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a-487a : 실재를 보는 철학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 중 법과 직무의 수호자로 임명되어야 하는 것은 어느 쪽인지 탐구된다. 각각의 실재를 본으로 삼아 언제나 주목하여 선과 미, 그리고 정의에 관한 법들을 정하여 지킬 수 있는 자들은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각 실재에 대한 인식만 할 뿐 아니라 경험 또한 다른 이들에 못지 않다. 이들의 성향이 밝혀지면 이들이 인식과 경험 양면을 겸비할 수 있으며, 이들이 지도자여야 하다는 점이 합의될 것이다. 그들은 우선 생멸에 의해 헤매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서 존재를 보여주는 배움을 사랑한다. 그들은 이를 전체로서 사랑한다. 또한 그들은 거짓을 증오하고 진리를 사랑한다. 진리는 지혜에 친근하여 철학자는 지혜 또한 사랑한다. 여러 갈래의 욕구 중 하나의 물길이 강해지면 다른 욕구들은 약해지는지라, 철학자는 영혼 자체의 즐거움 외에 육신의 즐거움은 약하게 된다. 모든 시간과 전 존재에 대한 관조를 품는 그 정신은 세속에 무관심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영혼은 정의롭고 온순하며 또한 쉬이 배운다. 또한 잘 기억하며 적도를 지킨다. 이런 성품이 그를 ~인 것 각각의 이데아로 인도한다. 

487b-489d : 문답으로 조금씩 몰려 말문이 막힐 수는 있으나, 실상 어려서 철학에 접해 늦게까지 그만두지 못하고 더 오래 지속하는 자들이 이상해지고, 이들 중 그나마 가장 나은 자들도 폴리스에 무용한 자들이 된다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다. '무용한 자들이 수호자가 되지 않는 한 악이 그칠 리 없다'라는 주장은 하기 어렵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비유로 답한다. 철학자가 무용하다는 사태는 복합적인 것이다. 마치 선주가 힘은 세나 귀먹고 눈멀어 항해에 대한 앎도 그런 처지인 반면, 선원들은 서로 키를 잡겠다 싸우는 상태와 같다. 아무도 항해술을 배운 바 없으나 선주를 에워싸고 서로 자기에게 키를 넘기라 온갖 짓을 다 한다. 누군가 약이나 술로 선주를 묶고 키를 잡고선, 항해술을 몰라도 자신을 돕는 자를 배에 관해 아는 자라 칭찬하며, 그 외의 사람은 무용하다 욕한다. 천문과 기상 등이 항해술에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이런 앎들을 추구하는 자는 배에 무용한 자로 불린다. 이것이 오늘날 철학자의 처지이다. 그러나 그 무용함은 철학자 탓이 아니라 그를 사용할 줄 모르는 자들 탓이다. 다스림이 필요한 자가 다스릴 자에게 찾아가야 맞다. 정치가들이 철학자에게 찾아가 통치를 청해야 한다. 

489e-490d : 철학에 접한 자들 중 대다수의 저열함의 필연성, 그리고 그것이 철학 탓이 아님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철학자는 처음 그를 이끈 진리를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전적으로 따르거나, 철학에 전혀 관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진리를 좇는 자는 ~이라고 생각되는 많은 각각의 것에 머물지 않고 각각의 것인 바 바로 그것 자체의 본성을 그와 동류인 영혼의 부분으로 포착할 때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인 것답게 ~인 것에 영혼의 그 부분이 접하여 합함으로써 지성과 진리를 낳아 앎에 이르러 참된 삶을 살고 양육되기 전까지 그 진통은 멈추지 않는다. 이를 다시 검토한 까닭은 철학에 접한 자 다수가 저열한 이유를 검토하기 위해서이다.

490e-496a : 우선 그들 다수의 전락을 검토한다. 다음으로 철학적 성향을 흉내내어 이 성향에 어울리는 일을 하는 그런 영혼들의 성향을 검토한다. 이는 넘치는 일을 하는 것이자 철학에 대한 오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철학에 걸맞는 성향을 갖춘 소수를 망치는 것들은 크고도 많다. 이 성향이 지니는 것들 하나하나가 영혼을 망치고 철학에서 떼어 놓으며, 준수함과 부, 체력과 가문 등이 또하 그리 한다. 강한 씨앗일수록 환경이 나쁠 때 더 크게 결핍을 겪듯, 최선의 성향은 잘못된 양육 상태에서 평범한 성향보다 더 크게 악해진다. 악은 좋지 않은 것보다 좋은 것에 더 반대되기 때문이다. 훌륭한 성향을 지닌 영혼은 적절한 가르침을 받으면 온갖 덕에 이르지만, 받지 못하면 그 정반대가 된다. 사적인 소피스테스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하는 대대적인 소피스테스들은 누구든 자신들이 바라는대로 교육시켜 만들어 낸다. 그들이 민회나 법정, 극장 따위에 모여 극단적으로 비난하고 또 칭찬하며 소란을 일으키면, 사적인 교육으로는 젊은이가 이를 버텨낼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설득하지 못한 자를 죽여 버린다. 통상 이에서 벗어난 성격은 없다. 다만 비범한 경우는 논외이다. 나아가 사적인 소피스테스들은 역시 다중의 믿음을 가르치며 이를 모두가 지혜라 부른다. 그들은 대중과 오래 지내 경험하여 배운 그 비위를 맞추는 기술을 지혜라 부르며 기술로서 체계화시켜 가르치려 한다. 그들은 대중에 맞추어 정의와 부정의를 명명하고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많이 다르며, 이러한 교육은 이상한 것이다. 그들은 다중을 주인으로 삼는다. 이런 상황에서 각각 그 자체가 ~이라고 대중이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철학자가 비난 받는다. 또한 대중을 주인 삼는 개인들에게도 비난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훌륭한 성향의 영혼은 어려서부터 눈에 띄어 사람들이 이용하고자 달려든다. 사람들이 그에게 아첨하여 그는 오만해지고 그에게 지성이 없다거나 이를 지니기 위해 노예처럼 고생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전혀 듣지 않을 것이다. 그가 훌륭한 성향 덕분에 철학에 이끌리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고자 하고 그와 가까이 지낼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으로 설득하려는 자들을 막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송사를 걸 것이다. 이것이 훌륭한 성향의 요소들과 여러 소위 좋은 것들이 그 영혼을 철학에서 이탈시킨다는 것이다. 폴리스와 사인에게 최대악도 최대선도 이런 성향의 영혼에서 생기며 평범한 영혼은 좋든 나쁘든 대단찮다. 이리하여 철학에 어울리는 자들이 철학은 멀리하고 철학과 가장 먼 자들과 어울린다. 이런 자들이 고아가 된 듯한 철학에 다가와 무용하다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아름다운 이름들과 장식들이 가득한데도 사람이 없는 걸 보고 자격 없는 자들이 마치 범죄자가 신전으로 숨듯 숨어든다. 저들에 맞는 일로 인해 앉은뱅이 몸을 가지듯 그 영혼도 힘이 빠진 그런 자들이 철학을 한답시고 나대며 궤변을 쏟아댄다.

496b-497a : 이러한 이후에 극소수의 부류가 철학과 교류하는 자들 가운데 남는다. 주변에 그를 파멸시키려는 자들이 없거나 제 나라가 작아 국사를 하찮게 여길 경우이다. 혹은 다른 기술에 대한 경시나 신체의 허약함도 그리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의 신호가 그를 이끌었다. 그들은 철학의 즐거움을 알고 다중의 광기를 목격하기도 하여 저항할 수 없는 다중에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피신한다. 그는 악에 가담치 않고 이곳에서의 삶에서 해방되기만을 기다린다. 그가 이룬 것이 작은 것은 아닐지라도 최대의 것 역시 아니다. 그가 어울리는 정체에서라면 개인적인 것에 더해 공공의 것도 보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철학이 비방받는 이유이다.

497b-499d : 당대 어떤 정체도 철학자에 적합치 않다. 때문에 철학자의 성향도 줄어간다. 만약 제대로 된 정체를 만나면 그 성향이나 활동 모두 다른 인간적인 것들에 비해 신적임이 드러날 것이다. 논의로 수립된 이 폴리스는 그렇다면 철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거가 필요하다. 현재 유년기를 갓 지난 젊은이들이 가장이 되기 전까지 시기에 철학을 접해 가장 어려운 대목에서 그만둔다. 이들이 철학에 통달한 자들로 간주된다. 이 힘든 대목은 논변logos에 관련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훗날 다른 이들이 철학을 할 때 불려가면 대단한 일로 여긴다. 그러나 노년에는 다들 그만둔다. 글라우콘들의 폴리스는 이와 반대로 해야 한다. 유년기에 교육과 철학을 수용하고 육신을 보살펴 철학의 봉사자로 삼아야 한다. 혼이 원숙해지는 시기에 혼을 단련하고 이후 정치와 군사업무에서 물러나면 방목되어 철학에 전념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말이 그대로 실현된 인간도 폴리스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철학자가 무용하다고 비난받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가 어떤 필연성으로 정치를 강제받기 전에는, 통치자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이 엄습하기 전에는 폴리스도 정체도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그러나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499e-502c : 몇몇 유난스런 자들에 의해 철학에 대한 적대가 만연했지만 철학자가 이러한 자임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비난을 멈출 것이다. 철학자는 실재를 본받고 찬탄하여 이를 닮아가는 자이다. 즉 변함없고 질서잡힌 자이며, 이를 추구하느라 인세에 관심이 없다. 그가 자신을 형성하는 데에서 나아가 그 본을 개인에도 사회에도 구현하도록 단련하게 강제한다면, 그 신적인 본을 이용하는 화가들이 폴리스의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리라 말한다면 사람들은 받아들일 것이다. 앞서 탈색 이야기처럼 철학자는 다른 개인과 폴리스를 그림을 그리지 전 화판처럼 깨끗하게 만들 것이다. 그는 형상들, 덕들 자체와 그것의 인간 내 구현 양자에 주목할 것이다. 진리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은 적합한 활동들을 만나 완전히 훌륭하고 철학적으로 될 것이다. 이런 일들이 불가능하지 않으며 또한 최선임이 밝혀졌다.

502d-505a : 통치자들은 시험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앞서 합의되었다. 이제 통치자로서 철학자가 시험을 받기 위한 교과들이 무엇인지 검토되어야 한다. 일견 대립되는 듯한 민첩과 안정을 모두 겸비한 성향이 엄밀한 교육, 명예, 통치에 걸맞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들을 감당할 수 이쓴지 시험받아야 한다. 정의, 절제, 용기, 지혜에 더하여 이것들을 증명하는 궁극적인 것에 대해 각기 대응하는 교과가 있다. 

505a-506a : 선의 이데아가 최대의 배움이다. 이것으로 인해 그 이외의 것들은 유익하고 유용한 것들로 된다. 이는 우리가 충분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모두가 알고 있다. 이걸 모른다면 다른 무엇을 안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과 미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이익이 되지 못한다. 대중은 쾌락을 선이라 생각하지만 세련된 자들에게는 지혜가 선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그 지혜는 선에 대한 지혜이다. 여기에서 선이 무엇인지 합의되지 못하였다. 쾌락을 선으로 보는 자들의 문제는 악한 쾌락도 있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정의롭거나 아름답다 여겨지는 것들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선택하는 반면, 선으로 여겨지는 것들에는 만족할 수 없고 선인 바의 것들을 추구하며 믿음에 만족하지 않는다. 선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의 것이자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지만,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여타의 것들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최선자들인 수호자들은 그들과 다른 상태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수호자들은 선을 알고 있어야 하며, 이런 자가 다스리는 정체는 완벽하게 통치되는 것이다.

506b-509c : 선은 앎인가 쾌락인가? 이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자로서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답한다. 앎이 결여된 믿음은 수치스러운 것이며 맹목적이다. 지성 없는 참된 믿음은 올바른 길을 가는 맹인과도 같다. 그러나 선 그 자체가 무엇인지 논의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단지 그 산물, 유사물을 논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목표로 다시 여러 가지 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이라 불리고 좋은 것이라 불리며 그 각각을 이러저러한 것들이라고 구별한다. 반면 미 자체, 선 자체를 말하며 저 여러 가지의 모든 것들에 관련하여서도 그 각각에 대한 이데아가 있다고 상정하여 그 이데아에 따라 각각의 것을 이러저러한 것인 바의 것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가시적이되 사유되지 않는 반면, 이데아들은 사유되되 비가시적이다. 전자는 감각되는 것들로서 감각으로써 감각한다. 그런데 감각의 경우 다른 것들과 달리 시각만은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 제 3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빛이다. 그 빛은 태양을 주인으로 한다. 그러나 시각 자체도 시각이 포함되는 눈도 태양은 아니다. 다만 눈이 태양을 닮았을 뿐이다. 그리고 눈은 태양의 넘쳐나는 것을 나나눠 가지며, 태양은 시각 자체가 아니라 시각의 원인이 되면서 동시에 시각에 의해 그 자체가 보이게 된다. 이러한 태양을 선의 이데아가 자신의 유비물로 되게 하였다. 태양이 가시적 영역에서 시각과 가시적인 것들에 대해 가지는 관계는 선의 이데아가 가지적 영역에서 지성과 가지적인 것들에 대해 가지는 관계와 유사하다. 태양이 빛을 비추어 대상을 보이게 하고 또 눈으로 하여금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처럼, 선의 이데아가 진리와 실재를 비추어 그렇게 밝혀지는 곳에서 영혼으로 하여금 지성을 갖게 만들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 영혼은 믿음만을 지니며 지성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선의 이데아는 인식과 진리의 원인이지만 그것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들보다 더 나은 것이다. 태양 자체는 생겨나는 것이 아니면서도 다른 것들을 생겨나게 하고 자라게 하며 양분을 제공한다. 그처럼 선의 이데아는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그리고 인식되게 해주지만 선 자체는 존재보다 더 높은 것이다.

509d-511e : 선의 이데아가 지배하는 부류와 영역은 가지적인 반면 태양의 대상과 영역은 가시적이다. 이 두 부류 각각을 상대적인 명확성과 불명확성에 따라 다시 둘씩 나눌 수 있다. 그리하여 가시적인 부류에는 또 다른 부분으로 영상이 주어진다. 이 영상이 모방하는 대상이 나머지 것들이다. 이 영상과 원본의 관계는 믿음의 대상과 인식의 대상 사이의 관계와 유사하다. 가지적 부분은 가시적 부류 중 원본을 다시 영상으로 삼아, 그 가정들에서부터 원리가 아닌 결론으로 나아가는 탐구가 속한다. 나머지 부분에서는 무가정의 원리로 나아가며, 영상으로 삼은 원본들 없이 형상들 자체를 사용하여 탐구를 진행한다. 산술과 기하는 수와 도형, 각 따위를 영상으로 삼은 원본으로서 이미 아는 것으로 가정하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여타의 것들을 거쳐,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자체에 반대되지 않음(모순 없음)을 결론으로 내린다. 여기에서 추구하는 것은 가지적 영상의 원본으로 삼는 바의 것이다. 이는 추론(사유, dianoia)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가시적 영역에서 원본의 자리에 있던 것들을 영혼은 가지적 영역에서는 모상으로 다룬다. 이와 달리 가지적 영역의 다른 부분은 이성 자체가 변증술적 논변의 능력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성은 전제들을 원리가 아닌 전제들로만 다룬다. 이는 원리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다. 이리하여 추구하던 원리를 발견하면 이 원리에 의존하는 것들을 견지하여 귀결점들로 내려가되, 형상들만을 이용하여 형상들 안에서 결론을 내린다. 이 네 부분들에 대응하는 영혼의 상태들로서 가장 위에 이해noesis, 다음으로 추론, 그리고 확신, 다음으로 추정(짐작)이 자리한다. 

-蟲-

449a-451c : 왕도정체-최선자정체 그리고 이와 같은 방식의 영혼 이외에는 나쁘고 잘못된 것들로 불린다. 이 나쁜 상태의 네 종류를 고찰하려는 찰나, 폴레마르코스가 아데이만토스에게 다른 주제를 논의할 것을 제안할지 말지 묻는다. 두 사람은 처자의 공유(koinonia) 방식이 무엇인지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립된 폴리스에 양육과 교육이 핵심이었으므로, 처자에 관한 혼인, 출산, 양육, 교육의 공유 방식이 잘못될 경우 폴리스는 망하고 잘 될 경우에만 비로소 앞서 논의된 폴리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일이 가능하게 여겨지기도 어렵고, 그리 여겨지더라도 최선인지 의문을 생기게 할 것이라고 염려한다. 또한 그는 전통에 대해 협잡꾼이 될까 걱정한다. 대화자들이 설령 결과가 잘못되더라도 놓아주리라 다짐하자 소크라테스는 남성극에 이어 여성극을 상연하겠노라 답한다. 

451d-457c : 경비견의 경우 암수 구분 없이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이를 위해 또한 구분 없이 같은 양육과 교육을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립된 폴리스에서도 남녀구분 없이 시가와 체육이 교육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폴리스에서는 성향에 따라 각기 고유하고 서로 다른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합의되었다. 따라서 남녀의 성향이 다르다면 같은 양육과 교육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고찰은 반박 기술에 속한다. 왜냐하면 같은 성향과 다른 성향 각각의 종을 규저하지 않고 자구에 매달려 논쟁하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같고 다른 성향은 영혼의 같고 다른 성향과 무관하다. 대머리든 아니든 제화공에 적합한 영혼은 모두 제화공의 직무를 수행하면 된다. 그러나 의사와 목수의 성향차이는 앞서의 차이와 전혀 다르다. 임신과 출산의 차이는 대머리 여부와 마찬가지의 차이일 뿐이다. 성별에 따른 힘의 차이는 있더라도 직무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남녀구분 없이 직무와 관련한 성향에 따라 고유한 직무를 부여해야 하고 따라서 같은 직무를 위해 같은 양육과 교육을 제공해야 하며, 수호자들의 경우에도 남녀구분 없이 그리해야 한다. 이제 남녀수호자들은 공동으로 모든 일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으로 한 차례의 파도를 헤쳐 넘었다. 그 다음 문제는 이런 직무와 교육 법제에 뒤따르는 법률이다.

457d-461e : 남녀가 서로 공유되고 그들의 동거가 금지되며 자식 또한 공유되고 혈연관계를 알 수 없어야 한다. 우선 이것의 가능성은 차치하고 그 이후의 일들을 통치자가 어찌 정리하는지 검토하기로 한다. 통치자는 법률에 따라 지시할 것이다. 유사한 남녀들이 공동식사와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교육과정에서 함께 어울려 본성상 서로 성적 관계로 이끌린다. 그러나 무질서한 관계는 통치자가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좋은 혈통을 남기기 위한 혼인을 고안해낼 것이다. 좋은 혈통의 암수 가축들을 적령기에 교배하듯 통치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결합시킨다. 앞서 약으로서의 거짓이 여기에서도 활용된다. 통치자들은 최선의 남녀가 최대한 관계를 자주 맺고 반대의 경우는 저열한 남녀를 짝지우며, 저자의 자식들은 양육하나 후자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지만, 이를 통치자들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한다. 혼인의 수는 폴리스의 적정 인구수를 고려하여 통치자들이 조정한다. 전공의 상으로 동침의 자유가 주어져야 하며, 뛰어난 자들의 자식들은 양육자들에게 데려가 양육하는 반면, 저열한 자식들과 불구 자식들은 숨길 것이다. 수유를 위해 산모들을 데려가되 역시 친자여부를 모르게 해야 한다. 남녀 각기 적령기(여성 20-40/남성 25-55)에는 통치자들의 조정 하에 관계하고, 이후 불임기의 남녀는 자유롭게 관계하되 근친은 피하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설령 자식을 낳더라도 그 자식은 양육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같은 시기에 태어난 자들을 형제로, 그 부모 세대를 모두 부모로, 조부 세대 역시 모두 조부로 서로 부르게 해야 한다. 통치자가 조작한 신탁에 따라 이런 의미의 형제자매간 혼인도 가능하다. 

462a-471b : 이상의 법령을 두고, 폴리스의 최대선이 무엇이고 그에 합치하는지 또 최대악은 무엇이여 그에는 합치하지 않는지 검토해야 한다. 모두가 친족이자 자기 사람들로 여기는 이 시민들은 같은 일을 자신들의 일로 여겨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한다. 이는 손가락의 상처를 온몸과 마음이 아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폴리스에서는 통치자들이 시민들을 보수를 주는 자들로 부르며 부양해 주는 자들이라 부른다. 또 통치자들 서로를 공동수호자로 부르며 서로를 친척으로 부르고 대한다. 이 명칭뿐만 아니라 행실까지 법으로 정해 서로를 친족으로 대하도록 한다. 수호자들, 보호자들의 처자공유는 이런 식으로 고통과 쾌락의 공유를 이루고 이는 최대선이다. 개별적인 사유재산이 서로를 가르고 분열시키는 반면 이러한 공유는 공감의 상태를 이룬다. 이들은 가계로 인한 잡다한 노고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분쟁으로부터 벗어나고 서로 돕고 공경하게 된다. 이는 올림피아 우승자보다도 복된 삶이다. 그는 생필품을 제공받으며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그의 승리는 폴리스 전체의 승리로 취급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자식대에까지도 부양받고 상과 장지를 받는다. 앞서 밝혔듯 굳이 특정집단인 수호자들만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전체 폴리스의 행복을 추구한 것이지만, 그들은 가장 행복한 상태에 놓였다. 더 나아가 수호자들은 자식들을 전장에 함께 데려가 교육시킨다. 전장의 위험을 수호자들이 알기에 자식들은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육과 양육을 통해 이 자식들은 말을 타고 위험에서 쉽사리 도망칠 수 있다. 또한 수호자들이 전투를 하면서 걸맞지 않은 두려움과 비겁함을 보인다면 직무를 강등시키고 생포된다면 적에게 넘겨줄 것이나 반면에 공을 세운 자는 그가 남녀불문 누구에게나 사랑받도록 할 것이다. 이로써 전투에 출중한 수호자의 혈통이 더 늘어날 것이다. 또한 고기를 상으로 내려 명예를 선사할 뿐만 아니라 그 체력을 기르게 할 것이다. 그들의 적에 대해서는 그리스 폴리스들의 경우 관대하게 대하여 야만인들에게 예속되는 일은 없도록 하고 노예로 삼지도 않을 것이다. 전사한 시신의 무장을 탈취하거나 그 회수를 방해하는 일은 금지된다. 또한 그리스 폴리스들 사이의 전쟁에서는 토지를 유린하고 가옥을 불태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불화에는 전쟁과 내분이 있는 바, 전자는 야만인에 대한 것인 반면 후자는 그리스인들 사이의 일이다. 즉 내분에서는 분열을 막기 위해, 장차 화해하기 위해서도, 토지유린과 가옥방화가 금지되어야 한다. 다만 내분이라는 불화의 장본인들만 적으로 삼아 그들이 처벌받게 될 때까지만 불화를 유지할 것이다. 

471c-473b : 이런 법과 이와 유사한 법이 필요하고 좋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글라우콘은 이제 다시 차치해 두었던 가능성의 문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는 세 차례의 파도 중 가장 큰 마지막 파도에 자신을 세운다며 한탄한다. 그는 이 논의가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탐구에서 이어진 것임을 언급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인간이 정의 그 자체와 완전히 같지 않더라도 최대한 가깝다면 만족할 것이라 말한다. 즉 일종의 본으로서 정의로운 폴리스와 정의로운 인간을 구상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본으로 그린 화가에게 그 인간이 실현될 수 없음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탓하지는 않겠듯, 훌륭한 폴리스의 본에 대해서도 그 실현여부로 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현되지 못한다고 하여 그 폴리스가 덜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실천이 말에 비해 진실에 덜 미침을 동의한다면 폴리스의 실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다만 어떻게 하면 이에 최대한 가깝게 폴리스가 통치될 수 있는지 찾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이 작업 이후 현재의 폴리스들은 무엇을 잘못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잘 통치되지 못하는지, 무엇이 변란을 겪어 이런 잘못된 형태로 나아가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473c-474c : 이 작은 변란이 가장 큰 파도에 관련된다. 그것은 철학이 통치의 능력과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러 성향들이 이 둘 중 어느 한 쪽으로 각기 따로 향하는 것이 저지되어야 한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악의 종식은 없다. 이 통합이 변질되어 폴리스는 잘못 통치되는 것이다. 철학이 정치와 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위해서는 철학자를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폴리스의 지도자로 되기에 적합한 성향이며, 여타의 사람들에게는 철학이 어울리지도 않고 이 지도자를 따르는 게 적합한 일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474c-480a : (philo-sophia, 지혜-사랑, 철학) 누군가 무엇을 사랑한다면 그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사랑하는 것이다. 소년애에 빠진 자는 피부색이나 코의 생김새나 무엇이 어떻든 사랑하는 소년의 전부 사랑한다. 명예를 사랑하는 자 역시 어떤 지위의 명예이든 가리지 않고 사랑한다. 철학자도 그렇게 모든 지혜를 욕구한다. 그러나 이는 아무것이나 보고 듣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아니라, 진리를 관조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미와 추,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 등 모든 형상은 각기 그 자체 하나이지만 여러 행위와 물체에 대한 공유와 상호결합을 통해 여럿으로 보인다. 구경을 좋아하는 자들은 아름다운 색, 형태, 그런 온갖 것들을 좋아하지만 아름다움 자체의 본성은 볼 수도 없고 반길 수도 없다. 그들은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고, 마치 꿈 속에서처럼 저 여러 아름다운 것들이 그것들이 모방하는 것 자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 자체를 믿고 여기에 참여하는 것들도 알아 이것들을 구분하는 자는 깨어있는 자이다. 후자의 사유는 앎이고 전자의 사유는 믿음에 불과하다. 전자의 사람이 항의한다면 그에게 인식하는 자에 관련하여 물어야 한다. 그는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있는가? 무언가 인식한다면 그것은 ~인 것이가 ~이지 않은 것인가? ~이지 않은 것은 알려질 수 없다. 완전하게 ~인 것은 완전하게 인식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어떤 식으로도 인식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면서 ~이지 않은 것은 순전한 ~임과 아무것도 아님의 중간에 놓인다. 이것들에 순서대로 앎, 무지, 그리고 그 사이의 어떤 것으로서 믿음이 상관한다. 앎과 믿음은 상이한 능력이며 상이한 대상에 관계한다. 그런데 ~인 것들 중 한 부류로서 능력은 그 자체로 빛도 형태도 없고, 구별할 만한 점을 볼 수 없다. 그것은 그 관계하는 대상과 작용만 볼 수 있다. 같은 대상에 같은 작용을 하면 같은 능력, 다른 대상에 다른 작용을 하면 다른 능력이다. 이제 앎과 믿음 모두 능력들이나 대상과 작용은 서로 다르다. 인식의 대상은 ~임이므로 믿음의 대상은 이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지 않음은 믿음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믿음은 무언가에 관계해야만 성립한다. ~이지 않음은 아무것도 아니며 무지를 대응시킨다. 따라서 믿음의 대상은 ~임도 ~이지 않음도 아니다. 그리하여 믿음은 앎도 무지도 아니다. 그러나 앎보다 명확하지도 무지보다 불명확하지도 않으므로 이 양극단을 넘어서지 않는다. 이제 여러 아름다운 사물들은 경우에 따라 추해 보이고, 여러 정의로운 것들도 경우에 따라 부정의해 보인다. 또한 어떤 것의 두 배는 동시에 다른 것의 반이기도 하다. 가볍거나 무거운 것도 마찬가지로 반대로 보일 수 있다. 많은 것들(ta polla)은 이렇듯 ~이지도 ~이지 않지도 않으며 ~이기도 하고 ~이지 않기도 하다. 이는 대중의 관례가 맴도는 자리이다. 이제 여러 아름다운 것들은 보지만 아름다움 자체는 못 보는 자는 믿음만 가질 뿐 앎은 없는 자이다. 반면 각각 그 자체로 언제나 똑같이 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이 ~인 것들을 보는 자들은 인식을 하는 것이며 믿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은 이런 자들이다. 이들은 믿음에 머무르는 자들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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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a-421c : 아데이만토스는 수호자들이 나라의 주인이면서도 불행하며 마치 용병과 같은 처지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남들은 이러한 재산을 향유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들이 가장 행복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렇더라도 지금 폴리스의 수립에서 염두에 두는 것은 특정 집단이 아닌 폴리스 전체의 행복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그러한 나라에서 정의를,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부정의를 알아보기 위한 처음의 의도에 부합한다. 전체 폴리스가 행복해야 한다. 앞서의 지적은 이를 테면 아름다운 조각상의 가장 아름다운 부위인 눈에 가장 아름다운 색이 자색이 아니라 검은색을 칠한다는 비난과 같다. 눈이 눈답게 해야 비로소 전체가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 더구나 다른 직군은 몰라도 수호자가 실제로 수호자인 게 아니라 단지 그렇게 여겨지기만 한다면 전체 폴리스가 파멸된다. 그러나 오직 이들만이 폴리스의 행복을 위한 계기를 쥐고 있다. 수호자는 폴리스 전체를 행복하게 하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며, 이를 이룬 뒤 각 집단은 각 성향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체 행복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421d-427c : 부와 빈곤이 다른 직군에 끼치는 영향이 검토된다. 부는 나태로 인해, 빈곤은 곤궁함으로 인해 상품의 질을 저하시키고 기술자 자신과 그 후계자들을 타락시킨다. 수호자들은 부와 빈곤이 폴리스에 들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 전자는 사치와 변란을, 후자는 자유인답지 못함과 저급한 기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아데이만토스는 부가 전쟁을 위해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론한다. 그러나 부자와 전사가 전투를 벌인다면 전문적인 전투기술을 갖춘 전사가 훨씬 유리하다. 또한 폴리스의 수호자들은 사유 재산이 없으므로 부자인 상대 나라를 회유하여 또 다른 나라에 맞서 동맹을 맺어 싸우도록, 그리고 전리품을 그들이 가지도록 만들 수 있다. 그들은 강한 전사들 보다는 그보다 나약한 자들과 싸우고자 할 것이다.
  아데이만토스는 다시 여러 폴리스의 재화가 한 폴리스에 집중됨은 위험하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수립 중인 폴리스 외에는 '하나의 폴리스'라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든 가난한 자들의 폴리스와 부자들의 폴리스가 있고 그 안에서도 여러 폴리스들이 나뉘어 언제나 한쪽을 다른쪽에 넘기면서 더 많은 동맹과 더 적은 적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의도된 대로 수립된 폴리스라면 명성이 아니라 실제로 가장 강한 폴리스가 될 것이다.
  이 여럿과 하나라는 것이 폴리스의 규모 결정의 기준이 된다. 폴리스는 하나로 머무를 한도까지만 성장해야 한다. 이 역시 수호자가 수호해야 하는 점이다. 이 통합을 위해 수호자의 자식도 자질에 따라 농부가 되고, 다른 집단의 후손도 우수한 경우 수호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은 교육과 양육만 잘 지킨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교육은 혼인, 출산 등 모든 것을 '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양육과 교육은 훌륭한 자질을 낳고, 이 자질은 교육을 통해 선조보다 더 계발된다. 따라서 건강한 교육과 양육의 방식은 그대로 고수되어야 하고 변화를 거부해야 한다. 유희로라도 변화가 유입되면 성격과 관행에 들어가 점차로 계약을 거쳐 법률과 정체에까지 미칠 것이다. 이는 폴리스를 전복시킬 것이므로 애초에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따라서 유희도 준법적이어야 한다. 예의와 효 등은 제대로 된 교육에 부수하여 그에 걸맞게 이루어질 것이다. 상거래의 세칙들도 마찬가지로 교육에 따를 것이다. 이런 세칙들에 집중함은 환자가 잘못된 습관을 고치지 않는 경우와 같다. 여러 약들을 먹더라도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이런 폴리스는 시민들의 법개정을 금지하지만, 시민들 비위를 맞추고 아첨을 하는 자에게는 존경을 주고 중책을 맡긴다. 이런 폴리스에서 중책에 스스로 나서는 자는 자신도 남들도 참된 정치가를 모르는 처지이다. 그러나 열심히 세칙들의 개정에 매달린다. 그러나 참된 입법가는 이런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 이어서 종교적 법령이 제정되는데, 이는 전통적 종교관, 전통 해설자에 따른다. 

427d-428e : 이제 폴리스가 수립되었다. 다음으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 있으며, 둘이 서로 무엇이 다르고, 행복하게 될 자가 어느 쪽을 지녀야만 하는지(실제로 어느 쪽을 지니게 되든지와 무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 폴리스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갖추었다. 정의를 처음 찾을 수도 있지만, 나머지 셋을 먼저 찾는다면 이 역시 남은 하나만이 정의일 것이므로 정의를 찾은 것이 된다. 그런데 이 폴리스에 가장 명백한 것은 지혜이다. 이 폴리스가 분별있기 때문이다. 분별은 앎에 의한 것이다. 이 폴리스에는 여러 앎들이 있으나, 부분적인 앎이 아닌 폴리스 전체에 걸쳐 안팎으로 숙고를 가능케 하는 그러한 앎은 완벽한 수호자들인 통치자들에게 있고 그 앎은 수호술이다. 그런데 이 집단은 여타 직군들에 비해 가장 적다. 따라서 천성에 맞추어 구성된 폴리스에서 전체의 지혜로움은 최소 집단, 그 부분과 그 지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지식(episteme)이 곧 지혜(sophia)이다.

429a-430c : 용기는 일종의 보전이다. 이 폴리스에서 용기는 한 집단이 폴리스에게 두려워할 것들에 대한 믿음을 보전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 집단이 법을 제정하여 교육을 통해 지시한 것이다. 바탕을 잘 준비하지 못한 양모에 염색을 하면 색을 망치듯, 시가와 체육을 통한 교육 없이는 법률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이 폴리스의 수호자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염색된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탈색되지 않는다.(구체적인 믿음의 내용들은 아마도 『법률』에서.) 

430d-432a : 절제를 제쳐 놓고 정의를 먼저 찾자는 소크라테스의 제안에 아데이만토스는 절제를 확인하고 싶다고 답한다. 절제는 화음과 화성에 유사하다. 그것은 일종의 질서로서, 쾌락과 욕망에 대한 자기극복이다. 그러나 자기극복은 동시에 자신에 대한 패배이기도 한 역설적 표현이다. 이를 구분하면 이기는 경우는 나은 자신의 나은 부분이 못한 부분에 대한 승리를 말하고 지는 경우는 그 역이다. 이 폴리스는 전자에 해당하므로 자신을 이기는 나라이다. 또한 일반인들에게는 여러 욕구들이 있으나 지성과 옳은 믿음을 갖춘 추론에 인도되는 욕망은 훌륭한 성향과 훌륭한 교육을 겸비한 자들에게 있다. 이 폴리스에서는 후자의 욕구가 전자의 욕구를 제압한다. 따라서 이 폴리스는 절제있는 폴리스이다. 더 나은 자의 통치에 대해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나 같은 믿음을 견지하므로, 여기에서 절제는 양편 모두에 있다. 이것이 화음, 화성과 유사한 측면이다. 지배에 대한 합의가 절제이다. 

432b-434c : 이제 남은 하나는 그를 통해 덕에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서 바로 정의이다. 이 정의에 대한 추적은 암중모색이나 소크라테스가 그 흔적을 발견한다. 그런데 정의는 이 폴리스의 수립 초기부터 강조된 바, 각자 본성 상 본디 적합한 한 가지 직무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각자의 일을 하고 다른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정의이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는 것이 정의이다. 앞서 지혜, 용기, 절제를 가능케 하고 또한 보전해 주는 것이 남은 한 가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남은 것은 정의뿐이므로 이것이 정의인 것이다. 폴리스의 덕에 대한 기여도는 앞서 세 가지에 정의가 못지 않다. 이는 판결에서도 목표가 된다. 각자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또한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또한 직무에 있어서 여타 전문가들의 일이 뒤섞임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전사의 일, 수호의 일이 다른 것들과 섞인다면 폴리스의 파멸을 초래한다. 장인, 전사, 수호자 셋 사이의 간섭이나 교체는 최대의 해악이자 악행이다. 이 악행은 곧 부정의이다. 이제 폴리스에서 정의가 밝혀졌고 그 반대로서 부정의도 확인되었다. 

434d-444e : 이러한 정의의 형상이 개인에게 적용되어 다시금 정의임이 확인되어야 한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정의를 찾아야 한다. 정의의 형상 자체는 크든 작든 같음 이름으로 닮은 것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인간은 정의로운 폴리스와 닮았다. 폴리스의 정의는 세 부류가 각자 고유한 역할을 한 덕분이며, 이 셋의 서로 다른 상태로 지혜, 용기, 절제가 성립했다. 인간의 영혼 또한 이렇듯 세 종류들을 지닌다. 폴리스 안의 것들은 영혼에서 유래하였으므로, 폴리스 내의 종류들과 성격들은 인간 영혼에도 똑같이 있다. 그런데 학습, 분노, 쾌락에 대한 욕구를 인간의 세 부분 각각이 따로 하는지 영혼 전체가 함께 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같은 것이 같은 부분에서 같은 것에 대해 반대되는 일을 동시에 행하거나 겪기는 불가능하다. 같은 것이 정지하는 동시에 운동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가만히 서 있는 인간이 팔과 머리를 움직일 수 있고, 이 경우 일부는 정지해 있지만 일부는 운동한다고 말해야 한다. 또한 회전하는 물체 또한 일부는 정지해 있지만 일부는 운동한다고 말해야 한다. 즉 축은 기울지 않고 정지해 있지만 원둘레는 운동한다. 긍정과 부정, 인력과 척력, 능동과 수동 등 이런 종류의 것들은 모두 반대된다. 마찬가지로 원함은 당기고 원치 않음은 밀어낸다. 이러한 욕구는 갈증의 경우 음료에 대한, 허기의 경우 음식에 대한 욕구이며 각기 고유하고 서로 다르다. 차고 더움 등의 부수적인 것들이 따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떤 성질의 것들은 어떤 성질의 것들에 대한 것인 반면, 그 자체인 것들은 그 자체인 것에 대한 것이다. 큼이 작음에 대하는 관계가 전자의 경우이다. 더함과 덜함, 배와 반, 무거움과 가벼움, 느림과 빠름, 온과 냉도 그러하다. 이것들은 상대적이다. 지식의 경우, 지식 자체는 배움 자체에 대한 것 혹은 무엇이든 대상일반에 대한 것인 반면, 특정 지식은 특정 대상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갈증도 음료 일반에 대한 갈증이다. 그러데 갈증에 처한 영혼은 음료만을 갈구한다. 이와 반대로 이끄는 것이 영혼 안에 있다면 결코 갈증에 처한 부분과 같지 않다. 이런 억제와 극복은 추론으로 생기며, 반대로 이끄는 것은 어떤 상태들이다. 전자는 영혼의 추론적 부분이고 후자는 비추론적이며 욕구적인 부분이다. 이 둘 외에 격정의 부분이 따로 있는지 혹은 앞서의 부분들 중 어느 하나인지 살펴 보아야 한다. 아데이만토스는 격정이 욕구의 일부라 짐작하나, 욕구에 대한 분노 역시 있기에 분노와 욕구를 별개이다. 격정은 이렇듯 추론에 협력하는가 하면 반대로 욕구에 협력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정의로 인한 처지에는 어떤 경우에도 분노하지 않지만 부정의로 인한 겪음에는 크게 분노한다. 이는 수립된 폴리스에서 보조자들이 통치자들에 순종하여 싸울 때 싸우고 지킬 때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재화를 생산하는 부류와 (통치자들을) 보조하는 부류 그리고 숙의 결정하는 부류 셋이 폴리스를 이루듯 영혼에도 세 번째 것으로서 격정적인 부분이 있다. 폴리스가 세 부류에 의해 지혜롭고 용기있으며 절제있게 되는 것, 그리고 정의롭게 되는 그 방식은 인간의 영혼이 세 부분을 통해 그리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정의는 제 자신의 일을 수행함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 영혼의 각 부분이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정의로운 인간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영혼에서 추론적 부분이 지혜와 선견지명으로 전체를 지배하고 격정적 부분은 이에 복종하고 협력하는 것이 적합하다. 이 둘 사이의 조화는 시가와 체육의 혼화가 추론적 부분을 키우고 격정적 부분을 달램으로써 만들어 준다. 이렇게 양육되고 교육 받은 두 부분이 욕구적인 부분을 지도한다. 폴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용기 있는 인간이란 이성의 지시에 따라 두려워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믿고 그 믿음을 보전하는 자이다. 또한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지시를 내리는 부분이 영혼 전체의 이익에 대한 앎을 갖춘 자이다. 그리고 절제 있는 자는 세 부분의 우애와 화합, 그리고 지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영혼의 소유자이다. 이런 자는 횡령, 절도, 반역, 사기 등을 결코 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배 및 피지배에서 영혼의 세 부분이 각기 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세 부분의 내분, 상호 간섭과 전체에 대한 모반이 부정의이다. 이는 질병상태와 같은 것이다. 지배관계를 본성에 따라 확립함이 신체의 건강이고 본성에 어긋나게 확립함이 질병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에서 덕은 일종의 영혼의 건강이고 악은 영혼의 질병과 추함, 허약함이다. 

445a-445e : 이제 주변의 의견과 상관없이 실제로 정의와 정의로운 행위가 이익인지 아니면 부정의가 이익인지 고찰해야 한다. 아데이만토스는 질병과 건강의 비유를 다시 언급하며 당연히 정의가 이롭고 부정의가 해롭다고 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한 가지인 반면 악은 여럿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이 중 언급할 만한 네 가지 것들을 살펴 보자고 제안한다. 정의가 하나이고 악이 여럿인 까닭은 폴리스의 방식이 여러 종류이듯 영혼의 방식들도 여럿이기 떄문이다. 그런데 정체와 영혼은 각기 그 방식이 다섯 가지이다. 지금 수립된 정체는 통치자들 중 한 사람이 특출나다면 왕도정체, 그런 자가 여럿이라면 최선자정체라 불린다. 이 둘은 한 종류이다. 여기에서는 양육과 교육이 같고, 그에 따라 법률은 바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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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a-389a : 신들과 영웅들을 모범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논의에 이어서, 용기를 함양시키는 교육을 위해 어떠한 설화가 필요한지 검토된다. 하데스의 일들이 사실이자 무서운 것들로 그려질 경우 이를 들은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고 죽음 대신 패배와 노예신세를 택할 것이다. 이 점에서 하데스를 찬양하도록 시인들을 감독해야 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하데스를 공포스럽게 묘사하는 구절들을 삭제하는 것은 그 작품성을 평가한 결과가 아니라 교육상의 해로움 때문임을 밝힌다. 자유인답기 위해서는 죽음보다도 노예신세를 더욱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수호자 교육을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훌륭한 자들은 서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음을 알기에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족적이기에 타인에 의존함이 적으므로 동료의 죽음에도 일반인보다 덜 두려워할 것이다. 따라서 유명한 위인들과 진중한 여인들이 아니라 못난 자들에게 비가를 돌려야 한다. 이리 하지 않는다면 이를 통해 배운 자들은 이런 짓을 하려 드는 마음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작은 고난조차 견디지 못할 것이다. 또한 신이나 영웅을 희화함도 안 된다. 이를 보고 웃음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는 큰 변화를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389b-389d : 진실이 중시되어야 하며, 거짓은 신들에게는 쓸모도 없으나, 인간들에게는 약으로써, 의사에게 한하여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통치자들은 폴리스의 이익을 위해 적이나 시민에게 거짓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의 경우 환자가 의사에게 또는 선원이 선장에게 거짓을 하는 것과 같거나 그보다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구상되는 폴리스에서 거짓을 행하는 자는 폴리스를 전복시키고 파괴할 관행을 들이는 자로서 처벌받는다. 

389e-392c : 젊은이에게는 절제 또한 교육되어야 한다. 대다수에게는 지배자를 따르고 자신의 욕정은 지배하는 것이 절제이다. 지배자의 경우 신이든 인간이든 주색에 빠지거나 욕정에 휘둘리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이들이 인내를 보여주는 모습이 교육되어야 한다. 영웅들이 재물을 탐하고 신에게 대항하며 오만하게 구는 옛 시인들의 묘사는 검열받아야 한다. 이런 시들이 교육될 경우 젊은이들이 영혼의 악에 무신경하게 될 위험이 있다. 여기까지의 신들과 영웅들이 아닌, 인간사에 대한 시인들의 묘사를 논하기 위해서는 결국 처음의 논의에서 탐구하던 그 정의를 먼저 알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시인들은 정의로운 자가 불행하고 부정의한 자가 행복하다고 말하며, 소크라테스 무리는 이에 반대하며 이와 반대의 설화를 그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의가 무엇이고 그것을 지닌 자가 어찌 보이든 그 본성상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따라서 설화의 내용에 관하여서는 이것으로 일단락된다.

392d-398b : 이제 문체(lexis)의 문제로 나아간다. 설화는 단적인 서술과 모방을 통한 서술 두 가지가 함께 한다. 시인은 등장인물을 흉내내기도 하고 그 자신이 화자로 나서기도 한다. 시와 설화 중 비극과 희극은 전적인 모방으로 서사가 진행되고 디튀람보스 시가는 단적인 서사만 진행되며 서사시는 양쪽 모두를 행한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검토가 진행된다. 모방만으로 서사를 진행해야 하는지, 일부의 모방만 수용해야 하는지, 후자의 경우 모방해도 좋은 것도 그렇지 않은 것은 각기 무엇인지, 혹은 모방을 전면적으로 금지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한다. 이는 비극과 희곡의 수용여부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논의는 수호자 교육을 위한 것이므로, 수호자가 모방을 필요로 하는지 고찰해야 한다. 지금 구성되는 폴리스의 개개인은 각기 고유한 능력과 기술로써 서로 다른 직무에 종사한다. 이들은 동시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수행할 수 없다. 모방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것들을 모방하는 것은 한 가지 것만을 모방하는 것에 비해 훌륭하게 수행될 수 없다. 이제 수호자는 자신의 고유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기에,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을 모방하기까지 하여 모방에 능해질 수는 없다. 심지어 유사한 모방들인 희극과 비극조차 동시에 잘 해낼 수는 없다. 나아가 가객이나 배우가 되는 것도 희극 배우인 동시에 비극 배우가 되는 것도 역시나 잘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수호자는 여타 전문직을 모두 버리고 자유의 장인이 되어야만 한다. 이 처음의 주장에 따르면 용기와 절제, 경건은 모방하되 비겁과 수치는 모방하지 말아야 한다. 모방은 습관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수호자는 남성으로서 여성을 모방하거나 노예를 모방하는 일도 없으며 무절제하거나 광기 들린 자들 역시 모방하지 않는다.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을 모방하지도 않고 자연물을 모방하는 일도 없다. 이제 서사의 한 종류는 두 가지이다. 우선 훌륭한 이가 훌륭한 사람의 말투나 행동에 대한 서사에 이르러서는 모방을 하나, 그 훌륭한 사람의 비참이나 좌절은 모방하지 않는 반면,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말투나 행동 서사에서는 유익한 장면이 아니라면, 자신보다 못한 자에 대한 모방을 바라지도 않고 능하지도 못하기에 모방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이 온갖 것들을 모방해대고 정작 서사는 적은 방식이 있다. 전자에 선법과 리듬이 부여되면 변화가 적기에 일관된 문체로 서사를 진행할 수 있다. 이 두 문체들 둘 중 어느 하나나 그 둘의 혼합이 서사의 방식들이다. 지금 구성되는 폴리스에서는 구성원 각자가 고유한 직무를 수행하며 일관되기에 양면적인 자도 다면적인 자도 없으므로, 혼합형도 마구잡이 모방도 거부된다. 외부에서 모든 일들에 능하고 모든 것을 모방할 수 있는 자가 오더라도, 놀랍고 재미있는 자라 칭찬할지언정 이 폴리스에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보다 재미없는 시인과 이야기꾼이 상기 법제에 따라 설화로써 교육할 것이다. 이로써 시가 및 설화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된다.

398c-402b : 노래와 서정시가의 양식이 검토된다. 노래는 말과 선법, 리듬으로 구성된다. 리듬은 말, 가사에 따라 분위기에 맞추어 조정된다. 비탄조 혼성 리디아 선법, 고음 리디아 선법 및 그런 유의 것들은 제외된다. 비탄과 한탄이 이 폴리스에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연을 위한 이오니아 선법, 리디아 선법 중 느슨한 몇 가지도 만취와 유약, 나태와 함께 거부된다. 용기있는 자의 어조와 억양,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굳건한 의지와 인내를 가진 자의 어조와 억양, 신에게는 기도하고 인간에게는 가르치고 충고하며, 절제 있고 절도 있는 자의 어조와 억양을 모방할 수 있는 선법만이 필요하다. 글라우콘은 이런 선법이 도리아 선법과 프리기아 선법이라 말한다. 이런 선법만이 남아 현이 많은 악기, 여러 선법을 이용하는 악기도 불필요해진다. 이런 것들이 모방한 아울로스까지 포함하여 그 제작자들도 폴리스에서 불필요하다. 리라, 키타라, 피리와 그 제작자들로 충분하다. 이렇게 사치스러운 나라가 완전히 정화되었다. 남은 것은 리듬에 대한 조정이다. 훌륭한 삶을 나타내는 리듬은 그러한 말에 따라야 하며 역으로 선법과 리듬에 말이 따라서는 안 된다. 여러 리듬들이 있으나 자세한 논의는 어렵고, 단지 우아함과 추함이 문제이다. 전자는 좋은 리듬, 후자는 나쁜 리듬을 따른다. 이들은 또 각기 아름다운 문체와 이에 반대되는 문체에 따르며, 이는 조화와 부조화도 마찬가지이다. 리듬과 선법이 말을 따르기 때문이다. 다시, 문체와 말은 영혼의 성격을 따른다. 이는 다른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표현들은 좋은 성격을 따른다. 반면 나쁜 표현들이 나쁜 성격을 따른다. 따라서 좋은 성격의 모상을 작품 속에 새겨넣을 예술가들, 이런 것의 성질을 천부적으로 추적할 줄 아는 자들을 남겨놓고 그렇게 감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젊은이들은 나쁜 풀을 먹고 자란 것처럼 큰 악을 품게 될 것이다. 반면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 양육된다면 큰 선을 품을 것이다. 이것이 시가 교육의 중요성이다. 이것이 성격을 형성하고, 그러한 성격이 선악에 대해 제대로 호오를 갖출 수 있게 한다. 또 이를 통해 스스로 훌륭한 자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문자를 숙달한 상태에서 글씨가 크든 작든 어디에 쓰였든 무관하게 그 내용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가에 능해짐으로써 훌륭한 성격(덕)과 악덕, 그 상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가든 알아보고 그것이 똑같은 지식과 훈련에 속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영혼 안에 훌륭한 성격이 들고 그에 합치되는 것들이 외모에 부여되어 이 둘이 같은 원형에 관여하여 있다면, 사랑함직 하다. 그러나 이런 자에 대한 사랑은 절제와 함께 하여야 한다. 선의의 교제를 넘어서는 관계는 무식하고 아름다움에 쑥맥인 자라 비난받는다.

402c-408c : 시가 이후에는 체육을 교육받아야 한다. 영혼의 덕이 육체의 덕을 이룬다. 우선 육체가 영혼을 따르도록 하고, 술을 삼가고 단순한 식사를 유지한다. 화려한 음식이나 여색을 멀리해야 한다. 영혼에서 다양성은 무절제를 낳고, 육체에서는 질병을 낳는다. 반면 단순성은 혼에 절제를, 몸에 건강을 낳는다. 질병에 걸려 타인에 의존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연명에 연연하며 자신의 고유한 직무에 투자할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약이나 절제술 등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치료가 장기간의 치료보다 낫다. 혹은 긴 치료를 요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그에게 이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몸에 대한 지나친 과심도 가정과 사회에 문제가 된다. 이런 지나친 관심은 철학을 하기 어렵게 하고, 다시 철학으로 인한 노고를 질병으로 간주하게 하여 덕의 수련에도 방해가 된다. 이런 이유로 아스클레피오스가 단기간 치료만을 행하고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자는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말해야 한다. 

408d-412b : 훌륭한 의사와 훌륭한 판관이 필요한가? 의사는 병과 상처를 겪음으로써 유능해지고, 따라서 몸이 아닌 영혼으로 몸을 치료하는 자이다. 반면 판관은 영혼으로 영혼을 다스린다. 따라서 영혼에 대한 악들을 경험하지 않아야 한다. 본성상 악하지 않기에 악이 무엇인지 아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려 판관은 노년이 어울린다. 영혼의 악에 익숙한 자도 역으로 훌륭한 판관을 의심하게 마련이다. 둘 각자는 상대편에 대한 본을 천성적으로는 지니고 있지 못하다. 저열함은 훌륭함도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지만 덕은 교육을 통해 자신도 저열함도 알게 될 것이다. 골골대는 자들과 영혼이 불치의 상태인 자들은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또한 시가를 통해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판관이 필요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시가에 따라 체육까지 교육받은 자는 의술 역시 필요치 않을 것이다. 체육은 힘이 아닌 기개를 위해 연마할 것이다. 따라서 시가도 체육도 모두 영혼을 위한 교육이다. 전자만 행하면 필요 이상 유약해지고 후자만 행하면 필요 이상 사나워진다. 수호자들은 이 양면을 겸비해야 한다. 체육과 시가는 격정과 철학을 위한 것이다. 이 모두는 영혼을 위한 것이다. 이 둘의 혼화를 가장 잘 조율하는 감독자가 교육과 양육의 규범들이다. 

412c-414b : 수호자들 중 다스릴 자와 다스림을 받을 자가 정해져야 한다. 연장자가 통치하고 연소자가 통치받는다. 통치자들은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자들이기도 해야 한다. 그들의 직무를 고려하면 폴리스를 가장 잘 수호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는 폴리스의 문제에 현명하고 또 폴리스에 마음쓰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마음쓰고 사랑하는 일은 대상과 자신의 이해가 상통할 때 가장 커진다. 따라서 나라의 이익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 외에는 전혀 행하지 않고자 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 믿음(doxa)이 지켜지는지 생애에 걸쳐 관찰되어야 한다. 거짓 믿음의 경우는 자발적으로 버리게 될 것이나, 이를 도둑맞거나 홀려서 혹은 강탈당하는 식으로 잃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의 논의, 시간에 의한 망각, 고통과 슬픔에 의한 강제, 쾌락과 공포로 인한 믿음의 변경 등이 있다. 따라서 잘 잊지 않고 속지 않는 자들에게 그 믿음을 잊기 쉽고 속기 쉬운 일들을 맡겨 시험해야 한다. 또한 고통과 수고를 부여하여, 그리고 쾌락과 공포를 주어 시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오염되지 않는 자를 수호자이자 통치자로 임명해야 한다. 이들은 내부로든 외부로든 모든 적들이 나라를 해칠 수 없게 하는 완벽한 수호자들이다. 이전까지 수호자들로 부른 연소자들은 이 통치자들의 믿음을 위한 보조자이자 협력자여야 한다.

414c-417b : 여기에 거짓말이 필요하다. 그들의 지역, 그 대지는 어머니이고 시민들은 모두 형제이다. 신은 이 대지의 자식들 중 통치자가 될 자들에게 황금을 섞고 보조자에게 은을, 여타의 시민들에게 쇠와 청동을 섞었다. 이후의 자손들은 대개 이 선조를 닮는다. 그러나 이것이 엇갈리기도 한다. 신은 이를 분별하여 혼합된 상태마다 걸맞는 직무를 맡기도록 하는 일을 수호자들에게 명했다. 쇠나 청동이 혼합된 자가 통치한다면 폴리스는 멸망할 것이다. 이런 거짓말은 세대에 걸쳐 설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더욱 폴리스와 서로에게 마음 쓰도록 만들 수 있다. 통치자들은 시민들을 이끌고 폴리스 내에서 내란과 외침을 통제하기 적합하고 계절을 나기 좋은 주둔지로 향한다. 그러나 이런 장소는 통치자들이 시민들을 수호하지 않고 오히려 해치려 들 때에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통한 훌륭한 영혼의 형성이 강조된다. 또한 수호일에 방해가 될 만한 사유재산은 금지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한 거처가 금지되어야 하고, 최소한의 보수와 공동식사가 제공되어야 한다. 또한 야영하는 군인처럼 공동생활을 하여야 한다. 영혼의 금은 이외의 금은보화는 필요치 않다. 개인의 토지와 주택과 재산을 가질 경우 수호자들은 시민의 협력자가 아닌 적대자가 될 것이다. 이 또한 법제화되어야 한다.

-蟲-

357a-358d : 글라우콘이 트라시마코스의 논의를 더 완벽하게 반박당할 수 있게끔 강화시키고자 한다. 자체로 좋은 것, 자체로도 좋고 부수적으로도 좋은 것, 자체로 고되나 부수적으로 좋은 것.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두 번째 부류라 여기고 글라우콘은 대다수 사람들이 세 번째라 여긴다고 말한다. 글라우콘은 부정의도 정의도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능력인지 밝혀져야 하는 것이지 그것들에 의한 결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또한 사람들이 정의를 무엇이며 그 기원은 무엇이라 말하는지, 다음으로 그 실천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자발적이지 않다는 것, 세 번째로 이것이 정당하다는 점을 말하겠노라 한다. 

