Πῶς δ᾿ οὔ;
  "어찌 아니겠습니까?"

  Οὐ μόνον ἄρα δυνατὸν ἀλλὰ καὶ ἄριστον πόλει νόμιμον ἐτίθεμεν.
  "그래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한 법을 우리가 폴리스에 세워준 걸세."

  Οὕτως.
  "그렇습니다."

  Ἀποδυτέον δὴ ταῖς τῶν φυλάκων γυναιξίν, ἐπείπερ ἀρετὴν ἀντί ἱματίων ἀμφιέσονται, καὶ κοινωνητέον πολέμου τε καὶ τῆς ἄλλης φυλακῆς τῆς περὶ τὴν πόλιν, καὶ οὐκ ἄλλα πρακτέον· τούτων δ᾿ αὐτῶν τὰ ἐλαφρότερα ταῖς γυναιξὶν ἢ τοῖς ἀνδράσι δοτέον διὰ τὴν τοῦ γένους ἀσθένειαν. ὁ δὲ γελῶν [b] ἀνὴρ ἐπὶ γυμναῖς γυναιξί, τοῦ βελτίστου ἕνεκα γυμναζομέναις, ἀτελῆ τοῦ γελοίου σοφίας δρέπων καρπόν, οὐδὲν οἶδεν, ὡς ἔοικεν, ἐφ᾿ ᾧ γελᾷ οὐδ᾿ ὅτι πράττει· κάλλιστα γὰρ δὴ τοῦτο καὶ λέγεται καὶ λελέξεται, ὅτι τὸ μὲν ὠφέλιμον καλόν, τὸ δὲ βλαβερὸν αἰσχρόν.
  "그럼 그 수호자들 중에서 여성들은 만일 그들이 정말로 히마티온(옷) 대신에 덕을 걸치려면 옷을 벗어야만 하고, 또한 전쟁을 그리고 폴리스에 관련된 그 밖의 수호하는 일도 공유해야만 하며, 여타의 일들은 하지 않아야 하네. 그런데 바로 이런 일들 중에서 더 가벼운 일들은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에게 부과되어야만 하는데 그 부류의 연약함 때문이지. 그런데 벌거벗은 여성들을 향해, 가장 좋은 것을 위하여 벗은 그녀들을 향해 웃어제끼는 사내는, 웃음에 대한 채 여물지 못한 지혜의 열매를 따면서, 그가 웃어버린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무슨 짓을 하는지도 알지 못할 것 같군. 이 말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이야되고 또 이야기된 것일 채일 테니까. 이로운 것은 아름답고, 해로운 것은 추하다는 것이지."

  Παντάπασι μὲν οὖν.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Τοῦτο μὲν τοίνυν ἓν ὥσπερ κῦμα φῶμεν διαφεύγειν τοῦ γυναικείου πέρι νόμου λέγοντες, ὥστε μὴ παντάπασι κατακλυσθῆναι, τιθέντας ὡς δεῖ κοινῇ πάντα ἐπιτηδεύειν τούς τε [c] φύλακας ἡμῖν καὶ τὰς φυλακίδας, ἀλλά πῃ τὸν λόγον αὐτὸν αὑτῷ ὡμολογῆσθαι ὡς δυνατά τε καὶ ὠφέλιμα λέγει;
  "그러니까 우리가 여성에 대한 법에 관해 논하면서 이런 마치 하나의 파도와 같은 것을 빠져 나왔다고, 그래서, 우리의 수호자들은 남녀 모두 공동으로 모든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정하면서, 완전히 쓸려 나가지 안게 되었다고, 오히려 가능하고도 유익하다고 논하는 그 논의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에 합치되었노라고 말해도 좋을까?"

  Καὶ μάλα, ἔφη, οὐ σμικρὸν κῦμα διαφεύγεις.
  그는 말했네. "물론이지요, 만만찮은 파도를 빠져 나오셨습니다."

  Φήσεις δέ, ἦν δ᾿ ἐγώ, οὐ μέγα αὐτὸ εἶναι, ὅταν τὸ μετὰ τοῦτο ἴδῃς.
  내가 말했지. "자넨 그게 대단치도 않다고 말할 걸세, 이 다음 파도를 볼 때에는 말이지."

  Λέγε δή· ἴδω, ἔφη.
  그가 말했네. "그럼 말씀해 주세요, 제가 보겠습니다." 

  Τούτῳ, ἦν δ᾿ ἐγώ, ἕπεται νόμος καὶ τοῖς ἔμπροσθεν τοῖς ἄλλοις, ὡς ἐγᾦμαι, ὅδε.
  나는 말했다네. "이 법에 그리고 앞서 여타의 법들에 뒤따르는 법은, 내 생각으로는, 이런 것이라네."

  Τίς;
  "무슨 법인가요?"

  Τὰς γυναῖκας ταύτας τῶν ἀνδρῶν τούτων πάντων πάσας [d] εἶναι κοινάς, ἰδίᾳ δὲ μηδενὶ μηδεμίαν συνοικεῖν· καὶ τοὺς παῖδας αὖ κοινούς, καὶ μήτε γονέα ἔκγονον εἰδέναι τὸν αὑτοῦ μήτε παῖδα γονέα.
  "이 모든 사내들의 그 모든 여인들이 공공의 여인들이도록, 개인적으로는 그 누구 한 사람에게도 그 어떤 한 여인도 동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 또한 아이들도 공공의 아이들이도록 하며, 태어난 가족을 알지도 못하고 그 낳은 자의 자식도 가족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네."

  Πολύ, ἔφη, τοῦτο ἐκείνου μεῖζον πρὸς ἀπιστίαν καὶ τοῦ δυνατοῦ πέρι καὶ τοῦ ὠφελίμου.
  그는 말했지. "이건 저것보다 그 가능성과 유익함이 훨씬 더 대단히 믿기 어렵네요."

  Οὐκ οἶμαι, ἦν δ᾿ ἐγώ, περί γε τοῦ ὠφελίμου ἀμφισβητεῖσθαι ἄν, ὡς οὐ 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 κοινὰς μὲν τὰς γυναῖκας εἶναι, κοινοὺς δὲ τοὺς παῖδας, εἴπερ οἷόν τε· ἀλλ᾿ οἶμαι περὶ τοῦ εἰ δυνατὸν ἢ μὴ πλείστην ἀμφισβήτησιν γενέσθαι.
  나는 말했다네. "나는 적어도 그 유익함에 관하여서는, 한편으로 여인들이 공공의 여인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식들이 공공의 자식들이라는 게 가장 크게 좋은 게 아니라고 하는 논쟁거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만일 그런 일이 가능하기만 하다면야 말이지. 오히려 나는 그 일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하여 대단한 논의가 생긴다고 생각하지."

  [e] Περὶ ἀμφοτέρων, ἦ δ᾿ ὅς, εὖ μάλ᾿ ἂν ἀμφισβητηθείη.
  그는 말했네. "양쪽 모두에 관해서 꽤나 대단한 논의가 일 것입니다."

  Λέγεις, ἦν δ᾿ ἐγώ, λόγων σύστασιν· ἐγὼ δ᾿ ᾤμην ἔκ γε τοῦ ἑτέρου ἀποδράσεσθαι, εἴ σοι δόξειεν ὠφέλιμον εἶναι, λοιπὸν δὲ δή μοι ἔσεσθαι περὶ τοῦ δυνατοῦ καὶ μή.
  나는 말했지. "자네는 함께 놓는 걸 말하는구만. 그런데 나는, 자네에게 유익하다 여겨진다면, 한 쪽으로부터는 달아나게 되리라고, 그래서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내게 남겨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네."

  Ἀλλ᾿ οὐκ ἔλαθες, ἦ δ᾿ ὅς, ἀποδιδράσκων, ἀλλ᾿ ἀμφοτέρων πέρι δίδου λόγον.
  그는 말했네. "그럼 남몰래 달아나지 못하셨고, 그러니 양쪽 모두에 관하여 설명을 해 주세요."

  Ὑφεκτέον, ἦν δ᾿ ἐγώ, δίκην. τοσόνδε μέντοι χάρισαί μοι· [458a] ἔασόν με ἑορτάσαι, ὥσπερ οἱ ἀργοὶ τὴν διάνοιαν εἰώθασιν ἑστιᾶσθαι ὑφ᾿ ἑαυτῶν, ὅταν μόνοι πορεύωνται. καὶ γὰρ οἱ τοιοῦτοί που, πρὶν ἐξευρεῖν τίνα τρόπον ἔσται τι ὧν ἐπιθυμοῦσι, τοῦτο παρέντες, ἵνα μὴ κάμνωσι βουλευόμενοι περὶ τοῦ δυνατοῦ καὶ μή, θέντες ὡς ὑπάρχον εἶναι ὃ βούλονται, ἤδη τὰ λοιπὰ διατάττουσιν καὶ χαίρουσιν διεξιόντες οἷα δράσουσι γενομένου, ἀργὸν καὶ ἄλλως ψυχὴν ἔτι ἀργοτέραν [b] ποιοῦντες. ἤδη οὖν καὶ αὐτὸς μαλθακίζομαι, καὶ ἐκεῖνα μὲν ἐπιθυμῶ ἀναβαλέσθαι καὶ ὕστερον ἐπισκέψασθαι ᾗ δυνατά, νῦν δὲ ὡς δυνατῶν ὄντων θεὶς σκέψομαι, ἄν μοι παριῇς, πῶς διατάξουσιν αὐτὰ οἱ ἄρχοντες γιγνόμενα, καὶ ὅτι πάντων συμφορώτατ᾿ ἂν εἴη πραχθέντα τῇ τε πόλει καὶ τοῖς φύλαξιν. ταῦτα πειράσομαί σοι πρότερα συνδιασκοπεῖσθαι, ὕστερα δ᾿ ἐκεῖνα, εἴπερ παρίης.
  나는 말했네. "정의에 따라야만 하는군. 그렇지만 이 만큼은 내게 호의를 베푸시게. 내게 만찬을 허락하시게. 마치 빈둥거리는 자들이, 혼자서 거닐 때, 습관처럼 자기네들 스스로 생각의 잔치를 벌이듯이 말일세.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도 아마도, 그들이 열중하는 것들 중 무언가가 성립할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전까지는, 그 가능과 불가능에 관해 숙고하느라 고생하지 않으려, 이것을 내버려 두는데, 그 숙고되는 것을 이미 성립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리하고, 이제 남은 것들을 배치시키고 그것이 생겨나 어떤 일들을 해낼는지 상술하면서 기뻐하니까, 달리 말해 게으른 영혼을 훨씬 더 게으르게 만들면서 말이지. 그러니 나 자신도 이미 느긋해졌고, 그래서 저것들은 미뤘다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고찰해 볼 작정이나, 지금은, 자네가 날 내버려 둔다면, 그것들이 가능하다 치고서, 그 이루어진 것들을 지배하는 자들이 그것들을 어찌 배열할는지, 그리고 실천된다면 우리의 폴리스와 그 수호자들에게 모든 일들 중 가장 유익하리란 점도 살펴 볼 걸세. 나는 먼저 이런 것들을 자네와 더불어 검토하여 거쳐 보고자 시도할 것이고, 다음으로 저것들을 그리 하려 하네, 자네가 내버려 둔다면 말이지."

  Ἀλλὰ παρίημι, ἔφη, καὶ σκόπει.
  그는 말했네. "그럼 저는 놓아 드릴 테니, 검토해 주세요."

  Οἶμαι τοίνυν, ἦν δ᾿ ἐγώ, εἴπερ ἔσονται οἱ ἄρχοντες ἄξιοι [c] τούτου τοῦ ὀνόματος, οἵ τε τούτοις ἐπίκουροι κατὰ ταὐτά, τοὺς μὲν ἐθελήσειν ποιεῖν τὰ ἐπιταττόμενα, τοὺς δὲ ἐπιτάξειν, τὰ μὲν αὐτοὺς πειθομένους τοῖς νόμοις, τὰ δὲ καὶ μιμουμένους, ὅσα ἂν ἐκείνοις ἐπιτρέψωμεν.
  내가 말했네. "그러니까 나는 만일 정말로 그 지배자들이 제 이름에 값하는 자들일 것이라면, 이들을 위한 용병들도 같은 방식이리라면, 이들은 배정받은 일들을 기꺼이 행할 것이고, 저들은 기꺼이 배정할 것이니, 어떤 일들은 법들을 준수하여, 다른 일들은 법들을 모방해서, 우리가 저들에게 맡길 모든 일들을 그리 할 것이라 생각한다네."

  Εἰκός, ἔφη.
  그는 말했지. "그럴 것 같네요."

  Σὺ μὲν τοίνυν, ἦν δ᾿ ἐγώ, ὁ νομοθέτης αὐτοῖς, ὥσπερ τοὺς ἄνδρας ἐξέλεξας, οὕτω καὶ τὰς γυναῖκας παραδώσεις καθ᾿ ὅσον οἷόν τε ὁμοφυεῖς· οἱ δέ, ἅτε οἰκίας τε καὶ συσσίτια κοινὰ ἔχοντες, ἰδίᾳ δὲ οὐδενὸς οὐδὲν τοιοῦτον κεκτημένου, [d] ὁμοῦ δὴ ἔσονται, ὁμοῦ δὲ ἀναμεμειγμένων καὶ ἐν γυμνασίοις καὶ ἐν τῇ ἄλλῃ τροφῇ ὑπ᾿ ἀνάγκης, οἶμαι, τῆς ἐμφύτου ἄξονται πρὸς τὴν ἀλλήλων μεῖξιν. ἢ οὐκ ἀναγκαῖά σοι δοκῶ λέγειν;
  내가 말했다네. "그러니 자네는, 그들을 위한 입법가로서, 그 사내들을 자네가 선출했던 것처럼, 그런 식으로 그 여인들 역시 본성이 닮을 수 있는 한에서 <선출하여> 넘겨주 걸세. 그런데 그 사내들은, 집도 함께 하는 식사도 공공의 것으로 지니기 때문에, 사적으로는 그 누구도 이런 것은 아무것도 획득한 바 없는지라, 함께 지낼 것이고, 또 함께 체육관에서든 다른 양육의 경우에든 뒤섞일 것이며, 내 생각에, 그 생득적인 필연에 의해 서로의 교배로 이끌릴 걸세. 아니면 자네에겐 내가 필연적인 일들을 논하는 걸로 보이지 않는가?"

  Οὐ γεωμετρικαῖς γε, ἦ δ᾿ ὅς, ἀλλ᾿ ἐρωτικαῖς ἀνάγκαις, αἳ κινδυνεύουσιν ἐκείνων δριμύτεραι εἶναι πρὸς τὸ πείθειν τε καὶ ἕλκειν τὸν πολὺν λεών.
  그는 말했지. "기하학적 필연으로는 아닙니다만, 상열지사의 필연으로 그렇군요. 저 필연보다는 이 필연이 많은 남자무리를 설복시키고 이끌기에 더 날카로울 것도 같네요."

  Καὶ μάλα, εἶπον. ἀλλὰ μετὰ δὴ ταῦτα, ὦ Γλαύκων, ἀτάκτως μὲν μείγνυσθαι ἀλλήλοις ἢ ἄλλο ὁτιοῦν ποιεῖν οὔτε [e] ὅσιον ἐν εὐδαιμόνων πόλει οὔτ᾿ ἐάσουσιν οἱ ἄρχοντες.
  내가 말했네. "훨씬 더 말이지. 그러면 이 다음으로는, 글라우콘, 서로 무질서하게 교배를 하든 뭐가 됐든 다른 짓을 하든 행복한 폴리스에서는 그런 일이 신성히 용납되지도 않고 그 지배자들이 그런 일을 허락하지도 않겠지?"

  Οὐ γὰρ δίκαιον, ἔφη.
  그는 말했네. "그야 온당치 못하니까요."

  Δῆλον δὴ ὅτι γάμους τὸ μετὰ τοῦτο ποιήσομεν ἱεροὺς εἰς δύναμιν ὅτι μάλιστα· εἶεν δ᾿ ἂν ἱεροὶ οἱ ὠφελιμώτατοι.
  "그래서 이 다음으로 우리는 혼인을 가능한 한 최대로 신성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네. 가장 이로운 자들은 신성한 자들일 테니까."

  Παντάπασι μὲν οὖν.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459a] Πῶς οὖν δὴ ὠφελιμώτατοι ἔσονται; τόδε μοι λέγε, ὦ Γλαύκων· ὁρῶ γάρ σου ἐν τῇ οἰκίᾳ καὶ κύνας θηρευτικοὺς καὶ τῶν γενναίων ὀρνίθων μάλα συχνούς· ἆρα οὖν, ὦ πρὸς Διός, προσέσχηκάς τι τοῖς τούτων γάμοις τε καὶ παιδοποιίᾳ;
   "그러면 실로 어떻게 그들이 가장 이로운 자들일 것인가? 내게 이걸 말해주게, 글라우콘. 내 자네 집에서 사냥할 줄 아는 개들과 굉장히 많은 혈통 좋은 새들을 보아서 하는 말일세. 그럼 혹시, 제우스에 대고서, 그것들의 짝짓기와 새끼치기에 뭔가 들러붙어 본 일이 있는가?"

  Τὸ ποῖον; ἔφη.
  그는 말했네. "어떤 걸요?"

  -蟲-

Οὐ σκέψῃ, ἔφη, παῖ, φάναι τὸν Ἀγάθωνα, καὶ εἰσάξεις Σωκράτη; σὺ δ', ἦ δ' ὅς, Ἀριστόδημε, παρ' Ἐρυξίμαχον κατακλίνου.
그는 말했네. "아가톤이 이리 말하더군. '얘야, 소크라테스를 찾아 보고 모셔 오지 않으련?' 그리고 그가 말했지. '아리스토데모스, 자네는 에뤽시마코스 곁에 앉으시게.'"
Καὶ ἓ μὲν ἔφη ἀπονίζειν τὸν παῖδα ἵνα κατακέοιτο· ἄλλον δέ τινα τῶν παίδων ἥκειν ἀγγέλλοντα ὅτι “Σωκράτης οὗτος ἀναχωρήσας ἐν τῷ τῶν γειτόνων προθύρῳ ἕστηκεν, κἀμοῦ καλοῦντος οὐκ ἐθέλει εἰσιέναι.”
그리고는 아이가 그를 앉을 수 있도록 씻겨 주었다고 하네. 그런데 아이들 중 다른 어떤 아이가 와서 이리 전하더라네. '지금 이 소크라테스께서는 물러나 이웃집 현관에 서 계셨고, 제가 청하여도 들어 오지 않으려 하십니다.'
[Stephanus page 175, section a, line 10] Ἄτοπόν γ', ἔφη, λέγεις· οὔκουν καλεῖς αὐτὸν καὶ μὴ ἀφήσεις;
그는 말했지. '그것 참 이상한 얘기로구나. 그럼 떠나지 말고 그 분을 불러야 하지 않니?'"
Καὶ ὃς ἔφη εἰπεῖν Μηδαμῶς, ἀλλ' ἐᾶτε αὐτόν. ἔθος γάρ τι τοῦτ' ἔχει· ἐνίοτε ἀποστὰς ὅποι ἂν τύχῃ ἕστηκεν. ἥξει δ' αὐτίκα, ὡς ἐγὼ οἶμαι. μὴ οὖν κινεῖτε, ἀλλ' ἐᾶτε.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 "부디 그러지 말고, 그 분을 놓아 두시게. 그야 그런 무슨 습관 같은 것을 갖고 계시니 말이지. 그 분께서는 이따금 되는대로 어디로든 자리를 피하셔서는 서 계시지. 금방 오실 걸세, 내가 생각하기로는 말이야. 그러니 닥달하지 말고, 놓아 두시게."
Ἀλλ' οὕτω χρὴ ποιεῖν, εἰ σοὶ δοκεῖ, ἔφη φάναι τὸν Ἀγάθωνα. ἀλλ' ἡμᾶς, ὦ παῖδες, τοὺς ἄλλους ἑστιᾶτε. πάντως παρατίθετε ὅτι ἂν βούλησθε, ἐπειδάν τις ὑμῖν μὴ ἐφεστήκῃ - ὃ ἐγὼ οὐδεπώποτε ἐποίησα - νῦν οὖν, νομίζοντες καὶ ἐμὲ ὑφ' ὑμῶν κεκλῆσθαι ἐπὶ δεῖπνον καὶ τούσδε τοὺς [Stephanus page 175, section c, line 1] ἄλλους, θεραπεύετε, ἵν' ὑμᾶς ἐπαινῶμεν.
'그럼 그리 해야만 하겠네, 자네 보기에 그러는 게 좋다면.' 아가톤이 그리 말했다네. '하지만 아이들아, 그 밖에 우리에게는 음식을 내오려무나. 누가 너희를 불러 세우지 않으면,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지,  너희들 내키는대로 내오렴. 그러니 이제, 나나 여기 다른 사람들이나 너희에 의해 식사에 초대받았다 생각하고, 시중을 들거라, 우리가 너희를 칭찬하게끔 말이지.'
Μετὰ ταῦτα ἔφη σφᾶς μὲν δειπνεῖν, τὸν δὲ Σωκράτη οὐκ εἰσιέναι. τὸν οὖν Ἀγάθωνα πολλάκις κελεύειν μεταπέμψασθαι τὸν Σωκράτη, ἓ δὲ οὐκ ἐᾶν. ἥκειν οὖν αὐτὸν οὐ πολὺν χρόνον ὡς εἰώθει διατρίψαντα, ἀλλὰ μάλιστα σφᾶς μεσοῦν δειπνοῦντας. τὸν οὖν Ἀγάθωνα - τυγχάνειν γὰρ ἔσχατον κατακείμενον μόνον - Δεῦρ', ἔφη φάναι, Σώκρατες, παρ' ἐμὲ κατάκεισο, ἵνα καὶ τοῦ σοφοῦ ἁπτόμενός σου ἀπολαύσω, ὅ σοι προσέστη ἐν τοῖς προθύροις. δῆλον γὰρ ὅτι ηὗρες αὐτὸ καὶ ἔχεις· οὐ γὰρ ἂν προαπέστης.
이런 일들이 있고 난 다음 그들은 식사를 했는데, 소크라테스께서는 들어 오지 않으셨다고 하네. 그리하여 아가톤이 빈번히 소크라테스께 사람을 보내자고 청하였지만, 그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더군. 그래서 그 분께서 습관대로 그리 많은 시간을 보내시지 않고 당도하셨으나, 그들 대부분이 한창 식사 중이었다네. 그래서 아가톤이, 마침 그 혼자만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기 떄문에, 이리 말했다고 하네. "소크라테스, 제 곁에 앉으시지요, 당신께 닿아 당신의 지혜 덕 좀 보게요. 그 현관에서 당신께 떠오른 지혜 말입니다. 그야 당신께서 그것을 발견하셔서 지니고 계실 게 분명하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떠나 오시지 않으셨겠죠."
[Stephanus page 175, section d, line 3] Καὶ τὸν Σωκράτη καθίζεσθαι καὶ εἰπεῖν ὅτι Εὖ ἂν ἔχοι, φάναι, ὦ Ἀγάθων, εἰ τοιοῦτον εἴη ἡ σοφία ὥστ' ἐκ τοῦ πληρεστέρου εἰς τὸ κενώτερον ῥεῖν ἡμῶν, ἐὰν ἁπτώμεθα ἀλλήλων, ὥσπερ τὸ ἐν ταῖς κύλιξιν ὕδωρ τὸ διὰ τοῦ ἐρίου ῥέον ἐκ τῆς πληρεστέρας εἰς τὴν κενωτέραν. εἰ γὰρ οὕτως ἔχει καὶ ἡ σοφία, πολλοῦ τιμῶμαι τὴν παρὰ σοὶ κατάκλισιν· οἶμαι γάρ με παρὰ σοῦ πολλῆς καὶ καλῆς σοφίας πληρωθήσεσθαι. ἡ μὲν γὰρ ἐμὴ φαύλη τις ἂν εἴη, ἢ καὶ ἀμφισβητήσιμος ὥσπερ ὄναρ οὖσα, ἡ δὲ σὴ λαμπρά τε καὶ πολλὴν ἐπίδοσιν ἔχουσα, ἥ γε παρὰ σοῦ νέου ὄντος οὕτω σφόδρα ἐξέλαμψεν καὶ ἐκφανὴς [Stephanus page 175, section e, line 6] ἐγένετο πρῴην ἐν μάρτυσι τῶν Ἑλλήνων πλέον ἢ τρισμυρίοις.
그러자 소크라테스께서 앉으셔서 이리 말씀하셨다고 그가 말하더군. "그렇다면 좋겠지, 아가톤, 만일 지혜가 이런 것이어서, 우리가 서로 맞닿아 있노라면, 우리 중 더 채워진 자로부터 더 빈 사람에게로 흐른다면, 마치 두 잔 속의 물이 더욱 채워진 데에서 더 빈 데에로 털실을 따라 흐르듯이 말이야. 지혜 또한 그렇다면야, 자네의 곁자리인 걸 아주 영광으로 알겠네. 내가 자네 곁에서 여러 아름다운 지혜로 채워지리라 생각하니까. 그야 내 지혜는 보잘 것 없는 것일 터이고, 혹은 마치 꿈 속의 것처럼 의심스럽기까지 할진데, 자네의 지혜는 빛나는 데다 넓은 품까지 지녀서, 바로 그 지혜가 어린 나이임에도 자네에게서 엊그제 그리스의 3만을 넘는 증인들 사이에서 그렇게나 지극히 광휘를 발하며 빛나게 되었으니 말일세."
Ὑβριστὴς εἶ, ἔφη, ὦ Σώκρατες, ὁ Ἀγάθων. καὶ ταῦτα μὲν καὶ ὀλίγον ὕστερον διαδικασόμεθα ἐγώ τε καὶ σὺ περὶ τῆς σοφίας, δικαστῇ χρώμενοι τῷ Διονύσῳ· νῦν δὲ πρὸς τὸ δεῖπνον πρῶτα τρέπου.
"아가톤은 말했네. '과하십니다, 소크라테스. 지혜와 관련하여 이런 것들도 또 조금 뒤에 저와 당신 모두 판결을 받을 겁니다, 디오뉘소스를 판관으로 삼아서 말이에요. 지금은 먼저 식사로 눈을 돌리시지요.'"

-蟲-

  Δίκαιον γοῦν.
  "지당하신 말씀이네요."

  Τάχα τοίνυν ἄν, ὅπερ σὺ ὀλίγον πρότερον ἔλεγες, εἴποι ἂν καὶ ἄλλος, ὅτι ἐν μὲν τῷ παραχρῆμα ἱκανῶς εἰπεῖν οὐ ῥᾴδιον, ἐπισκεψαμένῳ δὲ οὐδὲν χαλεπόν.
  "그러니까 어쩌면, 자네가 방금 전에 이야기한 그대로, 다른 사람도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네. 당장에 충분히 말한다는 건 쉽지 않지만, 고찰해 본다면 전혀 어려울 것이 없다고 말이지."

  Εἴποι γὰρ ἄν.
  "그리 말할 테니까요."

  Βοὐλει οὖν δεώμεθα τοῦ τὰ τοιαῦτα ἀντιλέγοντος [b] ἀκολουθῆσαι ἡμῖν, ἐάν πως ἡμεῖς ἐκείνῳ ἐνδειξώμεθα ὅτι οὐδέν ἐστιν ἐπιτήδευμα ἴδιον γυναικὶ πρὸς διοίκησιν πόλεως;
  "그럼 우리가 이런 것들을 반박하는 자에게 이렇게 요구하는 게 좋을까? 만일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저 사람에게 폴리스의 내정에 대해 여성에 고유한 아무런 직무도 없다는 걸 증명해 보인다면, 우리에게 따르라고 말일세."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Ἴθι δή, φήσομεν πρὸς αὐτόν, ἀποκρίνου· ἆρα οὕτως ἔλεγες τὸν μὲν εὐφυῆ πρός τι εἶναι, τὸν δὲ ἀφυῆ, ἐν ᾧ ὁ μὲν ῥᾳδίως τι μανθάνοι, ὁ δὲ χαλεπῶς; καὶ ὁ μὲν ἀπὸ βραχείας μαθήσεως ἐπὶ πολὺ εὑρετικὸς εἴη οὗ ἔμαθεν, ὁ δὲ πολλῆς μαθήσεως τυχὼν καὶ μελέτης μηδ᾿ ἃ ἔμαθεν σῴξοιτο; καὶ τῷ μὲν τὰ τοῦ [c] σώματος ἱκανῶς ὑπηρετοῖ τῇ διανοίᾳ, τῷ δὲ ἐναντιοῖτο; ἆρ᾿ ἄλλα ἄττα ἐστὶν ἢ ταῦτα, οἷς τὸν εὐφυῆ πρὸς ἕκαστα καὶ τὸν μὴ ὡρίζου;
  "자, 그럼, 우린 그에게 이리 말할 걸세. '대답해 보시오. 혹시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뭔가에 대해 한편은 재능을 타고나는가 하면, 다른 쪽은 재능이 없어서, 그 경우 전자는 뭔가를 쉽사리 배우는 반면, 다른 쪽은 어려움을 겪소이까? 또 전자는 단기간의 배움을 통해 그가 배웠던 바에 대해 상당한 수완을 갖추게 되지만, 후자는 많은 배움과 연습으로 채워지더라도 그가 배웠던 것을 구해내지 못하는 것이오? 또 전자의 경우 그의 육신에 관련된 것들이 사유에 종사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정반대이겠소? 이것들 말고 다른 어떤 것들로, 당신은 각각의 일들에 대해 재능을 타고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규정하시오?'"

  Οὐδείς, ἦ δ᾿ ὅς, ἄλλα φήσει.
  글라우콘이 말했네. "아무도 달리 말하지 않을 겁니다."

  Οἶσθά τι οὖν ὑπὸ ἀνθρώπων μελετώμενον, ἐν ᾧ οὐ πάντα ταῦτα τὸ τῶν ἀνδρῶν γένος διαφερόντως ἔχει ἢ τὸ τῶν γυναικῶν; ἢ μακρολογῶμεν τήν τε ὑφαντικὴν λέγοντες καὶ τὴν τῶν ποπάνων τε καὶ ἑψημάτων θεραπείαν, ἐν οἷς δή τι [d] δοκεῖ τὸ γυναικεῖον γένος εἶναι, οὗ καὶ καταγελαστότατόν ἐστι πάντων ἡττώμενον;
  "'그럼 당신은 사람들에 의해 연마되는, 그 안에서 이런 모든 점에서 사내의 부류가 여인의 부류보다 특출난 뭔가를 알고 계시오? 아니면 우리가 바느질이니 빵이나 채소를 다루는 일이니 하는 것들을 논하며 장광설을 늘어 놓아야 하겠소? 사실 그런 것들에서는 여성적인 부류가 뭐라도 되는 듯 여겨지긴 하지, 그 부류가 그 일에서 밀린다는 건 무엇보다도 가장 우스꽝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말이오.'"

  Ἀληθῆ, ἔφη, λέγεις, ὅτι πολὺ κρατεῖται ἐν ἅπασιν ὡς ἔπος εἰπεῖν τὸ γένος τοῦ γένους. γυναῖκες μέντοι πολλαὶ πολλῶν ἀνδρῶν βελτίους εἰς πολλά· τὸ δὲ ὅλον ἔχει ὡς σὺ λέγεις.
  글라우콘은 말했네. "맞는 말씀입니다, 모든 일마다 거기서 말마따나 한 부류가 다른 부류보다 훨씬 더 지배적이라는(강하다는) 것이요. 물론 많은 여성들이 여러 일들에서 많은 남성들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만, 대체로 당신 말씀대로이지요."

  Οὐδὲν ἄρα ἐστίν, ὦ φίλε, ἐπιτήδευμα τῶν πόλιν διοικούντων γυναικὸς διότι γυνή, οὐδ᾿ ἀνδρὸς διότι ἀνήρ, ἀλλ᾿ ὁμοίως διεσπαρμέναι αἱ φύσεις ἐν ἀμφοῖν τοῖν ζῴοιν, καὶ πάντων μὲν μετέχει γυνὴ ἐπιτηδευμάτων κατὰ φύσιν, πάντων [e] δὲ ἀνήρ, ἐπὶ πᾶσι δὲ ἀσθενέστερον γυνὴ ἀνδρός.
  "그럼, 이보게, 폴리스를 운영하는 자들의 직무는 아무것도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에게 속하지도, 그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속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본성들이 양쪽 생명들에 마찬가지로 퍼져 있는지라, 여성이 모든 직무에 자연스럽게(본성에 따라) 참여하고, 남성도 모든 일에 그러한데, 모든 일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긴 하지."

  Πάνυ γε.
  "훨씬 약하지요."

  Ἦ οὖν ἀνδράσι πάντα προστάξομεν, γυναικὶ δ᾿ οὐδέν;
  "그럼 우린 정말로 모든 일을 남성들에게 맡기고서, 여성들에게는 아무것도 맡기지 않겠는가?"

  Καὶ πῶς;
  "어찌 그러겠습니까?"

  Ἀλλ᾿ ἔστι γάρ, οἶμαι, ὡς φήσομεν, καὶ γυνὴ ἰατρική, ἡ δ᾿ οὔ, καὶ μουσική, ἡ δ᾿ ἄμουσος φύσει.
  "하긴 내 생각에는, 우리가 말할 것처럼, 본성상 여성도 의사인가 하면, 아니기도 하고, 음악가인가 하면, 음악에 문외한이기도 하지."

  Τί μήν;
  "그래서요?"

  [456a] Γυμναστικὴ δ᾿ ἆρα οὐ καὶ πολεμική, ἡ δὲ ἀπόλεμος καὶ οὐ φιλογυμναστική;
  "그런데 혹시 여성이 체육술과 전쟁술을 갖춘 자이기도 하고, 반면 전쟁을 못하고 운동을 즐지지 않는 자이기도 하잖나?"

  Οἶμαι ἔγωγε.
  "제가 생각하기로는요."

  Τί δέ; φιλόσοφός τε καὶ μισόσοφος; καὶ θυμοειδής, ἡ δ᾿ ἄθυμος;
  "그럼 어떤가? 지혜를 사랑하는가 하면 지혜를 싫어하는 자이기도 하지?  또한 용감한가 하면, 용맹이 없기도 하고?

  Ἔστι καὶ ταῦτα.
  "그렇기도 하죠."

  Ἔστιν ἄρα καὶ φυλακικὴ γυνή, ἡ δ᾿ οὔ. ἢ οὐ τοιαύτην καὶ τῶν ἀνδρῶν τῶν φυλακικῶν φύσιν ἐξελεξάμεθα;
  "그럼 여성이 수호술도 갖춘 자일 수도 있고, 갖추지 않으 수도 있지. 아니면 남성의 경우에도 수호술을 갖춘 자의 본성으로 이런 것을 꼽은 게 아니었는가?"

  Τοιαύτην μὲν οὖν.
  "이런 것이었지요."

  Καὶ γυναικὸς ἄρα καὶ ἀνδρὸς ἡ αὐτὴ φύσις εἰς φυλακὴν πόλεως, πλὴν ὅσα ἀσθενεστέρα ἢ ἰσχυροτέρα ἐστίν.
  "그럼 폴리스의 수호를 위한 동일한 본성이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속하는 게지, 더 약하거나 더 강하다는 것만 제외하고 말일세."

  Φαίνεται.
  "그리 보입니다."

  Καὶ γυναῖκες ἄρα αἱ τοιαῦται τοῖς τοιούτοις ἀνδράσιν [b] ἐκλεκτέαι συνοικεῖν τε καὶ συμφυλάττειν, ἐπείπερ εἰσὶν ἱκαναὶ καὶ συγγενεῖς αὐτοῖς τὴν φύσιν.
  "그래서 여성들도 이러한 사람들은 이러한 남성들과 함께 내정을 하고 수호를 하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이지, 만일 정말로 그러기에 충분하고 저 사내들과 본성상 동류라면."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Τὰ δ᾿ ἐπιτηδεύματα οὐ τὰ αὐτὰ ἀποδοτέα ταῖς αὐταῖς φύσεσιν;
  "그런데 같은 본성들에는 똑같은 직무가 부여되어야만 하지 않나?"

  Τὰ αὐτά.
  "똑같은 것들이 부여되어야 하지요."

  Ἥκομεν ἄρα εἰς τὰ πρότερα περιφερόμενοι, καὶ ὁμολογοῦμεν μὴ παρὰ φύσιν εἶναι ταῖς τῶν φυλάκων γυναιξὶ μουσικήν τε καὶ γυμναστικὴν ἀποδιδόναι.
  "그럼 우리가 앞서 맴돌던 곳에 다다랐고, 수호자들 중 여성들에게 음악술과 체육술을 부여하는 일이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다(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아니다)는 데에 동의하는 바일세."

  Παντάπασιν μὲν οὖν.
  "전적으로 그러합니다."

  [c] Οὐκ ἄρα ἀδύνατά γε οὐδὲ εὐχαῖς ὅμοια ἐνομοθετοῦμεν, ἐπείπερ κατὰ φύσιν ἐτίθεμεν τὸν νόμον· ἀλλὰ τὰ νῦν παρὰ ταῦτα γιγνόμενα παρὰ φύσιν μᾶλλον, ὡς ἔοικε, γίγνεται.
  "그럼 우리가 불가능한 것들을 입법시킨 것도 기원(희망사항) 같은 것들을 입법시킨 것도 아니지, 만일 정말로 그 법을 본성에 맞게 정했다면 말일세. 오히려 오늘날 이에 어긋나게 일어나는 일들이 본성에 훨씬 더 어긋나게 일어나는 것 같군."

  Ἔοικεν.
  "그런 것 같습니다."

  Οὐκοῦν ἡ ἐπίσκεψις ἡμῖν ἦν εἰ δυνατά τε καὶ βέλτιστα λέγοιμεν;
  "그러면 우리가 가능하고도 바람직하게(훌륭하게, 최선의 방식으로) 논할는지가 우리의 고찰이었지 않은가?"

  Ἦν γάρ.
  "그랬지요."

  Καὶ ὅτι μὲν δὴ δυνατά, διωμολόγηται;
  "그럼 정말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동의된 것이고?"

  Ναί.
  "네."

  Ὅτι δὲ δὴ βέλτιστα, τὸ μετὰ τοῦτο δεῖ διομολογηθῆναι;
  "그런데 정말로 최선인지, 그게 이 다음으로 합의되어야 하는가?"

  Δῆλον.
  "분명 그렇습니다."

  Οὐκοῦν πρός γε τὸ φυλακικὴν γυναῖκα γενέσθαι, οὐκ ἄλλη μὲν ἡμῖν ἄνδρας ποιήσει παιδεία, ἄλλη δὲ γυναῖκας, ἄλλως τε [d] καὶ τὴν αὐτὴν φύσιν παραλαβοῦσα;
  "그러면 여성이 수호술을 갖추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남성의 교육을 달리 하고, 여성의 교육도 달리, 특히 같은 본성을 지닌 경우에도 다른 교육을 하겠는가?"

  Οὐκ ἄλλη.
  "다른 교육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Πῶς οὖν ἔχεις δόξης τοῦ τοιοῦδε πέρι;
  "그럼 이런 것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가?"

  Τίνος δή;
  "무엇이요?"

  Τοῦ ὑπολαμβάνειν παρὰ σεαυτῷ τὸν μὲν ἀμείνω ἄνδρα, τὸν δὲ χείρω· ἢ πάντας ὁμοίους ἡγῇ;
  "자네 자신에 견주어 더 나은 자, 그리고 더 못한 자를 가정한다는 걸세. 아니면 모두가 닮았다고 생각하는가?"

  Οὐδαμῶς.
  "결코 그렇지 않지요."

  Ἐν οὖν τῇ πόλει ἣν ᾠκίζομεν, πότερον οἴει ἡμῖν ἀμείνους ἄνδρας ἐξειργάσθαι τοὺς φύλακας, τυχόντας ἧς διήλθομεν παιδείας, ἢ τοὺς σκυτοτόμους, τῇ σκυτικῇ παιδευθέντας;
  "그러면 우리가 정초한 폴리스에서, 자네는 어느 쪽이 우리에 의해 더 훌륭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상술하였던 그 교육을 받은 수호자들인가, 아니면 제화기술을 교육받은 제화공들인가?"

  Γελοῖον, ἔφη, ἐρωτᾷς.
  그는 말했네. "우스운 질문을 하시네요."

  Μανθάνω, ἔφην. τί δέ; τῶν ἄλλων πολιτῶν οὐχ οὗτοι ἄριστοι;
  내가 말했지. "알겠네. 그럼 어떤가? 여타의 시민들보다 이들이 훨씬 더 뛰어난가?"

  Πολύ γε.
  "무척이나 그렇습니다."

  [e] Τί δὲ αἱ γυναῖκες; τῶν γυναικῶν οὐχ αὗται ἔσονται βέλτισται;
  "그런데 여인들은 어떤가? 여서들 중 이 사람들이 가장 나은 자들이겠나?"

  Καὶ τοῦτο, ἔφη, πολύ.
  그가 말했네. "이 역시도 훨씬 더 그렇지요."

  Ἔστι δέ τι πόλει ἄμεινον ἢ γυναῖκάς τε καὶ ἄνδρας ὡς ἀρίστους ἐγγίγνεσθαι;
  "그런데 여성이든 남성이든 폴리스 내에서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뭐라도 있는가?"

  Οὐκ ἔστιν.
  "없습니다."

  Τοῦτο δὲ μουσική τε καὶ γυμναστικὴ παραγιγνόμεναι, ὡς [457a] ἡμεῖς διήλθομεν, ἀπεργάσονται;
  "그런데 이런 일은
, 우리가 상술했던대로, 시가교육과 체육이 함께 이루어짐으로써 성취되겠지?"

  -蟲-

  Πολύ γε, ἔφη.
  그가 말했네. "물론입니다."

  Βούλει οὖν, ἦν δ᾿ ἐγώ, ἡμεῖς πρὸς ἡμᾶς αὐτοὺς ὑπὲρ τῶν ἄλλων ἀμφισβητήσωμεν, ἵνα μὴ ἔρημα τὰ τοῦ ἑτέρου λόγου πολιορκῆται;
  나는 말했지. "그러니 우리 자신을 상대로 다른 자들을 대신해 논쟁해 보는 게 좋겠는가? 다른 편의 논변이 결여된 채로 봉쇄당하지 않도록 말일세."

  Οὐδέν, ἔφη, κωλύει.
  그가 말했네. "그리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b] Λέγωμεν δὴ ὑπὲρ αὐτῶν ὅτι "Ὦ Σώκρατές τε καὶ Γλαύκων, οὐδὲν δεῖ ὑμῖν ἄλλους ἀμφισβητεῖν· αὐτοὶ γὰρ ἐν ἀρχῇ τῆς κατοικίσεως, ἣν ᾠκίζετε πόλιν, ὡμολογεῖτε δεῖν κατὰ φύσιν ἕκαστον ἕνα ἓν τὸ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
  "그럼 우리는 그들을 대신해 이렇게 말하세.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과 논쟁할 필요는 전혀 없소. 당신들 자신이, 당신네들이 폴리스를 정착시킨 바로 그 정초의 시작에서, 본성에 따라 각자 한 사람이 그 자신의 한 가지 일을 수행해야 한다 합의하였으니 말이오.'"

  Ὠμολογήσαμεν, οἶμαι· πῶς γὰρ οὔ;
  "제 생각엔 우리가 동의했습니다. 어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Ἔστιν οὖν ὅπως οὐ πάμπολυ διαφέρει γυνὴ ἀνδρὸς τὴν φύσιν;"
  "'그럼 어떤 식으로든 여인이 사내와 본성상 전적으로 다르지 않을 수 있겠소?'"

  Τί μήν;
  "그래서 어쨌단 겁니까?"

  [c] "Πῶς οὖν οὐχ ἁμαρτάνετε νῦν καὶ τἀναντία ὑμῖν αὐτοῖς λέγετε, φάσκοντες αὖ τοὺς ἄνδρας καὶ τὰς γυναῖκας δεῖν τὰ αὐτὰ πράττειν, πλεῖστον κεχωρισμένην φύσιν ἔχοντας;" ἕξεις τι, ὦ θαυμάσιε, πρὸς ταῦτ᾿ ἀπολογεῖσθαι;
  "'그럼 어떻게 당신들이 지금 틀리지 않고 또한 당신네들 자신과 반대로 말하지 않겠소? 사내들과 여인들이 같은 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단언하면서, 가장 크게 분리된 본성을 갖춘 자들을 두고 그리 말하면서 말이오.' 놀라운 친구, 이런 말들에 대해 뭔가 답을 할 수 있겠는가?"

  Ὡς μὲν ἐξαίφνης, ἔφη, οὐ πάνυ ῥᾴδιον· ἀλλὰ σοῦ δεήσομαί τε καὶ δέομαι καὶ τὸν ὑπὲρ ἡμῶν λόγον, ὅστις ποτ᾿ ἐστίν, ἑρμηνεῦσαι.
  "어찌나 갑작스러운지, 썩 쉽지만은 않습니다. 허나 당신께 부탁드릴 테고 지금도 부탁드리고 있는 바, 우리를 위한 논변까지, 그게 뭐가 되었든지 간에 설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Ταῦτ᾿ ἐστίν, ἦν δ᾿ ἐγώ, ὦ Γλαύκων, καὶ ἄλλα πολλὰ τοιαῦτα, ἃ ἐγὼ πάλαι προορῶν ἐφοβούμην τε καὶ ὤκνουν [d] ἅπτεσθαι τοῦ νόμου τοῦ περὶ τὴν τῶν γυναικῶν καὶ παίδων κτῆσιν καὶ τροφήν.
  나는 말했지. "글라우콘, 내가  진즉에 내다보고서 두려워하던 그리고 또한 여인들과 아이들의 확보와 양육에 관한 그 법에 손대기를 주저하던 점들이 이런 것들, 그리고 이와 같은 다른 많은 것들이라네."

  Οὐ μὰ τὸν Δία, ἔφη· οὐ γὰρ εὐκόλῳ ἔοικεν.
  그가 말했네. "제우스께 맹세코, 녹록찮은 일이겠습니다."

  Οὐ γάρ, εἶπον. ἀλλὰ δὴ ὦδ᾿ ἔχει· ἄντε τις εἰς κολυμβήθραν μικρὰν ἐμπέσῃ ἄντε εἰς τὸ μέγιστον πέλαγος μέσον, ὅμως γε νεῖ οὐδὲν ἧττον.
  내가 말했네. "쉽지 않지. 허나 사실 사정은 이렇다네. 누가 자그만 욕조에 빠지든 대양 한가운데 빠지든, 헤엄치기야 조금도 덜 할 것 없이 매한가지란 말일세."

  Πάνυ μὲν οὖν.
  "그야 물론입니다."

  Οὐκοῦν καὶ ἡμῖν νευστέον καὶ πειρατέον σῴξεσθαι ἐκ τοῦ λόγου, ἤτοι δελφῖνά τινα ἐλπίζοντας ἡμᾶς ὑπολαβεῖν ἂν ἤ τινα ἄλλην ἄπορον σωτηρίαν;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 논의로부터 헤엄쳐 나와야만 하고 구제되기를 시도해야만 하잖나? 무슨 돌고래라도 한 마리 붙들 희망을 갖든 아님 다른 무슨 흔치 않은 구원이라도 희망하든 말일세."

  Ἔοικεν, ἔφη.
  그가 말했네. "그럴 것 같네요."

  [e] Φέρε δή, ἦν δ᾿ ἐγώ, ἐάν πῃ εὕρωμεν τὴν ἔξοδον. ὁμολογοῦμεν γὰρ δὴ ἄλλην φύσιν ἄλλο δεῖν ἐπιτηδεύειν, γυναικὸς δὲ καὶ ἀνδρὸς ἄλλην εἶναι· τὰς δὲ ἄλλας φύσεις τὰ αὐτά φαμεν νῦν δεῖν ἐπιτηδεῦσαι. ταῦτα ἡμῶν κατηγορεῖται;
  나는 말했지. "자, 그럼, 어느 쪽으로든 출구를 찾아 보세나.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본성은 다른 직무에 종사해야 한다고, 그런데 여인의 본성과 사내의 본성이 다르고 동의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다른 본성들이 같은 직무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네. 우리가 이런 걸로 고발당하는 게지?"

  Κομιδῇ γε.
  "정확히 그겁니다."

  [454a] Ἦ γενναία, ἦν δ᾿ ἐγώ, ὦ Γλαύκων, ἡ δύναμις τῆς ἀντιλογικῆς τέχνης.
  나는 말했네. "글라우콘, 반박하는 기술의 능력이란 참으로 대단하다네."

  Τί δή;
  "무슨 말씀이세요?"

  Ὅτι, εἶπον, δοκοῦσί μοι εἰς αὐτὴν καὶ ἄκοντες πολλοὶ ἐμπίπτειν καὶ οἴεσθαι οὐκ ἐρίζειν ἀλλὰ διαλέγεσθαι, διὰ τὸ μὴ δύνασθαι κατ᾿ εἴδη διαιρούμενοι τὸ λεγόμενον ἐπισκοπεῖν, ἀλλὰ κατ᾿ αὐτὸ τὸ ὄνομα διώκειν τοῦ λεχθέντος τὴν ἐναντίωσιν, ἔριδι, οὐ διαλέκτῳ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χρώμενοι.
  나는 말했지. "내게는 숱한 사람들이 의도치 않고서도 그리로 빠져 들고 또 그걸 쟁론이 아닌 변증(대화)이라 생각하는 걸로 여겨진다는 것 때문에 하는 말이네. 논의되는 바를 형상들에 따라(종류별로?) 나누어 가며 고찰할 능력은 없고, 오히려 같은 이름에 따라 논의되는 바와 반대의 것을 추구할 수 있는지라, 서로 변증이 아니라 쟁론을 사용하면서도 그렇다는 것이지."

  Ἔστι γὰρ δή, ἔφη, περὶ πολλοὺς τοῦτο τὸ πάθος· ἀλλὰ μῶν καὶ πρὸς ἡμᾶς τοῦτο τείνει ἐν τῷ παρόντι;
  그는 말했네. "그야 많은 사람들이 그들 사이에서 이런 일을 겪으니까요. 허나 물론 우리에게도 지금 이런 일이 뻗쳐 오는 건 아니겠지요?"

  [b] Παντάπασι μὲν οὖν, ἦν δ᾿ ἐγώ· κινδυνεύομεν γοῦν ἄκοντες ἀντιλογίας ἅπτεσθαι.
  나는 말했지. "그야 전적으로 그렇다네. 어쨌건 우리가 본의 아니게 반박에 손을 대는 것일 수도 있겠군."

  Πῶς;
  "어째서요?"

  Τὸ τὴν αὐτὴν φύσιν ὅτι οὐ τῶν αὐτῶν δεῖ ἐπιτηδευμάτων τυγχάνειν πάνυ ἀνδρείως τε καὶ ἐριστικῶς κατὰ τὸ ὄνομα διώκομεν, ἐπεσκεψάμεθα δὲ οὐδ᾿ ὁπῃοῦν τί εἶδος τὸ τῆς ἑτέρας τε καὶ τῆς αὐτῆς φύσεως καὶ πρὸς τί τεῖνον ὡριζόμεθα τότε, ὅτε 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 ἄλλῃ φύσει ἄλλα, τῇ δὲ αὐτῇ τὰ αὐτὰ ἀπεδίδομεν.
  "같은 본성이 똑같지 않은 직무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꽤나 용맹하고도 쟁론적으로 그 이름에 따라 추구하는데, 어떤 식이 되었든지 간에 다른 본성과 같은 본성의 그 형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에까지 미치는 것인지를, 우리가 다른 본성에는 다른 직무를, 같은 본성에는 같은 직무를 분배하던 그 때에 전혀 고찰하지 않았지."

  Οὐ γὰρ οὖν, ἔφη, ἐπεσκεψάμεθα.
  그는 말했네. "그야 우리가 고찰하지 않았었지요."

  [c] Τοιγάρτοι, εἶπον, ἔξεστιν ἡμῖν, ὡς ἔοικεν, ἀνερωτᾶν ἡμᾶς αὐτοὺς εἰ ἡ αὐτὴ φύσις φαλακρῶν καὶ κομητῶν καὶ οὐχ ἡ ἐναντία, καὶ ἐπειδὰν ὁμολογῶμεν ἐναντίαν εἶναι, ἐὰν φαλακροὶ σκυτοτομῶσιν, μὴ ἐᾶν κομήτας, ἐὰν δ᾿ αὖ κομῆται, μὴ τοὺς ἑτέρους.
  나는 말했지.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대머리들과 머리 긴 자들에게 같은 본성이 속하고 반대 본성이 속하지 않는 건지 물을 수 있을 것 같고, 또 반대되는 본성이 속한다고 우리가 동의하고 나면, 대머리들이 제화일을 할 경우, 머리 긴 자들은 못할 것이고, 이번엔 머리 긴 자들이 한다면, 다른 쪽은 못할 것 같네."

  Γελοῖον μέντἂν εἴη, ἔφη.
  그는 말했네. "그렇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

  Ἆρα κατ᾿ ἄλλο τι, εἶπον ἐγώ, γελοῖον, ἢ ὅτι τότε οὐ πάντως τὴν αὐτὴν καὶ τὴν ἑτέραν φύσιν ἐτιθέμεθα, ἀλλ᾿ ἐκεῖνο τὸ εἶδος τῆς ἀλλοιώσεώς τε καὶ ὁμοιώσεως μόνον [d] ἐφυλάττομεν τὸ πρὸς αὐτὰ τεῖνον 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 οἷον †ἰατρικὸν μὲν καὶ ἰατρικὴν τὴν ψυχὴν ὄντα† τὴν αὐτὴν φύσιν ἔχειν ἐλέγομεν· ἢ οὐκ οἴει;
  나는 말했네. "혹시 그 때 우리가 같은 본성과 다른 본성이란 것을 모든 방식으로 고려하지 않았고, 직무 자체에 관련하는 저 차이와 유사성에만 집중하였다는 것 말고 다른 무슨 점에서 우습게 된 겐가? 말하자면 우리는 의술을 갖춘 자와 의술적인 영혼이 같은 본성을 지니는 것들이라 논했던 걸세.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Ἔγωγε.
  "그리 생각합니다."

  Ἰατρικὸν δέ γε καὶ τεκτονικὸν ἄλλην;
  "그런가 하면 의술을 갖춘 자와 목공술을 지닌자는 본성이 다른가?"

  Πάντως που.
  "아마 전적으로 다르겠지요."

  Οὐκοῦν, ἦν δ᾿ ἐγώ, καὶ τὸ τῶν ἀνδρῶν καὶ τὸ τῶν γυναικῶν γένος, ἐὰν μὲν πρὸς τέχνην τινὰ ἢ ἄλλο ἐπιτήδευμα διαφέρον φαίνηται, τοῦτο δὴ φήσομεν ἑκατέρῳ δεῖν ἀποδιδόναι; ἐὰν δ᾿ αὐτῷ τούτῳ φαίνηται διαφέρειν, τῷ τὸ μὲν θῆλυ τίκτειν, τὸ [e] δὲ ἄρρεν ὀχεύειν, οὐδέν τί πω φήσομεν μᾶλλον ἀποδεδεῖχθαι ὡς πρὸς ὃ ἡμεῖς λέγομεν διαφέρει γυνὴ ἀνδρός, ἀλλ᾿ ἔτι οἰησόμεθα δεῖν τὰ αὐτὰ ἐπιτηδεύειν τούς τε φύλακας ἡμῖν καὶ τὰς γυναῖκας αὐτῶν.
  내가 말했지. "그렇다면 사내들의 부류와 여인들의 부류도, 어떤 기술이나 여타 직무에 대해서는 차이가 나는 것으로 드러날 테고, 그럼 이 일을 우리가 양편 각각에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나? 그런데 바로 이런 점에서, 여성은 출산을 한다는 것에 반해, 남성은 덮친다는 그런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아 보인다면, 우리가 논하는 바에 대해서는 여인이 사내와 다른 점이라고는 무엇도 전혀 더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할 테고, 오히려 우리의 수호자들과 그들의 여인들이 똑같은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할 걸세."

  Καὶ ὀρθῶς γ᾿, ἔφη.
  그는 말했네. "물론 옳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Οὐκοῦν μετὰ τοῦτο κελεύομεν τὸν τὰ ἐναντία λέγοντα [455a] τοῦτο αὐτὸ διδάσκειν ἡμᾶς, πρὸς τίνα τέχνην ἢ τί ἐπιτήδευμα τῶν περὶ πόλεως κατασκευὴν οὐχ ἡ αὐτὴ ἀλλὰ ἑτέρα φύσις γυναικός τε καὶ ἀνδρός;
  "그럼 이 다음으로 우리는 그 반대로 논하는 자에게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달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겠나? 폴리스를 정착시키는 일에 관한 것들 중 무슨 기술 혹은 어떤 직무에 대해서 여인의 본성이 사내의 본성과 같지 않고 다르다는 것인지 말이네."

  -蟲-

1. 어떤 영화를 봤다. '과학은 무서워, 기술은 무서워, 인간은 착해'를 뇌까리는 정신병자들로 가득 찬 영화. 논리, 수리, 전산, 통계, 자연과학과 여러 공학들 본래의 가치와 가능성에 대한 역사 속 빛나던 신념도, 이해의 한계 앞에서 언제나 망설이지 않고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수 많은 무명씨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도 찾을 수 없고,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에 이해하지 못한 채로 심지어 비겁하게 그 무지를 윤리로 치장하려 든 쓰레기들의 자기반성도 물론 찾을 수 없는, 뻔하디 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그들에게서 이성과 역사가 보장해 주고 있는 그 모든 편리를 몰수해 버리고 그냥 무인도로 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늘상 하는 말이지만, 유럽쪽이야 큰 전쟁 두 번 겪으면서 좌절할 핑계거리라도 있지, 서구학문을 수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기능하는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제 3세계 반도 씹쓰레기들은 뭐가 그리 잘나서 이성이 한계에 다다랐다느니 도구적 합리가 이러니 저러니 씨부려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유럽 새끼들도 엄살이 지나치고. 수로를 정비하고 백신을 만들고 생산량을 늘려서 지금 인구수가 얼마나 늘었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상대적 박탈감이니 빈부격차의 심화니 하는 것들은 지식과 합리의 부산물이 아니라, 세계에 부대끼며 쉬지 않고 머리 굴려 삶을 가져다 바친 사람들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기고 뒷짐지고 무임승차한 우리 쓰레기들의 채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이전까지 문자와 문법의 체득이 그러했듯, 종교와 천문과 법제에 대한 접근이 그러했듯, 그리고 늘상 논리와 수학이 그래 왔듯이, 오늘날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들과 그 응용들, 어느 사이에 필수불가결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전산과 통계의 분야들, 기술공학들도 그것들을 통해 밝혀진 사실의 세계 속에 사는 지적 생명체들에게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는 정당하다. 아니, 자연스럽다.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알기를 거부한 것 아닌가? 언제고 인류의 지난 지적 유산을 받아들이고 이어받기 녹록하였던 세대가 있었던가? 알려 하고 배우려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데도, 그게 귀찮고 제 자신의 밑천이 드러나는 게 쪽팔리고 겁나서, 게다가 그런 나태와 비겁을 인정하는 것조차도 싫어할 만큼 위선적이라서, 개새끼들이 가상의 괴물을 만들어댄다. 세계는 문을 두었고 우리에겐 열쇠가 있는데,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먼데, 진리에 닿기도 전에 절멸해 버릴지도 모를 위태로운 종 주제에 제 목숨줄이자 은인이라 할 만한 지성을 불신하고 모함하는 그 거만함이야 말로, 오히려 세상 전부를 이해하는 것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 아닐까 싶다. 발가벗고 어디 무인도로 다들 꺼져 버려라. 곧 죽어도 저 복잡하고 난해한 학문들에는 손끝도 닿고 싶지 않다면, 이 악물고 사회에 참여하고 정치활동을 지속하고 그렇게 도망자들의 채무라도 갚아라. 이도저도 싫다면, 입 닥치고 죽어라. 징징거림으로 가득 찬 망상은 구더기 들끓고 똥오줌과 피고름으로 범벅된 문드러져 가는 송장보다도 끔찍하니까.

2. 김보통 작가의 웹툰 '아만자'. 보면서 떠오른 것은 어릴 적 몇 장면들이다. 학교 땡땡이 치고 마을버스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노라면, 동네에는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얼굴이 변색되어 일그러졌거나 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도 흔했고, 그들 저마다 나름대로 나와 관계가 있었다. 어느 가게에 가면 앉아 있는 아저씨, 어디 가면 꼭 인사를 하는 아줌마, 어느 반 왕따 당하는 애,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있었고 나와 모르더라도 아버지를 알거나 대고모님을 알거나 뭐 그랬다. 고등학교를 관두고, 어쩌다 보니 운 좋게 대학이란 곳에도 가고, 심지어 지금은 당시에 상상은커녕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대학원이란 곳에 다니고 있노라니,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우'라느니, '병신'이나 '염병'이란 욕은 피씨하지 못하다느니(근데 '피씨하다'는 게 정확히 뭐냐?), 연민과 동정으로 대하지 말라느니 또 그러면서도 돕고 살라느니 어쩌라느니. 현실은 극적이라거나 뭐 그럴 것 없이 정말로 말 그대로 얄짤없이 현실일 따름이라서, 나는 새삼스레 동정이나 연민 같은 걸 느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차별의식을 가질 계기도 없었다. 눈앞에 그저 그렇게 펼쳐져 있는 사실들에 무슨 차등 같은 게 있을 턱이 있나. 내가 접해 본, 암환자를 소재로 다룬 여러 창작물들 대부분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굉장히 작위적인 것들 일색이었다. 허무맹랑한 희망을 말하거나 세상에 둘도 없을 절망을 그리면서 펼쳐내는 온갖 망상들에 감동했던 기억은 없다. 왜 보통 그렇잖은가, '제가 저 여인을 사랑해서 죄송합니다' 어쩌고 하는 류의, 아니, 심지어는 당사자들 마저도 어느 사이엔가 도통한 신선이라도 되었는지 일개 아무개씨에서 가르침을 설파하는 영혼의 지도자처럼 여기저기 삶의 소중함을 떠들거나 꿈과 용기를 지껄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아만자'라는 웹툰을 보면서는 침묵할 수 있었다. 주제넘는 격한 공감을 할 것도 없었고, 비웃고 조롱할 여지도 없었다. 아, 이런 조곤조곤함이라니. 이 만화는 참 좋은 만화다.

3. 『국가』는 매일 스테파누스 2장이면 대강 강의 들을 준비는 될 듯하다. 『향연』은 한 장이면 되고. 조금씩 해둔 게 있기도 하고 또 강독이든 윤독이든 청강도 몇 차례 들어갔었으니 점점 더 속도가 붙으리란 기대도 있고. 그냥 무턱대고 논문만 붙들고 있으려니 오히려 진도를 못 빼겠어서 내린 결정이다. 기계적으로 단어를 찾고 말을 옮기면서, 그 흐름에라도 기대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곧장 논문작업에 달려들 일은 아닌 것 같고, 내용정리 먼저. 대체 내용정리만 몇 번인지. 뭐 플라톤, 플라톤, 또 플라톤인 상황이고 그래도 접근법도 그 경로도 서로 다르니 뭔가 전모를 그리는데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그냥 기분이라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어느 날 갑자기 어딘가에 고립되어 버린다면, 혹은 시한부 인생이 된다면 무얼 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결국 지금의 나로서는 플라톤 대화편 한 권 붙잡고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곧 죽게 될 처지라면, 뭐 못 잊을 지난 사랑이라도 찾아 가려나 싶기도 했지만, 혹은 정다운 친구들을 만나거나 인사드리지 못한 은사님을 찾아 뵈려나 그런 생각도 해 봤지만, 그런 건 좀 무책임한 것도 같고 별로 내키지를 않아서. 뭐랄까, 내겐 꿈이 있고, 그 꿈은 내가 이룰 꿈이 아니라 막연히 그냥 뭔지 모를,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 같은 것이라서, 나는 그게 궁금한 것이지 그걸 내 걸로 하겠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그게 뭐든 그야말로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무엇일 것 같아서, 아, 말하다 보니 지나치게 거창해서 역겹네. 아무튼 보잘 것 없고 시덥잖고 쓰레기 같은 나는 차치하고, 추구할 만한 무언가와 그걸 추구한다는 그 짓거리가, 그게 참 좋아서, 이래저래 잘 사는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는 것보다는 그저 꾸던 꿈이나 마저 꾸다 뒈지고 싶다는 거다. 가능하다면, 이 일이 허락되는 시간이 내가 뒈지는 날까지는 닿았으면 한다. 잘, 좋은 삶을 살아왔는지 가늠할 척도가 함께 해줄 좋은 사람들에 달려 있다면야, 난 역시 실패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겠다. 여기저기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멀어지고 내가 머물렀던 자리들이 흐릿해지고 그저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에서 읽고 있는 문장이나 써 남기고 있는 넋두리들로만 있다가 사라지고 또 있다가 또 없어지고. 아마 앞으로 이전에도 없던 힘이 갑자기 번쩍 날 일도 없을 테고 갈수록 지쳐갈 것은 뻔할 테니까, 사람이 의당 사람과 맺어져 해야 할 노력을 하게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럴 엄두도 나질 않고, 그저 간간 연락이나 닿으면 내치지나 않는 정도의 관계, 그런 걸 기대한다는 건 그야말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욕심일 따름이고, 내가 좋아 죽고 못 살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일도 없으니, 그런 건 됐고, 드문드문 이 막막하고 까마득한 어둠에 발 디딜 딱 그 만큼의 볕이라도 드는 일이 종종 있어서 그 재미로 그 낙으로 버틴다. 외롭다기 보다는 미안할 따름이다. 어렸을 때는 온갖 종류의 여러 사람들과 다 함께 어울려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하게 되는 그런 꿈을 꾼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동료는 없고 죽은 스승들과 산 스승들과 마찬가지의 선배들과 후배들과 그런 식이다. 음, 사자 돌림 친구 몇은 있어야 하는데, 낄낄.

-蟲-

  [b] Καῖ ὁ Γλαύκων γελάσας, Ἀλλ᾿, ὦ Σώκρατες, ἔφη, ἐάν τι πάθωμεν πλημμελὲς ὑπὸ τοῦ λόγου, ἀφίεμέν σε ὥσπερ φόνου καὶ καθαρὸν εἶναι καὶ μὴ ἀπατεῶνα ἡμῶν. ἀλλὰ θαρρήσας λέγε.
  그러자 글라우콘이 웃더니만 이리 말하더군. "소크라테스, 만일 저희가 그 논의에 의해 무슨 잘못이라도 겪는다면, 살해에 결백한 자이시자 저희에 대한 기만자가 아니시라는 한에서 당신을 풀어 드릴 겁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마시고 말씀해 주시죠."

  Ἀλλὰ μέντοι, εἶπον, καθαρός γε καὶ ἐκεῖ ὁ ἀφεθείς, ὡς ὁ νόμος λέγει· εἰκὸς δέ γε, εἴπερ ἐκεῖ, κἀνθάδε.
 내가 말했네. "하기사 저 경우에도 풀려나는 자는 실로 결백한 사람이지, 법이 말하는 바대로 말일세. 저 경우에 정말 그렇다면, 이 경우도 그럴 듯하군."

  Λέγε τοίνυν, ἔφη, τούτου γ᾿ ἕνεκα.
  그가 말했지. "그러니 이를 위해서라도 말씀해 주세요."

