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들의 영역의 구조

1) 만일 종의 유에 대한 관계가 꼴들의 구조에 기초된다면, 그 구조는 반드시 계층적이어야만 한다.

2) 이것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 관점은 반대에 부딪쳤다. 예를 들어 체르니스 교수는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체에 대한 구성부분으로서 또는 종에 대한 유로서 어떠한 이데아도 없다. …플라톤은 어디에서도 이데아들 사이에 유와 종의 구별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라고 부른 것, 종차라고 부른 것, 그리고 종이라고 부른 것은 그에게 모든 별개의 관념적 단일체들이다, 각기 다른 것들의 현존을 수반하거나 다른 것들과 양립 가능한 측면들을 지닌 다른 것들 보다는 가기 다른 것들, 그러나 남김없이 다른 것들로 분석될 수는 없는 독립적 본성인. 플라톤은 그래서 분절을 사용하여 이데아들의 세계에서의 존재론적 계층을 산출할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소피스트』와 『정치가』, 분절에 대한 안내서로 여겨지게 된 그 두 저술들은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오히려 발견적 학습법을 의미했고, 한정된 이데아를 탐색함이 용이하도록 하는 수단을, 다른 이데아들로부터 그 이데아를 구별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의 함축들과 동일성을 의미했다는 것과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이데아, 이데아의 기원, 혹은 그것의 구성 요소들의 '구조'를 묘사하는 것으로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체르니스 교수는 일부 꼴들이 어떠한 부분들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서 단순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단순하다는 것을, 그리고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다는 것을 또한 주장한다. 그의 의견들은 후기 대화편들을 겨냥하고 있고, 명확하게 『소피스트』에서와 같은 종류의 집단에 속하는 원칙을 겨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초기 대화편들의 해석으로서도 잘 맞는다.

2) 이러한 관점에 반대되는 그 저술들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유나 혹은 그에 대해 꼴이 검토 아래에서 일부인 그러한 전체를 명시할 것임을, 또는 그 꼴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임을 진술하거나 시사하는 모든 저술들이다. 그러한 저술들은 : 『에우튀프론』 11e-12a, 『프로타고라스』 329c와 그 이후, 『메논』 74-6, 『라케스』 190c-d, 199e이다. 이러한 구절들 모두 유 아래에 종을 포함하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그래서 꼴들의 계층적 배열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지 않고 단층화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3)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저술들, 그리고 후기 대화편들의 다른 저술들이 그 저술들의 의도가 발견적이라는 점을 제쳐두고 세워진다고 제안한다: 그 저술들은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으로 전제를 반성한다. 그러나 탐구의 방법은 그 탐구의 핵심-문제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거나 적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꼴들이 상호에 대해 종과 유처럼 자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발견의 의도에 유용하다면, 어째서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의 가능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 확실한 대답은 그 전제가 꼴들의 실재적 구조에 답한다는 것이다.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대답에 반대하면서, 그 대신에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부는 방법론과 설명을 요하는 반대 사이의 동일척도불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실상 아무런 유들도 그리고 어떠한 계층도 없을 때, 어떻게 꼴들이 유들 아래에서 포함가능한 것들이고 발견적 기능을 제공하도록 계층적으로 배열된다는 전제가 가능한가?

4) 더 큰 어려움도 있다. 초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은 ποῖόν τι의 물음보다 τί의 물음이 우선한다거나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체르니스 교수가 제안하듯 오로지 꼴들 사이에서의 관계들만이 차이, 포함, 양립의 관계들이라면, 이러한 구별은 도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래서 만일 꼴 F가 그것의 함축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하지 않다면, 'F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F는 오로지 함축들과 양립들의 관계들에 의해서만 특징지어질 수 있고, 그러한 관계들 중 특정한 것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본질적인 것임을 뒷받침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οὐσία를 πάθος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F가 그것의 포함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시된다면, 후자는 그것이 F일 그러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 중의 어떠한 것들이든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보다 결핍하고 있거나 다른 것이라면, F는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이 아닐 것이고,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과는 다른 것일 것이다. 즉, 동일성은 '내적 관계들'로 이끈다. 그리고 양립가능성과 함축이 모든 각각의 꼴을 다른 모든 각각의 꼴들에 관련시키기 때문에, F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각각의 꼴과 관련될 것이다: 진리는 전체일 것이다. 스페우시푸스는 나중에 이러한 단계에 매우 근접하게 나아갔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플라톤은, 최소한 초기 대화편들에서는, 그렇지지 않은데, 왜냐하면 πάθος와 οὐσία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을 그 단계는 부정하기 때문이다.

