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 링크해 놓은 사이트들 중 'SOVIDENCE.' 블로그를 오랜만에 들어가 글 몇 편을 보았는데 일단 찾고 있던 어떤 그림을 찾은 느낌이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여러 분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느꼈다. 여하간에, 저 블로그에서 몇 편의 글을 읽고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결국 이 나라 이 사회에서 여성들은 무슨 중뿔난 해법이 국가 차원에서 등장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경력을 단절시키는 가장 큰 벽이라 할 만한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여성들의 성취를 억누르고 덮고 가렸던 유리벽 틈새로 이제 포화 상태인 그들의 능력이 비집고 나와 드러나게 될 것이고, 이미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사회의 반수 가까운 경쟁자들을 사회의 암묵적 지원 덕택에 무시할 수 있었던 남성들은 점차로 본래의 정상적인 경쟁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고, 적당히 도태되거나 심하면 대다수가 뒤쳐질 것이다. 결국 성과와 실적이 기준이 되어 가면서 여성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걸맞고 합당한 지위를 찾아가게 될 것이고, 그 '집단'은 견고해질 것이고, 여혐종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차별적 행동과 어휘를 수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속시키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부 돌출되는 사건들을 방지할 제도의 마련이 시급하지만, 그것은 촉매 역할을 할 뿐 대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구는 감소할 테고 노령화는 심해질 테고 실업율이 올라갈 텐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을 억압하겠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유슬림 국가를 선포하는 꼴이고, 실현 가능성도 없다. 일부(뭐 다수라고 해도 되겠지만) 남성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여성혐오 같은 게 없다고 억지를 부리는 이유를 이해하기 좀 어려웠는데, 결국 위기의식이 표출된 것이었나 싶기도 하고. 대학에 입학하고서 대학원에 있는 지금까지 여성 상급자(명예남성 말고)의 적극적 활동들을 경험해 온 것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구나 싶고 그러한 여성 동료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그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데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 그들의 능력이나 성취를 과소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내 생존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저러나 철학이란 참 무력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고, 낄낄. 한 개인으로서 걱정스러운 것은 결국 거스를 수 없는 이 변화의 과정에서 끔찍하고 흉악한 사건들이 더 많이 발생할 것 같다는 점인데, 조현병 환자 관리 강화 따위가 대책이라고 내놓는 나라에서 그걸 막아줄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냥 이 문제를 이 모임 저 모임에서 의도적으로 거론하고, 작은 규모의 분위기를 자꾸자꾸 만들어내는 정도의 일을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 그 외에 뭔가를 더 해야 하는지, 아님 그냥 여태껏 그래 왔듯 닥치고 숨어서 다가올 경쟁의 츠나미에서 각자도생의 길이나 모색하는 게 맞는 일인지, 결국 또 모르겠네. 링크 걸어 놓은 블로그들에 좋은 글들 많으니 이 쓰잘데기 없고 어두컴컴한 블로그에 오신 분들께서는 한 번 둘러 보시는 걸 추천드린다. -蟲-

Michael Frede, ´Prädication und Existenzaussage Platons Gebrauch von "... ist ..." und "... ist nicht ..." im Sophistes´, 1967, S.12-37.

II. Zwei Verwendungen von "...ist" 
   Eine Interpretation von 255C12-13

III. Die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1. Die Bedeutung der Unterscheidung
 2.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3.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und Selbstprädikation
 4. Die zweite Verwendung von "... ist ..."
 5. Eine Unterscheidung von Formen und Einzeldingen mit Hilfe der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II. Zwei Verwendungen von "...ist" 
   Eine Interpretation von 255C12-13

  Wenden wir uns also zuerst der Stelle im Sophistes zu, die am ehesten einen Anhaltspunkt dafür bietet, daß Platon das kopulative vom existentiellen "... ist" unterscheidet: 255c12-13
  255c8-255e1 wird gezeigt, daß "das Seiende" und das "Verschiedene" nicht zwei Ausdrücke für das Seiende sind. Das Merkmal des Verschiedenen, an dem sein Unterschied zum Seienden deutlich werden soll, wird in diesem Abschnitt zweimal formuliert:
(1) (255d6-7) "Was immer auch verschieden ist, das ist genau das, was es ist (nämlich verschieden), notwendig von einem anderen".
(2). "τὸ δέ γ᾿ ἕτερον ἀεὶ πρὸς ἕτερον (sc. λέγεσθαι)" (255d1).
우리는 우선 플라톤이 계사 "... is" 와 존재사 "... is" 를 구분한다는 상당한 암시를 주는 『소피스트』 의 해당 장 255c12-13 으로 향한다. 
  255c8-255e1 은 "The Being" 과 "The Different" 가 The Being 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이 아님을 보여준다. The Being 에 대해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The Different 의 특징은 이 구절에서 두 차례 공식화된다.
(1) (255d6-7) "언제나 다른 것, 그것은 어떤 그 외의 것에 대해 바로 그것인 바의 (즉 다른) 것이어야 한다.
(2) "다른 것은 언제나 다른 것에 대해 (진술된다)" (255d1).
(2) läßt wenigstens drei Übersetzungen zu, je nachdem, ob man "τὸ ... ἕτερον" a) auf den Ausdruck "ἕτερον", b) die Form des Verschiedenen oder schließlich c) das, was an der Form des Verschiedenen teilhat, bezieht.:
 (a) "`verschieden` wird immer in bezug auf ein anderes ausgesagt"
 (b) "das Verschiedene wird immer in bezug auf ein anderes ausgesagt"
 (c) "das Verschiedene wird immer in bezug auf ein anderes so (d. h. `verschieden`) genannt".
(Ich folge dem platonischen Sprachgebrauch und verwende aus Gründen, die später deutlich werden, "das X" sowohl für die Form X als auch die Dinge, die an dieser Form teilhaben.)
(2) 는 "τὸ ... ἕτερον" 이 a) "ἕτερον" 이란 표현을 지시하는 것인지, b) The Different 라는 형상을 지시하는 것인지 혹은 끝으로 c) The Different 라는 형상을 나눠 갖는 것, 그것을 지시하는 것인지에 따라, 적어도 세 가지 번역을 허용한다.
  (a) "'different' 라는 말은 언제나 그 외의 것에 관련하여 진술된다."
  (b) "The Different 라는 것은 언제나 그 외의 것에 관련하여 진술된다."
  (c) "The Different 라는 것은 언제나 그 외의 것에 관련하여 그렇게(즉 'different' 라고) 불린다."
(나는 플라톤의 화법에 따르고 이후에 분명해질 이유에 따라, "The X" 를 형상 X 만이 아니라 이 형상을 나눠 갖는 사물들에 대해서도 사용한다.)
-13- Ich möchte mich jetzt für keine der Übersetzungen (a)-(c) entscheiden, da die Übersetzung von 255d1 von der Übersetzung von 255c12-13 abhängt. Vielmehr will ich versuchen, 255d1-7 zunächst unabhängig von 255c12-13 zu interpretieren.
  Alle drei Versionen von (2) haben eines gegenüber (1) gemein: während in (1) von dem Begriff der Verschiedenheit die Rede ist, bezieht (2) auf die Verwendung von Prädikaten mit der Bedeutung von "... ist verschieden von ...". Übersetzungen wie "... das Verschiedene ist immer verschieden in bezug auf etwas anderes ..." sind also in jedem Fall nicht scharf genug.
  나는 번역 (a)-(c) 중 어느 것도 확정하지 않을 것이다. 255d1 에 대한 번역은 255c12-13 에 대한 번역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255c12-13 에 번역을 의존하지 않는 255d1-7 을 검토할 것이다.
  (2) 의 세 형식들 모두 (1) 에 반하여 공통점을 가진다. (1) 에서 논의는 Difference 개념에 대한 것인 반면, (2) 는 "... is different from ..." 의 의미를 가진 서술의 용법에 관련된다. "... The Different 는 언제나 그 외의 어떤 것과 관련하여 다르다 ..." 와 같은 번역은 각 경우에 충분히 분명치 못하다.
  
  Dieser Wechsel in der Redeweise von (1) zu (2) braucht uns freilich nicht zu stören; er findet sich häufig genug bei Platon. Ein besonders klares Beispiel dafür ist Soph. 258b2-4, wo vom Nichtseienden gesagt wird: "οὐδὲν ἧττον, ..., αὐτοῦ τοῦ ὄντος οὐσία ἐστίν, οὐκ ἐναντίον είνἐκῳ σημαίνουσα ἀλλὰ τοσοῦτον μόνον, ἕτερον ἐκεινου."
  Ein Problem wird aus diesem Wechsel im Ausdruck erst bei Aristoteles in der Kategorienschrift, 8a31-35. Und Boethus, der annimmt, daß von Platon die Relativa folgendermaßen bestimmt werden : "ὅσα αὐτὰ ἅπερ ἐστιν ἑτέρων λέγεται", zieht sich die folgende Kritik des Simplicius zu (in Cat. 159, 14-15; 159, 20-22) : "ἐν Σοφιστῇ δὲ βουληθεὶς τὸ ἕτερον τῶν πρός τι ὂν ἐπιδεῖξαι οὕτως φησίν. ὅτιπερ ἂ ἕτερον ᾐ, συμβέβηκεν ἐξ ἀνάγκης ἑτέρου τοῦτο αὐτὸ ὅπερ ἐστὶν εἶναι" (vgl. auch: Ammonius in Cat. 70. 10-14; Philoponus in Cat. 109, 23ff.).
  Wir werden also in jedem Fall zweckmäßig verfahren, wenn wir uns für die Interpretation von 255d1-7 an die Art der Formulierung von 255d1 halten. Denn alle relativa secundum esse sind auch relativa secundum dici, aber nicht umgekehrt alle relativa secundum dici auch relativa secundum esse.
  Wenn wir bisher auch noch nicht in der Lage sind, (2) zu übersetzen, so können wir doch auf Grund von (1) und (2) sagen, daß für das Verschiedene folgendes gilt :
  독해방식에서 (1) 에서 (2) 로의 이런 변형이 확실히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그것은 플라톤에게서 충분히 자주 발견된다. 그에 대한 특히 분명한 예시는 『소피스트』 258b2-4 이다. 거기에서는 Not Being 에 대해 진술된다. "Being 그 자체에 조금도 못지 않게 Being 이다, 저것에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만큼만을, 저것과 다름을 의미할 뿐이기에."
  표현의 이러한 변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8a31-35 에서 처음 문제시된다. 그리고 보에티우스는 플라톤에 의해 상대적인 것들이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고 받아들인다. "그것들이 다른 것들에 속한다고 진술되는 모든 것들", 이는 심플리키우스의 다음과 같은 비판을 이끌어낸다 (『범주론』 159, 14-15; 159, 20-22) : "『소피스트』 에서 그는 The Different 가 무언가에 대한 것들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기대하며 그런 식으로 말한다. 다를 바의 바로 그것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 다름에 속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암모니우스 『범주론』 70, 10-14, 필로포누스 『범주론』 109, 23 이하 참조).
  그리하여 우리는 255d1-7 의 해석을 위해 255d1 의 정식화 방식에 머무를 때에 각 경우 적절하게 진행하게 된다. 모든 존재에 따라 상대적인 것들은 또한 진술에 따라 상대적인 것들이지만, 역으로 모든 진술에 따라 상대적인 것들이 또한 존재에 따라 상대적인 것들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2) 를 여전히 번역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우리는 (1) 과 (2) 를 근거로 the Diffrent 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주된다고 말할 수 있다.
  (I) Wenn von einem Gegenstand a wahrheitsgemäß gesagt wird, daß er verschieden ist, dann ist immer folgende Bedingung erfüllt :
es gibt einen Gegenstand b, derart, daß in bezug auf b von a ausgesagt wird, daß es verschieden ist, und b ein von a verschiedener Gegenstand ist.
  Die Tatsache, daß die Wahrheit eines Satzes von der Form "x ist verschieden von y" immer die Erfüllung dieser Bedingung voraussetzt, liegt nach 255d4-6 daran, daß das verschiedene nur an einer der beiden Formen teilhat, von denen dort die Rede ist.
  An der gleichen Form hat nach 255d4-5 auch das Seiende teil, ohne daß die Wahrheit von "a ist" immer die Erfüllung dieser Bedingung verlangte; denn nach 255d5 zeigt sich das Bestehen eines Unterschiedes zwischen dem Seienden und dem Verschiedenen gerade darin, -14- daß, wenn das Seiende und das Verschiedene dasselbe wären, der Gebrauch von "... ist verschieden von ..." in einem wahren Satz nicht immer die Erfüllung dieser Bedingung voraussetzte.
  (I) 대상 a 에 대해, 그것이 다르다는 것이 참으로 진술되는 경우, 다음의 조건이 충족된다.
b 에 관련하여 a 가 다르다는 것이 a 에 대해 진술되는, 그리고 b 가 a 와 다른 대상인, 그런 대상 b 가 존재한다.
  "x is different from y" 형식 문장의 참이 언제나 이런 조건의 충족을 요청한다는 사실은, 255d4-6 에 따라 성립한다. 다른 것은 두 형상들 중 하나의 몫만 나눠 갖는다는 독해가 이에 관한 것이다.
  255d4-5 에서 The Being 이 같은 형상을 나누어 가지는데, "a is" 의 참이 언제나 위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점 없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255d5에서 The Being 과 The Different 사이의 구분 성립은, The Being 과 The Different 가 그 자체로 존재할 경우, 참인 문장에서 "... is different from ..." 의 사용이 항상 이 조건의 충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직접 근거하기 때문이다.
  (II) Wenn von einem Gegenstand a wahrheitsgemäß gesagt wird, daß er ist, dann ist in einigen Fällen folgende Bedingung erfüllt :
es gibt einen Gegenstand b, derart, daß in bezug auf b von a ausgesagt wird, daß es ist, und b ein von a verschiedener Gegenstand ist.
  (II) 대상 a 에 대해 it is 가 참으로 진술되는 경우, 몇몇 경우에 다음 조건이 충족된다.
b 와 관련하여 a is 가 a 에 대해 진술되는, 그리고 b 가 a 와 다른 대상인, 그런 대상 b 가 존재한다.
  (III) Wenn von einem Gegenstand a wahrheitsgemäß gesagt wird, daß er ist, dann ist in einigen Fällen folgende Bedingung nicht erfüllt : 
es gibt einen Gegenstand b, derart, daß in bezug auf b von a ausgesagt wird, daß es ist, und b ein von a verschiedener Gegenstand ist. 
  (III) 대상 a 에 대하여 it is 가 참으로 진술되는 경우, 몇몇 경우에 다음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b 와 관련하여 a is 가 a 에 대해 진술되는, 그리고 b 가 a 와 다른 대상인, 그런 대상 b 가 존재한다.
  Dagegen gilt der (III) entsprechende Satz für das Verschiedene nicht, weil das Verschiedene nur an einer der beiden Formen teilhat, die 255d4 erwähnt werden, und eben darin zeigt sich der Unterschied zwischen dem Seienden und dem Verschiedenen.
  Schwierigkeiten ergeben sich nun bei der Interpretation von (III). Welchen Gebrauch von "... ist" hat Platon im Auge, der nicht sowohl eine Ergänzung verlangt als auch voraussetzt, daß die Gegenstände, die der Ergänzung und dem Subjekt zugeordnet sind, numerisch verschieden sind?
  Dieses Problem löste sich leicht auf, wenn man den Interpretationen der Stelle folgte, nach denen hier zwischen den einstelligen und mehrstelligen Prädikaten, insbesondere aber zwischen einem vollständigen und einem unvollständigen Gebrauch von "... ist" unterschieden wird.
  하지만 (III) 은 The Different 에 부합하는 문장으로 간주되지 않는데, 255d4 에서 언급된 바 The Different 가 두 형상 중 하나의 몫만 나누어 가지고, The Being 과 The Different 사이의 구분 자체가 바로 그 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난점들은 (III) 에 대한 해석에서 발생한다. 플라톤이 염두에 둔 "... is" 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보어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보어와 주어에 할당되는 그 대상들이 수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하기도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단항 술어와 다항 술어 사이의, 특히 "... is" 완전 용법과 불완전 용법 사이의 구분에 따라 그 부분을 해석할 때에 쉽사리 해결된다.
  Einer solchen Interpretation, die durch 255c12-13 nahegelegt wird, steht allerdings der zweite Teil der Bedingung in (I)-(III) : "und b ein von a verschiedener Gegenstand ist" im Wege. Denn (III), das nach der Standardinterpretation des Textes dem vollständigen Gebrauch von "... ist" im Sinn von "... existiert" entsprechen sollte, läßt auf Grund des zweiten Teils der Bedingung immer noch die Möglichkeit zu, daß es sich um einen unvollständigen Gebrauch von "... ist" handelt, bei dem jedoch - im Gegensatz zu dem in (II) beschriebenen Gebrauch von "... ist" - den Argumenten nicht verschiedene Gegenstände, sondern derselbe Gegenstand zugeordnet ist. 
  Wir werden also zu prüfen haben, ob der zweite Teil der Bedingung für das Argument tatsächlich irrelevant ist oder nicht. Nehmen wir einmal an, daß der zweite Teil unwesentlich ist; dann können wir (III) folgendermaßen umformulieren:
  255c12-13 을 통해 제안되는 그러한 해석은 (I) - (III) 에서 조건의 두 번째 부분이 된다.
"그리고 b 는 a 와 다른 대상이다" 라는 방식에서. 왜냐하면 (III) 은, 해당 문헌의 표준적 해석에 따라 "... is" 완전 용법이 의미상 "... exists" 에 부합할 것으로서, 조건의 두 번째 부분에 근거하여 "... is" 의 불완전 용법을 다룰 가능성을 두지만, 거기에서 - (II) 에서 묘사된 "... is" 용법과 반대로 - 상이한 대상들이 아니라 같은 대상이 그 논증에 할당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조건의 두 번째 부분이 해당 논증에 실제로 부적절한지 그렇지 않은지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단 그 두 번째 부분이 본질적이지 않다고 가정하면, (III) 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III A) Wenn von einem Gegenstand a wahrheitsgemäß gesagt wird, daß er ist, dann ist in einigen Fällen folgende Bedingung nicht erfüllt:
es gibt einen Gegenstand b, derart, daß in bezug auf b von a ausgesagt wird, daß es ist.
  (III A) 대상 a 에 대해 it is 가 참으로 진술될 때, 몇몇 경우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b 와 관련하여 a 에 대해 it is 라고 진술되는 그런 대상 b 가 있다.
-15-  Entsprechend sei (II) zu (II A) verändert.
따라서 (II) 가 (II A) 로 변환된다.
  (II A) und (III A) lassen nun zwei Interpretationen zu. Beide Interpetationen unterscheiden zwei Verwendungen von "... ist", die erste Interpretation aber läßt - im Gegensatz zur zweiten - den zwei Verwendungen von "... ist" auch zwei Bedeutungen entsprechen.
  (II A) 와 (III A) 는 이제 두 가지 해석을 허용한다. 두 해석 모두 "... is" 의 두 용법을 구분하지만, 첫 번째 해석은 - 두 번째 해석과 반대로 - "... is" 의 두 용법에 두 가지 의미를 부합시킨다.
  Nach der ersten Interpretation bezöge sich (III A) auf einen Gebrauch von "... ist" in der Bedeutung von "... existiert", (II A) aber auf den kopulativen Gebrauch von "... ist"; welche Bedeutung man beim kopulativen Gebrauch ansetzen soll, ist unklar, für unser Argument aber auch unwesentlich; nehmen wir also an, das kopulative "... ist" habe bei Platon die Bedeutung von "... hat teil an ....".
  Es läßt sich leicht zeigen, daß diese starke Version von (II A) und (III A) völlig unbefriedigend ist. Aus der Art, wie zum Beispiel 250a bis b die Verschiedenheit der Form des Seienden von den Formen der Bewegung und der Ruhe aufgezeigt wird, ergibt sich, daß für Platon im Sophistes Prädikaten mit verschiedener Bedeutung auch vershciedene Formen zugeordnet sind. In diesem Fall müßten wir also "... ist", wenn es zwei Bedeutungen hat, zwei Formen, S 1 und S 2, zuordnen. Da an unserer Stelle aber nur der Gegensatz zwischen einem Gebrauch von "... ist" und der Verwendung von "... ist verschieden" hervorgehoben wird, erhielten wir also ein Argument dafür, daß S 2 von der Form des Verschiedenen unterschieden werden muß. Dagegen ist es unserem Text zufolge die eine Form des Seienden, die an den beiden Formen, welche den zwei Arten des Gebrauchs von Prädikaten entsprechen, teilhat und von der gezeigt wird, daß sie nicht mit der Form des Verschiedenen identisch ist.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III A) 는 "... exists" 의미에서의 "... ist" 용법에 관련되는 반면, (II A) 는 "... is" 계사적 용법에 관련된다. 계사적 용법에 어떤 의미를 적용해야 할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우리의 논증에는 본질적인 게 아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계사적 "... is" 가 "... shares in ..." 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강화판 (II A) 와 (III A) 가 완전히 불충분하다는 것은 쉽사리 드러난다. 예를 들어 250a-b 에서 형상 Being 의 형상 운동과 형상 정지와의 차이가 드러나는 그런 방식을 통해, 『소피스트』 에서 플라톤에게 술어들은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상이한 형상들에 할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 is" 가 두 의미를 지닐 때 두 형상들 Being 1 과 Being 2 를 할당해야만 한다.  허나 우리 입장에서 단지 "... is" 의 사용과 "... is different" 의 용법 사이의 대조만 강조되기에, 우리는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논증을 획득한다. 형상 Being 2 는 형상 Difference 와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문헌에 따르자면 Being 의 형상이고, 그것은 서술적 용법의 두 종류에 상응하는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하며 형상 Difference 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그로부터 밝혀진다.
  Dieser Einwand läßt sich gegen jede starke Version von (II A) und (III A) erheben. Ein spezieller Einwand aber trifft die hier diskutierte Version, nach der "... ist" einmal die Bedeutung von "... existiert" hat, dann aber die von "... hat teil an ...". Angenommen nämlich, ein Prädikat "b" käme einem Gegenstand a auf Grund der Tatsache zu, daß  a an der "b" zugeordneten Form b` teilhat, dann käme in den Fällen, auf die sich (II A) bezieht, nach dieser Interpretation "... ist" einem Gegenstand a auf Grund der Tatsache zu, daß a an der Teilhabe teilhat, was es freilich nur kann, wenn es an der Teilhabe an der Teilhabe teilhat, und das nur, wenn es an der Teilhabe an der Teilhabe an ... Teilhabe teilhat, das aber heißt, "... ist" in der Verwendung von (II A) könnte überhaupt keinem Gegenstand zukommen, und wahre Sätze mit kopulativem "... ist" wären unmöglich.
  Es bleibt also die schwache Interpretation von (II A) und (III A), wonach "... ist" sowohl unvollständig als auch - im Gegensatz zu "... ist verschieden" - vollständig gebraucht werden kann, in beiden Fällen aber die gleiche Bedeutung hat.
  (II A) 와 (III A) 의 강화된 형식 각각에 대해 이러한 반론이 제기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논의된 형태에는 특수한 반론이 적용되는 바, "... is" 가 한 번은 "... exists" 의 의미를 가짐에 따라, 다음 번에는 "... shares in ..." 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즉, 술어 "b" 가 a 는 형상 b' 에 할당된 "b" 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대상 a 가 된다고 가정하면, 다음으로 그 경우 (II A) 와 관련하여 이러한 해석에 따라 a 가 그 참여에 참여한다는 사실로부터 "... ist" 가 대상 a 가 되고, 참여에 대한 참여에 참여할 수 있을 때, (II A) 용법 "... ist" 는 전혀 어떤 대상도 될 수 없고, 계사적 "... ist" 를 가진 참인 명제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II A) 와 (III A) 의 약한 해석이 남는데, 그에 따라 "... ist" 는 불완전 뿐만 아니라 - "... is different" 와 반대로 - 완전 사용도 가능하며, 그러나 두 경우 모두에서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16- Solange man aber daran festhalten muß, daß "... ist" in jedem Fall die gleiche Bedeutung behält, läßt sich kein Kriterium für Vollständigkeit finden, auf Grund dessen sich der gewünschte Kontrast zwischen "... ist" und "... ist verschieden" ergäbe.
  그러나 각 경우에 "... is" 가 유사한 의미를 견지한다는 점, "... is" 와 "... is different" 사이의 요청되는 대조가 주어진다는 사실로부터 완전용법의 기준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기까지 견지해야 한다.
  1. Der Kontrast kann nicht einfach darin bestehen, daß zwar "a ist" ein grammatisch korrekt gebildeter Satz ist, nicht aber "a ist verschieden", wenn denn Relationen von Platon als Eigenschaften konstruiert werden; tatsächlich wird ja auch "ἕτερον" 263d1 und "ταὐτόν" 256a7-8 absolut gebraucht.
  1. 그 대조는 이하의 내용과 전혀 쉽사리 부합할 수 없다, 플라톤에 의해 관계가 속성으로 구성될 때, 더욱이 "a is" 는 문버적으로 정확히 구축된 명제인 반면, "a is different" 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실제로 "ἕτερον" 263d1 과 "ταὐτόν" 256a7-8 은 완전용법으로 사용된다.
  2. Es kann auch nicht darum gehen, daß man zu jeder Verwendung von "a ist verschieden" ein b finden kann, derart daß sich "a ist verschieden" zu "a ist verschieden von b" ergänzen läßt, das gleiche aber nicht für Platon selbstverständlich ist, daß "a ist" sich immer zu "a ist b" ergänzen läßt. Denn jeder Gegenstand, den es gibt, ist schließlich irgendetwas, sonst könnte man gar nicht von "diesem Gegenstand" reden.
  2. 그 핵심은 이하가 아니다. "a is different" 의 각 용법에 대해 b 를 찾을 수 있다는, "a is different" 가 "a is different from b" 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그러나 플라톤에게 "a is" 가 언제나 "a is b" 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만큼 자명하진 않다. 존재하는 각 대상은 결국에 어떤 무언가이고, 달리 말해 "이러한 대상" 에 관하여서는 전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Die meisten Aussichten scheint ein Kriterium zu haben, wonach ein Prädikat "b" dann unvollständig ist, wenn "a ist b" nicht in sich verständlich ist. Danach wäre z.B. "... größer als" unvollständig, "... rot" dagegen vollständig. Ein solches Kriterium wird in Worten, die stark an 255c12-13 erinnern (was natürlich sehr für die traditionelle Interpretation spricht), bei Diogenes Laeritus (III, 108-9; Div. Arist. Ross frg. 2) Platon zugeschrieben: τῶν ὄντων τὰ μέν ἐστι καθ᾿ ἑαυτά, τὰ δὲ πρός τι λέγεται. τὰ μὲν οὖν καθ᾿ ἑαυτὰ λεγόμενά ἐστιν ὅσα ἐν τῇ ἕρμηνείᾳ μηδενὸς προσδεῖται. ταῦτα δ᾿ ἄν εἴη οἷον ἄνθρωπος, ἵππος καὶ τἆλλα ζῷα. τούτων γὰρ οὐδὲν δι᾿ ἑρμηνείας χωρεῖ. τῶν δὲ πρός τι λεγομένων ὅσα προσδεῖταί τινος ἑρμηνείας ...". Ähnliches findet sich in einem Zitat des Platonschülers Hermodorus aus seiner Schrift über Platon bei Simplicius (in phys. 248, 2-3):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καθ᾿ αὑτὰ εἶναι λέγει ὡς ἄνθρωπον καὶ ἵππον, τὰ δὲ πρὸς ἕτερα ..."
  3. 기준을 가질 것으로 가장 기대되는 것은, 그에 따라 술어 "b" 가 불완전 용법인, "a is b" 가 그 자체로 이해되지 않을 경우 그런 것이다. 그에 따라 예를 들어 "... larger than" 은 불완전 용법일 것이나, "... red" 는 반대로 완전 용법일 것이다. 단어들 사이에서 그런 기준이 되는 것은, 그 강력한 형태를 255c12-13 에서 상기시키고 (그것은 전통적 해석이 말하기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있는 것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 다른 일부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된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이야기되는 것들은 표현상 아무것도 추가로 필요치 않는 모든 것이다. 이것들은 예를 들면 사람, 말과 여타 동물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 중 어느것도 표현을 위해 여지를 남기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들의 경우 어떤 표현을 추가로 필요로하는 모든 것들이다 ...". 심플리키우스에 의한  플라톤학파 헤르모도로스의 플라톤에 대한 저술로부터의 인용에서도 비슷한 것이 발견된다. "있는 것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 이야기되는데 사람과 말 같은 것이고, 다른 일부는 다른 것들에 대해 ...".
  
