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성

1)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이 현존한다고 주장되거나 암시되는 단언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단언들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가 아직 그 결론을 반대하는 학자들에게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기 때문에, 그 문제를 더 밀고 나가 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다.

2) 누군가는 이런 논증을 그려볼 수도 있겠다. 그 저술은 의심의 여지 없이 꼴들이 현존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 저술은 그런 주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추정되는 존재론적 관련이 사실 암암리에 어쨌든 언어적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있다. 플라톤은 - 누군가는 그 논증이 연이어지는 것을 상상할 것이다 - 실제로 언어에 대한 사실들인 항목들을 세계에 대한 사실들로 표현하기 위해, 담화의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의심할 것 없는 불가피한 편애라고 할지라도, 운이 나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분석으로서 제공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담화방식이다.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거나 시사하는 진술들은 논리적 여항 없이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지 않는 진술들로 환원가능하거나 분석가능하다. 본질에 대한 물음들은, 플라톤 자신조차 동의했을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에 대한 물음들이고, 의미에 대한 물음들은 당연히 언어적이다. 적절하게 이해된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 그리고 플라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적절하게 그것을 이해하지 않았는데 - 세계를 향해서가 아니라 말들의 의미를 향해 정향된다. 결국, 꼴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짐작컨데 단어들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탐구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의미를 분명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보편개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이한 문맥들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 단어들이 우리가 나타내는 것들을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표준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 서술이 해당하는 상황들을 동일화할 수단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본질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에 대한 모든 각각의 설명이 그 의미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요약하자면 '"경건"이란 단어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초기 대화편들에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언질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중적이고, 이중의 대답을 허용한다. 만일 그 물음이 그러한 대화편들의 본문이 꼴들의 현존을 긍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라면, 그 대답은 긍정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물음이 플라톤이 상술하고 있는 위치의 논리가 꼴들의 현존을 요청하느냐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 결정하게 된다. 그것은 이러한 대체가 순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4) 몇몇 상황들 아래에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은 사전적일 것이고, 프로디쿠스나 아니면 사전에 의해 대답될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와중에 소크라테스는 문자상의 동의어들에 대한 탐구에 종사하지 않는다. 에우튀프론조차 소크라테스가 경건이 신성함이라는 답으로 만족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5) 다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물 지시적 정의', 예시에 호소하는 정의에 의해 대답될 것이다. 그러나 예시가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협소하게 구성되는지, 아니면 요청되는 특징을 드러내 보이는 일반적 경우로서 더 넓게 구성되는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런 종류의 답변은 초기 대화편에서 그러한 답변이 나타나는 어디에서고 거부된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또는 더욱 일반적으로,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

6) 다시금,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아마도 경건의 구별적 특징들을 제공함으로써, '경건'이라는 단어의 적용의 기준들 혹은 사용의 규칙들을 제공함으로써 답변될 것이다. 그러나 구별적 특징의 관념이 가장 강한 의미에서 - 전체이자 유일하며 항상된 것(id quod omni et soli et semper), 그 용어를 적용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 -  이 물음은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에 등가가 아닌데, 왜냐하면 구별적 특징이나 대체 가능한 기준의 제공은 후자의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둘 것이기 때문이다. 에우튀프론이 경건을 모든 신들이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 소크라테스는 이 특징이 경건한 모든 것들이자 유일하게 경건한 것들을 구별하는 데에 시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떠맡지 않는다; 그는 맹목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그것의 가능성을 용인한다. 그는 그가 쉽사리 했었을 것 처럼, 그러한 특징이 경건의 예증들을 동일화함에 있어서 어떤 실질적 사용에 속한 것일지 아닐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에우티프론이 우연히 경건의 πάθος를, 경건한 것들에 대해 우연히 참인 어떤 것을 발견했을지라도, 그가 경건의 οὐσία를, 경건의 본성과 실재성을 보여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별적 특징의 제공은 그래서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7) 그러나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답변이 있다. 그것은 불분명한 답변이지만, 당장의 목적들을 위해서 중요한 한 가지 답변이다. 그것은 '경건'의 의미가 경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이란 것은 무엇인가 기원하는 것인가?
정확히 그렇다.

 8)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물음들은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물음들로 환원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첫번째 물음은 꼴들에 대한 물음들로 바뀌기 때문이다. 만일 비환원성이 존재론적 관련의 기준일 것이라면, 초기 대화편들에는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관련이 있다.

