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인과성

1) 꼴들은, 로크의 말을 빌리자면, 실재적 본질이며 명사적 본질이 아니다. 꼴들은 실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명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명칭들이나 단어들의 일상적 의미들에 대한 탐구는 그 탐구가 꼴들에 대한 탐구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꼴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그것들이 실제 사물들인 바의 그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본질은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인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의 존재에 대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실재는 내재적이며,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사물들의 발견 가능한 특질들이 의존하는 사물들의 구조는 그 사물들의 본질로 불릴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형성으로부터 명백하듯이, 그 단어의 적절한 의미이다; 그 기본 표기법에 있어서 적합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esentia.

로크의 설명에 의해, 본질은 '어떤 것의, 그로써 어떤 것이 그것인 바의 것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개별자의 실체적 꼴을 그 개별자의 실체와 동일시하면서, 본질을 본질을 가진 것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는 로크가 물려받았던 그 전통을 기초하였다.

2) 그러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 있음에 대해 그 꼴들이 꼴들인 것의 있음이 아니다. 하나의 있음인 보편개념은 다수성의 있음이 될 수 없다 - 정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보편개념들로부터 실체적 꼴을 구별하는 데에로 이끌렸는지의 이유이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어떤 주어진 경건한 사물이나 경건해 보이는 행위의 있음이라고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경건이 그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그러한 것임을 시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 어휘를 조금 빌리자면, 경건이 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3) 『대히피아스』에는 이 전제를 명백하게 만드는 논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히피아스가 올바름 어떤 것이다(ἔστι τι τοῦτο)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에 동의하도록 이끄는데,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지혜로운 것 등등의 그러한 것들은 만일 그것들이 어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의한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기 때문에, 히피아스는 아름다움도 어떠한 것이며, 그것들이 다른 말들이나 생각들 또는 개념들에 의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4) 이 논증은 분명히 『대히피아스』에만 놓이지만, 그것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각각의 초기 대화편들에 의해 가정되는데, 왜냐하면 꼴들이 본질들이라는 그 전제는 변증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꼴들은 정확히 보편개념들이고 표준들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바의 것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5) 플라톤이 매우 자주 꼴들과 그 꼴들을 지닌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화하기 위해 인과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꼴들이 본질들이기 때문이다. 『뤼시스』(221c)에서 소크라테스는 '원인이 파괴될 때, 그 원인이 그에 대한 존재를 지속시키는 원인인 그러한 것은 물론 있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원인이다: 경건의 현존은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현존에 필수적이다.

6)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과 그 꼴들의 예시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한다. 꼴들은 그 예시들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또는 그 예시들'에 현전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들에 '덧붙여져'야 할 것으로, 아니면 그것들'에' 있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 예시들은 다른 한편으로 꼴들을 '가지거나' '허용하거나' '취하거나' '나누어 가진다'. 이러한 은유들 전부 일상언어에 기초된다. 그것들은 정말로 평범하게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명사들과 함께 사용될 것이다. 영어에서 한 행위에 용기가 있다(there is courage in an action)고, 또는 올바름의 현전이 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내의 도량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7) 은유들로서, 그리고 친숙한 그리스어로서, 이러한 용어들은 소피스트적 논쟁들의 재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디오니소도루스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움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잠시 망설인 후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όν)와 다른 것들이고,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들 각각은 그 안에 현전하는 어떤 아름다움(κάλλος τι)을 지닌다고 말할 때, 디오니소도루스는 재빨리 주도권을 잡아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소 한 마리가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소로군요. 그리고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은 디오니소도루스고요'(301a). 소크라테스는 '맙소사'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현전'은 은유 - 혹은 최소한 많은 용례들을 지닌 단어 - 이고 잘 다룰 방법은 그것의 의미에 달려 있다.

8) 문제가 되고 있는 '현전'은 특수한 종류의 것이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나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떤 것에 현전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을 떠맡고,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그의 논의를 갑작스럽게 중단한다. '일부 사물들은 그 사물들에 현전하는 그러한 것 그 자체일 그런 것들이다;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만일, 예를 들어 금발이 하얗게 칠해진다면, 흼은 그 머리카락에 현전할 것이지만, 그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흴 적에, 흼은, 그 머리카락이 그래서 하얗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머리칼에 현전할 것이다. 앞서의 경우, 흼은 머리카락에 현전한다. 뒤의 경우, 머리카락은 '흼의 현전에 의해 하얗다'.

9) 어떤 것이 흴 때 그 의미에서 흼이 그것에 현전하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도구적 여격에 의존한다. 이러한 장치는 초기 대화편들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고, 사려있는 자들은 사려에 의해 사려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대히피아스』(300a)에 따르자면 아름다움 것들을 아름답도록 만든다(ποιεῖν).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어법과 결부된다. 이온은 그가 호메로스를 기릴 수 있음이 앎에 의한(도구적 여격)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온』541e).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건강에 의해(ὑπό와 동작주의 속격) 유익해진다고 생각한다(『크리톤』280a). 사려는 만일 그 사려가 그들에게 현전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좋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나쁜 것이다(『카르미데스』161a).

