 단계에 일관되게 적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다. 226b-231b에 걸쳐 분할의 기술이 논의의 주제가 되고 이것이 같은 것들 사이의 분리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분리로서 정화에 관련되어 검토된다. 다른 한편 251e-252e에서는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분리되지도 무조건적으로 결합되지도 않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결합하고 어떤 경우에는 결합하지 않고 분리되어야 한다는 논증이 제시된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 철자들 사이의 엮임과 소리들 사이의 섞임, 그리고 유들에 있어서 결합의 원인과 분리의 원인이 탐구된다. 257에서는 특히 다름이 분리의 원인으로서 'to me on einai'와 'to on ouk einai'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상의 구절들에서 등장하는 분리, 분할, 구분과 관련된 논의들이 소피스테스의 유를 정의해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분할에 적용될 수 있다면 분할의 기준을 확정하는 데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gnorimon'의 의미도 문제될 수 있다. 그것이 이미 정의된 것 혹은 그러한 정의가 알려진 것을 의미한다면 이미 정의된 것을 정의하는 과정이란 무엇이고 그 과정에서 분할의 역할과 의미는 무엇인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의미가 '알려지는 것'에 그친다면 어떤 조건에서 그것이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되는지, 그리고 알려지는 것이 알려지기 전과 알려진 이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지 등에 대한 추가적인 의문이 야기될 것이다.


  221c6-231e7. 소피스테스의 여섯 가지 모습들(여섯 차례의 분할들).

  (221c6-223b7) 젊은이를 사냥하는 기술(1) : 손님은 이 본보기를 따라(kata touto to paradeigma) 소피스테스 또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찾기를 시도할 것을 제안한다. 낚시꾼의 경우 첫 질문은 그를 일반인(私人, 門外漢, idiotes)으로 놓을지 아니면 기술을 가진 자로 놓을지의 여부였다. 마찬가지로 손님은 소피스테스에 대해서도 그를 일반인으로 놓을지 전적으로 진정 소피스테스(<전문>지식인, 識者)로 놓을지 테아이테토스에게 묻는다. 이에 대해 그 이름에 걸맞게 전문지식인으로 놓아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오고, 이어서 손님은 그를 낚시꾼과 비슷한 족속으로, 즉 사냥꾼으로 놓는다. 사냥은 앞서 수중 동물 사냥과 육지 동물 사냥으로 분리하여 둘로 나뉘었다(220a1-5).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어졌으나 후자에 대해서는 나누어지지 않았고 종(형상)이 많으리라고 진술되었다. 손님은 여기에서 소피스테스와 낚시꾼이 갈라진다고 하며 소피스테스의 경우 부와 젊음의 강, 아낌없이 주는 초지에서 길러지는 것들을 제압하여 예속하려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육지 동물 사냥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육지 동물 사냥이 길들인 동물 사냥과 야생 동물 사냥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길들인 동물 사냥에 대해 테아이테토스가 묻자, 이와 관련하여 인간이 길들인 동물이거나, 길들인 동물이 없거나, 있으되 인간은 야생이라거나, 아니면 인간이 길들인 동물이되 인간에 대한 사냥은 없다는 것 중 원하는 주장을 고르라는 손님의 요구에 테아이테토스는 자신들이 길들인 동물이며 인간 사냥이 있다고 답한다. 길들이 동물 사냥은 강제에 의한 사냥과 설득술로 나뉘고, 설득술이 다시 사적인 모임에서의 것과 공적인 모임에서의 것으로 나뉜다. 사적인 사냥은 보수를 받는 부분과 선물을 주는 부분이 있는데, 후자의 경우 구애자들이 행하는 사냥이다. 즉 선물을 주어 인간을 사로잡는 '구애술'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 보수를 받는 기술은 쾌락을 미끼로 보수를 요구하는 아첨술, 쾌락술의 부분과 탁월함(arete)를 위해 사교한다면서 현금을 보수로 요구하는 기술의 부분으로 나뉜다. 테아이테토스는 탁월함을 위한 사교를 통해 보수를 요구하는 부분, 이 족속을 소피스테스라 부르고자 한다. 이에 대한 손님의 요약에 따르면 기술 중 자기 것으로 삼는 기술에서, 사냥술에서, 동물 사냥술 중, 육지 사냥술에서, 길들인 동물 사냥술에서, 인간 사냥술에서, 사사로운 모임에서의 사냥술 중, 보수를 받는 기술 중, 현금을 버는 기술에서, 가짜로 교육하는 기술(doxopaideutike) 중, 부유하고 명망있는 젊은이들을 사냥하는 기술이 소피스테스의 기술이다.
