Β.

Τῶν ὄντων τὰ μέν ἐστι φύσει, τὰ δὲ δι' ἄλλας αἰτίας, φύσει μὲν τά τε ζῷα καὶ τὰ μέρη αὐτῶν καὶ τὰ φυτὰ καὶ τὰ ἁπλᾶ τῶν σωμάτων, οἷον γῆ καὶ πῦρ καὶ ἀὴρ καὶ ὕδωρ (ταῦτα γὰρ εἶναι καὶ τὰ τοιαῦτα φύσει φαμέν), πάντα δὲ ταῦτα φαίνεται διαφέροντα πρὸς τὰ μὴ φύσει συνεστῶτα.
존재하는 것들 중 일부는 자연에 의한 것이고, 다른 일부는 여타의 원인들로 인한 것이며, 자연에 의한 것들은 동물들과 그것들의 부분들 그리고 식물들과 물체들 중 단순한 것들, 이를 테면 흙과 불과 공기와 물이고 (왜냐하면 이것들과 이러한 것들이 자연에 의한 것들이라고 우리가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자연에 의하지 않고 구성된 것들에 대해 판이한 것들로 드러난다.
τούτων μὲν γὰρ ἕκαστον ἐν ἑαυτῷ 
ἀρχὴν ἔχει κινήσεως καὶ στάσεως, τὰ μὲν κατὰ τόπον, τὰ δὲ κατ' αὔξησιν καὶ φθίσιν, τὰ δὲ κατ' ἀλλοίωσιν· [Bekker page 192b, line 16] κλίνη δὲ καὶ ἱμάτιον, καὶ εἴ τι τοιοῦτον ἄλλο γένος ἐστίν, ᾗ μὲν τετύχηκε τῆς κατηγορίας ἑκάστης καὶ καθ' ὅσον ἐστὶν ἀπὸ τέχνης, οὐδεμίαν ὁρμὴν ἔχει μεταβολῆς ἔμφυτον, ᾗ δὲ συμβέβηκεν αὐτοῖς εἶναι λιθίνοις ἢ γηΐνοις ἢ μικτοῖς ἐκ τούτων, ἔχει, καὶ κατὰ τοσοῦτον, ὡς οὔσης τῆς φύσεως ἀρχῆς τινὸς καὶ αἰτίας τοῦ κινεῖσθαι καὶ ἠρεμεῖν ἐν ᾧ ὑπάρχει πρώτως καθ' αὑτὸ καὶ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λέγω δὲ τὸ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ὅτι γένοιτ' ἂν αὐτὸς αὑτῷ τις αἴτιος ὑγιείας ὢν ἰατρός· ἀλλ' ὅμως οὐ καθὸ ὑγιάζεται τὴν ἰατρικὴν ἔχει, ἀλλὰ συμβέβηκεν τὸν αὐτὸν ἰατρὸν εἶναι καὶ ὑγιαζόμενον· διὸ καὶ χωρίζεταί ποτ' ἀπ' ἀλλήλων).
왜냐하면 이것들 각각은 자체 내에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지니고, 어떤 것들은 장소에 따라, 다른 것들은 증가와 감소에 따라, 또 다른 것들은 전환(변화?)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침구와 의복은, 또 만일 이와 같은 무언가가 여타의 부류라면 그 또한, 그것의 각 술어를 획득한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즉 기술에 의한 것인 한에서, 변화의 아무런 본래적 충동도 지니지 않는 반면, 그것들에 돌로 된 것들로 혹은 흙으로 된 것들로 또는 이것들을 통해 섞인 것들로 이루어짐이 부수한 바로 그 측면에서, 또 그 만큼에 한해서만 충동을 지니는데, 
그 안에 일차적으로(?) 그 자체로 또한 부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운동하고 정지함의 어떠한(특정한) 자연적 원리와 원인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자신이 자기 스스로 의사임으로써 건강의 특정(어떤)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수적이지 않은 방식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건강해졌다는 바로 그 점에 한하여 의술을 지니는 게 아니라, 부수적으로 같은 자가 의사이고 또 건강해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어쨌든 서로로부터 독립되기도 한다).

