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 10장에서 대립관계를 다시 관계, 반대, 소유-결여, 긍정-부정의 네 가지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는 『자연학』에서 변화 및 운동이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변화를 생성 및 소멸과 구분하는데, 생성과 소멸의 경우 변화의 시작 혹은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는 『정치학』에서 왕정, 최선정, 혼합정 각각에 순서대로 그 타락한 형태로서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이 대립되어 놓인다고 주장한다. 또한 각각의 정체는 하나의 유로 하여 그 하위 종들이 구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사이에서 정체들 사이의 전환과 해체, 보존 등의 원인이 분석되고, 특히 타락된 형태의 정체들 각각은 자신의 고유한 특징이 극단화됨으로써도, 다른 한편 자신과 반대되는 정체를 원인으로 하여서도 해체될 수 있다고 이야기된다. 정체의 보존과 지속이 일종의 완성과 정지를, 반면 해체나 전환이 일종의 변화와 운동을 의미한다면, 변화의 운동의 조건으로서 반대관계가 각 정체들 사이에도 일관적으로 성립하리라 기대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범주론』에서 제시된 대립의 종류들, 그리고 반대관계와 반대항에 대한 설명이 정체들 각각과 그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관계가 성립하는 방식에 따라 최선정과 혼합정의 관계가 밝혀질 것이고, 전통적인 해석사의 문제 중 하나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이상적인 정체와 일종의 차선 정체인 현실적 정체의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것은 둘인지 혹은 하나인지, 그 시간상의 혹은 논리상의 선후관계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도 이러한 연구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蟲-

1. 상은 원본 아닌 것이면서 원본을 모방한 것이다. 이 상 중에서 모상은 실제로 닮아 있는 것이고 가상은 닮지 않았는데 닮아 보이는 것이다. 닮지도 않았는데 닮아 보인다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2. 모상은 원본의 비율을 그대로 따른 것, 가상은 원본의 비율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럴싸해 보이는 비율을 따른 것.


3. 그렇다면 가상은 원본과 어느 정도까지 단절될 수 있는가? 사과를 원본으로 하고, 코끼리나 삼각형을 가져다가 이름만 "사과"라고 붙이면 이것이 사과의 가상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과와 닮은 것을 제시하면, 이것은 앞선 규정에 따르면 모상이지 가상은 아니게 된다. 회화나 조각에서 가상의 제한조건이 비율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대한 규모의 조각상은 감상자와 가까운 아래쪽을 실제 비율보다 작게, 감사자에게서 먼 위쪽을 실제 비율보다 크게 만든다. 여기에서 상대적 비율을 크게 벗어나 가분수나 역삼각형에 가까운 것을 만들어내면 이는 더 이상 가상이라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말을 통해 만들어진 가상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경우 모순을 피하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 일종의 논리적 규칙을 따르는 것이 최소한의 조건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논리적 일관성과 정합성을 내적으로 갖춘 한에서, 전제가 거짓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거슬리는 사람을 다 죽여 버리는 것이 정의라고 말할 때, 거슬리니까 죽인다는 정도의 일관성이 있으면 정의가 실제로 무엇인지 전혀 모르더라도 이걸 정의의 가상으로 만들어 내세울 수 있을까? 

* "닮아 보인다"라는 것은 원본과 가상 사이에서 만족되는 조건인가, 아니면 가상과 수용자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것인가, 혹은 그 둘 모두가 어떤 식으로 결합되어 있는가?


4. 원본에 대해 완전하게 단적으로 무지하다면, 예를 들어 "정의"라는 말을 듣고 아무것도 연상하지 못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말해서 마치 외국인처럼 이 소리가 단어라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다면, 이에 대한 가상 제작도 이 가상을 모상으로나 더 나아가 원본으로 착각하는 기만도 양쪽 다 불가능할 것이다. 

* 여기에서 가상과 원본의 연결을 매개해주는 것으로 모상의 역할을 개입시켜야 하는지?

그러나 대중도 소피스트도 대상 자체나 앎과 관련된 적이 없거나 최소한 없을 수 있다. 문제는 소피스트가 기만하려는 상대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거나 아니면 모르더라도 모종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소피스트가 제작한 가상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우선 가상은 실제로 원본을 닮아 있진 않으며, 상대가 이 가상과는 다른 실제 대상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거나 이 가상과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 믿음(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게는 이 가상이 닮아 보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상이 가상이기 위해 닮아 보여야만 한다면, 이 닮아 보이게 된다는 상황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5. 가상에 의한 기만은 상대의 무지를 전제해야만 한다. 마지막 분할에 따르면 소피스트는 모순을 강제한다. 반면 전반적인 논의에서 소피스트는 이 모순을 강제받은 상대가 아니라, 전체 과정을 외부에서 지켜보는 감상자들에 의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논박 당하는 상대와 기만 당하는 상대가 단절되어 버린다. 단, 논박 당하는 상대가 기만 대상에 포함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일차적으로 직접적인 소피스트의 행위 대상은 논박 상대이고, 소피스트의 단일한 기술이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의 기술이 적용되는 대상은 바로 이 직접적인 상대여야 할 것이다. 그는 소피스트에 의해 모순에 빠지고, 이 모순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의견이 틀렸음을,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자임을 확인하게 된다. 반면 소피스트 자신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으며, 이를 알면서 조심스럽게 "아는 척"을 수행한다.

* 사기꾼 선동가와 확신범의 차이랄지. 


말에서 주어가 이어지는 서술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과 같이, 가상과 원본 사이의 관계에서도 모방의 범위가 제한된다고 볼 수 있을까? 참말은 모상, 거짓말은 가상, 말은 상. 이 경우 가상과 원본 사이의 관계에서 주어 역할을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참말은 사실과 닮은 것일 테고, 거짓말은 사실과 다른 것일 텐데, 거짓말이 사실과 닮아 "보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거짓말과 사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거짓말과 화자 그리고 청자 사이의 관계에서 나와야 하지 않나? 대강 뭐 이런 구도.


-蟲-

 

09-10

 

 

 

 

 

 

 

10-11

 

 

 

 

 

 

11-12

 

 

 

 

 

 

12-13

 

 

 

 

 

 

13-14

 

 

 

 

 

 

 

14-15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대학원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플라톤 

『소피스트』

강독 (예정)

 

 

15-16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대학원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플라톤 

『소피스트』

강독 (예정)

 

 

16-17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대학원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플라톤 

『소피스트』

강독 (예정)

 

 

17-18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비판문


18-19

 

언어철학-고유명

아리스토텔레스-의미론

대학원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19-20

 

언어철학-고유명

아리스토텔레스-의미론

대학원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강독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예정)

정암학당

 

 

20-21

 

언어철학-고유명

아리스토텔레스-의미론

대학원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예정)

정암학당

 

 

21-22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예정)

정암학당

 

 


1. DK 안티폰 강독 일정 미정.

2. 아리스토텔레스 『동물생성론』 강독 일정 미정.

3. 아리스토텔레스 『분석론 전서』 강독 일정 미정.

4. 플라톤 『소피스트』 강독,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 주말 진행 가능.

5. 5월 소논문 발표를 목표로. 플라톤 『소피스트』에서 자체적인 것과 관계적인 것의 문제, 플라톤 『테아이테토스』에서 전체와 전부와 원소와 구조, 플라톤 『파르메니데스』에서 전체와 부분과 하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자연학』, 『동물생성론』에서 마찬가지로 전체와 부분과 하나. 전체는 정의상 부분을 포함하는지, 전체 내에서 부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때 경계와 접촉과 연속 등의 개념, 단위로서의 하나와 수로서의 하나의 문제 등등.

6. 현대 영미 언어철학에서 고유명의 지시적 기능과 서술적 기능 중 어느 쪽에 플라톤의 초중기 이데아론이 적응 가능할는지, 그것은 후기 플라톤 형이상학과 언어철학에도 연속적으로 유효한지. 언어철학 맡으셨던 분 임용 성공하신 듯. 강상진 선생님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론이란 제목으로 수업 대체하실 예정이라는데, 갑자기 한 학기 아리스토텔레스가 몇 개가 된 거냐.

7. 2018-2: 9, 2019-1: 6, 2019-2: 6. 2020-1: 6. 5학기 째에 9학점 듣고 수료를 할지, 6학점 듣고 마지막 학기 등록금 좀 덜 내고 다닐지. 올해 안에 박사논문 주제 구체화하고(『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트』에서 자기술어화의 문제이긴 한데, 자체적인 것과 관계적인 것의 구도, 단일성과 복잡성의 구도 등을 어디에서 어떻게 논할지 등등), 관련해서 연구재단 연차보고서도 준비하고, 가능하면 올해 겨울에는 장기해외연수 지원 신청해 보자. 어디를 찔러 보나? 누가 날 받아주나?

8. IPS 지역 발표랑 『소피스트』 주제 발표 관련해서도 뭔가 찔러 볼 수 있을까나.

9.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수강생 나 포함 둘이던데, 남은 한 사람 고전어 할 줄 알면 강독식으로 진행하자 그래 볼까.


-蟲-

 

0900-0930


 

 

 

 

 

 

0930-1000

 


 

 

 

 

 

1000-1030

 

 

 

서양고대철학연습(005-205)

 

 

 

1030-1100

 

 

 

서양고대철학연습(005-205)

 

 

 

1100-1130

 

 

 

서양고대철학연습(005-205)

 

 

 

1130-1200

 

 

 

서양고대철학연습(005-205)

 

 


1200-1230

 

 

 

서양고대철학연습(005-205)

 

 

 

1230-1300

 

 

 

서양고대철학연습(005-205)

 

 

 

1300-1330

 

 

 

 

 

 

 

1330-1400

 

 

 

 

 

 

 

1400-1430

 

 

 

 

 


DK

1430-1500

 

 

 

 

 

 

DK

1500-1530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DK

1530-1600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DK

1600-1630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DK

1630-1700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DK

1700-1730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730-1800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800-1830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1830-1900

 

논리철학연습

(005-205)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1900-1930

 

논리철학연습

(005-205)

플라톤 

『소피스트』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1930-2000

 

논리철학연습

(005-205)

플라톤 

『소피스트』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2000-2030

 

논리철학연습

(005-205)

플라톤 

『소피스트』

 

 

 

2030-2100

 

논리철학연습

(005-205)

플라톤 

『소피스트』

 

 

 

2100-2130

 

논리철학연습

(005-205) 

플라톤 

『소피스트』

 

 

 

2130-2200

 

 

플라톤 

『소피스트』

 

 

 


1. 9월 말까지 학술발표논문 초안 및 콜로퀴움 준비.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트』 각 1편 목표.)

2. 9월 중 학술지 편집작업.

3. 10월 중 DB 정리작업 점검.

4. 『소피스트』, 『파르메니데스』 강독 시간 조정.

5. 연수지원계획 알아보기.


쳐자빠져 있기엔 돈도 시간도 그리 넉넉하질 못하잖냐. 정신차리자.


-蟲-

0. 무니츠랑 루드부쉬 제안은 외연이랑 내포 관련 카르납, 프레게 논의랑 다시 형상 관련 적용 논증 분석 이해하기 전에는 활용하기 어려울 듯. 정의에서의 부분과 실체에서의 부분 사이의 구분으로 접근할 경우 좀 더 접근성을 만들 수는 있지만, 최고류들 사이의 구분 문제와 상위류에서 하위류로의 분할 문제가 별개의 층위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문제제기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지 문제.


0. 무니츠랑 루드부쉬는 『소피스트』에서 분할의 방법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주제로 삼는 반면, 브라운은 분할의 결과로 나온 소피스트에 대한 일곱 가지 정의들이 긍정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굳이 두 주제가 연결되지 않음에도 억지스럽게 연결시킬 이유는 무엇인지? 혹은 그런 연결을 정당화할 방법이 있는지? 소피스트에 대한 앞선 여섯 가지 분할들은 소피스트에 우연하게 결합하는 참인 진술들, 반면 소피스트에 대한 마지막 분할을 그 유에 대한 온당한 정의라는 제안이 이전 yes-faction 제안과 다른 점은? 유나 형상을 그 자체로 간주한 분할과 참여를 통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간주한 분할이 정말로 분할 방법 자체에서 차이를 지니지 않는가?


0. 나는 『소피스트』에 함몰되어 있나? 잘 모르겠다. 


0. 플라톤의 철학이 철저하게 윤리적 기획이라는 기본적인 이해를 도무지 포기할 수 없다. 다만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당대의 도덕적, 윤리적 혼란에 맞서 도덕적 가치의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러한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의 이론철학적 작업들이 마치 기계적 필연에 대한 단순한 사실 관찰의 시도에 불과하게 되어 버리지 않나 싶은 것뿐이다. 


0. 이론과 실천의 연결, 더 강하게 말하자면 직결이 플라톤의 화두라면, 역으로 플라톤의 철학을 연구하는 자가 플라톤의 의도하는 방식의 실천적으로 옳고 나은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지능의 문제 아닌지. 이 경우 내가 다른 연구자와 삶의 태도에서 상충할 때, 내가 '틀렸거나' 아니면 다른 한 사람이 틀렸다고 봐야 하지 않는지. 나는 여전히 알아가고 또 고민하고 그런 과정에 있을 뿐이니, 내가 객관적 평가자 노릇을 할 수는 없다. 다만 나든 다른 사람이든 그가 제시하는 논증을 놓고 분석하고 재구성하고 평가할 수는 있다. 다시, 내가 완성형의 철학자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영생을 하며 끝없이 진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정당성 평가의 과정을 권위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생략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좁게는 학계, 넓게는 연구의 역사란 게 내겐 그런 의미이다. 물론 게으르고 멍청한 채로도 선하고 바르게 살 수 있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자가 반드시 지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해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악하고 그릇되고 비겁한 작자들 중, 적어도 아직까지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연구에서 감동 또는 좌절감을 줄 만큼 철저하고도 방대하고 또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은 작자는 본 적이 없다. 좀 기준을 낮춰서 말하자면, 나쁜 새끼 중에 꾸준히 공부하는 새끼를 본 적은 없다. 플라톤 철학에 대한 철학사 연구에 한정한 얘기고, 그것도 나한테 '니가 봤으면 뭘 얼마나 봤길래'라고 지적이 들어오면 할 말은 없다. 그냥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볼려고 애쓴 정도까지만 봤을 따름이니. 어쨌든 이 과정에서 내가 기대는 평가 기준으로서의 권위는 말 그대로 그 권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엄격할 것으로 기대된다. 더 많은 검증을 거친 더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된 더 집요한 평가를 거치고 살아남은 학적 결과물을 신뢰하는 편이 내겐 더 자연스럽다. 아쉽게도, 모두에게 열려있는 아름다운 철학 같은 건 믿지 않는다. 뭐 나 자신도 저 판에 낄 자격조차 못 갖춘 쓰레기라는 건, 당연히 인정하고. 권위에 권위를 실어주는 또 다른 권위 같은 순환논증이 되겠지만, 뭐 다른 수가 정말 있나? 난 착한 놈이 플라톤을 잘 하리란 기대도 못 하겠고, 멍청한 놈이 플라톤 식으로 착하리란 기대도 못 하겠단 것뿐이다. 꼭 잘 살아내고 싶지만, 나 자신이 멍청해서, 그렇게 못 살고 뒈질까봐 무척이나 두렵다는 뭐 그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0. 가끔 비겁한 놈이 되어 버렸나 고민한다. 여전히 앞서 연구자 선배로서, 내 스승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는 낮추지 않고 있다. 내가 믿는 내 나름의 잣대를 들이밀어 평가하고 실망하고 비판하고 비웃는다. 그래 놓고 나면 그 사람들 꽁무니를 물어 뜯겠다고 바둥거리며 달려드는 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알아서 까고 밟고 내동댕이를 쳐주곤 하였다. 좋은 배움의 기회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기회들이 주어지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그런 선배이자 스승의 역할을 자처할 용기는 내지를 못하겠고, 적어도 이젠 단순히 시간 기준으로 나보다 후발주자인 사람들을 상대로는 딱히 비판을 시도할 엄두도 내지를 못하겠다. 이건 엄밀하게 말하자면 내 잣대를 나 자신에게는 들이밀지 못하겠다는 것 아닐까? 물론 내가 재능이 일천하고 의지가 박약하니 단지 시간만 좀 더 많이 들였다는 걸로 뭘 대단히 더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더 알아야만 하는 것도 아닐 수야 있겠지만, 어쨌든 결국 더 많은 시간을 쓰긴 쓴 것이고, 의지가 박약한 건 내 기준으로 보자면 욕 먹어 마땅한 것이기도 하니, 내가 앞선 사람들에게 '댁들 그 시간 동안 뭐 했고 또 뭐 하고 있나'라고 따지듯 나도 똑같은 질문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한 거다. 그게 가능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 기준을 나한테 적용한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객관적 평가는 권위에 위임해 버렸고, 그 외에는 적당히 큰 사고 안 치고 흐름 따라 남들 사는 만큼 적당히 얌전하게 살면서, 떨궈져 나가지 않고 버티는 정도면 되는 걸까 아닐까 뭐 그런 거. 몸뚱이 건사하며 숨만 쉬고 살아 남기만 하려고 해도, 주기적으로 거듭해서 평가받고 심사받고 기준에 미달되면 도태되겠지. 뭐 쫓겨났을 때 체계니 구조니 남탓이나 하며 인정욕구 폭발해서 구라빨 세우며 싸돌아다니는 추태만 안 부리면 좋겠다. 근데 쫓겨나면, 더 살아서 뭘 할까나.


0. 공부는 어렵다. 하면 할수록 어렵다. 하필이면 이 공부가 왜 즐거운 걸까. 좆됐다.


-蟲-

0. 분할을 통해 나오는 것. a. 그 자체로(kath' hauto) 이야기되는 being. b. 어떤 것에 대해(pros allo) 이야기되는 being.

b-1. 유(genos, 형상-eidos) 차원에서 필연적으로 결합하는 부수적 술어 (e.g. The Being is the same) b-2. 가시적인 것들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우연적으로 결합하는 부수적인 술어 (e.g. Theaetetus is sitting)

분할은 유를 대상으로(b-1) 진행되지만, 소피스트라는 유에 대해서는 사냥, 장사, 쟁론, 교육 등 현실의 소피스트 개개인이 처한 상태(b-2)가 먼저 분할되어 나온다. 그러나 정의에는 a 차원이 필요하다. 문제! The Being, The Same, The Different 등과 달리 복합적인 유로서 낚시꾼, 소피스트 등도 그 자체로 이야기되는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0. 소피스트가 정의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기존 해석. 여기에서 적용되는 분할의 기술 자체가 불완전하다. Brown의 제안. 분할의 대상인 소피스트가 기술자가 아니다. + 무지한 자이며 거짓을 사용한다. 이를 테면, negative한 것은 정의되지 않는다. 소피스트는 negative하다. 소피스트는 정의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피스트는 negative하다. (순환오류?) 대화편 내에서 Not-Being의 형상이 발견되었고 그것의 본성(physis)이 무엇인지 규정되었다. 나아가 Not-Beautiful, Not-Just 등도 the Being으로 간주된다. 단지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정의되지 못한다는 것은 대화편의 서술에 부합하지 않는다.


0. 거짓을 만들어낼 줄 아는 그 앎과 거짓이 모상으로서 원본으로 삼는 바의 것 그 자체를 아는 앎은 같은 앎인가? 대상 자체를 아는 자가 그 대상의 거짓된 모상을 만들 경우. 원본의 비율을 닮은 모상과 비율을 왜곡하되 겉보기에만 원본과 닮아 보일 뿐인 모상. 본래의 비율과 '무관한' 모상을 만들어내는 경우, 즉 거짓 모상을 만들어내는 경우에 원본에 대한 앎은 기술 성립의 필요조건이 아닐 수 있다.


0. 소피스트가 젊은이를 사냥하거나 교육적인 것들을 매매하거나 쟁론하거나 상충하는 믿음들을 영혼으로부터 정화해내는 교육을 수행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으며, 때에 따라 소피스트에 대해 참되게 서술될 수 있다. 다만 소피스트가 소피스트인 한에서 그 자신의 기술로써 해내는 일로부터 내재적으로 도출되는 참인 술어들과는 구분된다. 낚시꾼의 경우에도 원칙적으로 같은 방식의 분할 '실패'가 발생할 수 있다. 낚시꾼도 잡은 물고기를 팔거나 물고기의 내장을 해체하거나 요리를 할 수도 있다. 다만 낚시꾼은 그 자신의 기술로 그러한 일들을 한다고 자부하거나 공언하지 않는다. 반면 소피스트는 자신의 기술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자기 자신의 기술로 '그 자체로' 이루어내는 일과 그 자신의 본질과 무관하게 부수적으로 우연히 이루어내는 일 사이의 구분 기준은 낚시꾼과 소피스트 양자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논의는 완결되지 않았다. 다만 그 자체로 서술되는 것과 다른 어떤 것에 관련하여 서술되는 것, 그리고 유에 대한 서술과 가시적인 것(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에 대한 서술의 구분이 사례로 제시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구분하는 방식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소피스트』에 한정하여 논해 보자면, 단순한 유와 복합적인 유와 가시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두 설명될 수는 없다. 테아이테토스는 마치 여러 유들의 복잡한 결합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테아이테토스는 유(단순하든 복합적이든)와 달리 시간 중에 변화하는 존재자이다. 이러한 존재자의 구성과 운동은 『티마이오스』의 논의를 거치기 이전에 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복합적인 유, 단순한 유와 시간 내의 존재자 사이의 복잡성을 지닌 듯한 그러한 중간자적 유에 대한 논의는 『필레보스』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구분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 그 자체와 무한한 하나들과 그 사이의 하나들.


0. 『고르기아스』에서의 요리와 화장은 『소피스트』 논의에 비추어 볼 때에도 기술일 수 없는가? 『소피스트』에서의 분할과 『정치가』에서의 분할은 어떻게 다른가? 철학자는 the being의 밝은 영역에서 눈부심으로 인해 분간하기 어렵고, 소피스트는 the not-being의 어두운 영역에서 그 어둠으로 인해 분간하기 어렵다. Brown은 이 구분을 근거로 소피스트 분할-정의를 실패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미 『소피스트』의 결론은 중립적인 소피스트술을, 철학자도 소피스트도 공유할 수 있는 종류의 중립적인 것으로서 제시하고 있지 않나?


-蟲-

0. 『테아이테토스』

앎의 후보로서 지각이 제시되었지만 전적으로 참(앎)이기만 하거나 전혀 말할 수 없게 되는 문제에 봉착한다. 감각을 통한 지각만으로는 영혼의 인식활동을 포함할 수 없으며, 이러한 영혼의 대상을 향한 접촉 없이는 있는 것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하다. 참인 믿음이 앎의 두 번째 후보로 제시된다. 앎=참인 믿음이라면, 앎과 믿음 전체의 관계는 어찌 되는가? 앎과 참인 믿음, 알지 못함과 거짓 믿음이 각기 동일하다면 믿음 중에서 거짓 믿음을 구분하여 말할 수 있는가? 어쨌든 거짓 믿음 문제가 제기되고, 이에 대한 탐구가 시도된다. 지각 논의에 한정하자면 거짓은 불가능해 보였다. (부분 없는 단순한 것에 대한 인지활동이 모두 겪는 문제 아닌가? 정말로 대상의 구조에 대한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인가?)

안다/알지 못한다 두 경우와 관련하여 착오를 통한 거짓 가능성 탐구 실패. 아는 것A와 아는 것B를 혼동하여 거짓을 믿는다면, (거짓을 믿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아는 둘 모두를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알지 못하는 것A와 알지 못하는 것B를 혼동할 수는 없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혼동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부분에서 "이상하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논증이 없는가? 확인 필요) 

안다/알지 못한다 두 경우를 통한 탐구에서 있다/있지 않다 두 경우를 통한 탐구로 이행. 있지 않은 것 그 자체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있지 않은 것 취급 가능성 배제. 거짓은 있는 것들 사이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소피스트』도 유사. 그러나 있지 않은 것도 독립적으로 취급 불가능하고 있는 것 역시 독립적으로 취급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론적으로는 있는 것들 사이에서 있는 것 그 자체와 다른 것을 토대로 삼아 있지 않은 것이 확보된다. 어떤 식으로도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러한 있지 않은 것은 배제되었다.)

믿음/믿지 않음 두 경우를 통한 거짓 가능성 탐구가 잠시 진행된다. 구도는 안다/알지 못한다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인다. 있다/있지 않다 경우가 다른 두 경우와 독립적이라면, 앎과 믿음은 단순한 논의의 반복으로 생각된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의 착오는 불가능하다/믿는 것과 (전혀) 믿지 않는 것 사이의 착오는 불가능하다. 알지 못하는 것과 믿지 않는 것과 있지 않는 것 셋 모두 일종의 인지 영역과 같은 것으로부터 배제된 대상을 논한다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인가? 있지 않은 것이 배제된다면, 같은 방식으로 알지 못하는 것과 믿지 않는 것도 함께 배제되는가?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일반적 상식이 지금 논의에서 개입될 수 있는가, 혹은 이 가능성도 거짓 가능성과 함께 부정되고 있는가? 7월 콜로퀴움 목표로.


0. 『파르메니데스』

"연습" 논증들 정리할 것. 

연습 이전 제논의 가정과 연습에서 파르메니데스의 가정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설명 필요. 연습 이전까지의 논의가 형상과 형상에 참여하는 것들, 혹은 형상들의 저 세계와 인간들의 이 세계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역설들인 반면, 연습 이후 논의는 형상들 자기 자신들 사이에서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인가? 정말로 그런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러한 논의 영역의 이행이 발생하는지 설명 필요.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제논의 가정에 관련하여 가시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는 논의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탄하였다고 말한다. 우선 이 번역 맞는지,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제한을 가하는 부분이 어디고 정확한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 강독 과정에서 추가 검토.


0. 『소피스트』

참의 종류가 구분되고 있는지. 있는 것들이 진짜로 있다. 실재성, 현실성, 구체성. 원본과 모상의 관계에서. 다른 한편 언어, 판단, 기타 영역에서 명제 차원의 거짓.

분할 문제. 낚시꾼 예행연습 분할은 낚시꾼의 정의에 성공한다. 반면 소피스트 분할은 여섯 차례 반복하여 서로 다른 규정들을 소피스트에 부여하게 되고, 형상 이론과 진술 분석을 거쳐 나온 거짓 가능성 증명 이후 비로소 마지막 분할이 소피스트의 정의에 이른다. 이 차이는 소피스트의 거짓 모상 제작 기술과 관련되는가? 아닐 듯. 소피스트가 사냥꾼이거나 장사꾼이거나 교육자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정치가나 철학자도 사냥꾼이거나 장사꾼이거나 교육자일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열려 있다. 낚시꾼도 물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 때에 한하여 장사꾼에 개입한다. 여전히, 낚시꾼이 장사꾼이라는 명제가 한편으로 참이고 다른 한편으로 거짓일 수 있다면 소피스트에 대해서도 한편으로 영혼을 정화하는 교육자라는 술어가 참되게 진술될 수 있고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는 이것이 거짓일 수 있다. 문제는 필연적으로 결합하는 술어들이 있는지,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우연히 결합하는 술어들과 관련하여 각 명제들의 진리치는 어떻게 처리되는지, 본질이나 정의에 해당하는 술어 없이 분할을 통한 정의 시도가 애초에 가능한지. 유나 형상은 단순한 한에서 그 자체의 본질과 그 외의 성질들을 구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소피스트라는 유라든지 혹은 테아이테토스와 같은 한 사람까지 갈 경우 정의에 필요한 기준점이 확보될 수 있을지? 내포와 외연의 적절한 결합 등을 제안하는 최근 논문이나 앞서 언급한 소피스트의 거짓 제작 기술 관련한 해석 시도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할 듯하다. 소피스트에 대한 마지막 분할 이외의 다른 모든 분할들은 정의에는 실패하나, 그것이 거짓 진술을 구성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피스트가 정의상, 혹은 본질적으로 사냥꾼이거나 교육자일 수는 없다. 그런데, 거짓 모상 제작자인 소피스트는 본질적으로 제작자일 수는 있는가? 좀 더 구체화. 6월 초까지 개괄 요약 시도. 정의, 분할, 양상.


-蟲-

1. 『테아이테토스』 St. pp.185-210 강독 준비. 

 1-1. 프로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두 입장의 상충 가능성. 만물유전을 전제한 인간척도설에서 거짓의 불가능성.

 1-2. 지각과 판단에서 대상의 수용방식과 대상의 구조. 대상의 직접 수용과 결합물로서의 대상.

 1-3. 거짓 판단과 전체-부분 논의의 연속성. 아는 자로서의 목격자와 참인 믿음을 가지지만 알지 못하는 재판장.

2. 『파르메니데스』 St. pp.135-166 강독 준비.

 2-1. 내용 구분 논의. 연구사 정리.

 2-2. St. p.132. 형상은 생각으로서 영혼 안에만 있는가? 형상은 영혼 안에만 존재할 수 있는 생각과는 다른 것인가?

 2-3. 색인작업.

3. R. M. Adams, Leibniz: Determinist, Theist, Idealist, 1994.

4. 『소피스트』 대상의 진리치와 진술의 진리치.

5. 서양고전학연구 가을호 8월 초까지 투고 준비. 『테아이테토스』 or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트』?


-蟲-


1. x의 본질이 F이라는 말은 x가 필연적으로 F라는 뜻이고 이는 다시 x이면서 F이지 않은 가능세계는 없다는 식으로 설명된다면, 본질과 양상과 가능세계론이 대강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자체로 본질에 따라 서술되는 경우를 대다수의 경우에 참인 서술이나 그 외의 경우들로부터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를 테면 명제론 같은 것을 고려하면,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종의 사고실험으로서 가능한 세계들과 같은 어떤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리라는 문헌 상의 정황을 생각하면, 다시 본질과 양상에 관련하여 가능세계의미론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관련성 혹은 대척점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다시, 어떤 것의 본질에 대한 서술과 관련하여 플라톤의 형상이론과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3인간 논변을 떠올릴 수 있겠고, 제3인간 논변을 포함 형상이론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개진되는 『파르메니데스』 편을 통해 플라톤 자신의 고유한 본질서술에 대한 이해를 추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해당 대화편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이론이 전개되지 않았다는 해석을 전제한다면, 이 필요하지만 찾을 수 없는 답변에 해당하는 다른 대화편으로서 『테아이테토스』 편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테아이테토스』 중심부 세 부분을 관통하는 주제를 앎과 의견(또는 믿음)의 구분 및 이를 위해 요청되는 거짓의 가능성 확보라 생각한다면, 앎의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속성과 의견의 거짓일 수 있음 혹은 개연적 또는 우연적으로 참이라는 속성 사이의 구분이 『파르메니데스』 에서 제기된 비판을 극복하고 형상이론을 수복하는 데에 필요한 작업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거짓의 가능성은 『소피스트』 편에서 적극적으로 논증된다. 거짓이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대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 영미 철학 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 그 자신과 연결지어 정리할 경우, 이 전체에 대비되는 플라톤의 진리론 혹은 양상론을 재구성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더해 형상의 자기술어화와 본질서술 그리고 거짓의 가능성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면 좋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찌 될지 나야 모르지.

2. 화요일 『테아이테토스』 강독, 이어서 형이상학(가능세계의미론과 이에 대한 비판적 흐름), 수요일 오전에 물리학의 철학, 끝나고 대전에서(...) 『파르메니데스』 강독, 금요일에 『테아이테토스』 수업. 지난 학기에 논문 쓴답시고 못 들어간 『파르메니데스』 수업도 그렇고, 내년에 있을 국제 플라톤 학회 주제가 『파르메니데스』 편인 것도 그렇고, 이번에 지도교수님께서 『테아이테토스』 강의 열어주신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판이 깔리는 느낌인데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 내가 챙겨먹어야 할 것을 챙겨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전히 변함없이 무너진 토굴에서 숨구멍을 찾는 느낌이다. 나아갈 길, 처럼 거창한 게 아니라 목숨부지하려면 반드시 찾아야 할 쥐구멍을 찾는 중이다. 주저앉아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많다. 이젠 정말 바지런을 떨 때다.

-蟲-

1.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지각, 참인 믿음, 설명을 가진 참인 믿음이 앎의 후보로 거론된다. 이 과정에서 거짓과 모상은 불가능한 것으로 귀결되며, 이에 따라 앎을 앎이 아닌 것들로부터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설명이 결여된 부분은 모상과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들이 앎과 어떻게 구분되고 또 어떻게 결부될 수 있는지 등이다. 『소피스트』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학설과 더불어 『테아이테토스』에서 거론되는 만물유전이라는 형이상학에 기초하는 지각인식론, 그리고 이러한 인식론의 반대짝인, 말하자면 형상인식론과 같은 입장을 근거로 하여 거짓 불가능성 논변이 재구성된다. 『국가』에서 대상과 인지상태의 구분에 따라 앎은 to on과, 무지는 to mē on과 결부되고 앎과 무지 사이의 믿음(의견, 판단)은 to on과 to mē on 사이의 무언가와 결부된다. 다시 『소피스트』에서 믿음은 말(logos)이나 이 말이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각(dianoia)의 끝에 나오는 긍정이나 부정으로 설명된다. 덧붙여 감각(aisthēsis)은 믿음과 섞여 나타남(인상 혹은 가상. 원문은 phainesthai.)을 만든다. 물론 여기에서 말과 생각은 앞서 『국가』에서 언급된 인지상태에 비추어 보면 믿음의 단계에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모든 to on은 각기 그 자체로 고유하게 내용을 갖추고 지시, 언급, 서술, 사유 가능한 것으로서 사실이다. 이러한 to on과 대비되어 상(eidо̄lon)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규정되지만 동시에 사실인 원본 to on의 비율을 따르는 모상과 따르지 않는 모상이라는 하위분류를 가진다. 이 하위분류에 따라 모상(eikо̄n)과 허상(phantasma)이 제시되고 이 둘에 각기 성질로서 참과 거짓이 순서대로 분배된다는 것이 내 해석이다. 문제는 나타남과 모상과 허상이 문헌 상에서 혼용되고 있다는 점이고, 거짓이 먼저 가능한 다음 비로소 상이 가능하다는 서술도 내 해석과 상충된다. 그러나 사실과 대비되는 상 일반에 대해 이 대비를 근거로 서술하게 되는 거짓이란 술어와 상의 분류 내에서 원본과의 일치 혹은 불일치에 따라 서술되는 참과 거짓이라는 술어는 진리치가 존재 차원에서 규정되는 경우와 인식 혹은 서술 차원에서 규정되는 경우의 구분을 시사한다. 이러한 구분에 따라 위의 혼용과 애매성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에 따라 거짓 믿음의 대상은 존재 차원에서 그 자체로 거짓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상의 차원에서 원본이 되는 사태를 기준으로 일치 여부에 따라 이야기될 수 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식이 아니라 그 대상을 어떤 식으로 모사하여 영혼 안으로 옮겨놓는 것, 대상에 대한 상을 갖는 것이 인식상태 일반에 대한 설명일 수 있을 것이다. 『테아이테토스』에서 제시되는 앎의 후보들과 이로부터 도출되는 거짓 불가능성의 역설이 이상의 『소피스트』 해석을 통해 분석될 수 있다면 두 대화편에 대한 하나의 통합적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앎의 후보로 지각이 거론된 부분에서 상대주의는 무오류주의를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해석에 따라 지각인식론에서 무오류주의로 귀결되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앎의 정의를 위해 앎과 구분되는 믿음에 대한 규정이 요청되는 상황에서 두 인지적 상태 사이의 구분에 양상의 문제가 개입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참인 믿음만을 고려하면 앎은 '필연적으로 참인 믿음'을 포함할 필요가 없다. 우연히 참인 명제들을 믿어도 앎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단순히 참인 명제에 대한 수용여부만이 문제라면 특정 대상의 본질 규정에 대한 참인 믿음과 부수적 혹은 우연적 속성에 대한 참인 믿음은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양상에 따라 앎과 믿음이 구분된다면, 앎은 엄격한 기준에 따라 강하게 제한된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을 때, 나는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아는가' 아니면 그것을 '옳게 믿는가' 문제. to on과 to mē on의 결합가능성과 관련하여 『파르메니데스』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어떻게 재해석하느냐에 따라, 이에 대한 대답들로서 『테아이테토스』와 『소피스트』에 대한 해석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일단 당장은 『테아이테토스』에서 거짓의 문제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검토부터.

2. 돈이 없다. 먹고 죽을래도 없다. 내 돈 어딨냐. 연구실 동료분께 일자리 주선을 부탁드리긴 했는데 어찌 될지 상황을 봐야 하겠고, 이 일을 따더라도 대학원 강의 세 개 수강하고 강독 최소 두 개 돌리면서 편집간사 일까지 병행해서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지도 솔직히 자신은 없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막무가내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가. 유학을 가고 싶기는 한데, 일단은 내 생각이 어디까지 구체화될 수 있는지 지켜보고, 관련해서 어떤 인간들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지도 더 알아보고, 너무 늦지 않게 결단을 내려야지. 뭐 내가 결심한다고 만사 해결되는 것도 아니긴 하겠다만.

3.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이랑 이번에 수강하는 물리학의 철학에서 공간개념 관련한 부분, 제논 얘기로 엮어서 뭔가 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적(인지적? 사유적?) 질료와 에우클레이데스 공간과 또 뭐 뭐. 그것의 분할은 무한하게 가능한지, 최소단위의 상정이 불가피한지, 두 경우 모두에서 모순으로 귀결되는지(제논?), 이것이 잠재적 분할과 현실적 분할 사이의 구분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지, 이건 강의 듣다가 재민형님께 여쭤봐도 되겠는데 잘 모르겠네. 그러고보니 『테아이테토스』는 강성훈 선생님께서 강의하시고 역자인 정준영 선생님까지 두 분 다 월요일마다 학당에 계시고, 『파르메니데스』든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사상 수용이든 김주일 선생님께 여쭤볼 수도 있겠고, 아, 정암은 사랑입니다. 그러니 님들아, 후원 좀.

-蟲-

1. 나는 존재사와 계사 구분에 관련하여서는 칸과 브라운의 입장에 동의한다. 『범주론』과 『명제론』에서 "Socrates is sick"으로부터 "Socrates is" 추론과 "Homer is a poet"으로부터 "Homer is" 추론의 참과 거짓이 달라지는 이유는 영미전통의 be 동사 의미구분을 통해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그것은 플라톤에게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관심사가 아니다.

2. "(a) poet"과 "sick"이 서로 다르며 being a poet과 being sick는 범주로도 다를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교양 있음'에 해당되는지 아니면 '동물'과 같은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을 것으로 보이는데, 만일 전자라면 이로부터 being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종의 유개념으로 간주하면 그것은 주어 '안에 있는 것'일 수 없고 다만 주어에 대해 말해지기만 할 것이다. 반면 scik은 주어 안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구분으로도 둘 사이의 진리치가 갈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3. 논문의 주장은 큰 틀에서 내 생각과 달리 가는 것 같지 않은데, 다만 여기에서 be 동사를 비정언적 존재개념, 따라서 조건부로 있는 것(예를 들어 살아'있다'랄지)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것은 아예 계사 중심으로 놓고 그 자체로 이야기되는 경우와 부수적으로 이야기되는 경우 둘 각각의 다시금 구분되는 경우의 수들 중에 배분하여 넣으면 마찬가지 문제가 같은 정도로 해결되지 않을까 싶다.

4. 소크라테스나 호메로스를 주어로 잡을 때, 주어의 어떤 측면을 중심에 두고 이에 대해 어떤 범주에서 서술하고자 하는지의 구분과 관련하여 be 동사의 의미구분은 그닥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 논의를 통해 be 동사의 단일한 의미의 가능한 후보 중 어느 쪽을 더욱 지지하게 되는지에 대한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5. Kahn, Owen, Brown 등이 보충어가 생략된 is 문장의 가능한 해석에 대해 다양한 논의들을 하였는데, 이를 끌어들여 논하더라도 역시 완전용법과 불완전용법의 연속성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될 뿐 아닐까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읽고 싶다.

-蟲-

 

09-10

 

 

 

 

 

 

 

10-11

 

 

물리학의 철학 대학원

 

 

 

 

11-12

 

 

물리학의 철학 대학원

 

 

 

 

12-13

 

 

물리학의 철학 대학원

 

 

 

 

13-14

 

 

 

 

 

 

 

14-15

 

『테아이테토스』 강독(예정)

 


서양고대철학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대학원

 

 

15-16

 

『테아이테토스』 강독(예정)

 

 서양고대철학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대학원

 

 

16-17

 

『테아이테토스』 강독(예정)

 

 서양고대철학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대학원

 

 

17-18

 

 

 

 

 

 

 

18-19

 

형이상학연구 대학원

 

 


 

 

19-20

 

형이상학연구 대학원

 

 

 

20-21

 

형이상학연구 대학원

 

 

 

21-22

 

 

 

 

 


강독: DK 미정

-蟲-

1. 『소피스트』 강독 8월 재개. 『필레보스』 강독 정상 진행. 『테아이테토스』 강독 7월 시작. 

   논문 중앙도서관 제출 전 수정 작업 7월 말까지.

   유학? 수료 후? 옥스포드의 루카씨도 제네바의 크레빌리씨도 오하이오의 실버만씨도 모두 안녕들 하신지요? 여러분들께서는 플라톤의 진리론과 논리적 규칙들에 대한 체계화 작업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노스와 스토아와 에피쿠로스와 아카데미아 회의주의라는 여러 갈래로 분기하는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논리학에 대한 직관과 통찰은 문헌근거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흐름 안에서 형상의 자기술어화는 해명되고 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는지요?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 하나씩 불러보면 멀리 북간도에서 아싸삐리뽕. 닝기미니주가리씨빠빠 어디의 누구한테 뭘 하러 왜 가야 하는지가 나와야 가든지 말든지 하겠으나, 그런 게 나온다고 내가 그냥 막 그냥 아주 그냥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기난장맞을 거. 사는 내내 스스로 또 남들을 통해 검증받고 검토받고 시험당하지 않고는 이 삶이 정말로 살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의심을 도무지 떨칠 수가 없을 것 같고, 다만 바라는 거라곤 그것뿐이라 또 막상 뭐 그리 대단하게 두렵거나 불안할 것도 없고 마음이 조급해질 건덕지도 없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만, 모르겠네. 허접찌끄래기개쓰레기마냥 나뒹굴다 어디 나자빠져 뒈지기밖에 더 하겠나.

2. 여전히 울분에 가득 차 있건만 이젠 차마 면목이 없고 더 팔아먹을 쪽조차 남질 않아서 타고 남은 쭉정이마냥 허부적거리기만 한다. 여전히,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공감이 가질 않고 화가 날 따름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게으르고 또 부끄러움을 모르면서도 허영과 자만을 이 악물고 붙들고 늘어지며 놓지 않을 수가 있는가. 누군가는 외롭게 늙으면 다들 그런다고도 하더만, 글쎄, 젊거나 어리다고 뭐 딱히 대단하게 다를 것도 없지 않나. 남의 생각을 차분히 이해할 노력도 하기 싫고 제 생각을 차근차근 면밀히 따지고 쌓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려는 노력 또한 하기 싫은 거라면 대체 왜 학문씩이나 한답시고 개꼬장을 피워대는 건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안했으며 이 혐오와 좌절과 간절함 같은 것이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마저 가졌더랬다. 그러나 갈수록 모르겠는 거다. 애초에 생각하는 일 자체가 귀찮은 족속들에게, 실로 생각할 능력이 돼먹질 못한 시정잡배개쓰레기시궁창버러지 따위인 나란 새끼는 지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새끼로 보일 텐데, 니나내나 도긴개긴인 마당에 악다구니쓰며 지랄쌩쇼에 매진하는 내가 또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결과만 놓고 보자면 다 마찬가지일 테니, 있는 대가릴 굴리지 않는 새끼들과 없는 대가릴 굴리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내가 다 함께 어우러져 씹창을 낼 따름이랄까. 무슨 말을 더 하겠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외줄 타는 난장이를 뛰어넘었다가 능지처참을 당하려나. 

3. 어떤 팟캐스트에서 에우다이모니아를 갖고 개소리를 한다. 개소리를 하긴 하는데, 그냥 단어 번역이 개판이란 것이고 어쨌든 고대에는 행복이 객관적인 어떤 것이었다더라, 그런데 요즘은 주관적인 만족 같은 뭐 그런 거더라, 그런데 행복에 지표를 두고 조사를 돌려 국가간에 순위를 매기더라, 뭐 그러고 넘어가더라. 그깟 거 틀려 봤자 별 상관 없는 거다. 그냥 잔가지, 곁가지, 없어도 되는 말. 덕윤리니 객관적 목록이론이니 논문거리야 많겠다만, 저 방송에서 하려던 말이 그건 아니었던 거고, 그냥 듣고 있자니 허망해지더라. 통계가 있고 항목이 있고 조사의 대상과 방법으로부터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어떤 왜곡이 있고 또 그 안에서 도출되어 나오는 함의가 있고, 그런 이야기들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을 물고 뜯는 작업이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그림이랄까, 각이랄까, 뭐 와꾸랄까 그런 게 잘 안 나오는 것 같고. 진즉부터 철학이란 게 아예 없더라도 그래서 세상이 망하거나 인류가 멸종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으리라고 생각은 해 왔지만, 글쎄. 

4. 만일 좋음과 훌륭함과 정의에는 형상이 있는데 인간과 소에는 있는지 잘 모르겠고 먼지와 구더기와 똥오줌에는 없을 거라면, 하나 그 자체와 하나인 좋음과 하나인 인간과 하나인 구더기와 여기 있는 이 한 사람과 저기 있는 저 한 마리 구더기의 이 모든 하나들이 다 같은 하나이지도 전혀 다른 하나들이지도 않다고 해야만 한다면, 그래서 어떤 무엇이 정말로 그러한 것인지 알 수 없고 무엇이 어떠하지 않은데도 그러하다 말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면, 참과 앎은 어떻게 가능하고 거짓과 기만은 또 어떻게 가능하며 참과 거짓이 언제나 한결같은 경우와 때에 따라 이리저리 뒤섞이는 경우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지, 『파르메니데스』에서 『테아이테토스』와 『소피스트』로 하나의 문제에 대한 두 방향의 대답이 주어지고 있다는 그림을 그려 보고 싶고 이미 그게 그런 그림이라고 말하는 대단하신 노친네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긴 한데, 모르겠네. 그걸 왜 하나, 하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생기고 그걸 하면 뭐가 어떻게 나아지나, 그 얘기를 하는 게 나 하난가 아님 벌써 철 지난 옛 유행에 지나지 않는가, 잘 모르겠으니 읽어볼 수밖에.

5. 고대철학 하나, 현대영미형이상학 하나, 나머지 하나는 뭘 들어야 하려나. 강의 세 개에 강독 세 개, 아니, 네 갠가. 뭐 하나는 해 놓은 거 다시 보는 거고, 다른 하나는 남이 한 거 훑으면서 따라가는 거고, 또 다른 하나도 남이 하는 거 따라가면서 얘기 듣는 거고, 그렇게 치면 크게 무리랄 것도 없긴 하겠다만. 라틴어는 언제 다시 읽나. 관심분야에 한정해서 읽으려면 단편들만 수두룩 빽빽인가, 아니, 뭐 보에티우스 읽을까? 문법이랑 독해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끼께로님 뵙고 싶긴 한데, 모르겠네. 

-蟲-

좌측 링크해 놓은 사이트들 중 'SOVIDENCE.' 블로그를 오랜만에 들어가 글 몇 편을 보았는데 일단 찾고 있던 어떤 그림을 찾은 느낌이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여러 분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느꼈다. 여하간에, 저 블로그에서 몇 편의 글을 읽고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결국 이 나라 이 사회에서 여성들은 무슨 중뿔난 해법이 국가 차원에서 등장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경력을 단절시키는 가장 큰 벽이라 할 만한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여성들의 성취를 억누르고 덮고 가렸던 유리벽 틈새로 이제 포화 상태인 그들의 능력이 비집고 나와 드러나게 될 것이고, 이미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사회의 반수 가까운 경쟁자들을 사회의 암묵적 지원 덕택에 무시할 수 있었던 남성들은 점차로 본래의 정상적인 경쟁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고, 적당히 도태되거나 심하면 대다수가 뒤쳐질 것이다. 결국 성과와 실적이 기준이 되어 가면서 여성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걸맞고 합당한 지위를 찾아가게 될 것이고, 그 '집단'은 견고해질 것이고, 여혐종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차별적 행동과 어휘를 수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속시키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부 돌출되는 사건들을 방지할 제도의 마련이 시급하지만, 그것은 촉매 역할을 할 뿐 대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구는 감소할 테고 노령화는 심해질 테고 실업율이 올라갈 텐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을 억압하겠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유슬림 국가를 선포하는 꼴이고, 실현 가능성도 없다. 일부(뭐 다수라고 해도 되겠지만) 남성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여성혐오 같은 게 없다고 억지를 부리는 이유를 이해하기 좀 어려웠는데, 결국 위기의식이 표출된 것이었나 싶기도 하고. 대학에 입학하고서 대학원에 있는 지금까지 여성 상급자(명예남성 말고)의 적극적 활동들을 경험해 온 것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구나 싶고 그러한 여성 동료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그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데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 그들의 능력이나 성취를 과소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내 생존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저러나 철학이란 참 무력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고, 낄낄. 한 개인으로서 걱정스러운 것은 결국 거스를 수 없는 이 변화의 과정에서 끔찍하고 흉악한 사건들이 더 많이 발생할 것 같다는 점인데, 조현병 환자 관리 강화 따위가 대책이라고 내놓는 나라에서 그걸 막아줄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냥 이 문제를 이 모임 저 모임에서 의도적으로 거론하고, 작은 규모의 분위기를 자꾸자꾸 만들어내는 정도의 일을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 그 외에 뭔가를 더 해야 하는지, 아님 그냥 여태껏 그래 왔듯 닥치고 숨어서 다가올 경쟁의 츠나미에서 각자도생의 길이나 모색하는 게 맞는 일인지, 결국 또 모르겠네. 링크 걸어 놓은 블로그들에 좋은 글들 많으니 이 쓰잘데기 없고 어두컴컴한 블로그에 오신 분들께서는 한 번 둘러 보시는 걸 추천드린다. -蟲-

Michael Frede, ´Prädication und Existenzaussage Platons Gebrauch von "... ist ..." und "... ist nicht ..." im Sophistes´, 1967, S.12-37.

II. Zwei Verwendungen von "...ist" 
   Eine Interpretation von 255C12-13

III. Die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1. Die Bedeutung der Unterscheidung
 2.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3.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und Selbstprädikation
 4. Die zweite Verwendung von "... ist ..."
 5. Eine Unterscheidung von Formen und Einzeldingen mit Hilfe der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II. Zwei Verwendungen von "...ist" 
   Eine Interpretation von 255C12-13

  Wenden wir uns also zuerst der Stelle im Sophistes zu, die am ehesten einen Anhaltspunkt dafür bietet, daß Platon das kopulative vom existentiellen "... ist" unterscheidet: 255c12-13
  255c8-255e1 wird gezeigt, daß "das Seiende" und das "Verschiedene" nicht zwei Ausdrücke für das Seiende sind. Das Merkmal des Verschiedenen, an dem sein Unterschied zum Seienden deutlich werden soll, wird in diesem Abschnitt zweimal formuliert:
(1) (255d6-7) "Was immer auch verschieden ist, das ist genau das, was es ist (nämlich verschieden), notwendig von einem anderen".
(2). "τὸ δέ γ᾿ ἕτερον ἀεὶ πρὸς ἕτερον (sc. λέγεσθαι)" (255d1).
우리는 우선 플라톤이 계사 "... is" 와 존재사 "... is" 를 구분한다는 상당한 암시를 주는 『소피스트』 의 해당 장 255c12-13 으로 향한다. 
  255c8-255e1 은 "The Being" 과 "The Different" 가 The Being 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이 아님을 보여준다. The Being 에 대해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The Different 의 특징은 이 구절에서 두 차례 공식화된다.
(1) (255d6-7) "언제나 다른 것, 그것은 어떤 그 외의 것에 대해 바로 그것인 바의 (즉 다른) 것이어야 한다.
(2) "다른 것은 언제나 다른 것에 대해 (진술된다)" (255d1).
(2) läßt wenigstens drei Übersetzungen zu, je nachdem, ob man "τὸ ... ἕτερον" a) auf den Ausdruck "ἕτερον", b) die Form des Verschiedenen oder schließlich c) das, was an der Form des Verschiedenen teilhat, bezieht.:
 (a) "`verschieden` wird immer in bezug auf ein anderes ausgesagt"
 (b) "das Verschiedene wird immer in bezug auf ein anderes ausgesagt"
 (c) "das Verschiedene wird immer in bezug auf ein anderes so (d. h. `verschieden`) genannt".
(Ich folge dem platonischen Sprachgebrauch und verwende aus Gründen, die später deutlich werden, "das X" sowohl für die Form X als auch die Dinge, die an dieser Form teilhaben.)
(2) 는 "τὸ ... ἕτερον" 이 a) "ἕτερον" 이란 표현을 지시하는 것인지, b) The Different 라는 형상을 지시하는 것인지 혹은 끝으로 c) The Different 라는 형상을 나눠 갖는 것, 그것을 지시하는 것인지에 따라, 적어도 세 가지 번역을 허용한다.
  (a) "'different' 라는 말은 언제나 그 외의 것에 관련하여 진술된다."
  (b) "The Different 라는 것은 언제나 그 외의 것에 관련하여 진술된다."
  (c) "The Different 라는 것은 언제나 그 외의 것에 관련하여 그렇게(즉 'different' 라고) 불린다."
(나는 플라톤의 화법에 따르고 이후에 분명해질 이유에 따라, "The X" 를 형상 X 만이 아니라 이 형상을 나눠 갖는 사물들에 대해서도 사용한다.)
-13- Ich möchte mich jetzt für keine der Übersetzungen (a)-(c) entscheiden, da die Übersetzung von 255d1 von der Übersetzung von 255c12-13 abhängt. Vielmehr will ich versuchen, 255d1-7 zunächst unabhängig von 255c12-13 zu interpretieren.
  Alle drei Versionen von (2) haben eines gegenüber (1) gemein: während in (1) von dem Begriff der Verschiedenheit die Rede ist, bezieht (2) auf die Verwendung von Prädikaten mit der Bedeutung von "... ist verschieden von ...". Übersetzungen wie "... das Verschiedene ist immer verschieden in bezug auf etwas anderes ..." sind also in jedem Fall nicht scharf genug.
  나는 번역 (a)-(c) 중 어느 것도 확정하지 않을 것이다. 255d1 에 대한 번역은 255c12-13 에 대한 번역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255c12-13 에 번역을 의존하지 않는 255d1-7 을 검토할 것이다.
  (2) 의 세 형식들 모두 (1) 에 반하여 공통점을 가진다. (1) 에서 논의는 Difference 개념에 대한 것인 반면, (2) 는 "... is different from ..." 의 의미를 가진 서술의 용법에 관련된다. "... The Different 는 언제나 그 외의 어떤 것과 관련하여 다르다 ..." 와 같은 번역은 각 경우에 충분히 분명치 못하다.
  
