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들의 내재

1)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이 그것들의 예시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예시들에 우선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그것들의 예시들 '안에'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영향을 미친다. 로스 교수는 꼴들에 대한 이론의 발전에 있어서 '내재로부터 떠나 초월로 향하는 일반적 변동이 있다. 초기에 거의 모든 것들이 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라고 주장해 왔다. 그는 후기 대화편들에서 특수자들은 결코 충분하게 그것들의 꼴들을 예시하거나 예증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한다; 특수자들은 오로지 그 꼴들을 흉내낼 따름이다. 그러나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은 '특수자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꼴은 그것들 안에 "현존한다"; 그것은 장인에 의해 "그것들 안에" 정위된다; 꼴은 그 예시들에게 '공통적'이다; 특수자의 경우에는 꼴을 "지니거나" 그 꼴에 "관여한다".

2) 이 주장의 힘은 '내재'의 의미에 달려 있다. 로스 교수가 인용하는 모든 표현들은 그리스어에서 추상명사들과 함께 정말로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한 행위에 올바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한 행위가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의 단순히 또 다른 방식, 그리고 이상적 방식일 따름이다. 꼴들은 추상 명사들의 의미들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들의 사용은 형이상학적으로 자연스럽다: 만일 꼴들이 그것들의 예시들 안에 내재적이라는 주장이 언어적 용법의 사실들을 요약할 따름이라면, 그 주장은 참이지만, 존재론적 지위의 문제가 관련되는 한에서는 무의미한 주장이다.

3) 다른 한편, 만일 '내재'라는 것이 언어의 특정 용례를 포괄하는 말일 따름이라기 보다는, 꼴들의 존재론적 지위에 속한 것으로 취해진다면, 초기 대화편들의 언어에 대한 로스 교수의 호소는 꼴들이 내재적이라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할 것이다. 내재의 이 비일상적 의미를 그것의 추정적 반대로, 초월성이란 말로 한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꼴들이 어떤 전문적 의미에서 사물들 '안에' 있다는 주장은 그것들이 '떨어져' 있다거나 '따로' 있다는 것에 대한 부정으로 대체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로스 교수는 내재와 초월을 모순으로서 다루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플라톤이 '안에'라는 것을 장소로 사용하고 그것의 동종적인 것들을 중기와 후기 대화편들에서, 바로 그가 초기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스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은, 그[플라톤]가 그 중 어느 표현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반면, 그는 그 둘 모두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진리에 접근할 아무런 방법도 보지 못했다는 것일 듯하다. 그 하나는 보편개념과 그것의 특수자들 사이의 관계의 친밀성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특수자들 각각이 어떤 보편자에 대해서도 완벽한 예증이 되는 데에 실패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 관계가 완전히 특유하고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조차 눈치챘었을 것이다. '분유'와 '모사' 모두 그에 대한 은유들이고, 그 두 가지 상호보완적인 은유들의 사용은 그 둘 중 하나만의 사용보다는 더 낫다.

그 결론은 따르기 어렵다. 만일 예증이 그 자체의 유에 속하는(특유한) 관계라면, 어떠한 분석도 불가능하고 어떠한 분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모사'와 '분유'는 그에 대한 유용한 은유이기 어렵다; 은유는 어떤 종류의 유비적 관계성을 수반하고, 여기에는 유추를 위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분유'는 '모사'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정확히 일상적으로 추상명사들과 함께 사용되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전혀 은유가 아니라는 것이 덧붙여질 것이다. 그러나 내재가 초월의 부정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리고 로스 교수는 어디에서도 그 용어에 그 자체의 독립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한다. 중기와 후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은 그것들을 모사하는 예시들에 의해 오로지 불충분하게만 예증된다는 것은 참이면서 중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어째서 그 문제들에 대한 그 진술이 만일 누군가 선택한다면 '초월'이라 불리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러나 어떠한 독립적 의미도 '내재'에 할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그 주장이 그 꼴들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면 참도 거짓도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것들의 예시들 안에 내재적이라는 로스 교수의 주장에 덧붙지 않는다.

4) 그 문제의 참은 꼴들이 강한 의미에서 후기에서 만큼이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것들이 그것들의 예시들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그것들의 예시들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따로' 존재한다. 초기 대화편들에서의 꼴들에 대한 이론과 후행했던 이론들 사이의 차이점은 분리에 대한 사실로 구성되지 않고, 분리가 생각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중기 대화편들은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변경된 추정, 꼴들이 있는 방식에 대한 이론으로 전환된 추정을 제시한다.


『파이돈』에서의 분리

1) 분리의 주제는 『파이돈』에서 처음으로 감각과 반성 사이의 대조를 통해 소개된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이 오로지 그 자체로 있고 또한 아름다움과 좋음도 그러하다는 시미아스의 논증을 유도해 냄으로써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런 것들이 시각이나 여타의 감각들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오로지 순수한 사유 그 자체만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감각은 앎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반성보다 하위에 놓인다(『파이돈』65d-e).

2) 자연스러운 확장에 의해 이 설명은 하나의 추론을 불러일으킨다: 감각의 대상들은 반성의 대상들보다 하위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이돈』에서 상기에 대한 두번째 논증의 핵심이다. 그 논증의 첫번째 가정은 같음의 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74a-b):

내 생각에 우리는 어떤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군 - 난 막대기가 막대기와 같다거나 돌이 돌과 같다거나 그런 종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을 넘어서서 저편에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네만 - 같음 그 자체 말일세.

그리고 나서 그 같음과 감각적인 같음이 ἕτερα ὄντα, 상이한 종류의 것들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같음들은 하나에 대해서만 같음을 입증할 뿐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고, 사실 정말로 같은 것들은 같지 않을 수도 없을 뿐더러 같음은 같지 않음일 수 없기 때문이다(74b-c). 그래서 같음은 그 같음이 같지 않음에 의해 같아질 수 없다는 점에서 같은 것들과는 다르고, 그러나 실상 감각적 같음들은 또한 같지 않을 것이다.