(ὡς 해석 1. κατὰ τοσοῦτον과 독립. Charlton. 해석 2. κατὰ τοσοῦτον과 연결. Hardie와 Gaye. 후자에 따를 경우 번역은: '그 안에 일차적으로(?) 그 자체로 또한 … 원리와 원인이 있는, 그러한 만큼에 한해서만 충동을 지닌다.')

ὁμοίως δὲ καὶ τῶν ἄλλων ἕκαστον τῶν ποιουμένων· οὐδὲν γὰρ αὐτῶν ἔχει τὴν ἀρχὴν ἐν ἑαυτῷ τῆς ποιήσεως, ἀλλὰ τὰ μὲν ἐν ἄλλοις καὶ ἔξωθεν, οἷον οἰκία καὶ τῶν ἄλλων τῶν χειροκμήτων ἕκαστον, τὰ δ' ἐν αὑτοῖς μὲν ἀλλ' οὐ καθ' αὑτά, ὅσα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αἴτια γένοιτ' ἂν αὑτοῖς.
그런데 제작하는(작용하는?) 여타의 것들 각각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중 어느 하나 자체 내에 제작의 원리를 지니지 않고, 오히려 어떤 것들은 여타의 것들 내에 그리고 외부에 지니니, 이를 테면 집이나 여타 인공물(수작업물) 각각이 그러하고, 또 다른 것들은 그것들 내에 지니지만 자체적으로 지니지는 않는 바, 부수적으로 그것들에게 원인이 생길 것들이 그러하다.
φύσις μὲν οὖν ἐστὶ τὸ ῥηθέν· φύσιν δὲ 
ἔχει ὅσα τοιαύτην ἔχει ἀρχήν. καὶ ἔστιν πάντα ταῦτα οὐσία· ὑποκείμενον γάρ τι, καὶ ἐν ὑποκειμένῳ ἐστὶν ἡ φύσις ἀεί. κατὰ φύσιν δὲ ταῦτά τε καὶ ὅσα τούτοις ὑπάρχει καθ' αὑτά, οἷον τῷ πυρὶ φέρεσθαι ἄνω· τοῦτο γὰρ φύσις μὲν οὐκ [Bekker page 193a, line 1] ἔστιν οὐδ' ἔχει φύσιν, φύσει δὲ καὶ κατὰ φύσιν ἐστίν. τί μὲν οὖν ἐστιν ἡ φύσις, εἴρηται, καὶ τί τὸ φύσει καὶ κατὰ φύσιν. ὡς δ' ἔστιν ἡ φύσις, πειρᾶσθαι δεικνύναι γελοῖον· φανερὸν γὰρ ὅτι τοιαῦτα τῶν ὄντων ἐστὶν πολλά.
그래서 상술된 바의 것이 자연이다. 이런 종류의 원리를 지니는 모든 것이 자연(본성)을 지닌다. 또한 이것들 모두가 실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뭔가 존속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연이 항상 존속하는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도 이러한 것들에 그 자체로 현존하는 모든 것도 자연에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에 있어서 위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도 아니고 자연을 지니지도 않지만, 자연에 의해 그리고 자연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이 무엇인지는, 이야기되었고, 또한 자연에 의해서라거나 자연에 따라서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야기되었다. 반면 자연이 어떠한지는, 입증을 시도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들 중 이러한 것들은 여러가지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τὸ δὲ δεικνύναι τὰ 
φανερὰ διὰ τῶν ἀφανῶν οὐ δυναμένου κρίνειν ἐστὶ τὸ δι' αὑτὸ καὶ μὴ δι' αὑτὸ γνώριμον (ὅτι δ' ἐνδέχεται τοῦτο πάσχειν, οὐκ ἄδηλον· συλλογίσαιτο γὰρ ἄν τις ἐκ γενετῆς ὢν τυφλὸς περὶ χρωμάτων), ὥστε ἀνάγκη τοῖς τοιούτοις περὶ τῶν ὀνομάτων εἶναι τὸν λόγον, νοεῖν δὲ μηδέν. 