  Überhaupt ist dieses Kriterium in der antiken Philosophie weit verbreitet; man vergleiche etwa Ar. Cat. 8a35-b19, Top. 142a28-30; Sext. Emp. P. H. I, 136; Adv. M. VIII, 453, X, 263.
  Legen wir dieses Kriterium zugrunde, dann verhält sich "... ist" bisweilen wie "... rot", bisweilen aber wie "... größer als ...". Wenn aber die Bedeutung von "... ist" in "a ist" und in "a ist b" die gleiche sein muß, dann kann nicht "a ist" bisweilen verständlich sein, bisweilen aber nicht.
  (II A) und (III A) scheinen also nicht auszureichen, um die Verschiedenheit der Form des Seienden von der Form des Verschiedenen aufzuzeigen; folglich wird man bei der Interpretation des Absatzes -17- anstelle von (II A) und (III A) zunächst von (II) und (III) auszugehen haben. Das Scheitern von (II A) und (III A) legt überdies nahe, daß der zweite Teil der Bedingung nicht nur nicht gestrichen werden darf, sondern für das Argument ganz wesentlich ist. Eine nachträgliche Betrachtung des Textes zeigt denn auch, daß der zweite Teil der Bedingung betont wird:
  이러한 기준은 고대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토피카』 등과 비교하라.
  이런 기준을 근거로 "... is" 가 때로는 "... red" 처럼 또 때로는 "... larger than ..." 처럼 사용되곤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a is" 와 "a is b" 에서 "... is"의 의미가 유사해야만 할 경우, "a is" 는 때로 이해될 수 없는 반면 때로는 그렇지 않다.
  (II A) 와 (III A) 는 그러므로 Being 의 형상과 Difference 의 형상 사이의 차이를 밝히기엔 충분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문단의 해석에 의해 (II A) 와 (III A) 대신 (II) 와 (III) 의 처음 형태를 결론으로 가질 것이다. (II A) 와 (III A) 의 실패는 다음을 추가로 시사한다. 그 조건의 두 번째 부분이 삭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논증에 대해 전적으로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해당 문헌에 대한 추가적 고찰은 또한 조건의 두 번째 부분이 강조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in 255c 13 "πρὸς ἄλλα"
in     d   1 "πρὸς ἕτερον"
in     d 5-6 "οὐ πρὸς ἕτερον"
in     d   7 "ἑτέρου"

  Man kann dagegen einwenden, daß man den Gebrauch von "πρὸς ἄλλα" und "πρὸς ἕτερον" im Gegensatz zu "πρός τι" nicht überwerten darf. Denn nach akademischen (Sext. Emp. Adv. M. VIII, 453-454; vgl. X, 265) und aristotelischen Definitionen (Cat. 6a36; Met. 1021a26) sind πρός τι-Prädikate eben die, die in bezug auf etwas anderes ausgesagt werden. In dem bereits erwähnten Hermodoruszitat (Simpl. in phys. 248, 2ff.) sind die πρός τι-Prädikate sogar eine Unterklasse der πρὸς ἕτερα-Prädikate. Weiter werden in demselben Metaphysikkapitel, in dem Aristoteles die obige Bestimmung von πρός τι-Prädikaten gibt, "... ist dasselbe wie ..." und "... ist gleich ..." als Beispiele für πρός τι-Prädikate angeführt (Met. 1021a9-10). Es scheint also fraglich zu sein, ob man eine solche Betonung auf das "ἕτερον" legen darf.
  누군가는 사람들이 "πρός τι" 에 대비하여 "πρὸς ἄλλα" 와 "πρὸς ἕτερον" 의 사용을 더 중시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카데미아학파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정의에 따를 경우 πρός τι 서술은 어떤 다른 것에 관련하여 진술되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된 헤르모도로스 인용에서 πρός τι 서술은 πρὸς ἕτερα 서술의 하위분류이기까지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πρός τι 서술의 상기 규정을 제시하는 『형이상학』에서는 더욱 확장되어, πρός τι 서술의 예시로 "... is itself like ..." 와 "... is like ..." 가 제시된다. 그러므로 "ἕτερον" 에 관한 그런 강조를 말하는지는 의심스러워 보인다.
  Überlegt man sich nun, wie bei einer solchen Bestimmung von πρός τι-Prädikaten "... ist dasselbe wie ..." als πρός τι-Prädikat aufgefaßt werden kann, dann kann sich "in Bezug auf etwas anderes" in der Definition dieser Prädikate nicht auf die numerische Verschiedenheit der Gegenstände beziehen, denen die Argumentsausdrücke zugeordnet sind, sondern nur auf eine - wie auch immer näher bestimmte - Verschiedenheit der Argumentsausdrücke selbst. So wird ja auch "... ist dasselbe wie ..." sinnvoll nur dann verwandt, wenn die Argumentsausdrücke verschiedene sind, "a ist dasselbe wie a" dagegen ist ein Grenzfall ohne Verwendung. πρός τι- und πρὸς ἕτερα-Prädikate können also überhaupt nur zusammenfallen, wenn man bei der Klassifizierung der Prädikate nicht von der numerischen Verschiedenheit bzw. Identität der Gegenstände ausgeht, die den Argumenten zugeordnet sind.
  이제 πρός τι 서술에 대한 그러한 규정을 통해  "... is itself like ..." 가 어떻게 πρός τι 술어로 이해될 수 있는지 고려하면, "어떤 다른 것과 관련하여" 라는 말은 이러한 술어의 정의상, Argumentsausdrücke(변항표현들)에 해당하는 그 대상들의 수적 구분과 관련될 수 없으며, 오히려 단지 - 어쨌든 더 엄밀하게 규정된 - 그 Argumentsausdrücke의 차이 자체와 관련될 수 있다. 그래서 "... is itself like ..." 는 다시, 그 Argumentsausdrücke이 상이할 경우 유의미하게 사용되고, 반대로 "a is itself like a" 는 용례 없는 극단적 사례이다. πρός τι- 그리고 πρὸς ἕτερα- 술어는, 술어들의 분류를 Argumenten 으로 이해되는 대상들의 수적 차이 혹은 동일성으로 가정하지 않을 때,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다.
  Genau das aber tut Platon in unserem Absatz, wie aus der zweiten Formulierung des Merkmals, durch das sich das Vershciedene vom Seienden unterscheidet, deutlich wird. Es ist also unberechtigt, wenn man hier "πρὸς ἕτερον" einfach durch "πρός τι" ersetzt.
  Da es sich bei (III A) um eine Spezialisierung von (III) handelt, können wir nach der Ausschaltung von (III A) versuchen, (III) entsprechend zu verschärfen. Während (III) nämlich behauptet, daß entweder der erste Teil oder der zweite Teil der Bedingung nicht erfüllt ist - 18 - oder beide Teile nicht erfüllt sind, behauptet (III A), daß der erste Teil der Bedingung nicht erfüllt ist. Nun haben wir gesehen, daß Platon - Jedenfalls an dieser Stelle - nicht einen Gebrauch von "... ist" im Auge hat, der den ersten Teil der Bedingung nicht erfüllt, folglich erst recht nicht einen Gebrauch, der beide Teile der Bedingung nicht erfüllt. So bleibt die dritte Möglichkeit, daß (III) sich auf einen Gebrauch bezieht, der den zweiten Teil der Bedingung nicht erfüllt, sehr wohl aber den ersten. (III) läßt sich also wie folgt verschärfen:
  (III`) Wenn von einem Gegenstand a wahrheitsgemäß gesagt wird, daß er ist, dann ist in einigen Fällen folgende Bedingung erfüllt : es gibt einen Gegenstand b, derart daß in bezug auf b von a ausgesagt wird, daß a ist, und a ist nicht ein von b verschiedener Gegenstand.
  Man vergleiche damit die entsprechende Formulierung für das Verschiedene in 255d5 :
  wenn das Verschiedene so wie das Seiende an beiden Formen teilhätte,
  ἦν ἂν ποτέ τι καὶ τῶν ἑτέρων ἕτερον οὐ πρὸς ἕτερον.
  그러나 물론 플라톤은 우리가 다루는 장에서, Difference 를 Being 과 구분하는 기준의 두 번째 공식화를 통해 그 일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πρὸς ἕτερον" 를 간단히 "πρός τι" 를 통해 대체할 경우 정당화되기 어렵다.
  (III) 을 (III A) 로 특수화하는 일이 문제이기에, (III A) 에 대한 분할에 따라 (III) 을 유비적으로 강조하는 일을 시도할 수 있다. 말하자면 (III) 은 그 조건의 첫 부분이나 두 번째 부분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두 부분 모두 충족하지 못함을 주장하는 반면, (III A) 는 그 조건의 첫 번째 부분을 충족하지 못함을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플라톤이 - 어쨌든 이 장에서 - 그 조건의 첫 부분을 충족하지 않는 "... is" 용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따라서 무엇보다도 그 조건의 두 부분 모두 충족하지 않는 용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남은 세 번째 가능성은, (III) 이 조건의 두 번째 부분을 충족하지 않지만 첫 부분은 매우 잘 충족하는 용법에 관련된다는 것이다. (III) 은 따라서 다음과 같이 강조된다:
  (III') 대상 a 에 대하여 it is 라는 것이 참인 것으로 진술될 때, 몇몇 경우 다음의 조건을 충족한다: a 에 대한 b 에 관련하여 a is 라고 이야기되는, 그리고 a 가 b 와 다른 대상이 아닌 그런 대상 b 가 존재한다.
  이를 그에 상응하는 Difference 에 대한 255d5 에서의 정식화와 비교해 보자:
  Difference 가 마치 Being 처럼 두 형상 모두의 몫을 나누어 가질 경우,
  다른 것들 중에서도 어떤 다른 것은 다른 것에 대한 것이 아닐 것이다.
  Wenn man nun an den relevanten Stellen für "ἕτερον" "ὄν" einsetzt und den Irrealis zurücknimmt (denn das Seiende hat an beiden Formen teil), dann erhält man genau (III') : ἔστι τι τῶν ὄντων ὄν οὐ πρὸς ἕτερον.
  Diese beiden Formen, denen die Verwendung von "... ist" in (II) und (III') entspricht, tauchen übrigens im Sophistes keineswegs zum erstenmal bei Platon auf. Im Charmides nämlich heißt es (169a1-5) :
"μεγάλου δή τινος, ὦ φίλε, ἀνδρὸς δεῖ, ὅστις τοῦτο κατὰ πάντων ἱκανῶς διαιρήσεται, πότερον οὐδὲν τῶν ὄντων τὴν αὑτοῦ δύναμιν αὐτὸ πρὸς ἑαυτὸ πέφυκεν ἔχειν, ἀλλὰ πρὸς ἄλλο, ἢ τὰ μέν τὰ δ᾿ οὔ."
  이제 "ἕτερον" 에 대한 관련 장들에서 "ὄν" 을 도입하고 반사실 서법을 제거하면 (Being 은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하니까), 확실히 (III') 를 얻는다: being들 중 어떤 being은 다른 것에 대한 것이다.
  (II) 와 (III') 에서 "... is" 용법에 부합하는 이러한 양쪽 형상들은 플라톤에 의해 『소피스트』 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카르미데스』 에서는 그것이 이렇게 불린다(169a1-5): 
"친구, 모든 것들에 대해, being 들 중 어떤 것도 본래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일 능력은 없고 다른 것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것들은 그렇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은지 충분히 분할할 누구든 그는 무언가 대단할 사람이어야 하네."
  Daß Platon sich für die zweite Möglichkeit entschieden hat, zeigt eine Stelle wie Legg.894d2, wo von der Bewegung die Rede ist, die sich selbst bewegen kann, d.h. von einer Bewegung, die das, was sie ist, nämlich eine Bewegung, in bezug auf sich selbst ist. Bewegung gehört also wie das Seiende zu den Formen, die an beiden Formen teilhaben, von denen 255d4 die Rede ist : sie können von einem Gegenstand a in bezug auf a, aber auch in bezug auf einen Gegenstand b, der von a verschieden ist, ausgesagt werden. Identität dagegen wird von einem Gegenstand a immer in bezug auf a ausgesagt, hat also genau wie das Verschiedene nur an einer der beiden Formen teil.
  플라톤이 두 번째 가능성을 선택했다는 것은, 『법률』 894d2 와 같은 장에서 보여주는 바이다. 거기에서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되는데, 그것이 그 자체로 운동할 수 있다고, 즉, 운동에 대하여, 그것이 그것인 바 다시 말해 운동인 것은 그 자신과 관련하여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Being 처럼 두 형상들 모두에 참여하는 형상들에 속하며, 이에 대해 255d4 에서 논의된다: 대상 a 에 대하여 a 와 관련하여서도 또 a 와 다른 대상 b 와 관련하여서도 그것들이 진술될 수 있다. 반대로 동일성은 대상 a 에 대해 언제나 a 와 관련하여서 진술되고, 그러므로 Difference 처럼 두 형상들 중 한쪽에만 참여한다.
  Wir haben bisher von dem Absatz, den wir interpretieren wollen, nur 255d1-7 berücksichtigt. Für dieses Stück haben wir eine befriedigende Interpretation gefunden, wenn wir annehmen, daß Platon hier zwei Verwendungen von "... ist" unterscheidet, die durch (II) und (III`) beschireben werden. (II) und (III`) fänden ihre Entsprechung in zwei Sätzen, die sich zu (II) und (III`) genauso verhalten, wie (2.) zu (1.) auf Seite 11: (II B) Seiendes kann das, was es ist, nämlich seiende, in bezug auf sich selbst sein.
  255d1-7 에 대해, 플라톤이 여기에서 (II) 와 (III') 를 통해 묘사되는 "... is" 두 번째 용법을 분간해낸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만족스러운 해석을 발견한다. (II) 와 (III') 는 11쪽 2. 가 1. 에 대응하듯 (II) 와 (III') 를 바로 그와 같이 취급하는 두 명제들에서 대응물을 발견한다: (II B) Being 은 그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것인 바의 것, 즉 being일 수 있다.
- 19 - (III` B) Seiendes kann das, was es ist, nämlich seiend, in bezug auf etwas von ihm numerisch Verschiedenes sein.
  Das Verschiedene dagegen ist nach 255d6-7 das, was es ist, nämlich verschieden, immer in bezug auf etwas anderes.
  Damit wäre also eine Interpretation gefunden, die zwar 255d1-7 gerecht wird, aber unverträglich mit der traditionellen Interpretation des ganzen Abschnittes ist, die von 255c12-13 ausgeht, sich für 255d1-7 aber bei genauerer Betrachtung als unzureichend erwiesen hat.
  (III' B) Being 은 그것과 수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 관련하여 그것인 바, 즉 being일 수 있다. 반대로 Difference 는 255d6-7 에 따라 언제나 다른 어떤 것과 관련하여 그것인 바, 즉 다를(-른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로써 한 가지 해석이 발견된다. 그것은 더욱이 255d1-7 을 충족하지만, 그 전체 구절의 전통적 해석과는 맞지 않는다. 전통적 해석은 255c12-13 에서 도출되지만 255d1-7 에 대해서는 더 면밀한 고찰을 통해 부적절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Es wird jetzt also zu prüfen sein, ob sich 255c12-13 mit unserer Interpretation von 255d1-7 verträgt.
  Nach den zahlreichen Übersetzungsmöglichkeiten und den vielen verschiedenen Übersetzungen zu urteilen, muß 255c12-13 wohl der vieldeutigste Satz im ganzen Dialog sein.
  Völlig eindeutig ist wirklich zunächst auch nur das Unwichtigste, die Übersetzung von "ἀλλ᾿ οἶμαί σε συγχωρεῖν".
  이제 검토되어야 할 것은, 255c12-13 이 255d1-7 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조화되는지 여부이다.
  판단할 여러 해석 가능성들과 많은 상이한 해석들에 따르면, 255c12-13 은 아마도 대화편 전체에서 가장 모호한 문장이어야만 한다. 
  "ἀλλ᾿ οἶμαί σε συγχωρεῖν" 에 대한 해석은 명백한데다 중요치도 않다.
  Als einigermaßen sicher können darüber hinaus folgende Punkte gelten :
  1. "τὰ μὲν ... τὰ δὲ ..." setzt irgendeine Klasse A voraus, die zwei elementfremde Unterklassen A1 und A2 hat, derart, daß jedes Element von A zwar Element von A1 oder A2 sein muß, aber nicht zugleich Element von A1 und A2 sein kann. Diese Tatsache ist für die Interpretation der Ausdrücke "πρὸς ἄλλα" und "αὐτὰ καθ᾿ αὑτά" wichtig, mit Hilfe derer A1 und A2 bestimmt werden. Denn sie müssen sich natürlich so entsprechen, daß wir tatsächlich die geforderte vollständige Disjunktion erhalten. So wird auch "τὰ μὲν ... τὰ δὲ ..." zwar gewöhnlich nicht scharf als vollständige Disjunktion übersetzt, dafür aber versucht man, durch die Übersetzung von "πρὸς ἄλλα" und "αὐτὰ καθ᾿ αὑτά" eine solche Disjunktion wiederzugeben. Am deutlichsten wird das bei Moravcsik (B.M.S, S. 54), der übersetzt : "... some are relational, and some non-relational". Die gleiche Funktion erfüllen bei den meisten Kommentaren die Ausdrücke "absolut" und "relativ".
   '1.' kann also als einigermaßen gesichert und allgemein akzeptiert gelten. Das Problem ist nur, um was für Mengen es sich bei A, A1 und A2 handelt.
  이하의 지점들이 어느 정도 더 확실한 것으로서 추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1.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는 어떤 분류 A 를 상정한다. 이것은 분기하는 하위 분류 A1 과 A2 를 가진다. A의 각 원소는 A1 이나 A2 의 원소여야만 하지만, A1 과 A2 에 대해 동시에 원소일 수는 없는 그런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πρὸς ἄλλα" 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에 대한 해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 해석의 도움으로 A1 와 A2 가 규정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가 실제로 요청되는 완전한 선언지를 얻는다는 사실에 자연스럽게 부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도 물론 통상적으로는 완전한 선언지로 해석되지 않지만, "πρὸς ἄλλα" 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에 대한 해석을 통해 그런 선언지를 그에 대해 재부여하고자 시도한다. Moravcsik (B.M.S, S. 54) 에 의한 해석으로 가장 분명해진다: "... 어떤 것들은 상대적이고, 어떤 것들은 비-상대적이다". 대다수 주석가들에 의한 "절대" 와 "상대" 라는 표현들도 유사한 기능을 충족시킨다.
  '1.' 은 그러므로 상당히 확실하고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단지 문제는, AA1 와 A2 가 무리에 무엇을 포함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2. Wenn sich nicht wichtige Gründe dagegen anführen lassen, daß "πρὸς ἄλλα" in 255c13 dem, "πρὸς ἕτερον" in 255d1 entspricht, dann muß "ἄλλα" in "πρὸς ἄλλα" strikt verstanden werden. (2) widerspricht der traditionellen Interpretation, darf aber auf Grund der Tatsache, daß sich die gegenteilige Annahme bei der Interpretation von 255d1-7 als unzulänglich erwiesen hat, ebenfalls als gesichert gelten.
  2. 255c13에서 "πρὸς ἄλλα" 가 255d1 에서 "πρὸς ἕτερον" 와 같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반박하지 못할 경우, "πρὸς ἄλλα" 에서 "ἄλλα" 는 제한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2.' 는 전통적 해석에 반대하지만, 아마도 255d1-7 에 대한 해석에 의해 그 반대 가정이 불충분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더 확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3. In 255c12-13 ist davon die Rede, daß etwas von irgend etwas ausgesagt wird ("λέγεσθαι" in 255c13); es müssen folgende Möglichkeiten erwogen werden :
- 20 - (A)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bezieht sich auf das, was ausgesagt wird.
(B) "τὰ μὲν ... τὰ δὲ ..." bezieht sich auf das, was ausgesagt wird, "τῶν ὄντων" auf das, wovon es ausgesagt wird.
(C)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bezieht sich auf das, wovon etwas ausgesagt wird.
  3. 255c12-13 에서, 어떤 것은 또 어떤 것에 대해서 진술된다(255c13 "λέγεσθαι")는 점이 논의된다; 이하의 가능성들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A)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는 진술되는 바의 것<술어>에 관련한다.
  (B)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는 진술되는 바의 것<술어>에, "τῶν ὄντων" 은 저것이 그에 대해 진술되는 바로 그것<주어>에 관련한다.
  (C)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는 어떤 것이 그에 대해 진술되는 바로 그것<주어>에 관련한다.
   (A) Nehmen wir also zunächst an,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beziehe sich auf das, was ausgesagt wird. 255c12-13 besagt dann etwas über die Menge der möglichen Prädikate (eigentlich: der Formen, die den möglichen Prädikaten zugeordnet sind), nämlich daß sie in zwei Klassen zerfallen:
        1. die Prädikate, die αὐτὰ καθ᾿ αὑτά ausgesagt werden, und
        2. die Prädikate, die πρὸς ἄλλα ausgesagt werden
  (A) 그러므로 우선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가 진술되는 바의 것에 관련한다고 가정하자. 255c12-13 은 가능한 술어들의 무리 (실질적으로: 형상들, 가능한 술어들을 구성하는) 에 대해 무언가를, 즉 두 부류로 분류된다는 것을 말한다:
        1.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진술되는 술어와
        2. πρὸς ἄλλα 진술되는 술어로.
  In diesem Fall gibt es zwei Möglichkeiten, "πρὸς ἄλλα" und entsprechend "αὐτὰ καθ᾿ αὑτά". Entweder sind mit "ἄλλα" in "πρὸς ἄλλα" die Gegenstände gemeint, von denen etwas ausgesagt wird, was verschieden von diesen Gegenständen ist, oder aber mit "ἄλλα" sind die Gegenstände gemeint, mit Hinsicht auf die etwas von Gegenständen ausgesagt wird, die verschieden von den ersten Gegenständen sind.
  이 경우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πρὸς ἄλλα" 와 그에 비례하여 "αὐτὰ καθ᾿ αὑτά". "πρὸς ἄλλα" 에서 "ἄλλα" 는 그에 대해 무언가 그와 다른 것이 진술되는 그런 대상들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ἄλλα" 가 대상들을 의미하는데, 그 대상들과 관련해서 이 첫 번째 대상들과 다른 대상들에 대해 무언가가 진술된다.
  Untersuchen wir zuerst die erste Möglichkeit. Wir haben demnach zwei Klassen von Gegenständen, die möglichen Prädikaten zugeordnet sind: solche, die immer von etwas von ihnen Verschiedenem ausgesagt werden (man könnte auf Grund von 255e4-6 meinen, daß z.B. die Form des Verschiedenen in diese Klasse gehöre), und solche, die von sich selbst ausgesagt werden.
  우선 첫 번째 가능성을 탐구하자. 그에 따라 가능한 술어들을 구성하는 대상들의 두 부류를 가진다. 어떤 것에 대해 언제나 그와 다른 것이 진술되는 대상들 (255e4-6 을 근거로 예를 들어 Difference 의 형상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체에 대해 진술되는 대상들.
  Eine solche Interpretation hätte allerdings den Nachteil, daß sich das Verschiedene in der Hinsicht, in der es hier immer von etwas von ihm Verschiedenen ausgesagt wird, für Platon in nichts vom Seienden unterscheidet.
  Von Mure und von Arangio-Ruiz ist allerdings eine Variante dieser Interpretation entwickelt worden, die zunächst etwas plausibler klingt.
  그런 해석은 무엇보다도 Difference 가 여기에서 언제나 그와 다른 무언가에 대해 진술되는 그런 측면에서 Diffrence 가 플라톤에게 Being 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단점을 지닌다. 
  Mure 와 Arangio-Ruiz 에게서 이러한 해석의 다양한 버전들이 전개되고, 그것들은 일견 그럴 듯해 보인다.
  Wie bereits durch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nahegelegt sein könnte, werden nach ihrer Interpretation hier zwei Klassen von Gegenständen unterschieden, die sich auch je nach Zugehörigkeit zu einer der beiden Klassen ihrem Sein nach unterscheiden. Schönheit, zum Beispiel, gibt es nur in bezug auf schöne Gegenstände, das Schöne ist ἕτερόν τι ὄν schön, und so wird Schönheit immer mit Bezug auf etwas von ihr Verschiedenes ausgesagt. Menschen dagegen gibt es an und für sich, weil der Mensch αὐτὸ καθ᾿ αὑτό Mensch ist. Damit wären wir also fast bei Aristoteles angekommen, und so sagt denn auch Mure (Aristotle, S. 180) : "Plato`s distinction of selfsubsistent from dependent - 21 - being is possibly the source of Aristotle`s conception of substance and accident."
  이미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를 통해 제안될 수 있었듯, 여기에서 그 해석에 따라 대상들의 두 부류들이 구분되는데, 또한 양쪽 부류 중 한 쪽에의 소속에 따라서 그 대상들의 Being 이 그에 따라 구분된다. 예를 들어 아름다움은 바로 아름다운 대상들에 관련하여 존재하고, 아름다운 것은 어떤 다른 아름다운 것이며, 그렇게 언제나 아름다움은 그것과 다른 무언가에 대한 관련으로써 진술된다. 반대로 인간은 그 자체에 대해 그 자체로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체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따라서 거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당도하게 되었고, Mure 또한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Aristotle, 180쪽): "플라톤의 자립적 being 과 의존적 being 사이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와 부수라는 개념의 원천일 수 있다."
  Tatsächlich wird eine solche Einteilung Platon bereits von Eudemus (ap. Simpl. in phys. 99, 25ff.) und den Divisiones Aristoteleae (Diog. L. III, 108-109) zugeschrieben.
  Jede Interpretation dieser Art hat alle Wahrscheinlichkeit gegen sich, da sie die Aufgabe von Platonischen Formen zumindest für Akzidentien, wenn nicht die Aufgabe von Formen überhaupt voraussetzt (vgl. allerdings: Ar. Met. A 1070a13ff. und Procl. in Parm. I, 888, 36ff.). Aber sie leistet auch nicht das, was sie leisten soll; sie zeigt nämlich nicht den Unterschied zwischen dem Seienden und dem Verschiedenen. Das Argument müßte etwa so konstruiert werden:
  Alles, was verschieden ist, ist verschieden in bezug auf etwas von ihm Verschiedenes, nämlich die Verschiedenheit (255d6-7); oder umgekehrt: die Verschiedenheit wird immer in bezug auf etwas von ihr Verschiedenes ausgesagt (255d1).
  Dagegen ist nicht alles, was ist, seiend in bezug auf etwas von ihm Verschiedenes. Denn Menschen gibt es, nicht weil es etwas vom Menschen Verschiedenes gibt, das über seine eigene Natur hinaus noch die Eigenschaft hat, Mensch zu sein, sondern weil es Dinge gibt, die Menschen sind, und nichts Mensch ist, was nicht auf Grund seiner eigenen Natur Mensch ist.
  Diese Konstruktion hat den Fehler, daß sich "Verschiedenes" in "in bezug auf etwas von ihm Verschiedenes" im Fall der Verschiedenheit auf die Form des Verschiedenen, im Fall des Seienden aber nicht auf die Form des Seienden, sondern auf die Dinge, die den Argumenten von "... ist ..." zugeordnet sind, bezieht. Bezieht man aber, "Verschiedenes" im Fall des Seienden genauso wie beim Verschiedenen, so unterscheidet sich die Form des Seienden wieder in nichts von der Form des Verschiedenen.
  Da sich diese Interpretation nun sowieso nicht empfiehlt, wird man auch in 255d7 "ἑτέρου" statt "πρὸς ἕτερον" beibehalten. Das aber zwingt uns dazu, "πρὸς ἕτερον" in 255d5-6 und in d1 wie "ἑτέρου" in 255d7 zu verstehen; dann aber müßte es besondere Gründe geben, "πρὸς ἄλλα" in 255c13 nicht so aufzufassen. Damit wäre auch der Ausgangspunkt der Interpretation, daß sich "ἄλλα" nicht auf die Ergänzungen, sondern auf die Subjekte von Prädikaten bezieht, hinfällig.
  실제로 플라톤이 그러한 구분을 했다는 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ap. Simpl. in phys. 99, 25ff.) 와 『분할』  (Diog. L. III, 108-109) 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방식의 해석 각각은 저마다 다른 설득력을 지닌다. 형상들 일반의 기능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플라톤적 형상들의 기능을 속성들에게 요청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다음을 참조하라: Ar. Met. A 1070a13ff. und Procl. in Parm. I, 888, 36ff.). 하지만 그 해석들은 성취해야 할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즉 the Being 과 the Different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 논증은 이하와 같은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다른 모든 것은 그것과 다른 것인 무언가와 관련하여 다름이다(255d6-7); 혹은 역으로: 다름은 언제나 그것과 다른 것인 어떤 것에 관련하여 진술된다(255d1).
  반대로 있는 모든 것이 그것과 다른 것인 어떤 것에 관련하여 being 이지는 않다. 인간은, 인간과 다른 것인, 인간이기 위해 그 고유한 본성을 제외한 특성을 지니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사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유한 본성을 토대로 인간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인간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는, "그것과 다른 것인 무언가와 관련하여" 에서 "다른 것" 이 다름의 경우에는 다른 것이라는 형상에 관련하지만, Being 의 경우에는 Being 의 형상에 관련하지 않고, 오히려 "... is ..." 의 변항들에 해당하는 사물들에 관련한다는 오류를 지닌다. 그러나 관련한다면, Being 의 경우에서 "다른 것" 이 다른 것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이고, 그럼 Being 의 형상은 다시 다른 것이란 형상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
  이런 해석이 어쨌든 바람직하지 않기에, 다시 255d7 에서 "πρὸς ἕτερον" 대신 "ἑτέρου" 가 견지된다. 하지만 그 일은 255d5-6 과 d1 에서의 "πρὸς ἕτερον" 을 255d7 에서의 "ἑτέρου" 처럼 이해할 것을 강요한다; 허나 그러면 255c13 에서의 "πρὸς ἄλλα" 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을 특별한 이유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 점에서 다시 "ἄλλα" 가 보어가 아니라 술어에 대한 주어와 관련한다는 그 해석의 출발점은 부적절하게 될 것이다.
- 22 - So bleibt also die zweite Möglichketi, daß mit "ἄλλα" die Gegenstände gemeint sind, mit Hinsicht auf welche Prädikate von Gegenständen ausgesagt werden, die verschieden von den ersten Gegenständen sind.
  Nimmt man nun "πρὸς ἄλλα" nicht strikt, dann erhalten wir eine verbreitet Interpretation der Stelle (vertreten u.a. von : Wilamowitz, Platon I, S. 568, Shorez, Cl.Ph. 1930, S. 80, Cornford, P T K, S. 282, Ross. P T I, S. 114, Cherniss, A C P A, S. 283 n 191, Owen, J H S, 1957, S. 107 n 25, Xenakis, Phronesis IV, 1959, S. 33, Lacez C Q NS IX, 1959, S. 49 n 1), wonach hier absolute von relativen Prädikaten unterschieden werden.
  그러면 두 번째 가능성이 남는다. "ἄλλα" 는 대상들을 의미하고, 어떤 술어에 관련한 측면에서 대상들에 대해 진술되고, 그 대상들은 첫 번째 대상들과 다르다.
  이제 "πρὸς ἄλλα" 를 제한적으로 취하지 말자. 그러면  해당 장에 대한 잘 알려진 해석을 얻는다(이하의 사람들을 포함한 다수가 표현한다 : Wilamowitz, Platon I, S. 568, Shorez, Cl.Ph. 1930, S. 80, Cornford, P T K, S. 282, Ross. P T I, S. 114, Cherniss, A C P A, S. 283 n 191, Owen, J H S, 1957, S. 107 n 25, Xenakis, Phronesis IV, 1959, S. 33, Lacez C Q NS IX, 1959, S. 49 n 1). 그 해석에 따라 여기에서 절대 술어와 상대 술어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진다.
  Diese Interpretation mag auch der Variante zugrunde liegen, die sich in B und Y und vielleicht sogar bei Simplicius (in Cat. 159, 17) findet und die noch von Campbell, Wohlrab, Apelt (Beiträge, S. 193) und zuletzt sogar noch von Peck (C Q NS II, 1952, S. 48) gelesen worden ist: "πρὸς ἄλληλα" anstelle von "πρὸς ἄλλα" in 255c13. Eine solche Unterscheidung von absoluten und relativen Begriffen wird nämlich im Parmenides mit folgenden Worten eingeführt: "οὐκοῦν καὶ ὅσαι τῶν ἰδεῶν πρὸς άλλήλας εἰσὶν αἵ εἰσιν" (133c9-10; cf. Ar. Cat. 6b28, 11b33). Doch verstößt eine solche Interpretation von 255c12-13 gegen (3).
  이러한 해석은 또한 다양한 해석들의 기초가 된다. B 판과 Y 판에서 그리고 심플리키우스에 의해 발견되고 다음으로 캠벨, 볼라브, 아펠트에 의해, 그리고 끝으로 펙에 의해 독해된 해석들. 255c13 에서 "πρὸς ἄλλα" 대신 "πρὸς ἄλληλα" 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절대와 상대 개념의 구분은 말하자면 파르메니데스에 있어서 이하의 문장으로 도입된다: "형상들 중 서로를 향한 것들 모두 또한 그것들(형상들)이다" (133c9-10; cf. Ar. Cat. 6b28, 11b33). 그렇지만 그러한 255c12-13 해석은 '3.' 을 위반한다.
  Versucht man sie dadurch zu modifizieren, daß man "πρὸς ἄλλα" strikt versteht, dann wird sie entweder mit (1) oder den eigenen Voraussetzungen unverträglich. Denn entweder erhalten wir keine vollständige Disjunktion mehr, oder wir müssen eine ad hoc Beschränkung der Klasse A der Prädikate einführen, die durch nichts im Text gerechtfertigt wird. A kann nämlich nicht mehr die Klasse aller Prädikate sein, sondern muß die Menge aller absoluten und aller πρὸς ἕτερα-Prädikate im strengen Sinn sein.
  다음을 통해 수정을 시도해 보자. "πρὸς ἄλλα" 가 제한적으로 이해된다면, 그 해석은 '1.' 이나 고유한 전제들과 충돌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적으로 어떤 완전한 선언지도 얻지 못하거나, 아니면 술어 부류 A 에 대한, 문헌상으로 전혀 정당화되지 않는 즉흥적 제한을 도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A 는 말하자면 단순히 모든 술어의 부류일 수 없고, 오히려 엄격한 의미에서 모든 절대 술어와 모든 πρὸς ἕτερα 술어의 무리여야만 한다.
  Nimmt man dazu an, daß den beiden Klassen von Prädikaten zwei Bedeutungen von "... ist" entsprechen, dann wird die Interpretation noch in einem anderen Sinn mit (1) unverträglich. Denn, wenn das Prädikat "... ist" ein Element von A ist, dann darf es nicht - wie hier angenommen wird - sowohl ein Element von A1 als auch von A2 sein.
  (Wenn "ἀεὶ" mit zur Bestimmung der Prädikate der zweiten Klasse gerechnet wird, d.h. nur auf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 λέγεσθαι" bezogen wird, dann ist völlig unabhängig von (1) klar, daß "... ist" nicht sowohl Element von A1 als auch von A2 sein kann; denn, wäre es Element von A2, könnte es nach Definition von A2 nicht Element von A1 sein.)
  Nehmen wir dagegen an, daß "... ist" nur zur ersten Klasse gehört, dann wird die Argumentation in 255d3-7, vor allem die Bemerkung, daß das Seiende an beiden Formen, das Verschiedene dagegen nur an einer von beiden teilhat, unverständlich. Es kann sich also nicht um eine Einteilung in absolute und πρὸς ἄλλα-Prädikate handeln, ganz gleich, ob "πρὸς ἄλλα" strikt genommen wird oder nicht.
  이하를 가정해 보자. 술어의 양쪽 부류에 "... is" 의 두 가지 의미가 부합한다고. 그러면 그 해석은 또 다른 의미에서 '1.' 과 부딪친다. 왜냐하면, "... is" 라는 술어가 A 의 원소일 경우, 아마도 그것은 - 여기에서 가정되듯 - A1 의 원소이자 또한 A2 의 원소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ἀεὶ" 로 두 번째 부류의 술어에 대한 규정이 정당화된다면, 즉, 단지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 λέγεσθαι" 에만 관련된다면, "... is" 가 A1 뿐만 아니라 A2 에 대해서도 원소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은 '1.' 과 전적으로 무관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A2 의 원소라면, 정의상 그것은 A1 에 대해서가 아니라 A2 에 대해 원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정해 보자. "... is" 가 단지 첫 번째 부류에만 속한다고. 그러면 255d3-7 에서의 논증은, 특히 the Being 이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하는 반면, the Different 는 양쪽 형상들 중 한쪽에만 참여한다는 언급은 불가해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절대 술어와 πρὸς ἄλλα 술어의 분류에 관련된 것일 수 없고, "πρὸς ἄλλα" 가 제한적으로 취해지든 그렇지 않든 아무 상관이 없다.
- 23 - Man könnte sich versucht fühlen, diese Interpretation dadurch zu retten, daß man unter den αὐτὰ καθ᾿ αὑτὰ λεγόμενα nicht absolute Prädikate versteht, sondern "αὐτὰ καθ᾿ αὑτά" entsprechend zu "πρὸς ἄλλα" so auffaßt, daß diese Prädikate von Gegenständen in bezug auf Gegenstände ausgesagt werden, die von den ersten Gegenständen nicht verschieden sind. Das aber ist sprachlich nicht möglich, da sich "αὐτὰ" in "αὐτὰ καθ᾿ αὑτά" auf die den Prädikaten zugeordneten Gegenstände, nicht aber wie bei "πρὸς ἄλλα" auf die den Ergänzungen zugeordneten Gegenstände beziehen muß.
  이 해석이, αὐτὰ καθ᾿ αὑτὰ λεγόμενα 하에서 절대 술어로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αὐτὰ καθ᾿ αὑτά" 가 "πρὸς ἄλλα" 에 부합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된다는 점, 대상들에 대한 이러한 술어들이 대상들과 관련하여 진술되고, 그 대상들은 첫 번째 대상들과 다르다는 것을 통해, 구제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데,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에서  "αὐτὰ" 가 술어들에 부합하는 대상들에 관련해야만 하는 반면, "πρὸς ἄλλα" 의 경우처럼 보어들에 부합하는 대상들에 관련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ine Schwäche haben alle Interpretationen dieser Art gemeinsam : es ist zwar richtig, daß die Dinge, die von etwas ausgesagt werden können, für Platon seiend sein müssen; in diesem Zusammenhang aber ist nach dieser Interpretation das "τῶν ὄντων" in 255c12 völlig überflüssig, denn es könnte genauso gut heißen: "...συγχωρεῖν τὰ μὲν αὐτὰ καθ᾿ αὑτὰ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 Doch nichts liegt näher als die Annahme, daß hier, wo der Unterschied zwischen dem Seienden und dem Verschiedenen gezeigt werden soll, das "τῶν ὄντων" nicht ohne Bedeutung sein kann, zumal es dem "τὸ ... ἕτερον" in 255d1 zu entsprechen scheint.
  Die Annahme also, daß hier die möglichen Prädikate in zwei Klassen aufgeteilt werden, hat uns nicht weitergeführt. 
  이런 식의 해석은 모두 공통적으로 한 가지 약점을 지닌다 : 어떤 것에 대해 진술될 수 있는 사물들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being 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확실히 맞다; 하지만 이러한 문맥에서 이 해석에 따르면 255c12 의 "τῶν ὄντων" 은 전적으로 부차적인데, 이하가 마찬가지로 승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συγχωρεῖν τὰ μὲν αὐτὰ καθ᾿ αὑτὰ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또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에 대해 언제나 진술된다". 그렇지만 어떤 것도, the Being 과 the Different 구분이 제시되어야 하는 여기에서 "τῶν ὄντων" 이, 특히 255d1 의 "τὸ ... ἕτερον" 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정확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능한 술어들이 두 부류로 분류된다는 가정은 더 이상 견지되지 않는다.