  Λέγειν δή, ἔφην ἐγώ, χρὴ ἀνάπαλιν αὖ νῦν, ἃ τότε ἴσως [c] ἔδει ἐφεξῆς λέγειν. τάχα δὲ οὕτως ἂν ὀρθῶς ἔχοι, μετὰ ἀνδρεῖον δρᾶμα παντελῶς διαπερανθὲν τὸ γυναικεῖον αὖ περαίνειν, ἄλλως τε καὶ ἐπειδὴ σὺ οὕτω προκαλῇ. ἀνθρώποις γὰρ φῦσι καὶ παιδευθεῖσιν ὡς ἡμεῖς διήλθομεν, κατ᾿ ἐμὴν δόξαν οὐκ ἔστ᾿ ἄλλη ὀρθὴ παίδων τε καὶ γυναικῶν κτῆσίς τε καὶ χρεία ἢ κατ᾿ ἐκείνην τὴν ὁρμὴν ἰοῦσιν, ἥνπερ τὸ πρῶτον ὡρμήσαμεν. ἐπεχειρήσαμεν δέ που ὡς ἀγέλης φύλακας τοὺς ἄνδρας καθιστάναι τῷ λόγῳ.
  나는 말했네. "그럼 이제 다시 되돌아가, 그 때 이어서 논해야 했을 듯한 것들을 논해야만 하네. 그런데 아마 이러는 게 옳을 수도 있겠군, 남성극을 완전히 마무리하고서 이번엔 여성극을 마무리하는 게, 특히 자네가 그리 청하기도 하니까. 우리가 상술했던대로 자라나고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내 입장에 따르자면, 우리가 처음 방향잡았던 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아이들과 여성들의 확보든 활용이든 다른 맞는 방향은 없으니 말이지. 그런데 우리는 어쨌든 그 논의에 따라 그 사내들을 무리의 수호자로서 정립시키려 시도했었지."

  Ναί.
  "네."

  [d] Ἀκολουθῶμεν τοίνυν καὶ τὴν γένεσιν καὶ τροφὴν παραπλησίαν ἀποδιδόντες, καὶ σκοῶμεν εἰ ἡμῖν πρέπει ἢ οὔ.
  "그러니까 우리는 그에 따라 그 출생과 양육도 그 유사한 것을 부여해 보고, 또 그게 우리에게 적절한지 아닌지 고찰해 보세."

  Πῶς; ἔφη.
  그가 말했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ὧδε. τὰς θηλείας τῶν φυλάκων κυνῶν πότερα συμφυλάττειν οἰόμεθα δεῖν ἅπερ ἂν οἱ ἄρρενες φυλάττωσι, καὶ συνθηρεύειν καὶ τἆλλα κοινῇ πράττειν, ἢ τὰς μὲν οἰκουρεῖν ἔνδον ὡς ἀδυνάτους διὰ τὸν τῶν σκυλάκων τόκον τε καὶ τροφήν, τοὺς δὲ πονεῖν τε καὶ πᾶσαν ἐπιμέλειαν ἔχειν περὶ τὰ ποίμνια;
  "이렇게 말일세. 우리가 경비견들 중 진정으로 경비견인 암캐들이 수캐들이 지키는 바로 그것들을 함께 지켜야 한다고, 그리고 공동사냥을 하고 여타의 일들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암캐들은 강아지들 낳고 먹이느라 할 수 없기에 집안에서 가사를 해야 하는 반면, 수캐들은 노역을 하고 그 양들에 관한 온갖 돌봄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고찰하는 게지."

  Κοινῇ, ἔφη, πάντα· πλὴν ὡς ἀσθενεστέραις χρώμεθα, τοῖς δὲ ὡς ἰσχυροτέροις.
  그가 말했네. "모든 걸 공동으로 해야 한다 생각하지요. 우리가 암캐들은 더 약한 것들로서 다루는 반면, 수캐들은 더 강한 것들로서 다룬다는 점만 제하고 말입니다."

  [e] Οἷόν τ᾿ οὖν, ἔφην ἐγώ, ἐπὶ τὰ αὐτὰ χρῆσθαί τινι ζῴῳ, ἂν μὴ τὴν αὐτὴν τροφήν τε καὶ παιδείαν ἀποδιδῷς;
  나는 말했지. "그러므로 어떤 동물을 같은 일들을 위해 쓸 수 있겠는가? 같은 양육과 교육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Οὐχ οἷόν τε.
  "그럴 수 없지요."

  Εἰ ἄρα ταῖς γυναιξὶν ἐπὶ ταὐτὰ χρησόμεθα καὶ τοῖς ἀνδράσι, ταὐτὰ καὶ διδακτέον αὐτάς.
  "그럼 만일 우리가 같은 일들을 위해 여인들도 사내들도 활용한다면, 그녀들에게 같은 것들을 가르치기도 해야만 하네."

  [452a] Ναί.
  "네."

  Μουσικὴ μὲν ἐκείνοις τε καὶ γυμναστικὴ ἐδόθη.
  "저 사내들에게는 시가교육과 운동교육이 부여되었지."

  Ναί.
  "네."

  Καὶ ταῖς γυναιξὶν ἄρα τούτω τὼ τέχνα καὶ τὰ περὶ τὸν πόλεμον ἀποδοτέον, καὶ χρηστέον κατὰ ταὐτά.
  "그럼 저 여인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두 가지 기술들 그리고 전쟁에 관련된 것들이 제공되어야만 하고, 같은 방식으로 활용되어야만 하지."

  Εἰκὸς ἐξ ὧν λέγεις, ἔφη.
  그가 말했지. "당신 말씀을 통해서는 그런 것 같습니다."

  Ἴσως δή, εἶπον, παρὰ τὸ ἔθος γελοῖα ἂν φαίνοιτο πολλὰ περὶ τὰ νῦν λεγόμενα, εἰ πράξεται ᾗ λέγεται.
  나는 말했네. "그래서 지금 논의되는 것들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것들이 관습에서 벗어나 우스꽝스러워 보일 듯하네, 만일 논의된 그 방식으로 실행된다면 말일세."

  Καὶ μάλα, ἔφη.
  그가 말했네. "무척이나 그렇습니다."

  Τί, ἦν δ᾿ ἐγώ, γελοιότατον αὐτῶν ὁρᾷς; ἢ δῆλα δὴ ὅτι γυμνὰς τὰς γυναῖκας ἐν ταῖς παλαίστραις γυμναζομένας μετὰ [b] τῶν ἀνδρῶν, οὐ μόνον τὰς νέας, ἀλλὰ καὶ ἤδη τὰς πρεσβυτέρας, ὥσπερ τοὺς γέροντας ἐν τοῖς γυμνασίοις, ὅταν ῥυσοὶ καὶ μὴ ἡδεῖς τὴν ὄψιν ὅμως φιλογυμναστῶσιν;
  그리고 내가 말했지. "그것들 중 자네는 무엇이 가장 우스워 보이는가? 아니, 벌거벗은 여인들이 씨름장에서 벌거벗고 사내들과 함께, 어린 여인들뿐만 아니라, 이미 노쇠한 여인들까지도, 노쇠한 사내들이, 주름지고 볼썽사나운 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하길 좋아할 때, 운동장에서 그러는 것처럼, 그렇게 운동을 한다는 게 (우스워 보이는 게) 분명한가?"

  Νὴ τὸν Δία, ἔφη· γελοῖον γὰρ ἄν, ὥς γε ἐν τῷ παρεστῶτι, φανείη.
  그가 말했네. "제우스께 맹세코 그렇습니다. 적어도 오늘날에는, 우스워 보일 테니까요.

  Οὐκοῦν, ἦν δ᾿ ἐγώ, ἐπείπερ ὡρμήσαμεν λέγειν, οὐ φοβητέον τὰ τῶν χαριέντων σκώμματα, ὅσα καὶ οἷα ἂν εἴποιεν εἰς τὴν τοιαύτην μεταβολὴν γενομένην καὶ περὶ τὰ γυμνάσια καὶ [c] περὶ μουσικὴν καὶ οὐκ ἐλάχιστα περὶ τὴν τῶν ὅπλων σχέσιν καὶ ἵππων ὀχήσεις;
  나는 말했네. "그럼 만일 정말로 논의를 촉발시켰다면, 잘난 자들의 조롱은 두려워하지 말아야만 하네, 운동에 관련하여 그리고 시가에 관해 또한 그 못지 않게 무장과 승마에 관하여서도 이러한 변화를 향해 무슨 조롱을 얼만큼 해대든지 말일세."

  Ὀρθῶς, ἔφη, λέγεις.
  그가 말했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Ἀλλ᾿ ἐπείπερ λέγειν ἠρξάμεθα, πορευτέον πρὸς τὸ τραχὺ τοῦ νόμου, δεηθεῖσίν τε τούτων μὴ τὰ αὑτῶν πράττειν ἀλλὰ σπουδάζειν, καὶ ὑπομνήσασιν ὅτι οὐ πολὺς χρόνος ἐξ οὗ τοῖς Ἕλλησιν ἐδόκει αἰσχρὰ εἶναι καὶ γελοῖα ἅπερ νῦν τοῖς πολλοῖς τῶν βαρβάρων, γυμνοὺς ἄνδρας ὁρᾶσθαι, καὶ ὅτε ἤρχοντο τῶν γυμνασίων πρῶτοι μὲν Κρῆτες, ἔπειτα [d] Λακεδαιμόνιοι, ἐξῆν τοῖς τότε ἀστείοις πάντα ταῦτα κωμῳδεῖν. ἢ οὐκ οἴει;
  "허나 우리가 정말 논의를 시작했으니, 그 법의 조잡한 데에까지 나아가야만 하네. 그들에게 자신들의 일들을 하지 말고 진지하기를 요구하면서, 또한 오늘날 야만인들 대다수가 추하고 우스운 것으로 여기는 바로 그것들이 헬라스인들에게 추하고 우습게 여겨지던 것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크레테인들이 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하고, 다음으로 라케다이모니아인들이 운동을 시작했을 때, 당대의 재기넘치는 자들이 그 모든 걸 희화화하는 일이 가능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말이지. 아님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Ἔγωγε.
  "전 그리 생각합니다."

  Ἀλλ᾿ ἐπειδή, οἶμαι, χρωμένοις ἄμεινον τὸ ἀποδύεσθαι τοῦ συγκαλύπτειν πάντα τὰ τοιαῦτα ἐφάνη, καὶ τὸ ἐν τοῖς ὀφθαλμοῖς δὴ γελοῖον ἐξερρύη ὑπὸ τοῦ ἐν τοῖς λόγοις μηνυθέντος ἀρίστου· καὶ τοῦτο ἐνεδείξατο, ὅτι μάταιος ὃς γελοῖον ἄλλο τι ἡγεῖται ἢ τὸ κακόν, καὶ ὁ γελωτοποιεῖν ἐπιχειρῶν πρὸς ἄλλην τινὰ ὄψιν ἀποβλέπων ὡς γελοίου ἢ τὴν τοῦ ἄφρονός τε καὶ κακοῦ, καὶ καλοῦ αὖ σπουδάζει [πρὸς] [e] ἄλλον τινὰ σκοπὸν στησάμενος ἦ τὸν τοῦ ἀγαθοῦ.
  "허나, 내 생각에, 해 본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게 입고 하는 것보다 벗고 하는 편이 더 나은 것으로 밝혀지고, 그래서 보기에 우스운 것이 진술에서 최선의 것으로 알려진 것에 의해 해소된 걸세. 또한 그것은 보여주었다네, 나쁜 것 외에 다른 뭔가를 우스운 것으로 생각하는 자는 멍청한 자라는 것을, 그리고 어리석고 나쁜 꼬락서니 말고 다른 무슨 모습을 바라보며 우스운 것으로 삼아 우스갯거리로 삼으려 드는 자는, 그래서 또한 좋음의 표식 말고 아름다움의 무슨 표식을 세워 놓고서 아름다움에 열중하는 것임을 말일세."

  Παντάπασι μὲν οὖν, ἔφη.
  "전적으로 그러합니다."

  Ἆρ᾿ οὖν οὐ πρῶτον μὲν τοῦτο περὶ αὐτῶν ἀνομολογητέον, εἰ δυνατὰ ἢ οὔ, καὶ δοτέον ἀμφισβήτησιν εἴτε τις φιλοπαίσμων εἴτε σπουδαστικὸς ἐθέλει ἀμφισθβητῆσαι, πότερον [453a] δυνατὴ φύσις ἡ ἀνθρωπίνη ἡ θήλεια τῇ τοῦ ἄρρενος γένους κοινωνῆσαι εἰς ἅπαντα τὰ ἔργα, ἢ οὐδ᾿ εἰς ἕν, ἢ εἰς τὰ μὲν οἵα τε, εἰς δὲ τὰ οὔ, καὶ τοῦτο δὴ τὸ περὶ τὸν πόλεμον ποτέρων ἐστίν; ἆρ᾿ οὐχ οὕτως ἂν κάλλιστά τις ἀρχόμενος ὡς τὸ εἰκὸς καὶ κάλλιστα τελευτήσειεν;
  "그러니 그 일들에 관하여 먼저 이 점이 동의해야만 하는 건, 그게 가능한지 아닌지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놀이를 좋아하는 자든 진중한 자든 간에 누가 논쟁을 벌이려 한다면 논쟁을 허용해 주어야만 하는 게 아닌가? 인간적인 여성적 본성이 남성 부류의 본성과 모든 작업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 가지 일도 그럴 수 없는지, 또는 어떤 것들은 가능하고, 또 다른 것들은 못 하는지, 전쟁과 관련하여서는 더욱이 이 일이 둘 중 어느 쪽인지 말이지. 혹시 그렇게 매우 훌륭하게 누군가 시작하여 또한 매우 훌륭하게 끝도 맺을 수 있을 성 싶지 않은가?

-蟲-

{ΑΠΟΛ.} Ἦσαν τοίνυν ἐκεῖνοι τοιοίδε τινές - μᾶλλον δ' ἐξ ἀρχῆς ὑμῖν ὡς ἐκεῖνος διηγεῖτο καὶ ἐγὼ πειράσομαι διηγήσασθαι.
그러니까 저 논의들은 이런 어떤 것들이었지 - 아니, 차라리 자네들에게 처음부터 저 사람이 설명해줬던 대로 나 또한 설명을 시도해 보겠네.
[Stephanus page 174, section a, line 3] Ἔφη γάρ οἱ Σωκράτη ἐντυχεῖν λελουμένον τε καὶ τὰς βλαύτας ὑποδεδεμένον, ἃ ἐκεῖνος ὀλιγάκις ἐποίει· καὶ ἐρέσθαι αὐτὸν ὅποι ἴοι οὕτω καλὸς γεγενημένος.
그러니까 그는 소크라테스께서 세신도 하시고 신도 신으시고서 그와 만나셨다고 말했네. 그건 저분께는 드문 일이지. 또 그는 그 분께 그렇게나 멋진 모습이 되셔서는 어디로 가시던 참이시냐고 물었다 하네.
Καὶ τὸν εἰπεῖν ὅτι Ἐπὶ δεῖπνον εἰς Ἀγάθωνος. χθὲς γὰρ αὐτὸν διέφυγον τοῖς ἐπινικίοις, φοβηθεὶς τὸν ὄχλον· ὡμολόγησα δ' εἰς τήμερον παρέσεσθαι. ταῦτα δὴ ἐκαλλωπισάμην, ἵνα καλὸς παρὰ καλὸν ἴω. ἀλλὰ σύ, ἦ δ' ὅς, πῶς ἔχεις πρὸς τὸ ἐθέλειν ἂν ἰέναι ἄκλητος ἐπὶ δεῖπνον;
그러니 그 분께서는 이리 말씀하셨다네. "만찬을 위해 아가톤의 집으로 간다네. 어제 우승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군중이 무서워 그에게서 달아났는데, 오늘 참석하겠노라 약조하고서 떠났으니. 그래서 이렇게 멀끔하게 차려 입은 게지, 아름다운 자 곁에 아름다운 자로서 나아가려고 말일세." 그런데 그 분께서 말씀하셨지. "그럼 자네는 초대받지 않은 채로 만찬에 갈만 한가, 어떤가?"
Κἀγώ, ἔφη, εἶπον ὅτι Οὕτως ὅπως ἂν σὺ κελεύῃς.
그는 말했네. "저야 선생님께서 하자시는대로 그리 하겠노라 말씀드리겠습니다."
Ἕπου τοίνυν, ἔφη, ἵνα καὶ τὴν παροιμίαν διαφθείρωμεν [Stephanus page 174, section b, line 4] μεταβαλόντες, ὡς ἄρα καὶ <Ἀγάθων' ἐπὶ δαῖτας ἴασιν αὐτόματοι ἀγαθοί>. 
그 분께서 말씀하셨지. "그러니 자네는 따라 오시게, 우리가 저 속담도 이렇게 바꿔 망가뜨리게끔, 그러니까 '잘난 사람들은 잘난 사람들의 만찬에 제 발로 간다'라고 말이지.
Ὅμηρος μὲν γὰρ κινδυνεύει οὐ μόνον διαφθεῖραι ἀλλὰ καὶ ὑβρίσαι εἰς ταύτην τὴν παροιμίαν· ποιήσας γὰρ τὸν Ἀγαμέμνονα διαφερόντως ἀγαθὸν ἄνδρα τὰ πολεμικά, τὸν δὲ Μενέλεων “<μαλθακὸν αἰχμητήν>,” θυσίαν ποιουμένου καὶ ἑστιῶντος τοῦ Ἀγαμέμνονος ἄκλητον ἐποίησεν ἐλθόντα τὸν Μενέλεων ἐπὶ τὴν θοίνην, χείρω ὄντα ἐπὶ τὴν τοῦ ἀμείνονος.
그야 호메로스께서는 바로 이 속담을 망가뜨리셨을 뿐만 아니라 욕보이기까지 하셨으니. 그 분께서 아가멤논은 전쟁일에 특출나게 잔난 자로, 반면 메넬라오스는 '겁쟁이 창잡이'로 그리시고는, 아가멤논이 번제(燔祭)를 하고 연회를 베풀 때 메넬라오스를 초대 받지 않은 채로 그 연회에 나아간 자로, 못난 자가 더 잘난 자의 연회에 나아간 자로 그리셨으니까."
Ταῦτ' ἀκούσας εἰπεῖν ἔφη Ἴσως μέντοι κινδυνεύσω καὶ ἐγὼ οὐχ ὡς σὺ λέγεις, ὦ Σώκρατες, ἀλλὰ καθ' Ὅμηρον [Stephanus page 174, section c, line 7] φαῦλος ὢν ἐπὶ σοφοῦ ἀνδρὸς ἰέναι θοίνην ἄκλητος. ὅρα οὖν ἄγων με τί ἀπολογήσῃ, ὡς ἐγὼ μὲν οὐχ ὁμολογήσω ἄκλητος ἥκειν, ἀλλ' ὑπὸ σοῦ κεκλημένος.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그가 말했네. "그렇지만 저 역시도 아마 당신 말씀대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 오히려 호메로스의 말씀대로 멍청한 자이면서 지혜로운 사람의 식사자리에 초대받지 않은 채로 가게 될 성싶습니다. 그러니 저를 데려 가시면서 무슨 변명을 하실지 보세요, 저는 초대 받지 않은 채로 오는 데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당신에게 불려 나왔다고 말이에요."
“Σύν τε δύ',” ἔφη, “ἐρχομένω πρὸ ὁδοῦ” βουλευσόμεθα ὅτι ἐροῦμεν. ἀλλ' ἴωμεν. 
그 분께서 말씀하셨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노라면' 우리가 할 말을 숙고해 낼 걸세. 그러니 가세나.
Τοιαῦτ' ἄττα σφᾶς ἔφη διαλεχθέντας ἰέναι. τὸν οὖν Σωκράτη ἑαυτῷ πως προσέχοντα τὸν νοῦν κατὰ τὴν ὁδὸν πορεύεσθαι ὑπολειπόμενον, καὶ περιμένοντος οὗ κελεύειν προϊέναι εἰς τὸ πρόσθεν. ἐπειδὴ δὲ γενέσθαι ἐπὶ τῇ οἰκίᾳ τῇ Ἀγάθωνος, ἀνεῳγμένην καταλαμβάνειν τὴν θύραν, καί τι [Stephanus page 174, section e, line 2] ἔφη αὐτόθι γελοῖον παθεῖν. οἷ μὲν γὰρ εὐθὺς παῖδά τινα τῶν ἔνδοθεν ἀπαντήσαντα ἄγειν οὗ κατέκειντο οἱ ἄλλοι, καὶ καταλαμβάνειν ἤδη μέλλοντας δειπνεῖν· εὐθὺς δ' οὖν ὡς ἰδεῖν τὸν Ἀγάθωνα, Ὦ, φάναι, Ἀριστόδημε, εἰς καλὸν ἥκεις ὅπως συνδειπνήσῃς· εἰ δ' ἄλλου τινὸς ἕνεκα ἦλθες, εἰς αὖθις ἀναβαλοῦ, ὡς καὶ χθὲς ζητῶν σε ἵνα καλέσαιμι, οὐχ οἷός τ' ἦ ἰδεῖν. ἀλλὰ Σωκράτη ἡμῖν πῶς οὐκ ἄγεις; 
그들이 이런 어떤 대화들을 하며 갔다고 그는 말했네. 그리고서 소크라테스께서 스스로 뭔가 생각에 잠기셔서는 가던 길에 남으셨고, 기다리던 그에게 앞서 가라고 하셨다더군. 그러고 나서 아가톤의 집에 이르게 되었고, 대문이 열려 있는 걸 알게 되었는데, 또 그 자리에서 그는 우스운 꼴을 당했다고 하네. 그러니까 안에서 어떤 아이 하나가 그에게 곧장 다가와 다른 사람들이 기대 누운 곳으로 이끌었고, 이제 식사가 시작될 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더군. 그래서 아가톤이 그를 보자마자 말했다네. "아리스토데모스, 자네 식사를 같이 하기에 딱 좋은 때에 도착했군. 무슨 다른 일로 왔다면, 다음 기회로 미루시게. 어제도 자네를 초대하려고 찾아 다녔는데,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더군.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어찌 우리에게 모셔오지 않는가?"
Καὶ ἐγώ, ἔφη, μεταστρεφόμενος οὐδαμοῦ ὁρῶ Σωκράτη ἑπόμενον· εἶπον οὖν ὅτι καὶ αὐτὸς μετὰ Σωκράτους ἥκοιμι, κληθεὶς ὑπ' ἐκείνου δεῦρ' ἐπὶ δεῖπνον.
그는 말했다네. "나도 동행하던 중이었는데 아무데서도 뒤따르시는 소크라테스를 찾을 수가 없군. 그래서 그는 자신도 소크라테스와 함께, 그 분께서 청하셔서 이리로 식사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더군.
[Stephanus page 174, section e, line 12] Καλῶς γ', ἔφη, ποιῶν σύ· ἀλλὰ ποῦ ἔστιν οὗτος; 
그는 말했다네. "잘했네, 자네. 허나 이 분께서 어디 계시려나?"
Ὄπισθεν ἐμοῦ ἄρτι εἰσῄει· ἀλλὰ θαυμάζω καὶ αὐτὸς ποῦ ἂν εἴη.
"방금까지 내 뒤에서 오고 계셨다네. 허나 나 자신도 그 분께서 어디에 계신 건지 당황하고 있지."

-蟲-

Ε

  [449a] Ἀγαθὴν μὲν τοίνυν τὴν τοιαύτην πόλιν τε καὶ πολιτείαν καὶ ὀρθὴν καλῶ, καὶ ἄνδρα τὸν τοιοῦτον· κακὰς δὲ τὰς ἄλλας καὶ ἡμαρτημένας, εἴπερ αὕτη ὀρθή, περί τε πόλεων διοικήσεις καὶ περὶ ἰδιωτῶν ψυχῆς τρόπου κατασκευήν, ἐν τέτταρσι πονηρίας εἴδεσιν οὔσας.
  "그러니까 이러한 도시와 시민은 좋고도 올바른 것으로 부른다네, 이런 사람도 그러하고 말일세. 반면에, 만일 정말로 이런 것이 옳은 것이라면, 여타의 것들은, 도시들의 내정에 관하여서도 개인들의 영혼의 방식(태도?)에 관하여서도 나쁘고 그릇된 틀(짜임?)이라 하네. 네 종류의 악덕 안에 머문 것이기 때문이지."
διοικήσις : internal administration.
κατασκευή : preparation. permanent or fixed assets. state, condition, constitution of a thing.

  Ποίας δὴ ταύτας; ἔφη.
  "그럼 이것들이 어떤 것인가요?" 그가 말했네.

  Καὶ ἐγὼ μὲν ᾖα τὰς ἐφεξῆς ἐρῶν, ὥς μοι ἐφαίνοντο [bἕκασται ἐξ ἀλλήλων μεταβαίνειν· ὁ δὲ Πολέμαρχος, σμικρὸν γὰρ ἀπωτέρω τοῦ Ἀδειμάντου καθῆστο, ἐκτείνας τὴν χεῖρα καὶ λαβόμενος τοῦ ἱματίου ἄνωθεν αὐτοῦ παρὰ τὸν ὦμον, ἐκεῖνόν τε προσηγάγετο καὶ προτείνας ἑαυτὸν ἔλεγεν ἄττα προσκεκυφώς, ὧν ἄλλο μὲν οὐδὲν κατηκούσαμεν, τόδε δέ· Ἀφήσομεν οὖν, ἔφη, ἢ τί δράσομεν;
  그래서 내가 그것들을 차례로 말하려던 참이었지, 내게는 그 각각이 서로 잇따르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폴레마르코스가, 아데이만토스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지라, 손을 뻗어 그의 어깨 위로 옷자락을 붙들고, 그를 끌어당기고 제 자신도 앞으로 몸을 뻗어 기울이고 어떤 얘기들을 했다네. 다른 얘긴 아무것도 듣지 못했네만, 이건 들었다네. 그는 말했지. "우리가 놓아두어야 할까, 아님 뭐라도 해야 할까?"

  Ἥκιστά γε, ἔφη ὁ Ἀδείμαντος, μέγα ἤδη λέγων.
  그제야 아데이만토스가 큰 소리로 말했네. "결코 놔둘 수 없지." 

  Καὶ ἐγώ, Τί μάλιστα, ἔφην, ὑμεῖς οὐκ ἀφίετε;
  그래서 내가 말했네. "자네들은 도대체 뭘 놓아두지 않겠다는 겐가?"

  Σέ, ἦ δ᾿ ὅς.
  "당신을요!" 그가 말했네.

  [c] Ὅτι, ἐγὼ εἶπον, τί μάλιστα;
  내가 말했지. "대체 뭣 때문에 말인가?"

  Ἀπορρᾳθυμεῖν ἡμῖν δοκεῖς, ἔφη, καὶ εἶδος ὅλον οὐ τὸ ἐλάχιστον ἐκκλέπτειν τοῦ λόγου, ἵνα μὴ διέλθῃς, καὶ λήσειν οἰηθῆναι εἰπὼν αὐτὸ φαύλως, ὡς ἄρα περὶ γυναικῶν τε καὶ παίδων παντὶ δῆλον ὅτι κοινὰ τὰ φίλων ἔσται.
  그가 말하더군. "저희에겐 당신께서 엄살을 부리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아시면서도 논의의 사소하지 않은 부분을 통째로 눙치고 넘기신 걸로 여지는데, 설명하지 않으시려고 말이죠. 또, 여자와 아이에 관하여 모두에게 친구의 것들은 공동의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기라도 한 듯이, 그걸 충분찮게 말씀하시면서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하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Οὔκουν ὀρθῶς, ἔφην, ὦ Ἀδείμαντε;
  내가 말했네. "그럼 올바르게 말한 게 아닌가, 아데이만토스?"

  Ναί, ἦ δ᾿ ὅς. ἀλλὰ τὸ ὀρθῶς τοῦτο, ὥσπερ τἆλλα, λόγου δεῖται, τίς ὁ τρόπος τῆς κοινωνίας· πολλοὶ γὰρ ἂν γένοιτο. [d] μὴ οὖν παρῇς ὅντινα σὺ λέγεις· ὡς ἡμεῖς πάλαι περιμένομεν οἰόμενοί σέ που μνησθήσεσθαι παιδοποιίας τε πέρι, πῶς παιδοποιήσονται, καὶ γενομένους πῶς θρέψουσιν, καὶ ὅλην ταύτην ἣν λέγεις κοινωνίαν γυναικῶν τε καὶ παίδων· μέγα γάρ τι οἰόμεθα φέρειν καὶ ὅλον εἰς πολιτείαν ὀρθῶς ἢ μὴ ὀρθῶς γιγνόμενον. νῦν οὖν, ἐπειδὴ ἄλλης ἐπιλαμβάνῃ πολιτείας πρὶν ταῦτα ἱκανῶς διελέσθαι, δέδοκται ἡμῖν τοῦτο ὃ σὺ [450a] ἤκουσας, τὸ σὲ μὴ μεθιέναι πρὶν ἂν ταῦτα πάντα ὥσπερ τἆλλα διέλθῃς.
  "맞아요." 그가 말했지. "허나 그 올바르다는 것은, 다른 것들이나 마찬가지로, 설명(logos)이 필요합니다. 공유의 방식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이든 간과치 마세요. 저희는 당신께서 어쨌든 아이를 만드는 일에 관하여, 어떤 식으로 낳을 것이고, 태어난 아이들을 또 어떻게 기를 것인지, 여인들과 아이들에 관하여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공유 전반을 두고 언급하시기를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저희는 그게
올바르게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정체(政體)에 어떤 큰 차이를, 아니, 차라리 전면적인 차이를 야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것들을 충분히 상술하기에 앞서 다른 정체를 살펴 보려 하시니, 저희로서는 당신께서 들으신 그대로, 이 모든 것을 여느 것들과 마찬가지로 상술해 주시기 전에는 당신을 놓아 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 여긴 겁니다."

  Καὶ ἐμὲ τοίνυν, ὁ Γλαύκων ἔφη, κοινωνὸν τῆς ψήφου ταύτης τίθετε.
  글라우콘이 말하더군. "그러니까 저 역시도 이쪽 표를 공유하는 걸로 치세요."

  Ἀμέλει, ἔφη ὁ Θρασύμαχος, πᾶσι ταῦτα δεδογμένα ἡμῖν νόμιζε, ὦ Σώκρατες.
  트라쉬마코스가 말했네. "신경쓰지 마시고, 저희 모두가 같은 의견이라 생각하세요, 소크라테스."

  Οἷον, ἦν δ᾿ ἐγώ, ἐργάσασθε ἐπιλαβόμενοί μου. ὅσον λόγον πάλιν, ὥσπερ ἐξ ἀρχῆς, κινεῖτε περὶ τῆς πολιτείας, ἣν ὡς ἤδη διεληλυθὼς ἔγωγε ἔχαιρον, ἀγαπῶν εἴ τις ἐάσοι ταῦτα [b] ἀποδεξάμενος ὡς τότε ἐρρήθη. ἃ νῦν ὑμεῖς παρακαλοῦντες οὐκ ἴστε ὅσον ἑσμὸν λόγων ἐπεγείρετε· ὃν ὁρῶν ἐγὼ παρῆκα τότε, μὴ παράσχοι πολὺν ὄχλον.
  내가 말했네. "나를 붙들어 놓고 자네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정체에 관해 자네들이 얼만큼의 논의를
, 마치 처음부터 하듯이, 다시 촉발시켰는지! 그런 것들은 그 때 이야기된 것들이라 받아들여 내버려 둔다면 반가운 일이리라 여기면서, 내가 상술해 놓고서 흡족해 하던 참인 그 정체에 관해 말일세. 지금 자네들이 불러들여 일으킨 그 득시글거리는 논의가 얼마나 되는지 자네들은 알지 못하는구먼. 그것을 알고서 내가 그 때 놓아 두었던 것인데,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말일세.

  Τί δέ; ἦ δ᾿ ὃς ὁ Θρασύμαχος· χρυσοχοήσοντας οἴδει τούσδε νῦν ἐνθάδε ἀφῖχθαι, ἀλλ᾿ οὐ λόγων ἀκουσομένους;
  트라쉬마코스가 말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께서는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연금술이라도 하느라고 온 줄 아십니까? 논의를 들으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고요?"

  Ναί, εἶπον, μετρίων γε.
  내가 말했네. "그렇지, 적절한 논의를 말이네만."

  Μέτρον δέ γ᾿, ἔφη, ὦ Σώκρατες, ὁ Γλαύκων, τοιούτων λόγων ἀκούειν ὅλος ὁ βίος νοῦν ἔχουσιν. ἀλλὰ τὸ μὲν ἡμέτερον ἔα· σὺ δὲ περὶ ὧν ἐρωτῶμεν μηδαμῶς ἀποκάμῃς [c] ᾗ σοι δοκεῖ διεξιών, τίς ἡ κοινωνία τοῖς φύλαξιν ἡμῖν παίδων τε πέρι καὶ γυναικῶν ἔσται καὶ τροφῆς νέων ἔτι ὄντων, τῆς ἐν τῷ μεταξὺ χρόνῳ γιγνομένης γενέσεώς τε καὶ παιδείας, ἣ δὲ ἐπιπονωτάτη δοκεῖ εἶναι. πειρῶ οὖν εἰπεῖν τίνα τρόπον δεῖ γίγνεσθαι αὐτήν.
  글라우콘이 말했지. "허나, 소크라테스, 그런 논의를 듣기에 적절하다는 건 지각 있는 자들에겐 그 삶 전체입니다. 허나 저희 사정은 차치하시고요. 그런데 당신께서는 저희가 여쭈어 본 것들에 관해 당신께서 그리 보여주는 게 좋겠다 싶은 식으로  보여주시는 데에 부디 지치지 마세요. 우리의 수호자들에게 아이와 여인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이 아직 어릴 적의 양육에 관해 그 공유가 무엇일는지, 출생과 교육의 사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양육에 관해서요.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 여겨지지요. 그럼 이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말해 봐 주시죠."

  Οὐ ῥᾴδιον, ὦ εὔδαιμον, ἦν δ᾿ ἐγώ, διελθεῖν· πολλὰς γὰρ ἀπιστίας ἔχει ἔτι μᾶλλον τῶν ἔμπροσθεν ὧν διήλθομεν. καὶ γὰρ ὡς δυνατὰ λέγεται, ἀπιστοῖτ᾿ ἄν, καὶ εἰ ὅτι μάλιστα γένοιτο, ὡς ἄριστ᾿ ἂν εἴη ταῦτα, καὶ ταύτῃ ἀπιστήσεται. διὸ [d] δὴ καὶ ὄκνος τις αὐτῶν ἅπτεσθαι, μὴ εὐχὴ δοκῇ εἶναι ὁ λόγος, ὦ φίλε ἑταῖρε.
  나는 말했네. "행복한 친구 같으니, 그건 설명하기가 쉬운 일이 아닐세. 믿기 어려운 점이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들보다 훨씬 더 많거든. 또 가능한 일들이라 말하더라도, 믿기 어려울 것이고, 최대한 잘 된다 해도, 이것들이 가능한 최선의 것들이리라는 것, 이 점도 믿기 어려울 걸세. 더욱이 이런 이유로 이런 일들에 손대기에는 어떤 주저스러운 점이 있으니, 그 논의가 소망으로 여겨지지나 않을까 하는 걸세, 친애하는 친구."

  Μηδέν, ἦ δ᾿ ὅς, ὄκνει· οὔτε γὰρ ἀγνώμονες οὔτε ἄπιστοι οὔτε δύσνοι οἱ ἀκουσόμενοι.
  그가 말했지. "전혀 망설이실 것 없습니다. 들을 사람들이 생각 없는 자들도 아니고 불신에 가득 찬 것도 아니고 앞뒤가 꽉 막힌 자들도 아니니까요."

  Καὶ ἐγὼ εἶπον· Ὦ ἄριστε, ἦ που βουλόμενός με παραθαρρύνειν λέγεις;
  그래서 내가 말했네. "훌륭한 친구, 어쨌든 정말로 나를 응원하려 생각하고 하는 말인가?"
παραθαρσύνω : embolden, encourage.

  Ἔγωγ᾿, ἔφη.
  그가 말했네. "전 그렇습니다."

  Πᾶν τοίνυν, ἦν δ᾿ ἐγώ, τοὐναντίον ποιεῖς. πιστεύοντος μὲν γὰρ ἐμοῦ ἐμοὶ εἰδέναι ἃ λέγω, καλῶς εἶχεν ἡ παραμυθία· ἐν [e] γὰρ φρονίμοις τε καὶ φίλοις περὶ τῶν μεγίστων τε καὶ φίλων τἀληθῆ εἰδότα λέγειν ἀσφαλὲς καὶ θαρραλέον, ἀπιστοῦντα δὲ καὶ ζητοῦντα ἅμα τοὺς λόγους ποιεῖσθαι, ὃ δὴ ἐγὼ δρῶ, [451a] φοβερόν τε καὶ σφαλερόν, οὔ τι γέλωτα ὀφλεῖν, παιδικὸν γὰρ τοῦτό γε· ἀλλὰ μὴ σφαλεὶς τῆς ἀληθείας οὐ μόνον αὐτὸς ἀλλὰ καὶ τοὺς φίλους συνεπισπασάμενος κείσομαι περὶ ἃ ἥκιστα δεῖ σφάλλεσθαι. προσκυνῶ δὲ Ἀδράστειαν, ὦ Γλαύκων, χάριν οὗ μέλλω λέγειν. ἐλπίζω γὰρ οὖν ἔλαττον ἁμάρτημα ἀκουσίως τινὸς φονέα γενέσθαι ἢ ἀπατεῶνα καλῶν τε καὶ ἀγαθῶν [καὶ] δικαίων <καὶ> νομίμων πέρι. τοῦτο οὖν τὸ κινδύνευμα κινδυνεύειν ἐν ἐχθροῖς κρεῖττον ἢ φίλοις, ὥστε εὖ με παραμυθῇ.
  나는 말했네. "그러니까 모든 걸, 자넨 그 반대로 만드는군. 그야 나는 내가 하는 말들을 내가 안다고 믿는다면야, 그 응원이 훌륭하게 된 걸 테지. 신중하고도 소중한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하고도 소중한 일들에 관하여 진리들을 알고서 말한다는 건 무난하고도 자신할 만한 일이니까. 그런데 믿을 수 없고 당장에 찾고 있는 그런 논의들을 한다는 건, 그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네만, 두렵고 불안한 일이라네. 뭔가 비웃음을 살까 해서는 아닐세, 그건 유치한 짓이니까. 허나 진리를 놓치고서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내 친구들까지 함께 끌어들여 가장 잘못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관해 좌절시키지나 않을까 싶군. 허나, 글라우콘, 나는 아드라스테이아께 부복한다네, 장차 내가 말할 바를 위해서 말이지. 그야 나는 정의로운 것들과 합법적인 것들에 관하여 아름답고도 훌륭한 자들을 상대로 사기꾼이 되기보다는 원치 않게 누군가의 살해자가 되는 것이 더 적은 죄이리라 기대하니까. 그러니 이런 위험은 친구들에게서보다는 적들에게서 감수하는 편이 더 낫겠으니, 자네 날 참 잘도 북돋웠네, 그려.
συμεπισπάω : draw on together.

-蟲-


  가을학기에는 정암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천체에 관하여(De Caelo et Mundo)』 읽을 듯하고, 여름 동안 중지되는 플라톤 『티마이오스』 윤독도 재개될 테고, 플라톤 『국가』 윤독도 뭐 계속 예정대로 진행이고, 대학원에서는 플라톤 『국가』 5~7권 읽을 듯한데 이건 확정은 아니고, 학부 강의로 플라톤 『향연』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은 2권 끝나면 『형이상학』 Ζ권으로 갈아탈지도 모르겠다. 기왕이면 미리 예습을 좀 해 두고 싶은데, 주요 논쟁사 좀 정리하고 초벌 번역도 좀 해 놓고 말이지. 그러거나 말거나 논문 계획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중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다른 돌파구는 떠오르지 않고, 그냥 다시 내용 정리로 돌아가야 하겄다. 어차피 문헌을 얼만큼 소화해 내느냐가 관건이다. 내가 고대 존재론을 두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릴 주제도 아니고, 플라톤의 철학 체계 전반에 결론을 내릴 주제도 역시 아니고, 그냥 제대로 읽고 또 제대로 쓸 수 있는지, 그것만 검증받으면 될 일이다. 미카엘 프레데도 레슬리 브라운도 오웬도 보스톡도 저 하늘 위를 붕붕 날아다니는 늙은이들인데, 지적을 받고서도 아직도 난 뭔가 이겨먹으려고만 들 뿐 뭔가 배워내고자 애를 쓰지는 못 하고 있는 듯도 싶고…. 어쩌겠나, 더러운 습속은 땟국물마냥 슥삭하고 빠지는 게 아니라 썩은 뼈를 긁어내고 시커먼 선지피, 고름 엉긴 문드러진 살덩이를 째고 찢어 발겨야 겨우 떼어낼 수 있을까 말까 한 것이니, 이 악물고 고난과 역경에 감사할 수밖에 없지. 일단 7월 안에 점검 한 차례 받고, 가능하면 8월에 두 차례 더 점검 받는 걸로 지도교수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겄다. 닝기미 씨빠빠, 진즉에 통과하고 졸업했었더라면 몇 푼이나마 나랏돈 받아낼 것도 늘었을 테고, 박사과정생 해외연수지원도 신청해 볼 수 있었을 테고, 아니, 다 좆까고 이 나라 빠져나갈 궁리를 좀 더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뭐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다 내 과오일 따름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별 다를 것 없다. 빡시게 들이밀고 내딛다 보면 종종 막히기도 하고 발목 잡히기도 하고, 그래도 매번 조금만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면 그 티끌만치라도 기어 가는 거다. 징징거리지 않아도, 뒈지면 내 길은 알아서 끝장이 날 테니, 난 그냥 닥치고 발버둥을 치면 되는 일이다. 아, 이젠 연애가 아니라 사람 살이 고프다. 아마도 이 감각을 내내 안고 살아야 하거나, 아님 어디 오피나 휴게텔에 가져다 바칠 돈이라도 벌어야 하겄지. 그래도 심정적으로는 미련이랄 것도 남길 것 없이 얄짤 없게 병신고자찌그래기와 같은 형편이 되어 가고 있으니, 돈도 없고 몸은 망가져 가고 그런 주제에 시간마저 없는데 워낙에 생긴 것도 쓰레기고, 뭐 의도치 않게 수도자의 고행길을 걷는 셈 치면 되려나, 낄낄. 아름다운 얼굴과 몸뚱이에서도, 저 하늘의 태양에서도, 길바닥에 나뒹굴다 발에 채이는 잡풀이니 개똥이니 구정물 구덩이에서까지도, 좋음의 형상이나 보고 딸이나 치자, 그러다 뒈지자, 썅알. 근데, 마음의 눈으로 좋음의 형상을 보면 마음의 좆이 발기해서 마음의 왼손으로 폭딸의 형상을 구현해야 하는 거냐? 저 모든 딸딸이들이 바라보는 단 하나의 자리에 그 모든 딸딸이의 본이 되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딸딸이의 형상이 처음도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려나... 음, 그렇다면 철학 참 해 볼 만한 일이군. 좋음의 형상을 위해 역립으로 좆나 달리는 개빨조새끼로 승천하고 싶다, 낄낄낄낄. 이데아계의 실장님이 쪼까내고 블랙리스트에 올리겠구만.

-蟲-

Ἐπεὶ δὲ διώρισται ποσαχῶς ἡ φύσις, μετὰ τοῦτο θεωρητέον τίνι διαφέρει ὁ μαθηματικὸς τοῦ φυσικοῦ (καὶ γὰρ ἐπίπεδα καὶ στερεὰ ἔχει τὰ φυσικὰ σώματα καὶ μήκη [Bekker page 193b, line 25] καὶ στιγμάς, περὶ ὧν σκοπεῖ ὁ μαθηματικός)· ἔτι εἰ ἡ ἀστρολογία ἑτέρα ἢ μέρος τῆς φυσικῆς· εἰ γὰρ τοῦ φυσικοῦ τὸ τί ἐστιν ἥλιος ἢ σελήνη εἰδέναι, τῶν δὲ συμβεβηκότων καθ' αὑτὰ μηδέν, ἄτοπον, ἄλλως τε καὶ ὅτι φαίνονται λέγοντες οἱ περὶ φύσεως καὶ περὶ σχήματος σελήνης καὶ ἡλίου, καὶ δὴ καὶ πότερον σφαιροειδὴς ἡ γῆ καὶ ὁ κόσμος ἢ οὔ.
자연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으니, 이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수학자가 자연학자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물체들은 평면도 입체도 선도 점도 지니는데, 수학자들은 그것들에 관하여 고찰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천문학이 자연학과 다른 것인지 혹은 그 일부인지 <살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자연학자에게 태양 혹은 달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 속한다면, 그런데 이것들에 대해 부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일이고, 다른 것보다도 자연에 관하여 논하는 자들이 달과 해의 형태에 관하여서도 논하고, 더욱이 대지와 우주가 구형인지 그렇지 않은지도 논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상한 일이다>.

περὶ τούτων μὲν οὖν πραγματεύεται καὶ ὁ μαθηματικός, ἀλλ' οὐχ ᾗ φυσικοῦ σώματος πέρας ἕκαστον· οὐδὲ τὰ συμβεβηκότα θεωρεῖ ᾗ τοιούτοις οὖσι συμβέβηκεν· διὸ καὶ χωρίζει· χωριστὰ γὰρ τῇ νοήσει κινήσεώς ἐστι, καὶ οὐδὲν διαφέρει, οὐδὲ γίγνεται ψεῦδος χωριζόντων. λανθάνουσι δὲ τοῦτο ποιοῦντες καὶ οἱ τὰς ἰδέας λέγοντες· τὰ γὰρ φυσικὰ χωρίζουσιν ἧττον ὄντα χωριστὰ τῶν μαθηματικῶν. γίγνοιτο δ' ἂν τοῦτο δῆλον, εἴ τις ἑκατέρων πειρῷτο λέγειν τοὺς ὅρους, καὶ αὐτῶν καὶ τῶν συμβεβηκότων. τὸ μὲν γὰρ περιττὸν ἔσται καὶ τὸ ἄρτιον καὶ τὸ εὐθὺ καὶ τὸ καμπύλον, ἔτι δὲ ἀριθμὸς καὶ γραμμὴ καὶ σχῆμα, ἄνευ κινήσεως, σὰρξ δὲ καὶ ὀστοῦν καὶ ἄνθρωπος οὐκέτι, ἀλλὰ ταῦτα ὥσπερ ῥὶς σιμὴ ἀλλ' οὐχ ὡς τὸ καμπύλον λέγεται. δηλοῖ δὲ καὶ τὰ φυσικώτερα τῶν μαθημάτων, οἷον ὀπτικὴ καὶ ἁρμονικὴ καὶ ἀστρολογία· ἀνάπαλιν γὰρ τρόπον τιν' ἔχουσιν τῇ γεωμετρίᾳ. ἡ μὲν γὰρ [Bekker page 194a, line 10] γεωμετρία περὶ γραμμῆς φυσικῆς σκοπεῖ, ἀλλ' οὐχ ᾗ φυσική, ἡ δ' ὀπτικὴ μαθηματικὴν μὲν γραμμήν, ἀλλ' οὐχ ᾗ μαθηματικὴ ἀλλ' ᾗ φυσική.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관하여서는 수학자 또한 문제 삼지만, 자연적 물체의 한계인 한에서 각각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부수적인 것들도 이와 같은 존재하는 것들에 부수하는 한에서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분리(독립)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부수적인 것들> 사유상으로 운동과 분리된 것들이고, 아무런 차이도 없으며, 분리된 것들 중에 거짓이 생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데아를 논하는 자들도 남몰래 이런 일을 행한다. 왜냐하면 수학적인 것들보다 덜 분리된 자연적인 것들을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의 것은 분명해질 것이다. 만일 누군가 그것들에 대해서도 또한 부수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 두편 각각의 정의들을 진술하고자 시도한다면. 왜냐하면 한편은 운동 없이, 홀과 짝 그리고 곧음과 휨일 것이고, 더욱이 수와 선과 도형일 것이나, 살과 뼈와 인간은 더 이상 없을 것이지만, 이런 것들은 매부리코처럼 진술되지 휨처럼 진술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학적인 것들보다 더 자연적인 것들도, 이를 테면 광학과 화성학 그리고 천문학 같은 것들도 이 점을 분명히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역전된 기하학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한편으로 기하학은 자연적 선에 관하여 고찰하지만, 자연적이라는 그러한 한에서 그리하지는 않는 반면, 광학은 수학적인 선을, 그러나 수학적인 것인 한에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인 한에서 고찰한다는 것이다.

ἐπεὶ δ' ἡ φύσις διχῶς, τό τε εἶδος καὶ ἡ ὕλη, ὡς ἂν εἰ περὶ σιμότητος σκοποῖμεν τί ἐστιν, οὕτω θεωρητέον· ὥστ' οὔτ' ἄνευ ὕλης τὰ τοιαῦτα οὔτε κατὰ τὴν ὕλην. καὶ γὰρ δὴ καὶ περὶ τούτου ἀπορήσειεν ἄν τις, ἐπεὶ δύο αἱ φύσεις, περὶ ποτέρας τοῦ φυσικοῦ. ἢ περὶ τοῦ ἐξ ἀμφοῖν; ἀλλ' εἰ περὶ τοῦ ἐξ ἀμφοῖν, καὶ περὶ ἑκατέρας. πότερον οὖν τῆς αὐτῆς ἢ ἄλλης ἑκατέραν γνωρίζειν; εἰς μὲν γὰρ τοὺς ἀρχαίους ἀποβλέψαντι δόξειεν ἂν εἶναι τῆς ὕλης (ἐπὶ μικρὸν γάρ τι μέρος Ἐμπεδοκλῆς καὶ Δημόκριτος τοῦ εἴδους καὶ τοῦ τί ἦν εἶναι ἥψαντο)· εἰ δὲ ἡ τέχνη μιμεῖται τὴν φύσιν, τῆς δὲ αὐτῆς ἐπιστήμης εἰδέναι τὸ εἶδος καὶ τὴν ὕλην μέχρι του (οἷον ἰατροῦ ὑγίειαν καὶ χολὴν καὶ φλέγμα, ἐν οἷς ἡ ὑγίεια, ὁμοίως δὲ καὶ οἰκοδόμου τό τε εἶδος τῆς οἰκίας καὶ τὴν ὕλην, ὅτι πλίνθοι καὶ ξύλα· ὡσαύτως δὲ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καὶ τῆς φυσικῆς ἂν εἴη τὸ γνωρίζειν ἀμφοτέρας τὰς φύσεις. ἔτι τὸ οὗ ἕνεκα καὶ τὸ τέλος τῆς αὐτῆς, καὶ ὅσα τούτων ἕνεκα. ἡ δὲ φύσις τέλος καὶ οὗ ἕνεκα (ὧν γὰρ συνεχοῦς τῆς κινήσεως οὔσης ἔστι τι τέλος, [Bekker page 194a, line 30] τοῦτο <τὸ> ἔσχατον καὶ τὸ οὗ ἕνεκα· διὸ καὶ ὁ ποιητὴς γελοίως προήχθη εἰπεῖν “ἔχει τελευτήν, ἧσπερ οὕνεκ' ἐγένετο”· βούλεται γὰρ οὐ πᾶν εἶναι τὸ ἔσχατον τέλος, ἀλλὰ τὸ βέλτιστον)·
그런데 자연이 두 가지로, 형상도 질료도 진술되기에, 우리가 매부리꼴에 관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고찰한다면 그러할 것처럼, 그런 식으로 관찰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들을 질료 없이도 질료에 따라서도 고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더욱이 그 자연들이 둘이기에, 그 자연적인 것의 둘 중 어느 쪽에 관한 것인지 이에 관련하여 누군가 당혹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양자로부터 나온 것에 관하여서인가? 하지만 만일 양자로부터 나온 것에 관하여서라면, 그 둘 각각에 관하여서이기도 하다. 그럼 양편 각각을 아는 일은 같은 앎에 속하는가 아니면 다른 앎에 속하는가? 왜냐하면 한편으로 고대인들에 주목할 사람들에게는 질료에 속하는 것이라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엠페도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는 형상과 '무엇인 바의 것임'에 고작해야 미미한 부분에만 닿았으니까). 그런데 만일 기술이 자연을 모방한다면, 그런데 형상을 아는 일과 질료를 아는 일이 어느 정도까지 같은 앎에 속한다면 (예를 들어 의사의 경우 건강을 알고 담즙과 열, 그것들 안에 건강이 드는 것들을 알듯, 또한 건축가의 경우 집의 형상과 또한 그 질료 또한, 즉 벽돌들과 목재들도 알듯이. 여타의 경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자연학에도 그 양편의 자연본성 모두를 아는 일이 속할 것이다. 더욱이 무엇 때문인지 하는 것과 목적도 같은 앎에 속하고, 그것들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것들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자연은 목적이자 그것 때문인 바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의 지속적인 운동이 존재할 때에 거기에 모종의 목적이 있고, 그 각각의 끝이 또한 그것 때문인 바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하 이유로 시인도 우스운 말을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그가 그 때문에 태어났던 바, 바로 그 목적을 지닌다."라고. 왜냐하면 모든 끝이 목적인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이 목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ἐπεὶ καὶ ποιοῦσιν αἱ τέχναι τὴν ὕλην αἱ μὲν ἁπλῶς αἱ δὲ εὐεργόν, καὶ χρώμεθα ὡς ἡμῶν ἕνεκα πάντων ὑπαρχόντων (ἐσμὲν γάρ πως καὶ ἡμεῖς τέλος· διχῶς γὰρ τὸ οὗ ἕνεκα· εἴρηται δ' ἐν τοῖς περὶ φιλοσοφίας). δύο δὲ αἱ ἄρχουσαι τῆς ὕλης καὶ γνωρίζουσαι τέχναι, ἥ τε χρωμένη καὶ τῆς ποιητικῆς ἡ ἀρχιτεκτονική. διὸ καὶ ἡ χρωμένη ἀρχιτεκτονική πως, διαφέρει δὲ ᾗ ἡ μὲν τοῦ εἴδους γνωριστική, ἡ ἀρχιτεκτονική, ἡ δὲ ὡς ποιητική, τῆς ὕλης· ὁ μὲν γὰρ κυβερνήτης ποῖόν τι τὸ εἶδος τοῦ πηδαλίου γνωρίζει καὶ ἐπιτάττει, ὁ δ' ἐκ ποίου ξύλου καὶ ποίων κινήσεων ἔσται. ἐν μὲν οὖν τοῖς κατὰ τέχνην ἡμεῖς ποιοῦμεν τὴν ὕλην τοῦ ἔργου ἕνεκα, ἐν δὲ τοῖς φυσικοῖς ὑπάρχει οὖσα. ἔτι τῶν πρός τι ἡ ὕλη· ἄλλῳ γὰρ εἴδει ἄλλη ὕλη. μέχρι δὴ πόσου τὸν φυσικὸν δεῖ εἰδέναι τὸ εἶδος καὶ τὸ τί ἐστιν; ἢ ὥσπερ ἰατρὸν νεῦρον ἢ χαλκέα χαλκόν, μέχρι τοῦ τίνος [γὰρ] ἕνεκα ἕκαστον, καὶ περὶ ταῦτα ἅ ἐστι χωριστὰ μὲν εἴδει, ἐν ὕλῃ δέ; ἄνθρωπος γὰρ ἄνθρωπον γεννᾷ καὶ ἥλιος. [Bekker page 194b, line 14] πῶς δ' ἔχει τὸ χωριστὸν καὶ τί ἐστι, φιλοσοφίας ἔργον διορίσαι τῆς πρώτης.
  또한 기술들이 질료를 만드는데 어떤 기술들은 단적으로 그리하고 다른 기술들은 유용하게 만들며, 우리는 모든 현존하는 것들이 우리를 위한 것인냥 그것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 또한 어떤 식으로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 때문인 바의 것은 두 가지이다. 이는 철학에 관한 글에서 이야기된다). 그런데 질료를 지배하는 기술들과 이를 아는 기술들은 둘로서, 사용하는 기술 그리고 제작술에 대한 규제적 기술이다. 이런 이유로 사용하는 기술 또한 어떤 식으로는 규제적 기술이지만, 한쪽, 즉 규제적 기술은 형상에 대한 인식적 기술인 반면, 다른 쪽, 질료에 속하는 쪽은 제작술로서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조타수는 조타기(키)의 형상이 어떤 무엇인지 알고 또한 그것을 부여하지만, 다른 자는 어떤 목재로부터 어떤 움직임들을 통해 그것이 성립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술에 따른 것들 내에서 우리는 기능(일, 작품)을 위해 질료를 만들고, 자연적인 것들 내에는 존재하는 질료가 현존한다. 더 나아가 질료는 어떤 것에 관련한(상대적인) 것들에 속한다. 왜냐하면 여타의 형상에는 여타의 질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자연학자는 형상과 무엇인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가? 의사가 힘줄을 알거나 대장장이가 청동을 아는 것처럼, 그 각각이 무엇을 위한 것들인지까지를, 그리고 형상에는 독립적이지만, 질료에는 내재하는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서 알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인간도 태양도 인간을 낳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독립된 것이 어떤 상태이며 무엇인지, 이를 정의하는 것은 제일 철학의 일이다.


Διωρισμένων δὲ τούτων ἐπισκεπτέον περὶ τῶν αἰτίων, ποῖά τε καὶ πόσα τὸν ἀριθμόν ἐστιν. ἐπεὶ γὰρ τοῦ εἰδέναι χάριν ἡ πραγματεία, εἰδέναι δὲ οὐ πρότερον οἰόμεθα ἕκαστον πρὶν ἂν λάβωμεν τὸ διὰ τί περὶ ἕκαστον (τοῦτο δ' ἐστὶ τὸ λαβεῖν τὴν πρώτην αἰτίαν), δῆλον ὅτι καὶ ἡμῖν τοῦτο ποιητέον καὶ περὶ γενέσεως καὶ φθορᾶς καὶ πάσης τῆς φυσικῆς μεταβολῆς, ὅπως εἰδότες αὐτῶν τὰς ἀρχὰς ἀνάγειν εἰς αὐτὰς πειρώμεθα τῶν ζητουμένων ἕκαστον. ἕνα μὲν οὖν τρόπον αἴτιον λέγεται τὸ ἐξ οὗ γίγνεταί τι ἐνυπάρχοντος, οἷον ὁ χαλκὸς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καὶ ὁ ἄργυρος τῆς φιάλης καὶ τὰ τούτων γένη· ἄλλον δὲ τὸ εἶδος καὶ τὸ παράδειγμα, τοῦτο δ' ἐστὶν ὁ λόγος ὁ τοῦ τί ἦν εἶναι καὶ τὰ τούτου γένη (οἷον τοῦ διὰ πασῶν τὰ δύο πρὸς ἕν, καὶ ὅλως ὁ ἀριθμός) καὶ τὰ μέρη τὰ ἐν τῷ λόγῳ. ἔτι ὅθεν ἡ ἀρχὴ τῆς μεταβολῆς ἡ πρώτη ἢ τῆς ἠρεμήσεως, οἷον ὁ βουλεύσας αἴτιος, καὶ ὁ πατὴρ τοῦ τέκνου, καὶ ὅλως τὸ ποιοῦν τοῦ ποιουμένου καὶ τὸ μεταβάλλον τοῦ μεταβαλλομένου. ἔτι ὡς τὸ τέλος· τοῦτο δ' ἐστὶν τὸ οὗ ἕνεκα, οἷον τοῦ περιπατεῖν ἡ ὑγίεια· διὰ τί γὰρ περιπατεῖ; φαμέν “ἵνα ὑγιαίνῃ”, καὶ εἰπόντες οὕτως οἰόμεθα [Bekker page 194b, line 35] ἀποδεδωκέναι τὸ αἴτιον. καὶ ὅσα δὴ κινήσαντος ἄλλου μεταξὺ γίγνεται τοῦ τέλους, οἷον τῆς ὑγιείας ἡ ἰσχνασία ἢ ἡ κάθαρσις ἢ τὰ φάρμακα ἢ τὰ ὄργανα· πάντα γὰρ ταῦτα τοῦ τέλους ἕνεκά ἐστιν, διαφέρει δὲ ἀλλήλων ὡς ὄντα τὰ μὲν ἔργα τὰ δ' ὄργανα.
이런 사항들이 정의되었기에 그 원인들에 관하여 고찰되어야만 한다, 어떤 것들이며 그 수는 얼만큼인지. 왜냐하면 문제화하는 것은 앎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각각에 관하여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원인)를 파악하기 이전에는 그보다 앞서 각각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것은 일차적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 역시 이러한 일을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자연 변화 전체에 관하여 행해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런 일들의 원리들을 앎으로써 탐구되는 것들 각각을 이 원리들로 이끌고자 시도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한 가지 방식으로는 원인이 '무엇으로부터' 뭔가가 되는 그 내속하는 무엇이라 진술되는데,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 청동과 쟁반에 대해 은 그리고 이런 류(類)들이다.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는 그 형상(種)과 본으로 진술되며, 이것은 무엇인 바의 것임에 대한 정의와 그런 류들 (예를 들어 음계의 2:1, 또 일반적으로 수) 그리고 그 정의 내의 부분들이다. 나아가 이런 연유로 변화나 정지의 일차적 원리로도 진술되는데, 예를 들어 바라는 자가 원인이며, 또한 아버지가 출산의 원인이고, 일반적으로 작용자가 작용받은 것의 그리고 변화시킨 것이 변화되는 것의 원인이다. 나아가 목적(완성)으로서도 진술된다. 이것은 '무엇 때문에'이다, 이를 테면 산책에 대해 건강이다. 왜냐하면 무엇으로 인해 산책을 하는가? 하면 우리는 "건강하고자"라 답하고, 또한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그 원인을 밝힌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타의 것이 운동하여서 그 완성의 중간이 되는 모든 것들도 그러하다, 이를 테면 건강에 대해 체중감소나 배설 또는 약품들이나 (의료)도구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 목적 때문인 바의 것이며, 한편은 활동들인 반면 다른 편은 도구들이기에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τὰ μὲν οὖν αἴτια σχεδὸν τοσαυταχῶς λέγεται, συμβαίνει δὲ πολλαχῶς λεγομένων τῶν αἰτίων καὶ πολλὰ τοῦ αὐτοῦ αἴτια εἶναι, οὐ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ἷον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καὶ ἡ ἀνδριαντοποιικὴ καὶ ὁ χαλκός, οὐ καθ' ἕτερόν τι ἀλλ' ᾗ ἀνδριάς, ἀλλ' οὐ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ἀλλὰ τὸ μὲν ὡς ὕλη τὸ δ' ὡς ὅθεν ἡ κίνησις. ἔστιν δέ τινα καὶ ἀλλήλων αἴτια, οἷον τὸ πονεῖν τῆς εὐεξίας καὶ αὕτη τοῦ πονεῖν· ἀλλ' οὐ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ἀλλὰ τὸ μὲν ὡς τέλος τὸ δ' ὡς ἀρχὴ κινήσεως. ἔτι δὲ τὸ αὐτὸ τῶν ἐναντίων ἐστίν· ὃ γὰρ παρὸν αἴτιον τοῦδε, τοῦτο καὶ ἀπὸν αἰτιώμεθα ἐνίοτε τοῦ ἐναντίου, οἷον τὴν ἀπουσίαν τοῦ κυβερνήτου τῆς τοῦ πλοίου ἀνατροπῆς, οὗ ἦν ἡ παρουσία αἰτία τῆς σωτηρίας. 
그러므로 한편으로 원인들은 거의 이 만큼의 가짓수로 진술되지만, 그 원인들이 여러가지로 진술됨으로써 같은 일의 원인이 여럿이라 귀결되는데, 부수적으로서가 아니라,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 조각술과 청동이, 다름 아닌 조각상인 바로 그 측면에 따라, 허나 똑같은 방식에서가 아니라, 한편은 질료로서 다른 한편은 그 운동이 연원하는 바로서 (여러 원인들로 진술된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상호 원인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노동함은 강건함에 대해 또 이 강건함이 노동에 대해서도 (원인이다). 허나 같은 방식에서가 아니라, 한편은 완성으로서 다른 한편은 운동(변화, 즉 나약함에서 강건함으로의 운동)
의 원리로서 그러하다. 나아가 똑같은 것이 반대되는 것들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여기 이것의 현존하는 원인인 바, 그것이 부재함도 우리가 종종 그 반대의 것에 대해 원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배의 전복에 대해, 그의 현존이 그 배의 무사에 대해 원인이었던, 그 조타수의 부재가 원인이다.

ἅπαντα δὲ τὰ νῦν εἰρημένα αἴτια εἰς τέτταρας πίπτει τρόπους τοὺς φανερωτάτους. τὰ μὲν γὰρ στοιχεῖα τῶν συλλαβῶν καὶ ἡ ὕλη τῶν σκευαστῶν καὶ τὸ πῦρ καὶ τὰ τοιαῦτα τῶν σωμάτων καὶ τὰ μέρη τοῦ ὅλου καὶ αἱ ὑποθέσεις τοῦ [Bekker page 195a, line 19] συμπεράσματος ὡς τὸ ἐξ οὗ αἴτιά ἐστιν, τούτων δὲ τὰ μὲν ὡς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οἷον τὰ μέρη, τὰ δὲ ὡς τὸ τί ἦν εἶναι, τό τε ὅλον καὶ ἡ σύνθεσις καὶ τὸ εἶδος· τὸ δὲ σπέρμα καὶ ὁ ἰατρὸς καὶ ὁ βουλεύσας καὶ ὅλως τὸ ποιοῦν, πάντα ὅθεν ἡ ἀρχὴ τῆς μεταβολῆς ἢ στάσεως [ἢ κινήσεως]· τὰ δ' ὡς τὸ τέλος καὶ τἀγαθὸν τῶν ἄλλων· τὸ γὰρ οὗ ἕνεκα βέλτιστον καὶ τέλος τῶν ἄλλων ἐθέλει εἶναι· διαφερέτω δὲ μηδὲν εἰπεῖν αὐτὸ ἀγαθὸν ἢ φαινόμενον ἀγαθόν.
지금 이야기된 모든 원인들이 전부 가장 두드러진 네 가지 방식들로 분류된다. 즉 음절들의 철자들과 인공물들의 질료 그리고 신체들의 불과 이런 종류의 것들 또한 전체의 부분들과 결론의 전제들은 '출처(무엇으로부터)'로서 원인이고, 이것들 중 어떤 것들은 밑에 놓이는 것으로서, 이를 테면 부분들인 반면, 다른 것들은 무엇인 바의 것으로서, 그 전체와 결합과 형상이다. 그런데 정자와 의사와 바라는 자 그리고 일반적으로 작용자는, 모두 변화나 정지가 연원하는 기원(원리)이다. 어떤 것들은 목적(완성)과 그것들의 선(좋음)으로서 (원인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해'는 그것들의 최선과 완성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선으로 말하든 선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든 그 둘은 아무런 차이도 없다.