5)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소크라테스가 물었고 또 그것이 대답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던 것처럼 물어지고 또 대답될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ποῖόν τι의 물음들로부터 구별이 유지될 것이라면, 꼴들 사이에서 포함들과 양립가능성 그리고 그것들의 부정들의 관계들 보다 더 나아간 어떤 관련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한 관련의 본성은 『메논』에서 올바름은 탁월함 자체가 아니지만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주장에 의해, 『라케스』에서 용기는 전체로서의 탁월함에 속하는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올바름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제시된다. 그 관련은 종과 유 사이의 관련이다: 한 부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 부분의 위치를 그것을 한 부분으로 하는 전체 속에서 정립해야만 한다.


탁월함의 단일성

1) 탁월함들이 유 속에 그것들을 정립시킴으로써 한정가능하다는 관점은 또 다른 초기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와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이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명제는 플라톤의 생애 마지막에 그의 생각을 차지한 것이었고, 그것은 종종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프로타고라스』의 교훈은 모든 탁월함들은 그것들이 앎이나 지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은 탁월함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정의로 고수되어 왔다. 솔직히, 그것은, 종과 유의 비동일성을 시사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가 아니다.

2) 『프로타고라스』에서 앎의 우선성은 단호하게 내세워진다(352b-c):

대부분의 사람들은 앎이 명령의 힘도 권위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앎을 가질지는 모르지만 그 앎은 제압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분노에 의해, 그리고 기쁨과 고통에 의해, 가끔은 사랑에 의해, 그리고 자주 두려움에 의해서 - 비록 앎이 어떤 가난한 노예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격정들에 의해 제멋대로 끌려다닐 것과 같이 말이다. 그것이 당신의 관점 아닌가, 프로타고라스? 아니면 당신은 오히려 앎이 아름다움과 능력, 그리고 그 무엇도 꺾을 수 없는 것에 속하는 어떤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텐가; 나쁨으로부터 좋음을 구별해 내기만 하면, 지상의 그 무엇도 그러한 앎을 가진 자를 그 앎 - 그의 조력자로 충분한 지혜 - 과 반대로 행동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겠는가?

이 구절은 의심할 나위 없이 소크라테스 그 자신의 믿음을 대변한다: 탁월함은 앎이다. 그 누구도 제 뜻으로 또는 알면서도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3) 만일 앎이 탁월함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탁월함이 앎을 수반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탁월함과 앎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점이 따르지는 않는다. 동치는 동일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치는 더 넓은 논증의 부분으로 나타난다. 그 논증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한 것에 대한 모든 이름들이라는, '용기',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탁월함'은 동의어들이라는(349b-c) 점을 받아들이도록 이끌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앎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4) 하지만 아직 이러한 방식에는 어려움들이 있다. 우선, 그 설명이 탁월함과 앎을 동일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능력의 동일성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이다. 만일 그 탁월함들의 명칭들이 동의어들이라면, 그 탁월함들이 지혜로 화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어떤지, 지혜를 포함한 그 탁월함들이 경건이나 올바름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임의적이다. 물론, 탁월함은 앎이나 지혜이다; 그러나 그래서, 탁월함은 용기나 경건, 또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동의어에 대해 대칭적인 관계이다.

