ΕΡΜ. Κρατύλος φησὶν ὅδε, ὦ Σώκρατες, ὀνόματος 383a4
ὀρθότητα εἶναι ἑκάστῳ τῶν ὄντων φύσει πεφυκυῖαν, καὶ οὐ 5
τοῦτο εἶναι ὄνομα ὃ ἄν τινες συνθέμενοι καλεῖν καλῶσι, τῆς
αὑτῶν φωνῆς μόριον ἐπιφθεγγόμενοι, ἀλλὰ ὀρθότητά τινα
τῶν ὀνομάτων πεφυκέναι καὶ Ἕλλησι καὶ βαρβάροις τὴν b
αὐτὴν ἅπασιν.
여기 이 사람 크라튈로스는, 소크라테스, 있는 것들 각각에게
이름의 옳음이 본성상 타고난 것으로서 있다고, 또한 이러한
이름은 어떤 이들이 그리 부르기로 협의하여, 그들 자신들의
말소리 중 일부를 붙여 발음하며 부르는 그런 것으로 있지
않다고, 오히려 이름들의 어떤 옳음이 헬라스인들에게도
야만인들에게도 똑같은 것으로서 그들 전부에게 타고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클라튈로스는 이름에 대해 본성상 타고난 보편적인 옳음이 있다고 주장한다.
ΕΡΜ. [...] οὐ δύναμαι πεισθῆ- 384c11
ναι ὡς ἄλλη τις ὀρθότης ὀνόματος ἢ συνθήκη καὶ ὁμο- d
λογία.
[...] 합의와 동의 외에
이름의 여타 무슨 옳음이 있다고는 납득할 능력이
없습니다.
[...] οὐ γὰρ d5
φύσει ἑκάστῳ πεφυκέναι ὄνομα οὐδὲν οὐδενί, ἀλλὰ νόμῳ
καὶ ἔθει τῶν ἐθισάντων τε καὶ καλούντων.
[...] 왜냐하면 본성상 그 어떤
이름도 그 누구에게도 각각에게 타고난 게 아니라, 관습을
형성하고 그렇게 부르는 자들의 법과 관습에 의해 있는
것이니까요.
반면에 헤르모게네스는 이름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들의 합의와 동의,
법과 관습이 이름의 옳음이라 주장한다.
<말의 부분에 대한 참과 거짓 이야기 385b2-d1
말 전체의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있다면 그 부분인 이름의
참과 거짓도 말할 수 있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각자가 각 사물을 명명하고 그 명명된
이름이 모두 참이라면, 그 지어진 만큼의 모든 이름들을 각
사물이 자신의 이름으로 갖게 된다. 385d2-e3
이를 a) 사물의 본질이 있는 경우와 b) 각자에게 보이는 바의 것으로
있는 경우(프로타고라스의 만물척도설)로 나누어 살펴 본다. 385e4-386a4
b)를 받아들일 경우 이름(명명과 호명 모두?) 모두가 옳고 오류가 불가능하다.
이 경우 분별과 무분별의 구분도 불가능하다. 이에 대비하여 모든 것이 동시에
모두에게 똑같이 언제나 있다면(b2), 이 경우에도 분별과 무분별이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이 어떤 것을 완전히 알거나 전혀 모르거나, 사물이 오직 알려져
있기만 하거나 아니면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전적으로 있거나 아예 있지
않거나의 양자택일일 경우 '모든 것이 동시에 똑같이 언제나' 있거나 있지
않으며, 이를 모든 사람이 알거나 혹은 모두 모르게 된다. 『에우튀데모스』
293b-297a)
ΣΩ. Οὐκοῦν εἰ μήτε πᾶσι πάντα ἐστὶν ὁμοίως ἅμα καὶ 386d8
ἀεί, μήτε ἑκάστῳ ἰδίᾳ ἕκαστον, δῆλον δὴ ὅτι αὐτὰ αὑτῶν
οὐσίαν ἔχοντά τινα βέβαιόν ἐστι τὰ πράγματα, οὐ πρὸς e
ἡμᾶς, οὐδὲ ὑφ᾿ ἡμῶν ἑλκόμενα ἄνω καὶ κάτω τῷ ἡμετέρῳ
φαντάσματι, ἀλλὰ καθ᾿ αὑτὰ πρὸς τὴν αὑτῶν οὐσίαν
ἔχοντα ᾗπερ πέφυκεν.