  Dieser Wechsel in der Redeweise von (1) zu (2) braucht uns freilich nicht zu stören; er findet sich häufig genug bei Platon. Ein besonders klares Beispiel dafür ist Soph. 258b2-4, wo vom Nichtseienden gesagt wird: "οὐδὲν ἧττον, ..., αὐτοῦ τοῦ ὄντος οὐσία ἐστίν, οὐκ ἐναντίον είνἐκῳ σημαίνουσα ἀλλὰ τοσοῦτον μόνον, ἕτερον ἐκεινου."
  Ein Problem wird aus diesem Wechsel im Ausdruck erst bei Aristoteles in der Kategorienschrift, 8a31-35. Und Boethus, der annimmt, daß von Platon die Relativa folgendermaßen bestimmt werden : "ὅσα αὐτὰ ἅπερ ἐστιν ἑτέρων λέγεται", zieht sich die folgende Kritik des Simplicius zu (in Cat. 159, 14-15; 159, 20-22) : "ἐν Σοφιστῇ δὲ βουληθεὶς τὸ ἕτερον τῶν πρός τι ὂν ἐπιδεῖξαι οὕτως φησίν. ὅτιπερ ἂ ἕτερον ᾐ, συμβέβηκεν ἐξ ἀνάγκης ἑτέρου τοῦτο αὐτὸ ὅπερ ἐστὶν εἶναι" (vgl. auch: Ammonius in Cat. 70. 10-14; Philoponus in Cat. 109, 23ff.).
  Wir werden also in jedem Fall zweckmäßig verfahren, wenn wir uns für die Interpretation von 255d1-7 an die Art der Formulierung von 255d1 halten. Denn alle relativa secundum esse sind auch relativa secundum dici, aber nicht umgekehrt alle relativa secundum dici auch relativa secundum esse.
  Wenn wir bisher auch noch nicht in der Lage sind, (2) zu übersetzen, so können wir doch auf Grund von (1) und (2) sagen, daß für das Verschiedene folgendes gilt :
  독해방식에서 (1) 에서 (2) 로의 이런 변형이 확실히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그것은 플라톤에게서 충분히 자주 발견된다. 그에 대한 특히 분명한 예시는 『소피스트』 258b2-4 이다. 거기에서는 Not Being 에 대해 진술된다. "Being 그 자체에 조금도 못지 않게 Being 이다, 저것에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만큼만을, 저것과 다름을 의미할 뿐이기에."
  표현의 이러한 변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8a31-35 에서 처음 문제시된다. 그리고 보에티우스는 플라톤에 의해 상대적인 것들이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고 받아들인다. "그것들이 다른 것들에 속한다고 진술되는 모든 것들", 이는 심플리키우스의 다음과 같은 비판을 이끌어낸다 (『범주론』 159, 14-15; 159, 20-22) : "『소피스트』 에서 그는 The Different 가 무언가에 대한 것들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기대하며 그런 식으로 말한다. 다를 바의 바로 그것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 다름에 속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암모니우스 『범주론』 70, 10-14, 필로포누스 『범주론』 109, 23 이하 참조).
  그리하여 우리는 255d1-7 의 해석을 위해 255d1 의 정식화 방식에 머무를 때에 각 경우 적절하게 진행하게 된다. 모든 존재에 따라 상대적인 것들은 또한 진술에 따라 상대적인 것들이지만, 역으로 모든 진술에 따라 상대적인 것들이 또한 존재에 따라 상대적인 것들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2) 를 여전히 번역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우리는 (1) 과 (2) 를 근거로 the Diffrent 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주된다고 말할 수 있다.
  (I) Wenn von einem Gegenstand a wahrheitsgemäß gesagt wird, daß er verschieden ist, dann ist immer folgende Bedingung erfüllt :
es gibt einen Gegenstand b, derart, daß in bezug auf b von a ausgesagt wird, daß es verschieden ist, und b ein von a verschiedener Gegenstand ist.
  Die Tatsache, daß die Wahrheit eines Satzes von der Form "x ist verschieden von y" immer die Erfüllung dieser Bedingung voraussetzt, liegt nach 255d4-6 daran, daß das verschiedene nur an einer der beiden Formen teilhat, von denen dort die Rede ist.
  An der gleichen Form hat nach 255d4-5 auch das Seiende teil, ohne daß die Wahrheit von "a ist" immer die Erfüllung dieser Bedingung verlangte; denn nach 255d5 zeigt sich das Bestehen eines Unterschiedes zwischen dem Seienden und dem Verschiedenen gerade darin, -14- daß, wenn das Seiende und das Verschiedene dasselbe wären, der Gebrauch von "... ist verschieden von ..." in einem wahren Satz nicht immer die Erfüllung dieser Bedingung voraussetzte.
  (I) 대상 a 에 대해, 그것이 다르다는 것이 참으로 진술되는 경우, 다음의 조건이 충족된다.
b 에 관련하여 a 가 다르다는 것이 a 에 대해 진술되는, 그리고 b 가 a 와 다른 대상인, 그런 대상 b 가 존재한다.
  "x is different from y" 형식 문장의 참이 언제나 이런 조건의 충족을 요청한다는 사실은, 255d4-6 에 따라 성립한다. 다른 것은 두 형상들 중 하나의 몫만 나눠 갖는다는 독해가 이에 관한 것이다.
  255d4-5 에서 The Being 이 같은 형상을 나누어 가지는데, "a is" 의 참이 언제나 위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점 없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255d5에서 The Being 과 The Different 사이의 구분 성립은, The Being 과 The Different 가 그 자체로 존재할 경우, 참인 문장에서 "... is different from ..." 의 사용이 항상 이 조건의 충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직접 근거하기 때문이다.
  (II) Wenn von einem Gegenstand a wahrheitsgemäß gesagt wird, daß er ist, dann ist in einigen Fällen folgende Bedingung erfüllt :
es gibt einen Gegenstand b, derart, daß in bezug auf b von a ausgesagt wird, daß es ist, und b ein von a verschiedener Gegenstand ist.
  (II) 대상 a 에 대해 it is 가 참으로 진술되는 경우, 몇몇 경우에 다음 조건이 충족된다.
b 와 관련하여 a is 가 a 에 대해 진술되는, 그리고 b 가 a 와 다른 대상인, 그런 대상 b 가 존재한다.
  (III) Wenn von einem Gegenstand a wahrheitsgemäß gesagt wird, daß er ist, dann ist in einigen Fällen folgende Bedingung nicht erfüllt : 
es gibt einen Gegenstand b, derart, daß in bezug auf b von a ausgesagt wird, daß es ist, und b ein von a verschiedener Gegenstand ist. 
  (III) 대상 a 에 대하여 it is 가 참으로 진술되는 경우, 몇몇 경우에 다음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b 와 관련하여 a is 가 a 에 대해 진술되는, 그리고 b 가 a 와 다른 대상인, 그런 대상 b 가 존재한다.
  Dagegen gilt der (III) entsprechende Satz für das Verschiedene nicht, weil das Verschiedene nur an einer der beiden Formen teilhat, die 255d4 erwähnt werden, und eben darin zeigt sich der Unterschied zwischen dem Seienden und dem Verschiedenen.
  Schwierigkeiten ergeben sich nun bei der Interpretation von (III). Welchen Gebrauch von "... ist" hat Platon im Auge, der nicht sowohl eine Ergänzung verlangt als auch voraussetzt, daß die Gegenstände, die der Ergänzung und dem Subjekt zugeordnet sind, numerisch verschieden sind?
  Dieses Problem löste sich leicht auf, wenn man den Interpretationen der Stelle folgte, nach denen hier zwischen den einstelligen und mehrstelligen Prädikaten, insbesondere aber zwischen einem vollständigen und einem unvollständigen Gebrauch von "... ist" unterschieden wird.
  하지만 (III) 은 The Different 에 부합하는 문장으로 간주되지 않는데, 255d4 에서 언급된 바 The Different 가 두 형상 중 하나의 몫만 나누어 가지고, The Being 과 The Different 사이의 구분 자체가 바로 그 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난점들은 (III) 에 대한 해석에서 발생한다. 플라톤이 염두에 둔 "... is" 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보어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보어와 주어에 할당되는 그 대상들이 수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하기도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단항 술어와 다항 술어 사이의, 특히 "... is" 완전 용법과 불완전 용법 사이의 구분에 따라 그 부분을 해석할 때에 쉽사리 해결된다.
  Einer solchen Interpretation, die durch 255c12-13 nahegelegt wird, steht allerdings der zweite Teil der Bedingung in (I)-(III) : "und b ein von a verschiedener Gegenstand ist" im Wege. Denn (III), das nach der Standardinterpretation des Textes dem vollständigen Gebrauch von "... ist" im Sinn von "... existiert" entsprechen sollte, läßt auf Grund des zweiten Teils der Bedingung immer noch die Möglichkeit zu, daß es sich um einen unvollständigen Gebrauch von "... ist" handelt, bei dem jedoch - im Gegensatz zu dem in (II) beschriebenen Gebrauch von "... ist" - den Argumenten nicht verschiedene Gegenstände, sondern derselbe Gegenstand zugeordnet ist. 
  Wir werden also zu prüfen haben, ob der zweite Teil der Bedingung für das Argument tatsächlich irrelevant ist oder nicht. Nehmen wir einmal an, daß der zweite Teil unwesentlich ist; dann können wir (III) folgendermaßen umformulieren:
  255c12-13 을 통해 제안되는 그러한 해석은 (I) - (III) 에서 조건의 두 번째 부분이 된다.
"그리고 b 는 a 와 다른 대상이다" 라는 방식에서. 왜냐하면 (III) 은, 해당 문헌의 표준적 해석에 따라 "... is" 완전 용법이 의미상 "... exists" 에 부합할 것으로서, 조건의 두 번째 부분에 근거하여 "... is" 의 불완전 용법을 다룰 가능성을 두지만, 거기에서 - (II) 에서 묘사된 "... is" 용법과 반대로 - 상이한 대상들이 아니라 같은 대상이 그 논증에 할당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조건의 두 번째 부분이 해당 논증에 실제로 부적절한지 그렇지 않은지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단 그 두 번째 부분이 본질적이지 않다고 가정하면, (III) 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III A) Wenn von einem Gegenstand a wahrheitsgemäß gesagt wird, daß er ist, dann ist in einigen Fällen folgende Bedingung nicht erfüllt:
es gibt einen Gegenstand b, derart, daß in bezug auf b von a ausgesagt wird, daß es ist.
  (III A) 대상 a 에 대해 it is 가 참으로 진술될 때, 몇몇 경우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b 와 관련하여 a 에 대해 it is 라고 진술되는 그런 대상 b 가 있다.
-15-  Entsprechend sei (II) zu (II A) verändert.
따라서 (II) 가 (II A) 로 변환된다.
  (II A) und (III A) lassen nun zwei Interpretationen zu. Beide Interpetationen unterscheiden zwei Verwendungen von "... ist", die erste Interpretation aber läßt - im Gegensatz zur zweiten - den zwei Verwendungen von "... ist" auch zwei Bedeutungen entsprechen.
  (II A) 와 (III A) 는 이제 두 가지 해석을 허용한다. 두 해석 모두 "... is" 의 두 용법을 구분하지만, 첫 번째 해석은 - 두 번째 해석과 반대로 - "... is" 의 두 용법에 두 가지 의미를 부합시킨다.
  Nach der ersten Interpretation bezöge sich (III A) auf einen Gebrauch von "... ist" in der Bedeutung von "... existiert", (II A) aber auf den kopulativen Gebrauch von "... ist"; welche Bedeutung man beim kopulativen Gebrauch ansetzen soll, ist unklar, für unser Argument aber auch unwesentlich; nehmen wir also an, das kopulative "... ist" habe bei Platon die Bedeutung von "... hat teil an ....".
  Es läßt sich leicht zeigen, daß diese starke Version von (II A) und (III A) völlig unbefriedigend ist. Aus der Art, wie zum Beispiel 250a bis b die Verschiedenheit der Form des Seienden von den Formen der Bewegung und der Ruhe aufgezeigt wird, ergibt sich, daß für Platon im Sophistes Prädikaten mit verschiedener Bedeutung auch vershciedene Formen zugeordnet sind. In diesem Fall müßten wir also "... ist", wenn es zwei Bedeutungen hat, zwei Formen, S 1 und S 2, zuordnen. Da an unserer Stelle aber nur der Gegensatz zwischen einem Gebrauch von "... ist" und der Verwendung von "... ist verschieden" hervorgehoben wird, erhielten wir also ein Argument dafür, daß S 2 von der Form des Verschiedenen unterschieden werden muß. Dagegen ist es unserem Text zufolge die eine Form des Seienden, die an den beiden Formen, welche den zwei Arten des Gebrauchs von Prädikaten entsprechen, teilhat und von der gezeigt wird, daß sie nicht mit der Form des Verschiedenen identisch ist.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III A) 는 "... exists" 의미에서의 "... ist" 용법에 관련되는 반면, (II A) 는 "... is" 계사적 용법에 관련된다. 계사적 용법에 어떤 의미를 적용해야 할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우리의 논증에는 본질적인 게 아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계사적 "... is" 가 "... shares in ..." 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강화판 (II A) 와 (III A) 가 완전히 불충분하다는 것은 쉽사리 드러난다. 예를 들어 250a-b 에서 형상 Being 의 형상 운동과 형상 정지와의 차이가 드러나는 그런 방식을 통해, 『소피스트』 에서 플라톤에게 술어들은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상이한 형상들에 할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 is" 가 두 의미를 지닐 때 두 형상들 Being 1 과 Being 2 를 할당해야만 한다.  허나 우리 입장에서 단지 "... is" 의 사용과 "... is different" 의 용법 사이의 대조만 강조되기에, 우리는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논증을 획득한다. 형상 Being 2 는 형상 Difference 와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문헌에 따르자면 Being 의 형상이고, 그것은 서술적 용법의 두 종류에 상응하는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하며 형상 Difference 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그로부터 밝혀진다.
  Dieser Einwand läßt sich gegen jede starke Version von (II A) und (III A) erheben. Ein spezieller Einwand aber trifft die hier diskutierte Version, nach der "... ist" einmal die Bedeutung von "... existiert" hat, dann aber die von "... hat teil an ...". Angenommen nämlich, ein Prädikat "b" käme einem Gegenstand a auf Grund der Tatsache zu, daß  a an der "b" zugeordneten Form b` teilhat, dann käme in den Fällen, auf die sich (II A) bezieht, nach dieser Interpretation "... ist" einem Gegenstand a auf Grund der Tatsache zu, daß a an der Teilhabe teilhat, was es freilich nur kann, wenn es an der Teilhabe an der Teilhabe teilhat, und das nur, wenn es an der Teilhabe an der Teilhabe an ... Teilhabe teilhat, das aber heißt, "... ist" in der Verwendung von (II A) könnte überhaupt keinem Gegenstand zukommen, und wahre Sätze mit kopulativem "... ist" wären unmöglich.
  Es bleibt also die schwache Interpretation von (II A) und (III A), wonach "... ist" sowohl unvollständig als auch - im Gegensatz zu "... ist verschieden" - vollständig gebraucht werden kann, in beiden Fällen aber die gleiche Bedeutung hat.
  (II A) 와 (III A) 의 강화된 형식 각각에 대해 이러한 반론이 제기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논의된 형태에는 특수한 반론이 적용되는 바, "... is" 가 한 번은 "... exists" 의 의미를 가짐에 따라, 다음 번에는 "... shares in ..." 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즉, 술어 "b" 가 a 는 형상 b' 에 할당된 "b" 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대상 a 가 된다고 가정하면, 다음으로 그 경우 (II A) 와 관련하여 이러한 해석에 따라 a 가 그 참여에 참여한다는 사실로부터 "... ist" 가 대상 a 가 되고, 참여에 대한 참여에 참여할 수 있을 때, (II A) 용법 "... ist" 는 전혀 어떤 대상도 될 수 없고, 계사적 "... ist" 를 가진 참인 명제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II A) 와 (III A) 의 약한 해석이 남는데, 그에 따라 "... ist" 는 불완전 뿐만 아니라 - "... is different" 와 반대로 - 완전 사용도 가능하며, 그러나 두 경우 모두에서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16- Solange man aber daran festhalten muß, daß "... ist" in jedem Fall die gleiche Bedeutung behält, läßt sich kein Kriterium für Vollständigkeit finden, auf Grund dessen sich der gewünschte Kontrast zwischen "... ist" und "... ist verschieden" ergäbe.
  그러나 각 경우에 "... is" 가 유사한 의미를 견지한다는 점, "... is" 와 "... is different" 사이의 요청되는 대조가 주어진다는 사실로부터 완전용법의 기준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기까지 견지해야 한다.
  1. Der Kontrast kann nicht einfach darin bestehen, daß zwar "a ist" ein grammatisch korrekt gebildeter Satz ist, nicht aber "a ist verschieden", wenn denn Relationen von Platon als Eigenschaften konstruiert werden; tatsächlich wird ja auch "ἕτερον" 263d1 und "ταὐτόν" 256a7-8 absolut gebraucht.
  1. 그 대조는 이하의 내용과 전혀 쉽사리 부합할 수 없다, 플라톤에 의해 관계가 속성으로 구성될 때, 더욱이 "a is" 는 문버적으로 정확히 구축된 명제인 반면, "a is different" 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실제로 "ἕτερον" 263d1 과 "ταὐτόν" 256a7-8 은 완전용법으로 사용된다.
  2. Es kann auch nicht darum gehen, daß man zu jeder Verwendung von "a ist verschieden" ein b finden kann, derart daß sich "a ist verschieden" zu "a ist verschieden von b" ergänzen läßt, das gleiche aber nicht für Platon selbstverständlich ist, daß "a ist" sich immer zu "a ist b" ergänzen läßt. Denn jeder Gegenstand, den es gibt, ist schließlich irgendetwas, sonst könnte man gar nicht von "diesem Gegenstand" reden.
  2. 그 핵심은 이하가 아니다. "a is different" 의 각 용법에 대해 b 를 찾을 수 있다는, "a is different" 가 "a is different from b" 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그러나 플라톤에게 "a is" 가 언제나 "a is b" 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만큼 자명하진 않다. 존재하는 각 대상은 결국에 어떤 무언가이고, 달리 말해 "이러한 대상" 에 관하여서는 전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Die meisten Aussichten scheint ein Kriterium zu haben, wonach ein Prädikat "b" dann unvollständig ist, wenn "a ist b" nicht in sich verständlich ist. Danach wäre z.B. "... größer als" unvollständig, "... rot" dagegen vollständig. Ein solches Kriterium wird in Worten, die stark an 255c12-13 erinnern (was natürlich sehr für die traditionelle Interpretation spricht), bei Diogenes Laeritus (III, 108-9; Div. Arist. Ross frg. 2) Platon zugeschrieben: τῶν ὄντων τὰ μέν ἐστι καθ᾿ ἑαυτά, τὰ δὲ πρός τι λέγεται. τὰ μὲν οὖν καθ᾿ ἑαυτὰ λεγόμενά ἐστιν ὅσα ἐν τῇ ἕρμηνείᾳ μηδενὸς προσδεῖται. ταῦτα δ᾿ ἄν εἴη οἷον ἄνθρωπος, ἵππος καὶ τἆλλα ζῷα. τούτων γὰρ οὐδὲν δι᾿ ἑρμηνείας χωρεῖ. τῶν δὲ πρός τι λεγομένων ὅσα προσδεῖταί τινος ἑρμηνείας ...". Ähnliches findet sich in einem Zitat des Platonschülers Hermodorus aus seiner Schrift über Platon bei Simplicius (in phys. 248, 2-3):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καθ᾿ αὑτὰ εἶναι λέγει ὡς ἄνθρωπον καὶ ἵππον, τὰ δὲ πρὸς ἕτερα ..."
  3. 기준을 가질 것으로 가장 기대되는 것은, 그에 따라 술어 "b" 가 불완전 용법인, "a is b" 가 그 자체로 이해되지 않을 경우 그런 것이다. 그에 따라 예를 들어 "... larger than" 은 불완전 용법일 것이나, "... red" 는 반대로 완전 용법일 것이다. 단어들 사이에서 그런 기준이 되는 것은, 그 강력한 형태를 255c12-13 에서 상기시키고 (그것은 전통적 해석이 말하기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있는 것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 다른 일부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된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이야기되는 것들은 표현상 아무것도 추가로 필요치 않는 모든 것이다. 이것들은 예를 들면 사람, 말과 여타 동물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 중 어느것도 표현을 위해 여지를 남기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들의 경우 어떤 표현을 추가로 필요로하는 모든 것들이다 ...". 심플리키우스에 의한  플라톤학파 헤르모도로스의 플라톤에 대한 저술로부터의 인용에서도 비슷한 것이 발견된다. "있는 것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 이야기되는데 사람과 말 같은 것이고, 다른 일부는 다른 것들에 대해 ...".
  
  Überhaupt ist dieses Kriterium in der antiken Philosophie weit verbreitet; man vergleiche etwa Ar. Cat. 8a35-b19, Top. 142a28-30; Sext. Emp. P. H. I, 136; Adv. M. VIII, 453, X, 263.
  Legen wir dieses Kriterium zugrunde, dann verhält sich "... ist" bisweilen wie "... rot", bisweilen aber wie "... größer als ...". Wenn aber die Bedeutung von "... ist" in "a ist" und in "a ist b" die gleiche sein muß, dann kann nicht "a ist" bisweilen verständlich sein, bisweilen aber nicht.
  (II A) und (III A) scheinen also nicht auszureichen, um die Verschiedenheit der Form des Seienden von der Form des Verschiedenen aufzuzeigen; folglich wird man bei der Interpretation des Absatzes -17- anstelle von (II A) und (III A) zunächst von (II) und (III) auszugehen haben. Das Scheitern von (II A) und (III A) legt überdies nahe, daß der zweite Teil der Bedingung nicht nur nicht gestrichen werden darf, sondern für das Argument ganz wesentlich ist. Eine nachträgliche Betrachtung des Textes zeigt denn auch, daß der zweite Teil der Bedingung betont wird:
  이러한 기준은 고대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토피카』 등과 비교하라.
  이런 기준을 근거로 "... is" 가 때로는 "... red" 처럼 또 때로는 "... larger than ..." 처럼 사용되곤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a is" 와 "a is b" 에서 "... is"의 의미가 유사해야만 할 경우, "a is" 는 때로 이해될 수 없는 반면 때로는 그렇지 않다.
  (II A) 와 (III A) 는 그러므로 Being 의 형상과 Difference 의 형상 사이의 차이를 밝히기엔 충분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문단의 해석에 의해 (II A) 와 (III A) 대신 (II) 와 (III) 의 처음 형태를 결론으로 가질 것이다. (II A) 와 (III A) 의 실패는 다음을 추가로 시사한다. 그 조건의 두 번째 부분이 삭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논증에 대해 전적으로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해당 문헌에 대한 추가적 고찰은 또한 조건의 두 번째 부분이 강조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in 255c 13 "πρὸς ἄλλα"
in     d   1 "πρὸς ἕτερον"
in     d 5-6 "οὐ πρὸς ἕτερον"
in     d   7 "ἑτέρου"

  Man kann dagegen einwenden, daß man den Gebrauch von "πρὸς ἄλλα" und "πρὸς ἕτερον" im Gegensatz zu "πρός τι" nicht überwerten darf. Denn nach akademischen (Sext. Emp. Adv. M. VIII, 453-454; vgl. X, 265) und aristotelischen Definitionen (Cat. 6a36; Met. 1021a26) sind πρός τι-Prädikate eben die, die in bezug auf etwas anderes ausgesagt werden. In dem bereits erwähnten Hermodoruszitat (Simpl. in phys. 248, 2ff.) sind die πρός τι-Prädikate sogar eine Unterklasse der πρὸς ἕτερα-Prädikate. Weiter werden in demselben Metaphysikkapitel, in dem Aristoteles die obige Bestimmung von πρός τι-Prädikaten gibt, "... ist dasselbe wie ..." und "... ist gleich ..." als Beispiele für πρός τι-Prädikate angeführt (Met. 1021a9-10). Es scheint also fraglich zu sein, ob man eine solche Betonung auf das "ἕτερον" legen darf.
  누군가는 사람들이 "πρός τι" 에 대비하여 "πρὸς ἄλλα" 와 "πρὸς ἕτερον" 의 사용을 더 중시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카데미아학파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정의에 따를 경우 πρός τι 서술은 어떤 다른 것에 관련하여 진술되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된 헤르모도로스 인용에서 πρός τι 서술은 πρὸς ἕτερα 서술의 하위분류이기까지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πρός τι 서술의 상기 규정을 제시하는 『형이상학』에서는 더욱 확장되어, πρός τι 서술의 예시로 "... is itself like ..." 와 "... is like ..." 가 제시된다. 그러므로 "ἕτερον" 에 관한 그런 강조를 말하는지는 의심스러워 보인다.
  Überlegt man sich nun, wie bei einer solchen Bestimmung von πρός τι-Prädikaten "... ist dasselbe wie ..." als πρός τι-Prädikat aufgefaßt werden kann, dann kann sich "in Bezug auf etwas anderes" in der Definition dieser Prädikate nicht auf die numerische Verschiedenheit der Gegenstände beziehen, denen die Argumentsausdrücke zugeordnet sind, sondern nur auf eine - wie auch immer näher bestimmte - Verschiedenheit der Argumentsausdrücke selbst. So wird ja auch "... ist dasselbe wie ..." sinnvoll nur dann verwandt, wenn die Argumentsausdrücke verschiedene sind, "a ist dasselbe wie a" dagegen ist ein Grenzfall ohne Verwendung. πρός τι- und πρὸς ἕτερα-Prädikate können also überhaupt nur zusammenfallen, wenn man bei der Klassifizierung der Prädikate nicht von der numerischen Verschiedenheit bzw. Identität der Gegenstände ausgeht, die den Argumenten zugeordnet sind.
  이제 πρός τι 서술에 대한 그러한 규정을 통해  "... is itself like ..." 가 어떻게 πρός τι 술어로 이해될 수 있는지 고려하면, "어떤 다른 것과 관련하여" 라는 말은 이러한 술어의 정의상, Argumentsausdrücke(변항표현들)에 해당하는 그 대상들의 수적 구분과 관련될 수 없으며, 오히려 단지 - 어쨌든 더 엄밀하게 규정된 - 그 Argumentsausdrücke의 차이 자체와 관련될 수 있다. 그래서 "... is itself like ..." 는 다시, 그 Argumentsausdrücke이 상이할 경우 유의미하게 사용되고, 반대로 "a is itself like a" 는 용례 없는 극단적 사례이다. πρός τι- 그리고 πρὸς ἕτερα- 술어는, 술어들의 분류를 Argumenten 으로 이해되는 대상들의 수적 차이 혹은 동일성으로 가정하지 않을 때,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다.
  Genau das aber tut Platon in unserem Absatz, wie aus der zweiten Formulierung des Merkmals, durch das sich das Vershciedene vom Seienden unterscheidet, deutlich wird. Es ist also unberechtigt, wenn man hier "πρὸς ἕτερον" einfach durch "πρός τι" ersetzt.
  Da es sich bei (III A) um eine Spezialisierung von (III) handelt, können wir nach der Ausschaltung von (III A) versuchen, (III) entsprechend zu verschärfen. Während (III) nämlich behauptet, daß entweder der erste Teil oder der zweite Teil der Bedingung nicht erfüllt ist - 18 - oder beide Teile nicht erfüllt sind, behauptet (III A), daß der erste Teil der Bedingung nicht erfüllt ist. Nun haben wir gesehen, daß Platon - Jedenfalls an dieser Stelle - nicht einen Gebrauch von "... ist" im Auge hat, der den ersten Teil der Bedingung nicht erfüllt, folglich erst recht nicht einen Gebrauch, der beide Teile der Bedingung nicht erfüllt. So bleibt die dritte Möglichkeit, daß (III) sich auf einen Gebrauch bezieht, der den zweiten Teil der Bedingung nicht erfüllt, sehr wohl aber den ersten. (III) läßt sich also wie folgt verschärfen:
  (III`) Wenn von einem Gegenstand a wahrheitsgemäß gesagt wird, daß er ist, dann ist in einigen Fällen folgende Bedingung erfüllt : es gibt einen Gegenstand b, derart daß in bezug auf b von a ausgesagt wird, daß a ist, und a ist nicht ein von b verschiedener Gegenstand.
  Man vergleiche damit die entsprechende Formulierung für das Verschiedene in 255d5 :
  wenn das Verschiedene so wie das Seiende an beiden Formen teilhätte,
  ἦν ἂν ποτέ τι καὶ τῶν ἑτέρων ἕτερον οὐ πρὸς ἕτερον.
  그러나 물론 플라톤은 우리가 다루는 장에서, Difference 를 Being 과 구분하는 기준의 두 번째 공식화를 통해 그 일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πρὸς ἕτερον" 를 간단히 "πρός τι" 를 통해 대체할 경우 정당화되기 어렵다.
  (III) 을 (III A) 로 특수화하는 일이 문제이기에, (III A) 에 대한 분할에 따라 (III) 을 유비적으로 강조하는 일을 시도할 수 있다. 말하자면 (III) 은 그 조건의 첫 부분이나 두 번째 부분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두 부분 모두 충족하지 못함을 주장하는 반면, (III A) 는 그 조건의 첫 번째 부분을 충족하지 못함을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플라톤이 - 어쨌든 이 장에서 - 그 조건의 첫 부분을 충족하지 않는 "... is" 용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따라서 무엇보다도 그 조건의 두 부분 모두 충족하지 않는 용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남은 세 번째 가능성은, (III) 이 조건의 두 번째 부분을 충족하지 않지만 첫 부분은 매우 잘 충족하는 용법에 관련된다는 것이다. (III) 은 따라서 다음과 같이 강조된다:
  (III') 대상 a 에 대하여 it is 라는 것이 참인 것으로 진술될 때, 몇몇 경우 다음의 조건을 충족한다: a 에 대한 b 에 관련하여 a is 라고 이야기되는, 그리고 a 가 b 와 다른 대상이 아닌 그런 대상 b 가 존재한다.
  이를 그에 상응하는 Difference 에 대한 255d5 에서의 정식화와 비교해 보자:
  Difference 가 마치 Being 처럼 두 형상 모두의 몫을 나누어 가질 경우,
  다른 것들 중에서도 어떤 다른 것은 다른 것에 대한 것이 아닐 것이다.
  Wenn man nun an den relevanten Stellen für "ἕτερον" "ὄν" einsetzt und den Irrealis zurücknimmt (denn das Seiende hat an beiden Formen teil), dann erhält man genau (III') : ἔστι τι τῶν ὄντων ὄν οὐ πρὸς ἕτερον.
  Diese beiden Formen, denen die Verwendung von "... ist" in (II) und (III') entspricht, tauchen übrigens im Sophistes keineswegs zum erstenmal bei Platon auf. Im Charmides nämlich heißt es (169a1-5) :
"μεγάλου δή τινος, ὦ φίλε, ἀνδρὸς δεῖ, ὅστις τοῦτο κατὰ πάντων ἱκανῶς διαιρήσεται, πότερον οὐδὲν τῶν ὄντων τὴν αὑτοῦ δύναμιν αὐτὸ πρὸς ἑαυτὸ πέφυκεν ἔχειν, ἀλλὰ πρὸς ἄλλο, ἢ τὰ μέν τὰ δ᾿ οὔ."
  이제 "ἕτερον" 에 대한 관련 장들에서 "ὄν" 을 도입하고 반사실 서법을 제거하면 (Being 은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하니까), 확실히 (III') 를 얻는다: being들 중 어떤 being은 다른 것에 대한 것이다.
  (II) 와 (III') 에서 "... is" 용법에 부합하는 이러한 양쪽 형상들은 플라톤에 의해 『소피스트』 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카르미데스』 에서는 그것이 이렇게 불린다(169a1-5): 
"친구, 모든 것들에 대해, being 들 중 어떤 것도 본래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일 능력은 없고 다른 것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것들은 그렇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은지 충분히 분할할 누구든 그는 무언가 대단할 사람이어야 하네."
  Daß Platon sich für die zweite Möglichkeit entschieden hat, zeigt eine Stelle wie Legg.894d2, wo von der Bewegung die Rede ist, die sich selbst bewegen kann, d.h. von einer Bewegung, die das, was sie ist, nämlich eine Bewegung, in bezug auf sich selbst ist. Bewegung gehört also wie das Seiende zu den Formen, die an beiden Formen teilhaben, von denen 255d4 die Rede ist : sie können von einem Gegenstand a in bezug auf a, aber auch in bezug auf einen Gegenstand b, der von a verschieden ist, ausgesagt werden. Identität dagegen wird von einem Gegenstand a immer in bezug auf a ausgesagt, hat also genau wie das Verschiedene nur an einer der beiden Formen teil.
  플라톤이 두 번째 가능성을 선택했다는 것은, 『법률』 894d2 와 같은 장에서 보여주는 바이다. 거기에서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되는데, 그것이 그 자체로 운동할 수 있다고, 즉, 운동에 대하여, 그것이 그것인 바 다시 말해 운동인 것은 그 자신과 관련하여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Being 처럼 두 형상들 모두에 참여하는 형상들에 속하며, 이에 대해 255d4 에서 논의된다: 대상 a 에 대하여 a 와 관련하여서도 또 a 와 다른 대상 b 와 관련하여서도 그것들이 진술될 수 있다. 반대로 동일성은 대상 a 에 대해 언제나 a 와 관련하여서 진술되고, 그러므로 Difference 처럼 두 형상들 중 한쪽에만 참여한다.
  Wir haben bisher von dem Absatz, den wir interpretieren wollen, nur 255d1-7 berücksichtigt. Für dieses Stück haben wir eine befriedigende Interpretation gefunden, wenn wir annehmen, daß Platon hier zwei Verwendungen von "... ist" unterscheidet, die durch (II) und (III`) beschireben werden. (II) und (III`) fänden ihre Entsprechung in zwei Sätzen, die sich zu (II) und (III`) genauso verhalten, wie (2.) zu (1.) auf Seite 11: (II B) Seiendes kann das, was es ist, nämlich seiende, in bezug auf sich selbst sein.
  255d1-7 에 대해, 플라톤이 여기에서 (II) 와 (III') 를 통해 묘사되는 "... is" 두 번째 용법을 분간해낸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만족스러운 해석을 발견한다. (II) 와 (III') 는 11쪽 2. 가 1. 에 대응하듯 (II) 와 (III') 를 바로 그와 같이 취급하는 두 명제들에서 대응물을 발견한다: (II B) Being 은 그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것인 바의 것, 즉 being일 수 있다.
- 19 - (III` B) Seiendes kann das, was es ist, nämlich seiend, in bezug auf etwas von ihm numerisch Verschiedenes sein.
  Das Verschiedene dagegen ist nach 255d6-7 das, was es ist, nämlich verschieden, immer in bezug auf etwas anderes.
  Damit wäre also eine Interpretation gefunden, die zwar 255d1-7 gerecht wird, aber unverträglich mit der traditionellen Interpretation des ganzen Abschnittes ist, die von 255c12-13 ausgeht, sich für 255d1-7 aber bei genauerer Betrachtung als unzureichend erwiesen hat.
  (III' B) Being 은 그것과 수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 관련하여 그것인 바, 즉 being일 수 있다. 반대로 Difference 는 255d6-7 에 따라 언제나 다른 어떤 것과 관련하여 그것인 바, 즉 다를(-른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로써 한 가지 해석이 발견된다. 그것은 더욱이 255d1-7 을 충족하지만, 그 전체 구절의 전통적 해석과는 맞지 않는다. 전통적 해석은 255c12-13 에서 도출되지만 255d1-7 에 대해서는 더 면밀한 고찰을 통해 부적절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Es wird jetzt also zu prüfen sein, ob sich 255c12-13 mit unserer Interpretation von 255d1-7 verträgt.
  Nach den zahlreichen Übersetzungsmöglichkeiten und den vielen verschiedenen Übersetzungen zu urteilen, muß 255c12-13 wohl der vieldeutigste Satz im ganzen Dialog sein.
  Völlig eindeutig ist wirklich zunächst auch nur das Unwichtigste, die Übersetzung von "ἀλλ᾿ οἶμαί σε συγχωρεῖν".
  이제 검토되어야 할 것은, 255c12-13 이 255d1-7 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조화되는지 여부이다.
  판단할 여러 해석 가능성들과 많은 상이한 해석들에 따르면, 255c12-13 은 아마도 대화편 전체에서 가장 모호한 문장이어야만 한다. 
  "ἀλλ᾿ οἶμαί σε συγχωρεῖν" 에 대한 해석은 명백한데다 중요치도 않다.
  Als einigermaßen sicher können darüber hinaus folgende Punkte gelten :
  1. "τὰ μὲν ... τὰ δὲ ..." setzt irgendeine Klasse A voraus, die zwei elementfremde Unterklassen A1 und A2 hat, derart, daß jedes Element von A zwar Element von A1 oder A2 sein muß, aber nicht zugleich Element von A1 und A2 sein kann. Diese Tatsache ist für die Interpretation der Ausdrücke "πρὸς ἄλλα" und "αὐτὰ καθ᾿ αὑτά" wichtig, mit Hilfe derer A1 und A2 bestimmt werden. Denn sie müssen sich natürlich so entsprechen, daß wir tatsächlich die geforderte vollständige Disjunktion erhalten. So wird auch "τὰ μὲν ... τὰ δὲ ..." zwar gewöhnlich nicht scharf als vollständige Disjunktion übersetzt, dafür aber versucht man, durch die Übersetzung von "πρὸς ἄλλα" und "αὐτὰ καθ᾿ αὑτά" eine solche Disjunktion wiederzugeben. Am deutlichsten wird das bei Moravcsik (B.M.S, S. 54), der übersetzt : "... some are relational, and some non-relational". Die gleiche Funktion erfüllen bei den meisten Kommentaren die Ausdrücke "absolut" und "relativ".
   '1.' kann also als einigermaßen gesichert und allgemein akzeptiert gelten. Das Problem ist nur, um was für Mengen es sich bei A, A1 und A2 handelt.
  이하의 지점들이 어느 정도 더 확실한 것으로서 추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1.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는 어떤 분류 A 를 상정한다. 이것은 분기하는 하위 분류 A1 과 A2 를 가진다. A의 각 원소는 A1 이나 A2 의 원소여야만 하지만, A1 과 A2 에 대해 동시에 원소일 수는 없는 그런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πρὸς ἄλλα" 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에 대한 해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 해석의 도움으로 A1 와 A2 가 규정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가 실제로 요청되는 완전한 선언지를 얻는다는 사실에 자연스럽게 부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도 물론 통상적으로는 완전한 선언지로 해석되지 않지만, "πρὸς ἄλλα" 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에 대한 해석을 통해 그런 선언지를 그에 대해 재부여하고자 시도한다. Moravcsik (B.M.S, S. 54) 에 의한 해석으로 가장 분명해진다: "... 어떤 것들은 상대적이고, 어떤 것들은 비-상대적이다". 대다수 주석가들에 의한 "절대" 와 "상대" 라는 표현들도 유사한 기능을 충족시킨다.
  '1.' 은 그러므로 상당히 확실하고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단지 문제는, AA1 와 A2 가 무리에 무엇을 포함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2. Wenn sich nicht wichtige Gründe dagegen anführen lassen, daß "πρὸς ἄλλα" in 255c13 dem, "πρὸς ἕτερον" in 255d1 entspricht, dann muß "ἄλλα" in "πρὸς ἄλλα" strikt verstanden werden. (2) widerspricht der traditionellen Interpretation, darf aber auf Grund der Tatsache, daß sich die gegenteilige Annahme bei der Interpretation von 255d1-7 als unzulänglich erwiesen hat, ebenfalls als gesichert gelten.
  2. 255c13에서 "πρὸς ἄλλα" 가 255d1 에서 "πρὸς ἕτερον" 와 같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반박하지 못할 경우, "πρὸς ἄλλα" 에서 "ἄλλα" 는 제한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2.' 는 전통적 해석에 반대하지만, 아마도 255d1-7 에 대한 해석에 의해 그 반대 가정이 불충분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더 확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3. In 255c12-13 ist davon die Rede, daß etwas von irgend etwas ausgesagt wird ("λέγεσθαι" in 255c13); es müssen folgende Möglichkeiten erwogen werden :
- 20 - (A)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bezieht sich auf das, was ausgesagt wird.
(B) "τὰ μὲν ... τὰ δὲ ..." bezieht sich auf das, was ausgesagt wird, "τῶν ὄντων" auf das, wovon es ausgesagt wird.
(C)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bezieht sich auf das, wovon etwas ausgesagt wird.
  3. 255c12-13 에서, 어떤 것은 또 어떤 것에 대해서 진술된다(255c13 "λέγεσθαι")는 점이 논의된다; 이하의 가능성들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A)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는 진술되는 바의 것<술어>에 관련한다.
  (B)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는 진술되는 바의 것<술어>에, "τῶν ὄντων" 은 저것이 그에 대해 진술되는 바로 그것<주어>에 관련한다.
  (C)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는 어떤 것이 그에 대해 진술되는 바로 그것<주어>에 관련한다.
   (A) Nehmen wir also zunächst an,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beziehe sich auf das, was ausgesagt wird. 255c12-13 besagt dann etwas über die Menge der möglichen Prädikate (eigentlich: der Formen, die den möglichen Prädikaten zugeordnet sind), nämlich daß sie in zwei Klassen zerfallen:
        1. die Prädikate, die αὐτὰ καθ᾿ αὑτά ausgesagt werden, und
        2. die Prädikate, die πρὸς ἄλλα ausgesagt werden
  (A) 그러므로 우선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가 진술되는 바의 것에 관련한다고 가정하자. 255c12-13 은 가능한 술어들의 무리 (실질적으로: 형상들, 가능한 술어들을 구성하는) 에 대해 무언가를, 즉 두 부류로 분류된다는 것을 말한다:
        1.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진술되는 술어와
        2. πρὸς ἄλλα 진술되는 술어로.
  In diesem Fall gibt es zwei Möglichkeiten, "πρὸς ἄλλα" und entsprechend "αὐτὰ καθ᾿ αὑτά". Entweder sind mit "ἄλλα" in "πρὸς ἄλλα" die Gegenstände gemeint, von denen etwas ausgesagt wird, was verschieden von diesen Gegenständen ist, oder aber mit "ἄλλα" sind die Gegenstände gemeint, mit Hinsicht auf die etwas von Gegenständen ausgesagt wird, die verschieden von den ersten Gegenständen sind.
  이 경우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πρὸς ἄλλα" 와 그에 비례하여 "αὐτὰ καθ᾿ αὑτά". "πρὸς ἄλλα" 에서 "ἄλλα" 는 그에 대해 무언가 그와 다른 것이 진술되는 그런 대상들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ἄλλα" 가 대상들을 의미하는데, 그 대상들과 관련해서 이 첫 번째 대상들과 다른 대상들에 대해 무언가가 진술된다.
  Untersuchen wir zuerst die erste Möglichkeit. Wir haben demnach zwei Klassen von Gegenständen, die möglichen Prädikaten zugeordnet sind: solche, die immer von etwas von ihnen Verschiedenem ausgesagt werden (man könnte auf Grund von 255e4-6 meinen, daß z.B. die Form des Verschiedenen in diese Klasse gehöre), und solche, die von sich selbst ausgesagt werden.
  우선 첫 번째 가능성을 탐구하자. 그에 따라 가능한 술어들을 구성하는 대상들의 두 부류를 가진다. 어떤 것에 대해 언제나 그와 다른 것이 진술되는 대상들 (255e4-6 을 근거로 예를 들어 Difference 의 형상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체에 대해 진술되는 대상들.
  Eine solche Interpretation hätte allerdings den Nachteil, daß sich das Verschiedene in der Hinsicht, in der es hier immer von etwas von ihm Verschiedenen ausgesagt wird, für Platon in nichts vom Seienden unterscheidet.
  Von Mure und von Arangio-Ruiz ist allerdings eine Variante dieser Interpretation entwickelt worden, die zunächst etwas plausibler klingt.
  그런 해석은 무엇보다도 Difference 가 여기에서 언제나 그와 다른 무언가에 대해 진술되는 그런 측면에서 Diffrence 가 플라톤에게 Being 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단점을 지닌다. 
  Mure 와 Arangio-Ruiz 에게서 이러한 해석의 다양한 버전들이 전개되고, 그것들은 일견 그럴 듯해 보인다.
  Wie bereits durch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nahegelegt sein könnte, werden nach ihrer Interpretation hier zwei Klassen von Gegenständen unterschieden, die sich auch je nach Zugehörigkeit zu einer der beiden Klassen ihrem Sein nach unterscheiden. Schönheit, zum Beispiel, gibt es nur in bezug auf schöne Gegenstände, das Schöne ist ἕτερόν τι ὄν schön, und so wird Schönheit immer mit Bezug auf etwas von ihr Verschiedenes ausgesagt. Menschen dagegen gibt es an und für sich, weil der Mensch αὐτὸ καθ᾿ αὑτό Mensch ist. Damit wären wir also fast bei Aristoteles angekommen, und so sagt denn auch Mure (Aristotle, S. 180) : "Plato`s distinction of selfsubsistent from dependent - 21 - being is possibly the source of Aristotle`s conception of substance and accident."
  이미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를 통해 제안될 수 있었듯, 여기에서 그 해석에 따라 대상들의 두 부류들이 구분되는데, 또한 양쪽 부류 중 한 쪽에의 소속에 따라서 그 대상들의 Being 이 그에 따라 구분된다. 예를 들어 아름다움은 바로 아름다운 대상들에 관련하여 존재하고, 아름다운 것은 어떤 다른 아름다운 것이며, 그렇게 언제나 아름다움은 그것과 다른 무언가에 대한 관련으로써 진술된다. 반대로 인간은 그 자체에 대해 그 자체로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체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따라서 거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당도하게 되었고, Mure 또한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Aristotle, 180쪽): "플라톤의 자립적 being 과 의존적 being 사이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와 부수라는 개념의 원천일 수 있다."
  Tatsächlich wird eine solche Einteilung Platon bereits von Eudemus (ap. Simpl. in phys. 99, 25ff.) und den Divisiones Aristoteleae (Diog. L. III, 108-109) zugeschrieben.
  Jede Interpretation dieser Art hat alle Wahrscheinlichkeit gegen sich, da sie die Aufgabe von Platonischen Formen zumindest für Akzidentien, wenn nicht die Aufgabe von Formen überhaupt voraussetzt (vgl. allerdings: Ar. Met. A 1070a13ff. und Procl. in Parm. I, 888, 36ff.). Aber sie leistet auch nicht das, was sie leisten soll; sie zeigt nämlich nicht den Unterschied zwischen dem Seienden und dem Verschiedenen. Das Argument müßte etwa so konstruiert werden:
  Alles, was verschieden ist, ist verschieden in bezug auf etwas von ihm Verschiedenes, nämlich die Verschiedenheit (255d6-7); oder umgekehrt: die Verschiedenheit wird immer in bezug auf etwas von ihr Verschiedenes ausgesagt (255d1).
  Dagegen ist nicht alles, was ist, seiend in bezug auf etwas von ihm Verschiedenes. Denn Menschen gibt es, nicht weil es etwas vom Menschen Verschiedenes gibt, das über seine eigene Natur hinaus noch die Eigenschaft hat, Mensch zu sein, sondern weil es Dinge gibt, die Menschen sind, und nichts Mensch ist, was nicht auf Grund seiner eigenen Natur Mensch ist.
  Diese Konstruktion hat den Fehler, daß sich "Verschiedenes" in "in bezug auf etwas von ihm Verschiedenes" im Fall der Verschiedenheit auf die Form des Verschiedenen, im Fall des Seienden aber nicht auf die Form des Seienden, sondern auf die Dinge, die den Argumenten von "... ist ..." zugeordnet sind, bezieht. Bezieht man aber, "Verschiedenes" im Fall des Seienden genauso wie beim Verschiedenen, so unterscheidet sich die Form des Seienden wieder in nichts von der Form des Verschiedenen.
  Da sich diese Interpretation nun sowieso nicht empfiehlt, wird man auch in 255d7 "ἑτέρου" statt "πρὸς ἕτερον" beibehalten. Das aber zwingt uns dazu, "πρὸς ἕτερον" in 255d5-6 und in d1 wie "ἑτέρου" in 255d7 zu verstehen; dann aber müßte es besondere Gründe geben, "πρὸς ἄλλα" in 255c13 nicht so aufzufassen. Damit wäre auch der Ausgangspunkt der Interpretation, daß sich "ἄλλα" nicht auf die Ergänzungen, sondern auf die Subjekte von Prädikaten bezieht, hinfällig.
  실제로 플라톤이 그러한 구분을 했다는 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ap. Simpl. in phys. 99, 25ff.) 와 『분할』  (Diog. L. III, 108-109) 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방식의 해석 각각은 저마다 다른 설득력을 지닌다. 형상들 일반의 기능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플라톤적 형상들의 기능을 속성들에게 요청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다음을 참조하라: Ar. Met. A 1070a13ff. und Procl. in Parm. I, 888, 36ff.). 하지만 그 해석들은 성취해야 할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즉 the Being 과 the Different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 논증은 이하와 같은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다른 모든 것은 그것과 다른 것인 무언가와 관련하여 다름이다(255d6-7); 혹은 역으로: 다름은 언제나 그것과 다른 것인 어떤 것에 관련하여 진술된다(255d1).
  반대로 있는 모든 것이 그것과 다른 것인 어떤 것에 관련하여 being 이지는 않다. 인간은, 인간과 다른 것인, 인간이기 위해 그 고유한 본성을 제외한 특성을 지니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사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유한 본성을 토대로 인간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인간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는, "그것과 다른 것인 무언가와 관련하여" 에서 "다른 것" 이 다름의 경우에는 다른 것이라는 형상에 관련하지만, Being 의 경우에는 Being 의 형상에 관련하지 않고, 오히려 "... is ..." 의 변항들에 해당하는 사물들에 관련한다는 오류를 지닌다. 그러나 관련한다면, Being 의 경우에서 "다른 것" 이 다른 것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이고, 그럼 Being 의 형상은 다시 다른 것이란 형상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
  이런 해석이 어쨌든 바람직하지 않기에, 다시 255d7 에서 "πρὸς ἕτερον" 대신 "ἑτέρου" 가 견지된다. 하지만 그 일은 255d5-6 과 d1 에서의 "πρὸς ἕτερον" 을 255d7 에서의 "ἑτέρου" 처럼 이해할 것을 강요한다; 허나 그러면 255c13 에서의 "πρὸς ἄλλα" 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을 특별한 이유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 점에서 다시 "ἄλλα" 가 보어가 아니라 술어에 대한 주어와 관련한다는 그 해석의 출발점은 부적절하게 될 것이다.
- 22 - So bleibt also die zweite Möglichketi, daß mit "ἄλλα" die Gegenstände gemeint sind, mit Hinsicht auf welche Prädikate von Gegenständen ausgesagt werden, die verschieden von den ersten Gegenständen sind.
  Nimmt man nun "πρὸς ἄλλα" nicht strikt, dann erhalten wir eine verbreitet Interpretation der Stelle (vertreten u.a. von : Wilamowitz, Platon I, S. 568, Shorez, Cl.Ph. 1930, S. 80, Cornford, P T K, S. 282, Ross. P T I, S. 114, Cherniss, A C P A, S. 283 n 191, Owen, J H S, 1957, S. 107 n 25, Xenakis, Phronesis IV, 1959, S. 33, Lacez C Q NS IX, 1959, S. 49 n 1), wonach hier absolute von relativen Prädikaten unterschieden werden.
  그러면 두 번째 가능성이 남는다. "ἄλλα" 는 대상들을 의미하고, 어떤 술어에 관련한 측면에서 대상들에 대해 진술되고, 그 대상들은 첫 번째 대상들과 다르다.
  이제 "πρὸς ἄλλα" 를 제한적으로 취하지 말자. 그러면  해당 장에 대한 잘 알려진 해석을 얻는다(이하의 사람들을 포함한 다수가 표현한다 : Wilamowitz, Platon I, S. 568, Shorez, Cl.Ph. 1930, S. 80, Cornford, P T K, S. 282, Ross. P T I, S. 114, Cherniss, A C P A, S. 283 n 191, Owen, J H S, 1957, S. 107 n 25, Xenakis, Phronesis IV, 1959, S. 33, Lacez C Q NS IX, 1959, S. 49 n 1). 그 해석에 따라 여기에서 절대 술어와 상대 술어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진다.
  Diese Interpretation mag auch der Variante zugrunde liegen, die sich in B und Y und vielleicht sogar bei Simplicius (in Cat. 159, 17) findet und die noch von Campbell, Wohlrab, Apelt (Beiträge, S. 193) und zuletzt sogar noch von Peck (C Q NS II, 1952, S. 48) gelesen worden ist: "πρὸς ἄλληλα" anstelle von "πρὸς ἄλλα" in 255c13. Eine solche Unterscheidung von absoluten und relativen Begriffen wird nämlich im Parmenides mit folgenden Worten eingeführt: "οὐκοῦν καὶ ὅσαι τῶν ἰδεῶν πρὸς άλλήλας εἰσὶν αἵ εἰσιν" (133c9-10; cf. Ar. Cat. 6b28, 11b33). Doch verstößt eine solche Interpretation von 255c12-13 gegen (3).
  이러한 해석은 또한 다양한 해석들의 기초가 된다. B 판과 Y 판에서 그리고 심플리키우스에 의해 발견되고 다음으로 캠벨, 볼라브, 아펠트에 의해, 그리고 끝으로 펙에 의해 독해된 해석들. 255c13 에서 "πρὸς ἄλλα" 대신 "πρὸς ἄλληλα" 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절대와 상대 개념의 구분은 말하자면 파르메니데스에 있어서 이하의 문장으로 도입된다: "형상들 중 서로를 향한 것들 모두 또한 그것들(형상들)이다" (133c9-10; cf. Ar. Cat. 6b28, 11b33). 그렇지만 그러한 255c12-13 해석은 '3.' 을 위반한다.
  Versucht man sie dadurch zu modifizieren, daß man "πρὸς ἄλλα" strikt versteht, dann wird sie entweder mit (1) oder den eigenen Voraussetzungen unverträglich. Denn entweder erhalten wir keine vollständige Disjunktion mehr, oder wir müssen eine ad hoc Beschränkung der Klasse A der Prädikate einführen, die durch nichts im Text gerechtfertigt wird. A kann nämlich nicht mehr die Klasse aller Prädikate sein, sondern muß die Menge aller absoluten und aller πρὸς ἕτερα-Prädikate im strengen Sinn sein.
  다음을 통해 수정을 시도해 보자. "πρὸς ἄλλα" 가 제한적으로 이해된다면, 그 해석은 '1.' 이나 고유한 전제들과 충돌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적으로 어떤 완전한 선언지도 얻지 못하거나, 아니면 술어 부류 A 에 대한, 문헌상으로 전혀 정당화되지 않는 즉흥적 제한을 도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A 는 말하자면 단순히 모든 술어의 부류일 수 없고, 오히려 엄격한 의미에서 모든 절대 술어와 모든 πρὸς ἕτερα 술어의 무리여야만 한다.
  Nimmt man dazu an, daß den beiden Klassen von Prädikaten zwei Bedeutungen von "... ist" entsprechen, dann wird die Interpretation noch in einem anderen Sinn mit (1) unverträglich. Denn, wenn das Prädikat "... ist" ein Element von A ist, dann darf es nicht - wie hier angenommen wird - sowohl ein Element von A1 als auch von A2 sein.
  (Wenn "ἀεὶ" mit zur Bestimmung der Prädikate der zweiten Klasse gerechnet wird, d.h. nur auf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 λέγεσθαι" bezogen wird, dann ist völlig unabhängig von (1) klar, daß "... ist" nicht sowohl Element von A1 als auch von A2 sein kann; denn, wäre es Element von A2, könnte es nach Definition von A2 nicht Element von A1 sein.)
  Nehmen wir dagegen an, daß "... ist" nur zur ersten Klasse gehört, dann wird die Argumentation in 255d3-7, vor allem die Bemerkung, daß das Seiende an beiden Formen, das Verschiedene dagegen nur an einer von beiden teilhat, unverständlich. Es kann sich also nicht um eine Einteilung in absolute und πρὸς ἄλλα-Prädikate handeln, ganz gleich, ob "πρὸς ἄλλα" strikt genommen wird oder nicht.
  이하를 가정해 보자. 술어의 양쪽 부류에 "... is" 의 두 가지 의미가 부합한다고. 그러면 그 해석은 또 다른 의미에서 '1.' 과 부딪친다. 왜냐하면, "... is" 라는 술어가 A 의 원소일 경우, 아마도 그것은 - 여기에서 가정되듯 - A1 의 원소이자 또한 A2 의 원소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ἀεὶ" 로 두 번째 부류의 술어에 대한 규정이 정당화된다면, 즉, 단지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 λέγεσθαι" 에만 관련된다면, "... is" 가 A1 뿐만 아니라 A2 에 대해서도 원소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은 '1.' 과 전적으로 무관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A2 의 원소라면, 정의상 그것은 A1 에 대해서가 아니라 A2 에 대해 원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정해 보자. "... is" 가 단지 첫 번째 부류에만 속한다고. 그러면 255d3-7 에서의 논증은, 특히 the Being 이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하는 반면, the Different 는 양쪽 형상들 중 한쪽에만 참여한다는 언급은 불가해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절대 술어와 πρὸς ἄλλα 술어의 분류에 관련된 것일 수 없고, "πρὸς ἄλλα" 가 제한적으로 취해지든 그렇지 않든 아무 상관이 없다.
- 23 - Man könnte sich versucht fühlen, diese Interpretation dadurch zu retten, daß man unter den αὐτὰ καθ᾿ αὑτὰ λεγόμενα nicht absolute Prädikate versteht, sondern "αὐτὰ καθ᾿ αὑτά" entsprechend zu "πρὸς ἄλλα" so auffaßt, daß diese Prädikate von Gegenständen in bezug auf Gegenstände ausgesagt werden, die von den ersten Gegenständen nicht verschieden sind. Das aber ist sprachlich nicht möglich, da sich "αὐτὰ" in "αὐτὰ καθ᾿ αὑτά" auf die den Prädikaten zugeordneten Gegenstände, nicht aber wie bei "πρὸς ἄλλα" auf die den Ergänzungen zugeordneten Gegenstände beziehen muß.
  이 해석이, αὐτὰ καθ᾿ αὑτὰ λεγόμενα 하에서 절대 술어로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αὐτὰ καθ᾿ αὑτά" 가 "πρὸς ἄλλα" 에 부합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된다는 점, 대상들에 대한 이러한 술어들이 대상들과 관련하여 진술되고, 그 대상들은 첫 번째 대상들과 다르다는 것을 통해, 구제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데,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에서  "αὐτὰ" 가 술어들에 부합하는 대상들에 관련해야만 하는 반면, "πρὸς ἄλλα" 의 경우처럼 보어들에 부합하는 대상들에 관련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ine Schwäche haben alle Interpretationen dieser Art gemeinsam : es ist zwar richtig, daß die Dinge, die von etwas ausgesagt werden können, für Platon seiend sein müssen; in diesem Zusammenhang aber ist nach dieser Interpretation das "τῶν ὄντων" in 255c12 völlig überflüssig, denn es könnte genauso gut heißen: "...συγχωρεῖν τὰ μὲν αὐτὰ καθ᾿ αὑτὰ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 Doch nichts liegt näher als die Annahme, daß hier, wo der Unterschied zwischen dem Seienden und dem Verschiedenen gezeigt werden soll, das "τῶν ὄντων" nicht ohne Bedeutung sein kann, zumal es dem "τὸ ... ἕτερον" in 255d1 zu entsprechen scheint.
  Die Annahme also, daß hier die möglichen Prädikate in zwei Klassen aufgeteilt werden, hat uns nicht weitergeführt. 
  이런 식의 해석은 모두 공통적으로 한 가지 약점을 지닌다 : 어떤 것에 대해 진술될 수 있는 사물들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being 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확실히 맞다; 하지만 이러한 문맥에서 이 해석에 따르면 255c12 의 "τῶν ὄντων" 은 전적으로 부차적인데, 이하가 마찬가지로 승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συγχωρεῖν τὰ μὲν αὐτὰ καθ᾿ αὑτὰ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또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에 대해 언제나 진술된다". 그렇지만 어떤 것도, the Being 과 the Different 구분이 제시되어야 하는 여기에서 "τῶν ὄντων" 이, 특히 255d1 의 "τὸ ... ἕτερον" 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정확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능한 술어들이 두 부류로 분류된다는 가정은 더 이상 견지되지 않는다.

  (B) Bezieht man nun "τῶν ὄντων" auf die möglichen Gegenstände von Aussagen, "τὰ μὲν ... τὰ δὲ ..." aber auf das, was von diesen Gegenständen ausgesagt werden kann, ergeben sich die gleichen Interpretationsmöglichkeiten wir unter (A) und damit auch die gleichen Einwände (mit kleinen Abweichungen natürlich; so müßte hier gefragt werden, warum die möglichen Gegenstände von Aussagen mit "τῶν ὄντων" bezeichnet werden, ja warum sie überhaupt erwähnt werden).
  (B) 이제 "τῶν ὄντων" 이 진술들의 가능한 대상들에 관련하는 반면,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는 이러한 대상들에 대해 진술될 수 있는 것에 관련한다면, (A) 하에서와 유사한 해석가능성들과 유사한 반론들이 나타난다 (사소한 문제들은 당연하다; 그래서 여기에서 물어야만 하는 것은, 어째서 "τῶν ὄντων" 이 진술들에 대한 가능한 대상들을 가리키는지, 그럼 도대체 왜 그것들이 언급되는지 하는 것이다).

  (C) Es bleibt also die Möglichkeit,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auf die Gesamtheit der Gegenstände überhaupt zu beziehen, von denen dann irgend etwas gesagt wird.  
  (C) 남은 가능성은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이 대상 일반의 총체에 관련하는 것이다. 

