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헌상, 「『소피스트』에서 있지 않음과 거짓 진술」 정리


1. 내용정리

국문초록 정리

  이 글은 『소피스트』 252c-263d에 관련하여 두 가지 논점을 다룬다. 우선 252c-257a에서 최고류들의 결합 논의로부터 to me on의 있음이 보여지는 방식을 검토한다. 이 부분에서 'einai'의 다양한 용법을 구분하여 어떤 것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이 벌어져 왔는데, 그 중 한 해석은 252c-257a에서 'einai' 동사의 소위 완전용법이 전제되고 있지 않으며, 문제 되는 것은 불완전용법뿐이라고 한다. 그 근거는 256d11-e4에서 256e6-7로의 전이가 불완전용법을 일관되게 사용한다는 전제하에서만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 글은 이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적 설명을 제시하여, 문제의 전이가 완전용법으로부터 불완전용법으로의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인다. 두 번째로 252c-257a에서 확립된 있지 않은 것의 있음이 어떻게 거짓 진술 분석에 적용되는지 검토한다. 플라톤은 252c-257a에서 사용된 있지 않음을 있는 것과 다름으로 분석하는 전략이 거짓 진술 분석에 직접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포착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파르메니데스 극복과 거짓 진술 분석의 두 과제를 한 분석틀로 공략하려던 플라톤의 기획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는 236b9<263b9의 오기(誤記).>의 거짓 진술 규정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많은 논란의 근원이다.


들어가는 글

  이 글은 최고류들의 결합이 논의되는 252c부터 거짓 진술 가능성이 확립되는 263d까지의 논의전개에서 핵심 주제인, to me on의 있음이 최고류들의 결합이 최고류들의 결합을 통해 분석되는 방식, 그 분석결과가 거짓 진술 분석에 활용되는 방식을 검토한다. 이 검토의 목표는 두 가지이다. 최고류들의 결합 논의를 통해 있지 않은 것의 본성이 규명되는 과정에서 'einai' 동사의 완전/불완전용법의 역할에 관한 논란 중, 그 과정에서 'einai'의 완전용법이 역할이 없으며, 불완전용법의 'einai'가 전제된다는 해석이 있다. 우선 이에 대해 완전용법으로부터 확장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헌에 더 충실한 해석임을 보이고, 그 확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안한다. 둘째, 최고류들의 결합을 통해 밝혀진 있지 않은 것의 본성은 거짓 진술 분석에 적용될 때 문제를 일으키고,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독해의 방안들이 제안되어 왔다. 이 글은 이 문제가 핵심적인 지점에 대한 플라톤의 불명확함에 기인한다는 것이라 주장하며, 그 불명확함이 어떤 지점에서 발생하며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하나의 설명을 제안한다.


1. 소피스트의 규정과 있지 않은 것(to me on)의 문제

  엘레아의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소피스트의 본성을 규명하기 정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소피스트가 말로 된 모상(eidola legomena)을 만들어, 듣는 이들을 현혹시키는 자로 규정한다(233c).<그러나 233c에서는 '말로 된 모상'이 언급되지 않는다. 234c5-6에 대한 오기로 추정된다.> 이 규정에서 서로 연결된 두 가지 난점이 발생한다. 첫째, 모상은 진짜인 것과 다른 그것과 닮은 것으로서, 진짜인 것이 정말로 -인 것인 반면 모상은 정말로 -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모상은 정말로 모상인 것이라는 점에서 정말로 -인 것이기도 하다. 이 기묘한 섞임이 문제가 된다. 둘째, 소피스트의 기술은 이러한 모상을 만들어 속이는 일종의 속임술이다. 이 기술을 통해 우리는 거짓 믿음을 가지게 된다. 거짓 믿음은 있는 것들과 반대되는 것들을 믿음으로써 생겨나며, 따라서 거짓 믿음은 있지 않은 것들을 믿는 것이다. 또한 거짓 믿음은 전적으로 있지 않은 것들을 어떤 식으로 있다고, 전적으로 있는 것들은 어떤 점에서도 있지 않다고 믿는 것이다. 진술은 이러한 규정에서 '믿음'을 '진술'로 대체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거짓/진술 믿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 대상인 있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대상이 없다면 그러한 진술/믿음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있지 않은 것은 사유될 수도, 말할 수도, 언표될 수도 없고, 말이 안 되는 것이라 동의되었다. 때문에 거짓 진술/믿음 자체가 자기모순적이고 성립불가능한 것이며, 이에 대한 생산자로 소피스트를 규정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소피스트의 기술을 속임술로 규정하기 위해 거짓 진술/믿음을 성립 가능한 것으로 규정해야 하고, 이를 위해 그 대상이 되는 '있지 않은 것'이 있다고 규정해야 하며, 이를 위해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을 비판해야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어떤 점에서 있다는 것, 있는 것이 어떤 식으로 있지 않다는 것을 결론으로 강제해야 한다. 이는 최고류들의 결합 논의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있지 않은 것의 있음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다.


