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사 용법과 진리사 용법에 대한 분석은 더욱 어려워질 것인데, 현존과 진리라는 개념들이 우선적으로 문장 구조가 아니라 그 동사의 의미, 혹은 전체 문장의 의미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의미를 서술, 존재 그리고 진리라는 언어적 기능들 사이의 관계들을 설명하기 위한 기초로서 합당할 만큼 충분히 정확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전략은 존재사 문장과 진리사 문장에서 그 동사의 논리적 기능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구문론적 분석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직 우리가 einai의 이런 다양한 용법들의 구문론적 구조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얻을 때에만 그 용법들의 개념적 관계들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7. 나는 먼저 진리사적 용법을 취하는데, 여기에서의 기초적 구문은 분명하고 균일한 반면, einai의 존재사적 용법은 문장 형식의 곤혹스러운 다양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리사적 용법은 (그 동사가 "is true" 혹은 "is the case"를 의미하는 경우) 통계적으로 오히려 드물고, 따라서 그 용법은 존재사적 동사의 특수한 경우로 취급되곤 하였다. 우리는 결국 그러한 취급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그 대신 이 용법에 고유한 명명을 부여하고 저술 내에 독립된 장을 그것에 할당하였다면, 그것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to be의 이러한 용법은 (So be it 혹은 Tell it like it is 처럼) 존중할 만한 자격을 갖고 있다. To be의 그 의미는 전사적임에 틀림없는데, 인도-유럽 세계 극지에(인도와 스칸다나비아) 속한 언어들에서 진리에 대한 단어는 *es-의 현재 분사의 파생어로써 제공되기 때문이다 (san, satya 등, 그리스어에서 to on와 직접적으로 어원을 같이 하는 단어들. 그래서 또한 고대 영어에서도 sooth라는 단어를 가진다). 진리사적 용법에 대해 내가 독립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두 번째 이유는 철학에 대한 einai의 이러한 용법의 근본적인 중요성이다. 지식의 대상으로서 Being이라는 개념을 위해 우선시되는 표현들 중 하나로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와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에게 Being(to on)이 여러 가지를 의미할지라도, 그것은 결정적으로 이해의 목표이자 지식의 대상으로서 진리라는 개념을 지적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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