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실재적 정의

1)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 속에서 확정적이고 기술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꼴을 명시해야 한다 - 즉, 보편개념이고 표준이며 본질이다. 『에우튀프론』은 그 설명이 반드시 그 꼴이 부분인 어떤 전체를, 그리고 그 전체의 어떤 부분이 그 꼴인지 진술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최근류와 종차로써 경건을 정의하는 것이다.

2) 이 관점에서 그런 종류의 정의는 물론 실재적 정의이며 명사적 정의가 아니다; 그 정의는 어떤 것들의 진리치인 말들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에 대한 말들이 참인 그러한 것들의 본성에 대한 정의이다. 실재적 정의는 말들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조건들이나 어떻게 그 말들이 실제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분석이다. 그것이 본질분석이기 때문에, 실재적 정의는 조건들로서가 아니라 참 또는 거짓이다. 예를 들어 올바름이 탁월함이라는 것은 참이고, 그것이 양이라는 것은 거짓이며, 만일 'is'가 종들과 유들에 관련하는 개념정의적 'is'로서 해석된다면 계속 그러할 것이다.

3) 실재적 정의에 대한 공통된 관념은 그러한 정의가 단순하게 명사적 정의에 현존 주장을 더한 것이라는 관념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삼각형의 실재적 정의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삼각형은 "분명한 세 각을 가진 도형"이고, 삼각형들이 있다'. 밀은 지난 세기(19세기)에 이것을 주장했고, 일부 해석자들에 따르자면, 그것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었기도 하다. 그래서 토마스 히쓰 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고자 더욱 고심한 정의들과 정의된 사물의 현존이나 현존하지 않음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정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어떤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고, 그 어떤 것이 그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의된 다양한 것들의 현존은 각 학문에서 기본적인 몇몇 것들, 그것들의 현존이 증명될 수 없고 각 학문의 제 1 원리들 중에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입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기하학에서 점들과 선들은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야만 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의 현존은 입증되어야만 한다.

히쓰 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계속해서 연결한다. 그 이론은 아마도 구조가 현존의 증명으로 기능하는 유클리드 『원론』에서 유클리드의 실행을 가지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당대의 수학에 더욱 밀접하게 관련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유클리드의 정의들과 그 정의들에 대한 그의 사용은 정의들 그 자체는 정의된 것들의 현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하지만 그것들 각각의 현존은 입증되거나 ('원칙들'의 경우에는)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과 일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하학에서 점들과 선들의 현존만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나머지 것들의 현존은 증명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유클리드의 첫번째 세 가지 가정들은 직선들과 원들을 작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명한다(『원론』에서 사용된 직선들을 제외한 '선들'만). 다른 것들은 정의되고 그 후에 작도되며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예를 들어 1권 정의 20에서 등변 삼각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된다; 그리고 (1권 1) 그 등변 삼각형을 작도할 것이 제안되고, 작도되었을 때, 그것은 정의와 일치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사각형이 정의될 때(1권 정의 22) 그러한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어떤지 하는 물음은 1권 46에서 정의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증명되기 전까지 열려 있다. 직각(1권 정의 10, 1권 11)과 평행(1권 정의 23, 1권 27-9)을 가지고도 비슷하다. 단순한 추정과 상상을 배제시키는데에 굉장한 주의를 요한다. 이름들에 대한 주관적 정의로부터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 정의로의 이행은 기하학에서 구조들(가정된 제 1원리들)을 수단으로, 다른 학문들에 있어서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듯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정의와 현존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의심할 것도 없이 아카데미아에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거기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 뿌리들은, 특정한 본성의 어떤 것에 대한 현존을 전제하도록 허용되고, 그 가정을 지지하거나 거부하도록 허용되는, 플라톤의 가설들에 의한 연구방법에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일한 것과 단일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른 것이다'라고 주장한 첫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4) 실재적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또한 현존과 근대 논리학에서 자주 제시되는 분석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밀접하게 부합한다. 정의들, 혹은 더욱 정확하게 말해서 그 참값이 유일하게 정의들에만 기대는 명제들은 분석적이고, 그들의 용어들로 의미하는 바에 의해 참이며, 그것의 반박들은 자기모순적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암여우(vixen)들은 암컷인 여우들이다'라는 것은 정확하게 참인데 왜냐하면 '암여우'라는 표현은 '암컷 여우'라는 표현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언어를 본다. 그러나 어떠한 분석적 명제도 분석적인 것으로서 현존 주장을 시사하지 않는다: 이것을 가정하는 것은 현존이 술어적 표현의 의미에 대해 부분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현존이 술어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될 것인데, 반면 사실 그것은 술어들에 대한 적용을 명시하는 양화사이다. 그래서 '암여우'가 의미하는 것은 암여우들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 않고 시사할 수도 없다: 그러한 정보의 단편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 세계를 보아야만 한다.

5) 실재적 정의가 단순하게 명사적 정의에 현존 주장을 더한 것이라는 관점은 그 이면에 수세기에 걸친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전통의 부담과 동시대 논리학의 부담 모두를 가진다. 그 관점은 그 관점이 『에우튀프론』과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 전제된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보기 위한 지적 상상력의 활동을 요구한다.

6) 그리고 분명히 그건 아니다. 『에우튀프론』의 변증 절차는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로 대변될 수는 없다. 추가적으로 '경건'이 어떤 것에든 해당되는지 아닌지를 밝혀내기 위한 시도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답하기 위한 필요조건들은 명사적 정의의 필요조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사적 정의들은 말들에 대한 정의들이지 표준들 또는 본질들에 대한 정의들이 아니고, 어째서 그것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것이기를 요구받아야 하는지 아무런 훌륭한 이유도 없다. 그리고 둘째로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존재적 의미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시된다: 소크라테스와 에우튀프론은 경건한 것들이 있다고  전제하고, 오로지 무엇이 그것들의 본성인지만을 묻는다; 그리고 현존에 대한 이러한전제는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최초에 사례들 - 그 물음이 제기된 모든 초기 대화편들 각가에서 이야기하는 것 - 에 호소함으로써 대답되는 모든 초기대화편들에서 이루어진다.

7) 이건 다른 식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꼴은 '실체시된 의미'가 아닌데, 예를 들어 '염소사슴'과 '직각원' 같이 의미하는 바는 있지만 어떠한 적용도 가지지 않는 표현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꼴은 '가능성', 또는 화이트헤드주의의 영원적 객체가 아닌데, 예컨데 유니콘들처럼 아무것도 만족시킬 수 없는 가능성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꼴은 오히려 무엇인 어떤 것의 본성이고, 그러므로 존재적 의미는 그 어떤 것의 바로 그 관념 안에 세워진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꼴들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혼동에 기초하는 것이다.