그런데 불분명한 것들을 통해 분명한 것들을 입증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과 자명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능력이 없는 자에 속하고 (그런데 이런 일을 겪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불분명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나면서부터 장님인 자가 색들에 관하여 추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에게 논의란 자구들에 관한 것이고 이해는 전혀 없을 수밖에 없다.

δοκεῖ δ' ἡ φύσις καὶ ἡ 
οὐσία τῶν φύσει ὄντων ἐνίοις εἶναι τὸ πρῶτον ἐνυπάρχον ἑκάστῳ, ἀρρύθμιστον <ὂν> καθ' ἑαυτό, οἷον κλίνης φύσις τὸ ξύλον, ἀνδριάντος δ' ὁ χαλκός. σημεῖον δέ φησιν Ἀντιφῶν ὅτι, εἴ τις κατορύξειε κλίνην καὶ λάβοι δύναμιν ἡ σηπεδὼν ὥστε ἀνεῖναι βλαστόν, οὐκ ἂν γενέσθαι κλίνην ἀλλὰ ξύλον, ὡς τὸ μὲν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ὑπάρχον, τὴν κατὰ νόμον διάθεσιν καὶ τὴν τέχνην, τὴν δ' οὐσίαν οὖσαν ἐκείνην ἣ καὶ διαμένει ταῦτα πάσχουσα συνεχῶς.
그런데 자연과 자연상 존재하는 것들의 실체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각각에 내속하는 최초의 것이라고 여겨지며, 그 자체로 비정형적인 것이기에, 이를 테면 목재는 침대의 자연이고, 청동은 조각상의 자연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안티폰은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말한다. 만일 누군가 침대를 매장하고서 그 썩은 침대가 다시금 싹을 틔울(or 꽃을 피울) 능력을 얻는다면, 침대가 아니라 목재가 될 능력일 것이며, 부수적인 방식으로 현존하는 것으로서는, 관습적인 구조와 기술인 반면, 그 실체는 저것(나무)으로서 지속적으로 이런 것들을 겪으면서 존속하기도 하는 것이다.
εἰ δὲ καὶ τούτων ἕκαστον πρὸς ἕτε
ρόν τι ταὐτὸ τοῦτο πέπονθεν (οἷον ὁ μὲν χαλκὸς καὶ ὁ χρυσὸς πρὸς ὕδωρ, τὰ δ' ὀστᾶ καὶ ξύλα πρὸς γῆν, ὁμοίως δὲ καὶ τῶν ἄλλων ὁτιοῦν), ἐκεῖνο τὴν φύσιν εἶναι καὶ τὴν οὐσίαν [Bekker page 193a, line 21] αὐτῶν. διόπερ οἱ μὲν πῦρ, οἱ δὲ γῆν, οἱ δ' ἀέρα φασίν, οἱ δὲ ὕδωρ, οἱ δ' ἔνια τούτων, οἱ δὲ πάντα ταῦτα τὴν φύσιν εἶναι τὴν τῶν ὄντων. ὃ γάρ τις αὐτῶν ὑπέλαβε τοιοῦτον, εἴτε ἓν εἴτε πλείω, τοῦτο καὶ τοσαῦτά φησιν εἶναι τὴν ἅπασαν οὐσίαν, τὰ δὲ ἄλλα πάντα πάθη τούτων καὶ ἕξεις καὶ διαθέσεις, καὶ τούτων μὲν ὁτιοῦν ἀΐδιον (οὐ γὰρ εἶναι μεταβολὴν αὐτοῖς ἐξ αὑτῶν), τὰ δ' ἄλλα γίγνεσθαι καὶ φθείρεσθαι ἀπειράκις. 