9) 이러한 관련을 제공하는 의미이론은 더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독자는 여전히 끈질긴 의심을 계속 지닐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일찍이 가상적 불길이 (당신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회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장작개비들을 태우지 않을 그런 종류의 불길이라고 언급했었다. 이것은 『소피스트』(247e)에서 존재론적 관련에 대한 플라톤의 고유한 기준, 그가 신들과 거인들에 의해 비슷하게 공유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준을 반영한다: 그것은 존재의 표징이 능력이라는 것이고, 작용하거나 작용받을 그러한 능력이라는 것이다(πάθημα ἢ ποίημα ἐκ δυνάμεώς τινος, 248b). 차이는, 차이이려면,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만일 꼴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이, 말하자면 단지 거기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작용할 것,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줄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것들은 이러한 것을 수행한다; 우리는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이 원인들임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과 지시

1) 만일 '경건'이란 단어의 의미가 경건이라면, 그리고 경건이 꼴이나 본질이라면, 그 단어와 그 어떤 것 사이에 자리하는 관계가 명칭이나 이름 붙임에 속하는 하나의 관계라고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방금 이름붙인(ὠνομάσατε) 어떤 것(πρᾶγμα)이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않은지 묻는다(330c); 나중에, 탁월함이 하나인지 혹은 여럿인지에 대한 물음은 '지혜', '올바름', '사려', '용기', 그리고 '경건'이 상이한 것들을 위한 이름들(ὀνόματα)인지 아니면 동일한 것을 위한 이름들인지 탐구하는 형식을 취한다.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한다: 그 대화편들은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이름들임을 전제한다.

2) 콰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의미는 그것이 지시대상과 분리되고 그 단어와 결합될 때 본질이 되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본질은 그것이 단어와 분리되고 대상과 결합될 때 의미가 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의미되는 어떤 것은, 최소한 때때로라도, 단순히 표현이라는 면에서가 아니라, 다소간 세계의 질서에 알맞는 내용의 일부라는 면에서, 그러나 그 자체로 그 본성이 발견에 있는 그러한 세계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항목이 된다. 우리는 세계를 불완전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말들의 의미를, 혹은 그 중의 일부를 불완전하게 이해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나의 표현으로써 의미하는 어떤 것, 그것의 공공연하거나 또는 명백한 내용과 우리가 만일 그 표현이 지시하는 본질을 이해했다면 의미해야 할 그러한 어떤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에우튀프론은 분명 그가 일상적으로 경건을 통해 의미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는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을 말한다; 숙고를 거쳐서, 그는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더욱 숙고한 끝에,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 중 아무것도 경건의 본질을 진술하지 않는다. 그의 이해력과 그의 의도 사이에, 그가 경건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설명과 그가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 만일 이따금 의미한다는 것이 이름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름지어지는 것이 본질이라면, 의미되는 것은 종종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표일 것이다.

3) 만일 때때로 의미함이 본질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본질에 대한 앎이 종종 불완전하다면, '제각기 모든 것이 그것인 것으로 질서지어져 있다'는 것은 이상 언어에 대해 참이 아닐 것인데, 왜냐하면 단어들을 지배하는 사용규칙들이 필연적으로 그 단어들이 그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규칙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해결책은 본질들을 부정하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는 거듭해서 사물의 본성에 속하는 윤곽을 추적하고 있다고, 그리고 단순히 우리가 그를 통해 본성을 바라보는 그 틀의 주변을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면이 우리를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언어와 우리에게 변치 않고 그것을 반복하는 듯이 보이는 언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단어를 사용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노력할 때,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 단어가 도대체 실제로 그것의 본래 집인 언어 게임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가? - 우리가 행하는 것은 단어들을 그 형이상학적 사용으로부터 우리 일상의 사용으로 되돌려 가져오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반대하고 있던 것을 아주 잘 알았다. 만일 이 관점이 참이라면, 소크라테스적 변증이 기대고 있는 그 전제들은 거짓이다. 그래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적 주장들도 거짓이다: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 용기가 지혜라는 주장, 경건이 올바름이라는 주장. 그 말들은 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 현대 영어에서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은 지혜롭지 않고도 용맹할 수 있으리라 주장함에 있어서, 그의 언어 사용 규칙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언어적으로 독특한 사물들의 결합은, 그것이 만약 언어에 대한 단순한 전제적 입법일 것이 아니라면, 본질의 관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본질과 일상언어

1)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단어들의 일상적 사용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의 사용이 근거하는 것들에 있어서 특징들을 탐구해 들어가는 것이다. 한 단어의 사용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 단어를 지시하는 특징과 연관된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사물들의 본성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면, 그로써 우리가 완전한 암흑 속에 있다는 것이 두따르진 않는다. 그러나 본질과 사용 사이의 관련은 경험적이다: '기준'이라는 용어의 제한적 의미에서, 단어가 지시하는 본질은 그것을 적용하기 위한 기준이고, 유일하게 신뢰 가능한 기준이다.