8)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해서 현존이란 말하자면 주어진 것이다: 그 목적은 변증의 본성을 관통하는 것이고, 그러한 관통은 정의 속에서 표현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관점이 일반화되고, 윤리학에 대한 물음들로부터 옮겨져서 전체 세계에 대한 물음들로 활동한다면, 정의는 어떤 것에 대한 모든 앎의 토대가 될 것이다.

9)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실재적 정의는 대상 - 탐구의 목표 역할을 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만일 그러한 정의가 단어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면, '개념'에 대한 정의 또한 아닐 것이라는 것은 아마도살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에우튀프론의 경건에 대한 개념 또는 일상적인 아테나인들이 '경건'이란 단어를 가지고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어떤 것은 경건의 본성과 본질에 대해 불충분하다; 이것은 엘렝코스, 변증적 반박술에 이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개념들의 꼴에 대한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목적론적이다: 경건의 꼴은 짐작컨데 에우튀프론이 만일 그의 말들이 의미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더라면 그 '경건'이란 말을 가지고 이해했을 어떤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가능성으로서 그가 '경건'이란 단어를 가지고 그가 '올바름'이나 '용기', '사려', '지혜' 그리고 '탁월함'이라는 다른 단어들로 의미하는 것과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의미했을 것임을 알아차릴 거라고 말한다. 비록 이러한 단어들의 이상적 사용에 있어서 이 단어들의 검토가 오직 이것이 역설이었다는 것만을 말할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한 단어를 가지고 이해하는 어떤 것은 우리가 그걸 가지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이해해야만 하는 어떤 것은 아니고, 꼴들과 우리의 일상적 개념들 사이의 그 구분은 실재적 정의의 결핍과 어려움 모두를 설명한다. 사물들의 본성과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들을 무분별하게 동일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많은 숙고가 요구된다.

최근류와 종차

1) 전통적인 논리학 교과서들에 따르면 정의는 많은 종들에 공통된 하나의 유를 언급함으로써 수행되고,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검토 하에 그 종들을 구별해 내는 차이점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러하고 로스 교수는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도 또한 그렇다고 주장했다:

['용기란 무엇인가?'와 같은 그런 물음들에 의해서] 용기는 요소들로 나뉘어질 수 있는 복합적인 것임이 암시된다; 만일 용기가 그러하지 않다면, 그 물음은 … 오직 용기는 용기라는 것만이 참인 응답일 바보같은 물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이러한 형식의 물음들에 대한 응답들은 원칙적으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명시적으로 수행해 나아가던 것과 같이 정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분석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의가 유들과 종차를 통해 진행하는 것이라는 그 주장은 『에우튀프론』에 의해 확인된다. 소크라테스의 그 문제에 대한 논의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들어간다. 첫번째 부분은 정의가 유를 제공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그 부분은 경건이 올바름의 한 부분인지, 그리고 올바름은 경건의 한 부분이 아닌지 어떤지를 묻는다. 그것은 스타시누스(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 시인)가 주장하게 된 것처럼 삼가는 마음은 두려움의 한 부분인 반면에 두려움은 삼가하는 마음의 한 부분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다음으로 그것을 뭐라 이름붙이지 않고서 종차의 관념을 도입하는 데에로 나아간다; 그 논증에서의 이 새로운 단계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점을 숙고하라'는 그의 요구에 의해 표시된다(12d, 5): 만일 경건이 올바름의 부분이라면, 그 다음으로 밝혀지는 것은, 짝수가 수에 있어서 서로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 측면들이 아니라 똑같이 나뉘어 떨어지는 두 측면들을 지닌 그러한 부분인 것처럼, 그것이 어떤 부분인가 하는 것이다.

2) 초기 대화편들의 정의에 대한 모든 사례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라케스』(192b)에서는 재빠름이 '짧은 시간에 꽤나 많은 것을 해내는 능력'으로 정의되고, 『메논』(75b)에서는 처음에 도형이 '언제나 빛깔을 뒤따르는 것'으로 정의된다. 어느 정의도 『에우튀프론』의 요구들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메논』은 그 도형을 '한 입체의 경계'로 한정함으로써 도형에 대한 정의를 개선시켜 나아간다. 그것은 최근류와 종차를 제공한다; 그래서 아마도 고르기아스의 방식으로 제공되는, '시각에 맞추어질 수 있는 형태의 발산'으로서 색을 정의하는(76d) 그럴싸한 가짜 정의도 제공한다.

3) 『에우튀프론』에서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이 그 문제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설명인지 아닌지, 또는 그의 의견들이, 에우튀프론을 이끌어 가는 수단으로서 부분적으로는 변증적인 것으로 의미되는지는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후자의 관점에 대한 증거가 있다. 만일 삼가는 마음이 두려움의 부분인 것처럼 경건이 올바름의 부분이라면, 그래서, 에우튀프론의 설명에 의해, 두려움이 삼가는 마음보다 넓은 것처럼 올바름은 경건보다 넓다; 즉, 경건은 올바름을 수반하는 반면, 올바름은 경건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프로타고라스』에서 주장되고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 암시적인, 탁월함은 정의에 있어서 모든 탁월함들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서나, 그 탁월함들이 상호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나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적 명제와 상충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마도 최소한 특히 탁월함의 경우에는, 『에우튀프론』에 있어서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이 자격을 부여함 없이, 그리고 수정을 요구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것은 아니라는 것일 터이다: a가 b의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b가 a보다 더 넓은 영역들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언제나 수반할 필요는 없다.

4) 이것이 『에우튀프론』이 정의를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것으로 그린다는 사실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우튀프론』은 정의될 것이 반드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로스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지도 않는다. 이 제안은 그것이, 예를 들어 경건이 요소들로 구성되지만, 그 요소들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정의가 독립적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그런 일련의 항목들에 있어서 반드시 한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 제안이 암시한다거나, 또는 정의가 불가능하고 그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 종결할 수 없는 무한퇴행을 암시한다는, 그런 일반적 반대에 대해 책임이 있다. 로스 교수의 해석에 대한 원문의 뒷받침도 없다; 소크라테스의 공간적 은유들은 공간들의 가분성을 제안하는 어떤 방식과도 중첩하지 않는다; 삼가는 마음이 있는 그 어디에서나 두려움이 있지만 두려움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삼가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도출된 그 추론은, 두려움이 삼가는 마음의 부분이 아니지만 삼가는 마음은 두려움의 일부라는 것이 아니다; 삼가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것을 나누지 않지만, 삼가는 마음을 검토함에 있어서 그것이 두려움을 수반한다는 것은 안다. 최근류를 가지고 그러하듯 종차를 가지고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종차의 사례는 짝수가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 두 쪽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나뉘어 떨어지는 두 쪽을 갖는 수'라는 것이다. 즉, 자체적으로 둘로 나뉠 수 있는 수라는 것이다. 2는 그 자체로 짝수이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이 차이는 짝수의 현존에 속하는 필연적 귀결을 표현하는 것이지, 짝수의 구조 속에서 하나의 요소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는 정의될 것이 반드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가정은 『에우튀프론』이라는 글 위에 정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설명을 투영하였음을 표현한다. 이러한 투사는 실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유(類)들

1) '유'와 '종'의 일상적 함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함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였던, 그의 가정들로부터 유래된 논리학적 전통의 침전물은, 유들은 내용에 있어서 종들보다 빈약하고, 그 추상적 계층에서 위로 향하는 이행은 공허를 향하는 이행이라는 것이다. 포르피리우스의 계통수에서 각각의 종은 최근, 하위, 그리고 최상위[summum] 유들을 수반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것의 정의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유도 그 유 아래에 들어가는 종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동물을 수반하지만, 동물은 사람을 수반하지 않는다; 동물의 경우 생물을 수반하지만 그에 의해 수반되지는 않는다. 유는 종보다 더 적은 표지(標識, merkmal. de. pl.-e)들, 더 적은 특징들을 가진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더욱 빈약하다.