3) 같음이 그것의 감각적 사례들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님을 보였을 때, 『파이돈』은 다음으로 계속해서 그것들의 관계를 특징지운다. 감각적 같음들이 같음이 같은 것처럼 같지는 않고, 그것이 그러한 것인 그런 종류의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동의된다; 그것들은 또 다른 종류의 것으로서 그러한 종류의 것인 것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에 대해 하위에 자리한다; 그것들은 그 같음과 유사하지만, 그것에 대한 측면에서는 부족하다(74d-e). 그러나, 우리가 이 결핍을 재인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체 안에서 그 자체에 대해 같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가졌다는 것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75b):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여타의 어떤 감각들을 사용하기 시작함에 앞서서, 우리는 반드시 같음 그 자체는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었어야만 하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감각적 같음들을 그 대상들에 귀속시킬 수 있다면 말이지. 그러한 모든 것들이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이기를 애쓰고 있으나 그것에 대해 하위에 있다는 근거에서 말일세.

그래서 말하자면 우리는 같음에 대한 우리의 앎을 감각적 같음들로부터 추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의 결핍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반드시 감각적 같음들이 같음들임을 재인하기 위해 그러한 앎을 가져야만 한다. 동일한 설명이 75c-d에 대해 유효하다:

더 크거나 더 적은 그런 종류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논증이 같음에 대해 아름다움 그 자체, 좋음 자체, 올바름, 경건에 대해서, 그리고 한 마디로 우리의 변증에 있어서 우리가 실재의 보증을 재가하는 그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보다 조금도 덜 적용되지 않기 때문일세.

반성에 대한 감각의 하위성은 지성적 꼴들에 대한 감각적 예시들의 하위성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4) 여기에서 분리는 명백하게 비동일성, 독립성, 또는 우선성 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을 필요로한다. 그것은 꼴들에 대한 예시들이 꼴들에 대한 불완전한 모사들 또는 유사물들이라는 주장을 필요로 한다. 블라스토스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모사 이론을 필요로 한다. 그 이론에 자연스러운 귀결로 감각적인 것들과 꼴들은 그것들의 실재성의 정도에 있어서 다르다는, 꼴들은 그것들의 예시들보다 더욱 실재적이라는 이론이 나중에 결합되었다.


두 세계

1) 『파이돈』은 계속해서 감각적 대상들과 지적 대상들을 두 세계, 가시계와 비가시계에 대한 원칙으로 전개시켜 나아간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알고, 지성적 영혼은 그 영혼의 앎의 대상들, 영원한 것들에 가깝다. 가시계의 대상들, '그것이 실재인 뒤에 이름지어지는 그러한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필멸의 영역에 있고, 서로에 대한 면으로나 그 자체들에 대한 면으로나 결코 동일하지 않다. 반대로, 그것의 현존에 대한 실재성을 우리가 묻고 답하는 속에서 설명해 내는 꼴들은 언제나 동일한 것들에 대한 측면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본성에 있어서 단일하며 오로지 그것들 자체만으로 현존하고 변화를 허용하는 그 어떠한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결코 속하지 않는다(78d-79b).

2) 『국가』에서 두 세계는 앎의 세계와 사견의 세계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거기에서 철학자, 지혜의 구애자를 정의하는 일을 떠맡고, 그를 그와 표면적으로만 유사한, 아름다운 볼 것들과 들을 것들의 구애자와 구별하는 일에 착수한다. 그 논의는 꼴들에 대한 이론을 전제함으로써 시작한다(Ⅴ, 475e-476a):

나는 자네가 나와 이 점에 있어서,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추함에 반대이고, 그것들은 두 가지의 것들이라는 점에 동의하리라 믿는다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들의 각각은 하나라는 것도 말일세. 같은 것들은 올바름과 그릇됨, 좋음과 나쁨, 그리고 모든 특성들에 대해 참일세. 각각의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것이지만, 행위들과 신체들과 각기 다른 것을 가지고 교류를 통하여, 각각은 많은 곳들에서 나타남으로써 많은 것들로 드러나지.

그것은 시각적인 것들과 청각적인 것들의 구애자들로부터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을 구분하는 아름다움의 꼴에 대한 인식이다.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꿈으 꾼다는 것은 어떤 것 같은 것을 단순히 그런 것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닮은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철학자는, 그가 아름다움과 그것에 참여하는 사물들 사이의 구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깨어 있고 또 꿈꾸고 있지 않으며, 단지 사견이 아니라 앎을 가진다(476c-d).

3) 이 닮음은 실재성의 정도들을 시사한다. 완전히 알 수 있는 어떤 것은 완전히 실재적이다(476e-477a). 그래서 만일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그러한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실재와 전적인 비실재 사이에 놓일 것이다. 앎은 실재하는 것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지는 비실재에 상응하므로, 우리는 만일 실재와 비실재 사이의 중간인 어떤 것이 있다면 앎과 무지 사이의 중간인 어떤 것이 있다고 기대해야만 한다. 이것은 사견이거나 믿음이다; 왜냐하면 사견은 무지보다 더욱 선명하고 앎보다는 더 흐릿하기 때문이다 (477a-b). 앎과 사견은, 그것들이 산출하는 정신의 상태에 의해서도 그것들의 대상들에 의해서도 구별되는, 서로 다른 힘들이나 능력들이다 (477c-d). 앎에 의해 산출되는 정신의 상태는 틀릴 수 없는 것이고, 사견에 의해 산출되는 것은 틀릴 수 있는 것이다. 앎의 대상은 실재적인 것이고, 그것의 능력은 실재를 그것이 그것인 바로서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사견의 대상은 비실재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비실재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래서 실재와 비실재 사이의 어떤 중간적인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478a-d).

4) 그 대상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의 현존을 재인하는 이들에게, 그러나, 동일한 것들에 대한 측면에서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현존하는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부정하는 그러한 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어야만 한다 (479a-b):

많은 아름다운 것들 중 어느 것이 또한 추함일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인가? 혹은 올바른 것들은 어떤 것이 그릇되지 않은 것인가? 또는 경건한 것들은 어느 것이 불경건하지 않은 것인가? 여러 짝들이 짝들인 만큼이나 양분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큰 사물들은 작다; 가벼운 사물들은 무겁고, 더 이상 반대인 것보다 하나인 것이지 않다. 있다고 이야기되는 이러한 많은 것들 중 각각의 무엇이든, 그것들은 있다고 이야기되지 않는 바로 그만큼일 것이다. …그것들은 모호하고, 그것들에 대해 있는 것으로서든 없는 것으로서든 그 양쪽 모두로서든 둘 다 아닌 것으로서든 고정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견의 대상들은 감각적이고, 그것들은 완전히 실재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다.