358e-359b : 부정의를 당한 피해가 그걸 행한 이익보다 훨씬 크다. 당하지 않고 행하기만 하는 일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법을 세운다. 이것이 정의의 기원이다. 이는 처벌 없는 부정의와 보복하지 못하는 피해라는 최선과 최악의 가운데 것이다. 

359c-360d : 특권적 자유(exousia)가 있다면 누구든 처벌 없는 부정의를 택할 것이다. 기게스의 반지가 있다면 정의로운 자든 부정의한 자든 욕망이 같은 곳으로 이끈다. 

360e-362c : 완전히 부정의하여 실수 없이 정의롭다는 평판까지 얻는 자와 완전히 정의롭기에 부정의하다는 누명조차 벗지 못하는 자를 비교해야 한다. 단지 그리 여겨지는 것이 아닌 실제로 엄밀한 정의와 엄밀한 부정의를 비교해야 한다. 이 경우 사람들은 정의로운 자가 부정의하다는 평판으로 죽임을 당할 것이고 부정의한 자는 정의롭다는 평판을 통해 관직을 얻고 상대를 이기며 부를 쌓아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362d-367e : 아데이만토스가 부언한다. 정의를 칭송하는 자들은 정의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한 명성을 찬양한다. 실제와 무관하게 정의롭다는 평판은 생전이나 사후에나 여러 좋은 것들을 얻게 해주고 부정의하다는 악명은 온갖 처벌들을 내린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정의와 절제가 아름답지만 고된 것인 반면 무절제와 부정의는 쉽고 달콤하되 단지 법과 평에서만 수치스럽다고 말한다. 신들마저도 정의로운 자에게는 시련과 고난을, 부정의한 자에게는 그 반대의 운명을 내린다. 그리고 기원과 제사로 면죄를 받거나 정의로운 자를 해할 수도 있다. 여겨짐이 진실을 제압하며 행복을 좌우한다. 인간들의 평판은 당파나 궤변으로 얻을 수 있고 신들에게서의 평판은 제물과 기원으로 얻을 수 있다. 사후의 심판마저 입교와 헌신으로 피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의 결과와 부정의의 결과에 비추어 보면 가능한 자는 모두 최대의 부정의를 택할 테고, 능력이 없는 자들이나 이를 비난할 것이다. 이는 정의와 부정의를 그 자체로 설명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부수하는 것들을 제외하고 그 자체로 정의와 부정의가 각기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두고 비교해야 한다. 

368a-371e : 신뢰할 만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반론으로부터 정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의 무능을 보충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 시력이 나쁜 자에게 작은 글씨를 읽히기 위해 더 큰 곳에 더 크게 쓰인 같은 글씨를 먼저 보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필요하다. 지금의 경우, 한 개인의 정의가 있다면 폴리스 전체의 정의 또한 있다. 후자를 검토해 전자와 유사성을 검토하여 전자를 검토하는 것이 좋다. 논변을 통해 폴리스를 구성하면 거기에서 정의와 부정의를 관찰할 수 있다. 폴리스는 자족할 수 없는 자들의 협력을 기원으로 한다. 이는 필요(chreia)이다. 우선 의식주의 필요가 농부, 건축가, 직조공, 제화공, 의사를 모은다. 이것이 가장 필연적인 나라(어쩔 수 없는 최소 한도의 나라)이다. 이들은 각기 자신의 기능을 공동을 위해 사용한다.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 고유한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 적기에 하여 공유함이 가장 효율적이다. 이들의 작업도구를 제작하기 위한 목공, 대장장이 등의 장인들이 필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축산기술자들도 추가된다. 무역 없이 자족하긴 거의 불가능하며, 거래를 위해 수출품이 필요하므로 국내 필요량 이상의 생산을 위한 더 많은 기술자들이 필요하다. 무역을 위한 상인들이 필요하며, 운송을 위한 항해사들이 필요하다. 국내 공유물은 매매를 통해 교환되며 이를 위해 화폐와 시장이 필요하다. 무능력하고 무용한 자들은 기술자들을 대신하여 이러한 거래를 떠맡는다. 이 외에 육체노동을 도울 임금노동자들이 필요하다. 이것이 완전히 성장한 나라이다.

372a-374d : 이 나라의 구성 과정과 마찬가지로 그 안의 정의와 부정의도 필요에 의해 발생할 것이다. 최소의 생존을 유지하는 '돼지들의 나라'에 더해 글라우콘은 노고를 참지 않고 누워서 잔치를 즐기는 호사스러운 나라를 언급한다. 전자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겅간한 나라로, 후자는 염증을 지닌 나라로 불린다. 염증의 나라에는 사치품들이 추가된다. 이를 위한 폴리스의 확장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사냥꾼과 모방가, 예술가와 세공인들이 추가된다. 또한 여러 종류의 시종들이 포함된다. 이 과정에서 더 많은 의사가 필요하고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더 많은 식량과 영토가 필요하게 된다. 이로써 전쟁이 발생한다. 전쟁뿐만 아니라 다른 악들도 이 필요 이상의 재화 추구를 기원으로 삼는다. 이렇게 확장된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고 군대 만큼 폴리스도 확장된다. 각기 고유한 능력과 그에 맞는 기술이 다르므로, 군인 또한 병법의 전문가로서 기존 시민들로는 구성될 수 없다. 

374e-376a : 수호자의 기능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직무에는 적성이 요구된다. 마치 혈통 좋은 개와 마찬가지로, 예민한 감각과 민첩함, 강한 힘이 육체에 요구되고 용맹해질 수 있는 격정이 정신에 요구된다. 그러나 이것만 갖출 경우 폴리스 자체 내에서 다른 자들을 공격할 수 있다. 따라서 오순하면서도 동시에 대담한 성격이 요구된다. 이 상반된 듯한 두 성격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지인들에게는 온순하지만 타인들에게는 사나운 혈통 좋은 개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이 경우 개는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데에 앎과 모름에 의해 그리하기에 개는 지혜를 사랑한다. 따라서 온순하면서 동시에 대담하기 위해 수호자는 천성적으로 지혜를 사랑해야 한다. 

376b-381e : 수호자의 교육 문제가 대두된다. 체육과 시가가 각기 신체와 영혼을 위한 교육이다. 시가의 경우 논의들로 이루어지고, 논의들은 진실과 거짓으로 구분된다. 통상 설화가 먼저 교육되므로 거짓이 앞서 교육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설화를 체육보다 먼저 교육시킨다. 유년기에 가장 잘 수용되기 때문에 설화에 대한 감독이 필요하다. 특히 헤시오도스나 호메로스 이래의 작가들에 의한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악의적 묘사를 비판해야 한다. 신들의 친족살해, 상호 전쟁과 음모는 큰 재화를 지불하지 않고는 듣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한 이와 유사한 설화의 창작은 금지해야 한다. 설령 그 함의가 좋더라도 유년기에는 파악할 수 없으니 함의와 무관하게 금지된다. 따라서 덕에 관한 최대한 훌륭한 작품들을 듣도록 해야 한다. 신은 신답게, 그 자체로 선이며 온갖 선의 원인이며 악에 대해서는 행하지도 일으키지도 않는 것으로 그려져야 한다. 신이 행하는 처벌과 응징은 그 결과 또한 선이어야 한다. 벌을 받은 자 역시 이 결과로 신의 은혜를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또한 덕 있는 상태의 것, 훌륭한 것은 영혼이든 물체든 가장 덜 변하게 마련이므로, 신은 변신하여 기만하는 게 아니라 본모습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설령 변하고자 한들 누구든 자신을 더 낫게 변화시킬 것이므로, 최선의 존재인 신은 자신을 변화시킬 더 나은 상태가 없기에 변하지 않을 것이다. 

382a-383c : 신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말이나 행동으로 환상을 보여 인간을 기만할 가능성이 남는다. 그러나 사실(ta onta)에 있어서 혼에서 이루어지는 기만은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한 거짓이며 이는 누구나 두려워 하는 일이다. 이러한 무지가 진정한 기만이며 말의 거짓은 그 모방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진정한 거짓인 무지는 신이나 인간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말의 거짓은 경우와 사람에 따라 유익할 수 있다. 과거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없을 때, 가능한 진실에 가깝게 만든 거짓은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신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는 전지하며,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가 사랑하는 자들 중에는 무지하거나 광기에 들린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진정한 거짓도 그 모방인 거짓도 허용하지 않는다. 신은 첫 번째로 선하게 그려져야 하며, 두 번째로 불변하며 거짓 없는 것으로 그려져야 한다. 이런 점들에서 전통의 시인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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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

화 

수 

목 

금 

토 

일 

0900 1000

 

 

 

 

 

 

 

1000 1100

 

 

 

 

 

 

 

1100 1200

 

 

 

 

 

 

 

1200 1300

 

 

 

 

『향연』
서울대(학부)
이윤철

 

 

1300 1400

 

 


 

『향연』서울대
이윤철

 

 

1400 1500

 

 

『국가』5-7권
서울대(대학원)
강성훈

 

『향연』
서울대(~1520)
이윤철

 

 

1500 1600

 


『국가』5-7권
서울대
강성훈

 

『파르메니데스』정암
김인곤

 

 

1600 1700

 


『국가』5-7권
서울대
강성훈

 

『파르메니데스』정암
김인곤

 

 

1700 1800

 


 

 

『파르메니데스』정암
김인곤

 

 

1800 1900

 

 


 

 

 

 

1900 2000

 

『국가』윤독
정암
강성훈, 김주일,
김혜경, 정준영

『티마이오스』
윤독 정암
김유석

 

아리스토텔레스
『천체론』정암
유재민

 

 

2000 2100

 

『국가』윤독
정암
강성훈, 김주일,
김혜경, 정준영

『티마이오스』
윤독 정암
김유석

 

아리스토텔레스『천체론』정암
유재민

 

 

2100 2200

 

『국가』윤독
정암
강성훈, 김주일,
김혜경, 정준영

『티마이오스』
윤독 정암
김유석

 

아리스토텔레스『천체론』정암
유재민

 

 

대충 이렇게 될 듯한듸. 시간 겹치는 것도 있고 이렇든 저렇든 논문도 못 쓴 주제에 이것저것 기웃거리기도 좀 꽁냥꽁냥하고 그래도 죄다 관심이 확 땡기는 것들인지라 단호히 내쳐 버리기도 좀 찌뿌둥하고 모르겄네. 아아, 앗싸리 한 학기 미뤄 버릴까=_=...

-蟲-


  327a-b : 화자는 소크라테스이다. 익명의 상대에게 '어제'의 일을 전해준다. 어제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피레우스 항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벤디스 여신께 축원을 드리고 거기에서 열리는 축제를 구경했다. 그들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노예를 시켜 그들을 붙들었다. 

  c-328c : 폴레마르코스, 글라우콘의 형제 아데이만토스, 니키아스의 아들 니케라토스 등 몇 사람이 합류하였고, 폴레마르코스는 자기들이 머릿수가 많으니 힘으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저녁에 횃불 경주와 철야제가 구경할 만하니 머물러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폴레마르코스의 형제 리시아스와 에우튀데모스, 칼케돈의 트라시마코스와 파이아니아의 카르만티데스, 아리스토니모스의 아들 클레이토폰이 있었고,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가 제물을 바친 뒤 제관을 쓴 채로 앉아있었다.

  c-329d : 케팔로스 주위로 둘려 놓인 의자에 사람들이 앉았고,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주 들르지 않는다고 서운해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 몸의 즐거움이 약화되어 대화에 대한 욕망과 즐거움은 그 만큼 커졌으니, 소크라테스가 자주 들러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말을 받아 케팔로스가 먼저 경험하였고 다른 이들은 아직 겪지 못한 노년의 문턱에 대해 그것이 어려운 고비인지 말해 줄 것을 청한다. 케팔로스는 노년에 이른 사람들이 젊을 적의 주색을 아쉬워하고 노인에 대한 사람들의 홀대를 한탄하며 온갖 불행이 노령 탓이라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자신은 그리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노년의 소포클레스가 성적 쾌락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것이 광포한 주인과 같은 것이며 그로부터 벗어난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케팔로스는 노년이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그로 인한 평화를 주는 것, 광적인 주인들에게서 풀려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노령이 문제가 아니라 생활방식이 절도 있고 쉬이 만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라고 말한다.

  e-330a : 소크라테스는 노령의 평안이 생활방식이 아니라 재물 덕분에 가능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케팔로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을 인용하여 반대한다. 세리포스 출신의 누군가가 그에게 그의 명성은 그 자신의 덕분이 아니라 말하자, 그가 상대에게 자신이 세리포스 출신이어도 유명할 수 없겠지만 상대가 아테네인이어도 유명할 수 없을 것이라 답했다고 한다. 지역과 마찬가지로 재물의 경우에도 그것을 갖춘 사람의 품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b-331d :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의 재산이 얼만큼 상속받은 것이고 또 얼만큼 불리거나 잃었는지 묻는다. 케팔로스는 조부 케팔로스 보다는 덜 가졌으나 부친 리사니아스 보다는 늘렸노라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가 스스로 재산을 모은 게 아니라 상속 받았기 때문에 애착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반면 스스로 번 자들은 시인이 자신의 작품을 애지중지하듯 부 이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으로 얻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케팔로스는 노년에 이르러 저승에서 벌을 받을 일이 두려워지게 마련이라 말한다. 그리고 재산은 품성이 훌륭한 자가 재산 탓으로 인간이나 신에게 의도치 않게 거짓을 고하거나 빚을 지는 등의 잘못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렇게 훌륭한 자에게는 가장 쓸모 있는 것이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듣고서 정직함과 갚을 것을 갚는 것이 단적으로 정의인지 되묻는다. 그리고 정직하고 되갚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는 정상인 친구가 맡겼던 무기를 이후에 그 친구가 미쳐서 돌려달라 할 때에 돌려주거나 이를 곧이곧대로 밝히는 건 잘못이 아니냐는 예시를 든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단적인 정직과 갚음은 정의(正義)의 정의(定意)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d-332c : 케팔로스는 제물을 보살피기 위해 자리를 뜨면서 논의를 폴레마르코스에게 상속한다. 폴레마르코스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이다'라는 시모니데스의 언명을 지지하면서 케팔로스의 말이 맞다고 소크라테스에게 반론한다.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의 말을 의심하기는 어려우나 그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논의를 이어 나아간다. 단적인 정직과 갚음은 앞서의 반례로 정의로운 것이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재차 지적하는 그에게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에 대해서는 좋은 것을 돌려주고 나쁜 것은 주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말한다. 반면 적에게 갚을 것은 적에게 적절한 것, 즉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대답을 통해 시모니데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한다. 각자에게 적절한 것이 곧 갚을 것이다. 
  → 
재산의 상속과 논의의 상속. 단순한 말장난? 케팔로스의 입장이 폴레마르코스에게서 유지, 계승, 발전되는가? 이 과정에서 시모니데스의 입장은 케팔로스의 입장과 동일한 것인가?

 d-334b : 의술은 몸에 약과 음식을 주는 기술로서, 몸에 적절한 것을 주는 것이다. 조리술은 요리에 조미를 주는 기술이다. 이 구도에 따라 정의는 친구들과 적들에게 각기 이로움과 피해를 주는 것이다. 의사는 의술로써 친구의 병을 고치고 적을 병들게 할 수 있다. 선장은 항해하는 이들에게 바다의 위험에 대해 마찬가지로 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을 해롭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자가 어떤 행위, 어떤 일에서 친구와 적에게 각기 이롭게 또 해롭게 하는 자인지 묻는다. 폴레마르코스는 전쟁이라 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병들지 않은 자에게 의사가 소용이 없고 항해하지 않는 자에게 선장이 소용 없듯, 전쟁을 하지 않는 자에게 정의로운 자도 소용이 없는지 되묻는다. 폴레마르코스는 이에 반대한다.
  → 여기에서 정의(dikaiosyne)가 기술(techne)에 유비된다. 이러한 이행이 자연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할 듯.
  평화시에 정의의 효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가 진행된다. 농사기술은 평화시에 작물의 수확에 유용하다. 제화술도 평화시 신발의 생산에 유용하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식으로 볼 때 정의는 어떤 유익함이 있는지 묻자 폴레마르코스는 약속(계약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이라 말한다. 약속은 공동으로 행하는 일들이다. 이는 바둑도 마찬가지이다. 헌데 바둑에서는 바둑기사가 정의로운 자 보다 더 좋은 상대이다. 또한 함께 건축을 한다면 건축술을 갖춘 자가 정의로운 자보다 더 유용할 것이다. 어떤 공동의 일이 정의로운 자가 유용한 영역이냐는 물음에 폴레마르코스는 금전관계라고 답한다. 그러나 돈을 쓰는 경우에는 무엇을 사느냐에 따라 말의 경우에는 말 전문가, 배의 경우에는 조선기술자나 선장이 정의로운 자보다 유용하다. 그리하여 돈을 쓰지 않고 보관할 때에 정의로운 자가 유용하다. 돈뿐 아니라 악기의 경우에도 그것이 쓰일 때엔 그 악기에 대한 연주기술이, 무장의 경우에도 사용할 때에는 해당 무장기술이 유용하며 정의는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 유용한 것이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이어서 보관하고 지키는 것을 전투에서의 공격과 방어에 연결시킨다. 공격에 능한 자는 방어에도 또한 능하다. 병의 경우에도 그것을 막는 데 능한 자는 그것을 일으키는 데에도 능하다. 군대를 잘 수호하는 자는 또한 적군의 책략과 작전을 알아차리는 데에도 능하다. 이를 일반화하여 어떤 것의 유능한 수호자는 바로 그것을 잘 훔쳐낼 수도 있다. 만일 정의가 무언가 보관하여 지키는 것이라면, 정의는 다시 그 무언가를 훔쳐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의는 친구의 이익과 적의 손해를 위한 절도 기술이다. 도둑질과 거짓맹약에 능한 자가 정의로운 자이다. → 그러나 이는 애초에 케팔로스에게서 넘겨 받은 정의, 정직에 배치된다.

 c-335a : 폴레마르코스는 정의가 잘 지키는 도둑의 기술이라는 결론에 혼란을 겪고, 그럼에도 시모니데스의 언명대로 정의는 여전히 친구에게 이롭고 적에게 해롭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고수한다. → 이는 정직과 갚음 중 전자에 대한 폐기, 후자에 대한 고수로 해석될 수 있을 듯하다. 소크라테스는 이 정의에서 친구와 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되묻는다. 그는 친구란 좋은 자로 여겨지는 자인지 혹은 그리 여겨지지 않더라도 실제로 그러한 자인지, 적의 경우에도 그가 나쁜 자로 여겨지는 자인지 혹은 그리 여겨지지 않지만 실제로 그런 자인지 묻는다. 폴레마르코스는 좋게 여겨지는 자가 친구이고 나쁘게 여겨지는 자가 적이라 답한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좋거나 나쁘지 않더라도 그렇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며, 이 경우 좋은 자, 즉 정의로운 자, 따라서 부정의를 저지르지 않는 자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정의가 된다. 폴레마르코스가 이를 거부하자 소크라테스는 남은 가능성을 검토한다.
  실제로 좋은 자에게 이롭게 대하고 실제로 나쁜 자에게는 해롭게 대해야 한다면, 오인한 자에게는 실제로 나쁘지만 좋게 여겨지는 자가 또한 친구인 바, 그 친구는 나쁜 자이기에 친구에게는 해를 입혀야 하고, 반대로 실제로 좋지만 나쁘게 여겨지는 자는 적이지만, 그 적은 실제로 좋은 자이기에 이롭게 해주어야 하며, 결국 친구에게는 해를 입히고 적에게는 이로움을 주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시모니데스의 언명과 정반대이다.
  폴레마르코스는 재차 친구와 적의 정의를 수정한다. 친구는 좋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좋기도 한 자이며, 반면에 적은 나쁘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쁘기도 한 자이다. 이 둘 중 한쪽으로 여겨질 뿐 실제로 그렇지 않은 자는 실제로 친구가 아니거나 적이 아니다. 

  b- 336a: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자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이 적절한 일인지 고찰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적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정의로운 자가 할 만한 일이라 말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말에게 해를 입히면 그 말의 기능, 덕(arete)은 저해된다. 이 저해는 말의 덕에 관한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의 덕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해를 입으면 바로 그 개의 덕에서 저해된다. 인간의 경우에도 해를 입는다면 인간이 인간적인 덕에 관련하여 더욱 나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인간의 덕이다. 시가술을 갖춘 자가 시가술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시가에 문외한으로 만들 수는 없다. 승마술을 갖춘 자가 바로 그 승마술로 누군가를 승마에 문외한이게끔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덕으로써 인간을 덕에 관련하여 더 나쁘게 만들 수는 없다. 정의는 인간의 덕이므로, 정의는 인간을 해롭게 할 수 없다. 이는 열이 차게 할 수 없고 뜨겁게 만들 수만 있으며 건조함이 습하게 만들 수 없고 마르게 할 수만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덕이 부덕을 산출할 수는 없다. 
  → 332d에서 의술은 병을 막고 건강을 낳는 것인 동시에 건강을 막고 병을 불어넣을 수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의술은 기술이고 여타의 기술들과 더불어 정의가 유비되는 대상이다. 정의 또한 기술이라면 그것으로 인간의 덕을 이롭게 하는 것뿐 아니라 해롭게 하는 것 역시 가능해야 한다. 비록 기술로서의 정의에 대한 고찰이 정직이란 측면에서 모순에 직면하긴 하지만, 그 결론이 정의는 기술이 아니라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술이 병을 일으키거나 수호술이 절도와 계략에 사용되거나 하는 일이 소크라테스가 이후 전개할 기술의 엄격한 정의에 부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술 자체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그 목표를 완수해내는 앎이자 힘이다.
  정의가 정직함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적극적인 효용도 없게 되고, 친구와 적 각각에 대한 합당한 대우라면 덕이 부덕을 낳는 모순이 귀결되므로 케팔로스-시모니데스-폴레마르코스의 정의에 대한 정의는 부정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의가 자신의 능력을 자부하는 부자들의 것이라 말한다.
  → 권력과 재물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적에게서 강탈하고 우리 편에게서 증대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될 일이 없어 보인다. 이는 상대적이고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종류의 이득을 중심에 놓았을 때 성립하는 정의관일 수 있다. 반면 인간의 덕, 인간이 인간다움을 기준으로 더욱 완전하고 훌륭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에 관련하여서는 친구만이 가지고 적은 가질 수 없거나 혹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으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 종류의 이득을 말하기 어렵다. 또한 적은 '나쁜 자'인데 덕으로서의 정의는 실상 나쁜 자를 좋은 자로, 즉 적을 친구로 만들어 버릴 것이므로, 정의의 기능 자체가 친구와 적의 구분과 상충한다.

  

  336b-338b : 여기까지 사이사이 트라시마코스가 난입을 시도했으나 청중들에게 저지당하다가, 이야기가 멈춘 틈을 타 '야수처럼' 뛰어든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묻거나 반박만 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 보라고 요구한다. 그와 동시에 필요한 것(to deon), 도움이 되는 것, 유익한 것, 유리한 것, 유용한 것이라고는 답하지 말라고 제한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겁에 질렸으나 트라시마코스가 논의로 인해 화를 내기 시작하던 때에서부터 그를 지켜봤기 때문에 답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대답은 황금을 찾는데 서로 양보를 할 리도 없는 마당에 그보다 더 귀한 정의를 찾는 데에 양보할 리 없다는 것, 만일 그럼에도 찾지 못했다면 자신과 폴레마르코스가 최선을 다했으나 능력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며, 유능한 쪽에게 혼나기 보다는 동정을 받는 게 더 합당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트라시마코스는 이러한 태도가 소크라테스의 익히 알려진 모른 척하기(eironeia)라며 이럴 줄 알았다고 비난한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지혜롭기 때문에(gar) 자신의 모른 척을 예견한 것이며, 또한 지혜롭기에(oun) 그가 자신에게 금한 것들에서 자신이 답을 찾더라도 잘못된 일이 아님을 또한 알 것이라 답한다. 트라시마코스가 질문한 방식은 마치 12를 6의 두 배, 4의 세 배, 2의 여섯 배 등 어떤 식으로도 말하지 말고 정확히 말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금한 것 중에 진실이 있더라도 그것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금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질문을 받은 자는 자신에게 그리 여겨지는 바의 것을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자 트라시마코스는 자신이 금한 것들을 제하고 이것들보다 더 나은 답을 자신이 내놓겠다고 응수한다. 그리고 이 일을 자신이 해낸다면 소크라테스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모르는 자가 아는 자에게서 받을 벌은 가르침을 받는 것뿐이라 답하지만 →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도 같은 입장이 드러난다. 트라시마코스는 벌금을 내라 하고, 주위 사람들이 대신 벌금을 내주겠다 나선다. 그러자 트라시마코스는 이 역시 소크라테스가 제 주장은 않고 대답을 논박하기만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 말한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자신이 알지 못하며 또한 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 자가, 무언가 알더라도 그걸 말하지 못하도록 무서운 자에게 금지를 당한 차에,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트라시마코스는 알고 있다고 말하니 그가 대답을 하는 편이 맞는 일이라 회유한다. 이를 다른 사람들이 지지하며 청하자,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트라시마코스는 인기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 말을 하고 싶어 했으나, 짐짓 '소크라테스가 답을 해야 한다.' 라고 고집을 피우다가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고 한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아무것도 내놓지 않으면서 배우기만 바라고 고마워하지도 않는다고, 이것이 그의 지혜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훌륭한 말이라 생각하는 것에는 그에 걸맞는 칭찬을 아끼지 않을 따름이라 답한다.

  c-340b : (1) 트라시마코스는 정의가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말한다(εἶναι τὸ δίκαιον οὐκ ἄλλο τι ἢ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소크라테스는 일반인보다 강한 운동선수의 몸에 고기가 이익을 준다면, 일반인에게 고기가 이롭고 또한 정의라는 뜻은 아닐 테니, 그 뜻을 더 정확히 설명해 달라 요청한다. 

       트라시마코스는 참주제든 민주제든 귀족제든 지배하는 쪽이 지배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각 지배층은 자기에게 유익한 쪽으로 입법을 하며, (1-추가) 이것을 피지배자들에게 정의로운 것으로 내세우고,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이자 부정의한 자라고 처벌한다고 말한다. 이제 (2) 입법을 한 지배층의 이익이 정의로운 것이다(ταὐτὸν εἶναι δίκαιον, τὸ τῆς καθεστηκυίας ἀρχῆς συμφέρον). 그런데 지배층이 더 강할 테니, 그래서 더 강한 자의 이익이 정의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한테는 이익이라 말하지 말라 해놓고 정작 트라시마코스는 이익이라 말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정의가 이익이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더 강한 자의' 이익이 정의인지 그 첨언은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지배층이 실수하는지 묻고, 그 실수는 이익이 아닌 불이익을 입법하는 것이리라 추정한다. 반면 피지배층은 입법된 바에 따라야 하고 그것이 정의이다. 그 실수의 측면에서 보자면 더 강한 자의 불이익이 정의가 된다. 폴레마르코스가 이를 거들고 나서고, 클레이토폰이 이에 반발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지배층이 제 이익에 위배되는 바를 명하고 피지배층이 이를 따르는 것이 정의롭다는 결론을 지적하여 재차 소크라테스를 지지한다. 그러나 클레이토폰은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명을 따르는 것이 정의라는 점은 트라시마코스가 말한 것이고, 여전히 유효하다고 반론한다. 다시 폴레마르코스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는 정의의 규정과 더 강한 자가 제 이익에 반해 내리는 명을 피지배층이 따르는 것이라는 정의의 규정이 상충됨을 강조한다. 이 경우 더 강한 자의 이익이 그의 불이익에 비해 조금도 더 정의로운 바 없다. 이에 대해 클레이토폰은 더 강한 자의 명령이 여전히 그 자신에게 이익일 것으로 생각한 바의 것을 의도하는 한에서, 그러한 상충은 없다고 주장한다. 

  c-341b : 소크라테스는 지배층의 생각에 의도에 주목하든 말든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트라시마코스의 의도이다. 그것이 더 강한 자에게 이롭든 아니든 그에게 이롭다고 여겨지는 것이 정의냐는 물음(→ 335a에서 제기된 사실과 믿음의 문제)에 트라시마코스는 실수를 저지르는 자를 더 강한 자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누군가를 기술을 갖춘 자(혹은 '-전문가,' -tikos)라고 부르는 한에서 그러한 자는 바로 그 기술에 관련하여 실수하지 않는 자이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τὸ ἀκριβέστατον) 지배자는 실수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입법하고, 피지배층은 이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정의이고, 따라서 더 강한 자의 이익이 정의이다.(→ 339c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지배자가 실수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이는 de re와 de dicto 중 전자에 실수라는 사례를 종속시키고 자신의 주장은 후자의 차원으로 한정하는 전략이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는 '정의상' 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에게 자신이 협잡질을 하는 걸로 보이냐고 묻고, 트라시마코스는 방금도 그러지 않았느냐고 대답한다. 즉 자신은 애초부터 엄격한 의미의 지배자와 현실 속의 지배자를 구분하였건만, 소크라테스가 의도적으로 이 둘을 섞었다고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오히려 엄격한 의미의 지배자와 현실의 지배자를 구분할 계기를 마련해 준 것, 즉 트라시마코스의 정의에 대한 최초의 규정을 강화시키도록 만든 것은 소크라테스의 물음, 실수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물음이다. 더불어 이익이라 여겨지는 것과 <실제로> 이로운 것 사이의 구분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c-343a :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에 대해 재차 묻는다. 엄밀한 의사는 돈을 버는 자인가, 환자를 돌보는 자인가? 트라시마코스는 후자라 답한다. 키잡이의 경우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선원들을 통솔하는 자이지, 선원이 아니다. 여기에서, 앞서 엄밀한 의미를 현실의 사태와 구분지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키잡이를 설명하는 데에 그가 항해 중이라고 고려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의 기술, 이를 통한 통솔에 관련하여 키잡이인 것이다. 의사는 의술로써 환자를 돌보고, 키잡이는 조타술로써 선원들을 돌본다. 어느 쪽이든 어떤 기술로든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각기 기술이 다루는 대상의 이익을 도모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술 자체는 부족함이 없기에 그 기술을 위한 또 다른 기술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술 자체가 완전한 것이라면, 그 기술의 전문가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돌볼 이유가 없다. 부족함이 없는 의술은 부족함을 지닌 현실의 몸을 돌보고, 마술은 말을 돌보며, 기술들은 그것들이 관여하는 대상을 관리하고 지배한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자기 자신도 아니고 더 강한 자도 아닌 부족하고 약하며 관리를 필요로 하는 것의 이익을 도모한다. 결국 조타술도 키잡이의 이익이 아닌 선원들의 이익을 도모한다. 마찬가지로 엄밀한 의미에서 지배자는 그 기술로써 피지배자의 이익을 도모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것의 정의는 역전되었다.

  b-344c : 트라시마코스는 양과 목자도 구분 못하느냐고 반문한다. 양을 치거나 소를 치는 자들은 그 가축들의 이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익이 자신들, 그 주인들에게 주는 이익을 고려한다. 통치자들 역시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의란 피지배자 자신에겐 해가 되나 타인, 지배자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이며, 부정의는 반대로 정의로운 자들을 조종하고 피지배자들은 이를 따라 저들에게 이익이 되게 행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정의로운 자는 정의롭지 못한 자보다 항상 덜 가진다. 계약의 경우, 폴리스의 일들에서 세금을 낼 때, 또 관직을 맡았을 때 모두 정의로운 자들은 손해를 감수하지만 부정의한 자들은 많은 이득을 본다. 부정의한 자는 더 많이 가지는 자, 남들을 능가하는 자들인 것이다. 가장 부정의한 것은 참주정치인 바, 이는 가장 정의로운 자들을 가장 불행하게 만든다. 또한 이것은 정의보다 강력하고 자유롭다. 그걸 남몰래 해내지 못하는 자들은 처벌을 받지만, 완전한 부정의를 저질러 사람들의 재산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까지 앗아가 버리는 자는 행복하고 축복받은 자라 불린다. 이제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인 반면,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 이익이다.

  d-348b : 소크라테스는 자신들이 하찮은 일을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더 설명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설령 트라시마코스의 가정대로 가장 완전한 부정의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이롭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반론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에게 말한 것을 유지하고 바꿀 때엔 밝힐 것을, 그리고 속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선 목자의 예시를 비판한다. 그에 앞서 엄밀한 기술에 대한 논의를 고려할 때, 목자가 기른 양을 잡아 먹든 팔아 치우든 그것은 목축술에는 하등 관심거리가 아니란 점을 지적한다. 여전히 목축술은 가축의 이익을 도모할 뿐이며, 잔치를 벌일 때엔 다른 기술이 쓰일 것이고, 매매를 할 때에도 역시나 돈 버는 기술이 사용되지 목축술이 쓰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전히 통치술도 그 자체로는 통치자의 이익이 아닌 피지배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자발적으로 관직을 맡는 자는 없다. 다음으로, 기술은 저마다 산출해 내는 이익이 고유하며 서로 다르다. 모든 기술이 부수적으로 돈을 벌게 해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돈에 관련된 또 다른 기술로 인한 것이다. 설령 돈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돈 벌이 기술 이외의 기술들은 각기 저마다의 기능을 수행해 내고 고유한 이익을 산출해낼 수 있다. 통치술의 보상은 통치술 자체로는 통치자에게 이익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이익이 없기 때문에 강제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맡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처벌이 주어져야 한다. 이 처벌도 보상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글라우콘이 그 까닥을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를 통해 수전노 취급이나 돈 욕심 부리는 자 취급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라 답한다. 또한 훌륭한 자들은 돈도 명예도 관심이 없는데, 그런 자들은 돈을 받아 통치를 위한 고용인으로 불리는 것도 싫어하고 관직을 통해 도둑질을 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또한 스스로 나서서 남들의 지배자 노릇을 하기도 바라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의 지배자가 가능한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서로 지배자 자리를 거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트라시마코스가 열거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부정의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낫다는 데에 반대하는지 묻고, 반대한다는 답을 듣자 어떻게 검토할지 다시 묻는다. 트라시마코스의 입장에 반론을 내놓을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서로 합의를 통해 자신의 판관이자 변론자가 되는 게 나은지. 글라우콘은 후자를 택한다.

  c-350c : 완전한 부정의는 완전한 정의보다 더 이롭느냐는 물음에 트라시마코스가 그렇다고 답한다. 그리고 탁월함과 나쁨을 각기 어찌 짝지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의는 고상한 착해빠짐, 부정의는 좋은 숙고라고 말하리라 답한다. 따라서 부정의한 자들은 분별 있고 훌륭한 자들이라 여긴다. 부정의는 탁월함과 지혜의 부류이고, 정의는 반대 부류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른 물음을 던진다. 정의로운 자는 정의로운 자를 어떤 점에서 능가하고 싶어 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올바른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정의로운 자는 부정의한 이에 대해서는 능가할 수 있다 여기고 또 그 능가함이 정의롭다 생각한다. 반면 부정의한 자는 정의로운 자를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것에 대해 능가할 만하다고 여긴다. 또 이를 위해 최대한으로 얻고자 경쟁한다. 즉 부정의한 자는 자신과 닮은 사람이든 다른 사람이든 능가하고자 한다. 트라시마코스가 이에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다른 물음을 던진다. 각 기술에 능한 자들은 해당 분야에 분별 있는 자인 반면, 능하지 못한 자들은 분별 없는 자들이다. 또 각 기술자는 제 자신의 분야에서는 분별 있지만 다른 분야에는 그렇지 못하다. 이제 각 기술자는 제 분야 전문가들을 능가하고자 하지는 않으나 그 외의 문외한들은 능가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의사가 행한 제대로 된 처방을 넘어서려는 의사도 없고, 다른 수학자가 한 제대로 된 계산을 넘어서려는 제대로 된 수학자도 없다. 반면 문외한들은 전문가든 아니든 능가하려 든다. 그런데, 전문가는 지혜로운 자이다. 지혜로운 자는 훌륭한 자이다. 즉, 전문가로서, 훌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자기와 같은 사람은 능가하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은 능가하려 한다. 반면 나쁘고 무식한 자는 같은 자도 반대되는 자도 넘어서려 한다. 부정의한 자는 전문가처럼 하지만 부정의한 자는 문외한처럼 하며, 따라서 전자가 훌륭한 반면 후자는 나쁘고 무식하다. 트라시마코스는 이에 동의하며 얼굴을 붉힌다.

  d-352c : 정의는 탁월함이자 지혜이지만 부정의는 악이며 무지임이 동의되었다. 다음으로 부정의가 정의보다 강력하다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검토받는다. 무정의한 나라는 다른 나라를 부정의하게 예속시키려 들 것이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더욱 강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는 정의로운 나라가 지혜와 덕을 갖추기에 더 강하지만, 트라시마코스 입장에서는 반대이다. 그런데 공동으로 일을 행하는 집단의 경우 집단 내 상호 간에 부정의는 대립을, 정의는 동의를 성립시키므로 후자가 더욱 강하다. 이는 두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한 사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부정의는 개인 내에서조차 대립을 일으켜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든다. 또한 정의로운 것에 대해 적대하게 만든다. 그런데 신들은 정의롭다. 따라서 부정의는 개인이 신들에 적대하게 만든다. 더욱이 이러한 맥락에서 완전한 부정의는 자체 내에 그리고 상호 간에 어쨌든 대립과 분란을 만들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며, 부정의한 일을 해내는 부정의한 자나 집단은 어느 정도 정의롭고 동시에 불완전하게 부정의한 것이다. 

  d-354a : 이제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 여부가 검토된다. 무엇이든 그 고유한 기능, 일은 오직 그것으로써만 가능하며 또한 가장 잘 수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각 기능은 그 덕과 악 또한 있다. 모든 것은 각기 그 고유한 기능에 관한 덕의 상태에서 가장 잘 발휘되고 악에 의해서는 추악하게 행해진다. 이제 영혼은 몸을 다스리고 삶을 꾸리며 숙고하고 생각하는 것이 고유한 기능이다. 그러한 혼에도 덕과 악이 있다. 정의는 덕이고 부정의는 악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혼은 좋은 삶을 살 것이고 부정의한 혼은 잘못 살 것이다. 전자는 행복할 것이고 후자는 불행할 것이다. 부정의는 정의에 비해 전혀 더 이롭지 않다. 여기에 이르자 트라시마코스는 벤디스 여신 축일에 펼쳐진 소크라테스를 위한 잔치를 마음껏 즐기라며 비꼰다.

  b-c :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잘 답해 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만족스럽진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 그것이 악과 무지인지 아니면 덕과 지혜인지 하는 문제로 넘어갔고, 더 나아가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로운지 하는 이야기로 넘어간 탓이라고 자책한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그것이 덕이자 지혜인 것인지, 그걸 지닌 자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아무것도 알 수 없으리라 한탄한다.

  -蟲-

  내가 물고 뜯고 뒷담화를 하고 면전에 욕을 했던 새끼들이 모두 떠났다. 난 사실 그 따위 걸 바란 게 아니다. 난 여전히 여기 별로 몇 사람 드나들지도 않는 구석진 블로그에 숨김없이 나름 솔직하게 다 지껄였다. 내가 바란 건, 여기 와서 '씨발, 내 생각은 그게 아니야! 난 그런 새끼가 아니야! 넌 병신이야!'라면서 나한테 욕을 하고 대드는 것이었다. 물론, 나같은 듣보잡 찌끄래기한테 뭔가 시간 쓰고 애써서 씨부리기 싫기도 하겠지. 근데, 그것마저 싫으면 공부는 왜 하냐? 니 석사 논문도, 박사 논문도, 그 이후 무슨 개씹소리도 다 좆나 씹히고 무시당할 것인듸. 모르겠다. 내가 그들을 불러다 앉혀 놓고 내 하고 싶은 얘기들을 쏟아내면, 그거야말로 그냥 꼰대질이 되는 것 아닌가? 이 상황에서, 당신들이 내게 들이대고 대들고 욕을 해야, 그래야 그 다음 걸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상황 아닌가? 거기다 씨발 니네들 공부 좆나 안 하잖아. 공부 잘 해서 학회지 게재하고 그 지랄하면야 나도 거기 껴서 니들한테 성질도 제대로 부리고 하지. 그냥 씨발 늬들만 잘났고 남들 다 거지새끼고 이러면 내가 뭘 어쩌라는 거냐. 아, 씨발. 늬들이 잘났으면 그냥 잘난대로 날 무시하고 저 멀리, 내가 따라 잡을 수조차 없는 까마득하게 멀고도 먼 잘난 자리로들 나아가라. 왜 학문에도, 니 새끼들 자신들에게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쫀심이나 세우며 개지랄을 하면서 씨발 좆나 기초적이고 아주 저급한 단계의 당연한 책임조차 외면하고 사는 거냐? 물론, 그런 일들에 고민하는 나 자신도 우스운 것이지만. 아, 모르겠다. 뭘 얼마나 꿈들을 꾸고 있는지. 학번 내세우며 여자애한테 집적거린다고 날 욕하던 후배야, 지 세계 빠져서 왕노릇 한다고 돌려 욕하던 또 다른 후배님아, 내 비판은 다 씹고 술을 만든다느니 그리스어를 가르친다느니 하던 또 다른 후배님아, 다들, 제발, 좀, 아, 씨발, 모르겠다. 정말 당신들이 맞는 걸까? 당신들이 제대로 철학의 정직하고 성실한 길을 가는 거고, 난 지금 잘난 척이 하고 싶어 아주 막 좀이 쑤시고 배배꼬여서 꼬장이나 피우는 것일까? 정말? 모르겠다. 난 당신들처럼 잘난 적이 없어서, 자신감을 그렇게까지 넘치게 가져 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어서, 그게 무슨 기분인지, 왜 나한테 대놓고 덤비질 않는 건지, 잘 모르겠다. 철학과 학생봇 봇주씨, 왜 접었습니까? 좀 더 나랑 할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왜들 다 떠납니까? 당신들도, 나 따위에 비할 바 없이, 진리를 좇다 뒈져 버린 저 숱한 목숨들보다도 더, 좆나 진지하게, 막 씨발 간절하게,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철학하고 싶어 뒈지겠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한테 침을 뱉고 욕을 할, 딱 그 정도의 폭력성, 그 정도의 적나라함조차도 없습니까? 그렇게까지 비겁하다면, 당신들은 왜 철학을 합니까? 나보다 훨씬 교묘하고 훨씬 더 비겁하며 더욱 악랄하고 영리한 이 미친 세상에서, 당신들은 무슨 생각으로 철학을 합니까? 왜, 대체 무슨 이유로, 세상을 바꾸지도, 사람을 구하지도, 아무것도 못하는 이 미친 학문이란 놈을 붙들고 살겠다고 떠드는 겁니까? ...아, 물론, 그 무슨 이유로든 날 무시할 수야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여태 그래왔듯 앞으로도 무시하쇼. 허나 내가 학계에 남아 있는 한, 지금과 같은 자세로 사기치고 구라치는 씹새끼들이 남아 있다면, 나는 내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쌍욕을 뱉어댈 것이니, 기대하쇼. 난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값 때문에라도, 허영심이나 채우며 잘난 척에 헤롱거리는 씹새끼들 가만 놔둘 생각 전혀 없으니까. 진지하고 성실하게 공부할 게 아니라면, 이 바닥에서 꺼지십쇼. 후배고 선배고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학문은 온몸으로 굴러가며 하는 거라고, 나는 그리 배웠습니다. 학부에서, 대학원에서, 어떤 교수에게서도 아무것도 배운 것 없고 워낙에 저 혼자 잘난 후배님들은, 그 허풍에 걸맞는 실력이 없다면, 나랑 같이 시궁창에서 짓이겨져 죽는 거야, 씨발. 기대해라. 기필코 후회하게들 만들어 주마, 씨발 새끼들.

-蟲-

P.S. 그냥, 여기 댓글로 욕이라도 달아. '씹새끼야, 면전에서 같은 소리 지껄여봐!'라고 달면 내가 술값 내고 쳐맞아 준다니까? 신고도 안 해. 내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다. 학술지 등재도 안 시키고 해외 대학에 지원서도 안 내고 그렇다고 무슨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는 것도 아니면, 니들 욕하고 좆나 씹는 나한테 술 한 잔 얻어 먹고 욕할 정도의 정성은 들일 만하지 않냐? 그거 안 하는 사이에 공부들 좆나 열심히도 하나 봐? 공부한 게 결과가 그거면, 그냥 뒈지라고.

P.S.2. 야, 철학과 핵생봇 봇주야, 너도 어쩌면 여기 볼까봐 한 마디 남기는데, 씨발, 나같으면 내 선생 욕 먹인 게 짜증나서라도 어떻게든 찾아 들어와서 씨발 한 번 면상이나 봅시다, 댓글이라도 그렇게 달고 쳐다보고 정말로 멱살이라도 한 번 잡아 보겠다. 니 선생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냐? 그 인간들이 어쩌고 사는지,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알기는 하냐? 니가 걔들 욕 먹인 거야. 계정 닫고 니 귀에 달콤한 얘기들이나 들으며 쳐박혀 숨으면 장땡이냐? 내가 너 뭐하는 누군지 알 게 뭐겠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데 이 정도로 씨부리면, 아니, 뭐 관심이고 기대고 존중이고 다 필요없고 일단 짜증나서라도 현피뜨고 싶지 않나? 앞에도 말했지만, 당신이 내게 칼을 들이 밀어도 난 주먹질하며 덤벼들 생각이 없다. 지지 마라. 외면하지 말아라. 제발 좀, 정면에서 직시하면서 부딪쳐라. 왜 다 이 따위냐. 

P.S.3. 아, 씨발, 씨발, 씨발. 자릿수를 교체해서 추론 가능하지만 측정되지 않은 무한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그럼 그 무한수는 이미 현존하는 거냐, 아니면 우리가 구성해낸 무언가냐? 가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정말 가능하냐? 내가 무언가를 참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와 그 무언가가 참일 때에 그것을 실제로 참이게끔 하는 이유들, 그 두 이유 사이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되는 거냐? 어떻게, 왜, 세계는 논리적 이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가? 아니면 그것 말고 다른 영역이 남아 있어서 그게 기적이고 신비고 뭐 그런 거냐? 내 생각에 이런 물음들은 아직 여전히 논쟁 중인 듯하다. 이 문제들이 애초에 해결될 수 없는 종류의 잘못된 물음들이라는 입장까지 포함해도, 모두가 합리적이고 정직하다는 가정 하에서도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남아 있다고, 그렇게 믿는다. 여기 답을 내 봐라. 그렇게 세상을 바꿔 봐라. 내 신이 되어 줘라. 내 신이 되어만 준다면, 내가 목이라도 못 내놓겠나. 나는 내 생각을 내세우고 싶지도 않고 내 이름을 남기는 것도 관심이 없고 다만 그냥 씨발 좆나 힘든 세상에 답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었다. 그 이후로 20년 정도를 징징거리다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이런 거다. 아직은, 답을 기대할 만큼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다는 거, 나든 우리든 모두든 어떻든, 아직은 이르다는 거, 그것뿐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 잔뜩 들으며 안간힘을 써가며 이해하려 애쓰며 조금이라도 거기 가까이 가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의미있고 유효한 노력을 쏟아부어 내 사는 동안에 가능한 한 가장 큰 진전을 목도하고 싶다. 씹새끼들 개지랄에 시간낭비하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로또 뽑듯이 병신들 헛짓거리 와중에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기를 기대하는 미친 짓거리는 전혀 하고 싶지 않은 거다. 정말 내가 틀린 건가? 내가 잘못 되었나? 그럼 뭔가? 저 역겨운 새끼들 토 나오는 중간 기말 보고서에 지껄인 미친 헛소리들에 희망을 걸어야 하나? 내가 그래야 할 정도로 뭔가 큰 잘못이라도 한 건가? 그런 지옥이 어디 있나? 하아. 뭐 딴 거 대단히 바라는 것도 없고, 그냥, 정직하고, 또 성실하게, 제발 좀, 책 좀 차근차근 곱씹어 읽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싫으냐? 철학은 왜들 하냐? 아악, 씨발.

1. 엘레아 출신의 이방인은 테아이테토스에게 존재와 비존재, 혹은 규정과 무규정이 공유하는 난점을 지나치게 밝은 빛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에 빗대어 설명한다. 파르메니데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저마다 그것인 바의 것으로서 있고, 그렇기에 오직 있을 뿐 있었던 것도 있을 것조차 아니며 모든 것이 그 하나에 다름 아니라면, 그래서 이것과 저것을 나눌 수 없고 시공도 생멸도 입에 올릴 수조차 없다면, 모든 것이 오직 있는 그 하나일 수밖에 없기에 있지 않거나 무엇이지 않은 아무것도 아예 가리키는 일조차 불가하다면, 그 하나뿐인 존재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그 이름조차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과 구분될 수 없고, 단일과 존재조차 분간할 수 없는 그 영원한 정적 속에서는 그저 긍정의 빛만 가득할 뿐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빛으로 가득 한 세계를 떠나 거기에 없는 것, 그것이지 않은 것, 그것 이외의 온갖 것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끊임없이 흘러 가는 세계에 이르러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변화하고 생멸하는 찰나의 순간을 붙잡아 매어둘 아무런 여지도 없다. 무엇인가가 또 다른 무엇인가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변화하기 이전의 것과 변화된 이후의 것이 저마다 각기 그러한 것으로 고정되어 생각되고 서술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정지는 변화와는 다르며 변화이지 않은 무엇이다. 그러나 변화와 정지는 모두 각기 그 자신인 바의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있다. 그 둘 모두가 존재이자 규정인 한편, 변화에도 정지에도 속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존재가 그 자체로 변화인 것도 정지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변화도 존재가 아니며 정지 역시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이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오직 그 각기 하나만으로 어떤 무엇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엘레아에서 온 손님이 말하고자 한 빛과 어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은 변화하기도 하고 정지해 있기도 하며 제 자신과 같은 한편 그 외의 것들과는 다르기도 한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들, 그것들의 존재, 차이, 동일, 정지, 변화 각각과 그것들 서로 간의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양극단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이 사유와 경험을 매개하여 앎을 확보해내는 자들이다. 그들은 진술과 진술 사이, 논리와 논리 사이를 오가며 필연과 우연을 조율해내 인식의 구조물을 쌓아 올리는 자들이다. 오직 단 하나의 답만이 나오는 두 세계, 두 개의 태양이 비추는 과도하게 밝은 지성의 세계, 빛은 단순히 긍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한 하나의 답, 긍정의 경우에도 부정의 경우에도 그 이외의 것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의 상징 같은 것이다. 지혜를 참칭하는 자들의 세계는 그 반대편에 놓인다. 그들은 진리를 뒤집어 제 자신들의 거짓을 수호한다. 거짓을 말하면서도 그러한 거짓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하여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할 수 없게 만들고, 그가 허상을 내놓는다 말하면 사실이 아닌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니 아무것도 아니며 자신이 무언가 내놓는다면 그것은 실상일 테고 허상을 내놓는다 비판한다면 그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반박한다. 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뒤에 숨은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그들의 변명에 앞서 행하는 덕에 대한 여러 생각과 말들과 가르침들까지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흔들리고 스러지고 또 다시 태어나는 흐름 속의 윤리를 논하며 다종다양한 편협함들에 빌붙어 강한 논변을 약하게도, 약한 논변을 강하게도 만들며 헤라클레이토스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 여러 폴리스들 사이를 떠돌아 다닌다. 그렇게 그들은 부유한 젊은이들을 사냥하고 그들을 타락시키며 불경한 자들로 만들어 더럽히고서는 그렇게 사로잡힌 젊은이들을 인질로 삼아 그들의 부모에게서 재물을 빼앗는다. 오직 존재하는 일자뿐인 세계와 그저 모든 것이 흘러가는 세계 각각을 일관되게 이해하고 또한 논증하면서 그 사이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정직한 철학자와, 질서 잡힌 것은 뒤흔들러 무너뜨리고 흘러가는 것은 억지로 막아 세움으로써 신이라도 된 듯이 제 뜻대로 거짓된 세계를 만들어대는 소피스테스, 양쪽 모두 그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가 너무도 많은 것이다. 엄격한 논리의 사슬을 짊어져야 하는가 하면 손에 든 물처럼 속절없이 새어나가 버리는 사견과 수사를 포획해야만 한다. 그러나 손님은 한쪽이 밝혀지면 다른 쪽도 그 만큼, 다른 쪽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남은 한쪽도 꼭 그만큼, 함께 밝혀지거나 함께 덮혀 버리리라 말한다. 그는 양편이 같은 만큼의 어려움을 공유하기에 그 둘 사이를 잘 헤쳐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양편은 존재와 비존재의 짝인가, 아니면 정지와 변화의 쌍인가, 여기에는 아직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다. 여기까지 내 이 개소리에서 특히나 씨발 같은 부분은 소피스테스가 하는 짓거리에 대해 지껄인 대목이지.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그는 마치 파르메니데스의 추종자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혹은, 그는 마치 제논처럼 역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을 가르치면서도 허상과 거짓이 없다는 주장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모순이다. 허상과 거짓이 없으려면 변화와 차이를 부정해야 하고, 그 결과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이며, 그러한 일자의 세계에서 논박과 설득, 교육과 정치가 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존재와 비존재를 씨부리노라니 헤겔이 『대논리학』에서 떠드는 존재와 무와 생성이었나 그 비슷한 뭐시기와 『정신현상학』에서 지시와 보편자 사이의 관계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언제 다시 차분히 붙잡고 곱씹을 시간이 오려나 모르겠네. 당장은 내 코가 석자라.

2. 권위는 실상 효율 때문에 유지되는 임시방편이라 믿는다. 그것 없이는 제도와 교육이 성립할 수 없다. 그건 죄다 정당하지 못할 테니까. 각자가 모두 각각의 모든 사실에 대해 똑같은 만큼의 논증을 구성해 같은 정도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같은 방식으로 믿을 것을 강요받게 될 테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통계 뽑아 확률 높게 참을 내놓는 구조, 직급, 그런 것들로 정당화하는 논증을 퉁치는 게, 그게 권위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역으로 이러한 정당화의 역할을 잘 수행해내지 못하는 권위는 따를 이유가 없다. 상사니 선배니 어른이니 뭐니 다 좆까고, 권위는 정당성의 자리를 대신하는 한에서만 효율적인 것이다. 권위에 따르고 이를 강요하는 건 권위가 제 역할을 하는지 못 하는지 검증하는 절차나 적절한 비판과 견제 없이는 무의미해진다는 얘기이겠지. 그러니 다 싫어하는 회식 자꾸 가지 말고, 술을 따르라느니 노래를 부르라느니 같이 춤을 추자느니 늙은이 서지도 앉는 좃 달고 추태 좀 그만들 부리고, 씨알도 안 먹힐 권위질 좀 관두는 게 좋지 않을까. 맡은 일을 잘 해내고 갈등 상황을 잘 조율하며 합리적 선택과 그에 따른 훌륭한 결과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면 거기에서 능력에 따른 합당한 권위가 성립할 거다. 그 능력과 성과에 따라 직급이 나뉘고 승진과 강등이 이루어진다면 합리적인 위계도 구성될 수 있을 테고, 권위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라는 것이 가능할 거다. 나이 쳐먹었다고 능사가 아니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든 낙하산을 타고 내리든 냅다 그냥 높은 자리 앉았다고 장땡이 아니라, 좀, 썅. 그나마 나 사는 동네는 묻고 따지고 하는 게 일인지라 덜하다면 덜한데, 윗자리에서 병신이 삽질하면 정말로 노답 아닌가. 군대 시절 일처리 등신같이 하던 양아치 새끼가 떠올라 갑갑하네. 무슨 군기강이니 애국이니 그런 거야 나 역시도 좆까라 마이신이고, 그냥 할 일과 시킨 일만 딱딱 끝내면 조용한 상황에서 발목 잡힌달까 걸리적거린달까 그게 정말 끔찍하게 싫어서, 반 유령취급 했었는데, 뭐 그래도 건강한 심신의 소유자였는지 별 탈 없이 전역하더만. 여차하면 나한테 총이라도 갈겼을지 모를 일이다. 내가 요즘 무장탈영 사고난 딱 그 부대 딱 그 지역에서 군복무했던지라 좀 식겁했지. 권위고 나발이고 못 하면 욕 먹는 거고 잘 하면 칭찬 듣는 거고, 그러고 보면 별로 가혹행위니 뭐니 그런 것도 없었는데, 군대 갔던 게 거의 10년 정도 전이니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없던 가혹행위가 다시 생기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폭행은 당연히 금지였고 얼차려, 집합, 암기강요 그런 거 실질적으로 단속해서 없애던 도중이기도 했고, 병간 상호존대도 어느 정도 시행될락 말락 하던 참이었는데, 뭐 그래봤자 군대는 감금, 고문, 시간낭비일 따름이니 이러나 저러나 싫을 수 있고, 몰라, 전역했으니 관심 없다.