  (B) Bezieht man nun "τῶν ὄντων" auf die möglichen Gegenstände von Aussagen, "τὰ μὲν ... τὰ δὲ ..." aber auf das, was von diesen Gegenständen ausgesagt werden kann, ergeben sich die gleichen Interpretationsmöglichkeiten wir unter (A) und damit auch die gleichen Einwände (mit kleinen Abweichungen natürlich; so müßte hier gefragt werden, warum die möglichen Gegenstände von Aussagen mit "τῶν ὄντων" bezeichnet werden, ja warum sie überhaupt erwähnt werden).
  (B) 이제 "τῶν ὄντων" 이 진술들의 가능한 대상들에 관련하는 반면, "τὰ μὲν ... τὰ δὲ ..." 는 이러한 대상들에 대해 진술될 수 있는 것에 관련한다면, (A) 하에서와 유사한 해석가능성들과 유사한 반론들이 나타난다 (사소한 문제들은 당연하다; 그래서 여기에서 물어야만 하는 것은, 어째서 "τῶν ὄντων" 이 진술들에 대한 가능한 대상들을 가리키는지, 그럼 도대체 왜 그것들이 언급되는지 하는 것이다).

  (C) Es bleibt also die Möglichkeit,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auf die Gesamtheit der Gegenstände überhaupt zu beziehen, von denen dann irgend etwas gesagt wird.  
  (C) 남은 가능성은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이 대상 일반의 총체에 관련하는 것이다. 

  Nach einer Klasse von Interpretationen bezieht sich nun "αὐτὰ καθ᾿ αὑτά" und "πρὸς ἄλλα" auf das, was von diesen Dingen ausgesagt wird. Man würde also den relevanten Teil von 255c12-13 so wiedergeben : "von einem Teil der Dinge, die sind, wird gesagt, daß sie αὐτὰ καθ᾿ αὑτά sind, von dem anderen Teil, daß sie πρὸς ἄλλα sind" (so etwa Taylor, S S, S. 161) oder, "von den Dingen, die sind, wird gesagt, daß die einen αὐτὰ καθ᾿ αὑτά, die anderen aber πρὸς ἄλλα sind" (so etwa Moravcsik, B M S, S. 54).
  Demnach gäbe 255c12-13 eine allgemeine Meinung über die ὄντα wieder, die dann im folgenden ohne weitere Begründung oder Kritik als Ausgangspunkt für das Argument genommen wird (das wird besonders deutlich bei Moravcsik, a.a.O., der übersetzt: "of beings we always say ..."). Ein Beispiel für eine solche Interpretation findet sich - 24 - bei Runciman (P.L.E., 88 n 1): "He is drawing a distinction between kinds of things that are ... in order to show that Being, which covers both, must be non-identical with Difference, which covers only one."
  한 종류의 해석에 따르면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와  "πρὸς ἄλλα" 는 이러한 사물들에 대해 진술되는 것에 관련한다. 그러므로 255c12-13 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이 재해석될 것이다 : "존재하는 사물들의 일부에 대하여 그것들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존재한다고, 다른 일부에 대하여서는, 그것들이 πρὸς ἄλλα 존재한다고 진술된다.(Taylor)" 혹은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한편으로는 αὐτὰ καθ᾿ αὑτά, 다른 한편으로는 πρὸς ἄλλα 존재한다고 진술된다.(Moravcsik)"
  그에 따라 255c12-13 은 ὄντα 에 일반개념을 부여할 것이고, 그것들은 이하에서 추가적인 추론이나 비판 없이 논증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특히 Moravcsik 의 해석에서 두드러진다: "of beings we always say ..."). 그러한 해석의 일례는 Runciman 에게서 발견된다. : "그는 오직 한쪽만을 포함하는 Difference 와 비-동일적이어야만 하는,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Being 을 보이기 위해 ... 존재하는 사물들의 종류들 사이에 구분을 짓고 있다."
  Der Hauptmangel einer solchen Auffassung scheint mir darin zu liegen, daß πρὸς ἄλλα und αὐτὰ καθ᾿ αὑτά, wenn man die Übersetzungen wörtlich nimmt, wie Eigenschaften von Dingen behandelt werden, für die sogar Formen angenommen werden (so bei Campbell, Cornford, Moravcsik und Runciman). Was das für Eigenschaften sein sollen, ist völlig unklar, und es lassen sich auch keine weiteren Beispiele für einen solchen Gebrauch von "πρὸς ἄλλα" oder "αὐτὰ καθ᾿ αὑτά" anführen. πρὸς ἄλλο und αὐτὸ καθ᾿ αὑτό bezeichnen die Art und Weise, in der ein Prädikat von einem Gegenstand ausgesagt wird, bzw. in der eine Eigenschaft einem Gegenstand zukommt. Wenn z.B. von Formen gesagt wird, daß sie αὐτὰ καθ᾿ αὑτά sind, dann bezeichnet "αὐτὰ καθ᾿ αὑτά" nicht irgendeine Eigenschaft der Formen, sondern gibt die Art und Weise an, in der sie sind. (Insofern die vorgeschlagenen Übersetzungen durch Betonung von "sind" auch eine solche Interpretation zulassen, werden sie später behandelt.)
  그러한 해석의 표면적 문제는 다음의 지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πρὸς ἄλλα 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가, 그 번역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사물들의 속성들이 취급되는 것처럼, 형상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가정된다는 점이다 (Campbell, Cornford, Moravcsik, Runciman 에게서 그러하듯). 무엇이 속성들에 대한 것이어야 할는지는 전적으로 불명하고, "πρὸς ἄλλα" 나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의 그러한 용법에 대해 아무런 추가적 예시도 예화하지 않는다. "πρὸς ἄλλα" 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는 대상들에 대해 술어가 진술되는 기술과 방식을 가리킬 것이다. 추정컨데, 그 방식으로 속성이 대상으로 된다. 예를 들어 형상들에 대해 그것들이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존재한다고 진술된다면, "αὐτὰ καθ᾿ αὑτά" 는 형상들의 일부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는 그 기술이나 방식을 표현한다. ("is" 에 대한 강조를 통해 또한 그러한 해석이 제안된 번역들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그 번역들이 다음으로 다루어진다.)
  Es ist auch unklar, wie man bei einer solchen Interpretation von 255c12-13 den folgenden Beweis verstehen sollte. Folgende Möglichkeit scheint sich anzubieten:
  Das Verschiedene ist πρὸς ἄλλο und gehört so zur zweiten Klasse von Dingen, das Seiende dagegen ist αὐτὸ καθ᾿ αὑτό und gehört zur ersten Klasse (vgl. Burnet, Greek Philosophy, S. 285: "Other is essentially relative and Being is absolute"). Bei einer solchen Interpretation wird der Form des Seienden offensichtlich nur ein Gebrauch von "... ist" zugeordnet, nämlich "... ist" im Sinn von "existiert"; das jedenfalls scheint gemeint zu sein, wenn vom Seienden im Gegensatz zum Verschiedenen gesagt wird, daß es absolut ist. Denn als Form ist das Verschiedene genauso für sich bestehend wie das Seiende. Wie soll man nun aber die Bemerkung verstehen, daß das Seiende im Gegensatz zum Verschiedenen an beiden Formen teilhat, von denen 255d4-5 die Rede ist?
  Da das Verschiedene und ebenso alle anderen Relativa genauso seiend sind wie das Seiende und die anderen Elemente der ersten Klasse, umfaßt das Seiende sowohl die Elemente der ersten wie auch die der zweiten Klasse. Das, was ist, hat sowohl an der Form des αὐτὸ καθ᾿ αὑτό als auch an der Form des πρὸς ἄλλο teil.
  Diese Interpretation scheitert einfach deshalb, weil sich das Seiende darin gar nicht vom Verschiedenen unterscheidet. Denn da das Seiende koextensiv mit dem Verschiedenen ist, muß natürlich auch gelten: "das, was verschieden ist, hat sowohl an der Form des αὐτὸ καθ᾿ αὑτό als auch an der des πρὸς ἕτερον teil"
  255c12-13 에 대한 그러한 해석에서 뒤따르는 논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역시 불명하다. 다음의 가능성이 제시되는 것으로 보인다:
  The Different 는 πρὸς ἄλλο 존재하고 그래서 사물들의 두 번째 부류에 속하며, the Being 은 반대로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존재하고 첫 번째 부류에 속한다 (Burnet, "다름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고 Being은 절대적이다"). 그러한 해석에 의해 Being 의 형상은 명백히 "... is" 의 한 용법, "현존하다" 라는 의미의 용법에 해당하게 된다; the Being 에 대해 the Different 와 반대로 진술될 경우, it absolutely is 라는 것은 어쨌든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the Different 가 the Being 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 형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 the Being 이 the Different 와 대조적으로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한다는 255d4-5 에 대한 독해인 그 언급은 이제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The Different 와 또한 여타 모든 상대적인 것들은 the Being 과 첫 번째 부류의 여타 원소들과 마찬가지로 being 이기에, the Being 은 첫 번째 부류의 원소들뿐만 아니라 두 번째 부류의 원소들도 포함한다. 존재하는 바의 것은 αὐτὸ καθ᾿ αὑτό 형상에도 πρὸς ἄλλο 형상에도 참여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런 이유로 쉽사리 오도하는데, the Being 이 그 경우 the Different 와 전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the Being 이 the Different 와 동연이고, 자연히 이하로 여겨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른 바의 것은 αὐτὸ καθ᾿ αὑτό 형상에도 πρὸς ἄλλο 형상에도 참여한다."
- 25- Man kann versuchen, das durch einen kleinen Zusatz zu vermeiden: "das, was verschieden ist, hat qua verschieden, nur an der Form des πρὸς ἕτερον teil". Leider gilt dann aber auch für das Seiende nach Voraussetzung ("das Seiende ist αὐτὸ καθ᾿ αὑτό"): "das, was ist, hat qua seiend, nur an der Form des αὐτὸ καθ᾿ αὑτό teil". Damit ist aber wieder völlig unklar, was gemeint ist, wenn gesagt wird, daß das Seiende an jenen beiden Formen teilhat.
  Wenn es nun sachlich nicht möglich ist, "πρὸς ἄλλα" und "αὐτὰ καθ᾿ αὑτά" als Prädikate aufzufassen, was auch sprachlich sehr hart wäre, dann scheinen wir in die etwas unglückliche Lage zu kommen, irgendwelche Prädikate ergänzen zu müssen.
  사소한 추가를 통해 회피하는 일을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바의 것은 다른 것으로서 πρὸς ἕτερον 형상에 참여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the Being 에 대해서도 전제("The Being 은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이다")에 따라 마찬가지이다: "있는 바의 것은 있는 것으로서 αὐτὸ καθ᾿ αὑτό 형상에 참여한다". 허나 이 점에서 다시금 the Being 이 양쪽 형상 각각에 참여한다고 진술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전적으로 불명하다.
  "πρὸς ἄλλα" 와 "αὐτὰ καθ᾿ αὑτά" 를 술어로 이해하는 일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경우, 어떤 술어든 보충을 해야만 하는 곤란한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는 점만은 말 그대로 확실할 것이다.
  Eine Form dieser Interpretation ist Cornfords. Er übersetzt:
"... among things that exist, some are always spoken of as being what they are just in themselves, others as being what they are with reference to other things" und sagt zu der Stelle (S. 282):
"Difference is here distinguished from Existence by the fact that Existence blends with (`partakes of`) both the characters belonging respectively to things which `are what they are just themselves`(καθ᾿ αὑτά) and things which `are what they are with reference to other things`(πρὸς ἄλλα)."
Was er mit "... Existence blends with - both the characters ..." meint, geht aus seinen Ausführungen über die Mischung von Formen hervor (S. 271). Wenn sich etwa die Form Lebewesen mit der Form Zweifüßigkeit mischt, dann hat die Klasse der Lebewesen L eine Unterklasse L1, die alle zweibeinigen Lebewesen umfaßt. Angenommen nun, L und L1 sind nicht leer, dann gilt also, wenn Lebewesen und Zweibeinigkeit sich mischen:
(1) "ein Teil der Lebewesen sind Zweibeiner".
Wenn sich also die Form des Seienden mit den Formen καθ᾿ αὑτά und πρὸς ἄλλα mischt, dann müßte gelten:
(2) "ein Teil dessen, was ist, ist καθ᾿ αὑτά".
(3) "ein Teil dessen, was ist, ist πρὸς ἄλλο".
  이러한 해석의 한 형태는 콘포드의 해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 존재하는 사물들 중에서, 일부는 언제나 그것들 자체로 그것들인 바의 것으로 있는 것(being)으로서 진술되고, 다른 것들은 또 다른 사물들에 관련하여 그것들인 바의 것으로 있는 것으로서 진술된다" 그리고 그 장에서 말한다(282쪽.):
"다름은 여기에서 현존과 구분된다. 현존은 '단지 그 자체로(καθ᾿ αὑτά) 그것들인 바의 것들인' 사물들에 그리고 '다른 사물들에 관련하여(πρὸς ἄλλα) 그것들인 바의 것들인' 사물들에 각기 속하는 양쪽 특성 모두와 섞인다('~에 참여한다')."
그가 "... 현존은 양쪽 특성 모두와 섞인다 ..." 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형상들의 섞임에 대한 그의 언급들로부터 나온다(271쪽.). 생물이라는 형상이 두발달림이라는 형상과 섞인다면, 생물이라는 유 L은 하위 유 L1 을 가진다. 그 하위류는 모든 두발달린 생물을 포함한다. 이제 L 과 L1 이 공집합이 아니라 가정하면, 생물과 두발달림이 섞일 경우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1) "생물의 일부는 두발달림이다"
그러므로 the Being 형상이 καθ᾿ αὑτά 그리고 πρὸς ἄλλα 형상들과 섞일 경우, 다음과 같아야만 한다:
(2) "존재하는 바의 것의 일부는 καθ᾿ αὑτά 로 존재한다".
(3) "존재하는 바의 것의 일부는 πρὸς ἄλλα 로 존재한다".
  Cornford allerdings formuliert in seiner Übersetzung anders, nach seiner Übersetzung müßten (2) und (3) wie folgt lauten:
(2`)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αὐτὸ καθ᾿ αὑτό" und
(3`)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πρὸς ἄλλο".
Der Grund für diese Umformulierung ist nicht schwer zu finden; denn mit (2) und (3) erhielten wir wieder eine der Interpretationen, wonach καθ᾿ αὑτό und πρὸς ἄλλο Eigenschaften von Gegenständen sind, die aber unzureichend wäre, weil die (2) und (3) entsprechenden Sätze für das Verschiedene ebenfalls gelten müssen, da das Seiende und das Verschiedene koextensiv sind.
  콘포드는 그의 번역에서 다른 식으로 정식화한다. 그의 번역에 따라 (2) 와 (3) 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2') 존재하는 바의 것의 일부는 존재하는 바의 것인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이다" 그리고
(3') 존재하는 바의 것의 일부는 존재하는 바의 것인 πρὸς ἄλλο 이다".
이러한 재진술에 대한 근거는 찾기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2) 와 (3) 으로 우리는 다시 καθ᾿ αὑτό 와 πρὸς ἄλλο 가 대상들의 속성들인 그런 해석을 얻었지만, the Being 과 the Different 가 동연이기에 (2) 와 (3) 에 해당하는 문장들이 the Different 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만하기 때문에, 그 해석은 불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 26 - Nun gilt nach 255d6-7:
(4) "alles, was verschieden ist, ist das, was es ist, πρὸς ἄλλο".
    Folglich gilt nicht:
(5) "ein Teil dessen, was verschieden ist, ist das, was es ist, αὐτὸ καθ᾿ αὑτό".
  Um nun den Kontrast zwischen dem Seienden und dem Verschiedenen zu erreichen, führt Cornford unter Hinweis auf 255d6-7 (S. 281 n 1) in die Übersetzung von 255c12-13 etwas ein, dem nichts im Text entspricht, nämlich "being what they are". Genau dieser Zusatz macht den Unterschied zwischen (2) und (3) einerseits und (2`) und (3`) andererseits aus.
  Was ist nun mit diesem Zusatz "... ist das, was es ist ..." in 255d7 gemeint?
  이제 255d6-7 에 따라 다음과 같다:
(4) "다른 바의 모든 것은 그것인 바 πρὸς ἄλλο 이다".
   따라서 다음은 아니다:
(5) "다른 바의 것의 일부는 그것인 바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이다."
  이제 the Being 과 the Different 사이의 대조를 얻기 위해, 콘포드는 255d6-7 과의 연관 속에서 255c12-13 에 대한 해석에서 문헌상 전혀 부합하지 않는 무언가, 즉 "being what they are" 를 집어 넣는다. 정확히 이러한 추가가 한편으로는 (2) 와 (3) 사이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2') 와 (3') 사이의 구분을 만들어낸다.
  이제 255d7 에 "... 그것인 바의 것이다 ..." 라는 이 추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Der Mensch z.B. ist verschieden vom Tisch. Als Verschiedener also ist er das, was er ist, von etwas anderem. Nun kann sich das "... ist ... das, was er ist, ..." nicht auf sein Menschsein, sondern nur auf sein Verschiedensein beziehen. Folglich ließe sich (4) auch so formulieren:
(4`) "alles, was verschieden ist, ist das, was es ist, nämlich verschieden, πρὸς ἄλλο".
  Entsprechend müßte dann aber auch "... ist das, was es ist ..." in (2`) und (3`) als "... ist das, was es ist, nämlich seiend ..." verstanden werden. Hier aber versteht das Cornford plötzlich ganz anders, nämlich etwa so: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z.B. Mensch, αὐτὸ καθ᾿ αὑτό" und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z.B. Sklave, πρὸς ἄλλο".
  예를 들어 인간은 책상과 다르다. 그러므로 the Different 로서 그는 그인 바 무언가와 또 다른 것이다. 이제 "... is ... being what he is ..." 는 인간존재임에 관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임에 관련할 수 있다. 따라서 (4) 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시킨다:
(4') "다른 바의 것인 모든 것은 그것인 바 즉 다른 것인 바 πρὸς ἄλλο 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에 따라 (2') 와 (3') 에서 "... is being what it is ..." 또한 "... is being what it is, that is being ..." 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콘포드는 그것을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 즉 이런 어떤 것이다:
"있는 바의 것의 일부는 그것인 바 예를 들어 인간인 바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이다" 그리고
"있는 바의 것의 일부는 그것인 바 예를 들어 노예인 바 πρὸς ἄλλο 이다".
  Korrigiert man nun Cornford dahingehend, daß man in Parallele zu (4`) statt (2`) und (3`)
(2``)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nämlich seiend, αὐτὸ καθ᾿ αὑτό" und
(3``) "ein Teil dessen, was ist, ist das, was es ist, nämlich seiend, πρὸς ἄλλο" wählt,
dann erhält man für 255c12-13 die Schleiermachersche Version:
"... daß von dem Seienden einiges an und für sich und einiges nur in Beziehung auf anderes immer so genannt werde", "so", d.h. "seiend".
  (Eine MIttelstellung zwischen Cornford und Schleichermacher nimmt Apelt ein:
"... daß das Seiende immer teils als für sich bestehend, teils im Verhältnis des einen zum anderen beurteilt wird".)
  이제 콘포드는 (4) 에 견주어 (2') 와 (3') 대신
(2'') "있는 바의 것의 일부는 그것인 바 즉 being 인 바 αὐτὸ καθ᾿ αὑτό 이다" 그리고
(3'') "있는 바의 것의 일부는 그것인 바 즉 being 인 바 πρὸς ἄλλο 이다" 를 택한 것으로,
그리하여 쉴라이어마허 판 255c12-13 해석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쪽으로 수정한다.
"... the Being 에 대해 일부는 그 자체로 일부는 다른 것에 관련하여 언제나 그렇게 불린다", "그렇게" 는 "being"이다.
  (아펠트는 콘포드와 쉴라이어마허의 중간 입장을 취한다:
"... the Being 은 언제나 부분적으로는 그 자체로 현존하고, 부분적으로는 다른 것에 대한 것으로 상대적으로 판단된다".) 
  Das Verschiedene dagegen wird nach 255d1 immer nur in bezug auf etwas anderes so genannt.
  Demnach wäre also das, wovon etwas ausgesagt wird, die Gesamtheit dessen, was ist; das, was ausgesagt wird, das Sein dieser Dinge; - 27 - was schließlich damit gemeint ist, wenn gesagt wird, daß "... ist" πρὸς ἄλλο ausgesagt wird, davon haben wir auf Grund unserer Interpretation von 255d1-7 auch eine gewisse Vorstellung. Es bleibt also zunächst zu klären, was mit "... wird αὐτὸ καθ᾿ αὑτό `seiend´ genannt" gemeint sein soll.
  Daß "seiend" bzw. "ist" ganz für sich allein, d.h. ohne Ergänzung, ausgesagt werden kann, kann sicher nicht gemeint sein, da sich "αὐτὸ" nicht auf "seiend", sondern auf das, was "seiend" genannt wird, bezieht.
  반대로 the Different 는 255d1 에 따라 언제나 어떤 다른 것에 관련하여 그렇게 불린다.
  그에 따르면 무언가가 그에 대해 진술되는 바의 것은 존재하는 바의 것의 총체가 될 것이다; 진술되는 바의 것, 이런 사물들의 그 존재; "... is" πρὸς ἄλλο 가 진술된다는 것이 논의될 경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결국 무엇인지, 그에 대해 우리는 255d1-7 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근거하여 그에 대한 하나의 명확한 개념 또한 얻는다. 그러므로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 αὐτὸ καθ᾿ αὑτό 'being' 이라 불린다" 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being" 또는 "is" 가 전적으로 오직 그 자체로, 다시 말해 보어 없이 진술될 수 있다는 점은, "αὐτὸ" 가 "being" 이 아니라 "being" 이라 불리는 바의 것에 관련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다.
  "... wird an und für sich ´seiend´ genannt" dagegen ist eine richtige Wiedergabe, wenn damit gemeint ist, daß man sich nicht auf einen anderen Gegenstand b bezieht, mit Hinsicht auf den man von einem Gegenstand a sagt, daß er ist, sondern, daß man mit Hinsicht auf a selbst von a sagt, daß es ist. (Der Zusatz, "sondern, daß man mit Hinsicht ... ist" ist auf Grund unserer Interpretation von 255d1-7 notwendig.) Daß das aber gemeint sein muß, wenn "seiend", bzw. "ist" das zu ergänzende Prädikat ist, ergibt sich daraus, daß (a) "πρὸς ἄλλα" strikt zu verstehen ist und (b) "αὐτὰ καθ᾿ αὑτά" entsprechend zu "πρὸς ἄλλα" so interpretiert werden muß, daß wir eine vollständige Disjunktion erhalten.
  Wenn das aber gemeint sein muß, dann bieten sich anstelle von "an und für sich" für "αὐτὰ καθ᾿ αὑτά" zwei andere Übersetzungen an : "auf Grund seiner selbst" oder besser "mit Bezug auf es selbst".
  "... 그 자체로 'being' 이라 불린다" 라는 것은 반대로, 그 말이 어떤 다른 대상 b 에 관련하여, 그것과 관련한 측면에서 한 대상 a 에 대해 he is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 그 자체와 관련한 측면에서 a 에 대해 it is 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때 올바른 해석이다. ("오히려, ... 와 관련한 측면에서 is" 라는 추가는 255d1-7 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근거하여 필연적이다.) 하지만 "being" 달리 말하면 "is" 가 보어를 취하는 술어일 경우를 의미해야만 한다는 것은 (a) "πρὸς ἄλλα" 를 제한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b) "αὐτὰ καθ᾿ αὑτά" 가 "πρὸς ἄλλα" 에 부합하는 것으로, 그래서 우리가 완전 선언지를 확보하게끔 그렇게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 의미여야만 할 경우, "αὐτὰ καθ᾿ αὑτά" 에 대해 "그 자체로" 대신 두 가지 상이한 번역들이 주어진다. "그 자체에 근거하여" 아니면 오히려 "그 자체에 관련하여".
  Der relevante Teil von 255c12-13 könnte dann vorläufig (ich lasse "ἀεὶ" noch unbeachtet) wie folgt übersetzt werden:
"von dem, was ist, wird das eine in bezug auf es selbst, das andere in bezug auf ein anderes seiend genannt".
  Bevor wir aber diese Übersetzung weiter präzisieren und interpretieren können, müssen zwei Dinge sichergestellt werden:
  1. "τὸ δέ γ᾿ ἕτερον ἀεὶ πρὸς ἕτερον" kann mit "das Verschiedene wird immer mit Bezug auf etwas anderes verschieden genannt" und entsprechend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αὐτὰ καθ᾿ αὑτά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 mit "von dem, was ist, wird das eine ... seiend genannt" übersetzt werden;
  2. "αὐτὰ καθ᾿ αὑτά" kann mit "in bezug auf es selbst" übersetzt werden.
  Beides, glaube ich, läßt sich mit Hilfe einer Aristotelesstelle aus περὶ ἐναντίων hinreichend zeigen.
  255c12-13 의 관련 구절은 그리하여 잠정적으로 ("ἀεὶ" 를 고려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what is 에 대하여 한편의 것은 그 자체에 관련하여, 다른 편의 것은 또 다른 것에 관련하여 being 이라 불린다".
  우리가 이러한 번역을 더욱 구체화하고 해석할 수 있기에 앞서, 두 가지 사항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1. "τὸ δέ γ᾿ ἕτερον ἀεὶ πρὸς ἕτερον" 라는 말이 "the Different 는 언제나 또 다른 무언가에 관련하여 different 라고 불린다" 라고 또 그에 맞추어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αὐτὰ καθ᾿ αὑτά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 는 "what is 에 대해 한 편의 것은 ... being 이라 불린다" 라고 번역될 수 있다;
  2. "αὐτὰ καθ᾿ αὑτά" 는 "그것 자체에 관련하여" 라고 번역될 수 있다.
  내 생각에 양편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περὶ ἐναντίων (반대되는 것들에 대하여) 을 통해 충분히 드러난다.
  Dort heißt es (Ross. fr. 2, 11.10-13) : "εἰ δὲ καὶ ταῦτα ἐναντία, φησί, διττῶς ῥηθήσεται τὸ ἐναντίον· ἢ γὰρ καθ᾿ αὑτὰ τὰ ἐναντία ῥηθήσεται, οἷον - 28 - ἀρετὴ καὶ κακία, κίνησις καὶ στάσις, ἢ τῷ μετέχειν ἐναντίων, οἷον τὸ κινούμενον τῷ ἑστηκότι ..."
  Dieser Satz könnte auch wie folgt formuliert sein : "... διττῶς ῥηθήσεται τὸ ἐναντίον· τῶν γὰρ ἐναντίων τὰ μὲν αὐτὰ καθ᾿ αὑτά ῥηθήσεται, οἷον ..., τὰ δὲ τῷ μετέχειν ἐναντίων, οἷον ..."
  Von Ross wird er übersetzt mit:
"... `contrary´ will be used in two senses; it will be applied either with reference to contraries themselves, like virtue and vice, movement and rest, or to things by virtue of a sharing in contraries, e.g. to that which moves and that which rests, or to the good and the bad."
  거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Ross. fr. 2, 11.10-13) : "만일 이것들도 반대되는 것들이라면, 반대되는 것은 두 가지로 이야기될 것이다: 즉 그 자체로 반대되는 것들이라 이야기될 것이거나, 예를 들어 덕과 악덕, 운동과 정지처럼, 아니면 반대되는 것들에 참여하는 측면에서, 예를 들어 움직이는 것이 정지해있는 것과 ..."
  이러한 명제들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 "... 반대되는 것은 두 가지로 이야기될 것이다: 즉 반대되는 것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 이야기될 것이고, 예를 들어 ..., 다른 일부는 반대되는 것들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예를 들어 ..."
  로스에 의하면 이렇게 번역된다.
  "... '반대' 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것이다; 그것은 반대항들 그 자체, 덕과 악덕, 운동과 정지 같은 것들을 지시하는 데에, 또는  반대항들에 참여를 통한 사물들, 예를 들어 운동하고 있는 것과 정지하고 있는 것, 혹은 좋은 것과 나쁜 것에 적용될 것이다." 
  Das ist zwar etwa das, was gemeint ist, aber für unsere Bedürfnisse nicht genau genug:
"τὰ ἐναντία" in "καθ᾿ αὑτὰ τὰ ἐναντία ῥηθήσεται" bezieht sich, wie "οἷον - 28 - ἀρετὴ καὶ κακία, ..." zeigt, auf die Menge der Gegensatzpaare, über die etwas ausgesagt wird, nämlich daß sie entweder in bezug auf sich selbst Gegensätze genannt werden (das gilt für die Gegensätze selbst wie Bewegung und Ruhe), oder aber, daß sie auf Grund ihrer Teilhabe an den Gegensätzen selbst Gegensätze genannt werden (z.B. das, was in Bewegung, und das, was in Ruhe ist).  
"ἢ γὰρ καθ᾿ αὑτὰ τὰ ἐναντία ῥηθήσεται, ... ἢ τῷ ...", das auch parallel zu 255c12-13 formuliert sein könnte, muß also übersetzt werden: "denn entweder werden die Gegensätze mit Bezug auf sie selbst Gegensätze genannt werden, oder ...". 
  그 의미가 그런 어떤 것이지만 우리에게 충분하진 못하다:
"καθ᾿ αὑτὰ τὰ ἐναντία ῥηθήσεται" 에서 "τὰ ἐναντία" 는 "οἷον ἀρετὴ καὶ κακία, ..." 같은 반대쌍들의 무리에 관련하여 무언가에 대해, 다시 말해 그 자체에 관련하여 반대들로 불리거나 (운동과 정지처럼 반대들 자체에 대해 그러하듯), 아니면 그것들의 반대들 자체에 대한 참여에 근거하여 반대들로 불린다 (예를 들어 운동 중에 있는 것과 정지 중에 있는 것). 255c12-13 과 일관되게 정식화될 수 있는 "ἢ γὰρ καθ᾿ αὑτὰ τὰ ἐναντία ῥηθήσεται, ... ἢ τῷ ..." 는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만 한다: "반대들은 그 자체에 관련하여 반대들로 불리게 되거나, 아니면 ...". 
  Damit wäre unsere Übersetzung von 255c12-13 auch sprachlich gerechtfertigt:
"Von dem Seienden wird das eine mit Bezug auf sich selbst, das andere mit Bezug auf etwas anderes seiend genannt."
  Nachträglich besehen, ist diese Übersetzung auch gar nicht so überraschend. Schon Cornford hat 255d1 so übersetzt, wie wir es tun: "and what is different is always so called with reference to another thing, isn`t it?" 
  그 점에서 255c12-13 에 대한 우리의 번역은 언어상으로 정당화될 것이다:
"The Being 에 대해 한편의 것은 그 자체에 관련하여, 다른 편의 것은 또 다른 무언가에 관련하여 being 이라 불린다."
  이어서 보자면, 이러한 번역은 또한 전혀 놀라울 것도 없다. 이미 콘포드는 255d1 을 우리처럼 번역했다. "그리고 what is different 는 언제나 또 다른 것과 관련하여 그렇게 불린다, 그렇지 않은가?"
  Nun ist 255c12-13 offensichtlich parallel zu 255d1 gebaut, da 255d1 immer noch direkt von "λέγεσθαι" und somit von "ἀλλ᾿ οἶμαι σε συγχωρεῖν" abhängig ist; dem "πρὸς ἕτερον" entspricht "πρὸς ἄλλα", dem "ἀεὶ" in 255d1 das "τὰ μὲν ... τὰ δὲ ...", dem "τὸ ... ἕτερον" entspricht aber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der Gegensatz schließlich zwischen dem, was für das Seiende gilt, und dem, was für das Verschiedene gilt, wird durch das "δέ γ᾿" in d1 ausgedrückt. Folglich ist es auch nur natürlich, wenn 255c12-13 entsprechend zu 255d1 übersetzt wird.
  이제 255c12-13 은 255d1 에 명백히 일관되게 구성된다. 255d1 은 여전히 "λέγεσθαι" 에 직접 의존하고 따라서 "ἀλλ᾿ οἶμαι σε συγχωρεῖν" 에 의존한다; "πρὸς ἕτερον" 은 "πρὸς ἄλλα" 에, 255d1 의 "ἀεὶ" 는 "τὰ μὲν ... τὰ δὲ ..." 에, 허나 "τὸ ... ἕτερον" 은 "τῶν ὄντων τὰ μὲν ... τὰ δὲ ..." 에 해당한다; the Being 에 해당하는 것과 the Different 에 해당하는 것 사이의 대조는 확실히 d1 에서 "δέ γ᾿" 를 통해 표현된다. 따라서, 255c12-13 이 255d1 에 부합하게 번역될 경우, 그것은 또한 자연스럽다.
  Nach unserer Übersetzung von 255c12-13 zu urteilen, werden hier Gegenstände in zwei Klassen aufgeteilt. Das gleiche gilt auch, wenn - 29 - man `Gegenstände` im weitesten Sinn nimmt, für die Aristotelesstelle. Das aber, was an der Aristotelesstelle wie die Beschreibung einer Zweiteilung von Gegesntänden A aussieht, ist in Wirklichkeit, wie "... διττῶς ῥηθήσεται τὸ ἐναντίον· ... γὰρ ..." zeigt, als die Beschreibung der Zweiteilung von Verwendungen des entsprechenden Prädikates "A" auf Grund der Zweiteilung der Gegenstände A gedacht.
  우리의 255c12-13 번역에 따라 판단하자면, 여기에서 대상들이 두 부류로 분류된다. '대상들' 이 넓은 의미로 이해될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럴 듯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에서 대상들의 부류 A 에 대한 이분의 기술과 같은 것은 실제로 "... διττῶς ῥηθήσεται τὸ ἐναντίον· ... γὰρ ..." 가 보여주듯 대상들의 부류 A 의 이분에 근거한 상응하는 술어 "A" 의 용법들의 이분에 대한 기술로 생각된다. 
  Wenden wir das nun auf unsere Stelle im Sophistes an, dann fällt unsere Interpretation von 255c12-13 mit der von 255d1-7 zusammen. 255c12-13 läuft dann nämlich auf folgendes hinaus:
"... ist" wird auf zweifache Weise verwendet:
  1. "... ist" wird von Dingen in bezug auf sie selbst ausgesagt (= (III`)).
  2. "... ist" wird von Dingen in bezug auf etwas von ihnen Verschiedenes ausgesagt (= (II)).
  Um welche beiden Klassen von Gegenständen es sich handelt, und wie "ἀεὶ" zu beziehen ist, wird sich im folgenden herausstellen, wenn wir die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näher untersuchen.
  Auf eine wichtige Folgerung aus dieser Interpretation sei aber schon hier aufmerksam gemacht. "x ist" muß in jeder Verwendung, in der mit "ist" auf die Form des Seienden Bezug genommen wird, durch "y" ergänzt werden. Selbst in den Fällen, wo das sprachlich nicht notwendig sein sollte, muß "y" wenigstens mitverstanden werden.
  이제 우리가 『소피스트』 에서 다루는 장에 그것을 적용하면, 255c12-13 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255d1-7 에 대한 해석과 일치한다. 255c12-13 은 다시 말해 다음에 상응하게 된다:
"... is" 는 이중의 용법으로 사용된다:
  1. "... is" 는 사물들에 대해 그 사물들 자체에 관련하여 진술된다 (= (III')).
  2. "... is" 는 사물들에 대해 what is the Different from them 에 관련하여 진술된다 (= (II)).
  대상들의 어떤 두 부류가 문제인지, 그리고 "ἀεὶ" 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지, "... is" 의 두 용법들을 더 면밀히 고찰할 때 이하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III. Die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III. "... is ..." 의 두 가지 용법들
1. Die Bedeutung der Unterscheidung
1. 구분의 의미
  Wenn die vorgeschlagene Interpretation von 255c12-255d7 richti sein sollte, dann erhebt sich die Frage, warum Platon es sich nicht - wie einige Zeilen zuvor bei der Identität - wesentlich leichter gemacht hat, um die Nichtidentität von Sein und Verschiedenheit zu beweisen.
  Er hätte einen Fall von "... ist ..." nehmen können, z.B. "der Mensch ist ein zweibeiniges ...-Lebenwesen", wo sich ".. ist ..." nicht durch "... ist verschieden ..." ersetzen läßt; oder umgekehrt einen Fall von "... ist verschieden von ...", wo die Argumente für Dinge stehen, die keinerlei συμπλοκή miteinander eingehen und wo "... ist verschieden von ..." sich folglich auch nicht durch "... ist ..." ersetzen läßt.
  Man wird daraus schließen dürfen, daß Platon dieser Unterscheidung von zwei Verwendungen von "... ist ..." eine besondere Bedeutung beimißt.
  앞서 언급된 255c12-255d7 의 해석이 정당화될 경우, 플라톤은 왜 Being 과 Difference 사이의 비동일성을 증명하기 위해 - 앞서 the Same 으로 몇몇 행을 그리 하였듯 - 그것을 근본적으로 더 쉽게 만들지 않았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그는 "... is ..." 의 사례로 예를 들어 "인간은 두 발 달린 ... -생물이다" 라는 것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 is ..." 는 "... is different ..." 로 대체되지 않는다. 또는 역으로 "... is different from ..." 의 사례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변항들이 사물들을 대신하는데, 아무런 συμπλοκή 도 함께 적용되지 않고 따라서 거기에서 "... is different from ..." 도 "... is ..." 로 대체되지 않게 된다.
  플라톤이 "... is ..." 의 두 가지 용법에 대한 이러한 구분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이 이로부터 추론될 수 있을 것이다. 
- 30 - Zunächst ist diese Unterscheidung wichtig für den unmittelbaren Zusammenhang. Das wird deutlich, wenn man bedenkt, daß die Theorie der `Spätlerner` darauf hinausläuft, daß "... ist ..." in seiner zweiten Verwendung nicht ebraucht werden darf. Wenn aber erst einmal zugegeben worden ist, daß von einem korrekten Gebrauch von "... ist ..." gibt, derart, daß von einem Gegenstand a in Bezug auf a ist - und die Argumente, die 251e8-255d1 vorgebracht werden, zwingen uns dazu - dann muß man auch zugeben, daß es eine ganze Klasse von Paaren (a, b) gibt, derart, daß von a in Bezug auf b sowohl "a ist" als auch "a ist nicht" gilt. Eben das aber wird sogleich im folgenden 255e8-256d10 gezeigt, wo wir die Satzpaare erhalten:
1a Bewegung ist ταὐτόν.
1b Bewegung ist nicht ταὐτόν.
2a Bewegung ist ἕτερον.
2b Bewegung ist nicht ἕτερον.
3a Bewegung ist ὄν.
3b Bewegung ist nicht ὄν.
  우선 이러한 구분은 그 직접적인 연결에 중요하다. '늦게 배우는 자들' 의 이론이 "... is ..." 를 그 두 번째 용법으로 사용되지 못하게끔 귀결된다고 생각할 때, 그 점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우선 일단 "... is ..." 의 적절한 용법에 대해 대상 a 에 대해서 a 와 관련하여 is 라는 것이 받아들여진다면 - 그리고 251e8-255d1 에서 제기된 그 논증이 우리에게 강요된다면 - a 에 대해서 b 와 관련하여 "a is" 뿐만 아니라 "a is not" 또한 성립하는 그런 짝 (a, b) 의 전체 집합이 있다는 것을 허용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뒤이어 오는 255e8-256d10 에서 다음과 같이 드러나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명제쌍들을 얻는다.
1a 운동은 ταὐτόν 이다.
1b 운동은 ταὐτόν 이 아니다.
2a 운동은 ἕτερον 이다.
2b 운동은 ἕτερον 이 아니다.
3a 운동은 ὄν 이다.
3b 운동은 ὄν 이 아니다.
  Daraus wird dann 256d11ff. die für die Argumentation wichtige Folgerung gezogen, daß Bewegung und die übrigen Formen nicht seiend sind.
  Die etwas ermüdende Ausführlichkeit, mit der hier Platon Satzpaare von der Form "x ist y", "x ist nicht y" einander gegenüberstellt und das Unproblematische dieses Gegensatzes erklärt, läßt vermuten, daß Platon hier die Lösung einer ernsthaften Schwierigkeit sieht.
  Es ist genau die NIchtbeachtung des Unterschiedes zwischen den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die im Parmenides dazu führt, daß aus der Tatsache, daß etwas nicht x ist, geschlossen wird, daß es dann in keiner Weise x ist.
  Es wird an diesen Satzpaaren aber auch deutlich, daß ein x sowohl y als auch nicht y sein kann, ohne daß daraus geschlossen werden dürfte, daß x nicht wirklich y und insofern nicht wirklich seiend ist.
  Über das Gewicht für den unmittelbaren Zusammenhang der Argumentation hinaus hat aber die Unterscheidung von zwei Verwendungen von "... ist ..." eine allgemeine Bedeutung, die sich klären wird, wenn wir nun im folgenden die beiden Verwendungen näher untersuchen.
  거기에서 256d11 이하 그 논증에 대한 중요한 결론이 도출되는 바, 운동과 여타 형상들이 not being 이라는 것이다.
  그 지루한 세부사항은, 그로써 플라톤이 여기에서 "x is y", "x is not y" 형식의 문장쌍들을 서로 마주 세우고 이러한 대립이 문제가 없음을 밝히는 바, 플라톤이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의 해법을 보았다고 가정하게 한다.
  그것은 확실히 "... is ..." 의 두 용법 사이의 구분을 놓치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이어지는 바, 어떤 것이 x 이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전혀 x 이지 않다고 결론나는 것이다. 
  "... is ..." 의 두 용법에 대한 구분은 그 논증에의 직접적인 연결이라는 중요성을 넘어서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는 그 두 용법을 이후 더 면밀히 고찰할 때 분명해진다.