2) 이러한 관점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품에서 말하는 것을 배웠고, 말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그 언어의 다른 발화자들이 확실하게 동의할 명백한 경우들이 그 용어들의 예시들임을 예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 용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물론 그 용어의 사용을 위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 사용을 관찰함으로써 기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주어진 한 행위가 경건하다는 것을 '경건'이란 단어에 제공할 기준을 제시할 수 없어도 완벽하게 잘 알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종종 기준보다는 사례가 제시됨을 통해서 어떤 것이 그것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을 더 잘 배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그러므로 오해된다. 의미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사례에 호소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반대한다는 데에 이어서 그것은 실수이다; 같은 식으로 의미는 사례들이 결정될 수 있기에 앞서 반드시 고정되어야만 한다고 전제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실수이다. 이러한 실수들 때문에,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의미에 대한 충분한 기준이 발견됐을 때 결정에 대한 아무런 건전한 수단도 가지지 못하고 부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째서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이 그렇게나 일관되게 실패로 끝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잘 받아들여질 것이다. 게임의 규칙들은 아무도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게끔 그렇게 정해져 있다.

3) 확실히 이러한 반대에 핵심이 있다. 에우튀프론은 사례에 호소해서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발화자들이 이상적으로 그 용어를 가지고 이해했던 어떤 것에 호소해서도 경건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러면 그는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앎에 대한 분명한 문제가 하나 있다. 때마침, 『메논』에서 플라톤이 탐구의 역설로 진술하였던,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과 같이 상기의 원칙으로 해결했던 한 문제가 있다.

4) 그러나 만일 앎의 문제가 분명하다면, 또한 그것은 분명 실재의 문제인데, 왜냐하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의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정의될 수는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는 그저 옳을 뿐인게 아니라 확실하게 옳기 때문이다. 만일 a가 F의 한 예라면, 그리고 만일 그에 대해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a가 정의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라면, 그리고 만일 b가 F의 한 예라면, b일 것은 a일 것이다; 그리고 a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정의하므로, F일 것은 a일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번갈아서 a는 F의 예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F일 그러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F는 그 자신의 예시이자 유일한 예시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F'를 대체하고, 그에 따라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이라는 형요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이라는 추상명사를 대신한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면, 그 특이함의 원천은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무엇이 이러저러한 용어로 경건한 것을 경건으로 정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인가?

5) 동일한 고려들이 경건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주어진 어떤 것이든 그것이 경건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대신한다. '나는 a가 F임을 안다'는 명제와 '나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는 명제는 양립할 수 없다. 만일 내가 a는 F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a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의 일례라는 것을 안다; 만일 내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그것의 한 예시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르고, 만일 내가 a가 그것의 일례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F의 한 예시라는 것을 모르며, 그러므로 a가 F라는 것을 모른다. F일 그러한 어떤 것이 a가 F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이라는 것이 뒤따르는데, 오로지 a가 그 특징에 대한 하나의 예시인 그 특징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a가 그 특징의 일례라고 누군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주어진 어떤 것이 경건하다는 앎에 선행한다.

6)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한 이러한 방어가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주사위를 조작하다) 주장할지 모른다. 그 주장은 어떤 것이 무엇임을 정의하는 것과 아는 것에 관련된 관념들 - 그것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적 실수인 - 에 달려 있다. 철학적 탐구의 고유한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사용의 분석이다. 『에우티프론』에서 세워진 그런 종류의 탐구는 그런 분석이 아니고,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일부 제한적 의미에서 (의심할 바 없이 신실하게) 기만이다.

7) 그러나 기만에 대한 그 주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에우튀프론』의 변증이 특별히 다루고자 시도하는 문제를 고려해 보자: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분쟁의 해결. 우리는 사례에 호소함으로써 도덕적 용어들의 사용을 위한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제안된다.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로서, 기준의 결여는 사례들이 빗나갈 때 정확하게 감지된다. 사례들의 비일관성은 기준의 비일관성에 대한 조짐이다: 만일 당신의 기준이 나의 사례를 예외로 한다면, 나는 나의 사례를 거부할 것이나, 나는 마찬가지로 당신의 기준도 거부할 것이다. - 많은 것이 의심의 여지 없이 누구의 소가 뿔에 받혔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모순 여부). 만일 도덕전 논증에서의 호소만이 사례들로부터 추출된 사용기준일 것이라면, 에우튀프론과 그의 아버지는 각자 논리적으로 난공불락의 위치에 있다. 도덕적 분쟁을 해소할 궁극적 방법이란 크롬웰 류의 담론에 의지하는 외에 아무것도 없다 - 우리들의 원칙을 교황의 입김과 두드림들로 정통이라 증명하는 것이다.