2. 최고류들의 결합과 있지 않은 것

2-1. '그 자체로'와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9-12쪽)

  편의상 운동, 정지, 있는 것, 같은 것, 다른 것을 M(Motion), R(Rest), E(Existence), S(Sameness), D(Difference)로 약칭한다. M과 R은 서로 섞일 수 없기에 둘이다. M과 R 둘 모두에 섞이는 E는 그 둘이 서로 섞일 수 없기에 세 번째 것이다. 이제 이 세 유들 각각이 자기 자신과는 '같고(S)' 나머지 둘과는 '다르다(D)'. S와 D는 모두 M과 R에 공히 속하기에, 그 둘 중 하나일 경우 다른 하나를 본성의 반대쪽으로 강제할 것이므로 S와 D가 M과 R로부터 구분된다. 다음으로 S가 E와 동일시된다면 M과 R이 모두 있다고 옳게 말하면서 그 둘이 같다고 불합리하게 말하게 되므로, S는 E와 다르다. 따라서 S는 네 번째 유이다. D와 E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있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어떤 것들은 항상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 말해진다.(255c14-15.)" 라는 진술이 등장한다. D는 항상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만 말해지는 반면 E는 두 형상 모두에 몫을 나누어 가지므로 D는 다섯 번째 유이다.

  <1> "있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어떤 것들은 항상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 말해진다.(255c14-15.)"

  <1>에서 제시되는 구분은 있음과 있지 않음의 의미에 관련되므로 그 해석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해석을 위해 구문론적 구분과 의미론적 구분이 전제된다. 이에 따르면 E의 경우 주어만을 취하는 X esti의 경우에는 구문론적으로 complete use, 보어까지 취하는 X esti Y의 경우에는 incomplete use라는 구분이 이루어지며 이는 각기 의미론적으로 전자가 존재를 나타내고, 후자는 다시 동일성의 의미와 서술의 의미로 구분된다. 이를 전제로 크게 세 가지 입장이 제시된다.

  1) '그 자체로'는 complete use를,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는 in-를 의미하며, E는 두 용법 모두를 지니고 의미론 상에서 각기 존재와 동일성으로 구분된다. D는 (구문론적으로) 후자의 용법만을 지닌다.
  2) 두 구분 모두 구문론적으로 in-을 의미하며, 의미론적으로 E의 경우 전자가 동일성, 후자가 서술로 나뉘고 그 각각이 순서대로 E의 '그 자체로' 쓰인 경우와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쓰인 경우에 해당한다. D는 (구문론적으로나 의미로적으로나) 후자의 용법만을 지닌다.
  3) 구문론상으로 '2)'의 구분과 같으나, E의 경우 서술관계에 따라 주어와 보어가 경우에도 '그 자체로'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희다"의 경우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흼으로써(by being white)가 아니라 그 성질을 가짐으로써(by having this feature) '다른 것과 관련하여,' 다른 어떤 것에 참여함으로써, 즉 색(color)과 관련하여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희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그 색이 희고 색이라고 말할 때, 그 색은 이런 성질을 가짐으로써 그 성질에 참여함으로써 희고 색인 것이 아니라, 그것임으로써, 그 자체로 희고 색이다. D의 경우 그 색은 핑크색과 다르다. 그러나 그 색이 핑크색이지 다른 것임으로써 그 자체로 핑크색과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인 다름과 관련하여 다름이라는 성질을 지니고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핑크색과 다르다.


2-2. 상이한 유들의 다양한 결합.(12-14쪽)

  다섯 유는 상이하며 서로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결합한다. 유들이 서로 다른 것이면서도 상호 결합한다는 사실로부터 me on이 on일 수 있는 가능성이 확보되기에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엘레아의 손님은 255e11-256d10에 걸쳐 M이 그 외의 네 유와 가지는 관계를 검토한다.

   1. 운동과 정지(255e11-256a2)
  1.1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
  1.2 따라서 운동은 정지가 아니다.
  1.3 운동은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1.4 따라서 운동은 있다.
 
   2. 256a3-9
  2.1 운동은 같은 것과 다르다.
  2.2 따라서 운동은 같은 것이 아니다.
  2.3 운동은 같은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2.4 따라서 운동은 같은 것이다.

   3. 운동과 다른 것(256c3-d4)
  3.1 운동은 다른 것과 다르다.
  3.2 따라서 운동은 다른 것이 아니다.
  3.3 운동은 다른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3.4 따라서 운동은 다른 것이다.

   4. 운동과 있는 것(256d5-10)
  3.1 운동은 있는 것과 다르다.
  3.2 따라서 운동은 있는 것이 아니다.
  3.3 운동은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3.4 따라서 운동은 있는 것이다.

  2-4를 통해 엘레아의 손님이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은 외견상 모순적으로 보이는 언명들이 동시에 참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주된 관심사는 2.2와 2.4, 3.2와 3.4, 4.2와 4.4의 쌍이 된다.


2-3. 'einai의 (의미론적)애매성'과 '뒤따르는 단어들의 애매성'.(14-16쪽)

  2.2와 2.4, 3.2와 3.4, 4.2와 4.4의 쌍이 외견상 모순되면서도 동시에 참일 수 있는 설명은 다음의 구절에서 발견된다.