2) 상승은 공허를 향하고, 하강은 충족을 향한다. 유에 대한 종의 관계에 대한 이런 설명은 종종 논리학의 중립적 문제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중립적일 수 없는 절차인데 그것이 다름 아니라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나게끔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3) 종종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느 날 그가 사는 세상을 바라 보았고 개별자들을 발견했다고 가정된다 - '실재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라 불린 어떤 것을 지니고 있는 철학자들의 웅장한 노선에서 첫번째로 말이다. 어쩌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오히려 자연적 종류들을 -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짐말이 아니라 말에 대한 우선함을 - 찾고 있었고 발견했다는, 그리고 그가 그러한 종류들에 속하는 것들인 소크라테스와 짐말과 같은 그런 개별자들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지지하도록 이끌렸던 것은 자연적 종류들에 대한 이러한 발견을 통해서라는 증거가 있다. 이러한 발견을 향한 도정은 플라톤만이 아니라 스페우시푸스도 포함한 아카데메이아에서 정의를 둘러싼 논란의 가시덤불을 통과했다. 그것은 제 2 실체의 구별적 표시 - 즉, 실체의 범주에 있어서 술부들 - 는 이름과 정의에 있어서 서술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범주들』의 원칙이 되었다. 이러한 규칙, 기초적 실재들의 본성을 표현하는 용어들을 골라낼 수 있도록 하게 되어있는 그 규칙은 존재론에 묶인다.

제 2 실체에 속하는 종은 유보다 더욱 실체적인데, 왜냐하면 종은 제 1 실체에 더욱 가깝기 때문이다. 만일 제 1 시체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욱 많은 정보를 주고 유보다 종을 부여하는 경향이 더 많은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별적인 사람에 대해 그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는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줄 것이다(왜냐하면 하나는 개별적 사람에 대해 더욱 특징적인 반면, 다른 하나는 더욱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별적 나무에 대해 그것이 나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 식물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줄 것이다. 나아가, 제 1 실체들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것이고 모든 다른 것들은 그 제 1실체들에 대해 술부일 수 있거나 그 제 1 실체들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제 1실체들은 무엇보다도 실체들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제 1 실체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자리하는 것처럼, 그렇게 종도 유에 대해 자리한다: 종은 유에 대한 것이다(유들은 종에 대해 서술되지만, 종은 유들에 대해 상호적으로 서술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로 마찬가지로 종은 유보다 더욱 실체적이다.

이러한 이행은,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일반화적 공허의 원칙으로 향한다. 그것은 또한 그것의 토대를 해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를 술어적인 것으로, 그리고 술부를 비대칭적으로 이해한다: 유는 그것의 종에 대해 서술 가능하지만, 종도 종차도 유에 대해 서술 가능하지 않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동물은 사람도 아니고 이족보행동물도 아니다. 유들이 종에 대해서 종이 개별자들에 대해 서는 것처럼 서기 때문이고, 개별자들은 종들보다 더욱 실체적이고, 종들은 유보다 더욱 실체적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나 코리스쿠스처럼 그것들도 그에 대해 서술가능한 제 1 실체에 대해 대조적으로, 설령 종들과 유들이 둘 다 제 2 실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면, 유들의 결핍이 즉각적으로 따른다: 상대적으로 덜 실체적인 유들은 상대적으로 더 실체적인 종들을 거의 포함할 수 없다시피 하다. 논리적으로 놓고 봤을 때, 유들은 종들을 수반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종차들이 그 종들의 유들에 대해 비본질적이어야만 하기 때문이고, 그 점에서 그 종들은 그것들의 유들에 대해 서술 가능하지 않다: 그 유는 그것의 종을 수반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 종의 분석에 있어서 오로지 한 요소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유의 종에 대한 관계에서 술어의 비대칭성은 수반의 비대칭성을 수반한다.

4) 『범주론』은 초기작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어휘는 그의 정신이 성장에 따라 변화했다. 제 1 실체와 제 2 실체 사이의 대립은 후기에 폐기되었다; 제 1 실체는 질료, 꼴, 그리고 그것들의 합성으로 분해되어 들어갔다; 제 2 실체는 실체적 꼴과 보편적 꼴로 분해되었다. 그러나 유들이 종들보다 더욱 결핍되어 있다는 전제는 남았다. 『형이상학』에서, 은유로써, 유들은 종들에 대한 질료로서, 나아가 종차들이 상대적으로 꼴로서 서는 한정에 대한 잠재력이 된다.

5) 이러한 주장 또는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은 가장 나중의 생각을 보편개념들에 채색하였다. 그것은 논리적 주어들로서, 이야기되는 것들에 속하는 우선성이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 자체로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의 우선성인, 개별자들의 우선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것은 술부들의 파생물,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들을 전제한다. 이러한 것들은 플라톤적인 전제들이 아니다.


플라톤적 유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들에 대한 설명은 초기 대화편들에 맞지 않는다. 우선, 그 설명이 비록 소크라테스의 어휘를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설명은 소크라테스의 은유를 뒤집는다. 소크라테스는 종이 유의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그 유는 전체이다. - 이 종 부분에 다른 부분들을 더하여 포함하는 그러한 전체이다. 그러나 만일 유들이 종들보다 더 결핍된 것이라면, 그 종은 전체인 종일 것이고, 그 종에 대한 유와 종차는 각각의 부분들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에서의 정의에 대한 이론들에 내재하는 문제들에 대한 숙고로써 은유의 이러한 역전을 지지하는 데에로 이끌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처음으로 부분과 전체의 은유를 도입했던 그가 그것을 뒤집힌 것으로 도입했을 성 싶지는 않다.