τὰ μὲν οὖν αἴτια ταῦτα καὶ τοσαῦτά ἐστι τῷ εἴδει· τρόποι δὲ τῶν αἰτίων ἀριθμῷ μὲν εἰσὶ πολλοί, κεφαλαιούμενοι δὲ καὶ οὗτοι ἐλάττους. λέγεται γὰρ αἴτια πολλαχῶς, καὶ αὐτῶν τῶν ὁμοειδῶν προτέρως καὶ ὑστέρως ἄλλο ἄλλου, οἷον ὑγιείας ἰατρὸς καὶ τεχνίτης, καὶ τοῦ διὰ πασῶν τὸ διπλάσιον καὶ ἀριθμός, καὶ ἀεὶ τὰ περιέχοντα πρὸς τὰ καθ' ἕκαστον. ἔτι δ' ὡς τὸ συμβεβηκὸς καὶ τὰ τούτων γένη, οἷον ἀνδριάντος ἄλλως Πολύκλειτος καὶ ἄλλως ἀνδριαντοποιός, ὅτι συμβέβηκε τῷ ἀνδριαντοποιῷ τὸ Πολυκλείτῳ εἶναι. καὶ τὰ περιέχοντα δὲ τὸ συμβεβηκός, οἷον εἰ ὁ ἄνθρωπος αἴτιος εἴη ἀνδριάντος ἢ ὅλως ζῷον. ἔστι δὲ καὶ τῶν συμβεβηκότων ἄλλα ἄλλων [Bekker page 195b, line 2] πορρώτερον καὶ ἐγγύτερον, οἷον εἰ ὁ λευκὸς καὶ ὁ μουσικὸς αἴτιος λέγοιτο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πάντα δὲ καὶ τὰ οἰκείως λεγόμενα καὶ τὰ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τὰ μὲν ὡς δυνάμενα λέγεται τὰ δ' ὡς ἐνεργοῦντα, οἷον τοῦ οἰκοδομεῖσθαι οἰκίαν οἰκοδόμος ἢ οἰκοδομῶν οἰκοδόμος. ὁμοίως δὲ λεχθήσεται καὶ ἐφ' ὧν αἴτια τὰ αἴτια τοῖς εἰρημένοις, οἷον τουδὶ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ἢ ἀνδριάντος ἢ ὅλως εἰκόνος, καὶ χαλκοῦ τοῦδε ἢ χαλκοῦ ἢ ὅλως ὕλης· καὶ ἐπὶ τῶν συμβεβηκότων ὡσαύτως. ἔτι δὲ συμπλεκόμενα καὶ ταῦτα κἀκεῖνα λεχθήσεται, οἷον οὐ Πολύκλειτος οὐδὲ ἀνδριαντοποιός, ἀλλὰ Πολύκλειτος ἀνδριαντοποιός. ἀλλ' ὅμως ἅπαντα ταῦτά ἐστι τὸ μὲν πλῆθος ἕξ, λεγόμενα δὲ διχῶς· ἢ γὰρ ὡς τὸ καθ' ἕκαστον, ἢ ὡς τὸ γένος, ἢ ὡς τὸ συμβεβηκός, ἢ ὡς τὸ γένος τοῦ συμβεβηκότος, ἢ ὡς συμπλεκόμενα ταῦτα ἢ ὡς ἁπλῶς λεγόμενα· πάντα δὲ ἢ ἐνεργοῦντα ἢ κατὰ δύναμιν. διαφέρει δὲ τοσοῦτον, ὅτι τὰ μὲν ἐνεργοῦντα καὶ τὰ καθ' ἕκαστον ἅμα ἔστι καὶ οὐκ ἔστι καὶ ὧν αἴτια, οἷον ὅδ' ὁ ἰατρεύων τῷδε τῷ ὑγιαζομένῳ καὶ ὅδε ὁ οἰκοδομῶν τῷδε τῷ οἰκοδομουμένῳ, τὰ δὲ κατὰ δύναμιν οὐκ ἀεί. φθείρεται γὰρ οὐχ ἅμα ἡ οἰκία καὶ ὁ οἰκοδόμος.
그러므로 원인들은 이런 것들이고 그 형상(종)에서 그 만큼의 것들이다. 그런데 그 원인들의 방식들은 수로는 여럿이나, 요약되면 이것들도 소수이다. 왜냐하면 원인들이 여러가지로 진술되고, 똑같은 동종의 것들 중에서도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앞서거나 뒤서는 식으로, 이를 테면 건강에 대해 의사와 전문가처럼 진술되며, 음계에 대해서도 2:1과 수가 진술되고, 개별적인 것들에 대해서 언제나 포괄적인 것들이 (원인으로) 진술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들의 유들도 부수적으로,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 어떤 식으로는 폴뤼클레이토스가 다른 식으로는 조각가가 (원인으로) 진술되는데, 그 조각가에게 폴뤼클레이토스로 존재한다는 것이 부수한다는 점 때문이다. 부수하는 것을 포괄하는 것들도 (그럴 것이다), 이를 테면 만일 인간이 조각상의 원인이거나 혹은 일반적으로 동물이 그러하다면. 그런데 부수하는 것들 중에서도 어떤 것들이 어떤 것들보다 더 멀고 또 더 가까운데, 이를 테면 흰 사람과 교양있는 사람이 그 조각상의 원인으로 진술될 경우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고유한 방식으로 진술되는 것들도 부수적인 방식으로 진술되는 것들도 모두 일부는 가능적인 것들로서 진술되고 일부는 현실화디는 것들로 진술되는 바, 이를 테면 건축물이 건축되었음에 대해 건축가나 건축 중인 건축가가 진술된다. 어떤 것들에 대해 그 원인들이 원인들인 것들도 이야기된 것들로 유사하게 진술될 것이다, 이를 테면 여기 이 조각상이나 조각상 혹은 일반적으로 상(象)에 대해, 또한 여기 이 청동이나 청동 혹은 일반적으로 질료에 대해. 부수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그러하다. 나아가 바로 저 똑같은 것들도 복합적인 것들로 진술될 것이다, 이를 테면 폴뤼클레이토스도 아니고 조각가도 아니라, 조각가 폴뤼클레이토스로.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전부 그 수로는 여섯이라 하더라도, 이중으로 진술되는 것들이다. 즉 개별적인 것으로서, 또는 유로서, 혹은 부수적인 것으로서, 또는 그 부수적인 것의 유로서, 혹은 그것들이 복합된 것들로서나 단적으로 진술되는 것들로서. 그런데 모든 것들은 현살화된 것들이거나 가능적이다. 그 차이는 이하의 정도이다. 한편으로는 현실화된 것들과 개별적인 것들이 그것들이 어떤 것들의 원인들인 바의 것들과 동시에 존재하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데, 이를 테면 여기 이 건강하게 되는 중인 자에게 치료를 행하는 중인 자와 여기 이 건축되고 있는 것에게 건축을 행하고 있는 여기 이 사람이 그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라 가능적으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건축물과 건축가는 동시에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δεῖ δ' ἀεὶ [Bekker page 195b, line 22] τὸ αἴτιον ἑκάστου τὸ ἀκρότατον ζητεῖν, ὥσπερ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οἷον ἅνθρωπος οἰκοδομεῖ ὅτι οἰκοδόμος, ὁ δ' οἰκοδόμος κατὰ τὴν οἰκοδομικήν· τοῦτο τοίνυν πρότερον τὸ αἴτιον, καὶ οὕτως ἐπὶ πάντων)· ἔτι τὰ μὲν γένη τῶν γενῶν, τὰ δὲ καθ' ἕκαστον τῶν καθ' ἕκαστον (οἷον ἀνδριαντοποιὸς μὲν ἀνδριάντος, ὁδὶ δὲ τουδί)· καὶ τὰς μὲν δυνάμεις τῶν δυνατῶν, τὰ δ' ἐνεργοῦντα πρὸς τὰ ἐνεργούμενα. ὅσα μὲν οὖν τὰ αἴτια καὶ ὃν τρόπον αἴτια, ἔστω ἡμῖν διωρισμένα ἱκανῶς.
그런데 항상 각각의 최고 원인이 추적되어야 한다, 여타의 주제에 관련하여서도 그러하듯 (이를 테면 인간은 건축가이기 때문에 건축하지만, 그 건축가는 건축술에 따라 그리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더 앞선 원인이며,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런 식이다). 나아가 유들의 유(-적 원인)들, 다른 한편으로 개별적인 것들의 개별적인 것(원인)들이 (추적되어야 한다)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서는 조각가가, 여기 이 조각상에 대해서는 여기 이 조각가가). 또한 가능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가능적 원인들이, 반면 현실화된 것들에 대해서는 현실화된 것들이 (추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인들이 얼만큼이며 원인인 방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충분히 정의된 것으로 하자.


-蟲-

Β.

Τῶν ὄντων τὰ μέν ἐστι φύσει, τὰ δὲ δι' ἄλλας αἰτίας, φύσει μὲν τά τε ζῷα καὶ τὰ μέρη αὐτῶν καὶ τὰ φυτὰ καὶ τὰ ἁπλᾶ τῶν σωμάτων, οἷον γῆ καὶ πῦρ καὶ ἀὴρ καὶ ὕδωρ (ταῦτα γὰρ εἶναι καὶ τὰ τοιαῦτα φύσει φαμέν), πάντα δὲ ταῦτα φαίνεται διαφέροντα πρὸς τὰ μὴ φύσει συνεστῶτα.
존재하는 것들 중 일부는 자연에 의한 것이고, 다른 일부는 여타의 원인들로 인한 것이며, 자연에 의한 것들은 동물들과 그것들의 부분들 그리고 식물들과 물체들 중 단순한 것들, 이를 테면 흙과 불과 공기와 물이고 (왜냐하면 이것들과 이러한 것들이 자연에 의한 것들이라고 우리가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자연에 의하지 않고 구성된 것들에 대해 판이한 것들로 드러난다.
τούτων μὲν γὰρ ἕκαστον ἐν ἑαυτῷ 
ἀρχὴν ἔχει κινήσεως καὶ στάσεως, τὰ μὲν κατὰ τόπον, τὰ δὲ κατ' αὔξησιν καὶ φθίσιν, τὰ δὲ κατ' ἀλλοίωσιν· [Bekker page 192b, line 16] κλίνη δὲ καὶ ἱμάτιον, καὶ εἴ τι τοιοῦτον ἄλλο γένος ἐστίν, ᾗ μὲν τετύχηκε τῆς κατηγορίας ἑκάστης καὶ καθ' ὅσον ἐστὶν ἀπὸ τέχνης, οὐδεμίαν ὁρμὴν ἔχει μεταβολῆς ἔμφυτον, ᾗ δὲ συμβέβηκεν αὐτοῖς εἶναι λιθίνοις ἢ γηΐνοις ἢ μικτοῖς ἐκ τούτων, ἔχει, καὶ κατὰ τοσοῦτον, ὡς οὔσης τῆς φύσεως ἀρχῆς τινὸς καὶ αἰτίας τοῦ κινεῖσθαι καὶ ἠρεμεῖν ἐν ᾧ ὑπάρχει πρώτως καθ' αὑτὸ καὶ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λέγω δὲ τὸ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ὅτι γένοιτ' ἂν αὐτὸς αὑτῷ τις αἴτιος ὑγιείας ὢν ἰατρός· ἀλλ' ὅμως οὐ καθὸ ὑγιάζεται τὴν ἰατρικὴν ἔχει, ἀλλὰ συμβέβηκεν τὸν αὐτὸν ἰατρὸν εἶναι καὶ ὑγιαζόμενον· διὸ καὶ χωρίζεταί ποτ' ἀπ' ἀλλήλων).
왜냐하면 이것들 각각은 자체 내에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지니고, 어떤 것들은 장소에 따라, 다른 것들은 증가와 감소에 따라, 또 다른 것들은 전환(변화?)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침구와 의복은, 또 만일 이와 같은 무언가가 여타의 부류라면 그 또한, 그것의 각 술어를 획득한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즉 기술에 의한 것인 한에서, 변화의 아무런 본래적 충동도 지니지 않는 반면, 그것들에 돌로 된 것들로 혹은 흙으로 된 것들로 또는 이것들을 통해 섞인 것들로 이루어짐이 부수한 바로 그 측면에서, 또 그 만큼에 한해서만 충동을 지니는데, 
그 안에 일차적으로(?) 그 자체로 또한 부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운동하고 정지함의 어떠한(특정한) 자연적 원리와 원인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자신이 자기 스스로 의사임으로써 건강의 특정(어떤)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수적이지 않은 방식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건강해졌다는 바로 그 점에 한하여 의술을 지니는 게 아니라, 부수적으로 같은 자가 의사이고 또 건강해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어쨌든 서로로부터 독립되기도 한다).

(ὡς 해석 1. κατὰ τοσοῦτον과 독립. Charlton. 해석 2. κατὰ τοσοῦτον과 연결. Hardie와 Gaye. 후자에 따를 경우 번역은: '그 안에 일차적으로(?) 그 자체로 또한 … 원리와 원인이 있는, 그러한 만큼에 한해서만 충동을 지닌다.')

ὁμοίως δὲ καὶ τῶν ἄλλων ἕκαστον τῶν ποιουμένων· οὐδὲν γὰρ αὐτῶν ἔχει τὴν ἀρχὴν ἐν ἑαυτῷ τῆς ποιήσεως, ἀλλὰ τὰ μὲν ἐν ἄλλοις καὶ ἔξωθεν, οἷον οἰκία καὶ τῶν ἄλλων τῶν χειροκμήτων ἕκαστον, τὰ δ' ἐν αὑτοῖς μὲν ἀλλ' οὐ καθ' αὑτά, ὅσα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αἴτια γένοιτ' ἂν αὑτοῖς.
그런데 제작하는(작용하는?) 여타의 것들 각각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중 어느 하나 자체 내에 제작의 원리를 지니지 않고, 오히려 어떤 것들은 여타의 것들 내에 그리고 외부에 지니니, 이를 테면 집이나 여타 인공물(수작업물) 각각이 그러하고, 또 다른 것들은 그것들 내에 지니지만 자체적으로 지니지는 않는 바, 부수적으로 그것들에게 원인이 생길 것들이 그러하다.
φύσις μὲν οὖν ἐστὶ τὸ ῥηθέν· φύσιν δὲ 
ἔχει ὅσα τοιαύτην ἔχει ἀρχήν. καὶ ἔστιν πάντα ταῦτα οὐσία· ὑποκείμενον γάρ τι, καὶ ἐν ὑποκειμένῳ ἐστὶν ἡ φύσις ἀεί. κατὰ φύσιν δὲ ταῦτά τε καὶ ὅσα τούτοις ὑπάρχει καθ' αὑτά, οἷον τῷ πυρὶ φέρεσθαι ἄνω· τοῦτο γὰρ φύσις μὲν οὐκ [Bekker page 193a, line 1] ἔστιν οὐδ' ἔχει φύσιν, φύσει δὲ καὶ κατὰ φύσιν ἐστίν. τί μὲν οὖν ἐστιν ἡ φύσις, εἴρηται, καὶ τί τὸ φύσει καὶ κατὰ φύσιν. ὡς δ' ἔστιν ἡ φύσις, πειρᾶσθαι δεικνύναι γελοῖον· φανερὸν γὰρ ὅτι τοιαῦτα τῶν ὄντων ἐστὶν πολλά.
그래서 상술된 바의 것이 자연이다. 이런 종류의 원리를 지니는 모든 것이 자연(본성)을 지닌다. 또한 이것들 모두가 실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뭔가 존속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연이 항상 존속하는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도 이러한 것들에 그 자체로 현존하는 모든 것도 자연에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에 있어서 위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도 아니고 자연을 지니지도 않지만, 자연에 의해 그리고 자연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이 무엇인지는, 이야기되었고, 또한 자연에 의해서라거나 자연에 따라서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야기되었다. 반면 자연이 어떠한지는, 입증을 시도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들 중 이러한 것들은 여러가지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τὸ δὲ δεικνύναι τὰ 
φανερὰ διὰ τῶν ἀφανῶν οὐ δυναμένου κρίνειν ἐστὶ τὸ δι' αὑτὸ καὶ μὴ δι' αὑτὸ γνώριμον (ὅτι δ' ἐνδέχεται τοῦτο πάσχειν, οὐκ ἄδηλον· συλλογίσαιτο γὰρ ἄν τις ἐκ γενετῆς ὢν τυφλὸς περὶ χρωμάτων), ὥστε ἀνάγκη τοῖς τοιούτοις περὶ τῶν ὀνομάτων εἶναι τὸν λόγον, νοεῖν δὲ μηδέν. 
그런데 불분명한 것들을 통해 분명한 것들을 입증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과 자명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능력이 없는 자에 속하고 (그런데 이런 일을 겪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불분명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나면서부터 장님인 자가 색들에 관하여 추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에게 논의란 자구들에 관한 것이고 이해는 전혀 없을 수밖에 없다.

δοκεῖ δ' ἡ φύσις καὶ ἡ 
οὐσία τῶν φύσει ὄντων ἐνίοις εἶναι τὸ πρῶτον ἐνυπάρχον ἑκάστῳ, ἀρρύθμιστον <ὂν> καθ' ἑαυτό, οἷον κλίνης φύσις τὸ ξύλον, ἀνδριάντος δ' ὁ χαλκός. σημεῖον δέ φησιν Ἀντιφῶν ὅτι, εἴ τις κατορύξειε κλίνην καὶ λάβοι δύναμιν ἡ σηπεδὼν ὥστε ἀνεῖναι βλαστόν, οὐκ ἂν γενέσθαι κλίνην ἀλλὰ ξύλον, ὡς τὸ μὲν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ὑπάρχον, τὴν κατὰ νόμον διάθεσιν καὶ τὴν τέχνην, τὴν δ' οὐσίαν οὖσαν ἐκείνην ἣ καὶ διαμένει ταῦτα πάσχουσα συνεχῶς.
그런데 자연과 자연상 존재하는 것들의 실체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각각에 내속하는 최초의 것이라고 여겨지며, 그 자체로 비정형적인 것이기에, 이를 테면 목재는 침대의 자연이고, 청동은 조각상의 자연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안티폰은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말한다. 만일 누군가 침대를 매장하고서 그 썩은 침대가 다시금 싹을 틔울(or 꽃을 피울) 능력을 얻는다면, 침대가 아니라 목재가 될 능력일 것이며, 부수적인 방식으로 현존하는 것으로서는, 관습적인 구조와 기술인 반면, 그 실체는 저것(나무)으로서 지속적으로 이런 것들을 겪으면서 존속하기도 하는 것이다.
εἰ δὲ καὶ τούτων ἕκαστον πρὸς ἕτε
ρόν τι ταὐτὸ τοῦτο πέπονθεν (οἷον ὁ μὲν χαλκὸς καὶ ὁ χρυσὸς πρὸς ὕδωρ, τὰ δ' ὀστᾶ καὶ ξύλα πρὸς γῆν, ὁμοίως δὲ καὶ τῶν ἄλλων ὁτιοῦν), ἐκεῖνο τὴν φύσιν εἶναι καὶ τὴν οὐσίαν [Bekker page 193a, line 21] αὐτῶν. διόπερ οἱ μὲν πῦρ, οἱ δὲ γῆν, οἱ δ' ἀέρα φασίν, οἱ δὲ ὕδωρ, οἱ δ' ἔνια τούτων, οἱ δὲ πάντα ταῦτα τὴν φύσιν εἶναι τὴν τῶν ὄντων. ὃ γάρ τις αὐτῶν ὑπέλαβε τοιοῦτον, εἴτε ἓν εἴτε πλείω, τοῦτο καὶ τοσαῦτά φησιν εἶναι τὴν ἅπασαν οὐσίαν, τὰ δὲ ἄλλα πάντα πάθη τούτων καὶ ἕξεις καὶ διαθέσεις, καὶ τούτων μὲν ὁτιοῦν ἀΐδιον (οὐ γὰρ εἶναι μεταβολὴν αὐτοῖς ἐξ αὑτῶν), τὰ δ' ἄλλα γίγνεσθαι καὶ φθείρεσθαι ἀπειράκις. 
그런데 만일 이러한 것들의 각각 또한 다른 무언가에 대해서 이와 똑같은 것을 겪었다면 (예를 들어 청동과 황금은 물에 대해, 뼈와 목재는 흙에 대해, 여타의 것들 중 무엇이 되었든 또한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자연과 실체는 저쪽이라고 (안티폰이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불을, 또 다른 이들은 흙을, 어떤 이들은 공기를, 또 다른 사람들은 물을, 다른 자들은 이것들 중 일부를, 또 어떤 이들은 이것들 전부를 존재하는 것들의 자연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구든 이것들 중 이러한 것으로 취한 것, 그게 하나든 여럿이든, 그것이 또 그만큼의 것들이 통틀어 실체라고 주장하며, 반면 여타의 것들은 모두 이것들의 겪음들, 상태들, 성향들이고, 또 이것들 중 무엇이든 영원한 반면 (왜냐하면 이것들에게는 이것들로부터의 변화가 없기에), 여타의 것들은 한정없이 여러 차례 생성되고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ἕνα μὲν οὖν τρόπον οὕτως ἡ φύσις λέγεται, 
ἡ πρώτη ἑκάστῳ ὑποκειμένη ὕλη τῶν ἐχόντων ἐν αὑτοῖς ἀρχὴν κινήσεως καὶ μεταβολῆς, ἄλλον δὲ τρόπον ἡ μορφὴ καὶ τὸ εἶδος τὸ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ὥσπερ γὰρ τέχνη λέγεται τὸ κατὰ τέχνην καὶ τὸ τεχνικόν, οὕτω καὶ φύσις τὸ κατὰ φύσιν [λέγεται] καὶ τὸ φυσικόν, οὔτε δὲ ἐκεῖ πω φαῖμεν ἂν ἔχειν κατὰ τὴν τέχνην οὐδέν, εἰ δυνάμει μόνον ἐστὶ κλίνη, μή πω δ' ἔχει τὸ εἶδος τῆς κλίνης, οὐδ' εἶναι τέχνην, οὔτ' ἐν τοῖς φύσει συνισταμένοις· τὸ γὰρ δυνάμει σὰρξ ἢ ὀστοῦν οὔτ' ἔχει πω τὴν ἑαυτοῦ φύσιν, πρὶν ἂν λάβῃ τὸ εἶδος τὸ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ᾧ ὁριζόμενοι λέγομεν τί ἐστι σὰρξ ἢ ὀστοῦν, οὔτε φύσει ἐστίν. ὥστε ἄλλον τρόπον ἡ φύσις ἂν εἴη τῶν ἐχόντων ἐν αὑτοῖς κινήσεως ἀρχὴν ἡ μορφὴ καὶ τὸ εἶδος, [Bekker page 193b, line 5] οὐ χωριστὸν ὂν ἀλλ' ἢ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τὸ δ' ἐκ τούτων φύσις μὲν οὐκ ἔστιν, φύσει δέ, οἷον ἄνθρωπος.)
그리하여 그렇게 한 가지 방식으로 자연이 진술되었는데, 자체 내에 운동과 변화의 원리를 지니는 것들의 그 각각에 제일의 것으로서 기저에 놓이는 질료라는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는 정의에 따른 것으로서 형태와 형상(or 형상과 종류)이다. 왜냐하면 기술에 따른 것도 기술적인 것도 기술이라 진술되듯, 그런 식으로 또한 자연에 따른 것도 자연적인 것도 자연이라고 진술되며, 저기(저 단계)에서는 아직 기술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지닌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가능적으로만 침대이고, 아직 침대의 형상을 지니지 못한다면, 기술이라고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자연에 의해 구성된 것들의 경우에서도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능적인 살이든 뼈든, 우리가 그로써 살이나 뼈가 무엇인지를 정의하여 진술하는 그 진술에 따른 형상을 취하기 전에는, 
아직 그 자신의 자연을 지니지도 못하고, 자연에 의한 것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타의 방식에서 자연은 그 자체 내에 운동의 원리를 지니는 것들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정의에 따른 그러한 형태와 형상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부터 나온 것은 자연은 아니나, 자연에 의한 것인 바, 이를 테면 사람 같은 것이다.)

καὶ μᾶλλον αὕτη φύσις τῆς ὕλης· ἕκαστον γὰρ τότε λέγεται ὅταν ἐντελεχείᾳ ᾖ, μᾶλλον ἢ ὅταν δυνάμει. ἔτι γίγνεται ἄνθρωπος ἐξ ἀνθρώπου, ἀλλ' οὐ κλίνη ἐκ κλίνης· διὸ καί φασιν οὐ τὸ σχῆμα εἶναι τὴν φύσιν ἀλλὰ τὸ ξύλον, ὅτι γένοιτ' ἄν, εἰ βλαστάνοι, οὐ κλίνη ἀλλὰ ξύλον. εἰ δ' ἄρα τοῦτο φύσις, καὶ ἡ μορφὴ φύσις· γίγνεται γὰρ ἐξ ἀνθρώπου ἄνθρωπος. ἔτι δ' ἡ φύσις ἡ λεγομένη ὡς γένεσις ὁδός ἐστιν εἰς φύσιν. οὐ γὰρ ὥσπερ ἡ ἰάτρευσις λέγεται οὐκ εἰς ἰατρικὴν ὁδὸς ἀλλ' εἰς ὑγίειαν· ἀνάγκη μὲν γὰρ ἀπὸ ἰατρικῆς οὐκ εἰς ἰατρικὴν εἶναι τὴν ἰάτρευσιν, οὐχ οὕτω δ' ἡ φύσις ἔχει πρὸς τὴν φύσιν, ἀλλὰ τὸ φυόμενον ἐκ τινὸς εἰς τὶ ἔρχεται ᾗ φύεται. τί οὖν φύεται; οὐχὶ ἐξ οὗ, ἀλλ' εἰς ὅ. ἡ ἄρα μορφὴ φύσις. ἡ δὲ μορφὴ καὶ ἡ φύσις διχῶς λέγεται· καὶ γὰρ ἡ στέρησις εἶδός πώς ἐστιν. εἰ δ' ἔστιν στέρησις καὶ ἐναντίον τι περὶ τὴν ἁπλῆν γένεσιν ἢ μὴ ἔστιν, ὕστερον ἐπισκεπτέον.
이러한 형태가 오히려 질료보다 더 자연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은 가능적일 때보다 오히려 실현되어 있을 그 경우에 각각의 것으로 진술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생성되지만, 침대는 침대로부터 그리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또한 그것의 자연은 그 모습이 아니라 목재라고 말하기도 하는 바, 만일 싹을 틔울 수 있다면, 생성될 수도 있을 것은 침대가 아니라 목재이리란 점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래서 이것이 자연이라면, 형태 또한 자연이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인간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생성으로서 진술되는 그 자연은 자연을 목적으로 하는(향한) 길이다. 왜냐하면 의료가 의술적인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길이 아니라 건강을 목적으로 하는 길이라 진술되는 것처럼 그러하진 않기 때문이다. 즉 의술로부터는 의술적인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료가 성립함이 필연적인 반면, 자연은 그런 식으로 자연에 관계 맺지 않고, 오히려 무언가로부터 무언가로 자라나는 것은 그 자라난 출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라나는가? 그로부터 자라난 출처가 아니라, 자라나는 결과 쪽이다. 그래서 형태가 본성이다. 그런데 형태와 자연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술된다. 왜냐하면 결핍도 어떤 의미에서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인 생성과 관련하여서 특정한 결핍과 반대가 성립하는지, 그것은 이후에 고찰해야 할 일이다.

-蟲-

  Ὅτι δὲ μοναχῶς οὕτω λύεται καὶ ἡ τῶν ἀρχαίων ἀπορία, λέγωμεν μετὰ ταῦτα. ζητοῦντες γὰρ οἱ κατὰ φιλοσοφίαν πρῶτοι τὴν ἀλήθειαν καὶ τὴν φύσιν τῶν ὄντων ἐξετράπησαν οἷον ὁδόν τινα ἄλλην ἀπωσθέντες ὑπὸ ἀπειρίας, καί φασιν οὔτε γίγνεσθαι τῶν ὄντων οὐδὲν οὔτε φθείρεσθαι διὰ τὸ ἀναγκαῖον μὲν εἶναι γίγνεσθα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ἢ ἐξ ὄντος ἢ ἐκ μὴ ὄντος, ἐκ δὲ τούτων ἀμφοτέρων ἀδύνατον εἶναι· οὔτε γὰρ τὸ ὂν γίγνεσθαι (εἶναι γὰρ ἤδη) ἔκ τε μὴ ὄντος οὐδὲν ἂν γενέσθαι· ὑποκεῖσθαι γάρ τι δεῖν. καὶ οὕτω δὴ τὸ ἐφεξῆς συμβαῖνον αὔξοντες οὐδ' εἶναι πολλά φασιν ἀλλὰ μόνον αὐτὸ τὸ ὄν.
  고대인들의 난관 또한 오직 그렇게만 해소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다음으로 논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철학의 영역에서 최초로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와 본성을 탐구하는 자들은 난관에 의해 떠밀려 이를 테면 무언가 다른 길로 돌아섰고, 생성되는 것은 존재로부터 또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됨이 필연적이지만, 둘 중 어느 쪽으로부터든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존재하는 것들 중 아무것도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존재는 (그것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생성되지도 않고 비존재로부터 아무것도 생성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무언가가 아래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결론을 과장하며 다수도 아니라 오직 존재 자체뿐이라고 말한다.
ἐξετράπησαν : ἐκτρέπω aor.
ἀπωσθέντες : ἀπωθέω aor. pass.

  ἐκεῖνοι μὲν οὖν ταύτην ἔλαβον τὴν δόξαν διὰ τὰ εἰρημένα· ἡμεῖς δὲ λέγομεν ὅτι τὸ ἐξ ὄντος ἢ μὴ ὄντος γίγνεσθαι, ἢ τὸ μὴ ὂν ἢ τὸ ὂν ποιεῖν τι ἢ πάσχειν ἢ ὁτιοῦν τόδε γίγνεσθαι, ἕνα μὲν τρόπον οὐθὲν διαφέρει ἢ τὸ τὸν ἰατρὸν ποιεῖν τι ἢ πάσχειν ἢ ἐξ ἰατροῦ εἶναί τι ἢ γίγνεσθαι, ὥστ' ἐπειδὴ τοῦτο διχῶς λέγεται, δῆλον ὅτι καὶ τὸ ἐξ ὄντος καὶ τὸ ὂν ἢ ποιεῖν ἢ πάσχειν. οἰκοδομεῖ μὲν οὖν ὁ ἰατρὸς οὐχ ᾗ ἰατρὸς ἀλλ' ᾗ [Bekker page 191b, line 5] οἰκοδόμος, καὶ λευκὸς γίγνεται οὐχ ᾗ ἰατρὸς ἀλλ' ᾗ μέλας· ἰατρεύει δὲ καὶ ἀνίατρος γίγνεται ᾗ ἰατρός. ἐπεὶ δὲ μάλιστα λέγομεν κυρίως τὸν ἰατρὸν ποιεῖν τι ἢ πάσχειν ἢ γίγνεσθαι ἐξ ἰατροῦ, ἐὰν ᾗ ἰατρὸς ταῦτα πάσχῃ ἢ ποιῇ ἢ γίγνηται, δῆλον ὅτι καὶ τὸ ἐκ μὴ ὄντος γίγνεσθαι τοῦτο σημαίνει, τὸ ᾗ μὴ ὄν. ὅπερ ἐκεῖνοι μὲν οὐ διελόντες ἀπέστησαν, καὶ διὰ ταύτην τὴν ἄγνοιαν τοσοῦτον προσηγνόησαν, ὥστε μηθὲν οἴεσθαι γίγνεσθαι μηδ' εἶναι τῶν ἄλλων, ἀλλ' ἀνελεῖν πᾶσαν τὴν γένεσιν· ἡμεῖς δὲ καὶ αὐτοί φαμεν γίγνεσθαι μὲν μηθὲν ἁπλῶς ἐκ μὴ ὄντος, πὼς μέντοι γίγνεσθαι ἐκ μὴ ὄντος, οἷον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ἐκ γὰρ τῆς στερήσεως, ὅ ἐστι καθ' αὑτὸ μὴ ὄν, οὐκ ἐνυπάρχοντος γίγνεταί τι· θαυμάζεται δὲ τοῦτο καὶ ἀδύνατον οὕτω δοκεῖ γίγνεσθαί τι, ἐκ μὴ ὄντος)· ὡσαύτως δὲ οὐδ' ἐξ ὄντος οὐδὲ τὸ ὂν γίγνεσθαι, πλὴν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ὕτω δὲ καὶ τοῦτο γίγνεσθαι,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οἷον εἰ ἐκ ζῴου ζῷον γίγνοιτο καὶ ἐκ τινὸς ζῴου τι ζῷον· οἷον εἰ κύων <ἐκ κυνὸς ἢ ἵππος> ἐξ ἵππου γίγνοιτο. γίγνοιτο μὲν γὰρ ἂν οὐ μόνον ἐκ τινὸς ζῴου ὁ κύων, ἀλλὰ καὶ ἐκ ζῴου, ἀλλ' οὐχ ᾗ ζῷον· ὑπάρχει γὰρ ἤδη τοῦτο· εἰ δέ τι μέλλει γίγνεσθαι ζῷον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ὐκ ἐκ ζῴου ἔσται, καὶ εἴ τι ὄν, οὐκ ἐξ ὄντος· οὐδ' ἐκ μὴ ὄντος· τὸ γὰρ ἐκ μὴ ὄντος εἴρηται ἡμῖν [Bekker page 191b, line 26] τί σημαίνει, ὅτι ᾗ μὴ ὄν. ἔτι δὲ καὶ τὸ εἶναι ἅπαν ἢ μὴ εἶναι οὐκ ἀναιροῦμεν.
  그러므로 저들은 이야기된 점들 때문에 그 의견을 취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로부터 혹은 비존재로부터 생겨난다' 라는 것, 혹은 '비존재나 존재가 무언가를 행한다'거나 '겪는다'거나 '무엇이든 여기 이것이 된다'는 것은, 한 가지 방식에서는 '
의사가 무언가를 한다'거나 '겪는다'거나 '의사로부터 무언가가 있다'거나 '된다'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그래서 이것이 두 가지로 진술될 경우, 존재로부터의 것도 존재도 행하거나 겪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의사가 의사로서가 아니라 건축가로서 건축하고, 의사로서가 아니라 검은 자로서 희게 된다. 다른 한편 의사로서 의술을 행하고 비의료인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특히 정당하게 '의사가 무언가를 뭔가를 행한다'거나 '겪는다'거나 '의사로부터 생성된다'고 말하기에, 의사로서 이런 일들을 겪거나 행하거나 그로부터 생성될 것이라면 그러하기에, 비존재로부터 생성된다는 것이 이것을, 비존재로서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저들은 바로 그것을 나누지 않고 빠뜨렸고, 또한 이러한 무지로 인해, 여타의 것들 중 아무것도 생성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모든 생성을 제거할 정도로 무지한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우리는 스스로도 한편으로 단적으로는 비존재로부터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는다고 말하자미나, 어떤 식으로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된다고, 이를 테면 우연적으로 그러하다고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는 비존재인, 그러한 결핍으로부터, 그것이 존속하지 않음에도 그로부터 무언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놀라운 것이고 그런 식으로, 비존재로부터 무언가 생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우연한 경우를 제외하면, 존재로부터 존재가 생성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식(예외적)으로 그것이 생성되니, 이를 테면 동물로부터 동물이 생겨나고 또 특정 동물로부터 특정 동물이 생겨난다면 그와 같은 방식에서이다. 예를 들어 <개로부터> 개가 <혹은> 말로부터 <말이> 생성된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오직 특정 동물로부터만이 아니라, 동물로부터, 그러나 동물로서가 아니라 개가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동물로서의 동물)은 이미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무언가 장차 우연적이지 않게 동물이 생성될 것이라면, 동물로부터 있을 것이 아니고, 또 만일 무언가 존재한다면(~이라면), 존재로부터가 아닐 것이다. 비존재로부터도 아니다. 왜냐하면 '비존재로부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비존재로서'라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존재나 비존재 모두 우리는 폐기하지 않았다.
διελόντες : διαιρέω aor. part.

  εἷς μὲν δὴ τρόπος οὗτος, ἄλλος δ' ὅτι ἐνδέχεται ταὐτὰ λέγειν κατὰ τὴν δύναμιν καὶ τὴν ἐνέργειαν· τοῦτο δ' ἐν ἄλλοις διώρισται δι' ἀκριβείας μᾶλλον. ὥσθ' (ὅπερ ἐλέγομεν) αἱ ἀπορίαι λύονται δι' ἃς ἀναγκαζόμενοι ἀναιροῦσι τῶν εἰρημένων ἔνια· διὰ γὰρ τοῦτο τοσοῦτον καὶ οἱ πρότερον ἐξετράπησαν τῆς ὁδοῦ τῆς ἐπὶ τὴν γένεσιν καὶ φθορὰν καὶ ὅλως μεταβολήν· αὕτη γὰρ ἂν ὀφθεῖσα ἡ φύσις ἅπασαν ἔλυσεν αὐτῶν τὴν ἄγνοιαν.
  그래서 한 가지 방식은 이러한 것이고, 다른 방식은 그러한 것들을 능력(잠재)과 발현(현실)에 따라서 논함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여타의 경우들에서 상당한 정확함을 통해 정의된다. 그래서(우리가 말했던 바로 그대로) 이야기된 것들 중 일부를 폐기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난점들이 해소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앞서의 사람들도 그 만큼이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변화를 향한 그 길에서 이탈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것으로 관찰됨으로써 자연은 그들의 모든 무지 일반을 해소시켰다.

  Ἡμμένοι μὲν οὖν καὶ ἕτεροί τινές εἰσιν αὐτῆς, ἀλλ' οὐχ ἱκανῶς. πρῶτον μὲν γὰρ ὁμολογοῦσιν ἁπλῶς γίγνεσθαί τι ἐκ μὴ ὄντος, ᾗ Παρμενίδην ὀρθῶς λέγειν· εἶτα φαίνεται αὐτοῖς, εἴπερ ἐστὶν ἀριθμῷ μία, καὶ δυνάμει μία μόνον εἶναι. τοῦτο δὲ διαφέρει πλεῖστον. ἡμεῖς μὲν γὰρ ὕλην καὶ στέρησιν ἕτερόν φαμεν εἶναι, καὶ τούτων τὸ μὲν οὐκ ὂν εἶναι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τὴν ὕλην, τὴν δὲ στέρησιν καθ' αὑτήν, καὶ τὴν μὲν ἐγγὺς καὶ οὐσίαν πως, τὴν ὕλην, τὴν δὲ οὐδαμῶς· οἱ δὲ τὸ μὴ ὂν τὸ μέγα καὶ τὸ μικρὸν ὁμοίως, ἢ τὸ συναμφότερον ἢ τὸ χωρὶς ἑκάτερον. ὥστε παντελῶς ἕτερος ὁ τρόπος [Bekker page 192a, line 9] οὗτος τῆς τριάδος κἀκεῖνος. μέχρι μὲν γὰρ δεῦρο προῆλθον, ὅτι δεῖ τινὰ ὑποκεῖσθαι φύσιν, ταύτην μέντοι μίαν ποιοῦσιν· καὶ γὰρ εἴ τις δυάδα ποιεῖ, λέγων μέγα καὶ μικρὸν αὐτήν, οὐθὲν ἧττον ταὐτὸ ποιεῖ· τὴν γὰρ ἑτέραν παρεῖδεν. ἡ μὲν γὰρ ὑπομένουσα συναιτία τῇ μορφῇ τῶν γιγνομένων ἐστίν, ὥσπερ μήτηρ· ἡ δ' ἑτέρα μοῖρα τῆς ἐναντιώσεως πολλάκις ἂν φαντασθείη τῷ πρὸς τὸ κακοποιὸν αὐτῆς ἀτενίζοντι τὴν διάνοιαν οὐδ' εἶναι τὸ παράπαν. ὄντος γάρ τινος θείου καὶ ἀγαθοῦ καὶ ἐφετοῦ, τὸ μὲν ἐναντίον αὐτῷ φαμεν εἶναι, τὸ δὲ ὃ πέφυκεν ἐφίεσθαι καὶ ὀρέγεσθαι αὐτοῦ κατὰ τὴν αὑτοῦ φύσιν. τοῖς δὲ συμβαίνει τὸ ἐναντίον ὀρέγεσθαι τῆς αὑτοῦ φθορᾶς. καίτοι οὔτε αὐτὸ αὑτοῦ οἷόν τε ἐφίεσθαι τὸ εἶδος διὰ τὸ μὴ εἶναι ἐνδεές, οὔτε τὸ ἐναντίον (φθαρτικὰ γὰρ ἀλλήλων τὰ ἐναντία), ἀλλὰ τοῦτ' ἔστιν ἡ ὕλη, ὥσπερ ἂν εἰ θῆλυ ἄρρενος καὶ αἰσχρὸν καλοῦ· πλὴν οὐ καθ' αὑτὸ αἰσχρόν, ἀλλὰ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ὐδὲ θῆλυ, ἀλλὰ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그러므로 다른 어떨 이들도 그 길에 가 닿았지만, 충분치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선 그들은 단순히 비존재로부터 무언가 생성된다는 것을 동의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옳게 논한다는 측면에서. 다음으로 그들에게는, 만일 정녕 수적으로 하나가 존재한다면, 가능적으로도(잠재적으로도)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상당히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질료와 결핍이 다르다고 말하고, 이것들 중 한쪽은 우연적으로 비존재라고, 즉 질료가 그러한 반면, 결핍은 그 자체로 비존재라 말하며, 또한 어떤 식으로든 실체에 근접한 것을 질료라고, 그런데 결핍은 전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비존재를 큼 그리고 작음과 유사하게, 양자를 합쳐서든 그 둘 각각을 따로든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이 방식은 저들의 그 셋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기, 즉 무언가 본성이 기저에 놓여야 한다는 데에까지 이르렀지만, 이 본성을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누군가 그 본성을 큼과 작음이라 말하면서 둘로 만든다 하더라도, 조금도 못지 않게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본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즉 기저에 놓인 본성은 생성되는 것들에 대해 형태와 공동원인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머니처럼. 그런데 반대의 또 다른 몫은 그것의 악영향에 사유를 집중하는 자에게는 자주 전적으로 비존재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무언가 신적이고 선하며 바람직한 것이 존재할 때, 우리는 한쪽을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본디 그 본성상 바랄 만하고 추구될 만한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반대로 그것의 소멸이 추구되는 일이 귀결한다. 그렇지만 형상 그 자체가 그 자신을 소위 바라는 일도 결핍이 결여된 것이라는 이유로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되며 (반대쌍은 서로 소멸시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질료가 그런 것이다. 만일 계집이 사내를 바라고 추함이 아름다움을 바란다면 그러할 것처럼. 그 자체로 추한 것을 제외하고, 우연적으로 추한 것이, 그리고 계집의 경우도, 오히려 우연적인 한에서.
Ἡμμένοι : ἅπτω pf. mp.
  φθείρεται δὲ καὶ γίγνεται ἔστι μὲν ὥς, ἔστι δ' ὡς οὔ. ὡς μὲν γὰρ τὸ ἐν ᾧ, καθ' αὑτὸ φθείρεται (τὸ γὰρ φθειρόμενον ἐν τούτῳ ἐστίν, ἡ στέρησις)· ὡς δὲ κατὰ δύναμιν, οὐ καθ' αὑτό, ἀλλ' ἄφθαρτον καὶ ἀγένητον ἀνάγκη αὐτὴν [Bekker page 192a, line 29] εἶναι. εἴτε γὰρ ἐγίγνετο, ὑποκεῖσθαί τι δεῖ πρῶτον ἐξ οὗ ἐνυπάρχοντος· τοῦτο δ' ἐστὶν αὐτὴ ἡ φύσις, ὥστ' ἔσται πρὶν γενέσθαι (λέγω γὰρ ὕλην τὸ πρῶτον ὑποκείμενον ἑκάστῳ, ἐξ οὗ γίγνεταί τι ἐνυπάρχοντος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εἴτε φθείρεται, εἰς τοῦτο ἀφίξεται ἔσχατον, ὥστε ἐφθαρμένη ἔσται πρὶν φθαρῆναι. περὶ δὲ τῆς κατὰ τὸ εἶδος ἀρχῆς, πότερον μία ἢ πολλαὶ καὶ τίς ἢ τίνες εἰσίν, δι' ἀκριβείας τῆς πρώτης φιλοσοφίας ἔργον ἐστὶν διορίσαι, ὥστ' εἰς ἐκεῖνον τὸν καιρὸν ἀποκείσθω. περὶ δὲ τῶν φυσικῶν καὶ φθαρτῶν εἰδῶν ἐν τοῖς ὕστερον δεικνυμένοις ἐροῦμεν. ὅτι μὲν οὖν εἰσὶν ἀρχαί, καὶ τίνες, καὶ πόσαι τὸν ἀριθμόν, διωρίσθω ἡμῖν οὕτως· πάλιν δ' ἄλλην ἀρχὴν ἀρξάμενοι λέγωμεν.
  그런데 <질료는> 한편으로는 소멸하고 생성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안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소멸하지만 (왜냐하면 소멸되는 것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즉 결핍이), 가능적으로는, 그 자체로서 소멸하지 않고, 그것이 불생이자 불멸임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생성된다면, 그것이 그로부터 나올 그리고 그것 안에 존속하는 무언가가 기저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본성 자체이다. 그래서 생성 이전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개물에 처음 기저에 놓이는 것, 그로부터 무언가 생성되고 그것 안에 부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존속하는 것을 질료라 말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소멸된다면, 궁극적으로 그것에 당도하고, 그래서 소멸 이전에 소멸되어 있을 것이다. 형상에 따른 원리에 관하여서는, 그것이 하나인지 여럿인지 또 무엇인지 혹은 무엇들인지 하는 문제는, 정확함을 통해(정밀하게)  정의하는 것은 제1 철학의 일이고, 그래서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그런데 자연적이고 소멸하는 형상들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이후의 설명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들이 있다는 것, 그것들이 무엇들이냐는 것, 수적으로 얼만큼이냐는 것은, 그렇게 정의된 것으로 하자. 그럼 다시 여타의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논의해 보자.

-蟲-

1.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시민의 덕(politike arete)을 가르친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민회나 법정에서 시민이라면 누구나 서로에게 조언을 한다는 점을 들어 딱히 시민의 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따로 있기는 어려울 것이라 말하고, 또한 페리클레스 등 시민의 덕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제 자식들을 훌륭한 시민으로 키우는 데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덕이 가르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리라 반박한다. 이러한 두 가지 반박에 대해 프로타고라스는 신화의 형식과 논증의 형식으로 두 가지 '위대한 연설'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한다. 그 논의는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우선 신화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들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dike(정의 or 정의감)와 aidos(염치)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것이 없다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나약한 인간들은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는 한에서 멸종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dike와 aidos를 통해 인간들은 최소한 서로 적대하거나 공동체를 파괴하지는 않게 된다. 즉,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는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서 정치적인 일들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회의 유지 및 존속에 필요한 이러한 소극적인 참여에서 나아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즉 가정과 폴리스의 일들을 잘 숙고하는 데에 이르기까지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 내에서 각 시민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지시와 훈계로 기본적인 규칙들을 습득하게 되고, 마치 모국어를 배우듯 학교, 시장, 법정 등 사적이거나 공적인 여러 모임들 속에서 서로를 통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지식들을 획득한다. 각기 그 천성 혹은 재능에 따라 배우는 바가 더디거나 그 성취가 월등하다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으나, 그들이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를 스스로 깨뜨리지 않는 한에서 그들 모두는 사회 바깥의 야만인들에 비하면 훨씬 더 시민적 덕의 전문가들이고 교사들이다. 서로가 가르치고 또한 서로 배운다는 점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교사이고 학생이다. 그러나 더 잘 숙고할 줄 아는 이가 있으며, 그에게 배우면 더욱 많은 것을 더욱 잘 배울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결론은 그러한 덕의 교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교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교사이며, 그럼에도 그 중에서 더 나은 교사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시민의 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에 골자이다.

  그가 그리는 사회는 일종의 합의를 통해 구성되고 또한 유지되는 공동체로 생각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가 속한 공동체를 해체시킬 수 없지만, 또 다른 한편 이 공동체의 구성은 각자 본성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dike와 aidos를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각자 자신의 정의와 염치로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어 공동체를 유지시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모두가 이 공동체의 존속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 그들 각자는 공동체 운영에 대한 조언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서로 대화와 설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참임을 믿게 만들어 각자가 믿는 방향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나아가고자 한다. 그들이 서로 가르치는 일에 반대하지 않고, 또한 시민적 덕을 갖추지 않는 일은 사회 속에서 불가능한, 혹은 설령 가능하더라도 숨겨야만 하는 일이라 믿는 한에서, 그들은 서로 대등한 발언권을 지닌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직접민주주의와 같은 형태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비록 프로타고라스가 자신에 대해 말하듯 그 중에서는 가정과 사회에 대해 더 나은 숙고를 지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해당 대화편의 이후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것은 자신의 말을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힘에 의해 강제받거나 혹은 어떤 절대적인 법령이나 심지어 진리 때문에라도 피치 못할 방식으로 누군가의 의견에 따르게 되지 않는다. 단지 말을 듣고 그 생각을 납득하게 되면 그에 자발적으로 따를 뿐이다. 

  프로타고라스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격언인 인간척도설을, 플라톤의 해석과 달리 인식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회적인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위의 사회상에 부합할 여지가 있다. 인간은 만물이 아니라 만사(萬事, panta bpragmata)의 척도이다. 사회적인 일들 일체는 모든 인간 개개인의 숙고 대상이며 각자의 의견은 누구의 것이 다른 누구의 것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다. 모두가 모두에게 교사이고 또한 학생이며, 사회에 참여하는 자는 그 누구라 하더라도, 아무리 소양이 없고 어리석다 하더라도 일단 사회구성원인 한에서는 시민적 덕의 전문가이다. 어떤 일이 이러저러하다거나 이러저러하지 않다는 일의 기준, 척도, 전쟁을 한다든지 범죄자를 추방한다든지 세금을 거둔다든지 하는 일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은 각 해당 개인에게 참이다. 객관적으로 절대로 옳고 그른 그러한 사회적 판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문제는 가치상대주의로 해석할 경우 어느 정도까지 극단적인 상대주의가 구성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수사술과 설득이란 개념이다. 설령 가치상대주의라 하더라도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주장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무엇을 더 선호하고 따를 것인지 여부가 진리를 기준으로 하지 않을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더 그럴싸하게 말하는 자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도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말이 참이라고 다른 누군가가 믿는다면, 그 믿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믿은 자에게 상대적으로 참이다.

2. 『테아이테토스』에서 제시되는 플라톤의 해석에 따라 프라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인식론적 상대주의로 해석할 경우 신들에 대한 그의 언급으로 전해지는 내요을 일관되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신들에 대해 그들이 이러저러한지/있는지 혹은 이러저러하지 않은지/없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척도인 한에서, 존재하는 것들에 속하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그가 믿는 바가 곧 참이 되는 그러한 인간이 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더욱이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등장인물로서 프로타고라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뿐만 아니라 제우스와 헤르메스, 헤라와 헤파이스토스까지 언급하고 나선다. 신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가 제시하는 신화적 해석이란 것은 프로타고라스 자신의 입장에 일관성있게 적용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를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일관된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은 사회적인 만사의 척도이다. 오직 인간만이 사회를 구성하며 그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성에 권리와 책임이 있고 그 정도에서 다른 구성원들과의 차이는 없다. 또한 그렇기에 각 개인은 해당 사회에 대해 동등한 발언권을 지니며 모두가 모두에게 가르치고 또한 배움으로써 사회를 유지, 존속시켜 나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지식, 시민적 덕의 전문가일 뿐 그 외의 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위대한 연설 중 전반부 신들에 대한 논의는 사회 구성의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인간이 사회에 대해 지니는 본성적 능력의 성립 혹은 획득 과정이란 것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신화를 통한 유비라 생각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없다. 신들이 실제로 그러하였는지 역사적 사실을 보고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개개인 상호에 어떤 기여도나 능력 자체의 차이는 없다는 점이 설득되기만 한다면, 이후 논증을 통해 제시되는 위대한 연설의 후반부 논의를 이해하는 데에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신들이 정말 그랬습니까?' 라고 되묻는다면 프로타고라스는 '그건 나도 알 수 없소'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신들이 주지 않았더라도 어쨌든 인간들은 사회를 꾸려 살아가며, 그 사회 밖에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 단지 그것만 전달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척도설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의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를 있는 그대로 신들에 대한 그의 전언과 일관되게 해석할 가능성도 검토가 필요하다.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상대주의 인식론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거기에 전제될 수 있는 존재론적 입장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을 끌어 들인다. 이 만물유전으로부터 인식론적 상대론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인식을 감각적인 것, 경험적인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어떤 한 순간 어떤 한 장소의 어떤 한 개인에게 그가 느낀 바의 것이 참이다. 즉 그가 감각하는 그대로의 것이 그에게 실제로 그러저러하다. 이러한 입장에 설 경우 신들이란 감각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종류의 것들로서, 그것들이 이러한지 저러한지 여부는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는 『소피스테스』에서 오직 손에 닿는 것들만을 믿는 자들, 거인족의 입장과 유사하다. 그저 손에 닿고 눈에 보이며 귀에 들려오는 순간순간의 것만이 나에게 사실이며 그러한 감각은 매순간 변화하기에 고정불변하게 내 감각과 무관하게 이를 테면 영혼 따위의 것 속에서만 가능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상태나 조건에 따라 감각은 서로 다르고 각자의 감각은 결코 공유될 수 없으므로, 또한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모두 상대적이다. 이 경우 결국 공통의 언어, 공통의 추론과 같은 객관적 성격의 어떠한 인식적 활동도 불가능할 것이므로, 그들은 아무말도 못하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입장이 그 논리의 내재적 측면에서 반박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플라톤 자신이 묘사하는 프로타고라스가 또 다른 대화편에서 사회 공동체의 합의나 상호에 가르치고 배우는 관습 및 전통 따위의 것들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아니, 그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기까지 한다. 또한 아이들에게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거의 주입시키는 방식으로 교육한다고 간주하며, 그것이 해당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합의된 것인 듯이 말하고 있다. 감각 경험을 통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서는 이러한 합의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언어와 교육, 그리고 합의를 통해 구성된 사회 등이 가능할 정도의 여지는 남는 그러한 방식의 상대주의로 해석되지 않는 한, 인간 척도설을 프로타고라스에 대한 것으로 전해지는 다른 입장들과 정합적으로 이해할 여지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3.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회의주의, 프로타고라스는 상대주의, 플라톤은 절대주의? 아, 모르겠네.

-蟲-

  

1. 왜 동일한 관계를 통해 상이한 결과들이 도출되는가. 다른 유들이 있음에 참여함으로써 있는 것들이 되는 경우와 있음 이외의 유들이 서로 결합하여 참여 대상에 관하여 있는 것들이 되는 경우의 차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무엇에 관하여 어떠하다는 사태와 이를 가리키는 문장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지시는 일종의 모방인가. 결국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은 유들의 결합과 분리, 즉 변증술이 진술에 대해 그리고 그 이전에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인 유에 대한 정의에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지 설명으로 이어진다. 다시, 이는 『소피스테스』라는 대화편 전체의 일관된 해석 가능성에 대한 탐구작업으로 귀결된다.

  무언가를 그 자체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직 그 자체의 본성만을 진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에 대한 진술보다도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재귀적 지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시 대상으로서의 무엇인가가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정된 상태를 넓은 의미에서 정지(stasis)로 간주할 수 있다면, 결국 자기 동일성이 요구되는 일체의 것은 모두 정지를 전제해야만 한다. 반면 이러한 정지만을 인정할 경우 소위 '형상의 친구들'이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술어를 필요로 한다. 그 이전에 최소한 그것의 이름이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이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대상은 이름에 의해 지시된다. 이러한 능동과 수동의 관계는 인식의 차원에서 설명된다. '형상의 친구들'은 무언가가 인식되기 위해서라도 그것이 반드시 정지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인식대상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은 인식된다. 그것은 인식된 것으로 변화한다. 어떤 일을 행하여 무언가로 만들 때에 그 무언가가 어떤 무엇으로 된다. 이러한 행함(poiein)과 겪음(paschein)은 능력(dynamis)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그것 없이는 지시도 진술도 사유도 불가능하며 아무런 결합도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이 능력이 발휘되어 나오는 결과는 이전에 있지 않거나 무엇이지 않은 것이 이후에 있거나 무엇인 것으로 이끌리는 것, 즉 무엇이 다른 무엇으로 되는 것, ~임/있음(einai)에서 ~됨/생김(gignesthai)으로의 이행이다. 이러한 ~됨/생김은 운동(kinesis)이다. 대화편의 진행 순서에 따르자면 이 운동, 능력만을 인정하고 정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다시 정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앞서 보았듯, 정지 없이는 어떤 것을 다름 아닌 바로 그것으로 동일시하고 고정된 것으로서 파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정지'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그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의 인식이 성립한다면, 그러한 인식작용을 통해 인식을 겪어 인식된 것으로 변화하는 한에서, 그 정지 역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운동'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그것으로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면, 그것을 지시하고 진술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바로 그것으로서 변화하지 않고 유지된다면, 그러한 한에서 운동 또한 정지해 있어야만 한다.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과 같은, 존재가 운동인가 혹은 정지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엘레아 출신의 손님에 의해 어느 쪽도 승리할 수 없는 싸움으로 결론내려진다. 그러나 있음, 운동, 정지라는 가장 큰(혹은 매우 중요한, megistos) 유들이 선택되고, 이것들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더 이상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운동은 정지와, 정지는 운동과 가장 반대되는 것이며, 그것들 사이의 결합은 가장 불가능하다고 거듭하여 언급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가능할 것이다. 운동은 자기 자신과 같을 수 있는가? 혹은 정지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가? 나아가 정지는 인식될 수조차 없는가? 이 물음은 유들 사이의 결합활동을 지시하는 동사 '참여(metechein)'에 이어진다. 어떤 것이 다른 무엇에 참여한다는 것, 그 대상의 몫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 그 대상을 공유한다(koinonein)는 것 역시 능동과 수동의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 여기에는 능력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러한 한에서 운동이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정지가 운동과 결코 결합할 수 없다면, 정지는 이러한 능력을 갖출 수 없고, 정지는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될 것이며, 정지를 가리키는 이름과 정지 그 자체 사이에서도 아무런 결합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손님은 만일 운동 그 자체가 어떤 식으로 정지에 참여했었더라면, 운동을 정지한 것으로 부르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언급은 if + simple past, would + base verb, 즉 반사실적 가정문의 형태로 주어진다.(고전 그리스어 ei + imperfect indicative V., an + imperfect ind. V.의 형태이다.) 그리고 테아이테토스는 이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맞는 말씀이라 맞장구를 치고, 그 근거로 어떤 것들(혹은 어떤 경우)은 결합하는 경향이 있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내세운다. 운동과 정지는 서로 가장 반대되고 그 결합은 가장 불가능한 것이라 이야기되어 왔다. 그래서 이들 사이의 결합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라는 전제가 주어질 때, 손님의 표현이 반사실적 가정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더라도, 테아이테토스의 대답을 통해 그 반사실적 가정이 현실화될 여지를 찾을 수는 없는가? 운동과 정지의 전면적인 결합은 말 그대로 모순이다. 정지가 운동이라거나 운동이 곧 정지라고 할 사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지는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을 술어로 갖는 한에서 그러한 것들에 참여하는 그 방식으로 운동할 수 있다. 운동은 운동 그 자체가 자기 자신과 같은 고유한 본성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그 점에서 그런 방식으로 또한 정지해 있을 수 있다. 문법적으로 이러한 독해를 이끌어낼 여지는 전무한가. 다른 한편 문맥을 고려하여 논증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운동과 정지 둘 사이의 결합 가능성이 배제될 수 있는가.

  운동과 정지가 각기 상호관계와 자기동일성 각각에 대해 전제된다면, 운동이 운동하는 경우와 운동이 정지하는 경우, 정지가 운동하는 경우와 정지가 정지해 있는 경우 사이의 구분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즉 그 자체로 오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활동, 그런 사태를 지시하는 진술(말하자면 자기술어화)과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을 통한 서술의 구분은 결합을 통한 변화와 진술이 어떠한 종류의 무엇인지에 대한 일례가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존재를 하나로 보는 자들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에서 손님은 존재가 하나와 맺는 관계를 '부분들'과 '전체' 그리고 '겪음'이란 말들을 통해 설명한다. 존재는 부분들을 통해 하나를 겪어 전체가 하나가 된다. 이를 통해 '존재는 하나이다'라는 참인 진술을 얻을 수 있다. 하나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존재가 그 전체를 아울러 존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지시될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여전히 하나이기도 하다. 만일 존재와 하나 사이의 관계가 존재와 운동, 같음과 정지 등 이후에 등장하는 '가장 거대한(아주 중요한) 유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결합과 분리에 있어서 부분적 관계와 전체적 관계라는 구분을 얻을 수 있다. 동일한 결합이라는 활동은 그 적용 범위 혹은 그 수준에 따라 상이한 결과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 

  진술(logos)이라는 유 그 자체는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 여타의 것들이지 않다. 그것들이 아니라는 것은 곧 '~이지 않음/있지 않음(to me on)'과 결합한다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인 결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스테스는 진술이 ~이지 않음과 결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그것들이 결합하지 않고서는 거짓진술이 성립할 수 없고, 거짓진술을 지어내는 기술로서의 소피스테스 기술이라는 것도 말할 수 없다. 소피스테스가 거짓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거짓말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진술이라는 유가 to me on과 결합한 결과는 진술이 자기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었지 그것이 거짓진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술과 to me on 사이의 결합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자기 이외의 것들이지 않게 되기도 하고, 거짓진술이 되기도 한다. 같은 요소들로 같은 결합이 이루어졌는데 어째서 서로 다른 두 가지 결과들이 나오는가. 여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진술이 to me on과 결합하여 진술이 아니게 되는 경우도, 불가능한 경우로서 여전히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합의 층위, 수준은 차이를 보인다.

2. 프로타고라스 '신들에 관하여' 발제 준비. 인간은 만물에 대해, ~인 것들에 대해서는 ~이라고 하는, ~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이지 않다고 하는 척도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면 신에 대해서도 인간은 척도이지 않은가.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신들에 대해서는 ~인지도 ~이지 않은지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혹시 '만물'이 아니라 '만사'인가.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정치와 정의, 염치를 논하는 프로타고라스는 인간들의 일, 즉 정치적인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서로 가르치고 또한 배운다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사에 대해 척도이다. 그렇다면 신들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 '신화적 설명'에서 등장하는 신은 일종의 유비를 위한 상징에 불과하다. 정의와 염치를 실제로 신이 준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빠짐없이 전제되어 있는 어떤 선천적 조건 혹은 능력에 대한 대강의 이해를 제공하기 위해 그런 직유를 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프로타고라스를 극단적인 상대주의자로 보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기가 어려운데, 어찌할까나. 뭐 욕심따라 갈 게 아니라 말이 되는 쪽으로 끌려 가야지. 헛바람을 조심하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회의주의자, 교조주의자, 상대주의자. 재미있는 삼각관계일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다시 정리해야 할 듯. 또 다른 과제는 『프로타고라스』에서 위대한 연설을 통해 추정 가능한 사회상, 그리고 그러한 사회상과 '인간척도설' 사이의 일관된 해석의 가능성. 아, '신들에 관하여' 발제 생각하다 보니 얼추 후자는 가닥이 잡힌 듯. 그런데 가닥이 잡혔다기 보다 그냥 윤철형님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_=? 뭐 배우는 입장이니 상관은 없을지도. 이걸로 논문 낼 것도 아니고.

3.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 장소 확보. 다음 주말에 분석철학 학회인지 뭔지 때문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 철학사상연구소 방 빌리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는 교수님들 전용. 일단 메일 드려 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걸로. 그런데 einai의 complete/incomplete 구분이 꽤 오랜 논쟁을 불러 일으킨 반면 gignesthai 관련해서는 왜 그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가. 무엇이 된다는 것과 무엇이 생긴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는 것 아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것들 사이의 생성과 복잡한 것들 사이의 생성, 단순한 생성을 구분하는 것 같은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에서 이에 관련해 뭔가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지. 재밌는 건 많은데 쉬운 건 없고 뭐 그렇네.

-蟲-

1. 재능, 돈, 노력. 셋 중 하나만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그가 철학을 하든 말든 난 관심 없다.
   각 조건은 다음과 같다.
   재능 : 어떤 식으로든 인정 받는 것. 학술지 등재든, 학계의 평판이든,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논증의 분석과 구성을 통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능력이겠다.
   돈 : 따로 매일 8시간 이상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도, 최소한 자기 자신, 좀 더 넓히자면 자신의 가족 생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수준. 금수저 물고 태어난 인간이 뭘 하든 간섭할 생각 없다. 한 세상 잘 놀다 가라.
   노력 : 정직함과 성실함, 논증적인 사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본 건 봤다고 하고 자기 생각은 자기 생각 그대로 표현하라. 모르는 걸 알기 위해 타인의 권위라든지 사회의 관습이라든지 어설픈 수사 따위의 지름길을 찾지 말고, 토씨 하나, 문장 한 줄이라도 이해가 안 되면 멈추어 서서 고민하라. 그걸 구성하고 분석하기 위해 마련된 학문의 역사로부터 도망가지 말라. 주장이라면 논거를 대고, 설명이라면 비약하지 말라.
  나머지는 보통 재능도 없고 부모 등골이나 빼먹는 거지새끼들이 노력도 없이 철학이란 이름만 붙은 거적데기를 뒤집어 쓰고서는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는 '나'에 도취되어 지랄병 도져 발광을 해대게 마련인데, 가뜩이나 어려운 동네 쳐들어 와서 똥물 튀기지들 말고 꺼져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2. Stanley Rosen 별세. 5월 5일이라고 뜨는데 아무튼 오늘 알게 되었다. 이렇든 저렇든 그의 저술이 내 논문 주제에 닿아 있는지라, 그러저러한 기분이랄지. 삼가 조의를 표한다. 매일, 매순간,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간다. 그 사실을 자꾸 잊어 버린다는 것도 참 기이한 일이다.

3. Peck은 왜 자꾸 쓰잘데기 없이 그리스어를 삽입해서 사람의 짜증을 돋구는가? 그냥 처음에 용어 정리하고 이후부터는 자기 번역어로 계속 서술하면 뭔가 큰 일이라도 나는가? 딱히 논증에 필요하지도 않은 원문이 자꾸 등장해서 번역해 옮기기만 힘들게 만든다. 작년에는 『소피스테스』 관련해서 서양고전학회에서 논문도 나왔고, 올해에는 서울대에서 그 대화편으로 강독이, 숭실대에서는 영역본 강독이 진행되는 듯하다. 어느 대중강연인가에서도 이 대화편에 대한 분석인지 정리인지가 과제로 주어진 듯하다. 김태경 번역, 이창우 번역 두 종류가 나와 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OCT 신판, 구판에 Bude판 등 판본도 여럿에 번역도 꽤나 많지만 실상 고전문헌학적으로 접근해서 문법 꼬치꼬치 캐물은 역서는 찾기가 어렵고, 우리말 '있다'와 '이다'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정리할 것인지에 대해 무슨 학술적 연구가 차곡차곡 쌓인 것 같지도 않고, 종류인지 형상인지 이게 후기인지 플라톤의 철학은 발전론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통합론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이러쿵저러쿵 문제는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한쪽으로 확 기운 극단적인 번역들이 여러 편 나온 뒤에야 그나마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은 표준번역이란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 전에 플라톤 철학 전반에 대한 학설 같은 게 한국에도 좀 생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뭐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나는 『소피스테스』 한 귀퉁이 지엽말단만 붙들고 늘어져 학위만 받으면 그만이다. 아무래도 꼬락서니가 박사 가서도 이 대화편 붙들고 늘어지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서도, 여하간에. 학위 다 끝내고 학자 자격증(하하,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우스꽝스럽긴 한데.) 받고 나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래도 티끌만큼은 유의미한 정리식의 논문이나마 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기대는 가져 본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도 단물이 다 빠지지 않는 대화편이니까.

