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또 한 일주일 정도를 날려 먹었다. 더위에 약하고 식도고 위고 장이고 엉망이고,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 봤댔자 본래 내 식대로 얘기하자면 정신력이 쓰레기인 것이겠지만서도. 『정치가』 윤독도 못 들어가고, 스토아 자연학 강독도 못 들어가고, 『국가』 윤독도 못 들어갔다. 화장실 쳐박혀서 토하다 설사하다 비척거리며 기어나와 널부러져서 또 끙끙거리다 보면 언제 해가 떴는지 언제 졌는지 가늠도 안 된다. 뭐가 문제인지. 나름 막다른 곳 끄트머리에 몰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전 같으면 이 정도 되면 발악을 해서라도 다음 걸음을 내딛었던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전보다 더 겁쟁이가 된 것도 같다. 수료는 했지만 아직 졸업 전이라 적(籍)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당장에 이거 아니면 끝장이다 할 만한 위기에 당면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게 빤히 보이는 그 만큼의 거리에서 그냥 어물쩡거리고 있을 뿐이다. 누가 등판을 걷어차고 싸대기라도 날려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가야할 길도 해야할 일도 빤히 보이고, 그걸 해내기에 내가 뭐가 얼마나 어떻게 부족한지도 잘 알겠는데, 그래서 서둘러서 바쁘게 채워 넣어야 하는데도 그냥 쳐박혀서 꿈질거리고 있다. 당연히도, 용기를 내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 그리고 뭔가 잘못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용기를 내는 게 아니라 저질러 버리는 뭐 그런 식으로. 내내 충동적이었을 뿐 무던하고 꾸준하게 견뎌내진 못 했던 것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든다. 잘못 살아왔다, 라는 생각. 뭐 운 좋으면 살아온 만큼은 충분히 더 살아갈 만한 나이이긴 하지만 어쨌든.

2. 아닐 줄은 알고 있었다. 내가 꼴같잖게 어울리지도 않는 실연남 흉내를 내는 사이에 그 친구는 또 아무렇지 않게 새 연애를 시작했다더라. 그도 그럴 것이 누구에게든 나는 멋진 남자, 라기 보다는 그냥 좋은 사람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흔한 평은 아니었으니. 나는 이 지경인데 너는 어찌 그리 잘 사느냐, 갖고 논 거냐, 배신이다, 뭐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힘든 건 다른 거다. 날 두고 그 친구가 설레는 마음을 갖는 것도 애가 타는 것도 뭐 그리 간절한 것도 아니었던 걸 뻔히 알면서도, 그저 내 욕심에 잠시라도 붙잡아두고 싶어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렸던 게 화근이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인생을 다 뒤집어 엎어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 본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는 이르게 끝장이 났지만 더 길어 봤댔자 우리가 1년만이라도 채워 만날 수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다.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란 사람은 그냥 곁에서 부담스럽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추장스러운 인간관계 중에 하나였고, 결국 알면서 모르는 척한 나 때문에 그 친구도 괜한 시간 낭비만 한 것이지. 사실 그 중간의 한 달도 못 되는 만남만 제외하면, 7~8년 가까이 지금과 별 다를 것도 없는 관계였다. 내가 짝사랑을 한다고 뭐 뒤를 캔다거나 집요하게 애정을 구걸한다거나 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 친구도 나름대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하고 싶은 일들 해 가며, 그게 어쩌면 적당했던 건데. 다만 정말 잘해줄 수 있었는데 그 기회까지 날려먹은 게 내내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 어쩌면 내가 바란 게 연애가 아닌 걸지도 모르겠다. 그냥 가끔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해주고, 날 더우면 그늘 좋은데서 부채질이나 해주며 이런저런 얘기나 하고, 그런 것도 같이 하기 싫을 정도로 내가 역겹고 귀찮은 종류의 인간이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 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하기사 언제부턴가 나란 놈은 참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저 하는 얘기라곤 철학 얘기, 공부 얘기, 그런 것들 뿐이고, 나도 모르게 우스갯소리가 어색해져 버렸다. 억지로 하라면야, 그런 자리에 서게 되거나 그런 부탁을 받게 되거나 하면야 실없는 소리도 하고 기실 별 관심도 없는 연예기사들을 읊거나 어느 음식점은 뭐가 맛있네 어느 동네에 옷가게가 싸네 뭐네 하는 뻘소리를 떠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친구든 연인이든 진지한 관계가 되면 별로 그럴 의욕이 안 생기는 걸 어쩌겠나. 