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de, M. "Plato's Sophist on false statements," in Cambridge Companion to Plato, ed. R. Kraut (Cambridge, 1990), 397-424. 논문에 대한 번역 및 요약, 정리인데 난 나를 믿지 않으니 보시는 분들께서도 저를 믿진 마시고 책을 빌리시든 구입을 하시든 알아서들 하시길.

1) 『소피스테스』의 대화자들인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소피스테스의 본성을 규정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소피스테스적 활동의 현상이 매우 다양하고 비정형적이며, 그들이 기껏해야 소피스테스의 피상적 특징 일부를 포착하는 데에 그치기에, 이 현상 기저의 난해한 실재를 파악하는 데에 실패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31c8-e7까지 이러한 내용이 요약되고, 232a1 이하로 소피스테스를 포획하기 위해 재개된 시도는 이 대화편의 나머지 부분이 그 해결에 할애되는 난점들 속으로, 더 핵심적인 문제를 향해 나아간다. 그 시도는 소피스테스가 사물들에 대해 그의 재현(모방), 진술이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그러한 것으로 보이고 여겨지도록 만드는 두드러진 능력을 지닌다는 제안이다. 이 제안은 235d2, 236c9 이하에서 시사되고, 236d9 이하에서 자세히 다루어지는 일련의 난점들을 야기시킨다. 이 문제들을 활용하여 소피스테스는 대화자들이 제안한 규정을 기각하고 그 포획으로부터 다시금 달아난다(cf. 239c9 이하, 241a3). 그 난점들은 요컨데 거짓 진술들의 가능성에 관하여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진술이 진술이기 위해서는 그 진술이 말할 어떤 것을 다루어야 하다. 즉, 그 진술로써 이야기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에서 거짓 진술은 what is not (혹은 what is not being)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거짓 진술은 진술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거짓 진술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러하다면 더욱이, ~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식으로 ~이지 않은 그러한 거짓 믿음들에 관련한 문제들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거짓 인상들의 문제 또한 있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인상에 관련하여서도 그런 문제가 있다. 그것이 실제로 참된 것 자체는 아니지만 단지 그것의 인상인 한에서, 어떤 식으로는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으나, 또 확정짓기 어려운 어떤 특수한 의미에서는 참이다(cf. 236e1-2, 239c9-240c6).[397-398쪽]

2) 이 문제들 대부분을 처리하려 시도하면서 손님은 거짓 진술들에 대한 그 핵심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서 그는 거짓 진술과 같은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고자 하며, 이 과정에서 거짓 진술의 가능성에 관련하여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혼란들을 정리하고자 시도한다. 그의 관점은 이러한 혼란들이 최소 두 가지 원천을 지닌다는 것인 듯하다. 첫 번째, 이 혼란들은 "not being"에서 부정 불변화사 "not"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이 오해로 인해 what is not, 혹은 what is not being을 전혀 아무것도 아니고 그래서 진술 내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 어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진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혼란이 있다. 이로 인해 한 진술의 진리치가 한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되거나 혹은 서술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야기된 것에 대한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일단 이 점을 인식하고, 또 "not being"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해석될는지 이해하고 나면,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우리는 또한 거짓 진술에 의해 이야기되는 것이란 ~이지 않은(that is not)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것 없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그것이 이야기하는, 문제가 되는 특정한 주어의 경우에서 (참)이지 않은 어떤 것일 뿐, 완벽하게 실제로 무엇인 것이다.[398쪽]

3) 그 문제에 대한 이러한 진단을 고려할 때, 플라톤은 두 단계를 거쳐 나아간다. 그는 우선(241c7-259c4) ~이지 않은 것(something that is not)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없음을 보이려 한다. 다음으로 (259c5 이하) 그는 진술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을 단언하는 진술을 말하는 것이 어떤 방식에서 문제가 없는 것인지 보이고자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자신이 처음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236e4-237a1) 떠맡았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왜냐하면 누군가 거짓들이 실제로 있다고 이야기하고 또한 생각하는 경우 그 문제를 어떻게 제기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을 언표하면서,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테아이테토스, 전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네.(거짓들을 진술한다거나 믿는다고 말하는 경우 어떻게 실제로 거짓들이라고 <단언>해야만 하는지, 그리고 이런 것을 언표하면서 모순을 강제받지 않는다는 것은, 테아이테토스, 전적으로 어려운 일일세.)" 플라톤이 어떤 면에서 자임하는 목표가 상당히 소박한 것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 목표는 거짓 진술들에 관련하여 누군가 야기시키고자 바라거나 혹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난점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관한 일관된 사유방식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여 더 이상 문제점을 노출시키지 않을 듯한 그런 사유방식을 찾아내는 것이다.[398-399쪽]

4) 그렇더라도, ~이지 않은 것, 즉 being이 아닌 것이 무엇일지에 관한 논의는 거짓 진술이 무엇일지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한 까닭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플라톤이 ~인 것, a being이라는 생각이 ~이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 전혀 못지 않게 혼란스럽다고, 그리고 이 두 혼란들이 관계맺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관점에서 not being에 관한 문제들은 단지 "… is not being"에서 "not"의 기능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관한 문제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being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관련한 문제들에도 기인한다. 더욱이, being에 관한 문제들은 진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적절한 이해의 도정에도 가로놓여 있다. 그러므로 242b6 이하에서 플라톤이 끝내 실제로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반박과 ~이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에 착수할 때, being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not being" 못지 않게 문젯거리인 그 이해를 처음으로 문제시함으로써 그 일을 수행한다(243c2-5, 250e5 이하 참조). 다음으로 그는 not being의 문제로 향하기에 앞서 being에 관한 문제들의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해결책을 다룬다(251a5 이하). 우리가 "not being" 혹은 "what is not"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의 전체 길이가 그렇게 주목할 만큼 긴 까닭은 이런 이유에서이다.[399쪽]

5) 그렇더라도 이 모든 것을 논의하는 대신 이 논문은 거짓 진술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따라서 Frede는 being에 대한 언급들은 매우 간략하게 논평하고, not being이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들을 어느 정도 더 자세하게, 거짓 진술에 관련된 난점들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범위에서 고찰한다.[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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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E PROBLEM OF BEING[399-402쪽]

1) Being에 관한 어려움은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것인 듯하다. 우리가 철학자들을 따라 being으로 헤아려지는 것을 한정하고 확정하고(242c5-6 참조), 결론적으로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과 무엇이든 멈추어 있는 것을 being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또한 이 두 부류가 ~인 것의 전부라고 결정한다 가정해 보자(249c10-d4). 여전히 being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249d6 이하). ~인 것은 무엇이든 움직이거나 아니면 멈추어 있는 것이 참이라 하더라도, being 자체는 움직이지도 멈추어 있지도 않다. 움직인다는 것도 멈추어 있다는 것도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또한 ~인 것은, 그러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그것 스스로는 움직이지도 멈추어 있지도 않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그저 ~인 바의 것일 따름이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움직이지도 멈추어 있지도 않다면, 그것은 a being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250c1-d5).[399-400쪽]
  <운동과 정지, 그리고 being 사이의 문제는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being 사이의 문제와 같은 구도로 논의된다. being 외의 둘은 가장 반대되는 것(전통논리에 따르자면 운동과 정지는 반대가 아니라 모순이겠지만)이다. 만일 being이 이 둘 중 어느 하나와 동일시된다면, 여전히 그 둘 모두 being이므로, 다른 한쪽과 동일시된 한에서의 being이 나머지 한쪽에도 적용되기에, 서로 반대되는 본성이 정반대의 본성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프레데의 분석대로 운동과 정지는 배타적 선언을 이룬다. being이 둘 중 어느 한쪽도 아니라면 그것은 being이 아니다. 나아가 이 경우 being이 아닌 한에서 운동도 정지도 운동'이지 않고' 정지'이지 않으며' 그것은 ~이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된다. 그러나 not being은 진술, 사유, 언표가 불가능하다. 문제는 왜 프레데가 이러한 여러 난점들 중 저 문제만을 언급하는가, 이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은 being it self가 a being일 수 없다는 것인가? 이는 달리 말하면 이후 유들의 결합 논의에서 being이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같거나 다르다고 진술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와 같은 종류의 것일 터이다. 그러나 a being이 being이 될 수 없고, 운동과 정지가 being이 될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한 언급은 프레데가 서술한 방식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 아닌가?>