3. 철학한답시고 지도 모르는 책이나 사람이나 말 몇 마디 갖고 장난질 치고 잘난 척 허세 부리면서 스승 욕 먹이고 학문 엿 먹이는 개쓰레기들이 '철학으로 질병과 기아를 극복하고 세계평화를 이룩하고 과학이니 기술이니 다 좆까고 인문학짱짱맨' 비슷한 헛소리들을 똥처럼 싸제끼는 걸 보고서 '씹새끼들, 계룡산 쳐박혀서 도나 닦아라, 씨발 것들'이라고 자꾸 넋두리를 해댔더니, 내가 계룡산 갈 일이 생겼다. 말이 씨가 되고 이게 다 업보요 카르마요 근데 또 산행 예정일에 비까지 온다 하네. 동행 예정이시던 현 지도교수님께서는 부학장이신지라 일이 바쁘셔서 못 오신다 하고, 그런데 어째 지도교수님 갈수록 바빠지시는 게 영 불안하다, 라고 하려다가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논문 준비 차곡차곡해서 찾아 뵈면 내칠 분도 아니신데 그저 게으른 내 잘못이고 다 내가 병신이고 머저리고 쪼다인 걸 뭐가 불안하고 걱정이고 나발이고인가 싶기도 하고, 모르겄다. 그 사이 내 친구 부부는 일본을 갔다가 부산을 갔다가 잘 놀고 돌아왔다는 것 같고, 또 다른 놈들은 내가 카톡 끊고 나니 소식을 통 모르겠고, 나는 섹스 못 한지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 타의에 의한 강제적 고자상태에 직면해 있다. 10년 가까이 키우던 개가 품에서 죽던 날, 아니, 그 놈을 화장해서 그 재를 봉투에 담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정말 넓은 집에 맛있는 거 맘껏 주면서 꼬박꼬박 산책시키고 병원다니며 그렇게 키울 여력이 안 되면, 다시는 짐승 키우지 말자는 생각을 했더랬다. 연애라고 뭐 별반 다르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얘기를 듣고, 시간을 내고, 집중을 하고, 상대가 바라는대로 외모를 꾸미고 습관을 바꾸고,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의 경제적 지원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상대가 만족할 만큼 봉사할 수 있을 게 아니라면, 그런데도 연애를 감행하는 건 그냥 '님하, 꽁씹 적선 좀, 하악하악'하는 것뿐 아닐까 싶어서, 저 열거한 노력들을 할 만큼 마음 흔들리는 사람이 당장에 있는 것도 아니라서(있었는데 차였으니-_-), 뭐 당분간은 왼손과 모니터를 현모양처 삼아야 할 듯하다. 개인적으로 매춘업에 비판적이지 않으니, 대외적으로 즐기려면 나중에 합법화 되어 있는 국가로 가서 살 생각도 있고, 뭐 범법을 저질러도 괜찮겠지, 요즘 오피니 뭐니 괜찮다더만. 『향연』에서 왜 그런 말 나오지, 몸이 아름다운 줄을 알고 이 몸이 아름다운 것과 저 몸이 아름다운 것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그렇게 아름다움이 하나인 걸 알고 나면 영혼이 정말로 아름다운 것인 줄을 알고서 나아가 아름다움 그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깨닫고 그것을 좇아 살아가는 것, 그게 인생의 바람직한 경로라고. 뭐 딱 이렇게 나온 건 아니고. 근데 난 아직 이 몸도 저 몸도 아름답다는 것까지만 알겠네. 솔직히 수려한 논리 같은 것의 아름다움이랄 것도 아예 싹 모르겠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중2중2함이 아니고서는 논리 갖고 사정하는 건 힘들지 않나 싶고. 그러고 보니 비트겐슈타인인가가 수학공식 떠올리며 쌌다 그러지 않았나? 아닌가? 아님 말고. 중2중2하든 좆나 개천재든 뭐 하나는 되야 저딴 변태짓도 할 텐데, 나는 좆나 범상한 장삼이사 필부필부 초동급부 어중이떠중이 찌끄래기새끼라서 못 해 먹겠네. 졸업논문!!!!!!!!!!!!!

-蟲-

1. 교육평론가 이범씨의 한계레 사설(?)에서 야당인지 야권인지는 기술을 가지고 안전, 환경 등등의 문제들에서 화제를 선점하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 같다. 맞는 얘기지만, 현실이 그렇긴 하지만, 그럴수록 기초학문이나 순수학문 혹은 더 넓게 잡아 산업에 직접 연계되지 않는 여러 학문분야들의 국내 자립은 요원해져만 가는 듯하다. 뭐 사실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으니 다들 상관할 바 아니겠지만서도.

2. 교수신문 몇십주년 기념으로 이태수 선생님 올리셨던 예전 글을 우연히 보게 됐다. 언제고 인문학이 유행이었던 적이라도 있느냐, 맨날 어려웠는데 새삼스레 위기는 무슨 위기, 뭐 그런 얘기도 있었던 것 같고, 세목에 함몰되지 말고 넓게 보고 과감하게 논쟁하라고 하시는 부분도 있는 듯하다. 학부 전공 없애 버리고 '교양' 개념 재정립하고 기초 학문들 입문과 개론에 적합한 교재와 교육과정 개발해내면, 그 과정 거치고 거쳐 몇 세대 뒤에 국내에서 자족적으로 논쟁이 확대, 재생산되는 날이 오면, 다른 분야에 대해 개소리 않고 자기 분야에 대해 뻔한 소리 않는 그런 학자들이 여기저기 여러 분야에서 출몰하여 서로 말을 섞을 수 있게 되면, 말씀하신 그대로 들이대고 덤비는 학자들이 그 중에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지식인이 말 그대로 아는 자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고 그 해법은 무엇이며 뭘 어떻게 해 봄직한지 떠드는, 책상물림 먹물들의 이상국가, 기대는 되네.

3. '나는 천재고 좆나 잘났는데 아무도 나를 몰라주네, 병신들!' 이라는 속내를 온몸에 후광처럼 둘러 뻗어대는 새끼들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동기나 선배는 말할 것도 없고 강사들이 같잖고 교수들이 우습고 요즘 날고 기는 전세계 새끼들은 무명씨 병신들이고 철학사 몇 권 보고 개론서 몇 권 훑었더니만 이름 좀 들어봤다 싶은 새끼들도 다 나만 못하네.'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상관할 바 아닌 것인데, 나도 참 괜한 오지랖이지. 까고 싶고 비웃고 싶으면 겉핥지 말고 그 사람들 졸업논문이라도 좀 찾아 보고, 요약정리해서 뭔 소린지 이해도 좀 해 보려 하고, 그래도 어줍잖게나마 분석철학, 언어철학, 현대영미인식론 어쩌고 하는 수업들 들었으면 논증 재구성할 때 최대한 정당화시키면서도 없는 얘기 만들어 하지 않으려고 애라도 좀 써 보고,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곧 죽어도 이건 개소리다, 싶은 그런 부분 짚어서 이래저래해서 논리가 개박살이니 꺼져라, 뭐 이렇게 욕을 하면 얼마나 좋나. 솔직히 저 병신들 저마다 써대는 환상소설 세계관들이야 관심도 없고. 그래도 양심이 있으면 지가 무슨 소리를 왜 하고 그게 어떻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는지, 그게 왜 설득력이 있는지,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하는지 정도는 만들어 놓고 잘난 척을 하든 딸딸이를 치든 해야 할 거 아닌가 싶긴 한데 말이지. 철학뿐이겠나, 어느 분야든 학문이란 형식을 갖추고 역사를 쌓은 분야는 죄다 진입장벽이란 게 있게 마련이다. 뭐 타고나길 워낙에 너무나도 대단하고 잘나서 이미 역사 속 위인들의 그 불멸의 이론들하고 맞짱을 떠야 하는 판국에 자꾸 강의 중간고사 보라 하고 기말과제 내라 하는 게 짜증날 수도 있겠는데(뭐 정말 그럴 수 있는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 음, 그냥 뒈지라고 말해주고 싶긴 한데 말이지.), 그러지 말고 그냥 학점 받아내고,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일 테니 그거 꼴랑 해봤자 시간 많이 남을 테고, 그 시간에 자기 하고 싶은 말 잘 써서 이 선생, 저 선생한테 들이밀고 읽어 주쇼, 첨삭해 주쇼, 그걸로도 성에 안 차면 국내 학술지들 조건 안 까다로운 곳 많으니 여기저기 찔러도 보고 평가서도 받아 보고, 그거 하면 되는데 왜 안 하고서 자폐증환자마냥 이리저리 조소나 날리며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살고들 있는지 모르겠다. 무시를 당하면 덜컥 화부터 낼 게 아니라 뭐 때문에 왜 무시하는지 차근차근 물어보고 스스로 고민도 해보고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게 싫으면 학문을 왜 하나, 어디 굴이나 파고 들어가 앉아 도나 닦지. 유독 이 철학이란 학문에 저 황금빛, 에메랄드빛, 사파이어빛 똥파리들이 득시글거리는 건 사실 학문하는 사람들 책임이 크긴 할 거다. 통제와 조작과 설계를 포함한 실험이 정립되고 논리의 형식이 정교화되고 우연과 추측의 영역이 통계로 개척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 학문들이 상호에도 독립적으로도 자기비판과 반성에 여념이 없던 역사 동안에, 씨발 이성은 뒈졌어, 이 지랄이나 떨었던 양놈새끼들이나 아 씨발 영혼이 우주랑 하나 되었으면 정말 좋겠네, 이 따위 헛발질이나 해대고 잘 먹고 잘 살고 착하면 장땡이지 하던 노랭이들이나 좆나 팔자 늘어졌었지. 뭐 얘기가 어디까지 가나. 쨌든, 알고자 하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일 테고 그걸 바로 알아야 바르게 좇고 또 곱씹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 이거 알아, 저거 알아 하면서 자랑질에 여념이 없는 병신들이 학문을 하네 마네 지가 철학자네 어쩌네 하는 꼬라지를 보노라면 울화가 치미는 거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이 문제에 천착하지 않는 새끼들에게 아무런 신뢰도 가질 수 없다. 뭐 존중이니 취향해 주시라. 아니, 콧물찔찔이들일 때는 구구단도 잘 외우고 덧셈뺄셈 시키는 대로 잘만 하던 새끼들이 왜 독해하고 분석하고 재구성하고 평가하라는 말에는 진저리를 치고 걸음마도 못 떼고서 미친 강아지마냥 호랑이 씹어 먹어 버리겠다고들 난리를 치는지. 각 분야의 근본을 확인하려는 사람이든 그 경계에서 벽을 넘겠다고 기를 쓰는 사람이든 저만치 멀리 가 있는 사람들의 재능과 노력이 어떤 것이고 얼만큼의 것인지 가늠도 못할 수준이라면, 그냥 때려치고 떠나는 게 본인들에게나 여러 사람들에게나 좋은 일 아닐까. 위에 이태수 선생님 얘기도 했고 김남두 선생님도 자주 하시는 말씀이고, 기종석 선생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게, 결국 철학은 제반학문과 괴리된 채로는 의미있는 작업일 수 없다는 거다. 그런데 타과 입문강의는 얼마나 들어 봤나? 들어 봤다면, 너무 쉽고 간단해서 아주 그냥 머리에 쏙쏙 들어와 박히던가? 난 여전히 천재가 나타나길 꿈꾸고 기다린다. 누군가 벽을 허물어 주면, 물길을 터주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사정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있어서다. 하지만 다른 한편, 4할 타자는 없고, 또 없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그냥 닥치고 꾸역꾸역 해 나가면 될 일을, 조바심을 내며 성급하게 비약을 해대고 날뛰느라 그 좋고도 귀한 시간 다 날려 버리는 사람들에게, 진지하고 정직하게 걸어왔고 또 걷는 중인 선생님들의 진심어린 충고가 씨알도 안 먹힐 때, 뭐, 그냥, 화가 난다는 거지. 늬들보다 몇 배는 잘나고 훨씬 더 열심히, 악착같이 읽고 고민하고 쓰던 사람들, 그러다 죽은 사람들, 안 죽고 버텨내는 사람들 생각에, 여전히 나는 늬들이 정말로 싫다. 늬들 오나홀로 쓰라고 있는 철학이 아니다.

4. 어떤 병신 찌끄래기가 고대 서양에서는 별을 보고 미래를 점치는 게 과학이었다느니 뭔 개씹소리를 해댔더라. 그러면서 과학주의자들이래나 뭐래나 이상한 명칭을 써가며 자연과학 욕을 하는데, 아, 씨발, 욕하려면 자연과학이나 욕하지 왜 덩달아 서양고대 자연철학자들까지 엿을 먹이냐. 그 양반들이 맞지도 않는 천동설 갖고 당대 기하학 지식으로 천체이동 시간계산한 거 찾아 봤으면 저딴 개소리 안 나오지. 게다가 자연철학자들이 제우스니 무녀의 신탁이니 이딴 거 좆나 믿기도 했겠다. 당대 희극이나 역사서 좀 뒤져 봐, 씨발. 태양이 돌덩이라고 했다가 좆나 욕 먹고 막 그러는 사람들이라고, 관습적인 믿음과 싸우고 논리와 경험 사이에서 줄타기 하면서 정신병자마냥 자기학대해대던 사람들이란 말이다. 비록 근대과학이 그 형식을 정립한 게 한참 뒤라고 하고, 기술과 설비에 더해 여러 방법론이 고안되어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정보들이 획기적으로 분석, 정리되고 있기야 하지만, 그래도 고대인들이 니만큼 개쓰레기는 아니었다. 과학주의가 뭐 어째? 그들이 정말로 꿈꿨음직한 일들이 이제서야 조금씩 시작되고 있는 와중이다. 아, 씨발, 됐고, EBS 코스모스 재방이나 봐라. 아니, 과학 싫다는 새끼가 SNS는 왜 쓰고 지랄인지 그것도 모르겠다만. 내가 화가 나는 건 그냥 모른다는 그게 싫어서가 아니라 빌어먹을 것들이 모르면 좀 알려고 하든지 잠자코 닥치든지 할 것이지 씨발 게으르고 비겁한 주제에 지 변명도 아니고 지 잘났다는 소리를 해대서다. 비단끈으로 목 매달고 뒈져라. 그럼 시체는 연구용으로든 장기이식이든 암튼 요긴하게 그 '자연과학'님께서 활용해 주실 테니. 니 목숨보다는 그 몸뚱이가 조금은 더 비쌀 것도 같네.

5. 특별법은 쌩양아치들이 개판으로 당사자 빼놓고 지들끼리 합의해서 넘어가려 들고, 군 가혹행위 사건 터졌다고 인문학을 가르치네 정훈교육을 하네 헛소리나 찍찍 뱉어들 대고, 그 와중에 에볼라 감염지역 다녀온 사람은 검역 놓치고, 그러거나 말거나 논문이나 써야지. 『국가』 읽고 『향연』 읽고 『천체에 대하여』 읽고 판단의 논리적 형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중첩 또는 결합이 시사하는 변화가 변화라는 개념 자체와 가지는 선후관계의 문제를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이 나름대로 해결하려 든다고, 그걸 해내야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뿐인 존재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끊임없는 흐름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이딴 개뻘소리나 찌끄리다 뒈져야지. 나를 밟아 짓이겨 침을 뱉는 어르신들은 욕심도 없이 그저 또 오늘도 바위에 계란 한 알 던지고 바닷물에 조약돌 한 개 던지시는데, 나같은 집먼지진드기만도 못한 씨부랄 놈이 무슨 양심이고 정의고 나발이고냐, 뭐가 학문의 정도고 앎에 대한 정직과 성실이고, 개뿔이나. 이룰 수 있는 자들은 이루고 싶으면 이루어도 좋다만, 나는 그저 그 날이 오기 한참 전에 뒈질 테니 뒈지기 전까지만이라도 헛짓거리 않고 뻘소리 않고 딱히 나 아니어도 되지만 기왕에 내가 했으면 버릴 것도 없는 정도의 연구를, 그냥 사는 동안까지는, 그렇게 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 따위로 비겁하고 이기적이니 아마 지옥이 있다면 그리로 끌려 가겠지만, 난 플라톤 전공자로 살 거니까 그냥 노새나 쇠파리 정도로나 태어날 각오나 하고 살아야지 뭐. 神崎 かなえ 예쁘다. 아, 그리고 김보통 작가 '아만자' 이번화 좋드라(링크).

-蟲-

P.S. 가후사마께서는 영웅들이 죽어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답니다. 난 '지나가는 황건적 신도 2*10^5' 정도 되려나.


1. 아무 힘도 없다. 아무 상관도 없다. 방관자이긴 한데 그렇다고 그래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도, 책임을 면제받은 것도 아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하면 답은 물론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렇다고 선뜻 뭘 어찌 할 수도 없다. 그래도 기어코 꾸역꾸역 살아남고 싶다. 다만, 기왕 산다면 좋은 삶, 올바른 삶, 살아갔고 살아왔다는 그런 실감이 있는 삶이길 바라는 것인데, 그건 좀 과한 꿈이라는 걸 이젠 진심으로 인정할 때도 된 것이려나, 잘 모르겠다. 사람을 품고 지킬 용기 같은 것이 필요하다. 나로서는 여전히, 그러려면 확신을 보장해 줄 구체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앎이거나, 혹은 돈이거나.

2. 긴장감에 대한 애증이랄까. 고대철학이란 놈은 유독 이게 문헌학인지 논증 중심의 어쨌든 철학인 건지 그게 쉽사리 결론 내릴 수 없는 모양새인 듯하다. 어차피 모든 정당성의 평가란 해당 논증을 담고 있는 그 문자에 즉해야만 하고, 그 안에서 허용되는 범위 밖으로 나가는 순간 평가의 권리를 상실하게 되게 마련이겠으나, 또 동시에 문장을 명제로 환원시키고 논리적 함축을 이끌어내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숨겨진 전제들을 끄집어 내어서 가능한 한 최대로 정당화시켜 놓지 않고서는 그 평가 자체의 정당성도 얻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아니, 애초에 앎이 목적이라면 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논증도 이를 평가하는 자 자신의 고유한 논증도 서로 양립불가능한 개싸움을 벌이는 게 아닌 바에야, 가능한 최선의 형태로 재구성된 뒤에 검토되어야 이걸 수용할지 거부할지 결론이 날 테고, 그런 결론들을 따라 가야 조금이라도 앎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을 테니까. 무엇이 쓰여 있고 또 그게 뭘 말하고 있는지, 그 지반을 잃고서는 다른 방식의 철학이 불가능하다는 극단적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상대로 한 대화가 곧 사유라는 플라톤의 생각을 따르더라도, 그게 또 웃긴 얘기이기도 한데, 플라톤을 연구하는 자들은 플라톤이 아닌 게지. 하여튼. 논증을 구성하고 이걸 다시 스스로 분석하고 재구성해서 평가하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 납득시키려 들고 또 이를 거부하고 그러는 것 역시, 뭐, 그렇다는 거다. 내 자신이 부족해서도 그렇거니와 이러저러해서 문헌에 충실할 것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그런데도 그 문헌 자체가 굉장히 넓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고대철학이 재밌긴 하다. 고작해야 손에 꼽을 정도 몇 가지 문헌 맛만 보고 만 중국고대사상서들도, 고대철학 하겠노라고 결심을 하기 전에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붙들고 살았던 칸트니 헤겔이니 하는 것도, 다 각기 다른 맛이 있지만 그래서 더욱이 이 맛은 안 나는 듯. 더 낫고 못하고 이런 얘길 떠나서, 그게 왜 엄격함이 강조되거나 혹은 개인의 체험이나 공감을 요구하거나 하는 어느 한쪽으로 향하지 않고, 뭐 그런 아리까리한 구석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 기하나 논리에 대한 그 뭐랄까, 경탄이랄까 경외랄까 그런 것도 있고 아직 학문이 미분되어 있던 시절의 노래와 그림과 하늘의 별들 따위가 뒤섞인 '지혜'에 대한 뭉뚱그린 희망 같은 것도 있고 뭐 그런 것 같은데, 이것도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겠지. 어쨌든 문헌과 논증 사이의 줄다리기 같은 것이 몹시 즐겁단 얘기다. 다른 쪽으로는 그다지 긴장감을 즐기는 취향은 아닌데, 앎과 행동 사이 같은 것이 그렇다. 아직 아무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고 어쩌면 영영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더라도 계속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아가는 일은 아직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일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우리는 알지 못하는 채로 머물러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모든 곳에서 해결하고 선택해야 할 문제들에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우리 각자가 행동에 나섰고 선택했으며 그렇게 역사는 쌓여 온 것 아닐까. 내 행동은 완전한 앎에 기반하지 않는 한 언제나 틀릴 수 있다. 그러나 저질러 버린 일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행동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면서도 그 한계가 정해져 있다. 가장 극단적인 신중함은 결국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그러지 않았나, 일단 다 의심해 보기는 하겠는데 이게 현실에서 삶에까지 적용되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니 일단 세상살이는 옛 성현들의 말씀이나 법규들을 따르는 정도로 해두자고. 플라톤이 그리는 소크라테스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말 저 너머 위대하고 완전한 신들이 기만을 일삼고 아랫도리를 휘두느르라 정신줄을 놓고 서로 싸움박질에 여념이 없는 것인지, 자신이 사는 나라의 법들은 틀림이 없는 것인지, 예로부터 전해져온 이러저러한 규범들은 반드시 따라야만 하며 그것이 또한 가장 최선인 그러한 것들인지, 온갖 것들을 의심하고 검토해 보면서도 일단은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의 전통을 공유하고 그들의 상식에서 함께 출발하고자 한다. 세상을 뒤집어 엎고 피고름이 썩어 문드러진 병든 살과 뼈를 도려내면서 새로운 세상을 불러 제끼는 것과 천하에 무도함을 한탄하며 무엇이 천명인지를 아는 날까지 몸을 감추고 엎드려 고민만 더해가는 것 사이의 어느 지점, 그 어느 지점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결국 완전히 알고 난 뒤의 행동만이 유일하게 선하고 정의로운 행동이라 믿는다. 그럴 수 없어서 행하는 차선책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그런 고민이 있는 것인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것저것 온몸으로 치받아 보자고 덤벼들던 때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발목이 잡혀 좌절했었고, 지금은 무력하고 비겁한 나를 향해 내 스스로 쏟아대는 혐오와 경멸을 버티기가 힘들다. 아우, 썅알.

3. 몇 시간 뒤에는 기종석 선생님 퇴임식에 갈 예정이다. 내 이전 지도교수셨던(뭐 지금도 행정적인 차이만 있을 뿐 크게 다르진 않은, 오히려 지도교수님'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랄까...) 김남두 선생님 퇴임기념강연 때도 느꼈지만, 확실히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다. 정암에서 선생님들 윤독도 이제 몇 권 남지 않았고, 고전어 사전이니 문법서니 다른 전집들에 개념어 사전들까지, 따지고 들자면야 앞으로도 기초작업이라 할 만한 것들은 쌔고 쌨지만, 어쨌든 감회가 묘하달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소피스테스』나 되짚어 읽으며, 다음 학기 『국가』 강의 들을 준비를 하면서, 또 『향연』 듣기 전에 대략적으로나마 초벌번역이라도 하면서, 다음 학기에는 반드시 내야만 하는(통과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논문을 작업하면서, 무명연구자가 되기 위한 발버둥을 계속해야 할 듯하다. 저 스승들께 배웠던 것들이나마 나는 제대로 곱씹어 삼키고 소화해냈나, 혹은 학계는 그것을 충분히 정리하여 마무리짓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해서 이루고 쌓인 것이 해야 할 모든 일들에 비하자면 과연 평할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충분한 크기, 양을 지닌 것인가, 그런 생각들을 하노라면 여전히 철학으로 세상을 바꾸겠노라는 치들에 대한 짜증이 치밀지만, 뭐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고 품을 넓힐 필요도 있겠지.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그것 역시 가능한 선택지들 중 하나일 테니까. 앎이 앎에서 또 다시 앎으로 이어지는 정말로 길고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앎들의 인드라 그물 속에서는 플라톤이 양자역학에 기여하는 날도 올지 모르겠다. 그 전에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그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 시간 내내 학문에 게으름과 비겁함이 없을 수만 있다면야. 그리 생각하면, 끄트머리 말단 귀퉁이 먼지나 때만도 못한 내 인생도 조금은 의미부여가 된다. 없어도 무방할 삶일지라도, 어쨌든 없지는 않은 그러한 기여는 하고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다. 딱 그만큼의 삶을 살 수 있게끔 허락을 받기 위해(그 허락을 누가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악착같이 하한선 근처에서 바둥거릴 수밖에. 그건, 참 재미있는 일이다. 다행한 일이다. 그나저나 외롭다. 살이 고프고 술이 고프고 그냥 삐끗하면 매음굴에서 아편이나 빨다 뒈질 것 같은, 그런 밤이로구나.

-蟲-

P.S. 『향연』 고전 그리스어를 모씨와 읽어 볼 요량인데 혹 생각 있는 분 계시면 연락 주심 좋고, 아님 말고. 어차피 가르쳐줄 선생님급 끼는 것도 아니니 부담없이 구경 오실 분들도 거부는 않겠음. 근데 정말 비생산적인 헛짓거리일 수는 있지. 낄낄.

1. 어떤 영화를 봤다. '과학은 무서워, 기술은 무서워, 인간은 착해'를 뇌까리는 정신병자들로 가득 찬 영화. 논리, 수리, 전산, 통계, 자연과학과 여러 공학들 본래의 가치와 가능성에 대한 역사 속 빛나던 신념도, 이해의 한계 앞에서 언제나 망설이지 않고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수 많은 무명씨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도 찾을 수 없고,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에 이해하지 못한 채로 심지어 비겁하게 그 무지를 윤리로 치장하려 든 쓰레기들의 자기반성도 물론 찾을 수 없는, 뻔하디 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그들에게서 이성과 역사가 보장해 주고 있는 그 모든 편리를 몰수해 버리고 그냥 무인도로 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늘상 하는 말이지만, 유럽쪽이야 큰 전쟁 두 번 겪으면서 좌절할 핑계거리라도 있지, 서구학문을 수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기능하는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제 3세계 반도 씹쓰레기들은 뭐가 그리 잘나서 이성이 한계에 다다랐다느니 도구적 합리가 이러니 저러니 씨부려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유럽 새끼들도 엄살이 지나치고. 수로를 정비하고 백신을 만들고 생산량을 늘려서 지금 인구수가 얼마나 늘었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상대적 박탈감이니 빈부격차의 심화니 하는 것들은 지식과 합리의 부산물이 아니라, 세계에 부대끼며 쉬지 않고 머리 굴려 삶을 가져다 바친 사람들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기고 뒷짐지고 무임승차한 우리 쓰레기들의 채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이전까지 문자와 문법의 체득이 그러했듯, 종교와 천문과 법제에 대한 접근이 그러했듯, 그리고 늘상 논리와 수학이 그래 왔듯이, 오늘날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들과 그 응용들, 어느 사이에 필수불가결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전산과 통계의 분야들, 기술공학들도 그것들을 통해 밝혀진 사실의 세계 속에 사는 지적 생명체들에게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는 정당하다. 아니, 자연스럽다.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알기를 거부한 것 아닌가? 언제고 인류의 지난 지적 유산을 받아들이고 이어받기 녹록하였던 세대가 있었던가? 알려 하고 배우려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데도, 그게 귀찮고 제 자신의 밑천이 드러나는 게 쪽팔리고 겁나서, 게다가 그런 나태와 비겁을 인정하는 것조차도 싫어할 만큼 위선적이라서, 개새끼들이 가상의 괴물을 만들어댄다. 세계는 문을 두었고 우리에겐 열쇠가 있는데,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먼데, 진리에 닿기도 전에 절멸해 버릴지도 모를 위태로운 종 주제에 제 목숨줄이자 은인이라 할 만한 지성을 불신하고 모함하는 그 거만함이야 말로, 오히려 세상 전부를 이해하는 것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 아닐까 싶다. 발가벗고 어디 무인도로 다들 꺼져 버려라. 곧 죽어도 저 복잡하고 난해한 학문들에는 손끝도 닿고 싶지 않다면, 이 악물고 사회에 참여하고 정치활동을 지속하고 그렇게 도망자들의 채무라도 갚아라. 이도저도 싫다면, 입 닥치고 죽어라. 징징거림으로 가득 찬 망상은 구더기 들끓고 똥오줌과 피고름으로 범벅된 문드러져 가는 송장보다도 끔찍하니까.

2. 김보통 작가의 웹툰 '아만자'. 보면서 떠오른 것은 어릴 적 몇 장면들이다. 학교 땡땡이 치고 마을버스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노라면, 동네에는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얼굴이 변색되어 일그러졌거나 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도 흔했고, 그들 저마다 나름대로 나와 관계가 있었다. 어느 가게에 가면 앉아 있는 아저씨, 어디 가면 꼭 인사를 하는 아줌마, 어느 반 왕따 당하는 애,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있었고 나와 모르더라도 아버지를 알거나 대고모님을 알거나 뭐 그랬다. 고등학교를 관두고, 어쩌다 보니 운 좋게 대학이란 곳에도 가고, 심지어 지금은 당시에 상상은커녕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대학원이란 곳에 다니고 있노라니,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우'라느니, '병신'이나 '염병'이란 욕은 피씨하지 못하다느니(근데 '피씨하다'는 게 정확히 뭐냐?), 연민과 동정으로 대하지 말라느니 또 그러면서도 돕고 살라느니 어쩌라느니. 현실은 극적이라거나 뭐 그럴 것 없이 정말로 말 그대로 얄짤없이 현실일 따름이라서, 나는 새삼스레 동정이나 연민 같은 걸 느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차별의식을 가질 계기도 없었다. 눈앞에 그저 그렇게 펼쳐져 있는 사실들에 무슨 차등 같은 게 있을 턱이 있나. 내가 접해 본, 암환자를 소재로 다룬 여러 창작물들 대부분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굉장히 작위적인 것들 일색이었다. 허무맹랑한 희망을 말하거나 세상에 둘도 없을 절망을 그리면서 펼쳐내는 온갖 망상들에 감동했던 기억은 없다. 왜 보통 그렇잖은가, '제가 저 여인을 사랑해서 죄송합니다' 어쩌고 하는 류의, 아니, 심지어는 당사자들 마저도 어느 사이엔가 도통한 신선이라도 되었는지 일개 아무개씨에서 가르침을 설파하는 영혼의 지도자처럼 여기저기 삶의 소중함을 떠들거나 꿈과 용기를 지껄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아만자'라는 웹툰을 보면서는 침묵할 수 있었다. 주제넘는 격한 공감을 할 것도 없었고, 비웃고 조롱할 여지도 없었다. 아, 이런 조곤조곤함이라니. 이 만화는 참 좋은 만화다.

3. 『국가』는 매일 스테파누스 2장이면 대강 강의 들을 준비는 될 듯하다. 『향연』은 한 장이면 되고. 조금씩 해둔 게 있기도 하고 또 강독이든 윤독이든 청강도 몇 차례 들어갔었으니 점점 더 속도가 붙으리란 기대도 있고. 그냥 무턱대고 논문만 붙들고 있으려니 오히려 진도를 못 빼겠어서 내린 결정이다. 기계적으로 단어를 찾고 말을 옮기면서, 그 흐름에라도 기대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곧장 논문작업에 달려들 일은 아닌 것 같고, 내용정리 먼저. 대체 내용정리만 몇 번인지. 뭐 플라톤, 플라톤, 또 플라톤인 상황이고 그래도 접근법도 그 경로도 서로 다르니 뭔가 전모를 그리는데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그냥 기분이라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어느 날 갑자기 어딘가에 고립되어 버린다면, 혹은 시한부 인생이 된다면 무얼 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결국 지금의 나로서는 플라톤 대화편 한 권 붙잡고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곧 죽게 될 처지라면, 뭐 못 잊을 지난 사랑이라도 찾아 가려나 싶기도 했지만, 혹은 정다운 친구들을 만나거나 인사드리지 못한 은사님을 찾아 뵈려나 그런 생각도 해 봤지만, 그런 건 좀 무책임한 것도 같고 별로 내키지를 않아서. 뭐랄까, 내겐 꿈이 있고, 그 꿈은 내가 이룰 꿈이 아니라 막연히 그냥 뭔지 모를,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 같은 것이라서, 나는 그게 궁금한 것이지 그걸 내 걸로 하겠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그게 뭐든 그야말로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무엇일 것 같아서, 아, 말하다 보니 지나치게 거창해서 역겹네. 아무튼 보잘 것 없고 시덥잖고 쓰레기 같은 나는 차치하고, 추구할 만한 무언가와 그걸 추구한다는 그 짓거리가, 그게 참 좋아서, 이래저래 잘 사는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는 것보다는 그저 꾸던 꿈이나 마저 꾸다 뒈지고 싶다는 거다. 가능하다면, 이 일이 허락되는 시간이 내가 뒈지는 날까지는 닿았으면 한다. 잘, 좋은 삶을 살아왔는지 가늠할 척도가 함께 해줄 좋은 사람들에 달려 있다면야, 난 역시 실패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겠다. 여기저기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멀어지고 내가 머물렀던 자리들이 흐릿해지고 그저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에서 읽고 있는 문장이나 써 남기고 있는 넋두리들로만 있다가 사라지고 또 있다가 또 없어지고. 아마 앞으로 이전에도 없던 힘이 갑자기 번쩍 날 일도 없을 테고 갈수록 지쳐갈 것은 뻔할 테니까, 사람이 의당 사람과 맺어져 해야 할 노력을 하게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럴 엄두도 나질 않고, 그저 간간 연락이나 닿으면 내치지나 않는 정도의 관계, 그런 걸 기대한다는 건 그야말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욕심일 따름이고, 내가 좋아 죽고 못 살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일도 없으니, 그런 건 됐고, 드문드문 이 막막하고 까마득한 어둠에 발 디딜 딱 그 만큼의 볕이라도 드는 일이 종종 있어서 그 재미로 그 낙으로 버틴다. 외롭다기 보다는 미안할 따름이다. 어렸을 때는 온갖 종류의 여러 사람들과 다 함께 어울려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하게 되는 그런 꿈을 꾼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동료는 없고 죽은 스승들과 산 스승들과 마찬가지의 선배들과 후배들과 그런 식이다. 음, 사자 돌림 친구 몇은 있어야 하는데, 낄낄.

-蟲-

  가을학기에는 정암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천체에 관하여(De Caelo et Mundo)』 읽을 듯하고, 여름 동안 중지되는 플라톤 『티마이오스』 윤독도 재개될 테고, 플라톤 『국가』 윤독도 뭐 계속 예정대로 진행이고, 대학원에서는 플라톤 『국가』 5~7권 읽을 듯한데 이건 확정은 아니고, 학부 강의로 플라톤 『향연』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은 2권 끝나면 『형이상학』 Ζ권으로 갈아탈지도 모르겠다. 기왕이면 미리 예습을 좀 해 두고 싶은데, 주요 논쟁사 좀 정리하고 초벌 번역도 좀 해 놓고 말이지. 그러거나 말거나 논문 계획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중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다른 돌파구는 떠오르지 않고, 그냥 다시 내용 정리로 돌아가야 하겄다. 어차피 문헌을 얼만큼 소화해 내느냐가 관건이다. 내가 고대 존재론을 두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릴 주제도 아니고, 플라톤의 철학 체계 전반에 결론을 내릴 주제도 역시 아니고, 그냥 제대로 읽고 또 제대로 쓸 수 있는지, 그것만 검증받으면 될 일이다. 미카엘 프레데도 레슬리 브라운도 오웬도 보스톡도 저 하늘 위를 붕붕 날아다니는 늙은이들인데, 지적을 받고서도 아직도 난 뭔가 이겨먹으려고만 들 뿐 뭔가 배워내고자 애를 쓰지는 못 하고 있는 듯도 싶고…. 어쩌겠나, 더러운 습속은 땟국물마냥 슥삭하고 빠지는 게 아니라 썩은 뼈를 긁어내고 시커먼 선지피, 고름 엉긴 문드러진 살덩이를 째고 찢어 발겨야 겨우 떼어낼 수 있을까 말까 한 것이니, 이 악물고 고난과 역경에 감사할 수밖에 없지. 일단 7월 안에 점검 한 차례 받고, 가능하면 8월에 두 차례 더 점검 받는 걸로 지도교수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겄다. 닝기미 씨빠빠, 진즉에 통과하고 졸업했었더라면 몇 푼이나마 나랏돈 받아낼 것도 늘었을 테고, 박사과정생 해외연수지원도 신청해 볼 수 있었을 테고, 아니, 다 좆까고 이 나라 빠져나갈 궁리를 좀 더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뭐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다 내 과오일 따름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별 다를 것 없다. 빡시게 들이밀고 내딛다 보면 종종 막히기도 하고 발목 잡히기도 하고, 그래도 매번 조금만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면 그 티끌만치라도 기어 가는 거다. 징징거리지 않아도, 뒈지면 내 길은 알아서 끝장이 날 테니, 난 그냥 닥치고 발버둥을 치면 되는 일이다. 아, 이젠 연애가 아니라 사람 살이 고프다. 아마도 이 감각을 내내 안고 살아야 하거나, 아님 어디 오피나 휴게텔에 가져다 바칠 돈이라도 벌어야 하겄지. 그래도 심정적으로는 미련이랄 것도 남길 것 없이 얄짤 없게 병신고자찌그래기와 같은 형편이 되어 가고 있으니, 돈도 없고 몸은 망가져 가고 그런 주제에 시간마저 없는데 워낙에 생긴 것도 쓰레기고, 뭐 의도치 않게 수도자의 고행길을 걷는 셈 치면 되려나, 낄낄. 아름다운 얼굴과 몸뚱이에서도, 저 하늘의 태양에서도, 길바닥에 나뒹굴다 발에 채이는 잡풀이니 개똥이니 구정물 구덩이에서까지도, 좋음의 형상이나 보고 딸이나 치자, 그러다 뒈지자, 썅알. 근데, 마음의 눈으로 좋음의 형상을 보면 마음의 좆이 발기해서 마음의 왼손으로 폭딸의 형상을 구현해야 하는 거냐? 저 모든 딸딸이들이 바라보는 단 하나의 자리에 그 모든 딸딸이의 본이 되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딸딸이의 형상이 처음도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려나... 음, 그렇다면 철학 참 해 볼 만한 일이군. 좋음의 형상을 위해 역립으로 좆나 달리는 개빨조새끼로 승천하고 싶다, 낄낄낄낄. 이데아계의 실장님이 쪼까내고 블랙리스트에 올리겠구만.

-蟲-

1.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시민의 덕(politike arete)을 가르친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민회나 법정에서 시민이라면 누구나 서로에게 조언을 한다는 점을 들어 딱히 시민의 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따로 있기는 어려울 것이라 말하고, 또한 페리클레스 등 시민의 덕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제 자식들을 훌륭한 시민으로 키우는 데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덕이 가르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리라 반박한다. 이러한 두 가지 반박에 대해 프로타고라스는 신화의 형식과 논증의 형식으로 두 가지 '위대한 연설'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한다. 그 논의는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우선 신화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들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dike(정의 or 정의감)와 aidos(염치)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것이 없다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나약한 인간들은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는 한에서 멸종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dike와 aidos를 통해 인간들은 최소한 서로 적대하거나 공동체를 파괴하지는 않게 된다. 즉,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는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서 정치적인 일들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회의 유지 및 존속에 필요한 이러한 소극적인 참여에서 나아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즉 가정과 폴리스의 일들을 잘 숙고하는 데에 이르기까지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 내에서 각 시민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지시와 훈계로 기본적인 규칙들을 습득하게 되고, 마치 모국어를 배우듯 학교, 시장, 법정 등 사적이거나 공적인 여러 모임들 속에서 서로를 통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지식들을 획득한다. 각기 그 천성 혹은 재능에 따라 배우는 바가 더디거나 그 성취가 월등하다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으나, 그들이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를 스스로 깨뜨리지 않는 한에서 그들 모두는 사회 바깥의 야만인들에 비하면 훨씬 더 시민적 덕의 전문가들이고 교사들이다. 서로가 가르치고 또한 서로 배운다는 점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교사이고 학생이다. 그러나 더 잘 숙고할 줄 아는 이가 있으며, 그에게 배우면 더욱 많은 것을 더욱 잘 배울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결론은 그러한 덕의 교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교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교사이며, 그럼에도 그 중에서 더 나은 교사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시민의 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에 골자이다.

  그가 그리는 사회는 일종의 합의를 통해 구성되고 또한 유지되는 공동체로 생각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가 속한 공동체를 해체시킬 수 없지만, 또 다른 한편 이 공동체의 구성은 각자 본성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dike와 aidos를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각자 자신의 정의와 염치로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어 공동체를 유지시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모두가 이 공동체의 존속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 그들 각자는 공동체 운영에 대한 조언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서로 대화와 설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참임을 믿게 만들어 각자가 믿는 방향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나아가고자 한다. 그들이 서로 가르치는 일에 반대하지 않고, 또한 시민적 덕을 갖추지 않는 일은 사회 속에서 불가능한, 혹은 설령 가능하더라도 숨겨야만 하는 일이라 믿는 한에서, 그들은 서로 대등한 발언권을 지닌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직접민주주의와 같은 형태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비록 프로타고라스가 자신에 대해 말하듯 그 중에서는 가정과 사회에 대해 더 나은 숙고를 지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해당 대화편의 이후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것은 자신의 말을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힘에 의해 강제받거나 혹은 어떤 절대적인 법령이나 심지어 진리 때문에라도 피치 못할 방식으로 누군가의 의견에 따르게 되지 않는다. 단지 말을 듣고 그 생각을 납득하게 되면 그에 자발적으로 따를 뿐이다. 

  프로타고라스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격언인 인간척도설을, 플라톤의 해석과 달리 인식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회적인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위의 사회상에 부합할 여지가 있다. 인간은 만물이 아니라 만사(萬事, panta bpragmata)의 척도이다. 사회적인 일들 일체는 모든 인간 개개인의 숙고 대상이며 각자의 의견은 누구의 것이 다른 누구의 것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다. 모두가 모두에게 교사이고 또한 학생이며, 사회에 참여하는 자는 그 누구라 하더라도, 아무리 소양이 없고 어리석다 하더라도 일단 사회구성원인 한에서는 시민적 덕의 전문가이다. 어떤 일이 이러저러하다거나 이러저러하지 않다는 일의 기준, 척도, 전쟁을 한다든지 범죄자를 추방한다든지 세금을 거둔다든지 하는 일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은 각 해당 개인에게 참이다. 객관적으로 절대로 옳고 그른 그러한 사회적 판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문제는 가치상대주의로 해석할 경우 어느 정도까지 극단적인 상대주의가 구성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수사술과 설득이란 개념이다. 설령 가치상대주의라 하더라도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주장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무엇을 더 선호하고 따를 것인지 여부가 진리를 기준으로 하지 않을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더 그럴싸하게 말하는 자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도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말이 참이라고 다른 누군가가 믿는다면, 그 믿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믿은 자에게 상대적으로 참이다.

2. 『테아이테토스』에서 제시되는 플라톤의 해석에 따라 프라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인식론적 상대주의로 해석할 경우 신들에 대한 그의 언급으로 전해지는 내요을 일관되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신들에 대해 그들이 이러저러한지/있는지 혹은 이러저러하지 않은지/없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척도인 한에서, 존재하는 것들에 속하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그가 믿는 바가 곧 참이 되는 그러한 인간이 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더욱이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등장인물로서 프로타고라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뿐만 아니라 제우스와 헤르메스, 헤라와 헤파이스토스까지 언급하고 나선다. 신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가 제시하는 신화적 해석이란 것은 프로타고라스 자신의 입장에 일관성있게 적용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를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일관된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은 사회적인 만사의 척도이다. 오직 인간만이 사회를 구성하며 그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성에 권리와 책임이 있고 그 정도에서 다른 구성원들과의 차이는 없다. 또한 그렇기에 각 개인은 해당 사회에 대해 동등한 발언권을 지니며 모두가 모두에게 가르치고 또한 배움으로써 사회를 유지, 존속시켜 나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지식, 시민적 덕의 전문가일 뿐 그 외의 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위대한 연설 중 전반부 신들에 대한 논의는 사회 구성의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인간이 사회에 대해 지니는 본성적 능력의 성립 혹은 획득 과정이란 것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신화를 통한 유비라 생각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없다. 신들이 실제로 그러하였는지 역사적 사실을 보고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개개인 상호에 어떤 기여도나 능력 자체의 차이는 없다는 점이 설득되기만 한다면, 이후 논증을 통해 제시되는 위대한 연설의 후반부 논의를 이해하는 데에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신들이 정말 그랬습니까?' 라고 되묻는다면 프로타고라스는 '그건 나도 알 수 없소'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신들이 주지 않았더라도 어쨌든 인간들은 사회를 꾸려 살아가며, 그 사회 밖에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 단지 그것만 전달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척도설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의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를 있는 그대로 신들에 대한 그의 전언과 일관되게 해석할 가능성도 검토가 필요하다.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상대주의 인식론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거기에 전제될 수 있는 존재론적 입장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을 끌어 들인다. 이 만물유전으로부터 인식론적 상대론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인식을 감각적인 것, 경험적인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어떤 한 순간 어떤 한 장소의 어떤 한 개인에게 그가 느낀 바의 것이 참이다. 즉 그가 감각하는 그대로의 것이 그에게 실제로 그러저러하다. 이러한 입장에 설 경우 신들이란 감각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종류의 것들로서, 그것들이 이러한지 저러한지 여부는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는 『소피스테스』에서 오직 손에 닿는 것들만을 믿는 자들, 거인족의 입장과 유사하다. 그저 손에 닿고 눈에 보이며 귀에 들려오는 순간순간의 것만이 나에게 사실이며 그러한 감각은 매순간 변화하기에 고정불변하게 내 감각과 무관하게 이를 테면 영혼 따위의 것 속에서만 가능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상태나 조건에 따라 감각은 서로 다르고 각자의 감각은 결코 공유될 수 없으므로, 또한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모두 상대적이다. 이 경우 결국 공통의 언어, 공통의 추론과 같은 객관적 성격의 어떠한 인식적 활동도 불가능할 것이므로, 그들은 아무말도 못하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입장이 그 논리의 내재적 측면에서 반박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플라톤 자신이 묘사하는 프로타고라스가 또 다른 대화편에서 사회 공동체의 합의나 상호에 가르치고 배우는 관습 및 전통 따위의 것들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아니, 그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기까지 한다. 또한 아이들에게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거의 주입시키는 방식으로 교육한다고 간주하며, 그것이 해당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합의된 것인 듯이 말하고 있다. 감각 경험을 통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서는 이러한 합의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언어와 교육, 그리고 합의를 통해 구성된 사회 등이 가능할 정도의 여지는 남는 그러한 방식의 상대주의로 해석되지 않는 한, 인간 척도설을 프로타고라스에 대한 것으로 전해지는 다른 입장들과 정합적으로 이해할 여지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3.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회의주의, 프로타고라스는 상대주의, 플라톤은 절대주의? 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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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동일한 관계를 통해 상이한 결과들이 도출되는가. 다른 유들이 있음에 참여함으로써 있는 것들이 되는 경우와 있음 이외의 유들이 서로 결합하여 참여 대상에 관하여 있는 것들이 되는 경우의 차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무엇에 관하여 어떠하다는 사태와 이를 가리키는 문장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지시는 일종의 모방인가. 결국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은 유들의 결합과 분리, 즉 변증술이 진술에 대해 그리고 그 이전에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인 유에 대한 정의에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지 설명으로 이어진다. 다시, 이는 『소피스테스』라는 대화편 전체의 일관된 해석 가능성에 대한 탐구작업으로 귀결된다.

  무언가를 그 자체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직 그 자체의 본성만을 진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에 대한 진술보다도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재귀적 지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시 대상으로서의 무엇인가가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정된 상태를 넓은 의미에서 정지(stasis)로 간주할 수 있다면, 결국 자기 동일성이 요구되는 일체의 것은 모두 정지를 전제해야만 한다. 반면 이러한 정지만을 인정할 경우 소위 '형상의 친구들'이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술어를 필요로 한다. 그 이전에 최소한 그것의 이름이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이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대상은 이름에 의해 지시된다. 이러한 능동과 수동의 관계는 인식의 차원에서 설명된다. '형상의 친구들'은 무언가가 인식되기 위해서라도 그것이 반드시 정지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인식대상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은 인식된다. 그것은 인식된 것으로 변화한다. 어떤 일을 행하여 무언가로 만들 때에 그 무언가가 어떤 무엇으로 된다. 이러한 행함(poiein)과 겪음(paschein)은 능력(dynamis)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그것 없이는 지시도 진술도 사유도 불가능하며 아무런 결합도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이 능력이 발휘되어 나오는 결과는 이전에 있지 않거나 무엇이지 않은 것이 이후에 있거나 무엇인 것으로 이끌리는 것, 즉 무엇이 다른 무엇으로 되는 것, ~임/있음(einai)에서 ~됨/생김(gignesthai)으로의 이행이다. 이러한 ~됨/생김은 운동(kinesis)이다. 대화편의 진행 순서에 따르자면 이 운동, 능력만을 인정하고 정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다시 정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앞서 보았듯, 정지 없이는 어떤 것을 다름 아닌 바로 그것으로 동일시하고 고정된 것으로서 파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정지'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그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의 인식이 성립한다면, 그러한 인식작용을 통해 인식을 겪어 인식된 것으로 변화하는 한에서, 그 정지 역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운동'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그것으로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면, 그것을 지시하고 진술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바로 그것으로서 변화하지 않고 유지된다면, 그러한 한에서 운동 또한 정지해 있어야만 한다.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과 같은, 존재가 운동인가 혹은 정지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엘레아 출신의 손님에 의해 어느 쪽도 승리할 수 없는 싸움으로 결론내려진다. 그러나 있음, 운동, 정지라는 가장 큰(혹은 매우 중요한, megistos) 유들이 선택되고, 이것들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더 이상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운동은 정지와, 정지는 운동과 가장 반대되는 것이며, 그것들 사이의 결합은 가장 불가능하다고 거듭하여 언급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가능할 것이다. 운동은 자기 자신과 같을 수 있는가? 혹은 정지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가? 나아가 정지는 인식될 수조차 없는가? 이 물음은 유들 사이의 결합활동을 지시하는 동사 '참여(metechein)'에 이어진다. 어떤 것이 다른 무엇에 참여한다는 것, 그 대상의 몫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 그 대상을 공유한다(koinonein)는 것 역시 능동과 수동의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 여기에는 능력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러한 한에서 운동이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정지가 운동과 결코 결합할 수 없다면, 정지는 이러한 능력을 갖출 수 없고, 정지는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될 것이며, 정지를 가리키는 이름과 정지 그 자체 사이에서도 아무런 결합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손님은 만일 운동 그 자체가 어떤 식으로 정지에 참여했었더라면, 운동을 정지한 것으로 부르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언급은 if + simple past, would + base verb, 즉 반사실적 가정문의 형태로 주어진다.(고전 그리스어 ei + imperfect indicative V., an + imperfect ind. V.의 형태이다.) 그리고 테아이테토스는 이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맞는 말씀이라 맞장구를 치고, 그 근거로 어떤 것들(혹은 어떤 경우)은 결합하는 경향이 있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내세운다. 운동과 정지는 서로 가장 반대되고 그 결합은 가장 불가능한 것이라 이야기되어 왔다. 그래서 이들 사이의 결합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라는 전제가 주어질 때, 손님의 표현이 반사실적 가정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더라도, 테아이테토스의 대답을 통해 그 반사실적 가정이 현실화될 여지를 찾을 수는 없는가? 운동과 정지의 전면적인 결합은 말 그대로 모순이다. 정지가 운동이라거나 운동이 곧 정지라고 할 사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지는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을 술어로 갖는 한에서 그러한 것들에 참여하는 그 방식으로 운동할 수 있다. 운동은 운동 그 자체가 자기 자신과 같은 고유한 본성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그 점에서 그런 방식으로 또한 정지해 있을 수 있다. 문법적으로 이러한 독해를 이끌어낼 여지는 전무한가. 다른 한편 문맥을 고려하여 논증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운동과 정지 둘 사이의 결합 가능성이 배제될 수 있는가.

  운동과 정지가 각기 상호관계와 자기동일성 각각에 대해 전제된다면, 운동이 운동하는 경우와 운동이 정지하는 경우, 정지가 운동하는 경우와 정지가 정지해 있는 경우 사이의 구분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즉 그 자체로 오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활동, 그런 사태를 지시하는 진술(말하자면 자기술어화)과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을 통한 서술의 구분은 결합을 통한 변화와 진술이 어떠한 종류의 무엇인지에 대한 일례가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존재를 하나로 보는 자들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에서 손님은 존재가 하나와 맺는 관계를 '부분들'과 '전체' 그리고 '겪음'이란 말들을 통해 설명한다. 존재는 부분들을 통해 하나를 겪어 전체가 하나가 된다. 이를 통해 '존재는 하나이다'라는 참인 진술을 얻을 수 있다. 하나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존재가 그 전체를 아울러 존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지시될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여전히 하나이기도 하다. 만일 존재와 하나 사이의 관계가 존재와 운동, 같음과 정지 등 이후에 등장하는 '가장 거대한(아주 중요한) 유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결합과 분리에 있어서 부분적 관계와 전체적 관계라는 구분을 얻을 수 있다. 동일한 결합이라는 활동은 그 적용 범위 혹은 그 수준에 따라 상이한 결과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 

  진술(logos)이라는 유 그 자체는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 여타의 것들이지 않다. 그것들이 아니라는 것은 곧 '~이지 않음/있지 않음(to me on)'과 결합한다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인 결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스테스는 진술이 ~이지 않음과 결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그것들이 결합하지 않고서는 거짓진술이 성립할 수 없고, 거짓진술을 지어내는 기술로서의 소피스테스 기술이라는 것도 말할 수 없다. 소피스테스가 거짓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거짓말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진술이라는 유가 to me on과 결합한 결과는 진술이 자기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었지 그것이 거짓진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술과 to me on 사이의 결합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자기 이외의 것들이지 않게 되기도 하고, 거짓진술이 되기도 한다. 같은 요소들로 같은 결합이 이루어졌는데 어째서 서로 다른 두 가지 결과들이 나오는가. 여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진술이 to me on과 결합하여 진술이 아니게 되는 경우도, 불가능한 경우로서 여전히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합의 층위, 수준은 차이를 보인다.

2. 프로타고라스 '신들에 관하여' 발제 준비. 인간은 만물에 대해, ~인 것들에 대해서는 ~이라고 하는, ~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이지 않다고 하는 척도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면 신에 대해서도 인간은 척도이지 않은가.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신들에 대해서는 ~인지도 ~이지 않은지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혹시 '만물'이 아니라 '만사'인가.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정치와 정의, 염치를 논하는 프로타고라스는 인간들의 일, 즉 정치적인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서로 가르치고 또한 배운다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사에 대해 척도이다. 그렇다면 신들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 '신화적 설명'에서 등장하는 신은 일종의 유비를 위한 상징에 불과하다. 정의와 염치를 실제로 신이 준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빠짐없이 전제되어 있는 어떤 선천적 조건 혹은 능력에 대한 대강의 이해를 제공하기 위해 그런 직유를 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프로타고라스를 극단적인 상대주의자로 보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기가 어려운데, 어찌할까나. 뭐 욕심따라 갈 게 아니라 말이 되는 쪽으로 끌려 가야지. 헛바람을 조심하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회의주의자, 교조주의자, 상대주의자. 재미있는 삼각관계일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다시 정리해야 할 듯. 또 다른 과제는 『프로타고라스』에서 위대한 연설을 통해 추정 가능한 사회상, 그리고 그러한 사회상과 '인간척도설' 사이의 일관된 해석의 가능성. 아, '신들에 관하여' 발제 생각하다 보니 얼추 후자는 가닥이 잡힌 듯. 그런데 가닥이 잡혔다기 보다 그냥 윤철형님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_=? 뭐 배우는 입장이니 상관은 없을지도. 이걸로 논문 낼 것도 아니고.