  (223c1-224e5) 탁월함에 관련한 교육매매술(2무역술-3도매술-4직매술) : 손님은 앞서의 결론에서 더 나아가 다른 방식으로 살펴볼 것을 테아이테토스에게 제안한다. 이 제안의 이유는 앞서 이야기된 것들에서 그들이 말하던 것과는 다른 어떤 유인 듯한 모습이 주어지며, 따라서 지금 좇고 있는 유는 무척이나 다채로운 기술에(εὖ μάλα ποικίλης) 참여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앞서의 논의에 따라 획득술의 종은 사냥하는 부분과 교환하는 부분 두 가지였다. 교환하는 기술에는 다시 종이 둘로서 한쪽은 선물하는 기술이고 다른 쪽은 거래술이다. 거래술은 자가생산물들에 대한 직매술과 타인의 산물들로 장사하는 상술로 나뉘고, 상술은 다시 도시 내의 소매술과 도시 간의 무역술로 나뉜다. 무역술은 몸을 기르고 몸이 쓰는 것들의 무역술과 혼이 그리하는 것들의 무역술로 나뉜다. 후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손님은 시가술, 회화술 등을 포함하여 영혼의 위안이나 진지한 기쁨을 위해 도시에서 도시로 가져와 매매되는 것들을 가져와 파는 자가 먹고 마실 것을 가져다 파는 자 못지 않게 무역상이라 불려 마땅하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설명된 영혼(-을 위한)매매술은 한편으로 과시술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전자(영혼매매술)만큼이나 우습더라도, 교육들에 대한 것이기에 이 행위와 형제간인 그러한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기술을 포함한다. 이를 교육매매술이라 하고 이러한 기술은 여타의 기술들에 대한 교육매매술과 탁월함(덕, arete)에 대한 교육에 관련된 다른 이름의 기술로 나뉜다. 이 후자의 기술이 소피스테스의 기술이며, 획득술의, 교환술의, 거래술의, 무역술의, 영혼매매술에서 탁월함에 대한 진술들과 교육들에 관련된 것으로 정리된다. 여기에 더하여 세 번째로 도시에 눌러앉아 이와 같은 것들에 관한 교육들을 매입하거나 스스로 고안하여 팔아 이로써 삶을 영위하는 자 또한 소피스테스라 부른다. 그래서 거래술에서 상술에 속하는 도매술이든 직매술이든 양자 모두 이러한 것들에 관한 교육매매의 유일 것이기에, 소피스테스의 기술을 지닌 유로 부를 것이다. 이로써 젊은이에 대한 사냥술에 더하여 교육매매술인 한에서의 무역술, 도매술, 직매술까지 네 가지 기술들이 소피스테스의 기술의 유인 듯이 나타난다.