10) 그러나 비록 이러한 표현들이 일상언어에 결부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종종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Ποιεῖν은 πάσχειν에 속하는 규칙동사이고, πάσχειν은 규칙적으로 '자격지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ποιεῖν은 '자격을 둠'의 의미로 규칙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혜가 사람들을 복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지혜가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또는 지혜가 그에 의해 사람들이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논리적 차이가 있다.

11) 이러한 표현들은 인과적이다 - 흔히 당구공들의 부딪침과 연관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적 원인에 대해 말하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 아름다움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이다: 아름다움의 현존은 다른 것들의,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인 한에서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대히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물들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가 현존해야만 아름다우며,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했을 때, 그 이유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그러한 어떤 것(δι᾿ ὅ)이 현존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12) 그것들이 그에 의해 어떤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인 바의 그러한 본질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꼴들은 원인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파이돈』(100c)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것들이 아름다움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케베스에게 그가 이러한 종류의 원인(αἰτία)을 허용하는지 묻는다. F. M. 콘포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라는 구절은 … 모호하다. '이유'는 '설명'(αἰτία의 관습적 용법)을 의미할 것이다. 그 전제는 그래서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진술과 동등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나는 말들의 그 형식을 바꾸어 말함으로써 대체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명제의 분석이 아니라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론은 그래서 이 사실이 (1)특정한 가시적인 것, 이 장미, (2)아름다움(Beautiful or Beauty), 그리고 (3)우리가 '~에 참여한다'를 대체할 수 있는, '~는 ~이다'로 표현되는 그 둘 사이의 관계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으로 구성된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오로지 하나의 설명만을 가진다: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장미가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존립하게 할 어떤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어느 관점에서든 우리는 한 명제에 대한 분석이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분석만을 가질 따름이고, 참인 진술의 이유나 그 사실의 현존에 대한 원인을 가지지는 않는다.

첫번째 주장은 제외될 것이다. 당신은 말을 바꿈으로써 오로지 본래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무지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명제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 그 누구도 그 표현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줄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αἰτία가 말 바꿈에 대해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고대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가 말 바꾸기를 시사하리라는 주장은 그래서 불충분하다.

13) 콘포드가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라고 부른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사실이라면, 그가 인정하듯, 어떤 식으로 분석이 말 바꾸기와 다른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경우든, 이것은 플라톤의 핵심을 놓친다. '이 장미는 아름답다'와 '이 장미는 아름다움의 꼴에 참여한다'는 실로 등가의 진술들이다 -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확히 사실들의 구조에 있어서 존재론적 우선성에 대한 이론이지, 명제 등가들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이 장미를 아름답다고 부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사물에 세례를 내리는데 그것에 있어서 그 특징 때문이고,(그 특징 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세례의 정당함을 보장하는 그 특징의 현존 때문이다. 꼴 자체는 그렇지만 오로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만일 그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장미가 아름다운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그 꼴은, 꼴의 현존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꼴은그 장미에 있어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현존뿐만 아니라 토양의 조건, 그리고 기후, 정원사의 기술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충분조건은 본질인과만이 아니라 작용인 또한 필요로 한다.

14) 그래서 꼴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것들인 바의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원인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세계가 그 세계인 어떤 것이 아니었으리란 의미에서 말이다.


지시의 재고

1)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하는데,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대상들을 명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로부터 초기 대화편들이 이제는 이전보다 덜 널리 주장되는 그 명제, 어떤 것을 기술한다는 것은 서술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를 전제한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이 마지막 명제는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명제와 관련되어 왔다: 잘 구성된(혹은 잘 분석된) 문장들의 구조는 반드시 문장이 표현하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일대일 혹은 2방향 유일 상응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명제이다. 잘 구성된 문장들은 술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문장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은 반드시 유사-술어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 술어들이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더 나아간 단계이고, 그러한 술어들은 그것들을 명명한다.

2)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하지 않은 명제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더욱이 그것과 관련된다고 거의 이야기될 수가 없다; 그 대화편들은 특정한 어떤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되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파이돈』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일이 하나의 기술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꼴들의 각각은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 꼴들의 제 몫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라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기술하는 것은 그에게 올바르다고 명명하는 것이고, 좌우간 올바름을 명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름이 비록, 올바르게 적용된다면, 소크라테스가 올바름에 참여하기 때문에 적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3) '올바른'과 '올바름' 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메이아적 구별이었을 것을 사용하면서, 동근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예시이다: '사물들이 상이한 어미들로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들의 이름을 획득할 때, 그것들은 동근어들이라 불린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문법학자(grammarian)는 그의 이름을 문법(grammar)로부터 획득하고, 용감한 자들은 그들의 것을 용감으로부터 취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를 동원어적으로 명명한다: 그는 그의 이름을 올바름으로부터 얻는데, 어미상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참여하고 있는 꼴의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그 꼴로부터 얻은 이름과 문법적 어미에 있어서 다를 필요가 없고, 플라톤의 고유한 사용에 따르고 소크라테스가 어원적으로 명명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르다'와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참여한다'는 등가 명제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반한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동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는데, 하나는 어원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것들에 대해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어원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미는 지시를 필요로 한다; 지시 대상들은 그렇지만 어원이 그것들의 관련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구별된다.

