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 problematische Satz ist also derjenige, der nur logische Möglichkeit (die nicht objektiv ist) ausdruckt, d.i. eine freie Wahl einen solchen Satz gelten zu lassen, eine bloß willkürliche Aufnehmung desselben in den Verstand. Der assertorische sagt von logischer Wirklichkeit oder Wahrheit, wie etwa in einem hypothetischen Vernunftschluß das Antecedens im Obersatze problematisch, im Untersatze assertorisch vorkommt, und zeigt an, daß der Satz mit dem Verstande nach dessen Gesetzen schon verbunden sei; der apodiktische Satz denkt sich den assertorischen durch diese Gesetze des Verstandes selbst bestimmt, und daher a priori behauptend, und drückt auf solche Weise logische Notwendigkeit aus. Weil nun hier alles sich gradweise dem Verstande einverleibt, so daß man zuvor etwas problematisch urteilt, darauf auch wohl es assertorisch als wahr annimmt, endlich als unzertrennlich mit dem Verstande verbunden, d.i. als notwendig und apodiktisch behauptet, so kann man diese drei Funktionen der Modalität auch so viel Momente des Denkens überhaupt nennen.
→ 개연 명제는 그러므로 그것, 단지 논리적 가능성 (대상적-객관적? 가능성이 아니라) 을 나타내는, 즉 자의적 선택이 그러한 명제를 유효하도록 하는, 지성 내로의 그 명제의 순전히 임의적인 수용이다.→ 단언 명제는 아마도 가언적인 이성추론에서 전항(前項)이 대전제 안에서는 개연적으로 소전제 안에서는 단언적으로 있듯이, 그렇게 논리적 실재성 혹은 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단언 명제는 그 명제가 지성과 그 지성의 법칙들에 따라 이미 결합하리란 것을 가리킨다; 필연 명제는 스스로 단언 명제를 이러한 지성 자체의 법칙들을 통해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필연 명제는 선험적으로 주장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방식에 대해 논리적 필연성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이제 여기에서 모든 것은 스스로 점차 지성에 통합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선 어떤 것을 개연적으로 판단하고, 그로부터 또한 그것을 충분히 단언적으로 참으로서 받아들이고, 끝으로 내재적인 것으로서 지성과 결합시킨다는 것, 즉 불가결하고 필연적인 것으로서 주장한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양상의 세 가지 기능을 또한 그렇게 많은 사유 일반의 계기들(상황들)로 명명할 수 있다.


Der problematische Satz ist also derjenige, der nur logische Möglichkeit (die nicht objektiv ist) ausdruckt, d.i. eine freie Wahl einen solchen Satz gelten zu lassen, eine bloß willkürliche Aufnehmung desselben in den Verstand.
개연 명제는 그러므로 그것, 단지 논리적 가능성 (대상적-객관적? 가능성이 아니라) 을 나타내는, 즉 자의적 선택이 그러한 명제를 유효하도록 하는, 지성 내로의 그 명제의 순전히 임의적인 수용이다.
→ 개연 명제는 그러므로 그것, 단지 논리적 가능성 (대상적-객관적? 가능성이 아니라) 을 나타내는, 즉 자의적 선택이 그러한 명제를 유효하도록 하는, 지성 내로의 그 명제의 순전히 임의적인 수용이다.
Der assertorische sagt von logischer Wirklichkeit oder Wahrheit, wie etwa in einem hypothetischen Vernunftschluß das Antecedens im Obersatze problematisch, im Untersatze assertorisch vorkommt, und zeigt an, daß der Satz mit dem Verstande nach dessen Gesetzen schon verbunden sei; der apodiktische Satz denkt sich den assertorischen durch diese Gesetze des Verstandes selbst bestimmt, und daher a priori behauptend, und drückt auf solche Weise logische Notwendigkeit aus.
단언 명제는 논리적 실재성 혹은 참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마도 가언적인 이성추론에서 전항(前項)이 대전제 안에서 개연적으로, 소전제 안에서 단언적으로 있듯이, 그리고 가리킨다, 그 명제가 지성과 그 지성의 법칙들에 따라 이미 결합하리란 것을; 필연 명제는 스스로 단언 명제를 이러한 지성 자체의 법칙들을 통해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선험적으로 주장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방식에 대해 논리적 필연성을 나타낸다.
→ 단언 명제는 아마도 가언적인 이성추론에서 전항(前項)이 대전제 안에서는 개연적으로 소전제 안에서는 단언적으로 있듯이, 그렇게 논리적 실재성 혹은 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단언 명제는 그 명제가 지성과 그 지성의 법칙들에 따라 이미 결합하리란 것을 가리킨다; 필연 명제는 스스로 단언 명제를 이러한 지성 자체의 법칙들을 통해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필연 명제는 선험적으로 주장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방식에 대해 논리적 필연성을 나타낸다.
Weil nun hier alles sich gradweise dem Verstande einverleibt, so daß man zuvor etwas problematisch urteilt, darauf auch wohl es assertorisch als wahr annimmt, endlich als unzertrennlich mit dem Verstande verbunden, d.i. als notwendig und apodiktisch behauptet, so kann man diese drei Funktionen der Modalität auch so viel Momente des Denkens überhaupt nennen.
왜냐하면 이제 여기에서 모든 것은 스스로 점차 지성에 통합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선 어떤 것을 개연적으로 판단한다는 것, 그로부터 또한 그것을 충분히 단언적으로 참으로서 받아들이고, 끝으로 내재적인 것으로서 지성과 결합시킨다는 것, 즉 불가결하고 필연적인 것으로서 주장한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양상의 세 가지 기능을 또한 그렇게 많은 사유 일반의 계기들(상황들)로 명명할 수 있다.
→ 왜냐하면 이제 여기에서 모든 것은 스스로 점차 지성에 통합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선 어떤 것을 개연적으로 판단하고, 그로부터 또한 그것을 충분히 단언적으로 참으로서 받아들이고, 끝으로 내재적인 것으로서 지성과 결합시킨다는 것, 즉 불가결하고 필연적인 것으로서 주장한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양상의 세 가지 기능을 또한 그렇게 많은 사유 일반의 계기들(상황들)로 명명할 수 있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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