  Nach einer Klasse von Interpretationen bezieht sich nun "αὐτὰ καθ᾿ αὑτά" und "πρὸς ἄλλα" auf das, was von diesen Dingen ausgesagt wird. Man würde also den relevanten Teil von 255c12-13 so wiedergeben : "von einem Teil der Dinge, die sind, wird gesagt, daß sie αὐτὰ καθ᾿ αὑτά sind, von dem anderen Teil, daß sie πρὸς ἄλλα sind" (so etwa Taylor, S S, S. 161) oder, "von den Dingen, die sind, wird gesagt, daß die einen αὐτὰ καθ᾿ αὑτά, die anderen aber πρὸς ἄλλα sind" (so etwa Moravcsik, B M S, S. 54).
  Demnach gäbe 255c12-13 eine allgemeine Meinung über die ὄντα wieder, die dann im folgenden ohne weitere Begründung oder Kritik als Ausgangspunkt für das Argument genommen wird (das wird besonders deutlich bei Moravcsik, a.a.O., der übersetzt: "of beings we always say ..."). Ein Beispiel für eine solche Interpretation findet sich - 24 - bei Runciman (P.L.E., 88 n 1): "He is drawing a distinction between kinds of things that are ... in order to show that Being, which covers both, must be non-identical with Difference, which covers only one."
  한 종류의 해석에 따르면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와  "πρὸς ἄλλα" 는 이러한 사물들에 대해 진술되는 것에 관련한다. 그러므로 255c12-13 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이 재해석될 것이다 : "존재하는 사물들의 일부에 대하여 그것들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존재한다고, 다른 일부에 대하여서는, 그것들이 πρὸς ἄλλα 존재한다고 진술된다.(Taylor)" 혹은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한편으로는 αὐτὰ καθ᾿ αὑτά, 다른 한편으로는 πρὸς ἄλλα 존재한다고 진술된다.(Moravcsik)"
  그에 따라 255c12-13 은 ὄντα 에 일반개념을 부여할 것이고, 그것들은 이하에서 추가적인 추론이나 비판 없이 논증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특히 Moravcsik 의 해석에서 두드러진다: "of beings we always say ..."). 그러한 해석의 일례는 Runciman 에게서 발견된다. : "그는 오직 한쪽만을 포함하는 Difference 와 비-동일적이어야만 하는,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Being 을 보이기 위해 ... 존재하는 사물들의 종류들 사이에 구분을 짓고 있다."
  Der Hauptmangel einer solchen Auffassung scheint mir darin zu liegen, daß πρὸς ἄλλα und αὐτὰ καθ᾿ αὑτά, wenn man die Übersetzungen wörtlich nimmt, wie Eigenschaften von Dingen behandelt werden, für die sogar Formen angenommen werden (so bei Campbell, Cornford, Moravcsik und Runciman). Was das für Eigenschaften sein sollen, ist völlig unklar, und es lassen sich auch keine weiteren Beispiele für einen solchen Gebrauch von "πρὸς ἄλλα" oder "αὐτὰ καθ᾿ αὑτά" anführen. πρὸς ἄλλο und αὐτὸ καθ᾿ αὑτό bezeichnen die Art und Weise, in der ein Prädikat von einem Gegenstand ausgesagt wird, bzw. in der eine Eigenschaft einem Gegenstand zukommt. Wenn z.B. von Formen gesagt wird, daß sie αὐτὰ καθ᾿ αὑτά sind, dann bezeichnet "αὐτὰ καθ᾿ αὑτά" nicht irgendeine Eigenschaft der Formen, sondern gibt die Art und Weise an, in der sie sind. (Insofern die vorgeschlagenen Übersetzungen durch Betonung von "sind" auch eine solche Interpretation zulassen, werden sie später behandelt.)
  그러한 해석의 표면적 문제는 다음의 지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πρὸς ἄλλα 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가, 그 번역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사물들의 속성들이 취급되는 것처럼, 형상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가정된다는 점이다 (Campbell, Cornford, Moravcsik, Runciman 에게서 그러하듯). 무엇이 속성들에 대한 것이어야 할는지는 전적으로 불명하고, "πρὸς ἄλλα" 나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의 그러한 용법에 대해 아무런 추가적 예시도 예화하지 않는다. "πρὸς ἄλλα" 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는 대상들에 대해 술어가 진술되는 기술과 방식을 가리킬 것이다. 추정컨데, 그 방식으로 속성이 대상으로 된다. 예를 들어 형상들에 대해 그것들이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존재한다고 진술된다면, "αὐτὰ καθ᾿ αὑτά" 는 형상들의 일부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는 그 기술이나 방식을 표현한다. ("is" 에 대한 강조를 통해 또한 그러한 해석이 제안된 번역들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그 번역들이 다음으로 다루어진다.)
  Es ist auch unklar, wie man bei einer solchen Interpretation von 255c12-13 den folgenden Beweis verstehen sollte. Folgende Möglichkeit scheint sich anzubieten:
  Das Verschiedene ist πρὸς ἄλλο und gehört so zur zweiten Klasse von Dingen, das Seiende dagegen ist αὐτὸ καθ᾿ αὑτό und gehört zur ersten Klasse (vgl. Burnet, Greek Philosophy, S. 285: "Other is essentially relative and Being is absolute"). Bei einer solchen Interpretation wird der Form des Seienden offensichtlich nur ein Gebrauch von "... ist" zugeordnet, nämlich "... ist" im Sinn von "existiert"; das jedenfalls scheint gemeint zu sein, wenn vom Seienden im Gegensatz zum Verschiedenen gesagt wird, daß es absolut ist. Denn als Form ist das Verschiedene genauso für sich bestehend wie das Seiende. Wie soll man nun aber die Bemerkung verstehen, daß das Seiende im Gegensatz zum Verschiedenen an beiden Formen teilhat, von denen 255d4-5 die Rede ist?
  Da das Verschiedene und ebenso alle anderen Relativa genauso seiend sind wie das Seiende und die anderen Elemente der ersten Klasse, umfaßt das Seiende sowohl die Elemente der ersten wie auch die der zweiten Klasse. Das, was ist, hat sowohl an der Form des αὐτὸ καθ᾿ αὑτό als auch an der Form des πρὸς ἄλλο teil.
  Diese Interpretation scheitert einfach deshalb, weil sich das Seiende darin gar nicht vom Verschiedenen unterscheidet. Denn da das Seiende koextensiv mit dem Verschiedenen ist, muß natürlich auch gelten: "das, was verschieden ist, hat sowohl an der Form des αὐτὸ καθ᾿ αὑτό als auch an der des πρὸς ἕτερον teil"
  255c12-13 에 대한 그러한 해석에서 뒤따르는 논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역시 불명하다. 다음의 가능성이 제시되는 것으로 보인다:
  The Different 는 πρὸς ἄλλο 존재하고 그래서 사물들의 두 번째 부류에 속하며, the Being 은 반대로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존재하고 첫 번째 부류에 속한다 (Burnet, "다름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고 Being은 절대적이다"). 그러한 해석에 의해 Being 의 형상은 명백히 "... is" 의 한 용법, "현존하다" 라는 의미의 용법에 해당하게 된다; the Being 에 대해 the Different 와 반대로 진술될 경우, it absolutely is 라는 것은 어쨌든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the Different 가 the Being 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 형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 the Being 이 the Different 와 대조적으로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한다는 255d4-5 에 대한 독해인 그 언급은 이제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The Different 와 또한 여타 모든 상대적인 것들은 the Being 과 첫 번째 부류의 여타 원소들과 마찬가지로 being 이기에, the Being 은 첫 번째 부류의 원소들뿐만 아니라 두 번째 부류의 원소들도 포함한다. 존재하는 바의 것은 αὐτὸ καθ᾿ αὑτό 형상에도 πρὸς ἄλλο 형상에도 참여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런 이유로 쉽사리 오도하는데, the Being 이 그 경우 the Different 와 전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the Being 이 the Different 와 동연이고, 자연히 이하로 여겨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른 바의 것은 αὐτὸ καθ᾿ αὑτό 형상에도 πρὸς ἄλλο 형상에도 참여한다."
- 25- Man kann versuchen, das durch einen kleinen Zusatz zu vermeiden: "das, was verschieden ist, hat qua verschieden, nur an der Form des πρὸς ἕτερον teil". Leider gilt dann aber auch für das Seiende nach Voraussetzung ("das Seiende ist αὐτὸ καθ᾿ αὑτό"): "das, was ist, hat qua seiend, nur an der Form des αὐτὸ καθ᾿ αὑτό teil". Damit ist aber wieder völlig unklar, was gemeint ist, wenn gesagt wird, daß das Seiende an jenen beiden Formen teilhat.
  Wenn es nun sachlich nicht möglich ist, "πρὸς ἄλλα" und "αὐτὰ καθ᾿ αὑτά" als Prädikate aufzufassen, was auch sprachlich sehr hart wäre, dann scheinen wir in die etwas unglückliche Lage zu kommen, irgendwelche Prädikate ergänzen zu müssen.
  사소한 추가를 통해 회피하는 일을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바의 것은 다른 것으로서 πρὸς ἕτερον 형상에 참여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the Being 에 대해서도 전제("The Being 은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이다")에 따라 마찬가지이다: "있는 바의 것은 있는 것으로서 αὐτὸ καθ᾿ αὑτό 형상에 참여한다". 허나 이 점에서 다시금 the Being 이 양쪽 형상 각각에 참여한다고 진술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전적으로 불명하다.
  "πρὸς ἄλλα" 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를 술어로 이해하는 일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경우, 어떤 술어든 보충을 해야만 하는 곤란한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는 점만은 말 그대로 확실할 것이다.
  Eine Form dieser Interpretation ist Cornfords. Er übersetzt:
"... among things that exist, some are always spoken of as being what they are just in themselves, others as being what they are with reference to other things" und sagt zu der Stelle (S. 282):
"Difference is here distinguished from Existence by the fact that Existence blends with (`partakes of`) both the characters belonging respectively to things which `are what they are just themselves`(καθ᾿ αὑτά) and things which `are what they are with reference to other things`(πρὸς ἄλλα)."
Was er mit "... Existence blends with - both the characters ..." meint, geht aus seinen Ausführungen über die Mischung von Formen hervor (S. 271). Wenn sich etwa die Form Lebewesen mit der Form Zweifüßigkeit mischt, dann hat die Klasse der Lebewesen L eine Unterklasse L1, die alle zweibeinigen Lebewesen umfaßt. Angenommen nun, L und L1 sind nicht leer, dann gilt also, wenn Lebewesen und Zweibeinigkeit sich mischen:
(1) "ein Teil der Lebewesen sind Zweibeiner".
Wenn sich also die Form des Seienden mit den Formen καθ᾿ αὑτά und πρὸς ἄλλα mischt, dann müßte gelten:
(2) "ein Teil dessen, was ist, ist καθ᾿ αὑτά".
(3) "ein Teil dessen, was ist, ist πρὸς ἄλλο".
  이러한 해석의 한 형태는 콘포드의 해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 존재하는 사물들 중에서, 일부는 언제나 그것들 자체로 그것들인 바의 것으로 있는 것(being)으로서 진술되고, 다른 것들은 또 다른 사물들에 관련하여 그것들인 바의 것으로 있는 것으로서 진술된다" 그리고 그 장에서 말한다(282쪽.):
"다름은 여기에서 현존과 구분된다. 현존은 '단지 그 자체로(καθ᾿ αὑτά) 그것들인 바의 것들인' 사물들에 그리고 '다른 사물들에 관련하여(πρὸς ἄλλα) 그것들인 바의 것들인' 사물들에 각기 속하는 양쪽 특성 모두와 섞인다('~에 참여한다')."
그가 "... 현존은 양쪽 특성 모두와 섞인다 ..." 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형상들의 섞임에 대한 그의 언급들로부터 나온다(271쪽.). 생물이라는 형상이 두발달림이라는 형상과 섞인다면, 생물이라는 유 L은 하위 유 L1 을 가진다. 그 하위류는 모든 두발달린 생물을 포함한다. 이제 L 과 L1 이 공집합이 아니라 가정하면, 생물과 두발달림이 섞일 경우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1) "생물의 일부는 두발달림이다"
그러므로 the Being 형상이 καθ᾿ αὑτά 그리고 πρὸς ἄλλα 형상들과 섞일 경우, 다음과 같아야만 한다:
(2) "존재하는 바의 것의 일부는 καθ᾿ αὑτά 로 존재한다".
(3) "존재하는 바의 것의 일부는 πρὸς ἄλλα 로 존재한다".
  Cornford allerdings formuliert in seiner Übersetzung anders, nach seiner Übersetzung müßten (2) und (3) wie folgt lauten:
(2`)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αὐτὸ καθ᾿ αὑτό" und
(3`)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πρὸς ἄλλο".
Der Grund für diese Umformulierung ist nicht schwer zu finden; denn mit (2) und (3) erhielten wir wieder eine der Interpretationen, wonach καθ᾿ αὑτό und πρὸς ἄλλο Eigenschaften von Gegenständen sind, die aber unzureichend wäre, weil die (2) und (3) entsprechenden Sätze für das Verschiedene ebenfalls gelten müssen, da das Seiende und das Verschiedene koextensiv sind.
  콘포드는 그의 번역에서 다른 식으로 정식화한다. 그의 번역에 따라 (2) 와 (3) 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2') 존재하는 바의 것의 일부는 존재하는 바의 것인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이다" 그리고
(3') 존재하는 바의 것의 일부는 존재하는 바의 것인 πρὸς ἄλλο 이다".
이러한 재진술에 대한 근거는 찾기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2) 와 (3) 으로 우리는 다시 καθ᾿ αὑτό 와 πρὸς ἄλλο 가 대상들의 속성들인 그런 해석을 얻었지만, the Being 과 the Different 가 동연이기에 (2) 와 (3) 에 해당하는 문장들이 the Different 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만하기 때문에, 그 해석은 불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 26 - Nun gilt nach 255d6-7:
(4) "alles, was verschieden ist, ist das, was es ist, πρὸς ἄλλο".
    Folglich gilt nicht:
(5) "ein Teil dessen, was verschieden ist, ist das, was es ist, αὐτὸ καθ᾿ αὑτό".
  Um nun den Kontrast zwischen dem Seienden und dem Verschiedenen zu erreichen, führt Cornford unter Hinweis auf 255d6-7 (S. 281 n 1) in die Übersetzung von 255c12-13 etwas ein, dem nichts im Text entspricht, nämlich "being what they are". Genau dieser Zusatz macht den Unterschied zwischen (2) und (3) einerseits und (2`) und (3`) andererseits aus.
  Was ist nun mit diesem Zusatz "... ist das, was es ist ..." in 255d7 gemeint?
  이제 255d6-7 에 따라 다음과 같다:
(4) "다른 바의 모든 것은 그것인 바 πρὸς ἄλλο 이다".
   따라서 다음은 아니다:
(5) "다른 바의 것의 일부는 그것인 바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이다."
  이제 the Being 과 the Different 사이의 대조를 얻기 위해, 콘포드는 255d6-7 과의 연관 속에서 255c12-13 에 대한 해석에서 문헌상 전혀 부합하지 않는 무언가, 즉 "being what they are" 를 집어 넣는다. 정확히 이러한 추가가 한편으로는 (2) 와 (3) 사이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2') 와 (3') 사이의 구분을 만들어낸다.
  이제 255d7 에 "... 그것인 바의 것이다 ..." 라는 이 추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Der Mensch z.B. ist verschieden vom Tisch. Als Verschiedener also ist er das, was er ist, von etwas anderem. Nun kann sich das "... ist ... das, was er ist, ..." nicht auf sein Menschsein, sondern nur auf sein Verschiedensein beziehen. Folglich ließe sich (4) auch so formulieren:
(4`) "alles, was verschieden ist, ist das, was es ist, nämlich verschieden, πρὸς ἄλλο".
  Entsprechend müßte dann aber auch "... ist das, was es ist ..." in (2`) und (3`) als "... ist das, was es ist, nämlich seiend ..." verstanden werden. Hier aber versteht das Cornford plötzlich ganz anders, nämlich etwa so: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z.B. Mensch, αὐτὸ καθ᾿ αὑτό" und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z.B. Sklave, πρὸς ἄλλο".
  예를 들어 인간은 책상과 다르다. 그러므로 the Different 로서 그는 그인 바 무언가와 또 다른 것이다. 이제 "... is ... being what he is ..." 는 인간존재임에 관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임에 관련할 수 있다. 따라서 (4) 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시킨다:
(4') "다른 바의 것인 모든 것은 그것인 바 즉 다른 것인 바 πρὸς ἄλλο 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에 따라 (2') 와 (3') 에서 "... is being what it is ..." 또한 "... is being what it is, that is being ..." 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콘포드는 그것을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 즉 이런 어떤 것이다:
"있는 바의 것의 일부는 그것인 바 예를 들어 인간인 바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이다" 그리고
"있는 바의 것의 일부는 그것인 바 예를 들어 노예인 바 πρὸς ἄλλο 이다".
  Korrigiert man nun Cornford dahingehend, daß man in Parallele zu (4`) statt (2`) und (3`)
(2``)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nämlich seiend, αὐτὸ καθ᾿ αὑτό" und
(3``)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nämlich seiend, πρὸς ἄλλο" wählt,
dann erhält man für 255c12-13 die Schleiermachersche Version:
"... daß von dem Seienden einiges an und für sich und einiges nur in Beziehung auf anderes immer so genannt werde", "so", d.h. "seiend".
  (Eine MIttelstellung zwischen Cornford und Schleichermacher nimmt Apelt ein:
"... daß das Seiende immer teils als für sich bestehend, teils im Verhältnis des einen zum anderen beurteilt wird".)
  이제 콘포드는 (4) 에 견주어 (2') 와 (3') 대신
(2'') "있는 바의 것의 일부는 그것인 바 즉 being 인 바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이다" 그리고
(3'') "있는 바의 것의 일부는 그것인 바 즉 being 인 바 πρὸς ἄλλο 이다" 를 택한 것으로,
그리하여 쉴라이어마허 판 255c12-13 해석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쪽으로 수정한다.
"... the Being 에 대해 일부는 그 자체로 일부는 다른 것에 관련하여 언제나 그렇게 불린다", "그렇게" 는 "being"이다.
  (아펠트는 콘포드와 쉴라이어마허의 중간 입장을 취한다:
"... the Being 은 언제나 부분적으로는 그 자체로 현존하고, 부분적으로는 다른 것에 대한 것으로 상대적으로 판단된다".) 
  Das Verschiedene dagegen wird nach 255d1 immer nur in bezug auf etwas anderes so genannt.
  Demnach wäre also das, wovon etwas ausgesagt wird, die Gesamtheit dessen, was ist; das, was ausgesagt wird, das Sein dieser Dinge; - 27 - was schließlich damit gemeint ist, wenn gesagt wird, daß "... ist" πρὸς ἄλλο ausgesagt wird, davon haben wir auf Grund unserer Interpretation von 255d1-7 auch eine gewisse Vorstellung. Es bleibt also zunächst zu klären, was mit "... wird αὐτὸ καθ᾿ αὑτό `seiend´ genannt" gemeint sein soll.
  Daß "seiend" bzw. "ist" ganz für sich allein, d.h. ohne Ergänzung, ausgesagt werden kann, kann sicher nicht gemeint sein, da sich "αὐτὸ" nicht auf "seiend", sondern auf das, was "seiend" genannt wird, bezieht.
  반대로 the Different 는 255d1 에 따라 언제나 어떤 다른 것에 관련하여 그렇게 불린다.
  그에 따르면 무언가가 그에 대해 진술되는 바의 것은 존재하는 바의 것의 총체가 될 것이다; 진술되는 바의 것, 이런 사물들의 그 존재; "... is" πρὸς ἄλλο 가 진술된다는 것이 논의될 경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결국 무엇인지, 그에 대해 우리는 255d1-7 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근거하여 그에 대한 하나의 명확한 개념 또한 얻는다. 그러므로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 αὐτὸ καθ᾿ αὑτό 'being' 이라 불린다" 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being" 또는 "is" 가 전적으로 오직 그 자체로, 다시 말해 보어 없이 진술될 수 있다는 점은, "αὐτὸ" 가 "being" 이 아니라 "being" 이라 불리는 바의 것에 관련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다.
  "... wird an und für sich ´seiend´ genannt" dagegen ist eine richtige Wiedergabe, wenn damit gemeint ist, daß man sich nicht auf einen anderen Gegenstand b bezieht, mit Hinsicht auf den man von einem Gegenstand a sagt, daß er ist, sondern, daß man mit Hinsicht auf a selbst von a sagt, daß es ist. (Der Zusatz, "sondern, daß man mit Hinsicht ... ist" ist auf Grund unserer Interpretation von 255d1-7 notwendig.) Daß das aber gemeint sein muß, wenn "seiend", bzw. "ist" das zu ergänzende Prädikat ist, ergibt sich daraus, daß (a) "πρὸς ἄλλα" strikt zu verstehen ist und (b) "αὐτὰ καθ᾿ αὑτά" entsprechend zu "πρὸς ἄλλα" so interpretiert werden muß, daß wir eine vollständige Disjunktion erhalten.
  Wenn das aber gemeint sein muß, dann bieten sich anstelle von "an und für sich" für "αὐτὰ καθ᾿ αὑτά" zwei andere Übersetzungen an : "auf Grund seiner selbst" oder besser "mit Bezug auf es selbst".
  "... 그 자체로 'being' 이라 불린다" 라는 것은 반대로, 그 말이 어떤 다른 대상 b 에 관련하여, 그것과 관련한 측면에서 한 대상 a 에 대해 he is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 그 자체와 관련한 측면에서 a 에 대해 it is 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때 올바른 해석이다. ("오히려, ... 와 관련한 측면에서 is" 라는 추가는 255d1-7 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근거하여 필연적이다.) 하지만 "being" 달리 말하면 "is" 가 보어를 취하는 술어일 경우를 의미해야만 한다는 것은 (a) "πρὸς ἄλλα" 를 제한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b) "αὐτὰ καθ᾿ αὑτά" 가 "πρὸς ἄλλα" 에 부합하는 것으로, 그래서 우리가 완전 선언지를 확보하게끔 그렇게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 의미여야만 할 경우,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에 대해 "그 자체로" 대신 두 가지 상이한 번역들이 주어진다. "그 자체에 근거하여" 아니면 오히려 "그 자체에 관련하여".
  Der relevante Teil von 255c12-13 könnte dann vorläufig (ich lasse "ἀεὶ" noch unbeachtet) wie folgt übersetzt werden:
"von dem, was ist, wird das eine in bezug auf es selbst, das andere in bezug auf ein anderes seiend genannt".
  Bevor wir aber diese Übersetzung weiter präzisieren und interpretieren können, müssen zwei Dinge sichergestellt werden:
  1. "τὸ δέ γ᾿ ἕτερον ἀεὶ πρὸς ἕτερον" kann mit "das Verschiedene wird immer mit Bezug auf etwas anderes verschieden genannt" und entsprechend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αὐτὰ καθ᾿ αὑτά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 mit "von dem, was ist, wird das eine ... seiend genannt" übersetzt werden;
  2. "αὐτὰ καθ᾿ αὑτά" kann mit "in bezug auf es selbst" übersetzt werden.
  Beides, glaube ich, läßt sich mit Hilfe einer Aristotelesstelle aus περὶ ἐναντίων hinreichend zeigen.
  255c12-13 의 관련 구절은 그리하여 잠정적으로 ("ἀεὶ" 를 고려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what is 에 대하여 한편의 것은 그 자체에 관련하여, 다른 편의 것은 또 다른 것에 관련하여 being 이라 불린다".
  우리가 이러한 번역을 더욱 구체화하고 해석할 수 있기에 앞서, 두 가지 사항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1. "τὸ δέ γ᾿ ἕτερον ἀεὶ πρὸς ἕτερον" 라는 말이 "the Different 는 언제나 또 다른 무언가에 관련하여 different 라고 불린다" 라고 또 그에 맞추어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αὐτὰ καθ᾿ αὑτά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 는 "what is 에 대해 한 편의 것은 ... being 이라 불린다" 라고 번역될 수 있다;
  2. "αὐτὰ καθ᾿ αὑτά" 는 "그것 자체에 관련하여" 라고 번역될 수 있다.
  내 생각에 양편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περὶ ἐναντίων (반대되는 것들에 대하여) 을 통해 충분히 드러난다.
  Dort heißt es (Ross. fr. 2, 11.10-13) : "εἰ δὲ καὶ ταῦτα ἐναντία, φησί, διττῶς ῥηθήσεται τὸ ἐναντίον· ἢ γὰρ καθ᾿ αὑτὰ τὰ ἐναντία ῥηθήσεται, οἷον - 28 - ἀρετὴ καὶ κακία, κίνησις καὶ στάσις, ἢ τῷ μετέχειν ἐναντίων, οἷον τὸ κινούμενον τῷ ἑστηκότι ..."
  Dieser Satz könnte auch wie folgt formuliert sein : "... διττῶς ῥηθήσεται τὸ ἐναντίον· τῶν γὰρ ἐναντίων τὰ μὲν αὐτὰ καθ᾿ αὑτά ῥηθήσεται, οἷον ..., τὰ δὲ τῷ μετέχειν ἐναντίων, οἷον ..."
  Von Ross wird er übersetzt mit:
"... `contrary´ will be used in two senses; it will be applied either with reference to contraries themselves, like virtue and vice, movement and rest, or to things by virtue of a sharing in contraries, e.g. to that which moves and that which rests, or to the good and the bad."
  거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Ross. fr. 2, 11.10-13) : "만일 이것들도 반대되는 것들이라면, 반대되는 것은 두 가지로 이야기될 것이다: 즉 그 자체로 반대되는 것들이라 이야기될 것이거나, 예를 들어 덕과 악덕, 운동과 정지처럼, 아니면 반대되는 것들에 참여하는 측면에서, 예를 들어 움직이는 것이 정지해있는 것과 ..."
  이러한 명제들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 "... 반대되는 것은 두 가지로 이야기될 것이다: 즉 반대되는 것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 이야기될 것이고, 예를 들어 ..., 다른 일부는 반대되는 것들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예를 들어 ..."
  로스에 의하면 이렇게 번역된다.
  "... '반대' 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것이다; 그것은 반대항들 그 자체, 덕과 악덕, 운동과 정지 같은 것들을 지시하는 데에, 또는  반대항들에 참여를 통한 사물들, 예를 들어 운동하고 있는 것과 정지하고 있는 것, 혹은 좋은 것과 나쁜 것에 적용될 것이다." 
  Das ist zwar etwa das, was gemeint ist, aber für unsere Bedürfnisse nicht genau genug:
"τὰ ἐναντία" in "καθ᾿ αὑτὰ τὰ ἐναντία ῥηθήσεται" bezieht sich, wie "οἷον - 28 - ἀρετὴ καὶ κακία, ..." zeigt, auf die Menge der Gegensatzpaare, über die etwas ausgesagt wird, nämlich daß sie entweder in bezug auf sich selbst Gegensätze genannt werden (das gilt für die Gegensätze selbst wie Bewegung und Ruhe), oder aber, daß sie auf Grund ihrer Teilhabe an den Gegensätzen selbst Gegensätze genannt werden (z.B. das, was in Bewegung, und das, was in Ruhe ist).  
"ἢ γὰρ καθ᾿ αὑτὰ τὰ ἐναντία ῥηθήσεται, ... ἢ τῷ ...", das auch parallel zu 255c12-13 formuliert sein könnte, muß also übersetzt werden: "denn entweder werden die Gegensätze mit Bezug auf sie selbst Gegensätze genannt werden, oder ...". 
  그 의미가 그런 어떤 것이지만 우리에게 충분하진 못하다:
"καθ᾿ αὑτὰ τὰ ἐναντία ῥηθήσεται" 에서 "τὰ ἐναντία" 는 "οἷον ἀρετὴ καὶ κακία, ..." 같은 반대쌍들의 무리에 관련하여 무언가에 대해, 다시 말해 그 자체에 관련하여 반대들로 불리거나 (운동과 정지처럼 반대들 자체에 대해 그러하듯), 아니면 그것들의 반대들 자체에 대한 참여에 근거하여 반대들로 불린다 (예를 들어 운동 중에 있는 것과 정지 중에 있는 것). 255c12-13 과 일관되게 정식화될 수 있는 "ἢ γὰρ καθ᾿ αὑτὰ τὰ ἐναντία ῥηθήσεται, ... ἢ τῷ ..." 는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만 한다: "반대들은 그 자체에 관련하여 반대들로 불리게 되거나, 아니면 ...". 
  Damit wäre unsere Übersetzung von 255c12-13 auch sprachlich gerechtfertigt:
"Von dem Seienden wird das eine mit Bezug auf sich selbst, das andere mit Bezug auf etwas anderes seiend genannt."
  Nachträglich besehen, ist diese Übersetzung auch gar nicht so überraschend. Schon Cornford hat 255d1 so übersetzt, wie wir es tun: "and what is different is always so called with reference to another thing, isn`t it?" 
  그 점에서 255c12-13 에 대한 우리의 번역은 언어상으로 정당화될 것이다:
"The Being 에 대해 한편의 것은 그 자체에 관련하여, 다른 편의 것은 또 다른 무언가에 관련하여 being 이라 불린다."
  이어서 보자면, 이러한 번역은 또한 전혀 놀라울 것도 없다. 이미 콘포드는 255d1 을 우리처럼 번역했다. "그리고 what is different 는 언제나 또 다른 것과 관련하여 그렇게 불린다, 그렇지 않은가?"
  Nun ist 255c12-13 offensichtlich parallel zu 255d1 gebaut, da 255d1 immer noch direkt von "λέγεσθαι" und somit von "ἀλλ᾿ οἶμαι σε συγχωρεῖν" abhängig ist; dem "πρὸς ἕτερον" entspricht "πρὸς ἄλλα", dem "ἀεὶ" in 255d1 das "τὰ μὲν ... τὰ δὲ ...", dem "τὸ ... ἕτερον" entspricht aber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der Gegensatz schließlich zwischen dem, was für das Seiende gilt, und dem, was für das Verschiedene gilt, wird durch das "δέ γ᾿" in d1 ausgedrückt. Folglich ist es auch nur natürlich, wenn 255c12-13 entsprechend zu 255d1 übersetzt wird.
  이제 255c12-13 은 255d1 에 명백히 일관되게 구성된다. 255d1 은 여전히 "λέγεσθαι" 에 직접 의존하고 따라서 "ἀλλ᾿ οἶμαι σε συγχωρεῖν" 에 의존한다; "πρὸς ἕτερον" 은 "πρὸς ἄλλα" 에, 255d1 의 "ἀεὶ" 는 "τὰ μὲν ... τὰ δὲ ..." 에, 허나 "τὸ ... ἕτερον" 은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에 해당한다; the Being 에 해당하는 것과 the Different 에 해당하는 것 사이의 대조는 확실히 d1 에서 "δέ γ᾿" 를 통해 표현된다. 따라서, 255c12-13 이 255d1 에 부합하게 번역될 경우, 그것은 또한 자연스럽다.
  Nach unserer Übersetzung von 255c12-13 zu urteilen, werden hier Gegenstände in zwei Klassen aufgeteilt. Das gleiche gilt auch, wenn - 29 - man `Gegenstände` im weitesten Sinn nimmt, für die Aristotelesstelle. Das aber, was an der Aristotelesstelle wie die Beschreibung einer Zweiteilung von Gegesntänden A aussieht, ist in Wirklichkeit, wie "... διττῶς ῥηθήσεται τὸ ἐναντίον· ... γὰρ ..." zeigt, als die Beschreibung der Zweiteilung von Verwendungen des entsprechenden Prädikates "A" auf Grund der Zweiteilung der Gegenstände A gedacht.
  우리의 255c12-13 번역에 따라 판단하자면, 여기에서 대상들이 두 부류로 분류된다. '대상들' 이 넓은 의미로 이해될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럴 듯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에서 대상들의 부류 A 에 대한 이분의 기술과 같은 것은 실제로 "... διττῶς ῥηθήσεται τὸ ἐναντίον· ... γὰρ ..." 가 보여주듯 대상들의 부류 A 의 이분에 근거한 상응하는 술어 "A" 의 용법들의 이분에 대한 기술로 생각된다. 
  Wenden wir das nun auf unsere Stelle im Sophistes an, dann fällt unsere Interpretation von 255c12-13 mit der von 255d1-7 zusammen. 255c12-13 läuft dann nämlich auf folgendes hinaus:
"... ist" wird auf zweifache Weise verwendet:
  1. "... ist" wird von Dingen in bezug auf sie selbst ausgesagt (= (III`)).
  2. "... ist" wird von Dingen in bezug auf etwas von ihnen Verschiedenes ausgesagt (= (II)).
  Um welche beiden Klassen von Gegenständen es sich handelt, und wie "ἀεὶ" zu beziehen ist, wird sich im folgenden herausstellen, wenn wir die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näher untersuchen.
  Auf eine wichtige Folgerung aus dieser Interpretation sei aber schon hier aufmerksam gemacht. "x ist" muß in jeder Verwendung, in der mit "ist" auf die Form des Seienden Bezug genommen wird, durch "y" ergänzt werden. Selbst in den Fällen, wo das sprachlich nicht notwendig sein sollte, muß "y" wenigstens mitverstanden werden.
  이제 우리가 『소피스트』 에서 다루는 장에 그것을 적용하면, 255c12-13 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255d1-7 에 대한 해석과 일치한다. 255c12-13 은 다시 말해 다음에 상응하게 된다:
"... is" 는 이중의 용법으로 사용된다:
  1. "... is" 는 사물들에 대해 그 사물들 자체에 관련하여 진술된다 (= (III')).
  2. "... is" 는 사물들에 대해 what is the Different from them 에 관련하여 진술된다 (= (II)).
  대상들의 어떤 두 부류가 문제인지, 그리고 "ἀεὶ" 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지, "... is" 의 두 용법들을 더 면밀히 고찰할 때 이하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III. Die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III. "... is ..." 의 두 가지 용법들
1. Die Bedeutung der Unterscheidung
1. 구분의 의미
  Wenn die vorgeschlagene Interpretation von 255c12-255d7 richti sein sollte, dann erhebt sich die Frage, warum Platon es sich nicht - wie einige Zeilen zuvor bei der Identität - wesentlich leichter gemacht hat, um die Nichtidentität von Sein und Verschiedenheit zu beweisen.
  Er hätte einen Fall von "... ist ..." nehmen können, z.B. "der Mensch ist ein zweibeiniges ...-Lebenwesen", wo sich ".. ist ..." nicht durch "... ist verschieden ..." ersetzen läßt; oder umgekehrt einen Fall von "... ist verschieden von ...", wo die Argumente für Dinge stehen, die keinerlei συμπλοκή miteinander eingehen und wo "... ist verschieden von ..." sich folglich auch nicht durch "... ist ..." ersetzen läßt.
  Man wird daraus schließen dürfen, daß Platon dieser Unterscheidung von zwei Verwendungen von "... ist ..." eine besondere Bedeutung beimißt.
  앞서 언급된 255c12-255d7 의 해석이 정당화될 경우, 플라톤은 왜 Being 과 Difference 사이의 비동일성을 증명하기 위해 - 앞서 the Same 으로 몇몇 행을 그리 하였듯 - 그것을 근본적으로 더 쉽게 만들지 않았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그는 "... is ..." 의 사례로 예를 들어 "인간은 두 발 달린 ... -생물이다" 라는 것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 is ..." 는 "... is different ..." 로 대체되지 않는다. 또는 역으로 "... is different from ..." 의 사례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변항들이 사물들을 대신하는데, 아무런 συμπλοκή 도 함께 적용되지 않고 따라서 거기에서 "... is different from ..." 도 "... is ..." 로 대체되지 않게 된다.
  플라톤이 "... is ..." 의 두 가지 용법에 대한 이러한 구분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이 이로부터 추론될 수 있을 것이다. 
- 30 - Zunächst ist diese Unterscheidung wichtig für den unmittelbaren Zusammenhang. Das wird deutlich, wenn man bedenkt, daß die Theorie der `Spätlerner` darauf hinausläuft, daß "... ist ..." in seiner zweiten Verwendung nicht ebraucht werden darf. Wenn aber erst einmal zugegeben worden ist, daß von einem korrekten Gebrauch von "... ist ..." gibt, derart, daß von einem Gegenstand a in Bezug auf a ist - und die Argumente, die 251e8-255d1 vorgebracht werden, zwingen uns dazu - dann muß man auch zugeben, daß es eine ganze Klasse von Paaren (a, b) gibt, derart, daß von a in Bezug auf b sowohl "a ist" als auch "a ist nicht" gilt. Eben das aber wird sogleich im folgenden 255e8-256d10 gezeigt, wo wir die Satzpaare erhalten:
1a Bewegung ist ταὐτόν.
1b Bewegung ist nicht ταὐτόν.
2a Bewegung ist ἕτερον.
2b Bewegung ist nicht ἕτερον.
3a Bewegung ist ὄν.
3b Bewegung ist nicht ὄν.
  우선 이러한 구분은 그 직접적인 연결에 중요하다. '늦게 배우는 자들' 의 이론이 "... is ..." 를 그 두 번째 용법으로 사용되지 못하게끔 귀결된다고 생각할 때, 그 점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우선 일단 "... is ..." 의 적절한 용법에 대해 대상 a 에 대해서 a 와 관련하여 is 라는 것이 받아들여진다면 - 그리고 251e8-255d1 에서 제기된 그 논증이 우리에게 강요된다면 - a 에 대해서 b 와 관련하여 "a is" 뿐만 아니라 "a is not" 또한 성립하는 그런 짝 (a, b) 의 전체 집합이 있다는 것을 허용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뒤이어 오는 255e8-256d10 에서 다음과 같이 드러나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명제쌍들을 얻는다.
1a 운동은 ταὐτόν 이다.
1b 운동은 ταὐτόν 이 아니다.
2a 운동은 ἕτερον 이다.
2b 운동은 ἕτερον 이 아니다.
3a 운동은 ὄν 이다.
3b 운동은 ὄν 이 아니다.
  Daraus wird dann 256d11ff. die für die Argumentation wichtige Folgerung gezogen, daß Bewegung und die übrigen Formen nicht seiend sind.
  Die etwas ermüdende Ausführlichkeit, mit der hier Platon Satzpaare von der Form "x ist y", "x ist nicht y" einander gegenüberstellt und das Unproblematische dieses Gegensatzes erklärt, läßt vermuten, daß Platon hier die Lösung einer ernsthaften Schwierigkeit sieht.
  Es ist genau die NIchtbeachtung des Unterschiedes zwischen den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die im Parmenides dazu führt, daß aus der Tatsache, daß etwas nicht x ist, geschlossen wird, daß es dann in keiner Weise x ist.
  Es wird an diesen Satzpaaren aber auch deutlich, daß ein x sowohl y als auch nicht y sein kann, ohne daß daraus geschlossen werden dürfte, daß x nicht wirklich y und insofern nicht wirklich seiend ist.
  Über das Gewicht für den unmittelbaren Zusammenhang der Argumentation hinaus hat aber die Unterscheidung von zwei Verwendungen von "... ist ..." eine allgemeine Bedeutung, die sich klären wird, wenn wir nun im folgenden die beiden Verwendungen näher untersuchen.
  거기에서 256d11 이하 그 논증에 대한 중요한 결론이 도출되는 바, 운동과 여타 형상들이 not being 이라는 것이다.
  그 지루한 세부사항은, 그로써 플라톤이 여기에서 "x is y", "x is not y" 형식의 문장쌍들을 서로 마주 세우고 이러한 대립이 문제가 없음을 밝히는 바, 플라톤이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의 해법을 보았다고 가정하게 한다.
  그것은 확실히 "... is ..." 의 두 용법 사이의 구분을 놓치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이어지는 바, 어떤 것이 x 이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전혀 x 이지 않다고 결론나는 것이다. 
  "... is ..." 의 두 용법에 대한 구분은 그 논증에의 직접적인 연결이라는 중요성을 넘어서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는 그 두 용법을 이후 더 면밀히 고찰할 때 분명해진다.

2.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2. "... is ..." 의 일차 용법
  In einem Satz von der Form "x ist y" wird "... ist ..." in seiner ersten Verwendung gebraucht, wenn das, was durch "x" bezeichnet wird, d.h. das, wovon etwas ausgesagt wird, nicht verschieden ist von Y-heit, d.h. dem, was von x ausgesagt wird.
- 31 - Damit scheiden alle Sätze, in denen "x" nicht für die Form oder den Begriff x steht, aus, da "y" immer Bezug auf eine Form nimmt.
  Unter welchen Umständen ist also die Form, für die "x" steht, nicht verschieden von der Form, die "y" zugeordnet ist?
  Aus 255d11-c1 ergibt sich, daß x und Y-heit (in diesem Fall das Seiende und Dasselbe) dann verschieden sind, wenn sich "x" nicht durch "y" ersetzen läßt. (Vgl. Parm. 142c1-2; Parm. 139d2-8)
  Dahinter steht natürlich die Vorstellung, daß die Form genau das ist, was durch das Prädikat ausgesagt wird. "x" und "y" wäre demnach die gleiche Form zugeordnet, wenn die beiden Ausdrücke synonym sind.
  Daraus ergibt sich, daß Definitionen Standardfälle für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sind. Ob außer Definitionen auch Klassifikationen in diese Kategorie fallen, hängt davon ab, ob für Platon das genus verschieden von der species ist oder nicht. Wenn das genus nicht verschieden von der species ist, dann ist nicht nur "der Mensch ist ein zweibeiniges ... Lebewesen" sondern auch "der Mensch ist ein Lebewesen" ein Fall der ersten Verwendung von "... ist ...".
  Ein Extremfall der ersten Verwendung von "... ist ..." liegt bei den Sätzen von der Form "das x ist x" vor. Von der Funktion dieser merkwürdigen Sätze wird später die Rede sein. Beispiele einer solchen Verwendung von "... ist ..." finden sich im Sophistes an mehreren Stellen, z.B. 258c1-3
"das Große ist groß"
"das Schöne ist schön"
"das Nichtseiende ist nicht seiend".
  "x is y" 형식의 명제에서 "... is ..." 는, "x" 를 통해 지시되는 것, 달리 말해 무언가가 그에 대해 진술되는 것이 Y-ness, 다시 말해 x 에 대해 진술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경우 일차 용법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x" 이 형상이나 개념 x 를 나타내지 않는 모든 문장들은 "y" 가 언제나 형상과 관련하기에 제외된다.
  그러면 "x"가 가리키는 형상은 어떤 조건에서 "y" 에 해당하는 형상과 다른가?
  255d11-c1 로부터 시사되는 바, x 와 Y-ness 는 (이 경우 the Being 과 Sameness), "x" 가 "y" 로 대체되지 않을 경우, 다른 것이다. (Parm. 142c1-2; Parm. 139d2-8)
  이에 대해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생각은 그 형상이 술어를 통해 진술되는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x" 와 "y" 는 그에 따라 그 두 표현이 동의어일 경우 같은 형상에 해당될 것이다.
  그로부터 시사되는 바, 정의가 "... is ..." 일차 용법의 표준사례이다. 정의 외에 분류까지 이 범주에 속하는지 여부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유와 종이 다른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에 달려있다. 유가 종과 다르지 않을 경우, "인간은 두 발 달린 ... 생물이다." 만이 아니라 "인간은 동물이다" 까지 "... is ..." 일차 용법의 사례이다.
  "... is ..." 일차 용법의 극단적 사례는 "x is x" 형식의 문장에서 성립한다. 이런 특수한 문장의 기능에 대한 독해는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 is ..." 용법의 사례는 『소피스트』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258c1-3 에서
"the Big is big"
"the Beautiful is beautiful"
"the Not Being is not being".

3.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und Selbstprädikation
3. "... is ..." 일차 용법과 자기술어
  Der Verdacht, daß es sich bei den angeführten Sätzen in 258c1-3 um die Art von Selbstprädikation handelt, die im Parmenides zu den Aporien des ersten Teils führt (Cherniss A J Ph., vol. 78, 1957, S. 258 n 123; Runciman, P L E, S. 102 und 101 n 2; Bluck, J H S, 1957, S. 186 n 17), beruht eben darauf, daß man nicht sieht, daß im Sophistes zwei Verwendungsweisen von "... ist x" unterschieden werden, je nachdem ob "... ist x" von der Form X oder einem einzelnen X ausgesagt wird, und daß diese Unterscheidung verwendet werden kann, um zwar die alten Formeln wie "ὁσιότης ist ὅσιον" beizubehalten, den Regress aber zu vermeiden.
  258c1-3 에서 인용된 문장들에서, 『파르메니데스』 첫 부분의 아포리아에 등장하는 자기술어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란 의심은 (Cherniss A J Ph., vol. 78, 1957, S. 258 n 123; Runciman, P L E, S. 102 und 101 n 2; Bluck, J H S, 1957, S. 186 n 17) 『소피스트』 에서 "... is x" 의 두 가지 사용 방식이, 그에 따라 "... is x" 가 형상 X 또는 개별자 X 에 대해 진술되는 식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구분이 "ὁσιότης is ὅσιον" 같은 오래된 형식에 적용되면서 소급을 피하게끔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점에 근거한다.
  Denn der Regreß entsteht eben dadurch, daß die einem Prädikat "x" zugeordnete Form X als verschieden von allen Elementen der Klasse betrachtet wird, für die "... ist x" gilt.
  Solange aber "... ist x" im gleichen Sinn - wenn auch in ausgezeichneter Weise - von der Form X wie von den einzelnen X ausgesagt wird, - 32 - gehört die Form X zu den Elementen der Klasse, für die "... ist x" gilt. "... ist x" muß aber solange für die Form X im gleichen Sinn wie für die einzelnen X gelten, wie die Form als Muster angesehen wird, mit Hinsicht auf das wir Einzeldinge "X" nennen. Das Muster aber ist natürlich verschieden von dem, wofür es ein Muster ist.
  Da nun "x" in "... ist x" auf das verweist, mit Hinsicht worauf Dinge "X" genannt werden, ist "die Form X ist x" genauso wenig ein Fall von echter Selbstprädikation wie "die einzelnen X sind x"; wir müssen also eine weitere Form X einführen, mit Bezug auf die die erste Form X und die einzelnen X "X" genannt werden.
  그 소급은 형상 X 에 상응하는 술어 "x" 가 "... is x" 가 참이 되는 부류의 모든 원소들과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는 바로 그 점을 통해 발생한다.
  하지만 "... is x" 가 개별자 X 에 대해서와 같이 형상 X 에 대해서도 같은 의미로 - 또한 주요한 방식으로 사용될 때 - 진술되는 반면, 형상 X 는 "... is x" 가 그에 대해 참인 그 부류의 원소들에 속한다. 그러나 형상이, 우리가 그와 관련한 측면에서 개별자들을 "X" 라고 이름하는, 그 본으로 간주되듯, "... is x" 는 개별자 X 에 대해서와 같은 의미로 형상 X 에 대해서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본은 그것을 본으로 삼는 것과 당연히 다르다.
  이제 "... is x" 에서 "x" 는 사물들이 그와 관련한 측면에서 "X" 라고 불리는 것을 지시하기에, "형상 X 는 x 이다" 라는 것은 "개별자 X 는 x 이다" 같이 더욱 실질적인 자기술어의 더 적은 경우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일차 형상 X 와 개별자 X 가 그와 관련하여 "X" 라 불리는 광의의 형상 X 를 도입해야만 한다.
  Unterstellt man nun, daß Platon unter anderem auf Grund der im Parmenides vorgetragenen Schwierigkeiten die Theorie der paradigmatischen Formen aufgegeben hat, dann liegt nahe, an diese Unterscheidung von zwei Verwendungen von "... ist ..." zu denken, um den Regreß zu vermeiden. Man beschränkt einfach die Klasse der Elemente, über der eine Form konstruiert wird, dadurch, daß man fordert, von ihnen solle "... ist x" nur in der zweiten Verwendung von "... ist x" gelten. Und das ist genau dann keine ad hoc Beschränkung mehr, wenn man aufhört, die Form X als ein Standard-X unter anderen X zu betrachten. Das Prädikat "x" bezieht sich nun auf den gleichen Gegenstand, auf den sich auch das Subjekt in "die Form X ist x" bezieht.
  Das ist genau der gleiche Schachzug, mit dem Aristoteles überhaupt abgelöste Formen zu vermeiden sucht; "Sokrates ist ein Mensch" ist für Aristoteles ein Fall von Selbstprädikation, "Mensch" bezieht sich auf die gleiche οὐσία wie "Sokrates" (vgl. z.B. An.Post. 73b5-8, 83b24-25).
  이제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 에서 제기된 난점들에 근거하여 여타의 것들 중 본이 되는 형상들이라는 이론을 폐기하였다고 가정하면, "... is ..." 의 두 용법에 대한 이런 구분을 생각하는 이유는 그 소급을 피하기 위함이다. 형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부류를 제한하는 것은 그 요소들에 대해 "... is x" 를 오직 "... is x" 의 이차 용법으로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형상 X 를 여타 X 들 중에서 표준-X 로 고려하는 한에서라면 그 경우에만 더 이상 전혀 자의적 제한이 아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리된 형상들 일반을 피하고자 사요안 수법과 똑같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자기술어의 한 사례이고, "인간" 은 "소크라테스" 와 똑같은 οὐσία 에 관련한다(vgl. z.B. An.Post. 73b5-8, 83b24-25).
  Die Akademie freilich hat einen anderen Weg eingeschlagen. Sie behielt paradigmatische Formen zumindest von natürlichen Substanzen bei, versuchte aber dem Argument vom "Dritten Menschen" durch die Forderung zu entgehen, daß einer Klasse, in der Elemente Priorität vor anderen Elementen haben, keine Form zugeordnet werden dürfe.
  Nun gibt es die Form des Menschen unabhängig von dem einzelnen Menschen, nicht aber die einzelnen Menschen unabhängig von der Form des Menschen.
  Qua Mensch aber unterscheidet sich die Form des Menschen nicht von den einzelnen Menschen, die genau wie die Form die Definition des Menschen erfüllen. Damit bildet die Form des Menschen eine Klasse mit dem einzelnen Menschen, hat aber Priorität vor dem einzelnen Menschen.
  Nach der Regel kann also der Klasse kein dritter Mann zugeordnet werden.
  아카데미 학파는 확실히 다른 길을 걸었다. 그들은 적어도 자연적 실체들에 대해서는 표준 형상들을 견지하였으나, "제 3 인간" 논변은 요소들이 다른 요소들보다 우선성을 지니는 그런 부류는 어떤 형상으로도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통해 피하고자 시도했다. 
  이제 인간의 형상은 개별 인간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지만, 개별 인간은 인간 형상에 독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인간의 형상은 인간의 정의를 그 형상과 마찬가지로 만족시키는 개별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로써 인간의 형상은 개별 인간으로 구성되지만, 개별 인간에 대해 우선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저 규칙에 따라 그 부류는 어떤 제 3 인간으로도 간주되지 않을 수 있다.
  Obgleich zwei verschiedene Verwendungen von "... ist ..." vorliegen, wenn man von der Form X und den einzelnen X sagt, daß sie x sind, so hat "... ist" doch in beiden Fällen dieselbe Bedeutung. Überdies - 33 - gibt es aber auch keinen Grund anzunehmen, daß "... ist x", je nachdem, ob es von der Form oder von den einzelnen X ausgesagt wird, verschiedene Bedeutung hat. Denn dem "x" ist in beiden Fällen die gleiche Form X zugeordnet. Nur wird sie eben in dem einen Fall von sich selbst ausgesagt (vgl. Aristoteles, περὶ ἰδεῶν fr. 3; Ross, S. 123, 9-11), im anderen Fall aber von etwas anderem. Insofern war es auch richtig, daß wir zu Anfang bei der zweiten Verwendung von "... ist ..." in "a ist b" die numerische Verschiedenheit von a und b betonten; denn insoweit a b ist, unterscheidet es sich von b überhaupt nicht; das heißt freilich nicht, daß die Form b lediglich ein weiteres b neben a ist.
  "... ist x" kann eben, ohne daß von verschiedenen Bedeutungen die Rede wäre, auf zwei Weisen verwendet werden:
1. um das Wesen der Form anzugeben,
2. um die Eigenschaft eines einzelnen X anzugeben (vgl. Ar. Top. 154a18, Met. 1059a10-14).
 그렇지만 "... is ..." 의 상이한 두 가지 용법은 형상 X 와 개별자 X 에 대해서 진술할 때 성립하지만, "... ist" 는 여전히 두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형상 X 에 대해 진술되느냐 개별자 X 에 대해 진술되느냐에 따라서 "... is x" 가 상이한 의미를 지닌다고 가정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두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형상 X가 "x" 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단지 한 경우에서 그 자체에 대해 진술되고 (Aristoteles, περὶ ἰδεῶν fr. 3; Ross, S. 123, 9-11), 다른 경우에는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해 진술될 따름이다. 우리가 처음에 "a is b" 의 "... is ..." 에 대한 두 번째 용법으로 a 와 b 사이의 수적 차이를 강조한 것이 정당했던 한에서; a is b 인 한에서, 그것은 b 와 일반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형상 b 는 a 에 비해 더 광의의 b 인 것이라 이야기된다. 
  "... is x" 가 다른 의미들에 대한 논의 없이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1. 형상의 본질을 서술하기 위해,
2. 한 개별자 X 의 속성을 서술하기 위해 (Ar. Top. 154a18, Met. 1059a10-14).

4. Die zweite Verwendung von "... ist ..."
4. "... is ..." 두 번째 용법
  Nehmen wir zunächst wieder die Fälle von "a ist b", in denen "a" für eine Form steht.
  In allen Fällen, wo "b" nicht das zum Ausdruck bringt, was notwendig zu a dazugehört, wird "... ist ..." in seiner zweiten Verwendung gebraucht.
  Das sind zunächst die Fälle, in denen ein Prädikat einer Form X nicht auf Grund der Tatsache zukommt, daß sie x ist, sondern auf Grund der Tatsache, daß sie Form ist.
  So ein Fall ist, um ein aristotelisches Beispiel zu benutzen: "der Mensch ist in Ruhe"; in Ruhe zu sein, ist aber kein Merkmal des Menschen, sondern kommt der Form Mensch nur qua Form, aber nicht qua Mensch zu (Top. 137b6ff., Top.148a14ff.).
  우선 다시 "a" 가 형상을 표시하는 "a is b" 의 사례들을 가정해 보자.
  "b" 가 a 에 필연적으로 속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는 모든 경우에 "... is ..." 는 그 두 번째 용법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형상 X 의 술어가 x 인 사태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그 술어가 형상인 사태에 근거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식 예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런 경우이다: "the Man is in rest"; to be in rest 는 인간의 어떤 특성도 아니고, 형상 인간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형상으로서 나타난다 (Top. 137b6ff., Top.148a14ff.).
  Bei "Bewegung ist verschieden von Ruhe" scheint der gleiche Fall vorzuliegen; denn nichts ist verschieden auf Grund seiner eigenen Natur (Soph. 255e4-6); Verschiedenheit ist also eine Beziehung zwischen Formen qua Formen. Im Gegensatz zum ersten Fall kommt sie aber Formen nicht einfach qua Formen, sondern nur qua Formen von etwas zu. Das gleiche gilt für Identität, Kontrarietät, Verträglichkeit.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 는 그와 같은 경우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본성에 근거하여서는 아무것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Soph. 255e4-6); 그러므로 다름은 형상들 사이의 형상들로서의 관계이다. 그러나 첫 경우와 반대로 그 형상들은 단지 형상들로서가 아니라, 바로 무언가에 대한 형상들로서 형상들이 된다. 동일, 모순, 양립가능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Etwas schwieriger ist die Frage, wie Prädikate zu klassifizieren sind, die aus der Definition von a für b ableitbar sind und insofern a qua a zukommen, von denen man aber dennoch unter Umständen nicht sagen würde, daß sie zum Begriff von a gehören. So folgt aus der Gleichseitigkeit eines Dreiecks seine Gleichwinkligkeit.
  Beim Genus schließlich, das der Form X qua x zukommt, liegt es mit Hinsicht auf Parm. 146b3-5 nahe, es als nicht strikt verschieden von - 34 - der Form zu betrachten. In diesem Fall läge also bereits eindeutig wieder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vor.
  더 어려운 물음은 술어들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이다. 그 술어들이 a 에 대한 정의로부터 b 에 대해 서술가능하고 a 가 a 로서 등장하는 한에서, 허나 그 술어들에 대해 그럼에도 특정 조건에서  a 의 개념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을 그런 술어들을 말이다. 삼각형의 등변으로부터 그것의 등각이 그렇게 도출된다.
  끝으로 x 로서의 형상 X 에 속하는 유를 통해 Parm. 146b3-5 와 관련된 측면에서 시사되는 바, 그 유는 형상과 엄격하게 다르지는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경우 따라서 이미 "... is ..." 의 일차 용법이 놓여 있을 것이다.  
  Auf eine solche Unterscheidung von Prädikaten, die einer Form X qua Form und solchen, die ihr qua x zukommen, macht Platon vielleicht 256b6-7 aufmerksam. Wenn man die sehr entschiedenen Bemerkungen in 252d9-10 und 254d7-8 vergleicht, ist jedenfalls die vorsichtige Formulierung in 256b6-7 merkwürdig: "οὐκοῦν κἂν εἴ πῃ μετελάμβανεν αὐτὴ κίνησις στάσεως, οὐδὲν ἂν ἄτοπον ἦν στάσιμον αὐτὴν προσαγορεύειν;" Bewegung ist qua Bewegung sicher nicht in Ruhe, qua Form aber ("πῃ") hat sie - wie alle Formen - an der Ruhe Anteil; und es fällt schwer zu glauben, daß Platon, der immer auf die Unveränderlichkeit der Formen hinweist und der 249b8-c5 auf Grund eben dieser Unveränderlichkeit gezeigt hat, daß es Ruhe gibt, im Fall von Bewegung vergessen haben sollte, daß auch Bewegung, qua Form, in Ruhe sein muß. Wenn erst einmal klargestellt ist, daß Bewegung nicht in Ruhe ist, dann bereitet die Annahme, daß Bewegung in Ruhe ist, gar keine Schwierigkeiten; und man sieht nicht, warum Platon eine solche Annahme vermeiden sollte. Daß aber diese Unterscheidung von Prädikaten von Formen X qua Form und qua x in der Akademie gebräuchlich gewesen ist, zeigt die gleiche Unterscheidung von Prädikaten in der aristotelischen Topik 137b7ff.
  형상으로서의 형상 X 에 속하는 그리고 x 로서의 형상 X 에 속하는 술어들에 대한 그러한 구분을 고려하여 플라톤은 아마도 256b6-7 을 구성하였을 것이다. 252d9-10 과 254d7-8 에서의 매우 명시적인 언급들을 비교할 경우, 256b6-7 의 신중한 정식화는 어찌됐든 흥미로운 것이다: "οὐκοῦν κἂν εἴ πῃ μετελάμβανεν αὐτὴ κίνησις στάσεως, οὐδὲν ἂν ἄτοπον ἦν στάσιμον αὐτὴν προσαγορεύειν;(그렇다면 만일 어떤 식으로<어떤 측면에서> 운동 자체가 정지에 참여하였더라면, 그것을 정지한 것이라 부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운동으로서의 운동은 확실히 정지 중에 있지 않지만, 형상으로서 ("πῃ") - 모든 형상들처럼 - 정지에 참여한다; 그리고 항상 형상들의 불변성을 시사하고 바로 이러한 불변성에 근거하여 249b8-c5  정지가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 플라톤이 운동의 경우에서 운동 역시 형상으로서 정지해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잊었으리라는 것을 믿기는 어렵다. 일단 한 번 운동이 정지 중에 있지 않다는 것이 명확해지면, 운동이 정지 중에 있다는 가정은 아무런 문제도 전혀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플라톤이 왜 그런 가정을 피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형상으로서의 형상 X 의 그리고 x 로서의 형상 X 의 술어들에 대한 이런 구분은 아카데미학파에서 통용되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피카』 137b7 이하 술어들에 대한 유사한 구분이 보여준다.
  Die Anwendung dieser Unterscheidung von zwei Verwendungen von "... ist ..." auf Sätze über Einzeldinge ist wesentlich einfacher. Was immer von Einzeldingen ausgesagt wird, ist verschieden von dem, wovon es ausgesagt wird. Die Einzeldinge sind das, was sie sind, in bezug auf die Formen (deswegen auch "τὰ πρὸς τὰ εἴδη" als Ausdruck für Einzeldinge: Alex. in Met. 56, 1-2; 58, 12-13; 97, 10-12; 123, 10-11; zit. bei Cherniss A C P A, S. 283 n 191; vgl. auch Asclep. in Met. 81, 33; Albinus IX, S. 163; [Hermann]).
  "... is ..." 의 두 용법에 대한 이러한 구분을 개별자들에 대한 문장들에 적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더 쉽다. 개별자들에 대해 언제나 진술되는 바의 것은 그것이 그에 대해 진술되는 그것과 다르다. 개별자들은 형상들과 관련하여 그것들인 바의 것이다(따라서 개별자들에 대한 표현으로서 "τὰ πρὸς τὰ εἴδη" : Alex. in Met. 56, 1-2; 58, 12-13; 97, 10-12; 123, 10-11; zit. bei Cherniss A C P A, S. 283 n 191; vgl. auch Asclep. in Met. 81, 33; Albinus IX, S. 163; [Hermann]).
  Das heißt natürlich nicht, daß nicht bestimmte Formen y gegenüber anderen Formen in bezug auf bestimmte Individuen x in der Weise ausgezeichnet wären, daß x notwendig y ist. In Sätzen über Individuen läßt sich also die aristotelische Unterscheidung von "... ist καθ᾿ αὑτό y" und "... ist ἕτερόν τι ὄν y" innerhalb der zweiten Verwendung von "... ist ..." ziehen.
  불특정 형상들 y 가 다른 형상들에 반대로 특정 개별자들 x 와 관련하여 x is necessarily y 인 방식으로 구별되리란 말은 자연스럽지 않다. 개별자들에 대한 문장들에서 "... is ..." 의 두 번째 용법 내에서 "... is καθ᾿ αὑτό y" 와 "... is ἕτερόν τι ὄν y" 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 구분이 성립한다.
  Diese Unterscheidung innerhalb der Verwendung von "... ist2 ..." scheint aber bei Platon nirgends dahingehend ausgebaut zu sein, daß - 35 - man mit ihrer Hilfe zwischen einfacher Veränderung und Werden und Vergehen, zwischen Gegenständen und Eigenschaften hätte unterscheiden können.
  Ansätze zu einer solchen Unterscheidung von zwei Verwendungen von "... ist2 ..." finden sich zum Beispiel im Phaedo 102b-c; an dieser Stelle wird eine Unterscheidung impliziert zwischen den Kriterien, die einen zur Verwendung eines Eigennamens, "Sokrates" oder "Simmias", berechtigen, und den Eigenschaften, die der Träger des Eigennamens darüber hinaus noch hat, und das in einem Zusammenhang, in dem von Veränderung und Vergehen die Rede ist (vgl. auch Phdo. 103d2ff.).
  Aus der Tatsache, daß es sich bei "a ist b", wenn "a" ein Einzelding bezeichnet, um die zweite Verwendung von "... ist ..." handelt, ergibt sich eine neue Interpretation der Seinsabhängigkeit von Einzeldingen gegenüber Formen.
  Einzeldinge sind zwar nun ohne Einschränkung wirklich seiend, sie sind auch wirklich x und nicht nur in irgendeiner Weise so ähnlich wie die Form X, aber es gäbe keine Einzeldinge, wenn es keine Formen gäbe, weil es keine bestimmten Einzeldinge gäbe, wenn wir nicht jeweils die entsprechenden Formen hätten. Die Formen sind dagegen unabhängig von den entsprechenden Einzeldingen.
  "... is2 ..." 용법 내에서 이런 구분은 그러나 플라톤에게서는 어디에서도 그 구분의 도움으로 변화와 생성과 소멸 사이를, 대상들과 속성들 사이를 구분할 수 있었을 쪽으로 결론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 is2 ..." 의 두 가지 용법에 대한 그런 구분을 향한 초기형태들은 그 예시가 『파이돈』 102b-c 에서 발견된다;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 나 "심미아스" 같은 고유명사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기준들과 고유명사의 담지자가 그 이상으로 추가해 가지는 속성들 사이의 구분이 암시되고, 변화와 소멸에 대해 그 안에서 논해지는 관계 내의 고유명사가 암시된다. (Phdo. 103d2ff.)
  "a is b" 에서 "a" 가 개별자를 지시할 떄 "... is ..." 의 두 번째 용법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로부터, 형상들에 대한 개별자들의 존재의존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사된다.
  현실적으로 x 이고 단지 어떤 식으로든지 형상 X 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번 부합하는 형상들을 취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규정된 개별자들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형상도 없을 경우 아무런 개별자도 없을 것인 그런 개별자들은 물론 제한 없이 현실적으로 being 이다. 반대로 형상들은 부합하는 개별자들에 의존적이지 않다.