  <2> "그러면 우리는 운동은 같은 것이자 동시에 같은 것이 아님을 거리낌 없이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같은 것이고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같은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ou... homoios eirekamen). 우리가 그것을 같은 것이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자신과 관련해서 같은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것을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는, 다른 것과의 결합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운동은 다른 것과의 이 결합으로 인하여, 같음과 분리됨으로써,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운동이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옳게 말하는 것입니다(256a10-b4)."

  M은 자신 이외의 유들에 대해 그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것들이 되지만, D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것들이 아니게 된다. 이 과정에서 metechein을 통해 긍정되는 것은 M을 주어로 하여 그것과 그 외의 유들 사이의 서술관계이다. 반면 부정되는 것은 M을 주어로 하여 그 외의 것들과의 동일성 관계이다. 즉 앞서 외견상의 모순은 E의 의미론적 구분이 지니는 애매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가 그 동사의 애매성을 강조하지도 않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때문에 이 논의가 einai의 애매성을 강조하기 위해 진행되었다는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플라톤이 강조하고자 한 지점이 einai의 보어가 지니는 애매성이라는 견해가 제시된다. 앞서 2.2와 2.4의 경우 동일한 표현인 'tauton'이 사용되지만 2.2는 그것이 추상명사를, 2.4는 형용사를 의미한다. 반면 D와 E의 경우 'to heteron'과 'to on'이 그 자체로 형용사로 쓰일 수 없다. einai의 보어로 3.2, 4.2에서 이 두 표현이 그대로 뒤따랐다면 3.2와 3.4, 4.2와 4.4 사이의 표현상의 차이로 인해 외견상의 모순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3.2와 4.2에서 관사를 생략함으로써 3.2와 3.4, 4.2와 4.4 사이에 작위적으로 외견상의 모순을 만들어낸다.
  좀 더 보충하여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3.2, 4.2 등에서 '~이 아니다'의 경우 이는 동일성의 부정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의 보어로는 관사가 붙어 실체화된 추상명사가 자리해야 한다. 반면 3.4, 4.4에서는 그 문장이 의미하는 것이 서술관계이므로 esti 이후에 추상명사가 아닌 형용사가 따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3.2, 4.2에서 'to heteron'과 'to on' 등의 표현으로 관사를 통해 그것들이 추상명사임을, 따라서 그 문장의 의미가 3.4, 4.4의 서술관계와 달리 동일성에 대한 부정의 문장임을 정확히 표현했다면 두 표현들 사이의 외견상의 모순이 강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외견상의 모순이란 동일성 관계와 서술 관계가 구분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드러나는 부정관계와 긍정관계 사이의 모순이다. 다만 Brown(2008)은 D와 E뿐만 아니라 S에 대해서도 플라톤이 정확한 표현을 위해서 관사를 사용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므로(p447),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조심스러운 요약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운동이 다르다(ἕτερον ἐστί)'와 '운동은 다른 것이다(ἕτερον ἐστί)'의 번역상의 차이에도 주의를 기울였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네 가지 외견상의 모순은 형용사와 추상명사가 표현상 구분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나, 위 번역은 표현상으로 그 차이를 드러내기 떄문이다.
  덧붙여, 'esti heteron tou heterou'와 'ouk heteron esti'에서 전자에 등장하는 'to heteron'은 위 논의에서 언급되는 외견상의 모순과 관련된 표현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esti heteron'과 'ouk esti heteron' 사이에서 서술관계로서 긍정을 의미하는 전자와 동일성 관계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후자 사이에, 각기 형용사와 추상명사를 의미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의 heteron이 표현상 같음에서 드러나는 모순이다. 'tou heterou'의 경우 이러한 표현상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관사를 생략함으로써 표현상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주장 자체는 철회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필요한 일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에 문제의 애매성을 확정지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후로 유들 사이의 관계에서 상이한 방식들을 통해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제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4. 'einai'의 (의미론적)애매성의 해석과 두 가지 난점.

  <3> "그러면 운동에 관해서 그리고 모든 유들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점은 필연적이군요(estin ara ex anankes to me on epi te kineseos einai kai kata panta ta gene). 왜냐하면 모든 것들에 관해서, 다른 것의 본성은 각각의 것을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드니까요(ouk on poiei). 그리고 모든 것들이 같은 식으로 이렇게 있지 않다고, 그리고 또 다시 그것들은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고 또한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옳게 말하는 것입니다(256d11-e4)."

  이는 앞서 M과 E의 관계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일반화된다.

