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런 모든 결함들을 인정하면서, 그 자료를 조직하는 데에 계사-존재사 구분이 유용하다는 것은, 이 책에서 내가 한 것처럼, 여전히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사적 용법이 함축적으로 존재사적 용법이라는 것, einai의 존재사적 용법 전부 혹은 그 대부분이 잠재적으로 서술적이라는 점을 재인하기 위해 그 구별 자체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으로 반성을 행했던 것은 아니다. 계사 구문과 독립 구문 사이의 구문론적 구분은 그 그리스어 동사에 실로 충분하지만 피상적인, 오직 그 동사에 대한 표면적 구조의 특징이다. 이것이 내가 레슬리 브라운의 플라톤 『소피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X is 형태의 문장에서와 X is Y 형태의 문장에서의 einai 동사들 사이의 관계가 Jane teaches에서와 Jane teaches French에서의 teach 동사들 사이의 관계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10쪽] 이것은 플라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도,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 언어에 대해 참인 듯하다. einai에 술어를 추가하는 것은 to teach 동사에 직접 목적어를 추가하는 것이 그 동사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 변화를 주지 않는다. 생성문법의 관점에서, 더 긴 형태일 수록 더 기초적이다. X teaches는 X teaches something에서 그 직접 목적어를 무화시킴으로써 도출된다. 유사하게, X is는 X is Y에서 그 술어를 무화함으로써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제안이다. 이것이 내가 삼가 내 방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말하는 내 논증을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건 einai의 용법 체계 중심에서 현존을 서술로 교체시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einai의 모든 독립적 혹은 존재사적 용법은 일부 술어의 축약된 형태로 여겨질 수 있다. X is는 어떤 Y에 대한 X is Y의 축약이다. 그 형식의 의미는 결국 to be는 to be something or other라는 것이다.
  서술적 용법과 존재사적 용법의 상호의존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i) einai의 계사 용법은 함축적으로 존재사적이라는 것. 계사로서 esti의 일상적 용법, 명사 술어나 처소격 술어를 가진 용법을 생각해 보자. 만일 esti를 그 문장 앞에 놓으면, "그러저러한 것이 있다"라는 번역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존재사적 어조를 자주 얻게 될 것이다. ἔστι πόλις Ἐφύρη μυχῷ Ἄργεος "아르고스의 귀퉁이에 에퓌르라는 도시가 있다." 같은 문장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어에서 단어의 배열은 아무런 구문론적 중요성이 없다. 첫 번째 위치에서 그 동사의 구문은 여전히 계사 구문, "에퓌르는 도시이다(Ἐφύρη πόλις ἐστί)"이다. 첫 번째 위치는 수사적 강조를 부여하지만, 그 동사 자체가 존재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존재사적 의미를 그 계사에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주어에 대한 이러한 존재사적 함축은 일반적으로 계사가 처소격 보어와 함께 이해될 때 더욱 강력하다.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말이다. (그래서 처소격 존재사 문장들의 유형들 전체 분류를 정립시킬 수 있다.) 하지만 계사의 존재사적 함축은 처소격 보어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는 주어를 그것에 대하여(about) 말할 어떤 것으로 놓는 것이 주-술 진술의 본질적 요소이며, 그리하여 주어에 대한 존재사라는 일부 주장이 긍정 주-술 문장 모두에서 함축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부정문들의 경우를 더 문제가 될 것으로 잠시 제쳐둔다.) 계사 문장들에서 이러한 주장은 주-술 관계의 신호로서 계사 esti에 의해 행해진다. 계사에 대한 그런 존재사적 함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당방형에서, 비록 [11쪽] 형식논리에서 이 규칙의 일반 양화 형식이 타당하지 않다 하더라도, "모든 그리스인은 인간이다"가 "일부 인간은 그리스인이다"를 함축하는 데에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어와 같은 자연언어에서, 서술적 진술은 그것에 대해 어떤 것이 참인 그러한 주어를 함의하고, (평범한 경우) 그 술어가 참이 되는 주어가 반드시 존재한다. 평범하지 않은 경우는, 비문법적 이유들로, 술어 표현이 실질적 속성을 부여하지 않고 따라서 주어의 현존이 문제가 되는 그런 경우이다. 그것이 아벨라르두스 시대에 논리학자들이 계사 est의 주어로 chimaera와 centaurus를 지니는 문장들을 재분석하기 시작한 이유이다. Chimaera est opinabilis "키메라는 의견의 대상이다" 같은 문장들은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키메라를 상상한다"라고 분석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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