5. Eine Unterscheidung von Formen und Einzeldingen mit Hilfe der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5. "... is ..." 두 용법을 통한 형상들과 개별자들 사이의 구분
  Wir erhalten keine vollständige Disjunktion von ὄντα-Formen einerseits und Einzeldingen andererseits -, wenn wir zwei Klassen von Gegenständen bilden, von denen die Elemente der ersten Klasse in bezug auf sie selbst, die Elemente der zweiten Klasse in bezug auf etwas anderes seiend genannt werden. Denn da "... ist ..." in beiden Verwendungen von Formen ausgesagt werden kann, bildeten die Elemente der ersten Klasse nur eine Untermenge der Elemente der zweiten Klasse. Die zweite Klasse umfaßte nämlich sowohl die Menge der Formen als auch die der Einzeldinge, die erste Klasse aber nur die Menge der Formen.
  우리는 한편으로 ὄντα-형상들과 다른 한편으로 개별자들에 대한 아무런 완전한 선언지도 확보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대상들에 대해 두 부류를, 그것들에 대해 첫 번째 부류의 원소들이 그 자체와 관련하여, 두 번째 부류의 원소들이 다른 무언가와 관련하여 being 이라 불리는 두 부류를 구성할 경우 그러하다. 왜냐하면 "... is ..." 는 두 가지 방식으로 형상들에 대해 진술될 수 있기에, 첫 번째 부류의 원소들이 두 번째 부류의 원소들의 하위부류만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류는 말하자면 형상들의 집단뿐만 아니라 개별자들의 집단 또한 포함하지만, 첫 번째 부류는 단지 형상들의 집단만을 포함한다.
  Eine solche vollständige Einteilung von Gegenständen in Formen einerseits und Einzeldinge andererseits läßt sich jedoch leicht erreichen, wenn man die Zugehörigkeit zur zweiten Klasse auf Dinge beschränkt, die immer nur in bezug auf anderes seiend genannt werden. Damit scheiden Formen als Elemente der zweiten Klasse aus, und Einzeldinge bleiben übrig. Für die Elemente der ersten Klasse wird dann gefordert, daß sie in bezug auf sich selbst seiend genannt werden, so daß alle Formen und nur Formen erfaßt werden, womit - 36 - aber nicht ausgeschlossen ist, daß Formen auch in bezug auf etwas anderes seiend genannt werden können.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형상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자들 사이에서 대상들에 대한 그런 완전한 분류는 두 번째 부류에의 소속이 언제나 다른 것과 관련하여서만 being 이라 불리는 사물들에 제한된다면 쉽사리 성취된다. 그로써 형상들은 두 번째 부류의 원소들로 할당되고, 개별자들은 여집합으로 남는다. 첫 번째 부류의 원소들에 대해서 그리하여 그것들이 그 자체에 관련하여 being 이라 불린다고, 그래서 모든 형상들만이 포함된다고, 하지만 그로써 형상들이 다른 무언가에 관련하여 being 이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이 배제되진 않는다고 주장된다.
  Es ist offensichtlich genau diese vollständige Einteilung, die Platon 255c12-13 im Auge hat.
  Das könnte einen dazu verleiten, das "ἀεὶ" in 255c13 anders zu verstehen, als es gewöhnlich geschieht. Meist wird nämlich dieses "ἀεὶ" auf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so u.a. von Schleiermacher, Taylor, Diès) bezogen und so interpretiert, daß es dem "ἀεὶ" in 255d1 entspricht. Von diesem "ἀεὶ" in 255d1 haben wir aber gesehen, daß es im Gegensatz zu "τὰ μὲν ... τὰ δὲ" in 255c12-13 steht und so seine Erklärung findet.
  그것은 플라톤이 255c12-13 에서 염두에 둔 이러한 완전한 분할도 분명히 마찬가지이다.
  255c13 의 "ἀεὶ" 를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다른 식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경우 (Schleiermacher, Taylor, Diès 를 포함하여) "ἀεὶ" 는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과 관련되고 그것이 255d1 의 "ἀεὶ" 와 같다고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255d1 의 "ἀεὶ" 에 대해 우리는 "τὰ μὲν ... τὰ δὲ" 와 반대이고 그렇게 그것에 대한 설명을 찾았음을 안다.
  Cornford freilich bezieht das "ἀεὶ" anders. Er übersetzt:
"... some are always spoken of as being what they are just in themselves, others as being what they are with reference to other things."
  Offensichtlich bezieht er das "ἀεὶ" auf beide Glieder, "τὰ μὲν ..." und "τὰ δὲ ...". Das aber ist auch sachlich nicht richtig. Denn das Seiende ist sowohl ein καθ᾿ αὑτὸ als auch ein πρὸς ἄλλο λεγόμενον, fände also keinen Platz in dieser Disjunktion. Und faßt man "some ...... others ..." nicht als vollständige Disjunktion auf, wie die Formulierung nahelegt, dann verstößt man gegen den Sprachgebrauch von "τὰ μὲν ... τὰ δὲ". Cornfords Übersetzung liegt die falsche Interpretation der Stelle zugrunde, die wir bereits S. 25ff. diskutiert haben.
  그렇지만 콘포드는 그 "ἀεὶ" 를 다른 식으로 이끌어낸다. 그는 이렇게 번역한다:
"... 일부는 언제나 바로 그 자체로 그것들인 바의 being으로 이야기되고, 다른 것들은 여타의 것들과 관련하여 그것들인 바의 being으로 이야기된다."
  명백히 그는 "τὰ μὲν ..." 과 "τὰ δὲ ..." 두 분지에 그 "ἀεὶ" 를 적용시킨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the Being 은 καθ᾿ αὑτὸ 뿐만 아니라 πρὸς ἄλλο λεγόμενον 이기도 하며, 그러므로 이러한 선언지의 자리는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는 ...... 다른 것들은 ......" 을 그 정식화가 제안하는 것처럼 완전한 선언지로 이해하지 않고, 그리하여 "τὰ μὲν ... τὰ δὲ" 의 언어 사용과 반대가 된다. 콘포드는 해당 장에 대한 우리가 25쪽 이하에서 이미 논의한 잘못된 해석을 번역의 근거로 둔다.
  Auf Grund unserer Interpretation könnte man dagegen meinen, daß sich "ἀεὶ" zwar auf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bezieht, aber die Funktion hat, eben die vollständige Disjunktion von Gegenständen im oben beschriebenen Sinn zu erreichen, die ohne das "ἀεὶ" - wie aus dem Beispiel mit den Gegensätzen deutlich wird - nicht gegeben wäre.
  Diese Interpretation wäre inhaltlich also die bei weitem befriedigendste; sie hat aber leider - wie die gewöhnliche Interpretation - den Nachteil, daß sie eine sehr unbeholfene Stellung von "ἀεὶ" voraussetzt, die man Platon wird kaum zumuten wollen.
  우리의 해석을 근거로 이에 반대하여 "ἀεὶ" 자체가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에 관련되지만, 위에서 서술된 의미로 대상들에 대한 완전한 선언지를 성취하는, "ἀεὶ" 없이는 성립하지 않을 - 반대들을 예시로 하여 명백해졌듯 - 기능을 지닌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그러므로 내용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  통상의 해석처럼 - , 플라톤에게 기대하긴 어려울 "ἀεὶ" 에 대한 매우 어설픈 태도를 상정한다는 결점을 지닌다.
  Man erwartete nämlich bei dieser Interpretation nicht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 sondern etwa "... τὰ δὲ ἀεὶ πρὸς ἄλλα λέγεσθαι". So wird man sich wohl aus sprachlichen Gründen doch dazu entschließen, "ἀεὶ" hier so zu konstruieren, wie es bei Platon häufig im Zusammenhang mit "λέγεσθαι" (vgl. Phil. 16c: "φήμην ... ὡς ἐξ ἑνὸς μὲν καὶ πολλῶν ὄντων τῶν ἀεὶ λεγομένων εἶναι" ; Phil. 15c; Euthyd. 272b), aber auch in anderen Zusammenhängen gebraucht wird (vgl. Phil. 15e; Charm. 164e; Gorg. 464d).
  다시 말해 이러한 해석에 기대되는 바는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 가 아니라, "... τὰ δὲ ἀεὶ πρὸς ἄλλα λέγεσθαι" 같은 어떤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언어적 근거들을 통해 여기에서 "ἀεὶ" 가, 플라톤에 의해 "λέγεσθαι" 와 결부되지만(vgl. Phil. 16c: "φήμην ... ὡς ἐξ ἑνὸς μὲν καὶ πολλῶν ὄντων τῶν ἀεὶ λεγομένων εἶναι" ; Phil. 15c; Euthyd. 272b), 또한 또 다른 관계에서도 사용되는 것처럼(vgl. Phil. 15e; Charm. 164e; Gorg. 464d) 구성하는 것이라고 결정할 것이다.
  Dann würde der relevante Teil des Satzes wie folgt wiedergegeben werden können:
"was seiend genannt wird, wird entweder mit Bezug auf sich selbst oder mit Bezug auf anderes so genannt".
- 37 - Damit hätten wir eine hinreichend genaue Interpretation von 255c12-13 und zugleich eine gewisse Vorstellung von den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die sich im folgenden verschärfen wird, wenn wir den Zusammenhang zwischen diesen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und dem identifizierenden und dem existentiellen "... ist" untersuchen.
  따라서 그 문장에 관련된 부분은 아래와 같이 재진술될 수 있을 것이다:
"being 이라 불리는 것은 그 자체와 관련하여서나 혹은 여타의 것과 관련하여 그렇게 불린다".
그로써 우리는 255c12-13 에 대한 충분히 정확한 해석과 동시에 "... is ..." 의 두 용법에 대한 특정한 표상, 우리가 "... is ..." 의 이러한 용법쌍과  동일성 "... is" 와 존재사 "... is" 사이의 관계를 검토한다면, 이하에서 엄격해질 그러한 표상 또한 얻을 것이다.

-蟲-


1. 여전히 나란 새끼는 흥미본위일 뿐인지도. 정보와 논리로 날 찍어 누르는 사람들이 좋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게 좋다. 좀 더 바라자면, 가야하고 못 가고 있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기까지 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다. 플라톤이 좋은 건 내가 좋음의 이데아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것에 못 미치는 모든 것들을 그 핑계로 보류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윤리와 도덕에 신뢰를 바치는 짓은 못 해먹겠단 거다. 건별로 상황마다 사력을 다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진 못하더라도 섣부른 신념의 노예 같은 건 성격상 영 내키질 않아서, 다만 더 옳은 길을 끊임없이 바랄 따름이다. 경건을 논하던 소크라테스는 "댁 마음대로 하쇼, 당신 좋을대로 답해 주겠소." 라고 비아냥거리는 에우튀프론에게 이리 말했다. "진실이 아니라면 내겐 전혀 즐거울 게 없소."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는 아무도 없다." 라는 신탁을 두고 아폴론이 틀린 거 아니냐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증명하겠노라고 당대의 식자들을 찾아 다녔던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면, 사실은 좀 부러운 마음도 없잖다. 그는 아마 궁금해 미치겠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알고 싶어 죽겠고, 조금씩이나마 뭔가 알아가는 듯한 그 간질간질한 것이 좋아 죽겠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뭐 시덥잖은 것들이 못 버티고 나가 떨어져 결국 재미없게 죽었지만, 영혼을 위한 최고의 치유라 그가 믿었던 철학을 하다가 그 덕에 한 세상 신나게 꼴리는대로 살다 가는 마당에 '덕분에 즐거웠수다.' 하며 닭 한 마리까지 되갚아 바쳤으니 그야말로 아쉬울 것 없는 인생 아니었겠나. 뭐 그거야 소크라테스님씩이나 되셨으니 그리 사셨던 게고, 나는 어쩌나, 시정잡배개쓰레기로 굴러먹다 뒈지게 생겼는데. 죽기 직전에 폰 쓸 힘이 남아 있다면 국경없는의사회에 반반무많이라도 배달시키고 뒈져야 하겠다. 아, 됐고, 학위 좀. 

2. 나는 상식 선을 확보하고 그 앞으로 더 나아가 논증이 오가는 상황 속 그런 페미니즘을 보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제3세계 반도 후미진 구석탱이에 사내새끼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 논의의 상대라는 자격 자체를 상실해 버린 것만 같다. 뭘 묻고 따지기에 앞서 그냥 하수구 시궁진창에서 쓰레기 줍기부터 시작해야 할 터인데, 여태까지도 이미 알면서 비겁했고 앞으로도 이 안락하고 쩐내 가득한 '자지의 왕국'에서 무슨 엄청난 내란을 일으킬 일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지금 대학원 연구실 같은 공동연구실 구석 한 켠에 골골대며 논문이나 읽고 번역이나 하고 첨삭 몇 줄 끄적거리는 매일을 보내다 볕 좋은 날 조용히 뒈지는 정도는 꿈꿔도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어쨌든 너무도 평온하고 안락한 삶의 결말이 되어 버렸다. 내가 배운 학문이 부정의를 묵인하거나 편드는 일을 긍정하지 않는 한에야, 지금도 어디서 죽어 나가고 있는, 살아남으면 또 살아남았다고 손가락질을 받고 내쫓기고 인두로 이마가 지져지는, 그런 사람들을 두고 저런 결말이 내게 거리낌 없이 흡족할 수야 있겠나. 그러나, 여전히, 내가 선 곳이 어디고 디딜 곳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아, 저 사람들이 내게 욕을 하고 비난을 하고 책임을 묻는다면 처벌을 받는 쪽으로라도 갈피가 잡힐 것이나, 아마 밖에서 보기엔 나 역시 언제 염산을 뿌리고 칼을 휘두를지 모를 의심스럽고 역겨운 무명의 시헤한남십치에 불과할 테니, 모르겠는 것이다. 글쎄, 내가 페미니스트이길 작정한다면 달라질까? 난 그런 확신과 용기가 무척이나 의심스러워서 도무지 그걸 뒤집어 쓰고 다닐 자신이 없다. 제도의 개선에 목소리와 머릿수와 표가 필요하다면 가져다 바칠 수 있고(특히 이번 기회에 진보연하는 가부장십치들의 팬티 내리기는 아주 잘 구경하였다. 다들 안녕. 니들한테 줄 표는 없다.), 자리마다 맞거나 죽을 위험이 덜한 내가 자지들에게 자지대 자지로 그러지들 좀 맙시다, 뭐 그정도 겐세이는 놓을 수 있고, 한때 푹 절어 살던 개저씨 쓰레기 농담도 많이 내려 놓았으니 조금씩 나아질지도 모르겠고. 어느 사이에 자연과학도 사회과학도 그 안의 천 갈래 만 갈래 지금의 진짜 현실을 논하는 온갖 눈들과 그림들도 모두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게 되어 버렸다. 껴서 주워듣고 싶고 이걸 알아라 저걸 배워라 그런 얘기들 들으며 버러지 취급을 받고 싶다. 먹물 찌질이는 이럴 때 개론서를 읽어야 하는 건가 하며 쿰척거리는 것이다. 근데, 여성 성노동자, 명예남성, '현모양처' 는 지금 논란 속에서 어떤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감을 못 잡겠다. 나는 그들이, 만약 어떤 연대란 것이 지금 필요하다면, 그 연대에 포섭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막상 '당사자'들의 상황에서는 입장이 다양하겠고 그 결들을 내가 세심히 살피겠다 나댈 수 있는 입장은 못 되니. 그런데 생각할 수록 지금 내 태도는 아마도 여성혁명 같은 것이 일어나면 결국 단두대행을 피할 수 없겠지 싶다. 그저 날이 갈수록 이래저래 수치와 죄책만 늘어간다. 감히 미안함을 품을 자격조차 없이 이런저런 전선에서 패주하다가, 그렇게 썩어 간다. 캬, 쓰레기네.

-蟲-

 인용한 글은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씨의 페이스북 글 전문. 

"강남역 살인 사건. 범죄자에게 정신병이 있으니 여성 혐오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는 주장에 대해서...

 정신병에도 맥락이 있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는 많은 조현병 환자들이 환청을 호소하면서 중앙정보부가 나를 미행하고 도청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무렵 어떤 환자가 TV 뉴스 생방송 중 뛰어들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말을 외치기도 했다. 80년대 후반에는 사회적으로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면서 CIA가 환청의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도 생겼고 2000년대 이후 삼성의 지배력이 커지면서는 삼성이 소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운동을 한다고 정신질환에 걸리는 것은 아니고, 정신질환에 걸릴 사람이 학생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이 정신병이 생기면 그 증상에 정치적 내용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망상이란 자기의 사고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고 내부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정신병(이 경우 정신병은 현실에 대한 검증력이 떨어져 현실과 비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질병 상태, 대표적으로는 급성기의 조현병, 조울정신병을 의미한다)을 가진 사람이 사회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드러낸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적 문제의 리트머스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정말 그런지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신병의 증상은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이다.

 어제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여성이 번화가의 화장실에서 한 남성에 의해 칼에 찔려 죽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났고’ 그래서 죽였다는 말을 했다. 그 남자는 오랜 조현병의 치료력을 갖고 있고 현재는 치료를 중단한 상태다. 그가 지금 정신병적 급성 상태에 있는지는 나로서는 정보가 없어서 모르겠다.

 그가 현실적인 판단력을 잃고 심각한 공격적인 행동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그 행위가 모두 정신병 때문인 것은 아니다. 정신병을 가진 사람의 범죄율이 정신병이 없는 사람에 비해 낮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여기에 일부 정신병적 증상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으로 범죄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정신병적 증상을 갖고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신병을 가진 한 사람이지, 정신병 그 자체가 아니다. 한 사람으로서 그들은 다양한 기질과 성격, 성장배경, 문화, 생활 조건이 다르며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도 다양하다.

 문제는 그가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은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고 그것은 ‘여성혐오’다. 이것이 그의 망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망상은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다. 만약 우리 사회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고,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 남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에 비해서 특별히 남자들에게 더 기분나쁜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병을 갖고 있으며, 범죄를 저지른 그는 아마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소외감과 분노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소외감의 원인을 여성들의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찾고, 분노의 초점을 여성들에게 맞춘 것은 분명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우리 사회 내에서 최근 들어 뚜렷하게 늘어난 심리적 현상인 여성 혐오가 (만약 그에게 정신병적 망상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의 망상 속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성 혐오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망상을 갖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망상을 가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병적 증상은 맥락이 있다.

 결국 그가 정신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이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말할 근거일 수 없다. 오히려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 범죄의 이유로 ‘여자들의 무시’ 운운하는 상황이 여성 혐오 이슈를 우리가 중요한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은 분명한 여성 혐오 범죄다. 그가 정신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닌 것이 아니라 그가 정신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여성혐오 범죄인 것이다.

 한 가지 더. 또 상상해 보자. 만약 우리 사회가 여성이 남성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안전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누군가 이런 살인을 저지르고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지금과 같은 사회적 파장이 일어났을까? 수많은 여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분명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 그런 분들이 있더라도 그저 해프닝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이 큰 이슈가 된 이유는 한 범죄자의 말 때문이 아니다. 그 범죄가 일어난 우리 사회의 위험한 현실 때문이다. 강력 사건의 희생자 비율이 남성에 비해 여성이 8배가 넘는 통계로 알 수 있듯 여성들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여성 차별에 더해서 최근 잘못된 여성 혐오 의식으로 위험성은 더 커지고 있다. 여성 혐오 의식의 확산으로 범죄의 가해자들이 스스로를 정당하다고 여기니 범죄의 잔인성은 증가하며 모방 범죄도 늘어난다.

 이 문제로 불필요한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 노력이다. 여성 혐오 의식이 정신병의 증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면 그 심각성을 인정하고, 사회 전반에서 이런 의식이 자리잡지 못하도록 구조적 개혁을 하고 의식의 변화를 추구해야지 지금 뭐를 하고 있나 싶다. ‘정신병이 범죄의 원인이냐? 아니면 여혐이 원인이냐?’ 이런 수준 낮은 논쟁은 이젠 멈춰야 한다."

==============================================================================

 플라톤이 『국가』 에서 그랬지. 말을 골라도 잘 달리는지 못 달리는지를 따지지 암수를 따지는 게 아니고, 사냥개를 골라도 암컷이든 수컷이든 사냥을 잘 하는 개를 고른다고, 사람도 성별이 아닌 능력과 적성에 따라 그에 합당한 교육을 받고 걸맞는 직책과 의무와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편견이란 거대한 파도를 넘어서서 이런 전제를 받아들여야 바람직한 사회를 구성할 수 있따고 말이야. 2천 년도 더 전에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게다가 이것도 남녀평등, 성평등이라 말하긴 부족하고 이 아자씨 여혐종자다. 적어도 오늘날 이 사회에서라면 저건 당연하고, 그냥 단순히 차이를 사상시켜 버리는 게 아니라 나아가 여러 다른 부분들을 그게 신체에 관련되든 사회에 관련되든 문화든 편견이든 여러 관점에서 그런 차이들을 조율하고 개선할 것, 보완할 것,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까지 왔어야 하는 거 아니냔 거다. 뭐 이렇게 말해봤자, 나같은 머가리 빻은 시헤한남십치가 단 한 번도 보장받지 않은 적 없는 공짜 권력과 온갖 특혜, 이걸 적극적으로 누리면 누릴 수록 남성집단에서 강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권위까지 심어주는 한국 남성의 편리를 다 내다 버릴 수 있을 리는 없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나는 여전히 밤거리를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고, 술이 떡이 되어 길바닥에 나자빠질 수 있고, 여관방, 화장실, 공중목욕탕 어디를 가든 훔쳐보는 시선이나 숨겨진 카메라 따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칼을 챙겨온 어떤 새끼가 숨어 있는 자리에 가더라도 나와 다른 남성들이 아니라 어떤 임의의 여성이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그걸 두려워할 이유조차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여성 혐오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망상을 갖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망상을 가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병적 증상은 맥락이 있다." 바로 그 맥락 안에서 동료 시민의 반수 가까이가 살해 당하고 폭력을 당하고 강간을 당하고 그런 여성혐오범죄를 목격하고 전해 들으며 점점 더 큰 공포를 느끼며, 피해를 당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비난을 당하고 폭력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위협을 받고 공포에 비명을 지른다는 이유로 갈등을 조장한다며 책임을 묻는 자들에게 둘러 싸이게 된다. 아주 오랜 시간 그래왔고 지금 그러하며 앞으로도 바뀌기 어려운 부조리인데, 이 부조리가 남성이 남성으로서 지니는 아무 근거없는 무자격의 특권 그 자체이다. 이 특권을 버리긴커녕, 이것이 다른 이들의 당연하고도 불가침한 권리를 박탈하였기에 자신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억울한 자신을 매도한다며 여성을 적으로 삼으려 들고 또 누군가는 연약한 여성을 지켜야 한다며 여성을 소유하려 들며, 또 누군가는 이 모든 문제의 직접적 피해 당사자인 여성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며 가르침을 전하려 안달을 한다. 뭐 이 모든 종류의 반응들을 싸잡아 욕할 단계에라도 왔는지도 의문스럽고, 나 자신이 페미니스트나 여성주의자를 자처한다면 정말 날 아는 모든 이가 비웃을 일이기도 하겠기에, 그래서 잘 모르겠다. 내 민증 뒷번호 앞자리가 바뀌지 않고, 내 겉모습이 바뀌지 않고, 내가 소속집단에서 지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전면에 나서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주장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선택지가 있기는 한지. 시헤한남십치인 나는 내가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건강한 신체도 매력적인 외모도 갖추고 있지 못하고 뛰어난 언변이나 포용력 넘치는 성격 역시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을 지니려 노력 또한 않고 있어서 연애시장에 진입조차 못한다는 것을, 그게 나 아닌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을 잠자코 인정하고 조용히 혼자 살다 뒈지는 정도의 선택 이외에는 달리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다. 아, 물론, 모든 조건을 애써 다 갖추더라도 상대(그게 누구든)가 날 선택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상대의 권한이고 자유일 따름이다. 음, 애초에 이 부분을 받아들이면 사는 게 훨씬 편한 것이기도 하고. 내가 사는 내내 저질러 왔던 온갖 언행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를 위선자로 부르고 가식을 떤다며 조롱을 하리라 예상하지만, 말했듯이 똥이 마려워도 참고 화장실에 가는 것은 위선이나 가식이라기 보다는 그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지금 이 상황은, 누군가 대로변에 똥을 싼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인 것 아닌가, 그것도 남성집단 내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못했을 비겁자가 한 여성을 단지 여성이란 이유로 칼로 난도질 해 살해한, 누가 봐도 끔찍한 여성혐오범죄 아닌가. 위선과 가식은 대환영이고, 거기까지 못 가더라도 최소한의 상식만이라도 지켜지길 바랄 따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蟲- 

P.S. 구조 자체가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안에서 남성으로서 상대적 이익을 취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고 억울하다는 말만 되풀이해봤자,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가해자다. 그냥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다른 남성들의 자각하지 못한 여성혐오부터 적극적인 여성혐오까지 지적하고 비판하고 언어적 혹은 물리적 폭력을 차단하는 정도의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여성을 대상으로 여성을 추앙하거나 여성을 지키거나 여성의 언행을 안전한(?) 방향으로 교정시키려 들거나 하지 말고 말이다. 이제까지 참았던 것이, 매우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어쨌든 표출되었으니, 여성들은 여성들 스스로 또 서로 지키고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이 사회의 부조리인 여성혐오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낼 것이고,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아마도 안전과 생존을 위해, 기존 질서에 편입되어 순응하고 이 질서를 옹호하는 여성들도 간혹 있을 것이나, 그들이 '생존을 위해' 그리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서로 싸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도 지껄이지 말고 남성은 잠자코 남성들끼리 치고 받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나. '여성 전용 주차장'을 보고 외국여성이 의아해 한다는 식의 사례들을 생각해 보면, 사실 지금 한국 수준에서는 산술적 평균조차 여성에게 보장해 주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겠고, 다시 말하는데 그런 건 진작에 해결이 났어야 할 '수준 낮은 논쟁'이다. 음, 무슨 얘길 더 하고 싶었느냐 하면, 이 구조 내에서 남성이라는 건 그 사실만으로도 여성에 대해 이미 가해자라는 것, 그리고 직접적인 신체적, 정신적 폭력의 잠재적 가해자란 건, 특정할 수 없는 가해자가 남성집단 내에 있다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특정할 수 없는 그 위험이 너무나도 큰 까닭에 여성이 남성 전체를 두려워하고 의심하더라도 그건 말하자면 정당방위라는 것, 그러니까 억울하면 색출해서 족쳐야 할 건 가해를 할 만한 새끼인 것이고, 남성집단이 그런 행동을 완벽히 억제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신뢰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리라는 것 정도이다. 설령 저 강남역 살인사건이 만에 하나 여성혐오로 인한 살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사건으로 일어난 여성들의 여론이 한국사회의 여성혐오, 여성들의 일상적 공포를 증명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기도 하고. 강남역 추모 쪽지 중에 그런 게 있더라, '언니는 꿈이 뭐였어요?' 였던가. 이런저런 억압으로 좌절된 이 나라 시민 절반의 꿈이 지금 보다 더 많이 실현되는 게, 이 나라에 나쁜 일일 리는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요즘은 집단 내 개체수도 극소수고 짝짓기 철에 간택만 바라며 빛 한 번 보러 나왔다 금새 뒈지는 수개미들이 한남보다 더 우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정자 보관소 냉자고에 정자나 기증하고 다들 자살하자 ㅇㅇ. 아니, 이 유전자는 이미 글렀는지도.

P.S.2. 평소 여성을 혐오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자와, 별 다른 생각은 없으나 여자를 약자로 간주하는 사회통념을 바탕으로 남성을 거르고 여성을 죽인 자 사이의 구분이라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봤다. 좀 더 나아가서, 이번 살인범 개인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과정에서 살인과 그의 마음 속 여성혐오를 관련지어 단순 살인보다 가중처벌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개인의 신념이 법에 의해 판단받을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야기도 보았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개인이 여성을 혐오하든 다른 어떤 소수집단을 혐오하든 나치를 추종하든 어떻든 그가 어떤 행동을 보이기 전까지는 그 '생각'만을 가지고 개인을 단죄할 수는 없는 게 오늘날 공유되는 인권으로서의 신념의 자유라는 가치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여성을 죽여야지' 라고 생각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는 무작위로 사람을 죽이려다 여성을 죽인 경우보다 더 강한 처벌을 가하는 것이 맞는 일로 보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여성혐오'라는 믿음을 잘못된, 악한 믿음으로 평가하면서 함의되는 일이 개인의 믿음에 대한 사회적 잣대를 통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여성혐오를 마음에 품어선 안 된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여러 사람들이 별 부담 없이 동의할 것이나, 특정 종교를 믿어서는 안 된다든가 어떤 사회, 경제, 문화의 한 특수한 지향을 마음 속에 품어서는 안 된다든가 하는 주장에 오늘날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성혐오가 옳다' 라는 믿음과 '민주주의가 옳다' 라는 믿음을 구분하는 건 전자가 나쁘고 후자가 좋다는 가치평가이다. 누가 무엇을 믿느냐는 문제에 대해 이러한 가치평가를 내려야, 그 다음 그 믿음과 특정 행위(이번 경우 '여성혐오'와 '여성살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따질 수 있고, 다시 이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처벌의 경중이 갈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강남역 여성혐오 여성살해를 두고 이것이 여성혐오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라 말하는 것은 분명하고도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여성을 살해한 범인이 여성혐오로 인해 살인을 했다면, 이 살인이 다른 살인에 비해 가중처벌을 받아야 하는지, 이건 어려운 일이라는 게 저 위에서 내가 봤다던 그 글이 하고자 하는 말인 듯하다. 

P.S.3. 여성을 살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과 여성을 통제하에 관리하며 특정 남성의 영역 내에서 보호받도록 만드는 일, 이 두 일이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여전히 이 두 부류를 구분해서 대응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한편에 남는다. 이를 테면 생리대를 면세품으로 제정하는 일이나 생리휴가의 보장성 강화에 대해서는 저 두 부류 모두 반대할 수 있을 듯하나, 안심귀가서비스 등의 여성 안전을 위한 정책에 대해서 혹은 택시 운전자의 신원 확인 강화랄지 뭐 그런 종류의 일들에는 소위 '진성 마초'라느니 '기사도'라느니 '신사' 따위의 말을 하는 부류는 공감하고 지금 대동단결하는 일베와 오유는 반대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이건 그들 말마따나 남성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것이니까). 여성전용주차장을 넓게 보면 여성혐오의 일환이나 좁게 보자면 여성혐오가 구조화된 사회에서 필요한 것, 이를 테면 사다리 같은 것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이려면 저 구분이 필요할 것이나, 그러한 단계적 해법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모두 묶어 전면적인 변화를 당장에 촉구해야 하는 것인지 남성인 나로서는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 어느 사이트에선가 여성을 대신해 무거운 짐을 들어주거나 하는 일을 이제부터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하던데, 주변 여성들 대부분이 조롱 섞인 환호를 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임시방편, 미봉책에 불과한 일들, 근본적으로는 여성혐오의 범주에 들어가는 여성의 대상화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이라 생각되는데, 구분이 어찌 되는지가 문제랄지. 다시, 남녀의 차이를 사상시키고 산술적 평등을 보장하는 것과 이 제거해 버린 차이를 다시 하나하나 고려하면서 형평성을 찾아 가는 것 사이의 구분이 문제라는 데에까지 갈 수도 있겠다. 플라톤을 통해서라면 아마 전자의 선까지 해석을 뽑아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후자는 고대 사상을 가지고서는 무리한 일이겠다. 거칠게 말하자면 앞의 것은 보편적 인권보장의 문제라면 뒤의 문제가 실제로 성평등이란 주제를 놓고 가치판단이 엇갈릴 수 있는 더 어려운 문제 아닐까 싶고, 여성혐오는 인권보장 차원에서도 부정할 수 있을 듯하고, 그럼 마초와 신사도 인권보장의 문제에서는 같이 갈 여지가 있겠으나, 그게 궁극의 목표가 아닌 바에야 구체적인 성평등의 문제에서 의견이 갈릴 사람들과의 오월동주라는 이야기 된다면, 다시 지금 여성들의 반응은 바로 그 임시방편도 여성혐오라는 얘기로 넘어가겠고, 쓰다보니 결국 내가 여성혐오를 들쭉날쭉하게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뭐 이쪽이야 이론으로나 실천으로나 주도해온 것도 여성이고 결과를 축적해온 것도 또한 여성이니, 귀를 막고 있지만 않는다면 다양한 방향성과 여러 논증들을 듣게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귀를 열어 둔다는 건, 결국 책이니 기사니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보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겠다.

『파이드로스』의 지상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이라든가 『파르메니데스』의 하나와 하나인 형상들과 하나인 것들의 그 모든 하나와 『소피스트』의 움직이면서 멈추어 있는 모든 것과 『국가』의 만물을 만물이게 하는 좋은 것 그 자체와 『티마이오스』의 가장 좋은 살아있는 세계의 본을 흔들리지 않고 가지런한 말로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것을 품고 있으나, 궁금해 하고 알아보고 찾아 다니는 것도 매 고비마다 자격과 허가가 필요하다. 우스갯소리로 석사과정에서 인간자격을 상실했다가 석사학위를 따면 그 자격을 회복하고 박사과정에 가면서 시민권을 포기했다가 박사학위를 받으면 시민으로 돌아오지만 그 때부터 비로소 잉여시민으로서 아무도 반기지 않는 비생산적 현학을 탐닉하다 굶어 죽는 것이 소위 '인문학도'의 인생역정 아니겠는가 하는 잡소리를 지껄였던 적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싶다. Owen이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Focal meaning'이란 것의 단초랄까 Being을 말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라든가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에서 중심으로부터 끝들로의 단일한 거리들과 그 전체와 부분들에 대한 플라톤의 이해라든가 뭐랄까 그런 걸 『소피스트』 독해에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은 분명 5~6년도 지났는데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Frede가 하는 얘기가 그런 얘기 아닌가 하는 지적을 받고 나니 한층 더 대단히도 지나보낸 시간이 허망하기만 하고 이제 난 그 때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쓰레기가 되었는가 싶다. Frede는 지중해에서 술 쳐먹고 헤엄치다 뒈졌다는데, 아, 당신은 좀 넘나 멋진것.

똥은 화장실에서 싸야 하는데, 똥이 마렵기 때문에 똥을 싸지르는 것은 정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백주대낮에 길바닥 한복판에서 설사똥을 싸지르는 쓰레기들이 넘실거리는 건 왜일까. 나는 똥이 마렵지만 어쨌든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는 똥을 싸지 않으려고 애쓰는 정도의 교양과 상식과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는데 '너는 왜 똥이 마려운가! 똥이 마렵다니 너는 노상방변의 혐의가 있구나! 개새끼구나! 쓰레기구나! 동네사람들, 이 새끼가 똥을 싸지르고 싶답니다, 글쎄! 세상에나, 말세네, 말세!'라고 꽥꽥거리는 미친 작자들은 또 왜 그러는 것인가. 남의 대장은 너의 것이 아니고 네 직장에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똥덩어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인정투쟁을 벌일 권리가 없는 것이라는, 이 간단한 이야기를 왜 그리도 복잡하게 비비 꼬아가며 서로 똥던지기에 열을 올리는 건가. 최소한의 위선과 가식조차 갖추지 못하는 짐승새끼들은 좀 도려내고 가도 괜찮지 않나 싶다. 『프로타고라스』에서 그 유명한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나오지 않나, 그 작자가 불도 주고 지혜(뭐 그냥 공학기술, 그러니까 우리 동료 철학도 여러분들께서는 플라톤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지금부터라도 기술을 배웁시다)도 주고, 그러고 나서도 짐승새끼들한테 쳐발리는 좆밥새끼들이라 제우스 킹왕짱께서 옜다, 먹고 떨어져라 하시며 모여 사는 데 필요한 기술, 정의와 수치란 걸 주시지 않았겠냐 말이지. 찌끄레기 쓰레기들 그래도 한 번 살아 보라고 도둑놈의 새끼 장물에 빈대붙은 싹통머리들한테 덤까지 쳐서 줬는데 그걸 발휘하지도 못하면, 어찌해야 하느냐 하면, 그런 건 살 가치가 없으니 죽여 버리라 하셨다 이거다. 사냥하는 짐승이 발톱과 이빨을 잃으면 뒈지듯이, 도망다니며 사는 짐승이 다리가 부러지면 역시나 뒈지듯이, 사람새끼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마땅한 일을 하려 애쓰지도 않으면 이 새끼 글러먹었구나 하고 모가지를 뎅겅 잘라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 아, 뭐, 그것도 번거롭고 그러하니 그냥 사회 밖으로 쪼까내서 뒈지든가 말든가, 우리는 우리끼리 하하호호 오손도손 잘 살아 보자는 거다. 방구석에서 좀비 내장 푸파팍 하는 거 보면서 낄낄항가항가하며 딸잡이를 하는 잉여새끼보다는 지하철에서 만만해 보이는 '여자'만 골라서 시비터는 노망난 개늙은이들을 죽이는 게 바람직하다는 뭐 그런 관점에서, 화장실에서 똥을 싸는 것은 정의이나 길바닥에 침을 뱉는 것은 악이다, 뭐 그런 이야기. 아, 누구 말대로 싹 다 그냥 통 속의 뇌였으면 참 좋을는지도 모를 일이겄구나.

-蟲-

Θαρρεῖν, ὦ Θεαίτητε, χρὴ τὸν καὶ σμικρόν τι δυνάμενον εἰς τὸ πρόσθεν ἀεὶ προϊέναι.  

"테아이테토스, 뭔가 조금이라도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힘이 있는 자는 용기를 내야만 하네." Platonis Sophista 261b4-5

1. 고전어강좌 

* 시간 조정을 위해 7월 4일로 시작 일짜를 재조정했습니다. 착오없으시길 바랍니다.* 

이번 여름에도 정암학당에서는 고전희랍어 과정을 개설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대학에서 한 학기 정도 기초 문법 수업을 들은 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열의와 노력만 갖춘다면 처음부터 하더라도 완주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학당 강좌가 다 그렇듯이 이 강좌 역시 후원회원님들의 뜻을 받들어 무료로 개설됩니다. 
이번 강좌는 학당연구원이자 관동대교수인 유재민 선생님이 맡아주셨습니다. 

요일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주당 2회, 8주간 진행됩니다. 

현재 예정은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5시지먄, 
첫 시간은 7월 4일 토요일에 만나 시간논의를 합니다. 
토요일 경우에 사정에 따라 금요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재를 준비하는 등의 사전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강좌는 참석하실 분들의 신청을 미리 받습니다. 

연구실장인 제 메일 synousia@gmail.com으로 
이름/현재 하는 일/희랍어공부 정도/이메일 주소/핸드폰 번호 를 알려 주시면 
수업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올 여름도 희랍어로 보람있는 땀방울을 흘리시길 기원합니다. 

 정암학당: http://www.jungam.or.kr 
-----------------------------학당 공지글을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2. 근간 여러 경로로 여혐 논란이 많았다. 그냥 간단히. 문화가 개방되고 교육이 지속되면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상향되어 간다고 믿는다. 문화상대주의 따위 엿이나 먹으라 그래라. 여하간, 그 과정이란 게 불연속이 아닌지라 변화과정에 있는 개개인 중에는 그 속도를 못 따라가는 사람도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이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수준 비슷한 것들은 많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겨 죄를 저지른 것들이 흠씬 두들겨 맞고, 그걸 타산지석 삼아 나같은 놈들은 대가리와 심보까지 시대에 맞추진 못하더라도 주둥이랑 사지 몸뚱아리나마 조심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요즘 욕 쳐먹는 온갖 실좆새끼들에게 약간의 부채의식도 있고 뭐 그렇다. 칼리폴리스를 위한 세 차례의 파도가 어서 지나가길 기원해 본다. 낄낄. 물론 법과 절차에 따른 적법한 처벌 이외에 개인이 개인에게 저지른 폭력이 대중에 의해 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 성평등의식이 일천한 사회에서 이 수준을 밑바닥에서 끌어올릴 사회적 합의도 교육의 내용이나 제도도 없는 상황에서 저런 나같은 사람 몇몇이 피 좀 흘려줘야, 나같은 것들이 경각심을 갖고 몸을 사리지 않겠나. 그렇게 몸 사리다 조용히 늙어 뒈지면 다음 세대는 좀 더 나아지겠지. 왜 공론화를 시켰냐느니 고소를 하라느니 따지는 얘기는 별 의미 없어 보인다. 그것도 그 개인들이 판단할 문제고, 트위터에 언론에 애인 때린 사람으로 대대적으로 홍보가 된다고 한들, 없는 사실이 아닌 한 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다만,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개새끼도 옳은 말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옳은 말을 한다고 개새끼가 성인군자 되는 것도 아니고. 말과 사람은 어쨌든 별개다. 그게 안 받아들여지는 동네라 밥줄이 끊기네 뭐네 얘기가 많은 것이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여성을 걷어찬 사람도 여성주의를 옹호하는 정당화된 글을 쓸 수 있는 거다. 변명의 글이 상당히 구리고, 자신의 분노조절장애를 치료할 적극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법적 처벌도 받지 않은 한 개인에게 달려들어 욕을 하고 동네 사람들 이거 보래요, 손가락질하는 것 다 딱히 말릴 근거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성교육을 할 건가, 아니면 피해자 고소 없이 다 수사해서 잡아들일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조리돌림뿐인 거다. 하지만 그 욕이 그가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이기는 어려울 듯하다. 뭐 그냥 그렇다고. + H씨께서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진행한 모양. 반박글도 있길래 링크 놓음. 뭐 남의 연애사야 어찌 됐든 무슨 상관이겠냐만.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62008

 3. 내가 차이자마자 한 일은 연락처 지우기였다. 늘상 그래왔다. 그런데 나중에 지인에게서 왜 그렇게 안 붙잡고 툭 놓아 버렸냐는 힐난까지 들었다. 내가 이 정도로 깔끔합니다. 이별통보했다고 식칼을 품고 찾아가거나 휘발유를 챙겨 들거나 염산을 구하러 이리저리 헤매다니지 않는 건전한 사람입니다. 그냥 질척거리는 것이든 폭력을 드러내는 것이든 어쩄든 상대방 의사가 '이별'이라면, 적어도 좋아하는 상대의 의사 정도는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얼마나 싫겠나? 끝내자는데 얼굴 들이밀고 전화질 해대고 '자니?' 이 지랄-_-. 내가 당하기도 싫고 해서 행한 적도 없고 그렇다. 근데 이렇게 하니까 나보고 '니 애정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뭐 이런 반응이나 오고. 이게 다 왜 그런고 하니 그냥 내가 못 생겨서 그런 거다. 못생김에 추가로 여러 찌질스러움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냥 포기하면 편하지.

 4. 김경만씨 논란은 뭐 딱히 새삼스럽지도 않다. 학문의 전분야가 지역과 문화의 특수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도 100%의 객관성을 추구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같은 분야로 묶인 학문활동들 사이에 객관적 기준이 배째라고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일 리도 없고, 각자 선택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잖나. 유학도 가고 번역도 하고 창조적 활동도 하고, 한 사람이 다 할 수 없으면 이래저래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누어 담읍시다. 뭐 몇 알 되지도 않는 거 다 썩어 없어질 거란 짐작은 해 보지만, 한 바구니 몰아 넣었다 당장에 다 깨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5. 일단 한 걸음 내딛어야 한다. 갈수록 그게 참 쉽지 않다. 

 -蟲-




  사물은 다양한 측면을 지닌다. 그것은 변화하여 본래의 성질을 잃기도 하고 이전에 없던 특징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여러 상이한 여러 모습들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모습들이 똑같은 하나의 사물에 속하는가 하면, 무지나 착각으로 인해 사물과 모습 사이의 관계에 여러가지 혼동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혼란을 일으키는 그 사물 혹은 사물들이 각기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물에 속하는 모습들과 그렇지 않은 모습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물에 속하지 않는 모습들이 속하는 다른 사물은 무엇인지, 또 이 두 사물이 공유하는 모습들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까지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앎을 가진다는 것은 각 사물에 대한 여러 현상들의 관계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로 인한 혼동 때문에 인간은 잘못 생각하거나 잘못 말 할 수 있다. 참인 믿음을 가지고 참인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잘못된, 즉 거짓 믿음을 가질 수도 있고, 이를 표현해 거짓인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어떤 믿음과 어떤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한다는 것은, 그 믿음과 말이 표현하는 사물과 현상의 관계가 실제로 그러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구분한다는 것이다. 

216a-218e 소피스트, 정치가, 철학자 사이의 혼동.

- 대화를 시작하면서 이미 이러한 문제가 암시된다. 1) 한 가지의 것이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2) 그것에 대해 여러 이름이 붙고, 3) 저마다 여러가지로 생각하고 또 말한다. 4) 그 말과 생각은 맞거나 틀릴 수 있다. 

219a-232a 소피스트의 여러 모습들.

- 소피스트라는 유는 소피스트-기술(sophistike)라는 하나의 기술로부터 나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소피스트는 사냥꾼, 상인, 쟁론가, 영혼의 정화자로 나타난다. 소피스트는 사냥술, 상술, 쟁론술, 정화술 각각을 모두 아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 때문에 하나의 기술에서 나온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여러 이름들로 불리게 된다. 

232b-236c 소피스트의 반박-모방술.

- 소피스트는 반박을 통해 잘못된 믿음을 지닌 영혼을 정화하여 쟁론에서 승리함으로써 젊은이들에게 소피스트 자신이 지혜롭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그렇게 젊은이들을 매혹시켜 그들을 사냥하고 그들에게 바로 그 반박술을 가르쳐 돈을 받는다. 소피스트의 여러 모습들의 중심에 반박술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피스트는 천지만물 세상만사 그 각각을 전부, 저마다의 전문가(기술자)를 상대로 반박할 수 있으며 이런 반박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소피스트가 그러하다는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모든 사안에는 해당 문제의 기술자, 그 일을 아는 전문가가 있고, 그러한 각 기술자 모두를 상대로 그 일을 알지 못하는 자가 제대로 반박을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소피스트는 모든 일 각각을 전부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기술로 여러가지 각 기술 모두를 알 수는 없다.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이 소피스트가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것은 모방이다. 사실이 아니지만 그 사실을 닮은 모방물을 사실로 믿도록 만드는 일은 가능하다.

236d-242b 모상과 거짓, 그리고 non-being.

- 모방의 대상을 그대로 본뜬 모상도 있고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켜서 원본을 닮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모상도 있다. 소피스트는 이 둘 중 어느 한 종류의 모상을 만드는 자일 것이다. 소피스트는 실제로는 모든 일에 지혜롭지 않고 그럴 수 없으면서도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에 지혜로운 자라고 거짓 믿음을 심어준다. 모상은 원본이 아닌 것이다. 원본은 참으로 그 자신인 바의 것이다. 원본이 아닌 모상은 그래서 참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참이 아닌 것, 참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거짓이란 어떤 것인 바의 것을 어떤 것이지 않은 것으로, 혹은 그 역으로 결합시키는 믿음이나 말이다.

어떤 것인 바의 것과 어떤 것이지 않은 것 사이의 결합. 
- 모상은 어떤 무엇을 닮은, 그러나 바로 그것이지는 않은 무언가이다.
- 거짓은 어떤 무엇인 바의 것을 어떤 무엇이지 않다고, 혹은 그 역으로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이다.
-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오직 어떤 무엇인 바의 것뿐이며, 어떤 무엇이지 않은 것은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 소피스트는 말로 된 모상을 통해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자이다. 그러나 모상도, 거짓도 그 안에서 어떤 무엇'이지 않음'이 섞인다. 이것 자체를 생각하거나 말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어떤 무엇'임'에 엮거나 그 역으로 결합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러나 소피스트가 말로 모상을 만들어 거짓 믿음을 심는다고 규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소피스트가 주장하는 앎을 논박하기 위해서 어떤 무엇'이지 않음'을 말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어떤 무엇'임'과 엮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것이 하나의 것으로서 여러 모습과 연결될 방법, 어떤 것 자체와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결합될 방법, 또한 그 어떤 것과 그것의 모습들 그리고 그 이름들에 사람의 말과 생각이 관계하는 방법이 문제이다. 대상과 그것에 대한 생각 혹은 말이 맺는 관계에서 참된 관계와 그릇된 관계는 각기 무엇이며 이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지 또한 문제가 된다. 이 모든 것은 어떤 것이 다른 무엇과 어떻게 결합되고 또한 분리되는지에 대한 문제이며, 이 모든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류가 바로 소피스트이다.

242c-245e being의 수, 246a-249d being의 종류. 

우선 분명해 보이는 것,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것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Being이다. 어떤 것 그 자체와 그것에 결합하는 여러가지 것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가능하고 또 어떠한 것인지 고찰된다.

다원론, 일원론, 운동, 정지.

대립되는 한쌍의 형상들이 있는가 하면 이 대립쌍을 포괄하면서도 이것들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형상도 있다. 이것들 사이의 관계에서 같음과 다름이 등장한다. 이 둘 역시 being의 형상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 형상들, 유들이 무엇인가? 판단의 형식들인가? 플라톤의 초-중기 형상들과 같은 것인가? 혹은 이전의 형상들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실재하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입장들이 나뉜다. 이에 따라 결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또한 이후 말이 무엇인지, 또한 거짓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을 해석하는 방식 역시 나뉜다.

249e-254d 결합과 분리의 방식.

형상들의 결합 없이는 말도 철학도 불가능하다--- 

254b-257a. Being에 대한 참여와 여타 형상들에 대한 참여. 256e에서 여타 형상들의 being에 대한 관계와 257a에서 Being의 여타 형상들에 대한 관계.

255c-d. 그 자체로. 다른 것에 대해.
258c. '~이지 않음'. 부정적 형상?
263b-d. 다름과 거짓.

해당 구절들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해당 대화편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또 그 해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 또한 판이해진다. 그러나 어느 입장에 서든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논의의 일관성과 정당성이다. 

  - 작성중-


  서론.

  플라톤은 철학의 출발점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점차로 증대되는 체계적 다양성을 숙고하는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출발점으로부터 나온 그의 윤리학, 인식론, 형이상학이 상호의존적이기에, 저 물음에 대한 그의 답변은 그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상당한 전개를 필요로 한다.

  이 글의 목적은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형상론, 개별자(특수자) 대한 설명, 형이상학 이론의 본성 자체라는 세 가지 핵심개념을 본으로 삼아 탐구하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 전체의 핵심은 형상들에 대한 이론이다. 이는 철학적 탐구의 목적이자 토대이다. 플라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가 형상의 실재를 [2쪽] 인식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탐구에든 그러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을 다루려는 이 책이 인식론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숙고가 최선의 삶의 방식에서 결정적 요소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인식론이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숙고를 행할 능력은 인간에게 고유하며 그 숙고는 세계가 사유가능한 방식으로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세계는 결정론적 방식으로 일정 정도 고정되어 있으며, 플라톤의 철학은 우리가 사는 우주가 합리적으로 질서잡혀 있기에 원칙적으로 우리에게 이해가능한 것이라는 관념에서 서술된다. 
  그리스 사상가 모두가 결정론자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치개념들이다. 플라톤이 경쟁자로 삼은 소피스테스들, 비극작가들, 역사가들, 정치인들이 고정된 가치개념이라는 전제에 반대했다. 플라톤은 숙고가 불안의 원천이라 봤고, 그것은 오직 인간만이 지속성을 문제삼기 떄문이며, 그럼에도 이성에 의해 제기된 그 문제, 그러한 현상으로부터의 구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안정적이고 확정적인 형상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래서 고정성과 안정성이라는 문제가 삶의 물음에 대한 숙고의 일부이다. 플라톤은 객관적 윤리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통해 그의 논증 방법이 상호 병렬될 수 있고 상호 양립가능여부와 일관성 및 비일관성이 판단될 수 있는 확정적인 관념들과 믿음들을 선제한다는 점을 파악해냈다. 고정되고 확정된 항목들이 있기에 동일한 판단이나 진술을 두고 서로 한 사람은 긍정하고 다른 사람은 부정하는 일이 가능하다. 형상들의 원리는 이 세계와 우리의 사유 내에 고정성과 항상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그의 통찰의 정수이다. 저자는 이를 실재론이나 플라톤주의(그것이 플라톤의 것이든 아니든)의 핵심에 놓인 것으로 파악한다. 형상들은 이해를 허용하는 질서 잡힌 우주의 선제조건이다. 형상들은 고정성, 안전성, 불변성의 원칙들이다. 이 형상들은 철학적 유산들을 남겼다. 보편적, 객관적, 심-독립적 실체들로서 프레게의 sharp borders, 비트겐슈타인의 『탐구』에서의 규칙들이 그 상속자들이다. 이러한 고정된 실체들을 "속성들"이라 부르자. 형상론으로 인도하는 통찰은 속성들이 자신의 본성이나 속성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플라톤의 일차적인 형이상학적 목표가 속성들 또는 형상들이 세계 내 안전성의 원천이자 원리들이라는 기반이 되는 직관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것이라 간주한다. 
  [3쪽] 안정적 형상들의 반대급부로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현상이 놓인다. 플라톤은 변화 역시 구제되고 설명되어야 할 현상으로 수용한다. 물리적, 물질적, 감각적 세계의 일상적 개별자들과 사건들이 이 변화하는 사물들에 속한다. 플라톤에게 자연의 영역은 형이상학적 탐구의 주제이다. 따라서 플라톤 형이상학의 이차적 목표는 물질적 세계 내 개별자들의 본성과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며, 특히 어떻게 변화가 가능한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특별한 일부이다. 인간의 능력, 특히 언어와 사유 역시 그러하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이해할 때, 우리는 언어와 사유가 성립하려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탐구 과정에서 인지적 상태들과 그 대상들의 본성을 고찰해야 한다. 형상들이 지식의 대상이자 합리적 능력의 토대이다. 다시금 형상들이 형이상학적 그리고 인식론적 탐구의 정점으로 밝혀진다. (플라톤에게 지식은 인간의 좋음 삶에 필수요소이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을 탐구하는 일 역시 그 정점은 형상들이다.)
  형이상학적 탐구의 유일한 통로는 인간의 인지능력과 언어능력을 고찰하는 것이다. 언어와 사유로부터 독립된 경로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형이상학을 전개해 가면서 형이상학적 이론화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이러한 측면은 『파르메니데스』에서 두드러진다. 이 대화편은 '~임/있음'을 '~이라는 사유'와 동일시하는 데에 주목한다. 변증적 탐구에 형상들이 필수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선언(Parm.135b-c) 이후, 형이상학적 탐구 자체의 본성에 관련된 문제는 해당 대화편의 두 번째 부분에서 형이상학의 일부가 된다. 탐구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가정들이 전제되면서, 플라톤은 어떤 무엇이 되었든 그에 대한 진리를 담지하는 일반원칙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작업에 착수한다. 부분적으로 그 작업은 탐구의 특정한 형식들은 가능한 반면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리가 "일반 존재론" 또는 "분석적 존재론"이라 부를 만한 것을 탐구한다. 그 목표는 제기될 수 있는 특수한 혹은 특별한 어떤 존재론이든 통제하는 일반 원칙들을 산출해내는 것이다. 좀 덜 상세한 방식으로나마 일군의 관념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도출되는 주-술, 보편-개별, 부분과 전체, 일(一)과 다(多), 동일과 차이, 내재, 분리 등을 발견하게 된다. [4쪽] 철학자가 형이상학적 탐구에 관련하여 사물들을 연구하고 검증하고 있는 한, 그는 오늘날 아마도 인식론의 일부로 간주될 무언가에 개입된다. 허나 전반적으로 일반 존재론적 설명을 추구함에 있어서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경계는 희미하다.
  하지만 플라톤에게는 경계가 불분명한 두 번째 더 특수한 영역이 있다. 일상 개별자들의 본성과 습성에 대한 설명 과정에서, 플라톤은 그의 후대인들이 "여럿에 걸친 하나(One-Over-Many)"라 부르는 추론 혹은 논증 방식을 개발한다. 우리는 여러 항목들이 유형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인지한다. 얼룩말도 백마도 모두 말이다. 아리스티데스도 소크라테스도 정의롭다. 그러한 사실들로부터 플라톤은 정의, 아름다움 따위의 형상들이 있음을 추론해 낸다. 사유와 발화가 자연 탐구의 일부분인 한, 이것들 역시 여럿에 걸친 하나 논증의 주제일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지식이 형상이라 단언하며, 그 스스로 명백하게 믿음, 지각, 명사, 진술의 형상들을 인정한다. 더욱이, 그의 탐구가 사유와 발화 일반에뿐만 아니라, 특별히 형이상학적 혹은 철학적 탐구에도 필요한 것으로 보여주는 항목들은 형상들로 간주될 만하다.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테스』에서 특히 그는 그 존재이유가 사유, 언어, 형이상학적 탐구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 할 만한 다수의 형상들 혹은 유들에 특수한 지위를 부여한다. 하지만, 말 자체나 혹은 네모가 형상인지 고찰함에 있어서 충족시키고자 시도하는 한 가지 필요조건은 그것들이 객관적이고 심-독립적인 실체들, 생각하는 자들이 전혀 아무도 없더라도 "존재"할 항목들이라는 것이다. 사유와 발화에 의해 요구되는 바에 관하여 그와 같은 것을 말하기는 망설여질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비 독립적이거나, 적어도 동일한 직관 방식에서 독립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길버트 라일은 그의 획기적인 저작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러한 속성들의 "공통범주적" 속성에 대한 플라톤의 인지가 그의 형상론에 혁신적인 변화를 촉발시켰다고 주장했다. 하나, 같음, 다름, 그 외 후기 대화편에 도입된 형상들과 같은 형상들의 의미를 구성함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재구성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식론과 형이상학 사이의 경계를 고찰할 것, 그리고 개념적/인식론적 실재론을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부터 구별해내는 어려움들에 경계할 것을 요구한다. 플라톤의 일반 형이상학 전개를 추적함은 이 저술의 세 번째 목표이다. 