8)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전망은 지나치게 암울한 것이다. 도덕적 의견 불일치, 그것이 아마도 주장될 것인데, 그것은 오로지 경계 경우들에서만 발생하고, 분명한 사례들에 호소함으로써 해소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F들이 깔끔하게 그 안에 자리잡히고 모든 비(非)F들이 정확하게 묘사된 원 없이 위치되는, 일종의 객체화된 벤다이어그램으로 상상하면서, 태평스럽게 F인 것들의 계층에 대해 말한다. 진실은 수학적 언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일상 언어에서 가장 일반적인 용어가 그것들을 그 안에서는 그것들의 적용 조건들이 불분명한 반영(半影)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사례는 분명히 F인 것과 분명히 F 아닌 것 사이에 그 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범위, 준연속체가 있다는 그런 방식에서 사례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것은 컵이다, 그리고 저것은 그릇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저러하게 부르거나 아무것으로도 부르지 않거나 그 둘 모두로 부를 어떤 것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의심스러운 경우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경우들을 분명하게 하기를 기대할 것이고, 경우들을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누구라도 그가 그것들을 논의하고 있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내가 지금 그로부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것이 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컵'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어떤 것을 모른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도덕적 용어들도 동일하다.

9) 이것이 참이라면 그건 즐거울 일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도덕적 용어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지적하였듯 '사람들에게 눈에 띄게 만드는 어떠한 상도 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경험적 용어들과 함께일 것이다, 선악의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들, 한 사람의 분명한 경우가 두번째 사람에게 반영을 드리울 수 있고 세번째 사람을 덮으며, 이것이 단순히 주변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추론이 그것을 가지고 다루어야만 할 가장 핵심적 문제들에 관한 것이라는 특이점을 가진다. 이러한 점을 사례들을 들어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불필요할 것이다 - 다행스럽게도 -; 비참하고 소란한 세기(이 책은 1970년대에 출판되었다)에, 독자는 그 스스로 감당하도록 남겨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마도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이 역설이리라거나 혹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할지라도, 악이 실어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지적하는 모험을 할지도 모른다. 만일 선과 악에 대한 물음들이 사람들이 언어로 하는 게임들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또는 태도나 관습 혹은 취향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도덕적 앎과 같은 어떤 것이 있다거나 혹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앎이 본질에 대한 식별에 존립한다는 『에우튀프론』의 주장은,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할지라도, 확실히 기만은 아니다.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함이 없이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 이름지어지는 단 하나의 것(Unum Nomen Unum Nominatum)

1) 지시적 의미 이론들은 종종 특유한 필연적 귀결, unum nomen unum nominatum(the sole name the sole named)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다양한 비판자들은 그들이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이러한 전제를 감지했다고 생각해 왔다. Mr 리차드 로빈슨은 '만일 소크라테스의 물음(X는 무엇인가?)이 답변을 허용하는 정당한 물음이라면 … 우리는 반드시 X라는 단어가 단일한 뜻을 가진다고 전제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로스 교수 또한 소크라테스적 물음에서 이러한 함축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플라톤은 이름의 의미에서 모호함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기로는 그가 이것을 다소 드물게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했고, 겉보기에 가장 순전한 이름이 가질 의미조차도 변화하는 그 의미의 음영을 완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추론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을 묻고 답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는 더 나아가 경건이 하나의 꼴이나 본질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들은 '경건'이나 '경건함'과 같은 단어들이 상이한 의미로 사용된다거나 사용될 수 있다거나 하는 물음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 잘못된 추론은 소크라테스는 다른 것들 중에서 우리가 같은 이름으로 상이한 것들을 부르는 것과 그렇게 불리는 것들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설명하기 위해 경건이 본질이라고 전제한다는 흐릿한 참을 가장한다. 이것은, 만일 그것이 일상언어에 대한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각 단어에 대해 하나의 유일하게 정확한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모호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umun nomen unum nominatum을 수반할 수가 없다.