  (224e6-226a5) 쟁론술(5) : 손님은 지금 추적하고 있는 유가 다른 어떤 것에도 유사한지 살펴보기를 제안한다. 획득술에는 경쟁술적인 부분이 속하며 이것이 한편으로는 경연으로, 다른 쪽으로는 투쟁으로 나뉜다. 투쟁술에서 몸에 몸으로 맞서게 되는 것은 폭력에 관한 것이다. 반면 진술에 진술로 맞서게 되는 것은 말싸움(ἀμφισβήτησις)에 관한 것이다. 말싸움에 관한 것은 정의와 부정의에 관하여 긴 진술에 긴 진술로 공적으로 맞서는 법정논쟁과 사인(私人)들 사이에서 답변들에 맞선 질문들로 나뉘어진 반박(ἀντιλογικόν)으로 나뉜다. 반박에서 약속(계약)을 둘러싸고 되는대로 비기술적으로 논쟁하는 종은 진술이 따로 분간해 두었고, 기술이 포함되었으며 정의 자체와 부정의 그리고 여타의 것들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논쟁하는 쪽은 쟁론이다. 쟁론은 돈을 쓰는 쪽과 돈을 버는 쪽으로 나뉜다. 돈을 쓰는, 즉 이런 일들에 관련하여 시간을 보내는 일의 즐거움으로 인해 제 자신의 일에는 소홀해지고, 반면 그 말에 관련하여 듣는 이들 중 대다수에게는 들으면서 즐거움이 함께하지 않는 그런 쪽은 수다라 불린다. 반면 사적인 쟁론들을 통하여 돈을 버는 쪽은 네 번째로 되돌아온 소피스테스이다. 이는 손님에 의해 돈을 버는 유로서, 쟁론적 기술에 속하고, 반박술에 속하며, 논쟁술에, 투쟁술에, 경쟁술에, 획득술에 속하는 소피스테스로 정리된다.
  (226a6-231b8) 시험-정화술(6) : 여기까지 드러난 소피스테스의 다섯 가지 모습을 통해 그 유가 다채롭고 한 손으로 잡히지 않는 사냥감이라는 것이 참되게 진술되었다는 점이 받아들여진다. 때문에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두 손으로, 더욱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그리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진행은 231c5-6에서 모든 것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는 언급으로 이어진다. 이는 앞서의 다섯 가지 분할들과 이후의 두 분할들이 소피스테스를 정의하는 데에 기여하는 방식에 대한 추정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손님은 이제 여섯 번째 추적을 시도한다. 그는 가사일들의 이름들, 예를 들어 거르다, 체로 치다, 체로 거르다, 키질하다, (털을)빗다, 감아 내리다, (북으로 베를)가르다 같은 것들을 언급하고 이 모두를 분할하는 것들로 아우른다. 손님의 진술에 따를 경우 이러한 것들에 관련하여 기술이 그 모든 것 안에서 단일하겠기에 그 기술을 단일한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그 기술이 곧 분할술이다. 분할의 두 종은 좋은 것으로부터 나쁜 것을 분리해내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부터 유사한 것을 분리해내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이름할 만한 것이 없으나 후자는 정화라 불리운다. 정화술의 분할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우선 물체와 관련하여 영혼이 있는 물체와 영혼이 없는 물체 사이의 분할이 이루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물체의 안과 밖으로 두 가지 정화가 나뉜다. 살아있는(즉, 영혼이 있는) 물체의 경우 내부로는 체육술과 의술이 (나쁜 것을) 분리해내어 제거하고, 외부로는 세신술 등 하찮은 것들이 정화를 제공한다. 영혼 없는 물체들에 대해서는 축융술을 비롯한 정돈술이 정화를 제공하나 이러한 것들은 세분할 경우 우스운 이름들이 나온다. 그러나 손님은 이러한 하찮음, 우스움, 혹은 이를 통한 이로움의 경중이 논의의 방법으로 고려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논의의 방법은 모든 기술들에 대해 동종적인 것(συγγενές)과 동종적이지 않은 것을 파악하고 유사성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를 강조하면서 손님은 영혼의 정화를 따로 놓고 그 외의 무언가를 정화하는 모든 것을 함께 묶는다. 그 이유는 논의의 방법이 사유에 관한 정화를 다른 정화로부터 따로 정의하고자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화는 영혼에 관한 것과 물체에 관한 것으로 나뉜다. 