 본질의 변증법

  플라톤 형이상학의 미궁에 들어서는 여러 가지 길들이 있다. 저자는 오직 단 하나의 길만이 있다고, 즉 자신이 가고자 하는 그 길만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여러 길들이 있음을 충분히 인정한다. (오히려 길이 없을까 두려워한다. 비트겐슈타인 말대로 플라톤의 미궁을 다루는 유일한 길은 들어서기를 거부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5쪽] ousia, 저자가 "본질"이라 번역하는 그것의 실을 따라 가는 것이다. 고대 형이상하겡서 이보다 더 고색창연한 관념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 고대 ousia 탐구 중 표준전거이지만 그의 선행 사상가들 대부분이 그 관념에 관련되어 있다. 표준적으로 그리스 처학은 이오니아 자연철학으로부터 시작한다. 변화와 다양성을 담지한 현재의 우주, 자연이 어떤 단일하고 불변하는 원칙, 이를 테면 공기나 무한자"로부터" 유래되는 방식에 대한 상이한 사변적 설명들이 제기된다. 이오니아의 방법론은 경험적이고 민주적이었다. 그들은 자연세계 현상들에 대한 관찰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렸다. 현상들은 이를 산출해낸 과정도 그 연원도 아니지만 당대 시민들과 관찰자들에게 널리 수용되었다. 자연세계에 대한 ㅈ식, 혹은 완벽한 지식이 가능한지 물음을 던진 최초의 사람은 크세노파네스로 보인다. 인간 지식의 한계에 대한 그의 불분명한 언급들은 차치하고, 사태에 대한 참된 진술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우리의 통상적인 인식적 상태, dokos 사이의 구분은 신용할 만하다. 우리는 dokos 안에서 단지 외견들에만 관련될 뿐이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오류를 불러 오는 단순한 외견들을 숨겨진 실재의 본성, 진리와 구분한다. 이오니아식 자연설명을 거부하는 점은 같지만, 두 사람은 전적으로 상이한 존재론을 내놓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파르메니데스는 고정된 실재를 주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변하며 변화 자체의 방식만이 지속적이라 본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이 변화를 전면적 차원에서 기술한다. 모든 수간 모든 개별자가 장소와 속성 모두에서 변화하는 중이다. 플라톤의 개별자는 이의 먼 상속자이다. 각 순간 모든 면에서 필연적으로 변화하진 않더라도, 플라톤의 개별자는 변화의 주체이다. 플라톤의 개별자들은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별자가 잃지 않을 속성이란 아무것도 없다.
  개별자들은 변화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으로든 인식론적으로든 플라톤에게 기본적인 것은 아니다. 변화 자체가 근본적 원칙일 수도 없는데, 플라톤은 변화가 시작하고 끝나는 안정적 지점들 혹은 상태들이 있을 때에만 변화가 가지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변화가 가능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 가능성을 보장할 형이상학적 설명을 추구했다. 이 설명의 핵심은 그의 형상들, 불변하고 본질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바로 그 실체인 바의 실체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형상들을 이해하면서,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에게 빚을 졌다. 
  [6쪽] 불행히도, 파르메니데스의 시는 너무 수수께끼 같아 존재에 대한 그의 설명에 확신을 갖고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두 가지 근본적으로 관련 있는 해석 문제들이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원론의 본성, 그리고 "is"의 본성이 그것이다. 이는 「진리의 길」 속 논증의 결정적 전제들의 특징이다. 전통적으로 플라톤의 『소피스테스』 보다 뒤지지는 않는 시기에 시작된 전통에 따라 파르메니데스는 수적 일원론자로 간주된다. 그의 형이상학적 우주에는 정확히 단 하나의 항목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정신, 존재, 혹은 일자일 수 있다. 플라톤은 『소피스테스』와 『파르메니데스』에서 사유와 언어의 대상인 존재를 그에 대한 사유와 언어로부터 분리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플라톤의 해석대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존재/정신은 사유나 언어의 대상일 수 없다.
  다른 이들은 파르메니데스가 "유(類)" 일원론자라 주장한다. 그들은 그가 한 종류의 실체, 즉 존재만을 허용하지만 그 한 종류의 여러 실체들이 있을 수 있음을 허용한다고 본다. 플라톤을 포함하여 파르메니데스의 후대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다원론적 형이상학의 전제를 변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문제는 변화, 생성, 소멸이다.
  파르메니데스 일원론에 대한 물음은 그가 존재를 이해한 방식으로 향한다. 그 길은 그의 시에서 제시된 논증에서 그 관념이 전개되는 방식이다. 광범위한 두 노선의 해석이 존재사 "is"를 서술적 "is"로부터 구분한다. 존재적 독법은 전형적으로 파르메니데스를 수적 일원론으로 간주한다. "순수한 존재적 독해"는 「진리의 길」에서 "is"가 단순히 존재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주어에 대해서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is'이다. 다른 어느 속성이든 허용하려면 그 주어는 어떤 종류의 다원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동일성조차, 그것은 존재하고 또한 자기동일적이기도 해야 한다. 일단 다원론이 수용되면, 차이와 비-존재가 따라오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후자는 파르메니데스에게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서술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유-일원론에 기운다. 존재자들의 다수성은 그들에 따르면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해 요구받는 것이 특정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것, 즉 그것이 "서술적으로 단일"할 것 때문에 가능하다. 서술적으로 단일하다는 것은 예비적 존재 F가 단일한 종류에 속한다는 것, mounogenes라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유일하게 F여야 하며, 그 고유한 본성을 F로 규정하는 단일한 설명을 허용해야만 한다. 허나 존재에 관한 어떤 것도, 그 시 속 논증도 서술적으로 단일할 수 있는 항목들의 수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파르메니데스, 특히 그에 대한 서술론적 해석이 도입한 존재, 현존, 본질 또는 본성, 같음, 다름, 비-존재의 연계는 명백히 분리를 요구한다. 그의 후속 사상가들이 실체들의,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적 제한들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주장되는 과정들에 호소하여 존재와 생성에 관련된 문제들을 제기하는 반면, 플라톤은 존재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가정들, 그리고 존재하는 것에 관한 이론화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하여 최초로 비판한다.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를 수적 일원론자로 간주하고 그의 "is"를 조재론적 노선에서 이해한다. 물론 플라톤의 의도는 변증적이고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이해의 기초를 플라톤의 해석에만 두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서술론적 해석은 플라톤의 형상들에 대한 전개방식과 유사하다. 플라톤이 그런 해석을 한 까닭은 자신의 독창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수 있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 시에서 "is"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본질이나 속성 혹은 술어들이 being에 속할 수 있는 상이한 방식들을 규정하는 노력, on이 형상인지 개별자인지 문법적 주어인지 하는 문제는,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연속될 것이다. 
  플라톤의 형상론은 그 전통에 획기적인 공헌이다. 플라톤에게 형상들은 본질의 일차적 담지자들이다. 그들의 ousia 점유는 그들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그들이 자연에서 지속성의 원천이기를 허용한다. 그것들은 다른 것들이 본질들을 담지한다면 오직 ousia의 담지자일 뿐일 것이고, 그것들의 본질 점유는 어떤 방식에서 그 동일한 본질에 대한 형상의 점유에 의존할 것이다.
  이 측면에서, 본질은 플라톤의 형이상학만이 아니라 대화편들의 미로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이끄는 실이다. 단일성, 동일성, 영혼 등의 다른 속성들이나 항목들 중 보질을 선택한다는 것은 (논쟁적이나마) 그것이 특권적 지위를 갖는다는 점을 함축한다. 저자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그것이 핵심이라 믿을 뿐만 아니라, 본질에 대한 연구가 그의 형이상학 이론 재구성에 발견적으로 가장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게서 본질이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초기 대화편에서의 최초 출현들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특유의 탐구는 시험술이고, 그 핵심은 Ti esti 물음이다. 그 주어 자리에는 주로 윤리적 속성들이 온다. 그 물음의 답은 정의 또는 logos이다. 오늘날 전형적으로 정의는 언어적인 것으로 간주되나 플라톤에게 그것은 존재론적인 것들이다. 정의는 단어나 개념이 아닌 사물이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정의의 언어적 의미와 존재론적 의미 사이를 오갈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점은 어떤 것의 본질이나 ousia를 언어적 정의가 짚어내거나 지시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다.
  저자의 플라톤 형이상학 탐구는 본질에 관한 세 가지 질문들에 의해 인도된다.
  [8쪽] 무슨 항목들이 본질을 가지는가?
  명백한 후보는 형상들 또는 개별자들이다.
  두 번째 질문은 본질과 본질을 지니는 것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에 관련된다.
  본질은 그것과 동일하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서든 서술될 수 있는가?
  본질은 (언제나) 그것을 지니는 무엇이든 그것과 동일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단히 복잡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Z. 6에서 일차적 실체는 엄밀히 말해 그 본질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질들을 위한 자리가 없음을 암시한다. 본질은 일차적이지 않은 실체들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에 대해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엄밀하게 말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주어에 대해 그와 동일하지 않은 본질을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질문은:
  본질의 존재론적 본성과 본질에 대해 우리가 알아내고 그것을 이상적인 한계에서 규정하는 방식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
  형상이 존재하는 방식으로부터 우리가 형상을 알고 정의하는 방식을 구별해낼 수 있는가? 이 물음을 구체화하는 방법은 언어적 정의의 구문론적 복잡성을 본질의 단순성 혹은 단일성에 대비시키는 것이다. 플라톤적 형상은 단순하거나 고유한 것, 여럿에 대한 하나로 간주된다. 플라톤적 형상의 단일한 본성과 그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 사이의 긴장은 후기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결합과 분리의 방법을 전개시킬 때 드러난다. 그물망 같은 혹은 "전체론적인" 결합들과 분리들의 구조는 플라톤이 형상들의 단일한 본성을 폐기했거나 본질의 개념을 이제는 형상들이 복잡한 단일자들이라는 식으로 수정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세 가지 물음들은 플라톤 형이상학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문헌 및 주제 선정을 형성한다. 저자는 여러 대화편들을 무시하고 그 대화편 내에 있는 이 저술이 다루는 형이상학적 측면들조차 무시한다. 
  저자 입장에서 볼 때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이 세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출현한다. 본질의 안정된 담지자로서 형상들의 특수 형이상학이 전개된다. 형상들은 본질을 결여한 개별자들로부터 구별된다. 다음으로 형상이 본질을 지닌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이어진다. 그는 존재, 정체, 단일, 같음, 다름과 그 밖에 단순히 형상이 형상이기 때문에 어떤 형상에든 특징지어지는 속성들을 독립시킨다. 일반존재론과 형상들간의 과계들에 대한 그의 연구는 형이상학적 영역과 개념적 영역 사이의 차이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 이끈다. 여기에서 그는 결합과 분리의 방법 그리고 형상들의 엮임이라는 관념을 발전시킨다. 이것들은 거짓 진술에 대한 설명을 가능케 하고, 실질적인 유들을 의미하는 용어들로부터 자연 내에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부합하지 않는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용어들을 구별해내게 해준다. 우리가 말하는 바와 존재하는 것이 분리된 곳에서. 끝으로, 형상들의 엮임, 그리고 결합과 분리의 방법에 대한 설명은 그가 정의와 지식에 대한 세 번째 물음에 답할 수 있도록 한다. 일반 존재론에 따라, 형상과 그 본질의 일부분존재론적 관계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동물이다" 같은 진술들은 "개념적 진리들"이다. 형상들 사이의 관계들은 양립가능과 불가능의 관계이다. 인간과 동물이 그에 대해 서술되는 유일한 존재들은 (존재론적으로) 개별적인 인간들이다. 형상들 사이의 관계들은 개별자들과 "그것들"에 걸친 형상들에 대한 결합과 분리에서 발견되고 드러난다. 이 새로운 무기들을 갖추고, 플라톤은 종국적으로 개별자의 본성, 그리고 개별자들과 형상들의 관계들에 대한 『티마이오스』와 『필레보스』에서의 설명을 제시할 준비를 갖춘다.
  


5장 형상들과 언어

 개괄

  모든 각각의 형상은 각기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로서 존재하며 단일하다. 이것, One-Being이 모든 형상들을 지배하는 원리이다.
  각각이 본질 그 자체인 형상은 그 형상을 예화하는 개별자들과 분리된다. 이러한 형상은 개별자에 대한 감각경험으로부터 추상되지 않는다. 형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고유한 방법, 변증법이 필요하다.
  모든 형상들은 각기 다른 형상들과 독립적으로 탐구될 수 없다. 각 형상이 One-Being임을 확립시켜 나아가는 과정에서 Unity, Sameness, Being, Difference 등의 상이한 본성들이 발견된다. 모든 형상들 각각이 이 본성들에 참여해야만 한다. 또한 실제로 다른 것들과 사유 속에서 혹은 진술의 의미에서 차이가 나는 것들이 서로 구분된다. 따라서 결합뿐만 아니라 분리까지, 형상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된다.
  형상의 One-Being과의 결합에 이어 제기된 분리의 문제에서, 결합이 분석적이진 않더라도 필연적이기에, 그 분리는 형상들 사이의 독립적인 현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각 형상은 모두 One-Being이다. 여기에서 각 형상은 사유의 능력을 통해 Unity와 Being 모두와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Diffrence가 필요하다. 이것들은 형상이 형상이기 위해 반드시 참여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이것들과의 분리가 독립적 현존의 의미라면, 형상들인 Unity, Being, Diffrence 중 어느 하나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나머지 둘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물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는 플라톤의 형상들에 대한 이전과는 다른 탐구방법에서 유래할 것이다. 이전까지는 형상이 지식의 안정된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변증법은 그러한 형상에 정의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교과로 제시되었다. 이는 영혼의 불멸이나 정의로운 삶이 곧 행복한 삶이라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변증법의 본성에 대한 탐구는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교과에 대한 탐구, 또 그러한 교과들의 공통된 원칙들에 대한 탐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의(definition) 개념의 발전에, 그리고 정의를 가능케 하는 이성적 영혼에 관련될 것이다.  
  플라톤이 새로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언어적 질서를 존재 질서로부터 구별해내는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적 탐구의 일부는 언어와 사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일을 포함하며, 그 가능성의 존재론적 토대에는 Being과 Unity가 있다.

  그러나 언어와 사유의 가능조건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이 그 자체 언어와 사유의 일부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자기수용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화, 유사성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플라톤은 『소피스트』에서 여러 존재론들을 다루면서 그 기저의 일반원칙들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주-술, 보편-개별, 부분-전체, 일-다, 동-이, 정지-운동, 참여, 분리, 사유, 언어, 이론 등의 개념들이 그 논증에 도입된다.
  언어와 존재의 상호작용에 대해 Unity, Sameness, Diffrence, Being에 관련한 결정들은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형상은 본질인 바의 것이다(본질로서 존재한다) '라는 자기술어화 전제로부터 형이상학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은 혼융된다. 지식이 존재한다는 그의 전제는 존재론적 함축을 지닌다. 그러나 그가 항상 개념적 혹은 '의미론적' 현상을 구제하기 위해 존재론적 항목들을 도입시키는 것은 아니다. 언어상의 모든 일반용어나 일반술어에 존재론적 대응물을 내놓지는 않는다.

  One-Being으로부터 형상의 복잡성이 귀결된다. 이는 파르메니데스주의에서 다원론으로의 이행이다. 이 다원론의 요소에 Being이 포함되고, Sameness와 Difference가 추가된다. 이 더욱 추상적인 형상들 사이의 관계가 탐구의 대상이다.
  이 관계를 언어로 표현하고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언어는 한계가 있지만, 형상들의 관계나 Being과 참여, 본질의 본성 등에 대한 새로운 문제들을 다룰 최선의 길을 언어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하는 것뿐이다. 기존 형상들과 이 새로운 형상들 사이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개별자처럼 형상도 다른 형상에 '참여'한다면 형상들이 속성을 지니게 된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형상의 복잡성을 요청한다. 

  플라톤 후기 철학에서 형상들의 결합과 분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초중기 플라톤 철학으로부터의 큰 변화로 간주된다. 개별자와 형상 외에 언어적 술어에 대응되는 비-형상 속성들이 있다. 심지어 이 변화가 형상들에 대한 포기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차이는 플라톤의 인식론적 변화들과 언어철학적 발전들에 어울린다. 더 이상 지식은 이름과 지각적 상징들이 아니라 진술과 명제로 유비된다. 주어와 술어가 더 복잡한 사태를 반영하며 단순하고 고립된 형상들은 명사의 지시체 역할을 한다.
  저자는 형상들, 형상들 사이의 관계, 언어와 형상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는 플라톤 후기 형이상학의 일부 특징들을 『소피스트』와 형상들의 엮임(symploke eidon)에 대한 탐구를 통해 다룬다. 그에 앞서 이 문제에 대한 기존 연구노선에 대한 고찰이 진행된다.

  Ryle(1939)은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에서부터 관계명제에서 추상명사가 고유명사이고 형상이 표현인 그런 실체적 형상론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명제 내 표현 요소가 아니라, 보편자들을 요소로 하여 명제를 구성하는 결합의 형식들을 모음형상이란 유비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보편자의 공통된 속성이란, 보편자가 속성을 지닐 수 없으므로, 명제의 형식적 특징들로 드러난다.
  라일은 플라톤 후기 철학 연구에 언어적 전회를 유발시켰다. 그는 형상에 관한 우리의 말과 생각 방식을 규정하는 개념들의 논리적 특성이 플라톤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제 플라톤에게 지식은 근본적으로 명제적이며, 명제나 판단은 복합적이고, 형상들 또는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공통범주적 형상들은 판단의 형식들이며 실체적 형상들과 구분된다. 이를 실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류이다. 실체적 형상들은 명제 내 표현들, 주어 또는 술어이다. 
  라일의 입장은 판단에 공통되며 전제되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체적 형상들은 이전과 달리 판단 내에서 개별자들과 다른 지위를 지니지 않으며, 보편자인 한 속성을 지닐 수 없기에 서로 관계할 수도 없다.
  라일의 입장이 극단적일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형상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련하여 Being과 참여에 대해 재고하도록 한다. 형상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그에 대해 '말하는 방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라일 입장의 두 번째 특징은 참여에 대한 공격이다. 라일은 Being을 형상들의 서열에서 해방시켰다. 반면 참여는 그런 지위를 결코 할당 받은 일이 없다. 라일의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은 참여를 형상으로 간주할 경우의 무한소급을 우려하여 참여에 대한 구-관념을 폐기한 것이다. 
  라일이 제기한 소급은 형상들 사이의, 혹은 형상들과 참여들 사이의 가능한 관계로서 참여를 제거했다. 이에 대해 참여가 해당 이론의 기초전제이며, 이를 정당화하지 않는 일은 다른 경우에도 많다는 반응도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대답은 참여를 두 대상 사이의 이항관계로 본 라일과 달리, 플라톤의 경우 참여를 통해 비로소 개별자에 속성들이 주어지고, 따라서 개별자는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 대답은 형상들 사이의 관계에는 적용될 수 없다. 저자는 형상이 특히 Being에 참여한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방식을 고찰할 것이고, 플라톤 후기 형이상학에서 '참여'라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행위에 앞서 어떤 형상도 존재하지도 논리적 주어가 되지도 못한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라일 소급에 대한 플라톤의 가능한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 형상이 참여한다는 사실이 단지 개별자 사례에서 대답이 제공되는 그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참여가 주어를 그 속성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 과정에서 소급을 피하기 위해 형상이 속성임을 포기할 수도, 개별자가 주어가 된다는 것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개별자와 형상이 결합한다는 점을 포기할 수도 없다. 형상을 포기하면 유명론의 입장이 되고 개별자를 포기하면 파르메니데스적 일원론이 될 것이나 두 입장 모두 플라톤의 입장은 아니다. 소급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은 궁극적으로 피장파장의 방식이 될 것이다. 개별자와 보편자를 포기하는 것은 소급을 겪느니만 못하다. 참여를 존재론에 포함시킴으로써 어떤 현상이 구제되는지 설명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 현상이 『소피스트』에서 제시된다.


『소피스테스』 논증의 배경

  『소피스트』는 소위 실체적 형상들이 아닌 Being, Sameness, Difference 사이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그리고 세부적으로 다룬다. 셋 모두 판단형식으로 내세워질 수 있기에 라일의 언어적 전회에서 역할을 하지만, 특히 Being이 해석의 모든 면면을 좌우한다. 라일은 Being이 판단의 여러 형식들 내에서 계사의 사용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Being에 대한 실체적 해석을 거부할 길을 열었다. 이어 Owen에 의해 중심문제는 플라톤이 발견해내고 독립시킨 einai 동사의 상이한 용례와 의미들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그는 해당 논쟁에 사용될 용어에도 기여하였다. 그는 Be 동사를 구문론적으로 일항술어를 확정하는 완전용법 혹은 실체적용법과 이항술어를 확정하는 불완전용법으로 나누고, 여기에 상응하여 의미론적으로 전자는 존재사, 후자는 주-술 계사 또는 동일성 기호로 구분하였다. 
  Frede 또한 자신의 저술에서 해당 계사에 대해 유사한 설명을 제시한다. 저자는 존재사로서 가장 잘 이해되는 einai가 등장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로써 플라톤이 einai의 존재사적 의미를 독립시켰다고 보긴 어렵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런 접근은 형상 Being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특히 Being에 있어서 현존의 문제를 본질이나 참여의 문제로부터 구별하게 된다. 이런 점은 분리의 문제, 그리고 Being에 대한 형상의 참여, 즉 형상의 본질(ousia) 소유라는 사실로부터 귀결되는 바에 대한 탐구에서 더욱 문제가 된다. 현존은 본질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따라서 일항 'is'의 독립은 기대되지 않는다. 
  플라톤은 언어행위의 기저에 놓이는 형상들의 본성에 대한 결론들을 도출해내기 위해 언어를 탐구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형상의 동일성과 그것의 본성이 Being이란 말로 정의되기에, Being과 Sameness의 관계를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프레데 역시 오웬처럼 언어적 계사에 주목하면서 Being과 Sameness의 참여, 그리고 그것들이 형상이라는 형이상학적 측면을 간과한다. 'Is'의 불완전용법에 여러 상이한 용례와 의미가 있다는 그의 입장은 특히 Being이 정확히 한 형상이라는 플라톤의 명백한 주장과 일치되기 어렵다. 라일 노선에서는 이것이 기존 형상에 대한 이해에서 새로운 형상 이해로의 전환에 대한 근거라 여길 수도 있지만.
 

  언어적 접근에는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첫 번째는 megista gene에서 운동과 정지에 대한 격하이다. (라일은 운동과 정지가 판단형식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를 생략한다. 또 다른 언어적 접근에서는 운동과 정지가 Being이 운동하지도 정지하지도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는 논증에서의 역할에 한정된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이 논증은 동일성 진술을 서술적 진술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런 구별을 이끌어내더라도 Being이 정지한다고 '서술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없다. 라일 입장에서는 Being이 정지한다면 실체적 형상이 되므로 문제가 된다.) 반면 모든 형상이 정지해 있으므로 Being 또한 형상으로서 정지해야 한다. 그런데 이 경우엔 운동 역시 형상이기에 정지해야 한다. 그러나 운동과 정지는 결합할 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igantomachia 부분에서의 결론은 모든 형상이 형상인 한에서 정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해당 부분을 통해 운동과 정지가 megista gene에 포함됨을 밝히고자 한다.
  두 번째는 『소피스트』 논증에서 참여의 역할이다. 참여는 그 논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라일은 참여를 배제시킨다. 그리고 대화편 내에서도 Being과 달리 참여는 megista gene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Megista gene의 목록이 전부 나열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Being이 포함되었다는 점 때문에 이는 불충분한 설명이 된다. 초-중기 플라톤에게 있어서 Being과 참여는 각기 형상과 개별자의 상이한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기에는 형상들도 상호 참여를 하므로 이 역시 충분한 반론이 되지 않는다. 참여가 목록에서 배제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megista gene의 지위를 플라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symploke eidon부터 시작할 수 없다. 그 이전 기초작업에 해당하는 논의를 고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형상들이 엮이기 위해 요구되는 형상들의 다수성, 그리고 플라톤 후기 철학에서 존재론적 진전들을 언어로 추적 가능케 해주는 언어적 도구들과 행위자들을 플라톤이 어떻게 확보하는지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 comes by both?


 『소피스테스』

 언어적 전회를 포착한 사람들은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이 도입되는 『소피스트』 236 이하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소피스트는 자신을 상(狀)-제작자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손님은 소피스트가 상 중에서 모상과 환상 중 어느 쪽을 제작하는지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상이 무엇인지, 즉 어떤 것으로 보이거나 나타나지만 그것이지는 않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혼란해 한다. 이 상 개념에 대한 문제가 이후의 논의를 촉발시킨다. 상-제작은 모든 것에 대해 지혜로운 자라는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소피스트의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다. 실제 사물의 이름을 가진 그림을 그려내는 기술자처럼, 소피스트는 말로 된 상들을 만들어낸다. 이 능력은 다시 그 이전 소피스트의 참된 정의를 파악하지 못한 여섯 가지 설명들 이후에, 반박술의 하위분류로 제시된다.
  소피스트의 특징을 드러내 줄 다중적인 정의들, 그리고 상(image)과 현상(appearance)이라는 개념은 해당 대화편의 도입부와 연결된다. 진정한 철학자는 다른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소피스트로도, 정치가로도 여겨지고 보인다. 이 이름들이 실제 유들에 대응되어 각기 셋씩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손님은 이름마다 하나씩 그 유들도 셋이라 답한다. 그러나 그 각각을 정의하긴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소피스트에 관하여 사람들은 그 이름만 공유할 뿐, 누군가를 소피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각기 서로 달리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피스트에 대한 여섯 가지 '소위' 정의들은 우리가 같은 현상을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일례이다.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언어의 유연성과 부정형성이 이러한 혼란과 거짓의 가능성을 남겨 놓는다. 여기까지 도입부의 단계들은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 언어가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실패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언어 사용자가 청자를 거짓 믿음으로 이끄는지 배울 준비를 하게 만든다. 이로써 언어, 세계, 화자라는 세 요소가 나타난다.

  소피스트를 상-제작자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거짓 진술과 거짓 믿음이 어떤 식으론가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거짓 진술이나 거짓 믿음에서 나아가 to me on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이 논박되지 않고서는 소피스트를 상-제작자로 분류하여 추적을 이어나가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손님은 우선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서 to me on이 불가능함을 세 가지로 논증한다. 첫째는 표현 혹은 이름의 문제이다. 표현이나 이름은 What is인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to me on은 말 그대로 what is not이므로, 이 표현 또는 이름은 어디에도 전혀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to me on을 실체, 주어로 삼을 경우이다. 그러나 to me on은 어떤 식으로도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있는 것들로써 그것을 부르거나 가리킬 수 없다. '그것'이라고 지시하거나 언급하는 것조차 그 과정에서 '한 개'라는 속성을 부여하게 되므로 아예 가리킬 수조차 없다. 나아가 세 번째로, '그것'이 지시, 언급, 사유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도 to me on을 '그것'이라 부르는 일이 되므로, to me on의 이러저러한 불가능성들을 언급할 수도 없다.
  손님은 이 세 논증들을 소피스트의 첫 번째 방벽으로 간주한다. 소피스트의 입장에서 볼 때, 일관되게 to mo on에 대해 논할 수는 없으므로, 상에 대해서도, 거짓 상에 대해서도 논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소피스트는 오직 말로 된 상들에만 관련한다. 상을 말로 정의할 경우, 그것은 실재를 닮은, 그러나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라 규정된다. 실재의 어떤 것이 참으로 그것인 한, 상은 참이 아니다. 그러나 상은 어떤 식으로 무엇인 것으로 있어야 한다. 실재이지 않은 것(to me on)이 있어야(to onti) 한다는 것은 첫 번째 to me on 논증을 시사한다. 상이란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이어 소피스트의 다음 반박은 누군가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거짓 믿음은 which is is not, 또는 which is not is라고 믿거나 생각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는 to me on 두 번째 논증을 시사한다. 이 두 가지 논박은 to me on 세 번째 논증을 소피스트가 피해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세 가지 to me on 논증은 이름이 반드시 지시체를 지녀야만 한다는, 그리고 지시체는 반드시 존재하거나 어떤 식으론가 존재해야 한다는 숨은 전제를 지닌다. 이는 소피스트가 말로 된 상들에만 관여한다는 언급을 통해 이해된다. To on 이외의, to on과는 다른 것으로 정의된 상은 이름 또는 말로 된 상들로 일반화된다. 지시체가 말과 다른 한, 그리고 지시체가 to on인 한, 말은 to me on이다. 그러나 말, 나아가 상 일반은 어떤 식으론가 있어야 한다. To on이 to me on에, 또 그 역으로도 어떤 식으론가 결합이 필요하다. 이는 파르메니데스적 일원론에 대한 반발이 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행위주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한 이 결합을 통해 상과 말이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거짓' 말과 '거짓' 믿음이 확보되지는 않는다. 마지막 다섯 번째 논증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to on을 to me on에 가져다 붙인다는 언급이 나온다. 

  손님은 소피스트의 파르메니데스적 방어에 대해 공격으로 응수한다. 그 목표는 not-being in some manner is, being in some manner is not 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손님은 앞선 사상가들이 to on을 몇 가지로, 또 어떤 것으로 주장하는지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to me on에 대해서만큼이나 to on에 대해서도 혼란에 빠져 있으며, 저 사상가들이 to on에 대해 논하는 것을 지금 to me on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이나 마찬가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손님은 우선 이원론의 입장을 고찰한다. 이 입장은 두 요소를 상정하고 양자 모두 혹은 둘 중 하나를 "Being"이란 이름으로 지시하거나 혹은 그 "Being"으로 제 3의 것인 Being을 지시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 서로 구분되는 기존의 두 요소가 모두 'is'로 똑같이 진술되어 일원론으로 귀결된다. "Being"이 하나의 이름으로 하나의 지시체를 가리킬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두 요소 중 어디에든 "Being"이란 이름이 붙어(X is, Y is) Being과 동일시될 것이다. 이 역시 일원론으로 귀결되며, being을 제 3의 구별되는 존재론적 요소로 수용하지 않는 한, 또한 동일화와 서술을 구분하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렇게 귀결된 일원론에 대해 다시 고찰이 시작된다. 그 논증은 앞서의 논증 노선을 따른다. 일원론은 "Being이 하나"라고 말하며 이는 같은 것을 두 이름("Being," "One")으로 명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어떤 것이고 Being, One과 구분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일원론에서 다원론으로 귀결된다. 만일 이름이 지시체와 같은 것이라면 지시체가 이름을 가지지 않거나 이름이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논증은 "the One"이라는 표현을 이름이라는 유(kind)의 차원에서 다루고, 다음으로 다시 구체적인 지시체를 가지는 개별적인 하나의 이름으로 다룬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상의 과정에서 파르메니데스적 입장을 전제하고서는 Not-Being 못지 않게 Being 또한 여러모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 나아가 첫째로, 이 논증은 서술과 동일화 진술을 구분하기에 앞서, 이름이 그 이름으로 명명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는 상에 대한 앞선 논증과 관련된다. 다음으로 이 논증은, 존재하는 유들 중의 하나로 '이름' 역시 to on이라는 점, 그리고 이름이 명명되는 대상들인 ta onta와 다르기에, 일종의 to me on이 존재한다는 점을 확신시켜준다. 그러나 여전히 Being에 대한 통찰은 확보되지 않는다.
  존재의 수를 논하는 입장에서 이름과 onta라는 상이한 두 유들을 구분하고, 다음으로 손님은 존재가 어떠한 것들인지 논한 입장들을 검토하는 과정으로 넘어간다. 이는 이름과 그 이름의 지시체가 구분될 때 이해할 수 있는 전환이다. 이 단계에서 플라톤은 말과 사물로부터 그 사용자, 제작자, 즉 영혼 쪽으로 이행한다.  

  이 Gignatomachia 단계에서 손님은 거인족의 입장을 전적으로 물질만을 존재로 보는 입장에서 영혼이나 지식 등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순화시킨다. 이 결과 거인족의 입장은 작용하거나 받는 '능력(dynamis)'을 존재의 표지로 받아들인다.
  반대편에서 신들의 입장은 가지적이고 비물질적인 것들만이 Being(ousia)이란 것이다. 반면 dynamis를 공유하는 것은 Being이 아니라 genesis(생성)이다. 전자는 같은 것에 같은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을 영혼을 통해 추론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후자는 매번 다른 것에 다른 식으로 감각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ousia가 가지적인 것, 즉 알려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앎이라는 작용을 받은 그 만큼 움직여진다. 
  논의에 영혼과 지식이 도입되면서, 완전한 to on에 그것들이 결여될 수 없는 한 존재는 운동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그와 동시에, 지식이 존재한다면 그 지식의 대상은 반드시 안정적이고 불변해야 하므로, 존재는 정지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존재는 운동하고 있기도 정지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해 지식의 대상들과 영혼에 한정된다. 

  손님의 결론은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이든 논하면서 지식과 정신을 파괴하는 자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과 정신을 거부하는 입장은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 이원론, 일원론, 거인족, 신들 네 입장 모두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을 논하는 입장들이며, 각각의 입장에서 자신의 고유한 설명을 제시할 수 없는 입장들이다. 
  존재의 수를 논하는 입장들을 검토하여 이름을 확보하였고, 존재가 어떠한 것인지 논하는 입장들을 고찰하여 지성적 영혼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형상들의 엮임이나 not-being 문제나 모두 형상들 또는 유들의 다수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원론과 일원론에 대한 고찰의 결과 일원론도 다원론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영혼에 더해 영혼이 아는 대상들이 있고, 이름과 이름이 명명하는 사물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다수성을 함축한다. 그러나 저자는 영혼이나 이름이 'ta onta'와 다른 부류의 것들로 간주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같은 류에 속하는, 알려질 수 있고 명명될 수 있는 두 존재들이 도입된다. 앎, 말, 생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앎을 행하는 영혼과 부동의 onta가 필요하다. 운동과 정지는 여기에서 필연적인 속성들이다. 움직이는 것과 멈추어 있는 것이 있으려면, 필연적으로 운동과 정지가 있어야 한다.
  운동과 정지 두 속성들이 있다는 것은 앞서 이원론과 같은 문제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손님은 영혼 안에서 그 둘을 구별하고 그것들의 ousia에 대한 공유에 주목함으로써, 그것들을 밖으로부터 포괄하는 Being을 제 3의 것으로 놓는다. Being, 운동, 정지는 세 가지 상이한 것들이며, Being은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서 운동하지도 정지하지도 않는다.
  '본성' 개념과 Being을 '공유'하는 속성들이 여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본성과 ousia에 대한 공유라는 말로 Being을 도입함으로써 손님은 운동, 정지와 구분되는 Being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이원론의 입장은 Being을 그 존재론에서 별개의 항목으로 두지 않았기에 Being을 다른 것에 대해 서술할 수도 없었다.

  Being을 분리시킬 수 있는 더 큰 이유는 gigantomachia에 있다. 그 대목에서 결론은 영혼에는 운동이, 형상에는 정지가 서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이 존재하기 위해, 'ousia에 대한 결합'이 존재하기 위해 운동과 정지는 달라야 한다. 'ousia'에 대한 결합은 곧 운동과 정지에 대해 being이 술어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운동과 정지는 모두 있어야 하며, 또한 그 둘과 being까지 서로 모두 달라야 한다.
  여기에서 be 동사에 대한 특수한 독해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Being은 본성상 정지하지도 운동지도 않는다"라는 구절은 be를 존재사로 읽을 경우 이 셋이 본성상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기에 좋다. 다른 한편 Being이 지식의 대상인 한 그것에 대해 정지가 서술되어야 한다. 이는 나아가 정지와 '가장 반대되는' 운동에도 정지가 서술되어야 한다는 문제에 이르게 된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손님이 여기에서는 형상들에 대해 전혀 논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아직 'is'라는 동사에 대한 특수한 독해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우선, 영혼과 지식의 대상이란 개념을 통해 보자면 운동과 정지가 매개될 수 있다. 같은 방식에서, Being은 본성에 따라서는 아닐지라도 지식의 대상이란 측면에서 정지해 있다고 서술될 수 있다. 같은 식으로 운동 또한 조건부의 운동으로, 즉 형상 자체의 변화가 아닌 인식적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자체 본성이든 다른 형상과의 관계이든 형상으로서의 본성이든 '전환'된 것은 없다.
  이 관점을 좀 더 밀고 나아가면, 운동 역시 영혼의 인식활동에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형상에 대한 말이나 생각 또는 앎을 가능케 하는 영혼의 자기운동에 한하여, 운동은 정지와 함께 Being이라는 형상에 대해 서술될 수 있다. 운동과 정지가 함께 Being을 안정적인 지식의 대상으로 확보한다. 이 둘은 나아가 지식, 언어, onta의 다수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어 소피스트의 방벽에 맞설 무기가 되어 준다.
  이 단계에서 손님은 자신들이 not-being 못지 않게 being에 대해 혼란에 빠졌다고 이야기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의 화제 전환은 논의를 더 진전시킬 준비가 되었다는 암시라고 여긴다. 이제 손님은 같은 것을 때마다 여러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지 묻는다. 이미 운동과 정지는 각각의 고유한 이름으로도, being이란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지만 손님은 사람과 그의 색, 형태, 덕들과 악덕들이라는 개별자의 사례로 넘어간다. 한 사람을 까맣다든지 크다든지 하는 식으로 여러 이름들로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가 여럿일 수도, 여럿이 하나일 수도 없다는 전제에서 반박한다. 

  하나와 여럿의 역설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참여'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이다. '참여'는 일과 다의 문제에 특정한 측면들을 해결하였으며, 개별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이 '참여'가 여기에서도 해법으로 등장할 것을 암시한다.
  손님은 운동, 정지, Being으로 돌아가 그것들이 서로 참여하는지 전혀 참여하지 않는지 아니면 일부는 참여하고 일부는 참여하지 않는지 묻는다. 어떤 입장이든 자신들이 존재로 내세우는 것이 존재한다는, 즉 ousia에 대한 공유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므로 참여가 전혀 없을 수는 없다. 모두 서로 참여한다면 정반대인 운동과 정지가 같아질 것이므로 이 역시 거부된다. 남은 가능성은 일부는 참여하고 일부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형상들의 엮임에 진입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철자 유비가 제시된다. 일부 철자는 서로 섞이는데 일부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 또한 모음 집단은 다른 것들을 엮어주며 자신도 다른 것들과 엮이지만 자음집단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서로 섞이고 섞이지 않는 관계를 파악하려면 전문가여야 한다. 이는 음들과 음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며, 유들에 대해서도 어떤 것이 섞이고 또 그렇지 않는지 보여줄 사람은 일종의 지식을 지녀야 한다.
  유들에 대한 결합과 분리의 지식을 가진 자는 철학자일 것이고 모음유비에 해당할 형상은 소위 megista gene일 것이다. 문제는 이 유비를 강하게 적용할 경우 발생한다. 모음 중에 어떤 음절에든 항상 필수적인 특정 모음은 없다. 다른 한편, 라일이 실체적 형상들로 간주한 소위 자음형상들의 경우, 그것들의 결합에 반드시 모음형상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또한 불분명하다. 그러나 자음철자끼리는 모음 없이 결합하여 음절을 구성하지 못한다. 형상들 사이의 매개에 모음형상과의 결합이 논리적으로 선행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만일 그런 선행하는 결합이 필요하다면 모음형상은 Being이나 Sameness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음형상 끼리의 결합에 대해서는 어느 쪽 경우도 설명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음형상이라 할 만한 Being과 Rest는 결합하여 'Being rests'라는 의미를 지니는 참인 명제를 구성한다.
  이 유비에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결합의 순서와 관련된다. 그리스어 알파와 윕실론을 순서대로 결합하면 의미있는 음절을 구성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형상들의 경우에도 결합 순서가 문제가 될 수 있다. Being이 Rest에 참여하는 경우와 Rest가 Being에 참여하는 경우 서로 의미가 달라진다. 플라톤은 참여 혹은 결합 관계를 비대칭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느 것이 모음형상이고 어느 것이 자음형상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Being, Sameness, Difference, Unity 까지 모음형상으로 간주하면 이 유비 구절이 더 잘 읽힌다. 또한 모든 형상을 통하여 공유하는 형상에 대한 언급도 등장한다. 이는 다른 유들이 더 많은 혹은 덜 참여한다는 규정에 뒤따른다. 논의는 그 형상들 중 megista gene를 택하고 각각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 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논의는 'megista'를 가장 널리 공유한다는, 즉 모든 형상들을 관통한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쉽지만, 실체적 형상인 운동과 정지의 경우 이 이해가 적용되기 어렵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형상들의 엮임

  Being은 고유한 본성을 지닌다. 운동과 정지는 Being에 참여함으로써 마찬가지로 각자 고유한 본성을 지닌다. 이로써 유들의 다수성이 확보된다. 여기에 더하여 각각이 여러 이름들로 불릴 수 있는 한, 그것들은 고유한 본성에 더하여 다른 속성들에 참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형상들 사이의 참여, 특히 Being에 대한 참여란 무엇인가? 두 번째는 참여를 행하는 형상들의 수와 참여의 범위(혹은 정도)이다.

  megista gene로 선택되는 유들은 우선 운동, 정지, Being이다. Megista의 의미는 이로써 수식받는 유가 더 넓은 범위까지 결합할 수록 더 크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논의의 이 지점에서 그 중요도에 대한 강조일 수도 있다. 세 유가 모두 megista로 칭해짐에도 운동과 정지는 서로 섞이지 않는 반면, 양자 모두 Being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 이는 megista의 의미에 대한 가정을 약화시킨다. 이어서 유들은 셋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러나 Being이 자기 자신에 참여한다는 언급은 없다. 그것들은 상이한 세 유들이므로, 이로부터 그 각각은 자기 자신과 같고 자신 이외 나머지 둘과 다르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서 Sameness와 Difference가 논의에 등장하게 된다. 이 둘 역시 Being과의 혼합으로 인해 있는 것들이 된다.

  다음으로 Sameness와 Diffrence가 운동, 정지와 다르다는 것이 증명된다. Sameness와 Difference 모두 처음 셋과 '필연적으로 언제나' 혼합되므로, 이 둘 역시 megista gene인 듯하다.
  운동과 정지가 같음, 다름과 다르다는 논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 운동과 정지 양자에 공통으로 서술되는 것은 둘 중 어느 쪽도 될 수 없다. 
  (2) 만일 그렇다면 운동이 정지하고 정지가 운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같음과 다름 양자에 관하여, 만일 변화나 정지가 그 둘 중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다른 한 쪽을 그 본래의 본성에 반대로 변하도록 강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반대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운동이나 정지가 그 반대에 참여할 경우 어떤 종류의 서술이 포함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논증 이전의 운동과 정지가 행하는 같음에 대한 참여는 참여자의 본성을 변화시키지도, 피참여자의 본성과 같은 것이 되게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논증에서는 예를 들어, 같음이 정지와 같다면, 운동이 같음에 참여함으로써 바로 그 참여 자체로 정지에 참여하게 되어 운동이 정지하게 된다. 이 결과가 운동의 본성이 정지의 본성이 된 것이든 운동이 정지의 속성을 획득한 것이든, 두 가능성 모두 앞선 논증에서 배제되었다. 따라서 같음, 다름은 운동, 정지와 다르다.
  '(3)'에서 운동과 정지가 이름으로 사용되다 일반화 용법으로 비약한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저자는 "운동"과 "정지"라는 말이 유들을 명명하기 위해 사용되며 개별자들에게까지 일반화되는 건 아닐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 둘 사이의 결합이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한다. 모든 형상은 형상인 한에서 정지하고 또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 논증은 테아이테토스를 향한 ad hominem 논증 또는 참여관계의 본성에 대한 얼버무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라면 테아이테토스는 운동과 정지가 형상인 한에서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데에 동의하기에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증을 서술로부터 동일화를 구분하는 데에 실패함에 따른 논증으로 보려는 시도도 있다. 이 논증 전까지 같음과 다름은 주어와 동일시되는 일 없이 주어에 대해 서술되지만, 이 논증에서는 주어와 술어가 동일시되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이 과정에서 오류보다 결론 도출에 더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Being과 Sameness가 구별된다는 점이 논증된다. 
  "만일 Being과 Sameness가 아무런 차이도 의미하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정지와 운동 양자 모두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있는 한, 이러한 방식으로 둘 모두 같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자기 자신과 같음'이 '서로 같음'과 혼동되는 오류가 드러난다. '같다'라는 술어에서 생략된 부사구를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플라톤은 그 해석을 수용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첫째, 정지와 운동이 섞이지 않는다는 주장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둘째, 같음과 being이 구별되는 개념들이라는 점이다. 자기동일성을 단언하는 것은 일종의 "Being" 주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는 "is" 불완전 용법을 동일성 의미를 한 축으로 갖는 것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우려할 만한 부분이다.

  이어서 끝으로 Being과 다름이 구분된다. 이 논증은 Being과 그 형상에 대해 이야기 되는 방식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프레데는 여기에서 Being과 다름의 대조로부터 출현하는 Being과 Not-Being 개념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저자는 여기에서 Being 자체와 그것의 참여에 대한 대조에 주목할 것이다.
  "있는 것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 이야기되는 반면, 다른 것들은 언제나 여타의 것들에 대해 이야기된다."
  "그런데 다름은 언제나 다른 것에 대해 이야기된다."
  "만일 다름이 Being처럼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했다면, 다른 것들 중에서 다른 것에 대하지 않은 다른 어떤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단적으로 어쨌든 다른 것은 무엇이든, 필연적으로 또 다른 것에 대해 바로 그러한 것임이 귀결되었다."
  일반적으로 해석상의 첫 번째 문제는 진술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담지된 속성들뿐만 아니라 속성들의 담지자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야기되는지 여부이다. 우선 ta men, ta de 구별이 출발점이다. 특히 "Being처럼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라는 구절이 문제가 된다. 
  전통적 입장은 ta men, ta de 구분을 절대적 속성들과 상대적 속성들이라는 두 종류로 나눈다. 이 경우 동사 "is"가 아닌 ta onat를 구분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Being이 양자 모두에 참여한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절대/상대 구분은 다시 두 가지 의미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단항과 다항의 논리적 차이이다. 크거나 작다는 술어는 다항술어에 속할 것이고, 반면 인간이나 말 같은 경우 단항술어가 될 것이다. 다른 구분은 존재론적 차이에 따른다. 개별자와 상들은 존재하기 위해 다른 존재들에 의존해야 하는 상대적인 술어가 될 것이다. 반면 모든 형상 각각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에 절대적인 술어가 될 것이다. 어떤 형상이든 논리적으로 상대적이라 말하는 일은 주저될 만하다. 존재론적으로는, 플라톤이 형상의 지위를 독립적인 것, 자족적인 것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것인지 물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형상들은 Being에 대한 참여로 인해 그러한 것이 된다고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개별자 역시 똑같은 형상에 똑같은 참여를 행하는데 그 결과는 의존적
(다른 것에 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개별자들이 being의 두 번째 형상에 참여한다거나 Being에 대한 참여보다 앞선 개별자들의 고유한 특징 때문에 Being에 참여해도 독립적 존재가 못 된다는 식의 답변은 문헌에 의해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논의가 형상의 차원에 국한되어 있으며, onton은 형상들을 지시한다고 보는 편이 바람직하다.
  속성들에 대한 논리적 구분은 해당 속성을 포함하는 술부의 이해가능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해당 속성만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가 가능한 명제가 성립한다면 절대적 속성, 그렇지 않고 보완을 필요할 경우 상대적 속성이 된다. 'Is'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구분이 적용될 수 있다. 완전용법 is의 경우 Being은 절대적인 것, 불완전용법의 경우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입장은 전형적으로 형상 Being의 역할이 상이한 종류의 서술들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며 Being에 형상의 지위를 할당하길 꺼려한다. 
  그들이 'is'에 적용하는 완전/불완전과 속성에 적용하는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고찰해야 한다. 문제는 제시된 속성, 특히 Being이 완전 속성인지 불완전 속성인지 여부이다. 또한 그리스어 esti를 포함하는 구문론적 혹은 의미론적 차이가 있는지 여부가 문제이다. 그러나 "is"에 대한 그러한 구분을 수용하더라도 그렇다고 형상으로서의 Being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더욱이 일부 학자들은 두 종류의 "is"에 따라 Being의 두 형상들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구분은 상대적 서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의들의 타당성에 호소하고 
존재사 "is"를 전제한다. 그러나 통상 개별자를 주어로 하고 속성이 술어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례와 달리, 플라톤의 형상으로 구성된 문장에서는 완전속성과 불완전속성, 완전용법과 불완전용법의 "is"를 구분하기 어렵다. 논리적으로 이해를 위해 보완이 필요한 속성일 Good itself 등은 완전용법 is와 함께 주어로 등장할 수도 있고 주부와 술부 모두에 불완전용법 is와 함께 등장할 수도 있다. 후자의 자기술어화를 고려할 때, 불완전속성이 불완전용법 "is"와 함께 구성한 문장에서 논리적 보완이 필요없는 결과까지 나온다. 이는 형상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서술적 진술이 주어로 형상을 포함할 경우, 불완전 속성은 정의되는 주어일 수도 있고 서술되는 속성일 수도 있으며 양자 모두일 수도 있다. "The Good is good."이 그러한 예이며, 이 문장은 자기-술어적으로 읽을 경우 The Good의 Goodness라는 본질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를 자기-참여적으로 읽는다면 The Good에 대해 a good thing으로서의 속성을 서술한 것이다.
  플라톤 당대에 완전/불완전이라는 속성구분을 사용할 수 있었으리란 점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단지 서술가능한 것들을 지시하기 위해 onton을 사용한 것은 과잉으로 보이고, 이 대화편에서 이런 상이한 종류의 속성들에 대해 그 논리적 특징들을 고찰하고 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는 점에서 그 구분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해석에 반대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지지자들이 Being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Cornford는 존재사 is를 형상으로 취하지만 이를 kath' auto로도 pros allo로도 분류하지 않으며 그 이유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최근의 지지자들 역시 형상 Being 자체에 관한 문제에 대해 무시한다. Being을 정위시켜주는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또 다른 전통적 해석은 속성의 구분이 아니라 'is'에 구분에 주목한다. 이 해석은 Being의 kath' auto 방식을 존재 진술, 즉 완전용법 혹은 일항술어 is로, pros allo를 서술, 즉 불완전용법 혹은 이항술어 is로 본다. Being에 대한 참여는 존재라는 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Being은 형상의 지위에 놓이는 반면, 참여는 형상들 사이에서 확보되는 관계이기에 형상에서 제외된다. 현존을 의미하는 Being과의 참여 결과로서의 진술이 Being에 참여하는 모든 형상들 각각에 대해 kath' auto 진술이다. 반면 Being 이외의 형상들에 대한 참여 결과는 pros allo 진술이 된다. Being은 pros allo 진술의 술어가 되지 않는다.

   전통적 해석이 술어의 종류에 집중하는 반면, 최근 해석은 이에 반대한다. 이 입장에 있는 Frede는 'is'의 두 가지 용례를 통해 해당 구절을 해석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pros allo와 kath' auto는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대상에 속성이 속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들은 동사 be의 용례에 반영되며, 형상들로 간주된다. 그는 이 부분에서 두 가지 형상들이 아니라 서술의 두 가지 용법들에 상응하는 하나의 형상을 고찰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두 가지 상이한 의미의 서술들을 논하고 있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의미에 맞는 두 형상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프레데가 '형상,' '용법,' '의미'라는 말들로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Being이 참여한다고 하는) '두 유들'의 난해함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는 Being의 두 번째 형상을 가정하지 않는다. 그는 "두 가지 유들"이 정확히 하나의 형상에 결합될 전략을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틀렸다.
  저자는 프레데와 being의 두 가지 방식들을 각기 being과 참여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같은 입장이지만, 크게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근본적 차이는 pros allo/kath' auto의 구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Being이 실체적 본성을 지닌다 믿지만, 프레데는 언어적 용법들로 모두 환원된다고 본다. 또한 pros allo/kath' auto 구분을 결정짓는 것을 저자는 being의 방식으로 본다. 저자의 입장에서 전자는 allo에 의한 속성이 지시됨으로, 후자는 자신의 본질로 존재함으로 이해된다. allo가 주어와 수적으로 구분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프레데는 주/술 사이의 수적 구분을 두고 이는 수용할 수 없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프레데에 따르면 'X  is Y'에서 첫 번째 방식의 'is'는 X와 Y의 Y-ness가 같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is'는 Y-ness의 다름을 의미한다. 이 구분은 Being과 다름이 구별되는 형상들임을 보여주고 형상들에 대한 다양한 진술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 Being의 두 가지 방식은 세 가지 서술들을 아우른다. (1) 자기-술어. (2) 이중역설(형상인 한에서 귀결되는 속성과 특정 형상으로서 지니는 속성 사이의 문제)로 귀결되는 서술. (3) 형상들에 참여하는 개별자들을 포함하는 서술.

  프레데의 is1은 정의(definition)의 "is"이다. 이는 형상이 곧 그 본질인 그러한 형상의 본질을 서술하거나, 자기-술어 서술에서 서로 동일한 실체인 주어와 술어를 연결한다. 문제는 술어가 주어-형상에 대한 정의일 경우이다. 프레데는 이 경우 "x is y"에서 x가 형상이나 개념 X를 표현하지 않는 문장들을 배제시킨다. 그 이유는 y가 형상을 지시하기 떄문이다. 저자는 이 말을 y가 Y-ness를 지시하기 때문에 항상 형상을 지시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다시, Y-ness는 X의 본질이거나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Y-ness가 X의 지시를 형상에 제한시킨다면 그 이유는 본질이 형상에만 서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X와 Y-ness가 수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대상을 가리킨다면 그 이유는 형상과 그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는 분류들이 이 경우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확신하진 않는다. 플라톤이 종과 유를 구분하지 않았다면 분류들 역시 is1의 사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피정의항에 대해 그 정의의 부분이 is1의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형상 인간과 형상 동물은 명백히 다른 형상들이라는 것이다. 유나 본질의 일부가 본질 자체와 같은 방식으로 서술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보자면 특히 자연종 범주들에서 개별자는 본질의 담지자로도 제일실체로도 간주된다. 따라서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고도 동물이라고도 서술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지금 문제시 되는 것이 물질적 개별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에게 물질적 개별자는 본질과 동일시되지 않으며, 형상들이 제일실체의 지위를 차지한다. 플라톤에게는 주어가 본질 그 자체인 주어의 본질 일부에 대한 존재론적 술어는 없다.
  언어 정의상 주어와 술어 사이의 서술관계는 주어-형상과 완전한 언어적 정의 사이의 관계와 같이 볼 수 있겠지만, 그러한 존재론적 사태는 형상의 단일성을 위협한다. 형상의 단일성을 고려하면 형상에 본질이 속하는 방식이 본질의 부분이 속하는 방식과 같을 수 없다. 여기에서 플라톤에게 언어적 서술과 존재론적 서술이 갈리는 예가 등장하는 것이다.(현대 형이상학에서, 속성 Φ와 이-것만-를 예화하는 단순한 개별자 a의 관계는 플라톤적 형상과 본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비교점을 지닌다. 첫째, a가 
Φ만을 예화하고 Φ가 a의 구성요소가 아니듯, 형상도 단 하나의 본질만을 지니며 본질은 형상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둘째, 현대의 문제는 단순 개별자 a와 복잡한 언어적 사실 사이의 간극을 지적하지만, 플라톤의 경우 언어적 정의의 복잡성과 본질의 단일성을 두고 혼란해 할 필요가 없다.)
  프레데의 is2는 주어를 특징짓는 것으로 보인다. 형상의 경우 그 본질과 무관하게 그것이 형상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술어들은 is2에 해당한다(ex, 정지하다). 개별자에 대한 서술은 모두 is2에 해당한다. 문제는 형상이 자기 자신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경우는 is2에도 is1에도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프레데를 따른다면 정의적 용법의 is와 특징 짓는 is 용법이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고, 그렇다면 이 두 용법이 어떻게 한 형상 Being인지 설명해야 한다. 
  프레데는 플라톤이 존재사 "is"를 고립시키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 입장에서 플라톤의 형상들은 본질을 부여받았기에 비로소 존재한다. 플라톤 형이상학의 근간은 논리적 질서로도 존재론적 질서로도 본질의 소유이다.
  프레데의 입장은 자기-참여 진술과 관련하여서도 문제가 있다. Is2가 항상 제2의 형상을 필요로 한다면 자기-참여는 불가능하다. 만일 pros allo를 kath' auto 이외의 모든 술어로 본다면, 자기-참여 술어를 pros allo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이 프레데에 대조되는 입장은 술어에서 특정된 속성에 의해 주어가 특징 지어지는 모든 서술을 pros allo로 통합시킨다.
  프레데는 pros allo, is2의 경우 주어와 술어의 수적 분리를 주장했다. 문제는 존재사 의미를 지니는 완전용법 is를 폐기하고 나면, 주어와 다른 제2의 형상이 도입되는 pros allo의 계사와 주어와 술어가 동일한 kath' auto의 동일성 기호 모두에 불완전용법 is가 할당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프레데는 동일성 기호로서 is1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is1과 동일성 기호를 동일시하는 것은 거부한다. 동일성 기호 "is"는 개별자와 정의 기술 사이에 성립하는 반면, 프레데의 is1은 형상들의 관계에 국한되며, is1이 동일성의 의미를 갖는 것은 주-술 수적 동일성에 주목한 우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개별자와 정의 기술에 대한 언급이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동일성 주장이 Sameness에 대한 참여로 분석된다는 점이다. Sameness의 자기-참여 서술을 제외하면 모든 동일성 주장은 제2의 형상, 곧 Sameness를 포함한다. 동일성을 의미하는 is가 있다면 그건 결국 pros allo 용법이 되는 것이다.

  대조적 독해로 보자면 kath' auto는 Being에 참여한 결과이다. 그 이외의 모든 참여는 pros allo이다. 이 독해는 자기-술어와 자기-참여를 구분해줄 뿐만 아니라, Being을 실체적 형상, 그것도 megista gene 중에서 megiston genos로 만들어 준다.
  자기-참여는 자기-술어에 의존적이다. 그리고 자기-술어는 곧 Being에 대한 각 형상의 참여, 각 형상의 그 자체가 곧 자신의 고유한 본성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선되는 과제는 Being에 대한 참여, kath' auto 자기-술어 개념을 설명하는 일이다.
  
kath' auto 술어는 정의적 is라고 부를 수 있다. 대화편에서 이러한 진술은 "F(-ness) is F" 형태로 제시된다. 피정의항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kath' auto 서술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본질, 곧 정의 전체뿐이다. 정의의 부분들은 언어적으로 kath' auto 서술이 가능하다. 이는 존재론과 인식론, 존재론적 서술과 언어적 서술의 분리를 보여준다. 덧붙여, 형상은 본질을 가짐으로써 존재하고, 형상들의 세계는 정의 가능한 실체들의 세계이며 단적으로 형상들이 정의가능하다는 사실 덕분에 존재한다.
  이러한 정의적 진술들은 동일성 진술과 다르다. 후자는 주어가 형상Sameness에 대한 참여함을 포함한다. "형상 X가 자기 자신과 같다"라는 주장에서 재귀표현은 "개념적으로 선행하는" Being에 대한 참여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확보한 X가 존재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모든 형상에 적용될 경우, 특히 Difference와 관련하여 문제가 발생한다. Difference 역시 본질을 가지므로, 
kath' auto is로 이 사태를 표현하면 "Difference is (Is) different."라는 정의적 진술이 나온다. 그러나 플라톤은 Difference가  언제나 pros heteron, 즉 어떤 다른 것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결을 단순히 주-술 구분만으로 피할 수는 없다. Kath' auto 진술에서 술어 'is difference'는 다름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지는 반면, 서술적으로 사용된 'is difference'의 경우 그것은 Difference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어떤 것 혹은 그 자신 이외의 모든 것과 다르다는 것을 주어에 대해 서술해 주는 것이다. 모든 형상들과 마찬가지로 Difference라는 형상 또한 그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지니며, 각 형상의 고유한 본성은 오직 하나씩이기에, Difference 역시 그 이외의 형상들과 구분되어 유일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pros heteron의 의미에서 'Difference is difference'라고 서술될 수 있다. 이는 Difference가 자기 자신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Nehamas는 Difference가 여타의 형상들과 다른 이유는 그 본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1) Difference에 참여하고, 2) 다른 것들과 공유하지 않는 특징들을 지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첫 번째 이유에는 동의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예를 들어 Difference의 특징인 모든 것들을 관통한다는 것은 다른 megista gene로부터 Difference를 구별해 주지 않는다. 저자는 Difference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지닌다는 것이 그것을 여타 megista gene로부터 구별해 준다고 생각한다.
  네하마스는 또한 'The Beautiful itself is not beautiful'에 대해서도, 아름다움이라는 형상이 아름다움 이외에 다른 특징들 또한 지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는 명제라고 주장한다. 이 입장은 Sameness와 Difference를 2차 속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둘 이상의 것들이 속성을 공유한다면 이 둘에 대해 Sameness가, 한쪽이 다른 쪽과 공유하지 않는 속성을 지닌다면 Difference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Difference is difference from Difference 라는 말은 다름이라는 형상이 자기 자신과 같다는 속성을 지니고, 이것을 다름이라는 본성과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주장은 마치 여타의 것들과 공유하지 않는 속성 때문에 어떤 것이 다름에 참여하는 것처럼, 그러한 공유되지 않는 속성을 지니지 않고선 다름에 참여할 수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저자는 Difference가 여느 형상들과 마찬가지로 형상이기 때문에 Difference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Difference의 자기참여에 대해 네하마스는 잘못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상이 형상이기 위해서는 Difference에 참여해야만 하며, 이런 이유로 형상 Difference 역시 Difference, 즉 자기 자신에 참여해야 한다.
  Difference뿐만 아니라 하나, 같음 등의 형상들도 이렇듯 자기-서술과 자기-참여를 보여준다. 라일의 공통-범주적 형상들은 플라톤에게는 판단 형식들이 아니라 형상들로 간주된다. 이런 설명들에 더해 왜 Being의 형상은 있으나 참여의 형상은 없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상의 본질이 중요하다.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있다/~이다' 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형상이 본질 이외의 다른 속성들, 특히 같음과 다름을 소유하기 위해서, 각 형상의 본질이 우선이고 핵심이다. 무언가가 '그 자체로 있다/~이다'란 것은 Being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선행될 때 비로소 그 본질인 바의 형상 각각이 자기 자신과 같고 그 이외의 것들과 다를 수 있다. 플라톤은 Being이 본질화하는 것이라 본다. Being에 참여하여 본질화된 이후에, 각 형상은 자기 자신과 같고 그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이 본질화가 형상들에 포괄적인 속성이다.
  Being에 대한 참여와 여타 형상들에 대한 참여에 시간순서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형상들의 세계는 비시간적이다. 그럼에도 Being에 대한 Being의 참여 등을 논할 때에 어려움이 있다. 첫째, Being에 대한 참여보다 앞서는 주어, 즉 형상은 논하기 어렵다. 둘째, 습관적으로 Being에 대한 참여는 다른 형상에 대한 참여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붉음이라는 형상에 참여한 것은 붉은 것이 된다. 참여주체는 참여대상에 참여함으로써 그 대상과 같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Being에 참여함으로써 being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서 being을 현존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각 형상이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이 된다는 쪽으로 보는 편이 더 낫다. Being에 참여하는 형상들에 공통된 점은 각각이 본질화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Being의 형상을 상정할 이유이고 어떤 식으로는 참여의 형상 자체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여는 그 주체가 개별자이든 형상이든 공통된 것이다. 형상이 Being에 참여하는 경우와 그 이외의 형상에 참여하는 경우 그 차이는 관계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참여 대상인 Being의 특별한 본질 때문에 발생한다. Being의 특별한 기능은 자신에게 참여하는 형상을 창조하거나, 혹은 적법화하거나, 그 주어들에게 참여 관계를 보장하는 것이다. 형상이 Being에 대한 참여 이전에는 적법한 객체가 아니었다고 이해될 경우, 그리고 Being에 의한 성격 규정이, 모든 것이 그렇게 규정되는 그러한 단일한 어떤 1차속성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면, 형상이 Being에 의해 성격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형상이 같음, 다름에 참여하여 이러한 속성들로 성격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형상은 그것들이 형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규정된다.
  Being 이외의 자기-참여 형상들은 Being에 참여하여 개별적 본질을 확보하고, 그 본질로 인해 자신을 구성하는 특징적 속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Being의 경우 자기-참여와 자기-서술에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Being에 참여하여 각각이 하나의 being이 되는 여타의 형상들에 참여하면서, Being은 자기-참여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참여는 그 안에서 주어가 술어에 의해 명명되는 속성에 의해 성격 규정되는 기초적 개념이다. 그러나 Being에 대한 참여는 Being의 근본적인 역할 때문에 특수한 예외가 된다. 이제 Being은 형상이지만 참여는 형상이 아님을 받아들인다면, 중기에서의 두 가지 기초적인 서술 관계는 후기에 이르러 하나, 즉 참여만 남는다. Being이 형상의 지위로 승격되고 플라톤이 형상들 또한 참여를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Being에 대한 참여는 그로써 대상에 본질을 부여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여전히 형상들만이 Being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중기 플라톤의 Being을 보존할 수 있다. Being에 참여한다는 것은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

Not-Beings

개괄

  후기 대화편인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트』에서도 여전히 형상들은 본질의 담지자이며 auto kath' auto on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탐구와 언어적 탐구에 대한 고찰을 통해, 변증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형상들이 각기 모두 One-Being이어야 한다는, 그리고 언어적 상과 거짓이 가능하기 위해 what is와 what is not이 무엇이며 그 둘을 언어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확정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추적 과정에서 존재자들의 다수성이 있어야만 하며, 그 각각이 Being과 그 외 특정 형상들에 참여함으로써 그 자체 반드시 여러 가지 것들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앞서 논의되었다. 저 두 대화편에서 형상들의 원칙들에 두 가지 공통된 특징들이 있다. 첫째, 형상들은 복잡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형상들은 존재자들이자 참여자들이다. 둘째, 플라톤은 언어, 사유, 형이상학적 이론화 자체에 대한 고찰이 요구하는 특수한 종류의 형상에 집중한다.
  이러한 고찰들에 비추어 저자는 플라톤이 점차 존재론적 질서와 개념적/언어적 질서 사이의 차이를 의식했다고 주장한다. 『소피스트』는 사유와 언어가 존재(what there is)를 묘사하는 데에 실패한 것, 즉 거짓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이 주장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 장에서 저자는 사유의 요소들로서, 형상들이 그에 대응되지 않는 여러 종류의 개념들의 상태에 대한 플라톤의 취급을 고찰한다. 그 중에서도 우선 not-beings(me onta), 특히 다름(Difference)의 부분들이 주목받는다. 플라톤의 Not-being과 거짓에 대한 설명에 관하여 학자들은 (1) 그것들이 형상들이라거나, (2) 형상인 다름의 부분들이고 그래서 형상들 혹은 일종의 형상이라거나, (3) 다름 자체와 동일시된다거나, (4) 비-형상적 개념들 또는 속성들이라거나, (5) 어떤 종류의 2차적 실체(second-order entity)이라는 식으로 입장이 나뉜다. 저자는 다름의 부분들이 형상이 아니라 주장한다. 그것들은 개념들이며 확정된 내용을 지니지만 그것들에 참여하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들이 주어가 되지만 아무것도 그것들에 참여할 수 없다면, 이는 개념적 질서와 존재론적 질서의 분리에 대한 첫 예시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모음과 나눔의 방법이 고찰된다. 이 방법의 진행은 피정의항에 대한 다양한 진술들로 귀결된다. 일부 진술들은 때로 형상이 대응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개념들(분할들-cuts)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인위적 창조이다. 다른 진술들은 실재 유들을 지시하며, 해당 형상이 정의의 "부분들"만이 아니라 분할 내의 모든 형상들에 관련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프레데는 피정의항에 대해 정의의 부분들이 본질 자체와 같은 방식으로 서술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가능성은 예를 들어 고양이 그 자체가 특정 개별 고양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물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입장은 auto kath' auto, pros allo 외에 제 3의 존재론적 관계, 다른 참여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 관계가 실재 유들에 대응하지 않는 부분들, 분할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할당될 것이다.
  다른 한편 형상들 사이에서든 분할들 사이에서든 존재론적 관계는 없고 개념적, 자의적 관계만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여러 나눔과 모음에서 배치되는 개념들에 의해 언급되는 형상들 사이에 존재론적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분할은 형상들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가 아니라 개념적 연결들을 그려낸다. "인간은 동물이다." 라는 진술은 형상들의 연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개별 인간들에게 인간성과 동물성이 공존하기 때문에 참이다. 여기에서도 개념적 질서와 존재론적 질서의 구별이 드러난다. 다름의 부분이나 정의의 부분이나 확정된 내용을 지니고 형상들로부터 도출된다 하더라도 참여의 대상은 전혀 아니다. 