그렇다면 만일 모두에게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한꺼번에
항상 있지도 않고, 각자에게 사적으로 각각의 것이 이씨도
않다면, 그럼 사태들이 자신들의 확고한 모종의 있음을
지닌 채로 있으며, 우리를 상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
의해 위로 또 아래로 우리의 가상에 끌려다니는 것들도
아니니, 오히려 그 자체로 자신들의 있음을 상태로 타고난
바로 그 상태로 있는 것들이지.
사물이 각각의 사람에게 보이는 바의 것으로 있지도 않고 모두에게 동시에 똑같이
있지도 않다면, 그 사람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들도 그 자체로는 각기 고유한 본성에
따라 행해진다. 대상과 행위의 본성에 따라 그에 적합한 도구로 해당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성공한다.(387a1)
사물과 행위가 저마다 고유한 본성, 본질이 있다면 그에 적합한 옳음이 있다.
말을 하는 것도 행위이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 말하기의 부분으로서 또한
행위이므로, 말하기 또한 그 고유한 옳음이 있다.
*이름하기는 말하기의 한 부분이다(387c8-9).
ΣΩ. Ἔχεις δὴ καὶ περὶ ὀνόματος οὕτως εἰπεῖν; ὀργάνῳ 388b7
ὄντι τῷ ὀνόματι ὀνομάζοντες τί ποιοῦμεν;
그럼 자네는 이름에 관련하여서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나?
수단으로 있는 이름으로써 우리가 이름하며 무엇을
행하는가?
ΕΡΜ. Οὐκ ἔχω λέγειν.
말할 수가 없네요.
ΣΩ. Ἆρ᾿ οὐ διδάσκομέν τι ἀλλήλους καὶ τὰ πράγματα 10
διακρίνομεν ᾗ ἔχει;
혹시 우리는 사태들이 어떠한 상태인지 판단하여
서로에게 뭔가를 가르쳐주지 않나?
ΕΡΜ.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ΣΩ. Ὄνομα ἄρα διδασκαλικόν τί ἐστιν ὄργανον καὶ
διακριτικὸν τῆς οὐσίας ὥσπερ κερκὶς ὑφάσματος. c
그럼 직물에 대해 베틀-북처럼 이름은 있음에 대해
가르침을 주는 어떤 수단이자 판단해주는 수단으로
있다네.
ΕΡΜ. Ναί.
네.
이름하기는 말하기의 일부이고 이 행위의 적합한 도구는 이름이며,
다른 도구에게 저마다 제작자인 장인이 있듯 이름에도 그 제작자인
장인이 있다. 이름은 가르치고 사물의 상태를 판단하는데 사용되는
도구이다. 헤르모게네스는 이름을 제공해주는 것이 법(규칙, ὁ νομός)이라
주장하였으므로(384d6), 이 법을 기술로 가지고 있는 기술자인 입법가가
이름의 장인이 된다.(388)
<앞서 분별과 무분별의 구분에 따라 이름에 관련하여서는 이 입법가가
분별있는 자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입법가에 비해 분별이 없는 자들이 된다.>
제작자는 도구가 특정 행위를 하도록 타고난 바의 것, 각 대상에 고유하게
적합한 도구(그 도구의 형상)에 주목하여 매번 재료에 도구를 재현해낸다.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가르치거나 판단하는 행위가 이름하기(명명과 호명)이다.
이름하기 위한 도구로서 이름이 있으며, 이러한 이름의 형상을 구현하기 위한
재료로 발음과 철자가 있다. 같은 형상을 부여하는 한 제작자, 재료, 지역과
무관하게 제대로 된 같은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구의 '형상'이 적합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사용자이다. 앞서의
논의에 따르자면 가르치고 판단하는 기술을 가진 자이고, 390c에서는 질문하고
대답할 줄 아는 자, 즉 변증 기술자이다.
<Cf. 『국가』 제작자와 사용자 관계>
이름의 제작자는 입법가, 이름의 사용자는 변증 기술자이다.
