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 Leitfadens der Entdeckung aller reinen Verstandesbegriffe
Dritter Abschnitt
모든 순수 지성개념들의 발견의 실마리
제 3 장

§ 10. Von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oder Kategorien
§ 10. 순수 지성개념들 혹은 범주들에 대하여

Die allgemeine Logik abstrahiert, wie mehrmalen schon gesagt word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und erwartet, daß ihr anderwärts, woher es auch sei, Vorstellungen gegeben werden, um diese zuerst in Begriffe zu verwandeln, welches analytisch zugehet. Dagegen hat die transzendentale Logik ein Mannigfaltiges der Sinnlichkeit a priori vor sich liegen, welches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ihr darbietet, um zu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einen Stoff zu geben, ohne den sie ohne allen Inhalt, mithin völlig leer sein würde. Raum und Zeit enthalten nun ein Mannigfaltiges der reinen Anschauung a priori, gehören aber gleichwohl zu den Bedingungen der Rezeptivität unseres Gemüts, unter denen es allein Vorstellungen von Gegenständen empfangen kann, die mithin auch den Begriff derselben jederzeit affizieren müssen. Allein die Spontaneität unseres Denkens erfordert es, daß dieses Mannigfaltige zuerst auf gewisse Weise durch gegangen, aufgenommen, und verbunden werde, um daraus eine Erkenntnis zu machen. Diese Handlung nenne ich Synthesis.
→ 이미 여러 번 이야기되었듯 일반 논리학은 인식의 모든 내용을 추상하고, 그리고 대상들이 최초로 분석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념화(化)를 하기 위하여 어딘가 있을 다른 곳에서 그 논리학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반면에 초월론적 논리학은 순수 지성개념들에 그것 없이는 그 초월론적 논리학이 아무런 내용 없이, 따라서 완전히 공허하게 될 그러한 재료를 주기 위해서 초월론적 감성학 초월론적 논리학에 제시하는 감성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그 자신 앞에 놓았다.→ 공간과 시간은 이제 순수 직관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들 아래에서 그 심정이 대상들에 대한 모든 표상들을 수용할 수 있는, 따라서 또한 그 표상들은 그 표상들의 개념을 매번 촉발해야만 하는, 그러한 우리의 심정의 수용성의 조건들에 속한다.→ 오로지 우리 사유의 자발성만이 이러한 잡다를 최초로 확실한 방법으로 점검되고, 수용되고, 관련되는 것을, 그를 통해 인식을 형성하기 위하여 요구한다.→ 이러한 행위를 나는 종합이라 명명한다.


Die allgemeine Logik abstrahiert, wie mehrmalen schon gesagt word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und erwartet, daß ihr anderwärts, woher es auch sei, Vorstellungen gegeben werden, um diese zuerst in Begriffe zu verwandeln, welches analytisch zugehet.
일반 논리학은 추상한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되었듯, 인식의 모든 내용을, 그리고 기대한다, 그 논리학에게 다른 곳에서, 어디엔가 있을, 대상들이 주어지기를, 이 대상들이 최초로 개념화(化)하기 위하여, 그것이분석적으로 이루어지는.
→ 이미 여러 번 이야기되었듯 일반 논리학은 인식의 모든 내용을 추상하고, 그리고 대상들이 최초로 분석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념화(化)를 하기 위하여 어딘가 있을 다른 곳에서 그 논리학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Dagegen hat die transzendentale Logik ein Mannigfaltiges der Sinnlichkeit a priori vor sich liegen, welches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ihr darbietet, um zu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einen Stoff zu geben, ohne den sie ohne allen Inhalt, mithin völlig leer sein würde.
반면에 초월론적 논리학은 감성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그 자신 앞에 놓았다, 그 잡다를 초월론적 감성학 초월론적 논리학에 제시하는, 순수 지성개념들에 재료를 주기 위해서, 그 재료 없이는 그 초월론적 논리학이 아무런 내용 없이, 따라서 완전히 공허하게 될.
→ 반면에 초월론적 논리학은 순수 지성개념들에 그것 없이는 그 초월론적 논리학이 아무런 내용 없이, 따라서 완전히 공허하게 될 그러한 재료를 주기 위해서 초월론적 감성학 초월론적 논리학에 제시하는 감성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그 자신 앞에 놓았다.
Raum und Zeit enthalten nun ein Mannigfaltiges der reinen Anschauung a priori, gehören aber gleichwohl zu den Bedingungen der Rezeptivität unseres Gemüts, unter denen es allein Vorstellungen von Gegenständen empfangen kann, die mithin auch den Begriff derselben jederzeit affizieren müssen.
공간과 시간은 이제 순수 직관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정의 수용성의 조건들에 속한다, 그 조건들 아래에서 잡다가(?) 대상들에 대한 모든 표상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그 표상들이 따라서 또한 그 표상들의 개념을 매번 촉발해야만 하는.
→ 공간과 시간은 이제 순수 직관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들 아래에서 그 심정이 대상들에 대한 모든 표상들을 수용할 수 있는, 따라서 또한 그 표상들은 그 표상들의 개념을 매번 촉발해야만 하는, 그러한 우리의 심정의 수용성의 조건들에 속한다.
Allein die Spontaneität unseres Denkens erfordert es, daß dieses Mannigfaltige zuerst auf gewisse Weise durchgegangen, aufgenommen, und verbunden werde, um daraus eine Erkenntnis zu machen.
오로지 우리 사유의 자발성만이 요구한다, 이러한 잡다를 최초로 확실한 방법으로 점검되고, 수용되고, 관련되는 것을, 그를 통해 인식을 형성하기 위하여.
→ 오로지 우리 사유의 자발성만이 이러한 잡다를 최초로 확실한 방법으로 점검되고, 수용되고, 관련되는 것을, 그를 통해 인식을 형성하기 위하여 요구한다.
Diese Handlung nenne ich Synthesis.
이러한 행위를 나는 종합이라 명명한다.
→ 이러한 행위를 나는 종합이라 명명한다.

-蟲-
So ist es ohne weiteres klar, daß die Bezeichnung >Vorsokratiker< bekundet, daß in unserem Bewußtsein in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der Griechen Sokrates einen beseonderen Platz einnimmt, wenn er gleichsam eine Art Nullpunkt werden konnte, an dem man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vor und nach ihm teilt. Daß er wirklich einen solchen Drehpunkt bildet, ist nicht erst in der neueren Philosophiegeschichte gesehen worden, sondern schon in der Antike, und Zeuge dafür ist uns Cicero, Tuscul. V 4, 10, wo er die Meinung äußert, die gewiß nicht erst seine eigene ist, sondern viel älter und auf griechischer Tradition beruhend: Sokrates habe die Philosophie vom Himmel herabgerufen und in die Städte und Häuser eingeführt und gezwungen, von nun an Untersuchungen anzustellen über das Leben, die mores - man könnte es übersetzen: die menschlichen Dinge, Lebensformen -, und weiter über Gut und Böse. Dies Wort, Sokrates habe die Philosophie vom Himmel in die Menschenwelt geholt und anstelle einer Naturspekulation eine stark vom Ethischen ausgehende Betrachtung gesetzt, ist, wie immer bei solchen Aussprüchen, einerseits richtig, andererseits auch wieder falsch, aber es bezeugt jedenfalls, daß man sehr früh so etwas angesetzt hat wie eine punkt wird, wenn man die Früheren nun von Sokrates aus zusammenfaßt und als Vorsokratiker bezeichnet.
→ 그래서 그 명칭 >전 소크라테스<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리스인들의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거기에서 사람들이 철학의 역사를 그의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일종의 영점이 될 수 있다면, 그가 하나의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리라는 것을 표명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가 실제로 그러한 전환을 형성한다는 것이, 새로운 철학사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미 고대에 보이며, 그에 대한 증인은 우리에게 끼께로, 『투스쿨룸의 논쟁들』. V 4, 10이다. 거기에서 그는 의견을 펼친다. 그 의견은 확실히 처음부터 그의 고유한 견해는 아니고, 오히려 훨씬 오래되고 그리스적 전통에 근거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하늘로부터 철학을 기원하였고 도시들과 집안들에 소개하고 명했다. 이제부터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필멸자들- 사람들이 그것을 :인간적인 것들, 삶의 방식들이라고 옮길 수 있는 -에 대해서, 그리고 나아가 좋음과 나쁨에 대해서 캐물음들을 행하라고.→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늘로부터 인간세계로 받았다는 이 말은, 언제나 그런 주장들에 있어서 그렇듯, 한편으론 맞고, 다른 한편으론 또한 틀리기도 한데, 그러나 그 말은 어쨌든, 사람들이 매우 일찍부터,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앞선 자들을 개괄하고 전 소크라테스로서 명명했을 때, 그러한 한 지점이 되는 듯한 그런 어떤 것을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Es ist auch richtig, daß all diese Vorsokratiker gegenüber dem, was von Sokrates aus beginnt und sich dann mit Platon und Aristoteles zum Hauptstrom der Philosophie entwickelt bis zu den hellenistischen Systemen, in ihrer Art des Philosophierens handgreifliche Unterschiede aufweisen. Kein Zweifel, daß diese Männer, die man meist mit Thales beginnen läßt, anders und in anderer Richtung gefragt haben als Platon und Sokrates. Man kann es vorläufig vielleicht so sagen, daß sie es zu tun hatten mit den onta, ganz allgemein ausgedrückt, den >das Seiende<, ist griechisch ein ganz gewöhnliches Wort der Umgangssprache, nicht wie bei uns ein philosophischer Begriff. So kann man bei Aristophanes einem Sklaven befehlen, ta onta herauszubringen, womit der Hausrat gemeint ist, >die Sachen<, wie wir sagen. Schon das ist bezeichnend, daß das, was bei uns ein philosophischer Begriff ist, zunächst ganz gewöhnlich das um den Menschen herum Vorhandene meint. So ist der Begriff des Seins bei den Griechen tatsächlich primär mit dem Charakter der >Vorhandenheit< geprägt, wie Heidegger richtig erkannt hat. Die Älteren fragten also nach dieser realen Vorhandenheit der seienden Dinge, nach dem uns umgebenden Sein der Natur, der physis, und sie fragten zumal in bestimmterer Weise nach dem Ursprung, der genesis von allem. Darauf beziehen sich dann auch alle Aussagen im Speziellen, insofern die onta sich darstellen als physis.
→ 이러한 모든 전 소크라테스들이 그에 마주 대하여,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철학의 본류에 헬레니즘적 체계들에까지, 그 체계들 안에서 철학함의 기술이 손에 잡힐 듯한 차이를 내보인다는 것은 또한 정당하다.→ 사람들이 대부분 탈레스와 함께 시작하도록 하는 이러한 방식들이 다른 방향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어쩌면 당장은 그렇게, 그 방식들에 onta와, 전적으로 일반적으로 표현될 때, >있는 것<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스어로 온타는 일상어의 전혀 평범한 단어이고, 우리에게 있어서와 같이 철학적 개념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 곁에서, 살림살이를 가지고 우리가 말하듯이 >사물들<을 생각함으로써 노예에게 타 온타를 내놓도록 명령할 수 있다.→ 이미 우리에게 있어서 철학적 개념인 어떤 것이, 애초에 전혀 평범하게 인간들 주위에서 수중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것은 독특하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존재의 개념은, 하이데거가 올바르게 알아차렸던 것처럼 실제로 처음에 >수중에 있음<의 성격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있는 것들의 이러한 실제로 수중에 있음에 대해서,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존재, 피지스의 존재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규정된 방식에 있어서 근원에 대해서, 모든 것의 제네시스(창조)에 대해서 물었다.→ 특수한 경우들에 있어서 모든 진술들은 또한 그 경우, 온타가 피지스로서 표현되는 한에서 그 점에 해당된다.


So ist es ohne weiteres klar, daß die Bezeichnung >Vorsokratiker< bekundet, daß in unserem Bewußtsein in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der Griechen Sokrates einen beseonderen Platz einnimmt, wenn er gleichsam eine Art Nullpunkt werden konnte, an dem man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vor und nach ihm teilt.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 명칭 >전 소크라테스<가 표명한다는 것,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리스인들의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하나의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그가 마치 일종의 영점이 될 수 있다면, 거기에서 사람들이 철학의 역사를 그의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 그래서 그 명칭 >전 소크라테스<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리스인들의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거기에서 사람들이 철학의 역사를 그의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일종의 영점이 될 수 있다면, 그가 하나의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리라는 것을 표명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Daß er wirklich einen solchen Drehpunkt bildet, ist nicht erst in der neueren Philosophiegeschichte gesehen worden, sondern schon in der Antike, und Zeuge dafür ist uns Cicero, Tuscul. V 4, 10, wo er die Meinung äußert, die gewiß nicht erst seine eigene ist, sondern viel älter und auf griechischer Tradition beruhend: Sokrates habe die Philosophie vom Himmel herabgerufen und in die Städte und Häuser eingeführt und gezwungen, von nun an Untersuchungen anzustellen über das Leben, die mores - man könnte es übersetzen: die menschlichen Dinge, Lebensformen -, und weiter über Gut und Böse.
그가 실제로 그러한 전환을 형성한다는 것이, 새로운 철학사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미 고대에 (보이고), 그에 대한 증인은 우리에게 끼께로, 『투스쿨룸 논쟁들』. V 4, 10이다, 거기에서 그는 의견을 펼친다, 그 의견은 확실히 처음부터 그의 고유한 견해는 아니고, 오히려 훨씬 오래되고 그리스적 전통에 근거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하늘로부터 철학을 기원하였고 도시들과 집안들에 소개하고 강요했다, 이제부터 캐물음들을 행하라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필멸자들에 대해서 - 사람들이 그것을 옮길 수 있다: 인간적인 것들, 삶의 방식들이라고 -, 그리고 나아가 좋음과 나쁨에 대해서.
→ 그가 실제로 그러한 전환을 형성한다는 것이, 새로운 철학사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미 고대에 보이며, 그에 대한 증인은 우리에게 끼께로, 『투스쿨룸의 논쟁들』. V 4, 10이다. 거기에서 그는 의견을 펼친다. 그 의견은 확실히 처음부터 그의 고유한 견해는 아니고, 오히려 훨씬 오래되고 그리스적 전통에 근거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하늘로부터 철학을 기원하였고 도시들과 집안들에 소개하고 명했다. 이제부터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필멸자들- 사람들이 그것을 :인간적인 것들, 삶의 방식들이라고 옮길 수 있는 -에 대해서, 그리고 나아가 좋음과 나쁨에 대해서 캐물음들을 행하라고.
Dies Wort, Sokrates habe die Philosophie vom Himmel in die Menschenwelt geholt und anstelle einer Naturspekulation eine stark vom Ethischen ausgehende Betrachtung gesetzt, ist, wie immer bei solchen Aussprüchen, einerseits richtig, andererseits auch wieder falsch, aber es bezeugt jedenfalls, daß man sehr früh so etwas angesetzt hat wie eine punkt wird, wenn man die Früheren nun von Sokrates aus zusammenfaßt und als Vorsokratiker bezeichnet.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늘로부터 인간세계로 받았고, 언제나 그런 주장들에 있어서 그렇듯, 한편으론 맞고, 다른 한편으론 또한 틀리기도 한데, 그러나 그 말은 어쨌든 증명한다, 사람들이 매우 일찍부터 그러한 한 지점이 되는 듯한 그런 어떤 것을 시작했다는 것,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앞선 자들을 개괄하고 전 소크라테스로서 명명했을 때.
→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늘로부터 인간세계로 받았다는 이 말은, 언제나 그런 주장들에 있어서 그렇듯, 한편으론 맞고, 다른 한편으론 또한 틀리기도 한데, 그러나 그 말은 어쨌든, 사람들이 매우 일찍부터,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앞선 자들을 개괄하고 전 소크라테스로서 명명했을 때, 그러한 한 지점이 되는 듯한 그런 어떤 것을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Es ist auch richtig, daß all diese Vorsokratiker gegenüber dem, was von Sokrates aus beginnt und sich dann mit Platon und Aristoteles zum Hauptstrom der Philosophie entwickelt bis zu den hellenistischen Systemen, in ihrer Art des Philosophierens handgreifliche Unterschiede aufweisen.
그것은 또한 정당하다, 이러한 모든 전 소크라테스들이 그에 마주 대하여,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철학의 본류에 헬레니즘적 체계들에까지, 그 체계들 안에서 철학함의 기술이 손에 잡힐 듯한 차이를 내보인다는 것.
→ 이러한 모든 전 소크라테스들이 그에 마주 대하여,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철학의 본류에 헬레니즘적 체계들에까지, 그 체계들 안에서 철학함의 기술이 손에 잡힐 듯한 차이를 내보인다는 것은 또한 정당하다.
Kein Zweifel, daß diese Männer, die man meist mit Thales beginnen läßt, anders und in anderer Richtung gefragt haben als Platon und Sokrates.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방식들이, 사람들이 대부분 탈레스와 함께 시작하도록 하는, 다른 방향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는 것.
→ 사람들이 대부분 탈레스와 함께 시작하도록 하는 이러한 방식들이 다른 방향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Man kann es vorläufig vielleicht so sagen, daß sie es zu tun hatten mit den onta, ganz allgemein ausgedrückt, den >das Seiende<, ist griechisch ein ganz gewöhnliches Wort der Umgangssprache, nicht wie bei uns ein philosophischer Begriff.
사람들은 그것을 어쩌면 당장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 방식들에 onta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는 것, 전적으로 일반적으로 표현될 때, >있는 것<과, 그리스어로는 일상어의 전혀 평범한 단어이고, 우리에게 있어서와 같이 철학적 개념은 아니라는.
→ 사람들은 그것을 어쩌면 당장은 그렇게, 그 방식들에 onta와, 전적으로 일반적으로 표현될 때, >있는 것<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스어로 온타는 일상어의 전혀 평범한 단어이고, 우리에게 있어서와 같이 철학적 개념은 아니다.
So kann man bei Aristophanes einem Sklaven befehlen, ta onta herauszubringen, womit der Hausrat gemeint ist, >die Sachen<, wie wir sagen.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 곁에서 노예에게 명령할 수 있다, 타 온타를 내놓도록, 살림살이를 가지고 생각함으로써, >사물들<을, 우리가 말하듯이.
→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 곁에서, 살림살이를 가지고 우리가 말하듯이 >사물들<을 생각함으로써 노예에게 타 온타를 내놓도록 명령할 수 있다.
Schon das ist bezeichnend, daß das, was bei uns ein philosophischer Begriff ist, zunächst ganz gewöhnlich das um den Menschen herum Vorhandene meint.
이미 그것은 독특하다, 그것, 우리에게 있어서 철학적 개념인 어떤 것이, 애초에 전혀 평범하게 인간들 주위에서 수중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 이미 우리에게 있어서 철학적 개념인 어떤 것이, 애초에 전혀 평범하게 인간들 주위에서 수중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것은 독특하다.
So ist der Begriff des Seins bei den Griechen tatsächlich primär mit dem Charakter der >Vorhandenheit< geprägt, wie Heidegger richtig erkannt hat.
그래서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존재의 개념은 실제로 처음에 >수중에 있음<의 성격으로 각인되었다, 하이데거가 올바르게 알아차렸던 것처럼.
→ 그래서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존재의 개념은, 하이데거가 올바르게 알아차렸던 것처럼 실제로 처음에 >수중에 있음<의 성격으로 각인되었다.
Die Älteren fragten also nach dieser realen Vorhandenheit der seienden Dinge, nach dem uns umgebenden Sein der Natur, der physis, und sie fragten zumal in bestimmterer Weise nach dem Ursprung, der genesis von allem.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물었다 있는 것들의 이러한 실제로 수중에 있음에 대해서,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존재, 피지스의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은 물었다 특히 규정된 방식에 있어서 근원에 대해서, 모든 것의 제네시스(창조)에 대해서.
→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있는 것들의 이러한 실제로 수중에 있음에 대해서,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존재, 피지스의 존재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규정된 방식에 있어서 근원에 대해서, 모든 것의 제네시스(창조)에 대해서 물었다.
Darauf beziehen sich dann auch alle Aussagen im Speziellen, insofern die onta sich darstellen als physis.
특수한 경우들에 있어서 모든 진술들은 또한 그 경우 그 점에 해당된다, 온타가 피지스로서 표현되는 한에서.
→ 특수한 경우들에 있어서 모든 진술들은 또한 그 경우, 온타가 피지스로서 표현되는 한에서 그 점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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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problematische Satz ist also derjenige, der nur logische Möglichkeit (die nicht objektiv ist) ausdruckt, d.i. eine freie Wahl einen solchen Satz gelten zu lassen, eine bloß willkürliche Aufnehmung desselben in den Verstand. Der assertorische sagt von logischer Wirklichkeit oder Wahrheit, wie etwa in einem hypothetischen Vernunftschluß das Antecedens im Obersatze problematisch, im Untersatze assertorisch vorkommt, und zeigt an, daß der Satz mit dem Verstande nach dessen Gesetzen schon verbunden sei; der apodiktische Satz denkt sich den assertorischen durch diese Gesetze des Verstandes selbst bestimmt, und daher a priori behauptend, und drückt auf solche Weise logische Notwendigkeit aus. Weil nun hier alles sich gradweise dem Verstande einverleibt, so daß man zuvor etwas problematisch urteilt, darauf auch wohl es assertorisch als wahr annimmt, endlich als unzertrennlich mit dem Verstande verbunden, d.i. als notwendig und apodiktisch behauptet, so kann man diese drei Funktionen der Modalität auch so viel Momente des Denkens überhaupt nennen.
→ 개연 명제는 그러므로 그것, 단지 논리적 가능성 (대상적-객관적? 가능성이 아니라) 을 나타내는, 즉 자의적 선택이 그러한 명제를 유효하도록 하는, 지성 내로의 그 명제의 순전히 임의적인 수용이다.→ 단언 명제는 아마도 가언적인 이성추론에서 전항(前項)이 대전제 안에서는 개연적으로 소전제 안에서는 단언적으로 있듯이, 그렇게 논리적 실재성 혹은 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단언 명제는 그 명제가 지성과 그 지성의 법칙들에 따라 이미 결합하리란 것을 가리킨다; 필연 명제는 스스로 단언 명제를 이러한 지성 자체의 법칙들을 통해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필연 명제는 선험적으로 주장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방식에 대해 논리적 필연성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이제 여기에서 모든 것은 스스로 점차 지성에 통합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선 어떤 것을 개연적으로 판단하고, 그로부터 또한 그것을 충분히 단언적으로 참으로서 받아들이고, 끝으로 내재적인 것으로서 지성과 결합시킨다는 것, 즉 불가결하고 필연적인 것으로서 주장한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양상의 세 가지 기능을 또한 그렇게 많은 사유 일반의 계기들(상황들)로 명명할 수 있다.


Der problematische Satz ist also derjenige, der nur logische Möglichkeit (die nicht objektiv ist) ausdruckt, d.i. eine freie Wahl einen solchen Satz gelten zu lassen, eine bloß willkürliche Aufnehmung desselben in den Verstand.
개연 명제는 그러므로 그것, 단지 논리적 가능성 (대상적-객관적? 가능성이 아니라) 을 나타내는, 즉 자의적 선택이 그러한 명제를 유효하도록 하는, 지성 내로의 그 명제의 순전히 임의적인 수용이다.
→ 개연 명제는 그러므로 그것, 단지 논리적 가능성 (대상적-객관적? 가능성이 아니라) 을 나타내는, 즉 자의적 선택이 그러한 명제를 유효하도록 하는, 지성 내로의 그 명제의 순전히 임의적인 수용이다.
Der assertorische sagt von logischer Wirklichkeit oder Wahrheit, wie etwa in einem hypothetischen Vernunftschluß das Antecedens im Obersatze problematisch, im Untersatze assertorisch vorkommt, und zeigt an, daß der Satz mit dem Verstande nach dessen Gesetzen schon verbunden sei; der apodiktische Satz denkt sich den assertorischen durch diese Gesetze des Verstandes selbst bestimmt, und daher a priori behauptend, und drückt auf solche Weise logische Notwendigkeit aus.
단언 명제는 논리적 실재성 혹은 참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마도 가언적인 이성추론에서 전항(前項)이 대전제 안에서 개연적으로, 소전제 안에서 단언적으로 있듯이, 그리고 가리킨다, 그 명제가 지성과 그 지성의 법칙들에 따라 이미 결합하리란 것을; 필연 명제는 스스로 단언 명제를 이러한 지성 자체의 법칙들을 통해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선험적으로 주장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방식에 대해 논리적 필연성을 나타낸다.
→ 단언 명제는 아마도 가언적인 이성추론에서 전항(前項)이 대전제 안에서는 개연적으로 소전제 안에서는 단언적으로 있듯이, 그렇게 논리적 실재성 혹은 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단언 명제는 그 명제가 지성과 그 지성의 법칙들에 따라 이미 결합하리란 것을 가리킨다; 필연 명제는 스스로 단언 명제를 이러한 지성 자체의 법칙들을 통해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필연 명제는 선험적으로 주장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방식에 대해 논리적 필연성을 나타낸다.
Weil nun hier alles sich gradweise dem Verstande einverleibt, so daß man zuvor etwas problematisch urteilt, darauf auch wohl es assertorisch als wahr annimmt, endlich als unzertrennlich mit dem Verstande verbunden, d.i. als notwendig und apodiktisch behauptet, so kann man diese drei Funktionen der Modalität auch so viel Momente des Denkens überhaupt nennen.
왜냐하면 이제 여기에서 모든 것은 스스로 점차 지성에 통합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선 어떤 것을 개연적으로 판단한다는 것, 그로부터 또한 그것을 충분히 단언적으로 참으로서 받아들이고, 끝으로 내재적인 것으로서 지성과 결합시킨다는 것, 즉 불가결하고 필연적인 것으로서 주장한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양상의 세 가지 기능을 또한 그렇게 많은 사유 일반의 계기들(상황들)로 명명할 수 있다.
→ 왜냐하면 이제 여기에서 모든 것은 스스로 점차 지성에 통합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선 어떤 것을 개연적으로 판단하고, 그로부터 또한 그것을 충분히 단언적으로 참으로서 받아들이고, 끝으로 내재적인 것으로서 지성과 결합시킨다는 것, 즉 불가결하고 필연적인 것으로서 주장한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양상의 세 가지 기능을 또한 그렇게 많은 사유 일반의 계기들(상황들)로 명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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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inteilung
1. 서론

Wir wollen uns in dieser Vorlesung mit der Periode des produktiven griechischen Denkens beschäftigen, die etwa vom sechsten vorchristlichen Jahrhundert bis zum Ende des fünften oder noch hinein in das vierte reicht, jener Periode, die, konkret gesprochen, gekennzeichnet ist durch das, was man nennt: die Vorsokratik. Nun habe ich dieses Kolleg aber nicht angekündigt als ein Kolleg über die Vorsokratiker, sondern habe es genannt: >Die Anfänge der Philsophie bei den Griechen<, und das mit gutem Grund. Diesen Grund will ich jetzt zunächst erklären, wodurch gleichzeitig der Gegenstand abgegrenzt und das nähere Ziel bezeichnet werden soll.
→ 우리는 이 강의에서 창조적인 그리스 사유의 시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6 세기로부터 5 세기 말 또는 더 나아가 4 세기 안까지 이어지며, 저 시기는 구체적으로 이야기될 때 사람들이 전(前) 소크라테스적이라 명명함으로써 특증지워진다. 이제 나는 이 강의를 전 소크라테스에 대한 강의로서 예고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철학의 기원<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은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한 일이다. 나는 지금 우선 이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대상이 한정되고 더 가까운 목표가 지시되도록 할 것이다.
Wir werden es zu tun haben, materiell betrachtet, mit den Fragmenten der Vorsokratiker, d.h. der Philosophen, die mit Thales beginnen und die wir weiter verfolgen in sogenannten >Schulen<: der milesischen, pythagoreischen, eleatischen Schule bis schließlich zur Sophistik. Wer sich wirklich mit den Dingen beschäftigen will, tut gut, sich die Fragmente anzusehen, aus denen wir das alles aufbauen und von denen es heute eine ganze Menge gibt.
→ 우리는 실질적으로 숙고하면서, 전 소크라테스 사람들, 즉 철학자들의 단편(조각)들탈레스와 함께 시작하고 그들을 우리가 더 나아가 밀레토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엘레아 학파에서 결국 소피트스에까지 이른바 >학파들< 안에서 추적하는 단편들을 가지고 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어떤 것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단편(조각)들을 관찰하는 것을 잘한다. 그 단편들로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세우고 그 단편들에서부터 오늘날 매우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Wenn man die übliche Bezeichnung >Vorsokratiker< richtig ansieht, bemerkt man sehr bald, daß das ein seltsamer Name ist. Es handelt sich dabei um eine Gruppe von Philosophen, und es ist doch seltsam, daß diese Gruppe üblicherweise mit einer Bezeichnung versehen wird, die in ihrer Begriffsbildung ein Vorher und damit auch ein >Noch nicht< - noch nicht Sokratik - enthält. Diese Merkwürdigkeit veranlaßt einen zum Nachdenken. Wir kennen auch sonst ähnliches, sprechen etwa von Vorgeschichte und meinen damit den Teil der Geschichte, der vor der literarisch überlieferten Geschichte liegt. Eine Abscheidung also nach der Schriftlichkeit und dem noch nicht Schriftlichen. So hat dieser Begriff seinen guten Sinn, obgleich von den Vorgeschichtlern aus der Begriff der Frühgeschichte danebengetreten ist.
→ 사람들이 >전 소크라테스<라는 통례의 명칭을 정당하게 판단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특이한 이름이라는 것을 곧장 알아차린다. 이 때 철학자들의 집단이 중요함에도 이 집단이 통상적으로 그 명칭의 개념형성에 있어서 앞선 것을 그리고 그와 함께 또한 >아직 아닌 것< - 아직 소크라테스적이지 않은 - 을 포함하는 그러한 명칭을 지닌다는 것은 여전히 특이하다. 이러한 주목할 만한 점은 숙고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또한 더욱이 비슷한 것을 아는데, 어느 정도 전사(前史)에 대해 말하며 그와 함께 문헌으로 전승된 역사 이전에 놓이는 역사의 일부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기록에 따른 것과 기록되지 않은 것에 따른 분리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개념은, 비록 선사 고고학자로부터 상고시대의 개념으로부터 잘못 디뎌졌다 할지라도 그 개념의 훌륭한 의미를 가진다.