5) 그 동일화 방식에는 두번째 어려움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들이 구별된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네 가지 논증들을 내놓는다. 첫번째(330b-331b)는 올바름과 경건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두번째(332a-333b)는 사려와 지혜의 단일성을; 세번째(333d-334a)는 그 결론에 도달하지 않고 중단되는데, 어쨌든 올바름과 사려의 단일성을 주장할 것이었다. 거기에서 남은 대화편을 통해 중단 없이 추적되는 그 물음이 다시 말해진 다음(439b-d) 긴 중간극이 따른다. 마지막 논증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용기와 지혜의 단일성을 증명할 것을 자임한다(349d-360e). 만일 탁월함들의 단일성이 탁월함들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해진다면, 이러한 논증들 각각은 논리적 오류이고, 그것들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그리고 창피스럽도록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그 문답의 고비를 넘긴다. 프로타고라스는 지적인 사람으로서 도처에서 묘사되고, 말들을 다루는 방식들에 있어서 지혜롭지만,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을 다룰 줄 모른다. 그의 실패는 물론 말의 단련에 있어서 기술 부족 탓이 아니다; 그것은 소피스트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비록 그가 탁월함을 가르치리라 주장할지라도, 탁월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그 사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은, 만일 그 논증들이 공허한 오류들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결론을 가리키는 쪽으로 그 논증들이 행한다고 의미되는 것으로서 이바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6)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타고라스』도 실패로 끝나고, 그것은 익숙한 이유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는 먼저 탁월함이 무엇인지 결정함이 없이는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점은 추론할 것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답의 변증에 대한 명쾌한 요약정리를 되보여준다 (360e-361c):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탁월함에 관련한 것들을 가지고 바로 그것인지, 탁월함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 밝혀내려는 바람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묻는다. 왜냐하면 나는 만일 그것이 한 번만 보여진다면 당신과 내가 논의한 물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가 말끔하게 정리되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논증의 결과는 그것이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혀를 가졌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 둘 다 뭐 이런 바보들이 있나,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분명히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없다고 말한 소크라테스 당신은 지금 바로 그 반대의 것을 설득하려 들고 있다, 모든 것 - 올바름도 사려도 그리고 용기도 - 은 앎임을 보여주려고 애쓰면서, 그걸 보여줌으로써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 는 것이 따라나오는 것을 말이다. 만일 그것이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하려 애쓰는 것처럼 앎과 다른 것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만일 그것이 당신 주장처럼 전적으로 앎일 것이라 증명하는 것이 된다면, 소크라테스, 만일 그것이 가르쳐질 수 없다면 더욱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서 프로타고라스가 조금 전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고 전제했는데 지금은, 다름 아닌 앎을 피함으로써, 그것이 무엇보다도 최소한 가르쳐질 수만은 없을 것이도록 그렇게, 그 반대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 프로타고라스, 내가 주장된 이 모든 것을 앞뒤로 볼 때, 나의 바람은 그것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것이오: 나는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향해 진격해야 할 것 같고 또 공격해야 할 것 같소. 그리고 나서 다시 되돌아와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물어야 할 듯 싶소.

『프로타고라스』의 결론에서,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모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들을 뒤집어 버렸다. 이러한 뒤얽힘은 변증적 반어법의 단편이다. 그 목적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의 필연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7) 『프로타고라스』는 『메논』에서 그 짝이 되는 조각을 가진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그는 전제를 가지고 그 문제를 정착시킬 것을 최종적으로 떠맡는다. 그는 만일 탁월함이 앎이라면 그것은 가르쳐질 수 있다(87a-c)고 가정한고; 그것이 앎이라고 주장한다(87c-89a); 그리고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선생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89c-96c); 그리고 그것이 '다이몬적인 분배에 의해, 이해 없이' 사람들 속에 현존한다고 결론내린다(100a). 즉, 소크라테스는 함축을 전제하고, 그 함축의 선행하는 것을 긍정하고, 그것의 결론을 부정하며, 회의주의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구조는 플라톤이 그의 독자들을 그의 전제들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할 작정이었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나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먼저 밝혀내지 않고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아포리아(당황)로 끝을 맺었고, 심지어 기하학자들로부터 빌려온 새로운 가정의 방법조차 그들을 구해내지 못한다(86e-87a). 그러나 또, 기하학자들은 그들의 용어들을 정의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할 수 없다. 이것은, 그래서, 그들의 실패의 교훈이다. 정의는 필수적이라는,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중인 그 어떤 것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익숙한 소크라테스적 교훈이다. 그래서 『메논』은 또한 변증적 역설의 한 조각이다: 그 극적인 구조는 정의가 필수적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과 같은 그런 도덕적 결론들을 권고하는 것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그러한 결론들만이 달성될 수 있는 그러한 조건을 지시하는 데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다.