3.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 장소 확보. 다음 주말에 분석철학 학회인지 뭔지 때문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 철학사상연구소 방 빌리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는 교수님들 전용. 일단 메일 드려 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걸로. 그런데 einai의 complete/incomplete 구분이 꽤 오랜 논쟁을 불러 일으킨 반면 gignesthai 관련해서는 왜 그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가. 무엇이 된다는 것과 무엇이 생긴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는 것 아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것들 사이의 생성과 복잡한 것들 사이의 생성, 단순한 생성을 구분하는 것 같은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에서 이에 관련해 뭔가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지. 재밌는 건 많은데 쉬운 건 없고 뭐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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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능, 돈, 노력. 셋 중 하나만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그가 철학을 하든 말든 난 관심 없다.
   각 조건은 다음과 같다.
   재능 : 어떤 식으로든 인정 받는 것. 학술지 등재든, 학계의 평판이든,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논증의 분석과 구성을 통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능력이겠다.
   돈 : 따로 매일 8시간 이상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도, 최소한 자기 자신, 좀 더 넓히자면 자신의 가족 생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수준. 금수저 물고 태어난 인간이 뭘 하든 간섭할 생각 없다. 한 세상 잘 놀다 가라.
   노력 : 정직함과 성실함, 논증적인 사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본 건 봤다고 하고 자기 생각은 자기 생각 그대로 표현하라. 모르는 걸 알기 위해 타인의 권위라든지 사회의 관습이라든지 어설픈 수사 따위의 지름길을 찾지 말고, 토씨 하나, 문장 한 줄이라도 이해가 안 되면 멈추어 서서 고민하라. 그걸 구성하고 분석하기 위해 마련된 학문의 역사로부터 도망가지 말라. 주장이라면 논거를 대고, 설명이라면 비약하지 말라.
  나머지는 보통 재능도 없고 부모 등골이나 빼먹는 거지새끼들이 노력도 없이 철학이란 이름만 붙은 거적데기를 뒤집어 쓰고서는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는 '나'에 도취되어 지랄병 도져 발광을 해대게 마련인데, 가뜩이나 어려운 동네 쳐들어 와서 똥물 튀기지들 말고 꺼져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2. Stanley Rosen 별세. 5월 5일이라고 뜨는데 아무튼 오늘 알게 되었다. 이렇든 저렇든 그의 저술이 내 논문 주제에 닿아 있는지라, 그러저러한 기분이랄지. 삼가 조의를 표한다. 매일, 매순간,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간다. 그 사실을 자꾸 잊어 버린다는 것도 참 기이한 일이다.

3. Peck은 왜 자꾸 쓰잘데기 없이 그리스어를 삽입해서 사람의 짜증을 돋구는가? 그냥 처음에 용어 정리하고 이후부터는 자기 번역어로 계속 서술하면 뭔가 큰 일이라도 나는가? 딱히 논증에 필요하지도 않은 원문이 자꾸 등장해서 번역해 옮기기만 힘들게 만든다. 작년에는 『소피스테스』 관련해서 서양고전학회에서 논문도 나왔고, 올해에는 서울대에서 그 대화편으로 강독이, 숭실대에서는 영역본 강독이 진행되는 듯하다. 어느 대중강연인가에서도 이 대화편에 대한 분석인지 정리인지가 과제로 주어진 듯하다. 김태경 번역, 이창우 번역 두 종류가 나와 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OCT 신판, 구판에 Bude판 등 판본도 여럿에 번역도 꽤나 많지만 실상 고전문헌학적으로 접근해서 문법 꼬치꼬치 캐물은 역서는 찾기가 어렵고, 우리말 '있다'와 '이다'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정리할 것인지에 대해 무슨 학술적 연구가 차곡차곡 쌓인 것 같지도 않고, 종류인지 형상인지 이게 후기인지 플라톤의 철학은 발전론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통합론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이러쿵저러쿵 문제는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한쪽으로 확 기운 극단적인 번역들이 여러 편 나온 뒤에야 그나마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은 표준번역이란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 전에 플라톤 철학 전반에 대한 학설 같은 게 한국에도 좀 생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뭐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나는 『소피스테스』 한 귀퉁이 지엽말단만 붙들고 늘어져 학위만 받으면 그만이다. 아무래도 꼬락서니가 박사 가서도 이 대화편 붙들고 늘어지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서도, 여하간에. 학위 다 끝내고 학자 자격증(하하,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우스꽝스럽긴 한데.) 받고 나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래도 티끌만큼은 유의미한 정리식의 논문이나마 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기대는 가져 본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도 단물이 다 빠지지 않는 대화편이니까.

4. 내일이면 어버이날이로구나. 뭐 후딱 석사 따고 나라 뜨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효도라면 효도일까나? 사실 딱히 남 좋으라고 하는 일도 아니니 면피는 안 되겠지만서도. 그나마 집돈이라도 안 축내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지. 다음 주에는 스승의 날이 있구만. 기종석 선생님 이번 학기에 정년이신데 학부 애들이 뭐라도 하려나 모르겠다. 거기 대학원 다니는 후배한테 물어 보면 뭔가 얘기가 있겄지. 정암에서 얻어온 기념품용 양주나 가져다 까야 하겄다. 정암에서 이사님께 드리는 소소한 성의입니다, 뭐 이러면 되려나. 크크. 건대는 이제 고전어 강의도 없어졌고, 지시사 하나도 제대로 못 잡아낸다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시던 선생님께서 탁자 앞에 서서 안경 돌리시던 고대철학 강의도 또 다른 누군가의 강의로 바뀌겠구만. 나야 뭐 출가외인이지만서도. 한국 고대철학 1세대에 이어 2세대도 한 분, 두 분 자리에서 물러나시는데, 그간 뭐가 어떻게 쌓여 왔는지, 축적되기는 한 건지, 아직은 여전히 바닷물에 돌멩이 던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양놈과 왜놈에 기생하는 기생충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지, 역시나 잘 모르겠다. 그래도 차곡차곡 번역들이 쌓이고 있다. 내 또래의 후속 세대 전공자들 수는 급감하고 있지만, 이 동네도 유행을 타는지 어느 때에 우르르 나왔다가 또 어느 때에는 쥐 죽은 듯 조용하고, 뭐 그런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주워 들은 이야기인데, 일본에서는 유럽과 영미에서 서양고전학이 재고되기 시작하던 그 19세기에 자기네들도 고전문헌학을 같이 시작했으니 꿀릴 것 없다는 식의 정신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들 생각하는지야 뭐 일본말을 안 배워 알아볼 수가 없지만(notomi 같은 양반은 종종 일본에 좋은 논문들 많은데 영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못 봐서 아쉽단 얘기도 하는 듯하더만, 역시나 잘은 모르겠고), 문제는 이런 주장도 맥락이 거세되어 있다는 거다. 유럽에서 고전학 흥할 때 배경은 낭만주의, 백과전서, 대륙관념론이 활개를 친 다음 혹은 그러던 와중을 거쳐 탈근대 담론까지 횡행하던 시기를 바탕에 깔고 있고, 해석학이니 구조주의니 뭐 많잖나? 영미권은 분석철학과 과학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서 세계대전을 통한 유럽과의 교류 와중에 대두된 것이 고전학이라는 얘기도 있고(기억에는 아마도 휠록이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반면에 일본은 그냥 시기만 겹칠 뿐 그런 배경은 없잖나. 뭐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나라에 비하면 날고 기는 동네이긴 하다만. 그러고 보니 저 대중강좌에 참고문헌으로 베나르데테(발음 이렇게 하는 거 맞나 모르겠다) 저술은 언급이 되는데 노토미 저술이 언급이 안 되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 말씀으로는 꽤나 잘 정리된 좋은 연구서라고들 하시던데, 뭐 읽어 본 바로는 딱히 흥미진진하진 않아서 역시나 잘 모르겠지만서도. 어차피 이거나 저거나 영어로 된 책들이니 후자를 추천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내가 듣는 수업도 아니고 뭐 상관 없겄지. 역시나 아쉬운 건 저 어려운 대화편에 대한 쓸 만한 국내 개론서가 없다는 것 아닐까? 길에서 나온『서양고대철학』1권에서는 3부 13장이 관련될 텐데, 최화 선생님은 좀, 음, 뭐 그냥 그렇다는 거다. 박홍규학파스러움이랄지 뭐랄지. 꽤 자주 얘기했던 것 같은데, 나는 탈근대 담론이 징징거림이나 칭얼거림이고 이성에 대한 지나치게 섣부른 체념이라고 생각해 왔고, 최근에 그런 논의가 나오는 것도 같다. 누구더라, 독일에 그 M. Gabriel이었나 하는 형아(나랑 몇 살 차이 안 나더만) 책이 유행이라던데. 여하간, 역시나 주워들은 바로는 박홍규 선생님도 전쟁 경험이란 게 플라톤 해석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듯한데 그게 바람직한지 잘 모르겠다. 세계대전 겪고 대공황 겪고 이러저러해서 '아, 씨발, 세상 망했다' 이러면서 여태까지 우린 다 틀렸어, 글러먹었어, 이런 반응이 대강이나마 탈근대 담론에 적용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씨발, 한국전쟁 씨발씨발 하면서 죽음이니 절대무니 거창하게 이러저러한 얘기들을 하게 되는 것도, 학술적으로는 딱히 정당화되기 어려운 종류의 것 아니려나? 뭐 『쓰여지지 않은 철학』이었나 하는 책이 생각나기도 하고, 정말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어떤 무언가가 철학적으로 환원되거나 혹은 아예 무가치하거나 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사실 이것도 유보적으로 생각할 문제이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대단한 문제들은 대단하신 님네들께 떠넘기고, 나는 자질구레한 짓거리들이나 하다 뒈지면 그만이지.

5. 10월 초까지 논문 완성해야 한다. 하자.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내게는 반드시 딛고 넘어가야 할 한 걸음이다. 여전히,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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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쪽] 플라톤의 『소피스테스』 259e4 이하에서, 우리는 다음 문장을 읽는다.
τελεωτάτη πάντων λόγων ἐστὶν ἀφάνισις τὸ διαλύειν ἕκαστον ἀπὸ πάντων·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모든 것들로부터 각각을 해체한다는 것은 모든 진술들의 궁극적인 파괴이다. 왜냐하면 형상들 서로간의 엮임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몇 쪽 뒤, 263a2와 8에서, 우리는 진술들(λόγοι)의 이러한 사례들을 발견한다.
Θεαίτητος κάθηται, Θεαίτητος πέτεται.(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
드러나는 난점은 λόγοι의 이러한 예시들이 앞서 인용된 문장의 두 번째 부분에서 이야기되는 바를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I

나는 우선 이 문제를 다룬 최근의 네 가지 시도들을 언급할 것이다.

(1) 콘포드 교수는(Plato's Theory of Knowledge, 1935, 300쪽 이하.), 인용된 문장의 두 번째 부분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분명하게 그 문장을 모든 λόγοι의 내용을 기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모든 각각의 λόγος 안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만일 이것이 그러한 뜻이라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λόγοι의 두 예시들과 정합적이지 못하리란 점을 깨달았다. '테아이테토스'가 형상이라거나 혹은 형상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또한 그래서 오직 하나의 εἶδος만이 이 예시들에 관련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어떤 λόγος 안에든 그에 관련된 오직 단 하나의 εἶδος만이 있다면, 분명한 의미에서 어떠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도 저 λόγος 안에 있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선행하는 논의 전체가 εἴδη 또는 콘포드가 플라톤적인 형상으로 간주하는('그 마지막 부분은 오로지 형상들의 세계만을 다룬다.' 302쪽.) γένη의 결합, 배합, 혼합 등에 관한 것이었을지라도, 즉, ἡ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ή라는 구절로 정확히 기술되는 주제에 관한 것이었을지라도, 콘포드는 우리에게 그 구절이 여기에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주1. 그는 '"함께 엮임"은 "결합함" 혹은 "혼합함"과 동의어가 아니다. [47쪽] 그것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든 진술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형상들이 모든 담화의 의미를 구성하는 유일한 요소들이란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개별적 사물들에 관하여서도 진술들을 구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진술 각각이 반드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을 포함해야만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라고 적고 있다.(300쪽.) 그래서 플라톤이 복수형태 εἰδῶν을 잘못 사용했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 뒤 260d7에 대한 첨언 중 콘포드는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에게 그 곳에서 εἴδη가 전혀 플라톤적 형상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eidos는 모호한 단어이다. 때로는 "실체(entity)"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302쪽.) 플라톤이 기록한 것에 관한 그런 과격한 취급의 필요성은 콘포드가 인용된 문장을 두고 그것이 플라톤에 의해 모든 λόγοι의 내용에 대한 기술을 의도하게 되었다고 가정함에 있어서 잘못하였으리란 것을 시사한다.

(2) 데이비드 로쓰 경은(Plato's Theory of Ideas, 1951, 115쪽 이하.) 그 문장이 모든 λόγοι의 내용을 언급한다고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콘포드의 관점과 유사한 관점을 취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가능한 한 점잖게, 플라톤이 그의 복수형태 εἰδῶν 사용이 단수형태에 대한 '과장'이라는 점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로쓰는, '그는 말하는 이나 생각하는 자에 의한 형상들의 함께 엮임에 모든 진술이 의존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이것은 사실상 과장인데, 한 문장은 주어로서의 고유명사, 그리고 형상이나 보편자를 나타내지 않는 고유명사를 가질지도 모르기 떄문이다. 하지만 문장의 술어는 통상 형상을 나타낸다.' 라고 말한다(115쪽). 그리고 116쪽에서 로쓰는 노골적으로, 플라톤이 취하는 예시, 즉 '테아이테토스는 난다'라는 진술이 모든 진술 각각은 형상들 상호의 엮임이라는 그의 주장을 묘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아무런 설명도 발견할 수 없고 단지 정중한 언어로 쓰여 넣어진, 플라톤이 단순한 셈에 능하지 못하다거나 그가 그의 주장을 묘사하기 위한 예시들을 잘못 선택했다는 단언만을 발견하게 된다.

(3) 최근 J. L. 아크릴씨에 의해 Bulltetin of the Institute of Classical Studies of the University of London, 2 (1955), 31쪽 이하에서 또 다른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가 주목하는) 콘포드와 로쓰의, 263a에서 제시되는 λόγοι의 예시들(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가지 진술들)이 그보다 앞선 문장에서 플라톤에 의해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 그런 어떤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든 설명하거나 예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대한 실패를 고려하여, 아크릴씨는 저 문장이 '모든 진술 각각이 형상들의 관계를 단언하거나 그에 관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아야만 한다.'(32쪽) 라고 전제한다. 오히려,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은 어떤 것이든 모든 진술 각각에 의해 선제된다.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도 포함하여서 말이다.' (34쪽) 달리 말해서, 우리는 모든 진술 각각에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을 기대하지 않는다.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은 필요-전제조건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어떤 진술에서든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의존하는 전제조건이다. [48쪽] 아크릴씨는 그의 언급 중 부정적인 부분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옳다. 그리고 플라톤이 διά라는 단어를 가지고 어떤 종류의 선제조건을 언급하려 한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아크릴씨는 그가 이러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필요-전제조건이 되는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할 때 설득력이 없다.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와 같은 그런 진술에 의해 선제되는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아크릴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는 진술은 오직 그것이 어떤 것("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지 않다" 혹은, 좀 더 한정적으로, "테아이테토스는 서있다")을 배제시키기 때문에만 진정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이다. 그 진술이 어떤 것을 배제시킨다는 말은 두 개념들("앉음"과 "앉지-않음" 혹은 좀 더 확정적으로 "앉음"과 "서있음") 사이에 양립불가능성(μηδεμία κοινωνία)이 있다는 말이다.' (34쪽.) 즉, 아크릴씨의 관점에서, '앉아 있음'이라는 말은 오직 그것이 다른 어떤 말과 양립불가능하기 때문에만 유의미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다. 또한 그 말은 그가 이것을 그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여긴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단락을 플라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끝맺는다.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아크릴씨의 과정은 이러한 것이다.
(i) 우선, 그는 플라톤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의역한다. '일부 개념들이 어울리리란 것은 유의미하고 비-자기모순적인 진술들(참이든 거짓이든)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ii) 다음으로, 그는 일부 개념들이 어울리지 않으리란 것이 진정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참이든 거짓이든)이 있기 위한 필요조건임을 보여준다.
(iii) 끝으로, 그는 플라톤의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인용한다 (34쪽).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나는 아크릴씨가 (ii)를 전제로 제시하는 증명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걸 믿지만, 그것은 플라톤이 이 문장을 가지고 다루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아크릴씨가 '두 개념들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이라 부르는 것의 귀결에 관해서가 아니라, εἴδη 상호간의 함께 엮임의 결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더욱이, 만일 우리가 양립불가능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을 때(예를 들어 252d. 254d 참조) 그가 했어야 하는 말을 되돌아 본다면, 우리는 그 말이 유의미한 진술들이 아니라, '두 개념들 사이의 양립불가능성'으로부터 귀결되거나 그것이 시사하는,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운동이 정지한다)와 같은 그런 자기-모순적 진술들이었음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 나는 아크릴씨 자신이 그걸 믿는다고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그가 덧붙이기를(34쪽), '플라톤은 인정하건데 그 점[구체적으로 말해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무엇이 되었든 모든 진술 각각에 의해 선제된다는 것]을, [49쪽] 다른 주제에 관한 논의에서 사용되는 테아이테토스의 사례들과의 관련 속에서 주장하지 않는다.' 라고 하기 때문이다. 

(4) 더욱 더 최근 시도는 R. S. 블럭 박사의 시도이다.("False Statement in the Sophist", J. H. S. 77 (1957) 181쪽 이하.) 블럭 박사의 해석은 복잡한 것이고 상당수의 중요한 물음들을 야기시키며, 그 중 일부는 내가 이전 논문에서 다루고자 시도하였던 것들이다. 여기에서 나는 그의 접근 방식이 불가능하거나 불만족스러운 귀결들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지점들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

(i) 블럭 박사의 첫 걸음은 콘포드와 유사한데, 그가 259e에서 언급된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 은, 방금 전 얼마 간의 시간 동안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를 붙들고 있던 그 주제인 형상들의 혼합이나 결합 따위(즉 우리로부터 독립적으로, 그것들 자체 사이에서 그것들의 관계들)와 동일시될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곧장 이어지는 문장에서 개탄된 그 '고립'이 251e-252c에서 고찰되었던 어떤 것들이든 γένη는 결합한다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야만 한다'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블럭 박사는 오로지 그 συμπλοκή에 관련하는 것만이 형상들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콘포드와 다르다. 콘포드는 다른 '요소들' 또한 마찬가지로 허용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었다(위를 보라.). 우리는 그 첫 번째 정의가 블럭박사가 아크릴씨의 해석에 대항해 제기하는 비판에서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을 이해하려는 방식에 대한 암시임을 발견한다. 그는 아크릴씨의 해석이 'εἰδῶν συμπλοκήν을 단순히 형상들의 세계의 복잡한 구조를, 그 존재하는 "망" 또는 "엮인 복잡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을 포함하고, 예상할 수 있듯, 우리가 이야기할 때 형상들을 함께 엮는 그러한 방식들을 언급하는 것으로는 간주하지 일은 포함하지 않는다' 라는 근거에서 그 해석에 반대한다.(182쪽). '259e에서 손님의 언급이 우리가 구성하는 어떤 진술에서든 우리는 사실상, 맞든 틀리든, 형상들을 함께 엮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오직 그런 식으로만 담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간주하는 것이 최선일 것으로 보인다.' 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참조하라. 이 생각, 우리가 이야기할 때 형상들을 함께 엮을 수 있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로쓰에게서도 나타난다. 위를 보라.), 물론 그것은 부조리하고, 그러므로 블럭 박사는 암묵적으로 우리가 함께 엮는 것이 형상들의 이름들, 혹은 형상들을 나타내는(혹은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풀어내는-unpack into-') 사물들과 개별자들(테아이테토스 같은)의 이름들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블럭 박사는 절대로 그가 이러한 대입을 구성하고 있다고 명시적으로 지적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의 해설에 내재한다. 그가 의미하는 것이 '이런 것들이 그에 대한 이름인 그러한 형상들' 혹은 '그것의 표현형 개별자들에 대해 이런 것들이 그 이름들인 그러한 형상들'일 때, '관련된 형상들'이라는 구절을 그가 사용함으로써 가장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대입은 해당 그리스어 문헌에 의해서는 그닥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플라톤이 담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50쪽] 형상들의 이름들을 우리가 함께 엮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바랐었더라면, 그가 그리 하는 걸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으로, 블럭 박사에 따르면, 손님의 그 문장은 엮임이 행해지는 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우리에 의해 그리 행해진다는 뜻이며, 형상들 그 자체의 그 어떠한 결합도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블럭 박사는 또한 형상들 그 자체와 그것들의 결합들이 그 사태 안에 포함된다는 것도 믿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관련된 형상들은 만일 진술이 참일 것이라면 결합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진술이든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반드시 형상들 사이의 특정 관계를 선제해야만 한다.' 블럭 박사가 사실상 손님의 언급을 형상들 자체의 결합에 관한 어떤 것을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다음을 통해 보여진다. '우리의 담화가 형상들의 함께 엮임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진술과 만일 형상들 사이의 아무런 결합도 없다면 담화는 파괴되리라는 진술은 의미를 지니는 모든 각각의 문장이 정확하게(맞게) 관련된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형상들의 함께-엮임'이 그것들의 이름들에 대한 우리들의 함께 엮음을 의미한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형상들 사이의 아무런 결합도 없다'라는 것은 오직 형상들 그 자체를 언급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블럭 박사의 관점에서 259e에서 손님이 두 가지 동시적 단언들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a) 우리에게 담화를[이것은 분명히 '맞든 틀리든' 행해질 수 있다.] 가능케 해주는 것은 우리에 의한 형상들의 이름들에 대한 함께 엮음이라는 것, (b) 참인 진술에서 우리에 의한 형상들의 이름들에 대한 함께 엮음을 우리에게 가능케 해주는 것은 형상들 그 자체 사이에서의 실질적인 결합이라는 것. 만일 플라톤이 이러한 단언들을 둘 중 어느 쪽이든 혹은 양자를 동시에든 구성하길 바랐다면, 그가 259e에서 우리가 읽은 그런 문장을 택했으리란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ii) 블럭 박사는 (내 생각이 맞다면) 손님이 거짓 λόγος에 대한 그의 해명을 진행할 때 그는 형상들에 관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손님은 그 문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실상 우리가 λόγοι 안에서 함께 엮는 그 동사들과 명사들이 형상들을 나타낸다는 것을 시사조차 하지 않는다. 블럭 박사는 대화편의 이 부분에서 형상들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이유들을 든다. (1) 플라톤은 소피스트들(그의 현재 적수들)을 향해 그들이 동의하지 않을 그러한 이론을 통해 참과 거짓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일이 부적절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 때 매우 적절한 고찰이다. 나는 내 이전 논문에서 μέγιστα γένη 논의 전반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과 더불어 [51쪽] 부적절성에 관한 이러한 지적을 구성하였었다. 이러한 이유가 타당한 것이라면, 또한 나는 그렇다고 믿는데, 왜 그것은 대화편의 이 지점 이전까지 작동하지 않는가?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μέγιστα γένη 논증을 통해 '소피스트'와 씨름하고 있는 것으로 자신들을 표현하였다. 두 번째로 (2), 블럭 박사는 두 형상들이 결합한다는 사실이 참인 λόγος를 필연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가능하게 만들 뿐이라는 점을 파악한다. 이것은 맞는 얘기다. 해당 대화편에서 논증의 진행 과정을 보여주는 와중에, 우리는 운동이라는 형상과 존재라는 형상(οὐσία에 대한 블럭 박사의 번역어)이 결합하지 않는 한 참되게 '운동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말할 의무는 없다. 우리는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고 말할 수 있다. 특정 형상들이 결합하리라거나 결합한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거짓 λόγος 논의를 진행할 때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블럭 박사가 말하는대로, 우리는 형상들[의 이름들]을 '부정확하게(잘못)' 함께 엮을 수 있다. 그리고 형상들 그 자체가 완전히 잘 결합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왜 그것들[의 이름들]을 부정확하게 결합하는지에 관해 아무런 방향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블럭 박사의 이유들 중 어느 쪽에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왜 형상들이 거짓 λόγος에 대한 손님의 해명에 작용하지 않아야 하는지 놀랍도록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 이유들은 그 이유들이 야기하는 물음에 답하는 데에는 완전히 무효하다. 왜 손님은 259e에서 우리가 구성하는 모든 진술 각각에서 우리가 형상들을 함께 엮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내는 수고를 감수하는가? 이 일이 거짓 λόγος에 대한 그의 해명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지 않았을 한에서, 그는 그 점을 지적하느라 자신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 그리고 우리를 잘못 이끄는 것 - 아닌가? 만일 블럭 박사가 옳다면, '우리에 의한 형상들의 함께 엮임'이라는 이 개념은 259e에서 갑작스럽게 극적으로 등장했다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고 극적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선행하는 것이나 이어지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고, 완전히 고립되고 맹목적인 것이 된다.

(iii) 만일 블럭 박사가 '함께-엮임'의 구성요소를 그 때까지 손님에 의해 고찰된 유형의 형상들에(예를 들어 'Κίνησις ἔστιν'이라는 λόγος 안에서 운동이라는 형상과 존재라는 형상의 함께 엮임) 한정했었다면, 나는 그가 꽤나 강력한 사례를, 비록 그 문맥이 여전히 그에게 결정적으로 반대되었을지라도 (57쪽 이하, 아래를 보라), 구성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그 요소들을 이런 유형의 형상들에 한정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기로, 손님의 문장은 '반드시 우리가 어떻게든 이런 유형의 둘 혹은 그 이상의 형상들에 관련된다는 가정 하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특수한 개별적 인격들 혹은 사물들에 관한 진술들을 다룰 때에라도,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 같은 진술을 다룰 때에라도 말이다.'(182쪽). 이 지점에서 블럭 박사는 그의 선행 연구자들이 직면했던 것과 같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와 같은 λόγος에서, 물론 많이 쳐줘도 단 하나의 형상이 있거나, 오직 하나의 형상이 표현되고, 우리는 συμπλοκή를 구성하기 위해 적어도 두 형상들이 필요하다. [52쪽] '앉아 있음'은 아마도 형상으로서 통과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테아이테토스'는 형상이 아니고 형상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여기에서 블럭 박사는, D. W. 햄린씨에 의해 또 다른 관계에서 구성된 제안을 적용하여, 강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가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이라는 형상을 앉아 있음이라는 형상과 함께 엮고 있다. …… "테아이테토스"는 그가 참여하는 모든 형상들의 목록으로 "풀리는 것(분석되는 것)"으로서 간주될지도 모른다. (182쪽). 이것은 콘포드, 로쓰, 그리고 아크릴이 고려하지 않았던 해법이다. 그들은 '테아이테토스'가 형상이 아니며 형상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난점을 해결할 어떠한 방법도 볼 수 없었다. 이 난점을 에둘러 감으로써, 블럭 박사는 이제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는 λόγος에서 우리가 형상들의 συμπλοκή를(즉 형상들의 진정한 συμπλοκή에 대한 언어 표현을)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블럭 박사가 우리에게 제시한 이러한 짝으로 이루어진 συμπλοκή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첫 번째로, '테아이테토스'가 인간이라는 형상을 나타낸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절망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아마도 만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을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다. '인간'이든 '앉음'이든 어떠한 형상들도 손님에 의해 언급되거나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여전히, 이것이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되지는 않을 터인데, 254c에서 손님이 논의의 간결함을 위해서 엄청난 수의 가용한 것들 중에서 특정 εἴδη를 선택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앉음이 그 선택된 εἴδη에 관하여 증명되는 것에 의해 포괄된다고 주장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인간과 앉음의 συμπλοκή는 손님이 제시하였던 증명과정 중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유비되지 않는다. 증명된 경우들은 전체를 전부 다 매우 규정된 방식이고, 이는 우리가 그것들을 나열한다면 분명해질 것이다.
  정지는 τὸ ὄν, θάτερον, 그리고 ταὐτόν과 결합한다(~에 참여한다, 기타 등등).
  운동은 같지 않다.
  모든 것이 θάτερον에, 그리고 ταὐτόν에 참여한다.
  
(이제 τὸ μὴ ὄν과 동일시된) Θάτερον은 τὸ ὄν에 참여한다.
  Τὸ ὄν은 θάτερον (τὸ μὴ ὄν) 에 참여한다.
  요약 : Τὸ ὄν과 Θάτερον이 모든 γένη를 '관통하며' 서로를 관통한다.
혼합, 참여, 기타 등등의 이와 같은 경우들에 비교해 볼 때, 인간과 앉음의 συμπλοκή는 이례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최소한도 그 방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혹은 앉음)과 Τὸ ὄν, Θάτερον, 혹은 ταὐτόν의 συμπλοκή가 있었다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과 앉음의 συμπλοκή는 증명된 경우들의 노선에서 두드러지게 벗어나는 것이다. 만일 손님이 259e에서 언급하면서 그때까지 언급되지 않은 구성에 속하는 συμπλοκή 혹은 그 경우들을 도입하고자 의도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가 우리에게 그의 의도에 대한 어떤 암시라도 줄 것을, 혹은 만일 이 곳이 아니라면 조금 나중의 지점에서 이 두 형상들을 호명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그가 곧장 260a-b에서 계속해서 그가 논의해왔던 것과 같은 방식의 구성에 속하는 συμπλοκή를
, 즉 일부 εἶδος와 τὸ ὄν의 συμπλοκή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릴 때, 그가 259e에서 또 다른 구조의 συμπλοκή를 의미한다는 우리의 의구심은 믿지 못할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가 염두에 둔 특수한 συμπλοκή는 λόγος와 τὸ ὄν의 경우이다. λόγος는 그가 εἶδος로도 γένος로도 기술하는 것이고(아래 56쪽을 보라.), 이것은 문맥을 고려하여 해당 구절을 읽는 누구에게든 명백하다. 인간과 앉음이라는 형상들의 도입은 기이할 뿐만 아니라 과잉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고찰된 해법들 중 어떤 것도 만족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그들이 해결하고자 의도한 난점이 완전히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난점은 단지 [54쪽] 플라톤이 말한 바에 대한 오독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오독의 주요 원인은, 내 생각에,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의 용법에 불일치하거나 혹은 적절한 설명을 구하는 데에 실패한, 그러한 εἶδος의 의미에 관한 선입견이다.
  네 가지 해석들 모두에서 우리는 유사한 사고과정을 발견한다. 우선, 259e에서 εἰδῶν을 통해 플라톤은 '형상들'(콘포드, 블럭). '형상들', 혹은 '보편자들', 혹은 '형상들을 가지고 기술되는 것들'(로쓰), '형상들', 혹은 '개념들', 혹은 '일반명사들의 의미들'(아크릴)을 의미한다는 것이 가정된다.
  두 번째로,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에 관한 그 문장은 우리에게 모든 각각의 λόγος의 내용에 관하여 어떤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 가정된다. (a) 그 문장이 모든 각각의 λόγος는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을 포함하거나 표현한다는 것을 선언한다거나(콘포드, 로쓰, 블럭), 혹은 (b) 그것이 한 λόγος 내에서 어떠한 용어든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기 이전에 충족되어야만 하는 조건을 진술한다는 것(아크릴)이 가정된다.
  세 번째로, 그 문장이 따라서 λόγοι의 내용과 관련되기 때문에,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λόγοι의 예시들은 어떤 식으론가 앞서 λόγος의 본성에 관하여 제시된 것으로 주장된 기술 혹은 정보를 묘사하거나 적어도 그것과 화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장된다.
  우리가 보았듯, 두 번째 전제에 관련해서 콘포드와 로쓰는 두 번째 가정과 관련하여서 견본 λόγοι가 어쨌든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을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실패하는데, 각각에서 오직 하나의 εἶδος만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블럭 박사는 매우 의문스러운 두 번째 εἶδος를 συμπλοκή를 구성하기 위해 도입한다. 그리고 아크릴씨는 한 용어가 λόγος 내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기에 앞서서 요구되는 것이 그것의 다른 것들 혹은 또 다른 것과의 συμπλοκή가 아니라, 그것의 다른 것들 혹은 다른 것과의 양립불가능성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들 중 어떤 것도 핵심 구절인 ἡ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ή에 대해 합당하지 않다. 플라톤이 실제로 말하는 바에 대한 고찰은 그의 말 속에 방금 언급된 두 가지 가정들을 위한 아무런 보장도 전혀 없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서 세 번째 주제 하에 표현된 의무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II

그럼 플라톤은 εἴδη라는 명칭을 『소피스테스』의 이 논의에서 무엇에 적용시키는가? 나는 내가 언급했던 학자들에 의해 구성된 가정들을 한편으로 치워두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대화편 자체 내에서 알아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여기에서 εἴδη라고 부르는 것의 상태에 관하여 어떠한 가정도 구성하지 않기 위해, 나는 그것들을 비결정적인 단어 '인자들'로 언급할 것이다.
  [55쪽] 관련된 그 인자들에 뭐가 되었든 어떤 명칭이 부여되기에 앞서 양립가능성과 상호 적용가능성이라는 주제에 관한 논의가 해당 대화편에서 주목할 만한 분량을 차지한다. 상호 적용가능성의 문제는 앞서 237에서 야기된다. 그리고 이후 그것은 특정 인자들이 '혼합'할 것인지, 상호적으로 '참여'할 것인지 기타 등등에 대한 물음을 통해 정식화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진술들이 허용될 수 있는 진술들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다.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 τὸ μὴ ὂν ἔστι, τὸ ὂν οὐκ ἔστιν, 이러한 등지의 것들 말이다. (이 논의의 특별한 의도는 물론 τὸ μὴ ὄν이 다른 인자들과 양립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τό τε μὴ ὂν ὡς ἔστι κατά τι, καὶ τὸ ὂν πάλιν ὡς οὐκ ἔστι πῃ (~이지 않음이 어떤 것에 따라서는 ~이라고도, 또 되돌려 ~임이 어떤 식으로 ~이지 않다고도. 241d6)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작업의 성공은 결국 258-259에서 선언된다. τὸ ὄν과 τὸ μὴ ὄν은 양립가능하다. 그것들은 상호적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자들이 무엇인지는, 손님이 그것들을 γένη와 εἴδη라고 부르기 시작하기 전부터조차,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들은 양립가능성과 양립불가능성에 관한 논의에서 나타나는 인자들이다.
  여러가지 동사들과 명사들이 이러한 양립가능성과 그것의 표현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다.
(1) 한 가지는 συμπλοκή이다. 그것은 앞서 240c1에서 등장한다. κινδυνεύει τοιαύτην τινὰ πεπλέχθαι συμπλοκὴν τὸ μὴ ὂν τῷ ὄντι. (이런 무슨 엮임에서 ~이지 않음이 ~임과 얽히는 것 같다. 그 문맥은 εἴδωλον-상, image-에 관한 논의이다. 그것은 ἀληθινόν-참된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ὄντως ὄν-~임다운 ~임-이 아니지만, ἔστι γε μήν πως-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실로 ~이긴 한 것이다.- 그것은 εἰκὼν ὄντως-~인 것답게 모상이다. Οὐκ ὂν ἄρα ὄντως ἐστὶν ὄντως ἣν λέγομεν εἰκόνα-그래서 ~임답게 ~이지 않음이 ~임답게 우리가 말하던 모상이다-.)
(2) 또 다른 것은 προσάπτειν이다. 241b1에서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게 된다. τῷ γὰρ μὴ ὄντι τὸ ὂν προσάπτειν ἡμᾶς πολλάκις ἀναγκάζεσθαι-왜냐하면 ~이지 않음에 ~임을 적용하도록 자주 우리가 강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λόγος ψευδής-거짓 진술-는 λόγος τά τι ὄντα λέγων μὴ εἶναι καὶ τὰ μὴ ὄντα εἶναι-어떤 점에서 ~인 것들이 ~이지 않다고 그리고 ~이지 않은 것들이 ~이라고 진술하는 그런 진술이다-. 그리고 '소피스테스'는 그러한 προσάπτειν-적용-을 금지한다.)
(3) 또 다른 것은 κοινωνία이다. 250b9에서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는다. ἀπιδὼν αὐτῶν [στάσεως καὶ κινήσεως] πρὸς τὴν τῆς οὐσίας κοινωνίαν-그것들[정지와 운동]의 ~임과의 공유에 비추어 보면서-.
(4) 251d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용어들의 예시들을 포함한다. προσάπτειν, ἄμεικτος, μεταλαμβάνειν, ἐπικοινωνεῖν.-적용, 섞이지 않음, 나누어 잡음(c.f. metechein), 마주-함께 가짐-. πότερον μήτε τὴν οὐσίαν κινήσει καὶ στάσει προσάπτωμεν … ἀλλ᾿ ὡς ἄμεικτα ὄντα καὶ ἀδύνατον μεταλαμβάνειν ἀλλήλων … τιθῶμεν; ἢ πάντα εἰς ταὐτὸν συναγάγωμεν ὡς δυνατὰ ἐπικοινωνεῖν ἀλλήλοις; -우리가 ~임을 운동에도 정지에도 적용시키지 않고 … 오히려 섞이지 않는 것들이자 서로 나누어 잡지 못하는 것이라고 … 정할까? 아니면 모든 것들을 같은 것으로 끌어모아 서로 마주-함께 가질 수 있는 것들이라고[정할까]?
이러한 그리고 이와 유사한 용어들(μετέχειν과 σύμμειξις 등), 양립가능성과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기술들은 그 주제에 관한 논의 내내 사용된다. 그리고 그러한 양립가능성과 양립불가능성에 관련되는 인자들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의심의 가능성도 피하기 위해, 나는 다음의 목록에서 오직 γένος나 εἶδος라는 명칭들이 해당 대화편 내에서 명백하게 적용되는 그러한 인자들만을 포함시켰다. 따라서 나는 253b8, γένη라는 호칭이 [56쪽] κίνησις, στάσις, οὐσία라는, 선행하는 문맥 내에서의 주로 논의되었던 세 가지 인자들에 처음으로 적용된 행보다 더 앞서는 어떠한 언급도 그 목록 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추가적으로, 가능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나는 여기에서 다음 사항을 언급해야 한다. (a) 252s7에서 εἴδη에 대한 언급 (ὅσοι κατ᾿ εἴδη τὰ ὄντα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ἔχοντα εἶναί φασιν ἀεί - 형상들에 따라 ~인 것들은 같은 것들에 대해 마찬가지 상태인 것들이라고 언제나 말한다 - ) 은 포함되지 않는데 그것은 명백히 형상들의 친구들이 믿는 νοητὰ ἄττα καὶ ἀσώματα εἴδη(사유대상이자 비물체적인 어떤 형상들)이고, 양립가능성에 대한 논의에 관련된 인자들에 대한 언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b) 257d 이하의 구절
, τὸ καλόν, τὸ μὴ καλόν, τὸ μέγα, τὸ μὴ μέγα, τὸ δίκαιον, τὸ μὴ δίκαιον 등이 언급되는 그 구절은 아마도 그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 것인데, 257e9 이하에서 τὸ καλόν과 τὸ μὴ καλόν이 τὰ ὄντα 중의 하나로 헤아려지기 때문이다.(258a7 이하 참조) 달리 말해서 나는 다음의 목록을 생각한다. 비록 그 언급들의 빠짐없는 목록표를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253b8 이래로 εἶδος나 γένος라고 불린 모든 인자 각각에 대한 언급을 포함시킨다.
(1) 254d4 τὸ ὄν, στάσις, κίνησις가 γένη라고 불린다. 그것들은 255c5에서 εἴδη라 불린다.
(2) 255c5 τὸ ταὐτόν이 네 번째 εἶδος로 기술된다.
(3) 255b 12-255d4 τὸ καθ᾿ αὑτό와 τὸ πρὸς ἄλλο가 εἴδη로서 언급된다.
(4) 255d8 ἡ τοῦ θατέρου φύσις가 εἴδη 중에 포함된다.
(5) 258c2 τὸ μὴ ὄν이 반드시 하나의 εἶδος로서 πολλὰ ὄντα에 셈해 넣어져야 한다.
(6) 260a5 λόγος: πρὸς τὸ τὸν λόγον ἡμῖν τῶν ὄντων ἕν τι γενῶν εἶναι.-우리에게 진술이 ~인 유들 중 하나의 무언가이다라는 점에 대해서.
(7) 260d5 이하. λόγος와 δόξα. 소피스테스는 τὰ εἴδη 중 일부가 τὸ μὴ ὄν에 참여한다는 것에 동의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들 중 일부는 그렇지 않다고, 그리고 λόγος와 δόξα는 그리하지 않는 그러한 것들에 속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λόγος와 δόξα의 본성을 탐구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것들의 τὸ μὴ ὄν과의 공유를 알아볼 수 있게끔.
(8) 263d7 만일 B사본과 T사본의 독해가 적용된다면, διάνοια, δόξα, φαντασία가 γένη라 불린다.
나는 여기에서 이 목록에서 손님이 γένος 혹은 εἶδος라는 명칭을 적용하는 그 항목들 모두가 플라톤적인 형상들인지 하는 물음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곳에서 내가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의 의도 중 일부는 τὸ μὴ ὄν, θάτερον, τὸ ὄν, ταὐτόν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의도에 맞게 요청되는 것은 전부, 『소피스테스』에서 이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εἶδος와 γένος라는 명칭들이 실제로 적용되는 그 인자들이 무엇인지 주목하는 것, 그리고 특히 λόγος가 
εἴδη 중 하나로 기술된다는 데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의에서 εἴδη와 γένη로 플라톤이 의미하는 바가 플라톤적 형상들이라는 그 믿음은, 259e5에서의 그 문장을, 손님이 명백히 λόγος를 εἶδος로 그리고 γένος로 기술한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오독하도록 이끌었던 한에서 관련이 있다.

III

우리는 이제 259e5에서의 그 문장,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이라는 문장의 의미를 고찰하는 일을 진행할 것이다. 그 문맥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사유 경로는 259d로부터 이어진다.
  손님은 결국 다른 것이 같다거나 같은 것이 다르다고 어떤 구체적이지 못한(불특정한) 방식으로 단언하는 자들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정확히 어떤 측면에서 그것들이 그러한지 말하게 되어야만 한다. 더 나아가, 그가 덧붙이기로, 모든 것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비-철학적 인간의 표지이다. 그러한 분리는 실제로 모든 λόγοι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그래서 그의 말로는 우리가 우리의 적들에게 한 εἶδος를 또 다른 것과 혼합시킨다는 것을 허용하도록 강제했던 것이 - 특히 이 점에 관해서, 이제 우리가 λόγος를 τὰ ὄντα γένη 중의 하나인 것으로서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 얼마나 적기에 이루어진 것인지 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λόγος를 박탈당했더라면, 우리는 철학을 박탈당해야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이제 즉시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에 당도하는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바로 그것의 존재를 박탈당했다면(αὐτὸ μηδ᾿ εἶναι τὸ παράπαν),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λέγειν할 수 없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박탈당했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무것도 다른 아무것과도 전혀 혼합함이 없다고 인정했었더라면 말이다.
  이 이야기의 요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소피스테스'에게 어떤 식으로든 어떤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을 인정하도록 강제했다. 이 συμπλοκή는 οὐσία(혹은 τὸ ὄν)의 여타 εἴδη 혹은 γένη와의 
συμπλοκὴ를 포함한다(259a5). 따라서 λόγος와 οὐσία의 συμπλοκή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λόγος와 같은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적들에게 뭐가 되었든 아무런 μεῖξις도 발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인정해 주었다면, λόγος와 οὐσία의 아무런 μεῖξις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λόγος 같은 그런 것도 전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행히도, 우리는 [58쪽] λόγος가 τὰ ὄντα γένη 중 하나라고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260a5). κίνησις와 στάσις처럼, 그것이 οὐσία와 서로 교통하지 않는 한 그 둘 중 무엇도 있을 수 없듯(252a2. 254d10, 256a1 참조), λόγος도 마찬가지로 οὐσία와 혼합하고 결합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259e5에서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이라는 문장은 다음을 뜻한다. 우리는 εἴδη 서로 간의 일부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특히, 우리는 τὸ ὄν(οὐσία)이 다른 모든 εἴδη와 결합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것은 εἴδη 중 하나인 λόγος와의 결합을 포함한다. 따라서 λόγος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 그 문장은 우리에게 λόγος의 내재적 특성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이제 λόγος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는 걸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만을 지적한다. 그 문장은 우리에게 한 용어가 한 λόγος 안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필연적인 선제조건들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 문장이 어떤 식으로든 λόγος의 정의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종류든 정의로 혼동하는 것은 기초적인 오류인데, 손님이 곧장 계속해서 그들이 λόγος 같은 것이 있다는 걸 보장받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왜냐하면 그들의 다음 작업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어서 말하기 때문이다.(διομολογήσασθαι τί ποτ᾿ ἐστίν, 260a7). 그리고 그들은 이 일을 즉시 진행한다. 이 언급은 손님 입장에서 만일 그가 λόγος의 정의와 유사한 어떤 것이든 언명했던 것이었다면 부조리할 것이다. 그리고 손님과 테아이테토스가 λόγος가 무엇인지 탐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소피스테스'는 τὸ μὴ ὄν이 οὐσία(τὸ ὄν)에 참여한다는 것(260d5)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제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여전히 모든 εἴδη가 τὸ μὴ ὄν에 참여한다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어떤 형상들은 그렇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고, λόγος와 δόξα는 그리 하지 않는 것들 중에 속한다고 말할 것이다. λόγος의 정의는 λόγος가 τὸ ὄν만큼이나 τὸ μὴ ὄν과도 '혼합'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결과로 λέγειν τὰ μὴ ὄντα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즉 ψεῦδος, ψευδὴς λόγος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에게 입증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에서 필연적인 단계일 것이다. 그 논증의 남은 부분은 내가 다른 곳에서 상술하였고, 그 설명을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구절이 진행되는 과정(260b10에서 261c8까지)이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기에 앞서 곧장, 손님이 지금 제기된 문제가 λόγος와 τὸ μὴ ὄν 사이에 그리고 δόξα와 τὸ μὴ ὄν 사이에 어떤 결합이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예를 들어 260b10 이하, 260d7, 260e2 이하, 261c7을 보라)라고 거듭하여 진술한다는 것은 덧붙일 만하다. 덧붙여,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감당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자마자, 관련된 그 인자들은 [59쪽] 더 이상 εἴδη(or γένη)가 아니라, ὀνόματα(명사들)이다. 이 점은 손님에 의해 261d1에서 꽤나 분명해진다. 그는 앞서 그들이 εἴδη의 함께 어울림을 (그리고 γράμματα의 어울림 또한, 그것은 253a1 이하에서 εἴδη에 대한 유비로 간주되었다) 논의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낸다. 이제 그들은 계속해서 ὀνόματα의 함께 어울림을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γράμματα가 모두 함께하지는 않을 것이고, 음들도, εἴδη도 그러할 바로 그와 같이, 그렇게 이제 그들은 ὀνοματα도 모두 함께하지는(συναρμόττειν, 261d5) 않을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ὀνόματα의 결합은 εἴδη의 결합과는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이 점은 만일 우리가 다음 세 가지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1) 두 종류의 ὀνόματα가 구별된다. 고유 ὀνόματα (즉 인명들을 포함하는 명사들), 그리고 ῥήματα (즉 동사들).
(2) 전형적으로 불가능한 결합은 이제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가 아니라, 명사들의 나열 혹은 동사들의 나열이다 (예를 들어 βαδίζει τρέχει καθεύδει, 262b). 오직 우리가 명사와 동사를 지닐 때에만 우리는 λόγος를 산출해내는 그러한 가능한 결합을 얻게 된다 (더욱이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라는 것은 이제, 비록 거짓 λόγος이더라도, λόγος를 만들어내는 가능한 결합일 것이다). 오직 그렇게만 '함께 어울림'과 συμπλοκή - 명사와 동사의 συμπλοκή (262c) 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화편의 더 앞선 부분,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가 가능한 결합에서 제외되었던 그 논의에서의 것과는 꽤나 다른 종류의 συμπλοκή이다.
(3) 선행하는 논의에서, 만일 한 결합이 아무튼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유효한 반면, 현재 논의에서 명사와 동사의 어떤 결합이든 가능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혹은 심지어 
한 번이라도 참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Θεαίτητος κάθηται는 소님에 의해 이야기되었을 때 참이지만, 언제나 참일 필요는 없고, 언제나 참이었던 것도 아니다. Θεαίτητος πέτεται는 결코 참이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참이 아닐 것이다).
  [60쪽] 나는 이 논의에서 우리가 앞선 συμπλοκή, συμπλοκή τῶν εἰδῶν이었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유형의 συμπλοκή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차이점들을 언급한다. 우리는 또한 '플라톤이 명백히 형상들에 관여하려 의도한다(314쪽)'라는 콘포드의 믿음, 그리고 그것들을 끌어 들이려 시도하는 그의 노력(313쪽, 317쪽)이 논의의 이 부분과 전적으로 불일치한다는 것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거짓 λόγος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하고 그것을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317쪽.)
  요약하자면, 259e에서 그 문장은 어떤 식으로도 λόγος의 구성에 대한 정의나 묘사, 혹은 λόγος에서 사용될 어떤 중요한 구성 요소든 그것의 산출을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들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대화편의 앞선 이야기에서 모든 εἴδη에 대해 확립된 원칙을 특수한 경우(즉 λόγος)에 적용시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263a에서 제시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가지 λόγοι의 내용들이 어떻게 저 문장과 정합적인지 보여줄 아무런 의무도 없다. 더구나 대화편에서 주어지는 λόγος의 정의, 즉 264d4에서 손님에 의해 주어진 정의가 있고, συμπλοκή라는 용어는 그 안에서 ㅏ타난다. συμπλέκων τὰ ῥήματα τοῖς ὀνόμασιν: '우리는 그러한 πλέγμα를 λόγος라 부른다' (그리고 262c5 ἡ πρώτη συμπλοκή를 참조하라). 하지만 이것은 εἴδη 상호의 συμπλοκή가 아니다. 그것은 동사의 명사와의 συμπλοκή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에 대하여 263a2 이하에서 제시된 
예시들은(Θεαίτητος κάθηται, Θεαίτητος πέτεται) 훌륭한 기술들이다.

IV

대화편 내에서 논증의 단계들에 대한 이하의 개괄은 이 논문에서 다루는 문제가 그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첨부된다. 그 개괄은 이러한 의도에 충분한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논증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위해 나는 독자제위께 이미 언급한 내 이전 논문을 언급해야만 한다.
  문제에 대한 진술. 그 문제는 236e1 이하에서 처음으로 명백하게 진술된다. ψευδῆ λέγειν이 어떻게 가능한가? ψευδῆ λέγειν은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 εἶναι하는 것이다. 그것은 241a1에서 재진술된다. ψευδὴς λόγος는 λέγει τὰ μὴ ὄντα εἶναι이다. '소피스테스'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인데, 그것이 τὸ ὄν을 τὸ μὴ ὄν에 '적용시킴'(προσάπτειν, 241b1)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τὸ ὄν을 [61쪽] τὸ μὴ ὄν에 '적용'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규준을 위반하는 것이(241d5 이하), τὸ μὴ ὄν이 어떤 식으로는 ἔστι(상동)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즉 일부 논쟁자들에 반대하여, 그러한 '적용들'이나 '결합들'이 허용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적법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251d5 이하)
(1) 1단계. γένη(혹은 εἴδη)의 일부 상호 결합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립시킨다(251e-252e). 그렇게 가능한 것으로 보여진 것들 중에 모든 εἴδη들의 οὐσία와의 결합들이 속한다 (256d, e, 일반적 승인은 259a, b). 이는 다음을 포함한다.
(a) τὸ μὴ ὄν의 οὐσία와의 결합(257a). 
  이것의 결과들은 다음을 포함한다.
  (i) τὸ ὂν οὐκ ἔστιν. εἴδη의 모든 개별 사례에서만큼, 그렇게 많은 ὄν이 τὸ ὄν에 관하여 있고, 무한한 μὴ ὄν이 그것에 관하여 있다(256e5). τὸ ὄν이 그 자체로 ~이지만, 셀수 없이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이지 않다'.(257a)
  (ii) τὸ μὴ ὂν ἔστιν (256d, 최종 승인은 258b). 즉 τὸ μὴ ὄν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무언가와 다른 것이다(257b, c). 더 보충하자면, 그것은 x인 것과 다른 것이다(257d 이하).
(b) λόγος의 οὐσία와의 결합.
  그 결과. λόγος ἔστιν(259e-260a). 즉 λόγος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 하지만 λόγος 또한 τὸ μὴ ὄν과 결합하는가? 우리는 τὸ μὴ ὄν이 모든 ὄντα 전반에 '퍼져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보여주었다(260b).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것이 특별히 λόγος와 δόξα에 적용됨을 보여주어야 하고(260b-e), 달리 말해 우리는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 λόγος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먼저 λόγος가 무엇인지 탐구해야만 한다.
(2) 2단계.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
  그 결과: λόγος는 명사와 동사의 결합이다.(261d-262e)
(3) 3단계. λόγος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주어)에 관하여 무언가(동사)를 말한다. λέγει τι περί τινος(262e-263a)
(4) 4단계. 우리는 각 εἶδος에 관하여 많은 ὄν이 있고, 엄청난 수의 μὴ ὄν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256e. 위의 (1) (a) (i)을 보라.). 유사하게,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여러 ὄντα와 여러 μὴ ὄντα가 있다(263b11 이하). 그러므로 λόγος는 λέγειν τὰ ὄντα περί τινος가 가능하고, λέγειν τὰ μὴ ὄντα περί τινος도 가능하다(ἕτερα τῶν ὄντων περί τινος, 263b11). 그러므로 소피스테스의 주장,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거짓 단언)은 μὴ ὄν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러므로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은 아무것도 단언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주장은 반박되었다. τὸ μὴ ὄν이 불완전한 구인 것으로 보여졌던 것처럼 - 그것은 τὸ μὴ ὄν-X, 즉 θάτερον τοῦ ὄντος-X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1) (a) (ii)를 보라)- 그렇게 λόγος도 마찬가지이다.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은 불완전한 구이다. 그것은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 περί τινος, 즉 λέγειν ἕτερα τῶν ὄντων περί τινος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ἕτερα는 ὄντα 만큼 많이 있다. [62쪽] λέγει τὸ μὴ ὄν하는 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니라, ἕτερα를 말하고 있으며, ἕτερα(입증되었던 것으로서)도 또한 ὄντα이다.
  259e4 이하에서의 말은 1단계 (b)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가지 λόγοι들은 3, 4단계에 속한다는 것을 위의 개괄로부터 알 수 있다.

