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Being and ~Being은 모순이다.

그런데 아는 자, 변증술에 능한 자, 철학자는

Being(or ~Being) in itself와 Being(or ~Being) in a relation with something을 구분한다.

a) Being in itself and ~Being in a relation with something은 참이다.

b) Being in a relation with something and ~Being in a relation with something 또한 참이다.

c) Being in a relation with something and ~Being in itself는 경우에 따라 참이다.

(~Being in itself가 the Difference with Being in itself일 경우.)

d) Being in itself and ~Being in itself는 거짓이고 모순이다.

모르는 자가 Being and ~Being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아는 자는 모르는 자의 믿음에 생략된 조건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믿음이 특정 조건에서 모순이 되는 믿음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그의 무지를 밝혀낸다.

그런데 소피스트는 스스로 모르는 자이면서 또 다른 모르는 자의 모순을 드러내고 무지를 밝힌다.

이 경우 소피스트는 결합과 분리의 기술인 변증술을 지니고 있지 못한 자로서,

단적으로 말해 in itself와 in a relation with something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Being and ~Being을 무조건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이 믿음 내에 포함되는 d) 믿음의 모순을 결과적으로 지적해내게 되며,

무지한 자이면서도 또 다른 무지한 자의 모순된 믿음을 지적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철학자는 조건과 층위에 따른 올바른 결합과 분리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결합과 분리를 통해,

반면 소피스트는 무조건적이고 단적인 결합과 분리를 통해,

이 둘 모두가 무지한 자의 모순된 믿음을 드러내며,

이 때에 지적되는 모순은 결과적으로는 같은 모순이다.

따라서 『소피스트』에서 철학자의 논박과 소피스트의 논박은

모순 그 자체가 참인 모순과 거짓인 모순으로 구분됨에 따라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며,

이 대화편 내에서 거짓 모순 혹은 가짜 모순이라는 특수한 개념은 요청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 "나의 아버지와 나의 개가 모두 나의 무엇이다."라는 믿음은

"나의"라는 속격이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와 소유를 의미하는 경우를 구분하지 않을 때

모순된 믿음 "나의 것은 나의 것이며 따라서 아버지는 개이다"라는 소피스트적 논박을 허용하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좋은 것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덕이다."라는 믿음은

그 획득의 다양한 방식들을 무차별적으로 모두 포함하는 한에서

"좋은 것을 '정의롭게' 획득할 수 있는 능력"과 "좋은 것을 '부정의하게'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쌍을 동시에 덕으로 승인하는 모순된 믿음을 포함하게 되며,

이 점이 논박을 당하고 아포리아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논박을 통해 모순이 지적되기 위해서는 논박을 당하는 자가 모순된 믿음을 지녀야 하며,

이러한 상대의 믿음 승인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모순을 강요하여 부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소피스트는 상대가 믿지 않는 모순을 억지로 믿도록 만드는 자가 아니라

상대가 의식하지 못하는 모순을 그것이 왜 모순되는지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자이다.

 

철학자는 분별없이 뭉뚱그려진 믿음 전체에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되는 부분믿음을 정확히 지적해냄으로써

논박을 수행하지만

소피스트는 전체 믿음과 그 안에 포함된 모순된 부분믿음을 구분해내지 못하는 채로

전체 믿음을 전면적으로 모순된 것으로서 지적해냄으로써

논박을 수행한다.

어느 경우든 논박의 대상이 되는 자가 무지한 경우 이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논박을 당하는 일 역시 피할 수 없으나,

만일 그가 아는 자라면 애초에 그런 전체믿음 자체를 무분별하게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비어도 노토미도 왜 거짓 모순, 거짓 논박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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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엘렝코스가 모순 지적에 그치지 않고 상대를 논파하여 무지를 자각시키는 데에까지 가야지만 성립한다는 이해를 내가 공유할 것인지부터 문제인 듯하다. 엘렝코스는 '논박'이라고도 번역되지만 '시험(test)'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사실 그 역할이란 상대가 앎을 가진 자인지 아니면 무지한 자인지를 확인하는, 상대를 시금석에 올려놓는 작업이라고 보는데, 이 경우 엘렝코스는 그저 상대방이 가지는 믿음들 사이의 정합성만 따지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모순을 지적하고 나서 칼리클레스마냥 모르쇠로 일관하며 어깃장만 놓는 자는 엘렝코스를 당하지 않은 것인가? 나는 그가 엘렝코스를 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이해가 잘못된 것일 가능성도 일단 염두에 둬야 하겠다. 엘렝코스는 상대의 무지를 드러낸다. 그 무지를 부끄러워하고 자각하고 개선의 의지를 다지든, 그것이 무지라는 걸 여전히 자각하지 못하든, 그게 엘렝코스의 성립에 결정적인 조건이 되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보는데, 아무튼 이것이 지적받은 점 중 하나.