2) 이 문제의 해결책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각각의 것이 수 많은 것들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단지 그 자체로 혹은 그 자체가 그것인 바의 것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그 자체로 어떤 것인 그러한 것의 유類라면), 또한 그 자체로서 그러한 바의 것들이 아닌 어떤 다른 것과 적절한 관계 속에 성립함으로써 그러한 것들이라고도 이야기될 수 있는지 보아야 한다. 그래서 being은 그 자체에 대해 단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being이 정지 또는 운동에 대한 적절한 관계 속에 성립함으로써 멈추어 있거나 혹은 움직이는 것을 막지 않는다. 이 점을 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 문제가 진술에 대한 문제와 얽혀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 당대인들의(아마도 안티스테네스의), 어떤 것에 대해 다른 어떤 것이라 말하는 것,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일부 관점이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 사람(a man)을 "사람(man)"이라 부르고 좋은 것(what is good)을 "좋음(good)"이라 부르는 것은 좋다. 하지만 만일 사람(a man)이 좋은 것이 아니고 다른 어떤 것이라면, 어떻게 사람에 대해 그가 좋(은 사람이)다고(he is good) 말할 수 있는가(251a5 이하 참조)? 이것은 진술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를 포함한다. 진술을 구성한다는 것은 단지 사물(a thing)을 그 고유한 특정 이름으로 부르는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플라톤이 이후에 지적할 것처럼(262d2-6) 어떤 것을 그것에 대해 무언가 계속해서 말하기 위해 명명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진술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어떤 것이 수 많은 것들로 이야기될 수 있고 여러 다른 이름들로 불릴 수 있는지(251a5-6 참조), 이에 대한 이해의 이러한 실패는, 결국 그것이 다시 악화시키기도 하는, being에 대한 실패에 의해 악화된다.[400쪽]

3) 여기에서 이해의 결정적인 지점은 255c12이하의 많은 논쟁이 있어온 구절에서 플라톤이 구성하는 지점이다. 우리가 사물들에 적용시키는 Being은 두 종류이다(255d4-5 참조). 우리가 사물들'이라고' 말하는 사물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써 ~이다. 우리가 사물들'이라고' 말하는 것들 중 다른 것들은 바로 다른 어떤 것과 관련하여, 다른 어떤 것과 적절한 관계 속에 성립함으로써 ~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흼 채로 ~이거나 being이다, 그러나 흼은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에 의해 그러한 어떤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가 다른 어떤 것, 즉 색 '흼'과 적절히 관계됨으로써만 그가 그러한 어떤 것이다. 그는 오직 이러한 특정한 방식으로만, 혹은 특정한 측면에서, 즉 흼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어떤 것, 즉 색에 대한 특정한 관계 속에 정립됨으로써, ~인 것(a being)이다. 그는 흼이라는 이 특성임으로써 흰 것이 아니라, 이러한 특성을 지님으로써 희다. 아마도 말하자면 다른 어떤 것에 "참여(metechein)"함으로써, 그는 희다. 반면 그 색은 흼이라는 이러한 특성에 참여함으로써, 가짐으로써 흰 것이 아니라 그것임으로써 희다고 이야기된다. 마찬가지로 그 색은 색인데, 이런 종류의 특성을 지님으로써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특성임으로써 색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단지 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색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 색은 색 분홍과 다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색 흼임으로써 그 색이 색 분홍과 다르다 하더라도, 이런 의미는 여기에서 적합한 의미는 아니다. 색 분홍이지 않다는 것은 색 흼이라는 것의 부분이 아니다. 그래서 색 흼은 다른 어떤 것과, 즉 다름과 적절하게 관련됨으로써 분홍과 다르다. 또한 그렇게, 지극히 일반적으로, 그 색 흼은 두 가지 상당히 다른 의미에서 ~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되었든 그 자체로 그것인 바의 것임으로써, 예를 들자면, 희고 또한 색이다. 그것은 또한, 예를 들면 분홍과 다르게끔, 그렇게 다름과 같은 여타의 사물들에 적절히 관련됨으로써 ~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단 being이 이러한 두 형식을 취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한 사물을 오로지 그것의 특유한 이름으로만 부를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많은 이름들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예를 들어 어떻게 우리가 색 흼에 대해 단지 그것이 희다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그것이 분홍과 다른(~인) 것이라고도, 그리고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being 자체가 운동 중이거나 정지 중일 수 있는지, 그 자체로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닐지라도 그럴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400-401쪽]

4) 허나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being에 관련한 그 문제의 해법이 not being에 관련한 문제를 해명하는지 보기 시작한다. ~인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이지 않은 여러 가지 것들, 다시 말해 그것이 다른 어떤 것에 관련하여서 ~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이라는 것이 being의 바로 그 본성 안에 자리한다. [401쪽]

5) 이러한 해석은 결정적으로 255c12-13에서 플라톤이 "… is …"의 두 가지 용법을 구별한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나는 플라톤이 그 이후 계속해서 이 구분에 의존한다고 가정하고자 하고, 그러나 255c12-13의 이러한 해석이 변화했기에, 이 해석을 방어함에 있어서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보스톡은 그의 "Plato on 'is not,'" Oxford Studies in Ancient Philosophy 2 (1984): 89.에서 그 해석을 공격했다. 시작하기에 앞서, 그 구분이 동일성의 "is"와 "일상적인" 계사, 곧 술어적 "is" 사이의 구분은커녕, "… is …"의 불완전 용법의 두 가지 의미들로도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반대하는 주장은 플라톤이 단 하나의 being에 대한 견해만 인지한다는 것, 그리고 대화편 전체에 걸쳐 플라톤이 마치 이러한 하나의 견해가 not being이라고, 다시 말해 그것이 not being이라고 말함(258b11-c4)에 있어서도, 그리고 어떤 것이라고, 다시 말해 그것이 어떤 것과 다르다고 말함(263b11)에 있어서도 모두 포함된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두 경우 모두에 적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이자 똑같은 being(255d5)이다. 더욱이 그 두 가지 사용들은 첫 번째 용법에서 "… is …"가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is identical with"로 대체될 수 없을 그러한 것들이다. 인간이 합리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합리적 동물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척추동물이라거나 흼은 색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 자체에 대해 인간이 무엇인지 혹은 그 자체로 흼이 무엇인지 말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명백히 동일성 명제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401-402쪽]

6) 보스톡이 가정하는 것으로 보이듯, 그 두 가지 용법의 구분이 문법적 혹은 논리적 구분으로 간주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만일 우리가 이로써 우리가 의존하는 형이상학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그러한 구분을 의미한다면, 실수일 것이다. 그래서, 보스톡이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92쪽)와 반대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관점에서, 그 자체 인간인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어떤 것, 즉 인간의 형상에 참여함으로써만 인간인 것임을 고려한다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와 "소크라테스는 그 골목에 그 사람이다"가 플라톤에게는 명백히 히 "… is …"의 첫 번째 용법이 아니라, 두 번째 용법의 사례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사람이, 그 둘 중 첫 번째 항목이 두 번째 항목에 참여하는 두 가지 상이한 항목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사람과 다르다는 것, 혹은 소크라테스가 인간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에 전혀 끌리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또한 "not being is not being"이 not being이 not being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끌리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X와 Y의 동일화는 "… is …"의 첫 번째 용법에서 "X is Y"의 참에 대한 필요조건이든 충분조건이든 어떤 것을 구성한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 자체로서 흼은 색이기에 그것은 필요조건을 구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를 들어 "The same is the same (i.e., with itself)"가 "The different is the same (i.e., with itself)"이 명백히 그러하듯 "… is …"의 두 번째 용법의 경우여야 할 것임을 고려할 때, 그것은 충분조건을 구성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자기-술어의 서로 다른 유들을 구별하도록 해주고 플라톤이 내내 관심을 가져왔고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그런 종류의 자기-술어가 무해한 방식으로 "… is …"의 첫 번째 용법을 포함하는 그런 것이라 주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402쪽]

7) being에 관한 문제에 대한 해법의 이러한 안타깝게도 지극히 간단하고 개략적인 설명을 가지고, 플라톤이 어떻게 not being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402쪽]


II. THE PROBLEM OF NOT BEING[403-412쪽]

1) ~이지 않은 것에 관련한 난점들에 대한 해법은 255e8에서 시작된다. 그 해법은 이하 네 부분들로 명백히 나뉜다:
   1. 255e8-257a12: 플라톤은 사물들, 나아가 being 그 자체의 형상도 not be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257b1-257c3 : 플라톤은 ~이지 않은 것에 관련한 난점들이 "not being" 구에서 "not"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에 그 기원을 가진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3. 257c4-258c5 : 플라톤은 ~이지 않은 사물들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not being의 본성이 무엇인지까지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4. 258c6-259c4 : 플라톤은 진술에 대한 논의로 인도하는 요약을 제시한다.[403쪽]

2) 우선 255e8-257a12를 고찰해 보자. 앞선 부분에서 플라톤은 특히 중요한 다섯 가지 구별되는 유(類)들 혹은 형상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being, 운동, 정지, 같음, 그리고 다름이다. 255e8 이하에서 그는 운동을 골라내어 운동이 정지, 같음, 다름, being과 다르기에, 정지이지 않고, 같음이지 않으며, 다름이지 않고, 그 추론의 일부로서(pari ratione, 같은 논증에 따라) being이지 않다고 주장한다(cf. 256c10-d10). 이와 관련하여 그는 만일 X가 Y와 다르다면 우리가 X는 Y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는 하나의 사실에 의존한다. 256d11-12에서 그는 이로부터 다음의 추론을 도출해낸다: "이런 이유로, 필연적으로, 운동의 경우에도 다른 모든 형상들의 경우에도 not being이 속한다." 이어지는 구절(256d12-e4)은 이 추론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밝혀준다. 운동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형상들도(물론 being 자체를 제외하고) being과 다르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들이 being이지 않다는 것은 그것들 모두에 대해 참일 것이다. 그래서 "being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는 말은 어떤 것에든 올바르게 적용될 가능성조차 없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최소한 being과는 다른 모든 형상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결론에서의 표현을 주의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만일 a가 F라는 것이 참일 경우 "a에 관하여서는 F(혹은 F-ness)이다"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 표현의 기저에는 F가 ~일 한 가지 방식이 F인 어떤 a가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듯하다.[403쪽]

