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그는 겉보기 혹은 거짓 양립불가능성과 그 자체 혹은 참인 양립불가능성을 구분한다. 전자를 통해 소피스트는 역시 참인 논박에 대비되는 거짓 논박을 구성하며, 이 논박을 통해 피논박자로 하여금 소피스트는 논박불가능하기에 지혜로운 반면 자기 자신은 논박당하였다는 점에서 지혜롭지 못하다는 거짓 믿음을 지니게 만든다. 

 

  1) 겉보기 모순과 진정한 모순

     아주 거칠고 단순한 예를 생각해 보자면, 변지윤은 20대에는 장발이었으나 30대 이후로는 대머리이다. 이에 대한 거짓 모순은 변지윤이 (무조건적으로) 장발인 동시에 또한 대머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인인 변지윤을 두고 그를 서술하는 시점을 구분하여 20대일 때라는 조건에서 변지윤은 장발인 동시에 또한 30대라는 조건에서 바로 그 동일인 변지윤은 대머리이기도 하다. 이는 모순이 아니다. 서술의 관점이나 측면을 구분함으로써 서로 양립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양립가능함을 보일 수 있을 때, 이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 양립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소피스트가 사용하는 거짓 모순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로 초기대화편들에서 제기되는 이러저러한 덕 자체와 그 덕의 사례들에 관련한 모순들이 바로 위에서 설명된 "사실은 어떤 식으로 양립 가능한" 겉보기 모순으로 생각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제우스를 따르는 것일 수도 또 이에 반대하는 헤라를 따르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나 거꾸로 경건하기 때문에 신이 비로소 그 경건한 것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라케스』에서는 임전무퇴와 전략적 후퇴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그 둘 모두가 용기로 간주되기도 한다.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차원에서 덕에 대한 참인 믿음들과 본질 혹은 정의(definition) 차원에서 덕에 대한 그 자체적인 규정은 서술의 차원이나 층위를 구분함으로써 비로소 양립가능한 것들이 되고, 그런 식으로 초기 대화편에서 제기되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상황들은 이러한 관점이나 조건에 대한 대화자들의 무지를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포리아로 끝나지만, 또한 바로 이 무지가 극복될 경우에 모순은 더 이상 모순이 아니게 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소피스트가 기만을 위해 고의적으로 고안해낸 거짓 모순이 초기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와 대화 상대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던 모순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인상을 주게 만든다. 그리고 심지어는 소크라테스가 거짓 모순을 만들어내 의도적으로 대화상대방을 기만한 것처럼 보이게까지 만든다. 물론 소피스트는 자신의 무지를 숨기는 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공개하며, 소피스트는 논박을 자신이 지혜롭다는 거짓 믿음을 가지도록 만들기 위한 기만의 도구로 사용하는 반면 소크라테스는 논박을 거쳐 자신과 상대방 모두 특정 주제에 무지함을 합의함으로써 탐구와 교육을 목표를 위한 예비단계로 해당 논박을 활용한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을 강조할수록, 더욱이 교육과 진정한 탐구를 목표로 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순이 소피스트의 기만전술에서 활용되는 모순과 구분되기 어렵다는 점도 그 만큼 기이해질 것이다.

     아마도 Beer가 할 법한 반론은 진정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들(대표적인 예로 정지와 운동)과 겉보기 양립 불가능한 것들(대화편에서 핵심적인 예로는 "is"와 "is not")이 구분될 수 있으며, 전자만이 진정한 모순의 요소이고 후자는 겉보기 모순의 요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is와 is not의 경우, 이것들은 특정 조건에서는 결합되는 반면 또 어떤 관점에서는 결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운동은 같은-것에 참여함으로써 "운동이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다"라고 서술된다. 그러나 또한 운동은 같은-것에 관련된 다른-것에 참여함으로써 "운동은 같은-것과는 다른 것이다"라고 서술되기도 한다. 전자의 의미에서 운동은 같은-것이지만 동시에 후자의 의미에서 운동은 같은-것이 아니기도 하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자체적으로는 서로 다른 것들이 참여관계를 통해서는 연결될 수 있으며, 다름을 통한 is not과 참여를 통한 is는 양립 가능하다. 그러나 여전히 자체적인 차원에서 is와 is not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소피스트는 어떤 것들을 양립 시키는 측면과 상호 배제시키는 측면을 왜곡함으로써 거짓 모순을 만들어낼 것이다. 즉 여기에서 본래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과 가상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의 구분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같은 요소들 사이에서 어떤 조건에 따라 양립 가능 여부가 구분되는지가 핵심이 된다. 이는 다시 앞서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진정한 탐구의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난관으로서의 모순과 소피스트가 기만을 위해 활용하는 모순은 구분되지 않는다. 


  2) 원본과 모상 사이의 거짓/모상과 가상 사이의 거짓.

      Beer에 따르면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자를 모방하여 자기 자신을 도구로 써서 자신이 지혜로운 자처럼 보이도록 하는 그러한 가상을 만들어내는 자이다. 그리고 이에 대비하여 지혜로운 자의 비율(영혼의 균형, 진정한 모순과 양립가능성에 따라 정합적인 믿음 체계)을 왜곡하는 소피스트의 가상과 달리, 이 비율을 그대로 보존시킨 모방물로서 지혜로운 자의 모상은 그 자체도 지혜로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본과 모상의 관계는 사물과 그림 혹은 실제 인물과 그를 묘사한 조각상 등의 비유를 통해 제시되고 있으며,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맥락에서 이 몸이란 결국 입을 통해 말을 하거나 손을 통해 글을 쓰는 등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원본과 상 사이의 단절이 굉장히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홀로그램이나 조각상을 실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일 것이고 거짓 믿음일 것이다. 가상이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킨 상이라는 묘사에 따라 소피스트의 경우 그가 제작하는 가상은 무엇인지, 이 가상이 모방하는 원본은 무엇이고 그 본래의 비율은 무엇인지, 그리고 소피스트의 가상이 이러한 특정한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키는 방법과 결과는 무엇인지, 이에 대한 Beer의 설명은 문헌근거로 충분히 잘 뒷받침되고 그 논지 또한 상당히 일관적이다. 그럼에도 그의 해석은 그 자신이 주목하는 바 (단지 가상만이 아니라) 가상과 모상을 모두 포함하는 상 일반이 거짓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처럼 서술되고 있다는 문헌 상의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소피스트의 경우에만 또 지혜로운 자의 영혼을 원본으로 하는 경우에만 모상과 원본은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가?

    해명되어야 할 문제는 원본에 대해 상이 거짓이라 불리는 맥락과 모상과 가상 사이에서 가상이 더욱 거짓이라 불리는 맥락이 구분된다는 것, 그럼에도 그 둘 사이에 모종의 연결이 있다는 것, 그리고 『소피스트』의 결론부에서 검토된 거짓이란 생각-말-믿음-인상에서 특정 주어에 관련하여 있지 않은 것들을 바로 그 주어에 관하여 있는 것으로 결부시키는 종류의 것이라는 것, 그래서 이런 식으로 규정된 거짓이 앞서 구분된 두 종류의 거짓을 포괄하거나 혹은 그 둘 사이를 적절히 매개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설명하는 것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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