이제 다시 이러한 영혼의 정화가 제거하는 대상이 되는 악에 대한 분할이 이루어진다. 영혼의 악은 신체의 악에 대한 분할에 유비된다. 신체의 악은 질병과 추함으로 나뉘고, 이에 따라 영혼에 있어서도 질병에는 내분(στάσις)이, 추함에는 불균형(ἀμετρία)이 대응된다. 내분은 믿음(판단)이 열망과, 격정이 쾌락과, 지성(logos)이 고통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서로 간에 추잡하게 어긋나는 것이다. 이 영혼의 내분과 질병은 저열함(πονηρία)이다. 반면 불균형은 운동에 참여하여 표적을 세워 그것에 맞기를 시도하나 매 촉발마다 빗나가고 벗어나게 되는 원인이다. 이처럼 영혼의 불균형도 영혼이 진리를 향해 촉발되지만 이해로부터 빗나가도록 만드는 것, 무지(ἀγνοία)이며 이는 사리분별로부터의 빗나감(παραφροσύνη)이다. 이제 영혼의 두 가지 악으로 영혼의 질병과 무지에 대해 정화 역시 두 가지로 대응하여 나뉜다. 영혼의 악이 신체의 악에 유비되어 분할되었듯 정화 또한 신체의 정화에 영혼의 정화가 유비되어 나뉜다. 신체의 경우 질병에는 의술이, 추함에는 체육이 대응하며, 이에 따라 영혼의 경우 그 저열함에는 처벌의 기술이(κολαστική), 무지에는 교수기술(διδασκαλική)이 대응된다. 영혼의 무지에 대한 정화로서의 교수기술은 다시 무지의 종류와 함께 둘로 나뉜다. 무지는 사유의 모든 실패 원인이 되는 어리석음(ἀμαθία)과 그 외의 무지로 나뉜다. 여기에서 어리석음이란 어떤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무지, 즉 어리석음에 대한 교수기술로서 교육(παιδεία)과 그 외의 무지에 대한 장인교수(δημιουργική διδασκαλική)가 교수기술의 하위분류를 이룬다. 교육은 다시 훈계술과 또 다른 기술로 나뉜다. 모든 어리석음은 비자발적이며, 스스로 지혜롭다 믿는 자는 자신이 능란하다 여기는 것들에 대해 전혀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고, 이에 대해 훈계술은 많은 노력에 비해 성과가 미미하기에 또 다른 기술이 필요하다. 이 또 다른 기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누군가 아무것도 진술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 진술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문답한다. (2) 진술들로써 그 믿음들을 서로 곁하여 같은 곳으로 모아, 그 믿음들이 같은 것들에 관련하여 같은 것들에 대해 같은 식으로 그 자신과 반대된다는 것을 밝혀준다. (3) 이를 보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자신에 관한 대단하고도 완고한 믿음들로부터 풀려난다. 이에 대해 손님은 의사의 유비를 든다. 의사가 몸 속의 장애물들(τὰ ἐμποδίζοντα)이 제거되지 않는 한 그 몸이 추가적인 양분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듯, 시험하는 자는 배움에 방해되는 믿음들을 제거하기 전까지 영혼은 추가된 배움의 이익을 취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에 논의되겠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무언가 말하는 것'은 거짓에 대한 설명에 해당하고, 이 상태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말한다고 믿는 것은 거짓 믿음에 대한 설명에 해당한다. 이를 정리하면 '거짓 진술을 말하고 거짓 믿음을 가진 자에게서 그의 믿음들을 같은 곳으로 모아 서로 곁하여 세움으로써 그 믿음들의 자기모순을 드러내 그의 믿음들을 제거하는 것,' 이것이 곧 시험(ἔλεγχος)이며 유(類)로서 고귀한 소피스테스술(ἡ γένει γενναία σοφιστική)이다.

  223c1-2. "앞서 이야기된 것들에서" 사냥술이 아닌 다른 유인 듯한 모습은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 이후의 내용에 따르면 그 '다른 유'는 교환술, 거래술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사적인 모임에서의 사냥술을 분할하는 과정에서 보수를 받고 현금을 버는 기술로의 이행을 통해 시사된 바 있다.