  (E를 제외한) 유 X에 관해서:
  (1) X는 E와 다르다 → X는 있지 않은 것이다.
  (2) X는 E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 X는 있는 것이다.
  (3) 따라서: X의 경우,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4>"그러면(ara) 형상들 각각에 관해서, 있는 것은 수가 많지만, 있지 않은 것은 셀 수 없이 많다(peri hekaston ara ton eidon poly men esti to on, apeiron de plethei to me on)(256e6-7)."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우선 1) 있는 것(to on)과 있지 않은 것(to me on)은 불완전용법으로 간주되고, 2) '~에 관해서 있는 것'의 의미는 einai의 converse use로 간주된다. Converse use는 예를 들어 'X는 F이다'가 'X에 관해서 F가 있는 것이다'와 동치로, 'X는 F가 아니다'가 'X에 관해서 F가 있지 않은 것이다'와 동치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전제 하에서 각각에 관해 있는 것이 수가 많다는 것은 서술관계를 참으로 만드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고, 있지 않은 것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은 동일성의 부정을 참으로 만드는 F가 무수히 많다는 것이라 해석된다. 이 해석에 따라, 그리고 논리적 연결을 함의하는 'ara'에 주목할 때, <3>의 on을 complete use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를 근거로 나아가 『소피스트』 전체에서 complete use는 역할이 없다는 주장도 제시된다. 그러나 <3>에서 그리고 그 이전의 맥락에서 M이 E의 몫을 나누어 가짐은 M을 독립적인 하나의 유로 확립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표현이고, 그 과정에서 'M은 ( )이다'의 incomplete use를 적용할 경우 부자연스럽기에 인용 3.에서는 complete use가 더 자연스럽다. 반면에 <4>는 incomplete use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둘 사이의 차이에 더하여 두 번째 차이가 있다. <3>에서 on과 me on은 E와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었고 그 관계를 통해 M 자체를 가리켰다. 반면 <4>에서 M에 관한 on은 M에 관하여 그것의 몫을 가지는 유들을 일반화해서 가리킨다. me on 역시 M이 아닌 그것과 다른 모든 유들을 가리킨다. 이 두 차이로 인해 <3>은 complete use, <4>는 in-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든 둘 모두 in-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든 두 대목 사이에서 모종의 확장, on과 me on을 규정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으나, 이를 설명하는 데에는 어느 쪽이든 어려움을 겪는다.


2-5. <3>의 완전용법(존재)에서 <4>의 불완전용법(서술)으로의 연속과 확장.(21-22쪽)

  <3>에서 어떤 것은 E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방식을 <4>에 적용하여 S가 M에 관련해 있는 것이 되는 것은, M이 나누어 가지는 E를 나누어 가진다는 점에서 M에 관해서 있는 것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의 경우에도 <3>에서 다름을 통해 규정되었듯 <4>에서도 또한 S가 M이 나누어 가지는 E와 다름을 통해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E 자체와 다른 것'은 'M이 나누어 가지는 E와 다른 것'과 차이가 있다. <4>에서 E 자체는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의 예이나, E 자체는 자기 자신과 다를 수 없으므로 E 자체와 M이 나누어 가지는 E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방식으로 볼 때 <3>에서 M은 E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는 것이 되고, <4>에서 S는 M이 나누어 가진 E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M에 관하여 있는 것이 된다. 이는 '몫을 나누어 가짐'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해석이며, <3>과 <4>의 차이는 단지 새로운 항 S가 추가되었다는 점뿐이다.
  이를 통해 <3>에서 <4>로 on과 me on의 의미 변화가 극단적 비약이 아니기 위해서는 <4>에서와 마찬가지로 <3>에서도 on이 불완전용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약화된다. <3>에서 M은 E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4>에서 M이 나누어 가진 E를 S가 나누어 가짐으로써, S는 M에 관해서 있는 것이 된다. E를 나누어 가진다는 관계의 방식과 그 결과로서 있는 것이 된다는 결과가 연속되므로, E의 의미와 그것에 관련하는 방식은 연속된다. 즉 이것은 <4>에 대해 <3>에서 'einai'의 완전용법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불완전용법이 적용된 것이 아니라 'einai'의 완전용법이 확장되어 적용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다름의 경우 einai 자체와 M의 einai가 구분되었으므로, S는 있는 것이면서(einai 자체에 대한 몫을 가짐으로써) 동시에 M에 대해서는 있지 않다는 것이 설명될 수 있다(M이 가진 있음과는 다름으로써).


2-6. 있는 것이 있지 않음.(23쪽)

  <5>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있는 것은 나머지 것들이 있는 그 만큼 있지 않습니다(hosaper esti ta alla, kata tosauta ouk estin). 그것이 이 나머지 것들이지 않은 한,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이지만(ekeina ... ouk on hen ... auto estin), 그것은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것들이지 않으니까요(aperanta ... ton arithmon talla ouk estin)(257a4-6)."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일 수 있음을 보인 뒤, 엘레아의 손님은 있는 것이 있지 않은 것임을 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표면적이다. <5>에서 E가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3>가 아닌 유들이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사태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앞서의 해석에 따르자면 <3>에서 M은 E 자체와 다름으로써 있지(E) 않은 것이다. 반면 <5>에서 E는 M이 E 자체에 대해 나누어 가진 몫으로서 M의 E와 E 자체가 다르다는 점에서 M에 대해서 있지 않은 것이다.