391a까지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 이름 이론에 대한 분석과 정당화가 진행되었다.
이름하기는 대상을 가르치고 판단하며 변증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 이름은 이러한
행위를 위한 도구이며, 대상의 본성에 따라서 이름할 때에 그 행위가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름하기와 이름에는 본성적인 옳음이 있다. 이를 기준으로
이름하기를 잘하는 자와 못하는 자가 구분될 수 있다.
* 명명과 호명의 구분은 아직 고려되지 않았는가? 없던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 것과
이미 있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또한 가르치고
변증하는 것은 단지 호명만으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말'을 하는 것, 지시하고
이에 대해 서술하며 그런 식으로 문답을 이어가는 것을 통해 성립하는 행위이다.
Note! 390d9-e5/391a4-6
ΣΩ. Κινδυνεύει ἄρα, ὦ Ἑρμόγενες, εἶναι οὐ φαῦλον,
ὡς σὺ οἴει, ἡ τοῦ ὀνόματος θέσις, οὐδὲ φαύλων ἀνδρῶν 10
οὐδὲ τῶν ἐπιτυχόντων. καὶ Κρατύλος ἀληθῆ λέγει λέγων
φύσει τὰ ὀνόματα εἶναι τοῖς πράγμασι, καὶ οὐ πάντα e
δημιουργὸν ὀνομάτων εἶναι, ἀλλὰ μόνον ἐκεῖνον τὸν ἀπο-
βλέποντα εἰς τὸ τῇ φύσει ὄνομα ὂν ἑκάστῳ καὶ δυνάμενον
αὐτοῦ τὸ εἶδος τιθέναι εἴς τε τὰ γράμματα καὶ τὰς
συλλαβάς. 5
그래서, 헤르모게네스, 이름의 정립은 자네 생각처럼
하찮은 일은 아닐 것 같고, 하찮은 사람들의 일도 또
아무렇게나 마주칠 사람들의 일도 아닐 것 같군.
그래서 크라튈로스가 본성상 사태들에 이름들이 있다고,
그리고 모든 장인이 이름들의 장인으로 있는 게 아니라,
오직 각각에게 본성상 이름으로 있는 것을 바라보며
그것의 형상을 문자들과 음절들에 정해줄 능력이 있는
저 자만이 그러하다 말하며 참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ΣΩ. Ἐγὼ μέν, ὦ μακάριε Ἑρμόγενς, οὐδεμίαν λέγω, 391a4
ἀλλ᾿ ἐπελάθου γε ὧν ὀλίγον πρότερον ἔλεγον, ὅτι οὐκ 5
εἰδείην, ἀλλὰ σκεψοίμην μετὰ σοῦ.
나는, 복받은 헤르모게네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네만,
조금 전에 내가 말하던 것들을 자네가 놓치긴 했군, 나는
알지 못하지만, 자네와 함께 검토할 수는 있으리란 것
말일세.
<소크라테스는 크라튈로스의 주장, 사물에는 본성에 따른 이름이
있다는 것, 이름의 형상을 문자와 음절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자만이 이름의 장인이라는 것을 참이라 평가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가 크라튈로스의 주장을 참이라고 평가는 하지만,
그 주장의 내용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정도의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자신은 아무 주장도 하고 있지 않다는 역설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름이란 각자 고유한 본질을 지닌 사물을 가르치거나 그 상태를
판단하기 위해, 또한 묻고 답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이다. 가르치거나
판단하고 변증하는 행위가 이름하기이며, 이름의 제작 장인은 입법가,
이름의 사용 기술자는 변증 기술자이다.
이어서 391b부터 이름의 옳음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기 시작하면서,
칼리아스가 프로타고라스에게서 이를 배웠다고 언급한다.