  223c6-7. "획득하는 기술의 종은 이중이다. 한편으로는 사냥하는 부분을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환(ἀλλακτικόν)하는 부분을 지닌다." 219d κτητική μεταβλητικόν-χειρωτική. χειρωτική ἀναφανδόν-κρυφαῖον. κρυφαῖον=θηρευτικόν.
  처음 교육매매술은 무역술의 하위분류로 제시되었으나 이후 제 3, 제 4의 모습(phantasma)이 제시되는 과정에서는 다시 교육매매술이 소매술과 직매술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소매술은 무역술과 함께 상술을 이루는 것이고, 상술은 다시 직매술과 더불어 거래술을 이룬다. 이에 따라 분할의 임의성이 지적될 수 있다.
  '여타의 기술들에 속하는(ἄλλων τεχνῶν)' 교육과 '탁월함에 관한(περὶ τῆς ἀρετῆς)' 교육이 구분되는 표현을 고려할 때, 앞서 기술과 여타의 능력들의 경우(219a4-6)와 마찬가지로 덕은 그 외의 기술들과 동급으로 분류된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탁월함은 기술의 일종이며 기술은 능력의 일종이다. 이를 고려할 때 교육의 분류 또한 그것이 속하거나 관련하는 기술들에 따라 둘 이상의 더욱 다종다양한 교육들로 분할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유에 종이 속하는 방식들과 여기에서 교육이 기술들에 속하는/관련하는 방식은 같은 결과를 낳는가?

  돈을 번다는 언급은 앞서 네 가지 모습들 모두에서 드러난다.
  225c에서 'εἰκῇ δὲ καὶ ἀτέχνως'. 사소한 문제이긴 하나 기술(혹은 기술자)의 분할과정에서 비기술적인 종이 등장한다. 이 상충은 분할의 단계들이 엄밀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다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정리하는 부분에서 'χρηματιστικὸν'은 앞서의 분할에서 등장하는 교환 이하의 매매술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자나 후자 공히 돈을 벌어 들이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2차 분할에서 지적한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제압으로부터 전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투의 하위종으로서 폭력까지 그 획득의 대상은 기술이 적용되는 대상과 일치한다. 그러나 논쟁 이하의 분류에서는 기술의 적용 대상은 상대가 되는 사람인 반면, 획득의 결과물은 사람이 아닌 돈으로 전환된다.
  '두 손으로 잡아야 한다.' 정화술에서 시험술로 이어지는 분할에서도 다시 한 번 같은 맥락의 표현이 등장한다. 231c '모든 것을 다 피하기는 쉽지 않다.' 이 표현은 분할의 결과들이 폐기되지 않고 유지되거나 혹은 적어도 거짓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소피스테스에 대해 참인 진술들과 소피스테스에 대해 정의인 진술이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구분이 없다면 소피스테스에 대해 참인 진술과 정의인 진술이 같은 것으로서 정의에 실패한 이제까지의 분할들은 모두 거짓이 된다. 반면에 마찬가지로 구분이 없는 상태에서 이 진술들이 모두 참이라는 점에서 모두 정의라면 역시 소피스테스는 다섯 가지 서로 다른 기술자들로 나타나 정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낚시꾼의 경우에도 자신이 획득한 물고기를 자신이 먹을 수 있고, 혹은 직매술을 통해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다. 낚시꾼을 분할하는 과정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던 문제가 소피스테스에게서는 발생하고 있다. 이후의 논의에서 소피스테스의 기술을 논박술에서 나아가 모방술, 일종의 장난으로 다루면서 그 기술이 '모든 것들'에 관련한다는 점이 이러한 문제 발생의 원인으로 지적된다면 이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논박 자체가 모든 주제들을 다루는 것에 대해 논박을 통해 돈을 버는 것과 논박을 통해 젊은이를 사냥하는 것이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기 어려울 것이다. 후자의 기술들이 목표로 하는 바는 전자의 기술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전자의 기술 자체의 목표는 후자의 기술들과 별개이다. 모방술의 목적은 모방의 완전한 수행이다.