2) 결핍된 유들과 초기 및 중기 대화편들을 조화시키는 그 방식에는 두번째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은 그 유들이 소크라테스가 그 곳에서 처음으로 고려한 용어의 종류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르피리우스의 계통수는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사람의 동물에 대한 관계나 동물의 생물에 대한 관계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짝수의 수에 대한 관계나 도형에 대한 원의 관계, 또는 탁월함에 대한 올바름의 관계에는 충분치 못하다. 왜냐하면 수의 현존이 짝수의 현존을 수반한다고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고, 도형의 현존이 원형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도 타당하며, 탁월함의 현존이 하나의 탁월함으로서 올바름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도 타당하기 때문이다. 일반화적 공허의 원칙은, 만일 그것이 어떤 것에든 어울리고, 말이나 개와 같은 자연적인 종류들에 어울린다.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원칙을 지지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그 원칙은 수학적 용어들, 또는 도덕적 용어들에 어울리지 않고, 그러므로 그것은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에 어울리지 않는다. 정의에 대한 관념에 대해 전형적인 그 원칙을 상정하는 것은 개념들의 실제 구조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들에 대한 그러한 관점이 그렇게나 오래, 또 그렇게나 널리 받아들여졌어야 하다는 것은 인간 정신에 대한 잘못된 추상의 능력을 위한 서글픈 증거이다.

3) 대신에 유들이 충족되거나 결핍되는 만큼 정의에 있어서 종차의 역할은 변화할 것이다. 만일 후자라면, 종차는 종에 대한 궁극적 한정이 될 것이다: '마지막 차이는 사물과 그 정의에 대한 실체일 것이다.' 종은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를 포함할 것이고, 그것들이 바로 그것인 어떠한 것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 정의상으로 그 부분들과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들이 그 유들의 종들을 부분들로서 포함하는 전체들로 간주된다면, 종차는 종차는 상이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전체는 그 자체 그것의 부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전체에 덧붙혀져 부분을 이룰 어떠한 한정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으로 놓고 보자면, 종차는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 한 종이 동일한 유 속에서 다른 종들과 구별될 그러한 특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특징은 그 종차의 구성요소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구별의 귀결일 것이다; 그것은 인식근거(ratio cognoscendi)일 것이고, 존재근거(ratio dssendi)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둘로 나뉠 수 있음은 홀수와 짝수 사이의 본질적 차이이다; 그렇지만 그 차이는 홀수와 짝수 사이의 구별을 구성하지는 않고, 오히려 그러한 구별의 필연적 귀결이다.


한정가능성과 단순성

1) 어느 초기 대화편에도 탁월함에 대한 만족스러운 정의는 아무것도 없다. 이로부터 종종 암시되어 온 것은 실재적 정의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건 말할 것도 없고, 그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꼴들은 정의될 수 없다.

2) 만족스러운 정의들이 결론에 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그 정의들이 달성될 수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만일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꼴들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면, 어째서 그들이 꼴들이 있다고 전제되는 변증적 탐구 방법을 지지해야 했는지 그 이유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꼴들이 정의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원칙적으로 대답될 수 없다. 즉,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물음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째서 그것이 물어져야 했는가? 어째서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14c에서 그것이 답해질 수 있다고 암시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그는 그 물음이 대답되기 전까지는 예를 들어 ποῖόν τι에 속하는 물음들과 같은 다른 여러 물음들에 대한 대답들이 알려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야 하는가? - '탁월함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앞선다는 것이다. 초기 대화편의 몇 안 되는 주장들은 꼴들이 정의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서 아주 좋지 못하게 놓인다.

3) 그러나 만일 꼴들이 정의될 수 있다면, 꼴들의 정의가능성을 그것들의 단순성과 조화시키는 일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4) 아리스토텔레스를 괴롭혔던 정의의 통일성에 대한 문제를 고려해 보자. S라는 종이 있다. 그 종은 G라는 유와 D라는 종차로 정의될 것이다. 즉, S는 G와 D이고, '~는~이다'는 한정적 동일성에 속하는 '~는 ~이다'인데, GD는 S인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을 낳는다: 정의될 것에서는 언급된 하나가 있고, 정의함에 있어서는 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가 둘과 동일할 수 있는가? 어떻게 S는 B와 D일 수 있는가?

5) 만일 정의를 고려함에 있어서 단지 명사적일 따름이라면, 이 문제는 흥미로울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는 ~이다'는 동의어에 대한 '~는 ~이다'일 것이고, 한 복잡한 표현이 그 표현에 대해 상대적으로, 언어적으로 더 단순한 또 다른 표현과 동의적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려 중인 정의는 명사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고, 그 정의가 산출한 역설도 또한 실재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그 역설을 존재하는 것은 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서 이중적이라는 그의 원칙으로써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종과 유 그리고 종차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다; 그렇지만 유는 그 자체로 오로지 한 종류의 질료나 가능성, 그에 대해 종차가 상대적으로 현실성으로서 그리고 꼴로서 마주서는 그러한 것이다.

6) 이런 해법의 이점이 뭐든지 간에, 그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는 부적절하다. 하나의 것인 꼴은 그것과 구별되는 다른 어떤 꼴과도 또는 일련의 꼴들과도 동일시될 수 없고, 그러므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도한 그런 종류의 동일성으로 표현할 수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한 탁월함에 대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일이 그 탁월함의 내적 존재가 복잡하고, 탁월함의 유를 포함하며, 그리고 그 복잡성 안에서 요소들로서 차이를 포함한다는 것을 수반한다고 일관성 있게 생각할 수 없었다. 정의에 대한 관계물, 종들은 단순한 단일체들이고,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것처럼은 일어나지 않는다.

7)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지는 물어볼 만한 일일 것이다. 만일 종들이 단순한 단일체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것들은 정의될 수 있는가? 이러한 어려움은, 비록 널리 논의되어 왔다 할지라도, 현실보다 더욱 분명하다. 단순성과 복잡성은 상대적 용어들이다. 그 어떤 것도 완전히 단순하거나 완전하게 복잡하지는 않다; 그것은 주어진 국면들에서 단순하거나 복잡하고, 다른 측면들에서는 다른 식일 것이다. 만일 탁월함이 경건을 부분으로 하는 하나의 전체라면, 그리고 경건이 경건에 마주서는 탁월함으로서 그 어떠한 더 하위의 꼴에도 마주서지 않는다면, 부분들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탁월함은 복잡하고 경건은 단순하다. 그러나 만일 종들의 꼴들이 이러한 측면에서 단순하다면, 그 꼴들이 모든 측면에서 단순하다는 것은 따라나오기 어렵다; 꼴들의 단순성을 확립시키는 바로 그 논증은 그 꼴들이 다른 꼴들과 부분과 전체, 종차, 수반, 양립가능성의 관계 속에 정립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꼴들은 창 없는 단자들이 아니고, 그것들에 대해 설명이 제시될 수 있다. 그 꼴들은 그것들을 포함하는 더 넓은 꼴들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정의할 수 있다. 유들인 그러한 더 넓은 꼴들은 부분들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복잡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유들이 이러한 측면에서 복잡하다는 사실로부터 그것들이 모든 측면에 있어서 복잡하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유들이, 더 상위의 유들에 의한 그것들의 포함이라는 측면에서, 전체들이 그것들의 부분들의 합산보다 더 큰 그러한 전체들로서, 단순하다는 것일 터이다.