8) 만일 이것이 『프로타고라스』와 『메논』에 대한 옳은 설명이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전하고자 하는 바가 탁월함과 앎의 단일성이라는 관점에 반대하여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그 둘 중 어떤 대화편도 이러한 문제에 헌신하지 않고, 두 대화편 모두 그 대화편들의 변증적 중심점으로서,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의 필수불가결함 - 즉 그것을 정의하는 일의 필연성 - 을 강조하며 결론에서는 그 물음이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9)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관한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이, 그 방식에서 탁월함이 하나일 그러한 대안적 방식들을 예상한다는 것은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에 동의하도록 이끌린다 (329c-330b): 탁월함은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용기라는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구별되고, 같은 것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 아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오로지 크기에서만 차이가 나는 황금의 일부 같은 부분들이 아니고, 두 눈과 두 귀 처럼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부분들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가 아니라(οὔτε αὐτὸ οὔτε ἡ δύναμις αὐτοῦ, 330b) 서로 그러한 종류의 것(οἷον)에 속하는 것들이다; 탁월함의 그 부분들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용기 있으나 올바르지 못하거나 올바르되 지혜롭지 못할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사람은 탁월함 전부를 가지지 못하고서도 탁월함들의 일부를 가질 것이라는 점에서, 분리될 수도 있다.

10) 다음으로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하는 하나의 전체임을 긍정함에 있어서, 복합된 반박을 내놓고 있다: 그는 탁월함의 상이한 부분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동일한 것들임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 부분들이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도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탁월함들이 하나일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

11) 탁월함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들이 상이한 정의들을 가진다고 마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탁월함이 기능에 있어서 다르거나 같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탁월함의 기능은 무엇인가?

12) 그런 물음은 『프로타고라스』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대답되지 않는다. 탁월함의 기능은 탁월함 그 자체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얼굴에 대한 예시를 무관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두 눈과 두 귀는 그것들의 기능들인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차이가 난다. 다시, 두 가지 덕들은 그것들이 동일하다거나(ταὐτόν) 아주 유사하다(ὁμοιότατον)는 것조차 긍정할 것도 없이 서로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οἷον)에 속한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단어의 '기능'이 그 단어의 의미 또는 능력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올바름이 '올바름'의 의미라 할지라도, 올바름의 기능은, '올바름'의 기능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은 아니다.

13) 만일 탁월함의 기능에 대한 관념이 이해될 것이라면, 우리는 그 표현이 그 안에서 사용되는 그러한 논증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기능으로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부정(330b)하는 근거, 그리고 나중에 그 탁월함들이 서로 간에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라는 것을 부정(330e-331c)하는 근거는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다(329e; 349d참조). 그리고 이것은 탁월함들이 서로 만나도록 한다는 것, 경건의 현존이 올바름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 또는 용기의 현존이 지혜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추론은 명확해 보인다: 탁월함의 기능은 그 기능을 도입하는 어떤 것 속에 놓인다; 만일 탁월함들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면, 그것들은 분리가능하다;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