5) 두 세계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일련의 비율들에 의거한다: 꿈꾸고 있음이 깨어 있음에 맞서듯, 그렇게 사견은 앎에 맞서고, 더 흐릿한 것이 더 분명한 것에, 덜 실재적인 것이 실재적인 것에, 꼴들의 예시들이 꼴들에 맞선다. 『정체』Ⅹ,597a에서 목수는 침대의 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꼴의 유사물들인 어떤 것을 만드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의 생산품을 완전히 실재적인 것으로 부르는 것은 오류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와 참에 대한 관점에서 흐릿하고, 또렷하지 않고, 미미하기 때문이다.

6) 두 세계는 후기 대화편 『티마이오스』에서 반복된다:

무엇이 언제나 실재이고 아무런 생성도 지니지 않는 그러한 것이고, 또 무엇이 언제나 생성 중이면서 절대로 실재이지 않은 그러한 것인가? 합리적 설명과 함께 사유로써 이해가능한 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실재하는 것이다; 반면에 비지성적 감각과 더불어 믿음의 대상인 것은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결코 실재로 있음을 지니지는 못하는 그러한 것이다.

있음은 지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에 맞서듯 생성에 맞선다.

7) 이것은 고도의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중요하게도, 우주에서 가장 높은 것과 인간 영혼에서 가장 깊은 것 사이의 유대를 강조하는 도덕적 종교적 원칙이다. 『향연』에서 구애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탐구에 있어서 또 다른 세계로 상승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본성과 본질을 묘사함에 있어서 플라톤의 산문이 갑작스럽게 합창 시의 형식으로 주신 찬가들을 터뜨리는 곳에서 알아차렸다(211a-b):

첫째로, 그것은 언제나 있으며 생겨나거나 있게 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라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다시, 그것은 한 측면에서 아름답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아름답지 않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순간 아름답고 다른 순간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한 관계에서 아름답고 다른 관계에서는 추한 그런 것도 아니다;
한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으로서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아름답고 저기에서는 추한 그러한 것도 아니다.

또 다시 그것은 얼굴과 두 손과 육신의 부분들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날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앎으로서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논증으로서도 그러하지 않다;
아름다움은 한 마리 짐승 안에서, 또는 지상에서, 혹은 천상에서, 다른 어떤 것 안에서든 그와 같이
어딘가에서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으로서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 자체인 어떤 것이고,
본성에 있어서 영원히 하나이다.
모든 다른 아름다운 것들은,
그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 아름다움을 나누어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더 늘지도 줄지도 않고,
그것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찬가이면서도 형이상학적 서술이다. 플라톤의 문체는 특정한 생각들의 자극 아래에서 빨라진다; 그의 운율들에 대한 두드려대는 박자, 춤추는 박자를 번역상에서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8) 이러한 시야의 높이에 도달한 구애자의 영혼은 완전히 뒤바뀐다 (『향연』212a):

산출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그 아름다움이 보일 수 있는 그 아름다움을 보는 중에만 그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는 탁월함의 상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가 상을 접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탁월함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참된 탁월함을 산출함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을 양육함에 있어서, 그는 신께 사랑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불멸한다.

출산의 은유는 자연스럽게 『정체』에서 사용된 성교와 결혼의 은유들과 연관을 맺는다:

앎에 대한 참된 구애자는 실재에 전력하도록 타고난 자이고, 사람들이 실재일 것이라 믿는 잡다한 것들 사이에서 머무를 수가 없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내를 가지고 그가 각각의 것의 본질적 본성을 실재와의 관련으로 인하여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 그의 영혼의 일부를 가지고 발견하기 전까지 희미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그의 길을 고수한다; 그리고 그가 그로써 실재하는 것에 도달하고 그것과의 통일에 들어갔을 때, 이 혼인의 자손은 지성과 진리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앎과 참된 삶과 양식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의 여정으로부터 휴식하게 된다.

『향연』과 『정체』에서 시야와 부활에 대한 플라톤의 강조는 엘레우시스 제전의 제례에 대한 어떤 유비이다. 그 제례는 풍요와 정화를 기원했고, 마지막 통과의례에서 끝났다. 그곳에서 제물들은 갑작스럽게 작열하는 빛 속에서 숭배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에 드러났고, 숭배자들은 신에 대한 그들의 유대와 그들의 구원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9) 두 세계의 원리는 또한 아이스퀼로스의 종교적 시야에 대한 유비를 지닌다:

9-1) 아이스퀼로스의 가장 마지막 작품들에 있어서 관찰가능한 단계에서, 합창의 부분은 여전히 극적이고, 대사와 동등한 중요성에 속한다. 그 두 요소들은 균등하게 균형잡힌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상이한 세계들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이행을 느낄 수 있다. 그 결과는 이제 두 측면들을 지니는 극의 흥미로운 이중성이다. 그 하나는 보편과 영원이고, 다른 하나는 특수와 시간에 제약됨이다.