『소피스트』에서 Not-Being: 255e 까지의 배경.

다름의 부분들의 상태를 고찰하려면 not-being, 상, 거짓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이것들의 역할을 봐야 한다.
  거짓 진술의 가능성을 논하는 대목에서 플라톤이 소피스트를 상대로 충분한 답을 내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거짓과 부정을 논하는 255e8-263d는 논란이 많지만, 저자는 플라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이 문제의 구성은 소피스트가 상-제작자라는 규정을 반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상이란 어떤 있지/~이지 않은 것이기에 불가능하고, 진술이란 말로 된 상이므로 진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진술이 가능하더라도, 있지/~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거짓 진술이 불가능하다. 
  플라톤은 거짓 진술의 가능성을 Being, not, 진술이 각기 무엇인지 설명함으로써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말로 된 상인 이름, 화자인 영혼이 존재하는 유들임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형상들의 엮임을 통해 모든 isd인 것들은 또한 is not임을 보여준다. Logos의 가능성이 확보되고, 따라서 Logos가 Being에 참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언어의 부분들 중 본래 문장을 구성하게끔 결합할 수 있는 짝으로 명사와 동사가 있다. 화자는 형상들의 언어적 대응물들을 결합하여 문장을 구성한다. 거짓 진술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은, 소피스트가 참이든 거짓이든 어떤 진술을 만드는 자이고, (문장이 가리키는?)그 현상의 "요소들"은 모두 있다/~이다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의 논증은 영혼, 언어, 복합적인 onta의 다수성이 있다는 것에 의존하여, 어떻게 이성적 행위자가 거짓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다름의 부분들을 나누는 데에, 그리고 거짓 진술에서의 주-술 병치에는 화자의 책임이 있다.
  논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이러한 화자가 아니라 모든 is가 is not이기도 하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플라톤은 다원론적 존재론과 형상들의 엮임을 통해 무엇이든 존재하려면 Being과 One에 결합해야만 하고, 그 때문에 각기 여럿인 혹은 복합적인 존재들의 다수성이 필요하다. Being이 이외의 것들과 다른 한에서 그 각각은 Being이 아니다. 이를 통해 not being을 beings에, each being을 not being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이 onta that both are and are not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어떻게 거짓을 말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거짓의 예로 제시된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진술은 해석상의 난점을 가져온다. 이 예문은 서술적 진술이다. 이 진술이 거짓인 까닭은 다음과 같다. '테아이테토스'는 물리적 개별자이고 '날고 있음'은 여러 개별자들이 공유하는 속성이다. 그런데 '날고 있음'이라는 속성은 테아이테토스에 속하는 그의 속성들로서 모든 onta와 다르므로 그에 대한 not-being이다.
  이에 대해 서술, 특히 부정적 서술은 어디에서도 고찰되지 않으며, 다름의 부분들이라는 원칙이 적용되는 것을 포함, 모든 부정적 발언은 비동일성 발언이라는 해석이 있다. 저자는 이에 반대한다. 저자는 다름의 부분들 원칙이 형상들의 비동일성 주장에서 개별자들(그리고 형상들)에 관한 부정서술로의 이행을 가져온다고 본다. 이 장에서는 그 이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거짓 진술에 대한 설명에 필요한 부분을 부정서술이 어떻게 채우는지 살펴 본다.

  『소피스트』 255e8-257a7

   일부 형상은 서로 결합하고 다른 형상들은 그렇지 않다. 형상이 형상이기 위해서는 Being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게 형성된 논리적 주어로서의 모든 각 형상은 이어서 같음과 다름에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만 한다. 철자 유비에 비추어 보자면 Being, 같음, 다름은 모음-형상이다. 그러나 서로 섞이지 않는 형상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한 형상은, 자기 자시과 관련하여서 같음에 참여함으로써, 같은 것이다(It is the same). 그러나 동시에 그 형상은, 같음에 관련하여 다름에 참여함으로써, 같은 것이 아니다(It is not the Same). 두 경우에 is와 is not은 달리 이야기된다. 적어도 이야기될 때 포함되는 형상들이라도 다르다. 이는 Being에 대한 참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형상은 Being에 참여함으로써 being이면서 being이 아니다. 즉 being과 다른, being이 아닌, not-being이다. 다름의 본성이 각각을 being과 다르게 만들어 not-being으로 만든다. "각 형상에 관련하여 being은 많지만 not-being은 셀 수 없이 많다.(256e5)"
  각 유는 Being에 참여하여 각기 being이다. 또한 각 유는 Being과 여타 beings에 참여하여 복합적이다.
 모든 각 형상에 관련하여 "많은" being들은 서술적으로, 즉 그 being들에 대한 참여 덕분에 being들이다. 반면 다름이 각 형상을 Being과 다르게 만들어 not-being으로 만들고, 이러한 다름 덕분에 각 형상에 "not-being"이 적용된다. 이를 통해 소피스트의 파르메니데스적 논증이 격파된다.
  256e5에 대해, 각 형상은 여러 속성들을 지니기에 많다(is much). 이 설명에서 서술적 "is"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오직 긍정문에서만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각 형상에 할당되는 not-being들은 다른 모든 각 형상과의 다름, 비동일성이다. 그러나 형상들의 수가 무한하다고 언급된 곳도 없고 개별자도 논의에서 배제되기에, '셀 수 없이'는 것은 '많은'에 대조이지만 형상이 참여하는 한정된 수의 형상들을 의미한다. 
  
각 형상은 그 자체로, 즉 Being에 참여하여, 단적으로 유일하게 그 본질이다. 하지만 각 본질이 서로 다름의 이유는 아니다. 다름 때문에 다른 것이 되고 다름은 그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지닌다. 그것은 단일한 형상으로서 각 형상이 어떤 다른 형상과도 다르다는 유사한 일련의 사실들을 설명해준다. 이 일련의 부정들은 다름의 주어만 고려할 뿐 다름의 대상에는 관심 갖지 않는다. 다름은 형식상 두 형상들에 적용된다. 다름의 분할에 대해서 언급은 없고 부정 진술에 대한 실마리도 없다. 그 이유는 Being, Sameness, Difference가 모든 유를 관통하고 그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한 형상을 고려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지의 성급한 도입과 정리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운동과 정지가 섞이지 않는다고 동의되었다고 할 때, 이는 부정 서술 문제를 도입하도록 만들 것이다. 첫 단계에서는 not-being의 경우에서조차 각 형상은 Difference와 참여하기에, 오직 결합하는 형상들만 보여준다.
  

  『소피스트』 257a8-259b5

  반-파르메니데스적 결론은 형상들의 엮임을 전제한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not-being"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being에 반대되는 어떤 것(enantion ti tou ontos)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2) 어떤 것이 크지 않다는 것이 같은 크기인 것보다 오히려 작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3) 부정이 반대라고 하는 주장에 반대할 것이다. 'not'과 'non'이 명사 앞에 올 때, 그 이름과 다른,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3)에 서술이 들어온 것인지, 플라톤이 여전히 비동일성 안에서 작업 중인지 하는 것이다.
  (1)에서는 반대(ἐναντίον)에 관한 발상이 이후 논의들에 결정적이다. 앞서 비동일성 논의와 달리 여기에서는 부정되는 속성에 주목하는 동시에 주어를 특정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비동일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주어와 동일하지 않은 특정 형상의 본성을 알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제 어떤 형상에 반대되는 무언가에 대한 개념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not"에 뒤따르는 형상에 관한 구체적인 어떤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앞서 "not-being"은 Being 자체와 그리고 다른 어느 형상과든 동일하지 않은 한에서 not-being이었다. 반면 곧장 이어지는 논의는 Being 자체에 관한 것이다. 허나 만일 (1)의 "tou ontos"가 Being 자체를 가리킨다면 논의는 이상해진다. Being 자체에 반대되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Being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tou ontos는 '어떤 being,' '어떤 형상'을 지시할 것이고, 반대 개념이 주어진 형상들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1)은 참여대상이 아닌 실체적 형상들로 비약하는 것이다.이전에는 그런 형상에 대한 논의가 없으므로 "other than being"이 형상들 사이의 비동일성 이외에 어떤 의미인지가 문제된다.
  (2)에서 ti me mega는 반대항으로 '작음'을 가진 실체적 형상으로서 적절한 예시이다. Not-large를 말하면서 반대인 작음이나 혹은 중간, 다른 어떤 것이든 여타의 것들보다 더 선호하여 논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발언의 의미는 큼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1)에 주어는 도입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3)은 술어에 한정된다. 만일 (2)의 어떤 것(ti)이 일상적 개별자를 지시한다면, 이전 논증을 넘어설 수 있다. 형상들에 국한할 경우 not-being은 지정된 주어쪽 형상과 그 외에 어떤 형상 사이의 비동일성을 언급한다. 만일 논의가 개별자를 포함하는 쪽으로 확장된다면, 비동일성 "not"뿐만 아니라 부정서술의 "not"까지 관련한 논의도 보는 편이 타당하다. 개별자는 형상들에 참여함으로써, 즉 서술적으로 그러한 것이기에 그것들인 바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체적 형상들은 개별자들이 참여하고 또 참여하지 않는 그러한 형상들이다. 
  개별자에 대한 논의로 생각할 때, (3)은 not-large가 해당 개별자의 large와 다른 속성 모두에 관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없는 "all"을 넣으면서 일반화할 때 위험이 있다. 제시된 주어가 지닌 속성이 Largeness와 다르다는 사실은 그것이 큰지 어떤지 여부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개별자의 속성들 중 어느 것에든 확실히 언급된 바는 없다. (2)의 예시를 통해 양립불가능성을 도입해 볼 수 있다. Not-large는 large라는 속성을 지님으로써 배제되는 여러 확정적 크기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는 문헌 근거가 부족하고, (3)의 일반화를 포섭하지 못하며, 제시된 확정적 속성들 중 어떤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을 수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독해가 not에 대한 선이해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즉, 어떤 것이 동시에 같은 측면에서 크고도 작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분명한 점은 "not"이 술어 F와 결합하여 의미하는 바는 F의 반대가 아니라 F와 다른 어떠한 것이란 점이다. 이 "not-F" 술어가 적용되는 주어의 범위에 개별자가 포함된다 가정하면, 이는 비동일성과는 다르다. 주어에 관하여 어떤 것을 배제하거나 주어와 다를 속성들의 잠재적 영역을 제공하는 것은 주어가 무엇이고 형상이 무엇인지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양립불가능성과 일반화를 제하면, 술어 "some(thing) other (ton allon ti)"가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Not-being이 의미하는 something other에 대한 설명으로 지식에 대한 유비가 등장한다. 다름의 본성은 지식처럼 분할된다. 지식은 어떤 식으로 하나이나, 주제에 따라 여러 부분들을 지닌다. 
  다름도 마찬가지로 하나이면서 여러 부분들을 지닌다. 아름다움에 대립되는 다름의 부분이 '안-아름다움'이다. 아름답지 않다고 서술되는 주어를 불특정한 것으로(X, Y, something) 보충하여 일반화하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그 주어는 다름의 부분이다. 다름이 개별 형상에 맞세워질 때 다름의 부분이 구성되고, 역으로 not-F의 의미를 고려하면서 다름의 부분을 예상하게도 된다. 이는 하나의 논리적 과정의 두 측면이다.
  다름의 '주제'가 되는 것은 독립적인 being, 형상이다. 그런데 다름 또한 고유한 본질을 지닌 형상이므로, 이 역시 Being이며, 그 부분들 역시 being이다. 
  만일 다름의 부분들이 Not-F, Not-G 등이고 이것들이 being이자 형상이라면, 다른 형상에 대해 그러하듯 이 형상들에 대해서도 개별자가 참여하여 해당 속성을 얻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부정적 속성을 지니는 개별자들에 공통되는 존재론적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다름 자체가 이 문제에 가능한 해법을 제공한다. 아마 다름은 그 자체 본래적으로 부분들로 나뉘고, 다름에 참여하는 것들은 항상 다름의 부분에 참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라톤은 운동이 그 외 모든 형상과 다른 이유를 다름 자체에 참여 때문으로 본다.
  

  

  
  

 결론

  초중기 플라톤의 개별자는 결합의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단순한 속성들의 묶음이다.
  개별자 속성다발의 결합 설명에 선행자로 형상론이 개선된다.- 덕과 덕의 부분들, 형상과 그 형상의 'pathe' 등-
  형상론의 개선으로 플라톤은 개별자 내에서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정적 진전은 전통적 형상들에 추가적으로 보완된 수학적 형상들, 그리고 용기(혹은 무한정자)이다. 이 둘이 개별자에게 구조와 안정성을 부여한다.
  - 존재의 네 가지 분류: 한정, 무한정, 혼합, 혼합의 원인. 개별자에게는 무한정한 물질적 측면 때문에 갖는 속성도 있고 결합 때문에 갖는 속성도 있다.
  - 무한정-물질적 요소는 기하학적 한계를 지니게 된다. 궁극적 수용자로서 그릇이 등장한다. 이 그릇이 개별자를 정위시킬 공간개념을 가능케 한다. 또한 시간 개념이 도입된다. 시공간상에 특정된 개별자의 범위 내에 속하는 속성들이 그 개별자에 한정하여 묶인다. 
  기하학적 형상이 개별자에게 시공간을 제공하고 구조와 안정성을 준다. 전통적 형상은 그 기하학적으로 한정된 형태에 질적 속성들을 부여한다. 이 결합이 개별자를 구성하며 여기에 개별자의 '본질'은 요구되지 않는다.
  일부 요소들 혹은 반대자들의 혼합물은 혼합의 형상과 달리 잘못된 혼합물일 수 있다. 같은 요소들이 상이한 수학적 한계들을 수용할 수 있다.
  용기는 이차적 질서이다. 용기는 개별자들을 기하학적 범위로 수용하고, 어떤 속성이든 받아들인다. 이는 개별자 자체에 일차적 속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용기는 형상 Being에 대응한다. 용기가 개별자에 대해 그러하듯 Being은 형상에 대해 이차적 질서이다. Being에 참여함으로써 형상들은 각기 논리적 주어가 된다.
  원소적 물체가 삼각의 형태일 필연성은 없다. 다른 구조에 따라 원소적 물체가 다른 성질을 띨 가능성은 열려 있다. 따라서 원소의 구조가 원소의 성질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적 공간이나 개별자 모두 조건적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일단 구조가 성립하면 그 구조에 따른 성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개별자가 본질을 지닌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 근거는 첫째, 특정 지폐는 해당 지폐를 생산한 조폐국과 필연적 관계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부모와 필연적으로 관계된다. 이를 본질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를 들어 x가 y와의 관계 r을 통해 F 속성을 지닌다면, 이 관계에 앞서 x는 본질을 지닌 어떤 무엇으로서 이미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반론에 대한 재반박은 그 사례가 개별자 사이의 관계인 반면 플라톤은 개별자의 속성을 항상 형상과의 관계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또한 본질적 관계와 본질이 구분될 수 있다. 이는 de re 본질주의와 de dicto 본질주의 사이의 구분을 필요로 하는 논의이다. 세 번째로,조폐의 경우 지속적으로 동일시되는 물질적 개체가 있지만 플라톤의 경우 그러한 연속적인 물질적 개체가 성립하는지 불분명하다.
   -두 번째 반론에 대해, 관계를 통해 속성을 획득하기 이전의 x가 어떤 속성이든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de dicto의 영역이다. 
  후기에 이르러 플라톤의 형상들은 상호 결합한다. 특히 특정 형상들은 모든 형상들이 형상이기 위해 참여해야만 하는 종류의 것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형상들은 논리적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같음과 다름은 개별자의 논리적 지위를 확정해줄 수 있다. 이런 결합은 형상들 사이의 참여가 재귀적일 수 있음을 함축한다. 이러한 자기-참여는 여타 형상이 해당 형상에 참여한 결과와 같은 결과를 낳는다. 반면 자기-서술은 본질을 나타낸다. 자기-서술은 Being에 대한 참여의 결과로 나타난다. X는 X인 바의 바로 그것이다.
  Being에 대한 참여는 논리적 공간에서 다른 모든 참여에 우선한다. Being은 용기와 마찬가지로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것이다. 
  Being과 용기의 이러한 연결은 변화하는 현상에 항상성을 부여하는 시도와 형이상학적 이론 자체의 본성에 대한 탐구 시도 사이의 결합을 암시한다. 유사한 방식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탐구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과 결부된다. 운동과 정지는 탐구주체로서 자기-운동자인 영혼과 그 영혼이 탐구하는 고정되고 확실한 대상들에 연결된다. 
  하나의 형상이 여러 개별자들에 의해, 또 여러 형상들에 의해 참여받고, 다양하게 서술되면서도 단일한 본질을 지닌다. 이러한 분리 역시 앞서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일이다.개별자와 형상의 구분, 형상과 형상 사이의 구분, 형상인 바의 것으로서 형상과 탐구의 대상으로서 형상 사이의 구분 등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분은 형이상학적 탐구에 대한 합리적 숙고의 결과이다. 무언가 탐구하고 알고자 할 때 대상의 고정성과 정의항/피정의항의 본질적 단일성은 항상 요청되게 마련이다.

서론

  플라톤의 철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체계적 반성이 가능하다 여기며, 이 활동 자체가 철학이라 주장한다. 이 체계적 반성은 인식활동으로서 인식론과 결부되고, 그러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대상의 고정성이 요청된다. 대상의 고정성은 대상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관련된다. 따라서 그의 윤리적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인식론과 형이상학을 논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들을 따로 분리시키기도 어렵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우선 세계와 우리의 사유 안에 객관성과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안정성 없이는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식, 탐구가 가능하다는 것은 세계가 가지적이며 따라서 합리적 질서에 맞추어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안정성의 원천을 플라톤은 형상과 그에 대한 직관으로 본다. 형상과 직관에 대한 탐구가 그의 형이상학에 일차적 목표이다.
  안정성의 반대급부에 변화하는 경험적 현상들과 그 안의 사물들이 놓인다. 자연세계와 사물들 역시 탐구의 대상이므로, 그 안에서 안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는 경험적 사실로서, 안정성과 함께 이 세계에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또한 설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의 형이상학에 이차 목표이다.
  이제 형이상학 자체에 대한 탐구가 요청된다. 형상에 대해, 또 자연에 대해 특수한 형이상학들이 있다면 이러한 형이상학들을 가능케 하는 소위 '일반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즉 탐구의 형식들을 지배하는 일반원칙들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며, 여기에 이르는 경로는 우리의 사유와 인식에 대한 고찰뿐이다. 
  여기에 더하여, 플라톤은 특수한 형상들을 고찰한다. 사유, 언어, 형이상학적 탐구를 가능케 하는 형상들이 있으며 그 형상들은 '여럿에 걸친 하나(One-Over-Many)'로서 공통범주적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형상들 역시 다른 형상들과 마찬가지로 심-독립적이며 객관적일 것을 요구받지만, 그것들이 사유와 언어의 가능조건이라는 점에서 이 독립성을 단언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인식론적 실재론과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구분이 요구된다.


 결론

  초중기 플라톤의 개별자는 결합의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단순한 속성들의 묶음이다.
  개별자 속성다발의 결합 설명에 선행자로 형상론이 개선된다.- 덕과 덕의 부분들, 형상과 그 형상의 'pathe' 등-
  형상론의 개선으로 플라톤은 개별자 내에서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정적 진전은 전통적 형상들에 추가적으로 보완된 수학적 형상들, 그리고 용기(혹은 무한정자)이다. 이 둘이 개별자에게 구조와 안정성을 부여한다.
  - 존재의 네 가지 분류: 한정, 무한정, 혼합, 혼합의 원인. 개별자에게는 무한정한 물질적 측면 때문에 갖는 속성도 있고 결합 때문에 갖는 속성도 있다.
  - 무한정-물질적 요소는 기하학적 한계를 지니게 된다. 궁극적 수용자로서 그릇이 등장한다. 이 그릇이 개별자를 정위시킬 공간개념을 가능케 한다. 또한 시간 개념이 도입된다. 시공간상에 특정된 개별자의 범위 내에 속하는 속성들이 그 개별자에 한정하여 묶인다. 
  기하학적 형상이 개별자에게 시공간을 제공하고 구조와 안정성을 준다. 전통적 형상은 그 기하학적으로 한정된 형태에 질적 속성들을 부여한다. 이 결합이 개별자를 구성하며 여기에 개별자의 '본질'은 요구되지 않는다.
  일부 요소들 혹은 반대자들의 혼합물은 혼합의 형상과 달리 잘못된 혼합물일 수 있다. 같은 요소들이 상이한 수학적 한계들을 수용할 수 있다.
  용기는 이차적 질서이다. 용기는 개별자들을 기하학적 범위로 수용하고, 어떤 속성이든 받아들인다. 이는 개별자 자체에 일차적 속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용기는 형상 Being에 대응한다. 용기가 개별자에 대해 그러하듯 Being은 형상에 대해 이차적 질서이다. Being에 참여함으로써 형상들은 각기 논리적 주어가 된다.
  원소적 물체가 삼각의 형태일 필연성은 없다. 다른 구조에 따라 원소적 물체가 다른 성질을 띨 가능성은 열려 있다. 따라서 원소의 구조가 원소의 성질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적 공간이나 개별자 모두 조건적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일단 구조가 성립하면 그 구조에 따른 성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개별자가 본질을 지닌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 근거는 첫째, 특정 지폐는 해당 지폐를 생산한 조폐국과 필연적 관계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부모와 필연적으로 관계된다. 이를 본질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를 들어 x가 y와의 관계 r을 통해 F 속성을 지닌다면, 이 관계에 앞서 x는 본질을 지닌 어떤 무엇으로서 이미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반론에 대한 재반박은 그 사례가 개별자 사이의 관계인 반면 플라톤은 개별자의 속성을 항상 형상과의 관계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또한 본질적 관계와 본질이 구분될 수 있다. 이는 de re 본질주의와 de dicto 본질주의 사이의 구분을 필요로 하는 논의이다. 세 번째로,조폐의 경우 지속적으로 동일시되는 물질적 개체가 있지만 플라톤의 경우 그러한 연속적인 물질적 개체가 성립하는지 불분명하다.
   -두 번째 반론에 대해, 관계를 통해 속성을 획득하기 이전의 x가 어떤 속성이든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de dicto의 영역이다. 
  후기에 이르러 플라톤의 형상들은 상호 결합한다. 특히 특정 형상들은 모든 형상들이 형상이기 위해 참여해야만 하는 종류의 것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형상들은 논리적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같음과 다름은 개별자의 논리적 지위를 확정해줄 수 있다. 이런 결합은 형상들 사이의 참여가 재귀적일 수 있음을 함축한다. 이러한 자기-참여는 여타 형상이 해당 형상에 참여한 결과와 같은 결과를 낳는다. 반면 자기-서술은 본질을 나타낸다. 자기-서술은 Being에 대한 참여의 결과로 나타난다. X는 X인 바의 바로 그것이다.
  Being에 대한 참여는 논리적 공간에서 다른 모든 참여에 우선한다. Being은 용기와 마찬가지로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것이다. 
  Being과 용기의 이러한 연결은 변화하는 현상에 항상성을 부여하는 시도와 형이상학적 이론 자체의 본성에 대한 탐구 시도 사이의 결합을 암시한다. 유사한 방식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탐구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과 결부된다. 운동과 정지는 탐구주체로서 자기-운동자인 영혼과 그 영혼이 탐구하는 고정되고 확실한 대상들에 연결된다. 
  하나의 형상이 여러 개별자들에 의해, 또 여러 형상들에 의해 참여받고, 다양하게 서술되면서도 단일한 본질을 지닌다. 이러한 분리 역시 앞서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일이다.개별자와 형상의 구분, 형상과 형상 사이의 구분, 형상인 바의 것으로서 형상과 탐구의 대상으로서 형상 사이의 구분 등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분은 형이상학적 탐구에 대한 합리적 숙고의 결과이다. 무언가 탐구하고 알고자 할 때 대상의 고정성과 정의항/피정의항의 본질적 단일성은 항상 요청되게 마련이다.

 -작성중-



1.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유들이 혼동된다. e.g. 소피스테스, 정치가, 철학자.

2. 소피스테스라는 유가 여러 기술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e.g. 상인, 교육자, 쟁론가.

3. 소피스테스는 말로써 논박하여 돈을 벌고 이를 가르치는 자이다.
    3-1. 그는 모든 각각의 기술에 대해 해당 장인을 상대로 논박할 수 있다고, 그리고 이를 남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공언한다.
    3-2. 어떤 기술을 건전하게 논박하려면 해당 기술을 알아야 한다. 소피스테스는 모든 기술을 논박한다고 주장하므로, 이에 따르면 그는 모든 기술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
    3-3. 소피스테스가 모든 기술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는 그렇게 보이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믿도록 만든다.

4. 소피스테스는 말로된 모상을 만드는 자이다.
    4-1. 소꿉장난은 모든 것을 알거나 행하지 못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모방하여 제작할 수 있다. 소피스테스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더라도 그것들을 말로 모방할 수 있다.
    4-2. 어리석은 자들을 상대로 하면 모방물을 원본으로 믿도록 속일 수 있다.
    4-3. 모방물은 원본의 비율과 배색을 따르는 모방과, 이런 비율을 왜곡시켜 원본을 닮은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모방으로 나뉜다. 전자는 모상, 후자는 현상(phantasma)이다.

5. 모상과 현상, 거짓.
    5-1. 모방의 문제. 모방된 것은 원본이 아니다. 원본은 참으로 그것인 바의 것이다. 그렇다면 모상은 '참인 원본'은 아닌 것이며, 따라서 참이 아닌 거짓이다. 예를 들어 사과를 모방한 사과는 사과가 아니며 거짓 사과이다. 그러나 참으로 사과인 것은 아니더라도 사과를 닮은 무엇이다. 그런데 소피스테스는 오직 말을 기준으로 삼아 반박할 것이다. 참인 사과는 사과인 바의 것, 사과로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인 사과가 아닌 것은 사과이지 않은, 사과로 있지 않은 것이다. 사과를 닮은 것이 사과가 아니고 '사과'라고 부를 수 없다면,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고 없는 것이다.
    5-2. 거짓은 어떤 무엇인 것을 그것이지 않다고, 혹은 어떤 무엇이지 않은 것을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거나 믿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무엇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전혀 없다.
    5-3. 원본이 아니면서 원본이지는 않은 것, 즉 모방물이란 것이 불가능하다. 나아가 그 모방물 중에서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킨, 즉 원본을 실제로 닮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원본을 닮은 것처럼 보이는 모방, 거짓 모방으로서 혀상 또한 불가능하다.

6. 아무것도 아님(to medamos on, 어떤 식으로도 있지 않음)

    6-1. 모방과 거짓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있지 않음/~이지 않음'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하나도 여럿도 아니며 '그것'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 각기 어떤 무엇이게 마련인 모든 있는 것들로부터 발가벗겨진 '아무것도 아님'은 그런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이름 역시 '무엇'이기 때문에) 따라서 누군가 그것을 통해 거짓을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그를 논박할 수조차 없다. 논박을 위해서도 그 'to me on'이란 것을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2. 모든 있는 것(to on)과 전혀 무관한 to me on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to on을 to me on과, to me on을 to on과 결부시켜야 하며, 있는 것들 중에서 그 '아무것도 아님'을 찾아내야 한다. 이는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면서 또한 소피스테스의 반론을 재반박하는 일이다.

7. 어떤 무엇임(to on, 있음)
    to me on을 완전히 추방시키도록 요구한 파르메니데스는 to on이 오직 하나(hen)이며 전부(pan)라고 말했다. 또한 일찍이 to on을 논했던 여러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이 몇 개이고 무엇인지에 대해 또 다른 여러 주장들을 펼쳤다.
    7-1. to on의 수에 대해 크게 두 입장이 있다. 
           (1) to on은 둘 이상의 것들이다. - to on(있는 것) 자체와 ta onta(있는 것들)을 구분하지 않으면 오직 to on뿐이고, 구분하면 to on 자체 이외에는 모두 to me on이 되어 버린다.
           (2) to on은 하나이다. - 오직 to on 하나뿐이라면 'to on'과 'hen'이라는 둘은 있을 수 없다. 또한 'to on'과 '전체(holon)'는 서로 다른 바, to on뿐일 경우 그것은 전체가 아니기에 자기 자신에게 부족한, 결핍된 것이 된다. 결핍되어 있다면 to on은 to on이기에 부족하므로 to me on이다.
    to on의 수를 논하는 입장은 아포리아에 빠진다. to on은 그것 하나만으로는 '하나'라는 것도, to on을 가리키는 'to on'이라는 명칭조차도 따로 가질 수 없어 to me on이 되어 버린다. 반면에 to on 이외의 것들까지 ta onta라면, 그것들 모두가 to on일 뿐으로 다시 to on만이 남게 되거나, to on 이외의 것들이 ta me onta로서 제거되어 또 다시 to on만 남게 된다. 혹은 서로 반대되는 둘 중 하나가 to on이라면, 그 외의 것도 반대되는 것으로서 있다는 점에서 역시 to on이므로, 반대의 것이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7-2. to on이 무엇인지에 대해 크게 두 입장이 있다. 
           (1) to on은 변화 중의 생성이다. 이 입장을 완화시켜 영혼이나 그 안에 자리하는 여러 덕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생각해 보자. 신체(soma, 물체)와 영혼 모두에 공통된 '변화 중의 생성'은 능력(dynamis)이라 할 수 있다. 능력이란 작용하거나 작용받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전에는 없는 것이 이후에 있게(이전에는 그것이지 않은 것이 이후에 그것이) 되거나 그 역이 된다. 
           (2) 생성에는 신체를 사용해 감각을 통해 관계맺는다. 반면 존재(to on)에는 영혼을 사용해 사유를 통해 관계 맺는다. 후자가 to on이다. 그러나 영혼이 존재와 맺는 관계의 예로 앎의 경우, 영혼이 알게 됨으로써 그 앎의 대상은 알려진다. 그 이전에 영혼은 아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 역시 알려진 것이 아니다. 이는 작용을 하고 또 겪는 '능력'의 사례가 된다.  
   5-3. to on이 무엇인지 논하는 입장은 아포리아에 빠진다. 앎의 대상은 이전에 그것인 바의 것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알려진 것과 앎의 대상이 서로 달라진다면 그것은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듯 변화(운동)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식 작용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 경우 어떠한 앎도 불가능하다. 

8. 결합과 분리.
    8-1. to me on은 그것을 규정할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없기 떄문에, to on은 모든 것들(심지어 대립하는 것들까지)이 그것을 규정하는 데에 사용되면서도 그 모든 것들과 구분하여 바로 그 to on을 따로 말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to me on이 단적으로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반면 to on은 모든 것들이 각기 또 전부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 to me on 역시 그것이 어떤 무엇이라 정의되기 위해서는 to on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to on이 자신 이외의 것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가능한지 검토되어야 한다. to on이 다른 것들과, 다른 것들이 to on과 맺는 관계 속에서 to me on을 찾을 수 없다면 모방도 거짓도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도 불가능할 것이다.
    8-2. to on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은 서로 결합하고 또한 분리된다. '인간'이라는 유와 '좋음'이라는 유가 결합하는 등 하나의 것이 여러 이름들로 불린다. 그러나 인간이 좋음과 다르듯 각각의 것들은 서로 다른 것들로서 분리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결합과 분리의 관계에는 크게 세 가지 가능한 방식이 있다. 1) 전적으로 모든 것이 함께 결합한다. 2) 모든 것이 각기 따로 분리된다. 3) 어떤 것들은 결합하고 또 어떤 것들은 분리된다. 1)의 경우 서로 대립되는 쌍마저 섞여 버리므로 이는 불가능하다. 2)의 경우 to on과의 결합 없이는 그 이외의 것들이 모두 to me on이 되므로, 즉 없는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므로 이 또한 불가능하다. 따라서 3)만이 가능한 결합과 분리의 방식이다.

9. to on, kinesis, stasis.
    결합과 분리의 방식을 존재, 운동, 정지(편의를 위해 순서대로 O, K, S)라는 앞서 직면한 문제와 관련지어 검토한다. 모든 것은 운동하거나 혹은 정지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런데 to on은 5의 결론에서 알 수 있듯 운동하는 것이어야 하는 동시에 정지해 있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어느 한쪽만 배제되더라도 인식이 성립될 수 없으며, 운동과 정지의 의미를 확장시킬 경우(작용과 동일성) to on이 결합과 분리조차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릴 수 있다. 또한 운동이나 정지뿐만 아니라 to on 이외의 모든 것은 to on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존재, 운동, 정지가 서로 어떤 식으로는 결합하고 동시에 또 다른 방식으로는 분리되어야 한다.

10. 유들의 결합, 참여, 그리고 estin의 의미. 
    존재는 그 자체의 본성상으로는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존재는 운동하여야 하고 또한 정지하기도 하여야 한다. 반면 운동도 정지도 존재와 결합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존재 또한 운동하기 위해서는 운동과, 정지하기 위해서는 정지와 결합해야 한다. 그런데 운동과 정지는 서로 반대된다. 만일 운동이 존재라면, 정지는 존재하기 위해 운동과 결합해야 할 것이므로 운동은 존재가 아니다. 정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존재가 아니다. 이 때문에 운동도 정지도 존재와 분리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다음의 결과들이 따라 나온다. O is K, O is S, O is not(ouk esti) K, O is not S. S is(then, S is to on), K is(then, K is to on), S is not O(then, S not is), K is not O(then, K not is). O가 S와 K 각각에 대해, S와 K도 각각 O에 대해 is와 is not이 모두 성립하며 이 모든 명제들은 참이어야 한다. 이 예들에서, O는 술어자리에서 완전용법의 존재사로도 불완전용법의 계사로도 쓰이는 것으로, 또한 계사인 경우에도 부정문에서는 동일성을, 긍정문에서는 서술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11. 유들의 결합과 tauton, thateron.
    K와 S는 서로 반대되며, 이 둘 모두 O에 결합함으로써 존재하므로, 이제 O, K, S는 서로 다른 세 가지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들은 각기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셋 모두에 대해 동일하게 '같다' 그리고 '다르다'라는 술어가 적용된다. 이러한 같음과 다름이(편의를 위해 순서대로 T, H) O, K, S 중 어느 하나라면 그 하나 이외의 것들도 같은 술어가 적용되어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같음과 다름도 각기 앞의 셋과 다른 제 4, 제 5의 것들이다. 이제 O, K, S, T는 제 5의 것인 H에 참여함으로써 자신 이외의 것들과 '다른 것' 된다.또한 O, K, S, H는 T에 참여함으로써 각기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 된다. O 이외의 것들은 O에 참여함으로써 'is'를 술어로 가지며, O와 관계하여 H에 참여함으로써 존재이지 않은 것(is not O, then, not is)이 된다. 이는 O와의 다름을 의미할 뿐 O에 반대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마치 크지 않은 것은 작은 것뿐만 아니라 같은 크기인 것도 포함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앞서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 to me on과 달리, 여기에서 me on(ouk esti)은 다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12. ta onta/ta me onta peri X.
     이제 to on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은 각기 to on에 참여함으로서 있는 것(to on)이 된다. 동시에 to on에 대해 그것과 다른 것으로서 이 모든 각각의 것은 있음이지 않은 것(to me on)이 된다. 또한, to on은 각각 그 자체에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도 성립하므로, to on에 참여하여 그 자체로 있는 것이 된 많은 것들이 서로에 대해서도(peri) 있는 것들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만큼의 ta onta가 있고, to on을 제외한 그 모든 것들만큼 to on은 ta me onta이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이 각기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르므로, ta me onta는 무수히 많다. 이로써 to me on이 to on과 thateron을 통해 발견되었다.

13. to me on, 그리고 말과 믿음.
     다름으로서의 to me on이 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으로 이것이 말이나 믿음 등에 결합하여 거짓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검토되어야 한다. 말이나 생각은 
이름과 동사를 결합하여, 항상 어떤 무언가에 관하여(peri), 그 대상과 상태를 지시하는 유(genos)이다. 여기에서 대상의 상태에 속하는 ta onta를 ta me onta로, ta me onta를 ta onta로 말하거나 생각함으로써 거짓이 발생한다. 즉 어떤 것에 관하여 있는 것과 다른 것들, 즉 사실과 다른 것들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바로 거짓이다.

14. 거짓된 모상을 제작하는 자.
      거짓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따라서 이러한 거짓이나 혹은 참을 진리치로 지니는 모상 또한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앞서 소피스테스는 자신이 모상을 제작하는 그 원본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로 드러났으므로, 그는 참된 비율을 따르는 모상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는 거짓 모상을 제작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만든 모상들이 거짓된 모상들임을 또한 알고 있다.


   문제: 분할의 방법과 변증법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유들의 결합에서 계사 ainai는 동일성의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peri와 함께 쓰이는 einai는 서술적 용법이다. 유들의 결합에서 ouk einai는 동일성 부정이나 진술분석에서는 부정 서술의 용법이다. 유들의 결합에서 다름은 비동일성 일반이나 거짓 내에서의 다름은 '다르면서 참인 명제'를 설명하지 못한다.  

  

 A: to on은 구문론적으로 완전용법과 불완전용법으로, 의미론적으로는 존재사와 계사로 나뉜다. 그러나 의미에 차이가 있더라도 동사의 형태로는 구분되지 않기 떄문에, 이를 혼동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구문론적, 의미론적 구분을 통해 to on 자체, ta onta, A esti(to on) B 각각이 서로 구분되는 방식을 밝혀주는 것이 대화편의 목적이다.

   A의 해법: to on은 존재사와 계사로 나뉘고, 계사는 다시 동일성의 의미와 서술의 의미로 나뉜다. 이러한 의미 구분에 따라 to on 자체, 완전용법 동사 to on, 불완전용법 동사 to on을 구분할 수 있다. 존재사로서의 to on에 대한 부정은 배제된다. 동일성의 to on은 재귀적으로만 사용되고, 그 부정은 어떤 x와 x 이외의 모든 것 사이의 비동일성을 의미한다. x is y의 경우 y is peri x로 대체될 수 있으며, 여기에서 to on의 불완전용법의 서술적 사용이 드러난다. 'to on은 그 자체로도 다른 것들에 관련해서도 모두 사용되는 반면, thateron은 다른 것들에 관련해서만 사용된다.'라는 설명에서 to on의 여러 의미들을 구분할 근거를 찾을 수 있다.

   A의 문제점: 본문에서 명시적으로 to on의 여러 의미들이나 용법들을 구분하는 구절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본문에서 별다른 언급 없이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는 to on을 임의로 구분하여 내용의 연결성, 일관성을 해친다. 특히 존재사로서 완전용법으로 사용된 is와 서술적 계사로서 불완전용버으로 사용된 is 사이의 의미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to on과 to me on 이외에 하나와 여럿, 운동과 정지, 같음과 다름에 할애된 상당한 분량의 내용이 to on의 의미 구분에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Kahn의 제안에 따라 서술적 용법을 중심으로 여러 다른 용법들이 파생되어 나온다는 식의 접근이 있다.


    B: 유는 여러 종들을 지닌다. 또한 각각의 모든 것은 여러 모습으로 보이고 또한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유와 종이 다르고 각각의 것은 그 자체 하나이며 자기 자신과 같고 그 이외의 것들과는 다르다. 유가 종들과, 하나의 것이 그 자신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들과 전적으로 분리되지도 않고 또 완전히 동일하지도 않다. 이러한 결합과 분리의 방식을 해명하는 것이 이 대화편의 목적이다.

   B의 해법: 각각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 자체의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들, 다른 이름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에 결합함으로써 확보된다. 이 결합(haptomai)은 공유(koinonia), 참여(또는 '몫을 나누어 가짐,' metekein) 등으로도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to on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반면 to on 이외의 것들은 to on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이는 운동, 정지, 같음, 다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참여를 통해 결합하는 것들은 관점에 따라 다시 분리될 수 있다. 이 분리는 '다름'이라는 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B의 문제점: to on과의 직접적인 결합관계를 통해 각각의 것들은 '존재'하게 된다(there is). 그런데 다른 것들과 결합함으로써는 ~으로서 존재하게 되거나 달리 말하자면 ~인 것이 된다(X is Y). 후자의 경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to on과의 결합이 언급되지 않으며, 두 경우 모두에 등장하는 동일한 to on이 전자의 경우에는 존재사로, 후자의 경우에는 계사로 서로 다르게 사용된다. 단순한 결합만으로는, 혹은 이 결합관계를 반복적용하는 것만으로는 to on의 의미 전환이 설명되기 어렵다. 특히 계사 to on이 사용되는 명제를 peri 명제로 전환하는 경우, to on의 역할이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존재가 운동한다'라는 명제는 존재가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참이 된다. 같은 명제를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존재가 운동이다'라고 표현하여도 참이며, 이는 다시 '운동이 존재에 관하여 존재한다'라고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이 세 명제가 모두 같은 의미이나, 동사로서 to on은 첫 번째 경우 등장하지 않고, 두 번째 경우에서는 계사이나, 반면 세 번째 경우에서는 존재사이다. 여타의 것들과 to on 사이의 결합관계는 존재사를 내놓는 경우 이외에는 그 방식이 설명된 바 없으므로, 두 번째 계사의 의미와 세 번째 '~에 관하여'라는 부사구는 이전의 결합관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蟲-

  지도교수님이 바뀌었다. 첫 지도교수님께서는 정년퇴임을 하시느라고, 두 번째 지도교수님께서는 행정직을 맡으시기도 했고 다른 제자들도 많은지라 이래저래 날 닥달하실 시간이 없으셨던 것도 같고(본인 말씀으로는 내가 다루려는 분야나 주제에 대해 본인보다 이해나 관심이 조금이나마 나은 분이기 떄문이라고도 하셨다) 그리하여 세 번째 지도교수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일로 찾아가 뵙고 말씀을 듣다가 좀 생명의 위기랄까, 뭐 그런 걸 느끼게 되었다. 수료하고 네 학기, 그 사이에 내 논문 주제나 계획을 남들에게 설득시키지도 못했고, 2차 자료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는 것을 납득시키지도 못했으며, 그러는 사이에 논문과 무관한 이런저런 자리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다는 건, 어쩌면 전문적인 학자로서의 자질 부족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을 하시더라. 생업을 따로 가지고 평생 취미로만 공부를 한다면야 모르겠지만, 직업 연구자로서 살려면 자신이 해야할 일을 제때에 제대로 해내야 하는 게 맞고 또 당연한 일이라는 말씀이셨다. 그 와중에, 대학원 입학 즈음에 내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허무맹랑한 논문으로 석사를 졸업하겠노라 나대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사람이 통과를 한 것을 두고 당시에 나는 상당히 불만이었는데, 앞으로는 이쪽 분야로 전업 학자를 하지 말라는 단서를 두고 그 조건으로 졸업을 시켰다고 하시더라. 내가 지금 그 인간과 같은 취급을 받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아니, 이미 그 급으로 추락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결국 석사 논문 심사라는 것은 이후 연구자로 살아가도 좋다는 인증을 받는 과정이고, 그래서 평생 학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같은 놈에게는 이 시기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는 것,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지도교수님께 그 얘기를 다시 듣고 '이런 얘기를 굳이 제가 해야 하나요?'라는 첨언까지 들으니 위기감이 고조된다. 학자로 살 수 없다면, 살 수 있을지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고. 애초에 주제를 선정하고 계획을 잡고 범위를 한정하고 내 능력과 내가 해야할 일의 규모를 가늠하는 것까지 모두 학자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일 텐데, 이렇게까지 내몰리고서도 읽고 쓰고 그러는 것 말고는 달리 살아갈 자신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아직 끝이 아니고,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고, 이렇든 저렇든 내게는 아직도 빠져나가 살아남을 길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아서, 좀 더 달려들어 매달릴 생각이지만서도. 매번 학당에서 뵙던 선생님께서 어느 사이에 지도교수님이 되어 버렸다. 진작에 논문부터 해결을 봤었더라면 이전 지도교수님 『고르기아스』 3학기 연속 강의도 듣고, 이번 지도교수님 대학원 『국가』 강의도 듣고, 그러면서 중간보고서, 기말보고서, 발제니 뭐니 이래저래 내게 워낙에 부족한 글쓰기 지적도 받고 그랬을 텐데, 뭐 다 뒤늦은 후회일 뿐이고. 여하간에 놓을 것 다 놓고, 학당에서 『국가』 윤독하는 날마다 매주 찾아 뵙고 상담받고 계획 검토받고 매주 혹은 격주로 자료정리한 것이나 초안 잡은 것 드리고,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파르메니데스』도 『티마이오스』도 『필레보스』도 모두 내게 필요하고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현실도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 남아야 한다. 죽고 싶지는 않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면 이 고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문헌 자체가,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애초에 쟁점이 무엇인지조차 합의가 쉽지 않을 만큼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대화편이기도 하고, 그런 연유로 석사과정에서 연구 훈련을 하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문헌이란 얘기는, 뭐 계속 들어 왔던 것이긴 하다. 그런데 또 그렇기 때문에 이 대화편을 가지고 석사과정에서 할 수 있는 수준의 작업도 있으리라 본다. 이해에는 단계가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애초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 간다. 있는/~인 것과 있지 않은/~이지 않은 것, to on과 to me on의 문제를 이 대화편의 중심에 놓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 나는 여전히 형상들의 결합이 더 중요하고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결합하고 또 어떻게 분리되는지, 이 방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이후에 비로소 to on과 to me on에 대해 무언가 말할 기초가 마련된다고 생각한다. 계사인지 존재사인지 진리사인지, 구문론에서 보어의 유무라든지 서술인지 동일시인지 하는 온갖 구분들을 to on에서부터 시작하여 거기에서 모두 마련해 놓고 여기에 형상들의 결합을 우겨 넣는 방식은 역시대착오이자 문헌에 밀착하지 못한 자의적 해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그런데 이걸 논하기에 앞서서, 크게 이 두 진영, 『소피스테스』를 언어철학 저술로 보는 측과 형이상학 저술로 보는 쪽의 대립이 시작하는 지점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니까, 그 두 입장 각각이 대체 왜 발생하는지, 이 대화편에서는 무엇을 왜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그것이 먼저고, 아마 여태까지의 지적들을 모아 보면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가망이나마 보이는 건 최대한 많이 쳐서 거기까지인 듯하다. 문헌 자체에서 문제는 연결고리의 문제이다.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해 도입된 분할의 방법, 이러저러한 모든 것들과 그것들의 모상, 그 모상의 참과 거짓, 거짓이 근거하는 모상이 근거하는 to me on의 불가능성, to on이 보여주는 to me on과 같은 정도의 난제, to me on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수행되는 변증, 형상들의 결합과 분리, 다시 진술과 믿음을 구성하는 이름과 말의 결합, 이름이 가리키는 무엇과 말이 가리키는 어떠함, 각 주제마다 전개되는 방식과 제안되는 해결책이 낯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어, 다시 여러 외국어들, 또 다시 우리말 각각의 고유한 특징과 한계 그리고 다시 이것들 사이의 차이까지 이해를 가로막는다. 이런 문제를 모두 해결해야 제대로 된 해석이겠지. 그런데 그거야 말로 내가 지금 해낼 수는 없는 정도의 어려운 일 아닌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내가 다루어야 할 문헌을 내가 장악하지 못하고 있어서 벌어지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대화편은 말과 생각이 무엇인지, 그게 어떻게 성립하고 어떤 구조를 지니는지 묻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말과 생각이 향하는 대상의 성립과 구조를 먼저 논하고, 그 대상을 모방하는 모상으로서의 말과 생각 사이의 관계를 따지고 있는 것인가, 거칠게 말하면 이게 내가 정리해야 할 연구사의 두 입장 되시겠다. 말과 생각은 어떻게 대상을 모방할 수 있는가, 그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대상세계는 어떤 식으로 되어먹었는가, 그 구조가 접근과 결합을 허용하는가, 과연 이런 물음들이 『소피스테스』라는 대화편을 읽으면서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물음이긴 한 건가. 그러나 저러나 지도교수님이 이제 세 분이다. 세 분 다 어쨌든 주기적으로 뵙게 되는지라, 바뀐 게 있다면 그저 숨통이 조금 더 죄인다는 정도일까나. 사실은, 만약 좌절된다면 어떤 식으로 죽어야 할까를 잠시 좀 구체적으로 생각했었다만, 죽기엔 좀 이르니까. 잡다하게 이것저것 자료랍시고 읽어 놓긴 했는데, 정리해서 쓰는 게 영 부족하다. 일단 연구서 두 권 반납일 전까지 대강이라도 정리를 해 두고, 그 사이에 생각 좀 정리하자. 내가 유들의 결합과 분리에서 부분과 전체, 그리고 중심 같은 것들에 주목한 까닭은 결국 존재사냐 계사냐, 동일성 명제냐 서술 명제냐 이런 도구들 없이, '그 자체로'와 '다른 것에 대하여'라든지 '다른 것에 관하여 ~인/있는 것'이라든지 따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해서였고, 그럼 이 갈림길까지 가는 과정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게 먼저고 또 맞다. 놀고 자빠져만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놓고 까이고 욕먹고 버티는 거, 들이받고 치받고 얻어 터지고 으르렁대는 거 그야말로 내 주특기 아닌가. 겁 먹지 말자. 말 그대로, 지금은 중요한 시기이고, 겁 먹으면 뒈지는 거다. 아, 죽어야 될까봐 좀 무섭긴 하네.

-蟲-

[p.1]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은 문장, 거짓, 비-존재에 관한 자신의 성숙된 관점을 보여준다. 이 과점은 오늘날 존재론과 언어철학의 탄생에 기여하였다. Crivelli는 1) 『소피스테스』에서 문장, 거짓, 비-존재에 관련하는 논증들을 정확히 재구성하고, 2) 그것들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서론에서 그는 『소피스테스』에서 호출된 주요 문제들과 그 해법들에 대한 개관을 제시하고 그가 우선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될 방법론에 대한 논의를 제공한다.


0.1 『소피스테스』에 의해 호출된 주요 문제들과 그에 대한 해법들.
  목적과 구조. 
『소피스테스』의 공언된 목표는, 핵을 둘러싸는 틀을 통해 그물망으로 된 구조를 지닌 그 소피스테스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 틀(216a1-236d4, 264b11-268d5)은 분할의 방법을 통해 소피스테스를 정의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 핵(236d-264b10)은 거짓에 관련된 일부 난점들을 드러내고 해소시킨다.
  틀과 핵 사이의 연결은 직접적이다. 소피스테스의 정의는 소피스테스가 거짓연설을 하며 그렇게 거짓믿음을 불어넣는 자로 기술되는 그런 방식으로 시도된다. 이 기술
(記述)은 거짓 역설과 충돌하며 그 기술에 대한 반박의 방식으로 제시된다. 거짓 역설은 거짓말과 거짓믿음의 불가능성을 결론으로 갖는 논증의 일종이다. 이렇게 귀결되는 다른 형태의 논증들도 있다.
  
『소피스테스』의 핵(236d5-264b10)은 난관에 봉착하는 부분(236d5-251a4)과 구성적인 부분(251a5-264b10)으로 나뉜다. 난관의 부분은 여러 난점들을 예행연습한다. 다시 이 부분이 두 요소로 나뉜다. 1) (236d5-242b5) 비-존재, 모상, 거짓말과 거짓믿음에 대한 문제들을 다룬다. [p.2] 2) (242b6-251a4) 존재의 문제가 비-존재의 문제에 필적함이 인정된다. 구성적 부분도 두 요소로 나뉜다. 1) (251a5-259d8) '차이' 개념에 기초하여 부정적 서술에 대한 분석이 주어지고, 이에 기반하여 역설로부터 자유로운 비-존재에 대한 설명이 전개된다. 2) (259d9-264b10) 비-존재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거짓말과 거짓믿음에 대한 설명에 적용시킨다.

  『소피스테스』가 호출하는 주요 문제는 거짓말과 거짓믿음의 가능한 방식에 대한 것이다. 거짓 역설은 거짓말과 거짓믿음 불가능 주장에 근거를 제시한다.
  
『소피스테스』에서 거짓역설의 주된 형태는 다음과 같다.
   [1] 거짓으로 말하는 것은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3] 따라서 거짓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제 [2]를 뒷받침하는 보조논증은 다음과 같다.
   [2.1]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함은 무엇인 것을 말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2.2] 무엇인 것을 말하지 않음은 어떤 것이든 말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2.3] 어떤 것이든 말하지 않음은 말함이라는 행위의 미완수를 함축한다.
      [2] 따라서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짓믿음의 불가능성 논증도 위와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을 포함하여 대다수 철학자들은 거짓말과 거짓믿음의 불가능성 주장에 반대하며, 거짓말과 거짓믿음이 가능할 뿐 아니라 현실이라는 상식적 관점에 따른다. 거짓불가능에 대한 그들의 반박은 거짓불가능을 지지하는 근거들에 대한 반박에 기초한다. 그 반박은 통상 전제 [2],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공격한다.('말'을 다루는 것으로 유비를 통해 '믿음'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현대 전략. 일부 현대 철학자들은 [2]에 대한 지지논증의 전제 [2.1]을 공격한다. 거짓과 관련된 의미에서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함은, 무엇이든 말하지 않음을 함축하는 한에서 무엇인 것을 말하지 않음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인 것(to be)'의 존재사 용법과 진리사 용법의 구분에 의존한다. [p.3] 이 현대적 전략에 따르면 어떤 것들은 ~이면서(존재하면서) 또한 ~이지 않다(참이 아니다). 여기에서 특수한 존재론적 범주가 있다고 전제된다. 그것은 말이나 믿음 또는 생각 따위의 활동 또는 진술이 통합된 대상으로 삼는 존재자들의 범주, 즉 명제이다. 모든 명제는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지만, 그 중 일부 명제들은 참이라는 점에서 ~인 반면 다른 명제들은 거짓이라는 점에서 ~이지 않다.

  플라톤의 전략. 플라톤도 [2]에 반대하여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함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 역시 [2.1]에 반대하여 거짓에 관련된 의미에서 ~이지 않은 것을 말함은 어떤 것이든 말하지 않음을 함축하는 의미에서 무엇인 것을 말하지 않음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근거도 수용한다. 그러나 이 입장을 시행하기 위한 플라톤의 전략은 현대의 전략과 매우 다르다.
  플라톤은 존재사와 진리사의 구분에 의존하지 않고, 명제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플라톤의 해법은, 거짓말을 하는 자가 어떤 것에 대하여 ~이지 않은 것(what is not)을 그것에 대해 ~인 것(to be)으로 말하는 데에서 ~이지 않은 것을 말한다고 가정한다. 발화행위에 대해 명제와 같은 단일화된 대상은 없다. 발화행위를 수행할 경우, 누군가 x라고 말한다는 그런 단일한 x는 전혀 없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라는 참인 문장을 발화한다고 해서, 테아이테토스가-앉아-있다-라고 하는 것 또는 날고-있는-테아이테토스 같은 발화행위의 대상 같은 단일한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명제'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명제의 진리치를 구분하는 것은 거짓 역설의 해법일 수 없다는 지적인 듯. 그런데 플라톤이 그렇게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긍정문을 가지고 발화행위를 수행할 때, y에 대해 x를 ~인 것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x와 y가 있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라고 말하면, '앉음'이라는 유(類)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서 ~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고 말하면, '낢(飛)'이라는 유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서 ~인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두 경우에서 발화행위는 상이한 두 가지 것들을 목표로 삼는다.
  플라톤은 만일 오류를 일으킬 정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짓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발화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를 피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명제를 포함하는 근대적 전략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발화행위의 통합된 대상으로서 명제를 피할 경우, '낮이라면 밝다(if it is day it is light)'라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p.4] 그 설명은 '낮이라면-밝다(If-it-is-day-it-is-light)'라는 명제에 대한 발화행위를 수행하는 것과 같다. 이 사례에 어떻게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을 ~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적용될지 알기 어렵다.

  이러저러하지 않음(not being so-and-so)과 부재(不在). 플라톤이 극복해야 할 문제는 거짓역설의 계기가 되는 것과 유사한 어려움이다. 플라톤은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을 ~인 것으로 말하는 경우의 ~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 전제하므로, y에 대해 x이지 않다는 것에서 x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거짓을 말하는 것이 비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귀결됨을 피하지 못한다면 거짓은 말할 수 없게 된다.
  플라톤은 x에 대해 x이지 않은 경우 x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님을 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부정에 대한 분석
, 즉 x가 이러저러하지 않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이 분석은 x가 이러저러하지 않은 경우, x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저러함'을 'y에 대해서'로 대체함으로써, 플라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결론을 구해낸다.
  플라톤의 부정 분석은 '다름' 개념에 호소한다. x가 이러저러하지 않다는 것은 x가 그러한 모든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부정이 부재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 부정 분석을 거짓에서 어떤 역할을 행하는 그 ~이지 않음에 적용시켜 보자. x가 y에 대해서 ~이지 않다는 것은 x가, y에 대해 ~인 모든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is not 'about y' → is not so-and-so.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문장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낢을 ~인 것으로 말하지만, 낢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인 모든 것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에 대해 ~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거짓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인 모든 것들과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낢이 부재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해명은 부정을 부재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차단한다.

[p.5] 부정적 거짓 명제에 기초한 반론. 플라톤은 어떤 것에 대해 그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말하는 경우에 ~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부정적인 거짓 문장에 기초한 반론의 여지를 남겨둔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지 않다.' 라는 문장의 경우, 그것이 거짓인 이유는 앉음이 그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문장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앉음이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지 않은 것을 말함으로 거짓을 말함이 기술되기 위해서는, 그 설명이 모든 거짓진술을 포괄해야 한다.