3) 256e6-7에서 플라톤은 255e8에서 시작한 논증으로부터 추가적인 결론을 도출해낸다. "이런 이유로, 각각의 형상에 관련하여 being인 많은 것들이 있지만, not being인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우리가 제시된 주어에 관련하여 ~인 혹은 being인 어떤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뿐 아니라, 제시된 주어에 관련하여 ~이지 않은 혹은 being이지 않은 항목들에 대해서도 말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앞선 결론에서 우리가 주목하였던 말하기 방식과 동일한 것을 가지게 되는 듯하다. 그 방식은 이 표현이 다음의 방식으로 이해될 것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a가 F라면 a의 경우 F-ness가 ~인 것이라 이야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F-ness는 만일 a가 F이지 않다면 a에 관련하여 ~이지 않다고, ~이지 않은 혹은 being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적어도 이러한 가정 하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 결론이 앞선 논증으로부터 귀결될는지 볼 수 있다. 운동이 그것이지 않은 수 많은 것들, 예를 들자면 그 외의 모든 형상들이 있다. 그리고 운동에 대해 참인 것은 물론 다른 모든 형상들에 대해서도 참이다. 그래서 각 형상에 관련하여 그것이 ~이지 않은, 혹은 being이지 않은 무수한 것들이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래서 여기에 형상들조차 not be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그 두드러지게 상당히 문제되는 두 번째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은 각각의 특정한 형상이 being의 형상이지 않다는 것만이 아니라, 여타 어떤 형상도 이 특정한 형상이지 않다는 경우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그 특정한 형상이 그것 외의 다른 어떤 형상에 관련하여서도 not being이라는 것이기도 하다.[403-404쪽]

4) 끝으로 257a11 이하에서 플라톤은 being 그 자체의 형상까지도 ~이지 않다거나 ~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고, 그것과 다른 모든 것들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플라톤이 여기에서 논하는 방식으로부터 그가 어떤 것의 F이지 않음을 어떤 것이 ~이지 않을, 즉 being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이야기할 추가적인 방식으로 간주한다는 점 또한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가 "이런 이유로 being은 여타의 것들이 있는 그 만큼의 방식으로 ~이지 않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257a4-5). 만일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255e8 이하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플라톤이 이미 그곳에서 그가 운동은 정지, 같음, 다름, 혹은 being이지 않다고 주장할 때, 분명하게 이것들을 운동이 ~이지 않은 혹은 being이지 않은 방식으로 취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각 경우 그가 운동에 대한 부정적 진술을, 운동이 다름임, 혹은 같음임, 또는 being임과 같이 ~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긍정적 진술과 짝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들이 ~이지 않을, 혹은 being이지 않을, 다시 말해 바로 이러저러한 것이지 않음으로써 ~이지 않을 추가적인 방법이 여전히 있다.[404쪽]

5) 이 부분의 결론들을 요약해 보자.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being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전적으로 무해해 보이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 만일 X와 Y가 다르다면, 우리가 "X는 Y이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이유로, 여타의 모든 형상들이 being의 형상과 다르기에, 그 형상들 각각은 not be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 이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떤 것이 not be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더욱 흥미로운 방법들이 있다. X가 Y이지 않다는 것은 X가 어떤 방식으로 ~이지 않다는 것, 즉 Y이지 않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는 또한 Y가 어떤 방식으로 ~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X와 관련하여, 혹은 X의 경우에서 ~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X가 이런 방식으로 ~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는 것은, 명백히 X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 예를 들어 Y와 다른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말하자면 Y이지 않은 어떤 것일 이러한 방식을, 그것이 being이었지 않는 한, 즉 Y와 다른 것이지 않았던 한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사하게, Y가 이런 식으로 ~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는 것은 Y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Y는 우리가 보였듯 수 많은 것들, 예컨데 X와 다른 것들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not being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추가적인 두 가지 방식들이 있다. (i) X가, 그것이 몇몇 Y이지 않은 한에서 ~이지 않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방식 (ii) Y가, 그것이 일부 X와 관련하지 않는 한에서 ~이지 않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방식. 명백히, 두 번째 방식은 단지 첫 번째 방식의 역(逆)이다. 어떤 경우든, not being인 것들이 있는 전적으로 이상할 것 없는 방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404-405쪽]

6) 이를 가지고 우리는 다음 부분, 257b1-257c3으로, 사람들이 ~이지 않은 것과 같은 그런 것은 전혀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들이 어디에서 혼란에 빠지는지 설명하고자 플라톤이 시도하는 부분으로 향할 수 있다. 그 주장은 그들이 "what is not"이나 "not being"은 반드시 ~인 것(what is)의 반대되는 것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 것은,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이라는 것이 그것에 대해 참인 그러한 어떤 것이다. 반대로, ~이지 않은 것이 이런 측면에서 ~이라는 것이 그것에 대해 참이 아닌 어떤 것이라는 인식을 하는 대신, 그들은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도 ~이라는 것이 그것에 대해 참이 아닌 어떤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not X" 형식의 표현들의 용법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형식의 표현들을 통해 의미되는 바는 X에 어떻게든 반대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405쪽]

7) 이 정도까지는, 아마도, 꽤나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석자들은 "not X" 형식 표현들의 사용에 대한 플라톤의 고유한 적극적 규정 그리고 특히 "not being"이라는 표현에 대한 그의 해명에 곤란을 겪었다. 플라톤의 표현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과 선행하는 구절 사이의 밀접한 관련을 유념해야 한다. 플라톤은 "not being"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257b3-4).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being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는 어느 때에든, 우리는 being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지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네." "It seems(~처럼 보인다)"라는 단서는 그 표현이 선행하는 것에 비추어 이해될 것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 뜻은 또한 우리가 다음 문장을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257b6-7).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것을 'not big'이라 말할 때, 우리가 그리하여 이 구절로써 같음보다 오히려 작음을 더 지시한다고 자네에게 여겨지는가?" 이것이 선행하는 문장에 대한 해명으로 표현된다는 사실로부터(이것이 그 응답이 되는 257b5에서 테아이테토스의 물음을 참조하라), 허나 또한 "e.g.(hoion, 예를 들어)"라는 말로부터도 명백하듯, 어떤 것을 크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것을 ~이지 않은 것으로(as not being) 이야기하는 경우로 간주된다.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어떤 것을 not being으로 이야기하는 경우인지는 즉각적으로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어떤 것을 not being으로 이야기하는 경우인 바, 즉 not being big으로 이야기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것이 해당 문헌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은 다음 고찰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255e8-257a12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257b3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not being이 (i) being의 형상이지 않은 어떤 것의 그 not bieng이거나, 혹은 (ii) 더 일반적으로, 어떤 이러저러한 특정한 것이지 않은 어떤 것의 not being이거나, (iii) 끝으로, (ii)의 역, 이러저러한 특정한 것에 관련하지 않는 어떤 것의 not being이라고 추정해야 할 것이다. 이제 being이지 않은 어떤 것은 그것이 being의 형상이 아닌 한에서 being의 반대가 아니라 단지 그것과 다르다는 점은 명백히 참이다. 하지만 크지 않은 것은 being의 형상이지 않음으로써 being이지 않은 것의 예가 아니다. 크지 않음이 이러저러한 특정한 것에 관련하여 being이지 않은 것의 직접적인 예시인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일 그러한 경우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참일 경우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그가 이 경우에 대해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이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작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플라톤이 여기 257b3에서 그에 대해 논하고 있는 not being이 이러저러한 특정한 것, 예를 들어 큰 것이지 못하는 어떤 것의 not being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이것이 플라톤이 being 자체의 형상까지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즉 그것과 다른 모든 것들이지 않음 속에서 not being이라고 말했을 때, 그 선행하는 구절에서 그가 결국에 말한 그런 종류의 not being이었다는 사실에 부합한다. 더 나아가, 그런 방식으로 not being인 것, 예를 들어 not big임으로써 not being인 것은 being인 것에 이런 방식으로 반대이지 않고, 단순히 다를 뿐이다. Not big인 것이 being인 것에 반대이지 않고, 단지 being인 것과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것에 상대적으로) big인 것과 다른 것일 한 가지 방식이 (상대적으로) 작은 것임일지라도, big인 것과 다를 또 다른 방식이 같은 크기일 것이라는 이유로 명백하다. 그래서 매우 일반적으로 "not X"는 단지 X인 것과 다른 어떤 것에 적용된다. [405-406쪽]