이렇게 징징거려도 나도 결국 근 1년 연락 한 번 더 해 본 일도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연락을 먼저 한다, 그런 건 정말이지 누구에게든 어색해서. 남들이 내게 연락을 해 오면 고맙고 반갑고 그렇긴 한데,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그리 연락을 하려고 들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무슨 권리로, 아무 허락도 없이, 다짜고짜 그 사람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와중인지도 모르면서 전화벨을 울려대고 받으라고 강요를 할 수 있는 건지. 나야 못 받을 상황이면 전화 꺼놓고, 사실 공부하는 거 말고는 딱히 일정이 빡빡한 종류의 인생도 아니고 해서 괜찮지만. 그러다 보니 그냥 가만히 있다가 연락이 끊기면 끊기는가 보다, 멀어지면 멀어지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들로서도 나 따위가 뭐 그리 대단히 아쉽고 귀중하다고 애써 시간내 찾고 자시고 하겠나, 뭐 그 과정에서 '저 새낀 연락도 안 해' 하며 내 욕을 하더라도 별 수 없지 싶다. 1년만이든 10년만이든, 그게 내 이상한 점일 수도 있는데, 나는 만나던 사람이 살갑고 정겹게 느껴진다. 어차피 나와 붙어 지내는 시간 말고는 각자의 영역이니까. 그 사이의 시간이야 내가 가타부타 할 것도 없고. 그냥 내 중심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상대편에서는 그닥 가깝게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나 혼자서 굉장히 친한 사람 취급을 해 버리기도 하고. 그래도 사실 큰 상관은 없다. 누구한테 부탁하는 성격도 아니고, 친하든 말든 보통은 상대방이 바라는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지 내가 먼저 이렇게 대해야지, 저렇게 대해야지 정해놓는 성격도 아니어서. 연애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총체적으로 인간관계가 죄다 문제인가 싶기도 하네. 어쨌든 다른 얘기가 아니라, 나랑 헤어진 친구가 딱히 미안해 하거나 아쉬워 하지 않고 새 사람 만나 즐겁게 잘 지내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으니 나도 뭔가 새삼 마음정리를 좀 하고 싶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다 죽자, 같이 망하자, 뭐 그런 게 좋을리 없기도 하고 상대는 별로 시덥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을 나혼자 부풀려서 끙끙거리고 있었던 것 같아서, 좀 객관적으로 내 생황을 돌아볼 계기도 되는 것 같고. 그래도 물론 7년을 한 사람만 보던 입장에서 그 시간이 다 헛짓거리였다는 게 좀 허망하긴 하지. 중간에 예상치 못한 그 기회만 없었으면, 지나가는 말로 했던 그 약속대로 서른 때 불쑥 들이밀고 같이 유학이나 가자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내가 좀처럼 올 일 없던 그 기회를 날려먹지만 않았더라면, 역시나 나도 좀 더 목표를 갖고 착실하게, 좀 현실적으로 애써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내게 학문이란 건 그냥 가는 데까지 주욱 걸어 나아가 보는 것 말고 목표랄 게 없고, 그 와중에 신경써야 할 현실적인 문제라고는 내 한 몸 건사하는 게 전부인지라, 사실 절박함이 없다. 쉬운 길이라 생각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피를 봐도 나 혼자 보는 거란 생각이 좀 들어서 말이다. 나랑 겹치던 그 친구 동기들과의 관계도 나만 빠지면 대충 별 다를 것 없을 듯하고, 난 조용히 사라져 주면 되는 거지 싶다. 동기녀석들은 무슨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건지 오랜만에 만난 학교 선배는 '얘기 들었다'며 안쓰럽게 쳐다 보더라만, 나야 뭐 워낙에 생겨먹기를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한 때에 굳이 끼어서 어색함을 더할 생각은 없다. 없던 일처럼, 없던 사람취급 해주면 고마울 따름이지. 난 그냥 혼자 꾸역꾸역 살다가, 좀 추하고 주변에 민폐이긴 하겠지만 지인도 없이 혼자 뒈지고, 그럼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연고지 없으면 송장이야 실험실로 가든 소각장으로 가든 어떻게 되겠지. 그 때까지 다만 정직하게, 구라빨 안 세우고, 잠자코 묵묵하게 연구만 할 수 있다면 된 거다. 잠깐 주제넘은 꿈을 꿨던 것 같다. 외롭지 않은 시간 같은, 누릴 자격도 없는 대단한 여유를 욕심냈던 것일지도. 그래도 유학가서 박사 끝나면 조금은 고립되어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스승이고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다 끊고, 아예 다른 나라 쳐박히면 그냥 조그맣고 꾀죄죄한 이방인 연구자로, 종종 커피 마시는 자리나 담배 피는 자리 가면 볼 수 있는, 이따금 별로 대단찮지만 그래도 개소리는 아닌 논문이나 몇 편 내는, 그런가 보다 하고 말 무명 연구자로 살다 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쓸데없는 기대나 희망 같은 거 없이 좀 조용하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세상일 장담은 못 하니까, 살다가 다른 인연 만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아마 그게 일이 그렇게 돌아가진 않을 듯하다. 