  두 가지 응답을 이에 맞서 플라톤이 사용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 설명이 긍정적 문장에만 적용된다고 하는 것이다. 허나 부정적 거짓 진술을 말하는 자는 ~이지 않음을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것에 대해 ~인 것을 ~이지 않은 것으로 말한다. 
  두 번째는 부정적 문장 역시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이 ~이라고 말한다는 전제에 의존한다. 부정적 진술을 하는 자가 어떤 것에 ~이라고 귀속시키는 것은 부정적 유(-類, negative kinds)이다.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지 않다.' 라는 문장을 말하는 자는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앉아-있지-않음'이라는 부정적 유를 귀속시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 거짓을 진술하는 자를 포함 거짓진술을 하는 자는 모두 어떤 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을 ~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p.6]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지 않다.' 라는 문장은 거짓이다. '앉아 있지 않음'이라는 유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인 모든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유. 플라톤의 두 번째 응답은 부정적 유를 도입시킨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들 다수가 이를 거부한다. 부정적 유들 중 어떤 것들은 완전히 이질적인 '아무것도 공통되지 않는' 사물들을 포괄할 것이다. 앉아 있지 않음은 낢이나 걸음뿐만 아니라 식물, 돌, 도형, 형상들을 모두 포함할 것이다. 
  이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은 '다름의 부분들'로서의 부정적 유들이라는 해명이다. 이 해명은 지식과 다름 사이의 유비에 기초한다. 모든 유들 각각에 대해 그것에 상응하는 지식의 한 부분이 있다. 이러한 지식과 마찬가지로 모든 유들 각각에 상응하는 다름의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아름다움이라는 유에 상응하는 다름의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 부분은 아름다움 아래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과 다르다. 즉 모든 아름다운 것과 다르다. 이 유의 이름이 '아름답지-않음'이다. <그러나 유의 일부분이 형성되는 과정은 유와 유의 결합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아름답지 않음은 다름이 아름다움과 결합함으로써 생겨난다. 다름은(존재가 그 자체로도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도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항상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 속에서 진술되는 것이므로, 여기에 더해 아름답지 않다는 진술의 주어가 되는 x도 필요하다. 부정적 유는 'x가 y에 대해서 다른 것이다'에 포함되는 x, y, 다름 셋 중 어느 것도 아니다. 이 경우, Brown의 지적대로, '아름답지 않음'에서의 그 부정이 아름다움이라는 척도 내에 한정되어야 하는 이유는 지식의 일부분이 대응물을 갖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다름의 부분이 부정적인 유이다. 아름다움 아래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과 다름, 그러한 다름 아래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 아래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것들이고 오직 그것들뿐일 따름이다. 이것들은 통합된 것이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식의 부분들이 각기 통합된 유라는 것 역시 부정해야 한다. 이는 부정적 유 아래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 그리고 오직 그것들만이 공유하는 특성을 잘 설명해준다.
  [p.7] 부정문으로든 긍정문으로든 거짓을 말하는 자는 어떤 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을 그것에 대해 ~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법을 도입하더라도 플라톤의 설명은 서술적 문장에 국한된다. '비-내린다(It is raining).'나 '경기가 벌어지면 팀이 폴커 역할을 할 것이다(If the match takes place then Tim will play Volker<일단 'will' 때문에 미래시제 문제를 지적하는 것 같은데, 팀인지 폴커인지 뭔지 나도 모르겠다. 이 번역 맞는 건가...>).' 

  다름과 반대. 플라톤은 이러저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경향이 왜 생기는지 설명한다. 이를 주장하는 자는 거짓말과 거짓믿음의 가능성을 부정해야 한다. 
  플라톤은 사람들이 부정을 반대와 결부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은 종종 이러저러하지 않은 것이 이러저러한 것들의 조건과 반대인 조건 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름답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추하다는 말로 이해하고 화를 낸다. 어떤 행위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해당 행위가 금지된다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이를 이러저러한 것이지-않음(is-not so-and-so, 부정이 is를 한정한다는 점을 강조.)에 적용하면, 이러저러한 것임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므로, 이러저러한 것이지-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 난점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은 부정을 반대와 결부시키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부정의 짝은 반대가 아니라 다름이다. x가 이러저러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이러저러한 것들과 반대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그 모든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 난점은 플라톤 또한 받아들이는, 존재한다는 것이 이러저러함(being so-and-so)의 부분, 즉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관점에 의존한다. [p.8] 이는 계사(copula)가 존재사적 의미(existential import)를 지닌다는 관점으로도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관점은 잘못 취해진 것으로 반박될 수 있다. 날개달린다는 것이 날개달리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시인이라는 것이 시인이 행위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이유로 '페가수스는 날개 달렸다'거나 '호메로스는 시인이다'라는 것이 거짓이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시된 두 예문들이 거짓이라면, 방식의 문제가 아닌 현존의 부정, 즉 부재 자체가 거짓의 이유라는 이야기이다. 반면 예문이 참이라면, 존재사적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이유로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일 것이다.> 플라톤은 모든 문장 각각은 반드시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이 추정상의 반례들을 묵살할 것이다. 그는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시하지 못하는 문장처럼 보이는 단어들의 조합형태는 실제로 문장이 아니라고, 최소한 진리치를 결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페가수스, 날개달림, 호메로스, 시인 각각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이 전제된다. 아니, 내가 전제하는 것인가?> 현존하지 않는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사문장들을 플라톤이 어찌 다루는지는 불명확하다. 어쨌든 저 예문들은 문장처럼 보인다. 그의 입장이 프레게 등의 현대 언어철학자들의 입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존재에 관한 문제들. 『소피스테스』에서 거짓역설의 주된 형식은 논란이 되는 전제에 의존하는 논증이다. ~이지 않은 것을 말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화편의 주요 난제는 비-존재에 관한 난점에 의존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존재 또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를 이전 사상가들과의 가상대화를 통해 구체화한다. 그들은 다원론자들과 일원론자들, '거인들(감각되는 물체들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신들(가지적 형상들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들 모두 플라톤에 의해 시험을 받는다. 그는 그들에게 '존재(being)'라는 단어의 의미를 묻는다. 문답의 귀결은, 변화와 정지 모두 존재한다 하더라도, 존재 자체는 변화와 정지 양자 모두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존재는 '그 고유한 본성에 의해' 정지해 있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다는 점이 추론된다. 이로부터 나아가 존재가 정지해 있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다는 점이 추론된다. 그 논증은 참에서 출발하여 거짓으로 종결된다. 따라서 이 논증은 타당하지 않다. 이 부당성에 대해 플라톤이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문헌적으로 잘 드러난다.

언어적 용법들 사이의 구분. 플라톤은 앞서 존재, 변화, 정지에 대한 논증의 부당성을 언어적 용법들을 구별함으로써 드러낸다. [p.9] 그 구별은 서술적 문장들이 이해될 방식들에 관련된다.
  만일 'φ'가 하나의 유를 의미한다면, 'σ is (a) φ'는, 'σ'에 의해 지시되는 실체가 'φ'에 의해 지시되는 유를 예화한다는 '일상적' 독해를 지닌다. σ와 φ는 각기 고유명사와 보편명사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설명은 부정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σ is not (a) φ'는, 'σ'에 의해 지시되는 실체가 'φ'에 의해 지시되는 유를 예화하지 않는다는 '일상적' 독해를 지닌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
σ'와 'φ' 모두 유들을 의미한다면, 'σ is (a) φ'는 '일상적' 독해뿐만 아니라 '정의적' 독해 또한 지닌다. 이 독해에 따르면 그 문장은 'σ''에 의해 지시되는 유가 'φ'에 의해 지시되는 유와 동일시될 경우 참이다. 부정의 경우, 'σ is not (a) φ'는 'σ''에 의해 지시되는 유가 'φ'에 의해 지시되는 유와 다를 경우 참이다.
  '변화는 정지이다'라는 문장은 '일상적' 독해에서 참인데 변화라는 유가 정지라는 유를 예화하기 때문이다(모든 유는 정지해 있으니까). 그러나 이 문장은 '정의적' 독해에서 거짓이다. 변화라는 유는 정지라는 유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변화는 정지이지 않다'를 참으로 만든다. '변화는 같음이다/이지 않다,' '변화는 다름이다/이지 않다,' '변화는 존재이다/이지 않다(is/is not a being)' 모두 긍정의 경우 '일상적' 독해에서, 부정의 경우 '정의적' 독해에서 참이다. 더 나아가, 'φ'가 의미하는 어떤 유든 존재라는 유와 다르다면, 'Being is not (a) φ'는 '정의적' 독해에서 참이다. 이를 통해 플라톤은 'being is not'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존재, 변화, 생성에 관한 앞선 논증의 유사-타당성을 설명할 수도 있다. 존재가 변화하지도 정지해 있지도 않는다는 것은 '정의적' 독해에서 참이지만, '일상적' 독해에서는 거짓이다. (존재는 정지를 예화한다.) 이 논증의 유사-타당성은 '정의적' 독해에서 '일상적' 독해로의 전이에 있다.
  긍정적 서술 문장이 '정의적' 독해에 따라 이해될 경우, 그것은 그 주어표현(본성이나 본질을 가지려면 유여야만 한다.)에 의해 지시되는 실체의 본성이나 본질에 대한 완전한 기술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p.10] 문장에 대한 '정의적' 독해는 동일성 진술들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문장들에 대한 독해에 가깝다. 그러나 그 둘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좋음은 『국가』에서 가장 높게 칭송받는 유이다.'라는 문장은 동일성 진술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독해에 비추어 참이지만 '정의적' 독해에 따르자면 거짓이다. '
『국가』에서 가장 높게 칭송받음'이란 기술이 좋음을 적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가능적인 어떤 성격을 지시할 뿐이기에 유와 유 사이의 동일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긍정적 서술문장은 '정의적' 독해에 따를 경우 본질이나 본성을 기술한다.> 

존재의 방식들 사이의 구분. '일상적' 독해와 '정의적' 독해 사이의 구분은 특정 논증들의 타당성 사이에서 유시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화편의 핵심에서 특히 중요한 특정 유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플라톤이 내놓는 다른 논증들의 타당성 또한 보여준다. 이를 통해 처음에 부당해 보였던 논증들의 타당성이 드러난다. 허나 이 구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존재 방식의 구분을 산출하는 데에 있다. 이는 특히 감각적 개별자들과 유들이 존재하는 방식들 사이의 구분을 내놓는다.
  문장 '
σ is (a) φ'에서 'σ'가 감각적 개별자를 의미하고 'φ'는 유를 의미할 경우, 어떠한 유도 감각적 개별자이지 않기에, φ에 의해 지시되는 유는 주어진 감각적 개별자와 다르다. 따라서, 술부가 유를 지시하고 주부가 주어진 감각적 개별자를 의미하는 곳에서 '~은/는 ~이다(to be)'를 포함하는 참인 긍정 서술 문장은 감각적 개별자와 다른 어떤 것을 도입시킨다. 이는 감각적 개별자들의 존재가 언제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주장에 근거가 된다. 이제 'σ'와 'φ' 모두 유를 의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σ is (a) φ'는 '정의적' 독해에서 참이다. 따라서, 이 경우 술부가 한 유를 지시하고 주부가 주어진 유를 지시하는 경우 'to be'를 포함하는 참인 긍정 서술 문장은 주어진 유와 다른 어떤 것도 도입시키지 않는다. 이는 유들의 존재가 '그 자체로서' 있다는 주장에 근거가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감각적 개별자들의 경우, 'to be'의 서술적 용법은 언제나 그 개별자들과는 다른 어던 것을 포함하는 것이 정확한 적용이다. 유들의 경우, 'to be'의 서술적 용법은 어떤 다른 것을 가져오지 않고도 정확히 적용될 것이다. [p.11]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감각적 개별자들은 오로지 그것들의 어떤 다르 것들과의 관계를 포함함으로써만 존재자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유들은 그들 자신 스스로 존재자의 지위를 얻는다. 존재사는 'to be'의 서술적 용법의 한 측면 또는 그 구성요소이다. 이런 이유로 존재의 상이한 방식들은 'to be'를 포함하는 서술적 문장들의 상이하 유형들 속에서 스스로 드러난다.


0.2 방법론
  근사-주석. 대화-형식을 통해 소개된 주제들과 개념들 사이의 밀접한 상호연관은 일부 주제와 개념을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시켜 검토함으로써 다루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만일 이런 종류의 작업이 시도된다면, 고찰 과정에서 문제들에 대한 이해에 본질적인 일부 요소가 간과된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글은 『소피스테스』의 대화 전개에 병렬적으로 전개된다. 거의 연속 주석(running commentary<이 따위 번역어밖에 없나?>)의 형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사선택이 이루어진다. 대화편에서 드러나는 모든 주제와 개념이 같은 정도로 논의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언어철학적 접근을 중시하였다(포괄적인 의미에서는 존재론적 문제들도 다루었다.). 특히 현대 언어철학자들이 제기할 만한 문제들을 중시하였고, 이에 대해 플라톤의 가능한 답변을 고려해 보았다. 이는 그가 실제로 말한 바로 그 말을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재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해석과 문헌학적 고찰을 철학적 정신에 입각하여 결합시킨다.
  플라톤의 입장을 넘어서려는 시도도 있다. 그의 관점일 것으로 취한 바를 그가 예상하지 않은 지평까지 전개시킨다. 이러한 전개는 '철학사'가 '개념사'와 달라지는 그러한 방식들 중 한 가지 것이다. 플라톤에 대해 논할 때에는 이를 분명히 할 것이다.
  이 연구의 접근법에서 또 다른 특징은 논증에 대한 천착이다. 특정한 핵심 논증들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분석하는 데에 많은 주의가 기울여진다. 저자는 플라톤이 합당히 지지하였을 논증들이, [p.12] 설령 건전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타당한 것인 경우, 개선되는 해석을 목표로 한다. 플라톤은 비루한 논증을 그의 등장인물들을 전시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플라톤에게 귀속되는 논증들의 질은 이따금 경쟁하는 해석들 사이의 평가기준이 되기도 한다.

편향된 관점? 일부 주석가들은 저자가 현대 언어철학이라는 유리한 고지에서 플라톤에게 접근한다는 정직한 고백에 불편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접근을 분석적 철학자들이 플라톤의 문헌을 그들의 해석에 맞게 왜곡시킴으로써 변질시킨다는 근거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저자의 응답은 문헌에 대한 해석 없는 접근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해석은 관점과 구체적 물음들을 포함한다. '본래의 문헌'을 완전히 '중립적' 방식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발상은 망상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신의 관점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리고 여러 대안적 접근들이 간으하다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가능한 한 가장 신뢰할 만한 '사진'을 제공하려는 자들조차 특정 주제와 발상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형식적 부록. 이 연구의 마지막 부분은 기호논리학의 형식적 설정에서 표혀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것이 플라톤이 어느 지점에 서는지(적어도 이전 장들에서 도출된 문헌에 기초한 검토에 따라 어디에 서는지)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모호하지 않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형식적 표현은 다른 방식으로 간과될 수 있었을 그 이론의 약속들을 밝힐 수 있게 해줄 것이다(혹은 없는 약속을 만들어내는 일을 피하게 해줄 것이다).
  이 기호논리학적 정리는 해석적 연구의 결과들에 대한 압축적 요약이라 요점정리의 자연스러운 자리인 말미에 놓인 것이다. 기호 논리학 모르면 무시해도 좋다.(...중심 논증들 인공언어로 다 번역해서 증명 검토한 건데, 여기 올릴지는 좀 더 생각해 보고-_-)


[p.13] 1장 정의된 소피스테스

『소피스테스』에서 진술된 목표는 소피스테스를 정의하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 분할의 방법이 적용되는데 이는 1.2절에서 다룰 것이다. 플라톤은 분할 방법에 기초한 소피스트에 대한 여섯 기술들을 쏟아 붓는다. 각 기술은 적어도 일부 소피스테스들이 공유하는 특정 특성들에 초점을 맞춘다. 1.3절은 소피스테스와 현상(phenomenon)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소피스테스에 대한 여섯 기술은 그를 여러 기술(技術, techne)들을 지닌 것으로 현상한다. 이것이 현상 개념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새로운 성격규정의 출발점이다. 소피스테스의 본질(ousia? physis? 어쨌든 영어는 essence)은 정확하게는 실상 그가 결여하고 있는 기술들을 가진 것으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 개념과 그에 연관된 거짓 개념은 난제를 산출해낸다. 이 난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소피스테스는 '정의를 통한 포획'을 피해 달아날 수 있다.


1.1 대화편의 인물들과 과업
소피스테스를 정의하는 과업. 『소피스테스』는 『테아이테토스』의 마지막 말에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가 바실레우스 관아에 가 봐야 하겠다며 그들이 헤어지는 그 자리에서 내일 다시 보자 말하고 『테아이테토스』가 끝난다. 『소피스테스』에서는 테오도로스가 그 약속을 상기시키며 그 말대로 자신들이 왔노라고 말하며 대화가 시작된다. 소피스테스의 극중 시기가 기원전 399년, 즉 소크라테스가 죽은 그 해임을 시사하는 것이자, 『테아이테토스』의 토론자들이 『소피스테스』의 토론자들에 포함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테오도로스, 테아이테토스, 소크라테스와 동명이인인 젊은이, 그리고 익명의 젊은이들과 또 한 사람이 있다.
  테오도로스는 엘레아로부터의 방문자를 대동하였다. 테오도로스는 그 손님을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 중 하나로 소개한다(216a3). 그리고 대단히 철학적인 자라고도 말한다(216a4). 이 언급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철학자를 알아보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고찰하도록 만든다. 신들이 종종 스스로 인간을 가장하여 들키지 않고 지상을 떠돌듯(216c4-6), 신적인 인간인 철학자들 또한 그렇기에 쉽사리 확인될 수 없다(216b8-216c1). 철학자들은 종종 정치가로, 때로는 소피스테스로 보이며, 어떤 때에는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216c8-216d2). 여기서 '가장(disguise)'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가장을 행하는 자는 바로 철학자이다. 이후에는 소피스테스가 그러한 일을 행하는 자일 것이다. 주석.5. Cf. Wolff(1991), 20. 이 대화편에서 대화자들은 부재하는 자들을 종종 문답을 통해 가장한다. 239c9-240c6 손님이 소피스테스를 대신하여 묻는 장면, 243d6-244b5 테아이테토스가 다원론자들을 대신하여 답하는 장면, 2446b244d13 테아이테토스가 일원론자를 대신해 답하는 장면, 246e2-248a3 테아이테토스가 거인족을 대신해 답하는 장면, 248a4-248e6 테아이테토스와 손님이 형상의 친구들을 대신해 답하는 장면.
  철학자들은 쉽사리 소피스테스 그리고 정치가와 혼동될 수 있기에, 소크라테스는 손님에게 철학자, 소피스테스, 그리고 정치가에 관한 엘레아의 입장(관점)을 묻는다(216d3-217a4, cf. Plt. 257a3-5). 소크라테스는 특히 엘레아인들이 '소피스테스,' '정치가,' '철학자'라는 그 이름이 셋이듯 그 유들 또한 셋이라 생각하는지 궁금해 한다(217b1-2). 손님은 엘레아에서 그 세 이름들에 상응하는 구별되는 세 유들이 있다고 답하고, 곧장 그 세 유들을 정의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 경고한다(217b1-4). 그는 그것들을 정의하는 일을 받아들인다. 그는 혼자 떠들기 보다는 대화자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작업을 할 것이다. 이 전체 작업의 첫 번째 동반자로 테아이테토스가 선택된다. 첫 작업은 정의의 방식으로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소피스테스, 정치가, 그리고 철학자. 이 세 이름들에 부합하는 서로 구별되는 세 유들이 있다는 점은 이 대화편에서 논증되지 않는다. 플라톤 당대 이 세 이름들이 같은 교육의 종사자들을 지시하는지 다른 교육의 종사자들을 지시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이 주제에 대한 엘레아의 입장에 관하여 조심스럽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이런 논쟁 때문일 것이다.
  [p.15] 소피스테스와 정치가에 대한 정의들로 인도하는 논의들은 동명의 대화편 『소피스테스』와 
『정치가』에서 보고된다. 플라톤은 철학자에 대한 정의를 목표로 할 세 번째 대화편일 『철학자』는 집필하지 않았다. 주석.8. Lauer (1966), 146; Frede (1996b), 149-51; Notomi (1999), 24-5; M. L. Gill (2010), 174) 등의 일부 주석가들은 세 번째 대화편이 기획되지도 않았으리라 믿는다. Davidson (1993), 114에 따르면 설령 '여러 이유로 […] 『필레보스』가 『철학자』라 불릴 수 없을지라도,' 그 대화편에 대해 저 집필되지 않은 대화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할 근거들이 있다.'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는 철학자에 대한 정의를 염두에 두고 착수된다.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는 단지 철학자로 보이는 것과 진정한 철학자를 구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1.2 분할의 방법
플라톤의 분할의 방법에 대한 개관. 분할의 방법은 유들을 유들로 '분할'함으로써 정의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주석.10. Moravcsik (1973a) 327-8. 플라톤은 분할 방법의 '교과서적 서술'을 제공하지 않는다(그에 근사한 것은 Phlb. 16b5-18d2이다). 주석.11. Sph. 253d1-253e3은 전통적으로 분할 방법을 기술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cf. Conford (1935), 266-8; Lauer (1966), 155; Berman (1996), 28-9; Fattal (1991), 155-6. 일부 주석가들은 최근 해당 구절의 두 번째 부분(253d5-253e3)이 분할 방법에 관련한다는 점을 부정했다: cf. Trevaskis (1967), 120-3; Gómez-Lobo (1977), 36-47; Bordt (1991), 523-4. 여기에서는 플라톤의 파편적인 언급들과 그의 시행에 기반하여 거칠게 성격규정하도록 한다.
  유를 나눈다는 것은 (1) 분할되는 그 유에 직접 종속되고, (2) 짝으로 분해되며, (3) 나뉘어지는 그 유를 소진하는(완전히 채우는) 둘 또는 그 이상의 한정된 수의 유들로 규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cf. Sph. 219a8-219c9), 기술이라는 유는 제작적 기술과 획득적 기술이라는 두 유들로 나뉜다. 이 두 유들은 (1) 기술 유에 직접 종속되고(왜냐하면 그 둘 모두 기술 유에 종속되며 어느 하나도 기술 유에 종속되는 어떤 유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2) 분해되며(양자 모두에 들어가는 아무것도 없기에), (3) 기술 유를 완전히 채운다(기술 유에 들어가는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저 둘 중 어느 하나 아래에 들어가기에).
  만일 유 F를 정의하고 시도하고 있다면, F가 종속하는 유 G를 규정함으로써 시작한다. 만일 G가 F와 동연인 유들로 분할될 수 있다면, 이 분할을 시행하고 그 과정은 종결된다. 그 대신 만일 G가 그렇게 분할될 수 없다면, F가 그 중 하나에 종속하는 그런 유들로 분할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유를 가지고 G에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 이 작업은 F가 그 중 하나와 동치인 유들에게로 한 유가 분할되는 단계에 당도할 때까지 반복된다.[p.16] F에 대한 정의는 F가 종속하는 것으로서 발견된 유들과 F와 동치인 유를 연달아 언급함으로써 확보된다.
  분할 방법에 대한 이 거친 묘사의 중심 개념은 종속이라는 개념이다. 종속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적당한 외연적 포함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모든 유들 F와 G에 대하여, G가 F가 포함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다른 것을 제외시킬 경우 F는 G에 종속한다. 종속은 적당한 외연적 포함보다 강한 의미이다. 설령 모든 유 F와 G에 대해, 오직 G가 F가 포함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다른 것들을 배제시키는 경우에만 F가 G에 종속한다 하더라도, 그 역은 거짓이다. 유 F가 유 G에 종속한다는 것은, 그 추가적인 필요조건이 F에 대해 제기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참되게 그리고 적합하게 G가 언급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정의에서 분할의 방법을 활용하는 데에 대한 마지막 문단의 설명이 상정하는 형이상학적 전제들은 언급할 만하다. 만일 유 F가 유 G에 종속한다면, F는 G가 분할될 수 있는 유와 동치이거나 F가 그런 어떤 유에 종속한다.

변증으로서 분할의 방법. 분할의 방법은 플라톤의 후기 철학에서 점차 더욱 중요해진다. 『고르기아스』(454d1-455a2, 463e3-466a6), 『국가』(5.454a-9) 등에서 등장하고, 『파이드로스』(265c8-266c1, cf. 271c10-271d5, 277b5-8)에서는 변증과 동일시된다. 그 방법은 『크라튈로스』(424b7-425c8), 『소피스테스』, 『정치가』, 『필레보스』에서 사용된다. 

  <파이드로스』 265c-266c까지 인용. 뤼시스 연설 이후 에로스에 대해 논하면서 그 종류를 나누는 논의로 들어간다. 자연스러운 마디에 따라 형상들로 나누는 것이 필요하고, 거기서 에로스(사랑)이라는 이름을 나누어 가지는 것들 중 광기가 들어간다는 걸 발견한다는 논의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이런 분할과 종합에 대한 애호가라 자처한다. 그는 이런 걸 할 줄 아는 자가 변증가라 말한다.>

분할의 방법이 유들을 다루기에, 그 방법과 변증의 동일시는 『국가』에서의 변증교육(cf. 7.532a1-532b5)을 선명하게 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분할 방법의 일부 특성들:

(1) 분할에 의해 도달한 유들은 임의로 선택되지 않는다. 반드시 유들의 객관적 관절을 따라야만 하며 '어떤 부분도, 마치 못난 도살자마냥 부숴 버리지' 않아야만 한다(Phdr. 265e1-3).주석.16. philip (1966), 346.
(2) 『정치가』(262a3-264b6)에서 플라톤은 분할에서 소규모 종들을 해당 유 내의 여분에 대비시켜 고립시키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동물을 인간과 (야생)짐승으로 나누면 안 된다. 이 경우 인간이나 짐승이나 동물의 부분일 뿐 그 '종'은 아니다. 유의 모든 각 종은 그 유의 부분이지만, 모든 부분이 종은 아니다. 유들을 나눌 경우 언제나 획득되는 부분들이 또한 종들이기도 한 한에서 행해야 한다. 
주석.17. Trevaskis (1967), 126; Cavini (1995), 131.
[p.18] (3) 같은 유가 하나 이상의 방식으로 분할될 수 있다. 일례로, 
『소피스테스』(219a8-219c9)에서 기술은 제작기술과 획득기술로 나뉘지만, 『정치가』(258b7-258e7)에서는 지식이 실천적 지식과 순수하게 인지적 지식으로 나뉜다.(기술techne과 지식episteme은 같은 유인 듯하다. cf. Sph. 257c7-257d3 그리고 Plt. 258b7, 258d5.)
(4) 때로 분할은 둘 이상의 종속하는 종들로 이끈다. 그 수는 가능한 최소이며 한정되어야 한다. (cf. Plt. 287c3-5; Phlb. 16c10-16e2)
(5) 분할의 방법은 다수의 목적을 갖는다. (5.1) 유들을 정의하는 데에 기여한다. (5.2) 분류들을 산출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의될 유가 종속하지 않는 분지들은 분할되지 않는다.  분류를 위한 분할 방법의 사용이 린나이우스의 방법론 이후의 계통도 구축에서 사용되는 철학적으로 흥미롭지 않은 활동으로 간주될 필요는 없다. 분류는 특정 주제 영역들의 개념적 구조를 밝혀줄 것이다. (5.3) 분할 방법은 애매성을 제거하는 데에 사용된다. (5.4) 분할 방법은 지적 능력을 증진시키는 활동으로서 수행된다.
(6) 분할은 분할 불가능한 유들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만일 분할이 정의를 목표로 한다면, 오직 정의될 한 유만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고려된다. 만일 분할이 분류를 목표로 한다면, 아무런 종속하는 유도 포함하지 않는 유들만이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
(7) 초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은 정의가 설명력을 가져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만일 '이러저러함'이 경건을 정의한다면, 이러저러한 것임은 반드시 그 어떤 경건한 것이든 왜 경건한지 설명해야만 한다. [p.19] 정의들을 산출하기 위해 분할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이러한 설명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어떻게 그리하는지는 불분명하다.
(8) 변증가는 분할의 일부 분지가 사소한지 여부를 개의치 않는다. 변증은 직면한 유들에 의해 촉발되는 감정적 반응들을 무시한다.(cf. Sph. 226e8-227b6)
(9) 변증가는 명칭에 개의치 않는 것이 허용된다. 분할을 통해 지목된 분지가 무명이라면, 변증가는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cf. Sph. 220a1-3; 225b13-225c6; 226d5; 267a10-267b2) 신조어를 도입한다. (cf. Sph. 220c7-8; 222c9-222d2; 223d6-9; 224b4-224c3; 225a9-12; 267d4-267e3; Plt. 261e1-7)
(10) 플라톤은 종종 분할을 종합의 역순과 결부시킨다(cf. Phdr. 265c8-266c1). 분할이 단일 유로부터 출발하여 둘 또는 그 이상의 종속 유들에 당도하는 반면, 종합은 여러 특수한 사례들(감각적 개별물들이든 개념적 유들이든)로부터 출발하여 그것들을 포괄하는 단일 유에 도달한다. 분할에 앞서 종합이 수행될 것을 기대할 수도 있다. 한 유를 둘 혹은 그 이상의 종속 유들로 분할하기 위해서, 분할될 일반 유를 규정해야만 한다. 이 규정은 종합에 근거할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에 의해 제시되는 분할의 예들 중 어느 것도 사전 종합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분할이 출발점으로 삼는 유는 언제나 즉각적인 직관 같은 것에 의해 규정되는 듯하다. 플라톤의 시행은 대신에 종합이 분할 기간 내에 전개된다는 것을 밝혀준다. 유 F가 분할되어 나올 둘 또는 그 이상의 유들을 기대하고 있을 때, 종종 F의 여러 구체적 사례들을 종합하고 그로써 F가 분할되어 나올 그 유들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Sph. 219a10-219c1; 219cc-9; 222c3-222d2; 226b2-226c9; 226e5-227a10; 267a10-267b2; Plt. 258c3-258e7)
(11) 분할의 방법은 플라톤 후기 철학의 성공적 측면이었다. 스페우싶포스는 분할의 방법을 통해 동물과 식물에 대한 분류학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p.20] (11.2)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분할 방법을 비판하며, 또한 자신의 생물학 저술을 이 방식으로 채운다. (11.3) 에피크라테스는 그의 희극에서 플라톤과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이 분할의 방법을 사용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는 비-철학자도 분할의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플라톤의 주목할 측면 중 하나라 여겼다는 것이다.

정의와 분류. 질문에 대한 답은 진리치와 적절성으로 평가된다. 특정 대상의 위치에 대한 물음에는 그 대상의 위치를 답하는 것이 참이며 또한 적절하다. 다른 위치를 답한다면 거짓이나 적절하며, 그 대상의 고유한 크기나 형태를 답한다면 참이지만 부적절하다. 이 질문에 다른 대상에 대해 위치 이외의 상태나 조건을 답한다면 거짓이자 부적절한 것이 된다. 
  [p.21]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도 유사한 점이 지적될 수 있다. 진리치와 적절성이 각기 모두 이야기될 수 있다.
  위치에 대한 질문은 위치선망 내의 정위를 요구한다. 질문에 포함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를 구체화시키라는 요구이다. '그것은 어떠한가?'라는 물음은 질적인 선망에서의 정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근본적인 존재론적 분류에서 그것이 존재하는 그 계층들의 선망에서 정위를 요구한다.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어떤 것을 정의하는 일이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정의들이 내적으로 분류들과 연결되는 까닭을 알 것이다. 또한 동일한 절차로서 분할이 분류와 정의 양자 모두를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치 물음에 대해서도 그 대답의 구체성과 정보량이 다를 수 있고,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그렇게 여러 방식으로 답할 수 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컵은 책상 위에 있고 또한 내 방 안에 있으며 대한민국에 있다는 식이다.> 이 정보량은 진리치와 적절성에 이은 세 번째 평가 척도이다.
  저자는 플라톤이 정의와 분류를 연계시킬 때 품은 생각도 이와 유사하다고 본다. 플라톤에게는 분류와 정의 모두 그 배후에 실재를 그 접합부에서 분할시키는 동일한 활동이 자리한다. [p.22] 그 근거는 플라톤이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 라는 물음과 '그것은 어떠한가(poion)?'라는 물음의 차이를 언급한다는 것이다(cf. Men. 71b3-4, 87b3).

소피스테스에 대한 여섯 가지 서술.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해 분할의 방법을 도입하기 전에 대화자들은 먼저 낚시꾼을 정의 대상으로 삼아 이 방법을 연습한다(218c5-221c5). 그들은 이 방법을 소피스테스에 적용하여 여섯 가지 상이한 서술들을 얻는다(221c-232a7). 첫째로 부유한 명망가 자제들을 사냥하는 사냥꾼, 다음으로 말과 교육의 무역상, 또한 이러한 것들의 도매상, 그리고 자체제작판매자, 여섯 번째로 쟁론가라는 서술들이 확보된다. 여섯 번째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논박을 통해 영혼을 허위의 지식으로부터 정화시키는 교육자로 보이게 된다.
  이 여섯 가지 서술들로 인해 테아이테토스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231b9). 소피스테스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보인다). 여섯 서술들은 각기 소피스테스의 본성을 규정하는 듯이 보이지만, 만일 소피스테스가 소피스테스의 기술이라는 하나의 기술로서 정의될 수 없다면, 그를 다른 기술자들로부터 구별해낼 수 없고, 그것은 정의라 할 수 없다. 그는 하나의 기술을 지닌 자로서 하나의 본성으로써 정의되어야 한다. 즉 여섯 서술들 중 어느 것도 참된 정의가 아니다. 이제 이 모든 기능들이 수렴되는 단 하나의 소피스테스술이라는 것을 찾아야 하나, 이러한 일은 어려워 보인다. 

[p.23] 현상적 전지(全知). 그들은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로 복귀하기에 앞서 이전의 여섯 서술들 중 대표적인 한 가지 것을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그것은 반박술(antilogike)이다. 그들은 반박술의 전문가이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친다고 자부한다. <왜 반박술이 가장 대표적인 것인지에 대한 논증이 대화편 내에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Paolo 역시 따로 논증하는 바 없다. 대화편에서 이 이후의 부분을 논증으로 수용한다면, 다른 이들과 싸워 이기는 듯이 보임으로써 상대방이 무지를 시인하게 만들고 젊은이들을 사냥하며 또한 돈을 버는 모든 것이 논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결과들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단적으로 '모든 것들'이다. 천지만물에 현세와 내세, 신과 미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장인들의 각 기술 전부를 또한 다룬다.
  이로부터 논의의 다음 단계에 현상적 지식(doxastike episteme)이 도입된다. 그 누구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는지에 대한 논증이 대화편 내에서 불분명하다. 여기에서도 Paolo는 논증을 제시하지 않는다. 구체적 개별자의 경우라면 episteme는 명제적 지식이 된다. 그러나 모든 명제적 지식을 개별적인 한 인간이 지닌다는 것과 관련된 논의를 대화편 내에서 찾기는 어렵다. 반면 '유(genos)'로서의 인간을 두고 말하자면, 그는 의사이거나 조타수이거나 하는 식으로 고유한 기술에 따라 그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 경우 모든 기술들의 전문가로서 하나의 유라는 것은 정의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유형(genos)의 인간이든 모든 기술들 각각 전부에 대한 전문가일 수 없다. 이 경우 episteme는 실천적 지식까지 함의할 것이다. 아마도 후자가 좀 더 대화편의 맥락 내에 위치시키기 용이할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테스는 귀족 자제들에게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믿도록 만든다. 소피스테스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기에 젊은이들이 그들에게 돈과 몸을 바치며 따르는 것이다. 소피스테스가 실제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고, 또한 그러면서도 젊은이들에게는 그가 그렇게 보이므로, 결국 소피스테스는 아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것으로서 현상적 지식의 담지자이다(doxastike episteme에서 doxastikos는 여겨지거니 믿어진다는 한정을 주는 의미와 그러한 믿음이나 현상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 모두를 포함한다. 믿음을 만들어내는 지식, 지식으로 믿어지는 것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이제 소피스테스의 본질은 그가 실상 결여하고 있는 기술들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는 바로 그것이다.

조형적 모방과 언어적 모방. 조형 모방물을 산출해내는 기술과 소피스테스의 기술 사이의 유비를 도입하는 본(paradeigma, 233d3)을 통해 문제는 분명해진다. 조형적 모방을 행하는 자들은 모든 것의 모방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모방물들이 원본이며 또한 그 모든 원본들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 수 있다. 언어적 모방자로서 소피스테스 또한 참인 문장들의 모방물들을 만들어 사태들의 진리로부터 동떨어진 어린 자들을 기만한다. 속은 자들은 소피스테스가 그의 모방물들이 참인 문장들이라고, 그리고 모든 참인 문장들을 자신이 만들 수 있다고 젊은이들이 믿도록 만든다(234b5-234d1). [p.24] 거짓 문장이 그 듣는 이들에게 모방의 원본인 참인 문장과 혼동되는 까닭은 전자가 후자를 모방한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몇 가지 개념적 도구를 도입하자. 모든 모방은 어떤 것을 모방한다. 이것은 '인지적 기만(cognate deception)'과 결부된다. 인지적 기만은 모방물을 원본으로 간주하는 거짓 믿음을 청자에게 주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기만은 두 종류이며 그와 함께 두 가지 모방물들이 있다. (1) '특수 모방'은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를 모방한 조각상 같은 것이다. 그것이 모방하는 대상에 대한 물음의 답은 고유명사이다. 이 경우의 인지적 기만은 잘못된 동일시이다. (2) '보편 모방'은 밀납 사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모방하는 대상을 물으면 일반 명사구로 답하게 된다. 이 경우의 인지적 기만은 잘못된 기술이다.
  거짓 문장들이 참인 문장들을 모방하는 것으로 간주될 경우 일반 모방이 작용하고 있다. 밀납 사과를 '사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과 같이, 특정 거짓 문장이 참인 문장을 모방할 때에, 기만 당하는 쪽에서는 바로 그 거짓 문장을 '참인 문장' 일반에 속하는 개별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동일시가 아니라 잘못된 기술이다.
  여기에서 '명제적 거짓'이라는 개념은 (그로써 거짓인 것으로 불리는 것은 문장이나 믿음 또는 명제이다) '존재론적 거짓' 개념과 (기만적으로 이러저러한 것에 대해 그것이 거짓으로 이러저러하다는 경우) 연결된다. 거짓 문장을 참인 문장으로 간주하도록 기만하는 거짓 문장은, 거짓 참 문장이다. <앞의 거짓은 명제의 내용, 뒤의 거짓은 명제의 참이라는 속성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eidolon), 모상(eikon), 현상(phantasma). 이어서 모방에 관련된 일종의 분류가 이루어진다(235b8-236d4). 소피스테스의 기술은 모방술의 일종인 바, 모방술은 모방물(mimema) 또는 상(eidolon)을 만들어 낸다. 이 상은 다시 원본을 닮은 모상과 [p.25] 원본을 닮지는 않았으나 닮은 것으로 보이는(phainetai) 현상으로 나뉜다. 원본의 비율과 채색을 따르는 조각이 모상이라면 원본의 비율과 색채를 왜곡함으로써 보는 자의 입장에서 원본에 닮은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들어진 것이 현상이다. 상의 이러한 두 종류가 나뉘듯 모방술 역시 둘로 나뉘는 것이다.
  모상과 현상 사이의 구분은 그것들이 유발하는 인지적 기만과 관련된다. 전자의 경우 인지적 기만은 모방물이 원본의 일부 특성들을 지님으로써 이루어진다. 현상의 경우 그것은 원본의 일부 특성을 지닌 것처럼 보임으로써 기만을 이루어낸다. 여기에서는 기만당하는 자에게 추가적인 거짓이 개입된다. 즉 해당 현상은 그것이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원본의 일부 특성들을 실제로는 결여하고 있다. 모상이 원본의 일부 특성을 지닌다는 참, 사실에 근거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모상과 현상 모두 일차적으로 거짓이며, 현상의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거짓에 기초한 거짓인 것이다. 현상이 원본이라는 명제적 거짓에 더하여, 현상이 원본의 일부 특성들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는 존재론적 거짓이 추가된다.
  참 문장을 모방한 거짓 문장의 발화자는 청자가 그 거짓 문장을 참인 것으로 믿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한 기만의 일부는 참인 문장의 일부 특징들을 포함하는 거짓 문장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다른 경우 그 기만은 참인 측면을 포함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만 할 뿐 실제로는 원본과 아무런 특성도 공유하지 않는 거짓 문장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자에서 말로 된 모상이, 후자에서 말로 된 현상이 나온다. [p.26] 주석.47. Gulley (1962), 149; Bluck (1963), 59; Tilghman (1969), 160 등은 참인 문장이 모상, 거짓인 문장이 현상이라 간주한다. 그러나 Paolo는 이것이 오류라 주장하며, Szif (1998), 402; Brown (2010), 161이 이 관점이 오류라는 근거로 제시된다. <나는 Bluck 등이 맞다고 본다. 일례로 유들의 결합 (논리적 순서로서)이전에 진술(logos)는 성립할 수 없고, logos의 구성요소인 명사는 사물을, 동사는 사태를 '지시'한다는 해당 대화편의 논의를 무시할 수 없다.>

탐구자들이 면한 난점들. 이 지점에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우선 소피스테스를 모상제작자로 분류할지 모방제작자로 분류할지 문제가 된다(236c9-10, cf. 235d2-3과 264c7-9). 두 번째로는 소피스테스가 반박을 제시하는 지점이 되는 그 유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236d1-4).


-작성중-

1. 좋아하던 사람이 결혼을 했단다. 하하하. 이런 식상함이라니. 뭔가 너무너무 평범해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숨막히는 '일상'이다. 서른 즈음의 사내새끼 누구라도 그러하듯, 나 역시도 '너의 결혼식'이나 '여전히 아름다운지' 따위를 읊조리며 술이나 마시는 찌질이가 되었다. 다만, 갈수록 장가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듯하니, 이빠진 일상이라고 해야 하려나.

2. 새벽 두어 시 즈음이던가, 왠 앳된 사내애의 고함인지 비명인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여자를 왜 떄려, 엄마를 왜 때려, 엄마 어디있어." 이런 말을 해댄다. 그래, 그런 동네였던 건 잘 알지만 아직도 '그런 동네'인 줄은 잠시 잊었네. 그랬었지. 또 어느 새벽에는 계집애 둘이서 고성을 질러댄다. 또 들어 보니, "바지 올려, 미친 년아!" "몰라, 나 오줌 눌 거야!" 그냥 그런 얘기를 들었대도 변태로 찍혀 경찰서에나 끌려갈까 두려워 신경 끄는 게 예삿일이겠지만, 왜 하필 우리 집 앞 골목에서 소변을 봐야 했던 거니. 여하간 관두라고 소리 지르기도 꼴이 우스워, 담장 너머 술 취한 여자애들 둘이 오줌을 누네 마네 실갱이 하는 꼴을 상상하며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시선을 던지다 문득 고갤 드니, 그게 다 보일 각도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사내새끼랑 눈이 마주친다. 아, 지저분하다. 안 보이는 나와 보이는 저 새끼가 눈이 마주쳤다, 이건 억울하네. 택시운전사는 "저 빨리 가야해요"하고 애원을 하고, 늘 그런 동네. 지긋지긋하다. 그토록 달아나고 싶었던 썩은 동네에 벌써 30년째, 지랄이 풍년이다.

3. 누가 그런다. 재능이 없다고 그렇게 꼬집어 지적질하는 게 즐겁고 재미지냐고. 뭐 나한테 한 소리는 아닌데, 여하간. 그럼 어쩔까? 없는 재능 있다고 구라라도 쳐야 좋은가? 막무가내로 일단 지르고 보라고 충동질이라도 해야 옳은가? 재능이 없다는 지적은 관두라, 때려 치워라, 그런 이야기하고는 다른 문제다. 출발점을, 디디고 선 땅을, 그 밑바닥을 알려주는 거다.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걸 직시하라고 조언하는 거다. 제 현실에서 눈 돌린 채로 날뛰고 뒹구는 건 제 삶도, 제 주변 사람들의 삶도 피곤하게 만들 따름이다. 시궁창 밑바닥을 벅벅 기고 있는 제 꼬라지를 자각하고 나서도, 제가 기어 올라야 할 그 구덩이의 깊이를, 비루한 몸뚱아리를 알고도 어쨌든 끝까지 나아가 보겠다면 그거야 그저 자기 선택이 아니겠나? 그걸 누가 말리겠냔 말이지. "넌 재능이 없다," "넌 돈이 없다," "넌 학벌이 쓰레기다," 그게 다 사실이라면 말해주는 게 맞는 거다. 거기에 일말의 양심과 책임감이 있다면 그 지린내나는 썩은 진창에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기어나올 수 있을는지, 그것까지도 말을 해주어야 하는 거고. 괜찮다느니 잘 될 거라느니 꿈을 가져 보라느니 일단 뛰어 들라느니, 귀에나 달콤한 무책임한 개소리들 지껄여 놓고서는 뭔가 대단히 청춘을 위로라도 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나 좆나 어른스러운 듯, 하악하악' 이 지랄하는 새끼들은 귀싸대기를 올려맞아도 싸물고 있어라. 어떤 일이든 그 일이 좋고 즐겁고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면, 성과와 무관하게 어떻게든 버텨나갈 구석은 항상 있다. 좆나 언터쳐블(불가촉이냐...) 상위 개간지들과 삐꾸찌끄래기찌질이들 사이 두텁고 넓은 그 가운데에 숱하게 인생 맡기고 목숨 내던지며 달려들다 사라져간 익명의 아무개들, 그들 중에 하나가 되는 거다. 재능과 무관하게, 노력만으로, 업적이 아닌 최저한도의 턱걸이, 최소한의 조건을 채워가면서, 그 무영씨들을 '존경'하면서 가는 거 말이다. 그럴 생각도 의지도 없는 씹새끼들이 재능이라곤 쥐뿔 좆도 없으면서 세상을 갈아 엎겠노라고 날뛰면, 가만히 다가가 부랄주머니를 걷어 차주고서 '정신 차려라'라고 말을 해주는 거다. 무책임을 희망과 긍정 같은 알량한 가식과 위선으로 덮어 버릴 생각들 말고, 남한테 뭐라 할 거면 욕 먹을 각오부터 해라. 이제 이런 얘기도 지겹다.

4. 석사 수료에 2년 걸리고 그 이후 또 2년째, 근데 논문을 또 다음 학기로 미뤘다. 이거저거 다 벌려놓고 들쑤시고 다니면서도 석사논문 따위야 어떻게든 통과는 받을 수 있지 않겠냐, 뭐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좀 가랑이 붙들고 울며불며 매달려 늘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 없다고 안 돌아갈 강의나 세미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제가 너무 주제넘었는지도. 문제들의 얼개를 잡고, 논쟁사를 정리하고,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도 될지, 그게 어떤 그림이 나오는 건지, 아무튼 다시 뭔가 만들어서 지도교수님께 내밀고서야 뭔가 상담을 받든 어쩌든 할 수 있을 거다. 꼴이 우습다만, 아직 내딛을 다리가 있고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안락사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란 놈이 폐기처분된 것일지, 이 즈음에서 억지는 관두고 다시 학원일이나 알아봐야 할지, 별 생각을 다 해 봐도 결국 지금 이 자리로 되돌아 온다. 묻고 따지고 고민하는 것 말고, 다른 걸 하면서 견딜 자신이 없다. 누가 날 죽이지 않는 한은, 이렇게 이대로 살아야 하겠어서 나는 좀 더 비집고 나아가야 하겠다. 내 처지를 내 모르는 바 아니오.

5. 논문 끝내면 『티마이오스』랑 『파르메니데스』, 『에우튀데모스』 좀 뒤적거리면서 영어 공부나 해야지.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해 놓고 유학 좀 알아 보고, 가능하면 박사과정 입학시험 없었으면 좋겠는데 뭐 있어도 별 수 없고, 그나마 TEPS 점수라도 받아 놓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독어 시험이야 뭐 그까이거 대충 때려 맞추면 되는 거고. 플라톤이 생각한 논리와 수리, 그게 궁금한 거다. 이걸 붙들고 늘어질 방법을 배울 길이 있을 거다. 그걸 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럼 그거나 붙잡고 평생 그걸로 노닥거리다 뒈지는 거다. 꿈처럼 행복한 이야기다. 뭐 봇따리 둘러메고 "이빨 털 테니 밥값 좀 주쇼." 하고 다니게 되는 걸 피할 길은 없겠지만, 딱히 노후 준비 없이 홀몸으로 살면야 크게 바쁠 일도 없겠고, 지금처럼 이리저리 선생님들 뵈러 다니고 또 유학 갔다 오는 게 이루어져야 할 말이겠지만 이 나라 저 나라 선생님들한테 메일도 보내고 학회에 논문도 좀 쏴 보고 하면서, PDF 찾으러 다니거나 이 도서관 저 도서관 뒤적거리면서, 이 소리 저 소리 들으면서 이것저것 궁금해 하고 또 조금은 풀기도 하면서, 제발 좀.

-蟲-

P.S. 왜 당신들이 쓰레기한테 쓰레기라 말해주지 못하는가 하면, 쓰레기는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단정짓고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쓰레기는 쓰레기대로 살아남는 방식이 있다. 난 쓰레기고, 니가 쓰레기라고 기꺼이 말해줄 생각도 있다. 너도 나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하는 소리다.

595a-598d : 이렇게 수립된 폴리스는 시가와 관련하여 특히 제대로 수립된 것이다. 영혼의 종들이 나뉜 점을 감안할 때 시 중에서 모방적인 것은 거부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럿에 관하여 각기 하나의 형상을 가정해 왔듯, 이번에는 침상과 식탁에 관하여 각기 그 이데아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각 가구의 장인은 이 이데아를 보면서 침상들과 식탁들을 만든다. 그러나 이데아 자체를 만들지는 못한다. 다른 한편, 이런 각 장인이 만드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수공예가 또한 있다. 이 자는 이런 것들에 더하여 천지간 또 그 너머의 모든 것도 만들어낸다. 그는 소피스테스이다. 이런 제작자는 어떤 식으로는 성립 가능하고 또 어떤 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거울을 비추든 그림을 그리든 하여, 비록 ~인 바의 것들(ta onta)은 아니라도 ~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phainomena)'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도 침상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진정한 침상이 아닌 침상으로 보이는 것을 제작해내는 것이다. 나아가 침상 제작자 역시, 침상인 바의 바로 그것인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침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인 바의 바로 그것을 만들지 않는 한, 그는 그것인 바의 것(to on)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것(toiouton)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완전히 ~인 것이라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제 신이 만드는 것이라 말할 본래적 침상이 있고, 다음으로 목수의 침상이, 끝으로 화가의 침상이 있다. 이에 따라 신, 목수, 화가가 각각을 관할한다. 신은 필연적으로든 그리 원했기 때문이든 침상인 것 자체를 하나만 만들어냈다. 설령 신이 침상인 것 자체를 두 개 만들었더라도, 그 두 침상들이 가지는 형상으로서 침상인 것 자체가 나타날 것이다. 이에 따라 신은 창조자이다. 이제 목수는 침상의 장인이고 화가는 침상의 모방자이다. 모방자는 본질로부터 세 번째 것의 제작자이다. 비극 작가와 모든 모방자가 이러한 화가와 같다. 화가는 또한 진실이 아니라 보이는 바의 것을 보이는대로 모방한다. 모방자는 실재의 작은 부분, 그것도 영상을 다루며, 여러 장인들을 그려줄지라도 그 기술들에는 전혀 정통하지 못하다. 그러나 잘 모방한 그림으로 어리석은 자들을 속일 수는 있다. 만일 누군가 모든 제작술을 알고 각자의 모든 앎들을 전부 아는 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는 모방자에 속은 어리석은 자인 것이다. 이는 지식과 무지 그리고 모방을 분간하지 못한 탓이다.

598e-603b : 비극의 경우에도 비극 시인은 모든 기술, 모든 덕과 악덕과 인간사 전부, 나아가 신들의 일까지 죄다 알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알지 못한다면 시를 지을 수 없으리란 이유에서이다. 이런 말을 전하는 자들은 화가에 속은 어리석은 자들과 마찬가지이다. 시로 짓는 것은 현상들이지 실재들이 아니며 그것은 실재로부터 세 번째로 놓이는 것이다. 만일 시인이 모방대상과 영상(모방의 결과) 모두 만들 수 있다면, 그는 후자에 천착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둘 다 아는 자라면 전자에 더욱 매진할 것이다. 저 호메로스조차, 여타의 것들은 차치하고라도 가장 중대하고 훌륭한 문제, 전쟁과 정치, 교육에 관하여서 두 번째에 오는 제작자이지 못하고 진실에서 세 번째로 동떨어진 모방자이다. 그가 지휘를 한 전투도 없고 법을 제정해준 나라도 없으며 교육시킨 제자들도 없다. 그가 실제로 앎을 지녔더라면 실제로 행동을 하여 더 많은 업적과 명예를 성취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시인은 모방자이며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모방대상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자들이나 그들의 운율, 리듬, 선법을 두고 그들이 주제에 관하여 잘 논하였다 떠든다. 이런 시들은 이 음악적 색채들이 제거되면 경시될 것들에 불과하다. 모방자는 실재를 전혀 모르며 그 현상에 대해서만 안다. 예를 들어 고삐와 재갈의 경우, 화가는 이를 그리나 그것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모르고 그 쓰임도 알지 못한다. 이는 말 타는 기술을 갖춘 자에 비하면 그 제작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에 각기 이처럼 사용하는 기술과 제작하는 기술, 모방하는 기술이 있다. 모든 것 각각의 덕과 아름다움과 옳음은 그 쓰임새에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사용 경험이 많은 자가 해당 제작물을 평가할 수 있고 이를 제작자에게 알려줄 수 있다. 사용자는 지식을 갖고 제작자는 그에게서 들어 옳은 확신은 가지나 지식을 갖지는 못한다. 그러나 모방자는 지식도 옳은 확신도 없으며 모방대상의 미와 악에 관하여 알 수도,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다. 그저 무지한 자에게 아름다워 보일 것으로 모방할 따름이다. 시인은 모방대상을 모르고, 진지하게 임하는 게 아니라 장난을 노는 것이며, 어떤 운율로 꾸미든 모방자일 따름이다. 그 모방이란 것이 지닌 능력은, 마치 시각에 대해 원근이나 매질, 색채와 음영에 따른 착시와 같은 일을 영혼에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해법은 측정과 계산 그리고 계량이다. 이를 통해 현상이 지배하는 대신 계산된, 측정된, 계량된 것이 지배하게 된다. 이는 영혼에서 논리적 부분의 기능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의해 측정된 똑같은 것을 두고 동시에 상반되게 현상하는 것으로 여겨질 경우가 있다. 이러한 측정과 어긋나는 판단은 영혼의 다른 부분에 속할 것이다. 이 중 논리적 부분이 영혼의 최선의 부분이다. 반면 이에 반대하는 부분은 미천한 부분이다. 모방술은 이렇듯 분별과 멀리 떨어진 부분에, 진실과 멀리 떨어진 모방으로써 교제하며 미천한 것들끼리 동료가 된다. 

603c-608b : 시에 대한 회화의 유사성 이외에 시 자체의 사유(추론)을 고찰해야 한다. 시라는 모방술은 행위들과 이에 대한 평가, 또 이에 따른 마음의 상태들을 모방한다고 한다. 이 경우 인간은 시각에서 똑같은 것을 두고 상반된 믿음들로 내분을 겪듯 행위들에 대해 영혼에서 자신과 내분을 겪게 된다. 그러나 훌륭한 자는 불행을 수월하게 견뎌낼 것이다. 그를 괴로움에 저항하도록 지시하는 것은 이성과 법이고 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감정이다. 법은 불운의 선악이 불분명하고 인세는 중대한 것이 아니며 괴로움은 시급한 판단을 지연시킨다고 가르친다. 이성이 최선이라 입증한 길을 따라 최대한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이 영혼에 습관화되어야 한다. 반대로 고통과 비탄, 그에 대한 기억으로 인도하는 부분은 비이성적이고 나태와 비겁에 친근한 것이다. 후자에 따라 분노가 일어나므로 쉽사리 분노하는 성격은 여러 머리를 지닌 욕구에 따르는 것이기에 다채로운 모방을 수용한다. 반면 분별을 갖춘 차분한 성격은 동일성을 유지하며, 이를 모방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이 부분과 먼 모방자로서 시인은 다채로운 성격을 모방한다. 시인은 결국 진리에 비해 하찮은 것들을 만들고, 하찮은 영혼의 부분에 어울리며, 그와 닮아간다는 점에서 화가와 같다. 시인이 이런 식으로 최악의 부분을 강화하고 이성적 부분을 파괴시키며 개인의 영혼 안에 악한 정체를 발생시키기에 그는 추방되어야 한다. 또한 비극에서의 비탄과 장광설을 사람들이 동정하고 몰입하며, 이 상태를 유지시키는 자를 훌륭한 시인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비탄에 빠지는 것보다 의연하게 대처하는 쪽이 더욱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이와 반대되는 일을 내세우는 시인이란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관객은 스스로 지나치게 울거나 웃는 일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시의 상연을 보며 그리하는 것은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이 과정에서 욕구를 키우고 이성을 약화시키게 된다. 이 외의 모든 욕구들에 대해서도 시를 통한 모방은 같은 작용을 한다. 호메로스의 시 중에서도 훌륭한 자들에 대한 찬양만을 수용하고, 그 이외의 쾌락을 주는 시가들은 거부해야 한다. 시와 철학 사이의 오랜 대립이 있어 왔으나, 앞서의 비판을 극복하는 시라면 수용될 수도 있다. 시가 쾌락만이 아니라 폴리스의 정체와 인간 생활을 위해 이롭다는 것을 밝힌다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러한 변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시는 추방되어야 하며, 명예든 재물이든 관직이든, 아니면 적어도 시에 의해서는 덕에 무관심해져서는 안 된다. 

608c-613e : 이제 덕에 대한 최대의 보상과 포상이 언급되어야 한다. 모든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생애만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에 걸쳐 불사하는 영혼과 관련하여 이것이 고찰된다. 파멸과 몰락을 가져오는 것은 악이나 보전과 이익을 주는 것은 선이다. 몸에는 병이, 청동이나 쇳덩이에는 녹이, 그렇듯 모든 것에는 각기 악과 질병이 있다. 그런 악과 질병은 그것이 붙은 것 전체를 해체하여 파멸시킨다. 선도, 악도 선도 아닌 것도 이러한 파멸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이제 어떤 것에 고유한 악이 그 어떤 것을 악한 상태에 처하게는 만드나 파멸시키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의 파멸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영혼의 경우 여러 악덕들이 있으나, 그것들로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음에 이르는 경우는 없다. 또한, 육신의 경우 곡식의 악화가 육신의 파멸을 직접 초래하는 게 아니라 육신의 악화를 초래하여 이 육신의 악화가 육신의 파멸을 부르듯, 육신의 악화가 영혼의 악화를 야기하지 않는 한 육신의 악화가 영혼의 파멸을 초래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육신을 아무리 해체시켜 파괴한들 영혼이 그 때문에 파괴되는 일은 없다. 부정의가 살인자를 만들고 그가 처벌을 받아 사형당하더라도, 그것은 악덕이 영혼을 파멸시키는 사례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악덕을 갖춘 자는 활발하게 만드는 반면 다른 자들을 죽이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영혼은 언제까지고 영혼인 채로의 것이다. 영원히 영혼인 바의 것이라면 그것은 불사의 것이다. 그것이 불사이기에 생성도 소멸도 영혼에는 없다. 또한 그것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것 역시 아닐 것이다. 영혼이 육체에 의해 오염된 현실이 아닌 순수한 상태의 영혼을 고려해야 한다. 인세의 영혼은 해신 글라우코스처럼, 풍랑에 부서지고 해초와 따개비들로 뒤덮여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이 여러 모습으로 보이지만, 본래는 단일한 것이다. 그 영혼은 신적이며 불멸하고 영원한 것과 동류이다. 그것이 무엇을 알게 되고 또 어떤 교제를 갈구하는지 알기 위해 영혼의 애지(철학)를 고찰해야 한다. 정의의 보상과 무관하게, 특권적 자유를 주는 기게스의 반지나 하데스의 두건을 가지든 말든 정의가 그 자체로 영혼을 위한 최선의 것임은 이미 밝혀졌다. 이제 이 정의와 여타의 덕들에 대해 인간들에게서 그리고 신들에게서 받는 보상이 논의된다. 앞서 부정의한 자가 정의롭게 여겨지기도 한다는(dokein) 점이 양해되었으나, 실상은 정의로운 자가 정의롭다는 평판(doxa) 또한 얻게 된다. 실제로 정의롭다는 것이 그로 인해 생겨나는 좋은 것들도 제공하며, 참된 정의를 지닌 자를 기만하지도 않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를 신들이 모를 리도 없다. 따라서 신들이 정의로운 자를 사랑하며, 그에게 최선의 것들을 선사한다. 생전이든 사후이든 그에게 생기는 불운마저 결국은 좋은 일로 귀결될 것이다. 덕을 실천하여 신을 닮으려는 자가 신들에게서 홀대받을 리 없기 때문이다. 반면 부정의한 자에게는 사정이 이와 반대일 것이다. 또한 인간들에게서는 정의로운 자가 결국 생애의 끝에 이르러 완주를 해낸 선수와 같이 좋은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다. 반면 부정의한 자들은 그 정체가 탄로나 조롱당하며 추방되거나 고문을 당할 것이다. 