8) 이제 결정적인 난점은 플라톤이 어떻게, 내가 당연시하였듯, 어떤 것의 큰 것이지 않음, 혹은 어떤 것의 크지 않은 것임(플라톤은 그 둘을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에 포함되는 그런 종류의 not being이 운동의 정지, 같음, 다름, being, 혹은 다른 어떤 형상이든 그것이지 않음에 포함되는 그런 종류의 not being과 같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해석자들은 플라톤이 257b3 혹은 257b6에서 다른 종류의 경우로 비약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 지점까지 그는 어떤 것이 직접적으로 어떤 다른 것과 다른 경우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한 형상이 어떤 다른 형상과 다른 그러한 경우들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작음(smallness)이라는 속성은 큼(bigness)이라는 속성과 다르다. 그리고 따라서 작음은 큼이 아니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혹은 우리가 플라톤의 표현을 받아들인다면, 작음(the small)은 안 큼(the not big)이고, 혹은 작음은 크지 않기까지 하다. 하지만 257b3에서 플라톤은 being이지 않은 것에 대해, 예를 들어 크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마치 이것이, 큼이라는 속성과 다른 것임으로써가 아니라, 그 속성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최소한 큰 것이지는 못한 것의 경우를 포함했던 것처럼, 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극히 다른 종류의 경우인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이 예고도 없이 한 종류의 사태에서 다른 종류의 사태로 넘어간다는 것은 그가 단지 혼동하고 있다는 의심을 갖도록 만든다. 이것이 보스톡이 주장하는 바이다. 덜 자비롭게 우리는 아마도 플라톤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자비의 원칙을 적용하고자 노력해 왔고, 더욱이, 플라톤을 혼란에 빠졌다는 죄목으로부터 풀어줄 어떤 방법을 찾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일종의 혼란을 플라톤에게 돌리지 않을 수 있을지 알아보기란 여전히 어렵다.[406-407쪽]

9) 그 문제는 플라톤이 257b3 이하에서 단지 "not big"과 같은 표현들 속에서, 매우 일반적으로 "not F" 형식의 표현들에서, 따라서 "not being"이라는 표현에서까지 "not"의 사용에 대해, 즉 "not"이 반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not F" 형식의 표현들에서 "not"의 사용에 대해 주장한다는 것은 충분히 사실이지만, 이 주장을 펴는 데에 있어서, 그가 이러저러한 특정한 어떤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주장했다고 믿는다는 것 역시 참일 것으로 보인다. 오웬처럼("Plato on Not-Being," 232, 237, 238) 플라톤이 여기에서 "not big" 같은 표현들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며 "not being"을 그런 표현들과의 유비 속에서 설명하고자 시도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독이다. 어떤 것에 대해 not big으로 말하는 것은, 동시에, 어떤 것에 대해 단지 not being에 대한 유비가 아니라 오히려 not being으로 말하는 것으로 취급된다.[407쪽]

10) 그 난점은 정확히 플라톤이 운동의 정지이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어떤 것의 크지 않음으로, 마치 양쪽 경우 모두에서 not being이 같은 종류의 not being인 것처럼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이 그의 숙고된 관점인 것으로 보인다. 257c4 이하에서 그가 not being의 본성인 바의 것을 설명하는 데에로 나아갈 때, 그가 우리가 고찰하고 있던 not being의 모든 경우에 추정상 포함되는,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의 해석에서든, 단순한 비동일성의 경우들과 우리가 일상적인 부정 서술로 간주할 그러한 것의 경우들 양자 모두에 포함되는 하나의 본성을 명시하기 때문이다(258a11 이하). 이로부터 플라톤이 그 문제를 "… is not …" 혹은 "not being"의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함으로써 해결하려 생각했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는 "운동은 정지이지 않다"와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지 않다" 둘 모두에 포함된 "… is not …"의 한 가지 의미가 있다고 가정함에 틀림없다. 문제는 명백히 어떻게 그가 이를 가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407-408쪽]

11) 만일 우리가, 오웬이 그리하듯(237쪽), 플라톤에 대해 동일성의 부정으로부터 서술 문장들에서 거짓을 고찰하는 쪽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작업을 가망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선, 여기에서 문제시되는 이행은 서술 문장들에서의 거짓을 향한 이행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보이기로는 부정적 서술 문장들을 향한 매개적 이행, 오웬이 너무 지나치게 빨리 강력하게 얼버무린 이행이다(237-8쪽). 하지만, 더 중대하게, 플라톤이 이전의 진술들을 단순히 동일성의 부정들로 생각한다고 추정하는 것은 실수이다. 만일 그가 그랬다면, 그 작업은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만일 X와 Y가 동일하지 않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리하여 X는 Y이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를 말하면서 우리는 X와 Y의 동일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not being을 X에 부과하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동일하게 작은 것에 대해 그것이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똑같은 not being을 그것에 부과하는 것이라고 추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 작은 것에 대해 그것이 ~이지 않다고, 즉 크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408쪽]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여기에서 어떤 구분을 만들고자 바라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뒤따르는 부분을 고찰하면 그러하다. 작음은 큼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작음은 큼이지 않다. 플라톤은 스스로 이로부터 "작음은 크지 않음이다"로 이행하는 것을 허용한다(추정컨데 이것이, 만일 "작음이 그 자체로 크다" 혹은 "작음이 그 자체의 본성에 의해 크다"가 참이라면 "작음이 크다"가 참인 그런 "… is …"의 용법에서 "작음이 크다"에 대한 부정이라는 사실에 의존함으로써). 그래서 우리는 "작음이 크지 않다"와 "이것(작은 것)이 크지 않다" 둘 모두를 가진다. 이 두 진술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어떤 것이 특정한 속성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고, 후자는 어떤 것이 특정한 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수로 플라톤이 이 차이를 특정해야 하는가?[408쪽]

13) 차후 257c4 이하 부분의 세부사항들에 들어서지 않고도, 우리는 이미 여기에서 플라톤이 not being을 다름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의 특정한 형상 혹은 유(類), "다름의 부분"과 동일시한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작음은 큼이지 않다" 혹은 "작음은 크지 않다"가 "작음(smallness)이 큼(bigness)과 다르다"를 의미하거나 그렇게 분석되어야 할 것이라 추정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그가 그 문장이 "작음은 큰 것과 다르다"로 분석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는 또한 그것을, 그가 "이것(작은 것)이 크지 않다"가 마찬가지로 "이것이 큰 것과 다르다"로 분석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어째서 그가 "not"의 용법에 대한 단지 하나의 설명이 있다고, "big"이나 "the big"에 아무런 애매성도 없다고, "difference" 혹은 "… is not …"에 아무런 애매성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만일 그가 원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에게 구별하기를 바라는 두 종류의 경우들을 구별할 수 있는지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 is big"에서 "… is …"의 두 가지 용법들을 구분함으로써 그리할 수 있다.[408-409쪽]

14) 다음으로 세 번째 부분(257c4 이하)에서, 플라톤은 ~이지 않은 것 혹은 being이지 않은 것이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이자 생각할 수 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불가능하며 논의의 주제로 부적절한 것과도 거리가 멀며, 정의를 구성하고, 유를 특정할 수 있는 것임을 보이고자 시도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유가 구성되는 방식을 고려할 때, ~이지 않은 것이 ~인 것만큼이나 실질적이라는 것을 보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고려해 보자. 그것은 우선 다름에 의해 구성된다. 다름은 ~인 어떤 것이다. 하지만 다름은, 지식이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인 것과 같이, 언제나 어떤 것과 다르다. 그래서 아름다움과의 다름이 있고, 즉, 아름다운 것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한 부류의 것들을, 말하자면 아름답지 않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또 다른 한 부류의 것들, 다시 말해 아름다운 그러한 모든 것들에 걸쳐 맞세워 내어 놓는다. 다름이 완전히 실질적이고 아름다움이 완전히 실질적이기에, 아름다움과 다름, 그리고 이런 이유로 아름답지 않음은, 아름다움만큼이나 완전히 실질적이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아름답지 않음은 아름다움 못지 않게 문제 없는 한 부류의 사물들을 구성한다. Not being의 경우에도 유사하다. 그것은 다름을 포함하고, 더 구체적으로는 특정한 방식에서 ~인 것 혹은 being인 것과 다름을 포함한다. 이에 대해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이 특정한 다름은 한 부류의 것들, 다시 말해 같은 방식으로 ~이지 않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또 다른 한 부류의 것들, 다시 말해 이런 식으로 ~인 그러한 모든 것들에 걸쳐 마주 세워 놓는다. being이지 않다는 것은 단지, 특정한 방식으로 ~인 것, 이러한 방식으로 being인 것과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나온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not being은 being만큼이나 실질적이고 이런 이유로 그 고유한 본성이다.[409쪽]

15) 아마도 누군가는 내가 그 설명에 도입시킨 "특정한 방식으로"라는 구절에 대해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플라톤에게 being이 언제나 이러저러한 어떤 것임(being)의 문제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에 부응하게 not being은 언제나 특정한 관점, 측면, 혹은 방식에서 not being에 대한 문제이다. 규정되지 않은 not being 같은 그런 것은 없다. 이것은 이하의 요약, 플라톤이 not being에 대해 being의 개별적 유에 반대로 마주 놓인 다름의 부분이라 말하는 곳에서 플라톤에 의해 파악된 것으로 보인다(pros to on hekaston, 258e1). 그래서 being이지 않다는 것은 특정 방식으로, 특정 관점에서 ~인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409-410쪽]