14) 이것은 그 논증의 양식에 걸맞는다.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모두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명제는 만일 그 명제가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나 또는 그것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면 틀린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만일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라면, 그것들은 기능에 있어서도 하나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기능에 있어서 하나라면 정의에 있어서도 하나라는 것이 뒤따를 방법은 없다. 사람이 올바름 없이 경건할 수 없다거나 경건함 없이 올바를 수 없다고, 또는 경건과 올바름이 서로를 도입한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름의 정의와 경건의 정의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탁월함들은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구별가능하다; 만일 탁월함들이 구별가능하다면, 그것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만일 탁월함의 부분들이 황금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면, 그 자체에 있어서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 모두 상이한,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라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즉, 탁월함의 특수한 경우에, 황금과 얼굴에 대한 그 예시들은 부적당하다는 것일 수 있고, 황금도 얼굴도 밝혀내지 못하는 정의에 있어서 차이와 기능에 있어서의 동일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일 수 있다.

15) 그 논증에 대해서는 이 만큼이면 됐다. 그러나 그 변증적 상황은 여전히 더욱 복잡하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고 추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올바름 없이 단지 지혜롭거나 용감할 수 있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탁월함들이 그 자체에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다르다는 그 주장을 반박할 것이고, 탁월함들이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탁월함들이 어떤 면에서 하나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것들이 서로 도입하고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라는 것인지 말이다.

16) 『프로타고라스』는 이 물음에 대해 세심하게 고안된 모호함을 유지한다. 그것은 대안들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니고, 프로타고라스 그 자신은 그 논증에 대한 그 대안들의 관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놀랄 것도 없다. 탁월함들이 정의에서 하나인지 기능에서 하나인지 혹은 양자에 있어서 하나인지 묻는 것은 탁월함이 무엇인지를 암시함으로써 묻는 것이다. 그 물음은 오로지 대화의 중국에서야 명확하게 된다(361b-c).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고려하는 중에 내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시사한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그가 탁월함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했고(318a-319a), 그리고 탁월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자로서, 소크라테스적 엘렝코스(논박술)가 바로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계획된 그러한 그 자신의 무지에 대한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탁월함의 본성으로 파고드는 탐구에 유익하게 착수할 수 없었다.

17) 요약하면: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하나일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예상한다 - 말하자면, 정의에 있어서의 동일성이나 같음, 그리고 기능에 있어서의 상호 함축 또는 같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 주제에 대한 다른 대화편들의 논증 양식에 부합한다. 그에 대해 『메논』은 탁월한 예시를 제공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단언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모든 것들은 영혼에 의존하지만, 영혼에 속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좋음을 지혜에 의존한다고; 이러한 설명으로, 유익한 것은 지혜이고, 우리는 탁월함이 유익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함이 지혜이고, 전체로서나 부분에 있어서나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지혜와 탁월함이 동일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상 탁월함들이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오히려 지혜가 탁월함에 대해 필연적인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한 것이며, 조건이며, 다른 탁월함들을 수반하고 또 그것들에 의해 수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 이후 『정체』에서 플라톤은 영혼에 대한 분석에 기초된 탁월함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그 설명은 탁월함들의 단일성을 상호 함축을 통해 긍정한다. 영혼은 그 부분들 각각이 적합한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올바를 수 있다; 절제는, 각 부분이 지배해야 하고 따를 것에 동의할 때; 지혜는 이성적 부분이 그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고 지배할 때, 용기는, 기백의 부분이 그 지배자의 명령에 있어서 훈련될 때 생긴다(『정체』Ⅳ, 442b-d). 그 탁월함들은 여기에서 명백하게 정의상으로 다르다; 그만큼 명백하게, 탁월함들은 기능에 있어서 하나이다 - 그것들은 서로를 도입하고, 서로로부터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용기는 지혜를 수반하고 그것에 의해 수반된다; 지혜는 올바름을 수반하고 또 그에 의해 수반된다; 올바름은 절제를 수반하고 그에 의해 수반된다. 소크라테스가 결론에 있어서 '우리가 지금 논증에 있어서 이 높이에 올랐으니, 내가 보기에, 산 정상으로부터 보는 것처럼, 탁월함의 단일한 꼴 하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언급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원칙은 그래서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라는 주장과, 그리고 탁월함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통해 정의될 수 있다는 주장과도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분들과 부분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동시함축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로고스와 우시아