2) 그것은 로스 교수와 Mr 로빈슨이 추정하는 것처럼 절대의미와 모호의미 사이에 엄격한 괴리를 시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의미에서의 같음과 의미에서의 다름이 배타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양자택일적이라 생각하기 쉽다. 만일 의미가 지시라면, 그 결론은 보편개념들에 대한 날카로운 이론이다. 그 이론에서 각각의 중요한 단어는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동일한 보편개념을 도입하거나, 서로 다른 보편개념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들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중심 주위로 우위성과 후위성의 질서에서 조직화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람들이 올바르고 행위들이 올바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체』(Ⅳ, 443e-444a)에서 올바른 행위들은 사람들 안에 영혼의 조건으로서 올바름을 산출하도록 지키거나 돕는 그러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행위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이란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사람에게 적용되는 의미로 정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뒤따른다. 그래서 그 형용사는 우선 사람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고, 파생적 의미에서 행위에 대해 사용되며, 이것은 절대의미도 모호의미도 아니며, 어원유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꼴, 기본 사용과 파생 사용 양자에서 도입되는 동일한 꼴이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방식으로 도입될 따름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초기 대화편들에서 어원유래에 대한 사실을 인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것이 그렇다는 강력한 암시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꼴들에 대한 이론과 용어들의 어원유래적 사용 사이에 어떠한 양립불가능성도 없다고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중기 대화편들에서 꼴들 그 자체는 특정 종류의 어원들에 속하는 우선 지시되는 것들이 된다.

3) 만일 umun nomen unum nominatum이라는 꼬리표가 좌우간 초기 대화편들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상 언어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어원을 제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언어의 개선을 위한 이상, 어휘의 조화가 세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요구로서 가장 잘 받아들여진다. 『크라튈로스』에서 하나의 이름은 베틀의 북과 유사한 도구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날실과 씨실을 가르면서 북으로 베를 짠다; 바로 그렇게, 사물들을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에 따라 나누면서 이름을 가지고 가르친다(388b-c). 그리고 보통의 아무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들어지거나 부숴질 수 있는 어떤 모형이 아니라 북 그 자체의 꼴을 보는 목수에 의해서 북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이름들은 아무개가 아니라 작명가에 의해, '모든 공예가들 중 가장 드문' 그 기술자에 의해 주어져야 한다(389a); 작명가는 각각의 이름을 그것의 적절한 사용에 맞추면서, 주어진 이름들 속에서 이름 그 자체의 꼴을 볼 것이다(389d). 그리고 목수의 작품의 가치를 직조공이 판단할 것과 같이, 그렇게 변증가는 이름들의 부여자에 의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것이다(390c). 플라톤주의는, 일상언어에 대한 그 태도에 있어서, 내재적으로 수정주의적이다.

4) 이름들을 부여하는 이러한 사업은 umun nomen unum nominatum에 관련되는데, 그렇지만, 이제껏 제시된 어떤 것과도 다른 의미에서 그러하다. 『메논』(71e 이후로)에서, 메논이 탁월함을 정의하도록 요구받을 때, 그는 그 각각이 고유한 정의를 지닌 탁월함들의 목록으로 응답한다: 사내의 탁월함은 폴리스를 돌보는 것이고, 친구들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며, 적들에게 해를 주는 것이다; 여성의 탁월함은 그녀의 남편에게 명령하고 또 그 남편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노예들, 노인들에 대한 다른 탁월함들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답변을 거부한다: 메논은 그에게 한 무리의 탁월함들을 주었고,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그 모든 것들에 있어서 동일한 하나의 것, 하나의 탁월함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것은 물론 단 하나의 것이 있다는 것을, 더욱이 'x의 탁월함'과 'y의 탁월함' 등에 대해 다양한 '~의 탁월함들'에 공통된 '탁월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른 식으로 보자면, '탁월함'은 총괄적 단어도 아니고, 불완전한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의 이름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내들의 탁월함과 여성들의 탁월함에 대해 말할 때, 어째서 우리가 어원들도 단순히 얼버무리는 것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취해질 수 있다; 그러나 『메논』과 『테아이테투스』 모두에서 그것은 오히려 보편성의 더 높고 더욱 흥미로운 단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취해진다. 자신의 일을 알고 있는 작명가는 짐작컨데 그것을 마음 속에 품을 것이다.


본질인과성

1) 꼴들은, 로크의 말을 빌리자면, 실재적 본질이며 명사적 본질이 아니다. 꼴들은 실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명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명칭들이나 단어들의 일상적 의미들에 대한 탐구는 그 탐구가 꼴들에 대한 탐구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꼴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그것들이 실제 사물들인 바의 그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본질은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인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의 존재에 대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실재는 내재적이며,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사물들의 발견 가능한 특질들이 의존하는 사물들의 구조는 그 사물들의 본질로 불릴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형성으로부터 명백하듯이, 그 단어의 적절한 의미이다; 그 기본 표기법에 있어서 적합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esentia.

로크의 설명에 의해, 본질은 '어떤 것의, 그로써 어떤 것이 그것인 바의 것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개별자의 실체적 꼴을 그 개별자의 실체와 동일시하면서, 본질을 본질을 가진 것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는 로크가 물려받았던 그 전통을 기초하였다.