꼴들의 영역의 구조

1) 만일 종의 유에 대한 관계가 꼴들의 구조에 기초된다면, 그 구조는 반드시 계층적이어야만 한다.

2) 이것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 관점은 반대에 부딪쳤다. 예를 들어 체르니스 교수는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체에 대한 구성부분으로서 또는 종에 대한 유로서 어떠한 이데아도 없다. …플라톤은 어디에서도 이데아들 사이에 유와 종의 구별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라고 부른 것, 종차라고 부른 것, 그리고 종이라고 부른 것은 그에게 모든 별개의 관념적 단일체들이다, 각기 다른 것들의 현존을 수반하거나 다른 것들과 양립 가능한 측면들을 지닌 다른 것들 보다는 가기 다른 것들, 그러나 남김없이 다른 것들로 분석될 수는 없는 독립적 본성인. 플라톤은 그래서 분절을 사용하여 이데아들의 세계에서의 존재론적 계층을 산출할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소피스트』와 『정치가』, 분절에 대한 안내서로 여겨지게 된 그 두 저술들은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오히려 발견적 학습법을 의미했고, 한정된 이데아를 탐색함이 용이하도록 하는 수단을, 다른 이데아들로부터 그 이데아를 구별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의 함축들과 동일성을 의미했다는 것과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이데아, 이데아의 기원, 혹은 그것의 구성 요소들의 '구조'를 묘사하는 것으로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체르니스 교수는 일부 꼴들이 어떠한 부분들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서 단순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단순하다는 것을, 그리고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다는 것을 또한 주장한다. 그의 의견들은 후기 대화편들을 겨냥하고 있고, 명확하게 『소피스트』에서와 같은 종류의 집단에 속하는 원칙을 겨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초기 대화편들의 해석으로서도 잘 맞는다.

2) 이러한 관점에 반대되는 그 저술들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유나 혹은 그에 대해 꼴이 검토 아래에서 일부인 그러한 전체를 명시할 것임을, 또는 그 꼴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임을 진술하거나 시사하는 모든 저술들이다. 그러한 저술들은 : 『에우튀프론』 11e-12a, 『프로타고라스』 329c와 그 이후, 『메논』 74-6, 『라케스』 190c-d, 199e이다. 이러한 구절들 모두 유 아래에 종을 포함하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그래서 꼴들의 계층적 배열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지 않고 단층화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3)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저술들, 그리고 후기 대화편들의 다른 저술들이 그 저술들의 의도가 발견적이라는 점을 제쳐두고 세워진다고 제안한다: 그 저술들은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으로 전제를 반성한다. 그러나 탐구의 방법은 그 탐구의 핵심-문제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거나 적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꼴들이 상호에 대해 종과 유처럼 자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발견의 의도에 유용하다면, 어째서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의 가능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 확실한 대답은 그 전제가 꼴들의 실재적 구조에 답한다는 것이다.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대답에 반대하면서, 그 대신에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부는 방법론과 설명을 요하는 반대 사이의 동일척도불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실상 아무런 유들도 그리고 어떠한 계층도 없을 때, 어떻게 꼴들이 유들 아래에서 포함가능한 것들이고 발견적 기능을 제공하도록 계층적으로 배열된다는 전제가 가능한가?

4) 더 큰 어려움도 있다. 초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은 ποῖόν τι의 물음보다 τί의 물음이 우선한다거나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체르니스 교수가 제안하듯 오로지 꼴들 사이에서의 관계들만이 차이, 포함, 양립의 관계들이라면, 이러한 구별은 도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래서 만일 꼴 F가 그것의 함축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하지 않다면, 'F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F는 오로지 함축들과 양립들의 관계들에 의해서만 특징지어질 수 있고, 그러한 관계들 중 특정한 것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본질적인 것임을 뒷받침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οὐσία를 πάθος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F가 그것의 포함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시된다면, 후자는 그것이 F일 그러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 중의 어떠한 것들이든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보다 결핍하고 있거나 다른 것이라면, F는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이 아닐 것이고,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과는 다른 것일 것이다. 즉, 동일성은 '내적 관계들'로 이끈다. 그리고 양립가능성과 함축이 모든 각각의 꼴을 다른 모든 각각의 꼴들에 관련시키기 때문에, F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각각의 꼴과 관련될 것이다: 진리는 전체일 것이다. 스페우시푸스는 나중에 이러한 단계에 매우 근접하게 나아갔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플라톤은, 최소한 초기 대화편들에서는, 그렇지지 않은데, 왜냐하면 πάθος와 οὐσία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을 그 단계는 부정하기 때문이다.

5)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소크라테스가 물었고 또 그것이 대답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던 것처럼 물어지고 또 대답될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ποῖόν τι의 물음들로부터 구별이 유지될 것이라면, 꼴들 사이에서 포함들과 양립가능성 그리고 그것들의 부정들의 관계들 보다 더 나아간 어떤 관련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한 관련의 본성은 『메논』에서 올바름은 탁월함 자체가 아니지만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주장에 의해, 『라케스』에서 용기는 전체로서의 탁월함에 속하는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올바름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제시된다. 그 관련은 종과 유 사이의 관련이다: 한 부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 부분의 위치를 그것을 한 부분으로 하는 전체 속에서 정립해야만 한다.


탁월함의 단일성

1) 탁월함들이 유 속에 그것들을 정립시킴으로써 한정가능하다는 관점은 또 다른 초기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와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이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명제는 플라톤의 생애 마지막에 그의 생각을 차지한 것이었고, 그것은 종종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프로타고라스』의 교훈은 모든 탁월함들은 그것들이 앎이나 지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은 탁월함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정의로 고수되어 왔다. 솔직히, 그것은, 종과 유의 비동일성을 시사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가 아니다.

2) 『프로타고라스』에서 앎의 우선성은 단호하게 내세워진다(352b-c):

대부분의 사람들은 앎이 명령의 힘도 권위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앎을 가질지는 모르지만 그 앎은 제압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분노에 의해, 그리고 기쁨과 고통에 의해, 가끔은 사랑에 의해, 그리고 자주 두려움에 의해서 - 비록 앎이 어떤 가난한 노예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격정들에 의해 제멋대로 끌려다닐 것과 같이 말이다. 그것이 당신의 관점 아닌가, 프로타고라스? 아니면 당신은 오히려 앎이 아름다움과 능력, 그리고 그 무엇도 꺾을 수 없는 것에 속하는 어떤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텐가; 나쁨으로부터 좋음을 구별해 내기만 하면, 지상의 그 무엇도 그러한 앎을 가진 자를 그 앎 - 그의 조력자로 충분한 지혜 - 과 반대로 행동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겠는가?