  여러 분할들은 그 출발점을 선정하는 데에 아무런 정당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매 결론마다 테아이테토스는 그것이 소피스테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 답하며, 손님은 이러한 답을 유도해내는 질문을 던진다. 낚시꾼에 대해 사람들이 지니는 인상은 낚시꾼이 행하는 활동으로부터 파생될 것이며 낚시꾼의 활동이 단순한 한에서 인상 역시 복잡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소피스테스의 경우에는 젊은이에 대한 사냥, 지식의 산매, 쟁론 등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지며 이것들 각각에 의존하는 여러 인상들이 사람들 사이에 생겨날 것이다. 원본과 모상, 둘 사이의 관계에서 다시 참과 거짓의 중첩된 구분을 고려할 경우, 유와 유의 활동들, 그리고 활동들에 대한 진술과 생각과 믿음들 사이의 단계적인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이 구분에서 출발점으로 선정될 수 있는 것은 피정의항인 유 자체일 수 없다. 또한 피정의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단순한 믿음도 정의에 활용될 수 없다. 반면 유의 일부로서 유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으면서 또한 믿음이나 진술이라는 모상의 원본이 될 수 있는 활동들, 이 활동들에 관련된 모상들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의 분류에서 분할이 반드시 획득이나 제작 중 어느 한쪽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다만 제작에 대한 정의와 이후 능력에 대한 논의에서 마찬가지로 만듦(작용)에 대한 정의를 고려해 볼 경우 대상에 직접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에서 분할 역시 제작의 하위분류로 간주할 여지가 있다. 분류는 전체를 부분들로 변화시키고 정화는 악들에 대해서는 소멸을, 악과 선의 혼합물에 대해서는 개선을 야기시킨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는 제작에 대한 정의가 악에 대해 긍정에서 부정으로 나아가는 배제의 방식과 다르다. 하지만 예를 들어 나무로부터 책상을 제작할 경우, 이전에 나무이던 것은 더 이상 나무가 아니게 된다. 오직 책상에 관점을 고정할 경우에만 책상 아니던 것이 책상이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모든 제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작과 분류의 관계보다 불분명한 지점은 오히려 능력의 차원에서 만듦에 대해 제시된 정의의 범위 안에서 획득이 구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획득의 대상도 획득이란 작용을 겪음으로써 변화된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제작에서의 변화와 획득에서의 변화를 구분할 기준이 필요하다. 

  덕(탁월함, arete)의 판매술(224d1-2)과 처벌술(κολαστική)의 관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교수술(διδασκαλική)의 하위분류로서 교육술(παιδεία), 다시 이것의 하위분류로서 훈계술(νουθετητική)와 짝을 이루는 시험술-혈통이 좋은 소피스테스술이 처벌술과 마찬가지로 정화술의 하위분류라 한다면, 무지의 제거가 아닌 지식의 전달로서 덕의 판매술과 짝을 이룰 또 다른 기술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덕을 전달하여 그 덕을 가지게끔 만들어주는 것과 악덕(영혼의 추함)을 제거해주는 것은 서로 다르다. 처벌술은 이를 테면 덕의 교육술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교수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교수술이 정화술의 하위분류로서 영혼의 무지에 대한 제거의 기능을 갖는 한, 교수술은 교육적인 것들(μαθήματα)을 넘겨주는 것(παραδιδόναι)과 다른, 이 넘겨줌에 앞서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수술이 기술교수술들(δημιουργικαὶ διδασκαλίαι)과 교육으로 나뉜다는 테아이테토스의 언급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무지(ἀγνοία) 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관련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무지는 단순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지는 잘못된 혹은 거짓인 믿음들이 올바른 혹은 참인 믿음들과 혼재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여타의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가 자부하는 '무지의 지'와 이를 관련시켜 본다면,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참인 믿음뿐만 아니라 거짓 믿음 역시 가지지 않으며, 그러한 한에서 교육받을 수 없게 된다.