2.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2. "... is ..." 의 일차 용법
  In einem Satz von der Form "x ist y" wird "... ist ..." in seiner ersten Verwendung gebraucht, wenn das, was durch "x" bezeichnet wird, d.h. das, wovon etwas ausgesagt wird, nicht verschieden ist von Y-heit, d.h. dem, was von x ausgesagt wird.
- 31 - Damit scheiden alle Sätze, in denen "x" nicht für die Form oder den Begriff x steht, aus, da "y" immer Bezug auf eine Form nimmt.
  Unter welchen Umständen ist also die Form, für die "x" steht, nicht verschieden von der Form, die "y" zugeordnet ist?
  Aus 255d11-c1 ergibt sich, daß x und Y-heit (in diesem Fall das Seiende und Dasselbe) dann verschieden sind, wenn sich "x" nicht durch "y" ersetzen läßt. (Vgl. Parm. 142c1-2; Parm. 139d2-8)
  Dahinter steht natürlich die Vorstellung, daß die Form genau das ist, was durch das Prädikat ausgesagt wird. "x" und "y" wäre demnach die gleiche Form zugeordnet, wenn die beiden Ausdrücke synonym sind.
  Daraus ergibt sich, daß Definitionen Standardfälle für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sind. Ob außer Definitionen auch Klassifikationen in diese Kategorie fallen, hängt davon ab, ob für Platon das genus verschieden von der species ist oder nicht. Wenn das genus nicht verschieden von der species ist, dann ist nicht nur "der Mensch ist ein zweibeiniges ... Lebewesen" sondern auch "der Mensch ist ein Lebewesen" ein Fall der ersten Verwendung von "... ist ...".
  Ein Extremfall der ersten Verwendung von "... ist ..." liegt bei den Sätzen von der Form "das x ist x" vor. Von der Funktion dieser merkwürdigen Sätze wird später die Rede sein. Beispiele einer solchen Verwendung von "... ist ..." finden sich im Sophistes an mehreren Stellen, z.B. 258c1-3
"das Große ist groß"
"das Schöne ist schön"
"das Nichtseiende ist nicht seiend".
  "x is y" 형식의 명제에서 "... is ..." 는, "x" 를 통해 지시되는 것, 달리 말해 무언가가 그에 대해 진술되는 것이 Y-ness, 다시 말해 x 에 대해 진술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경우 일차 용법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x" 이 형상이나 개념 x 를 나타내지 않는 모든 문장들은 "y" 가 언제나 형상과 관련하기에 제외된다.
  그러면 "x"가 가리키는 형상은 어떤 조건에서 "y" 에 해당하는 형상과 다른가?
  255d11-c1 로부터 시사되는 바, x 와 Y-ness 는 (이 경우 the Being 과 Sameness), "x" 가 "y" 로 대체되지 않을 경우, 다른 것이다. (Parm. 142c1-2; Parm. 139d2-8)
  이에 대해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생각은 그 형상이 술어를 통해 진술되는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x" 와 "y" 는 그에 따라 그 두 표현이 동의어일 경우 같은 형상에 해당될 것이다.
  그로부터 시사되는 바, 정의가 "... is ..." 일차 용법의 표준사례이다. 정의 외에 분류까지 이 범주에 속하는지 여부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유와 종이 다른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에 달려있다. 유가 종과 다르지 않을 경우, "인간은 두 발 달린 ... 생물이다." 만이 아니라 "인간은 동물이다" 까지 "... is ..." 일차 용법의 사례이다.
  "... is ..." 일차 용법의 극단적 사례는 "x is x" 형식의 문장에서 성립한다. 이런 특수한 문장의 기능에 대한 독해는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 is ..." 용법의 사례는 『소피스트』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258c1-3 에서
"the Big is big"
"the Beautiful is beautiful"
"the Not Being is not being".

3.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und Selbstprädikation
3. "... is ..." 일차 용법과 자기술어
  Der Verdacht, daß es sich bei den angeführten Sätzen in 258c1-3 um die Art von Selbstprädikation handelt, die im Parmenides zu den Aporien des ersten Teils führt (Cherniss A J Ph., vol. 78, 1957, S. 258 n 123; Runciman, P L E, S. 102 und 101 n 2; Bluck, J H S, 1957, S. 186 n 17), beruht eben darauf, daß man nicht sieht, daß im Sophistes zwei Verwendungsweisen von "... ist x" unterschieden werden, je nachdem ob "... ist x" von der Form X oder einem einzelnen X ausgesagt wird, und daß diese Unterscheidung verwendet werden kann, um zwar die alten Formeln wie "ὁσιότης ist ὅσιον" beizubehalten, den Regress aber zu vermeiden.
  258c1-3 에서 인용된 문장들에서, 『파르메니데스』 첫 부분의 아포리아에 등장하는 자기술어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란 의심은 (Cherniss A J Ph., vol. 78, 1957, S. 258 n 123; Runciman, P L E, S. 102 und 101 n 2; Bluck, J H S, 1957, S. 186 n 17) 『소피스트』 에서 "... is x" 의 두 가지 사용 방식이, 그에 따라 "... is x" 가 형상 X 또는 개별자 X 에 대해 진술되는 식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구분이 "ὁσιότης is ὅσιον" 같은 오래된 형식에 적용되면서 소급을 피하게끔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점에 근거한다.
  Denn der Regreß entsteht eben dadurch, daß die einem Prädikat "x" zugeordnete Form X als verschieden von allen Elementen der Klasse betrachtet wird, für die "... ist x" gilt.
  Solange aber "... ist x" im gleichen Sinn - wenn auch in ausgezeichneter Weise - von der Form X wie von den einzelnen X ausgesagt wird, - 32 - gehört die Form X zu den Elementen der Klasse, für die "... ist x" gilt. "... ist x" muß aber solange für die Form X im gleichen Sinn wie für die einzelnen X gelten, wie die Form als Muster angesehen wird, mit Hinsicht auf das wir Einzeldinge "X" nennen. Das Muster aber ist natürlich verschieden von dem, wofür es ein Muster ist.
  Da nun "x" in "... ist x" auf das verweist, mit Hinsicht worauf Dinge "X" genannt werden, ist "die Form X ist x" genauso wenig ein Fall von echter Selbstprädikation wie "die einzelnen X sind x"; wir müssen also eine weitere Form X einführen, mit Bezug auf die die erste Form X und die einzelnen X "X" genannt werden.
  그 소급은 형상 X 에 상응하는 술어 "x" 가 "... is x" 가 참이 되는 부류의 모든 원소들과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는 바로 그 점을 통해 발생한다.
  하지만 "... is x" 가 개별자 X 에 대해서와 같이 형상 X 에 대해서도 같은 의미로 - 또한 주요한 방식으로 사용될 때 - 진술되는 반면, 형상 X 는 "... is x" 가 그에 대해 참인 그 부류의 원소들에 속한다. 그러나 형상이, 우리가 그와 관련한 측면에서 개별자들을 "X" 라고 이름하는, 그 본으로 간주되듯, "... is x" 는 개별자 X 에 대해서와 같은 의미로 형상 X 에 대해서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본은 그것을 본으로 삼는 것과 당연히 다르다.
  이제 "... is x" 에서 "x" 는 사물들이 그와 관련한 측면에서 "X" 라고 불리는 것을 지시하기에, "형상 X 는 x 이다" 라는 것은 "개별자 X 는 x 이다" 같이 더욱 실질적인 자기술어의 더 적은 경우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일차 형상 X 와 개별자 X 가 그와 관련하여 "X" 라 불리는 광의의 형상 X 를 도입해야만 한다.
  Unterstellt man nun, daß Platon unter anderem auf Grund der im Parmenides vorgetragenen Schwierigkeiten die Theorie der paradigmatischen Formen aufgegeben hat, dann liegt nahe, an diese Unterscheidung von zwei Verwendungen von "... ist ..." zu denken, um den Regreß zu vermeiden. Man beschränkt einfach die Klasse der Elemente, über der eine Form konstruiert wird, dadurch, daß man fordert, von ihnen solle "... ist x" nur in der zweiten Verwendung von "... ist x" gelten. Und das ist genau dann keine ad hoc Beschränkung mehr, wenn man aufhört, die Form X als ein Standard-X unter anderen X zu betrachten. Das Prädikat "x" bezieht sich nun auf den gleichen Gegenstand, auf den sich auch das Subjekt in "die Form X ist x" bezieht.
  Das ist genau der gleiche Schachzug, mit dem Aristoteles überhaupt abgelöste Formen zu vermeiden sucht; "Sokrates ist ein Mensch" ist für Aristoteles ein Fall von Selbstprädikation, "Mensch" bezieht sich auf die gleiche οὐσία wie "Sokrates" (vgl. z.B. An.Post. 73b5-8, 83b24-25).
  이제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 에서 제기된 난점들에 근거하여 여타의 것들 중 본이 되는 형상들이라는 이론을 폐기하였다고 가정하면, "... is ..." 의 두 용법에 대한 이런 구분을 생각하는 이유는 그 소급을 피하기 위함이다. 형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부류를 제한하는 것은 그 요소들에 대해 "... is x" 를 오직 "... is x" 의 이차 용법으로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형상 X 를 여타 X 들 중에서 표준-X 로 고려하는 한에서라면 그 경우에만 더 이상 전혀 자의적 제한이 아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리된 형상들 일반을 피하고자 사요안 수법과 똑같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자기술어의 한 사례이고, "인간" 은 "소크라테스" 와 똑같은 οὐσία 에 관련한다(vgl. z.B. An.Post. 73b5-8, 83b24-25).
  Die Akademie freilich hat einen anderen Weg eingeschlagen. Sie behielt paradigmatische Formen zumindest von natürlichen Substanzen bei, versuchte aber dem Argument vom "Dritten Menschen" durch die Forderung zu entgehen, daß einer Klasse, in der Elemente Priorität vor anderen Elementen haben, keine Form zugeordnet werden dürfe.
  Nun gibt es die Form des Menschen unabhängig von dem einzelnen Menschen, nicht aber die einzelnen Menschen unabhängig von der Form des Menschen.
  Qua Mensch aber unterscheidet sich die Form des Menschen nicht von den einzelnen Menschen, die genau wie die Form die Definition des Menschen erfüllen. Damit bildet die Form des Menschen eine Klasse mit dem einzelnen Menschen, hat aber Priorität vor dem einzelnen Menschen.
  Nach der Regel kann also der Klasse kein dritter Mann zugeordnet werden.
  아카데미 학파는 확실히 다른 길을 걸었다. 그들은 적어도 자연적 실체들에 대해서는 표준 형상들을 견지하였으나, "제 3 인간" 논변은 요소들이 다른 요소들보다 우선성을 지니는 그런 부류는 어떤 형상으로도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통해 피하고자 시도했다. 
  이제 인간의 형상은 개별 인간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지만, 개별 인간은 인간 형상에 독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인간의 형상은 인간의 정의를 그 형상과 마찬가지로 만족시키는 개별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로써 인간의 형상은 개별 인간으로 구성되지만, 개별 인간에 대해 우선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저 규칙에 따라 그 부류는 어떤 제 3 인간으로도 간주되지 않을 수 있다.
  Obgleich zwei verschiedene Verwendungen von "... ist ..." vorliegen, wenn man von der Form X und den einzelnen X sagt, daß sie x sind, so hat "... ist" doch in beiden Fällen dieselbe Bedeutung. Überdies - 33 - gibt es aber auch keinen Grund anzunehmen, daß "... ist x", je nachdem, ob es von der Form oder von den einzelnen X ausgesagt wird, verschiedene Bedeutung hat. Denn dem "x" ist in beiden Fällen die gleiche Form X zugeordnet. Nur wird sie eben in dem einen Fall von sich selbst ausgesagt (vgl. Aristoteles, περὶ ἰδεῶν fr. 3; Ross, S. 123, 9-11), im anderen Fall aber von etwas anderem. Insofern war es auch richtig, daß wir zu Anfang bei der zweiten Verwendung von "... ist ..." in "a ist b" die numerische Verschiedenheit von a und b betonten; denn insoweit a b ist, unterscheidet es sich von b überhaupt nicht; das heißt freilich nicht, daß die Form b lediglich ein weiteres b neben a ist.
  "... ist x" kann eben, ohne daß von verschiedenen Bedeutungen die Rede wäre, auf zwei Weisen verwendet werden:
1. um das Wesen der Form anzugeben,
2. um die Eigenschaft eines einzelnen X anzugeben (vgl. Ar. Top. 154a18, Met. 1059a10-14).
 그렇지만 "... is ..." 의 상이한 두 가지 용법은 형상 X 와 개별자 X 에 대해서 진술할 때 성립하지만, "... ist" 는 여전히 두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형상 X 에 대해 진술되느냐 개별자 X 에 대해 진술되느냐에 따라서 "... is x" 가 상이한 의미를 지닌다고 가정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두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형상 X가 "x" 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단지 한 경우에서 그 자체에 대해 진술되고 (Aristoteles, περὶ ἰδεῶν fr. 3; Ross, S. 123, 9-11), 다른 경우에는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해 진술될 따름이다. 우리가 처음에 "a is b" 의 "... is ..." 에 대한 두 번째 용법으로 a 와 b 사이의 수적 차이를 강조한 것이 정당했던 한에서; a is b 인 한에서, 그것은 b 와 일반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형상 b 는 a 에 비해 더 광의의 b 인 것이라 이야기된다. 
  "... is x" 가 다른 의미들에 대한 논의 없이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1. 형상의 본질을 서술하기 위해,
2. 한 개별자 X 의 속성을 서술하기 위해 (Ar. Top. 154a18, Met. 1059a10-14).