2) 그러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 있음에 대해 그 꼴들이 꼴들인 것의 있음이 아니다. 하나의 있음인 보편개념은 다수성의 있음이 될 수 없다 - 정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보편개념들로부터 실체적 꼴을 구별하는 데에로 이끌렸는지의 이유이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어떤 주어진 경건한 사물이나 경건해 보이는 행위의 있음이라고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경건이 그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그러한 것임을 시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 어휘를 조금 빌리자면, 경건이 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3) 『대히피아스』에는 이 전제를 명백하게 만드는 논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히피아스가 올바름이 어떤 것이다(ἔστι τι τοῦτο)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에 동의하도록 이끄는데,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지혜로운 것 등등의 그러한 것들은 만일 그것들이 어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의한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기 때문에, 히피아스는 아름다움도 어떠한 것이며, 그것들이 다른 말들이나 생각들 또는 개념들에 의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4) 이 논증은 분명히 『대히피아스』에만 놓이지만, 그것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각각의 초기 대화편들에 의해 가정되는데, 왜냐하면 꼴들이 본질들이라는 그 전제는 변증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꼴들은 정확히 보편개념들이고 표준들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바의 것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5) 플라톤이 매우 자주 꼴들과 그 꼴들을 지닌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화하기 위해 인과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꼴들이 본질들이기 때문이다. 『뤼시스』(221c)에서 소크라테스는 '원인이 파괴될 때, 그 원인이 그에 대한 존재를 지속시키는 원인인 그러한 것은 물론 있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원인이다: 경건의 현존은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현존에 필수적이다.

6)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과 그 꼴들의 예시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한다. 꼴들은 그 예시들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또는 그 예시들'에 현전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들에 '덧붙여져'야 할 것으로, 아니면 그것들'에' 있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 예시들은 다른 한편으로 꼴들을 '가지거나' '허용하거나' '취하거나' '나누어 가진다'. 이러한 은유들 전부 일상언어에 기초된다. 그것들은 정말로 평범하게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명사들과 함께 사용될 것이다. 영어에서 한 행위에 용기가 있다(there is courage in an action)고, 또는 올바름의 현전이 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내의 도량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7) 은유들로서, 그리고 친숙한 그리스어로서, 이러한 용어들은 소피스트적 논쟁들의 재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디오니소도루스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움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잠시 망설인 후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όν)와 다른 것들이고,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들 각각은 그 안에 현전하는 어떤 아름다움(κάλλος τι)을 지닌다고 말할 때, 디오니소도루스는 재빨리 주도권을 잡아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소 한 마리가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소로군요. 그리고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은 디오니소도루스고요'(301a). 소크라테스는 '맙소사'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현전'은 은유 - 혹은 최소한 많은 용례들을 지닌 단어 - 이고 잘 다룰 방법은 그것의 의미에 달려 있다.

8) 문제가 되고 있는 '현전'은 특수한 종류의 것이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나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떤 것에 현전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을 떠맡고,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그의 논의를 갑작스럽게 중단한다. '일부 사물들은 그 사물들에 현전하는 그러한 것 그 자체일 그런 것들이다;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만일, 예를 들어 금발이 하얗게 칠해진다면, 흼은 그 머리카락에 현전할 것이지만, 그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흴 적에, 흼은, 그 머리카락이 그래서 하얗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머리칼에 현전할 것이다. 앞서의 경우, 흼은 머리카락에 현전한다. 뒤의 경우, 머리카락은 '흼의 현전에 의해 하얗다'.

9) 어떤 것이 흴 때 그 의미에서 흼이 그것에 현전하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도구적 여격에 의존한다. 이러한 장치는 초기 대화편들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고, 사려있는 자들은 사려에 의해 사려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대히피아스』(300a)에 따르자면 아름다움 것들을 아름답도록 만든다(ποιεῖν).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어법과 결부된다. 이온은 그가 호메로스를 기릴 수 있음이 앎에 의한(도구적 여격)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온』541e).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건강에 의해(ὑπό와 동작주의 속격) 유익해진다고 생각한다(『크리톤』280a). 사려는 만일 그 사려가 그들에게 현전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좋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나쁜 것이다(『카르미데스』161a).

10) 그러나 비록 이러한 표현들이 일상언어에 결부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종종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Ποιεῖν은 πάσχειν에 속하는 규칙동사이고, πάσχειν은 규칙적으로 '자격지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ποιεῖν은 '자격을 둠'의 의미로 규칙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혜가 사람들을 복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지혜가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또는 지혜가 그에 의해 사람들이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논리적 차이가 있다.