9-2) 이 현상의 본성은 우리가 희망하기로는 선명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가멤논』을 하나의 삽화로 취한다면 말이다. 이 극에서, 보이는 표현은 어떻게 트로이의 정복자가 귀국하였고 여왕에 의해 살해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앞으로 계속되는 단계에서 그 사건들은 특수한 사건들, 설화적 시간과 현실적 공간에 정위된 사건들이다. 그 인물들은 특정 개인들, 신화적이거나 역사적인 인물들이다 - 아이스퀼로스에게는 이에 대해 아무런 차이도 없다 - 그들은 그 순간 살았던 그리고 지상의 그 지점을 디뎠던 이들이다. 그러나 합창곡들에서 그 행위는 시간과 공간 바깥 우주의 계획으로 들어 내어진다. 그래서, 그 무대가 선명할 때 가시적 표현은 시간에 대해 유보되고, 적잖은 고통받는 사로잡힌 필멸자들의 그 일시적 광경을 뛰어 넘어서서, 바로 그 곳에서 그 때, 죄악의 그물 속에서, 장엄한 거리와 무시무시한 윤곽 속에서, 산들보다도 더욱 불변하게, 제우스의 영원한 권고 속에서, 확립된 진실들이 닥쳐 온다. 순간적 격정의 그 맥박은 차츰 잦아든다; 바로 지금 우리를 숨막히는 집중 속에 붙잡아둔 그 인간적 의지들의 충돌과 갈등은 인형극의 규모로 침잠하고 사그라든다; 지속되는 운명의 노래가 피에 사로잡힌 오만, 숙명의 고통으로의 끈질긴 유혹에 이끌린 오만의 주제를 펼친다 하더라도. 마치 합창부에서 불확실한 더 높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또 다른 무리가 동시에 더욱 장엄하고 상징적인 극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이 비가시적 장면에서 네메시스와 아테의 격정과 감정(휘브리스와 페이쏘)이 걷는다 - 후기 풍자의 핏기없는 추상들이 아니라, 여전히 초자연적 실재성의 극찬하는 특징들에 덮인. 무시간적 순간에 인간적 삶의 광경에서 제우스의 전능한 두 눈에 알려진 측면에서 장막이 걷힌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떨어질 때, 우리는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 일깨워지고, 정화되고, 고양되며, 평안한 그들의 필멸의 비극으로 되돌아온다.

플라톤과 아이스퀼로스 모두 도덕적 질서, 공통된 세계의 운행들을 관장하는 그 질서의 현존을 단언하였다; 두 사람 모두 그 질서를 어떤 의미에서 '분리된' 것으로, 그 자체의 고유한 실재성을 가진 것으로 다룬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 질서의 요소들은 주로 기하학과 도덕적 탁월함에서 발견되었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그 능력들은 동일성과 지혜, 좋음과 아름다움이고 만용과 복수가 아니다. 아이스퀼로스의 사유는 발상들의 동종의 그러나 더 오래된 방식의 계획, 그 뿌리들을 철학보다 오래된, 그리고 아마도 그리스보다도 더 오래된 신화들 속에 지니고 있던 계획 내에서 움직인다.


 플라톤 사유의 통일성

1)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은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분리되고, 그 점에서 그 꼴들은 그 예시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존재론적으로 그 예시들에 우선한다. 이것은 후기에까지 참인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중기 대화편들은 이 분리를, 결핍과 비실재의 심연으로 갈린 두 세계에 대한 원리를 수반하는 우주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확장시킨다. 이 원리와 결부된 것은 초기 대화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것과도 다른 종교적 태도이다; 초기 대화편들 어디에서도 꼴 - 어떤 꼴이든 - 이 경배의 적합한 대상이리라 시사되거나 함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와 중기의 대화편들 사이에 꼴들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 변화 - 혹은 더 정확하게, 발전 - 가 있다.

2) 이러한 주장은 이 세기의 특히나 두드러지는 플라톤주의자들 중 일부가 주장해 왔던 것처럼, 플라톤의 사유는 통일체라고, 그리고 『에우튀프론』과 다른 초기대화편들에서의 꼴들에 대한 이론은 『파이돈』과 『정체』에서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거부될 것이다. 『에우튀프론』, 『라케스』, 『뤼시스』로부터 도출된 세 가지 주요 문헌들은 이 관점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3) 『에우튀프론』은 꼴들이 기준들로서 사용되리라 전제하고, 기준으로서의 꼴에 대한 정의가 그 꼴의 반대항에 의해 그 꼴이 한정된다는 것을 시사할 수 없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것들은 『파이돈』의 모사이론에 있어서본질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일론 명제를 확립시켜주지 않는다. 꼴이 기준으로 사용되리라고 말하는 것이 한 가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꼴에 대한 그 꼴의 예증들이 결핍된 사례들인 그러한 꼴이 모범이기 때문에 꼴이 그렇게 사용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의 모든 예증이 각기 반드시 어떻게든 결핍된 경건이어야만 한다는 아무런 실마리도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꼴이 그 고유의 반대항에 의해 한정될 수 없다는 주장이고, 꼴의 모든 각각의 예증이 그것과 그것의 반대항 모두에 의해 한정되리라는 주장은 또 다른 것이다. 후자의 주장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유사물의 결핍에 대한 본질적인 것이다.

4) 『라케스』는 앎을, 과거, 현재, 미래에 독립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무시간적으로 만드는 앎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198d-199e). 앎의 무시간성은 그 앎의 대상들의 영원성을 수반한다는 것, 그리고 영원성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사물들의 감소하는 실재성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완전한 실재성을 수반한다는 것이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언급은, 만일 건전하다면, 단일론 명제를 뒷받침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앎이 과거, 현재, 미래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무시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그러므로 반드시 영원한 대상들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과 또 다른 것이다; 플라톤이 이러한 주장들을 초기 대화편들 안에서 연계시켰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