4. Die zweite Verwendung von "... ist ..."
4. "... is ..." 두 번째 용법
  Nehmen wir zunächst wieder die Fälle von "a ist b", in denen "a" für eine Form steht.
  In allen Fällen, wo "b" nicht das zum Ausdruck bringt, was notwendig zu a dazugehört, wird "... ist ..." in seiner zweiten Verwendung gebraucht.
  Das sind zunächst die Fälle, in denen ein Prädikat einer Form X nicht auf Grund der Tatsache zukommt, daß sie x ist, sondern auf Grund der Tatsache, daß sie Form ist.
  So ein Fall ist, um ein aristotelisches Beispiel zu benutzen: "der Mensch ist in Ruhe"; in Ruhe zu sein, ist aber kein Merkmal des Menschen, sondern kommt der Form Mensch nur qua Form, aber nicht qua Mensch zu (Top. 137b6ff., Top.148a14ff.).
  우선 다시 "a" 가 형상을 표시하는 "a is b" 의 사례들을 가정해 보자.
  "b" 가 a 에 필연적으로 속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는 모든 경우에 "... is ..." 는 그 두 번째 용법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형상 X 의 술어가 x 인 사태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그 술어가 형상인 사태에 근거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식 예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런 경우이다: "the Man is in rest"; to be in rest 는 인간의 어떤 특성도 아니고, 형상 인간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형상으로서 나타난다 (Top. 137b6ff., Top.148a14ff.).
  Bei "Bewegung ist verschieden von Ruhe" scheint der gleiche Fall vorzuliegen; denn nichts ist verschieden auf Grund seiner eigenen Natur (Soph. 255e4-6); Verschiedenheit ist also eine Beziehung zwischen Formen qua Formen. Im Gegensatz zum ersten Fall kommt sie aber Formen nicht einfach qua Formen, sondern nur qua Formen von etwas zu. Das gleiche gilt für Identität, Kontrarietät, Verträglichkeit.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 는 그와 같은 경우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본성에 근거하여서는 아무것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Soph. 255e4-6); 그러므로 다름은 형상들 사이의 형상들로서의 관계이다. 그러나 첫 경우와 반대로 그 형상들은 단지 형상들로서가 아니라, 바로 무언가에 대한 형상들로서 형상들이 된다. 동일, 모순, 양립가능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Etwas schwieriger ist die Frage, wie Prädikate zu klassifizieren sind, die aus der Definition von a für b ableitbar sind und insofern a qua a zukommen, von denen man aber dennoch unter Umständen nicht sagen würde, daß sie zum Begriff von a gehören. So folgt aus der Gleichseitigkeit eines Dreiecks seine Gleichwinkligkeit.
  Beim Genus schließlich, das der Form X qua x zukommt, liegt es mit Hinsicht auf Parm. 146b3-5 nahe, es als nicht strikt verschieden von - 34 - der Form zu betrachten. In diesem Fall läge also bereits eindeutig wieder die erste Verwendung von "... ist ..." vor.
  더 어려운 물음은 술어들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이다. 그 술어들이 a 에 대한 정의로부터 b 에 대해 서술가능하고 a 가 a 로서 등장하는 한에서, 허나 그 술어들에 대해 그럼에도 특정 조건에서  a 의 개념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을 그런 술어들을 말이다. 삼각형의 등변으로부터 그것의 등각이 그렇게 도출된다.
  끝으로 x 로서의 형상 X 에 속하는 유를 통해 Parm. 146b3-5 와 관련된 측면에서 시사되는 바, 그 유는 형상과 엄격하게 다르지는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경우 따라서 이미 "... is ..." 의 일차 용법이 놓여 있을 것이다.  
  Auf eine solche Unterscheidung von Prädikaten, die einer Form X qua Form und solchen, die ihr qua x zukommen, macht Platon vielleicht 256b6-7 aufmerksam. Wenn man die sehr entschiedenen Bemerkungen in 252d9-10 und 254d7-8 vergleicht, ist jedenfalls die vorsichtige Formulierung in 256b6-7 merkwürdig: "οὐκοῦν κἂν εἴ πῃ μετελάμβανεν αὐτὴ κίνησις στάσεως, οὐδὲν ἂν ἄτοπον ἦν στάσιμον αὐτὴν προσαγορεύειν;" Bewegung ist qua Bewegung sicher nicht in Ruhe, qua Form aber ("πῃ") hat sie - wie alle Formen - an der Ruhe Anteil; und es fällt schwer zu glauben, daß Platon, der immer auf die Unveränderlichkeit der Formen hinweist und der 249b8-c5 auf Grund eben dieser Unveränderlichkeit gezeigt hat, daß es Ruhe gibt, im Fall von Bewegung vergessen haben sollte, daß auch Bewegung, qua Form, in Ruhe sein muß. Wenn erst einmal klargestellt ist, daß Bewegung nicht in Ruhe ist, dann bereitet die Annahme, daß Bewegung in Ruhe ist, gar keine Schwierigkeiten; und man sieht nicht, warum Platon eine solche Annahme vermeiden sollte. Daß aber diese Unterscheidung von Prädikaten von Formen X qua Form und qua x in der Akademie gebräuchlich gewesen ist, zeigt die gleiche Unterscheidung von Prädikaten in der aristotelischen Topik 137b7ff.
  형상으로서의 형상 X 에 속하는 그리고 x 로서의 형상 X 에 속하는 술어들에 대한 그러한 구분을 고려하여 플라톤은 아마도 256b6-7 을 구성하였을 것이다. 252d9-10 과 254d7-8 에서의 매우 명시적인 언급들을 비교할 경우, 256b6-7 의 신중한 정식화는 어찌됐든 흥미로운 것이다: "οὐκοῦν κἂν εἴ πῃ μετελάμβανεν αὐτὴ κίνησις στάσεως, οὐδὲν ἂν ἄτοπον ἦν στάσιμον αὐτὴν προσαγορεύειν;(그렇다면 만일 어떤 식으로<어떤 측면에서> 운동 자체가 정지에 참여하였더라면, 그것을 정지한 것이라 부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운동으로서의 운동은 확실히 정지 중에 있지 않지만, 형상으로서 ("πῃ") - 모든 형상들처럼 - 정지에 참여한다; 그리고 항상 형상들의 불변성을 시사하고 바로 이러한 불변성에 근거하여 249b8-c5  정지가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 플라톤이 운동의 경우에서 운동 역시 형상으로서 정지해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잊었으리라는 것을 믿기는 어렵다. 일단 한 번 운동이 정지 중에 있지 않다는 것이 명확해지면, 운동이 정지 중에 있다는 가정은 아무런 문제도 전혀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플라톤이 왜 그런 가정을 피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형상으로서의 형상 X 의 그리고 x 로서의 형상 X 의 술어들에 대한 이런 구분은 아카데미학파에서 통용되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피카』 137b7 이하 술어들에 대한 유사한 구분이 보여준다.
  Die Anwendung dieser Unterscheidung von zwei Verwendungen von "... ist ..." auf Sätze über Einzeldinge ist wesentlich einfacher. Was immer von Einzeldingen ausgesagt wird, ist verschieden von dem, wovon es ausgesagt wird. Die Einzeldinge sind das, was sie sind, in bezug auf die Formen (deswegen auch "τὰ πρὸς τὰ εἴδη" als Ausdruck für Einzeldinge: Alex. in Met. 56, 1-2; 58, 12-13; 97, 10-12; 123, 10-11; zit. bei Cherniss A C P A, S. 283 n 191; vgl. auch Asclep. in Met. 81, 33; Albinus IX, S. 163; [Hermann]).
  "... is ..." 의 두 용법에 대한 이러한 구분을 개별자들에 대한 문장들에 적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더 쉽다. 개별자들에 대해 언제나 진술되는 바의 것은 그것이 그에 대해 진술되는 그것과 다르다. 개별자들은 형상들과 관련하여 그것들인 바의 것이다(따라서 개별자들에 대한 표현으로서 "τὰ πρὸς τὰ εἴδη" : Alex. in Met. 56, 1-2; 58, 12-13; 97, 10-12; 123, 10-11; zit. bei Cherniss A C P A, S. 283 n 191; vgl. auch Asclep. in Met. 81, 33; Albinus IX, S. 163; [Hermann]).
  Das heißt natürlich nicht, daß nicht bestimmte Formen y gegenüber anderen Formen in bezug auf bestimmte Individuen x in der Weise ausgezeichnet wären, daß x notwendig y ist. In Sätzen über Individuen läßt sich also die aristotelische Unterscheidung von "... ist καθ᾿ αὑτό y" und "... ist ἕτερόν τι ὄν y" innerhalb der zweiten Verwendung von "... ist ..." ziehen.
  불특정 형상들 y 가 다른 형상들에 반대로 특정 개별자들 x 와 관련하여 x is necessarily y 인 방식으로 구별되리란 말은 자연스럽지 않다. 개별자들에 대한 문장들에서 "... is ..." 의 두 번째 용법 내에서 "... is καθ᾿ αὑτό y" 와 "... is ἕτερόν τι ὄν y" 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 구분이 성립한다.
  Diese Unterscheidung innerhalb der Verwendung von "... ist2 ..." scheint aber bei Platon nirgends dahingehend ausgebaut zu sein, daß - 35 - man mit ihrer Hilfe zwischen einfacher Veränderung und Werden und Vergehen, zwischen Gegenständen und Eigenschaften hätte unterscheiden können.
  Ansätze zu einer solchen Unterscheidung von zwei Verwendungen von "... ist2 ..." finden sich zum Beispiel im Phaedo 102b-c; an dieser Stelle wird eine Unterscheidung impliziert zwischen den Kriterien, die einen zur Verwendung eines Eigennamens, "Sokrates" oder "Simmias", berechtigen, und den Eigenschaften, die der Träger des Eigennamens darüber hinaus noch hat, und das in einem Zusammenhang, in dem von Veränderung und Vergehen die Rede ist (vgl. auch Phdo. 103d2ff.).
  Aus der Tatsache, daß es sich bei "a ist b", wenn "a" ein Einzelding bezeichnet, um die zweite Verwendung von "... ist ..." handelt, ergibt sich eine neue Interpretation der Seinsabhängigkeit von Einzeldingen gegenüber Formen.
  Einzeldinge sind zwar nun ohne Einschränkung wirklich seiend, sie sind auch wirklich x und nicht nur in irgendeiner Weise so ähnlich wie die Form X, aber es gäbe keine Einzeldinge, wenn es keine Formen gäbe, weil es keine bestimmten Einzeldinge gäbe, wenn wir nicht jeweils die entsprechenden Formen hätten. Die Formen sind dagegen unabhängig von den entsprechenden Einzeldingen.
  "... is2 ..." 용법 내에서 이런 구분은 그러나 플라톤에게서는 어디에서도 그 구분의 도움으로 변화와 생성과 소멸 사이를, 대상들과 속성들 사이를 구분할 수 있었을 쪽으로 결론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 is2 ..." 의 두 가지 용법에 대한 그런 구분을 향한 초기형태들은 그 예시가 『파이돈』 102b-c 에서 발견된다;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 나 "심미아스" 같은 고유명사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기준들과 고유명사의 담지자가 그 이상으로 추가해 가지는 속성들 사이의 구분이 암시되고, 변화와 소멸에 대해 그 안에서 논해지는 관계 내의 고유명사가 암시된다. (Phdo. 103d2ff.)
  "a is b" 에서 "a" 가 개별자를 지시할 떄 "... is ..." 의 두 번째 용법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로부터, 형상들에 대한 개별자들의 존재의존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사된다.
  현실적으로 x 이고 단지 어떤 식으로든지 형상 X 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번 부합하는 형상들을 취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규정된 개별자들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형상도 없을 경우 아무런 개별자도 없을 것인 그런 개별자들은 물론 제한 없이 현실적으로 being 이다. 반대로 형상들은 부합하는 개별자들에 의존적이지 않다.

5. Eine Unterscheidung von Formen und Einzeldingen mit Hilfe der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5. "... is ..." 두 용법을 통한 형상들과 개별자들 사이의 구분
  Wir erhalten keine vollständige Disjunktion von ὄντα-Formen einerseits und Einzeldingen andererseits -, wenn wir zwei Klassen von Gegenständen bilden, von denen die Elemente der ersten Klasse in bezug auf sie selbst, die Elemente der zweiten Klasse in bezug auf etwas anderes seiend genannt werden. Denn da "... ist ..." in beiden Verwendungen von Formen ausgesagt werden kann, bildeten die Elemente der ersten Klasse nur eine Untermenge der Elemente der zweiten Klasse. Die zweite Klasse umfaßte nämlich sowohl die Menge der Formen als auch die der Einzeldinge, die erste Klasse aber nur die Menge der Formen.
  우리는 한편으로 ὄντα-형상들과 다른 한편으로 개별자들에 대한 아무런 완전한 선언지도 확보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대상들에 대해 두 부류를, 그것들에 대해 첫 번째 부류의 원소들이 그 자체와 관련하여, 두 번째 부류의 원소들이 다른 무언가와 관련하여 being 이라 불리는 두 부류를 구성할 경우 그러하다. 왜냐하면 "... is ..." 는 두 가지 방식으로 형상들에 대해 진술될 수 있기에, 첫 번째 부류의 원소들이 두 번째 부류의 원소들의 하위부류만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류는 말하자면 형상들의 집단뿐만 아니라 개별자들의 집단 또한 포함하지만, 첫 번째 부류는 단지 형상들의 집단만을 포함한다.
  Eine solche vollständige Einteilung von Gegenständen in Formen einerseits und Einzeldinge andererseits läßt sich jedoch leicht erreichen, wenn man die Zugehörigkeit zur zweiten Klasse auf Dinge beschränkt, die immer nur in bezug auf anderes seiend genannt werden. Damit scheiden Formen als Elemente der zweiten Klasse aus, und Einzeldinge bleiben übrig. Für die Elemente der ersten Klasse wird dann gefordert, daß sie in bezug auf sich selbst seiend genannt werden, so daß alle Formen und nur Formen erfaßt werden, womit - 36 - aber nicht ausgeschlossen ist, daß Formen auch in bezug auf etwas anderes seiend genannt werden können.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형상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자들 사이에서 대상들에 대한 그런 완전한 분류는 두 번째 부류에의 소속이 언제나 다른 것과 관련하여서만 being 이라 불리는 사물들에 제한된다면 쉽사리 성취된다. 그로써 형상들은 두 번째 부류의 원소들로 할당되고, 개별자들은 여집합으로 남는다. 첫 번째 부류의 원소들에 대해서 그리하여 그것들이 그 자체에 관련하여 being 이라 불린다고, 그래서 모든 형상들만이 포함된다고, 하지만 그로써 형상들이 다른 무언가에 관련하여 being 이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이 배제되진 않는다고 주장된다.
  Es ist offensichtlich genau diese vollständige Einteilung, die Platon 255c12-13 im Auge hat.
  Das könnte einen dazu verleiten, das "ἀεὶ" in 255c13 anders zu verstehen, als es gewöhnlich geschieht. Meist wird nämlich dieses "ἀεὶ" auf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so u.a. von Schleiermacher, Taylor, Diès) bezogen und so interpretiert, daß es dem "ἀεὶ" in 255d1 entspricht. Von diesem "ἀεὶ" in 255d1 haben wir aber gesehen, daß es im Gegensatz zu "τὰ μὲν ... τὰ δὲ" in 255c12-13 steht und so seine Erklärung findet.
  그것은 플라톤이 255c12-13 에서 염두에 둔 이러한 완전한 분할도 분명히 마찬가지이다.
  255c13 의 "ἀεὶ" 를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다른 식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경우 (Schleiermacher, Taylor, Diès 를 포함하여) "ἀεὶ" 는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과 관련되고 그것이 255d1 의 "ἀεὶ" 와 같다고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255d1 의 "ἀεὶ" 에 대해 우리는 "τὰ μὲν ... τὰ δὲ" 와 반대이고 그렇게 그것에 대한 설명을 찾았음을 안다.
  Cornford freilich bezieht das "ἀεὶ" anders. Er übersetzt:
"... some are always spoken of as being what they are just in themselves, others as being what they are with reference to other things."
  Offensichtlich bezieht er das "ἀεὶ" auf beide Glieder, "τὰ μὲν ..." und "τὰ δὲ ...". Das aber ist auch sachlich nicht richtig. Denn das Seiende ist sowohl ein καθ᾿ αὑτὸ als auch ein πρὸς ἄλλο λεγόμενον, fände also keinen Platz in dieser Disjunktion. Und faßt man "some ...... others ..." nicht als vollständige Disjunktion auf, wie die Formulierung nahelegt, dann verstößt man gegen den Sprachgebrauch von "τὰ μὲν ... τὰ δὲ". Cornfords Übersetzung liegt die falsche Interpretation der Stelle zugrunde, die wir bereits S. 25ff. diskutiert haben.
  그렇지만 콘포드는 그 "ἀεὶ" 를 다른 식으로 이끌어낸다. 그는 이렇게 번역한다:
"... 일부는 언제나 바로 그 자체로 그것들인 바의 being으로 이야기되고, 다른 것들은 여타의 것들과 관련하여 그것들인 바의 being으로 이야기된다."
  명백히 그는 "τὰ μὲν ..." 과 "τὰ δὲ ..." 두 분지에 그 "ἀεὶ" 를 적용시킨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the Being 은 καθ᾿ αὑτὸ 뿐만 아니라 πρὸς ἄλλο λεγόμενον 이기도 하며, 그러므로 이러한 선언지의 자리는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는 ...... 다른 것들은 ......" 을 그 정식화가 제안하는 것처럼 완전한 선언지로 이해하지 않고, 그리하여 "τὰ μὲν ... τὰ δὲ" 의 언어 사용과 반대가 된다. 콘포드는 해당 장에 대한 우리가 25쪽 이하에서 이미 논의한 잘못된 해석을 번역의 근거로 둔다.
  Auf Grund unserer Interpretation könnte man dagegen meinen, daß sich "ἀεὶ" zwar auf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bezieht, aber die Funktion hat, eben die vollständige Disjunktion von Gegenständen im oben beschriebenen Sinn zu erreichen, die ohne das "ἀεὶ" - wie aus dem Beispiel mit den Gegensätzen deutlich wird - nicht gegeben wäre.
  Diese Interpretation wäre inhaltlich also die bei weitem befriedigendste; sie hat aber leider - wie die gewöhnliche Interpretation - den Nachteil, daß sie eine sehr unbeholfene Stellung von "ἀεὶ" voraussetzt, die man Platon wird kaum zumuten wollen.
  우리의 해석을 근거로 이에 반대하여 "ἀεὶ" 자체가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에 관련되지만, 위에서 서술된 의미로 대상들에 대한 완전한 선언지를 성취하는, "ἀεὶ" 없이는 성립하지 않을 - 반대들을 예시로 하여 명백해졌듯 - 기능을 지닌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그러므로 내용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  통상의 해석처럼 - , 플라톤에게 기대하긴 어려울 "ἀεὶ" 에 대한 매우 어설픈 태도를 상정한다는 결점을 지닌다.
  Man erwartete nämlich bei dieser Interpretation nicht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 sondern etwa "... τὰ δὲ ἀεὶ πρὸς ἄλλα λέγεσθαι". So wird man sich wohl aus sprachlichen Gründen doch dazu entschließen, "ἀεὶ" hier so zu konstruieren, wie es bei Platon häufig im Zusammenhang mit "λέγεσθαι" (vgl. Phil. 16c: "φήμην ... ὡς ἐξ ἑνὸς μὲν καὶ πολλῶν ὄντων τῶν ἀεὶ λεγομένων εἶναι" ; Phil. 15c; Euthyd. 272b), aber auch in anderen Zusammenhängen gebraucht wird (vgl. Phil. 15e; Charm. 164e; Gorg. 464d).
  다시 말해 이러한 해석에 기대되는 바는 "τὰ δὲ πρὸς ἄλλα ἀεὶ λέγεσθαι" 가 아니라, "... τὰ δὲ ἀεὶ πρὸς ἄλλα λέγεσθαι" 같은 어떤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언어적 근거들을 통해 여기에서 "ἀεὶ" 가, 플라톤에 의해 "λέγεσθαι" 와 결부되지만(vgl. Phil. 16c: "φήμην ... ὡς ἐξ ἑνὸς μὲν καὶ πολλῶν ὄντων τῶν ἀεὶ λεγομένων εἶναι" ; Phil. 15c; Euthyd. 272b), 또한 또 다른 관계에서도 사용되는 것처럼(vgl. Phil. 15e; Charm. 164e; Gorg. 464d) 구성하는 것이라고 결정할 것이다.
  Dann würde der relevante Teil des Satzes wie folgt wiedergegeben werden können:
"was seiend genannt wird, wird entweder mit Bezug auf sich selbst oder mit Bezug auf anderes so genannt".
- 37 - Damit hätten wir eine hinreichend genaue Interpretation von 255c12-13 und zugleich eine gewisse Vorstellung von den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die sich im folgenden verschärfen wird, wenn wir den Zusammenhang zwischen diesen beiden Verwendungen von "... ist ..." und dem identifizierenden und dem existentiellen "... ist" untersuchen.
  따라서 그 문장에 관련된 부분은 아래와 같이 재진술될 수 있을 것이다:
"being 이라 불리는 것은 그 자체와 관련하여서나 혹은 여타의 것과 관련하여 그렇게 불린다".
그로써 우리는 255c12-13 에 대한 충분히 정확한 해석과 동시에 "... is ..." 의 두 용법에 대한 특정한 표상, 우리가 "... is ..." 의 이러한 용법쌍과  동일성 "... is" 와 존재사 "... is" 사이의 관계를 검토한다면, 이하에서 엄격해질 그러한 표상 또한 얻을 것이다.

-蟲-


1. 여전히 나란 새끼는 흥미본위일 뿐인지도. 정보와 논리로 날 찍어 누르는 사람들이 좋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게 좋다. 좀 더 바라자면, 가야하고 못 가고 있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기까지 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다. 플라톤이 좋은 건 내가 좋음의 이데아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것에 못 미치는 모든 것들을 그 핑계로 보류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윤리와 도덕에 신뢰를 바치는 짓은 못 해먹겠단 거다. 건별로 상황마다 사력을 다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진 못하더라도 섣부른 신념의 노예 같은 건 성격상 영 내키질 않아서, 다만 더 옳은 길을 끊임없이 바랄 따름이다. 경건을 논하던 소크라테스는 "댁 마음대로 하쇼, 당신 좋을대로 답해 주겠소." 라고 비아냥거리는 에우튀프론에게 이리 말했다. "진실이 아니라면 내겐 전혀 즐거울 게 없소."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는 아무도 없다." 라는 신탁을 두고 아폴론이 틀린 거 아니냐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증명하겠노라고 당대의 식자들을 찾아 다녔던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면, 사실은 좀 부러운 마음도 없잖다. 그는 아마 궁금해 미치겠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알고 싶어 죽겠고, 조금씩이나마 뭔가 알아가는 듯한 그 간질간질한 것이 좋아 죽겠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뭐 시덥잖은 것들이 못 버티고 나가 떨어져 결국 재미없게 죽었지만, 영혼을 위한 최고의 치유라 그가 믿었던 철학을 하다가 그 덕에 한 세상 신나게 꼴리는대로 살다 가는 마당에 '덕분에 즐거웠수다.' 하며 닭 한 마리까지 되갚아 바쳤으니 그야말로 아쉬울 것 없는 인생 아니었겠나. 뭐 그거야 소크라테스님씩이나 되셨으니 그리 사셨던 게고, 나는 어쩌나, 시정잡배개쓰레기로 굴러먹다 뒈지게 생겼는데. 죽기 직전에 폰 쓸 힘이 남아 있다면 국경없는의사회에 반반무많이라도 배달시키고 뒈져야 하겠다. 아, 됐고, 학위 좀. 

2. 나는 상식 선을 확보하고 그 앞으로 더 나아가 논증이 오가는 상황 속 그런 페미니즘을 보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제3세계 반도 후미진 구석탱이에 사내새끼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 논의의 상대라는 자격 자체를 상실해 버린 것만 같다. 뭘 묻고 따지기에 앞서 그냥 하수구 시궁진창에서 쓰레기 줍기부터 시작해야 할 터인데, 여태까지도 이미 알면서 비겁했고 앞으로도 이 안락하고 쩐내 가득한 '자지의 왕국'에서 무슨 엄청난 내란을 일으킬 일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지금 대학원 연구실 같은 공동연구실 구석 한 켠에 골골대며 논문이나 읽고 번역이나 하고 첨삭 몇 줄 끄적거리는 매일을 보내다 볕 좋은 날 조용히 뒈지는 정도는 꿈꿔도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어쨌든 너무도 평온하고 안락한 삶의 결말이 되어 버렸다. 내가 배운 학문이 부정의를 묵인하거나 편드는 일을 긍정하지 않는 한에야, 지금도 어디서 죽어 나가고 있는, 살아남으면 또 살아남았다고 손가락질을 받고 내쫓기고 인두로 이마가 지져지는, 그런 사람들을 두고 저런 결말이 내게 거리낌 없이 흡족할 수야 있겠나. 그러나, 여전히, 내가 선 곳이 어디고 디딜 곳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아, 저 사람들이 내게 욕을 하고 비난을 하고 책임을 묻는다면 처벌을 받는 쪽으로라도 갈피가 잡힐 것이나, 아마 밖에서 보기엔 나 역시 언제 염산을 뿌리고 칼을 휘두를지 모를 의심스럽고 역겨운 무명의 시헤한남십치에 불과할 테니, 모르겠는 것이다. 글쎄, 내가 페미니스트이길 작정한다면 달라질까? 난 그런 확신과 용기가 무척이나 의심스러워서 도무지 그걸 뒤집어 쓰고 다닐 자신이 없다. 제도의 개선에 목소리와 머릿수와 표가 필요하다면 가져다 바칠 수 있고(특히 이번 기회에 진보연하는 가부장십치들의 팬티 내리기는 아주 잘 구경하였다. 다들 안녕. 니들한테 줄 표는 없다.), 자리마다 맞거나 죽을 위험이 덜한 내가 자지들에게 자지대 자지로 그러지들 좀 맙시다, 뭐 그정도 겐세이는 놓을 수 있고, 한때 푹 절어 살던 개저씨 쓰레기 농담도 많이 내려 놓았으니 조금씩 나아질지도 모르겠고. 어느 사이에 자연과학도 사회과학도 그 안의 천 갈래 만 갈래 지금의 진짜 현실을 논하는 온갖 눈들과 그림들도 모두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게 되어 버렸다. 껴서 주워듣고 싶고 이걸 알아라 저걸 배워라 그런 얘기들 들으며 버러지 취급을 받고 싶다. 먹물 찌질이는 이럴 때 개론서를 읽어야 하는 건가 하며 쿰척거리는 것이다. 근데, 여성 성노동자, 명예남성, '현모양처' 는 지금 논란 속에서 어떤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감을 못 잡겠다. 나는 그들이, 만약 어떤 연대란 것이 지금 필요하다면, 그 연대에 포섭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막상 '당사자'들의 상황에서는 입장이 다양하겠고 그 결들을 내가 세심히 살피겠다 나댈 수 있는 입장은 못 되니. 그런데 생각할 수록 지금 내 태도는 아마도 여성혁명 같은 것이 일어나면 결국 단두대행을 피할 수 없겠지 싶다. 그저 날이 갈수록 이래저래 수치와 죄책만 늘어간다. 감히 미안함을 품을 자격조차 없이 이런저런 전선에서 패주하다가, 그렇게 썩어 간다. 캬, 쓰레기네.

-蟲-

 인용한 글은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씨의 페이스북 글 전문. 

"강남역 살인 사건. 범죄자에게 정신병이 있으니 여성 혐오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는 주장에 대해서...

 정신병에도 맥락이 있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는 많은 조현병 환자들이 환청을 호소하면서 중앙정보부가 나를 미행하고 도청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무렵 어떤 환자가 TV 뉴스 생방송 중 뛰어들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말을 외치기도 했다. 80년대 후반에는 사회적으로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면서 CIA가 환청의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도 생겼고 2000년대 이후 삼성의 지배력이 커지면서는 삼성이 소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운동을 한다고 정신질환에 걸리는 것은 아니고, 정신질환에 걸릴 사람이 학생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이 정신병이 생기면 그 증상에 정치적 내용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망상이란 자기의 사고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고 내부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정신병(이 경우 정신병은 현실에 대한 검증력이 떨어져 현실과 비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질병 상태, 대표적으로는 급성기의 조현병, 조울정신병을 의미한다)을 가진 사람이 사회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드러낸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적 문제의 리트머스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정말 그런지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신병의 증상은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이다.

 어제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여성이 번화가의 화장실에서 한 남성에 의해 칼에 찔려 죽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났고’ 그래서 죽였다는 말을 했다. 그 남자는 오랜 조현병의 치료력을 갖고 있고 현재는 치료를 중단한 상태다. 그가 지금 정신병적 급성 상태에 있는지는 나로서는 정보가 없어서 모르겠다.

 그가 현실적인 판단력을 잃고 심각한 공격적인 행동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그 행위가 모두 정신병 때문인 것은 아니다. 정신병을 가진 사람의 범죄율이 정신병이 없는 사람에 비해 낮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여기에 일부 정신병적 증상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으로 범죄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정신병적 증상을 갖고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신병을 가진 한 사람이지, 정신병 그 자체가 아니다. 한 사람으로서 그들은 다양한 기질과 성격, 성장배경, 문화, 생활 조건이 다르며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도 다양하다.

 문제는 그가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은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고 그것은 ‘여성혐오’다. 이것이 그의 망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망상은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다. 만약 우리 사회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고,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 남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에 비해서 특별히 남자들에게 더 기분나쁜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병을 갖고 있으며, 범죄를 저지른 그는 아마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소외감과 분노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소외감의 원인을 여성들의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찾고, 분노의 초점을 여성들에게 맞춘 것은 분명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우리 사회 내에서 최근 들어 뚜렷하게 늘어난 심리적 현상인 여성 혐오가 (만약 그에게 정신병적 망상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의 망상 속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성 혐오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망상을 갖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망상을 가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병적 증상은 맥락이 있다.

 결국 그가 정신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이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말할 근거일 수 없다. 오히려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 범죄의 이유로 ‘여자들의 무시’ 운운하는 상황이 여성 혐오 이슈를 우리가 중요한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은 분명한 여성 혐오 범죄다. 그가 정신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닌 것이 아니라 그가 정신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여성혐오 범죄인 것이다.