16) 이제 분명한 점은, 이 부분의 논의의 결론으로, "not"의 사용에 대한 앞선 부분에서 분명치 않았던 어떤 것이고, 우리가 기껏해야 그 부분을, "앞에 놓인 'not'이 그것을 뒤따르는 이름과는 다른 어떤 사물들 중 하나를 의미하거나, 차라리, 그 사물들에 적용되고 그 부정에 뒤따르는 이름에 의해 지시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들 중 하나를 의미한다(257b10-c2)"라는 문장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해석을 통해 회피했다는 것이다. 이제 분명한 것은 플라톤이 "not being"과 "… is not …"을 어떤 것이 어떤 것이지 못하는 경우 그것이 특정한 성질을 지니지 못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제 "not being"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정 서술이라 부를 그런 경우를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플라톤이 다음 부분, 258c7 이하를 향하여 그 논증의 요약으로 들어설 때 말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요약은 또한 혼란스럽고, 더욱이, 만일 누군가 어떻게 플라톤이 첫 부분에서 논의된 경우들을 정확히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의미에서 not being의 경우들이라고 취하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면, 즉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와 같은 진술들에서 문제가 되는 말하기라고 취하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면 반드시 혼란스러워야만 한다. 플라톤은 259a5 이하에서 다시 어떻게 어떤 것이 ~이지 않다거나 being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지 설명하기 때문이다. 다름의 형상을 취해 보자. 그것은 being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not being이다(259a6-b1). Being의 형상은 여타 모든 형상들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그것도 마찬가지로 ~이지 않고, 다시 말해 이러한 여타의 형상들이지 않다(259b1-5). 유사하게 여타의 형상들 각각이 나머지 형상들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여타의 형상들 각각이 여러 방식으로 ~이지 않다(259b5-6). 이제 이것이 "… is not" 혹은 "… is not being"의 무해한 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참이지만, 문제는 이것이 만일 우리가 어떻게 진술이 거짓일 수 있는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계속해서 그 만큼 도움이 될지 하는 것이다. 요약의 끝까지 내내 플라톤은 만일 X와 Y가 다르다면 우리가 X는 Y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기초하여 그는 우리가 X는 ~이지 않다고 혹은 X가 being이지 않다고, 즉 Y이지 않거나 Y인 것이 아니라고 말함에 있어서 정당화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Y가 being 자체의 형상인 경우, being이지 않은 being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든 그것이 참이라는 사실에 의존했다.[410-411쪽]

17) 이제 만일 누군가 첫 부분(255e8-257a12)에서의 부정 진술들이 비동일성 진술들이라 믿는다면, 그 진술들이 어떤 형상 X에 대해 그것이 어떤 형상 Y와 다르다는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 요약은 틀림없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거짓 진술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X는 Y이지 않다"의 의미는 분명 "X는 Y와 다르다"의 의미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특정 대상 a가 아름답다는 것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a가 아름답다"가 사실상 a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취지에서의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a의 not being beautiful은 a의 아름다움과 다름 혹은 아름답다는 것과 다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아름다움에 참여함으로써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움과 다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짓 진술들 때문에 필요로 하는 not being에 대한 설명은 X가 Y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단지 X가 Y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라는 설명보다는 더 복잡해야 한다. 그래서, 만일 그 요약이 우리에게 거짓 진술들의 설명이 필요하리라는 결론을 주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플라톤이 첫 부분의 부정 진술들을 비동일성 진술들로 간주했다는 가정을 견지하는 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는 데에 전혀 근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11쪽]

18) 내가 받아들이기로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플라톤이 "다름은 같음이지 않다"와 같은 진술들을 "다름이 같음과 다르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비동일성 진술들로 취한다고 추정하는 것이 내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진술들을 그가 "a는 아름답지 않다"라는 것을 a에 not being을 부여하는 것으로 취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주어에 not being을 부여하는 것으로 취한다. 하지만 누군가 이 점을 알아 보더라도, 플라톤이 요약에서 우리에게 염려할 것이 아닌 듯한, 그리고 어떤 경우든 만일 우리가 거짓 진술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염려할 바가 아닌, not being의 경우들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혼란스러운 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마도 그 설명은 플라톤이 요약에서 다시금 어떻게 어떤 것에 대해 not being이라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지 강조하고자 바란다는 것, 그리고 ~이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411쪽]

19) 우리의 의도에 맞게 우리는 지금까지 그 논의의 결론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요약할 것이다. 플라톤은 만일 X가 Y인 것과 다르다면, Y-ness 형상과 무엇이든 이러한 형상에 참여하는 것이 모두 Y인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곳에서, X가 Y이지 않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그런 "… is not …"의 사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부합하게 그는 X가 어떤 ~이지 않은 것, 예를 들어 Y이지 않은 채로 그렇다는 것을 주장하는 일이 문제가 없다는 걸 발견한다. 이에 맞추어 그는 "… is not …"의 역용법을 도입한다(256e6-7). 만일 X가 Y이지 않다면, Y-ness는 X와 관련하여 ~이지 않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그에 맞게, Y-ness가 X에 관련하여 ~인 것과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다시 다름 그리고 같음과 다름이, 비록 다른 방식들에서라도, 둘 모두 다름에 관련하여 ~인 것으로 간주되는 그러한 방식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거짓 진술들에 포함된 not being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거짓 진술들이 not being을 포함하는 그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술들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또한 그래서 이것이 그가 다음으로 향하는 주제이다.[411-412쪽]


III. FALSE STATEMENTS[412-423쪽]

1) 이제 진술들에 대한 더욱 적합한 이해에 이르도록 플라톤이 만드는 결정적인 이행은 진술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두 가지 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우리가 그 항목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 그 항목을 확정하는 일, 그리고 (2)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구체화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진술은 최소 두 부분으로, 논의의 주어를 확정하는 부분과 그로써 그 주어에 대하여 어떤 것이 이야기되는 그러한 부분으로 구성된다. 진술이 주어를 선정하는 일을 해내는 것은 최초에 진술을 얻기 위한 조건이다. 이런 이유로 그것의 참이나 거짓은 이러한 주어에 대해 그 다음으로 이야기된 것에 대한 문제이다. 즉, 참이나 거짓의 자리는, 이를 테면, 전체로서의 진술이 아니라, 그 진술의 서술적 혹은 진술하는 부분이다. 문제를 다른 식으로 살펴 보자. 참인 진술을 구성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이 저 어떤 것에 대해 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맞추어, 거짓 진술을 구성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을, 저 어떤 것에 대해 거짓이라고, 즉 참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진술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아무 것에 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뭐가 되었든 주어 표현이 그 진술의 주어로 명명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제 주어진 주어에 대해 어떤 것이 참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어떤 주어에 대해서든 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원칙적으로 어떤 주어들에 대해서는 거짓일 것이다. 역으로, 주어진 주어에 대해 거짓인 것은, 적어도 원칙적으로, 모든 주어들에 대해 거짓은 아닐 것이고, 어떤 것에 대해 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거짓 진술에 귀속되는 것에 관해서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만일 어쨌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주어에 대해 참이지 않은 것을 주어에 귀속시킨다는 것에 관련되는 문제여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는 더 이상 문제거리일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것을 어떤 것에 대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즉,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이 그것에 대해 참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그것이 이 특정한 주어에 대해 참인 것과 우연히 다른 것이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기에 완전히 좋은(말해도 좋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에 대한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진술이 어떤 것에 대한 것이라는 게 무엇인지 안다면,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의 혹은 어떤 것에 대한 참이라는 게 무엇인지 안다면, 그리고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인 바의 것과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짓 진술들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혹은 우리는 그 문제를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우리가 ~이지 않은 것이라는 게 단지 다른 것임의 특정한 방식일 뿐임을 알고 나서, 그리고 만일 우리가 진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지 않은 것이라는 게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거짓 진술들의 가능성을 알아 보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아주 간결하게 말해서, 플라톤의 해법인 것으로 보인다.[412-413쪽]

2) 하지만 진술들에 관련한 플라톤의 논의의 세부사항들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 보도록 하자. 그 핵심은 진술이 최소 두 부분들, 이름(onoma)과 동사(rhema)를, 플라톤이 두 종류의 부분들을 확정하듯(262c4 이하), 가진다는 것이다. 이름의 기능은 어떤 것을 명명하고, 언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어딘가에서 얻는" 동사를, 플라톤이 훨씬 모호하게 말하는 대로(262d4), 우리가 어떤 것을 진술(legein)하는 것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262d5) 그런 동사를 추가함으로써만, 따라서 또한 결과로 나온 복잡한 표현이 logos라 불린다(262d5-6). 진술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두 종류 표현들에 대한 확정과 규정에 관하여 여기에 모든 종류의 문제들이 있음은 명백하다. 그래서, 만일, 그리 보이듯, 여기에서 "이름"(고대 문법학자들의 뜻에서)과 "동사"가 각 품사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우리는 엄격히 말해서 오직 진술들의 엉뚱한 하위분류에 대한 규정만을 얻고, 반면 플라톤은 매우 일반적으로 단순한 (즉 비분자적) 진술들에 대한 규정을 목표로 하고 있고 실제로 구문론적 범주들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두 종류의 표현들에 대한 의미론적 규정은 부적절해 보이지만(262a3-7 참조), 우리는 그것들의 분류를 품사로든 구문론적 범주로든 해석한다. 하지만 그 난점들과 문제들이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이 만큼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 단순한 진술들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기능들을 지닌 두 부분들에 의해 구성된다. 그 한 부분은 그 기능이 명명하는 것, 언급하는 것, 주어를 확정짓는 것이고, 다른 한 부분은 그것을 수단으로 우리가 그 주어에 속하는, 혹은 그 주어에 대한 어떤 것을 말하고, 어떤 것을 진술하고, 어떤 것을 서술하는 것이다.[413-414쪽]