1. Einteilung
1. 서론

Wir wollen uns in dieser Vorlesung mit der Periode des produktiven griechischen Denkens beschäftigen, die etwa vom sechsten vorchristlichen Jahrhundert bis zum Ende des fünften oder noch hinein in das vierte reicht, jener Periode, die, konkret gesprochen, gekennzeichnet ist durch das, was man nennt: die Vorsokratik.
우리는 이 강의에서 창조적인 그리스 사유의 시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 시기가 아마도 기원전 6 세기로부터 5 세기 말 또는 더 나아가 4 세기 안까지 이어지는, 저 시기는, 그 시기가, 구체적으로 이야기될 때, 다음의 것을 통하여 특증지워진다, 사람들이 명명하는 것: 전(前) 소크라테스.
→ 우리는 이 강의에서 창조적인 그리스 사유의 시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6 세기로부터 5 세기 말 또는 더 나아가 4 세기 안까지 이어지며, 저 시기는 구체적으로 이야기될 때 사람들이 전(前) 소크라테스적이라 명명함으로써 특증지워진다.
Nun habe ich dieses Kolleg aber nicht angekündigt als ein Kolleg über die Vorsokratiker, sondern habe es genannt: >Die Anfänge der Philsophie bei den Griechen<, und das mit gutem Grund.
이제 나는 이 강의를 전 소크라테스에 대한 강의로서 예고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명명하였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철학의 기원<, 그리고 그것을 훌륭한 근거를 가지고.
→ 이제 나는 이 강의를 전 소크라테스에 대한 강의로서 예고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철학의 기원<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은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한 일이다.
Diesen Grund will ich jetzt zunächst erklären, wodurch gleichzeitig der Gegenstand abgegrenzt und das nähere Ziel bezeichnet werden soll.
이 근거를 나는 지금 맨 먼저 규명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대상이 한정되고 더 가까운 목표가 지시되도록.
→ 나는 지금 우선 이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대상이 한정되고 더 가까운 목표가 지시되도록 할 것이다.

Wir werden es zu tun haben, materiell betrachtet, mit den Fragmenten der Vorsokratiker, d.h. der Philosophen, die mit Thales beginnen und die wir weiter verfolgen in sogenannten >Schulen<: der milesischen, pythagoreischen, eleatischen Schule bis schließlich zur Sophistik.
우리는 그것을 해야할 것이다, 질료적(실체적)으로 숙고하면서, 전 소크라테스 사람들의 단편(조각)들을 가지고, 즉 철학자들의 (단편들을), 그들이 탈레스와 함께 시작하고 그들을 우리가 더 나아가 이른바 >학파들< 안에서 추적하는: 밀레토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엘레아 학파에서 결국 소피트스에까지의 (단편들을).
→ 우리는 실질적으로 숙고하면서, 전 소크라테스 사람들, 즉 철학자들의 단편(조각)들탈레스와 함께 시작하고 그들을 우리가 더 나아가 밀레토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엘레아 학파에서 결국 소피트스에까지 이른바 >학파들< 안에서 추적하는 단편들을 가지고 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Wer sich wirklich mit den Dingen beschäftigen will, tut gut, sich die Fragmente anzusehen, aus denen wir das alles aufbauen und von denen es heute eine ganze Menge gibt.
실제로 사물들에 몰두하고자 하는 사람은, 잘 한다, 단편(조각)들을 관찰하는 것을, 그 단편들로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세우고 그 단편들에서부터 오늘날 매우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 실제로 어떤 것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단편(조각)들을 관찰하는 것을 잘한다. 그 단편들로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세우고 그 단편들에서부터 오늘날 매우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Wenn man die übliche Bezeichnung >Vorsokratiker< richtig ansieht, bemerkt man sehr bald, daß das ein seltsamer Name ist.
사람들이 >전 소크라테스<라는 통례의 명칭을 정당하게 판단할 때, 사람들은 곧장 알아차린다, 그것이 특이한 이름이라는 것을.
→ 사람들이 >전 소크라테스<라는 통례의 명칭을 정당하게 판단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특이한 이름이라는 것을 곧장 알아차린다.
Es handelt sich dabei um eine Gruppe von Philosophen, und es ist doch seltsam, daß diese Gruppe üblicherweise mit einer Bezeichnung versehen wird, die in ihrer Begriffsbildung ein Vorher und damit auch ein >Noch nicht< - noch nicht Sokratik - enthält.
이 때 철학자들의 집단이 중요한데, 그럼에도 그것은 특이하다, 이 집단이 통상적으로 명칭을 지닌다는 것은, 그 명칭이 그 명칭의 개념형성에 있어서 앞선 것을 그리고 그와 함께 또한 >아직 아닌 것< - 아직 소크라테스적이지 않은 - 을 포함하는.
→ 이 때 철학자들의 집단이 중요함에도 이 집단이 통상적으로 그 명칭의 개념형성에 있어서 앞선 것을 그리고 그와 함께 또한 >아직 아닌 것< - 아직 소크라테스적이지 않은 - 을 포함하는 그러한 명칭을 지닌다는 것은 여전히 특이하다.
Diese Merkwürdigkeit veranlaßt einen zum Nachdenken.
이러한 주목할 만한 점은 숙고를 불러 일으킨다.
→ 이러한 주목할 만한 점은 숙고를 불러 일으킨다.
Wir kennen auch sonst ähnliches, sprechen etwa von Vorgeschichte und meinen damit den Teil der Geschichte, der vor der literarisch überlieferten Geschichte liegt.
우리는 또한 더욱이 비슷한 것을 알고, 어느 정도 전사(前史)에 대해 말하며 그와 함께 역사의 일부를 생각한다, 그 부분이 문헌으로 전승된 역사 이전에 놓이는.
→ 우리는 또한 더욱이 비슷한 것을 아는데, 어느 정도 전사(前史)에 대해 말하며 그와 함께 문헌으로 전승된 역사 이전에 놓이는 역사의 일부를 생각한다.
Eine Abscheidung also nach der Schriftlichkeit und dem noch nicht Schriftlichen.
그러므로 분리는 기록형식과 아직 기록되지 않은 것에 따른다.
→ 그러니까 기록에 따른 것과 기록되지 않은 것에 따른 분리가 있다.
So hat dieser Begriff seinen guten Sinn, obgleich von den Vorgeschichtlern aus der Begriff der Frühgeschichte danebengetreten ist.
그래서 이러한 개념은 그 개념의 훌륭한 의미를 가진다, 비록 선사 고고학자로부터 상고시대의 개념으로부터 잘못 디뎌졌다 할지라도.
→ 그래서 이러한 개념은, 비록 선사 고고학자로부터 상고시대의 개념으로부터 잘못 디뎌졌다 할지라도 그 개념의 훌륭한 의미를 가진다.

-蟲-
 Problematische Urteile sind solche, wo man das Bejahen oder Verneinen als bloß moglich (beliebig) annimmt. Assertorische, da es als wirklich (wahr) betrachtet wird. Apodiktische, in denen man es als notwendig ansieht¹. So sind die beiden Urteile, deren Verhaltnis das hypothetische Urteil ausmacht, (antec. und consequ.), imgleichen in deren Wechselwirkung das Disjunktive besteht, (Glieder der Einteilung) insgesamt nur problematisch. In dem obigen Beispiel wird der Satz: es ist eine vollkommene Gerechtigkeit da, nicht assertorisch gesagt, sondern nur als ein beliebiges Urteil, wovon es moglich ist, daß jemand es annehme, gedacht, und nur die Konsequenz ist assertorisch. Daher konnen solche Urteile auch offenbar falsch sein, und doch, problematisch genommen, Bedingungen der Erkenntnis der Wahrheit sein. So ist das Urteil: die Welt ist durch blinden Zufall da, in dem disjunktiven Urteil nur von problematischer Bedeutung, namlich, daß jemand diesen Satz etwa auf einen Augenblick annehmen moge, und dient doch, (wie die Verzeichnung des falschen Weges, unter der Zahl aller derer, die man nehmen kann,) den wahren zu finden.
→ 개연 판단들은 사람들이 긍정이나 부정을 순전히 가능적인 것으로서 (임의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경우 그러한 개연 판단들이다.→ 단정 판단들은 그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들이다.→ 필연 판단들은 그 판단들 안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¹ 그러한 판단들이다.→ 그래서 그것들의 관계가 가언 판단을 형성하는 양자의 판단들(전제와 결론)은 그 판단들의 상호작용 안에 선언 판단이 존립하는 판단들(분할의 마디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다 단지 개연적이다.→ 상술한 예시에서 :여기에 완전한 정의가 있다 라는 명제는 단정적으로 이야기되지 않고, 오히려 단지 그와 관련하여 누군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임의적 판단으로서만 생각된다. 그리고 오로지 결론만이 단정적이다.→ 그런 이유로 그러한 판단은 또한 명백한 오류일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연적으로 취해질 때 진리에 대한 인식의 조건들일 수 있다.→ 그래서 :세계는 맹목적 우연에 의해 여기 있다 라는 판단은 선언 판단 안에서 오로지 개연적 의미에 대한 것일 뿐이다. 즉 누군가 이 명제를 어느 정도 현재에 대해 취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그 모든 길들의 수 아래에서 잘못된 길의 기록과 같이) 진리를 발견하는 데에 쓸모가 있다.

¹ Gleich, als wenn das Denken im ersten Fall eine Funktion des Verstandes, im zweiten der Urteilskraft, im dritten der Vernunft ware. Eine Bemerkung, die erst in der Folge ihre Aufklarung erwartet.
→ ¹ 마찬가지로, 사유는 첫째로 지성의 기능이고, 다음으로 판단력의, 세 번째로 이성의 기능일 것이다.→ 이 소견은 이어지는 장들에서 처음으로 그 해명이 기대된다.


Problematische Urteile sind solche, wo man das Bejahen oder Verneinen als bloß moglich (beliebig) annimmt.
개연 판단들은 그러한 것들이다, 사람들이 긍정이나 부정을 순전히 가능적인 것으로서 (임의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경우.
→ 개연 판단들은 사람들이 긍정이나 부정을 순전히 가능적인 것으로서 (임의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경우 그러한 개연 판단들이다.
Assertorische, da es als wirklich (wahr) betrachtet wird.
단정 판단들은, 그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 단정 판단들은 그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들이다.
Apodiktische, in denen man es als notwendig ansieht¹.
필연 판단들은, 그 판단들 안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¹.
→ 필연 판단들은 그 판단들 안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¹ 그러한 판단들이다.
So sind die beiden Urteile, deren Verhaltnis das hypothetische Urteil ausmacht, (antec. und consequ.), imgleichen in deren Wechselwirkung das Disjunktive besteht, (Glieder der Einteilung) insgesamt nur problematisch.
그래서 양자의 판단들은, 그것들의 관계가 가언 판단을 형성하는, (전제와 결론), 그 판단들의 상호작용 안에 선언 판단이 존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할의 마디들) 모두 다 단지 개연적이다.
→ 그래서 그것들의 관계가 가언 판단을 형성하는 양자의 판단들(전제와 결론)은 그 판단들의 상호작용 안에 선언 판단이 존립하는 판단들(분할의 마디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다 단지 개연적이다.
In dem obigen Beispiel wird der Satz: es ist eine vollkommene Gerechtigkeit da, nicht assertorisch gesagt, sondern nur als ein beliebiges Urteil, wovon es moglich ist, daß jemand es annehme, gedacht, und nur die Konsequenz ist assertorisch.
상술한 예시에서 :여기에 완전한 정의가 있다 라는 명제는, 단정적으로 이야기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임의적 판단으로서만, 그로부터 그것이 가능한, 누군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생각된다, 그리고 오로지 결론만이 단정적이다.
→ 상술한 예시에서 :여기에 완전한 정의가 있다 라는 명제는 단정적으로 이야기되지 않고, 오히려 단지 그와 관련하여 누군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임의적 판단으로서만 생각된다. 그리고 오로지 결론만이 단정적이다.
Daher konnen solche Urteile auch offenbar falsch sein, und doch, problematisch genommen, Bedingungen der Erkenntnis der Wahrheit sein.
그런 이유로 그러한 판단은 또한 명백한 오류일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연적으로 취해질 때, 진리에 대한 인식의 조건들일 수 있다.
→ 그런 이유로 그러한 판단은 또한 명백한 오류일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연적으로 취해질 때 진리에 대한 인식의 조건들일 수 있다.
So ist das Urteil: die Welt ist durch blinden Zufall da, in dem disjunktiven Urteil nur von problematischer Bedeutung, namlich, daß jemand diesen Satz etwa auf einen Augenblick annehmen moge, und dient doch, (wie die Verzeichnung des falschen Weges, unter der Zahl aller derer, die man nehmen kann,) den wahren zu finden.
그래서 :세계는 맹목적 우연에 의해 여기 있다 라는 판단은, 선언 판단 안에서 오로지 개연적 의미에 대한 것일 뿐이다. 즉, 누군가 이 명제를 어느 정도 현재에 대해 취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쓸모가 있다, (잘못된 길의 기록이, 그 모든 잘못된 길들의 수 아래에서, 그 수를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는.
→ 그래서 :세계는 맹목적 우연에 의해 여기 있다 라는 판단은 선언 판단 안에서 오로지 개연적 의미에 대한 것일 뿐이다. 즉 누군가 이 명제를 어느 정도 현재에 대해 취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그 모든 길들의 수 아래에서 잘못된 길의 기록과 같이) 진리를 발견하는 데에 쓸모가 있다.

¹ Gleich, als wenn das Denken im ersten Fall eine Funktion des Verstandes, im zweiten der Urteilskraft, im dritten der Vernunft ware.
¹ 마찬가지로, 사유가 첫째로 지성의 기능이고, 다음으로 판단력의, 세 번째로 이성의 기능일 것이다.
→ ¹ 마찬가지로, 사유는 첫째로 지성의 기능이고, 다음으로 판단력의, 세 번째로 이성의 기능일 것이다.
Eine Bemerkung, die erst in der Folge ihre Aufklarung erwartet.
소견, 처음으로 이어지는 장들에서 그 소견의 해명을 기대하는.
→ 이 소견은 이어지는 장들에서 처음으로 그 해명이 기대된다.

-蟲-
Endlich enthält das disjunktive Urteil ein Verhältnis zweener, oder mehrerer Sätze gegen einander, aber nicht der Abfolge, sondern der logischen Entgegensetzung, so fern die Sphäre des einen die des andern ausschließt, aber doch zugleich der Gemeinschaft, in so fern sie zusammen die Sphäre der eigentlichen Erkenntnis ausfüllen, also ein Verhältnis der Teile der Sphäre eines Erkenntnisses, da die Sphäre eines jeden Teils ein Ergänzungsstück der Sphäre des andern zu dem ganzen Inbegriff der eingeteilten Erkenntnis ist, z.E. die Welt ist entweder durch einen blinden Zufall da, oder durch innre Notwendigkeit, oder durch eine äußere Ursache. Jeder dieser Sätze nimmt einen Teil der Sphäre des möglichen Erkenntnisses über das Dasein einer Welt überhaupt ein, alle zusammen die ganze Sphäre. Das Erkenntnis aus einer dieser Sphären wegnehmen, heißt, sie in eine der übrigen setzen, und dagegen sie in eine Sphäre setzen, heißt, sie aus den übrigen wegnehmen. Es ist also in einem disjunktiven Urteile eine gewisse Gemeinschaft der Erkenntnisse, die darin besteht, daß sie sich wechselseitig einander ausschließen, aber dadurch doch im Ganzen die wahre Erkenntnis bestimmen, indem sie zusammengenommen den ganzen Inhalt einer einzigen gegebenen Erkenntnis ausmachen. Und dieses ist es auch nur, was ich des Folgenden wegen hiebei anzumerken nötig finde.
→ 끝으로 선언판단은 둘 혹은 그 이상의 명제들 상호간의 관계를 포함하지만, 연속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한 명제의 범위가 나머지 명제의 범위를 배제하는 한에서 논리적 반대 관계를 포함한다. 그러나 선언판단은 그럼에도시에 그 명제들이 함께 고유한 인식의 범위를 만족시키는 한에서 결합의 관계를 포함하는데, 그러므로 선언판단은 분활된 인식의 전반적 총괄에 대해 각 부분의 범위가 다른 부분의 범위의 보충이므로 인식의 범위의 부분들의 관계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세계는 맹목적 우연을 통해 현존하거나, 또는 내적 필연성을 통해 현존하거나, 아니면 외적 원인을 통해 현존한다.→ 이러한 범위들 중에 하나로부터 인식을 배제한다는 것은 그 인식을 남은 범위들 중 하나에 놓는다는 것을 일컫는 것이고, 반대로 그 인식을 한 범위에 놓는다는 것은 그 인식을 남은 범위들로부터 배제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언 판단에 있어서, 그 인식들 자체가 상호간에 서로를 배제한다는, 그러나 그럼에도 그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그 인식들이 단일하게 주어진 인식의 전체 내용을 형성함으로써 전체에 있어서 참된 인식을 규정한다는 점에 존립하는, 인식들의 확실한 결합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또한 단지, 내가 뒤따르는 것을 위해 이와 관련하여 첨언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일 뿐이다.
4. Die Modalität der Urteile ist eine ganz besondere Funktion derselben, die das Unterscheidende an sich hat, daß sie nichts zum Inhalte des Urteils beiträgt, (denn außer Größe, Qualität und Verhältnis ist nichts mehr, was den Inhalt eines Urteils ausmachte,) sondern nur den Wert der Copula in Beziehung auf das Denken überhaupt angeht.
→ 4. 판단의 양상은, 그 기능은 판단의 내용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고, (왜냐하면 외적 양, 질 그리고 관계 외에는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판단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오히려 단지 사유 일반과 관련 속에서 결속의 값(가치)에만 관계한다는 특징을 그 자체로 지니는, 판단의 전적으로 특수한 기능이다.


Endlich enthält das disjunktive Urteil ein Verhältnis zweener, oder mehrerer Sätze gegen einander, aber nicht der Abfolge, sondern der logischen Entgegensetzung, so fern die Sphäre des einen die des andern ausschließt, aber doch zugleich der Gemeinschaft, in so fern sie zusammen die Sphäre der eigentlichen Erkenntnis ausfüllen, also ein Verhältnis der Teile der Sphäre eines Erkenntnisses, da die Sphäre eines jeden Teils ein Ergänzungsstück der Sphäre des andern zu dem ganzen Inbegriff der eingeteilten Erkenntnis ist, z.E. die Welt ist entweder durch einen blinden Zufall da, oder durch innre Notwendigkeit, oder durch eine äußere Ursache.
끝으로 선언판단은 둘 혹은 그 이상의 명제들 상호간의 관계를 포함하지만, 연속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논리적 반대 관계를 포함한다, 한 명제의 범위가 나머지 명제의 범위를 배제하는 한에서, 그러나 그럼에도 동시에 결합의 관계를 포함하는데, 그 명제들이 함께 고유한 인식의 범위를 만족시키는 한에서, 그러므로 인식의 범위의 부분들의 관계를 포함한다, 분활된 인식의 전반적 총괄에 대해 각 부분의 범위가 다른 부분의 범위의 보충이므로, 예를 들어 세계는 맹목적 우연을 통해 현존하거나, 또는 내적 필연성을 통해 현존하거나, 아니면 외적 원인을 통해 현존한다.
→ 끝으로 선언판단은 둘 혹은 그 이상의 명제들 상호간의 관계를 포함하지만, 연속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한 명제의 범위가 나머지 명제의 범위를 배제하는 한에서 논리적 반대 관계를 포함한다. 그러나 선언판단은 그럼에도시에 그 명제들이 함께 고유한 인식의 범위를 만족시키는 한에서 결합의 관계를 포함하는데, 그러므로 선언판단은 분활된 인식의 전반적 총괄에 대해 각 부분의 범위가 다른 부분의 범위의 보충이므로 인식의 범위의 부분들의 관계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세계는 맹목적 우연을 통해 현존하거나, 또는 내적 필연성을 통해 현존하거나, 아니면 외적 원인을 통해 현존한다.
Jeder dieser Sätze nimmt einen Teil der Sphäre des möglichen Erkenntnisses über das Dasein einer Welt überhaupt ein, alle zusammen die ganze Sphäre.
이러한 각각의 명제는 세계 일반의 현존에 대하여 가능한 인식의 범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모두 합쳐서 전체 범위를 차지한다.
→ 이러한 각각의 명제는 세계 일반의 현존에 대하여 가능한 인식의 범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모두 합쳐서 전체 범위를 차지한다.
Das Erkenntnis aus einer dieser Sphären wegnehmen, heißt, sie in eine der übrigen setzen, und dagegen sie in eine Sphäre setzen, heißt, sie aus den übrigen wegnehmen.
이러한 범위들 중에 하나로부터 인식을 배제한다는 것은, 말한다, 그 인식을 남은 범위들 중 하나에 놓는다는 것을, 그리고 반대로 그 인식을 한 범위에 놓는다는 것은, 말한다, 그 인식을 남은 범위들로부터 배제한다는 것을.
→ 이러한 범위들 중에 하나로부터 인식을 배제한다는 것은 그 인식을 남은 범위들 중 하나에 놓는다는 것을 일컫는 것이고, 반대로 그 인식을 한 범위에 놓는다는 것은 그 인식을 남은 범위들로부터 배제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Es ist also in einem disjunktiven Urteile eine gewisse Gemeinschaft der Erkenntnisse, die darin besteht, daß sie sich wechselseitig einander ausschließen, aber dadurch doch im Ganzen die wahre Erkenntnis bestimmen, indem sie zusammengenommen den ganzen Inhalt einer einzigen gegebenen Erkenntnis ausmachen.
그러므로 그것은 선언 판단에 있어서 인식들의 확실한 결합이다, 그 결합이 다음과 같은 점에 존립하는, 그 인식들 자체가 상호간에 서로를 배제한다는 것, 그러나 그를 통하여 그럼에도 전체에 있어서 참된 인식을 규정한다는 것, 전체적으로 그 인식들이 단일하게 주어진 인식의 전체 내용을 형성함으로써.
→ 그러므로 그것은 선언 판단에 있어서, 그 인식들 자체가 상호간에 서로를 배제한다는, 그러나 그럼에도 그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그 인식들이 단일하게 주어진 인식의 전체 내용을 형성함으로써 전체에 있어서 참된 인식을 규정한다는 점에 존립하는, 인식들의 확실한 결합이다.
Und dieses ist es auch nur, was ich des Folgenden wegen hiebei anzumerken nötig finde.
그리고 이러한 것은 또한 단지, 내가 뒤따르는 것을 위해 이와 관련하여 첨언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일 뿐이다.
→ 그리고 이러한 것은 또한 단지, 내가 뒤따르는 것을 위해 이와 관련하여 첨언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일 뿐이다.

4. Die Modalität der Urteile ist eine ganz besondere Funktion derselben, die das Unterscheidende an sich hat, daß sie nichts zum Inhalte des Urteils beiträgt, (denn außer Größe, Qualität und Verhältnis ist nichts mehr, was den Inhalt eines Urteils ausmachte,) sondern nur den Wert der Copula in Beziehung auf das Denken überhaupt angeht.
4. 판단의 양상은 판단의 전적으로 특수한 기능이다, 그 기능이 특징을 그 자체로 지니는, 그 기능은 판단의 내용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고, (왜냐하면 외적 양, 질 그리고 관계 외에는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판단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오히려 단지 사유 일반과 관련 속에서 결속의 값(가치)에만 관계한다는.
→ 4. 판단의 양상은, 그 기능은 판단의 내용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고, (왜냐하면 외적 양, 질 그리고 관계 외에는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판단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오히려 단지 사유 일반과 관련 속에서 결속의 값(가치)에만 관계한다는 특징을 그 자체로 지니는, 판단의 전적으로 특수한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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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 Leitfadens der Entdeckung aller reinen Verstandesbegriffe

모든 순수 지성개념들의 발견의 실마리

Zweiter Abschnitt

제 2 장

§ 9. Von der logischen Funktion des Verstandes in Urteilen

§ 9. 판단들에 있어서 지성의 논리적 기능에 대하여

Wenn wir von allem Inhalte eines Urteils überhaupt abstrahieren, und nur auf die bloße Verstandesform darin Acht geben, so finden wir, daß die Funktion des Denkens in demselben unter vier Titel gebracht werden könne, deren jeder drei Momente unter sich enthält. Sie können füglich in folgender Tafel vorgestellt werden.

→ 만일 우리가 판단 전반의 모든 내용들을 추상하고 그 점에 있어서 단지 순전한 지성형식에만 주목한다면 우리는 지성의 기능이 그 판단 자체에서 그 각각이 세 계기들을 포섭하는 네 항목들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항목들은 적절하게 다음 표에서 제시될 수 있다.

 

 1. Quantität der Urteile.

판단의 양

 

 

 Allgemeine 전칭

 Besondere 특칭

 Einzelne 단칭

 

 2. Qualität.

 

 3. Relation. 관계

 Bejahende 긍정

 Verneinende 부정

 Unendliche 무한

 

 Kategorische 정언

 Hypothetische 가언

 Disjunktive 선언

 

 4. Modalität. 양상

 

 

 Problematische 개연

 Assertorische 단정

 Apodiktische 필연

 


Da diese Einteliung in einigen, obgleich nicht wesentlichen Stücken, von der gewohnten Technik der Logiker abzuweichen scheint, so werden folgende Verwahrungen wider den besorglichen Mißverstand nicht unnötig sein.

→ 이러한 구분은 비록 본질적인 부분들에서는 아니더라도 몇몇 부분들에서 논리학자들의 통상적인 기술과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염려되는 오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의들이 불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1. Die Logiker sagen mit Recht, daß man beim Gebrauch der Urteile in Vernunftschlüssen die einzelnen Urteile gleich den allgemeinen behandeln könne. Denn eben darum, weil sie gar keinen Umfang haben, kann das Prädikat derselben nicht bloß auf einiges dessen, was unter dem Begriff des Subjekts enthalten ist, gezogen, von einigem aber ausgenommen werden. Es gilt also von jenem Begriffe ohne Ausnahme, gleich als wenn derselbe ein gemeingültiger Begriff wäre, der einen Umfang hätte, von dessen ganzer Bedeutung das Prädikat gelte. Vergleichen wir dagegen ein einzelnes Urteil mit einem gemeingültigen, bloß als Erkenntnis, der Größe nach, so verhält sie sich zu diesem wie Einheit zur Unendlichkeit, und ist also sich selbst davon wesentlich unterschieden. Also, wenn ich ein einzelnes Urteil (judicium singulare) nicht bloß nach seiner innern Gültigkeit, sondern auch, als Erkenntnis überhaupt, nach der Größe, die es in Vergleichung mit andern Erkenntnissen hat, schätze, so ist es allerdings von gemeingültigen Urteilen (judicia communia) unterschieden, und verdient in einer vollständigen Tafel der Momente des Denkens überhaupt (obzwar freilich nicht in der bloß auf den Gebrauch der Urteile untereinander eingeschränkten Logik) eine besondere Stelle.

→1. 논리학자들이 사람들은 이성 추론들에서 판단들의 사용에 있어서 단칭 판단들을 전칭 판단들과 마찬가지로 취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단칭 판단들이 전혀 아무런 외연도 가지지 않으므로 정확히 그 점에서 그 판단들의 술어가 주어의 개념 아래에 포함되는 몇몇에만 관련되고 몇몇에는 제외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단칭 판단은 모든 개념들에 대해서 예외 없이 유효한데, 동일한 판단이 외연을 가지는 보편타당한 개념일 경우 전체 의미의 개념에 대해 술어가 타당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 우리는 그에 반해 단칭 판단을 크기에 따르는 순전한 인식으로서 보편타당한 판단에 비유한다. 그래서 이러한 판단에 그 인식이 무한성에 대한 통일성과 같이 관계하고, 그러므로 그 인식 자체는 그로부터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단칭 판단을 단지 그 내적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 전반으로서 다른 인식들과의 비교 속에서 가지는 크기에 따라 평가한다면, 그 판단은 당연히 보편타당한 판단들과 구분되고, 사유 전반의 계기들의 완전한 도표 안에서 (비록 확실히 판단들 상호의 사용에 대한 제한된 논리학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특수한 위치를 차지할 만하다.

2. Eben so müssen in einer transzendentalen Logik unendliche Urteile von bejahenden noch unterschieden werden, wenn sie gleich in der allgemeinen Logik jeden mit Recht beigezählt sind und kein besonderes Glied der Einteilung ausmachen. Diese nämlich abstrahieret von allem Inhalt des Prädikats (ob es gleich verneinend ist) und sieht nur darauf, ob dasselbe dem Subjekt beigelegt, oder ihm entgegengesetzt werde. Jene aber betrachtet das Urteil auch nach dem Werte oder Inhalt dieser logischen Bejahung vermittelst eines bloß verneinenden Prädikats, und was diese in Ansehung des gesamten Erkenntnisses für einen Gewinn verschafft. Hätte ich von der Seele gesagt, sie ist nicht sterblich, so hätte ich durch ein verneinendes Urteil wenigstens einen Irrtum abgehalten. Nun habe ich durch den Satz: die Seele ist nichtsterblich, zwar der logischen Form nach wirklich bejahet, indem ich die Seele in den unbeschränkten Umfang der nichtsterbenden Wesen setze. Weil nun von dem ganzen Umfang möglicher Wesen das Sterbliche einen Teil enthält, das Nichtsterbende aber den andern, so ist durch meinen Satz nichts anders gesagt, als daß die Seele eines von der unendlichen Mange Dinge sei, die übrig bleiben, wenn ich das Sterbliche insgesamt wegnehme. Dadurch aber wird nur die unendliche Sphäre alles Möglichen in so weit beschränkt, daß das Sterbliche davon abgetrennt, und in dem übrigen Raum ihres Umfangs die Seele gesetzt wird. Dieser Raum bleibt aber bei dieser Ausnahme noch immer unendlich, und können noch mehrere Teile desselben weggenommen werden, ohne daß darum der Begriff von der Seele im mindesten wächst, und bejahend bestimmt wird. Diese unendliche Urteile also in Ansehung des logischen Umfanges sind wirklich bloß beschränkend in Ansehung des Inhalts der Erkenntnis überhaupt, und in so fern müssen sie in der transtzendentalen Tafel aller Momente des Denkens in den Urteilen nicht übergangen werden, weil die hierbei ausgeübte Funktion des Verstandes vielleicht in dem Felde seiner reinen Erkenntnis a priori wichtig sein kann.