V

이 논문의 본래 목적은 처음에 진술된 그 난점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 중요한 지점이 포함된다는 것, 손님이 εἶδος라는 명칭을 주석가들에 의해 주로 인정되는 다섯 가지 μέγιστα γένη, 즉 정지, 운동, τὸ ὄν(254d), ταὐτόν(255c에서 추가되는), Θάτερον(255d에서 추가되고 257b에서 τὸ μὴ ὄν과 동일시되는. 258c 참조보다 더 많은 인자들에 적용시킨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렇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다른 한편, 우리가 보았듯, 이러한 것들을 손님은 적어도 이하의 부분들에서 εἴδη(γένη)로 기술한다. τὸ καθ᾿ αὑτό τὸ πρὸς ἄλλο (255b 이하), λόγος (260a, d), 그리고 δόξα (260d). 내가 이미 지적하였듯, 우리는 아마도 이 목록에 τὸ καλόν, τὸ μὴ καλόν, τὸ μέγα, τὸ μὴ μέγα, τὸ δίκαιον, τὸ μὴ δίκαιον(257d), 그리고 (만일 우리가 B사본과 T사본의 독해를 받아들인다면) διάνοια와 φαντασία(263d)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물음이 야기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들 전부가 플라톤적인 형상들로 헤아려지는 것인가? 나는 (언급된 그 논문에서) 그것들 중 일부는 그렇게 헤아려지지 않는 것이라고, 즉 τὸ ὄν, τὸ μὴ ὄν (θάτερον), ταὐτόν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처음에 인용하였던 네 명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이 물음에 어떠한 대답이 제시되는가?
  로쓰는 처음 다섯 가지 위에서 나열된 것들이 플라톤적 형상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τὸ μὴ ὄν에 관련하여, 그는 (168쪽) 이것이 '진정한 형상이며, 게다가 가장 거대한 형상들 중 하나', 다름과 동일시되는 그러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τὸ μὴ καλόν 같은 부정어들의 주제에 관련하여서라도, 플라톤의 '그것들에 대한 태도는 모두 분명치 않고'(167쪽), 그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형상이라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 외의 『소피스테스』에서 명명된 εἴδη에 대하여 로쓰는, 추정컨데 그가 τὸ καλόν τὸ μέγα τὸ δίκαιον을 플라톤적 형상들로 포함시킬 것 같다 하더라도, 아무런 인식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콘포드는 분명하게 그 처음 다섯 가지 것들을 플라톤적 형상들로 간주하고 (275쪽, 그리고 여러 곳에서), 257d-258c에서 언급된 '도덕적 형상들'(즉 아름다움, 정의로움)까지도 그리 간주하며 (291쪽), 추정컨데 같은 구절에서 그것들과 함께 언급되는 τὸ μέγα도 그리 간주할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해 주석을 달면서 (291쪽, 주석 2.), 그는 우리에게 '"안 정의로움"은 "부정의"가 아니라 "정의"와 다른 어떤 형상이다'라고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로 형상이 아니라, 여러 형상들을 포괄하는 총괄적인 용어이다. 그는 τὸ καθ᾿ αὑτό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255d) 를 그곳에서(281쪽 주석 2. 256-7쪽 참조) 형상들로 기술한다. 그의 번역에서 그가 εἴδη를 '성질들'로 번역할지라도 말이다. 260d, 손님이 λόγος와 δόξα를 εἴδη로 기술하는 곳에서, 콘포드는 번역어로 'things'를 택하고, 'eidos는 모호한 단어이고, 종종 "entity"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며 (302쪽), '거짓에 참여할 수 있는 사유와 진술은 플라톤적 형상들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들과 우리가 발화하는 진술들 내에 존재하는 사유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그의 주석은 (260d, 302쪽 주석 1.) 그가 δόξα, διάνοια 그리고 φαντασία, (우리가 B사본과 T사본을 받아들인다면) 263d에서 
γένη로 불리는 그것들에 대해 같은 관점을 취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콘포드는 그의 형상들 목록표에 앉음(314쪽)과 날고 있음(315쪽)을 포함시킨다. 비록 이러한 것들이 손님에 의해 결코 그렇게 기술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콘포드는 '테아이테토스라는, 그런 형상은 전혀 없다.' 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314쪽)
  아크릴씨와 블럭 박사는 처음 다섯 가지 것들을 진정으로 플라톤적인 형상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난다 (블럭 박사는 명백히 그리 한다). 손님에 의해 언급된 다른 εἴδη를 그들은 주목하지 않고, 그들은 손님에 의해 언급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추가한다. 그래서, 아크릴씨는 모든 개념들 그리고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에 대응하는 형상들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앉음', '앉지 않음', '서 있음'을 포함하여). 그리고 블럭 박사는 인간, 돼지, 앉음과 날고 있음이라는 형상들을 언급한다 (비록 그가 ψευδὴς λόγος에 대한 손님의 해석에서 아무런 형상들도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더라도).
  만일 손님에 의해 εἴδη라고 불리는 항목들 중 일부가 플라톤적 형상들이 아니라면, 반면에 다른 것들은 그러하다면, 우리는 왜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해 추론되고 또한 추론될 수 있는 설명을 제시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부 항목들에 대한 콘포드의 거부는, 그가 다른 것들을 추가하는 것만큼이나, 임의적으로 보이고, 확실히 그 대화편의 문헌 내에서 아무런 정당화도 찾지 못한다. 로쓰는 그 문제의 일부만을 마주하고, 아크릴과 블럭은 그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대화편 내에서 손님에 의해 사용되는 언어에 직면하여, 적용될 수 있는 차별적 원칙이 무엇인지 알기란 어렵다. 우리가 보았듯 λόγος와 δόξα가 εἴδη로 기술될 뿐만 아니라, '결합' 등과 같은 용어가 다른 εἴδη에 대해서처럼 그것들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λόγος의 바로 그 현존이 εἴδη의 상호 συμπλοκή가 있다는 사실에 의해 성립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μεῖξις가 있다는 사실에도 의존하지만 (259e 이하) - 이 경우 λόγος의 οὐσια와의 συμπλοκή - 260b 이하에서 우리는 δόξα의 그리고 λόγος의  τὸ μὴ ὄν과의 '혼합', 그 '참여', 그 '상호관련', '결합'을 장차 증명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서 알게 된다. 255d에서 우리는 εἴπερ θάτερον ἀμφοῖν μετεῖχε τοῖν εἰδοῖν이라는 구절을 발견한다. 이 εἴδη의 쌍은 문맥이 보여주듯 τὸ καθ᾿ αὑτό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혹은 πρὸς ἕτερον)이다. 곧장, 일부 ὄντα는 전자에, 일부는 후자에 '참여'한다는 것이 시사된다 (255c).
  [64쪽] 다시, τὸ καλόν과 τὸ μὴ καλόν 그리고 257d 이하에서 언급된 다른 짝들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차별적 원칙이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다. 이것들 중 아무것도 여기에서 εἶδος나 γένος로 기술되지도 않고, 우리가 그것들의 '참여' 등등을 듣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257e에서 
τὸ καλόν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τὸ μὴ καλόν에 마주놓이는 것은 ὄν에 대해 다시 ὄν에 맞서는 마주 놓이는 것으로 기술된다 (ὄντος δὴ πρὸς ὄν ἀντίθεσις). 그리고 τὸ μὴ καλόν은 τὸ καλόν에 전혀 못지 않게 'ὄντα 중의 하나이다(ἐστι τῶν ὄντων)'라고 진술된다. 만일 우리가 τὸ μὴ καλόν을, 예를 들어 그것이 단지 θάτερον의 '부분'이라는 근거에서(257d에서 그렇게 기술된다) 실격시킨다면, 우리가 τὸ καλόν을 (258b1에서 분명히 시사되듯) 그것이 단지 τὸ ὄν의 '부분'이라는 근거에서 실격시켜야만 하는가? <이게 뭔 개소리야, 미친 늙은이.> 만일 τὸ καλόν이 여기에서 플라톤적 형상이라면, τὸ μὴ καλόν 에 같은 자격을 부여하길 거부할 아무런 근거도 문헌이 제시하지 않는다. '안 아름다움''은 형상이 아니지만', '아름다움 자체와는 다른, 존재하는 형상들 모두에 대한 총괄적인 명칭이다'라는, 그리고 그것이 '실재를 구성하는 형상들의 전 영역의 일부'이며 '단일한 형상, 즉 아름다움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그리고 대조되는 형상들의 전체 집단'이라는 주장은(293쪽), τὸ μὴ καλόν이 τὸ καλόν에 마주하여 놓인다고, 그리고 θάτερον의 '부분'이라고, τὸ καλόν이 τὸ ὄν의 '부분'인 것처럼 바로 그렇게 그러하다고 말하는 플라톤의 문헌에 명백히 반대된다. 만일, 콘포드가 믿듯, 여기에서 τὸ καλόν이 플라톤적 형상이라면, 그리하여 『소피스테스』라는 문헌은 그에게 τὸ μὴ καλόν이 정확히 그와 같은 상태를 지닌다는 것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플라톤적 형상들이라는 자격에 합당한 후보들에 대한 콘포드의 선택은, 어떤 것들은 택하고 어떤 것들은 거부하는 누구의 선택이 되었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순전히 자의적이다. 그 과정은 궁극적으로 이러저러한 후보들이 '반드시' 플라톤적 형상들이어야만 한다거나 그럴 수 '없다'고 느끼는지 여부에 대한 특정 주석가의 선입견에 의존한다. 그가 그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놓는 논증들이 무엇이든 상관 없다. 『소피스테스』에서 εἴδη로 언급되는 모든 하나하나가 플라톤적 형상이라고 주장하거나 그것들 중 아무것도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에서의 선택만이 적법하다. 나는 내 앞선 논문에서 τὸ μὴ ὄν (θάτερον), ταὐτόν 그리고 τὸ ὄν이 플라톤적 형상들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들을 제공하였고, 내가 암시들은 플라톤적 형상들도 아니라는 것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단지 그것만을 기초로 하여 그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 대한 증거를 뒷받침하는 추가적인 것도 있다. 플라톤은 우리에게 이 대화편에서 그가 소피스테스의 언어적 φαντάσματα, 즉 그들이 나타내고자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못 전하거나 왜곡시키는 용어들을 다룰 것이라는 분명한 암시를 주었다(234e1 그리고 그 이하 논의에서). 그리고 그 대화편의 이어지는 주된 부분에 대한 작업과 당도하게 된 결론들이 이 점을 충분히 지지한다. 플라톤은 명백히 이러한 용어들 중 하나, 최악의 문제이자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것, τὸ μὴ ὄν이 어떻게 결함을 가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언어적 εἰκών
, 참이고 맞는 언어적 표현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훼손되었고, 그것의 잃어버린 조각이 복원될 필요가 있다. 같은 일이 θάτερον, τὸ μὴ ὄν과 동일시되는 그것에도 적용된다. 암시적으로, 같은 것이 τὸ ὄν과 ταὐτόν에도 적용된다. 그것들도 훼손된 용어들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언어적 φαντάσματα가, 그것들이 온전하게 복원되었을 때조차, 플라톤적 형상들에 대한 명칭들일 것이라 가정하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다. 그것들이 확실히 정확한 언어적 표현들이고 더 이상 잘못 이끄는 것이 아닐 것일지라도. 이와 관련하여 콘포드에 의해 그것들 중 일부의 원천이 위치잡힌다는 것을 주목하는 일은 흥미로운 것이다. 그는 어디로부터 운동과 정지가 등장하는지 묻고 (277쪽), '그것들은 『파르메니데스』 129d에서 언급된 제논의 역설들에서 나타난 모순되는 용어들의 목록으로부터 온다. 운동(과 같은 것) 그리고 정지(와 같은 것)의 본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들에 관하여 상관된 사실은 오직 그것들이 반대되고 양립불가능하다는 것뿐이다.'라고 답한다. 그는 그것들이 아마 차라리 상징들로 대체되어도 좋았을 것이라고까지 추정한다. 나는 그가 비록 이러한 진단의 함축들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그리고 계속해서 『소피스테스』에서 운동과 정지가 플라톤적 형상들이기도 하다고 추정할지라도, 그의 진단에 관련해서는 콘포드가 전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그에 따라서 τὸ καλόν이든 τὸ μέγα든 τὸ δίκαιον이든 그 본성이 소위『소피스테스』의 그런 구도에 들어 오지 않는다고 덧붙일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단지 그 부정들이 마주놓이기 위한 편리한 긍정형들로 도입될 따름이다. 이것들 모두 사실상 소피스테스적인 용어들이다.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테스의 용어와 그것들의 결함들 중 일부에 대한 폭로를 다루고 있고, 단지 진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고유한 입장에 대한 공격들에서 사용될 때 그 위험이 드러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도 그리하고 있다. 플라톤이 τὸ καλόν과 τὸ δίκαιον 같은 용어들을 고안해냈다거나 독점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더욱이 부조리한 일일 것이다. 거의 어떤 그리스어 저자든 그 반대에 대한 증거를 제공할 수 있다. τὸ ὄν과 τὸ μὴ ὄν의 철학적 용법조차 최소한 파르메니데스 시기만큼은 오래 되었다. 초기대화편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히피아스 같은 사람과 τὸ καλόν의 의미를 논의하는 걸 발견하고, [66쪽] 우리는 만일 우리가 그런 용어들을 플라톤 말고 다른 사람들의 어휘에서 발견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소피스테스』 251b에서 언급되는 '늦게 배우는 자들'과 같은 역량에 속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제논 같은 더 예리한 사상가들까지 말이다. '소피스테스들'과 반박하는 자들의 활동들에 저항하면서 플라톤이 쏟은 엄청난 노력은 그 자체로 유행하였던 대화법의 횡행과 (그가 느꼈듯) 철학에 대한 위험을 시사한다. 이러한 태도의 위험성은 플라톤이 보았듯 그 피상성이었고, 실재 대신 단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었다. 플라톤 (혹은 소크라테스) 에 의해 고안되었던 것은 용어가 아니라, 실제로, αὐτὸ καθ᾿ αὑτὸ εἶδος, τὸ καλὸν αὐτὸ καθ᾿ αὑτό라는 개념, 그 용어, 그 자체의 고유한 자격으로 물리세계에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실체, 오직 λογισμός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에 기저에 놓일 것을 보여주는 활동이고 그것들이 확인되었을 때 사태들에 부합하는, 필요한 곳에서의 그러한 용어의 개선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주의를 용어에 한정하는 자들에 반대하여 공격한다. 그들은 그들의 용어가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인지 고찰하는 데 실패하거나, 그것이 진리나 실재에 대한 믿을 만한 지표라고 믿는 - 혹은 그들이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언어적인 교묘한 수법으로 플라톤을 때려눕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내 의견으로 μετέχειν과 또한 『소피스테스』에서 '결합'과 '혼합'을 지시하는 데에 사용되는 다양한 동사들 그리고 명사들 모두는 저 두 용어들이 같은 문장에서 자기모순없이 함께 사용될 수 있다는 것 이상을 함의하지 않는다. 이미 인용한 콘포드의 구절을 사용하자면, 명명된 사물들의 '본성'은 관련이 없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κίνησις와 στάσις는 '혼합'되지 않을 것인데,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는 명백히 자기모순적이기 때문이다. τὸ μὴ ὂν ἔστιν도 똑같이 그리고 명백히 자기모순 아닌가? 파르메니데스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말들에 의해 그들이 현혹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저 기만적인 허울을 넘어서서 어떤 더욱 견고하고 신뢰할 만한 것을 향해 뚫고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 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εἶδος나 μετέχειν 혹은 
τὸ καλόν이라는 말들을 플라톤에게서 볼 때마다 그것들이 플라톤적 형상들을 지시한다는 결론으로 비약하는 데에 맞서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즉 그것이 정확히 플라톤이 교정하기 위해 『소피스테스』를 집필했던 그 오류의 형식이다. 검토되지 않은 용어를 사실들에 대한 믿을 만한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뭐 별로 딱히 볼 만한 논문은 아니었다는 감상=_= 60년대 Phronesis 등재 논문이 이 따위라는 건 그 후 50년 가까이 축적된 연구들을 본 내가 눈이 높아졌다는 반증인가, 아니면 그냥 이 논문이 정말 쓰잘데기 없다는 얘기일까 잘 모르겠네. 토 나와.


유들의 결합(koinonia genon)이든 형상들의 상호 엮임(symploke allelon ton eidon)이든 그것이 진술(logos)의 성립조건이 되는 방식은 여러 층위이다.
1) 모든 genos가 being, sameness, difference (내 주장에 따르자면 motion, rest까지)와 필연적으로 결합한다. 그러므로 '진술(logos)'이라는 하나의 'genos' 역시 이러한 엮임 없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logos라는 genos의 성립조건)
2) 진술의 구성 요소가 되는 각각의 것들, 이름(명사, onoma)과 말(동사, rema) 역시 genos로서 1)의 엮임을 전제해야만 한다.(onoma와 rema라는 각각의 genos의 성립조건)
3) 진술의 구성 요소 각각이 가리키는 것(명사의 경우 사물이나 사태, 동사의 경우 이름이 가리키는 것에 관련된 행위 혹은 상태) 역시 형상들의 엮임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와 같은 진술의 경우를 보자. '테아이테토스'는 인간이라는 형상에 참여하는 개별자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형상은 동물이라는 유(genos)에 참여하고 영혼이라는 유에도, 지성, 사유라는 유들에도 참여하며 그런 식으로 엮여 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유인 한에서 마찬가지로 1)의 엮임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onoma가 가리키는 pragma, rema가 가리키는 praxis라는 각 genos의 성립조건, 그리고 각 pragma와 각 praxis라는 사태 자체의 성립조건.)
4) megista gene(가장 거대한 유들, 혹은 매우 중요한 유들)에 관한 논의에서 드러나듯, 유들의 엮인 결과는 'A is B(혹은 A verb- Bs)' 형태로 진술된다. A가 B에 참여(metechein)함으로써 A is B가 성립하고, A Bs가 성립한다. 모든 진술은 명사와 동사의 결합으로 제시되므로, 진술 일반은 '명사 + 동사'라는 형상들의 엮임을 필요로 한다.(onoma와 rema 사이의 결합에 대한 성립조건)
5) 4)에 이어서, 개별 진술들 각각에 대해서 특정 명사 A가 가리키는 어떤 것(real A)이 특정 동사 B(real B)가 가리키는 행위를 자신에 관하여 being인 것으로 지니는 사태, 즉 "A is B"라는 진술이 가리키는 사태는 'real A metechein real B'이다. Real A와 real B 사이의 상호 엮임이 형상들의 엮임인 경우를 고려할 때, 개별 진술 또한 형상들의 상호 엮임을 전제한다.(genos 차원에서 pragma와 praxis 사이의 결합에 대한 성립조건, 그리고 개별 pragma와 개별 praxis 사이의 결합에 대한 성립조건.)
여기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형상들의 엮임' 혹은 '유들의 결합'은 당연히 1) 아닌가? 나머지 경우들은 모두 1)에 함축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한데? 근데 왜 아크릴이고 팩이고 다들 엇나간 얘기를 하는 걸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뭐 내가 틀렸겠지. 쟤들은 박사님네들이고 나는 석사과정찌끄래기니까.

-작성중-

  구독 및 정보수집용으로만 돌리는 트윗을 훑어 보다가 철학 어쩌고 하는 계정을 보게 되었다. 누군가 플라톤이 관념론자가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며 무슨 얘기인지 설명해 달라고 했나 보더라. 답변이 가관이다. 인터넷 검색 돌려 블로그 글 하나를 링크해 놓고서는 '관념론이 아니라 보편자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이런 얘기를 하고, 그런데 관념론이란 게 도구적이라나 뭐라나 하여튼 그러면서 관념론일 수도 있고, '주된 시각이나 입장'까지 들먹이며 플라톤이 '주로' 관념론으로 이야기된단다. 이걸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사이 칸트가 플라톤을 비판하는 맥락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가 안 되어 있는 걸로 보인다만, 그거야 뭐 내가 칸트 전공자도 아니고 그 사람이 알아서 그러고 살든지 말든지. 그런데 보편자와 이데아를 구분 못하고 있다는 게 일단 굉장히 거슬린다. 개별자들이 이데아에 참여(metechein)한다는 것, 그리고 개별자들을 통해 귀납하고 추상하여 나온 보편자(katholou)는 개별자들에 의존적이라는 점 등만 생각해 보더라도 일단 보편자와 이데아가 뭐가 다른지는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안 읽었다는 얘기밖에 더 되겠나. 플라톤이 관념론이라는 게 주된 시각이라니, 이것도 답답하다 못해 참담할 노릇이다. 이게 대한민국 철학 전공 학부생의 수준인 게다. 그야 뭐 제대로 추천할 만한 우리말로 된 개론서는커녕 대화편 자체도 아직 번역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형편이니 학생들이나 타전공 선생들 탓만 할 수야 없겠지만서도. 어쨌든, 19세기 고전문헌학의 부흥과 함께 플라톤의 저술 자체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해석의 전통이 성립하고 난 이래로 플라톤을 관념론으로 치부하는 입장은 특히 근대 경험론의 영향과 그 이전 17세기 무렵부터 성립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자연과학의 전통 속에 몇몇 역사적인 철학자들의 오독과 더불어 철학사 전체를 특정 입장에서 개괄하거나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가 이제는 그마저도 잘 찾아보기 힘든 굉장히 보잘 것 없고 게으른 해석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는 주로 이슬람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바탕으로, 그리고 후기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왜곡 아래에서, 다시 그 두 요소들이 그리스도교 신학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생겨난 이질적인 '플라톤'이 나오지만 이걸 플라톤 해석의 전통이라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관념론 아니라고, 관념론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류도 아니라고, 그런 얘기를 꺼낼 필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답답하고 지친다. 저 철학과 봇인지 학생 봇인지 뭐시깽이는 왜 줍잖게 주워들은 이야기들과 같잖은 개론서들이 전하는 오류들을 그것도 마치 굉장힌 권위라도 있는 입장인냥 전하며 그걸 전하는 자신의 태도가 객관적인 척을 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스스로 찾아보거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자인하거나 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질 않는 것인지, 그걸 생각하면 역겹고 화가 나기까지 한다. 학생들에 대한 의무감, 책임감으로, 다른 한편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그렇게나 바라는 연구를 한켠으로 미루어 두고서 그래도 뭔가 훗날을 기약할 만한 한 걸음이 되지나 않을까 기대를 걸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선생들은 저런 것들을 가르쳤을 텐데, 그들이 제대로 된 선생이라면 틀림없이 저것들에게 정직하라고, 성실하라고, 겅중거리지 말고 조급해 하지 말라고 가르쳤을 것인데, 칸트에게 관념과 개념과 이념이 무슨 차이인지, 형식과 내용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 틀 안에서 경험이라든지 현상이라든지 하는 것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그렇게 이해할 때에 플라톤이 어떤 식으로 비판되고 있는 것인지 아무런 고민도 없이 '칸트는 플라톤을 관념론자라고 하니까'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해댄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전혀 읽히지 않는다는 거야 뭐 두 말할 나위도 없고, 그나마 플라톤에 대한 질문에 쓰잘데기 없이 끌어다 떠들 정도로 칸트에 자신이 있다면 적어도 『순수이성비판』은 좀 제대로나 읽든지, 이해를 못 하겠으면 '쉽게 읽는 ~' 시리즈를 사 읽든 다른 나라 교재로 쓰이는 칸트 개론서들 좀 찾아 보든, 그런 건 하지도 않고 그냥 칸트가 이랬느니 저랬느니 떠들고 싶어 한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공부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잘난 척이 하고 싶은 것 아닌가 말이다. 관념론이니 독단론이니 실재론이니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들이 맥락에 따라 달리 읽힌다느니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느니 하는 그딴 게으르고 비겁한 대답은 또 어디서 더러운 것만 배워서 떠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학술적 전문용어들은 해당 학문의 역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여러 검토와 비판을 거쳐 어느 정도까지 통용될 수 있을 만큼 검증된 개념들이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정의되는지 찾아보려는 노력 없이, 그게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하는 건 이제까지의 학문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심지어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등의 대륙 철학자들을 거치면서 관념론에 '객관적 관념론'이니 '관념 실재론'이니 하는 굉장히 접근하기 어렵고 난해한 변형들이 생겨나는 와중에도 여전히 관념론은 사유 속에, 믿음 체계 내에, 일종의 정합론에 가까운 진리관을 전제로 한다는 정도의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거기에서든 어디에서든 관념이라는 것은 생각하는 일과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저 혼자 무슨 귀신마냥 배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이성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과 그것이 이성 안에서 성립한다는 건 다른 얘기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부터 개념에 대한 엄밀한 정의의 필요성은 강조되어 왔고 그러한 작업이 실제로 이루어져 온 과정이 개념사(-史)이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다. 정의가 중요하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도 플라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플라톤에게 이데아가 원본이고 개별물들이 모상이라고 할 수는 있고, 모상에 대해서는 앎이 아닌 믿음만이 성립한다는 게 적어도 『국가』까지 플라톤이 견지하는 입장이긴 한데, 그게 그래서 '모상은 허상이니까 다 거짓'이란 식으로 결론이 나는 건 아니다. 믿음도 참인 믿음과 거짓인 믿음이 나뉠 수 있다. 이건 『메논』부터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티마이오스』 같은 데서는 인식 가능한 방식으로, 즉 수학적 비례에 따라 물질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일단 현상 개무시하고 경험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플라톤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는 따로 연구고 뭐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대화편 몇 권만 봐도 그대로 따라 나온다. 경험적인 앎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이 궁금하다면 『테아이테토스』 번역도 나왔는데 좀 사라, 인간들아. 다시, 『국가』에서 좋음의 이데아라든지 『티마이오스』에서 장인(demiurgos)이 본으로 삼는 이데아라든지 이런 것들은 존재와 가치의 기준이자 근거이고 토대이다. 독립적인 것이다. 심지어 세계를 제작하는 그 장인에게 있어서도 이데아가 그 신 같은 무언가의 머릿속에, 혹은 생각 속에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파이돈』 보면 이 이데아라는 것이 인과작용도 하고 게다가 그것에 참여하는 개별적인 것들이 그 이데아를 통해 갖게 되는 성질을 이데아 자체가 가장 뚜렷하고 확실하게, 가장 강하게 가지기도 한다. 여기다 대고 관념이라고 한다는 게 굉장히 기이한 일이라는 걸 굳이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소박한 실재론이란 걸 생각해 보잔 말이다. 참이라는 게 뭐냐,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객관적 사태에 부합한다는 거다. 객관적 사태, 그러니까 밖에 그냥 따로 있는 거 말이다. 플라톤은 그 참을 보장해 주는 것이 이데아라고 하는 거다. 이데아가 객관적이라는 얘기고, 그런 건 관념으로 퉁치지 못한다. 내가 씨발 무슨 논증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국내에 찾아볼 수 있는 개론서 꽤 있다. 한글로는 저 옛날옛적 Guthrie도 있고 영어로는 Ross도 있고 Annas도 있고, 알아 보려면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다. 애초에 저 학생 봇인지 뭔지도 답답하지만 거기다가 질문하는 사람 역시 이해가 안 간다. 궁금하면 정암학당 홈페이지 들어가서 물어 보면 되지 않겠나? 국내 플라톤 원전번역하는 전공 연구자들이 떼로 몰려 있는 곳을 놔두고, 익명의 인터넷 봇에게, 누가 봐도 굉장히 플라톤에게 대표적이라 할 만한 이론인 이데아론에 관련해서 묻는 이유는 뭔가. 거기다 물었더니 또 익명의 인터넷 블로거 글을 가져다 근거로 삼는 저 봇도 봇이고. 물론 권위는 정당성의 직접적인 원천이 아니다. 일종의 신빙론에 따른 임시방편이랄지, 해당 주제로 역사를 통해 검증된 절차를 거쳐 교육받고 시험을 통과하여 자격을 갖춘 소위 '전공자'라는 것이 그 외의 사람들에 비해 참인 주장을 확률적으로 더 많이 내놓으리라는 믿음 정도가 깔린 것일 터인데, 그마저도 개무시를 할 거라면 스스로 정당화 과정을 떠맡아 제대로 해내든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플라톤이 쓴 것으로 알려진 저술들을 살펴 보고, 그걸 나름대로 요약, 정리하고 그 안에서 논증을 분석해 보고 재구성해 보고 스스로 평가도 해 보고, 그걸 근거로 이러저러한 것을 플라톤이 주장한 것 같다고 논증도 하고, 다시 '관념론'이라는 게 뭔지 또 알아 보고, 이 좋은 인터넷 세상에서 서울대 철학과 DB를 뒤지든 스탠포드 인터넷 철학사전을 뒤지든 해서 그 개념이 어떻게 정의되는지 이해도 좀 해 보고, 애초에 이 과정이 공부고 이게 재밌어야 이 짓거리를 전공 삼는 건데, 이런 건 다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다짜고짜 내키는대로 '그건 이런 거 같아요' 하고 입부터 놀리고 싶다면 철학 떄려 치워야 하는 거 아닌가. 때려 치워라.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고 학제가 개선되고 연구자들이 양성되고 연구결과들이 축적된 다음, 언젠가는 당신들이 하고 싶어하는 그 '잘난 척'이란 걸 이 땅에서도 할 수 있는 조건이나 환경이 갖추어지는 날도 올지 모른다. 하지만 당장에 필요한 건 입 닥치고 밀린 연구를 수행하며 이름 없이 죽어갈 희생양들이다. 이 일은 정말 바쁘고 급한 데 막막할 정도로 많기도 한 그런 일이다. 번역을 하고 사전을 만들고 색인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번역어 하나하나 논문을 만들어 그 번역을 정당화하고 그러는 사이에 해당 저술에 대한 일관된 이해를 시도하고 특정 철학자의 사상 전체에 대한 개괄을 제공하고 그렇게 개별 철학자를 연구하여 한 시대를 재구성하고 그 시대를 분석, 정리, 평가하고, 그 방법론을 정리하고 다른 시대 다른 주제에 대한 연구들에 비추어 비교도 하고 자체적으로 비판도 해 보고, 아예 전혀 다른 학문분야를 통해 새로운 접근도 시도하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연구된 그러한 철학을 다시 현실성 있는 것으로,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고, 그러려면 천재 한 두 새끼가 필요한 게 아니라 바위를 뚫을 때까지 떨어질 수억만의 물방울들이, 바다를 메울 때까지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멩이들이 필요한 거다. 이걸 알고도 뛰어드는 나름 결연하고 단호한 의지를 지닌 연구자들이, 더구나 당신들보다 훨씬 열심히 살고 훨씬 더 똑똑하고 심지어 조건도 더 나아 투자할 시간까지 당신들보다 많은 그런 사람들이, 당신들 같은 찌끄래기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는 것에 조금은 양심의 거리낌이나 죄책감 같은 걸 느낄 수는 없나? 얘기가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고, 어쨌든 플라톤 관념론자 아니다. 단적으로 아니라고=_= 예전 글에 그렇게 써 놓았다가 어떤 분께서 최근에 덧글로 질문을 하셨는데, 이 질문이야 '니가 플라톤 관념론자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근거가 뭐냐?'라는 논조로 이해를 하면 나한테 묻는 게 맞는 일이다. 주장한 놈은 논증할 책임이 있으니까.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걸 따져 묻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 그런데 저 봇에게 질문을 하는 건 다른 문제다. '플라톤이 관념론자가 아니에요?'라고 물을 때는 상대가 그와 관련해 권위를 가져야 한다. 토론하거나 정당성을 따져 보자고 묻는 게 아니라 정보를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가장 바람직한 건 책에다가 묻는 것이다. 그걸로 해결을 못하겠으면 해당 전공자 찾아가서 묻는 거다. 어쨌든 내가 화난 건 칸트도 플라톤도 모르면서 그 둘을 섞어다가 인터넷 떠돌며 아무거나 주워다 먹고서는 아무렇게나 내뱉는 주제에 '학생'이라면서 겸손한 척까지 하는 저 봇의 태도가 싫다는 거,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철학 때려 치우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직접 멘션을 하고 싶지는 않고, 그냥 내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askfm에 몇 마디 남겼는데, 예상컨데 '이건 또 어느 동네 개가 짖어댔나' 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싶군. 뭐 나야 그런 취급을 받아도 싼 쓰레기니까, 그래서 별로 할 말은 없다. 알아서들 살겠지. 이런 얘기에 찔려 할 사람들은 애초에 저렇게 살지를 않으니까. 그저 무기력할 따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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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오냐오냐 하며 달래주고 치켜 세워주고 그런 식으로 용기를 북돋워주고 흥미를 유발시키는 게, 내 생각에는 지극히 무책임한 짓이다. 우선 그건 상대를 '헛소리 해도 되는'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뿐이다. 다음으로, 그렇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흥미만 갖고 천지사방 날뛰다가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빠져들어 버린 사람에게, '니 인생 니가 책임져' 하는 식으로 내팽개치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철학은 재밌는 거야, 그건 자유로운 거야, 이러니 저러니 달콤한 소리나 지껄여대는 치들이 저 학생들에게 강의자리 하나라도 소개해 주겠냐, 논문 작성법이나 제대로 가르치겠냐, 그냥 좋은 어른, 멋있는 어른, 그 씹어먹을 '멘토' 흉내질이나 해대며 악역은 다 남들한테 떠넘기는 거지. 왜 아이들에게 비판을 하지 않고 책임을 요구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저 늙은이들은 말할 것이다, '걔들은 아직 몰라도 된다'라고. 아니, 그런 건 없다. 학문이란 게 위아래 놓고 도 닦아 누구는 신선되고 누구는 이무기 되고 그러는 게 아니다. 애초에 무지 앞에 정직할 줄 알게 만들어 놓는 게 먼저다. 제 자신의 말과 생각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적어도 자기 자신은 알아야 한다는 그 의무를 뼈에 새겨주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철학이란 말장난과 겉치레에 불과해진다. 어쩜 이렇게 흥미로운 생각을! 너는 참 의욕에 넘치고 생기발랄하구나~! 그렇게 사기쳐서 대학원 재정확보용 살아있는 지갑으로 만들어 놓고 잡일이나 시키다 '늬 집에 돈 있나? 있음 외국 나가~ 없음 때려 치워~' 이 지랄이나 하겠지. 아니, 그나마도 정교수나 할 수 있는 짓거리고 그마저 아니라면 같이 세상 욕이나 하며 제 자신의 비참과 불운의 동반자로 멀쩡한 남의 집 귀한 자식 망쳐나 놓겠지. 인정한다. 배움이 부족하고 나이가 어리면 틀린 소리를 더 많이 하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특출난 거고, 그러니까 너무 가혹하게 굴 건 없고 그게 죄도 아니고 그냥 좋게좋게 어화둥둥해가며 가르치는 게 좋겠지. 그런데, 그게 정말 의미가 있나? 저 사람들도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을 갖고 스스로 심각하게 결심을 해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러고들 있는 거다.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된 글을 읽고 그런 식으로 '올바른 길'을 만들어 준 앞서 간 사람들에게 빚을 진 사람으로서, 연구자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이기도 한 그런 사람으로서, 더 진지하고 성실하게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관계라느니 인상이라느니 평판 따위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혹은 어줍잖은 몇 십년 나이 터울로 돼먹잖은 황희정승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실상을 보여주고 현실에 마주하게 해주는 게 바람직한 일 아닌가? 철학이 그런 게 아니란 걸, 학문이란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 그걸 알아야 스스로 저울질도 하고 인생의 결심도 제대로 해 볼 것 아닌가? 가난하고 바쁘고 몸이 고되도 어떻게든 될 것 같다고, 그렇게 허황되고 그릇된 망상을 품고서 학계에 뛰어드는 게 학문에도, 그 학문을 하려드는 당사자에게도 해가 되고 비참한 결말만이 남으리란 걸 왜 외면하는가? 결국 비겁한 건 애가 아니라 어른인 거다. 빌어먹을. 아니, 좋은 말로 다독이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저 틀려먹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는 자가 선생이랍시고 대가리를 끄덕였던 것이라면, 당신 역시도 그냥 철학을 때려 치워야 하는 거고. 양놈들 학부 때 읽는 일반론이다, 플라톤을 두고서 대륙 철학 가져다가 객관적으로도 관념이 성립할 수 있다느니 실재하는 관념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느니 그런 논쟁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놓고 '그거 관념론ㅋㅋ ㅇㅇ' 이 지랄을 한다면, 그건 그냥 공부하기 싫은 놈이나 할 소리 아닌가 말이다. 술자리에서 잘난 척하느라고 떠드는 소리만도 못한 저 뻘소리를 두고 나는 왜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하는 건가. 뭐 됐다, 나 같은 씹버러지야 뭔 지랄을 하든 누가 상관이나 하겠나, 지금 여기에 걸맞는 처지인 거다, 플라톤은 개뿔.

P.S.2. t.co/lTBeR95F2P ← 이런 트위터 링크로 사람들이 들어오는 듯한데, 나는 또 어디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는가... 나같은 개쓰레기 씹찌꺼기 좆버러지새끼를 백날 까 봐야 뭐 그리 좋은 꼴이나 볼 수 있을까 싶네. 나 따위에 대한 뒷담화로 심리적 딸딸이에 열 올리는 대신에 http://www.jungam.or.kr/donate ← 여기 들어가서 그리스 로마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에 후원이나 합시다. 훌륭한 국역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 활성화는 나같은 시정잡배양아치새끼들을 퇴치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어쩌면 '플라톤은 관념론~ 이데아는 보편자~' 이딴 소리도 수그러들지도 모르겠고, 낄낄.

P.S.3. 그런데 말이지, 내가 그 askfm에다가 '틀렸다, 맞았다고 한 교수 있으면 그 사람한테 항의하고 싶다'라고 남기고 답변이 '확인해 보겠다'였는데, 확인결과를 내가 어떻게 듣지? 만일 이런 것마저도 교수랍시고 자기 안 틀렸다며 우기고 든다면 찾아가서 날계란이라도 던져주어야 할 텐데. 나같은 병신이 논문이네 연구네 하며 지랄을 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짓거리 아니겠나. 그나저나 누가 내 이 거지발싸개 같은 시시껄렁한 잡소리 넋두리를 링크질 한 건지 정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을 셈인가? 알려주면 내 술을 쏘겠소. 관피아를 혁파하고 병영문화를 혁신할 창조경제의 심장과도 같은 박근혜 정부의 인문한국을 위한 거름이라 할 만한 국가장학금을 내 기꺼이 알코올에 탕진할 의사가 있소만. (그나저나 이공계 출신인 대통령께서는 인문학드립 그만 치시고 수리과학, 자연과학 기초학문 육성이나 좀 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는데 말이지. 플라톤 백날 읽어 봐라, 양아치 새끼들 군자 되는지.)

1. 글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건지 모르겠다. 수 많은 사건 사고를 거치는 동안에 내가 한 일이란 게 뭘까, 그런 게 있기나 한 걸까 의구심이 든다. 모니터 뒤에 퍼질러 앉아서 언제나 그렇듯 강 건너 남의 일이라는 듯이 보면서 혀를 차거나 한숨을 쉬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딴짓을 하거나 한다. 국가는 그 자체이자 그 구성원이기도 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 믿는다.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리 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 나라에 욕을 하고 분개하며 무언가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었다. 권리를 유보시킨 대신 그 만큼 국가가 책임져야 할 미성년자들조차 지키지 못하는, 반복되는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는 나라에서 바로 그 나라이기도 한 나는 여전히 비겁하고 게으르다. 나는 그저 사람들이 살아있기만을 바라지만 그런 나의 바람조차 주제넘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일 따름이다. 숨이 가쁘고 머리가 아파 한동안 TV도 인터넷도 멀리 하며 들어가야 할 강의들도 뒷전으로 하고 쳐 자빠져 있었다. 이불 뒤집어 쓰고 꼴에 끙끙 앓았다, 병신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남은 사람들까지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 마음이 몸뚱아리만큼이나 위태롭고 부실하다는 것 또한 모르는 바는 아니라서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능하면 응원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내심, 그저 잠자코 구경이나 하고 앉아 있는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도 떨칠 수가 없고. 재난으로 가난으로 병으로 사고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어가던 와중에도 어느 사이엔가 나란 놈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느니 그런 어줍잖은 변명이나 주워 섬기며 그저 내가 하는 일이나마 정직하게, 성실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면피를 할 수는 없을까 잔대가리나 굴리고 있게 되었다. 행정의 문제라느니 시장의 문제라느니 의식의 문제라느니 인재니 천재니 말들이 많고 개중에는 종교적인 갈등도 정치적인 갈등도 엿보이는데, 차마 끼어들 엄두조차 나질 않는다. 맞는 말도 있고 틀린 말도 있지만, 아직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아서 뭐라 말을 얹기 어렵다. 백만 분의 일의 확률로 기적이 일어난다면 수학적으로 우리는 매달 한 번은 기적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링크) 한 달에 한 번 기적을 만날 확률을 피해가는 이 일상이 더 큰 기적이라는 말이 덧붙지만, 사람은 희망과 기원에 정당성을 내맡겨 버리게 마련 아닌가. 그 한 달에 한 번 있을 기적이 이번에 일어나길 바랄 따름이다. 그저, 큰 아픔에 놀랄 때마다 우리 모두가 말했듯, 잊지 말고 기억해서 바꾸어야 한다는 것, 그것 말고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2. 플라톤 『소피스테스』 관련 논문들을 읽는 모임도 일정이 바뀌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 모임도 일정도 바뀌고, '프로타고라스 연구' 강의 시간도 바뀌고, 그러는 와중에 오늘은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윤독 청강을 가고 내일은 『소피스테스』 강독 강의에 들어가고 끝나자마자 라틴어2 시험감독을 들어가고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HUMANITAS와 PAIDEIA' 수사학회 자료집 편집을 해 제본을 맡기고 다시 오후에 논문 읽기 모임에 갔다가 플라톤 『티마이오스』 윤독 청강을 들어 가고, 토요일에는 오전부터 저녁까지 수사학회에서 심부름을 좀 하고, 아, 플라톤 『필레보스』 강의는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으려나…. 프로타고라스 강의 과제도 해결해야 하고 그 강의 발제 준비도 해야 하겠다. 겸사겸사 τὸ μὴ ὄν λέγειν에 대해서도 생각 좀 정리하고, 반박-모순 불가능 논증이랑 거짓 불가능 논증도 좀 더 정리하고,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9월 말까지는 반드시 논문 초안을 완성해야 한다. 5월과 6월까지 털어서 자료수집, 정리를 마무리 지어야 가능한 일정이다. 방학 내내 붙들고 쓰면 세 달 안에 쓸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도망쳐 온 것인지, 혹은 지금이라도 박차고 나가 뭐라도 하거나 안 되면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같잖은 가식질 때려 치우고 정말 개쌍놈으로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죽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지금 하고 있는 일들 말고는 더는 신경쓰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말이다. 죽겠다고 지랄병을 싸댔던 어린 날이 부끄럽고 그 어린 나에게 미안하고 그렇게 살아와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있는 내 자신이 죄스러워서, 이 비루하고 더러운 목숨으로 나 좋은 일만 하고 사는 게 면목 없기도 한데, 뭐 나는 앞으로도 이 따위로 계속 살다 뒈질 듯하다.

3. 딱히 이 말 저 말 할 입장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고, 그저 남들의 말들로 갈음한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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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해석한 프로타고라스와 이에 대한 논박은 무엇인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설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우선, 척도는 기준을 의미하고, '만물'은 '대상들'을 의미하며, 이에 따라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인간은 모든 대상들의 기준'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물질은 흐르고 있고, 그 물질 안에 나타나는 것들에 대한 설명이 내재한다. 또한 인간의 상태와 조건에 따라 그 인간에게 서로 다른 대상들이 파악된다. 나타나는 것들이 대상들이라면 그 대상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라거나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의 기준은 상이한 조건과 상태에 있는 상황마다의 인간이다. 그 인간 또한 상황과 조건이 변한다는 의미에서 흐르고 있는 물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흐르고 있는 물질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 어떤 대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 대상의 기준으로서 한 인간이 어떤 무엇이기 위해서는 그 인간 역시 다른 인간에게 그러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각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각자에게 참이다. 즉 무엇에 대하여, 어떤 관계 속에서 참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상대주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형이상학적 배경을 일종의 만물유전으로 간주한다. 물질의 흐름과 변화를 통해 매번 다른 상태의 인간에게 매번 다른 대상이 나타난다. 어떤 무엇으로서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닌 대상, 나타나는 것, 현상이므로, 한 현상은 다른 현상과 비교될 수 없는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된다.

  그에 따르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은 각자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참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다' 또한 하나의 나타난 것, 대상에 대한 믿음이므로 이는 자기논박이 된다. 다음으로 모든 믿음에는 그와 반대되는 믿음이 짝을 이룬다. 즉 한 믿음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짝을 이룬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만, 둘 모두 각기 나타나는 바의 것이자 특정한 믿음이다. 모든 나타나는 것이 참이라면 서로 모순되는 것이 동시에 참이되나 이는 불가능하다. 

2. 위 해석과 논박은 『테아이테토스』에서 플라톤의 해석 및 반박과 같은가? (혹은 플라톤의 ad hominem 전술과 관련하여,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프로타고라스 논박은 순수하게 논리적 논박인가 아니면 그 주장에 따라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에게 귀결하는 다른 사태들을 통한 ad hominem인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상대론으로 해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이라는 양화사를 적용해 그의 주장을 일반화시킴으로써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명제를 그 안에 개입시킨다. '인간척도설은 거짓이다'라는 명제는 '모든' 믿음이 참이라는 인간척도설에 대한 해석을 통해 일반명제로 둔갑한다. 그러나 상대주의를 엄밀하게 적용할 경우 인간척도설은 '이러저러한 조건에서 이러저러한 상태의 어느 한 순간의 어떤 장소의 어떤 한 사람에게' 이상의 조건에 붙은 한에서 개별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여전히 '인간척도설이 거짓이라는 믿음이 어느 순간 어떤 곳에서 누군가에게는 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1차진술과 2차진술을 구분한다면 사대론적으로 해석되는 인간척도설 자체는 메타차원의 언명으로서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상대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건을 의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프로타고라스를 무오류주의자로 간주하여 행해지는 논박이라는 점에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해석과 비판은 플라톤이 『테아이테토스』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전히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퓌론주의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다른 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 같은 현상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항상 짝을 이루어 믿음의 한 쌍이 있게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두 믿음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모순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 여기에서 객관적으로 참인 명제와 거짓인 명제가 각기 전제되지만,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게는 이 중에 참이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모든 x에 대해 만일 x가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x는 거짓이다'라는 주장이 '참인 어떤 x가 있다'를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x∧~x, Tx∧Fx와 같은 양립 불가능한 쌍을 동시에 긍정하는 판단 자체가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것이 프로타고라스에 대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비판이다. 이 비판은 플라톤의 비판과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제하는 진리관 역시 둘 사이에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이 이외에 플라톤의 경우,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따르자면 프로타고라스나 다른 사람들이나 개나 신이나, 지각되는 것과 여겨지는 것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각자가 척도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보다 존중받을 이유는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귀결되었을 경우 프로타고라스의 그 주장에 약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프로타고라스라는 사람 자체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일 따름이다. 즉 ad hominem이다. 상대주의에 머무르는 한에서, 모든 믿음이 각기 일시적이고 개별적이며 비교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런 믿음을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기억하여 떠올리거나 어떤 식으로 지속시킬 방법은 없으며, 따라서 언어도 추론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귀결이 '모든 믿음은 상대적이다'라는 메타차원의 언명에 치명적인 결함이 되는 것은 아니다. 

3.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프로타고라스 논박은 정당한가?

  일단 pros ti와 en hyle logos 사이의 관계에 따라 SE가 P를 상대론자로 본 것인지 무오류주의자로 본 것인지 해석이 갈릴 것이다. 배타적 선언문을 통한 프로타고라스 논박과 그에 앞서 hyle와 phainomena, phantasia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SE의 논박방식을 상이한 두 가지 논박들로 구분할 여지도 남는다. 다음으로 그의 논박이 회의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제기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참이거나 혹은 거짓이며 동시에 양자 모두이지는 않다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해도, 여전히 어떤 참인 것이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프로타고라스든 다른 누구든 어떤 자를 상대주의자로 간주하고서는 논리적 반박은 불가능하다. 조건을 추가하여 모든 개별 진술을 상대화하는 한에서 진술들 사이의 관계는 전혀 성립할 수 없으며 이 경우 모순 또한 발생할 수 없다. 단지 그러한 상대화 전략이 메타차원으로 구분되지 않고 회귀적으로 적용될 경우 자기부정으로 귀결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상대화가 개별화를 함의하는 한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진술 또한 일반명제로 간주하지 않을 수 있다. '특정 조건들 하에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P에 대해 그 부정으로 짝을 이룰 명제 따위는 없다. 결국 ad hominem을 통해, 그러한 상대주의는 사유나 언어나 지시조차 불가능하게 된다는 지적만이 가능할 뿐이다. 어떤 명제를 구성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객관화의 과정을 포함하며, 이는 상대주의에 위배된다. 플라톤 역시 이러한 상대주의를 뒷받침하는 고정되지 않고 개별적이며 일시적인 사태들을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을 통해 설명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플라톤이 P를 상대주의자로 본다면 그 역시 자기논박을 P에게 적용시킬 수 없고, 이는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논의와 다른 결론이다. 뭐 어쨌든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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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쪽] 내 목적은 이 어렵고도 중요한 구절의 완전한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특수한 문제를, 콘포드('Plato's Theory of Knowledge'에서)와 로빈슨('Plato's Parmenides')에 의해 이루어진 일부 언급들을 살펴 보면서, 논의하는 것이다. 우선 해당 구절에 대해 매우 간략하고 논증적이지 않은 개괄을 제시하는 편이 유익할 것이다. 플라톤은 개념들(eide, gene, ideai)이 특정한 규정된 방식들로 관련된다는 것,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251d-252e)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을 추구한다. 다음으로(253) 그는 철학자에게 이러한 관계들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임무를 부과한다. 철학자는 반드시 개념들의 전 영역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이, 유-종 구조에서든 다른 방식으로든, 어떻게 상호연결되는지에 대해 명확한 관점을 확보해야만 한다. 플라톤은 이제 그러한 철학작업의 일례를 제시한다. 『소피스테스』에서 이미 언급된 문제들에 상당히 관련된 일부 개념들을 선택하여 그는 우선(254-5) 그것들이 모두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정짓고, 다음으로(255e-258) 그것들이 상호에 대해 맺는 그 관계들을 해명한다. 이러한 관계들을 발견하고 진술하려는 시도는 ὄν과 μὴ ὄν이라는 복잡한 관념들에 빛을 비추고 플라톤으로 하여금 피상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제기된 특정한 난제들과 역설들을 하찮은 것들로 차치할 수 있게 해준다(259). 그는 끝으로(259e) 만일 도대체 logos가 있다면 개념들이 상호에 한정된 관계들 내에 있다는 것에는 절대적인 필연성이 있다고 언급한다.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왜냐하면 형상들 상호 간의 엮임으로 인하여 logos가 우리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당 대목은 논의의 시작이었던 핵심을 재천명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251d-252e).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있으며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이다. 이 구절에서 플라톤의 성과들 중 하나가 '계사의 발견' 혹은 한편으로 동일성 진술들에서 사용되고 다른 한편에서 한정 진술들에서 사용되는 그러한 'ἔστιν의 애매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 물음은 플라톤이 우리가 방금 언급한 그러한 구절들에서 기술할 법한 철학전 진전을 이루었는가 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특별한 구절들은 전혀 대단히 강조되는 바 없다. 그래서 플라톤이 (혹은 다른 누구라 하더라도) 계사를 '발견했다'라고 말하는 건 의심할 나위 없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기는 했는가? 그가 동사 ἔστιν의 그 다양한 역할들을 상술하거나 드러냈는가? 그의 선행자들과 동시대인들 중 다수가 그 단어의 상이한 용법들을 혼동함으로써 기이한 결론들에 당도하였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이한 용법들을 해명함으로써 응답했는가? 이런 것들이 실질적인 물음들이다. 다시, 단지 플라톤이 '애매성'을 의미하는 아무런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혹은 그가 아무 곳에서도 'ἔστιν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를 의미하고 때로는 …를 의미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에 근거하여 그가 ἔστιν의 애매성을 인지했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현학적인 오해가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실상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또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분석한다면, 그리고 만일 이 일이 진지한 철학적 구명(
究明) 내에서 일어난다면, 그가 '애매성을 인지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상당히 옳은 일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소한 지점들을, 이와 반대로, 주제가 되는 오직 근본적인 물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만 언급한다. 

  플라톤이 적어도 몇 가지 다른 용법으로부터 ἔστιν의 존재사적 용법을 식별해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된다(예를 들어 Cornford, p.296). 그가 어떻게 이 일을 행하는지는 256a1에서 κίνησις에 대한 그의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ἔστι δέ γε διὰ τὸ μετέχειν τοῦ ὄντος(그런가 하면 τὸ ὄν에 참여함-몫을 나누어 가짐-으로 인해 ~이다/있다). 이 διά는 κίνησις ἔστιν이라는 증명을 이끌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이전에 문제 없이 동의되었고 κίνησις와 τὸ ὄν 사이의 연결을 확정짓기 위해 사용되었다(254d10). 그것은 왜 κίνησις ἔστιν인지 그 이유를 이끄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κίνησις ἔστιν'에 의해 기술되는 추가적 상태로 귀결되는 어떤 사건이나 상태를 언급하지 않는다. Διά를 통해 도입되는 단어들은 κίνησις ἔστιν에서 사용되는
, 즉 존재사적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 ἔστιν에 대한 확장 혹은 '분석'을 제시한다. 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는 존재사적 ἔστιν에 대한 그 철학자의 등가 표현이다. 하지만, 보게 될 것처럼, 그것은 다른 용법들 내에서 ἔστιν에 대한 그의 분석이 아니다. 그래서 그 존재사적 의미는 식별된다.  

  그 철학자의 정식화(κίνησις 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는 κίνησις ἔστιν에서 ἔστιν의 의미를 해명하는 동시에, 또한 압축된 구어적 정식화에서는 불분명한 그 진술된 사태의 구조를 분명하게 해주고, 특정한 연결이 두 개념들 사이에서 단언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해준다. 그 철학자의 정식화는 두 개념들의 이름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정합성을 지시하는 단어, μετέχει, 그 자체로 형상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지어진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 단어 또한 포함한다. 

  Ἔστιν의 또 다른 두 가지 의미들, 계사와 동일성 기호로서의 의미들이 남아 있다. 이 의미들의 동화가 그 어떤 참인 비-동일성 진술들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이 역설로부터 그 기능(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ἔστιν의 그 두 용법들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명백한 입증(demonstration)이다. '입증'이란 말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증명(proof)'이 아니라 '전시(exhibition)' 또는 '표출(display)'이다. [2쪽] 역설을 해독해낼 방법은 그 역설이 발생하는 혼동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내놓는 것이다. Ἔστι의 서로 다른 두 용법들에 주의를 끌 수도 있고, 그것들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지적할 수도 있으며, 아마도 그 둘 사이를 혼동하도록 하는 가장 경미한 유혹마저도 제거하기 위해 대안적 표현 방식들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256a10-b4에서, κίνησίς ἐστι ταὐτόν(운동은 같음이다/같다), κίνησις οὐκ ἔστι ταὐτόν(운동은 같음이지 않다/같지 않다)이라는 한 쌍의 진술들을 플라톤이 어떻게 다루는지 고찰해 보자. 우리는 양자 모두를 단언하고자 하지만 이것들은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실제로 염려해야 할 일은 아니다(οὐ δυσχεραντέον). 왜냐하면 우리는 두 진술 모두에서 ὁμοίως(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진술들에 대한 분석(다시금 διά에 의해 도입되는)은 각 경우에서 단언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줄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적절히 이해할 경우 그것들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음을 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첫 번째 진술의 의미는 κίνησις μετέχει ταὐτοῦ(운동이 같음에 참여한다)이다. 두 번째 진술은 κίνησις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πρὸς ταὐτόν(운동은 같음에 대해 다름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

  두 진술들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에서 본질적인 핵심들은 이런 것들이다. (1) ἔστιν이 계사로 사용되는 경우 그것은 철학자의 형식에서 μετέχει에 의해 대체된다. (2) οὐκ ἔστιν에 대한 철학자의 형식은, 그 ἔστιν이 계사가 아니라 동일성-기호일 경우, (οὐ μετέχει가 아니라)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πρός …이다. 두 진술들에 대한 재정식화에서 플라톤은 명명된 두 개념들을 단지 연결하는데에 쓰이는 ἔστιν(계사)과 동일성(혹은 타자성) 개념을 표현하는 ἔστιν(혹은 οὐκ ἔστιν)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어떤 것이 동일성(혹은 타자성) 개념에 들어간다(falls under)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논의전개를 프레게의 논문 'Über Begriff und Gegenstand'의 한 구절에 비견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녹색이라거나 포유류라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혹은 숫자 4라고, 혹은 행성 비너스(금성)라고도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프레게가 지적하는 바 'is'의 두 가지 상이한 용법들을 구별해야만 한다. '마지막 두 가지 사례들에서 그것은 계사로서, 단지 진술에 대한 동사 기호로서만 기능한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어 단어 ist는 종종 단순한 인칭 어미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dies Blatt ist grün-그 잎은 푸른 것이다-과 dies Blatt grünt-그 잎은 푸르다-) <주석 4.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85b28도 떠오른다 : οἱ δὲ τὴν λέξιν μετερρύθμιζον, ὅτι ὁ ἄνθρωπος οὐ λευκός ἐστιν ἀλλὰ λελεύκται, οὐδὲ βαδίζων ἐστὶν ἀλλὰ βαδίζει. "어떤 이들은 그 표현 방식을 전환한다, '그 사람은 흼이다'가 아니라 '희어졌다', '걷는 것이다'도 아니고 '걷는다' 라고.>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것이 한 개념 아래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고, 문법적 술어가 이 개념을 대신한다. 다른 한편 위 세 가지 예시들(알렉산더 대왕, 숫자 4, 금성)에서 "is"는 산술에서, 등식을 표현하기 위한, "equals(같다)"라는 기호(등호)처럼 사용된다. … "샛별은 금성이다"라는 문장에서 "is"는 명백히 단순한 계사가 아니다. 그 내용은 술어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그래서 "금성"은 술부 전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샛별은 금성에 다르지 아니 하다(the morning star is no other than Venus)." 앞서 "is"라는 그 한 단어에서  함축되었던 것은 여기에서 네 가지 개별적인 단어들로 제시되며, "is no other than"에서 "is"는 이제 실제로 단순한 계사이다. 여기에서 서술되는 것은 그래서 금성이 아니라 금성에 다르지 아니이다. 이런 단어들은 개념을 대신한다.'