3. 있지 않은 것과 다른 것, 그리고 거짓 진술

3-1. 거짓 진술의 본성, 있는 것의 반대가 아닌 있는 것과 다른 것.(24-26쪽)

  257a12까지의 논의를 통해,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임이 보여졌고, 따라서 거짓 진술이 무언가 어떤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임을 보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엘레아의 손님은 곧장 거짓 진술에 대한 논의로 진입하지 않고 257b1-259d8까지의 또 다른 논의를 진행한다. 특히 이 부분의 내용이 뒤따르는 거짓 진술의 분석에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해석상의 난점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있지 않음, 다름, 거짓 진술이라는 세 주제를 하나의 연관된 주제로 다루는 과정에서 플라톤의 불명확한 구분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다.
  257b3-4에서 손님은 "우리가 있지 않은 것을 말할 때마다, 우리는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와 다른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예를 들어(hoion), 우리가 어떤 것을 "크지 않다(me mega)"고 말할 때, 우리가 그 표현으로써 같은 것(to ison)보다 작은 것(to smikron)을 더 지시하는 것으로 당신에게 보입니까?"라고 묻고 이 예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일반화한다. "그러면 부정어가 반대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될 때, 우리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단지 다음과 같은 점에만 동의할 것입니다. 그 앞에 놓인 'me'와 'ou'는 그 다음에 오는 이름들과는 다른 어떤 이름을 드러낸다는 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부정어 다음에 언표되는 이름들이 관련하는 사물과는 다른 어떤 사물을 드러낸다는 점 말입니다(257b1-c4)." 257e6-258a6에서는 부정어를 뒤따르는 단어의 또 다른 예로 아름답지 않은 것, 크지 않은 것, 정의롭지 않은 것이 등장한다. 이것들의 짝으로 아름다운 것, 큰 것, 정의로운 것을 더해 각 쌍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덜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이유는 전자가 후자에 대비되는, 다른 것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예시된 부정에 뒤따르는 이름들은 다른 것의 부분이고, 다른 것이 있는 것이므로, 부정에 뒤따르는 이름들 역시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밖의 다른 것들에 관해서도 동일한 식으로 말을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의 본성은 있는 것들에 속한다는 점이 밝혀졌고, 그리고 다른 것의 본성이 있으니, 이것의 부분들도 결코 어떤 것에도 못지 않게 있다는 점을 반드시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258a7-9)." 'me/ou+X'가 다른 것의 부분이고, 그러한 한에서 있는 것이라는 원칙이, 있는 것에 적용된다. "그렇다면, 다른 것의 부분의 본성(he tes thaterou moriou physeos)이 있는 것의 본성에 대비되었을 때(antikeimenon) 이 대비(antithesis)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면, 있는 것 자체 못지않게 존재(ousia)인 듯합니다.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과 다른 것만을 의미하니까요." 그리고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이 대비,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서의 '있지 않은 것'이 소피스트의 정의를 위해 찾던 '있지 않은 것'임을 선언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의 반대'가 아닌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 확립하는 일이다.


3-2. 거짓 진술의 두 규정과 문제점(26-27쪽)

  '있지 않은 것'을 일종의 대비로 이해하여 이를 거짓 진술의 분석에 적용되는 방식이 검토되어야 한다. 거짓 진술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6> (X에 관한) 거짓 진술은 X에 관해서 있는 것들과 다른 것들을(hetera ton onton) 말한다(263b9).
  <7> (X에 관한) 거짓 진술은 X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들을 있는 것들로서(ta me onta ... hos onta) 말한다(263b11-12).

  그리고 '테아이테토스는 난다'라는 진술을 거짓 진술로서, '테아이테토스는 앉는다' 라는 진술을 참인 진술로서 예시한다. 전자의 경우 <6>의 규정이 적용되어, '테아이테토스는 난다'는 그것이 테아이테토스에 관해서 있는 것들과 다른 것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이다. 여기에서 '테아이테토스에 관해서 있는 것들'은 <5>를 고려하면 테아이테토스가 몫을 나누어 가지는, 혹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F라고 하는 진술을 참으로 만드는 속성 F들이라 보는 게 자연스럽다. 반면 '테아이테토스는 앉는다'에 포함되어 있는 '앉음'은 그러한 속성일 것이다. 이제 거짓 진술은 테아이테토스에 관해서 있는 것들 중 하나인 앉음과 다른 날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앉음'과 다르지만 '테아이테토스는 F이다'를 참으로 만드는 많은 속성들을 통한 참인 진술들을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는 젊다"라는 진술이 참이라면, 그럼에도 '젊다'라는 속성은 '앉아 있다'라는 속성과 다르기에, 이는 또한 거짓 진술이다.


3-3. 해석의 제안들(27-29쪽)

  '앉음'과 다르지만 테아이테토스에 대해서 있는 것들이 만드는 참인 진술들은 '다름'으로서의 '있지 않음'을 통해서 설명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 세 가지 해석들이 있다.

