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테아이테토스』

앎의 후보로서 지각이 제시되었지만 전적으로 참(앎)이기만 하거나 전혀 말할 수 없게 되는 문제에 봉착한다. 감각을 통한 지각만으로는 영혼의 인식활동을 포함할 수 없으며, 이러한 영혼의 대상을 향한 접촉 없이는 있는 것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하다. 참인 믿음이 앎의 두 번째 후보로 제시된다. 앎=참인 믿음이라면, 앎과 믿음 전체의 관계는 어찌 되는가? 앎과 참인 믿음, 알지 못함과 거짓 믿음이 각기 동일하다면 믿음 중에서 거짓 믿음을 구분하여 말할 수 있는가? 어쨌든 거짓 믿음 문제가 제기되고, 이에 대한 탐구가 시도된다. 지각 논의에 한정하자면 거짓은 불가능해 보였다. (부분 없는 단순한 것에 대한 인지활동이 모두 겪는 문제 아닌가? 정말로 대상의 구조에 대한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인가?)

안다/알지 못한다 두 경우와 관련하여 착오를 통한 거짓 가능성 탐구 실패. 아는 것A와 아는 것B를 혼동하여 거짓을 믿는다면, (거짓을 믿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아는 둘 모두를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알지 못하는 것A와 알지 못하는 것B를 혼동할 수는 없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혼동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부분에서 "이상하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논증이 없는가? 확인 필요) 

안다/알지 못한다 두 경우를 통한 탐구에서 있다/있지 않다 두 경우를 통한 탐구로 이행. 있지 않은 것 그 자체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있지 않은 것 취급 가능성 배제. 거짓은 있는 것들 사이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소피스트』도 유사. 그러나 있지 않은 것도 독립적으로 취급 불가능하고 있는 것 역시 독립적으로 취급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론적으로는 있는 것들 사이에서 있는 것 그 자체와 다른 것을 토대로 삼아 있지 않은 것이 확보된다. 어떤 식으로도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러한 있지 않은 것은 배제되었다.)

믿음/믿지 않음 두 경우를 통한 거짓 가능성 탐구가 잠시 진행된다. 구도는 안다/알지 못한다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인다. 있다/있지 않다 경우가 다른 두 경우와 독립적이라면, 앎과 믿음은 단순한 논의의 반복으로 생각된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의 착오는 불가능하다/믿는 것과 (전혀) 믿지 않는 것 사이의 착오는 불가능하다. 알지 못하는 것과 믿지 않는 것과 있지 않는 것 셋 모두 일종의 인지 영역과 같은 것으로부터 배제된 대상을 논한다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인가? 있지 않은 것이 배제된다면, 같은 방식으로 알지 못하는 것과 믿지 않는 것도 함께 배제되는가?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일반적 상식이 지금 논의에서 개입될 수 있는가, 혹은 이 가능성도 거짓 가능성과 함께 부정되고 있는가? 7월 콜로퀴움 목표로.


0. 『파르메니데스』

"연습" 논증들 정리할 것. 

연습 이전 제논의 가정과 연습에서 파르메니데스의 가정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설명 필요. 연습 이전까지의 논의가 형상과 형상에 참여하는 것들, 혹은 형상들의 저 세계와 인간들의 이 세계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역설들인 반면, 연습 이후 논의는 형상들 자기 자신들 사이에서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인가? 정말로 그런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러한 논의 영역의 이행이 발생하는지 설명 필요.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제논의 가정에 관련하여 가시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는 논의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탄하였다고 말한다. 우선 이 번역 맞는지,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제한을 가하는 부분이 어디고 정확한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 강독 과정에서 추가 검토.


0. 『소피스트』

참의 종류가 구분되고 있는지. 있는 것들이 진짜로 있다. 실재성, 현실성, 구체성. 원본과 모상의 관계에서. 다른 한편 언어, 판단, 기타 영역에서 명제 차원의 거짓.

분할 문제. 낚시꾼 예행연습 분할은 낚시꾼의 정의에 성공한다. 반면 소피스트 분할은 여섯 차례 반복하여 서로 다른 규정들을 소피스트에 부여하게 되고, 형상 이론과 진술 분석을 거쳐 나온 거짓 가능성 증명 이후 비로소 마지막 분할이 소피스트의 정의에 이른다. 이 차이는 소피스트의 거짓 모상 제작 기술과 관련되는가? 아닐 듯. 소피스트가 사냥꾼이거나 장사꾼이거나 교육자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정치가나 철학자도 사냥꾼이거나 장사꾼이거나 교육자일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열려 있다. 낚시꾼도 물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 때에 한하여 장사꾼에 개입한다. 여전히, 낚시꾼이 장사꾼이라는 명제가 한편으로 참이고 다른 한편으로 거짓일 수 있다면 소피스트에 대해서도 한편으로 영혼을 정화하는 교육자라는 술어가 참되게 진술될 수 있고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는 이것이 거짓일 수 있다. 문제는 필연적으로 결합하는 술어들이 있는지,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우연히 결합하는 술어들과 관련하여 각 명제들의 진리치는 어떻게 처리되는지, 본질이나 정의에 해당하는 술어 없이 분할을 통한 정의 시도가 애초에 가능한지. 유나 형상은 단순한 한에서 그 자체의 본질과 그 외의 성질들을 구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소피스트라는 유라든지 혹은 테아이테토스와 같은 한 사람까지 갈 경우 정의에 필요한 기준점이 확보될 수 있을지? 내포와 외연의 적절한 결합 등을 제안하는 최근 논문이나 앞서 언급한 소피스트의 거짓 제작 기술 관련한 해석 시도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할 듯하다. 소피스트에 대한 마지막 분할 이외의 다른 모든 분할들은 정의에는 실패하나, 그것이 거짓 진술을 구성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피스트가 정의상, 혹은 본질적으로 사냥꾼이거나 교육자일 수는 없다. 그런데, 거짓 모상 제작자인 소피스트는 본질적으로 제작자일 수는 있는가? 좀 더 구체화. 6월 초까지 개괄 요약 시도. 정의, 분할, 양상.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