그런데 만일 이러한 것들의 각각 또한 다른 무언가에 대해서 이와 똑같은 것을 겪었다면 (예를 들어 청동과 황금은 물에 대해, 뼈와 목재는 흙에 대해, 여타의 것들 중 무엇이 되었든 또한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자연과 실체는 저쪽이라고 (안티폰이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불을, 또 다른 이들은 흙을, 어떤 이들은 공기를, 또 다른 사람들은 물을, 다른 자들은 이것들 중 일부를, 또 어떤 이들은 이것들 전부를 존재하는 것들의 자연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구든 이것들 중 이러한 것으로 취한 것, 그게 하나든 여럿이든, 그것이 또 그만큼의 것들이 통틀어 실체라고 주장하며, 반면 여타의 것들은 모두 이것들의 겪음들, 상태들, 성향들이고, 또 이것들 중 무엇이든 영원한 반면 (왜냐하면 이것들에게는 이것들로부터의 변화가 없기에), 여타의 것들은 한정없이 여러 차례 생성되고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ἕνα μὲν οὖν τρόπον οὕτως ἡ φύσις λέγεται, 
ἡ πρώτη ἑκάστῳ ὑποκειμένη ὕλη τῶν ἐχόντων ἐν αὑτοῖς ἀρχὴν κινήσεως καὶ μεταβολῆς, ἄλλον δὲ τρόπον ἡ μορφὴ καὶ τὸ εἶδος τὸ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ὥσπερ γὰρ τέχνη λέγεται τὸ κατὰ τέχνην καὶ τὸ τεχνικόν, οὕτω καὶ φύσις τὸ κατὰ φύσιν [λέγεται] καὶ τὸ φυσικόν, οὔτε δὲ ἐκεῖ πω φαῖμεν ἂν ἔχειν κατὰ τὴν τέχνην οὐδέν, εἰ δυνάμει μόνον ἐστὶ κλίνη, μή πω δ' ἔχει τὸ εἶδος τῆς κλίνης, οὐδ' εἶναι τέχνην, οὔτ' ἐν τοῖς φύσει συνισταμένοις· τὸ γὰρ δυνάμει σὰρξ ἢ ὀστοῦν οὔτ' ἔχει πω τὴν ἑαυτοῦ φύσιν, πρὶν ἂν λάβῃ τὸ εἶδος τὸ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ᾧ ὁριζόμενοι λέγομεν τί ἐστι σὰρξ ἢ ὀστοῦν, οὔτε φύσει ἐστίν. ὥστε ἄλλον τρόπον ἡ φύσις ἂν εἴη τῶν ἐχόντων ἐν αὑτοῖς κινήσεως ἀρχὴν ἡ μορφὴ καὶ τὸ εἶδος, [Bekker page 193b, line 5] οὐ χωριστὸν ὂν ἀλλ' ἢ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τὸ δ' ἐκ τούτων φύσις μὲν οὐκ ἔστιν, φύσει δέ, οἷον ἄνθρωπος.)
그리하여 그렇게 한 가지 방식으로 자연이 진술되었는데, 자체 내에 운동과 변화의 원리를 지니는 것들의 그 각각에 제일의 것으로서 기저에 놓이는 질료라는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는 정의에 따른 것으로서 형태와 형상(or 형상과 종류)이다. 왜냐하면 기술에 따른 것도 기술적인 것도 기술이라 진술되듯, 그런 식으로 또한 자연에 따른 것도 자연적인 것도 자연이라고 진술되며, 저기(저 단계)에서는 아직 기술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지닌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가능적으로만 침대이고, 아직 침대의 형상을 지니지 못한다면, 기술이라고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자연에 의해 구성된 것들의 경우에서도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능적인 살이든 뼈든, 우리가 그로써 살이나 뼈가 무엇인지를 정의하여 진술하는 그 진술에 따른 형상을 취하기 전에는, 
아직 그 자신의 자연을 지니지도 못하고, 자연에 의한 것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타의 방식에서 자연은 그 자체 내에 운동의 원리를 지니는 것들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정의에 따른 그러한 형태와 형상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부터 나온 것은 자연은 아니나, 자연에 의한 것인 바, 이를 테면 사람 같은 것이다.)