11) 이러한 표현들은 인과적이다 - 흔히 당구공들의 부딪침과 연관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적 원인에 대해 말하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 아름다움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이다: 아름다움의 현존은 다른 것들의,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인 한에서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대히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물들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가 현존해야만 아름다우며,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했을 때, 그 이유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그러한 어떤 것(δι᾿ ὅ)이 현존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12) 그것들이 그에 의해 어떤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인 바의 그러한 본질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꼴들은 원인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파이돈』(100c)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것들이 아름다움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케베스에게 그가 이러한 종류의 원인(αἰτία)을 허용하는지 묻는다. F. M. 콘포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라는 구절은 … 모호하다. '이유'는 '설명'(αἰτία의 관습적 용법)을 의미할 것이다. 그 전제는 그래서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진술과 동등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나는 말들의 그 형식을 바꾸어 말함으로써 대체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명제의 분석이 아니라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론은 그래서 이 사실이 (1)특정한 가시적인 것, 이 장미, (2)아름다움(Beautiful or Beauty), 그리고 (3)우리가 '~에 참여한다'를 대체할 수 있는, '~는 ~이다'로 표현되는 그 둘 사이의 관계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으로 구성된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오로지 하나의 설명만을 가진다: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장미가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존립하게 할 어떤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어느 관점에서든 우리는 한 명제에 대한 분석이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분석만을 가질 따름이고, 참인 진술의 이유나 그 사실의 현존에 대한 원인을 가지지는 않는다.

첫번째 주장은 제외될 것이다. 당신은 말을 바꿈으로써 오로지 본래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무지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명제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 그 누구도 그 표현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줄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αἰτία가 말 바꿈에 대해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고대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가 말 바꾸기를 시사하리라는 주장은 그래서 불충분하다.

13) 콘포드가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라고 부른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사실이라면, 그가 인정하듯, 어떤 식으로 분석이 말 바꾸기와 다른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경우든, 이것은 플라톤의 핵심을 놓친다. '이 장미는 아름답다'와 '이 장미는 아름다움의 꼴에 참여한다'는 실로 등가의 진술들이다 -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확히 사실들의 구조에 있어서 존재론적 우선성에 대한 이론이지, 명제 등가들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이 장미를 아름답다고 부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사물에 세례를 내리는데 그것에 있어서 그 특징 때문이고,(그 특징 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세례의 정당함을 보장하는 그 특징의 현존 때문이다. 꼴 자체는 그렇지만 오로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만일 그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장미가 아름다운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그 꼴은, 꼴의 현존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꼴은그 장미에 있어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현존뿐만 아니라 토양의 조건, 그리고 기후, 정원사의 기술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충분조건은 본질인과만이 아니라 작용인 또한 필요로 한다.

14) 그래서 꼴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것들인 바의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원인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세계가 그 세계인 어떤 것이 아니었으리란 의미에서 말이다.


지시의 재고

1)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하는데,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대상들을 명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로부터 초기 대화편들이 이제는 이전보다 덜 널리 주장되는 그 명제, 어떤 것을 기술한다는 것은 서술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를 전제한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이 마지막 명제는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명제와 관련되어 왔다: 잘 구성된(혹은 잘 분석된) 문장들의 구조는 반드시 문장이 표현하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일대일 혹은 2방향 유일 상응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명제이다. 잘 구성된 문장들은 술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문장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은 반드시 유사-술어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 술어들이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더 나아간 단계이고, 그러한 술어들은 그것들을 명명한다.

2)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하지 않은 명제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더욱이 그것과 관련된다고 거의 이야기될 수가 없다; 그 대화편들은 특정한 어떤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되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파이돈』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일이 하나의 기술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꼴들의 각각은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 꼴들의 제 몫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라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기술하는 것은 그에게 올바르다고 명명하는 것이고, 좌우간 올바름을 명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름이 비록, 올바르게 적용된다면, 소크라테스가 올바름에 참여하기 때문에 적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3) '올바른'과 '올바름' 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메이아적 구별이었을 것을 사용하면서, 동근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예시이다: '사물들이 상이한 어미들로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들의 이름을 획득할 때, 그것들은 동근어들이라 불린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문법학자(grammarian)는 그의 이름을 문법(grammar)로부터 획득하고, 용감한 자들은 그들의 것을 용감으로부터 취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를 동원어적으로 명명한다: 그는 그의 이름을 올바름으로부터 얻는데, 어미상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참여하고 있는 꼴의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그 꼴로부터 얻은 이름과 문법적 어미에 있어서 다를 필요가 없고, 플라톤의 고유한 사용에 따르고 소크라테스가 어원적으로 명명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르다'와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참여한다'는 등가 명제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반한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동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는데, 하나는 어원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것들에 대해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어원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미는 지시를 필요로 한다; 지시 대상들은 그렇지만 어원이 그것들의 관련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구별된다.