4) 종과 유들은 근원적인 반면에 어원적으로 그것들을 도입하는 서술들은 파생적이라는 것이 이 관점의 결론이다: 용감한 자들은 용감으로부터 이름지어지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이것이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종과 유들을 논리적(혹은 어쩌면 비논리적) 구조로, 기술들 그 자체인 의미의 근원적 매개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답변은 일대다(一對多) 논증이어 왔다. 그 논증에 대한 전제들은 현대적인 차림으로 존 오스틴에 의해 경탄스럽게 진술되어왔다 - 그는 물론 그 논증의 결론에 동의하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좌우간 언어를 통해 성취하는 그런 종류의 소통일 것이 있다면, 의사전달자('화자')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피(彼)의사전달자('청자')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징들의 축적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이 '말'이라 불릴 것인데, 물론 비록 그것들이 우리가 보통 말이라 불러야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일 필요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다 - 그것들은 신호기(信號旗) 따위의 것일 터이다. 또한 말과는 다른 어떤 것, 말이 그에 대한 소통을 위해 사용될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세계'라 불릴 것이다. 어째서 세계가 말을 포함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진술 그 자체, 그에 대해 어떤 특수한 경우이든 세계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진술 자체의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다. 더욱이, 세계는 유사성들과 부동성들(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는)을 내보여야만 한다(우리는 관찰해야만 하고): 만일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될 수 없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면, 말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서 - 물론, 마찬가지로 만족될 다른 조건들도 있다) 두 가지 관습적 방식들이 있어야만 한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황, 사물, 사건 등의 유형들을 가지고 말과 관계하는 기술적인 관습적 방식들(= 문장들). 세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상황들 따위를 가지고 말과 관련하는 지시적인 관습적 방식들(= 명제들).

오스틴은 보통 일상언어철학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어떤 표어들 아래에서도 행진하지 않았고 어떤 장단에도 맞추지 않았으며, 만일 언어가 그 세계에 대한 것일 터라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 기술하는 위의 문단은, 만일 내가 실수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투명한 형이상학의 단편이다. 오스틴은 주석에서 계속해서 첨언한다:

'~를 가진 일종의 ~이다'라는 것은 '~을 가진 그런 표준적 사태들과 충분히 유사한 ~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참된 하나의 사태일 하나의 진술은 자연적 관계인 특정한 다른 것들과 유사해야만 하고, 그러나 또한, 더 이상 순수하게 자연적 관계는 아닌 동일한 '서술' 가치에 대해 충분히 유사해야만 한다. '이것은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그런 것들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이것은 붉다고 불리는 그런 것들과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사물들이 유사하다거나 또는 심지어 '정확하게' 유사하다는 것조차 나는 문자 그대로 이해할 터이지만, 그것들이 같다는 것을 나는 문자 그대로 알 수 없다 - 그것들을 똑같은 색이라 부름에 있어서 관습은 그것들이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색에 주어질 이름에 대한 관습적 선택에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유사성과 부동성은 상이한 측면들에서 획득하는 관계들이다. 크리켓 공과 야구공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고 색에 있어서 부동하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이 이것이 그러하다는 측면들을 구별함이 없이 유사하고도 부동하다고 진술할 수는 없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세계 속의 사물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가 좌우간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독립적으로 획득하는 유사성과 부동성이 자연적 관계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관계들이 그 덕분에 획득하는 그러한 특징들 - 형태적 특징들, 색채적 특징들 등 - 이 언어적 관습의 문제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거의 이치에 맞기 어려워 보인다. 만일 그 관계들이 '자연적'이라면, 그것은 그 덕분에 그것들이 유지하는 그러한 특징들도 동일하게 그렇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그러한 특징들은 기술들이 아니다: 우리는 크리켓 공과 야구공이 모두 구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구체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 혹은 구형일 것임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물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기술되는 그 사물의 특징 덕분에 유지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용감한 자들이 용기로부터 이름지어지고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5)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유사성들과 부동성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특징들의 현존을 추론해내는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를 발견하고 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 문제를 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언급들은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의 경우 그 추론이 의지하는 그러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어떤 것을 한다. 그렇지만 초기든 중기든 대화편들에서 유사성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도출된 꼴들에 대한 우리의 앎은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사실상 유사성이 획득한다고 확신할 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을 통해서만 있기 때문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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