평생 가야 달 80~100 정도 벌며 어디 단칸방에 빵이나 몇 조각 끼니 삼으며 고전이나 뒤적거리며 저 혼자 키득거릴 골방 쓰레기에게 연애니 결혼이니 좀 안 어울리는 얘기이긴 하니까. 애초에 달리 살았다면 모를까, 이젠 별로 기대하고 싶지 않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늙어서까지 교류를 하고, 장인장모에 친부모까지 다 모시고 여행을 다니고, 아들딸 귀저기 갈고 새벽까지 잠 못 자며 피식 웃거나, 뭐 그런 장면들이 그냥 소설 속 혹은 영화 속 얘기 같기만 하다. 그 삶이 맞고 더욱 가치 있다고 믿지만, 아무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아쉽게도 그렇다고 다른 쪽으로 대단히 잘 풀릴 것도 아닐 듯하지만. 학문적으로 큰 성취는 물론 힘들 테고 명성을 얻는 일도 없을 테고 안정된 자리마저 꿈조차 꾸기 어렵고, 혹은 우습고. 그저 남은 건 철학뿐이구나. 그런데 이러고 자빠져 있다. 망할. 이래저래 고민 많고 고생 많던 그 친구는 좋은 사람 만나고 일 잘 풀려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잘들 살았으면 좋겠다. 언젠가부터 멀어져 버린 연락이 닿지 않는 이런저런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 그들에게 미안해 하기도, 그들을 그리워 하기도, 아쉬워 하기도 힘에 부치고 지친다. 재능도 조건도 따라주질 않고 아무런 여유도 없는데 성격까지 못나서 노력으로 빈 자리를 채우기도 힘든 나로서는, 그냥 하루씩 버텨 나아가는 것만도 숨이 찬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차였던 게 좋은 계기였던 것 같기는 하다. 아무리 달아도 손이 안 닿는 포도가 있게 마련이다. 시든 달든 그건 상관 없고.

3. 동물이라는 유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차지하는 부분은 인간이라는 종이 동물이라는 유에 대해 차지하는 부분과 같다. 그러나 멈춤이라는 유가 부분적으로 지니는 움직임은 움직임이라는 유가 부분적으로 지니는 멈춤과 다르다. 전자는 인식작용의 수용을 통한 변화를 함의하고 후자는 인식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함의한다. 기술의 분할에서 제압의 하위분류로서 사냥과 제압의 상위류로서 획득의 아래에 곧장 자리하는 사냥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최고류의 섞임에 대한 논의를 고려하자면 주어의 자리에 오는 것과 술어의 자리에 오는 것 사이의 차이가 발생하고 이에 기초하여 볼 때 획득 아래의 사냥과 제압 아래의 사냥은 주어의 차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동물에서 인간인 부분을 논하는 일과 인간에서 동물인 부분을 논하는 일 역시 차이를 가질 것이다. 여전히 이 문제에서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사냥이 사냥으로서 지니는 동일성은 획득 아래에서든 제압 아래에서든 유지되어야 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차이 역시 해명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이라 할 만한 것은 동물이라는 상위류의 속성과 불가분한 것인가? 뭔가 질문이 주제를 엎어 버린 듯한 기분이다. 내 입장은 뭐였더라. 낚시꾼 분할에서는 획득 아래에 교환과 제압이 오고 제압 아래에 경쟁과 사냥이 온다. 그런데 이후 소피스테스 분할에서는 다시 획득 아래에 사냥이 온다. 두 사냥은 서로 다르다. 그 차이는 획득과 사냥의 교집합이 획득과 제압과 사냥의 교집합과 다르다는 점을 통해 해명될 수 있다. 아마도 이게 내 입장이었을 거다. 그리고 여기에서 계보랄지 그 층위는 고정적이지 않다. 교집합이 문제이므로 사냥과 획득의 교집합을 논하는 것과 획득과 사냥의 교집합을 논하는 것에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 이에 대한 반론이 첫째로 자연물에서 생물과 무생물, 생물에서 동물과 식물, 나아가 인간까지의 계통도이다. 여기에서는 포함관계가 고정적이고 층위는 확고하다. 기술의 경우에는 왜 그렇지 않은가? 아니다, 교집합을 논하는 것 역시 포함관계를 통한 계층의 구분이 가능하다. 문제는 교집합의 경우에 한정할 때에 어떠한가 하는 점이다. 두 번째 반론은 내가 생각해낸 것일 듯한데 운동과 정지의 문제.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식, 그리고 능력(dynamis)과 더불어 작용과 수용이라는 다른 유들이 개입한다. 정지가 부분적으로 개입할 경우는 일관되게 인식 대상의 자기동일성이 논해지고, 운동이 부분적으로 개입할 경우에는 또 역시 일관되게 인식작용의 수용결과라는 변화가 논해지며, 정지 전체의 본성 자체와 운동 전체의 본성 자체는 어떤 주어에 귀속된 것으로 논해질 수 없다. 획득과 제압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논의되는 사냥 전체의 본성 자체는 동일한 어떤 무엇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차이는 주어의 단순성과 복합성 때문에 발생한다. 씨발, 또 혼자 생각했더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이래 가지고 공부하고 살 수 있겠나, 쓰레기.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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