  프레게는 어떤 것이 한 개념 아래에 들어감을 이야기함으로써 계사를 설명한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μετέχει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프레게는 동일성의 ἔστιν을, 해당 구절에서 'is'가 단순하게 계사이고('그 개념 아래에 들어간다 …') 'no other than …'이 개념을 대신하는 'is no other than'으로 확장시킨다. 플라톤은 
동일성의 ἔστιν을, μετέχει가 계사의 역할('아래에 들어간다')을 하고 ταὐτόν(혹은 θάτερον)이 개념을 명명하는 경우에서, μετέχει ταὐτοῦ …로 (그리고 οὐκ ἔστιν을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로) 확장시킨다. 그가 수행하는 분석들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내게는 플라톤이 전혀 프레게에 못지 않게 명백하게, 'is'의 의미들을 구별하고 해명하는 일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이 『소피스테스』 251-9에서 하는 일들 중 한 가지가 계사와 동일성 기호 사이의 구별이라는 주장은 다음 고찰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구별이 ὀψιμαθεῖς(늦게 배우는 자들, 251b)에 대항해 우리가 면역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요청되는 바로 그것이며, 플라톤은 그의 논의가 이 양반들을 제자리에 데려다 놓는 것이라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로빈슨은 이러한 고찰이 무슨 힘이든 지닌다는 걸 부정한다(p. 174). '플라톤은 확실히 그의 결합(Communion, κοινωνία)이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가 그 논박 방식이 그들이 한정을 동일성과 혼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귀결되지 않는다. 문헌 내에서 그가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귀결'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로빈슨 말이 맞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정확히 어떻게 플라톤이 그 스스로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했다'고 간주하였는지에 관련하여 일정부분 합리적인 제안을 구성할 자격이 있거나 차라리 그럴 의무가 있다. 만일 256a10-b10에 대한 상기 해석이 건전하다면, 저 구절은 늦게 배우는 자들의 오류를 노출시킨다. 그들은 모든 각각의 'is'를 동일성-기호로 이해한다. 그리고 플라톤 자신이 저 구절에서(혹은 다른 어딘가에서) 도출된 구별을 그 늦게 배우는 자들에 대항한 결정적인 대항수단으로 간주했다고 추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욱이, 만일 어떻게 플라톤이 그가 늦게 배우는 자들과 그들의 역설을 처리했다고 생각했는지에 관련하여 '다른' 합리적 제안이 구성될 수 없다면, 이 사실은 256a-b에 대해 그 안에서 그 역설에 대해 직접 관련되고 파괴적인 중요한 핵심을 발견하는 그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논거일 것이다.

  이제 형상들 사이에 결합이 있다는 그의 증명에 의해(251d-252e) 플라톤이 오직 동일성 진술들만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논박한다는 것이, ὄν과 μὴ ὄν에 대한 이후의 대화에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그가 스스로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하고 있다고 간주한다는 것이
 제안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3쪽] 그가 결합이 있다고 증명하는 데에 사용하는 논거들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251e7-252b7) 이런 것이다. 만일 아무런 결합도 없다면 철학자들과 자연학자들은 그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제기하면서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λέγοιεν ἂν οὐδέν). 이 귀결절이 거짓이며 엠페도클레스와 여타의 사람들이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상정(assumed)'된다. 하지만 물론 이 상정은 정확히 늦게 배우는 자들이 그들의 역설을 주장하면서 부정할 바의 것이다. 또한 그것에 기반한 논증은 명백히 그들에게 좋지 않다. 결합에 대한 플라톤의 두 번째 논증은(252b8-d1) 아무런 결합도 없다는 이론이 그 자체의 거짓을 함의하지 않고서는 진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늦게 배우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의 그 논증은 다음과 같은 것일 터이다. 당신은 오직 동일성 진술들만 참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진술 - '오직 동일성 진술들만 참일 수 있다' - 은 동일성 진술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당신의 이론은 거짓이다. 이제 이 논증은 확실히 가공할 만한 것이며 늦게 배우는 자들을 쉽사리 입다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차 진술(개별 진술, 원소)과 2차 진술(진술 일반, 집합)을 구별해내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주장 자체에 대한 반박으로서 그것은 물론 피상적이고 불충분하다. 그 주장은 농짓거리하는 늙은이들뿐만 아니라 진지한 사상가들 그들 스스로 이론적 근거들을 강제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여겨지는 바의 것을 주장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 자들에 의해서도 개진되었기 때문이다. 로빈슨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p.175) : '그런 더욱 책임감있는 사상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히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고, 만일 당신이 그럴 수 없다면, 무엇이든 그 모든 담화는, 당신이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그 역설까지 포함하여,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 사상가들은 이미 당신이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즉각 모든 사유와 발화를 파괴할 수 없다는 추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제는 당신이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훌륭한 이유를 아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그 논증 내에서 오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논증이 거짓이어야만 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오류가 무엇인지 보기를 원한다. 이제 그러한 사상가들에게는 플라톤의 결합이라는 원칙에 대한 증명은 전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우리가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다른 식으로는 어떠한 사유도 소통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떄문이라는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심지어 어떤 반대논증에도 주목하지 않고, 하물며 우리에게 그것이 어디에서 잘못되어 가는지 보여주지도 않는다.'

  나는 로빈슨이 제시한 이유들에서, 플라톤의 결합 증명이 그 역설정 주장을 (설령 그 주장에 대항해 그 증명 내의 두 번째 논증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만족스럽게 처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상당히 진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역설을 수용하도록 이끄는 오류나 혼동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구절 (251d-252e)은 늦게 배우는 자들과 그들의 역설에 대한 반박에서 플라톤이 말해야 하는 것 전체일 수 없다. 물론 그는 어딘가에서 그 기저에 놓이는 오류를, 그 역설이 세워진 부실한 토대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내가 제안하기로 그는 예를 들어 앞서 논의된 구절에서, ἔστιν의 두 가지 상이한 용법들 즉 계사로서의 용법과 동일성-기호로서의 용법을 분명하게 구별함으로써, 그리고 어떻게 그 두 용법들이 관련되는지 보여줌으로써 이 일을 수행한다.

  이제 콘포드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는 계사가 '형상들에 관계들에 대한 플라톤의 도식 내에서 그 어디에도 있을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p.279). 결합하는-'섞는'- 것으로 형상들 사이의 관계는 대칭적 관계이다. 그래서 그 관계는 한정 서술에서 주술관계, 즉 계사에 의해 지시되는 관계로서 같은 것일 수 없다(pp.256-7, 266).

  첫 번째는 매우 일반적인 지적이다. '연결되어 있는' 혹은 '결합되어 있는' 관계는 대칭적 관계이다. 하지만 물론 사물들이나 인격들이 결합되거나 연결될 여러 상이한 '방식들'이 있다. 그리고 이 방식들 중 다수가 비대칭적 관계들을 포함한다. 사람들의 한 집단, 한 가족의 구성원들에 대해, 그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어떻게' 서로서로 연결되는지 말하길 원한다면, '~의 아버지,' '~의 질녀' 같이 대칭적 관계들을 대신하지 않는 그러한 표현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이제 콘포드에 의해 철학자의 작업이 플라톤에 따르자면 '형상들의 계층구조를 명확하게 식별하고 그 연계된 구조를 다루는 것'이라는 점이 동의된다(pp. 263-4). 철학자가 이 작업을 수행하면서 구성하는 모든 진술 각각은 형상들 사이의 어떤 연결이나 결합을 단언할 것으로 기대될 것이다. 그리고 '결합'은 덧붙여 대칭적 관계이다. 하지만 물론 철학자는 각 경우에 존재하는 결합의 '종류'를 구체화하지 않고서는 아마도 그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어떤 비대칭적 관계들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한 '형상들의 지도'로부터의 작은 견본을 고찰해 보자.
                   Virtue
Justice Courage Wisdom Temperance
여기 제시된 구조는 철학자에 의해 기술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위해 그는 '반드시' 비대칭적 관계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위 도표에서 'Virtue'라는 단어와 'Justice'는 단지 서로 가까운 것만이 아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 '아래'에 있다. 유사하게, Virtue와 Justice는 단지 연결된 것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특수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Justice는 Virtue'의 일종'이다.

  [4쪽] 그래서 만일 '형상들의 세계'에 대한 복합적 구조가 기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대칭적 관계들이 적용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어떤 것은 플라톤이 쉽사리 간과할 수 있었을 만한 것도 아니다. 확실히 그가 철자들과 음들을 가지고 묘사하는 비유(253a-b)는, 그에 따르자면, 변증가가 형상들 사이의 '대칭적' 관계들을 단언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는 생각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f'와 'g'가 'i'의 도움으로 서로 부합하여 영단어를 구성하는지 말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분명하게 그 철자들이 그 안에서 취해질 수 있는 그 '질서'를 구체화하여야만 한다. 'gif'는 단어가 아니고, 'fig'는 단어이다. C장조 음계는 단지 이러저러한 음들이 아니라 특정 질서 속에서의 이러한 음들이다. 철자법이나 음계 혹은 형상들에 대한 사태들을 진술하는 데에 사용하는 어떤 용법들이 되었든지 간에, 어떤 비대칭적 관계가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만일 콘포드의 관점이 맞고 모든 철학자의 진술 각각이 형상들의 대칭적 '혼합'에 대해 말했다면, 철학자는 환원불가능한 방식으로 비대칭적인 진리들을, 예를 들어 Justice는 Virtue의 일종이라는 등의 진리를 절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콘포드의 관점이 옳은지 의심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소피스테스』가 철학자는 유들과 종들 사이의 관계들을 연구해야 하리라고 시사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그러한 관계들을 탐색하지는 않고, 그래서 『소피스테스』에 대한 적합한 해석은 그런 일들을 한켠으로 미루어 놓고 어떻게 플라톤이 그가 실제로 고찰하는 관계들을 전시하여 나아가는지에 집중해야 할 것이라
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그럼 플라톤이 구성하는 결합에 대한 진술들 중 일부를 살펴 보도록 하자.
 
  우선적으로, '운동이 존재한다'. (나는 콘포드의 번역을 유지한다. '변화'가 더 나을 것이다.) 콘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p. 256) : '"운동이 존재한다"는 형상 운동이 형상 존재와 혼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p. 279) :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는 "운동이 존재한다"와 등가로 간주된다.' 또 (p. 278) : '("혼합"에 의해) 만들어진 그 관계는 계사의 의미가 아니다. … 우리는 "존재가 운동과 혼합된다"라고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언급들을 한꺼번에 취하면 부조리해진다. 만일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가 '운동이 존재한다'를 의미한다면, '존재가 운동과 혼합된다'는 반드시 '존재가 운동한다'를 의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만일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가 '존재가 운동과 혼합된다'와 등가라면, '운동이 존재한다'는 반드시 '존재가 운동한다'와 등가여야만 한다. 명백히 플라톤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문제는 대칭적 관계를 제안하는 '혼합' 은유에 대한 콘포드의 주장에서 그렇지 않은 다른 관계들을 배제에 대한 것이다. '운동이 존재한다'가 등가인 어떤 것은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가 아니라(대칭적인 것으로서의 '혼합'), '운동이 존재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존재에 참여한다'(비대칭적인 것으로서의 '~에 참여함')이다. 콘포드의 언급은 그가 그의 해설에 '~에 참여한다'와 같은 어떠한 비대칭적 표현들도 (설령 플라톤의 해설이 이러한 은유들로 빼곡하다 하더라도) 들여놓지 않으리란 이유로 부조리에 빠진다.
  
  두 번째로,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 이제 이것은 추가적으로 '정지는 운동과 다르다'와 등가이다. 하지만 '결합'에 관한 어떤 추론이든 묘사하기에 앞서 우리는 반드시 그 진술을 그 '분석된' 형태로, 변증가의 용어로 전환해야만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얻는다. '운동은 정지로부터(~에 대해, pros) 다름과 결합한다'. <'pros'가 thateron에 부수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pros 'ti'가 딸려온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타의 모든 것들과 다르다(pros alla panta)'라고도 할 수 있고, 이 경우에 다름은 하나와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 혹은 무한정한 것 사이의 연결이다.>문제는 이 형식에서 '~과 결합한다'가 대칭적 관계를 대신하는 것으로 취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그렇게 간주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운동이 정지로부터 다름과 결합한다'가 '정지로부터 다름이 운동과 결합한다'에 등가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첫 번째 진술에서 언급된 '결합'은 명백히 한편으로는 운동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지로부터 다름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으로, '운동이 정지로부터 다름과 결합한다'가 운동이 정지와 다르다고 기술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정지로부터 다름이 운동과 결합한다'가 기술적인 방식으로 말해서 정지로부터 다름이 움직인다는 것이라고 간주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운동이 정지와 다르다'가 '운동으로부터 다름이 움직인다'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앞서에서와 같이, '~과 결합한다'를 대칭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취함으로부터 부조리가 귀결한다. 만일 '운동이 정지로부터 다름과 결합한다'가 운동이 정지와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면 (명백히 그러하듯이), '~과 결합한다'는 여기에서 반드시 '혼합'이 아니라 비대칭적 관계('~에 참여함,' '아래에 들어감')를 표현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고찰들은, 그리 말해도 좋다면, 여전히 매우 일반적이고 너무 많은 외삽과 '해석'을 포함한다. 나는 이 비평에 얼마나 많은 무게가 실릴지 장담하지 못한다. 플라톤이 『소피스테스』 251-9에서의 해석의 매우 긴장된 부분을 작성할 때 어떤 합리적이고 정합적인 무언가를 염두에 두었다고 추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콘포드의 설명이 재고를 통해 버거운 난점들 혹은 부조리들로 이끈다면 이것은 그에 대항하는 '직관적으로(prima facie)' 건전한 비평이다. (설령 결국 콘포드의 설명이 받아들여지게 되더라도 그 결점들이 플라톤의 논의 - 콘포드에 의해 해석된 것으로서 - 내에서 숨김없이 드러나야 할 것임은 받아들일 만한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실제 용어에 대한 더 면밀한 검토로 향하는 일은 확실히 필연적이다.

  플라톤은 형상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 말하면서 엄청나게 다양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것들 중 몇몇(예를 들어 συμμείγνυσθαι, 혼합됨)은 자연스럽게 '~과 연결되어 있음'이라는 다소 비규정적인 대칭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다른 것들, μετέχειν 처럼, 좀 더 규정적인, 비대칭적인 관계를 표현할 것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도 있다. 콘포드는 이 기대가 만족된다는 것을 부정하고 플라톤이 '참여함'을 '혼합'이나 '결합'이라 불리는 상호적 관계로부터 구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pp. 296-7). 그는 이 점을 관련된 모든 구절들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를 통해 지지하지는 않는다. 형상들 사이의 것으로서 '참여'가 대칭적 관계라는('혼합' 처럼, 따라서 계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5쪽] 그의 명시적인 논증은 255d 한 구절, 존재가 τὸ καθ᾿ αὑτό (그 자체)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여타의 것에 대하여) 모두'에 참여한다' 라고 이야기되는 구절에 의존한다. 콘포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p. 256) : '그래서 유적 형상은 종적 형상에 참여하기를(혼합되기를) 그 종적 형상이 유적 형상에 참여하는 것에 전혀 못지 않다.' 그리고 255d4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 형상들 모두를(구체적으로 τὸ καθ᾿ αὑτό 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포함'하는, 존재라는 것이 양자 모두'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것은 "참여"가 형상들의 경우에서 대칭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들 중 하나이다.' 나는 콘포드가 여기에서 시사하는 다른 대목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255d에 대한 언급은 그 자체로 콘포드의 '참여'에 대한 광범위한 언급들
, 형상들 사이에서 견지되는 하나의 유일한 관계로서 대칭적 '혼합'에 대한 그의 주장에 대한 매우 부적절한 정당화이다.

  칼 뒤르는 그의 논문 'Moderne Darstellung der Platonischen Logik'에서 플라톤에 의해 『소피스테스』 251-9에서 사용된 다양한 용어들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한 의미들을 할당하였지만, 완전한 정당화 같은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더욱 유용한 것은 데이비드 로쓰에 의한 다음의 검토이다 : '플라톤은 κοινωνία, κοινωνεῖν, ἐπικοινωνεῖν, ἐπικοινωνία, προσκοινωνεῖν을 두 가지 상이한 구조들 내에서 사용한다 - 소격과 함께(250b9, 252a2, b9, 254c5, 256b2, 260e2) 그리고 여격과 함께(251d9, e8, 252d3, 253a8, 254b8, c1, 257a9, 260e5). 전자의 용례에서 그 동사들은 "나누어 가짐"을 의미한다; 후자에서 그것들은 "~과 결합함" 혹은 "~과 통함"을 의미한다.' 나는 로쓰가 '비록 플라톤이 그 두 상이한 구조들을 사용하더라도, 그는 그것들 사이의 차이에 어떤 중요성도 덧붙이는 것 같지 않다'라고 추가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플라톤은 그 두 구조들을 무분별하거나 대체가능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구절들의 두 집단들 사이의 비교는 하나의 분명한 결론을 내놓는다 (나는 κοινωνία γενῶν 에 대한 주요 대목에 들어가지 않는 250b9와 260e2 그리고 e5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다). 소격을(예를 들어 θατέρου) 지배하는 κοινωνεῖν은 언급된 사실이 어떤 형상이 이러저러하다(예를 들어 ~과 다르다 …)는 것(계사로서)인 곳에서 사용된다. 즉, 그것은 어떤 것이 또 다른 것 '아래에 들어간다'는 사태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된다. 다른 한편으로 여격 구조는 형상들의 연결에 대한 상당히 일반적인 언급들 내에서 발생하며, 형상들의 어떤 특수한 쌍에 대한 것으로서 아무런 규정된 사태도 진술되고 있지 않은 경우에 발생한다. 물론 이는 - 일상적인 그리스어 용례가 시사하는 바 - 플라톤이 의식적으로 κοινωνεῖν을 두 가지 상이한 방식들로 사용한다는 것을 확신케 한다. 종종 그것은 '연결'의 일반적인 대칭적 관념을 표현하고, 때로는 그것이 규정된 비대칭적 관념, '나누어 가짐'을 표현한다.

  동사 μετέχειν이나 명사 μέθεξις는 『소피스테스』 251-9에서 열 세 차례 등장한다. 이것들 중 하나는 255d4에 있는데, 위에서 인용한 콘포드의 논증에서 그에 의해 사용된 구절이다. 하지만 다른 열 두 경우들 모두에서 'A-ness μετέχει B-ness'에 의해 표현된 사실이 A-ness is(계사) B, 그리고 절대로 B-ness is(계사) A는 아님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τὸ ὂν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는 존재가 …과 다르다는 사태를 정식화한다. 그것은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 즉 τὸ ἕτερον 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에 의해 표현되는 사태를 표현하는 데에 등가적으로 기여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이 모든 경우에서 μετέχειν을 사용하는 방식은 그가 그것으로써 대칭적 관계를 의도하였다고 믿기 매우 어렵게 만든다.

  공개적으로 다섯 가지 선택된 유들 사이의 특정 관계들에 대한 진술에 바쳐진 구절, 255e8-257a11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여기에서의 목표는 규정적 사실들을 신중하게, 철학적 용어로 진술하는 것이다. 단지 유들 사이에 연결들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중 일부인 것을 정확히 말하는 것이다. 이제 이 구절에서 (256b9), 개념들의 연결에 대한 순전히 일반적인 언급에서 (εἴπερ τῶν γενῶν συγχωρησόμεθα τὰ μὲν ἀλλήλοις ἐθέλειν μείγνυσθαι, τὰ δὲ μὴ : 만일 정말로 우리가 유들 중 일부는 서로 혼합하려 하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동의한다면.) 
콘포드가 선호하는 은유가 한 차례 등장한다. 그리고 여격을 지배하는 κοινωνία가 똑같이 구체적이지 않은 문맥에서 한 차례 등장한다.(256b9. εἴπερ ἔχει κοινωνίαν ἀλλήλοις ἡ τῶν γενῶν φύσις. : 만일 유들의 본성이 상호에 공유/결합을 지닌다면.) 사용된 다른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소격을 지배하는 κοινωνία가 한 차례 등장하고(256b2) 명명된 두 형상들(κίνησις와 θάτερον) 사이에 견지되는 규정적 관계를 진술하는 데에 사용된다. 진술된 사실은 운동이 ~과 다르다는 것이고, 다름이 운동한다는 게 아니다. μεταλαμβάνειν이 해석 논쟁이 있는 한 구절에서 한 차례 등장한다(256b6). 하지만 그 동사의 의미는 분명하다. 만일 κίνησις μεταλαμβάνει στάσεως (운동이 정지에 참여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 참이라면 κίνησίς ἐστι στάσιμος (운동은 정지하는 것이다)라고도 옳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μετέχειν (혹은 μέθεξις) 은 다섯 차례 등장하며(256a1, a7, b1, d9, e3), 각 경우에서는 첫 번째 형상이 두 번째 형상 아래에 들어가는 명명된 두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래서 255e8-257a11 대목에서의 실질적인 작업은 모두, 특정 형상들 사이의 실질적 관계들에 대한 설명들 모두, μετέχειν, μεταλαμβάνειν, 그리고 κοινωνεῖν (with genitive) 이라는 용어들에 의해 행해지며, 즉, 콘포드가 그렇게나 단호히 배제하였던 '~에 참여함'이라는 비대칭적 은유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에 참여한다'라는 것의 역할은 플라톤의 용어에서 명백하다: 추상명사, 한 개념의 이름을 지배하는 '~에 참여하다'는 그 추상명사에 상응하는 형용사를 지배하는 'is'(계사)로 구성되는 일상적 언어 표현에 등가이다.

  일부 용어들에 대한 플라톤의 용법에 대한 이러한 검토는, 비록 철저함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내 생각에 '혼합' 은유가 플라톤의 뜻에 대한, 그리고 μετέχειν과 그 변형들인 μεταλαμβάνειν 과 κοινωνεῖν (소격을 지배하는)이 플라톤에 의해 μείγνυσθαι의 단순한 대체물들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정짓는 안전한 단서라는 콘포드의 주장을 의심하기에는 충분하다. 255d, 콘포드가 활용하는 그 구절에서 μετέχειν이 예외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인정될 것이다. 하지만 한 구절이 다른 모든 여러 구절들보다 과장되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

  요약하자면, 나는 첫 번째로, 
플라톤의 철학적 언어에서 μετέχειν과 그 변형들이 일상 언어에서 계사의 역할에 상응하는 역할을 지닌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다양한 진술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플라톤이 계사 (μετέχει …)와 동일성 기호(μετέχει ταὐτοῦ) 그리고 존재사로서의(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 ἔστιν들 사이의 차이를 밝힌다는 것 - 그리고 밝히려 한다는 것 - 을 논증하고자 시도하였다.

내용 요약.

  → 251-259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개념들은 특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관련되며 이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 철학자의 작업, 변증이다. 그 일례로 megista gene가 선택되어 그것들이 모두 서로 다르다는 것이 확정되고, 다음으로 이것들의 상호관계가 해명된다. 이를 통해 to on과 to me on에 대한 해석의 관점이 마련되고 이와 관련된 여러 역설과 난점이 해소된다. 이는 logos의 성립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 위 대목에서 플라톤이 계사를 발견했거나 estin의 동일성 진술과 한정 진술 사이에 나타나는 애매성을 인식했는지, 그 문제에 진전을 이루었는지가 문제이다. 그가 그 애매성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맥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그 뜻을 해석, 설명, 분석하며, 이것이 진지한 철학적 구명 과정에서 이루어지므로 그는 이 애매성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사, 그리고 계사와 동일성-기호.

 → 플라톤은 estin의 존재사적 용법을 식별해낸다. 예를 들어 dia metechein tou ontos라는 표현은 존재사 estin을 분석한다. 이는 다른 용법들과 구분된다.  → 존재사로서의 estin을 metechei tou ontos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형상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metechein이 등장한다.  → 존재사 외에 다른 두 의미는 계사와 동일성이다. 이 의미들의 동화는 동일성 진술이 아닌 참인 진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역설은 두 의미 사이의 차이를 입증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 '운동은 같음이다/같다'와 '운동은 같음이지 않다/같지 않다'는 둘 다 estin을 포함하고 하나는 긍정, 다른 하나는 부정으로 양립 불가능하여 모두 동시에 단언하면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둘은 각기 metechei tautou와 metechei thaterou pros tauton이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 전자는 계사로서의 estin으로서 metechei로 대체된다. 반면 후자는 동일성 기호로 간주되어 그 부정이 metechei thaterou pros ti 로 대체된다. 이제 계사와 동일성/타자성 사이의 구분이 해명된다. 동시에 어떤 것에 참여한다는 표현을 통해 어떤 것이 어떤 개념 아래에 들어간다는 사태를 보여준다.  

계사와 동일성-기호의 관계.

→ 프레게는 is(estin/ist)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is+보어 형태가 하나의 동사로 대체될 수 있는 경우이다. '이것은 푸른 것이다'는 '이것은 푸르다'로 바뀌어도 의미가 같다. 여기에서 is는 무엇이 어떤 개념(술어) 아래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반면 '샛별은 금성이다'와 같은 진술의 경우 is는 단순히 대체될 수 없다. '샛별은 금성에 다르지 아니하다'로 바꿀 경우 여기에서의 is가 비로소 단순 계사이다.  → 프레게는 단순계사로서 is를 '개념 하에 들어간다'로 파악하고, 동일성 is를 개념이 포함되어 확장된 계사로 간주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역할을 metechei에 부과한다. 그리고 이 동사의 목적어가 되는 개념을 통해 이 metechei를 확장시킨다. 이 과정에서 동일성의 경우 목적어는 tauton, 동일성 부정의 경우 thateron이 된다. → 플라톤은 유들의 결합을 통해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한다. 그들은 is를 동일성 기호로 이해하지만, 동일성 기호는 플라톤이 제시하는 결합을 통해 단순한 계사와 개념이라는 요소들로 분석된다.   → 오직 동일성 진술만을 고집하는 자들에게 결합의 필연성을 말하여 논박하는 방식은 (1) 결합 없는 말이 의미가 없다는 것, (2) '동일성 진술만이 참이다'라는 진술 자체도 결합이라는 것 두 가지이다. 그러나 (2)는 정당한 논박이 아니다. 동일성 진술만이 참이라는 논증 내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장 자체의 오류가 제시되어야 한다.  → estin의 두 용법들을 구분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위 주장의 오류가 지적될 수 있다. 

계사와 비대칭적/대칭적 관계.

 → 콘포드는 형상 사이의 관계가 대칭적이므로 계사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 그러나 결합의 방식은 다양하고, 그러한 결합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변증이며 철학자의 작업이라면, 철학자는 다양한 결합 방식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비대칭적 관계도 고려해야만 한다.  → 콘포드의 주장과 달리 플라톤이 제시하는 비유들(철자들, 음들)이 비대칭적이기도 하고, 콘포드에 따를 경우 플라톤의 철학자는 환원불가능한 비대칭적 진리들을 표현할 수도 없다.

  → 비대칭적 관계는 유종관계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이 직접 탐구되지는 않으므로 플라톤이 말하는 결합 자체만 놓고 검토해야 한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 '운동이 존재한다'는 '운동이 존재에 참여한다'로 대체될 수 있으며 콘포드식으로는 '운동과 존재가 혼합된다'이다. 콘포드식으로 이는 다시 '존재가 운동한다'와 등가이다. 그러나 이는 플라톤의 의도가 아니다.  →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는 '운동이 정지에 대한 다름에 참여한다'이고 이는 콘포드에 따르면 '정지에 대한 다름이 운동에 참여한다'이다. 콘포드에 따라 이 경우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가 '정지에 대한 다름(혹은 '정지와 다르다는 것')은 움직인다'와 등가가 된다. →  이 과정에서 지나친 외삽이 있으므로 문헌근거를 좀 더 보강해야 한다.  → 콘포드는 to on이 그 자체인 것과 여타에 대한 것 모두에 참여한다는 점을 형상들 사이의 대칭적 관계의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언급하는 구절 외에는 비대칭적 관계를 뒷받침하는 구절 또한 많다.   → 로쓰는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가 소격을 지배할 경우 '나누어 가짐'을, 여격을 지배할 경우 '결합함, 통함' 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는 전자가 특정한 비대칭적 관계를, 후자가 일반적 대칭적 관계를 의미한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 콘포드가 대칭적 관계의 근거로 드는 단어 '혼합'은 그가 제시하는 구절 외에 모두 비대칭적 환원불가능한 관계를 의미한다. 플라톤에게 존재가 다름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과 다른 의미이다.   → megista gene를 검토하는 255e8-257a11 사이에 등장하는 관계들은 개념들의 일반적인 연결을 언급하는, 콘포드가 지시하는 구절을 제외하면 모두 비대칭적 관계를 의미한다. '추상명사 F에 참여한다'라는 것은 'is 형용사'라는 일상적 표현과 등가이다.  → 콘포드가 지시하는 구절이 예외적이긴 하나 일반적 언급이고 다른 더 많은 구절들이 그의 주장에 맞지 않는다.

  
  1. 아크릴에 따르면 존재사 is는 metechein tou ontos 의 결과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경우에서 metechein F-ness(-genitive)는 is F의 형태로 드러난다. 문제는 후자의 진술에서 주어와 목적어가 모두 to on이 아닌 경우에도 여전히 그 결과로서 is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계사 is가 어떻게 등장할 수 있는가? 여기에 더하여 X metechein tou ontos의 결과는 단순히 there is X일 뿐만 아니라 X is a Being 이기도 하다. 이 둘의 차이가 전혀 없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전자의 경우 X의 성격이나 상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나 후자에서는 X가 'X이다'라는 그 자신의 성격이 제외될 수 없다. 그렇다면 굳이 존재사를 따로 떼어 생각할 이유 또한 불분명하다. X의 본성을 그러저러한 것으로 긍정하는 것이 to on과의 결합을 통해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to on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도 to on이 계사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existence'가 독립적으로 그 당시에 이야기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일, 혹은 강하게 말하자면 역시대착오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2. 운동이 여타의 것들과 다른 것은 다름에 참여하기 떄문이다. 정지가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은 같음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운동이다/운동이 있다'라는 진술이 가리키는 사태에서만 유독 dia의 의미가 부가적이고 설명적이어야 하는가? 앞서의 문제제기에 따라 metechein tou ontos의 결과와 metechein F(to on을 제외한)의 결과는 다름에도 거기에는 여전히 is가 등장한다. 아크릴은 metechein을 도구 삼아 estin의 다의성을 설명하려 하지만, 이 과정에서 metechein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3. 대칭적 관계와 비대칭적 관계에 동일한 하나의 동사가 사용되기도 하고,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니는 여러 단어들이 또한 그렇게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해명되어야 한다. 아크릴은 metechein + genitive 문장을 '~ 아래에 들어간다'로 해석하지만, 그렇게 나온 결과에 비추어 그러한 해석을 부여할 뿐,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실상 『소피스테스』에서 손님이 마주하는 역설을 해결할 길도 확인하기 어렵다. 왜 metechein이 비대칭적으로 이해되는지 모르는 한에서 X metechein Y와 Y metechein X의 구분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 이 과정을 poiein과 paskein의 구도로, 따라서 gignomai(변화를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해결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paskein은 의존적인 사태인 반면 poiein은 자발적이고 독립적일 여지가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듯하다. 이는 X의 본성, X의 전체, X의 부분들 등의 표현들과 더불어 metechein이 지시하는 사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여지를 마련해 준다. X가 Y에 metechein한다는 것은 Y가 X를 poiein하고 X가 Y에 의해 paskein되는 사태와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이 되었든 어떤 것은 그것 자체로서 자기 자신의 성격, 본질을 기본으로 한다. 즉 같음이 자기 자신과 같거나, 다름이 여타의 것들과 다르거나, 운동이 운동하거나 정지가 정지하거나 혹은 to on esti 등의 사태들에서는 각기 자기술어화를 통해 이런 결과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상호 결합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혹은 '그 자체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상호, 즉 다른 것에 대한 결합이 필요하고 이는 수동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같음은 정지에 의해 정지가 되고, 정지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들'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같음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같은' 것으로서 '정지'해 있고 여타의 것들과 '다른' 것으로서 다름의 작용을 받는 식으로 '운동'하지 않는 한, 그 같음의 의미를 지시하거나 발화하거나 사유할 아무런 방법도 없고 그것을 가리킬 이름조차 없게 된다. 본질적인 중심과 부수적인 극단들을 부분들로 가지는 전체,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가 난관을 피하기 위해 요구받았던 조건들이다.

  4. megista gene 사이의 결합은 같거나 다르다는 단순한 결과를 낳는다. 반면 진술에서는 어떤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여러 술어들이 참이고 또 이것들과 다르고 서로 또 다른 여러 가지 술어들이 거짓이기도 하다. 참인 부정진술도 있고 거짓인 긍정진술도 있다. 특히 megista gene 사이의 결합관계는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거기에서 묘사된 바로 그런 방식의 결합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전혀 알 수도 가리킬 수도 없다. 반면 과연 테아이테토스는 필연적으로 날지 못하는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혹은, 날아다닌다고 하여 테아이테토스가 테아이테토스가 아니게 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두 경우 모두에서 is와 is not이 같은 형태로 등장할 수 있다. is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바탕으로 유들의 결합이라는 사태와 이름과 동사의 결합이라는 진술, 두 구조 사이의 차이를 통해 의미의 차이를 설명하는 쪽이 더 건전한 것으로 보인다. metechein이 계사를 의미하고 

  5. 다름의 부분들이 나뉘어 들어가는 것은 특정 X가 특정 Y와 다르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X는 ~X인 불특정의 일반에 대해서도 다르다. 아크릴은 아무런 설명 없이 '운동과 다름,' '정지와 다름' 등 특정한 다름'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 to me on은 어떤 식으로 설명되는가? 그는 다름으로서의 to me on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to on과의 결합을 부정하는, 불가능한 to me on, to on과 다르다는 의미에서의 to me on, to on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to me on이 모두 달리 이해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들 중 어느것으로도 만족스럽게 거짓을 정의할 수 없다.

  6. 늦게 배우는 자들이나 혹은 진지한 고찰을 통해 그들과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이 정말로 동일성 명제만이 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가? A, B, C라는 나열, 호명도 가능하다. 보어 없는 is는 'it is the case,' 'it's true,' if X, then Y. X is. therefore Y (양화 없이, 혹은 전칭으로) 등으로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사실상 to on과의 결합이 상정되지만 표면적으로는 오직 분리만을 주장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늦게 배우는 자들이든 진지한 자들이든, 그들에 대한 언급 이후로 제시되는 것은 결합과 분리에 관한 세 가지 가능성들이다. 

  7. 동일성 기호와 계사를 구분하는 것이 '늦게 배운 자들'에 대해 정당한 논박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여전히 ad hominem 아닌가?

-작성중-

  [72쪽]이 짧은 논문의 목적은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서 문장이란 것의 의미와 함축들을 고찰하는 것이다. 유들의 결합에 관한 부분 말미에서 손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모든 것들로부터 각각의 분리는 모든 진술들의 궁극적인 제거이다. 왜냐하면 형상들 상호의 엮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이 표현의 후반부에 주목할 것이며, 간결성을 위하여 이를 문장이나 진술 S라 칭할 것7이다.
  콘포드는 문장 S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우리에게 가능한 어떤 논의이든 그 현존은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 그의 주석에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모든 논의는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 … 그것은 형상들이 모든 논의의 의미에 유일한 요소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개별적인 사물들에 대해서도 진술들을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진술 각각이 반드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참)이다.' 몇 행 뒤 콘포드는 S에서 플라톤에 의해 구성된 핵심은 '모든 진술이나 판단이 최소한 하나의 형상에 대한 사용을 포함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플라톤이 "모든 논의는 형상들의 결합에 의존한다"라고 말했다고, 즉,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어떤 진술의 의미에든 개입한다고 말했다고 언급한다.(Cornford, 'Theory of Knowledge', 314쪽.)
  콘포드는 플라톤이 진술들에 '포함된' 혹은 '사용된' 형상들에 관하여 뭔가 말하고 있다고 당연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모든 진술이 다수의 형상들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한다. [73쪽]몇 쪽 뒤 플라톤 자신의 예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명백한 실책을 플라톤에게 돌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 그는 S를 모든 진술이 형상들의 엮임을 사용하거나 포함하거나 혹은 그것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필연적으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포함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형상들의 결합이라는 바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가 '서로간의(ἀλλήλων)'라는 단어를 고려할 때 특히나 분명하기에. 이 단어를 콘포드는 그의 번역에서 빠뜨렸다. '논의는 형상들의 "상호" 엮임에 의존한다.' 이것이 단지 어떤 진술의 의미에든 적어도 하나의 형상은 개입한다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그 누가 가정할 수 있을까? 만일 S가 어떤 logos에든 포함되는 형상들에 관하여 무언가 말한다면, 그것이 말하는 바는 반드시 형상들의 엮임이 어떤 logos에든 포함된다는 것이어야만 한다. 만일 이 후건이, 플라톤의 이후 예시들에 의해 보이듯, 명백히 거짓이라면, 우리는 S가 logoi들에 포함되는 형상들에 관하여 무언가 말한다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로쓰가 우리의 이 구절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간단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기로 손님은 '모든 논의들이 말하는 자 혹은 생각하는 자에 의한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고, 문장은 주어 역할을 할 고유명사, 형상이나 보편자를 나타내지 않는 고유명사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장의 술어는 통상 형상을 나타내고, 진술들의 모든 주어들은 고유명사들을 제외하고는 형상들 또는 형상들을 수단으로 하여 기술되는 것들을 나타낸다.(W. D. Ross. 'Plato's Theory of Ideas,' 1951, 115쪽.)' 로쓰는 S가 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모든 진술 각각은 최소한 두 형상들을 포함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이것이 거짓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지에 주목하자. 그는 S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있어서 그것이 노골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이라고, 아마도 우리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로쓰는 (그의 해석에 있어서) 그것을 과장이라 부름으로써 S의 거짓을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하지만 물론 플라톤은 모든 logoi에 대해 참인 무언가를 말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259e4, 260a9). 그래서 S는 로쓰의 해석에 있어서 단지 거짓이고, 두드러지게 거짓이다. 무난한 오독은 얼마 안 있어 스스로 드러난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예시들에 대해 말하면서, 로쓰는 그 문장들이 S(그가 해석하는 한에서의 S)를 반박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들이 '플라톤의 주장을 실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자못 진지하게 모든 철학자들이 성격이 좋다고 단언한다면, 그리고 곧장 계속해서 내가 아는 성격 나쁜 철학자들에 대해 떠든다면, 당신은 내 예시들이 '내 주장을 실증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74쪽] 물론, S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긴 했다. 당연히 그것이 테아이테토스에 대한 해당 진술들이 명백히 S에 대한 반박들이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확실히 그것은 모든 진술 각각이 형상들(혹은 '형상들을 수단으로 하여 기술되는 것들'조차')을 단언하거나 그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아야 한다. 그럼 그것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플라톤이 형상들의 엮임을 다루기 전에 말했던 것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선택된 여러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던 부분이 아니라 - 이 부분은 비교적 각론의 문제이다 - 오히려 251d-252e, 형상들의 엮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함을 보여주고자 추구하는 부분으로 가 보자. 진술 S는 모든 logoi를 위한 형상들의 엮임의 필연성에 관한 뭔가를 말한다. 이를 플라톤이 그러한 엮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추구하는 첫 번째 자리에서 사용된 논증들을 고찰함으로써 해명하는 일이 합당하다. 
  플라톤은 이 앞선 구절에서 세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한다. (1) 모든 형상 각각이 다른 모든 형상 각각과 결합한다. (2) 아무런 형상도 그 어떤 다른 형상과도 결합하지 않는다. (3) 형상들의 몇 쌍들은 서로 결합하는 반면, 다른 형상들은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처음 두 가능성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세 번째 가능성을 확정짓는다. 그리고 그것이 이어서 형상들의 엮임으로서 이야기된 이러한 형상들의 제한된 상호결합이다. 이 마지막 가능성에 대한 논증은 사실상 다른 두 가능성들을 반증하는 논증들로 구성된다.
  첫 번째 가능성은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운동이 정지한다와 같은 진술들이 귀결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모순적이며,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ταῖς μεγίσταις ἀνάγκαις ἀδύνατον). 그래서 만일 그러한 일들이 (1)에 의해 함축된다면, (1)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일반화하면, 만일 B에 대해 A가 주장되는 진술이 자기모순적이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형상 A는 형상 B와 결합하지 않음이 귀결된다. 우리는 플라톤이 '결합'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자 시도하고 있기에, 여기에서 그의 논증에 대한 타당성에 제기할 문제는 있을 수 없다. 여기까지 드러나는 것은 형상들의 상호결합에 대한 일부 제한이 일부 문장들은 자기 모순적인 진술들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의해 시사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μηδεμία σύμμειξις-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은 두 부분을 가진다. 첫째,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세계의 현실, 변화, 구조, [75쪽]태에 관하여 철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모든 이론들은 공허하고 헛된 것일 터이다. 다원론, 일원론, 엘레아학파, 헤라클레이토스학파, 그들 모두가 'λέγοιεν ἂν οὐδέν, εἴπερ μηδεμία ἔστι σύμμειξις.' 만일 정말로 아무런 엮임도 없다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2)에 대한 진술들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 진술을 함에 있어서 구성요소들은 단어들을 문장으로 결합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것들은 그 고유한 주장에 모순된다. 그것들을 반박하는 데에 다른 것이 필요치도 않다. οἴκοθεν τὸν πολέμιον καὶ ἐναντιωσόμενον ἔχουσιν. 그것들은 자체적으로 적과 모순을 지닌다.
  이 점을 고찰함에서 있어서 우선, 우리는 정확히 어떻게 (2)를 주장하는 자들이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반박되어 버리는지 주목해야만 한다. 그건 물론 그들이 직접적으로 엮임을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기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2)에 대한 진술이 필연적으로 (2)의 거짓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종류의 논증들이 다른 곳에서 플라톤에 의해 사용된다. 249c에서 그는 주장의 참이 실상 그 누구도 아무것도 아는 일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러한 주장의 특정한 진리치에 대해 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조롱한다. 혹은 『소피스테스』 244를 참고하라. 오직 단 하나만이 존재한다는 이론은 반드시 거짓이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참일 수 없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상이한 의미들을 가진 상이한 여러 단어들이 없는 한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진술의 의미는 필요조건으로서 그 진술 자체의 거짓을 전제한다.
  '아무런 형상도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자기 논박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의미가 일부 형상들이 결함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형상들의 결합에 관한 플라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실마리가 있다. 어떤 진술들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은 형상들의 어떤 짝들이 양립불가능한 것들이라는 것의 증명으로 간주된다. 이제 특정 진술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어떤 형상들이 다른 형상들과 결합을 행한다는 것에 대한 증명으로 간주된다. 플라톤의 결론, 형상들 사이에 결합관계들이 있다는 것, 하지만 형상들의 모든 쌍들 사이에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은, 어떤 문장들이 의미를 가지고 어떤 문장들은 그렇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존한다. 전자는 친근성 혹은 양립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하고, 후자는 적대성 혹은 양립불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한다.
  (2)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의 첫 번째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아무런 엮임도 전혀 없다면, 사물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모든 설명들은 공허할 것이다. 그것들은 전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을 것이다. 후자가 내가 λέγοιεν οὐδέν을 해석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이 표현은 물론 단순히 '거짓을 말하는 것'이나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진짜 진술은 전혀 아무것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 [76쪽]'뭔가를 말함에 있어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내게는 여기에서 논증이 이러한 후자의 의미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아무런 엮임이 없다면, 어떤 이론에 대한 아무런 진술도 의미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λέγειν οὐδέν이 단지 '거짓인 것을 말한다'를 의미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a) 그 논증은 명백히 결정적이지 못할 것이다. 대안으로서 (2)가 철학자들의 그러한 모든 이론들이 거짓임을 함축하였다고 간주한다면, 물론, 그것들은 아마도 거짓일 것이다. 플라톤 자신이 그런 이론들의 진위에 관하여 결정하기는 어렵다고 언급한다(243a2-3). (2)가 나열된 이론들의 거짓을 함의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은 그가 그러한 이론들 중 어느 하나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일 경우가 아닌 한 (2)가 거짓임을 누구에게도 전혀 설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b) 다시, λέγειν οὐδέν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있어서, 왜 (2) - 그 어떤 형상도 결합하지 않는다 - 가 그 이론들이 거짓임을 함축해야 할지는 완전히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형상들에 관한 모든 이론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세계와 그 진행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특정 형상들이 결합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아무런 형상들도 결합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그의 이론을 필연적으로 거짓이도록 만들겠는가? (c) 그렇지만 만일 언급된 철학적 이론들이 사실상 형상들이 결합한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것이 주장된다면, 그 결론은 플라톤의 논증이 부당하지 않고, 그러나 완전히 방향을 잃었다는 것일 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형상들이 결합해야만 한다는 것,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이 그러하다고 말한 모든 철학자들이 틀렸으리란 것을 의미할 터이기 때문이다.
  λέγειν οὐδέν이 '거짓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논증이 빈약하고 불분명하며 방향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개연성 있고 분명하며 상당히 적절한 논증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저 해석을 의심할 좋은 근거이다. 만일 우리가 그 표현을 '아무런 제대로 된 진술도 구성하지 못함, 뭐가 되었든 아무런 logos도 전달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 논증은 적절히 자리를 찾게 된다. 만일 개념들 사이의 아무런 연관도 없다면, 철학자들의 진술들(더욱이, 모든 진술들)은 단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자기-모순적 진술들이 있다는 것의 전제가 어떤 개념쌍들은 결합하지 않으리란 것인 바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의미를 지니고, 자기-모순적이지 않은 진술들이 있다는 것(참이든 거짓이든)의 필요조건은 어떤 개념들이 결합하리란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플라톤이 형상들의 결합이 있다고 증명하는 과정에서 구성하고 있는 핵심들이라고 제안한다. 인간의 논의는 오직 일반적 단어들의 의미들이 규정된 방식들에서 관련되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단어들의 어떠한 결합들이 의미있는 문장들을 구성하고 또 그렇지 않은지 결정하는 규정된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언어에 본질적이다. 개념들의 상호관련들(포함, 양립불가능, 기타 등등)을 입안하는 것은 변증의 작업이다.(『소피스테스』 253b-e 참조).
  [77쪽] 내게는 S에 대한 내 해석이 - 콘포드와 로쓰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그 표본적인 logoi들에 관련하여 아무런 난점도 없음을 보일 책임이 분명히 있다. 나는 '형상들의 결합 없이는 아무런 logos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언명이, 여러 logoi가 예를 들어 한 고유명사와 함께 오직 하나의 일반 명사를 포함한다는 사실에 의해 타당성을 잃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보여야만 한다. 논리학 이론에 관한 최근의 한 저술을 인용하는 것이 이 점을 분명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주된 목적들 중 하나는 사건들을 보고하고 사물들이나 사람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한 보고들과 기술들은 다음과 같은 형식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과 같다. 그것은 무엇과 같았나? 그것은 무엇과 같은가? 우리는 무언가를 기술하고, 그것에 우리가 다른 것들에 적용시키도록 준비된 단어들을 적용시킴으로써 무엇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에 적용시킬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외 없이 모든 각각의 것에 적용시키고자 마련한 단어(최근 대중적이며 특히 군사용어로 사용되는 특정 단어들 같은 것들)는 기술을 목적으로 해서는 쓸모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이 무엇 같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해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두 가지 행위들이 아니라, 같은 행위의 두 측면들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반드시 경계가 그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사물들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적용가능성을 한계짓는다.
  대체로 같은 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형이상학』 Γ권 4장에서, 그가 모순율을 주장하는 곳에서 구성된다. 그는 모순율이 증명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증명이 되었든 필연적으로 문제가 되는 그 원칙을 사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당신이 누군가에게 이 원칙의 필연성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그가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말할 것이라면, 한정된 의미를 가지고 그리 할 것이라면. 왜냐하면 당신은 그에게 그가 반드시 그의 진술을 이러저러한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의도해야만 한다는 것, 최소한 하나의 다른 진술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의도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진술과 양립 가능한 진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ἀρχὴ … τὸ ἀξιοῦν … σημαίνειν γέ τι καὶ αὑτῷ καὶ ἄλλῳ. τοῦτο γὰρ ἀνάγκη, εἴπερ λέγοι τι. εἰ γὰρ μή, οὐκ ἂν εἴη τῷ τοιούτῳ λόγος, οὔτ᾿ αὔτῷ πρὸς αὑτὸν οὔτε πρὸς ἂλλον. ἂν δέ τις τοῦτο διδῷ, ἔσται ἀπόδειξις. ἤδη γάρ τι ἔσται ὡρισμένον. 원리는 적어도 그 자신에게든 다른 자에게든 무언가 의미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무언가 말하려면 이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런 자에게 그 자신을 향해서든 다른 자를 향해서든 진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 점을 제시한다면, 그것이 증명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무언가 규정된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1006a18-25). 플라톤에게로 돌아가자.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라는 진술은 오직 그것이 무언가를 제외시키기 때문에만('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지 않다' 혹은 좀 더 한정적으로, '테아이테토스는 서 있다') [78쪽]진정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이다. 그것이 뭔가를 제외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두 개념들('앉음'과 '앉지 않음' 혹은, 좀 더 한정적으로, '앉음'과 '서 있음') 사이에 양립불가능성이 있다고(μηδεμία κοινωνία) 말하는 것이다. 개념들 사이의 관계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철학자는 언어 사용을 규제하는 규칙들을 끌어낸다. 그런 관계들이 있다는 것, 그런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언어라는 게 있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형상들 상호간의 결합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한다.
  이 약간의 언급들은 반드시 어떻게 형상들의 엮임이 뭐가 되었든 모든 각각의 진술에 의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을 포함해 모든 진술들에 의해 전제되는지 보여주는 데에 충분한 것이어야만 한다. 플라톤이 그 점을 테아이테토스 예시들과 관련하여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것은 다른 주제에 대한 논의에서 사용된다. 여전히, 그것은 관련된 주제이다, 그것이 두 진술들의 양립불가능성을 포함하기에. 그리고 나는 만일 우리가 플라톤에게 S를 이 사례들과 부합시키길 요구했다면, 그가 위에서 대강이 제시된 그 방식으로 그리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이것은 플라톤이 S에 전적으로 조화시킬 수 없었을 logoi의 사례들을 사용하여 S를 보충한다는 가정보다는 더 그럴 듯해 보인다.
  나는 점진적으로 형상들에 관한 논의에서 개념들에 관한 논의로 진행하였고, 이것들을 사실상 일반 명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나는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들에서 변증가나 철학자에게 할당된 작업이 개념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연구와 구성, 문장에서 단어들의 어떠한 결합이 의미를 구성하고 또 구성하지 않는지를 애매성을 해명하고 구별들을 지음으로써, 우리 모두가 어떻게 정확하게 말할지 아는 한에서 그것들에 대해 잠재적으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지님에도, 우리가 통상 진술하는 데에 문제가 없는 단어 의미들의 관계들에 관하여 명백히 사실들을 진술함으로써, 주목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차분한 탐구를 통해 추구될 작업이라는 점을 시사하였다.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명백히 요구하는 엄격한 여러 조건들을 추가하는 것은, 꽤나 분량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결론으로 오직 두 가지 작은 점들만을 언급할 수 있다.
  플라톤이 의심의 여지 없이 그가 앞서 기술하였던 변증술을 구현(실행)하는 『소피스테스』의 대목(254b 이하)이 있다. 그는 우선 특정 형상들(253d1-3 참조)을 구별하고, 다음으로 그것들의 관계들을 결정한다(253d9-e2 참조). 플라톤이 이 대목에서 하는 일이 너무 명백해서 반박될 수 없는 진리들에 호소하는 것이란 점을 주의하는 일이 중요하다. [79쪽]특히 언어를 아는 그 누구라도 즉각 인정해야만 하는 그러한 진리들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단순한 치환 논증에 의해 being은 sameness와 다른 것으로 증명된다(255b8-c4). 만일 그것들이 다르지 않다면, 그 두 가지 것들에 대해 그 둘 모두가 현존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들 둘 모두가 같다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특히, 우리는 운동이 정지와 더불어 둘 모두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둘 모두가 같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고 더욱이 그건 부조리할 것이다. Being이 sameness와 다르다는 변증가의 진술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명백하게(혹은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가 이미 어떤 식으로 알고 있는 단어의 의미들에 관한 사실을 보도록 해주는 것뿐이다. 변증가는 우리가 이미 그걸 가지고 말하고 있는 그 규칙들을 명시적이게 만든다.
  끝으로,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언급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비판들에 대한 탐색 이후, 파르메니데스는 계속해서 이데아론이 구조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이를 위해 대단하고도 교묘한 기술이 요구된다는 것을 시사한다(135b). '만일 이 모든 그리고 이와 유사한 반론들을 바라봄에 있어서 사물들의 형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혹은 각 경우에서 한정적 형상을 구별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그의 사유를 정착시킬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이고, 각각의 실재 사물이 언제나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인 한에서 그러할 것이다. 또한 그래서 그는 의미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해 버릴 것이다.' 이 구절은 파르메니데스의 입을 통한 강력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그의 이데아론을 완전히 폐기할 것을 제안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그가 스스로 그 이론의 개정판을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버린다고 말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반면에 말이다. 어쨌든, 인용된 구절은 강력하게 그가 지금 확신하는 것이 중기 대화편들에서 구상된 형상들이, 윤리적 이념들로서 그리고 직관의 형이상학적 대상들, 그리고 아마도 신비적 통찰의 대상들로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시사한다. 그가 지금 확신하는 것은 말의 의미를 보장하는 고정된 사물들, 고정된 개념들 -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 - 그 역할이 논의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소피스테스』는 더욱이 이러한 개념들이 상호의 특정한 규정된 관계들 내에서 성립해야만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변증가에게 개념들의 경계들과 상호관계들을 탐구하는 작업을 부과한다.


  형상들 상호의 엮임이 진술의 성립 조건이다. 이 문장의 의미를 콘포드는 '모든 진술은 적어도 하나의 형상에 관한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 반면 로쓰는 이를 '모든 진술은 적어도 둘 이상의 형상들을 엮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 전자의 경우 S에서는 다수의 형상들에 대해 그것도 그것들 상호의 엮임을 논하고 있으므로 그 표현이 콘포드의 해석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는 다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의 사례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즉 플라톤이 S와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의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일관성을 잃었거나, 로쓰의 S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로쓰는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 그에 따르면 S는 모든 진술이 둘 이상의 형상들을 결합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을 통해 볼 수 있듯 참이 아니다. 로쓰는 이를 과장에 의한 것이라 얼버무리고, 소극적으로 테아이테토스 사례가 S를 실증하지 않는다고만 말한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플라톤이 일관성을 잃었다는 비판에 다름 아니다.

  플라톤이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S가 모든 진술들에 대해 참이게끔 해석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형상들의 엮임에 대한 이전의 논의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형상들의 엮임에 관련하여 플라톤은 세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한다. (1) 모두 엮인다. (2) 아무것도 엮이지 않는다. (3) 일부는 엮이고 일부는 엮이지 않는다. (1)의 경우 자기모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진술이 성립하게 된다. A is B가 자기모순이며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형상 A와 형상 B는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전건이 (1)에 의해 함축된다면 (1)은 모순이므로 폐기된다. 다음으로 (2)에 관하여,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a. 무엇이 어떠하다고 말할 수 없다. b. 단어들의 결합으로서 문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형상들이 분리된다/결합하지 않는다'는 진술 자체가 형상들의 결합을 전제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거짓을 전제한다. 진술의 의미는 형상들 상호의 결합에 대한 증명이다. 진술의 무의미 혹은 모순이나 논리적 불가능성은 형상들 상호 분리의 근거이다.

  개념들 사이의 연관 없이 진술은 무의미하다. 자기 모순적이지 않으면서 진리치를 갖는(참/거짓) 진술의 성립은 개념들의 결합을 전제한다. 이러한 개념 연관을 구성하는 것이 변증이다. 이제 하나의 고유명사와 더불어 단 하나의 형상만으로 구성되는 진술이(테아이테토스의 진술 사례들), 이상의 해석에 따르는 의미에서 '모든 진술에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전제된다.' 라는 주장(S)과 양립가능함을 보여야 한다.

   언어는 보고나 기술을 위한 것이다. 이는 어떤 것들에는 적용되고 또 다른 것들에는 적용되지 않는 단어를 특정한 어떤 것에 적용시켜 그것들을 다른 것들과 관련시키고 또 다른 것들과는 구별해내는 행위이다. 이는 한 행위의 두 측면이다. 어떤 것에 대한 진술은 다른 것들에 대한 배제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러한 언어 규칙은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서 도출된다. 양립 불가능한 개념쌍이 있고, 그 중 한 개념을 적용시킴으로써 다른 개념이 배제된다. 이것은 언어 사용의 필요조건이다. 플라톤이 직접 S를 아크릴의 해석에 따라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에 적용시키지는 않지만, 이 해석은 S를 진술들에 부합시키는 데에 유효한 해석이다. 반면 앞서 콘포드나 로쓰의 해석은 이러한 부합을 수행하기에 무리가 있다. 변증가나 철학자의 작업은 개념들의 관계를 연구하여 단어들의 결합을 통한 문장의 의미 구성 방식을 해명하는 일이다.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이러한 개념들의 관계이다. 

  변증술은 개념들의 결합과 분리를 논하고, 이는 언어 사용자 일반이 무의식 중에 전제하는 조건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은 중기까지의 윤리적 이념들 혹은 형이상학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이데아들을 주장하는 그 이론이 사유를 정착시킬 무언가를 구성할 것을, 고정된 사물 혹은 개념들 -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 - 의 가능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소피스테스』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진술에 대해 수행하는 역할을 고찰함으로써 플라톤이 이해하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형상들의 엮임과 진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콘포드의 입장과 로쓰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둘 모두 여기에서 형상들의 엮임을 진술의 요소 혹은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플라톤이 제시하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은 개별자와 형상의 관계로서 이러한 해석에 배치된다. 그러나 이 사례들 역시 '모든 진술'에 포함되는 일종의 진술이며,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플라톤에 따를 경우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므로 이 사례들 역시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그에 대해 참인 것으로 밝혀져야 한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전적인 상호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전면적인 상호 결합도 아님을 문헌을 근거로 논증한 뒤, 이것이 문장의 의미가 구성되기 위한 논리적 법칙으로서 전제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개념의 결합 과정에서 동일률과 모순율의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이 직접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에서 주제가 되는 참과 거짓의 문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제안은 플라톤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가능케 한다. 논리적 규칙은 언어의 사용을 위해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참이다. 나아가 이것은 초중기 이데아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일종의 개선된 대안으로 이해될 여지를 열어준다. 