καὶ μᾶλλον αὕτη φύσις τῆς ὕλης· ἕκαστον γὰρ τότε λέγεται ὅταν ἐντελεχείᾳ ᾖ, μᾶλλον ἢ ὅταν δυνάμει. ἔτι γίγνεται ἄνθρωπος ἐξ ἀνθρώπου, ἀλλ' οὐ κλίνη ἐκ κλίνης· διὸ καί φασιν οὐ τὸ σχῆμα εἶναι τὴν φύσιν ἀλλὰ τὸ ξύλον, ὅτι γένοιτ' ἄν, εἰ βλαστάνοι, οὐ κλίνη ἀλλὰ ξύλον. εἰ δ' ἄρα τοῦτο φύσις, καὶ ἡ μορφὴ φύσις· γίγνεται γὰρ ἐξ ἀνθρώπου ἄνθρωπος. ἔτι δ' ἡ φύσις ἡ λεγομένη ὡς γένεσις ὁδός ἐστιν εἰς φύσιν. οὐ γὰρ ὥσπερ ἡ ἰάτρευσις λέγεται οὐκ εἰς ἰατρικὴν ὁδὸς ἀλλ' εἰς ὑγίειαν· ἀνάγκη μὲν γὰρ ἀπὸ ἰατρικῆς οὐκ εἰς ἰατρικὴν εἶναι τὴν ἰάτρευσιν, οὐχ οὕτω δ' ἡ φύσις ἔχει πρὸς τὴν φύσιν, ἀλλὰ τὸ φυόμενον ἐκ τινὸς εἰς τὶ ἔρχεται ᾗ φύεται. τί οὖν φύεται; οὐχὶ ἐξ οὗ, ἀλλ' εἰς ὅ. ἡ ἄρα μορφὴ φύσις. ἡ δὲ μορφὴ καὶ ἡ φύσις διχῶς λέγεται· καὶ γὰρ ἡ στέρησις εἶδός πώς ἐστιν. εἰ δ' ἔστιν στέρησις καὶ ἐναντίον τι περὶ τὴν ἁπλῆν γένεσιν ἢ μὴ ἔστιν, ὕστερον ἐπισκεπτέον.
이러한 형태가 오히려 질료보다 더 자연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은 가능적일 때보다 오히려 실현되어 있을 그 경우에 각각의 것으로 진술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생성되지만, 침대는 침대로부터 그리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또한 그것의 자연은 그 모습이 아니라 목재라고 말하기도 하는 바, 만일 싹을 틔울 수 있다면, 생성될 수도 있을 것은 침대가 아니라 목재이리란 점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래서 이것이 자연이라면, 형태 또한 자연이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인간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생성으로서 진술되는 그 자연은 자연을 목적으로 하는(향한) 길이다. 왜냐하면 의료가 의술적인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길이 아니라 건강을 목적으로 하는 길이라 진술되는 것처럼 그러하진 않기 때문이다. 즉 의술로부터는 의술적인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료가 성립함이 필연적인 반면, 자연은 그런 식으로 자연에 관계 맺지 않고, 오히려 무언가로부터 무언가로 자라나는 것은 그 자라난 출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라나는가? 그로부터 자라난 출처가 아니라, 자라나는 결과 쪽이다. 그래서 형태가 본성이다. 그런데 형태와 자연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술된다. 왜냐하면 결핍도 어떤 의미에서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인 생성과 관련하여서 특정한 결핍과 반대가 성립하는지, 그것은 이후에 고찰해야 할 일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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