이윤철(2021)의 지적대로 385e4-386a4에서 프로타고라스의
만물척도설은 이름의 옳음을 부정하는 입장으로 귀결되는 이론으로서
언급되었던 반면, 391b-c에서는 프로타고라스가 이름의 옳음을
주장하는 자로 언급된다. 프로타고라스에 대한 이러한 상충되는 두
서술은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 인식론과 자연주의 언어론
사이의 상충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전체로서 말의 참거짓과 그 부분으로서 이름의 참거짓에 대한 언급은
위의 논의에 따르면 이름에 관련하여 옳고 그름, 그 제작과 사용에
있어서 분별 있는 자의 행위와 무분별한 자의 행위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대한 근거로 제시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말과 이름의 참거짓을
논하는 부분을 생략할 경우, 헤르모게네스에게 규약주의에 따라 공적 이름과
사적 이름이 모두 있는지 묻고, 여기에 이어서 각자가 명명하는 그 이름이
각 사물의 이름인지 확인하는 논의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다. 또한 말과
이름의 관계가 이와 같이 분명하다면, 이름하기를 가르치고 판단하며 변증하는
행위와 동일시하는 서술이 그 뒤에 등장하는 점이 어색하다. 오히려 말하기가
이러한 행위에 해당할 것이고, 이름은 말의 부분일 뿐이므로 이름하기만으로는
해당 행위를 포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거짓 논의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자연주의적 이름 이해가 각 사물의 고유한 본질을 전제하고 이에 따라 이름의
옳음을 긍정하며, 규약주의와 상대주의 이름 이해는 이러한 사물의 본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비판은 여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 문제를
추가로 고민해 봐야 하겠다.
408c 이후에 385b-d가 온다면 어떨까? 편집 사항 참고할 것.)
이름의 옳음에 관련한 프로타고라스의 입장은 논외로 하고, 논의는 호메로스의
사례를 중심으로 고찰되기 시작한다.
ΕΡΜ. Καὶ τί λέγει, ὦ Σώκρατες, Ὅμηρος περὶ 391d2
ὀνομάτων, καὶ ποῦ;
그럼, 소크라테스, 호메로스께서 이름들에 관하여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또 어디서 말씀하셨습니까?
ΣΩ. Πολλαχοῦ· μέγιστα δὲ καὶ κάλλιστα ἐν οἷς διο-
ρίζει ἐπὶ τοῖς αὐτοῖς ἅ τε οἱ ἄνθρωποι ὀνόματα καλοῦσι καὶ 5
οἱ θεοί. ἢ οὐκ οἴει αὐτὸν μέγα τι καὶ θαυμάσιον λέγειν ἐν
τούτοις περὶ ὀνομάτων ὀρθότητος; δῆλον γὰρ δὴ ὅτι οἵ γε
θεοὶ αὐτὰ καλοῦσιν πρὸς ὀρθότητα ἅπερ ἔστι φύσει ὀνό-
ματα· ἢ σὺ οὐκ οἴει; e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지. 그런데 가장 중대하고도 훌륭하게
말씀하신 건 인간들도 신들께서도 이름들을 부르는 같은
것들을 두고 그 분께서 규정하신 구절들에서라네.
아니면 자네는 그 분께서 이런 구절에서 이름들의 옳음에
관련하여 뭔가 중요하고도 놀라운 것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적어도 신들께서는 그것들을
본성상 이름으로 있는 바로 그 이름들로 옳음을 향해서
부르신다는 게 분명하니까. 자네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같은 대상에 대해 신과 인간이 달리 부른다면, 신은 부족함이
없는 반면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므로, 신이 부르는 이름이
옳은 이름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헤파이토스와 싸운 트로이아 강을 두고 신들은 크산토스,
사람들은 스카만드로스라 불렀다.391e-392a
여기서는 신들의 이름이 옳을 것이다.
헥토르의 아들을 두고서는 아스튀아낙스라 부른 사람들과
스카만드리오스라 부른 사람들이 나뉘는데, 이 경우에는
아스튀아낙스가 트로이아인들이 부른 이름이고 후자는 여인들이
부른 이름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분별있다는 점에 따라
이 경우 전자가 옳은 이름으로 간주된다.
아스튀아낙스와 헥토르는 둘 모두 '소유'를 의미하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고, 헥토르는 왕으로서 나라를 소유하는 자이고,
헥토르와 아스튀아낙스는 부자지간으로 공유되는 본성이
있다고 간주한다. 즉, 이 두 사람의 이름은 그 두 사람의
본성을 잘 표현하는 이름이 된다. 이 경우 음절이나 철자의 차이는
상관이 없다.