4) 종과 유들은 근원적인 반면에 어원적으로 그것들을 도입하는 서술들은 파생적이라는 것이 이 관점의 결론이다: 용감한 자들은 용감으로부터 이름지어지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이것이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종과 유들을 논리적(혹은 어쩌면 비논리적) 구조로, 기술들 그 자체인 의미의 근원적 매개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답변은 일대다(一對多) 논증이어 왔다. 그 논증에 대한 전제들은 현대적인 차림으로 존 오스틴에 의해 경탄스럽게 진술되어왔다 - 그는 물론 그 논증의 결론에 동의하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좌우간 언어를 통해 성취하는 그런 종류의 소통일 것이 있다면, 의사전달자('화자')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피(彼)의사전달자('청자')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징들의 축적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이 '말'이라 불릴 것인데, 물론 비록 그것들이 우리가 보통 말이라 불러야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일 필요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다 - 그것들은 신호기(信號旗) 따위의 것일 터이다. 또한 말과는 다른 어떤 것, 말이 그에 대한 소통을 위해 사용될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세계'라 불릴 것이다. 어째서 세계가 말을 포함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진술 그 자체, 그에 대해 어떤 특수한 경우이든 세계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진술 자체의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다. 더욱이, 세계는 유사성들과 부동성들(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는)을 내보여야만 한다(우리는 관찰해야만 하고): 만일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될 수 없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면, 말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서 - 물론, 마찬가지로 만족될 다른 조건들도 있다) 두 가지 관습적 방식들이 있어야만 한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황, 사물, 사건 등의 유형들을 가지고 말과 관계하는 기술적인 관습적 방식들(= 문장들). 세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상황들 따위를 가지고 말과 관련하는 지시적인 관습적 방식들(= 명제들).

오스틴은 보통 일상언어철학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어떤 표어들 아래에서도 행진하지 않았고 어떤 장단에도 맞추지 않았으며, 만일 언어가 그 세계에 대한 것일 터라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 기술하는 위의 문단은, 만일 내가 실수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투명한 형이상학의 단편이다. 오스틴은 주석에서 계속해서 첨언한다:

'~를 가진 일종의 ~이다'라는 것은 '~을 가진 그런 표준적 사태들과 충분히 유사한 ~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참된 하나의 사태일 하나의 진술은 자연적 관계인 특정한 다른 것들과 유사해야만 하고, 그러나 또한, 더 이상 순수하게 자연적 관계는 아닌 동일한 '서술' 가치에 대해 충분히 유사해야만 한다. '이것은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그런 것들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이것은 붉다고 불리는 그런 것들과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사물들이 유사하다거나 또는 심지어 '정확하게' 유사하다는 것조차 나는 문자 그대로 이해할 터이지만, 그것들이 같다는 것을 나는 문자 그대로 알 수 없다 - 그것들을 똑같은 색이라 부름에 있어서 관습은 그것들이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색에 주어질 이름에 대한 관습적 선택에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유사성과 부동성은 상이한 측면들에서 획득하는 관계들이다. 크리켓 공과 야구공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고 색에 있어서 부동하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이 이것이 그러하다는 측면들을 구별함이 없이 유사하고도 부동하다고 진술할 수는 없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세계 속의 사물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가 좌우간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독립적으로 획득하는 유사성과 부동성이 자연적 관계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관계들이 그 덕분에 획득하는 그러한 특징들 - 형태적 특징들, 색채적 특징들 등 - 이 언어적 관습의 문제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거의 이치에 맞기 어려워 보인다. 만일 그 관계들이 '자연적'이라면, 그것은 그 덕분에 그것들이 유지하는 그러한 특징들도 동일하게 그렇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그러한 특징들은 기술들이 아니다: 우리는 크리켓 공과 야구공이 모두 구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구체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 혹은 구형일 것임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물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기술되는 그 사물의 특징 덕분에 유지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용감한 자들이 용기로부터 이름지어지고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5)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유사성들과 부동성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특징들의 현존을 추론해내는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를 발견하고 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 문제를 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언급들은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의 경우 그 추론이 의지하는 그러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어떤 것을 한다. 그렇지만 초기든 중기든 대화편들에서 유사성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도출된 꼴들에 대한 우리의 앎은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사실상 유사성이 획득한다고 확신할 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을 통해서만 있기 때문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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