이 구절은 의심할 나위 없이 소크라테스 그 자신의 믿음을 대변한다: 탁월함은 앎이다. 그 누구도 제 뜻으로 또는 알면서도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3) 만일 앎이 탁월함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탁월함이 앎을 수반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탁월함과 앎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점이 따르지는 않는다. 동치는 동일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치는 더 넓은 논증의 부분으로 나타난다. 그 논증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한 것에 대한 모든 이름들이라는, '용기',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탁월함'은 동의어들이라는(349b-c) 점을 받아들이도록 이끌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앎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4) 하지만 아직 이러한 방식에는 어려움들이 있다. 우선, 그 설명이 탁월함과 앎을 동일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능력의 동일성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이다. 만일 그 탁월함들의 명칭들이 동의어들이라면, 그 탁월함들이 지혜로 화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어떤지, 지혜를 포함한 그 탁월함들이 경건이나 올바름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임의적이다. 물론, 탁월함은 앎이나 지혜이다; 그러나 그래서, 탁월함은 용기나 경건, 또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동의어에 대해 대칭적인 관계이다.

5) 그 동일화 방식에는 두번째 어려움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들이 구별된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네 가지 논증들을 내놓는다. 첫번째(330b-331b)는 올바름과 경건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두번째(332a-333b)는 사려와 지혜의 단일성을; 세번째(333d-334a)는 그 결론에 도달하지 않고 중단되는데, 어쨌든 올바름과 사려의 단일성을 주장할 것이었다. 거기에서 남은 대화편을 통해 중단 없이 추적되는 그 물음이 다시 말해진 다음(439b-d) 긴 중간극이 따른다. 마지막 논증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용기와 지혜의 단일성을 증명할 것을 자임한다(349d-360e). 만일 탁월함들의 단일성이 탁월함들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해진다면, 이러한 논증들 각각은 논리적 오류이고, 그것들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그리고 창피스럽도록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그 문답의 고비를 넘긴다. 프로타고라스는 지적인 사람으로서 도처에서 묘사되고, 말들을 다루는 방식들에 있어서 지혜롭지만,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을 다룰 줄 모른다. 그의 실패는 물론 말의 단련에 있어서 기술 부족 탓이 아니다; 그것은 소피스트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비록 그가 탁월함을 가르치리라 주장할지라도, 탁월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그 사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은, 만일 그 논증들이 공허한 오류들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결론을 가리키는 쪽으로 그 논증들이 행한다고 의미되는 것으로서 이바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6)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타고라스』도 실패로 끝나고, 그것은 익숙한 이유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는 먼저 탁월함이 무엇인지 결정함이 없이는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점은 추론할 것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답의 변증에 대한 명쾌한 요약정리를 되보여준다 (360e-361c):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탁월함에 관련한 것들을 가지고 바로 그것인지, 탁월함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 밝혀내려는 바람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묻는다. 왜냐하면 나는 만일 그것이 한 번만 보여진다면 당신과 내가 논의한 물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가 말끔하게 정리되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논증의 결과는 그것이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혀를 가졌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 둘 다 뭐 이런 바보들이 있나,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분명히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없다고 말한 소크라테스 당신은 지금 바로 그 반대의 것을 설득하려 들고 있다, 모든 것 - 올바름도 사려도 그리고 용기도 - 은 앎임을 보여주려고 애쓰면서, 그걸 보여줌으로써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 는 것이 따라나오는 것을 말이다. 만일 그것이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하려 애쓰는 것처럼 앎과 다른 것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만일 그것이 당신 주장처럼 전적으로 앎일 것이라 증명하는 것이 된다면, 소크라테스, 만일 그것이 가르쳐질 수 없다면 더욱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서 프로타고라스가 조금 전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고 전제했는데 지금은, 다름 아닌 앎을 피함으로써, 그것이 무엇보다도 최소한 가르쳐질 수만은 없을 것이도록 그렇게, 그 반대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 프로타고라스, 내가 주장된 이 모든 것을 앞뒤로 볼 때, 나의 바람은 그것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것이오: 나는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향해 진격해야 할 것 같고 또 공격해야 할 것 같소. 그리고 나서 다시 되돌아와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물어야 할 듯 싶소.

『프로타고라스』의 결론에서,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모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들을 뒤집어 버렸다. 이러한 뒤얽힘은 변증적 반어법의 단편이다. 그 목적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의 필연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7) 『프로타고라스』는 『메논』에서 그 짝이 되는 조각을 가진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그는 전제를 가지고 그 문제를 정착시킬 것을 최종적으로 떠맡는다. 그는 만일 탁월함이 앎이라면 그것은 가르쳐질 수 있다(87a-c)고 가정한고; 그것이 앎이라고 주장한다(87c-89a); 그리고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선생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89c-96c); 그리고 그것이 '다이몬적인 분배에 의해, 이해 없이' 사람들 속에 현존한다고 결론내린다(100a). 즉, 소크라테스는 함축을 전제하고, 그 함축의 선행하는 것을 긍정하고, 그것의 결론을 부정하며, 회의주의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구조는 플라톤이 그의 독자들을 그의 전제들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할 작정이었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나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먼저 밝혀내지 않고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아포리아(당황)로 끝을 맺었고, 심지어 기하학자들로부터 빌려온 새로운 가정의 방법조차 그들을 구해내지 못한다(86e-87a). 그러나 또, 기하학자들은 그들의 용어들을 정의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할 수 없다. 이것은, 그래서, 그들의 실패의 교훈이다. 정의는 필수적이라는,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중인 그 어떤 것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익숙한 소크라테스적 교훈이다. 그래서 『메논』은 또한 변증적 역설의 한 조각이다: 그 극적인 구조는 정의가 필수적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과 같은 그런 도덕적 결론들을 권고하는 것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그러한 결론들만이 달성될 수 있는 그러한 조건을 지시하는 데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다.

8) 만일 이것이 『프로타고라스』와 『메논』에 대한 옳은 설명이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전하고자 하는 바가 탁월함과 앎의 단일성이라는 관점에 반대하여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그 둘 중 어떤 대화편도 이러한 문제에 헌신하지 않고, 두 대화편 모두 그 대화편들의 변증적 중심점으로서,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의 필수불가결함 - 즉 그것을 정의하는 일의 필연성 - 을 강조하며 결론에서는 그 물음이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9)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관한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이, 그 방식에서 탁월함이 하나일 그러한 대안적 방식들을 예상한다는 것은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에 동의하도록 이끌린다 (329c-330b): 탁월함은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용기라는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구별되고, 같은 것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 아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오로지 크기에서만 차이가 나는 황금의 일부 같은 부분들이 아니고, 두 눈과 두 귀 처럼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부분들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가 아니라(οὔτε αὐτὸ οὔτε ἡ δύναμις αὐτοῦ, 330b) 서로 그러한 종류의 것(οἷον)에 속하는 것들이다; 탁월함의 그 부분들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용기 있으나 올바르지 못하거나 올바르되 지혜롭지 못할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사람은 탁월함 전부를 가지지 못하고서도 탁월함들의 일부를 가질 것이라는 점에서, 분리될 수도 있다.