 한 가지 더. 또 상상해 보자. 만약 우리 사회가 여성이 남성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안전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누군가 이런 살인을 저지르고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지금과 같은 사회적 파장이 일어났을까? 수많은 여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분명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 그런 분들이 있더라도 그저 해프닝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이 큰 이슈가 된 이유는 한 범죄자의 말 때문이 아니다. 그 범죄가 일어난 우리 사회의 위험한 현실 때문이다. 강력 사건의 희생자 비율이 남성에 비해 여성이 8배가 넘는 통계로 알 수 있듯 여성들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여성 차별에 더해서 최근 잘못된 여성 혐오 의식으로 위험성은 더 커지고 있다. 여성 혐오 의식의 확산으로 범죄의 가해자들이 스스로를 정당하다고 여기니 범죄의 잔인성은 증가하며 모방 범죄도 늘어난다.

 이 문제로 불필요한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 노력이다. 여성 혐오 의식이 정신병의 증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면 그 심각성을 인정하고, 사회 전반에서 이런 의식이 자리잡지 못하도록 구조적 개혁을 하고 의식의 변화를 추구해야지 지금 뭐를 하고 있나 싶다. ‘정신병이 범죄의 원인이냐? 아니면 여혐이 원인이냐?’ 이런 수준 낮은 논쟁은 이젠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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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국가』 에서 그랬지. 말을 골라도 잘 달리는지 못 달리는지를 따지지 암수를 따지는 게 아니고, 사냥개를 골라도 암컷이든 수컷이든 사냥을 잘 하는 개를 고른다고, 사람도 성별이 아닌 능력과 적성에 따라 그에 합당한 교육을 받고 걸맞는 직책과 의무와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편견이란 거대한 파도를 넘어서서 이런 전제를 받아들여야 바람직한 사회를 구성할 수 있따고 말이야. 2천 년도 더 전에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게다가 이것도 남녀평등, 성평등이라 말하긴 부족하고 이 아자씨 여혐종자다. 적어도 오늘날 이 사회에서라면 저건 당연하고, 그냥 단순히 차이를 사상시켜 버리는 게 아니라 나아가 여러 다른 부분들을 그게 신체에 관련되든 사회에 관련되든 문화든 편견이든 여러 관점에서 그런 차이들을 조율하고 개선할 것, 보완할 것,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까지 왔어야 하는 거 아니냔 거다. 뭐 이렇게 말해봤자, 나같은 머가리 빻은 시헤한남십치가 단 한 번도 보장받지 않은 적 없는 공짜 권력과 온갖 특혜, 이걸 적극적으로 누리면 누릴 수록 남성집단에서 강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권위까지 심어주는 한국 남성의 편리를 다 내다 버릴 수 있을 리는 없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나는 여전히 밤거리를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고, 술이 떡이 되어 길바닥에 나자빠질 수 있고, 여관방, 화장실, 공중목욕탕 어디를 가든 훔쳐보는 시선이나 숨겨진 카메라 따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칼을 챙겨온 어떤 새끼가 숨어 있는 자리에 가더라도 나와 다른 남성들이 아니라 어떤 임의의 여성이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그걸 두려워할 이유조차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여성 혐오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망상을 갖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망상을 가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병적 증상은 맥락이 있다." 바로 그 맥락 안에서 동료 시민의 반수 가까이가 살해 당하고 폭력을 당하고 강간을 당하고 그런 여성혐오범죄를 목격하고 전해 들으며 점점 더 큰 공포를 느끼며, 피해를 당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비난을 당하고 폭력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위협을 받고 공포에 비명을 지른다는 이유로 갈등을 조장한다며 책임을 묻는 자들에게 둘러 싸이게 된다. 아주 오랜 시간 그래왔고 지금 그러하며 앞으로도 바뀌기 어려운 부조리인데, 이 부조리가 남성이 남성으로서 지니는 아무 근거없는 무자격의 특권 그 자체이다. 이 특권을 버리긴커녕, 이것이 다른 이들의 당연하고도 불가침한 권리를 박탈하였기에 자신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억울한 자신을 매도한다며 여성을 적으로 삼으려 들고 또 누군가는 연약한 여성을 지켜야 한다며 여성을 소유하려 들며, 또 누군가는 이 모든 문제의 직접적 피해 당사자인 여성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며 가르침을 전하려 안달을 한다. 뭐 이 모든 종류의 반응들을 싸잡아 욕할 단계에라도 왔는지도 의문스럽고, 나 자신이 페미니스트나 여성주의자를 자처한다면 정말 날 아는 모든 이가 비웃을 일이기도 하겠기에, 그래서 잘 모르겠다. 내 민증 뒷번호 앞자리가 바뀌지 않고, 내 겉모습이 바뀌지 않고, 내가 소속집단에서 지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전면에 나서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주장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선택지가 있기는 한지. 시헤한남십치인 나는 내가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건강한 신체도 매력적인 외모도 갖추고 있지 못하고 뛰어난 언변이나 포용력 넘치는 성격 역시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을 지니려 노력 또한 않고 있어서 연애시장에 진입조차 못한다는 것을, 그게 나 아닌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을 잠자코 인정하고 조용히 혼자 살다 뒈지는 정도의 선택 이외에는 달리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다. 아, 물론, 모든 조건을 애써 다 갖추더라도 상대(그게 누구든)가 날 선택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상대의 권한이고 자유일 따름이다. 음, 애초에 이 부분을 받아들이면 사는 게 훨씬 편한 것이기도 하고. 내가 사는 내내 저질러 왔던 온갖 언행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를 위선자로 부르고 가식을 떤다며 조롱을 하리라 예상하지만, 말했듯이 똥이 마려워도 참고 화장실에 가는 것은 위선이나 가식이라기 보다는 그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지금 이 상황은, 누군가 대로변에 똥을 싼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인 것 아닌가, 그것도 남성집단 내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못했을 비겁자가 한 여성을 단지 여성이란 이유로 칼로 난도질 해 살해한, 누가 봐도 끔찍한 여성혐오범죄 아닌가. 위선과 가식은 대환영이고, 거기까지 못 가더라도 최소한의 상식만이라도 지켜지길 바랄 따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蟲- 

P.S. 구조 자체가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안에서 남성으로서 상대적 이익을 취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고 억울하다는 말만 되풀이해봤자,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가해자다. 그냥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다른 남성들의 자각하지 못한 여성혐오부터 적극적인 여성혐오까지 지적하고 비판하고 언어적 혹은 물리적 폭력을 차단하는 정도의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여성을 대상으로 여성을 추앙하거나 여성을 지키거나 여성의 언행을 안전한(?) 방향으로 교정시키려 들거나 하지 말고 말이다. 이제까지 참았던 것이, 매우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어쨌든 표출되었으니, 여성들은 여성들 스스로 또 서로 지키고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이 사회의 부조리인 여성혐오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낼 것이고,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아마도 안전과 생존을 위해, 기존 질서에 편입되어 순응하고 이 질서를 옹호하는 여성들도 간혹 있을 것이나, 그들이 '생존을 위해' 그리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서로 싸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도 지껄이지 말고 남성은 잠자코 남성들끼리 치고 받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나. '여성 전용 주차장'을 보고 외국여성이 의아해 한다는 식의 사례들을 생각해 보면, 사실 지금 한국 수준에서는 산술적 평균조차 여성에게 보장해 주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겠고, 다시 말하는데 그런 건 진작에 해결이 났어야 할 '수준 낮은 논쟁'이다. 음, 무슨 얘길 더 하고 싶었느냐 하면, 이 구조 내에서 남성이라는 건 그 사실만으로도 여성에 대해 이미 가해자라는 것, 그리고 직접적인 신체적, 정신적 폭력의 잠재적 가해자란 건, 특정할 수 없는 가해자가 남성집단 내에 있다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특정할 수 없는 그 위험이 너무나도 큰 까닭에 여성이 남성 전체를 두려워하고 의심하더라도 그건 말하자면 정당방위라는 것, 그러니까 억울하면 색출해서 족쳐야 할 건 가해를 할 만한 새끼인 것이고, 남성집단이 그런 행동을 완벽히 억제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신뢰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리라는 것 정도이다. 설령 저 강남역 살인사건이 만에 하나 여성혐오로 인한 살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사건으로 일어난 여성들의 여론이 한국사회의 여성혐오, 여성들의 일상적 공포를 증명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기도 하고. 강남역 추모 쪽지 중에 그런 게 있더라, '언니는 꿈이 뭐였어요?' 였던가. 이런저런 억압으로 좌절된 이 나라 시민 절반의 꿈이 지금 보다 더 많이 실현되는 게, 이 나라에 나쁜 일일 리는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요즘은 집단 내 개체수도 극소수고 짝짓기 철에 간택만 바라며 빛 한 번 보러 나왔다 금새 뒈지는 수개미들이 한남보다 더 우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정자 보관소 냉자고에 정자나 기증하고 다들 자살하자 ㅇㅇ. 아니, 이 유전자는 이미 글렀는지도.

P.S.2. 평소 여성을 혐오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자와, 별 다른 생각은 없으나 여자를 약자로 간주하는 사회통념을 바탕으로 남성을 거르고 여성을 죽인 자 사이의 구분이라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봤다. 좀 더 나아가서, 이번 살인범 개인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과정에서 살인과 그의 마음 속 여성혐오를 관련지어 단순 살인보다 가중처벌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개인의 신념이 법에 의해 판단받을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야기도 보았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개인이 여성을 혐오하든 다른 어떤 소수집단을 혐오하든 나치를 추종하든 어떻든 그가 어떤 행동을 보이기 전까지는 그 '생각'만을 가지고 개인을 단죄할 수는 없는 게 오늘날 공유되는 인권으로서의 신념의 자유라는 가치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여성을 죽여야지' 라고 생각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는 무작위로 사람을 죽이려다 여성을 죽인 경우보다 더 강한 처벌을 가하는 것이 맞는 일로 보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여성혐오'라는 믿음을 잘못된, 악한 믿음으로 평가하면서 함의되는 일이 개인의 믿음에 대한 사회적 잣대를 통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여성혐오를 마음에 품어선 안 된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여러 사람들이 별 부담 없이 동의할 것이나, 특정 종교를 믿어서는 안 된다든가 어떤 사회, 경제, 문화의 한 특수한 지향을 마음 속에 품어서는 안 된다든가 하는 주장에 오늘날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성혐오가 옳다' 라는 믿음과 '민주주의가 옳다' 라는 믿음을 구분하는 건 전자가 나쁘고 후자가 좋다는 가치평가이다. 누가 무엇을 믿느냐는 문제에 대해 이러한 가치평가를 내려야, 그 다음 그 믿음과 특정 행위(이번 경우 '여성혐오'와 '여성살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따질 수 있고, 다시 이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처벌의 경중이 갈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강남역 여성혐오 여성살해를 두고 이것이 여성혐오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라 말하는 것은 분명하고도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여성을 살해한 범인이 여성혐오로 인해 살인을 했다면, 이 살인이 다른 살인에 비해 가중처벌을 받아야 하는지, 이건 어려운 일이라는 게 저 위에서 내가 봤다던 그 글이 하고자 하는 말인 듯하다. 

P.S.3. 여성을 살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과 여성을 통제하에 관리하며 특정 남성의 영역 내에서 보호받도록 만드는 일, 이 두 일이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여전히 이 두 부류를 구분해서 대응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한편에 남는다. 이를 테면 생리대를 면세품으로 제정하는 일이나 생리휴가의 보장성 강화에 대해서는 저 두 부류 모두 반대할 수 있을 듯하나, 안심귀가서비스 등의 여성 안전을 위한 정책에 대해서 혹은 택시 운전자의 신원 확인 강화랄지 뭐 그런 종류의 일들에는 소위 '진성 마초'라느니 '기사도'라느니 '신사' 따위의 말을 하는 부류는 공감하고 지금 대동단결하는 일베와 오유는 반대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이건 그들 말마따나 남성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것이니까). 여성전용주차장을 넓게 보면 여성혐오의 일환이나 좁게 보자면 여성혐오가 구조화된 사회에서 필요한 것, 이를 테면 사다리 같은 것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이려면 저 구분이 필요할 것이나, 그러한 단계적 해법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모두 묶어 전면적인 변화를 당장에 촉구해야 하는 것인지 남성인 나로서는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 어느 사이트에선가 여성을 대신해 무거운 짐을 들어주거나 하는 일을 이제부터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하던데, 주변 여성들 대부분이 조롱 섞인 환호를 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임시방편, 미봉책에 불과한 일들, 근본적으로는 여성혐오의 범주에 들어가는 여성의 대상화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이라 생각되는데, 구분이 어찌 되는지가 문제랄지. 다시, 남녀의 차이를 사상시키고 산술적 평등을 보장하는 것과 이 제거해 버린 차이를 다시 하나하나 고려하면서 형평성을 찾아 가는 것 사이의 구분이 문제라는 데에까지 갈 수도 있겠다. 플라톤을 통해서라면 아마 전자의 선까지 해석을 뽑아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후자는 고대 사상을 가지고서는 무리한 일이겠다. 거칠게 말하자면 앞의 것은 보편적 인권보장의 문제라면 뒤의 문제가 실제로 성평등이란 주제를 놓고 가치판단이 엇갈릴 수 있는 더 어려운 문제 아닐까 싶고, 여성혐오는 인권보장 차원에서도 부정할 수 있을 듯하고, 그럼 마초와 신사도 인권보장의 문제에서는 같이 갈 여지가 있겠으나, 그게 궁극의 목표가 아닌 바에야 구체적인 성평등의 문제에서 의견이 갈릴 사람들과의 오월동주라는 이야기 된다면, 다시 지금 여성들의 반응은 바로 그 임시방편도 여성혐오라는 얘기로 넘어가겠고, 쓰다보니 결국 내가 여성혐오를 들쭉날쭉하게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뭐 이쪽이야 이론으로나 실천으로나 주도해온 것도 여성이고 결과를 축적해온 것도 또한 여성이니, 귀를 막고 있지만 않는다면 다양한 방향성과 여러 논증들을 듣게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귀를 열어 둔다는 건, 결국 책이니 기사니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보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겠다.

『파이드로스』의 지상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이라든가 『파르메니데스』의 하나와 하나인 형상들과 하나인 것들의 그 모든 하나와 『소피스트』의 움직이면서 멈추어 있는 모든 것과 『국가』의 만물을 만물이게 하는 좋은 것 그 자체와 『티마이오스』의 가장 좋은 살아있는 세계의 본을 흔들리지 않고 가지런한 말로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것을 품고 있으나, 궁금해 하고 알아보고 찾아 다니는 것도 매 고비마다 자격과 허가가 필요하다. 우스갯소리로 석사과정에서 인간자격을 상실했다가 석사학위를 따면 그 자격을 회복하고 박사과정에 가면서 시민권을 포기했다가 박사학위를 받으면 시민으로 돌아오지만 그 때부터 비로소 잉여시민으로서 아무도 반기지 않는 비생산적 현학을 탐닉하다 굶어 죽는 것이 소위 '인문학도'의 인생역정 아니겠는가 하는 잡소리를 지껄였던 적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싶다. Owen이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Focal meaning'이란 것의 단초랄까 Being을 말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라든가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에서 중심으로부터 끝들로의 단일한 거리들과 그 전체와 부분들에 대한 플라톤의 이해라든가 뭐랄까 그런 걸 『소피스트』 독해에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은 분명 5~6년도 지났는데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Frede가 하는 얘기가 그런 얘기 아닌가 하는 지적을 받고 나니 한층 더 대단히도 지나보낸 시간이 허망하기만 하고 이제 난 그 때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쓰레기가 되었는가 싶다. Frede는 지중해에서 술 쳐먹고 헤엄치다 뒈졌다는데, 아, 당신은 좀 넘나 멋진것.

똥은 화장실에서 싸야 하는데, 똥이 마렵기 때문에 똥을 싸지르는 것은 정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백주대낮에 길바닥 한복판에서 설사똥을 싸지르는 쓰레기들이 넘실거리는 건 왜일까. 나는 똥이 마렵지만 어쨌든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는 똥을 싸지 않으려고 애쓰는 정도의 교양과 상식과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는데 '너는 왜 똥이 마려운가! 똥이 마렵다니 너는 노상방변의 혐의가 있구나! 개새끼구나! 쓰레기구나! 동네사람들, 이 새끼가 똥을 싸지르고 싶답니다, 글쎄! 세상에나, 말세네, 말세!'라고 꽥꽥거리는 미친 작자들은 또 왜 그러는 것인가. 남의 대장은 너의 것이 아니고 네 직장에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똥덩어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인정투쟁을 벌일 권리가 없는 것이라는, 이 간단한 이야기를 왜 그리도 복잡하게 비비 꼬아가며 서로 똥던지기에 열을 올리는 건가. 최소한의 위선과 가식조차 갖추지 못하는 짐승새끼들은 좀 도려내고 가도 괜찮지 않나 싶다. 『프로타고라스』에서 그 유명한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나오지 않나, 그 작자가 불도 주고 지혜(뭐 그냥 공학기술, 그러니까 우리 동료 철학도 여러분들께서는 플라톤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지금부터라도 기술을 배웁시다)도 주고, 그러고 나서도 짐승새끼들한테 쳐발리는 좆밥새끼들이라 제우스 킹왕짱께서 옜다, 먹고 떨어져라 하시며 모여 사는 데 필요한 기술, 정의와 수치란 걸 주시지 않았겠냐 말이지. 찌끄레기 쓰레기들 그래도 한 번 살아 보라고 도둑놈의 새끼 장물에 빈대붙은 싹통머리들한테 덤까지 쳐서 줬는데 그걸 발휘하지도 못하면, 어찌해야 하느냐 하면, 그런 건 살 가치가 없으니 죽여 버리라 하셨다 이거다. 사냥하는 짐승이 발톱과 이빨을 잃으면 뒈지듯이, 도망다니며 사는 짐승이 다리가 부러지면 역시나 뒈지듯이, 사람새끼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마땅한 일을 하려 애쓰지도 않으면 이 새끼 글러먹었구나 하고 모가지를 뎅겅 잘라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 아, 뭐, 그것도 번거롭고 그러하니 그냥 사회 밖으로 쪼까내서 뒈지든가 말든가, 우리는 우리끼리 하하호호 오손도손 잘 살아 보자는 거다. 방구석에서 좀비 내장 푸파팍 하는 거 보면서 낄낄항가항가하며 딸잡이를 하는 잉여새끼보다는 지하철에서 만만해 보이는 '여자'만 골라서 시비터는 노망난 개늙은이들을 죽이는 게 바람직하다는 뭐 그런 관점에서, 화장실에서 똥을 싸는 것은 정의이나 길바닥에 침을 뱉는 것은 악이다, 뭐 그런 이야기. 아, 누구 말대로 싹 다 그냥 통 속의 뇌였으면 참 좋을는지도 모를 일이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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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inai 용법들의 체계에서 표현되는 바로서의 Being 개념과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적 사유에서 현존 개념 사이의 대조를 통해 좀 더 가까이 가 보도록 하자. 그 체계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유형 6의 문장들에서("The gods are," "A centaur is not") 해당 동사의 사변적 용법에 아무런 특수한 역할도 할당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한 Being 논의에서 그런 문장들의 상대적으로 주변적 위치는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존재론적 사변에서 현존 개념이 전혀 명백히 정의되지 않은 역할을 그저 그렇게 수행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현존에 대한 물음들은 내가 나 자신의 현존을 확신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든 확신할 수 있는가, 물질적 대상들은 현존하는가, 나는 나 이외의 정신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과거는 실제인가, 이런 주제들에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지는, 데카르트에 의해 착수된 전통에서 갖는 그런 핵심적 중요성을 그리스 형이상학에서 갖추지 못한다. 
  어떻게 그 두 가지 전통 사이의 이런 극단적 차이를 설명할 것인가? 그 설명의 일부는 틀림없이 회의주의에 의해 수행된 역할 안에 놓인다. [32쪽] 회의주의의 극단적 도전은 -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무엇을 확실성을 갖고 알 수 있는가? - 고대 철학에서 역사적으로 이차적인 것이다. 이러한 회의적 물음이 일찍이 크세노파네스에 의해 유발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원후 3세기 두 번째 아카데미의 발흥 전까지, 고전적 사유의 주요 체계가 정식화되기 전에는, 그리스 철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진 못하였다. 반면, 그 회의주의의 도전과 그에 답하기 위해 요청된 인식론은 데카르트 자신의 사상에서도 그의 후속세대들의 사유에서도, 근대 철학에서 시작부터 중심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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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쪽] 그래서 문장 구문에 대한 플라톤의 발견은 동시에 어떠한 기술적 언어 사용에 대해서든 근본적인 조건들의 재인이었기도 하다. 주어와 술어라는 용어는 오직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서 출현하지만, 그 통찰은 똑같다. 문장의 주-술(명사-동사) 구조는 언어내에서 우리의 언어 사용을 우리가 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것에 연결시키는 지시와 기술의 의미론적 구조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나는 시작부터 서술 개념에서 이 근본적인 애매성에 주의를 요청해왔다. 한편으로는, 문장 내 요소들 사이의 구문론적 관계가, 다른 한편으로 문장 혹은 문장요소와 세계 내 그 지시체 사이의 의미론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to be의 통합된 체계 내에서 계사 구문의 중심 위치를 이해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서술의 의미론적 기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 계사 문장으로 향한다. Socrates is wise 혹은 Socrates is in the agora. 진술로서 평범하게 단언될 경우, 그런 문장은 세 가지 의미론적 관계를 포함한다. (1) 만일 그 문장이 참이라면, 주어는 반드시 현존해야만 하고, 즉, 그 문장이 그에 대한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2) 그 문장은 진리 주장을 구성하는데, 즉, 그것들이 그러하다고(그렇게 있다고, that they are) 그 문장이 말하는대로, 실제로 사물들이 그러하다고(that things are in fact) 주장한다. (3) 이 주장은 문제가 되는 서술이 (being wise, 혹은 being in the agora) 실제로 그 주어에 속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 부합하는 속성이 "발생한다"거나 이 특수한 경우에서 예화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러한 세 가지 의미론적 조건들은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서 einai의 세 가지 상이한 용법들에 부합한다. 1, 유형 4 문장들에서 주어에 대한 존재사적 용법 ("There is someone/no one who can escape death"); 2,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완결 문장에 대한 진리사적 구조 ("Things are as you say"); 그리고 3, 유형 5에서 술어들에 대한 발생의 동사 ("There will be vengeance from Orestes"). 일차 문장에서 서술의 신호로서 계사의 일상적 용법이 통상 이런 세 가지 의미론적 함축을 담기 때문에, 똑같은 동사가 또한 이차 문장의 세 유형들에서 이러한 의미론적 주장들을 명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그 기능인 문장 연산자로서도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명사-동사 문장들에서 술어는 to be 동사 없이 발생한다. 그 계사 동사는 오직 술어 표현이 형용사 또는 다른 명사적 형태일 때에만 요청된다. 그런 문장들에서 우리는 계사의 최소 역할을 (1) 인칭, 시제 따위에 대한 기호를 가져오는 동사적 형태로, (2) 서술 표현이나 동사 구를 [31쪽] 형성하기 위해 형용사와 결합하는, 그런 서술동사로서, 따라서 (3) 문장성, 즉 주-술 형태의 신호로 재인한다. 그것이 우리가 계사 동사를 서술의 신호로 기술할 때 의미하는 바 그 삼중의 기능이다. Socrates walks, Theaetetus sits 같은 더 단순한 형식의 문장들에서 이 기능은 동사만으로 수행된다. 계사로서, einai는 동사화, 동사 없는 술어로부터 동사 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기능한다. 더욱이, 이미 지적하였듯, 우회적 구조에서 einai는 그 언어의 어떤 동사든 대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Socrates is walking, Theaetetus is sitting (혹은 이것들의 그리스어 대응물들)를 명사-동사 문장의 변형들로 가진다. 전통 이론에서 계사 형태는 표준화되고 일반적인 동사라기 보다는 계사 동사가 서술의 신호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에 묶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to be가 광범위하고 다양한 문장 형식들에 대해 서술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재인하고 있다. 주요 서술 동사로서, einai는 서술 개념과 서술에 의해 내포되는 근본적인 의미론적 관계들 모두를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einai 용법들의 연결망은 서술, 진리, 현존 개념들을 함께 가져오는 더 거대한 개념적 구조를 표현하는 데에 기여한다. 이 세 가지 개념들 중 어느 하나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한 언급 없이 적절하게 해명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Being 개념을 표현하는 문장 형식들의 체계에 대한 개념적 통일성을 제공하는 것, 그것은 구문론과 의미론 양자 모두의 이러한 서술의 이중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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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내 생각에 그리스어 동사 be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그러나 이 사전적 설명은 Being 개념에의 탐구로서 존재론에 대한 그리스적 기획을 정당화할지도 모를 einai의 용법들의 통일성 개념을 정립시키는 데엔 아무 기여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존재사적 용법과 진리사적 용법에 대한 문장 구조와 의미론적 기능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가야만 하고, 어떻게 이것들이 내가 그 전 체계의 개념적 기초로 제안하는 해당 동사의 서술적 기능과 관련되는지 보아야만 한다.
  내 논증의 앞선 단계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리는 플라톤에 의해 『소피스트』에서 독자적으로 제안된 명사와 동사 사이의 구분에서, 그 가장 단순한 문장 구조에서 묘사된대로의 서술 개념을 가지고 시작했다. 플라톤은 명사와 동사를 구문론적으로, 문장 산출을 위해 결합하는 것으로도, 뿐만 아니라 또한 의미론적 기능들로, 동사는 행위(praxis)를 나타내고, 명사는 행위자(pratton) 혹은 사물(pragma)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정의하였다. 이러나 의미론적 차원은 플라톤의 간략한 설명에서 조심스럽게 전개되었다. 그의 예시 문장들은(Theaetetus sits, Theaetetus flies) 대화편 내에서 그 주어"에 대한(peri)" 것, 즉 테아이테토스 그 자신에 대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참인 문장은 그에 관련하여 "the things that are (ta onta)"을 말한다(263b). 이 논의에서 플라톤의 목표는 참인 진술과 거짓인 진술을 정의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방금 인용된 einai의 진리사적 용법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참과 거짓이라는 관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먼저 보편 문법의 기초 단어 부류로, 명사와 동사로 서술적 문장 구조의 분석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 형식적으로 말하자면, 명사와 동사는 그리스어에서 구별하기 쉽다 (설령, 우리가 아는 한, 누구 하나 앞서 그것들을 구분하는 일에 개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나 플라톤이 지적한 기능적 구별은 그리스어나 심지어 인도-유럽어의 특수성이 아니다. 사피어가 언급했듯, "반드시 무언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그러한 것이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선택되고 나면 이 담화의 주어에 대하여 무언가가 이야기되어야만 한다. ... 담화의 주어는 명사이다. ... 서술이라는 작업을 위해 확보되어 있는 형식은 ... 동사이다. ... 어떤 언어도 명사와 동사를 완전히 구별 못하는 경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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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에서 나는 einai에 대한 이런 처소격 해석을 통시적 신화로, 하나의 원초적 의미로부터 그 동사의 모든 용법들의 파생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그것을 언어상의 선사시대에 대한 신화적 해석으로서 거부하였다. 그렇지만, 통시적 주장 없이, 표현된 바로 그 형식에서 이 설명은 eiani의 모든 용법들에 있어서 그 동사의 직관적 의미에 대한 그럴 법한 사전적 기술을 제시한다. 그 동사의 기초적 의미는 "to be present, be available"이고, 인물들에 대해 전형적 용법 "to live, to dwell (somewhere)"이 함께 한다. 가장 공통적인 용법인 명사적 계사의 경우에서는 물론 장소적 의미가 가장 약하다. 그러나 때로 "mere copula"로 간주되는 이 경우에서조차, 우리는 고정-지속 상(相) 값에서 처소격 의미에 대한 일종의 유비를 발견한다. 그 유비는 그리스어 동사 to be의 경우에서 특히 강력하다. 그래서, 서술의 신호로서 그 구문적 역할에 더하여, 계사로서 einai는 여전히 그대로 존립함과 남아있음이라는 사전적 시사를 유지한다. 그것은 모든 계사 용법에 현존하는 고정-지속 값으로, 파르메니데스가 eternal being이란 개념으로 변형시킨 그것이다. "It never was nor will be, since it is all together now" (단편. 8, 5).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이 불변하는 Being은 여전히 처소격 용어로 표현된다: "equal to itself in every direction," "like the bulk of a rounded sphere, balanced equally from the center in every way" (단편. 8, 43과 49이하).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그 그리스어 동사의 모든 상과 어감을 다 함께 불변하는 사태 혹은 실체라는 단일한 개념, to eon, "that which is"로 끌고 옴으로써 Being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Einai의 처소격 값들에 대한 이 논의를 마치기에 앞서, 우리는 현존과 실재성이라는 발상들을 표현하는 데에 [29쪽] 장소 혹은 상황 개념의 그런 형이상학적 확장이 얼마나 널리 기여할 수 있는지, 비단 그리스어에서만이 아닌 관점에서 주목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리와 현존이라는 의미론적 관념들을 명시하기 위해 담론의 영역 안에 상정한다거나 정위시킨다거나 하는 은유들을 체계적으로 이용해왔다. 위치의 구상화라는 유사하게 비환원적 용법이 또 달리 아주 다른 하이데거식 현존 규정에서 Dasein, "being-there" 그리고 in-der-Welt-sein, "being-in-the-world"로 나타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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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inai의 다양한 용법들을 탐사해 보았기에,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용법들이 하나의 체계로서 함께 엮이는가 하는 물음을 고찰할 수 있다. 나는 이미 한 가지 대답을 구문론적 분석에 기초하여 지적하였으나, 이러한 노선을 진행시키기에 앞서 그 동사의 사전적 의미라는 주제에 대해 무엇이 이야기될 수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자.
  단일한 본뜻(Urbedeutung)이나 근본적 의미로부터 einai의 상이한 용법들을 도출해내려는 어떠한 시도든 그럴 법하게 유형1의 문장들에서 인물들에 대해 입증된 vitla-locative(生-處所格) 의미 "live, dwell"로부터 혹은 좀 더 일반적인 처소격 의미 "be present, be available, vorhanden sein"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유사-존재사적 의미가 처소격 보어를 가지는 einai의 모든 계사용법에 의해 자동적으로 내포된다. Socrates is here, Socrates is in the agora. 그것이 바로 그 동사의 절대, "존재사" 용법이 또한 이러한 처소격 구조에서 장소 부사를 무화시킨 결과로 보일 수 있기도 한 이유이다. Socrates is (somewhere). 이를 테면, 현존은 일반화되거나 부정형으로 남겨진 정위이다. 그 동사의 그런 처소-존재사적 의미는 "whatever is, is somewhere; what is nowhere is nothing"이란 오래된 그리스적 관념(고르기아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증언되는)에 부합한다. 따라서 플라톤이 형상들에 대해 비-공간적 실재성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시키길 바랐을 때, 그는 그것들을 noetos topos, 지성적 공간에 위치시킬 책임이 있었다(『국가』 6권, 508c1).
  이러한 장소적 의미가 인도-유럽어 어근 *es-의 가장 오래된 의미들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는 영어 동사 be의 "원초적인 의미"가 "어떤 특정된 장소에서 '장소를 점유함(to occupy a place)(즉, to sit, stand, lie 등)'"이며 그로부터 "to be somewhere, no matter where, to be in the universe or realm of fact, to have a place among existing things, to exist"라는 더 일반적인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고 제안한다.
  우리가 주목하였듯, "being-there" 혹은 "being-present"의 문자적 의미는 처소격 계사의 모든 용법에 함축되고, 처소-존재사격으로 분류되는 문장들에서 강화된다. 그것은 유형2와 3에 속하는 문장들 대부분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there is a city Ephyre in the corner of Argos." 다른 한편, einai의 모든 용법들에 가장 공통적인 경우에서, 서술적 형용사와 명사를 가지는 계사 구조, "being in a place"라는 문자적 의미는 완전히 부재한다. Socrates is wise, Socrates is a philosopher. 여전히, 명사적 계사의 경우에 우리가 취하는 것은 언어학자들이 einani의 상태적 측면으로 재인하는 [28쪽] 그런 의미에서의 처소격 의미에 대한 일종의 그림자이다. Become에 해당하는 동사들의 변화-운동의 측면에 반대되는, 상태 혹은 단계 동사로서 einai의 이 근본적인 사전적 값은 그리스어에서 특히나 강한데, 두 가지 독특한 형태학적 대비들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첫째로, 인도-유럽어 어근 *es로부터 파생된 다른 동사들과 달리, 그리스어 동사 einai는 지속어간을 활용 동안에 유지하고 다른 어근들로부터 나오는 어떠한 비-지속 형태나 부정과거 형태도 (영어 동사 is가 다른 *es- 이외의 어근들로부터 나오는 be와 was를 허용하고, 라틴어 esse가 fui/fuisse를 허용한 것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덧붙여, εἰμί be에 대한 상태-처소격 값은 근사-동음이의어 εἶμι "I go"와의 대조를 통해 강화된다. 두 고대적 -μι 동사들 사이의 이러한 대조는 εἰμί be 동사에 "to go"와 대조를 통해 "to stay"라는 의미를 함축시켜준다. einai에 대한 이런 수렴적인 일련의 언어적 특성들은 우리로 하여금 전통적 그리스 사유에서 왜 te be는 to be somewhere인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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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쪽] 이러한 사변적 문장 유형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유형 6에서 그 동사의 영향력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위해, 나는 부정이 먼저 나오는 것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현존에 대한 긍정은 이차적인 것으로, 회의적 의심에 대한 응답으로 보일 수 있다. "You say that Zeus does not exist? I say that he does!" 하지만 "Zeus is not?"이라고 말함으로써 의심하는 자가 의미한 바는 정확히 무엇인가? 만일 유형 4가 einai의 존재사적 용법에 대한 전형이라는 우리의 생각이 옳다면, einai의 의미론적 기능은 서술에 대한 주어를 상정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Zeus is를 부정한다는 것은 Zeus가 무엇이 되었든 참인 어느 술어에 대해서나 주어일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제우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단지 거짓일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거짓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에 대해 이야기할 그런 주어 따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의 현존 부정은 한 전통 전체에 대한 진리 부정이다. 시인들과 신학자들의 전통에 대해서 말이다. Zeus is not에 대한 이러한 독해는 우리가 유형 4의 구문에 따라 발견하길 기대할 관계사의 그 무화를 설명해준다. 유형 6 현존 부정에서는 조건들을 제시되는 주어에 의해 충족될 것으로 구체화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주어의 not-being이 그에 앞서 모든 술어의 무효화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유형 6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라면, 왜 그 동사의 표면적 구문이, 라일과 그 외의 사람들이 논평하듯, 체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절대 구조에서 einai는 일상적인 동사마냥 일차 술어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einai의 표면적 구문은 그 동사가 "be alive"나 "be present"를 의미하는 유형1에서와 마찬가지인 듯, 혹은 "there are no asses in all of Scythia, because of the cold" 같은 유형 2와 3에서 처소격 계사의 유사-존재사적 용법에서와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그 악명높은, existence는 술어인가 하는 물음을 불러 일으키는 이런 오해하기 쉬운 구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무엇보다 술어일 것이나, 일차 술어는 아닐 것이다. 유형 6에서 einai가 그 외양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일차 동사가 아니라는 점은 그것이 유형 1, 2, 3에서 똑같은 동사가 취하는 것처럼 시간이나 장소 보어를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러한 불일치에 주목하지 못함은, 문헌학자들이 그리스어에서 원초적인 (혹은 적어도 가장 알려진지 오래된) einai 용법으로 간주한 경우에서 유형1과 유형6을 결합시키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일부 철학자들로 하여금 방황하게 만들었다. 고전 문장 유형들에 대한 나의 일람표는 유형 6이 einai의 원초적 용법일 것 같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5세기 후기 이전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구문 분석은 유형 1의 경우로서 평범한 술어인 것과 상당히 다르게, 유형 6에서 einai는 유형 4의, 관계절에서 피연산 문장을 구체화하는, 존재사적 문장 연산자에 유비됨으로써 가장 잘 이해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유형 6을 그렇게나 어렵게 만드는 건 정확히 이 관계절의 부재이다.
  대신에, 우린 아마도 유형 6에서 einai의 절대 구조를 앞서 3절에서 제안되었던 것처럼 계싸 문장에서 술어를 무화시킨 결과로 해석할 것이다. X is는 X is something or other의 축약이다. 유형 6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 유형을 계사 구조에 더 밀접하게 묶어주지만 [27쪽] 그 강력한 존재사적 값은 그리 잘 설명해주지 못한다. 유형 6의 명백하게 존재사적인 영향력은 (being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유형 4의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부터의 도출로 더 잘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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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6은 후기 데카르트주의 철학의 특징인 존재사적 진술들의 종류에 고대 선례를 제공한다. (하이데거가 라이프니츠에게서 인용했던 급진적인 질문을 상기해 보라: What is there anything at all rather than nothing?) 그래서 유형 6은 유형 4에서 묘사되는 구어적 개념과 대비되는 더 사변적인 현존 개념을 표현하는 데에 기여한다. 유형 1~3에서의 einai의 내포된 존재사적 영향력과 달리, 유형 4의 문장들은 명시적으로 주어의 현존이나 부재와 관련되지만, 두 측면에서, 1) 가능한 주어들의 부류가 문맥에 의해 (위의 9절에서 인용된 우리의 첫 번째 예시로서의 문장, 그 협의회의 화자들) 혹은 그 문헌 자체에 의해서 (두 번째 예시에서 트로이인들, 특히 프리아모스의 아들들) 구체화되고, 2) 긍정된 것이나 부정된 것이 일반적으로 주어의 현존이 아니라 관계절에서 상술된, 특정 술어에 대한 주어라는 측면에서, 구체화된 현존과 관련된다는 것을 우린 보았다. 두 번째 구체화는 존재양화 ∃x(Fx)에서 구성요소 Fx에서 그 상관물을 갖는다. 두 경우 모두, 상정되는 것은 일반화된 주어가 아니라 한정된 술어들을 충족시키는 주어이다. 그렇지만, 첫 번째 구체화는 일상 회화와 논리학의 형식화된 담화 사이의 차이를 짚어낸다. 유형 4의 관용적 문장들에서 그 현존이 긍정되거나 부정되는 주어는 세계 내 어떤 객체도 아닌 확정된 유형의 어떤 것이다. 이야기하도록 구체화되는 개인, 트로이 전사이다. 이런 문장들은 불특정의 현존, 아무것도 아라기 보단 어쨌든 무언가인 바의 것을 다루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신이 현존하는지, 혹은 외부 세계의 현존을 논의할 경우처럼), 오히려 구체화되거나 문맥적인 현존, 한정된 맥락에서 (협의회나 전장) 구체화된 종류의 것의 (화자나 전사) 현존을 다룬다. 사변적인 유형 6에서, 주어에 대한 종류상의 구체화는 유지되지만 (신이나 켄타우로스), 맥락상의 제한과 구체적 술어는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문장 유형의 구문은 투명하지 않다. einai의 내포된 존재사적 영향력은 유형 4의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를 상기시키지만, 유형 6에서 우리는 아무런 피연산 문장도 갖지 않는다. 아마도 유형 6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는 어떤 임의의 술어에 대해서든 그 주어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유형 4에 대하여 einai의 주어에 종류적 제한은 견지하지만 (예를 들어 신들이나 켄타우로스들) 관계절을 제거함으로써 술어들에 대한 어떠한 구체화도 삭제하는 일반화로 이해하는 것이다. 유형 6에서 einai의 "절대" 구문, 이 경우 서술보어에 의해서든 관계절에 의해서든 제한받지 않은 구문에, 주어에 대한 현존의 마찬가지로 구체화되지 않은 긍정이나 부정이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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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세 경우에서 그 동사의 영향력을 구별하도록 허용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왜 진리사적 용법에서는 "is the case"로, 유형 4에서는 "there is" 혹은 "exists"로, 유형 5에서는 "occurs," "take palce"로 einai를 번역하는지 설명하는 일을 허용하는 것이 바로 문장 연산자로서 einai와 그 기저에 놓이는 피연산 문장 사이의 다양한 관계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에 주목하도록 하자. 이러한 것들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번역과 구문론적 분석에 기초하여 만든 구분들이다. 그리스어 화자에게 이것들은 동일한 동사, 일상의 계사 문장들에서 나타나는 바로 그 똑같은 동사의 단순한 세 가지 용법들일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어 화자는 진리사적 용법을 존재사적 용법으로부터 구별하려 하지도, 일상적 계사로부터 구별해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einiai의 상이한 구문론적 용법들 사이의 어휘적 일치의 한 가지 근본적 귀결은 그리스에서 사유하는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일련의 사건이나 사태들로부터 실체들을 구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리란 점이다. 그들이 ta onta, "beings" 혹은 "the things that are"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아마도 개별자들 혹은 자연종들, 일식이나 달의 위상 같은 천문학적 사건들, 혹은 더욱 일반화하여 사실들과 세계 내의 사실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의 현존을 지시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서는 꽤나 당황스러운 어떤 그리스 존재론적 논의들의 논리를 만든다. 우리의 번역과 분석은 사물, 사건, 그리고 사태 사이의 구분을 당연시한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그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구분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선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다루는 한, 그건 늘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인 것은 아니다.