  1) Oxford interpretation이라 불리는 입장은 <6>에서 '있는 것들'에 보편양화사를 추가하여 해석한다. 테아이테토스에게 '실제로 귀속되는 모든 속성들'과 다른 것이 그에 관해서 거짓이다. 즉 '날고 있음'이 단지 '앉음'과 달라서가 아니라 그에게 실제로 귀속되는 모든 속성들과 다르기 때문에 '테아이테토스가 난다'는 거짓 진술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문헌에 없는 양화사의 도입을 설명할 부담이 있다.
  2) <6>에서의 '다름'을 양립불가능성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앉음'을 테아이테토스가 가지고 있는 속성으로 볼 때 '난다'는 속성은 반대관계로서 '앉음'과 양립불가능하다. 혹은 테아이테토스가 가진 인간이라는 속성이 날개 달린 짐승이라는 속성과 모순되므로, 날개 달린 짐승이라는 속성에 귀속되는 '난다'는 속성 또한 테아이테토스가 가진 속성과 양립불가능하다. 나아가 특정 범주를 한정하여, '색'이라는 범주 내에서 흰색은 희지 않은 모든 색과 양립불가능하다는 식으로 거짓 진술에서의 다름을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거짓 진술의 일반적 규정을 제공하긴 하지만, 반대가 아닌 다름을 강조하는 이전까지의 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
  3) '다름'의 범위를 한정한다. 예를 들어 '크지 않은 것이 작은 것 못지 않게 같은 것을 지시할 수 있다'는 말에서 큼, 작음, 같음은 한정된 범위에 속하며 한 속성은 '다른' 속성들 각각 모두와 양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역시 명시적 언급이 아닌 추정에 근거한다.

  세 해석들 중 1)이 다름의 앞서 드러난 의미인 비동일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들'이 보편양화사를 내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자연스럽다고 판단된다.


3-4. 비동일성과 서술관계의 부정(29-30쪽)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추가적인 해석이 요청되는 이유는 <3>과 <4>에서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인 있지 않음이 거짓 진술에서의 있지 않음과 의미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3>과 <4>에서 다름은 비동일성을 의미하며, 이는 "M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언명을 만족스럽게 설명한다. M을 제외한 모든 유들이 비동일성 조건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명을 거짓 진술에 적용할 경우,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있지 않은 것들은 테아이테토스와 다른 것들이며, 이 경우 앞서 예시한 '젊음'을 테아이테토스에 대하여 진술하면 거짓 진술이 된다.
  'X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을 'X와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전략은 거짓 진술 분석에 곧바로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엘레아의 손님은 263b7-10에서 거짓 진술에 대한 규정을 하며 <4>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연관된 틀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제는 'X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을 동일성의 부정이 아니라 서술관계의 부정으로 이해하는 일이 거짓 진술 분석에 필요했다는 점이다. 거짓 진술이 '(어떤 것에 관해서) 있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규정될 때, 그 '있음'이 동일성이 아닌 서술관계를 내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 규정은 직관적으로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3-5. 비동일성과 서술관계의 부정 사이의 불명료함(31쪽)

  <6>에서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3>과 <4>의 설명틀이 견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6>에서 '있는 것과 다른 것'은, M을 예로 들면 M과 다른 어떤 유가 아니라, M과 관련해 있는 유와 다른 어떤 유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서는 각 유 자체의 상호 다름이 아니라 한 유에 속하는 유에 대한 다른 유의 다름을 논하고 있고 이는 <3>과 <4>에서 논의되지 않는 주제이다. '크지 않은 것'을 '작은 것' 못지 않게 '같은 것'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표현을 '큰 것과 다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앞서 언급하였듯 263b7-10에서 <4>를 가리키는 듯한 손님의 언급 때문에 이것이 'me/ou+X'에 대해 <3>, <4>와 다른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는 것을 의식하고 또한 의도한 것이라 확답하기도 어렵다. 또한 동일성 부정어가 아닌 서술 부정어 분석을 의도하고 의식했다면, 'me/ou+X'이 X와 다름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3>, <4>에서 'me/ou+X'가 비동일성으로 분석되었기 때문이다.


3-6. 두 가지 논파와 하나의 이론적 도구(31-32쪽)

  이러한 문제는 다름을 통한 있지 않음의 분석이라는 하나의 도구로 파르메니데스를 논파하여 세계에 다수의 존재들이 있고 그것들에 대해 다양한 참된 진술이 가능함을 보이려는 일과 거짓 진술의 역설을 극복하는 일이라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비동일성 혹은 다름으로서의 있지 않음은 세계에 다수의 존재자들이 있을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또한 이 존재자들 사이에 '몫을 나누어 가짐'의 관계가 개입하여 다양한 진술들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는 <6>에서 거짓 진술의 규정에 직접 적용될 수 없다.
 