4. 내일이면 어버이날이로구나. 뭐 후딱 석사 따고 나라 뜨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효도라면 효도일까나? 사실 딱히 남 좋으라고 하는 일도 아니니 면피는 안 되겠지만서도. 그나마 집돈이라도 안 축내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지. 다음 주에는 스승의 날이 있구만. 기종석 선생님 이번 학기에 정년이신데 학부 애들이 뭐라도 하려나 모르겠다. 거기 대학원 다니는 후배한테 물어 보면 뭔가 얘기가 있겄지. 정암에서 얻어온 기념품용 양주나 가져다 까야 하겄다. 정암에서 이사님께 드리는 소소한 성의입니다, 뭐 이러면 되려나. 크크. 건대는 이제 고전어 강의도 없어졌고, 지시사 하나도 제대로 못 잡아낸다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시던 선생님께서 탁자 앞에 서서 안경 돌리시던 고대철학 강의도 또 다른 누군가의 강의로 바뀌겠구만. 나야 뭐 출가외인이지만서도. 한국 고대철학 1세대에 이어 2세대도 한 분, 두 분 자리에서 물러나시는데, 그간 뭐가 어떻게 쌓여 왔는지, 축적되기는 한 건지, 아직은 여전히 바닷물에 돌멩이 던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양놈과 왜놈에 기생하는 기생충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지, 역시나 잘 모르겠다. 그래도 차곡차곡 번역들이 쌓이고 있다. 내 또래의 후속 세대 전공자들 수는 급감하고 있지만, 이 동네도 유행을 타는지 어느 때에 우르르 나왔다가 또 어느 때에는 쥐 죽은 듯 조용하고, 뭐 그런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주워 들은 이야기인데, 일본에서는 유럽과 영미에서 서양고전학이 재고되기 시작하던 그 19세기에 자기네들도 고전문헌학을 같이 시작했으니 꿀릴 것 없다는 식의 정신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들 생각하는지야 뭐 일본말을 안 배워 알아볼 수가 없지만(notomi 같은 양반은 종종 일본에 좋은 논문들 많은데 영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못 봐서 아쉽단 얘기도 하는 듯하더만, 역시나 잘은 모르겠고), 문제는 이런 주장도 맥락이 거세되어 있다는 거다. 유럽에서 고전학 흥할 때 배경은 낭만주의, 백과전서, 대륙관념론이 활개를 친 다음 혹은 그러던 와중을 거쳐 탈근대 담론까지 횡행하던 시기를 바탕에 깔고 있고, 해석학이니 구조주의니 뭐 많잖나? 영미권은 분석철학과 과학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서 세계대전을 통한 유럽과의 교류 와중에 대두된 것이 고전학이라는 얘기도 있고(기억에는 아마도 휠록이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반면에 일본은 그냥 시기만 겹칠 뿐 그런 배경은 없잖나. 뭐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나라에 비하면 날고 기는 동네이긴 하다만. 그러고 보니 저 대중강좌에 참고문헌으로 베나르데테(발음 이렇게 하는 거 맞나 모르겠다) 저술은 언급이 되는데 노토미 저술이 언급이 안 되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 말씀으로는 꽤나 잘 정리된 좋은 연구서라고들 하시던데, 뭐 읽어 본 바로는 딱히 흥미진진하진 않아서 역시나 잘 모르겠지만서도. 어차피 이거나 저거나 영어로 된 책들이니 후자를 추천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내가 듣는 수업도 아니고 뭐 상관 없겄지. 역시나 아쉬운 건 저 어려운 대화편에 대한 쓸 만한 국내 개론서가 없다는 것 아닐까? 길에서 나온『서양고대철학』1권에서는 3부 13장이 관련될 텐데, 최화 선생님은 좀, 음, 뭐 그냥 그렇다는 거다. 박홍규학파스러움이랄지 뭐랄지. 꽤 자주 얘기했던 것 같은데, 나는 탈근대 담론이 징징거림이나 칭얼거림이고 이성에 대한 지나치게 섣부른 체념이라고 생각해 왔고, 최근에 그런 논의가 나오는 것도 같다. 누구더라, 독일에 그 M. Gabriel이었나 하는 형아(나랑 몇 살 차이 안 나더만) 책이 유행이라던데. 여하간, 역시나 주워들은 바로는 박홍규 선생님도 전쟁 경험이란 게 플라톤 해석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듯한데 그게 바람직한지 잘 모르겠다. 세계대전 겪고 대공황 겪고 이러저러해서 '아, 씨발, 세상 망했다' 이러면서 여태까지 우린 다 틀렸어, 글러먹었어, 이런 반응이 대강이나마 탈근대 담론에 적용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씨발, 한국전쟁 씨발씨발 하면서 죽음이니 절대무니 거창하게 이러저러한 얘기들을 하게 되는 것도, 학술적으로는 딱히 정당화되기 어려운 종류의 것 아니려나? 뭐 『쓰여지지 않은 철학』이었나 하는 책이 생각나기도 하고, 정말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어떤 무언가가 철학적으로 환원되거나 혹은 아예 무가치하거나 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사실 이것도 유보적으로 생각할 문제이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대단한 문제들은 대단하신 님네들께 떠넘기고, 나는 자질구레한 짓거리들이나 하다 뒈지면 그만이지.

5. 10월 초까지 논문 완성해야 한다. 하자.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내게는 반드시 딛고 넘어가야 할 한 걸음이다. 여전히,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것뿐이다.

-蟲-

[46쪽] 플라톤의 『소피스테스』 259e4 이하에서, 우리는 다음 문장을 읽는다.
τελεωτάτη πάντων λόγων ἐστὶν ἀφάνισις τὸ διαλύειν ἕκαστον ἀπὸ πάντων·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모든 것들로부터 각각을 해체한다는 것은 모든 진술들의 궁극적인 파괴이다. 왜냐하면 형상들 서로간의 엮임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몇 쪽 뒤, 263a2와 8에서, 우리는 진술들(λόγοι)의 이러한 사례들을 발견한다.
Θεαίτητος κάθηται, Θεαίτητος πέτεται.(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
드러나는 난점은 λόγοι의 이러한 예시들이 앞서 인용된 문장의 두 번째 부분에서 이야기되는 바를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I

나는 우선 이 문제를 다룬 최근의 네 가지 시도들을 언급할 것이다.

(1) 콘포드 교수는(Plato's Theory of Knowledge, 1935, 300쪽 이하.), 인용된 문장의 두 번째 부분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분명하게 그 문장을 모든 λόγοι의 내용을 기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모든 각각의 λόγος 안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만일 이것이 그러한 뜻이라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λόγοι의 두 예시들과 정합적이지 못하리란 점을 깨달았다. '테아이테토스'가 형상이라거나 혹은 형상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또한 그래서 오직 하나의 εἶδος만이 이 예시들에 관련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어떤 λόγος 안에든 그에 관련된 오직 단 하나의 εἶδος만이 있다면, 분명한 의미에서 어떠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도 저 λόγος 안에 있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선행하는 논의 전체가 εἴδη 또는 콘포드가 플라톤적인 형상으로 간주하는('그 마지막 부분은 오로지 형상들의 세계만을 다룬다.' 302쪽.) γένη의 결합, 배합, 혼합 등에 관한 것이었을지라도, 즉, ἡ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ή라는 구절로 정확히 기술되는 주제에 관한 것이었을지라도, 콘포드는 우리에게 그 구절이 여기에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주1. 그는 '"함께 엮임"은 "결합함" 혹은 "혼합함"과 동의어가 아니다. [47쪽] 그것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든 진술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형상들이 모든 담화의 의미를 구성하는 유일한 요소들이란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개별적 사물들에 관하여서도 진술들을 구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진술 각각이 반드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을 포함해야만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라고 적고 있다.(300쪽.) 그래서 플라톤이 복수형태 εἰδῶν을 잘못 사용했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 뒤 260d7에 대한 첨언 중 콘포드는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에게 그 곳에서 εἴδη가 전혀 플라톤적 형상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eidos는 모호한 단어이다. 때로는 "실체(entity)"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302쪽.) 플라톤이 기록한 것에 관한 그런 과격한 취급의 필요성은 콘포드가 인용된 문장을 두고 그것이 플라톤에 의해 모든 λόγοι의 내용에 대한 기술을 의도하게 되었다고 가정함에 있어서 잘못하였으리란 것을 시사한다.

(2) 데이비드 로쓰 경은(Plato's Theory of Ideas, 1951, 115쪽 이하.) 그 문장이 모든 λόγοι의 내용을 언급한다고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콘포드의 관점과 유사한 관점을 취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가능한 한 점잖게, 플라톤이 그의 복수형태 εἰδῶν 사용이 단수형태에 대한 '과장'이라는 점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로쓰는, '그는 말하는 이나 생각하는 자에 의한 형상들의 함께 엮임에 모든 진술이 의존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이것은 사실상 과장인데, 한 문장은 주어로서의 고유명사, 그리고 형상이나 보편자를 나타내지 않는 고유명사를 가질지도 모르기 떄문이다. 하지만 문장의 술어는 통상 형상을 나타낸다.' 라고 말한다(115쪽). 그리고 116쪽에서 로쓰는 노골적으로, 플라톤이 취하는 예시, 즉 '테아이테토스는 난다'라는 진술이 모든 진술 각각은 형상들 상호의 엮임이라는 그의 주장을 묘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아무런 설명도 발견할 수 없고 단지 정중한 언어로 쓰여 넣어진, 플라톤이 단순한 셈에 능하지 못하다거나 그가 그의 주장을 묘사하기 위한 예시들을 잘못 선택했다는 단언만을 발견하게 된다.

(3) 최근 J. L. 아크릴씨에 의해 Bulltetin of the Institute of Classical Studies of the University of London, 2 (1955), 31쪽 이하에서 또 다른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가 주목하는) 콘포드와 로쓰의, 263a에서 제시되는 λόγοι의 예시들(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가지 진술들)이 그보다 앞선 문장에서 플라톤에 의해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 그런 어떤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든 설명하거나 예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대한 실패를 고려하여, 아크릴씨는 저 문장이 '모든 진술 각각이 형상들의 관계를 단언하거나 그에 관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아야만 한다.'(32쪽) 라고 전제한다. 오히려,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은 어떤 것이든 모든 진술 각각에 의해 선제된다.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도 포함하여서 말이다.' (34쪽) 달리 말해서, 우리는 모든 진술 각각에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을 기대하지 않는다.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은 필요-전제조건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어떤 진술에서든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의존하는 전제조건이다. [48쪽] 아크릴씨는 그의 언급 중 부정적인 부분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옳다. 그리고 플라톤이 διά라는 단어를 가지고 어떤 종류의 선제조건을 언급하려 한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아크릴씨는 그가 이러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필요-전제조건이 되는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할 때 설득력이 없다.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와 같은 그런 진술에 의해 선제되는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아크릴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는 진술은 오직 그것이 어떤 것("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지 않다" 혹은, 좀 더 한정적으로, "테아이테토스는 서있다")을 배제시키기 때문에만 진정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이다. 그 진술이 어떤 것을 배제시킨다는 말은 두 개념들("앉음"과 "앉지-않음" 혹은 좀 더 확정적으로 "앉음"과 "서있음") 사이에 양립불가능성(μηδεμία κοινωνία)이 있다는 말이다.' (34쪽.) 즉, 아크릴씨의 관점에서, '앉아 있음'이라는 말은 오직 그것이 다른 어떤 말과 양립불가능하기 때문에만 유의미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다. 또한 그 말은 그가 이것을 그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여긴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단락을 플라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끝맺는다.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아크릴씨의 과정은 이러한 것이다.
(i) 우선, 그는 플라톤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의역한다. '일부 개념들이 어울리리란 것은 유의미하고 비-자기모순적인 진술들(참이든 거짓이든)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ii) 다음으로, 그는 일부 개념들이 어울리지 않으리란 것이 진정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참이든 거짓이든)이 있기 위한 필요조건임을 보여준다.
(iii) 끝으로, 그는 플라톤의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인용한다 (34쪽).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나는 아크릴씨가 (ii)를 전제로 제시하는 증명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걸 믿지만, 그것은 플라톤이 이 문장을 가지고 다루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아크릴씨가 '두 개념들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이라 부르는 것의 귀결에 관해서가 아니라, εἴδη 상호간의 함께 엮임의 결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더욱이, 만일 우리가 양립불가능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을 때(예를 들어 252d. 254d 참조) 그가 했어야 하는 말을 되돌아 본다면, 우리는 그 말이 유의미한 진술들이 아니라, '두 개념들 사이의 양립불가능성'으로부터 귀결되거나 그것이 시사하는,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운동이 정지한다)와 같은 그런 자기-모순적 진술들이었음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 나는 아크릴씨 자신이 그걸 믿는다고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그가 덧붙이기를(34쪽), '플라톤은 인정하건데 그 점[구체적으로 말해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무엇이 되었든 모든 진술 각각에 의해 선제된다는 것]을, [49쪽] 다른 주제에 관한 논의에서 사용되는 테아이테토스의 사례들과의 관련 속에서 주장하지 않는다.' 라고 하기 때문이다. 

(4) 더욱 더 최근 시도는 R. S. 블럭 박사의 시도이다.("False Statement in the Sophist", J. H. S. 77 (1957) 181쪽 이하.) 블럭 박사의 해석은 복잡한 것이고 상당수의 중요한 물음들을 야기시키며, 그 중 일부는 내가 이전 논문에서 다루고자 시도하였던 것들이다. 여기에서 나는 그의 접근 방식이 불가능하거나 불만족스러운 귀결들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지점들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

(i) 블럭 박사의 첫 걸음은 콘포드와 유사한데, 그가 259e에서 언급된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 은, 방금 전 얼마 간의 시간 동안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를 붙들고 있던 그 주제인 형상들의 혼합이나 결합 따위(즉 우리로부터 독립적으로, 그것들 자체 사이에서 그것들의 관계들)와 동일시될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곧장 이어지는 문장에서 개탄된 그 '고립'이 251e-252c에서 고찰되었던 어떤 것들이든 γένη는 결합한다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야만 한다'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블럭 박사는 오로지 그 συμπλοκή에 관련하는 것만이 형상들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콘포드와 다르다. 콘포드는 다른 '요소들' 또한 마찬가지로 허용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었다(위를 보라.). 우리는 그 첫 번째 정의가 블럭박사가 아크릴씨의 해석에 대항해 제기하는 비판에서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을 이해하려는 방식에 대한 암시임을 발견한다. 그는 아크릴씨의 해석이 'εἰδῶν συμπλοκήν을 단순히 형상들의 세계의 복잡한 구조를, 그 존재하는 "망" 또는 "엮인 복잡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을 포함하고, 예상할 수 있듯, 우리가 이야기할 때 형상들을 함께 엮는 그러한 방식들을 언급하는 것으로는 간주하지 일은 포함하지 않는다' 라는 근거에서 그 해석에 반대한다.(182쪽). '259e에서 손님의 언급이 우리가 구성하는 어떤 진술에서든 우리는 사실상, 맞든 틀리든, 형상들을 함께 엮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오직 그런 식으로만 담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간주하는 것이 최선일 것으로 보인다.' 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참조하라. 이 생각, 우리가 이야기할 때 형상들을 함께 엮을 수 있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로쓰에게서도 나타난다. 위를 보라.), 물론 그것은 부조리하고, 그러므로 블럭 박사는 암묵적으로 우리가 함께 엮는 것이 형상들의 이름들, 혹은 형상들을 나타내는(혹은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풀어내는-unpack into-') 사물들과 개별자들(테아이테토스 같은)의 이름들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블럭 박사는 절대로 그가 이러한 대입을 구성하고 있다고 명시적으로 지적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의 해설에 내재한다. 그가 의미하는 것이 '이런 것들이 그에 대한 이름인 그러한 형상들' 혹은 '그것의 표현형 개별자들에 대해 이런 것들이 그 이름들인 그러한 형상들'일 때, '관련된 형상들'이라는 구절을 그가 사용함으로써 가장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대입은 해당 그리스어 문헌에 의해서는 그닥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플라톤이 담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50쪽] 형상들의 이름들을 우리가 함께 엮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바랐었더라면, 그가 그리 하는 걸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으로, 블럭 박사에 따르면, 손님의 그 문장은 엮임이 행해지는 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우리에 의해 그리 행해진다는 뜻이며, 형상들 그 자체의 그 어떠한 결합도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블럭 박사는 또한 형상들 그 자체와 그것들의 결합들이 그 사태 안에 포함된다는 것도 믿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관련된 형상들은 만일 진술이 참일 것이라면 결합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진술이든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반드시 형상들 사이의 특정 관계를 선제해야만 한다.' 블럭 박사가 사실상 손님의 언급을 형상들 자체의 결합에 관한 어떤 것을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다음을 통해 보여진다. '우리의 담화가 형상들의 함께 엮임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진술과 만일 형상들 사이의 아무런 결합도 없다면 담화는 파괴되리라는 진술은 의미를 지니는 모든 각각의 문장이 정확하게(맞게) 관련된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형상들의 함께-엮임'이 그것들의 이름들에 대한 우리들의 함께 엮음을 의미한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형상들 사이의 아무런 결합도 없다'라는 것은 오직 형상들 그 자체를 언급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블럭 박사의 관점에서 259e에서 손님이 두 가지 동시적 단언들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a) 우리에게 담화를[이것은 분명히 '맞든 틀리든' 행해질 수 있다.] 가능케 해주는 것은 우리에 의한 형상들의 이름들에 대한 함께 엮음이라는 것, (b) 참인 진술에서 우리에 의한 형상들의 이름들에 대한 함께 엮음을 우리에게 가능케 해주는 것은 형상들 그 자체 사이에서의 실질적인 결합이라는 것. 만일 플라톤이 이러한 단언들을 둘 중 어느 쪽이든 혹은 양자를 동시에든 구성하길 바랐다면, 그가 259e에서 우리가 읽은 그런 문장을 택했으리란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ii) 블럭 박사는 (내 생각이 맞다면) 손님이 거짓 λόγος에 대한 그의 해명을 진행할 때 그는 형상들에 관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손님은 그 문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실상 우리가 λόγοι 안에서 함께 엮는 그 동사들과 명사들이 형상들을 나타낸다는 것을 시사조차 하지 않는다. 블럭 박사는 대화편의 이 부분에서 형상들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이유들을 든다. (1) 플라톤은 소피스트들(그의 현재 적수들)을 향해 그들이 동의하지 않을 그러한 이론을 통해 참과 거짓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일이 부적절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 때 매우 적절한 고찰이다. 나는 내 이전 논문에서 μέγιστα γένη 논의 전반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과 더불어 [51쪽] 부적절성에 관한 이러한 지적을 구성하였었다. 이러한 이유가 타당한 것이라면, 또한 나는 그렇다고 믿는데, 왜 그것은 대화편의 이 지점 이전까지 작동하지 않는가?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μέγιστα γένη 논증을 통해 '소피스트'와 씨름하고 있는 것으로 자신들을 표현하였다. 두 번째로 (2), 블럭 박사는 두 형상들이 결합한다는 사실이 참인 λόγος를 필연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가능하게 만들 뿐이라는 점을 파악한다. 이것은 맞는 얘기다. 해당 대화편에서 논증의 진행 과정을 보여주는 와중에, 우리는 운동이라는 형상과 존재라는 형상(οὐσία에 대한 블럭 박사의 번역어)이 결합하지 않는 한 참되게 '운동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말할 의무는 없다. 우리는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고 말할 수 있다. 특정 형상들이 결합하리라거나 결합한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거짓 λόγος 논의를 진행할 때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블럭 박사가 말하는대로, 우리는 형상들[의 이름들]을 '부정확하게(잘못)' 함께 엮을 수 있다. 그리고 형상들 그 자체가 완전히 잘 결합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왜 그것들[의 이름들]을 부정확하게 결합하는지에 관해 아무런 방향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블럭 박사의 이유들 중 어느 쪽에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왜 형상들이 거짓 λόγος에 대한 손님의 해명에 작용하지 않아야 하는지 놀랍도록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 이유들은 그 이유들이 야기하는 물음에 답하는 데에는 완전히 무효하다. 왜 손님은 259e에서 우리가 구성하는 모든 진술 각각에서 우리가 형상들을 함께 엮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내는 수고를 감수하는가? 이 일이 거짓 λόγος에 대한 그의 해명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지 않았을 한에서, 그는 그 점을 지적하느라 자신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 그리고 우리를 잘못 이끄는 것 - 아닌가? 만일 블럭 박사가 옳다면, '우리에 의한 형상들의 함께 엮임'이라는 이 개념은 259e에서 갑작스럽게 극적으로 등장했다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고 극적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선행하는 것이나 이어지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고, 완전히 고립되고 맹목적인 것이 된다.

(iii) 만일 블럭 박사가 '함께-엮임'의 구성요소를 그 때까지 손님에 의해 고찰된 유형의 형상들에(예를 들어 'Κίνησις ἔστιν'이라는 λόγος 안에서 운동이라는 형상과 존재라는 형상의 함께 엮임) 한정했었다면, 나는 그가 꽤나 강력한 사례를, 비록 그 문맥이 여전히 그에게 결정적으로 반대되었을지라도 (57쪽 이하, 아래를 보라), 구성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그 요소들을 이런 유형의 형상들에 한정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기로, 손님의 문장은 '반드시 우리가 어떻게든 이런 유형의 둘 혹은 그 이상의 형상들에 관련된다는 가정 하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특수한 개별적 인격들 혹은 사물들에 관한 진술들을 다룰 때에라도,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 같은 진술을 다룰 때에라도 말이다.'(182쪽). 이 지점에서 블럭 박사는 그의 선행 연구자들이 직면했던 것과 같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와 같은 λόγος에서, 물론 많이 쳐줘도 단 하나의 형상이 있거나, 오직 하나의 형상이 표현되고, 우리는 συμπλοκή를 구성하기 위해 적어도 두 형상들이 필요하다. [52쪽] '앉아 있음'은 아마도 형상으로서 통과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테아이테토스'는 형상이 아니고 형상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여기에서 블럭 박사는, D. W. 햄린씨에 의해 또 다른 관계에서 구성된 제안을 적용하여, 강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가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이라는 형상을 앉아 있음이라는 형상과 함께 엮고 있다. …… "테아이테토스"는 그가 참여하는 모든 형상들의 목록으로 "풀리는 것(분석되는 것)"으로서 간주될지도 모른다. (182쪽). 이것은 콘포드, 로쓰, 그리고 아크릴이 고려하지 않았던 해법이다. 그들은 '테아이테토스'가 형상이 아니며 형상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난점을 해결할 어떠한 방법도 볼 수 없었다. 이 난점을 에둘러 감으로써, 블럭 박사는 이제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는 λόγος에서 우리가 형상들의 συμπλοκή를(즉 형상들의 진정한 συμπλοκή에 대한 언어 표현을)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블럭 박사가 우리에게 제시한 이러한 짝으로 이루어진 συμπλοκή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첫 번째로, '테아이테토스'가 인간이라는 형상을 나타낸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절망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아마도 만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을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다. '인간'이든 '앉음'이든 어떠한 형상들도 손님에 의해 언급되거나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여전히, 이것이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되지는 않을 터인데, 254c에서 손님이 논의의 간결함을 위해서 엄청난 수의 가용한 것들 중에서 특정 εἴδη를 선택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앉음이 그 선택된 εἴδη에 관하여 증명되는 것에 의해 포괄된다고 주장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인간과 앉음의 συμπλοκή는 손님이 제시하였던 증명과정 중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유비되지 않는다. 증명된 경우들은 전체를 전부 다 매우 규정된 방식이고, 이는 우리가 그것들을 나열한다면 분명해질 것이다.
  정지는 τὸ ὄν, θάτερον, 그리고 ταὐτόν과 결합한다(~에 참여한다, 기타 등등).
  운동은 같지 않다.
  모든 것이 θάτερον에, 그리고 ταὐτόν에 참여한다.
  
(이제 τὸ μὴ ὄν과 동일시된) Θάτερον은 τὸ ὄν에 참여한다.
  Τὸ ὄν은 θάτερον (τὸ μὴ ὄν) 에 참여한다.
  요약 : Τὸ ὄν과 Θάτερον이 모든 γένη를 '관통하며' 서로를 관통한다.
혼합, 참여, 기타 등등의 이와 같은 경우들에 비교해 볼 때, 인간과 앉음의 συμπλοκή는 이례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최소한도 그 방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혹은 앉음)과 Τὸ ὄν, Θάτερον, 혹은 ταὐτόν의 συμπλοκή가 있었다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과 앉음의 συμπλοκή는 증명된 경우들의 노선에서 두드러지게 벗어나는 것이다. 만일 손님이 259e에서 언급하면서 그때까지 언급되지 않은 구성에 속하는 συμπλοκή 혹은 그 경우들을 도입하고자 의도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가 우리에게 그의 의도에 대한 어떤 암시라도 줄 것을, 혹은 만일 이 곳이 아니라면 조금 나중의 지점에서 이 두 형상들을 호명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그가 곧장 260a-b에서 계속해서 그가 논의해왔던 것과 같은 방식의 구성에 속하는 συμπλοκή를
, 즉 일부 εἶδος와 τὸ ὄν의 συμπλοκή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릴 때, 그가 259e에서 또 다른 구조의 συμπλοκή를 의미한다는 우리의 의구심은 믿지 못할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가 염두에 둔 특수한 συμπλοκή는 λόγος와 τὸ ὄν의 경우이다. λόγος는 그가 εἶδος로도 γένος로도 기술하는 것이고(아래 56쪽을 보라.), 이것은 문맥을 고려하여 해당 구절을 읽는 누구에게든 명백하다. 인간과 앉음이라는 형상들의 도입은 기이할 뿐만 아니라 과잉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고찰된 해법들 중 어떤 것도 만족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그들이 해결하고자 의도한 난점이 완전히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난점은 단지 [54쪽] 플라톤이 말한 바에 대한 오독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오독의 주요 원인은, 내 생각에,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의 용법에 불일치하거나 혹은 적절한 설명을 구하는 데에 실패한, 그러한 εἶδος의 의미에 관한 선입견이다.
  네 가지 해석들 모두에서 우리는 유사한 사고과정을 발견한다. 우선, 259e에서 εἰδῶν을 통해 플라톤은 '형상들'(콘포드, 블럭). '형상들', 혹은 '보편자들', 혹은 '형상들을 가지고 기술되는 것들'(로쓰), '형상들', 혹은 '개념들', 혹은 '일반명사들의 의미들'(아크릴)을 의미한다는 것이 가정된다.
  두 번째로,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에 관한 그 문장은 우리에게 모든 각각의 λόγος의 내용에 관하여 어떤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 가정된다. (a) 그 문장이 모든 각각의 λόγος는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을 포함하거나 표현한다는 것을 선언한다거나(콘포드, 로쓰, 블럭), 혹은 (b) 그것이 한 λόγος 내에서 어떠한 용어든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기 이전에 충족되어야만 하는 조건을 진술한다는 것(아크릴)이 가정된다.
  세 번째로, 그 문장이 따라서 λόγοι의 내용과 관련되기 때문에,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λόγοι의 예시들은 어떤 식으론가 앞서 λόγος의 본성에 관하여 제시된 것으로 주장된 기술 혹은 정보를 묘사하거나 적어도 그것과 화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장된다.
  우리가 보았듯, 두 번째 전제에 관련해서 콘포드와 로쓰는 두 번째 가정과 관련하여서 견본 λόγοι가 어쨌든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을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실패하는데, 각각에서 오직 하나의 εἶδος만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블럭 박사는 매우 의문스러운 두 번째 εἶδος를 συμπλοκή를 구성하기 위해 도입한다. 그리고 아크릴씨는 한 용어가 λόγος 내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기에 앞서서 요구되는 것이 그것의 다른 것들 혹은 또 다른 것과의 συμπλοκή가 아니라, 그것의 다른 것들 혹은 다른 것과의 양립불가능성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들 중 어떤 것도 핵심 구절인 ἡ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ή에 대해 합당하지 않다. 플라톤이 실제로 말하는 바에 대한 고찰은 그의 말 속에 방금 언급된 두 가지 가정들을 위한 아무런 보장도 전혀 없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서 세 번째 주제 하에 표현된 의무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II

그럼 플라톤은 εἴδη라는 명칭을 『소피스테스』의 이 논의에서 무엇에 적용시키는가? 나는 내가 언급했던 학자들에 의해 구성된 가정들을 한편으로 치워두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대화편 자체 내에서 알아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여기에서 εἴδη라고 부르는 것의 상태에 관하여 어떠한 가정도 구성하지 않기 위해, 나는 그것들을 비결정적인 단어 '인자들'로 언급할 것이다.
  [55쪽] 관련된 그 인자들에 뭐가 되었든 어떤 명칭이 부여되기에 앞서 양립가능성과 상호 적용가능성이라는 주제에 관한 논의가 해당 대화편에서 주목할 만한 분량을 차지한다. 상호 적용가능성의 문제는 앞서 237에서 야기된다. 그리고 이후 그것은 특정 인자들이 '혼합'할 것인지, 상호적으로 '참여'할 것인지 기타 등등에 대한 물음을 통해 정식화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진술들이 허용될 수 있는 진술들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다.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 τὸ μὴ ὂν ἔστι, τὸ ὂν οὐκ ἔστιν, 이러한 등지의 것들 말이다. (이 논의의 특별한 의도는 물론 τὸ μὴ ὄν이 다른 인자들과 양립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τό τε μὴ ὂν ὡς ἔστι κατά τι, καὶ τὸ ὂν πάλιν ὡς οὐκ ἔστι πῃ (~이지 않음이 어떤 것에 따라서는 ~이라고도, 또 되돌려 ~임이 어떤 식으로 ~이지 않다고도. 241d6)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작업의 성공은 결국 258-259에서 선언된다. τὸ ὄν과 τὸ μὴ ὄν은 양립가능하다. 그것들은 상호적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자들이 무엇인지는, 손님이 그것들을 γένη와 εἴδη라고 부르기 시작하기 전부터조차,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들은 양립가능성과 양립불가능성에 관한 논의에서 나타나는 인자들이다.
  여러가지 동사들과 명사들이 이러한 양립가능성과 그것의 표현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다.
(1) 한 가지는 συμπλοκή이다. 그것은 앞서 240c1에서 등장한다. κινδυνεύει τοιαύτην τινὰ πεπλέχθαι συμπλοκὴν τὸ μὴ ὂν τῷ ὄντι. (이런 무슨 엮임에서 ~이지 않음이 ~임과 얽히는 것 같다. 그 문맥은 εἴδωλον-상, image-에 관한 논의이다. 그것은 ἀληθινόν-참된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ὄντως ὄν-~임다운 ~임-이 아니지만, ἔστι γε μήν πως-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실로 ~이긴 한 것이다.- 그것은 εἰκὼν ὄντως-~인 것답게 모상이다. Οὐκ ὂν ἄρα ὄντως ἐστὶν ὄντως ἣν λέγομεν εἰκόνα-그래서 ~임답게 ~이지 않음이 ~임답게 우리가 말하던 모상이다-.)
(2) 또 다른 것은 προσάπτειν이다. 241b1에서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게 된다. τῷ γὰρ μὴ ὄντι τὸ ὂν προσάπτειν ἡμᾶς πολλάκις ἀναγκάζεσθαι-왜냐하면 ~이지 않음에 ~임을 적용하도록 자주 우리가 강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λόγος ψευδής-거짓 진술-는 λόγος τά τι ὄντα λέγων μὴ εἶναι καὶ τὰ μὴ ὄντα εἶναι-어떤 점에서 ~인 것들이 ~이지 않다고 그리고 ~이지 않은 것들이 ~이라고 진술하는 그런 진술이다-. 그리고 '소피스테스'는 그러한 προσάπτειν-적용-을 금지한다.)
(3) 또 다른 것은 κοινωνία이다. 250b9에서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는다. ἀπιδὼν αὐτῶν [στάσεως καὶ κινήσεως] πρὸς τὴν τῆς οὐσίας κοινωνίαν-그것들[정지와 운동]의 ~임과의 공유에 비추어 보면서-.
(4) 251d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용어들의 예시들을 포함한다. προσάπτειν, ἄμεικτος, μεταλαμβάνειν, ἐπικοινωνεῖν.-적용, 섞이지 않음, 나누어 잡음(c.f. metechein), 마주-함께 가짐-. πότερον μήτε τὴν οὐσίαν κινήσει καὶ στάσει προσάπτωμεν … ἀλλ᾿ ὡς ἄμεικτα ὄντα καὶ ἀδύνατον μεταλαμβάνειν ἀλλήλων … τιθῶμεν; ἢ πάντα εἰς ταὐτὸν συναγάγωμεν ὡς δυνατὰ ἐπικοινωνεῖν ἀλλήλοις; -우리가 ~임을 운동에도 정지에도 적용시키지 않고 … 오히려 섞이지 않는 것들이자 서로 나누어 잡지 못하는 것이라고 … 정할까? 아니면 모든 것들을 같은 것으로 끌어모아 서로 마주-함께 가질 수 있는 것들이라고[정할까]?
이러한 그리고 이와 유사한 용어들(μετέχειν과 σύμμειξις 등), 양립가능성과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기술들은 그 주제에 관한 논의 내내 사용된다. 그리고 그러한 양립가능성과 양립불가능성에 관련되는 인자들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의심의 가능성도 피하기 위해, 나는 다음의 목록에서 오직 γένος나 εἶδος라는 명칭들이 해당 대화편 내에서 명백하게 적용되는 그러한 인자들만을 포함시켰다. 따라서 나는 253b8, γένη라는 호칭이 [56쪽] κίνησις, στάσις, οὐσία라는, 선행하는 문맥 내에서의 주로 논의되었던 세 가지 인자들에 처음으로 적용된 행보다 더 앞서는 어떠한 언급도 그 목록 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추가적으로, 가능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나는 여기에서 다음 사항을 언급해야 한다. (a) 252s7에서 εἴδη에 대한 언급 (ὅσοι κατ᾿ εἴδη τὰ ὄντα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ἔχοντα εἶναί φασιν ἀεί - 형상들에 따라 ~인 것들은 같은 것들에 대해 마찬가지 상태인 것들이라고 언제나 말한다 - ) 은 포함되지 않는데 그것은 명백히 형상들의 친구들이 믿는 νοητὰ ἄττα καὶ ἀσώματα εἴδη(사유대상이자 비물체적인 어떤 형상들)이고, 양립가능성에 대한 논의에 관련된 인자들에 대한 언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b) 257d 이하의 구절
, τὸ καλόν, τὸ μὴ καλόν, τὸ μέγα, τὸ μὴ μέγα, τὸ δίκαιον, τὸ μὴ δίκαιον 등이 언급되는 그 구절은 아마도 그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 것인데, 257e9 이하에서 τὸ καλόν과 τὸ μὴ καλόν이 τὰ ὄντα 중의 하나로 헤아려지기 때문이다.(258a7 이하 참조) 달리 말해서 나는 다음의 목록을 생각한다. 비록 그 언급들의 빠짐없는 목록표를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253b8 이래로 εἶδος나 γένος라고 불린 모든 인자 각각에 대한 언급을 포함시킨다.
(1) 254d4 τὸ ὄν, στάσις, κίνησις가 γένη라고 불린다. 그것들은 255c5에서 εἴδη라 불린다.
(2) 255c5 τὸ ταὐτόν이 네 번째 εἶδος로 기술된다.
(3) 255b 12-255d4 τὸ καθ᾿ αὑτό와 τὸ πρὸς ἄλλο가 εἴδη로서 언급된다.
(4) 255d8 ἡ τοῦ θατέρου φύσις가 εἴδη 중에 포함된다.
(5) 258c2 τὸ μὴ ὄν이 반드시 하나의 εἶδος로서 πολλὰ ὄντα에 셈해 넣어져야 한다.
(6) 260a5 λόγος: πρὸς τὸ τὸν λόγον ἡμῖν τῶν ὄντων ἕν τι γενῶν εἶναι.-우리에게 진술이 ~인 유들 중 하나의 무언가이다라는 점에 대해서.
(7) 260d5 이하. λόγος와 δόξα. 소피스테스는 τὰ εἴδη 중 일부가 τὸ μὴ ὄν에 참여한다는 것에 동의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들 중 일부는 그렇지 않다고, 그리고 λόγος와 δόξα는 그리하지 않는 그러한 것들에 속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λόγος와 δόξα의 본성을 탐구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것들의 τὸ μὴ ὄν과의 공유를 알아볼 수 있게끔.
(8) 263d7 만일 B사본과 T사본의 독해가 적용된다면, διάνοια, δόξα, φαντασία가 γένη라 불린다.
나는 여기에서 이 목록에서 손님이 γένος 혹은 εἶδος라는 명칭을 적용하는 그 항목들 모두가 플라톤적인 형상들인지 하는 물음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곳에서 내가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의 의도 중 일부는 τὸ μὴ ὄν, θάτερον, τὸ ὄν, ταὐτόν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의도에 맞게 요청되는 것은 전부, 『소피스테스』에서 이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εἶδος와 γένος라는 명칭들이 실제로 적용되는 그 인자들이 무엇인지 주목하는 것, 그리고 특히 λόγος가 
εἴδη 중 하나로 기술된다는 데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의에서 εἴδη와 γένη로 플라톤이 의미하는 바가 플라톤적 형상들이라는 그 믿음은, 259e5에서의 그 문장을, 손님이 명백히 λόγος를 εἶδος로 그리고 γένος로 기술한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오독하도록 이끌었던 한에서 관련이 있다.

III

우리는 이제 259e5에서의 그 문장,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이라는 문장의 의미를 고찰하는 일을 진행할 것이다. 그 문맥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사유 경로는 259d로부터 이어진다.
  손님은 결국 다른 것이 같다거나 같은 것이 다르다고 어떤 구체적이지 못한(불특정한) 방식으로 단언하는 자들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정확히 어떤 측면에서 그것들이 그러한지 말하게 되어야만 한다. 더 나아가, 그가 덧붙이기로, 모든 것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비-철학적 인간의 표지이다. 그러한 분리는 실제로 모든 λόγοι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그래서 그의 말로는 우리가 우리의 적들에게 한 εἶδος를 또 다른 것과 혼합시킨다는 것을 허용하도록 강제했던 것이 - 특히 이 점에 관해서, 이제 우리가 λόγος를 τὰ ὄντα γένη 중의 하나인 것으로서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 얼마나 적기에 이루어진 것인지 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λόγος를 박탈당했더라면, 우리는 철학을 박탈당해야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이제 즉시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에 당도하는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바로 그것의 존재를 박탈당했다면(αὐτὸ μηδ᾿ εἶναι τὸ παράπαν),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λέγειν할 수 없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박탈당했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무것도 다른 아무것과도 전혀 혼합함이 없다고 인정했었더라면 말이다.
  이 이야기의 요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소피스테스'에게 어떤 식으로든 어떤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을 인정하도록 강제했다. 이 συμπλοκή는 οὐσία(혹은 τὸ ὄν)의 여타 εἴδη 혹은 γένη와의 
συμπλοκὴ를 포함한다(259a5). 따라서 λόγος와 οὐσία의 συμπλοκή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λόγος와 같은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적들에게 뭐가 되었든 아무런 μεῖξις도 발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인정해 주었다면, λόγος와 οὐσία의 아무런 μεῖξις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λόγος 같은 그런 것도 전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행히도, 우리는 [58쪽] λόγος가 τὰ ὄντα γένη 중 하나라고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260a5). κίνησις와 στάσις처럼, 그것이 οὐσία와 서로 교통하지 않는 한 그 둘 중 무엇도 있을 수 없듯(252a2. 254d10, 256a1 참조), λόγος도 마찬가지로 οὐσία와 혼합하고 결합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259e5에서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이라는 문장은 다음을 뜻한다. 우리는 εἴδη 서로 간의 일부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특히, 우리는 τὸ ὄν(οὐσία)이 다른 모든 εἴδη와 결합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것은 εἴδη 중 하나인 λόγος와의 결합을 포함한다. 따라서 λόγος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 그 문장은 우리에게 λόγος의 내재적 특성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이제 λόγος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는 걸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만을 지적한다. 그 문장은 우리에게 한 용어가 한 λόγος 안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필연적인 선제조건들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 문장이 어떤 식으로든 λόγος의 정의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종류든 정의로 혼동하는 것은 기초적인 오류인데, 손님이 곧장 계속해서 그들이 λόγος 같은 것이 있다는 걸 보장받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왜냐하면 그들의 다음 작업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어서 말하기 때문이다.(διομολογήσασθαι τί ποτ᾿ ἐστίν, 260a7). 그리고 그들은 이 일을 즉시 진행한다. 이 언급은 손님 입장에서 만일 그가 λόγος의 정의와 유사한 어떤 것이든 언명했던 것이었다면 부조리할 것이다. 그리고 손님과 테아이테토스가 λόγος가 무엇인지 탐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소피스테스'는 τὸ μὴ ὄν이 οὐσία(τὸ ὄν)에 참여한다는 것(260d5)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제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여전히 모든 εἴδη가 τὸ μὴ ὄν에 참여한다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어떤 형상들은 그렇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고, λόγος와 δόξα는 그리 하지 않는 것들 중에 속한다고 말할 것이다. λόγος의 정의는 λόγος가 τὸ ὄν만큼이나 τὸ μὴ ὄν과도 '혼합'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결과로 λέγειν τὰ μὴ ὄντα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즉 ψεῦδος, ψευδὴς λόγος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에게 입증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에서 필연적인 단계일 것이다. 그 논증의 남은 부분은 내가 다른 곳에서 상술하였고, 그 설명을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구절이 진행되는 과정(260b10에서 261c8까지)이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기에 앞서 곧장, 손님이 지금 제기된 문제가 λόγος와 τὸ μὴ ὄν 사이에 그리고 δόξα와 τὸ μὴ ὄν 사이에 어떤 결합이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예를 들어 260b10 이하, 260d7, 260e2 이하, 261c7을 보라)라고 거듭하여 진술한다는 것은 덧붙일 만하다. 덧붙여,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감당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자마자, 관련된 그 인자들은 [59쪽] 더 이상 εἴδη(or γένη)가 아니라, ὀνόματα(명사들)이다. 이 점은 손님에 의해 261d1에서 꽤나 분명해진다. 그는 앞서 그들이 εἴδη의 함께 어울림을 (그리고 γράμματα의 어울림 또한, 그것은 253a1 이하에서 εἴδη에 대한 유비로 간주되었다) 논의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낸다. 이제 그들은 계속해서 ὀνόματα의 함께 어울림을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γράμματα가 모두 함께하지는 않을 것이고, 음들도, εἴδη도 그러할 바로 그와 같이, 그렇게 이제 그들은 ὀνοματα도 모두 함께하지는(συναρμόττειν, 261d5) 않을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ὀνόματα의 결합은 εἴδη의 결합과는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이 점은 만일 우리가 다음 세 가지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1) 두 종류의 ὀνόματα가 구별된다. 고유 ὀνόματα (즉 인명들을 포함하는 명사들), 그리고 ῥήματα (즉 동사들).
(2) 전형적으로 불가능한 결합은 이제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가 아니라, 명사들의 나열 혹은 동사들의 나열이다 (예를 들어 βαδίζει τρέχει καθεύδει, 262b). 오직 우리가 명사와 동사를 지닐 때에만 우리는 λόγος를 산출해내는 그러한 가능한 결합을 얻게 된다 (더욱이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라는 것은 이제, 비록 거짓 λόγος이더라도, λόγος를 만들어내는 가능한 결합일 것이다). 오직 그렇게만 '함께 어울림'과 συμπλοκή - 명사와 동사의 συμπλοκή (262c) 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화편의 더 앞선 부분,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가 가능한 결합에서 제외되었던 그 논의에서의 것과는 꽤나 다른 종류의 συμπλοκή이다.
(3) 선행하는 논의에서, 만일 한 결합이 아무튼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유효한 반면, 현재 논의에서 명사와 동사의 어떤 결합이든 가능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혹은 심지어 
한 번이라도 참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Θεαίτητος κάθηται는 소님에 의해 이야기되었을 때 참이지만, 언제나 참일 필요는 없고, 언제나 참이었던 것도 아니다. Θεαίτητος πέτεται는 결코 참이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참이 아닐 것이다).
  [60쪽] 나는 이 논의에서 우리가 앞선 συμπλοκή, συμπλοκή τῶν εἰδῶν이었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유형의 συμπλοκή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차이점들을 언급한다. 우리는 또한 '플라톤이 명백히 형상들에 관여하려 의도한다(314쪽)'라는 콘포드의 믿음, 그리고 그것들을 끌어 들이려 시도하는 그의 노력(313쪽, 317쪽)이 논의의 이 부분과 전적으로 불일치한다는 것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거짓 λόγος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하고 그것을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317쪽.)
  요약하자면, 259e에서 그 문장은 어떤 식으로도 λόγος의 구성에 대한 정의나 묘사, 혹은 λόγος에서 사용될 어떤 중요한 구성 요소든 그것의 산출을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들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대화편의 앞선 이야기에서 모든 εἴδη에 대해 확립된 원칙을 특수한 경우(즉 λόγος)에 적용시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263a에서 제시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가지 λόγοι의 내용들이 어떻게 저 문장과 정합적인지 보여줄 아무런 의무도 없다. 더구나 대화편에서 주어지는 λόγος의 정의, 즉 264d4에서 손님에 의해 주어진 정의가 있고, συμπλοκή라는 용어는 그 안에서 ㅏ타난다. συμπλέκων τὰ ῥήματα τοῖς ὀνόμασιν: '우리는 그러한 πλέγμα를 λόγος라 부른다' (그리고 262c5 ἡ πρώτη συμπλοκή를 참조하라). 하지만 이것은 εἴδη 상호의 συμπλοκή가 아니다. 그것은 동사의 명사와의 συμπλοκή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에 대하여 263a2 이하에서 제시된 
예시들은(Θεαίτητος κάθηται, Θεαίτητος πέτεται) 훌륭한 기술들이다.

IV

대화편 내에서 논증의 단계들에 대한 이하의 개괄은 이 논문에서 다루는 문제가 그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첨부된다. 그 개괄은 이러한 의도에 충분한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논증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위해 나는 독자제위께 이미 언급한 내 이전 논문을 언급해야만 한다.
  문제에 대한 진술. 그 문제는 236e1 이하에서 처음으로 명백하게 진술된다. ψευδῆ λέγειν이 어떻게 가능한가? ψευδῆ λέγειν은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 εἶναι하는 것이다. 그것은 241a1에서 재진술된다. ψευδὴς λόγος는 λέγει τὰ μὴ ὄντα εἶναι이다. '소피스테스'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인데, 그것이 τὸ ὄν을 τὸ μὴ ὄν에 '적용시킴'(προσάπτειν, 241b1)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τὸ ὄν을 [61쪽] τὸ μὴ ὄν에 '적용'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규준을 위반하는 것이(241d5 이하), τὸ μὴ ὄν이 어떤 식으로는 ἔστι(상동)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즉 일부 논쟁자들에 반대하여, 그러한 '적용들'이나 '결합들'이 허용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적법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251d5 이하)
(1) 1단계. γένη(혹은 εἴδη)의 일부 상호 결합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립시킨다(251e-252e). 그렇게 가능한 것으로 보여진 것들 중에 모든 εἴδη들의 οὐσία와의 결합들이 속한다 (256d, e, 일반적 승인은 259a, b). 이는 다음을 포함한다.
(a) τὸ μὴ ὄν의 οὐσία와의 결합(257a). 
  이것의 결과들은 다음을 포함한다.
  (i) τὸ ὂν οὐκ ἔστιν. εἴδη의 모든 개별 사례에서만큼, 그렇게 많은 ὄν이 τὸ ὄν에 관하여 있고, 무한한 μὴ ὄν이 그것에 관하여 있다(256e5). τὸ ὄν이 그 자체로 ~이지만, 셀수 없이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이지 않다'.(257a)
  (ii) τὸ μὴ ὂν ἔστιν (256d, 최종 승인은 258b). 즉 τὸ μὴ ὄν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무언가와 다른 것이다(257b, c). 더 보충하자면, 그것은 x인 것과 다른 것이다(257d 이하).
(b) λόγος의 οὐσία와의 결합.
  그 결과. λόγος ἔστιν(259e-260a). 즉 λόγος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 하지만 λόγος 또한 τὸ μὴ ὄν과 결합하는가? 우리는 τὸ μὴ ὄν이 모든 ὄντα 전반에 '퍼져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보여주었다(260b).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것이 특별히 λόγος와 δόξα에 적용됨을 보여주어야 하고(260b-e), 달리 말해 우리는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 λόγος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먼저 λόγος가 무엇인지 탐구해야만 한다.
(2) 2단계.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
  그 결과: λόγος는 명사와 동사의 결합이다.(261d-262e)
(3) 3단계. λόγος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주어)에 관하여 무언가(동사)를 말한다. λέγει τι περί τινος(262e-263a)
(4) 4단계. 우리는 각 εἶδος에 관하여 많은 ὄν이 있고, 엄청난 수의 μὴ ὄν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256e. 위의 (1) (a) (i)을 보라.). 유사하게,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여러 ὄντα와 여러 μὴ ὄντα가 있다(263b11 이하). 그러므로 λόγος는 λέγειν τὰ ὄντα περί τινος가 가능하고, λέγειν τὰ μὴ ὄντα περί τινος도 가능하다(ἕτερα τῶν ὄντων περί τινος, 263b11). 그러므로 소피스테스의 주장,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거짓 단언)은 μὴ ὄν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러므로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은 아무것도 단언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주장은 반박되었다. τὸ μὴ ὄν이 불완전한 구인 것으로 보여졌던 것처럼 - 그것은 τὸ μὴ ὄν-X, 즉 θάτερον τοῦ ὄντος-X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1) (a) (ii)를 보라)- 그렇게 λόγος도 마찬가지이다.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은 불완전한 구이다. 그것은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 περί τινος, 즉 λέγειν ἕτερα τῶν ὄντων περί τινος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ἕτερα는 ὄντα 만큼 많이 있다. [62쪽] λέγει τὸ μὴ ὄν하는 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니라, ἕτερα를 말하고 있으며, ἕτερα(입증되었던 것으로서)도 또한 ὄντα이다.
  259e4 이하에서의 말은 1단계 (b)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가지 λόγοι들은 3, 4단계에 속한다는 것을 위의 개괄로부터 알 수 있다.

V

이 논문의 본래 목적은 처음에 진술된 그 난점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 중요한 지점이 포함된다는 것, 손님이 εἶδος라는 명칭을 주석가들에 의해 주로 인정되는 다섯 가지 μέγιστα γένη, 즉 정지, 운동, τὸ ὄν(254d), ταὐτόν(255c에서 추가되는), Θάτερον(255d에서 추가되고 257b에서 τὸ μὴ ὄν과 동일시되는. 258c 참조보다 더 많은 인자들에 적용시킨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렇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다른 한편, 우리가 보았듯, 이러한 것들을 손님은 적어도 이하의 부분들에서 εἴδη(γένη)로 기술한다. τὸ καθ᾿ αὑτό τὸ πρὸς ἄλλο (255b 이하), λόγος (260a, d), 그리고 δόξα (260d). 내가 이미 지적하였듯, 우리는 아마도 이 목록에 τὸ καλόν, τὸ μὴ καλόν, τὸ μέγα, τὸ μὴ μέγα, τὸ δίκαιον, τὸ μὴ δίκαιον(257d), 그리고 (만일 우리가 B사본과 T사본의 독해를 받아들인다면) διάνοια와 φαντασία(263d)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물음이 야기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들 전부가 플라톤적인 형상들로 헤아려지는 것인가? 나는 (언급된 그 논문에서) 그것들 중 일부는 그렇게 헤아려지지 않는 것이라고, 즉 τὸ ὄν, τὸ μὴ ὄν (θάτερον), ταὐτόν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처음에 인용하였던 네 명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이 물음에 어떠한 대답이 제시되는가?
  로쓰는 처음 다섯 가지 위에서 나열된 것들이 플라톤적 형상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τὸ μὴ ὄν에 관련하여, 그는 (168쪽) 이것이 '진정한 형상이며, 게다가 가장 거대한 형상들 중 하나', 다름과 동일시되는 그러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τὸ μὴ καλόν 같은 부정어들의 주제에 관련하여서라도, 플라톤의 '그것들에 대한 태도는 모두 분명치 않고'(167쪽), 그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형상이라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 외의 『소피스테스』에서 명명된 εἴδη에 대하여 로쓰는, 추정컨데 그가 τὸ καλόν τὸ μέγα τὸ δίκαιον을 플라톤적 형상들로 포함시킬 것 같다 하더라도, 아무런 인식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콘포드는 분명하게 그 처음 다섯 가지 것들을 플라톤적 형상들로 간주하고 (275쪽, 그리고 여러 곳에서), 257d-258c에서 언급된 '도덕적 형상들'(즉 아름다움, 정의로움)까지도 그리 간주하며 (291쪽), 추정컨데 같은 구절에서 그것들과 함께 언급되는 τὸ μέγα도 그리 간주할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해 주석을 달면서 (291쪽, 주석 2.), 그는 우리에게 '"안 정의로움"은 "부정의"가 아니라 "정의"와 다른 어떤 형상이다'라고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로 형상이 아니라, 여러 형상들을 포괄하는 총괄적인 용어이다. 그는 τὸ καθ᾿ αὑτό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255d) 를 그곳에서(281쪽 주석 2. 256-7쪽 참조) 형상들로 기술한다. 그의 번역에서 그가 εἴδη를 '성질들'로 번역할지라도 말이다. 260d, 손님이 λόγος와 δόξα를 εἴδη로 기술하는 곳에서, 콘포드는 번역어로 'things'를 택하고, 'eidos는 모호한 단어이고, 종종 "entity"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며 (302쪽), '거짓에 참여할 수 있는 사유와 진술은 플라톤적 형상들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들과 우리가 발화하는 진술들 내에 존재하는 사유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그의 주석은 (260d, 302쪽 주석 1.) 그가 δόξα, διάνοια 그리고 φαντασία, (우리가 B사본과 T사본을 받아들인다면) 263d에서 
γένη로 불리는 그것들에 대해 같은 관점을 취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콘포드는 그의 형상들 목록표에 앉음(314쪽)과 날고 있음(315쪽)을 포함시킨다. 비록 이러한 것들이 손님에 의해 결코 그렇게 기술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콘포드는 '테아이테토스라는, 그런 형상은 전혀 없다.' 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314쪽)
  아크릴씨와 블럭 박사는 처음 다섯 가지 것들을 진정으로 플라톤적인 형상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난다 (블럭 박사는 명백히 그리 한다). 손님에 의해 언급된 다른 εἴδη를 그들은 주목하지 않고, 그들은 손님에 의해 언급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추가한다. 그래서, 아크릴씨는 모든 개념들 그리고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에 대응하는 형상들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앉음', '앉지 않음', '서 있음'을 포함하여). 그리고 블럭 박사는 인간, 돼지, 앉음과 날고 있음이라는 형상들을 언급한다 (비록 그가 ψευδὴς λόγος에 대한 손님의 해석에서 아무런 형상들도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더라도).
  만일 손님에 의해 εἴδη라고 불리는 항목들 중 일부가 플라톤적 형상들이 아니라면, 반면에 다른 것들은 그러하다면, 우리는 왜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해 추론되고 또한 추론될 수 있는 설명을 제시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부 항목들에 대한 콘포드의 거부는, 그가 다른 것들을 추가하는 것만큼이나, 임의적으로 보이고, 확실히 그 대화편의 문헌 내에서 아무런 정당화도 찾지 못한다. 로쓰는 그 문제의 일부만을 마주하고, 아크릴과 블럭은 그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대화편 내에서 손님에 의해 사용되는 언어에 직면하여, 적용될 수 있는 차별적 원칙이 무엇인지 알기란 어렵다. 우리가 보았듯 λόγος와 δόξα가 εἴδη로 기술될 뿐만 아니라, '결합' 등과 같은 용어가 다른 εἴδη에 대해서처럼 그것들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λόγος의 바로 그 현존이 εἴδη의 상호 συμπλοκή가 있다는 사실에 의해 성립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μεῖξις가 있다는 사실에도 의존하지만 (259e 이하) - 이 경우 λόγος의 οὐσια와의 συμπλοκή - 260b 이하에서 우리는 δόξα의 그리고 λόγος의  τὸ μὴ ὄν과의 '혼합', 그 '참여', 그 '상호관련', '결합'을 장차 증명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서 알게 된다. 255d에서 우리는 εἴπερ θάτερον ἀμφοῖν μετεῖχε τοῖν εἰδοῖν이라는 구절을 발견한다. 이 εἴδη의 쌍은 문맥이 보여주듯 τὸ καθ᾿ αὑτό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혹은 πρὸς ἕτερον)이다. 곧장, 일부 ὄντα는 전자에, 일부는 후자에 '참여'한다는 것이 시사된다 (255c).
  [64쪽] 다시, τὸ καλόν과 τὸ μὴ καλόν 그리고 257d 이하에서 언급된 다른 짝들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차별적 원칙이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다. 이것들 중 아무것도 여기에서 εἶδος나 γένος로 기술되지도 않고, 우리가 그것들의 '참여' 등등을 듣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257e에서 
τὸ καλόν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τὸ μὴ καλόν에 마주놓이는 것은 ὄν에 대해 다시 ὄν에 맞서는 마주 놓이는 것으로 기술된다 (ὄντος δὴ πρὸς ὄν ἀντίθεσις). 그리고 τὸ μὴ καλόν은 τὸ καλόν에 전혀 못지 않게 'ὄντα 중의 하나이다(ἐστι τῶν ὄντων)'라고 진술된다. 만일 우리가 τὸ μὴ καλόν을, 예를 들어 그것이 단지 θάτερον의 '부분'이라는 근거에서(257d에서 그렇게 기술된다) 실격시킨다면, 우리가 τὸ καλόν을 (258b1에서 분명히 시사되듯) 그것이 단지 τὸ ὄν의 '부분'이라는 근거에서 실격시켜야만 하는가? <이게 뭔 개소리야, 미친 늙은이.> 만일 τὸ καλόν이 여기에서 플라톤적 형상이라면, τὸ μὴ καλόν 에 같은 자격을 부여하길 거부할 아무런 근거도 문헌이 제시하지 않는다. '안 아름다움''은 형상이 아니지만', '아름다움 자체와는 다른, 존재하는 형상들 모두에 대한 총괄적인 명칭이다'라는, 그리고 그것이 '실재를 구성하는 형상들의 전 영역의 일부'이며 '단일한 형상, 즉 아름다움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그리고 대조되는 형상들의 전체 집단'이라는 주장은(293쪽), τὸ μὴ καλόν이 τὸ καλόν에 마주하여 놓인다고, 그리고 θάτερον의 '부분'이라고, τὸ καλόν이 τὸ ὄν의 '부분'인 것처럼 바로 그렇게 그러하다고 말하는 플라톤의 문헌에 명백히 반대된다. 만일, 콘포드가 믿듯, 여기에서 τὸ καλόν이 플라톤적 형상이라면, 그리하여 『소피스테스』라는 문헌은 그에게 τὸ μὴ καλόν이 정확히 그와 같은 상태를 지닌다는 것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플라톤적 형상들이라는 자격에 합당한 후보들에 대한 콘포드의 선택은, 어떤 것들은 택하고 어떤 것들은 거부하는 누구의 선택이 되었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순전히 자의적이다. 그 과정은 궁극적으로 이러저러한 후보들이 '반드시' 플라톤적 형상들이어야만 한다거나 그럴 수 '없다'고 느끼는지 여부에 대한 특정 주석가의 선입견에 의존한다. 그가 그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놓는 논증들이 무엇이든 상관 없다. 『소피스테스』에서 εἴδη로 언급되는 모든 하나하나가 플라톤적 형상이라고 주장하거나 그것들 중 아무것도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에서의 선택만이 적법하다. 나는 내 앞선 논문에서 τὸ μὴ ὄν (θάτερον), ταὐτόν 그리고 τὸ ὄν이 플라톤적 형상들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들을 제공하였고, 내가 암시들은 플라톤적 형상들도 아니라는 것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단지 그것만을 기초로 하여 그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 대한 증거를 뒷받침하는 추가적인 것도 있다. 플라톤은 우리에게 이 대화편에서 그가 소피스테스의 언어적 φαντάσματα, 즉 그들이 나타내고자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못 전하거나 왜곡시키는 용어들을 다룰 것이라는 분명한 암시를 주었다(234e1 그리고 그 이하 논의에서). 그리고 그 대화편의 이어지는 주된 부분에 대한 작업과 당도하게 된 결론들이 이 점을 충분히 지지한다. 플라톤은 명백히 이러한 용어들 중 하나, 최악의 문제이자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것, τὸ μὴ ὄν이 어떻게 결함을 가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언어적 εἰκών
, 참이고 맞는 언어적 표현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훼손되었고, 그것의 잃어버린 조각이 복원될 필요가 있다. 같은 일이 θάτερον, τὸ μὴ ὄν과 동일시되는 그것에도 적용된다. 암시적으로, 같은 것이 τὸ ὄν과 ταὐτόν에도 적용된다. 그것들도 훼손된 용어들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언어적 φαντάσματα가, 그것들이 온전하게 복원되었을 때조차, 플라톤적 형상들에 대한 명칭들일 것이라 가정하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다. 그것들이 확실히 정확한 언어적 표현들이고 더 이상 잘못 이끄는 것이 아닐 것일지라도. 이와 관련하여 콘포드에 의해 그것들 중 일부의 원천이 위치잡힌다는 것을 주목하는 일은 흥미로운 것이다. 그는 어디로부터 운동과 정지가 등장하는지 묻고 (277쪽), '그것들은 『파르메니데스』 129d에서 언급된 제논의 역설들에서 나타난 모순되는 용어들의 목록으로부터 온다. 운동(과 같은 것) 그리고 정지(와 같은 것)의 본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들에 관하여 상관된 사실은 오직 그것들이 반대되고 양립불가능하다는 것뿐이다.'라고 답한다. 그는 그것들이 아마 차라리 상징들로 대체되어도 좋았을 것이라고까지 추정한다. 나는 그가 비록 이러한 진단의 함축들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그리고 계속해서 『소피스테스』에서 운동과 정지가 플라톤적 형상들이기도 하다고 추정할지라도, 그의 진단에 관련해서는 콘포드가 전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그에 따라서 τὸ καλόν이든 τὸ μέγα든 τὸ δίκαιον이든 그 본성이 소위『소피스테스』의 그런 구도에 들어 오지 않는다고 덧붙일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단지 그 부정들이 마주놓이기 위한 편리한 긍정형들로 도입될 따름이다. 이것들 모두 사실상 소피스테스적인 용어들이다.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테스의 용어와 그것들의 결함들 중 일부에 대한 폭로를 다루고 있고, 단지 진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고유한 입장에 대한 공격들에서 사용될 때 그 위험이 드러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도 그리하고 있다. 플라톤이 τὸ καλόν과 τὸ δίκαιον 같은 용어들을 고안해냈다거나 독점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더욱이 부조리한 일일 것이다. 거의 어떤 그리스어 저자든 그 반대에 대한 증거를 제공할 수 있다. τὸ ὄν과 τὸ μὴ ὄν의 철학적 용법조차 최소한 파르메니데스 시기만큼은 오래 되었다. 초기대화편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히피아스 같은 사람과 τὸ καλόν의 의미를 논의하는 걸 발견하고, [66쪽] 우리는 만일 우리가 그런 용어들을 플라톤 말고 다른 사람들의 어휘에서 발견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소피스테스』 251b에서 언급되는 '늦게 배우는 자들'과 같은 역량에 속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제논 같은 더 예리한 사상가들까지 말이다. '소피스테스들'과 반박하는 자들의 활동들에 저항하면서 플라톤이 쏟은 엄청난 노력은 그 자체로 유행하였던 대화법의 횡행과 (그가 느꼈듯) 철학에 대한 위험을 시사한다. 이러한 태도의 위험성은 플라톤이 보았듯 그 피상성이었고, 실재 대신 단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었다. 플라톤 (혹은 소크라테스) 에 의해 고안되었던 것은 용어가 아니라, 실제로, αὐτὸ καθ᾿ αὑτὸ εἶδος, τὸ καλὸν αὐτὸ καθ᾿ αὑτό라는 개념, 그 용어, 그 자체의 고유한 자격으로 물리세계에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실체, 오직 λογισμός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에 기저에 놓일 것을 보여주는 활동이고 그것들이 확인되었을 때 사태들에 부합하는, 필요한 곳에서의 그러한 용어의 개선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주의를 용어에 한정하는 자들에 반대하여 공격한다. 그들은 그들의 용어가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인지 고찰하는 데 실패하거나, 그것이 진리나 실재에 대한 믿을 만한 지표라고 믿는 - 혹은 그들이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언어적인 교묘한 수법으로 플라톤을 때려눕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내 의견으로 μετέχειν과 또한 『소피스테스』에서 '결합'과 '혼합'을 지시하는 데에 사용되는 다양한 동사들 그리고 명사들 모두는 저 두 용어들이 같은 문장에서 자기모순없이 함께 사용될 수 있다는 것 이상을 함의하지 않는다. 이미 인용한 콘포드의 구절을 사용하자면, 명명된 사물들의 '본성'은 관련이 없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κίνησις와 στάσις는 '혼합'되지 않을 것인데,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는 명백히 자기모순적이기 때문이다. τὸ μὴ ὂν ἔστιν도 똑같이 그리고 명백히 자기모순 아닌가? 파르메니데스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말들에 의해 그들이 현혹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저 기만적인 허울을 넘어서서 어떤 더욱 견고하고 신뢰할 만한 것을 향해 뚫고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 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εἶδος나 μετέχειν 혹은 
τὸ καλόν이라는 말들을 플라톤에게서 볼 때마다 그것들이 플라톤적 형상들을 지시한다는 결론으로 비약하는 데에 맞서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즉 그것이 정확히 플라톤이 교정하기 위해 『소피스테스』를 집필했던 그 오류의 형식이다. 검토되지 않은 용어를 사실들에 대한 믿을 만한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뭐 별로 딱히 볼 만한 논문은 아니었다는 감상=_= 60년대 Phronesis 등재 논문이 이 따위라는 건 그 후 50년 가까이 축적된 연구들을 본 내가 눈이 높아졌다는 반증인가, 아니면 그냥 이 논문이 정말 쓰잘데기 없다는 얘기일까 잘 모르겠네. 토 나와.


유들의 결합(koinonia genon)이든 형상들의 상호 엮임(symploke allelon ton eidon)이든 그것이 진술(logos)의 성립조건이 되는 방식은 여러 층위이다.
1) 모든 genos가 being, sameness, difference (내 주장에 따르자면 motion, rest까지)와 필연적으로 결합한다. 그러므로 '진술(logos)'이라는 하나의 'genos' 역시 이러한 엮임 없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logos라는 genos의 성립조건)
2) 진술의 구성 요소가 되는 각각의 것들, 이름(명사, onoma)과 말(동사, rema) 역시 genos로서 1)의 엮임을 전제해야만 한다.(onoma와 rema라는 각각의 genos의 성립조건)
3) 진술의 구성 요소 각각이 가리키는 것(명사의 경우 사물이나 사태, 동사의 경우 이름이 가리키는 것에 관련된 행위 혹은 상태) 역시 형상들의 엮임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와 같은 진술의 경우를 보자. '테아이테토스'는 인간이라는 형상에 참여하는 개별자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형상은 동물이라는 유(genos)에 참여하고 영혼이라는 유에도, 지성, 사유라는 유들에도 참여하며 그런 식으로 엮여 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유인 한에서 마찬가지로 1)의 엮임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onoma가 가리키는 pragma, rema가 가리키는 praxis라는 각 genos의 성립조건, 그리고 각 pragma와 각 praxis라는 사태 자체의 성립조건.)
4) megista gene(가장 거대한 유들, 혹은 매우 중요한 유들)에 관한 논의에서 드러나듯, 유들의 엮인 결과는 'A is B(혹은 A verb- Bs)' 형태로 진술된다. A가 B에 참여(metechein)함으로써 A is B가 성립하고, A Bs가 성립한다. 모든 진술은 명사와 동사의 결합으로 제시되므로, 진술 일반은 '명사 + 동사'라는 형상들의 엮임을 필요로 한다.(onoma와 rema 사이의 결합에 대한 성립조건)
5) 4)에 이어서, 개별 진술들 각각에 대해서 특정 명사 A가 가리키는 어떤 것(real A)이 특정 동사 B(real B)가 가리키는 행위를 자신에 관하여 being인 것으로 지니는 사태, 즉 "A is B"라는 진술이 가리키는 사태는 'real A metechein real B'이다. Real A와 real B 사이의 상호 엮임이 형상들의 엮임인 경우를 고려할 때, 개별 진술 또한 형상들의 상호 엮임을 전제한다.(genos 차원에서 pragma와 praxis 사이의 결합에 대한 성립조건, 그리고 개별 pragma와 개별 praxis 사이의 결합에 대한 성립조건.)
여기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형상들의 엮임' 혹은 '유들의 결합'은 당연히 1) 아닌가? 나머지 경우들은 모두 1)에 함축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한데? 근데 왜 아크릴이고 팩이고 다들 엇나간 얘기를 하는 걸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뭐 내가 틀렸겠지. 쟤들은 박사님네들이고 나는 석사과정찌끄래기니까.