1. ΣΥΜΠΛΟΚΗ ΕΙΔΩΝ의 기존 해석과 한계 (72-73쪽)


Τελεωτάτη πάντων λόγων ἐστὶν ἀφάνισις τὸ διαλύειν ἕκαστον ἀπὸ πάντων· διὰ γὰρ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소피스테스』 259e4-6.)


위 인용은 앞선 요약에서 to on과 to me on에 대한 문제를 변증술을 통해 극복한 이후 이어지는 손님의 말이다. To on이 to me on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모순들(ἐναντιώσεις)을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것을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거부해야 한다는 논의에 이어, 손님은 “모든 것들로부터 각각의 것을 분리시키는 일은 모든 진술들의 궁극적인 파괴이다. 왜냐하면 형상들 상호의 엮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발언은 이어 진술(λόγος)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분석으로 두 대화자를 이끌게 된다. 

Ackrill은 해당 논문에서 인용된 구절의 후반부에 주목한다. 그는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진술의 성립 조건이라고 할 때에, 과연 여기에서 말하는 진술, 문장, 즉 logos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 함축들은 어떠한 것들인지를 형상들의 엮임을 통해 파악하고자 시도한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해당 구절에 대한 기존의 대표적인 두 가지 해석들을 소개하고 검토한다. 그는 F. M. Cornford의 Plato’s Theory of Knowledge(1935), W. D. Ross의 Plato’s Theory of Ideas(1951)에서 제시된 각 해석을 검토한다.

Ackrill은“형상들 상호의 엮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한다.”라는 문장을 논의의 간결성을 위해 S로 명명한다. Cornford에 따르면 S는 모든 진술이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는 의미이다. 이 의존이 오직 형상들만이 진술의 요소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진술 각각은 반드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참)이다. 그는 S가 지적하는 점이 '모든 진술이나 판단이 최소한 하나의 형상에 대한 사용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즉, 어떤 진술의 의미에든 최소한 하나의 형상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Cornford, 314쪽.)

그러나 Ackrill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번역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플라톤의 논의와도 일관되지 못하며, 그 해석이 문장 S 자체의 의미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우선 플라톤이 S 이후 제시하는 테아이테토스에 관련한 사례들은 개별자로 보이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이다. 즉 여기에서는 형상과 형상 사이의 결합이 아닌 적어도 개별자인 주어와 술부의 형상이 결합되고 있다. 또한 S에서 ‘서로 간의(ἀλλήλων)’라는 단어는 그의 번역에서 탈락되어 있다. 또한 ‘형상들의 엮임’이라는 말은 진술에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을 사용한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따라서 S가 진술에 포함된 형상에 관한 논의라는 것은 의심스럽다.

Ackrill에 따르면 Ross는 S가 ‘모든 진술은 최소한 두 형상들을 포함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Ackrill과 다르다. 그러나 Ross는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에 의한 형상들의 엮임을 말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S가 진술에 포함된 형상에 관한 논의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해석에 따를 경우 형상이나 보편자가 아닌 개별자를 주어로 갖는 진술 때문에 S는 거짓이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은 S을 모든 진술들에 대해 참인 것으로 말한다(259e4 ‘πάντων λόγων’, 260a9 ‘οὐδὲν … λέγειν‘). 더욱이 플라톤은 앞서 언급하였듯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을 사례로 들어 진술을 분석하고 있다. 즉 Ross의 해석에 따를 경우에도 플라톤은 일관성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Ross는 이 비일관성을 지적하지 않고 단지 그 사례들이 S를 입증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2. ΣΥΜΠΛΟΚΗ ΕΙΔΩΝ의 필연성(251d-252e) (74-75쪽)


S에서 논하는 형상이 진술에 사용되거나 그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할 경우 앞서의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S는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어야 하며,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자신이 제시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의 사례에도 부합해야 한다. 우선 S가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라는 점을 고찰하기 위해 형상들의 엮임이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인지 증명하는 플라톤의 논의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251d-252e에서 플라톤은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다. 

그는 여기에서 세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한다. (1) 모든 형상 각각이 다른 모든 형상 각각과 결합한다. (2) 아무런 형상도 그 어떤 다른 형상과도 결합하지 않는다. (3) 형상들의 몇 쌍들은 서로 결합하는 반면, 다른 형상들은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처음 두 가능성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세 번째 가능성을 확정짓는다. 형상들의 엮임은 이렇듯 형상들의 제한된 상호결합이다.

  모든 것이 서로 결합한다면 상호 모순되는 것들도 결합한다. 이를 통해 구성된 진술은 자기모순적인 진술이다. 만일 B에 대해 A가 주장되는 진술이 자기모순적이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형상 A는 형상 B와 결합하지 않음이 귀결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부 문장들은 자기 모순적인 진술들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의해 형상들의 상호결합에 대한 일부 제한이 시사된다는 것이다. 

(2)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은 두 부분이다. 첫 번째, 만일 정말로 아무런 엮임도 없다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2)에 대한 진술들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 진술을 함에 있어서 구성요소들은 단어들을 문장으로 결합시켜야만 한다. 이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첫 번째 반박은 다시 말하면 (2)에 대한 진술이 필연적으로 (2)의 거짓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249c에서 앎, 지혜, 지성과 분리된 채로 영혼이 있을 수 없다는 논증이나 244에서 to on과 하나, 혹은 하나와 그 이름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논증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2)는 필요조건으로서 그 자체의 거짓을 전제한다.

  '아무런 형상도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그 의미 자체가 일부 형상들이 결함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어떤 진술들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은 형상들의 어떤 짝들이 양립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한다. 특정 진술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어떤 형상들이 다른 형상들과 결합을 행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플라톤의 결론, 형상들 사이에 결합관계들이 있다는 것, 하지만 형상들의 모든 쌍들 사이에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은, 어떤 문장들이 의미를 가지고 어떤 문장들은 그렇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존한다. 전자는 친근성 혹은 양립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하고, 후자는 적대성 혹은 양립불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한다.



3. ΟΥΔΕΝ ΛΕΓΕΙΝ. (75-76쪽)


(2)에 대한 첫 번째 반박은 아무런 엮임도 전혀 없을 경우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리란 것이다. 여기에서 ‘οὐδὲν λέγοιεν’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리란 의미로도, 거짓을 말하리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240d-241a. 혹은 『에우튀데모스』, 『국가』 등 참조). 그러나 이를 ‘거짓을 말함’으로 이해할 경우 우선 (2)는 252b에서 나열된 주장들이 거짓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이 이 이론들의 반박 근거로서 ‘아무런 섞임도 없다’는 것을 그 이론들이 받아들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 않고, 실제로 그러하지 않기도 하다. 또한 ‘아무런 섞임도 없다’는 것이 거짓을 말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과정 또한 불분명하다. 252b의 주장들은 형상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 논하고 있지 않다. 단지 플라톤은 형상들의 섞임이 부정될 경우 이 이론들이 어찌 되는지에 대한 결론으로 ‘οὐδὲν λέγοιεν’을 내세울 따름이다. 끝으로 이 주장들이 형상들의 결합을 주장하는 것들이며, 섞임이 없을 경우 이 주장들이 거짓이 된다는 뜻으로 (2)를 이해한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논증이다. (2)가 사실이라면 (2)를 부정하는 자들은 거짓이라는 식의 논증은 해당 부분의 논의 맥락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οὐδὲν λέγοιεν’이 거짓을 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면 이는 쉽게 이해된다. 개념들이 결합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결합하지 못할 것이고 그 경우 진술이 성립하지 않을 것이므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모순적인 진술들은 결합하지 않는 개념쌍들을 전제한다. 반면 의미를 지니는(참이든 거짓이든) 진술들이 있다는 것은 개념들의 결합을 또한 전제한다. 진술은 오직 일반적 단어들의 의미들이 규정된 방식들에서 관련되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단어들의 어떠한 결합들이 의미있는 문장들을 구성하고 또 그렇지 않은지 결정하는 규정된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언어에 본질적이다. 개념들의 상호관련들(포함, 양립불가능, 기타 등등)을 입안하는 것은 변증의 작업이다.(『소피스테스』 253b-e 참조).



4. 언어의 요조건. (77-78쪽)


앞서의 논의를 통해 형상들의 엮임이 진술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진술을 위해 전제되는 것임이 밝혀졌다. 이제 S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 사례들에 부합한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언어는 사건을 보고하고 사물이나 사람을 기술한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어떤 것이 무엇 같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다른 것들과 비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해낸다. 이런 것들은 두 가지 행위들이 아니라, 같은 행위의 두 측면들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반드시 경계가 그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사물들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적용가능성을 한계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Γ권 4장에서 모순율을 설명하면서, 한정된 의미를 가지고 무언가를 말한다면, 그 진술이 이러저러한 진술을 배제해야 하며, 최소한 하나의 다른 진술과는 양립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한다. 다른 모든 진술과 양립 가능한 진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필요조건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에도 적용된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에서 ‘앉아 있음’은 ‘앉아 있지 않음’들, 더 정확히 말해 ‘서 있음’을 배제하는 한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이러한 개념들 사이에 양립불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념들 사이의 관계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철학자는 언어 사용을 규제하는 규칙들을 끌어낸다. 그런 관계들이 있다는 것, 그런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언어라는 게 있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5. 결론. (78-79쪽)


플라톤이 S를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에 직접 관련시키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후자에서 두 진술들의 양립불가능성을 포함하기에 두 문제는 서로 관련이 있다. 또한 S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앞서의 두 해석들보다 이 사례들에 더 잘 부합한다.

Ackrill는 자신이 형상들에 관한 논의를 점차 개념들에 관한 것으로 전개시켰고, 이것들을 일반 명사들로 취급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단어들 사이의 관계와 문장의 구성을 고찰하여 언어의 규칙, 조건을 해명하는 일이 변증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당화가 부족함을 시인하며 다음의 두 가지를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Ackrill에 의하면 254d 이하에서 플라톤은 형상들 사이의 양립가능/불가능을 검토하면서 언어를 아는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단어들의 의미 사이의 양립가능성에 대한 논의들이다. 변증가는 언어의 규칙들을 명시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은 중기까지의 윤리적 이념들 혹은 형이상학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이데아들을 주장하는 그 이론이 사유를 정착시킬 무언가를 구성할 것을, 고정된 사물 혹은 개념들 -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 - 의 가능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소피스테스』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2. 평가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진술에 대해 수행하는 역할을 고찰함으로써 플라톤이 이해하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형상들의 엮임과 진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콘포드의 입장과 로쓰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둘 모두 여기에서 형상들의 엮임을 진술의 요소 혹은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플라톤이 제시하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은 개별자와 형상의 관계로서 이러한 해석에 배치된다. 그러나 이 사례들 역시 '모든 진술'에 포함되는 일종의 진술이며,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플라톤에 따를 경우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므로 이 사례들 역시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그에 대해 참인 것으로 밝혀져야 한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전적인 상호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전면적인 상호 결합도 아님을 문헌을 근거로 논증한 뒤, 이것이 문장의 의미가 구성되기 위한 논리적 법칙으로서 전제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개념의 결합 과정에서 동일률과 모순율의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이 직접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에서 주제가 되는 참과 거짓의 문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제안은 플라톤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가능케 한다. 논리적 규칙은 언어의 사용을 위해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참이다. 나아가 이것은 초중기 이데아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일종의 개선된 대안으로 이해될 여지를 열어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형상들의 엮임과 진술 분석이라는 『소피스테스』에서의 두 가지 문제들이 상호에 발생시키는 일관성의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이는 이후 연구자들 역시 끊임없이 대안을 모색하도록 만든 『소피스테스』 연구사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또한 그의 대안은 자신이 제기한 문제점들을 포함하여 그 이전의 해석들이 지닌 난점들을 적절히 해소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형상들의 엮임’이 진술에 사용되거나 포함되는 것으로 한정된 데에서 나아가 언어의 성립 조건으로 그 해석의 여지를 확장시킨 것은 중요한 성과라 평가된다. 그가 이러한 해법을 제시하였기에 다른 문제들이 두드러진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아크릴의 논의에서 추가적인 검토 없이는 해명이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우선 그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을 개별자와 보편자 혹은 보편개념의 결합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소피스테스가 하나의 유라는 점에 주목할 경우, 이를 달리 생각할 여지가 생긴다. 소피스테스는 제작자이자 말로 된 모상에 관련하며 거짓에 또한 관련한다. 해당 대화편에서 제작, 말, 모상은 모두 유로 간주된다. 즉 소피스테스는 유들의 결합을 통해 구성되는 복합적인 유이다. Being, 같음, 다름은 그 정의에 다른 유들의 정의가 포함될 필요가 없을 것이나, 소피스테스는 여러 유들을 자신의 정의에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시간, 장소 등을 또한 유로서 간주할 수 있다면, 테아이테토스도 지금, 여기, 대화 등의 유들을 통해 한정어구들을 결합하여 정의할 수 있는 일종의 유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해당 대화편에서는 계속해서 유들에 대한 논의만이 이루어질 뿐 구체적인 개별자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티마이오스』에서와 같이 운동, 시간, 장소, 원소들 등에 대한 논의가 제시된 것도 아니고 『필레보스』에서 제시되는 그러한 무한정자에 대한 진술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크릴뿐만 아니라 그가 비판하는 콘포드나 로쓰도 마찬가지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을 개별자와 보편자의 결합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진술의 근거’라는 표현의 불분명함에 기인한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양립 가능성과 양립 불가능성이 진술의 성립 근거라고 주장한다. 단어들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개념들이 결합해야 하며 이를 통해서만 진술이 성립한다. 또한 동시에 한 개념이 다른 개념들을 배제하는 모순율을 통해서만 진술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이 모두는 진술의 성립근거라기 보다는 개념 자체의 성립근거이다. Megista gene를 논하는 부분에서 추론되는 바, 모든 각각의 형상은 Being, 같음, 다름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결합 없이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 지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진술 자체라는 유(類, genos)의 성립은 다른 모든 유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결합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진술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과정은 이와 다르다. 이 대화편에서 진술은 그 구성요소로 명사(혹은 이름, onoma)와 동사(혹은 말, rema)를 지니며, 이것은 각기 전자는 사물(pragma)을, 후자는 행위(praxis)를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진술의 구조에 대한 고찰 없이는 진술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근거를 논하기 어렵다. 아크릴은 진술의 형식적 근거와 진술의 내용이 성립하기 위한 근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술의 두 구성요소들이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지시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모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모순율뿐만 아니라 원본과 모상 사이의 관계 또한 진술의 성립 근거가 될 것이다.

아크릴은 양립불가능성을 일종의 모순관계로 파악하고 이것이 수용될 경우 진술이 무의미해지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가 드는 예시는 ‘운동이 정지한다’와 같은 진술이다. 그러나 256b6-8에서 손님은 운동과 정지의 결합 가능성을 언급한다. 또한 그에 앞서 gigantomachia를 논하는 과정에서 운동과 정지는 모두 인식의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설명된다. 어떤 것이 정지해 있지 않다면 그것을 말하거나 지시하는 그 순간 그것이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이므로, 사유나 진술을 위해 그 대상은 정지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지해 있기만 하다면 인식의 작용을 받아 인식된 것으로 변하는 그러한 운동조차 불가능할 것이므로, 또한 사유나 진술의 대상은 운동해야만 한다. 따라서 운동과 정지 각각이 진술되고 사유될 수 있는 한에서 그것들은 운동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는 것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 문장 자체는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진술이나 사유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의 의미는 거짓이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는 진술이 개연적으로 거짓인 반면 모순되는 주술관계의 경우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후자가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蟲-

1. 몇 시간 뒤에는 정암에 가서 이종환 선생님 필레보스 강의를 듣는다. 무한정(apeiron)과 상대적인 양(많고 적음) 그리고 유종관계를 구성하는 중간 형상들과 개별자들 등등에 대해 딱히 손에 잡히는 이해는 아직 갖질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내가 아직 그 놈의 유종관계를 구성하는 『소피스테스』에서의 변증(dialetike)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잘만 간다. 국가장학금은 5학기까지가 제한이던데 나는 벌써 7학기째다. 씨발, 닝기미, 내가 이렇게까지 좆병신이었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나 보다. 이번 주부터 매주 금요일 두시 즈음에는 『소피스테스』 관련 논문들을 읽는 모임이 있다. 이번에는 저 유명한 아크릴의 쓈풀로께 에이도오온을 읽을 계획인데, 뭐, 그냥 그렇다고. 정암에서 이런저런 출판 준비 윤문독회에 귀동냥을 다니는 일은 여전히 신나고 재미난다. 그럼 뭘 하나. 석사만 4년째라니, 이건 뭐 학부부터 다시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음, 정암 강의 듣고 나서는 그야말로 오랜만에 기종석 선생님, 김길수 선생님 뵈러 간다. 아, 면목이 없다. 당신들께서 가르쳐 주신 바를 내가 스스로 지키지도 못하고 있거니와 그 놈의 학교를 7년 가까이 들러 붙어 있었으면서도 뭐 하나 남겨 놓고 나오지도 못했다. 그 사이 학생들은 책의 무서움을 알기 보다는 말장난에 혈안이 되어 가기 시작하고, 어떤 늙은 개새끼는 개지랄을 하다가 쫓겨났다고 하고, 사람이 몇 씩이나 죽어 나가는 동안에 내가 아파하며 고민했던 것들이 다 구라빨 세운 것은 아니었나 회의감만 든다. 그 시간 내내 마음에 품었던 사람을 결국 놓쳐 버리고, 나같은 개쓰레기랑 같이 어울려 놀아 주던 정다운 친구들도 또 놓쳐 버리고,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기 보다는 다만 공유하고 공감하고 싶었을 뿐이건만 신뢰를 쌓을 시간에 이바구만 쳐대다가 미친 개꼰대새끼 취급을 받으며, 이제는 아마 잊혀졌겠지. 지난 10년이 내게 티끌만치라도 남아 있다면 그마저도 내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죄책감을 불러 오는 부채이지 싶다. 이제 남은 거라곤 그저 책 읽고 논문 쓰고 그러는 것뿐인데, 그것마저 놓쳐 버리면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번 달로 나랏돈 얻어 먹는 것도 쫑이고, 과외는 있다가 없다가 그러고, 아부지는 꼬장이나 부리며 계속 되도 않는 사업으로 재산이나 까먹고 계시고, 어무이도 이제 돈 벌어 오시기엔 이곳저곳 몸 고장나는 통에 무리가 이만저만하지 않은데, 이 와중에 그나마 수료라도 해 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봄이다. 봄처럼 싫은 것도 드물다. 옘병할 우라져 쳐 자빠질 씹창같은 꽃들이 만발을 하니 다 불살라 버리고 싶달까, 뭐가 그렇게 신나고 즐겁고 파릇파릇한지 모르겠다. 빙하기나 와 버려라. 아, 씨발, 그럼 나 돈 없어서 얼어 뒈지겠네. 뭐 그냥저냥하고 어쩌면 비교적 널널하고 느긋한 고난과 역경이다. 취직을 했든 장사를 했든 이보다 나았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를 않으니. 어디든 이 악물고 빡세게 엉겨 붙어 버티고 앉았는 사람들뿐이지 않겠나, 금수저 물고 비단으로 똥귀저기 해입는 윗동네님네들이 아니고서야, 한국 망해라 씨바.

2.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미친 놈 술주정 부리듯 끊임없이 씨부리는데도 뭔가 속에 쌓인 똥 같은 게 싸질러지질 않는다. 게워내고 싸지르는 게 필요한데, 잘못된 믿음들이든 잘못 쳐먹은 쓰레기든 뭐든. 그렇게 다 갈아 엎어야 새 바닥에 뭐라도 주워다 쳐 넣을 것 아닌가. 어쨌든. 소크라테스 흉내를 내는 강신주는 예의 그 정신나간 젊은 껄렁패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하다. 그 주둥이로 '철학'이라고만 지껄이지 않는다면 의미있는 일을 한다고는 생각한다. 현실과 그 속의 적나라한 자기 자신의 깜냥을 직시하도록 강요하고 몰아 세우는 것, 구체적인 밑바닥에서 제 두 발로 서서 발을 내딛게끔 닥달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뒈질 놈은 안 그래도 뒈지고 살 놈은 뭔 지랄을 해도 사니까, 딱히 사정 봐줄 건 없지. 그런데 서양철학만 해도 그 역사가 넉넉잡아 3천년이 되어 가는 마당에, 그 모든 노력을 개무시하고 뜬금없이 '너 자신을 알라' 이 지랄을 하면서 주체를 일깨우니 뭐니 하는 게 정말로 '철학'이라는 학문이 맡아야 할 역할인지 모르겠다. 아니, 그게 어쩌면 철학한다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다 하더라도, 저 오랜 역사를 제대로 소화해내지도 못한 이 시궁창에서 금꽃병에 천년화를 심겠노라고 주접을 떠는 게 가당키나 한지 그걸 모르겠다. 철학은 무슨 개뿔이 철학인가, 글줄도 못 알아 쳐먹는 새끼들 싸그리 긁어 모아 대학구석에 쳐박아 놓고서는 다이어트 가르치고 스키 가르치고 술이나 쳐먹이고 내쫓듯 졸업시키면서 뒷돈이나 챙기는 나라에서. 유불도 경전들의 편집이 제대로 되었나 고중세 근대 현대 서양 저술들이나 제대로 다 번역을 했나 그런 거 도맡을 연구자들이나 족히 뽑아냈나 아니 그럴 푼돈 줄 구멍이나 만들어 뒀나, 좆을 빨고 아주 그냥 히마티온 걸치고 고대 그리스 코스프레 하면서 철학 처음부터 다시 싹 다 새로 시작할까? 딱히 뭔 짓거리인지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떤 새끼는 칸트가 낫네 플라톤이 낫네 칸트도 모르는 좆뉴비들이랑 뭔 얘기를 하냐느니 개소리나 하고 앉았고(씨부랄, 『순수이성비판』이나 붙들고 있어 봤냐? 그게 좆나 지 새끼 일기장마냥 침발라가며 한 두 시간 읽으면 아주 머리에 쏙쏙 박히고 그러지? 대단한 천재들 나셨네. 누가 낫니 못하니를 떠나서 이제 막 배우는 새끼가 한다는 소리가 저 따위란 게 일단 빡치지 않나.), 또 어떤 새끼는 100년도 지난 영역본을 가져다가 플라톤을 읽네 영어 공부를 하네 마네 씨발 알려줘도 다 씹고 지랄을 해대고 있지를 않나 무슨 쳐 읽지도 않은 외국 저술 가져다가 씨부리며 잘난 척을 해대질 않나, 어떤 새끼는 뭐 프로타고라스인지 피타고라스인지 파르메니데스인지 지가 걔 애인이래나 뭐래나 이 지랄을 하며 고대 그리스어 문법 좀 하라고 선생들 달라 붙고 제자까지 붙여다가 주마다 보쟀더니 노느라 바쁘셔서 쳐 나오지도 않은 주제에 지가 딴 새끼들을 가르치네 마네 이 지랄을 하고 있다고 하시고, 그 새끼들이 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씨부리면 '아, 꼰대새끼 또 지랄이야' 이러고 말겄지. 뭐 그래야 마땅한 일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함께 읽고 묻고 따지고 그러지도 못한 주제에 뭐라고 좆같지도 않게 선배질을 쳐 하겠냐. 밥을 사줬냐 술을 사줬냐 학자금 대출 이자라도 내줬냐. 근데 쫌 내가 챙겼던 새끼들한테는 꽤나 서운하기도 하다. 니들에게 내가 뭐라도 해줬다면 니들도 쟤들한테 뭣 좀 해 주면 안 되는 거냐. 날 쓰레기 취급하며 떠났던 누군가는 여기저기에서 다시 철학자연하며 겁없이 씨부리는 일을 이리저리 싸지르고 다닌다고 들었고, 뭐 그 친구도 내가 직접 함께했던 시간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니 내가 가타부타할 자격은 없지. 같이 머리 싸매고 끙끙거렸던 놈들도 이젠 뒷방늙은이 취급을 받을 테니 내가 걔들한테 뭐라 하기도 참 꼴이 우습고. 모르겠다. 말 그대로의 '생계'를 지 스스로 책임지고, 제 3세계 변방에서 황국의 철학을 빌어다 쓰는 주제를 알고서 외국어 좆나게 배우고, 낱자 하나 토씨 하나 곱씹어 가며 읽은 적 없는 지난 날을 머리 쳐박고 후회하고 반성하면서 글 읽는 법부터 앗싸리 다시 배우고, 같은 분야에 투신한 다른 나라 새끼들이 앞서간 거리만큼의 노력을 추가하고 이미 없는 것이 검증된 그 비루한 재능을 마른 나무에서 즙 짜내듯 안간힘을 써서 뽑아내 또 노력을 쏟아 부어서, 안으로는 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로 그 학문의 역사와 체계를 가늠하고 밖으로는 이 학문이 기대고 붙드는 다른 학문들을 조망하고 이 모든 것들이 속하고 또 뒤섞이는 현실로부터 눈 돌리지 말고, 이게 다 되면 니들이 철학자라고 씨부리든 플라톤의 재림이라 자처를 하든 뭘 하든 상관 않겠는데, 니들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그러고들 있냐? 옌장, 모르겠다. 자꾸만 자꾸만 나는 무섭고 죄스럽다. 죽은 스승 죽은 선배 죽은 친구를 떠올리며 이렇게 떠올리고 언급하는 것조차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결국 또 그냥 떠들고 마는 거다.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하고 도모하며 막막하다 못해 까마득한 일더미에 파묻혀 조용히 번역하고 논문 내고 강의하는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부끄럽고 그냥 죽겠는 거다. 살고 죽어 가면서 이 바닥을 여기까지 명줄 이어 놓은 사람들에게, 내가 앞서 개쌍욕을 쳐던진 저 씹새들이 똥물을 들이붓고 있다는 생각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려나. 니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혹은 애써 사는 사람들이 니들에게 이 따위로 모욕을 당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냥 잠자코 연구하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건가, 니깟 것들의 취미생활에 기여하기 위해 시간 쓰고 마음 쓰고 하기에는, 이 미친 세상에서 저러한 노력들이 너무 아까울 만치 값지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는 건가. 뭐, 철학을 코에 가져다 걸든 머리 위에 뒤집어 쓰든 사실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나는 지금 동정과 연민에 호소하고 있는 거다. 이 미친 꼬라지를 쳐다 보고 앉았는 나를 긍휼히 여기사 제발들 좀 그만들 좀 해주면 안 되겠나. 흐, 안 되겠지.

3. 술이 고프고 사람이 고프다. 학부를 졸업하자 마자 나는 연달아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술에 취해서는 경찰차에 실려 가고 응급실로 실려 가고 그랬더랬다. 된통 다치고 나서는 요즘 들어서는 그렇게까지 쳐 마시고 나뒹굴지는 않는듸, 뭐 어쨌든 그랬더랬다. 예전엔 억지로 혼자이려고 지랄을 했더랬다만 이제는 그냥 딱히 아무 생각도 없다. 둘러 보면 혹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고 딱히 독신이 꿈인 것도 아니고 사람이 싫은 것도 아니건만, 요즘 들어 나는 한결 괴팍해진 듯하다. 예전에는 학회를 하든 토론을 하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냥 흥분해서 언성이 높아졌을 뿐인데 요즈음은 되도 않는 소리하고 억지 부리는 새끼들 꼬락서니가 역겹고 아니꼬와서 버럭질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다 맞고 니들 다 틀리고 좆나 나님 킹왕짱ㅋㅋ 뭐 이 지랄을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앗싸리 아주 잘 아는 선생 얘기나 들었으면 하는 거다. 씨잘데기 없는 잡소리들 쳐 듣고 앉아 있기에는 내가 너무너무 부족하고 뒤쳐져 있고 병신이란 생각에 견딜 수가 없어서, 조급해서 말이다. 뭐 씨발 딱히 대단히 신선하고 기발한 것도 아닌 얼렁뚱땅 때려잡는 감으로다가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똥오줌 구분도 못하고 지껄여대는데 내가 왜 참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안 참고 토악질을 해댄 내 뻘소리들도 만만찮은 뻘소리이긴 매한가지겠으나, 그래서 이중 삼중으로 화가 나는 것이지. 나도 싫고 니들도 싫고. 픽사 'Up' 앞부분이 생각나 뜬금없이 엉엉 울었다. 나도 긴 시간을 함께하고 서로 믿으며 어울린 그런 사람을 곁에 둘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부러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국민학교 때 첫사랑과 생이별을 하지만 않았으면 그리 될 수 있었으려나, 아님 사춘기도 오기 전부터 시작된 빌어먹을 중2병을 잘만 피해 갔더라면 사정이 조금 나았으려나, 내내 지랄만 하고 살다가 사람 하나 남기질 못하고 나는 벌써 주변에 다들 시집장가가고 애 낳고 살림살이 걱정하는 인간들에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그게 나쁘단 건 아니고, 이제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얘기랄까 뭐랄까. 'Up'에서 주인공 노친네는 헤어지고 나서까지 전적인 신뢰를 등에 업고 행복했을 것 같은데, 나는 남에게서는커녕 내 자신에게서도 신뢰를 얻질 못 하겠으니 이 일을 어쩌나. 아, 나 좆나 감성돋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 것이, 주변에 하나 둘 짝을 찾아 가정을 꾸리고 무난한 행복을 염원하며 외롭지 않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나는 필레보스마냥 그리 생각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고 즐겁고 행복하면 된 거다. 어쨌든 당장의 문제는 슬프고 아프고 불행한 자들이 남았다는 것이고, 진정으로 좋은 것이니 있는 그대로의 정의니 뭐니 하는 배부른 소리는, 여태껏 그래 왔듯 차근차근 고민할 놈들이나 고민하면 될 일이다. 세상에 기여하는 정도로만 보아도 학자나부랭이들이 씹지랄에 비하면야 당신들의 행복은 더할 나위 없이 생산적이고 긍정적이다. 기필코 결단코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길 바란다, 다들. 난 이 현실에서 도망나온 시궁창에서 좀 더 굴러야 쓰겄다.

-蟲-

  하나 자체와 하나들 그리고 하나를 나누어 가진 것들. 개별자들은 하나라는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하나가 '된다.'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겪음으로써 이전까지 어떤 무엇이지 않았던 것이 비로소 바로 그 무엇인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어 'gignomai'는 become의 뜻을 지니고 우리말에서는 '있다/이다'의 구분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생긴다/된다'의 두 의미로 구분되어 해석될 수 있다. 개별자는 하나에 참여하여 그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하나인 것이 되지만 이 하나라는 이데아로부터 분리될 경우 하나이지 않은 것이 된다. 하나의 인간이 사지를 지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뉘면서도 여전히 한 사람일 수 있는 까닭은 그를 하나이게끔 해주는 것과 그를 여럿이게끔 해주는 것이 따로 독립된 덕분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란 것은 모순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 자체의 이데아는 개별자들만이 아닌 여타의 이데아들에 대해서도 관계를 맺는다. 사람, 소, 좋음, 참은 각기 한 가지의 것이며 그 각각이 아래로 여러 사람들, 소들, 좋은 것들과 참인 문장들 혹은 믿음들을 지닌다. 이러한 이데아들 각각은 하나이며 그 자체로 여럿일 수는 없다. 또한 여러 개별자들이 각자의 정의나 속성을 이데아에 의존하는 한에서도 그 관계 속에서 이데아는 하나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자체를 제외한 여타의 이데아들은 그 자체의 본성상 하나인 것일 수도 없다.
  반대로 하나 그 자체의 이데아는 같음, 다름, 있음/임, 운동, 정지 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서 멈추어 있어야 하고, 그러한 '같음,' '정지'를 겪고 그것으로 변화하기 위해 또한 움직이고 작용을 받아야 하며 다른 것들에게 작용하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 그 자체를 제외한 여타의 것들로부터 구분되기 위해 이것은 여타의 것들과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조건들 혹은 상태들은 하나 그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것들이다. 하나는 하나이기만 할 뿐이다.
  즐거움은 여러 가지 즐거움들로 나뉜다. 육체적인 즐거움, 정신적인 즐거움, 일시적인 즐거움, 지속적인 즐거움, 큰 즐거움과 작은 즐거움과 이러저러한 즐거움들이 모두 즐거움이라는 하나의 것으로 아울러진다. 다시, 이 여러 가지 즐거움들 각각에 대해 바로 그러한 즐거움으로 명명되는 구체적으로 실현된 즐거움들이 있다. 지금 담배를 피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개소리를 싸지르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어제 잠들기 전에 느낀 즐거움과 온갖 것들의 매순간마다의 서로 다른 즐거움들이 어떤 종류의 즐거움에 속하고 그 여러 종류의 즐거움들이 다시 하나의 즐거움에 속한다. 하나에서 몇 가지의 것들로 다시 한정되지 않은 것들에까지 이데아로부터 개별자에 이르는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구체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이해될 수 없다. 혹은 그 이해의 확인을 구할 수 없다.
  단순한 이데아와 복잡한 이데아가 구분될 수 있다면 여기에는 상하의 구분 또한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음의 이데아는 크기가 같음의 이데아나 모양이 같음의 이데아 혹은 색이 같음의 이데아에 비해 더 넓은 외연을 지닐 것이고 수동적인 측면은 더욱 적을 것이다. 그 이데아들의 중첩에 시간과 공간 각각의 이데아가 공존할 수 있다면 구체적인 개별자들 역시 이를 테면 속성들의 다발과 같은 식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 이러저러한 조건들이 결합한 결과물로서 바로 여기 이 내가 그 순간의 것으로서 정의될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다.
  그러나 세계의 운동은 형상들의 운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같음과 다름 그리고 그 중간의 것이 결합하고 또한 수학적 비율들에 따라 한정된 뒤 그 마디들이 빈틈없이 나뉘어 일종의 계기적 연쇄를 구성한다(하하하, 개소리의 절정이다!). 그 비율들은 네 가지 원소들과 천체의 운동을 구성하고 이로부터 세계에 시간이 성립하며 이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원인과 필연과 chora에 대한 장인(혹은 제작자, Demiourgos)의 작업을 통해, 그리고 다시 이 작업을 인계받은 천체들 혹은 신들의 지속적인 개입을 통해 물질적 세계에 대한 수학적 이해의 가능성이 확보된다. 세계가 수학적이지 않다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은 걷잡을 수 없는 격류로 휘몰아칠 뿐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규칙적이며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변전한다.
  어쨌든 형상들의 상호 결합은 개별자들의 세계와 매개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필레보스』에서 그러한 매개의 방식이 제시되는가? 『소피스테스』는 형상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하고 『티마이오스』는 자연세계의 합법칙성을 설명하며 『법률』은 『국가』와 『크리티아스』의 이상국가를 지상의 시민들과 매개시킨다. 『소피스테스』에서는 『파르메니데스』에서 제시된 형상들 사이의 독립과 의존의 문제에 답을 하고 『티마이오스』에서는 개별자들의 세계를 설명하지만 『법률』에서 설득(peitho)과 확신(pistis)이 하는 그러한 매개 방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필레보스』에서 한없이 많은 개별자들을 아우르는 일정 가짓수의 말하자면 '중간 이데아들'이 탐구되고 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순한 이데아와 복잡한 이데아들 그리고 개별자들 사이의 삼중의 관계가 탐구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이 어딘가에서는 발견되어야만 한다.
  또 다른 종류의 심각한 문제는 하나라든지 있음/~임이라든지 필연이라든지 하는 것을 다루는 방식으로 '좋음'과 '즐거움'을 탐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먼지와 배설물의 이데아는 부정된 것으로 보인다(부정하지 않을 여지는 없나?). 이데아는, 이데아들은 좋은 것이고 좋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과연 인간이 지니는 어떠한 가치까지 포함된 대답이 필요한 것인가?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정치가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도덕적 가치와 같은 것이 고려되는가? 이미 자연주의적 오류에 대한 지적은 식상할 지경이다. 플라톤 당대에는 이미 자연학자들에 대한 조롱과 신화로 전해진 전통적 가치에 대한 풍자가 횡행하고 있었고 프로타고라스는 신들 따위 뭐가 어떤지 어떻지 않은지조차 모른다고까지 선언하였다. 정식화된 구분은 없을지라도 옳고 그른 것을 논하는 일과 땅을 재고 일삯을 나누는 일 사이의 단순한 차이를 지적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은 또 다른 시대착오의 오류일 것이다. 마치 하나는 좋고 둘은 나쁘며 콩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피타고라스처럼 플라톤이 멍청한 소리를 했다고 봐야 할까? 혹은 절제와 용기와 경건 같은 것들, 좋음 그 자체와 아름다움 그 자체, 정의 그 자체만이 이데아의 자격이 있으며 저 하늘의 태양 말고 모든 빛나고 따스한 것들은 일절 진정한 이데아의 지위를 얻을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인식 중 대체 어떤 것들이 그렇게나 가치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물론 좋음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최소한 규범윤리학에 있어서 용의 여의주 같은 것일 터이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있다면 만능이라 뭐 그런 얘기이다. 객관적 가치기준의 확보는 곧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향, 민주적인 만장일치와 같은 허황된 꿈을 실현할 근거 혹은 토대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어마무지한 뻥을 치기에는, 플라톤의 성향이 그리 급진적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논리 따로, 자연 따로, 사회나 정치 또 따로 다루고 언어 따로, 교육 따로, 종교 따로 문학예술 또 따로 다루는 사람이 그 모든 작업들이 시사하는 비약과 매개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곧장 '에라 모르겠다' 하며 거대한 개뻥을 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냥 마음껏 개소리가 하고 싶어서 싸질러 보았는데 잘 모르겠다. 나는 뭔가 지금 어줍잖게 칸트식으로 플라톤을 읽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상의 세계만이 인식의 대상이고 그곳은 규칙과 필연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의 지성에 합당한 자연법칙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따름이다. 자유와 도덕과 절대선은 저 너머 어딘가에, 음, 뭐, 있다고 하기도 뭐하고 뭐라고 해야 하려나. 그러나 저러나 칸트새끼가 우리 노친네한테 진공 속 비둘기마냥 푸왁하고 사지고 대가리고 내장까지 죄다 터져 버릴 거라고 욕을 했던 게 생각나네. 하지만 그가 말했던 '공기의 저항'이란 걸 무시한 건 오히려 칸트 아닌가? 말하자면 문헌학적인 마찰이라든지, 아님 지금까지 싸지른 내 개소리에서 시사되는 여러 문제들이라든지, 그런 걸 제껴놓고 '플라톤 개객끼'라 하는 게 대기권을 뚫고 솟구쳐 오른 비둘기꼬라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짱 먹는 도로의 무법자는 역시나 헤겔이려나. 다 밀어 버려! 아니아니, 사실 진짜 스페이스 도브는 학부찌질이들이겠지. 씨발, 배우는데 시간도 노력도 안 들인 걸 발만 한 번 걸쳤다 빼고서는 지가 무슨 권위자라도 된듯 읽어 본 적도 없는 외국서적들을 씨부리고 라틴어가 어쩌니 고대 그리스어가 저쩌니 씨부려대며 주제넘게 배울 것과 배우지 않을 것을 취사선택하고 조언과 충고를 꼰대질로 치부하며 끝간 데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꼬락서니라니. 딱 보니 내 꼬라지 나서 다 망해 버릴 거다. 다 죽자.

-蟲-

  돈 없는데 학문이 하고 싶다면 우선 몇 가지 관문을 거쳐 보길 권한다. 우선 첫째로 당신이 한 달에 얼만큼의 시간을 투자해 얼만큼을 벌 수 있는지 계산해 봐라. 그리고 당신이 먹고 자고 쌀 공간을 실제로 찾아 봐라. 견적이 나오겠지. 그럼 다시, 얼마를 일해야 그 방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 봐라. 그리고 그 방을 구해라. 자, 이제 시작이다. 당신이 진짜로 '방'을 구했다면 거기엔 당신이 여태껏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컵도 접시도 없고, 화장지도 없고, 칫솔이나 비누도 물론 없거니와 인터넷도 없고 베개도 없지. 당신이 멍청하다면 먹고 자고 쌀 공간을 고시텔 따위로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건 당신이 경제관념이 없다는 뜻이니 앞 단계를 다시 되짚도록 하자. 당신이 찾아야 할 건 최소한 전세다. 아니면 월세를 잡고 더 많은 일을 해 더 자주 더 많은 돈을 계속해서 내다 버려야 하지만, 뭐 원한다면 말리진 않겠다. 어쨌든, 방을 잡아 당분간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보라. 그 와중에 당신은 뭔가를 먹어야 할 텐데, 비위가 괜찮다면 꾸준히 중고등학교 근처 분식점을 애용할 것을 추천한다. 싸고 많으니까. 음식이 싸고 많은 일반음식점을 안다면 그것도 괜찮지. 이런 걸 알아보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는 점은 유념하길 바란다. 자, 이게 당신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조건이고 제약이다. 하루 못해도 8시간은 일을 해야 할 거고, 거기에 이동시간으로 한 두 시간을 또 버리겠지. 잠은 일곱 시간을 채워 자겠는가? 소문으로 떠도는 그 11시부터 3시까지인가의 수면만 지킨다 하면, 보자, 밥은 안 짓는다 치고 그래도 빨래는 하고 청소도 뭐 거르자면 거를 수는 있는데 그렇다고 쓰레기를 무한정 모아둘 수는 없으니 그거 정리하는 시간이라도 들일 수밖에 없다. 이거 한 시간 정도 또 잡자. 때 되면 생필품 채워야 하니 장보는 시간도 생각하자. 연애나 교우관계는 잠시 접어두자. 왜냐하면, 남은 시간을 탈탈 털어서 당신은 '학자질'을 하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학자질이 뭔지 알 길은 없으나 어쨌든 당신은 읽고 생각해서 정리하고 써야 할 거다. 당신이 국문 논문을 한 편 읽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가? 연구서는? 학문분야에 따라서 발로 뛰며 조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고, 혹은 자료 찾느라 여기저기 헤맬 수도 있겠고, 실험실을 들락거려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당신이 학자로서의 양심이 있다면, 이미 제시되어 검토를 받고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는 외국의 학문적 성과들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뭐 한국에서만 다루는 그런 학문이 있다면 축하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당신의 다른 경쟁자들은 돈이 있고 시간이 있고 게다가 어느 정도 선별을 거쳐 자격을 갖춘 능력 있는 사람들이다. 어쨌든, 외국 논문 읽는데에 드는 시간은 얼마인가?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하는 데에 돈이 얼마나 드는지는 계산해 보았나? 학교에 소속되어 해당 도서관에서 계약한 경로를 통해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거기에는 등록금이 들지. 장학금을 받고 싶겠지만, 과연 앞서 말한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해 나아가는 와중에 당신이 다른 여유로운, 그러면서도 재능 있는 아이들과 다이다이 떠서 걔들을 씹어 넘기고 장학금을 겟챠>_< 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학부나 석사나 박사 과정 중에 있다면 당신은 들어야 할 강의도 이것저것 있을 것이고 들어가야 할 세미나도 몇 개 있겠지. 이것들 각각 부과되는 과제들도 있고. 앞서 말한 논문 읽기나 잡다한 '연구'와 직결되는 경우는 확실히 드물 거다. 어머나, 졸업논문도 써야 하겠네. 뭐, 열심히 해 보자.

  어찌어찌 평타는 쳐서 가까스로 도태당하지 않고 박사 후 연구과정생이나 혹은 강사가 되었다고 해 보자. 아, 한 가지 잊은 게 있는데, 혹시 당신이 그냥 혼자 가난한 게 아니라 집안이 거지인가? 그럼 당신 가족의 생계는 어찌하나? 뭐 부모님이고 형제자매고 쌩깔 수 있다면 그나마 당신은 축복받은 가난뱅이이겠지만, 아니라면 앞서 이야기한 기본 조건에 하나 더하자. 못해도 80 정도는 가져다 바쳐야 할 거다. 4대 보험 보장되는 직장에 박혀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가족들과 당신 자신 앞으로 걸린 보험들도 좀 신경써야 하겠지. 천운에 기대어 당신에게는 아무런 사건사고도 없으리라 믿으며 산다면 뭐 그것도 말릴 수는 없지만. 그런데 운전은 하고 다닐 건가? 돈을 더 잡고, 그 예산에 맞춰 시간을 더 쓰자. 글쎄, 당신이 언제 어떻게 공부를 할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어쨌든 당신이 이제 부여받은 과제를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게 된 듯하다. 정말 그럴까? 당신이 속한 학계에는 이러저러한 학회들과 소모임들이 있을 거다. 당신은 막내급이고, 아마 모든 잡일을 하거나 아무 일도 않고서 쫓겨나거나 할 수 있을 거다. 운좋게 다른 누군가가 총대를 맨다면, 그 운을 쓴 덕분으로 당신에게는 강의자리가 오지 않겠지.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이제 신나게 아해들에게 과제를 내고 애들을 괴롭혀 보자. 그러려면 교재를 정하고, 강의계획을 짜고, 애들에게서 과제물을 받아서 채점을 하고, 그걸로 돈을 벌게 될 거다. 물론 당신이 박사 논문 주제로 잡았던 것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강의일 거다. 그래서 여기에 들이는 시간은 앞서 8시간 일하는 것과 퉁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강의를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음,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살 수 없다.' 뭐 어쨌든 당신이 아직도 여전히 가난한 걸로 봐서 당신은 그리 재능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의 고유한 학문노정에 투자할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연습을 통해 실력이 늘면 속도가 붙겠는데, 연습에도 시간이 드니까 당신은 그냥 계속 느린데다 부지런할 수도 없는 망조 들린 거북이 신세이다. 거북인데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았어. 허리에는 타이어를 매고 말이지. 당신은 고급 스판 빤스를 입고 맞춤 운동화를 신은 터질듯한 허벅지의 근육질 토끼들과 경쟁해야 한다. 뒤쳐질 때마다 당신이 벌 수 있는 돈은 줄고, 당신이 접근할 수 있는 자료들도 줄고, 당신이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만이라도 투자해야 할 시간은 계속 늘어만 간다. 당신은 '학문'으로 경쟁해야 하는데 말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 와중에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들어가는 평균비용이 얼마인지 검색해 보자. 일종의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질식사할 경우 막판에 사정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비약이고 과장이라며 도리질을 치는 당신이 상상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 와중에도 학자로서 학자다운 양심을 지켜가며 기어이 버티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실제로 있다. 당신이 역사 속 위인들이나 세계의 유명인들을 보며 허황된 꿈을 꾸는 사이에 이 땅에서 학문 목줄이 잘려 나가지 않도록 바닥을 벅벅 기며 악착같이 들러붙은, 당신의 진짜 구원자들 말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당신이 이런 헛된 꿈을 꾸지도 못했을 테니, 어찌 보면 철천지 원수일 수도 있겠지만, 하하. 자, 불가능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다. 가능한 게 아니라 이미 실현되어 있는 삶이다. 가난하 당신이 학자이길 원하고 학문을 하고자 바란다면 가야할 길이다. 정치에, 사회에, 경제에 참여하고 싶다면, 혹은 여러 학문분과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통찰을 하길 희망한다면, 당신은 이 와중에 당신 전공과 무관해 보이는 온갖 학문들에도 접근해야 할 거다. 실무적인 일들에도 부딪치겠지. 당신은 돈 벌어서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 쫄깃쫄깃한 긴장감을 당신이 학문을 그만두게 되는 그 순간까지 지속해야 한다. 계속 뒷덜미에 날붙이 끄트머리가 콕콕 찔러대는 기분을 느끼면서, 멀다 못해 아득할 정도로 앞서 나아가는 사람들의 잘 보이지도 않는 똥구녕이나 군침을 흘리며 바라보면서, 그러는 당신을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뒤에서 앞으로 제치고 나서는 후발주자들에게 닿지도 않을 저주나 퍼부으면서. 

  난 어쩌고 살고 있냐고? 이래저래 빌어먹고 산다. 한때 '독립이니 자주니 공허한 구호들을(UMC 가산데?)' 떠들며 저 앞서 지껄인 지랄을 몸소 체험해 보기도 했지만(검정고시 때부터 학부시절 앞머리 때까지 정도의 얘기다), 지금은 그냥 그보다 좀 못한 돈 집에 가져다 바치고 부모님 곁에서 얌전히 빌붙어 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을 벌고, 그 시간을 갖고 이것저것 읽거나 쓰거나 가끔 이렇게 개소리 지껄이며 노닥거리기도 한다. 전공 덕분에 유뉘쿠하고도 럭쪄리한 과외자리가 종종 생겨 그걸로 잠깐 돈 좀 모으고, 이래저래 장학금 주워다 받고, 틈나는대로 주말알바나 야간알바 뛰어 가면서 근근하게 살아간다. 그래야 할 정도밖에 못 되는 재능이고, 그나마 그 정도는 되는 집구석이라(빚 물려준 것 없고, 집이 있고! 나는 차남이지롱.) 나는 몇 차례 졸업논문 계획만 갖고도 퇴짜를 맞고 그냥저냥 그래도 공부란 걸 붙잡고 버티고 있지. 뭐 나도 앞으로 어찌 될지 장담은 못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뭘 어째야 하고 그게 얼마나 힘들지에 대해 자신을 속일 생각도 없고 딱히 엄살을 피울 생각도 없다. 그냥 내 발목에 걸린 족쇄와 등에 걸린 짐만큼 욕심을 버리고 꿈을 버리고 그러면서 놓을 것 최대한 놓아 가며 내가 붙잡고 싶은 걸 붙들고 안 놓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따름이다. 

  가난하다고 하여 왜 학문을 모르고 진리를 모르겠는가? 근데 씨발 개뿔도 모르고 좆도 아니면서 겉멋만 잔뜩 들어 지랄병해대며 여기저기 시비질 붙지 말고, 할 거면 닥치고 해라. 그리고 하다가 나가 떨어지든 어떻게든 들러붙어 버티고 섰든 이후의 일은 몸으로 보여라. '돈 없는 새끼가 학문이니 예술이니 씨부리지 말아라'라는 말에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고 당신의 사랑해 마지않는 진리가 모욕을 받은 듯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겠는가? 당신이 도대체 학문에 뭘 어떻게 해 주었는가 그거나 먼저 생각해 봐라. 당신이 그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당신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훨씬 더 반짝반짝 빛날 사람들 자리 대신 차지하고 쳐자빠져서는 뭔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봐서 당신이 얼마나 구역질나게 비루한지 좀 반성해 봐라. 그래, 괜찮다. 그 따위 당신이라도(그 따위 나라도 역시) 학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선택한 만큼의 책임감을 갖고 책임을 좀 져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돈 없다며? 아니, 정말로 정말로 돈이 없다면 내가 앞서 말한 저 처지에 쳐박혀 있을 테니, 딱히 '거지새끼 학문지랄 하지마'란 얘기가 뭔 뜻인지 모를 처지도 아닐 것이다. 누군가 밥과 반찬을 해주고 설겆이를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분리수거를 해주고, 관리비를 대신 내든 정화조 관리비 전기세 가스비 수돗세를 내든 뭔가 해주고, 니 새끼 의료보험비를 내주고 화장지를 대주고 넌 가끔 애새끼들과 어울려 술이나 쳐먹고 인터넷에서 깔짝깔짝 영화나 보고 음악이나 듣다가 좆나 고뇌에 찬 표정으로 씨팔 인생은 뭐고 예술은 뭐고 학문은 뭐냐고 정신적으로 자위질에 몰두하다가 '아 나 좆나 지식인스러워'하고 황홀경에 빠져 찍 싸대기나 하겠지. 이런, 화내서 미안. 진짜 돈 없으면 좆나게 쥐어짜서 겨우겨우 만들어낸 하루 대여섯 시간에 일생을 걸고 읽고 쓰고 골머리를 싸매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것뿐, 아무도 하지 말라고 할 입장은 못 된다. 아니, 하지 말라는 사람을 만나거들랑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도록 해라. 세상에 그렇게나 너를 아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물론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과 연민과 우월의식과 조롱과 야유이겠지만, 원래 그런 거 받아먹고 사는 거다, 나와 당신 같은 개뿔도 없는 새끼들은 말이다. 아, 다 필요없고 중심과 끝들의 변증법이다, 그지깽깽이들아.(...논문이 안 써져서 지랄하는 거 맞다.)

-蟲-

P.S. 아, 미안, 이 얘기를 빠뜨렸어. 빚은 은행에 지는 거다. 사채 생각이 들거들랑 그냥 자살해. 그리고 우리에겐 개인파산과 개인회생이라는 행복한 도피처가 있지. 학문할 거니까 금융권에서 고자되는 건 괜찮다고 봐, 낄낄.

P.S. 여기에 제격인 노래 하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입금하라'. 특히 이 가사가 쫭이지. '적어도 나는 정의로웠다, 너에게는 별 의미 없겠지만~'

『소피스테스』는 철학자, 정치가, 소피스테스가 서로 다른 것들인지 같은 것의 다른 이름들인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대화의 주도자인 엘레아의 손님에 의해 그 셋은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각각이 그 자체로 무엇이며 여타의 것들과 어떤 식으로 다른지를 그가 규명하는 쪽으로 논의가 전개된다. 그는 우선 소피스테스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 정의를 내리는 것을 목표로 하여 탐구를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소피스테스라는 부류가 소피스테스의 기술(techne)이라는 하나의 기술만으로 상술과 사냥술, 교육술을 비롯한 온갖 기술들을 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 문제로 제시된다. 더욱이 여러 기술들인 것으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이 소피스테스술(sophistike)만으로 모든 것을 논박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이를 다른 이에게 가르칠 수도 있다고까지 주장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님은 고유한 하나의 기술로서 다른 여러 기술들로도 여겨질 수 있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그러한 기술을 일종의 모방술로 판단한다. 그러나 모방의 결과물인 모상은 원본이 아닌 것, 참이 아닌 거짓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가리킨다는 것은 모두 참으로 어떤 무엇인 바의 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란 수도 이름도 거기에 덧붙을 수 없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따르자면 오직 있는/~인 것(to on)뿐이며 있지/~이지 않은 것(to me on)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이 둘은 뒤섞지 않아야 한다. 모상은 그것이 모방하는 그 원본이지 않다. 그 원본이 참이라면 모상은 거짓이다. 그러나 모상은 모상인 것으로서 참으로 모상이기도 하다. 즉 모상은 to on to me on을 뒤섞은 것이다.

또한 소피스테스는 이러한 모상을 통해 실제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에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고 그들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준다. 그러나 거짓이란 사실, to on을 말하거나 믿지 않고 to me on을 말하는 것, to me on to on이라고 또는 to on to me on이라고 말하거나 믿는 것이다. 그러나 to me on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이것을 to on과 섞을 수도 없으므로, 이러한 거짓 역시 불가능하다.

더불어 상대가 거짓을 말하거나 믿는다고 논박하려는 자는 그 자신도 to me on을 언급해야 하지만, 이번에도 to me on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거짓을 고하는 자뿐만 아니라 이 사람을 논박하려는 사람 역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모상과 거짓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to me on to on과 섞일 수 있는 방식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손님은 to on의 반대로서 전적으로 불가능한 to medamos on을 잠시 미루어 두고 to on에 대해 탐구함으로써 또 다른 to me on이 가능한지 고찰한다. 이 과정에서 to on to me on 못지 않게 여러 어려움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모든 것 각각이 전부 to on이므로 to on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을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차가움과 뜨거움이 있는/~인 것들이라면, 이것들은 to on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to on 자체와 이것들이 다르다면, 더 이상 있는/~인 것이 아니게 되므로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또한 오직 to on뿐이라면, 그것은 오직 그 하나일 것이나 하나라는 것도 to on뿐인 경우에서는 to on과 구분될 수 없다. to on을 하나라고 말하는 일조차 이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 to on이 참이며 앎의 대상인 한에서 변하지 않고 멈추어 있는 것이라는 주장과 오직 움직이고 작용을 주고 받는 능력을 갖춘 것만이 to on이라는 주장이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to on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to on이 인식됨으로써 인식된 것으로 변하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반대로 to on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한다면 그것은 가리킬 수도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는 바로 그 순간 곧장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to on은 다른 것들과 결합하면서도 또한 분리되기도 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To on과 그 이외의 것들 사이에서 결합과 분리의 관계를 알지 못하다면 to on to me on 양쪽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철학은 물론 말도 생각도 모두 잃어 버리게 된다. 이러한 결합과 분리에 대한 앎을 변증술(dialetike)이라 한다. 손님은 변증술을 통하여 운동과 정지는 to on에 참여함으로써 to on인 것이 되지만 여전히 to on은 그 외의 두 가지 것들과 다른 것이자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라는 점을 밝혀낸다. 자신과 같고 그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은 정지와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같음, 그리고 다름이, 운동과 정지가 to on에 참여하듯 그런 식으로 이 세 가지 것들의 참여 대상이 된다는 점이 드러난다. 특히 다름에 참여함으로써 각각의 것들은 여타의 것들과 다른 것이 되고 여타의 것들이지 않은 것, to me on이 된다. 즉 다르다는 의미에서의 to me on to on인 각각의 모든 것들 서로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to me on은 진술이나 믿음에 섞임으로써 거짓 진술이나 거짓 믿음을 만든다. 진술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혹은 명사, onoma)과 그 행위를 가리키는 말(혹은 동사, rema)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에 관하여 그 결합된 말이 그 대상과 다른 것을 가리킬 때 진술은 거짓이 된다. 이러한 말이 영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대로 이루어질 때 생각이며 그 생각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이 믿음이므로, 이것들의 경우에도 같은 설명이 적용된다.