10) 다음으로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하는 하나의 전체임을 긍정함에 있어서, 복합된 반박을 내놓고 있다: 그는 탁월함의 상이한 부분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동일한 것들임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 부분들이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도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탁월함들이 하나일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

11) 탁월함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들이 상이한 정의들을 가진다고 마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탁월함이 기능에 있어서 다르거나 같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탁월함의 기능은 무엇인가?

12) 그런 물음은 『프로타고라스』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대답되지 않는다. 탁월함의 기능은 탁월함 그 자체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얼굴에 대한 예시를 무관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두 눈과 두 귀는 그것들의 기능들인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차이가 난다. 다시, 두 가지 덕들은 그것들이 동일하다거나(ταὐτόν) 아주 유사하다(ὁμοιότατον)는 것조차 긍정할 것도 없이 서로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οἷον)에 속한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단어의 '기능'이 그 단어의 의미 또는 능력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올바름이 '올바름'의 의미라 할지라도, 올바름의 기능은, '올바름'의 기능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은 아니다.

13) 만일 탁월함의 기능에 대한 관념이 이해될 것이라면, 우리는 그 표현이 그 안에서 사용되는 그러한 논증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기능으로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부정(330b)하는 근거, 그리고 나중에 그 탁월함들이 서로 간에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라는 것을 부정(330e-331c)하는 근거는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다(329e; 349d참조). 그리고 이것은 탁월함들이 서로 만나도록 한다는 것, 경건의 현존이 올바름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 또는 용기의 현존이 지혜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추론은 명확해 보인다: 탁월함의 기능은 그 기능을 도입하는 어떤 것 속에 놓인다; 만일 탁월함들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면, 그것들은 분리가능하다;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

14) 이것은 그 논증의 양식에 걸맞는다.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모두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명제는 만일 그 명제가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나 또는 그것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면 틀린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만일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라면, 그것들은 기능에 있어서도 하나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기능에 있어서 하나라면 정의에 있어서도 하나라는 것이 뒤따를 방법은 없다. 사람이 올바름 없이 경건할 수 없다거나 경건함 없이 올바를 수 없다고, 또는 경건과 올바름이 서로를 도입한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름의 정의와 경건의 정의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탁월함들은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구별가능하다; 만일 탁월함들이 구별가능하다면, 그것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만일 탁월함의 부분들이 황금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면, 그 자체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모두 상이한,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라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즉, 탁월함의 특수한 경우에, 황금과 얼굴에 대한 그 예시들은 부적당하다는 것일 수 있고, 황금도 얼굴도 밝혀내지 못하는 정의에 있어서 차이와 기능에 있어서의 동일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일 수 있다.

15) 그 논증에 대해서는 이 만큼이면 됐다. 그러나 그 변증적 상황은 여전히 더욱 복잡하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고 추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올바름 없이 단지 지혜롭거나 용감할 수 있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탁월함들이 그 자체에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다르다는 그 주장을 반박할 것이고, 탁월함들이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탁월함들이 어떤 면에서 하나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것들이 서로 도입하고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라는 것인지 말이다.

16) 『프로타고라스』는 이 물음에 대해 세심하게 고안된 모호함을 유지한다. 그것은 대안들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니고, 프로타고라스 그 자신은 그 논증에 대한 그 대안들의 관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놀랄 것도 없다. 탁월함들이 정의에서 하나인지 기능에서 하나인지 혹은 양자에 있어서 하나인지 묻는 것은 탁월함이 무엇인지를 암시함으로써 묻는 것이다. 그 물음은 오로지 대화의 중국에서야 명확하게 된다(361b-c).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고려하는 중에 내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시사한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그가 탁월함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했고(318a-319a), 그리고 탁월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자로서, 소크라테스적 엘렝코스(논박술)가 바로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계획된 그러한 그 자신의 무지에 대한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탁월함의 본성으로 파고드는 탐구에 유익하게 착수할 수 없었다.

17) 요약하면: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하나일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예상한다 - 말하자면, 정의에 있어서의 동일성이나 같음, 그리고 기능에 있어서의 상호 함축 또는 같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 주제에 대한 다른 대화편들의 논증 양식에 부합한다. 그에 대해 『메논』은 탁월한 예시를 제공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단언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모든 것들은 영혼에 의존하지만, 영혼에 속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좋음을 지혜에 의존한다고; 이러한 설명으로, 유익한 것은 지혜이고, 우리는 탁월함이 유익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함이 지혜이고, 전체로서나 부분에 있어서나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지혜와 탁월함이 동일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상 탁월함들이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오히려 지혜가 탁월함에 대해 필연적인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한 것이며, 조건이며, 다른 탁월함들을 수반하고 또 그것들에 의해 수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 이후 『정체』에서 플라톤은 영혼에 대한 분석에 기초된 탁월함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그 설명은 탁월함들의 단일성을 상호 함축을 통해 긍정한다. 영혼은 그 부분들 각각이 적합한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올바를 수 있다; 절제는, 각 부분이 지배해야 하고 따를 것에 동의할 때; 지혜는 이성적 부분이 그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고 지배할 때, 용기는, 기백의 부분이 그 지배자의 명령에 있어서 훈련될 때 생긴다(『정체』Ⅳ, 442b-d). 그 탁월함들은 여기에서 명백하게 정의상으로 다르다; 그만큼 명백하게, 탁월함들은 기능에 있어서 하나이다 - 그것들은 서로를 도입하고, 서로로부터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용기는 지혜를 수반하고 그것에 의해 수반된다; 지혜는 올바름을 수반하고 또 그에 의해 수반된다; 올바름은 절제를 수반하고 그에 의해 수반된다. 소크라테스가 결론에 있어서 '우리가 지금 논증에 있어서 이 높이에 올랐으니, 내가 보기에, 산 정상으로부터 보는 것처럼, 탁월함의 단일한 꼴 하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언급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원칙은 그래서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라는 주장과, 그리고 탁월함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통해 정의될 수 있다는 주장과도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분들과 부분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동시함축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로고스와 우시아

1) 만일 앞서 말한 설명이 건전하다면,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그런 종류의 논증은 고려함에 있어서 실재적이고 명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지 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2) 그 대상이 적어도 그것이 유와의 관계에서 존립하는 종일 때에는 단순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될 것과 정의함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것을 고수하였던 그러한 관련은 획득하지 않는다: 그 종은 결합된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와 함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같음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같음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튀프론』10d, 13에서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은 경건에 대한 정의로서는 거부되는데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르기 때문이고(ἕτερον; 10e, 9에서 ταὐτόν이라는실에 견주어 반대로), 이러한 거부는 15c, 2에서 반복된다(οὐ ταὐτόν … ἀλλ᾿ ἕτερα ἀλλήλων).