-작성중-

  구독 및 정보수집용으로만 돌리는 트윗을 훑어 보다가 철학 어쩌고 하는 계정을 보게 되었다. 누군가 플라톤이 관념론자가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며 무슨 얘기인지 설명해 달라고 했나 보더라. 답변이 가관이다. 인터넷 검색 돌려 블로그 글 하나를 링크해 놓고서는 '관념론이 아니라 보편자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이런 얘기를 하고, 그런데 관념론이란 게 도구적이라나 뭐라나 하여튼 그러면서 관념론일 수도 있고, '주된 시각이나 입장'까지 들먹이며 플라톤이 '주로' 관념론으로 이야기된단다. 이걸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사이 칸트가 플라톤을 비판하는 맥락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가 안 되어 있는 걸로 보인다만, 그거야 뭐 내가 칸트 전공자도 아니고 그 사람이 알아서 그러고 살든지 말든지. 그런데 보편자와 이데아를 구분 못하고 있다는 게 일단 굉장히 거슬린다. 개별자들이 이데아에 참여(metechein)한다는 것, 그리고 개별자들을 통해 귀납하고 추상하여 나온 보편자(katholou)는 개별자들에 의존적이라는 점 등만 생각해 보더라도 일단 보편자와 이데아가 뭐가 다른지는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안 읽었다는 얘기밖에 더 되겠나. 플라톤이 관념론이라는 게 주된 시각이라니, 이것도 답답하다 못해 참담할 노릇이다. 이게 대한민국 철학 전공 학부생의 수준인 게다. 그야 뭐 제대로 추천할 만한 우리말로 된 개론서는커녕 대화편 자체도 아직 번역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형편이니 학생들이나 타전공 선생들 탓만 할 수야 없겠지만서도. 어쨌든, 19세기 고전문헌학의 부흥과 함께 플라톤의 저술 자체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해석의 전통이 성립하고 난 이래로 플라톤을 관념론으로 치부하는 입장은 특히 근대 경험론의 영향과 그 이전 17세기 무렵부터 성립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자연과학의 전통 속에 몇몇 역사적인 철학자들의 오독과 더불어 철학사 전체를 특정 입장에서 개괄하거나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가 이제는 그마저도 잘 찾아보기 힘든 굉장히 보잘 것 없고 게으른 해석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는 주로 이슬람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바탕으로, 그리고 후기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왜곡 아래에서, 다시 그 두 요소들이 그리스도교 신학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생겨난 이질적인 '플라톤'이 나오지만 이걸 플라톤 해석의 전통이라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관념론 아니라고, 관념론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류도 아니라고, 그런 얘기를 꺼낼 필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답답하고 지친다. 저 철학과 봇인지 학생 봇인지 뭐시깽이는 왜 줍잖게 주워들은 이야기들과 같잖은 개론서들이 전하는 오류들을 그것도 마치 굉장힌 권위라도 있는 입장인냥 전하며 그걸 전하는 자신의 태도가 객관적인 척을 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스스로 찾아보거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자인하거나 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질 않는 것인지, 그걸 생각하면 역겹고 화가 나기까지 한다. 학생들에 대한 의무감, 책임감으로, 다른 한편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그렇게나 바라는 연구를 한켠으로 미루어 두고서 그래도 뭔가 훗날을 기약할 만한 한 걸음이 되지나 않을까 기대를 걸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선생들은 저런 것들을 가르쳤을 텐데, 그들이 제대로 된 선생이라면 틀림없이 저것들에게 정직하라고, 성실하라고, 겅중거리지 말고 조급해 하지 말라고 가르쳤을 것인데, 칸트에게 관념과 개념과 이념이 무슨 차이인지, 형식과 내용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 틀 안에서 경험이라든지 현상이라든지 하는 것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그렇게 이해할 때에 플라톤이 어떤 식으로 비판되고 있는 것인지 아무런 고민도 없이 '칸트는 플라톤을 관념론자라고 하니까'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해댄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전혀 읽히지 않는다는 거야 뭐 두 말할 나위도 없고, 그나마 플라톤에 대한 질문에 쓰잘데기 없이 끌어다 떠들 정도로 칸트에 자신이 있다면 적어도 『순수이성비판』은 좀 제대로나 읽든지, 이해를 못 하겠으면 '쉽게 읽는 ~' 시리즈를 사 읽든 다른 나라 교재로 쓰이는 칸트 개론서들 좀 찾아 보든, 그런 건 하지도 않고 그냥 칸트가 이랬느니 저랬느니 떠들고 싶어 한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공부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잘난 척이 하고 싶은 것 아닌가 말이다. 관념론이니 독단론이니 실재론이니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들이 맥락에 따라 달리 읽힌다느니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느니 하는 그딴 게으르고 비겁한 대답은 또 어디서 더러운 것만 배워서 떠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학술적 전문용어들은 해당 학문의 역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여러 검토와 비판을 거쳐 어느 정도까지 통용될 수 있을 만큼 검증된 개념들이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정의되는지 찾아보려는 노력 없이, 그게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하는 건 이제까지의 학문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심지어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등의 대륙 철학자들을 거치면서 관념론에 '객관적 관념론'이니 '관념 실재론'이니 하는 굉장히 접근하기 어렵고 난해한 변형들이 생겨나는 와중에도 여전히 관념론은 사유 속에, 믿음 체계 내에, 일종의 정합론에 가까운 진리관을 전제로 한다는 정도의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거기에서든 어디에서든 관념이라는 것은 생각하는 일과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저 혼자 무슨 귀신마냥 배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이성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과 그것이 이성 안에서 성립한다는 건 다른 얘기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부터 개념에 대한 엄밀한 정의의 필요성은 강조되어 왔고 그러한 작업이 실제로 이루어져 온 과정이 개념사(-史)이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다. 정의가 중요하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도 플라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플라톤에게 이데아가 원본이고 개별물들이 모상이라고 할 수는 있고, 모상에 대해서는 앎이 아닌 믿음만이 성립한다는 게 적어도 『국가』까지 플라톤이 견지하는 입장이긴 한데, 그게 그래서 '모상은 허상이니까 다 거짓'이란 식으로 결론이 나는 건 아니다. 믿음도 참인 믿음과 거짓인 믿음이 나뉠 수 있다. 이건 『메논』부터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티마이오스』 같은 데서는 인식 가능한 방식으로, 즉 수학적 비례에 따라 물질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일단 현상 개무시하고 경험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플라톤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는 따로 연구고 뭐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대화편 몇 권만 봐도 그대로 따라 나온다. 경험적인 앎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이 궁금하다면 『테아이테토스』 번역도 나왔는데 좀 사라, 인간들아. 다시, 『국가』에서 좋음의 이데아라든지 『티마이오스』에서 장인(demiurgos)이 본으로 삼는 이데아라든지 이런 것들은 존재와 가치의 기준이자 근거이고 토대이다. 독립적인 것이다. 심지어 세계를 제작하는 그 장인에게 있어서도 이데아가 그 신 같은 무언가의 머릿속에, 혹은 생각 속에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파이돈』 보면 이 이데아라는 것이 인과작용도 하고 게다가 그것에 참여하는 개별적인 것들이 그 이데아를 통해 갖게 되는 성질을 이데아 자체가 가장 뚜렷하고 확실하게, 가장 강하게 가지기도 한다. 여기다 대고 관념이라고 한다는 게 굉장히 기이한 일이라는 걸 굳이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소박한 실재론이란 걸 생각해 보잔 말이다. 참이라는 게 뭐냐,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객관적 사태에 부합한다는 거다. 객관적 사태, 그러니까 밖에 그냥 따로 있는 거 말이다. 플라톤은 그 참을 보장해 주는 것이 이데아라고 하는 거다. 이데아가 객관적이라는 얘기고, 그런 건 관념으로 퉁치지 못한다. 내가 씨발 무슨 논증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국내에 찾아볼 수 있는 개론서 꽤 있다. 한글로는 저 옛날옛적 Guthrie도 있고 영어로는 Ross도 있고 Annas도 있고, 알아 보려면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다. 애초에 저 학생 봇인지 뭔지도 답답하지만 거기다가 질문하는 사람 역시 이해가 안 간다. 궁금하면 정암학당 홈페이지 들어가서 물어 보면 되지 않겠나? 국내 플라톤 원전번역하는 전공 연구자들이 떼로 몰려 있는 곳을 놔두고, 익명의 인터넷 봇에게, 누가 봐도 굉장히 플라톤에게 대표적이라 할 만한 이론인 이데아론에 관련해서 묻는 이유는 뭔가. 거기다 물었더니 또 익명의 인터넷 블로거 글을 가져다 근거로 삼는 저 봇도 봇이고. 물론 권위는 정당성의 직접적인 원천이 아니다. 일종의 신빙론에 따른 임시방편이랄지, 해당 주제로 역사를 통해 검증된 절차를 거쳐 교육받고 시험을 통과하여 자격을 갖춘 소위 '전공자'라는 것이 그 외의 사람들에 비해 참인 주장을 확률적으로 더 많이 내놓으리라는 믿음 정도가 깔린 것일 터인데, 그마저도 개무시를 할 거라면 스스로 정당화 과정을 떠맡아 제대로 해내든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플라톤이 쓴 것으로 알려진 저술들을 살펴 보고, 그걸 나름대로 요약, 정리하고 그 안에서 논증을 분석해 보고 재구성해 보고 스스로 평가도 해 보고, 그걸 근거로 이러저러한 것을 플라톤이 주장한 것 같다고 논증도 하고, 다시 '관념론'이라는 게 뭔지 또 알아 보고, 이 좋은 인터넷 세상에서 서울대 철학과 DB를 뒤지든 스탠포드 인터넷 철학사전을 뒤지든 해서 그 개념이 어떻게 정의되는지 이해도 좀 해 보고, 애초에 이 과정이 공부고 이게 재밌어야 이 짓거리를 전공 삼는 건데, 이런 건 다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다짜고짜 내키는대로 '그건 이런 거 같아요' 하고 입부터 놀리고 싶다면 철학 떄려 치워야 하는 거 아닌가. 때려 치워라.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고 학제가 개선되고 연구자들이 양성되고 연구결과들이 축적된 다음, 언젠가는 당신들이 하고 싶어하는 그 '잘난 척'이란 걸 이 땅에서도 할 수 있는 조건이나 환경이 갖추어지는 날도 올지 모른다. 하지만 당장에 필요한 건 입 닥치고 밀린 연구를 수행하며 이름 없이 죽어갈 희생양들이다. 이 일은 정말 바쁘고 급한 데 막막할 정도로 많기도 한 그런 일이다. 번역을 하고 사전을 만들고 색인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번역어 하나하나 논문을 만들어 그 번역을 정당화하고 그러는 사이에 해당 저술에 대한 일관된 이해를 시도하고 특정 철학자의 사상 전체에 대한 개괄을 제공하고 그렇게 개별 철학자를 연구하여 한 시대를 재구성하고 그 시대를 분석, 정리, 평가하고, 그 방법론을 정리하고 다른 시대 다른 주제에 대한 연구들에 비추어 비교도 하고 자체적으로 비판도 해 보고, 아예 전혀 다른 학문분야를 통해 새로운 접근도 시도하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연구된 그러한 철학을 다시 현실성 있는 것으로,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고, 그러려면 천재 한 두 새끼가 필요한 게 아니라 바위를 뚫을 때까지 떨어질 수억만의 물방울들이, 바다를 메울 때까지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멩이들이 필요한 거다. 이걸 알고도 뛰어드는 나름 결연하고 단호한 의지를 지닌 연구자들이, 더구나 당신들보다 훨씬 열심히 살고 훨씬 더 똑똑하고 심지어 조건도 더 나아 투자할 시간까지 당신들보다 많은 그런 사람들이, 당신들 같은 찌끄래기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는 것에 조금은 양심의 거리낌이나 죄책감 같은 걸 느낄 수는 없나? 얘기가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고, 어쨌든 플라톤 관념론자 아니다. 단적으로 아니라고=_= 예전 글에 그렇게 써 놓았다가 어떤 분께서 최근에 덧글로 질문을 하셨는데, 이 질문이야 '니가 플라톤 관념론자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근거가 뭐냐?'라는 논조로 이해를 하면 나한테 묻는 게 맞는 일이다. 주장한 놈은 논증할 책임이 있으니까.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걸 따져 묻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 그런데 저 봇에게 질문을 하는 건 다른 문제다. '플라톤이 관념론자가 아니에요?'라고 물을 때는 상대가 그와 관련해 권위를 가져야 한다. 토론하거나 정당성을 따져 보자고 묻는 게 아니라 정보를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가장 바람직한 건 책에다가 묻는 것이다. 그걸로 해결을 못하겠으면 해당 전공자 찾아가서 묻는 거다. 어쨌든 내가 화난 건 칸트도 플라톤도 모르면서 그 둘을 섞어다가 인터넷 떠돌며 아무거나 주워다 먹고서는 아무렇게나 내뱉는 주제에 '학생'이라면서 겸손한 척까지 하는 저 봇의 태도가 싫다는 거,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철학 때려 치우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직접 멘션을 하고 싶지는 않고, 그냥 내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askfm에 몇 마디 남겼는데, 예상컨데 '이건 또 어느 동네 개가 짖어댔나' 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싶군. 뭐 나야 그런 취급을 받아도 싼 쓰레기니까, 그래서 별로 할 말은 없다. 알아서들 살겠지. 이런 얘기에 찔려 할 사람들은 애초에 저렇게 살지를 않으니까. 그저 무기력할 따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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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오냐오냐 하며 달래주고 치켜 세워주고 그런 식으로 용기를 북돋워주고 흥미를 유발시키는 게, 내 생각에는 지극히 무책임한 짓이다. 우선 그건 상대를 '헛소리 해도 되는'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뿐이다. 다음으로, 그렇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흥미만 갖고 천지사방 날뛰다가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빠져들어 버린 사람에게, '니 인생 니가 책임져' 하는 식으로 내팽개치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철학은 재밌는 거야, 그건 자유로운 거야, 이러니 저러니 달콤한 소리나 지껄여대는 치들이 저 학생들에게 강의자리 하나라도 소개해 주겠냐, 논문 작성법이나 제대로 가르치겠냐, 그냥 좋은 어른, 멋있는 어른, 그 씹어먹을 '멘토' 흉내질이나 해대며 악역은 다 남들한테 떠넘기는 거지. 왜 아이들에게 비판을 하지 않고 책임을 요구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저 늙은이들은 말할 것이다, '걔들은 아직 몰라도 된다'라고. 아니, 그런 건 없다. 학문이란 게 위아래 놓고 도 닦아 누구는 신선되고 누구는 이무기 되고 그러는 게 아니다. 애초에 무지 앞에 정직할 줄 알게 만들어 놓는 게 먼저다. 제 자신의 말과 생각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적어도 자기 자신은 알아야 한다는 그 의무를 뼈에 새겨주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철학이란 말장난과 겉치레에 불과해진다. 어쩜 이렇게 흥미로운 생각을! 너는 참 의욕에 넘치고 생기발랄하구나~! 그렇게 사기쳐서 대학원 재정확보용 살아있는 지갑으로 만들어 놓고 잡일이나 시키다 '늬 집에 돈 있나? 있음 외국 나가~ 없음 때려 치워~' 이 지랄이나 하겠지. 아니, 그나마도 정교수나 할 수 있는 짓거리고 그마저 아니라면 같이 세상 욕이나 하며 제 자신의 비참과 불운의 동반자로 멀쩡한 남의 집 귀한 자식 망쳐나 놓겠지. 인정한다. 배움이 부족하고 나이가 어리면 틀린 소리를 더 많이 하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특출난 거고, 그러니까 너무 가혹하게 굴 건 없고 그게 죄도 아니고 그냥 좋게좋게 어화둥둥해가며 가르치는 게 좋겠지. 그런데, 그게 정말 의미가 있나? 저 사람들도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을 갖고 스스로 심각하게 결심을 해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러고들 있는 거다.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된 글을 읽고 그런 식으로 '올바른 길'을 만들어 준 앞서 간 사람들에게 빚을 진 사람으로서, 연구자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이기도 한 그런 사람으로서, 더 진지하고 성실하게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관계라느니 인상이라느니 평판 따위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혹은 어줍잖은 몇 십년 나이 터울로 돼먹잖은 황희정승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실상을 보여주고 현실에 마주하게 해주는 게 바람직한 일 아닌가? 철학이 그런 게 아니란 걸, 학문이란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 그걸 알아야 스스로 저울질도 하고 인생의 결심도 제대로 해 볼 것 아닌가? 가난하고 바쁘고 몸이 고되도 어떻게든 될 것 같다고, 그렇게 허황되고 그릇된 망상을 품고서 학계에 뛰어드는 게 학문에도, 그 학문을 하려드는 당사자에게도 해가 되고 비참한 결말만이 남으리란 걸 왜 외면하는가? 결국 비겁한 건 애가 아니라 어른인 거다. 빌어먹을. 아니, 좋은 말로 다독이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저 틀려먹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는 자가 선생이랍시고 대가리를 끄덕였던 것이라면, 당신 역시도 그냥 철학을 때려 치워야 하는 거고. 양놈들 학부 때 읽는 일반론이다, 플라톤을 두고서 대륙 철학 가져다가 객관적으로도 관념이 성립할 수 있다느니 실재하는 관념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느니 그런 논쟁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놓고 '그거 관념론ㅋㅋ ㅇㅇ' 이 지랄을 한다면, 그건 그냥 공부하기 싫은 놈이나 할 소리 아닌가 말이다. 술자리에서 잘난 척하느라고 떠드는 소리만도 못한 저 뻘소리를 두고 나는 왜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하는 건가. 뭐 됐다, 나 같은 씹버러지야 뭔 지랄을 하든 누가 상관이나 하겠나, 지금 여기에 걸맞는 처지인 거다, 플라톤은 개뿔.

P.S.2. t.co/lTBeR95F2P ← 이런 트위터 링크로 사람들이 들어오는 듯한데, 나는 또 어디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는가... 나같은 개쓰레기 씹찌꺼기 좆버러지새끼를 백날 까 봐야 뭐 그리 좋은 꼴이나 볼 수 있을까 싶네. 나 따위에 대한 뒷담화로 심리적 딸딸이에 열 올리는 대신에 http://www.jungam.or.kr/donate ← 여기 들어가서 그리스 로마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에 후원이나 합시다. 훌륭한 국역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 활성화는 나같은 시정잡배양아치새끼들을 퇴치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어쩌면 '플라톤은 관념론~ 이데아는 보편자~' 이딴 소리도 수그러들지도 모르겠고, 낄낄.

P.S.3. 그런데 말이지, 내가 그 askfm에다가 '틀렸다, 맞았다고 한 교수 있으면 그 사람한테 항의하고 싶다'라고 남기고 답변이 '확인해 보겠다'였는데, 확인결과를 내가 어떻게 듣지? 만일 이런 것마저도 교수랍시고 자기 안 틀렸다며 우기고 든다면 찾아가서 날계란이라도 던져주어야 할 텐데. 나같은 병신이 논문이네 연구네 하며 지랄을 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짓거리 아니겠나. 그나저나 누가 내 이 거지발싸개 같은 시시껄렁한 잡소리 넋두리를 링크질 한 건지 정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을 셈인가? 알려주면 내 술을 쏘겠소. 관피아를 혁파하고 병영문화를 혁신할 창조경제의 심장과도 같은 박근혜 정부의 인문한국을 위한 거름이라 할 만한 국가장학금을 내 기꺼이 알코올에 탕진할 의사가 있소만. (그나저나 이공계 출신인 대통령께서는 인문학드립 그만 치시고 수리과학, 자연과학 기초학문 육성이나 좀 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는데 말이지. 플라톤 백날 읽어 봐라, 양아치 새끼들 군자 되는지.)

1. 글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건지 모르겠다. 수 많은 사건 사고를 거치는 동안에 내가 한 일이란 게 뭘까, 그런 게 있기나 한 걸까 의구심이 든다. 모니터 뒤에 퍼질러 앉아서 언제나 그렇듯 강 건너 남의 일이라는 듯이 보면서 혀를 차거나 한숨을 쉬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딴짓을 하거나 한다. 국가는 그 자체이자 그 구성원이기도 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 믿는다.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리 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 나라에 욕을 하고 분개하며 무언가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었다. 권리를 유보시킨 대신 그 만큼 국가가 책임져야 할 미성년자들조차 지키지 못하는, 반복되는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는 나라에서 바로 그 나라이기도 한 나는 여전히 비겁하고 게으르다. 나는 그저 사람들이 살아있기만을 바라지만 그런 나의 바람조차 주제넘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일 따름이다. 숨이 가쁘고 머리가 아파 한동안 TV도 인터넷도 멀리 하며 들어가야 할 강의들도 뒷전으로 하고 쳐 자빠져 있었다. 이불 뒤집어 쓰고 꼴에 끙끙 앓았다, 병신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남은 사람들까지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 마음이 몸뚱아리만큼이나 위태롭고 부실하다는 것 또한 모르는 바는 아니라서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능하면 응원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내심, 그저 잠자코 구경이나 하고 앉아 있는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도 떨칠 수가 없고. 재난으로 가난으로 병으로 사고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어가던 와중에도 어느 사이엔가 나란 놈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느니 그런 어줍잖은 변명이나 주워 섬기며 그저 내가 하는 일이나마 정직하게, 성실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면피를 할 수는 없을까 잔대가리나 굴리고 있게 되었다. 행정의 문제라느니 시장의 문제라느니 의식의 문제라느니 인재니 천재니 말들이 많고 개중에는 종교적인 갈등도 정치적인 갈등도 엿보이는데, 차마 끼어들 엄두조차 나질 않는다. 맞는 말도 있고 틀린 말도 있지만, 아직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아서 뭐라 말을 얹기 어렵다. 백만 분의 일의 확률로 기적이 일어난다면 수학적으로 우리는 매달 한 번은 기적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링크) 한 달에 한 번 기적을 만날 확률을 피해가는 이 일상이 더 큰 기적이라는 말이 덧붙지만, 사람은 희망과 기원에 정당성을 내맡겨 버리게 마련 아닌가. 그 한 달에 한 번 있을 기적이 이번에 일어나길 바랄 따름이다. 그저, 큰 아픔에 놀랄 때마다 우리 모두가 말했듯, 잊지 말고 기억해서 바꾸어야 한다는 것, 그것 말고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2. 플라톤 『소피스테스』 관련 논문들을 읽는 모임도 일정이 바뀌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 모임도 일정도 바뀌고, '프로타고라스 연구' 강의 시간도 바뀌고, 그러는 와중에 오늘은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윤독 청강을 가고 내일은 『소피스테스』 강독 강의에 들어가고 끝나자마자 라틴어2 시험감독을 들어가고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HUMANITAS와 PAIDEIA' 수사학회 자료집 편집을 해 제본을 맡기고 다시 오후에 논문 읽기 모임에 갔다가 플라톤 『티마이오스』 윤독 청강을 들어 가고, 토요일에는 오전부터 저녁까지 수사학회에서 심부름을 좀 하고, 아, 플라톤 『필레보스』 강의는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으려나…. 프로타고라스 강의 과제도 해결해야 하고 그 강의 발제 준비도 해야 하겠다. 겸사겸사 τὸ μὴ ὄν λέγειν에 대해서도 생각 좀 정리하고, 반박-모순 불가능 논증이랑 거짓 불가능 논증도 좀 더 정리하고,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9월 말까지는 반드시 논문 초안을 완성해야 한다. 5월과 6월까지 털어서 자료수집, 정리를 마무리 지어야 가능한 일정이다. 방학 내내 붙들고 쓰면 세 달 안에 쓸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도망쳐 온 것인지, 혹은 지금이라도 박차고 나가 뭐라도 하거나 안 되면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같잖은 가식질 때려 치우고 정말 개쌍놈으로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죽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지금 하고 있는 일들 말고는 더는 신경쓰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말이다. 죽겠다고 지랄병을 싸댔던 어린 날이 부끄럽고 그 어린 나에게 미안하고 그렇게 살아와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있는 내 자신이 죄스러워서, 이 비루하고 더러운 목숨으로 나 좋은 일만 하고 사는 게 면목 없기도 한데, 뭐 나는 앞으로도 이 따위로 계속 살다 뒈질 듯하다.

3. 딱히 이 말 저 말 할 입장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고, 그저 남들의 말들로 갈음한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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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해석한 프로타고라스와 이에 대한 논박은 무엇인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설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우선, 척도는 기준을 의미하고, '만물'은 '대상들'을 의미하며, 이에 따라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인간은 모든 대상들의 기준'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물질은 흐르고 있고, 그 물질 안에 나타나는 것들에 대한 설명이 내재한다. 또한 인간의 상태와 조건에 따라 그 인간에게 서로 다른 대상들이 파악된다. 나타나는 것들이 대상들이라면 그 대상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라거나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의 기준은 상이한 조건과 상태에 있는 상황마다의 인간이다. 그 인간 또한 상황과 조건이 변한다는 의미에서 흐르고 있는 물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흐르고 있는 물질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 어떤 대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 대상의 기준으로서 한 인간이 어떤 무엇이기 위해서는 그 인간 역시 다른 인간에게 그러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각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각자에게 참이다. 즉 무엇에 대하여, 어떤 관계 속에서 참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상대주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형이상학적 배경을 일종의 만물유전으로 간주한다. 물질의 흐름과 변화를 통해 매번 다른 상태의 인간에게 매번 다른 대상이 나타난다. 어떤 무엇으로서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닌 대상, 나타나는 것, 현상이므로, 한 현상은 다른 현상과 비교될 수 없는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된다.

  그에 따르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은 각자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참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다' 또한 하나의 나타난 것, 대상에 대한 믿음이므로 이는 자기논박이 된다. 다음으로 모든 믿음에는 그와 반대되는 믿음이 짝을 이룬다. 즉 한 믿음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짝을 이룬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만, 둘 모두 각기 나타나는 바의 것이자 특정한 믿음이다. 모든 나타나는 것이 참이라면 서로 모순되는 것이 동시에 참이되나 이는 불가능하다. 

2. 위 해석과 논박은 『테아이테토스』에서 플라톤의 해석 및 반박과 같은가? (혹은 플라톤의 ad hominem 전술과 관련하여,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프로타고라스 논박은 순수하게 논리적 논박인가 아니면 그 주장에 따라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에게 귀결하는 다른 사태들을 통한 ad hominem인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상대론으로 해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이라는 양화사를 적용해 그의 주장을 일반화시킴으로써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명제를 그 안에 개입시킨다. '인간척도설은 거짓이다'라는 명제는 '모든' 믿음이 참이라는 인간척도설에 대한 해석을 통해 일반명제로 둔갑한다. 그러나 상대주의를 엄밀하게 적용할 경우 인간척도설은 '이러저러한 조건에서 이러저러한 상태의 어느 한 순간의 어떤 장소의 어떤 한 사람에게' 이상의 조건에 붙은 한에서 개별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여전히 '인간척도설이 거짓이라는 믿음이 어느 순간 어떤 곳에서 누군가에게는 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1차진술과 2차진술을 구분한다면 사대론적으로 해석되는 인간척도설 자체는 메타차원의 언명으로서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상대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건을 의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프로타고라스를 무오류주의자로 간주하여 행해지는 논박이라는 점에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해석과 비판은 플라톤이 『테아이테토스』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전히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퓌론주의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다른 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 같은 현상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항상 짝을 이루어 믿음의 한 쌍이 있게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두 믿음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모순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 여기에서 객관적으로 참인 명제와 거짓인 명제가 각기 전제되지만,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게는 이 중에 참이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모든 x에 대해 만일 x가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x는 거짓이다'라는 주장이 '참인 어떤 x가 있다'를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x∧~x, Tx∧Fx와 같은 양립 불가능한 쌍을 동시에 긍정하는 판단 자체가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것이 프로타고라스에 대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비판이다. 이 비판은 플라톤의 비판과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제하는 진리관 역시 둘 사이에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이 이외에 플라톤의 경우,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따르자면 프로타고라스나 다른 사람들이나 개나 신이나, 지각되는 것과 여겨지는 것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각자가 척도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보다 존중받을 이유는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귀결되었을 경우 프로타고라스의 그 주장에 약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프로타고라스라는 사람 자체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일 따름이다. 즉 ad hominem이다. 상대주의에 머무르는 한에서, 모든 믿음이 각기 일시적이고 개별적이며 비교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런 믿음을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기억하여 떠올리거나 어떤 식으로 지속시킬 방법은 없으며, 따라서 언어도 추론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귀결이 '모든 믿음은 상대적이다'라는 메타차원의 언명에 치명적인 결함이 되는 것은 아니다. 

3.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프로타고라스 논박은 정당한가?

  일단 pros ti와 en hyle logos 사이의 관계에 따라 SE가 P를 상대론자로 본 것인지 무오류주의자로 본 것인지 해석이 갈릴 것이다. 배타적 선언문을 통한 프로타고라스 논박과 그에 앞서 hyle와 phainomena, phantasia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SE의 논박방식을 상이한 두 가지 논박들로 구분할 여지도 남는다. 다음으로 그의 논박이 회의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제기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참이거나 혹은 거짓이며 동시에 양자 모두이지는 않다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해도, 여전히 어떤 참인 것이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프로타고라스든 다른 누구든 어떤 자를 상대주의자로 간주하고서는 논리적 반박은 불가능하다. 조건을 추가하여 모든 개별 진술을 상대화하는 한에서 진술들 사이의 관계는 전혀 성립할 수 없으며 이 경우 모순 또한 발생할 수 없다. 단지 그러한 상대화 전략이 메타차원으로 구분되지 않고 회귀적으로 적용될 경우 자기부정으로 귀결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상대화가 개별화를 함의하는 한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진술 또한 일반명제로 간주하지 않을 수 있다. '특정 조건들 하에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P에 대해 그 부정으로 짝을 이룰 명제 따위는 없다. 결국 ad hominem을 통해, 그러한 상대주의는 사유나 언어나 지시조차 불가능하게 된다는 지적만이 가능할 뿐이다. 어떤 명제를 구성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객관화의 과정을 포함하며, 이는 상대주의에 위배된다. 플라톤 역시 이러한 상대주의를 뒷받침하는 고정되지 않고 개별적이며 일시적인 사태들을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을 통해 설명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플라톤이 P를 상대주의자로 본다면 그 역시 자기논박을 P에게 적용시킬 수 없고, 이는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논의와 다른 결론이다. 뭐 어쨌든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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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쪽] 내 목적은 이 어렵고도 중요한 구절의 완전한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특수한 문제를, 콘포드('Plato's Theory of Knowledge'에서)와 로빈슨('Plato's Parmenides')에 의해 이루어진 일부 언급들을 살펴 보면서, 논의하는 것이다. 우선 해당 구절에 대해 매우 간략하고 논증적이지 않은 개괄을 제시하는 편이 유익할 것이다. 플라톤은 개념들(eide, gene, ideai)이 특정한 규정된 방식들로 관련된다는 것,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251d-252e)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을 추구한다. 다음으로(253) 그는 철학자에게 이러한 관계들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임무를 부과한다. 철학자는 반드시 개념들의 전 영역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이, 유-종 구조에서든 다른 방식으로든, 어떻게 상호연결되는지에 대해 명확한 관점을 확보해야만 한다. 플라톤은 이제 그러한 철학작업의 일례를 제시한다. 『소피스테스』에서 이미 언급된 문제들에 상당히 관련된 일부 개념들을 선택하여 그는 우선(254-5) 그것들이 모두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정짓고, 다음으로(255e-258) 그것들이 상호에 대해 맺는 그 관계들을 해명한다. 이러한 관계들을 발견하고 진술하려는 시도는 ὄν과 μὴ ὄν이라는 복잡한 관념들에 빛을 비추고 플라톤으로 하여금 피상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제기된 특정한 난제들과 역설들을 하찮은 것들로 차치할 수 있게 해준다(259). 그는 끝으로(259e) 만일 도대체 logos가 있다면 개념들이 상호에 한정된 관계들 내에 있다는 것에는 절대적인 필연성이 있다고 언급한다.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왜냐하면 형상들 상호 간의 엮임으로 인하여 logos가 우리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당 대목은 논의의 시작이었던 핵심을 재천명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251d-252e).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있으며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이다. 이 구절에서 플라톤의 성과들 중 하나가 '계사의 발견' 혹은 한편으로 동일성 진술들에서 사용되고 다른 한편에서 한정 진술들에서 사용되는 그러한 'ἔστιν의 애매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 물음은 플라톤이 우리가 방금 언급한 그러한 구절들에서 기술할 법한 철학전 진전을 이루었는가 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특별한 구절들은 전혀 대단히 강조되는 바 없다. 그래서 플라톤이 (혹은 다른 누구라 하더라도) 계사를 '발견했다'라고 말하는 건 의심할 나위 없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기는 했는가? 그가 동사 ἔστιν의 그 다양한 역할들을 상술하거나 드러냈는가? 그의 선행자들과 동시대인들 중 다수가 그 단어의 상이한 용법들을 혼동함으로써 기이한 결론들에 당도하였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이한 용법들을 해명함으로써 응답했는가? 이런 것들이 실질적인 물음들이다. 다시, 단지 플라톤이 '애매성'을 의미하는 아무런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혹은 그가 아무 곳에서도 'ἔστιν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를 의미하고 때로는 …를 의미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에 근거하여 그가 ἔστιν의 애매성을 인지했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현학적인 오해가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실상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또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분석한다면, 그리고 만일 이 일이 진지한 철학적 구명(
究明) 내에서 일어난다면, 그가 '애매성을 인지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상당히 옳은 일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소한 지점들을, 이와 반대로, 주제가 되는 오직 근본적인 물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만 언급한다. 

  플라톤이 적어도 몇 가지 다른 용법으로부터 ἔστιν의 존재사적 용법을 식별해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된다(예를 들어 Cornford, p.296). 그가 어떻게 이 일을 행하는지는 256a1에서 κίνησις에 대한 그의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ἔστι δέ γε διὰ τὸ μετέχειν τοῦ ὄντος(그런가 하면 τὸ ὄν에 참여함-몫을 나누어 가짐-으로 인해 ~이다/있다). 이 διά는 κίνησις ἔστιν이라는 증명을 이끌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이전에 문제 없이 동의되었고 κίνησις와 τὸ ὄν 사이의 연결을 확정짓기 위해 사용되었다(254d10). 그것은 왜 κίνησις ἔστιν인지 그 이유를 이끄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κίνησις ἔστιν'에 의해 기술되는 추가적 상태로 귀결되는 어떤 사건이나 상태를 언급하지 않는다. Διά를 통해 도입되는 단어들은 κίνησις ἔστιν에서 사용되는
, 즉 존재사적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 ἔστιν에 대한 확장 혹은 '분석'을 제시한다. 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는 존재사적 ἔστιν에 대한 그 철학자의 등가 표현이다. 하지만, 보게 될 것처럼, 그것은 다른 용법들 내에서 ἔστιν에 대한 그의 분석이 아니다. 그래서 그 존재사적 의미는 식별된다.  

  그 철학자의 정식화(κίνησις 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는 κίνησις ἔστιν에서 ἔστιν의 의미를 해명하는 동시에, 또한 압축된 구어적 정식화에서는 불분명한 그 진술된 사태의 구조를 분명하게 해주고, 특정한 연결이 두 개념들 사이에서 단언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해준다. 그 철학자의 정식화는 두 개념들의 이름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정합성을 지시하는 단어, μετέχει, 그 자체로 형상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지어진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 단어 또한 포함한다. 

  Ἔστιν의 또 다른 두 가지 의미들, 계사와 동일성 기호로서의 의미들이 남아 있다. 이 의미들의 동화가 그 어떤 참인 비-동일성 진술들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이 역설로부터 그 기능(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ἔστιν의 그 두 용법들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명백한 입증(demonstration)이다. '입증'이란 말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증명(proof)'이 아니라 '전시(exhibition)' 또는 '표출(display)'이다. [2쪽] 역설을 해독해낼 방법은 그 역설이 발생하는 혼동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내놓는 것이다. Ἔστι의 서로 다른 두 용법들에 주의를 끌 수도 있고, 그것들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지적할 수도 있으며, 아마도 그 둘 사이를 혼동하도록 하는 가장 경미한 유혹마저도 제거하기 위해 대안적 표현 방식들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256a10-b4에서, κίνησίς ἐστι ταὐτόν(운동은 같음이다/같다), κίνησις οὐκ ἔστι ταὐτόν(운동은 같음이지 않다/같지 않다)이라는 한 쌍의 진술들을 플라톤이 어떻게 다루는지 고찰해 보자. 우리는 양자 모두를 단언하고자 하지만 이것들은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실제로 염려해야 할 일은 아니다(οὐ δυσχεραντέον). 왜냐하면 우리는 두 진술 모두에서 ὁμοίως(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진술들에 대한 분석(다시금 διά에 의해 도입되는)은 각 경우에서 단언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줄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적절히 이해할 경우 그것들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음을 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첫 번째 진술의 의미는 κίνησις μετέχει ταὐτοῦ(운동이 같음에 참여한다)이다. 두 번째 진술은 κίνησις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πρὸς ταὐτόν(운동은 같음에 대해 다름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

  두 진술들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에서 본질적인 핵심들은 이런 것들이다. (1) ἔστιν이 계사로 사용되는 경우 그것은 철학자의 형식에서 μετέχει에 의해 대체된다. (2) οὐκ ἔστιν에 대한 철학자의 형식은, 그 ἔστιν이 계사가 아니라 동일성-기호일 경우, (οὐ μετέχει가 아니라)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πρός …이다. 두 진술들에 대한 재정식화에서 플라톤은 명명된 두 개념들을 단지 연결하는데에 쓰이는 ἔστιν(계사)과 동일성(혹은 타자성) 개념을 표현하는 ἔστιν(혹은 οὐκ ἔστιν)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어떤 것이 동일성(혹은 타자성) 개념에 들어간다(falls under)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논의전개를 프레게의 논문 'Über Begriff und Gegenstand'의 한 구절에 비견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녹색이라거나 포유류라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혹은 숫자 4라고, 혹은 행성 비너스(금성)라고도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프레게가 지적하는 바 'is'의 두 가지 상이한 용법들을 구별해야만 한다. '마지막 두 가지 사례들에서 그것은 계사로서, 단지 진술에 대한 동사 기호로서만 기능한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어 단어 ist는 종종 단순한 인칭 어미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dies Blatt ist grün-그 잎은 푸른 것이다-과 dies Blatt grünt-그 잎은 푸르다-) <주석 4.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85b28도 떠오른다 : οἱ δὲ τὴν λέξιν μετερρύθμιζον, ὅτι ὁ ἄνθρωπος οὐ λευκός ἐστιν ἀλλὰ λελεύκται, οὐδὲ βαδίζων ἐστὶν ἀλλὰ βαδίζει. "어떤 이들은 그 표현 방식을 전환한다, '그 사람은 흼이다'가 아니라 '희어졌다', '걷는 것이다'도 아니고 '걷는다' 라고.>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것이 한 개념 아래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고, 문법적 술어가 이 개념을 대신한다. 다른 한편 위 세 가지 예시들(알렉산더 대왕, 숫자 4, 금성)에서 "is"는 산술에서, 등식을 표현하기 위한, "equals(같다)"라는 기호(등호)처럼 사용된다. … "샛별은 금성이다"라는 문장에서 "is"는 명백히 단순한 계사가 아니다. 그 내용은 술어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그래서 "금성"은 술부 전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샛별은 금성에 다르지 아니 하다(the morning star is no other than Venus)." 앞서 "is"라는 그 한 단어에서  함축되었던 것은 여기에서 네 가지 개별적인 단어들로 제시되며, "is no other than"에서 "is"는 이제 실제로 단순한 계사이다. 여기에서 서술되는 것은 그래서 금성이 아니라 금성에 다르지 아니이다. 이런 단어들은 개념을 대신한다.'

  프레게는 어떤 것이 한 개념 아래에 들어감을 이야기함으로써 계사를 설명한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μετέχει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프레게는 동일성의 ἔστιν을, 해당 구절에서 'is'가 단순하게 계사이고('그 개념 아래에 들어간다 …') 'no other than …'이 개념을 대신하는 'is no other than'으로 확장시킨다. 플라톤은 
동일성의 ἔστιν을, μετέχει가 계사의 역할('아래에 들어간다')을 하고 ταὐτόν(혹은 θάτερον)이 개념을 명명하는 경우에서, μετέχει ταὐτοῦ …로 (그리고 οὐκ ἔστιν을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로) 확장시킨다. 그가 수행하는 분석들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내게는 플라톤이 전혀 프레게에 못지 않게 명백하게, 'is'의 의미들을 구별하고 해명하는 일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이 『소피스테스』 251-9에서 하는 일들 중 한 가지가 계사와 동일성 기호 사이의 구별이라는 주장은 다음 고찰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구별이 ὀψιμαθεῖς(늦게 배우는 자들, 251b)에 대항해 우리가 면역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요청되는 바로 그것이며, 플라톤은 그의 논의가 이 양반들을 제자리에 데려다 놓는 것이라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로빈슨은 이러한 고찰이 무슨 힘이든 지닌다는 걸 부정한다(p. 174). '플라톤은 확실히 그의 결합(Communion, κοινωνία)이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가 그 논박 방식이 그들이 한정을 동일성과 혼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귀결되지 않는다. 문헌 내에서 그가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귀결'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로빈슨 말이 맞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정확히 어떻게 플라톤이 그 스스로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했다'고 간주하였는지에 관련하여 일정부분 합리적인 제안을 구성할 자격이 있거나 차라리 그럴 의무가 있다. 만일 256a10-b10에 대한 상기 해석이 건전하다면, 저 구절은 늦게 배우는 자들의 오류를 노출시킨다. 그들은 모든 각각의 'is'를 동일성-기호로 이해한다. 그리고 플라톤 자신이 저 구절에서(혹은 다른 어딘가에서) 도출된 구별을 그 늦게 배우는 자들에 대항한 결정적인 대항수단으로 간주했다고 추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욱이, 만일 어떻게 플라톤이 그가 늦게 배우는 자들과 그들의 역설을 처리했다고 생각했는지에 관련하여 '다른' 합리적 제안이 구성될 수 없다면, 이 사실은 256a-b에 대해 그 안에서 그 역설에 대해 직접 관련되고 파괴적인 중요한 핵심을 발견하는 그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논거일 것이다.

  이제 형상들 사이에 결합이 있다는 그의 증명에 의해(251d-252e) 플라톤이 오직 동일성 진술들만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논박한다는 것이, ὄν과 μὴ ὄν에 대한 이후의 대화에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그가 스스로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하고 있다고 간주한다는 것이
 제안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3쪽] 그가 결합이 있다고 증명하는 데에 사용하는 논거들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251e7-252b7) 이런 것이다. 만일 아무런 결합도 없다면 철학자들과 자연학자들은 그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제기하면서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λέγοιεν ἂν οὐδέν). 이 귀결절이 거짓이며 엠페도클레스와 여타의 사람들이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상정(assumed)'된다. 하지만 물론 이 상정은 정확히 늦게 배우는 자들이 그들의 역설을 주장하면서 부정할 바의 것이다. 또한 그것에 기반한 논증은 명백히 그들에게 좋지 않다. 결합에 대한 플라톤의 두 번째 논증은(252b8-d1) 아무런 결합도 없다는 이론이 그 자체의 거짓을 함의하지 않고서는 진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늦게 배우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의 그 논증은 다음과 같은 것일 터이다. 당신은 오직 동일성 진술들만 참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진술 - '오직 동일성 진술들만 참일 수 있다' - 은 동일성 진술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당신의 이론은 거짓이다. 이제 이 논증은 확실히 가공할 만한 것이며 늦게 배우는 자들을 쉽사리 입다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차 진술(개별 진술, 원소)과 2차 진술(진술 일반, 집합)을 구별해내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주장 자체에 대한 반박으로서 그것은 물론 피상적이고 불충분하다. 그 주장은 농짓거리하는 늙은이들뿐만 아니라 진지한 사상가들 그들 스스로 이론적 근거들을 강제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여겨지는 바의 것을 주장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 자들에 의해서도 개진되었기 때문이다. 로빈슨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p.175) : '그런 더욱 책임감있는 사상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히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고, 만일 당신이 그럴 수 없다면, 무엇이든 그 모든 담화는, 당신이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그 역설까지 포함하여,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 사상가들은 이미 당신이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즉각 모든 사유와 발화를 파괴할 수 없다는 추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제는 당신이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훌륭한 이유를 아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그 논증 내에서 오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논증이 거짓이어야만 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오류가 무엇인지 보기를 원한다. 이제 그러한 사상가들에게는 플라톤의 결합이라는 원칙에 대한 증명은 전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우리가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다른 식으로는 어떠한 사유도 소통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떄문이라는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심지어 어떤 반대논증에도 주목하지 않고, 하물며 우리에게 그것이 어디에서 잘못되어 가는지 보여주지도 않는다.'

  나는 로빈슨이 제시한 이유들에서, 플라톤의 결합 증명이 그 역설정 주장을 (설령 그 주장에 대항해 그 증명 내의 두 번째 논증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만족스럽게 처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상당히 진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역설을 수용하도록 이끄는 오류나 혼동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구절 (251d-252e)은 늦게 배우는 자들과 그들의 역설에 대한 반박에서 플라톤이 말해야 하는 것 전체일 수 없다. 물론 그는 어딘가에서 그 기저에 놓이는 오류를, 그 역설이 세워진 부실한 토대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내가 제안하기로 그는 예를 들어 앞서 논의된 구절에서, ἔστιν의 두 가지 상이한 용법들 즉 계사로서의 용법과 동일성-기호로서의 용법을 분명하게 구별함으로써, 그리고 어떻게 그 두 용법들이 관련되는지 보여줌으로써 이 일을 수행한다.

  이제 콘포드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는 계사가 '형상들에 관계들에 대한 플라톤의 도식 내에서 그 어디에도 있을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p.279). 결합하는-'섞는'- 것으로 형상들 사이의 관계는 대칭적 관계이다. 그래서 그 관계는 한정 서술에서 주술관계, 즉 계사에 의해 지시되는 관계로서 같은 것일 수 없다(pp.256-7, 266).

  첫 번째는 매우 일반적인 지적이다. '연결되어 있는' 혹은 '결합되어 있는' 관계는 대칭적 관계이다. 하지만 물론 사물들이나 인격들이 결합되거나 연결될 여러 상이한 '방식들'이 있다. 그리고 이 방식들 중 다수가 비대칭적 관계들을 포함한다. 사람들의 한 집단, 한 가족의 구성원들에 대해, 그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어떻게' 서로서로 연결되는지 말하길 원한다면, '~의 아버지,' '~의 질녀' 같이 대칭적 관계들을 대신하지 않는 그러한 표현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이제 콘포드에 의해 철학자의 작업이 플라톤에 따르자면 '형상들의 계층구조를 명확하게 식별하고 그 연계된 구조를 다루는 것'이라는 점이 동의된다(pp. 263-4). 철학자가 이 작업을 수행하면서 구성하는 모든 진술 각각은 형상들 사이의 어떤 연결이나 결합을 단언할 것으로 기대될 것이다. 그리고 '결합'은 덧붙여 대칭적 관계이다. 하지만 물론 철학자는 각 경우에 존재하는 결합의 '종류'를 구체화하지 않고서는 아마도 그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어떤 비대칭적 관계들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한 '형상들의 지도'로부터의 작은 견본을 고찰해 보자.
                   Virtue
Justice Courage Wisdom Temperance
여기 제시된 구조는 철학자에 의해 기술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위해 그는 '반드시' 비대칭적 관계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위 도표에서 'Virtue'라는 단어와 'Justice'는 단지 서로 가까운 것만이 아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 '아래'에 있다. 유사하게, Virtue와 Justice는 단지 연결된 것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특수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Justice는 Virtue'의 일종'이다.

  [4쪽] 그래서 만일 '형상들의 세계'에 대한 복합적 구조가 기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대칭적 관계들이 적용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어떤 것은 플라톤이 쉽사리 간과할 수 있었을 만한 것도 아니다. 확실히 그가 철자들과 음들을 가지고 묘사하는 비유(253a-b)는, 그에 따르자면, 변증가가 형상들 사이의 '대칭적' 관계들을 단언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는 생각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f'와 'g'가 'i'의 도움으로 서로 부합하여 영단어를 구성하는지 말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분명하게 그 철자들이 그 안에서 취해질 수 있는 그 '질서'를 구체화하여야만 한다. 'gif'는 단어가 아니고, 'fig'는 단어이다. C장조 음계는 단지 이러저러한 음들이 아니라 특정 질서 속에서의 이러한 음들이다. 철자법이나 음계 혹은 형상들에 대한 사태들을 진술하는 데에 사용하는 어떤 용법들이 되었든지 간에, 어떤 비대칭적 관계가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만일 콘포드의 관점이 맞고 모든 철학자의 진술 각각이 형상들의 대칭적 '혼합'에 대해 말했다면, 철학자는 환원불가능한 방식으로 비대칭적인 진리들을, 예를 들어 Justice는 Virtue의 일종이라는 등의 진리를 절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콘포드의 관점이 옳은지 의심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소피스테스』가 철학자는 유들과 종들 사이의 관계들을 연구해야 하리라고 시사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그러한 관계들을 탐색하지는 않고, 그래서 『소피스테스』에 대한 적합한 해석은 그런 일들을 한켠으로 미루어 놓고 어떻게 플라톤이 그가 실제로 고찰하는 관계들을 전시하여 나아가는지에 집중해야 할 것이라
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그럼 플라톤이 구성하는 결합에 대한 진술들 중 일부를 살펴 보도록 하자.
 
  우선적으로, '운동이 존재한다'. (나는 콘포드의 번역을 유지한다. '변화'가 더 나을 것이다.) 콘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p. 256) : '"운동이 존재한다"는 형상 운동이 형상 존재와 혼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p. 279) :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는 "운동이 존재한다"와 등가로 간주된다.' 또 (p. 278) : '("혼합"에 의해) 만들어진 그 관계는 계사의 의미가 아니다. … 우리는 "존재가 운동과 혼합된다"라고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언급들을 한꺼번에 취하면 부조리해진다. 만일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가 '운동이 존재한다'를 의미한다면, '존재가 운동과 혼합된다'는 반드시 '존재가 운동한다'를 의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만일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가 '존재가 운동과 혼합된다'와 등가라면, '운동이 존재한다'는 반드시 '존재가 운동한다'와 등가여야만 한다. 명백히 플라톤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문제는 대칭적 관계를 제안하는 '혼합' 은유에 대한 콘포드의 주장에서 그렇지 않은 다른 관계들을 배제에 대한 것이다. '운동이 존재한다'가 등가인 어떤 것은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가 아니라(대칭적인 것으로서의 '혼합'), '운동이 존재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존재에 참여한다'(비대칭적인 것으로서의 '~에 참여함')이다. 콘포드의 언급은 그가 그의 해설에 '~에 참여한다'와 같은 어떠한 비대칭적 표현들도 (설령 플라톤의 해설이 이러한 은유들로 빼곡하다 하더라도) 들여놓지 않으리란 이유로 부조리에 빠진다.
  
  두 번째로,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 이제 이것은 추가적으로 '정지는 운동과 다르다'와 등가이다. 하지만 '결합'에 관한 어떤 추론이든 묘사하기에 앞서 우리는 반드시 그 진술을 그 '분석된' 형태로, 변증가의 용어로 전환해야만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얻는다. '운동은 정지로부터(~에 대해, pros) 다름과 결합한다'. <'pros'가 thateron에 부수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pros 'ti'가 딸려온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타의 모든 것들과 다르다(pros alla panta)'라고도 할 수 있고, 이 경우에 다름은 하나와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 혹은 무한정한 것 사이의 연결이다.>문제는 이 형식에서 '~과 결합한다'가 대칭적 관계를 대신하는 것으로 취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그렇게 간주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운동이 정지로부터 다름과 결합한다'가 '정지로부터 다름이 운동과 결합한다'에 등가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첫 번째 진술에서 언급된 '결합'은 명백히 한편으로는 운동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지로부터 다름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으로, '운동이 정지로부터 다름과 결합한다'가 운동이 정지와 다르다고 기술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정지로부터 다름이 운동과 결합한다'가 기술적인 방식으로 말해서 정지로부터 다름이 움직인다는 것이라고 간주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운동이 정지와 다르다'가 '운동으로부터 다름이 움직인다'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앞서에서와 같이, '~과 결합한다'를 대칭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취함으로부터 부조리가 귀결한다. 만일 '운동이 정지로부터 다름과 결합한다'가 운동이 정지와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면 (명백히 그러하듯이), '~과 결합한다'는 여기에서 반드시 '혼합'이 아니라 비대칭적 관계('~에 참여함,' '아래에 들어감')를 표현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고찰들은, 그리 말해도 좋다면, 여전히 매우 일반적이고 너무 많은 외삽과 '해석'을 포함한다. 나는 이 비평에 얼마나 많은 무게가 실릴지 장담하지 못한다. 플라톤이 『소피스테스』 251-9에서의 해석의 매우 긴장된 부분을 작성할 때 어떤 합리적이고 정합적인 무언가를 염두에 두었다고 추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콘포드의 설명이 재고를 통해 버거운 난점들 혹은 부조리들로 이끈다면 이것은 그에 대항하는 '직관적으로(prima facie)' 건전한 비평이다. (설령 결국 콘포드의 설명이 받아들여지게 되더라도 그 결점들이 플라톤의 논의 - 콘포드에 의해 해석된 것으로서 - 내에서 숨김없이 드러나야 할 것임은 받아들일 만한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실제 용어에 대한 더 면밀한 검토로 향하는 일은 확실히 필연적이다.

  플라톤은 형상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 말하면서 엄청나게 다양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것들 중 몇몇(예를 들어 συμμείγνυσθαι, 혼합됨)은 자연스럽게 '~과 연결되어 있음'이라는 다소 비규정적인 대칭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다른 것들, μετέχειν 처럼, 좀 더 규정적인, 비대칭적인 관계를 표현할 것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도 있다. 콘포드는 이 기대가 만족된다는 것을 부정하고 플라톤이 '참여함'을 '혼합'이나 '결합'이라 불리는 상호적 관계로부터 구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pp. 296-7). 그는 이 점을 관련된 모든 구절들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를 통해 지지하지는 않는다. 형상들 사이의 것으로서 '참여'가 대칭적 관계라는('혼합' 처럼, 따라서 계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5쪽] 그의 명시적인 논증은 255d 한 구절, 존재가 τὸ καθ᾿ αὑτό (그 자체)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여타의 것에 대하여) 모두'에 참여한다' 라고 이야기되는 구절에 의존한다. 콘포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p. 256) : '그래서 유적 형상은 종적 형상에 참여하기를(혼합되기를) 그 종적 형상이 유적 형상에 참여하는 것에 전혀 못지 않다.' 그리고 255d4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 형상들 모두를(구체적으로 τὸ καθ᾿ αὑτό 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포함'하는, 존재라는 것이 양자 모두'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것은 "참여"가 형상들의 경우에서 대칭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들 중 하나이다.' 나는 콘포드가 여기에서 시사하는 다른 대목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255d에 대한 언급은 그 자체로 콘포드의 '참여'에 대한 광범위한 언급들
, 형상들 사이에서 견지되는 하나의 유일한 관계로서 대칭적 '혼합'에 대한 그의 주장에 대한 매우 부적절한 정당화이다.

  칼 뒤르는 그의 논문 'Moderne Darstellung der Platonischen Logik'에서 플라톤에 의해 『소피스테스』 251-9에서 사용된 다양한 용어들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한 의미들을 할당하였지만, 완전한 정당화 같은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더욱 유용한 것은 데이비드 로쓰에 의한 다음의 검토이다 : '플라톤은 κοινωνία, κοινωνεῖν, ἐπικοινωνεῖν, ἐπικοινωνία, προσκοινωνεῖν을 두 가지 상이한 구조들 내에서 사용한다 - 소격과 함께(250b9, 252a2, b9, 254c5, 256b2, 260e2) 그리고 여격과 함께(251d9, e8, 252d3, 253a8, 254b8, c1, 257a9, 260e5). 전자의 용례에서 그 동사들은 "나누어 가짐"을 의미한다; 후자에서 그것들은 "~과 결합함" 혹은 "~과 통함"을 의미한다.' 나는 로쓰가 '비록 플라톤이 그 두 상이한 구조들을 사용하더라도, 그는 그것들 사이의 차이에 어떤 중요성도 덧붙이는 것 같지 않다'라고 추가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플라톤은 그 두 구조들을 무분별하거나 대체가능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구절들의 두 집단들 사이의 비교는 하나의 분명한 결론을 내놓는다 (나는 κοινωνία γενῶν 에 대한 주요 대목에 들어가지 않는 250b9와 260e2 그리고 e5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다). 소격을(예를 들어 θατέρου) 지배하는 κοινωνεῖν은 언급된 사실이 어떤 형상이 이러저러하다(예를 들어 ~과 다르다 …)는 것(계사로서)인 곳에서 사용된다. 즉, 그것은 어떤 것이 또 다른 것 '아래에 들어간다'는 사태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된다. 다른 한편으로 여격 구조는 형상들의 연결에 대한 상당히 일반적인 언급들 내에서 발생하며, 형상들의 어떤 특수한 쌍에 대한 것으로서 아무런 규정된 사태도 진술되고 있지 않은 경우에 발생한다. 물론 이는 - 일상적인 그리스어 용례가 시사하는 바 - 플라톤이 의식적으로 κοινωνεῖν을 두 가지 상이한 방식들로 사용한다는 것을 확신케 한다. 종종 그것은 '연결'의 일반적인 대칭적 관념을 표현하고, 때로는 그것이 규정된 비대칭적 관념, '나누어 가짐'을 표현한다.

  동사 μετέχειν이나 명사 μέθεξις는 『소피스테스』 251-9에서 열 세 차례 등장한다. 이것들 중 하나는 255d4에 있는데, 위에서 인용한 콘포드의 논증에서 그에 의해 사용된 구절이다. 하지만 다른 열 두 경우들 모두에서 'A-ness μετέχει B-ness'에 의해 표현된 사실이 A-ness is(계사) B, 그리고 절대로 B-ness is(계사) A는 아님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τὸ ὂν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는 존재가 …과 다르다는 사태를 정식화한다. 그것은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 즉 τὸ ἕτερον 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에 의해 표현되는 사태를 표현하는 데에 등가적으로 기여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이 모든 경우에서 μετέχειν을 사용하는 방식은 그가 그것으로써 대칭적 관계를 의도하였다고 믿기 매우 어렵게 만든다.

  공개적으로 다섯 가지 선택된 유들 사이의 특정 관계들에 대한 진술에 바쳐진 구절, 255e8-257a11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여기에서의 목표는 규정적 사실들을 신중하게, 철학적 용어로 진술하는 것이다. 단지 유들 사이에 연결들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중 일부인 것을 정확히 말하는 것이다. 이제 이 구절에서 (256b9), 개념들의 연결에 대한 순전히 일반적인 언급에서 (εἴπερ τῶν γενῶν συγχωρησόμεθα τὰ μὲν ἀλλήλοις ἐθέλειν μείγνυσθαι, τὰ δὲ μὴ : 만일 정말로 우리가 유들 중 일부는 서로 혼합하려 하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동의한다면.) 
콘포드가 선호하는 은유가 한 차례 등장한다. 그리고 여격을 지배하는 κοινωνία가 똑같이 구체적이지 않은 문맥에서 한 차례 등장한다.(256b9. εἴπερ ἔχει κοινωνίαν ἀλλήλοις ἡ τῶν γενῶν φύσις. : 만일 유들의 본성이 상호에 공유/결합을 지닌다면.) 사용된 다른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소격을 지배하는 κοινωνία가 한 차례 등장하고(256b2) 명명된 두 형상들(κίνησις와 θάτερον) 사이에 견지되는 규정적 관계를 진술하는 데에 사용된다. 진술된 사실은 운동이 ~과 다르다는 것이고, 다름이 운동한다는 게 아니다. μεταλαμβάνειν이 해석 논쟁이 있는 한 구절에서 한 차례 등장한다(256b6). 하지만 그 동사의 의미는 분명하다. 만일 κίνησις μεταλαμβάνει στάσεως (운동이 정지에 참여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 참이라면 κίνησίς ἐστι στάσιμος (운동은 정지하는 것이다)라고도 옳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μετέχειν (혹은 μέθεξις) 은 다섯 차례 등장하며(256a1, a7, b1, d9, e3), 각 경우에서는 첫 번째 형상이 두 번째 형상 아래에 들어가는 명명된 두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래서 255e8-257a11 대목에서의 실질적인 작업은 모두, 특정 형상들 사이의 실질적 관계들에 대한 설명들 모두, μετέχειν, μεταλαμβάνειν, 그리고 κοινωνεῖν (with genitive) 이라는 용어들에 의해 행해지며, 즉, 콘포드가 그렇게나 단호히 배제하였던 '~에 참여함'이라는 비대칭적 은유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에 참여한다'라는 것의 역할은 플라톤의 용어에서 명백하다: 추상명사, 한 개념의 이름을 지배하는 '~에 참여하다'는 그 추상명사에 상응하는 형용사를 지배하는 'is'(계사)로 구성되는 일상적 언어 표현에 등가이다.

  일부 용어들에 대한 플라톤의 용법에 대한 이러한 검토는, 비록 철저함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내 생각에 '혼합' 은유가 플라톤의 뜻에 대한, 그리고 μετέχειν과 그 변형들인 μεταλαμβάνειν 과 κοινωνεῖν (소격을 지배하는)이 플라톤에 의해 μείγνυσθαι의 단순한 대체물들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정짓는 안전한 단서라는 콘포드의 주장을 의심하기에는 충분하다. 255d, 콘포드가 활용하는 그 구절에서 μετέχειν이 예외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인정될 것이다. 하지만 한 구절이 다른 모든 여러 구절들보다 과장되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

  요약하자면, 나는 첫 번째로, 
플라톤의 철학적 언어에서 μετέχειν과 그 변형들이 일상 언어에서 계사의 역할에 상응하는 역할을 지닌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다양한 진술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플라톤이 계사 (μετέχει …)와 동일성 기호(μετέχει ταὐτοῦ) 그리고 존재사로서의(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 ἔστιν들 사이의 차이를 밝힌다는 것 - 그리고 밝히려 한다는 것 - 을 논증하고자 시도하였다.

내용 요약.

  → 251-259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개념들은 특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관련되며 이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 철학자의 작업, 변증이다. 그 일례로 megista gene가 선택되어 그것들이 모두 서로 다르다는 것이 확정되고, 다음으로 이것들의 상호관계가 해명된다. 이를 통해 to on과 to me on에 대한 해석의 관점이 마련되고 이와 관련된 여러 역설과 난점이 해소된다. 이는 logos의 성립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 위 대목에서 플라톤이 계사를 발견했거나 estin의 동일성 진술과 한정 진술 사이에 나타나는 애매성을 인식했는지, 그 문제에 진전을 이루었는지가 문제이다. 그가 그 애매성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맥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그 뜻을 해석, 설명, 분석하며, 이것이 진지한 철학적 구명 과정에서 이루어지므로 그는 이 애매성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사, 그리고 계사와 동일성-기호.

 → 플라톤은 estin의 존재사적 용법을 식별해낸다. 예를 들어 dia metechein tou ontos라는 표현은 존재사 estin을 분석한다. 이는 다른 용법들과 구분된다.  → 존재사로서의 estin을 metechei tou ontos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형상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metechein이 등장한다.  → 존재사 외에 다른 두 의미는 계사와 동일성이다. 이 의미들의 동화는 동일성 진술이 아닌 참인 진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역설은 두 의미 사이의 차이를 입증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 '운동은 같음이다/같다'와 '운동은 같음이지 않다/같지 않다'는 둘 다 estin을 포함하고 하나는 긍정, 다른 하나는 부정으로 양립 불가능하여 모두 동시에 단언하면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둘은 각기 metechei tautou와 metechei thaterou pros tauton이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 전자는 계사로서의 estin으로서 metechei로 대체된다. 반면 후자는 동일성 기호로 간주되어 그 부정이 metechei thaterou pros ti 로 대체된다. 이제 계사와 동일성/타자성 사이의 구분이 해명된다. 동시에 어떤 것에 참여한다는 표현을 통해 어떤 것이 어떤 개념 아래에 들어간다는 사태를 보여준다.  

계사와 동일성-기호의 관계.

→ 프레게는 is(estin/ist)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is+보어 형태가 하나의 동사로 대체될 수 있는 경우이다. '이것은 푸른 것이다'는 '이것은 푸르다'로 바뀌어도 의미가 같다. 여기에서 is는 무엇이 어떤 개념(술어) 아래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반면 '샛별은 금성이다'와 같은 진술의 경우 is는 단순히 대체될 수 없다. '샛별은 금성에 다르지 아니하다'로 바꿀 경우 여기에서의 is가 비로소 단순 계사이다.  → 프레게는 단순계사로서 is를 '개념 하에 들어간다'로 파악하고, 동일성 is를 개념이 포함되어 확장된 계사로 간주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역할을 metechei에 부과한다. 그리고 이 동사의 목적어가 되는 개념을 통해 이 metechei를 확장시킨다. 이 과정에서 동일성의 경우 목적어는 tauton, 동일성 부정의 경우 thateron이 된다. → 플라톤은 유들의 결합을 통해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한다. 그들은 is를 동일성 기호로 이해하지만, 동일성 기호는 플라톤이 제시하는 결합을 통해 단순한 계사와 개념이라는 요소들로 분석된다.   → 오직 동일성 진술만을 고집하는 자들에게 결합의 필연성을 말하여 논박하는 방식은 (1) 결합 없는 말이 의미가 없다는 것, (2) '동일성 진술만이 참이다'라는 진술 자체도 결합이라는 것 두 가지이다. 그러나 (2)는 정당한 논박이 아니다. 동일성 진술만이 참이라는 논증 내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장 자체의 오류가 제시되어야 한다.  → estin의 두 용법들을 구분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위 주장의 오류가 지적될 수 있다. 

계사와 비대칭적/대칭적 관계.

 → 콘포드는 형상 사이의 관계가 대칭적이므로 계사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 그러나 결합의 방식은 다양하고, 그러한 결합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변증이며 철학자의 작업이라면, 철학자는 다양한 결합 방식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비대칭적 관계도 고려해야만 한다.  → 콘포드의 주장과 달리 플라톤이 제시하는 비유들(철자들, 음들)이 비대칭적이기도 하고, 콘포드에 따를 경우 플라톤의 철학자는 환원불가능한 비대칭적 진리들을 표현할 수도 없다.

  → 비대칭적 관계는 유종관계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이 직접 탐구되지는 않으므로 플라톤이 말하는 결합 자체만 놓고 검토해야 한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 '운동이 존재한다'는 '운동이 존재에 참여한다'로 대체될 수 있으며 콘포드식으로는 '운동과 존재가 혼합된다'이다. 콘포드식으로 이는 다시 '존재가 운동한다'와 등가이다. 그러나 이는 플라톤의 의도가 아니다.  →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는 '운동이 정지에 대한 다름에 참여한다'이고 이는 콘포드에 따르면 '정지에 대한 다름이 운동에 참여한다'이다. 콘포드에 따라 이 경우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가 '정지에 대한 다름(혹은 '정지와 다르다는 것')은 움직인다'와 등가가 된다. →  이 과정에서 지나친 외삽이 있으므로 문헌근거를 좀 더 보강해야 한다.  → 콘포드는 to on이 그 자체인 것과 여타에 대한 것 모두에 참여한다는 점을 형상들 사이의 대칭적 관계의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언급하는 구절 외에는 비대칭적 관계를 뒷받침하는 구절 또한 많다.   → 로쓰는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가 소격을 지배할 경우 '나누어 가짐'을, 여격을 지배할 경우 '결합함, 통함' 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는 전자가 특정한 비대칭적 관계를, 후자가 일반적 대칭적 관계를 의미한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 콘포드가 대칭적 관계의 근거로 드는 단어 '혼합'은 그가 제시하는 구절 외에 모두 비대칭적 환원불가능한 관계를 의미한다. 플라톤에게 존재가 다름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과 다른 의미이다.   → megista gene를 검토하는 255e8-257a11 사이에 등장하는 관계들은 개념들의 일반적인 연결을 언급하는, 콘포드가 지시하는 구절을 제외하면 모두 비대칭적 관계를 의미한다. '추상명사 F에 참여한다'라는 것은 'is 형용사'라는 일상적 표현과 등가이다.  → 콘포드가 지시하는 구절이 예외적이긴 하나 일반적 언급이고 다른 더 많은 구절들이 그의 주장에 맞지 않는다.