5) 다시, 『뤼시스』가 있다. 거기에서 모든 가치있는 것들은 제일 가치있는 것의 상들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결핍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묘사된다. 『파이돈』이 꼴의 각각이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고 주장하듯, 그렇게 『뤼시스』는 '사물들에 대해 가치 있는 어떤 것은 가치 있는 다른 어떤 것 때문이라고 이야기함에 있어서, 우리는 단순한 말 바꾸기를 내놓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정말로 가치있는 것은 그 안에 소위 가치있다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당도하는 그러한 것 자체이다'(『뤼시스』 220a-b)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될 듯이 보이는 것은 이름들 또는 어원의 제일 명칭과 파생 명칭이고, 이것은 두 세계의 원리에 속하는 중요한 언어적 귀결이다. 그러나 『뤼시스』에서 가치 있는 사물들의 제일 가치있는 것에 대한 관계는 꼴들의 예증들의 꼴들에 대한 관계가 아닌데, 왜냐하면 앞선 관계는 후자는 그렇지 않지만 목적들에 대한 수단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지만 그것들은 『뤼시스』에서 치료가 건강을 위해 가치있는 것처럼 경건함을 위해서 경건하지는 않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윤리와 선택의 목표들에 관심을 두지 형이상학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그래서 『뤼시스』는 나중에 『파이돈』에서 꼴들에 적용되었던 이름의 이론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 작품은 『파이돈』의 꼴들에 대한 이론을 전제하지는 않으며, 수단들의 목적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수단들에 귀착되는 그 결핍은 특수자들의 결핍이 아니다. 『고르기아스』(467d)는 『뤼시스』의 요점을 또 다른 방식으로 놓는다: '만일 한 사람이 목적을 위해 어떤 것을 한다면, 그는 그가 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가 그것을 해서 이루려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6) 일반적으로 꼴들에 대한 이론의 단일론적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에 인용되는 그 세 구절들은 그 설명이 참임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되어야 할 또 다른 논증이 있다. 그것은 플라톤이 설령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중기 이론을 진술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침묵으로부터 언급으로의 논증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가 쓸 때마다 매번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7) 이 논증은 만일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이론이 꼴들의 예증들의 결핍과 감소되는 실재성을 시사한다는 것이 보일 수 있다면 더 많은 영향력을 지닐 것이다; 플라톤은 짐작컨데 최소한 우리만큼은 그런 함축들을 추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함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결핍과 감소되는 실재성은 중기 대화편들에서 앎의 문제들과 연관되고 초기 대화편들에서는 논의되지 않으며, 초기에 견지되는 주장들과 모순되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과 연관된다.

8) 그래서 예를 들어 감소되는 실재성에 대한 주장은 『정체』에서 앎의 대상들을 의견의 대상들로부터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바로 그 앎과 의견의 구별은 『메논』(97a-98b)보다 더 앞에 놓이지 않는다; 그리고 앎과 의견이 상이한 대상들을 가진다는 주장은 『메논』에 부재할 뿐만 아니라, 의견은 거기에서 '근거에 대한 숙고'에 의해 앎으로 전환되기 때문에(98a; 85c 참조) 『메논』에 의해 암시적으로 반박된다.

9) 또 다시, 『파이돈』은 꼴들이 현존한다는 주장과 우리의 영혼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이 동등하다(76d-e)고 견지하고, 이것의 배경이, 결국 꼴들에 대한 꼴들의 예시들의 결핍에 의존하는 상기의 원리이다. 그러나 초기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이루어진 불멸성에 대한 주장들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 만일 상기론과 결핍의 원리가 참이라면 거의 무시될 수 없는 주장들 - 불가지론자이다. 『변론』(20c-21d)에 있어서, 그의 무죄 선고에 표를 던졌던, 그리고 그의 개인적 관점들을 왜곡시킬 아무런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친구들과 동지들에게 말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해 오로지 다음과 같은 것만을 주장하고자 하고 있다. 죽음을 좋은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음과 의식 없음, 깊고도 꿈조차 없는 잠과 같은 상태이거나 아니면 이 세계로부터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 호머의 유행 이후 생각된 그러한 이행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파이돈』에서의 영혼이 불멸하며 죽음 이후에도 '오로지 그 자체로' 존재하리라는 뜨거운 신념으로 빛나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10) 물론 플라톤의 사유에 대한 통일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금자탑의 단일성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과 발전의 단일성, 생명의 단일성이다.


변화를 위한 동기들

1) 만일 초기와 중기 대화편들이 꼴들의 지위들에 대한 그 대화편들의 평가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러한 차이가 설명될 것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철학적 계기들이 그것을 촉진시켰는가? 초기와 중기 대화편들 양쪽에서 꼴들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분리'는, 대화편들의 그러한 집단들 사이에서와 같이 상이한 의미들을 지닌다. 꼴들은 초기 대화편들에서 예증들로부터 구별되고 그보다 우선하는 것으로서 분리되어 있다. 중기 대화편들에서 그것들은 완전한 실재적 모범들, 그것들에 대해 그것들의 예증들이 결핍되어 있고 덜 실재적 예시들인 그러한 것으로서 분리되어 있다. 중기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이 답하고자 했던 존재론적 지위들에 대한 물음들이 초기에 물었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 뒤따라야 하고, 이것은 사실 참이다. 중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의 설명은 초기대화편들이 직면하지 않았던 인식론의 문제들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그러한 문제들은 회의주의와 선험적 지식을 두고 발생하였다. 그것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변증에 대해서 일어났다; 특히, 그 문제들은 플라톤이 어떻게 소크라테스적 변증이 꼴들이나 본질들에 대한 탐구로서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을 다루는 데에로 돌아섰을 때 일어났다.


회의주의와 존재론적 지위

1) 솔직한 사람은, 경건함'은 어떤 것이다' 또는 '실재하는 것이다'라고, 또는 그가 그의 행위들의 적절성을 결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그것을 고려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됨에 있어서, 확실히 '좋아. 그게 어디 있는데?'라고 말할 것이라 기대된다. 그리고 그 자체로는 충분히 소박한 요구인 위치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진짜 물음을 감추고 있다: 만일 경건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실재성을 지녔는가?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으 어떻게 존재하는가?

2) 이러한 것들은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물음이고, 그러나 그것들은 관계들로서 비동일성이나 우선성을 듦으로써 답변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꼴들, 그것들이 그러한 관계들 안에 존립할 것이라 추정되는 그러한 꼴들에 대한 물음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엄밀히 말해서 주어진 어떤 꼴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꼴이어야 할 어떤 것에 대한 물음들이다. Mr 리차드 로빈슨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중기 대화편들의 가장 대단한 단 하나의 혁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소크라테스가 그가 이전에 행했던 것처럼 특수한 '본질들' 또는 '꼴들'에 대해 어떠한지 묻는 대신에 이제는 '꼴들'의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가 어떤 특수한 '꼴'에 대해서든 그러한 만큼 일반적 '꼴'의 본성에 대해 고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기 대화편들은 일반성의 새로운 단계로 상승한다: 그것들은 그것이 꼴일 그러한 어떤 것을 묻고, 그 물음에 두 세계의 원리를 가지고 답한다. 『에우튀프론』과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 그 물음은 대답되기는커녕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남는다.

