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에우튀프론은 종을 죽인 품팔이를 묶어 방치해 죽게 한 아버지에게 소송을 걸었다. 소크라테스는 오래된 신들을 믿지 않고 낯선 신들을 만들어내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멜레토스에 의해 고소를 당했다. 두 죄목이 모두 바실레우스의 종교적 문제에 대한 재판에 관련된다. 따라서 피고인 에우튀프론 아버지와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피소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불경에 대해서 고소를 한 자는 경건과 불경건을 잘 알기도 할 것이니 고소를 당한 처지인 자신을 그가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1 논의. 에우튀프론은 올바르지 못하게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에게 소송을 거는 지금 자신의 행위가 경건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거세한 일과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처단한 일을 든다. 또한 제우스를 모든 이들이 가장 옳고 훌륭한 신으로 모시기 때문에 그의 일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은 경건하다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하나의 일이 경건하다는 것 말고 이러저러한 경건한 일들을 경건한 것이도록 만드는 경건함, 하나의 특징으로서의 경건함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제2 논의. 에우튀프론은 이에 대해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경건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불경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앞서 크로노스와 우라노스의 싸움, 제우스와 크로노스의 싸움뿐만 아니라 신화 속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신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싸운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이 의견을 달리하고 싸우는 까닭은 수의 많고 적음이나 어떤 것의 크기나 무게와 달리 '옳고 그름, 미추, 좋고 나쁨'은 하나의 것을 두고도 서로 달리 말하면서 조율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를 근거로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행위를 신들 중에 누군가는 사랑하고 또 다른 어떤 신은 미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에우튀프론이 부모에게 소송을 건 것은 제우스는 좋아할 일이지만 크로노스와 우라노스가 싫어하고, 헤파이스토스는 좋아하지만 헤라는 싫어할 일이기에 경건하면서도 경건하지 않기도 하다고 반박한다.
제2 논의 후퇴1. 소크라테스는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경건'이라는 정의를 논박하였으나 에우튀프론은 다시금 '자신이 한 행위는 부정의한 살인을 고발한 것이고 이 행위는 다들 동의할 것이다'라고 구체적인 행위를 옹호한다.
 소크라테스는 다시금 '부정의한 살인'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만약에 그것이 애초부터 부정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물론 고소되고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살인은 에우튀프론에게는 부정의하지만 친족들에게는 부정의한 것은 아닌 것으로, 그리고 소크라테스에게는 그러한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앞서의 결론으로 되돌아온다. 하나의 행위를 두고 이 신들은 옳다 하고 저 신들은 그르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경건'이라는 말은 경건한 것이 동시에 불경건한 것이 되기도 하므로 적절한 정의일 수 없다.
제2 논의 후퇴2. 신들의 의견(혹은 개인 각자의 의견)으로는 어떤 한 행위가 경건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의 행위가 옳다는 '증거'를 요구한다. 여전히 이 증거는 앞서 소크라테스가 요구한 정의내림의 조건 속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에우튀프론은 다시금 '그건 아마도 작은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요구대로라면 그것은 선명하고 작고 정확한 일이다. 결국 에우튀프론은 더 많은 사례들을 들어 보이려고 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제3 논의.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이 '자신의 행위가 경건하다'는 점에 집착하는 것을 의식하고 논의를 전환시킨다. 모든 신이 '그 행위'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경건한 것이다'라는 정의가 옳은지 어쩐지에 대한 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논의를 정의의 문제로 끌어오기 위해 에우튀프론의 논의를 빌려 '(만일 당신의 행위가 모든 신들이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것이라면) 모든 신들이 사랑(동의)하는 것은 경건하고 모든 신들이 미워(반대)하는 것은 불경하다'라는 정의로 수정하겠는지 묻는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다시 이 정의를 반박한다.
           (1)무엇으로 되거나 무엇을 겪는 것은 그 '무엇이 됨'이나 '겪음'을 통해 그러한 것이 된다.
           (2)신들이 사랑하는 것도 신들에 의해 사랑을 받음으로써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3)경건한 것은 것이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만일 (4)경건한 것과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면,
           (2-1)신들이 사랑하는 것은 신들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에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한편 (3-1)신들이 사랑하는 것은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그런데  (2-1)과 (3-1)이 서로 어긋나고 또한 (3-1)은 (2)에도 모순되므로 경건한 것과 신들이 사랑하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르다.

제4 논의-1.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것이 이러저러한 것을 겪는다는 정의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논의를 전환시킨다. 그는 경건함과 올바름을 견준다.
이 경우 (1) 모든 경건한 것은 올바르고 모든 올바른 것도 경건하다, 이거나
           (2) 모든 경건한 것은 올바르지만 모든 올바른 것이 경건하지는 않다, 이다.
           (경건>올바름, 경건≠올바름, 이 두 경우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에우튀프론은 (2)를 선택하고 덧붙여서 신을 섬기는 올바름이 경건이며 나머지는 인간을 보살피는 올바름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다시 '섬김', '보살핌'이 무엇인지 묻는다. '섬김(보살핌)'은 그 대상의 이득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인간이 신을 보살펴 신이 얻을 '이득'은 없다.
제4 논의-2/제 2논의로의 후퇴1. 이제 에우튀프론은 '섬김(보살핌)'을 '노예가 주인에게 행하는 종류의 섬김'으로 수정한다.
 소크라테스는 주인이 목표하는 바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이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봉사인지 되묻는다. 에우튀프론이 동의하자 그는 조선공, 의사 등의 예를 든다. 그리고 다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신들이 이루어내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에우튀프론은 '좋고도 많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이란 언급을 통해 이것이 제2논의 후퇴2에서와 같은 종류의 답변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신들의 '목적'이 되는 것을 '신들이 만족스러워 하는 것'으로 대치하여 스스로 이전의 논의로 확실하게 후퇴해 버린다.
제4 논의-3/제 2논의로의 후퇴2. 소크라테스는 논의가 후퇴하였음을 간파하고 한탄하지만 '신들한테 제물을 바치고 기원을 하는데 대한 일종의 앎'이라는 에우튀프론의 정의에 대해 더 고찰하고자 한다. 이는 주고 받음이며 나아가 상대가 바라는 것을 주고 원하는 것을 청하여 받는 거래이다. 그러나 제4논의-1에서 언급되었듯 신들이 인간들을 통해 얻을 이득은 없고 '만족'을 얻을 뿐이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것'이 '사랑받는 것'과 다르냐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에우튀프론은 그 둘이 같다고 답한다. 이로써 논의는 아포리아에 빠진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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