οὐδ᾿ εἰ πρόσκειταί τι γράμμα ἢ ἀφῄρηται, οὐδὲν οὐδὲ
τοῦτο, ἕως ἂν ἐγκρατὴς ᾖ ἡ οὐσία τοῦ πράγματος δηλου-
μένη ἐν τῷ ὀνόματι. 393d5
또 어떤 철자가 추가되거나 탈락되더라도, 이 또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니, 그 이름 내에서 해당 사태의 그 있음이
드러나며 주도적인 것으로서 있는 한은 그렇다네.
이름이 대상의 있음, 본성을 드러내며 그게 주된 경우에
이름의 요소들이 만드는 차이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부터, 유사한(같은?) 본성을 표현하는 서로
다른 이름들이 양립할 가능성이 제시되기 시작한다. 즉
같은 뜻을 가진 다른 이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 ἀτεχνῶς γάρ ἐστιν οἷον λόγος τὸ 396a2
τοῦ Διὸς ὄνομα, [...]
제우스의 이름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말이다.
<여태까지 고찰한 이름들이 모두 그와 같이 사실은 일종의 말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이름이 사물의 본성을 가르쳐주고 변증하는 데에 사용된다면, 그리고 이름이
사물을 어떤 식으로 모방하려면 그것은 대상과 일부는 같고 일부는 달라야 한다.
이름과 사물이 같다면 그 둘이 구분될 수 없이 하나가 되어 버리고, 아예 다른
것이라면 이름이 사물을 표현할 수가 없다. 이름이 말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말은 전체이고 이름은 그 부분이란 구도에 따라 이름도 전체로서 자신의
부분들을 가질 것이고, 이 부분들은 다시 음절과 철자일 것이다. 그런데
음절과 철자 또한 그것을 대상으로 하는 그것들 각각의 이름들이 있다.
그리고 이름이 있는 한 이러한 소급은 무한히 진행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름이 아예 없는 것이 존재할 테고 그것은 지시하거나 부르거나 표현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다른 자모로 이루어진 이름들이 같은 본성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E.g.,
아스튀아낙스: "아낙스"는 '주인'을 뜻한다.
헥토르: '소유자'를 뜻한다.
아르케폴리스: 도시("폴리스")를 통치("아르케")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이름이 그 자체로 대상의 본성을 표현할 경우, 동어반복은
주어와 보어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에 대하여 그 본질을
서술하는 것이 된다. 아르케폴리스는 아르케폴리스이다=아르케폴리스는
도시를 통치한다.>
[...] δοκεῖ
οὖν μοι χρῆναι οὑτωσὶ ἡμᾶς ποιῆσαι· τὸ μὲν τήμερον εἶναι e
χρήσασθαι αὐτῇ καὶ τὰ λοιπὰ περὶ τῶν ὀνομάτων ἐπισκέ-
ψασθαι, αὔριον δέ, ἂν καὶ ὑμῖν συνδοκῇ, ἀποδιοπομπη-
σόμεθά τε αὐτὴν καὶ καθαρούμεθα ἐξευρόντες ὅστις τὰ
τοιαῦτα δεινὸς καθαίρειν, εἴτε τῶν ἱερέων τις εἴτε τῶν 397a1
σοφιστῶν.
그래서 내겐 우리가 그런 식으로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네.
오늘은 이 지혜를 사용하여 이름들에 관련된 남은 일들도
검토할 수 있지만, 내일은, 자네들에게도 괜찮게 여겨진다면,
우린 그 지혜를 주문을 외워 쫓아내고 누구든 이런 것들을
정화하는 데에 무시무시한 자라면, 사제들 중 누군가든
소피스트들 중 누군가이든 그를 찾아내 우리를 정화할 걸세.
<신들의 이름이 그 신의 본성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름의
옳음을 지니고 있다는, 자연주의 이름 이해에 따른 지혜를
내일은 폐기하고 스스로 정화할 수도 있다.>
앞서 신들의 이름과 달리, 영웅 및 인간의 이름은 선조로부터
유래하거나 부적절하게, 또한 (대상의 본성과 별개로) 대상에
대한 기원을 담아 명명을 한 경우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름들을 제외하고 '본성상 언제나 있는 것들'의 이름들을 앞서의
지혜에 따라 추가 검토한다. 그 예시로는 신들(천체들)과 신령들이
제시된다.(397a-398c)
그런데 앞서 제외하기로 하였던 영웅들의 이름을 여기에서(398c5-)
검토하기 시작한다. (물론 앞서 제외된 것은 영웅 각 개인의
이름인 반면, 여기에서 검토되는 것은 '영웅'이라는 일반명사이다.