11. 내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것은 존재사적 유형 6에 대한 논의이다. 그것은 아무런 처소격 보어나 명사적 보어도 없이 einai가 "절대적으로" 이해되는 경우의, 개별자들과 사물들의 종류들에 대한 현존의 단적인(unqualified) 선언이나 부정이다. Zeus is not. The gods are. Centaurs are not. 어떤 서술적 보어도 부재함은 einai의 이러한 용법을 근대의 동사 to exist와 유사하게 만든다. 나는 호메로스에게서는 이 문장 유형의 어떠한 사례도 발견하지 못한다. 유형 6은 그리스 문학에서 오직 [25쪽] 소피스트 시대의, 기원전 5세기 후반기 그리스에서의 신학적 회의주의의 발생과 더불어서만 나타난다. 어쨌든 그리스에서 뭔가 "exist" 같은 것을 의미하는 이러한 einai 용법은 신학적 사변의 분위기와 전통적 믿음의 대상들에 관련한 의심의 태도를 전제한다. (성경 구절에 표현된 "우매한 자들은 내심으로 '신은 없다' 말하였다." 같은 그런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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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4는 우리가 einai의 존재사 용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일람표 역할을 할 수 있다.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서, 그 동사는 여기에서 기능을 진리사적 구조에서 einai의 용법과 공유한다. 우리가 보았듯, 두 문장 유형 모두에서 einai는 언어외적 지시를, 문장의 주어에 대해서든 (유형 4에서) 혹은 문장 전체에 대해서든 (진리사의 경우), 명시화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리고 각 경우에서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는 오직 두 가지 값(esti와 ouk esti, 긍정과 부정)을 가지는데, 피연산 문장의 기술 내용을 보증하거나 거부한다. 하지만 이 문장 형식들 사이의 구문론적 차이는 현존과 진리 사이의, 그 동사의 존재사적 용법과 진리사적 용법 사이의 구별에 결정적이다. 유형 4에서 einai는 오직 피연산 문장의 주어에 대해서만 작동하는 반면(즉, 종속절을 이끄는 관계대명사 hos "who"), 진리사의 경우에서는 문장 구조 전체에 작동하고, 대화자가 말했고 화자가 긍정한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에 작동한다. 진리사적 einai가 실재성에 있어서 "상정"하는 것은 이러한 문장 구조의 내용, 상응하는 일련의 사태이다. 유형 4의 einai에 의해 상정되는 것은 관계절에서 표현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개별자들의 현존이다.

10. 존재사적 유형 5로 넘어가서, 우리는 구문론적으로 진리사적 구조에 더 가까운 문장 형식을 발견한다. 유형 5에서 그 동사의 주어는 더욱 기초적인 문장 내에서 술어 동사를 표현하는 추상적 행위 명사이다. 유형 5의 문장들에서 einai는 이하 문장의 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그런 발생의 동사로 기능한다.
  Around him was a clamor of the dead, 여기에서 추상 명사 clamor(klange)는 기저 문장 The dead clamored around him에서 그 동사의 명사화이다.
  There will be vengeance from Orestes, 이 문장은 기저 문장 Orestes will take revenge의 명사화로서 vengeance를 가진다.
  For you, Odysseus, there will be no murder at a wife's hand, 이 문장은 your wife will not murder you의 명사화로서 murder(phonos)를 가진다.
  주어로서의 추상 명사와 더불어, 이 문장 유형에서 그 동사의 구문은 명백히 이차적이다. 여기에서 einai는 기저에 놓이는 동사(to clamor, to take revenge, to murder)의 명사화된 형태를 주어로 취함으로써 표적이 되는 문장에 작동한다. 유형 5에서 einai의 구문은 꽤나 분명하지만, [24쪽] 그 의미론적 기능은 진리사의 경우와 유형 4에서 문장 연산자의 기능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 또한 esti 혹은 en은 그 의미론적 주어 - 이 경우 the verbal action - 를 "사실"로, 즉 담론의 세계에서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서 상정하는 데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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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유형2의 복수형식으로 해석한다면, 유형3에 속하는 문장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There are many paths up and down the camp," "Among you are the bravest of all the Achaians." 이 유형에서 주어를 도입시키는 수사적 기능은 덜 뚜렷하지만, 계사 동사의 존재사적 영향력은 처소격 보어 또는 양화사(some, many)에 의해 강화된다. 유형 2와 3의 부정 형식들에서 존재사적 어감은 특히 강하지만 국소적으로 제한된다. "There is in the whole Scythian land neither any ass at all nor any mule, because of the cold."

9. 지금까지 묘사된 어느 문장 유형에서도(유형1~3) 우리는 현존에 대한 단언이나 부정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there is"라는 영역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계사 동사의 용법을 발견한다. 제대로 된 존재사적 용법을 위해 우리는 유형 4로 향한다. 이 유형은 그 구조에 있어서 논리학에서의 존재 양화를 위한 ∃x(Fx) 형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There is an X such that X is F." 유형 4에서 einai 동사는 이하의 관계사절에서 정식화되는 서술을 위한 부정주어(someone, something)를 상정(혹은, 부정의 경우, 배제)하는 데에 기여한다. Let there be someone / who will speak wiser counsel; Now there is no one / who will escape death ...at my hands..., of all the Tojans and above all of the sons of Priam.
  부정주어가 전형적으로 인물 ("someone who...")이기에, 그 동사의 구문은 일차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 유형에서 그 동사는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 동사는 그것이 문장 연산자로 기능하는 관계사절과 함께 이해된다. 그래서 einai의 주어는 한정된 개별자가 아니라 이를 테면 제한된 변수로서, 그 관계사절에서 구체화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anyone 혹은 anything이다. 유형 4에서 einai의 의미론적 기능은 정확히, 의미론적 주어, 열린 문장(변항을 포함하는 문장)의 문법적 주어에 상응하는 언어외적 실체를,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지시하는 일을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x will speak wiser counsel, x will escape death at my hands. 그래서 유형 4의 구문론적 역할만이 아니라 의미론적 역할 또한 존재 양화의 그런 역할과 비슷하다. 특정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대상의 유효성을 긍정(혹은 부정)하는 것, 특정 술어들이 그에 대해 참인 그러한 주어를 상정(혹은 배제)하는 것.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23쪽] 서술에 대한 참과 서술의 주어에 대한 현존 사이의 개념적 연관을 재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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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하지만, 이 책에서 규정되는 여섯 가지 존재사적 유형들 중, 첫 번째이자 가장 생생한 문장 유형은 명백히 의미론적인 것도 아니고 구문론적으로 이차적인 것도 아닌데, einai가 이 경우 일상적인, 구체적 의미를 지니는 일차 동사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einai가 "to be alive," "to dwell," 혹은 "to be present"를 의미하는 경우에서 나의 존재사적 유형 1이다. 이런 유형에서 그 동사는 인물(인간 혹은 신)을 주어로 삼는다: "Your parents are still alive" (et' eisi); "The gods who are forever" (theoi aien eontes). 그 주어가 전형적으로 인물, 대화 상대자를 말하는 그것이기에, 오직 이 경우에만 그 동사가 1인칭과 2인칭으로 격변화한다; 다른 모든 존재사적 유형은 오직 3인칭 형식으로만 등장한다. 덧붙여, einai는 유형1의 경우 여느 일반 명사와 같이 시간과 장소 부사를 취한다. 그럼 어째서 우리는 이 유형을 존재사적이라 칭하는가? 그런 문장에서 그 동사가 exists 혹은 there is로조차 번역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계사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존재 동사 εἰμί의 예시들 가운데 L.S.J에 첫 번째로 기재되는 용법이다. 여타 권위자들도 그것을 유사하게 취급한다. 그 설명은 einai가 일단 여느 일상 동사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의미를 가졌다는 보편적인 가정 안에 놓인다. 유형1 용법들은 그런 본래 의미가 무엇이었을는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나의 유형2와 유형3으로 분류되는 존재사적 문장들은 구문론적 관점에서 유사하게 불순하다. "There is a city Ephyre in the corner of Argos". 모든 einai의 계사 용법들이 이러한 것들로, 통상 처소격이나, "there is"라는 번역에 의해 측정되는 한정된 존재사적 함축을 가진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어에서 이런 존재사적 어감에 부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 동사의 구문에서 아무런 대답도 발견할 수 없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그 계사는 첫 번째 자리에 등장한다. 그리스어 단어 배열은 자유롭기에, 첫 자리를 통해 부여되는 강조는 문법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수사적인 의미에 속한다. 나는, 계사 동사 자체가 그 (언어외적인) 주어의 실재성을 시사하기에, 그 동사의 이러한 그 동사의 내포된 존재사적 영향력은 바로 첫 번째 자리에 의해 이끌려 나오는 것이라 제안했다.
  책에 인용되는 사례들은 유형2 문장이 일반적으로 추가 서술에 대한 주어로서의 인물이거나 혹은 이어지는 묘사에 대한 지시의 지점으로서 지형상의 항목이다. 그런 문장들에서 그 동사의 존재사적 영향력은 문장에 문법적 주어를 도입시키는 수사적 기능과 관련되지만, 그 동사는 이 일을 정확히 부합하는 의미론적 주어를 위치시킴으로써, 즉, 뒤따르는 서술에 관련있을 인물이나 장소를 위치시킴으로써 행한다. 따라서 그 동사의 기저에 놓이는 처소격-존재사적 가치 ("is present somewhere")는 상관된 담론의 영역에 그 주어를 도입시키거나 "위치"시키는 수사적 행위에 의해 강조된다. 나는 그 동사에 관하여 수사적 강조에 의해 강조된 이러한 의미론적 함축들이, 우리가 그 동사의 주어에 대한 현존의 단언으로 지각하는 것이라 제안한다. 하지만 강조된다 하더라도 이 단언은 처소격 서술 내에 내포되기에, 우리는 존재사적 유형2에서 그 동사의 [22쪽] 의미론적(이차적) 용법을 적절하게 갖지 못한다. 우리가 가지는 것은 일차 계사의 수사적으로 의도된 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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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간결함을 위하여, 나는 우리가 여기에서 일상적인 평서문을, 즉 칠판에 적힌 주인 없는 문장이 아니라 일반적 억양으로 발화된 직설법 문장을 다루고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나는 문장과 진술 사이의 구별을 추상화시키는 중이다. 나는 앞서 einai의 일차 계사 용법들(적어도 긍정 용법들)이 일반적으로 그 의미론적 주어의 현존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제 아마도 단언된 것들로서의 문장들이 그것들의 문장 내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 진리 주장을 담지하기도 한다는 것 - 적어도 호메로스의 세계에 속한 실재성에서 그렇다는 것을 추가할 것이다. 그래서 einai의 계사 용법들은 모든 평서 문장들처럼, 두 측면에서 암시적으로 의미론적이다: 그것들은 주어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 진리 주장의 타당성 또한 시사한다. 나는 진리 주장이란 말로 문장이 단언하는 바는 무엇이든 그것을 의미한다 - 긍정적 참값의 후보로 이해된 문장내용-. 내 진리주장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이 Tractatus(4.022)에서의 언급으로 의미하였던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명제는 사물들이 그것이 참이라면 어떻게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들이 그렇게 서 있다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각각의 모든 평서문에 함축된다. 진리사적 구조에서 독특한 점은 이런 주장을 드러나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 명백한 진리 주장을 위한 운반책으로서 기여하는 것이 정확히 그 동사 to be인가? 내 생각에 그 대답은 서술의 표지로서 계사 einai의 역할 안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Theaetetus sits 같은 더 단순한 문장들에서, 이러한 기능은 일상적인 동사에 의해 수행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였듯, 어떤 동사든 is 더하기 분사로 대체될 수 있다. Theaetetus sits는 (그리스어에서 그에 상응하는) Theaetetus is sitting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와 그 밖에 이유들로, 그 계싸 동사는 가장 보편적인 동사로 보일 수 있고, 따라서 서술의 표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각각의 서술은 일상적 평서문 형태에서 진리 주장을 담지한다. 따라서 서술의 표지로서 계사 동사는 진리 주장의 표지가 될 수 있다. (인도와 스칸다나비아에서 "truth"에 해당하는 단어들이 입증하듯, 선사시대에 이미 그런 표지가 되었다.) 그것이 진리사적 구조에서 진리 주장을 명백히 하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 똑같은 그 동사인 이유에 대한 나의 설명이다. It is F는 일상적으로 It is truly F를 시사하기 때문에, is는 혼자서 is true를 의미할 수 있다.

8. 유사한 설명이 존재사 문장들에서 의미론적 연산자로서 einai 용법에 대해 제공될 수 있다. 계사 동사는 (직설법에서 어느 동사든 그렇듯) 그 주어의 현존에 대한 암시적 주장을 담지하기 때문에, 적절히 강조되었을 경우 똑같은 동사가 이러한 주장을 명백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존재사 문장에서 einai의 그 기능이다. 우리는 이 일이 존재사 문장 유형의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호메로스에서 그리고 호메로스 이후의 한 유형에서 다섯 가지 존재사 유형을 구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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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진리사 용법을 통해 나는 "is true" 혹은 "is the case, is a fact" 값을 가질 수 있는 einai의 어떤 경우이든 그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좀 더 엄격히 말하자면 진리사적 구조는 특수한 문장 형식이다. 진리사적 구조에서 einai를 포함하는 절은 말이나 생각에 해당하는 동사를 포함하는 비교 절과 관련된다: ἔστι ταῦτα οὕτω ὅπως σὺ λέγεις "Things are as you say (that they are)". 나는 be 동사를 가진 절을 essive(태격) 절이라 부르고, 생각이나 말에 해당하는 명제 태도를 가진 절을 intentional(의도) 절이라 부른다. 관용적으로 두 번째 essive 절의 발생은 통상 무화된다. 따라서 우리는 "Things are as you say"라는 더 단순한 형식을 가진다. 그러나 이 두 번째 essive 절은 진리에 대한 더욱 분명한 철학적 형식들에서 말하기에 해당하는 동사 이후에 등장할 것이다: "To say of what is that it is not, or of what is not that it is, is false; but to say of what is that it is, or of what is not that it is not, is true"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Γ, 1011b26). 두 번째 Essive 절이 무화되는 관용적 형태에서, 우리는 einai의 구문론적 주어로서, 대화자가 이야기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지시하는, 또한 그에 따라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기저에 놓이는 문장들을 지시하는 대명사 (tauta "these things")를 가진다. 그래서 이러한 진리사적 구조 내에서 einai 구문은 명백히 이차적인데, 기저에 놓이는 einai의 주어가 형식에 있어서 문장과이기에 그러하다. Essive 절에서의 einai 동사는 그 주어로서 기저에 놓이는 문장의 내용, 즉, intentional 절 ("what you say")에서 표현된 주장에 부합하는 사태를 취한다. Essive 절에서 esti의 논리적 기능은 대화자의 주장을 정확히 이러한 사태가 존재한다거나 "현존한다"고, 사물들이 대화자가 그것들이 그러하다 말하는 방식으로 "실제로 그러하다(in reality)"고 단언함으로써 보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사태의 실재성을 현존의 특별한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리사적 용법을 존재사적 동사의 특수한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 
  
일차적인 essive 절("Things are this way")에서 esti 구문은 문장 연산자 구문으로 묘사될 수 있는데, 그 동사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기저에 놓인 문장들을 자료 혹은 피연산항으로 취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것이 의미론적 문장 연산자로 기능하는데, 그것이 피연상 문장을 "실제"로(in "reality" 호메로스의 문장들에 대해 그것이 서사시들에서의 근-허구적 실재성이라는 의미에서) 사실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의미론적 연산자로서 기능하는 것이 정확히 einai 동사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문장적 진리 주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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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사 용법과 진리사 용법에 대한 분석은 더욱 어려워질 것인데, 현존과 진리라는 개념들이 우선적으로 문장 구조가 아니라 그 동사의 의미, 혹은 전체 문장의 의미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의미를 서술, 존재 그리고 진리라는 언어적 기능들 사이의 관계들을 설명하기 위한 기초로서 합당할 만큼 충분히 정확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전략은 존재사 문장과 진리사 문장에서 그 동사의 논리적 기능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구문론적 분석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직 우리가 einai의 이런 다양한 용법들의 구문론적 구조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얻을 때에만 그 용법들의 개념적 관계들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7. 나는 먼저 진리사적 용법을 취하는데, 여기에서의 기초적 구문은 분명하고 균일한 반면, einai의 존재사적 용법은 문장 형식의 곤혹스러운 다양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리사적 용법은 (그 동사가 "is true" 혹은 "is the case"를 의미하는 경우) 통계적으로 오히려 드물고, 따라서 그 용법은 존재사적 동사의 특수한 경우로 취급되곤 하였다. 우리는 결국 그러한 취급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그 대신 이 용법에 고유한 명명을 부여하고 저술 내에 독립된 장을 그것에 할당하였다면, 그것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to be의 이러한 용법은 (So be it 혹은 Tell it like it is 처럼) 존중할 만한 자격을 갖고 있다. To be의 그 의미는 전사적임에 틀림없는데, 인도-유럽 세계 극지에(인도와 스칸다나비아) 속한 언어들에서 진리에 대한 단어는 *es-의 현재 분사의 파생어로써 제공되기 때문이다 (san, satya 등, 그리스어에서 to on와 직접적으로 어원을 같이 하는 단어들. 그래서 또한 고대 영어에서도 sooth라는 단어를 가진다). 진리사적 용법에 대해 내가 독립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두 번째 이유는 철학에 대한 einai의 이러한 용법의 근본적인 중요성이다. 지식의 대상으로서 Being이라는 개념을 위해 우선시되는 표현들 중 하나로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와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에게 Being(to on)이 여러 가지를 의미할지라도, 그것은 결정적으로 이해의 목표이자 지식의 대상으로서 진리라는 개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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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이제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의미론적 서술 개념을 구체적인 명사들을 주어로 삼는 기초 (일차) 문장들이라는 초기 개념과 결합시킨다면, 우리는 그 문법적 분석이 일부 정의된 존재론적 함축들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술적 대상-언어로서 형성문법에 대한 나의 개념이 적절하게, 개인들과 안정적 대상들을 그 일차적 실체들로, 일차 문장들에 대한 의미론적 주어들로 가지는 유사-아리스토텔레스식 혹은 스트로슨식 존재론을 시사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강력한 의미에서의 존재론도 아닌데,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서 나오는 내 예시 문장들에 대한 실재를 재현하는 담론의 세계는 단순히 호메로스 서사시의 그 세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계를 기술하는 기초 문장들은 개인들과 개별물들을 그들의 의미론적 주어들로 삼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의 형성문법 사용은 기초 문장들의 두 가지 대안 개념들에 맞서 문제를 제기하는 효과를 지닌다. 내가 거부하는 그 두 가지 관점들은, 한편으로, 경험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감각-소여 같은 어떤 것을 전달하는 프로토콜-명제, 로크식 단순 관념, 혹은 흄식 인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빗슨주의자가 주장하는 바, 행위와 사건이 구체적 사물만큼이나 동일한 차원에서 기초적인 실체로 간주된다. 나는 John runs 혹은 Socrates is wise를 (언어 외적인) 주어들로서 개별자들을 취하는 기초 문장들로 선택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어나 영어와 같은 자연언어에서 문장들의 구문을 분석하기 위해 그것이 더 유용하다는 것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석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나 프랑스 혁명 같은 사건은 의미론적 주어로서 개별자들(소크라테스, 프랑스의 사람들)을 취하는 서술에 의해 표현될 것이다.