  
  1. 아크릴에 따르면 존재사 is는 metechein tou ontos 의 결과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경우에서 metechein F-ness(-genitive)는 is F의 형태로 드러난다. 문제는 후자의 진술에서 주어와 목적어가 모두 to on이 아닌 경우에도 여전히 그 결과로서 is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계사 is가 어떻게 등장할 수 있는가? 여기에 더하여 X metechein tou ontos의 결과는 단순히 there is X일 뿐만 아니라 X is a Being 이기도 하다. 이 둘의 차이가 전혀 없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전자의 경우 X의 성격이나 상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나 후자에서는 X가 'X이다'라는 그 자신의 성격이 제외될 수 없다. 그렇다면 굳이 존재사를 따로 떼어 생각할 이유 또한 불분명하다. X의 본성을 그러저러한 것으로 긍정하는 것이 to on과의 결합을 통해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to on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도 to on이 계사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existence'가 독립적으로 그 당시에 이야기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일, 혹은 강하게 말하자면 역시대착오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2. 운동이 여타의 것들과 다른 것은 다름에 참여하기 떄문이다. 정지가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은 같음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운동이다/운동이 있다'라는 진술이 가리키는 사태에서만 유독 dia의 의미가 부가적이고 설명적이어야 하는가? 앞서의 문제제기에 따라 metechein tou ontos의 결과와 metechein F(to on을 제외한)의 결과는 다름에도 거기에는 여전히 is가 등장한다. 아크릴은 metechein을 도구 삼아 estin의 다의성을 설명하려 하지만, 이 과정에서 metechein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3. 대칭적 관계와 비대칭적 관계에 동일한 하나의 동사가 사용되기도 하고,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니는 여러 단어들이 또한 그렇게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해명되어야 한다. 아크릴은 metechein + genitive 문장을 '~ 아래에 들어간다'로 해석하지만, 그렇게 나온 결과에 비추어 그러한 해석을 부여할 뿐,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실상 『소피스테스』에서 손님이 마주하는 역설을 해결할 길도 확인하기 어렵다. 왜 metechein이 비대칭적으로 이해되는지 모르는 한에서 X metechein Y와 Y metechein X의 구분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 이 과정을 poiein과 paskein의 구도로, 따라서 gignomai(변화를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해결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paskein은 의존적인 사태인 반면 poiein은 자발적이고 독립적일 여지가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듯하다. 이는 X의 본성, X의 전체, X의 부분들 등의 표현들과 더불어 metechein이 지시하는 사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여지를 마련해 준다. X가 Y에 metechein한다는 것은 Y가 X를 poiein하고 X가 Y에 의해 paskein되는 사태와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이 되었든 어떤 것은 그것 자체로서 자기 자신의 성격, 본질을 기본으로 한다. 즉 같음이 자기 자신과 같거나, 다름이 여타의 것들과 다르거나, 운동이 운동하거나 정지가 정지하거나 혹은 to on esti 등의 사태들에서는 각기 자기술어화를 통해 이런 결과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상호 결합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혹은 '그 자체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상호, 즉 다른 것에 대한 결합이 필요하고 이는 수동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같음은 정지에 의해 정지가 되고, 정지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들'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같음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같은' 것으로서 '정지'해 있고 여타의 것들과 '다른' 것으로서 다름의 작용을 받는 식으로 '운동'하지 않는 한, 그 같음의 의미를 지시하거나 발화하거나 사유할 아무런 방법도 없고 그것을 가리킬 이름조차 없게 된다. 본질적인 중심과 부수적인 극단들을 부분들로 가지는 전체,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가 난관을 피하기 위해 요구받았던 조건들이다.

  4. megista gene 사이의 결합은 같거나 다르다는 단순한 결과를 낳는다. 반면 진술에서는 어떤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여러 술어들이 참이고 또 이것들과 다르고 서로 또 다른 여러 가지 술어들이 거짓이기도 하다. 참인 부정진술도 있고 거짓인 긍정진술도 있다. 특히 megista gene 사이의 결합관계는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거기에서 묘사된 바로 그런 방식의 결합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전혀 알 수도 가리킬 수도 없다. 반면 과연 테아이테토스는 필연적으로 날지 못하는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혹은, 날아다닌다고 하여 테아이테토스가 테아이테토스가 아니게 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두 경우 모두에서 is와 is not이 같은 형태로 등장할 수 있다. is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바탕으로 유들의 결합이라는 사태와 이름과 동사의 결합이라는 진술, 두 구조 사이의 차이를 통해 의미의 차이를 설명하는 쪽이 더 건전한 것으로 보인다. metechein이 계사를 의미하고 

  5. 다름의 부분들이 나뉘어 들어가는 것은 특정 X가 특정 Y와 다르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X는 ~X인 불특정의 일반에 대해서도 다르다. 아크릴은 아무런 설명 없이 '운동과 다름,' '정지와 다름' 등 특정한 다름'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 to me on은 어떤 식으로 설명되는가? 그는 다름으로서의 to me on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to on과의 결합을 부정하는, 불가능한 to me on, to on과 다르다는 의미에서의 to me on, to on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to me on이 모두 달리 이해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들 중 어느것으로도 만족스럽게 거짓을 정의할 수 없다.

  6. 늦게 배우는 자들이나 혹은 진지한 고찰을 통해 그들과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이 정말로 동일성 명제만이 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가? A, B, C라는 나열, 호명도 가능하다. 보어 없는 is는 'it is the case,' 'it's true,' if X, then Y. X is. therefore Y (양화 없이, 혹은 전칭으로) 등으로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사실상 to on과의 결합이 상정되지만 표면적으로는 오직 분리만을 주장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늦게 배우는 자들이든 진지한 자들이든, 그들에 대한 언급 이후로 제시되는 것은 결합과 분리에 관한 세 가지 가능성들이다. 

  7. 동일성 기호와 계사를 구분하는 것이 '늦게 배운 자들'에 대해 정당한 논박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여전히 ad hominem 아닌가?

-작성중-

  [72쪽]이 짧은 논문의 목적은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서 문장이란 것의 의미와 함축들을 고찰하는 것이다. 유들의 결합에 관한 부분 말미에서 손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모든 것들로부터 각각의 분리는 모든 진술들의 궁극적인 제거이다. 왜냐하면 형상들 상호의 엮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이 표현의 후반부에 주목할 것이며, 간결성을 위하여 이를 문장이나 진술 S라 칭할 것7이다.
  콘포드는 문장 S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우리에게 가능한 어떤 논의이든 그 현존은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 그의 주석에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모든 논의는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 … 그것은 형상들이 모든 논의의 의미에 유일한 요소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개별적인 사물들에 대해서도 진술들을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진술 각각이 반드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참)이다.' 몇 행 뒤 콘포드는 S에서 플라톤에 의해 구성된 핵심은 '모든 진술이나 판단이 최소한 하나의 형상에 대한 사용을 포함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플라톤이 "모든 논의는 형상들의 결합에 의존한다"라고 말했다고, 즉,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어떤 진술의 의미에든 개입한다고 말했다고 언급한다.(Cornford, 'Theory of Knowledge', 314쪽.)
  콘포드는 플라톤이 진술들에 '포함된' 혹은 '사용된' 형상들에 관하여 뭔가 말하고 있다고 당연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모든 진술이 다수의 형상들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한다. [73쪽]몇 쪽 뒤 플라톤 자신의 예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명백한 실책을 플라톤에게 돌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 그는 S를 모든 진술이 형상들의 엮임을 사용하거나 포함하거나 혹은 그것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필연적으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포함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형상들의 결합이라는 바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가 '서로간의(ἀλλήλων)'라는 단어를 고려할 때 특히나 분명하기에. 이 단어를 콘포드는 그의 번역에서 빠뜨렸다. '논의는 형상들의 "상호" 엮임에 의존한다.' 이것이 단지 어떤 진술의 의미에든 적어도 하나의 형상은 개입한다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그 누가 가정할 수 있을까? 만일 S가 어떤 logos에든 포함되는 형상들에 관하여 무언가 말한다면, 그것이 말하는 바는 반드시 형상들의 엮임이 어떤 logos에든 포함된다는 것이어야만 한다. 만일 이 후건이, 플라톤의 이후 예시들에 의해 보이듯, 명백히 거짓이라면, 우리는 S가 logoi들에 포함되는 형상들에 관하여 무언가 말한다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로쓰가 우리의 이 구절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간단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기로 손님은 '모든 논의들이 말하는 자 혹은 생각하는 자에 의한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고, 문장은 주어 역할을 할 고유명사, 형상이나 보편자를 나타내지 않는 고유명사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장의 술어는 통상 형상을 나타내고, 진술들의 모든 주어들은 고유명사들을 제외하고는 형상들 또는 형상들을 수단으로 하여 기술되는 것들을 나타낸다.(W. D. Ross. 'Plato's Theory of Ideas,' 1951, 115쪽.)' 로쓰는 S가 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모든 진술 각각은 최소한 두 형상들을 포함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이것이 거짓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지에 주목하자. 그는 S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있어서 그것이 노골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이라고, 아마도 우리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로쓰는 (그의 해석에 있어서) 그것을 과장이라 부름으로써 S의 거짓을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하지만 물론 플라톤은 모든 logoi에 대해 참인 무언가를 말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259e4, 260a9). 그래서 S는 로쓰의 해석에 있어서 단지 거짓이고, 두드러지게 거짓이다. 무난한 오독은 얼마 안 있어 스스로 드러난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예시들에 대해 말하면서, 로쓰는 그 문장들이 S(그가 해석하는 한에서의 S)를 반박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들이 '플라톤의 주장을 실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자못 진지하게 모든 철학자들이 성격이 좋다고 단언한다면, 그리고 곧장 계속해서 내가 아는 성격 나쁜 철학자들에 대해 떠든다면, 당신은 내 예시들이 '내 주장을 실증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74쪽] 물론, S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긴 했다. 당연히 그것이 테아이테토스에 대한 해당 진술들이 명백히 S에 대한 반박들이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확실히 그것은 모든 진술 각각이 형상들(혹은 '형상들을 수단으로 하여 기술되는 것들'조차')을 단언하거나 그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아야 한다. 그럼 그것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플라톤이 형상들의 엮임을 다루기 전에 말했던 것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선택된 여러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던 부분이 아니라 - 이 부분은 비교적 각론의 문제이다 - 오히려 251d-252e, 형상들의 엮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함을 보여주고자 추구하는 부분으로 가 보자. 진술 S는 모든 logoi를 위한 형상들의 엮임의 필연성에 관한 뭔가를 말한다. 이를 플라톤이 그러한 엮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추구하는 첫 번째 자리에서 사용된 논증들을 고찰함으로써 해명하는 일이 합당하다. 
  플라톤은 이 앞선 구절에서 세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한다. (1) 모든 형상 각각이 다른 모든 형상 각각과 결합한다. (2) 아무런 형상도 그 어떤 다른 형상과도 결합하지 않는다. (3) 형상들의 몇 쌍들은 서로 결합하는 반면, 다른 형상들은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처음 두 가능성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세 번째 가능성을 확정짓는다. 그리고 그것이 이어서 형상들의 엮임으로서 이야기된 이러한 형상들의 제한된 상호결합이다. 이 마지막 가능성에 대한 논증은 사실상 다른 두 가능성들을 반증하는 논증들로 구성된다.
  첫 번째 가능성은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운동이 정지한다와 같은 진술들이 귀결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모순적이며,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ταῖς μεγίσταις ἀνάγκαις ἀδύνατον). 그래서 만일 그러한 일들이 (1)에 의해 함축된다면, (1)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일반화하면, 만일 B에 대해 A가 주장되는 진술이 자기모순적이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형상 A는 형상 B와 결합하지 않음이 귀결된다. 우리는 플라톤이 '결합'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자 시도하고 있기에, 여기에서 그의 논증에 대한 타당성에 제기할 문제는 있을 수 없다. 여기까지 드러나는 것은 형상들의 상호결합에 대한 일부 제한이 일부 문장들은 자기 모순적인 진술들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의해 시사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μηδεμία σύμμειξις-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은 두 부분을 가진다. 첫째,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세계의 현실, 변화, 구조, [75쪽]태에 관하여 철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모든 이론들은 공허하고 헛된 것일 터이다. 다원론, 일원론, 엘레아학파, 헤라클레이토스학파, 그들 모두가 'λέγοιεν ἂν οὐδέν, εἴπερ μηδεμία ἔστι σύμμειξις.' 만일 정말로 아무런 엮임도 없다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2)에 대한 진술들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 진술을 함에 있어서 구성요소들은 단어들을 문장으로 결합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것들은 그 고유한 주장에 모순된다. 그것들을 반박하는 데에 다른 것이 필요치도 않다. οἴκοθεν τὸν πολέμιον καὶ ἐναντιωσόμενον ἔχουσιν. 그것들은 자체적으로 적과 모순을 지닌다.
  이 점을 고찰함에서 있어서 우선, 우리는 정확히 어떻게 (2)를 주장하는 자들이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반박되어 버리는지 주목해야만 한다. 그건 물론 그들이 직접적으로 엮임을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기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2)에 대한 진술이 필연적으로 (2)의 거짓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종류의 논증들이 다른 곳에서 플라톤에 의해 사용된다. 249c에서 그는 주장의 참이 실상 그 누구도 아무것도 아는 일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러한 주장의 특정한 진리치에 대해 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조롱한다. 혹은 『소피스테스』 244를 참고하라. 오직 단 하나만이 존재한다는 이론은 반드시 거짓이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참일 수 없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상이한 의미들을 가진 상이한 여러 단어들이 없는 한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진술의 의미는 필요조건으로서 그 진술 자체의 거짓을 전제한다.
  '아무런 형상도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자기 논박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의미가 일부 형상들이 결함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형상들의 결합에 관한 플라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실마리가 있다. 어떤 진술들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은 형상들의 어떤 짝들이 양립불가능한 것들이라는 것의 증명으로 간주된다. 이제 특정 진술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어떤 형상들이 다른 형상들과 결합을 행한다는 것에 대한 증명으로 간주된다. 플라톤의 결론, 형상들 사이에 결합관계들이 있다는 것, 하지만 형상들의 모든 쌍들 사이에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은, 어떤 문장들이 의미를 가지고 어떤 문장들은 그렇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존한다. 전자는 친근성 혹은 양립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하고, 후자는 적대성 혹은 양립불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한다.
  (2)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의 첫 번째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아무런 엮임도 전혀 없다면, 사물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모든 설명들은 공허할 것이다. 그것들은 전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을 것이다. 후자가 내가 λέγοιεν οὐδέν을 해석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이 표현은 물론 단순히 '거짓을 말하는 것'이나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진짜 진술은 전혀 아무것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 [76쪽]'뭔가를 말함에 있어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내게는 여기에서 논증이 이러한 후자의 의미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아무런 엮임이 없다면, 어떤 이론에 대한 아무런 진술도 의미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λέγειν οὐδέν이 단지 '거짓인 것을 말한다'를 의미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a) 그 논증은 명백히 결정적이지 못할 것이다. 대안으로서 (2)가 철학자들의 그러한 모든 이론들이 거짓임을 함축하였다고 간주한다면, 물론, 그것들은 아마도 거짓일 것이다. 플라톤 자신이 그런 이론들의 진위에 관하여 결정하기는 어렵다고 언급한다(243a2-3). (2)가 나열된 이론들의 거짓을 함의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은 그가 그러한 이론들 중 어느 하나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일 경우가 아닌 한 (2)가 거짓임을 누구에게도 전혀 설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b) 다시, λέγειν οὐδέν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있어서, 왜 (2) - 그 어떤 형상도 결합하지 않는다 - 가 그 이론들이 거짓임을 함축해야 할지는 완전히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형상들에 관한 모든 이론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세계와 그 진행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특정 형상들이 결합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아무런 형상들도 결합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그의 이론을 필연적으로 거짓이도록 만들겠는가? (c) 그렇지만 만일 언급된 철학적 이론들이 사실상 형상들이 결합한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것이 주장된다면, 그 결론은 플라톤의 논증이 부당하지 않고, 그러나 완전히 방향을 잃었다는 것일 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형상들이 결합해야만 한다는 것,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이 그러하다고 말한 모든 철학자들이 틀렸으리란 것을 의미할 터이기 때문이다.
  λέγειν οὐδέν이 '거짓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논증이 빈약하고 불분명하며 방향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개연성 있고 분명하며 상당히 적절한 논증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저 해석을 의심할 좋은 근거이다. 만일 우리가 그 표현을 '아무런 제대로 된 진술도 구성하지 못함, 뭐가 되었든 아무런 logos도 전달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 논증은 적절히 자리를 찾게 된다. 만일 개념들 사이의 아무런 연관도 없다면, 철학자들의 진술들(더욱이, 모든 진술들)은 단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자기-모순적 진술들이 있다는 것의 전제가 어떤 개념쌍들은 결합하지 않으리란 것인 바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의미를 지니고, 자기-모순적이지 않은 진술들이 있다는 것(참이든 거짓이든)의 필요조건은 어떤 개념들이 결합하리란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플라톤이 형상들의 결합이 있다고 증명하는 과정에서 구성하고 있는 핵심들이라고 제안한다. 인간의 논의는 오직 일반적 단어들의 의미들이 규정된 방식들에서 관련되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단어들의 어떠한 결합들이 의미있는 문장들을 구성하고 또 그렇지 않은지 결정하는 규정된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언어에 본질적이다. 개념들의 상호관련들(포함, 양립불가능, 기타 등등)을 입안하는 것은 변증의 작업이다.(『소피스테스』 253b-e 참조).
  [77쪽] 내게는 S에 대한 내 해석이 - 콘포드와 로쓰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그 표본적인 logoi들에 관련하여 아무런 난점도 없음을 보일 책임이 분명히 있다. 나는 '형상들의 결합 없이는 아무런 logos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언명이, 여러 logoi가 예를 들어 한 고유명사와 함께 오직 하나의 일반 명사를 포함한다는 사실에 의해 타당성을 잃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보여야만 한다. 논리학 이론에 관한 최근의 한 저술을 인용하는 것이 이 점을 분명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주된 목적들 중 하나는 사건들을 보고하고 사물들이나 사람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한 보고들과 기술들은 다음과 같은 형식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과 같다. 그것은 무엇과 같았나? 그것은 무엇과 같은가? 우리는 무언가를 기술하고, 그것에 우리가 다른 것들에 적용시키도록 준비된 단어들을 적용시킴으로써 무엇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에 적용시킬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외 없이 모든 각각의 것에 적용시키고자 마련한 단어(최근 대중적이며 특히 군사용어로 사용되는 특정 단어들 같은 것들)는 기술을 목적으로 해서는 쓸모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이 무엇 같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해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두 가지 행위들이 아니라, 같은 행위의 두 측면들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반드시 경계가 그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사물들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적용가능성을 한계짓는다.
  대체로 같은 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형이상학』 Γ권 4장에서, 그가 모순율을 주장하는 곳에서 구성된다. 그는 모순율이 증명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증명이 되었든 필연적으로 문제가 되는 그 원칙을 사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당신이 누군가에게 이 원칙의 필연성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그가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말할 것이라면, 한정된 의미를 가지고 그리 할 것이라면. 왜냐하면 당신은 그에게 그가 반드시 그의 진술을 이러저러한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의도해야만 한다는 것, 최소한 하나의 다른 진술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의도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진술과 양립 가능한 진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ἀρχὴ … τὸ ἀξιοῦν … σημαίνειν γέ τι καὶ αὑτῷ καὶ ἄλλῳ. τοῦτο γὰρ ἀνάγκη, εἴπερ λέγοι τι. εἰ γὰρ μή, οὐκ ἂν εἴη τῷ τοιούτῳ λόγος, οὔτ᾿ αὔτῷ πρὸς αὑτὸν οὔτε πρὸς ἂλλον. ἂν δέ τις τοῦτο διδῷ, ἔσται ἀπόδειξις. ἤδη γάρ τι ἔσται ὡρισμένον. 원리는 적어도 그 자신에게든 다른 자에게든 무언가 의미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무언가 말하려면 이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런 자에게 그 자신을 향해서든 다른 자를 향해서든 진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 점을 제시한다면, 그것이 증명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무언가 규정된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1006a18-25). 플라톤에게로 돌아가자.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라는 진술은 오직 그것이 무언가를 제외시키기 때문에만('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지 않다' 혹은 좀 더 한정적으로, '테아이테토스는 서 있다') [78쪽]진정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이다. 그것이 뭔가를 제외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두 개념들('앉음'과 '앉지 않음' 혹은, 좀 더 한정적으로, '앉음'과 '서 있음') 사이에 양립불가능성이 있다고(μηδεμία κοινωνία) 말하는 것이다. 개념들 사이의 관계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철학자는 언어 사용을 규제하는 규칙들을 끌어낸다. 그런 관계들이 있다는 것, 그런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언어라는 게 있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형상들 상호간의 결합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한다.
  이 약간의 언급들은 반드시 어떻게 형상들의 엮임이 뭐가 되었든 모든 각각의 진술에 의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을 포함해 모든 진술들에 의해 전제되는지 보여주는 데에 충분한 것이어야만 한다. 플라톤이 그 점을 테아이테토스 예시들과 관련하여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것은 다른 주제에 대한 논의에서 사용된다. 여전히, 그것은 관련된 주제이다, 그것이 두 진술들의 양립불가능성을 포함하기에. 그리고 나는 만일 우리가 플라톤에게 S를 이 사례들과 부합시키길 요구했다면, 그가 위에서 대강이 제시된 그 방식으로 그리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이것은 플라톤이 S에 전적으로 조화시킬 수 없었을 logoi의 사례들을 사용하여 S를 보충한다는 가정보다는 더 그럴 듯해 보인다.
  나는 점진적으로 형상들에 관한 논의에서 개념들에 관한 논의로 진행하였고, 이것들을 사실상 일반 명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나는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들에서 변증가나 철학자에게 할당된 작업이 개념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연구와 구성, 문장에서 단어들의 어떠한 결합이 의미를 구성하고 또 구성하지 않는지를 애매성을 해명하고 구별들을 지음으로써, 우리 모두가 어떻게 정확하게 말할지 아는 한에서 그것들에 대해 잠재적으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지님에도, 우리가 통상 진술하는 데에 문제가 없는 단어 의미들의 관계들에 관하여 명백히 사실들을 진술함으로써, 주목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차분한 탐구를 통해 추구될 작업이라는 점을 시사하였다.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명백히 요구하는 엄격한 여러 조건들을 추가하는 것은, 꽤나 분량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결론으로 오직 두 가지 작은 점들만을 언급할 수 있다.
  플라톤이 의심의 여지 없이 그가 앞서 기술하였던 변증술을 구현(실행)하는 『소피스테스』의 대목(254b 이하)이 있다. 그는 우선 특정 형상들(253d1-3 참조)을 구별하고, 다음으로 그것들의 관계들을 결정한다(253d9-e2 참조). 플라톤이 이 대목에서 하는 일이 너무 명백해서 반박될 수 없는 진리들에 호소하는 것이란 점을 주의하는 일이 중요하다. [79쪽]특히 언어를 아는 그 누구라도 즉각 인정해야만 하는 그러한 진리들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단순한 치환 논증에 의해 being은 sameness와 다른 것으로 증명된다(255b8-c4). 만일 그것들이 다르지 않다면, 그 두 가지 것들에 대해 그 둘 모두가 현존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들 둘 모두가 같다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특히, 우리는 운동이 정지와 더불어 둘 모두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둘 모두가 같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고 더욱이 그건 부조리할 것이다. Being이 sameness와 다르다는 변증가의 진술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명백하게(혹은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가 이미 어떤 식으로 알고 있는 단어의 의미들에 관한 사실을 보도록 해주는 것뿐이다. 변증가는 우리가 이미 그걸 가지고 말하고 있는 그 규칙들을 명시적이게 만든다.
  끝으로,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언급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비판들에 대한 탐색 이후, 파르메니데스는 계속해서 이데아론이 구조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이를 위해 대단하고도 교묘한 기술이 요구된다는 것을 시사한다(135b). '만일 이 모든 그리고 이와 유사한 반론들을 바라봄에 있어서 사물들의 형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혹은 각 경우에서 한정적 형상을 구별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그의 사유를 정착시킬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이고, 각각의 실재 사물이 언제나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인 한에서 그러할 것이다. 또한 그래서 그는 의미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해 버릴 것이다.' 이 구절은 파르메니데스의 입을 통한 강력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그의 이데아론을 완전히 폐기할 것을 제안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그가 스스로 그 이론의 개정판을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버린다고 말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반면에 말이다. 어쨌든, 인용된 구절은 강력하게 그가 지금 확신하는 것이 중기 대화편들에서 구상된 형상들이, 윤리적 이념들로서 그리고 직관의 형이상학적 대상들, 그리고 아마도 신비적 통찰의 대상들로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시사한다. 그가 지금 확신하는 것은 말의 의미를 보장하는 고정된 사물들, 고정된 개념들 -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 - 그 역할이 논의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소피스테스』는 더욱이 이러한 개념들이 상호의 특정한 규정된 관계들 내에서 성립해야만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변증가에게 개념들의 경계들과 상호관계들을 탐구하는 작업을 부과한다.


  형상들 상호의 엮임이 진술의 성립 조건이다. 이 문장의 의미를 콘포드는 '모든 진술은 적어도 하나의 형상에 관한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 반면 로쓰는 이를 '모든 진술은 적어도 둘 이상의 형상들을 엮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 전자의 경우 S에서는 다수의 형상들에 대해 그것도 그것들 상호의 엮임을 논하고 있으므로 그 표현이 콘포드의 해석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는 다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의 사례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즉 플라톤이 S와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의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일관성을 잃었거나, 로쓰의 S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로쓰는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 그에 따르면 S는 모든 진술이 둘 이상의 형상들을 결합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을 통해 볼 수 있듯 참이 아니다. 로쓰는 이를 과장에 의한 것이라 얼버무리고, 소극적으로 테아이테토스 사례가 S를 실증하지 않는다고만 말한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플라톤이 일관성을 잃었다는 비판에 다름 아니다.

  플라톤이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S가 모든 진술들에 대해 참이게끔 해석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형상들의 엮임에 대한 이전의 논의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형상들의 엮임에 관련하여 플라톤은 세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한다. (1) 모두 엮인다. (2) 아무것도 엮이지 않는다. (3) 일부는 엮이고 일부는 엮이지 않는다. (1)의 경우 자기모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진술이 성립하게 된다. A is B가 자기모순이며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형상 A와 형상 B는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전건이 (1)에 의해 함축된다면 (1)은 모순이므로 폐기된다. 다음으로 (2)에 관하여,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a. 무엇이 어떠하다고 말할 수 없다. b. 단어들의 결합으로서 문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형상들이 분리된다/결합하지 않는다'는 진술 자체가 형상들의 결합을 전제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거짓을 전제한다. 진술의 의미는 형상들 상호의 결합에 대한 증명이다. 진술의 무의미 혹은 모순이나 논리적 불가능성은 형상들 상호 분리의 근거이다.

  개념들 사이의 연관 없이 진술은 무의미하다. 자기 모순적이지 않으면서 진리치를 갖는(참/거짓) 진술의 성립은 개념들의 결합을 전제한다. 이러한 개념 연관을 구성하는 것이 변증이다. 이제 하나의 고유명사와 더불어 단 하나의 형상만으로 구성되는 진술이(테아이테토스의 진술 사례들), 이상의 해석에 따르는 의미에서 '모든 진술에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전제된다.' 라는 주장(S)과 양립가능함을 보여야 한다.

   언어는 보고나 기술을 위한 것이다. 이는 어떤 것들에는 적용되고 또 다른 것들에는 적용되지 않는 단어를 특정한 어떤 것에 적용시켜 그것들을 다른 것들과 관련시키고 또 다른 것들과는 구별해내는 행위이다. 이는 한 행위의 두 측면이다. 어떤 것에 대한 진술은 다른 것들에 대한 배제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러한 언어 규칙은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서 도출된다. 양립 불가능한 개념쌍이 있고, 그 중 한 개념을 적용시킴으로써 다른 개념이 배제된다. 이것은 언어 사용의 필요조건이다. 플라톤이 직접 S를 아크릴의 해석에 따라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에 적용시키지는 않지만, 이 해석은 S를 진술들에 부합시키는 데에 유효한 해석이다. 반면 앞서 콘포드나 로쓰의 해석은 이러한 부합을 수행하기에 무리가 있다. 변증가나 철학자의 작업은 개념들의 관계를 연구하여 단어들의 결합을 통한 문장의 의미 구성 방식을 해명하는 일이다.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이러한 개념들의 관계이다. 

  변증술은 개념들의 결합과 분리를 논하고, 이는 언어 사용자 일반이 무의식 중에 전제하는 조건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은 중기까지의 윤리적 이념들 혹은 형이상학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이데아들을 주장하는 그 이론이 사유를 정착시킬 무언가를 구성할 것을, 고정된 사물 혹은 개념들 -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 - 의 가능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소피스테스』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진술에 대해 수행하는 역할을 고찰함으로써 플라톤이 이해하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형상들의 엮임과 진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콘포드의 입장과 로쓰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둘 모두 여기에서 형상들의 엮임을 진술의 요소 혹은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플라톤이 제시하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은 개별자와 형상의 관계로서 이러한 해석에 배치된다. 그러나 이 사례들 역시 '모든 진술'에 포함되는 일종의 진술이며,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플라톤에 따를 경우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므로 이 사례들 역시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그에 대해 참인 것으로 밝혀져야 한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전적인 상호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전면적인 상호 결합도 아님을 문헌을 근거로 논증한 뒤, 이것이 문장의 의미가 구성되기 위한 논리적 법칙으로서 전제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개념의 결합 과정에서 동일률과 모순율의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이 직접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에서 주제가 되는 참과 거짓의 문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제안은 플라톤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가능케 한다. 논리적 규칙은 언어의 사용을 위해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참이다. 나아가 이것은 초중기 이데아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일종의 개선된 대안으로 이해될 여지를 열어준다. 


1. ΣΥΜΠΛΟΚΗ ΕΙΔΩΝ의 기존 해석과 한계 (72-73쪽)


Τελεωτάτη πάντων λόγων ἐστὶν ἀφάνισις τὸ διαλύειν ἕκαστον ἀπὸ πάντων· διὰ γὰρ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소피스테스』 259e4-6.)


위 인용은 앞선 요약에서 to on과 to me on에 대한 문제를 변증술을 통해 극복한 이후 이어지는 손님의 말이다. To on이 to me on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모순들(ἐναντιώσεις)을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것을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거부해야 한다는 논의에 이어, 손님은 “모든 것들로부터 각각의 것을 분리시키는 일은 모든 진술들의 궁극적인 파괴이다. 왜냐하면 형상들 상호의 엮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발언은 이어 진술(λόγος)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분석으로 두 대화자를 이끌게 된다. 

Ackrill은 해당 논문에서 인용된 구절의 후반부에 주목한다. 그는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진술의 성립 조건이라고 할 때에, 과연 여기에서 말하는 진술, 문장, 즉 logos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 함축들은 어떠한 것들인지를 형상들의 엮임을 통해 파악하고자 시도한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해당 구절에 대한 기존의 대표적인 두 가지 해석들을 소개하고 검토한다. 그는 F. M. Cornford의 Plato’s Theory of Knowledge(1935), W. D. Ross의 Plato’s Theory of Ideas(1951)에서 제시된 각 해석을 검토한다.

Ackrill은“형상들 상호의 엮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한다.”라는 문장을 논의의 간결성을 위해 S로 명명한다. Cornford에 따르면 S는 모든 진술이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는 의미이다. 이 의존이 오직 형상들만이 진술의 요소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진술 각각은 반드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참)이다. 그는 S가 지적하는 점이 '모든 진술이나 판단이 최소한 하나의 형상에 대한 사용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즉, 어떤 진술의 의미에든 최소한 하나의 형상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Cornford, 314쪽.)

그러나 Ackrill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번역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플라톤의 논의와도 일관되지 못하며, 그 해석이 문장 S 자체의 의미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우선 플라톤이 S 이후 제시하는 테아이테토스에 관련한 사례들은 개별자로 보이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이다. 즉 여기에서는 형상과 형상 사이의 결합이 아닌 적어도 개별자인 주어와 술부의 형상이 결합되고 있다. 또한 S에서 ‘서로 간의(ἀλλήλων)’라는 단어는 그의 번역에서 탈락되어 있다. 또한 ‘형상들의 엮임’이라는 말은 진술에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을 사용한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따라서 S가 진술에 포함된 형상에 관한 논의라는 것은 의심스럽다.

Ackrill에 따르면 Ross는 S가 ‘모든 진술은 최소한 두 형상들을 포함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Ackrill과 다르다. 그러나 Ross는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에 의한 형상들의 엮임을 말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S가 진술에 포함된 형상에 관한 논의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해석에 따를 경우 형상이나 보편자가 아닌 개별자를 주어로 갖는 진술 때문에 S는 거짓이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은 S을 모든 진술들에 대해 참인 것으로 말한다(259e4 ‘πάντων λόγων’, 260a9 ‘οὐδὲν … λέγειν‘). 더욱이 플라톤은 앞서 언급하였듯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을 사례로 들어 진술을 분석하고 있다. 즉 Ross의 해석에 따를 경우에도 플라톤은 일관성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Ross는 이 비일관성을 지적하지 않고 단지 그 사례들이 S를 입증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2. ΣΥΜΠΛΟΚΗ ΕΙΔΩΝ의 필연성(251d-252e) (74-75쪽)


S에서 논하는 형상이 진술에 사용되거나 그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할 경우 앞서의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S는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어야 하며,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자신이 제시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의 사례에도 부합해야 한다. 우선 S가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라는 점을 고찰하기 위해 형상들의 엮임이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인지 증명하는 플라톤의 논의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251d-252e에서 플라톤은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다. 

그는 여기에서 세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한다. (1) 모든 형상 각각이 다른 모든 형상 각각과 결합한다. (2) 아무런 형상도 그 어떤 다른 형상과도 결합하지 않는다. (3) 형상들의 몇 쌍들은 서로 결합하는 반면, 다른 형상들은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처음 두 가능성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세 번째 가능성을 확정짓는다. 형상들의 엮임은 이렇듯 형상들의 제한된 상호결합이다.

  모든 것이 서로 결합한다면 상호 모순되는 것들도 결합한다. 이를 통해 구성된 진술은 자기모순적인 진술이다. 만일 B에 대해 A가 주장되는 진술이 자기모순적이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형상 A는 형상 B와 결합하지 않음이 귀결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부 문장들은 자기 모순적인 진술들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의해 형상들의 상호결합에 대한 일부 제한이 시사된다는 것이다. 

(2)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은 두 부분이다. 첫 번째, 만일 정말로 아무런 엮임도 없다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2)에 대한 진술들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 진술을 함에 있어서 구성요소들은 단어들을 문장으로 결합시켜야만 한다. 이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첫 번째 반박은 다시 말하면 (2)에 대한 진술이 필연적으로 (2)의 거짓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249c에서 앎, 지혜, 지성과 분리된 채로 영혼이 있을 수 없다는 논증이나 244에서 to on과 하나, 혹은 하나와 그 이름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논증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2)는 필요조건으로서 그 자체의 거짓을 전제한다.

  '아무런 형상도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그 의미 자체가 일부 형상들이 결함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어떤 진술들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은 형상들의 어떤 짝들이 양립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한다. 특정 진술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어떤 형상들이 다른 형상들과 결합을 행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플라톤의 결론, 형상들 사이에 결합관계들이 있다는 것, 하지만 형상들의 모든 쌍들 사이에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은, 어떤 문장들이 의미를 가지고 어떤 문장들은 그렇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존한다. 전자는 친근성 혹은 양립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하고, 후자는 적대성 혹은 양립불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한다.



3. ΟΥΔΕΝ ΛΕΓΕΙΝ. (75-76쪽)


(2)에 대한 첫 번째 반박은 아무런 엮임도 전혀 없을 경우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리란 것이다. 여기에서 ‘οὐδὲν λέγοιεν’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리란 의미로도, 거짓을 말하리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240d-241a. 혹은 『에우튀데모스』, 『국가』 등 참조). 그러나 이를 ‘거짓을 말함’으로 이해할 경우 우선 (2)는 252b에서 나열된 주장들이 거짓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이 이 이론들의 반박 근거로서 ‘아무런 섞임도 없다’는 것을 그 이론들이 받아들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 않고, 실제로 그러하지 않기도 하다. 또한 ‘아무런 섞임도 없다’는 것이 거짓을 말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과정 또한 불분명하다. 252b의 주장들은 형상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 논하고 있지 않다. 단지 플라톤은 형상들의 섞임이 부정될 경우 이 이론들이 어찌 되는지에 대한 결론으로 ‘οὐδὲν λέγοιεν’을 내세울 따름이다. 끝으로 이 주장들이 형상들의 결합을 주장하는 것들이며, 섞임이 없을 경우 이 주장들이 거짓이 된다는 뜻으로 (2)를 이해한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논증이다. (2)가 사실이라면 (2)를 부정하는 자들은 거짓이라는 식의 논증은 해당 부분의 논의 맥락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οὐδὲν λέγοιεν’이 거짓을 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면 이는 쉽게 이해된다. 개념들이 결합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결합하지 못할 것이고 그 경우 진술이 성립하지 않을 것이므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모순적인 진술들은 결합하지 않는 개념쌍들을 전제한다. 반면 의미를 지니는(참이든 거짓이든) 진술들이 있다는 것은 개념들의 결합을 또한 전제한다. 진술은 오직 일반적 단어들의 의미들이 규정된 방식들에서 관련되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단어들의 어떠한 결합들이 의미있는 문장들을 구성하고 또 그렇지 않은지 결정하는 규정된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언어에 본질적이다. 개념들의 상호관련들(포함, 양립불가능, 기타 등등)을 입안하는 것은 변증의 작업이다.(『소피스테스』 253b-e 참조).



4. 언어의 요조건. (77-78쪽)


앞서의 논의를 통해 형상들의 엮임이 진술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진술을 위해 전제되는 것임이 밝혀졌다. 이제 S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 사례들에 부합한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언어는 사건을 보고하고 사물이나 사람을 기술한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어떤 것이 무엇 같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다른 것들과 비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해낸다. 이런 것들은 두 가지 행위들이 아니라, 같은 행위의 두 측면들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반드시 경계가 그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사물들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적용가능성을 한계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Γ권 4장에서 모순율을 설명하면서, 한정된 의미를 가지고 무언가를 말한다면, 그 진술이 이러저러한 진술을 배제해야 하며, 최소한 하나의 다른 진술과는 양립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한다. 다른 모든 진술과 양립 가능한 진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필요조건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에도 적용된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에서 ‘앉아 있음’은 ‘앉아 있지 않음’들, 더 정확히 말해 ‘서 있음’을 배제하는 한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이러한 개념들 사이에 양립불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념들 사이의 관계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철학자는 언어 사용을 규제하는 규칙들을 끌어낸다. 그런 관계들이 있다는 것, 그런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언어라는 게 있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5. 결론. (78-79쪽)


플라톤이 S를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에 직접 관련시키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후자에서 두 진술들의 양립불가능성을 포함하기에 두 문제는 서로 관련이 있다. 또한 S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앞서의 두 해석들보다 이 사례들에 더 잘 부합한다.

Ackrill는 자신이 형상들에 관한 논의를 점차 개념들에 관한 것으로 전개시켰고, 이것들을 일반 명사들로 취급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단어들 사이의 관계와 문장의 구성을 고찰하여 언어의 규칙, 조건을 해명하는 일이 변증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당화가 부족함을 시인하며 다음의 두 가지를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Ackrill에 의하면 254d 이하에서 플라톤은 형상들 사이의 양립가능/불가능을 검토하면서 언어를 아는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단어들의 의미 사이의 양립가능성에 대한 논의들이다. 변증가는 언어의 규칙들을 명시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은 중기까지의 윤리적 이념들 혹은 형이상학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이데아들을 주장하는 그 이론이 사유를 정착시킬 무언가를 구성할 것을, 고정된 사물 혹은 개념들 -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 - 의 가능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소피스테스』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2. 평가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진술에 대해 수행하는 역할을 고찰함으로써 플라톤이 이해하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형상들의 엮임과 진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콘포드의 입장과 로쓰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둘 모두 여기에서 형상들의 엮임을 진술의 요소 혹은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플라톤이 제시하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은 개별자와 형상의 관계로서 이러한 해석에 배치된다. 그러나 이 사례들 역시 '모든 진술'에 포함되는 일종의 진술이며,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플라톤에 따를 경우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므로 이 사례들 역시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그에 대해 참인 것으로 밝혀져야 한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전적인 상호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전면적인 상호 결합도 아님을 문헌을 근거로 논증한 뒤, 이것이 문장의 의미가 구성되기 위한 논리적 법칙으로서 전제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개념의 결합 과정에서 동일률과 모순율의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이 직접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에서 주제가 되는 참과 거짓의 문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제안은 플라톤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가능케 한다. 논리적 규칙은 언어의 사용을 위해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참이다. 나아가 이것은 초중기 이데아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일종의 개선된 대안으로 이해될 여지를 열어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형상들의 엮임과 진술 분석이라는 『소피스테스』에서의 두 가지 문제들이 상호에 발생시키는 일관성의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이는 이후 연구자들 역시 끊임없이 대안을 모색하도록 만든 『소피스테스』 연구사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또한 그의 대안은 자신이 제기한 문제점들을 포함하여 그 이전의 해석들이 지닌 난점들을 적절히 해소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형상들의 엮임’이 진술에 사용되거나 포함되는 것으로 한정된 데에서 나아가 언어의 성립 조건으로 그 해석의 여지를 확장시킨 것은 중요한 성과라 평가된다. 그가 이러한 해법을 제시하였기에 다른 문제들이 두드러진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아크릴의 논의에서 추가적인 검토 없이는 해명이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우선 그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을 개별자와 보편자 혹은 보편개념의 결합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소피스테스가 하나의 유라는 점에 주목할 경우, 이를 달리 생각할 여지가 생긴다. 소피스테스는 제작자이자 말로 된 모상에 관련하며 거짓에 또한 관련한다. 해당 대화편에서 제작, 말, 모상은 모두 유로 간주된다. 즉 소피스테스는 유들의 결합을 통해 구성되는 복합적인 유이다. Being, 같음, 다름은 그 정의에 다른 유들의 정의가 포함될 필요가 없을 것이나, 소피스테스는 여러 유들을 자신의 정의에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시간, 장소 등을 또한 유로서 간주할 수 있다면, 테아이테토스도 지금, 여기, 대화 등의 유들을 통해 한정어구들을 결합하여 정의할 수 있는 일종의 유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해당 대화편에서는 계속해서 유들에 대한 논의만이 이루어질 뿐 구체적인 개별자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티마이오스』에서와 같이 운동, 시간, 장소, 원소들 등에 대한 논의가 제시된 것도 아니고 『필레보스』에서 제시되는 그러한 무한정자에 대한 진술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크릴뿐만 아니라 그가 비판하는 콘포드나 로쓰도 마찬가지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을 개별자와 보편자의 결합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진술의 근거’라는 표현의 불분명함에 기인한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양립 가능성과 양립 불가능성이 진술의 성립 근거라고 주장한다. 단어들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개념들이 결합해야 하며 이를 통해서만 진술이 성립한다. 또한 동시에 한 개념이 다른 개념들을 배제하는 모순율을 통해서만 진술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이 모두는 진술의 성립근거라기 보다는 개념 자체의 성립근거이다. Megista gene를 논하는 부분에서 추론되는 바, 모든 각각의 형상은 Being, 같음, 다름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결합 없이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 지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진술 자체라는 유(類, genos)의 성립은 다른 모든 유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결합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진술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과정은 이와 다르다. 이 대화편에서 진술은 그 구성요소로 명사(혹은 이름, onoma)와 동사(혹은 말, rema)를 지니며, 이것은 각기 전자는 사물(pragma)을, 후자는 행위(praxis)를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진술의 구조에 대한 고찰 없이는 진술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근거를 논하기 어렵다. 아크릴은 진술의 형식적 근거와 진술의 내용이 성립하기 위한 근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술의 두 구성요소들이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지시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모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모순율뿐만 아니라 원본과 모상 사이의 관계 또한 진술의 성립 근거가 될 것이다.

아크릴은 양립불가능성을 일종의 모순관계로 파악하고 이것이 수용될 경우 진술이 무의미해지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가 드는 예시는 ‘운동이 정지한다’와 같은 진술이다. 그러나 256b6-8에서 손님은 운동과 정지의 결합 가능성을 언급한다. 또한 그에 앞서 gigantomachia를 논하는 과정에서 운동과 정지는 모두 인식의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설명된다. 어떤 것이 정지해 있지 않다면 그것을 말하거나 지시하는 그 순간 그것이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이므로, 사유나 진술을 위해 그 대상은 정지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지해 있기만 하다면 인식의 작용을 받아 인식된 것으로 변하는 그러한 운동조차 불가능할 것이므로, 또한 사유나 진술의 대상은 운동해야만 한다. 따라서 운동과 정지 각각이 진술되고 사유될 수 있는 한에서 그것들은 운동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는 것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 문장 자체는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진술이나 사유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의 의미는 거짓이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는 진술이 개연적으로 거짓인 반면 모순되는 주술관계의 경우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후자가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蟲-

1. 몇 시간 뒤에는 정암에 가서 이종환 선생님 필레보스 강의를 듣는다. 무한정(apeiron)과 상대적인 양(많고 적음) 그리고 유종관계를 구성하는 중간 형상들과 개별자들 등등에 대해 딱히 손에 잡히는 이해는 아직 갖질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내가 아직 그 놈의 유종관계를 구성하는 『소피스테스』에서의 변증(dialetike)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잘만 간다. 국가장학금은 5학기까지가 제한이던데 나는 벌써 7학기째다. 씨발, 닝기미, 내가 이렇게까지 좆병신이었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나 보다. 이번 주부터 매주 금요일 두시 즈음에는 『소피스테스』 관련 논문들을 읽는 모임이 있다. 이번에는 저 유명한 아크릴의 쓈풀로께 에이도오온을 읽을 계획인데, 뭐, 그냥 그렇다고. 정암에서 이런저런 출판 준비 윤문독회에 귀동냥을 다니는 일은 여전히 신나고 재미난다. 그럼 뭘 하나. 석사만 4년째라니, 이건 뭐 학부부터 다시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음, 정암 강의 듣고 나서는 그야말로 오랜만에 기종석 선생님, 김길수 선생님 뵈러 간다. 아, 면목이 없다. 당신들께서 가르쳐 주신 바를 내가 스스로 지키지도 못하고 있거니와 그 놈의 학교를 7년 가까이 들러 붙어 있었으면서도 뭐 하나 남겨 놓고 나오지도 못했다. 그 사이 학생들은 책의 무서움을 알기 보다는 말장난에 혈안이 되어 가기 시작하고, 어떤 늙은 개새끼는 개지랄을 하다가 쫓겨났다고 하고, 사람이 몇 씩이나 죽어 나가는 동안에 내가 아파하며 고민했던 것들이 다 구라빨 세운 것은 아니었나 회의감만 든다. 그 시간 내내 마음에 품었던 사람을 결국 놓쳐 버리고, 나같은 개쓰레기랑 같이 어울려 놀아 주던 정다운 친구들도 또 놓쳐 버리고,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기 보다는 다만 공유하고 공감하고 싶었을 뿐이건만 신뢰를 쌓을 시간에 이바구만 쳐대다가 미친 개꼰대새끼 취급을 받으며, 이제는 아마 잊혀졌겠지. 지난 10년이 내게 티끌만치라도 남아 있다면 그마저도 내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죄책감을 불러 오는 부채이지 싶다. 이제 남은 거라곤 그저 책 읽고 논문 쓰고 그러는 것뿐인데, 그것마저 놓쳐 버리면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번 달로 나랏돈 얻어 먹는 것도 쫑이고, 과외는 있다가 없다가 그러고, 아부지는 꼬장이나 부리며 계속 되도 않는 사업으로 재산이나 까먹고 계시고, 어무이도 이제 돈 벌어 오시기엔 이곳저곳 몸 고장나는 통에 무리가 이만저만하지 않은데, 이 와중에 그나마 수료라도 해 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봄이다. 봄처럼 싫은 것도 드물다. 옘병할 우라져 쳐 자빠질 씹창같은 꽃들이 만발을 하니 다 불살라 버리고 싶달까, 뭐가 그렇게 신나고 즐겁고 파릇파릇한지 모르겠다. 빙하기나 와 버려라. 아, 씨발, 그럼 나 돈 없어서 얼어 뒈지겠네. 뭐 그냥저냥하고 어쩌면 비교적 널널하고 느긋한 고난과 역경이다. 취직을 했든 장사를 했든 이보다 나았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를 않으니. 어디든 이 악물고 빡세게 엉겨 붙어 버티고 앉았는 사람들뿐이지 않겠나, 금수저 물고 비단으로 똥귀저기 해입는 윗동네님네들이 아니고서야, 한국 망해라 씨바.

2.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미친 놈 술주정 부리듯 끊임없이 씨부리는데도 뭔가 속에 쌓인 똥 같은 게 싸질러지질 않는다. 게워내고 싸지르는 게 필요한데, 잘못된 믿음들이든 잘못 쳐먹은 쓰레기든 뭐든. 그렇게 다 갈아 엎어야 새 바닥에 뭐라도 주워다 쳐 넣을 것 아닌가. 어쨌든. 소크라테스 흉내를 내는 강신주는 예의 그 정신나간 젊은 껄렁패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하다. 그 주둥이로 '철학'이라고만 지껄이지 않는다면 의미있는 일을 한다고는 생각한다. 현실과 그 속의 적나라한 자기 자신의 깜냥을 직시하도록 강요하고 몰아 세우는 것, 구체적인 밑바닥에서 제 두 발로 서서 발을 내딛게끔 닥달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뒈질 놈은 안 그래도 뒈지고 살 놈은 뭔 지랄을 해도 사니까, 딱히 사정 봐줄 건 없지. 그런데 서양철학만 해도 그 역사가 넉넉잡아 3천년이 되어 가는 마당에, 그 모든 노력을 개무시하고 뜬금없이 '너 자신을 알라' 이 지랄을 하면서 주체를 일깨우니 뭐니 하는 게 정말로 '철학'이라는 학문이 맡아야 할 역할인지 모르겠다. 아니, 그게 어쩌면 철학한다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다 하더라도, 저 오랜 역사를 제대로 소화해내지도 못한 이 시궁창에서 금꽃병에 천년화를 심겠노라고 주접을 떠는 게 가당키나 한지 그걸 모르겠다. 철학은 무슨 개뿔이 철학인가, 글줄도 못 알아 쳐먹는 새끼들 싸그리 긁어 모아 대학구석에 쳐박아 놓고서는 다이어트 가르치고 스키 가르치고 술이나 쳐먹이고 내쫓듯 졸업시키면서 뒷돈이나 챙기는 나라에서. 유불도 경전들의 편집이 제대로 되었나 고중세 근대 현대 서양 저술들이나 제대로 다 번역을 했나 그런 거 도맡을 연구자들이나 족히 뽑아냈나 아니 그럴 푼돈 줄 구멍이나 만들어 뒀나, 좆을 빨고 아주 그냥 히마티온 걸치고 고대 그리스 코스프레 하면서 철학 처음부터 다시 싹 다 새로 시작할까? 딱히 뭔 짓거리인지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떤 새끼는 칸트가 낫네 플라톤이 낫네 칸트도 모르는 좆뉴비들이랑 뭔 얘기를 하냐느니 개소리나 하고 앉았고(씨부랄, 『순수이성비판』이나 붙들고 있어 봤냐? 그게 좆나 지 새끼 일기장마냥 침발라가며 한 두 시간 읽으면 아주 머리에 쏙쏙 박히고 그러지? 대단한 천재들 나셨네. 누가 낫니 못하니를 떠나서 이제 막 배우는 새끼가 한다는 소리가 저 따위란 게 일단 빡치지 않나.), 또 어떤 새끼는 100년도 지난 영역본을 가져다가 플라톤을 읽네 영어 공부를 하네 마네 씨발 알려줘도 다 씹고 지랄을 해대고 있지를 않나 무슨 쳐 읽지도 않은 외국 저술 가져다가 씨부리며 잘난 척을 해대질 않나, 어떤 새끼는 뭐 프로타고라스인지 피타고라스인지 파르메니데스인지 지가 걔 애인이래나 뭐래나 이 지랄을 하며 고대 그리스어 문법 좀 하라고 선생들 달라 붙고 제자까지 붙여다가 주마다 보쟀더니 노느라 바쁘셔서 쳐 나오지도 않은 주제에 지가 딴 새끼들을 가르치네 마네 이 지랄을 하고 있다고 하시고, 그 새끼들이 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씨부리면 '아, 꼰대새끼 또 지랄이야' 이러고 말겄지. 뭐 그래야 마땅한 일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함께 읽고 묻고 따지고 그러지도 못한 주제에 뭐라고 좆같지도 않게 선배질을 쳐 하겠냐. 밥을 사줬냐 술을 사줬냐 학자금 대출 이자라도 내줬냐. 근데 쫌 내가 챙겼던 새끼들한테는 꽤나 서운하기도 하다. 니들에게 내가 뭐라도 해줬다면 니들도 쟤들한테 뭣 좀 해 주면 안 되는 거냐. 날 쓰레기 취급하며 떠났던 누군가는 여기저기에서 다시 철학자연하며 겁없이 씨부리는 일을 이리저리 싸지르고 다닌다고 들었고, 뭐 그 친구도 내가 직접 함께했던 시간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니 내가 가타부타할 자격은 없지. 같이 머리 싸매고 끙끙거렸던 놈들도 이젠 뒷방늙은이 취급을 받을 테니 내가 걔들한테 뭐라 하기도 참 꼴이 우습고. 모르겠다. 말 그대로의 '생계'를 지 스스로 책임지고, 제 3세계 변방에서 황국의 철학을 빌어다 쓰는 주제를 알고서 외국어 좆나게 배우고, 낱자 하나 토씨 하나 곱씹어 가며 읽은 적 없는 지난 날을 머리 쳐박고 후회하고 반성하면서 글 읽는 법부터 앗싸리 다시 배우고, 같은 분야에 투신한 다른 나라 새끼들이 앞서간 거리만큼의 노력을 추가하고 이미 없는 것이 검증된 그 비루한 재능을 마른 나무에서 즙 짜내듯 안간힘을 써서 뽑아내 또 노력을 쏟아 부어서, 안으로는 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로 그 학문의 역사와 체계를 가늠하고 밖으로는 이 학문이 기대고 붙드는 다른 학문들을 조망하고 이 모든 것들이 속하고 또 뒤섞이는 현실로부터 눈 돌리지 말고, 이게 다 되면 니들이 철학자라고 씨부리든 플라톤의 재림이라 자처를 하든 뭘 하든 상관 않겠는데, 니들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그러고들 있냐? 옌장, 모르겠다. 자꾸만 자꾸만 나는 무섭고 죄스럽다. 죽은 스승 죽은 선배 죽은 친구를 떠올리며 이렇게 떠올리고 언급하는 것조차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결국 또 그냥 떠들고 마는 거다.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하고 도모하며 막막하다 못해 까마득한 일더미에 파묻혀 조용히 번역하고 논문 내고 강의하는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부끄럽고 그냥 죽겠는 거다. 살고 죽어 가면서 이 바닥을 여기까지 명줄 이어 놓은 사람들에게, 내가 앞서 개쌍욕을 쳐던진 저 씹새들이 똥물을 들이붓고 있다는 생각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려나. 니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혹은 애써 사는 사람들이 니들에게 이 따위로 모욕을 당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냥 잠자코 연구하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건가, 니깟 것들의 취미생활에 기여하기 위해 시간 쓰고 마음 쓰고 하기에는, 이 미친 세상에서 저러한 노력들이 너무 아까울 만치 값지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는 건가. 뭐, 철학을 코에 가져다 걸든 머리 위에 뒤집어 쓰든 사실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나는 지금 동정과 연민에 호소하고 있는 거다. 이 미친 꼬라지를 쳐다 보고 앉았는 나를 긍휼히 여기사 제발들 좀 그만들 좀 해주면 안 되겠나. 흐, 안 되겠지.

3. 술이 고프고 사람이 고프다. 학부를 졸업하자 마자 나는 연달아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술에 취해서는 경찰차에 실려 가고 응급실로 실려 가고 그랬더랬다. 된통 다치고 나서는 요즘 들어서는 그렇게까지 쳐 마시고 나뒹굴지는 않는듸, 뭐 어쨌든 그랬더랬다. 예전엔 억지로 혼자이려고 지랄을 했더랬다만 이제는 그냥 딱히 아무 생각도 없다. 둘러 보면 혹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고 딱히 독신이 꿈인 것도 아니고 사람이 싫은 것도 아니건만, 요즘 들어 나는 한결 괴팍해진 듯하다. 예전에는 학회를 하든 토론을 하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냥 흥분해서 언성이 높아졌을 뿐인데 요즈음은 되도 않는 소리하고 억지 부리는 새끼들 꼬락서니가 역겹고 아니꼬와서 버럭질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다 맞고 니들 다 틀리고 좆나 나님 킹왕짱ㅋㅋ 뭐 이 지랄을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앗싸리 아주 잘 아는 선생 얘기나 들었으면 하는 거다. 씨잘데기 없는 잡소리들 쳐 듣고 앉아 있기에는 내가 너무너무 부족하고 뒤쳐져 있고 병신이란 생각에 견딜 수가 없어서, 조급해서 말이다. 뭐 씨발 딱히 대단히 신선하고 기발한 것도 아닌 얼렁뚱땅 때려잡는 감으로다가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똥오줌 구분도 못하고 지껄여대는데 내가 왜 참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안 참고 토악질을 해댄 내 뻘소리들도 만만찮은 뻘소리이긴 매한가지겠으나, 그래서 이중 삼중으로 화가 나는 것이지. 나도 싫고 니들도 싫고. 픽사 'Up' 앞부분이 생각나 뜬금없이 엉엉 울었다. 나도 긴 시간을 함께하고 서로 믿으며 어울린 그런 사람을 곁에 둘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부러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국민학교 때 첫사랑과 생이별을 하지만 않았으면 그리 될 수 있었으려나, 아님 사춘기도 오기 전부터 시작된 빌어먹을 중2병을 잘만 피해 갔더라면 사정이 조금 나았으려나, 내내 지랄만 하고 살다가 사람 하나 남기질 못하고 나는 벌써 주변에 다들 시집장가가고 애 낳고 살림살이 걱정하는 인간들에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그게 나쁘단 건 아니고, 이제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얘기랄까 뭐랄까. 'Up'에서 주인공 노친네는 헤어지고 나서까지 전적인 신뢰를 등에 업고 행복했을 것 같은데, 나는 남에게서는커녕 내 자신에게서도 신뢰를 얻질 못 하겠으니 이 일을 어쩌나. 아, 나 좆나 감성돋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 것이, 주변에 하나 둘 짝을 찾아 가정을 꾸리고 무난한 행복을 염원하며 외롭지 않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나는 필레보스마냥 그리 생각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고 즐겁고 행복하면 된 거다. 어쨌든 당장의 문제는 슬프고 아프고 불행한 자들이 남았다는 것이고, 진정으로 좋은 것이니 있는 그대로의 정의니 뭐니 하는 배부른 소리는, 여태껏 그래 왔듯 차근차근 고민할 놈들이나 고민하면 될 일이다. 세상에 기여하는 정도로만 보아도 학자나부랭이들이 씹지랄에 비하면야 당신들의 행복은 더할 나위 없이 생산적이고 긍정적이다. 기필코 결단코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길 바란다, 다들. 난 이 현실에서 도망나온 시궁창에서 좀 더 굴러야 쓰겄다.

-蟲-

{ΣΩ.} Τοῦτ' αὐτὸ τοίνυν ἡμᾶς ὁ πρόσθεν λόγος ἀπαιτεῖ, πῶς ἔστιν ἓν καὶ πολλὰ αὐτῶν ἑκάτερον, καὶ πῶς μὴ ἄπειρα εὐθύς, ἀλλά τινά ποτε ἀριθμὸν ἑκάτερον ἔμπροσθεν κέκτηται τοῦ ἄπειρα αὐτῶν ἕκαστα γεγονέναι;
따라서 앞서의 진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바로 이것, 어떻게 그것들 양자(지혜와 쾌락)가 하나이면서 여럿인지, 그리고 어떻게 곧장 한정 없는 것들 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의 각각의 것들이 한정 없는 것들이 되기에 앞서 둘 각각이 어쨌든 무슨 수를 얻는지 하는 것일세.

{ΣΩ.} Λόγων ποτέ τινων πάλαι ἀκούσας ὄναρ ἢ καὶ ἐγρηγορὼς νῦν ἐννοῶ περί τε ἡδονῆς καὶ φρονήσεως, ὡς οὐδέτερον αὐτοῖν ἐστι τἀγαθόν, ἀλλὰ ἄλλο τι τρίτον, ἕτερον μὲν τούτων, ἄμεινον δὲ ἀμφοῖν. καίτοι τοῦτό γε ἂν ἐναργῶς ἡμῖν φανῇ νῦν, ἀπήλλακται μὲν ἡδονὴ τοῦ νικᾶν· τὸ γὰρ ἀγαθὸν οὐκ ἂν ἔτι ταὐτὸν αὐτῇ γίγνοιτο. ἢ πῶς;
오래 전 언젠가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쾌락과 지혜에 관한 무슨 진술(논변)들을 들었는데 이제 생각이 나는군, 좋음이란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니고, 오히려 그 밖의 무언가 세 번째 것으로, 그것들과는 다르고, 그것들보다 더 나은 것이라 했지. 그러니 적어도 이 점이 이제 우리에게 사실로 드러난다면, 쾌락은 승리로부터 떨어져 나올 걸세. 좋음은 더 이상 그것과 같아지지 않을 테니까. 아니면 어찌 되겠나?

{ΣΩ.} Μίκρ' ἄττα τοίνυν ἔμπροσθεν ἔτι διομολογησώμεθα. 그렇지만 아직 먼저 사소한 몇 가지를 우리가 합의해야 하겠네.
{ΠΡΩ.} Τὰ ποῖα; 어떤 것들을요?
{ΣΩ.} Τὴν τἀγαθοῦ μοῖραν πότερον ἀνάγκη τέλεον ἢ μὴ τέλεον εἶναι; 좋음의 몫(운명)은 필연적으로 완전한가 아니면 불완전한가?
{ΠΡΩ.} Πάντων δήπου τελεώτατον, ὦ Σώκρατες. 분명 모든 것들 중 가장 완전하지요, 소크라테스.
{ΣΩ.} Τί δέ; ἱκανὸν τἀγαθόν; 그럼 어떤가? 좋음은 충분한 것인가?
{ΠΡΩ.} Πῶς γὰρ οὔ; καὶ πάντων γε εἰς τοῦτο διαφέρειν τῶν ὄντων.
어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 점에서는 ~인 모든 것들보다 특출납니다.
{ΣΩ.} Τόδε γε μήν, ὡς οἶμαι, περὶ αὐτοῦ ἀναγκαιότατον [Stephanus page 20, section d, line 8] εἶναι λέγειν, ὡς πᾶν τὸ γιγνῶσκον αὐτὸ θηρεύει καὶ ἐφίεται βουλόμενον ἑλεῖν καὶ περὶ αὑτὸ κτήσασθαι, καὶ τῶν ἄλλων οὐδὲν φροντίζει πλὴν τῶν ἀποτελουμένων ἅμα ἀγαθοῖς.
참으로 이것만은, 내 생각이네만, 그것에 관하여 말하는 게 가장 필연적인 일인 듯하군, 그것을 아는 모든 것이 그것을 좇고 그것에 관하여 붙잡고 얻기를 바라 향해 나아가며, 좋음들과 함께 완성되어 나오는 것들 말고는 여타의 것들 중 아무것도 사려하지 않는다고 말일세.
{ΠΡΩ.} Οὐκ ἔστι τούτοις ἀντειπεῖν. 그런 것들에는 반대할 수가 없습니다.
{ΣΩ.} Σκοπῶμεν δὴ καὶ κρίνωμεν τόν τε ἡδονῆς καὶ τὸν φρονήσεως βίον ἰδόντες χωρίς.
그럼 쾌락의 삶과 지혜의 삶을 따로 보면서 살펴 보고 판단해 보세.
{ΠΡΩ.} Πῶς εἶπες; 어찌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ΣΩ.} Μήτε ἐν τῷ τῆς ἡδονῆς ἐνέστω φρόνησις μήτ' ἐν τῷ τῆς φρονήσεως ἡδονή. δεῖ γάρ, εἴπερ πότερον αὐτῶν ἔστ' ἀγαθόν, μηδὲν μηδενὸς ἔτι προσδεῖσθαι· δεόμενον δ' [Stephanus page 21, section a, line 1] ἂν φανῇ πότερον, οὐκ ἔστι που τοῦτ' ἔτι τὸ ὄντως ἡμῖν ἀγαθόν.
쾌락의 삶에도 지혜가 없고 지혜의 삶에도 쾌락이 없게 말이지. 왜냐하면, 만일 정말로 그것들 중 어느 한쪽이 좋다면야, 어떤 점에서도 아무것도 더 이상 필요(부족)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지. 그런데 둘 중 어느 한쪽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아마도 더 이상 그건 진정으로 우리에게 좋음이지 않겠지.

{ΣΩ.} Νοῦν δέ γε καὶ μνήμην καὶ ἐπιστήμην καὶ δόξαν [Stephanus page 21, section b, line 7] μὴ κεκτημένος ἀληθῆ, πρῶτον μὲν τοῦτο αὐτό, εἰ χαίρεις ἢ μὴ χαίρεις, ἀνάγκη δήπου σε ἀγνοεῖν, κενόν γε ὄντα πάσης φρονήσεως;
어쨌든 사유와 기억과 인식과 참된 믿음을 얻지 못하고서는, 우선 바로 이것, 기쁜지 기쁘지 않은지를 자네가 알지 못함이 필연적일 게 분명하지? 모든 지혜로부터 텅 비어 있으니.
{ΠΡΩ.} Ἀνάγκη. 필연적입니다.
{ΣΩ.} Καὶ μὴν ὡσαύτως μνήμην μὴ κεκτημένον ἀνάγκη δήπου μηδ' ὅτι ποτὲ ἔχαιρες μεμνῆσθαι, τῆς τ' ἐν τῷ παραχρῆμα ἡδονῆς προσπιπτούσης μηδ' ἡντινοῦν μνήμην ὑπομένειν· δόξαν δ' αὖ μὴ κεκτημένον ἀληθῆ μὴ δοξάζειν χαίρειν χαίροντα, λογισμοῦ δὲ στερόμενον μηδ' εἰς τὸν ἔπειτα [Stephanus page 21, section c, line 6] χρόνον ὡς χαιρήσεις δυνατὸν εἶναι λογίζεσθαι, ζῆν δὲ οὐκ ἀνθρώπου βίον, ἀλλά τινος πλεύμονος ἢ τῶν ὅσα θαλάττια μετ' ὀστρεΐνων ἔμψυχά ἐστι σωμάτων. ἔστι ταῦτα, ἢ παρὰ ταῦτα ἔχομεν ἄλλα διανοηθῆναι;
게다가 마찬가지로 기억은 지니지 못하고서는 자네가 언제 기뻤는지 기억하지 못함도, 순간 당면한 쾌락에 대해서도 무슨 기억이 되었든지 남지 않음도 필연적일 게 분명하네. 그런데 이번엔 참된 믿음을 얻지 못하고서는 기뻐 하는 자가 기쁘다고 믿지도 못하고, 헤아림을 결여하여 이후의 시간에 기뻐하리라 헤아릴 능력도 없음이 필연적일 게 분명하고, 인간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해파리의 삶이나 조개들과 더불어 바닷속 영혼 없는 것들의 몸뚱이들에 속한 삶을 사는 걸세. 이러한가, 아니면 이런 일들 말고 다른 것들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을까?

{ΣΩ.} Εἴ τις δέξαιτ' ἂν αὖ ζῆν ἡμῶν φρόνησιν μὲν καὶ νοῦν καὶ ἐπιστήμην καὶ μνήμην πᾶσαν πάντων κεκτημένος, ἡδονῆς δὲ μετέχων μήτε μέγα μήτε σμικρόν, μηδ' αὖ λύπης, ἀλλὰ τὸ παράπαν ἀπαθὴς πάντων τῶν τοιούτων.
이번엔 만일 누군가 우리의 삶이 지혜와 사유 그리고 인식과 기억 이 모든 것들 전부를 얻고서, 그런데 쾌락에는 크든 작든 관여치 아니하며, 또 고통에도 관여하지 않고, 이와 같은 모든 일들에 전적으로 아무런 부침(겪음)이 없이 허용된다면 하는 것일세.