1) 만일 앞서 말한 설명이 건전하다면,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그런 종류의 논증은 고려함에 있어서 실재적이고 명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지 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2) 그 대상이 적어도 그것이 유와의 관계에서 존립하는 종일 때에는 단순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될 것과 정의함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것을 고수하였던 그러한 관련은 획득하지 않는다: 그 종은 결합된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와 함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같음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같음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튀프론』10d, 13에서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은 경건에 대한 정의로서는 거부되는데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르기 때문이고(ἕτερον; 10e, 9에서 ταὐτόν이라는실에 견주어 반대로), 이러한 거부는 15c, 2에서 반복된다(οὐ ταὐτόν … ἀλλ᾿ ἕτερα ἀλλήλων).

3)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같음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연의 동일성, 또는 진리치 보존(salve veritate) 대체성이 아닌데, 설령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그러한 것들 모두가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것들만이 경건하거나 경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순히 πάθος를 진술할 뿐 οὐσία를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념적 동일성인 것도 아니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생각함에 있어서,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의 정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의어의 같음도 아니다.

4) 정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의에 있어서 필요한 같음은 이를테면 서술적 동일성, 말하자면 샛별과 태백성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하거나, 또는 - 그 예시에서 필요한 경험적 우연성을 피하기 위해 -  일곱번째 정수와 네번째 소수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동일성은 두 가지 한정적 서술들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실재적 정의에 있어서 정의될 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대상 그 자체이다. 그 비유는 만일 서술적 구절이 명사에 의해 대체된다면 더욱 근접하다: '금성은 샛별이다' 또는 '7은 네번째 소수이다'; 무엇보다도 유일한 서술로 정의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도 오독이다. 지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함이다; 그러나 '…는 탁월하다'라는 말이 소크라테스를 서술하는과 같은 의미에서 '…은(는) 탁월함이다'라는 말이 지혜를 서술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첫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이고, 두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한 특성에 대한 한 특성의 예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정적 서술에 있어서 필요한 후자의 관계이다.

5) 아마도 정의에서 필요한 종류의 동일성은 그것 자체의 유(sui generis)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포함하는 유와 그것을 그 유 속에서 다른 종들로부터 지적해 내는 종차를 진술함으로써 그 종인 어떤 것을 말할 때 필요한 그런 동일성이다. 종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종차는 종들에 대한 구별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그 구별의 결과이다; 정의에 있어서 종차는 사유근거이고, 존재근거가 아니며, 그러므로 정의에서 필요한 동일성은 대상들의 동일성이 아니다.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위한 최선의 - 그리고 ὁρίζειν과 ὅρος의 대다수 함축에 부합하는 하나의 -  비유는 사상(寫像)의 비유이다: 정의한다는 것은 한 종의 위치를 그 종을 포함한 유 속에서 정하는 것이다. 만일 종이 농장이라면, 유를 규정함의 목표는 그 농장이 위치하는 마을을 지시하는 것일 터이다; 차이를 규정함의 목표는 농장의 경계들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조사된 경계선들의 현존을 밝혀내는 것일 것이다. 정의에서 필요한 같음은 말하자면, 유일한 위치의 같음이다: 정의될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 안에서 사상된 그 위치를 점유한다.