 → 2. 마찬가지로, 비록 그 무한판단들이 일반 논리학에서 정당하게 저 긍정판단들로 셈해지고 구분의 어떠한 특수한 절도 형성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월론적 논리학에서 무한판단들은 긍정판단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 다시 말해 이러한 무한판단은 술어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고 (비록 그 내용이 부정이라 할지라도) 단지, 그 술어 자체가 주어에 덧붙여지는지, 또는 그 주어에 반대되는지 그에 대해서만 본다.→ 그러나 저 긍정판단은 판단을 또한 순전한 부정 술어에 따라서 이러한 논리적 긍정의 값이나 내용에 따라 평가하고, 이러한 것을 이익에 대한 전체 인식의 고려 속에서 이러한 것을 마련하는 것을 평가한다. → 내가 영혼에 대해 영혼이 필멸이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면 나는 부정판단을 통하여 최소한 오류를 막을 것이다. → 이제 나는, 내가 영혼을 불멸하는 실체들의 무한정한 범위 안으로 놓음으로써, 영혼은 불사적이다라는 명제를 통하여, 더욱이 그 논리적 형식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긍정한다. → 이제 가능한 실체들의 전범위로부터 필멸하는 것이 일부분을 포함하고, 그러나 불멸하는 것은 다른 부분을 (포함하므로), 그래서 나의 명제를 통해서, 영혼은 내가 필멸하는 것 모두를 제거할 때 남아 있는 무한히 많은 것들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다만 모든 가능한 것의 무한한 범위가, 필멸하는 것을 그로부터 분리시키고, 그 범위의 남은 공간에 영혼이 놓인다는 것, 그 만큼에서 한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은 이러한 예외에 있어서 여전히 무한하고, 그 공간의 더 많은 부분들이, 영혼에 대한 개념이 최소한으로 확장되거나, 또 긍정적으로 규정되는 것 없이 제거될 수 있다. → 이러한 무한한 판단들은 그러므로 논리적 범위의 고려 속에서 실제로 순전히 인식 전반의 내용에 대한 고려에서 제한되고, 그러한 한에서 무한한 판단들이 판단들 속에서 사유의 모든 계기들의 초월론적 목록표 안에서 넘어서게 되지 않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하여 수행된 지성의 활동은 아마도 그 지성의 순수한 선험적 인식의 범위 안에서 주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Alle Verhältnisse des Denkens in Urteilen sind die a) des Prädikats zum Subjekt, b) des Grundes zur Folge, c) der eingeteilten Erkenntnis und der gesammleten Glieder der Einteilung unter einander. In der ersteren Art der Urteile sind nur zwei Begriffe, in der zweiten zweene Urteile, in der dritten mehrere Urteile im Verhältnis gegen einander betrachtet. Der hypothetische Satz: wenn eine vollkommene Gerechtigkeit da ist, so wird der beharrlich Böse bestraft, enthält eigentlich das Verhältnis zweier Stätze: Es ist eine vollkommene Gerechtigkeit da, und der beharllich Böse wird bestraft. Ob beide dieser Sätze an sich wahr sein, bleibt hier unausgemacht. Es ist nur die Konsequenz, die durch dieses Urteil gedacht wird.

 → 3. 판단들 속에서 사유의 모든 관계들은 a) 주어에 대한 술어의 관계, b) 결과에 대한 원인의 관계, c) 분할된 인식의 관계와 상호간의 구분의 취합된 마디들의 관계이다.→ 첫번째 관계에서 판단의 기능은 단지 두 가지 개념들을, 두번째 관계에서는 두 가지 판단들을, 세번째 관계에서는 더 많은 판단들을 상호 관계에 있어서 관찰된다.→ 완전한 정의가 여기에 있을 때에는, 그래서 완강한 죄인들은 처벌받는다는 가설적 명제는 본래, 하나의 완전한 정의가 여기에 있다는, 그리고 완강한 죄인들이 처벌받는다는 두 명제들의 관계를 포함한다.→ 이러한 명제들 둘 모두가 그 자체로 참인지 아닌지는, 여기에서 결정되지 않고 남는다.→ 그것은 단지 이러한 판단을 통해 생각되는 결론일 뿐이다.

 

 

 

 

Des Leitfadens der Entdeckung aller reinen Verstandesbegriffe

모든 순수 지성개념들의 발견의 실마리

Zweiter Abschnitt

제 2장

§ 9. Von der logischen Funktion des Verstandes in Urteilen

§ 9. 판단에서 지성의 논리적 기능에 대해서

Wenn wir von allem Inhalte eines Urteils überhaupt abstrahieren, und nur auf die bloße Verstandesform darin Acht geben, so finden wir, daß die Funktion des Denkens in demselben unter vier Titel gebracht werden könne, deren jeder drei Momente unter sich enthält.

만일 우리가 판단 전반의 모든 내용들을 추상한다면,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단지 순전한 지성형식에만 주목한다면, 우리는 발견한다, 지성의 기능이 그 판단 자체에서 네 항목들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그 항목들의 각각이 세 계기들을 포섭하는.

→ 만일 우리가 판단 전반의 모든 내용들을 추상하고 그 점에 있어서 단지 순전한 지성형식에만 주목한다면 우리는 지성의 기능이 그 판단 자체에서 그 각각이 세 계기들을 포섭하는 네 항목들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Sie können füglich in folgender Tafel vorgestellt werden.

그 항목들은 적합하게 다음 표에서 제시될 수 있다.

→ 그 항목들은 적절하게 다음 표에서 제시될 수 있다.


 

 1. Quantität der Urteile.

판단의 양

 

 

 Allgemeine 전칭

 Besondere 특칭

 Einzelne 단칭

 

 2. Qualität.

 

 3. Relation. 관계

 Bejahende 긍정

 Verneinende 부정

 Unendliche 무한

 

 Kategorische 정언

 Hypothetische 가언

 Disjunktive 선언

 

 4. Modalität. 양상

 

 

 Problematische 개연

 Assertorische 단정

 Apodiktische 필연

 


Da diese Einteliung in einigen, obgleich nicht wesentlichen Stücken, von der gewohnten Technik der Logiker abzuweichen scheint, so werden folgende Verwahrungen wider den besorglichen Mißverstand nicht unnötig sein.

이러한 구분은 몇몇 부분들에서, 비록 본질적인 부분들에서는 아니더라도, 논리학자들의 통례의 기술과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염려되는 오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의들이 불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 이러한 구분은 비록 본질적인 부분들에서는 아니더라도 몇몇 부분들에서 논리학자들의 통상적인 기술과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염려되는 오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의들이 불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1. Die Logiker sagen mit Recht, daß man beim Gebrauch der Urteile in Vernunftschlüssen die einzelnen Urteile gleich den allgemeinen behandeln könne.

1. 논리학자들은 정당하게 말한다, 사람들은 이성 추론들에서 판단들의 사용에 있어서 단칭 판단들을 전칭 판단들과 마찬가지로 취급할 수 있다고.

→1. 논리학자들이 사람들은 이성 추론들에서 판단들의 사용에 있어서 단칭 판단들을 전칭 판단들과 마찬가지로 취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Denn eben darum, weil sie gar keinen Umfang haben, kann das Prädikat derselben nicht bloß auf einiges dessen, was unter dem Begriff des Subjekts enthalten ist, gezogen, von einigem aber ausgenommen werden.

왜냐하면 정확히 그 점에서, 단칭 판단들이 전혀 아무런 외연도 가지지 않으므로, 그 단칭 판단들의 술어가 순전히 몇몇에만, 주어의 개념 아래에 포함되는, 관련되고, 몇몇에는 제외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단칭 판단들이 전혀 아무런 외연도 가지지 않으므로 정확히 그 점에서 그 판단들의 술어가 주어의 개념 아래에 포함되는 몇몇에만 관련되고 몇몇에는 제외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s gilt also von jenem Begriffe ohne Ausnahme, gleich als wenn derselbe ein gemeingültiger Begriff wäre, der einen Umfang hätte, von dessen ganzer Bedeutung das Prädikat gelte.

그러므로 그 단칭 판단은 모든 개념들에 대해 예외 없이 유효하다, 동일한 판단이 보편타당한 개념이라면, 그 개념이 외연을 가질, 전체 의미의 개념에 대해 술어가 타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 그러므로 그 단칭 판단은 모든 개념들에 대해서 예외 없이 유효한데, 동일한 판단이 외연을 가지는 보편타당한 개념일 경우 전체 의미의 개념에 대해 술어가 타당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Vergleichen wir dagegen ein einzelnes Urteil mit einem gemeingültigen, bloß als Erkenntnis, der Größe nach, so verhält sie sich zu diesem wie Einheit zur Unendlichkeit, und ist also sich selbst davon wesentlich unterschieden.

우리는 그에 대해 단칭 판단을 보편타당한 판단에 비유한다, 순전히 인식으로서, 그 인식이 크기에 따르는, 그래서 이러한 판단에 그 인식이 무한성에 대한 통일성과 같이 관계하고, 그러므로 그 인식 자체는 그로부터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 우리는 그에 반해 단칭 판단을 크기에 따르는 순전한 인식으로서 보편타당한 판단에 비유한다. 그래서 이러한 판단에 그 인식이 무한성에 대한 통일성과 같이 관계하고, 그러므로 그 인식 자체는 그로부터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Also, wenn ich ein einzelnes Urteil (judicium singulare) nicht bloß nach seiner innern Gültigkeit, sondern auch, als Erkenntnis überhaupt, nach der Größe, die es in Vergleichung mit andern Erkenntnissen hat, schätze, so ist es allerdings von gemeingültigen Urteilen (judicia communia) unterschieden, und verdient in einer vollständigen Tafel der Momente des Denkens überhaupt (obzwar freilich nicht in der bloß auf den Gebrauch der Urteile untereinander eingeschränkten Logik) eine besondere Stelle.

그러므로, 만일 내가 단칭 판단(iudicium, 판단 + singularis gen.)을 단지 그 판단의 내적 정당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식 전반으로, 크기에 따라서, 그 크기를 그 판단이 다른 인식들과의 비교 속에서 가지는, 평가한다면, 그래서 그 판단은 당연히 보편타당한 판단들(iudicium + communis a.)과 구분되고, 사유 전반의 계기들의 완전한 도표 안에서 (비록 확실히 판단들 상호의 사용에 대한 제한된 논리학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특수한 위치를 차지할 만하다.

→ 그러므로 만일 내가 단칭 판단을 단지 그 내적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 전반으로서 다른 인식들과의 비교 속에서 가지는 크기에 따라 평가한다면, 그 판단은 당연히 보편타당한 판단들과 구분되고, 사유 전반의 계기들의 완전한 도표 안에서 (비록 확실히 판단들 상호의 사용에 대한 제한된 논리학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특수한 위치를 차지할 만하다.

 

2. Eben so müssen in einer transzendentalen Logik unendliche Urteile von bejahenden noch unterschieden werden, wenn sie gleich in der allgemeinen Logik jenen mit Recht beigezählt sind und kein besonderes Glied der Einteilung ausmachen.

2. 마찬가지로 초월론적 논리학에서 무한판단들은 긍정판단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비록 그 무한판단들이 일반 논리학에서 정당하게 저 긍정판단들로 셈해지고 구분의 어떠한 특수한 절도 형성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 2. 마찬가지로, 비록 그 무한판단들이 일반 논리학에서 정당하게 저 긍정판단들로 셈해지고 구분의 어떠한 특수한 절도 형성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월론적 논리학에서 무한판단들은 긍정판단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Diese nämlich abstrahieret von allem Inhalt des Prädikats (ob es gleich verneinend ist) und sieht nur darauf, ob dasselbe dem Subjekt beigelegt, oder ihm entgegengesetzt werde.

다시 말해 이러한 무한판단은 술어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고 (비록 그 내용이 부정이라 할지라도) 단지 그에 대해서 본다, 그 술어 자체가 주어에 덧붙여지는지, 또는 그 주어에 반대되는지.

→ 다시 말해 이러한 무한판단은 술어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고 (비록 그 내용이 부정이라 할지라도) 단지, 그 술어 자체가 주어에 덧붙여지는지, 또는 그 주어에 반대되는지 그에 대해서만 본다.

Jene aber betrachtet das Urteil auch nach dem Werte oder Inhalt dieser logischen Bejahung vermittelst eines bloß verneinenden Prädikats, und was diese in Ansehung des gesamten Erkenntnisses für einen Gewinn verschafft.

그러나 저 긍정판단은 판단을 또한 순전한 부정 술어에 따라서 이러한 논리적 긍정의 값이나 내용에 따라 평가하고, 이러한 것을 이익에 대한 전체 인식의 고려 속에서 이러한 것을 마련하는 것을 평가한다.

→ 그러나 저 긍정판단은 판단을 또한 순전한 부정 술어에 따라서 이러한 논리적 긍정의 값이나 내용에 따라 평가하고, 이러한 것을 이익에 대한 전체 인식의 고려 속에서 이러한 것을 마련하는 것을 평가한다.

Hätte ich von der Seele gesagt, sie ist nicht sterblich, so hätte ich durch ein verneinendes Urteil wenigstens einen Irrtum abgehalten.

내가 영혼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영혼이 필멸이 아니라고, 그래서 나는 부정판단을 통하여 최소한 오류를 막을 것이다.

→ 내가 영혼에 대해 영혼이 필멸이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면 나는 부정판단을 통하여 최소한 오류를 막을 것이다.

Nun habe ich durch den Satz: die Seele ist nichtsterblich, zwar der logischen Form nach wirklich bejahet, indem ich die Seele in den unbeschränkten Umfang der nichtsterbenden Wesen setze.

이제 나는 영혼은 불사적이다라는 명제를 통하여, 더욱이 그 논리적 형식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긍정한다, 내가 영혼을 불멸하는 실체들의 무한정한 범위 안으로 놓음으로써.

→ 이제 나는, 내가 영혼을 불멸하는 실체들의 무한정한 범위 안으로 놓음으로써, 영혼은 불사적이다라는 명제를 통하여, 더욱이 그 논리적 형식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긍정한다.

Weil nun von dem ganzen Umfang möglicher Wesen das Sterbliche einen Teil enthält, das Nichtsterbende aber den andern, so ist durch meinen Satz nichts anders gesagt, als daß die Seele eines von der unendlichen Menge Dinge sei, die übrig bleiben, wenn ich das Sterbliche insgesamt wegnehme.

이제 가능한 실체들의 전범위로부터 필멸하는 것이 일부분을 포함하고, 그러나 불멸하는 것은 다른 부분을 (포함하므로), 그래서 나의 명제를 통해서 다른 아무것도 이야기되지 않는다, 영혼은 무한히 많은 것들에 대한 하나일 것이다, 그 많은 것들이 남아 있는, 내가 필멸하는 것 모두를 제거할 때.

→ 이제 가능한 실체들의 전범위로부터 필멸하는 것이 일부분을 포함하고, 그러나 불멸하는 것은 다른 부분을 (포함하므로), 그래서 나의 명제를 통해서, 영혼은 내가 필멸하는 것 모두를 제거할 때 남아 있는 무한히 많은 것들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이야기되지 않는다.

Dadurch aber wird nur die unendliche Sphäre alles Möglichen in so weit beschränkt, daß das Sterbliche davon abgetrennt, und in dem übrigen Raum ihres Umfangs die Seele gesetzt wird.

그러나 그를 통하여 다만 모든 가능한 것의 무한한 범위가 그 만큼에서 한정된다, 필멸하는 것을 그로부터 분리시키고, 그 범위의 남은 공간에 영혼이 놓인다는 것.

→ 그러나 그를 통하여 다만 모든 가능한 것의 무한한 범위가, 필멸하는 것을 그로부터 분리시키고, 그 범위의 남은 공간에 영혼이 놓인다는 것, 그 만큼에서 한정된다.

Dieser Raum bleibt aber bei dieser Ausnahme noch immer unendlich, und können noch mehrere Teile desselben weggenommen werden, ohne daß darum der Begriff von der Seele im mindesten wächst, und bejahend bestimmt wird.

그러나 이러한 공간은 이러한 예외에 있어서 여전히 무한하고, 그 공간의 더 많은 부분들이 제거될 수 있다, 영혼에 대한 개념이 최소한으로 확장되거나, 또 긍정적으로 규정되는 것 없이.

→ 그러나 이러한 공간은 이러한 예외에 있어서 여전히 무한하고, 그 공간의 더 많은 부분들이, 영혼에 대한 개념이 최소한으로 확장되거나, 또 긍정적으로 규정되는 것 없이 제거될 수 있다.

Diese unendliche Urteile also in Ansehung des logischen Umfanges sind wirklich bloß beschränkend in Ansehung des Inhalts der Erkenntnis überhaupt, und in so fern müssen sie in der transtzendentalen Tafel aller Momente des Denkens in den Urteilen nicht übergangen werden, weil die hierbei ausgeübte Funktion des Verstandes vielleicht in dem Felde seiner reinen Erkenntnis a priori wichtig sein kann.

이러한 무한한 판단들은 그러므로 논리적 범위의 고려 속에서 실제로 순전히 인식 전반의 내용에 대한 고려에서 제한되고, 그러한 한에서 무한한 판단들이 판단들 속에서 사유의 모든 계기들의 초월론적 목록표 안에서 넘어서게 되지 않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하여 수행된 지성의 활동은 아마도 그 지성의 순수한 선험적 인식의 범위 안에서 주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무한한 판단들은 그러므로 논리적 범위의 고려 속에서 실제로 순전히 인식 전반의 내용에 대한 고려에서 제한되고, 그러한 한에서 무한한 판단들이 판단들 속에서 사유의 모든 계기들의 초월론적 목록표 안에서 넘어서게 되지 않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하여 수행된 지성의 활동은 아마도 그 지성의 순수한 선험적 인식의 범위 안에서 주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Alle Verhältnisse des Denkens in Urteilen sind die a) des Prädikats zum Subjekt, b) des Grundes zur Folge, c) der eingeteilten Erkenntnis und der gesammleten Glieder der Einteilung unter einander.

3. 판단들 속에서 사유의 모든 관계들은 a) 주어에 대한 술어의 관계, b) 결과에 대한 원인의 관계, c) 분할된 인식의 관계와 상호간의 구분의 취합된 마디들의 관계이다.

→ 3. 판단들 속에서 사유의 모든 관계들은 a) 주어에 대한 술어의 관계, b) 결과에 대한 원인의 관계, c) 분할된 인식의 관계와 상호간의 구분의 취합된 마디들의 관계이다.

In der ersteren Art der Urteile sind nur zwei Begriffe, in der zweiten zweene Urteile, in der dritten mehrere Urteile im Verhältnis gegen einander betrachtet.

첫번째 관계에서 판단의 기능은 단지 두 가지 개념들을, 두번째 관계에서는 두 가지 판단들을, 세번째 관계에서는 더 많은 판단들을 상호 관계에 있어서 관찰된다.

→ 첫번째 관계에서 판단의 기능은 단지 두 가지 개념들을, 두번째 관계에서는 두 가지 판단들을, 세번째 관계에서는 더 많은 판단들을 상호 관계에 있어서 관찰된다.

Der hypothetische Satz: wenn eine vollkommene Gerechtigkeit da ist, so wird der beharrlich Böse bestraft, enthält eigentlich das Verhältnis zweier Stätze: Es ist eine vollkommene Gerechtigkeit da, und der beharllich Böse wird bestraft.

가설적 명제: 완전한 정의가 여기에 있을 때에는, 그래서 완강한 죄인들은 처벌받는다, 는 본래 두 명제들의 관계를 포함한다: 하나의 완전한 정의가 여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완강한 죄인들이 처벌받는다는 것이다.

→ 완전한 정의가 여기에 있을 때에는, 그래서 완강한 죄인들은 처벌받는다는 가설적 명제는 본래, 하나의 완전한 정의가 여기에 있다는, 그리고 완강한 죄인들이 처벌받는다는 두 명제들의 관계를 포함한다.

Ob beide dieser Sätze an sich wahr sein, bleibt hier unausgemacht.

이러한 명제들 둘 모두가 그 자체로 참인지 아닌지는, 여기에서 결정되지 않고 남는다.

→ 이러한 명제들 둘 모두가 그 자체로 참인지 아닌지는, 여기에서 결정되지 않고 남는다.

Es ist nur die Konsequenz, die durch dieses Urteil gedacht wird.

그것은 단지 결론일 뿐이다, 그 결론이 이러한 판단을 통해 생각되는.

→ 그것은 단지 이러한 판단을 통해 생각되는 결론일 뿐이다.

 

-蟲-

Die Transzendentalphilosophie hat den Vorteil, aber auch die Verbindlichkeit, ihre Begriffe nach einem Prinzip aufzusuchen; weil sie aus dem Verstande, als absoluter Einheit, rein und unvermischt entspringen, und daher selbst nach einem Begriffe, oder Idee, unter sich zusammenhangen mussen. Ein solcher Zusammenhang aber gibt eine Regel an die Hand, nach welcher jedem reinen Verstandesbegriff seine Stelle und allen insgesamt ihre Vollstandigkeit a priori bestimmt werden kann, welches alles sonst vom Belieben, oder vom Zufall abhangen wurde.

→ 초월론적 철학은 그 철학의 개념들을 원칙에 따라 찾아낸다는 이점이자 의무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은 절대정 통일성으로서의 지성으로부터 순수하고 뒤섞이지 않고서 유래하고, 그런 이유로 그 자체로 한 개념 혹은 이념에 따라서 그 개념들 아래로 결합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합은 그에 따라서 각각의 순수 지성 개념이 그 개념의 위치와 그 위치의 선험적 완전성에 있어서 규정될 수 있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의향에, 혹은 우연에 의존하였을 규칙을 제공한다.

 

Des Transzendenatlen Leitfadens der Entdeckung aller reinen Verstandesbegriffe

모든 순수 지성개념들의 발견의 초월론적 실마리

Erster Abschnitt

제 1장

Von dem logischen Verstandesgebrauche uberhaupt

논리적 지성사용 전반에 대하여

 

Der Verstand wurde oben bloß negativ erklart: durch ein nichtsinnliches Erkenntnisvermogen. Nun konnen wir, unabhangig von der Sinnlichkeit, keiner Anschauung teilhaftig werden. Also ist der Verstand kein Vermogen der Anschauung. Es gibt aber, außer der Anschauung, keine andere Art, zu erkennen, als durch Begriffe. Also ist die Erkenntnis eines jeden, wenigstens des menschlichen, Verstandes, eine Erkenntnis durch Begriffe, nicht intuitiv, sondern diskursiv. Alle Anschauungen, als sinnlich, beruhen auf Affektionen, die Begriffe also auf Funktionen. Ich verstehe aber unter Funktion die Einheit der Handlung, verschiedene Vorstellungen unter einer gemeinschaftlichen zu ordnen. Begriffe grunden sich also auf der Spontaneitat des Denkens, wie sinnliche Anschauungen auf der Rezeptivitat der Eindrucke. Von diesen Begriffen kann nun der Verstand keinen andern Gebrauch machen, als daß er dadurch urteilt. Da keine Vorstellung unmittelbar auf den Gegenstand geht, als bloß die Anschauung, so wird ein Begriff niemals auf einen Gegenstand unmittelbar, sondern auf irgend eine andre Vorstellung von demselben (sie sei Anschauung oder selbst schon Begriff) bezogen. Das Urteil ist also die mittelbare Erkenntnis eines Gegenstandes, mithin die Vorstellung einer Vorstellung desselben. In jedem Urteil ist ein Begriff, der fur viele gilt, und unter diesem Vielen auch eine gegebene Vorstellung begreift, welche letztere denn auf den Gegenstand unmittelbar bezogen wird. So bezieht sich z.B. in dem Urteile: alle Korper sind teilbar, der Begriff des Teilbaren auf verschiedene andere Begriffe; unter diesen aber wird er hier besonders auf den Begriff des Korpers bezogen; dieser aber auf gewisse uns vorkommende Erscheinungen. Also werden diese Gegenstande durch den Begriff der Teilbarkeit mittelbar vorgestellt. Alle Urteile sind demnach Funktionen der Einheit unter unsern Vorstellungen, da namlich statt einer unmittelbaren Vorstellung eine hohere, die diese und mehrere unter sich begreift, zur Erkenntnis des Gegenstandes gebraucht, und viel mogliche Erkenntnisse dadurch in einer zusammengezogen werden. Wir konnen aber alle Handlungen des Verstandes auf Urteile zuruckfuhren, so daß der Verstand uberhaupt als ein Vermogen zu urteilen vorgestellt werden kann. Denn er ist nach dem obigen ein Vermogen zu denken. Denken ist das Erkenntnis durch Begriffe. Begriffe aber beziehen sich, als Pradikate moglicher Urteile, auf irgend eine Vortsellung von einem noch unbestimmten Gegenstande. So bedeutet der Begriff des Korpers etwas, z.B. Metall, was durch jenen Begriff erkannt werden kann. Er ist also nur dadurch jenen Begriff, daß unter ihm andere Vorstellungen enthalten sind, vermittelst deren er sich auf Gegenstande beziehen kann. Er ist also das Pradikat zu einem moglichen Urteile, z.B. ein jedes Metall ist ein Korper. Die Funktionen des Verstandes konnen also insgesamt gefunden werden, wenn man die Funktionen der Einheit in den Urteilen vollstandig darstellen kann. Daß dies aber sich ganz wohl bewerkstelligen lasse, wird der folgende Abschnitt vor Augen stellen.

→ 지성은 위에서 비감성적 인식능력을 통하여 순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제 우리는 감성에 대하여 예속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직관에도 관여하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지성은 그 어떠한 직관의 능력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최소한 인간의, 지성의 인식은 개념을 통한 인식이고 직관적이지 않고 논증적이다.→ 모든 직관들은 감성적인 것으로서 자극(촉발)에 근거하고, 그러므로 개념들은 기능에 근거한다.→ 그러나 나는 기능이란 말을 상이한 표상들을 공동의 표상으로 질서지우는 행위의 통일성으로 이해한다.→ 개념들은 그러므로 감성적 직관이 인상의 수용성에 기초하는 것처럼 사유의 자발성에 기초한다.→ 이러한 개념에 대하여 이제 지성은 개념을 통하여 판단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떠한 사용도 형성할 수 없다.→ 순전한 직관 이외에 어떠한 표상도 직접 대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므로, 개념도 전혀 대상에 직접 적용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직관이든 그 자체로 이미 개념이든) 좌우간 그 대상에 대한 다른 표상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판단은 대상에 대한 간접적 인식이고, 따라서 그 대상의 표상의 표상이다.→각각의 판단에는 많은 것들에 적용되는 개념이 있고 이러한 많은 것들 아래에서 또한 주어진 표상을 이해하는, 종국에는 대상에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개념이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가분적이다, 라는 판단에서 가분성의 개념은 상이한 다른 개념들과 관계맺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그 개념은 여기에서 특히 물체의 개념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특정한 현상들에 관계된다.→ 모든 판단들은 그에 따라 우리의 표상들 아래에서 통일의 자발성이다. 즉 직접적인 표상 대신에 이러한 표상과 몇 몇 표상을 자신 아래에서 포괄하는 더 상위의 표상이, 대상의 인식에 사용되고, 많은 가능한 인식들이 그를 통하여 그 안으로 모인다.→ 그러나 우리는 지성의 모든 활동들의 원인을 판단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지성 전반이 판단하는 능력으로서 표상될 수 있다. → 왜냐하면 지성은 앞서 말한 바에 따라 사유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개념을 통한 인식이다.→ 그러나 개념들은 가능한 판단들의 술어로서, 어떻든 규정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표상에 적용된다.→ 그래서 어떤 물체에 대한 개념, 예를 들어 금속의 개념은 저런 개념을 통해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단지 그를 통하여 그 아래에 그에 따라 개념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그러한 다른 표상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 개념은 그러므로 가능한 판단, 예를 들어 각각의 금속은 물체라는 판단의 술어이다.→ 지성의 기능은 그러므로, 만일 사람들이 판단들에서 통일의 기능을 완전히 명시할 수 있다면 모두 다 발견될 수 있다.→ 이러한 것이 그러나 전적으로 잘 성취될 것이라는 것은, 다음 장이 명시할 것이다.

 

 

 

 

Die Transzendentalphilosophie hat den Vorteil, aber auch die Verbindlichkeit, ihre Begriffe nach einem Prinzip aufzusuchen; weil sie aus dem Verstande, als absoluter Einheit, rein und unvermischt entspringen, und daher selbst nach einem Begriffe, oder Idee, unter sich zusammenhangen mussen.

초월론적 철학은 이점을 지닌다, 그러나 의무 또한 가진다, 그 철학의 개념들을 원칙에 따라 찾아낸다는; 왜냐하면 그 개념들은 지성으로부터, 절대정 통일성으로서, 순수하고 뒤섞이지 않고서 유래하고, 그런 이유로 그 자체로 한 개념에, 혹은 이념에 따라서, 그 개념들 아래로 결합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초월론적 철학은 그 철학의 개념들을 원칙에 따라 찾아낸다는 이점이자 의무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은 절대정 통일성으로서의 지성으로부터 순수하고 뒤섞이지 않고서 유래하고, 그런 이유로 그 자체로 한 개념 혹은 이념에 따라서 그 개념들 아래로 결합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Ein solcher Zusammenhang aber gibt eine Regel an die Hand, nach welcher jedem reinen Verstandesbegriff seine Stelle und allen insgesamt ihre Vollstandigkeit a priori bestimmt werden kann, welches alles sonst vom Belieben, oder vom Zufall abhangen wurde.

그러나 그러한 결합은 규칙을 제공한다, 그 규칙에 따라서 각각의 순수 지성 개념이 그 개념의 위치와 그 위치의 선험적 완전성에 있어서 규정될 수 있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의향에, 혹은 우연에 의존하였을.

→ 그러나 그러한 결합은 그에 따라서 각각의 순수 지성 개념이 그 개념의 위치와 그 위치의 선험적 완전성에 있어서 규정될 수 있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의향에, 혹은 우연에 의존하였을 규칙을 제공한다.

 

Des Transzendenatlen Leitfadens der Entdeckung aller reinen Verstandesbegriffe

모든 순수 지성 개념들의 발견의 초월론적 실마리

Erster Abschnitt

제 1 장

Von dem logischen Verstandesgebrauche uberhaupt

논리적 지성사용 전반에 대하여

 

Der Verstand wurde oben bloß negativ erklart: durch ein nichtsinnliches Erkenntnisvermogen.

지성은 위에서 순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비감성적 인식능력을 통하여.

→ 지성은 위에서 비감성적 인식능력을 통하여 순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Nun konnen wir, unabhangig von der Sinnlichkeit, keiner Anschauung teilhaftig werden.

이제 우리는, 감성에 대하여 예속되지 않고, 어떠한 직관에도 관여하게 될 수 없다.

→ 이제 우리는 감성에 대하여 예속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직관에도 관여하게 될 수 없다.

Also ist der Verstand kein Vermogen der Anschauung.

그러므로 지성은 그 어떠한 직관의 능력도 아니다.

→ 그러므로 지성은 그 어떠한 직관의 능력도 아니다.

Es gibt aber, außer der Anschauung, keine andere Art, zu erkennen, als durch Begriffe.

그러나 직관 이외에는 개념을 통하는 것 외에 인식하는 다른 어떠한 방법도 없다.

→ 그러나 직관 이외에는 개념을 통하는 것 외에 인식하는 다른 어떠한 방법도 없다.

Also ist die Erkenntnis eines jeden, wenigstens des menschlichen, Verstandes, eine Erkenntnis durch Begriffe, nicht intuitiv, sondern diskursiv.

그러므로 각각의, 최소한 인간의, 지성의 인식은 개념을 통한 인식이고 직관적이지 않고 논증적이다.

→ 그러므로 각각의, 최소한 인간의, 지성의 인식은 개념을 통한 인식이고 직관적이지 않고 논증적이다.

Alle Anschauungen, als sinnlich, beruhen auf Affektionen, die Begriffe also auf Funktionen.

모든 직관들은, 감성적인 것으로서, 자극(촉발)에 근거하고, 그러므로 개념들은 기능에 근거한다.