6. 우리는 이제 einai 체계의 통일성에 대한 나의 논증을 위한 기초로서 einai의 다양한 용법들을 조사하는 쪽으로 향한다. 이러한 목표를 유념하면서 나는 작금의 조사를 계사, 존재사, 진리사 용법들에 한정한다.
  계사는 엄격히 구문론적 개념이기에, 그러한 용법에 대한 기술은 상대적으로 단적일 수 있다. 우리가 보았듯, 두 종류의 계사 문장이 있다. 명사적 계사는, einai가 서술 형용사와 명사로써 이해되고, 처소격 계사는, 장소에 대한 술어들(in the marketplace, in Athens)로써 이해된다. 처소격 계사의 하위분류는 유사처소격 구조이고, 그 서술 표현은 형식상 처소격이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비유적이다. is in trouble, is in a bad mood. 이러한 문장 형식들 모두 주어로서의 추상적 (명사화된) 형식을 취하는 이차 구문에서 다시 반복된다. Wisdom is a virtue, The outcry was far away, Killing is against the law. 그러한 이차 문장들에 대해 참인 술어가 [18쪽] 그 주어의 현존을 시사하는 원리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 문장들의 추상적 주어에 대해서 현존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우리는 아마도 이차 계사 용법에 의해 시사되는 것이 그 기저의 일부 문장에 대해 참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이차 문장이 참이라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그 기저에 놓이는 일차 문장들은 또한 반드시 참이어야만 한다. 경건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가 경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의 발생은 사람들이 혁명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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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 "주어"(hypokeimenon)의 이러한 본래 뜻을 보존하고 싶고, 그건 단지 역사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문장들의 그 주-술 분석에 대한 참된 철학적 관심은 그 분석이 문장들을 넘어서서 세계 내 그 문장들의 주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콰인에게서 나온 공식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우리는 주-술 문장이 오직 그 술어 표현이 주어 표현이 지시하는 그 대상의 참일 때에만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장에 대해 진리 개념은 언어 외적 서술에 대한 진리 개념을 전제하는데, 언어적 표현들이 "세계 내" 혹은 일부 담론의 세계 내 대상들에 대한 참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참값을 통해 해석된 문장들의 주-술 구조는 의미론적 주어의 현존 개념을 포함한다. (이것은 서술, 진리, 현존 세 가지 용법들이 함께 자리한다는 내 논증의 근간이다.)
  나는 "의미론적"이라는 말을 여기에서, 일부 비언어적 모형, 예를 들면 집합론의 용어로 형식적 구조들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논리학 내에서의 형식 의미론적 개념과 유비함으로써 사용한다. 소크라테스에 관한 문장들에 대해 우리의 모형은 집합론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역사이다. 이 책에서 분석된 호메로스의 문헌들의 경우, 의미론적 해석의 영역은 호메로스 시에서 묘사된 것으로서의 세계, 영웅들과 트로이 전쟁의 사건들일 것이다. 의미론적 해석에 대해 논의의 영역이 역사에 의해 혹은 서사시에 의해 제공되는지 여부는 문제가 아니다. 아킬레스 자신이, 소크라테스 자신이 He died in 399 B.C.라는 문장의 의미론적 주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리아스』에서 여러 문장들의 의미론적 주어이다. 이러한 의미론적 서술 개념은, 문장과 그 문장이 그에 대한 것인 언어 외적 주어 사이의 관계로서, einai의 현존적 용법과 진리적 용법에 대한 우리의 설명에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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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쪽] 일차문장에서 주어 N은 고유명사일 수도 있으나, 또한 인물들이나 개별물들(동물들, 식물들, 장소들 따위)을 지시하는 보통 명사일 수도 있다. 나는 A man speaks, The cat sees the mouse, The tree is tall, 그리고 The tree stands in the yard 같은 문장들을 구문론적으로 일차술어로 헤아린다. 이러한 주어자리 명사들은 또한 술어 위치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일부 이론가들은 어쩌면 이 문장들을 기초적인 것들로 셈해 넣길 선호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대신에 그것들을 그 상응하는 술어(is a man, is a cat 따위)로부터 형성적으로 도출해낼 수도 있다. 무엇을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할 것인지에 관한 이러한 이론적 논쟁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일차 명사들에 대한 좀 더 너그러운 개념에 의존하려고 한다. 그 명사들은 인물들, 장소들, 특정물들을 지시한다. 일차명사들의 군이 순수하게 문법적인 용어들로 정의될 수 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여기에서 나는 개별적인 것들을 지시하는 "구체적인" 명사들을 한편에, 명사화된 술어들로부터 구성되는 "추상적인" 명사들을, 예를 들어 (he) is wise로부터 형성적으로 파생된 wisdom이나 (they) cried out으로부터 형성적으로 파생된 outcry 같은 것들을 다른 한편에 놓는 이러한 구별을 단순히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 문장의 구문론적 단계는 그 주어 명사의 단계에 의존할 것이다. 그래서 Socrates is wise는 계사 동사의 일차 용법이다. 다른 한편, Wisdom is a virtue와 The outcry was far away에서 그 계사 구문은 이차적인데, 이러한 문장들이 이차 (추상적) 명사들을 그 주어로 가지기 때문이다.
  일부 설명은 주부와 술부의 용어들을 위한 것이다. 서술은 (be 동사에 대한 언급 없이) 기초적인 명사-동사 문장, John runs 혹은 (플라톤이 이러한 분석을 처음 도입하는 데 사용하는 예시를 들자면) Theaetetus sits 같은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나는 문법적 주어라는 말로 이런 형식의 문장들에서 명사(혹은 명사구)를 의미하고, 문법적 술어로써 나는 그런 문장들에서의 동사 혹은 동사구를 의미한다. 서술로써 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명사와 동사(혹은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 문장성(-性)을 구성하는 그 관계이다. 여기에서 서술은 순수하게 구문론적 개념으로, 명사-동사 문장에 대해 문장성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처음에 주부와 술부라는 용어들은 구문론적으로 정의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onoma와 rhema로서 언급했던 두 가지 문장-성분들과 동일시된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어"(hypokeimenon)를 그의 고유한 서술 이론에 도입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그 onoma, 명사적 문장-성분에 귀착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해당 문장이 그에 대한 것인 바 대상이나 개별자에 귀착시켰다. 주부라는 용어의 본래 의미는 그래서 암묵적 주어나 논리적 주어로 부르는 것이다. 그 주어는 [16쪽] Socrates died in 399 B.C.라는 문장의 주어가 Socrates라는 이름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그 자신이라는 의미에서의 주어이다. 문장의 언어적 부분이 아닌 실체에 대한 "주부"라는 말의 이 본래 (하지만 근대적 관점에서 이차적인) 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 개념에 본질적이고, 여기에서 그에 대한 분석이 주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일차 명사들을 개인들이나 특정한 사물들을 지시하는 것들로 정의하면서 
(언어 외적인) 언급의 대상(subject of reference)이라는 개념에 의존해 왔다. 나는 여기서 "주어"라는 말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 주의를 당부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그 두 의미 모두에서 그 말을 체계적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Socrates died in 399 B.C.라는 문장을 고려할 때, 나는 Socrates를 그 문장의 구문상 혹은 문법적 주어로 부를 것이고, 반면 존재론적 혹은 의미론적 주어인 사람은 소크라테스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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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문론적 기술로 들어가기에 앞서, 언어철학에서 일부 개념들을 차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서술과 현존 개념을 말이다. 이것들은 자료들을 적절히 기술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그리스어 체계의 정합성에 대한 나의 논증을 정식화하는 데에도 필요할 것이다. 덧붙여 형성문법이 계사, 존재사, 진리사 용법들을 예화하는 문장유형들에 대한 엄격한 구문론적 기술을 제공하기 위해 요청된다. 나는 Zellig Harris의, 기초 혹은 핵심 문장들에 대한 이론을 포함하는 형식의 형성 문법을 채택했다. 그 기초 문장들은 그로부터 복합 문장들이 형성될 수 있는 혹은 이 문장들이 저것들로 해체될 수 있는 그런 문장들이다. 기초 문장들에 대한 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묘사하는 1차 기술 언어 부류에 대한 현대의 완전히 잘 작동하는 모형을 제공하고, 동시에 Harris의 형성들에 대한 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어떻게 언어의 남은 부분들이 그러한 기초 위에 구축될 수 있는지 알게 해준다. 이것은 그러한 형성 문법의 체계에 대한 독립적인 철학적 흥미인 것으로 치고, 문제가 되는 그리스어 동사를 기술하기 위한 그것의 쓰임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실질적으로 자연어에서 문장들의 기저에 놓이는 문법적 구조를 재현하는 체계이다. 역으로, 그런 체계는 적절히 문법적인 분석과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존재론적 기획 사이의 거리를 분명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의 구문론적 분석을 위해 우리는 기초 혹은 1차 문장 구조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의 형성 문법의 핵심 문장 형식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여기에서, N이 명사를, V가 동사를, A가 형용사를, P가 전치사를 표시하는 몇 가지 단순한 형식들을 나열한다.

1) NV: Socrates walks
2) NVN: Socrates sees Plato
3) N is A: Socrates is wise
4) N is N: Socrates is a man
5) N is PN: Socrates is in the marketplace; Socrates is in trouble

문장 형식 3과 4는 명사 연결 계사를 표현한다; 문장 형식 5는 처소격 계사와 유사처소격 계사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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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4. 그래서 나는 einai에 용법 체계에 대한 논리적 기초로서 합당한 것은 정확히 einai의 서술적 기능이라고, 철학적 연구 주제로서 Being이라는 주제를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이 체계의 이러한 개념적 통일성이라고 주장한다. 좀 더 일반적으로, 나는 서술, 현존, 진리라는 세 가지 개념이 다 함께 어떻게 언어가 실재에 대한 묘사로서 기능하는지에 대한 어떤 이론에든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어째서 존재론(Ontology), to on에 대한 이론이 그리스 철학의 분과로서 출현하였는지 설명하는 것은 바로 상호의존적 개념들의 이러한 연결망이다. 그리고 Being에 대한 그리스의 담론들이 지니는 개념적 정합성은 그 동사의 서술적 기능이 근본적인 것으로서 재인된다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구문론적 논증을 전개하기에 앞서, 나는 그것을 엄격하게 철학적인 고찰로 뒷받침하길 원한다. 서술적 구조의 우선성을 위한 사례를 이전에 빠뜨린 적이 있다. 플로티누스의 유명한 원리에서 the One과 the Good에 Being은 포함되지 않는다. 만일 그가 Being을 현존으로 이해했다면 the One의 Being을 그렇게 단정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만일 One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하였을 테니까 - 세계가 전무하였을 테고, 가지적 우주도 감각적 우주도 없었을 것인데, 다른 모든 것이 다 제 실재성을 the One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The One의 einai를 부정함으로써 플로티누스는 실재성이 아니라 서술적 구조를 부정한다. 서술에 속하는 being이 다수성을, 이를 테면 주어(hypokeimenon)와 그것에 대해 서술되는 것 사이의 개념적 구분을 함의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One"과 "Good"이 최고 원리의 속성들을 대표하지 않고, 단지 the One을 어떻게든 가리키면서 기술하지 않는 이름들일 뿐인 이유이다. 나는 플로티누스가 여기에서 그리스어 동사 einai의 근본적 기능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철학적 감각에 의존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내가 지금 einai의 계사 용법들이 그 주어에 대해 일상적으로 현존을 시사하리라고 주장하고 있기에, 그 서술적 기능을 지지하는 내가 제안했던 전환은 L. M. De Rijk 같이 존재사적 용법을 그 동사의 철학적 의미에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에게 덜 적대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서술적 용법이 중심에 오는지 존재사적 용법이 중심에 오는지 einai의 이런 명백히 경쟁적인 두 개념들은 궁극적으로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데, 그것들의 관심사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내 주장은 서술의 구문론적 기능이 [14쪽] einai의 용법들을 통일된 체계로서 파악하는 데에, 또한 철학 안에서 그 동사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 더욱 기본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우리가 번역과 구문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그 동사의 어휘상의 내용이나 의미를 탐색 중이라면, 계사 구문은 후보조차 안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로 이후 12절에서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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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사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Allan Bäck의 최근 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 이론』에서 체계적으로 전개된다. 벡은 그가 지지하는 이 관점을 계사의 아비센나식 해석이라 표현한다. "계사 is가 존재주장을 단언하고", 그래서 S is P는 S is existent as a P로 읽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센나와 벡에 따르자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일상적인 계사 문장 S is P는 두 가지 주장을 구성한다: "S exists"와 "S is P." 그들이 우리가 보기엔 현존을 주제화하지 않았기에, 그리스 철학자들은 부정적 현존재들에 대하여 많이 염려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해석가들은 부정적 현존재들의 근대적 문제가 플라톤의 Not-Being에 대한 관심 속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그들이 플라톤의 문제를 근대화하여 오늘날 독자들에게 더 흥미롭게 보이도록 만들려는 욕망에 잘못 이끌린 것이라 믿는다.) 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상상 속 대상들, 밀의 예시로 치자면 "켄타우로스는 시인들의 허구이다." 같은 것에 대한 어떤 특별한 관심도 찾아볼 수 없다.
  계사의 존재사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그쯤 하자. 이제 그 역 주장에 대해 보자.
  (ii) einai의 존재사적 용법들은 잠재적으로 서술적이라는 것이다. 영어에서, to exist는 명사나 형용사 술어를 취하지 않고, 처소격도 취하지 않는다. (Socrates exists wise는 허용될 만한 문장이 아니고, Socrates exists in the marketplace는 특수한 문맥 없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 된다.) 이 측면에서, exists는 esti에 대한 좋은 번역이 결코 될 수 없는데, [12쪽] 술어 표현을 통해 완성될 수 없는 그 동사의 어떤 용례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존을 단언하는 가장 명백한 그리스어 형식은 실상 그 형태에서 서술적이다: einai ti "to be something(rather than nothing)." 이것은 einai가 술어를 취할 때 그 존재사적 영향력을 전혀 상실하지 않는다는 점의 전형적 실례이다.
  레슬리 브라운은 어떻게 『소피스트』에서 einai의 독립적 혹은 존재사적 용법들이 플라톤에 의해 그가 "such-and-such is something"과 호환될 수 있는 표현으로서 "such-and-such is"로 취급하는 서술적 용법에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간주되는지 보여주었다. 『국가』 5권에서의 형상들의 법칙을 소개하는 핵심논증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절대적인 what is를 "what is completely(τὸ παντελῶς ὄν, 477a3)"로서의 형상들과 동일시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시작하지만 이것을 "the many beautiful things," 그 각각이 "will also appear ugly(479a)"한 것들, 그러므로 "not being과 purely being 사이에서 요동치는(479d)" 것들과의 대조로써 끝맺는다. 여기에서 다시 플라톤이 추가적 술어가 있는 einai와 없는 einai 사이에서 아무런 구분도 끌어내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그래서 『소피스트』에서도 
『국가』에서도 플라톤이 einai, ousia, on에 의해 표현되고 현존, 서술, 동일화, 진리, 아마 그 이상의 관념들을 포섭할 오직 하나의 Being 개념만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러 학자들이 현존과 서술이 함께 하는 지점에서 그 동사에 대해 "혼동된(fused)" 의미를 말하고자 바란 까닭이다. 나는 이 용어가 오해를 불러온다고 생각하는데, 혼동이라는 개념은 그 구성요소들이 앞서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물론 분석적 목적으로 플라톤의 문헌에 대한 주석에서 우리의 해석학적 메타언어에 그런 구분들을 도입시킬 필요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근대적 구분들과 고대 문헌들 내의 논의 아래 실제로 깔린 것 사이의 불일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한다. 그 두 의미를 혼동하고 있는 건 우리이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다.
  그래서 그 체계의 중심에 서술적 용법을 두는 것은 소위 존재사적 용법들을 이차적 혹은 파생적 현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구문론적 분석에 돌입할 때, 우리는 존재사적 용법과 진리사적 용법 모두 2차 형태로서, 1차 문장에 대한 구문론적 문장 연산자로서 
가장 잘 이해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inai의 이런 2차적인, 명백히 구문론적인 용법들은 계사로서의 1차 용법에서 그 동사의 암시적인 구문론적 기능들을 언급함으로써 설명될 것이리란 점을 제안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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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런 모든 결함들을 인정하면서, 그 자료를 조직하는 데에 계사-존재사 구분이 유용하다는 것은, 이 책에서 내가 한 것처럼, 여전히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사적 용법이 함축적으로 존재사적 용법이라는 것, einai의 존재사적 용법 전부 혹은 그 대부분이 잠재적으로 서술적이라는 점을 재인하기 위해 그 구별 자체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으로 반성을 행했던 것은 아니다. 계사 구문과 독립 구문 사이의 구문론적 구분은 그 그리스어 동사에 실로 충분하지만 피상적인, 오직 그 동사에 대한 표면적 구조의 특징이다. 이것이 내가 레슬리 브라운의 플라톤 『소피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X is 형태의 문장에서와 X is Y 형태의 문장에서의 einai 동사들 사이의 관계가 Jane teaches에서와 Jane teaches French에서의 teach 동사들 사이의 관계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10쪽] 이것은 플라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도,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 언어에 대해 참인 듯하다. einai에 술어를 추가하는 것은 to teach 동사에 직접 목적어를 추가하는 것이 그 동사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 변화를 주지 않는다. 생성문법의 관점에서, 더 긴 형태일 수록 더 기초적이다. X teaches는 X teaches something에서 그 직접 목적어를 무화시킴으로써 도출된다. 유사하게, X is는 X is Y에서 그 술어를 무화함으로써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제안이다. 이것이 내가 삼가 내 방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말하는 내 논증을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건 einai의 용법 체계 중심에서 현존을 서술로 교체시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einai의 모든 독립적 혹은 존재사적 용법은 일부 술어의 축약된 형태로 여겨질 수 있다. X is는 어떤 Y에 대한 X is Y의 축약이다. 그 형식의 의미는 결국 to be는 to be something or other라는 것이다.
  서술적 용법과 존재사적 용법의 상호의존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i) einai의 계사 용법은 함축적으로 존재사적이라는 것. 계사로서 esti의 일상적 용법, 명사 술어나 처소격 술어를 가진 용법을 생각해 보자. 만일 esti를 그 문장 앞에 놓으면, "그러저러한 것이 있다"라는 번역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존재사적 어조를 자주 얻게 될 것이다. ἔστι πόλις Ἐφύρη μυχῷ Ἄργεος "아르고스의 귀퉁이에 에퓌르라는 도시가 있다." 같은 문장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어에서 단어의 배열은 아무런 구문론적 중요성이 없다. 첫 번째 위치에서 그 동사의 구문은 여전히 계사 구문, "에퓌르는 도시이다(Ἐφύρη πόλις ἐστί)"이다. 첫 번째 위치는 수사적 강조를 부여하지만, 그 동사 자체가 존재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존재사적 의미를 그 계사에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주어에 대한 이러한 존재사적 함축은 일반적으로 계사가 처소격 보어와 함께 이해될 때 더욱 강력하다.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말이다. (그래서 처소격 존재사 문장들의 유형들 전체 분류를 정립시킬 수 있다.) 하지만 계사의 존재사적 함축은 처소격 보어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는 주어를 그것에 대하여(about) 말할 어떤 것으로 놓는 것이 주-술 진술의 본질적 요소이며, 그리하여 주어에 대한 존재사라는 일부 주장이 긍정 주-술 문장 모두에서 함축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부정문들의 경우를 더 문제가 될 것으로 잠시 제쳐둔다.) 계사 문장들에서 이러한 주장은 주-술 관계의 신호로서 계사 esti에 의해 행해진다. 계사에 대한 그런 존재사적 함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당방형에서, 비록 [11쪽] 형식논리에서 이 규칙의 일반 양화 형식이 타당하지 않다 하더라도, "모든 그리스인은 인간이다"가 "일부 인간은 그리스인이다"를 함축하는 데에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어와 같은 자연언어에서, 서술적 진술은 그것에 대해 어떤 것이 참인 그러한 주어를 함의하고, (평범한 경우) 그 술어가 참이 되는 주어가 반드시 존재한다. 평범하지 않은 경우는, 비문법적 이유들로, 술어 표현이 실질적 속성을 부여하지 않고 따라서 주어의 현존이 문제가 되는 그런 경우이다. 그것이 아벨라르두스 시대에 논리학자들이 계사 est의 주어로 chimaera와 centaurus를 지니는 문장들을 재분석하기 시작한 이유이다. Chimaera est opinabilis "키메라는 의견의 대상이다" 같은 문장들은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키메라를 상상한다"라고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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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서 내 원래 계획은 문헌학적이고 해석학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Being의 형이상학이 단순히 언어적 혼란으로부터나 어휘의 지역적 특수성의 구상화로부터 귀결된 것이라 주장하는 상대주의자나 실증주의자의 공격에 대한 내 관심이 그 계획을 변경시켰다. Being에 대한 물음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에 속했기에, 그들의 Being에 대한 관심을 타당한 철학적 기획으로서 방어할 책임을 느꼈다. 그 결과가 einai에 대한 다양한 용법들이 주목할 만한 통일성을 갖춘 개념적 체계, 서술 개념 부근으로 군집을 형성하는 상호의존적 개념들의 연결망을 형성했다는,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이 고대와 근대 모두에 존재론에 대한 적절한 주제를 제공한다는 나의 반대 주장이다.
  그래서 내 책의 논증은 하나는 언어적이고 하나는 철학적인 두 가지 결론들에 이른다. 철학적 결론은 그리스 존재론을 위한 나의 방어로서 einai 체계에 대한 나의 설명에 의존하지만 그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건 아니다. 그리스 존재론은 아마도 상이한 토대들에 의존할 테고, 독자는 einai 체계에 대한 내 설명을 수용할지도 모르지만 존재론에 대한 옹호로서 그것의 가치는 의미할 수도 있다. 더욱이, 나는 그리스 철학의 해석을 위한 내 분석의 생산성을 증명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그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연구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그리스 존재론의 역사에 대한 문법적 서설이다.

2. 그리스에서, 또 일반적으로 인도-유럽어들에서 동사 to be에 대한 30년 전 이론은 단순히 한 가지였다. 본래 "exists," 혹은 아마도 좀 더 구체적으로 "be present" 같은 그런 의미였을 *es- 동사가, 그게 우연히 명사적 서술어들과 함께 허사로서 쓰이게 되었던 그런 동사가 있었고, 그렇게 그 본래 의미를 잃고 "mere copula" 역할로 퇴화했다. 이런 계사로서 be와 "exists" 의미의 be 구분은 존 슈트어트 밀에 의해 처음 유명해졌다. 그는 Being의 형이상학 전체가 이 동사의 이런 두 용법들 사이의 혼동에 기인하였다고 주장했다. 언어학자들과 문헌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들의 의도들에 따라 이 이분법을 받아들였다. [9쪽] 나는 그 이분법의 만연한 영향력의 징후로서 1957년 커크와 레이븐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1판에서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였던 그리스 단어 esti의 서술적 의미와 존재사적 의미 사이의 혼동"이란 소리를 의문 없이 언급할 수 있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2판(1983년)에서 새로운 편집자 말콤 스콧필드는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혼동하였다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이 관점을 수정하였지만 esti의 파르메니데스적 용법이 "동시에 존재사적이면서 서술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나는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 동사 einai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의 증대된 세련됨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는 더이상 언어적 혼동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 Being 이론들에 대한 밀의 김빠지는 설명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한 발 더 나아가 계사와 존재사적 동사 사이의 대비 그 근원적 본성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이분법에 대한 급진적 비판은 30년 전에 비하면 오늘날엔 더 쉬워졌는데, 동사 is의 애매성에 대한 소위 프레게-러셀식 주장을 일관되게 반대해 주장해온 Jaakko Hintikka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그 방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G. E. L. Owen'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to be는 언제나 이러저러한 어떤 것임(to be something or other)이란 공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사적 용법들이 또한 서술적이기도 하였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저 구분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법은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 einai의 구문론에 관한 Lesley Brown의 작업에 의해 결정적으로 진일보하였다. 나는 계싸와 존재사 용법들 사이의 그 이분법에 대한 대 오래된 반박을 여기서 재론하진 않을 것이다. 그 두 용법들 모두 존재사적-처소격 문장들 같은 또 다른 중요한 용법들이 있다거나 계사 용법은 구문론적으로 정의되는 반면 존재사적 용법은 그 동사의 어휘적 의미의 문제이기에 그 구분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따위의 것들 말이다.


-蟲-

[7쪽] Introduction (2003)


1. 1-3, 5, 8장의 이론적 논의를 좀 더 분명하고 정확한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60년대 이래 언어 이론과 언어 철학의 일반 논의를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einai에 대한 내 이론적 설명의 더 간결하고 일관된 판본을 내놓는 바이다.
  "언어들이 내세울 변변한 Being 개념 같은 건 없다'는 A. C. Graham의 관점에 반대해 to be의 기능들이 그리스어나 인도-유럽 어만의 고유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내 논증은 유행이 지난 듯하다. 저 언어상대주의도 내 주장도 별로지만, 내 주장이 근거하는 내 일관된 핵심주장, einai 체계의 개념적 통일성은 새로운 형식으로 내가 여기 내놓는다.
  우선 이 기획의 본질을 밝힌다. 내 목표는 그리스 존재론에 일종의 문법적 서설이었다. 파르메니데스가 정식화한 그런 Being 개념은 역사적 선행자들 없이 난데없이 등장한 듯한데, 또 대단한 역사적 결과들을 낳았다. 플라톤의 형상론이나 Not-Being에 대한 싸움이 그의 to on 설명에서 나왔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가지로 이야기되는 to be나 'being qua being은 그의 단일론적 what is 개념에 대항마로 고안되었다. 그리스 자연철학의 전개과정은 파르메니데스주의의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8쪽] 그런데 그런 강력한 Being 개념이 파르메니데스의 선대에게선 안 보이니, 초기 그리스에서 to be 동사 용법을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언어자료를 더 잘 파악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원칙들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 공헌하길 바라며 이 동사 용법 일람표를 제시한다.


-蟲-

-한 쪽이든 두 쪽이든 그냥 일단.

Θαρρεῖν, ὦ Θεαίτητε, χρὴ τὸν καὶ σμικρόν τι δυνάμενον εἰς τὸ πρόσθεν ἀεὶ προϊέναι.  

"테아이테토스, 뭔가 조금이라도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힘이 있는 자는 용기를 내야만 하네." Platonis Sophista 261b4-5

1. 고전어강좌 

* 시간 조정을 위해 7월 4일로 시작 일짜를 재조정했습니다. 착오없으시길 바랍니다.* 

이번 여름에도 정암학당에서는 고전희랍어 과정을 개설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대학에서 한 학기 정도 기초 문법 수업을 들은 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열의와 노력만 갖춘다면 처음부터 하더라도 완주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학당 강좌가 다 그렇듯이 이 강좌 역시 후원회원님들의 뜻을 받들어 무료로 개설됩니다. 
이번 강좌는 학당연구원이자 관동대교수인 유재민 선생님이 맡아주셨습니다. 

요일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주당 2회, 8주간 진행됩니다. 

현재 예정은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5시지먄, 
첫 시간은 7월 4일 토요일에 만나 시간논의를 합니다. 
토요일 경우에 사정에 따라 금요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재를 준비하는 등의 사전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강좌는 참석하실 분들의 신청을 미리 받습니다. 

연구실장인 제 메일 synousia@gmail.com으로 
이름/현재 하는 일/희랍어공부 정도/이메일 주소/핸드폰 번호 를 알려 주시면 
수업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올 여름도 희랍어로 보람있는 땀방울을 흘리시길 기원합니다. 

 정암학당: http://www.jungam.or.kr 
-----------------------------학당 공지글을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2. 근간 여러 경로로 여혐 논란이 많았다. 그냥 간단히. 문화가 개방되고 교육이 지속되면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상향되어 간다고 믿는다. 문화상대주의 따위 엿이나 먹으라 그래라. 여하간, 그 과정이란 게 불연속이 아닌지라 변화과정에 있는 개개인 중에는 그 속도를 못 따라가는 사람도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이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수준 비슷한 것들은 많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겨 죄를 저지른 것들이 흠씬 두들겨 맞고, 그걸 타산지석 삼아 나같은 놈들은 대가리와 심보까지 시대에 맞추진 못하더라도 주둥이랑 사지 몸뚱아리나마 조심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요즘 욕 쳐먹는 온갖 실좆새끼들에게 약간의 부채의식도 있고 뭐 그렇다. 칼리폴리스를 위한 세 차례의 파도가 어서 지나가길 기원해 본다. 낄낄. 물론 법과 절차에 따른 적법한 처벌 이외에 개인이 개인에게 저지른 폭력이 대중에 의해 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 성평등의식이 일천한 사회에서 이 수준을 밑바닥에서 끌어올릴 사회적 합의도 교육의 내용이나 제도도 없는 상황에서 저런 나같은 사람 몇몇이 피 좀 흘려줘야, 나같은 것들이 경각심을 갖고 몸을 사리지 않겠나. 그렇게 몸 사리다 조용히 늙어 뒈지면 다음 세대는 좀 더 나아지겠지. 왜 공론화를 시켰냐느니 고소를 하라느니 따지는 얘기는 별 의미 없어 보인다. 그것도 그 개인들이 판단할 문제고, 트위터에 언론에 애인 때린 사람으로 대대적으로 홍보가 된다고 한들, 없는 사실이 아닌 한 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다만,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개새끼도 옳은 말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옳은 말을 한다고 개새끼가 성인군자 되는 것도 아니고. 말과 사람은 어쨌든 별개다. 그게 안 받아들여지는 동네라 밥줄이 끊기네 뭐네 얘기가 많은 것이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여성을 걷어찬 사람도 여성주의를 옹호하는 정당화된 글을 쓸 수 있는 거다. 변명의 글이 상당히 구리고, 자신의 분노조절장애를 치료할 적극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법적 처벌도 받지 않은 한 개인에게 달려들어 욕을 하고 동네 사람들 이거 보래요, 손가락질하는 것 다 딱히 말릴 근거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성교육을 할 건가, 아니면 피해자 고소 없이 다 수사해서 잡아들일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조리돌림뿐인 거다. 하지만 그 욕이 그가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이기는 어려울 듯하다. 뭐 그냥 그렇다고. + H씨께서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진행한 모양. 반박글도 있길래 링크 놓음. 뭐 남의 연애사야 어찌 됐든 무슨 상관이겠냐만.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62008

 3. 내가 차이자마자 한 일은 연락처 지우기였다. 늘상 그래왔다. 그런데 나중에 지인에게서 왜 그렇게 안 붙잡고 툭 놓아 버렸냐는 힐난까지 들었다. 내가 이 정도로 깔끔합니다. 이별통보했다고 식칼을 품고 찾아가거나 휘발유를 챙겨 들거나 염산을 구하러 이리저리 헤매다니지 않는 건전한 사람입니다. 그냥 질척거리는 것이든 폭력을 드러내는 것이든 어쩄든 상대방 의사가 '이별'이라면, 적어도 좋아하는 상대의 의사 정도는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얼마나 싫겠나? 끝내자는데 얼굴 들이밀고 전화질 해대고 '자니?' 이 지랄-_-. 내가 당하기도 싫고 해서 행한 적도 없고 그렇다. 근데 이렇게 하니까 나보고 '니 애정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뭐 이런 반응이나 오고. 이게 다 왜 그런고 하니 그냥 내가 못 생겨서 그런 거다. 못생김에 추가로 여러 찌질스러움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냥 포기하면 편하지.

 4. 김경만씨 논란은 뭐 딱히 새삼스럽지도 않다. 학문의 전분야가 지역과 문화의 특수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도 100%의 객관성을 추구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같은 분야로 묶인 학문활동들 사이에 객관적 기준이 배째라고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일 리도 없고, 각자 선택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잖나. 유학도 가고 번역도 하고 창조적 활동도 하고, 한 사람이 다 할 수 없으면 이래저래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누어 담읍시다. 뭐 몇 알 되지도 않는 거 다 썩어 없어질 거란 짐작은 해 보지만, 한 바구니 몰아 넣었다 당장에 다 깨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5. 일단 한 걸음 내딛어야 한다. 갈수록 그게 참 쉽지 않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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