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무니츠랑 루드부쉬 제안은 외연이랑 내포 관련 카르납, 프레게 논의랑 다시 형상 관련 적용 논증 분석 이해하기 전에는 활용하기 어려울 듯. 정의에서의 부분과 실체에서의 부분 사이의 구분으로 접근할 경우 좀 더 접근성을 만들 수는 있지만, 최고류들 사이의 구분 문제와 상위류에서 하위류로의 분할 문제가 별개의 층위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문제제기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지 문제.


0. 무니츠랑 루드부쉬는 『소피스트』에서 분할의 방법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주제로 삼는 반면, 브라운은 분할의 결과로 나온 소피스트에 대한 일곱 가지 정의들이 긍정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굳이 두 주제가 연결되지 않음에도 억지스럽게 연결시킬 이유는 무엇인지? 혹은 그런 연결을 정당화할 방법이 있는지? 소피스트에 대한 앞선 여섯 가지 분할들은 소피스트에 우연하게 결합하는 참인 진술들, 반면 소피스트에 대한 마지막 분할을 그 유에 대한 온당한 정의라는 제안이 이전 yes-faction 제안과 다른 점은? 유나 형상을 그 자체로 간주한 분할과 참여를 통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간주한 분할이 정말로 분할 방법 자체에서 차이를 지니지 않는가?


0. 나는 『소피스트』에 함몰되어 있나? 잘 모르겠다. 


0. 플라톤의 철학이 철저하게 윤리적 기획이라는 기본적인 이해를 도무지 포기할 수 없다. 다만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당대의 도덕적, 윤리적 혼란에 맞서 도덕적 가치의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러한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의 이론철학적 작업들이 마치 기계적 필연에 대한 단순한 사실 관찰의 시도에 불과하게 되어 버리지 않나 싶은 것뿐이다. 


0. 이론과 실천의 연결, 더 강하게 말하자면 직결이 플라톤의 화두라면, 역으로 플라톤의 철학을 연구하는 자가 플라톤의 의도하는 방식의 실천적으로 옳고 나은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지능의 문제 아닌지. 이 경우 내가 다른 연구자와 삶의 태도에서 상충할 때, 내가 '틀렸거나' 아니면 다른 한 사람이 틀렸다고 봐야 하지 않는지. 나는 여전히 알아가고 또 고민하고 그런 과정에 있을 뿐이니, 내가 객관적 평가자 노릇을 할 수는 없다. 다만 나든 다른 사람이든 그가 제시하는 논증을 놓고 분석하고 재구성하고 평가할 수는 있다. 다시, 내가 완성형의 철학자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영생을 하며 끝없이 진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정당성 평가의 과정을 권위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생략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좁게는 학계, 넓게는 연구의 역사란 게 내겐 그런 의미이다. 물론 게으르고 멍청한 채로도 선하고 바르게 살 수 있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자가 반드시 지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해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악하고 그릇되고 비겁한 작자들 중, 적어도 아직까지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연구에서 감동 또는 좌절감을 줄 만큼 철저하고도 방대하고 또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은 작자는 본 적이 없다. 좀 기준을 낮춰서 말하자면, 나쁜 새끼 중에 꾸준히 공부하는 새끼를 본 적은 없다. 플라톤 철학에 대한 철학사 연구에 한정한 얘기고, 그것도 나한테 '니가 봤으면 뭘 얼마나 봤길래'라고 지적이 들어오면 할 말은 없다. 그냥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볼려고 애쓴 정도까지만 봤을 따름이니. 어쨌든 이 과정에서 내가 기대는 평가 기준으로서의 권위는 말 그대로 그 권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엄격할 것으로 기대된다. 더 많은 검증을 거친 더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된 더 집요한 평가를 거치고 살아남은 학적 결과물을 신뢰하는 편이 내겐 더 자연스럽다. 아쉽게도, 모두에게 열려있는 아름다운 철학 같은 건 믿지 않는다. 뭐 나 자신도 저 판에 낄 자격조차 못 갖춘 쓰레기라는 건, 당연히 인정하고. 권위에 권위를 실어주는 또 다른 권위 같은 순환논증이 되겠지만, 뭐 다른 수가 정말 있나? 난 착한 놈이 플라톤을 잘 하리란 기대도 못 하겠고, 멍청한 놈이 플라톤 식으로 착하리란 기대도 못 하겠단 것뿐이다. 꼭 잘 살아내고 싶지만, 나 자신이 멍청해서, 그렇게 못 살고 뒈질까봐 무척이나 두렵다는 뭐 그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0. 가끔 비겁한 놈이 되어 버렸나 고민한다. 여전히 앞서 연구자 선배로서, 내 스승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는 낮추지 않고 있다. 내가 믿는 내 나름의 잣대를 들이밀어 평가하고 실망하고 비판하고 비웃는다. 그래 놓고 나면 그 사람들 꽁무니를 물어 뜯겠다고 바둥거리며 달려드는 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알아서 까고 밟고 내동댕이를 쳐주곤 하였다. 좋은 배움의 기회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기회들이 주어지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그런 선배이자 스승의 역할을 자처할 용기는 내지를 못하겠고, 적어도 이젠 단순히 시간 기준으로 나보다 후발주자인 사람들을 상대로는 딱히 비판을 시도할 엄두도 내지를 못하겠다. 이건 엄밀하게 말하자면 내 잣대를 나 자신에게는 들이밀지 못하겠다는 것 아닐까? 물론 내가 재능이 일천하고 의지가 박약하니 단지 시간만 좀 더 많이 들였다는 걸로 뭘 대단히 더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더 알아야만 하는 것도 아닐 수야 있겠지만, 어쨌든 결국 더 많은 시간을 쓰긴 쓴 것이고, 의지가 박약한 건 내 기준으로 보자면 욕 먹어 마땅한 것이기도 하니, 내가 앞선 사람들에게 '댁들 그 시간 동안 뭐 했고 또 뭐 하고 있나'라고 따지듯 나도 똑같은 질문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한 거다. 그게 가능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 기준을 나한테 적용한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객관적 평가는 권위에 위임해 버렸고, 그 외에는 적당히 큰 사고 안 치고 흐름 따라 남들 사는 만큼 적당히 얌전하게 살면서, 떨궈져 나가지 않고 버티는 정도면 되는 걸까 아닐까 뭐 그런 거. 몸뚱이 건사하며 숨만 쉬고 살아 남기만 하려고 해도, 주기적으로 거듭해서 평가받고 심사받고 기준에 미달되면 도태되겠지. 뭐 쫓겨났을 때 체계니 구조니 남탓이나 하며 인정욕구 폭발해서 구라빨 세우며 싸돌아다니는 추태만 안 부리면 좋겠다. 근데 쫓겨나면, 더 살아서 뭘 할까나.


0. 공부는 어렵다. 하면 할수록 어렵다. 하필이면 이 공부가 왜 즐거운 걸까. 좆됐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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