→ 모든 직관들은 감성적인 것으로서 자극(촉발)에 근거하고, 그러므로 개념들은 기능에 근거한다.

Ich verstehe aber unter Funktion die Einheit der Handlung, verschiedene Vorstellungen unter einer gemeinschaftlichen zu ordnen.

그러나 나는 기능이란 말을 행위의 통일성으로 이해한다, 상이한 표상들을 공동의 표상으로 질서지우는.

→ 그러나 나는 기능이란 말을 상이한 표상들을 공동의 표상으로 질서지우는 행위의 통일성으로 이해한다.

Begriffe grunden sich also auf der Spontaneitat des Denkens, wie sinnliche Anschauungen auf der Rezeptivitat der Eindrucke.

개념들은 그러므로 사유의 자발성에 기초한다, 감성적 직관이 인상의 수용성에 기초하는 것처럼.

→ 개념들은 그러므로 감성적 직관이 인상의 수용성에 기초하는 것처럼 사유의 자발성에 기초한다.

Von diesen Begriffen kann nun der Verstand keinen andern Gebrauch machen, als daß er dadurch urteilt.

이러한 개념들에 대하여 이제 지성은 다른 어떠한 사용도 형성할 수 없다, 지성이 그를 통하여 판단하는 것 이외의.

→ 이러한 개념에 대하여 이제 지성은 개념을 통하여 판단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떠한 사용도 형성할 수 없다.

Da keine Vorstellung unmittelbar auf den Gegenstand geht, als bloß die Anschauung, so wird ein Begriff niemals auf einen Gegenstand unmittelbar, sondern auf irgend eine andre Vorstellung von demselben (sie sei Anschauung oder selbst schon Begriff) bezogen.

어떠한 표상도 직접 대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므로, 순전한 직관 이외에, 개념도 전혀 대상에 직접 적용되지 않고, 오히려 좌우간 (그것이 직관이든 그 자체로 이미 개념이든) 그 대상에 대한 다른 표상에 적용된다.

→ 순전한 직관 이외에 어떠한 표상도 직접 대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므로, 개념도 전혀 대상에 직접 적용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직관이든 그 자체로 이미 개념이든) 좌우간 그 대상에 대한 다른 표상에 적용된다.

Das Urteil ist also die mittelbare Erkenntnis eines Gegenstandes, mithin die Vorstellung einer Vorstellung desselben.

그러므로 판단은 대상에 대한 간접적 인식이고, 따라서 그 대상의 표상의 표상이다.

→ 그러므로 판단은 대상에 대한 간접적 인식이고, 따라서 그 대상의 표상의 표상이다.

In jedem Urteil ist ein Begriff, der fur viele gilt, und unter diesem Vielen auch eine gegebene Vorstellung begreift, welche letztere denn auf den Gegenstand unmittelbar bezogen wird.

각각의 판단에는 개념이 있다, 그 개념이 많은 것들에 적용되는, 그리고 이러한 많은 것들 아래에서 또한 주어진 표상을 이해하는, 종국에는 대상에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각각의 판단에는 많은 것들에 적용되는 개념이 있고 이러한 많은 것들 아래에서 또한 주어진 표상을 이해하는, 종국에는 대상에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개념이 있다.

So bezieht sich z.B. in dem Urteile: alle Korper sind teilbar, der Begriff des Teilbaren auf verschiedene andere Begriffe; unter diesen aber wird er hier besonders auf den Begriff des Korpers bezogen; dieser aber auf gewisse uns vorkommende Erscheinungen.

그래서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가분적이다, 라는 판단에서 가분성의 개념은 상이한 다른 개념들과 관계맺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그 개념은 여기에서 특히 물체의 개념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특정한 현상들에 관계된다.

→ 그래서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가분적이다, 라는 판단에서 가분성의 개념은 상이한 다른 개념들과 관계맺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그 개념은 여기에서 특히 물체의 개념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특정한 현상들에 관계된다.

Also werden diese Gegenstande durch den Begriff der Teilbarkeit mittelbar vorgestellt.

그러므로 이러한 대상들은 가분성의 개념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표상된다.

→ 그러므로 이러한 대상들은 가분성의 개념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표상된다.

Alle Urteile sind demnach Funktionen der Einheit unter unsern Vorstellungen, da namlich statt einer unmittelbaren Vorstellung eine hohere, die diese und mehrere unter sich begreift, zur Erkenntnis des Gegenstandes gebraucht, und viel mogliche Erkenntnisse dadurch in einer zusammengezogen werden.

모든 판단들은 그에 따라 우리의 표상들 아래에서 통일의 자발성이다, 즉 직접적인 표상 대신에 더 상위의 표상이, 그 표상이 이러한 표상과 몇 몇 표상을 자신 아래에서 포괄하는, 대상의 인식에 사용되고, 많은 가능한 인식들이 그를 통하여 그 안으로 모인다.

→ 모든 판단들은 그에 따라 우리의 표상들 아래에서 통일의 자발성이다. 즉 직접적인 표상 대신에 이러한 표상과 몇 몇 표상을 자신 아래에서 포괄하는 더 상위의 표상이, 대상의 인식에 사용되고, 많은 가능한 인식들이 그를 통하여 그 안으로 모인다.

Wir konnen aber alle Handlungen des Verstandes auf Urteile zuruckfuhren, so daß der Verstand uberhaupt als ein Vermogen zu urteilen vorgestellt werden kann.

그러나 우리는 지성의 모든 활동들의 원인을 판단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지성 전반이 판단하는 능력으로서 표상될 수 있다.

→ 그러나 우리는 지성의 모든 활동들의 원인을 판단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지성 전반이 판단하는 능력으로서 표상될 수 있다.

Denn er ist nach dem obigen ein Vermogen zu denken.

왜냐하면 지성은 앞서 말한 바에 따라 사유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지성은 앞서 말한 바에 따라 사유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Denken ist das Erkenntnis durch Begriffe.

사유는 개념을 통한 인식이다.

→ 사유는 개념을 통한 인식이다.

Begriffe aber beziehen sich, als Pradikate moglicher Urteile, auf irgend eine Vortsellung von einem noch unbestimmten Gegenstande.

그러나 개념들은 가능한 판단들의 술어로서, 어떻든 규정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표상에 적용된다.

→ 그러나 개념들은 가능한 판단들의 술어로서, 어떻든 규정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표상에 적용된다.

So bedeutet der Begriff des Korpers etwas, z.B. Metall, was durch jenen Begriff erkannt werden kann.

그래서 어떤 물체에 대한 개념, 예를 들어 금속의 개념은 저런 개념을 통해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 그래서 어떤 물체에 대한 개념, 예를 들어 금속의 개념은 저런 개념을 통해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Er ist also nur dadurch jenen Begriff, daß unter ihm andere Vorstellungen enthalten sind, vermittelst deren er sich auf Gegenstande beziehen kann.

그러므로 그 개념은 단지 그를 통하여 저러한 개념이다, 그 개념 아래에 다른 표상들을 포함하는, 그 표상들에 따라 개념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 그러므로 그 개념은 단지 그를 통하여 그 아래에 그에 따라 개념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그러한 다른 표상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Er ist also das Pradikat zu einem moglichen Urteile, z.B. ein jedes Metall ist ein Korper.

그 개념은 그러므로 가능한 판단, 예를 들어 각각의 금속은 물체라는 판단의 술어이다.

→ 그 개념은 그러므로 가능한 판단, 예를 들어 각각의 금속은 물체라는 판단의 술어이다.

Die Funktionen des Verstandes konnen also insgesamt gefunden werden, wenn man die Funktionen der Einheit in den Urteilen vollstandig darstellen kann.

지성의 기능은 그러므로 모두 다 발견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판단들에서 통일의 기능을 완전히 명시할 수 있다면.

→ 지성의 기능은 그러므로, 만일 사람들이 판단들에서 통일의 기능을 완전히 명시할 수 있다면 모두 다 발견될 수 있다.

Daß dies aber sich ganz wohl bewerkstelligen lasse, wird der folgende Abschnitt vor Augen stellen.

이러한 것이 그러나 전적으로 잘 성취될 것이라는 것은, 다음 장이 명시할 것이다.

→ 이러한 것이 그러나 전적으로 잘 성취될 것이라는 것은, 다음 장이 명시할 것이다.


-蟲-

Wir werden also die reinen Begriffe bis zu ihren ersten Keimen und Anlagen im menschlichen Verstande verfolgen, in denen sie vorbereitet liegen, bis sie endlich bei Gelegenheit der Erfahrung entwickelt und durch eben denselben Verstand, von den ihnen anhängenden empirischen Bedingungen befreiet, in ihrer Lauterkeit dargestellt werden.

→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 개념들을 그 발단들 안에 준비되어 있는 개념들이 결국 경험을 계기로 전개되고 개념들에 부수하는 경험적 조건들을 제거한 바로 그와 같은 지성을 통하여 그 개념들의 순수성에서 묘사될 때까지 그 개념들의 최초 기원과 발단까지 인간 지성 안에서 추적할 것이다.

 

Der Analytik der Begriffe

개념의 분석학

Erstes Hauptstück

제 1 부문

Von den Leitfaden der Entdeckung aller reinen Verstandesbegriffe

모든 순수지성개념들을 발견할 실마리에 대하여

 

Wenn man ein Erkenntnisvermögen ins Spiel setzt, so tun sich, nach den mancherlei Anlässen, verschiedene Begriffe hervor, die dieses Vermögen kennbar machen und sich in einem mehr oder weniger ausführlichen Aufsatz sammeln lassen, nachdem die Beobachtung derselben längere Zeit, oder mit größerer Scharfsinnigkeit angestellt worden. Wo diese Untersuchung werde vollendet sein, läßt sich, nach diesem gleichsam mechanischen Verfahren, niemals mit Sicherheit bestimmen. Auch entdecken sich die Begriffe, die man nur so bei Gelegenheit auffindet, in keiner Ordnung und systematischen Einheit, sondern werden zuletzt nur nach Ähnlichkeiten gepaart und nach der Größe ihres Inhalts, von den einfachen an, zu den mehr zusammengesetzten, in Reihen gestellt, die nichts weniger als systematisch, obgleich auf gewisse Weise methodisch zu Stande gebracht werden.

→ 사람들이 인식능력을 여러가지 계기들에 따라 시도해 볼 때 상이한 개념들이 드러난다. 그 개념들을 이러한 능력이 오랜 시간, 혹은 대단한 예리함을 가지고 관찰이 시도된 뒤에 가지(可知)적으로 만들고 그 자체로 다소간 상세한 논고 안에서 모으도록 한다.→ 이러한 말하자면 기계적인 방식에 따라서 이러한 조사가 어디에서 완수될 것인가는 전혀 확실하게 정하도록 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이 단지 그러한 기회에 발견한 개념들은 어떠한 질서나 체계적 통일에서도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결국에는 단지 유사점들에 따라 결합되고 그 개념들의 내용의 크기에 따라, 단순한 것으로부터 더 복합적인 것에까지, 줄 세워진다. 비록 확실한 방식에서 방법적으로 성취된다 할지라도 그 줄은 전혀 체계적이지 않다.

 

 

Wir werden also die reinen Begriffe bis zu ihren ersten Keimen und Anlagen im menschlichen Verstande verfolgen, in denen sie vorbereitet liegen, bis sie endlich bei Gelegenheit der Erfahrung entwickelt und durch eben denselben Verstand, von den ihnen anhängenden empirischen Bedingungen befreiet, in ihrer Lauterkeit dargestellt werden.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 개념들을 그 개념들의 최초 기원과 발단까지 인간 지성 안에서 추적할 것이다, 그 발단들 안에 개념들이 준비되어 있는, 그 개념들이 결국 경험을 계기로 전개되고 바로 그와 같은 지성을 통하여, 그 지성으로부터 개념들에 부수하는 경험적 조건들을 제거한, 그 개념들의 순수성에서 묘사될 때까지.

→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 개념들을 그 발단들 안에 준비되어 있는 개념들이 결국 경험을 계기로 전개되고 개념들에 부수하는 경험적 조건들을 제거한 바로 그와 같은 지성을 통하여 그 개념들의 순수성에서 묘사될 때까지 그 개념들의 최초 기원과 발단까지 인간 지성 안에서 추적할 것이다.

 

Der Analytik der Begriffe

개념들의 분석학

Erstes Hauptstück

제 1 부문

Von den Leitfaden der Entdeckung aller reinen Verstandesbegriffe

모든 순수 지성 개념들의 발견의 실마리에 대하여

 

Wenn man ein Erkenntnisvermögen ins Spiel setzt, so tun sich, nach den mancherlei Anlässen, verschiedene Begriffe hervor, die dieses Vermögen kennbar machen und sich in einem mehr oder weniger ausführlichen Aufsatz sammeln lassen, nachdem die Beobachtung derselben längere Zeit, oder mit größerer Scharfsinnigkeit angestellt worden.

사람들이 인식능력을 시도해 볼 때, 여러가지 계기들에 따라, 상이한 개념들이 드러난다, 그 개념들을 이러한 능력이 가지(可知)적으로 만들고 그 자체로 다소간 상세한 논고 안에서 모으도록 하는, 관찰이 그와 같은 것을 오랜 시간, 혹은 대단한 예리함을 가지고 시도된 뒤에.

→ 사람들이 인식능력을 여러가지 계기들에 따라 시도해 볼 때 상이한 개념들이 드러난다. 그 개념들을 이러한 능력이 오랜 시간, 혹은 대단한 예리함을 가지고 관찰이 시도된 뒤에 가지(可知)적으로 만들고 그 자체로 다소간 상세한 논고 안에서 모으도록 한다.

Wo diese Untersuchung werde vollendet sein, läßt sich, nach diesem gleichsam mechanischen Verfahren, niemals mit Sicherheit bestimmen.

이러한 조사가 어디에서 완수될 것인가, 이러한 말하자면 기계적인 방식에 따라서, 전혀 확실하게 정하도록 하지 않는다.

→ 이러한 말하자면 기계적인 방식에 따라서 이러한 조사가 어디에서 완수될 것인가는 전혀 확실하게 정하도록 하지 않는다.

Auch entdecken sich die Begriffe, die man nur so bei Gelegenheit auffindet, in keiner Ordnung und systematischen Einheit, sondern werden zuletzt nur nach Ähnlichkeiten gepaart und nach der Größe ihres Inhalts, von den einfachen an, zu den mehr zusammengesetzten, in Reihen gestellt, die nichts weniger als systematisch, obgleich auf gewisse Weise methodisch zu Stande gebracht werden.

또한 개념들은 드러난다, 그 개념들을 사람들이 단지 그러한 기회에 발견한, 어떠한 질서나 체계적 통일에서도 아니고, 오히려 결국에는 단지 유사점들에 따라 결합되고 그 개념들의 내용의 크기에 따라, 단순한 것으로부터, 더 복합적인 것에까지, 줄 세워진다, 그 줄은 전혀 체계적이지 않다, 비록 확실한 방식에서 방법적으로 성취된다 할지라도.

→ 또한 사람들이 단지 그러한 기회에 발견한 개념들은 어떠한 질서나 체계적 통일에서도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결국에는 단지 유사점들에 따라 결합되고 그 개념들의 내용의 크기에 따라, 단순한 것으로부터 더 복합적인 것에까지, 줄 세워진다. 비록 확실한 방식에서 방법적으로 성취된다 할지라도 그 줄은 전혀 체계적이지 않다.

 

-蟲-

Daher wird der Inbegriff seiner Erkenntnis ein unter einer Idee zu befasendes und zu bestimmendes System ausmachen, dessen Vollständigkeit und Artikulation zugleich einen Probierstein der Richtigkeit und Echtheit aller hineinpassenden Erkenntnisstücke abgeben kann. Es besteht aber dieser ganze Teil der transzendentalen Logik aus zwei Büchern, deren das eine die Begriffe, das andere die Grundsätze des reinen Verstandes enthält.

→ 그런 이유에서 그 순수지성의 인식의 총체는 이념 아래에서 취급하고 규정하는 체계를, 그 체계의 완전성과 명료함이 동시에 모든 적합한 인식부분들의 정당성과 참에 대한 시금석을 제공할 수 있는 체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초월론적 논리학의 이러한 전체 부분은 한 권은 개념들을, 다른 한 권은 순수 지성의 근본명제들을 포함하는 2권으로 구성된다.

 

Der Transzendenatlen Analytik Erstes Buch

초월론적 분석학 제 1권

Die Analytik der Begriffe

개념들의 분석학

 

Ich verstehe unter der Analytik der Begriffe nicht die Analysis derselben, oder das gewöhnliche Verfahren in philosophischen Untersuchungen, Begriffe, die sich darbieten, ihrem Inhalte nach zu zergliedern und zur Deutlichkeit zu bringen, sondern die noch wenig versuchte Zergliederung des Verstandesvermögens selbst, um die Möglichkeit der Begriffe a priori dadurch zu erforschen, daß wir sie im Verstande allein, als ihrem Geburtsorte, aufsuchen und dessen reinen Gebrauch überhaupt analysieren; denn dieses ist das eigentümliche Geschäfte einer Transzendental-Philosophie; das übrige ist die logische Behandlung der Begriffe in der Philosophie überhaupt.

→ 나는 개념의 분석학이라는 말에서 개념의 해석을, 또는 철학적 연구들에서 그 내용들을 분해함에 따라서 그리고 명료성으로 이끌어 옴에 따라서 드러나는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통상의 취급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개념의 분석학이 최소한 그를 통하여 선험적 개념들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지성능력 자체의, 우리가 오로지 그 가능성의 출생지로서 지성 안에서만 찾아내고 지성의 순수한 사용 전반을 해석하는, 그러한 분해를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초월-철학의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는 철학 전반에서 개념들의 논리적 취급이다.

 

 

 

Daher wird der Inbegriff seiner Erkenntnis ein unter einer Idee zu befasendes und zu bestimmendes System ausmachen, dessen Vollständigkeit und Artikulation zugleich einen Probierstein der Richtigkeit und Echtheit aller hineinpassenden Erkenntnisstücke abgeben kann.

그런 이유에서 그 순수지성의 인식의 총체는 이념 아래에서 취급하고 규정하는 체계를 형성한다, 그 체계의 완전성과 명료함은 동시에 모든 적합한 인식부분들의 정당성과 참에 대한 시금성을 제공할 수 있다.

→ 그런 이유에서 그 순수지성의 인식의 총체는 이념 아래에서 취급하고 규정하는 체계를, 그 체계의 완전성과 명료함이 동시에 모든 적합한 인식부분들의 정당성과 참에 대한 시금성을 제공할 수 있는 체계를 형성한다.

Es besteht aber dieser ganze Teil der transzendentalen Logik aus zwei Büchern, deren das eine die Begriffe, das andere die Grundsätze des reinen Verstandes enthält.

그러나 초월론적 논리학의 이러한 전체 부분은 2권으로 구성된다, 그것의 한 권은 개념들을, 다른 한 권은 순수 지성의 근본명제들을 포함하는.

→ 그러나 초월론적 논리학의 이러한 전체 부분은 한 권은 개념들을, 다른 한 권은 순수 지성의 근본명제들을 포함하는 2권으로 구성된다.

 

Ich verstehe unter der Analytik der Begriffe nicht die Analysis derselben, oder das gewöhnliche Verfahren in philosophischen Untersuchungen, Begriffe, die sich darbieten, ihrem Inhalte nach zu zergliedern und zur Deutlichkeit zu bringen, sondern die noch wenig versuchte Zergliederung des Verstandesvermögens selbst, um die Möglichkeit der Begriffe a priori dadurch zu erforschen, daß wir sie im Verstande allein, als ihrem Geburtsorte, aufsuchen und dessen reinen Gebrauch überhaupt analysieren; denn dieses ist das eigentümliche Geschäfte einer Transzendental-Philosophie; das übrige ist die logische Behandlung der Begriffe in der Philosophie überhaupt.

나는 개념의 분석학이라는 말에서 개념의 해석을, 또는 철학적 연구들에서 통상의 취급을, 개념들, 그것들이 드러나는, 그 개념들의 내용들을 분해함에 따라서 그리고 명료성으로 이끌어 옴에 따라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개념의 분석학이 최소한 지성능력 자체의 분해를 시도했다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개념들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그 가능성을 오로지 지성 안에서만, 그 가능성의 출생지로서, 찾아내고 지성의 순수한 사용 전반을 해석하는;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초월-철학의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는 철학 전반에서 개념들의 논리적 취급이다.

→ 나는 개념의 분석학이라는 말에서 개념의 해석을, 또는 철학적 연구들에서 그 내용들을 분해함에 따라서 그리고 명료성으로 이끌어 옴에 따라서 드러나는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통상의 취급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개념의 분석학이 최소한 그를 통하여 선험적 개념들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지성능력 자체의, 우리가 오로지 그 가능성의 출생지로서 지성 안에서만 찾아내고 지성의 순수한 사용 전반을 해석하는, 그러한 분해를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초월-철학의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는 철학 전반에서 개념들의 논리적 취급이다.

 

-蟲-

Der Transzendentalen Logik Erste Abteilung

초월론적 논리학 제 1장

Die Transzendenatle Analytik

초월론적 분석학

Diese Analytik ist die Zergliederung unseres gesamten Erkenntnisses a priori in die Elemente der reinen Verstandeserkenntnis. Es kommt hiebei auf folgende Stücke an. 1. Daß die Begriffe reine und nicht empirische Begriffe sein. 2. Daß sie nicht zur Anschauung und zur Sinnlichkeit, sondern zum Denken und Verstande gehören. 3. Daß sie Elementarbegriffe sein und von den abgeleiteten, oder daraus zusammengesetzten, wohl unterschieden werden. 4. Daß ihre Tafel vollständig sei, und sie das ganze Feld des reinen Verstandes gänzlich ausfüllen. Nun kann diese Vollständigkeit einer Wissenschaft nicht auf den Überschlag, eines bloß durch Versuche zu Stande gebrachten Aggregats, mit Zuverlässigkeit angenommen werden; daher ist sie nur vermittelst einer Idee des Ganzen der Verstandeserkenntnis a priori und durch die daraus bestimmte Abteilung der Begriffe, welche sie ausmachen, mithin nur durch ihren Zusammenhang in einem System möglich. Der reine Verstand sondert sich nicht allein von allem Empirischen, sondern so gar von aller Sinnlichkeit völlig aus. Er ist also eine vor sich selbst beständige, sich selbst genugsame, und durch keine äußerlich hinzukommende Zusätze zu vermehrende Einheit.

→ 이러한 분석학은 우리의 모든 선험적 인식들을 순수지성인식의 요소들로 분해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어지는 부분들이 문제이다.→ 1. 개념들은 순수하고 경험적이지 않은 개념들이다.→ 2. 그 개념들은 직관과 감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와 지성에 속한다.→ 3. 그 개념들은 기초개념들이며 파생된 개념들로부터, 혹은 그로부터 복합된 개념들로부터 잘 구분된다.→ 4. 그 개념들의 표는 완전하고, 그 개념들은 순수 지성의 전(全) 영역을 완전히 가득 채운다.→ 이제 이러한 학의 완전성은 순전히 조사를 통해 마련된 집합체를 통하여 어림짐작으로는 확실성을 가지고 수용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그 확실성은 단지 선험적 지성인식의 전체의 이념에 따라서만 그리고 그로부터 그 이념을 형성하는 개념들의 규정된 구분을 통하여, 따라서 단지 그것들의 체계 내에서의 관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순수 지성은 자신을 경험적인 것들로부터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만큼이나 모든 감성으로부터도 완전히 분리시킨다.→ 그 순수 지성은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속하고, 그 스스로 자족하며, 어떠한 외적으로 부가하는 첨가물로부터도 증대하는 통일성이 아니다.

 

 

Diese Analytik ist die Zergliederung unseres gesamten Erkenntnisses a priori in die Elemente der reinen Verstandeserkenntnis.

이러한 분석학은 우리의 모든 선험적 인식들을 순수지성인식의 요소들로 분해하는 것이다.

→ 이러한 분석학은 우리의 모든 선험적 인식들을 순수지성인식의 요소들로 분해하는 것이다.

Es kommt hiebei auf folgende Stücke an.

이와 관련하여 이어지는 부분들에 이른다.

→ 이와 관련하여 이어지는 부분들이 문제이다.

1. Daß die Begriffe reine und nicht empirische Begriffe sein.

1. 개념들은 순수하고 경험적이지 않은 개념들이다.

→ 1. 개념들은 순수하고 경험적이지 않은 개념들이다.

2. Daß sie nicht zur Anschauung und zur Sinnlichkeit, sondern zum Denken und Verstande gehören.

2. 그 개념들은 직관과 감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와 지성에 속한다.

→ 2. 그 개념들은 직관과 감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와 지성에 속한다.

3. Daß sie Elementarbegriffe sein und von den abgeleiteten, oder daraus zusammengesetzten, wohl unterschieden werden.

3. 그 개념들은 기초개념들이며 파생된 개념들로부터, 혹은 그로부터 복합된 개념들로부터, 잘 구분된다.

→ 3. 그 개념들은 기초개념들이며 파생된 개념들로부터, 혹은 그로부터 복합된 개념들로부터 잘 구분된다.

4. Daß ihre Tafel vollständig sei, und sie das ganze Feld des reinen Verstandes gänzlich ausfüllen.

4. 그 개념들의 표는 완전하고, 그 개념들은 순수 지성의 전(全) 영역을 완전히 가득 채운다.

→ 4. 그 개념들의 표는 완전하고, 그 개념들은 순수 지성의 전(全) 영역을 완전히 가득 채운다.

Nun kann diese Vollständigkeit einer Wissenschaft nicht auf den Überschlag, eines bloß durch Versuche zu Stande gebrachten Aggregats, mit Zuverlässigkeit angenommen werden; daher ist sie nur vermittelst einer Idee des Ganzen der Verstandeserkenntnis a priori und durch die daraus bestimmte Abteilung der Begriffe, welche sie ausmachen, mithin nur durch ihren Zusammenhang in einem System möglich.

이제 이러한 학의 완전성은 어림짐작으로, 순전히 조사를 통해 마련된 집합체를 통하여, 확실성을 가지고 수용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그 확실성은 단지 선험적 지성인식의 전체의 이념에 따라서만 그리고 그로부터 개념들의 규정된 구분을 통하여, 그 이념을 형성하는, 따라서 단지 그것들의 체계 내에서의 관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이제 이러한 학의 완전성은 순전히 조사를 통해 마련된 집합체를 통하여 어림짐작으로는 확실성을 가지고 수용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그 확실성은 단지 선험적 지성인식의 전체의 이념에 따라서만 그리고 그로부터 그 이념을 형성하는 개념들의 규정된 구분을 통하여, 따라서 단지 그것들의 체계 내에서의 관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Der reine Verstand sondert sich nicht allein von allem Empirischen, sondern so gar von aller Sinnlichkeit völlig aus.

순수 지성은 자신을 경험적인 것들로부터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만큼이나 모든 감성으로부터도 완전히 분리시킨다.

→ 순수 지성은 자신을 경험적인 것들로부터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만큼이나 모든 감성으로부터도 완전히 분리시킨다.

Er ist also eine vor sich selbst beständige, sich selbst genugsame, und durch keine äußerlich hinzukommende Zusätze zu vermehrende Einheit.

그 순수 지성은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속하고, 그 스스로 자족하며, 어떠한 외적으로 부가하는 첨가물로부터도 증대하는 통일성이 아니다.

→ 그 순수 지성은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속하고, 그 스스로 자족하며, 어떠한 외적으로 부가하는 첨가물로부터도 증대하는 통일성이 아니다.

 

-蟲-

Da sie also eigentlich nur ein Kanon der Beurteilung des empirischen Gebaruchs sein solte, so wird sie gemißbraucht, wenn man sie als das Organon eines allgemeinen und unbeschränkten Gebrauchs gelten läßt, und sich mit dem reinen Verstande allein wagt, synthetisch über Gegenstände überhaupt zu urteilen, zu behaupten, und zu entscheiden. Also würde der Gebrauch des reinen Verstandes alsdenn dialektisch sein. Der zweite Teil der transzendentalen Logik muß also eine Kritik dieses dialektischen Scheines sein, und heißt transzendentale Dialektik, nicht als eine Kunst, dergleichen Schein dogmatisch zu erregen, (eine leider sehr gangbare Kunst mannigfaltiger metaphysischer Gaukelwerke) sondern als eine Kritik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in Ansehung ihres hyperphysischen Gebrauchs, um den falschen Schein ihrer sprüche auf Erfindung und Erweiterung, die sie bloß durch transzendentale Grundsätze zu erreichen vermeinet, zur bloßen Beurteilung und Verwahrung des reinen Verstandes vor sophistischem Belendwerke herabzusetzen.

→ 그러므로 초월론적 논리학은 단지 경험적 사용의 판단기준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논리학은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무제한한 사용의 도구로 여겨지도록 둔다면, 그리고 순수한 지성만을 가지고 대상 일반에 대한 종합적 판단, 주장, 결정을 감행한다면 오용된다.→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의 사용은 그리하여 변증적이게 된다.→ 그러므로 초월론적 논리학의 두번째 부분은 이러한 변증적 가상의 비판이어야만 하고,  그와 같은 가상을 교조적으로 자극하는 (유감스럽게도 여러 형이상학적 눈속임의 매우 잘 통하는 방법)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초자연적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 지성과 이성이 초월론적 근본명제들을 통하여 획득하는 줄로 착각하는 고안과 확장에 대한 지성과 이성의 주장의 그릇된 가상을 궤변론적 기만에 대한 순수 지성의 순전한 평과와 보존에 대해서 격하하기 위한 지성과 이성의 비판으로서 초월론적 변증학이라고 불린다.

 

 

Da sie also eigentlich nur ein Kanon der Beurteilung des empirischen Gebaruchs sein solte, so wird sie gemißbraucht, wenn man sie als das Organon eines allgemeinen und unbeschränkten Gebrauchs gelten läßt, und sich mit dem reinen Verstande allein wagt, synthetisch über Gegenstände überhaupt zu urteilen, zu behaupten, und zu entscheiden.

그러므로 초월론적 논리학은 단지 경험적 사용의 판단기준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논리학은 오용된다,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무제한한 사용의 도구로 여겨지도록 둔다면, 그리고 순수한 지성만을 가지고 감행한다면, 대상 일반에 대한 종합적 판단, 주장, 결정을.

→ 그러므로 초월론적 논리학은 단지 경험적 사용의 판단기준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논리학은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무제한한 사용의 도구로 여겨지도록 둔다면, 그리고 순수한 지성만을 가지고 대상 일반에 대한 종합적 판단, 주장, 결정을 감행한다면 오용된다.

Also würde der Gebrauch des reinen Verstandes alsdenn dialektisch sein.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의 사용은 그리하여 변증적이게 된다.

→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의 사용은 그리하여 변증적이게 된다.