3) 이 점을 명확히 하고 나서, 플라톤은 우리가 엄격히 분리시켜 놓을 필요가 있는 것으로 그가 분명히 가정하는 그러한 진술들의 두 가지 특징들로 향한다. (1) 그것들은 어떤 것에 대한 진술들이고, (2) 그가 간주하는대로 그것들은 특정 성질을 갖는 바, 즉 참이거나 거짓이다(262e4 이하). 첫 번째 특징에 놀라울 정도의 주목이 집중된다(262e11-263a10, 263c5-12 참조). 이러한 것들은 단지 상이한 특징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것이 두 번째 것으로부터 독립적이기도 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참이거나 거짓인 진술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어를 구체화시켜내는 진술의 부분을 지녀야 하고, 그 부분이 구체화시키는 어떤 주어는, 최소한 원칙적으로, 이 주어에 대해 이야기되는 무엇인가로부터 독립적으로 결정되며, 더 강력한 이유에서, 그것의 참이나 거짓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결정된다. 플라톤은 굉장히 분명하게 그 엘레아 손님으로 하여금 그가 손님에게 진술들의 참이나 거짓에 대한 고찰을 계속하도록 하기에 앞서 단순한 진술들에 대한 언급의 문제를 결정하도록 한다.[414쪽]

4) 우리가 역사적 배경으로 향한다면, 이 논의가 이루어지는 그 주의와 세밀함의 적절성은 어느 정도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위에서 주목하였듯 "to say(legein)"이라는 동사의 목적어(대상)에 대한 어떤 불명확성과 혼란이 있다. 이는 진술이 말한 것은 진술이 그것에 대한 것이었던 그것이었다는 관점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그 대화편에서(『에우튀데모스』 283e9-284a1), 크테싶포스에게 묻는다. 만일 누군가 거짓인 어떤 것을 말한다면, "그는 그 진술이 그것에 대한 바의 것인 바로 그것을 말하면서 그리 하는가?" 그리고 크테싶포스는 긍정하여 답한다. 이로부터 에우튀데모스는 거짓 진술을 만들어내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추론한다. 진술은 반드시 ~인 어떤 것에 대한 것이어야만 하고, 반면에 거짓 진술에 의해 이야기된 것은 ~이지 않은 어떤 것이기 대문이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진술이 그것에 대한 것인 바의 것이 그것의 참임 혹은 거짓임으로부터 독립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주어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라는 점, 또한 참이거나 거짓인 것은 이 후자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414쪽]

5) 플라톤이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역사적인 수수께끼, 혹은 아마도 차라리 일련의 수수께끼들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듭하여 안티스테네스에게 돌리는, 상호 모순되는 진술들과 같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관점이 있었다(『형이상학』 1024b16 이하, 『토피카』 104b20 이하). 사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관점을 어떠한 거짓 진술들도 전혀 있을 수 없다는 관점에 연결시킨다. 안티스테네스의 관점은,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언에 따르자면(1024b32-4), 각각의 것은 그것의 독자적인 logos나 진술을 지니는 바, 그것은 확정(동일시)하거나 설명하는 것이라는 관점이었다. 이는 언제나 학자들로 하여금 『테아이테토스』 마지막 부분의 시작에서 상세히 설명된 관점에 대해 상기시켰다. 그 관점에 따르면, 만일 진술이 어쨌든 어떤 것에 대해 구성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의 고유한 진술이어야만 하고, 그것에 적절하며 특유한 진술이어야만 한다(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 202a6-8 참조). 그리고 이것은 또한 『소피스테스』 자체 내에서(251a5 이하) 공박된 관점 중 하나를 상기시킨다. 그 관점에 따르면 각각의 것은 그것의 고유한 이름에 의해서만 호출되어야 할 것이고, 다른 어떤 것의 이름에 의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예를 들어 한 대상을 "희다"라고 부르지 않아야 할 것인 바, "희다"는 것은 색의 이름이고 대상은 색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러할지라도, 만일 각각의 것이 그것의 고유한 진술을 지니고 모든 진술들이 어떤 하나의 것에 대한 진술이어야 한다면, 모순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명백히 모순되거나 혹은 단지 반대되는 두 진술들 중에서조차 오직 하나의 진술만이 문제가 되는 것에 대한 진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다른 한쪽의 진술은 문제가 되는 것에 대한 진술일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참인 진술일 것이거나 혹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진술일 수 없을 것이며, 이런 이유로 거짓일 수도 없을 것이다.[414-415쪽]

6) 『에우튀데모스』 285d7 이하에서, 우리는 이러한 antilogia(반박) 논증의 어떤 다른 형태를 얻는다. 여기에서 그 논증은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자 프로타고라스 혹은 더 이전 변증론자들의 동료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286c2-3). 여기에서는 서로 반박하는 두 개인들에 대해여 그들이 같은 것에 대한 진술, 같은 진술일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의견차이도 내놓지 않는 그러한 진술을 산출하고 있을 수 없을 것이라 주장된다(286a4-7). 만일 그들 중 누구도 문제가 되는 그것에 대한 진술을 산출하지 않았다면 어떠한 불일치도 없을 것이다(286a7-b3). 그래서 만일 표면적으로나마 불일치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한 사람이 문제가 되는 그것에 대한 진술을 산출하고 있는 반면, 다른 쪽은 불일치하는, 그 첫 번째 진술과 모순되는 진술을 산출한다. 하지만 그 경우 두 번째 사람은 어떤 다른 것, 그 경우 아무런 모순도 없는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진술을 산출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혹은 그는 어떤 것에 대한 진술도 산출하지 못하며, 그 경우 그는, 첫 번째 발화자와 모순되는 것은 차치하고, 어떤 것도 어떻게든 말하지도 않는 것이다(286b3-6). 뒤따르는 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를, 마찬가지로, 거짓 진술의 가능성에 관련한 논증일 것으로도 받아들인다. 이 논증 그리고 이와 유사한 논증들은 만일 그것들이 특정한 형이상학적 관점들, 예를 들어 비실체적 변화를 부정하는 것 등과 관련된다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얻는다는 점이 더불어 주목될지도 모른다.[415쪽]

7) 이제 누군가 여기에서 플라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의 논증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의심할 한 가지 이유는, 그 관련성과 적절성과는 별개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해당 구절에서의 인상적인 언어적 상세함이다. 예를 들어 단지 “그 진술은 X에 대한 것(peri)이다”라는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 “너에 대한 것”을 사용하고, 그것이 또한 “X에 속하는 진술”과 “X의 진술,” 예컨데 “너에 속하는 진술”과 “너의 진술”을 말한다(262e6, e14; 263a4, a5, a9, c7), 때로는 양쪽 방식 모두를 결합시키면서(263a4, a5, a9-10),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로 하여금 말하기의 한 가지 방식이 다른 방식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하도록 허용할 확정된 질서를 주장함이 없이(263a5에서 “나와 나의 것에 대해” 그리고 263a9-10에서 “나의 것을 그리고 나에 대해” 참조). 이를 고려할 때, 그리고 “대해서”라는 언어적 표현이 전적으로 명백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또한 소유 대명사들로 이루어진 언어적 표현들이 일상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것이 antilogia(반박) 논증의 기저에 놓인 진술들에 관한 사유방식을, 더 나아가 antilogia 논증 자체를 시사한다고 보지 않기란 어렵다. 그래서 핵심은 진술이 그에 대한 것인 바의 것과 그 진술 내에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이 구별될 두 가지 것들이리란 것, 실상 그러할 것이며 일상적으로 그러하듯 설령 그 진술이 참이라 하더라도 다르다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같은 것에 대해 반대하는 진술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들 중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일 것이다. 그 사실로부터 거짓 진술에 의해 이야기된 것이 거짓이라는 것은 귀결되지 않고, ~이지 않은 어떤 것, 진술이 그것에 대한 바의 것이 ~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는 게,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것이도록 하지도 않는다.[416쪽]

8) 우리가 안티스테네스의 입장 또는 『에우튀데모스』에서 숙고되는 입장에 관련되는 관점에 대해 말해야 하는 바, 하지만 그것들과는 한 관점에서 중대하게 다른 그것이 또한 명백해진다. 안티스테네스의 관점은 각각의 것이 기껏해야 하나의 진술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소피스테스』에서 우리가 이미 “각각의 것은 여러 진술들을 가진다” 라고 주장하였다, to stay with the language of Antisthenes and the sophists (Aristotle, Met. 1024b32 이하 참조).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반대되거나 거짓인 진술들은 전혀 없다고, 현실에서 명백히 반대되거나 거짓인 진술은 다른 주제에 대한 참인 진술이라고 주장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일 소크라테스가 건강하다면, 누군가는 이것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진술이기는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건강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것이라는,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아프다”라는 진술은, 거짓은커녕, 그 진술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이 다른 소크라테스에 대한 것, 다시 마해 아팠던 소크라테스에 대한 것이었기에 그러하다는 관점을 취할지도 모른다. 263c7에서 엘레아 손님이 스스로 테아이테토스가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라는 진술을, 다른 누군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앉아 있는 그 자신에 대한 것(263a2)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단언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다시, 여러 관점들 중에서 그러한 관점을 취하는 것은 진술이 특정 주어에 관한 것이라는 것과 이 주어가 그것에 관하여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이야기된 어떤 것을 가진다는 것이 상당히 다른 것임을 알아 보는 데에 실패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론상 진술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가 그 다음으로 그것에 관해 이야기된 바의 것, 그것이 참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416-417쪽]