이는 플라톤이 고유명사와 일반명사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반명사 '인간'에 대해서도
검토가 이루어진다.
<393d, 396e, 399a, 401e, 406c 소크라테스의 말에 주의하라는 경고와
자신의 입장에 대한 의구심.>
이어서 399d부터 "영혼," "육체"라는 이름을 검토한 다음, 헤르모게네스는
다시 "제우스"와 같이 신들 각각의 고유명사를 같은 방식으로
검토해 보길 요청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스스로 또
서로를 부르는 이름에 대해서는 무지를 인정할 것을 제안하고,
신들이 기뻐하길 기원하며 인간들이 신들을 부르는 그러한
이름을 검토하는 차선책을 제안한다. (397a-398c에서 영웅들
각자의 이름 중에 소망이나 기원을 담은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이름을 통해 이름의 옳음을 검토하지 못하는 이유로
지적된 바 있다. 이를 고려하면 인간이 신들의 기쁨을 '기원'하며
만든 이름에는 이름의 옳음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영혼에 관련하여서는 숨을 쉬게 만드는 것(anapsychon)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명에서 나아가 본성(physis)을 운반(ochei)하는
것이기에 프쉬케라 불린다는 설명을 제시한다. 이 설명은
'에우튀프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 평가된다.
이 평가가 과연 긍정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육체는
무덤(sema), 표지(sema), 그리고 보존하다(soizetai)와 감옥(soma)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분석한다.>
401b부터 헤스티아, 크로노스, 레아의 이름이 검토된다. 헤스티아는
ousia, esti를 중심으로 분석되는 반면, 레아와 크로노스에 관련하여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이 고찰된다. 만물유전...
421e. 어구에서 또 다시 어구로. 이름은 이름이 한에서 대상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목표를 같은 방식으로 마찬가지로 성취해야 한다. 그러나
최초의 이름으로부터 이후의 이름들은 이러한 목표를 성취한다. 반면
최초의 이름들은 이러한 기초를 가지지 않게 된다.
427d에 이르러 이름의 옳음에 관련한 본질주의적 고찰이 마무리된다.
분석은 음절과 철자들까지 내려가고, 이것들 중 하나든 여럿이든
그것으로 대상을 닮음을 기준으로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 방법을 설명할 수 없다면 최초의 이름에 대해 그 옳음을
판별할 수도 없다. 다른 방식은 기계장치 신을 등장시키듯 신이 최초에
이름을 지어 그것이 옳다고 넘어가거나 아니면 고대의 외지인이 지어서
그 방식을 이제 소급해 추적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뿐이다.
407e에서는 헤르모게네스의 이름을 거짓 이름이라 말한 크라튈로스의
언급을 다시 꺼내며 그 이름 안에 들어있는 신의 이름인 "헤르메스"를
고찰하게 된다.
408c에서는 헤르메스의 아들 판의 이름이 모든 것("판")을 다루는 언어와
같은 점이 있이며 언어가 참과 거짓을 가지듯 판 역시 두 가지 본성을
지닌다고 이야기된다.
<본질주의 이름 분석은 음절과 철자, 즉 원소의 수준까지 진행되고,
원소와 원소의 이름은 아예 일치하거나 혹은 전자의 본성을 후자가
표현할 것이다. 일치할 경우 이름과 이름의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고, 표현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다시금 그 표현 안에
포함되는 원소로서의 이름들로 분석이 더 진행될 것이다. 후자는
무한소급의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 원소 이름이 있는 것들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경우에는, 이름을 통해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알 수 없는 것을 알아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운동만 하는 경우에도
오직 정지만 있는 경우에도 그것을 이름으로 지시하고 표현하는
일이 불가능하므로, 이미 세계는 운동과 정지 양자를 모두 포함해야
하는데 이 경우 단일한 원소가 세계에 대한 이름으로 옳을 수 없다.>
-작성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