 

다음으로는 『에우튀데모스』에서 소피스트식 말장난은 오류추리이며, 제대로 된 엘렝코스는 정당한 추리이고, 전자를 통한 엘렝코스가 바로 거짓 엘렝코스, 거짓 논박이리라는 것. 그리고 말장난 속에서 사실과 다르게 궤변적으로 연결된 것이 바로 가짜모순쌍이라는 것. 나는 "A는 B가 지혜로워지기를 바란다."에서 "A는 B가 달라지기(변하기)를 바란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달라진다"의 범위에 이전 단계에서는 포함되지 않았던 "'본질이나 존재 차원에서' 달라지기"가 포함되었다는 것, 소피스트는 이를 의도적으로 포함시킨 것이지만 이 말장난을 당하고 있는 상대방도 '지혜로워진다'를 '달라진다'로 전환시키는 데에 동의하면서 별 다른 추가조건을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소피스트는 "A는 B가 살아있는 지금과 달라지기를, 즉 죽기를 바란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고, A 자신이 이 말장난에 기여했다는 것, 즉 말장난의 논리적 여지를 마련해준 것이며 이것이 바로 피논박자의 무지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런데 "B의 달라짐"에 "B의 지금의 지혜상태와의 다름"이 "B의 이러저러한 상태들과의 다름"에 더하여 "B의 본질이나 존재와의 다름"까지 포함된다면, 이것은 '달라짐'의 애매성(이건지 저건지)이 아니라 모호성(여기까지인지 저기까지인지)인 것 아닌가? 즉 『메논』에서 "아름다운 것을 획득하는 능력이 덕이다"라는 명제(Q)가 제대로 한정되지 않아 그 범위 안에 "아름다운 것을 '정의롭게' 획득하는 능력이 덕이다"라는 명제(q1)와 "아름다운 것을 '부정의하게' 획득하는 능력이 덕이다"라는 명제(q2) 모두를 포함하게 되어서, 상호 양립 불가능한 q1과 q2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Q가 메논의 무지함을 드러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전칭명제 Q와 특칭명제 q3 "아름다운 것을 부정의하게 획득하는 능력은 덕이 아니다" 이 둘 사이의 대립이 엘렝코스를 통해 드러나는 모순이란 지적도 있었지만, 실상 q3이 메논의 믿음이었다면 애초에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q1과 q2가 양립할 수 없고, 이 모순에서 무지를 자각한 다음에 비로소 메논은 q2를 '폐기하고" q3를 자신의 믿음체계에 추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건 이미 엘렝코스를 통한 무지의 자각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새로운 배움이 진행된 상태 아닌가? 여하간, 아름다운 걸 획득하는 능력 모두가 아니라 그 중 일부만 덕이듯, A는 B의 달라짐 모두를 바라는 게 아니라 B의 달라짐 일부만을 바라는 것, 이건 유사한 구도라 볼 수 있지 않나? 전자의 경우 메논은 자기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닫고 덕에 대한 처음의 정의 "아름다운 것을 획득하는 능력이 덕이다"를 폐기한다. 후자의 경우에서 A는 "무슨 개소리냐! 나는 B를 사랑한다! 내가 B의 죽음을 바란다니 궤변이다, 궤변론자야!" 뭐 대강 이런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을 획득하는 능력이 덕이다"와 "B가 지금과 다른 자가 되길 바란다"가 둘 모두 명확한 조건이나 범위의 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 안에서 상호 모순되는 믿음쌍이 분석되어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모순쌍을 지적함으로써 드러나는 무지란, 결국 제대로 한정되지 않은 저 두 믿음 아닌가? "B가 지혜로워지길 바란다"는 "B가 죽은 자가 되길 바란다"를 배제하지 않고 "B가 달라지길 바란다"는 다시 "B가 (살아있는 지금의 상태로부터) 달라지길 바란다"를 또 역시 배제하지 않으니, 소피스트의 궤변이나 오류추리는 피논박자의 무지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고 지적된 모순은 유의미한 것 아닌가? 여기에서 '다름'이 과일 '배'와 탈 것 '배' 사이의 애매성과 유사한 방식의 애매성을 보이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달라질 대상의 범위를 어떻게 한정하느냐에 따라서 '다름'의 애매성이 발생한다고 본다면 이는 '획득'의 방법(아름답게, 훌륭하게, 정의롭게, 불의하게, 불경하게 등등...)을 어떻게 한정하느냐에 따른 '획득'의 애매성과 무엇이 다른지 아직도 모르겠다.

 

고민 중.

 

+ 만일 위 반론을 받아들여 오류가 소피스트에게만 있을 뿐 상대방에겐 없다고 한다면, 그리고 피논박자가 위 사례에서 소피스트에 의해 논박을 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면, 그래도 여전히 소피스트의 논박을 철학자의 논박과 동일시할 여지가 남는가? 소피스트는 오류추리를 통해 스스로 모순된 믿음쌍을 가지고, 이를 상대에게 강요한다. 위의 사례가 그 강요에 저항하여 강요된 믿음을 수용하지 않은 경우라 한다면, 반면에 소피스트가 지혜롭다 믿고 그에게 배우기를 청하며 돈을 가져다 바치기까지 하는 사람은 강요된 믿음을 수용했어야 할 것이다. 혹은 누군가 그렇게 강요된 믿음을 수용하여 결과적으로 모순을 드러내 보여 무지한 자로 밝혀졌을 때, 이러한 논박을 과정을 구경한 제3자는 소피스트가 논박에 성공한 반면 그 자신은 논박당한 일이 '아직' 없으므로, 소피스트를 지혜로운 자라고 여길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 때 소피스트의 오류 추리는 상대방 피논박자의 동의를 거쳐 그 피논박자 자신의 모순된 믿음이 된다. 모순되지 않는 것을 모순된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 논박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잘못된 추론을 통해 형성된 모순된 믿음을 상대방에게 심어주는 것이고, 여기에서도 여전히 거짓 모순과 참된 모순의 구분은 불필요해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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