Der zweite Teil der transzendentalen Logik muß also eine Kritik dieses dialektischen Scheines sein, und heißt transzendentale Dialektik, nicht als eine Kunst, dergleichen Schein dogmatisch zu erregen, (eine leider sehr gangbare Kunst mannigfaltiger metaphysischer Gaukelwerke) sondern als eine Kritik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in Ansehung ihres hyperphysischen Gebrauchs, um den falschen Schein ihrer Ansprüche auf Erfindung und Erweiterung, die sie bloß durch transzendentale Grundsätze zu erreichen vermeinet, zur bloßen Beurteilung und Verwahrung des reinen Verstandes vor sophistischem Belendwerke herabzusetzen.

그러므로 초월론적 논리학의 두번째 부분은 이러한 변증적 가상의 비판이어야만 하고, 초월론적 변증학이라고 불린다,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가상을 교조적으로 자극하는, (유감스럽게도 여러 형이상학적 눈속임의 매우 잘 통하는 방법) 오히려 그것의 초자연적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 지성과 이성의 비판으로서, 고안과 확장에 대한 지성과 이성의 주장의 그릇된 가상을, 그 고안과 확장을 지성과 이성이 초월론적 근본명제들을 통하여 획득하는 줄로 착각하는, 궤변론적 기만에 대한 순수 지성의 순전한 평과와 보존에 대해서 격하하기 위하여.

→ 그러므로 초월론적 논리학의 두번째 부분은 이러한 변증적 가상의 비판이어야만 하고,  그와 같은 가상을 교조적으로 자극하는 (유감스럽게도 여러 형이상학적 눈속임의 매우 잘 통하는 방법)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초자연적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 지성과 이성이 초월론적 근본명제들을 통하여 획득하는 줄로 착각하는 고안과 확장에 대한 지성과 이성의 주장의 그릇된 가상을 궤변론적 기만에 대한 순수 지성의 순전한 평과와 보존에 대해서 격하하기 위한 지성과 이성의 비판으로서 초월론적 변증학이라고 불린다.

 

-蟲-

Ⅳ. Von der Einteilung der transzendentalen Logik in die Transzendentale Analytik und Dialektik

Ⅳ. 초월론적 논리학에 대한 초월론적 분석학과 변증학으로의 구분에 대하여

 

In einer transzendentalen Logik isolieren wir den Verstand, (so wie oben in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die Sinnlichkeit) und heben bloß den Teil des Denkens aus unserm Erkenntnisse heraus, der lediglich seinen Ursprung in dem Verstande hat. Der Gebrauch dieser reinen Erkenntnis aber beruhet darauf, als ihrer Bedingung: daß uns Gegenstände in der Anschauung gegeben sein, worauf jene angewandt werden können. Denn ohne Anschauung fehlt es aller unserer Erkenntnis an Objekten, und sie bleibt alsdenn völlig leer. Der Teil der transzendentalen Logik also, der die Elemente der reinen Verstandeserkenntnis vorträgt, und die Prinzipien, ohne welche überall kein Gegenstand gedacht werden kann, ist die transzendentale Analytik, und zugleich eine Logik der Wahrheit. Denn ihr kann keine Erkenntnis widersprechen, ohne daß sie zugleich allen Inhalt verlöre, d.i. alle Beziehung auf irgend ein Objekt, mithin alle Wahrheit. Weil es aber sehr anlockend und verleitend ist, sich dieser reinen Verstandeserkenntnisse und Grundsätze allein, und selbst über die Grenzen der Erfahrung hinaus, zu bedienen, welche doch einzig und allein uns die Materie (Objekte) an die Hand geben kann, worauf jene reine Verstandesbegriffe angewandt werden können: so gerät der Verstand in Gefahr, durch leere Vernünfteleien von den bloßen formalen Prinzipien des reinen Verstandes einen materialen Gebrauch zu machen, und über Gegenstände ohne Unterschied zu urteilen, die uns doch nicht gegeben sind, ja vielleicht auf keinerlei Weise gegeben werden können.

→ 초월론적 논리학에서 우리는 (위에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감성을 그렇게 하였듯이) 지성을 고립시키고 우리의 인식들로부터 그 자신의 원천을 다만 지성 안에서만 가지는 순전한 지성의 부분만을 빼낸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인식의 사용은 사용의 조건으로서: 우리에게 직관 중에 거기에 적용될 수 있는 대상들이 주어진다는 것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직관 없이는 우리의 모든 인식에게 객관이 부족하고, 그 인식은 그리하여 완전히 공허하게 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인식의 요소들과 그러한 것들 없이는 결코 어떠한 대상도 생각될 수 없는 그러한 원칙들을 개진하는 초월론적 논리학의 부분은 초월론적 분석학이자 동시에 진리의 논리학이다.→ 왜냐하면 그 인식이 동시에 모든 내용을, 즉 좌우간 객관과의 모든 관련을, 따라서 모든 진리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어떠한 인식에도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오로지 유일하게 그것만이 또한 우리에게만 거기에 저 순수한 지성개념들이 적용될 수 있는 실질(객관)을 손 안에 쥐어줄 수 있을 오로지 이런 순수한 지성인식들과 근본명제들을 사용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매우 매혹적이고도 미혹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지성은 순수 지성의 순전히 형식적인 원칙들에 대한 공허한 궤변들을 통하여 실질적 사용을 형성하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부터도 주어질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서 구별 없이 판단하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In einer transzendentalen Logik isolieren wir den Verstand, (so wie oben in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die Sinnlichkeit) und heben bloß den Teil des Denkens aus unserm Erkenntnisse heraus, der lediglich seinen Ursprung in dem Verstande hat.

초월론적 논리학에서 우리는 지성을 고립시킨다, (위에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감성을 그렇게 하였듯이) 그리고 우리의 인식들로부터 순전히 지성의 부분만을 빼낸다, 그 부분이 그 부분의 원천을 다만 지성 안에서만 가지는.

→ 초월론적 논리학에서 우리는 (위에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감성을 그렇게 하였듯이) 지성을 고립시키고 우리의 인식들로부터 그 자신의 원천을 다만 지성 안에서만 가지는 순전한 지성의 부분만을 빼낸다.

Der Gebrauch dieser reinen Erkenntnis aber beruhet darauf, als ihrer Bedingung: daß uns Gegenstände in der Anschauung gegeben sein, worauf jene angewandt werden können.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인식의 사용은 그것에 기인한다, 그 사용의 조건으로서: 우리에게 직관 중에 대상들이 주어진다는 것, 거기에 그 대상들이 적용될 수 있는.

→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인식의 사용은 사용의 조건으로서: 우리에게 직관 중에 거기에 적용될 수 있는 대상들이 주어진다는 것에 기인한다.

Denn ohne Anschauung fehlt es aller unserer Erkenntnis an Objekten, und sie bleibt alsdenn völlig leer.

왜냐하면 직관 없이는 우리의 모든 인식에게 객관이 부족하고, 그 인식은 그리하여 완전히 공허하게 남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직관 없이는 우리의 모든 인식에게 객관이 부족하고, 그 인식은 그리하여 완전히 공허하게 남기 때문이다.

Der Teil der transzendentalen Logik also, der die Elemente der reinen Verstandeserkenntnis vorträgt, und die Prinzipien, ohne welche überall kein Gegenstand gedacht werden kann, ist die transzendentale Analytik, und zugleich eine Logik der Wahrheit.

그러므로 초월론적 논리학의 부분은, 그 부분이 순수한 지성인식의 요소들과 원칙들을 개진하는, 그러한 원칙들 없이는 결코 어떠한 대상도 생각될 수 없는, 초월론적 분석학이고, 동시에 진리의 논리학이다.

→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인식의 요소들과 그러한 것들 없이는 결코 어떠한 대상도 생각될 수 없는 그러한 원칙들을 개진하는 초월론적 논리학의 부분은 초월론적 분석학이자 동시에 진리의 논리학이다.

Denn ihr kann keine Erkenntnis widersprechen, ohne daß sie zugleich allen Inhalt verlöre, d.i. alle Beziehung auf irgend ein Objekt, mithin alle Wahrheit.

왜냐하면 그 부분은 어떠한 인식에도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인식이 동시에 모든 내용을, 즉 좌우간 객관과의 모든 관련을, 따라서 모든 진리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 왜냐하면 그 인식이 동시에 모든 내용을, 즉 좌우간 객관과의 모든 관련을, 따라서 모든 진리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어떠한 인식에도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Weil es aber sehr anlockend und verleitend ist, sich dieser reinen Verstandeserkenntnisse und Grundsätze allein, und selbst über die Grenzen der Erfahrung hinaus, zu bedienen, welche doch einzig und allein uns die Materie (Objekte) an die Hand geben kann, worauf jene reine Verstandesbegriffe angewandt werden können: so gerät der Verstand in Gefahr, durch leere Vernünfteleien von den bloßen formalen Prinzipien des reinen Verstandes einen materialen Gebrauch zu machen, und über Gegenstände ohne Unterschied zu urteilen, die uns doch nicht gegeben sind, ja vielleicht auf keinerlei Weise gegeben werden können.

그러나 그것은 매우 매혹적이고도 미혹스럽기 때문에, 오로지 이런 순수한 지성인식들과 근본명제들을, 그리고 스스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사용하는 것, 오로지 유일하게 그것만이 또한 우리에게만 실질(객관)을 손 안에 쥐어줄 수 있을, 거기에 저 순수한 지성개념들이 적용될 수 있는: 그래서 지성은 위험에 빠질 것이다, 순수 지성의 순전히 형식적인 원칙들에 대한 공허한 궤변들을 통하여 실질적 사용을 형성하는, 그리고 대상들에 대해서 구별 없이 판단하는, 그 대상들이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부터도 주어질 수 없는.

→ 스스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오로지 유일하게 그것만이 또한 우리에게만 거기에 저 순수한 지성개념들이 적용될 수 있는 실질(객관)을 손 안에 쥐어줄 수 있을 오로지 이런 순수한 지성인식들과 근본명제들을 사용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매우 매혹적이고도 미혹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지성은 순수 지성의 순전히 형식적인 원칙들에 대한 공허한 궤변들을 통하여 실질적 사용을 형성하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부터도 주어질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서 구별 없이 판단하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蟲-

Eine sophistische Kunst, seiner Unwissenheit, ja auch seinen vorsätzlichen Blendwerken den Anstrich der Wahrheit zu geben, daß man die Methode der Gründlichkeit, welche die Logik überhaupt vorschreibt,nachahmete, und ihre Topik zu Beschönigung jedes leeren Vorgebens benutzte. Nun kann man es als eine sichere und brauchbare Warnung anmerken: daß die allgemeine Logik, als Organon betrachtet, jederzeit eine Logik des Scheins, d.i. dialektisch sei. Denn da sie uns gar nichts über den Inhalt der Erkenntnis lehret, sondern nur bloß die formalen Bedingungen der Übereinstimmung mit dem Verstande, welche übrigens in Ansehung der Gegenstände gänzlich gleichgültig sein; so muß die Zumutung, sich derselben als eines Werkzeugs (Organon) zu gebrauchen, um seine Kenntnisse, wenigstens dem Vorgeben nach, auszubreiten und zu erweitern, auf nichts als Geschwätzigkeit hinauslaufen, alles, was man will, mit einigem Schein zu behaupten, oder auch nach Belieben anzufechten.

→ 그러한 궤변적인 방식은 사람들이 논리학 전반이 지시하는 철저성의 방식을 모방하고 논리학의 총체론을 각각의 공허한 사칭의 변명에 이용함으로써 그의 무지에게, 또한 그의 의도적인 기만들에 진리의 도료를 입히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의 확실하고 가용한 경고로서 그것을 주의할 수 있다: 도구라고 여겨지는 보편적인 논리학은 언제나 가상의 논리학, 증 변증적인 것이라고.→ 왜냐하면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에게 인식의 내용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단지 그 밖에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무관한 조건들, 지성과의 일치에 대한 형식적 조건들만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상의 논리학 자체를 최소한 그 사칭에 따르자면 그의 지식들을 펼치고 넓히기 위해서 수단(도구)으로서 사용하고자 하는 부당한 요구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몇 가지 가상을 가지고 주장하거나 원하는 대로 논박하는 수다 외에 다른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함에 틀림 없다.

 

Eine solche Unterweisung ist der Würde der Philosophie auf keine Weise gemäß. Um deswillen hat man diese Benennung der Dialektik lieber, als eine Kritik des dialektischen Scheins, der Logik beigezählt, und als eine solche wollen wir sie auch hier verstanden wissen.

→ 그러한 가르침은 철학의 품위에 어떤 식으로도 걸맞지 않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변증학의 이러한 명칭을 변증적 가상의 비판으로서 논리학에 고려해 넣었고,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도 또한 여기에서 그 명칭을 이해된 것으로 알고자 한다.

 

 

 

Eine sophistische Kunst, seiner Unwissenheit, ja auch seinen vorsätzlichen Blendwerken den Anstrich der Wahrheit zu geben, daß man die Methode der Gründlichkeit, welche die Logik überhaupt vorschreibt, nachahmete, und ihre Topik zu Beschönigung jedes leeren Vorgebens benutzte.

그러한 궤변적인 방식은, 그 가상의 무지에게, 또한 그 가상의 의도적인 기만들에 진리의 도료를 입히는, 사람들이 철저성의 방식을, 논리학 전반이 지시하는, 모방함으로써, 그리고 논리학의 총체론을 각각의 공허한 사칭의 변명에 이용함으로써.

→ 그러한 궤변적인 방식은 사람들이 논리학 전반이 지시하는 철저성의 방식을 모방하고 논리학의 총체론을 각각의 공허한 사칭의 변명에 이용함으로써 그의 무지에게, 또한 그의 의도적인 기만들에 진리의 도료를 입히는 것이다.

Nun kann man es als eine sichere und brauchbare Warnung anmerken: daß die allgemeine Logik, als Organon betrachtet, jederzeit eine Logik des Scheins, d.i. dialektisch sei.

이제 사람들은 하나의 확실하고 가용한 경고로서 그것을 주의할 수 있다: 보편적인 논리학은, 도구라고 여겨지는, 언제나 가상의 논리학, 증 변증적인 것이라고.

→ 이제 사람들은 하나의 확실하고 가용한 경고로서 그것을 주의할 수 있다: 도구라고 여겨지는 보편적인 논리학은 언제나 가상의 논리학, 증 변증적인 것이라고.

Denn da sie uns gar nichts über den Inhalt der Erkenntnis lehret, sondern nur bloß die formalen Bedingungen der Übereinstimmung mit dem Verstande, welche übrigens in Ansehung der Gegenstände gänzlich gleichgültig sein; so muß die Zumutung, sich derselben als eines Werkzeugs (Organon) zu gebrauchen, um seine Kenntnisse, wenigstens dem Vorgeben nach, auszubreiten und zu erweitern, auf nichts als Geschwätzigkeit hinauslaufen, alles, was man will, mit einigem Schein zu behaupten, oder auch nach Belieben anzufechten.

왜냐하면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에게 인식의 내용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단지 지성과 일치에 대한 형식적 조건들만을 가르쳐준다, 그 조건들이 그 밖에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무관한; 그래서 그 부당한 요구는, 그 가상의 논리학 자체를 수단(도구)으로서 사용하고자 하는, 그의 지식들을, 최소한 그 사칭에 따라서, 펼치고 넓히기 위해서, 수다 외에 다른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함에 틀림 없다, 모든 것을, 사람들이 원하는, 몇 가지 가상을 가지고 구장하는, 혹은 원하는 대로 논박하는.

→ 왜냐하면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에게 인식의 내용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단지 그 밖에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무관한 조건들, 지성과의 일치에 대한 형식적 조건들만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상의 논리학 자체를 최소한 그 사칭에 따르자면 그의 지식들을 펼치고 넓히기 위해서 수단(도구)으로서 사용하고자 하는 부당한 요구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몇 가지 가상을 가지고 주장하거나 원하는 대로 논박하는 수다 외에 다른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함에 틀림 없다.

 

Eine solche Unterweisung ist der Würde der Philosophie auf keine Weise gemäß.

그러한 가르침은 철학의 품위에 어떤 식으로도 걸맞지 않다.

→ 그러한 가르침은 철학의 품위에 어떤 식으로도 걸맞지 않다.

Um deswillen hat man diese Benennung der Dialektik lieber, als eine Kritik des dialektischen Scheins, der Logik beigezählt, und als eine solche wollen wir sie auch hier verstanden wissen.

그 때문에 사람들은 변증학의 이러한 명칭을, 변증적 가상의 비판으로서, 논리학에 고려해 넣었고,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그 명칭을 이해된 것으로 알고자 한다.

→ 그 때문에 사람들은 변증학의 이러한 명칭을 변증적 가상의 비판으로서 논리학에 고려해 넣었고,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도 또한 여기에서 그 명칭을 이해된 것으로 알고자 한다.

 

-蟲-

Weil aber die bloße Form des Erkenntnisses, so sehr sie auch mit logischen Gesetzen übereinstimmen mag, noch lange nicht hinreicht, materielle (objektive) Wahrheit dem Erkenntnisse darum auszumachen, so kann sich niemand bloß mit der Logik wagen, über Gegenstände zu urteilen, und irgend etwas zu behaupten, ohne von ihnen vorher gegründete Erkundigung außer der Logik eingezogen zu haben, um hernach bloß die Benutzung und die Verknüpfung derselben in einem zusammenhangenden Ganzen nach logischen Gesetzen zu versuchen, noch besser aber, sie lediglich darnach zu prüfen. Gleichwohl liegt so etwas Verleitendes in dem Besitze einer so scheinbaren Kunst, allen unseren Erkenntnissen die Form des Verstandes zu geben, ob man gleich in Ansehung des Inhalts derselben noch sehr leer und arm sein mag, daß jene allgemeine Logik, die bloß ein Kanon zur Beurteilung ist, gleichsam wie ein Organon zur wirklichen Hervorbringung wenigstens zum Blendwerk von objektiven Behauptungen gebraucht, und mithin in der Tat dadurch gemißbraucht worden. Die allgemeine Logik nun, als vermeintes Organon, heißt Dialektik.

→ 그러나 인식의 순전한 형식은 아무리 그 형식이 논리적 원칙들과 일치할지라도 실체적인(객관적인) 진리를 인식에게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결코 충분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래서 앞서서 먼저 논리학 외에 근거 있는 문의를 이끌어 오고, 그 후에 관련한 전체에서 논리적 법칙들에 따라 조사한 것의 이용과 결합만으로, 그러나 더 낫게는, 그 대상들을 단지 그에 따라서만 시험해 보는 것 없이, 단순히 논리학만 가지고는 아무도 대상들을 판단함 너머로, 그리고 좌우간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 너머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인식들의 내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허하고 부족함에도 약간은 유혹하는 어떤 것이 우리의 모든 인식들에 지성의 형식을 주는 매우 그럴듯한 방법으로 유지된다. 평가에 대한 규준인 그러한 보편적 논리학은, 마치 객관적 주장들에 대한 실질적인 산출에 대한 도구가 최소한 기만에라도 사용되듯이, 그리고 따라서 실제로 그렇게 오용된다.→그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허위의 도구로서 변증학이라 불린다.

 

So verschieden auch die Bedeutung ist, in der die Alten dieser Benennung einer Wissenschaft oder Kunst sich bedienten, so kann man doch aus dem wirklichen Gebrauche derselben sicher abnehmen, daß sie bei ihnen nichts anders war, als die Logik des Scheins.

→ 또한 옛 사람들이 학문이나 방법의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던 그 의미는 상이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그 명칭의 실질적 사용으로부터 그 명칭이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상의 논리학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다.

 

 

 

Weil aber die bloße Form des Erkenntnisses, so sehr sie auch mit logischen Gesetzen übereinstimmen mag, noch lange nicht hinreicht, materielle (objektive) Wahrheit dem Erkenntnisse darum auszumachen, so kann sich niemand bloß mit der Logik wagen, über Gegenstände zu urteilen, und irgend etwas zu behaupten, ohne von ihnen vorher gegründete Erkundigung außer der Logik eingezogen zu haben, um hernach bloß die Benutzung und die Verknüpfung derselben in einem zusammenhangenden Ganzen nach logischen Gesetzen zu versuchen, noch besser aber, sie lediglich darnach zu prüfen.

그러나 인식의 순전한 형식은, 아무리 그 형식이 논리적 원칙들과 일치할지라도, 여전히 결코 충분하지는 않다, 실체적인(객관적인) 진리를 인식에게 그것에 관하여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논리학만 가지고는 아무도 나아갈 수 없다, 대상들을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좌우간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들에 앞서 먼저 논리학 외에 근거 있는 문의를 이끌어 오는 것, 그 후에 관련한 전체에서 논리적 법칙들에 따라 조사한 것의 이용과 결합만으로, 그러나 더 낫게는, 다만 그에 따라서만 그 대상들을 시험해 보는 것.

→ 그러나 인식의 순전한 형식은 아무리 그 형식이 논리적 원칙들과 일치할지라도 실체적인(객관적인) 진리를 인식에게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결코 충분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래서 앞서서 먼저 논리학 외에 근거 있는 문의를 이끌어 오고, 그 후에 관련한 전체에서 논리적 법칙들에 따라 조사한 것의 이용과 결합만으로, 그러나 더 낫게는, 그 대상들을 단지 그에 따라서만 시험해 보는 것 없이, 단순히 논리학만 가지고는 아무도 대상들을 판단함 너머로, 그리고 좌우간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 너머로 나아갈 수 없다.

Gleichwohl liegt so etwas Verleitendes in dem Besitze einer so scheinbaren Kunst, allen unseren Erkenntnissen die Form des Verstandes zu geben, ob man gleich in Ansehung des Inhalts derselben noch sehr leer und arm sein mag, daß jene allgemeine Logik, die bloß ein Kanon zur Beurteilung ist, gleichsam wie ein Organon zur wirklichen Hervorbringung wenigstens zum Blendwerk von objektiven Behauptungen gebraucht, und mithin in der Tat dadurch gemißbraucht worden.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유혹하는 어떤 것이 매우 그럴듯한 방법으로 유지된다, 우리의 모든 인식들에 지성의 형식을 주는, 사람들이 그 인식들의 내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허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보편적 논리학이, 그 논리학이 평가에 대한 규준인, 마치 객관적 주장들에 대한 실질적인 산출에 대한 도구가 최소한 기만에라도 사용되듯이, 그리고 따라서 실제로 그렇게 오용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인식들의 내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허하고 부족함에도 약간은 유혹하는 어떤 것이 우리의 모든 인식들에 지성의 형식을 주는 매우 그럴듯한 방법으로 유지된다. 평가에 대한 규준인 그러한 보편적 논리학은, 마치 객관적 주장들에 대한 실질적인 산출에 대한 도구가 최소한 기만에라도 사용되듯이, 그리고 따라서 실제로 그렇게 오용된다.

Die allgemeine Logik nun, als vermeintes Organon, heißt Dialektik.

그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허위의 도구로서, 변증학이라 불린다.

→그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허위의 도구로서 변증학이라 불린다.

 

So verschieden auch die Bedeutung ist, in der die Alten dieser Benennung einer Wissenschaft oder Kunst sich bedienten, so kann man doch aus dem wirklichen Gebrauche derselben sicher abnehmen, daß sie bei ihnen nichts anders war, als die Logik des Scheins.

또한 그 의미는 상이하다, 그 의미에 옛 사람들이 학문이나 방법의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던, 그래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그 명칭의 실질적 사용으로부터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다, 그 명칭이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가상의 논리학 이외에.

→ 또한 옛 사람들이 학문이나 방법의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던 그 의미는 상이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그 명칭의 실질적 사용으로부터 그 명칭이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상의 논리학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다.

 

-蟲-

Denn, was diesen widerspricht, ist falsch, weil der Verstand dabei seinen allgemeinen Regeln des Denkens, mithin sich selbst widerstreitet. Diese Kriterien aber betreffen nur die Form der Wahrheit, d.i. des Denkens überhaupt, und sind so fern ganz richtig, aber nicht hinreichend. Denn obgleich eine Erkenntnis der logischen Form völlig gemäß sein möchte, d.i. sich selbst nicht widerspräche, so kann sie doch noch immer dem Gegenstande widersprechen. Also ist das bloß logische Kriterium der Wahrheit, nämlich die Übereinstimmung einer Erkenntnis mit den allgemeinen und formalen Gesetze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zwar die conditio sine qua non, mithin die negative Bedingung aller Wahrheit: weiter aber kann die Logik nicht gehen, und den Irrtum, der nicht die Form, sondern den Inhalt trifft, kann die Logik durch keinen Probierstein entdecken.

→ 왜냐하면 이러한 모순되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인데, 지성이 동시에 그 지성의 보편적 사유법칙들, 따라서 그 자체와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지들은 단지 진리의 형식만을, 즉 사유 전반의 형식만 관계하고, 전적으로 정당한 한에서만 그러하며,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비록 인식이 논리적 형식에 완전히 적합할는지는 몰라도, 즉 그 자체로 모순은 아닐지라도, 그 인식이 또한 여전히 대상에 모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순전히 논리적 표지, 말하자면 인식이 지성과 이성의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원칙들과 이루는 일치는 필수적 전제 조건, 따라서 모든 진리의 부정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 이상 논리학이 나아갈 수는 없고,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을 마주치는 오류를 논리학은 어떠한 시금석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없다.

 

Die allgemeine Logik löset nun das ganze formale Geschäfte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in seine Elemente auf, und stellet sie als Prinzipien aller logischen Beurteilung unserer Erkenntnis dar. Dieser Teil der Logik kann daher Analytik heißen, und ist eben darum der wenigstens negative Probierstein der Wahrheit, in dem man zuvörderst alle Erkenntnis, ihrer Form nach, an diesen Regeln prüfen und schätzen muß, ehe man sie selbst ihrem Inhalt nach untersucht, um auszumachen, ob sie in Ansehung des Gegenstandes positive Wahrheit enthalten.

→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지성과 이성의 전(全) 형식적 업무를 그것의 요소 안으로 풀어내고, 그것이 우리 인식의 모든 논리적 평가의 원칙들로서 드러낸다.→ 논리학의 이러한 부분은 그 때문에 분석학이라 불릴 수 있고, 바로 그 점에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사람들이 그것들 자체를 그것의 내용에 따라 탐구하기 전에 그것들이 대상들을 고려했을 때 긍정적 진리를 포함하는지 어떤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인식을 그것의 형식에 따라 이러한 법칙들에 있어서 증명하고 평가해야만 하는 진리에 대한 최소한의 부정적 시금석이다.

 

 

Denn, was diesen widerspricht, ist falsch, weil der Verstand dabei seinen allgemeinen Regeln des Denkens, mithin sich selbst widerstreitet.

왜냐하면, 이러한 모순되는 것이, 거짓이기 때문인데, 지성이 동시에 그 지성의 보편적 사유법칙들, 따라서 그 자체와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모순되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인데, 지성이 동시에 그 지성의 보편적 사유법칙들, 따라서 그 자체와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Diese Kriterien aber betreffen nur die Form der Wahrheit, d.i. des Denkens überhaupt, und sind so fern ganz richtig, aber nicht hinreichend.

그러나 이러한 표지들은 단지 진리의 형식만을, 즉 사유 전반의 형식만 관계하고, 전적으로 정당한 한에서만 그러하며,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 그러나 이러한 표지들은 단지 진리의 형식만을, 즉 사유 전반의 형식만 관계하고, 전적으로 정당한 한에서만 그러하며,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Denn obgleich eine Erkenntnis der logischen Form völlig gemäß sein möchte, d.i. sich selbst nicht widerspräche, so kann sie doch noch immer dem Gegenstande widersprechen.

왜냐하면 비록 인식이 논리적 형식에 완전히 적합할는지는 몰라도, 즉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닐지라도, 그 인식이 또한 여전히 대상에 모순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비록 인식이 논리적 형식에 완전히 적합할는지는 몰라도, 즉 그 자체로 모순은 아닐지라도, 그 인식이 또한 여전히 대상에 모순될 수 있기 때문이다.

Also ist das bloß logische Kriterium der Wahrheit, nämlich die Übereinstimmung einer Erkenntnis mit den allgemeinen und formalen Gesetze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zwar die conditio sine qua non, mithin die negative Bedingung aller Wahrheit: weiter aber kann die Logik nicht gehen, und den Irrtum, der nicht die Form, sondern den Inhalt trifft, kann die Logik durch keinen Probierstein entdecken.

그러므로 진리의 순전히 논리적 표지, 말하자면 인식이 지성과 이성의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원칙들과 이루는 일치는 필수적 전제 조건, 따라서 모든 진리의 부정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 이상 논리학이 나아갈 수는 없고, 오류를, 그 오류가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을 마주치는, 논리학은 어떠한 시금석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없다.

→ 그러므로 진리의 순전히 논리적 표지, 말하자면 인식이 지성과 이성의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원칙들과 이루는 일치는 필수적 전제 조건, 따라서 모든 진리의 부정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 이상 논리학이 나아갈 수는 없고,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을 마주치는 오류를 논리학은 어떠한 시금석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없다.

 

Die allgemeine Logik löset nun das ganze formale Geschäfte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in seine Elemente auf, und stellet sie als Prinzipien aller logischen Beurteilung unserer Erkenntnis dar.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지성과 이성의 전(全) 형식적 업무를 그것의 요소 안으로 풀어내고, 그것이 우리 인식의 모든 논리적 평가의 원칙들로서 드러낸다.

→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지성과 이성의 전(全) 형식적 업무를 그것의 요소 안으로 풀어내고, 그것이 우리 인식의 모든 논리적 평가의 원칙들로서 드러낸다.

Dieser Teil der Logik kann daher Analytik heißen, und ist eben darum der wenigstens negative Probierstein der Wahrheit, in dem man zuvörderst alle Erkenntnis, ihrer Form nach, an diesen Regeln prüfen und schätzen muß, ehe man sie selbst ihrem Inhalt nach untersucht, um auszumachen, ob sie in Ansehung des Gegenstandes positive Wahrheit enthalten.

논리학의 이러한 부분은 그 때문에 분석학이라 불릴 수 있고, 바로 그 점에서 진리에 대한 최소한의 부정적 시금석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인식을, 그것의 형식에 따라, 이러한 법칙들에 있어서 증명하고 평가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그것들 자체를 그것의 내용에 따라 탐구하기 전에, 결정하기 위해서, 그것들이 대상들을 고려했을 때 긍정적 진리를 포함하는지 어떤지를.

→ 논리학의 이러한 부분은 그 때문에 분석학이라 불릴 수 있고, 바로 그 점에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사람들이 그것들 자체를 그것의 내용에 따라 탐구하기 전에 그것들이 대상들을 고려했을 때 긍정적 진리를 포함하는지 어떤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인식을 그것의 형식에 따라 이러한 법칙들에 있어서 증명하고 평가해야만 하는 진리에 대한 최소한의 부정적 시금석이다.