3)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같음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연의 동일성, 또는 진리치 보존(salve veritate) 대체성이 아닌데, 설령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그러한 것들 모두가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것들만이 경건하거나 경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순히 πάθος를 진술할 뿐 οὐσία를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념적 동일성인 것도 아니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생각함에 있어서,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의 정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의어의 같음도 아니다.

4) 정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의에 있어서 필요한 같음은 이를테면 서술적 동일성, 말하자면 샛별과 태백성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하거나, 또는 - 그 예시에서 필요한 경험적 우연성을 피하기 위해 -  일곱번째 정수와 네번째 소수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동일성은 두 가지 한정적 서술들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실재적 정의에 있어서 정의될 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대상 그 자체이다. 그 비유는 만일 서술적 구절이 명사에 의해 대체된다면 더욱 근접하다: '금성은 샛별이다' 또는 '7은 네번째 소수이다'; 무엇보다도 유일한 서술로 정의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도 오독이다. 지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함이다; 그러나 '…는 탁월하다'라는 말이 소크라테스를 서술하는과 같은 의미에서 '…은(는) 탁월함이다'라는 말이 지혜를 서술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첫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이고, 두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한 특성에 대한 한 특성의 예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정적 서술에 있어서 필요한 후자의 관계이다.

5) 아마도 정의에서 필요한 종류의 동일성은 그것 자체의 유(sui generis)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포함하는 유와 그것을 그 유 속에서 다른 종들로부터 지적해 내는 종차를 진술함으로써 그 종인 어떤 것을 말할 때 필요한 그런 동일성이다. 종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종차는 종들에 대한 구별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그 구별의 결과이다; 정의에 있어서 종차는 사유근거이고, 존재근거가 아니며, 그러므로 정의에서 필요한 동일성은 대상들의 동일성이 아니다.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위한 최선의 - 그리고 ὁρίζειν과 ὅρος의 대다수 함축에 부합하는 하나의 -  비유는 사상(寫像)의 비유이다: 정의한다는 것은 한 종의 위치를 그 종을 포함한 유 속에서 정하는 것이다. 만일 종이 농장이라면, 유를 규정함의 목표는 그 농장이 위치하는 마을을 지시하는 것일 터이다; 차이를 규정함의 목표는 농장의 경계들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조사된 경계선들의 현존을 밝혀내는 것일 것이다. 정의에서 필요한 같음은 말하자면, 유일한 위치의 같음이다: 정의될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 안에서 사상된 그 위치를 점유한다.

6) 이러한 방식에서 생각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는 형이상학에서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꼴들이, 서로에 대해 포함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포함되는 것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존립하면서, 계층적으로 정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내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거나, 상호 구성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난다: 종들은 그것들이 만일 그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의해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리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특성을 그것들의 유들에 의존한다; 올바름은, 만일 그것이 탁월함이 아니었다면, 올바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탁월함은, 그것의 한 종이 올바름이 아니었더라면, 탁월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는 그것의 현존과 특징을 그것의 종에 의존한다. 전체는 그것의 부분들에 의존하여 전체인 그것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 점에 대해 조금 덜 명확하지만, 아마도 유들에 대한 정의는, 종들에 대한 정의와 달리, 구성 요소들로의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7) 이것은 플라톤적 유들에 대한 함축의 풍부함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있어서, 유들은 종들로부터의 추상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사람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사람과 말은 동물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그 유는 여기에서 단지 다양성에 대한 공통된 요소일 따름이고, 그것의 종들보다 더 '추상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정의가 사상에 대해 동종적이라면, 만일 유들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들이라면, 유는 공통된 특징이 아니라, 마치 그것의 현존이 그것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의 현존에 의해 전제하기도 하고 전제되기도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래서 유는, 함축의 상대적으로 결여되었음보다는 오히려 함축을 잔뜩 실은 것으로서, 결핍되었다기 보다는 풍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8) 하나의 체계로서, 유는 한 종류의 폐쇄를 지니고 있어야만 하고,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류의 제한들로부터 갈라놓는 단일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의 구별은 한 사물에 본질적인 것과 그 사물이 단지 가지게 되었을 뿐인 특징 사이의 구별을 수반한다. 올바름 또는 탁월함에 대한 경건의 관계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에 대한 경건의 관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 정의에 있어서 내적 성질을 시사한다면, 그러므로 그것은 꼴에 대한 모든 설명들이 본질을 진술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그 관계의 내적 성질만큼이나 외적 성질도 시사한다.

9) 유들은 체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종들은 그 유들의 요소들이기 때문에, 종들에 대한 정의들은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일상적 진술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들이다. 그러한 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또는 사용하기 위해서, 일반적 언어에도 개별적 사물들과 행위들에도 호소할 수 없다: 꼴들에 대한 지식은 지적 직관을,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는 직접적 통찰을 요청할 것이다. 실재적 정의의 진리는 오직 그에 대한 정의가 설명인 그러한 진리를 파악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10) 만일 이러하다면, 정의와 직관은 상보적일 것이다. 지적 직관은 실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만 '알고 있음에 의한 앎'에 속하는 난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설명도 제공함이 없이 푸른 하늘의 한 조각을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감각은 지적으로 노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꼴들에 대한 직관은 반대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증은 단순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 이전에 불충분한 설명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어떤 것을 충분한 설명 속에서 명확하게 보려고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시야는 진술들에 대한 검토에 의해 확보된다. 미리 앎에 의한 앎에 대한 지적 직관의 비교는 지적 직관의 대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11) 일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이 지점에서 압박을, 직관과 논리 사이의 긴장을 발견할 것을 주장해 왔다. R. G. 콜링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지만 상당히 높게 플라톤의 철학적 성취들은 평가받고, 최고에 못 미치는 어떤 가치에 있어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그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이 그 자신에 의해 철학과 수학 사이에서 확립되는 충분히 깊은 구별로 이끄는 것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결함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하는, 철학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방법론이 철학을 둘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하나는 재기 발랄한 억지 이론의 식상한 낭비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관적 시야이다. 이러한 첫번째 것이 두번째 것으로의 경로라는 것은 여러 세대들에 속하는 경험에 의해 플라톤이 그들의 길잡이로 취해졌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실들에 권위에서 받아들여질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 조명 속에서 사살들이 이해될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탐구 속에서, 철학적 탐구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플라톤이 우리에게 주진 않았다.

이러한 비판은 감각 지각의 틀을 관통하는 지적 직관을 강요함으로부터, 지적인 것으로서, 그 직관이 판단을 통해 지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함으로부터 귀결한다.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한 행위는 하나의 진술이 아니라, 진술 속에서 표현 가능한 하나의 내용을 필요로하고, 그로써 비평에 적합하다. 한 진술은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통해 통찰이 표현되는 그러한 것이다 - 그 자신에 대해서조차. 안다는 것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12)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초기 대화편들을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