3)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채로 남겨지는데 왜냐하면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비록 전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일반 상식과 관련되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 새로움을 감추는 자연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예를 들어 정확함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이 있다고 믿고, 그 정확함이 하나의 탁월함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쉽사리 물음에 의해 탁월함인 그러한 어떤 것을 말하고자 시도하는 데에로 이끌릴 것이다. 소크라테스식 취급에 있어서, 이것은 고도로 복잡한 현존 전제, 정확함의 꼴이 있다는, 그리고 그것이 보편개념이며, 기준이고, 본질이라는 전제의 사용을 수반할 것이다; 만일 이 전제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면, 정확함은 정확함의 예증들에 대해 우선할 것으로 그리고 그것들과 동일하지 않을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여전히, 그 전체 탐구는 무엇이 정확함인지를 결정하는 데에로 정향될 것이고, 그것이 있는지 아닌지로 향하지 않을 것이다. 논의의 진행은 모호함과 혼동으로부터 선명함으로의 이행으로 드러날 것이고, 보편에 속하는 정확함에 대한 숙고로서 드러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탐구가 회의적 의심들에 의해 문제시되지 않은 채로 남는 한, 정확함과 같은 그러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상식적인 믿음은, 일반 상식이 소크라테스적 탐구에 의해 본질에 대한 숙고로 향해졌을 때조차,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4) 그 이유는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때, 지적인 불만족의 표시라는 것이다. 정확함의 위치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 무의미하다는 것은, 즉, 논박되는 그런 것이 있다는 무비판적 전제일 때까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멈추도록 강제되고 설명을 내놓는다. 일반 상식은 그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정확함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 - 정확한 모든 사람들을 보라. 소크라테스적 탐구가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에우튀프론』에서 변증의 목표는 경건함의 꼴이 현존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또는 그것이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목표는 오로지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다 -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다.

5)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꼴들의 현존이 전제되기 보다는 의심받을 바로 때에만, 오직 실재적 정의의 가능성, 그와 함께 변증의 추구가 당연시되기 보다는 도전받을 때 요청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물음은 『메논』에서 상기의 원리에 의해 제기된 선험적 앎의 문제에 의해 처음으로 플라톤의 정신에 강제되었다.


회의주의와 선험적 지식

1) 『메논』을 초중기 대화편으로 분류하는 것은 관습적이고 이것이 부당하지도 않다. 그 산문체 형식은 초기의 것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저술의 상기와 영혼불멸에 대한 관심, 그것의 기하학으로부터 빌려온 가설적 방법론의 사용, 그리고 그것의 앎과 의견 사이의 구별은 『파이돈』과 『정체』에서 나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들에 대한 초기 진술들이다. 이것이 그러하기 때문에, 종종 『메논』이 기원전 387년 플라톤이 첫번째 이탈리아와 시칠리 여행으로부터 아테네로 돌아온 이후에 쓰여졌다고 생각되어 왔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그는 타렌툼의 아르퀴타스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피타고라스학파를 이끄는 당대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러므로 『메논』이, 『파이돈』의 완성된 종합으로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새로운 물음들과 생각들에 대한 자극제를 시사하는 경계적 대화편이라 추측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

2) 『메논』은 여러 초기 대화편들이 시작한 것처럼 그렇게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메논은, 그것의 예시들을 구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에우튀프론』에서와 같이, 어떤 특성들이 그것과 관련되는지 결정하기 위해서 - 특히,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 또는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지 아닌지, 또는 본성에 의해 갖추어져 있는지 아닌지 결정하기 위해서, 탁월함이 무엇인지 말하도록 요청받는다. 초기 대화편들에서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재빨리 그의 응답을 당혹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그 논의는 초기에 그러하였듯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데에 실패한 메논에게, 거기에는 그것을 물음에 있어서 아무런 요점도 없으리라 제안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논증을 요약한다 (80e):

한 사람에게 그가 아는 것에 대해서나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탐구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그가 아는 것으로 탐구해 들어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알기 때문이고, 탐구의 필요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탐구해 들어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가 탐구해 들어갈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역설은 『에우튀데모스』에서 도입되었던 배움에 대한 바보같은 역설들과 일부 유사성을 지니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논쟁술의 일부라고 분류한다(80e). 그러나 그 역설을 소피스트주의라고 일축해 버리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그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 『에우튀데모스』에서 하듯 그것의 논리를 교정하고자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상기의 원리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진지한 대답은 진지한 물음들을 시사한다.

3) 어째서 소크라테스가 그 역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그 이유는 찾기 어렵지 않다. F. H. 브레들리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대상에 대한 결핍, 그리고 더욱이 대상에 대한 추구는 특정한 의미에서 그 대상에 대한 앎을 시사한다. 만일 한 사람이 언제 소유물이 획득되거나 획득되지 않는지 그가 절대로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면 그는 당연히 절대로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추구 속에서 그리고 그 추구에 의해 그는 그 자신을 그 반대되는 가정에 맡긴다. 그리고 그 가정은 어느 정도 어떤 의미에서 있는 소유물에 달려 있다. 자연스럽게, 나는 처음부터 철학자가 그가 앞서 내놓는 명제들을 지닌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행위가 그가 가정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혹은 만일 요청받는다면 전제할 것이라고, 그가 명제들을 가졌을 때, 그는 그것들에 대해 판단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들이 그에게 실재성의 이상적 소유물에 두는지 아닌지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철학에서 오로지 회의주의만이 진리가 지금까지 그리고 실제로 도달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에 스스로 자신을 가둬두어야만 한다.

메논의 역설은 마라톤 전투의 정확한 일자, 또는 어제 아침식사의 식단에 대한 조사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변증에서 관련되는 그런 종류의 탐구에는 관련이 많다.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의 정의에 대한 탐구를 고려해 보자. 에우튀프론은 무엇이 경건인지 알았는가? 그러면 그 탐구는 무의미한데, 왜냐하면 만일 그가 안다면 그는 말할 수 있고, 변증은 시작되기도 전에 성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지하다. 그러나 어째서 그러면 그에게 그것을 정의하는 것을 요청하는가? 무지하기 때문에, 그는 소크라테스적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다른 대답보다 더 적절하다는 결정을 내리기 위한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못할 것이고, 그가 언제 옳은 대답에 닿았는지 혹은 잘못된 것을 내놓았는지 말할 아무런 기준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변증은 그것이 진실 이후 응답자들의 고유한 노력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단지 어둠 속을 더듬거리게 되고, 탐구의 긴장은 끊겨 버린다.