 

-蟲-

Wenn Wahrheit in der Übereinstimmung einer Erkenntnis mit ihrem Gegenstande besteht, so muß dadurch dieser Gegenstand von andern unterschieden werden; denn eine Erkenntnis ist falsch, wenn sie mit dem Gegenstande, worauf sie bezogen wird, nicht übereinstimmt, ob sie gleich etwas enthält, was wohl von andern Gegenständen gelten könnte. Nun würde ein allgemeines Kriterium der Wahrheit dasjenige sein, welches von allen Erkenntnissen, ohne Unterschied ihrer Gegenstände, gültig wäre. Es ist aber klar, daß, da man bei demselb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Beziehung auf ihr Objekt) abstrahiert, und Wahrheit gerade diesen Inhalt angeht, es ganz unmöglich und ungereimt sei, nach einem Merkmale der Wahrheit dieses Inhalts der Erkenntnisse zu fragen, und daß also ein hinreichendes, und doch zugleich allgemeines Kennzeichen der Wahrheit unmöglich angegeben werden könne. Da wir oben schon den Inhalt einer Erkenntnis die Materie derselben genannt haben, so wird man sagen müssen: von der Wahrheit der Erkenntnis der Materie nach läßt sich kein allgemeines Kennzeichen verlangen, weil es in sich selbst widersprechend ist.

→ 만일 진리가 인식과 그 대상의 일치 속에서 존립한다면, 그를 통하여 이러한 대상이 다른 것으로부터 구분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 인식이 충분히 다른 대상들에 유효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만일 그 인식이 관련되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인식은 허위이기 때문이다.→ 이제 진리의 보편적 표지는 모든 인식들에 대하여, 그 인식의 대상들에 대한 구분 없이, 정당할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곁에서 인식의 모든 내용을 (그것의 객체에 대한 연관을) 도외시하고, 진리가 직접 이러한 내용에 관계하기 때문에, 인식의 이러한 내용의 진리에 대한 표지에 따라 묻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부조리할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하고도 또한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의 표지가 제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이미 인식의 내용을 그것의 소재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 인식의 진리에 대하여 소재에 따라서는 그것에 어떠한 보편적인 표지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Was aber das Erkenntnis der bloßen Form nach (mit Beiseitesetzung alles Inhalts) betrifft, so ist eben so klar: daß eine Logik, so fern sie die allgemeinen und notwendigen Regeln des Verstandes vorträgt, eben in diesen Regeln Kriterien der Wahrheit darlegen müsse.

→ 그러나 순전한 형식에 따라서 인식에 (모든 내용들에 대한 무시와) 관련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 : 논리학은, 그것이 지성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을 개진하는 한, 바로 이러한 법칙들 안에서 진리의 표지들을 명시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Wenn Wahrheit in der Übereinstimmung einer Erkenntnis mit ihrem Gegenstande besteht, so muß dadurch dieser Gegenstand von andern unterschieden werden; denn eine Erkenntnis ist falsch, wenn sie mit dem Gegenstande, worauf sie bezogen wird, nicht übereinstimmt, ob sie gleich etwas enthält, was wohl von andern Gegenständen gelten könnte.

만일 진리가 인식과 그 대상의 일치 속에서 존립한다면, 그를 통하여 이러한 대상이 다른 것으로부터 구분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허위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인식이 대상과, 그것에 인식이 관련되는, 일치하지 않는다면, 비록 그 인식이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충분히 다른 대상들에 유효할 수 있는.

→ 만일 진리가 인식과 그 대상의 일치 속에서 존립한다면, 그를 통하여 이러한 대상이 다른 것으로부터 구분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 인식이 충분히 다른 대상들에 유효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만일 그 인식이 관련되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인식은 허위이기 때문이다.

Nun würde ein allgemeines Kriterium der Wahrheit dasjenige sein, welches von allen Erkenntnissen, ohne Unterschied ihrer Gegenstände, gültig wäre.

이제 진리의 보편적 표지는 그것이 될 것이다, 모든 인식들에 대하여, 그 인식의 대상들에 대한 구분 없이, 정당할.

→ 이제 진리의 보편적 표지는 모든 인식들에 대하여, 그 인식의 대상들에 대한 구분 없이, 정당할 것이 될 것이다.

Es ist aber klar, daß, da man bei demselb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Beziehung auf ihr Objekt) abstrahiert, und Wahrheit gerade diesen Inhalt angeht, es ganz unmöglich und ungereimt sei, nach einem Merkmale der Wahrheit dieses Inhalts der Erkenntnisse zu fragen, und daß also ein hinreichendes, und doch zugleich allgemeines Kennzeichen der Wahrheit unmöglich angegeben werden könne.

그러나 명백하다, 그것, 사람들이 그 곁에서 인식의 모든 내용을 (그것의 객체에 대한 연관을) 도외시하고, 진리가 직접 이러한 내용에 관계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부조리할 것이다, 인식의 이러한 내용의 진리에 대한 표지에 따라 묻는 것이, 그리고 그러므로 충분한, 그리고 또한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의 표지가 불가능하게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

→ 그러나 사람들이 그 곁에서 인식의 모든 내용을 (그것의 객체에 대한 연관을) 도외시하고, 진리가 직접 이러한 내용에 관계하기 때문에, 인식의 이러한 내용의 진리에 대한 표지에 따라 묻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부조리할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하고도 또한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의 표지가 제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Da wir oben schon den Inhalt einer Erkenntnis die Materie derselben genannt haben, so wird man sagen müssen: von der Wahrheit der Erkenntnis der Materie nach läßt sich kein allgemeines Kennzeichen verlangen, weil es in sich selbst widersprechend ist.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이미 인식의 내용을 그것의 소재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말해야만 할 것이다: 인식의 진리에 대하여 소재에 따라서는 그것에 어떠한 보편적인 표지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이미 인식의 내용을 그것의 소재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 인식의 진리에 대하여 소재에 따라서는 그것에 어떠한 보편적인 표지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Was aber das Erkenntnis der bloßen Form nach (mit Beiseitesetzung alles Inhalts) betrifft, so ist eben so klar: daß eine Logik, so fern sie die allgemeinen und notwendigen Regeln des Verstandes vorträgt, eben in diesen Regeln Kriterien der Wahrheit darlegen müsse.

그러나 순전한 형식에 따라서 인식에 (모든 내용들에 대한 무시와) 관련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 매우 분명하다: 논리학은, 그것이 지성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을 개진하는 한, 바로 이러한 법칙들 안에서 진리의 표지들을 명시해야 한다는 것.

→ 그러나 순전한 형식에 따라서 인식에 (모든 내용들에 대한 무시와) 관련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 : 논리학은, 그것이 지성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을 개진하는 한, 바로 이러한 법칙들 안에서 진리의 표지들을 명시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蟲-

Ⅲ. Von der Einteilung der allgemeinen Logik in Analytik und Dialektik

Ⅲ. 일반 논리학에 대한 분석과 변증으로의 구분에 대하여

 

Die alte und berühmte Frage, womit man die Logiker in die Enge zu treiben vermeinte, und sie dahin zu bringen suchte, daß sie sich entweder auf einer elenden Diallele mußten betreffen lassen, oder ihre Unwissenheit, mithin die Eitelkeit ihrer ganzen Kunst bekennen sollten, ist diese: Was ist Wahrheit? Die Namenserklärung der Wahrheit, daß sie nämlich die Übereinstimmung der Erkenntnis mit ihrem Gegenstande sei, wird hier geschenkt, und vorausgesetzt; man verlangt aber zu wissen, welches das allgemeine und sichere Kriterium der Wahrheit einer jeden Erkenntnis sei.

→ 사람들이 그로써 논리학자들을 그들이 고약한 변증에 마주칠 수밖에 없었거나, 그들의 무지를, 따라서 그들의 전체 기술의 자만을 알아차려야만 하는 궁지로 몰아세운다고 오산했던, 그리고 그들을 거기로 끌어오도록 탐색했던 고금의 물음은 이러한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의 이름 그대로의, 즉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일치일 그 뜻이 여기에서 선사되고 전제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것이 각각의 인식에 대하여 진리의 보편적이고 확실한 표지일지 알기를 바란다.

 

Es ist schon ein großer und nötiger Beweis der Klugheit oder Einsicht, zu wissen, was man vernünftiger Weise fragen solle. Denn, wenn die Frage an sich ungereimt ist, und unnötige Antworten verlangt, so hat sie, außer der Beschämung dessen, der sie aufwirft, bisweilen noch den Nachteil, den unbehutsamen Anhörer derselben zu ungereimten Antworten zu verleiten, und den belachenswerten Anblick zu geben, daß einer (wie die Alten sagten) den Bock melkt, der andre ein Sieb unterhält.

→ 사람들이 무엇을 이성적인 방식으로 물어야 하는지 안다는 것은 이미 사려나 통찰의 훌륭하고 필연적인 증거이다.→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불합리할 때, 그리고 불필요한 답변들을 요구할 때 그 질문은 그 질문을 제기한 그 사람의 부끄러움 외에도, 때론 그것의 부주의한 청자들을 불합리한 답변들로 유혹하고 (옛 사람들이 말하듯) 한 사람은 염소젖을 짜고, 다른 한 사람은 체로 받치는 우스운 광경을 주도록 하는 결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Ⅲ. Von der Einteilung der allgemeinen Logik in Analytik und Dialektik

Ⅲ. 일반 논리학에 대한 분석과 변증으로의 구분에 대하여

 

Die alte und berühmte Frage, womit man die Logiker in die Enge zu treiben vermeinte, und sie dahin zu bringen suchte, daß sie sich entweder auf einer elenden Diallele mußten betreffen lassen, oder ihre Unwissenheit, mithin die Eitelkeit ihrer ganzen Kunst bekennen sollten, ist diese: Was ist Wahrheit?

고금의 물음, 사람들이 그로써 논리학자들을 궁지로 몰아세운다고 오산했던, 그리고 그들을 거기로 끌어오도록 탐색했던, 그들이 고약한 변증에 마주칠 수밖에 없었거나, 그들의 무지가, 그러므로 그들의 전체 기술의 자만을 알아차려야만 하는 것, 그것은 이러한 물음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 사람들이 그로써 논리학자들을 그들이 고약한 변증에 마주칠 수밖에 없었거나, 그들의 무지를, 따라서 그들의 전체 기술의 자만을 알아차려야만 하는 궁지로 몰아세운다고 오산했던, 그리고 그들을 거기로 끌어오도록 탐색했던 고금의 물음은 이러한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Die Namenserklärung der Wahrheit, daß sie nämlich die Übereinstimmung der Erkenntnis mit ihrem Gegenstande sei, wird hier geschenkt, und vorausgesetzt; man verlangt aber zu wissen, welches das allgemeine und sichere Kriterium der Wahrheit einer jeden Erkenntnis sei.

진리의 명의, 그것이 즉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일치일, 여기에서 선사되고, 전제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기를 바란다, 어떤 것이 각각의 인식에 대하여 진리의 보편적이고 확실한 표지일지.

→ 진리의 이름 그대로의, 즉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일치일 그 뜻이 여기에서 선사되고 전제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것이 각각의 인식에 대하여 진리의 보편적이고 확실한 표지일지 알기를 바란다.

 

Es ist schon ein großer und nötiger Beweis der Klugheit oder Einsicht, zu wissen, was man vernünftiger Weise fragen solle.

그것은 이미 사려나 통찰의 훌륭하고 필연적인 증거이다, 아는 것, 사람들이 무엇을 이성적인 방식으로 물어야 하는지.

→ 사람들이 무엇을 이성적인 방식으로 물어야 하는지 안다는 것은 이미 사려나 통찰의 훌륭하고 필연적인 증거이다.

Denn, wenn die Frage an sich ungereimt ist, und unnötige Antworten verlangt, so hat sie, außer der Beschämung dessen, der sie aufwirft, bisweilen noch den Nachteil, den unbehutsamen Anhörer derselben zu ungereimten Antworten zu verleiten, und den belachenswerten Anblick zu geben, daß einer (wie die Alten sagten) den Bock melkt, der andre ein Sieb unterhält.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불합리할 때, 그리고 불필요한 답변들을 요구할 때, 그 질문은 가진다, 그 사람의 부끄러움 외에도, 그 질문을 제기한, 때론 결점을, 그것의 부주의한 청자들을 불합리한 답변들로 유혹하는, 우스운 광경을 주도록 하는, (옛 사람들이 말하듯) 한 사람은 염소젖을 짜고, 다른 한 사람은 체로 받치는.

→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불합리할 때, 그리고 불필요한 답변들을 요구할 때 그 질문은 그 질문을 제기한 그 사람의 부끄러움 외에도, 때론 그것의 부주의한 청자들을 불합리한 답변들로 유혹하고 (옛 사람들이 말하듯) 한 사람은 염소젖을 짜고, 다른 한 사람은 체로 받치는 우스운 광경을 주도록 하는 결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蟲-

Daher ist weder der Raum, noch irgend eine geometrische Bestimmung desselben a priori eine transzendentale Vorstellung, sondern nur die Erkenntnis, daß diese Vorstellungen gar nicht empirischen Ursprungs sein, und die Möglichkeit, wie sie sich gleichwohl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beziehen könne, kann transzendental heißen. Imgleichen würde der Gebrauch des Raumes von Gegenständen überhaupt auch transzendental sein: aber ist er lediglich auf Gegenstände der Sinne eingeschränkt, so heißt er empirisch. Der Unterschied des Transzendentalen und Empirischen gehört also nur zur Kritik der Erkenntnisse, und betrifft nicht die Beziehung derselben auf ihren Gegenstand.

→ 그런 이유로 공간도, 그것의 선험적인 어떠한 기하학적 규정도 초월론적 표상은 아니고, 오히려 단지 이러한 표상들이 전혀 경험적 원천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은 초월론적이라 부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 것에서 대상들 전반에 대한 공간의 사용 역시 초월론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감관의 대상들에 대해서만으로 제한되고, 그래서 그것은 경험적이라 부른다.→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구분은 그러므로 단지 인식의 비판에만 속하고, 그것들의 대상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는 관련하지 않는다.

In der Erwartung also, daß es vielleicht Begriffe geben könne, die sich a priori auf Gegenstände beziehen mögen, nicht als reine oder sinnliche Anschauungen, sondern bloß als Handlungen des reinen Denkens, die mithin Begriffe, aber weder empirischen noch ästhetischen Ursprungs sind, so machen wir uns zum voraus die Idee von einer Wissenschaft des reinen Verstandes- und Vernunfterkenntnisses, dadurch wir Gegenstände völlig a priori denken. Eine solche Wissenschaft, welche den Ursprung, den Umfang und die objektive Gültigkeit solcher Erkenntnisse bestimmete, würde transzendentale Logik heißen müssen, weil sie es bloß mit den Gesetze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zu tun hat, aber lediglich, so fern sie auf Gegenstände a priori bezogen wird, und nicht, wie die allgemeine Logik, auf die empirischen so wohl, als reinen Vernunfterkenntnisse ohne Unterschied.

→ 그러므로 어쩌면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관계할지도 모르는 개념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 속에서, 순수하거나 감각적인 직관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순수한 사유의 작용들로서, 따라서 그러나 경험적인 원천도 감성적인 원천도 아닌 그 개념들을 우리가 우리에게 그를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을 완전히 선험적으로 사유하는 순수한 지성인식과 순수한 이성인식의 학문에 대한 이념을 그에 대해 더 앞서서 마련한다.→ 그러한 인식들의 기원과 한계와 객관적 정당성을 규정하는 그러한 학문은 초월론적 논리학이라고 불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학문은 순전히 지성과 이성의 원칙들에만 관계하고, 그러나 단지, 그 학문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관련되는 한에서만, 그리고 보편적 논리학과 같이 순수한 이성인식과 구분도 없이 경험적인 것들에도 관련하지는 않는 한에서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Daher ist weder der Raum, noch irgend eine geometrische Bestimmung desselben a priori eine transzendentale Vorstellung, sondern nur die Erkenntnis, daß diese Vorstellungen gar nicht empirischen Ursprungs sein, und die Möglichkeit, wie sie sich gleichwohl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beziehen könne, kann transzendental heißen.

그런 이유로 공간도, 그것의 선험적인 어떠한 기하학적 규정도 초월론적 표상은 아니고, 오히려 단지 인식이다, 이러한 표상들이 전혀 경험적 원천이 아니라는, 그리고 가능성은, 그 가능성이 마찬가지로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가 하는, 초월론적이라 부를 수 있다.

→ 그런 이유로 공간도, 그것의 선험적인 어떠한 기하학적 규정도 초월론적 표상은 아니고, 오히려 단지 이러한 표상들이 전혀 경험적 원천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은 초월론적이라 부를 수 있다.

Imgleichen würde der Gebrauch des Raumes von Gegenständen überhaupt auch transzendental sein: aber ist er lediglich auf Gegenstände der Sinne eingeschränkt, so heißt er empirisch.

그와 마찬가지 것에서 대상들 전반에 대한 공간의 사용 역시 초월론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감관의 대상들에 대해서만으로 제한되고, 그래서 그것은 경험적이라 부른다.

→ 그와 마찬가지 것에서 대상들 전반에 대한 공간의 사용 역시 초월론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감관의 대상들에 대해서만으로 제한되고, 그래서 그것은 경험적이라 부른다.

Der Unterschied des Transzendentalen und Empirischen gehört also nur zur Kritik der Erkenntnisse, und betrifft nicht die Beziehung derselben auf ihren Gegenstand.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구분은 그러므로 단지 인식의 비판에만 속하고, 그것들의 대상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는 관련하지 않는다.

→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구분은 그러므로 단지 인식의 비판에만 속하고, 그것들의 대상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는 관련하지 않는다.

 

In der Erwartung also, daß es vielleicht Begriffe geben könne, die sich a priori auf Gegenstände beziehen mögen, nicht als reine oder sinnliche Anschauungen, sondern bloß als Handlungen des reinen Denkens, die mithin Begriffe, aber weder empirischen noch ästhetischen Ursprungs sind, so machen wir uns zum voraus die Idee von einer Wissenschaft des reinen Verstandes- und Vernunfterkenntnisses, dadurch wir Gegenstände völlig a priori denken.

그러므로 기대 속에서, 어쩌면 개념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그 개념들이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관계할지도 모르는, 순수하거나 감각적인 직관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순수한 사유의 작용들로서, 따라서 그 개념들을, 그러나 경험적인 원천도 감성적인 원천도 아닌, 우리가 우리에게 순수한 지성인식과 순수한 이성인식의 학문에 대한 이념을 그에 대해 더 앞서서 마련한다, 그를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을 완전히 선험적으로 사유하는.

→ 그러므로 어쩌면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관계할지도 모르는 개념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 속에서, 순수하거나 감각적인 직관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순수한 사유의 작용들로서, 따라서 그러나 경험적인 원천도 감성적인 원천도 아닌 그 개념들을 우리가 우리에게 그를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을 완전히 선험적으로 사유하는 순수한 지성인식과 순수한 이성인식의 학문에 대한 이념을 그에 대해 더 앞서서 마련한다.

Eine solche Wissenschaft, welche den Ursprung, den Umfang und die objektive Gültigkeit solcher Erkenntnisse bestimmete, würde transzendentale Logik heißen müssen, weil sie es bloß mit den Gesetze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zu tun hat, aber lediglich, so fern sie auf Gegenstände a priori bezogen wird, und nicht, wie die allgemeine Logik, auf die empirischen so wohl, als reinen Vernunfterkenntnisse ohne Unterschied.

그러한 학문은, 그것이 그러한 인식들의 기원과 한계와 객관적 정당성을 규정하는, 초월론적 논리학이라고 불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학문은 순전히 지성과 이성의 원칙들에만 관계하고, 그러나 단지, 그 학문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관련되는 한에서만, 그리고 보편적 논리학과 같이 순수한 이성인식과 구분도 없이 경험적인 것들에도 관련하지는 않는 한에서만.

→ 그러한 인식들의 기원과 한계와 객관적 정당성을 규정하는 그러한 학문은 초월론적 논리학이라고 불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학문은 순전히 지성과 이성의 원칙들에만 관계하고, 그러나 단지, 그 학문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관련되는 한에서만, 그리고 보편적 논리학과 같이 순수한 이성인식과 구분도 없이 경험적인 것들에도 관련하지는 않는 한에서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蟲-

In diesem Falle würde es eine Logik geben, in der man nicht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abstrahierte; denn diejenige, welche bloß die Regeln des reinen Denkens eines Gegenstandes enthielte, würde alle diejenigen Erkenntnisse ausschließen, welche von empirischem Inhalte wären. Sie würde auch auf den Ursprung unserer Erkenntnisse von Gegenständen gehen, so fern er nicht den Gegenständen zugeschrieben werden kann; da hingegen die allgemeine Logik mit diesem Ursprunge der Erkenntnis nichts zu tun hat, sondern die Vorstellungen, sie mögen uranfänglich a priori in uns selbst, oder nur empirisch gegeben sein, bloß nach den Gesetzen betrachtet, nach welchen der Verstand sie im Verhältnis gegen einander braucht, wenn er denkt, und also nur von der Verstandesform handelt, die den Vorstellungen verschafft werden kann, woher sie auch sonst entsprungen sein mögen.

→ 이러한 경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는 논리학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순전히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유의 법칙들을 포함한다면, 그 논리학은 경험적 내용에 대한 것일 모든 그러한 인식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 원천이 대상들에 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한, 대상들로부터 우리의 인식들의 원천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와 반대로 보편적 논리학은 이러한 인식원천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오히려 최초로 선험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혹은 단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표상들을 순전히 법칙들에 따라 평가하고, 만일 지성이 사유한다면 그러한 것에 따라 지성이 그 표상들을 상호간에 연관 속에서 사용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그 형식이 표상들에 마련될 수 있는, 그로부터 그 표상들이 또한 보통 발원될 지성형식에 대해서만 논한다.

 

Und hier mache ich eine Anmerkung, die ihren Einfluß auf alle nachfolgende Betrachtungen erstreckt, und die man wohl vor Augen haben muß, nämlich: daß nicht eine jede Erkenntnis a priori, sondern nur die, dadurch wir erkennen, daß und wie gewisse Vorstellungen (Anschauungen oder Begriff) lediglich a priori angewandt werden, oder möglich sein, transzendental (d.i. die Möglichkeit der Erkenntnis oder der Gebrauch derselben a priori) heißen müsse.

→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모든 후속하는 판단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이 충분히 눈앞에 지녀야만 하는 주해를 한다. 즉: 각각의 선험적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확실한 표상들이 (직관들이나 개념) 다만 선험적으로 응용된, 혹은 가능한 것을 초월론적(다시 말해 인식의 가능성이나 그 자체의 선험적 사용)이라 불러야만 한다.

 

 

In diesem Falle würde es eine Logik geben, in der man nicht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abstrahierte; denn diejenige, welche bloß die Regeln des reinen Denkens eines Gegenstandes enthielte, würde alle diejenigen Erkenntnisse ausschließen, welche von empirischem Inhalte wären.

이러한 경우 논리학이 있게 될 것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는; 왜냐하면 그 논리학은, 순전히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유의 법칙들을 포함한, 모든 그러한 인식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적 내용에 대한 것일.

→ 이러한 경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는 논리학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순전히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유의 법칙들을 포함한다면, 그 논리학은 경험적 내용에 대한 것일 모든 그러한 인식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Sie würde auch auf den Ursprung unserer Erkenntnisse von Gegenständen gehen, so fern er nicht den Gegenständen zugeschrieben werden kann; da hingegen die allgemeine Logik mit diesem Ursprunge der Erkenntnis nichts zu tun hat, sondern die Vorstellungen, sie mögen uranfänglich a priori in uns selbst, oder nur empirisch gegeben sein, bloß nach den Gesetzen betrachtet, nach welchen der Verstand sie im Verhältnis gegen einander braucht, wenn er denkt, und also nur von der Verstandesform handelt, die den Vorstellungen verschafft werden kann, woher sie auch sonst entsprungen sein mögen.

그것은 또한 대상들로부터 우리의 인식들의 원천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 원천이 대상들에 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한; 이와 반대로 보편적 논리학은 이러한 인식원천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오히려 표상들을, 그것들이 최초로 선험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혹은 단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순전히 법칙들에 따라 평가하고, 그러한 것에 따라 지성이 그 표상들을 상호간에 연관 속에서 사용한다, 만일 지성이 사유한다면, 그리고 그러므로 단지 지성형식에 대해서만 논한다, 그 형식이 표상들에 마련될 수 있는, 그로부터 그 표상들이 또한 보통 발원될.

→ 그것은 또한, 그 원천이 대상들에 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한, 대상들로부터 우리의 인식들의 원천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와 반대로 보편적 논리학은 이러한 인식원천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오히려 최초로 선험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혹은 단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표상들을 순전히 법칙들에 따라 평가하고, 만일 지성이 사유한다면 그러한 것에 따라 지성이 그 표상들을 상호간에 연관 속에서 사용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그 형식이 표상들에 마련될 수 있는, 그로부터 그 표상들이 또한 보통 발원될 지성형식에 대해서만 논한다.

 

Und hier mache ich eine Anmerkung, die ihren Einfluß auf alle nachfolgende Betrachtungen erstreckt, und die man wohl vor Augen haben muß, nämlich: daß nicht eine jede Erkenntnis a priori, sondern nur die, dadurch wir erkennen, daß und wie gewisse Vorstellungen (Anschauungen oder Begriff) lediglich a priori angewandt werden, oder möglich sein, transzendental (d.i. die Möglichkeit der Erkenntnis oder der Gebrauch derselben a priori) heißen müsse.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주해한다, 그것의 영향을 모든 후속하는 판단들에까지 미치는, 그리고 사람들이 충분히 눈앞에 지녀야만 하는, 즉: 각각의 선험적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것,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확실한 표상들이 (직관들이나 개념) 다만 선험적으로 응용된, 혹은 가능한, 초월론적(다시 말해 인식의 가능성이나 그 자체의 선험적 사용)이라 불러야만 한다.

→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모든 후속하는 판단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이 충분히 눈앞에 지녀야만 하는 주해를 한다. 즉: 각각의 선험적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확실한 표상들이 (직관들이나 개념) 다만 선험적으로 응용된, 혹은 가능한 것을 초월론적(다시 말해 인식의 가능성이나 그 자체의 선험적 사용)이라 불러야만 한다.

 

-蟲-

Sie handelt von der Aufmerksamkeit, deren Hindernis und Folgen, dem Ursprunge des Irrtums, dem Zustande des Zweifels, des Skrupels, der Überzeugung usw.; und zu ihr verhält sich die allgemeine und reine Logik wie die reine Moral, welche bloß die notwendigen sittlichen Gesetze eines freien Willens überhaupt enthält, zu der eigentlichen Tugendlehre, welche diese Gesetze unter den Hindernissen der Gefühle, Neigungen und Leidenschaften, denen die Menschen mehr oder weniger unterworfen sind, erwägt, und welche niemals eine wahre und demonstrierte Wissenschaft abgeben kann, weil sie eben sowohl als jene angewandte Logik empirische und psychologische Prinzipien bedarf.

→ 그것은 주의, 그 주의의 장애물과 결과, 오류의 원천, 회의(懷疑)와 가책과 확신 등의 상태에 대하여 논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편적이고 순수한 논리학의 관계는 자유 의지 전반의 순전히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법칙을 포함하는 순수한 도덕이 이러한 법칙을 인간들이 대체로 예속되는 심정과 경향 그리고 열정들의 장애 아래에서 고려하는 본래의 윤리학에 대하는 것(관계)과 같고, 그러한 것(윤리학)은 결코 참이자 입증된 학문을 내놓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저 응용된 논리학과 똑같이 경험적이고 심리학적인 원칙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Ⅱ.Von der Transzendentalen Logik

Ⅱ.초월론적 논리학에 대하여

 

Die allgemeine Logik abstrahieret, wie wir gewies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d.i. von aller Beziehung derselben auf das Objekt, und betrachtet nur die logische Form im Verhältnisse der Erkenntnisse auf einander, d.i. die Form des Denkens überhaupt. Weil es nun aber sowohl reine, als empirische Anscahuungen gibt, (wie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dartut,) so könnte auch wohl ein Unterschied zwischen reinem und empirischem Denken der Gegenstände angetroffen werden.

→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가 확신하듯이 인식의 모든 내용들, 다시 말해 객체에 대한 그 인식의 모든 관계를 도외시하며, 인식들 상호간의 관계들에서 단지 논리적 형식만을, 다시 말해 사유 전반의 형식만을 평가한다.→ 이제 그것은 순수한 직관들만이 아니라 경험적 직관들까지도 주기 때문에, (초월론적 감성학이 입증하듯이,) 그래서 또한 마찬가지로 대상들에 대한 순수한 사유와 경험적 사유 사이에서 구별이 마주쳐질 수 있다.

 

 

 

Sie handelt von der Aufmerksamkeit, deren Hindernis und Folgen, dem Ursprunge des Irrtums, dem Zustande des Zweifels, des Skrupels, der Überzeugung usw.; und zu ihr verhält sich die allgemeine und reine Logik wie die reine Moral, welche bloß die notwendigen sittlichen Gesetze eines freien Willens überhaupt enthält, zu der eigentlichen Tugendlehre, welche diese Gesetze unter den Hindernissen der Gefühle, Neigungen und Leidenschaften, denen die Menschen mehr oder weniger unterworfen sind, erwägt, und welche niemals eine wahre und demonstrierte Wissenschaft abgeben kann, weil sie eben sowohl als jene angewandte Logik empirische und psychologische Prinzipien bedarf.

그것은 주의, 그 주의의 장애물과 결과, 오류의 원천, 회의(懷疑)와 가책과 확신 등의 상태에 대하여 논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편적이고 순수한 논리학의 관계가 순수한 도덕이, 그 순수한 도덕이 자유 의지 전반의 순전히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법칙을 포함하는, 본래의 윤리학에 대해, 그 윤리학이 이러한 법칙을 심정과 경향 그리고 열정들의 장애 아래에서, 그것들에 인간들이 대체로 예속되는, 고려하는 것과 같고, 그러한 것은 결코 참이자 입증된 학문을 내놓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저 응용된 논리학과 똑같이 경험적이고 심리학적인 원칙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그것은 주의, 그 주의의 장애물과 결과, 오류의 원천, 회의(懷疑)와 가책과 확신 등의 상태에 대하여 논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편적이고 순수한 논리학의 관계는 자유 의지 전반의 순전히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법칙을 포함하는 순수한 도덕이 이러한 법칙을 인간들이 대체로 예속되는 심정과 경향 그리고 열정들의 장애 아래에서 고려하는 본래의 윤리학에 대하는 것(관계)과 같고, 그러한 것(윤리학)은 결코 참이자 입증된 학문을 내놓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저 응용된 논리학과 똑같이 경험적이고 심리학적인 원칙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Ⅱ. Von der Transzendentalen Logik

Ⅱ. 초월론적 논리학에 대하여

 

Die allgemeine Logik abstrahieret, wie wir gewies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d.i. von aller Beziehung derselben auf das Objekt, und betrachtet nur die logische Form im Verhältnisse der Erkenntnisse auf einander, d.i. die Form des Denkens überhaupt.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가 확신하듯이 인식의 모든 내용들, 다시 말해 객체에 대한 그 인식의 모든 관계를 도외시하며, 인식들 상호간의 관계들에서 단지 논리적 형식만을, 다시 말해 사유 전반의 형식만을 평가한다.