{ΣΩ.} Μῶν οὖν οὐκ ἤδη τούτων γε πέρι δῆλον ὡς οὐδέτερος αὐτοῖν εἶχε τἀγαθόν; ἦν γὰρ ἂν ἱκανὸς καὶ τέλεος [Stephanus page 22, section b, line 5] καὶ πᾶσι φυτοῖς καὶ ζῴοις αἱρετός, οἷσπερ δυνατὸν ἦν οὕτως ἀεὶ διὰ βίου ζῆν· εἰ δέ τις ἄλλα ᾑρεῖθ' ἡμῶν, παρὰ φύσιν ἂν τὴν τοῦ ἀληθῶς αἱρετοῦ ἐλάμβανεν ἄκων ἐξ ἀγνοίας ἤ τινος ἀνάγκης οὐκ εὐδαίμονος.
그러니 물론 이런 것들에 관하여서는 이미 그 둘 중 어느 쪽도 좋음을 지니지 못한다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충분하고도 완전하며 모든 식물과 동물이 택함직한 것일 테니까, 그런 식으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을 것들에게는 말이지. 그런데 만일 우리 중 누군가 그 밖의 것들을 택한다면, 참으로 택함직한 쪽의 본성(자연)을 거슬러 불행스러운 무지나 무슨 필연을 통해 택한 것이겠지.

{ΣΩ.} Τάχ' ἄν, ὦ Φίληβε, ὅ γ' ἐμός· οὐ μέντοι τόν γε [Stephanus page 22, section c, line 6] ἀληθινὸν ἅμα καὶ θεῖον οἶμαι νοῦν, ἀλλ' ἄλλως πως ἔχειν. τῶν μὲν οὖν νικητηρίων πρὸς τὸν κοινὸν βίον οὐκ ἀμφισβητῶ πω ὑπὲρ νοῦ, τῶν δὲ δὴ δευτερείων ὁρᾶν καὶ σκοπεῖν χρὴ πέρι τί δράσομεν· τάχα γὰρ ἂν τοῦ κοινοῦ τούτου βίου αἰτιῴμεθ' ἂν ἑκάτερος ὁ μὲν τὸν νοῦν αἴτιον, ὁ δ' ἡδονὴν εἶναι, καὶ οὕτω τὸ μὲν ἀγαθὸν τούτων ἀμφοτέρων οὐδέτερον ἂν εἴη, τάχα δ' ἂν αἴτιόν τις ὑπολάβοι πότερον αὐτῶν εἶναι. τούτου δὴ πέρι καὶ μᾶλλον ἔτι πρὸς Φίληβον διαμαχοίμην ἂν ὡς ἐν τῷ μεικτῷ τούτῳ βίῳ, ὅτι ποτ' ἔστι τοῦτο ὃ λαβὼν ὁ βίος οὗτος γέγονεν αἱρετὸς ἅμα καὶ ἀγαθός, οὐχ ἡδονὴ ἀλλὰ νοῦς [Stephanus page 22, section d, line 8] τούτῳ συγγενέστερον καὶ ὁμοιότερόν ἐστι, καὶ κατὰ τοῦτον τὸν λόγον οὔτ' ἂν τῶν πρωτείων οὐδ' αὖ τῶν δευτερείων ἡδονῇ μετὸν ἀληθῶς ἄν ποτε λέγοιτο· πορρωτέρω δ' ἐστὶ τῶν τριτείων, εἴ τι τῷ ἐμῷ νῷ δεῖ πιστεύειν ἡμᾶς τὰ νῦν.
아마도, 필레보스, 내 사유야 그렇겠지. 하지만 적어도 참되고도 신적인 사유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어떻든 다른 처지이리라 생각한다네. 그러므로 우승을 놓고 이러한 (지혜와 쾌락의)공동의 삶에 맞서 아직껏 내가 사유를 위해 논쟁을 하는 건 아니네만, 2등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무엇을 할지 알아보고 고찰해야만 하네. 왜냐하면 아마도 이러한 공동의 삶에 대해 우리 양편 각자가 한쪽은 사유를 원인으로, 다른 쪽은 쾌락을 원인으로 삼을 테고, 그렇게 좋음은 그 양편 어느 쪽의 것도 아닐 테지만, 아마도 누군가 그것들 중 어느 한쪽을 원인으로 간주하겠지.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나는 필레보스에 맞서 아직은 훨씬 더 크게 싸울 걸세. 이러한 혼합된 삶에서, 그 삶이 취하여 이러한 택함직하고도 동시에 좋은 삶이 된 바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든지 간에, 쾌락이 아니라 사유가 이 삶과 더욱 동류이자 더욱 닮은 것이라고, 그리고 같은 논변에 따라서 어떤 경우든 즐거움에 우승도 또한 2등도 함께한다고 참으로 논할 수는 없으리라고 말이지. 3등과도 더 멀리 떨어진 것이지, 만일 어떠 점에서든 우리가 지금의 일들에 있어서 내 사유를 신뢰해야 한다면 말일세.

-蟲-

  하나 자체와 하나들 그리고 하나를 나누어 가진 것들. 개별자들은 하나라는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하나가 '된다.'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겪음으로써 이전까지 어떤 무엇이지 않았던 것이 비로소 바로 그 무엇인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어 'gignomai'는 become의 뜻을 지니고 우리말에서는 '있다/이다'의 구분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생긴다/된다'의 두 의미로 구분되어 해석될 수 있다. 개별자는 하나에 참여하여 그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하나인 것이 되지만 이 하나라는 이데아로부터 분리될 경우 하나이지 않은 것이 된다. 하나의 인간이 사지를 지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뉘면서도 여전히 한 사람일 수 있는 까닭은 그를 하나이게끔 해주는 것과 그를 여럿이게끔 해주는 것이 따로 독립된 덕분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란 것은 모순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 자체의 이데아는 개별자들만이 아닌 여타의 이데아들에 대해서도 관계를 맺는다. 사람, 소, 좋음, 참은 각기 한 가지의 것이며 그 각각이 아래로 여러 사람들, 소들, 좋은 것들과 참인 문장들 혹은 믿음들을 지닌다. 이러한 이데아들 각각은 하나이며 그 자체로 여럿일 수는 없다. 또한 여러 개별자들이 각자의 정의나 속성을 이데아에 의존하는 한에서도 그 관계 속에서 이데아는 하나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자체를 제외한 여타의 이데아들은 그 자체의 본성상 하나인 것일 수도 없다.
  반대로 하나 그 자체의 이데아는 같음, 다름, 있음/임, 운동, 정지 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서 멈추어 있어야 하고, 그러한 '같음,' '정지'를 겪고 그것으로 변화하기 위해 또한 움직이고 작용을 받아야 하며 다른 것들에게 작용하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 그 자체를 제외한 여타의 것들로부터 구분되기 위해 이것은 여타의 것들과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조건들 혹은 상태들은 하나 그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것들이다. 하나는 하나이기만 할 뿐이다.
  즐거움은 여러 가지 즐거움들로 나뉜다. 육체적인 즐거움, 정신적인 즐거움, 일시적인 즐거움, 지속적인 즐거움, 큰 즐거움과 작은 즐거움과 이러저러한 즐거움들이 모두 즐거움이라는 하나의 것으로 아울러진다. 다시, 이 여러 가지 즐거움들 각각에 대해 바로 그러한 즐거움으로 명명되는 구체적으로 실현된 즐거움들이 있다. 지금 담배를 피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개소리를 싸지르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어제 잠들기 전에 느낀 즐거움과 온갖 것들의 매순간마다의 서로 다른 즐거움들이 어떤 종류의 즐거움에 속하고 그 여러 종류의 즐거움들이 다시 하나의 즐거움에 속한다. 하나에서 몇 가지의 것들로 다시 한정되지 않은 것들에까지 이데아로부터 개별자에 이르는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구체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이해될 수 없다. 혹은 그 이해의 확인을 구할 수 없다.
  단순한 이데아와 복잡한 이데아가 구분될 수 있다면 여기에는 상하의 구분 또한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음의 이데아는 크기가 같음의 이데아나 모양이 같음의 이데아 혹은 색이 같음의 이데아에 비해 더 넓은 외연을 지닐 것이고 수동적인 측면은 더욱 적을 것이다. 그 이데아들의 중첩에 시간과 공간 각각의 이데아가 공존할 수 있다면 구체적인 개별자들 역시 이를 테면 속성들의 다발과 같은 식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 이러저러한 조건들이 결합한 결과물로서 바로 여기 이 내가 그 순간의 것으로서 정의될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다.
  그러나 세계의 운동은 형상들의 운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같음과 다름 그리고 그 중간의 것이 결합하고 또한 수학적 비율들에 따라 한정된 뒤 그 마디들이 빈틈없이 나뉘어 일종의 계기적 연쇄를 구성한다(하하하, 개소리의 절정이다!). 그 비율들은 네 가지 원소들과 천체의 운동을 구성하고 이로부터 세계에 시간이 성립하며 이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원인과 필연과 chora에 대한 장인(혹은 제작자, Demiourgos)의 작업을 통해, 그리고 다시 이 작업을 인계받은 천체들 혹은 신들의 지속적인 개입을 통해 물질적 세계에 대한 수학적 이해의 가능성이 확보된다. 세계가 수학적이지 않다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은 걷잡을 수 없는 격류로 휘몰아칠 뿐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규칙적이며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변전한다.
  어쨌든 형상들의 상호 결합은 개별자들의 세계와 매개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필레보스』에서 그러한 매개의 방식이 제시되는가? 『소피스테스』는 형상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하고 『티마이오스』는 자연세계의 합법칙성을 설명하며 『법률』은 『국가』와 『크리티아스』의 이상국가를 지상의 시민들과 매개시킨다. 『소피스테스』에서는 『파르메니데스』에서 제시된 형상들 사이의 독립과 의존의 문제에 답을 하고 『티마이오스』에서는 개별자들의 세계를 설명하지만 『법률』에서 설득(peitho)과 확신(pistis)이 하는 그러한 매개 방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필레보스』에서 한없이 많은 개별자들을 아우르는 일정 가짓수의 말하자면 '중간 이데아들'이 탐구되고 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순한 이데아와 복잡한 이데아들 그리고 개별자들 사이의 삼중의 관계가 탐구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이 어딘가에서는 발견되어야만 한다.
  또 다른 종류의 심각한 문제는 하나라든지 있음/~임이라든지 필연이라든지 하는 것을 다루는 방식으로 '좋음'과 '즐거움'을 탐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먼지와 배설물의 이데아는 부정된 것으로 보인다(부정하지 않을 여지는 없나?). 이데아는, 이데아들은 좋은 것이고 좋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과연 인간이 지니는 어떠한 가치까지 포함된 대답이 필요한 것인가?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정치가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도덕적 가치와 같은 것이 고려되는가? 이미 자연주의적 오류에 대한 지적은 식상할 지경이다. 플라톤 당대에는 이미 자연학자들에 대한 조롱과 신화로 전해진 전통적 가치에 대한 풍자가 횡행하고 있었고 프로타고라스는 신들 따위 뭐가 어떤지 어떻지 않은지조차 모른다고까지 선언하였다. 정식화된 구분은 없을지라도 옳고 그른 것을 논하는 일과 땅을 재고 일삯을 나누는 일 사이의 단순한 차이를 지적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은 또 다른 시대착오의 오류일 것이다. 마치 하나는 좋고 둘은 나쁘며 콩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피타고라스처럼 플라톤이 멍청한 소리를 했다고 봐야 할까? 혹은 절제와 용기와 경건 같은 것들, 좋음 그 자체와 아름다움 그 자체, 정의 그 자체만이 이데아의 자격이 있으며 저 하늘의 태양 말고 모든 빛나고 따스한 것들은 일절 진정한 이데아의 지위를 얻을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인식 중 대체 어떤 것들이 그렇게나 가치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물론 좋음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최소한 규범윤리학에 있어서 용의 여의주 같은 것일 터이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있다면 만능이라 뭐 그런 얘기이다. 객관적 가치기준의 확보는 곧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향, 민주적인 만장일치와 같은 허황된 꿈을 실현할 근거 혹은 토대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어마무지한 뻥을 치기에는, 플라톤의 성향이 그리 급진적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논리 따로, 자연 따로, 사회나 정치 또 따로 다루고 언어 따로, 교육 따로, 종교 따로 문학예술 또 따로 다루는 사람이 그 모든 작업들이 시사하는 비약과 매개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곧장 '에라 모르겠다' 하며 거대한 개뻥을 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냥 마음껏 개소리가 하고 싶어서 싸질러 보았는데 잘 모르겠다. 나는 뭔가 지금 어줍잖게 칸트식으로 플라톤을 읽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상의 세계만이 인식의 대상이고 그곳은 규칙과 필연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의 지성에 합당한 자연법칙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따름이다. 자유와 도덕과 절대선은 저 너머 어딘가에, 음, 뭐, 있다고 하기도 뭐하고 뭐라고 해야 하려나. 그러나 저러나 칸트새끼가 우리 노친네한테 진공 속 비둘기마냥 푸왁하고 사지고 대가리고 내장까지 죄다 터져 버릴 거라고 욕을 했던 게 생각나네. 하지만 그가 말했던 '공기의 저항'이란 걸 무시한 건 오히려 칸트 아닌가? 말하자면 문헌학적인 마찰이라든지, 아님 지금까지 싸지른 내 개소리에서 시사되는 여러 문제들이라든지, 그런 걸 제껴놓고 '플라톤 개객끼'라 하는 게 대기권을 뚫고 솟구쳐 오른 비둘기꼬라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짱 먹는 도로의 무법자는 역시나 헤겔이려나. 다 밀어 버려! 아니아니, 사실 진짜 스페이스 도브는 학부찌질이들이겠지. 씨발, 배우는데 시간도 노력도 안 들인 걸 발만 한 번 걸쳤다 빼고서는 지가 무슨 권위자라도 된듯 읽어 본 적도 없는 외국서적들을 씨부리고 라틴어가 어쩌니 고대 그리스어가 저쩌니 씨부려대며 주제넘게 배울 것과 배우지 않을 것을 취사선택하고 조언과 충고를 꼰대질로 치부하며 끝간 데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꼬락서니라니. 딱 보니 내 꼬라지 나서 다 망해 버릴 거다. 다 죽자.

-蟲-

Ὧδ' οὖν ἡμεῖς λέγωμεν πρῶτον περὶ πάσης γενέσεως ἐπελθόντες· ἔστι γὰρ κατὰ φύσιν τὰ κοινὰ πρῶτον εἰπόντας οὕτω τὰ περὶ ἕκαστον ἴδια θεωρεῖν. φαμὲν γὰρ γίγνεσθαι ἐξ ἄλλου ἄλλο καὶ ἐξ ἑτέρου ἕτερον ἢ τὰ ἁπλᾶ λέγοντες ἢ τὰ συγκείμενα. λέγω δὲ τοῦτο ὡδί. ἔστι γὰρ γίγνεσθαι ἄνθρωπον μουσικόν, ἔστι δὲ τὸ μὴ μουσικὸν γίγνεσθαι μουσικὸν ἢ τὸν μὴ μουσικὸν ἄνθρωπον ἄνθρωπον μουσικόν.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우선 생성 전체에 관하여 논의를 진행하면서 이런 식으로 진술해 보자. 왜냐하면 자연에 대해 공통된 것들을 우선 말하고 그런 식으로 각각에 관한 개별적인 것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한 것들을 논하면서든 혼합된 것들을 논하면서든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혹은 다른 것으로부터 또 다른 것이 (생긴다)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바로 이런 식으로 말한다. 즉 인간이 음악적이게 될 수 있는데, 음악적이지 않은 것이 음악적으로 될 수 있거나 음악적이지 않은 인간이 음악적이지 않은 인간이 음악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ἁπλοῦν μὲν οὖν λέγω τὸ γιγνόμενον τὸν ἄνθρωπον καὶ τὸ μὴ μουσικόν, καὶ ὃ γίγνεται ἁπλοῦν, τὸ μουσικόν· συγκείμενον δὲ καὶ ὃ γίγνεται καὶ τὸ γιγνόμενον, ὅταν τὸν μὴ μουσικὸν ἄνθρωπον φῶμεν γίγνεσθαι μουσικὸν ἄνθρωπον. τούτων δὲ τὸ μὲν οὐ μόνον λέγεται τόδε γίγνεσθαι ἀλλὰ καὶ ἐκ τοῦδε, οἷον ἐκ μὴ μουσικοῦ μουσικός, τὸ δ' οὐ λέγεται ἐπὶ πάντων· οὐ γὰρ ἐξ ἀνθρώπου ἐγένετο μουσικός, ἀλλ' ἅνθρωπος ἐγένετο μουσικός. 
그러니까 나는 되는 것으로서 인간과 음악적이지 않은 것을 단순한 것으로 진술하고, 또한 되어지는 결과, 음악적인 것도 단순하다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가 음악적이지 않은 인간이 음악적인 인간이 된다고 말할 때, 그 되어진 결과도 되는 것도 혼합된 것이라 진술한다. 이것들 중 한편은 여기 이것이 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여기 이것으로부터 나온다고도 진술된다. 예를 들어 음악적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음악적인 것으로. 반면 다른 쪽은 모든 경우들에 관하여 그렇게 진술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음악적이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음악적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τῶν δὲ γιγνομένων ὡς τὰ ἁπλᾶ λέγομεν γίγνεσθαι, τὸ μὲν ὑπομένον γίγνεται τὸ δ' οὐχ ὑπομένον· ὁ μὲν γὰρ ἄνθρωπος ὑπομένει μουσικὸς γιγνόμενος ἄνθρωπος καὶ ἔστι, τὸ δὲ μὴ μουσικὸν καὶ τὸ ἄμουσον οὔτε ἁπλῶς οὔτε συντεθειμένον [Bekker page 190a, line 13] ὑπομένει.
그런데 우리가 단순한 것들로서 된다고 말하는 되는 것들 중, 한편은 지속하는 것으로서 되는 반면 다른 쪽은 지속하지 않으면서 된다. 즉 인간은 음악적이게 되면서 인간으로 남고 또한 인간인 반면, 음악적이지 않은 것과 비음악적인 것은 단순하게도 복합적으로도 지속하지 않는다. 
διωρισμένων δὲ τούτων, ἐξ ἁπάντων τῶν γιγνομένων τοῦτο ἔστι λαβεῖν, ἐάν τις ἐπιβλέψῃ ὥσπερ λέγομεν, ὅτι δεῖ τι ἀεὶ ὑποκεῖσθα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καὶ τοῦτο εἰ καὶ ἀριθμῷ ἐστιν ἕν, ἀλλ' εἴδει γε οὐχ ἕν· τὸ γὰρ εἴδει λέγω καὶ λόγῳ ταὐτόν· οὐ γὰρ ταὐτὸν τὸ ἀνθρώπῳ καὶ τὸ ἀμούσῳ εἶναι. καὶ τὸ μὲν ὑπομένει, τὸ δ' οὐχ ὑπομένει· τὸ μὲν μὴ ἀντικείμενον ὑπομένει (ὁ γὰρ ἄνθρωπος ὑπομένει), τὸ μὴ μουσικὸν δὲ καὶ τὸ ἄμουσον οὐχ ὑπομένει, οὐδὲ τὸ ἐξ ἀμφοῖν συγκείμενον, οἷον ὁ ἄμουσος ἄνθρωπος. 
이것들이 정의될 때, 되는 것들 일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파악될 수 있다, 만일 누군가 우리가 말한 방식대로 주목한다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언제나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리고 만일 그 수가 하나이나, 종(형상)은 하나이지 않다면 그 경우에도. 즉 나는 종적으로라는 것을 정의상으로라는 것과 같은 것으로 논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점에서 있는 것과 비음악적이라는 점에서 있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한편은 지속하는 반면, 다른 한편은 지속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대립하지 않는 것은 지속하지만 (왜냐하면 인간이 지속하기 때문이다), 음악적이지 않은 것과 비음악적인 것은 지속하지 않고, 양자로 이루어진 복합물도, 이를 테면 비음악적인 인간도 지속하지 않는다.
τὸ δ' ἔκ τινος γίγνεσθαί τι, καὶ μὴ τόδε γίγνεσθαί τι, μᾶλλον μὲν λέγεται ἐπὶ τῶν μὴ ὑπομενόντων, οἷον ἐξ ἀμούσου μουσικὸν γίγνεσθαι, ἐξ ἀνθρώπου δὲ οὔ· οὐ μὴν ἀλλὰ καὶ ἐπὶ τῶν ὑπομενόντων ἐνίοτε λέγεται ὡσαύτως· ἐκ γὰρ χαλκοῦ ἀνδριάντα γίγνεσθαί φαμεν, οὐ τὸν χαλκὸν ἀνδριάντα. 
그런데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어떤 것이 이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차라리 지속하지 않는 것들에 관하여서 진술된다는 것이며, 이를 테면 비음악적인 것으로부터 음악적으로 되지, 인간으로부터 그리 되지는 않는다. 
τὸ μέντοι ἐκ τοῦ ἀντικειμένου καὶ μὴ ὑπομένοντος ἀμφοτέρως λέγεται, καὶ ἐκ τοῦδε τόδε καὶ τόδε τόδε· καὶ γὰρ ἐξ ἀμούσου καὶ ὁ ἄμουσος γίγνεται μουσικός. διὸ καὶ ἐπὶ τοῦ συγκειμένου ὡσαύτως· καὶ γὰρ ἐξ ἀμούσου ἀνθρώπου καὶ ὁ ἄμουσος ἄνθρωπος γίγνεσθαι λέγεται μουσικός. 
그렇지만 대립되는 것이자 지속하지 않는 것으로부터는 양쪽 방식으로 진술된다, 이것으로부터 이것이 된다고도 이것이 이것이 된다고도. 왜냐하면 비음악적인 것으로부터도 비음악적인 자도 음악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복합적인 것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비음악적인 인간으로부터도 비음악적인 인간도 음악적이 된다고 진술되기 때문이다.
πολλαχῶς δὲ λεγομένου τοῦ γίγνεσθαι, καὶ τῶν μὲν οὐ γίγνεσθαι ἀλλὰ τόδε τι γίγνεσθαι, ἁπλῶς δὲ γίγνεσθαι [Bekker page 190a, line 33] τῶν οὐσιῶν μόνον, κατὰ μὲν τἆλλα φανερὸν ὅτι ἀνάγκη ὑποκεῖσθαί τ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καὶ γὰρ ποσὸν καὶ ποιὸν καὶ πρὸς ἕτερον [καὶ ποτὲ] καὶ ποὺ γίγνεται ὑποκειμένου τινὸς διὰ τὸ μόνην τὴν οὐσίαν μηθενὸς κατ' ἄλλου λέγεσθαι ὑποκειμένου, τὰ δ' ἄλλα πάντα κατὰ τῆς οὐσίας)· ὅτι δὲ καὶ αἱ οὐσίαι καὶ ὅσα [ἄλλα] ἁπλῶς ὄντα ἐξ ὑποκειμένου τινὸς γίγνεται, ἐπισκοποῦντι γένοιτο ἂν φανερόν. ἀεὶ γὰρ ἔστι ὃ ὑπόκειται, ἐξ οὗ τὸ γιγνόμενον, οἷον τὰ φυτὰ καὶ τὰ ζῷα ἐκ σπέρματος. 
된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진술될 때, 그것들 중 일부는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 무엇이 된다고, 반면 실체들의 경우에만 단적으로(단순하게) 된다고 진술될 때, 여타의 것들에 대해서는 되는 무언가가 지속함이 필연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왜냐하면 얼만큼이나 어떠함 그리고 다른 것에 관계함과 [언제] 어디에는, 오직 실체만이 여타의 그 어떤 지속하는 것에 대해서도 진술되지 않고,  반면 여타의 모든 것들은 실체에 대해 진술되기 때문에, 지속하는 무언가에 대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체들도 [여타의] 단순하게 ~인 것들 전부도 지속하는 무언가로부터 된다는 점은, 면밀히 고찰하는 자에게 분명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지속되는 것, 그것으로부터 되는 것이 나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식물들과 동물들은 씨앗으로부터 나온다.

γίγνεται δὲ τὰ γιγνόμενα ἁπλῶς τὰ μὲν μετασχηματίσει, οἷον ἀνδριάς, τὰ δὲ προσθέσει, οἷον τὰ αὐξανόμενα, τὰ δ' ἀφαιρέσει, οἷον ἐκ τοῦ λίθου ὁ Ἑρμῆς, τὰ δὲ συνθέσει, οἷον οἰκία, τὰ δ' ἀλλοιώσει, οἷον τὰ τρεπόμενα κατὰ τὴν ὕλην. πάντα δὲ τὰ οὕτω γιγνόμενα φανερὸν ὅτι ἐξ ὑποκειμένων γίγνεται. 
그런데 단적으로 되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은 형태변화에서 되며, 예를 들어 조각상이 그러하고, 다른 것들은 추가에서 그리 된다, 예를 들어 증가하는 것들. 다른 것들은 분리에서 되고, 예를 들어 그 돌로부터 헤르메스가 되는 것, 다른 것들은 구성에서, 이를 테면 집들, 또 다른 것들은 변화에서, 예를 들어 질료에 따라 전환되는 것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되는 모든 것들은 지속하는 것들로부터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ὥστε δῆλον ἐκ τῶν εἰρημένων ὅτ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ἅπαν ἀεὶ συνθετόν ἐστι, καὶ ἔστι μέν τι γιγνόμενον, ἔστι δέ τι ὃ τοῦτο γίγνεται, καὶ τοῦτο διττόν· ἢ γὰρ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ἢ τὸ ἀντικείμενον. λέγω δὲ ἀντικεῖσθαι μὲν τὸ ἄμουσον, ὑποκεῖσθαι δὲ τὸν ἄνθρωπον, καὶ τὴν μὲν ἀσχημοσύνην καὶ τὴν ἀμορφίαν καὶ τὴν ἀταξίαν τὸ ἀντικείμενον, τὸν δὲ χαλκὸν ἢ τὸν λίθον ἢ τὸν χρυσὸν τὸ [Bekker page 190b, line 17] ὑποκείμενον.
그래서 이야기된 바들로부터 되는 것 일체는 언제나 결합된 것임이 분명하고, 무언가 되는 것이 있는 반면, 그것이 되어지는 무슨 결과가 있으며, 이것은 이중임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지속하는 것이거나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비음악적인 것은 대립된다고, 인간은 지속한다고, 그리고 대립되는 것은 형태없음과 형상없음과 구조없음이라고, 지속하는 것은 청동이나 돌이나 황금이라고 말한다.
φανερὸν οὖν ὡς, εἴπερ εἰσὶν αἰτίαι καὶ ἀρχαὶ τῶν φύσει ὄντων, ἐξ ὧν πρώτων εἰσὶ καὶ γεγόνασι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ἀλλ' ἕκαστον ὃ λέγεται κατὰ τὴν οὐσίαν, ὅτι γίγνεται πᾶν ἔκ τε τοῦ ὑποκειμένου καὶ τῆς μορφῆς· σύγκειται γὰρ ὁ μουσικὸς ἄνθρωπος ἐξ ἀνθρώπου καὶ μουσικοῦ τρόπον τινά· διαλύσεις γὰρ [τοὺς λόγους] εἰς τοὺς λόγους τοὺς ἐκείνων. δῆλον οὖν ὡς γίγνοιτ' ἂν τὰ γιγνόμενα ἐκ τούτων. 
그러므로, 만일 자연상의 ~인 것들에 원인들과 원리들이 속한다면, 최초의 그것들로부터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실체에 대해 진술되는 것 각각이 있고 되는 것들이라면, 모든 것이 지속하는 것과 형태로부터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음악적인 인간은 인간과 음악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복합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분할들이 저것들의 정의들로 나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되는 것들이 이것들로부터 되리란 것이 분명하다.
ἔστι δὲ τὸ μὲν ὑποκείμενον ἀριθμῷ μὲν ἕν, εἴδει δὲ δύο (ὁ μὲν γὰρ ἄνθρωπος καὶ ὁ χρυσὸς καὶ ὅλως ἡ ὕλη ἀριθμητή· τόδε γάρ τι μᾶλλον, καὶ οὐ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ἐξ αὐτοῦ γίγνετα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ἡ δὲ στέρησις καὶ ἡ ἐναντίωσις συμβεβηκός)· ἓν δὲ τὸ εἶδος, οἷον ἡ τάξις ἢ ἡ μουσικὴ ἢ τῶν ἄλλων τι τῶν οὕτω κατηγορουμένων. 
그런데 지속하는 것은 수적으로 하나인 반면, 종적으로는 둘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황금과 일반적으로 질료는 가산적인데. 이것은 오히려 여기 이 무엇이고, 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우연적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결핍과 반대는 우연적이다.) 그런데 종은 하나이다, 예를 들어 질서나 음악 혹은 그런 식으로 진술(범주화)되는 여타의 것들 중 어떤 것은.
διὸ ἔστι μὲν ὡς δύο λεκτέον εἶναι τὰς ἀρχάς, ἔστι δ' ὡς τρεῖς· καὶ ἔστι μὲν ὡς τἀναντία, οἷον εἴ τις λέγοι τὸ μουσικὸν καὶ τὸ ἄμουσον ἢ τὸ θερμὸν καὶ τὸ ψυχρὸν ἢ τὸ ἡρμοσμένον καὶ τὸ ἀνάρμοστον, ἔστι δ' ὡς οὔ· ὑπ' ἀλλήλων γὰρ πάσχειν τἀναντία ἀδύνατον. 
이런 이유로 한편으로 원리들은 둘이라고 논해져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 셋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한편으로는 반대라고, 예를 들어 만일 누군가 음악적인 것과 비음악적인 것 혹은 뜨거움과 차가움 또는 조화로운 것과 부조화한 것을 말한다면, 반면 그렇지 않다고 논해져야 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원리들이 서로에 의해 반대를 겪는 일은 불가능하기 떄문이다.
λύεται δὲ καὶ τοῦτο διὰ τὸ ἄλλο εἶναι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τοῦτο γὰρ οὐκ ἐναντίον. ὥστε οὔτε πλείους τῶν ἐναντίων αἱ ἀρχαὶ τρόπον τινά, ἀλλὰ δύο ὡς εἰπεῖν τῷ ἀριθμῷ, οὔτ' αὖ παντελῶς δύο διὰ [Bekker page 191a, line 1] τὸ ἕτερον ὑπάρχειν τὸ εἶναι αὐτοῖς, ἀλλὰ τρεῖς· ἕτερον γὰρ τὸ ἀνθρώπῳ καὶ τὸ ἀμούσῳ εἶναι, καὶ τὸ ἀσχηματίστῳ καὶ χαλκῷ.
이것은 지속하는 것이 여타의 것이라는 점으로 인해 해소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반대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리들은 어떤 식으로 반대들보다 더 많지 아니하고, 오히려 말 그대로 수에 있어서 둘이며, 또한 실체는 원리들과 다른 것으로 현존한다는 점으로 인해 모든 식으로 둘은 아니고, 오히려 셋이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임과 비음악적인 것으로서 ~임이 다르고, 형태없음으로서 또한 청동으로서의 ~임도 다르기 때문이다.
πόσαι μὲν οὖν αἱ ἀρχαὶ τῶν περὶ γένεσιν φυσικῶν, καὶ πῶς ποσαί, εἴρηται· καὶ δῆλόν ἐστιν ὅτι δεῖ ὑποκεῖσθαί τι τοῖς ἐναντίοις καὶ τἀναντία δύο εἶναι. τρόπον δέ τινα ἄλλον οὐκ ἀναγκαῖον· ἱκανὸν γὰρ ἔσται τὸ ἕτερον τῶν ἐναντίων ποιεῖν τῇ ἀπουσίᾳ καὶ παρουσίᾳ τὴν μεταβολήν.
그러므로 생성에 관련한 자연적인 것들의 원리들이 얼만큼의 것들인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얼만큼의 것들인지, 이야기되었다. 또한 무언가 그 반대들 아래에 지속해야 하며 반대가 둘이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떤 다른 방식으로는 필연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반대들 중 어느 한쪽이 부재와 현존으로써 변화를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ἡ 
δὲ ὑποκειμένη φύσις ἐπιστητὴ κατ' ἀναλογίαν. ὡς γὰρ πρὸς ἀνδριάντα χαλκὸς ἢ πρὸς κλίνην ξύλον ἢ πρὸς τῶν ἄλλων τι τῶν ἐχόντων μορφὴν [ἡ ὕλη καὶ] τὸ ἄμορφον ἔχει πρὶν λαβεῖν τὴν μορφήν, οὕτως αὕτη πρὸς οὐσίαν ἔχει καὶ τὸ τόδε τι καὶ τὸ ὄν. μία μὲν οὖν ἀρχὴ αὕτη, οὐχ οὕτω μία οὖσα οὐδὲ οὕτως ὂν ὡς τὸ τόδε τι, μία δὲ ἧς ὁ λόγος, ἔτι δὲ τὸ ἐναντίον τούτῳ, ἡ στέρησις.
그런데 지속하는 본성은 유비에 따른 인식적 문제이다. 왜냐하면 조각상에 대해 청동이나 침대에 대해 목재 혹은 형태를 갖추고 있는 여타의 것들 중 무언가에 대해 [질료와] 비형태적인 것을 형태를 취하기에 앞서 지니는 식으로, 실체와 여기 이 무엇 그리고 to on에 대해 여기 이 무엇도 그러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하나의 원리는 이것이다, 여기 이 무언가가 하나이고 ~인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하나이진 않지만, 다른 한 원리는 그것에 정의가 속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것에 반대인 것, 결핍이 있다.
ταῦτα δὲ πῶς δύο καὶ πῶς 
πλείω, εἴρηται ἐν τοῖς ἄνω. πρῶτον μὲν οὖν ἐλέχθη ὅτι ἀρχαὶ τἀναντία μόνον, ὕστερον δ' ὅτι ἀνάγκη καὶ ἄλλο τι ὑποκεῖσθαι καὶ εἶναι τρία· ἐκ δὲ τῶν νῦν φανερὸν τίς ἡ διαφορὰ τῶν ἐναντίων, καὶ πῶς ἔχουσιν αἱ ἀρχαὶ πρὸς ἀλλήλας, καὶ τί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πότερον δὲ οὐσία τὸ εἶδος ἢ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οὔπω δῆλον. ἀλλ' ὅτι αἱ ἀρχαὶ τρεῖς [Bekker page 191a, line 21] καὶ πῶς τρεῖς, καὶ τίς ὁ τρόπος αὐτῶν, δῆλον. πόσαι μὲν οὖν καὶ τίνες εἰσὶν αἱ ἀρχαί, ἐκ τούτων θεωρείσθωσαν.
이것들이 어떤 식으로는 둘이고 또한 어떤 식으로는 더 많은지, 위에서 이야기되었다. 그러므로 먼저 원리들이 반대라는 것만이 진술되었고, 다음으로 여타의 무언가가 지속함이 필연적이며 그래서 셋이라는 것이 진술되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부터 이제 반대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또한 원리들이 상호관계에서 어떠한지, 또한 지속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분명하다. 그런데 형상이 실체인지 지속하는 것이 실체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원리들이 셋이라는 것과 어떤 식으로 셋인지, 또한 그것들의 방식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그러므로 원리들이 얼만큼의 어떠한 것들인지, 이러한 것들을 통해 관찰되었다.

-蟲-


{ΣΩ.} Τὸν νυνδὴ παραπεσόντα λέγω, φύσει πως πεφυκότα θαυμαστόν. ἓν γὰρ δὴ τὰ πολλὰ εἶναι καὶ τὸ ἓν πολλὰ [Stephanus page 14, section c, line 9] θαυμαστὸν λεχθέν, καὶ ῥᾴδιον ἀμφισβητῆσαι τῷ τούτων ὁποτερονοῦν τιθεμένῳ.
난 방금 생겨난 것, 어쨌든 본디 놀랍게 마련인 것을 말하고 있다네. 그야 여럿이 하나이고 하나가 여럿이라 이야기된 것은 놀라운 것이고, 이런 것들 중 어느 쪽을 내세우는 자에게든 쉽사리 논쟁이 붙으니 말일세.
{ΠΡΩ.} Ἆρ' οὖν λέγεις ὅταν τις ἐμὲ φῇ Πρώταρχον ἕνα γεγονότα φύσει πολλοὺς εἶναι πάλιν τοὺς ἐμὲ καὶ ἐναντίους ἀλλήλοις, μέγαν καὶ σμικρὸν τιθέμενος καὶ βαρὺν καὶ κοῦφον τὸν αὐτὸν καὶ ἄλλα μυρία;
그럼 혹시 당신께서는 누군가 저 즉 프로타르코스를 두고 본디 한 명으로 태어났으나 여럿이라고 그리고 다시 그 여럿이 저라고 그리고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라고, 그 똑같은 사람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그리고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으로 또한 여타의 무수한 것들로 두면서 말하는 경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ΣΩ.} Σὺ μέν, ὦ Πρώταρχε, εἴρηκας τὰ δεδημευμένα τῶν θαυμαστῶν περὶ τὸ ἓν καὶ πολλά, συγκεχωρημένα δὲ ὡς ἔπος εἰπεῖν ὑπὸ πάντων ἤδη μὴ δεῖν τῶν τοιούτων ἅπτεσθαι, παιδαριώδη καὶ ῥᾴδια καὶ σφόδρα τοῖς λόγοις ἐμπόδια [Stephanus page 14, section d, line 8] ὑπολαμβανόντων γίγνεσθαι, ἐπεὶ μηδὲ τὰ τοιάδε, ὅταν τις ἑκάστου τὰ μέλη τε καὶ ἅμα μέρη διελὼν τῷ λόγῳ, πάντα ταῦτα τὸ ἓν ἐκεῖνο εἶναι διομολογησάμενος, ἐλέγχῃ καταγελῶν ὅτι τέρατα διηνάγκασται φάναι, τό τε ἓν ὡς πολλά ἐστι καὶ ἄπειρα, καὶ τὰ πολλὰ ὡς ἓν μόνον.
프로타르코스, 자넨 하나와 여럿에 관한 놀라운 일들 중 대중적인 것들을 말했네만, 말마따나 모든 이들에 의해 이미 이런 일들에는 손댈 필요가 없다고 합의된 것들을 말한 걸세. 유치하고도 쉬우며 논변들에 대단히 방해되는 것들이 된다고 그들이 여겼으니까. 다음으로 이런 것들도 필요없다 합의된 것들이지. 누군가 각자의 그 사지와 또한 동시에 부분들을 논변상으로 나누면서, 이 모든 것들이 저 하나라고 동의하고서는, 하나가 여럿이며 무한하다고도 또 여럿이 오직 단 하나라고도 괴이한 것들을 말하도록 강제된다고 비웃으며 논박할 경우의 것들 말이네.
{ΠΡΩ.} Σὺ δὲ δὴ ποῖα, ὦ Σώκρατες, ἕτερα λέγεις, ἃ μήπω συγκεχωρημένα δεδήμευται περὶ τὸν αὐτὸν τοῦτον λόγον; 
그럼 당신께서는, 소크라테스, 어떤 다른 것들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까? 바로 그 논변에 관하여 대중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것들로서 말이죠.
{ΣΩ.} Ὁπόταν, ὦ παῖ, τὸ ἓν μὴ τῶν γιγνομένων τε καὶ 
ἀπολλυμένων τις τιθῆται, καθάπερ ἀρτίως ἡμεῖς εἴπομεν. [Stephanus page 15, section a, line 3] ἐνταυθοῖ μὲν γὰρ καὶ τὸ τοιοῦτον ἕν, ὅπερ εἴπομεν νυνδή, συγκεχώρηται τὸ μὴ δεῖν ἐλέγχειν· ὅταν δέ τις ἕνα ἄνθρωπον ἐπιχειρῇ τίθεσθαι καὶ βοῦν ἕνα καὶ τὸ καλὸν ἓν καὶ τὸ ἀγαθὸν ἕν, περὶ τούτων τῶν ἑνάδων καὶ τῶν τοιούτων ἡ πολλὴ σπουδὴ μετὰ διαιρέσεως ἀμφισβήτησις γίγνεται.
이보게, 방금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언제든 하나라는 것을 생성되는 것들에도 소멸되는 것들에도 놓지 않을 경우를 말한다네. 방금 우리가 말했던 바로 그런 여기에 속하는 하나도 시험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 합의되었으니까. 그런데 누군가 사람을 한 명으로 그리고 소를 한 마리로 또한 아름다움을 하나로 또 좋음을 하나로 세우고자 시도할 때, 이런 하나들에 관하여 그리고 이러한 하나들의 그 여럿에 관하여서도 나눔과 함께 대단한 논쟁이 생긴다네.
{ΠΡΩ.} Πῶς; 어떻게요?
{ΣΩ.} Πρῶτον μὲν εἴ τινας δεῖ τοιαύτας εἶναι μονάδας ὑπολαμβάνειν ἀληθῶς οὔσας· εἶτα πῶς αὖ ταύτας, μίαν ἑκάστην οὖσαν ἀεὶ τὴν αὐτὴν καὶ μήτε γένεσιν μήτε ὄλεθρον προσδεχομένην, ὅμως εἶναι βεβαιότατα μίαν ταύτην; μετὰ [Stephanus page 15, section b, line 5] δὲ τοῦτ' ἐν τοῖς γιγνομένοις αὖ καὶ ἀπείροις εἴτε διεσπασμένην καὶ πολλὰ γεγονυῖαν θετέον, εἴθ' ὅλην αὐτὴν αὑτῆς χωρίς, ὃ δὴ πάντων ἀδυνατώτατον φαίνοιτ' ἄν, ταὐτὸν καὶ ἓν ἅμα ἐν ἑνί τε καὶ πολλοῖς γίγνεσθαι. ταῦτ' ἔστι τὰ περὶ τὰ τοιαῦτα ἓν καὶ πολλά, ἀλλ' οὐκ ἐκεῖνα, ὦ Πρώταρχε, ἁπάσης ἀπορίας αἴτια μὴ καλῶς ὁμολογηθέντα καὶ εὐπορίας [ἂν] αὖ καλῶς.
우선은 이런 어떤 것들을 진정으로 하나들인 것으로 취해야 하는지 논쟁이 생기지. 다음으로 또 어떻게 이런 하나들이, 그 자체로 언제나 제각기 하나이면서 또한 생성도 소멸도 허용치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엄밀하게 이러한 하나인가? 그 다음으로 이번엔 생성되며 무한정한 것들 안에 산산조각이 난 그리고 여럿이 된 하나를 세워야 하는지, 혹은 하나 전체를 그 자체와 따로 세춰야 하는지 문제가 된다네. 그럼 그것은 모든 일 중에서 가장 불가능해 보일 것인 바, 같고도 하나인 것이 하나와 여럿에 동시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지. 이런 것들이 그러한 하나와 여럿에 관한 일들이고, 프로타르코스, 저것들은 아닐세, 훌륭하게 합의되지 못하면 온갖 난점의 원인이 되고 또 훌륭히 합의되면 해결책의 원인이 될 것은 말이지.
{ΠΡΩ.} Οὐκοῦν χρὴ τοῦθ' ἡμᾶς, ὦ Σώκρατες, ἐν τῷ νῦν πρῶτον διαπονήσασθαι;
소크라테스, 지금 상황에서 우선 우리가 애써야만 하는 것이 그런 것들 아니겠습니까?
{ΣΩ.} Ὡς γοῦν ἐγὼ φαίην ἄν.나야 그렇게 말하겠네만.
[Stephanus page 15, section c, line 7] {ΠΡΩ.} Καὶ πάντας τοίνυν ἡμᾶς ὑπόλαβε συγχωρεῖν σοι τούσδε τὰ τοιαῦτα· Φίληβον δ' ἴσως κράτιστον ἐν τῷ νῦν ἐπερωτῶντα μὴ κινεῖν εὖ κείμενον.
따라서 저희 모두도 당신께 지금 이러한 것들에 합의한 걸로 취하세요. 그런데 필레보스에게 지금 상황에서 질문을 하여 잠자코 있는 그를 건드리지는 않는 게 상책이지 싶습니다.
{ΣΩ.} Εἶεν· πόθεν οὖν τις ταύτης ἄρξηται πολλῆς οὔσης καὶ παντοίας περὶ τὰ ἀμφισβητούμενα μάχης; ἆρ' ἐνθένδε;
좋아, 그럼 어디서 시작할까? 그 논쟁거리들에 관하여 이러한 온갖 숱한 전투를 말이네. 혹시 이런 곳에서부터일까?
{ΠΡΩ.} Πόθεν; 어디에서부터요?
{ΣΩ.} Φαμέν που ταὐτὸν ἓν καὶ πολλὰ ὑπὸ λόγων γιγνόμενα περιτρέχειν πάντῃ καθ' ἕκαστον τῶν λεγομένων ἀεί, καὶ πάλαι καὶ νῦν. καὶ τοῦτο οὔτε μὴ παύσηταί ποτε οὔτε ἤρξατο νῦν, ἀλλ' ἔστι τὸ τοιοῦτον, ὡς ἐμοὶ φαίνεται, τῶν [Stephanus page 15, section d, line 8] λόγων αὐτῶν ἀθάνατόν τι καὶ ἀγήρων πάθος ἐν ἡμῖν· ὁ δὲ πρῶτον αὐτοῦ γευσάμενος ἑκάστοτε τῶν νέων, ἡσθεὶς ὥς τινα σοφίας ηὑρηκὼς θησαυρόν, ὑφ' ἡδονῆς ἐνθουσιᾷ τε καὶ πάντα κινεῖ λόγον ἅσμενος, τοτὲ μὲν ἐπὶ θάτερα κυκλῶν καὶ συμφύρων εἰς ἕν, τοτὲ δὲ πάλιν ἀνειλίττων καὶ διαμερίζων, εἰς ἀπορίαν αὑτὸν μὲν πρῶτον καὶ μάλιστα καταβάλλων, δεύτερον δ' ἀεὶ τὸν ἐχόμενον, ἄντε νεώτερος ἄντε πρεσβύτερος ἄντε ἧλιξ ὢν τυγχάνῃ, φειδόμενος οὔτε πατρὸς οὔτε μητρὸς οὔτε ἄλλου τῶν ἀκουόντων οὐδενός, ὀλίγου δὲ καὶ τῶν ἄλλων ζῴων, οὐ μόνον τῶν ἀνθρώπων, ἐπεὶ βαρβάρων γε οὐδενὸς [Stephanus page 16, section a, line 3] ἂν φείσαιτο, εἴπερ μόνον ἑρμηνέα ποθὲν ἔχοι. 
아마도 우리는 진술들에 의해 하나이자 여럿이 된 똑같은 것이 진술되는 것들 각각으로 온갖 방향으로 언제나 날뛰어 다닌다고, 예나 지금이나 그러하다 말할 걸세. 그리고 이건 언젠가 그칠 것도 이제 시작된 것도 아니고, 내게 보이기로는 이러한 것, 우리에게 있어서 진술들 그 자체의 불멸하고 불후한 어떤 상태라네. 그런데 젊은이들이 그걸 처음으로 맛보고는, 무슨 지혜의 보고라도 찾았다 싶어 즐거워 하면서, 쾌락에 의해 신들리고 또한 온갖 진술을 건드려대길 즐기는데, 어떤 때엔 다른 것들에 관련하여 하나로 둥글리고 뭉치는가 하면, 또 다른 때엔 풀어내고 나누며, 특히나 우선 제 자신을 난관으로 내던지는가 하면, 다음으로는 언제나 제 다음 사람(곁에 있는 자)을, 연하든 연상이든 동년배든 마주치면 그리 하면서, 제 아비든 어미든 그 밖에 듣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사정없이,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 중에서도 거의 남김없이, 만일 어딘가에서 통역자만 구한다면야 이방인들 중에서도 누구 하나 봐주지 않을 걸세.
{ΠΡΩ.} Ἆρ', ὦ Σώκρατες, οὐχ ὁρᾷς ἡμῶν τὸ πλῆθος, ὅτι νέοι πάντες ἐσμέν, καὶ οὐ φοβῇ μή σοι μετὰ Φιλήβου συνεπιθώμεθα, ἐὰν ἡμᾶς λοιδορῇς; ὅμως δὲ μανθάνομεν γὰρ ὃ λέγεις, εἴ τις τρόπος ἔστι καὶ μηχανὴ τὴν μὲν τοιαύτην ταραχὴν ἡμῖν ἔξω τοῦ λόγου εὐμενῶς πως ἀπελθεῖν, ὁδὸν δέ τινα καλλίω ταύτης ἐπὶ τὸν λόγον ἀνευρεῖν, σύ τε προθυμοῦ τοῦτο καὶ ἡμεῖς συνακολουθήσομεν εἰς δύναμιν· οὐ γὰρ σμικρὸς ὁ παρὼν λόγος, ὦ Σώκρατες.
소크라테스, 저희가 여럿인 게 혹시 안 보이십니까? 저희 모두가 젊은데다가, 만일 저희를 욕하신다면, 저희가 당신께 맞서 필레보스와 함께 합세하지 않을까 두려워 하지도 않으시니까요. 그럼에도 당신 말씀을 저희가 알겠습니다. 만일 저희의 이러한 혼란은 논의로부터 어떻든 얌전히 떠나 줄, 반면에 논의를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무슨 길을 찾아낼 무슨 방책이나 수단이 있다면, 당신께서 그 일에 집중해 주시고 저희도 힘 닿는 데까지 따르겠습니다. 그야 당장의 논의가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소크라테스.
{ΣΩ.} Οὐ γὰρ οὖν, ὦ παῖδες, ὥς φησιν ὑμᾶς προσαγο
ρεύων [Stephanus page 16, section b, line 5] Φίληβος. οὐ μὴν ἔστι καλλίων ὁδὸς οὐδ' ἂν γένοιτο ἧς ἐγὼ ἐραστὴς μέν εἰμι ἀεί, πολλάκις δέ με ἤδη διαφυγοῦσα ἔρημον καὶ ἄπορον κατέστησεν.
필레보스가 자네들을 부르며 말하듯이, 이보게들, 그야 작은 일이 아닐세. 물론 내 자신이 언제나 그 길을 사랑하는 자인 그 길보다 더 나은 길은 없거니와 생기지도 않을 테지만, 그게 나를 자주 따돌려 달아나고는 난관에 봉착시켰다네.
{ΠΡΩ.} Τίς αὕτη; λεγέσθω μόνον. 그 길이 무슨 길입니까? 그저 말씀만 하시지요.
{ΣΩ.} Ἣν δηλῶσαι μὲν οὐ πάνυ χαλεπόν, χρῆσθαι δὲ παγχάλεπον· πάντα γὰρ ὅσα τέχνης ἐχόμενα ἀνηυρέθη πώποτε διὰ ταύτης φανερὰ γέγονε. σκόπει δὲ ἣν λέγω.
한편으론 그다지 밝히기 어렵지 않은 길이네만, 쓰기에는 전적으로 어려운 길이지. 왜냐하면 기술에 관여하는 것으로 이제껏 발견된 그 모든 것들이 이 길을 통하여 분명한 것들이 되었다네. 내가 말하는 길을 검토해 보시게.
{ΠΡΩ.} Λέγε μόνον. 말씀만 하시죠.
{ΣΩ.} Θεῶν μὲν εἰς ἀνθρώπους δόσις, ὥς γε καταφαίνεται ἐμοί, ποθὲν ἐκ θεῶν ἐρρίφη διά τινος Προμηθέως ἅμα [Stephanus page 16, section c, line 7] φανοτάτῳ τινὶ πυρί· καὶ οἱ μὲν παλαιοί, κρείττονες ἡμῶν καὶ ἐγγυτέρω θεῶν οἰκοῦντες, ταύτην φήμην παρέδοσαν, ὡς ἐξ ἑνὸς μὲν καὶ πολλῶν ὄντων τῶν ἀεὶ λεγομένων εἶναι, πέρας δὲ καὶ ἀπειρίαν ἐν αὑτοῖς σύμφυτον ἐχόντων. δεῖν οὖν ἡμᾶς τούτων οὕτω διακεκοσμημένων ἀεὶ μίαν ἰδέαν περὶ παντὸς ἑκάστοτε θεμένους ζητεῖν - εὑρήσειν γὰρ ἐνοῦσαν - ἐὰν οὖν μεταλάβωμεν, μετὰ μίαν δύο, εἴ πως εἰσί, σκοπεῖν, εἰ δὲ μή, τρεῖς ἤ τινα ἄλλον ἀριθμόν, καὶ τῶν ἓν ἐκείνων ἕκαστον πάλιν ὡσαύτως, μέχριπερ ἂν τὸ κατ' ἀρχὰς ἓν μὴ ὅτι ἓν καὶ πολλὰ καὶ ἄπειρά ἐστι μόνον ἴδῃ τις, ἀλλὰ καὶ [Stephanus page 16, section d, line 7] ὁπόσα· τὴν δὲ τοῦ ἀπείρου ἰδέαν πρὸς τὸ πλῆθος μὴ προσφέρειν πρὶν ἄν τις τὸν ἀριθμὸν αὐτοῦ πάντα κατίδῃ τὸν μεταξὺ τοῦ ἀπείρου τε καὶ τοῦ ἑνός, τότε δ' ἤδη τὸ ἓν ἕκαστον τῶν πάντων εἰς τὸ ἄπειρον μεθέντα χαίρειν ἐᾶν. οἱ μὲν οὖν θεοί, ὅπερ εἶπον, οὕτως ἡμῖν παρέδοσαν σκοπεῖν καὶ μανθάνειν καὶ διδάσκειν ἀλλήλους· οἱ δὲ νῦν τῶν ἀνθρώπων σοφοὶ ἓν μέν, ὅπως ἂν τύχωσι, καὶ πολλὰ θᾶττον καὶ βραδύτερον ποιοῦσι τοῦ δέοντος, μετὰ δὲ τὸ ἓν ἄπειρα εὐθύς, τὰ δὲ μέσα αὐτοὺς ἐκφεύγει - οἷς διακεχώρισται τό τε διαλεκτικῶς πάλιν καὶ τὸ ἐριστικῶς ἡμᾶς ποιεῖσθαι πρὸς [Stephanus page 17, section a, line 5] ἀλλήλους τοὺς λόγους.
한편으론 적어도 내게 드러나기로는 인간들을 위한 신들의 선물이, 신들로부터 어딘가에서 프로메테우스 같은 누군가를 통해 가장 밝은 무슨 불로서 떨어졌다네. 고대인들도, 우리보다 뛰어나고 또하 신들에 더욱 가까이 살던 자들인데, 이런 풍문을 전해주었으니, 언제나 진술되는 것들은 하나와 여럿을 통한(~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한정과 무한정을 자신들 내에 본래부터 지니고 있으면서 그러하다는 걸세.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들이 그렇게 질서잡혀졌으니 모든 것에 관하여 매번 단 하나의 형상을 세우며 추적해야 한다는 것이지. - 왜냐하면 (형상이) 내재해 있단 것을 발견해낼 거라고 하니 말일세 - 그래서 우리가 (그 형상에) 참여하게 된다면, 하나 다음으로 만일 둘이라면 둘을, 그렇지 않다면 셋이나 다른 수를 검토해야 하고, 그것들의 각기 하나를 다시 같은 방식으로 하여, 최초의 하나가 하나가 하나이자 여럿이며 무한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얼만큼의 것인지도 알 때까지 그리해야 한다는 얘기네. 그런데 무한정과 하나 중간에 그것의 모든 수를 이해하기 전에는 그 무한정의 형상을 다수 쪽으로 적용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제서야 모든 것들의 각기 하나를 무한정 쪽으로 넘겨 놓고서 놓아 보내 준다고 하네. 그러므로 신들은, 내가 말한 그대로, 우리에게 서로 검토하고 배우고 또한 가르치도록 그렇게 넘겨주었다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 중 지혜로운 자들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하나와 여럿을 필요한 것보다 더 빠르거나 더 늦게 만들고는, 하나 다음으로 곧장 무한정으로 만들며, 그 중간의 것들은 그들로부터 달아나 버린다네 - 그것들에 의해 되짚어 우리가 서로간에 진술들을 변증적으로 만든 경우와 쟁론적으로 만든 경우가 판가름되지.
{ΠΡΩ.} Τὰ μέν πως, ὦ Σώκρατες, δοκῶ σου μανθάνειν, τὰ δὲ ἔτι σαφέστερον δέομαι ἃ λέγεις ἀκοῦσαι.
어떤 것들은 어쨌든 제가 당신 말씀을 알아들은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소크라테스, 다른 것들은 여전히 당신 말씀을 더 확실히 듣기를 청합니다.
{ΣΩ.} Σαφὲς μήν, ὦ Πρώταρχε, ἐστὶν ἐν τοῖς γράμμασιν ὃ λέγω, καὶ λάμβαν' αὐτὸ ἐν τούτοις οἷσπερ καὶ πεπαίδευσαι.
프로타르코스, 내가 말하는 것은 문자들 안에서 확실하다네. 자네가 교육받기도 한 그 문자들에서 내가 말한 바를 파악해 보게.
{ΠΡΩ.} Πῶς; 어떻게요?
{ΣΩ.} Φωνὴ μὲν ἡμῖν ἐστί που μία διὰ τοῦ στόματος ἰοῦσα, καὶ ἄπειρος αὖ πλήθει, πάντων τε καὶ ἑκάστου.
우리에게 소리란 아마도 입을 통해 나오는 한 가지의 것이자, 또 이번엔 수에 있어서 한정이 없다네, 모든 소리들도 각각의 소리도 말이지.
{ΠΡΩ.} Τί μήν; 그래서 뭔가요?
[Stephanus page 17, section b, line 6] {ΣΩ.} Καὶ οὐδὲν ἑτέρῳ γε τούτων ἐσμέν πω σοφοί, οὔτε ὅτι τὸ ἄπειρον αὐτῆς ἴσμεν οὔθ' ὅτι τὸ ἕν· ἀλλ' ὅτι πόσα τ' ἐστὶ καὶ ὁποῖα, τοῦτό ἐστι τὸ γραμματικὸν ἕκαστον ποιοῦν ἡμῶν.
어쨌든 그것들 중 한쪽 것으로는 우리가 전혀 지혜로운 자들이지 않을 것이네, 그 소리에 대해 한정 없는 것을 아는 것으로도 하나인 것을 아는 것으로도 못하지. 허나 그것이 얼만큼이고 어떠한 것들인지 아는 것, 이것은 우리 각자를 문자를 아는 자로 만들어줄 수 있지.

{ΠΡΩ.} Ἀληθέστατα.더할 나위 없이 맞는 말씀이십니다.

{ΣΩ.} Καὶ μὴν καὶ τὸ μουσικὸν ὃ τυγχάνει ποιοῦν, τοῦτ' ἔστι ταὐτόν.
그렇거니와 마침 음악을 아는 자로 만들어주는 것도, 그게 같은 것이지.
{ΠΡΩ.} Πῶς; 어떻게요?
{ΣΩ.} Φωνὴ μέν που καὶ τὸ κατ' ἐκείνην τὴν τέχνην ἐστὶ μία ἐν αὐτῇ.
소리는 아마 저 기술에 따라서도 그 자체 내에서 하나라네.
[Stephanus page 17, section c, line 3] {ΠΡΩ.} Πῶς δ' οὔ; 어찌 아니겠습니까?
{ΣΩ.} Δύο δὲ θῶμεν βαρὺ καὶ ὀξύ, καὶ τρίτον ὁμότονον. ἢ πῶς;
그런데 우리는 저음과 고음 둘을 세우고, 세 번째로 중음을 놓지. 아니면 어찌 하는가?
{ΠΡΩ.} Οὕτως. 그리 하지요.
{ΣΩ.} Ἀλλ' οὔπω σοφὸς ἂν εἴης τὴν μουσικὴν εἰδὼς ταῦτα μόνα, μὴ δὲ εἰδὼς ὥς γ' ἔπος εἰπεῖν εἰς ταῦτα οὐδενὸς ἄξιος ἔσῃ.
허나 오직 이것들만 알고서는 결코 음악기술에 있어서 자네가 지혜롭지 않을 테고, 심지어 모른다면 말마따나 이런 일들에 아무런 쓸모도 없을 걸세.
{ΠΡΩ.} Οὐ γὰρ οὖν. 그야 쓸모없지요.
{ΣΩ.} Ἀλλ', ὦ φίλε, ἐπειδὰν λάβῃς τὰ διαστήματα ὁπόσα ἐστὶ τὸν ἀριθμὸν τῆς φωνῆς ὀξύτητός τε πέρι καὶ βαρύτητος, [Stephanus page 17, section d, line 1] καὶ ὁποῖα, καὶ τοὺς ὅρους τῶν διαστημάτων, καὶ τὰ ἐκ τούτων ὅσα συστήματα γέγονεν - ἃ κατιδόντες οἱ πρόσθεν παρέδοσαν ἡμῖν τοῖς ἑπομένοις ἐκείνοις καλεῖν αὐτὰ ἁρμονίας, ἔν τε ταῖς κινήσεσιν αὖ τοῦ σώματος ἕτερα τοιαῦτα ἐνόντα πάθη γιγνόμενα, ἃ δὴ δι' ἀριθμῶν μετρηθέντα δεῖν αὖ φασι ῥυθμοὺς καὶ μέτρα ἐπονομάζειν, καὶ ἅμα ἐννοεῖν ὡς οὕτω δεῖ περὶ παντὸς ἑνὸς καὶ πολλῶν σκοπεῖν - ὅταν γὰρ αὐτά τε λάβῃς οὕτω, τότε ἐγένου σοφός, ὅταν τε ἄλλο τῶν ἓν ὁτιοῦν ταύτῃ σκοπούμενος ἕλῃς, οὕτως ἔμφρων περὶ τοῦτο γέγονας· τὸ δ' ἄπειρόν σε ἑκάστων καὶ ἐν ἑκάστοις πλῆθος [Stephanus page 17, section e, line 4] ἄπειρον ἑκάστοτε ποιεῖ τοῦ φρονεῖν καὶ οὐκ ἐλλόγιμον οὐδ' ἐνάριθμον, ἅτ' οὐκ εἰς ἀριθμὸν οὐδένα ἐν οὐδενὶ πώποτε ἀπιδόντα.
허나, 이보게, 자네가 그 음정들이 고저와 관련하여 소리의 수에서 얼마큼인지, 그리고 어떠한 것들인지, 그리고 그 음정들의 경계들을, 또한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그 만큼의 음계들을 파악하고 나면 - 그것들이 선조들께서 저분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그것들을 선법들로 부르게 해주신 것들인데, 또한 이번엔 신체의 움직임들 안에서도 생겨나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그런 상태들도, 실로 수들을 통해 측도되는 것들로서 리듬과 박자라 명명해야 하는 것들이라 말씀하시는 바, 하나 전체와 여럿들에 관하여 그런 식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셨다고 하시지 -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그것들을 파악할 때, 바로 그 때 자네가 지혜로운 자가 되고, 무엇이 되었든 하나인 것들 중 여타의 것을 이런 식으로 살펴보며 파악했을 때, 그렇게 이것에 관하여 자네가 슬기로운 자가 되니까. 그런데 각각의 것들과 각각의 것들 안의 무한정한 수는 자네를 매 경우마다 슬기로움에 있어서 한정 없는 자로 만들고 말할 줄도 셈할 줄도 모르는 자로 만드니, 수에 대해 그 무엇에서도 아무것도 도무지 살펴볼 수 없기 때문이라네.
{ΠΡΩ.} Κάλλιστα, ὦ Φίληβε, ἔμοιγε τὰ νῦν λεγόμενα εἰρηκέναι φαίνεται Σωκράτης.
필레보스, 내게는 방금 진술된 것들을 소크라테스께서 아주 훌륭하게 언급하신 것 같구만.
{ΦΙ.} Κἀμοὶ ταῦτά γε αὐτά· ἀλλὰ τί δή ποτε πρὸς ἡμᾶς ὁ λόγος οὗτος νῦν εἴρηται καὶ τί ποτε βουλόμενος;
내게도 그것들이 그리 보이긴 하네. 허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방금 그런 진술이 이야기되었고 또 대체 뭘 바라시는 겁니까?
{ΣΩ.} Ὀρθῶς μέντοι τοῦθ' ἡμᾶς, ὦ Πρώταρχε, ἠρώτηκε Φίληβος.
어쨌든 프로타르코스, 필레보스가 우리에게 이걸 제대로 물었군.
{ΠΡΩ.} Πάνυ μὲν οὖν, καὶ ἀποκρίνου γε αὐτῷ. 물론 그렇고요, 그럼 그에게 답을 해 주시죠.
[Stephanus page 18, section a, line 6] {ΣΩ.} Δράσω ταῦτα διελθὼν σμικρὸν ἔτι περὶ αὐτῶν τούτων. ὥσπερ γὰρ ἓν ὁτιοῦν εἴ τίς ποτε λάβοι, τοῦτον, ὥς φαμεν, οὐκ ἐπ' ἀπείρου φύσιν δεῖ βλέπειν εὐθὺς ἀλλ' ἐπί τινα ἀριθμόν, οὕτω καὶ τὸ ἐναντίον ὅταν τις τὸ ἄπειρον ἀναγκασθῇ πρῶτον λαμβάνειν, μὴ ἐπὶ τὸ ἓν εὐθύς, ἀλλ' [ἐπ'] ἀριθμὸν αὖ τινα πλῆθος ἕκαστον ἔχοντά τι κατανοεῖν, τελευτᾶν τε ἐκ πάντων εἰς ἕν. πάλιν δὲ ἐν τοῖς γράμμασι τὸ νῦν λεγόμενον λάβωμεν.
바로 그것들에 관하여 사소한 걸 좀 더 상술하고서 그 일들을 하겠네. 즉 우리가 말했듯, 언제든 누군가 뭐가 되었든 하나를 취한다면, 그 사람은 무한정의 본성에 곧장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에 주목해야 하고, 그렇게 반대로 누군가 우선 무한정한 것을 파악하도록 강제될 때에도, 하나로 곧장 눈을 돌리지 말고, 이번엔 또 어떤 수가 각기 무슨 다수를 지니는지 이해해야 하며, 모든 것들로부터 하나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걸세. 그런데 방금 진술된 걸 돌이켜 문자들 안에서 취해 보세나.
{ΠΡΩ.} Πῶς; 어떻게요?
[Stephanus page 18, section b, line 6] {ΣΩ.} Ἐπειδὴ φωνὴν ἄπειρον κατενόησεν εἴτε τις θεὸς εἴτε καὶ θεῖος ἄνθρωπος - ὡς λόγος ἐν Αἰγύπτῳ Θεῦθ τινα τοῦτον γενέσθαι λέγων, ὃς πρῶτος τὰ φωνήεντα ἐν τῷ ἀπείρῳ κατενόησεν οὐχ ἓν ὄντα ἀλλὰ πλείω, καὶ πάλιν ἕτερα φωνῆς μὲν οὔ, φθόγγου δὲ μετέχοντά τινος, ἀριθμὸν δέ τινα καὶ τούτων εἶναι, τρίτον δὲ εἶδος γραμμάτων διεστήσατο τὰ νῦν λεγόμενα ἄφωνα ἡμῖν· τὸ μετὰ τοῦτο διῄρει τά τε ἄφθογγα καὶ ἄφωνα μέχρι ἑνὸς ἑκάστου, καὶ τὰ φωνήεντα καὶ τὰ μέσα κατὰ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ἕως ἀριθμὸν αὐτῶν λαβὼν ἑνί τε ἑκάστῳ καὶ σύμπασι <στοιχεῖον> ἐπωνόμασε· [Stephanus page 18, section c, line 7] καθορῶν δὲ ὡς οὐδεὶς ἡμῶν οὐδ' ἂν ἓν αὐτὸ καθ' αὑτὸ ἄνευ πάντων αὐτῶν μάθοι, τοῦτον τὸν δεσμὸν αὖ λογισάμενος ὡς ὄντα ἕνα καὶ πάντα ταῦτα ἕν πως ποιοῦντα μίαν ἐπ' αὐτοῖς ὡς οὖσαν γραμματικὴν τέχνην ἐπεφθέγξατο προσειπών. 
신인지 신 같은 사람인지 누군가가 소리가 한정 없음을 이해하고서는 - 이집트에서는 얘기되기로 테우트가 그런 누군가가 되었다고 하니까, 그는 무한정 안에서 모음들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란 걸, 또 다시 어떤 것들은 음성에 속하진 않으나 무슨 소리에는 참여하는 것들이라는 걸, 그것들의 수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았으며, 오늘날 우리가 자음이라 부르는 것들을 문자들의 세 번째 형상으로 구분했다지. 그 다음으로 묵음들과 자음들을 각기 하나에 이르기까지 나누었고, 모음들과 중간 것들도 같은 방식으로 나누었는데, 그것들의 수를 파악하여 각기 하나마다에도 통틀어 모두에도 자모라 명명할 때까지 그리 하였다네. 그런데 그가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만일 그 모든 것들을 배우지 않고서는 그 자체로 그 하나를 알 수도 없으리라 파악하고서, 이번엔 하나인 것이자 그 모든 것들을 어떻든 하나로 만들어 주는 이러한 사슬(끈)을 헤아려 그것들에 대한 하나의 기술로서 문법-기술을 이름 붙여 언표하였다지.
{ΦΙ.} Ταῦτ' ἔτι σαφέστερον ἐκείνων αὐτά γε πρὸς ἄλληλα, 
ὦ Πρώταρχε, ἔμαθον· τὸ δ' αὐτό μοι τοῦ λόγου νῦν τε καὶ σμικρὸν ἔμπροσθεν ἐλλείπεται.
내가 그것들을 서로 견주어 이것들은 저것들 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알았다네, 프로타르코스. 그런데 내게는 그 논변에서 지금도 그렇거니와 앞서도 사소한 똑같은 것이 부족하군.
{ΣΩ.} Μῶν, ὦ Φίληβε, τὸ τί πρὸς ἔπος αὖ ταῦτ' ἐστίν;
필레보스, 물론 무엇에 관련한 것인지 이번엔 이 말이
아니겠나?
{ΦΙ.} Ναί, τοῦτ' ἔστιν ὃ πάλαι ζητοῦμεν ἐγώ τε καὶ Πρώταρχος.
네, 진작부터 저와 프로타르코스가 좇던 게 그런 것입니다.