2. 평가

  구문론적 구분과 의미론적 구분을 중심으로 유들의 결합과 그 속에서 metechein과 다름으로서의 to me on에 대한 가능한 해석들을 정리하고 이를 거짓 진술에 대한 분석에 적용한 입장들을 정리함으로써 to on과 to me on, 유들의 결합, 거짓 진술 세 가지 문제들이 각기 어떻게 이해되고 있으며 또한 서로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구도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기존 연구들의 상이한 입장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 또한 이 연구의 결실이라 생각된다. 다른 한편 동일성 관계와 서술 관계, 그리고 각각에 대한 부정이라는 이론적 도구로 해석상의 여러 상이한 난점들을 일관된 시각에서 분석한 점은 이 논문에서 특히 중요한 시도로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있음의 몫을 나누어 가짐'과 '다름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있지 않음'을 중심으로 einai의 완전용법이 불완전용법으로 확장될 수 있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한 점 역시 눈에 띈다. 이는 <3>에 대해 문헌에 충실한 해석을 견지하면서도 <4>에서 확인되는 einai의 의미 확장을 적절히 설명해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즉 특정 대상을 주어로 삼아 그것에 대해 서술관계를 맺는 속성들은 그 대상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들로 이해될 수 있고, 이러한 한에서 불완전용법의 의미들 중 하나로 간주되는 서술관계가 완전용법을 통해서도 해명될 수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 과정에서 X의 있음과 있음 자체의 구분은 이 이론적 도구의 확장된 적용 혹은 일반화의 가능성 또한 열어준다.
  이 해석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검토해 보자. 예를 들어 '나무는 땅이 아니다'라는 진술은 앞서의 해석을 통해 '나무는 땅의 있음과 다름을 통해 땅에 대해 있지 않다'라고 바꾸어 진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땅에 있다. 이 경우 '땅에'라는 표현은 장소를 표현하는 부사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유들의 결합에서 언급되는 최고류들은 물리적 공간과 무관한 논리적 사태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유들의 결합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는 땅이라는 장소에 위치하는 나무와 그 장소로서의 땅 사이의 관계를 직접 해명할 수는 없다. 다만, '장소' 역시 일종의 고유한 유로 간주할 수 있다면, 장소를 매개로 나무가 땅의 있음에 대해 몫을 나누어 가진다는 설명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추정해 보자면, 장소가 땅의 있음에 대해 몫을 나누어 가지고 바로 이러한 있음을 다시 나무가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이 경우 땅에 나무가 있다는 사태를 설명할 여지는 남을 것이다. 즉 나무는 땅에 대해 있으면서 또한 땅에 대해 있지 않을 수 있다. 이로부터 추론 가능한 점은 있음 자체로 부터 그 몫을 나누어 가진 어떤 것에 대해 있음, 또 그 나누어 가져진 있음에 대해 몫을 나누어 가짐 등의 관계를 통해 '있음의 몫을 나누어 가짐'이 복잡한 중첩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각 단계마다의 있음에 대해 바로 그 각각의 있음과 다름을 통해 여러 층위의 '있지 않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추정을 바탕으로 <4>로 돌아가 보면, '있음의 몫을 나누어 가짐'의 관계는 제한적이다. 일차적으로 있음 자체에 대한 나누어 가짐이 전제되는 한에서, 이런 방식으로 있는 것이 된 각각의 것들의 수만큼 유한한 있음들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있는 것들이 진술되고, '각 유에 대해' 있는 것들은 각 유가 각기 나누어 가진 그 있음에 한하여 그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 것들로 또한 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있지 않은 것들은 무한히 많을 것인데, X라는 유의 있음을 나누어 가지는 Y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X와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기에 또한 있지 않은 것이며, 아예 X에 대해 나누어 가짐의 관계를 갖지 않는 것들 또한 모두 각기 고유하고 자기 자신과 같으며 X와 다르다는 점에서 X에 대해 있지 않은 것들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확인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M은 S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 인해 같은 것이다(256a). 반면 S가 M이 지닌 E의 몫을 나누어 가지면 'S는 M에 대하여 있는 것이다'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를 esti를 통해 표현하면 'M esti S(-ame)'이 될 것이다. 이는 다시 'M은 같은 것이다'라는 앞서의 표현과 동일하다. E 자체와 E 이외의 유가 지닌 E 사이에서는 각 유의 고유한 존재와 어떤 다른 유에 대한 존재라는 의미의 구분이 가능하다. 그러나 E 이외의 유가 지닌 E에 대한 metechein은 E 이외의 유 자체에 대한 metechein과 구분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metechein의 주어가 S이고 그 대상이 M이 지닌 E인 경우가 역으로 M이 주체가 되고 그 대상이 S가 되는 경우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즉 두 경우 모두 'M이 S이다'라는 M에 대한 S의 서술관계로 귀결된다. 그러나 M과 R의 경우(256b6-8)에서 알 수 있듯 M은 R에 대해 직접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정지한 것이라 부를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어떤 것이 M에 대해 몫을 나누어 가진다면 그 주체가 되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 될 것이고 '어떤 것이 움직인다'고 진술될 것이다. 따라서 위 해석에 따를 경우 'S가 M의 E에 대한 몫을 나누어 가짐'을 'S가 M의 몫을 나누어 가짐'과 구분하고 또한 전자를 'M이 S의 몫을 나누어 가짐'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나 해석이 문헌 상으로 어느 정도까지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 문헌 상의 정당화에 있어서 문제는 서술관계를 매개하는 'X가 그 몫을 나누어 가진 E'와 역시 서술관계를 성립시키는 'X의 몫을 나누어 가짐'이 중첩될 때, 어째서 두 표현 중 전자만이 명시적으로 등장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문제는 E 자체와 X의 E 사이의 분명한 의미 차이가 발생하므로, 이 차이를 발생시키는 추가적인 조건이 둘 사이의 연속성 속에서 해명되어야 한다는 요구로 볼 수도 있다.