→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가 확신하듯이 인식의 모든 내용들, 다시 말해 객체에 대한 그 인식의 모든 관계를 도외시하며, 인식들 상호간의 관계들에서 단지 논리적 형식만을, 다시 말해 사유 전반의 형식만을 평가한다.

Weil es nun aber sowohl reine, als empirische Anscahuungen gibt, (wie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dartut,) so könnte auch wohl ein Unterschied zwischen reinem und empirischem Denken der Gegenstände angetroffen werden.

이제 그것은 순수한 직관들만이 아니라 경험적 직관들까지도 주기 때문에, (초월론적 감성학이 입증하듯이,) 그래서 또한 마찬가지로 대상들에 대한 순수한 사유와 경험적 사유 사이에서 구별이 마주쳐질 수 있다.

→ 이제 그것은 순수한 직관들만이 아니라 경험적 직관들까지도 주기 때문에, (초월론적 감성학이 입증하듯이,) 그래서 또한 마찬가지로 대상들에 대한 순수한 사유와 경험적 사유 사이에서 구별이 마주쳐질 수 있다.

 

-蟲-

In der allgemeinen Logik muß also der Teil, der die reine Vernunftlehre ausmachen soll, von demjenigen gänzlich abgesondert werden, welcher die angewandte (obzwar noch immer allgemeine) Logik ausmacht. Der erstere ist eigentlich nur allein Wissenschaft, obzwar kurz und trocken, und wie es die schulgerechte Darstellung einer Elementarlehre des Verstandes erfordert. In dieser müssen also die Logiker jederzeit zwei Regeln vor Augen haben.

 1) Als allgemeine Logik abstrahiert sie von allem Inhalt der Verstandeserkenntnis, und der Verschiedenheit ihrer Gegenstände, und hat mit nichts als der bloßen Form des Denkens zu tun.

 2) Als reine Logik hat sie keine empirische Prinzipien, mithin schöpft sie nichts (wie man sich bisweilen überredet hat) aus der Psychologie, die also auf den Kanon des Verstandes gar keinen Einfluß hat. Sie ist eine demonstrierte Doktrin, und alles muß in ihr völlig a priori gewiß sein.

→ 그러므로 보편적 논리학에서는 순수 이성론을 형성해야 할 그 부분이 응용된 (비록 여전히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논리학을 형성하는 부분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다.→ 비록 짧고 건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성의 요소론의 표준적인 제시를 요구하기에 전자가 고유하게 오로지 학문이다.→ 이러한 것 안에서는 그러므로 논리학자들은 항상 두 가지 법칙들을 눈앞에 가져야만 한다.

→ 1) 보편적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지성인식의 모든 내용들을 도외시하고, 지성의 대상들의 차이를 도외시하며, 그리고 사유의 순수한 형식 외에 다른 무엇과도 관계해서는 안된다.

→ 2) 순수한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어떠한 경험적 원칙들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이 때때로 납득하듯이) 심리학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길어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지성의 표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증명된 이론이며,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충분히 선험적으로 확실함에 틀림없다.

 

 Was ich die angewandte Logik nenne, (wider die gemeine Bedeutung dieses Worts, nach der sie gewisse Exerzitien, dazu die reine Logik die Regel gibt, enthalten soll,) so ist sie eine Vorstellung des Verstandes und der Regeln seines notwendigen Gebrauchs in concreto, nämlich unter den zufälligen Bedigungen des Subjekts, die diesen Gebrauch hindern oder befördern können, und die insgesamt nur empirisch gegeben werden.

→ 내가 응용된 논리학이라 명명하는 것은 (그에 따라 그것이 순수 논리학이 그것에 법칙을 부여하는 확실한 훈련들을 포함해야 할 이러한 용어의 일반적 의미에 반하여) 그래서 그것은 실제로, 즉 이러한 사용을 방해하거나 촉진시킬 수 있는, 그리고 모두 단지 경험적으로만 주어지는 그러한 주관의 우연적 조건들 아래에서, 지성의 표상이자 그것의 필연적 사용의 법칙들이다.

 

 

 

In der allgemeinen Logik muß also der Teil, der die reine Vernunftlehre ausmachen soll, von demjenigen gänzlich abgesondert werden, welcher die angewandte (obzwar noch immer allgemeine) Logik ausmacht.

그러므로 보편적 논리학에서는 그 부분이, 순수 이성론을 형성해야 할,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다, 응용된 (비록 여전히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논리학을 형성하는.

→ 그러므로 보편적 논리학에서는 순수 이성론을 형성해야 할 그 부분이 응용된 (비록 여전히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논리학을 형성하는 부분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다.

Der erstere ist eigentlich nur allein Wissenschaft, obzwar kurz und trocken, und wie es die schulgerechte Darstellung einer Elementarlehre des Verstandes erfordert.

전자가 고유하게 오로지 학문이다, 비록 짧고 건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성의 요소론의 표준적인 제시를 요구하기에.

→ 비록 짧고 건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성의 요소론의 표준적인 제시를 요구하기에 전자가 고유하게 오로지 학문이다.

In dieser müssen also die Logiker jederzeit zwei Regeln vor Augen haben.

이러한 것 안에서는 그러므로 논리학자들은 항상 두 가지 법칙들을 눈앞에 가져야만 한다.

→ 이러한 것 안에서는 그러므로 논리학자들은 항상 두 가지 법칙들을 눈앞에 가져야만 한다.

 

1) Als allgemeine Logik abstrahiert sie von allem Inhalt der Verstandeserkenntnis, und der Verschiedenheit ihrer Gegenstände, und hat mit nichts als der bloßen Form des Denkens zu tun.

1) 보편적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지성인식의 모든 내용들을 도외시하고, 지성의 대상들의 차이를 도외시하며, 그리고 사유의 순수한 형식 외에 다른 무엇과도 관계해서는 안된다.

→ 1) 보편적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지성인식의 모든 내용들을 도외시하고, 지성의 대상들의 차이를 도외시하며, 그리고 사유의 순수한 형식 외에 다른 무엇과도 관계해서는 안된다.

 

2) Als reine Logik hat sie keine empirische Prinzipien, mithin schöpft sie nichts (wie man sich bisweilen überredet hat) aus der Psychologie, die also auf den Kanon des Verstandes gar keinen Einfluß hat.

2) 순수한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어떠한 경험적 원칙들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이 때때로 납득하듯이) 심리학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길어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지성의 표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 2) 순수한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어떠한 경험적 원칙들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이 때때로 납득하듯이) 심리학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길어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지성의 표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Sie ist eine demonstrierte Doktrin, und alles muß in ihr völlig a priori gewiß sein.

그것은 증명된 이론이며,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충분히 선험적으로 확실함에 틀림없다.

→ 그것은 증명된 이론이며,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충분히 선험적으로 확실함에 틀림없다.

 

 

 Was ich die angewandte Logik nenne, (wider die gemeine Bedeutung dieses Worts, nach der sie gewisse Exerzitien, dazu die reine Logik die Regel gibt, enthalten soll,) so ist sie eine Vorstellung des Verstandes und der Regeln seines notwendigen Gebrauchs in concreto, nämlich unter den zufälligen Bedigungen des Subjekts, die diesen Gebrauch hindern oder befördern können, und die insgesamt nur empirisch gegeben werden.

  내가 응용된 논리학이라 명명하는 것은, (이러한 용어의 일반적 의미에 반하여, 그에 따라 그것이 확실한 훈련들을, 순수 논리학이 그것에 법칙을 부여하는, 포함해야 할,) 그래서 그것은 실제로 지성의 표상이자 그것의 필연적 사용의 법칙들이다, 즉 주관의 우연적 조건들 아래에서, 그 조건들이 이러한 사용을 방해하거나 촉진시킬 수 있는, 그리고 그 조건들이 모두 단지 경험적으로만 주어지는.

→ 내가 응용된 논리학이라 명명하는 것은 (그에 따라 그것이 순수 논리학이 그것에 법칙을 부여하는 확실한 훈련들을 포함해야 할 이러한 용어의 일반적 의미에 반하여) 그래서 그것은 실제로, 즉 이러한 사용을 방해하거나 촉진시킬 수 있는, 그리고 모두 단지 경험적으로만 주어지는 그러한 주관의 우연적 조건들 아래에서, 지성의 표상이자 그것의 필연적 사용의 법칙들이다.

 

-蟲-

Die allgemeine Logik ist nun entweder die reine, oder die angewandte Logik. In der ersteren abstrahieren wir von allen empirischen Bedingungen, unter denen unser Verstand ausgeübet wird, z.B. vom Einfluß der Sinne, vom Spiele der Einbildung, den Gesetzen des Gedächtnisses, der Macht der Gewohnheit, der Neigung etc. mithin auch den Quellen der Vorurteile, ja gar überhaupt von allen Ursachen, daraus uns gewisse Erkenntnisse entspringen, oder untergeschoben werden mögen, weil sie bloß den Verstand unter gewissen Umständen seiner Anwendung betreffen, und, um diese zu kennen, Erfahrung erfordert wird. Eine allgemeine, aber reine Logik, hat es also mit lauter Prinzipien a priori zu tun, und ist ein Kano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aber nur in Ansehung des Formalen ihres Gebrauchs, der Inhalt mag sein, welcher er wolle, (empirisch oder transzendental). Eine allgemeine Logik heißt aber alsdenn angewandt, wenn sie auf die Regeln des Gebrauchs des Verstandes unter den subjektiven empirischen Bedingungen, die uns die Psychologie lehrt, gerichtet ist. Sie hat also empirische Prinzipien, ob sie zwar in so fern allgemein ist, daß sie auf den Verstandesgebrauch ohne Unterschied der Gegenstände geht. Um deswillen ist sie auch weder ein Kanon des Verstandes überhaupt, noch ein Organon besondrer Wissenschaften, sondern lediglich ein Kathartikon des gemeinen Verstnades.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순수한 논리학이거나 또는 응용된 논리학이다.→전자에서 우리는 그 아래에서 우리의 지성이 영향을 받는 모든 경험적 조건들, 예를 들어 감각의 유입, 상상의 유희, 기억의 규칙들, 습관의 힘, 경향 등 그러므로 또한 편견의 원천들까지도, 그로부터 우리에게 확실한 인식들이 생기는, 또는 위조될지도 모르는 모든 사태들 전반을 도외시한다. 위조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 사태들이 그것의 사용의 확실한 상황들 아래에서 순전히 지성에만 관계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것들을 알기 위해서 경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하나의 보편적인, 그러나 순수한 논리학은 그러므로 순수한 법칙들과 선험적으로 관계해야 하고, 지성과 이성의 표준이지만, 단지 지성 사용의 형식들과 관련해서 지성이 바라는 (감각적이거나 초월론적인) 내용일지 모른다.→그러나 보편적 논리학은 그 논리학이 주관적 경험적 조건들 아래에서 우리에게 심리학을 가르쳐주는 지성의 사용 법칙들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될 때 그리하여 응용된 논리학이라 부른다.→그러므로 그 논리학은 비록 그것들이 보편적인 한에서일지라도 대상들의 구분 없이 지성사용에 적용되는 경험적 원칙들을 가진다.→ 그 때문에 보편적 논리학은 또한 지성 전반의 표준도 아니고, 특수한 학문들의 도구도 아니며, 오히려 다만 일반적 지성의 정화일 따름이다.

 

 

Die allgemeine Logik ist nun entweder die reine, oder die angewandte Logik.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순수한 논리학이거나 또는 응용된 논리학이다.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순수한 논리학이거나 또는 응용된 논리학이다.

In der ersteren abstrahieren wir von allen empirischen Bedingungen, unter denen unser Verstand ausgeübet wird, z.B. vom Einfluß der Sinne, vom Spiele der Einbildung, den Gesetzen des Gedächtnisses, der Macht der Gewohnheit, der Neigung etc. mithin auch den Quellen der Vorurteile, ja gar überhaupt von allen Ursachen, daraus uns gewisse Erkenntnisse entspringen, oder untergeschoben werden mögen, weil sie bloß den Verstand unter gewissen Umständen seiner Anwendung betreffen, und, um diese zu kennen, Erfahrung erfordert wird.

전자에서 우리는 모든 경험적 조건들을 도외시한다, 그 아래에서 우리의 지성이 영향을 받는, 예를 들어 감각의 유입, 상상의 유희, 기억의 규칙들, 습관의 힘, 경향 등 그러므로 또한 편견의 원천들까지도, 모든 사태들 전반을, 그로부터 우리에게 확실한 인식들이 생기는, 또는 위조될지도 모르는, 왜냐하면 그 사태들이 그것의 사용의 확실한 상황들 아래에서 순전히 지성에만 관계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알기 위해서, 경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전자에서 우리는 그 아래에서 우리의 지성이 영향을 받는 모든 경험적 조건들, 예를 들어 감각의 유입, 상상의 유희, 기억의 규칙들, 습관의 힘, 경향 등 그러므로 또한 편견의 원천들까지도, 그로부터 우리에게 확실한 인식들이 생기는, 또는 위조될지도 모르는 모든 사태들 전반을 도외시한다. 위조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 사태들이 그것의 사용의 확실한 상황들 아래에서 순전히 지성에만 관계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것들을 알기 위해서 경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Eine allgemeine, aber reine Logik, hat es also mit lauter Prinzipien a priori zu tun, und ist ein Kano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aber nur in Ansehung des Formalen ihres Gebrauchs, der Inhalt mag sein, welcher er wolle, (empirisch oder transzendental).

하나의 보편적인, 그러나 순수한 논리학은, 그러므로 순수한 법칙들과 선험적으로 관계해야 하고, 지성과 이성의 표준이지만, 단지 지성 사용의 형식들과 관련해서, 내용일지 모른다, 지성이 바라는, (감각적이거나 초월론적인).

→하나의 보편적인, 그러나 순수한 논리학은 그러므로 순수한 법칙들과 선험적으로 관계해야 하고, 지성과 이성의 표준이지만, 단지 지성 사용의 형식들과 관련해서 지성이 바라는 (감각적이거나 초월론적인) 내용일지 모른다.

Eine allgemeine Logik heißt aber alsdenn angewandt, wenn sie auf die Regeln des Gebrauchs des Verstandes unter den subjektiven empirischen Bedingungen, die uns die Psychologie lehrt, gerichtet ist.

그러나 보편적 논리학은 그리하여 응용된 논리학이라 부른다, 그 논리학이 주관적 경험적 조건들 아래에서 지성의 사용 법칙들에 대하여, 그 법칙들이 우리에게 심리학을 가르쳐주는, 주의를 기울이게 될 때.

→그러나 보편적 논리학은 그 논리학이 주관적 경험적 조건들 아래에서 우리에게 심리학을 가르쳐주는 지성의 사용 법칙들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될 때 그리하여 응용된 논리학이라 부른다.

Sie hat also empirische Prinzipien, ob sie zwar in so fern allgemein ist, daß sie auf den Verstandesgebrauch ohne Unterschied der Gegenstände geht.

그러므로 그 논리학은 경험적 원칙들을 가진다, 비록 그것들이 보편적인 한에서일지라도, 대상들의 구분 없이 지성사용에 적용되는.

→그러므로 그 논리학은 비록 그것들이 보편적인 한에서일지라도 대상들의 구분 없이 지성사용에 적용되는 경험적 원칙들을 가진다.

Um deswillen ist sie auch weder ein Kanon des Verstandes überhaupt, noch ein Organon besondrer Wissenschaften, sondern lediglich ein Kathartikon des gemeinen Verstnades.

그 때문에 보편적 논리학은 또한 지성 전반의 표준도 아니고, 특수한 학문들의 도구도 아니며, 오히려 다만 일반적 지성의 정화일 따름이다.

→ 그 때문에 보편적 논리학은 또한 지성 전반의 표준도 아니고, 특수한 학문들의 도구도 아니며, 오히려 다만 일반적 지성의 정화일 따름이다.

 

-蟲-

Die Logik kann nun wiederum in zwiefacher Absicht unternommen werden, entweder als Logik des allgemeinen, oder des besondern Verstandesgebrauchs. Die erste enthält die schlechthin notwendigen Regeln des Denkens, ohne welche gar kein Gebrauch des Verstandes stattfindet, und geht also auf diesen, unangesehen der Verschiedenheit der Gegenstände, auf welche er gerichtet sein mag. Die Logik des besondern Verstandesgebrauchs enthält die Regeln, über eine gewisse Art von Gegenständen richtig zu denken. Jene kann man die Elementarlogik nennen, diese aber das Organon dieser oder jener Wissenschaft. Die letztere wird mehrenteils in den Schulen als Propädeutik der Wissenschaften vorangeschickt, ob sie zwar, nach dem Gange der menschlichen Vernunft, das späteste ist, wozu sie allererst gelangt, wenn die Wissenschaft schon lange fertig ist, und nur die letzte Hand zu ihrer Berichtigung und Vollkommenheit bedarf. Denn man muß die Gegenstände schon in ziemlich hohem Grade kennen, wenn man die Regeln angeben will, wie sich eine Wissenschaft von ihnen zu Stande bringen lasse.

→ 논리학은 이제 또 다시 보편적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또는 특수한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이중의 의도로 기획될 수 있다.→ 전자는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어떠한 지성의 사용도 생기지 않는, 사유의 전적으로 필연적인 법칙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들의 상이함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보지 않고 이러한 것들에 관계한다.→ 특수한 지성사용의 논리학은 대상들에 대해 올바르게 사유하는 모종의 방식에 대한 법칙들을 포함한다.→ 저것은 사람들이 기초논리학이라 부를 수 있고, 이것은 이러저러한 학문의 수단이라 부를 수 있다.→ 후자는 대부분 학문들의 예비학으로 학교들에서 사전 제공되고, 비록 그러한 것들이 인간 이성의 노정에 따라 늦는 것일지라도 만일 학문이 이미 충분히 준비되었다면, 그리고 단지 후자의 손이 그 학문의 교정과 모범을 필요로 한다면 가장 먼저 그것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어떻게 대상들에 대한 학문이 실현되는지 법칙들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대상들을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Die Logik kann nun wiederum in zwiefacher Absicht unternommen werden, entweder als Logik des allgemeinen, oder des besondern Verstandesgebrauchs.

논리학은 이제 또 다시 이중의 의도로 기획될 수 있다, 보편적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또는 특수한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 논리학은 이제 또 다시 보편적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또는 특수한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이중의 의도로 기획될 수 있다.

Die erste enthält die schlechthin notwendigen Regeln des Denkens, ohne welche gar kein Gebrauch des Verstandes stattfindet, und geht also auf diesen, unangesehen der Verschiedenheit der Gegenstände, auf welche er gerichtet sein mag.

전자는 사유의 전적으로 필연적인 법칙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어떠한 지성의 사용도 생기지 않는,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에 관계한다, 대상들의 상이함을 보지 않고, 그것에 그것이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 전자는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어떠한 지성의 사용도 생기지 않는, 사유의 전적으로 필연적인 법칙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들의 상이함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보지 않고 이러한 것들에 관계한다.

Die Logik des besondern Verstandesgebrauchs enthält die Regeln, über eine gewisse Art von Gegenständen richtig zu denken.

특수한 지성사용의 논리학은 법칙들을 포함한다, 대상들에 대해 올바르게 사유하는 모종의 방식에 대한.

→ 특수한 지성사용의 논리학은 대상들에 대해 올바르게 사유하는 모종의 방식에 대한 법칙들을 포함한다.

Jene kann man die Elementarlogik nennen, diese aber das Organon dieser oder jener Wissenschaft.

저것은 사람들이 기초논리학이라 부를 수 있고, 이것은 이러저러한 학문의 수단이라 부를 수 있다.

→ 저것은 사람들이 기초논리학이라 부를 수 있고, 이것은 이러저러한 학문의 수단이라 부를 수 있다.

Die letztere wird mehrenteils in den Schulen als Propädeutik der Wissenschaften vorangeschickt, ob sie zwar, nach dem Gange der menschlichen Vernunft, das späteste ist, wozu sie allererst gelangt, wenn die Wissenschaft schon lange fertig ist, und nur die letzte Hand zu ihrer Berichtigung und Vollkommenheit bedarf.

후자는 대부분 학문들의 예비학으로 학교들에서 사전 제공되고, 비록 그러한 것들이, 인간 이성의 노정에 따라, 늦는 것일지라도, 가장 먼저 그것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만일 학문이 이미 충분히 준비되었다면, 그리고 단지 후자의 손이 그 학문의 교정과 모범을 필요로 한다면.

→ 후자는 대부분 학문들의 예비학으로 학교들에서 사전 제공되고, 비록 그러한 것들이 인간 이성의 노정에 따라 늦는 것일지라도 만일 학문이 이미 충분히 준비되었다면, 그리고 단지 후자의 손이 그 학문의 교정과 모범을 필요로 한다면 가장 먼저 그것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Denn man muß die Gegenstände schon in ziemlich hohem Grade kennen, wenn man die Regeln angeben will, wie sich eine Wissenschaft von ihnen zu Stande bringen lasse.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상들을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법칙들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대상들에 대한 학문이 실현되는지.

→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어떻게 대상들에 대한 학문이 실현되는지 법칙들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대상들을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蟲-

Wollen wir die Rezeptivität unseres Gemüts, Vorstellungen zu empfangen, so fern es auf irgend eine Weise affiziert wird, Sinnlichkeit nennen; so ist dagegen das Vermögen, Vorstellungen selbst hervorzubringen, oder die Spontaneität des Erkenntnisses, der Verstand. Unsre Natur bringt es so mit sich, daß die Anschauung niemals anders als sinnlich sein kann, d.i. nur die Art enthält, wie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Dagegen ist das Vermögen, den Gegenstand sinnlicher Anschauung zu denken, der Verstand. Keine dieser Eigenschaften ist der andern vorzuziehen. Ohne Sinnlichkeit würde uns kein Gegenstand gegeben, und ohne Verstand keiner gedacht werden.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Daher ist es eben so notwendig, seine Begriffe sinnlich zu machen, (d.i. ihnen den Gegenstand in der Anschauung beizufügen,) als seine Anschauungen sich verständlich zu machen (d.i. sie unter Begriffe zu bringen). Beide Vermögen, oder Fähigkeiten, können auch ihre Funktionen nicht vertauschen. Der Verstand vermag nichts anzuschauen, und die Sinne nichts zu denken. Nur daraus, daß sie sich vereinigen, kann Erkenntnis entspringen. Deswegen darf man aber doch nicht ihren Anteil vermischen, sondern man hat große Ursache, jedes von dem andern sorgfältig abzusondern, und zu unterscheiden. Daher unterscheiden wir die Wissenschaft der Regeln der Sinnlichkeit überhaupt, d.i. Ästhetik, von der Wissenschaft der Verstandesregeln überhaupt, d.i. der Logik.

→ 우리는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심성의 수용성을,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촉발 되는 한에서, 감성이라 이름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에 반해 표상들 자체를 산출하는 능력 또는 인식의 자발성은 지성이다.→ 우리의 본성은 당연히 직관이 감각적인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없다는 것, 즉 단지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촉발되는 그 방식을 포함할 뿐이라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에 반해 감각적 직관의 대상을 사유하는 능력은 지성이다.→ 이러한 특성들 중 어떤 것도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감성 없이 우리에게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성 없이는 어떠한 것도 사고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그런 이유로 그것의 개념들을 감각적으로 만드는 것, (즉 개념들에 대상을 직관 안에서 함께 결합하는 것,) 또한 그것의 직관들을 지성적으로 만드는 것 (즉 그것들을 개념들 아래로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두 가지 능력들, 혹은 소질들 모두 그것들의 능력들을 맞바꿀 수 없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고, 감관은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다.→ 그저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으로부터만 인식은 발생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들의 일부를 뒤섞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사람들은 각각의 것들이 다른 하나로부터 세심하게 분류하고, 구분해야 할 중대한 이유를 가진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감성 전반의 법칙들에 대한 학문들, 즉 감성학을, 지성법칙들 전반에 대한 학문, 즉 논리학과 구분한다.

 

 

Wollen wir die Rezeptivität unseres Gemüts, Vorstellungen zu empfangen, so fern es auf irgend eine Weise affiziert wird, Sinnlichkeit nennen;

우리는 심성의 수용성을,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촉발되는 한에서, 감성이라 이름하고자 한다;

so ist dagegen das Vermögen, Vorstellungen selbst hervorzubringen, oder die Spontaneität des Erkenntnisses, der Verstand.

그래서 그에 반해 능력은, 표상들 자체를 산출하는, 또는 인식의 자발성은, 지성이다.

→ 우리는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심성의 수용성을,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촉발 되는 한에서, 감성이라 이름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에 반해 표상들 자체를 산출하는 능력 또는 인식의 자발성은 지성이다.

Unsre Natur bringt es so mit sich, daß die Anschauung niemals anders als sinnlich sein kann, d.i. nur die Art enthält, wie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우리의 본성은 당연히 필요로 한다, 직관이 감각적인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없다는 것, 즉 단지 그 방식을 포함할 뿐이라는 것,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촉발되는.

→ 우리의 본성은 당연히 직관이 감각적인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없다는 것, 즉 단지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촉발되는 그 방식을 포함할 뿐이라는 것을 필요로 한다.

Dagegen ist das Vermögen, den Gegenstand sinnlicher Anschauung zu denken, der Verstand.

그에 반해 능력은, 감각적 직관의 대상을 사유하는, 지성이다.

→ 그에 반해 감각적 직관의 대상을 사유하는 능력은 지성이다.

Keine dieser Eigenschaften ist der andern vorzuziehen.

이러한 특성들 중 어떤 것도 더 나은 것은 아니다.

→ 이러한 특성들 중 어떤 것도 더 나은 것은 아니다.

Ohne Sinnlichkeit würde uns kein Gegenstand gegeben, und ohne Verstand keiner gedacht werden.

감성 없이 우리에게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성 없이는 어떠한 것도 사고될 수 없게 될 것이다.

→ 감성 없이 우리에게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성 없이는 어떠한 것도 사고될 수 없게 될 것이다.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Daher ist es eben so notwendig, seine Begriffe sinnlich zu machen, (d.i. ihnen den Gegenstand in der Anschauung beizufügen,) als seine Anschauungen sich verständlich zu machen (d.i. sie unter Begriffe zu bringen).

그런 이유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의 개념들을 감각적으로 만드는 것, (즉 개념들에 대상을 직관 안에서 함께 결합하는 것,) 또한 그것의 직관들을 지성적으로 만드는 것 (즉 그것들을 개념들 아래로 가져오는 것).

→ 그런 이유로 그것의 개념들을 감각적으로 만드는 것, (즉 개념들에 대상을 직관 안에서 함께 결합하는 것,) 또한 그것의 직관들을 지성적으로 만드는 것 (즉 그것들을 개념들 아래로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Beide Vermögen, oder Fähigkeiten, können auch ihre Funktionen nicht vertauschen.

두 가지 능력들, 혹은 소질들 모두 그것들의 능력들을 맞바꿀 수 없다.

→ 두 가지 능력들, 혹은 소질들 모두 그것들의 능력들을 맞바꿀 수 없다.

Der Verstand vermag nichts anzuschauen, und die Sinne nichts zu denken.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고, 감관은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다.

→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고, 감관은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다.

Nur daraus, daß sie sich vereinigen, kann Erkenntnis entspringen.

그저 그로부터,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 인식은 발생할 수 있다.

→ 그저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으로부터만 인식은 발생할 수 있다.

Deswegen darf man aber doch nicht ihren Anteil vermischen, sondern man hat große Ursache, jedes von dem andern sorgfältig abzusondern, und zu unterscheiden.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들의 일부를 뒤섞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사람들은 중대한 이유를 가진다, 각각의 것들이 다른 하나로부터 세심하게 분류하고, 구분해야 할.

→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들의 일부를 뒤섞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사람들은 각각의 것들이 다른 하나로부터 세심하게 분류하고, 구분해야 할 중대한 이유를 가진다.

Daher unterscheiden wir die Wissenschaft der Regeln der Sinnlichkeit überhaupt, d.i. Ästhetik, von der Wissenschaft der Verstandesregeln überhaupt, d.i. der Logik.

그 때문에 우리는 감성 전반의 법칙들에 대한 학문들, 즉 감성학을, 지성법칙들 전반에 대한 학문, 즉 논리학과 구분한다.

→ 그 때문에 우리는 감성 전반의 법칙들에 대한 학문들, 즉 감성학을, 지성법칙들 전반에 대한 학문, 즉 논리학과 구분한다.

 

-蟲-

Der transzendentalen Elementarlehre

Zweiter Teil

Die transzendentale Logik

초월론적 요소론

제 2 부문

초월론적 논리학

Einleitung

Idee einer transzendentalen Logik

서론

초월론적 논리학의 이념

Ⅰ.

Von der Logik überhaupt

Ⅰ.

논리학 전반에 대하여

 

 

Unsere Erkenntnis entspringt aus zwei Grundquellen des Gemüts, deren die erste ist, die Vorstellungen zu empfangen (die Rezeptivität der Eindrücke), die zweite das Vermögen, durch diese Vorstellungen einen Gegenstand zu erkennen (Spontaneität der Begriffe); durch die erstere wird uns ein Gegenstand gegeben, durch die zweite wird dieser im Verhältnis auf jene Vorstellung (als bloße Bestimmung des Gemüts) gedacht. Anschauung und Begriffe machen also die Elemente aller unsrer Erkenntnis aus, so daß weder Begriffe, ohne ihnen auf einige Art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noch Anschauung ohne Begriffe, ein Ereknntnis abgeben können. Beide sind entweder rein, oder empirisch. Empirisch, wenn Empfindung (die die wirkliche Gegenwart des Gegenstnades voraussetzt) darin enthalten ist: rein aber, wenn der Vorstellung keine Empfindung beigemischt ist. Man kann die letztere die Materie der sinnlichen Erkenntnis nennen. Daher enthält reine Anschauung lediglich die Form, unter welcher etwas angeschaut wird, und reiner Begriff allein die Form des Denkens eines Gegenstandes überhaupt. Nur allein reine Anschauungen oder Begriffe sind a priori möglich, empirische nur a posteriori.

→ 우리의 인식은 심성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천들로부터 발원한다. 그것들의 첫번째 것은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인상들의 수용성)이고, 두번째 것은 이러한 표상들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개념들의 자발성) 능력들이다; 전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고, 후자를 통하여 이러한 것(대상)이 저 표상과의 관계 속에서 (심성의 순전한 규정으로서) 사고된다.→ 직관과 개념들은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인식의 요소들을 이룬다, 그래서 개념들도, 그 개념들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직관 없이는, 또한 직관도 개념들 없이는,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 지각이 (그 지각이 대상의 실질적 현전을 전제하는) 그 안에 포함될 때 감각적이다: 그러나 그 표상에 아무런 지각도 섞이지 않을 때는 순수하다.→ 사람들은 후자를 감성적 인식의 요소들이라 이름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순수한 직관은 다만 그 아래에서 어떤 것이 직관되는 그러한 형식만을 포함할 따름이고, 순수한 개념은 오로지 대상 전반을 사유하는 형식일 뿐이다.→ 하지만 순수한 직관들이나 개념들만이 선험적일 수 있고, 감각적인 것들은 그저 후험적일 수 있다.