9) 그래서, 진술들의 이러한 특징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에 대한 우리의 검토를 결론짓기 위해, 플라톤은 꽤나 의도적으로 진술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진술일 수 없다는 점을, 그리고 진술은 어떤 것에 관한 것이어야 함을 당연시하고 있다(263c9-11). 하지만 그는 진술들에 관한 어떤 혼란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거짓 진술들이라는 그러한 것들이 ~이지 않은 것에 관한 것이며 이런 이유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쪽으로의 어떠한 이행에도 저항한다. 진술들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가지고 또한 ~이지 않은 어떤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 나은 파악을 가지고서, 우리는 이제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거짓 진술이 ~이지 않은 어떤 것을 진술하는 진술인지 이해하는, 그런 식으로 이러한 일이 전적으로 문제없는 것임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러한 지점에 이르렀다.[417쪽]

10)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진술들의 중대한 특징, 성질, 그것들의 참임 혹은 거짓임에 대한 논의로 향할 수 있다(cf. 263a11-d5). 그렇더라도 우선 여기에서는 "quality(성질)"이란 용어에 대해 간략히 첨언하도록 하자(cf. 262e5, e9; 263a11, e2). 그 표현 자체만으로는, 어떤 것의 그것인 바의 것, 혹은 본질(260e4-5, 263c2 참조)과 그것과 닮은 것 사이의 익숙한 대조에 의존하여, 진술이 그 진술의 참임 혹은 그것의 거짓임과 독립적으로 진술임을 시사한다. 진술은 (1) 주어를 특정하는 일을 수행해냄으로써 그리고 (2) 이 주어에 관하여 어떤 것을 말함으로써 진술이다. 일단 이러한 두 조건들이 충족되고 나면 우리는 진술을 얻으며, 그 진술이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 여부의 문제는 오직,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플라톤이 주장하기로는, 두 조건들 모두가 충족되고 나서 발생할 따름이다. 더욱이, 그는 참과 거짓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그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야기된 바의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하자면 우리는 그 술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417쪽]

11) 플라톤은 처음에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가설상) 참인 진술로 향하지만, 그것을 상당히 일반적으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참인 진술로서 고찰한다. 그가 목표로 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참인 진술의 일반적 규정이다. 어떤 경우든, 그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규정한다(263b4~5): legei … ta onta hos estin peri sou. 이것은 그 자체로 받아들일 경우 여러 방식으로 모호하다. hos(how or that)의 모호성을 고려할 때, 그것은 아마도 참인 진술이 사물들을 그것들이 그러한대로 ~이라고 말한다는 뜻이거나, 혹은 참인 진술이 ~인 사물들을 그것들이 ~이라고 말한다는 뜻일지 모른다. 263b9, 263d1, 263d2에서 hos의 상응하는 용례들은 후자의 의미임을 시사한다. onta가 그 주어에 대해 긍정적으로 참인 술어들을 지시하는지 여부 혹은 그 주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술어들에 걸치는 것으로 간주되는지 여부에 달린 추가적인 모호성이 있다. 이것이 최소한 단순한 참인 진술을 일반적으로 의도하는 듯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onta가 후자의 의미로 추해지는 것이라 추정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추가적인 문제가 있는데, 말하자면 peri sou가 onta를 취하는지 estin을 취하는지 여부이다. 263b11과의 비교는 그것이, 양자 모두를 취하는 게 가능하다 할지라도, 확실히 onta를 취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명확화를 고려할 때, 그 주장은 참인 진술이 실제로 ~인 것에 대해, 다시 말해 그 주어에 관해 혹은 그 주어에 관련하여서 그것이 ~이라는 것을 말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X에 관하여 ~인 것 혹은 X에 관련하여 ~인 것(what is about, or with reference to, X)"이라는 구절은 명백히 어떤 해명을 필요로 하는 꽤나 준-전문적 용어이다. 우리는 "… is …"의 역용법과 같은 어떤 것, 우리가 앞서, 플라톤 자신이 여기에서의 그의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좀 더 아래의 어느 정도의 행들(263b11-12)을 지시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256e6에 연결하여 논의했던 그런 것을 인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나는 "~와 같은 것(something like)"이라고 말하는데, 작은 차이가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플라톤이 여기에서 단지 긍정적 진술들의 참이 아니라, 참인 진술들의 참을 일반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다고 추정한다면, 우리는 그가 이제 "F는 a와 관련하여 ~인 어떤 것이다"에서 "F"가 "not G" 형식 그 자체일 것을 허용한다고 추정해야 한다. 그래서 참인 진술들에 관한 플라톤의 관점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a에 관한 일련의 단순한 참인 진술들에 부합하여, a에 관련하여 ~인 일련의 F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인 진술은 a에 관련하여 ~인 그러한 F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 혹은 그것이 a와 관련하여 ~이라고 말하는 진술일 것이다.[417-418쪽]

12)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를 고찰해 보자. 첫 번째로 이것이 진술이기 위해서 이것은 어떤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 그것에 관해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어떤 것을 언급하고 명명하는 일을 수행해내야 한다. 그 진술은 테아이테토스를 언급하면서 그리 한다. 테아이테토스가 거기에서 그에 관해 이야기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측면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앉아 있다는 것에 관하여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앉아 있다는 그러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정합적인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가정해 보건데) 앉아 있다는 것에 관련된 어떤 언급 없이는 세계에 대한 완결된 설명이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앉아 있는 것들이 있는 한에서 앉아 있다는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며, 그래서 또한 이런 관점에서 앉아 있음이 ~인 어떤 것, 다시 말해 그것들과 관련하여 ~인 어떤 것임도 명백하다. 그래서 앉아 있음에 관한한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문제는 오직 앉음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어떤 것인지 여부, 혹은 -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보자면 -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는지 여부이다. 그리고 그 주장은 정확하게 만일 앉음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어떤 것이라면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참이라는 것이다.[418-419쪽]

13)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거짓 진술과 관련하여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것이다.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를 취해 보자. 그 진술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것은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것이고, 그는 ~인 어떤 것이다. 그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된 바의 것, 즉, 날고 있다는 것에 관하여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날고 있음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 그것에 관한 정합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완결된 기술은 그것에 대한 어떤 언급을 해야 할 것이다. 날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 한, 물론 날고 있음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 오직 문제는 날고 있음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어떤 것인지 여부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주장은 거짓이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not being, 혹은 ~이지 않은 것인 바의 것에 관하여 말했던 것을 고려할 때, 이것도 지금은 문제가 아니다.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날고 있음이 ~이지 않다는 것은 단지 날고 있음이 마침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것과 다르다는 것, 즉 날고 있음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F들 중 하나가 아니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날고 있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인 어떤 것임을 보았고, 하나 이상의 방식에서 이러하다는 것을 보았다. 더구나, 테아이테토스의 경우에서 그것의 not being 자체는 단지 그것이 ~인 어떤 것인 다른 측면, 다시 말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무엇이든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419쪽]

14) 하지만, 이것이 236c부터 계속해서 플라톤이 그렇게나 주의를 기울여 고조시키고 있던 점임을 고려해, 그 스스로 이제 어떻게 거짓 진술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가 이 특정한 예시를 다루는지 상세하게 고찰해 보도록 하자. 그는 263b7에서 거짓 진술로 나아간다. 그가 말하는 바는 이러한 것이다. ho de de pseudes hetera ton onton(거짓은 ~인 것들과 다른 것들이다). 이 문장이 생략된 것이며 263b4-5에서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는 참인 진술에 관한 "men" 절에 부합하는 대응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이해될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거짓 진술은 ~인 것들과는 다른 것들을 진술한다(legei). 참인 진술들에 관한 주장이 그것들은 ~인 그러한 것들에 대해 그것들이 ~이라고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약간의 난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참인 진술들에 대해 그 진술들이 ~인 것들에 대해 그것들이 ~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견지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그러하듯 특정한 진술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오직 ~인 것들 중 하나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 말할 뿐이며, 플라톤이 그리 하듯 ~인 것들에 대해 그것들이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딱히 우리에게 우려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플라톤은 263b3-4에서 참인 진술이 ~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on ti hos esti)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어진 주어에 관련하여, ~인 것들의 부류 전체에 대한 언급을, 거짓 진술에 대한 적절한 규정을 위해 이것이 필요할 것이기에, 참인 진술에 대한 규정 안에 넣고자 한다. 이것은 우선 플라톤의 논의에 따라 "… is …"의 용법에 대한 적절한 규정에서 보편 양화사의 필요에 부합하고, 다음으로, 여러 주석가들이 옳게 주장해 온 거짓에 대한 그 필요에 부합한다. 오직 그렇게만 플라톤은 거짓 진술이 ~인 것들 중 어떤 것이든 그것과 다른 것을, 즉 주어진 주어에 대한 관계 속에서 ~인 것들 중 어떤 것과 다른 것을 말하거나 그에 대해 진술한다고 말할 수 있다. 거짓 진술에 대해 그것이 ~인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진술한다고 말하는 것이 단순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거짓이기 위해 그것은 ~인 것들, 다시 말해 주어진 주어에 관련하여 ~인 것들 중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더 나아가, 263b4-5와의 유사성을 고려할 때, 263b7이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거짓 진술은 무엇이 되었든 주어진 주어와 관련하여 ~인 것과 다른 것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 말하자면 저 주어와의 관련 속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런 이유로 플라톤은 263b9에서 계속해서 주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이지 않은 것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 말한다." 명백히, 여기에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은 (a) 263b3-4로부터 263b7를 가지고 이해되어야 하는 "that it is(그것이 ~이라는 것)"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b) "~인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으로부터 "~이지 않은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저 후자의 이행은 예를 들어 어떻게 아름답지 않은 것 혹은 크지 않은 것이 단지 아름답거나 큰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 것일 뿐인지에 대한 우리의 앞선 설명에 의해 포괄된다. 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being인 것이면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 것이 not being이다.[419-420쪽]