  이는 이후 거짓 진술의 문제에서 플라톤의 서술방식을 비판하는 입장과 일관되지 못한 측면 또한 있다. ~E와 D의 관계를 유들의 결합에서 거짓진술의 분석으로 적용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추가된 부분, 동일성의 의미에서 서술의 의미로의 전환 혹은 확장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들의 결합을 논하는 부분과 거짓 진술을 분석하는 부분의 차이는 문헌을 통해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는 반대의 주장도 가능하다. 상기 논문에서는 문헌 상에 이름(주어)과 말(동사)의 구분이 거짓 진술의 분석에 앞서 진술 자체의 분석 단계에 이르러 추가되었음에도 이에 대한 고려가 없다. 유들의 결합과 달리 말은 앞서 '모상'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유들의 결합과 진술에서 이름과 말 사이의 결합을 단순히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또한 다름으로서의 to me on 규정을 통해 모든 각각의 것이 자신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to me on과 필연적으로 결합할 수밖에 없음에도 손님은 소피스트가 진술의 경우 to me on과 결합하지 않을 것이라 재반박할 것이며 따라서 말과 믿음과 인상이 무엇인지를 추적해야 한다고 말한다(260d5-261a4). 이 재반박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도 역시 유들의 결합과 진술에서의 결합을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모상의 규정과 거짓의 규정 역시 구분해야 한다. 만일 단순히 있는 것들 사이의 대비로서 다름이 거짓에 적용되는 '있지 않음'이라면, 그 있지 않음의 역할은 어떤 것을 그 외의 것들과 다른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 없이는 다른 것들과의 구분이 불가능하므로 그것을 이름할 수도, 가리킬 수도, 말할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한에서 대비로서의 있지 않음은 모든 유들에 필연적으로 결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말의 경우, 손님은 이것들이 있지 않은 것과 섞인다면 거짓된 믿음과 말이 생긴다고 말하고 테아이테토스 또한 이에 동의한다(260c1-5). 이는 적어도 유들의 결합에서 다름을 통해 도출되는 결과와는 다른 결과이다. 더욱이 257d11-257e5까지의 내용은 아름답지 않은 것(to me kalon)을 "있는 것들 중의 어떤 한 유의 부분으로 구분됨으로써, 그리고 다시 또 있는 것들 중 무언가에 대해 대비됨으로써"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구분됨'으로 옮긴 'aphoristhen'은 단순히 '분리'만을 의미하지 않고 '따로 규정됨,' '따로 정의됨'을 의미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인용된 257b1-c4를 다시 보면, 부정에 뒤따르는 이름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름들(onomata),' 나아가 '사태들(pragmata)'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려들에 비추어 볼 때 '대비'로서의 to me on은 그 자체로 고유한 본성을 지닌 개별적인 유 또는 이름이나 사태라 해석할 여지가 남는다. 이 역시 유들의 결합에서 대비로 이해된 '있지 않음'이 수행하는 역할이 말과 믿음에 결합하여 거짓을 산출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근거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엘레아의 손님 혹은 플라톤 자신이 유들의 결합에서 규정된 다름과 to me on을 거짓 진술 분석에도 일관되게 사용하고자 한다거나 혹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최소한 거기에 추가되는 요소가 문헌 상에 등장하지 않는다고까지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이러한 차이를 논문에서는 동일성의 부정과 서술관계의 부정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이 구분을 불명확하게 하여 전자에서 다름으로서의 있지 않음이 수행하는 역할을 그대로 거짓 진술 분석에 적용하려 한 것이 문헌 상에 드러나는 플라톤의 문제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말, 생각, 믿음, 인상이 무엇인지 추적해야 한다는 손님의 주장(260d5-261a4)은 이전까지의 있지 않음을 거짓 진술 분석에 적용함에 있어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플라톤이 의식하고 있다는 충분한 문헌상의 근거로 보인다. 덧붙여 추상적 혹은 보편적인 것으로 보이는 유들 사이의 결합은 진술 분석에서 제시된 '테아이테토스'라는 구체적인(더욱이 '지금 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라는 한정까지 붙는, 263a9) 한 사람과 그를 가리키는 이름, 그리고 그의 현재 진행 중인 행위로서 '날고 있다'나 '앉아 있다'와 그에 대한 동사들 사이의 결합과 큰 차이를 보여주며, 이러한 예시를 선택한 것은 플라톤 자신이라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부적으로는 위 논문의 21쪽에서 'M과 완전히 분리된 R'이라는 표현에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256b6-8을 고려할 때 M과 R이 서로에 대해 몫을 나누어 가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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