4) 메논 역설의 압박은 꼴들이 기준들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전제에 의해 경감되기 보다는 오히려 증대된다. 경건한 것들을 점검함으로써는 경건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경건에 대한 앎이 없이는 어떤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우튀프론은 그러므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위해 그의 일상 세계를 고려해 볼 수 없다. 용이한 지적 직관에 어떤 쉬운 호소가 있지도 않은데, 그것은 탐구를 수반하고 그 역설은 어떻게 그 탐구가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을 요하기 때문이다.

5) 소크라테스는 그 역설을 두 뿔 사이로 빠져나감으로써 해결한다. 그 역설은 명백한 앎과 절대적 무지 사이의 이분법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배움과 탐구가 상기라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것이 그렇다면, 탐구하는 것은 이미 함축적으로 알려진 어떤 것을 명확한 의식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6) 그것은 이 설명이 변증의 평범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탁월함이 무엇인지 말하고자하는 시도로서, 그러나 어떻게 변증이 가능한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 즉, 어떻게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합리적으로 물어지고 대답될 것인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내놓아진다는 주의와 관련이 있다. 그 역설은 이 가능성을 시험함으로써 분명한 형이상학적 화두를 던진다. 변증은 실재적 정의를 목표로 한다; 그것은 꼴들의 현존을 전제한다. 만일 변증이 탐구의 한 형식으로서 불가능하다면, 그것들에 대한 아무런 앎도 없기 때문에, 그 변증의 탐구 대상들이 현존한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떠한 훌륭한 근거도 없다.

7) 상기에 대해 주어진 그 정당화는 잠정적으로는 충분하다. 기하학에 무지한 한 노예가 그의 발 밑 모래에 새겨진 도형들과 지적 질의의 원조 이외에 다른 아무런 도움도 없이 상당히 어려운 정리의 진리를 상기해 내도록 만들어진다. 이것은 상기의 진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에 있어서 망설인다: 그는 상기의 원리가 참이라고 확신하지 않고, '만일 우리가 우리가 그에 대해 무지한 바로 그것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우리의 의무라 믿는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메논』86b)라는 것만을 확신할 따름이다. 이 망설임의 이유는 찾기 어렵지 않다. 『메논』에는 어떻게 우리가 상기된 앎을 얻는지에 대해서도, 그 상기된 앎의 대상들의 지위는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분명한 설명이 없다. 대중적 신화의 차원에서를 제외하면 꼴들에 대해서든 선재하는 영혼에 대해서든 그것에 대해 던져진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없다. 하지만 그 물음은 만일 상기설이 참이라면 피할 수 없다. 『메논』에서의 상기설은 변증이 진행되는 것을 허용하기 위한 목적만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임시적으로(ad hoc) 불충분하다.


상기와 결핍

1) 『파이돈』에서, 하나의 다른 정신, 사물들이 종결된다고 생각한 사람의 정신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서 상기에 대한 논의는 『메논』의 논증에 대한 요약과 함께 시작하지만(『파이돈』73a), 우리가 보았듯 꼴들에 관련된 측면에서 감각적인 것들의 결핍에 기초한 새로운 설명으로 진행한다. 『메논』에서 소크라테스적 변증을 정당화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촉발된 상기의 원리는 두 세계 사이의 심연이 다리놓아지는 수단이 되었다.

2) 이 새로운 존재론은 회의주의적 의심들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다. 그것은 아마도 확실히 기하학에 의해 플라톤의 정신에 제시되었을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아마도 그의 소실된 작품 『수학에 대하여』에서 기하학은 물리적 세계에 적용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연 속에는 유사물들이 있지만, 기하학자의 넓이 없는 선과 길이 없는 점들에 대해 어떠한 물리적 등가물들도 없다. 프로타고라스는 이로부터 '기하학은 그렇게나 나쁘다'라고 추론하였다. 플라톤은 다른 결론을 이끌어 냈다. 기하학은 앎이며, 선명하고 확실하다. 만일 물리적 세계가 기하학의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그만큼 물리적 세계가 나쁜 것이다. 직선자와 콤파스를 가지고 작업하는 기하학자는 모래 위에 구조들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의 도구들이 물리적일지라도, 그리고 그의 언어 - 플라톤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 가 물리적 활동들의 언어일지라도, 그가 획득하는 진리는 물리적 대상들에 대한 진리가 아니다; 그의 구조물들은 오히려 그의 사유가 그것을 향해 정향된 그러한 것들의 상들, 부정확한 유사물들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기하학적 선은 기하학적 원에 대해 하나의 점에서 그리고 오로지 그 한 점에서만 접선이다. 그러나 물리적 선은 물리적 원을 한 점에서가 아니라 직선의 부분과 호를 통해 건드린다. 곡선과 직선은 거리에 있어서 일치한다 - 기하학적 부조리이자 물리적 사실이다. 그래서 기하학의 정리들은 그것들이 그에 의해간접적으로 증명되는 그러한 모래 위의 구조물들에 대해서만 단발적으로 맞다. 이것은 그렇게, 기하학자의 도구들이 너무 무디기 때문이라거나 그의 작업들이 너무 어설프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정리들이 견지되는 조건들이 그 자체로 물리적으로라기 보다는 기하학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물리적 대상들, 기하학적 서술들에 의해 그것들인 것으로 한정되는 그 대상들은 그러한 서술들에 의해 시사되는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데에 실패한다. 감각적 도해들은 기하학적 관계들의 닮음꼴들이다 - 그 닮음꼴들이 우리에게 그 관계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것들은 훌륭한 닮음꼴들인데, 다른 식으로는 그것들이 정리들을 발견함에 있어서나 증명들을 구성함에 있어서 유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결핍된 닮음꼴들이다. 그것들의 결핍은 정도의 일종이 아니라 종류의 하나이다; 물리적 도형들은 원칙적으로 기하학적 도형들의 대응물이 될 수 없는 유사물들이다.