6) 이러한 방식에서 생각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는 형이상학에서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꼴들이, 서로에 대해 포함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포함되는 것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존립하면서, 계층적으로 정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내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거나, 상호 구성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난다: 종들은 그것들이 만일 그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의해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리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특성을 그것들의 유들에 의존한다; 올바름은, 만일 그것이 탁월함이 아니었다면, 올바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탁월함은, 그것의 한 종이 올바름이 아니었더라면, 탁월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는 그것의 현존과 특징을 그것의 종에 의존한다. 전체는 그것의 부분들에 의존하여 전체인 그것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 점에 대해 조금 덜 명확하지만, 아마도 유들에 대한 정의는, 종들에 대한 정의와 달리, 구성 요소들로의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7) 이것은 플라톤적 유들에 대한 함축의 풍부함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있어서, 유들은 종들로부터의 추상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사람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사람과 말은 동물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그 유는 여기에서 단지 다양성에 대한 공통된 요소일 따름이고, 그것의 종들보다 더 '추상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정의가 사상에 대해 동종적이라면, 만일 유들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들이라면, 유는 공통된 특징이 아니라, 마치 그것의 현존이 그것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의 현존에 의해 전제하기도 하고 전제되기도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래서 유는, 함축의 상대적으로 결여되었음보다는 오히려 함축을 잔뜩 실은 것으로서, 결핍되었다기 보다는 풍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8) 하나의 체계로서, 유는 한 종류의 폐쇄를 지니고 있어야만 하고,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류의 제한들로부터 갈라놓는 단일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의 구별은 한 사물에 본질적인 것과 그 사물이 단지 가지게 되었을 뿐인 특징 사이의 구별을 수반한다. 올바름 또는 탁월함에 대한 경건의 관계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에 대한 경건의 관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 정의에 있어서 내적 성질을 시사한다면, 그러므로 그것은 꼴에 대한 모든 설명들이 본질을 진술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그 관계의 내적 성질만큼이나 외적 성질도 시사한다.

9) 유들은 체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종들은 그 유들의 요소들이기 때문에, 종들에 대한 정의들은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일상적 진술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들이다. 그러한 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또는 사용하기 위해서, 일반적 언어에도 개별적 사물들과 행위들에도 호소할 수 없다: 꼴들에 대한 지식은 지적 직관을,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는 직접적 통찰을 요청할 것이다. 실재적 정의의 진리는 오직 그에 대한 정의가 설명인 그러한 진리를 파악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10) 만일 이러하다면, 정의와 직관은 상보적일 것이다. 지적 직관은 실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만 '알고 있음에 의한 앎'에 속하는 난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설명도 제공함이 없이 푸른 하늘의 한 조각을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감각은 지적으로 노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꼴들에 대한 직관은 반대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증은 단순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 이전에 불충분한 설명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어떤 것을 충분한 설명 속에서 명확하게 보려고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시야는 진술들에 대한 검토에 의해 확보된다. 미리 앎에 의한 앎에 대한 지적 직관의 비교는 지적 직관의 대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11) 일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이 지점에서 압박을, 직관과 논리 사이의 긴장을 발견할 것을 주장해 왔다. R. G. 콜링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지만 상당히 높게 플라톤의 철학적 성취들은 평가받고, 최고에 못 미치는 어떤 가치에 있어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그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이 그 자신에 의해 철학과 수학 사이에서 확립되는 충분히 깊은 구별로 이끄는 것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결함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하는, 철학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방법론이 철학을 둘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하나는 재기 발랄한 억지 이론의 식상한 낭비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관적 시야이다. 이러한 첫번째 것이 두번째 것으로의 경로라는 것은 여러 세대들에 속하는 경험에 의해 플라톤이 그들의 길잡이로 취해졌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실들에 권위에서 받아들여질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 조명 속에서 사살들이 이해될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탐구 속에서, 철학적 탐구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플라톤이 우리에게 주진 않았다.

이러한 비판은 감각 지각의 틀을 관통하는 지적 직관을 강요함으로부터, 지적인 것으로서, 그 직관이 판단을 통해 지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함으로부터 귀결한다.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한 행위는 하나의 진술이 아니라, 진술 속에서 표현 가능한 하나의 내용을 필요로하고, 그로써 비평에 적합하다. 한 진술은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통해 통찰이 표현되는 그러한 것이다 - 그 자신에 대해서조차. 안다는 것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12)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초기 대화편들을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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