-蟲-

  돈 없는데 학문이 하고 싶다면 우선 몇 가지 관문을 거쳐 보길 권한다. 우선 첫째로 당신이 한 달에 얼만큼의 시간을 투자해 얼만큼을 벌 수 있는지 계산해 봐라. 그리고 당신이 먹고 자고 쌀 공간을 실제로 찾아 봐라. 견적이 나오겠지. 그럼 다시, 얼마를 일해야 그 방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 봐라. 그리고 그 방을 구해라. 자, 이제 시작이다. 당신이 진짜로 '방'을 구했다면 거기엔 당신이 여태껏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컵도 접시도 없고, 화장지도 없고, 칫솔이나 비누도 물론 없거니와 인터넷도 없고 베개도 없지. 당신이 멍청하다면 먹고 자고 쌀 공간을 고시텔 따위로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건 당신이 경제관념이 없다는 뜻이니 앞 단계를 다시 되짚도록 하자. 당신이 찾아야 할 건 최소한 전세다. 아니면 월세를 잡고 더 많은 일을 해 더 자주 더 많은 돈을 계속해서 내다 버려야 하지만, 뭐 원한다면 말리진 않겠다. 어쨌든, 방을 잡아 당분간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보라. 그 와중에 당신은 뭔가를 먹어야 할 텐데, 비위가 괜찮다면 꾸준히 중고등학교 근처 분식점을 애용할 것을 추천한다. 싸고 많으니까. 음식이 싸고 많은 일반음식점을 안다면 그것도 괜찮지. 이런 걸 알아보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는 점은 유념하길 바란다. 자, 이게 당신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조건이고 제약이다. 하루 못해도 8시간은 일을 해야 할 거고, 거기에 이동시간으로 한 두 시간을 또 버리겠지. 잠은 일곱 시간을 채워 자겠는가? 소문으로 떠도는 그 11시부터 3시까지인가의 수면만 지킨다 하면, 보자, 밥은 안 짓는다 치고 그래도 빨래는 하고 청소도 뭐 거르자면 거를 수는 있는데 그렇다고 쓰레기를 무한정 모아둘 수는 없으니 그거 정리하는 시간이라도 들일 수밖에 없다. 이거 한 시간 정도 또 잡자. 때 되면 생필품 채워야 하니 장보는 시간도 생각하자. 연애나 교우관계는 잠시 접어두자. 왜냐하면, 남은 시간을 탈탈 털어서 당신은 '학자질'을 하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학자질이 뭔지 알 길은 없으나 어쨌든 당신은 읽고 생각해서 정리하고 써야 할 거다. 당신이 국문 논문을 한 편 읽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가? 연구서는? 학문분야에 따라서 발로 뛰며 조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고, 혹은 자료 찾느라 여기저기 헤맬 수도 있겠고, 실험실을 들락거려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당신이 학자로서의 양심이 있다면, 이미 제시되어 검토를 받고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는 외국의 학문적 성과들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뭐 한국에서만 다루는 그런 학문이 있다면 축하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당신의 다른 경쟁자들은 돈이 있고 시간이 있고 게다가 어느 정도 선별을 거쳐 자격을 갖춘 능력 있는 사람들이다. 어쨌든, 외국 논문 읽는데에 드는 시간은 얼마인가?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하는 데에 돈이 얼마나 드는지는 계산해 보았나? 학교에 소속되어 해당 도서관에서 계약한 경로를 통해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거기에는 등록금이 들지. 장학금을 받고 싶겠지만, 과연 앞서 말한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해 나아가는 와중에 당신이 다른 여유로운, 그러면서도 재능 있는 아이들과 다이다이 떠서 걔들을 씹어 넘기고 장학금을 겟챠>_< 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학부나 석사나 박사 과정 중에 있다면 당신은 들어야 할 강의도 이것저것 있을 것이고 들어가야 할 세미나도 몇 개 있겠지. 이것들 각각 부과되는 과제들도 있고. 앞서 말한 논문 읽기나 잡다한 '연구'와 직결되는 경우는 확실히 드물 거다. 어머나, 졸업논문도 써야 하겠네. 뭐, 열심히 해 보자.

  어찌어찌 평타는 쳐서 가까스로 도태당하지 않고 박사 후 연구과정생이나 혹은 강사가 되었다고 해 보자. 아, 한 가지 잊은 게 있는데, 혹시 당신이 그냥 혼자 가난한 게 아니라 집안이 거지인가? 그럼 당신 가족의 생계는 어찌하나? 뭐 부모님이고 형제자매고 쌩깔 수 있다면 그나마 당신은 축복받은 가난뱅이이겠지만, 아니라면 앞서 이야기한 기본 조건에 하나 더하자. 못해도 80 정도는 가져다 바쳐야 할 거다. 4대 보험 보장되는 직장에 박혀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가족들과 당신 자신 앞으로 걸린 보험들도 좀 신경써야 하겠지. 천운에 기대어 당신에게는 아무런 사건사고도 없으리라 믿으며 산다면 뭐 그것도 말릴 수는 없지만. 그런데 운전은 하고 다닐 건가? 돈을 더 잡고, 그 예산에 맞춰 시간을 더 쓰자. 글쎄, 당신이 언제 어떻게 공부를 할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어쨌든 당신이 이제 부여받은 과제를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게 된 듯하다. 정말 그럴까? 당신이 속한 학계에는 이러저러한 학회들과 소모임들이 있을 거다. 당신은 막내급이고, 아마 모든 잡일을 하거나 아무 일도 않고서 쫓겨나거나 할 수 있을 거다. 운좋게 다른 누군가가 총대를 맨다면, 그 운을 쓴 덕분으로 당신에게는 강의자리가 오지 않겠지.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이제 신나게 아해들에게 과제를 내고 애들을 괴롭혀 보자. 그러려면 교재를 정하고, 강의계획을 짜고, 애들에게서 과제물을 받아서 채점을 하고, 그걸로 돈을 벌게 될 거다. 물론 당신이 박사 논문 주제로 잡았던 것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강의일 거다. 그래서 여기에 들이는 시간은 앞서 8시간 일하는 것과 퉁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강의를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음,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살 수 없다.' 뭐 어쨌든 당신이 아직도 여전히 가난한 걸로 봐서 당신은 그리 재능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의 고유한 학문노정에 투자할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연습을 통해 실력이 늘면 속도가 붙겠는데, 연습에도 시간이 드니까 당신은 그냥 계속 느린데다 부지런할 수도 없는 망조 들린 거북이 신세이다. 거북인데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았어. 허리에는 타이어를 매고 말이지. 당신은 고급 스판 빤스를 입고 맞춤 운동화를 신은 터질듯한 허벅지의 근육질 토끼들과 경쟁해야 한다. 뒤쳐질 때마다 당신이 벌 수 있는 돈은 줄고, 당신이 접근할 수 있는 자료들도 줄고, 당신이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만이라도 투자해야 할 시간은 계속 늘어만 간다. 당신은 '학문'으로 경쟁해야 하는데 말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 와중에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들어가는 평균비용이 얼마인지 검색해 보자. 일종의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질식사할 경우 막판에 사정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비약이고 과장이라며 도리질을 치는 당신이 상상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 와중에도 학자로서 학자다운 양심을 지켜가며 기어이 버티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실제로 있다. 당신이 역사 속 위인들이나 세계의 유명인들을 보며 허황된 꿈을 꾸는 사이에 이 땅에서 학문 목줄이 잘려 나가지 않도록 바닥을 벅벅 기며 악착같이 들러붙은, 당신의 진짜 구원자들 말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당신이 이런 헛된 꿈을 꾸지도 못했을 테니, 어찌 보면 철천지 원수일 수도 있겠지만, 하하. 자, 불가능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다. 가능한 게 아니라 이미 실현되어 있는 삶이다. 가난하 당신이 학자이길 원하고 학문을 하고자 바란다면 가야할 길이다. 정치에, 사회에, 경제에 참여하고 싶다면, 혹은 여러 학문분과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통찰을 하길 희망한다면, 당신은 이 와중에 당신 전공과 무관해 보이는 온갖 학문들에도 접근해야 할 거다. 실무적인 일들에도 부딪치겠지. 당신은 돈 벌어서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 쫄깃쫄깃한 긴장감을 당신이 학문을 그만두게 되는 그 순간까지 지속해야 한다. 계속 뒷덜미에 날붙이 끄트머리가 콕콕 찔러대는 기분을 느끼면서, 멀다 못해 아득할 정도로 앞서 나아가는 사람들의 잘 보이지도 않는 똥구녕이나 군침을 흘리며 바라보면서, 그러는 당신을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뒤에서 앞으로 제치고 나서는 후발주자들에게 닿지도 않을 저주나 퍼부으면서. 

  난 어쩌고 살고 있냐고? 이래저래 빌어먹고 산다. 한때 '독립이니 자주니 공허한 구호들을(UMC 가산데?)' 떠들며 저 앞서 지껄인 지랄을 몸소 체험해 보기도 했지만(검정고시 때부터 학부시절 앞머리 때까지 정도의 얘기다), 지금은 그냥 그보다 좀 못한 돈 집에 가져다 바치고 부모님 곁에서 얌전히 빌붙어 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을 벌고, 그 시간을 갖고 이것저것 읽거나 쓰거나 가끔 이렇게 개소리 지껄이며 노닥거리기도 한다. 전공 덕분에 유뉘쿠하고도 럭쪄리한 과외자리가 종종 생겨 그걸로 잠깐 돈 좀 모으고, 이래저래 장학금 주워다 받고, 틈나는대로 주말알바나 야간알바 뛰어 가면서 근근하게 살아간다. 그래야 할 정도밖에 못 되는 재능이고, 그나마 그 정도는 되는 집구석이라(빚 물려준 것 없고, 집이 있고! 나는 차남이지롱.) 나는 몇 차례 졸업논문 계획만 갖고도 퇴짜를 맞고 그냥저냥 그래도 공부란 걸 붙잡고 버티고 있지. 뭐 나도 앞으로 어찌 될지 장담은 못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뭘 어째야 하고 그게 얼마나 힘들지에 대해 자신을 속일 생각도 없고 딱히 엄살을 피울 생각도 없다. 그냥 내 발목에 걸린 족쇄와 등에 걸린 짐만큼 욕심을 버리고 꿈을 버리고 그러면서 놓을 것 최대한 놓아 가며 내가 붙잡고 싶은 걸 붙들고 안 놓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따름이다. 

  가난하다고 하여 왜 학문을 모르고 진리를 모르겠는가? 근데 씨발 개뿔도 모르고 좆도 아니면서 겉멋만 잔뜩 들어 지랄병해대며 여기저기 시비질 붙지 말고, 할 거면 닥치고 해라. 그리고 하다가 나가 떨어지든 어떻게든 들러붙어 버티고 섰든 이후의 일은 몸으로 보여라. '돈 없는 새끼가 학문이니 예술이니 씨부리지 말아라'라는 말에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고 당신의 사랑해 마지않는 진리가 모욕을 받은 듯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겠는가? 당신이 도대체 학문에 뭘 어떻게 해 주었는가 그거나 먼저 생각해 봐라. 당신이 그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당신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훨씬 더 반짝반짝 빛날 사람들 자리 대신 차지하고 쳐자빠져서는 뭔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봐서 당신이 얼마나 구역질나게 비루한지 좀 반성해 봐라. 그래, 괜찮다. 그 따위 당신이라도(그 따위 나라도 역시) 학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선택한 만큼의 책임감을 갖고 책임을 좀 져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돈 없다며? 아니, 정말로 정말로 돈이 없다면 내가 앞서 말한 저 처지에 쳐박혀 있을 테니, 딱히 '거지새끼 학문지랄 하지마'란 얘기가 뭔 뜻인지 모를 처지도 아닐 것이다. 누군가 밥과 반찬을 해주고 설겆이를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분리수거를 해주고, 관리비를 대신 내든 정화조 관리비 전기세 가스비 수돗세를 내든 뭔가 해주고, 니 새끼 의료보험비를 내주고 화장지를 대주고 넌 가끔 애새끼들과 어울려 술이나 쳐먹고 인터넷에서 깔짝깔짝 영화나 보고 음악이나 듣다가 좆나 고뇌에 찬 표정으로 씨팔 인생은 뭐고 예술은 뭐고 학문은 뭐냐고 정신적으로 자위질에 몰두하다가 '아 나 좆나 지식인스러워'하고 황홀경에 빠져 찍 싸대기나 하겠지. 이런, 화내서 미안. 진짜 돈 없으면 좆나게 쥐어짜서 겨우겨우 만들어낸 하루 대여섯 시간에 일생을 걸고 읽고 쓰고 골머리를 싸매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것뿐, 아무도 하지 말라고 할 입장은 못 된다. 아니, 하지 말라는 사람을 만나거들랑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도록 해라. 세상에 그렇게나 너를 아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물론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과 연민과 우월의식과 조롱과 야유이겠지만, 원래 그런 거 받아먹고 사는 거다, 나와 당신 같은 개뿔도 없는 새끼들은 말이다. 아, 다 필요없고 중심과 끝들의 변증법이다, 그지깽깽이들아.(...논문이 안 써져서 지랄하는 거 맞다.)

-蟲-

P.S. 아, 미안, 이 얘기를 빠뜨렸어. 빚은 은행에 지는 거다. 사채 생각이 들거들랑 그냥 자살해. 그리고 우리에겐 개인파산과 개인회생이라는 행복한 도피처가 있지. 학문할 거니까 금융권에서 고자되는 건 괜찮다고 봐, 낄낄.

P.S. 여기에 제격인 노래 하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입금하라'. 특히 이 가사가 쫭이지. '적어도 나는 정의로웠다, 너에게는 별 의미 없겠지만~'

『소피스테스』는 철학자, 정치가, 소피스테스가 서로 다른 것들인지 같은 것의 다른 이름들인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대화의 주도자인 엘레아의 손님에 의해 그 셋은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각각이 그 자체로 무엇이며 여타의 것들과 어떤 식으로 다른지를 그가 규명하는 쪽으로 논의가 전개된다. 그는 우선 소피스테스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 정의를 내리는 것을 목표로 하여 탐구를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소피스테스라는 부류가 소피스테스의 기술(techne)이라는 하나의 기술만으로 상술과 사냥술, 교육술을 비롯한 온갖 기술들을 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 문제로 제시된다. 더욱이 여러 기술들인 것으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이 소피스테스술(sophistike)만으로 모든 것을 논박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이를 다른 이에게 가르칠 수도 있다고까지 주장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님은 고유한 하나의 기술로서 다른 여러 기술들로도 여겨질 수 있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그러한 기술을 일종의 모방술로 판단한다. 그러나 모방의 결과물인 모상은 원본이 아닌 것, 참이 아닌 거짓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가리킨다는 것은 모두 참으로 어떤 무엇인 바의 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란 수도 이름도 거기에 덧붙을 수 없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따르자면 오직 있는/~인 것(to on)뿐이며 있지/~이지 않은 것(to me on)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이 둘은 뒤섞지 않아야 한다. 모상은 그것이 모방하는 그 원본이지 않다. 그 원본이 참이라면 모상은 거짓이다. 그러나 모상은 모상인 것으로서 참으로 모상이기도 하다. 즉 모상은 to on to me on을 뒤섞은 것이다.

또한 소피스테스는 이러한 모상을 통해 실제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에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고 그들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준다. 그러나 거짓이란 사실, to on을 말하거나 믿지 않고 to me on을 말하는 것, to me on to on이라고 또는 to on to me on이라고 말하거나 믿는 것이다. 그러나 to me on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이것을 to on과 섞을 수도 없으므로, 이러한 거짓 역시 불가능하다.

더불어 상대가 거짓을 말하거나 믿는다고 논박하려는 자는 그 자신도 to me on을 언급해야 하지만, 이번에도 to me on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거짓을 고하는 자뿐만 아니라 이 사람을 논박하려는 사람 역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모상과 거짓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to me on to on과 섞일 수 있는 방식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손님은 to on의 반대로서 전적으로 불가능한 to medamos on을 잠시 미루어 두고 to on에 대해 탐구함으로써 또 다른 to me on이 가능한지 고찰한다. 이 과정에서 to on to me on 못지 않게 여러 어려움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모든 것 각각이 전부 to on이므로 to on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을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차가움과 뜨거움이 있는/~인 것들이라면, 이것들은 to on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to on 자체와 이것들이 다르다면, 더 이상 있는/~인 것이 아니게 되므로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또한 오직 to on뿐이라면, 그것은 오직 그 하나일 것이나 하나라는 것도 to on뿐인 경우에서는 to on과 구분될 수 없다. to on을 하나라고 말하는 일조차 이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 to on이 참이며 앎의 대상인 한에서 변하지 않고 멈추어 있는 것이라는 주장과 오직 움직이고 작용을 주고 받는 능력을 갖춘 것만이 to on이라는 주장이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to on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to on이 인식됨으로써 인식된 것으로 변하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반대로 to on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한다면 그것은 가리킬 수도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는 바로 그 순간 곧장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to on은 다른 것들과 결합하면서도 또한 분리되기도 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To on과 그 이외의 것들 사이에서 결합과 분리의 관계를 알지 못하다면 to on to me on 양쪽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철학은 물론 말도 생각도 모두 잃어 버리게 된다. 이러한 결합과 분리에 대한 앎을 변증술(dialetike)이라 한다. 손님은 변증술을 통하여 운동과 정지는 to on에 참여함으로써 to on인 것이 되지만 여전히 to on은 그 외의 두 가지 것들과 다른 것이자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라는 점을 밝혀낸다. 자신과 같고 그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은 정지와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같음, 그리고 다름이, 운동과 정지가 to on에 참여하듯 그런 식으로 이 세 가지 것들의 참여 대상이 된다는 점이 드러난다. 특히 다름에 참여함으로써 각각의 것들은 여타의 것들과 다른 것이 되고 여타의 것들이지 않은 것, to me on이 된다. 즉 다르다는 의미에서의 to me on to on인 각각의 모든 것들 서로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to me on은 진술이나 믿음에 섞임으로써 거짓 진술이나 거짓 믿음을 만든다. 진술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혹은 명사, onoma)과 그 행위를 가리키는 말(혹은 동사, rema)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에 관하여 그 결합된 말이 그 대상과 다른 것을 가리킬 때 진술은 거짓이 된다. 이러한 말이 영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대로 이루어질 때 생각이며 그 생각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이 믿음이므로, 이것들의 경우에도 같은 설명이 적용된다.

이제 모상은 원본 자체와는 다른 것이지만 원본에 대하여 그것을 닮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모상 중 말로 된 모상이 원본에 대해 원본과 다른 것을 말할 경우, 말로 된 거짓 모상, 즉 거짓말이 생겨난다. 소피스테스는 이러한 거짓말로 사람들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기만적인 모방자로 규정된다.

간략히 정리한 이 대화편의 내용은 그 안에 여러 난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to on to me on의 의미와 변증술의 구체적인 내용, 그리고 진술에 대한 변증술의 관계 등은 그 자체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불일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다루고 있는 문제들에 관련된 다른 대화편들을 참고하는 일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주제적인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to on to me on에 관련하여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의 철학자인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가 남긴 단편 역시 해석에 도움을 줄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모상과 거짓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다시 변증술이 필요하다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플라톤이 이러한 대화의 배경을 설정하여 그 안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실제로 어떤 문제의식 아래에서 제기된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증술이라는 바로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지 파악되지 않는다면 역으로 이 대화편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어려울 것이다. 이 대화편이 어떤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된 것인지 가늠해 보는 일은 다시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핵심적인 문제들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불가피한 관문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소피스테스』라는 대화편을 『파르메니데스』라는 또 다른 대화편에 대한 일종의 응답으로서 간주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문제가 플라톤의 대표적인 이론으로 간주되는 소위 이데아론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른 한편, 이 문제가 어떤 이유에서 소피스테스를 정의한다는 배경 속에서 논의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또 다른 대화편 『에우튀데모스』를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에 앞서, 플라톤과 소피스테스 모두에게 특정 방식으로 수용된 파르메니데스 그 자신의 이론에 대해 간단히 고찰함으로써, 전체적으로 to on to me on의 문제가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심화, 발전되어 나아가는지에 대한 윤곽을 그려 보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대화편 내에서 변증술이 문제시되는 부분에 이르기까지 논의의 맥락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는 일 역시 필요하다. 『소피스테스』는 거듭 새로운 문제가 부각되면서 점차 내용이 심화되어 가면서 논의의 주제가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 대화편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단계별로 제기되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그 문제들이 서로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내용상의 불일치나 각 문제 자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난점이 구체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들 상호의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도 어떤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는 사유를 위한 탐구의 오직 두 길만이 있다고 선언하며 그 두 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편의 길은 어떤 식으로든 있으며/~이며 또한 있지/~이지 않을 수 없다는 길이고, 다른 편의 길은 있지/~이지 않으며 또한 있지/~이지 않아야만 한다는 길이다. 후자의 길은 배움이 전무한 길인 바, 있지/~이지 않음은 생각할 수도 언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DK28 B2). 그가 말하는 두 길로서 영어 Be 동사에 해당하는 'esti'와 그 부정인 'ouk esti,' 그리고 이 동사의 부정사(einai/me-), 실체화하는 관사를 동반한 분사(to on/-me-) 등이 활용되어 파르메니데스의 시 곳곳에서 논의의 핵심주제어로 거듭 등장한다. 

'Esti'가 존재를 의미하든 계사를 의미하든 혹은 그 두 의미를 포함하거나 혼용하든 중요한 것은 오직 to on뿐이며 to me on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to on이지 않은 그 무엇도 없으며 to me on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유에 기여하는 탐구의 두 길은 따르도록 강제하는 진리의 길과 진입을 불허하는 금지된 길로 이루어지며,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한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다/있다,' 이것뿐이다. 모든 것이 '있다'거나 혹은 어떤 무엇'이다'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to on 이외의 것은 모든 것 이외의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므로 to on과 구분되는 어떤 것도 말하거나 생각할 수조차 없다. To on to on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며 연속적이고 이것을 나눌 제 2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는/~인 것은 시작도 끝도 없이 그 외부라 할 것이 전혀 아무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확고한 한계 내에, 즉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멈추어 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변화하지 않으며 어느 방향으로도 차이가 나지 않고 하나이자 전체로서 그 자신일 따름이다. 

사유의 두 길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추론은 일견 형식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데 그 추론의 방식은 분석적 혹은 연역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타당성은 전제가 참인 경우에 한하여 결론의 참을 필연적으로 보장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 전후로 고대 그리스 자연학자들(physikoi)이 내놓은 세계에 대한 여러 주장들은 모두 그러한 확실성을 보장받지 못하였다. 하나의 물질이 희박과 농축의 원리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한다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한 것들이 결합하거나 분리되며 우리에게 감각된다거나 하는 입장들은 모두 변화와 운동을 받아들인 것이며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궁극적으로 변치 않는 확고한 판단의 대상과 같은 것을 가질 수는 없었다. 물도, 공기도, 씨앗이나 원소 혹은 원자도 시간과 장소를 비롯한 여러 상태의 변화를 겪는 한에서 파르메니데스의 to on에 비하자면 한참이나 불안정한 것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경험과 상식에 비추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인 그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이 진지한 탐구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을 따른다면 일상적인 경험세계가 전면적으로 부정되어 버린다. '이것'과 이것이지 않은 '저것'조차 구분하여 가리킬 수 없고 그것들을 지시하는 서로 다른 이름들을 가질 수도 없다. 모든 것은 바로 그것 자체'인 것'이면서 동시에 여타의 것들'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이러한 '~' '~이지 않음'의 결합을 가사자들, 필멸자들의 혼동된 사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파르메니데스 스스로 하나라느니 전체라느니 정지니 연속이니 하는 to on과는 다른 어떤 술어들을 to on에 덧붙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결론은 다시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있다. 오직 to on뿐이며 to me on은 불가능하다. 

 


이데아론()의 문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감각되는 세계 속에서 그것들이 정말로 지속적인 변화의 와중에만 있으며 어떤 식으로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그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 무언가를 가리키는 그 바로 순간에도 가리켜진 그것은 변화하여 방금 가리킨 것과는 다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경험하는 것들을 가리키거나 말하거나 세계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린다. 변화의 와중에서도 어떤 것을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고 지시하고 서술하며 사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험에 기초한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같은 바람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동시에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춥게 느껴질 수 있다. 혹은 신들에게 사랑받는 일이 경건한 일이라면, 신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하므로, 어떤 하나의 일이 경건한 동시에 경건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단 것과 쓴 것을 가르는 기준에서부터 경건이나 정의와 같은 가치판단의 기준에 이르기까지, 어떤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본이 없이는 변하지 않는 확고한 판단, 앎이란 불가능하다. 그러한 본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심지어는 모순되게 보이는 여러 사물이나 사태가 그러한 본에 관련될 때, 비로소 앎이 가능하고 판단에 대한 평가가 가능해진다. 이는 단순히 인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돌은 구를 수도 있지만 어딘가에 박힐 수도 있다. 그것은 운동하기도 하지만 정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운동과 정지는 서로 모순이다. 혹은 꽃다발을 생각해 보라. 꽃다발은 여러 송이의 꽃들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하나'의 꽃다발이다. 그 하나의 꽃다발은 '하나'의 꽃다발이면서 동시에 '여러' 송이의 꽃''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빠른 말투를 가지면서 몸놀림이 느릴 것이다. 그는 어린이였으나 지금은 어른일 것이다. 그는 두 팔과 두 다리로 이루어진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모순되는 것들이 어떻게 동일한 것 안에 함께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데아론은 하나의 설명을 제시해준다. 그 자체로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서 고정불변하며 영원한 것, 그러한 것이 있고 그것의 이름으로 서술되는 여러 개별적인 것들은 바로 이것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돌이 구를 수 있는 것, 즉 움직이는 것인 까닭은 그것이 운동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은 또한 정지의 이데아에도 참여하며, 그러나 운동과 정지 각각은 그 자체로 서로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부분적으로는 운동에, 또 부분적으로는 정지에 참여함으로써 돌은 움직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형상에 참여함으로써 한 명의 사람이지만 또한 여럿(다수)의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두 팔과 두 다리를 지니며 과거의 나이자 현재의 나이며 미래의 나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파르메니데스의 to on과 유사하다. 여러 다양성과 변화는 이데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데아들에 의존하는 개별물에 속하는 것이다. 이데아는 각기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일 따름이며 여타의 것들로부터 독립적이다. 변화와 생멸로부터 구분된 이데아는 철저히 자기동일성을 유지함으로써 그것에 참여하는 개별물들이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 중에서도 어떤 무엇으로 지시되고 사유되며 서술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준다. 또한 이러한 한에서 궁극적이고 확실한 앎의 대상은 바로 이데아이다. 이데아에 대해 앎을 가지게 된다면 이 앎은 이데아에 대한 것인 한에서 불변하고 확고한 진리에 대한 인식으로 유지된다. 이데아가 관점이나 상황 등 여타의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일이 없고 새로 생겨나거나 혹은 사라지지도 않기에, 이에 대한 인식 또한 영원한 것이 된다. 반면에 이러한 이데아에 참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영구불변한 앎을 지닐 수 없고 단지 이러저러하게 보이거나 여겨진다는 믿음만을 가질 수 있다. 개별 사물들에 대해서 가능한 일은 그것들이 어떠한 이데아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이데아에 대한 앎을 근거와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한계가 있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이데아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이다. 예를 들어 운동의 이데아를 생각해 보자. 운동의 이데아는 운동 이외에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것일 터이다. 그러나 정지함이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면 그것은 지시도 사유도 서술도 언표도 불가능하다. 가리키는 순간 다른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동의 이데아는 운동이며 운동이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운동이란 것으로서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으며 그런 식으로 정지해 있다. 또한 운동의 이데아는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어야 하며 그 외의 것들과 다른 것이기도 해야 한다. 어쨌든 운동은 정지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운동이 운동이기만 하다면, 같음의 이데아가 따로 있고, 또한 다름의 이데아가 따로 있으며 이 이데아들이 모두 분리되어 각기 독립적이기만 하다면, 운동의 이데아가 자신과 '같다'거나 그 외의 것들과 '다르다'거나 하는 사태는 불가능할 것이다. 운동이란 이데아는 한 개의 이데아일 테니 '하나'라는 이데아에도 의존해야 한다. 이데아가 모두 그 자체로 독립적이라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데아와 개별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인간의 이데아를 생각해 보자.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바로 이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데아는 인간인가?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과는 다르고 인간이지 않은 무언가에 참여함으로써 그것에 참여한 것들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데아론에 따르면 개별 인간들을 인간이게끔 해주는 본이 인간의 이데아이고, 개별 인간들은 그 이데아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데아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데아가 '인간이다'라는 것은 그것이 개별적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판단된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이데아를 인간이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인간의 이데아와 개별 인간들을 모두 인간이도록 해주는 또 다른 제 3의 인간이데아 같은 것을 상정한다면, 이는 무한히 소급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인간들과 인간의 이데아, 그리고 양쪽 모두를 인간이도록 해주는 제 3의 인간은 마찬가지로 모두 다 '인간이다'라고 판단될 것이며, 이 세 부류를 모두 인간이도록 하는 제 4의 인간이데아가 필요할 것이며, 이러한 과정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아론이 마주하게 되는 이러한 문제들에 논리적 순차를 부여할 수 있다. , 이데아들 사이의 관계가 형상과 개별물들 사이의 관계보다 우선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개별적인 것들은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정체성을 부여받게 되고, 그렇기에 이데아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위 ' 3 인간 논변'의 요지는 인간의 이데아가 인간이라는 술어를 가지게 되는, 이데아의 자기술어화 방식을 묻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 역시 이데아들이 성립하는 방식에 대한 첫 번째 물음에 포함될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테스

 

플라톤에 따르면 그 자신만이 아니라 소피스테스들도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을 그나름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두 수용의 방식은 상이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화편 『에우튀데모스』에서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는 어떤 무엇은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어야만 하며 다른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는 입장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당혹시킨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아는 자이며 아는 자는 모르는 자가 아니므로 결코 모를 수 없다는 주장이 그들에 의해 제기된다. 이에 따라 어떤 것을 아는 자는 단적으로 모든 것을 알 뿐 전혀 아무것도 모르지 않게 된다.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워 이전과 다르게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는 일은 그 사람이 더 이상 바로 그 사람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므로 그가 존재하지 않기를, 즉 죽기를 바라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일단 어떤 무엇이거나 그러한 것으로 있는(to on ti) 것은 결코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이는 분명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에서 엿볼 수 있는 동일하고 고정된 판단의 강조와 한 종류의 것이다.

이러한 활용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두 사람은 더 진전된 재반론을 시도한다.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비판하자, 그들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거짓이란 사실(to on)이 아닌 것(to me on)을 진술하거나 믿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나 생각은 반드시 어떤 무엇인가(to on ti)에 대한 말이나 생각이어야만 한다. 즉 아무 것도 말하지 않거나(to me on legein) 사실(to on)을 말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이는 다시 반박 불가능성의 논변으로 이어진다. 디오뉘소도로스에 따르면 어떤 하나의 것에 대해 두 사람이 서로 달리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A란 것에 대해 서로 달리 말하고 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한 사람은 A인 것(to on A)를 말하고 있을 것이며 다른 한 사람은 그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한에서 A이지 않은 것(to me on A)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거나, 아니면 한 사람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으나 다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하나의 것이 같은 동시에 또한 다르기도 하기란 불가능하며, 같은 것을 말하는 한에서 서로 다른 말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같은 것에 대해 한 사람은 맞고 한 사람은 틀려서 맞은 자가 틀린 자를 반박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to on은 단지 to on일 뿐이며 다른 무엇, to me on일 수는 없다는 전제는 상대의 주장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그 주장을 논박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동일성 명제뿐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엄격한 진리의 기준이 소피스테스들에 의해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주장이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데에 활용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논박에 저항하는 자들의 논리 또한 같은 방식으로 부정당한다. 애초에 거짓이란 불가능하며, 거짓을 주장하는 자와 참을 주장하는 자가 같은 문제를 두고 서로 논박하는 일조차 또한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의 맥락

 

플라톤의 대화편 『소피스테스』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논의한다. 특히나 이 대화편에서는 모든 것, 이데아와 개별 사물들을 아우르는 말 그대로의 모든 것이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형상(eidos)들을 중심으로 그 상호관계가 탐구된다. 능동이나 수동의 작용에 전제되는 운동(움직임, kinesis), 지시나 언표 및 진술과 사유뿐만 아니라 자기동일성을 위해서도 전제되어야만 하는 정지(멈춤, stasis), 그 자체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같음, tauton), 자신 이외의 것들에 대한 타자성(다름, thateron)에 더하여 존재(있음) 혹은 어떠한 무엇임(~, to on)이 서로에 참여함으로써(metechein) 공유(koinonia)를 통해 변화하고 상호에 적용되거나 적용바든 과정이 묘사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들 혹은 유(, genos)들 사이의 관계는 그것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타의 모든 형상들과 만물에 대해서도 성립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형상들의 함께-엮임(symploke)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그것이 직면한 한계와 더불어 이해하기 위해 고찰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은 유들의 공유(koinonia) 혹은 형상들의 결합(symploke)을 곧장 다루지 않고 배경이 되는 탐구과정 속에 이 작업을 포함시킨다. 주 대화자인 엘레아 출신의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철학자와 정치가 그리고 소피스테스 사이에 발생하는 혼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그 과정에서 위의 탐구를 수행하게 된다. 손님에 의해 고찰되는 소피스테스는 상인으로 보이는가 하면 사냥꾼으로도 보이고 또한 영혼을 정화하는 교육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상인, 사냥꾼, 교육자는 각기 고유하고 서로 다른 기술자들이다. 교육술은 사냥술과도 상술과도 다르며 나머지 두 기술 각각도 마찬가지로 다른 두 기술들과 다르다. 소피스테스가 소피스테스술이라는 하나의 기술로부터 연유한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여러 기술들, 앎들을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는 이것이 문제가 된다. 그는 말로써 이러한 일들을 해내며 특히 모든 기술들에 대해 반박하고 가르치는 일이 가능하다고 자부한다. 더욱이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따른다. 그러나 한 부류의 인간이 단 하나의 기술로 모든 기술과 앎을 지니기란 불가능하다.

이 대화편에서 그가 행하는 논박은 앞서 『에우튀데모스』에서 드러난 그러한 방식의 논박이다. 손님에 의하면 그는 전적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것이지 않은 것(to me on ti)으로서 모상과 같은 것을 말하거나 참이지 않은 거짓을 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말이나 생각은 to me on이 아니라 to on에 대한 것이라는 점은 두 대화편에서 공통되게 등장하는 논점이기도 하다. 그 논박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일종의 모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방이란 그 원본~인 것이 아니라 원본~이지 않은 것, 참으로 원본 자체가 아니라 원본에 대해 거짓인 것이다. 나아가 거짓이란 ~인 것을 ~이지 않다고 혹은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믿거나 진술하는 것이므로, 소피스테스의 기술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이지 않은 것을 논해야 한다. 그러나 ~이지 않은 것에는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없고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그것을 가리킬 수조차 없다. '너는 모상을 만들고 거짓을 말한다'라고 논박하려는 자는 스스로 모상이나 거짓을, 그 안에 든 ~이지 않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지 않음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믿더라도 그 ~이지 않음을 '그것'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으므로, ~이지 않음을 논박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는 스스로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며 원본의 비율과 맞지 않는 허상을 모방해내 사람들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유이다. 그런데 모방된 모상, 허상이란 무엇인가? 거울이나 수면에 비친 '사람'은 참으로 사람인 것은 아니고 사람이지 않다. 참이 아니므로 거짓이고 ~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떤 무엇이다. 참이 아니고 참으로 그 무엇이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어떤 무엇이라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이지 않음은 진술, 언표, 사유, 지시 모두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그것에 ~인 무엇도 적용될 수 없고 그것이 ~인 무엇에 적용될 수도 없다. 그러나 모상과 허상은 ~이면서 ~이지 않고, 거짓 또한 ~인 것은 ~이지 않다고 혹은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진술하거나 믿는 것이다. ~이지 않음은 결합될 수도 결합할 수도 없음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임의 경우는 어떠한가? 두 길 중 남은 길은 ~임뿐이다. ~임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마지막 가능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이지 않음이 가능하다면 ~임 안에서의 ~이지 않음을 논할 수 있고 이로부터 모상과 거짓에 대한 설명 가능성, 나아가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선 ~임을 수와 결합시키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라고 하거나 여럿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하나와 ~임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임이 하나다'라는 진술이 불가능하고, ~임 자체도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과 그것 자체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반면 ~임을 여럿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 여러 가지 것들과 ~임의 관계가 문제시된다. 뜨거움과 차가움은 모두 ~인 것들이다. 그러나 뜨거움은 차가움이지 않고 그 역도 성립한다. 더욱이 그것들이 ~임과 같다면 더 이상 ~임은 여럿이 아니라 ~임 하나뿐이다. ~임은 하나일 수도 여럿일 수도 없다. ~임 자체가 아닌 모든 것이 ~이지 않은 것으로서 아무것도 아니라면 오직 ~임뿐이다. 그러나 ~임을 포함해 둘 이상의 것들을 말하는 순간 ~임 자체와 구분되는 그와 다른 어떤 것, ~이지 않은 무언가가 ~이어야만 한다. 

~임이 움직이느냐 멈추어 있느냐에 대해서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그것이지 않은 것이 된다. 어떤 것이 움직이고 변화한다면 그것을 그것이라고 말하고 믿는 일의 참이 보장되지 않는다. 반면에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작용도 받지 않을 것이며, 인식작용 또한 받지 않을 것이다. 이를 확장시킨다면 그것은 지시'받거나' 할 수도 없을 터이니 이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자면, 운동도 정지도 모두 각기 ~인 것이어야 하며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으므로, 이런 식으로도 ~임은 운동이기도 하고 정지이기도 하여야만 한다. ~임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들이 ~이기도 하고 ~이지 않기도 해야 하므로, 그리고 ~임 자체도 그 자체이기만 하여서는 안 되고 운동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며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하여야만 하므로, 이러한 일들이 가능해지는 방식이 문제가 된다. 이 방식이 곧 유들의 결합방식이고 이를 알아보는 것이 변증의 기술이다.

존재가 운동이라는 것은 존재와 운동이 동일하다는 것과 의미가 다르다. 역으로, 운동은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운동이다' 혹은 '운동이 존재한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든다. 이 결합이 불가능하다면 운동은 비존재, ~이지 않은 것이 되고 그것은 진술, 사유, 언표, 지시 모두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운동이 존재와 동일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운동이 존재한다,' '운동이 존재이다'라는 문장은 여전히 참이다. 이제 문제가 발생한다. 존재가 운동에 적용되는 경우와 운동이 존재에 적용되는 경우, 다시 말해 운동이 존재에 참여하는 경우와 존재가 운동에 참여하는 경우 그 결과는 서로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의 기준이 불분명하다. 더 나아가 각 경우에서 동일성을 의미하는 '~이다'가 배제되는 과정 역시 드러나지 않는다.

각각의 모든 것은 자기 자신과 같고 여타의 것들과 다르다. 같음과 다름이라는 이 두 유들은 모든 것과 결합한다. 그런데 운동이 존재와 다르다는 것은 운동이 존재이지 않다는 것, 운동이 ~이지/있지 않다는 것을 함의한다. 다름은 파르메니데스적 to me on의 대체물로서 그 의미는 유들의 결합에 한하여 볼 때 비동일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존재에서 부정을 제거하면 남는 것, 부정의 대상인 존재 혹은 ~임은 동일성을 의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일성의 확보는 같음이라는 유와 결합함으로써 가능하다.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한다. ~임과 같음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또한 ~이지 않음과 다름은 구분되는가 아니면 같은 것의 다른 두 이름들인가?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은 모든 유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최소한 모든 각각의 것은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과 구분되어야 한다. , 대상과 이름은 서로 다른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것이 하나다'라는 주장이 논파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언표할 수도 진술할 수도 없거나 아니면 이름만 남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손님은 소피스테스가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여전히 어떤 것들은 서로 섞이고 어떤 것들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믿음과 진술에는 ~이지 않음이 섞이지 않는다고 반박하리라 예상한다. 진술이 운동이나 정지와 다른 한, 믿음이 영혼이나 하나와 다른 한에서, 진술과 믿음이 ~이지 않음과 결합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 구절을 적용해 보더라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은 마치 큼과 크지 않음의 예를 통해 묘사된다. 크지 않음은 큼의 반대인 작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크기임까지 포함한다. 이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니, 받아들인다면 더욱 더 소피스테스의 재반박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진술은 진술 자체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지 않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국 진술의 전체에 걸쳐 ~이지 않음이 필수적이라고 하더라도, 거짓 진술을 성립시키는 ~이지 않음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진술은 거짓 진술이다. 그 이유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테아이테토스 ~이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참인 진술이다. 그 이유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테아이테토스가 서 있다'라는 진술은 어떠한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앉아 있다는 것이 존재, ~임을 말하고 있다면 '서 있다'는 것은 '앉아 있다'와 다르므로 이 역시 거짓이 될 것이다. 이 경우의 거짓은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와 같은 종류의 거짓인가? 더 나아가, '테아이테토스는 사람이다'라는 진술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람' '앉아 있다'와 서로 다르다. 이 진술은 그리하여 거짓이 되는가?

'테아이테토스' '앉아 있다'도 엄밀히 말하자면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은 그 자체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진술은 이름과 동사로 구성된다. 이름은 사물을, 동사는 사태는 가리킨다. 진술의 구성요소가 가리키는 것은 전부 어떤 무엇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지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술이 왜 ~이지 않음과 섞이지 않으리라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임과 다른 한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외의 무엇과든 다른 한에서 모든 것은 ~이지 않음에 참여하지만, 그럼에도 진술이나 믿음이 가리키는 것은 지시 대상 자체이지 그 대상과 다른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 또한 아니다. Ta men ta de를 대상이 아닌 상황으로, 관점의 목적격으로 부사적으로 번역한다면 진술과 믿음은 ~이지 않음과 결합하지 않는 경우에 속할 수 있다. 이것들은 이것들 자체가 아닌 여타의 무언가에 관한 것, 그것에 의존적인 것이다. To medamos on은 대상화될 수도 없을 뿐더러 이를 대상으로 삼는 진술이나 믿음 역시 불가능하다. 이름이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과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경우는 없고 동사 역시 그것이 가리키는 행위와 다른 행위를 가리킬 수는 없다. 이 결합 없이는 진술이 불가능하다. 『에우튀데모스』에서 논의하는 그러한 종류의 거짓 진술이나 거짓 믿음은 배제된다. 그렇다면 유들의 결합에서 비동일성을 의미하던 ~이지 않음이 어떻게 진술에서는 부정적 진술을 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하는가? 


문제들

 

나눔과 모음

소피스테스는 사냥꾼이자 장사꾼이면서 쟁론가이면서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 하나의 기술로 동시에 여러 서로 다른 고유한 기술들인 그러한 기술은 불가능하다. 또한 단 하나의 기술을 지니고서 그 기술로서 다른 모든 기술들을 수행해내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라는 하나의 기술이 어떻게 여러 다른 모습들로 드러나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소피스테스 기술에 고유한 문제가 아니다. 낚시꾼도 땅꾼도 모두 사냥꾼이다. 그러나 낚시꾼과 땅꾼은 서로 다르다. 소매상도 무역상도 자가판매상도 모두 상인이다. 그러나 소매상과 무역상과 자가판매상은 모두 서로 다르다. 소피스테스라는 하나의 유, 그 유가 지닌 단 하나의 기술이란 다른 여러 기술들과 구분되면서도 기술이라는 바로 그 점에서 그 모든 것들과 함께 모이는 그러한 것이다. 어떤 때에 모으고 어떤 때에 나누어야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한지 해명되어야 한다. 기술 일반에서 제작과 획득을 나누고 획득에서 다시 나눔을 거듭하여 사냥술에 이르면 우리는 사냥술이 무엇인지 정의하게 된다. 그러나 사냥술에서 다시 나눔을 거듭하면 육상에서의 사냥과 수중에서의 사냥이 나뉘고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둘이 하나의 같은 것에 포함되고, 그 둘을 포함한 것이 또 다른 것과 구분되면서도 또 다시 하나로 모인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다. 반면 소피스테스의 기술을 나누고 모으면서 이 문제가 새삼스럽게 제기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논박하며 이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실제로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여겨지게끔 만드는 기술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문제

to on뿐이며 to me on은 불가능하다. to on to me on에 엮을 수도 없고 to me on to on에 엮을 수도 없으며 애초에 to me on 자체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수도, 이름도, 지시사도 모두 ta onta이므로 그 중 어떤 것도 to me on과 결합할 수 없다. 그러나 to me on 없이는 거짓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고, 나아가 모상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없다. 원본이 참으로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이라면, 모상은 원본이지 않은 것, 참으로 그것이지 않은 것, 거짓인 것이다. 그런데 거짓은 ~인 것을 ~이지 않다고 혹은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다. 모상에도 거짓에도 to on to me on이 얽혀 있다. 뿐만 아니라 to on 자체도 그것 아닌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하나라면 하나 자체와 to on 자체는 서로 다를 것이므로, 그리고 to on이라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이 to on을 지시한다면 이름과 대상 역시 서로 다를 것이므로, to on 자체와 다르기에 to me on인 이러저러한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 없이는 to on도 가리키거나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to on 이외의 것들은 to on 자체이지 않은 한에서 to me on이고, to me on은 다시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으며 거기에 to on을 적용시키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이름도 하나도 모두 to on 자체는 아니기에 오직 to on 자체만이 가능하다. 그럼 다시 to on은 하나뿐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는 앞서 보았듯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각기 따로 분리되어 있다면 to on 이외의 모든 것은 ta me onta로서 사라지고, to on과 이름마저 결합할 수 없기에 to on to on이라 할 수조차 없게 된다. 반면 모든 것이 구분 없이 결합된다면 정지인 동시에 운동이자 이름인 동시에 그 지시대상이며 그런 식으로 말할 수도 사유할 수도 없는 것만이 남는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결합하고 어떤 경우에는 결합하지 않아야 한다. 

 

형상들의 결합

결합을 의미하는 동사로 참여(metechein), 적용(haptesthai) 등이 등장하고 결합의 요소들은 주어와 목적어로 구분되어 등장한다. 또한 결합의 결과 ~에 관하여 ~이다(epi ~ einai), ~ ~이다(A is B), ~ ~한다(A is B-ing) 등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같음과 운동의 관계를 보자면 1) 같음이 운동에 참여한다 2) 운동이 같음에 참여한다 3) 같음이 운동에 적용된다 4) 운동이 같음에 적용된다 네 가지 경우가 가능하다. 1) 4)의 경우 (1)같음이 운동이다, (2)같음이 운동한다, (3)같음에 관하여 운동이 ~이다와 같이 같음에 대해 운동이 술어로 주어지는 세 경우가 가능하다. 2) 3)의 경우 주술관계가 역전된 마찬가지로 세 결과가 도출된다. 이러한 해석이 정당하다면 주술관계의 역전은 능동과 수동의 구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같음이 운동인 경우와 운동이 같음인 경우 사이의 구분은 가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에 관하여 ~인 것들과 ~이지 않은 것들이 수없이 많다는 묘사를 고려할 때 특히 결합 결과로서의 주어와 술어 사이의 구분이 가능한 결합방식은 더욱이 필수적인 것이다. 

유들의 결합에서는 to on에 참여하는 결과로 그 참여 주체가 to on이 된다. 그런데 운동, 정지, 같음, 다름에 참여할 경우 참여 주체는 to on의 경우에서처럼 그 대상을 술어로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이후의 묘사를 고려할 경우 그 참여 대상이 참여 주체에 관하여 ~인 것이 된다. ~임이 운동한다(to on kineitai)는 것은 ~임이 운동이라(to on estin kinesis)는 것이고 이는 ~임에 관하여 운동이 ~(ten kinesin einai epi to on) 것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결과는 to on과의 직접 결합을 통한 결과가 아니다. 만일 서양고전학회에서 제안된 해석을 따라 술어가 되는 과정이 to on 자체가 아니라 참여 대상의 to on에 참여함으로써 그 대상에 관하여(epi X) to on이 되는 과정이라면, 이는 주술관계에 불일치를 일으킨다. 운동이 같음에 참여하면 그 결과 운동은 자기 자신과 같다. 그런데 운동이 같음의 to on에 참여한다면 운동이 같음에 관하여 to on이 되는 것이고, 이는 거꾸로 같음이 운동한다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이 해법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X einai epi Y를 일과된 해석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to on과 다름으로서의 to me on을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름으로서의 to me on으로까지 확장시키기 어렵다. to on과의 관계에서 여타의 것들은 to on에 참여하여 ta onta가 된다. 그러나 다시 그것들은 다름에 결합하면서 to on 자체와 다른 것들이 된다. to on과 다른 한에서 그것들은 ta me onta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운동과 같음의 관계에서, 운동은 자기 자신과 같다는 점에서 같음이다. 그런데 다시 운동이 같음과 다른 한에서 운동은 같음이지 않기도 하다. 여기에서 같음',' 같음'이지 않음'은 곧 to on tauton, to me on taouton이다. 어떤 주어에 대해 술어가 되는 것과 그 주어에 관하여 ~인 것이 되는 것이 의미가 같고, 어떤 것에 대해 부정술어가 되는 경우 또한 그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조건이 없다면 유들의 결합에서 to on을 제외한 것들 사이의 결합 결과로서 나오는 주술문장이 설명될 수 없다. to on의 결합관계의 요소가 아닌데도 to on이 결합결과에 등장하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하고, 그 이유는 epi X einai로 설명되며, 따라서 이 epi X einai가 유들의 결합 방식과 일관되게 설명되어야 유들의 결합이 온전히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가 결합할 수 있는지 없는지 불확실하다. Gigantomachia 부분을 고려한다면 변화(~이지 않은 것이 ~이 됨)를 겪는 모든 것은 운동한다. 정지도 인식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같음과 다름, to on을 겪어 그 겪은 바의 것이 되므로, 그것은 운동한다. 정지의 경우, 정지하지 않으면 동일할 수 없고 동일할 수 없다면 인식될 수 없으므로, 운동을 운동이라고 진술하고 사유할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정지해야 한다. 나아가 만일 자기 자신과 같음이 같음의 대상이 되는 자기 자신의 정지를 필요로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면, 운동이 운동이기 위해서라도 운동은 정지해야 한다. 그러나 유들의 결합을 논하는 부분에서 손님은 운동과 정지가 가장 반대되는 것이라 말하고, 테아이테토스도 이에 동의한다. 이후 운동이 정지한다거나 정지가 운동한다는 문장이 등장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편집들이 제안되기도 한다.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큼과 작음의 관계와 같다면, 이 둘의 결합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는 같음과 다름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모든 각각의 것은 자기 자신과 같은 한에서 같음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른 한에서 다름과 결합해야만 한다. 이는 같음과 다름 자체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같음과 다름이 그렇기에 서로 결합한다면, 정지와 운동의 짝은 같음과 다름의 짝과 같은 경우인가, 다른 경우인가?

자기술어화의 문제 또한 발생한다. 같음은 자기 자신과 같다. 다른 모든 유들이 그러하듯 같음 자체도 자기 자신과 같아야 한다. 다름 역시 다른 모든 유들이 그러하듯 그 자신도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르다. 이 경우 같음이 자신과 같다는 것과 운동이 자신과 같다는 것은 서로 다른 작용을 통한 서로 다른 결과인가? 혹은 운동이 같음에 참여하듯 같음도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참여한다고 해야 하는가? 또한 다름의 경우, 다름 그 자체가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다르다고 한다면, 다름은 자기 자신과도 다른가? to on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to on에 참여함으로써 to on이 된다. 그러나 to on은 그 자체로 to on이다. 그렇다면 다름도 그 자체로 다르고 같음도 그 자체로 같은가?

 

다름으로서의 to me on

다름으로서의 to me on에 대한 묘사는 '큼과 크지 않음'의 비유, 그리고 아름답지 않음 등에 대한 진술들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크지 않음은 큼의 반대인 작음뿐만 아니라 같은 크기임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아름답지 않음을 아름답지 않다고 언급한다. 이 둘 모두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A는 무수히 많다. 그 중 어떤 것도 특칭되지 않는다. 아름답지 않음 또한 추함, , 움직임, 아름다움 자체와 다른 모든 것들일 수 있다. 크지 않음은 작음과 같은 크기임뿐만 아니라 개임, 날고 있음, 뜨거움 등 무수한 것들을, 큼 자체와 다른 모든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L. Brown의 제안대로 암묵적으로 일정 범위가 제한된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우선 그러한 제한이 주어지는 맥락이 대화에 직접 등장하는 바 없고, 일정 범위로 제한한다고 해서 불특정의 것이 갑자기 특정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검지 않음은 검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주어가 검지 않은 특정한 무엇인가를 지시할 경우 그것은 희거나 붉거나 푸를 것이다. 그러나 흼과 붉음과 푸름은 서로 다르다. 주어가 특정한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을 경우 부정적 자기언급의 역설에 봉착할 수 있다. '참이지 않음은 참이지 않다'라는 진술이 참이라면, '참이지 않음'이라는 사태에 부합하는 참인 진술은 불가능하다. 참이지 않음이 참이라면 더 이상 참이 아니지 않을 것이기 떄문이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음이 아름답지 않다'가 참이기에, '참이지 않음' 또한 '참이지 않다'고 진술하는 것이 참이다. 

 

형상들의 결합과 진술분석

유들의 결합에서 to me on이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이라면, 이 다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각각의 것은 자기 자신과 같고 그 외의 것들과 다르다. 그러나 진술분석은 진술과 믿음에 to me on이 섞이지 않을 가능성 때문에 요청된다. 진술이 진술이고 믿음이 아니며 믿음 또한 자기 자신이고 그 외의 것이 아닌 한에서, 유들의 결합에서 드러난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이 이것들에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유들의 결합에서 밝혀지는 to me on의 의미는 on과 다른 모든 것에 더하여 서로 다른 모든 것에 부여되는 서로의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이다. 반면 진술분석에서 거짓 진술에 포함되는 to me on은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의 to on 다른 것이다. 하지만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것이 참일 때 앉아 있음과 다르면서도 거짓이 아닌 테아이테토스에 대한 진술들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가 사람이라는 것은 '앉아 있음'과는 다르면서 또한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인 것이고 참일 것이다. 또한 앉아 있음과 다른 서 있음은 테아이테토스에게 거짓이 될 것이나, 테아이테토스가 일어선다면 참이 될 것이다. 날고 있음은 거짓 진술의 예시로서 거짓 진술에 대한 정의가 날고 있음과 서 있음 모두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날고 있음이 인간이라는 유의 정의에서 배제되기 떄문에 인간인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거짓이라면, 서 있음이 거짓인 이유는 설명될 수 없다. 

 

 


해석의 제안

 

~임의 수를 논하는 과정에서 손님은 파르메니데스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한다. ~임은 중심으로부터 끝들까지 균등하다. ~임은 중심과 끝들, 전체와 부분들을 지닌다. ~임이 하나라면 ~임은 부분들을 통해 하나를 겪어 그 전체가 하나이게 될 것이다. ~임이라는 유와 하나라는 유 사이의 결합관계가 이런 식으로 성립한다면, 이는 다른 유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유들의 결합이 부분들을 통해 전체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서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은 중심과 끝들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런 식의 결합은 유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방식과 결과에 있어서 구분짓게 해준다. 예를 들어 운동이 존재에 적용(haptesthai)될 경우, 달리 말해 존재가 운동에 참여(metechein)할 경우 존재는 운동하게 된다. 이 경우 '존재가 운동한다'는 명제는 참이 되고 '존재가 운동이다'라는 문장 또한 참이 된다. 인식의 대상으로서 모든 대상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고 인식되기 이전의 상태로부터 인식된 이후의 상태로 변화된다는 것은 곧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선 운동과 정지 사이의 결합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갖게 된다. 작용과 수용의 능력이 있는 한에서, 결합하고 적용받는 모든 형상들은 운동에 참여한다. 또한 모든 형상들은 각기 그 자체로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정지에 참여한다. 이는 운동과 정지 각각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즉 운동은 정지에, 정지는 운동에 참여해야만 한다. 다만 이러한 상호작용은 본성의 중심, 능동적인 측면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자기술어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러한 접근은 한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마련해 준다.같음의 본성의 중심은 능동적으로 '같다'라는 술어를 지닌다. 그러나 그 외의 술어들은 참여를 통해 의존적으로 얻게 되고 수동적으로 작용을 받음으로써 성립한다. 같음의 본성이 능동적으로 작용한 결과는 다른 유들이 같음에 참여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얻게되는 수동적 결과와 같다. 같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같음을 겪는 것이며 같아지는 것이다. 이는 to on이 하나를 겪어서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더 이전에 묘사되는 방식과 같다. 그렇다면 같음은 자신에게 참여하는 것들에게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그것들을 같음으로 만든다. 이 능동성은 같음 자체의 중심에 오는 본성이다. 반면 같음의 부분에는 to on, 운동도, 정지도, 다름 또한 작용하며 같음은 그 부분들을 통해 여타의 것들에 참여한다. 이 능동적인 중심이 정의의 대상이 된다. 소피스테스의 기술 자체의 능동적 측면은 거짓된 모상의 제작이다. 오롯하게 그 기술 자체만으로는 사냥도 매매도 정화도 불가능하다. 운동은 그 무엇보다도 운동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운동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같고 다른 것들과 다르며 ~인 것이어야 한다. 테아이테토스에게 인간이라는 것은 테아이테토스의 능동적 측면이 속한 유일 것이고 이는 정의상 필수불가결할 것이다. 그러나 앉아 있음은 테아이테토스에게 정의상 필요한 능동적 측면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날고 있음 역시 정의상 배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태풍에 휩쓸리거나 뜨거운 공기로 밀어 올려지는 연 위에 올라타거나 커다란 새를 잡아 타거나 해서 날고 있을 때, 그는 날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앉아 있다는 것이 그러하듯 날고 있다는 것도 지금 여기에서 그에게 거짓일 뿐이다.

 -작성중-

  나는 병신이고 학문은커녕 학문의 기초마저 후달리게 어렵기만 한 터에 어깨에 힘을 어찌 빼나. 뭘 더 얼마나 굽히고 낮추고 버려야 내 꼬라지에 걸맞는 수준으로 발버둥을 칠 수 있는 건가. 전체를 물 흐르듯 거듭해서 읽고 읽고 또 읽으며 가자니, 다시 돌아올 때마다 내가 저지른 지랄들과 헛짓거리들이 눈에 밟혀서 누가 오함마로 대가리라도 깨부숴 줬으면 싶은데, 많지도 적지도 않은 시간만 남아서, 내게 또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긴 길을 에둘러 갈 결심을 세울 용기가 남아있는지도 이젠 잘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적당히 비비고 문대서 타협하고 빌어먹고 사기치고 구라치고 그렇게 넘어가자니, 그러고 살기엔 아직 배가 부른데, 등이 따순데, 게으르고 비겁하게 넘어가자니, 자꾸만 죽은 사람들이 눈에 밟히는데, 주제 넘게도 내가 그런데 어째야 하나. 공부하다 뒈지면 면피라도 될까 싶건만, 미친 놈이 술주정이나 해댈 뿐 책 붙들고 있는 사이에 죽을 기미는 보이지를 않는다. 모든 걸 다 알 수도 없고, 다 이겨먹을 수도 없고, 먼저 배운 사람들이 남들 배우라고 써 남겨 놓은 것에서도 배울거리를 못 찾으면 그딴 공부는 해서 무엇하나. 뭘 어떻게 가르쳐주는지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전보다 더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고 들러 붙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어깨에 힘만 들어간다. 주제도 깜냥도 안 되는 나란 새끼는 철 지난 논문 하나 붙들고 무슨 건곤일척의 담판이라도 짓겠다는 듯이 바들바들 떨면서 그럴싸한 말 몇 마디를 찾느라 시간만 허비한다. 사태에 부합한다는 진술이 그 진술이 지시하는 대상이 있다는 의미와 그 진술이 서술하는 속성이 그 대상에 귀속된다는 의미까지 확장되고 그 사태가 있다는 진술로도 간주된다. 무엇인가가 진술된다면 그것은 무엇인 것으로서 존재한다, 이는 필연적이다. 무엇인가가 진술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무엇인 것으로서 존재한다. □(A→B)에서 (A→□B)로의 오류추리, 오류추리라고 하는데 양화가 들어가서 오류인가 그냥 형식적으로 문제인가, 글쓴이가 어느 쪽을 주장하고 있는 건지는 잘 안 잡히고 그 와중에 그건 지금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니란다. 타란이었나 콕슨이었나 오웬이었나 여하간 이 양상 가지고 파르메니데스의 시에서 등장하는 길들이 세 개랬나 네 개랬나 뭐 그랬다는데. 이것 봐, 내 안의 병신이 이만큼이나 자랐어. 씨바. -蟲-

  (1)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에 나타나는 being의 원칙을 함축하는 단순하고 역사적으로 타당하며 철학적으로 파악가능한 가정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정들은 암묵적으로 주어질 뿐 그의 시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역사적 타당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역시대착오의 오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경우 당대의 선구자로서 그가 선취한 영역을 이해할 가능성이 닫혀 마찬가지로 역시대착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능동적이고 주재적인 가정들로서 이 시에 대한 일반적 입장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시 자체에 대해, 후대의 반응들에 대해, 그리고 오늘날 철학적 선제들과의 유사성을 통한 그의 철학의 정당성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열릴 것이다.
  (2) 탐구의 과정은 첫째, 초기 그리스에서 being 개념에 대한 기초작업을 제시한다. 둘째, 'it cannot be said that anything is not'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핵심 원리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다. 셋째, 'of what is, all that can be said is: it is'라는 원리를 설명하고, 넷째, "진리의 길"에서 남은 우주론을 간략히 다룬다. 다섯째, 파르메니데스 스스로 자신의 논증 결과들을 믿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고찰한다. 그리고 방법론에 대해 첨언한다.

1. A Word on ὄν

  (1) 파르메니데스가 τὸ ἐόν을 제시하는 구조나 독자에게 기대하는 해석은 불분명하나 그가 이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에 대한 통찰을 전하려 한다는 것은 충분히 분명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해석을 위해 그리스어 ἐστιν, ὄν, τὸ ὄν, εἶναι 등에 대한 독해를 확정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2) 주-술 결합에서 'is'와 존재사 'is'의 구분은 당대 그리스 일상어법에서도 철학적 용법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시에서 보어가 등장하지 않는 완전용법이 빈번히 출현한다. 이런 이유로 그가 존재사적 의미에 스스로 국한되었으며 이 지점에서의 혼동이 그의 전체 원칙 전반에 책임을 갖는다는 입장이 제시된다. 그러나 당대 철학적 용법은 존재사에도 술어적 용법에도 국한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며 혼용된다. 
  (3) 이 혼용은 ἐστι의 사용 자체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예들을 포함하는 더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보인다. 이것들은 파르메니데스 해석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a) 대상에 대한 속성 부여를 사실을 진술하는 단언의 이상적이거나 전형적인 형식으로 간주하는 경향과 (b) copula로 연결된 주-술문장을 대상에 대한 속성 부여의 이상적이거나 전형적인 형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서술적 ἐστι는 사태에 부합하는 것(참인 것, is the case) 혹은 속성을 부여받는 것(현전하는 것, obtains)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구분되지만 당대에 동화된 다양한 용례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1a) 사실이라는 것은 (ὄν) with (1b) 존재와 (ὄν), (2a) 사실들은 (πράγματα, τυγχάνοντα, etc.) with (2b) 대상들과 (πράγματα, τυγχάνοντα, etc.), (3a) 변화는 (the case) (γίγνεσθαι) with (3b) 발생과 (= coming to exist) (γίγνεσθαι). 

 주-술 계사는 속성 부여의 표준이고 속성 부여는 사태 진술의 표준이다. 1에서 사태 진술은 현전과 동화되고, 2에서 사태들은 대상들과 동화되며, 3에서 사태의 변화는 사태의 발생과 동화된다. 사태와 대상의 혼용은 의미론적으로 특수항과 보편항의 동화경향이다. 이 경우 부합한다는 것은 is의 두 의미에 따라 둘로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사태를 기술하는 문장의 참값은 특수항이나 보편항에 어떤 것을 적용하는 존재자 지시와 혼용되는 경향을 가질 수 있다. 반면 문장의 거짓은 용어 적용의 실패와 합쳐진다.

 (4a) 언어적으로 표현하여 ~인 것을 말하는 것(참을 말하는 것)과 (4b) 있는 것을 말하는 것(존재하는 어떤 것을 명시하는 것)
 (5a) ~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거짓을 말하는 것)과 (5b) 있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명시하는 것)

 끝으로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의 혼용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국가/정체』 5권(476-480)에 등장하는 지식의 대상과 믿음의 대상 사이의 구분, 그리고 이 두 쌍 각각의 내적 관계를 고려하면 방법적으로 알려진 것은 존재하는 것이, 명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사실로서 그러함이 필연적이라는 원칙이 도출된다. 이 역시 혼용된다. 

 (6a) 필연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다 with (6b) 필연적으로, 알려진 것은 있다
 (7a) 알려진 것은, 필연적으로 ~이다 with (7b) 알려진 것은, 필연적으로 있다

7a에 대조적으로 믿음에 관련된 원칙들이 도출된다.

 (8a) 비-필연적으로, 믿어진 것은 ~이다.
 (9a) 믿어진 것은, 비-필연적이다.

6에서 7 혹은 8a에서 9a로의 오류를 차치하면(조건과 귀결 사이의 양상관계가 귀결절 자체의 독립적 양상으로 바뀌나? necessitas consequentiae → necessitas consequentis), 방법적 지식과 명제적 지식의 결합 속에서 ὄν의 두 가지 용법이 혼용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

  (4) 방법적 지식을 감각지각으로 간주하면

  (8a) 비-필연적으로, 믿어진 것은 ~이다. with (8b) 비-필연적으로, 감각지각된 것은 있다.
  (9a) 믿어진 것은, 비-필연적이다. with (9b) 감각지각된 것은, 비-필연적으로 있다.

역시 이행과정의 오류를 차치하면, 방법적 지식과 믿음이 모두 doxa 개념으로 포괄된다. 이제 혼용은 τὸ ὄν, τὸ γνωστόν, τὸ δοξαστόν의 삼중이다.

  (5)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평가는 그의 시에서 being의 두 의미 혼용에 더해, 그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결론들을 도출하는 데에 중요하지 않다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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