15) 우리는 이제 이 대화편 내에서 그 문제가 발생한 이래로 처음으로 우리 스스로 거짓 진술들이 ~이지 않은 것을 말하거나 그에 대해 진술한다(legei)는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는지 알고, 그런 식으로 이해될 때 어째서 그것이 어떤 문제들 제기하지 않는지 안다. ~이지 않은 것을 말함은 주어진 주어와의 관련 속에서 ~인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남아있는 그 어떤 꺼림칙함도 치워 버리기 위해, 플라톤은 263b7d에서 사용되는 것으로서 "what is not(~이지 않은 것)"을 263b11-12에서 계속해서 설명해 나아간다. 여기에 플라톤이 정말로 말하는 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작은 문헌상의 문제가 있다. 263b11에서 첫 번째 단어는 사본들에 의해 ontos로 제시된다. 만일 우리가 전승된 독해를 따른다면, 플라톤은 설령 거짓 진술이 ~이지 않은 것을 말하거나 그것에 대해 진술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의 것이 실제로(ontos) ~인 어떤 것이라는, 즉 다른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는 거짓 진술이 주어진 주어에 관련하여 실제로 ~인, 즉 다른 어떤 것을 말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의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거짓 진술은 주어진 주어에 관하여 실제로 ~인 어떤 것을, 다시 말해 이 주어에 관련하여 ~인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 어떤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해진 문헌을 받아들이는 대신, 모든 근대 편집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코르나리우스의 추정에 따른다면, 그리고 ontos를 onton으로 읽는다면 플라톤이 이에 훨씬 근사치에 오는 어떤 것을 말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ton onton으로 추정한다면 여전히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취하는 문헌이 뭐가 되었든지 간에, 플라톤이 구성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지점은 충분히 분명하다. ~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그것이 ~인 한에서만, 다시 말해 주어진 주어에 관련하여 ~인 것과 다른 한에서만 "not being"이라 불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263b11-12) 플라톤은 우리로 하여금 각각의 모든 것과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인 것들과 무수히 많은 ~이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우리의 앞선 발견을 상기시킨다. 그 표현을 고려할 때 그는 틀림없이 256e6-7을 돌이켜 지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학자들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주요한 문제를 구성했다.[420-421쪽]

16) 여기 263b에서 플라톤의 사유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고 하는 거짓 진술을 취해 보자. 그것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그와 관렪여 ~이지 않은 어떤 것, 즉 날고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이지 않은 어떤 것, 다시 말해 날고 있음을, 마치 그것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 속에 ~인 것 처럼 나타내거나 말한다. 이것은 문제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앞서 어떤 것과 관련해서든 ~이지 않은 수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날고 있음은 단지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이지 않은 그러한 것들 중 하나일 따름이다. 또한 이것이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는 진술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날고 있음을, 사실상 그것이 ~이지 않을 때, 사실 날고 있음이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무엇이든 그것과 다를 때, 혹은, 그 문제를 달리 보자면, 사실상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지 않을 때, 테아이테토스와 관련하여 ~인 어떤 것으로 나타낸다(263d1-2 참조).[421쪽]

17) 하지만 만일 우리가 256e6-7에서의 주장, 플라톤이 263b11-12에서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주장을 되돌아 본다면, 그것은 X와 Y가 다르고, 이런 이유로 우리가 그 경우에 X는 Y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이런 이유로 Y가 X와 관련하여 not being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경우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X에 대해서든 X가 그것과 다른, 따라서 X가 그것이지 않은 수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각각의 모든 것과 관련하여 그것과 관련하여 not being인 수 많은 것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생각되는 바 여기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데, 설령 테아이테토스와 날고 있음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참이라 하더라도,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음과 다르고 따라서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지 않다는(날고 있음이지 않다는) 것, 이것은 어째서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인지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의미는 아니다. 설령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는 것이 참이라 할지라도, 테아이테토스와 날고 있음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고 따라서 그러한 의미에서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지 않다는(날고 있음이 아니라는) 것은 여전히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의 거짓을 설명하는 것일 수 없다.[421-422쪽]

18) 256e6-7과 그에 앞선 부분에 대한 주석가들의 이해를 고려할 때, 특히 이 부분에서 "X는 Y이지 않다" 형식의 진술들이 비동일성 진술들을 표현한다는 그들의 추정을 고려할 때, 그들은 또한 어째서 플라톤이 여기 263b에서 not being에 대한 논의의 후반부, - 누구의 해석으로 보나 - 플라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정적 진술로 간주할 것에 합의하고자 시도하는 그곳을 언급하지 않는지에 대해 올바르게 혼란에 빠진다(McDowell, "Falsehood and Not-being," 122쪽 이하, Bostock, "Plato on 'Is not" 111쪽 참조). 이제부터 플라톤의 256e6-7에 대한 재언급은 오직, 플라톤이 내내 "X는 Y이지 않다" 형식의 진술들을 그 부분에서 비동일성 진술들, 다름에 대한 진술들로서가 아니라, not being에 대한 진술들, 즉 다른 것임의 특정한 방식에 대한 진술들로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기 때문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곳에서조차 다른 것임의 이러한 방식이 두 형상들이 서로 다른 경우들에서만이 아니라, 어떤 것이 특정한 성질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들에서도 드러났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제 256e6-7은 플라톤이 263b에서 의존해야 하는 "… is …"의 용법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57b1 이하 이어지는 추가된 논의는 그 용법이 또한 부정 서술의 경우를 포괄한다는 것을 보도록 해준 이러한 용법에 대한 이해였다. 그 이해는 이어지는 논의를 우리가 256e6-7을 통해 그것의 being을 확인하였던 바로 그 not being의 본성을 밝혀내는 것으로 취한다. 이것이 263b에서 플라톤으로 하여금 256e6-7을 재지시하도록 허용하는 것, 혹은 차라리, 말하자면 258b를 재지시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추가적 해명이 요구되는 문헌 상의 세부사항들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추가적인 해명으로 특정한 지점들에 대해 플라톤이 더 분명하고 더 정확해졌기를 우리가 바랄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의 논증에 대한 개요와 그의 일반적인 입장은 합리적으로 분명하고 혼란에 의해 손상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422-423쪽]


IV. CONCLUSION[423쪽]

 사실 더 앞선 대화편들에 비하여 『소피스테스』에서 인상적인 것은 이 대화편의 "교조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이다. 이 대화편은 신중하게 일련의 문제들, aporiai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대화편의 초반부는 초기 대화편들 혹은 그 직전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와도 유사하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 대화편은 이러한 aporiai의 해결들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대화편의 전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언급하고 또한 따르는 방법론적 원칙들 중 한 가지, 주어진 주제적 문제에 대해 우리는 해당 문제에 대한 적절한 설명, 그 적절성을 부분적으로 aporiai에 대한 설명과 해결 양자 모두의 능력을 통해 입증하는 그러한 설명을 진행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관련된 aporiai를 명확히 바라 보아야 한다는 원칙을 상기시킨다(『영혼론』 1권 2장 403b20-21, 『형이상학』 2권 1장, 995a27 이하 참조). 그리고 『소피스테스』는 이러한 난점들을 매우 체계적이고 거의 전문적인 방식으로 해소해 나아간다. 신중한 분석을 통해 이 대화편은 주제를 명확하게 독립시키고 확정짓고자 시도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대화편은 플라톤의 모든 대화편들 중에서도 특출나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이 대화편은 또한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이 문헌과 관련하여 곤란을 겪는다면, 그것은 좋은 의미에서 그러할 것인즉, 당시의 플라톤은 거의 전적으로 탐구된 바 없는 문제들, 그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개념들조차 상실된 채였던 그러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거짓 진술들에 의해 나타난 난점에 대한 플라톤의 해결책은 뛰어난 성취이다.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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