  우선 손님과 테아이테토스가 정의를 위해 도입하는 분할이 있고, 그 분할의 내용으로 등장하는 분할이 있으며, 분할의 일종으로서 시험이 있다. 시험은 다시 무지에 대한 정화로서 소피스테스가 사람들에게 행하는 시험, 소피스테스의 시험에 맞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가 행하는 시험, 이 과정에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가 일원론, 다원론, 유물론, 형상론에 대해 행하는 시험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정의를 위한 분할은 분류일 뿐 정화가 아니다. 이 경우 같은 것을 같은 것과 나눌 때에 이 나눔의 기준이 무엇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 또한 소크라테스, 손님, 소피스테스 각각에 대해 진술될 수 있는 시험이라는 것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지 논의되어야 한다. 230d에서 제시되는 시험에 대한 정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역할뿐이다. 또한 그에 앞서 230b의 묘사를 보자면 시험은 상대의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일을 목표로 한다. 소크라테스, 손님, 소피스테스 공히 이러한 목표에 도달한다.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여럿이라고 말하게 되는 등의 결론은 세 경우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손님은 이 문제를 극복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더 나아갈 것을 제안하고, 실제로 더 나아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만, 소피스테스는 이 결론을 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또 다른 지점은 시험술이 누구의 기술인가 하는 것이다. 손님에 의해서, 그리고 손님이 가정하여 반박당하는 소피스테스의 입장을 통해서 모두 충족된다는 것이다. 이 논란에서 번역의 문제가 대두되는 부분은 231a9-b1이다. 여기에서 'οὐ'가 본동사를 수식하느냐 'σμικρῶν'을 수식하느냐가 문제이다. 후자의 경우 '충분히 주의할 경우, 사소하지 않은 규정들에 관하여 논박이 생겨날 것으로 생각한다.' 라는 번역이 이루어질 것이다. 반면 전자의 경우에는 '충분히 주의할 경우, 사소한 규정들에 관하여서 논박이 생겨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번역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번역을 반대하는 이들의 논거는 첫째로 문법상 'οὐ'가 가까운 'σμικρῶν' 대신 'οἴομαι'를 수식한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며, 다음으로 '사소한 규정들'의 의미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οὐ'의 위치를 고려할 때 전체 문장에 대한 부정의 의미로 번역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으며, '사소한 규정들' 못지 않게 '사소하지 않은 규정들'도 의미의 규명이 필요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시험에 대한 정의가 자기모순을 통한 무지의 입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 한에서, 이에 합치하는 활동이 문헌 내에 제시될 때에 개에 의한 시험이든 늑대에 의한 시험이든 그 차이는 중요치 않을 수 있다. 이는 227a-c까지 제시되는 손님의 발언과도 관련될 수 있다. 장군술과 이 잡기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실상 시험을 소크라테스에 고유한 것으로서 소피스테스에게는 적용 불가한 것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시험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테스 사이의 가치평가를 통해 이를 한쪽에 배타적으로 적용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과정에서 이 차이에 주목할 필요는 없다. 충분한 경계의 의미를 분할을 성립 가능케 하는 근거로서 중후반부의 변증술에 대한 이해와 결부지어 생각한다면, 사소한 규정들에서 논박이 일어나지 않는 과정 또한 설명 가능하다. 예를 들어 각각의 모든 것들을 to on이라 부를 때 to on 자체와 그 이외의 것들 사이의 차이는 명명의 기준이 to on이라는 점을 '충분히 경계'한다면 차치할 수 있다. 물론 to on이라는 것은 to on 자체에게만 고유한 본성일 뿐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겪음을 통해 나온 결과일 것이다. 이는 소피스테스와 시험술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소피스테스라는 유를 정의하기 위해 시험술의 정의는 불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의 구체적인 어떤 한 사람의 소피스테스가 다른 누군가에게 시험술을 적용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테아이테토스는 어쩌면 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테아이테토스가 개이거나 말이기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 소피스테스를 추적하면서 드러난 여섯 가지 모습들과 소피스테스라는 유 자체 사이의 관계는 이후 유들의 결합, 그리고 거짓 진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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