이제 모상은 원본 자체와는 다른 것이지만 원본에 대하여 그것을 닮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모상 중 말로 된 모상이 원본에 대해 원본과 다른 것을 말할 경우, 말로 된 거짓 모상, 즉 거짓말이 생겨난다. 소피스테스는 이러한 거짓말로 사람들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기만적인 모방자로 규정된다.

간략히 정리한 이 대화편의 내용은 그 안에 여러 난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to on to me on의 의미와 변증술의 구체적인 내용, 그리고 진술에 대한 변증술의 관계 등은 그 자체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불일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다루고 있는 문제들에 관련된 다른 대화편들을 참고하는 일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주제적인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to on to me on에 관련하여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의 철학자인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가 남긴 단편 역시 해석에 도움을 줄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모상과 거짓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다시 변증술이 필요하다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플라톤이 이러한 대화의 배경을 설정하여 그 안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실제로 어떤 문제의식 아래에서 제기된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증술이라는 바로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지 파악되지 않는다면 역으로 이 대화편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어려울 것이다. 이 대화편이 어떤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된 것인지 가늠해 보는 일은 다시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핵심적인 문제들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불가피한 관문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소피스테스』라는 대화편을 『파르메니데스』라는 또 다른 대화편에 대한 일종의 응답으로서 간주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문제가 플라톤의 대표적인 이론으로 간주되는 소위 이데아론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른 한편, 이 문제가 어떤 이유에서 소피스테스를 정의한다는 배경 속에서 논의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또 다른 대화편 『에우튀데모스』를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에 앞서, 플라톤과 소피스테스 모두에게 특정 방식으로 수용된 파르메니데스 그 자신의 이론에 대해 간단히 고찰함으로써, 전체적으로 to on to me on의 문제가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심화, 발전되어 나아가는지에 대한 윤곽을 그려 보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대화편 내에서 변증술이 문제시되는 부분에 이르기까지 논의의 맥락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는 일 역시 필요하다. 『소피스테스』는 거듭 새로운 문제가 부각되면서 점차 내용이 심화되어 가면서 논의의 주제가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 대화편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단계별로 제기되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그 문제들이 서로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내용상의 불일치나 각 문제 자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난점이 구체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들 상호의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도 어떤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는 사유를 위한 탐구의 오직 두 길만이 있다고 선언하며 그 두 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편의 길은 어떤 식으로든 있으며/~이며 또한 있지/~이지 않을 수 없다는 길이고, 다른 편의 길은 있지/~이지 않으며 또한 있지/~이지 않아야만 한다는 길이다. 후자의 길은 배움이 전무한 길인 바, 있지/~이지 않음은 생각할 수도 언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DK28 B2). 그가 말하는 두 길로서 영어 Be 동사에 해당하는 'esti'와 그 부정인 'ouk esti,' 그리고 이 동사의 부정사(einai/me-), 실체화하는 관사를 동반한 분사(to on/-me-) 등이 활용되어 파르메니데스의 시 곳곳에서 논의의 핵심주제어로 거듭 등장한다. 

'Esti'가 존재를 의미하든 계사를 의미하든 혹은 그 두 의미를 포함하거나 혼용하든 중요한 것은 오직 to on뿐이며 to me on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to on이지 않은 그 무엇도 없으며 to me on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유에 기여하는 탐구의 두 길은 따르도록 강제하는 진리의 길과 진입을 불허하는 금지된 길로 이루어지며,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한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다/있다,' 이것뿐이다. 모든 것이 '있다'거나 혹은 어떤 무엇'이다'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to on 이외의 것은 모든 것 이외의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므로 to on과 구분되는 어떤 것도 말하거나 생각할 수조차 없다. To on to on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며 연속적이고 이것을 나눌 제 2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는/~인 것은 시작도 끝도 없이 그 외부라 할 것이 전혀 아무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확고한 한계 내에, 즉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멈추어 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변화하지 않으며 어느 방향으로도 차이가 나지 않고 하나이자 전체로서 그 자신일 따름이다. 

사유의 두 길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추론은 일견 형식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데 그 추론의 방식은 분석적 혹은 연역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타당성은 전제가 참인 경우에 한하여 결론의 참을 필연적으로 보장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 전후로 고대 그리스 자연학자들(physikoi)이 내놓은 세계에 대한 여러 주장들은 모두 그러한 확실성을 보장받지 못하였다. 하나의 물질이 희박과 농축의 원리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한다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한 것들이 결합하거나 분리되며 우리에게 감각된다거나 하는 입장들은 모두 변화와 운동을 받아들인 것이며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궁극적으로 변치 않는 확고한 판단의 대상과 같은 것을 가질 수는 없었다. 물도, 공기도, 씨앗이나 원소 혹은 원자도 시간과 장소를 비롯한 여러 상태의 변화를 겪는 한에서 파르메니데스의 to on에 비하자면 한참이나 불안정한 것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경험과 상식에 비추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인 그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이 진지한 탐구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을 따른다면 일상적인 경험세계가 전면적으로 부정되어 버린다. '이것'과 이것이지 않은 '저것'조차 구분하여 가리킬 수 없고 그것들을 지시하는 서로 다른 이름들을 가질 수도 없다. 모든 것은 바로 그것 자체'인 것'이면서 동시에 여타의 것들'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이러한 '~' '~이지 않음'의 결합을 가사자들, 필멸자들의 혼동된 사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파르메니데스 스스로 하나라느니 전체라느니 정지니 연속이니 하는 to on과는 다른 어떤 술어들을 to on에 덧붙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결론은 다시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있다. 오직 to on뿐이며 to me on은 불가능하다. 

 


이데아론()의 문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감각되는 세계 속에서 그것들이 정말로 지속적인 변화의 와중에만 있으며 어떤 식으로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그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 무언가를 가리키는 그 바로 순간에도 가리켜진 그것은 변화하여 방금 가리킨 것과는 다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경험하는 것들을 가리키거나 말하거나 세계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린다. 변화의 와중에서도 어떤 것을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고 지시하고 서술하며 사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험에 기초한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같은 바람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동시에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춥게 느껴질 수 있다. 혹은 신들에게 사랑받는 일이 경건한 일이라면, 신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하므로, 어떤 하나의 일이 경건한 동시에 경건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단 것과 쓴 것을 가르는 기준에서부터 경건이나 정의와 같은 가치판단의 기준에 이르기까지, 어떤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본이 없이는 변하지 않는 확고한 판단, 앎이란 불가능하다. 그러한 본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심지어는 모순되게 보이는 여러 사물이나 사태가 그러한 본에 관련될 때, 비로소 앎이 가능하고 판단에 대한 평가가 가능해진다. 이는 단순히 인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돌은 구를 수도 있지만 어딘가에 박힐 수도 있다. 그것은 운동하기도 하지만 정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운동과 정지는 서로 모순이다. 혹은 꽃다발을 생각해 보라. 꽃다발은 여러 송이의 꽃들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하나'의 꽃다발이다. 그 하나의 꽃다발은 '하나'의 꽃다발이면서 동시에 '여러' 송이의 꽃''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빠른 말투를 가지면서 몸놀림이 느릴 것이다. 그는 어린이였으나 지금은 어른일 것이다. 그는 두 팔과 두 다리로 이루어진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모순되는 것들이 어떻게 동일한 것 안에 함께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데아론은 하나의 설명을 제시해준다. 그 자체로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서 고정불변하며 영원한 것, 그러한 것이 있고 그것의 이름으로 서술되는 여러 개별적인 것들은 바로 이것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돌이 구를 수 있는 것, 즉 움직이는 것인 까닭은 그것이 운동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은 또한 정지의 이데아에도 참여하며, 그러나 운동과 정지 각각은 그 자체로 서로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부분적으로는 운동에, 또 부분적으로는 정지에 참여함으로써 돌은 움직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형상에 참여함으로써 한 명의 사람이지만 또한 여럿(다수)의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두 팔과 두 다리를 지니며 과거의 나이자 현재의 나이며 미래의 나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파르메니데스의 to on과 유사하다. 여러 다양성과 변화는 이데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데아들에 의존하는 개별물에 속하는 것이다. 이데아는 각기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일 따름이며 여타의 것들로부터 독립적이다. 변화와 생멸로부터 구분된 이데아는 철저히 자기동일성을 유지함으로써 그것에 참여하는 개별물들이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 중에서도 어떤 무엇으로 지시되고 사유되며 서술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준다. 또한 이러한 한에서 궁극적이고 확실한 앎의 대상은 바로 이데아이다. 이데아에 대해 앎을 가지게 된다면 이 앎은 이데아에 대한 것인 한에서 불변하고 확고한 진리에 대한 인식으로 유지된다. 이데아가 관점이나 상황 등 여타의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일이 없고 새로 생겨나거나 혹은 사라지지도 않기에, 이에 대한 인식 또한 영원한 것이 된다. 반면에 이러한 이데아에 참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영구불변한 앎을 지닐 수 없고 단지 이러저러하게 보이거나 여겨진다는 믿음만을 가질 수 있다. 개별 사물들에 대해서 가능한 일은 그것들이 어떠한 이데아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이데아에 대한 앎을 근거와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한계가 있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이데아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이다. 예를 들어 운동의 이데아를 생각해 보자. 운동의 이데아는 운동 이외에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것일 터이다. 그러나 정지함이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면 그것은 지시도 사유도 서술도 언표도 불가능하다. 가리키는 순간 다른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동의 이데아는 운동이며 운동이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운동이란 것으로서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으며 그런 식으로 정지해 있다. 또한 운동의 이데아는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어야 하며 그 외의 것들과 다른 것이기도 해야 한다. 어쨌든 운동은 정지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운동이 운동이기만 하다면, 같음의 이데아가 따로 있고, 또한 다름의 이데아가 따로 있으며 이 이데아들이 모두 분리되어 각기 독립적이기만 하다면, 운동의 이데아가 자신과 '같다'거나 그 외의 것들과 '다르다'거나 하는 사태는 불가능할 것이다. 운동이란 이데아는 한 개의 이데아일 테니 '하나'라는 이데아에도 의존해야 한다. 이데아가 모두 그 자체로 독립적이라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데아와 개별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인간의 이데아를 생각해 보자.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바로 이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데아는 인간인가?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과는 다르고 인간이지 않은 무언가에 참여함으로써 그것에 참여한 것들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데아론에 따르면 개별 인간들을 인간이게끔 해주는 본이 인간의 이데아이고, 개별 인간들은 그 이데아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데아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데아가 '인간이다'라는 것은 그것이 개별적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판단된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이데아를 인간이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인간의 이데아와 개별 인간들을 모두 인간이도록 해주는 또 다른 제 3의 인간이데아 같은 것을 상정한다면, 이는 무한히 소급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인간들과 인간의 이데아, 그리고 양쪽 모두를 인간이도록 해주는 제 3의 인간은 마찬가지로 모두 다 '인간이다'라고 판단될 것이며, 이 세 부류를 모두 인간이도록 하는 제 4의 인간이데아가 필요할 것이며, 이러한 과정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아론이 마주하게 되는 이러한 문제들에 논리적 순차를 부여할 수 있다. , 이데아들 사이의 관계가 형상과 개별물들 사이의 관계보다 우선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개별적인 것들은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정체성을 부여받게 되고, 그렇기에 이데아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위 ' 3 인간 논변'의 요지는 인간의 이데아가 인간이라는 술어를 가지게 되는, 이데아의 자기술어화 방식을 묻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 역시 이데아들이 성립하는 방식에 대한 첫 번째 물음에 포함될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테스

 

플라톤에 따르면 그 자신만이 아니라 소피스테스들도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을 그나름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두 수용의 방식은 상이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화편 『에우튀데모스』에서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는 어떤 무엇은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어야만 하며 다른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는 입장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당혹시킨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아는 자이며 아는 자는 모르는 자가 아니므로 결코 모를 수 없다는 주장이 그들에 의해 제기된다. 이에 따라 어떤 것을 아는 자는 단적으로 모든 것을 알 뿐 전혀 아무것도 모르지 않게 된다.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워 이전과 다르게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는 일은 그 사람이 더 이상 바로 그 사람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므로 그가 존재하지 않기를, 즉 죽기를 바라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일단 어떤 무엇이거나 그러한 것으로 있는(to on ti) 것은 결코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이는 분명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에서 엿볼 수 있는 동일하고 고정된 판단의 강조와 한 종류의 것이다.

이러한 활용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두 사람은 더 진전된 재반론을 시도한다.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비판하자, 그들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거짓이란 사실(to on)이 아닌 것(to me on)을 진술하거나 믿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나 생각은 반드시 어떤 무엇인가(to on ti)에 대한 말이나 생각이어야만 한다. 즉 아무 것도 말하지 않거나(to me on legein) 사실(to on)을 말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이는 다시 반박 불가능성의 논변으로 이어진다. 디오뉘소도로스에 따르면 어떤 하나의 것에 대해 두 사람이 서로 달리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A란 것에 대해 서로 달리 말하고 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한 사람은 A인 것(to on A)를 말하고 있을 것이며 다른 한 사람은 그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한에서 A이지 않은 것(to me on A)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거나, 아니면 한 사람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으나 다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하나의 것이 같은 동시에 또한 다르기도 하기란 불가능하며, 같은 것을 말하는 한에서 서로 다른 말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같은 것에 대해 한 사람은 맞고 한 사람은 틀려서 맞은 자가 틀린 자를 반박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to on은 단지 to on일 뿐이며 다른 무엇, to me on일 수는 없다는 전제는 상대의 주장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그 주장을 논박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동일성 명제뿐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엄격한 진리의 기준이 소피스테스들에 의해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주장이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데에 활용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논박에 저항하는 자들의 논리 또한 같은 방식으로 부정당한다. 애초에 거짓이란 불가능하며, 거짓을 주장하는 자와 참을 주장하는 자가 같은 문제를 두고 서로 논박하는 일조차 또한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의 맥락

 

플라톤의 대화편 『소피스테스』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논의한다. 특히나 이 대화편에서는 모든 것, 이데아와 개별 사물들을 아우르는 말 그대로의 모든 것이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형상(eidos)들을 중심으로 그 상호관계가 탐구된다. 능동이나 수동의 작용에 전제되는 운동(움직임, kinesis), 지시나 언표 및 진술과 사유뿐만 아니라 자기동일성을 위해서도 전제되어야만 하는 정지(멈춤, stasis), 그 자체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같음, tauton), 자신 이외의 것들에 대한 타자성(다름, thateron)에 더하여 존재(있음) 혹은 어떠한 무엇임(~, to on)이 서로에 참여함으로써(metechein) 공유(koinonia)를 통해 변화하고 상호에 적용되거나 적용바든 과정이 묘사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들 혹은 유(, genos)들 사이의 관계는 그것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타의 모든 형상들과 만물에 대해서도 성립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형상들의 함께-엮임(symploke)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그것이 직면한 한계와 더불어 이해하기 위해 고찰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은 유들의 공유(koinonia) 혹은 형상들의 결합(symploke)을 곧장 다루지 않고 배경이 되는 탐구과정 속에 이 작업을 포함시킨다. 주 대화자인 엘레아 출신의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철학자와 정치가 그리고 소피스테스 사이에 발생하는 혼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그 과정에서 위의 탐구를 수행하게 된다. 손님에 의해 고찰되는 소피스테스는 상인으로 보이는가 하면 사냥꾼으로도 보이고 또한 영혼을 정화하는 교육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상인, 사냥꾼, 교육자는 각기 고유하고 서로 다른 기술자들이다. 교육술은 사냥술과도 상술과도 다르며 나머지 두 기술 각각도 마찬가지로 다른 두 기술들과 다르다. 소피스테스가 소피스테스술이라는 하나의 기술로부터 연유한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여러 기술들, 앎들을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는 이것이 문제가 된다. 그는 말로써 이러한 일들을 해내며 특히 모든 기술들에 대해 반박하고 가르치는 일이 가능하다고 자부한다. 더욱이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따른다. 그러나 한 부류의 인간이 단 하나의 기술로 모든 기술과 앎을 지니기란 불가능하다.

이 대화편에서 그가 행하는 논박은 앞서 『에우튀데모스』에서 드러난 그러한 방식의 논박이다. 손님에 의하면 그는 전적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것이지 않은 것(to me on ti)으로서 모상과 같은 것을 말하거나 참이지 않은 거짓을 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말이나 생각은 to me on이 아니라 to on에 대한 것이라는 점은 두 대화편에서 공통되게 등장하는 논점이기도 하다. 그 논박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일종의 모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방이란 그 원본~인 것이 아니라 원본~이지 않은 것, 참으로 원본 자체가 아니라 원본에 대해 거짓인 것이다. 나아가 거짓이란 ~인 것을 ~이지 않다고 혹은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믿거나 진술하는 것이므로, 소피스테스의 기술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이지 않은 것을 논해야 한다. 그러나 ~이지 않은 것에는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없고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그것을 가리킬 수조차 없다. '너는 모상을 만들고 거짓을 말한다'라고 논박하려는 자는 스스로 모상이나 거짓을, 그 안에 든 ~이지 않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지 않음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믿더라도 그 ~이지 않음을 '그것'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으므로, ~이지 않음을 논박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는 스스로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며 원본의 비율과 맞지 않는 허상을 모방해내 사람들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유이다. 그런데 모방된 모상, 허상이란 무엇인가? 거울이나 수면에 비친 '사람'은 참으로 사람인 것은 아니고 사람이지 않다. 참이 아니므로 거짓이고 ~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떤 무엇이다. 참이 아니고 참으로 그 무엇이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어떤 무엇이라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이지 않음은 진술, 언표, 사유, 지시 모두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그것에 ~인 무엇도 적용될 수 없고 그것이 ~인 무엇에 적용될 수도 없다. 그러나 모상과 허상은 ~이면서 ~이지 않고, 거짓 또한 ~인 것은 ~이지 않다고 혹은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진술하거나 믿는 것이다. ~이지 않음은 결합될 수도 결합할 수도 없음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임의 경우는 어떠한가? 두 길 중 남은 길은 ~임뿐이다. ~임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마지막 가능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이지 않음이 가능하다면 ~임 안에서의 ~이지 않음을 논할 수 있고 이로부터 모상과 거짓에 대한 설명 가능성, 나아가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선 ~임을 수와 결합시키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라고 하거나 여럿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하나와 ~임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임이 하나다'라는 진술이 불가능하고, ~임 자체도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과 그것 자체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반면 ~임을 여럿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 여러 가지 것들과 ~임의 관계가 문제시된다. 뜨거움과 차가움은 모두 ~인 것들이다. 그러나 뜨거움은 차가움이지 않고 그 역도 성립한다. 더욱이 그것들이 ~임과 같다면 더 이상 ~임은 여럿이 아니라 ~임 하나뿐이다. ~임은 하나일 수도 여럿일 수도 없다. ~임 자체가 아닌 모든 것이 ~이지 않은 것으로서 아무것도 아니라면 오직 ~임뿐이다. 그러나 ~임을 포함해 둘 이상의 것들을 말하는 순간 ~임 자체와 구분되는 그와 다른 어떤 것, ~이지 않은 무언가가 ~이어야만 한다. 

~임이 움직이느냐 멈추어 있느냐에 대해서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그것이지 않은 것이 된다. 어떤 것이 움직이고 변화한다면 그것을 그것이라고 말하고 믿는 일의 참이 보장되지 않는다. 반면에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작용도 받지 않을 것이며, 인식작용 또한 받지 않을 것이다. 이를 확장시킨다면 그것은 지시'받거나' 할 수도 없을 터이니 이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자면, 운동도 정지도 모두 각기 ~인 것이어야 하며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으므로, 이런 식으로도 ~임은 운동이기도 하고 정지이기도 하여야만 한다. ~임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들이 ~이기도 하고 ~이지 않기도 해야 하므로, 그리고 ~임 자체도 그 자체이기만 하여서는 안 되고 운동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며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하여야만 하므로, 이러한 일들이 가능해지는 방식이 문제가 된다. 이 방식이 곧 유들의 결합방식이고 이를 알아보는 것이 변증의 기술이다.

존재가 운동이라는 것은 존재와 운동이 동일하다는 것과 의미가 다르다. 역으로, 운동은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운동이다' 혹은 '운동이 존재한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든다. 이 결합이 불가능하다면 운동은 비존재, ~이지 않은 것이 되고 그것은 진술, 사유, 언표, 지시 모두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운동이 존재와 동일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운동이 존재한다,' '운동이 존재이다'라는 문장은 여전히 참이다. 이제 문제가 발생한다. 존재가 운동에 적용되는 경우와 운동이 존재에 적용되는 경우, 다시 말해 운동이 존재에 참여하는 경우와 존재가 운동에 참여하는 경우 그 결과는 서로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의 기준이 불분명하다. 더 나아가 각 경우에서 동일성을 의미하는 '~이다'가 배제되는 과정 역시 드러나지 않는다.

각각의 모든 것은 자기 자신과 같고 여타의 것들과 다르다. 같음과 다름이라는 이 두 유들은 모든 것과 결합한다. 그런데 운동이 존재와 다르다는 것은 운동이 존재이지 않다는 것, 운동이 ~이지/있지 않다는 것을 함의한다. 다름은 파르메니데스적 to me on의 대체물로서 그 의미는 유들의 결합에 한하여 볼 때 비동일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존재에서 부정을 제거하면 남는 것, 부정의 대상인 존재 혹은 ~임은 동일성을 의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일성의 확보는 같음이라는 유와 결합함으로써 가능하다.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한다. ~임과 같음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또한 ~이지 않음과 다름은 구분되는가 아니면 같은 것의 다른 두 이름들인가?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은 모든 유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최소한 모든 각각의 것은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과 구분되어야 한다. , 대상과 이름은 서로 다른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것이 하나다'라는 주장이 논파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언표할 수도 진술할 수도 없거나 아니면 이름만 남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손님은 소피스테스가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여전히 어떤 것들은 서로 섞이고 어떤 것들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믿음과 진술에는 ~이지 않음이 섞이지 않는다고 반박하리라 예상한다. 진술이 운동이나 정지와 다른 한, 믿음이 영혼이나 하나와 다른 한에서, 진술과 믿음이 ~이지 않음과 결합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 구절을 적용해 보더라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은 마치 큼과 크지 않음의 예를 통해 묘사된다. 크지 않음은 큼의 반대인 작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크기임까지 포함한다. 이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니, 받아들인다면 더욱 더 소피스테스의 재반박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진술은 진술 자체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지 않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국 진술의 전체에 걸쳐 ~이지 않음이 필수적이라고 하더라도, 거짓 진술을 성립시키는 ~이지 않음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진술은 거짓 진술이다. 그 이유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테아이테토스 ~이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참인 진술이다. 그 이유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테아이테토스가 서 있다'라는 진술은 어떠한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앉아 있다는 것이 존재, ~임을 말하고 있다면 '서 있다'는 것은 '앉아 있다'와 다르므로 이 역시 거짓이 될 것이다. 이 경우의 거짓은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와 같은 종류의 거짓인가? 더 나아가, '테아이테토스는 사람이다'라는 진술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람' '앉아 있다'와 서로 다르다. 이 진술은 그리하여 거짓이 되는가?

'테아이테토스' '앉아 있다'도 엄밀히 말하자면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은 그 자체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진술은 이름과 동사로 구성된다. 이름은 사물을, 동사는 사태는 가리킨다. 진술의 구성요소가 가리키는 것은 전부 어떤 무엇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지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술이 왜 ~이지 않음과 섞이지 않으리라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임과 다른 한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외의 무엇과든 다른 한에서 모든 것은 ~이지 않음에 참여하지만, 그럼에도 진술이나 믿음이 가리키는 것은 지시 대상 자체이지 그 대상과 다른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 또한 아니다. Ta men ta de를 대상이 아닌 상황으로, 관점의 목적격으로 부사적으로 번역한다면 진술과 믿음은 ~이지 않음과 결합하지 않는 경우에 속할 수 있다. 이것들은 이것들 자체가 아닌 여타의 무언가에 관한 것, 그것에 의존적인 것이다. To medamos on은 대상화될 수도 없을 뿐더러 이를 대상으로 삼는 진술이나 믿음 역시 불가능하다. 이름이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과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경우는 없고 동사 역시 그것이 가리키는 행위와 다른 행위를 가리킬 수는 없다. 이 결합 없이는 진술이 불가능하다. 『에우튀데모스』에서 논의하는 그러한 종류의 거짓 진술이나 거짓 믿음은 배제된다. 그렇다면 유들의 결합에서 비동일성을 의미하던 ~이지 않음이 어떻게 진술에서는 부정적 진술을 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하는가? 


문제들

 

나눔과 모음

소피스테스는 사냥꾼이자 장사꾼이면서 쟁론가이면서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 하나의 기술로 동시에 여러 서로 다른 고유한 기술들인 그러한 기술은 불가능하다. 또한 단 하나의 기술을 지니고서 그 기술로서 다른 모든 기술들을 수행해내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라는 하나의 기술이 어떻게 여러 다른 모습들로 드러나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소피스테스 기술에 고유한 문제가 아니다. 낚시꾼도 땅꾼도 모두 사냥꾼이다. 그러나 낚시꾼과 땅꾼은 서로 다르다. 소매상도 무역상도 자가판매상도 모두 상인이다. 그러나 소매상과 무역상과 자가판매상은 모두 서로 다르다. 소피스테스라는 하나의 유, 그 유가 지닌 단 하나의 기술이란 다른 여러 기술들과 구분되면서도 기술이라는 바로 그 점에서 그 모든 것들과 함께 모이는 그러한 것이다. 어떤 때에 모으고 어떤 때에 나누어야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한지 해명되어야 한다. 기술 일반에서 제작과 획득을 나누고 획득에서 다시 나눔을 거듭하여 사냥술에 이르면 우리는 사냥술이 무엇인지 정의하게 된다. 그러나 사냥술에서 다시 나눔을 거듭하면 육상에서의 사냥과 수중에서의 사냥이 나뉘고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둘이 하나의 같은 것에 포함되고, 그 둘을 포함한 것이 또 다른 것과 구분되면서도 또 다시 하나로 모인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다. 반면 소피스테스의 기술을 나누고 모으면서 이 문제가 새삼스럽게 제기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논박하며 이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실제로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여겨지게끔 만드는 기술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문제

to on뿐이며 to me on은 불가능하다. to on to me on에 엮을 수도 없고 to me on to on에 엮을 수도 없으며 애초에 to me on 자체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수도, 이름도, 지시사도 모두 ta onta이므로 그 중 어떤 것도 to me on과 결합할 수 없다. 그러나 to me on 없이는 거짓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고, 나아가 모상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없다. 원본이 참으로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이라면, 모상은 원본이지 않은 것, 참으로 그것이지 않은 것, 거짓인 것이다. 그런데 거짓은 ~인 것을 ~이지 않다고 혹은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다. 모상에도 거짓에도 to on to me on이 얽혀 있다. 뿐만 아니라 to on 자체도 그것 아닌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하나라면 하나 자체와 to on 자체는 서로 다를 것이므로, 그리고 to on이라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이 to on을 지시한다면 이름과 대상 역시 서로 다를 것이므로, to on 자체와 다르기에 to me on인 이러저러한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 없이는 to on도 가리키거나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to on 이외의 것들은 to on 자체이지 않은 한에서 to me on이고, to me on은 다시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으며 거기에 to on을 적용시키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이름도 하나도 모두 to on 자체는 아니기에 오직 to on 자체만이 가능하다. 그럼 다시 to on은 하나뿐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는 앞서 보았듯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각기 따로 분리되어 있다면 to on 이외의 모든 것은 ta me onta로서 사라지고, to on과 이름마저 결합할 수 없기에 to on to on이라 할 수조차 없게 된다. 반면 모든 것이 구분 없이 결합된다면 정지인 동시에 운동이자 이름인 동시에 그 지시대상이며 그런 식으로 말할 수도 사유할 수도 없는 것만이 남는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결합하고 어떤 경우에는 결합하지 않아야 한다. 

 

형상들의 결합

결합을 의미하는 동사로 참여(metechein), 적용(haptesthai) 등이 등장하고 결합의 요소들은 주어와 목적어로 구분되어 등장한다. 또한 결합의 결과 ~에 관하여 ~이다(epi ~ einai), ~ ~이다(A is B), ~ ~한다(A is B-ing) 등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같음과 운동의 관계를 보자면 1) 같음이 운동에 참여한다 2) 운동이 같음에 참여한다 3) 같음이 운동에 적용된다 4) 운동이 같음에 적용된다 네 가지 경우가 가능하다. 1) 4)의 경우 (1)같음이 운동이다, (2)같음이 운동한다, (3)같음에 관하여 운동이 ~이다와 같이 같음에 대해 운동이 술어로 주어지는 세 경우가 가능하다. 2) 3)의 경우 주술관계가 역전된 마찬가지로 세 결과가 도출된다. 이러한 해석이 정당하다면 주술관계의 역전은 능동과 수동의 구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같음이 운동인 경우와 운동이 같음인 경우 사이의 구분은 가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에 관하여 ~인 것들과 ~이지 않은 것들이 수없이 많다는 묘사를 고려할 때 특히 결합 결과로서의 주어와 술어 사이의 구분이 가능한 결합방식은 더욱이 필수적인 것이다. 

유들의 결합에서는 to on에 참여하는 결과로 그 참여 주체가 to on이 된다. 그런데 운동, 정지, 같음, 다름에 참여할 경우 참여 주체는 to on의 경우에서처럼 그 대상을 술어로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이후의 묘사를 고려할 경우 그 참여 대상이 참여 주체에 관하여 ~인 것이 된다. ~임이 운동한다(to on kineitai)는 것은 ~임이 운동이라(to on estin kinesis)는 것이고 이는 ~임에 관하여 운동이 ~(ten kinesin einai epi to on) 것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결과는 to on과의 직접 결합을 통한 결과가 아니다. 만일 서양고전학회에서 제안된 해석을 따라 술어가 되는 과정이 to on 자체가 아니라 참여 대상의 to on에 참여함으로써 그 대상에 관하여(epi X) to on이 되는 과정이라면, 이는 주술관계에 불일치를 일으킨다. 운동이 같음에 참여하면 그 결과 운동은 자기 자신과 같다. 그런데 운동이 같음의 to on에 참여한다면 운동이 같음에 관하여 to on이 되는 것이고, 이는 거꾸로 같음이 운동한다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이 해법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X einai epi Y를 일과된 해석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to on과 다름으로서의 to me on을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름으로서의 to me on으로까지 확장시키기 어렵다. to on과의 관계에서 여타의 것들은 to on에 참여하여 ta onta가 된다. 그러나 다시 그것들은 다름에 결합하면서 to on 자체와 다른 것들이 된다. to on과 다른 한에서 그것들은 ta me onta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운동과 같음의 관계에서, 운동은 자기 자신과 같다는 점에서 같음이다. 그런데 다시 운동이 같음과 다른 한에서 운동은 같음이지 않기도 하다. 여기에서 같음',' 같음'이지 않음'은 곧 to on tauton, to me on taouton이다. 어떤 주어에 대해 술어가 되는 것과 그 주어에 관하여 ~인 것이 되는 것이 의미가 같고, 어떤 것에 대해 부정술어가 되는 경우 또한 그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조건이 없다면 유들의 결합에서 to on을 제외한 것들 사이의 결합 결과로서 나오는 주술문장이 설명될 수 없다. to on의 결합관계의 요소가 아닌데도 to on이 결합결과에 등장하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하고, 그 이유는 epi X einai로 설명되며, 따라서 이 epi X einai가 유들의 결합 방식과 일관되게 설명되어야 유들의 결합이 온전히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가 결합할 수 있는지 없는지 불확실하다. Gigantomachia 부분을 고려한다면 변화(~이지 않은 것이 ~이 됨)를 겪는 모든 것은 운동한다. 정지도 인식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같음과 다름, to on을 겪어 그 겪은 바의 것이 되므로, 그것은 운동한다. 정지의 경우, 정지하지 않으면 동일할 수 없고 동일할 수 없다면 인식될 수 없으므로, 운동을 운동이라고 진술하고 사유할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정지해야 한다. 나아가 만일 자기 자신과 같음이 같음의 대상이 되는 자기 자신의 정지를 필요로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면, 운동이 운동이기 위해서라도 운동은 정지해야 한다. 그러나 유들의 결합을 논하는 부분에서 손님은 운동과 정지가 가장 반대되는 것이라 말하고, 테아이테토스도 이에 동의한다. 이후 운동이 정지한다거나 정지가 운동한다는 문장이 등장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편집들이 제안되기도 한다.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큼과 작음의 관계와 같다면, 이 둘의 결합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는 같음과 다름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모든 각각의 것은 자기 자신과 같은 한에서 같음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른 한에서 다름과 결합해야만 한다. 이는 같음과 다름 자체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같음과 다름이 그렇기에 서로 결합한다면, 정지와 운동의 짝은 같음과 다름의 짝과 같은 경우인가, 다른 경우인가?

자기술어화의 문제 또한 발생한다. 같음은 자기 자신과 같다. 다른 모든 유들이 그러하듯 같음 자체도 자기 자신과 같아야 한다. 다름 역시 다른 모든 유들이 그러하듯 그 자신도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르다. 이 경우 같음이 자신과 같다는 것과 운동이 자신과 같다는 것은 서로 다른 작용을 통한 서로 다른 결과인가? 혹은 운동이 같음에 참여하듯 같음도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참여한다고 해야 하는가? 또한 다름의 경우, 다름 그 자체가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다르다고 한다면, 다름은 자기 자신과도 다른가? to on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to on에 참여함으로써 to on이 된다. 그러나 to on은 그 자체로 to on이다. 그렇다면 다름도 그 자체로 다르고 같음도 그 자체로 같은가?

 

다름으로서의 to me on

다름으로서의 to me on에 대한 묘사는 '큼과 크지 않음'의 비유, 그리고 아름답지 않음 등에 대한 진술들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크지 않음은 큼의 반대인 작음뿐만 아니라 같은 크기임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아름답지 않음을 아름답지 않다고 언급한다. 이 둘 모두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A는 무수히 많다. 그 중 어떤 것도 특칭되지 않는다. 아름답지 않음 또한 추함, , 움직임, 아름다움 자체와 다른 모든 것들일 수 있다. 크지 않음은 작음과 같은 크기임뿐만 아니라 개임, 날고 있음, 뜨거움 등 무수한 것들을, 큼 자체와 다른 모든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L. Brown의 제안대로 암묵적으로 일정 범위가 제한된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우선 그러한 제한이 주어지는 맥락이 대화에 직접 등장하는 바 없고, 일정 범위로 제한한다고 해서 불특정의 것이 갑자기 특정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검지 않음은 검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주어가 검지 않은 특정한 무엇인가를 지시할 경우 그것은 희거나 붉거나 푸를 것이다. 그러나 흼과 붉음과 푸름은 서로 다르다. 주어가 특정한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을 경우 부정적 자기언급의 역설에 봉착할 수 있다. '참이지 않음은 참이지 않다'라는 진술이 참이라면, '참이지 않음'이라는 사태에 부합하는 참인 진술은 불가능하다. 참이지 않음이 참이라면 더 이상 참이 아니지 않을 것이기 떄문이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음이 아름답지 않다'가 참이기에, '참이지 않음' 또한 '참이지 않다'고 진술하는 것이 참이다. 

 

형상들의 결합과 진술분석

유들의 결합에서 to me on이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이라면, 이 다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각각의 것은 자기 자신과 같고 그 외의 것들과 다르다. 그러나 진술분석은 진술과 믿음에 to me on이 섞이지 않을 가능성 때문에 요청된다. 진술이 진술이고 믿음이 아니며 믿음 또한 자기 자신이고 그 외의 것이 아닌 한에서, 유들의 결합에서 드러난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이 이것들에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유들의 결합에서 밝혀지는 to me on의 의미는 on과 다른 모든 것에 더하여 서로 다른 모든 것에 부여되는 서로의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이다. 반면 진술분석에서 거짓 진술에 포함되는 to me on은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의 to on 다른 것이다. 하지만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것이 참일 때 앉아 있음과 다르면서도 거짓이 아닌 테아이테토스에 대한 진술들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가 사람이라는 것은 '앉아 있음'과는 다르면서 또한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인 것이고 참일 것이다. 또한 앉아 있음과 다른 서 있음은 테아이테토스에게 거짓이 될 것이나, 테아이테토스가 일어선다면 참이 될 것이다. 날고 있음은 거짓 진술의 예시로서 거짓 진술에 대한 정의가 날고 있음과 서 있음 모두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날고 있음이 인간이라는 유의 정의에서 배제되기 떄문에 인간인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거짓이라면, 서 있음이 거짓인 이유는 설명될 수 없다. 

 

 


해석의 제안

 

~임의 수를 논하는 과정에서 손님은 파르메니데스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한다. ~임은 중심으로부터 끝들까지 균등하다. ~임은 중심과 끝들, 전체와 부분들을 지닌다. ~임이 하나라면 ~임은 부분들을 통해 하나를 겪어 그 전체가 하나이게 될 것이다. ~임이라는 유와 하나라는 유 사이의 결합관계가 이런 식으로 성립한다면, 이는 다른 유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유들의 결합이 부분들을 통해 전체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서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은 중심과 끝들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런 식의 결합은 유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방식과 결과에 있어서 구분짓게 해준다. 예를 들어 운동이 존재에 적용(haptesthai)될 경우, 달리 말해 존재가 운동에 참여(metechein)할 경우 존재는 운동하게 된다. 이 경우 '존재가 운동한다'는 명제는 참이 되고 '존재가 운동이다'라는 문장 또한 참이 된다. 인식의 대상으로서 모든 대상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고 인식되기 이전의 상태로부터 인식된 이후의 상태로 변화된다는 것은 곧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선 운동과 정지 사이의 결합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갖게 된다. 작용과 수용의 능력이 있는 한에서, 결합하고 적용받는 모든 형상들은 운동에 참여한다. 또한 모든 형상들은 각기 그 자체로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정지에 참여한다. 이는 운동과 정지 각각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즉 운동은 정지에, 정지는 운동에 참여해야만 한다. 다만 이러한 상호작용은 본성의 중심, 능동적인 측면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자기술어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러한 접근은 한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마련해 준다.같음의 본성의 중심은 능동적으로 '같다'라는 술어를 지닌다. 그러나 그 외의 술어들은 참여를 통해 의존적으로 얻게 되고 수동적으로 작용을 받음으로써 성립한다. 같음의 본성이 능동적으로 작용한 결과는 다른 유들이 같음에 참여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얻게되는 수동적 결과와 같다. 같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같음을 겪는 것이며 같아지는 것이다. 이는 to on이 하나를 겪어서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더 이전에 묘사되는 방식과 같다. 그렇다면 같음은 자신에게 참여하는 것들에게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그것들을 같음으로 만든다. 이 능동성은 같음 자체의 중심에 오는 본성이다. 반면 같음의 부분에는 to on, 운동도, 정지도, 다름 또한 작용하며 같음은 그 부분들을 통해 여타의 것들에 참여한다. 이 능동적인 중심이 정의의 대상이 된다. 소피스테스의 기술 자체의 능동적 측면은 거짓된 모상의 제작이다. 오롯하게 그 기술 자체만으로는 사냥도 매매도 정화도 불가능하다. 운동은 그 무엇보다도 운동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운동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같고 다른 것들과 다르며 ~인 것이어야 한다. 테아이테토스에게 인간이라는 것은 테아이테토스의 능동적 측면이 속한 유일 것이고 이는 정의상 필수불가결할 것이다. 그러나 앉아 있음은 테아이테토스에게 정의상 필요한 능동적 측면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날고 있음 역시 정의상 배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태풍에 휩쓸리거나 뜨거운 공기로 밀어 올려지는 연 위에 올라타거나 커다란 새를 잡아 타거나 해서 날고 있을 때, 그는 날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앉아 있다는 것이 그러하듯 날고 있다는 것도 지금 여기에서 그에게 거짓일 뿐이다.

 -작성중-

  나는 병신이고 학문은커녕 학문의 기초마저 후달리게 어렵기만 한 터에 어깨에 힘을 어찌 빼나. 뭘 더 얼마나 굽히고 낮추고 버려야 내 꼬라지에 걸맞는 수준으로 발버둥을 칠 수 있는 건가. 전체를 물 흐르듯 거듭해서 읽고 읽고 또 읽으며 가자니, 다시 돌아올 때마다 내가 저지른 지랄들과 헛짓거리들이 눈에 밟혀서 누가 오함마로 대가리라도 깨부숴 줬으면 싶은데, 많지도 적지도 않은 시간만 남아서, 내게 또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긴 길을 에둘러 갈 결심을 세울 용기가 남아있는지도 이젠 잘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적당히 비비고 문대서 타협하고 빌어먹고 사기치고 구라치고 그렇게 넘어가자니, 그러고 살기엔 아직 배가 부른데, 등이 따순데, 게으르고 비겁하게 넘어가자니, 자꾸만 죽은 사람들이 눈에 밟히는데, 주제 넘게도 내가 그런데 어째야 하나. 공부하다 뒈지면 면피라도 될까 싶건만, 미친 놈이 술주정이나 해댈 뿐 책 붙들고 있는 사이에 죽을 기미는 보이지를 않는다. 모든 걸 다 알 수도 없고, 다 이겨먹을 수도 없고, 먼저 배운 사람들이 남들 배우라고 써 남겨 놓은 것에서도 배울거리를 못 찾으면 그딴 공부는 해서 무엇하나. 뭘 어떻게 가르쳐주는지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전보다 더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고 들러 붙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어깨에 힘만 들어간다. 주제도 깜냥도 안 되는 나란 새끼는 철 지난 논문 하나 붙들고 무슨 건곤일척의 담판이라도 짓겠다는 듯이 바들바들 떨면서 그럴싸한 말 몇 마디를 찾느라 시간만 허비한다. 사태에 부합한다는 진술이 그 진술이 지시하는 대상이 있다는 의미와 그 진술이 서술하는 속성이 그 대상에 귀속된다는 의미까지 확장되고 그 사태가 있다는 진술로도 간주된다. 무엇인가가 진술된다면 그것은 무엇인 것으로서 존재한다, 이는 필연적이다. 무엇인가가 진술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무엇인 것으로서 존재한다. □(A→B)에서 (A→□B)로의 오류추리, 오류추리라고 하는데 양화가 들어가서 오류인가 그냥 형식적으로 문제인가, 글쓴이가 어느 쪽을 주장하고 있는 건지는 잘 안 잡히고 그 와중에 그건 지금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니란다. 타란이었나 콕슨이었나 오웬이었나 여하간 이 양상 가지고 파르메니데스의 시에서 등장하는 길들이 세 개랬나 네 개랬나 뭐 그랬다는데. 이것 봐, 내 안의 병신이 이만큼이나 자랐어. 씨바. -蟲-

  (1)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에 나타나는 being의 원칙을 함축하는 단순하고 역사적으로 타당하며 철학적으로 파악가능한 가정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정들은 암묵적으로 주어질 뿐 그의 시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역사적 타당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역시대착오의 오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경우 당대의 선구자로서 그가 선취한 영역을 이해할 가능성이 닫혀 마찬가지로 역시대착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능동적이고 주재적인 가정들로서 이 시에 대한 일반적 입장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시 자체에 대해, 후대의 반응들에 대해, 그리고 오늘날 철학적 선제들과의 유사성을 통한 그의 철학의 정당성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열릴 것이다.
  (2) 탐구의 과정은 첫째, 초기 그리스에서 being 개념에 대한 기초작업을 제시한다. 둘째, 'it cannot be said that anything is not'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핵심 원리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다. 셋째, 'of what is, all that can be said is: it is'라는 원리를 설명하고, 넷째, "진리의 길"에서 남은 우주론을 간략히 다룬다. 다섯째, 파르메니데스 스스로 자신의 논증 결과들을 믿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고찰한다. 그리고 방법론에 대해 첨언한다.

1. A Word on ὄν

  (1) 파르메니데스가 τὸ ἐόν을 제시하는 구조나 독자에게 기대하는 해석은 불분명하나 그가 이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에 대한 통찰을 전하려 한다는 것은 충분히 분명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해석을 위해 그리스어 ἐστιν, ὄν, τὸ ὄν, εἶναι 등에 대한 독해를 확정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2) 주-술 결합에서 'is'와 존재사 'is'의 구분은 당대 그리스 일상어법에서도 철학적 용법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시에서 보어가 등장하지 않는 완전용법이 빈번히 출현한다. 이런 이유로 그가 존재사적 의미에 스스로 국한되었으며 이 지점에서의 혼동이 그의 전체 원칙 전반에 책임을 갖는다는 입장이 제시된다. 그러나 당대 철학적 용법은 존재사에도 술어적 용법에도 국한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며 혼용된다. 
  (3) 이 혼용은 ἐστι의 사용 자체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예들을 포함하는 더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보인다. 이것들은 파르메니데스 해석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a) 대상에 대한 속성 부여를 사실을 진술하는 단언의 이상적이거나 전형적인 형식으로 간주하는 경향과 (b) copula로 연결된 주-술문장을 대상에 대한 속성 부여의 이상적이거나 전형적인 형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서술적 ἐστι는 사태에 부합하는 것(참인 것, is the case) 혹은 속성을 부여받는 것(현전하는 것, obtains)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구분되지만 당대에 동화된 다양한 용례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1a) 사실이라는 것은 (ὄν) with (1b) 존재와 (ὄν), (2a) 사실들은 (πράγματα, τυγχάνοντα, etc.) with (2b) 대상들과 (πράγματα, τυγχάνοντα, etc.), (3a) 변화는 (the case) (γίγνεσθαι) with (3b) 발생과 (= coming to exist) (γίγνεσθαι). 

 주-술 계사는 속성 부여의 표준이고 속성 부여는 사태 진술의 표준이다. 1에서 사태 진술은 현전과 동화되고, 2에서 사태들은 대상들과 동화되며, 3에서 사태의 변화는 사태의 발생과 동화된다. 사태와 대상의 혼용은 의미론적으로 특수항과 보편항의 동화경향이다. 이 경우 부합한다는 것은 is의 두 의미에 따라 둘로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사태를 기술하는 문장의 참값은 특수항이나 보편항에 어떤 것을 적용하는 존재자 지시와 혼용되는 경향을 가질 수 있다. 반면 문장의 거짓은 용어 적용의 실패와 합쳐진다.

 (4a) 언어적으로 표현하여 ~인 것을 말하는 것(참을 말하는 것)과 (4b) 있는 것을 말하는 것(존재하는 어떤 것을 명시하는 것)
 (5a) ~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거짓을 말하는 것)과 (5b) 있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명시하는 것)

 끝으로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의 혼용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국가/정체』 5권(476-480)에 등장하는 지식의 대상과 믿음의 대상 사이의 구분, 그리고 이 두 쌍 각각의 내적 관계를 고려하면 방법적으로 알려진 것은 존재하는 것이, 명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사실로서 그러함이 필연적이라는 원칙이 도출된다. 이 역시 혼용된다. 

 (6a) 필연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다 with (6b) 필연적으로, 알려진 것은 있다
 (7a) 알려진 것은, 필연적으로 ~이다 with (7b) 알려진 것은, 필연적으로 있다

7a에 대조적으로 믿음에 관련된 원칙들이 도출된다.

 (8a) 비-필연적으로, 믿어진 것은 ~이다.
 (9a) 믿어진 것은, 비-필연적이다.

6에서 7 혹은 8a에서 9a로의 오류를 차치하면(조건과 귀결 사이의 양상관계가 귀결절 자체의 독립적 양상으로 바뀌나? necessitas consequentiae → necessitas consequentis), 방법적 지식과 명제적 지식의 결합 속에서 ὄν의 두 가지 용법이 혼용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

  (4) 방법적 지식을 감각지각으로 간주하면

  (8a) 비-필연적으로, 믿어진 것은 ~이다. with (8b) 비-필연적으로, 감각지각된 것은 있다.
  (9a) 믿어진 것은, 비-필연적이다. with (9b) 감각지각된 것은, 비-필연적으로 있다.

역시 이행과정의 오류를 차치하면, 방법적 지식과 믿음이 모두 doxa 개념으로 포괄된다. 이제 혼용은 τὸ ὄν, τὸ γνωστόν, τὸ δοξαστόν의 삼중이다.

  (5)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평가는 그의 시에서 being의 두 의미 혼용에 더해, 그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결론들을 도출하는 데에 중요하지 않다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 

-작성중-

2014년 상반기 정암학당 연구강좌를 안내합니다.
이번 학기에는 주제연구강좌를 통합해서 두 개의 강좌를 개설합니다.

1. 플라톤의  <필레보스>와 좋은 삶
: <필레보스>를 중심 텍스트로 플라톤의 후기 윤리학 연구로 학위를 해온
이종환 선생님(서울시립대학교 교수)이 진행합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 3시~6시입니다.
단 3월 첫 주는 쉬고, 둘째 주인 3월 10일부터 16회 진행됩니다.

2.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강독
: 김기영 선생님(정암학당 연구원)의 진행으로 <오디세이아> 3권까지 읽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매주 월요일 저녁 7시~10시입니다.

* 수업계획서를 첨부합니다. 많은 참여 기대하겠습니다.

* 그밖에 플라톤 전집을 위한 윤독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10시에는 기존에 진행되어온 <국가> 윤독을,
수요일 저녁 7시~10시에는 김인곤 선생님의 <파르메니데스>를,
금요일 저녁 7시~10시에는 김유석 선생님의 <티마이오스>를 진행합니다.
직접 윤독자로 참여하지 않으셔도 같이 참여하시는 것은 적극 환영합니다.

 (링크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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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냥 미친 척하고 다 들어가 버릴까...
  여기에 추가로 전에 썼듯 목요일에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소피스테스』 강독 강의 있고, 서양철학전공 강의로 프로타고라스의 체계적 철학 재구성 가능성 문제(랄까?), 이거는 학기 시작돼 봐야 일시가 확정될 것 같고, 그러거나 말거나 논문 쓰셔야지요, 씹쓰레기버러지쉐끼야=_=... 아, 몰라. 배째. 논문도 쓰고 이것들도 다 들을 거여. 잠 안 자고 밥 안 먹고 아득바득 달겨들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좀 정리해 보자.



 토

 9-10


 

『파이드로스』
강독/건대

 

『파이드로스』
강독/건대
//프로타고라스
읽기/서울대
(예정1)

 

 10-11


 

 『파이드로스』
강독/건대

 

『파이드로스』
강독/건대
//프로타고라스
읽기/서울대
(예정1)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강독
서울대

 11-12


 

 『파이드로스』
강독/건대
(3/8까지?)

 

『파이드로스』
강독/건대
(3/8까지?)
//프로타고라스
읽기/서울대
(예정1)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강독
서울대

 12-13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강독
서울대

 13-14

 

 


 

 

 

 14-15




『소피스테스』강독/서울대

 

 

 15-16

 『필레보스』
주제강좌
정암학당

 


『소피스테스』강독/서울대

 

 

 16-17

 『필레보스』
주제강좌
정암학당



『소피스테스』강독/서울대

 

 

 17-18

『필레보스』
주제강좌
정암학당
(3/10부터 15주)




 

 

 18-19

 

 

 

 

 

 

 19-20

 『오뒤세이아』강독
정암학당

 『국가』
교열 청강
정암학당

『파르메니데스』교열 청강
정암학당

프로타고라스
읽기/서울대
(예정2)

『티마이오스』교열 청강
정암학당

 

 20-21

 『오뒤세이아』강독
정암학당

 『국가』
교열 청강
정암학당

『파르메니데스』교열 청강
정암학당

프로타고라스
읽기/서울대
(예정2)

『티마이오스』교열 청강
정암학당

 

 21-22

 『오뒤세이아』강독
정암학당

 『국가』
교열 청강
정암학당

『파르메니데스』교열 청강
정암학당

프로타고라스
읽기/서울대
(예정2)

 『티마이오스』교열 청강
정암학당

 

  이번 봄 학기 동안의 시간표가 될지도. 호메로스는 매주 100행이라는데, 분량만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부담스러운 건 아니고, 『소피스테스』는 그나마 초벌번역이라도 몇 차례 갈겨 놓은 게 있으니 역시 좀 부담이 덜하고, 프로타고라스 강의는 예전에 윤철형님 정암에서 강의하셨던 거랑 강독 지도해 주셨던 것도 있으니 이것도 발제만 안 시키신다면 뭐 그럭저럭. 『파이드로스』는 어쨌든 곧 끝날 거고, 『자연학』은 진행 자체가 급하지는 않으니 강독 때문에 힘들 것은 없는데 내용이해가OTL... 교열독회들은 본래 생각대로라면 아무 부담없이 그냥 들어가서 귀동냥이나 하고 앉았다가 들은 거나 때마다 정리하면 그만이었겠지만, 대화편들이 굵직굵직한지라=ㅠ=;;; 솔직히 예상이 좀 어려운 건 『필레보스』. 계획서만 봐서는 거의 강의급으로 생각하고 계신 듯한데, 원래는 연구원 선생님들끼리 갓 학위 마치신 분들 학위주제 중심으로 새로운 정보도 듣고 의견도 교환하는 그런 취지 아니었나? 뭐 어쨌든 나야 학생이니 앗싸리 강의쪽으로 해주시면야 좋을 따름. 문제는 읽을 거리들도 꽤나 많이 덧붙여 놓으신 데다가 내가 필레보스는 번역해 놓은 게 없어서뤼. 으음, 논문주제 생각하면 사실은 『필레보스』랑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테스』 이렇게 들으면 되는 건듸 내가 개인적으로 『티마이오스』 빠돌이라=_=/ 『오뒤세이아』는 『소피스테스』 도입부서부터 인용되는 것인듸, 게다가 호메로스 강독할 기회가 나로서는 은근히 얻기 힘든 것이기도 하고... 몸으로 굴러 보면 답이 나오겠지.

-蟲-

P.S. 『파르메니데스』St.126-166. 1일 2 sections. 『필레보스』St.11-67. 1일 3 sections. 『티마이오스』St.17-92. 1일 4 sections. 매일 2쪽 정도 해서 일주일에 St.12씩 준비=_=? 여기에 『오뒷세이아』 매주 100행씩? 아무튼 이래이래 하면 15주, 6월 중순에 마무리. 일단 계획이 그렇다는 것이고=ㅁ=...

정암수업계획서-김기영-2014-1.hwp


필레보스-강의계획서-정암학당.hwp


1. 2월 말까지 서론 작성. 무슨 문제를 왜 다루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혀 내용이 공유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식으로 '전달'에 중점을 두어 작성할 것. 왜 하필 『소피스테스』이고 거기서도 굳이 '유들의 결합'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 이 대화편이 무슨 문제를 왜 다루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연장선 상에서 줄거리 요약정리 내일까지 마무리!

2. 2월 27-28일 서양고전학-서양고대철학 전공 모임. 이 모임에서 서론에 대한 검토가 병행된다면 참석, 아닐 경우에는 참석하기 어려울 듯. 진짜 탈탈 긁어 모아도 한 줌 될까 싶은 귀한 동학들이자 도반들인듸, 그래도 어쩌겠나. 그냥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3. 서양고전학 협동과정 『소피스테스』 강독, 매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이후 6시부터 10시까지는 윤철형님 프로타고라스 강의 아니면 정암학당에서 『필레보스』 주제강좌. 역시 둘 다 참석 못 할 수도 있고.

4. 논문 요약정리 좀.

5. 정암학당 『파르메니데스』 윤독, 『티마이오스』 윤독. 아마도 금요일에 몰리거나 수, 금으로 나뉠 텐데 정말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잘 되면 앞에 『소피스테스』까지 포함해 내가 관심을 가지다 못해 애닳아 하는 세 대화편 모두를 동시다발적으로 가르침 받으며 들을 수 있는데 말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논문에 좀 진전이 있어야 하겠지. 엇나가기 시작한 갈림길로 되불려 왔고, παιδαγωγοί들께서 이리저리 데리고 다녀 주시니, 내가 노력만 하면 될 거다. 잘 돼야 하고, 잘 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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