614a-616a : 이런 현세의 보상과 처벌은 사후의 보상에 비하면 하잘 것 없다. 이 사후의 이야기는 에르라는 용감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그는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되살아나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영혼들과 함께 신비한 장소에 이르렀다. 그 곳에는 대지와 천상 양쪽으로 한쌍씩 마주보는 구멍들이 나 있었다. 그 구멍들 사이에서 심판자들이 심판을 한다. 심판을 통해 정의로운 자는 하늘의 오른쪽 구멍으로, 부정의한 자는 왼쪽 구멍으로 보냈다. 남은 두 구멍 중 땅 쪽에서는 먼지를 뒤집어쓴 영혼이 올라왔고, 하늘 쪽에서는 순수한 영혼이 내려왔다. 오랜 여정을 마친 듯한 그 영혼들은 초원에 야영을 하며 서로 다른 쪽의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지하에서 온 자들은 비탄을, 천상에서 온 자들은 찬탄을 나누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의 생애를 100년으로 잡아 선행에도 악행에도 그 열 배의 값을 치르거나 받는다 한다. 그리하여 이 여정은 1000년이 걸린다. 그런데 대참주 아르디아이오스는 겪을 일들을 오르는 입구에서 다른 참주들과 큰 악행을 저지른 사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오르려 해도 그 입구가 대노하고 그 곁의 불과 같은 자들이 끌어내려 내던지고 고문하여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그는 타르타로스로 추락할 것이었다.

616b-620d : 여정을 마치고 야영하던 그들은 여드렛날에 초원을 떠나 이른 곳에서 그들은 천구와 대지를 관통한 기둥 같은 빛줄기를 보았다. 하루를 더 나아가 빛에 이르러 보니 그 끈의 끝들이 하늘에서 뻗쳐 전체 회전을 매어 주고 있었다. 그 끝들에서 아낭케 여신의 방추가 뻗쳐 연결되어 모든 회전을 운동시켰다. 전체 돌림추는 여덟 개로 서로 끼워 맞춰져 있었다. 전체는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나 그 안의 일곱 원들은 반대로 회전하며 아낭케의 무릎에 머무르고 있었다. 각 원마다 세이렌들이 앉아 하나의 음을 내어 전체 소리가 화음을 이루었다. 이를 빙 둘러 같은 거리에서 아낭케의 딸들인 운명의 여신들, 즉 과거의 라케시스와 현재의 클로토, 미래의 아트로포스가 앉아 화음에 맞춰 노래하고 있었다. 클로토는 방추 바깥 둘레를 오른손으로 돌리다 멈추기도 하고, 아트로포스는 왼손으로 안쪽 둘레를 그리하였으며, 라케시스는 두 방향 것들을 각각의 손으로 교대로 그리하였다. 영혼들은 먼저 라케시스에게로 나아가야 했다. 대변자가 라케시스의 무릎에서 제비와 삶의 본을 들어 말하길, 필멸자들의 새 주기의 시작이라 하였다. 또한 그들은 제비를 통해 필연적으로 동반할 삶을 택하게 될 것인 바, 첫 번째 제비를 뽑은 자가 처음으로 선택하게 된다고 하였다. 덕은 주인이 없어 귀히 여기는 자 더 갖고 경시하는 자 덜 갖게 되며 그 책임은 선택한 자의 것이지 신의 탓이 아니라고도 하였다. 제비를 뽑은 자들 앞에 삶의 본들이 놓였는데 영혼의 수보다 본들의 수가 더 많았다. 본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의 삶도 있었기 때문이다. 참주의 삶도 거지의 삶도 남성의 삶도 여성의 삶도 있으며 외모, 건강, 명성의 여러 갈래들도 있었다. 혼의 성향은 없었으니 삶에 따라 그 성향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선택을 위해 유익한 삶을 분간해내고 최선의 것을 택할 수 있도록 하는 학문이 있다면 이를 가장 중히 여겨야만 한다. 여러 조건들을 따져 혼을 더 정의롭게 만드는 삶은 선이며 더욱 부정의하게 만드는 삶은 악이라는 고려와 함께 더 나은 삶과 더 못한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학문이 중요하다. 대변자는 덧붙여, '마지막 순서의 사람에게도 그가 이성적으로 선택하며 진지하게 산다면 만족할 만한 삶이 있다'라고 하였다. 첫 번째 영혼은 최고의 참주 신분을 선택하였으나 그 안에 자식을 잡아먹는 운명이 섞여 있음을 몰랐고, 이를 알고서는 제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운과 신들을 탓하였다. 하늘에서 온 영혼, 훌륭한 정체에서 철학을 추구하였던 자들은 고된 일들로 단련된 적이 없어 이런 실수를 한다. 반면 땅에서 올라온 영혼은 스스로 고생하고 타인의 고생도 목도하여 신중하다. 이리하여 대다수의 영혼들에 좋고 나쁨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인세에 염증을 느낀 영혼들은 짐승의 삶을 택하기도 하였으나, 오디세우스는 사인의 삶을 찾아 헤매다 결국 찾아냈고, 그가 첫 번째 순서였더라도 이 삶을 택했으리라 했다고 한다. 

620e- : 모든 영혼이 삶을 선택한 뒤 다시 라케시스에게로 나아갔다. 라케시스는 각자 선택한 다이몬을 그 삶의 수호자로 동반시켰다. 각 다이몬은 각자의 영혼을 클로토에게 인도하여 운명을 확인받았다. 그리고 다시 아트로포스에게 가서 되돌리 수 없는 운명의 실로 인도하였다. 이로부터 아낭케의 옥좌 아래로 나아가 레테(망각)의 평야로 이끌었다. 영혼들은 아멜레테스(무관심) 강에서 야영을 하였고, 그 물을 마시고서 모든 것을 잊게 되었다. 밤중에 천둥과 지진이 일고 모두가 출생을 향해 흩어져 옮겨졌다. 이를 믿는다면 구원받을 것이며 망각의 강을 잘 헤쳐 나아가 영혼을 더럽히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영혼이 불사이며 모든 선악을 견딜 수 있다 믿으며 이 모든 논의를 납득한다면, 자신과도 신들과도 친구가 되기 위해 윗길을 향해 분별과 정의를 추구하며, 잘 살게 될 것이다.

-蟲-

571a-576b : 참주정과 참주의 발생과정에 이어 그가 어떤 자이고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지 검토되어야 한다. 그에 앞서 욕구들에 대한 이전의 구별을 좀 더 진행해야 한다. 필수적이지 않은 쾌락과 욕구 중 일부는 비정상적인 것들로서, 일부 사람들에게서는 법률과 이성을 동반한 더 나은 욕구들에 억제되어 약화되거나 제거되는 반면, 몇몇 사람들에게서는 더 강하게 남는다. 이런 욕구는 꿈 속의 욕구들로, 근친과 수간과 신에 대한 간음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살해와 온갖 무지하고 파렴치한 짓들을 저지르려 한다. 건전하고 절제 있는 자는 영혼의 이성적 부분을 훌륭한 논리와 고찰로 대접하는 반면 욕구적 부분에는 과부족이 없이 하여 잠들도록 한다. 이로써 최선의 부분이 방해받지 않고 통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같은 방식으로 격정적 부분 또한 진정시킨다. 이렇듯 욕구와 격정을 진정시키고 지혜가 깃드는 부분을 움직여, 꿈속의 환영들 또한 그 비정상성이 최소화되도록 한다. 이렇듯 흉포하고 무법한 욕구가 꿈에서 드러난다. 민주정을 닮은 자는 과두정을 닮은 수전노 아비에게서 양육되는 동시에 앞서 언급된 욕구로 가득 찬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된다. 그는 양쪽 기질의 중간에 자리하여 부자유스러운 삶도 무법한 삶도 아닌 민주적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자들이 자라나 그들에게서 양육된 젊은이들은 소위 자유라 하는 위법에 인도된다. 민주정을 닮은 부모와 친지들은 이 젊은이의 중간적 욕구를 지원하는 반면, 타인들은 다른 욕구들을 자극한다. 이 젊은이를 제압하기 위해 저 참주를 새우는 마술사들은 날개 달린 큰 수벌인 욕정을 그 젊은이의 다른 욕구들의 지도자로 심어 주려 한다. 이 욕정 주위로 다른 욕구들이 맴돌며 그 욕정을 키우고, 욕정은 이러한 호위 속에 미쳐 날뛴다. 이 무리가 수치를 아는 믿음과 욕구를 찾아 죽이고 쫓아낸다. 이렇게 절제를 숙청하고 젊은이는 광기로 가득 찬다. 술에 취한 자나 정신이 나가 광기에 붙들린 자 또한 참주적 생각을 한다. 참주적 인간은 천성이나 생활방식에 의해 주정뱅이이자 욕정과 충동에 휘둘리는 자이다. 이렇게 에로스가 참주로 자리한 자는 주색에 빠져 방탕해지고 가산을 탕진해 빚을 지며 그마저 다 잃고 나면 사기를 치고 강도질을 하게 된다. 그는 부모의 재산을 가져다 쓰다 제한을 받으면 부모를 속이고 부모에게서 절도를 행하며 빼앗고 폭력까지 쓰게 된다. 에로스가 참주가 된 이후에는 꿈 속에서의 욕구들이 깨어 난 이후에도 활개를 치며, 이 사람 안의 유일한 지배자로서 에로스는 그 사람을 무법자이자 무정부상태의 인간으로 만든다. 에로스는 그를 온갖 대담한 악행으로 이끌어 소란스러운 욕구들을 지배할 것이다(전쟁을 일으키는 참주와 같이.). 이런 자는 참주를 경호하거나 용병일을 할 것이나, 평화시에는 범죄자가 될 것이다. 이런 자들이 폴리스의 다수가 되어 그들이 탄생시키는 참주는 그 자신의 혼에 최강의 참주를 지닐 것이다. 이런 참주는 모국, 조국을 예속시키고 노예 삼을 것이다. 이런 자는 참주가 되기 이전까지 자신에게 아첨하는 자들만을 사귀고, 필요한 자들에게 필요한 때에는 비굴할 것이나 필요가 채워지면 토사구팽할 것이다. 그러하여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주인노릇을 하거나 역으로 노예노릇만 하며 영원히 참된 우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안팎으로의 분열과 갈등은 정의와 가장 반대의 것이다. 이런 자는 꿈에서나 가능할 자가 현실에 생겨난 것이며, 참주정 내에서 점점 더 그 성향이 강화될 것이다. 따라서 가장 악한 자가 가장 비참한 자로 드러날 것이다. 또한 가장 오래도록 참주 노릇을 하는 자가 가장 오래 비참할 것이다.

576c-580c : 각기 다섯 종류의 인간이 다섯 종류의 정체에 상응하여 유사하다. 또한 덕에 관련하여 폴리스와 폴리스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이제 참주정과 최선자정의 관계는 정반대의 관계이다. 참주정은 가장 비참하며 최선자정은 가장 행복하다. 이제 참주정적인 인간을 목격한 듯이 가정하여 그 처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참주정은 전체와 훌륭한 자들이 노예의 상태에 처한다. 마찬가지로 참주정적 인간은 전체가 굴종과 부자유로 가득하며 가장 훌륭한 부분들이 노예가 되고 최악이자 가장 광기어린 부분이 주인이 된다. 그 영혼 전체가 노예의 상태이다. 이러한 영혼은 원하는 바를 이룰 가능성이 가장 적다. 이러한 나라는 필연적으로 가난하며 또한 끊임없이 불만족에 시달린다. 이런 폴리스와 이런 인간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다. 또한 비탄과 신음, 통곡과 고통이 그 어느 폴리스보다도 더욱 크다. 그러나 단지 이런 영혼일 뿐만 아니라 사인에 머무르지 못하고 실제로 참주가 된 경우의 인간이 가장 비참하다. 사인이든 참주든 참주정적 영혼의 소유자는 노예뜰을 거느린 부자와 유사하다. 폴리스가 시민 개개인을 지원할 경우에는 부자가 제 노예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처자와 재산에 더해 그 가노들과 함께 고립된다면, 그는 커다란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그런 자는 노예들 중 일부에게 아첨을 하고, 또 일부를 해방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이런 자 주위로, 누구의 지배나 간섭도 허용치 않고 그렇게 하려는 자를 살해하려 드는 이웃들이 자리잡는다면, 더욱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참주는 바로 이러한 처지의 부자와 유사하다. 사인에 머무르지 못하고 참주가 되어 버린 참주정적 인간은, 병자가 제 육신과 싸우듯 내내 온갖 것들과 싸우게 된다. 그는 아첨과 굴종에 묶인 노예이며, 제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도 없다. 그는 시기와 질투, 불신에 더해 부정의와 고독, 불경 등 온갖 악들을 수용하고 키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검토의 결과, 가장 정의로운 자가 가장 행복하며, 이런 자는 최선자정(왕정)적인 인간이며 제 자신을 군왕으로서 다스리는 자이나, 가장 부정의한 자는 가장 비참하며, 이런 자는 가장 참주정적인 인간으로서 제 자신도 폴리스도 참주정의 방식으로 다스린다. 

580d-583a : 폴리스가 세 부류로 나뉘듯, 각 영혼도 세 부분으로 나뉜다. 영혼의 세 부분에 따라 즐거움도 셋으로 나뉜다. 하나는 배움을 가능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격정을 일으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다양하나 그 중 가장 큰 것은 욕구적인 그러한 부분이다. 식욕, 색욕 따위와 이에 관련한 욕구들이 강렬하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되며, 이는 재물욕이 속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재물이 그 욕구들의 충족에 소용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부분은 재물욕의 부분 또는 이익추구의 부분이라 불린다. 반면 격정적 부분은 승리와 명성을 지향한다. 이 부분은 승리욕과 명예욕의 부분이라 불린다. 남은 부분은 교육욕과 애지의 부분이다. 이 부분들 중 어느 부분이 영혼 전체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첫 번째 세 부류가 애지의 부류, 승리욕의 부류, 이익추구의 부류로 나뉜다. 그 각각에 속하는 쾌락도 각기 고유하다. 세 부류는 각기 지혜, 명성, 이익을 저마다 최선의 것으로 삼고 여타의 것들을 경시한다. 이런 종류의 쾌락들과 그러한 삶들은 훌륭함이나 수치, 선과 악이 아닌 쾌락과 고통을 기준으로 서로 경쟁한다. 세 주장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경험과 분별과 논리를 기준으로 판정되어야 한다. 경험으로는 애지적 부류가 가장 앞선다. 여타의 부류들은 각자가 추구하는 욕구에 머물러 그 이상의 것을 전혀 추구하지 않지만, 애지적 부류는 여타의 쾌락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면 명예와 관련하여서는 세 부류 모두 저마다 추구하는 바를 이루면 따라 오기에 그 경험에서 서로 다를 바 없다. 반면 지혜와 존재에 대한 관조로부터 얻는 쾌락의 경험은 애지의 부류만 취할 수 있다. 또한 분별도 애지적 부류만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셋 사이의 경쟁에 대한 판정은 논리를 기준으로 하는 바, 그것은 애지적 부류의 수단이다. 판정의 기준은 부나 이익도 아니고 명예와 승리와 용기 또한 아니다. 이리하여 영혼의 애지적 부분이 추구하는 쾌락이 최고의 쾌락이며 그러한 부분이 지배하는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이다. 다음으로 명예욕의 쾌락이 이익추구의 쾌락보다 고유하게 추구하는 바에 더욱 가깝기에 명예욕의 부분이 두 번째이다. 이익추구의 부분이 가장 마지막이다. 이리하여 정의로운 자는 연이어 두 차례 부정의한 자에게 승리하였다.

583b-588a : 분별을 갖춘 자의 쾌락 이외에는 진실하지도 순수하지도 못한 환영과 같은 쾌락들이다. 고통은 쾌락과 반대이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중간 상태가 있다. 이 상태는 영혼의 평정(hesychia)이다. 고통에 빠진 자는 기쁨이 아닌 평온을 최상의 쾌락으로 찬양한다. 반면 쾌락에서 벗어난 경우 평온은 괴롭다. 평온은 쾌락도 되고 고통도 되나 쾌락과 고통의 중간 것이다. 사실상 평온은 고통에 비교하여 쾌락으로 '보이고' 쾌락에 비교하여 고통으로 '보이는 것'뿐이다. 이러한 이행은 영혼에서의 변화(운동, kinesis)이다. 그리고 이 과정의 현상들은 기만적이다. 즉 이런 보이는 것들, 쾌락의 정지 혹은 고통의 정지로서 고통과 쾌락은 진정한 것들이 아니다. 향기를 맡는 것과 같은 쾌락은 이와 다르다. 그러나 쾌락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육체를 통해 영혼에 이르는 쾌락들은 고통의 정지이다. 또한 미래의 쾌락과 고통에 앞서는 기대로 생겨나는 예비적 쾌락과 예비적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진실을 모르는 채 상대적으로 위치를 가늠하는 것과 같다. 아래에서 중간으로 옮겨진 자가 자신이 위에 있다 믿듯, 고통에서 해방된 자는 자신이 쾌락을 향유한다 믿고 또 쾌락을 중단당한 자는 자신이 고통에 처했다 믿는다. 허기와 갈증 등이 이러한 것이다. 그것은 육체에 관련한 상태의 공허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에 관련한 상태의 공허는 무지와 무분별이다. 그런데 진정한 충족은 식음료가 아니라 순수한 존재에 더 많이 관여하는 참된 믿음과 지식, 지성, 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같은 것에 관여하는 것, 진리에 더 관여하는 것이 존재에 더 많이 관여하는 것이다. 일반화하면 육체에 대한 보살핌보다 영혼에 대한 보살핌이 더욱 존재에 많이 관여한다. 또한 영혼 자체도 육체 자체보다 존재에 더 많이 관여한다. 즉 더 존재에 많이 관여하는 것을 더 존재에 많이 관여하는 것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이 진정한 충족이다. 이것이 더 참된 쾌락이다. 분별과 덕에 대해 경험 없는 자들은 위아래로 옮겨지며 일생을 헤매지만 중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들은 갈수록 지상의 주색에 빠져들고 탐욕과 불만족으로 인해 서로 죽고 죽이기까지 한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채우려 하는 어리석은 짓거리이다. 이런 자들은 쾌락의 영상과 환영을 곁하여 살며 이것들에 물들어 버린다. 격정의 경우에도 성찰과 지성이 결여된 채 헛된 분노와 헛된 명예를 추구할 따름이다. 이익 추구의 욕구들과 명예욕의 욕구들은 지식과 논리에 따라 이와 함께 쾌락을 추구할 떄에 쾌락을 취할 수 있다. 따라서 영혼 전체가 애지의 부분에 순종할 때 각 부분이 추구하는 바를 성취하고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반면 애지 이외의 부분이 지배할 때에는 고유한 쾌락도 찾을 수 없고 여타의 부분들도 어긋난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이제 애지(철학)로부터 가장 먼, 법과 질서에서 가장 먼 것들이, 즉 애욕과 참주적 욕구가 이런 어긋남을 유발하고, 왕도적이고 절도 있는 욕구들은 이와 반대이다. 따라서 참주가 쾌락에서 가장 멀며, 쾌락에 가장 가까운 자는 군왕이다. 세 종류의 쾌락 중 진정한 쾌락은 하나이며 다른 둘은 서출이다. 참주는 과두정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여 민주정적 인간 다음으로 세 번째 자리에 온다. 따라서 참주가 추구하는 쾌락 또한 과두정적인 것으로부터 세 번째에 오는 것이다. 과두정적 인간은 다시 최선자정적이며 왕도정적 인간으로부터 세 번째에 온다. 따라서 참주는 군주의 참된 쾌락으로부터 셋의 세 배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인간도 쾌락도 셋의 세 배만큼 떨어져 있으니 이를 합한 행복의 거리는 참주와 군주 사이에 729배이다. 훌륭하고 정의로운 자가 부정의하고 악한 자보다 쾌락에서 이 만큼 우세하다면, 용기와 아름다움 그리고 여타의 덕에의해서도 크게 우세할 것이다.

588b- : 본래의 논의로 돌아가면, 엄밀하게 부정의한 자이지만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자에게는 부정의를 행함이 이롭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의 영혼을 형상화하면 여러 머리가 달린 형상에 속하는 짐승이다. 그 머리들 중에는 사나운 것도 온순한 것도 있으며 그 머리에서 이 머리들이 모두 자라날 수도 바뀔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사자의 형상을, 그 다음으로는 인간의 형상을 세운다. 이 세 형상들을 하나로 합쳐 함께 자라도록 하고, 그 외피는 한 명의 인간으로 보이도록 한다. 부정의가 이익이며 정의는 이롭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자는 제 안의 여러 머리를 한 짐승과 사자는 키우고 제 안의 인간은 굶주리게 하여 약화시키고는, 그 인간이 저 두 짐승 중 어느 쪽으로든 이끌리게 내버려 두고, 그것들이 서로 싸우며 잡아 먹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정의가 이롭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 안의 인간이 그 인간 전체를 장악하여 여러 머리를 가진 것에서는 온순한 머리들을 키우고 사나운 것들은 막으며, 사자를 조력자로 길들여 공동으로 전체를 돌보아 서로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합하도록 만든다. 부정의가 이롭다 주장하는 자는 어느 모로 보나 무지로 인해 거짓을 고하는 자이다. 그에게는 미추에 관하여 야수들을 인간적인, 나아가 신적인 것에 종속시킴이 아름답고 온순한 것을 사나운 것에 굴종시킴은 추하다고 설득해야 한다. 나아가 아무리 대단한 황금을 얻더라도 자신의 최선의 부분을 최악의 부분에 종속시키고서는 비참할 따름이다. 이런 일은 여러 머리를 가진 짐승을 지나치게 해방시킨 탓에 일어난다. 격정적 부분과 관련하여서는 너무 풀어주면 고집스럽고 고약한 성미라 비난받고, 너무 옥죄면 비굴하고 아첨을 해댄다고 비난을 받게 된다. 영혼의 최선의 부분과 관련하여 자질이 부족한 자는 저 부분을 주인으로 삼은 최선의 인간에게 지배받아야 한다. 이는 피지배자의 이익과 나아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자체 내에서 최선의 것이 지배함이 가장 좋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 외부의 최선을 따름이 차선이다. 교육 역시 소년들의 영혼 속에 아직 자라지 못한 최선의 정체를 대신 세워주기 전까지는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지 않다가, 그 정체가 영혼 안에 수립되면 자유롭게 하는 것이 좋다. 이제 부정의와 무절제는 결코 이로울 수 없으며, 차라리 처벌을 받아 교화되는 편이 처벌 없이 악함을 더해 가는 것보다 낫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제 영혼을 절제와 분별이 갖추어진 정의, 건강을 갖춘 아름다움이 함께하는 영혼의 상태를 실현해줄 학문에 매진할 것이다. 이에 맞추어 욕구를 절제하고 재물 또한 이에 조화롭게 소유할 것이며 자신을 더 낫게 할 명예에만 관여할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어렵더라도 이론상의 폴리스에서 이는 명백하다. 지상에는 이러한 폴리스가 없을지라도 하늘에는 그러한 폴리스가 본으로서 자리한다.

-蟲-

543a-545c : 처자의 공유, 공동교육과 공동직무, 그리고 철학과 전술의 전문가로서 통치자들의 선발이 논의되었다. 또한 공동주거와 공동소유, 수호자들에 대한 생계지원과 수호의 대상으로서 전체 시민이 논의되었다. 이제 다시 본래의 논의 맥락을 확인해야 한다. 본래의 맥락은 이러한 폴리스가 훌륭한 것이고 또한 이를 닮은 인간이 훌륭한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이를 제외한 모든 폴리스들은 잘못된 것이며, 그 잘못을 살펴볼 만한 것들로 네 종류의 정체들이 있고 또한 이를 닮은 네 종류의 인간이 있다. 이를 통해 최선의 인간과 최악의 인간을 모두 검토하여 전자가 가장 행복하고 후자는 가장 비참한지 혹은 그 역인지 고찰하는 것이 목표였다. 잘못된 네 가지 정체를 논하려는 대목에서 폴레마르코스와 아데이만토스가 논의를 중단시켰다. 이제 다시 그 잘못된 네 가지 정체들로 돌아간다. 첫째는 크레테 및 라코니케(스파르타) 식 정체이고 그에 버금가는 과두정이 두 번째 것으로서 여러 악들로 만연해 있다. 이와 불화하고 이 다음으로 출현하는 것은 민주정이다. 네 번째로 이 모든 것들 중 빼어난 것으로 말기적 질병으로서 참주정이 있다. 세습군주정과 매관매직의 왕정은 이들 사이에 놓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기질도 그들이 살고 있는 폴리스에 따라 다섯이다. 최서자정을 닮은 자가 훌륭하고 정의로운 자이다. 다음으로 라코니케 식 정체에 따라 승리와 명예에 집착하는 자가, 다음으로 과두정적 인간과 민주정적 인간 그리고 참주정적 인간 순으로 언급된다. 마지막 가장 부정의한 자에 이르러 이를 가장 정의로운 자와 마주 세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순수한 정의와 순수한 불의가 이를 지닌 자의 행, 불행과 관련하여 어떤 관계인지 완벽하게 고찰하고, 이로써 트라시마코스를 따라 불의를 추구하거나 아니면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라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이다.최선자 정체와 최선의 인간을 고찰한 순서대로, 이번에도 명예욕의 정체(政體)를 그러한 인간보다 먼저 고찰해야 한다. 다음으로 과두정과 과두정적인 인간을, 세 번째로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을, 넷째로 참주정과 참주정적 영혼을 고찰할 것이다.

545d-548c : 관직을 장악한 집단 자체에서 정체의 전환이 비롯되며 이는 집단에 내분이 생겼을 때이다. 반면 집단이 한마음일 때에는 아무리 작더라도 전복될 수 없다. 따라서 최선자정의 전복, 그리고 보조자들과 통치자들 상호 또 자체 내 분쟁의 방식이 검토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 방식을 신화적으로 묘사한다. 생성과 소멸의 순환 주기에는 수학적 질서가 있고, 이를 어겨 출산할 경우 그 태생이 저열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기는 최선자정의 통치자들조차 알 수 없고 신만이 알기에 실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세대를 거쳐 거듭되면서 시가와 체육이 망각되고, 금과 은, 청동과 철의 각 종족을 구별하는 안목도 사라짐으로써 이 종족들이 뒤섞이게 된다. 이로부터 내분이 유래한다. 이제 통치자들 중 철과 청동의 종족은 재물의 소유를 추구하고 황금 및 은의 종족은 덕과 기존의 최선자정으로 이끌며 서로 반목하다 중간에서 합의한다. 이제 토지와 가옥이 사유화되고, 통치자들을 부양하던 동료시민들을 노예로 만든다. 이것이 최선자정과 과두정의 중간단계로서 명예정이다. 이 정체는 양 정체를 흉내내면서 또한 그 자체의 특성도 지닐 것이다. 여전히 통치자를 존중하고 수호자 집단을 수호 이외의 업무로부터 멀리하게 하며 공동식사를 유지하고 체육과 전쟁을 주의하겠지만, 더 이상 지혜로운 자들을 관직에 앉히지 않고 전술과 전략에 치중할 것이다. 반면 과두정과 유사하게 재물욕을 드러낼 것이며 자신의 사람들에게 재물을 낭비할 것이다. 또한 재물을 공유하지 않으므로 남의 것을 유용하고 시가를 멀리하고 체육을 우선시하기에 법을 피해 쾌락을 추구한다. 이는 선악이 혼합된 정체이다. 여기에서는 격정이 우세하여 승리와 명예에 대한 집착만이 가장 두드러진다.

548d-550b : 이 정체에 일치하는 인간은 경쟁을 추구하며 고집스럽다. 시가와 이야기를 좋아하나 덜 시가적이고 변론에 무능할 것이다. 노예에게는 가혹하고 자유민에게는 상냥하며 통치자들에게는 순종적이다. 통치를 추구하며 명예를 사랑하고, 통치의 자격을 전쟁의 공적에서 찾는다. 그는 시가와 혼화된 이성을 갖춘 최선자정의 수호자에는 부족한 자로서 재물을 거부하는 성향도 젊어서부터 늙어갈수록 약화되고 덕에서 멀어질 것이다. 이런 자가 명예정적인 청년이다. 그런 자는 세속의 일을 멀리하는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생겨날 것이다. 부인은 그가 권력을 쥐지도, 다른 시민들보다 가족을 더 아끼지도 않는 그러한 태연함에 대해 비난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남에게 간섭하지 않는 이러한 아버지는 무시당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존경을 받는다. 이 양쪽 사람들에게서 그 자식은 영향을 받는다. 아버지는 자식의 영혼에서 이성적 부분을 키우지만, 다른 자들은 욕망과 격정의 부분들을 키운다. 양 극단에 이끌려 중간으로 오게 된 영혼의 주도권은 격정적 부분이 쥐게 된다.

550c-552e : 다음으로 과두정은 평가재산에 따라 부자가 통치하고 빈자는 관여하지 못하는 정체이다. 명예정에서 과두정으로의 이행은 각자의 사유재산으로부터 발생된다. 자신의 재산이 생기므로 그것을 소비할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법률을 왜곡시키게 된다. 이런 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무리를 이루고, 그럴수록 부가 추앙받고 덕은 경시된다. 이 과정에서 명예를 추구하던 자들은 결국 재산을 추구하게 되고, 부자는 찬양받고 관직에 올려지지만 빈자는 멸시당한다. 정치에는 일정 수준의 재산을 갖춘 자만이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정치에 참여하는 자들은 무력이나 겁박으로 이 체제를 유지한다. 이 정체의 결함은 첫째, 통치에 통치술이 아닌 재산만을 갖춘 자가 뛰어들어 정체를 망쳐 버린다. 다음으로 이 폴리스는 단일한 것이 아닌 둘로 분열된 것이 된다. 즉 부자와 빈자로 나뉜다. 이 양편이 서로에게 계략과 음모를 꾀하고 적대할 것이다. 세 번째로 통치집단인 부자들이 적대하고 있는 빈자들을 무장시켜 전쟁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며, 부에 집착하므로 전쟁 비용을 지불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므로 외부와 전쟁을 치를 수도 없다. 네 번째로(이는 첫 번째와 일맥상통한다.) 직무와 기술이 불일치하고 혼란스럽게 된다. 농사꾼이 돈을 벌고 또한 정치에 참여하며 전쟁을 한다. 즉 제 소관이 아닌 서로 다른 직무에 간섭한다. 나아가 한 폴리스 내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제 모든 것을 팔아 넘기고, 또 다른 자는 이것을 전부 사들이며, 그렇게 다 팔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가 여전히 그 폴리스 내에서 장인도 기병도 상인도 아닌 채로 빈자라 불리며 거주하는 일이 허용된다. 따라서 빈부격차가 심화된다. 이렇게 빈자로 전락한 자가 이전에 부자였을 때에도 그는 그저 낭비벽에 심한 자일 뿐이며 통치자로 보이기만 하지 실제로 통치자는 아니었다. 그는 마치 벌집의 수벌처럼 분란의 씨앗이 된다. 날개를 단 모든 수벌은 침이 없으나 날개 없는 수벌들 중 일부는 침을 지니며, 그 침을 지닌 수벌은 노년에 악행을 저지른다. 침 없는 거지들과 침 가진 범죄자들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침을 지닌 수벌들을 과두정의 통치자들은 힘으로 억누른다. 이는 교육이 부재하고 통치자 잘못되어 생겨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결함들이 있을 것이다. 

553a-555a : 과두정을 닮은 인간은 명예정을 닮은 자의 자식으로서 태어난다. 명예를 좇던 아버지가 과두정으로 이행된 폴리스와 부딪쳐 침몰하고 모든 재산과 온 인생을 상실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 자식은 겁에 질린다. 그는 명예욕과 격정을 영혼에서 몰아내고, 가난으로 인해 수전노처럼 굴며 재산을 모아댄다. 그는 욕구적 부분을 자신의 황제로 삼는다. 그 아래 이성적 부분과 격정적 부분이 부복하고 노예노릇을 하게 된다. 이런 자는 재물욕에 빠져 인색하며 부지런하다. 이런 자는 교육에 개의치 않으며 따라서 그의 안에서는 거지와 같은 침 없는 수벌이란 욕망과 범죄자 같은 침 가진 수벌이란 욕망이 상존한다. 이것은 단지 강제와 공포, 제 재산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통해 억제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특권적 자유(exousia)가 주어지거나 남의 재산을 유용하게 될 때에는 이 거지와 범죄자 같은 수벌들이 들끓는다. 이런 자의 영혼 내에서는 욕망들이 서로 분쟁한다. 더 나은(안전한?) 욕망들이 통상 이기므로 남들보다 점잖아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는 통합된 영혼을 못 지니는 덕 없는 자이고 경쟁에 헌신할 줄도 모르며 다만 인색한 수전노에 불과하다.

555b-558c : 과두정은 그것이 내세우는 좋은 것으로서 최대한의 부에 관련한 불만족으로 인해 민주정으로 이행된다. 통치자들은 젊은이들의 낭비를 이용하여 제 부를 키우고 시민들의 무절제를 부추긴다. 이 과정에서 침을 지닌 수벌 같은 자들이 무장을 갖춘 채로 빈자가 되어 빚을 진 채 시민권까지 박탈 당하고서는 제 재산을 앗아간 자들과 그 외의 사람들까지 증오하고, 변란을 꾀하게 된다. 과두정의 통치자들은 계속 돈을 뿌려 이런 빚 진 자들을, 저런 수벌과 거지를 양산해낸다. 증여재산의 처분을 금지하지도 않고, 계약 당사자의 위험을 계약의 조건으로 법제화하지도 않으며, 이런 폴리스의 청년들은 비겁하고 게으르며 나약하다. 부자도 빈자도 덕에 대해서는 심려치 않는다. 이 상황에서 전쟁이 난다면 비만한 부자들과 볕에 그을린 빈자들이 서로의 상황을 목격하게 되고, 빈자가 부자를 업신여기게 된다. 이렇듯 분열된 폴리스는 한편으로 같은 과두정 동맹을, 다른 한편으로는 또 같은 민주정 동맹을 끌어들여 내분을 키워간다. 이 과정에서 빈자가 승리하여 부자를 도륙하거나 추방하고서, 시민에게 균등하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추첨으로 관직을 할당함으로써 민주정이 생기는 것이다. 이 민주정은 신분상의 자유와 언로의 자유, 특권적 자유를 첫째 특징으로 갖는다. 이로 인해 그 정체의 시민들은 각자 자의적으로 직무를 선택하여 맡는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뒤섞여 온갖 성격들로 치장된 이 정체는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이 정체에서는 다른 모든 정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폴리스 내에서는 통치, 전쟁, 화합과 교류에 어떠한 법도, 의무나 책임, 강제도 없다. 앞서 논의된 훌륭한 자질과 훌륭한 유희(를 통한 교육)는 경시되고, 온갖 직무가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통치자는 다만 대중의 구미에 맞으면 그만이다. 이러한 민주정은 어떤 균등함을 나누어 주는 무정부 상태의 정체이다.

558d-561e : 민주정을 닮은 자는 과두정을 닮은 구두쇠 아비에게서 태어난다. 아비와 같이 그 자식도 필수적인 욕구들로써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들을 억누른다. 전자는 불가피한 것 그리고 그 충족이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다. 이 두 부류는 본성에 의해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훈련을 통해 제거할 수 있고 그 충족이 이롭지 못하거나 심지어 해로운 욕구들이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필수적 욕구가 주도하는 영혼은 과두정적인 반면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에 점령된 영혼은 앞서의 수벌과 같은 자이다. 과두정에서 민주정으로의 이행과 마찬가지로, 청년의 영혼 내에서 분열된 욕구들 중 한 부류가 외부의 욕구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그 청년은 민주정적인 자가 된다. 이러한 자의 다른 욕구들이 부모에게서건 친족들에게서건 지원을 받으면, 이 젊은이의 내면에서 또한 내분이 일어난다. 필수적 욕구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가 서로 경쟁하지만, 그 아비는 양육에 무지하고, 따라서 이 청년의 영혼에는 수호자들인 훌륭한 학문과 활동이 부재하기에, 결국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가 그 영혼을 점령한다. 결국 필수적 욕구와 동류인 외부의 조언들도 차단할 것이고, 수치를 무지로, 절제를 비겁으로 명명하며 추방해 버릴 것이다. 이 빈자리에 오만과 무정부상태, 낭비벽과 몰염치를 앉힌다. 이런 것들을 교양과 자유, 용기라 부르며 결국 민주정적인 인간이 된다. 이런 자에게 행운이 따른다면 서로 다른 욕구들이 번갈아 가며 주도권을 쥐면서 나름 균등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그는 두 부류의 욕구들 중 한편을 드는 조언을 거부할 것이며 모든 종류의 욕구들을 한결같이 존중할 것이다. 그는 술에 빠졌다가 이내 시가에 몰두하기도 하고 다시 철학을 건드리는가 하면 재산축적에 매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즐겁고 자유로운 삶이라 칭송한다. 그는 민주정의 폴리스처럼 복합적이고 다양한 성격으로 가득 찬다. 

562a-566c : 민주정으로부터 참주정이 발생한다. 그 과정은 과두정에서 민주정으로의 이행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과두정은 부를 좋은 것으로서 추구하였고, 이에 대한 불만족과 재물 이외의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 민주정을 파멸시켰다. 민주정 또한 자유에 대해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유의 희석되지 않은 원주를 과음하여 사람들은 자유에 불만족하게 된다. 통치받지 않는 피지배자와 통치하지 않은 통치자들을 칭찬하며, 이런 폴리스에서 자유는 전면적으로 확산된다. 부자지간이 역전되고 거류민이 시민의 노릇을 하게 된다. 모든 관계가 역전되어 가축이 주인보다 존중받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결국 어떠한 복종도 못 참게 되고, 일체의 법률이 무시된다. 이제 과두정을 망친 질병과 같은 질병이 민주정에서는 특권적 자유에 의해 더 크고 강하게 일어난다. 지나침은 곧장 반대방향으로 대변혁을 일으킨다. 곧, 지나친 자유는 극단적 예속으로 탈바꿈된다. 특권적 자유에 의해 강화되는 질병이란 침을 가진 또 가지지 못한 수벌들의 창궐이다. 과두정에서는 무시당하던 수벌들이 민주정에서는 앞장을 서고, 그 중 가장 사나운 무리가 말과 행동으로 나서고 나머지 것들은 주위에서 웅성거리며, 반대자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이들과 반대되는 자들로 부자들이 있다. 이들은 수벌들의 먹이가 된다. 그리고 이 두 부류와 다른 세 번째 부류가 민중이다. 민주정에서는 이들 민중이 최대 다수이며 주도권을 쥔다. 수벌들은 부자에게서 먹이를 얻어 먹고 그 찌꺼기들을 민중에게 돌려 인기를 얻는다. 부자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반대하려 들지만, 이는 민주정에 대한 과두정의 전복시도라 매도당한다. 이러한 위협에 내몰려 부자들은 실제로 과두정으로의 전복을 꾀하게 된다. 이로써 상호 탄핵, 재판과 소송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민중이 앞장세우는 선도자 격의 뿌리에서 참주가 자라난다. 제물 사이의 인육을 맛본 자는 필연적으로 늑대가 되고야 만다는 신화처럼, 민중의 지도자 격이 되는 자는 동족의 피를 맛보고, 죽은 동족의 재산과 토지를 함께 나누며 채무를 무효화할 것을 암시한다. 이런 자는 부자들에 의해 사형을 선고 받거나 추방되거나 혹은 암살되거나, 그렇지 않으려면 참주가 될 수밖에 없다. 참주가 될 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경호대를 요구한다. 민중은 그를 염려하여 이를 찬성한다. 반면 부자는 민중의 미움을 사 달아나게 된다. 이로써 민중의 선도자 격인 자는 참주가 된다. 

566d-569c : 참주정적 인간과 이런 자가 생기는 폴리스의 행복이 검토되어야 한다. 초기의 참주는 재산을 나누고 모두에게 온화한 척을 할 것이다. 그리고 추방한 정적들 중 일부와는 화해하고 또 일부는 제거하여 외부와 전쟁을 일으켜 민중들이 참주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유지시킨다. 이 과정에서 전쟁의 세금을 거두어 민중들이 생계에 골몰하여 참주에 대해 음모를 꾸미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필요하다면 자신을 적대하는 민중을 전쟁 중 적에게 넘겨주려는 의도에서도 전쟁을 선호한다. 이것이 시민들에게서 증오를 사는 짓들이며, 참주를 옹립한 주변인들 중 용감한 자들이 그에게 반대하고 나설 수 있다. 비판할 지혜와 용기를 갖춘 자들은 모두 적으로 돌려 친구건 시민이건 죄다 제거해 나아가, 참주 곁에는 유용한 자가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조금이라도 훌륭한 자질을 갖춘 자들은 모두 찾아내 제거하려 든다. 의사와 반대로 참주는 최악의 것을 남기고 최선의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가 믿을 자들은 외부의 수벌들뿐이며, 그들로 경호대를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폴리스의 시민들에게서 노예들을 빼앗아 해방시켜 제 경호대로 삼을 것이다. 이런 지경인데 시인들은 참주들이 자신들 같은 현자들과 교제함으로써 현명하다 말하니, 이런 이유에서 시인들은 최선자정체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폴리스들을 드나들며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곳들에서 인기를 얻는다. 참주정의 재정은 신전의 재화와 파멸당한 부자들의 재산으로 유지되다가, 이것이 다하면 민중이 참주를 부양하게 된다. 민중은 이내 다 큰 자식을 노쇠한 아비가 양육하듯 느껴 참주와 그의 친구들을 백수 자식과 거렁뱅이들로 여겨 내쫓으려 할 것이다. 참주는 친부살해자로서 이에 대항할 것이다. 결국 민중은 시기상조의 자유에 대한 대가로 가장 참혹하고 고된 노예살이를 하게 된다.

-蟲-


514a-517a : 교육과 교육부족에 관하여 또 다른 비유가 제시된다. 입구와 같은 넓이의 동굴 끝 벽을 향해 죄수들이 사지와 목이 결박되어 있다. 입구와 죄수들 사이를 가로 질러 길이 나 있고, 그 길보다 더 입구에 가까운 쪽에 불이 있다. 가로지른 길과 죄수들 사이에는 담이 쳐져 있다. 저 길을 지나는 자들이 머리 위로 자연물들이 아닌 여러 제작물들 따위를 이고 다니면, 불이 그것들을 비추어 동굴 끝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지나는 자들은 소리를 내거나 잠자코 있거나 한다. 이들은 그림자와 들려오는 소리만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이러저러한 것들이라 믿고 그렇게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이 결박에서 풀려나 저 불빛을 보게끔 강요당한다면, 고통스러울 것이며 저 제작물들 자체를 눈이 부셔 볼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 그에게 저 제작물들이 이전의 그림자보다 더 실재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는 거꾸로 그림자들이 저 제작물들보다 더 실재라 여전히 믿으려 할 것이다. 더욱이 동굴의 불 자체를 보도록 강요한다면 더욱 고통스러워 하며, 그 자신이 볼 수 있는 그림자들로 달아나 그 그림자들이 더 실재라 생각할 것이다. 그를 억지로 이끌어 동굴 밖 빛 아래로 끌어낸다면 고통스러워 하고 화를 낼 것이다. 동굴 밖에서도 같은 순서로 그림자, 다음으로 이러저러한 상들, 그 다음 실물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하늘을 우선 밤에 별과 달을 본 이후에야 낮에 태양과 빛을 볼 수 있게 된다. 가장 마지막에 태양 자체를 보게 되고, 이를 보고서 태양이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고, 그간 본 모든 진리의 원인이 태양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동료 죄수들 사이에서 그림자를 더 잘 분간하고 그 움직임을 더 잘 예측하는 자가 부와 명성을 얻더라도 부러워할 리 없고, 그런 처지에 놓이느니 무슨 짓을 겪더라도 그리 살지 않는 쪽을 택한다. 이제, 그가 다시 갑작스럽게 본래의 동굴 끝으로 돌아간다면, 눈이 어둠으로 가득 차 분간할 수 없고 벽의 그림자들을 다른 죄수들보다도 훨씬 덜 알아볼 것이다. 죄수들은 그를 비웃을 것이고, 그가 동굴 밖에서 본 것들을 가소롭게 여길 것이다. 또한 그들을 해방시켜 위로 이끌려는 자를 죽이려 들 것이다.

517b-519b : 속박된 동굴은 가시적 영역에 대한 유비이다. 감옥 속의 불빛은 태양에 비유되고, 올라감(anabasis)과 그 높은 곳에서의 관조(thea)가 가지적 영역과 그를 향해 올라가는 길(anodos)에 비유된다. 그 궁극 목적은 선의 이데아를 보는 것이며, 이후 모든 옳고 아름다운 것의 원인이 이것임을, 가시적 영역에서 빛과 빛의 주인을 낳고, 가지적 영역에서는 스스로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것임을, 또한 무슨 일이든 지혜롭게 수행하려면 이 선의 이데아를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경지에 이르면 인세에 개의치 아니하게 된다. 오로지 저 선의 이데아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가 인세의 어둠 속에서 당황하고 저 이데아를 전혀 모르는 자들과 논쟁하며 우스운 꼴을 보이게 된다. 이처럼 빛에서 어둠으로 향한 경우, 그리고 역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향한 경우 둘 모두 혼란을 낳고, 따라서 이를 보고 현명한 자는 그것이 어느 쪽 경우에 해당하는지 살피려 한다. 이를 고려할 때 교육이란 마치 시력이 전무한 눈에 시력을 부여하듯 그런 식으로 영혼에 지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각 영혼의 능력과 각자가 이해하는 바에 사용하는 수단을, 어둠에서 빛으로 몸 전체를 전향하듯, 그렇게 생멸로부터 존재로 전향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교육은 존재 중에서도 가장 밝은 선의 이데아를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이어져야 한다.여타의 덕들은 습관과 단련을 통해 이후에 생겨나지만 현명함의 덕은 발생이 아니라 방향이 문제이다. 이로부터 생멸과 동류인 것들을 제거하여야 한다.

519c-521b : 어둠에 머무는 자들은 목표를 갖지 못하기에, 빛에서 어둠으로 온 자들은 여전히 인세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지복의 섬(makaron nesoi)으로 이주한 줄로 착각하여 인세에 관여하지 않으려 들기에 폴리스를 다스릴 수 없다. 폴리스를 수립 중인 우리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선의 이데아를 향한 오르막길로 이끌 뿐만 아니라, 그 이후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고 다시 죄수들 곁으로 내려가지 않으려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이것은 훌륭한 철학자들을 해하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우선 이 폴리스의 법은 폴리스 내의 한 집단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잘 살도록, 전체가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그런 식으로 시민들을 설득하고 강제한다. 또한 철학자들이 태어나고 그렇게 되도록 양육받은 것은 폴리스에게 진 빚이며, 그러한 폴리스이기 때문에 그렇게 철학자들로 자라날 수 있었다. 이 폴리스의 교육은 공과 사, 폴리스에 대한 정치와 선의 이데아에 대한 관조 모두를 목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다시 내려가야 한다.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면 가시적 영역을 다른 죄수들보다 훨씬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원본과 모상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통치를 위해 서로 싸우며 꿈 속을 헤매는 다른 폴리스들과 달리 제대로 된 폴리스는 통치를 가장 덜 열망하는 곳이 된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되면 이 폴리스의 철학자들은 자기들끼리 순정한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노고를 함께 하고자 할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자들에게 정의로운 일을 지시하는 것이다. 통치의 대가로 통치 이전에 통치보다 나은 삶을 제공할 경우 앞서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폴리스가 가능하다. 통치를 업신여기는 삶을 사는 자들은 철학자이며, 철학자는 최선의 통치를 위한 일들에 관하여 가장 잘 아는 자들이기도 하다. 이들로 하여금 통치를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통치를 위한 경쟁 또한 억제된다.

521c-526c : 지하에서 신들로 향하듯 교육을 통해 철학자를 만들고 빛으로 이끄는 과정이 검토될 차례이다. 이것은 혼의 전환(psyches periagoge)이며, 이것이 진정한 철학, 존재를 향해 올라가는 길이다. 이런 교육은 수호자들을 위한 것이고, 수호자들은 전사들이기에 이 교육 역시 전사들에게 무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앞서 제시된 체육과 시가는 지금 추구하는 그 교육이 아니다. 전자는 생멸에 관계된 것이며, 후자는 체육에 상관된 것으로서 조화와 규범을 형성해 주지만 정작 혼의 전환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필요한 교육은 모든 기술과 모든 사유와 지식이 공통으로 이용하는, 가장 우선되는 교육이다. 그것은 수와 계산이다. 이는 또한 전술에도 사용되므로 전사들인 수호자들에게 유용하기도 하다. 이러한 수와 계산에 관련하여 본디 직관과 존재로 이끄는 그러한 것이 있다. 그것은 감각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감각 중 어떤 것은 직관을 촉발시키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전자는 반대되는 감각들로 동시에 이행하는 것이다. 대상을 감각이 그 대상인지 그와 반대되는 것인지 밝히지 않을 때 이러한 촉발이 일어난다. 그러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약지부터 중지까지 세 손가락에 대해 시각은 그것들이 각기 손가락이라 영혼에 전한다. 그것들의 위치나 순서, 색이나 형태와 무관하게 손가락은 손가락이며, 손가락이 손가락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손가락들의 크고 작음은 위치나 순서에 따라 달리 보인다. 인지는 중지보다는 크지만 동시에 약지보다는 작다. 또 각 손가락은 부위에 따라 단단하기도 하고 물렁하기도 하여 서로 상이하다.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동시에 또한 상대적으로 무거운 경우 또한 가능하다. 이런 감각들은 혼으로 하여금 계산과 직관을 촉발시킨다. 각기 전달된 것들이 통틀어 둘로 계산된다면, 전달된 양편은 또 각기 서로 다른 하나씩의 것들이다. 이 경우 혼은 그것들을 독립된 것들로, 그렇지 않다면 통합된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시각은 큼과 작음을 독립된 것들로 구분하지 않는다. 반면 혼은 이것들을 서로 다른 별개의 독립된 것들로 간주하기 때문에 감각으로부터 전달된 것들에 대해 혼란을 겪고 계산을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작음이 무엇인지, 그러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손가락이 손가락으로 보이는 감각은 직관과 계산을 촉발시키지 않는 쪽이고, 크면서 작거나 단단하면서 부드럽거나 한 대립되는 것들의 동시적 감각은 직관과 계산, 사유를 촉발시키는 쪽이다. 수(arithmos)와 하나(一, hen)는 후자에 속한다. 절대적으로 하나인 것도 없지만 하나이지 않은 것도 없고 가시적 영역의 일체의 것들이 그렇게 감각되기에 하나는 영혼을 당혹시키고, 사유를 촉발시키며, 탐구를 강요하고, 하나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묻도록 만든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고찰로 이끌고 그렇게 방향을 전환시켜주는 교과이다. 하나가 이렇기 때문에 모든 수가 같은 상태에 놓이고, 다시 산술과 수론은 모두 수에 관련된 것으로서 진리로 인도하는 것들일 것이다. 이 교과를 법으로 정하여, 거래나 매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직관만으로 수들의 본성을 고찰하게 될 때까지 지속시켜야 한다. 이는 생성에서 진리와 존재로 영혼 자체를 방향전환(metastrophe)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교과는 수들 자체를 논하게 만든다. 이 경우 하나 자체는 엄밀하게 하나여서 결코 어떠한 부분도 포함되지 않으며, 이러한 단일성이 수들 각각 그 자체에 포함되므로 모든 수가 서로 같고 그 안에 아무런 부분도 없다. 이런 수들 자체를 논함으로써 직관을 사용하도록 영혼이 강제를 받게 된다.

526d-528e : 다음으로 필요한 교과는 기하학이다. 이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군사적 목적에 부합하는 동시에, 영혼의 방향전환에 기여한다. 기하학 내에서 작도나 합 등의 용어들은 구체적 실천을 뜻하는 듯하지만 사실 그 전체 교과는 앎을 위해 추구될 뿐이다. 즉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그려내거나 이전에 떨어져 있던 것을 합하여 새로운 크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기하학의 목적은 아니다. 기하학은 그것인 채로 영원한 바의 것들을 다룬다. 세 번째 교과 후보로 천문학이 거론된다. 글라우콘이 이 학문을 두고 농업과 항해 및 전술에 대한 기여를 다시 언급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첨언이 대중을 두려워하기 떄문에 나온 것이라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이 교과들을 통해 각 영혼의 어떤 기관이 완전히 정화되어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문학과 기하학 사이에 평면기하와 입체기하의 구분이 생략되었기에 입체 기하가 세 번째 교과 후보로 거론된다. 이런 혼란이 발생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어려운 이러한 교과들이 세간에 무시되어 왔기 때문이고, 또한 이 교과의 감독자가 드물며 생기는 일 역시 쉽지 않고 그 교과를 탐구하는 자들이 쉬이 거만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폴리스 전체가 함께 감독하고 또한 존중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을 문제이다. 이제 다시 네 번째 교과로서 천문학이 제정된다. 

529a-531c : 오늘날(당대)의 천문학은 비록 고개를 하늘을 향하더라도 실상은 영혼으로 하여금 아래를 보도록 만들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to aoraton)에 관련된 교과가 아닌 한 영혼을 위로 향하게 할 수 없으며,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들 중 어느 것에도 인식은 없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빠름과 느림이 참된 수와 참된 도형의 상호 관계 내에서 운동하며, 그 안에서 그 안의 존재들을 운동시킨다. 이러한 운동은 이성과 추론에 의해 파악되며 시각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천체는 이에 관련한 배움을 위한 본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훌륭한 예술작품에서 비율의 진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기하학자에게는 헛되어 보일 것처럼, 천체도 최대한 훌륭하게 구성되었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한결같으며 조금도 이탈하지 않으리라 믿는 자는 기하학자에게 우스워 보일 것이다. 기하학에서 도형들을 이용하고 그려진 도형들에 천착하지 않듯, 천문학에서도 천체들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이용해야 한다. 문제는 이동(phora)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동에 관하여 눈은 천문학에 맞추어지듯, 귀는 화성학에 맞추어진다. 화성을 가능케 하는 운동(enarmonios phora)에 관한 화성학은 천체의 운동에 관한 천문학과 자매관계이다. 이 경우에도 음 또는 음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협화음들 내의 수들을 찾는다. 그러나 어떤 수가 협화음이고 아닌지, 무슨 이유로 각기 그러한지 더 소급하여 올라가진 않는다. 

531d-532e : 이상의 네 가지 교과들이 상호 공동이자 동류인 관계를 이루고, 그리하여 어떻게 서로의 근친성이 성립하는지 그 결론이 나온다면 선의 이데아를 파악하는 데에 이것들이 기여할 것이다. 이 교과들은 변증술의 서곡이다. 변증술은 설명(logos)을 주고 받는 것이며, 이것이 알아야만 하는 것을 알게 될 조건이다. 이는 감각을 사용하지 않고 진술(설명)을 통해 각각의 것인 바 그 자체를 향해 출발하여, 선인 바의 것 그 자체를 지성에 의한 직관 그 자체로써 파악하기 전까지 지속하는 과정(여정, poreia)이다. 이 모든 교과들은 영혼의 최선의 부분이 결박에서 풀려나 존재들 중 최선의 것을 관조하도록 이끄는 힘을 가진 것이다. 글라우콘은 이전 교과들을 자세히 논했듯 변증술 역시 그 힘의 특성과 유형들, 방법들을 논할 것을 요구한다. 

533a-534a : 소크라테스는 여기서부터 더 이상 비유가 사용될 수 없다고 답한다. 이전의 교과들을 거친 자에게 변증술은 무언가를 보여줄 것이다. 교과는 각각의 것인 바 그 자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거나, 사람들의 믿음과 욕망 그리고 제작과 유지를 다룬다. 반면 앞의 네 교과들은 존재에 관하여 가정들을 이용하여 접근하되 설명을 해내지 못한다. 무언가에 대해 시작(원리, arche)도 모르는 것이고 끝도 중간항들도 모르는 것으로 짜여진 그러한 일치는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변증적 탐구방법은 확싱성을 위해 원리 자체로 나아가며 가정들을 폐기한다. 이 과정에서 앞서의 교과들을 이용하여 위로 이끈다. 이 교과들은 엄밀히 말해 지식이 아니며, 의견보다 명료하지만 인식보다 불분명한 추론이다. 이제 인식, 추론, 확신, 추정이 차례로 나뉜다. 이 중 뒤의 둘은 믿음, 앞의 둘은 직관이다. 믿음은 생멸에 관계되지만 직관은 존재에 관련한다. 존재와 생멸의 관계는 직관과 믿음의 관계와 같다. 다시 이관계는 지식과 확신의 관계와 같고 또한 추론과 추정의 관계와도 같다. 믿음과 직관의 각 대상이 다시 둘씩 나뉘는 것에 대해서는 긴 논의가 필요하다.

534b-536b : 각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자가 변증술에 능한 자이고, 설명 못하는 한은 지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선의 이데아를 설명하고 이에 맞서는 논박을 모두 논파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선의 이데아를 아는 것이 아니며, 이를 모른다면 여타의 좋은 것들도 알지 못한다. 이런 상태는 무리수의 선분처럼 비이성적이기에 정치를 맡길 수 없다. 또한 변증술은 다른 교과들의 가장 위에 놓인다. 이러한 교육을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은 쉬이 배우고 잘 기억하며 인내를 갖춘 영혼에 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철학을 건드려 철학에 대한 오명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양면에 걸쳐 근면해야 한다. 자타에 무관하게 자발적 거짓에 공히 분노하되 본의가 아닌 거짓과 무지에는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 앞서 밝힌 네 가지 덕들에서도 알맞은 자여야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전한 자들을 이러한 교과로 양육한다면 정의 자체도 나무라지 않을 것이며 폴리스와 그 체제가 보전될 것이다.

536c-537d : 통치자는 나이가 많은 자를 선출하지만, 교육은 어려서부터 받아야 한다. 변증술에 앞서는 것으로 법으로 정해진 일체의 예비교육은 유년기에, 영혼이 굴종을 배우지 않도록 강제 없이 교육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예비교육은 놀이의 형태여야 한다. 여기에 더해 전장에서의 일까지 포함하여 그 과정에서 가장 능숙한 자를 선발해야 한다. 체육이 필수적인 2~3년, 육체의 피로로 학문에 대한 태도가 드러나는 기간이 끝난 뒤에 이런 자를 선별한다. 이 떄 이들은 20세이며, 그들에게 큰 명예를 선사해야 한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그간 배운 여러 교과들을 모아 그 상호 친근성과 존재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갖게 해야 한다. 이것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변증술적 자질에 대한 증명이다. 이런 자들 중 그러한 자질이 가장 뛰어나고 학문에 굳건하며 전쟁과 법적 의무에서도 확고한 자들을 그들이 서른이 될 때 다시 선별하여 다시 더 큰 명예를 선사하고, 변증적 논변의 힘으로 시험하여 존재 자체를 향해 진리와 더불어 나아가는지 확인해야 한다.

537e-540c : 그러나 변증술을 행하는 자들은 무법으로 점철될 위험이 있다. 마치 자신이 입양된 처지임을 뒤늦게 알고 양부모와 그 친척들 멀리하게 되는 것처럼, 변증술을 행하는 자들은 이전까지 그들이 확신을 가졌던 아름다움이니 선이니 정의니 하는 것들이 사실상 그 반대로 알고 있던 것들과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그러한 것들은 아님을 알게 되면 그에게 주입되었던 기존의 교육들을 불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나고 자란 폴리스의 법과 질서를 어기려 들 것이다. 이러한 위험을 피학시 위해 변증에 접근하는 방식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어린 사람들이 반박에 심취하는 일이 없도록 변증을 접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반면 나이 든 자들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변증을 활용할 것이다. 따라서 변증을 배울 자들은 예의바르고 견실해야 한다. 이런 자들이 변증에 몰두할 시기는 체육에 몰두할 시기의 두 배 정도, 5년이다. 그 이후 다시 동굴로 내려가는 일을 강제받아야 한다. 전쟁에서 지휘를 하고 관직을 맡아 경험을 쌓도록 하면서, 이 과정에서도 흔들림없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시험받아야 한다. 이 실무기간은 15년이다. 이 과정을 무사히 거쳐 나온 자들 중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했던 자들로 하여금 이제 선 자체를 보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번갈아 이를 본으로 삼아 폴리스와 개인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철학으로 시간을 보내다 차례가 오면 정치를 하고 통치자 노릇을 하며 사람들을 교육시켜 자신들을 대신할 폴리스의 수호자들로 만든다. 그 이후에야 그들은 지복의 섬으로 떠나고, 남은 자들은 피티아에게 물어 그들을 수호신으로 삼거나 혹은 그에 값하는 자들로 받들어야 한다. 이는 남녀 성별과 무관하다. 

540d-541b : 여기까지의 논의는 희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가능한 일이며 또한 이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일은 진정한 철학자들이 통치자들로서 세속의 명예를 경멸하고 옳은 것과 그로 인한 명예만을 가장 존중하며 정의를 가장 중시하고 받들어 키워 폴리스에 질서를 부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시민들을 10세 이상 모두 시골로 내보내고 그 영향으로 부터 벗어난 자식들을 넘겨 받아 이전까지 논의한 법과 양식으로 양육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최선의 폴리스와 그 체제, 또 이를 닮은 인간과 그 영혼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