3) 꼴들의 이론에 대한 이것의 관련성은 직접적이다.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동등성의 감각적 예증들, 또한 비동등성의 예증들이기도 한 그 예증들은 그러므로 결핍되게 동등성과 유사하다고 전제하고, 이 판단이 비교에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등성 그 자체에서 그 자체에 대한 우선적인 앎을 가졌어야만 한다고 전제한다. 이 논증이 의존하는 토대가, 기하학에 있어서 물리적 도형들의 유사한 결핍성에 의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제시되었어야만 한다.

4) 유비는 등가가 아니다. 물리적 원들과 기하학적 원들의 관계는 어떤 종류의 원들과 원형성의 관계와는 다르다. 그러나 기하학이 플라톤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을 해명해 주었고, 상기에 의해 제기된 존재론적 지위의 문제들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대답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5. 결론

1) 1663년 하버드 대학에서 학위 수여식 직전에 학위 논문 한 편이 유포되었다. 오래 전 행복했던 때에 미친듯이 먹고 마시던 하버드 학위 수여식은 공식적 토론들에 의해 마침표가 찍혔다. 그 논문은 화제들을 제공했다. 그것은 논쟁을 위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공했다. Ethica est vitiorum Emplastrum corrosivum. 거칠게 옮기자면 그것은 도덕 철학에 대한 연구가 악덕을 위한 허술한 고약이란 뜻이다. 중세 삼학(trivium; 문법, 논리학, 수사학)과 4과(quadrivium; 산술, 음악, 기하, 천문)의 윤곽들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던 교육과정의 대학에 걸맞게, 문법 과학은 어느 하나 잊혀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Ha Ha He vox est bilaris bene Nota, 그러니까 Ha Ha He가 잘 알려진 웃음소리를 지시하는 표현인지 아닌지를 토론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3학의 중심은 논리학이었고, 논리학은 보편개념들에 대한 고대의 고결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는 한 명제 속에 기억되었다: Universalia sunt in se ἀειφανεῖς in re ἀφανεῖς Asterismi - '보편개념들은, 그 자체 내에서는 언제나 빛나는, 그러나 사물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별들이다.'

2) 물론 그 학위 논문은 가짜 학위 수여식을 벌이려고 작정을 한 학부 3학년 무리에 의해 퍼뜨려진 풍자물이었다. 그 날조차 학부생들은 시간 낭비에 기발한 재능을 가지고 학구적 예절에 대한 어떤 불경을 위해 합심하였다. 의심할 것 없이 그 모든 것은 그들의 학부에 중요한 원천이었다 - 그들의 학부의 여섯 전부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찰스 촌시 총장과 함께였다.

3) 1663년 학부 3학년생들은 어디에서나 천체의 음악과 함께 언제나 빛나고 보이지 않는 그들의 별들의 빛을 연관지었을 것이다.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로렌조가 그들보다 먼저 알았고 제시카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대에게 보이는 가장 작은 별조차 그 궤적 안에서 천사와 같이 노래하지 않는 별이 없소, 어린 눈을 한 천사들에 따라 합창 하는 동안은.(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4막 1장).' 그리고 그들은 소리를 가지고 있듯 바로 그렇게 빛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하기 쉽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작은 별들의 그 빛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별들의 운행의 음악이 들을 수 없듯이, 왜냐하면, '이 스러져 버릴 질척이는 육신이 그 빛을 지독하게 뒤덮어 가둔 동안은'(출처 상동),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4) 꽤 괜찮은 생각이다. 그러나 가짜 학위수여식에서의 그 무리는 까불거림을 증명한 듯하고, 당연히 일부 순전한 영혼에게는, 훌륭한 시를 훼손시켜가면서, 그 작은 별들의 빛은 사실 구경꾼의 영혼의 눈이 깜빡이는 것이었다고 주장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 유명론자들은 거지 같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5) 이러한 회의주의는 물음의 특정한 분할을 제안한다. 물론 별들에 대한 물음이 있다; 그것은 철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이 여전히 토론하고 있는 것이거나, 최소한 어째서 그들이 그것을 토론하지 않아야 하는지 토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깜빡임에 대한 다양한 물음들도 있다 - 그것을 누가 가졌는지에 대해, 그리고 어째서 그가 그것을 가졌는지에 대해, 언제 그러한지에 대해. 내가 이 책에서 논의했던 것이 그러한 한 가지 물음일 것이다.

6) 나는 주장했다. - 아마 이 점에 대해서는 되풀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그리고 특히나 『에우튀프론』은 꼴들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이론은 『파이돈』과 『정체』에서 발견되는 그 꼴들에 대한 이론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그 꼴들의 탐구에 속하는 대상들로서 존재들의 구분되는 계층이 현존한다고 전제하는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토대이다. 그렇지만 중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초기 대화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달리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산출하기 위해 제공된다; 그 설명이 답변으로 여겨지는 그러한 물음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 안에서 일어나는 물음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해서 던져지는 물음들이다 - 특히, 실재적 정의들에 대한 탐구와 같은 그 변증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러한 물음들은 탐구의 역설에 의해 『메논』에서 처음으로 발생하고 상기의 원리에 의해 해소된다; 그래서 변증의 수행은 처음으로 선험적 지식의 소유를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메논』에서 임시적으로 제공된 이러한 주장은 『파이돈』과 『정체』에서 결핍과 실재성의 정도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존재론에 기초된다.

7) 중기 대화편들에서 발견되는 꼴들에 대한 이론은 그래서 초기 대화편들에서 발견되는 이론과 동일한 것도 아니고, 별개의 한 가지 것도 아니다.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초기 이론을 일부로서 탐고 있기 때문이다. 같지 않다. 그것은 초기 대화편들이 유발시키지 않은 화두들로 정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에우튀프론』에서 플라톤의 깜빡임의 가득한 광채를 발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알 수 있는 플라톤적 반짝임을 확실히 찾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蟲-

P.S 아, 초벌번역 정말 개떡이지만 어쨌든 하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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