 

 

Der transzendentalen Elementarlehre

Zweiter Teil

Die transzendentale Logik

초월론적 요소론

제 2 부문

초월론적 논리학

Einleitung

Idee einer transzendentalen Logik

서론

초월론적 논리학의 이념

Ⅰ.

Von der Logik überhaupt

Ⅰ.

논리학 전반에 대하여

 

Unsere Erkenntnis entspringt aus zwei Grundquellen des Gemüts, deren die erste ist, die Vorstellungen zu empfangen (die Rezeptivität der Eindrücke), die zweite das Vermögen, durch diese Vorstellungen einen Gegenstand zu erkennen (Spontaneität der Begriffe);

우리의 인식은 심성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천들로부터 발원한다, 그것들의 첫번째 것은,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인상들의 수용성)이고, 두번째 것은 능력들이다, 이러한 표상들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개념들의 자발성);

durch die erstere wird uns ein Gegenstand gegeben, durch die zweite wird dieser im Verhältnis auf jene Vorstellung (als bloße Bestimmung des Gemüts) gedacht.

전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고, 후자를 통하여 이러한 것(대상)이 저 표상과의 관계 속에서 (심성의 순전한 규정으로서) 사고된다.

→ 우리의 인식은 심성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천들로부터 발원한다. 그것들의 첫번째 것은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인상들의 수용성)이고, 두번째 것은 이러한 표상들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개념들의 자발성) 능력들이다; 전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고, 후자를 통하여 이러한 것(대상)이 저 표상과의 관계 속에서 (심성의 순전한 규정으로서) 사고된다.

Anschauung und Begriffe machen also die Elemente aller unsrer Erkenntnis aus, so daß weder Begriffe, ohne ihnen auf einige Art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noch Anschauung ohne Begriffe, ein Ereknntnis abgeben können.

직관과 개념들은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인식의 요소들을 이룬다, 그래서 개념들도, 그 개념들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직관 없이는, 또한 직관도 개념들 없이는,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

→ 직관과 개념들은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인식의 요소들을 이룬다, 그래서 개념들도, 그 개념들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직관 없이는, 또한 직관도 개념들 없이는,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

Beide sind entweder rein, oder empirisch.

양자는 모두 순수하거나 감각적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 양자는 모두 순수하거나 감각적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Empirisch, wenn Empfindung (die die wirkliche Gegenwart des Gegenstnades voraussetzt) darin enthalten ist: rein aber, wenn der Vorstellung keine Empfindung beigemischt ist.

감각적이다, 지각이 (그 지각이 대상의 실질적 현전을 전제하는) 그 안에 포함될 때: 그러나 순수하다, 그 표상에 아무런 지각도 섞이지 않을 때.

→ 지각이 (그 지각이 대상의 실질적 현전을 전제하는) 그 안에 포함될 때 감각적이다: 그러나 그 표상에 아무런 지각도 섞이지 않을 때는 순수하다.

Man kann die letztere die Materie der sinnlichen Erkenntnis nennen.

사람들은 후자를 감성적 인식의 요소들이라 이름할 수 있다.

→ 사람들은 후자를 감성적 인식의 요소들이라 이름할 수 있다.

Daher enthält reine Anschauung lediglich die Form, unter welcher etwas angeschaut wird, und reiner Begriff allein die Form des Denkens eines Gegenstandes überhaupt.

그런 이유에서 순수한 직관은 다만 형식만을 포함할 따름이다, 그 형식 하에서 어떤 것이 직관되는, 그리고 순수한 개념은 오로지 대상 전반을 사유하는 형식일 뿐이다.

→ 그런 이유에서 순수한 직관은 다만 그 아래에서 어떤 것이 직관되는 그러한 형식만을 포함할 따름이고, 순수한 개념은 오로지 대상 전반을 사유하는 형식일 뿐이다.

Nur allein reine Anschauungen oder Begriffe sind a priori möglich, empirische nur a posteriori.

하지만 순수한 직관들이나 개념들만이 선험적일 수 있고, 감각적인 것들은 그저 후험적일 수 있다.

→ 하지만 순수한 직관들이나 개념들만이 선험적일 수 있고, 감각적인 것들은 그저 후험적일 수 있다.

 

-蟲-

Es ist auch nicht nötig, daß wir die Anschauungsart in Raum und Zeit auf die Sinnlichkeit des Menschen einschränken; es mag sein, daß alles endliche denkende Wesen hierin mit dem Menschen notwendig übereinkommen müsse, (wiewohl wir dieses nicht entscheiden können,) so hört sie um dieser Allgemeingültigkeit willen doch nicht auf Sinnlichkeit zu sein, eben darum, weil sie abgeleitet (intuitus derivativus), nicht ursprünglich (intuitus originarius), mithin nicht intellektuelle Anschauung ist, als welche aus dem eben angeführten Grunde allein dem Urwesen, niemals aber einem, seinem Dasein sowohl als seiner Anschauung nach (die sein Dasein in Beziehung auf gegebene Objekte bestimmt), abhängigen Wesen zuzukommen scheint; wiewohl die letztere Bemerkung zu unserer ästhetischen Theorie nur als Erläuterung, nicht als Beweisgrund gezählt werden muß.

→ 우리가 직관방식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감성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모든 유한한 사유하는 존재는 이 점에서 인간과 필연적으로 일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것들은 이러한 보편적 가능성에 속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것들이 근원적이지 않고 (근원적 직관) 파생되었기 (파생적 직관)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제시된 토대로부터만 그것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것의 직관에도 결코 따르지 않는 (그 직관이 그것의 현존을 주어진 객체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근원존재에 의존적 본질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지성적 직관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감성 이론을 위한 후자의 견해는 논거로서가 아니라 단지 해명으로서 헤아려져야만 하지만 말이다.

 

Beschluß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초월론적 감성학의 맺음말

 

Hier haben wir nun eines von den erforderlichen Stücken zur Auflösung der allgemeinen Aufgabe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wie sind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nämlich reine Anschauungen a priori, Raum und Zeit, in welchen wir, wenn wir im Urteile a pirori über den gegebenen Begriff hinausgehen wollen, dasjenige antreffen, was nicht im Begriffe, wohl aber in der Anschauung, die ihm entspricht, a priori entdeckt werden und mit jenem synthetisch verbunden werden kann, welche Urteile aber aus diesem Grunde nie weiter, als auf Gegenstände der Sinne reichen, und nur für Objekte möglicher Erfahrung gelten können.

→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초월론적철학의 보편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부문들에 대한 한 가지 것을 가진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가?→ 즉 순수한 선험적 직관들인 공간과 시간은 그 안에서 우리가 선험적 판단에서 주어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할 때, 개념 안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에 상응하는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드러날 수 있고 저런 것과 종합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어떤 것과 마주치지만, 그러나 그러한 판단들이 감관의 대상들에 미치는 이외에 이러한 근거에서 결코 더 나아가서 유효할 수는 없고, 단순히 가능한 경험의 객체에 대해서만 유효할 수 있다.

 

 

 

Es ist auch nicht nötig, daß wir die Anschauungsart in Raum und Zeit auf die Sinnlichkeit des Menschen einschränken;

그것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직관방식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감성으로 제한하는 것;

es mag sein, daß alles endliche denkende Wesen hierin mit dem Menschen notwendig übereinkommen müsse, (wiewohl wir dieses nicht entscheiden können,) so hört sie um dieser Allgemeingültigkeit willen doch nicht auf Sinnlichkeit zu sein, eben darum, weil sie abgeleitet (intuitus derivativus), nicht ursprünglich (intuitus originarius), mithin nicht intellektuelle Anschauung ist, als welche aus dem eben angeführten Grunde allein dem Urwesen, niemals aber einem, seinem Dasein sowohl als seiner Anschauung nach (die sein Dasein in Beziehung auf gegebene Objekte bestimmt), abhängigen Wesen zuzukommen scheint;

그것은 있을지 모른다, 모든 유한한 사유하는 존재는 이 점에서 인간과 필연적으로 일치해야만 한다는 것,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것들은 이러한 보편적 가능성에 속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에 (파생적 직관), 근원적이지 않고 (근원적 직관), 그러므로 지성적 직관이 아니다, 제시된 토대로부터만 근원존재에, 그것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것의 직관에도 결코 따르지 않는 (그 직관이 그것의 현존을 주어진 객체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의존적 본질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것으로서;

wiewohl die letztere Bemerkung zu unserer ästhetischen Theorie nur als Erläuterung, nicht als Beweisgrund gezählt werden muß.

비록 우리의 감성 이론을 위한 후자의 견해는 논거로서가 아니라 단지 해명으로서 헤아려져야만 하지만 말이다.

→ 우리가 직관방식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감성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모든 유한한 사유하는 존재는 이 점에서 인간과 필연적으로 일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것들은 이러한 보편적 가능성에 속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것들이 근원적이지 않고 (근원적 직관) 파생되었기 (파생적 직관)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제시된 토대로부터만 그것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것의 직관에도 결코 따르지 않는 (그 직관이 그것의 현존을 주어진 객체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근원존재에 의존적 본질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지성적 직관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감성 이론을 위한 후자의 견해는 논거로서가 아니라 단지 해명으로서 헤아려져야만 하지만 말이다.

 

Beschluß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초월론적 감성학의 맺음말

 

Hier haben wir nun eines von den erforderlichen Stücken zur Auflösung der allgemeinen Aufgabe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wie sind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초월론적철학의 보편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부문들에 대한 한 가지 것을 가진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가?

→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초월론적철학의 보편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부문들에 대한 한 가지 것을 가진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가?

nämlich reine Anschauungen a priori(, Raum und Zeit, in welchen wir, wenn wir im Urteile a pirori über den gegebenen Begriff hinausgehen wollen, dasjenige antreffen, was nicht im Begriffe, wohl aber in der Anschauung, die ihm entspricht, a priori entdeckt werden und mit jenem synthetisch verbunden werden kann, welche Urteile aber aus diesem Grunde nie weiter, als auf Gegenstände der Sinne reichen, und nur für Objekte möglicher Erfahrung gelten können.

즉 순수한 선험적 직관들, 공간과 시간이, 그 안에서 우리가, 우리가 선험적 판단에서 주어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할 때, 그것을 마주치는, 개념 안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직관 안에서, 그 직관이 그것에 상응하는, 선험적으로 드러날 수 있고 저런 것과 종합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들이 이러한 근거에서 결코 더 나아가서 (유효할 수는 없고), 감관의 대상들에 미치는 이외에, 그리고 단순히 가능한 경험의 객체에 대해서만 유효할 수 있다.

→ 즉 순수한 선험적 직관들인 공간과 시간은 그 안에서 우리가 선험적 판단에서 주어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할 때, 개념 안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에 상응하는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드러날 수 있고 저런 것과 종합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어떤 것과 마주치지만, 그러나 그러한 판단들이 감관의 대상들에 미치는 이외에 이러한 근거에서 결코 더 나아가서 유효할 수는 없고, 단순히 가능한 경험의 객체에 대해서만 유효할 수 있다.

 

-蟲-

Ⅳ. In der natürlichen Theologie, da man sich einen Gegenstand denkt, der nicht allein für uns gar kein Gegenstand der Anschauung, sondern der ihm selbst durchaus kein Gegenstand der sinnlichen Anschauung sein kann, ist man sorgfältig darauf bedacht, von aller seiner Anschauung (denn dergleichen muß alles sein Erkenntnis sein, und nicht Denken, welches jederzeit Schranken beweiset) die Bedingungen der Zeit und des Raumes wegzuschaffen. Aber mit welchem Rechte kann man dieses tun, wenn man beide vorher zu Formen der Dinge an sich selbst gemacht hat, und zwar solchen, die, als Bedingungen der Existenz der Dinge a priori, übrig bleiben, wenn man gleich die Dinge selbst aufgehoben hätte: denn, als Beidngungen alles Daseins überhaupt, müßten sie es auch vom Dasein Gottes sein. Es bleibt nichts übrig, wenn man sie nicht zu objektiven Formen aller Dinge machen will, als daß man sie zu subjektiven Formen unserer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Anschauungsart macht, die darum sinnlich heißt, weil sie nicht ursprünglich, d.i. eine solche ist, durch die selbst das Dasein des Objekts der Anschauung gegeben wird (und die, so viel wir einsehen, nur dem Urwesen zukommen kann), sondern von dem Dasein des Objekts abhängig, mithin nur dadurch, daß die Vorstellungsfähigkeit des Subjekts durch dasselbe affiziert wird, möglich ist.

→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면밀하게,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이,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를 통해 그 형식들은 감각적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Ⅳ. In der natürlichen Theologie, da man sich einen Gegenstand denkt, der nicht allein für uns gar kein Gegenstand der Anschauung, sondern der ihm selbst durchaus kein Gegenstand der sinnlichen Anschauung sein kann, ist man sorgfältig darauf bedacht, von aller seiner Anschauung (denn dergleichen muß alles sein Erkenntnis sein, und nicht Denken, welches jederzeit Schranken beweiset) die Bedingungen der Zeit und des Raumes wegzuschaffen.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사람들은 면밀하게 그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그것의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을.

→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면밀하게,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Aber mit welchem Rechte kann man dieses tun, wenn man beide vorher zu Formen der Dinge an sich selbst gemacht hat, und zwar solchen, die, als Bedingungen der Existenz der Dinge a priori, übrig bleiben, wenn man gleich die Dinge selbst aufgehoben hätte:

그러나 그런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에 앞서 형성하였다면,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에, 그것들이,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는,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denn, als Beidngungen alles Daseins überhaupt, müßten sie es auch vom Dasein Gottes sein.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이,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s bleibt nichts übrig, wenn man sie nicht zu objektiven Formen aller Dinge machen will, als daß man sie zu subjektiven Formen unserer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Anschauungsart macht, die darum sinnlich heißt, weil sie nicht ursprünglich, d.i. eine solche ist, durch die selbst das Dasein des Objekts der Anschauung gegeben wird (und die, so viel wir einsehen, nur dem Urwesen zukommen kann), sondern von dem Dasein des Objekts abhängig, mithin nur dadurch, daß die Vorstellungsfähigkeit des Subjekts durch dasselbe affiziert wird, möglich ist.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그 형식들이 그를 통해 감각적이라고 불리는,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다.

→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를 통해 그 형식들은 감각적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蟲-

Dieser geschieht aber nicht nach unserem Prinzip der Idealität aller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en; vielmehr, wenn man jenen Vorstellungsformen objektive Realität beilegt, so kann man nicht vermeiden, daß nicht alles dadurch in bloßen Schein verwandelt werde. Denn, wenn man den Raum und die Zeit als Beschaffenheiten ansieht, die ihrer Möglichkeit nach in Sachen an sich angetroffen werden müßten, und überdenkt die Ungereimtheiten, in die man sich alsdenn verwickelt, indem zwei unendliche Dinge, die nicht Substanzen, auch nicht etwas wirklich den Substanzen Inhärierendes, dennoch aber Existierendes, ja die notwendige Bedingung der Existenz aller Dinge sein müssen, auch übrig bleiben, wenn gleich alle existierende Dinge aufgehoben werden; so kann man es dem guten Berkeley wohl nicht verdenken, wenn er die Körper zu bloßem Schein herabsetzte, ja es müßte so gar unsere eigene Existenz, die auf solche Art von der für sich bestehenden Realität eines Undinges, wie die Zeit, abhängig gemacht wäre, mit dieser in lauter Schein verwandelt werden; eine Ungereimtheit, die sich bisher noch niemand hat zu Schulden kommen lassen.

→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직관들의 이념에의 우리의 원칙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만일 사람들이 저 표상형식들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통해 모든 것이 순전한 가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공간과 시간을, 그것들의 가능성이 그에 따라 사태 그 자체에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는 특성들로 간주한다면, 그리고 그 안으로 사람들이 휩쓸려드는 그 모순을 숙고한다면, 동시에, 실체들이 아닌, 실질적으로 실체들에 고유한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하는 것인 두 가지 끝이 없는 것들이, 모든 것들의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어야만 하고, 설령 모든 실존하는 사물들이 지양된다 할지라도 또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한 버클리에게서 그가 물체를, 더욱이 우리들의 고유한 실존이 시간처럼 없는 것(아닌 것)의 존속하는 실재성 그 자체에 그러한 방식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게 될 물체를 순전한 가상으로 격하시켰을 때, 이러한 물체와 함께 진짜 가상으로 변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곡해하지 않을 수 있다. 불합리,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과실을 범하지도 않았음에도.

 

 

Dieser geschieht aber nicht nach unserem Prinzip der Idealität aller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en;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직관들의 이념에의 우리의 원칙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vielmehr, wenn man jenen Vorstellungsformen objektive Realität beilegt, so kann man nicht vermeiden, daß nicht alles dadurch in bloßen Schein verwandelt werde.

더욱이, 만일 사람들이 저 표상형식들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이 순전한 가상으로 변화되(지 않-nicht가 중복된 듯)는 것을.

→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직관들의 이념에의 우리의 원칙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만일 사람들이 저 표상형식들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통해 모든 것이 순전한 가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Denn, wenn man den Raum und die Zeit als Beschaffenheiten ansieht, die ihrer Möglichkeit nach in Sachen an sich angetroffen werden müßten, und überdenkt die Ungereimtheiten, in die man sich alsdenn verwickelt, indem zwei unendliche Dinge, die nicht Substanzen, auch nicht etwas wirklich den Substanzen Inhärierendes, dennoch aber Existierendes, ja die notwendige Bedingung der Existenz aller Dinge sein müssen, auch übrig bleiben, wenn gleich alle existierende Dinge aufgehoben werden;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공간과 시간을 특성들로 간주한다면, 그것들의 가능성이 그에 따라 사태 그 자체에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는, 그리고 그 모순을 숙고한다면, 그 안으로 사람들이 휩쓸려드는, 동시에 두 가지 끝이 없는 것들이, 실체들이 아닌, 실질적으로 실체들에 고유한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하는 것인, 모든 것들의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어야만 하고, 또한 남는다, 설령 모든 실존하는 사물들이 지양된다 할지라도;

so kann man es dem guten Berkeley wohl nicht verdenken, wenn er die Körper zu bloßem Schein herabsetzte, ja es müßte so gar unsere eigene Existenz, die auf solche Art von der für sich bestehenden Realität eines Undinges, wie die Zeit, abhängig gemacht wäre, mit dieser in lauter Schein verwandelt werden;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한 버클리의 그것을 곡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가 물체를 순전한 가상으로 격하시켰을 때, 그것이 더욱이 우리들의 고유한 실존, 없는 것(아닌 것)의 존속하는 실재성 그 자체에 그러한 방식으로, 시간과 같이,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게 될, 이것과 함께 진짜 가상으로 변하게 되어야만 한다.

eine Ungereimtheit, die sich bisher noch niemand hat zu Schulden kommen lassen.

불합리,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과실을 범하지도 않았음에도.

→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공간과 시간을, 그것들의 가능성이 그에 따라 사태 그 자체에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는 특성들로 간주한다면, 그리고 그 안으로 사람들이 휩쓸려드는 그 모순을 숙고한다면, 동시에, 실체들이 아닌, 실질적으로 실체들에 고유한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하는 것인 두 가지 끝이 없는 것들이, 모든 것들의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어야만 하고, 설령 모든 실존하는 사물들이 지양된다 할지라도 또한 남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한 버클리에게서 그가 물체를, 더욱이 우리들의 고유한 실존이 시간처럼 없는 것(아닌 것)의 존속하는 실재성 그 자체에 그러한 방식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게 될 물체를 순전한 가상으로 격하시켰을 때, 이러한 물체와 함께 진짜 가상으로 변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곡해하지 않을 수 있다. 불합리,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과실을 범하지도 않았음에도.

 

-蟲-

Ⅲ. Wenn ich sage: im Raum und der Zeit stellt die Anschauung, so wohl der äußeren Objekte, als auch die Selbstanschauung des Gemüts, beides vor, so wie es unsere Sinne affiziert, d.i. wie es erscheint; so will das nicht sagen, daß diese Gegenstände ein bloßer Schein wären. Denn in der Erscheinung werden jederzeit die Objekte, ja selbst die Beschaffenheiten, die wir ihnen beilegen, als etwas wirklich Gegebenes angesehen, nur daß, so fern diese Beschaffenheit nur von der Anschauungsart des Subjekts in der Relation des gegebenen Gegenstandes zu ihm abhöngt, dieser Gegenstand als Erscheinung von ihm selber als Objekt an sich unterschieden wird. So sage ich nicht, die Körper scheinen bloß außer mir zu sein, oder meine Seele scheint nur in meinem Selbstbewußtsein gegeben zu sein, wenn ich behaupte, daß die Qualität des Raums und der Zeit, welcher, als Bedingung ihres Daseins, gemäß ich beide setze, in meiner Anschauungsart und nicht in diesen Objekten an sich liege. Es wäre meine eigene Schuld, wenn ich aus dem, was ich zur Erscheinung zählen sollte, bloßen Schein machte¹.

→ Ⅲ. 내가 :공간과 시간 안에 외적 객체만이 아니라 심성의 자기직관도 또한 둘 모두를, 직관을, 우리의 감관을 촉발하는 것처럼, 곧 그것이 현상하는 것처럼, 표상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대상들이 순전히 가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 안에서 언제나 객체들은 그 현상들 조차도 우리가 그 객체들에 부여하는 현실적인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특성이 그저 주관의 직관방식에 대해서만 주어진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 그 대상에 부착되는 한에서, 현상으로서 이러한 대상이 객관 그 자체로서 동일한 그것으로부터 구분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간과 시간의 성질이 내가 그에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세우는 그것들의 현존의 조건으로서 이러한 객관들 자체 안이 아니라 나의 직관방식 안에 놓는다고 주장할 때, 물체들이 순전히 나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혹은 나의 정신이 그저 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내가 현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순전히 가상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나의 고유한 책임일 것이다¹.

 

¹Die Prädikate der Erscheinung können dem Objekte selbst beigelegt werden, in Verhältnis auf unseren Sinn, z.B. der Rose die rote Farbe, oder der Geruch; aber der Schein kann niemals als Prädikat dem Gegenstande beigelegt werden, eben darum, weil er, was diesem nur in Verhältnis auf die Sinne, oder überhaupt aufs Subjekt zukommt, dem Objekt für sich beilegt, z.B. die zwei Henkel, die man anfänglich dem Saturn beilegte. Was gar nicht am Objekte an sich selbst, jederzeit aber im Verhältnisse desselben zum Subjekt anzutreffen und von der Vorstellung des ersteren unzertrennlich ist, ist Erscheinung, und so werden die Prädikate des Raumes und der Zeit mit Recht den Gegenständen der Sinne, als solchen, beigelegt, und hierin ist kein Schein. Dagegen, wenn ich der Rose an sich die Röte, dem Saturn die Henkel, oder allen äußeren Gegenständen die Ausdehnung an sich beilege, ohne auf ein bestimmtes Verhältnis dieser Gegenstände zum Subjekt zu sehen und mein Urteil darauf einzuschränken; alsdenn allererst entspringt der Schein.

→ ¹현상의 술어(빈사)는 우리의 감관에 대한 관계 속에서 객관 자체에 부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미의 그 붉은 색, 또는 향기; 그러나 가상은 결코 술어로서 대상에 부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가상이 이러한 것을 단지 감관에 대한 관계 안에서, 혹은 전적으로 주관에 따라 귀속되는 객관에 그 자체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것들을 사람들이 토성에 처음에 부여한 두 고리.→ 전혀 객관 그 자체에가 아니라, 언제나 그것의 주관에 대한 관계들 속에서 마주치는 것이고 전자의 표상으로부터 불가분한 것, 그것은 현상이고, 그래서 공간과 시간의 술어(빈사)는 정당하게 감관의 대상들에 그러한 것으로서 부여되며, 이 점에서 어떤 가상도 아니다.→ 반면에, 이러한 대상들의 주관과의 규정된 관계에 대해 보지 않고 나의 판단을 그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 내가 장미 자체에 붉음을, 토성에 고리들을, 혹은 모든 외적 대상들에 연장 자체를 부여한다면;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가상이 발생할 것이다.

 

 

 

Ⅲ. Wenn ich sage: im Raum und der Zeit stellt die Anschauung, so wohl der äußeren Objekte, als auch die Selbstanschauung des Gemüts, beides vor, so wie es unsere Sinne affiziert, d.i. wie es erscheint;

Ⅲ. 내가 말한다면: 공간과 시간 안에 직관을 표상한다고, 외적 객체만이 아니라, 심성의 자기직관도 또한, 둘 모두를, 그렇게 우리의 감관을 촉발한다, 곧 그것은 현상한다고;

so will das nicht sagen, daß diese Gegenstände ein bloßer Schein wären.

그것은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러한 대상들이 순전히 가상이라고.

→ Ⅲ. 내가 :공간과 시간 안에 외적 객체만이 아니라 심성의 자기직관도 또한 둘 모두를, 직관을, 우리의 감관을 촉발하는 것처럼, 곧 그것이 현상하는 것처럼, 표상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대상들이 순전히 가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Denn in der Erscheinung werden jederzeit die Objekte, ja selbst die Beschaffenheiten, die wir ihnen beilegen, als etwas wirklich Gegebenes angesehen, nur daß, so fern diese Beschaffenheit nur von der Anschauungsart des Subjekts in der Relation des gegebenen Gegenstandes zu ihm abhöngt, dieser Gegenstand als Erscheinung von ihm selber als Objekt an sich unterschieden wird.

왜냐하면 현상 안에서 언제나 객체들은, 그 현상들 조차도, 우리가 그 객체들에 부여하는, 현실적인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특성이 그저 주관의 직관방식에 대해서만 주어진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 그 대상에 부착되는 한에서, 현상으로서 이러한 대상이 객관 그 자체로서 동일한 그것으로부터 구분된다.

→ 왜냐하면 현상 안에서 언제나 객체들은 그 현상들 조차도 우리가 그 객체들에 부여하는 현실적인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특성이 그저 주관의 직관방식에 대해서만 주어진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 그 대상에 부착되는 한에서, 현상으로서 이러한 대상이 객관 그 자체로서 동일한 그것으로부터 구분된다.

So sage ich nicht, die Körper scheinen bloß außer mir zu sein, oder meine Seele scheint nur in meinem Selbstbewußtsein gegeben zu sein, wenn ich behaupte, daß die Qualität des Raums und der Zeit, welcher, als Bedingung ihres Daseins, gemäß ich beide setze, in meiner Anschauungsart und nicht in diesen Objekten an sich liege.

그래서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물체들이 순전히 나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혹은 나의 정신이 그저 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내가 주장할 때, 공간과 시간의 성질이, 그러한 것, 그것들의 현존의 조건으로서, 내가 그에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세우는, 이러한 객관들 자체 안이 아니라 나의 직관방식 안에 놓는다고.

→ 그래서 나는 내가 공간과 시간의 성질이 내가 그에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세우는 그것들의 현존의 조건으로서 이러한 객관들 자체 안이 아니라 나의 직관방식 안에 놓는다고 주장할 때, 물체들이 순전히 나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혹은 나의 정신이 그저 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Es wäre meine eigene Schuld, wenn ich aus dem, was ich zur Erscheinung zählen sollte, bloßen Schein machte¹.

그것은 나의 고유한 책임일 것이다, 만일 내가 그로부터, 내가 현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어떤 것, 순전히 가상을 만들어 낸다면¹.

→ 만일 내가 현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순전히 가상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나의 고유한 책임일 것이다¹.

 

¹Die Prädikate der Erscheinung können dem Objekte selbst beigelegt werden, in Verhältnis auf unseren Sinn, z.B. der Rose die rote Farbe, oder der Geruch;

¹현상의 술어(빈사)는 객관 자체에 부여될 수 있다, 우리의 감관에 대한 관계 속에서, 예를 들어 장미의 그 붉은 색, 또는 향기;

aber der Schein kann niemals als Prädikat dem Gegenstande beigelegt werden, eben darum, weil er, was diesem nur in Verhältnis auf die Sinne, oder überhaupt aufs Subjekt zukommt, dem Objekt für sich beilegt, z.B. die zwei Henkel, die man anfänglich dem Saturn beilegte.

그러나 가상은 결코 술어로서 대상에 부여될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왜냐하면 그 가상이, 이러한 것에 단지 감관에 대한 관계 안에서, 혹은 전적으로 주관에 따라 귀속되는, 객관에 그 자체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 고리, 그것들을 사람들이 토성에 처음에 부여한.

→ ¹현상의 술어(빈사)는 우리의 감관에 대한 관계 속에서 객관 자체에 부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미의 그 붉은 색, 또는 향기; 그러나 가상은 결코 술어로서 대상에 부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가상이 이러한 것을 단지 감관에 대한 관계 안에서, 혹은 전적으로 주관에 따라 귀속되는 객관에 그 자체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것들을 사람들이 토성에 처음에 부여한 두 고리.

Was gar nicht am Objekte an sich selbst, jederzeit aber im Verhältnisse desselben zum Subjekt anzutreffen und von der Vorstellung des ersteren unzertrennlich ist, ist Erscheinung, und so werden die Prädikate des Raumes und der Zeit mit Recht den Gegenständen der Sinne, als solchen, beigelegt, und hierin ist kein Schein.

전혀 객관 그 자체에가 아니라, 언제나 그것의 주관에 대한 관계들 속에서 마주치는 것이고 전자의 표상으로부터 불가분한 것, 그것은 현상이고, 그래서 공간과 시간의 술어(빈사)는 정당하게 감관의 대상들에, 그러한 것으로서, 부여되며, 이 점에서 어떤 가상도 아니다.

→ 전혀 객관 그 자체에가 아니라, 언제나 그것의 주관에 대한 관계들 속에서 마주치는 것이고 전자의 표상으로부터 불가분한 것, 그것은 현상이고, 그래서 공간과 시간의 술어(빈사)는 정당하게 감관의 대상들에 그러한 것으로서 부여되며, 이 점에서 어떤 가상도 아니다.

Dagegen, wenn ich der Rose an sich die Röte, dem Saturn die Henkel, oder allen äußeren Gegenständen die Ausdehnung an sich beilege, ohne auf ein bestimmtes Verhältnis dieser Gegenstände zum Subjekt zu sehen und mein Urteil darauf einzuschränken; alsdenn allererst entspringt der Schein.

반면에, 내가 장미 자체에 붉음을, 토성에 고리들을, 혹은 모든 외적 대상들에 연장 자체를 부여한다면, 이러한 대상들의 주관과의 규정된 관계에 대해 보지 않고 나의 판단을 그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가상이 발생할 것이다.

→ 반면에, 이러한 대상들의 주관과의 규정된 관계에 대해 보지 않고 나의 판단을 그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 내가 장미 자체에 붉음을, 토성에 고리들을, 혹은 모든 외적 대상들에 연장 자체를 부여한다면;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가상이 발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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